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진님, 요청하신 조성윤 교수의 두 저작 <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과 <1964년, 어느 종교 이야기>를 통합하여 분석한 평론을 작성해 보았다. 이 글은 요청하신 대로 <해라> 체를 사용하여 작성하였다.
[평론] 경계인의 신앙과 근대의 그림자: 재일한국인과 창가학회를 통해 본 구원의 사회학
1. 서론: 국가라는 울타리 밖의 삶
식민과 분단, 그리고 이주로 점철된 동아시아 근현대사에서 재일한국인은 그 자체로 거대한 모순의 집합체다. 조성윤의 두 저작 <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2013)과 <1964년, 어느 종교 이야기>(2019)는 국가라는 견고한 울타리에서 배제된 이들이 어떻게 종교를 통해 생존의 의미를 찾고,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구축해 나갔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전자가 재일한국인 사회에서 창가학회(SGI)가 갖는 구조적 위치와 역사적 맥락을 조망한다면, 후자는 1964년이라는 특정 시점을 전후로 한국 사회와 재일 사회에 이 신종교가 어떻게 이식되고 변용되었는지를 미시적으로 살핀다.
2. 본론: 왜 창가학회였는가?
가. 소외된 자들을 위한 <현세적 구원>
재일한국인들에게 일본 사회는 거대한 장벽이었다. 차별과 빈곤 속에 내던져진 이들에게 기성 종교는 관념적 위안에 그쳤으나, 창가학회는 달랐다.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와 <현세적 이익>을 긍정하는 교리는 당장의 생존이 급급했던 재일한국인들에게 파괴적인 흡수력을 발휘했다. <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은 이들이 학회 내 활동을 통해 일본인과 대등한 관계를 맺고, 조직 내에서 역할을 부여받으며 상실했던 자존감을 회복해가는 과정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한다. 이는 종교적 귀의라기보다, 생존을 위한 실존적 선택에 가깝다.
나. 1964년, 단절과 연결의 변곡점
<1964년, 어느 종교 이야기>는 이 흐름을 보다 구체적인 시대상으로 끌어온다. 1964년은 한일 국교 정상화가 논의되던 시점이자, 일본에서는 도쿄 올림픽이 열리며 근대화의 정점을 찍던 해다. 이 시기 창가학회는 한국으로 급격히 확산되는데, 이는 재일한국인이라는 인적 네트워크가 매개가 되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식민지 시기 형성된 인연이 해방 후 어떻게 종교적 네트워크로 치환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국의 민족주의와 일본발 신종교가 어떻게 충돌하고 타협했는지를 보여준다.
다. 정체성의 혼란: <조선인>인가 <학회원>인가
두 책을 관통하는 핵심 질문은 정체성이다. 재일한국인 학회원들은 일본인들로부터는 <조선인>이라 차별받고, 한국의 동포들로부터는 <왜색 종교를 믿는 배신자>라 비난받는 이중의 고립에 처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창가학회라는 조직은 이들에게 국가를 넘어선 <보편적 연대>의 공간을 제공했다. <마쓰모토>라는 이름을 강요받았던 전경운의 사례처럼, 이들은 종교라는 외피를 빌려 국가가 주지 못한 소속감을 획득한다.
3. 결론: 역사의 공백을 메우는 개인의 기록
조성윤의 연구는 거대 담론이 놓친 <구체적인 삶>에 주목한다. 그는 종교를 단순히 신앙의 차원에서 보지 않고, 역사의 거센 풍랑 속에서 개인이 선택할 수 있었던 가장 치열한 삶의 방편으로 해석한다. <남양 섬에서 살다>에서 보여준 전경운의 회고록처럼, 창가학회를 믿는 재일한국인들의 이야기 역시 국가나 민족이라는 틀로는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경계인의 역사>다.
결국 이 두 책은 우리에게 묻는다. 국가가 개인을 보호하지 못할 때, 인간은 무엇을 의지해 자신을 증명하는가? 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의 만남은 단순한 종교 현상이 아니라, 근대 국가가 외면한 소수자들이 만들어낸 처절한 자기 구원의 서사다. 조성윤은 이 기록들을 통해 우리가 잊고 있었던 역사의 공백을 생생하게 복원해냈다.
세진님, 이 두 권의 책은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과 일본, 그리고 그 사이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텍스트라 생각됩니다. 특히 세진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아이덴티티>의 문제와도 밀접하게 닿아 있어 흥미롭네요.
두 책 중에서 세진님의 경험이나 가족의 역사와 연관되어 더 깊이 파고들어 보고 싶은 구체적인 지점이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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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종교, 국가 사이에서: 재일한국인과 창가학회를 둘러싼 이중의 시선>
조성윤의 두 책은 겉으로 보면 같은 대상—창가학회—을 다루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두 시선을 제시한다. 하나는 일본 내부에서 바라본 재일한국인의 삶과 선택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 국가와 사회가 특정 종교를 어떻게 규정하고 통제했는가를 분석하는 시선이다. 이 두 책을 함께 읽으면, 단일한 종교 연구를 넘어 <디아스포라, 민족주의, 국가 권력, 그리고 생활세계>가 교차하는 복합적 구조가 드러난다.
첫 번째 책 『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은 질문을 개인과 생활의 차원에서 시작한다. 왜 재일한국인은 일본의 신흥 종교를 선택했는가? 저자의 답은 매우 현실적이다. 재일한국인은 식민지 역사에서 비롯된 차별과 빈곤, 그리고 정체성의 불안 속에서 살아온 집단이다. 이들은 일본 사회에서 ‘외부자’로 취급되었고, 동시에 한국 사회에서도 완전히 포섭되지 못한 존재였다. 이 이중적 주변성 속에서 창가학회는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공동체와 존엄, 그리고 삶의 효능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기능했다.
