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23

미리보는 남포의 명물 ‘서해갑문, 청년영웅도로’ : 교육 : 사회 : 뉴스 : 한겨레



미리보는 남포의 명물 ‘서해갑문, 청년영웅도로’ : 교육 : 사회 : 뉴스 : 한겨레

등록 :2007-10-02

서해갑문의 모습
[북한] 남북 정상회담 노무현대통령이 방문하는 북한의 명소
노무현 대통령은 2일부터 4일까지 ‘2007 남북 정상회담’ 길에 오른다.



7년만에 남북의 정상이 만나는 이번 회담에 국내외적으로 이목이 집중되는 가운데, 노무현 대통령이 방문하는 남포의 명물 서해갑문, 청년영웅도로, 평화자동차공장을 미리 둘러보자. 남북 정상이 만나 합의할 내용을 기대하는 것 만큼 이번 방문지에 담긴 사연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세계를 놀라게 한 혁명의 상징, 서해갑문



남포는 평양 못지 않게 인기를 끌고 있는 북쪽 최대 공업도시이자 항만문화도시이다. 또한 남북을 잇는 물류 중심지로 주목받고 있다.




남포 서해갑문은 북측에서 먼저 노무현대통령에게 방문을 권유했을 정도로 북쪽의 자랑거리이다. 5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20리 바다를 막고, 갑문을 건설한 것은 세계 유수의 전문가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역사상 보기 드문 일이었다.



1967년 평양에 홍수가 나면서 북은 엄청난 피해를 겪었다. 당시 대동강 상류에 몇개의 갑문을 세워 물 조절을 하였으나 서해에서 밀려오는 대규모 밀물은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물론 그 피해는 다 북쪽의 국민들이 받았다.



이에 북은 1981년 5월부터 1986년 6월까지 40억 달러를 투자해 5년만에 서해갑문을 건설했다. 북쪽 전문가들은 5년이라는 짧은 시간안에 서해갑문을 만든 것은 국민의 피해를 하루라도 빨리 막고, 경제 산업 전반에 필요한 용수들을 확충하는 위한 과정이었다고 평가한다.



이 갑문은 남포시 영남리와 황해남도 은율군 송관리 사이의 대동강 하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폭 14m, 길이 7km의 둑을 쌓고 3개의 갑문과 댐, 수문 36개가 설치돼 있다. 이는 미림갑문, 봉화갑문과 함께 북한의 3대 갑문 중 하나로, 세계적 규모를 자랑한다.



서해갑문은 대동강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1981년 5월 4일 착공했다. 북한은 처음 완공 목표를 3년으로 하고 1개 군대 규모의 병력과 수만 명의 노동자를 투입했다. 공사기간에는 남포갑문으로 불렀으나, 완공 후 서해갑문으로 이름을 바꿨다.



서해갑문 건설로 인해 최대 5만톤급의 화물선도 무역항을 통과할 수 있게 됐다.

서해갑문은 평남·황남의 20만 정보에 해당하는 농업용수와 남포공업지구의 공업용수를 확보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북한방송에 따르면 서해갑문이 건설되면서 대동강의 소금농도가 기존 0.35%에서 0.006%로 줄어들어 어류와 조류의 서식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됐다고 한다.



이밖에 대동강 하류지역의 홍수방지, 내륙 수상운수 확충, 남포와 황남 간의 육로수송 단축, 남포·대동강 지역의 풍치 조성, 인공호수에서의 양식업 개발 등 다양한 기능을 하고 있다. 또 총 8㎞의 방조제를 쌓았으며 제방 및 갑문 위로 4차선 도로와 철도를 설치했다.



실제 2006년 북한 조선중앙방송의 보도에 따르면 준공 된 이후 20년 간, 화물선 2만 7천 500척을 비롯해 19만 2천 800여척의 크고 작은 선박이 통과했다. 또 남포항을 비롯한 무역항들의 화물선 통과 능력이 훨씬 커져, 5만 톤급 대형선박이 드나들 수 있게 됐다.



이러한 위엄에 걸맞게 지난 1992년 정원식 당시 국무총리, 1994년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2005년 메가와티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 등 국내외 주요인사가 서해갑문을 방문했다.



