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17

김재준 자서전 [범용기 제1권] 목차 요약 평론

 목회와 신학: [범용기 제1권](각주해설판) - 목차


[범용기 제1권](각주해설판) - 목차

〖 범용기 제1권 - 목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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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 목사의 자서전 『범용기』(각주해설판)을 발행하며
첫머리

어릴 때 추억

경원 함양동 3년

회령에서 3년

웅기서 서울로

서울 3년

서울에서 고향에 돌아와

소학교 교사 3년
동경 3년

미국 3년

돌아와 보니

평양 3년 [33-36]

간도 3년

조선신학원 발족

편집후기

부록 : 장공 김재준 목사 연보 및 휘호

장공 김재준 목사 연보

- 본 내용은 김경재 교수가 집필한 『김재준 평전』(2001)에 수록된 내용을 옮긴 것입니다.

1901년 9월 26일

함북 경흥군 상하면 오봉동 창꼴마을에서 김호병 씨와 채성녀 씨의 2남 4녀 중 둘째아들로 태어남

1905년 ~ 1910년

서당 훈장이셨던 부친으로부터 『천자문』, 『통감』, 『대학』, 『중용』, 『논어』, 『맹자』 등을 읽고 몸에 익히면서 가풍을 따라 유교의 세계에서 소년 시기를 자람

1910년 ~ 1915년

9살 때 경원 향동소학교 3학년에 편입, 고건원보통학교를 마치고, 회령 간이농업학교를 졸업(13~16세)

1915년 ~ 1917년

회령군청 간접세과 고원으로 취업

1917년

18세 때 장석연 씨의 맏딸 장분여와 결혼. 이후 일생을 해로하면서 3남 3녀를 낳고 기름

1917년 ~ 1920년

회령군청에서 웅기 금융조합 직원으로 전직. 웅기에서 만주, 시베리아로 망명하는 애국 지사들을 수시로 보며 가냘픈 민족 의식이 싹트기 시작

1920년

웅상 출신 청년 전도사로 서울 남대문교회 송창근 전도사의 방문을 받고, 나라와 교회를 생각하고 뜻을 품음. 웅기금융조합 사직하고 서울로 유학을 떠남

1920년 ~ 1923년

중동학교 고등과에 편입. 서울 YMCA 영어 전수과에서 영어 공부를 시작하고, 이상재ㆍ윤치호ㆍ신흥우 등의 강연을 듣고 신문화 흡수에 전력함. 톨스토이와 성 프란시스 전기 등을 탐독하고 청빈 사상에 큰 영향을 받음

1924년

승동교회에서 열린 장로교 연합 사경부흥회 때,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고 믿기로 결심하고 회심을 경험함. 믿은 지 3년 후 승동교회 김영구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음

1924년 ~ 1926년

함북 경흥에 귀향하여 용현소학교, 귀낙동소학교 신아산소학교에서 교사로서 어린 학생들을 가르침

1926년 ~ 1928년 

일본 아오야마 학원 신학부에서 고학하면서 자유로운 학풍에서 신학 공부. 1928년 아오야마 신학부 졸업. 기독교 사상과 신앙을 주축으로 한 교육 사업에 일생을 바칠 것을 설계함. 졸업반 때 귀향하여 두만강 유역 교회를 순방 강연함

1928년 9월 ~ 1932년 5월

미국에 유학함. 1928년 9월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수업하고, 1929년 9월 미국 웨스턴 신학교에 편입학. 같은 학교에서 1932년 5월 신학사(S.T.B), 1932년 5월 신학석사(S.T.M) 학위를 받음. 미국 경제 공황에 직면하여 귀국함. 미국 유학 시절 송창근, 한경직과 특별한 신앙 동지로서의 우의를 굳건히 함                                                   

1933년 4월 ~ 1936년 4월

귀국 후 평양에서 3년을 지냄. 1933년 4월 숭인상업학교 교유에 취임하고, 평양 산정현교회 집사직으로 봉사하다가 1933년 8월 평양노회에서 강도사(講道師) 인허를 받음. 1936년 4월 신사 참배 문제와 민족 교육 금지 문제로 숭인상업학교 교유직을 사임함. 이 무렵 순교자 열전 연구에 몰두함. 평양 3년 머무는 기간 동안 송창근, 한경직, 김재준 등 젊은 소장 학자들은 평양신학교 신학 연구지 『신학지남』에 기고자로 관계를 맺게 되고, 유형기 박사의 『단권 성경 주석』 번역자로서 필화 사건에 연루되어 세 사람 연서로 성명서를 냄

1936년 8월 ~ 1939년 9월

간도 용정 은진중학교에 봉직하면서 3년을 간도에서 청년 교육에 힘씀. 1936년 8월, 은진중학교 교유에 취임. 1937년 동만노회에서 목사 안수받음. 1937년 5월부터 1938년 2월까지 월간 『십자군』을 발간함

1939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평양신학교가 폐쇄됨

1939년 9월 ~ 1940년 2월

서울 승동교회 김대현 장로의 재정을 기반으로, 조선신학원 설립 기성회가 발족(김대현, 송창근, 김영주, 차재명 중심) 설립 사무 실무 책임자로 김재준 목사가 간도 은진중학을 사임하고 설립 사무를 전담하여 추진

1940년 3월

조선신학원이 경기도 도지사 인가로서 승동교회에서 개교. 설립자 겸 원장에 김대현 장로, 이사장에 함태영 목사, 교수로서 윤인구, 김재준 임명

1941년 ~ 1944년

일제 말기 조선신학원 끝까지 지킴. 일제에 의한 관제 『조선 혁신 교단』 시절(1942)과 조선신학원과 감신의 『합동 강의』 기간 동안에도 조선신학교 교장으로서(1943~46) 학교를 지킴

