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마부인을 비롯해서 7,80년대의 영화를 보면 박정희와 전두환을 욕할 수 밖에 없다. 영화는 원래 정지된 프레임을 인간의 눈이 가지는 잔상효과를 이용해서 잇고 있는 것인데 그런 잔상효과 말고도 적극적인 관객의 상상력이 영화를 만들어주고 있는 거 같다.
애마부인 같이 장면 연결도 안되는 영화가 그 시대의 아이콘이 된 것은 워낙 굶주린 인간남자들의 상상력이었다. 모닥불과 파도 촛불로 은유적으로 성적인 장면들이 표현된 건 이유가 있는데 9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영화에는 사전 사후 철저한 검열이 있었다. 비디오 영화들도 철저하게 그 규정을 따라야 했다. 여자와 남자의 성행위 장면은 정상체위(?)만 가능했고 여성의 젖꼭지나 남성의 성기는 "우유"라는 말도 있는데 필름에 뿌옇게 가려서 못 보게 했다.
60년대 우리 영화는 오히려 지금 보다 훨씬 더 좋았다. 지금도 나는 60년대 영화들을 본다. 신상옥 감독이 홍콩영화감독들의 존경을 받고 배우러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한국영화가 70년대,80년대 그렇게 쪼그라 든 데는 박정희씨의 철저한 문화말살 정책이었고 그들은 청년들의 장발만 자른 게 아니었다. 그들은 기를 죽였고 우리 정신을 훼손했다. 나는 그런 흔적을 내 동시대인들에게서 자주 본다.
그러나 아무리 밟아도 꽃은 핀다고 나는 두 사람의 작가를 기억한다.
그 시대 내가 좋아하던 작가는 임권택 감독이 아니라 그의 시나리오 작가 송길한씨였고 고상만 피디가 아니라 김기팔 작가였다. 그들은 뛰어난 분들이지만 별다른 평가도 못 받았고 심지어 김기팔 작가 작품은 80년 내내 중도 하차를 당했다. 80년 학살 때 작가 중에서 유일하게 절필선언하고 시장에서 장사했던 분이다. 지금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
송길한 작가도 임권택 감독의 영화 중에 좀 괜챦은 것이 있다면 모두 그의 작품이다. 그도 역시 별로 주목을 못 받았고 아마 그 시대에 고료나 제대로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송길한씨의 조카가 셀린느 송이다. 또한 그녀는 넘버쓰리"를 만든 송능한 감독의 딸이며 그는 아이들을 데리고 이민을 갔던 모양이다.
한국에서 살 때 보다 훨씬 더 많은 고료와 대우를 받고 있을 거다. 90년대에 한국에서 영화 작가들이 걸핏하면 아이디어를 빼앗기고 300만원 정도 받을 때 교포작가들이 헐리우드 시나리오 뱅크에 당선되면 3억 정도를 버는 걸 보았다. 영화화 되면 더 많이 받았다. 일단 생활이 안정되는 것이다. 물론 그건 시장규모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너무 부러웠던 건 우리 나라 처럼 작가들의 작품이 상영될 때 검열을 받거나 정부에서 압력을 넣어 중도하차 되지는 않는다는 거였다.
나는 어떤 집안의 유전자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혹시 한(恨)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ㅋㅋ 날개를 피지 못한 한. 나는 셀린느 송의 영화를 사실 아직 안 봤는데 "길소뜸"에 나오는 분단의 슬픔 만큼 강렬한 영화는 뭔지 아닐 거 같아서다. 그래도 그녀를 응원하고 싶어진다.
나하고는 일면식도 없는 두분 작가를 가끔 나 라도 기억하고 싶다는 건 내 오지랍이라고 치자.
