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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7

Taek Gyu Kim | Facebook 친일

Taek Gyu Kim | Facebook:


Taek Gyu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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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을 같이 읽자
지난주 목요일, 대학원 기말 리포트를 채점하다가 중국인 여학생이 자신과 한국 문화의 인연에 관해 술회한 부분을 읽었다. 그녀가 초등학교 3학년일 때 “한국 드라마가 대량으로 중국에 수입되었다. 《대장금》, 《내 이름은 김삼순》, 《거침없이 하이킥》에 《천국의 계단》까지. 당시 중국 티브이는 마치 한국 드라마 채널 같았다. ... 한국 드라마는 주부부터 우리 엄마 같은 직장 여성에 이르기까지 각 계층에 깊이 파고들었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 관한 기본 교육을 엄마와 함께 한국 드라마를 보며 받은 셈이다. 매일 소파에서 엄마와 울며불며 서로 휴지를 건네며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말이다.” 
더 인상적인 부분은 그녀가 한국 유학을 온 후의 변화에 관한 서술이었다. “2015년 9월 3일, 베이징에서 열린 항일 전쟁 승리 70주년 열병식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은 맹하고 귀여운 모습으로 중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당시 중국과 한국의 관계는 온통 화목하기만 했다. 겨우 몇 년도 안 돼서 양국 관계가 지금 이 지경까지 악화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그랬다. 바로 그 이듬해인 2016년 가을, 나는 베이징의 어느 호텔 로비에서 사장 스타일의 낯선 남자에게 “길거리에 나가봐라. 우리가 현대 자동차를 저렇게 많이 사서 몰고 다니는데 너희 한국이 사드를 배치해?”라고 욕을 먹었다. 그 후로 내가 관여하던 한중 출판 교류는 2년 넘게 단절되었다. 작년부터 조금씩 회복되고 있기는 하지만 과거의 좋았던 시절로 되돌아가기는 다소 힘들 것 같다.
같은 날 오후에는 새로 독서 모임을 만들기 위한 예비 모임에 갔다가 젊은 친구들을 만났다. 그중 웹소설 업체에 다니는 K는 본래 일본소설 편집자였다. 2년 전 여름, 갑자기 나를 찾아와 “일본 수출규제 강화 전후로 일본 라이트노벨 매출이 절반 밑으로 떨어졌어요. 아무래도 회사에서 해고당할 것 같습니다.”라고 고민을 토로했는데, 다행히 요즘 인기 상승 중인 중국 웹소설 쪽으로 업무를 확장해 간신히 수명 연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학 전문 출판사에서 중국어 교재를 편집하는 S는 위기의 한가운데 있었다. “일본어 교재도 판매가 반 토막이 났는데 중국어 교재는 아예 4분의 1토막이 났어요. 이러다가는 정말 회사에서 쫓겨나겠어요!” 어쩔 수 없이 어학서 이외의 일반서로 눈을 돌려 한창 기획 중이라고 했다. 사실 내 본업인 중국 문학 번역도 판매가 부진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책이 안 팔리는 것보다 나를 더 속상하게 하는 것은 우리 독자들이 내용과는 무관하게 ‘중국 것’이라는 선입견만으로 중국 문학을 외면하는 현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날 나와 그 젊은 친구들을 비롯한 5명은 앞으로 한, 중, 일의 현대사와 문화 현상에 관해 책, 드라마, 영화를 보고 토론하는 모임을 운영하기로 했다. 그들은 대부분 중국어와 일본어를 다 구사할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문화콘텐츠를 오래 즐겨와서 내가 배울 게 많을 듯했다. “선생님은 왜 이런 모임을 꾸리려고 하세요?”라고 누가 물었다. “저는 오랫동안 한중일 삼국의 역사·문화를 비교하고 아우르는 시각을 갖고 싶었어요. 지금 세 나라는 반중, 반한, 반일의 조류가 어느 때보다 기승을 부리지만 사실 깊이 들어가 보면 한국의 드라마, 영화, 음악과 중국의 웹소설, 웹툰 그리고 일본의 애니메이션이 서로 깊숙이 침투해 있잖아요. 게다가 고대의 상호 문화 교류와 근대의 동시적인 서양 수용을 돌이켜보면 이웃 국가로서 수많은 접점이 있죠. 한중일의 정치·외교 관계와 민족 감정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모르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삼국을 하나의 역사·문화 단위로 삼아 이해하려는 노력은 계속 있어야 해요.”라고 나는 답했다.
우선 취합한 도서 목록을 보니 조너선 스펜서, 프랑크 디쾨터의 중국사 시리즈와 강상중, 가토 요코 등의 일본사 논저처럼 무거운 인문서들이 많았다. 역시 나도 구세대여서 책을 매개로 지식을 흡수하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다. “요즘 중국 드라마와 일본 애니메이션은 어떤가요? 볼 만한가요?”라고 묻자, 곧장 두 젊은 친구에게서 “요즘 중국 드라마, 장난 아니에요. 예전과는 달라요.”, “일본 애니메이션은 여전히 문제작들을 배출하고 있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앞으로 그들에게 얹혀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


Taek Gyu Kim
4 December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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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뒷목을 삐었다고 뭔가를 뒤지더니 동그란 파스를 찾아 목에 붙이는 게 아닌가! 생전 처음 봐서 물었다.
"그게 뭐야? 그게 뭐야?"
"응, 일본 동전 파스라는 건데 어느 특정 부위가 아플 때 붙이면 효과가 아주 강력해."

자동으로 어떤 말이 입에서 나왔다.
"역시 일제야!"

