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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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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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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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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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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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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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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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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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Ⅰ
20세기 초에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섰던 申采浩는 한일합병 직전인 1910년 2월에「20세기 新國民」이라는 글에서 “한국이 수천년 이래로 반도내에 偃仰(한가하게 지냄-인용자)하여, 단지 右便에 支那가 有하며 左便에 일본이 有한 줄만 知하다가, 수십 년 전부터 홀연 세계적 국가가 되어 列國競爭場에 入하였다가, 淸日戰役에 一變하며 露日戰役에 再變하여, 드디어 금일 면목을 作하였나니, 盖 한국이 如斯히 不振不立하고 一敗再敗함은(하략)”이라고 하여, 개항에서 한일합병까지의 역사를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경계로 하여 세 시기로 구분하였다. 개항기의 역사가 ‘국제관계에 편입되어 열국경쟁의 마당에 섬’과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의 대응의 좌절’로 특징화되고 있다. 국권회복운동의 최전선에서 민족운동을 실천한 변혁지향적 지식인의 현실인식·현실파악에서 가장 중요시되었던 것은, 권력정치적 국제질서와 그것에의 한국 민족의 대응이었다.
1876년의 開港은 한국의 역사를 질적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 되었다. 이전의 한국역사는, 외부의 영향 특히 동아시아 질서의 규정·제약을 크게 받고 있었지만, 그러나 이 규정·제약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었고, 기본적으로는 한국사회 내부 모순의 갈등·대립에 의하여 전개된 自己完結의 역사였다.
그러나 개항 이후의 한국역사는 세계자본주의체제에 편입된 것이었기 때문에 종래의 자기완결성을 상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항자체는 일본에 대한 것으로서, 일방적인 치외법권의 설정, 일방적인 영토주권의 침해, 일방적인 영해주권의 침해, 관세자주권·관세의 전면적 부정, 일본화폐의 유통권과 조선화폐의 運出權 등을 자유무역의 이름 밑에서 강요한 불평등조약이었다는 점에서 일본에 대한 종속이었다.
그러나 그 자유무역의 내용구성이 1882년까지만 보더라도 한국에의 수입품의 88.3%는 유럽·미국의 제품이었고 그 유럽·미국제품의 78.2%가 織物이었으며, 일본제품은 11.7%에 불과하였다. 한국으로부터의 수출품은 쌀(30%)·콩(10.9%)·금(19%) 등이었다.
위와 같은 무역의 담당자로서의 일본은 유럽·미국 산업자본을 위하여 그 시장을 개척해 준 셈이며 스스로는 중개무역을 한국인에게 사기·폭력의 방법으로 전개함으로써, 그리고 한국의 쌀을 싼 값으로 사가서 일본 노동자의 저임금을 위한 식량으로 삼고 자국의 쌀을 국제시장에 높은 값으로 파는 쌀의 이중교역을 전개함으로써 본원적 자본축적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일본에 대한 한국의 개항은 구미 선진자본주의를 중심국으로 하는 세계 자본주의체제에의 일본을 매개로 한 종속이었다. 때문에 1875년의 강화도사건 후 일본이 한국에 全權을 파견하는 것을 일본주재의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 공사 등이 지지하였으며 주일 미국공사 빙함(Bingham)은 副全權으로서 한국에 가는 井上馨에게 테일러(B.Taylor)가 지은「페리의 일본원정소사」를 기증함으로써 미국에 의한 일본의 강제 개국을 참고할 것을 시사하였다. 이러한 점에서도 일본의 한국에 대한 침략성과 구미 선진자본주의에 대한 종속성이라는 양면성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일본을 매개로 한 세계 자본주의체제의 한국에 대한 규정·강요의 질은 외견상 자기와 닮은 모습으로 한국이 변혁할 것을 강제하는 내용의 것이었다. 이러한 ‘변혁의 강제’가 개항 이후 한국이 부닥치게 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조건이었다. 그것은 환상의 영역 밖에서는 피할 수 없는 객관적 조건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객관적인 조건은 객관적이란 말 그대로 한국사의 밖에 外在하는 것이었지만, 근대 자본주의 침략의 본질적인 성격으로 말미암아 외재적인 동시에 한국사에 內在化하는 내재적 조건으로도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객관적 조건이 아무런 매개 없이 한국사에 직접적으로 내재화하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사회 내부 모순의 전개에 매개되어서 한국사에 내재화하게 된다. 따라서 개항 이후의 한국사의 전개는 극히 복잡한 관계로서 착종하게 된다.
Ⅱ
이러한 복잡성·착종성을 더욱 증폭시킨 것은 淸의 한국진출이었다. 淸은 개항이후 특히 1882년의 壬午軍亂 이후 전통적인 事大藩屬關係에 더하여 國權主義的으로 한국에 진출함으로써, 한국의 세계자본주의체제 즉 권력정치적인 국제질서에의 대응을 더욱 어렵고도 복잡한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淸은 자국의 자본주의적 성숙의 저수준으로 말미암은 경제적 침투력의 취약성을, 종래의 事大藩屬關係를 근대적 성격의 정치적 지배력의 강화로, 바꾸어 말하면 국권주의적으로 보완하려고 하였다. 1882년의 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은 청의 실질적인 조선지배 책동을 여실히 들어낸 것으로 조선이 청의 속방임을 명문화하여「청이 속방을 우대하는 뜻에서 맺은 것으로 각국과 더불어 일체 균점하는 예를 갖지 못한다」고 못박음으로써 종속관계를 기초로 한 독점적 특권을 규정하였다. 즉 영사재판권, 한성개잔, 내지채판권, 저관세율, 조선연해어채권 및 연해운항순시권, 의주·회령육로통상권 등 외교적 경제적 특권을 강제로 인정시킨 것이 그것이다. 이 통상장정은 종래의 종속관계원칙을 기본내용으로 하고 거기에 서양식 조문을 나열한 것에 불과하여 종속관계의 文證이 되었음과 아울러 청이 조선경제문제에 적극적으로 간섭하는 계기를 마련한 셈이었다. 그리고 1885년 10월에 총리교섭통상사의로 조선에 온 袁世凱는 조선에 주차관으로 부임한 이래 약 10년간(1885∼1894) 청의 대조선적극책에 편승하여 이홍장이 입안한 정책을 충실히 실행하며 조선의 국정을 간섭하였다. 그는「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라는 직함을 띠고 총판조선상무 진수당의 후임으로 임명되어 왔으므로 외국공사와 같은 외교사절이 아니었고 겉으로는 통상교섭을 전담하는 직무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종주국의 대표로서 조선의 일체 정령을 감독하는 임무였다. 천진조약에 따라 청·일 양군이 모두 철수한 뒤 국제관계의 미묘한 정황 속에서 조선의 정치·외교간섭은 물론이고 청국상인의 보호·장려 등 대조선경제정책의 중임까지도 감당해야 하였음은 비록 영·러의 각축으로 인하여 청의 종주권행사가 다소 용이하였다고는 하나 그 임무는 막중한 것이었다. 이홍장은 원세개가 조선의 조신들과 긴밀한 유대를 맺고 있으며 임오·갑신의 정변을 겪는 동안의 그의 수단과 기민한 활동을 익히 보았으므로 그에게 조선 경영을 일임하게 된 것이었다. 이리하여 이홍장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 원세개는 위협과 힐책으로 조선내정에 간섭하여 속칭 ‘袁大人’으로 불리면서 ‘監國大臣’ ‘朝鮮之王’으로 비유되기도 하였다.
위에서와 같은 조선의 대외관계에서의 불평등성은 1882년의 朝美條約, 1883년의 제2차 朝英條約 등에서 더욱 심화되었다. 조미조약에는 最惠國待遇 조항이 포함됨으로써 이후 서구열강이 조선에서 동일한 이권을 모두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조영조약에서는 개항장에서의 토지·가옥의 임차·구매 및 주택·창고·공장의 설립까지 허용되어 제국주의 국가들의 자본이 자유롭게 침투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조영조약 체결의 당사자인 파크스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얻었다”라고 만족하는 정도였다.
그 후 독일(1883), 러시아(1884), 이탈리아(1884), 프랑스(1886), 오스트리아(1892) 등과 차례로 체결된 조약에서도 이러한 불평등조항들은 어김없이 삽입되었다. 조선의 반식민지적 상태를 제도적으로 조건짓는 불평등조약체제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Ⅲ
한국은 이러한 불평등조약체제라는 형식을 통하여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일환에 위치되었다. 세계자본주의체제에서의 국가관계는 모든 국가가 다른 국가들과의 형식적인 대등성의 관계에서만 존재하게 되는 국제질서였다. 다른 국가들과 고립되어 자기완결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국가는 존재할 수 없었다. 따라서 형식적 대등성의 국제질서의 사실적 내용은,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착취-피착취관계 속에서 국민국가로서 자기를 형성하여 패권을 구하거나 보다 우위의 위치를 구하여 정복이나 전쟁을 반복하면서 경쟁하는 국가들과, 미처 국민국가를 형성하지 못하여 경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식민지·반식민지로 추락하는 국가들로의 양극분해였다.
이러한 양극분해의 위기적 상황에서 자신을 국민국가로서 형성하려는 사회·경제·정치적 움직임은 대개 세 갈래의 흐름에서 나타났다. 첫째는 정부 자신의 움직임이었고 둘째는 개화파 정치세력의 움직임이었으며, 셋째는 아래로부터의 농민층의 움직임이었다. 다음에서는 첫째와 셋째의 것을 그 윤곽에서 그려보려고 한다.
정부 차원에서의 움직임은 물론 국민국가 형성을 자각적으로 추진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국제질서 자체가 각 국가들로 하여금 국가로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면 국민국가 형성에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객관적 강제가 있었으며, 정부차원의 움직임도 개항에서 1894년까지의 통시적 국면에서 볼 때 객관적으로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보인다.
민씨척족정권도 그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부국강병정책을 실행하였던 바, 1885∼1894년간 재정·군사·외교·치안사무 등 국정전반을 총괄하는 권한을 내무부에 집중시켜 최고의 의결·결정기구로 만들고 이를 통해 정권을 장악함과 아울러 각종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즉, 민응식·민영익·민영환·민영준 등 민씨척족은 내무부의 독판 내지 협판직을 장기간 보유한 채 병조판서, 중앙군 영사 및 호조판서, 선혜청당상, 전환국 등 군사·재정관련부서와 육영공원 및 연무공원 등 개화·자강추진기구의 요직을 번갈아 역임함으로써 ‘勢道’로 행세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내무부는 왕실의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홍삼전매권을 관리하였으며, 새로운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주전기계를 도입하고 화폐개혁을 추진하였고, 외국인 기술자를 초빙하고 근대식 기기를 들여와 광산을 개발하였을 뿐 아니라 신식 기선을 매입하여 세곡운반과 무역에 활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사업은 재정을 확충시키지 못한 채 오히려 민폐를 유발하는 등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와 같이 내무부가 추진했던 재정확보책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게 됨에 따라 고종과 민씨척족은 차관도입을 통해 자금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종의 차관도입정책은 청국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벗어나는 동시에 기채대상국을 통해 조선에서 열강의 세력균형을 꾀하면서 청국을 견제하려는 목적을 지닌 것이었다. 따라서 청국은 조선의 차관도입을 저지하였으며, 나아가 조선에 대한 차관공여를 강요해 내정간섭을 강화시키려 하였다. 요컨대, 고종은 청국의 적극적인 종주권 강화정책에 대항하기 위해 주미전권공사를 파견하여 자주·평등외교를 전개하는 한편 원세개의 소환운동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청국의 반대로 말미암아 오히려 원세개의 권한이 더 강화되고 주미전권공사 박정양이 강제 소환당함으로써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이 내무부를 통해 주도했던 반청 자주외교는 조선의 국가적 독립을 대외적으로 표방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아래로부터의 농민층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뒤에서 살피기로 한다.
일본도 청국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자기개혁의 결정적 고비에서 정치적·군사적 개입을 감행함으로써 한국의 Nation으로서의 통합을 결정적으로 저지하였으니, 예컨대 임오군란, 갑신정변에서의 일본의 정치·군사적 침략이 그것이었다. 이에 덧붙여 일본은 동아시아에서는 상대적으로 보다 발전한 자본주의적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국에 대하여 경제적으로도 적극적으로 침투하였다.
한일무역관계의 두드러진 특징은 면제품의 수입과 곡물의 수출로 나타났다. 1894년 이전의 일본상인은 자국의 면제품이 아니라 영국제 면제품을 중개무역의 형식으로 한국에 수출하였다. 일본상인이 가져온 영국 면제품은 1893년경 한국인 면포 총소비량의 1/4을 차지할만큼 늘어나서 한국의 면포수공업자는 물론 가내부업으로 면포를 생산하던 농민들의 성장을 저지하였다.
한국으로부터의 곡물수출은 농산물의 상품화를 확대시키고, 쌀값을 올라가게 하였으나, 그 이익은 지주·부농·상인들에게 돌아갔다. 반면에 농민·도시빈민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당시의 쌀값은 1883년에서 1894년 사이에 경인지방에서 약 7배, 다른 지방에서는 약 2∼3배로 뛰었다.
이러한 무역의 확대는 상업유통구조에도 영향을 미쳤다. 개항장 객주가 새로운 상인층으로 등장하였고, 개항장이 국내 상품 유통의 중심지로 부상하여 재래의 상업유통질서와 대항적인 위치에 서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국내상업유통의 패권을 잡아가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한국의 소상인층이 점차 몰락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한국이 청·영국과 맺은 1883년의 불평등조약으로 서울에서의 점포개설과 내지통상이 허용됨에 따라 외국상인들은 이후 서울과 개항장을 거점으로 내지시장에도 침투해 들어왔다. 청국상인들의 활동으로 육의전 상인과 시전상인들이 타격을 받았다. 이들은 1890년 1월 청·일본 상인의 점포 철수를 요구하면서 시위와 동맹철시를 벌였다.
또한 외국상인의 내지시장에의 진출은 개항장 객주의 商權을 위축시켰다. 이에 대하여 정부는 25객주 전관지역제등을 실시하여 개항장 객주를 통한 유통권의 유지를 기도하였고, 개항장의 한국 상인들은 객주상회사를 설립하여 상권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정부와 객주상인들의 이러한 노력은 객관적으로 외상에 대항하여 한국의 상권을 지키려는 성격을 지니는 것이었다.
일본상인의 내지상업활동은 곡물수출의 증가를 초래하였는데, 특히 1890년에는 일본의 국내사정이 겹쳐 곡물수출은 비약적으로 증가되어 이후 대체적으로는 증가일로였다. 개항 이후 1894년까지 대략 114건 내외의 방곡령이 실시되었는데, 이는 중앙정부가 외압으로 인하여 국내시장을 보호하지 못하는 가운데 일본의 경제적 침탈과 직접 대면하게 된 지역적 곡물시장권의 대항의 표현이었다. 동시에 이는 소농·빈농들이 곡물을 장시에서 구매하는 처지에로 몰락해가고 있었다는 표현이기도 했다.
Ⅳ
다음 앞에서 말한 셋째의 움직임 즉 아래로부터의 농민층의 움직임에 대하여 살펴볼 차례이다. 개항으로 인한 곡물상품화의 추세 속에서 양반관료와 상인들과 지주들과 부농들은 대체로 이익을 볼 수 있는 층들이었다. 소농·빈농층과 소상인들은 몰락의 추세였다.
조선후기 이래의 신분제의 동요는 개항 이후에는 경제적 동요에 자극되어 더욱 촉진되었다. 그 단적인 특징은 양반층의 증대와 노비호의 격감이었다. 이는 전통적 신분구조의 구성원리인 班常制와 良賤制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국가신분제로서의 성격은 거의 상실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개항기의 신분계층구조는 사회적 신분과 경제적 계급이 착종되어 대체로 상층부에는 양반사족을 모태로 하는 토호층과 반상을 포괄하는 신분구성을 갖는 요호부민층이 있고, 하층부에는 평민·천민 신분층의 소빈민층이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동요 속에서도 양반층의 사회적 특권은 존속되고 있어서 양반의 특권을 이용한 자의적인 억압과 수탈이 자행되고 있었다. 따라서 신분제의 동요 속에서 사회적 정당성·권위가 이미 의심되기 시작한 양반층의 자의적 특권행사는 편민·천민층의 반발과 저항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모순의 표현으로 농민층의 반항인 동학농민전쟁이 발생·전개되었다. 제1차 농민전쟁에서는 국내적으로는 전국의 차원에서 탐관오리를 제거함으로써 소상품생산자로서의 경제적 활동의 안정성·자립성을 획득하고, 대외적으로는 외국상인의 국내시장질서 준수를 강요함으로써 소상인으로서의 발전을 보장받으려고 하였다. 이후 10월 중순의 제2차 농민전쟁의 개시 때까지 농민군은 사실상 전라도 지방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농민군은 각지에 執綱所를 설치하여 폐정개혁을 스스로의 힘에 의하여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실행하였다. 제1차 농민전쟁에서는 탐학관리를 응징하는 것이 폐정개혁의 구체적 실천방법이었음에 대비할 때, 이것은 큰 성장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의 힘에 의하여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개혁을 실행하였으므로 이 시기의 집강소 개혁사업에서 농민군의 의지와 이념, 그리고 개혁의 역량이 가장 전형적으로 드러나고 그 한계도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집강소 단계에서는 폐정의 개혁을 자신들이 주체가 되어 시행함으로써 위에서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다. 집강소 질서 하에서 제12조를 제외한 다른 조항은 실현되었다고 보인다. 봉건제도가 근본적으로 변혁되지는 않았지만 계서적인 신분제도는 전면적으로 해체됨으로써 봉건제도는 크게 개혁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농민군의 집강소가 기존의 행정체계와 이원적으로 병립되었지만 농민군의 자치적 행정기관으로서 확립되었고, 농민군세력의 군사적 우세성이 확고한 곳에서는 사실상 일원화됨으로써 농민의 지방권력기구로 성립되기도 하였다. 농민군은 지방의 차원이긴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생활질서를 다듬어 나가고 새롭게 창출하기도 하였다. 이는 조선사회의 역사적 전진이었고 농민군의 비약적 성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제2차 농민전쟁에서는 위에서와 같은 목적추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일본침략세력을 축출함으로써 그 목적을 이룩하고, 동시에 한국주민의 정치적 생활의 경역의 자립성·불가침성을 지켜내고, 그 경역 내의 정치적 주권자로서의 국왕의 통치주권을 확립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객관적으로는 국민국가의 확립에로 이어질 수 있는 정치적 동태였던 것이다.
<鄭昌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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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1. 청의 간섭
1) 청의 주차관 임명
조선은 고종이 즉위한 후 대원군이 섭정하면서 천주교 전래를 막고, 아편전쟁 이래 청이 서양제국에 굴복당한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이유에서 쇄국정책을 고수하고 있었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병인·신미양요 이후 더욱 쇄국에 자신을 갖게 된 조선은 물밀듯 밀려드는 서세동점의 사실을 외면함으로써 고립무원의 궁지에 빠져들었다.
한편 청은 아편전쟁 이후 자강책에 급급한 나머지 동고의 겨를이 없었으며 조선의 쇄국책에 대해서 조금도 간섭할 뜻이 없었다. 다만 使行의 내왕으로 事大儀節을 다하게 함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이 장차 제3국에 의해 쇄국정책이 무너지고 개국하게 될 것이 필지의 사실임을 알고 타국에 앞서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킴으로써 조선내의 권익을 선점하고 또 세력기반을 닦으려 기도하였다. 대원군이 하야하자 일본은 정한론을 펴는 일본국내 강경파들의 불만을 해소시킬 목적에서 소위「운양호사건」을 고의로 일으켜 조선을 제압하여 개국시키고자 하였다. 이 사건 이후 일본은 조선과의 직접교섭에 임하지 않고 조·청 종속관계에 중점을 두어 먼저 종주국인 청정부에 책임을 묻고자 모리(森有禮)공사를 북경에 파견하여 總署의 공친왕 奕訢과 담판하게 하였다. 이 때 공친왕은 “속방인 조선을 침점하지 않는 한 일본과 조선과의 우호관계는 청이 그것을 인정하고 간섭하지 않는다”고 하였다.0001) 이는 조선이 대내외적으로 주권을 행사하는 공법상의 독립국임을 인정하는 사실이 되어, 청은 이후 조선문제에 고심하게 되었고 조선에서의 선수를 일본에 빼앗기게 되었다. 기실 공친왕이나 직예총독 李鴻章은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운동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양무운동을 벌여 바야흐로 국력의 충실에 전념하고 있는 때였으므로 조선문제로 일본과 불화하여 개전하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1876년 초 강제로 체결된 강화도조약의 제1조에「조선은 자주독립국」이라 규정함으로써 일본은 청의 간섭을 배제하고 독자적으로 조선과 외교문제를 교섭하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그런데 1879년 일본이 琉球國을 폐하고 나가사끼현으로 만드는 침략성을 드러내자 청의 대일 감정은 격변하였고 따라서 조선정책에도 종래의 미온적 태도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간섭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게 되었다. 사실 청은 19세기 중엽 이후 계속하여 번속국을 상실하고 있었다. 예컨대 1852년 영국이 버마를, 1860년에는 러시아가 연해주를, 1874년에는 프랑스가 베트남을, 1879년에는 일본이 유구를 각기 차지함으로써 번속국을 상실하였고 따라서 조선은 유일하게 남아 있던 청의 번속국이었다.
특히 일본의 유구병탐은 장래 조선침략을 시사하는 것이고 나아가 청의 東三省에도 직접적인 위험이 박두하리라 예상하였기 때문에 1880년대에 들면서 청은 종전의 명목적인 종속을 항구적이고 실질적인 종속으로 전환시키고자, 조선에 대한 적극적 진출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홍장은 조선으로 하여금 쇄국책을 버리고 서구열강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케 권고함으로써 일본의 진출을 방지하고자 하였다.0002) 마침 조선에서도 일·러 양세력의 현저한 진출에 자극되고 국내에서 자강문제가 대두함에 따라 서양과의 통상문제가 진전되고 있던 터라, 청의 권고를 받아들여 1882년 4월 朝美條約을 선두로 서구제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조선문제에 대한 이 같은 청의 적극책에도 불구하고 임오군란이 일어나기까지 청은 일본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끌려가는 형세를 면치 못하여서 크게 부심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임오군란이 발생하였으므로 청은 물실호기로 여겨 군대를 파견하여 종주권을 만회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군란소식을 접한 지 일주일만에(1882. 6. 29) 馬建忠과 북양수사제독 丁汝昌을 조선에 급파하였고 잇달아 청 육군의 파견과 대원군 제거라는 새로운 대응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이에 淮軍統領 吳長慶 휘하의 청 육군 3천여 명이 7월 7일 남양만에 입항하였다(후에 청의 주차관이 되는 원세개는 이때 23세의 말단 청년무관으로 함께 내한하였다).
그러나 청이 많은 군사를 파견한 것은 일본의 감정을 악화시킬 중요한 요인이었으므로 마건충은 청일양국의 충돌을 가급적 피하고 군란을 원만하게 평정하려고 시도하였다. 한편 군란을 수습하고자 내한한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는 조선정부에 7개조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협상을 제기하였으나 결렬상태였으므로 청의 대원군 피랍계획은 보다 구체화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조·일간의 협상이 타결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0003)
7월12일 오장경과 정여창은 吳兆有·黃仕林·袁世凱 등 막료를 거느리고 한성의 숭례문 밖에 진주한 다음, 이튿날(13일) 마건충과 함께 그들을 방문한 대원군을 몇 차례 필담 후 전격 拘囚하여 강제로 마산포로 호송하였다. 이리하여 대원군은 군함 登瀛洲호에 승선되어 14일 천진으로 압송되었다.0004)
대원군 납치 후 청측은 魚允中으로 하여금 국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게 하고 오장경 명의로 된 通諭를 발표하여 대원군 납치를 정당화시키면서 백성들의 소요를 엄금하였다. 아울러 대원군의 장자인 훈련대장 李載冕을 남별궁에 위치하여 연금시키고 난당소탕이라는 2단계 수습책을 강행, 16일 새벽 청군을 출동시켜 왕십리·이태원 일대를 일제히 공격하였다.0005) 이 소탕작전에서 청군은 언어가 불통하여 진위를 가리지 못하고 무조건 체포하였던 바 원세개가 지휘한 왕십리 방면에서는 군민 150여 명, 오장경이 맡았던 이태원 방면에서 20여 명, 도합 170여 명이 체포되었다.0006)
청은 조선의 임오군란을 계기로 전격적인 출병을 단행함과 동시에 보수파의 영수격인 대원군을 납치하여 군란을 평정하였으며 아울러 오장경의 경군 3천여 명을 그대로 조선에 주둔시켜 계속 조선정부를 보호 감시케 함으로써 숙원이던 청의 종주권을 되찾고 조선을 그들의 기미에 얽매이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후 청·일 양국의 세력침투는 가중되었고 조선을 둘러싼 청·일간의 대립도 보다 현저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임오군란 후 조선의 치안은 청군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는데 난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조선군대 창설이 긴요하였다. 신·구간에 조선군대는 임오군란시 모두 해산되었으므로 고종은 친위군의 필요를 절감하고 오장경에게 이 뜻을 전했다. 오제독은 원세개에게 친위군 창설을 일임하여 1000명으로 구성된 新建親軍營을 만들어 훈련케 하였다.0007) 원세개는 이를 좌영·우영으로 나누고 다시 별기군을 개편하여 전영·후영을 증설함으로써 신식군대 4군영을 창설하게 되었다. 한규직·윤태준·이조연·민영익 등 친청사대당 인물들을 각기 전·후·좌·우영사로 임명하게 되니 결국 2000명에 달하는 조선의 신식군대는 원세개의 통솔하에 있게 되었다.0008) 뿐만 아니라 청은 대조선정책을 보다 강화할 목적에서 1882년 9월 조선과「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고 조선에서의 치외법권, 내지통상권, 연해운항 순시 및 어채활동 등 경제·외교적 특권을 강제로 인정시켰다.0009)
이러한 가운데 청정부내에서는 청류당의 강경론자들이 대조선적극책의 가일층 강화를 주장하면서 일본을 완전 제어하기 위해 출병하고, 조선에 감국대신을 파견할 것 등을 들고 나왔다.0010) 이러한 청류당의 주장은 조선을 둘러싼 청·일의 쟁패에 역점을 둔 것으로, 조선문제는 유구나 그 외의 주변 번속국과는 류가 다르고 조선이 일본에 귀속되면 만주가 위험하기 때문에 일본의 조선에서의 세력기반을 제거해야 한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이홍장은 출병보다는 자강에 전력 경주하여 해군의 군비확장에 매진하면서 東征시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견해였다.0011) 이홍장의 소극론은 청류당의 적극론에 봉착하게되자 다소의 수정을 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을 청의 완전 속국으로 만드는 데는 찬성하지 않았으나 조선의 국정을 감시하고 보호할 필요성은 인정하였으므로 외교관계 고문을 파견하여 조·중관계를 일층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1월초 독일인 묄렌도르프0012)와 馬建常을 파견하여 조선의 재정·외교를 맡게 하고 원세개는 군사를 담당케 하여0013) 오장경 통할하에 조선정부를 감시함으로써 조선이 청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1884년초 청·불간에 월남문제를 둘러싸고 전운이 감돌자 주화론자인 공친왕일파는 주전론자인 청류당일파에게 공격당하여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이홍장의 외교정책도 맹렬한 탄핵을 받아 열세에 몰리게 되었다.0014) 이에 오장경은 조선주둔 청군의 절반을 청·불전에 대비코자 철수시키게 되었다.0015) 이 당시 조선정국은 친청적인 사대당과 일본에 기대는 독립당간의 반목·알력이 표면화하였는데, 청병이 철수하자 일본의 원조를 얻어 독립당은 청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개혁을 단행하여 자주독립을 쟁취하려는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이 해 10월 신설된 우정국청사 낙성식을 계기로 독립당일파는 갑신정변을 일으켜 신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이 정변은 준비가 불충분하였고 계획이 치밀하지 못하였으며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한 일군의 약세에 대비되는 청군의 활약으로 결국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이 결과 국왕의 비호하에 활동한 독립당의 반청운동은 완전히 종지부를 찍게 되었으며 원세개의 조선내에서의 세력확보와 대조선적극책을 구사할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장경 인솔하에 청군의 반이 떠난 후 잔류한 주한 청군 3영은 오조유가 통솔하게 되어 있었지만 그는 우유부단하여 결단력이 없었으므로 실권은 總理營務處會辦朝鮮防務 원세개가 쥐게 되었다.0016) 그러므로 정변 발발 후 원세개는 강력하게 청군 출동을 주장하여 정변진압을 결행하였던 것이다. 오조유가 이홍장의 명령을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원세개는 청군을 출동시켜 일본군과 충돌·교전을 감행하여 패퇴시키고, 즉시 국왕을 자기 군영으로 옮기게 하여 독립당을 견제함으로써0017) 사건의 종지부를 찍게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강력한 청군의 무력간섭은 원세개의 결단이었는데, 이는 청불전쟁으로 이홍장이 동고의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크게 볼 때 이홍장의 외교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는 원세개였지만 대조선정책을 수행하는 방법에 있어서 그는 이홍장과는 류를 달리 하였다. 즉 근본적인 면에서는 이홍장의 정책을 따르지만 세부적인 면에서는 이홍장의 유화·소극적인 방법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간섭하여 청의 종주권을 강화시키고자 하였다.0018) 결과적으로 그의 대조선정책은 성공하였고 이후 청의 대조선정책 수행에 최적격의 인물로 간주되어0019) 청일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10년간 청의 주차관으로 임명되어 조선에서의 임무에 충실하게 된다. 이러한 그의 세력기반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통하여 구축된 것이었다.
그런데 갑신정변 후 일본의 대청감정은 악화일로여서 화·전양론이 분분하였던 바 이는 청국에 큰 위협이 되고 있었다. 일본측 주장은 청과의 개전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으나 양국병 충돌의 책임을 묻고 책임자의 처벌을 요구하였으므로 청은 이에 동의하였다. 비록 일본의 태도가 청세력을 견제하려는 수단에 불과하였으나 청은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려는 생각에서 양국병 충돌의 책임자로 간주된 원세개를 소환함으로써 사태를 수습하려고 하였다.0020) 이리하여 원세개는 갑신정변 직후인 11월에 일단 귀국하였다.
한편 일본은 주한공사 다께조에(竹添進一郞)의 실책을 만회하기 위하여 정변직후 외무경 이노우에(井上馨)를 파견하여 한성조약을 맺고 자국에 유리한 조항을 삽입케 하는 한편, 1885년초에 이토(伊藤博文)를 천진에 파견하여 이홍장과 천진조약을 체결하여 양국철병을 가결하는 등 외교적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이와 같이 양국은 조선을 둘러싸고 각축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갑신정변 이후 국제관계의 변화에 따라 조선정세가 유동적인 상황에 이르게 되자 청에 대한 일본의 정책은 완화되고 도리어 청의 대조선적극책을 지원하는 결과를 빚어냈다.
즉, 이홍장의 추천으로 조선에 온 묄렌도르프는 총세무사 겸 외무협판의 요직에 있으면서 국왕의 신임을 받고 있었는데, 조선을 감시하는 목적을 띠고 온 그는 오히려 러시아와 결탁함으로써 청일을 견제하고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만들려는 이른바 聯露策을 기도하였다. 여기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 영국은 거문도를 불법 점령함으로써 국제관계를 크게 긴장시켰다. 조선의 연로설과 이에 따른 영국의 거문도점령 등 일련의 사태가 연발하자 청·일 양국은 영·러의 대립에 크게 당황하여 국제관계의 긴장을 완화시키는데 공동 노력하게 되었다. 특히 일본은 러시아의 남하를 두려워하였으므로 청과 제휴하여 그 세력을 견제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에 일본 외무대신 이노우에는 1885년 5월 8개조에 달하는 조선의 정치개혁안을 이홍장에게 제시하였다.0021) 이 가운데는 미국인 가운데 유능한 자를 뽑아 묄렌도르프의 임무를 대행시킬 것(5조), 현재 주한청상무위원 보다 재간이 뛰어난 청의 관리를 택하여 조선 국정을 탐지케 할 것(6조) 등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일본이 청을 앞세워 조선내정에 간섭케 하고 배후에서 조·청관계를 조종하려는 의도였다. 이홍장은 청·일 양국이 조선의 공동 종주국이 되는 것을 우려하였지만 일단 묄렌도르프 교체문제와 주한청관 대체문제에 중점을 두어 대조선정책의 쇄신을 기도하였다. 그는 조선 국왕이 무능하여 왕비와 그 일파에 의해 정국이 조종되므로 국정을 감시할 인물의 파견이 급선무라 생각하고 대원군 석방과 원세개의 재파견을 추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이홍장은 원세개로 하여금 대원군을 조선으로 호송케 하였다(1885. 8). 대원군을 석방하여 민비일파의 세력을 견제하려 한 이홍장의 예측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묄렌도르프 또한 관직에선 물러났으나 국왕과 왕비의 신임을 받고 조선에 체류중이었으므로 조선은 아직 연로책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원세개는 조선 도착 후 먼저 대원군과 민비일파의 불화를 조정하는 한편 9월에는 김윤식을 만나 연로책의 부당성을 통렬히 비난하였고 이어 국왕에게 소위 摘姦論을 지어 올려, 러시아 방비를 위해서는 청과 제휴·공수동맹을 맺어야 함을 역설하였다.0022) 원세개에게 설복된 국왕은 청의 구원병을 수원에 내주케 하여 러시아를 저지해 줄 것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0023)
무골해삼으로 지칭되는 주한청상무위원 陳樹棠이0024) 조선 국정을 보필하고 간섭할 재능이 부족한 인물임을 잘 아는 이홍장은 청군 철수후의 대조선정책을 강력하게 집행하는 데는 원세개가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 판단하고, 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로 임명함과 동시에 道員으로 승진시키고 아울러 三品銜의 賞을 더 보태어 이 해 10월 원세개를 조선의 주차관으로 파견하였던 것이다.0025) 이홍장은 원세개가 능소능대하며 술수와 지모가 뛰어날 뿐 아니라 이미 조선에서 공을 세워 이름을 떨치고 있었으므로 조선을 청에 종속시켜 청의 주도하에 대외관계를 유지하게 하고 조선국정을 감시하는 데 최적의 인물이라 판단하고0026) 그를 선정하였던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이후 10년간 원세개는 정치적으로 조선의 내정·외교에 적극적으로 간섭하였음은 물론이고 청상의 보호와 통상·교역의 증대에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나아가 조선의 해관·차관 간섭, 전선부설권 선점, 윤선운항 등을 강행함으로써 일본에게 기선을 제압당한 대조선 경제권을 만회하고자 안간힘을 다하였다. 이와 같은 원세개를 통한 청의 간섭 즉 조선에 대한 정치, 경제적 적극책은 결국 일본과의 대립을 심화시켜 청일전쟁을 유발시키는 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0001) ≪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臺北;文海出版社, 1963) 권 1, (2)總理各國事務衙門奏與日本使臣往來照會等件擬咨送禮部轉行朝鮮摺, 광서 2년 1월 30일.
0002) ≪李文忠公全集奏稿≫권 34, 密勸朝鮮通商西國摺, 광서 5년 7월 14일.
權錫奉,<李鴻章의 對朝鮮列國立約勸導策에 대하여>(≪歷史學報≫21, 1963).
0003) 馬建忠,≪東行三錄≫(臺北;廣文書局, 1961), 임오 7월 7·8·9·10·11일.
0004) 權錫奉,<壬午軍亂>(≪한국사≫16, 국사편찬위원회편, 1975), 435쪽.
0005) ≪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권 3, (137)北洋通商大臣李鴻章奏捕治朝鮮亂黨情形摺, 광서 8년 7월 29일.
王信忠,≪中日甲午戰爭之外交背景≫(臺北, 文海出版社, 1964), 45쪽.
0006) 李陽子,<淸의 對朝鮮政策과 袁世凱>(≪釜大史學≫5, 1981), 88∼89쪽. 원세개가 지휘한 왕십리에서의 체포자 수가 훨씬 많았으며 이 때부터 원세개의 조선에서의 활약이 서서히 시작되었다.
0007) 金允植,≪陰晴史≫하권, 고종 19년 9월 19일.
王信忠, 앞의 책, 82∼83쪽.
0008) ≪高宗純宗實錄≫中, 고종 21년 8월 26일, 169쪽.
0009) 金鍾圓,<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의 체결과 그 영향>(≪한국사≫16, 국사편찬위원회, 1975), 142∼184쪽.
0010) 張謇은 朝鮮善後之策을 상주하고 鄧承脩, 張佩倫은 일본에 대한 출병을 상주하였다.≪張季子 九錄≫政聞錄 권 3. 爲東三省事復韓國鈞函.≪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권 4, (139)給事中鄧承脩奏朝鮮亂黨已平請乘機完結球案摺, 광서 8년 8월 2일. (147)翰林院侍讀張佩倫奏請密定東征之策以靖藩服摺, 광서 8년 8월 16일.
0011) ≪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권 4, (151)北洋通商大臣李鴻章覆奏宜先練水師再圖東征摺, 광서 8년 8월 22일.
0012) 高柄翊,<穆麟德의 顧聘과 그 背景>(≪진단학보≫25·26·27 合輯, 1964).
0013) Jerome Ch'en,≪Yuan Shih-K'ai≫(Stanford Univ. Press, 1972), 10쪽.
0014) 羅惇融,<中法兵事本末>(≪中國近百年史資料初編≫所牧), 328∼331쪽.
0015) ≪李文忠公全集奏稿≫권 49, 議分慶軍駐朝片, 광서 10년 4월 4일.
0016) Jerome Ch'en, 앞의 책, 10쪽.
0017) 沈祖憲,≪容菴弟子記≫(중국현대사료총서 제1집, 台北, 1962), 17∼25쪽.
0018) ≪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권 5, (214)北洋大臣來電, 광서 10년 10월 23일.
0019) ≪李文忠公全集奏稿≫권 49, 議分慶軍駐朝片, 광서 10년 4월 4일.
0020) 沈祖憲, 앞의 책, 15쪽.
0021) ≪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권 8, (385)軍機處奏進呈徐承祖與日本外部井上馨問答等件片, 광서 11년 5월 29일.
0022) ≪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권 9, (409)附件4 袁世凱與朝鮮執政諸臣筆談節略. 附件 5 袁世凱摘姦論, 광서 11년 9월.
0023) 위의 책, 권 9, (409)袁世凱摘姦論 가운데「九月初四日謁見國王筆談」참조.
0024) Jerome Ch'en, 앞의 책, 10쪽.
0025) ≪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권 9, (410)李鴻章奏派同知袁世凱接辦朝鮮交涉通商事宜摺, 광서 11년 9월 21일;≪구한국외교문서 제8권, 淸案 1≫, 279쪽, (451)袁世凱의 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關防祗受에 관한 照會.
0026) ≪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上冊, 177쪽. 이홍장은 원세개를 천거할 때 “담력과 지략을 갖고 있고 상황판단에 능하며 조선의 사정에도 정통하다”고 칭찬하고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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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선의 대외관계
1) 조·일관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친일 협력 세력의 와해로 조선에서 실질적 영향력을 상실한 일본은 이 조약으로 조선의 안보를 평화적으로 보장하는 군란 이전 상황으로 돌아가게 되고, 청과 동등한 출병권을 획득하여 사실상 청을 견제할 수 있는 합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다는 사실에서 일본 외교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갑신정변은 청·일의 첨예한 대립을 종식시켰고 이를 계기로 일의 외교정책은 청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하여 조선에서 청이 러시아세력을 견제하는 방향으로 조정되었다.
그러나 天津條約 체결에 앞서 1885년 4월 15일 영국함대의 거문도점령사건이 일어나자 주일 영국공사 프란키트(F. R. Plunkett)는 일본 정부에 “영국 정부는 예측하기 어려운 사건의 방지를 위해 영국함대에 의한 거문도 일시점거가 단행되었다”는 것을 통고하였다. 이에 일본은 이 군사점령사건에 대해 그들의 입장을 유보한다는 방침을 알리고, 조선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주영 일본공사 하라이(河賴)를 통해 영국의 조선에 대한 군사행동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전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거문도 일시 점령은 다른 열강의 先占을 방지하려는 예방책에 근본 목적이 있음을 일본에 해명하면서 이 문제를 청과 교섭하려는 입장을 전하였다. 이에 河賴는 거문도가 조선에 속한다고 하여 조선과 직접 협상하도록 희망하는 본국 정부의 입장을 전달하여 청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 주장을 일축하고 조선이 주권국가임을 밝혔다.
6월 13일 일본은 ① 영국의 거문도 점령은 러시아가 그 전철을 밟아 원산·부산 또는 제주도를 점령할 우려가 있고 ② 조·러 조약이 체결된다면 최혜국 조관에 따라 조선이 제3국에 이와 같이 허락할 우려가 있으며 ③ 이홍장도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반대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사실상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반대한다는 입장으로 정리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태도변화는 장기적으로 볼 때 영국의 거문도 점령이 러시아에게 조선을 농락할 기회를 주어 러시아가 조선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에 기인하였다. 7월 일본 외무경 井上馨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일시 청과 타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홍장에게「조선 처리 8조」을 제출하였는데 첫째, 조선의 내정·외교 등 정무를 일·청 공동으로 감독관리하며, 둘째, 궁중과 정부를 구별하여 정부의 관여없이 궁중으로부터 밀지 하달을 막아 국사 개입을 못하게 하고 셋째, 조선 정부는 김홍집·어윤중·김윤식을 지도적 지위에 임명하는 내용을 먼저 이홍장과 상의한 후 이홍장과 井上이 공동으로 다시 협의한 후 조선이 처리토록 하는 것이었다. 井上의 조선 공동보호 제안은 사실상 청의 종주권 지위를 묵인하여 청·일이 조선에서 양국간 분쟁을 피하면서 내정·외교를 공동으로 관리하여 일본의 기존 세력을 유지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홍장은 井上의 건의를 단호히 거절하고 조선의 내정·외교에 대한 통제와 간섭을 강화하기 위해 대원군의 석방과 함께 袁世凱를 총독에 해당하는「駐箚朝鮮統理交涉通商事宜」라는 긴 직책에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영국의 거문도 철수문제는 이홍장이 직접 개입하여 러시아가 조선 영토를 점령하지 않는다는 청·러 天津협약을 체결함으로써 해결되어 1887년 2월 영국의 철군이 단행하였다. 이홍장의 聯英制俄정책은 영국이 청의 종주권을 사실상 인정하는 계기를 만들었기 때문에 청은 조선의 정치·외교·군사 및 경제 영역에까지 적극 관여하여 일본의 대조선 우위무역은 위협받게 되었다. 이에 일본은 이홍장의 聯俄策을 견제하고 조선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1887년에 이어 전함 20척, 정병 10만 명을 보유할 만큼 육·해군의 증강과 1883년 착수한 군함건조 계획에 따라 해군력을 강화하여 동아시아에서 지도적 해군강국으로 탈바꿈하였다.
1888년 4월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가 외무대신으로 취임한 시기는 일본이 착수한 헌법 기초 작업이 진행되어 그들은 이듬해 2월 明治제국주의 헌법을 공포하였다. 이 헌법에 따라 외교문제는 외부의 정치적 간섭을 배제하고 천황은 내각 국무대신의 보필에 의해 외교정책을 결정하며 집행할 권한과 和戰결정권 및 조약체결권을 비롯한 군 지휘와 통제권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외교문제에 관한 내각의 결의는 천황의 청원 형식을 밟아야 했고 정부에 대해 구속력이 없어 외무대신은 의원의 질문에 답할 필요가 없을 만큼 천황의 권한이 크게 강화되었다. 이 해 12월 24일 大隈가 신내각을 조직한 후 그가 쓴「군사의견서」를 각료들이 읽도록 주문하였다. 이 의견서에는 시베리아 철도 기공 날이 곧 러시아의 조선에 대한 침략이 시작되는 시기라고 전제하고, 이러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구주 열강의 조선침략 우려를 제거하며 兵備의 完整이야말로 일본의 최대 급선무라 아니할 수 없다고 기술하고 있다.
일본이 조선에서 수입한 상품가는 1886년 247만불, 1891년 525만불로 증가되었고 이 중 일본이 수입한 것은 대부분 쌀과 황금이었고, 조선해상 운송은 기선 1501척 가운데 일본 기선은 1355척에 달하였다. 일본과 청의 대조선 무역이 수출에서 일본이 1885년 82%, 청이 18%였으나 1888년 72% 대 28%, 일본은 1892년 55%대 45%로 추격 당했고, 일본이 1887년 수입한 84.9%의 조선 황금은 1892년 청이 오히려 57% 수입하여 일본은 43%에 불과하는 등 역전현상이 일어났다.
이듬해 가을 일본은 쌀 대흉작에 이어 1890년 여름 보리 대흉작으로 각지에서 쌀 소동이 일어났다. 마침 이즈음 조선에서도 흉작으로 인해 함경도 관찰사 趙秉式이 1884년 3월 조·일간 체결한 무역규칙 제37조 규정을 적용하여 大豆 등 곡물의 일본 수출을 금지하는 방곡령을 발표하고, 황해도 관찰사 吳俊泳마저 일본에 곡물수출을 전면 금지하는 防穀令을 내려 양국관계가 악화되었다. 그러자 신임 외무대신 아오키 수조(靑木周藏)는 방곡령으로 인해 발생한 그들 상인의 손실액 14만 7천 6백여 원의 배상과 이의 철폐를 요구하는 등 이 문제에 적극 간섭하고 나섰다. 일본의 배상요구는 1890년 일본 경제가 공황을 맞아 米價 폭등으로 5월에서 7월까지 쌀소동이 발생하여 야기된 국내 식량부족이 각종 공업의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섭통상사무협판 민종묵은 “손해배상은 아국의 치욕”이며 “이 금액이 너무 과다하다”는 이유를 들어 회답도 하지 않자 일본은 8월 1일 조선 주재 일본공사 스기야마 테이스케(梶山鼎介)로 교체하여 그들이 제시한 14만여원의 배상금에 대해 조선의 해답을 요구하자 정부는 6만여원 지불을 알렸다. 그러나 무츠 무네미츠(陸奧宗光)는 조선의 배상금 감면요구를 전적으로 거부하고 외무성 통상국장 겸 취조국장 하라 타카시(原敬)를 서울에 보내 梶山에게 일본정부의 강경방침을 전달하였다. 1892년 9월 11일부터 4차 회담에 이르기까지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자 조선은 민종묵을 趙秉稷으로, 일본도 梶山을 재야정객 오이시 마사미(大石正巳)로 교체, 방곡령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듬해 2월 25일 大石는 조병직에게 방곡배상액 14만 7천 1백여원과 이자 銀 2만 8천 5백여원 합계 17만 5천 7백여원을 요구하는 강경책을 제시하였다. 일본의 대조선 강경책은 山縣이 1890년 3월 2일 내각에「군사의견서」와「외교정략론」을 제출하여 공공연하게 조선을 일본의 利益線(Interest Line)임을 공포하고 이를 보호하기 위한 일본의 대조선침략의지를 천명한 바와 같이 국가독립자위의 길은 첫째, 主權線을 지켜 타인의 침해를 용납하지 않는 것이며 둘째, 이익선을 방호하여 자기의 유리한 지역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오늘날 열강국 사이에 끼어 일국의 독립을 유지하고자 원한다면 오직 주권선을 수호해야 하며 이러한 결정이 불충분하면 반드시 이익선을 보호할 수 없다고 주장한 사실에 기인하였다. 그가 말한 이익선의 초점은 곧 조선이었고 이것이 곧 그들의 대륙정책의 시발점이었다.
난관에 부딪힌 이 배상금 문제는 원세개의 요청에 의해 이홍장과 伊藤이 개입하고, 陸奧가 파견한 육군중장 카와카미 소오로쿠(川上操六)가 이 해 5월 4일 입경, 조선에 최후통첩을 전달하여 19일 정부는 배상총액 11만원 중 6만원은 3개월 이내, 3만원은 5년 분할, 2만원은 6년 분할에 합의함으로써 타결되었다.
1894년 3월 28일 李鴻章의 아들 前駐日 청공사 李經芳과 일본 재야 거물 오오미와 쵸오베(大三輪長兵衛)의 자금이 연루된 김옥균의 피살사건이 상해에서 발생하였다. 주일대리공사 兪箕煥으로부터 이 사실을 타전받은 조선은 곧 원세개를 통해 洪鍾宇의 보호와 송환을 요청하고, 원세개로부터 협조전문을 받은 이홍장은 30일 상해해관도 聶緝槼에 이를 적절히 처리하도록 타전하여, 곧 범인 홍종우를 縣衙에 이송시켜 환대하였다. 본국 정부의 긴급명령으로 4월 6일 상해에 도착한 駐天津 통상사무 徐相喬는 이홍장을 만나 홍종우의 국내 호송과 김옥균 시신 운구 처리 문제를 부탁하였다. 다음 날 이홍장의 편의제공 지시를 받은 상해해관도 聶緝槼과 서상교는 경찰의 도움으로 김옥균의 심복인 일본인 와다 엔지로(和田延次郞)에게 인도된 시체를 다시 인수하여 범인 홍종우와 함께 청 군함 威靖號로 인천에 호송하는 등 사건을 일방적으로 처리해 버렸다.
김옥균의 피살과 시체처리 소식은 일본 조야 인사들을 분노시켰다. 더욱이 조선이 舊習을 이유로 김옥균의 사체에 형벌을 가해 陵遲處斬시키려 하자 오토리 케이스케(大鳥圭介)공사는 이의 중지를 요청한데 이어, 4월 14일 조선 주재 외교사절단을 통해 다시 조선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조선주재 러시아공사 베베르는 김옥균이 朝鮮籍이어서 마땅히 조선이 스스로 처리할 것이며 우리들은 이를 권고할 뿐 결코 내정간섭을 해서는 안된다는 이유로 반대하여 大鳥의 저지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어쨌든 청이 김옥균 시신 처리과정에서 보인 불공정성이나 조선의 홍종우에 대한 중용 조치는 일본에게 反淸反朝운동의 명분을 제공하였고, 상당한 충격을 안겨주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조·일을 비롯한 청·일간 국제적 위신에 관련된 외교적 문제로까지 비화될 수 있는 분쟁의 소지를 남겼다.
김옥균의 피살과 시체 처리 문제로 조·일 관계가 악화된 상황에서 이 해 4월 全奉準의 지도하에 東學徒들이 주도한 전라도 고부군 농민폭동이 일어났다. 반정부 농민 세력이 6월 1일 전주를 함락하자 민영준은 領敦寧 金炳始의 반대를 꺾고 국왕의 어명을 받아 袁世凱를 통해 3일 청병의 조선 파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일본 군부는 이미 5월 20일 육군 소좌 이지치 고오스케(伊地知幸介)를 통해 조선농민 반란정보를 입수하고, 22일 대리공사 스기무라 후카시(杉村 濬)는 외무성에 출병준비 의견서를 제출한 바 있기 때문에 외무대신 陸奧는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전 29일 “목하 조선정부가 청국에 원병을 요청했다”는 풍문의 진위를 보고하도록 지시할 만큼 조선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날 경우를 대비하여 파병할 만반의 대책을 세우고 있었다.
6월 1일 조선 정부의 청병 지원을 탐문한 杉村는 공관 번역관 鄭永邦을 비밀리 원세개에게 보내 “동학폭도가 창궐하여 상무를 크게 손해를 입혀 이런 일은 크게 우려할 일이며 … 귀 정부는 어찌하여 신속히 조선을 대신하여 진압하지 않는가? 우리 정부는 절대 다른 의도가 없다”라고 하여 오히려 청의 무력 진압조치를 재촉하였다. 다음 날 원세개로부터 조선의 파병요청 사실을 확인한 杉村가 이 사실을 본국 정부에 보고하자 이 날 임시 각의에서는 “만약 중국이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떤 명분을 쓰더라도 아국도 반드시 군대를 파견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였다. 군비확장과 조약개정 교섭을 둘러싸고 대외강경운동이 고양되어 내각탄핵이라는 정치적 위기를 맞은 伊藤수상은 재빨리 衆議院 해산을 결의하고 긴급소집된 임시각의에서 이 사실을 보고한 뒤 외무경 陸奧, 외무차관 하야시 타다스(林童), 참모차장 카와카미 소오로쿠(川上操文) 등 3인의 의견을 받아들여 일본이 壬午·甲申의 조선사변에서 청국에 승기를 제압당해 실패를 자초한 결과와 이 두 차례의 치욕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청국보다 많은 병력을 동원해 신속히 서울에 진입하여 청군의 입경을 저지한다는 강경한 방침을 결정하였다.
6월 5일 明治天皇이 참모본부내에 대본영 설립을 승인하자 이 날 외상 陸奧는 주조선 공사 大鳥에게 “조선에서 우세를 취득하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삼고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되 비록 평화를 파괴하는 것은 전적으로 내가 책임진다”고 하여 전쟁 도발 단서를 찾는 임무를 부여하였다. 원세개로부터 上國체면을 위해서라도 파병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이홍장은 천진조약에 따라 일본 정부에 파병을 통고한다면 별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판단하여 7일 주일 공사 汪鳳藻를 통해 直隷提督 葉志超 휘하 청병 1,500명이 속방보호를 위해 출병한다고 통고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즉각 주북경 대리공사 고무라 준타로오(小村壽太郞)를 통해 천진조약에 따라 공관과 거류민 보호라는 구실을 내세워 출병을 통고하고 1개 혼성여단 병력의 출병을 강행하였다.
9일 大鳥와 함께 인천에 도착한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소장 휘하 일본군함 6척은 곧 488명의 육전대를 편성하여 대포 4문을 대동하고 조선의 저지를 물리치고 서울에 진입한데 이어 12일 1,024명의 보병대대와 15일 2,700명이 계속 인천에 도착함으로써 淸軍보다 3배 우세한 병력으로 조선 정국과 정부를 무력으로 장악하여 군사상 淸軍의 기선을 제압하였다. 7일 일본의 출병이 조선의 요청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제물포조약 제5조와 천진조약 제3조에 근거한 것이라는 杉村의 출병통고를 받은 조선은 즉시 그에게 파병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다음 날 주일공사 金思轍을 통해 일본의 파병에 항의하였다.
9일 외무독판 조병직은 주서울 외교사절단의 힘을 빌려 일본의 출병을 중지시키려고 하였다. 동시에 러시아 임시대리공사 케에르 베르그(Pavel de Kehrberg)와 독일 부영사 젬부시(Zembush)도 大鳥에 일본군의 대거침입을 항의하였다. 그러나 휴가중인 고령의 미국 대표 씨일(M. B. Sill)은 참여하지 못해 외교사절단의 동원으로 일본에 압력을 가하려는 조선정부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다행히 6월 11일 정부와 농민군 사이에 全州和約이 성립되어 외국이 간섭할 구실이 없어졌음에도 일본은 大鳥가 보고한 군대 상륙 중지 요청을 외면하고, 그들이 염려하는 영·미·러 등 열강의 간섭을 교묘히 피하면서 전쟁을 일으킬 구실을 찾고 있었다.
15일 일본은 원세개와 大鳥공사가 수 차례 회담에서 토의한 청·일 공동철병안을 파기하고, 조선에 내정개혁을 요구하기로 결정한 후 다음 날 주일 汪공사에게 각의에서 결정한 일·청 공동 진압과 조선 내정 공동개혁안을 통고하고 이 결과에 따라 공동철수 문제를 결정한다는 입장을 전달하였다. 외무대신 陸奧가 이 내정 개혁안은 “우리 외교의 위치를 일시에 피동자의 위치에서 주동자로 변화시켰다”고 실토한 것처럼 청의 공동철수안에 대한 逆代案으로 조선 내정 공동개혁안이 제의되었다.
21일 汪공사는 조선의 내정 개혁은 강화도 조약 제1조에 위반되며, 일본은 조선의 자주를 인정하여 내정을 간섭할 권리가 없다고 하여 일본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다음 날 일본은 단독으로 조선에 내정개혁 의사를 밝힌 뒤 청에 제1차 절교서를 보내 開戰도 불사하겠다고 하여 내정개혁안을 전쟁 도발 수단으로 삼았다. 26일 大鳥는 고종에게 전략상 조선 독립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내정개혁 필요성만을 거론한 다음, 내정개혁위원 임명과 개혁에 관해 자기와 협의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일본군 철수가 선결문제이고, 내정개혁은 자주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일본의 내정간섭을 격렬히 비난하자 28일 大鳥는 내정개혁과 종속의 두 문제에 대한 조선정부의 회답을 29일까지 요구하였다.
7월 1일 일본은 조선에 재정 조사, 관리 도태, 병제 개혁과 경찰 설립 등 7개항의 내정개혁안을 제출하였다. 3일 大鳥는 申正熙·金宗漢과 내정개혁안을 협의하였으나 신정희는 “정부는 남쪽에 소란이 있은 이래 바야흐로 更張을 꾀하고 있다”고 알리면서 오히려 일본의 先撤兵이 이루어진 후 내정개혁안을 의정할 것임을 통고하였다. 다음날 大鳥는 杉村을 보내 개혁조사위원으로 국왕이 신임하는 중신 몇 사람을 임명할 것을 요구하고 5일 하오까지 회답할 것을 강요하자 정부는 부득이 7일 신정희 등 3명을 내정개혁교섭위원으로, 김홍집 등 5명을 총재로, 박정양 등 15명을 위원으로 임명하여 교섭토록 하였다.
조·일간 제1차 내정개혁위원회에서 大鳥는 “친일 정부를 세워 일본에 협력하지 않는 관리에 타격을 주고, 전쟁에 필요한 해안·철도 및 각 도시간 전선 수리 및 설치를 내용으로 하는 여섯 가지의 條款을 제출하고 3일 내에 타결해 주도록 요구하였다. 12일 청이 영국의 조정을 거부한 것을 계기로 일본은 개전을 결정하고, 청에 제2차 절교서를 전달하는 한편, 13일 大鳥에게 청·일간 충돌을 촉진하는 것은 오늘날의 급선무이므로 이를 단행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이라도 꾀하라고 하여 강압적인 수단으로 개전정책을 실행토록 훈령하였다.
17일 영·일 통상항해조약이 개정된 다음 날 명치천황은 樞密院 의장이 참석한 회의에서 개전을 결정하였다. 19일 大鳥가 일방적으로 조선에 서울-부산간 군용전신선 가설과 일본 군대 병영 건축을 강행하자 이 날 저녁 원세개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서울을 떠나 버렸다. 이러한 상황하에 大鳥는 다음 날 종속문제를 꺼내어 조선으로부터 청군의 퇴거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폐기를 요구하는 등 강압적인 수단으로 和戰 최후통첩을 보내 22일까지 회답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大鳥에게 “조선은 자주적이며 강화도 조약을 위반한 적도 없으며, 청군의 京內 주둔은 조선의 요청에 의한 것이나 반란이 진정된 후 이미 수 차 철병을 요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貴國처럼 철병하지 않기 때문에 고심하고 있다”는 회답을 보냈으나 일본의 개전 결심을 막을 수는 없었다.
23일 일본의 경복궁 점령 계획이 완료된 상태에서 大鳥는 대원군에게 사태가 병력동원을 가능케 한다고 통고하고 왕궁을 포위한 후 일병의 호위 하에 쿠데타를 일으키고 金嘉鎭·兪吉濬 등으로 구성된 친일 김홍집내각을 수립하였다. 25일 대원군은 부득이 조·청간 제조약의 폐기와 개전을 위한 청군의 철수를 주장하고 27일 일본은 대원군을 견제하는 軍國機務處를 설립토록하여 그들이 지원하는 친일 개화파 인사들로 하여금 실권을 장악케 하여 내정개혁안을 구체화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국내 정치권의 상황이 급변한 가운데 이홍장이 영국의 전쟁개입이나 지지를 얻고자 용선한 영국 국적의 高升號에 청 병력 1,100명과 선원 67명, 선장과 유럽인 8명, 여객 1명을 싣고 영국기를 게양하고 牙山으로 향하던 중 7월 25일 朝鮮 近海 豊島海上에서 일본함대의 일방적인 발포로 격침되었다. 동시에 이 날 일본 육군의 우세한 병력은 牙山주둔 淸軍에 공격을 개시하여 개전이 선포되기 전 청의 권위와 자존심을 짓밟는 중대한 전쟁 도발을 자행하자 청은 부득이 속방을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8월 1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여 양국간에 조선의 통치권을 에워싼 쟁탈전이 시작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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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1. 통치기구의 재정비
갑신정변은 조·청 양국간의 종속관계를 청산하고 전통적인 체제를 개혁함으로써 근대국민국가를 건설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 정변의 실패로 서구의 제도와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발전시키려고 노력했던 金玉均·朴泳孝·洪英植·徐光範 등 이른바 急進(變法)開化派는 살해당하거나 일본으로 망명함으로써 정계내에서 제거되었다. 아울러 ‘開化’라는 말조차 꺼낼 수 없을 정도로 개항 이래 추진되어 왔던 개화·자강운동은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청국의 후원을 받았던 金弘集·金允植·魚允中 등 漸進(穩健·時務)開化派는 의정부 중심의 전통적 행정기구의 요직을 차지하여 정변으로 인한 정치·사회적 혼란을 수습하는 데 앞장섰다. 1884년 10월 19일부터 21일에 걸쳐 단행된 인사개편에서 갑신정변 당시 청국군의 개입을 袁世凱에게 요청하였던 沈舜澤은 領議政에, 정변에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였던 김홍집은 左議政 겸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外衙門) 督辦에, 김윤식은 兵曹判書 겸 江華留守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協辦에, 어윤중은 宣惠廳提調에 각각 임명되었던 것이다. 반면에 민씨척족 중에서는 閔泳翊이 前營使에, 그리고 閔種黙이 漢城判尹에 등용되었을 뿐이었다.
그후 1884년 11월 24일 김홍집은 特派全權大臣으로 임명되어 갑신정변의 善後처리를 위해 내한한 일본측 전권대신 井上馨과 漢城條約을 체결하였고, 어윤중은 11월 7일에 호조참판을 겸직한 데 이어 1885년 1월 8일에 貢市堂上에 임명되었다. 특히 김윤식은 12월 7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독판으로 승진되어 외교업무를 장악하면서 고종과 민씨척족이 引俄拒淸策의 일환으로 추진한 제1차 조러밀약을 무효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로써 조선정계 내에서는 청국의 후원을 받은 김홍집·김윤식·어윤중 등이 군사·재정·외교권 등을 장악하고 민씨척족세력을 견제하면서 국정을 주도하게 되었다.0143)
한편 갑신정변을 무력으로 진압한 청국은 1879년 이래 취해왔던 조선에 대한 소극적인 견제정책을 버리고 적극적인 간섭정책을 취하기 시작했다. 청국의 대조선정책을 입안했던 北洋大臣 李鴻章은 정변발생의 근본원인을 고종의 우유부단과 민씨척족의 전횡, 그리고 일본의 책동에 말미암은 친일적 개화파의 반청 자주노선의 추구 등으로 파악하고 조선의 내정·외교에 깊숙히 관여·조정하는 정책을 채택하였던 것이다.0144)
우선 청국은 온건개화파들을 앞세워 반청세력의 기반이었던 기구 및 제도를 개편함으로써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강화시켰다. 이러한 청국의 의도는 정변 직후 고종이 1884년 10월 20일부터 23일까지 下都監에 駐防한 淸軍의 營務處에 머물면서 總理營務會辦朝鮮防務 袁世凱의 권고에 따라 이뤄졌던 제반 조치에 잘 반영되어 있다. 고종은 10월 21일에 정변 당시 반포된 모든 傳敎를 환수하는 동시에 郵政局을 혁파하고 統理軍國事務衙門을 議政府에 ‘合付’시켰다. 특히 통리군국사무아문을 폐지한 것은 청국이 조선의 개화·자강사업을 통제하는 한편 이 기구를 통해 실권을 행사하고 있던 민씨척족세력을 견제·약화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어 11월 30일에 고종은 金允植이 代撰한 綸音을 반포하여 모든 국정을 議政府에 위임한다는 뜻을 밝힘으로써 갑신정변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정국 운영권을 의정부에 넘겨주었다.0145)
또한 청국은 갑신정변 이후 점차 반청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던 고종과 민씨척족을 견제하기 위해 興宣大院君 李昰應의 放還을 추진하였다. 정변 직후 對日紛爭의 확대 방지를 최우선과제로 삼았던 청국 조정은 조선정계의 혼란을 야기할지도 모를 대원군의 석방에 반대하였던 입장을 바꾸어 1884년 12월 6일과 1885년 봄 두 차례에 걸쳐 李鴻章으로 하여금 고종에게 그의 귀국을 간청하도록 종용하였던 것이다. 이에 1885년 3월 20일 고종은 일단 李鴻章의 권고를 받아들인다는 태도를 표명할 목적으로 閔種黙 등 陳奏使일행을 청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0146)
그러나 대원군의 귀국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가 약화될 것을 염려한 고종과 민씨척족세력은 진주사일행의 출발을 고의적으로 지연시키는0147) 동시에 4월 초순경에 閔泳翊을 天津에 파견하여 대원군의 석방을 저지시키려고 하였다. 이홍장은 민영익에게 대원군과의 화해를 권유하였지만, 대원군의 석방이 이미 결정되어 버렸음을 인지한 민영익은 이를 거절하고 귀국하였다. 그 결과 청국과 고종 및 민씨척족세력간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어 갔다.
한편 청국의 내정간섭이 갈수록 심화되는 상황 속에서 高宗은 정치적 권한과 입지를 확보·강화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이를 위해 고종은 3월 29일에 김윤식을 병조판서직에서 해임시켰으며, 4월 6일에 宣惠廳에서 경기도 여주·남양을 제외한 各邑許代를 時價代納토록 한 啓請이 事體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선혜청당상 어윤중을 파면시키는 등 정부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친청파 관료들을 축출하였던 것이다.0148)
아울러 고종과 민비는 閔丙奭·閔種黙·閔泳緯·閔世鎬·閔泳煥·閔肯(炯)植 등 민씨척족을 의정부와 6조, 그리고 승정원의 요직에 대거 등용함으로써 세력기반을 재강화하였다. 즉, 閔丙奭은 2월 24일에 어윤중의 후임으로 호조참판을 거쳐 3월 25일에는 도승지에, 閔種黙은 3월 29일에 김윤식의 후임으로 병조판서에, 閔泳緯는 4월 11일에 이조판서를 거쳐 5월 16일에 의정부 좌찬성에, 閔世鎬는 4월 11일에 호조참판에, 閔泳煥은 공조참판·지의금부사·승지를 거쳐 4월 11일에 규장각 직제학에, 閔肯(炯)植은 전라도병마절도사를 거쳐 4월 30일에 병조참판직에 각각 발탁되었던 것이다. 특히 5월 2일 평안도관찰사 겸 친군서영사 閔應植은 고종의 명령에 따라 평양의 병정을 이끌고 상경한 후 23일에 좌영사직에 올라 왕실의 보호를 책임지는 역할을 맡았다.0149)
이처럼 갑신정변으로 말미암아 위축되었던 민씨척족을 정부 요직에 집중 배치한 고종과 민비는 국정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4월 25일 청국에 의해 강제 폐지당했던 統理軍國事務衙門을 부활시키려고 시도하였다. 이는 당시 청국의 대조선 내정간섭이 점차 강화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친청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던 김윤식 등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운영권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어 그 기능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가 청국에 의해 통제받자0150) 5월 25일 고종은 다시 “軍國庶務를 總察”하는 동시에 “宮內事務를 兼管”할 內務府를 신설한다는 교지를 반포하였다. 고종과 민씨척족은 청국이 반대할 빌미를 주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청국에서 1653년 황제직속기구로서 宮內사무를 전담하기 위해 설립되었던 淸國의 ‘內務府’를 본떠 동일한 명칭의 내무부를 설치함으로써 군주권 내지 주권을 보존하고, 나아가 富國强兵에 관련된 개화·자강정책을 적극 추진하려고 했던 것이다.
