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에 도주
나카에 도주 中江藤樹 | |
|---|---|
| 로마자 표기 | Nakae Tōju |
| 출생 | 1608년 4월 21일 |
| 사망 | 1648년 10월 11일 |
| 성별 | 남성 |
| 국적 | 일본 |
| 직업 | 철학자 |
나카에 도주(中江藤樹, なかえ とうじゅ, 1608년 4월 21일 ~ 1648년 10월 11일)는 일본의 철학자다. 일본 양명학의 시조이다.
평소 등나무(藤樹) 아래에서 강학하였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를 ‘도주 선생’이라 불렀다. 청년 시절에 도주는 하야시 라잔의 문하에서 정주학을 배웠으며, 33세가 되던 해에 우연히 《왕용계어록(王龍溪語錄)》을 읽고 많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용계의 어록에 불교의 말들이 섞여 있고 그 견해가 선학(禪學)에 가깝다고 여겨, 그것에 대해 시종 의심을 품었다고 한다. 그러나 37세 되던 해 《왕양명전집》을 구해 여러 번 읽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성인의 일관된 학문은 태허(太虛)를 체(體)로 삼으니, 이단(異端)과 외도(外道)가 모두 내 안에 있다. 내가 어찌 말이 같다고 꺼리겠는가”(〈藤樹先生行狀〉) “치지격물(致知格物)의 학문이 비록 새롭다고 하지만 해가 거듭하여도 참뜻을 밝힐 수 없구나. 하늘이 도와서 밝은 세계로 돌아와 태평함에 이르렀으니, 오늘 아침 내 마음에는 새 봄이 찾아 온 듯하구나.”(〈藤樹先生遺稿〉) 이로부터 도주는 완전히 양명학에 귀의하였다. 그러나 도주는 양명학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구애됨 없이 다른 여러 학파의 장점도 받아들였다. 그는 이 토대 위에서 자신의 독특한 사상 체계인 도‘주학’을 건립하였고, 나아가서는 일본 양명학의 이론적 기틀을 마련하였다.
우주론에 있어서 나가에 도주는 완전히 왕수인의 심본체론을 계승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심(心)이란 전체적인 총칭이요, 태극의 다른 이름이다. 심은 리(理)와 기(氣)를 합하고 심과 성(性)을 통괄하여 비록 주재한다 하더라도, 기실 천지의 형체 밖에까지 통한다. 그것을 크다고 하면 밖이 없고, 작다고 하면 안이 없으니, 바로 조화의 하늘이요, 그것 역시 나에게 주어져 존재한다.”(〈翁問答〉) 이 말은 ‘마음’은 우주의 본체인 동시에, 천지만물과 모든 리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도주의 주관적 관념론의 이론 체계가 비록 왕수인의 철학 체계를 계승하고 있더라도, 그 내용과 사유적 구조에 있어서는 일부 다른 점도 있다. 도주 철학 체계의 최고 범주는 ‘명덕(明德)’이다. 명덕은 본래 태허(太虛)와 체를 함께 하는 것이다. 이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비록 가슴 한가운데 존재하더라도 빛은 사해(四海)를 밝게 비추고 신명에 통하니, 천하를 평정하고 나라를 다스리며 집안을 가지런히 함에 있어서 통하지 않음이 없다. 따라서 천지만물은 모두 명덕(明德) 가운데 갖추어져 있다.”(《藤樹先生全集》) “대개 명덕이라고 하는 것은 상제(上帝)가 인간 속에 자리한 것이니 순수하고 지극히 선한 것이다.”(《藤樹先生全集》) 즉 명덕은 인간이 본래부터 가진 선천적인 도덕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도주는 “양지(良知)가 바로 천리요, 명덕이다”라고 말하여 양지와 명덕을 통일시켜 규정하였다. 양지와 명덕을 동일시하는 관점은 도주와 왕수인이 서로 일치한다. 그러나 도주는 ‘효(孝)’를 명덕의 본질로 간주하였고, 효를 인류 사회 최고의 도덕적 법칙과 우주 만물의 시원으로 여겼다.