검열해서 잘라낸 필름과 검열로 다 쓰지 못한 대본들 중도 하차한 작품들 많았을 거 같고
이제와서 문화가 돈이 되어야 하고 산업이 되어야 하는데 다시 되살리려면 시간이 걸릴 거 같다. . 미국의 원조로 어찌 어찌 먹고 살게 되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다 같은 시대를 살고 같은 걸 보고 당했는데 정치적인 목적으로 뉴라이트가 되어 박정희를 찬양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거. 먹고 살려면 무엇이든지 해야 하지만 아마 그 말을 하는 분들도 그 시대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내심 없을 것이다 ㅋ
Swn Yang건전가정의례준칙 이 그 산물이죠 홍동백서 조율이시 보급도 박정희가 표준화하라했고 민족기록화 작업이나 지 전직장 전신이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었고 그게 옛 경무대 나 청와댜 초창기 설계안(돌풍이란 드라마를 거기서 찍었음)이랑 닮은게 의도적이죠 다
임명묵신생활운동에서 비롯된 장개석 유교파시즘 영향도 무시 못했을 것 같습니다. 박통께서도 4공 전까지는 유교를 타성과 문약함의 상징으로 비난을 했다가 70년대부터 띄워주는.. 그럼 그 사이에는 뭐가 있었냐인데, 해방정국에서 장개석 중화민국에 있다가 조선으로 돌아온 김구 이범석 및 기타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알게 모르게 중화민국의 유교파시즘 영향이 좀 있었을 거 같습니다. 사실 이범석은 너무 명확한 사례고...
Swn Yanghttp://aladin.kr/p/3M9W1 개인적으로 이책을 추천드리고, 간재 전우의 사망인지 김창숙 사망과 성균관대 현대화 개혁 추진 시점인지에 따라 사상으로써 완전 사멸 시점은 보통 크게 두가지로 갈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Swn Yang그리고 예시를 든 영화는 임권택의 미성년성착취 혐의가 확고한 영화인데 저분 글대로라면 연대책임이군요 (당시 유럽의 소음끼치는 포르노 '예술'들은 굳이 언급라지 않겠습니다)
산하의 오역ostrpdSone7g620ut49mf9ggh71cc34lg1f488hm789f6f3fa31fa505u8al ·
나의 에로영화 탐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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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에 영화 <애마부인>을 다룬 드라마 <애마>가 올라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얘기를 들으면서 저는 제 중학교 시절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특이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 시절 저는 영화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학교 가면 극장은 학생 출입 금지 구역이고, 한 달인가 두 달에 한 번씩 있는 단체 영화 관람 외에는 가면 안되고, 교외 지도 교사에게 걸리면 징계 먹는다고 협박이 난무했습니다만 다른 건 다 말 잘 듣는 범생이였어도 영화는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자.... 이건 영상 보고 오셔야 합니다 g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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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8KV9nCEwo04 영화를 좋아하다 보니!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영화를 좋아하다 보니! 저는 여기저기 영화를 많이 보러 다녔습니다. 부산의 유명한 개봉관들도 나름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에는 괘 철저했습니다. 그래서 이본동시를 주로 이용했는데 1982년은 참으로 한스러운 한 해였습니다. 그 해는 제가 중학교 1학년이던 해인데, 제 학창 시절 유일하게 교복을 입던 해였습니다. 시커먼교복에 시커먼 모자. 그리고 학교 교문에 들어가면 거수경례를 하고 들어가고, 선도부 선배들한테 빳다도 맞던 시기였습니다. 그때 선도부 무서웠습니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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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선도부가 아니라 교복이었습니다. 원래 2본 동시 극장은 애들이나 어른이나 별로 안가렸습니다. 그런데 교복을 입고는 들어갈 수가 있어야죠. 집에 가서 사복을 갈아입고 나오다가는 너 어디 가냐는 어머니의 레이다에 딱 걸릴 것 같고. 그런데 그 해에 유독 참으로 보고 싶은 영화가 많이 나왔습니다. 바로 한국 영화 에로 시리즈의 3대 거탑 <애마부인>과 <산딸기>와 <빨간앵두>가 모두 시작된 해가 1982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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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전두환 정권이 3S 정책을 펴서 스포츠, 스크린, 섹스로 국민들의 관심을 정치로부터 돌리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하는데 그 말을 누가 처음 했는지 모르지만 공식적인 문서나 지침으로 밝혀진 적은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정치를 떠나서 다 흥미로운 것들이지만 사람들이 거기에 빠져서 정치를 멀리하지도 않았단 말이죠. 즉 말은 있는데 실체는 없는 그런 개념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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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 해에는 이 세 시리즈의 탄생을 보지 못했습니다만 1983년 즈음이 되면 죄다 섭렵한 한국영화키드가 됩니다. 에로영화키드 아니냐구요? 어허 다른 것도 봤다니깐. 뭐든지 첫편만한 속편은 없다고, 저는 애마시리즈와 산딸기시리즈와 빨간앵두 시리즈를 거의 다 봤지만 역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편들입니다. 애마 시리즈와 산딸기 시리즈의 1편의 히로인은 안소영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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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의 한자 영화제목은 뜻밖이었습니다. 애마부인의 마가 말 마자가 아니라 대마초 할 때 마였던 거죠. 원래는 말 마자였는데 심의 과정에서 바뀌었다고 합니다. 말 마자는 너무 외설적이라는 지적 때문이었다는데 아니 그렇다고 대마초 마자를 쓰는 센스는 또 뭡니까. 마귀 마자를 쓰든지 하지. (6공화국 들어서 나온 애마부인들은 대마초 부인이 아니라 말타는 부인으로 됩니다....)