내무부 설치 敎旨가 발표된 지 보름 뒤인 1885년 6월 10일에 의정부는 전문 15조로 구성된<內務府 新設節目>을 마련하였다. 그런데 이 절목은 당상관의 五衛都總官직 겸임 금지조항이 삭제된 것만 제외하면 통리군국사무아문의 그것과 내용상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0151) 따라서 내무부는 청국의 ‘내무부’에서 그 명칭을 따왔을 뿐 그 체제와 기능은 통리군국사무아문을 계승하였다고 볼 수 있다.0152)
內務府 新設節目 一. 衙門體統 一依政府例爲之爲白齊. 一. 衙門處所 以勤政殿東月廊爲之爲白齊. 一. 督辦 以正從一品 協辦 以正從二品 參議 以堂上正三品爲之 以督辦
有闕 則首協辦權差爲白齊. 一. 大臣堂郞 課日齊會爲白齊. 一. 軍國事務 獻可替否 究有至當爲白齊. 一. 堂上 依政院例 各有分掌爲白齊. 一. 如有進達事 請司謁入稟爲白齊. 一. 堂上一員 輪回入直爲白齊. 一. 仕進後 依政院例 仕記呈納爲白齊. 一. 堂郞 雖除拜臺職 勿拘仕直爲白齊. 一. 主事 勿拘文蔭武 以參上人擇差 副主事 亦以文蔭武參下及生進幼學擇 差而三十朔後陞六 依例陞付主事 分掌擧行 一員輪回入直爲白齊. 一. 堂上 除拜外任 則不得兼帶 以京畿監司守令四都留守 仍帶行公爲白齊. 一. 印信 令禮曹鑄成 一顆 以銀鑄成 用於御覽文蹟 一顆 鐵鑄成 用於各項
文簿爲白齊. 一. 書吏八人 掌務書吏一人 大廳直三名 徒隷三十名 文書職三名 軍士三名
朔料 以惠廳戶兵曹排給爲白齊. 一. 外他合行條件 追後稟旨施行爲白齊 (≪備邊司謄錄≫, 고종 23년 6월 9일).
이 절목은 내무부의 조직과 그 구성원에 대한 규정인데, 그 후 좀더 세밀한 규정이 추가되었다. 특히 8월 9일에 고종은 총리대신 沈舜澤에게 “여러 堂上·堂下官들과 함께 잘 토의하여 章程을 만들어 終始之效를 도모할 것”을 지시하였고, 이에 따라 내무부의 조직과 운영체제를 규정한<內務府 分司章程·事務規則>이 마련되었다.0153)
내무부의 신설절목과 그외 추가된 절목들, 그리고 分司章程·事務規則 등에 의하면 내무부는 의정부와 동일한 正一品衙門으로서 국왕을 보필하기 위해 궁궐 내 勤政殿 東月廊에 그 처소를 두었다.0154) 이와 같이 내무부는 ‘機密重地’의 위상을 갖추고 大臣과 堂郞이 매일 모여 中央의 각 관청 및 軍營과 지방의 8道·4都의 대소 사무를 의정부의 예에 따라 낱낱이 보고받아 군사 및 궁내사무를 비롯한 국가 중대사를 논의·결정하였으며, 주요 사안의 경우 국왕에게 직접 보고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내무부 堂上은 承旨가 국가의 중대 사안을 가지고 입시하거나 국왕이 殿座에서 정무를 처리할 때 항상 참여하여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으며, 국왕의 행차 때 수행·보좌하는 임무를 맡아 보았던 것이다.0155)
내무부는 總理大臣을 수반으로 해서 正·從一品의 督辦, 正·從二品의 協辦, 堂上正三品의 參議 등 堂上官과 文·蔭·武官 및 生員·進士·幼學 등의 배경에 구애없이 선발된 主事와 副主事 등 堂下官, 그리고 書吏·掌務書吏·大廳直·徒隷·文書職·軍士 등 관리직으로 구성되었다. 총리대신은 당상관이 상의해서 마련한 各司의 사무를 보고받아 결정·처리하는 내무부의 최고위직이며, 독판은 각사의 업무를 총괄하는 실질적인 책임자였고, 협판과 참의는 실무를 담당하는 관리로서 각각 독판과 협판의 직무를 보좌하였으며, 주사와 부주사는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하급관리였다.0156)
내무부의 당상관과 당하관은 相避제도에 구애받지 않았다. 특히 당상관은 臺職을 포함한 중앙의 모든 관직과 지방관직 중에서도 경기감사·수령과 4도의 유수를 겸직할 수 있었다. 더욱이 1886년 9월에 이르러 군사업무를 담당한 병조판서와 중앙군영의 營使, 그리고 재정을 관할하는 호조판서와 선혜청당상 등이 내무부의 당상관직을 예겸하도록 하는 규정이 만들어짐으로써 내무부는 그 권한과 기능이 한층 더 강화되어 갔다.0157)
이와 같이 내무부는 국왕의 직속기구로서 국왕을 보필하는 동시에 君主權의 강화와 개화·자강책을 추진하는 기구로서 출범하였다. 또한 그 업무를 효율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당상관들로 하여금 군사와 재정을 포함한 중앙정부의 요직을 겸임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점차 조선 중기의 備邊司를 방불케 하는 최고의 국정의결·집행기구로 발전할 수 있었다. 아울러 내무부는 비변사와 달리 그 堂郎이 상피제의 구속을 받지 않음으로써 특정 권력가문에 의해 운영될 수 있는 가능성도 농후하였다.
내무부는 설치 당시 일시적으로 承政院의 예에 따라 吏·戶·禮·兵·刑·工務 등 6務로 조직되었지만, 곧이어 1885년 6월 20일경에 職制·修文·軍務·司憲·地理·工作·農務局 등 7局의 독자적인 편제를 갖추게 되었다. 이어 6월 24일에 高宗이 내무부관리들을 처음 접견한 자리에서 그들에게 ‘利國便民’에 힘쓸 것을 당부한 후 내무부는 8월 1일경 7局을-예전의 통리기무아문·통리군국사무아문과 현존하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조직과 동일한-7司로 개명하게 되었다. 이때 7사는 司憲局의 명칭만 典憲司로 바뀌었을 뿐이었다.0158)
內務府 分司章程 一. 職制司 掌各官職薦撰賞勳啓文承宣外務等事. 一. 修文司 掌典禮學校圖書修史天文施醫記簿等事. 一. 地理司 掌各道山川道里治水監繕田地商務稅務財務漕運鑛山造幣典艦等事. 一. 農務司 掌裁種牧養堤堰漁獵煮鹽開拓等事. 一. 軍務司 掌各道水陸軍兵演操參謀兵器鎭堡運粮測量軍馬等事. 一. 典憲司 掌戶籍各道人口法律警察詞訟等事. 一. 工作司 掌各道工匠土木金石機器造船鐵道電線郵便橋梁製紙營繕織繰等事. (≪東萊府啓錄≫, 고종 22년 8월 1일)
이 장정에 의거하여 7司의 소관업무를 살펴 보면 직제사는 관리추천과 외교업무를, 수문사는 典禮와 문서작성·정리 및 교육업무를, 지리사는 조운·광산·조폐 등의 稅源발굴과 재정업무를, 농무사는 농수산업의 육성업무를, 군무사는 군대훈련·設鎭·군량마련·무기제조 등의 군사업무를, 전헌사는 법률 및 치안업무를, 공작사는 기기·조선·철도·전선·우편·교량·製紙 등 각종 근대적 시설의 설치·운영업무를 각각 관장하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내무부는 외교·교육·재정·군사·치안·산업 등 국정 전반에 걸친 사무를 총괄하는 권한을 가졌다.0159)
이로 말미암아 내무부의 소관업무는 전통적 행정기구인 의정부·6조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4司 1學의 그것과도 상당 부분 중첩될 수 밖에 없었다. 예컨대 내무부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조직을 비교하면 외교방면에서 직제사와 掌交司가, 재정방면에서 지리사와 富敎司가, 개화기구의 운영방면에서 공작사와 郵程司가, 교육방면에서 수문사와 同文學이 각각 중복된 업무를 맡게 되었던 것이다.0160)
아울러 1885년 8월부터 1891년 11월까지 내무부 산하에는 개화·자강업무를 추진하기 위한 각종 기구들이 설치되었다. 내무부는 惠商公局을 개칭한 商理局을 비롯하여 典圜局0161)·鑛務局·轉運局·交換局을 지리사에, 機器局을 공작사에, 育英公院을 수문사에, 農業牧畜試驗場을 개칭한 種牧局을 農務司에, 鍊務公院을 軍務司에 각각 두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1885∼1894년간 내무부는 개화·자강에 관련된 모든 사업을 효율적으로 조정·관장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0162)
이처럼 내무부가 신설되거나 개편된 자강사업 추진기구들을 그 산하기구로 편입시키는 방향으로 조직을 정비해 나감에 따라 그 소관업무가 중복되었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조직은 상대적으로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그 결과 1887년 4월 27일에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그 기능이 이미 상실된 富敎司·郵政司와 同文學을 폐지시키고 예하에 외교·통상업무를 전담하는 6사만을 남겨놓게 되었다.0163)
이렇게 업무분야를 확정지은 내무부는 1887년 중반부터 1891년 11월 16일 交換局을 설치하여 화폐개혁을 시도할 때까지 7사와 그 산하기구를 통해 각종 개화·자강사업을 추진하는 동시에 청국의 대조선 종주권 강화정책에 대항하는 자주외교를 펼쳐 나갔다.0164)
그러나 1894년 봄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였을 때 그들의 진압에 실패한 조선정부는 내무부 독판 민영준의 주장을 받아들여 청국군의 파병을 요청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선에 파병한 일본은 정부측과 농민군 사이에 全州和約이 맺어지게 되자 駐兵의 명분을 만들려고 조선정부에 내정개혁을 단행하라고 촉구하였다. 이때 일본 특명전권공사 大鳥圭介가 조선측에 제시한<內政改革方案綱領>은 바로 內外政務를 궁중사무와 분리하고 의정부로 하여금 이를 총괄케 함으로써 ‘世道執權 弊制’의 本山이었던 내무부를 폐지하는 데 주안점을 둔 것이었다.0165) 따라서 6월 8일 고종은 내무부 독판 申正熙, 협판 金宗漢과 曺寅承을 위원으로 임명하여 老人亭에서 大鳥공사와 내정개혁방안을 상의케 하는 한편 6월 11일 독자적으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校正廳을 설치한 뒤 여기에 내무부의 당상관을 대거 등용하였다.0166) 그러나 6월 21일 일본군의 경복궁 불법 점령 후 일본측의 후원으로 집권한 대원군은 내무부의 관료들을 현직에서 축출함과 동시에 25일에 자기를 지지하는 친일개화파를 중심으로 軍國機務處를 설치하였다. 이로써 내무부는 新官制가 시행되는 7월 20일까지 명목상으로만 유지되었다가 폐지되고 말았다.
0143) 尹致昊 著·宋炳基 譯,≪尹致昊日記≫上(探求堂, 1975), 295·301쪽;中央硏究院 近代史硏究所 編,≪淸季中日韓關係史料≫3(臺北:中央硏究院 近代史硏究所, 1972), 1541쪽.
0144) 1885년 10월 11일 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 袁世凱의 부임으로 본격화되었던 청국의 대조선 적극정책에 관해서는 林明德,≪袁世凱與朝鮮≫(臺北:中央硏究院 近代史硏究所, 1972);Young Ick Lew(柳永益), “Yüan Shih-k'ai's Residency and the Korean Enlightenment Movement,” The Journal of Korean Studies, Vol. 5, 1984;權錫奉,≪淸末 對朝鮮政策史硏究≫(一潮閣, 1986);李陽子,<淸의 對朝鮮政策과 袁世凱>(≪釜大史學≫5, 1981) 등 참조.
0145) 金允植,<常參綸音>,≪金允植全集≫下(亞細亞文化社, 1980), 82∼83쪽.
0146) 大院君의 釋還과정에 대해서는 申基碩,≪韓末外交史硏究≫(一潮閣, 1967), 265∼293쪽;權錫奉, 앞의 책, 305∼334쪽.
0147) 陳奏使는 6월 11일에 비로소 고종에게 사폐하였다. 4월 27일에 부사를 趙秉式으로 교체하고, 5월 7일 承文院의 咨文撰出에 대한 退定을 지시한 것은 모두 고종과 민씨척족이 가능한 한 진주사의 파견을 늦추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진다.
0148) 高宗이 친청 인사들을 본격적으로 정부요직에서 몰아낸 시기가 李鴻章이 丁汝昌제독을 서울에 파견하여 청·일 양국군을 조선에서 공동 철수시키기로 합의했다는 天津條約의 내용을 高宗에게 정식으로 통보했던 1885년 3월 26일 직후였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0149) 菊池謙讓,≪近代朝鮮史≫下(京城:鷄鳴社, 1940), 180∼181쪽;韓哲昊,<閔氏戚族政權期(1885∼1894) 內務府 官僚 硏究>(≪아시아문화≫12, 1996), 262∼265쪽.
0150) 4월 25일부터 5월 25일까지 약 한달 동안 조·청 양국간에는 통리군국사무아문의 부활을 둘러싼 의견대립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통리군국사무아문이 아닌 내무부로 그 명칭을 바꾼 것은 양국간의 타협에 의한 결과라고 여겨진다.
0151) 통리군국사무아문의 新設節目을 포함한 조직과 운영에 관해서는 韓哲昊,<統理軍國事務衙門(1882∼1884)의 組織과 運營>(≪李基白先生古稀紀念 韓國史學論叢≫, 一潮閣, 1994) 참조.
0152) 金允植도 內務府를 統理軍國事務衙門의 後身으로 보았다. 金允植,≪續陰晴史≫下(國史編纂委員會, 1960), 562쪽;≪時事新報≫, 1885년 9월 1일.
0153) ≪高宗實錄≫, 고종 22년 8월 9일;≪東萊府啓錄≫(≪各司謄錄≫12, 國史編纂委員會, 1984), 597∼598쪽. 고종은 8월 9일에 장정과 규칙을 만들도록 지시하였는데,≪東萊府啓錄≫에 의하면 8월 1일조에<分司章程·事務規則>이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장정이 마련된 날짜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0154) 고종은 청의 간섭으로부터 기밀을 유지하는 동시에 국왕의 역할을 증대시킬 목적으로 내무부를 궐내에 설치하였으며, 따라서 내무부는 근시기구의 성격을 갖는다고 파악되기도 한다. 연갑수,<개항기 권력집단의 정세인식과 정책>(≪1894년 농민전쟁연구 3≫, 역사비평사, 1993), 132∼133쪽.
0155) ≪日省錄≫, 고종 22년 6월 24일;고종 24년 4월 10·13일.
0156) <事務規則>,≪東萊府啓錄≫, 고종 22년 8월 1일.
0157) 이들 외에 大提學도 내무부의 당상을 예겸토록 하였다. 아울러 그후 정치권의 실세였던 민씨척족들이 대거 독판과 협판직에 진출하기 시작했다.≪日省錄≫, 고종 22년 6월 11일·고종 23년 9월 18일·고종 25년 9월 28일.
0158) 1885년 8월 1일에 7局이 7司로 변경되었다는 사실은 이 날자의≪日省錄≫에 주사와 부주사의 업무분장에서 地理司·軍務司·農務司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고 있고, 새로 발견된<內務府 分司章程>에 역시 7사의 명칭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알 수가 있다.≪東萊府啓錄≫및≪日省錄≫, 고종 22년 8월 1일;김필동,<갑오경장 이전 조선의 근대적 관제개혁의 추이와 새로운 관료 기구의 성격>(≪한국의 사회제도와 농촌사회의 변동≫, 文學과 知性社, 1992), 53∼54쪽 참조.
0159) 이들 7사의 업무를 통리군국사무아문의 6사와 비교해 보면, 군무사는 그 명칭과 기능이 동일하였으며, 직제사는 掌內司와 典選司, 지리사는 理用司, 농무사는 農商司, 공작사는 監工司의 그 소관업무를 각각 일부 계승하였고, 그외에 수문사의 직무가 추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0160)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4司 1學의 소관업무에 관해서는≪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章程≫(奎章閣 #21783) 참조.
0161) ≪日省錄≫, 고종 22년 8월 24일. 전환국의 총판에 조폐사무를 관할했던 지리국이 아니라 공작사의 협판 閔泳煥이 임명된 사실은 아직까지 업무에 따른 올바른 인사행정이 이뤄지지 않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
0162) 내무부의 조직에 관해서는 韓哲昊,<閔氏戚族政權期(1885∼1894) 內務府의 組織과 機能>(≪韓國史硏究≫90, 1995), 9∼14쪽.
0163) 이 시기는 주차관 袁世凱와 가장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민씨척족세력과 반목상태에 있었던 金允植과 魚允中이 朴泳孝의 부친 朴元陽 장례사건으로 궁지에 몰렸던 시기이기도 하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조직 개편과정에 관해서는 田美蘭,<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에 關한 硏究>(≪梨大史苑≫24·25 合輯, 1990), 223∼227쪽.
0164) 1887년 7월 24일에 7사의 印章이 만들어졌다는 점은 7사의 업무가 본격화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또한 동년 12월 25일 “自今爲始 邊務事外務事軍務事狀啓 內務府啓下事 政院知爲”라는 교지는 내무부가 외교업무를 장악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日省錄≫, 고종 24년 7월 24일;≪備邊司謄錄≫, 고종 24년 12월 25일.
0165) <內政改革方案綱目>중 일본측이 10일 이내에 결정해 줄 것을 요구한 사항은 내무부중심의 권력구조 폐지와 내무부를 통해 권력을 행사해 온 민씨척족세력의 제거에 촛점을 맞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高麗大學校 亞細亞問題硏究所 編,≪舊韓國外交文書:日案≫2(高麗大學校出版部, 1967), 667쪽;日本外務省 編,≪日本外交文書≫27:1(東京:日本國際連合協會, 1936), #396, 586∼591쪽.
0166) 1894년 6월 13일에 행지중추부사 金永壽, 이조판서 尹用求, 호조판서 朴定陽, 병조판서 閔泳奎, 한성부판윤 申正熙, 행대호군 李裕承·金晩植·趙鍾弼, 협판 沈相薰·金宗漢·曺寅承·金思轍, 예조참판 朴容大, 개성부유수 李容稙, 한성부우윤 魚允中 등 15명이 교정청 당상에 임명되었는데, 그 가운데 과반인 9명이 내무부 당상관이었다.≪高宗實錄≫, 고종 31년 6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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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민씨척족정권의 시정
1885∼1894년간 민씨척족정권은 재정·군사·외교·치안사무 등 국정전반을 총괄하는 권한을 내무부에 집중시켜 최고의 의결·결정기구로 만들고 이를 통해 정권을 장악함과 아울러 각종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즉, 민응식·민영익·민영환·민영준 등 민씨척족은 내무부의 독판 내지 협판직을 장기간 보유한 채 병조판서, 중앙군 영사 및 호조판서, 선혜청당상, 전환국 등 군사·재정관련부서와 육영공원 및 연무공원 등 개화·자강추진기구의 요직을 번갈아 역임함으로써「勢道」로 행세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중앙군의 영사 내지 지방군의 책임자로서 군대통솔권을 장악하였던 金箕錫·鄭洛鎔·韓圭卨·李鐘健 등 親閔系 武官들과 함께 왕실의 안전과 정권의 군사적 기반을 공고히 하는 동시에 국제정세에 비교적 밝고 외국어에 능통하거나 時務능력을 갖춘 朴定陽·金嘉鎭·金鶴羽 등 개화파 관료들을 내무부에 발탁·활용하여 개화·자강정책 및 자주외교정책을 펼쳐 나갔던 것이다.0167) 따라서 민씨척족정권의 시정은 내무부가 입안·시행했던 안건들에 잘 반영되어 있다.
민씨척족정권은 권력 유지를 위해서 이른바「富國强兵」策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그들은 강병보다는 부국에 중점을 두고 정책을 추진했다. 내무부 당상관은 戶曹와 宣惠廳의 당상관직을 겸하였을 뿐 아니라 지리사 산하에 전환국·교환국·광무국·전운국 등을 관할함으로써 국가재정을 실제적으로 운영해 나갔다. 내무부가 강구하였던 재정확보책으로는 왕실의 內帑金과 紅蔘의 제조·무역권 등 王室財政의 관리, 鑄錢·開鑛·轉運 등 새로운 財源開發 사무의 전담 등을 들 수 있다.
내무부는 “軍國庶務를 總察”하는 동시에 “宮內事務를 兼管”할 목적으로 신설되었는데, 궁내사무로는 王室의 內帑金과 紅蔘의 전매를 관리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우선 내무부는 왕실에 필요한 공물을 납부하는 貢市人과 市廛상인들에게 호조와 선혜청을 통해 그들의 활동자금을 분배해 주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또한 내무부는 大王大妃 趙氏가 사망하였을 때 친군영의 무명 130동과 삼베 100동, 선혜청의 무명과 삼베 각 20동, 그리고 호조의 삼베 30동을 갹출하여 그 장례비에 쓰도록 조치하였다. 이와 아울러 내무부는 惠商公局을 商理局으로 개칭하여 예하에 소속시킴으로써 전국의 褓負商을 관리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내무부는 조선 초기부터 對淸 무역의 수출품으로서 국가의 중요한 재원이었던 紅蔘의 專賣權을 장악하였다. 원래 홍삼의 제조·무역권은 특정상인과 역관 등이 독점하고 왕실은 이들에게 蔘稅를 징수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으나 1884년부터 왕실이 이를 직접 관할하여 왕실의 재원으로 충당하기 시작했다.0168) 따라서 1885년 이후에는 궁내사무를 관장하게 된 내무부가 홍삼을 관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1886년 8월 11일 내무부는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기 위하여 赴燕使가 갖고 가는 包蔘(紅蔘)의 수량을 5천근 더 추가로 지정하는 동시에 포삼의 密貿를 방지하기 위해 禁潛規定을 엄격히 시행하고, 이의 위반자를 梟首에 처하라고 국경지역에 접한 각도 관리들에게 지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후 홍삼 밀무가 끊임없이 행해지자 내무부는 홍삼을 밀조하여 수출한 개성상인을 군민 앞에서 효수시키고, 사전에 적발된 居間들을 遠惡地에 유배시키는 등 엄중한 조치를 내렸다.0169)
이처럼 내무부는 내국인의 홍삼 밀매를 엄격하게 단속하였지만 외국인의 범법행위에 관해서는 직접적인 통제를 가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이 그 업무를 대신하였다. 예컨대 1887년에 인천에 정박했던 청국군함이 귀국하면서 80상자의 홍삼을 실어 가려고 했을 때 인천세관장인 쉐니케(J. F. Schönicke)가 禁需品임을 이유로 허가하지 않았다. 그러자 인천주재 청국영사는 이 사실을 駐箚官 袁世凱에게 알렸고, 그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독판에게 홍삼 반출을 허락하도록 압력을 넣었기 때문에 쉐니케도 어쩔 수 없이 묵인하고 말았다.0170) 또한 1888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외국상인-특히 淸商-이 홍삼을 偸運하는 일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 인천·부산·원산 3항의 관리에게 이를 엄금하라는 공문을 내리기도 하였다.0171)
다음으로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시도한 방법 중의 하나는 근대적 금속화폐를 주조하여 그 수익을 얻는 것이었다. 갑신정변 직후 주전정책을 담당했던 典圜局은 물가급등으로 인한 폐해를 방지하기 위해 當五錢의 주조를 억제하였다. 그러나 1887년 4월 18일에 국가의 재정난이 심화되자 내무부는 經用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銅産地에 인접해서 원료공급이 용이한 昌原·馬山에 전환국의 專管 아래 委員을 파견하여 당오전을 주조하였다. 이처럼 전환국 위원을 파견하여 직접 주전사업을 감독케 한 것은 화폐발행권의 중앙 통제라는 긍정적인 측면도 없지 않았다.0172)
그러나 1888년 5월 18일에 내무부는 留守營으로 승격된 春川府의 경비를 조달할 목적으로 西江의 伏波亭과 濯纓亭에서 당오전을 주조토록 하되 春川府와 戶曹로 하여금 이를 관리토록 하였으며, 鎭禦營에서도 주전사업을 재시행하게 함으로써 사실상 전환국의 단독적인 주전사업 관리체제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말았다. 더욱이 1888년 7월 이후에는 서울의 萬里倉 등 3곳에서 국가가 단지 세금만을 징수하는 請負鑄錢事業이 허가되기에 이르렀다. 청부주전업자가 국가에 바치는 세금은 주전일수를 기준으로 산정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야간에도 작업을 강행하였다. 그 결과 당오전의 품질은 더욱 조악해졌고, 화폐가치의 하락으로 통화의 문란은 극심해질 수 밖에 없었다.0173) 이에 내무부는 만리창에서 만든 당오전을 다시 주조하라고 명령하고, 앞으로 조악한 화폐주조가 재발할 경우 都監官과 都邊首 및 해당 당상관을 중죄로 다스리겠다고 엄칙하였다.
그러나 1889년 9월 25일 고종은 군량을 보충하기 위한 방편으로 주전소가 보유한 백만냥을 내무부로 하여금 호조·선혜청·친군영·각영에 분획하도록 지시하였다. 또한 1890년 12월 19일에 전환국은 서북지방의 銅鉛산지에서 가까운 평양에 주전소를 설치하여 관찰사의 전관하에 주전을 재개하였다. 이때 평양주전소는 주조를 과다하게 강행함으로써 錢價의 하락과 물가상승을 촉발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주조이익을 얻기 위해 조악화를 남발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다.0174)
이에 대한 시정책으로써 내무부는 1891년 11월 5일 ‘新式貨幣條例’를 제정하고 전환국으로 하여금 銀銅화폐를 주조케 하는 동시에 交換局을 신설하여 엽전·당오전과 함께 통용할 것을 제안하였다.0175) 즉 전환국에서는 근대적인 조폐기술로 신식화폐를 주조하는 동시에 교환국에서는 구식화폐와 신식화폐를 교환하는 업무를 수행케 함으로써 화폐제도를 개혁코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해 1891년에는 일본에 파견된 전환국 幇辦 安駉壽의 주선으로 日本第五銀行 頭取 大三輪長兵衛와 大坂製銅株式會社長 增田信之를 각각 교환국 회판과 전환국 감독으로 초빙하는 한편 1892년에는 전환국을 인천으로 이전하여 신식화폐를 주전할 기계설비를 새로이 갖추었다. 아울러 화폐개혁을 주도할 인사가 이루어져 내무부 독판 겸 호조판서 朴定陽이 민영익을 대신하여 전환국 겸 교환국 관리로, 내무부 참의 成岐運이 전환국 겸 교환국 총판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閔丙奭이 관장했던 평양에서의 주조사업이 계속 진행되어 폐제문란을 야기시키다가0176) 일본화폐의 조선진출을 합법화시킨 ‘新式貨幣發行章程’이 발포되기 4일 전인 1894년 7월 8일에야 비로소 중단되는 등 ‘신식화폐조례’는 제대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0177)
한편 1880년대 초반 국가재정 확보책의 일환으로 광산개발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던 정부는 채광행위를 합법화시키는 한편 광업 주관부서를 설치함으로써 광무체계를 정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갑신정변으로 무산되어 버렸고 개광사업은 지방 감영의 관장 아래 이뤄지게 되었다. 따라서 당시에 근대식 기술과 대규모의 자본을 필요로 하는 광산개발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가적 차원의 재정지원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었다.0178)
이와 같은 추세에 부응하여 1887년 4월 5일 고종은 내무부의 지리국 산하에 광업행정을 전담할 鑛務局을 설치하고 내무부 협판 민영익을 그 총판으로 임명하였다.0179) 그후 내무부는 광무국의 체제가 완전히 정비될 때까지 각도의 광무를 엄격히 감독하기 위해 영흥부사 李容翊과 개천군수 申泰休를 함경남도와 평안북도 광무감리에, 그리고 李根澔를 광무국 방판에 각각 임명하는 한편 평양감사로 하여금 광무국 소속인 平壤 煤炭을 관할토록 조치하였다. 또한 광무국은 미국인 피어스(Aillerd I. Pierce) 등 외국인 기술자를 고빙하고 근대식 광무기기를 도입하여 광산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였으나 재정 부족 등의 이유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개항 후 청일 양국이 조선에 신식 기선을 도입하여 점차 무역을 확대시키고 상권을 장악하게 되자 정부는 1883년 稅穀운송기구인 轉運局을 설치함과 아울러 청국의 招商局, 영국의 怡和洋行, 독일의 世昌洋行 등 외국기선회사와 조약을 체결하여 조선 水域에 기선을 정기 운항하도록 조치하였다. 특히 정부는 이들 기선회사에게 赤字時 결손액을 보충해 주는 조건으로 稅米운송권을 부여함으로써 일본의 해운업 진출을 견제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1885년에 이르러 전운국은 제대로 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외국기선회사들도 무역부진 등을 이유로 기선운항을 중단하고 말았다.0180)
이에 내무부는 전운국의 체제와 기능을 강화시키고자 1886년 7월에 工作司를 통해 海龍號와 朝陽號 등 기선 2隻을 구입하여 전운국에 소속시킨 데 이어 1889년 말에 전운국의 산하에 청의 官督商辦기업인 招商局을 모방한 관영기선회사인 利運社를 창설하고 顯益號·利運號 등을 사들였다.0181) 아울러 내무부는 전운사무를 관장할 인원을 증원하고 그에 대한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내무부는 새로 구입한 기선의 관리책임자로 總務官을 두어 轉運御史를 겸임토록 하였으며, 인천항에 들여오는 세곡을 처리할 轉運委員과 세곡운반선을 감독하는 監運委員을 관할했다.
그러나 이들 기선의 구입비용은 대부분 외국의 차관으로 충당하였기 때문에 이를 상환하기 위해서 또다른 차관을 들여오는 악순환이 되풀이됨으로써 오히려 국가재정의 궁핍을 초래하였다. 또한 내무부는 전운국을 통해 공미수송에만 주력한 나머지 조선상인에 의한 연안 및 대외무역을 진흥시키는 정책을 펼치지 못하였다. 더욱이 내무부는 세곡운반권을 가진 전운국관리들의 횡포를 적절히 통제하지 못하고 농민들의 부담을 가중시킴으로써 동학농민군 봉기의 한 원인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요컨대 내무부는 왕실의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홍삼전매권을 관리하였으며, 새로운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주전기계를 도입하고 화폐개혁을 추진하였고, 외국인 기술자를 초빙하고 근대식 기기를 들여와 광산을 개발하였을 뿐 아니라 신식 기선을 매입하여 세곡운반과 무역에 활용하고자 하였다. 이외에도 내무부는 호남의 김제 등 11읍의 계속된 흉년으로 늘어난 陳廢田을 개간하기 위해 均田官을 파견하기도 하였다.0182)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사업은 재정을 확충시키지 못한 채 오히려 민폐를 유발하는 등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와 같이 내무부가 추진했던 재정확보책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게 됨에 따라 고종과 민씨척족은 차관도입을 통해 자금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차관정책은 청국의 내정간섭과 경제적 예속을 방지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청국 이외의 국가를 대상으로 추진되었다. 우선 1887년 민영익은 광산채굴권을 담보로 100만원을 차관하려고 시도하였다. 이 모채에는 조선의 광산에 관심을 가진 미국인 타운센트로부터 차관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미국보다는 가까운 일본에 의뢰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어 일본에 차관을 제의하였으나 일본이 응하지 않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 당시 차관목적은 은행을 설치하여 일본제일은행에서 징수하던 해관세 징수권을 회수하고 일본의 관세운용 간섭을 배제함으로써 재정결핍을 보충하는 한편 경인간 철도를 가설함으로써 공미운반비용을 절감하려는 데 있었다.
이어 1889년에 고종은 민영익·데니(Owen N. Denny)와 협의하여 기존의 외채를 갚아 재정을 정리하고 광산개발과 철도건설을 추진하기 위해 프랑스로부터 200만원을 모채하려고 하였다. 고종은 내무부 독판 金永壽와 주사 金彰鉉을 조선주재 프랑스이사관에게 보내 의뢰하여 반승낙을 받았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중지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고종은 데니와 한규설을 통해 영국이나 미국으로부터 차관도입을 재차 추진하였으나 역시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0183)
또한 1890년에 고종은 르젠드르(Charles W. LeGendre)를 고용하고 그를 통해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 차관을 도입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내무부 협판에 등용된 직후 일본으로 파견되어 은밀히 차관협상을 벌였으며, 이어 홍콩과 상해로 가서 은행개설을 명목으로 모채하였지만 청국의 저지공작으로 실패하고 말았다.0184)
이처럼 고종의 차관도입정책은 청국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벗어나는 동시에 기채대상국을 통해 조선에서 열강의 세력균형을 꾀하면서 청국을 견제하려는 목적을 지닌 것이었다. 따라서 청국은 조선의 차관도입을 저지하였으며, 나아가 조선에 대한 차관공여를 강요해 내정간섭을 강화시키려 하였다. 그리하여 청국은 일본 및 구미 열강에게 조선에 대한 차관중지를 요청한 데 이어 1892년 두 차례에 걸쳐 20만원의 차관을 제공해 주었다. 고종은 처음에 청국이 인천과 부산 등의 관세를 담보로 요구하자 난색을 표명하였지만 재정의 궁핍을 만회할 별다른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이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청국의 압제로부터 벗어나려고 시도된 차관도입정책은 청국의 강력한 방해공작과 재정의 취약성을 틈탄 차관대여라는 회유공작으로 실패하고, 오히려 청국의 내정간섭을 더욱 강화시키는 빌미를 준 셈이 되었다.
한편 내무부는 “軍國庶務를 總察”하기 위해 설치되었을 뿐 아니라 병조판서와 중앙 군영의 營使는 내무부의 당상관을 겸임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내무부는 군사통솔권을 장악하고 중앙과 지방의 군영으로부터 직접 군사업무를 보고받아 이를 총괄적으로 처리하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임오군란 직후 청의 군사제도를 참고하여 정비된 중앙의 新建親軍營制는 갑신정변 이후에도 1888년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또한 지방군도 친군영제에 따라 1885년에 平壤監營은 親軍西營으로, 1887년에 慶尙監營은 親軍南營으로, 江華軍營은 親軍沁營으로 각각 개편되었다.0185)
조선 정계내에 반청적인 분위기가 성숙되었던 1888년에 이르러 고종은 내무부를 통해 軍制改編을 시도하게 되었다. 즉 4월 19일에 고종은 기존의 군제가 재정낭비가 심할 뿐 아니라 500명으로 편제되는 각영의 군사로써는 서양식 훈련을 실시하기가 곤란하다는 이유로 親軍右營·後營·海防營을 統衛營으로, 前營·左營을 壯衛營으로, 그리고 別營을 總禦營으로 축소·개칭함으로써 5營制를 3營制로 통폐합시켰는데, 이때 내무부로 하여금 節目을 마련하도록 지시하였던 것이다. 이어 5월 19일에 내무부는 이미 도착해 있던 미국인 교관들로 하여금 근대식 군사훈련을 실시토록 할 鍊武公院을 설치하고, 7월 22일에 그 職制절목을 마련하는 동시에 청국식 무기에 대체할 무기의 구입과 火藥製造所의 설립을 추진하였다.0186)
그러나 이러한 군제개혁은 재정 부족과 청국의 방해로 말미암아 성공을 거둘 수가 없었다. 1891년 2월 27일에 수도의 요지인 蕩春臺와 北漢山城을 방비할 經理廳이 신설되고 經理使에는 閔泳駿이 임명되었으며, 1892년 윤6월 15일에는 국왕을 호위하는 龍虎營이 재정비됨으로써 중앙군제는 종전과 동일한 5군영제로 돌아가고 말았다.
내무부는 지방군제의 개편도 단행하였다. 내무부는 1888년 4월 19일에 국왕이 유사시에 거처할 행궁을 마련하기 위해 春川府에 留守營을 설치하여 이로 하여금 畿甸과 關東부근의 읍을 관할토록 하였으며,0187) 1888년 8월 18일에 三南陸軍을 관할하던 統制營을 統禦營으로 개칭하고 그 영장직을 충청병사가 겸직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1893년에 다시 충청병영은 舊例대로 복구되었으며, 통어영은 南陽府에 이설되어 海沿總制營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總制使로 하여금 그 관할 아래 놓이게 된 江華留守직을 겸하도록 하였다. 또한 1893년에 내무부는 全羅監營에 兵隊 4백명을 抄出해서 丁額을 복설시키고 그 영호를 親軍南營으로 칭하였으며, 함경북도 按撫營에 別砲衛 200명과 新抄軍 300명을 모집해서 親軍北營을 보강하였다.
내무부는 중앙과 지방의 軍費를 마련·분획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우선 내무부는 중앙군의 군비 충당을 위해 황해도의 社還米·關西의 城餉穀·호남의 漕復米와 量餘米 및 漕倉船價米를 중앙군영에 납부토록 하였으며, 인천항의 稅銀이나 주전소의 1백만량을 특하받기도 했다. 또한 내무부는 開城留守營의 군사모집과 훈련에 소용될 군량으로 江華砲糧 중 3천섬을, 江華鎭撫營의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三南砲木代錢을, 按撫營의 別砲衛와 新抄軍을 운영할 자금으로 2년치의 함경북도 焰硝代錢을, 복설된 충청병영의 餉需로 總制營 소관 免稅結錢 중 3만량을 각각 사용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리고 내무부는 신설된 春川留守營의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西江의 伏波亭과 濯纓亭에서 주전사업을 벌이는 동시에 輪船船價米를 배정하였으며, 海沿總制營의 신설 비용으로 전 海防營 관할지역의 屯田과 각도의 砲糧米 외에 중앙 관청의 잡비와 京主人의 몫을 이속시켰다.
그럼에도 당시 지방의 병영은 만성적인 군수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규정대로 훈련을 실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내무부는 거의 매년 흉년 등을 이유로 8道 5都의 군사훈련을 중단시키는 동시에 병력을 堤堰을 축조·개수하는 데 동원하거나 元·保軍에게 布를 거두어 들였다.0188) 아울러 내무부는 江華沁營과 春川留守營에서 봄·가을에 실시하던 무관 선발시험, 즉 都試를 合設하거나 취소하였다. 이러한 내무부의 조치는 다만 유사시에 군정을 동원할 수 있도록 그 인원을 형식상으로 파악하면서 군역을 국가재정의 일부로 활용하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내무부는 국방의 요충지에 鎭을 설치하고 그에 따른 비용과 인력의 동원문제 등을 관장하였다. 1887년 1월 18일 내무부는 러시아의 조선 침투를 막기 위해 영국이 무단 점령한 후 철수했던 거문도에 鎭을 설치하고자 漢城判尹 李元會를 經略使로 임명하여 그 방략을 보고토록 하였다.0189) 이어 3월 17일에 이원회의 別單에 의거하여 내무부는 李民熙를 巨文島僉使에 임명하고, 該道 監司로 하여금 設鎭에 필요한 兵艦軍器 등의 조달방안을 마련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어 5월 23일에 내무부는 전라감사 李憲稙의 보고서를 신중히 검토한 끝에 거문도와 대치해 있는 靑山島의 鎭을 폐지하고 해당 첨사와 군수물자를 거문도에 이속시켰다. 그러나 청산도의 관아를 옮겨 짓는데 따른 재정적 부담으로 도민들의 불평이 팽배하자 내무부는 청산도의 진을 그대로 유지한 채 鎭將으로 하여금 分駐 防禦토록 수정하였다. 이처럼 거문도와 청산도에 鎭이 모두 설치되었지만, 두 鎭간의 거리가 멀어 공문 왕래가 지체되었기 때문에 내무부는 효율적으로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長興府 生日島와 平日島, 興陽縣의 草島를 巨文鎭에 소속시킴으로써 관할지역을 조정해 주었다.
다음으로 1886년 4월 20일에 내무부는 全羅右水營의 관할 아래 있는 聖堂鎭의 殿最·船隻配置·收布地方 등에 관한 규정을 마련하였고, 11월 3일에는 靈光郡 북쪽에 있는 1개 면을 이곳에 이속시켰으며, 1887년 6월 6일에는 東萊府 絶影島를 復鎭하였다. 또한 1890년 3월 27일에 내무부는 영·호남 사이에 위치한 요충지 鳥嶺과 秋風嶺에 진을 설치한 후 조령의 관문인 聞慶縣을 都護府로 승격시키는 한편 그곳의 守城將을 管城將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내무부가 유사시에 군사적 조치를 취한 대표적인 사례는 동학교도의 교조신원운동과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진압한 것이었다. 1893년 2월 10일 동학교도들은 교조신원을 위한 복합상소를 올린 후 3월 10일 報恩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이러한 동학교도의 움직임에 대해 고종은 3월 19일 협판내무부사 趙秉鎬를 충청감사에, 魚允中을 兩湖宣撫使로 각각 임명한 데 이어 25일 의정부의 정승들과 정부차원의 대응책을 협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고종은 충청병영의 병정으로 동학교도를 진무한다는 것은 무리이고 京軍의 파병 역시 시기상조임을 내세워 청국에게 원병을 요청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심순택 등이 외국군대의 청병에 반대하자 고종은 일단 統禦營軍額을 이전대로 淸州兵營에 두도록 내무부에 지시를 내렸다. 이에 따라 내무부는 청주병영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조치하는 한편 江華軍營의 군사 300명을 水原에 주둔시키고 仁川兵丁 120명을 總制營에 소속시킴으로써 수도권방어에 만전을 기하였다.0190) 다행히 선무사 어윤중의 시의적절한 恩威幷行策으로 동학교도의 교조신원운동은 정부군과 충돌없이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조정은 동학교도 및 농민들의 불만을 해소시키기 위한 근본적인 개혁을 등한시하였기 때문에 1894년 3월 21일에 古阜民亂을 시발로 동학농민군의 제1차 봉기가 전라도 각지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4월 2일 내무부는 전라병사 洪啓薰을 兩湖招討使로 임명하여 그로 하여금 壯衛營 군대를 거느리고 농민군 진압에 나서도록 하였다.
그러나 4월 6일 黃土縣전투에서 정부군이 농민군에게 대패하자 내무부는 홍계훈의 증원군 요청에 따라 15일에 강화진무영의 병정 500명과 장위영의 병정 200명을 증파하여 무력에 의한 진압체계를 강화하였다. 아울러 고종은 4월 18일에 농민군의 표적이 되었던 전라감사 金文鉉, 안핵사 李容泰, 고부군수 趙秉甲을 처벌하고 폐정의 시정을 약속하는 칙유를 발포하는 등 회유책을 강구하였다. 이와 같은 조처에도 불구하고 농민군은 4월 23일 長城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全州를 향해 진격하였다. 정부군의 연이은 敗報에 접한 내무부는 4월 27일 李元會를 兩湖巡邊使로 임명하여 統衛營 등 3영의 군사를 대동시켰지만, 그들이 출발하기도 전에 이미 농민군에 의해 전주성이 함락되고 말았다.0191)
한편 내무부의 독판 민영준은 초토사 홍계훈으로부터 전세가 불리하므로 ‘外兵’을 빌려 진압할 수 밖에 없다는 보고에 따라 4월 12일 이후 청군의 借兵을 고종에게 요청하였지만 심순택 등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함락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곧 소집된 4월 30일의 重臣會議에서 민영준은 고종을 설득하여 원세개를 통해 청국에 차병을 의뢰하였다. 청국은 이 요청을 받자마자 군대를 파견하는 동시에 이 사실을 일본에 통고하였으며, 농민군의 동향을 예의 주시해 왔던 일본도 즉각 대규모 병력을 파병함으로써 청일전쟁의 서막이 오르게 되었다.0192)
청·일 양국의 파병소식에 접한 동학농민군은 이들에게 파병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5월 7일 정부측과 이른바 全州和約을 맺었다. 이에 내무부는 초토사와 강화영 兵房을 계속 주둔시키는 동시에 순변사를 즉시 철수시킴으로써 농민군 진압에 대한 군사적 조처를 마무리했다.
이상과 같이, 내무부는 서양식 군사 훈련을 위해 5營制를 3營制로 개편하고 그 운영을 주도하고 연무공원을 설치하는 등 군사력을 통솔하였다. 그러나 내무부가 추진했던 중앙군영의 개편은 1891년 이후 왕궁보호와 수도방위에 역점을 두었기 때문에 5영제로 환원되었으며, 지방군제 역시 수도권방위에 치중하여 지방군은 명목상으로 존재할 뿐이었다. 더욱이 이러한 개편작업은 청국의 간섭과 재정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제대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1894년 (제1차)동학농민군 봉기 때 내무부는 자체 군사력으로 이를 진압하지 못하게 되자 청병의 파견을 요청함으로써 청일전쟁의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그외에도 내무부는 國境劃定·민란예방을 위한 戶籍정비 등 국가의 각종 사안을 처리하였다. 우선 내무부는 朝·淸간의 국경 분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던 間島지역의 경계선 획정문제와 越境人의 단속문제에 관여하였다. 양국간의 변경지역에 거주하는 조선농민이 두만강을 넘어 간도로 이주하여 농지를 개간하게 되자 청국은 조선정부측에 이를 단속해 줄 것을 요구해 왔다. 이에 1885년 7월 30일 내무부는 安邊府使 李重夏를 土們勘界使,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 趙昌植을 종사관으로 임명하여 청국측 관리들과 국경문제를 논의하도록 하였다.0193) 그러나 白頭山定界碑에 적혀 있는 土們江의 해석을 둘러싸고 양국 대표들의 의견이 엇갈렸기 때문에 1887년 1월과 1888년 3월에 열린 협상에서도 결국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였다.
내무부는 평안·함경도의 각 지역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越境행위를 막기 위해 함경도 按撫使로 하여금 변경문제를 맡아보도록 하거나 監理慶興陸路通商事務직을 겸임한 慶興府使로 하여금 邊政사무를 보고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鍾城과 會寧의 邊民 중에 청의 吉林 지역으로 넘어들어가 경작하는 자가 점차 늘어갔다. 심지어 종성의 관리들이 이들에게 收稅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문제에 대해 袁世凱로부터 항의를 받은 내무부는 前鍾城府使 睦承錫과 前會寧府使 金在容을 파직시켰다. 또한 내무부는 義州府로 압송된 월경 내지 潛越殺戮한 죄인들을 효수형 내지 유배에 처하였으며, 범법한 淸商을 곤장으로 다스린 禮山縣監 尹相耈를 파면시키는 등 양국간의 분쟁을 줄이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고 내무부는 日本人의 불법적인 삼림채벌이 횡행하고 있던 鬱陵島에 대해서도 平海郡 소속 越松萬戶로 하여금 울릉도의 島長을 겸임시켜 관리·감독하도록 조처하였다.0194)
다음으로 내무부는 전국적으로 빈발하고 있었던 민란과 범법행위를 예방하는 조치로서 五家作統法을 부활시키고 戶口臺帳을 작성함으로써 각호의 인적 사항과 지역별 호구의 증감·이동 상황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특히 내무부는 漢城의 치안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捕盜廳의 책임자인 좌·우 포도대장에 대한 임명권을 장악하였으며, 家券〔집문서〕의 도난 및 위조가 성행하게 되자 漢城府가 만들어준 집문서로만 매매하도록 하는 규정을 마련하였다. 또한 富平府에 창고가 설치된 이후 화물의 왕래가 잦아짐에 따라 내무부는 부사로 하여금 討捕使를 겸임토록 하여 譏察을 강화시켰다.0195)
이와 같이 내무부를 통해 국정전반의 운영을 주도했던 민씨척족세력은 청국이 조선의 내외정을 감독하기 위해 파견한 원세개의 ‘監國’체제 하에서 주권보존의 근간이 되는 재정·군사권을 장악하는 데에만 치중한 나머지 당시의 조선이 필요로 했던 개화·자강정책을 추진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따라서 1894년초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자 민씨척족은 자신들의 失政을 인정·自退하고 개혁을 도모하기 보다는 기득권유지 차원에서 청국에 군대파견을 요청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이로 인해 1894년 7월 청국의 派兵을 빌미로 조선침략을 꾀한 일본군에 의해 내무부가 폐지됨과 아울러 민씨척족정권은 붕괴하고 말았다.
0167) 糟谷憲一,<閔氏政權上層部の構成に關する考察>(≪朝鮮史硏究會論文集≫27, 1990), 89∼96쪽;연갑수, 앞의 글, 131∼132·139∼140쪽;韓哲昊, 앞의 글(1996), 261∼272쪽.
0168) 崔泰鎬,<紅蔘專賣制度의 成立過程에 관한 硏究-封建財政의 解體過程을 中心으로->(≪경제논총≫3, 1983), 47∼53 참조.
0169) ≪日省錄≫, 고종 23년 8월 11일·10월 27일.
0170) 朴奉植,<‘메릴’書簡>(≪金載元博士回甲紀念論叢≫, 乙酉文化社, 1969), 11∼15쪽.
0171) 高麗大學校 亞細亞問題硏究所編,≪舊韓國外交關係附屬文書:統署日記 1≫(高麗大學校出版部, 1972), 755쪽.
0172) 元裕漢,<當五錢攷>(≪歷史學報≫35·36 합집, 1967), 320∼321쪽;吳斗煥,<當五錢 硏究>(≪經濟史學≫6, 1983), 183쪽.
0173) 仁川府廳 編,≪仁川府史≫(仁川府, 1934), 1209쪽.
0174) 평안관찰사였던 閔丙奭은 錢品이 조잡하고 윤곽이 甚小한 당오전을 다액 주조하여 巨富가 되었다고 한다. 鄭喬,≪大韓季年史≫上(國史編纂委員會, 1954), 65쪽.
0175) ≪日省錄≫, 고종 28년 11월 5·16·19일. 교환소 총판에는 내무부 협판 李完用, 회판에는 일본인 大三輪長兵衛가 임명되었다. 한편 한성부 소윤 李建昌은 은동화폐의 발행에 따른 폐단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0176) 1893년말 우의정 鄭範朝는 은동화폐의 주조를 취소하고 평양 주조소를 철폐시킬 것을 건의하였으나 고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주전문제로 말미암아 지사 金永壽, 독판 閔泳駿, 호조판서 朴定陽 등이 사직소를 올렸으며, 평안관찰사 閔丙錫도 자책 사임소를 제출하기도 하였다.≪日省錄≫, 고종 30년 11월 25·27·29일·12월 14일.
0177) 安田吉實,<李朝貨幣≪交換局≫と大三輪文書について>(≪朝鮮學報≫72, 1974), 68∼78쪽.
0178) 李培鎔,≪韓國近代 鑛業侵奪史硏究≫(一潮閣, 1989), 6∼19쪽;朴萬圭,<開港以後의 金鑛業實態와 日帝侵略>(≪韓國史論≫10, 1985), 276∼283쪽.
0179) 당시 민영익은 청국에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에 내무부는 협판 韓圭卨을 광무국 회판으로 임명하여 사무를 담당하게 하였다.≪日省錄≫, 고종 24년 5월 11일.
0180) 이점에 대해서는 韓㳓劤,<船運과 專運使의 문제>(≪韓國開港期의 商業硏究≫, 一潮閣, 1970);安秉珆,<李朝時代の海運業>(≪朝鮮社會の構造と日本帝國主義≫, 東京:龍溪書舍, 1977);羅愛子,<開港後 淸·日의 海運業浸透와 朝鮮의 對應>(≪梨花史學硏究≫17·18 합집, 1988) 등 참조.
0181) 利運社의 창설 당시 社長에는 독판내무부사 閔泳駿, 副社長에는 밀양부사 겸 전운총무관 鄭秉夏와 전라도 전운총무관 趙弼永, 그리고 사무관에 전운국위원 禹慶善이 임명되었다.≪仁川府史≫, 792∼794쪽.
0182) 균전관으로는 부사과 金昌錫이 파견되었다.≪高宗實錄≫, 고종 27년 12월 30일.
0183) 金正起,<朝鮮政府의 淸借款 導入(1882∼1894)>(≪韓國史論≫3, 1976), 444∼454쪽.
0184) 權錫奉, 앞의 책, 348∼369쪽.
0185) 李炳周,<開化期의 新·舊軍制(1864∼1894)>(≪韓國軍制史:近世朝鮮後期篇≫, 323∼325쪽.
0186) 李光麟,<美國 軍事敎官의 招聘과 鍊武公院>(≪韓國開化史硏究(改訂版)≫, 一潮閣, 1969), 174∼184쪽;柳永益,<美國 軍事敎官 傭聘始末 片考>(≪韓國近現代史論≫, 一潮閣, 1992), 63∼66쪽.
0187) 黃 玹,≪梅泉野錄≫(國史編纂委員會, 1955), 103쪽.
0188) ≪日省錄≫, 고종 24년 9월 19일;≪承政院日記≫, 고종 27년 10월 6일·고종 28년 9월 18일.
0189) ≪日省錄≫, 고종 24년 1월 18·19일.
0190) ≪日省錄≫, 고종 30년 3월 25일·28일·4월 8일.
0191) 이렇듯 심각한 상황에 직면한 내무부는 농민군의 봉기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독판 申正熙와 참의 成岐運로 하여금 軍務司를 관할하게 하였다.≪日省錄≫, 고종 31년 5월 1·3일.
0192) 민영준의 청국 파병 요청에 관해서는 李瑄根,≪韓國史:現代篇≫(乙酉文化社, 1963), 78∼98쪽;朴宗根,≪淸日戰爭과 朝鮮≫(一潮閣, 1989), 11∼13쪽.
0193) ≪日省錄≫, 고종 22년 7월 30일 및 11월 6일.
0194) ≪高宗實錄≫, 고종 25년 2월 7일.
0195) ≪日省錄≫, 고종 22년 11월 27일·12월 16일, 고종 24년 11월 15일, 고종 27년 3월 29일, 11월 22일. 朴銀淑,<開港期 捕盜廳의 運營과 漢城府民의 動態>(≪서울학연구≫5, 1995), 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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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독립외교의 추진
갑신정변 이후 고종과 민비는 청국의 내정간섭에 반발하여 러시아를 끌어들이려는 제1차 조러밀약을 추진하였다가 실패하였다. 이에 1885년 8월말 청국의 李鴻章은 대원군을 귀국시킴과 아울러 그에 대한 호송 명분 아래 袁世凱를 ‘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란 직함으로 파견하였다. 그후 원세개는 조선의 외교와 통상은 물론 국정 전반에 걸쳐 간섭함으로써 청국의 對朝鮮 종주권을 강화시켜 나가는 동시에 반청적 태도를 취하였던 고종 및 민씨척족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다.0196)
조·청 양국의 대립과 갈등은 1886년 7월초 고종의 제2차 조러밀약 추진과 그에 대응한 원세개의 국왕폐위 시도로 극에 달하였다. 제2차 조러밀약설은 고종의 측근인 金嘉鎭·金鶴羽·趙存斗·全良黙 등이 서울 주재 러시아대리공사 베베르(Karl I. Waeber)에게 청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조선의 독립을 보존하기 위해 군사를 파견해달라는 문서를 전달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조·러간의 교섭은 이에 반대하였던 민영익이 원세개에게 密報함으로써 중간에 탄로되고 말았다. 원세개는 조러밀약설을 바로 李鴻章에게 보고하는 동시에 청군을 파견하여 ‘昏君’ 고종을 폐위시키고 대원군을 섭정으로 복귀시킬 것을 건의하였던 것이다.0197)
한편 조러밀약설이 폭로되고 원세개의 고종폐위계획에 접한 고종은 크게 당황하여 조러밀약 자체를 공식적으로 부정하고, 김가진 등 4명을 문서날조혐의로 유배시킴으로써 사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이홍장 역시 청군의 파견이 조선의 민심을 악화시킬 우려가 있고, 대원군의 세력이 고종을 능가하기에는 역부족이며, 러시아가 밀약설을 전면 부인하였기 때문에 원세개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로써 고종의 조러밀약기도에 강경하게 대처하려 했던 원세개의 고종폐위시도는 무산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원세개는 조선의 내정간섭정책을 더욱 강경하게 추진하기 시작했다. 1886년 7월 29일 그는 러시아와 일본의 조선 침략야욕을 경계하면서 조선이 더 이상 서양 각국의 세력을 끌어들이지 말고, 청국의 啓導 아래 내치와 외교를 개혁함으로써 스스로 자강·자립을 도모해야 된다는 내용의<朝鮮大局論>·<時事至務十款>·<諭言四條>등을 조선정부와 고종에게 지어 보냈다.0198) 요컨대, 원세개는 이 글들을 통해 조선이 청국의 도움없이는 열강의 침략을 막아낼 수 없음을 강변함으로써 조선정부내의 반청운동을 차단하고 국정 전반에 걸친 청국의 발언권을 강화하겠다는 방침을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이었다.
고종은 한편으로 원세개의 의견을 수용하는 태도를 취하여 당면한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청국의 강압적인 내정간섭을 견제하려는 자주외교정책을 강구하였다. 이러한 고종의 반청외교는 내무부의 주도 아래 추진되었다. 왜냐하면 당시 외교전담기구였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외아문)이 원세개와 친청적 입장을 취하였던 김윤식 등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0199) 따라서 고종은 데니를 비롯한 르젠드르·그레이트하우스(Clarence R. Greathouse) 등 미국인 고문관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 아닌 내무부의 협판으로 임명하였을 뿐 아니라 1887년 12월 25일에 邊政 및 軍務와 아울러 外務 역시 내무부에서 관장하도록 조치하였다.0200) 이러한 기반 아래 내무부는 歐美常駐 公使團의 파견, 駐(天)津大員을 통한 袁世凱 소환운동 등 반청 자주외교를 추진했던 것이다.
먼저 우리나라와 조약을 체결한 구미 각국에 전권공사를 파견하여 독립국가의 면모를 과시하자는 의견은 미국대리공사 겸 무관이었던 포크(George C. Foulk)와 묄렌도르프의 후임으로 내무부 협판 겸 외아문 장교사 당상에 임명된 데니, 그리고 민영익에 의해 제시되었다. 포크와 데니는 조선이 각국에 공사를 파견하면 상대국도 격이 높은 사절을 조선에 주재시키게 될 것이며, 이들이 청국의 독점적인 영향력 행사를 견제해 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고종은 각국에 파견된 조선공사가 그곳의 청국공사와 대등하게 상대함으로써 조선의 자주를 고양시키게 된다는 점도 고려하여 그들의 권고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또한 민영익은 외교적인 측면 외에 미국에 부산·인천·원산의 3항구를 저당하여 차관을 얻고, 이를 가지고 미국에 파병을 요청하여 청국의 횡포를 응징하자는 의견을 내놓기도 하였다.0201)
이러한 권고에 고무된 고종은 구미 각국에 공사를 파견하기 위한 사전작업으로 먼저 1887년 5월 16일에 내무부 협판 閔泳駿을 駐日辦理大臣, 내무부주사 金嘉鎭을 駐日參贊官으로 임명·파견하고, 나중에 외아문 독판 徐相雨로 하여금 원세개에게 이를 조회토록 함으로써 청국의 반응을 살펴보았다.0202) 그런데 청국이 주일공사의 파견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자 6월 29일 내무부는 이를 ‘先派後咨’의 선례로 삼아 朴定陽과 沈相學에게 먼저 내무부의 협판직을 부여한 뒤 그들을 각각 駐美全權公使와 영국·독일·러시아·이태리·프랑스 등 유럽 5개국 全權公使에 임명하였다.0203)
그러나 원세개는 주일공사와는 달리 구미전권공사의 파견을 청국의 대조선 종주권 강화정책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여겨 이를 강경하게 저지시키고자 하였다. 7월 2일 그는 구미전권공사의 임명사실을 이홍장에게 보고한데 이어 7월 24일에 그 대책으로 舊制에 의거하여 각국에 주차하는 조선공사가 청국공사에게 呈文·銜帖을 사용하고, 청국공사는 硃筆로 조회하는 이른바 ‘3條’를 준수토록 함으로써 조선이 청국의 속방임을 표시할 것을 건의하였다. 조·청 양국 사신간의 왕래문서에 상하관계를 표시하도록 한 3조가 이홍장에 의해 채택되자 원세개는 이를 조선정부와 파견될 조선공사, 그리고 각국 주재 청국공사에게 통보하였다. 고종은 3조가 조·청 양국공사간의 문서에 국한된 것이기 때문에 별다른 이의없이 수용하였다.0204)
원세개는 3조 문제가 타결되자 다시 8월 2일 조선정부가 공사파견에 대해 ‘先行請示’하지 않았음을 힐문하였다. 이러한 원세개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8월 7일 고종은 주미전권공사 박정양과 참찬관 이완용을 소견하고 辭陛를 받아 그 다음날 出城토록 지시하였지만, 원세개의 강경한 항의에 못이겨 공사일행을 소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8월 11일 고종은 賫奏官 尹奎燮을 李鴻章에게 보내 박정양의 파미를 요청하는 동시에 조선 주재 미국공사관으로 하여금 청국측의 조치에 항의를 표시토록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주재 딘스모어(Hugh A. Dinsmore)공사는 물론 국무장관 베이야드(T. F. Bayard)의 훈령을 받은 청국주재 덴비(C. Denby)공사, 그리고 고문관 데니 등이 청국정부에 공식적으로 조선의 주미공사파견에 대한 청국의 부당한 방해활동을 항의·비판하였다. 결국 9월 24일 이홍장은 주미공사가 임지에서 소위<另約三端>을 준수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아 파견을 허락하기에 이르렀다.0205) 청국이 내세운<영약삼단>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공사가 처음으로 각국에 도착하면 마땅히 먼저 청국공사관으로 나아가 具報하고 청국공사와 함께 外部로 나아가되 그 뒤에는 拘定하지 않는다.
둘째, 朝會公宴 및 酬酌交際 등이 있을 때 조선공사는 마땅히 청국공사보다 낮은 자리에 앉는다.
셋째, 交涉事大에 관계되는 緊要한 일은 조선공사가 마땅히 먼저 청국공사에게 협상한 후 그 지시에 따라야 한다(≪淸季中日韓關係史料≫4, 2379∼2382쪽).
삼단은 조선공사에 대한 청국공사의 우월권을 인정케 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전통적인 조공관계에 근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종은 내면적으로 삼단을 꼭 준수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여 이를 형식적으로 수용하고 구미공사의 파견을 실현시켰다.
이와 같이 3개월간에 걸친 조·청간의 외교적 실강이 끝에 박정양 공사일행은 11월 12일 서울을 출발, 미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박정양과 함께 미국에 파견된 사절단의 일행으로는 參贊官 李完用, 書記官 李夏榮·李商在, 飜譯官 李采淵, 隨員 姜進熙·李憲用, 武弁 李鍾夏, 垠率 金老美·許龍業, 그리고 이들의 안내책임자인 미국인 參贊官 알렌(Horace N. Allen) 등 총 11명이었다.0206)
朴定陽은 10월 2일 제물포에서 미국군함 오마하(Omaha)號를 타고 釜山을 거쳐 10월 5일 長崎에 도착하였다. 그는 10월 7일 민영익을 만나기 위해 香港에 들렀다가 마카오를 거쳐 10월 24일 橫濱으로 돌아왔다. 10월 26일 그는 알렌일행과 합류하여 橫濱을 출발, 하와이를 거쳐 11월 14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으며, 11월 18일(양력 1888년 1월 1일)에 드디어 미대륙에 상륙한 뒤 기차로 대륙을 횡단하여 11월 26일 워싱턴에 도착하였다.
박공사는<영약삼단>을 무시한 채 주미 청국공사 張蔭桓을 방문하지 않고 미국무성과 직접 국서봉정 절차를 협의하였다. 이에 대해 청국공사는 영약삼단의 준수를 촉구하였지만, 박공사는 정부의 明文이 없었다는 이유를 내세워 거절하고, 12월 5일 백악관에서 클리블랜드(Grover Cleveland)대통령에게 國書를 奉呈하였다. 특기할 것은 국서에서 중국 연호가 아닌 조선의 개국 연호를 사용하고, 고종 스스로 청국의 황제와 동등한 지위를 표시하는 ‘朕’이란 칭호를 사용함으로써 조선이 자주독립국가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으려 한 점이다.0207)
국서를 봉정한 후 주미공사관을 개설한 박정양은 알렌의 도움을 받아 데이비스(Robert H. Davis)를 조선정부의 필라델피아領事로 임명하였고, 각종 공식 외교행사와 연회에 참석하여 독자적인 외교를 전개하였으며, 미국으로부터 200만불의 차관을 얻어내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그는 행정·입법·사법부의 주요 공공기관과 대학교·신문사·박물관 등 근대적 사회시설, 그리고 워싱턴기념비·남북전쟁 전적지 등을 시찰함으로써 근대적 제도와 문물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0208)
그러나 박정양은 청국측의 派美 허락조건이었던<영약삼단>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원세개의 압력에 굴복한 고종으로부터 소환명령을 받게 되었다. 그는 1888년 10월 12일 클리블랜드대통령을 예방하여 고별인사를 나눈 다음 이상재 등과 귀국길에 올랐다. 11월 27일 미국땅을 떠난 그는 12월 19일 橫濱을 거쳐 東京의 주일조선공사관에 여장을 풀고 국내사정을 탐색한 다음 1889년 3월 12일에야 비로소 釜山에 도착하였다. 그가 서울에 올라와서 고종에게 복명한 것은 미국을 떠난지 9개월만인 7월 24일이었다.0209) 박정양은 최초의 미국견문기인≪美俗拾遺≫와 복명문답을 통해 미국의 제도와 문물을 상세히 소개함으로써 고종과 정부 관리들의 호의적이고 긍정적인 대미관을 형성·확산시키는 데 공헌하였다.0210)
박정양이 고종에게 복명한 후 청국은 그의<영약삼단>에 대한 위반행위를 징벌하라고 강경하게 주장했다. 이로 말미암아 고종은 그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독판에 임명하려던 계획을 철회했지만 都承旨 겸 副提學직을 제수하였을 뿐 아니라<영약삼단>의 개정을 요구하였다.0211) 아울러 1891년 9월 6일 원세개가 일시 출국한 틈을 타서 고종은 9월 15일에 박정양을 호조판서와 내무부 독판으로 임명하였다. 이홍장은 박정양의 기용을 마냥 거부할 수만도 없었기 때문에 그를 중임에 서용하거나 공사직에 재임명할 수 없다는 조건에서 묵인해 주었지만<영약삼단>의 개정요청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부의사를 표명하였다.0212)
그럼에도 고종은 박정양의 후임으로 초대 주미전권공사의 일원이었던 이하영·이완용 등을 차례로 서리공사로 임명함으로써 대미외교를 지속시켜 나갔다.0213) 그리고 1893년 1월 28일 鄭敬源을 시카고 만국박람회(The Chicago World Fair) 出品事務大員으로 선임하여 명예사무대원 알렌과 함께 파견함으로써 미국과의 유대관계를 도모하기도 하였다. 정경원은 귀국 도중 일본에 머물면서 다량의 서적 구입에 몰두할 만큼 근대적 학문과 문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0214)
한편 박정양·이완용·이하영·이상재 등 초대 주미전권공사일행은 청국의 대조선 내정간섭이 심화되는 정세 속에서 반청 자주외교를 충실히 수행해냄으로써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親美 開化派로 대두하게 되었다. 일·러 양국의 조선 침탈을 견제하기 위한 세력균형책의 일환으로 조미조약의 체결을 알선·주도한 청국의 의도와는 달리 친미 개화파가 우호적인 미국관을 바탕으로 반청 친미외교의 실무를 담당하면서 정계에 대두하였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특히 그들이 사행기간에 미국인 參贊官 알렌과 맺었던 인연은 三國干涉 후 친러적 인사들과 貞洞派를 형성하여 반일 친미외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0215)
이와 같이 자주외교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주미전권공사의 파견이 나름대로 성공을 거둔 반면 유럽주재 전권공사의 파견은 실패로 돌아갔다. 沈相學에 이어 유럽 5개국 전권공사에 발탁된 趙臣熙는 홍콩에 머물면서 주미전권공사 박정양에 대한 청국측의 강경한 태도를 인지하고 정부의 부임 독촉에도 불구하고 1890년 1월 귀국해 버렸다. 또한 그의 후임인 朴齊純도 원세개의 압력으로 인해 서울에서 떠나지도 못하고 말았다.
