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26

이야기 한국교회사 1, 1592-1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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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g-Deuk O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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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2026 세종도서 교양 종교 부문에 <이야기 한국교회사 1, 1592-1893> 선정. 새물결플러스 출판사 만세! 높은 안목을 가진 심사위원들에게 심심한 감사!--차정식, 방원일, 이치만, 민경식, 김유준, 김은하, 박상언, 김종진.

<이야기 한국교회사 2, 1894-1902>도 곧 출간합니다.
작년에 원고를 넘긴 3권, 4권도 올해 나오길 기대.
출판사에 도움이 되어 다행입니다.
이제 이 시리즈가 교양 서적이 되었습니다.
네 권 시리즈 연구비를 지원해 주신 김지철 목사님께 감사.
(덧) 내가 참여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편, <북한기독교역사사전(1-2)> 도 학술 부문에 선정! 

도서명
강영안의 공부한다는 것
거꾸로 읽는 교회사
거울 속의 물고기
공적 신앙의 윤리
교양으로 읽는 기독교
기독교, 로마를 뒤흔든 낯선 종교
김교신, 백년의 외침
뇌과학자가 본 붓다의 마음
로마서 뒷조사
마커스 보그의 고백 : 기억에서 회심으로, 그리고 확신
모두를 위한 루터
붓다, 불안을 말하다
성경책 파는 조선 상인들
성서와 가난
성서의 인물들, 그 빛과 그림자
신약성경 연구를 위한 그리스 로마 철학사 입문
아버지의 죄
염주의 역사와 수행 이야기
예수님 가이드
이야기 한국 교회사(1): 1592-1893
인류 문명과 기독교의 공헌
인문학의 길에서 성서를 만나다
중세의 눈으로 본 예수
청년, 동학을 짓다
초기 교회, 그들이 살았던 세상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절집 말씀
헬라어의 시간
황금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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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한국교회사 1, 1592-1893


이야기 한국 교회사 1 : 1592-1893 - 사건·예화·담론의 연대기 | 이야기 한국 교회사 1
옥성득 (지은이)새물결플러스2025-























미리보기




책소개
급속한 성장 이후 신뢰의 위기와 정체성의 혼란에 놓인 한국교회가 어디서 어긋났는지를 묻는다. 선언과 구호 대신, 실제로 걸어온 길을 근원부터 되짚는 역사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옥성득 교수는 한국교회의 역사적 사실과 의미를 재조명하며 현재의 좌표를 가늠할 토대를 제시한다.

『이야기 한국교회사』 시리즈는 지난 400여 년 동안 한국과 기독교가 만난 사건과 경험을 1차 사료에 근거해 연대기적으로 엮었다. 제1권은 임진왜란부터 청일전쟁까지의 격변 속에서 한국 기독교의 형성과 변화를 다룬다. 신문 기사, 편지, 일기, 보고서 등 실제 기록을 바탕으로 통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사진과 지도, 색인을 갖춘 자료집으로서 깊이 있는 역사 이해를 돕는다.


목차


서언
약어
1. 임진왜란부터 개항 이전까지 1592-1875년
2. 개항부터 개신교 선교사 입국 이전까지 1876-1883년
3. 선교사 입국부터 청일전쟁 전까지 1884-1893년
색인


책속에서


이 책은 초대 한국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중요한 사건, 예화, 담론이 담긴 1차 사료를 연대순으로 정리한 것이다. 구하기 힘든 사료를 수집하고 정리해서 오늘 다시 읽으면 영감과 감동을 주는 이야기를 선별해서 실었다. 현재 알고리즘에 따라 유행하는 이야기나 시중에 떠도는 근거 없는 이야기나 소문이 아니라, 당대 1차 사료에서 한국의 개신교 그리스도인이 남긴 소중한 이야기, 경험, 간증, 생각, 논설을 선별하여 수록한 연대기다. 첫 교회사가인 누가가 그의 복음서에서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눅 1:3)라고 밝힌 집필 원칙을 따라 이 책을 썼다.
종교개혁의 한 원리가 “오직 성경만으로”이지만, 지난 2,000년간 하나님께서 일하신 이야기는 교회사를 공부해야 알 수 있고, 지난 500년 이상 하나님이 한반도에서 사람들을 통해 하신 놀라운 일은 한국교회사 자료를 읽고 정리해야 알 수 있다. 이 책에는 외국에서 일어난 예화가 아니라 한반도에서 한국인이 경험한 실화를 모았다. 우리는 그 전체 이야기의 일부다. 우리가 어디서 와서, 현재 어디에 있으며,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전체 이야기를 보아야 한다. 한 손에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한국교회사 이야기를 들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자.
_“서언” 중에서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옥성득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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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UCLA) 아시아 언어문화학과 임동순·임미자 한국기독교학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와 국사학과를 졸업한 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이어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 신학교(신학석사)와 보스턴 대학교 신학대학원(신학박사)에서 기독교 역사를 공부했다. 현재는 UCLA에서 한국 근현대사와 한국 기독교사와 종교사를 가르치고 있으며, 해방 이전 한국 개신교 역사 복원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는 『대한성서공회사』(전 3권),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 『한국 기독교 형성사』(제37회 한국기독교출판문화상 대상), 『한국교회 첫 사건들』, 『이야기 한국교회사 1-3』 등이 있고, 편역서로는 『언더우드 자료집』(전 5권), 『대한성서공회사 자료집』(전 3권), 『마포삼열 자료집』(전 4권), 『한국간호역사 자료집』(전7권)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브라운 총무의 한국 여행, 1901년>,<이야기 한국 교회사 1 : 1592-1893>,<한국교회, 어디로 가나?> … 총 23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새물결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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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바울과 로마 황제 가문의 신격화 현상>,<예언서의 잃어버린 세계>,<하나님이 커브볼을 던지실 때>등 총 439종
대표분야 : 기독교(개신교) 12위 (브랜드 지수 513,221점)





함재봉은 윌리엄 샌즈의 [조선비망록]을 어떻게 읽(었)을까요?

ChatGPT - 동아시아의 평화와 화해

함재봉은 윌리엄 샌즈의 [조선비망록]을 어떻게 읽(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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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님, 함재봉 교수의 사상적 틀(문명사적 시각, 국제정치학적 현실주의, <한국 사람 만들기>의 5대 파벌 담론)을 바탕으로, 그가 윌리엄 샌즈의 <조선비망록>과 '중립화 구상'을 어떻게 읽고 평가할지에 대한 평론입니다.

함재봉의 시각에서 읽는 윌리엄 샌즈의 <조선비망록>

함재봉 교수는 저서 <한국 사람 만들기>와 여러 문명사적 연구를 통해 구한말 한반도의 비극을 <세계 문명사적 대전환에 대한 조선 지배층의 무지와 체제적 무능력>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한다. 이러한 함재봉의 분석 틀로 윌리엄 샌즈의 <조선비망록>을 읽는다면 크게 네 가지 핵심 지점으로 정리할 수 있다.

1. 성리학적 중화질서에 갇힌 '친중 위정척사파'의 한계 확인

함재봉은 조선이 멸망으로 치달은 근본 원인 중 하나로 주자 성리학 근본주의에 매몰되어 서구 근대 국제법 질서(베스트팔렌 조약 체제, 만국공법)를 이해하지 못한 지배층의 지적 지체를 꼽는다.

  • 샌즈가 <조선비망록>에서 묘사한 고종과 조정 관료들의 모습—주변 열강의 역학 관계를 파악하지 못하고 미신과 밀실 음모, 감정적 외세 배척에 매달리는 행태—은 함재봉이 규정한 <친중 위정척사적 세계관의 파산>을 내부자 시선에서 증명하는 생생한 사료로 읽힌다.

2. '영세중립화론'에 대한 평가: 현실주의적 처방 vs 구조적 불가능성

함재봉 교수는 국제정치를 냉혹한 힘과 동맹의 역학으로 바라보는 현실주의 정치학자다. 따라서 샌즈의 '조선 중립화론'에 대해 이중적인 시선으로 독해할 것이다.

  • 외교적 통찰에 대한 긍정:

    샌즈가 청일전쟁 이후 조선이 취해야 할 생존 전략으로 '외세 의존(인아거일 등) 탈피'와 '다자간 세력 균형을 통한 중립 보장'을 제시한 것은, 당시 지정학적 환경에서 꺼낼 수 있었던 가장 합리적인 현실주의적 처방이었다고 평가할 것이다.

  • 국력 없는 중립화의 허구성 비판:

    그러나 함재봉의 관점에서 중립화는 스스로를 방어할 '무장력'과 '제도적 근대화'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는 공허한 선언에 불과하다. 샌즈의 구상이 실패한 이유는 열강의 배신 이전에, 조선 스스로 국가를 지킬 근대적 군사·재정 체제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냉정하게 짚을 것이다.