도주학과 양명학을 비교해 보면, 양명학 가운데는 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적극적인 진취 정신이 충만되어 있다. 그러나 도주의 학문 세계는 이와는 상대적으로 현실 세계의 고민과 번뇌에서 해탈하고, 내면적 세계의 평온과 쾌락을 추구하는 데 좀 더 무게가 실려 있다. 따라서 도주학은 방황과 불안 속에서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위해 안식처를 마련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 전락하였다. 젊어서는 극단적인 배불론자였던 그가 후기에 와서 불교와 타협하고, 심지어 불교를 유학에 끌어들여 절충시키려고 한 것도 이러한 학문적 성향을 연관된다. 도주의 학문은 양명학과 비교해서 이론적 수준이나 사상 체계가 세련되지 않았으며, 거칠고 조잡함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이는 그가 양명학자로 변신하여 자기의 사상과 이론을 펼친 시기가 불과 5년밖에 되지 않고, 학문적 수양과 개인적 소질에 있어서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저서
- 대학계몽(大學啓蒙)(1628년)
- 지경도설(持敬圖說)(1638년)
- 원인(原人)(1638년)
- 논어향당계몽익전(論語郷黨啓蒙翼傳)(1639년)
- 옹문답(翁問答)(1640년)
- 효경계몽(孝經啓蒙)(1642년)
- 소의남침(小醫南針)(1643년)
- 신방기술(神方奇術)(1644년)
- 경장(鏡草)(1647년)
- 대학고(大學考)(1647년)
- 대학해(大學解)(1647년)
- 중용해(中庸解)(1647년)
- 중용속해(中庸續解)(1647년
中江藤樹
なかえ とうじゅ 中江 藤樹 | |
|---|---|
中江藤樹像 | |
| 生誕 | 1608年4月21日 近江国高島郡(滋賀県高島市) |
| 死没 | 1648年10月11日(40歳没) 近江国高島郡 |
| 墓地 | 滋賀県高島市玉林寺 |
| 国籍 | |
| 別名 | 近江聖人 |
| 著名な実績 | 『大学啓蒙』 『翁問答』、『鑑草』 |
| 影響を受けたもの | 王龍溪(王陽明の高弟)、王陽明 |
| 影響を与えたもの | 熊沢蕃山、淵岡山、中川謙叔 |
| 活動拠点 | 近江国 |
中江 藤樹(なかえ とうじゅ、1608年4月21日(慶長13年3月7日) - 1648年10月11日(慶安元年8月25日))は、近江国(滋賀県)出身の江戸時代初期の陽明学者。近江聖人と称えられた。諱は原(はじめ)、字は惟命(これなが)、通称は与右衛門、藤樹と号した[注釈 1]。
経歴
高島郡小川村で農業を営む中江吉次の長男として誕生[注釈 2]。9歳の時に伯耆米子藩主・加藤氏の150石取りの武士である祖父・徳左衛門吉長の養子となり米子に赴く。1617年(元和2年)米子藩主・加藤貞泰が伊予大洲藩(愛媛県)に国替えとなり祖父母とともに移住する。1622年(元和8年)祖父が死去し、家督100石を相続する。
1634年(寛永11年)27歳で母への孝行と健康上の理由により藩に対し辞職願いを提出するが拒絶される。脱藩し京に潜伏の後、近江に戻った。郷里である小川村(現在の滋賀県高島市)で私塾を開く。これが藤樹書院である。1637年(寛永14年)伊勢亀山藩士・高橋小平太の娘・久と結婚する。藤樹の屋敷に藤の巨木があったことから、門下生から「藤樹先生」と呼ばれるようになる。
やがて朱子学に傾倒するが、次第に陽明学の影響を受け、格物致知論を究明するようになる。その説く所は身分の上下をこえた平等思想に特徴があり、武士だけでなく農民、商人、職人にまで広く浸透し江戸の中期頃から、自然発生的に「近江聖人」と称えられた。
1646年(正保3年)妻・久が死去。翌、1647年(正保4年)近江大溝藩士・別所友武の娘・布里と再婚する。1648年(慶安元年)41歳で死去[注釈 3]。墓所は滋賀県高島市玉林寺。
代表的な門人として熊沢蕃山、淵岡山、中川謙叔、石川茂次などがいる。