역시 자동으로 아내가 핀잔을 주었다.
"니가 그 말 할 줄 알았다, 이 친일파."
"....."
*사진은 로이히츠보코 동전 파스


Taek Gyu Kim
25 September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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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과 함께 한국 문단의 최대 관심사는 친일 문학 행위에 대한 비판과 그 청산 문제였다. 친일파로 지목된 문인들은 어떤 형식으로든 이 문제에 대한 비판을 거쳐야만 했다. 우선 이광수는 일제 시대에 일본의 황민화 정책을 앞장서서 지지했다. 스스로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의 전쟁 승리를 기원하는 많은 글을 썼고 학병 권유 연설을 하기도 했다.  해방 직후 그는 “과거 칠팔 년 걸어온 내 길이 그 동기는 어찌 갔든지 민족 정기로 보아서 나는 정녕 대도를 걸은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조선 신궁에 가서 절을 하고, 가야마 미쓰로로 이름을 고친 날, 나는 벌써 훼절한 사람이었다. 전쟁 중에 내가 천황을 부르고 내선일체를 부른 것은 일시 조선 민족에게 내릴 듯한 禍端을 조금이라도 돌리자 한 것이지마는, 그러한 목적으로 살아 있어 움직인 것이지마는, 이제 민족이 일본의 羈絆을 벗은 이상 나는 더 말할 필요도 또 말할 자격도 없는 것이다. 가장 깨끗하자면 해방의 기별을 듣는 순간에 내가 죽어버리는 것이지마는 그것을 못한 나의 갈 길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라고 고백했다.


Taek Gyu Kim
3 September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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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야와 아침 밥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아빠, 나 요즘 유시민의 한국현대사 읽는데 이승만은 어떤 사람이야?"
헉, 올 것이 왔구나. 
"이승만은 국부라고 불렸잖아. 나라의 아버지. 한 나라의 대통령이 국부라고 불리는 게 옳다고 생각해?"
"모르겠어."
"난 우리 현대사의 지도층이 권위주의적이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던 것 같아. 자기가 옳고, 자기가 없으면 안 되며, 자기가 대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도자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겠어?"
"그런데 이승만은 친일파 싫어하지 않았어?"
으악, 너무 깊이 들어가잖아.
"이승만이 친일파를 싫어했든 안 싫어했든 이승만은 친일파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어. 1945년 해방 이후 이승만은 미군정과 손잡고 정권을 구성했잖아. 사실은 미군정이 국가 복원을 주도했지만. 미군정은 친일파 청산 같은 민족적 문제보다는 어떻게든 효율적이고 안정적으로 우리 사회를 관리하는 데 더 관심이 많았어. 어쨌든 걔들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잖아."
"응."
"그런데 해방 이후에 미군정이 손쉽게 활용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일본에 협력한 관리들과 지식인들이었어. 그래서 그들의 친일 경력을 단죄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등용해 국가 경영에 써먹었던 거야."
"응."
"그 과정에서 미군정에 협력했던 이승만도 자연히 친일파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거고."
소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또 물었다. 
"그러면 남산에 이승만 동상을 세운 건 어떻게 생각해?"
아이고, 골치 아파라.
"우리 현대사는 독재로 점철되어 왔잖아. 역시 친일 경력의 관료, 지식인들이 계속 독재 정권을 떠받쳤고. 그 바람에 제대로 역사가 씌어지지도, 가르쳐지지도 못했어. 그러다가 80년대 말부터 민주화와 역사 바로보기 작업이 시작되면서 다행스럽게 객관적인 역사 교육이 이뤄졌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과 독재에 협력한 사람들과 그들의 자손이 옳게 평가되고 청산된 것은 아니야. 숨죽이고 있었다고나 할까. 그 사람들이 계속 우리 사회의 기득권자로 존재하면서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 들어와 역사적 자존감까지 탈취하려고 역사를 고쳐 쓰려고 하는 거야. 이승만 동상도 그 일환이고. 너도 알다시피 박근혜는 친일 부역 독재자의 딸이잖아."
"교학사 교과서도 그런 거야?"
"응. 교육부도 결국 친일과 독재의 사관에 동조하는 입장에 선 거지"
"교육부하고 교학사 교과서랑 관련이 있어?"
"교육부의 지원이 없었으면 교학사 교과서는 만들어지지도 못했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야?"
"글쎄. 무엇보다도 이명박, 박근혜를 뽑은 우리들한테 책임이 있지 않을까?"
"유시민도 그랬어. 한국 현대사의 각 단계마다 우리 국민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수준에 따라 지도자를 뽑았었대."
"......"
아주아주 보람 있고 머리 아픈 아침식사였다.


Taek Gyu Kim
27 November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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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리와 박경리의 인연
친일 문학가 이광수가 숱한 후학들을 <조선문단>을 통해 등단시켰던 것이 내게 의외였던 것처럼 해방 후 보수문단의 대표자였던 김동리가 박경리의 문단 진출을 이끌었다는 사실도 내게 충격을 주었다. 
"한국전쟁 중 남편을 잃고 세 살 아들마저 병으로 잃은 '전쟁 과부' 박경리는 김동리의 부인이 진주여고 선배여서 자신이 써둔 시 원고를 김동리에게 보일 기회가 생긴다. 그 원고를 보고 한동안 반응이 없던 김동리는 얼마 뒤 작품을 갖고 '문예살롱'으로 나오라는 전갈을 보낸다. 낯가림이 심했던 박경리는 친구를 앞세운 채 문예살롱에 드나들며 김동리에게 계속 습작품을 보였는데 김동리는 그녀에게 시 대신 소설을 써보라고 권한다. 이미 일본어로 소설을 써본 적이 있던 박경리는 곧 소설 습작으로 방향을 튼다. 그러던 중 문예살롱에서 누가 그녀의 얼굴을 스케치해 주위 사람들에게 돌리는 일이 벌어진다. 이 일로 그녀는 모욕감에 떨며 다시는 문예살롱에 나가지 않는다. 김동리에게 넘긴 습작 원고 뭉치도 친구를 통해 돌려받는다. 그런데 어느 날 박경리는 김동리의 큰아들로부터 <현대문학>에 작품이 추천되었으니 원고료를 받아가라는 얘기를 듣는다. 박경리에게 습작품을 돌려줄 때 빼놓은 작품을 김동리가 <현대문학>에 추천한 것이다. 이로써 박경리의 단편 <계산>이 <현대문학> 1955년 8월호에 발표된다. 첫 추천을 받고 1년이 지난 뒤 <흑흑백백>으로 추천이 완료되어 박경리는 비로소 한국문단에 얼굴을 내민다."