1945년

해방의 기쁨과 함께 8월에 「기독교 건국 이념」 집필 발표. 9월에 천리교 본부 건물을 미군정청으로부터 인수 불하받아 동자동 교사 시대 교수로 일함. 12월에 경동교회를 설립함

1946년 3월

송창근 박사가 제4대 조선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고, 김재준은 한경직과 함께 교수가 됨. 6월 장로교 남부 총회에 의해 총회 직영 신학교로 지정            

1950년 1월

『십자군』을 속간하여 1951년 8월까지 속간 30호 발간함

1950년 ~ 1951년

6ㆍ25 동란으로 같은 해 8월 송창근 학장 북으로 피랍. 1951년 3월 부산 피난 전시 대학 개강. 부산 항서교회당 및 남부민동 임시 천막 교사에서 수업.

1951년 4월

학교명을 한국신학대학으로 변경, 김재준 목사 학장 서리에 취임


1953년

장로교가 보수적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분열. 장로회 37회 대구 총회에서 김재준 목사직 파면 선언, 한국신학대학 총회 인준 취소, 한신 출신 교회 취임 거부, 이미 위임된 한신 출신 목사들의 노회 재심 등을 불법적으로 결의. 대구 37차 총회의 불법성에 저항하여, 같은 해 6월 서울 동자동 한국신학대학 강당에서 장로회 38회 호헌총회를 개최. 기독교장로회 탄생


1953년 ~ 1957년

서울 환도 후 동자동 교사에서 학장 서리 겸 교수로서 봉직


1958년 ~ 1959년

1957년 12월, 수유리 한국신학대학 새 캠퍼스로 입주. 김재준 목사 제6대 학장으로 취임. 캐나다 연합교회 초청으로 순회 답방(1958.8~1959.9)


1959년 5월

밴쿠버에 소재한 브리티시 콜럼비아 주립대학교 유니온 칼리지에서 명예신학박사 수여받음


1961년

5ㆍ16 군사정변으로 군사 정권에 의해 60세 정년제 강행으로 동년 9월 한국신학대학 학장직 및 교수직에서 강제 퇴임. 쌍문동 국민주택으로 이주함


1961년 8월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이 됨


1965년 4월

한국신학대학 명예학장으로 추대됨. 9월에 기독교장로회 총회 총회장으로 추대됨. 한신학원 제7대 이사장으로 피선(1966.9~1970.9)


1965년

한ㆍ일 굴욕 외교 반대 국민 운동을 한경직 목사와 주도하여 영락교회에서 대중 강연, 교회의 대사회 참여 운동 시작


1970년 9월

월간지 『제3일』 창간. 박형규, 현영학, 서광선, 이문영, 문익환, 문동환, 이우정 등이 동인으로 참여


1972년

국제엠네스티 한국위원장이 됨. 12월에 유신헌법이 발포됨


1973년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장으로 추대됨.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공동의장(김재준, 함석헌, 천관우, 지학순, 이병린)


1974년 3월

캐나다로 출국. 11월에 북미주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의장직 수임(2회 연임)


1974년 10월

캐나다에서 『제3일』 속간. 1981년 6월호까지 속간 60호 발간


1975년

북미주한국인권수호협의회 명예회장으로 추대됨


1983년 9월

귀국


1983년 ~ 1985년

전국 국토 순례. 『재야 원로 모임』에 참여하여 민주화 운동과 평화 통일 운동을 지속함


1987년 1월

고문으로 살해당한 고 박종철 군 국민추도회 발기인이 됨. 함석헌과 함께 「새해 머리에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유언으로 남김


1987년 1월 27일

서울 한양대학교 부속병원에서 87세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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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 목사의 자서전 <범용기> 1권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 직후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기 속에서 한 사상가이자 목회자,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아낸 저자의 발자취를 담은 기록이다. 본 서는 저자의 유년 시절부터 청소년기의 방황과 결혼, 서울과 일본 및 미국에서의 유학 생활, 그리고 귀국 후 평양과 간도에서의 교육 및 목회 활동을 거쳐 조선신학원(현 한신대학교)의 설립과 해방을 맞이하기까지의 과정을 연대기적으로 추적한다. 이를 통해 개인의 역사를 넘어 한국 기독교 형성과 신학적 갈등, 그리고 민족의 수난사를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저자의 삶은 함경북도 경원의 <창꼴집>이라는 대가족적이고 유교적인 환경에서 출발한다. 조부와 부모의 영향 아래 서당과 신식 학교를 거치며 자란 유년기의 경험은 향후 그의 인성과 사상적 기초를 형성하는 자양이 된다. 청소년기 회령과 웅기를 거쳐 서울로 진출한 저자는 1920년대 서울의 역동적인 풍경과 YMCA 등을 접하며 근대적 지성과 기독교 신앙을 본격적으로 수용하고 세례를 받는다. 이후 소학교 교사 생활을 거쳐 감행한 일본 동경 유학과 미국 프린스턴 및 웨스턴 신학교로의 유학은 그의 학문적 지평을 세계적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산학원에서의 고학 생활과 미국에서의 경제공황기 유학은 그에게 단순한 학문 탐구를 넘어 세계사적 현실을 몸소 체험하게 만들었다. 귀국 후 평양 숭인상업학교와 간도 은진중학교에서의 교직 생활은 신사참배 강요라는 일제의 종교적·민족적 압제 속에서 신앙의 정조를 지키며 강원룡, 안병무 등 후학을 양성하는 실천적 역사의 장이었다. 마침내 김대현 장로와의 만남을 통해 조선신학원을 발족하고 전개해 나가는 과정은 보수적 교권과의 긴장 속에서도 한국 고유의 주체적 신학을 정립하려는 투쟁의 기록이며, 이 여정은 1945년 해방의 감격과 혼란 속에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 자서전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은 역사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개인이 겪은 실존적 고뇌와 선택을 담담하면서도 정직한 필치로 서술했다는 점에 있다. 저자는 자신을 영웅화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범용(凡庸)한 사람의 기록'이라는 서명에 걸맞게 인간적인 한계와 고뇌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특히 일제강점기 말기의 신사참배 압박과 단권성경주석을 둘러싼 교단 내 신학적 갈등은 저자가 겪은 사상적 수난의 깊이를 보여준다. 그는 전통적인 근본주의 신학의 배타성에 맞서 역사적·비판적 성서 연구의 길을 열고자 했으며, 이는 한국 개신교 신학의 다양성과 성숙을 이끈 기념비적 사건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또한, 간도 은진중학교 시절 학생회 활동을 하던 강원룡이나 안병무 같은 인물들과의 교류는 그의 교육적 거목으로서의 면모를 확인시켜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서는 연대기적 나열과 단편적인 삽화 중심의 구성으로 인해, 특정한 신학적 쟁점이나 사상적 전환점에 대한 깊이 있는 이론적 성찰이 다소 파편화되어 나타난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각 장의 소제목들이 보여주듯 사건과 장소의 이동이 빈번하여, 독자가 그의 내면적 사상의 심화 과정을 거시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행간을 읽어내는 노력이 요구된다.