구미주재 전권공사의 파견과 더불어 고종이 추진한 반청운동은 청국정부에 원세개의 소환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이 운동 역시 고종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내무부에 의해 주도되었다. 1882년<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의 체결 교섭 당시 事大使行의 폐단을 내세워 추진된 ‘派使駐京’안이 무산되고, 그 대신 조·청 양국간에는 일반 공사보다 격이 낮은 ‘商務委員’을 상호 파견·주차시키기로 합의되었다.0216) 그런데 通商事務를 처리하는 駐津大員인 督理通商事務와 從事官·書記官 등에 대한 인사권은 애초부터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 아니라 내무부가 행사하였다. 그리하여 내무부는 고종폐위음모 이후 원세개와 고종간의 불화가 심화되자 주진대원으로 하여금 원세개 소환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원세개의 1차 임기가 만료되는 1888년 8월 초에 종사관 成岐運은 이홍장에게 원세개의 후임으로 馬建常을 임명해 줄 것을 의뢰하였고, 이어서 8월 27일에는 고종이 직접 이홍장에게 원세개의 교체를 요구하였다. 당시의 소환요청이유는 원세개가 임기가 만료되었을 뿐 아니라 조선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사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홍장은 조선의 요청에 응하는 것이 上國의 체통을 잃는 것이며, 더욱이 원세개를 대신할 마땅한 인물이 없다는 판단 아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1889년 5월 21일에 내무부는 민영익과 김가진의 주도 아래 독리통상사무·종사관·서기관 전원을 교체시키면서 재차 원세개의 소환 교섭을 추진하였다. 신임 독리통상사무 金明圭에게 주어진 임무는 표면상 귀국한 초대주미전권공사 박정양에 대한 이홍장의 선처를 부탁하는 것이었다.0217) 그러나 실제로 袁世凱의 조선내정간섭이 양국간의 관계에 커다란 손해를 입히고 있으므로 그의 후임으로 ‘公正明識’한 자를 선임·파견해 줄 것과 외교상의 자주권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그의 주임무였다. 이에 대해 이홍장은 원세개가 조선을 보호한 공이 있는 만큼 조선에 계속 머물면서 그 임무를 다할 것이라고 답변하였다. 아울러 그는 비록 조선이 각국과 조약을 체결했어도 청국의 속방이고, 청국과 교섭하면서 자주적인 지위를 내세우는 것은 양국간에 수백년 동안 내려오는 명분과 기강을 도외시한 처사라고 하면서 원세개의 교체를 요구한 조선정부를 오히려 힐난하였다.0218)
요컨대, 고종은 청국의 적극적인 종주권 강화정책에 대항하기 위해 주미전권공사를 파견하여 자주·평등외교를 전개하는 한편 주진대원으로 하여금 원세개의 소환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청국의 반대로 말미암아 오히려 원세개의 권한이 더 강화되고 주미전권공사 박정양이 강제 소환당함으로써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이 내무부를 통해 주도했던 반청 자주외교는 조선의 국가적 독립을 대외적으로 표방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0196) Young Ick Lew, 앞의 글(1984), pp. 68∼71 참조.
0197) 具仙姬,<갑신정변 직후 反淸政策과 청의 袁世凱 파견>(≪史學硏究≫51, 1996), 59∼69쪽.
0198) ≪高宗實錄≫, 고종 23년 7월 29일. 이들 문건에 대해서는 金源模,<袁世凱의 韓半島 安保策(1886)>(≪東洋學≫16, 1986) 참조.
0199) 高宗은 이미 내무부 설치 직후부터 각국 공사를 召見할 때 내무부의 독판이 入侍하는 것을 定式으로 삼아 외교에 관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놓았다.≪日省錄≫, 고종 22년 6월 28일·고종 23년 7월 29일·고종 25년 10월 29일 등 참조.
0200) 韓哲昊, 앞의 글(1995), 28∼29쪽.
0201) 宋炳基,<소위 “三端”에 대하여>(≪史學志≫6, 1972), 96∼97쪽.
0202) ≪日省錄≫, 고종 24년 5월 16일. 이어서 6월 8일 내무부는 전환국위원 全良黙과 安吉壽를 서기관으로, 교섭아문주사 安駉壽를 번역관으로 임명하였다. 특히 1886년 제2차 조러밀약을 추진하였던 김가진·전양묵과 반청사상이 강한 안경수를 주일공사관원으로 파견한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0203) ≪日省錄≫, 고종 24년 6월 7일, 29일. 이처럼 일본 및 구미주재 전권공사에 임명된 인물들이 예외없이 협판내무부사의 직함을 가졌다는 점은 내무부가 반청 자주외교의 구심처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0204) 宋炳基, 앞의 글, 98쪽.
0205) 주미공사파견을 둘러싼 조·청·미 3국간의 교섭에 관해서는 宋炳基, 앞의 글, 100∼101쪽;스워다우트 지음·申福龍·姜錫燦 옮김,≪데니의 생애와 활동-韓末 外交 顧問制度의 한 硏究-≫(평민사, 1988), 145∼155쪽;金源模,<朴定陽의 對美自主外交와 常駐公使館開設>(≪藍史鄭在覺博士古稀紀念 東洋學論叢≫, 고려원, 1984), 364∼367쪽 참조.
0206) 朴定陽,≪從宦日記≫2(≪朴定陽全集(竹泉稿)≫, 亞細亞文化社, 1984), 정해 10월 1일, 624∼625쪽.
0207) ≪舊韓國外交文書:美案 1≫10, 317쪽.
0208) 박정양이 견문한 바는≪從宦日記≫(≪朴定陽全集≫2)와≪美行日記≫(≪朴定陽全集≫6) 참조.
0209) 박정양일행의 귀국일정에 대해서는≪美行日記≫, 471∼548쪽 참조.
0210) 韓哲昊,<初代 駐美全權公使 朴定陽의 美國觀-≪美俗拾遺≫(1888)를 중심으로->(≪韓國學報≫66, 1992), 63∼88쪽.
0211) 1889년 1월 7일 고종이 “出疆使臣 無碍檢擬”라는 지시를 내린 것은 박정양에게 관직을 제수하려는 조치였다고 판단된다.≪日省錄≫, 고종 26년 1월 7일.
0212) 林明德, 앞의 책, 165∼167쪽.
0213) 장수영,<구한말 역대 주미공사와 그들의 활동>(≪재미과기협회보≫11-6, 1983), 37∼38쪽.
0214) 杉山米吉,≪現今淸韓人傑傳:朝鮮國≫(東京:杉山書店, 1894), 34쪽.
0215) 韓哲昊,<甲午更張 中(1894∼1896) 貞洞派의 改革活動과 그 意義>(≪國史館論叢≫36, 1992), 39∼42쪽.
0216) 金鍾圓,<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에 대하여>(≪歷史學報≫32, 1966), 138∼140·151쪽.
0217) ≪日省錄≫, 고종 26년 8월 24일.
0218) 林明德, 앞의 책, 156∼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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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개화정책의 추진과 좌절
갑신정변의 실패로 말미암아 정부내에서는 물론 일반 민중에게까지도 개화에 대한 거부반응이 확산되어 갔다. 더욱이 청국의 원세개는 조선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함으로써 반청 자주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던 개혁지향적인 세력을 축출하는 데 진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무엇보다도 반개화의식을 불식시키고 개혁의 당위성을 확보하는 것을 당면과제로 삼게 되었다.
우선 정부는 개화에 필요한 교육과 계몽사업을 가장 효율적으로 추진해가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갑신정변 당시 박문국의 신문시설 파괴로 발행이 중단된≪漢城旬報≫를 속간하기로 결정하였다.≪한성순보≫의 속간에 심혈을 기울인 인물은 친청파로 알려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독판 金允植이었다.0219) 그는 갑신정변으로 말미암아 반일감정이 비등했던 상황 속에서도 井上角五郞을 재고용하고 일본으로부터 인쇄기계와 활자를 구입하여 博文局을 재건립하였다. 그리하여 1885년 12월 21일에≪漢城周報≫가 발간되기에 이르렀다.0220) 김윤식이 집필한 것으로 알려진≪한성주보≫창간호의 ‘周報序’에는,≪한성순보≫가 조선사회에 끼친 영향력이 적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갑신정변으로 말미암은 정치적 혼란이 수습되자 신문의 발행을 바라는 여론을 수렴하여 창간을 추진하였다고 續刊의 동기를 밝히고 있다.0221)
≪한성주보≫의 편집 방침은 “국가의 교섭과 관리의 陞黜에서부터 개항의 謠俗과 農桑사무와 商稅·時價의 高下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모두 기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침은 “국민들의 고통을 애써 찾고 막힌 것을 제거함은 물론이고, 利國便民의 모든 방법을 다 게재하여 정치가 上理에 도달”0222)하게 한다는 전통적인 ‘求言’과 ‘制治’의 제도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한성주보≫가 단지 “명령과 敎戒가 행해지고, 이로 말미암아 상벌의 信實하고 명확함”0223)을 드러냄으로써 기존의 전제군주체제를 강화하려는 官報의 성격을 띤 것만은 아니었다.
또한≪한성주보≫의 창간 목적은 “백성의 고통을 힘써 찾을 뿐 아니라 아울러 세계 각국의 情形을 探訪하여 천하사람의 귀에 들려주고 천하사람이 마음으로 생각하게 한다”0224)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바로 ‘利國便民’의 방법을 모색하는 동시에 국민들을 계몽하고 견문을 넓히는 작업과 직결되어 있었다. 또한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나라도 저들과 같이 신보를 간행하여 백성들의 이목을 깨우쳐 주면 백성이 날로 富해질 것이며, 국가도 날로 강해져서 장차 천하를 호령하는 수레를 타고 저 西人들의 앞에 달릴 수 있는” 富國强兵을 이룩하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0225) 이로 보아 김윤식 등 온건개화파는≪한성주보≫를 만들어 자신들의 개혁목표가 바로 부국강병에 있음을 천명함으로써 개혁추진에 필요한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아울러≪한성주보≫는≪한성순보≫와는 달리 국한문혼용이나 한글전용으로 기사를 게재함으로써 국민계몽에도 앞장섰다.0226) 나아가≪한성주보≫는 한글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정부차원의 번역기관을 설치하여 각종 외국어서적을 한글로 번역·보급할 것을 역설하였으며, 한글의 우수성과 간편성이 세계적으로도 공인받고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국민들에게 자국의 문화적 우월성과 자부심을 심어 주고자 노력했던 것이다.0227)
그러나 박문국은 원래 정부로부터 全州府의 소금·생선·담배, 平壤府 旅閣主人의 口錢 등에 대한 수세권을 배정받아 운영비로 쓰도록 되어 있었으나 잘 거두어지지 않았고, 구독료도 징수되지 않아 운영의 곤란을 겪었다. 그리하여 국민들에게 국제정세와 근대적 지식을 전달해 줌으로써 개화의식을 조장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였던≪한성주보≫는 발행된 지 2년 반만인 1888년 6월 6일 박문국의 재정 적자로 말미암아 폐간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한성주보≫의 폐간 당시 김윤식·어윤중 등 신문 발행을 주도했던 온건개화파가 정부의 요직에서 축출된 점으로 미루어 반청적 입장을 견지했던 고종과 민씨척족세력이 정치적인 의도로 신문의 폐간을 방기했으리라 여겨진다.
한편 근대식 농법과 전신 등 근대적 기술의 도입, 신식교육의 실시 등은 種牧局·育英公院·電報局(電郵總局) 등을 예하기관으로 둔 내무부에 의해 주도되었다. 우선 내무부는 농상사무를 권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農務牧畜試驗場을 산하조직인 농무사에 소속시켜 種牧局으로 개칭하고 그 堂上으로 하여금 전관케 하였다.0228) 報聘使의 隨員으로 미국을 방문했던 崔景錫이 귀국 후 모범농장의 설치를 국왕에게 청원하였고, 고종이 망우리 일대의 넓은 토지와 자금을 하사하여 1884년 초에 농무목축시험장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농무목축시험장은 뉴욕주재 명예총영사 프레이저(Everett Frazer)로부터 각종 농산물의 종자와 가축, 그리고 신식 농기구를 수입하여 품종을 개량하고 근대적인 농법을 도입했다.
최경석이 작성한<試驗場各種目錄>에 의하면, 농장은 현재의 농업시험장과 다를 바 없는 많은 종류의 농작물과 야채, 과수들을 재배하고 있었다. 그후 농장에서는 이들의 재배법과 사용법을 소개한 해설서와 함께 수확물의 종자를 전국의 군현에 보내 재배하도록 권하였다. 또한 농장에서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우마 등의 가축도 들여와 품종개량과 사육방법을 개선하기도 하였으며, 버터·치즈까지 만들 수 있는 낙농업까지 계획하였다. 그러나 1886년초 최경석이 갑자기 병사하고 미국에 요청한 농업기사 역시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업은 방치상태에 놓여지고 말았다.0229)
내무부는 이 시험장을 農牧局으로 개칭하는 한편 1887년 가을에 영국인 농업기술자 재프리(R. Jaffray)를 고빙하여 그 경영 뿐 아니라 2년제 농업학교인 農務學堂을 설립케 하고 학생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는 내무부가 장기적인 안목에서 농업을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새 농법을 보급시킬 교육기관의 설립에 대한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계획 역시 재프리가 1888년 5월에 사망하는 바람에 아쉽게도 중단되고 말았다.0230)
다음으로 내무부는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체계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방안으로써 근대적 학문과 외국어를 교육하는 育英公院을 수문사 예하에 설치하고, 수문사 堂郞으로 하여금 그 사무를 겸관케 하였다. 원래 보빙사의 건의로 입안된 육영공원의 설립계획은 갑신정변으로 말미암아 일시 중단되었다가 1886년에 비로소 헐버트(Homer B. Hulbert) 등 미국인 교사 3명이 도착한 것을 계기로 결실을 보게 된 것이었다.
<育英公院 設學節目>에 의하면 공원에는 左院과 右院을 두었는데, 좌원은 젊은 문무관리 가운데 선발하여 통학케 하고, 우원은 15세에서 20세까지의 재능있는 자를 선발하여 기숙사생활을 엄격하게 시키며, 이에 필요한 운영비는 호조와 선혜청에서 반씩 공동 부담한다. 교과내용은 책읽기와 글쓰기부터 시작하여 수학·자연과학·역사·정치학 등을 배우며, 시험은 월말과 연말, 그리고 3년 뒤에 ‘大考’라는 시험을 치뤄 급제하면 졸업시켜 벼슬을 주도록 하였다.
육영공원의 학생모집 현황을 살펴보면, 1886년에 좌원 14명과 우원 21명 도합 35명을 선발하고, 1887년에 좌원 6명과 우원 14명 합계 20명, 그리고 1889년에 우원 57명을 추가로 모집하여 총 112명에 달하였다. 최초의 입학생은 모두 양반 고관의 자제였고, 교사들은 영문 교과서를 가지고 영어로 강의하였다. 처음에는 학생들의 지적 능력이 높고 근대적 학문에 열의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학습진도도 매우 빨랐다. 그러나 정부의 명령 내지 부형의 권유로 입학했던 학생들은 육영공원의 졸업 여부와 관계없이 관직을 보장받고 있었으므로 엄격한 학칙, 교사들의 철저한 교육에 반발하여 병이나 관청업무를 핑계로 결석을 일삼게 되었다. 또한 공원의 운영을 담당하였던 閔應植·閔種黙·閔丙奭·閔泳達 등 민씨척족도 공원 운영비를 횡령할 정도로 신교육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부족하였기 때문에 학생들의 행동을 방관하였고, 심지어 그들의 요청으로 겨울에는 수업시간을 하루 6시간에서 4시간으로 단축하고 좌원의 학생들은 3일마다 한번씩만 수업받도록 조치하기도 하였다. 반면에 교사들은 서양식방법을 강행하려 했으므로 학생들과 충돌을 일으켰다. 더욱이 육영공원은 학생들을 충원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재정마저 부족하여 교사들에게 제대로 봉급을 지불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1894년에 폐지되었다.0231)
육영공원이 성공적으로 운영되지 못한 직접적인 원인은 학생의 신분을 양반고관의 자제나 고관들이 추천한 사람들로 제한함으로써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을 상대적으로 꺼려하는 사람들에게 근대적 문화를 수용하도록 조처한 데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사회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일반평민들에게까지 신학문에 접할 수 있도록 한 외국선교사들이 설립한 학교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이념과 정책 밑에서 새로운 정신을 구현하는 교육기관은 구래의 전통과 특권의식에서 완전히 벗어난 외국선교사들에 의해 설립·운영되었던 것이다.
육영공원 보다 몇달 빠른 1886년경에 설립된 培材學堂과 梨花學堂은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와 스크랜턴(Mary F. Scranton)에 의해 세워졌다. 이 두 사람은 외교관계가 수립된 후 미국 감리교 선교부에서 조선에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들로서 기독교 전도사업이 공식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던 당시의 상황 속에서 먼저 교육사업에 착수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두 학당은 우리나라 최초로 일반평민들에게 교육을 실시하는 근대식 학교가 되었다.
아펜젤러목사는 주한미국공사관부 무관 포크중위를 통해 국왕과 학교설립문제를 놓고 교섭을 벌여 1886년 여름 서울 서소문동에 학교를 설립하였다. 학생 모집은 2명으로 시작하여 그 이듬해에 67명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배재학당은 학생들이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도록 自助部를 설치하였다. 한편 스크랜턴은 선교사업의 중요한 분야의 하나로 여성교육기관을 설립할 필요성을 느끼고 그 준비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도착 1년 후 1명으로 교육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여성교육기관으로서의 이화학당은 학교운영에 있어 배재학당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일반의 냉대를 받았다. 이는 여성의 지위가 남성과는 달리 격하되어 있던 당시의 사회제도와 풍조 속에서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화학당은 그 다음 해에 학생수가 46명으로 불어났다. 더욱이 고종과 정부측도 나라의 문명개화에 기여하는 두 학당을 정식으로 인정해 줌으로써 발전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1887년 고종은 두 학당에 각각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란 교명을 하사했을 뿐 아니라 편액까지 내렸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일반대중의 호응과 관심이 자연히 증대될 수 있었다.0232)
한편 장로교 선교사로는 1886년말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목사가 자비로 학교에 올 학생이 없었던 당시의 실정을 고려하여 전원을 기숙사에 수용하여 숙식을 제공하는 일종의 기숙학교를 세웠다. 그리하여 고아원, 예수교학당 혹은 구세학당이라고 불렸졌던 이 학교는 경신중·고등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이어 간호원으로 내한한 엘러즈(Annie J. Ellers)는 언더우드가 설립한 학교의 부대사업으로 여자교육사업에 착수하였다. 그가 병으로 말미암아 차질이 빚자 한때 헤이든(Mary E. Hayden)이 맡았다가 1890년 도티(S. A. Doty)에 의해 비로소 학교 체제를 갖추어 뒤에 정신여자중·고등학교로 발전하였다. 이와 같이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사학들은 기독교적 인물을 기르고 선교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지도자의 양성을 목적으로 삼았지만, 개화운동에도 커다란 공헌을 하게 되었다.0233)
또한 1885년 2월 고종은 알렌에게 국립병원 설립을 허가해 주어 廣惠院이 만들어졌다. 그후 1886년 3월 조선인들에게 의학을 가르칠 목적으로 알렌·헤론·언더우드 등이 교수진으로 참여한 국립의학교가 설립되었다. 여기에서는 실용의술을 비롯하여 물리·화학 등을 가르쳤으나 의학교로서의 구색을 갖추지 못하고 병원에서 필요한 일을 돕는 조수와 약국원을 양성하는 데 머물고 말았다.0234)
마지막으로, 갑신정변으로 말미암아 중단되었던 郵政사업은 내무부가 工作司 예하에 電報局을 설치하여 근대적인 전신시설을 설치함으로써 재개되었다. 1885년 6월 청국이<朝鮮電線條約>을 맺어 漢城電報總局(일명 華電局)을 설치하고 서울·인천간과 서울·평양·의주간의 이른바 西路電線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청국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西路電線을 가설하려고 하자 내무부는 조선측의 電務委員을 파견하여 이를 감독하도록 지시하였다.0235) 그러나 서로전선은 청국의 차관을 도입하여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청국이 그 관할권을 장악하게 되었다.0236)
이에 대해 일본은 청국의 서로전선 가설이 조일간에 체결된 바 있는<釜山口設海底電線條約>에 위배된다고 주장하면서 서울·부산간의 전신가설을 요구하였다. 이에 1885년 11월 정부는 일본과<부산구설해저전선조약 속약>을 맺고 서울·부산간의 남로전선을 착공하게 되었다. 이 전선공사는 청국이 대행하였으나 지연되었기 때문에 정부가 朝鮮電報總局을 설치하여 직접 가설에 착수하였다. 정부는 독일의 世昌洋行으로부터 기채하여 기구를 구입하고 영국인 기사 핼리팩스(T. E. Hallifax)로 하여금 노선을 측량케 한 뒤 착공하여 1888년 5월말에 남로전선의 준공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조선정부는 남로전선을 독자적으로 주관하여 가설·운영하였기 때문에 업무상의 규정에 있어서도 서로전선의 경우와는 달리 전신규정을 새로 마련하여 사용하였다. 그리하여<국내전보규칙>의 전신을 이루는 우리 나라 최초의<電報章程>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때 모르스부호를 한글로 제정한 ‘國文字母號碼打法’이 오늘날까지 계속 사용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아울러 정부는 자주적으로 전신을 가설하고 관리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이를 위해 1888년 말경 정부는 청국에 서로전선의 관리권 반환을 요구한 데이어 그 이듬해 5월에 프랑스로부터 200만불의 차관을 얻어 청국의 차관을 상환하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또한 정부는 외교고문관 데니의 의견에 따라 남로전선을 연장하여 서울·원산간의 북로전선을 가설하고, 이를 블라디보스톡의 러시아전선에 연결시키려는 계획 아래 전신기재를 구입하기도 하였다. 이는 북로전선이 개통될 경우 일본 및 상해 등지에서 유럽과 미국 방면으로 발송되는 전신은 인도방면을 우회하지 않아 이익을 얻게 될 것이고, 또한 청국의 지배 아래 있는 서로전선도 자연히 중요성이 반감될 것이라는 판단 아래 추진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역시 청국의 반대로 착공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1891년 2월 청국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고 외국의 전선과 접속시키지 않는다는 내용의<朝鮮北路電線條約>을 체결한 뒤에야 비로소 착공되어 그해 6월 완공되기에 이르렀다.0237)
이상으로 미루어 볼 때, 내무부는 서양의 근대적 문물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기 위해 그 산하에 개화·자강추진기구들을 설립·운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내무부가 주전·개광 등을 통해 확보한 재정 가운데 그 일부를 연무공원·육영공원·종목국·전보국 등을 설치하는 데 투자하여 자주적으로 ‘富國强兵’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노력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이러한 개화정책들은 전통적인 정치·사회질서를 유지한 채 서양의 제도와 기술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는 데 머물렀으며, 그나마 청국의 간섭과 정책담당자들의 무능, 그리고 재정의 빈약 등으로 말미암아 제대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0219) 당시 친청파로 분류되었던 김윤식·김홍집·어윤중 등의 개화인식과 개혁활동에 관해서는 崔震植,<金允植의 自强論 硏究>(≪大邱史學≫25, 1984);原田環,<一八八◯年代前半の閔氏政權と金允植>(≪朝鮮史硏究會論文集≫22, 1985);李相一,<雲養 金允植의 政治思想硏究>(≪泰東古典硏究≫6, 1990);韓哲昊,<1884∼1894年間 時務開化派의 改革構想>(≪史叢≫45, 1996) 참조.
0220) 李光麟,<漢城旬報와 漢城周報에 대한 一考察>, 앞의 책, 77∼82쪽.
0221) ≪漢城周報≫, 1885년 12월 21일.
0222) ≪漢城周報≫, 1886년 8월 30일.
0223) ≪漢城周報≫, 1886년 7월 17일.
0224) ≪漢城周報≫, 1886년 8월 30일.
0225) ≪漢城周報≫, 1886년 7월 17일.
0226) 예를 들어≪漢城周報≫제4호에는 총 18면 가운데 1/4 이상이 순한글로 기사가 쓰여져 있다. 李光麟,<漢城旬報와 漢城周報에 대한 一考察>, 앞의 책, 84쪽.
0227) ≪漢城周報≫, 1886년 1월 12일.
0228) ≪日省錄≫, 고종 23년 7월 15일;≪承政院日記≫, 고종 24년 12월 28일.
0229) 李光麟,<農務牧畜試驗場의 設置에 대하여>, 앞의 책, 205∼214쪽.
0230) ≪統署日記≫1, 고종 24년 8월 23일·고종 25년 5월 19일.
0231) 李光麟,<育英公院의 設置와 그 影響>, 앞의 책, 104∼125쪽.
0232) 孫仁銖,≪韓國開化敎育硏究≫(一志社, 1980), 71∼74·130∼135쪽.
0233) 白樂濬,≪韓國改新敎史, 1832∼1910≫(연세대학교 출판부, 1973), 137∼141쪽.
0234) 白樂濬, 위의 책, 112∼128쪽.
0235) 내무부는 서로전선이 가설되자 부호군 李容稙을 電線大員으로 임명하여 淸國派員과 함께 檢飭케 한 데 이어 李應相·姜泰熙·尙澐·朴喜鎭 등을 電務委員으로 임명하였다.≪日省錄≫, 고종 22년 8월 9·19일.
0236) 金正起,<西路電線(仁川-漢城-義州)의 架設과 反淸意識의 形成>(≪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3), 800∼805쪽.
0237) 林明德, 앞의 책, 227∼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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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외국인 고문의 고빙
조선정부는 개화정책과 자주외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일환으로 다수의 외국인 고문관과 기술자를 고빙하게 되었다. 개항 이후 서구식 제도와 문물을 수용할 수 있는 내재적 기반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정치·외교·군사·교육·산업 전분야에 걸쳐 근대적 지식과 경험을 갖춘 외국인 고문관의 고빙이 절실히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정부는 1881년부터 일본·청국인은 물론 그들의 권고로 묄렌도르프 등 서구인을, 갑신정변 이후에는 청국의 내정간섭이 강화되는 상황 속에서 주로 미국인 고문관·군사교관·교사·기술자 등을 초빙하였다.
우선 외교 및 법률고문으로는 데니·그레이트하우스·르젠드르 등 모두 미국인을 채용함으로써 미국에 대한 신뢰를 나타내 주고 있다. 조러밀약의 추진으로 파면당한 묄렌도르프의 후임으로 1886년 5월 데니가 부임하였다. 청국은 조선에서 러·일 양국의 세력이 점차 증대하자 이에 대처할 외교고문으로 미국인 데니를 천거한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청국으로부터 조선의 친청정책 유도, 종속유지의 사명이 암암리에 주어졌다. 그러나 판사출신인 그는 袁世凱가 고종폐위 등 조선의 내정에 극심하게 간섭하고 아울러 자신의 영향력 증대를 꺼려하는 태도를 취하게 되자 오히려 반청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데니는 조선이 청국과 朝貢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屬國은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그는 丙寅洋擾와 천주교 포교관계로 소원해 왔던 프랑스와 국교를 맺도록 주선한 데 이어<한러육상조약>을 체결토록 하였으며, 구미 각국에 조선의 외교사절을 상주케 함으로써 청국의 간섭을 배제시키는 등 조선의 자주적인 외교활동을 도왔다. 아울러 그는 조·청간의 종속관계를 부정하고 국제법 이론에 근거해 조선왕국의 독립성을 명쾌하게 밝혀 놓는 동시에 청국의 부당한 내정간섭을 신랄히 비판하는≪淸韓論≫을 저술·출판하였다. 이 글은 짧은 정치 논설이었지만 군사적으로 조선의 주권을 탈취하지 않는 한 조선이 영구적인 독립국임을 선명하게 논증한 것이었기 때문에 청국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다. 데니는 친구 프레이저의 商社를 조선으로 유치하여 철도부설권을 획득하도록 이권에 관여하기도 했지만, 조청관계를 국제법적으로 규명하고 조선의 해외공관 설치를 주선함으로써 대내외적으로 자주독립외교를 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0238)
1890년초 데니가 청국의 압력에 의해 임기를 마치고 사임하자 역시 미국인 르젠드르가 외교고문으로 취임하였다. 원래 프랑스인으로서 미국에 귀화하였던 그는 청국 厦門영사, 그리고 일본 외무성 고문을 역임하다가 미국공사 딘스모어의 추천에 의해 채용되었다. 메릴의 사임으로 해관총세무사직이 공석이 되자 고종은 청국의 간섭에서 벗어나 해관을 독자적으로 운영하고자 르젠드르를 발탁하려 시도했으나 원세개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일본과 상해에 파견되어 구미 열강으로부터 200만원 차관교섭을 벌였으나 역시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또한 1890년 8월 외교·법률고문으로 미국인 그레이트하우스가 고빙되었다. 그는 법률가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신문사를 경영한 바 있었으며, 특히 일본 橫濱총영사로 근무하는 동안 친일적 외교관으로 평가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외무성의 추천을 받아 초빙되었다. 이들 두 사람은 내무부 협판직을 부여받았으며,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등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일본과 황해도 防穀令사건과 제주도 通漁문제 등을 절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0239)
다음으로 해관담당 고문에는 묄렌도르프의 후임으로 미국인 메릴(Henry F. Merrill)이 고빙되었다. 1885년 9월 해관 총세무사로 임명된 그는 청국 해관에서 근무하였으며, 부임하기 전 이홍장과 청국 총해관사 하트(Robert Hart) 등으로부터 조선해관을 청국해관의 일부분으로 개편·통합하라는 훈령을 받았다. 메릴은 이 훈령을 비교적 충실히 이행하여 부임 직후 묄렌도르프 휘하에 있던 해관원을 상당수 해고 또는 직위 교체하였다. 이와 동시에 인천해관 세무사서리에 독일인 쉐니케, 부산해관 세무사서리에 프랑스인 피리(T. Piry), 원산해관 세무사서리에 영국인 크리그(E. F. Creagh) 등을 신규 채용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였다. 메릴은 조선해관의 분기별 보고서를 청국해관의 貿易總冊에 합쳐 간행토록 하라는 지시를 착실히 시행함으로써 조선해관이 자연히 청국해관의 지부로 인식되기도 하였다.0240)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릴도 원세개와의 불화로 1889년 사임하고 귀국하였다. 메릴의 뒤를 이어 쉐니케, 모오간(F. A. Morgan)이 서리로 임명되면서 진남포와 그 밖의 개항장에도 해관이 설치되는 등 해관사무의 질서가 잡혀갔다. 1893년에는 역시 청국해관에 근무하였던 영국인 브라운(J. McLeavy Brown)이 총세무사로 임명되어 근무하게 되었다.
또한 교사로서 역시 미국인 헐버트·길모어(G. W. Gilmore) 및 벙커(D. Z. Bunker) 등이 초빙되었다. 미국인교사 초빙은 보빙사 민영익이 방미 중 이미 교섭한 바 있었다가 1884년 9월 조선정부가 미국공사 푸트에게 직접 의뢰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추진되었다. 푸트의 요청을 받은 미국 내무성 교육국장 이튼(J. Eaton)은 외국에 파견될 교사는 신앙심이 두터운 신학생이 적당하다는 생각하에 외교선교부직원과 협의하여 뉴욕시에 있는 유니온신학교에서 인물을 구하였다. 그리하여 헐버트·길모아·번(H. E. Bourne) 3명을 선발하였으나 갑신정변으로 말미암아 일시 중단되고 말았다. 그후 1885년 중반부터 교섭이 재개되어 그 다음해 7월 4일 조선에 교사들이 도착하였다.
그런데 애초에 오기로 작정되었던 사람 중 번은 중도에 포기하고 그 대신 벙커가 참가하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미국의 일류대학을 졸업하여 신학을 전공하고 있었다. 길모어는 프린스톤대학을, 벙커는 오베린대학을 각각 졸업하여 유니온 신학교의 졸업반에 있었고, 헐버트는 다트마스대학을 졸업한 뒤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특히 헐버트는 명문의 집안으로 그의 아버지는 다트마스대학 출신으로 조합교회의 유명한 목사인 동시에 미들버리대학의 총장이었고, 어머니는 다타마스대학의 창설자의 후예이며 인도에 파견되었던 선교사의 딸로서 그의 가족은 철저한 칼빈주의 신봉자들이었다.0241)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의 사정으로 말미암아 육영공원이 설치된지 3년만인 1889년 길모어가 먼저 사임 귀국하고, 1891년 헐버트도 뒤따라 사임하였다. 그리고 1894년 봄 벙커마저 배재학당으로 자리를 옮김에 따라 육영공원은 유명무실한 존재로 변해버렸던 것이다.
한편 군사교관으로는 다이(William McEntyre Dye)·커민스(Edmund H. Cummins)·리(John G. Lee)·닌스테드(F. H. Nienstead) 등 4명의 미국인이 초빙되었다. 군사교관은 보빙사에 의해 처음으로 요청되었고, 1884년 고종이 푸트공사에게 직접 요청한 적도 있었다. 그후 갑신정변의 사후 수습과정에서 체결된 청·일 양국간의 천진조약에서 양국이 조선에서의 군사충돌을 회피하려는 방책으로 공동철수를 규정하는 한편 제3국의 군사교관에게 조선군대의 훈련을 맡기도록 합의가 이루어졌다. 더욱이 고종이 러시아교관을 초빙하려던 계획이 폭로되면서 자연스레 미국교관의 고빙이 추진되었다. 그 결과 미국은 조선의 군사문제에 깊이 간여할 수 있는 특권을 조선정부 뿐 아니라 청·일 양국으로부터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국내문제로 말미암아 관심을 쏟지 못하다가 1887년에 이르러 현역이 아닌 퇴역장교라도 무방한가를 문의하였고, 이에 대해 고종은 유능한 장교라면 현역이나 퇴역에 관계없이 채용할 의사가 있으며, 수석교관 1명과 조교관 2명 총 3명의 군사교관을 후한 조건으로 고용할 계획을 아울러 통보하였다. 또한 1888년 초대 주미전권공사 박정양일행이 적극적으로 미국측과 교섭을 벌인 결과 다이 등 3명의 선발을 완료하게 되었다.0242)
수석교관 다이는 펜실베니아주 출신으로 미국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졸업생이었다. 그는 남북전쟁 발발을 전후하여 전시명예대령 혹은 준장 계급까지 승진하였으나 전쟁 후 육군의 역할이 감소되자 소령으로 자원제대하였다. 그후 그는 농업에 잠시 종사하다가 1873년부터 5년간 이집트의 터어키총독이 거느린 군대의 참모차장으로 용빙되어 아비씨니아정토전에 참전하여 부상당하기도 하였다. 1878년에 귀국한 그는 1883∼1886년간 워싱턴 콜럼비아특별지구의 시경 총경으로 근무하였으며, 조선 부임 직전에는 미연방정부 연금국의 육해군본부 부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다이가 직접 선발한 두 명의 조교관 중 커민스는 버지니아주 알렌산드리아출신으로 남북전쟁시 남부 연방군의 소령으로 출전하여 미시시피강 및 멕시코만 연안 방위대에서 복무한 경력이 있었다. 리는 의사로서 필라델피아방위군에 복무한 적이 있으며, 필라델피아 검시관사무소의 전속의사로 근무하다가 조선으로 고빙되어 왔다. 이들 미동부 출신자들과는 별도로 딘스모아공사의 주선으로 선발된 닌스테드는 미해군의 사병으로 근무한 경험이 있고, 神戶주재 미국영사관 부영사 겸 통역관이란 섭외관직에 종사하고 있다가 조교관으로 발탁되었다.
이처럼 수석교관 다이를 제외한 3명의 교관은 정규사관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장교로서 전투경험도 별로 없는 일종의 아마추어 군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조선에 수석교관 내지 조교관으로 초빙되어 상당히 높은 대우를 받게 되었다.
이들 네 명의 군사교관은 서울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창설된 연무공원에서 근무하였다. 그들은 영어로 조선정부가 구입하였던 미제무기의 사용법, 대오편성연습, 전초전전술 등을 무관들에게 가르쳤다. 그러나 연무공원 교육은 개시된 지 얼마 안되어 차질을 빚기 시작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조선정부측의 대우에 불만을 느낀 일부 미국인 교관들의 직무 태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커민스와 리는 숙소의 급수시설 미비와 조선인 당번병의 부족에 대해 불평하고, 자신들과 다른 경로로 채용된 닌스테드와 반목하였으며 과음으로 직무를 게을리 하였던 것이다. 마침내 그들은 봉급마저 체불되자 조선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기사를 미국과 청국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투고하기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정부는 다이의 동의를 얻어 1889년 9월에 조선정부 비판, 과음 및 무능 등의 이유로 조교관 커민스와 리를 해고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커민스와 리를 계약기간 만료 전에 일방적으로 해고했기 때문에 결국 딘스모아공사의 요구에 따라 이들에게 3년분 봉급과 왕복여비를 완급해 준 1891년 3월에야 퇴거시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0243)
그후 남은 두 명의 교관은 약 160명의 연무공원 무관과 1,200여 명에 달하는 서울 궁성수비대를 훈련시켜야 하는 과중한 업무를 떠맡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연무공원의 교육이나 시위대의 훈련이 체계적·효율적으로 진행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연무공원의 사관양성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시위대를 위시한 중앙군의 군사력은 질적으로 오히려 저하되는 결과를 낳았다. 더욱이 1893년말 닌스테드도 사임하게 됨에 따라 연무공원은 외견상으로만 존속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신식화폐를 주조하기 위한 전환국이 설치되고 묄렌도르프가 총판에 임명되었으며, 이어서 조폐기구를 독일에 주문하는 한편 기술자의 고빙을 서두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1885년 가을 크라우스(F. Kraus)·리이트(C. Riedt)·디드리히트(C. Diedricht) 등 독일인 기술자 3명이 초빙되었고, 조각과 기관기사로는 일본 조폐국 旗手 稻川彦太郞과 池田隆雄이 고용되었다. 처음에 전환국에서는 은화·동화 등 14종의 화폐를 주조할 계획이었으나 조러밀약사건으로 묄렌도르프가 총판직에서 물러남으로써 은화 1원, 동화 10문, 5문 3종만 시험적으로 주조되다가 중단되면서 이들은 해고되었다.
그뒤 1892년 전환국 방판 안경수가 서양식 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일본인 관계자만을 고빙하여 인천전환국을 출범시켰으나 업무상 분쟁으로 말미암아 그 다음해 일본인관계자는 철수하게 되었다. 이에 조폐사업은 그동안 大阪의 조폐국에서 기술을 연수해 온 조선인들이 주전 실무를 담당하였지만, 운영자금의 부족·청국의 간섭 등으로 부진을 면치 못하였다.0244)
또한 정부는 미국 광산기술자를 초빙하여 광산개발을 추진함으로써 재정을 확충하려고 시도하였다. 1888년말 피어스는 주미조선공사관의 참찬관 알렌과 서기관 이하영의 주선으로 내무부 광무국의 광산감독에 임명되었다. 그로부터 평안북도 운산금광에 풍부한 금이 매장되어 있다는 보고를 받은 정부는 미국에서 石英臼機 10대 등 광무기기를 구입함과 아울러 5명의 광산기술자를 초빙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광무국은 이들 가운데 스코트(Scott)·하베이(Harvey) 두 사람만 채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주한 미국공사에게 거센 항의를 받았지만 정부는 알렌이 단독으로 그들을 고빙하였기 때문에 책임을 질 수 없다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그후 정부는 광산채굴에 필요한 막대한 비용을 마련하지 못하자 스코트 등도 해임시킴으로써 그들의 기술을 제대로 활용해 보지도 못한 채 재정만 낭비하고 말았다.0245)
한편 전신·우체·전등의 근대적 시설분야에서도 그 건설과 운용을 담당할 외국인 기술자가 초빙되었다. 먼저 1885년 청국의 화전국이 주관하였던 서로전선의 가설에는 다수의 청국 기술자가 조선에 파견되었는데, 당시 덴마크인 뮤렌스테스(H. J. Muhlensteth)가 고빙되어 왔다. 서로전선 건설 후 1886∼1888년간 그는 정부가 독자적으로 가설하였던 남로전선의 공사를 지휘하기도 했다. 그리고 남로전선 가설시 동문학에서 영어를 교수한 바 있는 영국인기사 핼리팩스가 勘路委員으로서 1년간 노선을 측량하는 데 관계하였다. 또 1893년 전보총국이 전우총국으로 개편될 때, 그레이트하우스가 잠시 회판외체우편사무에 임명되었다. 외교고문이었던 그가 이 직책을 맡게 된 것은 국제우편관계 때문이었다. 그밖에 1887년초 경복궁에 전등을 설치할 때 미국인 멕케이(William McKay)를 고빙하였으나 내한한 지 얼마 안되어 조선인에게 저격당하여 사망하고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전기 가설공사가 늦어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1884년 모범농장인 농무목축시험장을 설치하면서 1887년 영국인 재프리를 채용하였으나 그 역시 10개월 뒤에 사망하였던 것이다.0246)
이상과 같이 조선정부는 외국인 고문관 및 기술자를 고빙하여 개화·자강정책과 자주외교를 효율적으로 추진하려고 노력하였지만 부국강병과 국가독립의 실현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그 실패의 원인으로는 먼저 정부가 근대적 지식과 기술을 수용하거나 열강간의 상호 견제 내지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외국인 고문을 고빙하기도 하였지만, 청·일 양국과 구미열강이 자국의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을 확대시키려는 방편으로 그들을 파견한 사례가 많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 외국인 고문들은 자신 내지 본국, 또는 자신을 추천해 준 국가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도모함으로써 외국인고문 고빙은 정부가 의도한 본래의 목적과 달리 오히려 조선의 자주적인 발전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외국인 고빙은 정치·경제·군사분야에 편중되었던 반면 국력 강화의 기초를 다지는 교육·기술분야에 소홀히 하였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교육관계 고빙인은 근대적 학문을 심도있게 교육하기보다 어학을 가르치는 데 역점을 두었고, 산업기술자는 단계적이고 무계획하게 초빙된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근대화 추진의 인적 자원 양성이나 근대산업의 기반 형성에 커다란 기여를 하지 못하였다.
또한 조선에 초빙된 외국인 고문들은 출신과 경력, 그리고 전문성의 측면에서 제대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의 부족, 연령문제 등으로 인해 본국에서 출세할 기회를 잃었거나 청·일 양국과 이해관계에 얽혀 있었기 때문에 초빙되었던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뚜렷한 소명의식과 사명감을 갖고 고문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기보다 고액의 월급과 지위를 보장받고 이권을 챙기는 데 열중하였던 것이다.
한편 1885∼1893년간 정부가 외국인 고문관들을 고빙하여 자주독립 내지 부국강병을 이룩하려는 노력은 조선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하고 있었던 청국의 방해 혹은 비협조로 좌절되기도 하였다. 특히 원세개는 조선정계내에서 개화파 내지 개화지향적인 인물들을 축출함으로써 조선의 개화활동 자체를 위축시켰으며, 청국의 추천으로 파견된 고문들을 통제함으로써 자국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확충하는 데 주력하였던 것이다. 심지어 원세개가 고종폐위까지도 서슴치 않고 시도하는 정황 속에서 애초부터 외국인 고문의 고빙을 통해 자주외교와 개화정책을 원활하게 펼쳐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하였다고 여겨진다.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점은 국가재정의 빈약으로 말미암아 정부가 장기적인 계획 아래 다수의 유능한 외국인 고문을 초빙·대우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정부는 주로 해관세 수입에 의해 외국인 고빙에 필요한 재정을 충당하려 했지만, 조선해관은 청국해관의 지배 하에 있었으므로 자유롭게 해관세를 사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해관세 수입마저 직원의 봉급과 외국에서 도입한 차관의 상환금 등으로 대부분 지출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정부의 재정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그 결과 봉급도 제때 지불받지 못한 상황에서 외국인 고문들은 업무를 충실히 이행할 의욕을 상실하게 되었고, 일부는 중도에서 해고당해 귀국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울러 정부내에 국제정세에 밝고 근대적 제도와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개화파세력이 부재했던 점도 외국인 고문의 지식과 능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김옥균·홍영식 등 급진개화파들은 살해당하거나 일본으로 망명하였으며, 청국의 후원으로 요직에 등용되었던 김홍집·김윤식 등 점진개화파 역시 반청적 입장으로 전환한 고종과 민씨척족에 의해 관직에서 배제되었던 것이다. 비록 박정양·김가진 등 소수의 개화파인사들이 개화·자강기구에 기용되었지만 근대화추진에 대한 열의나 능력도 없었던 민씨척족이 외국인 고문관과 기술자를 효과적으로 이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0247)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인 고문관은 조선의 개화·자강운동의 발전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즉, 그들은 대내외적으로 조선의 자주 내지 독립의식을 선양시키는 데 기여하였을 뿐 아니라 교육활동을 통해 근대적 의식을 심어주고 개화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데 일조하기도 하였다.
<韓哲昊>
0238) 스워다우트 지음·申福龍·姜錫燦 옮김,≪데니의 생애와 활동-韓末 外交 顧問制度의 한 硏究-≫(평민사, 1988).
0239) 崔鍾庫,≪韓國의 西洋法受容史≫(博英社, 1982), 155∼158·192∼193쪽.
0240) 高柄翊,<朝鮮海關과 淸國海關과의 關係-「메릴」과「하트」를 中心으로->(≪東亞交涉史의 硏究≫, 서울大學校出版部, 1965), 465∼481쪽.
0241) 李光麟,<育英公院의 設置와 그 變遷>, 앞의 책, 112∼119쪽.
0242) 李光麟,<美國軍事敎官의 招聘과 鍊武公院>, 앞의 책, 161∼173쪽.
0243) 柳永益,<開化期 美國人 軍事敎官 傭聘 始末>, 앞의 책, 63∼71쪽.
0244) 元裕漢,<典圜局攷>(≪歷史學報≫37, 1968), 58∼63·74∼80쪽.
0245) 李培鎔, 앞의 책, 22∼25·59∼62쪽.
0246) 李光麟,≪韓國史講座 V:近代篇≫(一潮閣, 1981), 226∼232쪽.
0247) Young Ick, Lew, “American Advisers in Korea, 1885∼1894:Anatomy of Failure,” Andrew C. Nahm, ed., The United States and Korea:American- Korean Relations, 1866∼1976(Kalamazoo:The Center for Korean Studies, Western Michigan University, 1979), pp. 78∼82;李光麟, 위의 책, 232∼233쪽. 李元淳,<韓末 雇聘歐美人 綜鑑-外國人雇聘問題 硏究 序說->(≪韓國文化≫10, 1989), 304∼3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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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1. 개항 후의 국제무역
2. 국내적 상품유통의 변동

3. 방곡령실시의 사례와 원인

4. 사회신분제의 동요

5. 개항기 지주제와 농업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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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1. 동학농민전쟁의 사회경제적 배경
1) 개항 이후 미곡수출의 증대와 지주경영의 강화
1876년 우리 나라가 경험한 개항은 세계사적으로 볼 때 세계 후진 제지역에서 보편적으로 경험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개항은 이러한 세계사적 보편성과 더불어 한국사적 특수성도 지닌 것이었다. 한국사적 특수성은 산업혁명도 달성하지 못한 일본에 의해 개항됐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일본은 歐美선진국가에서 직물류의 자본제 상품을 수입하여 한국에 수출하는 중개무역을 수행하였다. 그러므로 일본에 대한 개항은 일본에 대한 종속만이 아닌, 구미선진국가를 중심국으로 하는 세계자본주의 시장체제에의 일본을 매개로 한 종속이었던 것이다.0553) 따라서 개항을 계기로 우리 나라는 후진국가인 일본과 청나라의 압력 뿐만 아니라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압력을 이중적으로 받았다. 특히 자본주의 발달이 미숙한 일본과 청에 의해 가해진 외압은 자본주의적 논리가 아니라 정치적, 군사적 외압을 통해 관철되는 원시적 축적형 외압이었다.0554)
이러한 이중의 외압은 구체적으로 일본과 청을 비롯한 구미열강과의 불평등조약 체결로 구체화되었다. 朝日修好條約에서 관세자주권의 상실, 일본화폐의 유통권 허용, 곡물수출의 허용이 이루어졌고, 1882년 朝美修好條約·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과 그 이듬해 수정체결 된 朝英條約을 계기로 서울, 양화진의 개방과 내지통상권이 허용됨으로써 불평등조약체제하의 우리 나라의 시장은 서울은 물론 내륙지방까지 외국자본에 전면 개방되었던 것이다.0555)
이와 같은 불평등조약체제의 성립은 미숙하나마 국내적 분업체제에 의해 형성되었던 종전의 상품생산과 유통구조에 커다란 변화를 야기하였다. 이러한 변화 가운데 가장 심각한 변화는 일본에 대한 미곡유출로 야기된 농업환경의 변화였다. 개항 이전 조선사회는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농업에서의 상품생산이 성장하고 있었으며, 농민적 상품화폐경제도 확대되는 추세였다. 특히 지주경영은 19세기 중반 이후 광범위한 농민항쟁으로 말미암아 정체되는 추세에 있었다. 그러나 개항 이후 곡물수출의 증대와 이로 말미암은 미곡가격의 상승은 위기에 처한 지주제가 강화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인천의 개항장을 끼고 있는 강화지역의 지주층들은 미곡무역에서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고 토지에 투자하여 대지주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0556) 호남지역에서도 금강, 영산강을 중심으로 한 포구와 내륙장시로 연결되는 시장권을 통하여 미곡의 상품화가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지주제가 발전하였다.0557) 지주층은 직영지의 확대, 소작경영의 강화, 그리고 精米를 통한 상품화과정을 직접 장악하는 방식으로 지주제를 강화하였다. 지주의 직영지경영은 신분적 관계에서 벗어난 노비·雇工·挾戶層 혹은 임노동층을 노동력으로 동원하였으며, 소작지 경영에서도 빈번한 作人교체와 마름에 대한 통제강화를 통해 지대수입을 증대시켰다. 지주층은 종전과 달리 증대된 소작료 등을 시장에 판매하거나, 또는 고리대나 상업투자를 통해 화폐자본을 축적하였고, 이를 다시 토지에 투자함으로써 대규모 토지를 집적하여 대지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소작농민층은 지주층의 직영지 확대와 소작경영강화로 인해 점차 몰락하여 갔다. 차지규모도 10두락 내지 5두락 정도로 열악해졌으며, 소작권의 잦은 이동으로 안정적인 생계마저도 위협받았던 것이다.
한편 미곡유출로 인해 미곡의 상품화가 진전되고, 기선 등의 근대적 운송수단의 도입을 기반으로 사회적 분업이 발전하면서 상업적 농업은 활성화되었고, 이 과정에서 부농경영도 성장하였다. 부농경영의 성장으로 농촌의 소빈농층들은 농업경영에서 점차 驅逐되고 임노동자로 몰락되어 갔다.0558) 그러나 부농경영의 성장은 지주제 강화와 대립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농민전쟁 직전에 이르러서는 상농층, 특히 부농의 경영도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곡물수출은 곡물의 상품화를 촉진하면서 경작면적의 증대와 생산력의 발전을 통해 부농성장의 가능성을 열어 놓기는 했지만, 농민경리에서의 잉여는 대부분 외국상인과 지주층에 의해 수탈당했기 때문에 결국 부농경영도 위기에 처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0559)
이와 같이 자본주의 시장체제에의 편입으로 결과한 농업환경의 변화는 농촌사회의 급속한 분해, 재편성을 초래하였다. 지주층은 경제적 이익을 획득하였지만, 소빈농층은 시장관계로의 강제적 편입에 따라 농민적 잉여의 유출을 강요당함으로써 전반적으로 몰락하여 갔다. 지주적 상품생산은 성장하고 농민적 상품생산은 쇠퇴하였다. 이렇듯 세계자본주의 시장체제에의 강제적 편입은 민족적 모순 뿐만 아니라 봉건적 생산관계인 지주-소작인간의 모순도 심화시켰던 것이다.
0553) 정창렬,<韓末 變革運動의 政治·經濟的 性格>(≪韓國民族主義論≫, 창작과 비평사, 1982).
0554) 梶村秀樹,<동아시아 지역에서의 帝國主義體制로의 이행>(≪韓國近代經濟史硏究≫, 사계절, 1983).
0555) 김경태,<丙子開港과 不平等條約關係의 構造>(≪梨大史苑≫11, 1973).
0556) 김용섭,<江華島 金氏家의 秋收記를 통해서 본 地主經營>(≪東亞文化≫11, 1972).
홍성찬,<韓末 日帝下의 地主制硏究-江華 洪氏家의 秋收記와 帳冊分析을 중심으로->(≪韓國史硏究≫33, 1981).
0557) 왕현종,<19세기말 호남지역 지주제의 확대와 토지문제>(≪1894년 농민전쟁연구 1-농민전쟁의 사회경제적 배경-≫, 역사비평사, 1991).
0558) 이윤갑,<개항∼1894년 농민적 상품생산의 발전과 갑오농민전쟁-경북지역의 농업변동을 중심으로->(≪계명사학≫2, 1991).
0559) 하원호,<개항후의 곡가변동에 대하여(1876∼1894)>(≪이우성교수정년논총 민족사의 전개와 그 문화(하)≫, 창작과비평사, 1990). 개항 이후 부농경영의 추이에 대해서는 학계의 견해가 일치되고 있지 않다. 대체로 미곡상품화의 진전에 따른 부농경영의 성장가능성을 인정하고 있지만, 이 가능성이 농민전쟁기까지 지속된다는 견해와 1890년을 기점으로 부농성장이 억제되고 있다고 보는 견해가 대립되고 있다. 이러한 견해의 차이는 농민전쟁의 주체문제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사안의 하나이다. 즉 1890년대를 기점으로 부농성장이 저지, 억제되고 있다는 하원호의 입장은 농민전쟁의 참여집단으로 부농층을 상정하는 반면, 부농성장이 농민전쟁기까지 계속 유지되었다고 보는 이윤갑의 견해는 부농을 외세와 봉건지배세력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는 층으로 설정하고, 이들은 농민전쟁기에 소빈농층의 공격대상이 되었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농성장추이에 대한 논란은 하원호,≪韓國近代經濟史硏究≫(신서원, 199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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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학교조 신원운동
1) 동학교단의 조직과 운영
동학농민전쟁의 성격을 규명하고 그 역사적 의의를 조명하는 데 있어 우선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과제중의 하나가 그 전단계의 투쟁 양상을 밝혀내는 일이다. 이른바 조선 후기에 들어 빈발하던 民亂과 동학교단측에 의해 주도된 敎祖伸寃運動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동학농민전쟁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교조신원운동은 대체로 동학교단이 주도한 단순한 종교운동으로 파악함으로써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어떠한 경로를 거쳐 전국적인 투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는가를 규명하는 데 소홀했음이 지배적인 연구 경향이었다.0587)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전단계 투쟁으로서 동학농민전쟁을 趨動해 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는 교조신원운동에 대한 연구는 동학농민전쟁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밝혀내는 바탕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여전히 학계의 쟁점이 되고 있는 東學과 동학농민전쟁의 관계를 규명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연구 과제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 지배체제의 모순이 심화되면서 민란이 빈발하고 있을 무렵, 1860년 4월 5일 慶尙道 慶州에서 몰락양반의 庶子나 다름 없던 崔濟愚(1824∼1864)0588)에 의해 창시된 東學은 지속되는 정치의 부패, 조세수탈의 가중, 계급적 모순의 심화, 흉년과 질병으로 인해 불안과 고통속에서 삶을 지탱해 가던 조선사회의 기층민들에게 큰 호소력으로 파고 들었다. 기존의 부패한 현실을 부정하고 이상적인 미래를 제시하면서 민중들에게 포교된 동학은 사회개혁을 바라던 일부 지식인층과 민중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사상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유교적 윤리가 지배하던 당시 사회에서 동학은 이단시되었고, 일부 지식층과 기층 민중을 중심으로 한 동학 교세의 급격한 증가는 커다란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 그리하여 1863년 12월 체포된 최제우는 ‘左道로 백성들을 미혹시켰다’는 죄명으로 이듬해 3월 10일 처형되었다. 최제우의 처형 이후 동학교세는 일시적으로 위축되었으나 그의 제자 崔時亨(1827∼1898)의 노력으로 1870년대 후반에는 지도체제가 확립되었고, 동학의 기본경전인≪동경대전≫과≪용담유사≫의 集成이 이루어졌으며, 주요 종교의식이 확립되어 교세가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1880년대에는 丹陽·槐山·淸風·忠州·淸州·沃川·報恩·公州·木川·禮山 등 충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교세가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그리하여 증가되는 동학의 교세는 당시 지배층에게 만만치않은 위협으로 인식되었고, 그에 따라 지방 수령들은 지속적으로 동학에 대한 탄압을 계속했다. 1880년대 이후 지방 수령들에 의한 동학 탄압은 邪學을 금단한다는 명분 아래 동학교도의 재산을 수탈하거나 잡아 가두는 등의 형태로 이어졌으며 동학교도들은 피신과 도망, 석방금을 내고 풀려나는 소극적인 방법으로 교문을 지켜 나갔다.0589)
그러나 1890년대 초에 들어와 동학교단은 ‘敎祖伸寃運動’0590)이라는 합법적 청원운동을 통해 동학을 공인받고자 하였다.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伸寃함으로써 동학의 공인과 포교의 자유를 인정받고자 했던 교조신원운동은 經國大典에 보장된 伸訴제도를 통해 조정의 공인을 받기 위한 집단적 시위운동으로 나타났다.
0587) 敎祖伸寃運動에 관한 기존의 연구성과를 연도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李光淳,<崔海月과 非暴力運動>(≪韓國思想≫1·2, 1957).
金義煥,<1892∼1893년의 東學農民運動과 그 性格-參禮聚會·伏閤上訴·報恩集會를 中心으로->(≪韓國史硏究≫5, 1970).
韓㳓劤,<東學의 性格과 東學敎徒의 運動>(≪한국사 17:동학농민봉기와 갑오개혁≫, 국사편찬위원회, 1973).
趙景達,<東學農民運動과 甲午農民戰爭의 歷史的 性格>(≪朝鮮史硏究會論文集≫19, 1982).
鄭昌烈,<東學敎門과 全琫準의 關係-敎祖伸寃運動과 古阜民亂을 中心으로->(≪19世紀 韓國傳統社會의 變貌와 民衆意識≫,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82).
―――,<古阜民亂 硏究>上·下(≪韓國史硏究≫48·49, 1985).
張泳敏,<東學의 大先生伸寃運動에 관한 一考察>(≪白山朴成壽敎授華甲紀念論叢 韓國獨立運動史의 認識≫, 1991).
申榮祐,<報恩과 東學集會>(≪外俗離 書院溪谷 文化遺蹟≫, 충북대 호서문화연구소, 1992).
―――,<장안 마을 東學 大都所와 돌성 築造의 의미>(≪報恩 帳內里 東學遺蹟≫, 충북대 호서문화연구소, 1993).
박찬승,<1892, 1893년 동학교도들의 ‘신원’운동과 ‘척왜양’운동>(≪1894년 농민전쟁연구≫3, 역사비평사, 1993).
배항섭,<1890년대 초반 민중의 동향과 고부민란>(≪1894년 농민전쟁연구≫4, 1995).
0588) 최제우는 정확하게 말한다면 庶子가 아니라 再嫁한 寡婦의 아들이다.
0589) 1880년대에 지방 수령들에 의해 자행된 동학 탄압사례는 필자의 다음 논문에 잘 밝혀져 있다.
朴孟洙,≪崔時亨硏究-主要 活動과 思想을 中心으로-≫(韓國學大學院 博士學位論文, 1996),<표 12>참조.
0590) 1864년 3월 10일에 ‘左道惑民之律’에 의해 처형당한 동학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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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교조신원운동의 전개
(1) 공주취회
공주취회는 1890년대 초에 전개된 최초의 교조신원운동이라는 점에서 주목되어 왔다. 또한 당시 동학교단을 이끌고 있던 최시형의 지도노선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집회로 인식되어 왔다. 기존 연구는 徐丙鶴·徐仁周 등이 최시형의 승인이 없이, 혹은 반대를 무릅쓰고 공주취회를 추진한 것으로 이해해 왔다.0591) 이같은 연구는 1871년 3월에 일어났던 寧海民亂 당시 李弼濟의 제의를 최시형이 적극 만류하고 가담하지 않았다는 주장과 맞물려 최시형을 더욱 ‘보수적인 인물’로 규정하는 바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근래들어 새롭게 발굴된 자료들은 최시형에 대한 그동안의 인식이 바로 잡아져야 한다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최근에 발굴된 자료들에 의하면 최시형은 영해민란에도 적극 참여했으며,0592) 1892년 7월에 서인주와 서병학에 의한 교조신원운동 전개 요청 이후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즉, 최시형은 1892년 8월 21일 淸州 松山 孫天民家에 머물면서 忠州에 거주하는 辛司果에게 서한을 보내 40명의 ‘望碩之士’를 선발하여 그 명단을 가지고 9월 10일까지 직접 청주 松山 孫士文家0593)로 찾아오도록 지시하였다.0594) 또한 1892년 8월 29일에는 호남좌우도 편의장 南啓天에게도 비슷한 내용의<輪照>를 하달하였다.0595) 南啓天에게 보낸<윤조>역시 1백여 명을 선발하여 주소성명이 적힌 명단을 9월 5일까지 보내도록 지시하고 있다. 이같은 조치는 모두 공주취회가 열리기 직전에 이루어지고 있는 점에서 본격적인 교조신원운동의 전개를 위한 사전준비였다고 생각된다.
1892년 10월 서인주와 서병학은 재차 최시형을 찾아와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할 것을 요청하였다. 최시형 역시 수령과 이서 토호들의 침학에 시달리고 있던 교도들의 절박한 사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0596) 두 사람의 건의를 받아 들여 교조신원운동을 허락하는 立義通文을 하달하였다. 1892년 10월 17일 밤에 하달된 입의통문의 요지는 각 접주와 교도들에게 伸寃의 大義에 합력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1892년 10월에 전개된 公州聚會는 종래 알려진 것처럼 서인주·서병학 2인이 최시형의 허락없이 전개한 것이 아니라 최시형의 허락 아래 교단적 차원에서 추진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서인주와 서병학 등이 최시형의 허락을 얻어낸 까닭은 교주의 허락이 있어야 동학조직의 동원이 가능하고 많은 교도들을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伸寃의 大義에 적극 참여하라’는 최시형의 입의통문이 각지의 접주들에 하달된 후 충청감사에게 최제우의 신원을 호소하기 위한 公州議送所가 설치되었다.0597) 이 내용에 의하면, 각 접주는 ‘誠德信義知事之道儒’를 인솔하고 공주의송소로 와서 淸州로부터의 명령을 기다려 처사를 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여기서 淸州는 최시형이 은거하고 있던 淸州 松山 손천민가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손천민가에는 孫天民·徐仁周·徐丙鶴 등 신원운동 지도부가 왕래하면서 최시형의 명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공주취회에 참가한 각 접주 및 교도들은 최시형-손천민, 서인주, 서병학-공주의송소로 이어지는 명령계통을 따라 행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공주의송소’에 모인 각 지방 접주들과 교도 1천여 명은0598) 10월 20일경0599) 교조신원을 요구하는 議送單子를 작성하여 충청감영에 제출하였다. 이 의송단자는 10월 17일 밤에 발송한 立義通文에서 최시형이 주장했던 동학교조 최제우의 신원을 요구하는 동시에 西學의 만연 현상 및 倭國之商의 부당한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0600) 충청감사에게 제출된 의송단자에 나타난 西學과 倭商에 대한 비판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방금 서양 오랑캐의 學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 뒤섞여 있고 왜놈 우두머리의 毒이 외진에 도사리고 있으니 망극할 일이며, 음흉하고 거역하는 싹이 임금님의 수레 바로 밑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절치부심하는 일이다. 심지어 왜놈 상인들은 각 항구를 두루 통하여 싸게 사서 비싸게 팔아 얻는 이익을 저들이 마음대로 하니 돈과 곡식이 마르고 백성들이 지탱하고 보전하기 어렵다. 心腹같은 땅과 咽喉같은 장소의 관세 및 시장세와 산림과 천택의 이익마저 오로지 바깥 오랑캐에게로 돌아가니 이것이 또한 우리들이 손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는 바이다.”0601) 여기에 나타난 斥倭洋의식은 1892년 11월의 삼례취회에서, 그리고 1893년 2월 광화문 복합상소단계와 3월의 보은취회, 그리고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 단계에서도 한결같이 강조된다. 왜양을 강하게 배척하고 동학금단을 구실로 한 전재수탈을 금해줄 것을 요구한 의송단자를 받은 충청감사는 10월 22일 “동학을 금하고 금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朝家의 처분에 달린 것이므로 監營에서는 단지 조가의 명령을 따라 시행할 뿐이므로 감영에 와서 호소할 일이 아니라”고 답변하였다. 그리고 10월 24일에는 각 군현 守宰들에게 동학을 금한다는 핑계로 討索하는 행위를 금하는 조치를 담은 甘結을 하달하였다.0602)
충청감사의 감결은 실제로는 기만적인 것이었지만 30년동안 탄압과 지목에 시달려 온 최시형으로서는 동학금단을 구실로 한 수령, 이서, 토호배들의 수탈행위를 금하겠다는 충청감사의 조치에 대하여 일정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하였다. 충청감사 조병식에게<各道東學儒生議送單子>라는 청원서를 제출함으로써 시작된 공주취회는 집단적인 呈訴 형식 덕분에 희생자가 없었다. 비록 ‘敎祖의 伸寃’이란 원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동학교도에 대한 관리의 탐학을 금한다는 甘結을 얻어냄으로써 동학교단 지도부는 상당히 고무되었다. 그리하여 최초의 신원운동인 공주취회는 이후 전개될 삼례취회를 비롯 광화문 복합상소, 보은취회 등 일련의 집회를 연달아 개최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 그 의의가 크다.
0591) 기존 연구들은<海月先生文集>,<本敎歷史>,<侍天敎宗繹史>등 동학교단사에 근거하여 최시형이 1892년 7월에 徐仁周와 徐丙鶴이 제의한 敎祖伸寃運動 전개 요청을 거절하였다고 한결같이 주장하고 있다.
0592) 관변측 자료인<嶠南公蹟>과 <寧海賊變文軸>, 교단측 자료인<崔先生文集道源記書>와<海月先生文集>등은 최시형이 1871년 3월의 寧海民亂에 적극 가담하였음을 분명하게 밝혀 주고 있다.
0593) 孫士文은 孫天民을 가리킨다. 士文은 손천민의 字이다.
0594) <神師의 遺墨>(≪天道敎會月報≫195, 1927. 3).
0595) <1892. 8. 29 輪照>(≪海月文集≫,≪海月文集≫에 대한 상세한 해제는 앞에 소개한 朴孟洙의 학위논문에 실려 있다).
0596) 당시 최시형이 교조신원운동을 허락하게 된 배경에 대하여<天道敎創建史>는 “이 해 十月에 徐仁周 徐丙鶴이 또한 固請하고 諸道人이 亦是 指目을 견디지 못하야 굳게 伸寃함을 請한대 神師 이에 立義文을 지어 各地에 遍諭하시니(≪東學思想資料集≫貳, 135쪽)”라 하였고,<東學史>에서는 이 해 十月에 四方에 있는 道人들이 指目에 쫒기여 모여온 자 많아야 伸寃할 일을 請하는 자 많은 지라 先生은 이 여러 사람의 뜻을 쫒아 許諾을 하고 곧 입의문을 지어 효유하니(≪東學思想資料集≫貳, 426쪽)”라 하여 관의 탄압과 지목에 시달리던 하층교도들의 요구와 이에 부응한 서인주 서병학 등의 요청을 받아들여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할 것을 허락하였다고 하였다.
0597) ‘公州議送所’에 관한 내용은 奎章閣에 소장된<東學書>, 동학·천도교측 자료인<本敎歷史>,<侍天敎宗繹史>등에는 없고 全北 扶安에 있는 천도교 호암수도원에 소장되어 있는『海月文集』에만 실려 있다. 立義通文이 도착된 후 각 地方 接主들이 취해야 할 행동지침을 담고 있어 주목된다.
0598) <時聞記>(≪東學農民戰爭史料大系≫2, 驪江出版社, 1994), 175∼176쪽.
0599) 충청감사의 題音이 10월 22일에 나왔으므로 의송단자 제출일자를 10월 20일경으로 추론하였다.
0600) 원래 東學의 斥倭洋意識은 1860년에서 1863년 사이에 최제우가 지은 東經大全과 용담유사 등의 저작 속에 이미 드러나 있었다.
0601) <各道東學儒生議送單子>(≪韓國民衆運史資料大系:東學書≫, 驪江出版社, 1986), 64∼65쪽.
0602) 위의 책, 68∼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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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삼례취회
공주취회에서 충청감사로부터 ‘지방관들의 동학금단을 구실삼은 토색을 금한다’는 甘結을 얻어낸 동학교문은 크게 고무됐다. 공주취회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평가한 교단 지도부는 충청도와 함께 탄압이 극심했던 전라도에서도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충청감영에서 얻어낸 성과들을 전라감영에서도 얻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이에 최시형 등 교단 지도부는 교통이 편리한 參禮驛을 집결 장소로 택하였다.