3. '친미 기독교파'의 맹아와 미국의 국익 우선주의 목도

함재봉의 5대 정체성 담론 중 하나는 서구 근대 문명과 자유주의, 국제 연대를 체득한 <친미 기독교파>(서재필, 이승만, 윤치호 등)의 형성이다.

  • 샌즈의 기록은 미국 정부가 도덕적 정의나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가 아니라, 철저히 자국의 팽창과 국익(필리핀 지배 확립 및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따라 움직였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 함재봉은 샌즈의 좌절을 통해, "단순한 맹목적 친미나 외세에 대한 환상은 독립을 가져다주지 않으며, 국제정치의 힘의 구조 속에서 동맹의 가치를 스스로 창출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교훈을 도출할 것이다.

4. '문명 표준(Global Standard)' 수용 실패에 대한 탄식

함재봉 교수는 "한국은 글로벌 스탠다드를 받아들이고 외부를 향해 열려 있을 때 번영했지만, 문을 닫았을 때는 쇠퇴하고 몰락했다"고 일관되게 강조한다.

  • 샌즈가 제안했던 행정, 사법, 조세, 군사 개혁은 조선이 '문명국가의 표준'으로 진입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다.

  • 함재봉은 샌즈의 기록을 <열린 근대 문명으로의 전환을 거부하고 기득권 수구에 안주하다 스스로 자멸해 버린 조선 왕조의 비극적 교훈서>로 읽을 것이다.

종합

함재봉 교수에게 윌리엄 샌즈의 <조선비망록>은, 근대 문명사적 거대한 해일 앞에서 조선의 낡은 성리학적 질서가 왜 무너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증명하는 '체제 파산의 현장 보고서'이자, 힘의 균형과 국제정치의 냉혹함을 잊은 국가는 결코 독립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현실주의적 경고장'으로 읽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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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재봉은 윌리엄 샌즈의 [조선비망록]을 어떻게 읽(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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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이 질문은 꽤 흥미롭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함재봉이 샌즈의 『조선비망록』을 직접 어떻게 평가했는지>는 제가 확인한 공개 자료에서는 찾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함재봉은 이렇게 말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 만들기』, 특히 2권과 5권, 그리고 <한국인의 탄생> 강좌에서 반복되는 함재봉의 역사해석을 적용하면, 그가 샌즈를 어떻게 읽을지는 상당히 구체적으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제 판단을 먼저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함재봉은 샌즈의 ‘중립화’ 자체보다, 샌즈가 중립화의 전제라고 본 국가개혁·행정능력·교육·국제질서 편입에 훨씬 더 주목했을 것이다. 그리고 샌즈의 실패를 ‘중립화라는 좋은 구상이 열강 때문에 좌절됐다’기보다는 ‘근대국가로 변신하지 못한 대한제국이 열강의 세력정치 속에서 자주독립을 유지할 수 없었던 사례’로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샌즈와 함재봉 사이에는 상당한 공통점과 중요한 차이가 동시에 나타납니다.

1. 함재봉은 샌즈의 국제정치 진단에는 상당히 공감했을 것이다

샌즈가 본 대한제국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끼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쪽을 끌어들여 다른 쪽을 막는 정책은 장기적으로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신 조선을 개혁한 뒤 여러 강대국으로부터 독립과 중립을 공동 보장받자는 것이었습니다. 샌즈 연구자인 Wayne Patterson도 샌즈의 목표를 <국내 개혁 + 한국의 국제적 중립화>로 정리합니다.

이 사고방식은 의외로 함재봉의 <조선책략> 평가와 매우 가깝습니다.

함재봉은 조선이 미국 등 여러 나라와 수교하는 것을 단순한 개항으로 보지 않습니다. 러시아 같은 한 강대국이 조선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여러 국가와 관계를 맺으면서 <근대적 세력균형 외교>를 배워가는 과정으로 해석합니다. 그의 설명에서 조미수교는 조선이 중국 중심 질서에서 빠져나와 <주권국가들이 서로 조약을 맺는 국제질서>에 들어가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따라서 샌즈가

<러시아도 일본도 조선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

고 말한다면 함재봉은 상당 부분 동의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훨씬 뒤인 2014년 함재봉은 현대 한국 외교에서도 미·중 가운데 하나만을 선택하는 식의 단순 양자택일보다 여러 국가와 관계를 발전시키는 <hedging, 보험 들기>를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샌즈와 함재봉이 꽤 가깝습니다.


2. 그러나 함재봉은 <중립화>라는 말 자체에는 훨씬 냉정했을 것 같습니다

샌즈를 읽으며 함재봉이 가장 먼저 물었을 질문은 아마 이것일 것입니다.

<누가 그 중립을 보장하는가?>

조선이

<우리는 중립국입니다>

라고 선언한다고 중립국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벨기에나 스위스식 중립화가 성립하려면 주변 강대국들이 그 국가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인정해야 하고, 무엇보다 그 약속을 지킬 이해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1900년 전후의 동아시아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한반도를 자신의 <이익선>으로 보기 시작했고, 러시아도 한반도와 만주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습니다. 함재봉의 최근 강좌에서도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주권선·이익선> 논리를 매우 중요하게 다룹니다. 일본 지도자에게 조선은 단순한 이웃나라가 아니라 일본 본토 방위를 위해 영향력을 행사해야 하는 전략공간이 되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함재봉식 질문은 아주 냉정해집니다.

<일본이 조선을 반드시 필요로 하고 러시아도 조선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무슨 힘으로 양국에게 조선의 중립을 받아들이게 할 것인가?>

샌즈에게 바로 그 힘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미국 정부조차 샌즈를 뒷받침하지 않았습니다. 샌즈의 개인적 한국 독립론과 미국 정부의 실제 동아시아 정책 사이에는 큰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함재봉이라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중립은 의지가 아니라 힘과 제도의 결과다.>


3. 그래서 함재봉이 가장 높이 평가했을 샌즈의 생각은 오히려 <선개혁 후중립>입니다

저는 이것이 두 사람의 가장 중요한 접점이라고 봅니다.

샌즈는

<먼저 중립을 선언하고 그다음 나라를 고치자>

고 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국가를 먼저 제대로 만들어야 국제사회가 그 국가의 중립을 보장할 수 있다>

고 보았습니다.

행정 개혁, 조세제도, 교육, 정부 능력, 질서 확립을 강조했습니다. Patterson 역시 샌즈가 고종에게 개혁을 설득하면서 그 위에 한국의 중립을 세우려 했다고 정리합니다.

여기서 샌즈와 함재봉은 거의 만납니다.

최근 <한국인의 탄생> 강좌를 관통하는 함재봉의 가장 강한 주장은 일본의 성공을 단순히 <서양을 받아들였다>고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관찰 → 번역 → 학습 → 모방 → 제도화 → 국가능력 강화>

를 계속했습니다.

가나가와 조약·해리스 조약에서도 처음에는 굴욕을 당하지만 조약·관세·외교·군사기술을 배우고 국가제도를 바꾸어 갑니다. 함재봉에게 근대국가의 핵심은 바로 이런 <학습하고 제도화하는 능력>입니다.

그렇다면 『조선비망록』을 읽으면서 함재봉이 밑줄을 칠 대목은 아마

<조선은 중립화해야 한다>

보다

<중립화되기 위해서는 먼저 행정과 교육을 개혁해야 한다>

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4. 고종 평가에서는 샌즈보다 함재봉이 훨씬 더 비판적일 것입니다

여기서 두 사람의 거리가 벌어집니다.

샌즈도 고종에게 크게 실망했습니다. 우유부단함, 궁정 측근들의 영향, 개혁의 번복 등을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샌즈에게는 고종에 대한 상당한 연민이 있습니다.

그는 고종을

<무능한 황제>

로만 본 것이 아니라

<일본·러시아와 여러 외국 세력에 둘러싸여 선택지가 극도로 좁아진 약소국의 군주>

로도 보았습니다.

함재봉은 이 부분에서 훨씬 엄격할 가능성이 큽니다.

『한국 사람 만들기 5』의 목차만 보아도 그의 관점은 매우 선명합니다.

제1장의 제목부터 <독립 아닌 독립: 아관파천>이고, 그 안에 <고종의 보호령 요청>이 있습니다. 이어 <조선을 러시아의 보호령으로>, 러시아 군사교관, 러시아 재정고문, 독립협회의 러시아 내정간섭 반대 등을 상세히 추적합니다.

즉 함재봉에게 고종의 문제는 단순히 <강대국 사이에서 어쩔 수 없었다>가 아닙니다.

고종이

<일본을 막기 위해 러시아를 불러들이고 → 러시아가 부담스러워지면 또 다른 외세를 이용하는>

왕조적 세력균형 외교를 반복하면서도 정작 <국민·의회·근대적 행정·시민사회를 갖춘 국가>로 권력을 재편하는 데에는 소극적이었다는 것이 훨씬 중요한 문제입니다.

