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26

加藤陽子「日清戦争研究の現在」(2013年度学術俯瞰講義 この国のかたち−日本の自己イメージ 第7回) - YouTube

加藤陽子「日清戦争研究の現在」(2013年度学術俯瞰講義 この国のかたち−日本の自己イメージ 第7回) - YouTube


加藤陽子「日清戦争研究の現在」(2013年度学術俯瞰講義 この国のかたち−日本の自己イメージ 第7回)
OCW UTokyo
29,264 views  Apr 24, 2020  東京大学駒場キャンパス
UTokyo OpenCourseWare( https://ocw.u-tokyo.ac.jp/ )で公開中の一部のコンテンツをこちらのYouTubeチャンネルでもご覧いただけ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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コース名:この国のかたち−日本の自己イメージ
開講年度:2013年(学術俯瞰講義)
タイトル:日清戦争研究の現在
講師名:加藤陽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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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대학 카토 요코(加藤陽子) 교수의 학술강연 <청일전쟁 연구의 현재(日清戦争研究の現在)> (2013년 도쿄대 학술부감강의)에 대한 요약 및 평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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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토_요코_청일전쟁_연구의_현재_요약_및_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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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토 요코 「청일전쟁 연구의 현재」 강연 요약 및 평론 >

1. 서론: 근대 일본의 전쟁 기억과 청일전쟁 재해석

도쿄대학 문학부 카토 요코(加藤陽子) 교수의 2013년 도쿄대 학술부감강의 <이 나라의 형상 - 일본의 자아 이미지> 제7회 강연 <청일전쟁 연구의 현재>는 근대 일본이 치른 전쟁들의 서사와 기억이 일본의 국가적 정체성 형성 및 대외 인식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다각도로 조명한다. 강연은 전쟁 기억의 재구성 방식, 학도병의 지성사적 고뇌, 그리고 청일전쟁 개전 과정을 둘러싼 정치·외교적 실상을 사료에 근거하여 입체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2. 강연 핵심 내용 요약

가. 전쟁의 정의와 기억·증언의 구조

카토 교수는 전쟁 기억의 재현 및 증언 방식에 대한 민족학·역사학적 연구(세키자와 마유미 등의 연구)를 제시한다. 프랑스 오라두르 마을 학살 사건의 기억 방식과 일본 히로시마 원폭 피해 기억 방식을 비교·분석한다. 프랑스는 사실 증언과 사료에 근거해 객관적 사실만을 냉정하게 기록·전달하는 반면, 일본의 히로시마 원폭 기억(추모비 문구 "과오는 되풀이하지 않겠습니다")은 전쟁과 비극을 인위적 폭력이 아닌 마치 '태풍'이나 '진도'와 같은 불가항력적 '자연현상(비극)'처럼 받아들이는 경향이 존재함을 지적한다. 더불어 패전 직후 전사자의 유골이나 정확한 전사 통지를 유족에게 전달하지 못했던 일본 국가의 체제적 한계와, 유족들이 느낀 상실감이 '자연현상적 침묵'으로 수용되는 과정의 구조적 원인을 분석한다.

나. 학도병의 눈으로 본 전쟁과 역사적 자의식

1943년 학도출진 정지로 전장에 투입된 고등교육 엘리트 학도병들(사사키 하치로, 마츠나가 시게오)의 손기·문헌 분석을 통해 그들의 내면 고뇌를 재조명한다. 사사키 하치로는 군부와 정부가 내건 '귀축미영'이나 '10억 아시아의 해방'이라는 구호를 단순한 민중 선동용 공념불로 간주하면서, 국가적 진영 논리를 넘어선 인간적 이성과 가치를 고민했다. 후대의 편집 과정에서 이들의 글이 국가주의적 혹은 반군부적 프레임에 맞춰 일부 윤색·개작된 실상을 검증한다. 또한 마츠나가 시게오는 나장여난과 백촌강(백강구) 전투 등 고대 일본의 패전 역사를 모티브로 소설을 쓰며, 당시 일본이 추진하던 대륙 침략의 무모함과 종말을 예견하는 지적 자의식을 보여주었다.

다. 청일전쟁 개전의 실상: 정형화된 역사관에 대한 반론

기존 통설이나 교과서적 설명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봉기 이후 천진조약에 의거해 청일 양국이 파병하고 자연스럽게 전쟁으로 돌입했다고 기술하지만, 카토 교수는 사료 실증을 통해 내부 정치가 침략 외교를 추동한 복잡성을 밝혀낸다. 당시 무츠 무네미츠 외무대신의 <건건록(蹇蹇錄)>은 개전 이후 삼국간섭 등을 경험한 뒤 후일 다듬어진 회고적 성격이 강하며, 개전 초기 일본 정부(이토 히로부미 내각) 내부에는 외교적 타협론과 강경론, 그리고 국내 의회 해산이라는 심각한 내정 위기가 얽혀 있었다. 일본은 영국과의 조약 개정 협상 등 국제 정세를 고려하면서도, 내부의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고 한반도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 궁궐(경복궁)을 기습 점령하는 쿠데타적 군사 행동을 감행하고 청일전쟁을 촉발시켰음을 입증한다.

3. 강연 평론 및 학술적 시사점

가. 결정론적 역사관 탈피와 사료 비판의 엄밀성

카토 교수의 분석은 청일전쟁이 사전에 일관되고 완벽하게 계획된 자국 주도의 정해진 수순이었다는 단선적 획일론을 경계한다. 무츠 무네미츠의 <건건록>에 대한 엄밀한 사료 비판을 통해 1차 사료가 작성된 시점과 맥락을 구분하고, 일본 조정·군부·외교 라인 간의 갈등과 불확실성을 복원해 냈다. 이는 사료의 텍스트성에 가려진 외교사적 실상을 재구성하는 뛰어난 사료 비판의 모범을 보여준다.

나. 근대 일본의 자아 이미지와 대외 인식의 원형 규명

청일전쟁 당시 일본이 조선 궁궐을 기습 점령하고도 '청국을 동양의 문명화 과정에서 배제'하기 위해 청국만을 '비문명국'으로 명시하여 선전포고를 작성한 지점은, 근대 일본이 형성한 탈아입구(脫亞入歐)적 자아 이미지의 왜곡된 단면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자신들의 침략적 도발과 폭력성을 '문명 전달'의 명분으로 포장하던 구조가 이후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연속되었음을 지적한다.

다. 전쟁 기억의 탈신화화와 현대적 경각심

학도병들의 사유나 원폭 피해의 기억 방식을 추적하며 역사적 사건을 가공된 영웅주의나 일방적 피해자 의식으로 단순화하는 것을 경계한다. 전쟁을 마치 자연재해처럼 관념화함으로써 책임 소재와 폭력의 본질을 회피해 온 일본 사회의 심리적 기제를 짚어내고, 근대 일본의 국가 형태(이 나라의 형상)를 객관적으로 직시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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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요코 「청일전쟁 연구의 현재」 1,000단어 요약·평론>

가토 요코(加藤陽子)의 「청일전쟁 연구의 현재」는 청일전쟁을 단순히 1894~1895년에 일본과 청나라가 조선을 둘러싸고 벌인 군사충돌로 설명하지 않는다. 이 강의의 핵심은 청일전쟁이 일본이라는 근대국가의 자기 이미지, 헌법과 의회, 국제법, 언론, 군사동원, 국민의식이 한꺼번에 시험된 최초의 대외전쟁이었다는 데 있다. 또한 전쟁이 발생한 직접 원인보다 일본 사회가 전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정당화했으며, 그 기억을 어떻게 재구성했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핀다.

강의는 먼저 전쟁을 바라보는 방법론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역사가는 단순히 “왜 전쟁이 일어났는가”라고 묻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전쟁 당시 사람들에게 어떤 선택지가 보였는가, 어떤 정보가 공개되거나 감춰졌는가, 정부와 군대는 국민에게 무엇을 설명했는가, 국민은 왜 전쟁을 지지했는가를 함께 물어야 한다. 가토는 전쟁의 원인을 승전국이 사후적으로 만든 서사에 맡기지 않고, 당시의 문서, 의회 기록, 신문, 개인 일기, 외교자료를 통해 재구성하려 한다.

  1. 청일전쟁과 근대 일본의 자기 이미지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자신을 서구 열강과 동등한 “문명국”으로 만들려 했다.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설치하며, 근대적 군대와 관료제를 정비했다. 그러나 제도만 갖추었다고 해서 서구가 일본을 동등한 국가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불평등조약이 유지되었고, 일본은 여전히 서구 국제질서의 주변부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일전쟁은 일본이 스스로를 문명국으로 증명할 기회가 되었다. 일본 정부와 언론은 전쟁을 문명과 야만의 싸움처럼 묘사했다. 일본은 근대적 군대, 국제법, 적십자 활동, 포로 대우를 강조했고, 청나라는 낡고 무질서한 국가로 표현했다.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은 아시아의 후진국이 아니라 서구와 나란히 설 수 있는 근대국가”라는 자기 이미지가 강화되었다.

그러나 가토는 이 자기 이미지가 현실과 일치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일본은 국제법을 존중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조선 왕궁을 점령하고 조선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또한 전쟁 과정에서 여순 학살과 같은 대규모 폭력이 발생했다. 즉 일본의 문명국 담론은 침략과 폭력을 감추는 정치적 언어이기도 했다.

  1. 전쟁을 가능하게 한 헌법과 의회

가토가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청일전쟁이 메이지헌법 시행 이후 처음 벌어진 대외전쟁이었다는 점이다. 일본에서는 전쟁이 천황과 군부만의 결정이었는지, 의회와 국민도 책임을 나누어야 하는지를 살펴야 한다.

메이지헌법에서 군 통수권은 천황에게 속했고, 군대는 의회의 통제를 제한적으로만 받았다. 그러나 실제 전쟁 수행에는 막대한 예산과 군수물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의회의 협력이 필수적이었다. 전쟁 전까지 정부와 대립하던 정당들도 전쟁이 시작되자 군사예산을 승인하고 정부를 지지했다. 국내의 정쟁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고 “국가적 단결”이 강조되었다.

