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10

마광수와 로버트 S. 드 로프의 성사상 비교

성 에너지 요약 및 평론 - Google Gemini

세진님, 요청하신 마광수 교수의 성사상과 로버트 S. 드 로프(Robert S. de Ropp)의 사상을 비교한 분석입니다. 앞서 작성한 서평의 기조를 이어받아 본문은 <해라>체로 작성했으며, 별표 대신 < > 기호를 사용했습니다.

마광수와 로버트 S. 드 로프의 성사상 비교

로버트 S. 드 로프와 한국의 마광수는 모두 문명이 성(Sexuality)을 죄악시하고 억압해 온 방식을 강력하게 비판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출발선을 공유한다. 그러나 그 억압된 성 에너지를 어떻게 해방하고 어디로 지향하게 할 것인가에 대한 궁극적인 목적지에서는 결정적인 차이를 보인다.

비교 항목로버트 S. 드 로프 (Robert S. de Ropp)마광수 (Ma Kwang-soo)
성의 본질우주적 원동력이자 영적 진화를 위한 고순도 연료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본능이자 유희적 생명력
핵심 방법론<승화(Sublimation)>와 의식적 통제를 통한 에너지 전환<카타르시스(Catharsis)>와 가식 없는 본능의 표출
억압에 대한 대안에너지를 뇌와 정신의 영역으로 끌어올려 초의식 달성성적 판타지의 자유로운 배설을 통한 정신적 치유
문화적 지향점탄트라, 연금술적 전통에 기반한 신비주의적 영성도덕주의와 엄숙주의를 타파하는 야설(野說)의 미학

1. 공통점: 반(反)도덕주의와 문명 비판

두 사상가는 성을 억압하는 기존의 종교적, 사회적 규범을 인간을 병들게 하는 주범으로 지목한다.

  • 기형적 병리 현상에 대한 경고: 드 로프는 억압된 성 에너지가 심층 심리에서 부패하여 신경증과 사회적 폭력성으로 변질된다고 보았다. 마광수 역시 한국 사회의 과도한 엄숙주의와 위선이 오히려 성범죄, 가학성, 변태적 왜곡을 낳는다고 주장했다.

  • 위선 타파: 두 사람 모두 성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올려 솔직하게 논해야만 인간 정신이 건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주의적 태도를 견지한다.

2. 차이점: <승화>의 신비주의 vs <배설>의 유희주의

가장 극적인 차이는 성 에너지를 다루는 방식에서 발생한다.

  • 드 로프의 '에너지 보존과 승화': 드 로프에게 성은 그 자체로 머물러서는 안 되는, 더 높은 차원으로 변형되어야 할 대상이다. 육체적 배설(오르가즘)로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을 경계하며, 이를 의식적으로 보존하여 창조성과 영적 깨달음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보았다. 즉, 성은 <영적 진화의 도구>이다.

  • 마광수의 '자유로운 배설과 유희': 마광수는 성을 무언가 다른 고상한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승화> 개념 자체를 일종의 기만이자 또 다른 가식으로 보았다. 그는 성적 판타지를 억압 없이 배설하고, 말초적 감각과 피부의 유희를 있는 그대로 즐기는 것이 인간을 구원한다고 믿었다. 마광수에게 성은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궁극적인 목적이자 축제>이다.

3. 미학적 지향: 영적 초의식 vs 감각적 탐미주의

  • 드 로프의 수직적 상승: 동양의 탄트라 요가나 연금술처럼, 육체의 에너지를 척추를 타고 뇌로 올리는 수직적 전이를 지향한다. 종교적 도덕은 비판하지만, 결론은 고차원적 영성이라는 엄숙함을 지닌다.

  • 마광수의 수평적 확장: 정신보다 육체를, 이성보다 감각을 우위에 둔다. 야한 여성을 예찬하고, 성적 페티시즘이나 판타지를 문학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가식적인 지식인 사회의 뒤통수를 치는 탐미주의적이고 도발적인 노선을 취한다.