영호 개봉한 지 1년 반쯤 넘어서 동네 2본동시 극장에서 봤던 <애마 부인1>은 의외로 왕성한 성적 호기심을 지녔던 소년에게는 퍽 시시했습니다. 장안의 화제였던 안소영 배우의 가슴이야 압도적이었지만, 야한 장면 기다리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을뿐더러, 스토리와 연기도 꽤 훌륭했습니다. 남편 임동진에 옛 애인에는 하명중, 그리고 또 다른 상대였던 하재영은 <바보들의 행진>의 병태였으니까 말입니다. 안소영씨는 후일담에서 안장도 없이 알몸에 가까운 복장으로 말을 탔을 때의 괴로움을 얘기한 적이 있는데 운전도 못해서 운전을 배우면서 촬영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논두렁에 차를 박기도 했다죠. 그래도 주연을 따냈다는 자긍으로 버텼답니다. 정인엽 감독은 이때 기이한 칭찬을 하죠. “풍만한 가슴 보고 뽑았는데 일류 배우 쓴 것보다 효과를 거뒀다.” 이게 지금 칭찬인지 디스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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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딸기>는 토속에로티시즘을 얘기해서 그런가 웬지 사극 분위기여서 보다가 잤던 기억이 납니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어떻게 그런 영화 보면서 중2짜리가 잠을 자겠냐고 하시면 할 말이 없는데 물론 야한 장면 오디오 나오면 깨긴 깼습니다. 하지만 스토리가 연결 안되니 또 자고.....그 영화에도 배우들 라인업은 좋았습니다. 돌아가신 김인문 아저씨나 나름 청춘스타였던 진유영, 남궁원 아저씨도 나왔으니까요,
오히여 야하기는 산딸기2가 정말 야했습니다. 2탄 주연 선우일란의 연기는 어찌 어찌 다 보고 온 아이들로 그득했던 중학교 교실에서도 유명했죠. 저는 물론 아무 말도 안하고 있었습니다만, 선우일란은 ‘쨉도 안되게’ 야하다는 평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야한 연기를 할 당시의 선우일란은 미성년자였습니다. 요즘 세상에는 감독이 은팔찌를 차도 두 겹을 찰 일이지만 당시에는 그게 가능했습니다. 신문 지상에는 21살로 소개되긴 했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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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앵두 이야기나 보디히트 개인교수 등 당시 미성년자 관람불가 탐험기는 다음으로미루겠습니다만 하나 아쉬운 것은 당시 여배우들이 되레 나름 충분한 연기 열정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당시 한국 영화의 트렌드였던 벗기기 영화에 갇혀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안소영 배우는 이후 tv 드라마에도 나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때 같이 보던 친구의 코멘트가 지금도 기억납니다. “저리 한복 입히 놓으면 가슴 큰 거 모르겠네.” 함께 하던 남자 배우들은 이후로도 다양하게 연기 생활을 이어갔는데 안소영이나 선우일란 등은 그냥 그 이미지로 80년대의 박제가 됐습니다. 아쉬운 일이죠..... 이상 저의 에로영화의 추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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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많은데.... 지금 생각하면 거길 다 어떻게 들어갔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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