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25

08 책 주대환. 대한민국을 사색하다



알라딘: 대한민국을 사색하다
대한민국을 사색하다

주대환 (지은이) | 산책자 | 2008-11-28



7.0

Sales Point :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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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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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적 인간’ 주대환의 도발적 사유의 면모가 담겨져 있는 솔직한 정치 시평. 토지공개념과 소농의 길에 이르기까지 좌우의 색깔 논쟁을 넘어 당대의 문제에 현실적으로 접근하려는 주대환의 지적은 신랄하다.

저자는 외형만 갖춘 우리의 민주주의를 회의하고 자유민주주의에 머물 수 없는 대한민국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대한민국 좌파’ 주대환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이 나라의 장점들을 긍정하고, 영국의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의 모습에서 ‘국가를 긍정한 사회주의자’ 상을 발견한다.





책머리에 - 오랜 벗들을 만나러 새 길을 떠나다
프롤로그 -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되다

1.도대체 민주화는 다 된 겁니까
남원·무주에서 민주주의를 회의하다

2.지리산에서 팔자 고친 사람들
'지리산길'에서 민주주의를 사색하다

3.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과 선비
학자들에게 지식인의 길을 묻다

4.지금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진실'
'좋은벗들'에게 인민의 배고픔을 듣다

5.태양계 안에서 태양계를 볼 수 있을까
촛불 밝힌 광화문에서 데카르트로 돌아가다

6.국민을 감히 가르치려 하지 마라
마산에서 대한민국의 역사를 강의하다





저자 : 주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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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주대환의 시민을 위한 한국현대사>,<좌파논어>,<대한민국을 사색하다> … 총 6종 (모두보기)
소개 :
1954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다. 마산중·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하였다. 민주화운동으로 청년 시절을 보내고, 부마항쟁을 비롯한 여러 사건으로 투옥된 적도 있다. 1987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김철순이라는 가명으로 혁명을 선동하는 글을 썼다. 1992년에 한국노동당 창당준비위원장, 2004년에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이라는 큰 감투를 쓴 적도 있다. 2008년 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를 거쳐, 지금은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대한민국을 사색하다>, <좌파논어> 등이 있...






[사회] 한 권의 책으로 세상을 바꾸는 법! <힐 더 월드> l 2008-12-17

오늘 첫머리에 오른 책들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면 어떨까. 그건 아마도 이런모양이 될 것이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바로탐욕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만약우리가 마음을 모아 자본주의를 넘어선 상상을 통해 미래를 위한 경제학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면, 그때야 비로소 세상은 치유 될 수 있을 것(힐 더 월드)이다." 사실 오늘 이 페이퍼를 통해서...



‘정직하거나 혹은 문제적이거나’ 좌파 주대환의 입장!
금단의 선을 넘어 ‘대한민국 좌파’의 정체성을 시원스레 말하다

한국 사회 현실에 뿌리박은 ‘토종 좌파’들을 찾아, 새로운 사회 기획을 꿈꾸며
돈키호테 주대환, ‘홀로 천천히 자유롭게’ 대한민국을 기행하고 성찰하다

35년 간 이 땅에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민주화 운동과 노동 운동에 헌신해온 ‘실천하는 지식인’ 주대환. 이 땅에 진보 정당을 만들기 위해 20여 년 동안 온몸을 던져 설복하고 글을 쓰고, 적과 동지와 투쟁해온 논객. 그가 2008년 봄 민주노동당을 떠나 모든 당적을 정리하고, 새 길을 벼리기 위해 ‘사색 기행’을 떠났다.

주대환은 도그마에 갇힌 대한민국의 좌파에게 사망 선고를 내리고, 과감하게 뉴-레프트 운동을 주창한다. 과연 그가 말하는 ‘새로운 좌파’의 관점은 무엇인가? 그 철학적 바탕은 무엇인가? 그가 말하는 '대한민국 좌파'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왜 그는 새삼 대한민국을 긍정하자고 말하는가? 그가 말하는 '토종 좌파'는 무엇인가? 그는 여전히 좌파인가?