Taek Gyu Kim
5 July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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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직후 주둔한 미군이 점령군이고 초대 정부가 미군정과 친일 인사들의 합작품이라는 이재명의 발언에 오세훈, 이준석, 원희룡, 윤석열이 줄줄이 개떼처럼 달라붙어 별 소리를 다 한다. 국민을 갈라치지 말라느니, 우방을 점령군 취급한다느니...
난 대학 때 이재명의 말과 동일한 역사를 배웠다. 수업 시간에도, 학회에서도. 저 보수 인사들은 나와 전혀 다른 데서 역사를 배웠나?
1982년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에 대한 관점을 물어보면 더 재미있겠군.


Taek Gyu Kim
4 November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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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레이>, <적빈> 등 1930년대 일련의 저항소설을 집필한 백신애(1908-1939)는 대구에서 친일 거상 백내유의 딸로 태어나 반일 지식인인 오빠 백기호의 영향을 받았다. 사범학교를 나와 1926년 19세에 경북 최초의 여교사가 되었으며 조선여성동우회 회원인 것이 발각돼 학교에서 축출된 후에는 서울에 올라가 여성운동을 벌였다. 같은 해 2월 25일 천도교회관에서 경성여성청년동맹 2주년 기념식에 단독으로 집회 허가를 받아내고 혼자서 대회를 치르는 강단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집안의 강요로 은행원 이근채와 결혼을 했지만 오빠를 찾아 상해 여행을 간 뒤 일방적으로 이혼을 요구, 집사를 시켜 이혼 수속을 밟는다. 이 정도면 대구경북 지역 페미니스트의 원조가 아닐까. 진냥 (Heejin Jagn)


Taek Gyu Kim
7 November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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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오, <헤밍웨이 읽기>-23
중국의 감정 혁명을 이끈 선구자
‘민국’의 역사, 특히 전기의 역사에는 한 가지 눈에 띄는 주제가 있는데, 중국의 철학자 리쩌허우(李澤厚)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구국(救國)과 계몽의 이중 변주’라고 불린다. 이것은 두 가지 강력한 동기 사이의 밀고 당김을 뜻한다. 한쪽은 구국이 먼저라고 주장했으며 다른 한쪽은 계몽이 더 중요하고 근본적이라고 강조했다. 양쪽의 견해는 모두 거대한 열정을 촉발했다. 
처음에는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과 맞닥뜨리고 그다음에는 일본이 한쪽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 탓에 중국은 여러 차례 망국의 벼랑 끝에 섰다. 그랬으니 당연히 구국과 생존을 도모하는 부르짖음이 생겨났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런 분석을 한 이들이 있었다. 중국이 그렇게 깊은 위기에 빠진 것은 국민이 너무 무지하고 어리석기 때문이므로 반드시 그들에게 현대적인 지식을 주입해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라를 구할 수 없고 설령 이번에 구하더라도 다음에 다시 똑같이 능멸과 위협을 당한다는 것이었다.
‘계몽파’는 적극적으로 백화문(구어문) 사용을 제창하여 누구나 쉽게 글자를 알아보고 지식을 흡수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것은 ‘구국파’가 보기에는 긴급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 국민이 어리석은 게 문제라 해도 국가가 먼저 망해버리면 어떻게 계몽을 한단 말인가? 구국파는 불가피하게 강한 엘리트적 태도를 갖고 있었으며 국민 개조와 사회 개혁을 기다릴 수가 없었다. 우선 안목과 능력을 지닌 엘리트들이 정확한 방향을 제시하고 국민들을 이끌거나 심지어 따라오도록 강요하여, 집단의 통일된 행위로 먼저 나라부터 부강하게 하자는 생각이었다.
사실은 계몽도 구국의 수단이기는 했지만 사안의 선후와 경중에 대한 판단 차이로 인해 계몽파와 구국파 사이에는 고도의 긴장 관계가 형성되었고 수십 년에 걸쳐 논쟁과 대립이 이어졌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은 어떤 의미에서는 구국파의 승리를 상징했다. 여전히 대다수가 문맹인 농민들을 구성원으로 삼은 그 새로운 국가의 출현은 새로운 희망을 가져왔다.