ギャラリー
逸話
ある武士が近江国を旅していたときの話。大切な金を馬の鞍につけたまま馬を返してしまった武士は金が戻らずがっかりしていたが、そのときの馬子が金をそっくり渡すため武士のもとに戻ってきた。感謝した武士はせめて礼金を渡そうとするが馬子は受け取らない[3]。仔細をきくと、馬子の村に住む中江藤樹の教えに導かれてのことという。そこで武士は迷わず、藤樹の弟子となった。この武士こそのちに岡山藩の家老となった熊沢蕃山であるという[3]。
著書
- 大学啓蒙(1628年)
- 持敬図説(1638年)
- 原人(1638年)
- 論語郷党啓蒙翼伝(1639年)
- 翁問答(1640年)
- 孝経啓蒙(1642年)
- 小医南針(1643年)
- 神方奇術(1644年)
- 鑑草(1647年)
- 大学考(1647年)
- 大学解(1647年)
- 中庸解(1647年)
- 中庸続解(1647年)
刊本
- 『鑑草 附春風・陰隲』加藤盛一校註 岩波文庫 1939
- 『日本哲学思想全書 第7巻 (科学 学問篇)』「大学解」 三枝博音・清水幾太郎編 平凡社 1956
- 『日本哲学思想全書 第14巻 (道徳 儒教篇・道徳論一般篇)』「中庸解」平凡社 1957
- 『日本の思想 17』「翁問答(抄)」 西田太一郎編 筑摩書房 1970
- 『日本思想大系 29 中江藤樹』岩波書店 1974
- 『藤樹先生全集』弘文堂書店 1976
- 『日本の名著 11 中江藤樹・熊沢蕃山』伊東多三郎責任編集「翁問答」中央公論社 1976
- 『日本教育思想大系 中江藤樹』日本図書センター 1979
- 『鑑草 現代語新訳』日本総合教育研究会 編訳 行路社 1990
- 『中江藤樹人生百訓』中江彰著 致知出版社 2007
- 『中江藤樹一日一言 孝を尽くし徳を養う』中江彰編 致知出版社 2008
伝記・研究・小説
- 内村鑑三『Representative Men of Japan』1894、改訂1908(新訳『代表的日本人』岩波文庫 1995)
- 峡北隠士 著『近江聖人』,魚住書店,明33.11,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 足立栗園 著『近世立志伝』第6 中江藤樹,積善館,明35-36,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 中里介山 著『中江藤樹言行録』,内外出版協会,明40.12,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 河村北溟 著『中江藤樹百話』,求光閣,明44.3,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 曽田文甫 編『孝経集義 : 中江藤樹先生定本』,静観書院,明42.5,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 帝国教育会 編『六大先哲』,弘道館,明42.9.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 佐藤緑葉 著『中江藤樹 : 家庭訓話』,岡村書店,明42.9,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 上原七右衛門 著『中江藤樹先生略伝』,上原斯文堂,明44.9,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 童話研究会 編『偉人と英雄 : 教訓童話』4 (中江藤樹),積文館書店,大正14.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 神戸酒商青年会 編『中江藤樹先生』,神戸酒商青年会,昭和2,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 富士川遊 著 『新撰妙好人伝』第4編 (中江藤樹),厚徳書院,昭和12.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 加藤盛一 著『中江藤樹』,啓文社,昭14,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 高橋俊乗 著『中江藤樹』,弘文堂,昭和17,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 和田政雄 著 ほか『中江藤樹』,鶴書房,昭和18,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 渡部武『中江藤樹』清水書院 Century books 人と思想 1974