요약하자면

로버트 S. 드 로프는 성을 <정신적 승화를 통해 신에게 다가가는 계단>으로 보았고, 마광수는 성을 <위선적인 문명의 가면을 벗겨내고 인간 본연의 천진난만함으로 돌아가는 해방구>로 보았다. 드 로프가 금욕주의를 넘어선 <에너지 연금술사>라면, 마광수는 도덕주의를 깨부순 <유희적 감각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마광수 교수의 성론은 당시 한국 사회의 특수한 엄숙주의와 맞물려 큰 파장을 일으켰는데, 이 두 관점 중 세진님께서는 어느 쪽의 접근 방식에 더 공감이 가시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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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의 성사상과 비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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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드 롭의 <Sex Energy>와 마광수의 성사상은 겉으로 보면 둘 다 “성 억압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그러나 속으로 들어가면 상당히 다르다. 드 롭은 성을 <생명 에너지>로 보고, 마광수는 성을 <개인의 자유와 상상력>의 문제로 본다. 드 롭은 생물학·동물행동학·의식론 쪽에서 출발하고, 마광수는 문학·도덕비판·한국 사회 비판 쪽에서 출발한다.

가장 큰 차이는 출발점이다. 드 롭에게 성은 인간 이전의 힘이다. 세포, 동물, 생식, 진화, 호르몬, 본능의 세계에서 성은 생명을 계속 이어가게 하는 기본 동력이다. 인간의 성도 이 거대한 생명사 안에 들어 있다. 그래서 그는 성을 죄나 외설로만 보면 안 되고, 생명의 기본 원리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반면 마광수에게 성은 주로 <억압받는 개인의 욕망>이다. 그는 인간이 동물이라는 점을 자주 강조하지만, 실제 관심은 생물학보다 사회적 위선에 있다. 한국 사회가 성욕을 감추고, 여성을 순결 이데올로기로 묶고, 문학과 예술을 도덕 교과서처럼 심판하는 현실에 분노한다.

둘 다 반도덕주의자처럼 보이지만, 반대하는 대상도 다르다. 드 롭이 반대하는 것은 성을 자연과 인간 이해에서 떼어내는 무지다. 그는 성을 생물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문화적으로 통합해 보려 한다. 마광수가 반대하는 것은 훨씬 더 구체적이다. 유교적 위선, 한국식 체면문화, 순결주의, 검열, 남성중심적 이중도덕, 문학에 대한 도덕주의적 판결이다. 그래서 드 롭의 문체가 설명적·교양과학적이라면, 마광수의 문체는 도발적·공격적·자기고백적이다.

성욕을 보는 방식에서도 차이가 있다. 드 롭은 성욕을 위험하면서도 창조적인 힘으로 본다. 그것은 인간을 낮은 본능에 묶을 수도 있지만, 자기이해와 의식 성장의 재료가 될 수도 있다. 그의 다른 책 <The Master Game>의 맥락에서 보면, 성은 인간이 의식적으로 다루어야 할 에너지다. 무조건 방출할 것도 아니고, 무조건 억압할 것도 아니다. 알아차리고, 이해하고, 전환해야 할 힘이다.

마광수는 이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성욕의 긍정을 주장한다. 그는 성욕을 고상하게 승화해야 한다고 말하기보다, 먼저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그의 핵심은 “인간은 야하다”, “성욕은 인간의 근본이다”, “성적 상상력은 문학의 중요한 원천이다”라는 데 있다. 마광수에게 성욕은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영적으로 승화해야 할 것이 아니라, 솔직히 말하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드 롭보다 더 문학적이고 더 반규범적이다.

여성에 대한 시각에서는 둘의 차이가 더 뚜렷하다. 드 롭은 동물과 인간의 성행동을 비교하면서 성 역할의 다양성을 보여주려 한다. 자연계에는 단일한 남성성·여성성 모델이 없다는 식이다. 이것은 고정된 성역할을 상대화하는 효과가 있다. 반면 마광수는 여성의 성적 자유를 옹호하면서도, 동시에 남성 욕망의 시선에서 여성을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제목 자체가 그렇다. 그는 “여성도 성욕을 가진 주체”라고 말하지만, 표현 방식은 자주 “남성이 욕망하는 야한 여자” 쪽으로 기운다. 그래서 마광수의 성사상에는 해방적 요소와 남성중심적 한계가 함께 있다.

이 점이 중요하다. 마광수는 순결주의를 공격했다. 그것은 분명 한국 사회에서 필요한 작업이었다. 그는 여성을 성적 무지와 억압 속에 가두는 도덕을 비판했다. 그러나 그가 그린 해방된 여성은 완전히 독립적인 여성 주체라기보다, 때로는 남성 작가의 성적 상상력을 충족시키는 존재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마광수는 페미니즘과 부분적으로 만난다. 그러나 끝까지 같이 가지는 않는다. 그는 여성의 욕망을 옹호했지만, 여성의 관점에서 성권력 구조를 분석한 사상가는 아니었다.

