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리영희 평전 | 김삼웅 | 알라딘[eBook] 리영희 평전
김삼웅 (지은이)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2011-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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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법조인책소개
'사상의 은사'에서 '의식화의 원흉'까지, 한국현대사 참 지성의 봉우리로 우뚝한 언론인 리영희의 파란곡절로 점철된 생애와 사상을 조목조목 짚어낸 평전. 리영희와 오랜 교감을 나눈 후배 언론인 김삼웅이 집필한 책으로, 자서전 <역정>과 <대화>는 물론 십 수권의 저서와 수백 편의 글을 아우르고 각계각층의 다양한 '리영희론'을 수렴하여 정리하고 평한 최초의 책이다.
이 평전은 저자와 리영희와의 깊고도 오랜 교감과 저자의 각고의 노력 끝에 나왔다. 숱한 평전을 써온 저자의 지론대로 '평전은 시비是非를 치우침 없이 다루는 것'이지만 '실명비판으로 악명(?)을 떨친 강준만의 필하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온전한' 리영희인지라 역시 이 평전에서도 비非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있다면 아들, 남편, 아버지로서 가족에게 소홀했다는 것이다.
경남도민일보 기자 김훤주는 "언론인 리영희는 참된 지식을 궁구했고 또한 기꺼이 나누었다. 독서의 넓음과 깊음은 현대사를 통틀어 따를 자가 별로 없고, 그에 바탕을 둔 글쓰기는 비겁한 삶을 각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고 정의한다. 저자는 '민주와 자유 그리고 오로지 진리에 봉사한 휴머니스트' 리영희의 생애와 사상을 다양한 프리즘으로 조명한다.
목차
책머리에_ 우상의 칼에 맞선 이성의 펜
제1장 평생을 우상 타파에 바친 이성의 파수꾼
‘리영희인’과 ‘그와는 무연한 사람’으로 나뉘는 세상
루쉰을 글쓰기와 생활의 은사로 삼다
권력의 탄압을 무릅쓰고 진리 추구의 길을 걷다
지식청년으로 무엇보다 인간적 가치를 존중하다
병마를 딛고 일어나 다시 우상타파에 나서다
제2장 유복한 출생 그러나 고단한 성장
운산에서 태어나 삭주에서 자라다
공무원 아버지와 부잣집 딸 어머니
가족의 ‘민중사’로부터 저항과 비판의 뜻 키우다
서울 유학 중 근로동원으로 학업을 중단하다
제3장 8.15해방과 6.25전쟁 그리고 청년 리영희
고향에서 일제패망과 민족해방을 맞다
혼란기의 서울, 친일파가 다시 득세하다
해양대학생이 되어 반탁운동을 하다
교사 재임 중 통역장교로 입대하다
전시의 최전방에서 군대의 비리와 모순에 분개하다
청렴으로 일관한 삶, 부친 회갑연도 못 차리다
리영희의 길, 마르크 블로크의 길
제4장 4월 혁명의 격랑에 온몸을 던진 기자의 혼
합동통신 외신기자로 사회 첫발을 딛다
이승만의 폭정을 보며 변혁의 시대정신에 눈뜨다
궁핍을 팔아 기자의 정도를 지키다
《워싱턴포스트》지에 ‘진실’을 기고하고
‘장학생’으로 미국 연수를 가다
이승만 독재정권을 비판하고, 4.19혁명 일선에 나서다
《워싱턴 포스트》지에 혁명의 실상을 기고하다
대학교수들, 학생들이 다 차린 밥상에 숟가락만 얹다
《뉴리퍼블릭》지에 중립화 문제를 기고하다
제5장 기자 리영희와 군인 박정희, 그 숙명의 대결
5.16쿠데타에 분연히 반대하고 나서다
잇따른 ‘특종 사고’로 군정의 탄압이 가중되다
공약을 저버린 박정희, 리영희의 계속되는 ‘특종 사고’
13평짜리 ‘진보의 성지’를 마련하다
제6장 잇따른 필화와 강제해직의 수난
《조선일보》 외신부장으로 이직, 첫 필화와 회사에서 활극
베트남 취재 거부로 사직을 강요당하다
베트남전쟁의 진실을 알리고 참상을 고발하다
외판원으로 생계를 꾸리다가 합통통신에 복직하다
본격적인 논문 발표, ‘64인 지식인 선언’으로 다시 해직당하다
줄담배와 배갈 그리고 치열한 글쓰기
중국 근대화 100년사 탐구 그리고 ‘조건반사의 토끼’
‘전환시대의 논리’로 사상의 단비를 뿌리다
제7장 행동의 길로 나선 사상의 은사
대학교수가 되어서 더욱 치열해지다
반이성에 대항하는 글쓰기와 더불어 사회운동에 앞장서다
중국문제연구소 설립으로 지식에 날개를 달다
냉철한 ‘이성’으로 ‘우상’의 심장을 쏘다
제8장 우상들과 투쟁, 감옥에서 한철
D검사와 리 교수의 ‘웃기는’ 논쟁 3막
‘정찰제’ 재판과 상고이유서 감옥에서 보낸 ‘불효’의 나날
‘투사’가 되어가는 아내 감옥에서 들은 ‘우상’의 사망소식
제9장 피로 물든 서울의 봄 그리고 외로운 호랑이와 그 벗들
피로 물든 ‘서울의 봄’ 그리고 조작된 ‘내란음모죄’
루쉰의 글을 통해 5공체제를 비판하다
일제 말기의 친일군상과 일본 교과서 왜곡의 본질을 말하다
한 시대를 지탱하고 지켜낸 ‘양심’들과 교감하다
자서전 집필 중 끌려가 ‘북괴 찬양선동죄’로 구속되다
제10장 뒤늦은 복직 그리고 숱한 간난 끝에 얻은 자유의 날개
‘미문화원 방화사건’ 증인으로 법정에 서다
뒤늦은 복직 그리고 친일부역자 비판
23년 만에 얻은 ‘자유의 날개’로 일본에 가다
독일 연구소 초청으로 아내와 유럽 여행을 떠나다
한국이 베트남에 사과부터 해야 하는 이유
제11장 6월 항쟁과《한겨레》그리고 방북취재기획
우파의 ‘부패’와 좌파의 ‘분열’에 일침을 놓다
버클리 대학에서 강의하는 한편 자서전을 정리하다
국민이 만든《한겨레》창간으로 새로운 활력을 얻다
주한 미국대사에 반론을 제기하고 세기의 논쟁을 제안하다
‘남북한 전쟁능력 비교연구’로 또 하나의 우상을 깨다
방북취재단 ‘사건’으로 정권의 탄압을 받다
곡필 언론인과 기회주의 지식인을 질타하다
파란곡절의 60년 화갑을 맞아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다
제12장 동구권의 변혁과 현실사회주의 패배 선언
세계변혁의 길목에서 ‘역정’을 돌아보며 자신을 성찰하다
‘자유인’의 표상, 북한 학자와 심포지엄에서 만나다
‘문민정부’에 좌절, 그래도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제13장 꺼지지 않는 이성의 불꽃
결혼 40년 만의 작은 행복, 온수 나오는 집과 유럽여행
리영희가 여전히 비종교인일 수밖에 없는 까닭
‘퇴장선언’에도 불구하고 펜을 내려놓을 수 없는 까닭
‘못다 이룬 귀향’의 슬픔, ‘준법서약’의 굴레를 벗긴 기쁨
제14장 다시 누가 있어 그의 이성을 이을 것인가
반세기의 ‘신화’와 싸워온 ‘동굴 속의 독백’
병상에 누워, 다시 거꾸로 도는 역사의 시계를 보는 슬픔
자서전 출간, 그리고 절필선언에 따른 ‘리영희 생제문’
노령에 터진 상복賞福도 ‘시대의 상심’에 위로가 되지 못했다
제15장 리영희, 마지막 인터뷰
닫는 글_ ‘1인분의 역할’의 의미를 되새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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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40-41 맹자는 하늘이 큰 뜻을 수행하려는 사람에게는 늑골을 괴롭힌다 하고, 하늘은 큰 역할이 끝나지 않는 사람은 불러가지 않는다 하였다. 리영희가 일흔 나이에 중풍을 맞고 쓰러졌다가 다시 회생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역할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일 터이다.