이것은 전쟁 책임을 군부와 정부에만 돌릴 수 없다는 뜻이다. 정당과 언론, 지식인, 국민 역시 전쟁에 동의하고 열광했다. 전쟁은 위에서 일방적으로 강요된 사건이 아니라, 여러 사회세력이 참여하여 만든 국민적 사업이었다.

이 점은 일본 근대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훗날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설명할 때 흔히 군부가 국가를 장악하고 국민을 속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청일전쟁 연구는 훨씬 이른 시기부터 의회정치와 대중사회가 전쟁 동원에 협력했음을 보여준다.

  1. 국민은 어떻게 전쟁을 알았는가

강의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언론과 정보의 문제다. 청일전쟁은 일본 국민이 신문과 그림, 전쟁통신을 통해 전황을 거의 실시간으로 접한 최초의 전쟁이었다. 신문은 전투의 승리를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전쟁화를 통해 일본군의 용맹함과 청군의 패배를 시각화했다.

그러나 국민에게 제공된 정보는 선택되고 편집된 것이었다. 패배와 군 내부의 혼란, 전염병과 보급 실패, 민간인 피해는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 반대로 승리와 영웅담은 반복적으로 강조되었다. 전쟁은 언론이 만들어낸 이야기이기도 했다.

특히 일본군의 실제 전사자보다 질병으로 죽은 병사가 훨씬 많았다는 점은 근대전쟁의 이면을 보여준다. 강의는 일본군이 전장에서 승리했지만 위생과 보급, 의료체계에서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승리의 기억 속에서는 이러한 죽음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전사자의 가족과 지역사회는 신문 보도와 전몰자 추도식을 통해 전쟁과 연결되었다. 전쟁은 전선에 있는 군인만의 사건이 아니라, 국민 전체가 군인과 유족을 통해 경험하는 국가적 사건이 되었다. 전몰자의 죽음은 개인적 비극에서 국가를 위한 희생으로 바뀌었다.

  1. 천황과 국민 통합

청일전쟁은 천황제 국가가 국민을 통합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메이지 천황은 전쟁 지도자의 이미지로 국민 앞에 등장했다. 천황은 대본영에 머물며 군을 지휘하는 존재로 묘사되었고, 병사와 국민은 천황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었다.

전쟁 이전의 일본 사회에는 정부와 의회의 갈등, 지역적 이해관계, 계층 간 대립이 존재했다. 그러나 외부의 적이 만들어지면서 이러한 갈등은 뒤로 밀렸다. 국민은 천황 아래 결집했고, 국가에 대한 충성이 시민의 덕목으로 강조되었다.

가토의 분석에서 중요한 점은 이러한 통합이 단순한 강압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많은 국민이 실제로 승리를 기뻐했고, 전쟁채권을 사고, 군인 가족을 지원하며, 전몰자를 추모했다. 국민은 국가에 동원된 동시에 전쟁을 자신의 일로 받아들였다.

이 경험은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사회적 기반이 되었다. 청일전쟁에서 형성된 천황 중심의 국민 통합, 전쟁 승리에 대한 집단적 감격, 희생의 미화는 러일전쟁과 이후의 전쟁에서도 반복되었다.

  1. 조선은 어떻게 다루어졌는가

청일전쟁은 조선을 둘러싼 전쟁이었지만 일본의 공식 서사에서 조선인은 주체가 아니었다.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청나라와 싸운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 정부를 강압적으로 개편했으며, 동학농민군을 진압했다.

가토의 강의에서 조선 문제는 일본의 전쟁 논리를 해체하는 중요한 열쇠다. 일본은 청나라가 조선의 독립을 침해한다고 비판했지만, 자신 역시 조선의 주권을 존중하지 않았다. “조선의 독립”이라는 말은 일본이 청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조선을 자국의 세력권에 넣기 위한 명분이었다.

이 점에서 청일전쟁은 일본이 서구 제국주의의 피해자 위치에서 가해자 위치로 이동한 사건이다. 일본은 불평등조약의 개정을 요구하면서 서구의 인종적 차별을 비판했지만, 동시에 조선과 중국을 열등한 국가로 규정하고 지배하려 했다.

다만 이 강의는 일본의 제도와 국민의식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조선 민중의 경험은 충분히 다루지 않는다. 동학농민군과 조선 주민이 겪은 강제동원, 식량 약탈, 전투와 학살을 함께 보아야 청일전쟁의 전체상이 드러난다.

  1. 승리와 제국의 탄생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청나라는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고, 타이완과 펑후제도, 요동반도를 일본에 할양하며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했다. 이 배상금은 일본의 군비확장과 산업화에 사용되었다. 전쟁 승리는 일본 경제와 군사국가의 성장을 촉진했다.

그러나 러시아·독일·프랑스의 삼국간섭으로 일본은 요동반도를 반환해야 했다. 일본 국민은 이를 굴욕으로 받아들였다. 청나라에는 승리했지만 서구 열강 앞에서는 여전히 약하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이 감정은 러시아에 대한 적대감과 군비확장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청일전쟁은 한 번의 승리로 끝난 사건이 아니다. 승리는 일본 국민에게 자신감을 주었지만 동시에 더 강한 군사력을 가져야 한다는 욕망을 키웠다. 청일전쟁은 러일전쟁, 한국 병합, 만주 침략으로 이어지는 팽창의 출발점이었다.

  1. 강의의 강점

이 강의의 가장 큰 강점은 청일전쟁을 외교사나 군사사에 한정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헌법, 의회, 언론, 국민감정, 전몰자 추모, 천황제, 국제법을 하나의 구조로 연결한다. 이를 통해 근대전쟁은 군대만이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제도와 사회 전체가 만드는 것임을 보여준다.

또한 “국민은 군부에 속았다”는 단순한 설명을 비판한다. 국민은 정보통제의 피해자였지만 동시에 승리를 원하고 전쟁을 지지한 행위자였다. 이 분석은 전쟁 책임을 더 넓고 깊게 생각하게 한다.

가토는 역사적 판단에서 현재의 도덕적 우월감을 경계한다. 당시 사람들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제한된 정보 속에서 선택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선택을 무조건 정죄하거나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제도와 언어가 전쟁을 자연스럽고 정당한 것으로 보이게 했는지를 밝히는 일이다.

  1. 강의의 한계

첫째, 강의는 일본의 자기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조선과 중국의 시각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일본 국민이 전쟁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잘 설명하지만, 전쟁터가 된 조선의 민중이 무엇을 경험했는지는 주변화된다.

둘째, 일본 국민의 전쟁 지지를 강조하다 보면 국가의 정보통제와 강압을 상대적으로 약하게 평가할 위험이 있다. 국민이 자발적으로 전쟁을 지지했다 해도, 그 판단은 정부와 언론이 제공한 제한된 정보 위에서 이루어졌다. 자발성과 조작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셋째, 일본의 근대국가 형성과 전쟁의 관계를 잘 보여주지만, 자본주의와 군수산업, 식민지 획득의 경제적 동기를 더 깊이 다루지는 않는다. 배상금과 영토 획득은 국가적 위신뿐 아니라 산업과 자본 축적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 종합 평론

가토 요코의 강의는 청일전쟁을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이 쇠퇴한 청나라를 이긴 전쟁”이라는 통상적 서술에서 구해낸다. 일본의 승리는 단지 군사기술의 결과가 아니었다. 헌법국가, 의회, 언론, 천황제, 국민동원이 결합하여 만들어낸 총력적 국가 운영의 결과였다.

그러나 바로 그 근대성이 식민주의와 결합했다. 법과 의회, 언론과 교육은 전쟁을 막지 못했다. 오히려 전쟁을 합법화하고 국민을 동원하는 수단이 되었다. 근대적 제도가 존재한다고 해서 평화와 민주주의가 자동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이 강의가 오늘날에도 중요한 이유는 전쟁이 시작되는 방식보다 전쟁이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정부가 안보를 강조하고, 언론이 적을 단순화하며, 의회가 비판을 멈추고, 국민이 승리에 열광할 때 전쟁은 특별한 비상사태가 아니라 국가적 상식으로 변한다.

  1. 결론

청일전쟁은 일본이 처음으로 국민국가 전체를 동원하여 수행한 대외전쟁이었다. 이 전쟁을 통해 일본은 자신을 문명국, 헌법국가, 군사강국으로 상상하게 되었다. 동시에 조선과 중국을 지배할 수 있는 제국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가토 요코의 핵심 통찰은 일본 제국주의가 어느 날 군부의 쿠데타로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 뿌리는 청일전쟁 당시 이미 형성되고 있었다. 의회는 예산을 승인했고, 언론은 전쟁을 미화했으며, 국민은 승리를 축하했고, 천황은 국가통합의 상징이 되었다.