전라도 삼례에 집결하라는 동학 지도부의 동원령이 담긴 敬通0603)은 1892년 10월 27일(음력) 밤 全羅道 參禮道會所 명의로 각 포에 발송되었다. 이 경통은 ‘錦營에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니 完營에 議送單子를 내는 것 또한 天命’0604)이라 하여 삼례집회의 목적을 밝히는 한편, ‘모임에 달려오지 않으면 별단의 조치를 마련함은 물론이요 하늘로부터 죄를 받을 것’0605)이라며 교도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그리하여 10월 29일부터 각지에서 몰려들기 시작한 동학교도들은 11월 1일에 이르러서는 수천을 헤아리게 되었다.0606) 11월 2일 姜時元·孫天民 등은 최시형의 재가를 받은<各道儒生議送單子>를 전라감사 李耕稙에게 제출하여 大先生0607)의 원한을 풀어 주도록 간청하였다. 이 議送單子에서 동학교도들은 “최제우선생이 上帝의 명을 받아 儒佛仙 三道를 합해 하나로 만들어 한울님을 지성으로 섬기며 儒로서는 五倫을 지키며 佛로서는 심성을 다스리고 仙道로는 질병을 제거케 했다”0608)며 동학사상의 정당성을 천명한 뒤, 대선생이 무고한 죄명으로 처형된 지 30년이 지나도록 그 寃抑을 풀어 大道를 떳떳이 세상에 彰明할 수 없었던 恨을 호소했다. 또 동학과 서학을 ‘氷炭의 관계’로 규정하고 동학을 “윤리도 없고 분별도 없는 西學과 더불어 차별없이 취급하는 것은 不可하다”고 주장하면서 ‘서학의 여파로 간주, 유독 동학에 대해서만 힘을 기울여 배척하는 행위’의 온당치 못함을 지적하였다.0609) 뿐만 아니라 “列邑의 수령들이 빗질하듯 잡아 가두고 재산을 討取하여 쓰러져 죽는 자가 끊이지 않고 더불어 豪民들마저 侵虐에 가담하여 道人(동학교도)들이 정처없이 떠돌며 살 길이 없게 하고 있다”0610)며 동학에 대한 지방 수령과 토호들의 탄압과 이를 빙자한 토색을 고발하고, 동시에 “서양오랑캐의 學과 왜놈 우두머리의 毒이 다시 外鎭에 들어 앉아 날뛰며 제멋대로 행하고 있다”0611)며 外勢의 창궐을 강하게 경고하는 내용을 담아 공주취회에서도 주장한 斥倭洋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었다. 결국 의송의 요지는 동학은 서학을 배격하는 忠君孝親·廣濟蒼生·輔國安民의 敎이므로 조정이 현실적으로 인정하는 여러 道에 대해 간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학 포교의 자유를 공인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학교도들이 제출한 의송단자에 대해 전라감영은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엿새가 지나도록 아무런 반응이 없자 삼례취회 지도부는 11월 7일경 독촉 議送을 다시 보냈다. 11월 9일에야 “너희 동학은 나라에서 금하는 바이다. 사람의 심성을 갖추고서도 어찌하여 正學을 버리고 이단을 좇아 스스로 죄를 범하는 것인가. 소장의 내용인즉 동학을 널리 포교토록 허용하기를 바랐으니 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곧 물러가 모두 새 사람이 되어 미혹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0612)는 題音을 내렸다. 이러한 무성의한 제음은 동학교도들을 크게 자극하였다. 그러자 이경직은 11월 11일자 甘結을 통해 ‘동학 禁斷을 빌미로 한 錢財의 수탈을 금하라’는 지시를 내렸다.0613) 11일자 감결은 동학을 공인하지 않은 채 교도들에 대한 지방수령들의 토색질을 금한다는 내용이었다. 충청감영에서 하달된 감결과 비슷한 요지였다. 이에 따라 동학교단 지도부는 11월 12일 完營道會所 명의의 경통을 내려 ‘道는 비록 나타났으나 寃은 아직 풀지 못했다’며 삼례취회의 제한적 성과를 내세우고 ‘法軒(해월 최시형)의 지휘를 기다려 雪寃을 도모토록 고심하는 것이 도리’라고 밝히면서 ‘곧 귀가하여 길가에서 방황하지 않도록 하라’고 해산을 종용하였다.0614) 12일자의 경통은 또 “첫째, 처신과 행사는 도리에 합당했으니 이제부터 더욱 도리에 힘쓰자. 둘째, 삼례취회는 대의명분에 떳떳하다. 해월 선생이 직접 지휘하지 못한 것을 달리 생각하지 마라. 셋째, 이후 무단한 탄압이 있을 경우 소장 등을 제출하며 적극 대응하라. 넷째, 도리를 어기고 기강을 어지럽히는 자는 엄히 책망하라. 다섯째, 일찍부터 대의에 참여, 살림이 어려워진 교도들을 함께 도우라”0615)는 다섯 가지 행동강령도 하달하였다. 이로써 10여 일에 걸친 삼례취회는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고 임시로 설치됐던 완영도회소는 철수했다. 그러나 지도부의 공식 해산명령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교도들은 해산하지 않고 있었다. 11월 19일자 北接道主 명의로 나온 통문이 이를 반증한다. 즉 ‘임금께 伏閤상소할 계획을 다시 도모하려 하니 다음 조치를 기다려 달라’ ‘서로 도와 떠돌아 다니지 않도록 하여 합심해 異論이 없도록 하라’0616)는 경통 내용이 그 증거이다. 19일자 경통과 함께 21일자로 하달된 전라감영의 감결 또한 일부 교도들이 21일까지도 해산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한글로 번역하여 널리 게시하라’는 당부까지 곁들인 두번째 감결의 주된 내용은 ‘동학도들을 잘 타일러 편안히 살게 하며 읍속들은 토색질을 금하라’는 것이었으나 서두에서 ‘동학교도들을 安接토록 할 것’을 다시 지시하고 있어0617) 이때까지 해산하지 않거나 다른 곳을 떠돌며 귀향하지 않은 교인들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곧 삼례취회가 지도부에 의해 11월 12일 공식 폐회됐다 할지라도 실질적인 해산은 21일 이후로 볼 수 있다.
삼례취회는 당시 동학교단 교주인 최시형이 직접 주도한0618) 조직적인 신원운동이었다. 노골적이고 집단적인 대중집회를 통해 동학의 공인 및 포교의 자유획득과 같은 ‘정치적 요구’를 달성하려 했으며, 교문 자체의 문제를 넘어 당시 민족적 현안이었던 ‘斥倭洋倡義’의 실현까지를 언급했다는 점에서 삼례취회의 역사적 의의는 더욱 높이 평가받고 있다. 삼례취회는 또 집단적인 운동을 통해 일정한 성과를 얻어낼 수 있음과 동학교단과 일반민중과의 결합 가능성, 대중집회에 대한 실험 등을 성공적으로 타진함으로써 장차 동학농민전쟁의 징검다리로서의 의의를 갖는다.
0603) 동학교단 지도부와 각 지역의 包와 接, 또는 포와 포, 접과 접끼리 중요사항을 전달하기 위하여 발했던 通文을 말한다.
0604) <敬通>,≪韓國民衆運動史資料大系:東學書≫, 70쪽.
0605) <敬通>, 위의 책, 71쪽.
0606) 이 때의 참여 규모를<天道敎書>는 “11월 1일 각지 두령이 포내 도인들을 솔하고 參禮驛에 赴하니 그 參會者 수천인이라”하였고,<天道敎會史草稿>는 “11월 3일에 각지 두령이 포내 도인을 솔하고 삼례역에 會集한 자 수천이라”고 전하고 있다.
0607) 당시 동학교도들이 교조 최제우를 존칭하여 부르던 호칭.
0608) <各道東學儒生議送單子>, 위의 책, 71∼72쪽.
0609) <各道東學儒生議送單子>, 위의 책, 72쪽.
0610) 위의 책, 73쪽.
0611) 위의 책, 74쪽.
0612) <題音>, 위의 책, 75쪽.
0613) <甘結>, 위의 책, 77∼78쪽.
0614) <1892년 11월 12일 敬通>, 위의 책, 78∼79쪽.
0615) 위의 책, 79∼80쪽.
0616) 위의 책, 82쪽.
0617) 위의 책, 85쪽.
0618) 삼례취회 무렵 최시형은 경상도 尙州 功城面 旺室에서 말을 타고 삼례로 출발하려다 낙상하여 실제 참석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삼례취회를 지도한 孫天民, 姜時元 등은 최시형의 심복 제자들로서 사실상 최시형의 명령을 그대로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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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광화문복소와 척왜양방문 게시운동
공주와 삼례에서 행한 동학교도들의 신원운동은 당초 요구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지방 수령들의 성과를 거두는 데 성공하였다. 동학교도들에 대한 부당한 침학행위를 말라는 공식적인 명령을 충청감사와 전라감사로부터 얻어낸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여러 자료들에 의하면 충청·전라 양 감영의 공문은 별 효과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학의 공인문제와 교조의 신원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동학교단 지도부는 교도들을 더욱 조직화하여 중앙 조정을 향한 신원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양 감영에서 모두 동학의 공인문제는 중앙 조정의 권한이라 언명하였기 때문이다.
중앙 조정을 향한 복합상소 계획은 이미 삼례취회 단계에서 결정되어 있었다. 삼례취회를 결산하는 1892년 11월 19일자 동학 지도부의 敬通이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한다. “임금님께 복합할 계획은 방금 상의해서 다시 도모하려 하니 다음 조치를 기다리라”0619)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이 경통 내용은 광화문 복소가 공주·삼례 신원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준비되었음을 보여 준다. 동학교단 지도부는 우선 1892년 12월 6일경 복합상소에 대비한 도소를 충청도 報恩 帳內에 설치하였다. 12월 6일 도소를 설치하였다는 사실이 실린<本敎歷史>에 의하면, “당시 도소를 설치하자마자 각지로부터 오는 교도의 수가 폭주하여 迎送과 사무처리가 폭주했다”0620)고 전한다. 광화문 복합상소 계획은 이같이 몰려드는 민중들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동학지도부는 1차적으로 도소에 몰려드는 교도들을 통제하기 위해 12월 6일자로 도소출입을 제한하는 경통을 보냈다. 그러나 복합상소는 쉽게 실행되지 못했다. 복합상소에 대한 지도부의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고 복합상소 계획에 대해 최시형의 허락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복합상소의 성과가 어떻게 나타날 지 알 수 없는 상태였고 복합상소를 전후한 탄압을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동학 지도부는 12월 중순께 서울로 직접 올라가지 않고 중앙 조정에 소장을 올렸다. 첫머리에서 “道란 사람으로서 다같이 행할 바를 이름한 것이니 邪가 있고 바름이 있으며 같음이 있고 다름이 있는 것은 모두가 사리를 바르게 구한 것이니 헛된 판단만이라 할 수는 없다”0621)고<朝家回通>0622)이라는 상소장에서 지도부는 東學이 이단이 아님을 역설하고 충청도·전라도 지역에서 관리들의 탐학을 열거하면서 조정의 공평한 조처를 요청하였다. 동학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관리들의 탐학금지를 요구하는 이같은 상소에 대답이 없자, 동학 지도부는 상경투쟁인 복합상소를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그리하여 1893년 1월 淸州 松山에 있던 孫天民의 집에 奉疎都所가 설치되었다.0623) 봉소도소의 임원은 姜時元·孫天民·孫秉熙·金演局·徐丙鶴 등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은 복합상소 계획을 각 지역에 알린 다음, 2월 초순경 서병학을 먼저 서울로 보내 都所를 정하는 문제와 숙소문제를 해결하도록 했다. 서병학외 다른 지도자들은 2월 8일 과거보러 올라가는 선비차림으로 분장하여 일제히 상경했다. 이 무렵 서울에는 동학교도 수만 명이 외국인을 몰아내기 위해 상경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복합상소 당시 상경한 동학도의 수는 분명치 않다. 수만 명이라는 기록도 전하지만 당시 일본≪東京日日新聞≫이 게재한 수백 명 정도가 상경한 것으로 보인다.0624) 복합상소는 2월 11일부터 시작됐다. 광화문 앞에 출두하여 복소한 인원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다. 9명에서부터 80여 명에 이르기까지 분분하지만 대체로 동학지도부의 주요 인물들과 중견 동학지도자 40여 명이 복소에 나선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朴光浩를 疎首로 한 복소참여자는 13일까지 3일동안 상소문을 붉은 보자기에 싸서 상을 받들고 광화문앞에 나아가 엎드려 호소했다. 상소절차의 잘못을 들어 상소접수조차 거부하던 중앙정부는 14일 ‘집으로 돌아가 생업에 안주하면 원하는 바를 따라 해주겠다’는 내용의 傳敎를 내렸다. 정6품의 관원인 司謁이 전한 이같은 대답은 해산명령과도 같은 통고였다. 이리하여 1892년 10월부터 전개해 온 신원운동은 복합상소에서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함으로써 원점에 서게 되었다. 오히려 소두 박광호를 잡아 들이라는 왕의 명령으로 동학교도들은 더욱 가혹한 탄압을 받게 됐다. 그러나 이같은 외형적인 별무성과에도 광화문 복소는 동학교인들의 역사적 자각을 불러 일으키게 했으며 향후 투쟁방향의 새로운 전환을 준비할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광화문 복합상소 직후 京鄕에서는 斥倭洋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서울의 외국 공관과 교회당에 외국인을 배척하는 掛書가 나붙었으며 지방 관아에도 외국인을 배척하는 榜文이 게시되었다. 특히 미국인 선교사 기포드의 학당에 붙은 괘서를 시작으로 한 달 여동안 서울에서 잇따라 발생한 斥倭洋榜文 게시사건은 당시 국내외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특히 광화문 복합상소 이전부터 수만 명의 동학교도들이 외국인을 배척하고 몰아내기 위해 상경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던 상황에서 외국인들을 더욱 불안과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서울주재 외국공관에서는 유사시에 대비하여 본국과 연락을 취하고 자국민의 피난을 고려하는가 하면 조선정부에 대책을 촉구하는 등 부산한 움직임을 보였다. 대내외적으로 큰 파문을 던진 이같은 척왜양방문 게시사건을 주도한 세력은 과연 누구이며 일련의 교조신원운동과는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 또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전면에 내세워진 ‘斥洋斥倭’의 주장과는 어떤 연결고리를 갖는가. 이같이 제기되는 여러 의문은 척왜양방문 게시사건을 주도한 주도세력 문제와 관련지어 최근 학계의 가장 뜨거운 쟁점의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서울에서의 척왜양방문은 미국인 선교사 집에 붙은 두 건과 프랑스·일본 공사관에 나붙은 각 한 건의 榜文이 전부이다. 모두 한문으로 기록된 이들 괘서는 내용상 서양의 기독교 침투와 일본의 세력확장에 강한 증오심을 담고 있다.
첫 괘서는 광화문 복합상소가 해산한 다음 날인 1893년 음력 2월 14일 밤 미국인 선교사 기포드 학당의 문에 붙었다. “아, 슬프도다. 소인배들은 이 글을 경건히 받을지어다. 헤아려 보면 우리 동방의 나라는 수천년 예의와 범절의 나라였노라. 이러한 예의지국에 태어나 이 예의를 행하기에도 오히려 겨를이 없거늘 항차 다른 가르침을 생각하겠는가. (중략) 우리 도의 근원은 하늘에 나서 밝은 하늘의 뜻을 천하에 비치니 감히 날뛰면서도 도를 능멸할 수 있는가. 세상을 一致할 도는 理致중에 있으니 어떻게 조심하지 않으랴. 소인배들은 대도를 함께 하여 사람마다 그 書冊을 불태우면 혹시 만의 하나라도 살 수 있는 길이 있을 지 모르겠다.”0625) ‘白雲山人 弓之先生’이라 하였을 뿐 정확한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붙은 이 방문은 기독교를 믿는 조선인들에게 경고한 글로 보여진다. 기독교를 배척하는 방문은 이어 같은 달 18일 미국인 존스의 집 교회당에도 붙었다. “敎頭 등을 효유하노라”로 시작되는 이 방문은 그 말미에 “너희들은 빨리 짐을 꾸려 본국으로 돌아가라. 그렇지 않으면 忠信仁義한 우리는 갑옷·투구·방패를 갖추어 오는 3월 7일에 너희들을 성토하겠노라”0626)라는 내용이 들어 있어 외국인들을 공포로 몰아 넣었다. 또 프랑스공관에도 같은 달 20일을 전후해 비슷한 내용의 괘서가 붙었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 프랑스 공사는 본국에 兵船 세 척의 파견을 요청했고, 병선이 인천항에 대기중이라는 기록이 전한다.0627) 1893년 3월 2일 일본공사관 앞벽에도 방문이 나붙었다. “일본 상려관은 펴보아라”로 시작된 이 방문은 “아직도 탐욕스런 마음으로 다른 나라에 웅거하여 공격하는 것을 으뜸으로 삼아 혈육을 본업으로 삼으니 진실로 무슨 마음이며 필경 어찌하자는 것인가. (중략) 하늘은 이미 너희들을 증오하며 스승님은 이미 경계하였으니 安危의 기틀은 너희가 취함에 달려 있다.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빨리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0628)라고 하여 당시 일본의 침략을 경고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광화문복소를 전후하여 榜文揭示를 통해 척왜양운동을 이끈 세력은 과연 누구일까. 방문 자체가 모두 익명으로 된 데다 당시의 척왜양의식은 어느 한 계층에 한정되지 않고 조선사회 전반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도세력을 지목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재까지 학계에서는 대체로 세 가지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첫째 동학교단 지도부가 복합상소운동과 병행하여 벌였을 가능성, 둘째 동학교단 내의 혁신세력이 독자적으로 주도했을 가능성, 셋째 동학과는 별개의 세력들이 벌인 척왜양운동일 가능성 등이 그것이다. 당시의 동학교단 지도부가 척왜양방문 게시사건을 주도한 세력일 것이라고 이해하는 입장은0629) 동학사상과 동학교단 안에서 일관되게 주장되어 온 척왜양의식을 강조한다. 특히 公州·參禮취회 단계에서 강하게 표출된 척왜양의식을 기반으로 동학지도부가 복합상소운동과 병행하여 배외운동을 벌였으며, 이후 보은취회에서 ‘斥倭洋倡義’의 깃발로 올려졌다는 입장이다. 동학지도부는 그동안 지방관리들의 탐학행위는 직접 체험했으나 외국세력의 위협은 현실적으로 느끼지 못했다. 광화문복소를 위해 상경한 뒤 비로소 외세의 위협을 실감한 지도부는 보국안민의 절박한 역사의식에서 배외운동을 제기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함께 광화문복소 직후 일어났다든지, 동학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는 문구가 방문 내용 여러 군데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점도 그 근거가 되고 있다. 둘째 1893년 3월의 척왜양운동을 주도한 세력에 관한 또 하나의 입장은 동학의 혁신파를 지목하는 견해이다. 동학내에 지도부와 다른 성격의 혁신세력이 당시 이미 존재했음을 전제로 한 이같은 견해는 종래 학계의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다. 이는 온건한 방법의 광화문복소 대신 실력 대결을 주장했던 徐丙鶴 등 혁신파가 지도부의 제지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복소와는 별도로 배외운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이같은 견해는 천도교 일부 자료에 “서인주·서병학은 상소하여 진정할 뜻이 없고 교도로 하여금 兵服을 바꿔 입도록 하고 병대와 협동하여 정부 간당을 소탕하고 조정을 크게 개혁하기로 결정하였는지라, (중략) 神師(최시형)가 이에 부당함을 책하였다”0630)는 데 근거를 두고 있다. 이 견해에 대해서는 서병학이 복합상소를 비롯한 신원운동을 처음부터 주도하였고 보은취회에서 금구취회를 비난한 말, 무력침입의 시기적 폭발성을 들어 비판되고 있다. 또 당시 조선주재 일본 변리공사가 본국에 보낸 외교문서 등에 근거, 서울에서의 척왜양방문 게시사건이 전라도 지방의 동학의 여러 갈래가 중심이 됐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0631) 즉 여러 갈래의 동학교도들이 척왜양방문을 게시하고, 괘서에 나오는 3월 7일 서울에서의 왜양성토를 시도했으며 이를 위해 지방에서의 상경 움직임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여러 자료에서 보여준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같은 일련의 과정에서 하나의 세력으로 응집되어 이후 金溝에서 독자적인 취당을 갖는 세력으로 성장했으며, 그 지도자가 全琫準이라는 것이다. 셋째 척왜양방문 게시사건이 동학도의 복합상소 직후에 일어났고, 동학교도가 상경하여 외국인을 습격할 것이라는 소문을 근거로 동학교도들이 중심이 된 척왜양사건으로 단정하는 것은 무리라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0632) 이와 관련 광화문복소를 계기로 동학과는 별도의 광범위한 배외세력들을 결집하여 일으킨 배외운동일 가능성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사회는 프랑스와 미국선교사들의 거리낌없는 활동, 방곡령에 따른 일본의 배상요구, 청·일상인들의 조선 상권의 잠식 등으로 외세에 대한 일반인들의 반감이 팽배해 있던 점에서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는 주장이다. 외세에 대한 조선사회의 반감은 괘서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이미 화적들의 외국상인 습격이나 중국상인 점포에 대한 방화, 1890년 서울 상인들의 집단적인 同盟撤市투쟁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도 일반 세력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척왜양방문 게시사건의 주도세력을 놓고 이처럼 해석이 엇갈리고 있는 것은 이를 뒷받침할 만한 결정적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이같은 각 입장차이는 직접적인 근거 대신 어디까지나 가능성에 머무르고 있다.
0619) 앞의 註 30)과 같음.
0620) <本敎歷史>(≪天道敎會月報≫28, 1912. 11), 24쪽.
0621) <朝家回通>,≪韓國民衆運動史資料大系:東學書≫, 87쪽.
0622) 명칭 그대로라면 ‘조정이 어떤 글에 대한 답을 내린 글’이라는 뜻이지만 내용을 보면 東學 都所에서 조정에 보낸 소장임을 알 수 있다.
0623) <權秉悳自敍傳>(≪韓國思想叢書≫, 330쪽).
<天道敎會史草稿>(≪東學思想資料集≫壹, 448쪽).
0624) ≪東京日日新聞≫, 명치 26년(1894) 4월 19일.
0625) ≪舊韓國外交文書≫10:美案, 高宗 30년 2월 18일(高麗大 亞細亞問題硏究所, 1967), 718∼719쪽.
0626) ≪舊韓國外交文書≫10:美案, 高宗 30년 2월 19일, 719쪽.
0627) 金允植,≪續陰晴史≫上, 癸巳 2月 24日條, 257쪽.
0628) ≪舊韓國外交文書≫2:日案, 高宗 30년 3월 2일, 385쪽.
0629) 張泳敏, 앞의 글 참조.
0630) <天道敎會史草稿>(≪東學思想資料集≫壹), 449쪽.
<天道敎創建史>(≪東學思想資料集≫貳), 143쪽.
0631) 鄭昌烈, 앞의 글 참조.
0632) 배항섭, 앞의 글, 34∼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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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보은취회와 금구취당
1893년 3월 11일, 報恩 帳內里에서 시작된 ‘보은취회’는 동학농민전쟁의 전단계를 밝히는 역사적 사건으로서 전라도 金溝懸 院坪에서 이루어진 ‘院坪聚黨’과 함께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 학계의 연구성과에 따르면 ‘금구취당’이 동학농민전쟁의 前史로서 그 정치적 성격이 크게 부각되고 있는 것에 비해 ‘보은취회’는 물리적 투쟁을 되도록 자제하려 했기 때문에 한계를 보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보은취회가 동학교단의 조직역량을 확인시킨 집회였던 점, 이전의 신원운동이 ‘교조의 신원’이라는 종교적 요구 중심으로 이뤄졌던 데 비해 보은취회는 ‘척왜양’의 기치를 전면적으로 드러낸 집회였던 점, 그 목적이 척왜양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탐학관리와 세도가들을 처단하고자 하는 데 있었던 점으로 볼 때 보은취회 역시 사회개혁운동의 한 맥락으로, 또한 동학농민전쟁의 전단계 투쟁으로서 일정한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보은취회는 우선 전국 각 지역에서 수만 명의 道人들이 참가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조정에서 파견된 宣撫使 魚允中이 올린 보고서를 보면, “처음에는 부적, 주술로써 무리를 현혹하고 참위를 전하여 세상을 기만하였는 데, 필경에는 才氣를 갖추고도 뜻을 얻지 못한 자, 貪墨이 횡행하는 것을 분하게 여겨 민중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자, 外夷가 우리의 利源을 빼앗는 것을 분통하게 여겨 큰소리 하는 자, 貪士·墨吏의 침학을 당해도 호소할 바 없는 자, 京鄕에서의 武斷과 협박때문에 스스로를 보전할 수 없는 자, 京外에서 죄를 짓고 도망한 자, 營邑屬들의 부랑무리배, 영세농상민, 풍문만을 듣고 뛰어든 자, 부채의 참독을 견디지 못하는 자, 常賤民으로 뛰어나 보려는 자가 여기에 들어 왔다”0633)라고 하여 당시 사회의 기층민중과 사회구조에 큰 불만을 가진 세력 등 다양한 계층에서 모여 들었음을 보여 준다. 3월 말까지 지속적으로 모여든 인원은 대략 3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0634) 이들은 산아래 평지에 성을 쌓고 그 안에서 대오를 정비하며 ‘斥倭洋倡義’라고 쓴 기를 내거는 한편 새로운 방문과 통문을 냈다. 날이 갈수록 숫자가 느는 데다 통문을 나붙이는 등 세가 더해지자 3월 16일 보은 군수 李重益이 해산령을 내렸으나0635) 이에 대해 도인들은 “창의함은 오직 척왜양에 있으니 비록 巡營의 甘飭이나 主官의 面諭라도 그칠 수 없다. 또 동학은 처음부터 邪術이 아니며, 설사 사술이라 하여도 임금이 욕을 당하고 신하가 죽는 지경에서는 忠義 하나 뿐이니, 각처 유생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죽음을 맹세하고 충에 진력하고자 한다”0636)라고 하여 해산을 거부하고 다시 “왜양지사를 치는 것으로 죄삼아 가둔다면 和를 주장하는 매국자를 상준단 말인가? 어찌 우리 순상의 밝음으로써 헤아리지 못함이 이처럼 심하단 말인가? 혹 미혹하여 왜양의 신복이 되려는 자는 관령을 따르라”0637)라는 榜을 내걸어 척왜양의 의지를 과시하였다.
이처럼 보은에 모인 동학교도들은 보은군수의 해산령을 거절하면서 척왜양의지를 더욱 강력하게 표출했다. 보은집회의 세력들이 척왜양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물론 그것이 큰 목적이기도 했지만 당시 유림에 풍미하고 있던 衛正斥邪사상과 동일한 선상에 놓여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그들이 집회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척왜양은 조선사회를 이끌고 있던 봉건적 지배층에 의해 무난하게 용납될 수 있었던 봉건적인 대외사상에 부합되는 것이었던 셈이다. 이들은 3월 22일 보은군수의 해산령도 거절하고 “지금에 이르러 생명이 도탄에 빠진 것은 방백수령의 탐학무도함과 세호가의 무단에 있으니 만약 지금 소청하지 못하면 어느 때에 국태민안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지방수령들의 탐학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갈수록 확대되는 보은취회의 양상을 방관하고 있을 수 없게 된 조정에서는 3월 25일 충청감사 趙秉式에게 책임을 물어 파직시키고 이들을 해산시킬 선무사로 어윤중을 보내는 한편, 충청병사 洪在羲에게 군사 3백 명을 이끌고 장내리로 가게 했다. 양호선무사 어윤중은 보은출신이었다. 그는 장내리로 가서 접도들을 온갖 감언이설로 회유하고 협박하면서 왕의 칙유문을 발표했다. 이에 보은취회 지도부는 해산을 약속하고 노약자와 어린이를 돌려 보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집회는 이합집산의 양상을 드러내게 되었다. 특히 보은취회 지도부는 4월 1일 순무사 어윤중이 公州營將, 淸州兵營 軍官, 報恩 군수를 대동하고 찾아와 왕의 綸音을 읽고 퇴산을 명하자 3일 안에 해산하기로 약속을 하였고 崔時亨·孫秉熙·徐丙鶴 등은 도인들을 남겨 둔 채 4월 2일 밤을 틈타 도망하고 말았다.
광화문 복합상소에 이어 보은취회 역시 무력하게 해산되고 만 것은 결국 지도부가 무력투쟁을 회피한 결과였다. 이같은 보은집회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집약되고 있다. 첫째는 보은집회 지도부의 기만성, 불철저성, 패배주의로 인해 별다른 성과없이 실패한 점을 들어 동학농민전쟁의 전단계로서 높은 위치를 부여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있고,0638) 둘째는 이 집회를 통해 민권의식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종교운동에서 벗어나 정치적 방향으로 나아간 성격을 보이고 있는 점에서 그 의의를 어느 정도 평가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금구취당을 주도한 세력의 독려에 힘입은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0639) 지금까지 학계의 연구성과로 볼 때 보은집회는 동학농민전쟁의 전단계로서 큰 위상을 부여하기는 어렵지만 신원운동의 차원에서 정치적 투쟁의 단계로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 주었다는 역사적 의의를 과소평가할 수 없다.
한편, 보은취회가 열리던 시기에 전라도 금구현 원평에서도 취회가 열리고 있었다. ‘金溝聚黨’이 바로 그것이다.0640) 충청도 보은의 장내리에서 이른바 보은취회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全羅道 金溝懸 水流面 院坪里0641)에서도 동학교도들의 별도 집회가 열리고 있었음은 여러 자료들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원평은 전라감영이 자리잡고 있는 전주에서 서남쪽으로 15㎞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고, 큰 場이 서 인근에서 생산되는 物産이 풍부하게 거래되었으며 따라서 사람의 왕래가 잦은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따라서 대규모 집회를 가질 수 있는 여건이 충족된 데다 官衙가 있는 금구로부터 적당한 이격거리를 두어 여러 모로 안성맞춤이었다. 또한 母岳山과 金山寺로 상징되는 독특한 지리적 배경은 종교적 집회장소로의 선택에 중요한 고려가 됐을 가능성이 높다. 즉 금산사를 중심으로 한 원평지역 일대는 예나 지금이나 비결신앙의 상징처럼 일컬어지고 있다. 당시에도 민간신앙의 근거지였고 이 곳을 항상 감싸고 있는 적당한 신비로움이 고단한 현실에 찌들고 지친 민중들을 효과적으로 끌어모아 주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원평집회가 수월하게 이뤄질 수 있었던 배경 중의 하나는 이곳이 보은으로 가는 전라도지역 교인들의 중간 기착지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원평은 정읍·고창·장흥·영광·나주·함평·무안·순천·영암쪽에서 올라 오는 교도들이 반드시 거쳐 지나야 하는 거점이었다. 더욱이 金溝는 동학지도자 金德明包의 본거지로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가진 金德明이 동학교단의 大接主 위치에서 일정 정도의 역할을 맡았으리라는 추측은 충분히 가능하다.0642)
‘금구취당’은 1893년 3월 21일(음력) 이전에 이뤄지고 있었다. 이 시기는 보은취회가 진행되고 있던 때이다.≪일성록≫高宗 30년(1893, 癸巳) 3월 27일자 기사는 새로운 전라감사에 부임하는 金文鉉이 고종에게 辭陛하는 자리에서 나눈 대화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고종이 가로되 ‘湖南은 왕조가 일어선 터전이고 御眞을 모신 慶基殿이 있어 다른 지방과 달리 소중하고 나라 살림의 창고와도 같은 곳이다. 근래에 이르러 어찌된 까닭인지 풍속이 타락하고 인심이 간사, 교활해져 일종 동학의 무리가 창궐하여 날뛴다 하니 백성들을 안도하게 할 계책과 없애버릴 방책을 경이 판단하여 처리토록 하라.’ 文鉉이 답하기를 ‘신의 역량이 보잘 것 없어 제대로 보답하지 못할 듯하오나 이른바 비도들이 준동한다는 것은 참으로 변괴라 할 것입니다’ (중략) 고종이 이르기를 ‘말이란 한 번 두 번 옮기다 보면 터무니 없는 말을 지어내게 되는 것이니 족히 믿을 것이 못된다. 호남에서도 金溝에 가장 많다 하니 전주 감영에서 어느 정도 거리인가. 먼저 그 소굴을 격파하여 금단하고 일소하는 방도를 삼도록 하라.’ 文鉉이 답하기를 ‘30리 가량 되는 데 금구, 원평에 과연 취당하고 있다 하옵니다.”0643)
금구취당을 확인해 주는 또 다른 보고서는<討匪大略>이다. 1894년 11, 12월의 농민군 토벌기사가 주로 실린<토비대략>에는 “계사년(1893년) 4월 동학군 4, 5만 명이 일부는 湖西의 報恩 帳內에서 屯據하고 있었고 일부는 湖南의 金溝·院坪에 둔거해 있었다”0644)며 보은취회와 더불어 금구에서도 일정한 규모의 집회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금구 원평집회에 모여든 동학교도들은 1만 명이 넘었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신임 전라감사 김문현이 전주감영에 도착했을 때 軍司馬 崔永年으로부터 “금구에 운집한 東徒가 거의 만여 명이나 된다”0645)는 보고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충청도 沔川에 유배돼 있던 金允植의 ‘沔陽行遣日記’에도 “또 금구 원평취당 수만 인은 장차 제물포로 直走하겠다고 聲言했다고 한다”0646) “전라도에서는 금구 원평에서 도회하였는 데 그 괴수는 보은에 사는 黃河一·茂長접주 孫海中(孫化中의 誤記)이며, 만여 인을 거느리고 21일 도착한다는 뜻을 私通했다고 한다”0647)며 적어도 1만 명 이상의 동학교도들이 집결, 세를 과시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금구취당은 과연 누구에 의해서 주도됐으며 이들은 어떤 형태의 시위를 벌였을까. 금구취당의 주도인물은 全琫準이었다는 것이 학계의 대체적인 견해이다.0648)≪日省錄≫등의 자료에 의하면 보은취회 해산 이후 ‘湖西의 徐丙鶴, 湖南의 金鳳集·徐章玉을 該道의 감사로 하여금 營獄에 체포 구금토록 하라’는 주모자들에 대한 체포령이 의정부로부터 발령됐는데 ‘金鳳集’은 全琫準의 가명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김윤식의 ‘면양행견일기’, 吳知泳의 ‘東學史’ 등이 金鳳集을 ‘全哥나 全琫準으로 고쳐 기록하고 있으며, 전봉준이 ‘金鳳均’ 등 여러 가명을 실제 사용했다는 자료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동학교문측의 기록인≪侍天敎歷史≫에서도 “법소에서는 교도의 난동을 금하였다. 이것이 전봉준이 교도들을 사사로이 빼앗아서 전라도 금구 원평에 주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며 금구취당을 전봉준이 거느리고 있던 집단으로 전하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던 자료에는 금구취당이 현지에서 보인 행동들이 전혀 기록돼 있지 않다. 그러므로 실제 이들은 가시적인 시위를 벌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금구취당은 보은취회에 일부가 직접 참여, 일련의 급진적 행동을 보였으며 전봉준도 참여를 시도했다는 주장도 있다.0649) 따라서 院坪에 모여 있되 별도의 행동은 하지 않고 보은취회 세력과 聲氣를 통하면서 보은쪽의 추이를 예의주시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이 있다. 금구취당이 보은취회에서 벌인 행동들은 서병학이 선무사 어윤중에 보낸 密報에서 간접 확인되고 있다. 보은취회의 주모자였던 서병학은 보은취회의 해산을 종용하는 어윤중에게 “湖南聚黨은 얼핏 보면 우리와 같지만 종류가 다르다. 통문을 돌리고 방문을 게시(發文揭榜)한 것은 모두 그들의 소행이다. 그들의 情形은 극히 수상하니 원컨대 공께서는 자세히 살피고 조사 판단하여 그들과 우리를 혼동하지 말고 玉石을 구별해 주시오”0650)라고 했다. 이같은 徐의 ‘밀고’에 따르면 보은취회에서 내걸린 척왜양의 기치들은 지도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모두 금구취당의 의도에 따른 것으로 파악된다. 徐의 이러한 진술이 전적으로 사실이라면 금구취당은 교조인 水雲의 伸寃을 위해 계획 실행된 종교적 성향의 보은취회를 척왜양의 슬로건을 전면에 내세우는 정치집회로 변질시킨 動力으로 작용했다는 엄청난 정치적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학계에서는 실제 이러한 방향의 연구가 진행돼 금구취당의 성격을 脫종교적이며 보다 투쟁적이고 정치적 지향을 지닌 세력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최근 학계에서는 금구취회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있어 대체적으로 두 가지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첫째는 금구취회가 보은취회와는 달리 독자적으로 열렸으며 척왜양과 지방관의 탐학금지 등 강한 정치적 성향을 지녔다고 보는 시각이다. 이와 함께 일련의 교조신원운동의 과정에서 전봉준이 동학지도부와는 별도의 세력을 갖추고 금구취회를 계기로 완전히 성장,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주도케 된다는 견해이다. 둘째는 금구취회가 ‘전봉준에 의해 주도된 정치성 강한 집회’라는 데는 일단 동의하되 보은취회와 성격을 완전히 분리하거나 지나치게 정치성을 부여하는 데 대해 비판적 태도를 보이는 연구이다.
첫번째 견해에 따른 연구에서는0651) ‘동학농민전쟁의 최대 지도자인 전봉준이 어떤 경로로 고부민란에서 갑자기 지도자로 출현하고 1893년 11월 사발통문 서명자의 한 사람으로 등장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금구취당’이라는 열쇠로 풀어 놓고 있다. 즉 김봉균이라는 가명으로 전봉준이 주도한 금구취당은 이미 1893년 2월 중순에서 2월 말 사이 서울서 척왜양방문 게시운동(이른바 괘서사건)을 전개했고 2월 말에서 3월 초까지는 전주에서 비슷한 운동(3월 1일경 전라감영문에 붙여진 榜文)을 벌였으며 3월 7일에는 서울에서 외국선교사, 상인의 축출과 지방관리의 압제와 탐학 제거를 위한 일대 정치공세를 벌이자고 선동하는 등 강도높은 척왜양 반압제운동을 전개한 집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하나의 세력으로 응집돼 늦어도 3월 초에는 내부적인 규율을 갖춘 집단으로 성립되었고 적어도 3월 중순에는 금구에서 독자적인 집회를 가질만큼 완강한 세력으로 성장했다는 견해이다.0652) 이처럼 전봉준을 주축으로 한 금구취당은 이른바 북접지도부와 노선을 달리하면서 투쟁의식을 강화해 동학농민전쟁의 주도세력으로서의 잠재력을 갖춰 나갔다는 것이다.
이같은 논증은 탁월하고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으나 신진학자들에 의해 제기되는 몇가지 반론에 부딪혀 있다. 즉, 금구취회가 비록 독자적으로 會集하고 척왜양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강하게 내세웠다고는 하나 공주-삼례-광화문-보은으로 이어지는 동학교단의 신원운동과 투쟁의 연장선상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들은 서울에서 벌어진 괘서사건을 금구취당의 동학교도들이 주도했고 금구취당의 總代 20명이 서울에서 운동을 벌이다 포도청에 구류됐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사료의 오독이거나 지나친 추리라며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또한 ‘금구취당이 남접과 합세해 보은취회를 좀더 정치적으로 몰고 가기 위해 보은에 집단적으로 참여하려 했으나 취회가 해산해 버리자 선발대 천여 명이 忠州로 방향을 돌려 上京하려 했다’는 해석은 명백히 사료를 오독한 것이라는 반박을 받고 있다.0653) 4월 2일 보은취회가 해산하면서 ‘사잇길로 원평에서 충주로 간 자가 천여 명’이라는 한 報恩 將吏의 보고서가 전하는데 이는 서울에서 별도 계획을 실행하려고 상경하려던 금구취당의 선발대가 아니라 보은취회에 참여했다가 충주쪽으로 돌아가던 보통의 동학교도들이었다는 것, 여기서 나오는 원평은 보통의 전라도 금구 원평이 아니라 현재 ‘忠北 報恩郡 山外面 院坪’이라는 지적이다. 또 하나는 금구에서 보은과 별도의 취회가 이뤄진 것은 단순히 참여 교도들의 식량조달의 한계 때문에 집회를 분산시킨 것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즉, 보은·금구취회는 동일한 목적 아래 분산적으로 열렸던 신원집회라며 금구취당에 대한 별도의 의미 부여를 차단하고 있다.0654)
이상과 같이 금구취당은 동학교도들이 최대 규모의 세를 과시한 보은취회의 시기에 별도로 열리고 있었다는 점과 이를 전봉준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따라서 금구취회에 관한 배경과 올바른 성격 규정은 동학농민전쟁의 전반을 재조명하는 데 중요한 연결고리인 것이다. 1893∼1894년 사건 전반에 걸친 안타까움이긴 하나 특히 금구취회에 관해 직접적으로 관련된 문건이 단 한 건도 발견되지 않고 있음은 큰 아쉬움이 아닐 수 없다.
<朴孟洙>
0633) <聚語>(≪東學亂記錄≫上), 122쪽;(≪東學農民戰爭史料大系≫2), 66∼67쪽.
0634) 金義煥,≪近代朝鮮의 民衆運動≫, 68∼69쪽.
표영삼,<보은 장내리 척왜양창의> (≪新人間≫505, 1992. 5), 33∼36쪽.
0635) 東學人令,<聚語>(≪東學農民戰爭史料大系≫2), 39쪽.
0636) <聚語>(≪東學農民戰爭史料大系≫2), 35쪽.
0637) <聚語>, 위의 책, 35∼36쪽.
0638) 趙景達, 앞의 글 참조.
0639) 鄭昌烈, 앞의 글 참조.
0640) ≪日省錄≫, 고종 30년 3월 21일.
0641) 현재의 김제군 金山面 院坪.
0642) 원평은 금구취회의 집결지로서 뿐 아니라 동학농민들이 원평주위에서 성장하거나 활동했으며 사건의 주요한 지역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반경 20㎞이내에 자리잡고 있다. 멀리 북쪽으로 삼례가 20㎞ 거리에, 전봉준의 舊居가 있는 정읍군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이 서남으로 17㎞ 지점에, 金開南의 고향이자 全州和約 이후 전봉준이 기거했다는 정읍군 산외면의 지금실이 남쪽 9㎞지점에 각각 위치해 있다. 전봉준이 어린 시절 한때를 보냈던 정읍군 감곡면 계룡리 황새마을 또한 서쪽 1.5㎞에 불과하며 말목장터는 서남쪽 13.5㎞, 1894년 3월 25일경 동학농민군이 연합하여 결진했던 白山은 서쪽 19㎞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또 대접주 金德明이 출생한 용계마을은 원평 동쪽 1㎞ 지점에 있고 그가 성장하고 활동의 본거지로 삼았던 巨野마을은 원평 동쪽 2.5㎞ 지점에 자리해 있다. 따라서 이들 지역은 오늘날로 치면 원평을 중심으로 한 1일 생활권이었으며 한편으로는 院坪 市場圈에 속하는 곳이다. 이처럼 원평은 동학농민전쟁의 태동과 전개과정에서 항상 지리적 밀접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전봉준장군이 지휘하는 최후의 전투인 구미란전투(1894년 11월 25일)를 원평은 직접 체험하게 된다.
0643) ≪日省錄≫, 고종 30년 3월 21일.
0644) <討匪大略>(≪韓國民衆運動史資料大系:1894년의 農民戰爭篇≫, 驪江出版社, 1986), 395쪽.
0645) <東徒問辨>(≪東學亂記錄≫上, 國史編纂委員會, 1959), 155쪽.
0646) <沔陽行遣日記>癸巳 3월 28일조,≪續陰晴史≫上, 262쪽.
0647) 위의 책, 癸巳 4月 5日條, 264쪽.
0648) 鄭昌烈, 앞의 글 참조.
0649) 張泳敏, 앞의 글, 257쪽.
0650) <聚語>(≪東學亂記錄≫上), 121∼122쪽;(≪東學農民戰爭史料大系≫2), 69∼70쪽.
0651) 鄭昌烈,≪甲午農民戰爭硏究≫(延世大 博士學位論文, 1991), 44∼82쪽.
0652) 위의 글, 82쪽.
0653) 張泳敏, 앞의 글, 253쪽.
0654) 표영삼,<보은 장내리 척왜양창의>(≪新人間≫505, 199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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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1. 동학농민군의 봉기
동학농민전쟁은 한국 근대 민족운동사에서 한 획을 긋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조선 후기 이래 군·현 단위로 전개되어 온 반봉건 농민항쟁의 흐름을 전국적인 규모에서 종합하여 봉건 모순의 척결을 촉구하는 한편, 개항 이후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야기된 민족 모순을 극복하여 근대민족국가를 수립하려는 반제·반봉건 운동이었다.
동학농민전쟁은 대체로 네 단계로 발전되어 갔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0655) 제1단계는 ‘고부민란’의 단계이다. 고부에서 민란이 발발하여 농민 약 1천여 명이 고부관아를 습격한 1894년 1월 11일(양력 2월 17일)경부터 3월 3일(양력 4월 8일) 신임군수 朴源明의 설득으로 해산하기까지의 시기이다. 제2단계는 ‘제1차 농민전쟁’의 단계이다. 3월 20일(양력 4월 25일) 무장에서 전라도 일대의 농민들이 전봉준·손화중·김개남 등의 지도하에 기포한 때부터 5월 7일(양력 6월 10일) 전주화약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이다. 제3단계는 ‘執綱所 시기’이다. 청군과 일본군의 침략으로 농민군이 정부군과 ‘전주화약’을 체결한 5월 8일(양력 6월 11일)부터 9월 12일(양력 10월 10일)까지 농민군은 전라도 각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농민 통치를 실시하였다. 제4단계는 ‘제2차 농민전쟁’의 단계이다. 농민군이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하여 재봉기한 9월 13일부터 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에 패배한 1894년 말까지의 시기이다.
0655) 신용하,≪동학과 갑오농민전쟁 연구≫(일조각, 1993).
정창렬,≪갑오농민전쟁연구-전봉준의 사상과 행동을 중심으로-≫(연세대 박사학위논문, 199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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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학농민군의 격전
1) 관군의 남하와 황토현·장성전투
(1) 농민군의 진군과 감영군의 출동
갑오년 3월 25일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하는 농민군 부대는 정연한 기율 속에 백산에서 전주성을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이들의 1차 목표는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성 점령이었다.
‘保國安民’과 ‘東徒大將’ 기를 앞세우고 그 뒤에 청·홍·묵·백·황의 오색기를 벌려 각기 방향을 표시했다. 포사의 어깨에는 弓乙을 붙이고 등에는 同心義盟 넉자를 붙였다. 전봉준 대장은 백립·백의 차림에 손에는 염주를 들고 입으로는 ‘三七’주문을 외며 지휘했으며 대오는 삼삼오오 진법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행진했다.
0707) 이즈음 각 고을의 관청은 자체방어능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아전들의 상당수가 농민군에 투신했다. 농민군은 3월 28일 태인현 동헌과 내아를 점령하여 군기를 탈취하고 4월 1일 오전 10시경에는 금구현 원평까지 진출하였다.
0708) 이들은 원평에서 진을 치고 하루를 묵으며 전주감영의 동향을 살피는 한편 무장을 강화하고 양식을 확보하는 등 전주성 입성 전략을 모색했다.
전라감사 김문현은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농민군의 심상치 않은 동향을 수시로 조정에 보고하는 한편 감영군을 출동시킬 것을 결심한다. 우선 이서와 군교를 풀어 전주성의 서·남문 경비를 강화하는 한편 농민군을 제압할 감영군을 소집했다. 감영군의 주력은 1893년 설치된 武南營의 병력이었으며 각 고을에서 징병한 향병과 보부상들이 합세했다. 우영관 李璟鎬를 총지휘관으로 하여 영병 7백여 명, 토병 5백여 명, 보부상 1천여 명 등이 진압군으로 편성되었다.
0709) 이들은 4월 3일 오전 10시경 농민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금구쪽으로 진출했다.
감영군의 출동소식을 접한 농민군의 주력부대는 3일 오후 4시경에 재빨리 방향을 바꿔 태인현의 인곡·북촌·용산 등지로 진을 옮겨 버렸다.
0710) 한편 농민군의 일대는 백산에서 곧바로 부안으로 진출하여 그곳에서 봉기한 세력과 하동면 분토동에서 합류했다. 이들은 약 5백명이었으며 홍·백의 ‘保國安民旗’와 부안·고부·영광·무장·흥덕·고창 등의 읍이름을 새긴 소기 등을 내걸고 행진했다. 부안으로 진출한 농민군 중 2백여 명은 4월 1일 부안 현아에 들이닥쳐 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풀어준 뒤 분토동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아침에는 부안 공형에게 ‘장시에 폐막이 없도록 하라’는 경고문을 보냈으며 일부는 이날 오후 6시경에 분토동에서 서쪽으로 2리 떨어진 서도면 부흥역으로 진을 옮겼다.
0711) 농민군의 주력부대는 4월 3일 밤을 태인에서 지낸 다음 일부 견제병력만을 현지에 남기고 부안으로 이동했다. 4일 오전에는 부안에 진을 치고 있던 농민군 일대와 합세한 농민군 주력부대는 부안 동헌에 돌입하여 현감 李喆和를 감금하고 아전들을 결박한 뒤 군기를 탈취했다.
0712) 또한 이날 영광 법성포의 이향에게 다음과 같은 통문을 보내었다.
0713)… 또 우리가 오늘 의거한 것은 위로 宗社를 보존하고 아래로 백성을 편안하게 할 것을 죽음으로써 맹서하였으므로 두려워 동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차례로 살펴 보건대 앞으로 고쳐야 할 문제들로서, 전운영이 吏民에게 폐단이 된 것, 균전관이 폐단을 제거한다면서 폐단을 만드는 것, 각 시정에서 금전으로 나누어 세금을 거두는 것, 각 포구의 선주들이 강제로 빼앗는 것, 외국의 潛商들이 고가로 사들이는 것, 염전에 대한 시장세, 여러 물품을 도매하여 이익을 취하는 것, 起田과 陳田을 막론하고 私田에 백지징세를 하는 것, 오래된 환곡의 본전을 뽑는 것 등등 폐막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농공상의 네 가지 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은 한 마음으로 협력하여 위로 국가를 돕고 아래로 빈사상태에 있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면 어찌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濟衆義所
이 통문은 폐정개혁에 대한 농민군의 구체적인 요구조항들이 처음으로 제시된 것으로서 영광 법성포 뿐 아니라 당시 농민군의 영향권 아래에 있던 고부·부안·흥덕·태인·정읍·장성·무장·함평 등의 수십 개 고을에 발송되었다고 생각된다.
4월 6일 오전 농민군의 주력부대는 부안을 떠나 고부를 향해 진군을 계속했다. 태인쪽의 잔여세력들도 진을 풀고 고부쪽으로 향했다. 이들의 합류목표지점은 도교산이었다.
0714) 도교산은 황토산이며, 황토산은 곧 황토현이다.
감영군은 농민군의 뒤를 쫓아 원평을 지나 백산쪽으로 진군해 왔다. 부안의 농민군을 압박해 가던 감영군은 6일 죽산쪽으로 진출해 있던 일대와 백산에서 합류하여 고부쪽으로 향한 농민군 주력을 추격했다. 감영군은 농민군을 추격하면서 연도에서 닥치는대로 노략질을 일삼아 백성들의 빈축을 샀다. 농민군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던 黃玹은 관군과 농민군의 행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관군은 서쪽으로 진군하면서 향병과 영병이 뒤섞여 행군하였다. 행군을 하게 되면 연도에서 닥치는대로 노략질하였고, 점포를 망가뜨리고 상인들의 물건을 겁탈하는가 하면, 마을로 가득 몰려가니 닭이나 개가 남아나는게 없었기에 백성들은 한결같이 이를 갈면서도 겁이나 피했다. (중략) 적(농민군-필자)은 관군의 소행과는 반대로 하기에 힘써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은 하지 않게끔 명령을 내려 조금도 이를 어기지 않으면서 쓰러진 보리를 일으켜 세우며 행군하였다. 이때 관군이나 도적들 양 진영은 모두 양식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만 민간으로부터 먹을 것을 구하여 힘들게 옮겨와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적들의 진영에는 음식을 담은 광주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관군은 굶주린 기색이 얼굴에 나타났다.”
0715)0707) 崔琉鉉,≪侍天敎歷史≫,≪東學思想資料集≫3(아세아문화사, 1978), 616쪽.
0708) ≪오하기문≫, 75∼76쪽;≪주한일본공사관기록≫1, 2쪽.
0709) 鄭碩謨,<甲午略歷>(≪동학란기록≫상), 63쪽.
0710) 洪啓薰,<兩湖招討謄錄>(≪동학란기록≫상), 163쪽;≪오하기문≫, 78쪽.
0711) ≪남유수록≫, 甲午 4월 1일;<양호초토등록>(≪동학란기록≫상), 163쪽.
0712) ≪남유수록≫, 甲午 4월 5일;<양호초토등록>(≪동학란기록≫상), 163쪽.
0713) <동비토록>(≪한국학보≫3, 一志社, 1976, 여름), 244쪽.
≪주한일본공사관기록(번역본)≫1, 20쪽.
0714) <양호초토등록>(≪동학란기록≫상), 163쪽.
0715) ≪오하기문≫, 79∼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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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주성의 점령과 화약
(1) 전주성 점령
갑오년 4월 27일 아침이 밝았다. 삼천에서 하루밤을 묵은 1만여 명의 농민군은 전봉준 대장의 지휘 아래 아침 일찍부터 전주성 공략에 나섰다. 용머리 고개를 중심으로 진을 편 농민군은 성내외의 동정을 살피다 마침내 정오 무렵부터 전주성 공격을 개시했다. 27일은 마침 서문 밖에 장이 서는 날이었다.≪동학사≫는 농민군의 전주성 입성 장면을 다음과 같이 실감나게 기록하고 있다.
0737)동학군은 장꾼들과 함께 섞여 이미 수천명이 시장 속에 들어와 있었다. 때가 오시쯤에 이르자 장터 건너편 용머리 고개에서 일성의 대포소리가 터져 나오며 수천방의 총소리가 일시에 장판을 뒤덮자 장꾼들이 정신을 잃고 뒤죽박죽되어 서문과 남문으로 물밀듯이 들어가는 바람에 동학군들은 이들과 섞여 문안으로 들어서며 함성을 내지르고 총질을 했다. 서문에서 파수보던 병정들은 도망질하기에 바빴다. 순식간에 성안에도 동학군 소리요, 성밖에도 또한 동학군의 소리다. 전대장은 유유히 대군을 거느리고 서문으로 들어와 선화당에 자리하니…
이른바 무혈입성이었다.
사실상 전주성은 무방비 상태였다. 전라감사 김문현은 4월 18일자로 이미 파면되었고 ‘督判交涉通商事務’으로 있던 金鶴鎭이 후임으로 임명되었으나 아직 부임하지 않고 있었다. 감영의 군사들은 초토사 홍계훈 군에 배속되어 있었기에 전주성은 이미 무장해제 상황이나 다름 없었다.
농민군은 동문을 제외한 서·남·북문에서 공격했으며 장성전투에서 노획환 대환포로 서문을 깨뜨렸다. 곧 성문이 열렸고 전봉준은 전라감사의 집무실인 선화당을 접수했다.
0738) 전라감사 김문현은 체통도 잊은 채 가마를 버리고 떨어진 옷과 짚신으로 변복한 뒤 동문을 빠져나가 공주까지 도주했다. 달아난 것은 김문현 뿐이 아니었다. 중영장 임태두, 판관 閔泳昇 등도 자신의 목숨 하나를 도모하는 데 바빴다.
경황중에도 조경묘 참봉 장효원은 慶基殿에 모셔져 있는 태조의 御影을 둘둘 말아 허리에 꽂고 조경묘에 있는 전주 이씨의 시조인 李翰의 위패를 끌어안고 위봉산성을 행해 내달렸다. 홀로 달아나던 판관 민영승이 장참봉을 발견하고는 어영을 재빨리 넘겨받아 위봉사 대웅전에 모셨다.
0739) 성을 버렸다는 죄를 훗날 면제받고자 하는 영악함이었다.
선화당에 자리한 전봉준은 농민군의 대오를 정비하고 4문을 굳게 방비하는 한편 기강을 세우며 농민군의 무질서를 바로잡아 나갔다. 이들은 성 안에서 검가와 검무를 즐겼으며, 옷감을 거두어 오랫동안 갈아 입지 못한 겨울옷을 벗고 여름옷을 새로 지어 입기도 했다.
한편 전봉준의 계략에 말려 5백여리를 뒤쫓아 다닌 홍계훈의 경병들은 전주성이 함락된 27일에야 뒤늦게 금구에 도착했다. 홍계훈은 장성 전투에서 선봉 이학성이 패배하고 농민군은 갈재를 넘어 정읍으로 향했다는 보고를 받고도 곧바로 출발하지 않고 영광에 머물러 있다가 25일에야 영광을 출발하여 고창, 정읍을 거쳐 금구에 도착했던 것이다.
0740) 홍계훈은 금구에서 ‘전주성이 비도의 손에 떨어졌다’는 소식을 접하고, 전주성이 점령된 이유를 “감영부의 관속배 중 내응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
0741)이라고 중앙정부에 보고했다.
전주성 점령은 동학농민전쟁의 전기간에 걸쳐 농민군이 거둔 최대의 승리이자 최후의 승리이기도 했다. 전주는 조선왕조의 발상지이자 전라도의 심장부였으며 호남일대의 으뜸가는 부였다. 따라서 농민군의 전주성 점령은 중앙정부에까지 엄청난 충격을 던져 주었다. 전주감영의 점령은 곧 전라도의 장악을 의미했고 나아가 조정에 대한 실질적 도전을 뜻했다.
전주성 점령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4월 29일 긴급 대신회의가 고종의 주재하에 열렸다. 이 자리에서 고종은 淸兵借兵案을 제기하였다. 김병시 등의 반대의견도 있었으나 여러 대신들은 ‘事勢가 부득이 하다’고 하여 동의하였다.
0742)0737) ≪동학사≫, 123쪽.
0738) 이하 전주성 함락 상황은≪동학사≫, 123∼124쪽 참조.
0739) <양호초토등록>,≪동학란기록≫상, 173쪽.
0740) 위의 책, 172쪽.
0741) 위의 책, 173쪽.
0742) <甲午實記>(≪동학란기록≫상),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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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완산전투
전주성을 점령함으로써 농민군은 1차목표를 달성했다. 무장기포 이후 한달여 남짓 전라도 서남부 지역을 잇따라 점령하여 치밀한 작전으로 관군을 유인한 뒤 전주성을 마침내 함락시킨 것이다. 그러나 싸움은 이제부터였다. 농민군은 그동안 유인작전으로 관군을 효과적으로 분산시켰으나 전주성 입성으로 관군과의 정면 전투가 불가피해졌다. 전주성을 놓고 농민군의 수성과 관군의 공성으로 치루어진 완산전투는 향후 동학농민전쟁의 방향을 결정짓는 분수령이 되었다.
농민군의 뒤를 쫓아온 홍계훈의 관군은 4월 28일 전주 용머리고개에 도착했다. 농민군이 전주성을 함락한 다음날이었다. 관군은 바로 완산에 진을 쳤다. 내칠봉, 외칠봉, 좌우칠봉의 삼면칠봉으로 이루어진 완산은 최고봉이 해발 186m밖에 안되지만 전주성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전주성 남쪽을 빙둘러 요소요소에 주력부대를 배치한 관군과 성을 차지한 농민군이 전주천을 사이에 두고 대치함으로써 전주는 일촉즉발의 전운속에 휩싸였다.
수성과 공성의 입장이 바뀐 농민군과 관군의 완산전투는 관군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홍계훈의 관군은 28일 진을 친 직후 곧바로 농민군이 주둔한 전주성을 향해 야포공격을 퍼부었다. 이에 농민군 수백 명이 성을 나와 동서로 완산칠봉을 오르려했으나 저지당했다.
이날 오전부터 날이 저물도록 양군 간에 공방전이 벌어졌다. 전투 결과에 대해 홍계훈은 “갑옷을 입고 칼을 휘두르고 천보총을 쏠 수 있는 자 30인을 포함하여 수백 명의 적을 참획했다”
0743)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농민군 측에 다소 피해가 컸던 것 같다. 이 과정에서 관군이 성 안을 향해 대포를 쏘아대서 경기전이 훼상했고
0744) 성 안밖의 수천 호가 불에 탈 정도로
0745) 관군의 포격이 격심했다.
이후 며칠간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29일에는 농민군이 북문으로 나와 황학대를 공격할 때 관군이 회선포를 쏘아 농민군 수백 명이 사살당했다.
0746) 5월 1일에는 “적은 남문으로 대대가 떼거리로 몰려 나왔지만, 관군이 회선포를 발사하자 맥없이 흩어져 다시 달아났다. 이때 죽은 사람이 300여 명이었다.”
0747) 2일에는 농민군이 서문쪽으로 몰려나와 용머리고개의 관군 진영을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관군이 또다시 대포를 계속하여 발사하자 다시 물러났다. 연이은 대포공격에 농민군은 점점 흐트러지기 시작하였다.
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사활을 건 대접전은 5월 3일에 이루어졌다. 농민군은 이날 오전 10시께 서문과 북문으로 진출해 사마교와 구근 하류를 건너 유연대를 공격했다. 농민군의 위세에 눌린 유연대 주둔 관군은 남쪽으로 도주했고 이를 추격한 농민군은 일거에 다가산을 점령한 뒤 관군의 본영이 있던 완산으로 육박해 들어갔다. 이날 농민군의 모습에 대해≪오하기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0748)선봉에 선 이복룡은 커다란 깃발을 세우고 유연대를 거쳐 황학대를 지나 곧바로 완산으로 올라갔다. 이들은 마치 굴비를 꿰듯 한 줄로 늘어서서 진격하였으므로 다만 좌우의 상황만 살필 수 있었을 뿐, 앞뒤의 상황은 알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앞에 가던 사람이 꼬꾸라져도 뒤에 오는 사람들은 알지 못한 채 용기를 내어 봉우리를 기어 오르며 더욱 기세등등하였다. 계훈은 칼을 뽑아 손에 들고 큰소리로 병사들을 독려하였고 경병은 연달아 대포를 쏘았다.
설욕을 노리던 농민군은 이날 전투에서도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전주성으로 다시 후퇴했다. 이날 전투에서 농민군은 전봉준이 왼쪽 허벅지에 총상을 입었고 소년장사 이복룡(당시 14세)과 용장 김순명을 잃었다. 그외에도 수백 명의 농민군이 전사하고 농민군 전열이 더욱 흔들리게 되었다.
0749) 농민군 중에 도망자가 속출하고, 일부에서는 전봉준을 잡아 홍계훈에게 바치고 목숨을 빌어보자는 논의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날 전투를 끝으로 관군과 화약을 맺어 5월 8일 농민군이 자진해산할 때까지 더 이상의 전투는 없었다.
0743) <양호초토등록>(≪동학란기록≫상), 173쪽.
0744) <全琫準供草>, 初招問目(≪동학란기록≫하), 528쪽.
0745) <갑오약력>(≪동학란기록≫상), 64쪽.
0746) <양호초토등록>(≪동학란기록≫상), 173쪽.
0747) ≪오하기문≫, 99쪽.
0748) ≪오하기문≫, 100쪽.
0749) <양호초토등록>(≪동학란기록≫상), 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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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주화약
5월 3일 대접전 이후 농민군의 동요가 있자 전봉준은 5월 4일 홍계훈에게 읍폐민막의 개혁을 위한 폐정개혁안이 포함된 所志를 제출하였다.
0750) 5월 5일 內署에서 홍계훈에게 보낸 전보에서는 “귀하의 말을 믿을 수 없다. 기어이 소멸하도록 하라”
0751) 시달하였는데, 조정에서는 5월 5일 현재로서는 전봉준의 휴전제의를 거부하기로 결정하였다고 생각된다. 5월 6일 오후 2시경에 전봉준의 使者 2명이 홍계훈에게 와서 다시 휴전을 제의하였다. 5월 7일에는 그 사자가 일전에 소지한 바 민원을 상계하고 실시하면 해산하겠다는 供文(각서)을 제출하였다. 5월 5일 이후 조정에서는 논의를 거쳐 전봉준의 휴전제의를 수락하기로 결정하고 고종이 홍계훈에게 수락을 지시함으로써 5월 7일에 전주화약이 성립되었다. 즉 정부에서는 27개조의 폐정개혁안을 실시하고 농민군은 전주에서 철수하기로 협정되었던 것이다. 이에 제1차 농민전쟁은 전주화약으로 종결되었다.
전봉준이 전주성을 점령하여 서울로 진격한다는 애초의 계획을 중단하고 정부군과 화약을 맺은 연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정부군이 농민군 토벌의 목표를 성취하지 않은 채 휴전에 합의한 까닭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농민군과 정부군이 각각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먼저 농민군의 상황을 보자. 첫째로 농민군 최고 지도자 전봉준은 淸兵의 파병을 크게 의식했다. 조선정부가 4월 29일 청군의 파견을 요청하는 조회문을 청국에 보내자 이를 기다리고 있던 청국의 북양대신 이홍장은 5월 2일 즉시 910명의 병력을 출발시키고, 뒤이어 1,500명의 병력을 출동시켰다. 이에 5월 5∼7일에 걸쳐 2,500명의 청군이 충청도 아산만에 상륙하였다.
0752) 농민군은 전주화약 후 5월 12일의 통문에서 “듣건대 청병은 3천명 뿐이라고 하는 데 수만 명이라고 와전되었고 또 각군 군대가 길에 쫙 깔려 있다고 하기 때문에 우선 잠시 퇴병하였다. 지금 들으니 그렇지 않아서 후회가 막급이다. 일이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청병이 퇴거하기를 기다려서 다시 의기를 들 것이다”
0753)고 하였다.
둘째로 청·일 양군의 진주로 인한 국제분쟁의 확대와 국가적 위기를 막기 위해 전봉준은 휴전을 제의했다. 일본은 4월 30일 조선 조정이 청국에 청군의 차병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는 보고를 받자 즉시 수상 伊藤博文의 주재하에 참모총장과 차장을 참석시킨 내각회의를 열어 조선정부의 요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출병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일본은 청국군이 아산만에 상륙하기 전인 5월 6일부터 약 6,000명의 혼성 여단을 인천 부평지구에 상륙시키고 5월 10일에는 주조선 일본공사 大鳥圭介가 420명의 육전대와 20명의 순사에 대포 4문을 이끌고, 농민전쟁의 ‘진압’을 위해서 경군이 모두 남하하여 무방비 상태에 있는 서울에 침입하였다.
0754) 일본군과 청국군 침입의 정보가 들어오자 그 이전까지 결사적으로 관군에 공격적이었던 농민군 총대장 전봉준은 나라의 앞일을 염려하여 관군과의 화약을 모색하게 되었다.
세째로 戰勢上의 불리함과 농민군의 동요로 화약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농민군은 무장기포 이후 승승장구, 승리의 쾌거로 이끌어왔던 전세와는 전혀 다른 상황을 이곳 전주성에서 맞고 있었다. 28일의 첫싸움에서부터 손실을 입은 농민군은 싸움을 걸기도 하고 선공을 당하기도 하면서 치러낸 싸움마다 전과보다는 피해를 거듭 입었다. 가뜩이나 열세 속에 놓여 있던 농민군 진영이 참패한 것은 5월 3일의 전투에서였다. 그간의 접전에서 관군의 신식무기를 제압한 농민군이었지만 이미 대포로 무장한 관군의 위력을 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동안 전투마다 승리로 사기가 진작되어 있던 농민군에게 예상치 못한 전세가 펼쳐지자 농민군 내부에서는 예상보다 큰 충격으로 동요가 일어났고 지도부 또한 이러한 분위기를 바로잡기 위한 전략이 필요했을 것이다. 게다가 농심을 천심으로 알고 살아 온 농민군으로서는 농번기가 닥쳐 있어 어떤 형식으로든 이 상황을 돌파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네째로 제1차 농민전쟁과정에서 농민군은 폐정개혁안을 끈질기게 제기하고 휴전교섭 과정에서도 완강하게 요구하였는데, 이로 보아서 농민군은 위정자들이 청일양국군의 침입으로 조성된 국가적 위기를 고려하여 농민군의 현실성있는 요구를 수락하여 폐정을 개혁하리란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었고, 그러한 이유에서 휴전화약을 제기하였다고 생각된다.
다음으로 관군의 입장에서도 전주성 공방을 계속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관군의 병력만으로는 농민군의 진압이 힘들다고 판단한 조선정부는 淸兵의 차병을 요청하여 사태를 해결하려고 했으나, 일본군이 제물포조약을 빙자하여 군대를 출동시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맞게 되었다. 출병을 강행하려는 일본을 막기 위해 정부는 원세개에게 청국군의 상륙을 중지시킬 것을 요구했으나 일본군은 기민하게 5월 6일 이미 제물포를 통해 입경했고, 같은 시각에 청국군 또한 아산의 백석포에 상륙하여 정부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농민군의 위압적인 대세를 외세에 의존해 쉽게 해결하려했던 정부로서는 스스로의 계책에 옭아매인 셈이어서 이에 대한 해결이 시급했다. 거기에다 전주성에서의 전투가 관군의 승리로 역전되자 당초의 원병 빌미가 이미 없어진 상황에서 청·일 병력의 출병은 빨리 들어내야 하는 화약고와도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정부로서는 청일 양국군을 철수시킬 명분을 만들기 위해 어떻게든 빠른 시일 내에 전주성을 되찾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실제로 조선정부는 화약 후 5월 10일에는 청국에, 5월 11일에는 일본에 철병요구를 했다.