결론적으로 <범용기> 1권은 한 기독교 지도자의 사적 연대기를 넘어, 식민지 지식인이 어떻게 세계적 지성을 흡수하고 이를 국내의 척박한 현실 속에서 토착화·제도화했는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다. 종교와 교육, 민족운동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그가 보여준 실천적 삶은 오늘날 한국 교회와 사회가 직면한 근본주의적 도그마와 역사의식의 부재를 매섭게 성찰하도록 유도하는 지혜의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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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1992년 한신대학출판부에서 나온 『범용기 1―새 역사의 발자취』를 중심으로 정리한 것이다. 『범용기』는 김재준이 캐나다 체류기인 1974~1983년에 집필한 여러 권의 자서전이며, 1983년에는 1·2권을 합친 368쪽짜리 국내판도 출간되었다. 현재 장공기념사업회가 원문을 다시 정리하고 해설판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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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용기 1―새 역사의 발자취>
장공 김재준 지음

 요약·평론

  1. ‘범용한 사람’이 기록한 비범한 시대

『범용기』의 제목은 한자로 ‘凡庸記’, 곧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의 기록이라는 뜻이다. 한국기독교장로회의 형성과 한신대학교 설립에 중심적으로 참여하고, 한국 교회의 신학 논쟁과 민주화운동을 이끈 김재준의 생애를 생각하면 지나치게 겸손한 제목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제목에는 그의 독특한 자기이해가 담겨 있다. 그는 자신을 영웅이나 성인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대의 흐름 속에 던져진 한 평범한 인간이 어떻게 신앙을 배우고, 판단하고, 실패하고, 책임을 감당했는지를 기록하려 한다.

김재준은 글을 쓴다는 것은 쓴 사람이 자기 삶에 책임지는 일이며, 과거에 쓴 글은 언제든 자신을 고발한다고 말한다. 이 고백은 『범용기』 전체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이 책은 성공한 종교 지도자가 자신의 업적을 정리한 공적서가 아니다. 한 인간이 자신의 과거를 다시 바라보며 무엇이 진실이었고 무엇이 미숙했는가를 묻는 양심의 기록이다.

그렇지만 『범용기 1』은 개인적인 추억에만 머물지 않는다. 김재준의 삶이 일제강점기, 식민지 교육, 일본 유학, 미국 신학 수학, 귀국 후 한국 교회의 신학적 갈등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한 목사의 자서전인 동시에 20세기 전반 한국 개신교 지성사의 내부 기록이다.

  1. 함경북도의 유교적 가정

김재준은 1901년 함경북도 경흥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 세계는 기독교보다는 유교적 질서와 전통적 농촌생활에 가까웠다.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고 동양고전을 접한 경험은 이후 그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그는 기독교인이 된 뒤에도 유교와 동양문화 전체를 미신이나 이교로 배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통적 선비정신에서 정직, 절제, 책임감, 의리를 발견했다.

『범용기 1』에서 고향은 단순한 출생지가 아니다. 그것은 그의 언어와 정서, 인간관계와 도덕적 감각이 형성된 장소다. 김재준은 후일 서구 신학을 깊이 공부했지만 서구인이 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의 신학은 동양적 교양을 버리고 서양 교리를 수입한 결과가 아니라, 한국인의 역사 경험 속에서 기독교 복음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노력으로 발전했다.

이 점에서 그의 자서전은 한국 개신교의 일반적 회심 서사와 조금 다르다. 흔히 회심 이전의 전통문화는 어둠, 회심 이후의 기독교는 빛으로 단순하게 대비된다. 그러나 김재준은 이전의 삶 전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전통을 파괴하는 외래 신앙이 아니라 전통의 장점과 한계를 새롭게 성찰하게 하는 자유의 경험이었다.