- 山住正己『中江藤樹』朝日新聞社 朝日評伝選 1977
- 山本命『中江藤樹の儒学 その形成史的研究』風間書房 1977
- 木村光徳『叢書・日本の思想家 4 中江藤樹・熊沢蕃山』明徳出版社 1978
- 古川治『中江藤樹』明徳出版社 シリーズ陽明学 1990
- 栢木寛照『時代のこころ人のこころ 中江藤樹に学ぶ 熱血和尚のにんげん説法3』二期出版 1994
- 下程勇吉『中江藤樹の人間学的研究』広池学園出版部 1994
- 古川治『中江藤樹の総合的研究』ぺりかん社 1996
- 童門冬二『小説中江藤樹』学陽書房 1999 のち人物文庫
- 大橋健二『中江藤樹・異形の聖人 ある陽明学者の苦悩と回生』現代書館 2000
- 高柳俊哉『中江藤樹の生涯と思想 藤樹学の現代的意義』行人社 2004
- 千葉ひろ子文 遠藤恵美子絵『中江藤樹 近江聖人と慕われたまごころの教育者』新教育者連盟 子供のための伝記シリーズ 2005
- 久保田暁一『中江藤樹 道に志し孝を尽くし徳を養う生き方』致知出版社 2006
- 木南卓一『中江藤樹私新抄』明徳出版社 2008
- 中江彰『中江藤樹の生き方』明徳出版社 2009
- 林田明大『評伝・中江藤樹 日本精神の源流・日本陽明学の祖』三五館 2017
顕彰施設
高島市内の施設
- 近江聖人中江藤樹記念館(高島市安曇川町上小川)
- 藤樹神社(高島市安曇川町上小川) - 藤樹神社創立協賛会により創建された[4]。協賛会の名誉会員には杉浦重剛、東郷平八郎、大隈重信らがおり、顧問には渋沢栄一が就いた[5]。
高島市の説明板
JR安曇川駅から藤樹書院までの通り「よえもんさん通り(通称)」には2種類の説明板がある[6]。
- 中江藤樹のことば
- 遺言の現代語訳
- 藤かげの道
- 幼少期からの逸話
脚注
注釈
出典
- ^ 「先哲叢談/原念斎・漢学者伝記集成」竹林貫一編
- ^ 本間・越田(2014)p.101
- ^ a b 本間・越田(2014)pp.100-101
- ^ 渋沢栄一と藤樹神社 高島市、2024年3月7日閲覧。
- ^ 創立100年を迎えた藤樹神社〜創立に関わった偉人たち〜 高島市、2024年3月7日閲覧。
- ^ 『近江聖人中江藤樹 散策マップ』高島市教育委員会事務局 社会教育課
参考文献
- 本間康司・越田年彦『覚えておきたい人と思想100人』清水書院、2014年9月。ISBN 978-4-389-50039-9。
- 林田明大『評伝・中江藤樹』三五館、2017年10月。
関連項目
外部リンク
- 近江聖人中江藤樹記念館 - 高島市
- NPO法人高島藤樹会 - NPO法人高島藤樹会
- 米子の中江藤樹 - 米子市
나카에토키
나카에 토쥬 나카에 후지키 | |
|---|---|
나카에토 수상 | |
| 탄생 | 1608년 4월 21일 오 미쿠니 타카시 마군 ( 시가현 다카시마시 ) |
| 사망 | 1648년 10월 11일 (40세 몰) 오미 고쿠 타카시 마군 |
| 묘지 | 시가현 다카시마시 타마린지 |
| 국적 | |
| 별명 | 오미 성인 |
| 유명한 업적 | 『대학 계몽』 『자문답』, 『감초』 |
| 영향을 받은 것 | 王龍溪 (왕 용, 고을 왕) |
| 영향을 준 것 | 구마자와 소야마 , 후치오카야마 , 나카가와 켄지 |
| 활동 거점 | 오미나라 |
나카에 후지키 (나카에 토우쥬, 1608년 4월 21일 ( 경장 13년 3월 7일 ) - 1648년 10월 11일 ( 경안 원년 8월 25일 ))는 오미국 ( 시가현 ) 출신의 에도 시대 초기의 양명 학자 . 오미 성인 이라고 불렸다.諱는 原(시작), 글자 는 惟命(이른나), 통칭은 요우에몬, 후지키라고 호했다 [ 주석 1 ] .
