[편집인의 편지 #7] ‘반일무죄’, '친일유죄' 의 종식
일본을 보는 ‘50년의 렌즈’를 벗어
권성주 기자
업데이트 2025.08.14
눈을 감고 한 번 생각해보자. 삼국시대부터 본격화한 일본과의 역사에서 우리는 그들에게 어떤 국가였나. 학교에서 어떻게 배우고 미디어로 어떻게 전해져왔나. ‘백제, 불교문화, 조선통신사’ 등의 단어들이 떠오를 듯하다. 백제는 일본 야마토 왕실에 불교 사원과 경전을 보내 일본의 불교 수용과 확산의 계기를 만들었고, 중국 당나라의 정치제도, 건축기술, 문화예술을 전달하는 매개역할을 했다. 일본 최초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유명한 교토의 ‘호류지’와 동양의 비너스라 불리는 ‘백제관음상’ 등이 그 대표적인 흔적들이다. 조선통신사는 1607년~1811년 12차례에 걸쳐 일본에 파견된 조선의 대규모 외교 문화 사절단이었다. 관료, 의사, 화가, 음악가, 무용수 등, 다양한 직역들로 최대 504명 규모까지 구성됐던 사절단은 당시 일본 지식사회에는 자극이었고, 대중에게는 엔터테인먼트였다.
반대를 떠올려보자. 일본은 우리에게 어떤 국가였나. ‘임진왜란, 을사늑약(조약), 식민지배’ 등의 단어들이 떠오를 듯하다. ‘정유재란(1597~8)’을 포함해 일컫는 임진왜란(1592~8)은 우리에게 큰 상처를 남겼고,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된데 이어, 1910년 ‘경술국치(한일병합조약)’로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경복궁 근정전에 일장기가 내걸렸다. 식민지가 된 후 일본의 격화되는 전쟁에 우리는 수많은 청년들이 동원돼 희생되었고 죄 없는 여성들이 ‘위안부’가 되어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우리는 좋은 것을 주었지만 그들은 우리를 공격해왔다’, ‘우리는 피해자였고 그들은 가해자였다’ 그렇게 배워왔다.
일본은 그렇게만 생각하진 않는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 등이 대표적인 예다. 우리에게 고통을 안긴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좋은 것도 남겼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렇게 우리도 그들도, 그 시대를 살지 않았으나 교과서로 그렇게 각자의 ‘역사’를 배워왔고 미디어를 통해 그렇게 재인식해왔다. ‘역사’는 사건의 선택적 취합이고, 그 선택의 방향은 자국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끔 하는 것이라는 통념대로라면,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인식은 그렇게 점점 달라질 수 있다.
그러한 ‘교육’과 ‘미디어’라는 수단을 필두로 형성된 일본에 대한 ‘집단의 기억’은 ‘우리는 피해자 그들은 가해자’라는 인식을 오래 정착시켰고, 그 기억과 인식은 우리의 일본에 대한 자세를 만들어왔다. ‘반일무죄(反日無罪)’다. '좋은 것만 주었으나 피해자인 우리'는 '가해자이나 사죄하지 않는 그들'을 어떻게 비판하고 얼마나 강하게 비난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가한 잘못이 크고 제대로 사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정당성이 스스로 부여된다.
철거되는 부산 일본영사관 앞 소녀상 (사진 : 한국일보)‘반일무죄’의 사회인식은 국내외의 ‘법’과 국민 ‘정서’가 상충될 때 나타났다. 2016년 12월 28일, 부산 일본 영사관 앞에 위안부 피해여성을 상징하는 소녀상 조형물이 시민단체에 의해 기습적으로 세워졌다. 관할 행정기관인 부산 동구청은 도로법상 위반이고 외교 영사활동을 보장한다는 ‘비엔나 협약’에 위반한다 이를 즉시 철거했다. 그러나 불과 이틀 뒤, 소녀상은 철거 전 위치로 돌아왔고 일본 영사관 앞에서 제막식이 거행됐다. 동구청장은 쇄도하는 비판여론과 비난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말한다.