■ 이 책을 말한다: 논객 주대환을 둘러싼 소리소문들에 답하다

‘좌파의 신화’가 대한민국을 긍정하다니! 주대환 논쟁에 답하다
올 여름 뉴라이트의 기관지라 할 《시대정신》에 기고한 주대환의 글 「민주노동당의 분당 사태와 좌파의 진로」를 둘러싸고 짐작대로 논란이, 그러나 예상보다 큰 논쟁이 일었다. 주대환의 목소리는 보수 우파와 뉴라이트가 수용하기에는 여전히 뻑적지근한 진보적 입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진보 진영 혹은 기존 대한민국의 좌파가 수용하기에는 대단히 민감한 주장을 품고 있다. 과연 주대환의 입장은 무엇인가? 이 정직하고 사려 깊은 기행문이자 솔직한 정치 시평 <대한민국을 사색하다>속에 ‘문제적 인간’ 주대환의 도발적 사유의 면모가 모두 담겨 있다.

실패했다, 그러나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되다
이 나라를 선진 복지국가로 만들기 위해 제대로 된 진보 정당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그런 진보 정당을 만들기 위해 평생을 바쳐온 지 35년, 지금 이 나라는 그가 원했던 선진국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아니 된 것 같기도 하단다. 할인마트에 쌓여 있는 수많은 물건들을 보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나라가 된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지만 여전히 민주주의를 완성한 복지국가라고 하기엔 부족한 모습을 볼 때는 실망하기도 한다. 그에게 한국은 부끄러움과 애정이 교차하는 조국이다. ‘인생 2모작’을 시작하면서 그는 지난 역정으로부터 자유로이 결별하고 맨몸으로 길을 떠난다. ‘대한민국을 긍정하는 행복한 좌파’가 되어, 앞으로 이 나라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

‘좌빨’과 ‘수꼴’의 시대는 가라
‘한국의 국민 스포츠는 정치인 씹기’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국인들의 정치 불신은 극에 달해 있다. 국민들은 집권 보수 우파의 방종과 비리에 실망하고 분노하면서도 진보 좌파 정치인들을 그에 대한 대안으로 떠올리지 못하는 아이러니 속에 빠져 있다. 이런 현상을 단지 시민들의 무지함과 무관심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진보 정치인들은 여기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 삼연(혈연, 지연, 학연) 문화는 과연 한국 사회의 병폐인가? 북한의 인권ㆍ기아 문제에 좌파는 어떻게 다가서야 하는가? 386세대가 비판받고 반성해야 할 점들은 무엇인가? 이명박과 노무현은 정말로 대조적인 정치인들인가? 진짜 복지국가로 가는 로드맵은? 현실에 대처하는 사회민주주의자의 답변은? 토지공개념과 소농의 길에 이르기까지 좌우의 색깔 논쟁을 넘어 당대의 문제에 현실적으로 접근하려는 주대환의 지적은 신랄하다.

대한민국을 긍정하는 좌파는 가능한가?
외형만 갖춘 우리의 민주주의를 회의하고 자유민주주의에 머물 수 없는 대한민국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대한민국 좌파’ 주대환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이 나라의 장점들을 긍정하고, 영국의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의 모습에서 ‘국가를 긍정한 사회주의자’ 상을 발견한다. 우리가 공기처럼 당연히 여기는 상하수도 등 여러 가지 사회 공공서비스가 실은 이들의 발상이고 업적이라는 사실, 그리고 건국 초 실행되어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된 토지개혁도 여운형과 조봉암이라는 사회주의자들의 업적이라는 사실을 재조명한다. 대한민국이 결코 우파 혼자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는 사회민주주의를 다시금 새로운 대안으로 주창한다. 대한민국의 행보와 현재 속에는 긍정해야 할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 현실에 단단히 뿌리를 박고 진보를 실천하는 정직한 사람들, 즉 대안학교와 대안 공동체를 일구는 벗들, 여고생들의 촛불시위, 국민건강보험을 지키는 ‘토종 좌파’들, 굶주리는 북한 민중을 위해 헌신하는 ‘좋은벗들’, 소농을 일구는 생활 좌파들의 살아가는 모습 속에 살길이 보이고,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을 긍정하는 이유가 된다.