하지만 단순히 계몽과 구국의 대립과 힘 겨루기로 이 기간의 역사를 정리한다면 너무나 많은 것들을 빠뜨리게 된다. 예를 들어 쉬즈모(徐志摩[1897~1931], 중국 현대시의 개척자로 꼽히는 낭만주의 시인. 미국과 영국에 유학했고 귀국 후 각 대학에서 재직하며 많은 작품을 썼다. 인도 시인 타고르를 중국에 소개하는 데 공헌하기도 했으며 1928년에는 중국 현대시의 중요한 유파인 신월파[新月派]를 조직했다)도 빠뜨릴 수밖에 없다. 쉬즈모는 계몽에도 구국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저우쭤런(周作人[1885~1967], 루쉰의 동생으로 일본에서 영문학과 그리스어 등을 배웠고 루쉰과 공동으로 유럽 근대문학을 번역, 출판했다. 1924년 루쉰 등과 함께 유명한 수필 유파 ‘어사사’[語絲社]를 결성해 이후 빼어난 많은 수필을 발표했다. 하지만 중일전쟁 때 친일 괴뢰 정부인 왕징웨이[汪精衛]정권에 부역하여 전후에 전범으로 투옥됐으며 출옥 후에는 베이징에서 계속 번역 작업을 했다) 같은 사람도 집어넣을 자리가 없다. 그가 쓴 소품문(小品文, 일상생활에서 보고 느낀 것을 자유로운 필치로 간단히 적은 수필)들은 구국에도 계몽에도 속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남들이 전전긍긍하며 구국과 계몽을 염려할 때 그저 자연을 감상하며 생활의 정취를 추구했는데도 뜻밖에 당시 큰 명성을 누렸다. 이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며 또 여기에는 어떤 이치가 숨어 있는 걸까?
나중에 정리되어 나온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 그 시대 사람들의 감수성을 복원해야만 우리는 비로소 이 문제에 답할 수 있다. 그 시대 사람들이 보기에 쉬즈모와 바진 사이에는 그렇게 명확한 경계선이 없었다. 후스(胡適[1891~1962] 중국의 학자, 교육가로 미국 유학 시절 잡지를 통해 백화문 운동을 제창해 문학혁명의 계기를 만들었고 1917년 귀국 후에는 베이징대학 교수로 취임하여 과학과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계몽운동의 중심 인물로 활약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직전인 1948년 타이완으로 건너가 중앙연구원 원장 등 요직을 역임했다)와 천두슈(陳獨秀[1879~1942] 일본과 프랑스에서 유학한 뒤 1916년 상하이에서 잡지 《신청년》을 창간해 5·4 신문화운동의 사상적 근거를 마련했다. 그리고 1921년 중국 공산당 창당을 주도했으며 코민테른의 지시 아래 중앙 총서기로서 국민당과의 합작을 이끌었지만 1927년 국공합작의 결렬로 총서기직에서 축출되었다) 사이에도 역시 명확한 경계선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혁명 세대에 속했으며 혁명의 조류 속의 선도적인 인물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쉬즈모의 글을 읽어도 량치차오(梁啓超[1873~1929], 중국 청말, 중화민국 초의 계몽 사상가이자 문학가. 어려서 전통 교육을 받았지만 서양 서적을 보고 생각이 크게 바뀌어 캉유웨이[康有爲]와 함께 여러 나라 서적의 번역, 신문과 잡지의 발행, 정치 학교 개설 등 혁신 운동을 펼쳤으며 신사상을 소개하고 구사상을 배격하는 정치 논설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무술변법의 실패로 일본에 망명한 뒤에도 계속 《청의보》[淸議報], 《시무보》[時務報] 등을 통해 계몽 활동을 전개했다), 후스, 루쉰의 글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쉬즈모가 거둔 혁명의 효과는 후스에 뒤지지 않았다. 량치차오와 후스가 일맥상통하여 추진한 것이 지식의 혁명이었다면 쉬즈모는 감정 혁명을 추진한 선도자였다. 계몽의 논리는 중국을 구하려면 먼저 중국을 개조하여 서양과 같은 현대 국가로 탈바꿈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중국을 개조하려면 서양의 과학기술을 배워야 했는데, 먼저 정치제도의 개혁을 수행하지 않으면 과학기술은 중국에서 뿌리내릴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먼저 국민의 의식과 국민의 지식수준을 바꾸지 않으면 정치제도 역시 효과적으로 이식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수십 년간의 실험과 추진이 이어졌는데도 한발 한발 뒤로 물러나 1919년 전후의 ‘5·4 시기’에 이르러서는 루쉰이 말한 ‘국민성’까지, 다시 말해 먼저 국민의 정신을 개조해야 하며 정신의 개혁이야말로 모든 것의 근본이자 모든 것의 기점이라는 주장까지 후퇴하고 말았다.
후스는 ‘모든 가치의 재평가’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고 ‘과학적 방법’과 ‘과학적 태도’에 관해 논의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것은 단지 지식 차원의 개혁이 아니라 정신적 차원의 개혁이었다. 쉬즈모는 후스보다 좀 더 철저했을 뿐만 아니라 좀 더 매력적이기도 했다. 그는 후스처럼 정신의 원리를 이야기하는 대신에 자신의 정신을, 매우 색다른 낭만적인 정신을 글로 나타냈다. 이것은 수많은 독자들에게 인간이 살아가는 또 다른 방식과, 강한 열정을 갖고 속박되지도, 열정 속에서 위축되지도 않는 새로운 삶을 시범으로 보여준 것과 같았다. 이런 삶은, 이런 삶에서 투영되는 낭만적인 감정은 그전까지 중국에는 없었던 것이며 심지어 중국의 전통 사회에서는 독사나 맹수처럼 여겨져 어떻게든 제거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하남석 박민호 김결
End of results