드 롭은 성을 더 넓게 보지만, 그만큼 날카로운 사회비판은 약하다. 마광수는 성을 더 좁게, 더 한국적으로, 더 개인적으로 보지만, 그만큼 폭발력이 있다. 드 롭은 “성은 생명의 힘이다”라고 말하고, 마광수는 “성욕을 숨기며 고상한 척하지 말라”고 말한다. 드 롭은 성의 자연사와 의식의 문제를 연결하고, 마광수는 성의 표현 자유와 검열 문제를 연결한다.

두 사람의 공통점도 작지 않다. 첫째, 둘 다 성을 인간 존재의 주변부가 아니라 중심부로 본다. 둘째, 성을 억압하면 인간 이해가 왜곡된다고 본다. 셋째, 성욕을 악으로 규정하는 종교적·도덕적 관념을 의심한다. 넷째, 인간을 지나치게 고상한 존재로 보는 관념에 반대한다. 인간은 몸을 가진 동물이고, 욕망하는 존재이며, 성적 상상력을 가진 존재라는 점에서 둘은 통한다.

하지만 최종 지향은 다르다. 드 롭은 성을 <의식적으로 다루어야 할 에너지>로 본다. 그는 성의 이해를 통해 인간이 더 높은 자기인식으로 갈 수 있다고 본다. 마광수는 성을 <억압에서 풀어내야 할 자유>로 본다. 그는 성을 통해 인간이 더 정직해지고, 더 솔직해지고, 더 위선 없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드 롭의 관심은 <에너지의 이해와 전환>이고, 마광수의 관심은 <욕망의 인정과 표현>이다.

그래서 두 사람을 한 문장으로 비교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드 롭은 성을 생명과 의식의 차원에서 해석한 사람이고, 마광수는 성을 자유와 위선 비판의 차원에서 밀어붙인 사람이다. 드 롭은 성을 자연 속에 놓았고, 마광수는 성을 한국 사회의 법정과 강단과 문단 한복판에 던져 넣었다.

평가하자면, 드 롭은 마광수보다 균형 잡혀 있지만 덜 절박하다. 마광수는 드 롭보다 거칠고 편향되어 있지만 훨씬 더 절박하다. 드 롭에게 성은 연구 대상이자 삶의 에너지였다. 마광수에게 성은 자신을 걸고 싸운 전장이었다. 그래서 마광수의 글은 이론적으로는 허술할 수 있지만, 한국 사회의 성 억압과 문화적 위선을 폭로하는 힘은 훨씬 강하다.

결국 두 사람을 함께 읽으면 보완이 된다. 드 롭은 마광수에게 생물학적·의식론적 넓이를 보태준다. 마광수는 드 롭에게 사회적 현실성과 검열에 맞선 투쟁성을 보태준다. 드 롭만 읽으면 성은 너무 교양적 주제가 될 수 있고, 마광수만 읽으면 성은 너무 한국 사회와 자기상처의 문제로 좁아질 수 있다. 둘을 함께 놓으면 성은 생명의 힘이면서, 동시에 자유의 문제이고, 또 사회적 억압과 위선의 문제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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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宇衍 - 이재명 대통령이 위안부는 매춘부라는 발언을 한 김병헌 소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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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宇衍 260203