■ 주대환은 누구인가: 문제적 인물, 주대환을 파악하는 몇 갈래 오솔길

1954년 경남 함안 태생. 1973년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에 입학했다. 평생 민주화 운동과 노동 운동, 진보 정당 운동에 헌신하였다. 민청학련 사건(1974년) · 긴급조치 9호 위반(1978년) · 부마항쟁19(79년) 등으로 3차례 구속되는 우여곡절 끝에 1985년에 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줄곧 고향인 경남 마산과 서울, 인천에서 노동 운동을 했고, 1992년에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사건(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또 한 차례 구속되기도 했다. 1992년 한국노동당 창당준비위 시절부터 민노당 창당의 모태가 된 '국민승리21(1997년)'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2000년 민노당 창당을 기획한 이론가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2004년 6월 당 정책위의장 선거에서 다수파인 NL 진영을 꺾고 당선됐다.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 때 당적을 정리하고, 현재 ‘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로 활동하며 새로운 좌파 운동의 진로를 모색하고 있다. 지은책으로는 <사회주의자의 실천 1,2>(공저), <진보 정치의 논리>, <진보정당은 비판적 지지를 넘어설 수 있는가> 등이 있다.
문제아, 아웃사이더, 돈키호테 등으로 불린다는 주대환. 정작 본인은 ‘정직한 사람’이라 불러달라고 한다. 때로는 이상주의자처럼 미욱하게 때로는 노회한 경험주의자로 보이는 정치인이며 때로는 ‘주카르트’라 부를 만한 사려 깊거나 회의적인 나르시시스트 사회철학자, 지독한 자기 검열의 문필가 혹은 스타일리스트다. ‘반쯤 현실을 긍정하고 반쯤 부정’한다는 그의 철학과 정치의 통섭 시도가 어떤 새로운 궤도를 그릴지 궁금하다. 종친회 자리에 끼인 좌파 지식인 정치인, 그의 현재 모습은 현실적이다.

■ 주대환은 말한다: 속 시원한, 통렬한, 사려 깊은 주대환의 언어들

“민주화 20년, 민주주의는 이미 생활이 되고 현실이 되었는데 저는 여전히 민주주의를 회의합니다. 그러나 이미 민주주의는 거부할 수 없는 대세이고 환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1987년 민주주의 혁명의 흥분에서 벗어나서 진정 새로운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이제 더 이상 외형만 갖춘 민주주의 또는 이른바 ‘자유민주주의’에 머물 수 없는 조국, 대한민국과 함께 말입니다.”

“한 세기 전의 영국의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처럼 국가와 제도를 믿는 좌파, 대한민국을 긍정하는 좌파는 과연 오늘 한국 사회에서 가능할까요? 항상 반쯤 현실을 긍정하는 좌파, 그리고 반쯤 부정하는 좌파, 그러나 긍정할 때도 부정할 때도 대충하지 않고 철저하게, 그야말로 ‘온몸으로’ 하는 좌파, 현실을 긍정하면서 동시에 부정하는 좌파, 그런 좌파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요?”

“특히 이른바 386세대의 정치인들, ―물론 그들도 이미 40대이지만 편의상 그렇게 부른다면― 제가 한 인터뷰에서 ‘30년의 번영이 낳은 응석받이’라고 불렀던 그들과 이들은 다릅니다. 혁명 놀이를 하던 그 철없는 아이들과 ‘토종 좌파’가 같을 수는 없습니다. 80년대 대학교 캠퍼스에서 학생운동은 하나의 패션이었고 그 분위기에서 누구나 쉽게 혁명가.대전략가가 되기도 했습니다.”