뉴욕 타임스스퀘어 옥외 전광판에 상영된 '군함도의 진실' 홍보영상 (사진 : 중앙일보)
2017년 7월 3일, 전 세계인이 모이는 뉴욕 맨하튼의 중심 타임스퀘어 대형 전광판에 피골이 상접한 어느 광부의 사진이 걸렸다. 사진을 포함한 영상에는 ‘600명의 강제징용 노동자(forced labors) 중 120명이 죽었다(killed)’는 문구가 달렸고 1주일 동안 전 세계인에 전파됐다. 그러나 그 사진은 조선의 강제징용 피해자와는 무관한 메이지시대 후쿠오카현 탄광의 일본인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한 적극적인 대일 비판 캠페인의 소재가 사실과 달랐으나 해당 ‘군함도의 진실’ 캠페인 책임자는 ‘실수’였다며 ‘사진 한장으로 일본 우익에게 빌미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글을 SNS에 올렸다. 그 외 조치는 없었고, 그 사진은 여전히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사진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일본으로부터 입은 상처와 피해자로서의 집단의 기억은 ‘법’도 ‘사실관계’도 넘어서는 것이었다.
2013년 8월 출판된 『제국의 위안부』(왼쪽)와 2015년 6월 출간된 일부 대목 삭제판(오른쪽) (사진 : 시사IN)
최근 이러한 ‘반일 무죄’의 대일 자세가 변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두 사건을 소개한다. 2015년 2월, 일제시대 종군 위안부의 실상을 파헤친 연구 결과물 ‘제국의 위안부’에 대해 법원의 출판금지 결정이 내려졌다. 2013년 8월 출판 당시 학계와 언론의 큰 주목을 받으며 ‘치밀한 탐색’, ‘묵직한 고민’ 등 호평을 받았으나, 10개월 뒤였던 2014년 6월, 위안부 피해여성 9명이 자신들을 매춘부, 일본군 협력자 등으로 매도했다며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내고 저자인 박유하 교수를 명예훼손으로 고발했다. 분위기는 급변했고, 박교수는 ‘위안부를 팔아먹은 마녀’처럼 여론의 비판을 받았다.
지난 2025년 2월, 10여년에 이르는 긴 재판을 끝으로 박교수는 민 형사 재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법원은 결정문에서 명예훼손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이 사건 도서는 조선인 위안부가 일본군의 일방적 피해자였다는 기존 서사 구조를 비판하면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대안적 담론을 제시하려는 학문적 시도"라고 했다. 그동안 일부 피해자 및 그들을 대변하는 단체의 주장과 다른, 조금이라도 일본측 주장과 유사한 해석은 그 실체적 사실 증명 여부 관계없이 ‘친일유죄’의 재판대에 섰다. 그 재판이 10년이 걸렸다. "이 싸움은 위안부 할머니들과 저와의 싸움이 아니라 할머니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저와의 싸움입니다" 박교수가 '무죄' 취지 판결을 받은 뒤 남긴 말이다.

2017년 7월 3일, 전 세계인이 모이는 뉴욕 맨하튼의 중심 타임스퀘어 대형 전광판에 피골이 상접한 어느 광부의 사진이 걸렸다. 사진을 포함한 영상에는 ‘600명의 강제징용 노동자(forced labors) 중 120명이 죽었다(killed)’는 문구가 달렸고 1주일 동안 전 세계인에 전파됐다. 그러나 그 사진은 조선의 강제징용 피해자와는 무관한 메이지시대 후쿠오카현 탄광의 일본인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한 적극적인 대일 비판 캠페인의 소재가 사실과 달랐으나 해당 ‘군함도의 진실’ 캠페인 책임자는 ‘실수’였다며 ‘사진 한장으로 일본 우익에게 빌미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글을 SNS에 올렸다. 그 외 조치는 없었고, 그 사진은 여전히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사진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일본으로부터 입은 상처와 피해자로서의 집단의 기억은 ‘법’도 ‘사실관계’도 넘어서는 것이었다.