따라서 청일전쟁을 이해한다는 것은 일본 군대의 승리를 이해하는 것만이 아니다. 근대국가와 민주적 제도가 어떻게 전쟁에 협력할 수 있는지, 국민의 애국심이 어떻게 제국주의로 전환되는지, 국제법과 문명 담론이 어떻게 침략을 정당화하는지를 이해하는 일이다. 이것이 오늘날 가토 요코의 청일전쟁 연구가 던지는 가장 중요한 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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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学術俯瞰講義この国のかたち日本の自己イメージで今回で第7回目となりました
今回から2回分を担当されるあの加藤陽子先生についてあの私会の福岡から冒頭にあの
初回を短くさせていただきます 加藤先生はですね埼玉県さいたま市
昔の大宮市の大間れで桜蔭高校経て東大へ進まれました1994年よりあの東京本学の
文学部で教鞭をとられています ご専門はですね特にですね
あの1930年代の外交と軍事に精力的に取り組まれています皆さん1930年代と
いうのはあの世界史を勉強した人はあのもちろんが勝てますように例えばあのさん
1933年にはドイツでヒトラーが政権を掌握 しそして日本でもですね1932年にはあの前々回の佐伯先生のところで私たちはの
チャーリーチャップリンの数奇な運命と一緒にピン等しました515事件それから
1936年には226試験 いうふうにですね んあの軍事的なクーデターが起こってだんだんとあの戦争へと向かっていくそうした
時代であります 加藤先生は繰り返しになりますがその1930年代の外交と軍事を中心にしかしそれに
とどまらず広い あの子やからあの日本史そして世界の中での日本史
いうことを研究されています ですね今回あの先生非常に勝者がジョジョが多いんですがその中で特にあの何を学生
さんにお勧めしましょうかということですね あのところにですね真相ば模索する1930年代
陸軍中堅外日米関係という本を先生あみんな ていますこちらですね1993年に初版で2012年に山川出版
皮膚パン者からですね新装版が出ています皆さんあの盛況であるいはあの街の本屋さん
で手に取ってみられてみてください 加藤先生どうぞよろしくお願い致します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あのやはり法学系の先生は大教室に慣れ
ていますので ザワザワってきた時に我々文学部ですとあの一番少ない人数ですと15人くらいまあ
多くても80人くらいなんですねですから ザワザワってされるとこう動揺して面白い花
足を言わなければとか声を大きく張り上げたりしてやるんですけどむしろあの
静かに静かになるまで待つと待ってる間に寝てしまうのではないとみたい
まあそういうような跡は非常にテクニックがある話し方で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で最後に10分ぐらいはし次になりそうです
すので16時10分ぐらいまでにこの a 3判のうん裏表ですね
まああのやはり固有名詞が多い時代だったりいたしますのでこういう風にプリント
アウトしましたこのようなあの立派なお部屋でこのお部屋はサンデル先生あたりが講演
したい 公平なんですかなんかこう歩き回って刺さなきゃいけないようなそういう気持ちにさせ
られますが まぁ基本はこちらの 裏表にデータなどを載せておりますがこの
これ以外にも随分いろいろなことは申し上げますただ例えば 聞き取れなかったものなどはカタカナ形で書いておいて後でインターネットなどで検索
してみていただくということもできますですからまあ貴方はこれを見ながらやり
ましょう をだいたい大きなお話は3つからなりますひとつ目に
まあこの国のかたちというこの連続講義に際しましてまぁ戦争ということをどう絡ま
せるか もちろん長谷部先生が戦争する国家 1月16日に抗議
用意されておりますし a か軽部先生なども皇室国体の問題で戦争と不可分なお話も
されていると思いますで私が文学部として何らかの形でこの国のかたち戦争って言い
ますと 戦争体験 記憶というような問題からお話を始めてそれが一番のところです
で2番目はちょうど今11月の20
8日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があのと巨大額で70年前に11月12日
まあここにもイチョウ並木がありますが本郷の a 1桜並木のところを
これは東京大学の学徒出陣を得1943年にあの12月に入営入団する学生に行く
反して壮行会がありましたその走行会が11月12日だということもありまして
まああの全体の政府がやりました gackt マーコートを昔の高等専門学校以上大学私立大学
まぁそういう人たちの出陣式は雨で への東条首相がですね10月21日の
a q あのジグ外苑のパロもう 運動場でやったわけですね競技場でやりましたそれとは別に投打で行ったのは11月
12日ですですから11月ということでまぁ学徒兵の目に映じた戦争ということを
でそこからマーセ添えの味方後は日中戦争など
にやはり絡め取られていく学徒兵も降りました 彼らが彼らの知性でどういうふうに戦争を眺めてたのか
それを2番目に見ますそれからまあ我々今あの 中国との関係でない架空の調査などでも中国に親しみを感じないというする国民が正
あの統計がある五時以降最大になったということもあり そして私の本の先ほどの模索する1930年代で言いますと
まああの本の中の陸軍とかいう部分を中国とか読み替えると比較的祖父流れがわかるん
ではないかというようなあのきな臭さがまあ国際関係でしょ 応じている中で
はいその東アジアの中の日本というものについて
西戦争というこの体験 ですね実態等その語られかたま教科書レベルも含めて
まあこの体験1894年95年 この記憶というものがどの程度我々のそのこの国のかたちというものを縛るのか
まあこの国のかたちというのは島りょうた the law さんの花 を使った言葉でありますしまあ彼は日露戦争に関して一つの一大叙事詩を書き
まああの nhk のテレビにもなりましたがその内に設定
時代設定をしまして日清戦争から見ていくこれが3つ目ですですから まぁだいたい20分20分20分ぐらいの予定なんですけれどもたく車道
をも頭でっかちで最初の方だけ なんか長くやってで先生は最後のほうやるのを嫌がっているのではないかとかいう鋭い
ミニコメントがありましてそれはそうですね最後の方のまとめ
レジメを作りながらまとめというところに何を言うかを考えて作り終わったことがない
ということもありましていろいろ考えながら話をする本ですからつい長くダラダラし ますただ今日はあのチャントキチっとしたお話を広い教室で聞き慣れてる皆さんですの
できちっとやりたいと思います 素ですからまあ20分ぐらいで一番のところでしょうかねはいまずあのあの戦争につい
て再定義することの難しさについてつぶやいたといいますか書いてくださったのは福岡
ついすらご存知かもしれませんし 長谷で先生の弟れっしにあたるんでしょうかねちょっと変わった形で3年準備
さんというあの憲法学しかしあの様々なことでご発言もありますのでお暇な時に何年純
ちっと引けばいろいろな原発問題でのご発言も出てくるかと思うただ私はこの長谷部
先生が編纂されました 岩波講座憲法減俸と時間という
これは 読みようによってはすごくあの簡単に書かれているように見える
性も多いんですねその中に私は何と戦争という形で
一生を書いておりますに真一郎などの大法会の設置の話とか天皇の塔推定な話とか
まあそれを書いておりまして同じ共編者共著者の一人として安念さんのこの論文をまあ
非常に興味深く読んが ものとしてご紹介しておきます皆さんのところにある書いてございませんが
あの今から一番きもの処ちょっと読み上げてみますね 我々は結局あの巨大な戦争がなぜこれはまああの日中戦争以降太平洋戦争についての
ことを巨大な戦争と彼を言ってると思いますが何のために戦われたのか答えを見いだせ
ずじまいであったのである ある事項を憲法に規定するとは
当該事項について通常の意味での討論つまりは多数決によって決着をつけるという
スタイルの討論を行わないことを意味する 日本人は私の立場から見れば懸命にも得体の知れない問題は多数決で決着させる技代表
の中から削除する決断をしたのであると まあ光っ 不能なというようなキーワードの hey 馳先生
スタートを切った事業ですからウナのことを言っているのやらと思われるかもしれませ
んがあんねんさんとしては憲法第9条というものをあの掲げる
ながらしかし自衛隊というものについての最も 支持率が高い時代我々は生きてるわけですね
良いことだ9条と自衛隊込みでこれは存在していいものだと言う
まあそういうようなことで有権解釈的にはどうかということなどを含めですね
なぜこれが共存可能なのかだから憲法に実は書くべきでもいちいちか かないことのほうがいい
ことがあるまあそれを日本国憲法の時になぜ 絵馬 ghq に言われたからとはいえしかし金森徳次郎がですね線何回も答弁して
まあ彼は非常に面白い答弁ですねまぁ川は流れ 水は流れても川は流れないとかいう言い方をして死刑は変わったん
のかとか国民なのか天皇なるかとか言って野党から来ます利根川という位置は変わら
ないですよね神田川の位置は流れないですよね でもそこに流れている水は流れてるんですとか言いながら
あの全文のところには天皇も入るんですとか言いながら まああのごまかすということもありますがそういうその国
日本国憲法というものがなかなかこう書かないで理性を保った
それはなぜかといった時に憲法ができるきっかけとなった まあ戦争っていうのは究極的には相手国の憲法が着替えるところまで行くというのは
あの長谷部理論でる層からのお話だということは知ってるかもしれん
ませんがそうするとその姉あの戦争自体は 何なんだ
ね石油が700倍とかねえ glp 10倍とか
です練り性合理性があったら回線はし得ないで例えば abcd 包囲陣にあの囲まれ
て a 持たざる国なんだって叫んでいますけれども じゃあなんで持たざる国を脱する一番最初一番早い方法はなぜかというと
abcd 包囲陣の方にするよることなんですよねまぁこれを喝破したのは異例 あきら先生という幅る大学の西洋史の先生ですけれども
まあそれをすりよっからこれは あの秀吉豊臣家がへ滅ん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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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れを考えるときに あの安念さんはまぁちょっと曖昧に聞こえている再定義することの難しさ
まあ1957年代生まれの人がそれを放棄してどうすると皆さん起こるかもしれません
がまあとりあえず格好にくくっているんじゃないかな日本人はっていうことを正直に
書かれた論文だと思いました で2番目に行きましょうで今 からお話しすることはですね
えっとマルイチからマルヨンの下のところの 関沢まゆみさんという先生のご本などに学びながら私が帰っていることで
関澤まゆみさんという方はこの方はあの皆さんは千葉県に住んでいらっしゃる方は日か
9的便利なんですけどそれ部屋の方はなかなか不便ですが桜の国立歴史民俗博物館と
いうものがございますが皆さんは高校の時ムリヤリにとかもしくは 近現代の展示室ができたから初めて国が作った戦争天地だから見に行こうとかですね
そう ちょっと行った事がある方いますか桜の国立歴史民俗博物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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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はですね もう色々歴史認識のうるさいだけあってあの
近現代の博物館はエンターテイメスト生も含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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たころはやはり戦友が小指などを切ってですね
ちゃんと その現地で供養してまー白木の箱鳴り入れてきます