  1. 회심과 인격적 자유

청년 김재준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과정은 『범용기 1』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의 회심은 강렬한 신비체험이나 기적보다 죄책감과 내적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경험에 가까웠다. 그는 기독교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신분이나 가문, 관습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독립된 인격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자유는 자기 욕망을 마음대로 실현하는 개인주의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유로워진 사람은 동시에 이웃과 역사에 책임을 져야 한다. 자유와 책임은 분리되지 않는다. 이 인격주의적 신앙은 훗날 그가 교권과 독재권력에 맞서게 되는 정신적 뿌리가 된다.

그는 성경과 교회의 권위를 중요하게 여겼지만 인간의 양심과 이성을 포기하는 복종을 신앙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교회가 어떤 결정을 내렸더라도 그것이 복음과 양심에 어긋난다면 질문해야 한다. 『범용기 1』은 이러한 태도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젊은 시절부터 형성된 것임을 보여준다.

  1. 일본 유학과 신학적 탐구

김재준은 신학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한국의 지식인에게 일본은 식민통치국이면서도 근대 학문과 서구사상을 접할 수 있는 통로였다. 그는 일본의 신학교에서 공부하며 한국 교회에서 접하기 어려웠던 현대 신학과 성서연구 방법을 배웠다.

일본 유학은 그에게 두 가지 긴장을 남겼다. 하나는 식민지 조선인으로서 일본 제국 안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정치적 긴장이며, 다른 하나는 전통적 신앙과 현대 학문 사이의 신학적 긴장이었다. 그는 이 두 긴장을 회피하지 않았다.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학문을 거부하거나, 현대인이 되기 위해 신앙을 버리는 양자택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를 증언하는 책으로 믿으면서도, 그것이 역사적 상황에서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성경은 경건하게 읽어야 할 뿐 아니라 문학적·역사적·비판적으로 연구해야 했다. 이러한 입장은 훗날 한국 장로교 내부에서 심각한 논쟁을 일으켰다.

그의 신학적 태도는 ‘의심을 통한 불신’이 아니라 ‘질문을 통한 성숙한 믿음’이었다. 그는 질문하지 않는 믿음이 강한 믿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외부 권위에 의존하여 질문을 금지하는 신앙은 현실의 도전을 견디지 못한다고 보았다.

  1. 미국 유학과 보수신학의 중심부

김재준은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신학교와 웨스턴신학교 등에서 수학했다. 이 시기는 미국 장로교 안에서도 근본주의와 현대주의가 격렬하게 충돌하던 때였다. 그는 보수 장로교 신학의 중심부에서 공부했지만, 성경의 문자적 무오성을 신앙의 절대 기준으로 삼는 입장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에게 미국 유학은 서구신학을 그대로 한국에 옮겨오는 과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 교회 안에도 역사와 문화에 따라 다양한 신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시간이었다. 그는 선교사들이 전해 준 장로교 신앙을 기독교의 유일한 형태로 여기지 않았다. 선교사 역시 특정 시대와 교단의 신학을 가진 인간이며, 그들의 해석도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깨달음은 한국 교회의 신학적 자립이라는 문제로 이어진다. 한국 교회는 서구 선교사의 교리를 반복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되고, 한국의 역사와 문화, 민족의 고통을 자신의 신학적 질문으로 삼아야 한다. 김재준이 후일 조선신학교 설립에 참여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1. 귀국과 한국 교회의 현실

귀국한 김재준이 마주한 한국 교회는 신앙적으로 열정적이었지만 신학적 자유와 학문적 깊이가 충분하지 않았다. 교회는 성경을 사랑했지만, 성경에 대한 역사적 질문을 불신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했다. 선교사들의 권위도 여전히 컸다.

김재준은 이런 상황에서 신학 교육과 저술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정답을 암기시키기보다 스스로 질문하도록 가르치려 했다. 신학교는 교단에 순종하는 목사를 생산하는 곳이 아니라 복음과 시대를 함께 읽는 자유로운 인격을 기르는 곳이어야 했다.

그는 일부 선교사와 교회 지도자들이 성경비평과 현대신학을 위험한 자유주의로 몰아붙이는 태도를 비판했다. 그러나 『범용기』에서 그는 이들을 단순히 악인으로 그리지 않는다. 보수적인 선교사들과 목회자들도 나름대로 복음과 교회를 지키려 했음을 인정한다. 문제는 그들이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을 기독교 자체와 동일시하고 다른 해석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1930년대 ‘아빙돈 단권 성경주석’ 사건은 이러한 충돌을 상징한다. 현대 성서학의 성과를 수용한 이 주석서를 둘러싸고 김재준을 비롯한 신학자들이 자유주의자로 공격받았다. 그는 송창근·한경직 등과 함께 해명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훗날 김재준을 둘러싸고 벌어진 더 큰 성서관 논쟁의 전조였다. 김재준은 당시 경험을 통해 한국 교회에서 신학 논쟁이 학문적 토론보다 교권과 정통성 판정의 문제로 변질될 위험을 보았다.

  1. 조선신학교와 신학적 자립

『범용기 1』의 후반부에서 중요한 사건은 조선신학교의 설립이다. 일제 말기 선교사들이 떠나고 기존 신학교육이 위기에 처하자 한국인 스스로 교역자를 양성해야 할 필요가 커졌다. 김재준은 조선신학교 설립과 교육에 참여하며 한국인에 의한 신학 교육의 길을 열었다.

조선신학교는 단순히 평양신학교를 대신하는 임시기관이 아니었다. 김재준에게 그것은 한국 교회가 서구 선교사의 보호와 통제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신학을 시작하는 장소였다. 그는 현대 성서학을 가르치고, 학생들에게 학문과 신앙을 함께 추구하도록 했다.