2013년 8월 출판된 『제국의 위안부』(왼쪽)와 2015년 6월 출간된 일부 대목 삭제판(오른쪽) (사진 : 시사IN)최근 이러한 ‘반일 무죄’의 대일 자세가 변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두 사건을 소개한다. 2015년 2월, 일제시대 종군 위안부의 실상을 파헤친 연구 결과물 ‘제국의 위안부’에 대해 법원의 출판금지 결정이 내려졌다. 2013년 8월 출판 당시 학계와 언론의 큰 주목을 받으며 ‘치밀한 탐색’, ‘묵직한 고민’ 등 호평을 받았으나, 10개월 뒤였던 2014년 6월, 위안부 피해여성 9명이 자신들을 매춘부, 일본군 협력자 등으로 매도했다며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내고 저자인 박유하 교수를 명예훼손으로 고발했다. 분위기는 급변했고, 박교수는 ‘위안부를 팔아먹은 마녀’처럼 여론의 비판을 받았다.
지난 2025년 2월, 10여년에 이르는 긴 재판을 끝으로 박교수는 민 형사 재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법원은 결정문에서 명예훼손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이 사건 도서는 조선인 위안부가 일본군의 일방적 피해자였다는 기존 서사 구조를 비판하면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대안적 담론을 제시하려는 학문적 시도"라고 했다. 그동안 일부 피해자 및 그들을 대변하는 단체의 주장과 다른, 조금이라도 일본측 주장과 유사한 해석은 그 실체적 사실 증명 여부 관계없이 ‘친일유죄’의 재판대에 섰다. 그 재판이 10년이 걸렸다. "이 싸움은 위안부 할머니들과 저와의 싸움이 아니라 할머니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저와의 싸움입니다" 박교수가 '무죄' 취지 판결을 받은 뒤 남긴 말이다.

100일 간의 친견법회를 마치고 일본 이송을 준비 중인 부석사 금동관세음보살좌상 (사진 : 중도일보)
우리 사회의 ‘반일무죄’ 인식 변화를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례를 소개한다. 1378년 왜구에 약탈당한 것으로 추정된 ‘금동관세음보살좌상’이 2012년 한국의 절도범에 의해 국내로 반입됐고, 불법 유통과정에서 검거되어 2013년 국립문화유산연구원 수장고에 보관되었다. 이후, 해당 불상의 원소유지를 주장한 충남 서산의 부석사와 불상을 도난당한 일본 쓰시마의 간논지 사이에 소유권 분쟁이 일어났다. 약 10년 간의 재판 과정 끝에 지난 2023년 10월, 대법원은 간논지가 20년의 취득시효 완성으로 불상의 소유권을 취득했다 최종 판결했고 2025년 5월 쓰시마 박물관으로 반환됐다.
부석사와 간논지는 불상이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 100일 동안 부석사에서 친견 법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합의하였고, 지난 7월엔 부석사가 복제품을 만들 수 있도록 일본측에서 불상의 3D 데이터를 제공했다. 일본에 의해 약탈당했다 우리 품에 돌아온 우리 문화재를 다시 일본에 돌려주는 과정은 법적 논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쉽지 않은 것이었다. 부석사 입장에선 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일명 ‘부석사불상’을 둘러싼 이번의 일련의 과정은 필자에게 우리 안의 ‘반일무죄’를 넘어선 순간으로 비쳐졌다. 100일 법회 기간에 남긴 부석사 측 대표자의 말이 인상적이다. “부석사 불상의 의미를 한일이 공유하면서 앞으로 불교문화유산 보전과 활용에 어떻게 협력할지 두루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겠다”.

