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03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14 조선 여성은 언제부터 차별받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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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여성은 언제부터 차별받았을까?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14회
법률방송
138,501 views  Nov 13, 2024  #한국인 #역사 #함재봉
본 강연은 함재봉의 『한국 사람 만들기 I: 조선 사람 만들기, 친중위정척사파』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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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방송에서 함재봉 원장과 함께 역사적 사건과 인물 등을 통한 한국 사람의 정체성을 알아봅니다.

이번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14번째 시간에는 주자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사대부의 나라 조선이 여성들에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기록을 통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사대부들이 강조한 여성의 절개와 정조는 무엇으로부터 시작됐고, 또 그것은 어떻게 이어져 왔을까요? 또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무엇을 강요해왔을까요? 

최근까지도 이어지는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문화의 뿌리는 무엇인지 파헤쳐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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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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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한국인의 탄생의 봉입니다 난 시간에는 조선 사람들이
언제부터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지 언제부터 사당을 지었는지 그리고
언제부터 족보를 만들게 되었는지 이런 거를 쭉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 주자
성리학이란 체제가 들어오는 과정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말씀을 드렸는데요 어 그 주자 성약 체제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면서 조선 여성들의 삶이 어떻게 바뀌나 조선 여성들의 처지가
어떻게 밝혔나이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겠 습니다 한국인의 탄생 이제
[음악]
시작하겠습니다 제가이 특히 조선 여성들의 삶을 조명하고 싶었던 이유는 우리가
역사를 볼 때요 어 정치사 왕조사 그 사회 엘리트
계층의 역사만 봐선 안 됩니다 사실 근데 기록이 남아 있는 거는 는
엘리트들에 대한 기록밖에 없습니다 왕조실록 이런 건 다 왕실에서 왕하고
대신들이 나누는 대화들 나와 있는 거고 그다음에 무슨 문 집들이 있거나 이건 전부 다 정말로 최고의 엘리트들
사대부 집안에서나 그런 걸 기록을 남기고 그런 거죠 그런데 정작 인구의
90% 이상은 뭡니까 평민 천민 뭐 그렇죠 무슨 뭐 뭐 무반 서울 뭐
하여튼 이런 사람들이죠이 사람들에 대한 기록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실은 거의 없습니다 근데 우리가 역사를 볼
때 어떤 시대를 평가하고 그럴 때에 전쟁을 얼마나 잘했고 뭐 어떤 어떤
왕이 무슨 훌륭한 통치를 했고 뭐 이런 얘기를 우리가 할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 당시에 일반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살았을까 우리가 가늠해 봐야 되는 거죠 근데 그랬을 때에
너무나 우리 기록이 없는데 다행이도 천만 다행이도 19세기부터 들어오기
시작하면은 서양의 선교사들 선교 분들이 와가지고 놀라운 기록을 남기죠
정말로 당시의 시대 상황 당시의 사회상 당시의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우리가 알 수가 있고 특히 저는 사회 밑바닥에 있었던 가장
천대받고 가장 착취당하고 했던 그런 사람들의 삶을 우리가 들여다봐야지 그
사회의 수준과 정도와 모든 거를 간음할 수가 있는데 특히 인구의
절반이었다 여성들의 삶 을 조명해 보는 거는 우리가 조선말을 어떻게 볼
것인지 우리의 근세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척도가
된다고 생각해서 여성의 삶을 어 면밀히 저는 들여다봐야 된다고
생각을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때의 모습을 정말로 생생하게
절절하게 기르고 남긴 선교사 이런 분들 여행한 분들 특히
외국사람 그 으로 우리가 어 봐야 되고 다행히 그 기록들이 있어서
그래서 우리가 그 시대 상황을 재구성할 수가 있습니다 19세기 말에
그 외국 사람들이 이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어이 사람들이 목격했던
조선 여성들의 처지에 대해서 한번 같이 살펴보고요 늘 그렇듯이 항상 전
1차 문헌을 우리가 중시해야 됩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직접 목격하고 직접
기록했던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그래서 첫 번째로 오늘 봐야 될 슬라이드는
뭐냐면 1894년에 95년에 우리나라에 와서 우리나라를
샅샅이 보고 경험하고 조선과 그 이웃 Korea and her neb 아는
놀라운 책을 남긴 이벨라 비 여사의 기록 그중에서도 조선 여성들의 그분이
그린 조선 여성들의 모습에서부터 출발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처럼 조선에서도 풍속이 무섭게 부패해 있으며 그 필연적인 결과로 여성의 보통 처지는 불쾌
아리만큼 천하고 열등한 상태에 놓여 있다 여자는 남자의 반려가 아니라 노예에 불과하고 쾌락이나 노동의
연장에 불과하며 법률과 관습은 여자에게 아무런 권리도 부여하지 않고
말하자면 아무런 정신적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다 남편이나 부모의 지배
아래 있지 않는 여자는 누구나 주인 없는 짐승처럼 먼저 차지하는 사람의
소유물이 된다는 것은 널리 인정되고 법정에서도 공인된 원칙으로서 논하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여기서 남편이나 부모의
집배 아래 있지 않는 여자는 누구나 짐승처럼 먼저 찾아하는 사람 것이 된다는 건 이건 이제 보상 이런 거죠
우리는 과부를 뭐 구제해주는 아름다운 미풍 양속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경우도 많은데 외국인의 눈으로 봤을 때는 너무나도 야만적인
어 풍수 있고 특히 여자들의 처지가 얼마나 어
처했는지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음도 그거 못지 않게 충격적인 당시
상황을 얘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달래 신부에 의하면 우발적으로 또는
의도적으로 외관 남자들이 손을 만졌을 경우 딸들은 아버지들 손에 부인들은
남편들의 손에 죽었고 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최근에는 한 하녀가
자신이 모시는 젊은 아씨를 불길에서 구하려고 시도조차하지 않고 방치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 이유를 묻자 불이난 혼란 속에 어느 외관 남자가
자신의 아씨를 만졌고 따라서 살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죠 뭐 파키스탄 이런 데서 언어 링이라 그러죠 자기 딸이나 누이나 이런 사람들이 허락하지 않은 연애를
하거나 이러다가 걸리면은 어 죽이고 어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 그
명예와 정조를 지켜주기 위해서 그 집안의 명예를 위해서 딸을 죽
를 죽이고 하는 그런 관습이 있었는데요 지금 조선에서 똑같은 어 그 관습이 있었습니다 사진에서도
보시듯이 그 당시에 여염집 여자들이 저렇게 복장을 하고
나가는 건 지금 이슬람이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나라에서 여성들이 눈만
내놓고 다니는데 그런 모습을 그대로 보실 수가 있습니다 이사벨 여사가
이제 이거 언제부터 이랬을까 얘기를 하면서 이제 조선이라 거를 사실
어떻게보면 굉장히 정확하게 지적을 해냅니다 여성들을 가둬놓는 전통은 500년 전 현재의 왕조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 당시에는 가족을 부패한 사회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시작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전통이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것은 한 조선 사람이 허버트 존스 그 당시에
저 선교사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버트 존스 씨에게 솔직히 털어 놓았듯이도 조선 남자들이 자신들의
부인을 믿지 못해서라고 서로를 믿지 못하게 때문이라고 생각된다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조선의 도시 사람들과 상류층의 부도덕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자 그러면 왜 언제부터 이렇게 조선
여성들의 지위가 하락하기 시작했는가 그걸 이제 오늘 본격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첫 번째는 주자 주자 성약의 도입이 주자 성리학의 도입으로
여성들이 재산권을 갖고 있었고 남자들이 장가 들어서 살던 결혼 제도도 밖 그고 무조건 장자 상속의
종법제도 그리고 남자 중심의 남전 여비의 시스템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면서 여성들한테 이름도 주지 않고 돌림자 이름 같은 거 주지 않습니다 이제 그러면서 그 남성
중심의 사회가 만들어진게 이제 첫 번째 우리가 여러 번 살펴봤던 그 부분이고요 두 번째는 이제 임진 회란
때 경제가 완전히 이제 붕괴를 하는 거죠 그래서 경작지가 임진란 전과
후에 3분가 이제 파괴가 되고 그럼으로써 경제가 몰락을 하기 시작하는데 여러분 경제가 몰락 하면요
항상 뭐 남성들도 힘들어지지만 특히 평민들 천민들의 여성들의 삶이 정말로
고파집니다 왜냐면 매기고 입히고 하는 문제를 여성들이 해결해야 되는데 그
문제를 참 어 가해지기 시작하면은 해결하기 힘든데 조선의 후기가 임진란
후기가 이제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자 근데 그런 어떤 거시적인 뭐
종교적이거나 어 경제적이거나 이런 문제만이 아니라 뭐 윤리 도덕 문제
있어서도 조선 여성들을 정말로 놀랍게 속박하기 시작하는 계기가 있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니라 병자 홀란이 병자 호란을 통해서 여성들에 대한이
정조 조선 여성들의 정조에 대한 집착이 조선 남성들 사이에서 굉장히
강해집니다 그 아까 베시 여사가 그랬죠 이게
이게 원래 조선 초기에는 어 사회가 혼란해 여자 여자들을 보호하려고
그래서 시작된 거 같은데 나중에 가면 서로를 믿 남자들이 서로를 믿지 못해서 여자들 가두기 시작했다 이제
이런 이런 얘기를 하는데 사실은 어 병자 호환이란 것 때문에 조선
여성들을 가두기 시작하는 그 제도가 주자 성학과 종법 제도와 이런 것만이
아니라 이러한 전쟁을 겪고 나면서 그 전쟁을
어 해결하는 방법 새로운 도덕적 윤리적 결정을 내리고 가치관을 설립을
하면서 그때부터 더욱더 여성들을 속박하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자 대표적인게 뭐냐면 뭐 잘 아시는 분들
많이 계시겠지만 소위 환향녀 문제입니다 뭐냐면 병자 호란을 통해서
이제 수십만 명이 그 포로로 그 청나라 군사들 이제 잡혀가 많은
경우에는 거기서 그냥 그 조선 사람들 노예로 쓰고 그러기도 했지만 또 많은 경우에는 몸값을 받고 도로 팔았습니다
그래서 조선 사람들이 심양에 가서 거기에 가서 시장에 가면은 끌려갔던
조선 사람들을 돈을 주고 다시 사오고 그래서 그 데려오고 구제하고 이런
경우들도 많았었는데 아무튼이 과정에서 이제 그 그 여성들 잡혀갔던
여성들이 돌아오는 경우에 말하 그면 이제 몸을 더럽혔다 정조가 유린했다이
문제가 이제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그러면 예를 들어서 부인이 잡혀갔는데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다 그랬을 경우에 그러면 아니 정조가 유린된 여자를
도시 도루 받을 수가 있느냐 이제 이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는 거죠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하는
것이 병자 환을 겪고 난 직후의 조선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이제 대표
적 사건이 뭐였냐면 유라는 당시의 우정까지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딸이 봉림대군 씹을 갑니다 나중에 효종이 되는 그니까 효종의
장인 있죠 근데 그 장한테 장선진이라는 아들 그러니까는 효종
비의 오빠죠 그 장선의 처가 그 장유의
며느리가 병한 심양에 끌려갔다가 돌아옵니다
그랬더니 장유가 이런 상소를 올립니다 외 아들 장선이 있는데 강도의 변에
그의 처가 그의 처가 잡혀갔다가 속한 데와 지금은 친정 부모집에가 있다
그대로 배필로 삼아 함께 선조의 제사를 받을 수 없으니 이혼하고 새로
장가 들도록 허락해 달라 여러분 강도의 변이 뭡니까 강화도 왜
그러냐면 병자를 일으키면서 쳐들어왔을 때에 보통 조선의 왕들이 어떡합니까
강화도로 도망가죠 그러니까 몽골 군이나 여진 족이나 수구는 없다 거기 이제 바다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항상
강화도로 피난을 갑니다 이번에도 이제 강화도로 재빨리 피난을 가려고
인조가 도성을 떠나 갖고 이제 강화도로 가죠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천군이 너무 날렵하게 생각보다 훨씬
빨리 쳐 내려오기 때문에 강화도 까지 가지 못하고 삼전도에서 잡히는 거죠
그래서 삼전도에서 잡히면서 어쩔 수 없이가 갖고 이제 거기서 삼괴 국어 두레를 하면서 그 구력 항복을 하게
되고 군신 관계를 맺게 된 거죠 청청 나라하고 그랬는데 이미 많은 사람들은 강화도에
피난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이 잡혀 버리니까 항복을 해 버리니까 당연히
강화도 그냥 항복을 해 버리는 거고 그래서 이제 강화도에서 소현세자 내외
님 되고 내외도 있지만 여기 지금 장유의 그 며느리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잡혀갔다가 돌아온 거죠 돌아왔더니 저 시아버지가 아유 우리 우리 매누이
실절 상태라서 더 이상 우리 조상 제사를 받들게 할 수 없다 그래서
이혼을 허락해 달라 이제 이제 예조에 다 했던 거죠 그랬더니 그런데 메누리 아버지는
도승지 있습니다 한이경 도승지 그러니까 비서실장이 지금 비서실장이
딸이 심양에 잡혀갔다 왔더니 우정이 이제 시아버지가 그
실절 했다고 이혼을 시킨다 그러니까는 아 도승지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아니 당신이 무슨 증거가 있어서 우리 딸이
어떤 고초를 당하고 왔는데 이게 무슨 무슨 소리냐 하면서 절대 안 된다 그러니까 예조 예에서는 우정하고
도승지가 싸우니까 도저 안 되겠습니다 하면서 임금한테 아 저 어회 인한테 어전회의를
하십시오 그래서 어전 회의를 하면서 그때에 영의정이었던
어 최명길이 이런 발언을 합니다이 자리에서 뭐라 그랬냐면 신이 전에
심양에 갔을 때 출신 사족으로 속 속하기 위해 따라간 사람들이 매우 많았는데 남편과 아내가 서로 만나자
부등켜 앉고 통곡하기 마치 저승에 있는 사람을 만난 듯이 하여 길가다