 
이재명 대통령이 위안부는 매춘부라는 발언을 한 김병헌 소장을 얼빠졌네, 짐승이네 하며 공개적으로 모욕했습니다. 일국의 대통령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거칠고 사나운 언사였습니다. 경찰은 이 대통령의 사주를 받고 김소장 자택을 압수수색하고 소환조사를 하였렀습니다.
김병헌 소장은 위안부가 강제로 연행된 성노예가 아니라, 포주와 계약을 맺고 군인에게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성노동을 하는 성노동자라는 것이 지적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것이 본질입니다.
조선 여성을 강제연행하여 위안부로 삼았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정의기억연대나 성평등가족부조차 그 증거를 하나도 내놓지 못하였습니다. 그러한 사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성이 위안부가 되려면 영업허가원, 인감증명서, 호적등본 등 7종의 서류를 갖추어야 했습니다. 강제연행을 통해 위안부를 조달하는 것 자체가 제도적, 구조적으로 불가능했다는 뜻입니다. 위안부 강제연행은 명백한 역사날조입니다.
반면에 위안부가 되는 여성이나 그 가족이 위안소 업주, 다시 말해 포주와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해당 여성이나 그 가족은 일을 시작하기 전에 업자로부터 전차금이라고 불리는 선급금을 받았습니다. 적을 때는 수백엔, 많을 때는 수천엔이었습니다. 당시 논 10마지기 이상을 살 수 있는 큰돈을 선급금으로 받기도 했던 것입니다.
위안부가 일을 시작하면 매출액을 포주와 나눠가졌습니다. 위안부는 자신의 몫으로 선급금을 갚아나가고, 또 그 나머지를 현지에서 사용하거나 조선의 가족에게 송금하였습니다. 전 위안부 문옥주가 랑군 시내에서 호화쇼핑을 하고, 조선의 어머니에게 거액을 송금할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 가능했던 일입니다.
위안부에게는 계약기간이 있었습니다.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2년 가량이었습니다. 위안부는 선급금을 모두 갚거나 이 계약기간이 끝나면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임금이 있고, 계약기간이 있는 노예가 도대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시 한번 말합니다.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라 포주와 계약을 맺고 임금을 받으면서 일본군에게 성서비스를 제공하는 성노동자였습니다.
위안부를 매춘부라고 부르면 분노하는 사람들이 한국인 가운데 아직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수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해서 위안부가 성노동자라는 역사적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이 역사적 진실이 결국은 국민 다수의 상식으로 바뀔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해방 후 1990년대 초까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던 위안부 문제가 역사적 문제, 외교적 문제로 새로이 등장한 것은 정의연과 반일종족주의자들 탓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안부 문제를 위안부 사기라고 부릅니다. 국민들의 생각이 이처럼 바뀌었듯이, 지금 국민들의 생각도 결국은 진실을 향해 변화할 것입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위안부 사기에 휩쓸린 국민적 정서를 악용하고 또 부추기면서, 대통령이라는 직위를 남용하여 일개 국민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였습니다. 경찰은 그 대리전에 나섰습니다.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걸맞지 않은 말을 내뱉고 경찰을 사주한 이재명을 규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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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회에 제대로 까발려서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인식을 시켰으면 좋겠네요..
80년대 초반까지 봉고차로 부녀자를 납치해서 인신매매를 하던 나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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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이 이렇게 시간 낭비를 하니 민생 관련 수사는 뒷전으로 밀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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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안부 소녀상을 비판한다》
    상징이 사실을 대체한다
    사실 위안부 소녀상은 역사 자료가 아니라 정치적 상징물이다. 문제는 이 상징이 사실을 보완하지 않고 대체한다는 점이다.
    소녀상은 하나의 단일한 전제를 갖고 있다. “어린 소녀가 일본 국가에 의해 일방적으로 납치되어 성노예가 되었다”는 도식이다. 그러나 실제 위안부 문제는 시기, 지역, 모집 방식, 연령, 관여 주체가 복합적으로 얽힌 사안이다. 군 관여, 민간 업자, 자발·강요의 스펙트럼, 전시 성매매라는 국제적 맥락이 모두 존재한다.
    소녀상은 이 복합성을 단칼에 지워버린다. 단일 이미지가 모든 경우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면, 역사 연구는 설 자리가 없다. 반증 자료는 “2차 가해”로 봉쇄되고, 다른 사례는 “예외”로 밀려난다.
    이같은 방식은 역사학이 아니라 종교적 신앙이다. 역사는 상징으로 정리되거나 기억되지 않는다. 증거와 반증의 충돌로 다뤄지고 기록된다.
    피해를 보호하지 않고 소비한다