경력
다카시 마군 오가와무라에서 농업을 영위하는 나카에 요시차의 장남으로서 탄생 [ 주석 2 ] . 9세 때에 백야 요 네코 번주 가토 씨의 150개 이시토리의 무사인 할아버지, 도쿠사에몬 요시나가의 입양이 되어 요나고 로 향한다. 1617년 ( 모토와 2년) 요나고 번주· 가토 사다야스 가 이요 오스 번 ( 에히메현 )으로 국환이 되어 조부모와 함께 이주한다. 1622년 (원화 8년) 할아버지가 사망하고 가독 100석을 상속한다.
1634년 ( 히로나가 11년) 27세에 어머니에 대한 효행과 건강상의 이유로 번 에 사직 소원을 제출하지만 거절된다. 탈번 경 에 잠복 후 오미 로 돌아갔다. 향리인 오가와무라(현재의 시가현 다카시마시 )에서 사학원을 연다. 이것이 후지키 서원이다 . 1637년 (히로나가 14년) 이세가메 야마 번사 ·다카하시 코다이라의 딸·히사와 결혼한다. 후지키의 저택에 등나무의 거목이 있었기 때문에, 문하생으로부터 「후지키 선생님」이라고 불리게 된다.
이윽고 주자학 에 기울지만, 점차 양명학 의 영향을 받아 격물치지론을 규명하게 된다. 그 말하는 곳은 신분의 상하를 넘은 평등 사상에 특징이 있어, 무사뿐만 아니라 농민, 상인, 장인에까지 넓게 침투해 에도의 중기 무렵부터, 자연 발생적으로 「오미 성인」이라고 칭해졌다.
1646년 ( 정보 3년) 아내·히사가 사망. 다음, 1647년 (정보 4년) 오미 오미조 번사·벳쇼 토모타케 의 딸·후리와 재혼한다. 1648년(경안 원년) 41세로 사망 [ 주석 3 ] . 묘소는 시가현 다카시마시 타마린지.
대표적인 문인으로 구마자와 소야마 , 후치오카야마 , 나카가와 켄지, 이시카와 시게지 등이 있다.
갤러리
일화
한 무사가 오미나라를 여행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 소중한 돈을 말의 안장에 붙인 채 말을 돌려 버린 무사 는 돈이 돌아오지 않고 실망하고 있었지만, 그 때의 마자가 금을 똑같이 건네주기 위해서 무사에게 돌아왔다. 감사한 무사는 적어도 예금을 건네려고 하지만 마코는 받지 않는다 [ 3 ] . 자세를 올리면 마코의 마을에 사는 나카에토키의 가르침으로 이끌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무사는 헤매지 않고 후지키의 제자가 되었다. 이 사무라이 바로 그곳에 오카야마 번의 가로 가 된 구 마자 와 소야마라 는 [ 3 ] .
저서
- 대학 계몽(1628년)
- 지경도설(1638년)
- 원인(1638년)
- 논어향당 계몽익전(1639년)
- 翁問答(1640년)
- 孝経啓蒙 (1642년)
- 소의남침(1643년)
- 신방기술(1644년)
- 감초 (1647년)
- 대학고(1647년)
- 대학해(1647년)
- 中庸解 (1647년)
- 中庸 속해 (1647년)
간본
- 『감초 부춘풍・음록』카토 모리이치교주 이와나미 문고 1939
- 「일본 철학 사상 전서 제7권(과학 학문편)」「대학해」미에히로 히로네・시미즈 기타로 편 히라 범사 1956
- 『일본철학사상전서 제14권 (도덕 유교편·도덕론 일반편)
- 『일본의 사상 17』「翁問答(抄)」니시다 타이치로편 쓰 쿠마 서방 1970
- 『일본 사상대계 29 나카에토키』 이와나미 서점 1974
- 「후지키 선생님 전집」히로몬도 서점 1976
- 『일본의 명저 11 나카에토키・쿠마자와 소야마』이토 타사부로 책임 편집 「솥문답」 중앙공론사 1976
- 『일본교육사상대계 나카에토키』 일본도서센터 1979
- 「감초 현대어 신역」일본 종합 교육 연구회 편역 행로사 1990
- 『나카에토 수인생 백훈』 나카에 아키라 치치 출판사 2007
- 『나카에토키 하루하루 한마디 효력을 다하고 덕을 기른다』 나카에 아키라편
전기 · 연구 · 소설
- 우치무라 감조 『 Representative Men of Japan』 1894, 개정 1908(신역 『대표적 일본인』 이와나미 문고 1995)