보는 사람들이 길가다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부모나 남편으로 돈이 부족해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장차 차례로 가서
속할 것입니다 만약 이혼해도 된다는 명이 있게 되면 반드시 속을 원하는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허다한 분자들을 영원히 이역의 귀신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소원을 이루고 집에서 원망 품는다면 어찌
화기를 상하게 하기에 충분치 않겠습니까 신이 반복해서 생각해보고
정으로 참작해 보아도 끝내 이혼하는 것이 옳은 줄을 모르겠습니다 그럽니다
그러니까 대단한 사람입니다 뭐냐면 절대 안 됩니다 이혼 시키면
절대 안 됩니다 그러면서이이 최명길이 뭐까지
하냐면요 야 그러면 우리가 임진 회란 때 똑같은 일을 당했는데 그럼 임진
회란 때도 선조 대왕이 뭔가를 결정을 내렸을 거 아니냐 그러면서 사신을 사고로 보내 갖고 왕조 실로
거기에 있는 선조 신록을 읽어 오게끔 해요 여러분 실록이 것은 사신들 그 사관들이 볼 수 있습니다 아무도 못
봅니다 왕 자신들도 못 봅니다 그러니까 그거를 볼 수 있는 사람을
뽑아서 그 사람 보고 가서 도대체 선조가 뭐라고 그때에 결정을 내렸는지를 보라 그럽니다 그때 이제
외군 테 잡혀갔던 사람들이 여자들이 풀려나고 그랬을 경우에 똑같은 문제가 그 논란이 벌어지니까 그때 선조가 안
된다 그랬답니다 그래서 이제 그 그것까지 인용하면서 절대로 안 됩니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이제이어서 얘기를 이렇게 합니다 그리고 한 이겸의 딸에 관한 일은 별도로 의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이
심양으로 갈 때들은 이야기인데 청나라 병사들이 돌아갈 때 자세이 잠옷
아름다운 한 처녀가 있어 청나라 사람들이 온갖 방법으로 달래고
협박하였다 사보에 이르러 굶어 죽었는데 청나라 사람들도 감탄하여
묻어주고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또 심양의 관사에 있을 때 한 처녀를
값을 정하고 속하려 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이 뒤에 약속을 위배하고 값을 더
요구하자 그 처녀가 돌아갈 수 없음을 알고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죽고 말았습니다 이에 끝내는 그녀의 시체를
사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가령이 두 처녀가 다행히 기한 전에 속되라
반드시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비록 정결한 지조가 있더라도 누가 다시
알아 주겠습니까 이로서 미로 본다면 전쟁에 급한 상황 속에서 몸을 더럽혔다는 누명을 뒤집어 쓰고서도
밝히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사로잡혀 간 녀들을 모두 몸을 더럽혔다고 논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한 이겸이 상하여 진한 것도 또한 어찌 특별한 원통한 정상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름대로 하라고 하였습니다 인조가
그렇게였습니다 근데 여러분 다음 문장을 보세요 실록의 다음 문장이
뭐라고 써 있냐면요 그러나이 뒤로는 사대부집 자제는 모두 다시 장가를
들고 다시 합하는 자가 없었다 저는 이걸 보고 조선 남자들의 저
비열함 저 비겁함 정말 너무 놀랍습니다 자기네들이 못 지켜져서
끌려갔었는데 이것도 양반 4대부 집에서 지체 높을수록 어 몸을
더럽혔기 때문에 자기 조상들의 제사를 받들게 할 수 없다 이러면서 다
이혼을 시켰습니다 그러니까 왕도 최명길의 의견을 받아서 선저
때도 안 그렇기 때문에 임진란 직후에도 안 그었기 때문에 이혼하면 안 된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다
사대부 자재들은 다 새장가를 들어버렸다 끌려갔던 부인들을 다 버리고 그런데 실록에 보면 사관이
기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견을 집어넣는 부분이 꼭 있습니다 그 어전회의를 쭉한 얘기를 해갖고
이렇게 결정이 내렸지만 다 이렇게 이혼을 시켜 버렸다고 하면서 사관이
또 자기 의견을 지우는 부분이 나옵니다 뭐라 그러냐면 사신은 논한다 사신게 역사 사자입니다 사신은 논한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려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으니이는 절의가
국가의 관계되고 우주의 동이 되기 때문이다 사로잡혀 갔던 부녀들은 비록
그녀들의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변을 만나 죽지 않 절리를 잃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의 집과는 의리가 이미
끊어진 것이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최명길은 삐뚤어진 견해를 가지고 망령되게 선조때이를
인용하여 니하는 말에 끊어버리기 어렵다는 의견을 갖추 진달 하였으니 잘못됨이 심하다 그러면서 최명길이
임진란 당시에 선조 실록의 기록까지 참조하면서 까지 했던 것조차도 이런
궤변을 늘어놓기 위해서 한다 여정들이 정절을 못 지켰으면 당연히 내쳐야
되는 거다라고 그렇게 사관도 써 버립니다 그러니까 사대부 자재들이 다 이혼을 시켜 버리는 거죠 자
그런데 그로부터 몇 년 후에 송시열이 송자 대전에 나온 기록이 있습니다
바로이 장선진 대대한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지금 어쨌든 다른 사대부
집안에서 어떻게는지 몰라 또이 장유의 아들 장선을 이혼시키는 건 결국은 어떡합니까 최명길의 말을 듣고 그래
그럼 이혼 안 된다 이렇게 결정을 내렸지 않습니까 그까 이혼을 못 했던 거죠 그거에 대해서 송시열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신은 또 상고 하건데 정자가 이르기를 절한 여자를 취하여
배필로 삼으면이는 벌써 자신이 실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정축년 별란 초에 절한
부인을 그 남편으로 하여금 버리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는 실적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 그때에 장유의 아들 장선을 이혼을 안 시킨
거는 실조를 하도록 만든거다 남자도 법을 의롭게 제정했다 아도 오히려
악용이 될까 걱정인데 이런 식으로 법을 만드니 어떻게 백성을 방지하겠습니다 삼가 듣건대 장선진
집에 실절 부인의 소생이 있는데 상신이 그와 혼인을 의논했다 하니
추함이 막심합니다 대신이 이와 같기 때문에 정이 날로 격화되고 임금의
위세가 날로 강화되니 매우 두렵습니다 무슨 얘기냐면 장선의 집에서 그 그
심양에 끌려갔다 온 그 부인하고 사이에 아들이 있었 아들이 있는데 그 집하고 다른 집하고 혼사가 오고 간
거예요 혼사가 오고 갔다는조차도 추하다는 겁니다 지금 어떻게 그런 집
자제하고 결혼할 생각을 하는 대신이 있느냐 라면서 비난을 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결정을 내리고 법을 만드니까 나라가 지금 이모양 꼴리다 라면서 실제한 여자들을 내치지 못하게
한 것이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얘기를 합니다 이제이 부분을 읽으면서 야
정말 어떻게 저렇게 모든 일을 저렇게 여자들한테 다 떠넘기고
저렇게 비겁한 얘기를 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저는요 이거에
대한 정말 놀라운 객관적인 자료를 찾았습니다 제가 책을 쓰면서 그 당시에 여러가지 책들에 대해서 읽다가
너무나도 놀라운 얘기를 발견했는데 이게 뭐냐면 미국 학자 페시아 이브라고 일리노이 대학에 있는 유명한
중국학 하는 교수가 그 쓴 저 편집한 책이 있습니다 책 제목이
Chinese Civilization a source book 그래 갖고 중국 역대에 유명했던 기록들 이런
것들을 발해 갖고 자기가 번역을 해서 낸 책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은 양주
기라 책이 있는데요 그 책의 내용을 쭉 그걸 완전히 번역을 했는데 그
중에서 제가 그걸 읽다가 발견한 대목입니다 우선 이게 이게 배경이
뭐냐면요 양주 1기라는게 뭐냐면 청나라가 이제 명나라를 제압을 하고
명나라가 무너진다면 청나라가 들어가서 그래서 처음에는이 중국 사람 명나라 사람들이 청군을 다 환영을 했습니다
왜냐면 너무 그전에 이자성의 난이 있고 너무나 어지러운데 오히려 천군이 들어와서 질서를 잡고 그러니까
처음에는 환영을 했었는데 그까 중국 사람들이 청조에 절 아주 결사적으로 저항을
하기 시작게 뭐냐면 변발령이 내립니다 여러분 변발령이 뭔지 아세요 변발이게
중국 사람들이 이렇게 앞에 머리 이렇게 깍 면도 같이 하고 그다음에 어떻게하면 머리를 이렇게 땄지
않습니까 남자들이 그걸 변발이 그러는 거죠 이건 만주족의 머리죠 그죠 원래
머리는 어떡합니까 상투를 틀었죠 남자들이 똑같이 제갈량도 상투를었고 다 상투 입
손권도 상투 틀었고 그 상투가 없어진게 청나라 때문에 없어지는 거죠 그 그 전까지는 조선의 상나 중국의
상나 똑같았습니다 근데 그 상투를 다 잘라 버리라는 거예요 지금 청나라가
들어오면서 여진족이 변발령이 내리니까 이제 한족들이 중국 사람들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청나라가 수없는 전쟁을 하면서 이거 평정하러 다닙니다 그러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청 조종이 뭐라 그러지 어느 날 안 되겠다 이제 뼈대를 지접 보야
된다 다음부터는 만일에 변발의 반대에서 저항을 하다가 함락이 함락이
되는 도시가 있으면 그 도시에서는 남녀 노소 다 죽여 버린다
완전히 전멸을 시켜 버리겠다 그럽니다 그래서 실제로 실제로
양주라는데 가장 큰 도시 무역의 그 그 그 그 도시였습니다 그 번창하는
도시에서도 또 반란이 라니까 그거를 공략을 해 갖고 청군이 들어가서
함락이 된 다음부터 10일 동안 처참한 학살극을 버립니다 근데
그 학살극을 버리는 거를 그중에 한 사람이 살아남아 갖고 그거를 탁
기록을 해한게 남아 있었던 거죠 그게 양주 기입니다 10일 동안 양주에서
겪은 일입니다 그런데이 사람이 그러니까 매일 같이이 집 저집이 창고
저 창고 뭐 지하실 베라벨대 다 숨으면서 간신히를 버텨냈는데 이날도
또 이제 어느 집에 피해서 또 어느 집 벽장에 이제 숨었답니다 그래서 벽장에 숨어 있는데 자기가 숨어 있는
그 벽장이 있는 방에 지금 천군 병사들이 들어온 거예요 중흥 여자들을
데리고 끌고서 그러면서 이제 여자들 희롱을 하는 거죠 거기서 근데 희롱을
하다가 그 청나라 병사가 이런 말을 했다 라는 기록이 지금 양주 11기에 나오는 거를 제가 피 페시 브레이
교수가 번역한 영어로 된 걸 제가 찾아서 읽어 읽어서 다시 번역을 한 겁니다 이런 얘기가 이런 대화고
겁니다 청의 군사들은 사람들에게 자주 말했다 우리가 고려 그러니까 그 당시
고려라고 불렀습니다 조선을 정복했을 때는 수만 명의 여자를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그 중 단 한 명도 정조를 잃지 않았다 그런데 중국 같은 대국
여자들은 어찌 이리 수치심을 모르는 가라면서 천군 병사들이 본인 입으로
그러는 거예요 아니 우리가 그때 몇 년 전에 조선에 쳐들어가서는 수십만
명을 잡아왔는데 그중에는 조선의 여자들은 단 한 명도 실제한 여자가 없었다 그니까 아까 최명길 말대로
뭡니까 자결을 하거나 굶어죽거나 하면서 그걸 다 뿌리 쳤었는데 그런데 중국 여자들은 왜
이렇게 정조를 못 지키냐 오히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냐면은 지금
장선진의 부인에 대해서 장유 그다음에 그 그 사관들 이런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조선 여성들에 대한 그 의심과 오해 오히려 중국 병사들 청나라
병사들의 입으로 건 아니었다라고 증명이 오히려 되고
있습니다 그런 거를 보면은 정말 조선의 여성들은 대단했다 조선 남성들에 비해서 비할 바 없이
대단했다 그런데 이런 기록들이 조선의 기록에서도 나옵니다 이정암이라는
유명한 선비가 임진 외란을 겪고 나서 이런 글을 쓴게 있습니다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 옛사람의 글을 읽고 옛사람의 절리를 사모하여 평소에는 큰
소리 치면서 의에 죽고 구차히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국가가
위험하고 어려운 전쟁으로 빼앗고 약탈하는 때를 만나면 목숨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는 자가 중한 둘도 없는 법인데 부인이나 처녀들 중에는 반대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간혹 있으니 나는이를 우리 가문의 세 절부
보았다 임진란 당시에도 놀라운 기록들 많습니다 여러분 놀라운 기록들을 보고
있으면요 조선의 여성들은 끝까지 싸우는 모습들이 너무나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어떡합니까 그다음부터는 그렇게 여성의 정조가
중요해지기 시작하면서 이때부터 조선에 뭐가 세지냐 면요 문이라는 것이
본격적으로 세워집니다 그래서 연료의 통계를 보시면요 몇십 배가 늘어납니다
연료들이 갑자기 그리고이 병자호란 전에는 열려라 그러면은 뭐 수절 해도
열려고 그랬는데 병자 한부는 연료의 기준이 뭐냐면 실절 할 상태가을 때
자결을 하느냐 남편이 죽으면 따라서 죽느냐 안 안 죽느냐를 가지고 연료의
기준을 세우는데 그 연료비가 전국에 세워지기 시작하 겁 그니까 자기네가
못 지킨 못 지켜준 그 조선 여성들의 정조를 여성들 보고 지키라 그러고
이제부터는 우리가 지키겠다 그러면서 연료비를 세우고 여성들을 꼼짝없이 속박을 하기 시작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여성들의 지위는 급전직하로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런 상황을 교사들이 와서 서양의
선교사들이 19세기 말에 와서 보는 겁니다 그래서 스크랜턴 여사가 어
1895년에 조선에 들어와서 이제 어 이화학 땅이라는 걸 이제 처음 세우려
그런 거죠 1896년에 이제 이화학당이 본격적으로 세워지지만 이분들이 제일 먼저 와서 하는게
고아원을 세우는 겁니다 그러니까는 언더우드 목사도 경신 학교라는 걸 세우죠 그게 다 고아원에서 시작을
하는 겁니다 워낙 고아들이 많으니까 조선에 그러니까 이제 그 남자 고원도
생겼지만 이제 여자 고원을 그래서 스크랜튼 여사는 여자 아이들을 위한 고원을 세우려고 그래서 그 계획을
했다 하면서 그거에 대한 보고서를 쓴게 있습니다 내 다음 사역은 빈민 구제가 될 것입니다 2 3주 전 이런
생각을 하였는데 올바른 방향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나는 버려진 고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당장 와 두 명을 집에 데려올 생각이었습니다 새 집이 마련될 때까지 지 않고 형편대로 곧 시작하려
했습니다 오늘 아침까지 심사숙고한 끝에 두 명이 아니라 여섯 명을 데려다 기르기로 결심하고 내게 고아
이야기를 해준 사람에게 부탁해서 고아들을 더 데려오도록 하였습니다 기대를 갖고 기다렸는데 그는
며칠이지나 빈손으로 돌아와 여자 고아들을 구하기 어렵습니다 남자 고아들은 아주 많은데
어린 여자 아이들은 돈을 주고 사가기 때문입니다라고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이건 남자들은 아주 극빈층이 아니면 부인이나 첩을 여러 명 거느리고 사는데 그런 배경에서 어린 여자
고아들을 사고 판아 봅니다
어 그러니깐 그이 여자아이들은 고화도 못 못
찾습니다 내버려두지 않는 거죠 다 처벌로 부모 없고 버려진 사람은
첩으로 데려오거나 뭐 기생으로 팔거나 뭐 노비로 팔거나 이렇게 하겠죠
그래서 이사벨라 비숍 여사가 또 이런 얘기를 합니다 조선에는 여자아이들
가르치는 학교가 없다 조선의 여성은에 대해 아무런 교육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지체가 높은 계층에서는
언문을 배우는 여자도 있지만 그 숫자는 1천명당 한 명도 안 된다
그렇죠 한글을 배우는 경우도 있지만 1천명에 하나 정도도 안 된다 여자들에게 부과된 영역은 글을 할
필요가 없다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맨날 그죠 옷이나 짓고 앉아 있는데
글을 알아서 뭘 하냐 이런 얘기가 됩니다 예외가 있다면 점자는 계층에 속하지 않은 여성들이다 뭐죠 기생
얘기죠 남자들의 잡다한 놀이 대상이 되어주기 위하여 그들은 이야기를 읽고 낭송하거나 춤추고 노래하고 악기를