だけれども44年のまあ7月以降ですねもうこれはま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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だから例えばある舞台では彼のガダルカナルですが土を入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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汚いはがきでそのかかりんが殴り書きで帰って何何彼に来てくだ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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あなたの舞台は健全な舞台だから1ヶ月後に帰ってきますなんて言って
つまり帳面見て調べるのがめんどくさいわけです ですからそうやって追い出されてだけど帰ってみたら次の日にはその戦友さんからその
最後の4の 詳しいことについてのハガキが登録とかですから本当に言われない思いをしながらと
いうのはあの丸6番のところでお話しますけれども まあし兵士がどこで死んだのか際遺族に教えられなかった国が日本であるということの
十戒はちょっと後でお話しますがまあそういう歴史民俗学農家 だがですねじゃあフランスはどうかなっていうことで行ったんですね
でこれはあのフランスと日本を比べる まあドイツと日本を比べるっていうやり方はあのどんだけ反省してるかっていうの
競い合いの時によく言われヤラれるんですけれども まあ彼女はフランスを選んだ積山さんは
一つは何でしょうねその日本の場合 侵略と原爆というのがある種罪と犠牲の総裁のようになっている
だからドイツの場合例えばまあ侵略のある ドレスデンという焼かれたのもあるだけど原爆ほどの衝撃はないとなったときにその
ある種のヴィシー政権などでドイツに加担したというフランスだけれども何の罪もない
人々が ss などによって焼かれたことがあるフランスそれをマージ0にすることであの
犠牲となんてやった罪というそのバランスという点で少し比較が可能かなということな
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これについてはのコメントなど をでぜひあの書いてください比較するのにどういうことがいい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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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り組み方を調査に行くんですね彼女はこれは請求136年で1500人くらいの
小さな村です で1944年という時に事件は起きますですから44年6月ですから
ドイツももうかなり苦しくなってくるその時にフランスに中東している ss が基本
的にその なんでしょ待ち伏せ攻撃をレジスタンスから受けたりする
そうしますと ss は一人の ss 隊員殺すと役人だぞって事を言ってるわけだ
からこそ治安が維持できる ですから必ずもし ss が殺されたら
かける100とヒューの音を殺していこうというようなことがあったものか1946年
6月乃亜 44年6号 月10日に事件が起きましてナチスの親衛隊によってこの
ちょうど蛭間町に入った1574人のまあ 居住者のうち642に昼間いたということですから
だいたいこれはあの年寄りとか子供とか女性が多かったんでしょう まぁそういう人達が
はまああの いわゆる属性の調査ですね 戸籍とか言語とかそういうのを調査するから積まれと言われて教会とか
あの広場に連れて行かれるまぁそこでまぁ基本的には銃殺されて焼かれるわけです
けれども 街自体も焼かれてしまうほとんど生存者が昼間いた人が前夜彼
てしまうのでこの街はいないしかしその亡くなった方のし 裏側にこう潜んでて生き残った人がいるこの生存者6名による証言によって戦後裁判が
なされるわけです マルニばフランス政府はこれは1945年もちろんこれは戦勝国として
a ドイツに望みますねでボルドーれ裁判がある でこの犯人はドイツ人は7人だとわかってるこれは ss 証拠ですしかしそれに協力
しました アルサス出身のフランス人ですですからあのう
アルザスロレーヌの問題が分かってれば分かるようにフランスとしても まあいうはとつまりフランス人だって苦労した苦労したフランス時
占領下でやったことだということで基本的には最初は死刑 強制労働の判決を下していました
しかしこれはすぐ勢に特赦ということで14人余りのフランス人は
者コース れてしまうわけですですからまああの東京裁判 横浜裁判 bc 9裁判が1952年以降
やはりまが巣鴨に入った戦犯たちがまあ釈放運動っていうものが起こるわけですね日本
が独立したい子それとある守護獣これはさんということを でまぁ時間的にも
非常にあのを一致しているところじゃないです消化 しかしまるさんのところですしかしこの村はですね
もう許さんと1974年まで遺族たちはフランス絵図と断交状態にありましてようやく
ミッテラン大統領の時に記憶のための資料館というこ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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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憶なための資料館が開館されていますですからフランスでさえ
やはり四十何年の年月がかかっているということになるんじゃないでしょうか
デココ の記念館はあのみんな訪れますとどういうことをやってくれるかと言いますとさあ
何時何分ですとここで ss 将校が ように皆さんたちに声をかけたんですってことで事実上再現体験です
でこの教会に連れて行かれましたここで銃殺されましたということ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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あ の平和のメッセージとかヴィシー政権がどうのとか ドイツに協力したフランス人がということを言いません
6人の証言者が見たことで何人がどの場所でどのように殺されたかで殺された人と製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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受けているようで 忘れないゲット我々ここで起きたことを覚えておいてという言葉が遺跡の入り口や
掲げられているという風に書いてありますが4者から性処そしてもう一つ今申し上げた
ように a に何て言うんでしょうか 語り部は一切感情を交えず起こったことじゃ
海はない見てれば一番わかるでしょうというそこに
a 信頼を置いている一方で丸4番に行きましょうそれでは我々の国はどうだろう
広島市の平和記念公園にある厳罰死没 原爆死没者慰霊機であります
これはあの慰霊碑 の言葉遣い自体があのかなり特徴のある日本語だということもありなんとか聞いたこと
があ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安らかに眠って下さい過ちは繰返しませぬからです過ちは繰り返しませんからという
ことで で事実これはか たりべという形で
なりあの頑丈移入しながら聴いてる人に まあ涙をん
なんて言うんでしょうかを喚起するような形で 生者が死者に語りかけですから聖書がっ者に語りかけるもう過ちは犯しませんですから
日米安保条約第2条の経済の条項で平和裏にと同じあに行きますよ
9条があるからもう戦争し ませんというその誓いとしてあの
生者が死者にお約束するというちょっとここはやはり違うだろう
ここで私たちは あの私の頭の中まああのぐるぐるに汚れてしまってあったぞ中で皆さんの気持ちを忖度
するのは申し訳ないんですけれども例えばね皆さんは じゅぐや不可とかあとその戦時徴用工ですね住友金属はまだ多少をどうするか迷ってる
と思うんですね韓国経済との関係があまりにも密接すぎるから しかし三菱重工などはあの戦時徴用工などに関しては1965年の日韓
基本条約で完全に妥結済みであるということでまぁ政府の判断もあり
まああのこそしているわけですねそういうことを聞いた時にあれ韓国の人はやっぱり
なんでこだわるんだろうという気持ちで見る目はないでしょうかこだわるんだろう
日本人は例えば ああああああ アメリカにもちろん日本が1941年に日米戦争を始めた
37年日中戦争始めただけれども非戦闘員を10万15万のオーダーで殺すようなあの
原子爆弾これを受けてもアメリカへの今のあの して
シミ覚えるのデータを見てもやっぱり 戦争には負けたんだ負けた馬は仕方がないぐらいに思っちゃっているんではない
でしょうかその忖度からあのなぜ 忘れられない気持ちを抱いているんでしょうねっていう気持ちで東アジアの人を見た
ことはないでしょうか で私はこの広島の問題原爆の問題って言うところでは確かにマルゴのようなあの要素は
ある しかしまる録のような要素もあるということで今のあのしつこいなっていうような考え
を持ってしまうこともある我々ということ
をちょっと眺めてみたいんですねこれは1958年のことであります
ギュンターアンダースといってもピンとくる人はあまりいないかもしれませんが
ハンナああ レントの歳夫と言ったら大丈夫ですよ 何でいいの夫とかいうのはどうでしょうかね私はの自慢ひろいきの妻だったりして
でも加藤陽子さんの夫とか言われるとあの配偶者は予備校の教師をしていますけどやる
かもしれません皆さんの中にもちょっと 彼の講義で害悪を受けた してもいるかも知れませんのでちょっと文貼っておきますがちょっとに c 戦争中に
私が危惧するような その解釈を述べているのでないか怪しいんですけれども
まあこの牛タンダンスはそのハンナアーレントハンナアーレントと言われて 最近新聞や渋谷なんかの映画館の具合を見たりしてちょっ
を覚えてませんかアイヒマン裁判などを傍聴に行ってアメリカをベースにあの
ものを書いた人ですけれどもやっぱり普通のおじさん普通の市民が起こした
600万の由良人虐殺というそれを書いたことで右からも左右からも左からもといい
ますかユダヤ人団体からも あのドイツ側からも様々に批判された女性ですがその花アーレントの映画があのあり
ますはいで母との関係などもあの暗示されているのでしょう まあこのジュギュターンダースが広島長崎を訪れてですね
第4回の原水爆大会か何かに来たんですその時に の日記があると私はこの日記自体はあの津波の形而上学という
歳父が起こっていこうまた注目されて2009年にあの出た本ですがそちらのフランス
人の哲学者の本を読んでて このアンダースのことを知りましたがこのアンダースは公開
ています 被爆者にあったんですね彼らは一様に咎めるべきものについて語らず
出来事が人間に男されたという点について沈黙する つまりアメリカの考古こういう兵士がまあ
パッドなんとかリトルボーイとかその乗せてきた b 29にあの
字をつけてたりするんじゃなくて b 29に乗せた核弾頭にあたらをつけてたりする
わけですが そういう人間としてはあの人間によって起こされたという点については沈黙するそして
一応にこの上ない犯罪の被害者となったにも関わらず ほんの少しの塩さあも抱いていない
これは私からすればあまりに行き過ぎていて理解を通り越してしまう あの曲について彼らは一様にそれが自身や隕石の落下
あるいは津波でもあるかのように語るのだと まぁ最近地震やいい席出神と裏すべて地球を襲ってくれているので
あの本当に理解不能なほど残虐な問題を我々が想像する時津波だとかやりユダヤの虐殺
について生き残った人たちに語らせた映画のショアーというのあれはやはり津波という
含意がある言葉なんだそうですね ですからあのいわゆる静 円減少に還元してなんか持ってかれちゃったとか
戦死者の奥様がよく言うのはガダルカナルに持ってかれて死んだんまあ死んだとは言う
けど持ってかれたっていうのは何かね台風か何かで巻き込まれて亡くなったかのような
物言いですねですから自然現象のように感じてしまう
日本というので やっぱり同一陣としてははたから見てそう思う
だから先ほどの安らかに眠ってくださいという誓いも込めて まああっさりした民族がなんかこう
絶望自分たちが始めたという犠牲と
罪の総裁という観念がそれほどいつも皆さんに
喚起されているわけではないのにあっさり アメリカに対してはん
親しみを感じる落とした人というふうには思わないというそこは何故だろうっていう