“진정한 좌파라고 생각한다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 노래를 자유주의자들과 어울려 함께 부르는 한 좌파는 자기의 정체성을 정립할 수 없을 것입니다. ‘토종 좌파’가 될 수 없습니다. 저 1980년대를 넘어서지 못할 것입니다. 민주주의 혁명의 추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더 이상 국민들을 헛갈리게 하지 않게 위해서라도 민주화 운동 시기의 동지들이 우 몰려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젊은 시절 저는 실용주의를 예사로 무시했습니다. 독일적 사고에 깊이 빠져들어 헤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저의 큰 사상적 오류였습니다. 스승이 없는 자의 불행입니다. 그 불행을 딛고 이제 영국적 사고로 나아가려 합니다. 레닌의 사상적 아버지가 마르크스라면 그 할아버지 헤겔, 증조부 데카르트로 돌아가서 이별을 고하려 합니다. 아니 저 아득한 선조 플라톤으로 돌아가서 그와 작별하려고 합니다. 나의 조국의 할아버지들, 성리학자들로 돌아가서 그들에게 이별을 고하려 합니다.”

“이상하게도 한국 기독교는 유난히 구약으로 설교하는 목사들이 많으면서도,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구절을 가르치는 목사가 없습니다. 오히려 서울 강남의 교회들은 ―아마 그중에 소망교회라는 교회도 있는 모양인데― ‘세금폭탄론’에 적극 동조하고 종합부동산세 반대론에 가세하고 있습니다. ‘부동산보유세를 많이 내는 것이 기독교적이다’고 설교하는 목사가 없는 한국 기독교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한국이라는 나라의 발전 과정에는 여러 가지 변수들이 작용하고 원인들이 얽혀 들었습니다. 우연적인 계기도 있었고 필연적인 원인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초의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야 합니다. 거대한 물체가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해야 비로소 다른 힘들이 보탬이 되고 작용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최초의 원인이 바로 토지 개혁입니다.”

“대한민국 건국 당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보통선거권이 보장됐습니다. 당시 세계적 기준으로 봤을 때 손색이 없는, 최소한 법률과 제도상으로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로 건국되었습니다. 유럽에서도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준 게 그렇게 이르지 않습니다. 불과 몇 년 앞선 정도? 이 모두가 독립운동 시절 사회주의운동의 결과라는 말입니다. 즉 대한민국 건국에 사회주의가 아로새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촛불 뒤의 배후 세력이 바로 대한민국 국민이고 대한민국을 지키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느끼기에 지금 대한민국에 위기가 왔기 때문에 들고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세계화로 인한 대한민국의 새로운 변화를 대한민국의 위기로 인식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대한민국이 원래, 특히 건국될 때 매우 평등한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돈이 있고 없고의 차이로 건강할 권리가 좌지우지되는 소고기 수입, 의료민영화 따위의 정책이 평등한 나라에서 살아온 국민의 입맛에 맞을 리 없습니다.”

“앞으로 대한민국을 이야기할 때는 조봉암을, 그리고 통일 한국을 말할 때는 여운형을 반드시 함께 말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과거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고 미래의 일부가 되기도 합니다. 이루지 못한 꿈은 그것이 아름다운 만큼 반드시 훗날 다른 모습으로 이루어지기 마련입니다. …여운형과 조봉암은 사회주의적인, 좌파적 이상을 민주주의를 통해 달성하려 했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그로써 그들은 충분히 사회민주주의자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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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 2편




긍정하기엔 너무한 대한민국 hkcsp ㅣ 2010-05-27 ㅣ 공감(7) ㅣ 댓글 (0)


오랜만에 서평.... 이라기보다는 몇 가지 코멘트를 달을 수 있을 만한 책을 읽었다. 주대환의 글은 예전에 그가 우파 잡지 <시대정신>에 기고했다고 하여 논란이 된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와 좌파의 진로"(좌파는 대한민국을 긍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 것으로 유명한...)를 대충 보고, "이건 뭥미?" 라고 생각하고 말았는데, 어제 우연히 도서관에서 발견하여 심심하던 차에 읽게 되었다.