    소녀상은 피해자를 보호하지 않는다. 피해를 영구 전시한다. 얼굴 없는 ‘소녀’는 개인의 삶과 선택, 이후의 생을 말하지 못한다. 이름도, 나이도, 지역도, 이후의 삶도 없다. 오직 ‘순결한 피해’만 남는다. 이때 피해자는 인간이 아니라 도덕적 공격 무기가 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여성의 존엄을 과거의 성적 피해에 고정한다는 점이다. 생존자들은 각기 다른 삶을 살았다. 결혼했고, 일했고, 자녀를 두었고, 침묵하거나 말하기도 했다. 소녀상은 이 다양성을 덮기에, 피해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낙인으로 박제된다. 이는 연민이 아니라 윤리적 착취다.
    외교와 법을 파괴하는 상징
    소녀상은 정치적 압박 장치다. 외교 협상과 국제법의 영역에서 다뤄야 할 사안을, 지방자치·시민단체·학교 앞 공간으로 끌어내린다. 합의가 이뤄져도 “상징은 남는다”는 저들만의 논리가 작동한 것이다. 이는 합의의 효력을 부정하는 파렴치한 행위다.
    또한 소녀상은 국가 책임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일본 정부의 책임 문제와, 전시 성매매라는 보편적 전쟁 범죄의 문제, 당시 조선 사회의 중개 구조와 해방 이후의 국가 책임이 한 덩어리로 묶인다. 이렇게 섞인 책임은 아무도 끝까지 지지 않는다. 분노만 유지될 뿐이다. 그 결과 외교는 성과를 내지 못하고, 갈등은 산업처럼 재생산된다.
    질문을 금지하는 교육
    학교 앞 소녀상은 교육적으로 최악이다. 교육은 질문을 허용해야 한다. 그러나 이 사안에서 질문은 금기다. “모집 방식은 어땠는가”, “연령 분포는?”, “다른 전쟁 지역의 사례는?” 같은 기본 질문조차 도덕적 비난으로 차단된다.
    아이들은 역사적 사고를 배우지 못한다. 대신 정답 암기를 배운다. 선악 이분법, 피해자와 가해자의 영구 고정, 집단 감정의 자동 반응이 주입된다. 이는 시민 교육이 아니라 강제 동원 교육이다. 복잡한 세계를 이해할 능력을 빼앗고, 분노에 반응하는 습관만 교육된다.
    소녀상은 문제 해결에 기여하지 않는다
    위안부 문제는 연구, 기록, 보상, 개별 존중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러나 소녀상은 이 경로를 처음부터 생략시켰다. 그 결과 피해자는 존엄을 회복하지 못하고, 외교는 교착되고, 교육은 망가진다.
    소녀상은 정의의 상징이 아니다. 갈등을 유지하는 장치다. 역사, 윤리, 정치, 교육 어느 기준에서도 정밀한 해결책이 아니다. 상징을 내려놓지 않는 한, 문제는 남는다. 분노만 재생산된다. ㅅㅗ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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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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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군위안부는 “매춘부”였나.
    ● 이재명의 “사자(死者)명예훼손”
    이재명 대통령이 우리의 反수요집회 시위를 두고 “사자명예훼손”이라고 했다. 그 핵심은 위안부를 “매춘부”라고 부르는 것일 터이다.
    ● 위안부는 성(性)노동자다.
    위안부와 포주는 계약관계에 있었다. 계약과 함께 포주는 위안부에게 선급금(당시에는 “전차금(前借金)”이라고 했다)을 지불했고, 계약기간이 미리 정해졌다. 선급금은 수백 엔에서 수천 엔으로 논 몇 마지기, 많을 때는 10마지기 이상을 살 수 있는 거액이었고, 이는 보통 여성이 평생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할 거액이었다. 위안부가 일을 시작하면 총매출액을 포주와 분할하여 40% 내외가 위안부의 몫이 되었다. 위안부는 그중에서 절반가량을 선급금을 갚아나가는 데, 나머지 절반가량을 자신의 소비에 충당하였다. 저 유명한 전 위안부 문옥주가 휴일이면 시내에 나가 보석을 사고 쇼핑을 하고 조선의 어머니에게 집을 사줄 수 있었던 것도 이렇게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위안부는 선급금을 모두 갚거나, 계약기간이 종료되면 조선으로 돌아가거나 기간을 연장했다.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라, 성노동자였다.
    ● 위안부를 “매춘부”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
    “매춘부”는 ‘성노동자는 더러운 사람’이라는 일반인의 정서에 오랫동안 뿌리 깊게 침윤되어 온 표현이다. 즉 “매춘부”는 “성노동자”의 감정적, 혐오적 표현이다. 그런 이유로 “위안부는 매춘부”라는 주장으로 시작하면 일반인은 물론이고 연구자들조차 토론이 어려워진다. 그들은 “위안부는 매춘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혐오세력”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으로 만족한다. “매춘부”라는 표현이 이성적인 논의의 블랙홀이 된다.
    ● 성노동자를 매춘부라고 표현하는 사람을 처벌할 수 없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2019년 12월 反수요집회 시위를 시작한 이래 나는 “매춘부”라는 표현을 삼가해왔다. 그러나 현실에는 성노동자를 혐오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그것도 셀 수 없을 만큼이나 많다. 이재명의 “사자명예훼손” 주장이나 그를 넙죽 받아안는 경찰은 그들 일반인들이 자신의 생각을 양심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처벌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한 것이다. 규탄받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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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사련에도 올릴 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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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松山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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