자신의 저서를 사들고 온 후학들에게 사인이라도 해줄라치면 리영희의 떨리는 손이 힘겨워 보인다. 해방공간에서 리영희가 무척 존경했던 백범 김구의 휘호체를 일러 ‘떨림체’라고들 한다. 백범은 1938년 3월 7일 저녁,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에서 3당 대표들을 조선혁명당 본부 남목청南木廳에 불러 통합논의를 하던 중 괴한의 총탄을 심장 근처에 맞아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이후 수전증이 심해진 탓에 백범체는 ‘떨림체’가 되었는데, 자칭 ‘총알체’라고 농을 하기도 하였다. 리영희의 ‘떨림체’ 역시 그런 의미에서 값지다 하겠다.
리영희의 ‘병세’는 놀라울 정도로 호전되어 그 사이 임헌영과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을 담은《대화》를 구술을 통해 펴내었다. 김대중에 이어 노무현 정부에서 제도민주주의가 착실하게 뿌리를 내리고 인권신장과 남북화해협력의 틀이 제법 잡혀가자 리영희는 “내가 했던 주장이 이제 상식이 되었으니, 내 글의 소임은 다한 것 같다”며 벅찬 은퇴의 변을 토로했다.
그러나 건강을 차츰 회복한 리영희에게 이명박 정부의 통치 행태는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이었다. 역사의 퇴행과 권력의 만행을 지켜보다 못한 리영희는 글 대신 말로 추상같은 질타를 던졌다. 2009년 7월 1일 저녁, 서울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린 인권실천시민연대(인권연대) 창립 10주년 기념행사에서 행한 강연에서 이명박 정권을 파시즘으로 규정하였다. 접기

P. 66 리영희는 어머니 뱃속에서 ‘목격’한 무지렁이 머슴의 독립군으로의 변신과, 외삼촌의 선진개혁적인 사상과 실천에서 정신적 충격을 받게 되고, 이것은 저항과 비판 정신의 씨앗이 되었다. “나의 생애에서 내가 의식하지 못한 ‘의식의 역사’가 됐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나 자신의 내부에 외가의 불행에 거슬러 올라가는 일종의 정신적 ‘내면의 원시시대’에서 ‘무의식의 근거’가 됐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묻는다.
이와 같은 정신적 ‘각성’을 겪으면서 리영희는 일 년의 “절반이 겨울이고 밤이 긴” 압록강에 가까운 고향에서 소년기를 보낸다. 긴 겨울이 되면 어른들은 꿩고기 다진 국물에 냉면을 말아먹고, 아이들은 썰매를 타는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일제가 민주를 침략하기 전까진 시골 벽촌에는 그런대로 ‘평화’가 유지되고 있었다.
소년 리영희는 “웃으면 양 볼에 보조개가 살짝 파이는 예쁜 아이”로, 한 반이던 국수집 딸 김명수와 그네를 타면서 “인생에 남은 첫 연정”을 느꼈다. 해방 뒤 서울 남대문·동대문시장의 포목시장을 지배하고 앉아 있는 평안도 출신 여성들 속을 가끔 헤매었지만, 첫 연정의 여인 명수는 끝내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기에 처음으로 만난 이 소녀는 리영희의 가슴속에서만 남게 되었다. 접기

P. 443 “지난 한 세월 동안 내게는, 이 사회에 ‘신문지’는 있어도 ‘신문’은 없었다. 무슨 말인지 알 수도 없는 넋두리를 인쇄한 ‘…지紙(종이)’는 내게 조석으로 배달되어왔지만 ‘새 소식(신문)’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소식이라는 것도 하나같이 권력을 두둔하는 낡은 것이고, 권력에 아부하는 구린내 나는 내용들이었다. 그러기에 그따위 ‘신문종이’를 만들어내는 신문인들이 감히 ‘언론인言論人’을 참칭할 때 나는 그들을 ‘언롱인言弄人’이라는 호칭으로 경멸해왔다.”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김삼웅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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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 현재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대한매일신보≫(지금의 ≪서울신문≫) 주필을 거쳐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문화론을 가르쳤으며, 4년여 동안 독립기념관장을 지냈다.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전 제주 4·3사건 희생자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백범학술원 운영위원 등을 역임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원,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건립위원회 위원, 3·1운동·임시정부수립100주년기념사업회 위원 등을 맡아 바른 역사 찾기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역사·언론 바로잡기와 민주화·통일운동에 큰 관심을 두고, 독립운동가와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인물의 평전 등 이 분야의 많은 저서를 집필했다. 지금까지 쓴 책으로 『백범 김구 평전』, 『단재 신채호 평전』, 『빨치산 대장 홍범도 평전』, 『우당 이회영 평전』, 『다산 정약용 평전』 등 평전 50여 권을 비롯해 『할 말이 있다: 한국을 바꾼 역사의 순간』, 『한국필화사』, 『을사늑약 1905 그 끝나지 않은 백년』, 『3·1 혁명과 임시정부』, 『꺼지지 않는 오월의 불꽃: 5·18 광주혈사』, 『겨레의 노래 아리랑』, 『10대와 통하는 독립운동가 이야기』, 『선생님, 홍범도 장군이 누구예요?』 등과 첫 소설 『네 칼이 센가 내 칼이 센가』가 있다. 접기

최근작 :
<송건호 평전>,
<선생님, 홍범도 장군이 누구예요?>,
<수운 최제우 다시읽기> … 총 189종
(모두보기)출판사 제공 책소개
“사상의 은사”에서 “의식화의 원흉”까지, 한국현대사 참 지성의 봉우리로 우뚝한 언론인 리영희의 파란곡절로 점철된 생애와 사상을 조목조목 짚어낸 ‘최초의 평전’이 그와 오랜 교감을 나눈 후배 언론인 김삼웅에 의해 리영희 생전에 나왔다. “민주와 자유 그리고 오로지 진리에 봉사한 휴머니스트” 리영희의 생애와 사상을 다양한 프리즘으로 조명한 이 평전은 자서전《역정》과《대화》는 물론 십 수권의 저서와 수백 편의 글을 아우르고 각계각층의 다양한 ‘리영희론’을 수렴하여 정리하고 평한 최초의 책이다.
야만의 시대, 우상의 칼에 맞선 이성의 펜
우선 이 평전의 저자 김삼웅부터가 평생을 언론인으로서 비판의 책무를 다하고자 한 대표적인 비판언론인으로 통한다. 그런 저자에게 선배 언론인 리영희는 일찍이 경외의 대상이자 사숙의 스승이었다. 1996년 삼인출판사 개업식에서 리영희와 저자는 나란히 축사를 했다. 개업식에 나온 막걸리를 서너 잔이나 마신 리영희는 얼굴에 표도 나지 않았고 저자는 한 잔만 했는데도 혼자 다 마신 양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저자는 이를 빗대어 리영희에게 “선생님, 진실이란 뭘까요?” 하는 화두를 꺼내어 한참 ‘진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1998년이 저물어갈 무렵《서울신문》주필로 있던 저자는 리영희에게 원고 청탁을 하는데, “《서울신문》에는 안 쓴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이에 저자는 “내년부터 제호를《대한매일》로 바꿔 면모를 일신하려 한다”고 설득하여 이후 1999년 ‘리영희와의 신년 대담’을 성사시키고 그 사회를 보게 되면서 각별한 인연을 쌓아갔다. 저자가 독립기념관장으로 있던 2006년 리영희는 저자의 초청으로 독립기념관에서 강연하는 등 두 사람의 교감이 더욱 깊어졌다. 이듬해 저자는 리영희의 자택을 방문하여 주 2회씩 6개월에 걸쳐 장장 150시간에 이르는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리영희 전문가’가 되고 말았다. 2006년 리영희가 자서전《대화》를 끝으로 절필을 선언하자 저자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한 신문에 <리영희 생제문生祭文>을 쓰기도 했다. 리영희는 그동안 저자가 쓴 10여 권의 평전을 모두 꼼꼼히 읽고 잘못된 부분까지 지적하여 편지를 보낼 정도로 자신의 성정을 닮은 이 후배 언론인(저자)을 각별히 아꼈다.