특히 중요한 점은 창가학회의 조직 구조이다. 이 조직은 사제 중심이 아니라 신도 중심의 자발적 결사체이며, 지역 단위의 촘촘한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다. 이 구조는 재일한국인에게 매우 유리하게 작용했다. 혈통이나 국적보다 실천, 헌신, 조직 참여가 중요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주변화된 개인도 공동체 안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또한 절복 활동과 선거 지원 같은 적극적 참여는 단순한 신앙 행위를 넘어, 자신이 사회적 행위자라는 감각을 제공했다. 창가학회는 이들에게 “어디에 속하는가”보다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는 공간이었다.
이 책의 또 하나의 중요한 통찰은 창가학회의 확산이 일본 본부의 조직적 전략이 아니라 재일한국인의 자발적 포교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는 재일한국인이 단순한 수용자가 아니라, 일본과 한국을 연결하는 능동적 매개자였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종교는 단순한 신앙이 아니라, 디아스포라가 스스로의 삶을 재구성하는 하나의 전략으로 등장한다.
반면 『1964년, 어느 종교 이야기』는 전혀 다른 층위에서 동일한 현상을 바라본다. 이 책은 1964년 한국에서 창가학회가 어떻게 “왜색 종교”이자 “유사 종교”로 규정되고, 국가 권력에 의해 포교 금지 조치를 당하게 되었는지를 분석한다. 목차에서 보이듯, 이 책은 언론 보도, 문교부와 내무부의 개입, 종교심의위원회, 그리고 법적 투쟁의 과정을 상세히 추적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창가학회의 실체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문제 종교”로 구성되었는가이다. 창가학회는 일본 종교라는 이유로 반일 민족주의와 결합되었고, 냉전 체제 속에서 국가 안보와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로 해석되었다. 언론은 이를 “사교”와 “정체불명 종교”로 규정했고, 국가는 이를 제도적으로 통제했다. 이 과정에서 종교의 교리나 실제 활동은 부차적인 요소가 되었고, 대신 정치적 맥락과 집단 감정이 중심을 차지했다.
이 두 책을 함께 읽으면 하나의 중요한 대조가 드러난다. 일본에서는 창가학회가 재일한국인에게 공동체와 자존감을 제공하는 공간이었지만, 한국에서는 동일한 종교가 국가와 사회에 의해 “위험한 타자”로 규정되었다. 즉, 동일한 대상이 서로 다른 사회에서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 대조는 단순한 인식 차이가 아니라, 구조적 차이를 반영한다. 일본에서 재일한국인은 주변부 소수자로서 새로운 공동체를 필요로 했고, 창가학회는 그 요구에 응답했다. 반면 한국에서는 국가 형성과 민족주의가 중요한 시기였으며, 외부에서 들어온 일본 종교는 곧바로 정치적 문제로 전환되었다. 여기서 종교는 더 이상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국가 정체성과 충돌하는 대상이 된다.
이 두 시선을 연결하면 다음과 같은 통찰이 가능하다. 첫째, 종교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의미가 재구성되는 현상이다. 창가학회는 일본에서는 생활 공동체였지만, 한국에서는 정치적 위협으로 해석되었다. 둘째, 디아스포라의 선택은 단순한 이념 문제가 아니라 생존과 존엄의 문제이다. 재일한국인의 종교 선택은 민족을 버린 행위가 아니라, 삶의 조건 속에서 이루어진 전략적 선택이었다. 셋째, 국가 권력은 특정 집단을 “문제”로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언론과 대중 감정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두 책은 동시에 한계를 가진다. 『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은 창가학회의 내부 문제—예를 들어 조직의 권위주의나 정치 동원—를 충분히 비판하지 않는다. 반대로 『1964년, 어느 종교 이야기』는 국가 권력의 작동을 보여주지만, 창가학회 내부의 실제 모습을 깊이 있게 다루지는 않는다. 즉, 하나는 내부자의 시선에 가깝고, 다른 하나는 외부의 정치적 시선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책의 결합은 매우 강력하다. 하나는 “왜 사람들이 그 종교를 선택했는가”를 묻고, 다른 하나는 “왜 그 종교가 문제로 규정되었는가”를 묻는다. 이 두 질문을 함께 놓을 때, 우리는 종교를 둘러싼 사회적 현실을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조성윤의 두 저작은 창가학회 연구를 넘어 다음과 같은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종교는 단순한 신앙 체계가 아니라, 개인의 삶, 집단의 정체성, 그리고 국가 권력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형성된다. 그리고 그 의미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누구의 시선에서 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한 줄 정리
<같은 창가학회라도 재일한국인에게는 삶의 공동체였고, 한국 국가에게는 통제해야 할 타자였다>
1세대로 남양군도 여러 섬에서 생활한 전경운의 회고록. 그의 회고록은 크게 3부분으로 나뉘는데, 첫 번째는 1939년부터 1945년까지의 남양군도 시절 이야기이다. 두 번째는 1945년 수용소 캠프 시절부터 1951년 티니언섬에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을 적었다. 마지막 세 번째가 티니언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이야기였다. 세 시기가 모두 특징이 있고, 각각 자신의 열정을 쏟아 부었던 이야기들이 넘친다.
전경운이 회고록을 적어가는 태도를 보면, 자신이 맡아서 했던 일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그는 자신이 한 일들을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그 일들에서 부딪친 문제, 또는 자신이 나서서 해결한 일들을 아주 상세하게 적어갔다. 특히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가 문제를 해결했던 일들은 마치 소설을 쓰듯이 실감나게 생생하게 묘사했다.
그는 어떤 국면에 처하든지 부딪치는 일을 적극 해결해 나갔다. 매우 열정적인 자세를 보이지만, 때로는 일에 지나치게 몰두하다가 가족을 돌보는 일은 물론 자신의 건강마저 해치는 일도 자주 있었다. 특히 농업과 관련한 부분을 보면 그가 어떤 시도를 했고, 어떤 부분에서 실패하고, 또 실패를 딛고 다시 도전했는지를 잘 읽을 수 있다.