우리 사회의 ‘반일무죄’ 인식 변화를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례를 소개한다. 1378년 왜구에 약탈당한 것으로 추정된 ‘금동관세음보살좌상’이 2012년 한국의 절도범에 의해 국내로 반입됐고, 불법 유통과정에서 검거되어 2013년 국립문화유산연구원 수장고에 보관되었다. 이후, 해당 불상의 원소유지를 주장한 충남 서산의 부석사와 불상을 도난당한 일본 쓰시마의 간논지 사이에 소유권 분쟁이 일어났다. 약 10년 간의 재판 과정 끝에 지난 2023년 10월, 대법원은 간논지가 20년의 취득시효 완성으로 불상의 소유권을 취득했다 최종 판결했고 2025년 5월 쓰시마 박물관으로 반환됐다.
부석사와 간논지는 불상이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 100일 동안 부석사에서 친견 법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합의하였고, 지난 7월엔 부석사가 복제품을 만들 수 있도록 일본측에서 불상의 3D 데이터를 제공했다. 일본에 의해 약탈당했다 우리 품에 돌아온 우리 문화재를 다시 일본에 돌려주는 과정은 법적 논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쉽지 않은 것이었다. 부석사 입장에선 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일명 ‘부석사불상’을 둘러싼 이번의 일련의 과정은 필자에게 우리 안의 ‘반일무죄’를 넘어선 순간으로 비쳐졌다. 100일 법회 기간에 남긴 부석사 측 대표자의 말이 인상적이다. “부석사 불상의 의미를 한일이 공유하면서 앞으로 불교문화유산 보전과 활용에 어떻게 협력할지 두루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겠다”.

1998년 10월 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본 국회 연설 모습 (사진 : KBS 뉴스 캡쳐)
필자는 우리 안에 오래 자리잡아온 ‘반일무죄’의 대일인식을 ‘50년의 렌즈’라 표현한다. 계기가 된 것은 1998년 10월 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본 국회 연설이었다. 그는 일본 의원들 앞에서 양국관계의 중요성을 설파하며 이렇게 말했다. “50년도 안되는 불행한 역사 때문에 1,500년에 걸친 교류와 협력의 역사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분명 피해자였음에도 일본의 의원들 앞에서 그 기억과 인식을 극복하자는 그의 연설은 무척이나 감명 깊은 대인의 자세였다. 그런 그의 자세가 한일 대중문화 개방을 이끌었고, 한류 붐의 마중물이 되어 현재의 ‘K’ 컨텐츠의 산업화를 만들어냈다.
그가 말한 ‘50년도 안되는 역사’는 임진왜란 7년, 외교권이 박탈돼 실질적 식민지배가 시작된 1905년부터의 40년을 합한 47년을 뜻한다. 그리고 그 47년의 역사가 우리가 교과서로 배우고 미디어로 재인식해온 일본이다. 본 칼럼의 모두에 ‘눈 감고 생각해보자’ 했을 때 떠오르는 우리가 일본을 바라보는 렌즈다. 우리는 지금껏 그 렌즈 외 다른 색의 렌즈를 껴보지 않았다. 행여 잘못 꼈다간 ‘친일유죄’의 죄인이 되기 일수였다. 이제 그 ‘반일무죄’의 50년의 렌즈가 벗겨지고 있다.
그들에게 한국은 ‘세계사’의 일부이나 우리에게 그들은 ‘국사’의 큰 부분이었다. 그래서 그 50년의 렌즈를 벗어 던지는 것은 우리에게 더 큰 변화를 불러올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분명 가해자에 고개 숙이는 패배도 모멸도 아니고, 친일이 되는 것 더더욱 아니다. 우리가 강해졌고, 우리의 위상이 변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그들의 피해자로 가두어 온 족쇄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10년 전 ‘제국의 위안부’에서 금기시 됐던 이야기들이 최근 2~3년 전부터 접점이 비슷한 논문들이 나오고 있고,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일본 학자들을 불러 학회를 열기도 한다. 앞서 #6의 칼럼에서 다뤘듯, 세계가 변하고 대한민국의 위상이 변하고, 우리 안의 일본을 대하는 인식도 변했다. 10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은 박유하 교수가 언론 인터뷰에서 남긴 말로 이 글을 맺는다. 그의 말에 일본을 바라보는 우리 안의 50년의 렌즈를 벗고, ‘반일무죄’, ‘친일유죄’를 정면으로 극복해야 할 이유가 담겨있다.