이 평전은 저자와 리영희와의 이런 깊고도 오랜 교감과 저자의 각고의 노력 끝에 나온 “잘 익은 된장”이다. 숱한 평전을 써온 저자의 지론대로 “평전은 시비是非를 치우침 없이 다루는 것”이지만 “실명비판으로 악명(?)을 떨친 강준만의 필하筆下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온전한” 리영희인지라 역시 이 평전에서도 비非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있다면 아들, 남편, 아버지로서 가족에게 소홀했다는 것이다. 그 엄혹했던 야만의 시대에 지식인으로서 ‘일인분의 역할’을 다하고자 했던 리영희로서는 가족을 제대로 돌볼 겨를이 없었겠지만 1989년 화갑을 맞아 그 ‘잘못’을 가족들에게 사과하고 비로소 “가족의 사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김훤주(경남도민일보 기자)가 정의한 대로 “언론인 리영희는 진정한 특종 기자다. 세계 정치의 맥을 잡아 혈을 찔렀다. 그런 특종 기사가 부지기수다. 국내 질서는 휘어잡았으나 국제 질서에서 비루했던 이 땅의 권력자들을 끝없이 불편하게 만들었다. 언론인 리영희는 참된 지식을 궁구했고 또한 기꺼이 나누었다. 독서의 넓음과 깊음은 현대사를 통틀어 따를 자가 별로 없고, 그에 바탕을 둔 글쓰기는 비겁한 삶을 각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의 글은 방황하는 지식인에게 양심을, 주린 민중에게 밥을 주었다. 밥이 되는 양심을 나눠주었다.” 리영희의 그런 진면목을 조목조목 그리고 종합적으로 그려낸 김삼웅의 이 평전은 “평생을 우상 타파에 바친 이성의 파수꾼”의 바이러스를 다시 퍼뜨리는 데 손색이 없어 보인다.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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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육신은 떠났지만 선생의 말씀과 정신은 영원히 남아있을 것입니다.
dyadic1 2010-12-09 공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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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고절(傲霜孤節)' 리영희선생님의 뜻과 사상,참지식의 발로를 잊지 않을겁니다.
우보 2010-12-15 공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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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선생이 이리도 대단한 사람인줄 몰랐다. 평전을 집필해주신 김삼웅 선생님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NamGiKim 2017-07-13 공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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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리영희 선생님의 육성 어록이 다수 인용되어 있습니다. 훨씬 친근감이 가고 내용이 믿음직합니다.
밭고랑 2013-02-08 공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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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의 시 "광야에서'가 불현듯 생각나는 것을 무엇 때문일까?
열띠미 2010-12-29 공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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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삶

그는 호(號)가 없다. 난체하는 사람들이 먼저 짓는 것이 호인 세상에 리영희 선생은 그 흔한 호가 없다. 스스로 짓지 않으셨으리라. 설혹 지었다해도 앞다퉈 새기는 모습은 저서의 어디에도 보이질 않는다. 그런 행위조차도 허영이라고 보셨던 것일까? 그 만큼 자신의 삶에 철두철미한 사람은 흔치 않다. 선생의 평전을 읽으며 내내 남아 있는 것은 그 철두철미함이다. 천성이 그러한 사람도 있으니 그러려니 할 수 도 있겠지만, 대개 사람은 어려움에 빠지거나 유혹이 있을 때 자신에 대한 철두철미함이 와르르 한순간에 무너진다. 그것이 어쩌면 평범한 사람들이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시대와 역사의 상황이 허락하지 않는 선생의 지사적 삶에서는 개인의 영달을 위한 무너짐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것이 선생이 살아온 궤적이 필부들과 다른 이유가 아닐까?
어쩔수 없이 선택한 군대시절에 선생은 그 지조를 지키는 계기를 만난다. 그것은 술자리에서 있었던 기생과의 일화이다. 그 명민한 기생은 호기를 부리려는 선생에게 따끔하게 일침을 가한다.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을 받은 선생은 그 일을 통해 전존재가 내면에서 산산히 부셔저 내리는 심정을 감싸안고 인간적으로 더욱 숙성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7년간의 군생활, 사실 전쟁통의 군대라는 것은 온갓 부정가 비리가 만연했으리라. 그 속에서 자신을 다잡고 철저히 개인의 일에 매진하는 생활을 유지한다는 것은 아무나 함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닐것이다. 그만큼 선생의 픔성은 특출났다고 본다.
제대후의 삶부터는 고난의 연속이요, 형극의 길이다. 시대의 부름과 역사의 격동에서 가련한 한 인간으로써 최선을 다하고 1인분 만큼의 역할을 충실히 하자는 다짐과 실천은 특별하다. 선생의 그것은 단지 지사적 객기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불의에 대항하고 민중과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는 커다란 시각으로 견지되었다. 선생은 학습을 게을리하지 않아 주야로 획득한 어학, 글쓰기 실력으로 누구보다 빠르고 치밀하게 세상을 앞날을 예측하고 과거를 돌아보는 필봉을 휘날리기 시작한다. 그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귀감이 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만 필연적으로 권력자들의 미움과 시기를 동반한 강한 탄압을 받기 시작한다. 그 탄압은 본격적으로 박정희정권때부터 시작하여 군부정권 30년 내내 계속된다. 투옥과 해직을 반복하는 와중에 생계를 꾸리기 위한 선생의 일은 지식인으로써 자신을 파악하는 것을 통해서다. 철저히 지식인됨을 자각한 선생의 각오와 생활에 대한 자세는 더욱 견고해진다. 가히 철옹성같은 성정을 가꾸기에 이르는 선생이다. 탄압과 더불어 선생의 기자로써의 예리한 감각, 정세에 대한 탁월한 분석들은 내외의 관심을 받게되고 지천명에 이르러서는 사상의 은사로써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화갑을 지나면서 선생은 우상과의 싸움을 평생했지만 스스로 그것이 되는 것에 대한 우려를 자각하고 철저한 반성과 회한의 시간을 갖는다. 어느 정도의 명성을 획득한 사람들이 나이을 먹을수록 눈앞의 그것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말년을 그야말로 추하게 보내는 경우를 우리는 숱하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선생은 그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나이를 먹을수록 자기반성과 연구에 게을러하지 않는다. 억세고 끊임없이 부딪힌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며 좀 더 부드럽게 사고하고 쓰자는 속내를 많이 드러내고 있다. 어느덧 병약해진 자신을 돌아보며 선생은 자신의 역할은 이제 다 되었노라 선언한다. 이제는 후대의 몫이 남아 있고, 자신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면 되는 것이라고. 부드러움과 강함이 이토록 적절히 조화된 예는 매우 드물다. 선생이 일생의 스승으로 삼은 뤼쉰과 장일순 선생들 처럼, 아니, 선생은 어느 면에서는 그들을 뛰어넘으신다. 누구의 말처럼 종교인이 아니면서도 여는 종교인보다 더 뛰어난 깨달음을 보여주시는 선생이다. 실천하는 지식인으로써의 선생 같은 역할을 맡는 사람이 앞으로는 나오기 힘들것이다. 그것이 서글퍼 저자인 김삼웅선생도 못내 아쉬워하고 있다. 저자의 노력으로 선생의 삶과 더불어 압축된 현대사와 잘 모르고 있던 사실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알 수 있었다. 저자의 노력에도 경의를 표한다.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육성으로 행한 현정부에 대한 매서운 질타는 그들에게 뜨금함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또한 현실에 안주하고 욕망에 들끓어 있는 많은 사람들을 깨우는 사자후로써 한반도에 메아리쳤다. 그야말로 마지막 가시는 그날까지도 시대속에서 선생의 역할을 다하고자 하셨다. 이 위대한 삶을 산 거인은 모두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말씀을 힘겹게 하셨다. 그 말씀을 아로새겨 최소한 불의에 타협하거나 욕망의 용광로를 끓어 안는 짓은 안하리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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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싸리 2011-02-22 공감(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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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를 아는 사람과 그와는 무연한 사람

그의 이름에는 언제나 얼마간의 부담이 붙어있다.
누구와도 타협을 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의식화의 원흉'이라느니 '사상의 은사'라는 극단적인 평가가 뒤따른다.
진실을 추구하고 바른 말을 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름에 파란곡절한 한국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묻어있는 사람.
그래서 첫만남이 쉽지만은 않다.
조금은 그를 안다고 할지라도, 이처럼 <평전>이라는 두툼한 책을 접하게 되면
혹시 그를 미화하려는 편향된 성격의 자료는 아닌지
한번쯤 떨떠름한 마음으로 앞뒤를 살펴보게 되는 것도
'우상 타파'를 위해 평생을 바쳐온 그의 일생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러시아 사상가 베르자예프(1874~1948)는 자신의 정신세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이유로
인간을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으로 분류했다고 한다.