다루는 등 남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 것들만 골라서 흘려 맞는다
이런 여성들은 신분 상승을 이룰 수도 있으나 절대로 누구의 부인이 될 수는
없다 조선의 남자들은 자신의 혈 흠집이 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부인은
비록 하얀 벽이 완전히 머리가 비어 있는 여자라도 다른 곳에서 찾지 결코
잔치 않은 계층에서는 찾지 않는다 그니까 글을 좀 알고 그래도
남자들하고 대화가 상대가 되는 거는 기생들 밖에 안 되고 그럼 기생들은
부인으로 맞이할 수 없고 잘해야 불어나 맞이할 수 있는데 그러면 부인들은 그러 글을 가리냐 아무것도
안가 그럼 어떻게니까 가 높은 집일수록
부인은 머리가 백치 백치 상태 백치처럼 하얗 되는 겁니다 이게 지금
조선 여성의 처지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다음에 이제
나오는게 또 이거는 언더우드 목사 부인이 한 얘기입니다 조선의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아름답지 않다 나는 이들을 그누구 못지 않게 사랑하고 내친 자매와 같이 생각하지만이는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비해 절망 노동 병마 사랑받지 못함 무지
너무나너무나 많은 경우에 수치심은 그들의을 눈을 흐리멍텅하게 만들었고
그들의 얼굴을 굳어지고 상처나게함으로써 25살이 넘은 여자들 사이에서 아름다운 비슷한 것을 찾는
것은 헛된 일이다 아직 염려와 고대 노동의 손길이 닿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나 젊은 부인들 시들 괄호열고
이분이 시라고 아예 쓰셨습니다 SSI 중에는 이쁘고 매력적이고
흔치는 않지만 아 아름답기까지 한 얼굴을 볼 수 있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나 이들 불쌍한 궁중의 여인들은 그런 경우가 아니다 굳어질 때로 굳어졌고 거칠고 저속하게 한 이들을
보면 가쓴 마음만 들 뿐이다 그러니까 앞부분에는 조선 여성들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얘기를 하는 거죠 너무나
힘들게 살기 때문에 이쁜 여자 여자들 처 찾아보기 힘들다 지금 전 세계에서
미용이나 모든 거에 미에 있어서 앞서가는 조선 한국의
여성들의 100년 전에 모습이 절했다
뒷부분에 뭐라고 써 있냐면이 불쌍한 궁중의 여인들은 그런 경우가 아니다 이게
뭐냐면요 지금 이때가 언더우드 어 목사 부인이 고정하고 민비를 연하로
들어갔을 때입니다 궁중에 그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거기에 이제 궁궐에 있는 많은 뭐 상궁이 무슨 뭐 무수리 뭐
하여튼 여자들이 있을 거 아닙니까 경복궁에는 만 명이 항이 득을 거렸답니다 많은 경우 여자들이 근데
그 여자들은 일반 백성들 같이 헐벗고 굶주리고 그래서 아름답지 않은게
아니라 당연히 화장도 했을 거고 궁중 여인들이 했는데
너무나 굳어졌고 거칠고 저속하다 담배 피고 뭐 이러면서 그런 거를 보면서
아 조선의 여성들 또 이랬었구나 하는 거를 우리가 간음에 볼 수 있습니다
다음에는 독립 신문입니다 여러분 독립 신문이 1896년 서재필 씨가 와서 어 독립
신문을 만들지 않습니까 그 독립 신문에 이런 기사가납니다 서재필 씨가 쓴 기사입니다 세상의 불쌍한 인생은
조선 옆편 내니 우리가 오늘날이 불쌍한 옆편 내들 위하여 조선
인민에게 말하노라 여러분 여기서 옆편 내 이런 걸 보면 지금 우리말로는 굉장히 안 좋은 상수로 말 같이 돼
있지만 당시의 조선 말로는 좋은 말이었던가 봅니다 그니까 전혀 우리가 어투가
달랐었다 거죠 우리말로 지금하면 여성들이 옆편 내가 나이보다 조금 더
낮은이 아닌데 낮은이라는게 낮은이가 아닌데 낮은 사람이 아닌데 사나이들이
천대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나이들이 문명 개화가 못되어 이치와 인정은
생각하지 않고 다만 자기의 심만 믿고 팔힘만 믿고 압제하는
것이니 만 믿고 하려는 것이니 어찌 야만에서 다름이 있으리요 사람이 야만과 다른 것은
정의와 예법과 의리를 알아 행신 하는 사람 것이을 조선 사나이가 옆편 내
대접하는 것을 보고 두면 정도 없고 의도 없고 예도 없고 참 사랑하는 마음도 없이 대접하기를 나이보다 천한
사람으로 하고 무리하게 자는 풍속과 억지와 위험으로 행하는 일이 많으니
많이 있으니 그 옆편 애들을 대하여 어찌 불쌍하고 부한 마음이 없사
장부라고 하는 것은 강하고 교만한 사람을 없신 여기고 약하고 고한
피곤한 인생을 높이고 위해주는 법인데 옆편 내라는 것은 사나보다 약하니
장부의 도리에 약한 일을 존경하고 위하는 것이 높고 마땅한 일이라 조선
옆편 애들이 약한 고로 자유한 권위 권리가 없고 없어졌고 대접받기를 오게
갇힌 죄인 같이하니 그 산 아이들의 무리한 죄상을 생각하면 매우 천하고
심하더라 조선 남녀의 행실을 비교하여 볼데 옆편 내가 나이보다 100배가 나은 것이 첫째는 사나이 중에
음행하는 자가 더 많고 둔 사람이 많이 있으되 옆편 중에는 음행하는
이도 적고 간 부든 옆도 은즉 어찌 나이보다 높고 정결하지 하리요 무리한
사나이들이 풍성 만들기를 저희는 행하며 장가든 후 불 두어도 부끄러움이 없고 자기 아내는 음행이
있지 간부가 있으면 대변으로 아니 그런 고르지 못한 일이 어찌 있으리요
자기 행실이고 정결한 후 자기 아내가 행실이 그면 그때는 그 아내를
는다든지 법률로 다스리는 것은 하거니와 자기 행실이 그런즉 자기
안에 책망하는 권력이 없는지라 조선산 중에 음행을 하든지을 두는 자는
음행이 있는 내 다스리는 법률로 다스리는 것이 마하라 천 의 생각에
자기 아내가 문 더워 문밖에 임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내외하는 풍속을
마련하여 죄인 같이 집에 가두어두고 부리기를 종 같이 하고 대하기를
자기보다 낮은 사람으로 여기니 어찌 분치 아니리요 아내가 죽으면 치하는
것은 저희들이 옳은 법으로 정하였고 서방이 죽으면 가하여 가는 것은 천히
여기니 그것은 무슨인지 모라 가는 한 옆편 내가 소의 소년의 과부가 되면가
하여도 무방하고 사나이도 소년에 상처면 치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조선 부인 애들도 차차 학문이 높아지고 지식이 러지 부인의
권리가 산하이 권리와 같은 줄을 알고 무리한 사나이들을 제어하는 방법을
알리라 그렇기에 우리는 부인 네들 권하노니 아무쪼록 학문을 높이 배워
산 아이들보다 행실이 더 높고 지식도 더 넓혀 부인의 권리를 찾고 어리석고
무리한 사나이들을 교육하기 바라더라 독립신문 18 96년 4월 21일 일면
이단입니다 여러분 3주째 밖에 안 된 신문입니다 그니까 그런데 누가
썼습니까 외국 사람도 아니고 외국 여자도 아니고 조선 여자도 아니고
조선 남자인 서제 씨가 쓴 글입니다 그 서표 씨의 눈에서
보기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을 지금 여성들이 당하고 있다 조목조목 들어서
조선 남자들의 위선과 야만을 매섭게 비난하고
있습니다 다음 하나 또 보겠습니다 이거는 이제 조선 남성이 본 조선
남성입니다 그니까 이거는 윤치호 선생이 또 쓴 일기에 쓴 글입니다
1903년 6월 19일자 일기에 나오는 글인데 이런 글이 있습니다 조선인 남성은 이기주의 의 화신이다
소인 남성은 자신이 편하기만 한다면 아내와 자녀들이 편하게 지내는지
불편하게 지내는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사실 아내들은 자신의 군주이자
주인에게 봉사하는 것만이 의인 의무인 인일 뿐이다 우리 어머님은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즐겁게 일하신다 사람들은 모두 각자 따로 상을 받아야 하고
함께 식사하는 시간이 나 장소가 없기 때문에 어머님과 하녀들은 오랫동안
음식을 준비하고 밥상을 차린 일로 하루 종일 정신없이 바쁘다 정해진
시간에 공동 식당에 차린 공동 식탁에서 식사를 한다면 걱정거리와 문제거리가 많이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우리 아버님은 그렇게 터이 없는 제안에는 전혀 귀를 기울지 않으신다
라면서 1903년 6월 19일자 일기에 썼습니다 지금 여기서 쓰고 있는 자기 아버님 얘기가 유능
씨입니다 윤흥열 씨는요 여러분 정말로 개화파 있습니다 개화한데도 전 세대는
했었던 거죠 그러니까 윤흥열 씨가 일찌감치 신사유람단 때 일본에
건너가서 그때에 후쿠사 유키치 만나고 그다음에 그 저 영국 영사도 만나고
다 만나고 옵니다 그러면서 오자마자 어떡합니까 오자마자 자기 아들 16살짜리 아들 윤치호를 일본에
보내는 거죠 그래서 후쿠사 테 의탁을 해서 후쿠사 가 동인사 보내줘서 1년간 일본말을 배우고 6개월간
영어를 배우고 후트 공사가 주한 주조선 미국 공사가 부임할 때 그때
도쿄에서 만나서 후트 공사의 통역으로 18살 때 다시 조선에 들어와서
이따가 갑신정변이 12월에 일어나서 실패하고는 이제 외국에 나가서 상해로
먼저 가서 상해의 중서 서원이라는 앵글로 아메리 레지라데 가서 4년 동안 영어로 대학을 졸업을 합니다
너무 공부를 잘해서 그 학교를 설립한 영 앨렌 목사라는 분이 자네는 미국
가야 된다 그래서 밴더빌트 대학에 유학을 보내줘서 밴더빌트 대학에서 또
대학을 졸업하는데 영문학을 전공을 해서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 거기 선생들이 어떻게 이렇게 똑똑한 사람이
있냐 그랬습니다 영어로 강연을 하면서 그 동네에 그 주변에 미국 남부를
돌면서 강연을 하면서 학비를 벌었답니다 그러고 나서는 그것도 모 자라서 에모리 대학에 가서 석사
학기까지 하고 그러고는 이제 에 돌아가서 거기에서 자기가가 배웠던
중서 서원에 가서 3년 동안 또 교수 영어로 교수 노릇을 하고 그러고 나서는 갑보 영장이 나니까 조선에
이제 다시 들어오게 되는 거죠 자 이런 분이 전 세계를 지금 다 왔습니다 그러니까 뭐 조선말 하고
한문은 물론이고 일본말 영어 중국어 다 하는 분입니다 가장 열려 있고
가장 세상을 많이 받고 대단한 분인데 이분이 돌아와서 돌아와서 조선에 와서
보니까 그런데 도대체 우리 어머님은 참 좋으신 분이라서 남편을 봉양을
하고 자식들을 위해서 그렇고 온갖 손님들을 다 치지만 이게 얼마나 고대고 힘든
일이냐 그런데 도대체 서양식으로 가서 보면요 식구들이 밥 먹을 때 되면 그냥 다 한 번에 한 다이닝룸에 앉아
갖고 식탁에 앉아 갖고 다 같이 밥먹고 치우면 되는데 아 이거는 또 이제 양반집이라고 다 독상을 그것도
시 식사 시간도 없었습니다 따로 아무 때나 아무 때나 손님 오면 그냥 그때그때 밥상을내는 거예요 이제 이런
거를 보면서 얼마나 조선의 여성들이 고대다 그것도 하층민 아니라
자기 어머니 같이 굉장히 그래도 지체가 높고 재산도 많고 권세도
있었던 집안에서조차도 여성들의 삶은 이렇게 고됐다 거를 또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 보통 평민들의 여성들의 삶에 대해서도 했었고 어 사대부집 어
그러니까 윤치호 신의 집안 같은 그 여성들에 대한 얘기도 했고 근데 정말이 다음이 황태자 비에 대한
얘기가 수 있어 아 참 그 조선 여성들의 처지를 너무 적날하게 보여주는 거 같아서 한번 같이 읽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이 역시 윤치호 일기에 나온 얘기입니다 윤치호 일기가 1904년 11월 6일 날 이런
부분이 나옵니다 어젯밤에 황태비 순명 민씨가
돌아가셨다 아니 의들이 여성환자를 진료하지 못하게 하는 부당한 조선의
관습 때문에 강제로 죽음을 당한 것이다 어
순종황제가 비가 둘이 있었습니다 그니까 어 순명 황후가 있고
순정효황후가 있죠 순명 효우가 지금 아직
세자였던 필요한 처방을 정확하게 진단하는 것은 의학이 자랑할 수 있는 건 이상이다 황태자비의 경우는
아무것도 보일 수 없었다 그나마 잠깐 맥 맥을 보는 것도 못했다는 겁니다
심지어 손도 손목 주의 좁은 분분 부분을 제외하고는 비단으로 감쌌다
외국인 의사라면 황태자비를 살릴 수 있었으리라고 확신한다 황태자비를
진단하기 위해서 60여명의 의사가 소환되었다 하지만 그 의사 가운데 환자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환자를 못 본 거죠 형태 잡이를 어떻게 남자 의사들이 들어가서
봅니까 진각을 못 하는 거죠 의사가 처방전을 지을 때는 전체 의사들의
평가에 따랐다 의사들이 그렇게 처방전 짓는 과정을 다 끝냈을 때는
쓸모없거나 해로운 것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러니까 뭡니까 회의를 통해 갖고 약을 조제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강한게 있으면 혹시 무슨 부작용이 있을까 봐 겁나서 다 다 빼 버린다는 거죠 그래서 아무
쓸데없 찌꺼기 약 강제만화 의사라 해도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기회를 갖지 못했다 왕족이 궁궐에서 병이 났을 때는 오직 천우
신조나 기회나 운수 외에 그 왕족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민영익이 민영익이 갑신정변 당시에 정변 파대는데 칼을 일곱
군데나 맞고서 거의 죽어 가는 것을 그때에 마침 10월 중순쯤에 알렌
목사가 아 알렌 의사가 해피면 와 있었고 그리고 그 알아서 그때
멜레프고 후트 공사가 이제 불렀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근데 그때는
어떻게 했습니까 남자고 그러니까 어쨌든간에 그걸 뜯어내고 다 한의사들
물리치고 꿰매고 자르 전부 다 해 갖고 그 사람을 살려내는 거죠 상투
날아가고 다 찢기고 한 사람까지도 살려냈는데 지금 못
살려냈습니다이이 비를 그러니까는 이런 걸 아는 윤초 씨
입장에서는 정말 통탄할 일이죠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 있느냐
하면서 서양 의사였으면 무조건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얘기를 합니다
이것이 여자이기 때문에 아무리 황족이 황실도 겪어야 되는 그런 비극적인
삶이었습니다 자 자 그러면 지금 우리가 어 지금 대한민국은 제가 한국
사람들의 기대수명에 대해서 한번 찾아봤는데 아주 최신 정보를 하나 찾았습니다
2024년 각국 국가별 기대수명 이제 순위가 나온 겠 있습니다 근데 여기
보시면요 1위가 홍콩입니다 근데 홍콩은 뭐 사실 독립 국가도 아니고 인구도 얼마 안 되기 때문에 한
500만이 나 될까요 그러니까 어 거기는 어쨌든 그 남녀를 합쳐서 평균
기대 그니까 기대 명이 85.6 3세 2위가 사실은 1위가 나라로 치면
1위가 1번입니다 1 1번이 84.85 여성들이 87.88 C
남성들이 81.8 3세 그런데 한국이 대한민국이 그 다음입니다
84점 평균 84.4 3세 여성은 8.28 남성은
81.32 아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까지 세계에서 두 번째 세
번째로 제일 오래 사는 나라가 됐습니다 이것은 조선이 아닌 다른 나라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대한민국이라는 다른 나라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역사를 바라볼 때는 어떻게 어떻게 해서 조선 시대에는 여성들이 저런
대우를 받고 비록 황태자 비례도 저렇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그런
사람들이 이제는 세상 세계에서 제일 오래 사는 그런 남자들보다 오래 사는
그런 세상이 되었는가 무엇이 변했고 무엇이 발전했고 무엇이 좋아졌고 무엇이
근대화가 됐기 때문에 이루어졌지 조선 사람이 어떻게 해서 한국 사람이 되어서 이런 기적이 일어나는지 그런
것을 살펴보는 것이 그것이 우리의 역사 한국의 역사를 어
바라보는 관점이 그런 근원을 어내는 것이 바로 역사가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은 어 조선의 여성들의 어 삶이
어땠을까 아 그런 것을 그런 것을 말씀을 드렸는데요 글쎄요 저도 어
이것을 조사를 하고 읽고 쓰고 하면서 참 마음이 많이 아팠고 아 참 이런
이런 시대가 있었구나 우리 선조들이 우리 선대들이 이렇게 살았 구나
그러면서 참 오늘의 대한민국에 대한 감사와이 시대에 타는 거에 대한
고마움도 느껴보고 그랬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역사를 직시하는 어 아무리
아프고 슬픈 역사지만 그를 직시해야만 우리가 여기 어떻게 왔고 그리고
앞으로 앞으로 어느 방향으로 나가야 될지를 알게 되는 거 같아서 어 힘들
때론 힘들지만이 문제를 깊이 한번 달아봤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정한 론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에서 일어났던 논쟁인데 조선의 역사에 굉장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논쟁이
때문에 정한론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을 통해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한국인의 탄생 지금까지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음악]
===