Taek Gyu Kim | Facebook 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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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k Gyu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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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내무성은 패전 직후인 1945년 8월 18일 비밀리에 전국 경찰에 <점령군 위안시설 설치지령>을 내렸고 국가자금의 특별융자를 지시했으며 도쿄에서는 <전후 처리의 국가적 긴급시설의 일단으로서 주둔군 위안의 대사업에 참가하는 신 일본 여성의 솔선 협력을 구함>이라는 제목으로 ‘여사무원 모집, 18세 이상 25세까지, 숙사·피복·식량 일체 지급’이라는 공고를 붙였다. 나중에 이것이 미군 위안부 모집이라는 것을 알고 많은 여성이 돌아갔지만 1000명은 남아서 ‘정부 공인의 매춘부’가 됐다.(61)
- 유영수, <일본이 선진국이라는 착각>


Taek Gyu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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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그러니까....
제국주의 일본은 한국 무단통치 기간에 수백만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갔다.
그 후로 74년. 일본은 전후의 폐허에서 국제 정치경제에서 중요한 국가로 자리잡았지만 아시아 침략과 태평양전쟁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다. 난징학살도 위안부 문제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고집하며 강대국에 걸맞는 (거짓된) 도덕성을 보유하려 한다.
한일협정의 효력 범위에 대한 논란은 있을 수 있다. 국가 보상과 개인 배상의 차이에 대한 논란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핵심은 반인륜적 국가 범죄에 대한 일본의 공식적이며 지속적인 인정과 반성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이럴 때 혹자는 한일 간 불행했던 과거를 덮고 전향적인 미래를 지향하자고 한다.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현실을 보자고도 한다. 이들은 지금 "일제에 의한 수백만의 죽음은 선대의 일일 뿐이고 우리 세대의 일이 아니니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눈앞의 장사에만 집중하자"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역시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눈앞의 손익계산에만 몰두하자"는 것이다.
그들을 가리켜 누구는 친일파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역사도 민주주의도 휴머니즘도 없다. 있다 해도 그것은 그들에게 속내를 감추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들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기득권과 가족과 협소한 이익집단 챙기기와 자기우월주의뿐이다. 그들은 이익을 위해서는 친일파도 될 수 있고 친미파도 될 수 있고 심지어 친러파도 될 수 있다. 그들은 한국에도 있고 일본에도 있고 지금 백색테러가 횡행하는 홍콩에도 있다.
내 가장 즐거운 재미 중 하나는 그들을 발견하고 속내를 간파해 살짝 비꼬아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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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k Gyu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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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하 선생의 <제국의 위안부> 관련 논란은 꽤 오래됐지만 관심이 없어 아는 바가 없다. 그런데 오늘 우연히 일본의 원전 오염수 방류에 대한 이분의 페이스북 글을 보았다. 무엇보다 서두가 인상적이었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방사능”처리수”(“오염수”의 일본쪽 호칭) 문제에 관한 일본측 설명이 주한 일본대사관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다. 이걸 읽어 봐도 옳은지 어떤지 객관적으로 판단할 능력이 내겐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건강을 해칠 걸 알면서도 강이나 바다에 오수를 흘려보내는 파렴치한 공장주같은 나라는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러려니 한다. 사고난지 벌써 십 년이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연구를 했을까 싶고 그렇다면 나름 최선의 선택을 했을 것이라고 믿으려 하는 것이다."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분이 일본이라는 나라를 대단히 신뢰하고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분이 일본을 신뢰하는 만큼이나 나도 우리 조국을 신뢰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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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k Gyu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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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는 결국 종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을 망상과 착각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하는군요.
"그는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에 대해 '인간은 부끄럽거나 나쁜 일을 했다고 느끼는 경우에 강제적으로 어쩔 수 없이 했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스스로 반복해서 말하다 보면 스스로 믿게 된다'고 주장했다."
무려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가 자국의 현대사를 편향된 눈으로 바라볼 수도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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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 "위안부란 명칭 참 상냥해" 妄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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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k Gyu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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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기사다. 이제 이 정도 논조의 기사도 포털 메인에 뜨는구나! 내가 인상 깊었던 것은 "한국도 미국도 북한과의 교류로 북한이 스스로 무너질 것을 바라지 마라."이다. 북한은 정상 국가로서 동독처럼 경제난으로 흡수 통일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시나리오를 품고 남북 교류를 기대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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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는 무조건 일본편.. 남북 합심해 과거사·독도 문제 대응해야"
[서울신문]“남북한이 한목소리로 일본의 위안부·징용 등 과거사 문제와 독도 문제 등에 공동 대응해야 한다. 그러면 일본이 지금과 같은 경제 도발을 생각지도 못할 것이고, 국제사회에서 남북의 위상이 커지고 대의명분도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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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k Gyu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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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래 기사를 보고 무척 황당하고 불쾌했다. 기자가 쓴 기사가 맞나 싶었다. 하지만 이 기사를 읽고 내게 동감하는 사람은 딱 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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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역사 2cm] 약자 짓밟는 일본..'오쓰 사건'엔 온 국민이 싹싹 빌었다