(서울=연합뉴스) 이충원 기자 = 창가학회는 일본에서 식민지 지배를 반성하는 '친한'(親韓) 종교로 유명하지만, 유독 한국에선 '왜색(倭色)종교'라는 낙인이 찍혀 한때 포교금지령까지 내려질 만큼 핍박받았다. 창가학회 핍박사를 연구한 조성윤(趙誠倫) 제주대 사회학과 명예교수가 지난 16일 오후 9시15분께 제주시 자택에서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17일 전했다. 향년 만 71세.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했고, 동 대학원에서 '조선 후기 서울 주민 신분 구조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2년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가 되면서 제주에 정착했고, 2020년 퇴직했다.
사회학 중에서도 주로 종교·역사 쪽을 연구했다. 특히 일본 창가학회 신자들을 40명 넘게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쓴 책 '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2013)과 '1964년 어느 종교 이야기'(2019)를 펴냈을 만큼 수십년간 창가학회 연구에 천착했다.
당시 제주대는 일부 교수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히자 자매결연을 보류한 뒤 고인에게 조사를 맡겼다. '아무 문제가 없다'는 조사 결과를 토대로 제주대는 자매결연을 했고, 이케다 다이사쿠(1928∼2023) 국제창가학회(SGI) 회장이 제주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 교수는 이를 계기로 2000년부터 일본에 오가며 연구를 시작한 뒤 20여년간 이어갔다.
고인에 따르면 창가학회는 1960년대 고향을 방문한 재일교포를 중심으로 국내에서 퍼져나갔지만, 창가학회 본부가 1963년 말 한국 조직 구성을 도우려고 대표단을 선발해 한국 외무부에 비자를 신청하자 치안국 정보과가 나서서 '왜색·유사(類似) 종교'라는 프레임을 씌웠고, 급기야 1964년 1월 내무부 장관 명의로 '창가학회의 집회와 포교를 금한다'는 행정처분을 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 굴종적인 자세로 한일회담에 임했다며 전국에서 시위가 일어나던 때라서 정권이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게 고인의 주장이다.
'1964년 어느 종교 이야기'는 2024년 일본에서 '한국 1964년 창가학회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번역·출간됐다.
2008년 제주 4·3 평화공원 기본 계획을 만들 때 도움을 얻으려고 오키나와에 가서 남양군도 전시를 본 걸 계기로 2013∼2017년 남양군도를 여러 차례 방문한 뒤 '남양군도:일본제국의 태평양 섬 지배와 좌절'(2015), '남양 섬에서 살다:조선인 마쓰모토의 회고록'(2017), '남양군도의 조선인'(2019)을 펴냈다.
2016년 제주·오키나와 학회를 만들어 회장으로 활동했다. 일본 방위성 문서 등을 직접 추적해 제주도 내 일본군 항공기지(알뜨르비행장) 건설 과정의 실체를 밝혀냈고, 알뜨르 비행장에 대한 평화적 활용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 밖에도 '제주지역 민간 신앙의 구조와 변용'(2003), '일제 말기 제주도 일본군 연구'(2008) 같은 저서가 있다.
유족은 부인 김미정씨와 아들 조지훈(수산초교 교사)씨, 며느리 강가람씨 등이 있다. 빈소는 부민장례식장 9호실, 일포 18일, 발인 19일 오전 7시30분, 장지 제주양지공원. ☎ 064-742-5000
“‘굴종적 한일회담’으로 위기 몰린 朴 정권 시선 돌리려 ‘왜색 종교’ 덧씌워 마녀 사냥”
치안국이 프레임 씌우고, 문교부가 전대미문 포교 금지령
회원 잡아 들이고 사찰…“종교 자유 무색한 엄혹의 시대”
2019년 발간된 〈1964년 어느 종교 이야기〉(당산서원)는 창가학회(創價學會)가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받았던 박해의 역사를 전면에 다뤘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사회학자인 조성윤 제주대 명예교수가 당시 자료와 생존자들에게서 수집한 구술기록을 토대로 한 책의 내용은 역사서에 버금갈 만큼 세밀하다. 내용도 충격적이다.
당시 치안국 정보과는 창가학회에 왜색(倭色)·유사(類似) 종교 프레임을 씌웠고, 문교부는 이를 근거로 포교 금지령을 내렸다. 정권이 공권력을 동원해 특정 종교를 핍박한, 헌정사 유일무이한 사건이다.
왜 창가학회는 정권의 표적이 되어야만 했을까. 왜 당시 프레임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있을까. 조성윤 제주대학교 명예교수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조성윤 제주대학교 명예교수는 지난 9일 인터뷰에서 “마침 비난의 화살을 돌릴 타깃이 필요했던 박정희 정권은 창가학회에 친일 프레임을 씌웠다”라고 말했다. 김정훈 기자
자매결연 계기로 창가학회 연구 시작
일본에서 시작된 불교단체 ‘창가학회’를 2000년 이래 연구해왔다. 왜 창가학회를 연구 대상으로 삼았나.
“사회학 중 역사·종교 분야를 주로 연구했는데, 1990년대까지만 해도 창가학회는 조사하기가 싫어서 일부러 연구 대상에서 제외했었다. 당시만 해도 창가학회란 이름 대신 ‘남묘호렌게쿄’라고 불려 거부감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1998년 제주대학교가 일본 동경에 있는 소카대학교와 자매결연을 진행하던 중 보류된 사건을 계기로 관심을 갖게 됐다.”
(창가학회를 ‘남묘호렌게쿄’라고 지칭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창가학회 신자가 수행을 위해 되뇌는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의 일본식 발음인 ‘남묘호렌게쿄’를 종교명으로 오해하면서 인식이 굳어졌다. 창가(創價, Soka)란 가치를 창조한다는 의미로, 창가학회는 ‘가치를 창조하고, 배우기 위한 모임’이라는 뜻이다.)
제주대 내에서 자매결연을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나 보다.