세진님, 요청하신 강좌 14회 내용에 대한 요약과 평론입니다. 나를 향하지 않은 본문(요약 및 평론)은 <해라> 체를 사용하고, 각 사실적 정보에는 출처 각주를 붙였으며 강조 기호는 < >로 표기했다.

<조선 여성은 언제부터 차별받았을까?> 요약 및 평론

1. 내용 요약

강좌 14회에서 함재봉은 19세기 말 서양 선교사와 지식인들의 1차 사료(기록)를 바탕으로, 조선 시대 유교 성리학과 종법 질서의 도입, 그리고 양란(임진왜란·병자호란)을 거치며 조선 여성의 지위가 어떻게 극단적으로 실추되고 억압받게 되었는지를 다각도로 해부한다.

(1) 외국 관찰자들의 기록과 조선 여성의 처참한 실상

  • 비숍 여사 및 달래 신부의 증언: 비숍 여사의 <조선과 그 이웃들>에 따르면 조선 여성은 법적·정신적 권리를 부인당한 채 노동과 쾌락의 연장선상에 있는 '노예'와 다름없었다. 외관 남자가 실수로 손만 대어도 남편이나 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자살을 강요당하는 명예살인(Honor Killing)적 습속이 존재했다.

  • 외출 및 교육의 차단: 양반가 여성들은 얼굴을 가리는 장옷을 써야 했으며, 문해율은 1,000명 중 1명도 안 될 정도로 교육에서 소외되었다. 언더우드 부인의 증언처럼 과중한 노동, 비위생, 절망, 무지로 인해 20대만 지나도 외모와 건강이 극도로 피폐해지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2) 병자호란과 '환향녀(還鄕女)' 파동: 비겁한 남성성과 정조의 강제

  • 환향녀의 비극과 사대부의 이기심: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잡혀갔다 몸값을 치르고 돌아온 여성들에 대해, 효종의 장인 장유 등 사대부들은 '실절(失節)'을 이유로 조상의 제사를 받들 수 없다며 이혼을 요구했다.

  • 최명길의 반대와 사대부들의 실행: 최명길은 선조 대의 전례와 억울하게 끌려간 부녀자들의 사정을 들어 이혼을 반대했고 인조 역시 이를 받아들였으나, 사대부 자제들은 끝내 돌아온 부인들을 버리고 새장가를 들었다.

  • 청나라 기록과 역사적 역설: 사관들과 송시열조차 실절한 부인을 내치지 않는 것이 잘못이라 비난했으나, 정작 청나라 군사들의 기록(<양주십일기>)에서는 "조선 여성들은 단 한 명도 정조를 잃지 않고 자결하거나 저항했다"고 증언하여 조선 사대부들의 비겁함과 오해를 반증해 준다. 이후 조선 조정은 자기들의 무능을 덮고자 전국에 열녀문을 세우며 여성의 정절을 더욱 가혹하게 옥죄었다.

(3) 근대적 지식인들의 비판과 신분·성별을 뛰어넘는 비극

  • 독립신문과 윤치호의 고발: 1896년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통해 조선 남성들의 위선, 축첩 제도, 여성 학대를 야만적이라 매섭게 비판했다. 윤치호 역시 자신의 일기에서 "조선 남성은 이기주의의 화신"이라며 어머님과 여성들이 당하는 무급 노동과 억압을 통탄했다.

  • 황태자비(순명효황후)의 비극: 남녀 유별이라는 유교적 관습 때문에 60여 명의 한의사가 호출되고도 손목에 비단을 감은 채 진맥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 황태자비 순명효황후가 사망했다. 궁궐의 최고 권력층 여성조차 유교적 가부장제의 비합리성 속에서 치료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죽어갔던 것이 조선 여성의 궁극적 실상이었다.

2. 평론: 유교적 가부장제의 폭력성과 근대적 인권의 탄생

강좌 14회는 조선 왕조와 사대부 담론의 화려한 겉껍질 뒤에 숨겨진 '인구 절반(여성)에 대한 구조적 폭력과 수탈'을 냉정하게 해부한 사상사적 및 문화인류학적 성과이다.

첫째, 여성 억압의 역사적 기원과 '남성성의 비겁함'에 대한 통찰이다. 조선 여성의 차별이 태고의 민족적 본성이 아니라 성리학적 종법제의 수용과 양란이라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 심화되었음을 밝혀낸다. 특히 병자호란 당시 나라와 국방을 지키지 못한 사대부 남성들이, 그 책임을 끌려갔다 돌아온 여성들의 '정절 논쟁'으로 전가하고 열녀문을 통해 이념적으로 통제하려 했던 비겁성을 사료로 철저히 고발한다.

둘째, 서구 관찰자 사료와 내부 개혁파 사료의 입체적 결합이다. 비숍 여사, 달래 신부, 언더우드 부인 등 외부자의 눈에 비친 객관적 기록과, 서재필의 <독립신문> 논설 및 윤치호 일기라는 내부 선각자들의 고발을 결합함으로써 조선 말기 여성 인권의 비참함을 선명하게 입증했다. 이는 낭만적·민족주의적 조선관을 깨뜨리고 근대 인권 의식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강력한 근거가 된다.

셋째, 황태자비의 죽음이 보여주는 '제도적 비합리성'의 극치 고발이다. 아무리 높은 신분의 왕실 여성이라 하더라도 '남녀유별'이라는 관념에 갇혀 의사의 제대로 된 진찰조차 받지 못하고 목숨을 잃어야 했던 사건을 부각함으로써, 유교적 명분론이 어떻게 인간의 생명권과 최우선적 가치를 침해했는가를 일깨워준다.

결론적으로, 함재봉의 14회 강연은 조선이라는 유교 성리학 국가가 여성에게 얼마나 가혹한 체제였는가를 증명하며, 오늘날 대한민국 여성들이 누리는 자유, 교육, 세계 2위권의 기대수명이 조선 체제의 해체와 서구적 근대성(개인, 인권, 기독교 교육)의 수용을 통해 비로소 가능해진 문명사적 기적임을 통찰하게 만든다.

안내: 세진님, 원하시는 다음 강좌(15회 등)의 자료가 있으시다면 편하게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동일한 형식으로 요약과 평론을 작성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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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13회

<조선 사람들은 언제부터 제사를 지냈나>

요약

• 이번 강의는 오늘날 흔히 “오래된 한국 전통”으로 여기는 제사와 족보가 실제로는 언제, 어떤 과정을 통해 조선 사회에 정착했는지를 설명한다. 함재봉은 조상제사와 족보를 민족 고유의 불변하는 관습으로 보지 않고, 주자학적 가족제도와 국가질서가 확산되면서 형성된 역사적 제도로 해석한다.

• 고려와 조선 초기에도 조상을 기리는 행위는 있었지만, 오늘날 익숙한 형태의 장자 중심 제사와 부계 족보가 전국적으로 정착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라고 설명한다. 불교식 천도재, 무속적 조상숭배, 다양한 지역 관습이 공존했고, 유교식 제사는 처음부터 보편적인 생활규범이 아니었다.

• 주자학에서 제사는 죽은 조상의 영혼을 위로하는 의식인 동시에 살아 있는 후손의 도덕과 가족질서를 훈련하는 제도였다. 조상을 공경하고 제사의 절차를 지키는 일은 효의 실천이었으며, 가정과 국가의 위계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이해되었다.

• 초기 조선 정부는 주자학적 제례를 보급하려 했지만 백성은 이를 잘 알지 못했다. 제사상을 어떻게 차리고, 누가 제주가 되며, 어느 조상까지 모셔야 하는지조차 일정하지 않았다. 국가와 사대부는 중국의 예서와 《주자가례》를 기준으로 절차를 통일하려 했다.

• 제사의 중심에는 사당이 있었다. 주자학적 이상에 따르면 집 안에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을 설치하고,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야 했다. 그러나 사당을 세울 경제력이 없는 백성이 많았고, 실제 보급은 매우 느렸다. 따라서 법령과 유교적 이상이 곧바로 일상생활이 된 것은 아니었다.

• 태종과 세종 시대의 기록에도 사당과 제사를 둘러싼 혼란이 나타난다. 관리들조차 정확한 예법을 몰랐고, 세종은 신하들과 함께 제사의 절차와 대상, 사당 설치 문제를 논의했다. 함재봉은 이를 통해 유교식 제사가 이미 완성된 전통이 아니라 국가가 새로 만들어가던 제도였다고 강조한다.

• 제사의 보급에는 인쇄술과 예서의 확산이 중요했다. 《주자가례》와 각종 제례서가 보급되면서 사대부들은 혼례·상례·제례의 표준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었다. 예법을 아는 능력은 새로운 지배계층의 문화적 자격이 되었다.

• 족보 역시 처음부터 오늘날과 같은 형태가 아니었다. 초기 족보에는 아들과 딸, 친손과 외손이 비교적 폭넓게 기록되었고, 출생 순서에 따라 자녀를 적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조선 초기 가족질서가 아직 철저한 부계·장자 중심으로 재편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 강의에서는 1476년에 만들어진 《안동권씨 성화보》를 대표적 초기 족보로 소개한다. 이 족보는 여성과 외손 계통도 상당히 자세히 기록했으며, 후대 족보보다 양계적인 성격이 강했다.

• 시간이 지나면서 족보는 부계 혈통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딸과 외손의 기록은 줄어들고, 같은 성과 본관을 가진 남계 후손이 중심이 되었다. 족보는 단순한 가족기록이 아니라 양반의 신분과 혼인 자격, 재산권, 관직 진출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문서가 되었다.

• 성씨와 본관의 보편화도 비교적 늦은 현상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성이 없는 백성이 많았고, 19세기 말 호적제도가 정비될 때까지 모든 사람이 오늘날처럼 성과 본관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함재봉은 “모든 한국인이 오래전부터 같은 방식으로 성씨와 족보를 가졌다”는 통념을 비판한다.

• 부계 족보와 장자 중심 제사의 확산은 가족구조를 바꾸었다. 맏아들이 제사와 가문의 계승을 맡게 되면서 장자의 지위가 높아졌고, 상속도 점차 장자와 아들 중심으로 변했다. 여성은 혼인하면 남편 집안의 구성원으로 편입되고 친정 제사와 재산에서 멀어졌다.

• 제사는 가족을 결속하는 기능도 했다. 흩어져 사는 후손이 정기적으로 모이고 공동의 조상을 확인하면서 문중 의식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누가 적통인지, 누가 제사를 주관하고 재산을 관리할지를 둘러싼 갈등과 배제도 만들어냈다.

• 함재봉은 주자학적 가족제도가 개인보다 집단을 앞세웠다고 설명한다. 사람은 독립된 개인이기보다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형과 동생이라는 관계 속에서 규정되었다. 제사와 족보는 이러한 관계를 반복적으로 확인하고 교육하는 장치였다.

• 이러한 질서는 조선 후기까지 수백 년에 걸쳐 확산되었다. 국가의 법령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사대부의 실천, 족보 편찬, 문중 조직, 상속제도, 혼인관습이 서로 맞물리면서 사회 전체의 규범이 되었다.

• 강의의 결론은 제사와 족보가 처음부터 존재한 한국인의 본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자학적 국가가 특정한 가족형태와 인간관계를 보급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반복하여 실천하면서 비로소 “전통”이 되었다. 다음 강의에서는 이러한 제도 변화가 조선 여성의 지위를 어떻게 낮추었는지를 살펴보겠다고 예고한다.