ことを釜問われているわけですね でまぁ日本人の気質かなとか言うがあっさりしていてちょっとその血で血を洗う抗争が
あって半島や大陸とは違うなどという痛さになるとまあそれは学問 がなくなるわけですがでそうするとねもうちょっと考えていくとそのあっさりって何
だろうっていうことなんですね 6番目です戦死者遺族にっていうことで我々は例えば
あの8月15日の戦没者追悼式典 閣僚や首相は靖国神社に参拝すべきなのはやはりあの
倒れた来なく倒れた人が祀られているからであるという物言いは大変ありますですか
戦没者というものいたのにはあれが正式の痛み肩であるからやはりあの
参拝すべきだという議論ですからアメリカの銃規制と同じぐらい安くに no
or の閣僚の参拝問題はいろんな論じ方がされると思うんですが私はやはりこの
一ノ瀬さんという方はここに上げておきました一ノ瀬さんという方は先ほどの関沢先生
とともに歴博でこの戦争経験の
を体験の記憶と語りのプロジェクトであの助教さんの時に関わった方です
今彼は埼玉大学にあの先生になっておられますけれど彼は本当の執念で歴史学者的な
執念で遺族会が 様々にあの今年遺族会解散になりましたけれどもあまりに高齢化が進んだということ
ですねその遺族会が私家版として編纂したような書物を
まあ悉皆集めましてこれはあの歴歴史民俗博物館に行けば全部あの収集がか
のな限りされていると思いますがそれをこう呼んで行くと我々は例えば1945年
ぐらいまで戦争が終わるまでは確かに 遺族扶助料とか恩給とかそれから戦争で亡くなった人へ村デー
正式のお葬式をする構想ですから村で最下級のたとえ
おうちであったとしてもそれこそ蝶々さんが来る 代議士が来るまあそういうような園村前
第で誉之 曹丕がなされていたしかし基本的にはその1944年の後半からの1年間はこれは
your て県のデータですけれどもその戦没地は岩手県全体の戦没者これは第2師団
などですからやはり南方で死ぬんですが1945年まで30
17年以降の戦没者を岩手県でデータ取りますとあの44年後半からの死者が9割です
だから遺族としては あのちゃんと賑々しく
纏ってもらえなかった遺骨がちゃんとした白木の箱に入ってこない
戦死公報が役場から来ない取りに来いと言われた それ ghq が来たら1952年まであの軍人恩給とかそんな止められると大変な
踏んだり蹴ったりなものがありますただ彼が この一ノ瀬さんが明らかにしたのは役場の役人が冷たかったということだけじゃなくて
その人々も冷たかったっていうことについて議場なその語りですね遺族たちのこの怨念
にも当たる語り が語られていますつまりどこでしょう
死んだのか骨はどこなのかで結局あの
第1副印象というまああの書きませんがこれ陸軍省のことですが咲き145年8月に
終わって9月に陸軍がなくなってもそのまま第1副印象という
d モビライゼーションということ てその戦時体制を解くその役所が残りますとだんだん皆外から帰ってくる
第1副印象の書類の中に残された手紙がありましてこれはあの吉田豊先生という
一橋大学の方が 岩波新書のシリーズ日本近現代史のあれ私が互換ですが6巻の対応戦争アジア太平洋
戦争の中でいいよーされていますけれども まあ自分の愛する我が息子がどこで死んだのかが分からない
骨が明らかにされるまではその自分の戦争は終わらないでその文章はやはり
後ろの方ではその陛下の命でまぁここをの神と言われて軍事所宮です
ねいった人間の骨が シュシュされていないってことの怒りが第二復員省に手紙で言ってますですから昨日
あたりの新聞でもフィリピンのあの自衛隊などが今
大風で救いに入ってますがある層も含めまた の遺骨収集のまあ復活というんでしょうかそういうものがなされているように遺骨が
帰って来ないどこで死んだのか 政府は1953年ぐらいに打ち切ります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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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車まあ非常に少ないそういう時の戦死者
日中戦争37年の選手車まだまだ少ない そういう地域に地域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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あんな風に 例えば南京で死んだっていうのを歩いている人が村人全員しを分かっ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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起きてしまったというそこでありますそれであ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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でありますが 非常に a reit 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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フィリピンのマニラに新聞だ設定って言われて 40歳で戦争があった次の図4福音するんですがその子と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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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の大使としてアメリカから来てた人ですそのジョセフグルーの対日10年というあ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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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れを訳したことで非常に著名な医師かあさんは 40でフィリピンのルソン島から船で帰ってくるんです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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ですから別にあの ghq ではなくフィリピンにアメリカが進駐してきた時この1年間はまあ比較て
木大事に扱われた人でしょ通訳ということもあるしね だけど46年に日本にこう上陸する直前に彼はなくんですね
船の中ででこれが私はちょっとあの いってりのなく瞬間体はこっちなのかと思ってまあ私は今53ですか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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船員さんがですね今から上陸させるでお前たちの中にしあの
白木の箱遺骨を持ってる奴はいえ何個持ってる買えって言った時に彼はもう滂沱の涙が
出たやはりナンパ白っていう形とか やはりそのルソンっていうところで
てその帰ってくる前に直前に病死した人もいるわけですね そういったときにやはりその船にを運行する人っていうのは陶磁器上げ戦なんかの人
から見ればもう神様ぐらい有難い人ですよねあの安全に運行して魚雷の残りなんかに
接触せずに日本 に連れてきてくれたその立派な繊維さんがお前たちの中でその遺骨を何個持っている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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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れから今申し上げたような石か禁治産のあの人を投光器投稿というのは
へほ糧になるということですねそういうものなどを見ながら 集めていくまたようなええっ
戦争の語り口をあの見ていかなきゃいけないと思いますそれではずいぶん長くなで2番
に行きますが区東平ですこれは皆さんに を誓いお話になるでしょうか佐々木八郎さんという典型的なエリートのレート
松永茂雄さんという少し浮くつを抱えた人の2つの例を挙げながらお話をいたします
みなさんの中でいろいろ 分店から理転したとかどっか留学してたとこで24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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ちょっと言いますねで4-3とかもう私とかも何十倍なんですがあの
24歳と聞いたのは今申し上げる佐々木八郎さん24であの死んでると言うかことです
先八郎さんというのは1922年東京生まれで第一高等学校の文化甲類これは英語
先週ですでもちろんドイツ語なども1週間中何時間やるような旧制高校の勉強ですね
それで経済学部です これは1919年に経済学部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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決意して済んでるだろうということはちょっと細かいことを言いますが 1941年の10月16日に近衛内閣が退陣するとき第3次近衛
で東条内閣ができるその日に だから法律っていうのはできちゃうと大変なんですがその日に併記法改正というものが
議会ではなくて緊急勅令で つまり憲法第8条の緊急勅令を使いながらこのケーキ法附則をとりますっていう決定が
なされます その取りますという決定は何かというと
24歳に達するまでま24歳に達するまで
その併記法に定める高等教育機関に在学している学生は徴兵猶予を認める
認めることについては法律でこれを定めるつまり何か改正があるとき法律で改正される
ということは議会の審議で チェックができるその安心感が併記法の付則にはあったんで1941年10月16日
までは しかし東条内閣は2年後の 下級証拠ですね少尉さんです30人くらいの部隊を率いて指揮する
その下級将校の不足が2年後に予想されるとして帝国議会外観機を待たずに
ぺこ議会開会機というのは12月ですからか一戦になっちゃうわけで またずにこれを
の不足を取っちゃっただからピンと来る人は無理やり分店とかであり点とかですね
無理やりこの頃増え始めた私立学校法かとかねそういうところに行く道もありました
しかしこの人はやはり まあそれがやはりなんて言うんでしょうかね あの当時の海軍兵学校なんかの棋風とか
あと一項の棋風とか吉田満というあの線栢山頭を妻を書いた人か言っていますが
って言うんでしたっけなぁあの その晩からとかそういうことではなくて
8大きなこと自分に関わる大きなことなんだけれどもそれをあたかも何のことでもない
かのようにする寄付で次回1月9日にいますすいませんそういう寄付っていうのがある
わけであの相手スアの選んだじゃないでしょうか であの43年
長袖 u を停止で東京大学から学徒出陣します それで彼は飛行予備学生となりで何度もこの過程では長男であるかとかいろいろまあ
チェックもあり後技量があまり優れていないとですね
例えば6週間で双発機 を飛行機ゴウちゃんと霞ケ浦形でできないとケッチンとかして地上勤務にまあされると
だからもちろん 学生上がりの予備将校について海軍が非常に不当な扱いをしたという語りもあります
しかしやはり国がもうどうせもない子になりますという主婦なしとあ
戦ってねということになると思いますねその元格闘がよく皆さんも英語とか他の外国語
で いろいろ会議なんか出たときに自分は下手だと思ってもでもその中でいる中で一番でも
できるかなと思ったらやっぱり通訳が役割果たすじゃないですかそれと同じような期間
で行ったんじゃないでしょうかね でんっ 彼は45年4月中4日ですでまぁ今日帰りましたら帰りがけなどの電車などでさっき
八郎というのを今行かないでくださいね 違うのに女が一番辛い真姫ちゃダメですよ今引くとこれ画像が出ます
であの14apr にあのまさに昭和たいとしてあの大和室
激鳴り沖縄防衛の時を援護するというので一例のとこうですがその特攻に行く時のまあ
こういう話すると本当にかわいそうになりますがねあの まあ一項の安倍能成と東大の早朝その二人が高