0755) 양측의 이러한 사정이 맞물려 협상이 시작되었다. 고종은 외국군, 특히 일본군 주둔의 빌미를 없애기 위해 신임 전라관찰사 김학진에게 신속히 사태를 수습할 수 있는 전권을 주었고, 김학진은 농민군과 협상을 해서라도 전주성을 수복하여 자신의 임무를 완성해야만 했다. 전봉준은 청일 양국에 군사주둔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화약을 맺되, 봉기의 시초부터 주장해 온 폐정개혁의 실시를 요구하였다. 27개조항으로 된 농민군 측의 요구를 김학진과 홍계훈이 받아들임으로써 협상이 타결되자 5월 7일 ‘전주화약’이 비공식적으로 성립되었다. 그리하여 홍계훈은 농민군의 안전을 보장하는 勿侵標를 발급하였고 농민군은 5월 8일 전주성을 관군에게 비워주고 ‘귀화’라는 형식적 이름 하에 자진해산하였다.
제1차 동학농민전쟁은 ‘전주화약’이 이루어지고 농민군들이 일단 전주성에서 나와 해산하였으므로 막을 내렸다. 비록 농민군이 당초의 목표대로 서울로 직향하여 중앙권력을 변혁시키지는 못했다고 할지라도 관군을 격파하고 정부가 파견한 경군까지 곤경에 몰아 넣어 ‘폐정개혁’의 약속까지 받아냈다는 것은 어찌됐든 농민군으로서는 눈부신 성과임에 틀림없었다. 이는 과거의 민란에서 국지적으로 고립되어 안핵사에 의해 주모자가 체포되어 효수되고 민란군이 해산되는 것을 반복한 것과 비교해 볼 때 엄청난 진전이었다. 이런 점에서 전주화약은 성공적인 쾌거로 평가되고 있는 제1차 동학농민전쟁의 승리를 상징하는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0750) 위의 책, 207쪽.
0751) <兩湖電記>, 39쪽;정창렬, 앞의 글, 160쪽.
0752) 신용하,<갑오농민전쟁 시기 집강소의 설치>(≪동학과 갑오농민전쟁연구≫, 일조각, 1993), 163쪽.
0753) ≪주한일본공사관기록≫1, 89쪽.
0754) 박종근,≪청일전쟁과 조선≫(일조각, 1989), 16∼17쪽.
0755) 위의 책, 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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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 요구
제1차 동학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은 무엇을 목표로 싸웠는가? 농민군은 봉기의 시초부터 그들의 요구를 여러가지 형태로 제시해 왔다. 농민군은 창의문, 격문 등을 통해 봉기의 정당성을 널리 알리기도 하였고 전쟁의 상대였던 조선정부에 대하여는 자신들의 구체적인 요구를 담아 ‘原情’, ‘通文’ 등의 형태로 제시하기도 하였다. 정부측에 제시한 농민군의 요구사항들은 일종의 폐정개혁안 내지 사회개혁안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여기서는 폐정개혁안의 분석을 통해 농민전쟁 당시 농민들에게 부과되었던 사회적 모순의 성격과 농민전쟁의 목표 내지 농민군의 사회경제적 지향을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농민군이 제1차 농민전쟁 기간 중에 조목별로 제시한 폐정개혁 요구안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기록은 모두 여섯 가지이다. 4월 4일 부안을 점령한 농민군이 법성포 이향에게 보낸 ‘東學軍通文’ 9개조,
0756) 4월 19일 경군을 이끌고 내려온 招討使 홍계훈에게 제시한 ‘湖南儒生原情’ 8개조,
0757) 5월 초 전주화약 직전 화약의 조건으로 초토사 홍계훈에게 제시한 27개조 중 14개조,
0758) 전주성에서 물러나와 5월 11일경 巡邊使 이원회에게 제시한 ‘全羅道儒生等原情’ 14개조
0759)와 5월 17일경 ‘原情列錄追到者’ 24개조,
0760) 그리고 5월 20일 경 長城에서 전라감사 김학진에게 제시한 ‘개혁안’ 13개조
0761) 등이 그것이다.
물론 농민군은 농민전쟁을 일으킨 당초부터 체계적이고 상세한 폐정개혁조목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농민군은 처음 봉기했을 때에는 간단한 구호에서부터 시작하였고 전쟁을 계속하는 동안 필요에 따라 폐정개혁안을 발표, 제시하였다. 따라서 개혁안은 애초부터 체계적으로 마련되어 완결된 일정불변의 어떤 조목들이 아니라 집약된 구호에서부터 몇 가지의 구체적인 조목으로 나타났으며, 그것도 모두를 다 기록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가장 긴급하다고 느껴진 조목들이 먼저 제시되었을 것이다.
0762) 그러므로 기록에 따라서 조목 수나 내용에 있어서 차이가 발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민군이 제기한 요구조항들은 각 개혁안에서 동일한 조항들이 다수 있다.
여섯 가지 개혁안들을 내용별로 보면 1) 조세수취체제와 이에 관련된 탐관오리에 관한 조항 2) 무역·상업문제에 관한 조항 3) 기타 정치적 요구조항으로 분류할 수 있다. 아래의 ‘폐정개혁 요구사항 분류목록’은 여섯 가지 개혁안에 나열된 요구조항들을 같은 내용의 것을 묶어 28개 조항으로 정리한 것이다.
폐정개혁 요구조항 분류목록
0763) (1) 조세수취체제에 관련된 조항
(가) 조세수취체제 일반에 관한 조항
1) 軍政·還穀·田稅 三政은 通編의 예에 따라 준행할 것(續1)
조세를 명목도 없이 더하여 징수하는 것(東)
(나) 田政에 관한 요구조항
2) 田稅는 전과 같이 할 것(全)
3) 흉년의 白地징세를 없앨 것 (續2)
각읍의 陳浮結은 영원히 면세할 것(續1)
起田과 陳田을 막론하고 私田의 白地徵稅를 하지 말 것(日)
4) 均田官이 폐단을 없앤다고 하면서 도리어 폐단을 낳는다 (日)
均田御使를 혁파할 것(大)
均田官이 토지면적을 속여서 세금을 징수하는 것(東)
均田官의 陳結 농간은 백성을 괴롭히는 바가 심대하므로 혁파할 것(續2)
5) 각 宮房의 輪回結은 모두 혁파할 것(續1)
6) 어느 곳을 막론하고 洑를 쌓아 세금을 거두는 것을 革罷할 것(續2)
(다) 軍政에 관한 요구조항
7) 봄 가을 두차례의 戶役錢은 이전 例에 따라 戶마다 2兩씩으로 내려서 配定할 것(大)
洞布錢은 每戶당 春秋 二兩씩으로 정할 것(全)
軍錢을 때도 없이 과다 징수하는 것(東)
姻戚에게 부과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것(東)
軍錢은 봄 가을 매호 당 1兩씩 원래대로 정할 것(續2)
8) 各項의 結錢收斂은 平均으로 分排하여 濫徵하지 말 것(大)
나라의 結稅는 더 보태지 말 것(全)
結米는 옛 大同의 예로 復古할 것(續2)
結上頭錢·考錢 등은 매년 증가하고 있는데 이를 혁파할 것(續2)
(라) 還穀에 관한 요구조항
9) 臥還은 그 본전을 뽑아버릴 것(日)
환곡의 본전을 회수하고도 이자를 독촉하는 것(東)
환곡은 옛 수령이 그 본전을 거둔 것은 다시 징수치 말 것(續1)
도내의 환곡은 옛 수령이 거둔 것을 다시 민간에서 거두지 말 것(全)
옛 수령이 이미 거둔 환곡은 다시 징수치 말 것(續2)
10) 賑庫는 一道 내 인민의 膏血인 바 곧 혁파할 것(續1)
본 감영의 賑庫錢은 모두 인민의 膏血인 바 이를 영원히 혁파할 것(續2)
11) 오래된 私債를 官長을 끼고 억지로 받아내는 것을 일체 금할 것(續2)
(마) 雜稅·雜役에 관한 요구조항
12) 浦口의 魚鹽稅는 혁파할 것(全)
각 浦의 魚鹽稅는 시행하지 말 것(續2)
鹽田의 市稅는 거두지 말 것(日)
각 浦口의 船主가 억지로 빼앗는 것을 금할 것(日)
13) 沿陸에 새로 생긴 각종 雜稅를 혁파할 것(續1)
14) 각읍의 官況은 원래 수요 외에 더하여 磨鍊하는 것을 모두 혁파할 것(續1)
烟戶雜役을 줄일 것(全)
각종 잡역이 나날이 늘어나는 것(東)
烟戶雜役을 따로 나누어 加斂하는 것을 모두 혁파할 것(續2)
(바) 轉運營에 관한 조항
15) 轉運營의 吏民에 대한 폐단을 혁파할 것(日)
轉運所를 혁파할 것(全)
轉運司를 혁파하고 이전과 같이 각 읍에서 상납케 할 것(大)
轉運營이 加斂하면서도 독촉하는 것(東)
轉運營의 漕運은 해당 읍으로부터 상납하는 예를 복고할 것(續2)
輪船上納 이후 每結당 加磨鍊米가 3, 4 斗나 되었는데 이를 혁파할 것(續1)
각 浦口의 船主가 억지로 빼앗는 일(日)
(사) 貪官汚吏에 관한 요구조항
16) 貪官汚吏는 징계하여 쫓아낼 것(大)
탐관오리는 모두 쫓아낼 것(全)
임금의 총명을 가리어 賣官賣爵하고 국권을 조롱하는 자는 모두 쫓아낼 것(全)
각 관청의 관속들이 강제로 빼앗고 가혹하게 구는 것(東)
각읍의 貪官汚吏는 모두 쫓아낼 것(續1)
殘民을 침학하는 貪官汚吏는 일일이 쫓아낼 것(續2)
奸臣이 권력을 농단하여 國事가 날로 어그러지니 그 賣官하는 것을 懲治할 것(大)
17) 各邑의 守令이 그 地方에서 묘지를 쓰고 田庄을 사들이는 것을 嚴禁할 것(大)
해당 邑의 지방관이 논을 사서 본읍에 묘지를 쓰는 것을 법에 따라 처분할 것(續2)
官長은 자기 경내에 묘지를 쓰지 않고 또 논을 매입하지 말 것(全)
각읍의 수령이 아래로 민인의 山地를 강제로 빼앗아 묘지를 훔치는 것을 금할 것(全)
세력을 가지고 남의 壟土를 빼앗은 자는 죽임으로써 징계할 것(續2)
18) 各邑의 포흠한 吏胥는 千金이상이면 죽이고 일족에게 물리지 말 것(大)
公錢을 포흠한 것이 千金이면 殺身贖罪케 하고 族戚으로부터 거두지 말 것(續2)
19) 各邑 吏胥의 分房할 때 請錢을 받지 말고 쓸만한 사람을 뽑아 任房할 것(大)
各邑의 吏屬을 임명함에 있어 任債하는 일을 嚴禁할 것(續2)
각읍 아전의 任債는 모두 혁파할 것(續1)
각읍의 任房 名色은 모두 혁파할 것(續1)
20) 각읍 관아의 物種所入은 時價에 따라 取用할 것(續1)
각읍 관아의 物種所入은 時價에 따라 排用하고 常定例는 혁파할 것(續2)
21) 京·營邸吏의 料米는 옛날 예에 따라 삭감할 것(續2)
(2) 무역·상업문제에 관련된 조항
(가) 제국주의 세력의 경제적 침투에 관한 조항
22) 다른 나라의 潛商이 쌀값을 올리는 것을 금할 것(日)
각 浦口에서 사사로이 쌀을 사고 파는 것을 엄금할 것(大)
각 浦口 潛商의 쌀거래를 엄금할 것(續2)
각 浦口의 貿米商을 모두 금단할 것(續1)
大同상납 전의 각 浦口에서의 潛商의 쌀거래를 금지할 것(全)
23) 各國 상인은 各 港口에서만 買賣케 하고 都城에 들어와 設市치 못하게 하며 各處에서 任意로 行商치 못하게 할 것(大)
(나) 국내 상업문제에 관한 조항
24) 각읍 市井의 각 물건에 대한 分錢收稅와 都賈 名色은 혁파할 것(續2)
각종 물건을 매점매석하여 이득을 취하는 것을 금할 것(日)
25) 각 市廛이 分錢收稅하는 것을 금할 것(日)
보부상의 폐단이 크니 이를 혁파할 것(大)
보부상의 작폐를 금단할 것(全)
보부상·雜商의 작당행패를 영원히 혁파할 것(續2)
(3) 기타 요구조항
26) 電報는 민간에 폐단이 심하므로 철폐할 것(續1)
電報局은 민간에 폐가 가장 심하므로 혁파할 것(續2)
27) 東學人으로 무고하게 살륙되고 갇힌 자는 일일이 伸寃할 것(續2)
28) 大院君이 국정에 관여한즉 民心은 얼마간 바라는 바가 있을 것이다(大)
0756) 이것은 농민군이 古阜 점령 당시에 法聖浦 吏鄕에게 보낸 통문인데, 일본 상인들이 공사관에 보낸 甲午년 4월의 정황보고 속에 들어 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1, 20∼21쪽;伊藤博文,≪秘書類纂 朝鮮交涉資料≫(秘書類纂刊行會, 1936), 332∼333쪽.
0757) ≪오하기문≫, 88∼89쪽;<東匪討錄>, 353쪽.
0758) 이것은 전주화약 때에 招討使 洪啓薰에게 제시한 것으로 모두 27개조로 되어 있었는데 전봉준 판결문에는 14개조만이 실려 있다.<全琫準判決宣言書>,≪韓國學報≫39집, 1985, 188∼189쪽.
0759) 이것은 전라도 儒生등(농민군)이 巡邊使 李元會에게 폐정개혁을 原情한 것으로 다음의 ‘原情列錄追到者’와 함께 실려 있다. 金允植,≪續陰晴史≫上(國史編纂委員會, 1971), 322∼323쪽.
0760) <東匪討錄>,≪韓國學報≫3집, 264쪽;金允植,≪續陰晴史≫上, 323∼325쪽.<東匪討錄>에는 巡邊使 앞으로 보낸 ‘所願列錄’ 23개조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은≪續陰晴史≫의 ‘原情列錄追到者’ 24개조의 내용과 일치하되 그 중 1개조(軍錢 春秋每戶一兩式 元定事)만이 누락되어 있다.
0761) 이것은 농민군이 長城에 퇴거하여 전라감사 金鶴鎭에게 제시한 것이다.
鄭喬,≪大韓季年史≫上(國史編纂委員會, 1971), 86쪽.
0762) 한우근,<동학군의 폐정개혁안 검토>(≪역사학보≫23집, 1964), 61쪽.
0763) 각 항의 끝에 ( )하여 적어 놓은 것은 각 요구조항이 있는 출전을 가리킨다. (日)은 東學軍通文 9개조가 실려 있는≪日本公使館記錄≫, (東)은 湖南儒生原情이 실려있는<東匪討錄>, (全)은 湖南儒生原情 14개조가 실려 있는<全琫準判決宣言書>, (續1)은 全羅道儒生等原情 14개조가 실려 있는≪續陰晴史≫上, (續2)는 原情列錄追到者 24개조가 실려 있는≪續陰晴史≫下, (大)는 長城 改革案 13개조가 실려 있는≪大韓季年史≫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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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세수취체제에 대하여
(1) 조세수취제도 전반에 관하여
0764)위에서 보듯이 농민군이 제시한 개혁안에서 절반 이상의 항목이 조세수취체제와 직접 관련된 것이고 탐관오리의 작폐에 관련되는 조항을 합치면 28개 조항 중 21개가 조세수취체제에 관련된 요구조항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농민군의 봉기가 기본적으로 봉건적 모순에서 시작되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요구조항 1)의 “軍政·還穀·田稅 三政은 通編의 예에 따라 준행할 것”은 수취체제 전반에 대한 농민군의 요구를 총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신분제를 매개로 한 봉건적 조세제도인 租庸調체계가 조선 후기의 사회 변동으로 동요하면서 새로이 정립된 조세체계는 전정·군정·환곡으로 표현되는 三政이었다. 조선시대의 농민이 무엇보다도 봉건국가의 조세수취체계 속에서 수탈의 대상으로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농민군의 생활상의 요구는 무엇보다도 삼정문란의 개선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三政 문란에 대한 농민들의 직접적인 생활상의 요구가 개혁안을 통해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농민군의 요구는 표면적으로는 봉건적 수취제도 그 자체를 거부하거나 삼정제도의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하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고 조세수취제도의 운영상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通編의 예에 따라 준행할 것”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언뜻 보기에는 복고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농민군의 이러한 주장은 주관적으로는 당장의 생활상의 요구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조선 후기에 봉건체제가 해체기에 들어서고 그 유지의 근간의 하나인 조세수취제도가 극도로 문란해진 상황이라는 객관적인 조건에서 보면 그것은 봉건적 조세수취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공격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봉건정부는 이러한 농민군의 요구를 현실적으로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농민군을 체제전복 세력으로 간주하여 진압에 나섰던 것이다.
0764) 이하의 폐정개혁안 분석은 정진상,≪갑오농민전쟁에 관한 사회사적 연구≫(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2), 85∼117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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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정에 관한 요구조항
2)∼6)은 田政에 관한 농민들의 요구조항들을 열거한 것이다. 조선 봉건국가는 토지세가 재정의 근간이었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후기에 이르러 전쟁과 천재지변으로 국결이 줄어들고 정치적 기강이 해이해지는 틈을 타 土豪·관리·모리배의 토지 잠식으로 국가의 세입이 줄어들자, 농민들에게 과다한 징세를 하게 되는 각종 폐단이 수반되었다. 게다가 조선 후기 상품화폐경제의 진전에 따라 금납이 전세수취의 방법으로 시행되는 데 따라 이를 둘러싼 폐단도 발생하게 되었다. 농민군은 전세수납 방법을 둘러싼 여러 문제를 제기하여 ‘田稅는 전과 같이 할 일’을 요구조항으로 내걸었던 것이다.
3)의 요구조항은 白地징세와 陳浮結에 관한 것이다. 陳田은 전국적으로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조선 후기에 흉년으로 늘어난 陳田으로 말미암아 田地의 實結數는 원장부의 결수보다 훨씬 적었으며, 그 위에 吏胥의 농간과 白地징세의 폐가 심했다. 진전이 많이 발생하여 전세가 줄어들자 진전의 일부에 대해서는 白地징세가 부과되었고 때로는 ‘族徵’, ‘里徵’이 수반되기도 하였다.
0765) 이에 농민군은 ‘각읍의 陳浮結은 영원히 면세할 것’을 주장하고 백지징세에 반대하였다.
4)의 均田使에 관한 조항은 陳田 징세에 대한 구체적인 폐단을 지적한 것이었다. 균전사의 작폐에 관해서는 여러 개혁안에서 중복하여 나타날 만큼 그 폐단이 큰 것이었다. 고종 27년 말 고종의 특명으로 균전사에 임명된 金昌錫은 수년 간의 면세를 약속하고 流亡民으로 하여금 진전을 起墾케 하고는 약속과는 달리 추수시에 징세를 강행하였으며, 또 다시 진폐된 田畓에 대해서는 그 전년의 장부에 의거하여 징세하기도 하였다.
0766) 이에 농민군은 관직을 이용한 불법징수에 저항하여 ‘均田御使를 혁파할 것’을 주장하였다.
5)는 宮房輪廻結의 폐지를 요구하는 조항이다. 各 宮房의 導掌들은 宮房 權勢에 의탁하여 농민을 침학하거나 舊災라고 모칭하여 公稅를 납부하지 않고 私腹을 채우는 일이 많았다. 宮房田은 有土, 無土를 막론하고 이에 대한 收斂이 일반 민결에서와 다를 바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궁방의 權勢에 의탁한 導掌·吏胥輩의 작간·침학이 한층 더한 것이었다.
0767) 그리하여 농민군은 ‘각 宮房 輪回結은 모두 혁파할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6)은 수리시설에 관한 농민군의 요구조항이다. 堤堰이나 洑는 일반적으로 관의 관리하에 있어 그 修築에는 흔히 농민이 동원되었다. 농민의 동원에 있어서는 防水用의 防築과 아울러 다수의 농민이 요역을 감당해야 했다. 제언이나 보에 관련하여 가장 직접적인 민폐는 역시 水稅의 남징에 있었다. 즉 새로 洑를 쌓는다는 것을 빙자하여 농민으로부터 수세를 남징하는 처사가 성행되었다. 고부민란의 발단이 고부군수 趙秉甲의 萬石洑 新築이었다는 점
0768)은 築洑와 水稅에 대한 농민들의 인식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0765) 한우근,≪동학란 기인에 관한 연구≫(서울대출판부, 1971), 100쪽.
0766) 黃 玹,≪梅泉野錄≫(국사편찬위원회, 1971), 109쪽.
0767) 한우근, 앞의 책, 116쪽.
0768) <全琫準供草>初招問目(≪동학란기록≫하), 5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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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군정에 관한 요구조항
7)과 8)은 軍政에 관한 농민의 요구이다. 7)의 요구조항은 軍布의 경감에 관한 것이다. 1750년의 균역법은 良丁의 군포 2필을 1필로 경감하고, 대원군 집정시에는 양민에게만 부과시키는 군포를 양반에게도 같이 부과시키자는 취지에서 戶布制를 실시하여 班常을 가리지 않고 1丁에 대하여 1년에 2냥씩의 동포전을 징수케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동포전의 실시는 도리어 구제보다도 더 과중한 부담이 되었다. 따라서 농민은 한편에서는 법규의 준행을 호소함과 함께 다른 한편에서는 이같은 불법행위의 기초를 이루는 세제의 철폐를 요구하였다. 여기서도 농민군은 봉건적 조세인 군역 자체의 폐지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군포를 징수하되 국법에 따라 ‘洞布錢은 每戶당 春秋 二兩씩으로 정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8)의 조항은 結米에 관한 것이다. 1750년 균역법의 실시에 따라 군포 2필을 1필로 감하는 대신 그 보충책으로 토지에 結米 또는 結錢을 징수케 하였다. 이러한 결미·결전의 가렴 또한 심하였다. 田結에 대한 기본수세액은 그리 과다한 것이 아니었으나, 여기에 부가되는 각종각색의 結役이 허다하여 결당 수세액은 높아지기 마련이었다. 田結에 대한 총세액으로 결산된 것이 소위 結價인데 여기에는 원래의 田稅·大同·三手米稅·結錢은 물론이요 소위 각종 수렴이 첨가되어 농민의 부담이 커졌던 것이다.
0769) 농민군이 ‘各項의 結錢收斂은 平均分排하여 濫徵하지 않을 일’이나 ‘結米는 옛 大同의 예로 復古할 일’을 주장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도 농민군은 봉건적 조세제도 그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지는 않고 다만 舊例대로 집행할 것을 요구하였다.
0769) 한우근, 앞의 책, 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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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환곡에 관한 요구조항
9)∼11)은 還穀제도에 관련된 요구조항이다. 還穀은 본래 빈민구제를 위하여 설치한 대부제도인데 조선 후기에는 그 성격이 변질되어 소위 삼정의 문란 중에서도 환곡의 폐가 가장 심하였다고 할 정도였다. 이것은 지방관의 고리대업의 수단이 되었으며, 지방관은 帳簿위조에 의한 불법징수, 이중징수, 이자율의 인상 등으로 농민을 항상적 채무자로 몰아간 것이었다. 환곡을 통한 농간에는 군현의 수령 뿐만 아니라 각 도의 감사도 개입하고 있었다. 환곡 시행에 따르는 폐단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다. 환곡을 分給·收斂할 때 폐단이 따랐으며 환곡 逋欠의 폐도 계속되었다. 가장 심각한 폐단은 元還穀이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0770) 게다가 수령이 교체되는 경우 기왕의 逋欠으로 인한 허부화된 원곡을 채우기 위해 다시 농민에게 징수하였다. 농민군이 환곡의 폐단 중에서 특히 ‘臥還은 그 본전을 뽑아 버릴 것’이라든지 ‘환곡은 옛 수령이 그 본전을 거둔 것은 다시 징수치 말 것’을 주장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주장이었다. 이와 같이 농민군의 환곡제도에 대한 문제제기도 역시 제도 그 자체가 아니라 법에 정해진 대로 시행하고 관리의 부정을 없애자는 것이었다.
10)은 社倉 혹은 賑庫를 철폐하라는 요구를 담고 있다. 고종 4년(1867)에는 환곡의 폐를 시정하기 위해 社倉制를 실시하기로 하였는데, 社倉節目에 의하여 먼저 社倉을 각 면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동에 설치하고 근실하고 부유한 자를 택하여 社首로 삼아 이를 관장토록 하되 각 동의 근간인으로 동장을 삼아 사수의 지시를 받아 감독케 하였다.
0771) 그러나 据納者에 대한 감독은 당연하다 하더라도 流亡者에 대해서는 동민에게 공동책임을 지웠기 때문에 실제로는 종래의 白徵과 다름없었다. 또한 사창미까지도 환곡과 같이 중외의 경비보충의 주요한 재원으로 쓰이고 고리대금업으로 이용되자 농민에게는 이름을 달리한 또 하나의 수탈기구로 인식되었다. 그리하여 농민군은 새로 생긴 社倉 혹은 賑庫를 혁파할 것을 주장한 것이었다.
11)은 고리채에 관한 조항이다. 조선 후기에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환곡의 고리대화로 인해 사적인 고리대 행위는 널리 퍼져 있었다. 그 중에서도 지방의 영읍에서는 庫債라 하여 均役·賑恤 등의 庫錢을 그 관리자가 유용하여 빌려준 다음 사리를 도모하는 일이 흔했다.
0772) 고리대 행위의 자행 중에서도 공금을 유용하여 이를 대부하거나 또는 公債를 빙자하여 사채를 勒徵하는 폐가 매우 심했다. 이와 같이 사채가 대부분 공금을 이용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낼 때에는 당연히 수령의 권력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농민군은 ‘오래된 私債를 官長을 끼고 억지로 받아 내는 것을 일체 금할 일’이라고 하여 사채를 강제로 대부하거나 억지로 빼앗는 것을 금지할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0770) 위의 책, 157쪽.
0771) 위의 책, 164쪽.
0772) 위의 책, 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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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잡세·잡역에 관한 요구조항
12)의 조항은 魚鹽稅의 혁파를 요구하고 있다. 어염세는 원래 균역법 실시에 따르는 보충책으로 마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중간물주를 배제하고 세수의 증대를 꾀한 균역법 실시의 의도와는 달리 번잡한 稅制의 결함때문에 도리어 영세 魚鹽民에게 과다한 부담을 지웠으며 게다가 영세 어염민의 도산에 따라 隣徵·族徵이 자행되고 또 白徵의 폐단마저도 심하였다. 또한 이같은 상황에서 어장·염분은 다시 내수사를 위시한 各宮·各司 내지 향반·토호들에게 다시 점탈되어 私稅의 남징·첩징의 폐가 어염민을 이산하는 지경으로 몰아넣었다.
0773) 게다가 개항 후 외국 어민, 특히 일본어민의 침투가 보다 절박하게 한국의 어민을 위협하게 되었다. 봉건국가의 조세와 일본어민의 침투로 이중의 압박을 받은 영세 어민은 어염세 자체의 혁파를 요구하고 있었으며 농민군은 이들의 요구를 개혁안 속에 포함시키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농민군에는 연안의 영세 어염민도 농민군에 참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0)은 無名雜稅의 혁파에 관한 조항이다. 沿江에 있어서는 흔히 어염선에 대하여 잡세를 신설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외에도 대원군 집정시에 신설한 都城門稅, 한강유역에 있어서 水上·水下의 무명잡세, 각 營邑에서의 무명잡세 등이 있었다.
0774) 이 같은 沿江·場市에 있어서의 신설세는 각 衙門·각 宮房에서의 징색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농민군은 이와 같이 각 아문·궁방·지방관의 탐학에 의해 부과되는 봉건적인 무명잡세의 폐지를 요구하였다.
14)는 각읍의 官況과 烟戶雜役에 관한 요구조항이다. 官況, 즉 지방관원의 봉록은 원래 국법
0775)으로 정하기로는 大同경비 중에서 지출하게 되어 있어 따로 징수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각 읍에서는 添徵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었다. 또한 每戶에 부과되는 요역부담을 烟戶雜役 혹은 烟役이라 불렀는데 여기에는 애초에 어떠한 제한이 없어서 수령의 탐학이 개재될 여지가 많이 있었다. 그리하여 농민군은 ‘각읍의 官況은 원래 수요 외에 더하여 磨鍊하는 것을 모두 혁파할 것’과 ‘烟戶雜役을 줄일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0773) 위의 책, 145∼146쪽.
0774) 위의 책, 153쪽.
0775) ≪續大典≫戶典 外官供給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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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전운영에 관한 조항
폐정개혁 분류목록의 15)는 전운영에 관한 농민들의 요구조항을 열거한 것이다. 개항 이후 과거 목선에 의한 선운 대신 기선에 의한 공물 운송이 시작되었는데 이를 맡은 관청이 轉運營이었다. 전운영의 폐단으로는 우선 정부의 기선 구입에 따르는 경비로 선가미를 따로 거두어 들였기 때문에 농민의 세미 부과는 가중되었다. 또한 전운사가 선운을 관장한 이후로 田稅·大同米를 위시하여 船價米·三手米·永宗米 등 농민과 선상에게 부과되는 일체의 稅米를 督徵·수송하는 책임과 권력을 갖고, 그 밑에 監官·船主 등의 횡포와 弄奸·逋欠의 여지가 많았다.
0776) 위의 목록에서 보는 바와 같이 농민군이 제시한 모든 개혁안이 전운영 혁파를 거론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도 개혁안의 맨 앞에 나타나곤 하였던 점은 전운영에 대한 농민군의 怨聲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전운영에서의 수탈은 국가의 징세기구에 있어서의 중간수탈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전라도 전운사 趙弼永은 당시 일반적으로 자행되고 있던 중간수탈을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준 인물이었다.
0777) 그래서 농민전쟁을 관찰한 한 유생은 “호남의 난(농민전쟁)은 趙弼永으로부터 시작되어 趙秉甲을 거쳐 李容兌(泰)로 끝났다.”
0778)라고 말하고 있을 정도이다.
전운영 혁파의 문제는 이전의 민란 단계에서 전국적인 농민전쟁으로 발전할 수 있게 한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0779) 과거의 민란은 개별 군현 단위의 邑政이 문제의 발단이 되었고 민란의 전개도 일개 군현을 벗어나지 못하고 고립적으로 전개되었던 반면에, 전운영의 문제는 적어도 전라도의 여러 군의 공통 관심사가 되어 농민들을 군현 단위에서 끌어내어 전국적 규모로 단결하게 한 문제로 제기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공사관의 보고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민란의 수령은 앞서 비밀히 58주〔53주〕의 동학당에게 격문을 띄웠다. 그 목적은 다만 한 郡의 利害에 그치지 않고 먼저 전운영을 파괴하고 나아가 폐정을 개혁하려는 데 있다고 한다. 兵糧은 우선 軍倉의 稅穀을 빼앗아 이에 충당한다고 한다.”
0780) 농민군은 전운영 문제를 통해 “한 군의 利害에 그치지 않고” 공통의 관심사를 발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1차 농민전쟁 중에 농민군은 실력으로 전운사를 공격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0781)0776) 한우근,<동학란 기인에 관한 연구(상)-특히 일본의 경제적 침투와 관련하여->(≪아세아연구≫7-3호, 고려대아세아문제연구소, 1964), 36쪽.
0777) “趙弼永이… 갖은 명목을 교묘히 붙여 가렴하니 세납선여전이 100만 꿰미나 되었다. 국왕은 그를 재주있다고 여겨 3년이 되었어도 교체하지 않았다. 재물로 소론 갑부가 되었다….”≪梅泉野錄≫, 87쪽.
0778) 崔永年,<東徒問辨>(≪동학란기록≫상), 158쪽.
0779) 정창렬,≪갑오농민전쟁연구-전봉준의 사상과 행동을 중심으로-≫(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1), 123∼124쪽 참조.
0780) 巴溪生,<全羅道古阜民擾>(≪주한일본공사관기록≫1), 56쪽.
0781) 주한일본공사관의 보고에는 “沃溝의 群山과 靈光의 法聖浦에 주둔하고 있는 동학도들이 함께 轉運船을 공격하여 모두 쫓아냈으므로 운반할 길이 끊겼다. 이 民擾는 다만 백성들만이 일으킨 것이 아니라, 諸邑의 吏胥들도 轉運하는 데 피폐하였으므로 죽을 힘을 다해 轉運을 폐지하려고 백성들과 함께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였다”라고 하여 농민군의 전운사 공격에 대해 보고하고 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1,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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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탐관오리에 관한 요구조항
위에서 살펴 본 田政·軍政·還穀 및 雜稅에 관한 폐단의 매개고리는 기실 거의 모두가 지방관리, 즉 守令과 吏胥의 불법·협잡·탐학이었다. 그리하여 동학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의 주요한 공격대상은 貪官汚吏이며 국정을 위태롭게 하는 매관매작을 행하여 국권을 조롱하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전봉준은 “각읍의 守宰는 上納을 칭하고 혹 結卜을 加斂하여 戶役을 횡탈한다. 조금 부유한 백성이 있으면 공연히 죄로 엮어 재산를 늑탈하고 토지를 횡탈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0782)고 보았으며, 이로 인한 농민의 피해를 없애기 위해 봉기했으며 그 구체적인 공격목표를 전라도의 탐학한 관리의 일소와 중앙의 賣爵權臣의 배제에 두고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또 농민군이 무장에서 기포할 때 발표한 倡義文에서도 관료층의 부패가 국가의 위망을 초래하며 만민을 도탄의 극에 빠뜨리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국가의 위망을 염려치 않고 오로지 ‘肥己潤家之計’를 꾀하고 있는 公卿 이하 方伯·守令에 이르는 탐학이야말로 농민군의 주요한 공격대상이었던 것이다. 16)에서 보는 바와 같이 거의 모든 개혁안에서 중복하여 貪官汚吏의 징치를 요구하는 조항이 들어 있는 것을 보면 농민군의 공격의 목표를 잘 알 수 있다. 또 농민군은 이러한 요구가 받아 들여지지 않자 실력으로 탐관오리를 징치하기도 하였다.
수취체제의 문란과 직접 관련되는 조항 외에도 농민군이 구체적으로 제시한 守令·吏胥의 탐학행위가 여러 가지로 저질러지고 있었다. 17)은 守令이 인민의 토지와 묘지를 점탈하는 것에 대한 지적이다. 英朝朝 이후로 수령이 民家나 民塚을 점탈하는 것은 법으로 금해 왔지만, 수령이나 관찰사가 그들의 권세를 믿고 인민의 토지나 묘지를 점탈하는 경우가 많았다. 더구나 宮房이나 班家에서 묘지의 경계를 무시하고 이를 광점하는 경우 민답이 이에 몰입되는 수도 있었다.
0783) 농민군은 이와 같이 지방관이 그 권세로써 民田을 점탈하고 묘지를 함부로 발굴하는 불법을 규탄하고 ‘各邑 守令이 자기 地方에서 田庄을 사들이는 것을 嚴禁할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18)의 조항은 公金의 유용에 관한 것이다. 공금의 逋欠·犯用이 삼정을 여러모로 더욱 어지럽게 하였기에 농민군은 逋吏 자체를 규탄의 대상으로 삼았다. 조선 후기에는 경외를 막론하고 吏胥의 民에 대한 주구가 심하였다.
0784) 결세는 물론 각종의 상납까지도 모두 포흠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 중 대동·저치미 등을 포함한 환곡에 있어서 그 폐가 가장 심하였다. 이러한 이서의 逋欠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관부에서의 감독이 없을 수도 없어서 그것이 바로 民斂·族徵의 폐단을 자아내었다. 농민군에 ‘各邑의 포흠한 吏胥는 千金이상이면 죽이고 族徵하지 말 것’을 주장한 것은 이와 같은 사정에 근거한 것이었다.
19)는 任債에 관한 요구조항이다. 각 읍에서 새로 吏任을 선임할 때 차임되는 衙前은 금전을 상납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었는데 이를 任債라고 했다. 그것은 또 비단 衙前 즉 吏任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랜 관습에 따라 鄕任(座首·別監)이나 校任(향교의 役員)·面任 등에까지도 예사로 되어 있었다. 탐학한 수령은 관례 이상의 뇌물을 받게 되기가 일쑤여서 이러한 뜻에서는 흔히 任賂라 하였다.
0785) 그러나 이같은 임채는 결국은 吏胥 등이 평민을 침탈하는 근원이 되었기 때문에 농민군은 ‘各邑의 吏屬을 임명함에 있어 任債하는 일을 嚴禁할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20)은 각읍 관아의 잡비를 충당하는 데서 나타나는 징렴의 폐단을 지적한 것이다. 관아에서 사용하는 物種은 官庫와 임시물자를 다루는 民庫가 있어 각각 민간으로부터 구입하였는데 관아에서는 官需를 구입할 때 시가에 좇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공정가격이 낮게 정해져 시가보다도 헐값으로 강제 구매하는 일이 잦았다. 또한 관에서 권력을 의탁하여 가격조작에 의한 부당이득을 취하기도 하였다.
0786) 게다가 당시는 만성적인 인플레 상태에 있어 저가격에 의한 물자수용은 수용되는 측에 큰 손실을 가져 왔다. 그리하여 농민과 영세상인의 생활은 더욱 큰 핍박을 받았다. 농민군이 ‘각읍 관아의 物種所入은 時價에 따라 取用할 것’을 주장한 것은 인플레 하에서의 생활 방위였으며, 관리의 부정과 수탈에 대한 반대를 나타낸 것이다.
21)은 京·營邸吏의 폐단에 관한 것이다. 京·營邸吏는 경저리, 영저리 등을 말하는데 그들은 공납문첩을 전관하여 왔을 뿐 아니라 대동법 실시 이후로는 공납청부업자의 구실도 하게 되었다. 경저리·영저리 役價米는 법정세 외에 邑用으로 읍민에게서 添徵되는 명색의 하나로 이른바 계판에 드는 것이었다.
0787) 이들 邸吏는 흔히 환곡 등 公穀을 유용하여 고리대업을 하기도 하고, 邸吏 役價를 먼저 환곡의 利殖으로 받아 감으로써 결국은 읍민에게 피해를 주었다. 농민군은 이러한 京·營邸吏의 役價米를 첨징하지 말고 구례에 따를 것을 요구하였다.
0782) <전봉준공초>, 재초문목(≪동학란기록≫하), 532쪽.
0783) ≪日省錄≫, 高宗 7년 9월 6일조;한우근, 앞의 책, 183쪽.
0784) 吏胥輩가 逋欠을 자행하게 된 이유는 그들에게 일정한 봉급제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위에 그들은 신분지위의 향상을 좀체로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흔히 營邑의 各庫 色吏에 차출되어 여기서 생활비를 마련하게 되어 있었다. 한우근, 앞의 책, 188쪽.
0785) 한우근, 앞의 책, 195쪽.
0786) 위의 책, 201쪽.
0787) ≪日省錄≫, 고종 15년 4월 4일조;한우근, 앞의 책, 2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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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역·상업 문제에 대하여
(1) 일본의 경제적 침투에 대하여
농민전쟁에서 제기되었던 농민군의 폐정개혁안은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의 정치·경제적 침략 양상과도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농민군이 제1차 농민전쟁 시기부터 ‘斥倭洋倡義’·‘逐滅倭夷’의 기치를 내건 것은 일본제국주의의 경제적 침략에 그 원인이 있었다. 농민군이 폐정개혁안을 통해 직접적이고 명시적으로 일본의 침탈에 반대한 것은 미곡의 유출과 외국상인의 내지행상이었다.
폐정개혁 분류목록 22)는 일본상인의 미곡 유출에 대한 농민군의 요구를 담고 있다. 농민군이 제시한 모든 개혁안에서 미곡의 국외 유출문제를 거론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개항 이후 일본으로의 미곡 유출이 날로 심하여지자 지방관들은 방곡령으로 이를 막아 보려고 하였지만, 그때마다 일본공사의 항의로 철회하게 되고 곡물유출은 늘어가기만 하였다. 이같은 곡물유출로 종래의 국내 곡물수급구조는 위협받았으며, 곡물의 대일 수출 증대에 따른 곡물 상품화의 진전과 곡가의 등귀는 직접적으로 임노동자층과 빈농의 생계를 압박하여 광범한 농민층의 저항을 촉발하는 원인이 되었다.
0788) 농민층도 곡물의 상품화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상품화의 이익은 자가소비 부분까지 판매하는 경우에는 수탈의 다른 형식에 불과하였다. 농민이 잉여생산물을 판매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반드시 그 이익이 농민에게 돌아간 것이 아니었고, 조선의 곡물상인과 일본상인, 그리고 봉건지배계급이 농민의 잉여를 착취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0789) ‘각 浦口 潛商의 쌀거래를 엄금할 것’을 요구조항으로 내건 것은 미곡의 상품화 자체가 강요되고 있는 현실에서 미곡의 유통과정에서 농민층의 이익을 수호하려는 요구였다.
폐정개혁안 분류목록의 23)은 외국상인의 내지행상을 금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개항 후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한 청국상인과 일본상인은 서울시장에 침투하여 수입품만이 아니라 市廛상인의 전매상품인 백목면, 명태 등의 국내품까지 취급하였다. 이러한 일본상인의 내지행상은 곡물의 상품화를 가속화하며 가격의 등귀를 유발하여 농촌의 임노동자층과 빈농의 불만을 고조시켰다. 뿐만 아니라 일본상인의 내지행상은 농민적 상품교환의 장으로서의 농촌 場市에 타격을 가하였다.
0790)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농민군은 ‘各國人 상업은 各港口에서만 買賣케 하고 都城에 들어와 設市치 못하게 하며 各處에서 任意로 行商치 못하게 할 것’을 구체적인 요구로 내세웠던 것이다. 농민군은 수출시장과 연관되어 있던 미곡의 상품화 자체를 반대했다기 보다는
0791) 미곡 매매를 농촌 장시의 시장질서 내부로 한정함으로써 場市를 중심으로 한 재래의 시장구조의 파괴를 막고, 그럼으로써 지역적인 재생산구조의 유지를 도모하려는 것이었다.
0792) 여기에는 소생산자로서의 농민과 소상인의 이해관계가 표현되고 있다.
0788) 하원호,<곡물의 대일유출과 농민층의 저항>(≪1894년 농민전쟁연구≫1, 역사비평사, 1991), 273쪽.
0789) 하원호, 위의 글, 269쪽.
0790) 吉野誠,<李朝末期における米穀輸出の展開と防穀令>(≪朝鮮史硏究會論文集≫15, 朝鮮史硏究會, 1978), 110쪽.
0791) 전봉준은 체포 후 법정 신문에서 “그러면 일본군대와 경성에 머무르는 외국인들을 모조리 구축하려고 하였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그렇지 않다. 다른 나라는 단지 통상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일본은 군대를 거느리고서 경성에 주둔하고 있어서 우리나라의 영토를 침략하려는 것이 아닌가 의아했다”라고 하여 외국과의 무역관계 그 자체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사실로서 전제하고 있었다.<全琫準供草>(≪동학란기록≫하), 538쪽.
0792) 吉野誠, 앞의 글, 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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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국내상업문제에 대하여
일본의 무역을 통한 경제적 침투는 직접적으로 조선 농민을 압박하기도 하였지만 국내상인을 매개로 하여 조선민중을 압박하기도 하였다.
폐정개혁안 분류목록 24)는 都賈혁파에 대한 농민군의 요구이다. 일반적으로 객주·여각은 도매상이라는 의미에서 널리 都賈라고도 일컬어졌다. 또한 개항후 개항장에서의 무역은 개항장 객주라는 새로운 상인층을 출현시켰다. 개항장에서 자유상인(상회)이 대두하여 전통적이고 전근대적인 객주의 권익을 침해하는 것으로 나타나자 재정부족에 허덕이던 봉건정부로서는 특허독점적인 객주·여각의 체제를 더욱 통제하여 세입의 확보를 꾀하려 하였다.
0793) 객주는 그 독점적인 특권에 의하여 대소 상민을 탐학하였다. 또한 개항장에 있어서는 물론 미개항장에 있어서도 객주·여각은 일본 상인의 매매를 중간 주선하는 일을 담당하는 중에 그들의 미곡매출을 알선하는 역할도 하고 또 그들의 상품행상인, 즉 보부상에게 연계시켜 주는 기능도 하였다. 객주·여각은 일본인의 미곡매출과 상품매각에 중간매개적 역할을 하여 결국 미곡을 유출시킴으로써 농민군의 공격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각읍 市井의 각 물건에 대한 分錢收稅와 都賈 名色은 혁파할 것’이라는 농민군의 주장은 봉건정부와 이에 결탁한 특권상인들의 分錢收稅를 철폐하고 봉건적 특권상인제도를 철폐하라는 요구로 해석된다. 봉건적 상업정책에서 소외되어 독점적 특권 상인의 지배아래 이윤을 수탈당하던 소상인과 소상품생산자의 불만이 고조되면서 이러한 요구가 나왔던 것이다. 이는 봉건적 상업체계를 극복하고 소상인의 자유로운 상업활동을 보장받으려는 것이었다.
폐정개혁안 분류목록 25)는 市廛과 褓負商의 폐단에 대한 농민들의 요구조항을 열거해 놓은 것이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서울의 시전과 지방의 보부상은 상업활동의 핵심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각기 길드적인 조직을 가지고 관부에 대하여 소정의 역(납세)을 지는 대가로 상품 독점매매의 특권을 차지하여 정부와 상호 보상관계를 맺고 있었다. 개항 이후 일본을 위시한 제국주의세력의 경제적 침투로 이들 상인들은 타격을 받았지만, 봉건정부의 봉건적 특권상인체제 강화정책으로 모순이 민중에 전가되었다.
원래 상업기구인 시전체제는 조선 후기부터 한편으로 정부가 부과하는 과다한 收稅에 시달리고 다른 한편으로 세도가의 豪奴 등에 의한 任意 亂廛 행위로 쇠퇴의 길을 걸었다. 게다가 개항으로 청국상인과 일본상인이 서울에 점포를 개설함으로써 더욱 약화되었다.
0794) 난전이 치성하고 외국상인이 침투해 들어오자 시전상인은 소상인에 대한 분전수세를 강화하려 하였기 때문에 농민군은 ‘각 市廛이 分錢收稅하는 일을 금할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보부상단은 1881년 이후로 1885년에 이르는 동안에 정부로부터 비호를 받아 특권적인 행상 길드 조직을 강화하는 동시에 정부에 대하여 일정의 납세와 충성의 의무를 져서 이를테면 완전한 어용집단이 되었다.
0795) 행상길드 조직으로 장시를 지배하게 된 보부상의 독점적 특권은 일반 상인의 자유로운 상거래를 배제했으며, 그들이 객주여각을 통하여 외래 상품을 구득하여 이것을 일반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역할도 맡았다. 보부상은 특권 어용상인으로 장시를 지배하고 상리를 농단하였을 뿐 아니라 외국상인-객주·여각-보부상의 루트를 통하여 외국의 경제적 침투를 가능케 하는 말단조직의 기능을 지니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보부상의 특권적 행위는 소상인과 농민의 원망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농민군은 ‘보부상의 작폐를 금단할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부에 충성하는 집단으로서 갑오농민전쟁에서 농민군과는 원래적으로 적대관계에 서게 되었다. 실제로 농민군토벌의 巡邊使는 보부상을 조발하여 전선을 수호케 하고 정탐의 역할 등을 맡겼다.
0796) 첫 전투인 황토현 전투에서 보부상단이 농민군의 적대 편에 섰으며, 갑오 5월에 전라도 금산군 지방의 농민군은 보부상대에 의하여 격파당하기도 하였다.
0797) 농민군 또한 보부상을 적대세력으로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0798) 또한 관군이 전주성을 회복할 때에도 보부상단이 정부군과 합세하였다.
0799)0793) 한우근, 앞의 글(하), 155쪽.
0794) 한우근,<개국후 일본인의 한국침투>(≪동아문화≫제1집, 서울대 동아문화연구소, 1963) 참조.
0795) 한우근, 앞의 글(하)(1964), 173쪽.
0796) ≪續陰晴史≫上, 307쪽.
0797) ≪주한일본공사관기록≫1, 4쪽.
0798) 보부상들은 대체로 동학당들에 대해 원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학당들이 부상들만 보면 죽이기 때문인데, 그 사이에 살상을 당한 (보부상의)수효가 수십명이라고 합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1, 5쪽).
0799) ≪주한일본공사관기록≫1,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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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타 정치적 요구조항
사회경제적 요구조항 이외에 폐정개혁안에 나타나는 농민군의 요구사항으로는 전보국의 혁파, 동학인의 신원, 대원군의 섭정 요구 등 세 가지가 있다.
먼저 폐정개혁 분류목록 26)은 전보국의 혁파를 주장한 것이다. 개항 이후 일본인이 설치한 전보국의 폐단은 전국 각지를 전선으로 연결하면서 세운 전신주가 농지를 침탈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농민들의 생활과는 전혀 관계없는 전신, 전화는 농민들에게는 토지 침탈로 밖에 해석되지 않았을 것이다.
27)의 조항은 동학인이라는 이유로 피해를 받은 농민들의 신원을 요구한 조항이다. 동학은 정부에서 금했기 때문에 지방관리들은 동학교도들에 대해 온갖 협박과 박해를 가했을 뿐 아니라 수탈대상으로 지목되면 동학인으로 몰아 부치기도 하였다. 고부민란 후 안핵사 이용태가 고부 군민들에 대해 행한 학정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28)의 요구조항은 농민군의 권력구상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유일한 조항이다. 제1차 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은 주로 봉건지배층, 즉 민씨정권의 타도를 일차적인 목표로 내걸었다. 그러나 제1차 농민전쟁 단계에서는 농민군은 민씨정권을 타도한 후 대원군의 집정을 막연한 형태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단계에서는 독자적인 권력구상을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농민군은 4월 20일경 招討使에게 보낸 湖南儒生原情書에서 “일이 이지경에 이르른즉 억조창생이 마음을 같이 하고 팔도의 백성이 뜻을 모아 위로는 國太公을 받들어 攝政을 맡겨 부자의 인륜과 군신의 의를 온전히 하며, 아래로는 백성을 편안케 함으로써 宗廟·社稷을 다시금 보존할 것을 죽기로 맹서하고 변하지 않을 것이다”
0800)라고 하였으며, 4월 18일 羅州公兄에게 보낸 通文에서도 폐정개혁을 “國太公을 받들어 맡김”으로써 폐정개혁을 할 수 있다고 설득하고 있다. 또 전주에서 화약 교섭중이던 5월 4일 招討使에게 보낸 所志에서는 “太公을 받들어 섭정을 맡기자는 것은 그 이치가 심히 당연하거늘 어찌하여 반역이라 일컫고 살해하는가”
0801)라고 하여 대원군 정권의 성립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상에서 제1차 농민전쟁 시기 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안의 구체적 요구조항들을 검토하였다. 폐정개혁안에 나타난 조세수취체제에 관한 농민군의 요구는 임술민란 단계의 농민들의 요구와 일맥 상통하는 것이었다. 임술민란에서도 농민군의 주된 요구는 전정, 군정, 환곡 등 삼정문란의 폐단을 시정할 것과 수세담당자인 관리들의 부정행위를 포함한 조세제도 운영상의 문제를 주요한 문제점으로 제기하였던 것이다.
0802) 이것은 동학농민전쟁 시기의 봉건적 모순의 기본구조가 임술년의 그것과 기본적으로 같은 것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다만 이 시기에는 그 모순이 더욱 첨예한 형태로 드러났기 때문에 지역적인 봉기의 수준을 넘어 전국적인 농민전쟁으로 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농민군이 제기한 폐정개혁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농민군이 제1차 농민전쟁에 봉기할 때 ‘四大名義’와 ‘檄文’에서 내세운 민씨정권의 타도나 사회신분제의 폐지 등 구체제를 붕괴시키는 근본적 요구를 하지 않고, 당시 봉건정부가 생각하기에도 당연한 봉건적 가렴주구의 폐정의 개혁만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된다. 우선 위에서 열거한 개혁안이 전쟁의 적대편에 있다고 인식한 대상, 즉 봉건정부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0803) 이 경우는 일반적으로 운동의 전략적 목표를 천명하기보다는 상대방이 받아들여 즉각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최소강령을 제시하게 된다. 또한 농민전쟁에 여러 계층이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모든 계층에게 직접적인 생활상의 요구로 나타나는 최소강령을 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폐정개혁안의 분석은 농민들의 구체적인 생활상의 요구를 파악하는 데는 대단히 유용한 것이지만, 농민전쟁의 역사적 성격을 밝히는 데에는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농민군의 폐정개혁안 자체는 당시의 객관적 조건으로 볼 때 한계를 갖는 것이었다. 농민군은 당시의 봉건적 수취체제의 모순에서 파생된 여러 폐단들을 들어 그 시정을 요구하고 있지만, 그것이 봉건적 수취체제 그 자체에 대한 공식적인 거부를 표현하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通編의 예’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데서 보이듯이 봉건적 수취제도의 정상화라는 외양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 점은 아직 농민군이 봉건정부와의 싸움에서 자신감을 가질 수 없었던 전쟁의 초기 단계에 나타나는 의식과 행동의 미숙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어느 곳을 막론하고 築洑 收稅하는 것을 革罷할 것’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나듯이, 농민군은 봉건정부에 대하여 자신들의 즉자적인 생활상의 요구를 수세적으로 방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물론 이러한 삼정문란의 책임을 이전의 민란단계에서는 각 군현단위의 守令·吏胥層에 돌리고 있었던 데 대하여, 농민전쟁의 최고지도자 전봉준은 “민폐의 근본은 吏胥들의 逋欠에 있고, 吏逋는 貪官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탐관은 집권자들의 탐람에 있다”
0804)고 하여 그 책임을 궁극적으로 집권세력에 돌리고 있다는 점이 한 단계 진전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개혁안에서는 농민들의 생활상의 요구를 즉자적으로 반영한 것이기 때문에 농민 대중의 의식의 한계를 넘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요컨대 폐정개혁안에서 나타나는 농민군의 경제적 지향은 봉건적 조세수취체제의 모순이 파생시킨 여러 폐단들을 제거함으로써 소농민 경제의 자립성을 획득 내지 유지하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개혁안 자체는 다분히 봉건적 지배질서를 근원에서 부정하고 있지 않을 뿐더러, 공세적이라기보다는 수세적인 요구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당시 봉건체제가 봉건질서 안에서 농민들의 요구를 수렴할 수 없는 객관적 조건에 처해 있었다면, 이러한 최소한의 요구도 봉건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을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말하면 농민군의 주관적인 요구가 설사 봉건체제의 개혁을 통한 구질서의 복귀에 있었다 할지라도, 그러한 요구가 전면적으로 실현된다면 조선왕조의 지배구조는 그 뿌리에서부터 붕괴될 수 밖에 없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었다. 그 때문에 봉건정부는 그러한 농민군의 요구를 봉건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으로 받아 들여 농민군의 진압에 나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무역·상업문제에 대한 농민군의 요구조항들은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세력의 경제적 침투와 이로 인해 변화된 상업구조에 대한 대응이었다. 조선 후기 이래 발전되어 오던 상품화폐경제는 개항으로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면서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고 있었다. 자본제 상품의 수입과 곡물의 유출을 통한 제국주의 침탈은 먼저 유통부문을 재편시키며 생산구조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봉건지배계급도 이에 편승하여 수탈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임술민란 단계에서는 아직 본격화되지 않은 새로운 현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여 봉기한 농민군의 상품문제에 관한 구체적인 주장을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해 보면 첫째, 물가 앙등의 원인이 되어 농민들을 핍박하고 있는 미곡의 국외유출을 방지하고 외국 상인들의 내지행상으로 인한 상권 확대를 금지할 것 둘째, 국내의 특권적 상인층(객주, 선주, 보부상 등)의 활동을 제약할 것 등이다.
첫번째와 관련하여 농민들은 미곡의 상품화 자체를 부정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요컨대 필요한 식량을 확보할 수 없을 정도의 미곡수탈이 미곡수출로 귀결되고 있는 사실을 문제로 하고 있는 것이며 다른 한편 미곡상품화의 경로를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개항 이후 미곡의 일본유출 경로는 지방관·吏胥가 농민으로부터 수탈한 미곡이 각 포구의 객주를 거쳐 일본인 미곡상을 통해 유출되거나 혹은 보부상이 장시에서 매입한 미곡이 객주를 경유하여 일본인 미곡상을 통해 유출되는 과정을 밟고 있었다. 이러한 경로에 의한 미곡의 상품화는 가격조작에 의해 농민의 불이익을 증대시켰으며 농민경영의 발전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었다. 농민군은 제국주의 침투로 변화된 이러한 미곡유통구조를 개편하려는 지향을 가졌던 것이다.
두번째로 국내독점상인은 제국주의의 경제침투에 대응하여 더욱 독점이 강화되어 반동화되는 길을 걸었다. 조선정부는 전기적 특권상인들을 매개로 하여 제국주의 침투에 대응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영세 상인층의 활동이 극도로 제한되고 일반 농민들도 독점상인의 매점매석으로 생활에 핍박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농민군은 봉건적 상업구조의 철폐를 요구하고 소생산자적 상품유통의 길을 지향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보부상 조직에도 들어가지 못한 농촌의 영세소상인층이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하여 자신들의 경제적 요구를 내세웠던 것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동학농민전쟁은 제국주의 세력과 조선정부 및 독점상인의 이중적인 침탈이라는 모순구조 속에서 허덕이던 농민들이 소상인, 소상품생산자들과 연대하여 제국주의 세력과 봉건지배체제를 무너뜨리려 한 농민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제1차 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은 반제·반봉건의 투쟁목표를 명확한 형태로 표현하고 있었으나, 그러한 투쟁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을 농민군 스스로의 힘으로 구상하는 단계로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0805) 농민군은 대원군의 섭정을 하나의 대안으로 생각하는 데서 보이듯이 아직 기존의 정치구조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제1차 농민전쟁의 단계에서 농민군은 경제적으로는 봉건적 억압과 외래 자본주의의 침략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소상품생산자로서의 자립·발전을 지향하였지만, 그러한 경제적 지향을 실현할 수 있는 독자적인 정치권력 구상을 형성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한계는 집강소 시기의 통치경험과 제2차 농민전쟁 과정을 통해 미구에 극복될 수 있는 것이었다.
<鄭診相>
0800) <東匪討錄>(≪韓國學報≫3), 259∼60쪽;≪오하기문≫, 89쪽.
0801) <양호초토등록>(≪동학란기록≫상), 207쪽.
0802) 망원한국사연구실,≪1862년 농민항쟁≫(동녘, 1988), 62∼69쪽 참조.
0803) 개혁안의 수취인은 巡邊使, 觀察使 등이었다.
0804) <東學軍通文>(≪나라사랑≫15, 외솔회, 1974), 136∼137쪽.
0805) 전봉준은 재판과정에서 제1차 농민전쟁의 봉기에 대하여 “무슨 의견으로 거병하였는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한 번 세상을 건지고 싶었다”라고 하고 있는데 이 단계에서는 그 내용을 구체화시키지는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全琫準供草>, 재초문목(≪동학란기록≫하), 5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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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1. 집강소의 설치
5월 8일의 全州和約은 4월 23일 長城전투 승리 이후 농민군의 의식과 행동의 진전·성장의 결과이고, 따라서 농민군의 큰 승리였다. 이후 10월 중순의 제2차 농민전쟁의 개시 때까지 농민군은 사실상 전라도 지방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농민군은 각지에 執綱所를 설치하여 폐정개혁을 스스로의 힘에 의하여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실행하였다. 제1차 농민전쟁에서는 탐학관리를 응징하는 것이 폐정개혁의 구체적 실천방법이었음에 대비할 때, 이것은 큰 성장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의 힘에 의하여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개혁을 실행하였으므로 이 시기의 집강소 개혁사업에서 농민군의 의지와 이념, 그리고 개혁의 역량이 가장 전형적으로 드러나고 그 한계도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점에서는 갑오농민전쟁 전체의 현실적 성격, 농민적 변혁역량의 가능성, 그리고 그 한계성도 이 집강소의 단계에서 가장 잘 드러나게 된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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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집강소의 구성과 조직
집강소 공인시기에 농민군은 더욱 늘어났다. “新附者가 날로 늘어나고 脅從者도 늘어나 시끄럽기 짝이 없었다. 한 도의 모든 고을이 그들에게 장악되었고”
0905) “저 흉악한 자들은, 전일 전주성에 들어갈 때에 비하면 열 배나 된다”
0906)는 것이었다. 충청도 태안에서는 농민군에 가입하지 않으면 위협하였으므로 98∼99%는 가입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0907) 이렇게 늘어나는 농민군은 대부분이 천민신분의 농민이었다고 생각된다. 예컨대 “賊黨은 모두 賤人 奴隷였다. 때문에 양반 士族을 가장 미워하였다. 갓 쓴 자를 만나면 문득 ‘너도 양반이냐’라고 욕하면서 빼앗아서 찢어버리거나 자기가 쓰고는 저자를 횡행함으로써 욕보였다. 노비들은 賊에 가입했거나 안했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賊을 당겨서 상전 주인을 위협하여 강제로 노비문서를 태워 從良케 하였다. 혹은 상전 주인을 묶어서 주리를 틀고 곤장치고 매질하였다. 이에 노비를 가진 자는 대세에 눌려 노비문서를 불태움으로써 피해를 막았다. 淳謹한 노비는 혹 태우지 말라고 하기도 하였으나 분위기가 이미 그런지라 상전 주인은 노비를 더욱 두려워 하였다. 혹 士族 상전과 노비가 같이 賊에 가입하면 서로 接長이라고 불러서 賊의 法에 순응하였다. 屠漢·才人들도 平民·士族과 맞먹으니 사람들이 더욱 이를 갈았다”
0908)라고 하듯이 노비와 천민들의 농민군 가입이 특히 현저하였다.
이러한 추세는 갑오개혁에서 ‘劈破班常等級’ ‘公私奴婢之典 一切革罷’의 조치가 취해지면서
0909) 더욱 강화되었다.
0910) 1894년 경상도 금산군 과내면에서는 私奴 金碧完이 放牛하여 呂生員宅의 논에 피해가 있자, 여생원댁에서 金을 불러다가 꾸짖으니 金은 “당신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인데 당신이 어찌 나를 꾸짖는가. 내가 장차 당신을 꾸짖는 날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0911) 이러한 상황에서 김개남 예하의 才人接
0912)·손화중 예하의 賤人接
0913)·洪洛官이 거느린 才人布
0914)는 더욱 증강되었을 것이다.
상민신분의 농민들은 집강소 공인시기에 더욱 농민군에 참여하였다고 생각된다. 갑오개혁의 신분제 폐지에 ‘더욱 거리낌 없어졌고’ 따라서 농민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예컨대 1894년 12월 12일 이규태가 무안현에 보내는 감결에서 “금년 동학배가 창궐함에 被勒者(강요되어 동학군에 가입한 자-인용자)는 요행이라고 생각하고 樂從者(자원하여 농민군에 가입한 자-인용자)는 지금이 시세를 탈 수 있는 때라고 생각하여 민첩하게 일제히 난장판에 몰려들었다. 평민으로서 농민군에 가입하지 않은 자는 거의 드물었다”
0915)라고 하였듯이 상민신분 농민의 농민군 참여가 더욱 보편화되었다고 생각된다.
집강소 공인시기의 경우에도 동학신도들이 농민군에 많이 참여하였지만 이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농민으로서의 입지에서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학신도의 자세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자세는 그냥 가지면서 농민적인 입지에서 행동하는 것이었다. 동학신도로서의 자세는 예컨대 “賊은 師禮를 매우 존중하였는데 濟愚·時亨 등에 대해서는 모두 그 이름 부르기를 기위하였다. 濟愚를 가리켜서는 ‘濟字愚字’라고 하고 時亨을 가리켜서는 ‘時字亨字’라고 하였다. 接主에 대하여서도 마찬가지였는데 혹은 별호를 칭하고 혹은 某丈某氏라고 하였다”
0916)고 한다.
집강소 상호간의 관계에서는 어떤 질서였는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이 시기에도 전라도 농민군은 크게 보아 세 지역으로 갈라져 있었다고 보인다. 전봉준의 우도, 김개남의 좌도 그리고 손화중·최경선의 光州 일대
0917)로 나뉘어져 있었다고 보인다. 예컨대 “巨魁에는 김개남·손화중·전봉준 등이 있었는데 각기 수 만의 무리를 장악하고 있었다”
0918)고 한다. 이들 3거괴에 소속되지 않으면서 독립되어 있는 집강소도 많았다.
상부의 巨魁를 달리하는 집강소끼리는 갈등·대립도 많았다. “내종에는 남이 관리하는 사람을 유인하는 등 남의 진영에 들어가 인마 총포 탄약 등을 약탈하는 일까지도 있었다”
0919)고 한다. 9월 18일에 順天 집강 梁河一이 金溝接과 南原接의 협력을 얻어서 樂安에 침입하였는데 낙안에서는 집강 金士逸이 寶城接의 힘을 빌려서 방어하였으나 패배하였다.
0920) 淳昌에서는 5월 하순 이래 군수 李聖烈과 집강 李士文 竝立의 집강소가
0921) 행정을 처리하고 있었는데, 6월 6일 전봉준의 淳昌 순행에서 나타나듯이 李士文은 전봉준 계열의 집강이었다. 9월 초순에 김개남 예하의 典糧官이면서 潭陽 接主인 南應三이 순창에 난입하여 소동을 피웠으나 李士文의 방어에 의하여 쫓겨났다.
0922) 김개남이 전봉준의 장악·지배지역을 잠식하려는 시도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김개남과 전봉준이 꼭 대립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7월 이후 雲峰은 朴鳳陽이 民砲를 조직하고 농민군을 축출하여 집강소가 없는 고을이었고, 박봉양은 김개남과 대립하고 있었는데
0923) 8월말경 전봉준은 운봉에 들어가 박봉양과 김개남을 通好케 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0924) 여기에서는 전봉준과 김개남의 협력관계를 읽을 수 있다.
다음 집강소의 조직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집강소가 공식적으로 인정됨으로써 집강소 조직도 크게 정비되기에 이르렀다. 예컨대 정석모가 집강소가 “완연히 하나의 관청을 이루었다”
0925)라고 하였듯이, 집강소는 행정기관화되면서 조직까지 정비되었던 것이다.
첫째, 집행기관 기능이 있었는데, 이에는 書記·省察·執事·童蒙 등의 직임이 있었다. 이들은 집강의 지휘를 받으면서 행정관련 사무를 처리하였다. 김덕명은 “院坪店에 都所를 설치하고 公穀·公錢을 거두었고”,
0926) 집강소에서는 “軍器·軍糧과 王稅·軍木을 거두고 (중략) 말, 나귀와 사람, 총, 식칼까지라도 모두 거두어 들였으며”,
0927) “賊은 軍需米·軍需錢·軍布를 거두었다”
0928)라고 하듯이, 우선 租稅 징수 기능을 수행하였다. 집강소 질서하에서는 전운영의 기능이 소멸됨으로써
0929) 집강소에서 거둔 조세는 중앙에 수납되지 않았고 지방질서의 유지와 농민군의 무장력 유지에 사용되었다. 태인의 집강소에는≪徭役節目≫1책과≪田稅都錄≫1책이 보관되고 있었는데
0930) 조세수납 행정에 쓰인 참고자료였다고 생각된다. 충청도의 鴻山에서는 농민군이 將廳과 作廳까지도 장악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0931) 따라서 “吏胥輩는 모두 동학당에 入籍하여 姓名을 보존하였다”
0932)라고 한 吏胥輩의 농민군 참여는 집행기관의 書記·省察·執事 등을 보조하는 역할이었다고 생각된다.
둘째, 의결기관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는 “집강소를 설립하여 (중략) 매 읍에 (중략) 議事員 약간인을 두었으며”
0933)라는 기술에서 알 수 있다. 이 기관도 집강이 장악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셋째, 호위군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는 “관민간에 남은 군기와 마필을 거두어 집강소의 호위군을 세우고 만일을 경계하였다”라는 기술에서
0934) 알 수 있다.
0905) <錦城正義錄>甲編, ≪謙山遺稿≫卷 19, 12쪽.
0906) 위의 책, 11쪽.