평론

이 강의의 장점은 제사와 족보를 민족의 영원한 전통으로 신화화하지 않고, 주자학·국가정책·재산·신분·문중조직이 만들어낸 역사적 제도로 설명한다는 데 있다. 특히 초기 족보가 여성과 외손을 폭넓게 기록했다는 사실은 조선 가족제도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다만 제사를 주로 부계 가부장제의 형성 장치로 설명하면서, 추모·돌봄·친족연대·지역 공동체와 같은 복합적 의미는 상대적으로 약하게 다룬다. 불교·무속·민간신앙과 유교 제례가 실제 생활에서 혼합된 양상도 더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전체적으로는 오늘날의 전통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강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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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13 조선 사람들은 언제부터 제사를 지냈나?

조선 사람들은 언제부터 제사를 지냈나?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13회 - YouTube

조선 사람들은 언제부터 제사를 지냈나?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13회
법률방송
1,262,398 views  Oct 3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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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13번째 시간에는 주자 성리학을 받아들인 조선이 유교의 전통 제도라 할 수 있는 제사와 족보를 어떻게 들여와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나갔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과정에서 형성된 조선 사람은 지금의 한국 사람에게는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오랜 전통이라 믿어왔던 제사와 족보 그리고 성(姓). 그 형성과정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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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음악]
[음악]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한국인의
탄생 봉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선비라는 인간형이 중국에서 어떻게 형성이
되었고 그것이 어떻게 조선에 소개되서 들어오게 됐는지 살펴봤습니다 오늘이
시간에는 그 선비가 들어옴으로써 종법 제도가 뿌릴 내리기 시작하는데요 그
종법제도 핵심은 제도의 핵심은 역시 제사입니다 그럼 제사라는 것은 사실
조선조가 세워진 이후에나 처음으로 조선에서 이제 정착이 되기 시작한
거고요 그리고 제사를 지내려 그러면은 당이 또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당이라는
것도 조선초에 처음으로 지어지기 시작을 하고 그리고 사당이 지어지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면서 종법 제도가 뿌리를 내리고 같은 종친들 그리 같은
성씨들 그리 모여서 살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족보라도 처음으로 쓰여지기
시작합니다 제사 사당 족보이 모든 것이 굉장히 오래된 우리 조선의 전통
한국사람 전통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아무리 빨리 봐야
일찍 잡아봐야 조선 초이고 실제로이 모든 것이 제사 들리고 사당에 사당을
짓고 족보를 만들고 하는 거는 15세기 16세기 조선 중반에 가서야
뿌리를 내리는 어떻게 보면 상당히 최근에 그 관습 풍습이 되겠습니다
오늘은이 부분에 대해서 한번 같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인의 탄생
이제 [음악]
시작하겠습니다네 오늘은 그 주제를 어 제사를 거부한 조선 사람들로
잡았습니다 한국 사람 어 그러면 지금 아직도 적어도 60% 한 70%
아직도 어한 제사를 지낸다 그럽니다 어 심지어는 를 금지하는 개신 교도들
중에서도 한 20% 아직도 제사를 지낸다는 그런 통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제사야 말로 한국 고유의 것이고 아주 오래된 고유의 전통이라고
생각들 많이 하십니다 근데 이제 오늘 제가이 말씀드리고 싶은 거는 사실이
제사를 드려온 것도 역시 주자 성리학을 드려온 어 조선이 쓰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에 이제 제사가
소개됐을 때는 제사를 지낼 줄 아는 조선 사람이 없었습니다 조선이
1392년에 세워지기 전까지는 천년 동안 불교 불교를 했던 어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 시대 내내 어 불교를 그 국교로
삼았었다 관원 상제 이런 거는 다 사실은 절에 가서 했던 거죠 사찰에 가서 했던 거 기 때문에 그니까
이것이 어떻게 소개가 그 부분에 대해서 이제 말씀을 드리고 특히 초기의 제사를 지내도록
하려고 조정에서 정부에서 많은 이제 홍보를 하고 역량을 기울일 때 굉장히
그에 대한 저항이 강했었다라는 것을 어 그 한번
밝히면서 고려 사람하고 조선 사람하고 어떻게 달랐고 조선 사람하고 어 한국
사람하고 어떻게 달랐고 이런 부분을 한번 우리가 몇밀리 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보통 제사라 그러면요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장례 절차를 치르거나 했을
때는 불교에서는 사찰에 가서 하는 거죠 어 불공을 들이는 것도 사찰에
가서 하는 거고 그리고 개신교에서는 교회에 가서 하는 거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거고
그리고 천주교는 그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리는 거고 마찬가지로 주자
성리학에서는 제사를 지내는 거죠 차례라고 하고 하여튼이 제사를 지냅니다 그러니까 종교마다 문명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다른 방식의 종교 행위가 있는데 유교에서는이
제사라는 걸 하는 겁니다 자 근데 말씀드리이 제사가 너무나도 낯설었던
조 조선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태조 때부터 계속해서 제사를 지내라 하는 명을 어
영을 내립니다 해조 6년 1397년 있니다 대부의 감여 제도
가 이미 영감에 나타나 있는데 오로지 부도를 숭상하고 귀신을 아첨하여 섬겨
사당을 세워서 선조의 제사를 받들지 않으오니 원컨데 지금부터는 나를 정하여 사당을
세우게 하되 감히 영을 어기고 오히려 예전 폐습을 따른 자가 있으면 헌사로
하여금 규리하 하소서 그러니까 뭐냐면 지금 당연히 사대부 그니까 조선이
이제 세워지고 주자 성약을 받아들여서 이제 대부의 나라가 됐으면 대부는
뭐를 해야 되냐면 제사를 지내야 되는데이 사대부들이 아직도 뭡니까 부도를 숭상 부도라는게 뭡니까 불교적
그러니까 그거를 상해서 절에만 가고 지금 그 제사를 안 지내 안 지낸다
그러니까 이거를 빨리 사당을 세워서 선조를 받들게 하고 안 하는 사람들은
사헌부 이런 데다 얘기해서 엄한 벌을 내리도록 하소서 이러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니까 조선 초에는 전혀 제사가 뭔지 어떻게 하는지 몰랐고
불공 만 드리고 있던 예불 만 드리고 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제 이런 영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다음에 또
보시면요 이번 이제 태종 1년입니다 첫해에 사헌부에서 어 대사헌이지 이런
사람들이 이제 상소를 올립니다 가여 법은 가여 아는 것은 이제 그 저
사당이 가요의 법은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전에 부모를 섬기는 자는 살아서는 효도를 다하고 죽으면
살아서 봉양하는 것보다 후하게 하여 섬기기를 생존한 것이 하되 것 같이
하되 종신토록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그 부모를 죽은 것으로 여기지
않는 뜻입니다 부도의 속화이 행해지면서 남의 자식된 자는 간사한
말에 혹하여 부모가 죽으면 부처에게 천거하여 천당에서 산다고 생각하고
상을 마친 뒤에는 공허한 것에 붙이고 다시 사당을 세워 섬기지 않으니
그러므로 국가에서 풍속이 날로 박하여지는 것을 염려하여 매양 명령을 내리매 반드시 가요의 영을 먼저 하여
백성이 덕이 백성의 덕이 후한 대로 돌아가게 하려고 한지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뭐냐면
예전엔 그랬다는게 뭐냐면 사실은 예전엔 이런 적이 없습니다 조선에서는 6월을 찌 감치 어 행하든 중국에서는
그래서 돌아가시라 뭐 3년상을 치르고 마치 살아 계신 것 같이 계속해서
사당을 세워서 제사를 지내고 그런데 어이 불교에서는
불교에서는 그냥 화장을 해버리고 이제 그 그 원래로 돌아갔다 그러면서 다
공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면서 사단 같은 걸 세워서 주기적으로 제사를 지내고 이러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쩌다가 우리가 이렇게 됐냐 그러니까 자기는 해 보지 않았지만 중국 거를 받아들이면서 지금 하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그러나 즐겨 행하는 자가 없으니 대게 이단에 사설이 굳어져서
깨뜨릴 수 없고 또는 시설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뭐냐면 이단의 사설이란게 뭡니까
불교의 이단 잘못된 설 때문에 지금 이런 거를 제사를 안
지내고 있고 그다음에 시설하는 방법을 알지 못 사당이라는게 도체 뭐라는 걸
모르는 거죠 그 절만 지었던 사람들한테 갑자기 사당을 지으라고 하면
사당을 어떻게 짓는 거고 절과 어떻게 다르고 거기서 뭘 하는 거고 이런 거를 전혀 모르는 거죠 그러니까 이제
이거를 일일이 가르쳐 줘야 됩니다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신등은 생각하건데 왕성의 왕성은 그 수도는
풍화 이 다스리는 근본이니 사대부의 집으로 하여금 먼저 행하게 한 뒤에
그 나머지도 행하게 하면 무엇이 행하여지지 않겠습니까 또 도성은 집이
협착하여 사당을 설치하기가 어려우니 따로 괴 하나를 만들어 신주를 넣어서
깨끗한 방에다 두게 하여 간편한 것을 따르게 하고 외 방에는 각각 주부
군현의 공화 동쪽에 임시로 사당을 설치하여 명을 받고 나가는 수령이
적자라면서요 신주를 받들고 부임하게 하고 적장이 아니면 또한 주현의
사당에서 지방을 써서 행하게 하고 조종에 있든지 외방에 있든지 사당의
제사를 주장하는 자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분양 재배하고 출입할 때는 반드시 고하며 모든 죄를 한결같이
문공 가래에 의하여 아랫 사람에게 보이면 권면하기 않고도 자연히 교화가
백성에게 미칠 것입니다 그러니까는 친형 문제 장가 가지 말고 시집가라
했을 때 문제 같이 아 위에서 4대 부부터 행하고 왕실 아고 4대부 부터라도 좀 행하면 차차히 따아 오지
않겠습니까 했던 어
세종하우스 4대 부부터 합 행합시다 근데 어떻게 합니까 이거 더군다나
도성에서이 장소도 협소하고 그러니까 일일히 사당을 따로 건물을 짓구
하기가 너무 힘드니까 그러면 깨끗한 방에다 가 이렇게 괴작을 놔서 괴를
놓고 거기에다가 그 신주를 모시게 하라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뭐냐면 집집마다 사당이 있어야 되는데
그렇다고 새 건물을 도성 한 가운데 있는 집들이 건물을 막고 질 수도 없으니까 이제 따로 방 하나라도
마련해서 이렇게라도 하게 합시다 그리고 이제 관리가 지방에 임명이
되면은 뭐 갈 때 인사를 하고 가게 하고 또 거기 가서도 관하 옆에다 다 이런 걸 만들어 넣어서 이게 도대체
뭐를 해야 된다는 거를 일일히 지금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본래부터 사당을 세우지 않은 자라도 반드시 이로부터기할 것입니다
서울에서는 명년 정월부터 외방에서 2월부터 시작하여 거행하게 하고
따르지 않는 자는 사에서 리하여 파한 연후에 하게 하소서 그러니까이 사당을
설치해서 이런 식으로 인사를 하고 제사를 지내라는 거가 정확하게니까 년 정월부터 조금 이걸
하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기한을 정해 놓고 그때까지 해라 해라 해라 그때까지도 안 해 놓은 사람들은
이제 파직을 하고 벌을 주자 이렇게까지 이제 얘기를 합니다 유기에 주장에서는 사당이 있어야 됩니다
사당에서 지금 그 제사를 지내야 되는 겁니다 근데이 사당이 지금 안
지어지고 있습니다 사당도 안 지어지고 있고 제사도 안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 이제 또 태종 6년에 0이
내려집니다 대사헌 허응 이런 사람들 상소를 올립니다 이제 가요를 세운 자가
사람의 한두 사람도 안 되고 그까 지금 태조 때부터
계속해서 세워라 그 제살 지내라고 아무리 얘기를 하고 명년 정원까지
하라고 명을 내렸는데도 지금 아직까지도 가요를 세운 자가 사람에 한두 사람도 안 되고 조선 사람들이
여러분 가열을 사당을 안 세웠다는 겁니다 그죠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나라의 법령을 따르지 아니하고도 예사로이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 조금도 사람의 자식된 뜻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유교의 입장에서 봐서는 도대체 인간들이 도대체 효성이 있으면은 당연히 조상을 위한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야 되는데 도대체가 이거를 안 따르는 걸 보면이 사람 효성도 없다 원낙 한데 중요의 가요를 세워야
할 자들로 하여금 금년을 기한으로 하여 독하 세우게 하고 만일 따르지
아니하는 자가 있거든 경에서는 본 부에서 외방에서 감사가 자세히 살펴서
논지 하게 하소서 그럼 우리가 이제 조선에서 우리 한국으로 대한민국으로
넘어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근대 국가를 하려 그러면 예를 들어서 재판소 있어야 되는 거고
그렇죠 재판소의 판사들이 있어야 되는 거고 거기에 가서 이런 거를 결정을 해야 되고데 이제 이런 거를 도대체
어떻게 세워야 되는 거지 재판소가 뭘 하 데지 법관들이 뭔지 어떻게 법관을
훈련해야 되는 훈련해야 되는 건지 그 사람들이 가서 도대체 어디에 앉아서 뭐를 무슨 절차를 거쳐서 어떻게
하는지 이런 걸 아무것도 몰랐듯이 사당이라는 걸 져서 제사라는 걸 그 안에서 짓는 방식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한테 지금 이걸 다 가르키게 하고 대부들 본인들이도 제대로 이제
공부를 해서 알아서 사당을 세고 제사를 지내야 되는데 사대부들도 지금 안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라에서 법을 줘 저 벌을 줘서까지도 이거를 하라 이제 이렇게 합니다 태종
6년입니다 태종 13년에 가면 또 이런 기록이 또 있습니다 성부에서 세 가지를 조목별로 아렸다
첫째 가의 설치는 이미 뚜렷한 갑이 있는데 사대부가 넓게 집터를 점령하고
당을 높이되 일찍이 가면은 세우지 아니하니 특히 근본에 보답하는 뜻이
없습니다 바라건데 중자로 하여금 금을 한정하여 모두 사당을 세우게 하고
어기는 자는 헌사의 문여 기하게 하소서 안됩니다 그니까 태조 때부터
종종 종 태종 1년부터 매년 이럽니다 13년이 됐는데도 아직도 터는 넓게
잡고 담장은 높이 쌓고 뭐 호화로운 집은 짓는데 사당이라는 건 도대체
사대부들이 안 짓고 있다 이제는 진짜 벌을 엄하게 내리셔서 해야 됩니다라고
또 어 그 그 상소가 올라갑니다 그러니까 그 일반 백성들
입장에서는 자기네가 그 누가 돌아가시면 가서 답
이식을 하고 그러니까 화장을 하고 그러는 거죠 그리고 불공을 드리고 예불을 드리고 수백년에 걸쳐서 수천에
걸쳐서 익숙해 있습니다 그니까 좋은 일이 있든 나쁜 일이 있든 결혼을
하든 이런 모든 것을 절에 가서 해야 됐죠 삼국 시대 신라 고려 시대 가장
찬란하고 가장 화려하고 한 건물들은 다 사찰들이