(서울=연합뉴스) 황대일 기자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 최고령(99세)이던 이순덕 할머니가 4월 4일 별세했다. 할머니는 그동안 "인정하라, 사죄하라, 보상하라"고 목청껏 외쳤지만 별 성과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일본은 위안부 진상 규명과 손해배상에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했다. 아베 신조 총리가 2015년 발표한 전후 70년 담화도 진심 어린 사과는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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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k Gyu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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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li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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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사람들을 위하는게 뭘까'
중학교 3학년때 처음 자살시도를 했다. 자살 실패 후, 어차피 죽으면 없어질 몸이니 다른사람을 위해 살다가 가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가지 않고 봉사활동을 했다. 당장 도울 수 있는 아이들을 돕는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공부방에서 아무리 사랑을 주어도, 아이들은 학교나 가정에서 차별과 폭력에 시달리다 왔다. 사회의 거대한 폭력을 바로잡지 않고서 사랑만 준다고 아이들이 행복해지지 않는다. 또 내가 죽고나면 또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가? 살아있는 동안 모든 사람들을 위한 최선이 뭘까 고민했다. 내린 결론은 아이들이 애초에 빈곤과 폭력에 시달리지 않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 환경을 만드는 방법을 공부하기 위해 사회복지과에 진학했다. 그런데 사회복지과는 정치는 건들지 말자고 했다(하는 것 같았다). 마침 2008년 촛불집회가 열렸고, 그때 세상이 이렇게 바뀔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거의 매일 아고라를 보며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었다.
촛불만 든다고 세상이 바뀔 것 같진 않았다. 문제의 근원을 바꿔야 한다. 그 근원은 정치라고 생각했다. 잘못된 정책을 생산하는 정치, 역사의 정의를 세우지 않는 정권이 문제다. 그래서 MBout을 외쳤다.(그들은 불순세력의 선동으로 변질된거라 했지만) 여러 방법 중에서 제도정치를 변화시키기 위해 정당에 가입했다.
그때부터 진보정당활동을 시작했다. 진성당원제로 운영되고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일하는 사람들을 위하는 정당. 진보정당이라는 깃발아래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민주노동당은 엘리트정당이 아니라, 민주주의정당이어서 좋았다. 노동자.농민. 대학생의 대중조직인 민주노총, 농민회, 한대련 등 조직된 시민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었기에 그랬다.
당활동도 중요하지만, 진보정당의 기반인 대중조직이 활성화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학생운동을 했다. 사회과학, 인문학을 두루 공부할 수 있는 사회학 대학원에 진학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여러 방법과 전략들이 있는데, 주요모순이 자본인지 통일인지에 따라 정파가 나뉘고 전략도 달라졌다. 운동방법과 인식의 위계는 하나의 조직, 하나의 전략, 하나의 방법만이 최선이라는 태도를 가져왔다. 이게 맞을까, 고민도 들었지만 당장 죽어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다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일단 정권교체는 꼭 해야하기 때문에 힘을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명박의 임기가 끝나면서 바라본 한국사회는 충격적이었다. 사대강으로 온나라 강바닥이 폐허가 됐다. mbc, kbs사장이 바뀌고 시사프로그램이 모조리 없어졌다. 보도지침이 일상이 됐고, 방송은 편향된 소식만 전했다. 종편이 시작됐고 정치는 예능으로 전락했다. 그러다가 종북몰이가 시작됐다. "빨갱이"라는 케케묵은 단어에서 "종북"의 등장을 보고 처음엔 웃었다. 누가 이런걸 믿겠어?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종북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숨막히는 여론의 공기 속에서 통합진보당은 해산됐다. 동시에 4년간 만나던 연인과 증오로 가득찬 이별을 했다. 무기력했다. 세상은 쉬이 바뀔 것 같지 않았고, 성급히 봉합했던 과거의 상처는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16살때 버리고 왔던 내가 찾아왔다. 삶의 목적이었던 "사람들을 위한 삶"을 살 수 없게 된 나는 살아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그렇게 두번째 자살을 시도했다. 자살 실패 후 도무지 힘이 안났다. "사람들을 위하는 삶"을 살 수 없게 된 내 오늘이 무가치하고 무의미했다. 누구도 이 마음을 온전히 이해해 줄 수 없을 것 같아 고독했고 스스로 고립됐다.
그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글로 다 뱉어내지 못했던 마음의 응어리들이 물감으로 튀어나왔다. 밤새 요동치는 마음을 색깔로 질감으로 뱉어내면서 하루하루 버텼다. 숨막히는 세상에서 캔버스는 내가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그 자유 속에서 영혼의 허리띠가 풀어졌다. 내일이나 미래를 위해, 세상을 위해서 이전에 오직 '지금' 존재하는 감각을 캔버스가 가르쳐줬다. 이 해방의 경험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정말 사람들을 위하는 건 사람들이 자기 자신으로 온전히 존재할 수 있게하는거다. 예술이라는 자기실현방식이 그 답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언니와 함께 감성노리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사회적경제조직으로 사람들과 연결되고, 미술로 마음을 소통하는 공간에서 나도 치유되어갔다.
온전한 나로 존재하는 것이 사람들을 위한 일이라는 걸 알게됐다. 건강해지기 위해 이곳 저곳에 상담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기성 상담이론은 삶을 다 담지 못했다. 상담치료를 거부하고 정신분석과 꿈분석, 미술치료와 사회심리학을 공부했다. 실존주의에 바탕을 둔 실존미술치료가 온전한 삶을 돕는 좋은 방법이었다. 나만 아픈 것이 아니라, 병리적인 사회에서 우리 모두는 다 아프다. 누가 누굴 구원하고 누가 누굴 돕는가? 사람들을 위한다는 오만이 문제였다. 내 존재를 배제하고 세상을 위하다니. 나는 오늘 인간으로 존재하는게 아니라 스스로를 메시아적 위치에 놓았던 것이다. 내 실존을 사유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중 세월호참사가 일어났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대낮에 일어났다. 해경은 vip의 눈치를 보느라 정신없었고, 구조하는 것 보다 보고하고 지시를 기다리기 바빴다. 수상한 행적이 많고, 언론은 의도적으로 물타기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 살아온 것인데, 모든게 무너졌다. 내 삶이 통째로 부정당했다. 이 나라가 이정도는 아닐줄 알았다. 가장 충격적이었던건, 이런 일이 있음에도 출근하고 시험을 보러 나가야 하는 삶의 방식이었다. 영혼과 양심을 집에 두고 나와야하는 현대인의 삶이 낯설고 이상했다. 당장 내 삶을 구해내지 않으면 그 위험한 굴레에 빠져들어갈 것 같다. 그건 내 영혼과 양심에 대한 기만이다.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이 죽었는데, 이 끔찍한 폭력 앞에서 멀쩡한 사람들이 야속했다. 그림을 그려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 모든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실존은 방 안이 아니라 거리에 있었다. 거리에서 뱉어내야 했다. 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나 함께 울면서 다시 노래 부를 수 있었다.
그렇게 거리에서 그림그리고 유랑하며 지냈다. 다시, 이 위태로운 땅에서 온전한 삶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내 하루를 어떻게 재구성해야하는가 고민했다. 허허당스님께 끊임없이 흐르고, 방랑하는 삶,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오늘을 배웠다. 그 후 인도로 갔다. 명상하고, 산책하고, 그림그리고, 책읽고 글을 쓰면서 삶의 생기를 회복했다. 특히 방치해뒀던 죽음과 화해하기 위해 죽음을 사유했다. 죽음을 생각하면 할수록 삶의 본질과 가까워졌다. 삶은 한번뿐이고 유한하다는 단순한 진실이 지금 존재하는 것들을 사랑하게했다. 나를 포함한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말이다. 어서 사람들과 이 영감과 생기를 공유하고 싶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사람들과 만나고 퍼포먼스를 하고다녔다. 세상이라는 캔버스에 삶으로 맘껏 그림그리는 게 예술이다. 이 과정이 누군가의 삶에 작은 파장이라도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회예술은 내게 새로운 삶의 방식이 됐다.