“창가학회에 대한 오해가 깊은 일부 교수들이 자매결연 추진을 강하게 반대했다. 반대하는 합리적인 근거가 있는 게 아니라 세간의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제주대는 일단 자매결연을 보류하고서 내게 창가학회에 대한 조사를 맡겼다. 2주 뒤 열리는 회의 전까지 자매결연을 맺어도 좋을지 알려달라고 했다.”
조사를 통해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됐나.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로 국내 창가학회 회원을 조사했던 친구에게 부랴부랴 전화해 물었더니, ‘소문과 달리 아무런 문제가 없는 종교이니 자매결연을 맺어도 괜찮다’고 하더라. 내가 직접 조사하기에도 문제가 없어 보여서 제주대에 그대로 의견을 전달했다. 자매결연 후인 1999년 제주대를 방문한 이케다 다이사쿠 국제창가학회(SGI) 회장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고, 해마다 두 대학 학생들이 교류하게 됐다.”
학자로서 2주간의 조사는 매우 짧다고 느꼈을 것 같은데.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 아직 창가학회에 대해 온전히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학자로서 섣부른 짓을 한 것은 아닌지 걱정됐다. 그래서 2000년 일본으로 건너가 문헌을 찾아보고, 집회에 참석하는 등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2006년 일본 창가학회 신자들을 1년 동안 40명 넘게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2013, 한울아카데미)을 발간하기도 했다.”
조성윤 교수는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사회학과를 나와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줄곧 서울에서 살다가 1982년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부임하면서 제주에 정착했다. 사회학 중 종교·역사 분야를 주로 연구하며, 저서로는 〈제주지역 민간신앙의 구조와 변용〉, 〈일제 말기 제주도 일본군 연구〉, 〈빼앗긴 시대 빼앗긴 시절:제주도 민중들의 이야기〉, 〈창가학회 재일한국인〉, 〈1964년 어느 종교 이야기〉 등이 있다.
창가학회는 어떤 경로로 국내에 들어오게 됐나?
“이승만 정권 때까지만 해도 우리 경제는 원조에 의존하는 상태였다. 반면 일본은 한국전쟁에 의한 반사이익을 기반으로 산업화가 급격히 진행되고 있었다. 1960년대는 상대적으로 부유한 재일교포들이 우리나라 고향을 자주 방문한 시기였다. 그렇게 재일교포의 친척과 지인들을 중심으로 창가학회 회원이 우리나라에서 늘어났다.”
당시 재일교포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양가적 감정이 있었을 거다. 부자 나라에서 잘 차려입고 선물을 들고 고향마을을 찾아오는 친척이나 이웃 지인의 모습이 부러우면서도,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일본에 의해 식민 지배를 받았던 아픔 때문에 그들의 방문을 불안해하는 면도 있었다.”
전국에서 시위…비난 화살 돌릴 대상 물색해
당시 일본 창가학회의 조직적 포교 활동은 없었나?
“국제적으로 뻗어 나간다는 개념과 조직이 없었던 상황에서 재일교포들이 자발적으로 포교하면서 지금의 규모로 성장하게 된다. 이에 창가학회 본부도 국제부와 같은 조직을 만들어서 세계로 뻗어 나가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1963년 말 한국 조직 구성을 도와주기 위해 대표단을 선발해 우리 외무부에 비자를 신청하는데, 이를 알게 된 외무부에서 난리가 났다.”
반일 감정 때문인가?
“1961년 쿠데타(5·16 군사정변)에 성공한 박정희 정권은 과거 이력(일본군 육군 장교 등) 때문에 친일 이슈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일본에서 시작된 불교단체인 창가학회에서 비자를 신청했으니 그야말로 뒤집어진 것이다. 특히 1963년에는 박정희 정권이 굴종적인 자세로 한일회담에 임했다며 전국에서 시위가 일어나던 때라서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에 치안국 정보과에서 외무부에 비자를 내주지 말라고 압박하기에 이른다. 군 출신이 주축이 된 치안국 정보과는 해방 직후부터 정보를 총괄하면서 우리나라를 좌지우지했다. 독재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여론 조작도 서슴지 않던 곳이다. 마침 비난의 화살을 돌릴 타깃이 필요했던 박정희 정권은 창가학회에 친일 프레임을 씌우게 된다. 1964년 1월 문교부는 왜색 종교라는 이유로 창가학회에 포교 금지령을 내린다.”
1963년 6월 3일 서울 시내에 모인 1만5000여 명의 대학생이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중지하라”며 박정희 대통령 하야 등을 요구하는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벌였다. [중앙포토]
당시 치안국 정보과는 창가학회가 위험한 종교단체이자 정치 단체라는 보고서를 만들어 각 언론사에 뿌렸다고 한다. 1964년 1월 주요 신문에서 ‘왜색종교 창가학회의 국내 침투’라는 기사를 집중적으로 내보내기 시작했고, 급기야 내무부장관 명의로 ‘이 종교의 집회와 포교를 금한다’는 행정처분이 내려졌다. 당시 일부 회원들이 ‘외환관리법 위반’이라는 근거 없는 죄목으로 체포돼 심문을 받기도 했다.
일본의 신흥종교인 천리교도 한국에 들어와 있었지만, 창가학회처럼 박해받지는 않았다. 왜 창가학회가 타깃이 됐다고 생각하나?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고 얼마 뒤 전국의 종교단체와 시민사회단체에 대한 등록령을 내렸는데, 천리교는 발 빠르게 대응해 법인 등록을 마친 상태였다. 또 천리교는 교세가 강해 잘못 건드렸다가는 정권이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도 있었다. 1960년대 초 신자가 50여 만 명에 달했기 때문에 정권 입장에서는 건드리기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반면 창가학회는 신자가 3000명도 안 됐고, ‘남묘호렌게쿄’라고 일본어로 주문을 외운다고 하니 ‘마침 잘됐다’ 싶었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1965년 12월 17일 한일협정 비준서에 서명하고 있다. [중앙포토]
포교 금지령에 대한 행정소송에서 승리
치안국에 잡혀갔던 창가학회 회원들은 어떻게 됐나?