<리영희 평전>의 저자는 책의 서두에 이 표현을 빌어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리영희를 아는 '리영희人'과 '그와는 무연한 사람'."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에게 이 표현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말일까?
'사상의 은사'니 '의식화의 원흉'이니 하는 그간의 평가들은 잠시 흘려듣기로 하고
적어도 그를 통해 우리 사회의 어떤 '진실'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 하나만 남겨두고는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머리와 가슴을 포맷한 채, 책장을 펼쳐든다.
평전[評傳] : 개인의 일생에 대하여 평론을 곁들여 적은 전기.
한국 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었던 시대가 이 이야기의 배경으로 펼쳐진다.
일제시대, 8.15해방, 6.25전쟁, 4.19혁명, 5.16쿠데타, 유신정권, 군사정권, 민주화 운동,
그리고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부 시대.
처음부터 매서운 눈매, 백발의 노학자로 각인되었던 그의 이미지는
얼핏 배우 류승용(?)을 연상케하는 눈망울 초롱한 20대 젊은이의 모습으로 등장하여
격변하는 역사의 장면마다 서서히 자신의 관점과 목소리를 가다듬기 시작한다.
통역장교로 6.25를 겪으면서 '대한민국 군대의 야만성, 부패, 타락, 비인간적 실태'를 목격하고,
언론인(합동통신, 조선일보, 한겨레)으로 사회적 진실과 참상을 고발하며 갖가지 수난을 당하고,
교육자(한양대 신문방송학과)로서 냉철한 '이성'의 글쓰기와 더불어 사회운동에도 앞장을 선다.
그동안 '아홉 번 연행되고, 다섯 번 구치소에 가고, 세 번 재판을 받아 총 1012일의 감옥생활을 하고,
언론계에서 두 번 퇴직당하고, 교수직에서 두 번 해직당하는 파란과 중첩의 수난사'를 경험한다.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이러한 과정 속에 골고루 등장하며 그 의미를 드러낸다.
베트남전쟁과 미국, 중국, 일본, 소련 등 한반도와 관련된 국제사회의 주요 이슈들도 마찬가지다.
일본어, 영어, 프랑스어에 능통하고 중국어도 해독이 가능했던 뛰어난 어학 실력 뿐만 아니라
누구보다 빠르고 깊게 시대 흐름을 읽어낼 수 있었던 '언론인'이라는 자리가 큰 역할을 담당한다.
거기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 글 하나를 쓰더라도 외국 대사관 도서실까지 돌아다니며 자료를 모으고
인터뷰를 하고 개인 스크랩북까지 만들어가며 글을 썼던 그 열정과 성실함.
그러자면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 쉬운 말을 가지고 알기 쉽게 써야 한다. 복잡하고 어려운 사물·관계를 평이하게 풀어써야 한다. …(추상적인) 이론으로 해명하려 하지 말고 구체적인 증거와 자료를 제시해야 한다. 학자·전문가·교수·박사 따위의 자화자찬의 높은 자리에서 '가르친다'는 교만한 자세로서가 아니라 '함께 고민하고, 함께 생각해보자'는 친절함이 바탕이어야 한다.
- 평전 p.26; 리영희《역설의 변증》,1987
기자 시절 그는 '특급자료'들을 찾아 매주 미국·영국·프랑스 대사관 공보처 도서실 등을 '순례'했다. 거기서 신간, 논문, 정보저널 등을 읽고 복사하고 하나하나 점검해 나갔으니 그냥 앉아서 주어지는 자료만 소화해내는 기자들이나 대학에서 국제관계 연구를 하는 교수들보다도 앞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나아가 그는 해외의 인맥까지 뚫어 국내에서는 구할 수 없는 자료도 입수해 들였다. 그는 이 많은 자료들을 일일이 관리하고 챙겨 스크랩을 만들어둠으로써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쓸 수 있도록 했다. 아마도 그는 한국에서 최초로 개인용 스크랩북이라는 것을 만든 사람일 것이다.
- 평전 p.242~243; 조유식 <리영희 그 독한 기자정신의 역정>, 《월간 말》1995.
이러한 내공을 바탕으로 이승만/박정희 정권의 가려진 실상을 <워싱턴포스트>, <뉴리퍼블릭> 등
해외 언론의 기고를 통해 세계에 알림으로써 정치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키고, 나아가
크고 작은 특종과 저술을 통해 국내외 외교관계나 정책 실행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뽑혀 미국에서 신문학 연수를 받으면서 해외의 독립운동 단체를 방문한 것이나
귀국 도중 도쿄의 서점에서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발굴하여 국내에 처음 소개한 일화도 유명하다.
그의 주요 서작들과 관련 자료에서 발췌된 상당히 많은 분량(평전 전체의 1/2 이상)의 인용문들이
장면 장면마다 생생하게 주인공의 목소리를 전달한다.

(1960년대 중반) 그때 그 많은 후배 지식인들이 제기동의 내 집에 모인 까닭은 여러가지지만, 무엇보다 내가 거의 유일하게 국내외 시국정세를 앞서 내다보고, 그것을 설명해서 의미를 밝혀주고 내일의 전망을 예측해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지. 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캄캄한 세상에 내가 한 줄이 빛이 되어,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해 있는 상태였지요.
- 평전 p.201; 리영희《대화》311~312쪽.
그 시대를 암흑으로 몰아가는 권력에 눈이 뒤집힌 자들…(중략)…그런데 그들은 하나의 위대한 우상 을 믿고 있었다. 반反 무슨무슨주의, 냉전논리, 흑백이분법, 총검숭배 따위가 그것이다. 평화는 약자의 도덕이라는 믿음에는 니체 숭배자였고, 권력의 의지만이 최고의 철학이라는 데서는 히틀러의 아류들이었다.
이들에 의해서 짓눌린 백성들은 이성을 믿고, 그 회복을 기원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거꾸로 보이고, 뒤집혀 있고, 일그러져 있는 세상에 이성의 빛이 활짝 비치기를 손 모아 기도하고 있었다.
- 평전 p.282; 리영희, 풍운아 <우상과 이성>의 일대기 中
…호소력을 갖고 많은 독자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내용이 추상적·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이 시대의 민족적·인간적 삶을 규정하는 문제적 구조를 제대로 말하기 때문이었다. 그 추상성과 이론을 뒷받침하는 상황성이 있기에 책의 제목으로 《우상과 이성》이 되고, 저자가 투옥당하고 책이 수난을 당함으로써, 이 책은 문제작 또는 명저로 '만들어지고' '역사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었다. 《우상과 이성》은 이제 추상의 논리세계가 아니라 역사의 현실로서 이 시대 이 사회에 굳건히 존재하게 되는 것이었다.
- 평전 p.289; 김언호 <리영희 선생의 《우상과 이성》을 만들면서>, 《책의 공화국에서》中
우리 사회, 특히 지식인들에게 끼친 그의 영향력이 어떠했는지는 수많은 언급들이 직접 증언한다.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 '생각의 스승'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훌륭한 '정보'나 '견해'를 들려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생각하게' 했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고병권)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 자체를 바꾸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
길고 긴 독재정권시대 젊은이들의 "몽롱한 의식에 끼얹은 찬물 한 바가지". (김삼웅 평전 저자)
리영희의 삶이 곧 한국현대사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
한국 진보적 지식인들의 보편적 세계관 형성에 기여했다. (위키백과)


이러한 영향력 때문에 <르몽드>는 '사상의 은사'라고 그를 칭했지만 뒤가 구린 권력자들에게는 '의식화의 원흉'이라 불리며 탄압을, 보수언론과 보수 성향 지식인들에게는 그 자신이 새로운 '우상'으로 들어섰다는 공격과 비판을 잇달아 받게 된다.
그들에 의해 직장을 잃고 감옥에 수감되고 책들이 금서로 낙인찍혀 감시를 받는 힘든 시간들이 그에게는 오히려 생각을 다듬고 세상을 살피며 더욱 명징한 글을 써내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은 이 땅의 실천적 지식인들에게 반복적으로 되풀이되어 일어났던 서글픈 역사의 아이러니.