0907) ≪김약제일기≫3, 갑오 8월 23일, 24일(≪叢書≫3), 78∼79쪽.
0908) ≪梧下記聞≫2, 甲午 8月條(≪叢書≫1, 214쪽).
0909) ≪日省錄≫, 고종 31년 6월 28일.
0910) ≪김약제일기≫, 갑오 7월 25일(≪叢書≫3, 71쪽), 주 104)의 개혁조치가 있자 賤民 常民의 마음이 더욱 거리낌없어져서 노비는 自退免賤했다고 한다.
0911) <訟案>2, 광무 1년 8월.
0912) ≪梧下記聞≫3, 甲午 10月(≪叢書≫1, 257쪽).
0913) ≪梧下記聞≫2, 甲午 8月(≪叢書≫2, 214쪽).
0914) ≪梧下記聞≫3, 甲午 11月(≪叢書≫3, 342쪽).
0915) <先鋒陣各邑了發關及甘結>(≪記錄≫下, 328쪽).
0916) ≪梧下記聞≫2, 甲午 8月(≪叢書≫1, 215∼216쪽).
0917) ≪錦城正義錄≫甲編(≪謙山遺稿≫卷 19, 15쪽).
0918) 위의 책, 11쪽.
0919) ≪東學史≫, 153쪽.
0920) ≪梧下記聞≫3, 甲午 9月(≪叢書≫1, 246쪽).
0921) ≪梧下記聞≫2, 甲午 5月(≪叢書≫1, 160쪽).
0922) ≪梧下記聞≫3, 甲午 9月(≪叢書≫1, 249∼250쪽).
0923) <朴鳳陽經歷書>(≪東學亂記錄≫下, 511쪽).
0924) ≪梧下記聞≫2, 甲午 8月(≪叢書≫1, 211쪽).
0925) <甲午略歷>(≪記錄≫上, 65쪽);≪駐韓日本公使館記錄≫1, ‘4월 13일 午時 초운사 전보’, 12쪽, 342쪽;≪大韓季年史≫上, 고종 31년 4월, 75쪽.
0926) <巡撫先鋒陣謄錄>(≪記錄≫上, 669∼670쪽).
0927) ≪東學史≫, 153∼154쪽.
0928) ≪梧下記聞≫2, 甲午 8月(≪叢書≫1, 216쪽).
0929) 위의 책, 甲午 8月(≪叢書≫1, 196쪽).
0930) <先鋒陣各邑了發關及甘結>(≪記錄≫下, 349쪽).
0931) 이복영,≪일기 제10≫, 갑오 10월 14일(≪叢書≫3, 236∼237쪽).
0932) ≪甲午略歷≫(≪記錄≫上, 65쪽).
0933) ≪東學史≫, 126쪽.
0934) 위의 책, 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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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집강소의 폐정개혁
농민군이 집강소를 설치한 것은 폐정을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개혁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 성장과 발전의 결과 7월 6일에는 집강소가 공인되었다. 관민의 타협·합작이라는 형태의 공인 아래서도 농민군 세력의 우세라는 배경에서 폐정개혁 사업은 더욱 본격화되었고 체계화되어 나아갔다.≪동학사≫에는 집강소의 폐정개혁 내용으로서 12개조가 기재되어 있다.
0935) 이 폐정개혁건 12개조의 실재여부 문제는 집강소 폐정개혁의 내용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고 따라서 갑오농민전쟁의 성격까지도 규정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여러 견해가 제시되었는데 그 윤곽을 알아보기로 한다. 전라도에는 “집강소가 설치되어 12개조의 프로그램에 의한 폐정의 개혁이 집행되었다”
0936)라고 하고 그 폐정개혁건 12개조는 5월 8일의 전주화약 때에 농민군이 휴전의 조건으로 제시하였고 정부에 의하여 수용된 것이라고
0937) 추가하는 견해가 있었다.
폐정개혁건 “12개조의 조항은 봉건제의 부정에 관한 전봉준의 이념으로서 (중략) 구사회의 질서를 전복시키는 사상적 기반 위에 서는 것이며 낡은 이조사회의 질서를 전면적으로 개혁하려는 것이라고 하겠으며, 그것은 원리적으로는 근대사회 형성의 기본구조에 접근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0938)라고 하여 강령의 실재와 농민군에 의한 실천 의지와 시도를 인정하고 그 역사적 성격을 봉건제 부정·근대지향으로 정위하는 견해가 있었다.
이러한 적극적 평가에 반해 “동학 자체도 전주 패주 이후에는 그 세력이 쇠약되었다. 때문에 이무렵 ‘東學割據’의 지방에 일종의 자치기관은 나왔을 수도 있지만 이것이 전부 집강소라고 했을지 어땠을지도 의문이다. 이들 사실로 보아서 전주화약이라는 것은 상상의 산물임에 지나지 않고, 동학의 ‘폐정개혁안’이라는 것도 지어낸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0939)라고 하여, 폐정개혁건 12개조는 물론이고 전주화약 때의 27개조 폐정개혁안까지도 ‘지어낸 이야기’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었다. 山邊의 의문제출에 찬성하면서도, 전주화약 때의 27개조 폐정개혁안의 역사적 실재는 긍정하고, 그러나 폐정개혁건 12개조는 ‘지어낸 이야기’로 보는 견해가 있었다.
0940) 이러한 부정에 반하여 폐정개혁건 12개조 중 토지평균분작 조항에는 의문이 있으나 나머지는 “대체로 실제와 가까운 것”이고 “그 大綱은 실재 실시된 것으로 생각한다”
0941)라고 하여, ‘지어낸 이야기’ 설을 부정하는 견해가 있었다. 한편 “당시 집강소에서는 폐정의 개혁을 위한 행정의 요강을 공포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12개조항으로 알려져 있다. (중략) 그러나 동학군은 그들이 제시한 12개조항의 개혁요강을 실지로 시행하는데 있어서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있었다”
0942)라고 하여 역시 ‘지어낸 이야기’설을 부정하는 견해도 있었다.
집강소의 12개조 폐정개혁요강의 실재를 부정하는 견해는 “무엇보다도 양반유생 황현이 갑오농민전쟁 직후에(거의 당시에) 쓴≪오하기문≫에 의하여 철저히 반박되고, 집강소와 그 폐정개혁요강의 실재가 잘 증명되고 있다”
0943)라고 하여 폐정개혁건 12개조의 역사적 실재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견해도 있었다.
그러나 ‘지어낸 이야기’설이 다시 제기되었다. 토지평균분작안은 “만주집단이주를 통해서까지 그토록 혁신적으로 실현해 보고자 했던 오지영 자신의 토지개혁방안이 아닐까”
0944)라고 하여, 12개조는 오지영의 ‘상상의 산물’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었다. 오지영의≪동학사≫에 대하여, “역사소설이라는 관식사가 딸린 일종의 야사”로서 “믿어서는 안되는 자료”
0945)라고 하여, 12개조가 오직 그곳에서만 기술되고 있는≪동학사≫의 자료적 신빙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견해도 있었다. 이렇게 ‘지어낸 이야기’설이 다시금 제기되었다.
위에서와 같은 전면 긍정과 전면 부정을 종합하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12개조가 완전히 잘못된 것으로 볼 수는 없으며, 그 조항의 상당수가 실제 농민군들에 의해서 실천에 옮겨진 내용으로 파악해야 한다. 다만 12개조 모두가 전봉준과 김학진에 의해 하나의 강령으로서 문서화된 안건이 아니란 점이다. 이들 조항은 오지영이 당시의 농민군 활동과 폐정개혁의 내용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조문화한 것이란 점을 충분히 염두에 두어야 한다”
0946)라는 견해가 있었다. “12개조와 같은 명시된 폐정개혁정강은 없었다고 생각되지만 그 폐정개혁정강들은 집강소 시기의 정황을 상당히 잘 요약해서 보여주는 것들이다”
0947)라고 하는 견해가 있었다. “≪동학사≫의 폐정개혁안의 조목은 (중략) 역시 모두 의심스럽다. 그러나 이들 조목을 오지영에 의한 전적인 作爲의 산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똑 부러진 강령은 없었더라도 폐정개혁 12조목은 都察의 직임을 가진 오지영이 각 도소에서의 민중의 내적인 요구나 실제로 행해진 폐정개혁을 견문한 것에도 터전하여 기술된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0948)라고 하는 견해가 있었다. 앞의 세 견해는 똑 부러진 모습으로의 12개조 강령의 성립은 부정하면서도 그것이 집강소에 의한 폐정개혁의 역사적 내용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는 파악이다.
필자도 기본적으로는 주 138) 141) 142)의 견해에 동조한다. 그러나 필자는 김학진과 전봉준 사이에서 문서화하지는 않았지만 서로의 양해로서 묵인리에 합의된 사항들로서, 농민군이 실제로 시행한 개혁사업이나 장차 시행하려는 명시된 지향들 중의 일부를 오지영이 기술한 것이 12개조 폐정개혁건이라고 생각한다. 김학진은 왕명에도 복종하지 않으면서까지 양측의 협력·합력에 의한 지방질서 안정 위의 집강소질서라는 撫局을 유지하려 하였고, 전봉준은 7월 17일의 통문이나 8월 20일 무렵의 남원에서의 김개남·손화중과의 3자회담
0949)에서와 같이 국내정세·국외정세로 말미암은 국가적 위기 속에서 관민합작의 집강소 질서를 유지하면서 좀 더 정세를 관망하는 것이 농민군의 개혁사업을 위한 만전지책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전봉준은, 농민군의 우세한 실력에 밀린 마지못한 묵인에서일지라도 김학진의 동의를 전제로 하는 폐정개혁사업을 하였고, 농민군의 일방적 강행이나 일방적 선언의 폐정개혁사업을 하지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폐정개혁건 12개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道人과 政府와 사이에는 宿嫌을 蕩滌하고 庶政을 協力할 事
2. 貪官汚吏는 그 罪目을 査得하여 一一嚴懲할 事
3. 橫暴한 富豪輩는 嚴懲할 事
4. 不良한 儒林과 兩班輩는 懲習할 事
5. 奴婢文書는 燒祛할 事
6. 七斑賤人의 待遇는 改善하고 白丁頭上에 平壤笠은 脫去할 事
7. 靑春寡婦는 改嫁를 許할 事
8. 無名雜稅는 一幷勿施할 事
9. 官吏採用은 地閥을 打破하고 人材를 登用할 事
10. 外敵
0950)과 奸通하는 者는 嚴懲할 事
11. 公私債를 勿論하고 已往의 것은 幷勿施할 事
12. 土地는 平均으로 分作케 할 事
(1, 2 등의 번호는 인용자가 편의상 붙인 것임)
첫째, 뚜렷하게 드러나는 특징은 봉건적인 계서적 신분제도를 전면적으로 철폐하려는 원칙이었다. 제4조, 제5조, 제6조, 제7조, 그리고 제9조가 그것이었다. 제7조는 이미 상민층과 천민층에서는 관행화되어 있었던 것을 공식적인 제도화로서 재확인하는 것이었고, 제4·제5·제6조는 제1차 농민전쟁과 집강소 시기에 농민군에 의하여 실천되었던 것을 공식적 제도화로서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제9조와 함께 갑오개혁에서 국가의 차원에서도 제도화되었다. 따라서 봉건적인 계서적 신분제도는 집강소 질서하에서 철폐되었다고 생각된다.
둘째, 봉건적 정치형태를 개량하려는 원칙도 두드러지고 있다. 제2조와 제9조가 그것인데, 제2조 역시 제1차 농민전쟁과 집강소 시기에 농민군에 의하여 실천되었던 것을 공식적 제도화로서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제9조는 갑오개혁에서 국가 차원에서도 제도화됨으로써 집강소 질서하에서 봉건적 정치행태는 크게 개량되었다고 생각된다.
셋째, 경제관계에서의 봉건적 폐단을 개혁하려는 원칙이었다. 제8조와 제11조가 그것인데, 제8조는 교정청의 개혁에서도 확인되고 있고
0951) 갑오개혁에서도 제도화되었다. 公私債의 勿施조항은 농민군측에게는 생활상의 절실한 문제였다. 부여 대방면에서 吳鳳龍은 李復榮으로부터 1888년에 租 10斗를 빌려서 1893년에 원리금 합하여 4石의 租를 갚았는데, 집강소 질서하에서 吳는 4石租의 반환을 요구하였고 결국 1894년 10월에 이복영은 4石租를 반환하고 있다.
0952) 충청도 태안에서는 집강소 질서하에서 平民이 양반에게 20년전에 갚은 400金의 반환을 요구하였고 양반은 그것을 반환하였다.
0953) 역시 태안에서 琴峴의 張淸一은 入道하고나서 전에 갚은 원리금을 모두 반환하기를 양반 債主에게 요구하였으나 그 양반 채주가 乞免함에 포기하고 있었다.
0954) 충청도에서 이러하였으니까 농민군의 우세가 더욱 현저하였던 전라도 지역에서는 위와 같은 경우가 더 많았다고 짐작된다. 그러나 역시 부여 대방면의 집강소의 接司는 國典의 자모정식법에 준거하여 고리채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있었는데
0955) 이러한 경우도 많았으리라고 짐작되며, 특히 고리채 문제는 지역에 따른 농민군의 지배력에 따라 편차가 많았으리라고 생각된다. 이상과 같이 집강소 질서하에서 경제관계에서의 봉건적 폐단도 일정하게 개혁되었다고 생각된다.
넷째, 횡포한 부민을 응징함으로써 均産의 이념을 실현하려는 원칙이었는데 제3조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는 농민군에 의하여 제1차 농민전쟁과 집강소 시기에 실천되고 있었던 현상이었다.
0956) 그러나 그것은 무조건적인 富民응징이거나 富民으로부터의 討財는 아니었다. 그것은 富民도 이미 농민전쟁에 동조층으로서 참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증명되고 있다. 예컨대 “中流 이하의 民은 이번의 소란에 오히려 돈벌이의 기회가 열림을 반겨하였지만, 上流의 재산가로서 평소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었던 자들은 풍성학려하여 약탈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아무데로나 도망하는 자가 많았다”라는 보도가 있고,
0957) 충청도 홍주에서는 농민군 활동기의 절정기에서도 평소 潤産을 도모하지 않고 待客과 賙貧에도 힘을 기울였던 宋氏家에는 농민군들이 서로 경계시키면서 침입하지 않았다는 견문기사도
0958) 있음에서 그렇게 생각된다. 이 제3조의 원칙은 김학진의 입장에서는 현실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상대적인 열세로 말미암아 부득이 양보함으로써 집강소 질서하에서 봉건적·관료적 특권에 의한 부축적은 크게 제약되었고 동시에 그런 방법에 의하여 부를 축적한 봉건적·관료특권적 부민은 크게 奪財당하였다고 생각된다.
다섯째, 外敵 구체적으로는 일본과 간통하는 자는 응징한다는 민족적 원칙이었다. 농민군은 3월 25일의 4개 名義
0959) 이래 斥倭의 원칙을 일관되게 견지하였다. 그러나 농민군은 일본의 조선진출을 식민지화의 위기로는 인식하지 않았고,
0960) 6월 21일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사건도 식민지화의 결정적 위기로까지는 인식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0961) 농민군의 최대·최고의 목적은 폐정개혁이었고 집강소 공인시기의 단계에서는 봉건적 모순의 근본적 해결이 최우선의 과제였다. 그 과제를 온전하게 수행하기 위한 여건으로서의 斥倭였다고 생각된다.
개화파 정권도 일본에 의하여 장악되어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김홍집은 평양의 淸陣에 편지를 보내어 청일전쟁의 승패결과에 대비하면서 조선의 局外中立을 구상하고 있었고,
0962) 김가진도 청일간의 승패의 귀결을 관망하고 있었다.
0963) 개화파 정권에 의한 갑오개혁도 8월 17일의 평양성전투에서의 일본의 대승 이전까지는 개화파의 구상에 의하여 시행되었다고 생각된다.
0964) 따라서 이 원칙은 양측에 의하여 어렵지 않게 합의되었고 恩津의 黃山에서는 6월 21일의 사건 이후 “이전 동도는 일본인에 대하여 하등의 방해를 하지 않았으나 이번은 일본인에 대한 감정이 매우 나쁘며”
0965) 공주에서는 역시 6월 21일의 사건 이후 농민군이 일본을 討平하는 데에 군량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富民·士族家에 곡물·말·총 등을 卜定하고 있었음에서
0966) 나타나듯이 철저하게 준수되고 있었다.
여섯째, 토지소유 내지는 토지경작의 문제에 관한 원칙이었는데 제12조가 그것이다. 관민합작의 집강소, 공식적으로 인정된 집강소의 성격규정 문제에서 가장 핵심적인 관건이 되는 조항이라고 생각된다. 제12조의 파악문제 역시 집강소와 갑오농민전쟁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에 대한 파악에서도 견해가 크게 갈리고 있다.
0967) 그러나 필자는 제12조는 말 그대로 토지의 경작을 평균되게 한다는 경작평균의 원칙이었다고 생각하며, 제2∼11조 특히 제11조가 김학진의 상대적 양보였고, 그것에 반하여 제12조는 농민군측 즉 전봉준의 상대적 양보였다고 생각한다.
농민전쟁 진행과정에서 토지문제에 관련하여 농민들이 어떤 행동을 하였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1894년 7월 30일 태안에서 농민군 李某에게 畓文記를 빼앗긴 어떤 地主는 “道人들이 애초에 經界說이 없어서 畓文記를 빼앗아갔다”
0968)라고 말하고 있다. 道人들이 토지사유를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역시 태안에서 金若濟의 從叔은 일단 畓券을 농민군들에게 빼앗겼다가 나중에 찾아오고 있다.
0969) 농민전쟁 진행 중에 부안에서는 농민군 南眞元·金甫一이 金丙喜의 時作畓을 탈경하였다.
0970) 역시 농민전쟁 진행 중인 7월과 9월에 光州의 최경선 농민군은 지주인 鄭士辰의 幷租를 탈취하고 있다.
0971) 長城에서도 농민군이 地主의 賭租를 탈취하였다.
0972) 농민군들이 지주전호제를 반대하고 토지소유를 지향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전봉준부대의 경우에도 5월 하순의 행동과 6월 20일 무렵의 행동에서와 같이 균산주의적 지향을 나타내고 있었는데, 이는 위에서의 지주전호제 부정과 같은 궤도에 있는 것이었다.
≪康津邑誌≫ ‘名僧草衣傳’(草本謄寫)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고 한다.
0973)草衣는 정다산의 詩友일 뿐만 아니라 道交였다. 다산이 유배로부터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에≪경세유표≫를 밀실에서 저작하여 그의 문생 李睛과 親僧 초의에게 주어서 비밀히 보관 전포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 전문은 중간에 유실되었고, 그 일부가 그 후 대원군에게 박해당한 南尙敎·南鍾三 부자 및 洪鳳周 일파에게 전하여졌으며, 그 일부는 그 후 강진의 尹世煥·尹世顯·金炳泰·姜雲伯 등과 해남의 朱挺浩·金道一 등을 통하여 갑오년에 기병한 全綠豆·金介男 일파의 수중으로 들어가서 그들이 이용하였다. 전쟁 끝에 관군은<정다산비결>이 녹두 일파의 ‘匪賊’을 선동하였다 하여, 정다산의 유배지 부근의 민가와 高聲寺·白蓮社·大芚寺 등 사찰들을 수색한 일까지 있었다.
전봉준·김개남 등의 농민군이 정약용이 밀실에서 저작한≪경세유표≫즉<정다산비결>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농민군들은 집강소에 의한 폐정개혁 사업을 실천하면서 자신들의 개혁방향·개혁이념을 다듬어나갈 필요성을 절감하였고, 그것을 다듬어나가는 과정에서 정약용의≪경세유표≫특히 井田制를 개혁의 기준으로 삼게 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정약용의 개혁사상과 농민군의 연결 가능성에 대해서 주목하는 견해도 있었다. “농민군 지도층이 실학사상, 특히 다산의≪경세유표≫의 정치사상을 계승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중략) 다산 제자의 후손이 농민군에 가담하고 있었던 점으로서도 확인된다. 다산의 제자에는 尹鐘億이 있었고 그의 아들 尹樂浩는 학자로서 父學을 계승하고 있었으며, 그 아들에는 尹柱莘이 있었는데 이 尹柱莘은 강진에서 농민군(동학)에 가담하여 접주를 하였으므로, 정부군·일본군의 농민군 진압과정에서 체포되어 처형되고 있었다. 윤주신은 그 가학을 통해서 다산의 학문에 쉽게 접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러하였다면 그러한 사상은 어렵지 않게 농민군 지도부의 공유의 사상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0974) ≪경세유표≫의 정전제 토지제도개혁안의 내용에 대해서도 견해가 크게 갈리고 있다. 견해의 다기성은 매우 복잡하지만 平均分作의 해석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정리하면 대개 세 가지 견해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토지소유의 재분배를 현실적 내지는 궁극적 목적으로 하였다는 견해이다. 대부분의 견해가 여기에 속한다.
0975) 둘째는 지주전호제를 용인하면서 九一稅法을 실시하여 治田(생산력 발전-인용자)·皆職·均稅를 실현하려 하였다는 견해이다.
0976) 셋째는 정전제에는 均稅의 원칙만이 관철되고 있다는 견해이다.
0977) 필자는 둘째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0978) 농민군 지도부는 집강소에 의한 폐정개혁을 경험하면서, 개혁방향·개혁이념을 다듬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고 그 모색과정에서 정약용의≪경세유표≫의 정전제 구상에 접하게 되었고, 지주제를 용인한 속에서 경작능력에 따른 경작지의 均分이라는 개혁원칙을 수립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관민합작의 집강소 질서에서는 ‘경작능력에 따른 경작지의 均分’안이 지주제의 철폐를 전제로 하는 ‘토지소유의 均分’안보다는 훨씬 실현의 가능성이 많은 것이었다.
농민들의 압도적 다수는 지주제를 철폐한 속에서의 ‘토지소유의 均分’안을 희망하고 지지하였지만, 관민합작의 집강소 질서를 어디까지나 유지하는 속에서 폐정개혁을 진행한 전봉준에게는 ‘경작지의 均分’안이 현실적인 개혁원칙으로 될 수 밖에 없었다. 김학진 쪽에서도 ‘경작지의 均分’안은 세력의 열세 속에서 마지못해서나마 허용과 묵인의 여지가 많은 것이었다.
김학진의 종사관으로서 김학진의 난민효유문을 모두 작성하면서 농민전쟁 수습과정에서 김학진의 두뇌역할을 한 金星圭의 토지제도개혁안이 주목된다. 김성규의 지주전호제도 개혁안은, 요약하면 소작지의 균등분작과 그 소작인의 常定化를 전제로 하는 생산물의 1/4 수준에서의 恒定賭租法이었고
0979) 이러한 구상은 1904년에 문장화되었지만,
0980) 그가 이와 같은 지주제 개혁안을 구상하게 된 것은 그 부친의 토지론이나 다산의 농업개혁론과도 관련하여 이미 오래전부터의 일이었다면,
0981) ‘경작지의 均分’안은 김학진 쪽에서도 허용과 묵시적인 동의의 여지가 넓은 것이었다.
동학당 정토군 독립 제19대대 사령관 南小四郞 소좌가 전봉준을 포획한 당시에
0982) 그를 취조한 口供書에서 전봉준은 “나의 종국의 목적은 (중략) 田制·山林制를 개정하는 것이었다”
0983)고 하였다.
농민전쟁에서 田制의 개정을 종국적 목적으로 삼은 전봉준이 폐정개혁사업에서 田制의 개정에 관련되는 지향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있기 어려운 일이며, 집강소 체제 운영의 양쪽 당사자 모두에서 현실성이 많았던 ‘경작지의 均分’안이 제12조의 土地平均分作으로 성립되었다고 생각된다.
더욱이 정약용의 정전제 개혁안에서는 “자기 땅에서 스스로가 농사짓는 경우는 官에서 금단할 수 없다”
0984)라고 하여 自耕其田者=自耕農은 능력에 따른 기준면적을 초과하여 경작하더라도 그대로 경작이 허용된다고 하였다. 힘써 농사짓는 富農에게는 환영의 여지가 매우 많은 개혁구상이었다. 따라서 제12조의 ‘경작지의 均分’안 역시 농민전쟁에 다수가 참가한 부농에게도 수용의 여지가 많을 수 있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제12조는 개혁강령으로서만 성립하고 존재하였을 뿐, 현실화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봉건적 사회질서의 가장 핵심되는 기둥인 지주전호제를 현실적으로 크게 개혁시킬 수 있는 강령이 역사적으로 성립되었다는 것은 농민군의 커다란 성장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상에서와 같이 집강소 질서 하에서 제12조를 제외한 다른 조항은 실현되었다고 보인다. 봉건제도가 근본적으로 변혁되지는 않았지만 계서적인 신분제도는 전면적으로 해체됨으로써 봉건제도는 크게 개혁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농민군의 집강소가 기존의 행정체계와 이원적으로 병립되었지만 농민군의 자치적 행정기관으로서 확립되었고, 농민군세력의 군사적 우세성이 확고한 곳에서는 사실상 일원화됨으로써 농민의 지방권력기구로 성립되기도 하였다. 농민군은 지방의 차원이긴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생활질서를 다듬어 나가고 새롭게 창출하기도 하였다. 이는 조선사회의 역사적 전진이었고 농민군의 비약적 성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鄭昌烈>
0935) ≪東學史≫, 126∼127쪽.
0936) 강재언,<조선에 있어서 봉건체제의 해체와 농민전쟁(2)>(≪역사학연구≫177, 1954. 11), 18쪽.
0937) 강재언,≪조선근대사연구≫(일본평론사, 1970), 181쪽.
0938) 김용섭,<전봉준 공초의 분석>(≪사학연구≫2, 한국사학회, 1958), 34쪽.
0939) 山邊健太郞,<甲申事變과 東學의 亂>(≪世界의 歷史 11-흔들리는 中華帝國-≫筑摩書房, 1962), 279쪽.
0940) 박종근,<갑오농민전쟁에 있어서 ‘전주화약’과 ‘폐정개혁안’>(≪역사평론≫140, 1962), 427쪽.
0941) 김용덕,<북학사상과 동학>(≪사학연구≫16, 한국사학회, 1963), 119쪽.
0942) 한우근,<동학농민봉기>(≪한국사≫17, 국사편찬위원회, 1973), 127·129쪽.
0943) 신용하,<갑오농민전쟁 시기의 농민집강소의 활동>(≪동학과 갑오농민전쟁연구≫, 일조각, 1993), 215쪽.
0944) 노용필,<오지영의 인물과 저작물>(≪동아연구≫19, 서강대동아연구소, 1989), 94쪽.
0945) 유영익,<전봉준 의거론>(≪이기백선생고희기념한국사학논총≫하, 일조각, 1994;≪동학농민봉기와 갑오경장≫, 일조각, 1998), 17쪽.
0946) 김양식,<1·2차 전주화약과 집강소 운영>(≪역사연구≫2, 역사문제연구소, 1993;≪근대한국의 사회변동과 농민전쟁≫, 신서원, 1996), 153쪽.
0947) 박찬승,<1894년 농민전쟁의 주체와 농민군의 지향>(≪1894년 농민전쟁 연구≫5, 역사비평사, 1997), 126쪽, 127쪽.
0948) 조경달,≪異端의 민중반란-동학과 갑오농민전쟁-≫, (암파서점, 1998), 212쪽.
0949) ≪梧下記聞≫2, 甲午 8月(≪叢書≫1, 210쪽).
0950) ‘○’으로 되어있는 것을≪東學史(草稿本)≫에 의하여 ‘外敵’으로 고쳤다.
0951) ≪日省錄≫, 고종 31년 6월 14일 ;≪續陰晴史≫上, 甲午 6月 21日條, 319쪽.
0952) 홍성찬,<1894년 집강소기 設包下의 향촌사정>(≪동방학지≫39, 연세대국학연구원, 1983), 88∼89쪽에서 재인용.
0953) ≪김약제일기≫3, 갑오 7월 27일(≪叢書≫3, 72∼73쪽).
0954) 위의 책, 갑오 8월 1일, 74쪽.
0955) 홍성찬, 앞의 글, 89쪽.
0956) 오지영은 집강소 질서하에서는 “또는 부자나 양반이나 그 죄과를 懲習하는 일방”(≪동학사≫, 152쪽)이라고 하였다.
0957) ≪조선변란실기≫, 26쪽. 信夫淸三郞,≪增補 日淸戰爭≫(南窓社, 1970), 25쪽에서 재인용.
0958) 洪楗,≪洪陽紀事≫,<亂中記聞>(≪叢書≫9, 198쪽).
0959) ≪大韓季年史≫上 , 74쪽.
0960) 公州儒生 李丹石은 “곳곳에서 봉기하니, 봉기하지 않은 고을이 없었다. 모두 斥倭를 명분으로 하지만 실은 火賊이었다”라고 하였고(≪時聞記≫甲午條,≪叢書≫2, 177쪽), 일본인 기자는 “洋夷倭奴를 斥攘해야한다고 부르짖지만 이것은 구실일 뿐이고 실은 정부를 전복하여 혁신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다”라고 보도하였다(≪東邦協會報告≫38회, 명치 27년 6월 27일 보고, 95쪽).
0961) 전봉준은 제2차 재판에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사건을 ‘侵掠我國境土’ 즉 식민지화의 위기로 인식하면서 그것에 대한 대처에 골몰하였다(≪전봉준공초≫, 538쪽). 8월 11일 전봉준은 전주에서의 일본인과의 회견에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사건 이후 “우리는 일본의 행동, 대원군의 행동을 아직 자세히 몰라서 안심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힘써 동지들의 분격을 가라앉힘과 동시에 우리 정부의 동태를 알려고 하고 있다”라고 말하였다(≪日淸交戰錄≫12, 명치 27년 10월 16일(음력 9월 18일), 42∼43쪽). 8월 17일의 일본군의 평양전투 승리 이전에는 청일간의 우열이 분명치 않았고, 일본의 한국제압도 극히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0962) 伊藤博文編,≪朝鮮交涉資料≫中(原書房, 1970), 635∼636쪽.
0963) ≪日本外交文書(韓國篇)≫5, ‘445. 京城狀況報告의 件’, 701∼702쪽.
0964) 유영익,<갑오경장을 위요한 일본의 대한정책>(≪갑오경장연구≫, 일조각, 1990), 3쪽.
0965) ≪駐韓日本公使館記錄≫3, 240쪽.
0966) ≪時聞記≫, 甲午 7月 5日(≪叢書≫2, 178쪽).
0967) 주 131) 133) 138)의 논문들에서는 土地所有의 균등분배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와서는 농민전쟁 연구가 심화되면서 대체로 부정되고 있다. 김양식은 “집강소의 주요한 기능은 무기관리와 부량배 단속과 같은 치안유지였으며, 폐정개혁활동 역시 원칙적으로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졌으므로 집강소는 농민군 대 정치권력 사이의 문제해결 방식이었을 뿐, 사회구조의 혁명적 재편까지는 전망한 것이 아니었다”(주 141)의 논문, 165·167쪽)라고 하여 제12조의 역사적 실재를 부정하였다. 박찬승은, 농민들은 지주제의 해체를 희망하고 있었지만 농민군 세력은 객관적 여건상 “아직 토지혁명의 문제를 주된 목표로 설정할만한 주체적 역량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주 142)의 논문, 130쪽)라고 하여 제12조의 강령으로서의 성립을 회의하고 있다.
조경달은, 제12조는 “문자 그대로 토지소유의 均分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주 143의 책, 212쪽)되지만, 그것은 민중의 내적인 요구·희망을 반영하고 있을 뿐 개혁강령으로서의 성립은 믿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나 토지소유의 재분배·균등분배로 보는 견해도 더욱 실증적으로 주장되고 있다. 김용섭은 주 169)에서와 같이 농민군 지도부는 정약용의≪경세유표≫에서의 토지개혁구상 즉 지주전호제도의 전면적 해체와 경작농민에의 토지소유 재분배를 내용으로 하는 토지제도 개혁구상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하여, 제12조를 토지소유의 균등분배로 파악하였다. 신용하는≪경세유표≫의 정전제의 농민군 지도부에의 계승,≪동학사≫(초고본)의 두레제 강령 등을 종합하여, 제12조를 “지주제도를 폐지하고 경작농민들에게 私田 8구를 1구씩 균등하게 분배해주어 자작농으로하는”(신용하,<갑오농민전쟁과 두레와 집강소의 폐정개혁>≪한국사회의 신분계급과 사회변동≫, 문학과 지성사, 1987;≪동학과 갑오농민전쟁연구≫, 일조각, 1993, 281쪽) 토지소유의 균등분배로 파악하였다.
0968) ≪김약제일기≫3, 갑오 7월 30일(≪叢書≫3, 74쪽).
0969) 위의 책, 갑오 8월 21일(≪叢書≫3, 78쪽).
0970) ≪民狀置付冊≫2, 을미 3월 2일, 30쪽.
0971) ≪光州郡范治明獄事初覆檢文案≫.
0972) <巡撫先鋒陣謄錄>(≪東學亂記錄≫上, 650∼651쪽).
0973) 최익한,≪실학파와 정다산≫, 1955. 여기의 인용은 청년사 재간본 411쪽에 의한다. 번역을 부분적으로 약간 수정하였다.
0974) 김용섭,<조선왕조 최말기의 농민운동과 그 지향>(≪한국근현대농업사연구≫, 일조각, 1992), 370∼371쪽. 신용하도 주 165)의 논문에서 정약용의 정전제 개혁사상의 농민군 지도부에의 계승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0975) 김용섭,<18, 9세기의 농업실정과 새로운 농업경영론>(≪대동문화연구≫9,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1972;≪증보판 한국근대농업사연구≫상, 일조각, 1984);박찬승,<정약용의 정전제론 고찰>(≪역사학보≫110, 1986);성대경,<다산의 농업개혁론>(≪대동문화연구≫21, 1987);정윤형,<다산의 재정개혁론>(≪다산학의 탐구≫, 민음사, 1990);강만길,<다산의 토지소유관>(≪다산의 정치경제사상≫, 창작과 비평사, 1990);안병직,<다산의 농업경영론>(위와 같은 책).
0976) 박종근,<다산정약용의 토지개혁사상의 고찰>(≪조선학보≫28, 1963);정석종,<다산정약용의 경제사상>(≪이해남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일조각, 1970);신용하,<다산정약용의 정전제 토지개혁사상>(≪김철준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지식산업사, 1983).
0977) 이영훈,<정약용의 정전제론의 구조와 역사적 의의>(≪제4회 동양학 국제학술회의 논문집≫,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1991).
0978) 졸고,<한국사회경제사와 실학>(≪한중실학사연구≫, 민음사, 1998).
0979) 김용섭,<광무개혁기의 양무감리 김성규의 사회경제론>(≪증보판 한국근대농업사연구≫하, 일조각, 1984), 134쪽.
0980) 김용섭, 위의 글, 139쪽.
0981) 김용섭, 위의 글, 135쪽.
0982) 전봉준은 12월 2일 淳昌에서 체포되어 12월 7일 일본군에게 인도되었다(<巡撫先鋒陣謄錄>,≪東學亂記錄≫上, 611쪽). 따라서 口供書는 12월 초순에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0983) ≪東京朝日新聞≫, 명치 28년 3월 5일, ‘동학당 대두목과 그 자백’, (≪사회와 사상≫1, 1988년 9월호), 261쪽.
0984) ≪與猶堂全書≫5,≪經世遺表≫田制10, 井田議 2, 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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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1. 동학농민군의 재기
동학농민군은 9월 중순에 들어와 다시 무장 봉기를 결정하였다.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서 물러난 후 3∼4개월 동안 정국은 급변하였다. 동학 조직에는 많은 사람들이 합류해 왔고, 지방관아의 농민 통제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동학농민군이 장악한 지역에는 民政기관인 집강소가 설치되어 농민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폐정을 개혁하는 전례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조선 국토 안에서 벌어진 청일 간의 전투로 인해 경기도·충청도·평안도 지역의 백성들이 전쟁의 참화 속에서 고통을 받았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일본군이 경복궁을 습격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개화파 정권이 들어서서 일련의 개혁조치를 시행한 사실도 그때 그때 전국에 알려져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한 속에서 동학농민군이 재봉기를 결정한 것이었다. 이 재봉기는 지역면에서 볼 때 1차봉기와 크게 차이가 났다. 제1차 봉기는 전라도와 충청도의 일부 군현에서 시작되었지만 재봉기는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일시에 궐기한 것은 물론 경상도·경기도·강원도·황해도의 많은 군현에서도 봉기하였다. 동학교단은 1차봉기를 승인하지 않았지만 재봉기에는 교주 崔時亨이 起包令을 내려 전국의 조직을 참여시켰다.
전국에 걸친 대규모의 재봉기가 이처럼 가능했던 것은 우선 斥倭라는 명분이 뚜렷했기 때문이었다. 동학과 사회여론은 斥倭의 명분 아래 일치하였다. 민간에는 壬亂 이후 남아있는 적개심 위에 다시 국왕을 위해한 경복궁 습격사건으로 반일감정이 격화되었고, 일본의 再侵 우려가 고조된 속에서 성립된 민족종교인 동학이 조직과 이념을 제공하면서 對日戰爭에 앞장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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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반일투쟁의 전개
1) 반일투쟁의 발발
농민군이 1894년 9월에 들어 다시 일어난 일차적인 목적은 일본의 침략행위를 물리치고 輔國安民하려는 데 있었다.
1051) 농민군은 제1차 농민전쟁에서도 ‘斥倭洋’ 구호를 제기하였지만, 그들의 행동이나 요구내용을 볼 때 일차적인 목적은 어디까지나 民에게 해악을 끼치는 폐정을 개혁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농민전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에 출병하는 뜻밖의 심각한 상황이 초래되었다. 6월 이후에는 일본의 경복궁 강점과 청일전쟁 개전, 내정간섭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태 속에서 일본의 침략의도가 점차 노골화하였다. 이에 따라 농민군 지도부, 특히 全琫準의 관심은 폐정개혁으로부터 반외세문제, 곧 ‘斥倭’ 쪽으로 급격히 선회하였다.
1052) 일본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하여 국가가 멸망한다면, 폐정개혁은 고사하고 生民이 하루도 편히 살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1053) 이미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 강점과 청일전쟁이 발발한 직후부터 전라도 일대에서는 반일투쟁의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경복궁강점 직후인 6월 23일경부터 일주일 안에 고부·부안·무장·김제 등지에서 농민군이 다시 봉기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들의 巨魁들은 6월 8, 9일경에 모의하여 6월 16일 김제에서 대회를 가지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며, 일본이 大兵을 일으켜 우리나라를 집어삼키려 하므로 나라를 생각하는 자라면 모두 무기를 들고 일어나 막아야 한다며 사방의 士夫도 동참할 것을 촉구하였다고 한다.
1054) 6월 29일 장성에서는 “倭兵이 장차 이를 것이므로 일이 매우 급박하다”면서 500∼600명의 농민군이 관아에 쳐들어와 무기를 탈취하여 갔다.
1055) 6월 22, 23일 무렵부터는 군산과 전라도에 인접한 강경지역에서도 농민군들이 청국병과 합세하여 일본군과 싸운다고 하며 총, 말 등 전쟁에 사용할 물품들을 민가에서 거두어 들였다.
1056) 7월 9일에는 전라도 부안의 농민군이 서천군으로 들어와 방포하며 “전라도 연해에 정박해 있는 일본선박이 몇백 척이나 되어 전라도 전체가 놀라고 있다. 계엄하지 않을 수 없으나, 부족한 것이 마필과 군기이다”라고 하며 총과 화약, 馬匹 등을 빼앗아 갔다.
1057) 8월 25일에는 전봉준보다 오히려 더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金開南이 남원에서 대규모 대회를 열고 기포를 결의하였다. 8월 19일 경부터 농민군이 남원으로 모여 들었으며, 9월 1일에는 김개남과 기맥이 통하던 금구출신의 대접주 金仁培가 광양·순천의 농민군을 이끌고 경상도 하동을 공격하면서 사실상 재기포를 시작하였다.
1058) 전봉준도 이미 일본군의 경복궁 강점사건 발발 전인 6월 중순 경에 추수를 한 후 다시 일어날 계획임을 밝힌 바 있다.
1059) 또 일본군의 경복궁 강점 소식을 늦어도 7월에는 접하였지만,
1060) 8월 말까지도 재기포를 미루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 전봉준은 자신에게 병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농민군들을 한꺼번에 불러 일으키기가 수월치 않았으며, 군량에 필요한 곡식의 수확을 기다리느라고 기포가 늦어졌다고 하였다.
1061) 그러나 재기포를 연기한 요인으로 지적되어야 할 것은 전봉준으로서는 중앙정국의 동향과 청일전쟁의 추이에 대한 정확한 정보도 없었고, 명확한 판단도 내릴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집강소시기 전봉준의 정세인식과 행동방침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이미 1893년 3월의 보은집회 무렵부터 권력장악을 위해 농민군을 이용하고자 하였던 대원군세력은 일본군의 경복궁 강점 직후 섭정을 시작하면서 농민군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채우려는 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1062) 섭정을 시작한 대원군은 6월 말에서 7월 초에 걸쳐 徐璋玉·徐丙學·張斗在 등 주요한 동학접주들을 석방하였다.
1063) 이 가운데 장두재는 7월 초 무렵에 대원군을 만나서 청군과 합세하여 일본군을 물리치기로 합의한 후 7월 9일에는 金德明·金開南 및 孫化中 앞으로 기포를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1064) 전봉준에게도 대원군의 밀사들이 수 차례 왕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1065) 8월 10일에는 전봉준의 처족 7촌이자 全羅左右道 都執綱을 맡고 있던 宋熹玉이 善工主事로 임명된 바 있다.
1066) 이는 대원군측이 자신들의 정변계획에 전봉준을 끌어들이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하였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전봉준측과 대원군측 사이에는 기맥이 일정하게 통하고 있었으며, 장두재의 편지 내용이나 대원군측의 의도도 전봉준에게 전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봉준의 생각과 행동은 대원군측의 의도와는 달랐다. 대원군과 밀의한 장두재가 농민군의 재기포를 촉구하는 편지를 김덕명, 김개남, 손화중에게 보낸 지 일주일 정도 후인 7월 17일 전봉준은 무주집강소에 다음과 같은 통문을 보냈다.
방금 外寇가 범궐하였다. 국왕이 욕을 당했으니, 우리들은 마땅히 달려가 목숨을 걸고 의로써 싸워야 하나 저 도적들이 바야흐로 청나라와 전쟁 중이어서 그 예봉이 매우 날카로우므로 갑자기 맞서 싸웠다가는 그 화가 宗社에 미칠지도 모른다. 물러나 은둔하여 시세를 관망한 연후에 기세를 올려 계책을 취하는 것이 萬全之策이다. 바라건대 반드시 경내의 각 접주에게 통문을 돌려 서로 상의하여 각자 安業하고 경내에서 胥動하는 무리를 일절 금단하여 마을에서 횡행하며 소동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기를 切望한다.
1067) ‘마땅히 달려가 싸워야 할 것’이라는 표현에서 이 통문이 재기포를 촉구하는 장두재의 편지로 인하여 자칫 동요할지도 모를 접주들을 자제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약 한 달 후인 8월 11일에도 전봉준은 일본군에 의해 민씨정권이 축출되었고, 대원군이 집정하면서 폐정을 개혁하고 政法을 바로잡아 자신들이 원하던 바가 많이 달성되었으나, “일본이 하고자 하는 바와 대원군이 하고자 하는 바를 우리들은 아직 상세히 알 수 없어 마음을 놓을 수 없다. 때문에 나는 힘써 동지들의 분격을 가라앉힘과 동시에 우리 정부의 동태를 알려고 한다.”고 하였다.
1068) 이러한 전봉준의 입장은 8월 25일 무렵 김개남이 남원에서 재기포하는 데 반대할 때까지도 이어졌다.
1069) 그것은 무엇보다 중앙정국이나 일본의 동향, 대원군의 의도 등에 대해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전봉준은 대원군측이나 일부 농민군 지도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섯불리 움직이기보다는 중앙정국이나 일본측의 동태를 좀더 신중하게 관찰하고자 하였다. 또 청일간의 전쟁이 끝나면 어느 나라든 농민군 진압에 개입할 것이지만, 현실적인 농민군의 역량으로는 그에 맞서기 어려우며, 그럴 경우 자신들이 소망했던 바를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8월 말까지도 전봉준은 官과의 물리적 충돌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관민상화’체제를 유지하는 가운데 농민군의 역량을 효과적으로 보존·강화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나아가 일단 중앙정국과 청일전쟁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필연적으로 도래할 반외세투쟁에 대비하여 士族이나 재산이 있는 계층까지 포괄하는 연합을 추진해 나가려는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070) 이러한 정세 인식에 입각하여 재기포를 유보하던 전봉준이 재기포를 결심하는 것은 대원군측의 밀사와 접촉한 직후인 9월 10일 무렵이었다. 전봉준이 제2차 기포, 곧 반일투쟁을 결심하기 직전인 9월 2일 대원군측 밀사인 朴東鎭과 鄭寅德 등이 전주로 내려왔다. 이들은 기포하여 상경할 것을 촉구하는 대원군의 密敎를 가져와 9월 7, 8일경 전봉준에게 전달하였다.
1071) 이들은 먼저 전봉준의 처족 7촌이자 全羅左右道 都執綱을 맡고 있던 宋憙玉과 접촉하였다. 송희옥은 대원군측의 밀사를 만난 다음날 휘하의 농민군들을 거느리고 전주성을 빠져 나갔으며,
1072) 9월 6일 전봉준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띄웠다.
앞으로 더 일을 계획하고자 삼가 묻고자 합니다.
(중략) 과연 어제 저녁 또 두 사람이 비밀리에 내려왔기에 상세히 그 전말을 알아본즉 과연 이는 開化邊에 압도되어 먼저 효유문을 발하고 뒤이어 秘計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내려온 두 사람을 곧 가두어 두고 이들을 엄중히 지키도록 하여 서로 말을 통하지 못하도록 조치하여 두었으니, 밤을 아랑곳하지 말고 올라오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湖中에도 이런 일이 있어서 벌써 발각되어 잡혀 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대체로 속히 행하면 萬全策이 되고 늦으면 기밀이 발각되는 것이므로 이를 양찰하시고 대사를 일으킬 수 있도록 천번 만번 빕니다. 호서지방에서는 초 10일에 대회를 갖고 한 쪽에서 올라가도록 명령하였다 하므로 계속하여 뒤쫓아 간 다음에야 일이 완전하게 합치될 수 있습니다. 들뜨지 마시고 제대로 하시기 바라며 나머지는 아직 갖추어 올리지 못합니다.
甲午 9月 初6日
接弟 宋熹玉 再拜
1073) 송희옥의 편지를 받은 전봉준은 삼례로 가서 박동진과 정인덕을 만났고,
1074) 9월 8일 이전 李建英이 남원의 김개남을 찾아가서 국태공의 명령이라며 ‘起兵赴京’할 것을 密諭하였다.
1075) 같은 무렵 전봉준도 삼례에서 이건영을 만나 다음과 같은 국왕의 밀지를 받았다.
1076)너희들은 선대 왕조로부터 교화하여 내려 온 백성들로서 선왕의 은덕을 잊지 않고 지금까지 살고 있는 것이다. 조정에 있는 자는 모두 저들에 아부하고 있어 서로 은밀히 의논할 자가 한 사람도 없으니, 외롭고 의지할 데가 없어 하늘을 향하여 통곡할 따름이다. 방금 왜구들이 침범하여 화가 국가에 미치었는 바 운명이 조석에 달렸다. 사태가 이에 이르렀으니 만약 너희들이 오지 않으면 박두하는 화와 근심을 어떻게 하랴. 이로써 교시하노라.
1077) “국가의 운명이 조석에 달렸다”는 국왕의 밀지를 받은 전봉준은 국왕의 밀지가 도착한 사실과 그에 대한 비밀을 당부하는 회람을 義龍·月波·和中 등으로 명기한 동지들에게 돌렸다.
1078) 이러한 몇 가지 자료들은 재기포 직전인 9월 초순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부와 대원군측 사이에는 긴밀한 접촉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전봉준이 재기포를 결심한 것은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우선 전봉준이 아직까지 勤王主義的 의식을 엄연히 가지고 있음을 고려할 때
1079) 起兵하여 상경해 줄 것을 절박하게 요청하는 밀지를 국왕이 직접 보냈다는 사실 자체가 ‘輔國安民’을 위한 기병을 결심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대원군 밀사와의 접촉을 통해 8월 16일에 있었던 청일간의 평양전투에서 일본군이 승리한 사실, 일본이 명백한 침략의도를 가지고 있으며, 농민군 진압에 본격적으로 투입될 것이라는 사실, 대원군은 집정은 하고 있으나 일본이 내세운 개화파에 포위되어 사실상 자신의 뜻을 펼 수 없게 되었다는 점 등 청일전쟁과 중앙정국의 추이, 일본군의 침략의도와 농민군 진압계획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받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1080) 이에 따라 전봉준은 위에서 언급한 바 반일투쟁의 개시를 연기한 이유들 가운데 아직 수확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고, 특히 농민군의 역량이 취약하다는 점이 해소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의 참화를 연상하며 “국가가 멸망하면 생민이 어찌 하루라도 편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서 “국가와 멸망을 함께”하기 위해 재기포를 결심하였던 것이다.
1081) 재기포를 결심한 전봉준은 9월 10일경 삼례에 大都所를 설치하고 기병준비에 착수하였다. 삼례는 백여 호도 안되는 작은 고을이었지만, 도로가 사방으로 통하는 요충이었고 다수의 농민군이 임시거처로 사용할 수 있는 邸幕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때 삼례에서 모여 전봉준과 함께 모의한 인물은 진안의 접주 文季八·金永東·李宗泰, 금구의 접주 趙駿九, 전주의 접주 崔大奉·宋日斗, 정읍의 접주 孫如玉, 부안의 접주 金錫允·金汝中·崔卿宣·宋熹玉 등이었다. 전봉준은 삼례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5, 6일 후에는 직접 손화중과 최경선이 있던 광주와 나주로 갔으며, 김개남에게도 연락하였다. 전봉준은 각지의 “忠義之士”에게 함께 일어날 것을 촉구하는 동시에 “이번 거사에 호응하지 않는 자는 不忠無道한 자”라는 통문을 돌렸다.
1082) 전봉준은 각지의 官衙에도 재기병을 알리는 통문을 보내 군수품 조달에 협조할 것을 촉구하였다. 9월 10일 태인현에는 거사를 위해 公穀과 公錢을 이용해야겠으니, 軍需米 300석과 동전 2,000냥을 금구·원평의 대도소로 수송하기 바란다는 전봉준의 통보가 전달되었다. 17일에는 백미 300석, 동전 2,000냥, 白木 15同을 여산으로 보내라는 농민군 大都所의 傳通이 고산 관아에 도착하였다. 이외에도 9월 10일부터 20일 사이에 김제, 능주, 광주, 군산, 전주 등 각지의 관아에 화약·탄환 등의 무기와 쌀·白木 등 군수물자를 농민군 도소로 보내라는 통문이 날아들었다.
1083) 9월 18일경에는 장차 서울로 쳐들어가려 하니 군량을 준비해 두라는 통문이 충청도 각읍에도 전달되었다.
1084) 이와 함께 인근 지역의 官衙를 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기도 하였다. 9월 9일에는 전라도 금구의 농민군이 고산 관아를 공격하고, 다음 날에는 무기를 탈취하여 전주쪽으로 향하였다. 10일 밤에는 삼례에 집결하였던 농민군이 여산을 공격하였고, 13일 밤에는 무기를 탈취하여 돌아갔다. 14일에는 삼례에 모여 있던 농민군 8백여 명이 전주성으로 쳐들어가 화포 74문, 탄환 9,773발, 탄자 41,234개, 환도 300자루 등 무기를 탈취해 갔고, 16일에는 백여 명의 농민군이 威鳳山城을 공격하여 무기를 빼앗아 갔다. 또 8월 말부터 남원에서 재기포를 준비한 金開南도 이 무렵 인근읍으로부터 무기와 군수물자를 적극적으로 끌어 모았고,
1085) 9월 26일에는 孫化中도 통문을 돌려 인근 농민군을 광주에 결집시켜 전봉준에 호응하였다.
1086) 농민군의 재기병 준비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1051) <全琫準供草>(≪東學思想資料集≫壹, 亞細亞文化社, 1979), 318∼319쪽 및 340, 362쪽.
1052) 裵亢燮,<執綱所 時期 東學農民軍의 활동양상에 대한 一考察>(≪歷史學報≫153, 1997) 참조.
1053) <東京朝日新聞>, 명치 28년 3월 5일(≪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22), 367쪽.
1054) <東京日日新聞>, 명치 27년 8월 5일(≪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22), 509쪽.
1055) ≪古文書≫2, 서울대 도서관, 412쪽.
1056) ≪駐韓日本公使館記錄≫3(國史編纂委員會, 1986), 236∼240쪽.
1057) <錦藩集略>別啓, 7월 7일조(≪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4), 34∼35쪽. 위 기사의 내용은 7월 9일에 일어난 일이지만, 7월 7일조에 잘못 실려 있다.
1058) <梧下記聞>2筆(≪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 209∼210, 217∼218쪽;≪駐韓日本公使館記錄≫2, 71∼72쪽;<嶺上日記>8월 19일(≪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2), 286∼287쪽.
1059) 海浦篤彌,<東學黨視察日記>(≪日本人≫18호, 1895년 2월), 130∼136쪽.
1060) <全琫準供草>, 372쪽.
1061) <全琫準供草>, 364쪽.
1062) 대원군과 농민전쟁의 관계에 대해서는 李相栢,<東學黨과 大院君>(≪歷史學報≫27·28합집, 1962);柳永益,<全琫準 義擧論>(≪李基白先生古稀紀念韓國史學論叢≫下, 1994);김양식,<대원군일파의 정변계획과 농민군과의 관계>(≪근대한국의 사회변동과 농민전쟁≫, 신서원, 1996);張泳敏,<大院君의 東學農民軍·保守兩班 動員企圖에 관한 一考察>(≪重山鄭德基博士華甲紀念韓國史學論叢≫, 1996);양상현,<대원군파의 농민전쟁 인식과 동향>(≪1894년 농민전쟁연구 5≫, 역사비평사, 1997);배항섭,<전봉준과 대원군의 ‘밀약설’ 고찰>(≪역사비평≫, 1997년 겨울호) 참조.
1063) ≪駐韓日本公使館記錄≫8, 54쪽.
1064) ≪駐韓日本公使館記錄≫8, 54∼55쪽.
1065) <全琫準供草>, 347쪽.
1066) ≪舊韓國官報≫1, 8월 초10일, 166쪽.
1067) <隨錄>, 茂朱執綱所, 甲午 7月 17日(≪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5), 278∼279쪽.
1068) <時事新報>, 명치 27년 10월 5일(≪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22), 331∼332쪽;≪日淸交戰錄≫12, 명치 27년 10월 16일, 43쪽.
1069) <梧下記聞>2筆(≪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 210∼211쪽.
1070) 이 시기 전봉준의 정세판단과 행동방안에 대해서는 裵亢燮,<執綱所 時期 東學農民軍의 활동양상에 대한 一考察>(≪歷史學報≫153, 1997) 참조.
1071) <隨錄>(≪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5), 296쪽;≪駐韓日本公使館記錄≫8(國史編纂委員會, 1993), 55쪽, 361쪽;<全琫準供草>, 341쪽, 358∼359쪽.
1072) <隨錄>(≪東學農民戰爭史料大系≫5, 驪江出版社, 1994), 296쪽.
1073) ≪駐韓日本公使館記錄≫8(國史編纂委員會, 1993)(이하 생략), 55·361쪽.
1074) <全琫準供草>, 341쪽.
1075) <甲午略歷>(≪東學亂記錄≫上, 國史編纂委員會, 1959), 67∼68쪽.
<梧下記聞>3筆, 247쪽.
1076) <全琫準供草>, 341쪽.
1077) ≪駐韓日本公使館記錄≫8, 54·360쪽.
<東學文書>(≪東學農民戰爭史料大系≫5), 99쪽.
1078) ≪駐韓日本公使館記錄≫8, 54쪽, 361쪽.<東學文書>에는 자신이 밀지를 보낸 사실이 누설될 경우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므로 철저히 비밀로 하라는 8월 14일자로 된 국왕의 밀지가 실려 있다(≪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5, 112쪽).
1079) 鄭昌烈,≪甲午農民戰爭硏究≫(延世大學校 博士學位論文, 1991), 255쪽.
1080) ≪駐韓日本公使館記錄≫8, 55∼76쪽.
<全琫準供草>, 3차문목·5차문목 참조.
1081) <東京朝日新聞>, 명치 28년 3월 5일(≪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22), 367쪽.
1082) <全琫準供草>, 321∼322쪽, 373∼375쪽, 378쪽, 381∼382쪽.
<判決宣告書>(≪東學關聯判決文集≫, 總務處 政府記錄保存所, 1994), 30쪽.
<梧下記聞>3筆(≪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 253쪽.
1083) ≪駐韓日本公使館記錄≫1(國史編纂委員會, 1986), 129∼130쪽.
≪駐韓日本公使館記錄≫8, 51쪽.
1084) 金允植,≪續陰晴史≫上, 9月 18日(國史編纂委員會, 1960), 340쪽.
1085) ≪駐韓日本公使館記錄≫1, 129∼130쪽.
≪駐韓日本公使館記錄≫8, 51쪽.
1086) 朴冀鉉,<日史>, 甲午 9月 23日(≪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7, 1996), 485∼4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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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남·북접 연합과 봉기의 확산
전봉준의 재기포 결정이 북접과의 합의하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1087) 전봉준은 北接과의 연합을 이끌어 내기 위해 북접에 함께 기포할 것을 요청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동학교단측의 영향을 강하게 받던 충청도 지역에서도 이미 1894년 3월 20일의 茂長起包를 전후한 시기부터 동학교도들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된 바 있다. 5월, 6월에 들어 민보군의 활동과 관군의 반격, 교단지도부의 기포 금지지시 등으로 소강상태를 맞았으나, 7월 초부터는 사실상 기포단계에 들어갈 만큼 다시금 활발해졌고, 곳곳에서 교단측의 태도에 반발하는 지도자들이 나타났다. 7월부터 다시 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해진 데는 충청도가 조선 왕조정부의 요청을 받고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출병한 청나라 군대가 상륙한 곳으로 청일전쟁의 최초의 전장이었다는 사실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이에 따라 충청도 농민군은 각지에서 양반가를 공격하는 등 雪憤行爲를 하거나 일부지역에서는 농민군집강소를 설치하고 개혁활동을 시도하는 한편 ‘斥化擧義’를 주장하는 등 반일구호를 본격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7월 이후 전개된 충청지역 농민군의 활동은 중앙정국과 청일전쟁의 동향을 살피며 기본적으로는 관민상화의 질서 속에서 개혁활동을 추진하고자 하였던 전라도 지역 농민군의 활동양상과는 대조되는 것이다. 조정에서는 7월 9일 鄭敬源을 湖西宣撫使에 임명하여 호서지역을 순행하며 농민군을 귀화시키도록 하였다. 이에 대해 동학교단은 충청각지의 접주급 인물을 집강으로 임명하여 교도들의 기포와 설분행위를 금단하는 등 조정의 대책에 호응하였다.
1088) 7, 8월에 걸쳐 교도들에게 官令에 복종하고 교도 가운데 侵勒하거나 掘塚, 錢財 강탈 등을 자행하는 자가 있으면 교단에 알리거나 관에 고발토록 하는 내용이 포함된 通諭文을 잇따라 내렸다.
1089) 교단측이 농민군의 봉기를 금압한 것은 관군으로부터 무차별적인 탄압을 받아야 했던 교도들이나 기포를 주장하는 접주들로부터 반발을 야기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충청지역의 농민군이 남접에 호응하여 전면적으로 기포하는 데 커다란 제약요인이 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전봉준과 서장옥은 재기포를 결심한 뒤 북접에도 함께 기포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북접의 통유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북접은 9월에도 전봉준과 徐璋玉이 “倡義를 빙자하여 평민을 침학하고 도인을 죽이는 것이 끝이 없다”고 비난하며, 남접을 토벌하라는 통유문을 돌린 바 있다.
1090) 또 같은 9월에 관청과 일본군병참소에까지 전봉준과 서장옥이 “북접을 끼고 때를 틈타 함께 일어나려 했지만, 북접은 스승의 훈계를 각별히 따라 굳게 거절하고 따르지 않았다”라고 하며 북접을 남접과 차별화하고자 하는 글을 보냈다.
1091) 전봉준 등의 기포 동참요청에 대해 북접에서는 “남접을 토벌하라”는 극언까지 불사하며 반대하였으나, 이미 7월, 8월에 걸쳐 충청도와 경상도 등지에서는 교단의 지시를 무시하고 기포하는 동학교도가 점증하였고, 사실상 기포상태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북접 산하의 접주들이나 농민군들이 이미 교단의 통제 밖에 있었음을 보여 준다. 또 측근들마저 동학교도들이 무고하게 살상당하는 참상을 보고하자, 드디어 9월 18일 崔時亨은 각포의 접주들을 청산에 불러 모으고 “교도들을 동원하여 전봉준과 협력하여”
1092) “先師의 宿寃을 快伸하고 宗國의 急難에 同赴” 할 것을 지시하였다.
1093) 함께 기포하자는 전봉준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에 따라 북접에서도 法所와 都所를 倡義所로 개칭하였으며, “우리 접주들은 힘을 합하여 倭賊을 쳐야겠다”는 통문을 돌리고 반일항쟁에 동참하게 된다.
1094) 북접은 산하 각 지역에 기포령을 내렸으며, 이 무렵부터 각지에서 농민군들이 본격적인 기포를 시작하였다.
영동지역에서는 일본군이 대구에 들어오고, 성환전투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하였다는 소문이 난 다음인 7월 12일 무렵부터 활동하고 있던 농민군이 9월 26일 정식으로 기포하였다.
1095) 홍주·예산·서산·태안 등지에서도 이미 7월 초순부터 농민군들이 사방에서 일어나 활동하고 있었으며,
1096) 홍주목사 이승우의 농민군 진압에 대응하여 대대적인 기포준비를 하고 있다가 9월 30일 북접으로부터 기포령이 떨어진 이후에 정식으로 기포하였다.
1097) 충청도와 마찬가지로 북접 영향하에 있던 경상도 지역에서도 지역에 따라서는 이미 3월 말부터 동학교도들의 활동이 활발해졌으며, 일본군의 경복궁 강점이 알려진 6월 말부터 활동이 격화되었다. 이어 8월에는 성주·예천 등지에서 농민군이 읍내를 공격하는 사실상의 기포가 이루어졌으며, 일본을 적대하자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병참대의 일본군과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1098) 김산지역 역시 3월 말부터 지주양반층은 농민군들로부터 시달림을 받고 있었으며 농민군은 8월 초부터는 곳곳에 모여 반관·반부민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었으나, 9월 25일 교단으로부터 기포하라는 통문이 도착하자 정식으로 기포하였다.
1099) 이에 따라 9월 하순이 되면 義兵이라 칭하며 국왕의 명에 항거하는 농민군의 봉기가 전라도와 충청도, 경상도 뿐만 아니라 강원도와 경기도, 황해도 등으로 확산되었고 평안도에서도 반일투쟁 양상이 전개되었다.
1100)1087) <全琫準供草>, 343쪽.
1088) 배항섭,<충청지역 동학농민군의 동향과 동학교단-≪洪陽紀事≫와≪錦藩集略≫을 중심으로->(≪百濟文化≫23, 1994);<충청도지역 東學農民戰爭과 農民軍指導部의 성격>(≪동학농민전쟁과 농민군 지도부의 성격≫, 서경출판사, 1997), 44∼50쪽 참조.
1089) <天道敎會史草稿>(≪東學思想資料集≫壹), 458∼460쪽.
1090) <天道敎會史草稿>(≪東學思想資料集≫壹), 461쪽.
1091) <侍天敎歷史>(≪東學思想資料集≫參), 625쪽.
1092) <天道敎創建史>(≪東學思想資料集≫貳), 155쪽.
1093) <天道敎會史草稿>, 461쪽.
1094) ≪駐韓日本公使館記錄≫1, 173쪽.
1095) <記聞錄>(≪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1), 554∼564쪽.
1096) <洪陽紀事>(≪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9), 96쪽.
1097) <昌山后人 曺錫憲歷史>(≪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0), 130∼132쪽.
1098) 申榮祐,≪甲午農民戰爭과 嶺南保守勢力의 對應≫(延世大 博士學位論文, 1991), 59∼91쪽 및 이 글의 주 57)참조.
1099) <歲藏年錄>(≪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2), 256∼260쪽.
1100) ≪日省錄≫, 고종 31년 9월 24일∼26일;<甲午實記>,≪東學亂記錄≫上, 35쪽. 각 지역별 농민군의 활동에 대한 최근의 연구로는 한국역사연구회,≪1894년 농민전쟁연구≫4, 199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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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관군 및 일본군의 남하
이미 9월 초부터 농민군이 서울로 쳐들어 온다는 소문까지 나돌고, 경기도 죽산과 안성에서도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이들에 대한 본격적인 진압대책을 마련하였다. 9월 10일에는 壯衛營 領官 李斗璜과 經理廳 領官 成夏泳 등 무관들을 죽산부사와 안성군수에 임명하였고, 9월 21일에는 兩湖巡撫營을 설치하고 申正熙를 都巡撫使로 삼았다. 이어 이두황을 순무영 右先鋒, 별군관 이규태를 左先鋒으로 임명하였다.
1101) 또 전국 각지에 召募使와 討捕使 등을 임명하거나 파견하였다.
1102) 충청감영으로부터 농민군 수만 명이 병영을 공격하여 감영이나 병영의 병력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다는 급보가 날아들자 9월 28일 순무영에 증원군을 파견하도록 명령하였다.
1103) 9월 29일에는 더 이상 선무만으로는 농민군의 봉기를 진정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여 양호선무사 직함을 없앰으로써 오로지 무력진압정책을 펴기로 결정했다.
1104) 순무우선봉 이두황은 장위영 병대 4개 소대를 이끌고 9월 20일
1105) 서울을 출발, 용인을 거쳐(21일) 죽산에 도착하여(22일) 용인·죽산·이천·진천 등지의 농민군을 진압하다가 10월 9일 죽산을 출발하여 남하하였다. 음죽(9일)-음성(10일)-청안(11일)-청주 쌍교동(12일)을 거쳐 10월 13일 청주성에 입성한 이두황은 성하영의 경리청군 및 일본군 白木誠太郞 중위, 宮本竹太郞 소위와 합류하여 일본군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13일부터 15일까지 경리청군, 진남영병과 함께 보은 장내리 등을 수색하던 이두황은 16일 회인에 도착하였다. 이두황은 17일 아침 충청감영으로부터 전라도 지역의 농민군이 북상하여 노성·논산 등지에 진을 치고 있으니 급히 공주로 오라는 전령을 받고 공주를 향해 떠났다. 공주 접경인 부강점(17일)-연기 봉암(18일)을 거쳐 19일 유성에 도착한 이두황은 10월 20일 청주병영으로부터 목천 세성산에 농민군이 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목천으로 향하였다. 천안-廣(松)亭(20일)을 거쳐 21일 세성산에 도착한 이두황은 그 곳에 진을 치고 있던 농민군과 접전하였다.
세성산성은 감영과 병영이 있던 공주와 청주 사이에 위치한 요충지로 서울로 통하는 길목이었을 뿐만 아니라 남하하는 관군의 배후를 위협할 수도 있는 지점이었다. 그러나 이두황은 세성산이 가지는 이러한 지리적 중요성 뿐만 아니라 세성산의 농민군을 격파함으로써 선봉진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고, 농민군의 기세를 꺽음으로써 장차 전개될 농민군과의 전투에서 승기를 다져보자는 의도에서 공주로 급히 올라오라는 통보에도 불구하고 세성산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전투는 10월 21일 벌어졌다. 3,000여 명의 농민군은 삼면이 깍아지른 듯한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관군의 공격에 맞섰으나 결국 농민군은 대장 김복용이 체포되어 참수되는 등 17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하여 달아났다. 세성산 인근의 농민군을 추적하여 진압하던 이두황은 10월 26일 세성산을 출발, 봉암을 거쳐(26일) 10월 27일 공주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공주에 도착한 직후 예산·서산·태안·해미 등지의 위급함을 보고받고 10월 29일 장위영병을 이끌고 예산지역으로 출발하여, 광정(29일∼11월 2일)-온양(3일)-신창(4일)-예산(5일)-해미(6일-8일)를 거쳐 11월 9일 홍주에 도착하였다.