사실 이 책을 예전에 서점에서 대충 본 적이 있긴 한데, 별로 읽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어제는 그냥 훑어보던 중에 <임을 위한 행진곡은 그만 부르자>(131쪽)라는 아주 도발적인 제목을 발견하고 읽어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사실 나도 요즘 비슷한 고민으로, 어지간하면 앞으로 '동지'나 '민중'같은 단어는 쓰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의 말대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하 임진곡)과 같은 민가나 '동지', '민중'하는 단어들은 "그 곡조와 가사의 지나친 비장함은 일상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아 어색하고, 그 정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낯설고 닫혀 있다는 느낌을"(132쪽) 주기 때문이다. 이제 껍데기만 남은 '운동권 하위문화'와는 단절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좀 하고 있던 터였다. 책을 읽으면서 여러 부분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동의할 수 있는 지점이 꽤 있기도 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1.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 말자?



그에 따르면 우리가 80년대적 운동권 동창회 정서를 버리지 못하면 이른바 '토종좌파'(그는 칸트적인 합리주의적 사고를 버리고 경험주의와 실용주의에 바탕을 둔 사회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토종좌파'라는 말로 개념화한다. 그가 대표적 토종좌파로 칭찬하는 사람이 제주대 이상이 교수다.)로 나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이 토종좌파라는 말이 한국적인 정세와 조건에 맞는 운동을 하고,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집단을 말하는 것이라면 나는 그의 말에 백번 동의한다.


하지만 그게 '임진곡'을 버려야 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그는 노무현 정부때 이 노래가 청와대에서 불려졌다는 말을 듣고, 이런 자유주의자들과 같은 부류로 엮여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임진곡'을 부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런 이유라면 오히려 나는 더 열심히 임진곡을 부를 것이다. 그가 그렇게 애타게 찾는 한국적 '토종좌파'는 단순히 맑스-레닌의 교조주의에 빠져있지 않다고해서, 외국이론에 심취해서 현실을 보는 눈을 갖지 못하는 먹물적 근성을 버린다고만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게 아니다. 철저하게 우리의 지난 저항운동의 역사에 근거해야만 한다. 그 스스로가 그것으로부터 절대적 영향을 받았을, 518을 잊고서는 우리는 앞으로 어떤 진정한 의미의 저항운동도 시작할 수 없다. 518에 대한 해석이야 다를 수 있지만, 그 저항현장의 상징인 노래를 폐기하자고 하는 것은 감정적인 대응일 뿐이다. 물론 나도 그로부터 연유한 운동권 하위문화가 얼마나 심각하게 운동 전반의 개방성과 유연성을 질식시켰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80년대 저항운동이 앙상한 운동권 하위문화로 귀결된 것이 유일하거나 필연적인 경로는 아니었다. 설령 그렇다 해도, 우리는 이미 그렇게 형성되어져 버린 조건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즉 자신이 선택한 조건들 속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조건들 속에서 만든다. 모든 죽은 세대들의 전통은 마치 악몽처럼 살아 있는 세대들의 머리를 짓누른다."(맑스,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




2. 토지개혁 때문에 대한민국의 출발은 진보적이었다?


우리는 지난 저항운동의 역사가 남겨놓은 한계와 가능성을 명확히 하고, 그 가능성을 중심으로 계승해 나가야 겠지만, 그렇다고 맘에드는 것만 골라서 이어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 면에서 여운형과 조봉암을 치켜세우며 "대한민국은 진보적인 시대에 건국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일찍이 그 어디서도 보지 못한 역사에 대한 '편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두 명의 훌륭한 정치인이 해방을 전후하여 가장 인기있는 정치인이었고, 시대를 앞서나간 인물이란 점에는 누구도 토를 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실제 이들이 현재의 대한민국 '체제'를 긍정적으로 형성하는데 얼마나 큰 공을 세웠느냐 하는 문제로 오면 그리 대답할 만한 게 없다. 실로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포부를 채 펼쳐보지도 못한 채 타살되었고, 그러니 그들이 역사에 남긴 것은 말과 글, 즉 '사상'뿐이다.