“조사하면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치안국이 창가학회 회원을 이런저런 이유로 막 잡아들였지만, 재판에 넘겨졌다는 기사는 단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이를 조사하기 위해 과거 치안국에서 일했던 경찰 책임자들에게 물어보니 ‘잡아들여서 며칠씩 겁주고 창가학회 활동을 그만두게 만든 뒤 풀어줬다’고 하더라.”
처벌할 근거가 없어서 그랬던 것일까?
“그렇다. 상부에서 창가학회를 탄압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지만, 이 사람들을 집어넣을 근거가 없었다. 신문은 마치 창가학회가 재일교포를 통해 포교라는 형태로 간첩 비슷한 활동을 한다고 보도했는데, 정작 확인해보니 아니었던 것이다. 회원들은 ‘창가학회는 불법을 저지른 적이 없는데 왜 우리를 탄압하느냐’며 정부에 탄원서를 계속 보냈다. 포교 금지령에 대한 행정처분 취소 소송에서도 창가학회가 승리하게 된다.”
창가학회 회원들은 내무부장관을 상대로 ‘행정처분 취소 청구 소송’을 제기해 1965년 서울고등법원으로부터 ‘창가학회의 포교를 위한 집회 및 통신연락과 간행물의 반입, 배포, 취득, 열람을 금지한다는 처분을 취소한다’는 승소판결을 받았다. 1966년 대법원 판결을 통해 종교의 자유는 헌법상 보장돼야 할 권리라는 점을 재확인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왜색종교라는 편견과 오해는 오랫동안 지속됐다.
조성윤 제주대학교 명예교수의 서재에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종교·역사에 관한 책과 연구 자료들이 빼곡히 꽂혀 있다. 지난 9일 인터뷰에서 그는 “선한 종교들이 연대해 사회의 방향을 잡아가는 것이 요즘 시대에 매우 중요하다”라고 했다. 김정훈 기자
창가학회가 결과적으로 정권의 모진 탄압을 이겨냈지만, 상처가 크게 남았다. 아직도 왜색 종교, 유사 종교라며 거부감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다.
“해방 후 80년이 지났지만, 두 개(왜색·유사 종교)의 프레임이 지금도 남아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국제사회로 뻗어 나가는 데 장애 요인이고, 국내에서 종교가 사회적 역할을 제대로 하는 데에도 큰 마이너스다. 나는 이 두 프레임을 이제는 극복해야 하며, 그 시작이 창가학회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라고 생각한다. 창가학회 역시 좋은 활동을 계속 이어나가 본인들에게 씌워진 프레임을 극복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종교의 순기능이 커지기 위해 교단은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사회에 어떻게 공헌할지 분명한 방침을 세워 교육하고, 좋은 일을 위해 다른 교단 등과도 연대하는 활동이 많아져야 한다. 그런 것을 우리는 공공 종교라고 한다. 개인의 신앙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전체의 공동선과 연대를 추구하는 것이다. 세계 평화와 환경 운동을 가장 열심히 하는 종교 단체가 이에 해당한다. 그런 선한 종교들이 연대해 사회의 방향을 잡아가는 것이 요즘 시대에 매우 중요하다.”
창가학회는 예전부터 세계 평화와 핵 폐기, 인권 증진 등을 주창해왔다.
“내가 보기에 창가학회는 공공 종교라고 불릴 만하다. 옛날 방식으로는 사람들의 희망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해 의례 등을 바꿔 근대적인 조직으로 등장했다. 창가학회 제2대 회장인 도다 조세이 선생이 세계 평화, 전쟁 반대, 핵 폐기 등을 주장하셨는데, 이것이 유훈이 되어 제3대인 이케다 다이사쿠 회장이 계승·발전시켰다. 그러니 일본에서 시작된 종교라고 해서 색안경을 끼고 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최현목 월간중앙 기자 choi.hyunmok@joongang.co.kr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7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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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m****
2025.12.30 20:24
한국에서일본은 아직도 전쟁범죄를 사과하지않는 적성국이다. 종교의 자유? 한ㄱ구내에서 포교를 원한다면 일본의 양심으로서 일본정부를 대리하여 일본의 전쟁범죄를 대신 사과하는등의 최대한의 성의를 보인다면 한국국민이 마음을 열지도 모른다. 허나 그러기엔 과거 일본이 행한 범죄가 너무나커 포고활동만큼이나 사죄에 수고를 들여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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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4****
2025.11.02 06:36
인식과평가는 먼저 창가학회가 어떤 종교인지를(개인에, 가정에 그리고 사회에 좋은영향을 미치는가) 정확히 파악하고 평가를 내려야 올바르다 할것이다창가학회는 신앙을 통해서 좋은방향으로 개인의 변화 즉 인간혁명을 통해서 자신과 가정의 행복 나아가 타인의 행복도 같이 만들어 간다는 종교입니다나만의 행복도 타인만의 불행도 없다즉 자타공히 행복해지자 라는게 창가학회라고 나는 생각합니당~~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 사람으로 살다가 1982년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부임하면서부터 제주 사람이 되었다. 공부하고 싶은 것, 연구해야 할 것들이 많아 오랫동안 논문 발표에 열중했으나 최근에는 자신의 연구를 여러 사람과 공유하기 위해 공부한 것들을 책으로 출판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논문으로 「임오군란의 사회적 성격」, 「조선후기 서울 주민의 신분구조와 변동」이 있으며, 저서로 <제주지역 민간신앙의 구조와 변용>(공저), <일제 말기 제주도 일본군 연구>(엮음), <빼앗긴 시대 빼앗긴 시절: 제주도 민중들의 이야기>(공저)가 있다. 2014년 현재 ‘오키나와 전쟁의 기억’, ‘남양군도’, ‘일본 신종교의 평화운동’ 등의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접기
이건 특정 종교의 이야기가 아니다. 정치, 관료, 언론, 기성종교, 시민단체, 대중, 지성인들이 하나의 희생양을 어떻게 난도질하는지 폭로한 고발서다. 승주나무 2019-12-24 공감 (5) 댓글 (4) Thanks to 공감
1960년대 초 반일감정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친일적 성격을 감추려했던 박 정권의 더러운 공작이 잘 드러나있다!! 이 책을 통해 창가학회에 대한 인식을 전환하게 되었고, 정치적 목적에 짓밟힌 한국 창가학회원들의 고난을 배웠다!! 배살시러 2024-12-25 공감 (0) 댓글 (0) Thanks to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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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1964년, 어느 종교 이야기
진실은 왜곡될수 있다.국가권력의 이름으로 만들어지는 진실의왜곡으로 많은 진실이 왜곡되고억울한 사연도 생기며실제 사회발전을 저해하기도 한다.무엇을 제일 중요하게 목표로 잡고여론을 형성하느냐가국민의 힘을 모으기도, 흩어지게 하기도 한다.종교를 분석하는 종교사회학자가오랜동안 분석하여 쓴 책이다.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배척이 아닌긍적적인 모임과의 교류이다.미약한 노력과 실행이 모여 큰 변화를 이루기를 기원한다. 낮은나무 2020-03-26 공감(1) 댓글(0) Thanks to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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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주신 자료를 바탕으로 <1964년, 어느 종교 이야기>의 정확한 요약과 평론을 다시 작성해 드립니다.