なんて言うんですよね揮毫したへ 日の丸の波止ですよ彼の理性からすればそれはすごく問題だと思うんですが日の丸の旗
をたたんで鉢巻きにして出撃する前の写真があります
ですからこれはなかなかあの日所がありますけれども まあ彼はそのなんで有名かといいますと
その遥かなる山だにという これは遥かなる山なりというのは a
皆さんの方のレジメには書いてないですね遥かなる山がにというのは東大の中の戦没
学生だけの手記を集めたものです きけわだつみの声は私立学校含め
あの戦没学生の手記なんですけれどもその彼の中の最初に
あのでてますやなやら先生じゃなくナンバラ茂早朝の後の会言葉でこの言葉が書いて
あるんですね つまり宮沢賢治のカラスの北斗七星を読んだ感想で自分の気持ちがこのカラスのおくと
姿勢のカラス艦隊のトップである第3 大尉さんですねにあの硬くされるって言うようなもので書いてあってつまり
カラスの北斗七星っていうのはこれは小森陽一先生あたりが国語の授業かなんかでやっ
てるんでしょうかね 面白いんですよねえっと注文の料理店という1924年に作られた賢治の小説集
の中に出されたものでおそらくこれは1921年から22年のワシントン海軍軍縮会議
っていうものを意識して 書かれたものですカラスの北斗七星で簡単なんですだからまあこういう話をしていると
また横に逸れますがその空母とかその戦艦とかそういうものを擬人化してで女の子
ちゃんもちゃんと 戦いの位メンバーなんですねでその
から 二艦隊富山ガラス管体が戦って出会いて敵を殺すのは嬉しいんだけれども
だけれども嬉しくないっていうその想いって言うからカラスの身としては敵の数が止ま
ガラスの数が減るのはうれし だけれどもなんか褒められた気持ちにはならないって言う
まあそういうことを書いた小説ですがそれを使いながら彼は丸に2位をしてありますよ
こう書いてあります 正直なところ某米防衛
撃滅とか10億の神の解放とかということは単なる民主主扇動のためのカラー念仏とし
てしか響かないのだ そして正しいものには常に見方をしたい
コード感情すべて僕にとっては10戦に人間的なものであって 国籍の異なるというだけで人を愛し憎むことはできないということです
で私が引用しましたこのカラー先生の本はこの方は昭和6年ぐらい1931年までです
から額等 8していかないで済んだ形で東大法あの経済学棒でてあの法政大学で経済学の教鞭を
執った岡田先生ですが何が偉いかというと私下線を引いておきました
防衛防衛某米防衛撃滅とか10億のためのか
方とかでこのアンダーラインの部分はですね 1951年に刊行された
遥かなる山がにの中ではえーっとね違う風に回
修正が施されちゃってるんですね例えばこうです 軍の指導者たちのっていうふうに書かれていますですから
これ登壇出版界の生協があの1951年2回出したということは独立も
前に戦没学生の手記をこう集めて出した
準備してただからアメリカに対する抗厳しい言葉っていうのが分以上この方全然
アメリカに対する あの反米色はない方だけれども言葉ヅラでやり直されているだから同様に心から敵を
憎み あの子 文が喜んで死んでいくということを書いている衣装などもこれはあのね振られると言い
ますか 排除される編集がなされたりしたという事につきこの岡田先生はきちっと調べて戦没
学生のいっしょそのものの実態を調べながら5調査をなさった方 ですつまり軍の指導者たちの言うことは単なる民主扇動のための空念仏というのと当時
政府がいろいろスローがにあげてた言葉これを載せることではちょっと迫力が違います
よね 反軍的なというよりは政府が用いて言った言葉について
チッと書いてあると言うやはり私はこの改ざんと言うな どういう立場であれ全くいけないことだと思いますそれからまあ2番目に行きましょう
松永修行さんですこの 方はどちらかというと先ほどのは本当のエリートの本当の秀才がすべてを分かった上で
あの死んでいったという感じの部分ですねでまぁ本当の秀才がというのはちょっと
佐々木八郎さんがどんなものを中学時代に読んでたか言います府立第八中学で中学と
いうのは当時あの15から 16歳ぐらいのですね高校が17歳からでしょうか
中学で読んでた全集が武者小路実篤有島武郎そして宮沢賢治徳冨蘆花国木田独歩泉鏡花
谷崎潤一郎 森鴎外田山花袋徳田秋声志賀直哉 川端康成倉田百三そう
れからを中学で読んでるそしてここになりますと ツルゲーネフトルストイ度不貞スキー値 f 二名女0時服をスキ
スタンダール g ドモーパッサンロマンロランそしてパールバッグなども読んでいる それで大学に入りましてからはヘーゲルの歴史哲学の二役事
分で約し始めているでマルクスの資本論も自分で訳し始めていて
で1945年のあの4月 2月に最後にお家に帰るのかなその時に自分がもうこれは完成させられないけれどもと
いうので あの卒論とが卒論という形ではないですが自分の考えをまとめたノートあの遺族に残し
ていますねまあこういう人が去った後 はいそれから2番目ですこの人は
まあこの年食ってますね13年までです で途中はいえー31年にコート第一高等学校の理科コール位に入っているんですが32
年にふと止めて児童文学とかになりますそれでや自分はじゃああの
そうか國學院大学などで a ちょっとやろうかっていうことで日本思想
古事記日本書紀なんかも読み始めるということをやります ただしこの方はもうあの24歳という年齢自体をその際学年で特例もない
前にもう達者ってるので入隊しちゃってるわけですね 中退しているときですから彼はまあイレギュラーな形で学徒出陣した形ですがそれだけ
に成熟したことをやってます1931年9月に勃発した満州人を横目に見ながら
あの自分は34年から室グァの中国に行くわけですが
あその前に書いた白村江の高い2台を取った際を取った歴史小説
みな草を執筆してまーす医師と書いて それを33年に冊子として製本しています
で狩ればこの後が気にこれも先ほどのから先生の本などにちゃんと異様されているので
残されていますね あとがきにこういう風に書いていますこれよこれは遠い昔の物語である伝説である
けれども 一成 300年の後の今日本の描きつつある歴史はあまりにもこの物語と似ているのではない
かというようなことを書いてそれで戦病死38年で大変な激戦です
戦病死していますまあこの38年11月ぐらいというのは
あの次にお話しする日清戦争をなど以降の日本の中国観と言うんでしょうかね
中国はおそらく まああの玄翁に怒られた杉山元参謀総長が半年で中国は
って言っちゃった人ですよね で この11月の兎すんのってい陸軍病院でしなきゃいけなかったのもある種見誤ってた
ことで中国は36年ぐらいから上海とか南京とかの三角形をなすあのクリーク地帯を
含む場所に非常に 深里陣地を築いていましたこれはドイツなんかノアの軍事顧問団はる兄ハウゼンとか
ですね そういうドイツ中国関係っていうのはすごく関係が良かった
ドイツも1920年代軍縮しなきゃいけなかったときにじゃあ軍人たちどこ行こう武器
の使い方はどこ おり教えに行こうと言ったときにあのマニュアル付きでちゃんと中国に行ってたわけ
です だから高松宮は彼は海軍で 情報の場所2930
7年10位 1月ぐらいからこの翌年ぐらいまで
いましたですから高松宮日記という天皇の弟の日記が
中興 ジョー口論から出てますがその日記には
とに息を詰めるように日本の航空機の損害のあの数と後と苦情って言うんですけれども
中国がのあの飛行機なり の あの暗号解読ですねそれをやった結果などが書かれてますねその中に書いてあった言葉
が非常に重要で つまり日本軍は陸軍は1937年11月ぐらいまでその薄んクリークなり
10新人値というものを中国側が気づいているということをつかんでいなかったとそれ
がちゃんとその海軍側のある種かなり正確な情報に接することができる人の日記なり
業務日誌に出て来ですからあの砂丘という ドイツ軍顧問きている蒋介石がちゃんとや通っている
これ1933年くらいからわかっていることです だけど日本が高をくくってて蒋介石が準備しているのは共産党軍との戦争準備だ
ですから今日蒋介石もカス非常に賢いです つまり 1934年から36年くらいまでの間はこれは国共内戦が一番大変な時です
だからもう少しで共産党の息の根を止められるのにということを
蒋介石が書いているのも事実です しかしその作戦の 装備や様子庫などを重慶ぐらいまでさかのぼれるようなあの
ガンボートですよねそういうものをイタリアなんかからたくさん輸入してるって言うの
はやっぱりこれはなんていうんですよねなんか輸入してるでもそれは共産党に使うもの
だろう 何か 情報が入ってくるものと分析というところがずれていくそれがつまり
見下している気持ちとか様々なものが邪魔するんですね ですからこの a ず松永さんが死んだ
激戦というのもまざか日本が日中戦争の戦線で20万人も
しるんだっていうことはあの日本側としてはもう本当に考えてなかったようなことだと
思うんですね それではこの方がその100走行の戦いっていうようなことでわかりますよねえと唐や
新羅の連合軍に 倭国は大半してそれ以降
40年間ぐらい日本は頭から襲われるのが怖くてこうしかも怒られるのが怖くて検討
知っていけないんですね しかも日本側が遣唐使って言っているだけで
遣唐使というのは同等の国が送る施設ですね
中国側としてはこれはあの 違う久利町行に来ているたら
挑戦など新羅などと違って定期的に長考に来ているんではない
だから月桃紙というのは本当は調香師なんですけど日本側は検討しという
それともう一つ天皇というのは天皇と読ませてたんですけれどもその天皇という名の
リオ日本側で なろるときは これは立浪の規定があるんですけれどもその対外的に名乗るということと自らが支配し
ている兆候国を率いている 君主であるというその
設定があるんですデフォルトとしてそうなんだから だから新羅は日本に朝貢している国であるという虚構が必要なんです天皇という天皇と
いう言葉は ですか発生した頃からやはりそのある種の神はこれは建国神話っていうのはどこ
の民族も所国家も必要ですけれども ですからこのなくす甲からその何十年か経って702年ですか
頭にまた使い遅れる時までの間の日本の緊張っていうのは凄いことなんです
負けた負けて頭が何をしてくるか分からない 出そう 緊張感っていうことを使いながら彼はそんなことするなら
開戦しなきゃいいのにということでまぁ 物語として書いたんですねこの人ははいでまるさんに行きますで私はくそーゆーあのお
気を張られした話をしているわけですけれども でも 皇紀2600年+というような時間が戦前期には流れていたことを考えれば
アクス甲の戦いと今度の戦争を比べた人の一人に昭和天皇はいるわけです
これは知っててもいい話ですが1946年8月中4日というとこれは間違いないで
いただきたいんですが 1年後ですねポツダム宣言受諾を鈴木貫太郎使用とともに行った1年後でありまして
この受諾1周年の茶話会で えっと商店のはこういうことを言ってますで資料としてはイナダ修一備忘録というので
稲田修一は当時10時長ですえっと今国立公文書間にはこのイナダ修一のあの官僚時代
のさまざまな記憶がありますね ですからあの公文書管理法とかそう
いうものをあの特定秘密保護法などが60年後解除された後にはぜひこういう国立後部
紹介に入れていただきたいものだと思います ただあの軸ということを言うと国体が変わらないとそんなぶりにあるかなぁと思ったり
この位なら修一さんの白明らかになったのもやはり国体が変わったということ とがあるんではないでしょうかねつまりかなり詳細に書いてますつまりステン動画
首相を対戦時の主将鈴木貫太郎 そして今の首相46年段階の主将の吉田茂
それからあの閣僚などを招いて茶話会をやってるわけですそこで天皇はこう言ってます
戦争に負けたのは誠に申し訳ないと しかし日本が負けたら今度だけではない昔調整に兵を出したく好きへの日の一戦で
一敗地にまみれたので半島から兵を聞いた そこでいろいろ会心が行われた
これが日本の文化な発展に大きな転機となった このことを考えるとこの際日本の進むべき道も
をの巣から分かると思うというようなことのまとめ方で つまり章天皇は日本にとっての敗戦は白村江そして
にここだって捉えて わけですねですから海の向こうの体温日アメリカっていうのではなくてやはりとうとう
と まあ中国アメリカソビエトに負けたっていうその比喩ですねだから歴史を考えるときに
あの 時空を越えてね国民国家ある時期の話じゃない 白村江のを昭和期に否定するのはどうか比べるのはどうかと思われるかもしれませんが
国民の 式を縛っているもしくは剣道の意識を縛っている
考え方っていうのを知るのはすごく大事だと思いますね 柏村公ですからその柏村こうっていうのを掲げながら今の戦争31年以降の
マーシュ事変はやっぱりおかしいってことを書き残した この変わり種の松永修行さんという方も私はひどく引かれる想いがありますね