주대환의 말대로 해방 직후 유력한 정치인(김일성, 박헌영, 여운형, 김규식, 김구, 이승만) 중에 좌우 양극단의 두 사람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타살되면서, 한반도는 사실상 극우와 극좌의 나라가 되었다. 적어도 50년대 남한은 '이승만의 나라'라고 할 수 있을텐데, 토지개혁 하나만 가지고 이 나라가 조봉암의 업적 위에 세워졌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리 좋게 봐주려해도 비약이 너무 심하다. 이에 더해 (그것이 북한과의 체제경쟁 과정에서 출현한 정책이었다는 점을 제외한다해도) 토지개혁을 현재 대한민국 체제의 출발점으로 삼으려는 논의는 문제가 많다. 이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주대환은 자신이 아무리 신좌파를 외치고 다녀도 구좌파적 사고방식, 즉 단계론적/진화론적인 사고방식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여진다.


그는 남한의 토지개혁을 치켜세우면서, 그것은 집단농장으로 전락한 중국 공산당의 토지개혁이 아니라 79년 덩샤오핑 체제 하에서 실시된 토지개혁이 남한의 그것과 견줄만 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농민들에게 자기 소유의 땅을 쥐어주고 "모두 부자가 되라!"라는, 우리나라 모CF의 "부자 되세요~"와 견줄만한 지상명령을 제시한다. 이는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黑猫白猫)론으로 잘 드러나는데, 이것을 보통 중국의 자본주의로의 전환에 있어 첫 기점으로 삼는다. 주대환에게 이것은 한국의 토지개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다시 말하자면 건국 당시 대한민국은 소농의 나라였습니다. 토지 개혁으로 조그만 땅뙈기를 갖게 된 수많은 자영농민들의 자발적 중노동과 창의력이, 그 말릴 수 없는 교육열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자본주의 경제 발전의 기적을 만든 에너지의 원천입니다."(226쪽)


정리하자면 중국이나 한국이나 모두 토지개혁을 통해 자본주의로의 발전과 번영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이고, 대한민국은 이런 '위대한 유산'을 바탕으로 낡은 NL과 PD적 사고방식을 버리고 '사회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보면 제2인터내셔널 당시 자본주의의 성숙이 자동적인 사회주의로의 진화로 나아가게 한다고 말한 일부 '정통 맑스주의자'(주대환이 따르는 베른슈타인류나 그가 반대하는 스탈린류나 모두 여기에 속한다)들의 사고방식과 뭐가 그리 다른지 궁금하다. 게다가 '자발적 중노동'이라니!! 이런 식이라면 인클로저 운동 당시 도시로 내몰린 빈민들의 노동도 '자발적'이었고, 먼지 소굴 평화시장에서 어린 여공들의 일을 대신해주기도 했던 전태일의 노동도 자발적인 것이다. 어쩌면 주대환의 생각은 작년에 광주항쟁에 대해 '선진국에서도 다 그런 과정을 겪더라'라며 통과의례쯤으로 발언했던 황석영의 관점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월러스틴이 말했듯이, 서양의 부르주아 혁명은 신흥 자본가계급의 출현이 아니라 기존 귀족계급의 '환상변신'에 의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는 '근대로의 진화'라고 보는 관점은 옳지 않다. 한국의 50년대도 마찬가지 아닌가? 조선 말기와 일제 식민지 시기에 봉건 지주였던 놈들이 반민특위를 짓밟고 자본가계급으로 '환상변신'을 했다는 것은 굳이 월러스틴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상식이 아니던가?




3. 전쟁은 '평등주의'다!?


나아가 내가 주대환을 다음의 인용문을 근거로 '주전론자'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또 하나의 억지일까?



"그리고 한국전쟁에서 두어 차례 전선이 밀려 내려오고 밀고 올라감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다니고, 월남 또는 월북함으로써 뒤섞이는 사이에 신분 질서와 귀족의 생활양식, 전통문화는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고급문화를 대중이 따라하여 전반적으로 문화적 상향평준화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거꾸로 모두가 어떤 가식도 핑계도 없이 노골적으로 돈과 힘을 추구하는 천민이 된, 위대한 천민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 ...) 그리하여 대한민국은 평등하기 때문에 위대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천민자본주의의 나라, 대한민국이 평등하다니요? 그렇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평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건국 당시 대한민국은 평등했습니다. 세상 모든 사물의 평가는 상대적입니다. 건국 당시의 대한민국이 평등하다는 것은 절대적인 평가가 아니라 세계의 다른 나라들에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222-3쪽)


한국전쟁이 기존의 신분관계를 청소해서 대한민국은 모두가 천민인 나라, 평등한 나라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원래 자본주의 자체가 천한 것이니 한국식 천민자본주의가 부끄러울 이유도 없고, 지금의 대한민국 발전을 이끌어 온 엄청난 교육열도 이 '천민적 평등주의'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위대하신 대한민국을 만든 것은 팔할이 전쟁이었다. 오 전쟁이시여~ 뭐 이런건가?