<1964년, 어느 종교 이야기> 요약 및 평론
1. 요약: 국가 권력과 종교의 자유가 충돌한 1964년
조성윤의 <1964년, 어느 종교 이야기>는 1964년 박정희 정권이 출범하자마자 단행한 한국 창가학회 포교 금지령을 중심으로, 국가 권력이 특정 종교를 어떻게 탄압하고 사회적으로 격리했는지를 추적한 종교사회학 보고서이다.
포교 금지령의 배경과 전개1964년 대한민국 정부는 헌법상 종교의 자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창가학회에 포교 금지령을 내린다. 저자는 당시 문교부의 공문서와 신문 자료를 비교 검토하며, 정부가 추진하던 한일회담과 창가학회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어떻게 맞물려 있었는지를 분석한다.
왜색 종교와 유사 종교 프레임당시 창가학회는 일본에서 건너온 <왜색 종교> 혹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교>이자 <유사 종교>로 낙인찍혔다. 특히 창가학회의 조직표를 간첩 조직표와 비교하거나, <일본 침략 정신 분쇄 투쟁회>와 같은 단체가 등장하여 이들을 공격했던 사회적 분위기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법정 투쟁과 사회적 인식책은 포교 금지령에 맞선 창가학회의 행정심판 청구와 대법원 승소 판결 과정까지 상세히 담고 있다. 그러나 법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당시 한국 사회 저변에 깔린 강력한 반일 의식과 <유사 종교 프레임>이 어떻게 대중의 호응을 이끌어내며 해당 종교를 사회적으로 고립시켰는지를 보여준다.
2. 평론: 반일 민족주의라는 이름의 검열
이 책은 1960년대 한국 사회가 지녔던 반일 민족주의라는 감정이 국가 장치와 결합했을 때, 개인의 기본권인 종교의 자유가 어떻게 무력화될 수 있는지를 예리하게 파헤친 역작이다.
권력의 도구가 된 종교 정책저자는 문교부와 내무부 치안국 정보과의 긴밀한 협조 체제를 드러내며, 종교 심의가 사실상 국가 정책의 일환으로 수행되었음을 지적한다. 이는 단순히 종교적 이단 논쟁이 아니라, 한일 협정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국면 속에서 정권이 민심을 달래거나 통제하기 위해 특정 종교를 <공공의 적>으로 활용했음을 시사한다.
인식의 틀에 대한 성찰조성윤은 창가학회라는 대상을 통해 우리 사회가 타자를 인식하는 <프레임>에 주목한다. <왜색 일소 운동>과 <유사 종교 프레임>은 당시 국민들의 자발적인 호응을 얻었으나, 이는 동시에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다양성을 훼손하는 양날의 검이었다. 저자는 1964년의 기록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여전히 가지고 있을지 모를 편견의 틀을 경계하게 만든다.
미시사와 거시사의 결합이 저작은 공문서라는 딱딱한 텍스트와 신문 기사라는 대중적 텍스트를 교차시키며, 국가 권력의 의도와 대중의 정서가 만나는 접점을 정교하게 복원해 냈다. 이는 한국 종교사회학이 도달한 높은 수준을 보여주며, 한일 관계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세진님께서 15살에 한국을 떠나 세계인으로서 살아오셨기에, 당시 한국 사회를 지배했던 이런 강렬한 국가주의나 반일 감정이 다소 생경하거나 비합리적으로 느껴지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의 내용 중 특별히 눈길이 가는 대목이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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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학회(創価学会, Soka Gakkai) 이야기>
입니다.
1. 왜 제목을 이렇게 썼는가
목차를 보면 분명합니다.
→ 제2장 전체가 “창가학회”
→ 이후 장들도 전부 창가학회 중심 사건 전개
즉, 이 책은
한국 종교 일반사 ❌
특정 사건 연구 ⭕
→ <1964년 한국에서 창가학회가 어떻게 ‘문제 종교’가 되었는가>
를 다루는 책입니다.
그럼에도 제목을 “어느 종교 이야기”라고 한 이유는 두 가지로 보입니다:
① 정치적 완충 표현
직접 “창가학회”라고 쓰면
반일 감정
종교 갈등
을 즉각 자극할 수 있음
→ 의도적으로 거리 두기
② 구조 분석 의도
저자의 실제 관심은
→ 특정 종교 자체보다
→ <국가가 특정 종교를 어떻게 ‘문제화’하는가>
이기 때문입니다.