그러나 일제 말기의 상황은 복잡했다. 신학교육을 계속하려면 식민지 당국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고, 신사참배와 황민화 정책의 압박도 피할 수 없었다. 『범용기』의 가치는 이런 시대를 단순한 영웅과 배신자의 대립으로 그리지 않는 데 있다. 그는 당시 사람들이 제한된 선택지 안에서 어떤 타협과 저항을 했는지를 회고한다.

다만 김재준 자신의 일제 말기 행적과 판단에 대해서는 좀 더 철저한 자기비판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가능하다. 자서전은 자신의 동기와 상황을 설명하는 데는 강하지만, 그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였는지까지 충분히 보여주지는 못한다.

  1. 문체와 자서전의 특징

『범용기 1』의 문체는 화려하지 않다. 사건을 과장하거나 자신을 중심인물로 내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과의 만남, 작은 일화, 여행, 학업, 교회생활을 담담하게 기록한다. 제목 그대로 ‘범용한’ 생활의 기록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담담함 속에는 강한 윤리적 긴장이 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예정된 영웅담으로 만들지 않는다. 선택의 순간마다 자신이 무엇을 보고 어떻게 판단했는지를 설명한다. 그에게 신앙은 초자연적 섭리를 사후에 발견하는 일이기보다, 불확실한 현실에서 양심을 따라 결단하는 행위다.

또한 이 책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목회자, 선교사, 신학자, 교인, 가족, 학생들과의 관계를 통해 한국 교회사 내부의 연결망이 드러난다. 유명 인물의 공식 전기에서는 보이지 않는 작은 만남과 감정, 오해와 우정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

  1. 책의 장점

첫째, 『범용기 1』은 김재준 신학의 사상적 형성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성서비평 수용, 신학의 자유, 한국적 신학의 필요성은 외국 이론을 추상적으로 받아들인 결과가 아니었다. 유교적 가정, 회심, 일본과 미국 유학, 식민지 현실, 선교사와의 갈등이 축적되어 형성된 것이다.

둘째, 한국 기독교사를 내부자의 목소리로 들려준다. 공식 교회사에서는 교단의 창립과 논쟁의 결과가 중심이 되지만, 『범용기』에서는 그 과정에 참여한 사람들이 무엇을 걱정하고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가 보인다.

셋째, 그의 자기 서술에는 비교적 절제된 겸손이 있다. 그는 자신을 예언자나 민주투사로 미리 규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는 후대의 추모자들이 김재준을 지나치게 이상화하는 것과 대조된다.

  1. 한계와 평론

그러나 자서전은 어디까지나 자기 기억의 산물이다. 김재준은 자신이 경험한 사건을 자신의 시각에서 선택하고 배열한다. 성서관 논쟁이나 교단 갈등에서 자신의 입장은 합리적이고 개방적인 것으로, 반대편은 폐쇄적이고 교권적인 것으로 보이기 쉽다. 실제로 보수 장로교인들이 느낀 신앙적 위기와 식민지·공산주의 경험에서 생긴 불안도 더 깊이 고려할 필요가 있다.

또한 ‘범용’이라는 자기비하는 진실한 겸손인 동시에 독자를 설득하는 수사일 수 있다. 자신을 평범한 사람으로 낮춤으로써 오히려 그의 도덕적 권위가 강화된다. 그는 공적 영향력이 매우 컸던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내린 결정의 정치적·제도적 결과도 개인의 선의와 별도로 평가해야 한다.

가족생활에 대한 서술도 공적 활동에 비해 제한적이다. 학업과 교회, 신학논쟁에 집중하면서 아내와 가족이 감당한 희생은 상대적으로 배경으로 물러난다. 이는 당시 남성 지식인의 자서전에서 흔히 나타나는 한계다.

무엇보다 『범용기 1』을 김재준의 후일 민주화운동 경력만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1권에서 더 중요한 것은 정치투사 김재준이 아니라 자유로운 인격과 주체적 신학을 찾아가는 청년 김재준이다. 그의 민주화운동은 갑작스러운 정치적 전향이 아니라, 젊은 시절부터 형성된 양심의 자유와 역사적 책임의식이 사회적으로 확장된 결과였다.

  1. 종합 평가

『범용기 1―새 역사의 발자취』는 한 위대한 인물의 성공담이라기보다 한 신앙인이 자유로운 인간으로 형성되어 가는 과정의 기록이다. 김재준은 유교적 전통, 기독교 회심, 일본과 미국의 신학,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통과하면서 어느 하나에 맹목적으로 복종하지 않는 태도를 배웠다.

그가 남긴 핵심 유산은 특정한 신학 이론만이 아니다. 신앙인은 성경과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스스로 생각해야 하며, 교회의 명령보다 양심의 책임을 더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정신이다. 또한 한국 교회는 외국 신학을 반복하는 데 머물지 않고 자기 역사와 현실을 신학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요구다.