1106) 이규태는 교도중대와 통위영 2개 중대를 이끌고 10월 10일 서울을 출발하였다. 교도중대는 경성에 있던 일본군 후비18대대의 히라키(白木) 중위와 미야모토(宮本) 소위의 지휘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1107) 이들은 과천(11일)을 거쳐 수원에 도착한 뒤(12일∼17일) 17일 양지에서 일본군 서로분진대와 합류하여 진위로 갔다. 18일 진위에서 일본군은 2개의 枝隊로 나누어 하나는 안성 쪽으로 가고, 다른 하나는 일본병 87명과 대관군 43명을 거느리고 평택∼아산 등지로 향발하였고, 이규태는 성환(18일)을 거쳐 천안으로 곧장 남하하여 19일 천안에서 일본군과 합류하였다. 22일까지 천안에 체류한 뒤 廣亭(23일)을 거쳐 10월 24일 공주에 도착하였다.
1108) 이밖에 성하영은 9월 24일 안성군수로 부임,
1109) 그곳의 농민군을 진압한 후 경리청 영관 구상조와 함께 경리청병 3개 소대를 이끌고 청안을 거쳐 10월 10일 청주로 가서 주둔하다가, 12일 이두황군과 합류한 뒤 회인·毛老院을 거쳐 19일 공주에 도착하였다.
1110) 안성군수 홍운섭이 이끄는 경리청군 1개 소대는 10월 16일 안성을 출발 천안을 거쳐 19일 공주에 도착하였다.
1111) 10월 27일 현재 공주에 주둔중인 경군은 장위영 850명(領官 이하 병정 692명, 書記 이하 군무요원 158명), 경리청 560명, 통위영 250명 등 1,660여 명이었다. 이 가운데 장위영 병대는 예산·덕산·홍주·해미 등지의 농민군이 창궐하므로 내포지역으로 이동하여 일본군과 함께 그 지역의 농민군을 초토하라는 지시를 받고 10월 29일 공주를 출발하여 홍주로 향하였다.
1112) 한편 8월 16일 벌어진 평양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청일전쟁의 승기를 잡은 일본은 본격적인 내정간섭을 시작하였으며,
1113) 농민군 진압에 일본군를 직접 투입하기 시작하였다. 7월 초순부터 전선파괴 등 조선인들의 반일투쟁이 발생하기 시작하였고,
1114) 8월 24일 무렵에는 전라도·충청도·경상도에서 농민군이 봉기하여 서울로 침입한다는 풍설이 나돌았다. 또 8월 25일·26일에는 태봉·용궁 등에서 일본군이 공격을 당하여 사망하거나 부상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은 이미 8월 24일 이전부터 조선정부는 힘이 없어 이들을 진압할 수 없으며, 이들 지역으로부터 조세를 징수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이익에 방해가 되므로 일본군 1개 소대와 순사 30명을 조선정부에 빌려주어 농민군을 진압할 필요가 절실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어 8월 28일 외무대신 무츠(陸奧宗光)는 부산항에 주둔중이던 일본군 1개 소대를 태봉·문경 지역으로 파견하도록 하였고, 9월 4일 이전에 부산에 주둔중이던 2개 중대가 두 차례로 나누어 파견되었다.
1115) 그러나 농민군의 봉기가 각처에서 이어지자 9월 9일 일본공사 오오토리(大鳥圭介)는 외무대신 무츠에게 일본군을 동원하여 본격적으로 농민군 진압 태세를 취하는 것이 좋겠다고 상신하였다. 또 늦어도 9월 15일 이전에 조선정부는 농민군 진압을 위해 일본군대를 파견해 줄 것을 일본에 공식 요청하였으며,
1116) 9월 18일 일본은 일본군 약간을 파병하여 조선군을 도와 농민군을 진압하고 싶다고 하여 승낙의 뜻을 전하였다. 조선정부가 9월 18일에 있었던 일본측의 제의를 공식 수락한 것은 9월 21일이었다. 이어 9월 27일 새로 부임한 일본공사 이노우에(井上馨)는 9월 28일 대본영에 농민군 진압을 위한 1개대대 병력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9월 21일 본격적인 농민군 진압계획을 세운 대본영은 10월 2일 대대장 미나미(南小四郞)의 인솔하에 일본 후비보병 독립 제19대대를 출발시켰다.
1117) 그러나 일본은 이보다 앞선 9월 17일 농민군 진압을 위해 일본군을 남하시키기로 결정하였고, 19일에는 2개 소대를 남하시켰다. 1개 소대는 原田 소위가 이끌고 용인·죽산을 거쳐 충주 지방으로, 1개 소대는 鈴木 特務曹長이 이끌고 수원·진위·천안을 거쳐 공주로 가도록 하고, 후자는 다시 두 개의 대로 나누어 하나는 아산·평택·홍주로 향하게 할 예정이었다.
1118) 이에 따라 9월 27일 인천수비대 소속 1개 소대(49명) 병력을 原田常入 소위 인솔하에 남하시켰다.
1119) 이들은 인천-수원을 거쳐 10월 5일 충주에 도착하였다. 10월 6일 原田常入 소위가 2개 분대를 이끌고 괴산지역을 정찰하던 중 농민군 200여 명과 조우하여 전투를 벌인 결과 原田 소위 이하 4명이 부상하고 1명이 즉사하자,
1120) 용산수비대 대대장 飯森이 1개 소대, 인천수비대 소속의 山村대위가 2개 분대를 이끌고 각기 10월 7일과 10월 9일 충주로 증파되었다.
1121) 이들은 합류하여 10월 14일부터 충주·괴산·청산·보은 등을 수색한 후 山村은 10월 말 용산과 인천으로 복귀하였다.
1122) 한편 10월 2일 일본에서 출발한 일본군 후비보병 독립 제19대대의 본부 및 제1, 2중대는 10월 9일, 제3중대는 13일 인천에 도착하였다.
1123) 이들은 14일 용산에 집결하였고, 10월 15일에서 17일 사이에 농민군 진압을 위해 남하하였다.
1124) 10월 19일에는 용산수비대 1개 중대가 뒤따라 출발하여 동로분진대와 합류하였다.
1125) 일본공사 이노우에는 미나미가 인솔한 제19대대가 인천에 도착한 10월 9일에 조선의 외무대신 金允植에게 서한을 보내 앞으로 농민군 진압에 임하는 조선군과 각 지방관에게 일본군 장교의 지휘를 따르도록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1126) 또 10월 13일 인천병참사령관 육군포병중좌 이토오(伊藤祐義)는 후비보병 독립 제19대대가 남하하기에 앞서 일본공사 이노우에에게 농민군 진압계획을 보고하였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충청·전라 각지 東學黨의 근거지를 剿節하라.
2. 조선정부의 요청에 의해 후비보병 제19대대는 다음과 같은 세 개의 길로 分進하여 조선군과 협력, 沿道에 있는 동학당을 격파하고 그 화근을 剿滅함으로써 동학당이 다시 흥기하는 후환을 남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두머리로 인정되는 자는 체포하여 경성 공사관으로 보내고, 동학당 거물급 간의 왕복문서, 혹은 정부내부의 관리나 지방관, 또는 유력한 측과 동학당 간에 왕복한 문서는 힘을 다해 수집하여 함께 공사관으로 보내라. 이번 동학당을 집압하기 위해 파견된 조선군 각 부대의 진퇴와 調達은 모두 일본군 士官의 명령에 따르게 하고, 일본군법을 지키게 하며 만일 군법을 위배하는 자가 있으면 군율에 따라 처리하기로 조선정부로부터 조선군 각 부대장에게 이미 하달되었다.
3. 보병 1개 중대는 西路, 즉 수원·천안 및 공주를 경유, 전주부 街道를 전진하여 그 진로 좌우의 驛邑을 정찰하라. 보병 1개 중대는 中路, 즉 용인·죽산·청주를 경유, 성주 가도로 전진하여 그 진로 좌의 역읍을 정찰하라. 보병 1개 중대는 東路(일본병참선로), 즉 가흥·충주·문경 및 낙동을 경유, 대구부 가도로 전진하여 그 진로 좌우의 역읍을 정찰하라. 본부 중대는 중로 분진대와 함께 행진하라.
4. 동로 分進中隊를 조금 먼저 가게 해서 匪徒를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즉 전라도방면으로 내몰도록 힘써야 한다. 만일 비도들을 강원도와 함경도 쪽, 즉 러시아 국경에 가까운 곳으로 도피케 하면 적지 않게 후환이 남을 것이므로 엄밀히 이를 예방해야 한다.
1127) 이노우에 공사가 직접 나서서 진두 지휘한 일본군의 농민군 진압 계획의 요체는 농민군을 서남방 전라도 해안쪽으로 몰아넣은 다음 합세하여 초멸하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서·중·동 세 갈래로 나누어 남하하되 동로분진대에 1개 중대를 증원하고 중로, 서로분진대보다 빨리 남하하도록 하여 강원도와 경상도의 농민군을 전라도쪽으로 내몰도록 한 것이다.
1128) 농민군진압에 투입된 일본군의 규모는 ①미나미少佐가 이끄는 3개 중대로 이루어진 후비보병 독립 제19대대 ②충주 방면의 원군으로 서울에서 내려온 후비 제18대대 제1중대 ③홍주 방면의 원군으로 용산, 인천에서 온 후비 제6연대 제6중대 ④전라도 남부지방의 원군으로 부산에서 온 후비 제10연대 제4중대 등이 있고 ⑤황해도 방면에도 평양으로부터 후비 제6연대 제4중대 ⑥용산으로부터 파견된 후비 제6연대 제7중대(일부) ⑦황주에서 파견된 후비 제6연대 제8중대(일부) 등 모두 9개 중대였다. 청일전쟁 시기에 1개 중대는 221명 내지 198명으로 구성되었고, 또 일부는 결원이 있음을 감안할 때, 농민군 진압에 투입된 일본군은 약 1,900여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129) 이 가운데 西路, 즉 수원·천안을 거쳐 공주로 진격하게 되어 있던 서로분진대(중대장, 森尾 대위)는 과천(17일)을 거쳐 18일 진위에서 예산지역의 농민군세력이 거세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2개대로 나누어 본대(2개 소대와 2개 분대, 약 125명)는 공주로 남하하고, 枝隊는 예산으로 향하였다. 공주로 남하한 본대는 양성(18일)-직산(19일)-천안(20∼22일)-덕평(23일)을 거쳐 10월 24일 공주에 도착하였다.
1130) 9월 말에 1개 소대를 이끌고 서울서 출발한 스즈키(鈴木) 特務曹長은 수원·진위·천안을 거쳐 10월 8일 이전에 이미 공주감영에 도착하여 그 곳의 조선군병들을 훈련시키며 주둔하고 있었다. 스즈키는 10월 9일 이토오(伊藤) 兵站監을 통해 보은·괴산지역의 농민군을 정찰하고, 곧 파견할 군대가 도착할 때까지 임기응변하며 청주로 가서 주둔하라는 이노우에 공사의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전봉준이 충청감사에게 글을 보내면서 공주지역의 정세가 긴급해진 직후인 10월 18일 공주에 남아서 방어하겠다고 요청하여 10월 28일 승낙받았다.
1131) 남하 도중 진위에서 서로분진대와 갈라져 해미지역으로 간 枝隊는 아카마쓰(赤松國封) 소위가 인솔하였으며 인원은 1개 소대와 2개 분대, 그리고 조선관군 34명이었다. 이 지대는 평택-아산(19일)-신창(21일)-예산(22일)-면천(23일)을 거쳐 24일 해미에 도착하였으며, 농민군 1만 5,000여 명과 승전곡에서 접전한 후 덕산으로 들어갔다.
1132) 이어 25일에는 홍주로 퇴각하였으며, 농민군의 세력이 예상외로 크자 10월 27일 홍주에서 인천 병참부로 지원군을 요청하였다. 28일에는 내포지역 최대의 전투였던 홍주성전투가 28일 오후부터 29일까지 계속되었다. 이 전투에 가담한 관군 및 일본군은 2,000여 명이었다. 이때 농민군은 3만여 명이나 되었으나 크게 패하여 해미쪽으로 퇴각하였다. 이후 농민군은 해미 등지에서 일본군 및 관군, 민보군과 수 차례 접전하였으나 패배하여 많은 사상자를 남긴 채 각지로 흩어지고 말았다.
후원병인 인천 항구수비대 1개 소대와 용산주재 2개 소대는 후비보병 제6연대 제6중대장인 야마무라(山村) 대위의 인솔하에 11월 3일 오후 7시 인천을 출발하여 11월 5일 새벽 아산현에 상륙하였으며, 신창·신례원을 경유하여 11월 7일 오후 홍주에 도착하였다. 홍주 지역의 농민군의 세력이 약해지자, 11월 8일 후원병력만 홍주에 남고 아카마쓰 소위는 자신이 인솔하던 일본군 1개 소대와 2개 분대, 조선관군 34명을 이끌고 공주로 출발하였다.
1133) 후원병은 사이토(齋藤) 소위에게 1개 소대와 민보군 300명을 내주어 해미·서산·태안을 수색하게 하고, 11월 12일 해미를 거쳐 인천으로 귀환 예정이었다. 그러나 11월 11일 홍주목사 李承宇로부터 한산 남포 지역에 농민군 수천 명이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인천 귀환을 연기하고 한산으로 척후를 파견하고, 사이토 소위에게는 홍주로 복귀할 것을 지시하였다. 정탐 결과 한산 남포 등지 농민군 세력이 과장되어 있는 것으로 판단한 야마무라대위는 11월 13일 홍주로 복귀한 사이토와 함께 11월 14일 홍주를 출발, 태안(15일)·서산(16일)·덕산(17일)의 농민군 잔여세력을 진압하면서 수원을 거쳐 11월 23일 인천으로 복귀하였다.
1134) 이상으로 볼 때 공주전투가 벌어질 당시 공주감영에는 서로분진대 가운데 홍주 방면으로 빠져 나간 1개 소대와 2개 분대를 제외한 제2중대 병력과 스즈키(鈴木) 소위가 이끌고 와 있던 1개 소대 등 3개 소대와 2개 분대 병력(약 175명)이 주둔해 있었다.
1135)1101) ≪東學亂記錄≫上, 220쪽.
1102) ≪日省錄≫, 고종 31년 9월 25일∼29일.
1103) ≪日省錄≫, 고종 31년 9월 28일.
1104) ≪啓草存案≫, 고종 31년 9월 29일.
1105) ≪舊韓國官報≫1(亞細亞文化社, 1973), 開國 503년 9월 19일, 520쪽.
1106) <兩湖右先鋒日記>·<巡撫先鋒陣謄錄>(≪東學亂記錄≫上);≪東學亂記錄≫下, 14∼20쪽 등에서 정리.
1107) ≪駐韓日本公使館記錄≫1, 152쪽.
≪駐韓日本公使館記錄≫3, 378쪽.
1108) <先鋒陣日記>,<巡撫先鋒陣謄錄>(≪東學亂記錄≫上);<先鋒陣呈報牒>(≪東學亂記錄≫下)에서 정리.
1109) 안성군수는 9월 30일 홍운섭으로 교체되었고, 성하영은 10월 11일 서산군수로 임명되었다.
1110) ≪東學亂記錄≫上, 262·270·384·421·427쪽.
≪駐韓日本公使館記錄≫3, 302쪽.
1111) ≪東學亂記錄≫上, 419쪽.
1112) ≪東學亂記錄≫上, 298쪽;≪駐韓日本公使館記錄≫1, 246∼247쪽.
1113) ≪駐韓日本公使館記錄≫2, 232∼233쪽.
1114) ≪駐韓日本公使館記錄≫3, 333·335쪽.
1115) ≪駐韓日本公使館記錄≫3, 272∼279쪽 ;<日本外務省外交史料館 所藏文書>(≪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9), 342∼349쪽, 412·419쪽.
1116) ≪駐韓日本公使館記錄≫3, 353쪽.
1117) 鄭昌烈,≪甲午農民戰爭硏究≫(延世大學校 博士學位論文, 1991), 244∼247쪽 참조.
1118) ≪駐韓日本公使館記錄≫3, 284∼289쪽·355∼356쪽; 5, 64쪽.
1119) ≪駐韓日本公使館記錄≫1, 143∼145쪽.
1120) ≪駐韓日本公使館記錄≫3, 297쪽;6, 91쪽.
1121) ≪駐韓日本公使館記錄≫3, 297쪽;1, 217쪽.
1122) ≪駐韓日本公使館記錄≫1, 218∼220쪽.
1123) ≪駐韓日本公使館記錄≫3, 249쪽, 369∼373쪽.
1124) ≪駐韓日本公使館記錄≫6, 60쪽;3, 249쪽.
1125) ≪駐韓日本公使館記錄≫3, 300∼301쪽.
1126) ≪駐韓日本公使館記錄≫1, 150쪽.
1127) ≪駐韓日本公使館記錄≫1, 153∼156쪽;5, 67∼68쪽.
1128) ≪駐韓日本公使館記錄≫1, 301∼302쪽;5, 65∼66쪽.
1129) 趙景達,≪異端の民衆反亂:東學と甲午農民戰爭≫(岩波書店, 東京, 1998), 305쪽 참조.
1130) ≪駐韓日本公使館記錄≫6, 60∼68쪽.
1131) ≪駐韓日本公使館記錄≫1, 169·174쪽;3, 367·382쪽.
1132) ≪駐韓日本公使館記錄≫1, 206∼208쪽;6, 63∼64쪽.
1133) ≪駐韓日本公使館記錄≫1, 206∼208쪽, 211쪽, 222∼233쪽;3, 311·317쪽.
1134) ≪駐韓日本公使館記錄≫1, 233∼239쪽.
1135) ≪駐韓日本公使館記錄≫1, 246∼247쪽. 서로분진대에 앞서 공주에 도착하여 주둔하고 있던 스즈키(鈴木)는 서로분진대가 10월 24일 공주에 도착하자 곧바로 공주를 떠난 것으로 기록된 자료도 있으나(<公山剿匪>(≪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2, 421쪽), 스즈키는 우금치 전투에 참여한 것이 확실하다(≪駐韓日本公使館記錄≫1, 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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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농민군의 북상과 공주전투
삼례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재기병을 준비하던 전봉준은 1개월이 지나도록 삼례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은 전봉준에게 병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9월 초에 재기포를 결심할 때도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 남겨져 있던 두 가지 문제, 즉 추수가 끝나지 않아 군량과 농민군을 동원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는 점, 농민군의 현실적인 역량이 취약하였다는 점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전봉준은 추수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한편, 각지에 통문을 띄워 함께 기포할 것을 촉구하였다. 또 전라 각지 邑鎭의 무기고를 탈취하여 무장력을 강화한 농민군은
1136) 추수가 거의 끝날 무렵인 10월 12일경 북상을 개시하였다.
1137) 이때는 이미 관군과 일본군의 무력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다음이었다.
북상에 앞서 전봉준은 농민군의 군수품 조달을 위해 충청 각 고을에도 장차 서울로 갈 계획이므로 군량을 준비해 둘 것을 요청하는 통문을 보낸 바 있다.
1138) 북상 당시 농민군은 약 4,000명이었고 이들은 주로 전라우도의 농민군이었다. 손화중과 최경선도 원래는 공주로 함께 북상하려 하였으나 일본군이 바다를 통해 내려 온다는 정보를 접하자 이에 대비하기 위해 광주로 내려가 주둔하기로 했다. 전봉준은 김개남에게도 함께 출전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김개남은 49일을 채워야 한다는 참위설을 내세우며 남원에 머물렀다.
1139) 한편 9월 18일을 기해 기포를 결정한 북접 동학교단은 산하의 각지 접주들에게 동원령을 전달하는 한편, 10월 2일에는 청산에서 대규모 대회를 개최하여 전열을 정비하였다.
1140) 북접에서는 청산대회의 소식을 늦어도 10월 11일에는 전봉준에게 통보하였으며,
1141) 대회를 마친 다음 남접세력과 합세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142) 재기포를 결심하고서도 한 달여 동안 삼례에 머물며 무장을 강화하고 있던 전봉준이 10월 2일 무렵에 북상을 개시한 것은 이 무렵 북접으로부터 청산대회에 대한 통보를 받았다는 점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이 북상을 시작하여 논산에 도착한 것은 10월 12일이었다.
1143) 여기서 전봉준은 다시 농민군을 초모하였다. 삼례에서 북상하는 과정에서 농민군의 수는 불어났으며, 10월 12일부터 16일 사이에는 손병희가 이끌고 온 북접의 농민군과 논산에서 합세함으로써 논산에서 공주로 진격할 때에는 1만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1144) 북상하는 농민군의 일차 공격목표는 충청감영이 있는 공주였다. 공주는 서울로 통하는 길목이자 삼면이 산으로 둘러쳐 있고, 북쪽으로는 금강이 흐르는 천혜의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일본군 소위 스즈키(鈴木)도 후비 19대대장 미나미에게 “공주를 동학도에게 넘겨주게 되면 사방의 동학도가 금방 봉기해서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될 것”이다라고 하여 공주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1145) 이 때문에 전봉준은 공주성을 점령하여 지키면 일본군이 쉽게 공격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공주성을 점령한 후 일본군과 담판할 계획이었다고 밝혔다.
1146) 공주공격을 앞둔 전봉준은 남북접 농민군이 합세한 직후인 10월 16일 兩湖倡義軍領袖의 자격으로 골육상쟁을 피하고 항일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관군의 동참을 촉구하는 글을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보냈다.
<全琫準上書>
兩湖倡義軍의 領袖 全琫準이 삼가 湖西巡相 閤下에게 글을 올립니다.
(중략)일본 오랑캐(日寇)가 분란을 야기하고 군대를 출동하여 우리 국왕을 핍박하고 우리 백성들을 뒤흔들어 놓았으니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 임진왜란 때 오랑캐가 왕릉을 능멸하고 궁궐을 불태웠으며, 국왕과 우리 부모들을 능욕하고 백성들을 살륙하여 臣民들의 公憤을 샀으니 千古에 있지 못할 원한입니다. (중략)지금 朝廷의 大臣들은 망령되이 자신의 몸만 보전하고자 위로는 국왕을 협박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속이며 東夷와 내통하여 남쪽 백성들의 원망을 사자 親兵을 妄動하여 先王의 赤子들을 해치고자 하니 실로 무슨 뜻이며, 마침내 무슨 일을 저지르려는 것입니까. 금일 우리가 하고자 하는 바는 실로 그것이 지극히 어렵다는 사실을 알지만, 一片丹心은 죽음과도 바꿀 수 없으며, 人臣으로서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을 掃除하여 先王朝가 五百年 동안 遺育해준 은혜에 보답코자 하니, 엎드려 원컨대 閤下도 깊이 반성하여 죽음으로써 義를 함께 한다면 千萬 다행일 것임.
갑오 10월 16일
在論山謹呈
1147) 전봉준은 논산에서 10여일 이상 체류하였다. 박제순에게 동참을 촉구하는 글을 띄우고서도 1주일 이상을 더 머물렀다. 이것은 농민군의 역량을 최대화하려는 의도였으며, 아직 농민군의 역량이 취약하였음을 말한다. 그러나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의 농민군과 합류한 이후부터 전봉준은 공주공격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10월 19일 무렵에는 은진·노성 사이에 농민군의 활동이 분주하였고, 노성의 창고미를 경천으로 옮기는 것이 관군에게 발견되었다.
1148) 논산에서 북상하기에 앞서 공주전투에 필요한 군량을 미리 확보해 두려는 의도였다. 드디어 23일 밤 논산의 농민군은 공주에서 남쪽으로 30리 지점에 위치한 경천을 점령하였다. 이 무렵 북접에서 온 옥천포 농민군은 공주 동쪽으로 30리 떨어진 大橋에 진을 치고 있었다. 남북접이 연합한 농민군은 남쪽과 동쪽에서 공주를 협공하려는 것이었다.
1149) 이때부터 약 20여 일에 걸쳐 농민군과 관군 및 일본군 사이에는 공주감영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게 되며, 이 전투는 농민전쟁의 성패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150) 한편 충청감사 박제순은 전봉준이 논산에서 글을 보내는 등 공주를 압박해 오자 순무영과 일본군측에 급히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관군과 일본군은 공주로 속속 이동하였으며, 농민군의 공주성 공격이 개시된 10월 24일 경에는 관군 810명, 일본군 2개 소대와 2개 분대, 약 120여 명이 공주로 집결하였다. 이외에도 감영병과 민보군이 있었을 것이나 자세한 병력수는 알 수 없다. 여기에 맞서는 농민군의 수는 많게는 4만여 명에 달하였다.
1151) 청주방면으로 남하하였던 교도중대와 일본군 미나미의 대대본부, 그리고 중로분진대의 일부도 공주의 위급함을 듣고 공주로 향하여 공주 동쪽으로 50여리 떨어진 부강까지 왔다가 회덕·문의 지역의 농민군이 크게 위세를 떨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회군하여 돌아갔다.
1152) 공주성을 둘러싼 최초의 전투는 10월 23일 이인에서 벌어졌다. 경천에 주둔한 전봉준은 부대를 둘로 나누어 북접계 농민군을 이인쪽으로 보내고 자신은 효포로 향하였다. 이인역에 진을 치고 있던 농민군은 10월 23일 스즈끼 소위가 인솔하는 일본군 50여 명,
1153) 성하영의 경리청 1개 소대 병력, 구완희가 이끄는 감영병력 4개 분대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취병산까지 후퇴하였다가 다음날 이인에서 물러났으며, 관군도 감영으로 후퇴하였다. 10월 24일에는 대교까지 진격하여 진을 치고 있던 북접 옥천포의 농민군이 경리청 副領官 洪運燮의 공격을 받고 20여 명의 전사자와 6명의 생포자를 남긴 채 40, 50리 이상 퇴각함으로써 이들은 농민군본대의 공주성 공략에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2개 소대 병력을 이끌고 효포에 주둔하며 지키고 있던 홍운섭은 23일 밤 논산으로부터 경천을 향해 4만여 명의 농민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 자신들의 형세가 위태로와질 것으로 여겨 24일 새벽에 효포의 병력을 철수하여 대교의 농민군을 공격한 것이다.
같은 날 전봉준은 효포 건너편의 산쪽에 주력부대를 배치하고 있다가 홍운섭이 이끄는 경리청군이 大橋의 농민군을 공격하러 간 사이에 효포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성하영·백낙완이 이끄는 관군이 이들을 공격하였으며, 24일 저녁에는 공주에 막 도착한 森尾대위 인솔하의 일본군 100여 명과 이규태가 이끄는 관군이 가세하였다. 陵峙를 중심으로 농민군은 관군에 대항하며 일대 접전을 벌였다. 농민군은 일본장교가 보기에도 병법을 아는 자가 있다 할 만큼 민첩하게 대응하며 항전하였으나, 50∼70명의 전사자를 내고 거너편 時也山으로 후퇴하여 진을 치고 있다가 밤에는 경천으로 후퇴하였다. 효포에서 후퇴한 전봉준은 농민군의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다시 노성·논산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논산으로 물러난 전봉준은 흩어진 병사들을 불러 모으는 한편, 각지에 원병을 요청하며 농민군을 다시 결집시켰다. 전봉준은 김개남에게도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1154) 김개남은 이때 청주일대를 공격하는 중이었으며 공주전투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전봉준이 삼례에서 북상할 때 함께 출전할 것을 요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참위설을 빙자하여 남원에서 49일을 머문 김개남은 10월 14일 남원을 출발하여 북상을 시작하였다. 이때 농민군의 수는 8,000여 명이었으며, 16일 전주에 도착하였다. 22일 직전에는 삼례를 출발하여 22일 선봉대가 고산을 거쳐 금산을 점령하였다. 이후 금산은 11월 9일까지 농민군 수중에 떨어져 참혹한 보복을 당했다.
1155) 일본군에 밀린 김개남 부대는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11월 10일 오후 2시경 錦山 등지에서 鎭岑으로 진격하였다. 이들은 관청을 부수고 문서를 모두 불태웠으며, 창고를 털어 환곡을 탈취하는 한편, 읍내 민가를 침탈하여 재산을 빼앗았다. 이어 留鄕 및 公兄들과 邑屬들을 옥에 가두고 때려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 11일 정오 무렵에는 청주로 가기 위해 懷德 新灘津을 향해 출발하였다. 13일 오전 8시경 신탄진 방향에서 진격해 간 농민군은 청주성을 공격하였으나, 淸州에 들어와 있던 일본군 및 청주병영의 관군의 공격을 받아 2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크게 패하였다. 이들은 진잠방면으로 후퇴하여 13일 밤 다시 진잠을 공격하였으나 관군에 밀려 연산방면으로 도주하였다. 14일에는 청주에서 패하여 도주한 일군의 농민군이 신탄진에 모여 있는 것이 발견되기도 했다.
1156) 한편 전봉준은 논산일대에서 다시 결집한 농민군이 2만여 명에 이르자 노성과 경천으로 다시 진출하여 군량을 나르고 포대를 설치하며 전투를 준비하였다. 감영에서는 일본군과 관군이 3개의 부대로 나누어, 두 부대는 판치와 이인으로 나가 주둔하고 하나는 감영에 남아 있는 방식으로 서로 순환하며 농민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전투는 11월 8일 오후 3시쯤 시작되었다. 농민군은 두 갈래로 나누어 하나는 논산에서 곧장 고개를 넘어 오실산 옆길을 따라 이인을 향하여 공격해 왔고, 다른 부대는 노성현 뒷산과 경천쪽에서 판치와 효포를 공격하였다. 敬川에서 板峙로 진격한 농민군은 판치를 지키고 있던 구상조의 경리청병을 공주쪽 산 위로 밀어붙이고 효포 능치 일대의 산 위로 올라가 깃발을 꽂고 진세를 과시하며 관군과 대치하였다. 이인으로 진격한 농민군은 이인에 주둔하고 있던 성하영의 경리청군을 牛禁峙까지 후퇴시키며 공세를 펼쳤다. 이에 森尾대위가 일본군을 이끌고 와서 지원하며 맞섰으며, 성하영과 함께 이인에 나가 진을 치고 있던 백낙완은 농민군에 포위되었다가 저녁늦게야 포위망을 뚫고 감영으로 돌아왔다.
우금치가 위급해지자 11월 8일밤 森尾 대위는 우금치 옆의 가장 높은 봉우리로 올라가 진을 쳤다. 우금치 전투가 벌어진 11월 9일 아침 농민군은 동쪽으로 板峙 뒷산으로부터 서쪽으로는 鳳凰山 뒷기슭에까지 3, 40리에 걸쳐 마치 병풍을 펴놓은 듯한 진세를 펼치며 세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관군은 金鶴洞에 통위영 대관 吳昌成과 敎長 朴尙吉을, 陵峙에는 경리청 영관 洪運燮·具相祖, 대관 曹秉完·李相德 등을, 孝浦 烽燧臺에는 통위영 영관 張容鎭, 대관 申昌熙 등을, 우금치에는 성하영, 우금치 견준봉에는 백낙완을, 주봉에는 영장 이기동 등을 배치하였다. 농민군은 11월 9일 오전 10시쯤 이인에서 우금치방향과 오실 뒷산방향으로 나누어 공격하였다. 오후 8시경까지 양측은 치열한 공방전을 4, 50차례나 펼쳤다. 결과는 농민군의 패배였다. 농민군은 많은 손실을 입고 퇴각하였으며, 11일·12일 경에는 능치 등 공주 부근 산봉우리에 남아있던 농민군마저 관군에 쫒겨 계룡산 등지로 후퇴함으로써 20여 일에 걸친 공주공방전은 농민군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1157)1136) 9월 중순무렵 전라 각지 邑鎭 가운데 농민군에게 무기를 탈취 당한 곳은 29개 지역이었다(≪啓草存案≫, 고종 31년 9월 17일).
1137) 전봉준은 삼례에서 재기한 날짜가 10월 12일이라고 진술하였고(<全琫準供草>, 368쪽), 삼례를 출발하여 논산에 도착한 날은 12일이었다(≪東學亂記錄≫下, 382쪽).
1138) 金允植,≪續陰晴史≫上, 9月 18日(國史編纂委員會, 1960), 340쪽.
1139) <全琫準供草>, 325∼326쪽, 375쪽;<梧下記聞>, 253쪽.
1140) ≪東學亂記錄≫上, 276·279·407쪽.
1141) ≪東學亂記錄≫下, 382쪽.
1142) 10월 16일 일본군은 보은에서 체포한 농민군으로부터 “최시형은 14일 청산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15, 16일에 걸쳐 2만여 명의 농민군을 규합한 후 황간·영동을 경유하여 전주로 가서 전봉준과 합세할 계획이라”는 진술을 받아냈다(≪駐韓日本公使館記錄≫1, 219쪽).
1143) ≪東學亂記錄≫下, 382쪽.
1144) <全琫準供草>, 324·377쪽;<判決宣告書原本>(≪東學關聯判決文集≫, 政府記錄保存所, 1994), 30쪽;≪駐韓日本公使館記錄≫8, 51쪽.
1145) ≪駐韓日本公使館記錄≫1, 174쪽.
1146) <全琫準供草>(≪東學思想資料集≫壹), 319∼320쪽.
1147) ≪東學亂記錄≫下, 383∼384쪽.
1148) ≪東學亂記錄≫上, 79·222·406쪽.
1149) ≪東學亂記錄≫上, 419·426쪽;≪東學亂日記≫下, 10쪽.
1150) 공주전투에 대한 최근의 연구로는 이이화,<전봉준, 반제의 봉화 높이들다>(≪역사비평≫1990년 여름호);韓㳓劤,≪東學과 農民蜂起≫(전정판), 1992;鄭昌烈, 앞의 글, 1991;우윤,<공주대회전과 최후의 항전>(≪전봉준과 갑오농민전쟁≫, 1993);愼鏞廈,<甲午農民戰爭의 第2次農民戰爭>(≪東學과 甲午農民戰爭≫, 1993);서영희,<농민전쟁의 2차봉기>(≪1894년 농민전쟁 연구≫4, 1995);양진석,<1894년 충청도지역의 농민전쟁>(≪1894년 농민전쟁 연구≫4, 1995) 등이 있다.
1151) 전봉준은 공초에서 1만여 명이었다고 진술하였으며(<全琫準供草>), 10월 23일 경천으로 들어올 당시의 농민군 규모에 대해 관군측에서는 4만여 명으로(≪東學亂記錄≫下, 10쪽), 일본군측에서는 우금치전투 당시 농민군 규모를 2만여 명으로 각기 추산하였다(≪駐韓日本公使館記錄≫1, 247쪽). 대교방면에 집결해 있던 농민군의 수에 대해 관군측에서는 수만 명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민간기록에는 3, 4천명으로 되어 있다〔(<若史>(≪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2), 227쪽〕.
1152) ≪東學亂記錄≫上, 456쪽.
≪駐韓日本公使館記錄≫1, 304쪽;3, 310·387쪽;6, 29쪽.
1153) 관군측 기록에 따르면 이때 공주감영에는 100명의 일본군이 있었다고 하였으나〔≪東學亂記錄≫上, 439쪽;<公山剿匪記>(≪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2, 420쪽〕, 아직 서로분진대가 도착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鈴木이 거느리는 1개소대 병력 뿐이었다.
1154) <公山剿匪記>(≪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2), 429쪽;≪東學亂記錄≫下, 309쪽.
1155) 鄭昌烈, 앞의 책, 259쪽;李眞榮,<金開南과 동학농민전쟁>(≪한국근현대사연구≫제2집, 1995년);김양식,≪근대한국의 사회변동과 농민전쟁≫, 1996, 347∼350쪽.
1156) ≪東學亂記錄≫上, 499쪽, 504∼507쪽.
≪駐韓日本公使館記錄≫1, 249∼250쪽.
1157) 공주전투의 구체적인 전개과정에 대해서는≪駐韓日本公使館記錄≫1, 209∼210쪽, 246∼248쪽;≪東學亂記錄≫上, 228∼238쪽·426쪽·440∼444쪽;下, 10∼22쪽·28∼32쪽;<公山剿匪記>(≪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2)에서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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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항일연합전선의 추진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한 농민군들은 노성에 머물면서 다시 진영을 수습하려 하였다. 농민군은 東徒倡義所의 이름으로 11월 12일 京軍과 營兵, 吏校 및 市民에게 알리는 순한글로 된 고시문을 내걸어 斥倭와 斥化를 위해 동심합력할 것을 호소하였다.
고시경군여영병이교시민
"무타(無他)라 일본과 됴선이 국(開國) 이후로 비록 인방(隣邦)이 누(累代) 젹국(敵國)이더니 성상(聖上)의 인후(仁厚)심을 힘입어 삼항(三港)을 허(許開)하사 통샹이후(通商以後) 갑신십월의 흉(四凶)이 협적(俠敵)야 군부(君父)의 위(危殆)미 됴셕(朝夕)의 잇더니 종사(宗社)의 홍복(鴻福)으로 간당(奸黨)을 쇼멸(消滅)고 금년뉵월의
1158) 화간당(開化奸黨)이 왜국(倭國)을 쳐결(締結)여 승야입경(乘夜入京)야 군부(君父)를 핍(逼迫)고 국권(國權)을 쳔(擅恣)며 우황 방수령(方伯守令)이 다 화중 쇼쇽으로 인민을 무휼(撫恤)지 안이코 살륙(殺戮)을 죠하며 녕(生靈)을 도탄(塗炭) 이졔 우리 동도가 의병을 드러 왜적을 쇼멸고 화를 제어며 됴정(朝廷)을 쳥평(淸平)고 직(社稷)을 안보 양 의병 이르 곳의 병졍과 군교(軍校)가 의리를 각지 아니고 나와 졉젼(接戰) 비록 승(勝敗) 업스 인명이 피의 샹니 엇지 불샹치 아니 리요 기실은 됴션기리 샹젼(相戰)쟈 아니여늘 여시(如是) 골육샹젼(骨肉相戰)니 엇지 닯지 아니리요 공쥬한밧(公州大田) 일로 논지여도 비록 츈간의 보원(報怨) 것시라 일이 혹며 후회 막급이며 방금 군이 압경(壓京)의 팔방이 흉흉 폄벽도이 샹젼만 면 가위 골육샹젼이라 일변 각컨 됴션람 기리야 도(道) 혹은 다르 척왜(斥倭)와 척화(斥化)
1159) 기의(其義)가 일반이라 두어 글로 의혹을 푸러 알게노니 각기 돌여 보고 츙군(忠君) 우국지심(憂國之心)이 잇거든 곳 의리로 도라오면 샹의야 갓치 척왜척화(斥倭斥化)야 됴션으로 왜국이 되지 안이케 고 동심합녁야 를 이루게 올라
갑오 십일월 십이일
동도창의쇼(東徒倡義所)
1160) 같은 날 倡義所 명의의 한문으로 된 고시문(示京軍營兵)도 제시되었다. 그 요체는 양차에 걸친 공주전투에 대해 후회막급임을 밝히는 동시에 앞으로는 절대로 서로 싸우거나 죽이지 말고 힘을 합하여 보국안민하자는 것이었다.
1161) 제2차 농민전쟁, 곧 반일투쟁에서 보이는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위의 고시문에서 보이듯이 다양한 세력을 포괄하는 항일연합전선의 구축을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는 점이다. 우선 10월 16일 전봉준이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올린 글이나 위의 고시문에서 강조하는 관료 및 경군·영병에 대한 합세촉구는 제1차 농민전쟁에서는 거의 나오지 않았던 주장이다. 제1차 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은 吏胥層을 끌어 들이려는 노력은 보였지만, 관료들에게는 자신들의 행동이 반역이 아니며, 어쩔 수 없이 봉기한 것이라는 점을 호소하는 정도였지, 이들을 끌어 들이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1162) 또 농민군은 초기단계에서는 경군과는 적대행위를 삼가는 모습을 보여 주었지만, 영병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공격하였고, 4월 23일의 장성전투 이후에는 경군과도 거리낌없이 적대하였다.
1163)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군지도부는 농민전쟁에 임하기 이전부터 ‘반봉건’과 ‘반외세’의 과제를 동시에 포착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특히 전봉준은 손화중·김개남·최경선·김덕명 등 변혁지향적인 인물들 뿐만 아니라, 儒林을 비롯하여 褓負商·기름장수·鍮器장수·엿장수·솥장수를 포괄하는 다양한 세력과의 연합전선을 構想하였다.
1164) 5월 초 청·일 양국군이 조선에 출병한 이후 일본군이 내정개혁을 강요하는 데서 나아가 경복궁을 강점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키자 ‘반외세’, 특히 反倭문제는 전봉준의 초미의 관심으로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전봉준의 연합구상은 더욱 강화되어 갔다. 전봉준은 전라감사 金鶴鎭이 7월 6일 ‘共守全州 同赴國難’ 하자고 제의하자 고심 끝에 전주로 가서 전라감사 김학진과 ‘官民相和’를 맺고 함께 협력하여 국난을 극복하기로 약속하였으며, 士族이나 지주층까지도 포괄하는 ‘반외세’를 위한 ‘민족적 대연합’을 통해 광범위한 연합전선을 구축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주체적으로 연합전선을 추구하였다는 사실은 농민군의 역량이 그만큼 성장해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연합의 성격과 대상 면에서 제1차 농민전쟁과 제2차 농민전쟁은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농민군의 궁극적 목표는 ‘輔國安民’으로 집약할 수 있지만, 제1차 농민전쟁 시기에는 ‘安民’을 우선과제로 삼았기 때문에 반봉건 개혁을 위한 ‘계급중심의 연합’이었다. 이에 비해 제2차 농민전쟁 시기에는 ‘輔國’을 우선과제로 삼았기 때문에 斥倭斥化 투쟁을 위한 ‘반외세 연합’으로 그 성격이 변화하였다. 이렇게 볼 때 제1차 농민전쟁에서는 기본역량을 “양반과 부호 앞에 고통받는 民衆과 方伯守令 아래서 굴욕을 받는 小吏”에서 구하였지만
1165) ‘반봉건’ 개혁 특히, 민씨정권의 축출이라는 면에서 농민군과 개화파와의 연합가능성이 열려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제2차 농민전쟁에서는 개화파세력이 일본과 함께 가장 주요한 타도대상이 되었다. 반면에 “조상의 뼈다귀를 우려 행악을 하여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양반·보수유생층은 제1차 농민전쟁에서는 중요한 공격대상이었지만, 斥倭斥化를 1차적 과제로 한 제2차 농민전쟁에서는 보수유생층이 중요한 연합대상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1166) 객관적으로도 일본군의 침략행위가 명백해진 다음이었기 때문에 1차 기포에 비해 척사적 유생층들과의 연합 가능성은 그 만큼 넓혀져 있었다. 실제로 일부 유생들 사이에서는 ‘反倭倡義’ 움직임이 일어나기도 했다. 예컨대 공주의 유생 徐相轍은 7월 2일에 안동에서 향청 명륜당에 모이라는 반왜창의문을 돌렸고, 8월 초에는 집결한 의병이 2,000여 명에 달하자 태봉병참부를 공격한 다음, 청풍(9월 18일)·경기 광주 곤지암(20일) 등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고 곤지암쪽으로 피신하였다.
1167) 서상철은 위로는 縉紳으로부터 아래로는 匹夫에 이르기까지 임진왜란 때 참화를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음을 상기하면서 일본이 경복궁을 강점하여 국왕과 관료들을 협박하고 군대를 쫓아낸 일은 임진왜란 때보다 더 심하다고 하였다. 또 일본은 우리 나라의 백세의 원수이며, 우리 나라 일은 우리가 자주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有義君子들은 모두 무기를 들고 모이라고 촉구하였다.
1168) 9월 11일 전후 충청도 공주일대에서도 湖州大義所 명의로 “조정에서 密敎가 있었으며, 청나라도 우리 나라를 위해 진력하고 있으니” 輔國安民을 위해 창의할 것을 촉구하는 격문이 충청 각지에 발포되었다.
1169) 또 정확한 시점은 모르나 8월 말에서 9월 초로 추정되는 시기에 호남지역의 창의를 촉구하는 恩津義兵所 명의의 통문이 나돌았다. 조정에서는 매국자들이 원수의 군대를 불러 국왕을 협박하고 있으며, 大國에 저항하는 것은 의리상 잘못된 것이니 호남 53현에서 모두 창의하라고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뒤에 첨부된<의병소조약>에는 통문을 먼저 고산향교에 보내니 한 부를 베껴 놓고 다시 전주로 보내면 전주에서 여러 장을 만들어 각 읍으로 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1170) 이외에도 8월 28일 경상도 예천 花枝 都會에서 보수집강소로 보내는 통문에는 “오백년의 왕정에 倭酋가 득세하여 억조창생이 덕화를 입지 못하였다. 千里邦畿 어느 지역도 도탄에 빠졌으니 생령을 어찌 보존하겠는가. 바야흐로 지금 道中의 본의는 척왜다. (중략)도인은 곧 의병이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1171) 또 이미 9월 초에 倭賊을 섬멸하고 그들의 잔당을 토멸하자는 대회를 가진 바 있는 진주지역의 ‘東學黨’은 1894년 9월 10일 忠慶大都所의 명의로 다음과 같은 掛書를 내걸었다.
우리 나라는 옛날부터 소중화라 칭해 왔으며, 삼천리는 예의의 나라이고 풍부한 강토이다. 그러나 지금은 국운이 否塞하고 人道가 頹廢하므로 간신들이 화를 불러 들여 왜적들이 우리 국경을 침범하기에 이르렀다. (중략) 아! 東土의 의사들이여 어찌 피를 뿌리며 분개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가?
1172) 예천의 화지 도회를 제외하고 湖州大義所·恩津義兵所·忠慶大都所의 실체나 반일통문이 나온 배경은 정확히 확인하기 어렵지만 그 내용이나 정황으로 볼 때 적어도 유생층이 개입했거나 유생층을 반일투쟁에 적극적으로 끌어 들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임이 분명하다.
농민군측에서도 이들을 끌어 들이기 위해 격문이나 구호에서 보수적 측면을 강조하였다. 전봉준에 앞서 10월 15일 농민군측에서는 公州倡義所義將 李裕尙 명의의 글을 박제순에게 올렸다. 이 글에서 이유상은 “감히 묻건대 청나라를 막자는 것인가 일본을 막자는 것인가 의병을 막자는 것인가. 청나라를 막자는 것은 大義를 멸시하는 것이고, 義兵을 막자는 것은 그 계책이 잘못되었다. 일본을 막자는 것은 壬辰倭亂 이후 누군들 이러한 마음이 없었겠는가”
1173)라고 하여 역시 임진왜란 이래의 대일 적대감을 강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청에 대한 적대는 大義를 어그러뜨리는 것이라 하고 있어서 ‘反日親淸的’ 태도와 함께 斥邪的, 華夷論的 분위기를 보여 주고 있다.
전봉준도 10월 16일 박제순에게 보낸 글에서 ‘日寇’의 침략행위로 말미암아 국왕이 욕을 당하는 일, 조정대신(개화파-필자)들이 東夷와 連腸하여 국왕을 협박하고 백성들의 원한을 산 일 등을 임진왜란 당시 국왕이 욕을 당한 치욕·통분 등과 연결하여 강조하고 있다. 또 선왕의 적자로서 二心을 품은 자(개화파-필자)들을 공격하여 선왕조 오백년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일어섰음을 강조하며 박제순에게도 斥倭斥化투쟁에 동참할 것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전봉준의 글은 물론 ‘민족적 대연합’을 추진하기 위한 전술적 고려가 전제된 것이지만, 일본의 침략이라는 민족적 위기를 당하여 전봉준의 의식 속에 온존되어 있던 근왕주의적 의식이 강하게 표출되어 있다.
1174) 또 11월 13일의 고시문에서는 척왜척화를 위한 연합전선에 대한 강조와 동시에 반왜의식의 강렬함이 왜와 조약을 체결한 개화간당에 대한 소멸, 나아가 개화 자체에 대한 제어로까지 발전해 나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일부 유림에서는 농민전쟁이 일어나자 그 원인을 제공한 집권층의 부패를 비판하기도 하였고, 특히 斥倭와 관련하여서는 동정 내지 공감을 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일부 관리들과 유학자들은 농민군에 직접 가담하기도 하였다.
1175) 그러나 보수유생층으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이끌어내지는 못하였다. 관리나 유생 가운데는 농민군에 동조하거나 가담하는 인물도 있었지만,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연합으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대부분의 관리들이나 유생층은 민보군을 조직하여 반농민군활동을 벌이거나 일본과 연합한 민보군의 농민군 탄압에 침묵할 따름이었다.
연합을 이끌어내지 못한 가장 큰 요인은 보수층의 계급적 속성이나 이념적 한계 때문이지만, 여기에는 농민군의 역량이 항일연합전선을 구축해 낼 만큼 성장해 있지 못했다는 측면도 작용하였다. 집강소 시기 이래 곳곳에서 분출된 농민군 대중의 사적인 보복이나 약탈적 행동은 항일연합전선의 기반을 축소할 수 밖에 없었다. 충청도 예산 일대에서 기포한 접주 朴熙寅은 재기포 당시 “많은 道衆이 招募되었으나, 군율이 있을 수 없고 법적 규제가 지켜질 수 없는 이 烏合之衆으로는 日軍까지 합세한 관군과의 싸움은 아무리해도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 견해를 보이고 있었다.
1176) 이 점에서 전봉준이나 손화중 역시 다를 바 없었다. 8월말 무렵 전봉준은 농민군에 대해 “무리가 비록 많으나 烏合之衆이어서 쉽게 무너져 소망하였던 것을 끝내 이루지 못할 것이다”고 평가하였으며, 손화중은 농민군이 “어리석고 천하여 禍를 즐기거나 빼앗고 훔치는 일을 즐겨하는 무리들”이어서 일이 성사되기 어렵게 되었다고 평가하였다.
1177) 농민군 대중의 이러한 행동은 2차전쟁 시기에 들어 열세에 몰리게 되자 대중들을 강제로 동원하는 과정에서 더욱 심하게 노정되었다. “광양·순천 지방의 적은 거리낌없이 평민들을 협박하여 날마다 억지로 동학에 가입시켰으므로 백성들이 명령을 감당할 수가 없었으며”,
1178) “최근에 들리는 소문에는 비적들이 강제로 양민을 몰아서 모두 저들의 무리에 끌어 넣어 집을 버리고 생업을 잃어버린 채 울부짖게 만든다고 하는데 추종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열이면 아홉이나 된다”고 하였다.
1179) 10월, 11월에 들면서 강제로 농민군에 끌어 들이는 행동은 더욱 심화되었다. 일부 농민군 지도자가 선량한 양민을 전투시에 앞에 세우거나 돈을 받고 강제 징집을 면제해 준다거나,
1180) 일부 지역에서는 민인들을 강제로 동원하는 과정에서 돈을 받고 제외시켜 주는 사례가 나오기도 하였다.
1181) 이 점은 충청도나 경상도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1182) 지도부에서 추구한 보수유생과의 항일연합전선을 구축하는 데도 적지 않은 방해요인이 되었다.
1183)1158) 그 동안 학계에서는 ‘금년뉵월’이라는 구절을 두고 논란이 있었다. “개화간당이 왜국을 체결하여 승야입경하여 군부를 핍박하고 국권을 천자한” 사건은 문맥상 1894년 6월 21일 새벽에 일어난 일본군의 경북궁강점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東學亂記錄≫에는 ‘금년십월’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근 정창렬 교수가 국사편찬위원회에 보관되어 있는 원본 사진과 대조해 본 결과 ‘금년십월’은 ‘금년뉵월’의 오기임이 밝혀졌다. 그외에도 몇 군데 자구상의 오류가 있는 부분은 밑줄로 표기해 두었다. 이 자리를 빌어 자료를 보내주신 정창렬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1159) 원래 이 고시문은 순한글로 쓰여진 것이나,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활자화하면서 임의로 한문을 병기하였다. 이 과정에서 ‘척화’를 ‘斥華’로 기입하였으나, ‘斥化’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에 대해서는 鄭昌烈, 앞의 글, 1991, 253∼254쪽 참조.
1160) ≪東學亂記錄≫下, 379∼380쪽. 같은 날 농민군은 이와 비슷한 내용의 한문으로 된 격문<示京軍營兵>을 동시에 내놓았다(≪東學亂記錄≫下, 185∼186쪽).
1161) ≪東學亂記錄≫下, 185∼186쪽.
1162) 裵亢燮,≪東學農民戰爭硏究≫(高麗大 博士學位論文, 1996), 104∼108쪽 참조.
1163) 鄭昌烈, 앞의 글, 156쪽.
1164) 吳知泳,<東學史>(≪東學思想資料集≫2, 1979), 517∼519쪽;<東學史>(草稿本)(≪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 455쪽.
1165) <東學史>(≪東學思想資料集≫貳), 467∼468쪽.
1166) 裵亢燮,≪東學農民戰爭硏究≫(高麗大博士學位論文, 1996), 204∼213쪽 참조.
1167) 金祥起,<朝鮮末 甲午義兵戰爭의 展開와 性格>(≪한국민족운동사연구≫3, 1989), 46∼53쪽;朴宗根 著·朴英宰 譯,≪淸日戰爭과 朝鮮≫, 201∼208쪽.
1168) <日本外務省外交史料館 所藏文書>(≪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9), 428∼432쪽.
1169) <黃海道東學黨征討略記>, 公州湖西九接中(≪韓國民衆運動史資料大系≫1, 驪江出版社, 1986), 539쪽;<大阪朝日新聞>, 명치 27년 12월 1일자(≪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23, 1996), 126쪽.
1170) <隨錄>, 285∼290쪽.
1171) ≪甲午斥邪錄≫, 8월 28일조.
1172) ≪駐韓日本公使館記錄≫1, 140∼141쪽. 병사 閔俊鎬가 1년도 안되어 이임하고 倭의 세력을 업은 신병사가 부임하는 데 대한 부당함을 장황하게 역설하고 있다. 또 이들은 관군과 대적하여 싸우지도 않을 뿐 아니라 민준호도 이들을 탄압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기세를 도와준다고 하였다(≪駐韓日本公使館記錄≫1, 170쪽).
1173) ≪東學亂記錄≫下, 381∼382쪽.
1174) ≪東學亂記錄≫下, 383∼384쪽.
1175) 裵亢燮,<1894년 東學農民軍의 反日抗爭과 ‘民族的 大聯合’ 推進>(≪軍史≫35, 1997), 121∼124쪽 참조.
1176) <昌山后人 曺錫憲歷史>(≪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0), 137쪽.
1177) <梧下記聞>2筆, 210∼211쪽.
1178) <梧下記聞>3筆, 256쪽.
1179) <梧下記聞>3筆, 291쪽.
1180) <梧下記聞>, 279∼289쪽.
1181) <嶺上日記>(≪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2), 289쪽.
1182) 裵亢燮, 앞의 글(≪歷史學報≫153), 101쪽 참조.
1183) 이 점과 관련하여 집강소시기 “전라도 作亂의 일은 잘못된 것”이었다는 오지영의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東學史>, 5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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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농민군의 후퇴와 농민전쟁의 좌절
우금치에서 패배한 후 논산쪽으로 후퇴한 전봉준은 11월 14일 밤 강경·논산 어름에서 김개남 부대와 합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김개남은 11월 13일 청주전투에서 패배한 후 진잠을 거쳐 14일 연산에서 다시 집결하여 일본군 및 관군과 접전하였으나, 오후 5시쯤 노성·은진방면으로 퇴각하였던 것이다.
1184) 전봉준과 김개남 부대가 합세한 농민군은 15일 魯城 烽火山·논산 大村의 圓峯과 小土山·은진 黃華臺 등에서 추격하는 관군과 일본군 공격을 받고 오후 4시경에는 남쪽으로 후퇴하여 전라도로 들어갔다.
1185) 김개남부대가 합류하기 전인 14일 오후 노성 봉화대에 주둔해 있을 당시 농민군의 수는 공주전투시의 1만∼4만여 명에서 2,500명 정도로 줄어 있었다. 김개남이 합류한 이후인 15일에는 3,000여 명이었다.
1186) 남원에서 북상할 당시 8,000여 명에 달하던 김개남 휘하의 농민군은 500여 명에 불과할 정도로 위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1,000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전라도로 후퇴한 전봉준은
1187) 11월 19일 전주로 들어갔으며, 23일에는 금구쪽으로 이동하였다.
1188) 전주까지 전봉준과 김개남은 함께 행동하였으며, 자신들의 본거지인 이곳에서 흩어진 농민군을 다시 모아 최후의 항전을 준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23일 전주를 떠났으며, 이때 두 개의 부대로 나누어 전봉준은 고부·태인 방향으로, 김개남은 남원방향으로 간 것 같으며, 전봉준이 이끄는 부대는 적어도 6,000∼7,000명 정도는 되었다.
1189)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은 25일 원평에 도착하여 진을 치고 일본군 및 관군과 접전하였다. 오전 9시경에 시작된 전투는 오후 4시경에 끝났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37명의 전사자를 내었으며, 관군과 일본군은 回龍銃 10정·조총 60정·鉛丸 7石·화약 5櫃·子砲 10坐·刀鎗 200자루·米 500石·錢 3,000냥·木 10同·소 2마리·말 11필·牛皮 10장·虎皮 1令·文書 2籠 등을 노획하였다.
1190) 원평에서 물러나 태인으로 간 농민군은 11월 27일 태인의 주산인 성황산·한가산·도리산 등 3개 산 9개 봉우리에 진을 쳤다. 태인까지 추격해 온 관군과 농민군 사이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오전 10시부터 약 12시간에 걸쳐 농민군은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4, 50명이 생포되고 3, 40명이 전사하였으며 회룡포 15정, 조총 200여 정과 다수의 탄약·죽창·말 6필 등을 노획당하는 참패를 당하고 고부와 남원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이때 전봉준·金文行·劉公萬 등이 이끄는 농민군의 수는 8,000여 명이었으며, 경군은 230명, 일본군은 40명이었다.
1191) 전봉준은 태인전투에서 패한 후 농민군을 다시 결집하였으나 이미 더 이상 전투에 임할 대오조차 갖출 수 없었다. 전봉준은 여기서 농민군을 해산할 수 밖에 없었다.
1192) 사실 재기포를 시작할 당시 농민군의 역량은 일본군에 맞서 싸우기에는 취약하였다. 농민전쟁이 실패로 끝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제2차 봉기에 직접적으로 진압에 가담한 일본군에 비해 농민군의 군사력이 턱없이 취약하였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농민군은 관군측으로부터 노획한 회룡포(에피르)·回旋砲(캇트링)·極老砲(크르프)·레밍턴총이나 스나이더총과 같은 근대적 화기로 무장하기도 하였지만
1193) 대부분은 鳥銃으로 무장하였고, 그것도 없을 경우 창이나 죽창으로 무장하였다. 따라서 농민군측에서도 일본군과 1대 1로 맞설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농민군측에서도 농민군 100명 정도가 일본군 1명을 당해낼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1194) 또 일본군에 비해 조총은 사거리가 짧았기 때문에 전투에서 극히 불리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따른 전투상황을 황현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우리 나라 총의 사거리는 100보 정도에 불과하지만, 일본총의 사거리는 400∼500보도 더 되었으며, 불이 총대안에서 저절로 일어나 불을 붙이는 번거로움이 없었다. 따라서 비록 눈이나 비가 내린다고 하여도 계속 쏠 수 있었다. 적과 수백 보 떨어진 거리에서 적의 총탄이 미치지 못할 것을 헤아린 다음 비로소 총을 쏘았으므로 적은 빤히 쳐다보면서 감히 한 발 쏘지 못하였다.
1195) 이에 따라 일본군 1인이 농민군 수천 명을 당해낼 수 있고, 관군 1인은 수십 명을 상대할 수 있다는 극단적인 전력평가가 나오기도 하였다.
1196) 농민군 지도부에서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전봉준은 “동학당의 軍, 그 무리들은 훈련받지 못하였고 무기는 玩具와 같다. 사람, 무기 모두 정예한 일본군에 비길 수 있다고는 본디 믿지 않았다”고 하였고,
1197) 10월 16일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보내는<上書>에서도 자신들의 “하고자 하는 바가 극히 어려움을 실로 잘 알고 있다”고 하였다.
1198) 그러나 농민전쟁이 실패로 돌아간 또 하나 이유로 지적해야 할 점은 조직적 결합도나 의식 등 농민군 내부의 문제점이다. 농민군의 역량에 대한 위와 같은 부정적 평가도 농민군 내부의 문제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이것은 의식을 성장시키고 조직적 결합도를 강화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였던 집강소시기에 농민군이 전개한 개혁활동이 왜곡 내지 저지되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여기에는 외세의 개입이라는 정세변화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전봉준은 5월초 청·일군대의 조선진출이라는 예기치 않은 사태를 맞아 관심의 초점을 폐정개혁이라는 내부적 문제로부터 반외세 문제로 전환시켜 갔다. 이에 따라 전봉준은 5월 8일 전주성에서 철수한 이후 청·일군이 계속 주둔할 수 있는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농민군들의 私的인 雪憤행동을 엄금하고자 하였다. 이어 경복궁 강점이 일어나면서 반외세문제가 더욱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자 7월 6일 전라감사 金鶴鎭과 ‘官民相和’를 맺고 함께 협력하여 국난을 극복하기로 약속하였으며 士族이나 지주층까지도 포괄하는 ‘반외세’를 위한 ‘민족적 대연합’을 통해 광범위한 항일전선을 구축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반외세, 곧 반일투쟁이 당면과제로 제기되면서 연합의 내용과 대상이 바뀜에 따라 전봉준은 제1차 농민전쟁시기에 제기하였던 폐정개혁요구의 수위나 내용을 일정하게 양보 내지 유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官民相和’의 한 주체인 김학진의 입장과 크게 상치되거나 반외세투쟁을 위한 연합세력으로 인식하고 있던 보수유생층과 재산이 있는 자들을 자극할 경우 압도적 힘의 우위를 가진 외세의 침략행위를 목전에 두고 敵前分裂을 자초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전봉준은 급격한 폐정개혁활동을 자제하면서 ‘官民相和’에 입각한 체계적인 폐정개혁을 추진해 나가는 한편 농민군의 私的인 雪憤행위를 제지시켰다.
그러나 전봉준의 이러한 생각과 행동은 농민군의 그것과는 달랐다. 각지에서 치안의 공백을 틈타 등장하였던 ‘무뢰배’들은
1199) 논외로 치더라도, 집강소시기 농민군의 주력층을 이루던 것은 신분적으로는 상천민, 계급적으로는 소빈농이었다. 집강소 시기에는 천민층이 집중적으로 입도하였고,
1200) 농민군의 활동도 대체로 향촌사회에 着根하지 못한 유랑적 부류에 의해 이루어졌다.
1201) 이러한 농민군 대중과 일부의 지도자들은 ‘민족적 모순’보다 ‘계급적 모순’에 더 관심이 많았다. 이들은 ‘경제적 균산주의’와 ‘사회적 평등주의’에 입각한 민중적 이상사회의 실현을 추구하였으며, 그들이 평소에 품어 왔던 양반과 지주에 대한 원초적 반감이나 저항의식이 폭력을 수반하며 집단적으로 표출되었다.
1202) 이에 따라 전봉준과 농민군 대중 간에는 갈등과 균열상이 노정되었고, 지도부 간에도 내분의 조짐이 일어났으며,
1203) 그렇지 않아도 느슨하던 농민군 내부의 결합도는 더욱 취약해졌다. 이러한 사정에 대해 농민군 진압에 투입되었던 후비보병 독립 19대대장 南小四郞은 농민군 조직에 대해 6월 이전에는 농민군에게 일정한 지휘계통이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각 지방에는 각각 巨魁라고 하는 자가 있어서 配下를 통솔하지만, 거괴들을 통솔하는 대거괴는 없다 …… 각 거괴는 각자의 의견에 따라 각 지방에서 기포하여 자기 의사를 결행하려고 한 것 같다”
1204)고 할 정도로 조직적 결합은 느슨하였다.
초기에 보여준 농민군들의 엄격한 기율도 약화되면서 제2차 기포 초기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김개남은 자기 휘하의 중간 지도자인 남응삼에게 10월 旬頃 기병할테니 무리를 이끌고 올 것을 요청했으나 불응하였다. 이때 남응삼의 書記는 김개남을 ‘烏合之卒鼠竊之將’이라 하며 출전하자마자 패배할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1205) 9월 16일 청풍에서도 내분이 일어나 동학도들이 접주를 무기로 위협하면서 “너는 왜 우리를 간교한 말로 동학에 끌어들였느냐. 이제는 하루 속히 사죄하고 우리 모두가 화를 입지 않도록 하라”하고 상주부에 그를 송치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1206) 논산에서 공주로 북상하는 과정에서도 농민군 내부의 결속도가 저하되고 있었다. 매일 點考할 때마다 闕額이 수백 명에 달하였고, 추위와 배고픔을 못이겨 도망하는 자가 많았으며, 서로 선봉에 서기를 꺼려 내분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따라 충청감사 박제순은 이때 농민군을 공격하면 쉽게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며 빨리 지원병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1207) 전봉준은 우금치전투에서 “두 차례 접전 후 1만여 명의 군병을 點考하니 남은 자는 3천여 명을 넘지 않았으며, 그후 또 두 차례 접전한 후 점고하니 5백여 명에 불과했다”고 하였으며, “금구에 이르러 다시 초모하였을 때 농민군의 수는 증가되었으나, 기율이 없어 다시 개전하기 어려웠다”고 진술하였다.
1208) 이러한 사정은 농민군 내부의 결속도가 그만큼 취약하였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거기에는 ‘민족적 모순’을 중시하는 전봉준 등 지도부와 ‘사회적 평등주의’와 ‘경제적 균산주의’에 입각하여 ‘계급적 모순’을 중시하던 일부 지도자와 빈농·천민으로 구성된 농민군 대중 사이에 가로 놓여 있던 이념 내지 지향에서의 차이가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이상과 같이 전봉준이 적극적으로 추진한 ‘민족적 대연합’에 의한 항일전선의 구축이 실패하고 농민군 내부의 결속도마저 취약해진 상태에서 우세한 화력으로 압박해 오는 일본군 및 관군의 연합세력을 상대하기는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공주전투를 고비로 농민군은 퇴각의 길을 걷게 되었고, 농민군지도자들이 체포됨으로써 농민전쟁은 좌절하고 만다.
전봉준은 11월 29일 입암산성을 거쳐
1209) 김개남과 만나기 위해 순창 피로리로 잠입하였다가 12월 2일 밤 주민 한신현 등이 끌고 온 주민들에게 체포되었다. 전봉준 스스로는 상경하여 서울의 정국을 상세히 탐지하기 위해 상경하려다가 체포되었다고 하였다.
1210) 전봉준은 순창관아에 수감되어 있다가 12월 7일 일본군에 인계되어 초토영이 설치되어 있던 나주로 이송되었으며, 최경선과 함께 임시로 설치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1211) 3월 29일 처형되었다.
1212)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 농민군은 공주전투에서 패배한 뒤 논산·전주를 거쳐 원평·태인전투까지 전봉준과 행동을 함께 하였다. 태인전투 이후에는 순창을 거쳐 최시형이 머물고 있는 임실로 가서 합류하였다. 이후 북접 농민군은 장수를 거쳐 금산·茂朱 등지를 거치는 동안 전투를 치르며 북상하여, 12월 9일에는 黃澗을 공격한 후 12월 10일경에는 永同 龍山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12월 12일 관군 및 보부상, 민보군의 공격을 받고 報恩·청주로 퇴각하였다.
1213) 이후 靑山을 거쳐 報恩 鐘谷에 진을 치고 있던 북접 농민군은 12월 17일 밤부터 12월 18일 일본군과 尙州 민보군의 공격을 받아 3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화양동을 거쳐 충주 외서촌으로 갔으나, 다시 관군의 공격을 받았다. 12월 24일에는 忠州 無極장터에서 관군의 공격을 받아 농민군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최시형·손병희 등 북접의 지도자들은 이때 잠적하여 체포되지는 않았다.
1214) 김개남은 11월 23일 전주에서 남원 방면으로 퇴각하였다가, 12월 1일 태인 종송리에서 강화영병에게 체포되었다.
1215) 심영의 중군 황헌주가 김개남을 포박하여 12월 2일 전주로 이송하였다. 이도재는 전주 인근에 아직 농민군들이 다수 둔취해 있을 뿐만 아니라 서울로 이송도중에 탈취당할 염려가 있다는 이유로 12월 3일 오후에 참수하고, 수급만 서울로 보냈다.
1216) 광주에서 활동하던 손화중과 최경선은 11월 27일 광주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전봉준부대가 태인에서 패하고 전봉준이 입암산성으로 들어간 직후인 12월 1일 손화중은 부하들을 해산하고 광주를 떠나 고창으로 잠입하였으며, 12월 11일 고창에서 주민들에게 체포되어 고창현에 갇혀 있다가 일본군에게 넘겨졌다.