따라서 샌즈가 고종을 보며

<개혁하려 해도 주변의 간신과 외세 때문에 못한다>

고 안타까워한다면, 함재봉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측근정치 자체가 고종 정치체제의 일부 아니었는가?>

라고 반문할 것 같습니다.


5. 특히 <독립협회> 문제에서 둘의 차이가 선명해질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샌즈의 구상은 상당히 <위로부터의 개혁>입니다.

황제에게 좋은 외국인 고문이 조언하고,

행정을 개혁하고,

재정을 정상화하고,

군대를 개선한 뒤,

열강과 외교협상을 통해 중립국가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개명된 황제 + 유능한 외국 고문 + 개혁관료>

모델입니다.

반면 후기 함재봉이 『한국 사람 만들기 5』에서 강조하는 것은 다른 방향입니다.

<독립신문 → 토론회 → 만민공동회 → 관민공동회 → 헌의 6조 → 중추원 개혁 → 의회정치>

입니다. 책에서 독립협회의 종착점을 거의 <의회민주주의>의 탄생으로 읽습니다.

이 차이는 상당히 큽니다.

샌즈는

<좋은 정부를 만들어야 독립할 수 있다>

고 생각합니다.

함재봉은 거기에

<근대적 국민과 시민사회가 만들어져야 근대국가가 된다>

를 덧붙일 것입니다.

그래서 함재봉이 『조선비망록』을 읽는다면 샌즈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아마 이렇게 비판할 것 같습니다.

<샌즈는 근대국가를 만들려 했지만 근대적 국민을 만드는 문제까지 충분히 보지는 못했다.>

이것은 아주 함재봉적인 비판일 것입니다.


6. 그런데 샌즈를 <친미기독교파>에 집어넣을 수 있을까?

여기에도 재미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함재봉은 한국 근대의 중요한 인간형을

<친중위정척사파 / 친일개화파 / 친미기독교파 / 친소공산주의파 / 인종적 민족주의파>

라는 경쟁적 계보로 봅니다.

샌즈는 분명 미국인이지만 <친미기독교파>의 핵심 인물들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는 언더우드·아펜젤러 같은 개신교 선교사가 아니었고, 오히려 가톨릭적 배경이 강한 미국인이었습니다. 훗날에도 저명한 가톨릭 평신도로 소개될 정도였습니다.

그러므로 함재봉이라면 샌즈를

<친미기독교파를 만든 선교사>

라기보다

<서구 근대 국제질서와 행정국가의 논리를 대한제국 궁정 안에 가지고 들어온 미국인>

으로 읽는 편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구별입니다.

언더우드가 <학교·교회·병원·성경·한글>을 통해 아래로부터 사회를 바꾸었다면,

샌즈는 <외교·행정·재정·국제법>을 통해 위로부터 국가를 바꾸려고 했습니다.

함재봉에게는 아마 전자가 역사적으로 더 성공적인 근대화의 통로였다고 보일 것입니다.


7. 가장 큰 차이: 샌즈는 <중립국가>를 꿈꾸었지만, 후기 함재봉은 <자유주의 국제질서 편입>을 더 중시합니다

여기서 현대 함재봉과 샌즈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생깁니다.

함재봉은 2014년에는 미·중 사이에서 <hedging>을 강조했지만, 2018~2019년에는 훨씬 분명하게 자유민주주의·자유시장경제·자유주의 국제질서를 한국의 선택으로 제시했습니다. 2019년 아산 국제정세전망 서문에서는 한국이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버리면 자유와 번영도 유지하기 어렵다고 매우 명시적으로 주장합니다.

따라서 오늘의 함재봉이 샌즈에게 묻는다면 아마 이 질문이 될 것입니다.

<왜 굳이 중립이어야 하는가?>

샌즈 시대에는 미국이 한국을 지켜줄 생각이 없었고 한미동맹도 없었습니다.

반면 함재봉이 보는 1945년 이후 대한민국의 성공은 미국 중심 자유주의 국제질서와 분리하여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그는

<대한제국의 중립화 실패>

<대한민국의 한미동맹>

을 대비시킬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즉,

<1900년의 조선은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 중립을 원했다.
1948년 이후의 대한민국은 자유주의 국제질서 안으로 확실히 들어갔다.>

그리고 후자가 성공했다고 평가할 가능성이 큽니다.


8. 그렇다면 샌즈가 오히려 함재봉에게 던지는 반론도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함재봉의 관점으로 샌즈만 비판하고 끝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샌즈가 함재봉에게 되물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대한제국의 내부 실패를 너무 크게 보는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샌즈는 현장에서 제국주의가 실제 작동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조선이 개혁한다고 해도

일본은 조선을 전략적 이익선으로 보고 있었고,

러시아도 남하하고 있었으며,

미국은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울 생각이 없었습니다.

즉 <더 좋은 행정, 더 좋은 교육, 더 좋은 국민>만으로 제국주의를 저지할 수 있었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 점에서 샌즈는 함재봉의 설명을 보완합니다.

함재봉의 강점은

<왜 일본은 근대국가가 되었고 조선은 그러지 못했는가>

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샌즈의 강점은

<근대국가가 되려고 몸부림치는 약소국에게 강대국 국제정치가 얼마나 작은 행동공간만 허용했는가>

를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둘을 함께 읽어야 합니다.


9. 결국 두 사람을 한 문장씩 놓아보면

샌즈는 이렇게 말합니다.

<조선을 개혁하고 열강이 중립을 보장하게 해야 독립을 유지할 수 있다.>

함재봉은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중립을 보장받기 전에 조선은 먼저 근대국가와 근대국민을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에 실패했기 때문에 아무도 조선의 독립을 지켜주지 않았다.>

그런데 제가 한 문장을 더 붙이고 싶습니다.

<그 근대국가가 좀 더 일찍 만들어졌다고 해서 일본과 러시아가 반드시 조선을 놓아주었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바로 이 세 번째 문장이 샌즈를 함재봉과 함께 읽을 때 얻어지는 가장 중요한 균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함재봉 × 샌즈>의 관계를 <반대>라기보다 <70%의 공감과 30%의 결정적 차이>라고 봅니다. 둘 다 <약소국의 독립에는 내부 국가역량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매우 가깝습니다. 그러나 샌즈는 최종 해답을 <다자적 중립 보장>에서 찾았고, 후기 함재봉은 훨씬 더 <자유주의 국제질서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제도적 결속>에서 찾는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현대 한반도 중립화론을 생각할 때도 결정적입니다. <샌즈 → 고종의 중립화 → 해방 후 중립화론 → 함재봉의 자유주의 국제질서론>을 한 줄에 놓으면, 결국 질문은 <약소국의 자율성은 비동맹에서 생기는가, 아니면 강력한 동맹과 국제질서에 들어감으로써 생기는가>로 귀결됩니다. 이것이 두 사람의 가장 생산적인 논쟁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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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5

윌리엄 샌즈가 저서 [조선비망록] 에서 제시한 '조선 중립화론' 1898

ChatGPT - 동아시아의 평화와 화해

신복룡에 의하면 
 샌즈가 <조선비망록>에서 "조선은 중립화가 살길이다"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샌즈가 어떤 의미로 그런 말을 했는지에 대해 평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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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님, 윌리엄 샌즈(William F. Sands)가 저서 <조선비망록>(Undiplomatic Memories)에서 제시한 '조선 중립화론'의 배경과 그 역사적 의미에 대한 평론입니다.

샌즈의 <조선 중립화론>에 관한 평론

1. 샌즈가 직면한 19세기 말 한반도의 현실

윌리엄 샌즈는 1898년 주한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부임한 뒤,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대한제국의 최고 외교·행정 고문관으로 활동했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청일전쟁 이후 청나라의 영향력이 소멸하고, 만주와 한반도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일본의 제국주의적 패권 경쟁이 극에 달하던 시점이었다.

당시 대한제국 조정은 내부적으로 극심한 파벌 싸움과 부패에 휩싸여 있었으며, 외세에 대항할 만한 군사력이나 재정적 기반을 전혀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고종과 지배층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하거나 특정 외세의 힘을 빌려 다른 외세를 견제하는 이른바 <인아거일(引俄拒日)>과 같은 불안정한 세력 균형 전술에 의존하고 있었다.

2. '조선의 중립화'가 지닌 구체적 의미와 구상

샌즈가 주장한 "중립화가 살길이다"라는 구상은 단순한 이상주의적 평화론이 아니라, 힘의 공백 상태에 놓인 소국이 제국주의 열강의 완충지대로서 생존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생존 전략이었다.