이런 식의 주장은 사실상 종말론적으로 읽힌다. 모든 것이 파괴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새로 지을 수 없다는... 그렇다면 우리는 세계대전이 전지구적 경제성장의 기회를 가져왔다고 말하는 제국주의자들의 주장에 수긍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이것을 앞에서 지적한 그의 '자발적 중노동'이란 표현과 연결해 생각해 보면, 전쟁으로 피폐화된 상황 속에서 한국은 근대적 평등주의의 사상적 기반을 얻었고, 이로써 근대화의 발판을 만들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이 일제의 식민통치와 세계대전 참전이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뉴라이트의 역사관과 어떤 면에서 차이가 있는 것인가? 이런 식이라면 현재 전쟁을 겪고 있는 중동지역 시민들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탄을 축복의 폭죽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인가?




4. 여전한 남의 것에 대한 맹목적 추종


이에 대해 나의 과잉해석이라고 말한다면 인정하겠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받아들일때 한 쪽 눈엔 블라인드를 쳐버리는 습관은 여기서 그치는게 아니었다. 이를테면 "마찬가지로 뒤집어 보면, 한국이 OECD에 가입했다는 사실 역시 때로는 고맙습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충분한 준비 없이 졸속하게 OECD에 가입해서 구제금융을 받아야만 하는 외환위기를 초래했다고 비판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건 맞습니다. 그러나 과연 OECD가 한국의 가입 조건으로 제시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 공무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 엄두를 내었겠습니까?"(230쪽) 같은 구절 말이다.


한국 정부가 언제부터 그렇게 국제기구의 말을 잘 들었다고 공무원노조 탄생의 공을 OECD로 넘기는지 알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주대환은 자기가 그렇게 부르짖는 '토종 좌파'로서의 자질이 매우 부족하다. 그는 대한민국을 긍정하자고 말하면서도 그 근거를 대한민국 내부가 아니라 항상 외부에서 찾는다. 대한민국 최초 헌법이 가장 선진적인 민주주의 제도를 받아들인 결과라는 것도 사실상 서구문물에 대한 찬양이다. 그가 여운형, 조봉암을 존경하는 이유도 그들이 서구식 민주주의를 신뢰했기 때문이다.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을 좋아하는 것도 그들이 '서구적' 국가관료제도를 신뢰했기 때문이다. 그는 식민지 시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저항운동의 역사 속에서 피어난 대한민국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의 모조품으로서 대한민국을 긍정하는 것이다.


진보신당 상상연구소의 장석준은 주대환의 이런 주장을 두고 역사 속에서 어떤 기원적 사건을 찾고 그것으로부터 정통성의 계보를 작성하는 것은 전형적인 주자학자들의 역사관인데, 주대환의 주장이 딱 그 꼴이라고 비판했다. (장석준, <진보좌파에게 대한민국은 무엇인가?>, 시민과세계 2008 하반기호) 여기에 덧붙이자면 주대환은 한국 땅에서 한 번도 자리를 잡은 적 없는 서구형 민주주의/복지국가를 대한민국 정통성의 기원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대한민국을 긍정해야 한다면 이 나라가 '민주공화국'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는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는 3.1운동으로부터 시작된 수많은 대중들의 저항행동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긍정해야 한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장석준이 말하듯이 "민주공화국을 위해서 대한민국을 넘어서야"한다. 그런 방향으로 우리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다시 써내려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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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런 글을 읽는 것은 나로서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앞서서 운동했던 대표적인 분이 이렇게 매력없는 글로서 사람을 실망시키니 후배의 마음은 찢어진다. 한 논평자의 말처럼 주대환의 이런 선회는 이미 90년대초 '신노선'을 선언할 당시의 선택이 "주어진 선택지들 중에서 선택한 무엇이 아니라 '더는 이대로 돌파할 수 없는 한계선'을 맞닥드리며 어쩔 수 없이 포기하며 좌파에게 남은 기획을 '새로운 기획'이라 믿고 또 다시 헌신해온, 좌파의 총체적 위기와 기획의 빈곤 위에서 싸워온 우리 운동과 우리 자신의 현실적 자화상"(최윤식, "사민주의가 대안일 수 없는 이유", 레디앙, 08.09.08)인 것처럼 예정된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어차피 좋든 싫든 주대환류의 역사적 효과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우리의 미래도 이렇게 예정되어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가 '운동의 혁신'이란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난 운동의 결과들과 단절을 선언하는 것 밖엔 길이 없지 않는가?