독립운동과 사회개혁, 민주화를 이끌었다는 분들이 왜 대부분 '투사'이고 '저항'의 이미지인지, 왜 그토록 반항적이고 모난 사람들처럼 보였는지에 대한 의문들까지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며 해소되는 느낌이다.
그는 특히 이념 편향적 사고에 따른 그릇된 용어를 바로잡는데 힘을 쏟았다. 지식인의 역할은 사물의 이름을 정확히 쓰는 것이라는 신념이었다. 《논어》<정언正言>편에 나오는 "정치의 요체는 곧 정명正名(사물의 이름 또는 명분을 정확하게 쓰는 것)"이라는 뜻에 따른 자세였다. -평전 p.227

소통, 서민, 살리기 같은 단순한 용어들마저 그 뜻이 이상하게 변질되어 사용되는 현재와 비교하면
1960~70년대에 이미 이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후배 언론인들을 가르쳤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요즘 쓰여진 글이 아닌가 시대를 의심케 하는 아래의 내용들은 또 어떠한가.
…식민지적 재산질서를 반영한 지주계층과, 식민지교육으로 '지식인'이 된 '식민지적 엘리트'가 모든 분야의 지배질서의 상층부를 그대로 장악해버렸다. 국내외에서 민족해방을 위해 싸운 애국·독립지사들이 적잖게 있기는 했지만, 그들에게는 국내의 대중적 기반이 없었다. 친일·수구·반민족적 세력은 기득권의 보존이라는 공통적 이해문제로 단결됐지만 개혁을 앞세운 세력은, 대중은 조직화되지 못하고 지도층은 분열되어 있었다.
- 평전 p.385; 리영희《우상과 이성》中, 1997
지난 한 세월 동안 내게는, 이 사회에 '신문지'는 있어도 '신문'은 없었다. 무슨 말인지 알 수도 없는 넋두리를 인쇄한 '…지紙(종이)'는 내게 조석으로 배달되어 왔지만 '새 소식(신문)'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소식이라는 것도 하나같이 권력을 두둔하는 낡은 것이고, 권력에 아부하는 구린내 나는 내용들이었다. 그러기에 그따위 '신문종이'를 만들어내는 신문인들이 감히 '언론인言論人'을 참칭할 때 나는 그들을 '언롱인言弄人'이라는 호칭으로 경멸해왔다.
- 평전 p.443; 리영희《自由人자유인》中, 1990
다만 나라(민족)의 운명을 그런 사람들에게 맡겨서는 안 됐었다는 우리 국민의 '직무유기'를 개탄하는 것이다.…우리와 일본의 관계를 이런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생각할 뿐 아니라 우리는 해방 직후와 그 후 오늘까지의 미국의 세계관이나 정책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볼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 평전 p.349; 리영희《분단을 넘어서》中, 1984
80년대에 일본 교과서 문제의 본질이 '과거'에 있지 않고 '내일'에 있다고 간파한 글(p.350)이라든지,
1994년에 쓴 <전쟁을 부추기는 자들이 있다>와 같은 글의 내용(p.475), 심지어
"분열주의자이지 통합주의자가 아니거든"이라는 절묘한 표현을 통해 이승만의 실체와 그들의 권력유지 형태를
예리하게 짚어낸 글(p.161~162)들을 보면, 그 지적에 감탄하면서도 어째서 수십년 전에 이미 비판받고 폭로된
그 장면들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다시보기'로 재방송되고 있는지... 황당한 기시감 앞에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내가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눠져야 할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지금까지도 그렇고 영원히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
- 평전 p.27~28; 리영희《우상과 이성》서문, 1977
누가 살아 내었더라도 참으로 힘들었을 격동의 시대, 그 선택의 순간들.
편익보다는 손해를 감수해야 하고 심지어 몇 번이나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진실을 추구하고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단순하면서 확고한 기준 하나로 감당해온 험난한 여정.
냉전시대에 굶주리고 헐벗는 것으로만 묘사되었던 북한과 중국의 현실을 '미화'시켜 소개했다거나
'반공 친미'라는 대립적 구도를 통해서라도 한국 사회를 한 방향으로 묶어두려던 정치 권력에 대해
비민주성, 폭압통치 등 모나고 불편한 '유언비어'를 주장하여 젊은이들의 반공 의식과 건전한 사상을 '오염'시킨
'의식화의 원흉' 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그에게도 따라붙는다. 하지만, 아무리 그를 비난하고
폄하를 한다고 쳐도 '치열하게 살아온 독립적인 시각의 언론인이자 학자 '임을 그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그런 와중에도 부인,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부모님에 대한 회한, 가끔 드러나는 아래와 같은 내용들은
늘 꼬장꼬장하고 강직했을 것 같은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새롭게 보여주는 듯하다.
남자와 여자의 판단이 다를 때 작은 일은 남자 쪽이건 여자 쪽이건 어느 것을 따라도 무방할 것이니 서로 양보하는 미덕이 해결해줄 것입니다. 그러나 결정적 순간의 큰일에서 의견차가 생긴다면 신랑은 반드시 신부의 의견을 따르기 바랍니다. 이것은 인생의 선배로서 경험적으로 드리는 충고입니다.
- 평전 p.517; 유홍준(미술사학자)의 결혼식 주례사, 1975
자신의 글에 책임지는 치열한 자세, 본질을 꿰뚫으려는 끊임없는 노력, 언행일치의 행동하는 양심.
직필 직언을 서슴지 않던 옛 선비의 이미지에 지식과 진실을 대중과 나누려는 근대 지식인의 모습까지.
또 다른 '우상숭배'를 염려하여 남들이 붙여놓은 '사상의 은사'란 표현을 굳이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역사에 이 정도로 투철한 문제의식과 실천정신을 가진 '지식인'이 있었다는 사실 하나쯤은
아무리 '보수적'으로 몸을 사려 이야기한다고 해도 응당 하나의 '모범'으로 삼을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나는 좌·우의 어떤 정치·이데올로기적 권력이건 진실을 은폐·날조·왜곡하려는 흉계에 대항해서 진실을 찾아내고, 그것을 바른 모습대로 세상에 밝혀내는 것을 글 쓰는 목적으로 삼고 일관하였다. 광적인 반공·냉전·전쟁애호·반통일 세력이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던 시기에 특히 그러했다.
'진실'은 균형 잡힌 감각과 시각으로만 인식될 수 있다. 균형은 새의 두 날개처럼 좌左와 우右의 날개가 같은 기능을 다할 때의 상태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에 맞고, 인간 사유의 가장 건전한 상태다.
진보의 날개만으로는 안정이 없고, 보수의 날개만으로는 앞으로 갈 수 없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균평 잡힌 인식으로만 안정과 발전이 가능하다.
- 평전 p.481; 리영희《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中, 1994

<오마이 뉴스>에 연재되었던 때문인지 6~10페이지 간격으로 매듭이 되어있는 형태의 평전.
가끔씩 흐름이 끊어지고 단편화 되어 있다고 느껴지는 경우도 있지만, 한 가지 이슈에 지나치게 늘어지지 않고 보기보다 쉽게 읽힌다는 것 또한 이러한 편집의 영향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주요 저서에서 인용된 수많은 '명대사'와 함께 한 편의 영화나 대하드라마를 본 듯한 느낌.
<굿나잇 앤 굿럭>, <프로스트 vs 닉슨> 또는 <바더 마인호프> 같은 타입의 영화들이 머리속에 슬쩍 대비되어 떠오른다.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극적인 장면이나 반전은 아마 힘들것이다. 주인공은 초지일관 변함이 없으니까...)
고민하는 20대 젊은이의 눈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시대를 염려하는 80대 할아버지의 목소리로
끝을 맺을 때까지, 진실을 추구하는 그 의지는 한결같고 세상을 보는 눈과 양심은 늘 푸르다.
아직 그를 몰랐던 이들/이미 아는 이들에 상관없이, '은사'나 '원흉'이라는 세간의 평가보다는
치열하게 살았던 '한 사람의 일생'을 통해 파란만장한 우리의 근현대사를 다시 짚어보면서
사건 이면의 진실을 추구하는 시각, 그런 생각이 빚어지게 된 역사적 배경, 주요 저서의 내용들까지
전반적으로 돌아보며 정리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찬양의 뉘앙스는 미리 걷어내고 읽으시길.)
그분의 책을 읽었다지만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제목으로부터의 통찰'과 몇 가지 비판적 시각 외에는
어느새 흐릿한 기억속에 현실에만 안주하고 있었던 '지나간 세대'의 독자들에게도 유익한 시간이 되지 않을까.