  • 스위스·벨기에식 영세중립국 모델 추구: 샌즈는 한반도가 특정 패권국(러시아 또는 일본)에 완전히 장악될 경우, 동북아시아 전체의 세력 균형이 무너져 대규모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열강(미국, 영국, 러시아, 일본, 프랑스, 독일 등)이 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집단으로 보장하는 <영세중립화>를 최우선 외교 과제로 설정했다.

  • 외세 의존적 외교의 탈피: 조선이 스스로를 지킬 군사력이 없는 상황에서 특정 열강과 비밀 협약을 맺거나 한쪽에 기대는 것은 결국 침략의 빌미를 주는 자살행위와 다름없다고 보았다.

  • 내정 개혁을 위한 시간 확보: 중립화는 목적 그 자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군사적 위협을 차단한 상태에서 사법·군사·재정 개혁을 추진해 진정한 근대 국가로 자립하기 위한 '보호벽'이자 '시간 벌기' 전략이었다.

3. 샌즈 중립화 구상의 한계와 좌절

샌즈의 중립화론은 당시 대한제국이 취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논리적 대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구조적 한계로 인해 실패로 귀결되었다.

  • 국제정치적 현실(열강의 무관심과 밀약): 영세중립국이 성립하려면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일치와 보장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한반도를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 확정하고 전쟁을 준비 중이었으며, 미국은 필리핀 지배를 확고히 하기 위해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묵인하는 방향(이후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 내부적 역량 및 지지 기반의 부재: 고종을 비롯한 조정 관료들은 중립화의 엄중한 조건(내부 개혁, 엄격한 중립 준수)을 체계적으로 실행할 의지와 능력이 부족했다. 샌즈의 개혁안은 기득권 관료들의 반발과 고종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번번이 좌절되었다.

4. 총평

샌즈의 <조선비망록>에 나타난 중립화론은 제국주의 세력 판도 속에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숙명을 꿰뚫어 본 실용주의적 처방이었다. 그는 조선이 열강의 완충지대로서의 가치를 적극 활용해 외교적 다자 안전보장을 이끌어내고, 그 틈새에서 근대적 자립을 이뤄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비록 열강의 패권주의와 대한제국 지배층의 무능으로 실현되지 못한 비운의 구상으로 끝났으나, 강대국에 둘러싸인 완충 국가의 생존 방정식이라는 관점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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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복룡이 붙인 <조선은 중립화가 살길이다>라는 제목은 샌즈(William Franklin Sands, 1874–1946)의 생각을 상당히 정확하게 압축하지만, 한 가지는 먼저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문장은 샌즈가 <조선비망록(Undiplomatic Memories)>에서 그대로 쓴 문장이라기보다 신복룡의 요약적 제목에 가깝습니다.

샌즈 자신의 표현은 훨씬 구체적입니다. 그는 당시 자신의 목표가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한국을 중립화하는 것>이었다고 회고합니다. 그리고 세계 여러 나라가 한국과 평화관계를 맺고 그 중립화를 받아들이게 하려면 우선 <행정의 개선과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것을 단순히 <조선은 어느 편에도 붙지 말아야 한다>는 말로 읽으면 샌즈의 구상을 절반밖에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의 생각은 훨씬 더 적극적인 <국제적 중립국가 건설 계획>이었습니다.

1. 샌즈가 말한 것은 <중립외교>보다 <중립화>였다

가장 중요한 차이입니다.

<중립(neutrality)>은 한 국가가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 행동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립화(neutralization)>는 강대국들이 조약을 통해 특정 국가의 독립과 영토를 공동으로 보장하고, 그 국가는 그 대가로 군사동맹과 침략전쟁에서 벗어나겠다고 약속하는 국제적 지위를 뜻합니다.

샌즈가 생각했던 것은 후자였습니다.

오늘날 연구자들은 그의 안을 대체로 <벨기에 또는 스위스식 영세중립>으로 해석합니다. 러시아와 일본뿐 아니라 미국·영국·프랑스·독일 등 열강이 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공동으로 보장하는 구상이었습니다.

즉,

러시아 편도 일본 편도 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와 일본 어느 쪽도 한국을 독점할 수 없도록 국제체제를 만들자>

는 구상이었습니다.

이 차이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2. 샌즈가 보기에 조선의 문제는 <약해서>라기보다 <지정학적으로 너무 중요해서>였다

당시 한국은 러시아에게는 남하와 부동항의 통로였고, 일본에게는 대륙 진출의 교두보이자 자국 안보와 직결된 공간이었습니다.

샌즈는 일본과 러시아의 충돌을 상당히 일찍 예상했습니다. 실제로 그가 <조선비망록>에서 중립화를 말할 때에도 명시적으로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충돌이 일어날 경우>라고 합니다.

따라서 그의 판단은 이렇습니다.

<한국이 일본 또는 러시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의 적이 된다.>

그런데 한국에는 어느 한 강대국의 군사적 보호를 받아 다른 강대국을 물리칠 힘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제3의 길은

<한국을 누구의 소유물도 될 수 없는 국제적으로 보장된 완충국가로 만드는 것>

입니다.

이 점에서 샌즈의 중립화론은 이상주의보다 오히려 매우 현실주의적입니다.

그는 <평화가 좋은 것이니까 중립하자>고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

<지정학적 위치상 한국에는 편들기가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3. 그래서 샌즈의 중립화론은 <비무장 평화주의>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이 점도 흥미롭습니다.

오늘날 <중립화>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군대를 줄이고 주변국과 평화롭게 지내는 나라>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샌즈의 사고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그는 벨기에식 중립국이 되기 위해서는 한국 역시 스스로를 방어할 능력이 있어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징병제를 포함한 군사력 강화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구상은 대략 이렇습니다.

<자위력을 갖춘 한국 + 내부적으로 안정된 정부 + 국제조약에 의한 열강의 보장>

입니다.

이것은 <무장하지 않은 중립>이라기보다는

<독립을 지킬 수 있는 국가를 만들어 놓고 그 독립을 국제법적으로 봉인하는 것>

이었습니다.


4. 그런데 샌즈에게는 매우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었다 — <선개혁 후중립화>

여기서 샌즈의 중립화론이 독특해집니다.

그는 열강이 당시의 대한제국을 그대로 중립국으로 보장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보장을 받을 만한 국가가 먼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조선비망록>에서 행정 개선과 교육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후대 연구자 김현숙은 이를 정확히 <선개혁 후중립화>라고 정리합니다.

샌즈가 생각한 개혁은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행정제도를 합리화하고, 재정을 안정시키며, 교육을 확대하고, 부패한 관료체제를 고치고, 경제적 기반을 튼튼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논리는 명확합니다.

<국가가 자기 나라를 제대로 통치하지 못하면 열강은 그 나라의 영세중립을 신뢰하지 않는다.>

따라서 샌즈에게 중립은 외교정책 하나가 아니라 <국가개조 프로젝트의 최종 목표>였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신복룡의 <조선은 중립화가 살길이다>라는 제목보다

<조선을 개혁하여 열강이 침범할 필요도, 명분도 없는 중립국으로 만들어야 한다>

가 샌즈의 생각을 더 정확히 표현합니다.


5. 그러나 바로 여기에 샌즈 중립화론의 심각한 모순이 있습니다

샌즈는 한국의 주권을 보존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주권을 보존하기 위한 개혁을 <외국인들이 상당 부분 감독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그의 안에서는 중립을 보장하는 열강들이 한국의 개혁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행정·경제·재정 영역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심지어 터키나 이집트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비슷한 국제적 재정기구도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역설이 생깁니다.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서구 열강의 공동관리 아래 들어간다.>

김현숙의 비판이 바로 이것입니다. 일본 한 나라의 식민지가 되지는 않더라도, 경제와 행정을 서구 열강에 크게 의존한다면 결과적으로 20세기 초 중국과 비슷한 <반식민지적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샌즈를 완전히 <한국 독립의 선의의 옹호자>로만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그에게는 당시 서양 엘리트들에게 흔했던 <문명화 사명>이라는 사고가 강하게 있었습니다.

즉,

<한국인은 아직 제대로 근대국가를 운영할 능력이 부족하므로 서양인이 지도해서 개혁해야 한다>

는 오리엔탈리즘적·가부장주의적 측면이 있었습니다.

중립화를 주장하면서도 완전한 자주성을 믿은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6. 그래도 샌즈의 안과 일본의 보호국화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 점에서는 균형 있게 평가해야 합니다.

샌즈의 안에 제국주의적 요소가 있었다고 해서 일본의 보호국화·병합과 동일하게 볼 수는 없습니다.

샌즈가 궁극적으로 보존하려 했던 것은

<한국이라는 독립된 국제법적 주체>

였습니다.

일본은 점점

<한국의 독립을 제거하여 일본의 전략권 안으로 편입>

하는 방향으로 갔습니다.

샌즈는 반대로

<어느 한 강대국도 한국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만들자>

고 했습니다.