부탁드린다. 어린 놈이 더 이상 이런 절망스러운 결론에 다다르지 않도록 선배님들이 지난 운동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를 좀 더 성실하게 해 주시기를... 그래서 그것이 '대안사회'로 불리든 '진보한국'으로 불리든, 그것을 이뤄나가는데 미력한 지성을 보태는데 망설일 이유를 만들지 않게 해 주시기를...


좌파로서 대한민국을 긍정하다 아랑훼즈 ㅣ 2009-05-27 ㅣ 공감(0) ㅣ 댓글 (0)


책이 출판된 때가 2008년 11월이다. 저자는 이 해에 민노당 분당 사태 때 당적을 정리하고 탈당을 하였다. 민노당 분당 사태의 핵심 중에 하나인 '일진회 사건'과 '종북주의'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이미 책 제목에 분명히 드러나 있다. '대한민국'. 그렇다. 저자는 '대한민국'을 긍정하고 인정한다. 그리하여 '건국'이라는 표현에도 불편감을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대한민국' 건국의 의의를 변호하고 긍정한다. 이러한 면만 보면 저자가 순전히 한국의 보수우파라는 착각에 빠질 정도인데, 저자는 70년대 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진보운동을 해온 잔뼈 굵은 좌파 운동가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떠한 면에서 '대한민국'을 긍정하는 것일까? 이를 위해 그가 이야기하는 것을 크게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농지개혁, 여운형과 조봉암, 데카르트 등 등... 책 전체에서 저자는 이 것들을 근거로 대한민국이 분명 한계가 있지만, 반대로 가능성도 분명히 있는 긍정적인 사회라는 것을 꾸준히 역설한다. 나는 저자의 이런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이야기를 통해 나 자신을 잠시나마 위로하고 희망을 꿈꿀 수 있어 좋았다. 물론, 저자는 직업 운동가이자 정당인이었기 때문에 학자들처럼 한국 사회를 과학적이고 정교하게 묘사하고, 판단하는 것은 부족할 수 있다. 하지만, 학자들의 분석과 대안을 현실적으로 실천하고 행동해 본 입장에서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별개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정치와 동떨어지게 보이는 데카르트 이야기였다. 저자가 학생 시절에 탐독하였던 데카르트. 이후에 그의 정치적 실천과 가치판단에 굳건한 기준으로 작용하였던 데카르트의 합리적인 철학은 그의 정치이념의 기초이다. 꾸준하고 긴 정치활동을 통해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그의 신념과 철학은 깊어졌고, 결국 성선론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는데에 까지 도달한다. 그는 더이상 공산주의 사회가 가정하였던 성선적인 인간론을 믿지 않는다. 대신에 성실하게 회의하고, 비판하여 현실적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실현하길 원한다. 그래서 그는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한다.

지금은 2009년이고, 4.29 재보선에서 민노당과 진보신당은 후보단일화로 국회의원 1명을 당선시켰고, 전라도에서는 민노당 후보 3명이 기초의원과 단체장 선거에 당선되었다. 저자는 지금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내년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진보대연합이라는 과제를 이루기 위해 양 당이 고군분투하고 있는 요즘, 제3세력으로 자립했던 저자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못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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