ですからあの当時のが区東平魔女へ猶予があったのは5万人と言いますねですから
8当時のその超英雄がある中で青年って言うな
の2%ぐらいですかそういうのは中で特に市勾当台となったら本当のトップであります
ですから市向東来星のあの所得調査みたいものが実は文部省にありましてえーっとで
だいたい皆さんも豊かな学生さんだと思いますけど 一番平均値が書籍人が僚一か
食費を除いて自分がどれだけ自由にお金を使えるかっていう答えが1940年段階
ぐらいで80円です80円っていうのは a リートとして銀行などに努めた人の初任
給ですね だからすごいと思うのだから彼がこれだけの本をまあ嫁ているということなど
洋書などがもういくらでも読めるって事があるんじゃないでしょうか それではじゃあにシーセンスおきますねどうしてある種の皇
何かゆがんだ形での考え方というものが日本になるのかっていうことを
ざっくりとあの言いますねあと2枚部を10分でやるなんていうのは大変なことなので
もうざっくり産業とかなっちゃいそうですがまぁでも大体どういう意味で日清戦争を
振り返るか分かっていただいた 思いますからは一番に行きますみなさんは理系もいるでしょうし
あの日本史を後期で使ってない方もいると思いますから教科書的な説明はどうだろうを
振り返っておきました まずあこんな感じで書かれてます大学制度ができたこの年
伊藤撮り交渉というあでとりあえず 朝鮮などに次の事変が起きた時に日本と中国が
者出兵しましょうねお互い良いあってという条約できた あそこに
水は流れ川は流れず9点たって でこの教科書はここはずるいんですよね9年間になったんだ
でまぁ94年になって突然頭が区の浸透を中心とした飲み氾濫
これは挑戦中韓国側では東岳農民運動と言いますが起こった
でバーあの政府にターン してはい日と減税要求でソウル感情にをそそられるんじゃないかというので
まあ兵を 朝鮮政府は深刻に要求する でそれを知った日本があの6月2日に1894年6月2日に兵を出して
a 回戦は2か月後というようなプロセスを踏んだっていうそのお話です
だから朝鮮の 問題で日本は朝鮮がその米の輸出にうるさく言う
あと日本側の綿布湯質なんかをなかなか 中国商人と基礎やって勝てないどうしようっていう不満が募るでその実業家の不満を
背景に2ヶ月ぐらい いい絵を置いたまま交渉して
戦争に 誘ったこれが1960年ぐらいのあのあるいわゆる唯物史観的な帝国主義日本が日清
戦争を起こしたというそういう説明の仕方になるんですね ただこれもあのゆがんだということではなくて理由はあります
例えばうんこ この丸2番ご覧ください6月2日の朝鮮出兵閣議決定の会社ここなんですねこれで
例えば角池って後でみますけれども我々この閣議決定見る前に閣議決定にもってた外務
大臣である 陸奥宗光という人間の県兼六というこれ g 難しいですよ
寒いという子の間ぶりにしたは足と友情か県兼六
私の拙い書き物というような意味ですがその県兼六の期日にパラレルんだ
つまりこの鍵権力の記述はよく皆さん分かるように歴史はいつ書いたかが大事です
だから 1894年6月2日の夜に書いたならばそれはその閣議決定の木墓地を外務大臣が示す
のには重要ですしかしこの陸奥は1895年10月に書いてますですからもう5月の
三国干渉 猛虎は場 よく決まった三を鑑賞を屈服的にも優れた
それが見えた後に病気を抱えながら書いたんです6つ
だからここでもつは 自分は回戦に向けて弱着と
戦争やっただからつまり6月2日の閣議決定もこうなんですね
8皆さんのページでは6月2日の閣議決定というのはえーっと兄のとこの真ん中へんあ
後ろのほうの真ん中にですね 3ページ裏面開けてください
カッコ4のところではい閣議決定の文章を書いておきました
頃いカッコ4のところですね裏側さんというレジメのナンバーがあるところですけれど
もこう書いておきました各位げって我が兵を持ってはが国民を保護するを怠るべから
ざるがために深刻と連合反映するを待たず 条約の名文これ
天津条約です公文したたちに出兵するを適当とする つまり居留民を守るために出兵まあこれはいつも同じことですが形状駐在講師杉村書記
官よりの雷電によれば朝鮮政府はすでに 応援を深刻に求めたりと云へり
申告のこれに応じたるやいない 家は未だ方超越といえども将来申告もその兵員を
派遣しまぁなんに派遣するからこれからですが 両国の軍隊はこの両国は日本と清国の軍隊です
あるいは連合の旗力気同じあるいは朝鮮政府の要求により臨機に応援
防護するの必要を生ずるのもまた図るべからずこれまた
あらかじめ三角の中に置かざるべからずというので 両国軍隊が強調して頑張るような働きをするから気をつけようというのがこの文章で
どっちともとれますよねで州兵を見てみると丸にをご覧下さい
これはしようとしてまさに6月7日その晴れ書かれた 群に関して大山巌陸軍大臣と西郷従道海軍大臣が
で先に行く感情そうリング 出かける陸海軍のトップにもてげって言って持ってがせた訓令です
このたびの出兵は全くはが公使館領事館及び 帝国臣民保護のために出したるものにして決して
申告と事を成すがためにあらざるは断言し奥成 断言し置くところ形でつまり
とにかく 波形はする だけど深刻との軋轢は
やるつもりじゃないんだぞとメール でこれを例えばイトーの手紙などでも周辺をあたっていきますと走路に入る時には憲兵
mp ですね憲兵ではなくて 巡査を入れてソウルに入れよう上陸させを別にあのソウルの人々と戦うんじゃなくて
農民兵 反乱兵を抑えるためそれを
混乱に巻き込まれないようになんだよってことを一刀は言ってますだからここで
伊藤が だしていることその意を受けて軍が出してる抑えと陸奥言ってること陸奥はこの県警の
国こう書いてます 受注のハックまではが提案に同意せざるべしと考え
改革を要求するも格別重きを置かずつまり わかりますか陸奥はこう言っているわけです
6月スカ出兵するときにえっと日新共同で
朝鮮の改革をやろうじゃないか だけど申告は絶対調整は自分の族王だと思ってるから
属国だと思ってるから断ってくる 断ってくるから回戦になる
だから 日同社っていう言葉見たことありますか
被害の日に動くでもの好むつの6月2日もしくは6月15日ぐらいまでの
県兼六の中に書かれた陸奥自分の行動の説明は
一応申告に 共同出兵野郎その理由は朝鮮政府に対して改革を進めよう
そういうことを朝鮮政府はあごめんさあ清国政府はあの絶対に受け取らない
だからこれは開戦なんだって回線を誘うため ただ向こうからを
怒らせて改正させるためなんだっていうことを言います でなんで陸奥は向こうから改正させなきゃいけないかっていうことについては
まぁ次回ゆっくりお話しますけれどもカッコ5番とかの後ろにありますようにイギリス
と上映会成功主やってます だから1894年の7月の21日にイギリスは憤懣やるかたないっていうの日本に
怒鳴り込むんですね なぜなら7月19日にちゃんとイギリスは日本と通商航海条約という条約改正をじま
すってことはを します だけど21日日本に怒鳴り込んでお前は深刻と前走を始めるつもりかとイギリスが一番
大事なのは申告を中心としその貿易であると だから戦争をもしやるならばこのまま開戦すれば日本政府は開戦の責任をとらるべしと
いうなことで7月21日にイギリスはと目に掛かりますですから6月の2日
7月の21日あたりまで やっぱりこれは日本政府は揺れてるんです
が降らしてるんですで伊藤博文や特に 李鴻章さんがいれば
日清の共同改革をやってくれるだろう だから伊藤主将というもちろん分菅首相です
このあと声優界というものを作りますつまりもうやめますがものすごく楽観的な気持ち
で交渉やる人は逆に強硬なんです受けてくれるだろうそうなそうだ日中の共同出兵
調整 塩改革提案鉄道敷設際してねっていう 電信引いてねっでそういうことを養成することを中国は朝鮮に促すだろう
だけど陸奥的な開戦論のアレだと日本は6月から断固として
決然たる愛受領決して戦争の準備をし 陸海軍は1890年の3月ぐらいあっあからちゃんと合同演習やってて訓練バッチリ
勝ちましたップであの戦線の象徴 うなんていうのは分野の戦争ですね文明っていうものを中国が理解しない
だから続国として挑戦を支配するそのような深刻に対してどうですかっていう当選そう
だっていうことが聖戦の 詔勅ですけれどもこの先生の詔勅も実は2日間で書かれています
で先生の詔勅も最初の詔勅にはもうやめますね あの韓国も入って朝鮮と中国に対して日本は線征服しようとしてますそれを申告だけに
で帰国 名指しすることのメリットデメリット走行
で深刻に対して8番の国という レッテルがより貼られるようになる
理由はわかりますよねつまり朝鮮日本は7月23日に朝鮮王宮を襲撃して王様を捕まえ
て退院君という王様のお父さんに政権を支えますだから日本はに神戦争を始める前に
最初に戦ってるのは張世平 を戦っていますだから自分がクーデタを成功させちゃって首根っこ捕まえたからもう
朝鮮に宣戦布告する必要はないで挑戦は自分の言うことを聞いてるからその国を批判
する必要はない その調整が言うこと聞いてるのにを後ろにいる中国があってこの理論になるわけです
だけれども今申し上げたように日本は1月9日にあり ますが議会でめちゃくちゃです伊藤の後ろ
物が後ろにはもう憲法停止しなきゃ この議会は乗り切れないってぐらいの危機
きゃっ発ぐらいの自体が無いせいで起こってます だからもう6月の2日の決定も議会
第3と同じ日です海鮮あゴメス6月2日にとにかく 6000名を苦労っていう決定は議会を2回目解散する決定と同じです
2回目解散は半年前に行ったそれをもう1回解散するんですよ
これはひどいでしょですからそのようなご加護 他の日本史が本当はあ
て日清戦争なんですだけれどもこう綺麗な形のに c 戦争観
それはやはり教科書にもどうしてもあの引き継がれているところがあると思いまして
これは後ろちょっと急いでしまいましたので1月9日にもう1回ちゃんと国内の問題を
抱えた 6つの苦悩と伊藤の プランですねそのあたりの食い違い
あと軍部のプランそれをちょっとお話しながら まあなぜあのような形で中国を
分野版の国だと名指しする必要ができたのかという話を
じゃあいたします以上です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何かご質問があったらどうぞ エイ じゃあと質問なんですけどもえっと日清戦争の時にあのやっぱり日本があまり
政権として統一したいしか取れずに戦争に入っていったということはやっぱりあの太平
洋戦争の時にもえっと 似たような状況だったと思うんですがそういったねえ日本の
その憲法とあのそういったものに由来するものでしょうか8お考えになりますが非常に
質問であのまさにそうですね日本はこの後やる日露戦争の時にも
81904年の a 2月から開戦ですけれども12月まで元老とあの閣議の間で1点がないんですね
ですからその朝鮮問題で除染までは出るけれどもロシアと満州問題で戦争するかどうか
これは2か月前までないです ただ逆に言うとそのこういうことが起こるんです郡
の方はどうせ閣議なり言動がリーダーシップ取る後明治天皇の後ろ向きさ加減からする
とギリギリまで決定ができないとなると制海権を握りんなくても済むような戦争プラン
を立てるんです ということはさっきもより残虐なと言うんですが調整に
なんでにし清掃戦う時にソウルのお灸をちゃんと占領しなきゃいけないかというと挑戦
すべてをあの電信通して道路通して戦争しないと効果以上は深刻艦隊の方が優勢だっ
たりしますから 日本兵をこう呼ん越田運ぶっていうこと を海軍がはもうちょっと予期し得ないが
雷の状況がありましただからある集その西軍関係っていうところが3つに行くのが一番
いいんですが政府のガーが慎重であればあるほど軍はどちらの側でもできるように
しかもどちらの側で持って行った時にかなり無理をしながら
回戦もしてない国大きいを襲う てクーデタ起こすというところからの回戦をやらざるを得ないというようなことになり
ますので 憲法という点で言いますとその回戦決定の決意とか
その問題は今後起こってくると思う日論時にも再現されますのでその点忘れずに
ちゃんと憲法と絡めてお話しできるようにしたしますドア がとうございました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じゃあどうも加藤先生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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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清戦争 닛신 전쟁 - Wikipedia 2