따라서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일본안 = 한국 주권의 소멸>
<샌즈안 = 제한되고 외세에 영향을 받더라도 한국 주권의 존속>

입니다.

그것은 작은 차이가 아닙니다.


7. 그러면 왜 실현되지 못했을까요?

여기서 샌즈의 중립화론은 가장 큰 현실적 장애물에 부딪칩니다.

영세중립은 작은 나라가 혼자 선언한다고 성립하지 않습니다.

<주변 강대국들이 그 나라를 먹지 않겠다고 합의해야> 합니다.

벨기에의 경우 유럽의 강대국들이 벨기에를 서로 차지하지 않는 것이 모두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국제적 보장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정반대였습니다.

일본은 한국을 자신의 생존과 안보에 필수적인 지역이라고 보았고, 러시아 역시 한반도에 전략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특히 1902년 영일동맹이 성립하면서 일본의 한국에 대한 특수한 이해관계를 영국이 사실상 인정하는 국제환경이 만들어졌습니다. Patterson 연구에 대한 최근 서평도 샌즈가 바로 이 무렵 “한국이 절대적으로 중립국이 되지 않는다면 독립을 잃을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설명합니다.

더 치명적인 문제는 <미국>이었습니다.

샌즈 개인은 미국이 한국 중립화의 중요한 자산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한국 독립을 위해 러시아나 일본과 충돌할 의사가 없었습니다.

샌즈 자신도 고종에게 미국 정부가 한국의 문제 때문에 국제적 분쟁에 말려들 가능성은 없다는 취지의 냉정한 말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중립화론에는 치명적인 구조적 약점이 있었습니다.

<중립화를 보장해야 할 나라들은 한국을 위해 싸울 생각이 없었고, 한국을 노리던 나라들은 중립화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8. 그래서 저는 샌즈의 생각을 <옳은 진단, 취약한 처방>이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샌즈의 가장 뛰어난 통찰은 이것입니다.

<한국 문제의 본질은 한국 내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북아 세력균형 문제다.>

실제로 1904년 러일전쟁은 바로 한국과 만주를 둘러싼 경쟁에서 폭발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승리하자 한국은 1905년 보호국, 1910년 식민지가 됩니다.

그러므로 샌즈가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한반도를 양국 경쟁으로부터 분리해야 한다>

고 판단한 것은 놀라울 만큼 정확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처방에는 두 가지 약점이 있습니다.

첫째, 열강이 국제법과 조약을 존중할 것이라는 기대가 지나치게 컸습니다.

둘째, 한국 내부의 자율적 개혁 역량보다 서구 고문과 외국의 감독을 지나치게 신뢰했습니다.

결국 그의 중립화론은 <한국의 자주적 중립>과 <열강에 의한 한국의 공동관리> 사이에서 애매하게 걸쳐 있었습니다.


9. 고종의 입장에서 보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중립화가 샌즈 개인의 기발한 발명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대한제국 내부에서도 이미 벨기에·스위스와 같은 중립국 모델에 대한 관심이 있었고, 고종 역시 여러 통로를 통해 중립화를 추진했습니다. 1899년 전병훈의 건의가 있었고, 1902년에는 고종이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에게 중립화 문제와 관련해 접근하기도 했습니다. 벨기에와의 외교관계 강화도 이런 맥락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따라서 더 정확한 역사상은

<샌즈가 한국인에게 중립화라는 아이디어를 가르쳐 주었다>

가 아니라

<고종과 일부 대한제국 관료들이 이미 모색하고 있던 중립화 노선에 샌즈가 국제정치적·제도적 구체성을 부여했다>

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10. 결국 <조선은 중립화가 살길이다>의 정확한 의미

저라면 신복룡의 제목을 다음과 같이 풀어쓰겠습니다.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끼어 있는 한국이 어느 한쪽의 보호를 구하는 순간 다른 한쪽의 공격대상이 된다. 따라서 한국의 독립을 보존하려면 내부적으로 국가를 개혁하고 자위능력을 갖춘 뒤, 일본·러시아를 포함한 열강으로부터 벨기에식 영세중립을 국제조약으로 보장받아야 한다.>

이것이 샌즈의 <중립화>에 가장 가깝습니다.

그래서 저는 샌즈를 <평화주의자>라기보다는 <약소국의 생존을 세력균형과 국제법으로 해결하려 했던 현실주의적 중립화론자>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상당히 역설적으로, 샌즈의 안에서 가장 현대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은 <중립 그 자체>보다 이 인식입니다.

<한반도의 독립은 한반도 내부의 힘만으로 결정되지 않으며, 주변 강대국들이 한반도를 자기들 경쟁의 전장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국제적 장치가 필요하다.>

이 생각은 1900년의 대한제국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1945년 이후 한반도의 분단, 한국전쟁, 그리고 그 뒤 여러 차례 제기된 <한반도 중립화론>에서도 거의 같은 문제가 되풀이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복룡이 19명의 서양인 가운데 샌즈에게 특별히 <중립화>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선택이라고 봅니다.

다만 다음 단계에서는 <샌즈의 1900년 중립화안 → 고종의 대한제국 중립화 외교 → 해방 후 한반도 중립화론>을 연결해 보면 훨씬 더 흥미로워집니다. 특히 <김낙중·선우학원·박한식의 중립화론과 샌즈의 구상이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를 비교하면, <열강이 보장하는 중립>에서 <민족이 선택하는 중립>으로 개념이 어떻게 변했는지가 아주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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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F. 샌즈(William Franklin Sands),  『조선비망록(Undiplomatic Memories)』 ---- 1,000 단어 요약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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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님, 윌리엄 F. 샌즈의 저서 <조선비망록>에 대한 상세 요약 및 평론입니다.

윌리엄 F. 샌즈의 <조선비망록> 요약 및 평론

1. 저자 및 시대적 배경

윌리엄 프랭클린 샌즈(William Franklin Sands, 1874~1946)는 1898년 약관의 나이에 주한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부임했다. 1899년 주한 미국공사 호러스 알렌과의 불화와 사임 이후, 그는 고종 황제의 직접적인 요청을 받아 1900년부터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직후까지 대한제국 궁내부의 최고 내부 고문관(Advisor to the Imperial Household)으로 일했다.

그가 재임하던 시기는 청일전쟁 이후 청나라의 영향력이 거세되고, 만주와 한반도를 둘러싸고 제정 러시아와 일본 제국이 치열하게 충돌하던 격동기였다. <조선비망록>(원제: Undiplomatic Memories: The Far East, 1896-1904, 1930년 출간)은 외교관이라는 공식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고, 대한제국 권력의 중심부에서 고종과 조정 관료들을 직접 상대하며 겪었던 생생한 내부 기록이다.

2. 주요 내용 요약

가. 샌즈가 목격한 대한제국의 모순과 지배층의 무능

샌즈는 조선 사회가 지닌 깊은 역사와 잠재력을 인정하면서도, 지배층의 부패와 비효율성에 대해 냉혹한 비판을 가했다. 조정은 외세의 침략 위협 앞에서도 파벌 싸움과 매관매직, 점술과 미신에 의존하는 후진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종 황제에 대해서는 성품이 온화하고 독립을 열망하는 군주로 묘사했으나, 결단력과 통치력이 결여되어 주변 간신과 외세의 간계에 끊임없이 휘둘리는 비극적 인물로 기록했다.

나. '영세중립화' 구상과 외교적 독립 노선

샌즈가 제시한 구국의 핵심 전략은 바로 <스위스·벨기에식 영세중립국화>였다. 그는 대한제국이 자체적인 군사력으로 러시아나 일본을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특정 외세(러시아나 미국)에 일방적으로 의존하여 다른 외세를 견제하려는 시도는 결국 자멸을 부를 뿐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열강(미국, 영국, 러시아, 일본, 프랑스, 독일) 모두가 참여하는 다자간 조약을 체결하여 한반도의 중립과 영토 보전을 집단으로 보장받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로라고 주장했다.

다. 내부 개혁 추진과 좌절

중립화는 단순한 외교적 선언에 머무르지 않고, 국가의 내실을 다지기 위한 '시간 벌기'였다. 샌즈는 중립 보장을 방패 삼아 신식 군대 양성, 사법 제도 개혁, 도로 및 통신망 확충, 조세 개혁 등 근대 국가로 도약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정 개혁을 시도했다. 또한 지방에서 일어난 민란 현장(1901년 제주 이재수의 난 등)에 직접 파견되어 사태를 평정하고 중재하는 등 과감한 현장 행정을 펼쳤다. 그러나 그의 개혁안은 수구파 관료들의 기득권 저항, 일본과 러시아의 집요한 방해 공작, 그리고 조국의 팽창주의적 국익만을 좇던 주한 미국공사 알렌과의 갈등 속에서 체계적으로 뒷받침되지 못했다.