- 협북 은사 저 "오미 성인", 어주 서점, 명 33.11, 국립 국회 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 아다치 구리엔 저 「근세립 시전」 제6 나카에토키, 적선관, 아키라 35-36, 국립 국회 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 나카사토 개산 저 「나카에토 수언 행록」, 내외 출판 협회, 아키라 40.12, 국립 국회 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 가와무라 키타가 『나카에토 수백화』, 구광각, 아키라 44.3, 국립 국회 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 소다 분카 편 「효케이 집의 : 나카에토키 선생정본」, 시즈칸 서원, 아키라 42.5, 국립 국회 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 제국교육회 편 「육대선철」, 히로미치칸, 아키라 42.9.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 사토 미도리바 저 『나카에토키 : 가정훈화』, 오카무라 서점, 아키라 42.9, 국립국회 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 우에하라 시치에몬 『나카에토키 선생님 약전』, 우에하라 에이몬도, 아키라 44.9, 국립 국회 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 동화연구회 편『위인과 영웅 : 교훈동화』4(나카에토키), 적문관 서점, 다이쇼 14. 국립국회 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 고베 술상 청년회 편 「나카에토 키 선생님」, 고베 술상 청년회, 쇼와 2, 국립 국회 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 후지카와 유 저 『신센 묘호인전』 제4편
- 가토 모리이치, 나카에 후지키, 케이분샤, 쇼 14, 국립 국회 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 다카하시 슌승 저 「나카에토키」, 히로후미도, 쇼와 17, 국립 국회 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 와다 마사오 저 외 『나카에토키』, 학 서방, 쇼와 18, 국립 국회 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 와타나베 타케『나카에토키』 시미즈 서원 Century books 사람과 사상 1974
- 야마주 마사미『나카에토키』 아사히 신문사 아사히 평전선 1977
- 야마모토 명 『나카에토키의 유학 그 형성 사적 연구』 카자마 서방 1977
- 기무라 코토쿠『타카시・일본의 사상가
- 후루카와 오사무『나카에토키』 명덕 출판사 시리즈 양명학 1990
- 栢木寛照『시대의 마음의 마음 나카에토키에게 배운다 열혈화상의 당근설법3』
- 하정 용길『나카에토키의 인간학적 연구』 히로이케 학원 출판부 1994
- 후루카와 오사무 『나카에토키의 종합적 연구』 페리칸사 1996
- 동문 후유이『소설 나카에토키』학양서방 1999 이후 인물문고
- 오하시 켄지『나카에토키・이형의 성인 어느 양명학자의 고뇌와 회생』 현대서관 2000
- 타카야나기 슌야 「나카에 후지키의 평생과 사상 후지키학의 현대적 의의」행인사 2004
- 치바 히로코 문 엔도 에미코 그림 “나카에 후토키 오미 성인과 몹시 놀란 진정한 교육자” 신교육자 연맹 아이를 위한 전기 시리즈 2005
- 쿠보타 효이치『나카에토키 길을 향해 효를 다하고 덕을 기르는 삶의 길』치치 출판사 2006
- 키난 타쿠이치『나카에토 키 사신초』 메이토쿠 출판사 2008
- 나카에 아키라 「나카에토키의 삶의 방법」메이토쿠 출판사 2009
- 하야시다 아키라대 “평전·나카에토키 일본 정신의 원류·일본 양명학의 조” 미고칸 2017
현창 시설
다카시마 시내 시설
- 오미성인 나카에토키 기념관 (다카시마시 아즈미가와초 카미카와)
- 후지키 신사(다카시마시 아즈미가와초 가미오가와) - 후지키 신사 창립 협찬회에 의해 창건되었다 [ 4 ] . 협찬회의 명예회원으로는 스기우라 시게 요시 , 도고 히라 하치로 , 오쿠마 시게노부 신등 이 있어, 고문에는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취했다 [ 5 ] .