너도나도 '지식인'을 자처하는 이 시대에, 현대 지식인의 사표로 거론되는 한 인물의 삶을 통하여
한국의 근현대사와 그 시대의 '좌와 우'를 뒤흔든 사상적 개요까지 훑어볼 수 있으니 일석이조가 아닐까 싶다.

장하준 교수의 교양 경제서가 '금서'로 지정되고 부시2세가 '평화'의 이름으로 종교집회에 초빙되기도 하는 전근대적 상황이 가끔 펼쳐지지만, 신문을 뒤지고 대사관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찾아야 했던 과거와 달리 '클릭' 한 번으로 위키리크스며 동서고금의 엄청난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지금.
지식이 있다고 '지식인'이 아니라 어떤 눈과 자세를 지녀야 참다운 지식인인가를 말없이 보여주는 그의 삶과 글들은, 당연한 듯 누리고 있는 오늘의 현실이 얼마나 지독한 고민과 희생들을 바탕으로 한 걸음씩 힘겹게 전진해왔는지를 역사와 함께 당당하게 증거하고 있다. 스스로 인지하든 못하든, '리영희와 무연한 사람'이라고 말하기에는 현대 한국 사회와 이 땅의 지식인에게 끼친 그의 영향력이 너무도 크다.
오랫동안 그분의 서재에 걸려 있었다는 서산대사의 시를 읽으며,
어느 한쪽 치우침 없이 허투루 살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다시 옷깃을 여미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평전>을 덮는다.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눈길을 걸을 때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흐트러지게 걷지 마라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내가 걷는 발자국이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뒤에 오는 이의 길이 될 것이니
▲李泳禧 : 사진출처 ⓒ프레시안(김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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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enow 2011-02-27 공감(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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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서간 사상가 리영희

내가 종교처럼 숭앙하고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려고 하는 것은 국가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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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19-04-18 공감(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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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상의 은사 ' 리영희를 추모하다
불우한 시대에 태어난 사상의 은사
리영희 교수가 세상을 떠난지도 이제 막 한 달하고도 20여 일이 지났다. 조금 있으면 두 달을 채우게 된다. 12월 5일. 유난히도 시끌벅적한 2010년의 마지막 끝자락에 리 교수의 죽음은 어두운 장막으로 가려진 시대의 등불이 꺼졌음을 알리는 슬픈 날이었다. 부고 소식이 모든 매스컴으로 전파되자마자 끝이 없는 추도의 물결이 이어졌던게 엊그제같은데 지난 주 토요일에 봉은사에서는 리영희 교수 추모 49재가 열렸다.
하지만, 영영 다시 볼 수 없는 이 위대한 인물을 진심으로 추모하기에는 세상은 너무 매정했다. 아니, 그가 이 세상을 떠나기에는 너무 이른 감이 있었고 시기가 좋지 않았다. 리 교수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에 일어난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행위는 전쟁이라는 앞을 예상할 수 없는 공포에 국민들은 또 한 번 몸을 떨어야했고, 정부는 천안함 도발 사건보다 더 강력한 대북 제재를 가함으로써 대북 관계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리 교수의 업적에 대한 그 어떤 뚜렷한 대중적인 평가를 할 기회가 없었다. 그의 사상이 제공해준 영향분을 먹고 자란 후대의 지식인들은 대선배 아니 은사의 업적을 재조명했을 뿐이다.
젋은 사람들에게 ' 리 영 희 ' 이 석자의 이름은 생소했으며 바쁘고 먹고 사는게 중요한 대중들의 머릿속에는 젊은 시절, 민주화 운동의 불꽃을 피워준 시대의 은인은 쉽게 잊혀져가고 있었다.
리 교수는 생전에 독재, 군부정치세력들이 왜곡한 시대에 정면으로 맞선 공로로 실천적인 지식인이라는 명예로우면서도 뒤늦은 훈장을 달게 되었지만, 그 훈장을 달기까지에는 여러 번 고초를 겪어야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3권 정부 시절동안 세상의 진실을 알리고자한 지식인과 사회운동가들은 억울한 누명을 씌운채 감옥을 드나들었는데, 연속으로 감옥살이를 한 이는 유일하게도 리영희뿐이다.
리영희는 ' 친북 좌파 ' , ' 빨갱이 ' 라는 좋지 않은 별명을 들은채 그렇게 감옥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복역한 이후에 권력의 음모로 인해 빼앗겨버린 자신의 명예를 복권했지만, 자신의 등 뒤에 권력이 붙여 놓은 ' 친북 좌파 ' 라는 명함은 리영희 본인 스스로도 죽기 전까지 떼어내지 못하고 말았다.
때 늦은 사상의 은사와의 만남
' 불운 ' 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야말로 시대를 잘못 타고난 그의 운명은 혼이 떠나가버린 육체가 되어서도 이어지는가 보다. 공교롭게도 리영희가 세상을 떠난 후 5일 뒤에 초판 1쇄가 발행된 것이다. 이 책의 출판사인 책보세의 발행인 김이수 씨는 리 교수가 그토록 고대하던 책을 접하지 못한채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해 편집후기 말미에 뒤늦은 안타까움이 묻어난 아쉬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부고 소식 덕분에 뒤늦게나마 평전으로나마 그의 활동 이력과 사상을 알아본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 불운 ' 이기도 하다.
지금도 대중들과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 최고의 불온 도서 ' 로 회자되고, 우리 시대에 잊혀서는 안 될 최고의 명저로 손꼽히는 <전환시대의 논리>와 그 밖에 <우상과 이성><새는 ' 좌우 ' 의 날개로 난다>를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내가 감히 사상의 은사의 업적을 함부로 논하고 있다는 것이 불경스러운 일이 아닌가 모르겠다.
평전과 더불어 리 교수의 마지막 책이 되고만 대담짐 <대화>를 읽었지만 평소에 들을 수 없었던 그의 생의 이력과 일화들이 눈에 띌 뿐이다. <리영희 평전>에는 이전에 리 교수의 업적을 조명한 책들뿐만 아니라 생전에 리 교수가 쓴 책과 칼럼 그리고 대담집의 내용들을 인용하여 ' 리영희 사상의 정수 ' 들을 담아냈지만, 평전만으로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시대비판의 목소리의 울림을 느끼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이 책에 마지막 부분에 있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한 저자 김삼웅과의 인터뷰 내용이 그나마 저자의 생생한 육성을 느낄 수 있다.
노래 실력 좋은 가수는 라이브로 부르는 무대 현장에서 직접 가봐야 그 가수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처럼 배우고 알려고 하는 지성의 사상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직접 그가 쓴 책을 읽어보는 것이 우선이다. 저자가 쓴 책이야말로 저자의 목소리인 것이다.
리영희, 굴곡의 대한민국 현대사 그리고 현재의 대한민국
제대로 그가 쓴 책들을 접해보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리영희 평전>이 리영희 사상의 진면목을 보여주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리영희 선생이 자신에 대한 평전을 직접 읽어보셨다면 무슨 말을 했을까?)
<리영희 평전>을 쓴 김삼웅은 리영희와 관련된 수많은 책들과 자료를 무작위로 인용하지 않았다. 시대적인 상황에 맞게 적재적소로 인용, 배치되었음을 물론이고 나 같은 리영희 사상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부족한 독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핵심적인 정수들을 가려 뽑았다.
그리고 이 책은 단순히 리영희라는 ' 굴곡 ' 의 현대사를 살다간 노학자의 업적을 띄워주려는 평전의 일반적인 서술 방식에만 치중하기보다는 리영희가 살았던 ' 굴곡 ' 의 현대사까지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리 교수가 바라본 대한민국의 현대사의 모습은 지금과 별반 다를게 없다는 점이다. ' 부정 ' , ' 왜곡 ' , ' 최악 ' 이라는 단어를 써가면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 대해 서슴없이 지적하고 비판했던 그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지금도 유효하다.
남한은 북한이라는 형제와 싸우기 위해서, 미국이라는 억센 사내를 집안에 불러들여, 안방 아랫목에 모셔놓고 수십 년간 알몸으로 시중들어 왔다. 북한이라는 형제가 남한보다 강하고 우월했던 1970년대 후반까지라면, 그 사내가 이마를 살짝 찌푸리기만 해도 만면에 아양을 떨면서 치마를 걷어 올리는 것은 살기 위해서였다. 사내는 지난날의 상황을 교묘히 이용하여 성적 사디즘을 즐겼다. 지금은 그에 그치지 않고 집주인의 목숨 보호자를 자처하게 되었다.