라. 러일전쟁과 몰락의 현장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은 일방적으로 대한제국의 중립 선언을 무시하고 한양을 점령했다. 샌즈의 다자 중립화 구상은 결국 강대국들의 제국주의적 결탁(가쓰라-태프트 밀약 등)과 대한제국의 국력 부재로 인해 완전히 파탄 났다. 일본의 강요로 고문직에서 해임된 샌즈는 조선을 떠나게 되었고, 대한제국은 보호국화와 강제 병합의 길로 굴러떨어졌다.

3. 심층 평론

가. 제국주의 시대의 냉철한 '현실주의적' 통찰

<조선비망록>이 지닌 가장 큰 학술적·사상적 가치는 당대 소국의 생존 조건을 꿰뚫어 본 지정학적 통찰에 있다. 샌즈는 19세기 말 국제정치판이 '약육강식의 힘의 논리'로 움직인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조선이 열강 사이에서 생존하려면, 한반도가 특정 국가의 손에 넘어가지 않는 것이 동북아의 세력 균형에 필수적이라는 점을 열강들에게 역으로 설득하는 <전략적 완충지대 논리>를 펴야 했다. 샌즈의 중립화론은 감정적 반일이나 맹목적 친러·친미를 넘어선, 당시 취할 수 있었던 가장 합리적인 현실주의 외교 전략이었다.

나. 서구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선 인간적 관찰

많은 서구 개항기 견문록들이 조선을 '미개하고 정체된 야만의 땅'으로 타자화한 반면, 샌즈의 시선은 상대적으로 따뜻하고 입체적이었다. 그는 백성들의 근면성과 인내력, 뛰어난 신체 조건과 잠재력을 높이 평가했다. 망국의 원인을 민족성 전체의 열등함이 아니라, 지도층의 극심한 부패와 제국주의 열강의 무자비한 침탈이라는 구조적 모순에서 찾았다.

다. 한계와 구조적 결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샌즈의 구상은 피할 수 없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첫째, '외교적 중립 보장'은 주변 강대국들의 암묵적 동의가 필요한데, 당시 대륙 진출을 사활적 목표로 삼은 일본과 팽창을 노리던 러시아 모두 조선을 분할하거나 독점할 대상(zero-sum)으로 보았지 완충지대로 남겨둘 의사가 없었다. 둘째, 중립을 담보할 최소한의 자위적 군사력과 응집된 내부 결속력이 대한제국에는 전무했다. 중립국 스위스는 강력한 민병대와 방어적 군사력을 바탕으로 중립을 지켰으나, 대한제국은 껍데기뿐인 군대와 분열된 조정만이 존재했다.

4. 결론

윌리엄 F. 샌즈의 <조선비망록>은 무력하게 스러져간 한 왕국의 마지막 순간을 내부자의 시선으로 증언한 비극의 기록이다. 샌즈가 외친 "조선은 중립화가 살길이다"라는 메시지는 단순한 과거의 외교적 주장을 넘어선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거대한 패권 경쟁의 틈바구니에 놓여 있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숙명 속에서, 자주적 역량과 다자적 외교 균형 감각이 왜 국가 생존의 필수 조건인가를 준엄하게 일깨워주는 고전적 텍스트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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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F. 샌즈, 『조선비망록(Undiplomatic Memories: The Far East 1896–1904)』 — 1,000단어 요약·평론

윌리엄 프랭클린 샌즈(William Franklin Sands, 1874–1946)의 『조선비망록』은 흔히 말하는 <외국인의 조선 견문기>와는 성격이 상당히 다르다. 샌즈는 잠시 한국을 여행한 관찰자가 아니라 1898년 주한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부임하고, 이후 고종의 궁내부 고문으로 들어가 대한제국 정치의 내부를 직접 경험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이 책은 풍속기이면서 외교 회고록이고, 동시에 <대한제국이 왜 열강의 각축 속에서 살아남지 못했는가>를 내부에서 지켜본 기록이다. 책은 1930년에 출판되었으며 일본, 한국, 서울 외교단, 고종, 영사재판, 선교사, 궁정생활, 반란, 이권외교, 외교정책, 러일전쟁으로 이어지는 15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대한제국 멸망을 단순히 <한국의 무능>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샌즈는 고종과 조선 관료들의 무능·부패·우유부단을 매우 혹독하게 비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한국을 둘러싼 일본·러시아·영국을 비롯한 열강의 행동을 직접 관찰하면서 <약소국이 스스로 개혁할 공간 자체를 강대국들이 파괴하고 있었다>고 보았다. 이 두 시각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 『조선비망록』의 가장 큰 가치이자 동시에 모순이다.

1. 젊은 외교관이 발견한 <외교의 민낯>

책의 원제 <Undiplomatic Memories>는 흥미롭다. 문자 그대로 하면 <외교적이지 않은 회고>다. 샌즈가 보고 싶었던 것은 공식 외교문서 뒤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권력정치였다.

그는 이미 서문에서 미국 외교제도의 문제를 비판한다. 당시 미국 외교관 임명은 전문성과 체계적인 교육보다는 정치적 연줄과 사회적 배경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다. 샌즈 자신도 유력한 해군 장교였던 아버지와 정치권 인맥의 도움을 받아 젊은 나이에 외교관이 되었다. 훗날의 연구는 『조선비망록』이 이런 자신의 특권이나 젊은 시절의 실수들을 상당히 완화하여 묘사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한국에 온 뒤 샌즈가 배운 것은 외교가 결코 점잖은 국가 간 교섭만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대한제국에서 외교는 철도, 광산, 항만, 차관, 세관, 고문직을 서로 차지하려는 <이권 쟁탈전>이었다.

따라서 이 책에서 외교관은 단순한 외교관이 아니다.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고, 자국 선교사를 보호하며, 왕에게 압력을 넣고, 특정 관리의 임면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였다.

샌즈가 본 서울은 제국주의 세계정치의 축소판이었다.


2. 조선에 대한 두 개의 시선

샌즈의 한국관에는 명백한 이중성이 있다.

처음 서울에 왔을 때 그는 불결함, 빈곤, 행정의 무질서를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이는 19세기 말 서구 여행자들에게 흔히 발견되는 <문명/야만>의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서울과 한국인을 서구 근대국가의 기준으로 평가하고, 조선이 뒤떨어져 있다고 판단한다. 실제로 초기 편지에서 그의 서울 묘사는 『조선비망록』보다 훨씬 거칠었다는 연구도 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시선이 바뀐다.

그는 한국인의 개인적 친절, 신뢰, 손님에 대한 환대를 높이 평가한다. 책에 아예 <Native Trust and Hospitality>라는 장을 따로 둘 정도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구별이 나타난다.

<한국인은 문제가 있지만 한국 사회 전체가 무능한 것은 아니다.>

샌즈가 점차 비판하게 되는 것은 <민족적 성격>보다 정치제도와 지배층, 그리고 그 제도를 이용하는 외세였다.

따라서 비숍(Isabella Bird Bishop)이 러시아 연해주에 이주한 한국인들이 훨씬 근면하고 성공적으로 생활하는 모습을 보고 <문제는 한국인이 아니라 조선의 정치제도>라고 판단했던 것과 상당히 통한다.

샌즈에게도 한국인의 잠재력과 대한제국 정치체제의 무능은 서로 다른 문제였다.


3. 고종 — 무능한 군주인가, 포위된 약소국 군주인가

『조선비망록』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고종이다.

샌즈는 고종을 무조건 옹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당히 답답해한다. 고종의 우유부단함, 밤에 정무를 보는 생활 방식, 재정 낭비, 측근 정치, 개혁 결정의 번복 등을 반복해서 비판한다. 실제 개인 서한에는 고종을 매우 무능하고 나약하게 평가하는 표현도 나타난다.

그러면서도 샌즈는 고종에게 깊은 동정심을 갖게 된다.

그가 보기에 고종은 단순한 전제군주가 아니다.

러시아 공사가 압력을 가하고, 일본 공사가 협박하며, 영국인 세관 고문이 국가 재정을 장악하고, 각국 외교관과 사업가가 이권을 요구하는 가운데 왕위를 유지해야 하는 <포위된 약소국 군주>였다.

샌즈는 약소국의 황제에게 러시아와 일본 공사가 행사하는 권력이 거의 전제군주와 비슷했다고 기록했다.

이 때문에 『조선비망록』을 읽으면 고종에 대한 평가가 단순해지지 않는다.

고종에게 분명히 책임이 있다. 그러나 <고종이 유능했더라면 대한제국은 살아남았을 것이다>라는 식의 설명 역시 성립하기 어렵다는 것이 샌즈가 목격한 현실이다.


4. 대한제국을 둘러싼 <이권 제국주의>

이 책의 역사적 가치가 가장 높은 부분 중 하나는 <Concession Diplomacy>, 즉 이권외교를 다룬 부분이다.