그러나 진심을 뱉어낼수록 언론과 미디어에서 나는 특별한 존재로, 사람들과 다른존재로 비춰졌다. 그것이 칭찬이든 비난이든 고립되는 건 같다. 의미를 독점한 한사람은 온전할 수가 없다. 깜깜한 시대일수록 한사람의 영웅이나 독재자나 범죄자가 부각되기 마련이다. 이 굴레를 깨기 위한 근본적인 방법은 없을까. 모든 사람들이 주인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했다. 모바일과 SNS와 같은 온라인플랫폼은 그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강력한 도구다. 그래서 온라인플랫폼을 개발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활동했다. 새로운 정치활동과 삶의 방식을 반영한 정치혁명이자 문화혁명이다.
하지만 시스템만 구축한다고 세상이 변하는게 아니다. 본질적으로는 사상의 빈곤이 문제라 생각했다. 사람들은 삶의 문제를 각개의 힐링이나, 관념의 경전이나 기존의 대중문화나 통념으로 해결한다. 모여야할 변화의 에너지가 그렇게 흩어지고, 자살은 늘어간다. 그래서 작년 말 인도의 오르빌 영성공동체에 다녀올 계획이었다. 동학혁명을 추동한 동학이 있었듯, 지금 한국사회에 맞는 온전한 삶과 세상을 담보하는 사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삶의 문제가 있을 때 명상으로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영성공동체에서 예술로 자기를 표현하고, 사람들 속에서 자기를 실현하는 온전한 삶의 방식. 이 사유를 정리해서 공유하는게 모든 삶을 위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목격한 폭력을 못본체 할 수 없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위안부 한일협상은 거리로 나올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러던 중 효녀연합 퍼포먼스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처음엔 사람들과 의미가 공명되어 너무 신나고 좋았다. 하지만 진심이 가공되고 재단되는건 시간문제였다. 일베 뿐 아니라 기성언론에서도 도구화하는 한국사회의 짙은 여성혐오를 발견했다. 여성혐오는 여성을 싫어하는게 아니다. 인간이기 전에 여성으로서 대상화하는 모든 인식과 태도다. 성녀로 찬양하거나 창녀로 모욕하는 여성혐오가 진심을 압도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환경과 문화, 삶의 정서가 이 모든걸 뒷받침하고 있다.
끔찍한건 여성혐오를 만들어온 구조와 문화에 나역시 기여해왔다는 사실이다. 누군가의 시선으로 소비되는 것에 익숙해진 나를 발견한다. 국가권력 앞에서 발톱을 드러내고 싸우고자 했던 내가 은밀한 자본권력에 길들여진 것이다. 가부장제에서 여성이 소비되고 소모되는 방식에 순순히 기여하고 있었다. 이 굴레에서 외치는 "우리 나와서 함께 싸웁시다"는 대다수의 여성들에게 폭력으로 다가갔을거다. 당장 오늘 대상화된 삶을 살고 있는데, 나와서 대승적인걸 해결하기 위해 구호를 외치라고 하다니.
뒤돌아보니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교수님과 철학자와 사상가와 혁명가는 모조리 남자였다. 우연의 일치일까. 혁명이론과 사회과학서적의 저자는 대부분이 남자였다. 단순히 남자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다. 나조차도 그들이 남성이기 때문에 더 많은 신뢰와 긍정을 보내고 있다.
다행히 젠더감각이 깨어났다. 굳은껍데기가 한꺼풀 벗겨져 조금은 아프다. 카페에서 들리는 노래와 지하철 광고판, 신문의 배열과 서점, 페이스북의 타임라인에 즐비한 여성혐오 정서가 나를 따갑게 찌른다. 보이지 않았던 이슈도 보인다. 3일마다 한명이 여성이 남성의 폭력으로 죽어간다는걸 이제야 알았다. 공포의 사회에서 여성혐오는 더더욱 커지고있다. 인간소외가 심화될수록 여성혐오는 극단으로 표출된다. 폭력은 구석구석 존재한다. 나의 오늘에도. 모든 폭력은 사소하지 않다. 이 폭력 앞에서 우리는 선한 행위를 한다고 스스로를 기만하거나 '이정도면 됐지' 자위해왔던 건 아닌가. 내 의미에 취해 앵무새처럼 희망을 말해오지 않았나. 그런 희망을 얘기하는 것보다 모든 폭력을 직시하는게 더 중요한데. 뒷통수를 맞은 느낌이다.
총선을 앞두고, "아젠다설정을 어떻게 해서 프레임을 어떻게 짜고... 그래서 전략적으로 총선에서 승리하고 대선에서 승리하면 세상이 바뀐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 삶이 정말 온전할 수 있을까? 정권교체를 한다고 해서 내 오늘이 해방될 수 있는가? 국가라는 틀에서 제도정치가 바뀐다고 삶이 해방되는가?
물론, 지금 이대로 가다간 사람들이 다친다. 때문에 총선에서 반드시 이겨야 하는건 맞다. 하지만 그 급박한 변화이론에서 거세당해온 젠더이슈는? 항상 미뤄왔던 젠더이슈는 도대체 언제 이야기하는가? 본질에 대한 사유와 성찰을 멈추면 안된다. 그걸 멈춰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변화에서 소외되고 있다. 젠더이슈는 나열된 이슈 중 하나가 아니다. 삶의 감각에서 나오는 사회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새로운 인식과 태도다. 오히려 젠더를 거세함으로서 우리는 너무 어렵게 세상을 바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세상의 변화에서 사적영역이라 분류된 이슈는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났고, 사회의 변화에서 오늘의 삶은 배제되어왔다. 당연히 사람들의 삶은 변화담론에서, 역사책에서 소외된다. 세상이 바뀌지 않은 이유다.
세상을 바꾸는 본질적인 힘은 공감이다. 멀리있는 이론이나 깃발에 모이라고 외치는게 아니라, 삶의 감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미래나 전략적 성취가 아니라, 바로 '오늘'이어야 한다. 모든 폭력과 모든 차별이 전선이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삶을 담아내야 한다. 삶에 숨겨진 가장 은밀한 폭력-젠더폭력을 들춰내고, 공기처럼 존재하는 폭력을 고발함으로서 모든 인간의 해방을 실천해야한다. 이것은 그동안 세상을 바꾸기 위한 모든 방법론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다. 세계를 바꾸는 방법론의 차원이 아니라, 세계와 내가 관계맺는 방식의 차원이다. 방법에서의 혁명이고, 목적에서의 혁명이다.
매드맥스에서 퓨리오사가 그린랜드를 쟁취하기 위해 여성들의 족쇄를 풀었듯, 설국열차를 멈추고 소녀와 북극곰이 만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됐듯, 브이포벤데타에서 이브가 물로 다시 태어나 세상의 다른 변화방식을 이끌기를 주문받았듯, 이 시대가 우리에게 다른방식의 변화를 주문한다. 혁명은 그들이 생각치 못한 곳에서 일어난다. 모든 오늘을 배제하지 않는 변화. 희생이나 사명이 아니라. 구호를 외치거나 이론을 갖다 쓰지 않고, 삶의 언어로 만난다. 인간의 고통 앞에 가장 먼저 나가고, 가장 늦게 들어온다. 아니, 들어오지 못해 서성이면서 방랑하고 배회하고 사유하고 노래한다.
'정말 사람들을 위하는게 뭘까?' 다시 질문을 던진다. 내가 누구를 위하는가? 노예가 자기가 노예였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는데. 이 감각을 계속해서 공유하려한다. 어떻게 오늘을 구성해야 하고, 당장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 이론이나 책 말고, 오직 내 몸의 감각을 뱉어내고, 맨발로 선 인간으로 사람들과 만나고싶다. 오늘의 해방을 담보하는 인식과 태도가 아니라면, 무엇이 사회변화와 삶을 위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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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k Gyu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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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려했던 일이 발생했네요. 문창극씨의 발언은 개인적인 견해로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충분히 표명되고 토론될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총리는 되지 말아주세요. 그러면 당신의 견해가 우리 정부의 견해로 탈바꿈하여 향후 백 년간 일본 극우의 입증 자료로 이용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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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언론들, 문창극 망언에 '반색'
[한겨레]극우 성향 '산케이', '위안부 문제 사과 필요 없다' 대서특필'아사히'도 문 후보자 '식민지 배상 문제 끝났다' 칼럼 보도일본 언론들은 12일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등 '친일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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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k Gyu Kim | 박유하 선생의 [제국의 위안부> 관련 논란은 관심이 없어 아는 바가 없다.