- 김삼웅 <리영희 펑전> p 146 -
* 리영희 <새는 ' 좌우 ' 로 날개로 난다> [한미 관계의 본질을 알면] p 143 에서 재인용
한 번 글을 쓰기 시작하면 ' 붓이 너무 곧다 ' 라는 최준기의 표현대로 호전적이면서도 직설적인 리 교수의 문장은 보는 이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지만, 리 교수는 30년 전부터 이미 왜곡되어버린 한미 관계를 정확히 꼬집어 내고 있었다. 리 교수는 김삼웅과의 인터뷰에서 MB 정부는 ' 미국의 노예정권 ' 이며 지금의 실상은 일본으로부터 주권을 빼앗긴 1905년의 대한제국 시대와 흡사하다고 말했다. 여전히 반공 사상으로 가득찬 극우 세력의 망명을 떨치지 못한 채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1994년 5월 4일 영변 원자로에서 연료봉 추출을 시작했고, 6월 13일 IAEA(국제원자력기구)를 탈퇴하는 등 위기를 고조시켰다. 김영삼은 거듭된 강경발언으로 긴장을 증폭시키고 북한에서 ' 서울 불바다 ' 발언이 쏟아졌다. 미국은 영변 핵시설 정밀 타격을 검토하는 등 전쟁의 분위기가 한반도를 휩쓸었다. 존 샬리카슈빌리 미 합참의장이 클린턴 대통령에게 " 90일 이내 북한 제압 가능하다 " 는 한반도 전쟁 시나리오가 보고되고, 한국군 45만 명과 민간인 100만 명 사상, 경제적 피해 1조 달러 등 막대한 피해가 예상되자 이 계획은 접은 것으로 알려졌다.
- 김삼웅 <리영희 평전> p 476 -
* <경향신문> 2010년 5월 28일
전쟁의 위기가 한반도에 고조되고 있었던 16년 전에 리영희는 <전쟁을 부추기는 자들이 있다> 라는 시론에서 김영삼의 문민정부가 과거의 군사정권이 만들어낸 고착화된 분단 및 극우 이데올로기와 미국의 군사적 예속상태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얕궂게도 16년 전의 한반도 정세는 정권이 여러번 바뀌고 난 지금도 똑같이 재현되고 있다. 천안함 호 침몰과 연평도 포격 도발 이후로 취한 MB 정부의 강경한 대북노선은 전쟁 위기론이 고조된 것은 물론이고 미국과 함께 서해에서 대대적인 모의 합동훈련을 실시함으로써 군사력을 과시하였다. 말로는 한미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한 모의 훈련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부닥치게 될 북한과의 전면전을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리영희의 비유대로 미국은 한국에게는 절대로 놓칠 수 없는 ' 목숨 보호자 ' 인 셈이고 지금도 ' 목숨 보호자 ' 라는 든든한 ' 빽 ' 을 믿고 있는 것이다. 이런 한미 관계 때문에 ' 한국 & 미국 & 일본 vs 북한 & 중국 & 러시아 ' 로 갈라진, 냉전체제의 구도가 재현되고 있다. 결국, 오늘날의 한국의 행보는 우리도 모르는 동안에 역사를 거꾸로 가는 퇴보의 시대를 걷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신문은 역대 정권과의 관계와 존재양식에서 ' 무법 ' 적인 강한 정권에겐 한없이 약하고 총칼을 차지 않은 문치성 정부에는 폭력적으로 포악했다. 같은 하나의 정권에게도 양면적으로 대응했다. 그 권력집단이 눈을 부라리면 언론(인)은 두 손을 비벼가며 정권을 찬송했다. 그토록 찬송을 바쳤던 권력이 기울기 시작하면 (금세 안면을 싹 바꾸고 누구보다 열렬히) 비방과 매도를 일삼았다.
- 김삼웅 <리영희 평전> p 160 -
* 리영희 <새는 ' 좌우 ' 로 날개로 난다> [끝내 변할 줄 모르는 언론인들의 기회주의]
p 316~317에서 재인용
정치가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해야지 어느 특정 집단또는 단체의 이익만을 대변해서는 안된다. 특정 이념을 가진 사람만을 위한 사회나 특정 기업 집단을 위한 사회나 모두 편향된 가치관이다.오늘날 ' 조중동 ' 으로 대표되는 언론 매체는 과거의 유신, 군부 정권 시절에 어떤 정치적인 편향이나 기업에 편향된 가치관을 심기위해 의도적으로 글을 올린다거나 일부러 삭제하기도 하였다. (재미있게도, 정권을 두둔한 ' 조중동 ' 의 편파적인 보도 내용과 이와 관련된 리영희 선생이 겪은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특히, 오늘날의 ' 조중동 ' 은 정권이 달라질 때마다 정권의 대세에 따른 편파적인 이중잣대식 보도는 지금도 여전하다.
고인을 떠나보내는 슬픔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지난 토요일에 진행된 리영희 교수 추모 49재에서 명진 스님은 대한민국의 현실을 개탄하면서 " 리영희 선생의 극락왕생을 바라지 않는다, 선생이 형형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우리가 잘못을 하면 ' 이러면 안 되지 ' 하고 꾸짖어주시길 바란다 " 고 말했다. 리영희 교수와 같은 존재가 대한민국 땅에 꼭 있어야한다는 생각을 강조함으로써 " 그 때까지 눈감지 마십시오 " 라는 말로 추모사를 마무리하였다.
명진 스님의 말에는 잘못 돌아가고 있는 대한민국의 실상을 안타까워하기 보다는 사회의 잘못된 실상을 지적할 줄 아는 참된 지식인 한 명을 떠나 보내야한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절실히 배어나고 있다.
그런 신문기사를 보고 난 뒤에 느낀 기분 탓일까?
굴곡이 심했던 자신의 활동을 회상하는 담담하면서도 겸손한 감회를 술회하는 리영희는 이미 자신의 학문 생활을 마무리짓는거나 다름 없는 ' 절필 선언 ' 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다소는 외람되고 조금은 자화자찬적인 평가지만 1980년대에서는 나의 글과 책은 거의 무용지물이 되었다. 60~70년대에 나의 글들이 지녔던 일정한 의미와 역할은 거의 지향되고 초극되었다. 얼마나 반가운 발전인가! 이를테면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의 역할을 했다는 셈일까? 그렇다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냐!
- <리영희 평전> p 407 -
* 리영희 [30년 집필의 회상], <한길문학> 1990년 5월 창간호
자신 스스로 선고한 ' 절필 선언 ' 은 어떻게보면 운동 기능은 상실되었지만 호흡 기능은 유지되는 식물인간이라고 자처하는 거나 똑같은 것이다. 리영희에게 운동 기능이란 불의와 맞서 싸워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에 민주화의 길에 들어서면서부터 그동안 금서로 지정되었던 사회사상 서적들이 봇물 터지듯이 쏟아졌다. 이렇다보니, 70~80년대까지 민주화 운동권 인사들과 진취적인 사고를 가진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 경전 ' 이나 다름 없었던 리영희의 저서들은 시대가 변할수록 영향력이 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갑자기 찾아온 병마와 절필 선언 속에서도 노학자는 ' 우상 ' 에 갇힌 대중들의 ' 이성 ' 을 일깨워주는데 온 힘을 다했다. 자신의 사상적 지주였던 루쉰 의 말을 인용한대로 ' 자신의 혀로 몸에 난 상처자국을 핥아내는 하이에나처럼 ' 노구를 이끌고 불의와 몽매가 판치는 세상의 전투에 다시 뛰어들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플루타르코스의 말을 빌리자면, 리영희 교수가 고통 없는 극락으로 갔다는 것이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것처럼 받아들어서는 안 된다. 그가 이승의 고통을 모른다고 해서 우리에게 해로울게 없다. 이미 우리 곁을 떠나간 이에 대해서 아쉬움 속에 슬픔과 미련에만 매달려서는 안된다.