다카시마시의 설명판
JR 아즈미가 와 역에서 후지키 서원 까지의 거리 「요에몬씨 거리(통칭)」에는 2종류의 설명판이 있다 [ 6 ] .
- 나카에토키의 말
- 유언의 현대 어역
- 후지카게의 길
- 어린 시절의 일화
각주
주석
출처
- ↑ “선철총담/원념사이·한학자 전기 집성” 죽림 관일편
- ↑ 혼마·고시다(2014) p.101
- ↑ a b 혼마·고시다(2014) pp.100-101
- ↑ 시부사와 에이이치와 후지키 신사 타카시마시 , 2024년 3월 7일 열람.
- ↑ 창립 100년을 맞이한 후지키 신사~창립에 관련된 위인들~ 다카시마시, 2024년 3월 7일 열람.
- ↑ 『오미 성인 나카에토키 산책 맵』 다카시마시 교육위원회 사무국 사회 교육과
참고문헌
- 혼마 야스시·고시다 노부히코 '기억하고 싶은 사람과 사상 100명' 시미즈 서원 , 2014년 9월. ISBN 978-4-389-50039-9 .
- 하야시다 아키다이 『평전・나카에토키』 산고칸, 2017년 10월.
관련 항목
외부 링크
- 오미성인 나카에토키 기념관 - 다카시마시
- NPO 법인 다카시마 후지키 회 - NPO 법인 타카시마 후지키 회
- 요나고의 나카에토키 - 요나고시
Nakae Tōju
Nakae Tōju 中江 藤樹 | |
|---|---|
Nakae Tōju | |
| Born | April 21, 1608 Takashima, Ōmi Province, Japan |
| Died | October 11, 1648 (aged 40) Takashima, Ōmi Province, Japan |
| Nationality | Japanese |
Nakae Tōju (中江 藤樹; Japanese pronunciation: [toꜜː.dʑɯ],[1] 21 April 1608 – 11 October 1648) was a writer and Confucian scholar of early Edo period Japan popularly known as "the Sage of Ōmi".[2]
Biography
Nakae was the eldest son of a farmer in Ōmi Province. When he was nine years old, he was adopted by his grandfather, Yoshinaga Tokuzaemon, who was a samurai with a stipend of 150 koku serving Yonago Domain in Hoki Province. In 1617, the daimyō of Yonago, Kato Sadayasu was transferred to Ōzu Domain in Iyo Province and Nakae relocated to Shikoku with his grandparents. In 1622, his grandfather died and Nakae inherited a position with a stipend of 100 koku. However, in 1634, at the age of 27, he left his position without officially resigning due to filial piety for his mother and health reasons. After hiding for a time in Kyoto, he returned to his home village of Ogawa in Ōmi (currently part of Takashima, Shiga, where he opened a private academy for Confucian studies. This was the Tōju Shoin (藤樹書院). The Tōju Shoin takes its name from a giant wisteria which grew behind Nakae's house. His students nicknamed him Mr Wisteria Tree, or "Tōju" in the kanbun pronunciation of its kanji.