있죠 절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그냥 지나가다 보면 있는 것이 사찰들이 그런 데에
가서 슬픈 일 기쁜 일 이런 거를 부처님한테 고하고 또 스님들이 다
있어 가지고 승려들이 있어서 그걸 다 어떻게 하는 이런 것를 표현을 하고 경전들이 이런 것이 다 완벽하게 갖춰
있었었던 겁니다 그것도 완벽한 정도가 아니죠 천년 동안 했었던 거죠
그런데 갑자기 그걸 할 수 있는 저를 다 니다 그죠 3천개가 있던 차를
36개로
태종하프 아내고 환속시키는 닫아버리고이 이러고 있는데이 사람들이
그럼 갑자기 어딜 갑니까 갑자기 제사를 하라 그러면은 지금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슬픈데 거기에 가서 그걸
하라 그러면 지금 절에 가서 하면은 스님들 하고 다 불공드리는 방식과
모든 거를 해소를 했었고 경험을 했었던 사람들이 이런 걸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이런
거를 하라 그래도 못 한는 거죠 자 그다음에 보면요 어 그다음 기록이
훌쩍 뛰어서 세종 13년 1431년 있니다 그러니까 나라 세운지 어떻게
됩니까 나라 세운지 한 40년대가 때입니다 세종에 이제 물어보는 겁니다 시자에서 돌아와 경연에 나아갔다 이제
경연이라는게 임금님이 공부하는 거죠 신하들고 대제학 하고 공부하는 겁니다 근데 그때 임금이 이금게 이르기를
서울과 지방의 사대부와 서인의 집에 모두 사당을 세웠는가 비록 사당을 세웠더라 신주를
설치하지 않고 제사를 지낸다면 한가 비인 그릇이 될 뿐인 것이다 그거 뭐냐면 이에게 이제 물어보는 거죠
우리가 지금 나라 세우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사당을 세우라고 했 했는데 도대체 사당을 세웠냐 근데 참
재밌는게 뭐냐면 세종이 벌써 아는 거죠 사당을 세운 거는 같은데 문제는 뭐냐면 그럼 그 안에서 제대로 제사는
지내고 있느냐 신주는 걸 만들어서 우파라는 걸 만들어서 그럼 그거라도 하고 있는 거냐 이제 이런 것까지도
물어보는 거예요 그런데 이금이 이렇게 답합니다 이금이 대답하기를 사당은 이미 일정한 기한이
있으므로 모두 일을 세웠지만 신주를 설치했는지 아니 했는지는 신은 알지
못합니다 안 됩니다 그니까 사당을 지으라고 하나도 난리를 치고 뭐 깨끗한 방을
뭐 따로 마련하라 그러고 지방에 관화 옆에 뭐를 세우라고 하도 난리치니까
세웠는데 근데 그 안에 들어가서 뭘 하느냐 모르죠 그 신조조 아도 지금
안 갔다 놓은 사람들이 태반이고 아니 저나 거기까지는 저희가 조사를 못 해
봤습니다 그 안에 신주가 모셔서 제대로 지금 제사를 지내고 있는까지는 확인을 못했습니다 그럽니다 그러고
나서 이제 그다음니다 세종 14년 1432년 2월 2일 평민과 아전들의
가여 설치에 대한 예조의 보고가 들어옵니다 지금 크고 작은 인민과 아전들은 가를 세우지 않은 자가
상당히 많습니다 청컨대 헌불 하여금 오는 갑인년 정호를 시작으로 하여 그
일을 행하지 않는 자를 조사하게 하여 일찍이 내린 교지에 의거하여 처벌하게
하소서 그중에 집이 가난하여 노비가 없고 살고 있는 집이 열을 넘지 않는
자와 여의 사이에 집터가 3 4부 이하인 자에게는 한 간을 세운 것을
허가하고 그 힘이 부족하여 세울 수 없는 자와 본래부터 의관한 사족의
집안이 아닌 자는 당분간 그 침실에서 제사 지내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그러니까는 어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어 거쳐서
거쳐 나가면서 그게 여러 대가 지나가면서 바뀌기 시작하는 거죠
그러니까 일이이 태조 태종 세종 하면서 성종
때까지의 많은 사람들은 나라에서 강요를 하니까 사당을 세워 갖고 아 가서이 이렇게 하는 거구나 하는 거를
하다 보면은 그 어려서부터 따라다니 어쩔 수 없이 따라다니고 있던 다음 세대 다다음 세대부터는 완전히 몸에
익히기 시작하는 거고 그다음부터는 이제 아니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아니 건어물은 여기다 놓고 과일은
여기에 이러면서 서로가 그 그 문제에 대해서 논할 수가 있게 되고 그런 너무나 자연스럽게 되는 거죠 이게
뭐냐면요 세종이라는 사람이 우리가 뭐 한글 창제하고 뭐 장영실을 데리고
자격루를 만들고 대마도 정벌을 하고 참 많은 정말로 많은 일을 하지만은
그중에서 대표적인게 뭐냐면이 주자 성리학을 들려오는 일을 하는 겁니다 강남 농법이라고 그렇게 들여오려고
애를 쓴다 그러니까 그 강남 농법과 같이 짝을 이루고 있던
송의 유학 송 유학 주자 성도 같이 들어오는 겁니다 그니까 세종은 그
이념이 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이고 이앙법 모내기를 어떻게
하느냐를 그렇게 관심을 갖고 있는 거고 이런 새로운 사상을 퍼트리기 위해서 한글을 창제해서 한글을 더
쉬운 말로 또 퍼트리려고 하는 것도 있고 그런데 그 모든 것과 더불어서
예법 주자 성리학의 모든 제사법 그걸 위한 사당치 까지도 정말로 세밀하게
관심을 가지면서 완전히 새 문명을 뿌리 내리는데 집중적으로 저는 그런
의미에서 세정 대왕이 대단한 정말로 대단한 분입니다 그러니까 새 문명을
들여오기 위해서 천년 된 불교 문명을 가장 철저하게 뒤집고 그 불교 문명을
뒤집는 것과 동시에 뭡니까 새로운 농법을 들려오면서 산업 전반 자체를
변화시키 키려고 했던 뛰어났던 어 인물이고 뛰어났던 군주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저희가 세종의 스케일을 가끔가다 너무 오히려 과소 평가하는게 아닌가 해서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자 그다음에 자 이렇게 이렇게 난리를
치니까 그니까 태조 태종 세종이 그 센 사람들이 그 막강한
사람들이 이렇게 심혈을 기어서 새 문명을 드리옵니다 자 그러면 사당 세워졌고 아 제사라는 거 이제 어느
정도지 지내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이제 뭐냐면 또 하나가 그다음 단계가
뭔지 아십니까 한국 사람이라면 당연히 집집마다 다 갖고 있는게 있습니다 족보입니다 그래서 그 족보에 따라서
아 우리 집안이 뭐 언제부터 있었고 언제부터 있었고 이런 거를 다 알고 있고 조상이 뭐를 했고 아는데요
그런데 여러분 적보라게 추자 성리학 들어오기 전에는 없었습니다
족보를 따질 일이 없었습니다 부계 혈통 종법 이거를 따지는 주자 성
이하기 유교가 들어와야지 특히 대부라는 계층이 새로 생기면서 그
사대부란 계층이 자기네 족보를 만들기 시작하는 거는 중국에서도
장횡거 정자 정호 그 형제 그러면서 주자가 이제
그런 걸 관성을 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조선에서도
사당 짓기 급급하고 제사 지내는 법 가르쳐주기 급급해서 사실은 족보
만드는 법은 그거보다도 훨씬 늦게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조선 사람들 최초에 가장 오래된 족보 우리가 알고
있는 현저한 족보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 1476년 성 성종 7년에 만들어지는
안동 권시 성화보 여러분 1476년 있니다 성종 임은
태정태세문단 예성 그때 와서야 족보라도
만들어집니다 그만큼 아이 친족 부의 혈통을 해서 종을 따진다는 개념조차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제 만들어진 겁니다 그래서 그런데 거기에 보면은
안동권씨 성화보 처음으로 족보를 만들면서 도와줬던 서거정이 그 유명한
학자가 서문을거다 씁니다 그 서거정의 서문을 읽어 보면은 아이 족보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새로운 일이었던가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서문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옛날 중국에는 종법이
아는 것이 있어 소목의 순서를 정하고 적선과 지선을 구별하여 백세가 지나도
그 관계를 분명하게 밝힐 수가 있었는데 대가 멀어지고 자손이 번성하자 국가에서이를 관장할 수
없어이 법을 폐지하였다 그 뒤 자기의 가게는 스스로 밝혀야 된다는
주장으로이 보첩 제도가 생겨났다 또한 수 당 이후에는 국가의 기관으로
도보구 설치하여 관리를 두고 문서를 제작하여 혼인의 사실과 과거의 급제
천거 등을 모두 기록하여 정사에 참고하게 한 것이 보초의 시초이다
그러니까 유여은 장자상속 원칙의 법입니다 그래서 그것 그 종법을
했었는데 나라에서 하던 것도 다 없어지고 이제 각 집안에서 그거 근근히 이어오다가 수당 때에 와서는
뭡니까 관리를 뽑기 시작할 때 그럼 관리가이 사람들이 사람의 배경이 뭘까
이런 거 우리 지금 말로 하면 신원조회 같은 거죠 그래서 조상이 누구고 과거는 언제
급제고 뭐 이런 거를 쭉 적는 기록들을 남기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보초의 시시 시작이다 이렇게 되는 거죠 그렇게 해서 이제 족보라도
송나라의 사대부란 새로운 계층이 생기면서 과거 급제 못하면 못하면서
제지 지주 남았던이 사대부들이 자기네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제이 종법
보첩 족보를 만들어서 자기네 종을 이제 따지기 시작합니다 자 그래서
그것을 조선이 받아들여서 드디어 이제이 서거정이 와서 안동권 씨의
족보를 만들었던 겁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이어갑니다 얘기를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종도 없고 보초도 없어서 겨우 몇 대만 지나면 조상의 명호를
잊어버린 것이 예사로이 되어 있어 친족과 조상을 존경할 수 있는 근거를
잃어버렸었다 이렇게 되어서는 효를 권장하고 예속을 성취하고자 해도
불가능하기 때문에이 보을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소원한 상계에
있어서는 참고할 문헌이 있는 것만 찾아서 기재하고 참고할 수 없는 것은
요약하여 40만을 기재하였으며 대수가 멀지 않아서 근거가 있는 것은 모두
찾아서 기재하였다 무슨 말씀입니까 15세기에 만들 때도 몇대 전에 거는
아무도 기록을 해 놓은 사람이 없죠 그까 뭐를 모르는가 거죠 그니까 대충 알 수 있는 거를 연구를 하여튼
조사를 해서 찾아낼 수 있는 건 찾고 특히 최근 대의 거는 그래도 어느 정도 기록이 있으니까 그거를 다
합쳐서 만들었다 그렇지만 우리 원래 없었다 이런 거 그러니까
조선에서도 족보 가 14 76년에 처음 만들어집니다
그럼 여러분 우리가 알고 있는 뭐 뭐죠 김해김 씨 그러면 신라 시때 뭐
박혀 것에 거슬러 올라가고 그런다 그러는데 사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얘기입니다 뭐냐면은
1470년 자기 족보를 따져본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까 갑자기 천년 전에
얘기를 알 방법이 없죠 그니까 사실 그 족보는 이때부터 만들어 15세기
정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주자 성리학적인 유교적인 조건은 그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그걸 어디서 알 수가 있냐면요 조선 초에는 인구에 90%
성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뭐 왕건 궁예 견 그러잖아요 그러면 어 건의 왕씨가
유교에서 말하는 그 왕이었는지 성이었지만 기록에서 보면은 태조가
왕시 성을 내렸다는 기록들이 있거든요 자기를 도와서 창업을 한 그죠 고려를
창건한 사람들한테 왕시 성을 내려요 그리고 예를 들어서 뭐 궁예가 시가
아니죠 견이 씨가 아닙니다 성이 없습니다 그럼 김씨
김유신 김춘추 중국식으로 생각하는 종법 제도에서 말하는 성씨 있을까 좋다죠
사실 우리가 다시 들여다봐야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은 성취라는게 제가
봐서는 그 전에 조선이 들어오기 시작하기 전에 주자 성이 성이
들려오기 전에는 사실 성취라는 것은 자위 같은 것을 것 같아요 특권들이
갖고 있는 자귀 같은 성격이 더 강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16세기까지 인구의 40% 성이 없었습니다 왜요
노비였다 성이 없었습니다 언제 성실을 갖게 된지세요 1894년에 갑보 경장으로 노비제
혁파를 해버리면서 그럼 파다는게 뭡니까 노비들도 성을 가져야 되는 거죠 개똥이 말똥이 이러지 말고 성과
이름을 가져야 되는 거죠 그때에 전체 인구들이 대부분이 성과 이을 받게
되는 거고 조선 사람들이 100% 무조건 성하고 이름을 가져야 되는
것은 1910년 한일 합방이 되고 나서 일제가 들어와서 민적법 지금의
주민 등록증 같은 거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100% 인구 조사를 해 갖고이 사람들을 전부 다 등록을
시키면서 등록시킬 때 뭐라 그럽니까 성과 이름을 가지라 그러는 거죠 저의 가설은 이렇습니다 우리나라에
김씨가 한 성의 전체 성의 인구의 1인가 뭐 그렇다 그러죠 씨 뭐 이씨
밀양박씨 전주희 씨 김혜 씨 몇백만 명씩 됩니다 근데 어떻게 그렇게
몇백만 명씩 될 수가 있죠 한성이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미국에 보면요
미국의 흑인들 흑인들 성을 보면 아 아실 수 있어요 존즈
스미스 제일 많은게 그렇습니다 그러니까이 얼마 전에 돌아간 제임스 존스 있죠 그 스타워즈에서 그 페이더
목소리내는 그 그 제임스 존입니다 대표적인 영국의 아주 좋은 이름이죠
그다음에 배우 중에 뭐 윌 스미스 스미스가 뭡니까 아담 스미스 같이 영국 스코틀랜드 그쪽 사람이 성이
근데 왜 흑인들이 존하고 스미스라는 성들이 그렇게 많습니까 왜 그런지 아세요 1864년에 남북 전쟁이
끝나고 링컨 대통령이 노예제를 해버렸습니다 어한 시이는 예
갑자기 그러면서이 사람들 보고 너도 성과 이름을 가지라 그러는 거죠 무조건 그럼 흑인들이 400년 전에
노예로 끌려와서 아프리카에서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고 무슨 족보가 있어 갖고 조상의 고향이나 이름이나 부족을
따질 수 있는 상황도 아닌데 그러면 성과 이름을 가져라 그러 어떡합니까 그때 대부분 누구 이름을 갖습니까
대부분 자기의 주인이었던 사람의 이름을 따든 아니면 뭐 그 당시에
제일 그래도 재산 있고 권세 있는 사람들의 백인들의 이름을 닦겠습니다
그러니까 조사고 스미가 많습니다 우리나라에 왜 그렇게 김씨들이 많고
그렇습니까 이씨가 많습니까 그게 다 당시에 가장 권세 있었던 사람들이고
가장 재산 많고 힘 셌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노비로 아무 성 이름 없이
있다가 굳이 가지라 그러니까 희왕 힘은 힘센 성을 갖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렇게 김씨가 많고 그렇습니다 자 이러니까 이렇게
해서 이런 과정을 거쳐서 이제 사람들 보고 제사 지내라 사당을 만들어라
족보를 만들어라 그러면 뭐가 나옵니까 사람들이 뭐에 따라서 살게 돼요
성씨에 따라서 성씨들이 집단적으로 살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사당을
세워서 그 사당에서 그 사당에을 조상으로 같이 모시는
후손들이 같이 모여서 살기 시작하는 거죠 그러면서 뭐가 생깁니까 집성촌이
아는게 생긴 거죠 동족 마을들이 생기는 겁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안동 하회 마을 월성 양동 마을 이런
집성촌이 생기는 거예요 성씨별 살기 시작하하는 겁니다 이게
뭐냐면요 고려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집성촌으로 안 살았죠 성식 없었으니까
그럼 어떻게 살았습니까 여러분 많이 역사 시간에 배우셨을 거예요 고려 때까지만 해도 군현제를
했었습니다 군 현재라는게 뭐냐면 훨씬 단위가 큰 겁니다 굉장히 단위가
큽니다 사찰 같은 거를 중심으로 해서 두레라는 형식으로 해서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큰 단위 한 만 명씩
단위가 같이 살면서 같이 노동을 하면서 그때는 특히 농업 농법 같은
것이 발전을 못했기 때문에 훨씬 더 노동 집약적인 거죠 대단위로 살면서
대단위로 노동 투입을 해야지만 먹고 살 수가 있었던 거죠 그래서 고려 시대는 군현제가 됩니다 그런데 지금
동종 마을이라는 건 군 현재보다 훨씬 작죠 그러니까 뭘로 바뀝니까 조선에
오면은 동하고 리로 바뀝니다 동하고 리 동리 동리 동리 하면은 동네가
되는 거죠 동네라는 말도 동하고 리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훨씬 더
작은 단위의 집성 단위 그니까 동족 단위로 한 100호 정도 잘해 봐야
그러겠죠 그 호들이 자기네들끼리 농업을 농사를 지어서도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효율적인 이제 농업이 개발이 된 거고 강남농법 이런 거를