1217) 최경선 역시 12월 1일 귀화한다는 방문을 남기고 광주를 떠나 잠입하였다가 12월 3일 화순 동복에서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인도되었다. 손화중과 최경선은 전봉준과 같이 나주에 수감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되었다.
1218)<裵亢燮>
1184) ≪駐韓日本公使館記錄≫1, 252쪽;<梧下記聞>3筆(≪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 268쪽;≪東學亂記錄≫下, 463쪽.
1185) ≪東學亂記錄≫上, 245∼248·317∼319·523∼530쪽;下, 39∼43·187∼189쪽.
1186) ≪駐韓日本公使館記錄≫1, 253쪽. 관군측에서는 이때 농민군의 수를 만여 명이라 하였다(≪東學亂記錄≫下, 39쪽).
1187) 전라도 쪽으로 후퇴할 당시 농민군의 수는 1,000명 정도였다(≪東學亂記錄≫上, 318쪽, 528쪽;≪東學亂記錄≫下, 43쪽).
1188) <札移電存案>, 甲午 11月 30日(≪各司謄錄 63:啓草存案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2), 288쪽.
1189) ≪駐韓日本公使館記錄≫6, 45쪽. 관군측에서는 23일 금구 원평으로 간 농민군이 數三千명, 25일 원평에 집결해 있는 농민군의 수가 1만여 명 이상인 것으로 보고하였다(≪東學亂記錄≫上, 553쪽;下, 199쪽).
1190) ≪東學亂記錄≫上, 553쪽.
1191) ≪東學亂記錄≫上, 326∼327쪽·565∼566쪽. 일본군은 태인전투시에 농민군의 수가 대단히 많아 수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하기도 했다(≪駐韓日本公使館記錄≫6, 44∼45쪽). 관군측에서는 8,000명, 혹은 5,000∼6,000으로 추산하기도 했다(≪東學亂記錄≫上, 565·327쪽;下, 85쪽).
1192) <全琫準供草>, 320쪽.
1193) ≪駐韓日本公使館記錄≫1, 161쪽;≪駐韓日本公使館記錄≫6, 28쪽.
1194) ≪駐韓日本公使館記錄≫1, 217쪽.
1195) <梧下記聞>3筆, 254∼255쪽.
1196) ≪東學亂記錄≫上, 91쪽.
1197) <東京朝日新聞>, 명치 28년 3월 5일(≪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22), 366쪽.
1198) ≪東學亂記錄≫下, 382쪽.
1199) <梧下記聞>首筆, 108·110쪽.
1200) <梧下記聞>수필, 109쪽.
1201) <兩湖電記>(≪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6), 148쪽.
1202) 裵亢燮, 앞의 글(1996), 154·159쪽 참조.
1203) <梧下記聞>首筆, 110쪽.
1204) ≪駐韓日本公使館記錄≫6, 25∼26쪽.
1205) <甲午略歷>, 74∼76쪽.
1206) 박성수 주해,≪渚上日月≫, 갑오년 9월 16일조, 217쪽. 상주에서도 교도들이 접주를 잡아 笞杖을 치며 “너 때문에 우리들이 이 지경이 되었다”고 하며 해산한 일이 있었다(위와 같음, 9월 19일조, 217쪽).
1207) ≪東學亂記錄≫上, 222·399·406쪽;下, 79쪽.
1208) <全琫準供草>(≪東學思想資料集≫壹), 320쪽.
1209) ≪東學亂記錄≫下, 287·300쪽.
1210) ≪東學亂記錄≫上, 253·574·580쪽;下, 208쪽;<全琫準供草>, 320쪽.
1211) ≪東學亂記錄≫上, 61∼62·611쪽;下, 221쪽.
≪駐韓日本公使館記錄≫6, 52쪽;<梧下記聞>3筆, 309쪽.
1212) <二六新報>, 명치 28년 4월 26일(≪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22), 272쪽.
1213) <天道敎會史草稿>(≪東學思想資料集≫壹), 468∼469쪽;<天道敎創建史>(≪東學思想資料集≫貳), 156∼157쪽;≪駐韓日本公使館記錄≫3, 250쪽;≪駐韓日本公使館記錄≫6, 68∼70쪽;≪東學亂記錄≫上, 619쪽;≪東學亂記錄≫下, 73쪽.
1214) ≪駐韓日本公使館記錄≫6, 68∼70쪽;<天道敎會史草稿>(≪東學思想資料集≫壹), 470쪽;申榮祐,≪甲午農民戰爭과 嶺南 保守勢力의 對應≫(延世大 博士學位論文, 1991), 265∼266쪽.
1215) ≪東學亂記錄≫上, 579쪽.
≪東學亂記錄≫下, 60쪽, 218쪽.
≪駐韓日本公使館記錄≫1, 197쪽.
1216) ≪駐韓日本公使館記錄≫1, 197쪽;6, 2∼4쪽, 8쪽.
황현은 감사 이도재의 심문에 대해 김개남이 “우리들이 한 일은 모두 대원군의 은밀한 지시에 의한 것이다. 지금 일이 실패한 것은 또한 하늘의 뜻일 뿐인데 어찌 국문한다고 야단이냐”고 하였기 때문에 김개남을 살려 두었다가는 혹여 난을 불러올까 두려워 서울로 이송하지 않고 전주에서 목을 베어 죽였다고 하였다(<梧下記聞>3筆, 302∼303쪽;<嶺上日記>(≪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2), 294쪽).
1217) ≪東學亂記錄≫上, 572쪽;≪東學亂記錄≫下, 206쪽, 709쪽;≪舊韓國官報≫1, 867∼878쪽.
1218) ≪東學亂記錄≫上, 572쪽;≪東學亂記錄≫下, 206, 288, 707쪽;<梧下記聞>3筆, 3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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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학농민전쟁의 역사적 의의
1) 결합의 유대
1894년의 농민전쟁에서는 사람들이 전쟁에 참가하는 결합방식이 다양하고 다원적이었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것으로는 농민들의 결합·유대 형성에 동학교문의 조직이 크게 기여하였다는 사실이다. 동학교문의 接主가 그대로 농민군의 지도자인 경우가 많았다. 1895년 2월 11일의 제2차 법정신문에서 전봉준은 “이른바 접주는 모두 동학이었고 그 이외의 구성원은 충의의 자원자(忠義之士)가 많았다”
1219)고 하였고 1895년 2월 9일의 제1차 법정신문에서는 “고부민란 때에는 寃民과 동학이 합세하였지만 동학은 적었고 원민이 많았다”
1220)고 하였다. 동학의 조직도 더러는 농민전쟁의 진전에 따라 창출되기도 하였으니 전봉준은 “접주·접사는 기왕에 본래 있었으나 혹은 기포시에 창설되기도 하였다”
1221)고 말하고 있다.
동학교문의 조직이 농민군의 결성에 하나의 결합원리로 될 수 있었던 것은 동학의 교리가 일정하게 백성의 希願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였지만 공주·삼례·광화문·보은 등지에서의 교조신원운동을 통하여 특히 호남지역의 동학교문이 혁명적인 방향으로 크게 기울었기 때문이었다. 동학교문의 조직이 농민군의 결합원리로 됨으로써 농민운동이, 종래 고을의 차원으로 폐쇄되어 있었던 지역국지성에서 벗어나 한 道를 포괄하는 지방의 차원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농민군의 결성에 또 하나의 결합원리로 등장한 것은 고을공동체에 있어서의 鄕權에 이미 상당하게 진출하였던 새로운 향임층으로서의 농민적 향권세력이었다고 보여진다. 고을공동체의 기본단위인 촌락공동체의 향임에서 上尊位는 양반이 담당하고 閑丁塡代·還上 등의 실무는 평민에서 차출되는 副尊位의 담당이었다. 조선후기, 시대가 내려올수록 촌락공동체=里의 향직인 존위·里正·집강 등은 평민이 담당하는 것이 더욱 일반화되어 갔던 바, 1889년 전라도의 어느 고을에서는 평민이 座首가 되기도 하였으며, 따라서 향권의 주도권을 두고 士族과 평민층간에 대립과 각축전이 전개되었다.
1222) 1862년 3월 16일에 발생한 咸陽민란에서는 ‘향권을 장악하려는 목적’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1223) 그 해의 다른 민란들에서도, 향임·향리에 대한 철저한 응징이 공통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향권쟁취의 의식이 있었다고 짐작된다.
1224) 농민전쟁의 5∼9월의 단계에서 시행된 집강소는 형식에 있어서 종래의 향소의 집강제도를 계승한 것이며
1225) 1893년 11월의 金溝院坪 전봉준 세력집단의 ‘사발통문’에서도 통문의 수신자가 各里 里執綱으로 되어 있는 사실로 보아 농민전쟁에서 농민의 결합원리의 하나가 농민적 향권세력을 중심으로 한 사회관계였다고 생각된다.
또 하나의 결합원리는 각 고을의 지역적 반란을 하나의 유기적인 지방반란으로 통합한다는 원리였다. 1894년 1월 11일에 발생한 고부민란은 농민전쟁의 단서를 이룬 것이었으며, 민란 이후 전봉준이 3월 20일의 본격적 농민전쟁 때까지 대세를 관망하면서 기다렸던 것은 고부민란의 각 고을에로의 확산을 기다린 것이었다. 안핵사 이용태의 만행에 격분하고 있는 전라도의 고을들에 통문을 발하여 전면적으로 봉기할 것을 제기하였고 무장·고창·홍덕·태인·정읍·김제·금구 등에서 농민군 8천여명이 이에 호응하여 백산에 집결하였다.
이렇게 집결한 농민군은 대장에 전봉준, 총관령에 손화중·김개남, 총참모에 김덕명·오시영, 영솔장에 최경선, 비서에 송희옥·정백현으로 하여 연합체로서의 체제를 갖추었다.
1226) 그러나 이것은 “내가 일체를 지휘하였다”
1227)는 유기적 통일체로서의 연합체라는 전봉준의 법정진술과는 달리 형식상의 체제에 불과하였다. 각 농민군 부대는 각기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5월 이후의 집강소 단계에서도 “전봉준은 수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금구원평에 근거하여 전라우도를 장악·지휘하였고 김개남은 수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남원에 근거하여 전라좌도를 장악·지휘하였으며 그밖에 김덕명·손화중·최경선 등도 각기 한 지방을 근거하였”
1228)듯이 전라일대를 각 농민군 부대장이 분할·장악하였으며, 5월 중순 이후 전봉준은 금구·김제·태인·순창·남원·운봉·옥과·담양·장성·창평·순천 등 전라좌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손화중은 전라우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정부와의 협조에 의한 집강소 개혁의 실시를 각 농민군 부대에 권유하였던 것이다.
1229) 그러나 김개남은 정부와의 협조하에 집강소에 의한 개혁정치의 실시를 권유하는 전봉준의 제의를 끝내 거절하였기 때문에 이후 김개남과 전봉준은 서로 상의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1230) 그러나 전라도 일대 고을마다의 집강소가 전혀 독립적이지는 않았다. 집강소의 총본부를 전주에다가 두고 이를 大都所라고 하였으며 “전봉준은 귀화하였다고 일컫고 단신으로 감영에 들어와 감사의 일을 맡아 하였다. 감영의 關文·甘結은 반드시 전봉준의 결재가 있은 연후에야 열읍에서 거행하였다”
1231)라고 하듯이 형식상으로는 전봉준 대도소가 통일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농민전쟁의 결합원리는 지역적 반란을 하나의 유기적인 지방반란으로 통합해 나아가려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결합원리는 貪虐 증오의 共感에 의한 心情的 紐帶였다. 黃玹은 제1차 농민전쟁의 茂長에서의 발발에 대하여 “동학은 代天理物하고 輔國安民하며 죽이거나 약탈하지 않으며 오직 탐관오리만은 용서하지 않는다라고 倡言함에 愚民이 響應하고 右沿 일대 10여읍이 일시에 봉기하니 열흘 남짓 사이에 수만명에 이르렀다. 동학이 난민과 합함이 이에서 시작되었다”
1232)라고 하고 또한 호남에서는 財物이 풍부하여 수령과 아전의 탐학이 가장 심하였고, 따라서 서울의 속담에서는 “아들을 낳아서 호남에서 벼슬살이 시키는 것이 소원이다”라고 하였으며, 그러므로 호남에서는 民과 吏가 서로 미워하고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함이 ‘백대에 걸친 원수 갚기’와 방불한 바가 있다고 하였다.
1233) 이러한 상황에 겹쳐서 趙弼永이 전운어사로 와서 교묘하게 名目을 늘리고 稅 위에다가 稅를 첨가하여 호남 전체가 병들고, 金昌錫이 均田御使로 내려와서는 白地徵稅하고 國結을 宮庄으로 돌림으로써 湖南右道가 더욱 병들고, 게다가 金圭弘·金文鉉의 탐학이 겹쳐서 千金의 부자는 밤에도 잠을 못잘 만큼 불안하였고, 小民은 假貸할 데가 없어서 숨을 헐떡이고 있다고 黃玹은 지적하였는데,
1234) 요컨대 庶民富豪와 小民이 모두 감사·관리·수령·아전에게 수탈당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姦民思亂者가 庶民富豪와 小民을 선동함에 이에 그들이 東學黨에 저자에 몰려가듯이 몰려드니, 호남우도에서 호남좌도의 골짜기까지 동학당이 없는 곳이 없었다”
1235)라고 하였다.
전라도의 사정 특히 전라우도의 사정이 이러하였기 때문에 “창의문이 한번 세상에 떨어지자 백성들의 수선거리는 소리는 참 굉장하였다. 옳다 인제는 잘 되었다. 天理가 어찌 무심하랴. 이놈의 세상은 얼른 망해야 한다. 망할 것은 얼른 망해버리고 새 세상이 나와야 한다”
1236)는 반응이 일어났던 것이다. 따라서 3월 말에는 “3월 20일 이후 (중략) 수령은 모두 도망하고 아전 군교도 따라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賊이 오기도 전에 邑內가 먼저 텅텅 비어버린다. 또 여러 고을이 본래 성곽이 없고 (중략) 설사 금성탕지라 한들 民이 평소에 수령과 아전을 원망하는데, 누구와 더불어 지킬 것인가. 이로 말미암아 누구하나 衆民에 호소하여 城을 지키려는 자가 없었다. 城이 떨어졌다는 소식은 날마다 들리지만 실인즉 賊은 일찍이 하나의 城도 포위공격한 일이 없었다”
1237)는 것처럼 농민전쟁에의 民의 호응이 있게 되었다.
이러한 탐학증오의 심정적 공감대를 탐학증오라는 소극적 레벨에 정지시키지 않고 적극적 代案으로, 추상적으로 높은 차원에까지 레벨엎시킨 것이 民惟邦本이념이었다. 즉 이러한 심정적 공감대가 민유방본이념의 기반으로 되었던 것이다.
국가에는 누적된 빚이 있으나 갚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교만과 사치와 음란한 일만을 거리낌없이 일삼으니, 八路는 魚肉이 되고 만인은 도탄에 허덕이도다.
守宰가 貪虐하니 백성이 어찌 곤궁치 아니하랴. 백성은 국가의 근본이라, 근본이 쇠잔하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는도다.
1238) 탐학행위와 민유방본은 항상 대극의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었다. 포고문에서는 위에 바로 이어서 “輔國安民의 방책을 생각지 아니하고 밖으로 鄕第를 설치하여 오로지 제 몸만을 위하고 부질없이 國祿만을 도적질하는 것이 그 어찌 옳은 일이라 하겠는가! 우리는 비록 초야의 유민일지라도 나라에 몸붙여 사는 자라, 국가의 危亡을 앉아서 보겠는가! 八域이 마음을 합하고 수많은 인민이 뜻을 모아 이에 義旗를 들어 보국안민으로써 死生의 맹세를 하노니, (하략)”
1239)라고 하여, 민유방본이념을 조금 현실화하여 輔國安民이념을 내세우고 있다. 보국안민이념을 더욱 level down시켜서 현실화하고 구체화한 것이 농민군의 폐정개혁안 27개조였다.
東徒가 격문을 전하여 그 취지를 명백하게 한 때에 이르러서는 公州監營의 高官(監司 아래 3번째 되는 重職人과 면회할 때 친히 同官의 말을 들었다 함)과 같은 사람도 東徒가 열거하는 時弊는 어쨌든 가장 중요한 것에 해당되는 것으로써 東徒가 일을 일으킨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라고 공언할 정도이다. 일반의 감정이 이와 같은 이상 지방의 弊政을 근저까지 革除하지 않는 이상 東徒는 가령 일시 해산한다 해도 다른 날에 기회를 기다려 재연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저들은 한통의 請願書를 남기고 全州를 떠나 長城地方으로 갔으나, 그 후 그 請願이 관철되지 않으면 그 지방의 東徒들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이 떠들썩하였다.
1240) 위의 상황은 5월 10∼15일의 것이지만, ‘동도가 열거하는 時弊’는 농민군의 폐정개혁안 27개조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렇게 폐정개혁 27개조가 농민들에게 현실적합적인 것으로 인식된 것은, 기본적으로는 탐학증오의 심정적 유대에 의하여 농민들이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또 다른 결합의 원리는 공동의 힘으로 侵漁를 막아내는 것이었다.
各地道人이 解歸以後에 各地官吏들의 東學黨 逮捕侵虐이 前日과 조금도 다름없어 安居의 望이 없는지라 道人들은 할 수 없이 官屬과 對抗策을 講究할 밖에는 다른 道理가 없음을 알고 各包各接이 서로 團結을 지어 어느 地方에서 일이 생기든지 하면 그 卽時로 보발을 띄워 그 附近으로부터 솔밭을 흔들고 일어서서 잡혀가는 사람을 빼앗아 놓기로 하였다. 그렇게 團結이 되었기 때문에 제골서 잡으러 온 將校使令이라든지 鎭營이나 監營이나 서울에서 내려온 捕校라 할지라도 東學黨을 잡아갈 때에는 東學黨이 四面으로 쏟아져서 捕校들을 둘러싸고 잡힌 사람을 빼앗아간 일이 많았었다. 이러한 일은 忠淸道나 慶尙道보다도 全羅道에서 먼저 생겼으며 全羅道에서도 井邑 大接主 孫和中包에서 먼저 始作이 되었었다.
1241) 이것은 1893년 보은취회 해산 후의 상황이지만 주로 전라도 지역, 그 중에서도 孫和中包의 경우에 많았던 경우로서 무리의 힘으로 侵漁를 막아내는 것이었는데, 包에로의 결집에 현실적인 유대로 기능하였다. 1894년 5월 20일 李偰은 상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242)臣은 오랫동안 시골에 살면서 요즈음 方伯守令들의 행위를 보면, 報國의 마음은 없이 肥己의 욕심만 있어서, 혹 부지런히 힘써 농사짓거나 장사하여 밥술이나 먹는 백성이 있으면 어거지로 匪類로 몰거나 무거운 죄목을 씌워서 옥에 가두고 차꼬 채워 닥달한다. (중략) 이 때 東學徒가 꾀어서 말하기를 ‘자네가 우리 당에 들어오면 侵漁를 면할 수 있고 이런 고생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민이 이에 줄지어 동학당에 들어갔다. (중략) 이것이 東徒와 亂民이 합하여 하나로 되는 까닭이다.
공동의 힘으로 侵漁를 방어하는 결합의 원리는 특히 ‘勤力農商 可繼朝夕者’인 中農이나 商人이 농민군에 합류하는 데에 큰 誘因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4월 하순의 시점에서 富商豪農이 농민군에 돈과 곡식을 제공하여 농민군은 군량에 차질이 없었고,
1243) 나아가서는 豪農紳商이 적지 않게 동학당에 참여하였는데
1244) 참여의 이유는 앞에서와 같은 수탈에서 벗어나고 富 축적의 안정을 원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1245) 예컨대 順天의 李士維, 麗水의 金成五는 富民으로서 농민전쟁 때의 接主·巨魁였다.
1246)1219) <全琫準供草>, 을미 2월 11일, 再招問目(≪東學亂記錄≫下, 국사편찬위원회, 1971), 535쪽.
1220) 위와 같음, 을미 2월 9일, 招招問目, 위의 책, 525쪽.
1221) 위와 같음, 을미 2월 11일, 再招問目, 위의 책, 535쪽.
1222) 金仁杰,<朝鮮後期 鄕權의 추이와 지배층 동향>(≪韓國文化≫2, 1981), 178∼182쪽.
1223) <右兵營狀啓 6月 25日>(≪壬戌錄≫, 국사편찬위원회, 1958), 45쪽.
1224) 鄭昌烈,<백성의식·평민의식·민중의식>(≪역사와 인간≫변형윤·송건호 편, 두레, 1982), 20쪽.
1225) 瀨古邦子,<甲午農民戰爭期에 있어서 執綱所에 대하여>(≪朝鮮史硏究會論文集≫16, 1979), 127쪽.
1226) 吳知泳,≪東學史≫(永昌書館, 1940), 111∼112쪽.
1227) <全琫準供草>, 을미 2월 11일, 再招問目(≪東學亂記錄≫下), 537쪽.
1228) 鄭碩謨,<甲午略歷>(≪東學亂記錄≫上), 65쪽.
1229) <全琫準供草>, 을미 3월 7일, 四次問目, 위의 책, 551쪽.
1230) 위의 책, 558쪽.
1231) 李容珪,≪若史≫2.
1232) 黃 玹,≪梧下記聞≫1, 47쪽.
1233) 위의 책, 41쪽.
1234) 위의 책, 42쪽.
1235) 위와 같음.
1236) 吳知泳, 앞의 책, 109∼110쪽.
1237) ≪梧下記聞≫1, 50쪽.
1238) 吳知泳,<倡義文>(≪東學史≫), 108∼109쪽.
<東匪討錄>(≪한국학보≫3, 1976 여름호, 일지사), 235쪽.
黃 玹,≪梧下記聞≫1, 48∼50쪽.
‘茂長東學輩布告文’<聚語>(≪東學亂記錄≫上), 142∼143쪽. 이 布告文은 전봉준이 쓴 것이라고 생각된다. 茂長봉기를 전봉준이 주도하였고, “전봉준 자신의 집필이었다고 전하는 만큼”(이선근,≪한국사 현대편≫, 을유문화사, 1963, 58쪽) 이라는 점에서 그렇게 추정된다.
1239) 위와 같음.
1240) ≪주한일본공사관기록>3, 215쪽.
1241) ≪東學史≫, 86∼87쪽.
1242) ≪梧下記聞≫1, 90쪽.
1243) ≪萬朝報≫, 명치 27년 6월 8·9일.
1244) ≪二六新報≫, 명치 27년 6월 10일.
1245) ≪萬朝報≫, 명치 27년 6월 10일.
1246) ≪廉記≫, 경자 10월(洪性讚,<1894년 집강소기 設包下의 향촌사정>(≪東方學志≫39, 1983), 106쪽에서 재인용).
==
2) 경제적 지향
1894년의 농민전쟁은 3월의 제1차 농민전쟁, 6월의 집강소, 9월의 제2차 농민전쟁이라는 세 단계로 발전하였고 그 과정에 따라 농민군의 사회경제적 지향도 성장·발전하였으므로 편의상 세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려고 한다.
3월 20일에서 5월 8일까지의 제1차 농민전쟁의 단계에서 농민군은 전라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각지에서 그들의 정치적 요구와 지향을 나타내는 4개名義,
1247) 檄文,
1248) 通文,
1249) 布告文,
1250) 榜文,
1251) 訴志
1252) 등을 발표하였고, 그들의 사회경제적 요구 즉 폐정개혁의 요구는 1894년 4월 4일의 격문,
1253) 4월 20일 무렵 초토사에게 보낸 호남유생원정서,
1254) 5월초 순변사 李元會에게 제출한 전라도유생원정서
1255)와 湖南會生等上書
1256) 등으로 나타나 있으며 1894년 5월 8일의 전주화약 때에 이들을 27개 조목으로 종합·정리하여 초토사 홍계훈에게 제시하고,
1257) 초토사가 그 조목들을 왕에게 보고하고 실시되도록 노력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화약에 호응하였다.
1258) 폐정개혁안 27개조를 몇 묶음으로 정리하면 田結부담의 경감을 요구하는 것이 4개 조목, 洞布·환곡·연호잡역 등 농민부담의 경감을 요구하는 것이 5개 조목, 전운소의 폐지를 요구하는 것이 1개 조목, 보를 쌓아서 수세하는 것을 금지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1개 조목, 均田의 폐지요구가 1개 조목, 권력을 배경으로 한 고리대 징수의 금지요구가 1개 조목, 개항장의 미곡상이 내지시장 밖에서 미곡매입하는 것을 금지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1개 조목, 농촌소상인을 억압하는 상품유통관계 시정의 요구가 5개 조목, 백성의 묘지를 지방관이 빼앗는 것을 금지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 1개 조목, 탐관오리의 처벌을 요구하는 것이 2개 조목, 아전을 임명할 때 사례조로 받는 任債의 폐지요구가 1개 조목, 전보국의 폐지요구가 1개 조목, 민비 척족세력의 제거와 대원군의 옹립을 요구하는 것이 1개 조목, 동학인의 복권을 요구하는 것이 1개 조목이었다. 그 중에서 전운소 폐지요구는 4월 4일의 격문에서부터 호남회생등상서까지에 모두 제기되고 있고, 개항장 미곡상인의 내지시장 밖에서의 미곡매입 금지요구는 호남유생원정서에서만 제기되지 않았다. 이 두 항목은 모두가 개항후의 미곡수출과 밀접히 연관되는 현상이었다.
일본상인의 내륙지방 행상은 1887년 무렵부터 시작되어 1890년 전후부터는 본격화되었고, 일본 자본주의의 구조 자체의 내적인 요구에 의하여 1890년부터는 한국으로부터의 미곡수출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농민적 상품교환의 장으로서의 농촌장시, 이 장시를 중심으로 한 미곡시장, 그 내부에 미곡판매농민과 구매농민을 함께 거느리는 재래의 시장구조가 수출시장과의 접촉에 의하여 동요·파괴되기 시작하였다.
1259) 그러나 1894년 당시에는 수출시장과의 연관을 전면적으로 차단한다는 것은 이미 현실적인 가능성이 결여된 것이었다. “외국의 潛商이 높은 값으로 쌀을 구입하는 것”
1260)을 시정할 것, “개항장의 잠상이 쌀을 구입하는 것을 일체 금단할 것”
1261) 등은 수출시장과의 연관을 전면적으로 차단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핵심은 미곡매매를 농촌장시의 시장질서 내부에로 한정함으로써 농촌장시를 중심으로 한 재래의 시장구조의 파괴를 막고, 그럼으로써 지역적인 재생산구조의 유지를 도모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1262) 전주화약 27개조목의 하나인 “대동上納 전에는 각 개항장의 잠상이 쌀을 구입하는 것을 금단할 것”에서는 그 금단의 시기를 대동상납 전 즉 보리가 나오기 전의 봄철에만 한정하고 있다.
1263) 이 경우에는 쌀값이 올라가는 춘궁기에 있어서의 농촌장시의 보호·방어에 역점을 두고 있다. 즉 수출시장과의 연관을 객관적인 사실로 인정·전제하고서 농촌장시=농민적 시장을 중심으로 한 재생산구조의 유지를 도모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1895년 2월 11일의 제2차 법정신문에서 전봉준이 재봉기한 이유를 “일본이 대궐을 범한 연유를 따지고자 하였다”하자, 법관이 “그러면 일본군대와 경성에 머무르는 외국인들을 모조리 구축하려고 하였는가”라고 물었으며 이에 전봉준은 “그렇지 않다. 다른 나라는 단지 통상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일본은 군대를 거느리고서 경성에 주둔하고 있어서 우리나라 경토를 침략하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되었다”
1264)라고 하였듯이 외국과의 무역관계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사실로서 전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운소의 혁파도 그러한 농촌시장을 전제로 하여, 농민생활에 가해지는 억압과 수탈을 철폐하려는 것이었다. 전운소 창설 즉 “輪船에 의한 상납 이후 每結의 加磨鍊米가 3∼4두에 이르렀다”
1265)라는 가마련미는, 전운사 조필영이 인천에서 일본상인에게 선가미만 매도한 것이 아니라 세미본곡까지도 매도하고 그것을 量餘不足米라는 명색으로 농민들에게 재징수한 것이었다.
1266) 즉 미곡수출로 인한 세미곡 상품화의 증대에 따른 과세의 가중이었다. 따라서 전운소 혁파의 요구는 미곡상품화의 증대추세에 있어서 탐학관료의 세미곡 상품화 증대에 대한 농민적 미곡상품화 지향의 저항이었다. 이러한 지향은 이미 고부민란의 경우에도 나타나고 있었다. 전운에 대한 농민층의 반감·저항은 “동도가 나그네로 가장하여 인천 제물포에 와서 전운사위원 1인을 유인하여 배에 싣고 멀리 사라져버렸다. 동도는 진작부터 전운소에 대하여 묵은 반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267)라는 기록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상을 종합하면, 농민군은 농민의 생산력 발전의 장애물 제거와 농민의 소상품생산자로서의 자립·발전을 보장해 줄 것을 요구하고
1268) 농촌소상인의 자립·발전을 보장해 줄 것을 요구하며 아울러 균전폐지의 요구에서 나타나듯이 농민적 토지소유의 발전을 요구하고 그러한 보장을 대원군정권의 성립에서 기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농민군은 이상과 같은 기대에의 저지물로서 민씨척족정권을 그 상징으로 하는 봉건적 제관계를 주요한 것으로, 다음 일본을 그 대표로 하는 외국의 경제적 침투를 부차적인 것으로 인식하였다. 3월 25일에 발표한 ‘4개명의’에서는 ‘왜오랑캐를 쫓아내어 버린다’라고 하였지만 제1차 농민전쟁 당시에는 아직 “일본인이 직접 공격목표가 되었다기보다도 국가의 내정문제로서 위정자 즉 부패관권에 대한 경고로서 발하여진 것이었다.”
1269) 위에서와 같이 제1차 농민전쟁의 경제적 지향은 소상품생산자·소상인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5월에서 9월까지의 집강소의 단계이다. 집강소 단계에서의 폐정개혁은≪東學史≫에 나오는 ‘폐정개혁건 12개조’
1270)의 사항들이었다. 12개조중 제12조인 ‘土地의 平均分作’ 이외에는 실현되었다고 보인다. 미쳐 실현되지 못한 제12조까지 포함하여 농민군의 경제적 지향을 요약하면, 경제관계에서의 봉건적 폐단의 개혁, 均産의 실현, 농민적 토지소유의 실현, 농업생산력 발전의 실현
1271) 등이었다고 생각된다. 기본적으로는 제1차 농민전쟁 단계와 같았지만 농업생산력의 발전이라는 視角이 새로이 보완됨으로써 한걸음 더 역사적으로 전진되었다고 생각된다.
1247) 鄭 喬,≪大韓季年史≫上 권 2, 고종 31년 갑오 3월, 74쪽.
1248) 吳知泳,≪東學史≫, 112쪽.
1249) ≪東匪討錄≫,<4月 初4日 東徒通文法聖吏鄕>(≪韓國學報≫3, 1976), 244쪽.
≪朝鮮交涉資料≫中,<東學黨彙報>, 332쪽.
1250) <聚語>, 갑오 4월 11일,<茂長東學輩布告文>(≪東學亂記錄≫上), 142∼43쪽.
1251) 鄭 喬,≪大韓季年史≫上 권 2, 고종 31년 4월, 75쪽.
1252) ≪兩湖招討謄錄≫, 갑오 5월 4일(≪東學亂記錄≫上), 207쪽.
1253) 朴殷植,≪韓國痛史≫제2편 제26장, 甲午東學之亂(≪朴殷植全書≫上), 108∼109쪽.
≪東匪討錄≫(≪韓國學報≫3,<새자료>, 1976), 244쪽.
1254) <湖南儒生原情于招討使文>,≪東匪討錄≫(≪韓國學報≫3,<새자료>), 259∼260쪽.
1255) 金允植,≪續陰晴史≫上 권 7, 고종 31년 5월, 322∼323쪽.
1256) <湖南會生等上書>,≪東匪討錄≫(≪韓國學報≫3,<새자료>, 1976), 263∼264쪽.
金允植,<又原情列錄追到者>, 앞의 책, 323∼325쪽.
1257) <全琫準判決宣言書>(≪나라사랑≫15, 1974), 147∼149쪽.
1258) 韓㳓劤,<東學軍의 弊政改革案檢討>(≪歷史學報≫23, 1964)
朴宗根,<甲午農民戰爭(東學亂)에 있어서의 ‘全州和約’과 ‘弊政改革案’>(≪歷史評論≫140, 1962).
1259) 吉野誠,<李朝末期에 있어서 穀物輸出의 展開와 防穀令>(≪朝鮮史硏究會論文集≫15, 1978), 110쪽.
1260) 朴殷植,≪韓國痛史≫제2편 제26장, 甲午東學之亂(≪朴殷植全書≫上), 108∼109쪽.
≪東匪討錄≫(≪韓國學報≫3,<새자료>, 1976), 244쪽.
1261) 위와 같음. 위와 여기에서 말하는 潛商이란 場市의 시장질서 내부에서 하는 상행위가 아니라 그것을 벗어나서 행하는 상행위로서 장시의 시장질서·시장구조를 교란하는 상행위를 일컫는다.
1262) 吉野誠,<李朝末期에 있어서 穀物輸出의 展開와 防穀令>(≪朝鮮史硏究會論文集≫15, 1978), 114쪽 참조.
1263) ‘大同上納前’은 “수확 후 조세 納入까지의 기간으로서 米價가 가장 下落하는 시기”(吉野誠,<朝鮮開國後의 穀物輸出에 대하여>, 60쪽의 주 74))가 아니라, “大同米의 收納은 春秋 두 번으로 나누는데 三南과 江原道는 이듬해 봄에 한꺼번에 합쳐서 上納한다”(大典會通 卷2 戶典 徭賦, 景仁文化社, 1969, 282쪽)라고 하였듯이 米價가 가장 올라가는 봄철을 의미한다.
1264) <全琫準供草>, 을미 2월 11일, 再招問目(≪동학란기록≫하), 538쪽.
1265) 金允植,≪續陰晴史≫上 권 7, 고종 31년 갑오,<五月, 全羅道儒生等原情于巡邊使李元會 革弊後錄>의 제11조, 323쪽.
1266) 吉野誠,<朝鮮開國後의 穀物輸出에 대하여>(≪조선사연구회논문집≫15, 1978), 49쪽.
1267) <東學黨의 情形>(≪朝鮮交涉資料≫中), 338쪽.
1268) 梶村秀樹,<李朝末期(開國後)의 綿業의 流通 및 生産構造>(≪朝鮮에 있어서 資本主義의 形成과 展開≫, 龍溪書舍, 1977), 115∼116·119∼120쪽과 주 17) 참조.
1269) 韓㳓劤,<東學軍의 弊政改革案檢討>(≪歷史學報≫23, 1964), 68쪽.
1270) 吳知泳,≪東學史≫, 126∼127쪽.
1271) 필자는 ‘土地의 平均分作’을 토지소유의 재분배가 아니라 토지경작의 재분배라고 생각하며, 이 점에서 정약용의≪경세유표≫에서의 정전제 개혁안에서의 농업생산력 발전의 원리를 계승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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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국가·민족·국민
제1차 농민전쟁의 단계에서 농민군은 민씨척족정권의 제거와 대원군정권의 성립을 기대하였다. 1894년 3월 25일의 四個名義에서는 “군대를 이끌고 서울에 들어가 權貴를 모두 없앤다”고 하였는데, 권귀란 4월 4일 법성포 吏鄕에게 보낸 통문
1272)에서 “민폐의 근본은 吏逋에 말미암고 이포의 근본은 탐관에 말미암고 탐관의 범행은 탐학·부정한 집권층에 말미암는다”고 한 탐학·부정의 집권층을 의미하며, 또 박은식이 “동도가 창궐한 초기에 그들은 장차 서울로 북상하여 왕 측근의 惡을 쓸어버리겠다고 부르짖었다”
1273)고 한 ‘왕 측근의 악’을 의미하며, 4월 28일 농민군이 전주를 점령하고서 전주 남문에 게시한 방문
1274)에서 “대저 나라의 형세로 말하면 집권대신은 모두 외척으로서 밤이 지새도록 경영하는 것은 다만 일신·일파의 사리뿐이고 자기네 일당을 각 고을에 깔아놓아 백성해치기로써 일을 삼는다”고 한 외척 즉 민씨척족정권이었다. 전봉준은 또 제1차 법정재판 직전에 독립 제19대대장 南小四郞에게 낸 구공서에서도 “원래 우리들이 기병한 것은 閔族을 무너뜨려서 폐정을 개혁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1275)라고 하였다. 전주화약의 27개 조목에서 “왕의 총명을 막아 가리고 매관매작하며 國權을 조종·농간하는 자들을 일제히 축출할 것”이라고 하고 5월 20일 무렵 장성에서의 폐정개혁요구
1276)에서 “간신이 권력을 농간하여 나라일이 날로 그릇된다. 그 매관매직을 처벌할 것”이라고 한 것도 민비척족정권의 축출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민씨척족정권에 대한 부정은 다른 정권의 성립에 대한 기대로 귀결되지 않을 수 없다. 농민군은 4월 20일 무렵 초토사에게 보낸 湖南儒生原情書
1277)에서 “일이 이 지경에 이르른즉 억조창생이 마음을 같이 하고 8도의 백성이 뜻을 모아 위로는 國太公(大院君-인용자)을 받들어 섭정을 맡겨 부자의 인륜과 군신의 義를 온전히 하며 아래로는 백성을 편안케 함으로써 종묘·사직을 다시금 보존할 것을 죽기를 맹서하고 변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고, 전주에서 화약교섭중이었던 5월 4일에 초토사에게 보낸 訴志
1278)에서는 “太公을 받들어 섭정을 맡기자는 것은 그 이치가 심히 당연하거늘 어찌하여 반역이라 일컫고 살해하는가”라고 하여 대원군정권 성립의 요구를 명백히 나타내었다. 이러한 요구는 5월 20일 무렵 장성에서의 폐정개혁 요구에서도 “국태공이 국정에 참여하면 민심에 거의 희망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 재확인되고 있다. 대원군 정권 성립에의 이러한 기대는 동학의 8자주문에도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었다.
1279) 민비척족정권에 대한 농민군의 부정이 당시의 권력관계에서 그것의 대극점에 위치하고 있었던 대원군의 섭정에로 귀결되었다는 것은 농민군의 권력구상이 기존의 권력관계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봉건적 억압과 외래 자본주의 침략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소상품생산자로서의 자립·발전을 지향하였던 농민군이 사회적 해방의 권력의 이미지는 대원군의 섭정에서 끝막음하고 있었다. 따라서 농민군의 국가구상은 재래의 유교적인 국가의식, 민본 이데올로기 즉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고 근본이 깎이면 나라가 잔약해진다”는 ‘輔國安民’ 의식에서 머물고 있었다.
1280) 물론 ‘보국’의 방법으로서의 ‘안민’의 실체적 내용에 새로운 성격이 담겨 있음은 앞의 경제적 지향에서 이미 본 바와 같다.
실제로 농민들에게는 오랜 동안의 恭順과 忍從의 생활에서 습성화된 권력공포증세가 있었다. 예컨대 1894년 1월에 농민군들이 白山으로 옮긴 뒤에 전봉준이 고부민란 중민들에게 ‘함열 조창에로 나아가 전운영을 치고 전운사 조필영을 징치할 것’을 촉구하였으나 “군중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것은 民擾가 越境을 하면 반란의 칭을 받는다는 이유”였고,
1281) 민란 중민들은 해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농민군은 폐정개혁을 요구하는 주체로서의 자기의 정치적 위치를 조정 즉 정부에 직접 건의한다는 차원에조차 두지 못하였다. 1895년 2월 11일의 제2차 법정신문에서 전봉준의 진술은 다음과 같았다.
1282)문:그렇다면 訴狀을 내어서 호소하지 않았는가?
답:감영과 고을에 수없이 소장을 제출하였다.
문:그렇다면 조정에도 또한 소장을 내어 호소하였는가?
답:소장을 낼 길이 없어 홍계훈 대장이 전주에 머무르고 있을 때에 이러한 사정을 소장으로 호소하였다.
소장을 낼 길이 없었다는 것은 당시의 제도에도 말미암았겠지만 조정에의 직접 건의라는 발상, 즉 조정 대 농민군이라는 위치설정의 의식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농민군은 스스로를 홍계훈의 대극점에 두는 데서 그치고 있었다.
그러나 홍계훈 관군의 대극점에의 위치설정도 사실은 제1차 농민전쟁 말기에 쟁취된 것이었다. 초토사 홍계훈의 보고에 의하면 1894년 4월 22일 경군이 “함평에 도착하여 농민군 수천명과 맞닥뜨려 장차 교전하려 함에 농민군이 산에 올라 큰 소리로 말하기를 이 군대는 主上의 명을 받들어 내려온 것이다. 탐관(지방관-인용자)의 군대와는 질이 다르니 결코 대항하지 않겠다. 만약 항전하면 우리는 逆徒의 죄를 벗을 수 없다고 하였다. 경군이 동쪽으로 향하면 그들은 서쪽으로 도주하고 경군이 서쪽으로 향하면 그들은 동쪽으로 달아나 접전하기가 불가능한 형세이다. 심히 답답하다”
1283)고 하였다. 4월 22일자 전라감사의 전보에 의하면 “동도가 전주 남문 밖에 투서하였는데 그것을 펴보니 경군에는 대항하지 않고 지방군은 반드시 격파하여 탐관을 축출하고 부정한 아전을 소멸하겠다. 이것이 우리들의 보국안민의 본뜻이다. 비록 백년이 지나도 결코 물러서 해산하지 않겠다”
1284)고 하였다. 4월 23일의 장성전투에서의 경군에 대한 승리 이후에 농민군은 경군과도 대적할 자세를 확립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집강소 단계에서의 농민군의 국가구상도 제1차 농민전쟁 단계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다고 보인다. 이 단계에서의 사회적 해방의 권력의 이미지는 官民相和를 전제로 한 지역적 권력의 성립으로서 표출되었다. 즉 봉건적 신분제의 철폐, 봉건적 지주전호제도의 개혁을 집강소라는 좁은 범위의 지역권력으로써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좁은 지평에서나마 농민층의 권력의 이미지가 현실화되었다는 것은 한국역사상 초유의 일이었고 획기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짧은 기간, 좁은 범위의 지역권력의 체험은 다음 단계에서의 새로운 권력구상으로 발전해 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집강소의 권력의 이미지도 민본 이데올로기 울타리 안에서의 것이었다. 농민군은 전주화약 27개 조목의 실시에 대한 기대에서 6월 무렵까지는 벗어나지 못하였다. 1895년 2월 11일의 제2차 법정재판에서 “절목(27개 조목-인용자)을 제출한 이후에 탐관을 제거하는 성과가 있었는가?”라는 법관의 물음에 전봉준은 “별 성과가 없었다”고 하였고 “그렇다면 홍계훈 대장이 백성을 속인 것이 아닌가” “그렇다” “그렇다면 백성이 어찌 다시 호소하지 않았는가” “그 후 홍계훈 대장은 서울에 가버렸으니 다시 어찌 호소하리오”
1285)라고 하였고 제3차 법정재판에서 “9월 봉기 이전 조정의 효유문은 하나 둘이 아니었으나 끝내 실시되지 않았다”
1286)고 하였듯이 27개 조목 폐정개혁 실시에의 기대를 포기하지 않았고 또 농민군 스스로를 조정의 대극점에 위치설정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그 기대를 포기하지 않은 데에는 정부의 일정한 대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6월 11일 정부에서는 오랫동안 쌓여온 폐단을 고침으로써 大更張·大懲創하기 위하여 校正廳을 설치하고 6월 16일에는 12개 항목의 개혁항목을 공표하였다.
1287) 이 항목들은 “모두 동학당의 原情(폐정개혁 요구-인용자) 안에 있는 것들이었다. 점진적으로 자주개혁함으로써 일인들의 요구를 막아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임시변통으로 미봉하는 것이어서 여전히 형식일 뿐이었다. 어찌 이것으로써 농민란을 처리할 수 있으리오”
1288)라고 김윤식은 평가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대체로 6월까지의 상황이었고, 집강소 폐정개혁 12개조가 개별 시차적으로, 지역적으로도 들쑥날쑥하게 형성되어가던 6월말부터는, 농민군의 지방행정기관으로서의 집강소는 국가의 지방행정권력기구와 병존하면서 자신의 지방지배권을 사실상 관철시켜 나아갔다. 이러한 집강소의 경험으로 농민군들은 자신들이 지배권력에 일방적으로 恭順하고 順從하는 객체적인 被治物만은 아니라는 의식을 가지기 시작하였다고 생각된다.
9월의 제2차 농민전쟁도 보국안민의 실현이었다. 그러나 이전의 보국안민과는 그 내용에 있어서 상당한 변화가 발견된다. 첫째 백성 즉 농민군의 뜻을 직접 왕에게 상세히 펼치겠다는 것이었다. 전봉준은 제3차 법정재판에서 “下情(백성의 사정과 뜻-인용자)은 왕에게 알려지지 않고 上澤(왕의 덕정의 혜택-인용자)은 백성에게 미치지 않았다. 고로 일차 서울에 올라가 기어이 백성의 생각을 상세히 펼치려고 하였다”
1289)고 말하였다. 즉 농민군 스스로를 홍계훈의 대극점, 조정의 대극점에서 뛰어넘어 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對面의 위치에 설정하고 있었다. 백성의 사정과 뜻을 직접 왕에게 전달하겠다는 의식은 농민의식의 민주주의적 발전의 단서가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둘째 위의 필연적 귀결로서 대원군 섭정에의 기대를 전적으로 포기하였다는 사실이다. 제1차 농민전쟁 단계에서는 농민군의 대원군 섭정에의 기대가 전혀 일방적 희망일 뿐이었고 9월의 단계에서는 대원군으로부터의 구체적 결탁 제의가 있었고, 농민군도 그 제의에 호응하여 결탁하려는 움직임도 현실적·구체적으로 있었지만, 그것은 대원군 정권수립의 기대에서가 아니라 농민군의 정치적·군사적 행위에서의 정략적·전략적 세력연합의 차원에서였다. 즉 대원군정권 수립의 기대에서 정략적·전략적 이용의 대상으로의 변환이었다.
셋째 9월 재봉기의 목적은 일본세력을 몰아내려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6월 21일 새벽 경복궁을 포위 점령하여 민씨척족정권을 타도하고 이어 한국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국권을 장악하였다. 6월 23일에는 수원부의 楓島 앞바다에서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6월 25일에는 군국기무처를 신설하여 친일 개화당 정권을 성립시키고 7월 20일에는 잠정합동조관을, 7월 26일에는 한일공수동맹을 체결함으로써 개화당 정권을 손안에 장악하였다.
이러한 일본군의 행동을 전봉준은 7월 말 8월 초에 남원에서 듣고
1290) 이것은 한국의 국토를 침략하려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1291) “우리들 臣民된 자들로서는 일각도 안심할 수 없어 이해(거사의 성패-인용자)가 어찌될 것인가는 생각지 않고”
1292) “忠義之士는 같이 창의하자는 뜻으로 방문을 내걸고 또는 각처에 이 봉기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不忠無道한 사람이라는 통문을 돌려”
1293) 재차 봉기하게 되었다. 즉 “피고는 일본군대가 대궐에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필시 일본군이 我國을 병탄코자 하는 것인줄 알고 일본병을 물리치고 그 거류민을 국외로 구축할 마음으로 다시 기병을 도모”하였다.
1294) 일본에의 병탄을 막고 일본인을 축출하는 것이 9월 재봉기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농민군 재봉기가 일본군의 경복궁 쿠데타, 그리고 한일공수동맹 등이 있은 직후 즉 8월에 결정되지는 않았다. 거기에는 “전봉준이 때마침 신병이 있었고 많은 사람을 일시에 움직이기도 어렵고 아직 새쌀이 나오지 않은 농번기”
1295)였다는 사정, 그리고 북접의 소극적인 태도라는 사정도 있었겠지만 신분제도를 폐지하는 등의 갑오경장에 대한 기대도 있었다고 보인다.
1894년 7월 10일에는 일체의 상납을 金納으로 할 것을 결정하고
1296) 8월 22일에는 그것을 재확인하고 구체적으로 結價를 정하기로 결정하였다.
1297) 이에 대한 농민층의 반응은 “새 政令이 한번 반포되자 백성은 모두 발을 구르며 좋아하여 洋을 따랐는지 倭를 따랐는지는 묻지 않고 모두 기뻐하여 재생의 기색이 있었”
1298)으며 “稅米를 代錢으로 하는 頒令이 있고부터 民情은 흡연하여 앞을 다투어 바쳤다”
1299)고 한다. 농민전쟁 때 전봉준과 상의하여 농민군을 이끌고 서울로 쳐들어가 정부를 전복하고 國憲을 일신하려고 하였다는
1300) 李沂도 “작년부터 전세는 돈으로 걷는데 농민에게는 倉費가 없어지고 국가에는 漕弊가 없어지게 되었으니 실로 만세에 고쳐서는 안될 법이다”
1301)라고 평가하였다. 실제 1894년 12월에 결가를 1결에 30냥으로 정할 때 1결의 현물세를 쌀 19두 6승 2홉으로 잡고 당시의 쌀값으로 환산한 것이니까
1302) 농민층에 대한 개화당 정부의 조세면에서의 상당한 양보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보아서 갑오경장에 대한 농민군의 일정한 기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고 보인다.
1894년 9월 18일 일본은 자기네가 농민군을 진압하겠다고 나섰고 21일 개화당 정권은 이를 수락하였다.
1303) 농민군 토벌을 위한 개화당 정권-일본의 결합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무렵에 전라도 농민군의 재봉기가 확정되었으니 “匪徒는 호남으로부터 공주 등지에 이르기까지 길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1304) 아직까지는 적대적이지 않았던 개화당 정권과 농민전쟁의 모순, 지주적 토지소유 발전의 코스와 농민적 토지소유 발전의 코스의 모순이 이제 일본 자본주의 침략세력의 개입에 의하여 적대적인 성격의 모순으로 전화되었다.
일본에의 한국병탄을 저지하고 일본인들을 이 땅에서 축출하겠다는 9월 재봉기의 목적의 바탕에는 “조선으로 왜국이 되지 않게 하는”
1305) 의식 즉 ‘倭國化’를 반대하는 의식이 깔려 있었다. 농민군들의 경우 ‘왜국화’의 내용은 “금년 유월에 개화간당이 왜국을 체결하여 승야 입경하여 君父를 핍박하고 국권을 擅恣하며 우황 방백수령이 다 개화 소속으로 인민을 무휼하지 아니코 살륙을 좋아하며 생령을 도탄함에”
1306)라고 하였듯이 일본군과 개화파세력에 의한 ‘국왕과 國權의 허구화’였다.
이 이전 대원군 섭정에의 기대도 민씨척족정권에 의하여 허구화된 국왕에 국왕으로서의 실체를 부여하기 위한 방법에서였다. 농민군이 갖고 있었던 유교적인 정치의식에 의하여서도 국왕·국권에 실체가 부여되지 않고는 그 정치의식 자체가 존립될 수 없었기 때문에 9월 재봉기의 단계에서도 실체부여의 방법은 모색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사람끼리야 道俗은 다르나 斥倭와 斥化는 그 義가 일반이라 두어자 글로 의혹을 풀어 알게 하노니 각기 돌려보고 忠君憂國之心이 있거든 곧 의리로 돌아오면 상의하여 같이 斥倭斥化하여 조선으로 왜국이 되지 아니케 하고”
1307)라고 하였듯이 실체 부여의 방법은 ‘척왜·척화를 원칙으로 한 한국주민의 결집’이었다.
9월 재봉기 이전의 단계에서는 농민군의 사회적 해방의 이미지가 대원군 정권의 성립이라는 권력의 이미지로 나타났는데 9월 재봉기의 단계에서는 농민군의 사회적 해방의 이미지가 ‘척왜·척화를 성취하는 주체로서의 한국주민의 결집’으로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유교적 정치이론의 멍에에서 벗어나서 민족으로서의 결집에로 나아가는 의식의 단서가 마련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1894년 10월 13일 청주 부근에서 농민군과 대치한 장위영 부영관 李斗璜은 효유문에서 “또 너희들이 말하는 바 道, 德을 따져보자. 너희들은 덕을 일컬으면서 敬天이라고 하고 輔國이라고 하며 安民이라고 하는데 모두가 우리 道의 지류를 몰래 도적질하여 따로이 한 기치를 세운 것이다. 만일 너희들이 이것에만 일삼고 다른 패악한 행동이 없다면 조정에서 어찌 금지하는 영을 내리겠는가(중략) 지금 너희들의 행동을 너희들의 말과 비교해보면 말은 가공의 것이고 행동은 匪類이니 이는 하늘을 업수이 여기는 것이다”
1308)라고 하였는데 특히 9월 단계의 농민군의 의식·행동의 발전에 적합한 표현이었다.
위의 결집에는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동시에, 백성의 사정과 뜻을 직접 왕에게 전달하겠다는 의식이 동반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 결집의 구조는 反侵略·反封建을 전제로 하고, 소상품생산자로서의 자립·발전의 지향을 중심으로 하며, 그것의 反植民地化·反開化에로의 확대·발전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당시의 역사적 조건에서는 ‘근대민족으로서의 결집·형성’으로 귀결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발전은 농민군의 구성에서도 반영되었다. 9월 이전 단계의 농민군은 전라도의 농민으로만 구성되었다는 지방적 제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제1차 재판에서 “전주에 들어갈 때 (삼례에서 재봉기하여 전주로 입성할 때-인용자) 군사를 불러 모음에 전라도의 온 인민을 몽땅 끌어 모았는가?” “각도의 인민이 상당히 많았다” “공주로 나아갈 때에도 또한 각도의 인민이 상당히 많았는가?” “그때도 그랬다”라고 하였듯이
1309) 9월 재봉기의 농민군은 남한 일대의 농민으로 구성되었다.
다시 말하면 국왕·국권의 절대성을 자명의 전제로 하는 유교적 정치의식의 궤도를 충실하게 따라감으로써 그것에의 실체부여가 요구되었고, 그 요구가 개화와 침략일본과의 결탁에 의하여 촉발됨으로써 근대민족으로서의 결집이 요청되었고, 여기에서 농민군의 정치의식에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 유교적 정치의식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와 같이 9월 재봉기의 단계에서 농민의 정치의식은 민주주의적 발전의 단서가 열리고 유교적 정치의식에서 벗어나 자립화하며, 민족으로서의 결집에 눈뜨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치의식은 국권이 허구화하거나 소멸하더라도 그것에 의하여 굴절되지 않고 자기의 독자적인 발전의 길, 민족과 민주주의에의 전망을 넓혀갈 수 있는 토대를 이미 쟁취하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공동체적 제관계가 완전히 청산됨으로써 계급으로서의 결집이 객관적으로 가능하고도 필연화되는 단계가 되면 위의 정치의식은 민족해방의 이데올로기로서 다시 한번 비약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끝내 국권주의·국가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따라서 민족해방의 이데올로기로 비약할 수 없었던 개화사상의 정치의식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제2차 농민전쟁에서는 아울러 농민군의 의식에서 새로운 변화의 싹이 보이고 있다. 전봉준은 농민군 재봉기의 이유에 대해 “다른 외국인들은 단지 통상만 할 뿐인데 일본인은 군대를 거느리고 京城에 주둔함으로 우리나라 境土를 침략하는 것으로 의심되었기 때문이다”
1310)라고 하였고, “피고(전봉준-인용자)는 일본군대가 대궐로 들어갔단 말 듣고 필시 일본인이 我國을 倂呑코자 하는 뜻인줄 알고”
1311) 재봉기하였다고 한다.
告示·京軍與營兵 而敎示民
無他라 일본과 조선이 開國 이후로 비록 隣邦이나 累代 敵國이더니 聖上의 仁厚하심을 힘입어 三港을 許開하사 通商以後 갑신십월의 四凶이 挾敵하야 君父의 危殆함이 朝夕에 있더니 宗社의 洪福으로 奸黨을 消滅하고 금년 유월에 開化奸黨이 倭國을 締結하여 乘夜入京하여 군부를 逼迫하고 國權을 擅恣하며 우황 方伯守令이 다 개화중 소속으로 인민을 撫恤하지 아니코 殺戮을 좋아하며 生靈을 塗炭함에 이제 우리 동도가 의병을 드러 왜적을 소멸하고 개화를 제어하며 朝廷을 淸平하고 社稷을 안보할새 (하략)
1312) 11월 12일의 창의 고시에서는 일본군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조선 국왕이 핍박당하고 사직의 안보가 위태로우며 國權이 擅恣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동경일일신문≫은 제2차 농민군 봉기에서의 ‘擧兵의 名義’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1313)우리들은 전에 폐정을 釐革할 목적으로 일어났으나 詔諭가 있어서 초토사와 화약을 맺고(중략) 일본은 大兵을 파견하여 我國家를 呑하려고 하여, 日兵은 大擧 境土를 제압하고 이미 京城에 들어왔는데, 이에 국가가 위급하고 존망이 갈리었다. 진실로 國을 생각하는 者는 창을 들고 일어나 방어해야할 때이다. 宮中의 일은 물을 겨를 조차 없으므로 우리가 먼저 일어나 日兵을 방어해야 한다. (하략)
농민군은 일본군의 침략을 ‘我國家를 呑하려는 것’, 한국의 ‘境土를 제압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농민군은 제2차 농민전쟁의 단계에서 國家와 國權과 境土를 유기적으로 일체화시켜서 인식하고 있었다. 일정한 經界 안에서 효력을 가지는 國權이 있는 것을 國家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 國家와 자신의 운명을 일체화시켜서, 자신을 그 구성원으로 하는 영역국가에 헌신하려고 하는 농민군은 국민의 일보직전의 상태에 자신을 갖다놓았다고 생각된다.
원래 우리들이 병을 일으킨 것은 閔族을 타도하고 폐정을 개혁할 목적이었지만, 閔族은 우리들의 입경에 앞서 타도되었기 때문에 일단 병을 해산했다. 그런데 그후 7월 일본군이 경성에 들어가 왕궁을 포위했다는 것을 듣고 크게 놀라 동지를 모아서 이를 쳐없애려고 다시 병을 일으켰다. 단 나의 종국의 목적은, 첫째 閔族을 무너뜨리고 한패인 간신을 물리쳐서 폐정을 개혁하는 데 있고, 또한 轉運使를 폐지하고 田制·山林制를 개정하고 私利를 취하는 小吏를 엄중히 처단할 것을 원할 뿐이다.
1314) 전봉준은 12월 초순 南小四郞에의 口供에서 농민전쟁의 목적을 위에서와 같이 田制를 개정하고 탐관오리를 처단하는 내정혁신이라고 하였다. “적어도 전봉준이 있는 한은 적어도 순수동학당(농민군-인용자) 만큼은 일본 배격 때문에 그들의 內政更革의 本願을 버려버리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라는
1315) 보도에서처럼, 농민군의 기본목적은 내정개혁이었고, 항일전쟁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위에서와 같은 국민의식에로의 접근 역시 내정개혁을 위한 농민군의 투쟁, 특히 집강소의 역사적 경험의 기반 위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치의식에서의 전진은 다음과 같은 새로운 권력구상
1316)으로 결실되고 있었다.
일본군을 몰아내고 惡奸의 吏를 쫓아내어 임금 곁을 깨끗이 한 후에는 몇 사람 柱石의 士를 내세워서 정치를 하게 하고 우리들은 곧장 농촌에 돌아가 常職인 농업에 종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國事를 들어 한 사람의 세력가에게 맡기는 것은 크게 폐해가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몇 사람의 명사가 協合하여 合議法에 의하여 정치를 담당하게 할 생각이었다.
1895년 1월 말 일본영사관에서의 일본인 경부의 “너는 경성에 공격해 들어온 후에 누구를 추대하려고 생각하였는가”라는 질문에 전봉준은 위와 같이 대답하면서, 폐정개혁·내정개혁을 담보하는 새로운 권력구조로서 몇 사람의 名望家의 合議法에 의한 정치운영의 권력구조 구상을 나타내었다. 전봉준은 한 사람의 세력가가 정치를 담당하는 민씨척족정권의 권력구조 형태와 대원군 권력구조 형태를 모두 비판하였다. 전봉준은 “원래 우리나라의 정치를 그르친 것은 모두 대원군이기 때문에, 인민이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다”
1317)라고 하였다. 전봉준은 이제 대원군에의 기대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전봉준은 대원군을 배척하지는 않았다. 斥洋과 斥倭에서는 일치되고 있음을 인정하였다.
1318) 전봉준이 말하는 ‘몇 사람 柱石의 士’에는 대원군 세력도 포함되는 것이리라고 짐작된다. 항일 연합전선의 대상인 척사위정의 보수유림세력도 또한 포함되는 것이라고 짐작된다. 전봉준은 제2차 농민전쟁의 단계에서는 내정혁신을 위한 방법으로서 항일의 연합전선과 연합정권까지 구상하였다. 농민군 세력도 연합정권의 일각에 자리시켰을 가능성도 농후하였다. 그러나 “우리들은 곧장 농촌에 돌아가 상직인 농업에 종사할 생각이었다”고 하듯이 농민군 스스로를 국권의 담당주체로 인식하는 정치의식은 성립되지 못하였다. 농민군은 영역국가에서 외부로부터의 간섭을 배제하여 국가가 정치의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권한으로서의 國權 즉 主權을 의식함으로써, 영역국가와 主權을 국가정치의 원칙으로서 드러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國權·主權의 담당자로서의 국민은 인식되지 못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농민군은 근대적 내셔널리즘 일보 전의 단계에는 도달하였다고 생각되며, 따라서 농민전쟁은 객관적으로는 농민층에 의한 밑으로부터의 길에 의한 국민국가 형성의 길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농민전쟁은 기본적으로는 일본군의 무력탄압으로 말미암아, 즉 농민군을 ‘살륙’함으로써 농민군 세력을 한반도로부터 ‘剿滅’하려고 한
1319) 일본의 군사력에 의하여 좌절되었다. 1894∼1895년의 갑오경장으로 한국은 淸에의 번속체제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형식상 모든 단위국가의 대등성을 전제로 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국제질서에서 독립국가로 정립되었으나,
1320) 농민전쟁의 좌절로 말미암아 半식민지로서의 성격을 심화시켜 나아갔다. 淸은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로 말미암아 瓜分의 위기에 처함으로써 종속국에로의 길로 들어섰음에 반하여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타민족을 억압하는 제국주의에로의 길로 명백히 들어서게 되었다. 동학농민전쟁은 결과적으로 동아시아 3국의 양극분해를
1321) 촉진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체제가 확립되는 계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동학농민전쟁은 그 이후 한국에서의 모든 민족·민주 변혁운동에서 끊임없이 역사적 기억과 사회적 傳記로서 소생함으로써 그 운동들의 동력으로서 거듭 부활하였다.
<鄭昌烈>
1272) ≪東匪討錄≫,<4月 初4日 東徒通文法聖吏鄕>(≪韓國學報≫3, 1976), 244쪽.
≪朝鮮交涉資料≫中,<東學黨彙報>, 332쪽.
1273) 朴殷植,≪韓國痛史≫(≪朴殷植全書≫上), 111쪽.
1274) 鄭 喬,≪大韓季年史≫上 권 2, 고종 31년 4월, 75쪽.
1275) ≪東京朝日新聞≫, 명치 28년 3월 5일(≪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22, 사운연구소, 1996), 509쪽.
1276) 鄭 喬,≪大韓季年史≫上, 고종 31년 5월, 86쪽.
1277) <湖南儒生原情于招討使文>,≪東匪討錄≫(≪韓國學報≫3,<새자료>), 259∼260쪽.
1278) ≪兩湖招討謄錄≫, 갑오 5월 4일(≪東學亂記錄≫上), 207쪽.
1279) ‘卽以今知 院位大監’ 韓國敎會史硏究所 Mutel 文書(韓㳓劤,<東學思想의 本質>(≪東方學志≫10, 1969), 55쪽 주 33)에서 재인용.
1280) <茂長東學輩布告文>(≪東學亂記錄≫上), 142∼143쪽.
<倡義文>(≪東學史≫), 108∼109쪽.
1281) 張奉善,<全琫準實記>(≪井邑郡志≫, 1937), 353쪽.
1282) <全琫準供草>, ‘再招問目’(≪東學亂記錄≫下), 538쪽.
1283) <東學黨에 관한 彙報>(≪朝鮮交涉資料≫中), 339쪽.
1284) 위의 책, 340쪽.
1285) <全琫準供草>, ‘再招問目’(≪동학란기록≫하), 538쪽.
1286) <全琫準供草>, ‘3次問目’, 547쪽.
1287) 金允植,≪續陰晴史≫上, 고종 31년 6월 24일, 325∼326쪽.
1288) 위의 책, 320쪽.
1289) <全琫準供草>, ‘3次問目’(≪동학란기록≫하), 547쪽.
1290) <전봉준공초>, ‘3차문목’(≪동학란기록≫하), 548쪽;‘4차문목’, 552쪽.
1291) <전봉준공초>, ‘재초문목’(≪동학란기록≫하), 538쪽.
1292) 위의 책, 541쪽.
1293) 위의 책, ‘초초문목’, 530쪽.
1294) <전봉준판결선고서>(≪동학관련판결문집≫, 총무처정부기록보존소, 1994), 30쪽.
1295) <전봉준공초>, ‘3차문목’(≪동학란기록≫하), 548쪽.
1296) ≪한말근대법령자료집≫1, 1894년 7월 10일,<의안>, 26쪽.
1297) 위의 책, 1894년 8월 22일,<의안>, 95쪽.
1298) 黃 玹,≪梅泉野錄≫, 고종 31년 12월, 168쪽.
1299) 위의 책, 178쪽.
1300) 정인보,<해학이공묘지명>(≪해학유서≫, 국사편찬위원회, 1956), 9쪽.
1301) 위의 책,<전제망언>, 8쪽.
1302) 金容燮,<光武年間의 量田·地契事業>(≪韓國近代農業史硏究≫下, 일조각, 1988), 472쪽.
1303) ≪日案≫3, (고대아세아문제연구소, 1967), 94∼95·98쪽.
1304) ≪日案≫3, 99쪽.
1305) <告示. 京軍與營兵而敎示民>(≪東學亂記錄≫下), 379쪽.
1306) 위와 같음.
1307) 위와 같음.
1308) <양호우선봉일기>, 갑오 10월 13일(≪동학란기록≫상), 272∼273쪽.
1309) <전봉준공초>, ‘초초문목’(≪동학란기록≫하), 529∼530쪽.
1310) <전봉준공초>, ‘재초문목’(≪동학란기록≫하), 538쪽.
1311) <전봉준판결선고서>(≪동학관련판결문집≫, 총무처정부기록보존소, 1994), 30쪽.
1312) <선유방문 병동도상서소지등서>(≪동학란기록≫하), 379쪽.
1313) ≪동경일일신문≫, 명치 27년 8월 5일(≪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22, 사운연구소, 1996), 509쪽.
1314) ≪동경조일신문≫, 명치 28년 3월 5일(≪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22), 369쪽.
1315) ≪二六新報≫, 명치 27년 11월 11일(≪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22), 149쪽.
1316) ≪동경조일신문≫, 명치 28년 3월 6일<동학수령과 합의정치>(≪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22), 372쪽.
1317) ≪동경조일신문≫, 명치 28년 3월 5일<동학당 대두목과 그 자백>(≪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22), 369쪽.
1318) ≪동학사≫, 158쪽.
1319) 井上勝生,<甲午農民戰爭(東學農民戰爭)과 日本軍>(≪近代日本의 內와 外≫田中彰 編, 吉川弘文舘, 1999), 272쪽.
1320) 졸고,<근대국민국가인식과 내셔널리즘의 성립과정>(≪한국사 11, 근대민족의 형성 1≫, 한길사, 1994), 70쪽.
1321) 梶村秀樹,<東아시아 지역에 있어서 제국주의 체제에의 이행>(≪발전도상경제의 연구≫, 세계서원, 1981;≪梶村秀樹著作集 2-朝鮮史의 方法-≫, 명석서점, 1993 재수록), 292∼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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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정리
1. 열강이 우리 나라에 침략적 야심을 품자, 우리 나라를 둘러싼 국제적 분란이 그치지 않았다.
2. 일본의 경제적 침투로 농촌 사회가 피해를 받게 되자, 동학과 농민은 서로 호응하여 부패한 정치와 일본의 침략을 배격할 것을 목적으로 동학 운동을 일으켰다.
3. 근대적인 국가로 발전하기 위한 갑오경장은 외세의 간섭이 강하여 우리 사회에 올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