In 1637, Nakae married Hisashi, the daughter of a retainer of Ise-Kameyama Domain. Nakae gradually became obsessed with the Cheng–Zhu school, but was also highly influenced by Yangmingism, which argued for the primacy of human intuition or conscience over intellect: moral improvement arises out of conscience-based action (similar to Aristotle's ethics). Nakae added a more religious aspect to Wang's "School of Intuition of Mind", calling the human conscience the "divine light of heaven". Nakae's works also supplied his followers (such as Kumazawa Banzan [1619–1691]) with "the moral foundation for political action".[3] His wife died in 1846 and the following year he remarried to Kuri, the daughter of a retainer of Ōmizo Domain. In early 1848, he rebuilt the Tōju Shoin on a larger scale; however, he died less than half a year later at the age of 41. His grave is at the temple of Tamarin-ji in Takashima.[2]
The Tōju Shoin building was destroyed by a large fire in 1880 along with 34 nearby farmhouses. The current structure is a reconstruction built in 1882, but on a smaller scale than the original. It was designated a National Historic Site in 1922, with the area under protection expanded in 2007.[4] It is about a 15-minute walk from Adogawa Station on the JR Kosei Line.[2]
Nakae was unusual in teaching that humanism transcended social status or gender, and that his teachings would be useful to women as well as men. While accepting the then standard view of women as usually lacking such virtues as compassion and honesty, he argued: "if a wife's disposition is healthy and pious, obedient, sympathetic and honest, then ... every member of her family will be at peace and the entire household in perfect order."[5] His teachings spread widely not only to samurai but also to farmers, merchants, and craftsmen, and has been spontaneously called "Ōmi saint" since the middle of the Edo period.[2] His later disciples included Yoshida Shoin.[2]
Gallery
Selected works
In a statistical overview derived from writings by and about Nakae Tōju, OCLC/WorldCat encompasses roughly 130+ works in 200 publications in 5 languages and 740+ library holdings.[6]
- 1650 -- Dialogue with the elder (Okina mondō).[7]
- 藤樹遺稿 (1795)
- 翁問答 (1831)
- 藤樹全書: 中江藤樹先生遺稿 (1893)
- 中江藤樹文集 (1914)
- 孝經五種 (1925)
- Nakae Tōju sensei zenshu (1928)
- 鑑草; 附・春風; 陰騭 (1939)
- 藤樹先生全集 (1940)
- 中江藤樹・熊沢蕃山集 (1966)
- 中江藤樹 (1974)
- 中江藤樹・熊沢蕃山 (1976)
See also
Notes
- Kindaichi, Haruhiko; Akinaga, Kazue, eds. (10 March 2025). 新明解日本語アクセント辞典 (in Japanese) (2nd ed.). Sanseidō.
- Isomura, Yukio; Sakai, Hideya (2012). (国指定史跡事典) National Historic Site Encyclopedia. 学生社. ISBN 978-4311750403.(in Japanese)
- Bodart-Bailey, p. 741.
- "藤樹書院跡" [Tōju Shoin ato] (in Japanese). Agency for Cultural Affairs. Retrieved August 20, 2020.
- Bodart-Bailey, Beatrice. (1997). "Confucianism in Japan" in Companion Encyclopedia of Asian Philosophy, p. 743 citing De Bary, William. (1981). Neo-Confucian Orthodoxy and the Learning of the Mind-and-Heart, p. 372.
- WorldCat Identities: 中江藤樹 1608-1648
- Shirane, Haruo. (2006). Early Modern Japanese Literature, 354-358.
References
- Bodart-Bailey, Beatrice. (1997). "Confucianism in Japan" in Companion Encyclopedia of Asian Philosophy (Brian Carr and Indira Mahalingam, eds). London: Routledge. ISBN 9780415035354; OCLC 35049601
- de Bary, William Theodore. (1981). Neo-Confucian Orthodoxy and the Learning of the Mind-and-Heart.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ISBN 9780231052283; OCLC 7461831
- Nauman, St. Elmo. (1979). Dictionary of Asian Philosophies. London: Routledge. ISBN 9780710002136; OCLC 470939937
- Shirane, Haruo. (2002). Early Modern Japanese Literature.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ISBN 9780231109901; ISBN 9780231109918; OCLC 48084101
- Nakae Tōju Britannica Concise Encyclopedia 2006. Retrieved: March 26, 2006.
External links
- Intellectual Currents in Tokugawa Japan — by Jason Chan; includes extracts from Toju's writings
- Takashima City web site: Toju Nakae and Toju shoin national historical site Archived 2021-11-26 at the Wayback Machine
- Toju's hometown in Japan — set of (stereo) photographs
- East Asia Institute, University of Cambridge: Further reading/bibliography

No comments:
Post a Comment
Note: Only a member of this blog may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