이 책의 담담한 제목과 문체 뒤에는 매우 급진적인 인간관이 있다. 인간은 어떤 교권이나 국가권력에도 완전히 예속될 수 없는 자유로운 인격이며, 그 자유는 역사에 대한 책임으로 나타나야 한다. 『범용기 1』은 바로 그 자유와 책임이 한 인간 안에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보여주는 한국 기독교 지성사의 중요한 자서전이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범용기 1』은 자신을 평범한 사람이라 부른 김재준이 전통과 근대, 신앙과 학문, 교회와 역사 사이를 통과하며 자유로운 양심의 신학자로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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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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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훈
당교회사랑제일교회
노회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대신복원)[1]
개인정보
출생1956년 5월 8일(70세)
대한민국 경상북도 의성군
교파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복원)
재직자유통일당 상임고문
전직초대 자유통일당 대표
학력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편목과정 수료(석사 과정 아님)
서명{{{다른서명}}}
관련싸이트자유통일당 홈페이지
유튜브 국민혁명당
유튜브 너알아 Tv
tv자유일보

전광훈(全光焄,[2] 1956년 5월 8일~)은 '이단성 있음' 판정을 받은[3] 개신교 목사이자 극우 유튜버, 정치인이다. 자신이 만든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복원)[4]의 담임목사를 지냈으며, 고문을 맡고 있다. 극우 성향의 유튜브 채널, '전광훈TV Pastor Jun TV'을 운영하는 유튜버이자 자유통일당 초대 당대표이기도 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뉴라이트 성향을 보이고 있다. 또한 광화문에서 개최한 보수단체 집회에서 박정희유신헌법에서 처음으로 창작된 자유 뒤에 민주주의가 붙는 자유민주를 거론하면서 "이승만대한민국을 건국할 때 4대 정신으로 건국했으며 그것은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 한미동맹, 기독교입국론이다. 그리고 박정희의 정신은 첫째, 목표를 세우라. 둘째, 사람을 찾으라. 셋째, 기한을 정하라. 넷째, 무모한 도전을 하라."고 말하였으며 공개적으로 "하나님, 꼼짝 마. 하나님!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는 발언을 하였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에 대해 차기 대통령감이라고 밝힌 전광훈은 기독자유당 후원회장으로 총선에서 비례대표 투표를 호소하고 있으며 범국민투쟁본부 의장으로 문재인 퇴진 집회에 앞장섰었다. 2020년 4월 15일 총선을 앞두고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가 창당한 자유대연합이라는 신당의 후원자이기도 하다.[5]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집행유예 선고를 받은 전광훈은 2019년 8월 15일 광화문 집회에서 자유한국당 지지를 촉구한 사전선거운동 등으로 구속되어 보석 상태에서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6] 그러나 코로나19 자가격리 통보를 받은 채 시위를 진행하다가 논란이 되었다. 결국 보석 조건 위반으로 인해 재판부 직권으로 보석이 취소되고 보석금 3,000만 원이 몰수되었다.

어린 시절

경상북도 의성군 출신으로, 쌍호국민학교광운전자공업고등학교대한신학교를 중퇴하고[7] 당산동에 위치한 교육부 인가를 받지 못한 대한신학교 야간 학부를 졸업해 목사 자격증을 취득했다.[8]

활동

1998년 청교도영성훈련원을 설립해 원장을 맡았다.[9], 한국예수문화원 상임이사,[10] 한국통일선교대학교 이사장, 청교도영성훈련원 원장,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회장을 역임했다. 제25대 한기총 대표회장에 당선되면서 "동성애, 이슬람, 차별금지법에 반대하고 종교인 과세 문제에 대해 원점에서 다시 검토해야 한다"며 기독교 입국론을 주장했다.[11]

2005년 대구의 한 집회에서 "여신도가 나를 위해 속옷을 내리면 내 신자고 그렇지 않으면 내 교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12] 2007년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 당시에는 "이명박 장로를 찍지 않으면 생명책에서 지우겠다"는 등 발언을 했다.[13]

2017년에 실시된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 기간 도중에 자신을 지지하던 후보를 위해 "사전 선거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구속된데 이어 앞서 2018년 초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을 뽑는 선거 과정에서 생긴 잡음과 갈등 때문에 내부에서 자신을 견제하던 최성규엄기호 등을 상대로 민·형사상의 소송이 진행 중이었고 큰 수술을 받아 간병인 도움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하였던 전광훈은 〈하나님과 트럼프〉를 출판하는 일을 맡아 추천사에서 "동성애, 이슬람,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 위협" 등의 문제가 있는 시점에 "하나님께서 도널드 트럼프미국 지도자로 세워 위에 열거된 위험 요소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갈 것"이라고 썼다.[14]

2019년 3월 20일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를 만나 "자유한국당이 2020년에 실시될 대한민국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200석을 획득하면 이 나라를 바로 세우고, 제2의 건국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다. 반대로 200석 획득에 실패하면 국가가 해체될 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빠지게 된다."[15]고 말한 이후에 "문재인은 북한의 간첩"이라며 대통령 하야 촉구 및 시국 선언을 발표한 직후 청와대 앞에서 기도회를 겸한 단식 농성에 돌입하였으나 각계에서 비판받으면서 한기총 임원회에서 사퇴를 요구받았다.[16] 계속된 막말로 논란이 있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2019년 6월 10일 전광훈에 대해 거짓 선지자로 규정하면서 행동을 반기독교적 행위라고 지적했으나[17] 문재인 퇴진 집회 등에서 거친 발언을 계속하며 보수 우파 진영의 구원자라는 평가를 받은 전광훈은[14] 2019년 12월 26일 청와대 앞 불법 집회를 주도한 혐의와 한기총 특별조사위원들이 고발한 횡령 혐의 등으로 구속영장이 청구되었으나 2020년 1월 2일 기각되었다.[18] 북한의 대남 매체인 우리민족끼리에서는 전광훈 목사에 대한 특집기사를 보도하면서 "기독교 국가를 꿈꾸는 전광훈과 같은 목사들을 비판하는" 민중의 소리를 인용하여 시리즈로 보도한 바 있다.[19] 개신교 시민단체평화나무(이사장 김용민)는 2020년 1월 8일 "전광훈이 소속돼 있던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에서 목회자가 되려면 1980년대 4년제 대학 학력인정 학교인 각종학교 '대한신학교'를 나와야 했지만, 그가 대한신학교에서 공부한 흔적이 없다"라고 주장하면서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전광훈의 목사안수증이 진본인지 의심된다"며 경찰에 고발했으나[20] 다음 날인 10일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제23대 대표회장에 전광훈이 단독 입후보했다. 서울혜화경찰서는 전광훈 측의 계좌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2019년 초에 각 교단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는다"거나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기 위해 입신(入神)과 방언(方言) 등을 해야 한다"고 강조해 논란이 되어 2008년부터 이단으로 분류되었던 목사 변 모 씨에게 5억 원을 받은 정황이 포착돼 대가성 여부에 대해 수사중이다. 당시 한기총 윤리위원회와 실사위원회·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가 내부 반발을 묵살하고 1주일 만에 "이단성이 없다"고 결론 내리면서 교계에 논란이 일었으나 3개월 후 광화문 집회에서 해당 목사에 대해 "이단이 아닌 참단(교회)이었다"며 "앞으로 내가 할 일의 90%를 대신할 것"이라고 말했다.[21] 한편, 개그맨 서세원을 목사의 길로 인도했으며[22] 이 탓인지 서세원의 네 번째 영화 연출작이 될 뻔한 《건국대통령 이승만》 영화 제작 추진위원회장이 되었으나[23] 서세원이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감독직에서 물러나면서[24] 영화 제작이 무산되었다.