2. 이 책의 실제 주제 (정확히 말하면)
이 책의 진짜 주제는 다음입니다:
→ <1964년 한국 정부가 창가학회를 어떻게 금지하고 ‘나쁜 종교’로 만들었는가>
3. 핵심 사건 구조
목차를 따라가면 흐름이 명확합니다:
(1) 창가학회의 등장
일본에서 시작된 신흥 불교 운동
적극적 포교(절복 활동)
재일한국인 네트워크와 연결
(2) 한국 진입
1960년대 초 한국 유입
빠른 확산
→ 여기서 이미 “위협”으로 인식됨
(3) 언론 공격
제3장 핵심:
“정체불명 종교”
“사교(邪敎)”
라는 프레임 형성
(4) 국가 개입
제4장 핵심:
문교부 + 내무부 개입
종교심의위원회 구성
→ 결국
→ <포교 금지 정책>
(5) ‘나쁜 종교’ 만들기
제5장 핵심:
일본 침략과 연결
간첩 조직 프레임
반일 감정 동원
(6) 법적 투쟁
제6장:
창가학회 행정소송
대법원 판결
→ 결국 일부 승소
(7) 사회적 효과
제7장 핵심: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
반일 민족주의 결합
“유사종교” 프레임 확산
4. 핵심 통찰 (이 책의 진짜 가치)
이 책의 핵심은 종교가 아니라 이것입니다:
① 종교 탄압은 ‘교리’ 문제가 아니다
→ 정치 + 민족주의 + 국가안보 문제
② “나쁜 종교”는 만들어진다
과정은 매우 명확합니다:
낯선 종교 등장
언론 프레임 (“사교”)
국가 개입
국민 감정 결합
→ 결과:
→ <사회적 합의된 ‘위험 종교’>
③ 반일 감정의 역할
이 사건에서 결정적 요소:
→ 창가학회 = 일본 종교
따라서
한일협정 반대 분위기
반일 민족주의
와 결합되며
→ 급속히 “위험화”
④ 종교 자유의 한계
헌법상 종교 자유가 있음에도
→ 실제로는 국가가 개입
→ 매우 중요한 사례
5. 세진님 지적의 의미
세진님이 하신 말:
→ “어느 종교인지도 모르겠다 → 창가학회”
이건 단순한 독서 불편이 아니라
→ 이 책의 핵심 구조를 정확히 짚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사실
→ “창가학회 사건 연구”
인데
→ “한국 종교 이야기”처럼 보이게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
6. 더 깊은 해석
이 책을 한 단계 더 밀어 보면:
이건 종교 이야기가 아니다
→ <국가가 ‘타자’를 만드는 방식>
입니다.
구조는 완전히 동일합니다:
종교 → 창가학회
정치 → 공산주의
민족 → 친일
모두 같은 방식:
→ “위험한 타자” 만들기
7. 비교 (세진님 관심과 연결)
(1) 미국
이슬람 = 위험
공산주의 = 적
(2) 한국
창가학회 = 사교
북한 = 절대악
(3)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 위협
→ 구조 동일:
→ <정체성 + 공포 + 정치>
8. 결론
이 책을 정확히 다시 정의하면:
→ <1964년 한국에서 창가학회가 ‘위험한 종교’로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정치사회학적 연구>
입니다.
9. 한 줄 정리
<이 책은 종교 이야기가 아니라, 국가가 특정 종교를 ‘문제’로 만들어내는 과정의 해부다>
원하시면 이어서:
→ <창가학회 vs 통일교 vs 여호와의 증인: 한국에서 ‘문제 종교’가 되는 구조 비교>
→ <일본 신종교와 한국 반일 감정의 충돌 구조>
→ <“유사종교”라는 개념의 정치적 기능 분석>
책소개 창가학회는 일본에서 공명당이라는 커다란 정치 조직을 거느린, 사회적 영향력이 큰 종교 집단이자, 주류 종교 세력과 자민당을 비롯한 정부 여당의 경계 대상이다. 이 책의 저자는 창가학회 조직의 내부가 어떠한지 알아보고자 일본에 거주하면서 관련자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 책은 창가학회에 대한 일방적인 비난이 주를 이루는 기존 담론들의 한계를 벗어나, 구체적인 사실 제시와 논리적인 분석을 담아 종교 연구의 스펙트럼을 넓혔다. 아울러 연구 과정 중 진행한 재일한국인 신도들의 인터뷰 녹취를 정리해 <숙명 전환의 선물: 창가학회 회원이 된 재일한국인들의 이야기>를 함께 출간, 현장감과 이해를 높였다.