대한제국에서 제국주의는 처음부터 군대를 보내 나라를 점령하는 방식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철도 부설권을 얻는다.
광산 채굴권을 얻는다.
세관을 장악한다.
차관을 제공한다.
자국인을 정부 고문으로 집어넣는다.

이렇게 경제와 행정의 핵심 부분을 조금씩 장악한다.

샌즈 본인도 미국인의 철도·금광·수도사업 이권에 관여했기 때문에 완전히 외부의 비판자는 아니다. 바로 이것이 이 책을 더 흥미롭게 만든다. 그는 <제국주의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제국주의 체제 안에서 활동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기록은 제국주의의 실제 작동방식을 매우 잘 보여준다.

국가가 하루아침에 식민지가 되는 것이 아니다.

<주권이 조금씩 외국인의 손으로 이전되는 과정>이 먼저 일어난다.


5. 일본에 대한 샌즈의 변화

샌즈가 처음 동아시아에 온 곳은 일본이었다. 당시 많은 미국인처럼 일본의 근대화에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직접 일본의 행동을 경험하면서 그의 태도는 크게 변한다.

샌즈의 개인문서에는 일본이 한국의 개혁을 일부러 방해하고 무정부적 상황을 조성하여, 결국 일본이 한국을 관리해야 한다는 명분을 만들려 한다는 매우 강한 비판이 나타난다.

이 관찰은 중요하다.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를 흔히

<조선이 개혁하지 못했다 → 일본이 근대화를 가져왔다>

는 순서로 설명해왔다.

샌즈가 목격한 것은 오히려

<한국이 개혁하려 했다 →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이해관계가 개혁을 방해했다 → 정치적 혼란이 다시 외세 개입의 명분이 되었다>

라는 악순환이었다.

물론 이것이 대한제국 내부 개혁 실패의 책임을 없애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부 실패>와 <외부 방해>를 함께 보아야 한다는 점에서 샌즈의 기록은 매우 중요하다.


6. 이 책의 핵심 — <중립화>

앞서 살펴본 샌즈의 중립화론은 책 전체의 논리를 집약한다.

샌즈는 러시아와 일본이 충돌하면 한국이 전장이 되고 결국 독립을 잃을 위험이 크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의 목표는 러일 충돌이 발생하더라도 <한국을 중립화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실현하려면 무엇보다 행정 개선과 교육이 필요하다고 썼다.

여기서 샌즈가 말하는 중립은 소극적인 <어느 편에도 들지 않기>가 아니다.

대한제국을 개혁하고 자립할 수 있는 국가로 만든 뒤, 열강이 한국의 독립과 영토를 공동으로 보장하도록 만드는 국제적 중립화다.

따라서 그의 구상은

<국내 개혁 → 국가능력 강화 → 국제적 중립 보장>

이라는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그는 한반도의 지정학을 정확히 보았다.

한국이 일본 쪽으로 기울면 러시아가 위협을 느끼고, 러시아 쪽으로 기울면 일본이 위협을 느낀다. 따라서 한쪽 강대국을 불러 다른 강대국을 막는 정책은 결국 한국을 그 강대국의 종속국으로 만들 위험이 있다.

샌즈의 해답은 <강대국 경쟁 자체로부터 한반도를 분리하는 것>이었다.


7. 그러나 샌즈 역시 제국주의 시대의 사람이었다

이 책을 너무 친한적(親韓的) 회고록으로만 읽으면 안 된다.

샌즈는 한국인을 좋아했고 일본의 침략을 비판했지만, 동시에 서구인이 한국 정부를 지도하고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에는 전형적인 <문명화 사명>의 사고가 있다.

즉 한국의 독립은 보존되어야 하지만, 한국인은 아직 스스로 근대국가를 제대로 운영하기 어려우므로 유능한 외국인 고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명백한 가부장주의다.

또 하나 주의해야 할 점은 이 책이 사건 당시 작성한 일기가 아니라 <25~30년 후에 쓴 회고록>이라는 사실이다.

1930년의 샌즈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었다.

러일전쟁이 일어났고, 일본이 승리했고, 한국이 식민지가 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까지 지나갔다.

따라서 1898~1904년의 경험은 이미 <한국이 결국 일본에 병합되었다>는 결과를 아는 사람의 기억을 통해 재구성되어 있다.

최근 연구자 Robert Neff도 Wayne Patterson의 샌즈 연구를 소개하면서, 『조선비망록』에는 샌즈 자신의 특권, 실수, 고종과의 갈등 등이 상당 부분 정리되거나 생략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이 책은 귀중한 사료이지만 <샌즈 자신의 자기변호>라는 측면도 함께 읽어야 한다.


8. 가장 중요한 역사적 통찰 — <대한제국은 왜 망했는가>

『조선비망록』을 읽으며 가장 경계해야 할 두 가지 단순화가 있다.

첫째는

<조선이 부패하고 무능했기 때문에 망했다>

는 설명이다.

둘째는 반대로

<일본 제국주의 때문에 모든 것이 망했다>

는 설명이다.

샌즈의 기록은 두 설명을 동시에 복잡하게 만든다.

그가 본 대한제국에는 분명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관료제는 부패했고, 재정은 허약했고, 중앙정부의 행정능력도 부족했다.

그러나 바로 그 허약한 국가를 둘러싸고 일본·러시아·영국·미국·프랑스 등이 철도·광산·세관·차관·고문직을 차지하려 경쟁했다.

따라서 대한제국은

<개혁이 필요했기 때문에 외세가 개입했고, 외세가 개입했기 때문에 자주적인 개혁이 더욱 어려워지는>

구조에 갇혔다.

이것이 『조선비망록』에서 읽어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통찰이라고 본다.


9. 헐버트·비숍·매켄지와 다른 샌즈

신복룡이 여러 서양인의 조선관 가운데 샌즈에게 특별히 <중립화>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비숍은 <한국 사회의 잠재력>을 발견했다.

헐버트는 한국문화와 한국인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변호했다.

매켄지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한국 독립이 어떻게 파괴되는가>를 기록했다.

샌즈는 조금 다르다.

그의 관심은

<약소국 한국을 국제정치 구조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게 할 것인가>

에 있었다.

그래서 샌즈는 이들 가운데 가장 <지정학적인 관찰자>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한국의 문제는 문화적 후진성만도, 일본의 악의만도 아니었다.

<러시아와 일본이라는 두 제국 사이에 위치한 작은 국가가 어떻게 주권을 유지할 것인가>라는 국제정치 문제였다.


10. 종합 평가

『조선비망록』은 <한국을 사랑했던 미국인의 아름다운 회상>도 아니고 <서양인이 후진 조선을 비판한 견문록>도 아니다.

그보다는

<한 젊은 미국 외교관이 제국주의 국제질서의 가장 위험한 접경지에서 약소국의 소멸 과정을 목격하고, 수십 년 뒤 자신의 경험을 다시 해석한 책>

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샌즈는 대한제국의 결함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보았다. 그러나 동시에 그 결함을 이용하고 때로는 확대했던 열강들의 행동도 보았다. 그리고 일본이 결국 한국을 차지할 것이라는 위험을 비교적 일찍 감지했다.

그가 내놓은 대안이 <중립화>였다.

나는 이 점에서 『조선비망록』의 가장 중요한 문장을 <조선은 중립화가 살길이다>라기보다 다음처럼 다시 표현하고 싶다.

<약소국의 생존은 한 강대국을 선택하는 데 있지 않고, 강대국들이 그 약소국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국제질서를 구축하는 데 있다.>

문제는 샌즈가 그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실현할 힘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도 그럴 의지가 없었다.

바로 여기에서 『조선비망록』은 과거의 대한제국을 넘어 현대 한반도 문제와 연결된다. 1900년대의 질문은 놀라울 정도로 익숙하다.

<중국·러시아·일본·미국이라는 강대국 사이에서 한반도는 어느 한 편을 선택함으로써 안전해지는가, 아니면 강대국 경쟁 자체를 완화하는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가?>

샌즈의 중립화안이 그대로 오늘날의 해답이 될 수는 없다. 그 안에는 서구 열강의 공동관리라는 제국주의적 요소도 있었고, 국제보장의 실현 가능성도 낮았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문제의 구조>는 120년이 지난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 점에서 『조선비망록』은 단순한 구한말 견문기가 아니라 <한반도 약소국 외교의 실패와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책>으로 읽을 가치가 있다.