들여오면서 그래서 동정 마을을 형성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성시가 무조건
성시 중심으로 사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개인 단위로 사는 거죠 개인이 중요한 겁니다 우리는 근대 사회에서는
그니까 인이 주민등록 중인 개인이 나가서 살면 세대가 되는 거고 이렇게 되는 건데 지금 여기는 성시 중심으로
살려 그랬던 거죠 그러니까 성씨 단위로만 모여서 살게 되니까 어떻게 됩니까 백성 성이 100개가 되면은
그게 요즘으로 말하면 국민 인민 피플이 되는 거죠 근데 뭐 성
100개가 넘으면 예를 들어서 앞에다 그냥 만자를 붙여서 만백성 이어 버리면 뭡니까 국민 전체
이렇게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조선이 그럼 어떻게 형성이 되냐 사대부
집안에서는 자기 조상 중심으로 해서 종종 중심으로 해서 사당을 세워서
사당 중심으로 동네를 형성해서 동정마을 형성해서 살고 자 그다음
단계가 뭡니까 왕은 뭡니까 그럼 왕은 뭐랍니까 만백성을
대표해서 묘하고 사직에 나가서 제사를 지냅니다 자 그러면 종묘 사직이 뭐냐
종 는 자기네 왕실의 그 종이죠
자기네 사당이 백성들 보고 아까 가묘를 설치하라고 태조에서 해서
결국은 설치하게 만든 그 가묘 사당이 그 사당을 왕실에서도 자기네 사당이 있죠
집안의 사당이 그게 종묘 그런 의미에서는 왕실도 다른 집하고 사대부
집하고 똑같아요 다만 뭐가 달 왕은 자기 집안에 사당에 가서만
제사를 지내는게 아니라 어떡합니까 만백성을 대표해서 사직단이데 가서
제사를 지립니다 사직은 뭐냐면 곡식과 땅의 신인을 모시는 대입니다 그래서
곡식과 땅의 신을 모시는 데에 만 백성을 대표해서 가서 제사를 지내는
역할을 하는게 그게 왕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종묘 사직을
지키십시오 그런 모습들을 우리가 영화에서도 많이 보고 사극에서도 많이 보는데 그게 뭐냐면 나라라는 것이
종묘와 사직으로 되는 거죠이 사대부의 나라 유주자 성약의
나라는 그렇게 되는 거죠 여기서 한 단계만 더 나가면 뭡니까 조선이 받드는
명의 청의 황제는 뭐라 그럽니까 천자라고 부르죠 그럼 천자는
어떡합니까 사해 사해네 전세계를 다 대표해서 하늘의 아들로서 어디를
갑니까 천단의 가서 합니다 북경에 가면 천단 공원 있죠 이렇게 동그란
멋있는 건물 있습니다 그 천단 가서 하늘의 제사를 지내는 것이 사해를
대표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그것이 천자 그래서 천자는 그 모든 제후들과
백성들을 대표해서 천단 가서 제사를 지내는 그런 시스템이 만들어지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 나중에 나중에 고종이 고종이 대한제국을 세우지 않습니까
칭제건원 자기가 이제 황제다 그러면서 광무 이러면 이제 연호를 명나라에 뭐
숭정 이런 연호를 연호를 쓰지 않고 광무 이제 연어를 씁니다 근데 그때에
황제로서 즉위할 때 뭐를 하는지 아세요 원구단이라는 걸 만듭니다
고종과 그 주변에서 그때 우리도 독립된 국가가 됐다 그러니까 더 이상
중국을 안
받들도록 해서 광무제가 된 거지만 자 대한 제국도 사실은 그 주자
성리학적인 유교적인 중화질서적인 그 세계관 속에서 작동을 했다는 걸 여기서 이제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아무튼 조선의 질서는 이렇게 형성이 되는 겁니다 거기에
핵심은 제사를 지내는 거였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사당을 만드는 거고
그거를 통해서 성시 집단으로 살기 시작하면서 그 성시 집단의 정체성을
기록하고 확립하기 위해서 적보라 거를 만들기 시작하고 하는데이 과정이
15세기 16세기 17세기 들어와서야 이게 완전히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는
것이지 그 전에는 없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제사 지내기 시작한 것도 사당 만들 짓기 시작한 것도 족보
만들기 시작한 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거보다 훨씬 더 근래에 와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겁니다 이렇게 해서 막 어렵게 어렵게 불교 천년 불교
국가를 주자 성리학의 나라로 이제 만들었습니다 제도적으로 이제 이렇게 만들어지는 나라인데 이렇게 만들어지는
나라 속에서 여기가 조선 사람이라 사람들이 저는 굉장히 특이한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왜냐면 굉장히 친해지는
거를 중요시 생각합니다 여러분 친해진다는 거 한번 생각해 보세요 친짜 친척을 때 종친 할 때 그
진짜입니다 저는 요새도 보고 있으면은 한국 사람들의 참 놀라운 특징 중에
하나가 뭔지 아세요 친구의 형을 만나면 형 형님 친구의 누나를 만나면
누님 친구의 부모님을가 가서 어머님을 만나면 어머님 친구의 아버님을 만나면
아버님 이렇게 됩니다 영어로 하면 미국 같은 데서 어떡합니까 친구 친구의 아버지 만나면 어떡합니까
미스터 김 친구 어머님은 뭐 미스 리이 이러지 거기 그 사람들이
마더파더 이러지 않습니다 마 이러지 않아요 근데 우리나라는 분명히 그럽니다
그리고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 저는 이제 대학에서도 보면 아직도 대학이
그렇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보면 쫙 신입생들이 들어오지 않습니까 그럼 신입생들이 들어오면 서로가 몰라요
그러 이제 서먹서먹 해서 한국 사람들은 말도 못 걸어요 잘 왜냐면 동기들한테 존대말을 할 수도없고
그렇다고 처음 보는 사람한테 말막 막 하기도 참 어색하고 그런데 참 편한게 뭐냐면 선배들이 있으면 돼요 선배들이
옆에 있으면 예를 들어서 뭡니까 형 오빠 언니 누나 이래 버립니다 여러분
이상하지 않아요 모르는 사람하고 친해진다는 거는 그 사람이 우리
가족이 된다는 뜻이 돼야 되는 거고 저 사람이 가족이었을 경우에는 나의
형이 될지 오빠가 될지 누나가 될지 언니가 될지를 따지는 거예요 그니까 한국 사람들은 아직도 누구를 만나면은
저 사람이 내 가족이었습니다 나하고 무슨 관계였을까 따져요 그래서 형 오빠 언니 누나가 되는 거고 그러면은
세상에 편해집니다 그다음부터는 누가 밥 사고 커피 사고 이게 쫙 정해져요
얼굴 표정 몸가짐 너무나 편하게 그 툴 속에 딱 들어가면서 우리가 편하게
생활을 할 수가 있게 되는 거죠 택시를 타더라도 택시 기사 아저씨 식당에 가도 아주머니
요새는 아예 이모라고 아지 부르더라고요 정말로 놀라웠던게 저는
옛날에는 아저씨 아줌마 그럴 때 저희 외가에서 특히
어 외숙모 외삼촌을 외삼촌 이렇게 못
부르게 하셨어요 그거는 촌수를 따질 때 하는 얘기지 실제로는 뭐냐면 아저씨 아줌마라는 거는 굉장히 정다운
거고 굉장히 가져 가까운 사람 숙부 숙모 그죠 이모 고모 이런 분들을
아줌마 아저씨라고 불렀어요 그래서 저는 큰 아저씨 작은 아저씨 큰 아주머니 작은 아주머니 이렇게
했었거든요 근데 식당에 가면 아저씨 아줌마 아줌마 그러면 여러분 그거 왜 그런지 아세요 아줌마 이모 저 깍두기
좀 더 주세요 그럼 뭐예요 정말로 더 줘요 왜 정말로 조카 같이
생각을 해요 한국 사람은 다 그 그 관계가 돼야 되는 거죠 그 관계를
만들어야지만 되는 거고 그 관계를 못 만들 면은 아주 어색합니다 외국
사람들 저는 요새 와 갖고는 참 재밌는게 외국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이제 한국에 들어와서 삽니까 근데데 TV 쇼에서 이렇게 같이 친해지고 이런 사람들 보면은 외국 사람들한테도
외모적으로 아니면 말이나 이제 문화적 배경이 다른 사람을 보면은 근데 그런 사람한테도 이제 형 오빠 언니 누나
하기 시작하더라고요 아 이러면 이제 가까워지는 거구나 근데 문제는 뭐냐면 이렇지 않으면 왜 가
가까워지지 못합니다 저는 그렇게 되는 것이 여태까지 조선이 만들어온 조선이
종법 제도를 들여와서 제사라는 거를 지내게 하고 사당을 건립을 하고 족보를 만들고 해서 친 친해져야 되는
걸로 친척이 돼야 되는 걸로 만들어 놓은 거고 따라서 그거에 따라서 모든 사회 관계를 친하게 만드는 거죠
그니까 이렇게 보시면 돼요 우리가 삼강 오륜 이런 얘기를 하는데 륜은
인간관계에는 딱 다섯 가지밖에 없다라고 보는 겁니다 부자유친 장유유서 남녀유별 하듯이요 다섯
가지만 있는 거예요 그 다섯 가지 관계를 정확하게 알아서 누구를 만나든지 저 사람이이 다섯 가지 관계
속에서 무엇일까 특히 그 중에서도 신이죠 부자유친 아닙니까 친해진다는
건 가족 관계로 만들어야 되겠다라는 거고 나머지는 거기에서 다 파생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야말로 주자
성리학이 얼마나 깊이 우리 사회에 뿌리 내 내렸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가르쳐 주는 거고 우리가 갖고 있는이 복잡한 존대말 같은 거 저 사람하고
나하고의 관계가 친척이었던 경우에 뭐였을까 정확하게 따져 갖고 그걸 구사할 줄 알아야 되고 정확하게
구사를 할 때는 저 사람은 인간이 됐다 그러는 거고 그런 거를 못 할 때 저 인간이
덜됐다 그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한국 사람들은 만들어집니다
이제 강남 농법을 들여오고 종법 제도를 들여오고 족보를 만들고 사당을
설치하고 장가 가은 사람을 시집가게 만들고 그리고 집성촌을 만들어서 살게
하고 그러면서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시면 고려 사회하고 조선 사회가
얼마나 달라졌다는 걸 아실 수가 있죠 안 건드린게 없습니다 절에 가은
사람을 갑자기 사당에가 이런 정도가 아니라요 정말로 속속들이 이걸 고쳐내
그 세종이나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참 경외심 같은 걸 느끼는게
뭐냐면은 이렇게 지독할 정도로 불교를 배척을 하고 그 뿌리를 캐내면서 주자
성약이라는 걸 들여왔습니다 그런데 태조 태종 세종
세조 다 개인의 종교는 뭐였습니까 끝까지 불교 있습니다
여러분 조선의 왕 중에서 불교의 관계된 거를 전혀 안 보고
순전히 유교의 교육만 받고 자라서 왕이 된 최초의 왕이 성종 있니다
그전까지 전부 다 불교 세계에서 자랐죠 그러니까 여러분 태조 이성계가
지금 주자 성리학의 나라를 세웠는데 가장 친했던 사람이 누굽니까 무학
대사였어요 무학 대사하고 맨날 같이 다니고 뭐 도성을 어디에 질까 하도 뭐
그런 거 결정하는 거 모든 거를 무학대사 하고 그리고 나중에 이제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그런 절에 가서
그냥 있는 거죠 태종도 그랬고 세종도 유명했죠
세종도 석보상절이라는 걸 짓지 않습니까 석보상절이 뭡니까
1446년 자기 왕비 소혼 왕우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둘째 아들
수양대군 명을 내려서 수양대군이 김수원 등에 도움을 받아서 석가의
가족과 그의 일대기를 기록하고이 이을 한글로 번역한 책이 그게 석보 상들이
왜냐면 아무리 이념적으로 아이 새 이념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뭡니까
인간이기 때문에 자기가 사랑하는 부인이 돌아갔을 때 그거에 대해서 위로를 받으려고 하고 그 넋을
기르려고 하고 하는 거는 자기가 자라온 방법밖에 안 되는 거죠 그게 이제 불교의 방식입니다 그 유명한
월인 천강 지옥도 세종 1449년 불교 가로서 지은 겁니다이 역시 수양
그 수양대군이 엮은 석보 상조를 보고 그 대목 대목을 되도록 한글로 해서
가사를 지은 것이 또 어린 청강 지옥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냐면
여러분 개혁이라는 건요 저는 이때 세종 같은 사람들의 개혁을 보면서
아이 사람들이 개혁이 왜 저렇게 성공할 수 있었는가 그 당시에 기술이나 뭐 출판이나 모든 뭐
요즘같이 방송 국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SNS 있었던 거 아니고 전국적인 무슨 학교가 있어서 똑같은
교육을 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한 150년 200년이 지나면 불교 국가였던
나라가 완전히 주사 성리의 국가가 되는 것은 개혁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자기의 종교임도 불구하고 자기의
기반을 버립니다 개혁이라는 것은 개혁의 주체 세력이 자기의 경제적
이권과 자기의 특권을 버릴 때에만이 개혁이 성공합니다 1번의 메이지
유신이 성공하는 것은 그 일본의 봉건 시대의 가장 특권층이
사무라이들이 어떡합니까 사무라이들이 사무라이 계급을 없애버림으로써 성공을
하는 거죠 그래서 사무라이 반들이 일어나지만 그걸 평정을 하면서 결국은
신분 제대로 없애버리는 거죠 태조 태종 세종 성까지 전부 다 조선의
왕들이 뭐냐면 자기의 종교인 불교를 버려 왜냐면 국가를 위해서는 지금
주자 이 들어와야 되는 거고 강남농법 들어오려면 이것이 다 어우러져서
완전히 사회를 다시 조직을 해서 동마을 식으로 해서 백성 중심으로
살아야 되는 거 등등 등등을 알았기 때문에 그것이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이 나라가 나갈 방향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자기의
종교인 불교를 배척을 했습니다 그래서 세종의 개혁이 성공을 했습니다
그고 결과 고려 사람이 조선 사람으로 나오게 되고 그 조선 사람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한국 사람의 가장 큰 특중 중에 하나인 모든 인간관계를 가족 관계로 소급 키려고
하는 저는 사실 그러면 우리가 근대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있어서 그러면
이런 것은 혹시 걸림돌이 되는 거 아닌가 그죠 모든 사람을 대등하게
대하고 똑같이 대해야 되는데 어떻게 합니까 다 친소 관계로 대하는 이런
것은 지금 우리가 근대화를 하는데 있어서 사실 직시해야 되고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 날 것인가 우리가 굉장히 고민을 해야지 데로서 개혁이 또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 조선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는데
초기에는 조선 초기에는 참 어려웠습니다 어 정부가 적극적으로 위로부터의 놀라운 개혁을 밀어
붙임으로써 비로서 이제 뿌리내리게 된 거고 어 제사 드리는 거 사당 짓는 거 족보 만드는
것은 사실 조선 중반 중기 정도에 와서야 보편화가 되고 뿌리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오늘은 그 과정을 살펴봤고요 따라서 조선 사람은 뭐
항상 제사를 지내왔고 항상 족보를 갖고 있었고 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생각보다 최근에서 자에서 하기 시작했던 일이다
걸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렇게 들어온 종법제도 제사
지내는 거 친족 중심에이 사회가 뿌리를 내리면서 사실은 어떻게 보면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되는 것이 초선의 여성들이었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장가를으로써 여자들이 경제권을 잡고 있었고
남자들이 가에 얹혀서 살고 가로부터을 받아서 살고이 재산을 받아서 살고
이런 이런 얘기를 저 말씀드렸지만 그것이 모두 친족 중심의 종법 제도로
바뀌기 시작하면서 여성들의 지위가 급격히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조선 말기가 되면은 여성들의 지위는 처참할 정도가
됩니다 다음 시간에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조선
여성들의 지위가 급격하게 낮아지기 시작했는지 그 부분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습니다 역사적 사건과 임무를 통해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한국인의
탄생 지금까지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시간에 다시 받겠습니다
[음악]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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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람들은 언제부터 제사를 지냈나?> 요약 및 평론