모진 고난을 숱하게 겪으면서 살다간 리영희 선생이 이승보다 더 나은 곳으로, 그가 그토록 가보고 싶어했던 앙코르와트 사원으로 가기 위한 것인 만큼 우리는 이를 위안으로 삼고 위로하는 것이 떠나간 고인을 위한 것이다. 이제 고인이 극락왕생할 수 있도록 축원해줘야 한다.
사상의 은사를 추모하고 위로할 수 있는 진정한 방법은 그가 떠나면서 남긴 수많은 유산들, 그가 쓴 수많은 글들은 다음 후손들에게도 읽혀져야하며 우리는 그의 글을 통해서 ' 우상 ' 에 갇히지 않고 ' 이성 ' 을 통해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식견을 갖추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다.
1974년, 대한민국 사상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한 <전환시대의 논리>는 출판되자마자 금서 도서로 지정된 어려운 상황에서도 민주화 운동권 학생들은 정부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해가면서 몰래 읽어나갔다. 그리고, 후배들이 대학에 들어오게 되면 선배들이 가장 먼저 권하는 책이 바로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였다. 이런 독서의 되물림은 그 당시 냉전 이데올로기의 편견의 장막에 장님이 되다싶이한 대중과 지식인들의 눈을 확 뜨게 해주었으며 민주화 운동의 불길을 지펴준 기름 역할을 해주었다.
정치에 냉소적인 무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은 연예인들을 추종하는 젊은 세대들에게는 리영희는 듣도 보지 못한 이름일 것이다.
1970~80년대의 <전환시대의 논리>가 갓 대학에 입학한 후배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필독서라고 한다면 대담집 <대화>와 이 <리영희 평전>은 오늘날 사회에 첫 발을 내딛을 우리 젊은 세대들, 특히 리영희라는 지식인의 사상을 모르고 있다거나 그의 사상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필독서라고 말하고 싶다. 리영희의 사상을 제대로 접할 수 있는 저작들을 먼저 읽는 것이 당연한 상례이지만, 그의 사상을 보다 입체적으로 알 수 있으며 그의 육성이 남아있는 대담집과 평전을 먼저 읽어보는 것도 리영희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사상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고 곱씹는 것이야말로 그가 이승을 떠나면서 남기고 간 정신을 추모하고 유지할 수 있는, 고인을 진심으로 기리는 우리들의 자세이다.
' 리영희 선생님, 이제 이승의 미련을 버리시고 부디 극락왕생하시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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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1-24 공감(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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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기억으로서, 전략을 끌어낼 수 있는 성지로서

<리영희 평전>을 가장 달가워하지 않을 사람을 꼽으라면 박씨 일가도 아닐 것이며, 요란한 기소장을 썼던 D검사도 아닐 것이다. 아마 리영희선생 자신일 것이다. 물론 선생은 이 책을 무척 기다리셨다고 했으나, 이 책이 그저 시대가치를 등에 업고 여전히 그것들을 자양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들먹이는 무슨 호적부쯤이 된다고 생각하신다면 그는 이 책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내 억측일 수도 있으나 나는 그리 믿는다.
그가 정신적, 육체적 피로를 토로하며 한 시대의 전면에서 물러섰을 때,
"내가 할 일은 다 했고, 남은 역할은 내가 변치 않고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있어 주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라고 그의 책 <대화>에서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 하나로도 가슴 벅찼지만, 저항하고 고발하는 지식인의 시대가 막을 내리는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두렵고 서운하였다. 욕심이었고 파렴치한 생각이었지만 이 시절에도 계속 스승은 살아서 작동해주길 바랬다. 강준만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장기집권'을 원했다. 그러나, 2010년 겨울 시끄러운 세상속에는 선생의 부음 소식도 끼어 있었다. 마음이 헝크러지는 날들이었다.
리영희선생에게 있어 '생각한다'라는 말과 대비되는 말은 '우상'이었다. 선생이 평생을 혼자 치열하게 싸워온 것도 그것이었다. 리영희선생이 '우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종교의식에서 쓰이는 숭배되는 어떤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숭배하는 그 무엇에 대해 생각할 수 없음, 말 할 수 없음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체로 이런 것들은 그것이 전통의 이름을 달고 있건, 종교의 이름을 붙이고 있건, 정치적으로 처벌되는 무엇이건, 사회안에서 암묵적으로 동의한 관행이건, 나름의 체제를 만들고 폭력적인 방법(여기서 폭력이란 타인에게 자신의 혹은 사회적 취향을 강요하거나 굴종할 수 밖에 없는 처지를 깨닫게하는 과정까지 포함한다)을 동원해 사유를 금기시한다. 그리 생각하면 우리는 여전히 '우상'과 '헛것'이 판치는 아수라판을 살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고병권씨는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전제나 토대에 입각해서 추론하는 일이 아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우상을 파괴한다는 것은 사유의 전제까지 사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 때 가능하다"
라고 정의했다. 나는 여기서 리영희선생의 스승됨을 본다. 그로부터 의식을 각성당한 한 지식인은 스승의 역사적 기억을 자양분으로 이렇게 반듯하게 세상을 향해 그리고 그의 학생들에게 말할 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리영희선생의 힘이라고 믿는다. 단순히 빛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과할 수 있는 에너지의 원천, 용기가 되어주는 선생, 세상에 그런 선생은 많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책과 그의 말과 그의 행동을 보며 부르르 떨고, 울고, 악을 쓸 수 있었던 그들이 나는 내심 부럽다. 물론, 그 시절을 내게 살아내라고 했으면 나는 어떠했을지 말하지 않아도 내가 더 잘 안다. 나는 무뇌충으로 살았거나, 술주정뱅이가 되었을 것이다.
여튼 내가 대학에 다니던 무렵, 우리는 무작정 출처도 정확하지 않은 쎈 것들을 읽었고, 쎈 것들을 말하는 것이 뭔가 더 알고 더 나아간다고 생각했었다. 심지어 왼쪽에 모여있는 사람들끼리 '입으로만 싸우는'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는 했다. 얼굴을 들기 민망한 시절을 산 셈이다. 그리고 그 결과 밑둥없이 부유하는 그래서 이리 끌리고 저리 끌리는 어른이 되어, 그저 산 목숨 하나를 지키기 위해 생계라는 슬로건 아래에서 눈을 감기 바빴고, 우상에 절하고 침바르는 일을 알아서 하느라 바빴다. 그러면서 입은 여전히 살아 있어 늘 봄이 오지 않음을 투덜거렸다. 어쩌면 아예 봄이 올 것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고.
"다소는 외람되고 조금은 자화자찬격인 평가지만 1980년대에는 나의 글과 책이 거의 무용지물이 되었다. 60~70년대에 나의 글들이 지녔던 일정한 의미와 역할은 거의 지양되고 초극되었다. 얼마나 반가운 발전인가! 이를테면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의 역할을 했다는 셈일까? 그렇다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냐!"
리영희선생이 <30년 집필의 회상>에 남긴 글 일부다. 물론 이 글은 6월 항쟁의 과정에서 각성된 민중,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 모든 영광을 그들에게 돌린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의 청년들은 그 바탕에 선생의 글이 있었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2011년의 우리는 반가운 발전이라는 말을 과연 들을 수 있는 처지에 놓인 것일까.
최장집교수가 그의 책<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에서 밝혔듯이, 한국사회는 질적으로 민주화 이후 더 퇴보한 것 같다. 질적으로 물러섰다라는 말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지 그것을 통계적으로 들이밀 수는 없지만, 민주화 이전의 사회적 패권이 민주화 이후 또 다른 소수에게 옮겨 갔음을 짐작할 수 있는 예들은 차고 넘친다. 게다가 그들은 훨씬 명민해졌다. 이런 시절 선생의 퇴장은 일견 더 한 꼴을 보지 않으셔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이제는 어찌해야 합니까,라는 혼자말이 절로 나온다. 그리고는 양심도 없이 등대가 서있던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러면서 또 양심도 없이 모든 유적지가 그러하듯이 나는 그 자리가 그저 관광의 대상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을 갖는다. 역사적 기억으로서, 교훈의 자리로서, 각성의 불빛으로서, 전략을 끌어낼 수 있는 성지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너무 견고하고 높기만 했던 선생, 어디선가 멀고 먼 나라에서 온 것만 같던 선생님, 편히 쉬십시오. 장담할 수는 없지만 어느 순간 선생마저도 의심해보자고 달려들 수 있도록 깨어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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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1-03-02 공감(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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