그리고 신복룡의 『이방인이 본 조선 다시 읽기』에서 샌즈를 읽은 뒤 원전으로 돌아가면 더욱 분명해지는 것은, <망국의 원인을 조선 내부에서만 찾는 설명이 얼마나 부족한가> 하는 점이다. 대한제국에는 분명 내부적 실패가 있었다. 그러나 샌즈가 직접 보았던 것은 <개혁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나라가, 바로 그 개혁을 수행할 정치적 공간을 제국주의 경쟁 때문에 잃어가던 과정>이었다. 이것이 이 책이 지금까지도 읽힐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조선비망록 | 한말 외국인 기록 18 | W.F.샌즈 | 알라딘

조선비망록 | 한말 외국인 기록 18 | W.F.샌즈 | 알라딘


조선비망록 | 한말 외국인 기록 18
W.F.샌즈 (지은이),신복룡 (옮긴이)집문당1999-09-10




May 14, 2024 · 
윌리엄 F. 샌즈(William Franklin Sands),
 『조선비망록(Undiplomatic Memories)』 
신복룡 역주, 『조선비망록』, 집문당, 2019년 개정판, 49~54쪽

https://archive.org/details/undiplomaticmemo0000sand

책소개
미국 외교관인 저자가 냉정함과 사실성, 남다른 지식으로 한국 근대사의 현장을 묘사한 책. 일본과 조선의 관계, 서울의 외교사절, 영사재판, 황제의 고문관, 조선인의 신뢰성, 이재수의 난 등을 예리하게 관찰했다.

CONTENTS
PROLOGUE: Upon Diplomacy
CHAPTER I: Japan
CHAPTER II: Korea
CHAPTER MI: The Diplomatic Corps and the Foreig Colonies at Seoul
CHAPTER IV: The Emperor
CHAPTER V: Consular Courts, Foreign Jurisdiction and Higher Politics
CHAPTER VI: Missionaries
CHAPTER VII: Life in the Legations
CHAPTER VIII: The Adviser to the Emperor
CHAPTER IX: Life at Court and Native Sports
CHAPTER X: Torture, Bandits and Rebellion
CHAPTER XI: The Amazons
CHAPTER XII: Native Trust and Hospitality
CHAPTER XIII: Concession Diplomacy
CHAPTER XIV: Foreign Policy
CHAPTER XV: The End
=============
목차


1. 서론:외교란 무엇인가?
2. 일본
3. 조선
4. 서울의 외교 사절들
5. 황제
6. 영사재판
7. 선교사들
8. 공사관생활
9. 황제의 고문관
10. 대궐에서의 생활과 민속놀이
11. 고문, 산적 그리고 반란
12. 여인의 나라 제주도:이재수의 난
13. 조선 사람의 신뢰성과 친절
14. 이권 외교
15. 외교 정책
16. 결론



저자 및 역자소개
W.F.샌즈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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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조선주재 미국 외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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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UPON DIPLOMACY

T HESE memories of the early days of a "career" diplomat are, perhaps, incomplete without some explanatory comment upon career di-plomacy in general and American diplomatic practice in particular. It is generally accepted to-day that American career foreign service started with Roose-velt, quite probably because there is nobody left in the diplomatic service who started there earlier than the Roosevelt administration. Veterans are not encouraged.
As a matter of fact the career service actually antedates Roosevelt. It had been felt that too many juniors in diplomacy were wealthy young men wanting posts at European courts for the sole purpose of making acquaintance there which would advance them socially at home, and that much reasonably good material was being spoiled in the process with no satisfactory results for anybody. They believed it scarcely possible to send an impressionable youth to a court in Europe and have him come out un-affected by the point of view of the golden gentlemen around whom it centred. They decided to pick a few youngsters whom they knew, and to send them first to the Pacific, either to the South American capitals or to the Far East, to study the working of concession diplomacy, spheres of influence and dollar diplomacy generally, away from the attractions of courts; to watch European diplomacy in the raw, in the regions where presently American interests would be greatly affected. After service

there, these first career diplomats were to come home and take a special course at some good American college supplementary to what they had been seeing, mainly in history and economics. They were to study America from their new point of view and get a sound interpretation of what American interests really are. Then they were to go through a clerkship in the State Department and learn not only the routine of the Department itself, but the manner of working of the whole American system of govern-ment. Only after that were they to be permitted to go to Europe, and only the most tried and reliable of them then.
There was no particular reason why I should be appointed to be the first of these, except that both the President and the Secretary of State were friends of my father, and that I had several European languages to begin with and had matriculated for university in Europe.
I had felt frightfully important, of course, and when I was given the choice between first secretary in Chile and second secretary at the legation in Tokyo, I chose the latter, in order to " finish" Asia, work back to South America and then display my accumulated wisdom and experience in Europe. I was not yet twenty-one years old when I was appointed, and had to wait before my commission could be legal.
It seemed to me quite natural then that a Presi-dent and a Secretary of State should take the trouble to explain to me exactly what they wanted and why they wanted it. I felt that it was hardly respectable not to be on easy terms with Presidents and Secretaries of State.
Had not Presidents, from Grant on, been frequent and informal visitors in my grandfather's house

(except Chester Arthur, who was not approved of, and not received) ?
Even the complete lack of interest in my existence of everybody in the State Department except the Secretary did not shake my serene confidence. "The department," in those days, consisted of a close corporation within the Department; of a Secretary of State who in the eyes of the inner circle was an outsider and was expected to be an unreliable and possibly a dangerous person, to be watched and thwarted if necessary, and two bodies of "public enemies "-the diplomatic service and the consular body. Both these latter bodies were usually made up of political appointees, like postmasters at home. They were not expected by the departmental family to last long, nor to do anything worth the trouble of doing while in office. The main hope of the inner departmental circle was that "lame ducks" would do nothing too preposterous before they vanished into the outer darkness to be replaced by other lame ducks.
Flaming youth of twenty years made a mental note, during the statutory thirty days' period of instruction, to undertake considerable reform in the Department after salvaging the Far East. He never got around to that, however.
My own foreign service covers a period of transi-tion in the diplomatic service, but, living continually on the firing line where immediate action was often necessary, without available precedent or anyone to consult before acting, that experience was very different from the well-ordered routine of diplomatic life to-day. It is the personal experience of those early years that I have sketched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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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22 — The most generally liked people in the corps were the Spaniards. Two years later, when we were at war, the members of the Spanish and the American legations conformed rigidly to the etiquette pre¬ scribed in a neutral country. When one of them happened to call and found an “ enemy ” there, the
Page 137 — Two men meeting by chance, unknown to each other even by name, but apparently belonging to the noble class, would spar for hours in conversation, never ending a verb, each trying to conceal his own rank and place the other’s exactly, by every possible device. They would develop a kind of neutral language until one would triumphantly guess the precise status and social antecedents of his adversary partner in the game and use the corresponding verbal form. If he were wrong the other would at once use a form of verbal ending obviously lower than the guesser’s rank, to indicate that had he been quite a gentleman he could not have made such a social blunder.
Page 233 — the French and British cruisers. Finally, an English officer and one of our own came up to the club and 4t was possible to get the news. The Russian ships had made a good try. When they came back, all living men from both were removed to the French and British cruisers, ours remaining neutral. The French, of course, took all they could, as Russia’s ally ; but Japan’s ally, the Englishman, took all the rest, out of which grew a complication. The little destroyer had brought in a peremptory message to both to give up the Russians as prisoners of war. Both refused. According to our informant another message stated that, if refused, the Russians would be taken. The English captain’s answer wa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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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19 — In the welter of competition for spheres of influence and special interests neutrality could not possibly mean anything to the Oriental mind but weakness ; in this case it might even mean to them disapproval of me on the part of my own government. Nor was it likely that any European diplomat would understand it. As adviser to the emperor I was either the instrument of the American minister’s policies near the throne, or I represented nothing at all and was open prey to any other diplomat in the place. Protection of foreign officials in Asiatic governments by diplomacy ranging from official protest through naval demonstrations, to actual bombardment and landing expeditions had been drilled too deeply into backward countries for anyone to succeed as an independent and impartial adviser.
Page 122 — I knew all that, but I also knew that I had some influence with the emperor ; he listened to me with confidence. I also knew that there was a considerable body of Korean officials who would prefer to be honest and were as decent as the system let them be. Several powerful nobles were heartily ashamed of the backwardness of their country and might be expected to help in a reform programme. I counted on the American party in the palace to become the chief advocates for reform, and on the American mission-trained natives and the oppressed peasants to support it enthusiastically. I believed that I could secure the co-operation of honest men like Sir John McLeavy Brown and Sir John Jordan, and that I could get the beginnings of an educational system out of unification of the various language schools, controlled by foreigners and supported by the Korean government, and could make all minor appointments from their graduates until we could develop further. Eventually I hoped to work out a definite tax system based upon a census, and to extend a definite code of procedure to the district and provincial courts. If I could get that far, and if I could show some measure of progress and reform, it seemed to me possible to hope for peace treaties and international agreements to guarantee our neutrality. I did not realize that it would take thirty years and a world war to bring people to the Kellogg trea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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