Taek Gyu Kim | Facebook



Taek Gyu Kim ·

16 April 2021

박유하 선생의 <제국의 위안부> 관련 논란은 꽤 오래됐지만 관심이 없어 아는 바가 없다. 그런데 오늘 우연히 일본의 원전 오염수 방류에 대한 이분의 페이스북 글을 보았다. 무엇보다 서두가 인상적이었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방사능”처리수”(“오염수”의 일본쪽 호칭) 문제에 관한 일본측 설명이 주한 일본대사관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다. 이걸 읽어 봐도 옳은지 어떤지 객관적으로 판단할 능력이 내겐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건강을 해칠 걸 알면서도 강이나 바다에 오수를 흘려보내는 파렴치한 공장주같은 나라는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러려니 한다. 사고난지 벌써 십 년이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연구를 했을까 싶고 그렇다면 나름 최선의 선택을 했을 것이라고 믿으려 하는 것이다."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분이 일본이라는 나라를 대단히 신뢰하고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분이 일본을 신뢰하는 만큼이나 나도 우리 조국을 신뢰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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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st relevant

  • 임지형
    저도 다른페친글에서 보고 한마디했네요 일본을 참으로 신뢰하고있다고!!!
    • Taek Gyu Kim
      임지형 대단하지 않습니까, 저 애국심!!
    • 임지형
      김택규 그니까요! 저정도면 이민가서 저나라 시민권 따야하는거 아닌가싶어요
    • Taek Gyu Kim
      임지형 아닙니다. 진정한 애국자라면 한국에 계속 남아 일본의 입장을 열심히 설명해야죠.
      7
    • 임지형
      김택규 아!!!전 거기까진 생각을 못했네요 일리있네요 진짜~
  • 김창영
    어떤 어린 애는 한국더러 중국에는 너무 관대하고 일본에는 무자비 하다고 하던데 에라이 일본 가서 살아라 하고 싶었지만 이미 일본 유학생. 하앗 이랏샤이마세
  • Sung Mok Choo
    저의 한 줄 평 : 블랙코미디
    • Taek Gyu Kim
      한국보다는 일본이 인권존중의 선진국이라 하지 않습니까....
  • Paz Lee
    일단 믿음의 파란불이 켜지면 뭘해도 꺼지지않는분들이 있죠.
    첨엔 나름 중심에서 품위를 유지하던 분이 점점 우성향에 흡착친일주의자로 변하는 중입니다.
  • Sunyoung Kang
    그사람글에 댓글보니 정신이상한 사람 천지입니다..
  • 沛弛 遂僰
    박씨는 그렇다 치고 편드는 사람들은 뭔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 Taek Gyu Kim
      沛弛 遂僰 편드는 분들 많지요. 학문과 표현의 자유 존중하시는 분들. 근데 위 글은 너무 상식이 떨어져서 아연실색이에요.
  • 김미옥
    그 분은 내가 이순신 장군 초상을 일본인이 훼손했다고 하자 증거를 대라던 분입니다. 증거를 들이대자 그만 끝내자면서 덧붙이더군요. 사람들이 많이 보는 포스팅을 하는 자가 일본에 대해 그러면 안된다고요. 뭐 전에 다른 이와 논쟁하다 밀리니 '내 나이가 몇인데' 경로사상이 없다고 공격합디다. 오늘 오염수 방출 글 보고 이 분이 내 페친이 아니라는 것이 얼마나 안도가 되던지.
    4
  • Jin Hyeon
    논문이란 선입견이 없어야 하는데. 이미 선입견을 두고 논문 시작을 했다는 것이네요.
    3
  • 이용구
    핵종에는 반감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웃기지도 않군요.
  • 황규관
    참...
  • 이지영
    그래서 유학생 받고 잘 대해주는 겁니다. 미국 유학->친미 프랑스 ㅡ>친블파, 독일 ->친독. 독일에서는 말이야~~ 헉. 그다지 큰 예외가 없더라고요.
  • So Young Moon 
    Follow
    그 분은 누구신가요???
  • 조정향
    어이상실입니다
  • Heyryun Koh
    아픈 사람이네요
  • Bae Inseok
    "능력이 내겐 없다"
    그런데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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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하 선생님은 일본이 "사람들의 건강을 해칠 걸 알면서도 강이나 바다에 오수를 흘려보내는 파렴치한 공장주같은 나라"가 아니며 "(원전) 사고난 지 벌써 십 년이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연구를 했을까 싶고 그렇다면 나름 최선의 선택을 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하셨습니다.
틀림없이 일본에는 많은 선량한 시민들의 따뜻한 마음과 웅숭깊은 문화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부는 그렇지 않습니다. 후쿠시마 쓰시마 마을에 살던 사람들의 10년 후 지금을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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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nme Lyu and 49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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