1. 내용 요약

강좌 13회에서 함재봉은 현대 한국인이 반만년의 고유한 전통이라 믿어온 제사, 사당, 족보, 성씨, 집성촌(동족 마을)이 실제로는 조선 초기 위로부터의 집요한 국가적 강제와 유교적 사회공학을 통해 15~16세기 중반 이후에나 비로소 정착된 상대적으로 최근의 인위적 관습임을 입증한다.

(1) 제사·사당의 수용과 초기 조선인들의 강한 거부

  • 천년 불교 풍습과의 충돌: 고려까지 천년 넘게 불교식 장례·예불(화장 및 사찰 이용)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 유교식 제사와 사당(가묘)은 대단히 낯설고 이물스러운 제도였다.

  • 조정의 집요한 강제와 처벌: 태조, 태종, 세종 대에 이르기까지 사대부와 민초들은 사당 세우기와 제사 지내기를 한사코 거부했다. 태종 대에는 사당을 짓지 않는 자를 파직하고 처벌하는 엄벌령을 거듭 내렸으며, 공간이 협소한 한양 도성 내에서는 방 하나에 궤(箱)를 놓아 신주를 모시게 하는 등 세밀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며 제사를 강제했다.

(2) 족보의 출현, 성씨의 확산, 그리고 집성촌의 형성

  • 최초의 족보(성화보): 부계 혈통을 따지는 종법 개념이 없었던 조선에서 최초로 등장한 유교적 족보는 1476년(성종 7년)의 <안동권씨 성화보>였다. 서거정의 서문이 증언하듯, 그 이전까지는 조상의 명호조차 기록으로 남기지 않던 사회였다.

  • 성씨의 대중화와 민적법: 조선 초기 인구의 90%, 16세기까지도 인구의 40%(노비 등)는 성씨가 없었다. 1894년 갑오개혁의 신분제 폐지와 1910년 일제의 민적법 시행을 거치며 권세 있던 집안의 성(김·이·박 등)을 따라 성씨를 가지게 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성씨 구조가 형성되었다.

  • 동족 마을(집성촌)의 탄생: 제사와 사당을 중심으로 성씨 단위(백성)의 모여 살기가 시작되면서, 고려 시대의 대규모 '군현/두레' 체제가 해체되고 100호 안팎의 작은 '동(洞)·리(里) 중심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3) 세종의 리더십과 의식구조의 유교화

  • 개혁의 역설: 태조, 태종, 세종, 세조 등 개혁을 주도한 군주들 개인의 신앙은 죽을 때까지 불교(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등)였으나, 국가의 미래와 시스템을 위해 자신의 기득권과 개인적 신념을 뒤로하고 주자학적 질서를 철저히 이식했다.

  • 가족주의적 사회 관계의 형성: 종법 질서가 깊이 뿌리내리면서 한국인은 타인을 대할 때 '가족 관계(형, 누나, 이모, 삼촌 등)'로 확장·소급하여 친소(親疏)를 따지는 독특한 사회적 인간형을 형성하게 되었다.

2. 평론: 전통의 허구성 해체와 리더십의 본질

강좌 13회는 한국 근대 사상사 및 인류학적 관점에서 '불변의 민족적 전통'이라는 신화를 철저히 탈신화화하는 명쾌한 통찰을 보여준다.

첫째, '오래된 전통'으로 착각해 온 유교 관습의 계보학적 해부다. 제사, 족보, 사당, 집성촌 등이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온 자연스러운 습속이 아니라, 조선 왕조가 불교적 삶의 양식을 뿌리 뽑기 위해 수백 년간 국가 권력을 동원해 강제 집행한 '기획된 관습'이었음을 명확히 증명한다. 태종·세종 대의 상소 사료를 통해 당대 조선인들이 제사를 얼마나 거부하고 무지했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전통에 대한 역사적 착시를 깨부순다.

둘째, 국가 개조를 이끈 리더십의 본질에 대한 통찰이다. 세종을 비롯한 초기 군주들이 개인적으로는 불교 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시스템과 생산력(강남 농법)을 높이기 위해 주자학적 질서를 철저히 밀어붙였던 자세를 부각했다. 리더가 자신의 사적 신념이나 기득권을 버리고 국가적 대의를 택할 때에만 비로소 거대한 문명적 전환이 성공할 수 있음을 입증한 훌륭한 정치가론이다.

셋째, 현대 한국인 의식구조(擬似 가족주의)의 역사적 기원 규명이다. 모르는 타인을 만났을 때도 '형, 오빠, 이모' 등 가족적 관계망으로 포섭해야만 비로소 안도하는 한국 특유의 서구와 다른 관계 맺기 양식이, 조선조 종법제와 제사 문화가 심어놓은 '친(親)'의 유산임을 입증한다. 이는 공적·보편적 법치보다 사적·혈연적 친소 관계가 우선시되는 현대 한국 사회의 성찰적 과제를 정확히 짚어낸다.

결론적으로, 함재봉의 13회 강연은 고려의 불교 사회가 어떻게 조선의 유교적 '제사·족보 사회'로 급변했는가를 밝혀냄으로써, 우리가 절대적이라 믿어온 관습과 의식구조 역시 시무에 따라 언제든 해체되고 새롭게 재구성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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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13회

<조선 사람들은 언제부터 제사를 지냈나>

요약

• 이번 강의는 오늘날 흔히 “오래된 한국 전통”으로 여기는 제사와 족보가 실제로는 언제, 어떤 과정을 통해 조선 사회에 정착했는지를 설명한다. 함재봉은 조상제사와 족보를 민족 고유의 불변하는 관습으로 보지 않고, 주자학적 가족제도와 국가질서가 확산되면서 형성된 역사적 제도로 해석한다.

• 고려와 조선 초기에도 조상을 기리는 행위는 있었지만, 오늘날 익숙한 형태의 장자 중심 제사와 부계 족보가 전국적으로 정착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라고 설명한다. 불교식 천도재, 무속적 조상숭배, 다양한 지역 관습이 공존했고, 유교식 제사는 처음부터 보편적인 생활규범이 아니었다.

• 주자학에서 제사는 죽은 조상의 영혼을 위로하는 의식인 동시에 살아 있는 후손의 도덕과 가족질서를 훈련하는 제도였다. 조상을 공경하고 제사의 절차를 지키는 일은 효의 실천이었으며, 가정과 국가의 위계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이해되었다.

• 초기 조선 정부는 주자학적 제례를 보급하려 했지만 백성은 이를 잘 알지 못했다. 제사상을 어떻게 차리고, 누가 제주가 되며, 어느 조상까지 모셔야 하는지조차 일정하지 않았다. 국가와 사대부는 중국의 예서와 《주자가례》를 기준으로 절차를 통일하려 했다.

• 제사의 중심에는 사당이 있었다. 주자학적 이상에 따르면 집 안에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을 설치하고,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야 했다. 그러나 사당을 세울 경제력이 없는 백성이 많았고, 실제 보급은 매우 느렸다. 따라서 법령과 유교적 이상이 곧바로 일상생활이 된 것은 아니었다.

• 태종과 세종 시대의 기록에도 사당과 제사를 둘러싼 혼란이 나타난다. 관리들조차 정확한 예법을 몰랐고, 세종은 신하들과 함께 제사의 절차와 대상, 사당 설치 문제를 논의했다. 함재봉은 이를 통해 유교식 제사가 이미 완성된 전통이 아니라 국가가 새로 만들어가던 제도였다고 강조한다.

• 제사의 보급에는 인쇄술과 예서의 확산이 중요했다. 《주자가례》와 각종 제례서가 보급되면서 사대부들은 혼례·상례·제례의 표준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었다. 예법을 아는 능력은 새로운 지배계층의 문화적 자격이 되었다.

• 족보 역시 처음부터 오늘날과 같은 형태가 아니었다. 초기 족보에는 아들과 딸, 친손과 외손이 비교적 폭넓게 기록되었고, 출생 순서에 따라 자녀를 적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조선 초기 가족질서가 아직 철저한 부계·장자 중심으로 재편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 강의에서는 1476년에 만들어진 《안동권씨 성화보》를 대표적 초기 족보로 소개한다. 이 족보는 여성과 외손 계통도 상당히 자세히 기록했으며, 후대 족보보다 양계적인 성격이 강했다.

• 시간이 지나면서 족보는 부계 혈통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딸과 외손의 기록은 줄어들고, 같은 성과 본관을 가진 남계 후손이 중심이 되었다. 족보는 단순한 가족기록이 아니라 양반의 신분과 혼인 자격, 재산권, 관직 진출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문서가 되었다.

• 성씨와 본관의 보편화도 비교적 늦은 현상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성이 없는 백성이 많았고, 19세기 말 호적제도가 정비될 때까지 모든 사람이 오늘날처럼 성과 본관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함재봉은 “모든 한국인이 오래전부터 같은 방식으로 성씨와 족보를 가졌다”는 통념을 비판한다.

• 부계 족보와 장자 중심 제사의 확산은 가족구조를 바꾸었다. 맏아들이 제사와 가문의 계승을 맡게 되면서 장자의 지위가 높아졌고, 상속도 점차 장자와 아들 중심으로 변했다. 여성은 혼인하면 남편 집안의 구성원으로 편입되고 친정 제사와 재산에서 멀어졌다.

• 제사는 가족을 결속하는 기능도 했다. 흩어져 사는 후손이 정기적으로 모이고 공동의 조상을 확인하면서 문중 의식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누가 적통인지, 누가 제사를 주관하고 재산을 관리할지를 둘러싼 갈등과 배제도 만들어냈다.

• 함재봉은 주자학적 가족제도가 개인보다 집단을 앞세웠다고 설명한다. 사람은 독립된 개인이기보다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형과 동생이라는 관계 속에서 규정되었다. 제사와 족보는 이러한 관계를 반복적으로 확인하고 교육하는 장치였다.

• 이러한 질서는 조선 후기까지 수백 년에 걸쳐 확산되었다. 국가의 법령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사대부의 실천, 족보 편찬, 문중 조직, 상속제도, 혼인관습이 서로 맞물리면서 사회 전체의 규범이 되었다.

• 강의의 결론은 제사와 족보가 처음부터 존재한 한국인의 본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자학적 국가가 특정한 가족형태와 인간관계를 보급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반복하여 실천하면서 비로소 “전통”이 되었다. 다음 강의에서는 이러한 제도 변화가 조선 여성의 지위를 어떻게 낮추었는지를 살펴보겠다고 예고한다.

평론

이 강의의 장점은 제사와 족보를 민족의 영원한 전통으로 신화화하지 않고, 주자학·국가정책·재산·신분·문중조직이 만들어낸 역사적 제도로 설명한다는 데 있다. 특히 초기 족보가 여성과 외손을 폭넓게 기록했다는 사실은 조선 가족제도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다만 제사를 주로 부계 가부장제의 형성 장치로 설명하면서, 추모·돌봄·친족연대·지역 공동체와 같은 복합적 의미는 상대적으로 약하게 다룬다. 불교·무속·민간신앙과 유교 제례가 실제 생활에서 혼합된 양상도 더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전체적으로는 오늘날의 전통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강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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