2015년 9월 예장 대신(3000교회) 총회장이었던 전광훈 목사는 예장 백석총회(4000교회)와 통합을 선언한다.[25] 그러나 통합 반대파들에게 소송을 당하여 결국 2017년 6월 1심에서 무효처리가 되고 2018년 7월 3일 항소심에서도 무효처리가 확정이 된다. 예장 백석과 합류하였던 대신 측 600교회는 예장 대신(수호) 측 과 합류하여 예장 대신이라고 하였고, 2019년 9월 예장 백석과 합류에 찬성하였던 대신 측 교회들과 백석 측이 합친 500여교회가 모여 예장 백석 대신을 창설하였고, 그 후 2019년 10월 19일 전광훈 목사는 예장대신(복원) 교단을 창설한다.[26]

2019년 8월 30일, 대한예수교장로회 백석대신 총회는 서울동노회를 탈퇴신고를 하지 않고 있었던 전광훈 목사를 교단 헌법 권징 제 1장 제 3조 1~11항, 책벌 6조 2항에 의거하여 본 교단에서 면직 및 제명하고 말았다.[27]거기에 전광훈 목사는 이미 교단 통합이 무효가 되었는데 망신주기의 일환이라며 반발하였다.[28] 그 후 2020년 4월 27일 백석대신 총회(장종현 총회장)는 서울 서초구 총회회관에서 실행위원회를 개최하고 지난 41회기 징계자와 재판에 불복해 탈퇴한 목회자 모두에게 사면 및 복권 결정을 내려 전광훈 목사는 백석대신 총회 측에서 복권되었다.[29]

2017년 19대 대선 당시 장성민 국민대통합당 후보를 지지했으나 이후 홍준표로 지지 후보를 바꾸었다. 장성민을 지지하는 내용의 단체 메시지를 전달했다가 공직선거법과 정치자금법을 위반한 혐의로 2018년 5월 5일 구속되었으며,[30] 공직선거법에 대해 유죄로 확정받아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31]

2020년

2020년 코로나19 범유행 당시 서울특별시가 집회를 금지했지만 광화문 일대에서 태극기 집회를 열었다.[32] 집회에서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를 호소한 것에 대해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구속되었으나[33] 4월 20일 법원의 보석허가로 풀려났다.[34] 이후 사랑제일교회에서 확진자가 발생했으며,[35] 광복절인 8월 15일 광화문에서 여러 보수단체들과 함께 집회를 열었으며 17일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다.[36] 위법한 집회에 참가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어겼다는 이유로 보석이 취소되었다.[37] 2021년 8월 6일 서울중앙지방검찰청으로부터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과 감염병예방법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며,[38] 서울중앙지방법원은 2023년 2월 15일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 벌금 450만원을 선고했다.[39]