북한은 서해갑문을 김정일 노동당 총비서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첫 인공위성 ‘광명성 1호’ ▲1만톤 프레스 ▲황해제철소 산소열법 용광로 ▲함남 금야군 광명성제염소 등과 함께 ‘5대 경제성과물’중 하나로 평가하고 있다.



청년이 만든 기적, 청년영웅도로



한편 남포로 가는길에 빼놓을 수 없는 명물이 바로 청년영웅도로이다.



청년영웅도로는 평양과 남포를 잇는 구간 42km, 왕복 10차선 고속도로를 일컫는 말로, 북한의 청년동맹 산하 조직인 ‘속도전 청년돌격대’에 의해 건설됐다.



청년영웅도로 기념우표와 건설을 진행할 당시 청년들의 노동 모습

이 도로는 1998년, 11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로 시작해 1년 11개월 만에 공사를 마치고 조선노동당 창당 55주년을 기념하여 2000년 10월 10일 완공됐다.



당시 북은 미국의 경제봉쇄와 홍수의 자연재해가 겹쳐 온국민이 굶주림과 고통에 시달린‘고난의 행군’시기였다. 청년들은 이 어려운 시기를 청년들이 이겨내겠다는 각오와 결심으로 특별한 장비 없이 도로를 건설해냈다. 원래 명칭은 ‘평양~남포 고속도로’였으나 이를 건설한 청년들의 영웅적 기상을 살려 ‘청년영웅도로’라 불린다.



청년영웅도로 건설에는 5만 명의 청년들이 참가했으며, 그 중 35명은 ‘노력영웅’ 칭호를 수여 받았다. 당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청년영웅도로 건설에서 특출한 노력적 위훈을 세운 건설자에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노력영웅 칭호를 수여함에 대하여’라는 정령을 통해 김영수 돌격대장 등 35명에게 노력영웅 칭호와 함께 금메달 및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했다.



북은 청년영웅도로 건설 사업을 “청년들이 역사에 유례없는 ‘고난의 행군’, 강행군에서 승리자의 영예를 떨쳤다”며 “붉은기를 높이 들고 조국의 강성부흥을 위한 성스러운 투쟁에 청춘의 지혜와 열정을 남김없이 바쳐가고 있는 자랑찬 현실”이라고 평가했다.



제2의 ‘휘파람’붐 일으킨 평화자동차공장



청년영웅고속도로 남포 쪽 끝자락에 위치한 평화자동차공장은 어쩌면 남포의 명물 중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시설이자, 북한의 발전된 경제기술을 확인하는 계기가 될지 모른다.



남포 평양자동차 공장 전경 ⓒ 평화자동차 공장

현재 이 공장은 남북경협의 대표적 성공사례이자 자동차 합영생산으로 남북관계의 질을 한 단계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합영생산이란, 북한과 외국(남한 포함)이 자본을 함께 출자하고 회사도 공동으로 경영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평화자동차공장은 1997년 11월 5천500만 달러를 투자해 첫 진출한 이후, 2001년 1단계로 남포에 자동차 수리개조 및 조립공장 준공검사를 마치고 2002년 2월 첫 번째 자동차를 출고했다.



특히 이태리 피아트 모델을 개조해 최초의 독자모델로 개발한 1600cc의 ‘휘파람’은 북한 도로 사정에 적합하고 연비가 적게 든다는 장점이 있어 북측 시장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다고 한다. 그밖에 소형 지프인 뻐꾸기와 사파리 형태의 뻐꾸기II 등 신기종을 출고하고 있다.



평양역 앞에 설치되어 있는 ‘휘파람’ 빌보드 광고. ⓒ 평화자동차 공장

평양에서 42km 떨어진 남포에 세운 평화자동차 조립생산 공장에는 150~200여명의 북측 기술자들이 주로 패널 조립, 도색, 엔진, 트랜스미션 분야의 선진 조립기술을 집중적으로 터득하고 있다. 이들은 북측 자동차산업을 세계최고로 도약시키겠다는 일념으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자동차 산업은 2만개 이상의 부품이 들어가는 점에서 유관 산업연관 효과가 적지 않다. 또한 자동차 산업은 우수한 기술인력과 첨단기술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북측 지도부에서도 남다른 애착을 갖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지훈 기자 news-1318virus@hanmail.net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239947.html#csidx19f557ea47e69c99034bd5a5a57ae8f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