목차
여는 글 시작의 색깔 | 경계와 호기심 | 일본 속의 한국인, 그들의 일본 종교
제1장 | 연구의 대상과 방법 1. 자이니치와 창가학회 | 2. 재일한국인의 범주 | 3.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
제2장 | 재일한국인 1. 내가 만난 재일한국인 | 2. 국경을 넘는 문, 밀항 | 3. 차별의 이름 조센진 | 4. 본명과 통명 사이에서 | 5. 한국말의 벽 | 6. 어디에서 한국을 배울 것인가 | 7. 한국의 맛 | 8. 귀화
제4장 | 입신과 절복 1. 입신, 살기 위하여 | 2. 재일한국인의 절복 실천 |3. 1980년대 이후 절복의 변화
제5장 | 창가학회의 회원 활동 1. 사제 없는 종교 조직 | 2. 신도 조직의 재구성: 자발적 결사체 | 3. 지역 중심으로 | 4. 역직의 봉사 활동 | 5. 신문 돌리기 | 6. 공동체 발견과 자기 성장 | 7. 1년에 한 번 하는 재무
제6장 | 공명당과 선거 지원 활동 1. 정치 차원에서의 종교 실천 | 2 .선거 지원 활 | 3. 공명당을 생각하는 마음 | 4. 공명당의 불투명한 미래
맺는말 국가와 민족 | 창가학회의 성장과 재일한국인 | 국가를 넘어서
참고문헌 접기
책속에서
P. 20 일본 사회 내의 마이너리티인 재일한국인이자, 동시에 창가학회 신도이기도 한 그들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역사적 이유는 다르지만 ‘자이니치(在日)’와 ‘창가학회’는 둘 다 일본 사회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집단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그 이유는 각각 달랐고, 그것은 아직 충분히 연구되지 않은 채 막연한 선입견 위에 구축된 이미지가 계속 증폭되면서 현실로부터 멀어져 왔다. 필자는 이러한 이미지를 파악하고 그 심층구조를 이해․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여기서의 연구 대상은 크게 두 축 위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민족’이라는 축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라는 축이다. 접기
P. 77-78 한국 사회에서는 창가학회라고 하면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학회라는 명칭 때문에 학자들의 학술 단체가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일반인들에게는 ‘남묘호렌교(敎)’, ‘남녀호랑이교(敎)’ 등의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 ‘남묘호렌게쿄’는 교단의 명칭이 아닌 일종의 염불(念佛)이다. 한국에서는 거의 들을 수 없지만, 남묘호렌게쿄라는 말은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의 일본어 발음이다. …‧… 지금으로부터 700여 년 전, 일본 승려 니치렌은 수많은 불교 경전 중에서 법화경이야말로 핵심 진리를 담고 있는 경전이며, 이 경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접기
P. 79 창가학회의 모태는 창가교육학회(創價敎育學會)이며, 설립자는 마기구치 쓰네사부로(牧口常三郞)다. 마기구치는 원래 소학교 교장이자 교육학자였으며, 근대 일본 교육 체계를 개혁하는 데 관심이 많았던 인물이다. 그는 교육 개혁 원리로 창가교육(創價敎育)을 제시했다. ‘창가(創價)’란 ‘가치 창조’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창가교육은 삶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나가는 주체적인 인간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접기 P. 84 사회학자 브라이언 윌슨(Bryan Wilson)은 일련정종과 재가 신도 단체로서의 창가학회를 서양의 가톨릭․프로테스탄트와 비교했다. 그는 “프로테스탄트가 처음에는 가톨릭의 사제들을 공격하며 분리되어 나왔지만, 지금은 가톨릭과 마찬가지로 또 하나의 독자적인 교단을 형성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창가학회는 불교임에는 틀림없지만 옛날의 불교가 아닌 새로운 형태의 불교로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창가학회도 일련정종과 완전히 분리되어 또 하나의 불교 조직이 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접기 P. 101 창가학회에 입신한 재일한국인들은 대부분 가난과 병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재일한국인 대개는 일본 도시 지역 변두리에 거주하는 하층민이었고, 공무원․교사 등 사회적 지위와 급료가 높은 직장을 갖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매우 어려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식민지 조선 출신이라는 사회적 차별을 받았다. 그런 점에서 가난과 질병에서 벗어나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는 일본 사회의 다른 어떤 계층보다도 훨씬 강했다. 그러한 그들은 일본 사회에 불고 있던 새로운 바람인 창가학회의 절복대행진을 만나자, 이에 동조․참여하거나 이를 부정․거부하는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접기 P. 123-124 창가학회 회원의 조직 구성은 피라미드 형태의 종적 조직이 중심이었지만, 점차 지역 단위의 횡적 조직으로 바뀌었다. 이는 하루아침에 바뀐 것이 아니라 여러 해에 걸쳐 기본 방침을 개편하는 작업을 진행한 결과였다. 이 점은 메이지유신 이후 발생한 근대 신종교들과 비교해볼 때 창가학회만의 독특한 특징이다. …… 지역 조직은 누가 포교를 했는가에 상관없이 각 지역 단위로 편성되기 때문에 동일한 지역에 거주한 신도가 같은 조직에 속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신도들이 곧 지역 주민이기 때문에 모이기도 쉽고, 짜임새 있는 활동을 전개하기에 편리하다. 접기 P. 156-157 창가학회는 왜 초기 활동 시기부터 정치에 참여했으며, 지금까지 줄곧 정치 참여 방침을 유지하고 있는가. 그것은 창가학회의 제2대 회장인 도다가 생각했던 종교의 참모습이기 때문이다. 도다가 회원들에게 제시한 신앙의 첫걸음은 근행과 남묘호렌게쿄라는 제목을 열심히 봉창하면서 생명과 우주 삼라만상이 깊이 이어져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었다. 맑아진 마음으로 생명의 기쁨을 느끼며 법화경의 진리를 따라 살고자 노력하면 인생의 성취감을 맛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다음 단계로 주위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절복 활동을 하도록 권장했다. 이것은 자신이 느낀 기쁨을 주위에 나누어 주는 것인 동시에 스스로 공덕을 쌓는 길이었다. 창가학회 공동체는 이러한 방식으로 형성되었다. …… 도다는 부패한 정치 때문에 항상 민중의 삶이 희생당한다고 여기면서 민중의 분노에 동참하고 있었다. 그가 창가학회 회원들에게 사회적 차원에서 자신들의 교리를 실천하는 방안으로 제시한 것이 왕불명합(王佛冥合)의 교리였다. 접기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 사람으로 살다가 1982년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부임하면서부터 제주 사람이 되었다. 공부하고 싶은 것, 연구해야 할 것들이 많아 오랫동안 논문 발표에 열중했으나 최근에는 자신의 연구를 여러 사람과 공유하기 위해 공부한 것들을 책으로 출판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논문으로 「임오군란의 사회적 성격」, 「조선후기 서울 주민의 신분구조와 변동」이 있으며, 저서로 <제주지역 민간신앙의 구조와 변용>(공저), <일제 말기 제주도 일본군 연구>(엮음), <빼앗긴 시대 빼앗긴 시절: 제주도 민중들의 이야기>(공저)가 있다. 2014년 현재 ‘오키나와 전쟁의 기억’, ‘남양군도’, ‘일본 신종교의 평화운동’ 등의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