저서

  • 《이승만의 분노》 2016.03.17. 퓨리탄
  • 《전광훈 목사의 옥중서신》 2020.06.10. 하임

같이 보기

각주

  1. 전광훈 목사를 지지하는 교단으로, 그와 관련된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2. 이동복 (2020년 2월 1일). 자유통일당의 創黨(창당)과 고교연합의 입장에 관한 생각. 조갑제닷컴. 2020년 8월 21일에 확인함.
  3. 교단결의. 현대종교. 2025년 5월 27일에 확인함.
  4. 전광훈 목사를 지지하는 교단이다.
  5. 이용필 (2020년 1월 21일). 기독자유당 전당대회, 전광훈 목사 "비례대표 1번 김승규, 2번 장경동…2명만 들어가도 기적 일어나". 뉴스앤조이. 2020년 1월 29일에 확인함.
  6. 서울중앙지방법원2020고합240
  7. 이동준 (2020년 1월 5일). 학력위조 의혹 전광훈 목사 측 “학교가 증명서 잘못 발급”. 세계일보. 2025년 2월 22일에 확인함.
  8. 박주연 (2025년 2월 19일). “전광훈·손현보 ‘파워게임’…극우의 ‘주목경쟁’ 자극적 공격성 표출”[박주연의 색다른 인터뷰]. 경향신문. 2025년 2월 22일에 확인함.
  9. 노희경 (2004년 5월 18일). 한국교회 제2부흥위한 대규모 집회 준비 전광훈 목사. 국민일보. 2025년 2월 22일에 확인함.
  10. 김무정 (1996년 7월 8일). “세속문화 대응 신앙생활화”/한국예수문화원 창립. 국민일보. 2025년 2월 22일에 확인함.
  11. 전광훈 목사, 한기총 대표회장 당선 "기독교 입국론으로 나라 재설계"
  12. 박수진 (2011년 9월 27일). 전광훈 목사가 밝히는 ‘빤스 발언’의 진실. 한겨레. 2025년 2월 21일에 확인함.
  13. 고석표 (2011년 9월 1일). 기독당 추진 전광훈 목사 발언 물의. 노컷뉴스. 2025년 2월 21일에 확인함.
  14.  서명삼 (2020년 1월 7일). 전광훈은 어떻게 보수 우파의 구원투수가 되었나. 뉴스앤조이. 2020년 3월 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0년 1월 17일에 확인함.
  15. 권종술 (2019년 4월 10일). [극우개신교를 파헤치다③] 극우보수개신교 상징 한기총 탄생의 비밀. 민중의소리. 2020년 1월 1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0년 1월 10일에 확인함.
  16. 임경래 (2019년 5월 17일). 한기총 임원회에서 ‘전광훈 대표회장 사퇴 촉구’. 컵뉴스. 2020년 1월 1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0년 1월 10일에 확인함.
  17. 이대희 (2019년 6월 10일). NCCK "거짓 선지자 전광훈, '남남갈등'의 주범". 프레시안. 2020년 1월 1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0년 1월 10일에 확인함.
  18. 김완 (2019년 12월 26일). ‘폭력 집회 주도’ 전광훈 목사 구속영장 신청. 2019년 12월 31일에 확인함.
  19. [전광훈을 비판한다④] 전광훈은 사라질 수 있을까?. 2019년 12월 29일. 2020년 1월 2일에 확인함.
  20. 연합뉴스 (2020년 1월 8일). 개신교 시민단체 "전광훈 추가고발…목사안수증 진본여부 의심". 연합뉴스. 2020년 1월 1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0년 1월 18일에 확인함.
  21. 박하얀; 윤준호 (2020년 1월 21일). [단독] 전광훈 측 계좌에 '수억 입금'…'이단 해제' 대가성 수사. 노컷뉴스. 2020년 1월 2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0년 1월 25일에 확인함.
  22. 하성태 (2014년 7월 29일). '건국대통령 이승만' 천만 영화 만들기, 무섭다. 오마이뉴스. 2021년 11월 29일에 확인함.
  23. 하성태 (2014년 7월 29일). '건국대통령 이승만' 천만 영화 만들기, 무섭다. 오마이뉴스. 2021년 11월 29일에 확인함.
  24. 하성태 (2014년 7월 29일). '건국대통령 이승만' 천만 영화 만들기, 무섭다. 오마이뉴스. 2021년 11월 29일에 확인함.
  25. 뉴스, CTS. 예장 백석‧대신 ‘통합’ – 대한예수교장로회 백석-대신 통합총회. 2021년 12월 2일에 확인함.
  26. 백석·대신 통합 4년 만에 4개 교단 분열. 2019년 9월 24일. 2021년 12월 2일에 확인함.
  27. 크리스천투데이 (2019년 9월 5일). 예장 백석 “전광훈 목사 제명·면직, 문제 없었다” 반박. 2020년 2월 15일에 확인함.
  28. 크리스천투데이 (2019년 9월 3일). 전광훈 목사 “백석대신 제명 공고, 본인에 대한 명예훼손”. 2021년 12월 2일에 확인함.
  29. 국제. 예장백석(장종현 목사), 교단 분쟁관련 징계 인사들 모두 사면 복권. 2021년 12월 2일에 확인함.
  30. 박성석; 이승규 (2018년 5월 5일). 전광훈 목사, 선거법 위반 혐의로 법정 구속. 노컷뉴스. 2025년 2월 21일에 확인함.
  31. 유설희 (2019년 10월 6일). 광화문 집회서 헌금함 돌린 전광훈 한기총 회장, 정치자금법 위반 무죄 확정. 경향신문. 2025년 2월 21일에 확인함.
  32. 김민제 (2020년 2월 22일). 이 와중에 밀어붙인 태극기집회 “코로나19 야외에선 안전” 궤변. 한겨레. 2025년 2월 21일에 확인함.
  33. 박소희 (2020년 2월 25일). 전광훈 목사 구속…'공직선거법 위반'. MBC NEWS. 2025년 2월 21일에 확인함.
  34. 허진무 (2020년 4월 20일). ‘공직선거법 위반’ 한기총 전광훈 목사 보석 석방. 경향신문. 2025년 2월 2일에 확인함.
  35. 옥기원 (2020년 8월 14일).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이틀간 13명 확진… 시설폐쇄·주말 집회 금지 통보. 한겨레. 2025년 2월 21일에 확인함.
  36. 서혜미 (2020년 8월 17일). ‘자가격리 대상’이라던 전광훈 목사, 결국 ‘확진’ 판정 나와. 한겨레. 2025년 2월 21일에 확인함.
  37. 조윤영 (2020년 9월 7일). 법원, 전광훈 보석 취소…140일 만에 재수감. 한겨레. 2025년 2월 21일에 확인함.
  38. 윤수한 (2021년 8월 9일). '작년 광복절 집회 주도' 전광훈, 집시법·감염병예방법 위반 기소. MBC NEWS. 2025년 2월 21일에 확인함.
  39. 정혜민 (2023년 2월 15일). ‘방역 위반 광복절 집회’ 전광훈, 1심 징역형 집행유예. 한겨레. 2025년 2월 21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