“너무나 당연한 ‘독해’를 얻는데 10년이 걸렸다. ‘제국의 위안부’는 일본의 책임을 묻고자 했던 책이다”. “우리가 책임을 제대로 묻기 위해서는 문제 자체를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과거 정대협처럼 ‘강제연행’만 주장하면 많은 일본인은 이 문제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일본에서 이른바 양심적인 사람들 10%가 받아들이고 좋게 생각했다고 치자. 나머지 70~80%가 석연치 않은 감정을 가졌다면, 과연 제대로 책임을 지운 것이고, 우리는 만족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JK-Daily 편집인 권성주]
[現]
필자는 우리 안에 오래 자리잡아온 ‘반일무죄’의 대일인식을 ‘50년의 렌즈’라 표현한다. 계기가 된 것은 1998년 10월 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본 국회 연설이었다. 그는 일본 의원들 앞에서 양국관계의 중요성을 설파하며 이렇게 말했다. “50년도 안되는 불행한 역사 때문에 1,500년에 걸친 교류와 협력의 역사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분명 피해자였음에도 일본의 의원들 앞에서 그 기억과 인식을 극복하자는 그의 연설은 무척이나 감명 깊은 대인의 자세였다. 그런 그의 자세가 한일 대중문화 개방을 이끌었고, 한류 붐의 마중물이 되어 현재의 ‘K’ 컨텐츠의 산업화를 만들어냈다.
그가 말한 ‘50년도 안되는 역사’는 임진왜란 7년, 외교권이 박탈돼 실질적 식민지배가 시작된 1905년부터의 40년을 합한 47년을 뜻한다. 그리고 그 47년의 역사가 우리가 교과서로 배우고 미디어로 재인식해온 일본이다. 본 칼럼의 모두에 ‘눈 감고 생각해보자’ 했을 때 떠오르는 우리가 일본을 바라보는 렌즈다. 우리는 지금껏 그 렌즈 외 다른 색의 렌즈를 껴보지 않았다. 행여 잘못 꼈다간 ‘친일유죄’의 죄인이 되기 일수였다. 이제 그 ‘반일무죄’의 50년의 렌즈가 벗겨지고 있다.
그들에게 한국은 ‘세계사’의 일부이나 우리에게 그들은 ‘국사’의 큰 부분이었다. 그래서 그 50년의 렌즈를 벗어 던지는 것은 우리에게 더 큰 변화를 불러올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분명 가해자에 고개 숙이는 패배도 모멸도 아니고, 친일이 되는 것 더더욱 아니다. 우리가 강해졌고, 우리의 위상이 변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그들의 피해자로 가두어 온 족쇄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10년 전 ‘제국의 위안부’에서 금기시 됐던 이야기들이 최근 2~3년 전부터 접점이 비슷한 논문들이 나오고 있고,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일본 학자들을 불러 학회를 열기도 한다. 앞서 #6의 칼럼에서 다뤘듯, 세계가 변하고 대한민국의 위상이 변하고, 우리 안의 일본을 대하는 인식도 변했다. 10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은 박유하 교수가 언론 인터뷰에서 남긴 말로 이 글을 맺는다. 그의 말에 일본을 바라보는 우리 안의 50년의 렌즈를 벗고, ‘반일무죄’, ‘친일유죄’를 정면으로 극복해야 할 이유가 담겨있다.
“너무나 당연한 ‘독해’를 얻는데 10년이 걸렸다. ‘제국의 위안부’는 일본의 책임을 묻고자 했던 책이다”. “우리가 책임을 제대로 묻기 위해서는 문제 자체를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과거 정대협처럼 ‘강제연행’만 주장하면 많은 일본인은 이 문제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일본에서 이른바 양심적인 사람들 10%가 받아들이고 좋게 생각했다고 치자. 나머지 70~80%가 석연치 않은 감정을 가졌다면, 과연 제대로 책임을 지운 것이고, 우리는 만족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JK-Daily 편집인 권성주]
[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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