연표

1894년
  • 3월 : 동학당, 조선 전라도 에서 봉기(그 후 갑오농민전쟁 으로 확대)
  • 5월 27일이나 28일 : 주조 대리 공사 스 기무라 히로시 에서 조선이 '병을 지나 에게 빌려' 움직임 있어 외무성에 통보
  • 5월 31일 : 조선 정부, 청나라에 원병을 결의. 이토 내각 , 내각 탄핵 상주 결의안이 통과되어 난국에 직면
  • 6월 1일 : 스기무라, "袁世凱이와쿠 조선 정부는 청나라의 원병을 청하거나"라고 타전
  • 6월 2일:이토 내각, 중의원 해산과 청이 조선에 ​​출병했을 경우에 공사관·거류민 보호를 위한 조선 출병을 각의 결정
  • 6월 4일 : 청의 북양통상대신 이강장 , 조선출병을 지령
  • 6월 5일: 참모 본부 내에 대본영 을 설치(형식상 전시 에 이행)
  • 6월 6일 : 천진조약 에 따라 청이 일본에 조선출병을 통고
  • 6월 7일 : 일본도 같은 조약에 따라 청나라에 조선 출병을 통고

(이후, 닛신 양군이 조선에 ​​상륙하는 것과 동시에, 닛신간과 북일간의 협상, 또한 영국과 러시아가 닛신간의 분쟁에 개입)

  • 7월 9일: 청의 총리 담문 이 영국의 중재안을 거절
  • 7월 10일: 주로공사 니시토쿠지로 보다 더 이상 러시아가 간섭하지 않는다는 정보가 외무성에 도착한다.
  • 7월 11일: 이토 내각, 청의 영국 조정안 거절을 비난함과 동시에, 청과의 국교 단절을 표명하는 「제2차 절교서」를 각의 결정
  • 7월 16일 : 일영통상항해조약 조인( 영사재판권 철폐 달성). 청, 군기처 등의 합동회의에서 개전 자중을 결론으로 ​​하고, 18일에 상주
  • 7월 20일 : 주조 공사 오토리 케이스케 , 조선 정부에 대해 마지막 통제(회답 기한 22일)
  • 7월 23일: 일본군, 조선왕궁을 점령. 국왕 고종을 수중으로 한다. 일본측의 압력으로 대원군 이 국정총재로 취임
  • 7월 25일: 대원군, 청과의 종번 관계 해소를 선언해, 오토리에게 아산의 청군 소토를 의뢰. 토시마 오키해전 ( 다카하루호 사건 )
  • 7월 29일: 아산으로 향한 일본군과 청군이 교전해, 일본군이 승리( 성환의 전투 )
  • 8월 1일: 닛신 양국, 서로 선전 포고
  • 8월 5일 : 대본영, 참모본부 내에서 미야나카 로 이동
  • 9월 13일 : 대본영, 전쟁지도를 위해 히로시마 이전( 히로시마 대본영 )
  • 9월 15일: 메이지 천황, 히로시마에 들어간다. 평양공략전 에서 일본군이 승리
  • 9월 17일: 황해 해전 에서 일본 함대가 승리. 그 결과 일본이 제해권을 거의 장악
  • 9월 19일: 이강장, 지구전(서양열강의 개입을 기대) 등을 상주
  • 10월 24일: 일본의 제1군압록강 도하를 개시, 제2군요동반도 상륙을 개시
  • 11월 21일: 제2군, 여순구를 점령
1895년
  • 2월 1일:히로시마에서 키요시와의 제1차 강화회의(다음날, 일본이 위임장 미비를 이유로 교섭 거절)
  • 2월 중순 : 육해군 공동의 산동 작전 완료. 일본이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
  • 3월 초순 : 제1군, 요가평원 작전 완료. 일본이 요동반도 전역을 점령
  • 3월 16일: 예결 대비해 참모총장 고마츠미야 아키히토 친왕 육군 대장이 정청대 총독에 임명된다.
  • 3월 19일:강화 전권의 이강장, 모지 도착(다음날부터 시모노세키 에서 협상)
  • 3월 23일 : 일본군, 대만 해협호호 열도 에 상륙. 26일 작전 완료
  • 3월 24일: 이강장, 폭한에 저격된다(일본, 조건을 완화하고 강화를 서두른다).
  • 3월 30일: 닛신 휴전 조약 조인
  • 4월 17일: 닛신 강화 조약 의 조인(5월 8일, 발효)
  • 4월 23일:러시아・프랑스・독일, 청에의 요동반도 반환을 요구( 삼국 간섭 )
  • 5월 4일: 이토 내각, 요토 반도 반환을 각의 결정
  • 5월 5일: 일본이 러시아·프랑스·독일에게 요동반도 반환을 전한다.
  • 5월 29일: 일본군, 할양된 대만 북부에 상륙을 개시
  • 5월 30일: 메이지 천황, 히로시마에서 도쿄로 환행
  • 6월 17일: 일본이 대만대만 총독부 를 설치
  • 8월 6일: 대만 총독부 조례에 따라 대만에서 군정 을 깔았다.
  • 10월 8일: 조선에서 을미사변 ( 민비 암살 사건) 발생
  • 11월 8일: 청과 요동 환부조약 체결
  • 11월 18일: 대만 총독 , 대본영에 전도 평정을 보고
1896년
  • 2월 : 조선에서 친노파의 쿠데타가 성공해( 노관 파천 ), 일본이 정치적으로 크게 후퇴
  • 3월 31일: 대만 총독부 조례 공포로 군정에서 다시 민정으로 이행
  • 4월 1일 : 대본영의 해산
1900년
1906년

양국의 전쟁지도와 군사전략

일본

일본은 일청전쟁 전체를 통해 주전론 으로 굳어 정치와 군사가 통일되어 있었다 [ 77 ] . 개전 전인 5월 30일 중의원에서 내각 탄핵 상주안 을 통과하는 등 조약 개정 등 외교 정책을 둘러싸고 이토 내각과 격렬하게 대립하는 대외 경육파도 개전 후 그 자세를 크게 바꿨다. 해산 총선거 후, 히로시마에 소집된 임시 제7의회 로, 정부 제출의 임시 군사비 예산안 (그 액수 1억 5,000만엔은 전년도 일반 회계 세출 결산액 8,458만엔의 1.77배)을 만장 일치로 가결하는 등, 이토 내각의 전쟁 지도를 전면적으로 즉 개전에 의해 반정부적인 배외주의적 내셔널리즘이 이를 억제해 온 정부의 지지로 돌아간 것이다. 또 반정부의 중의원 의원뿐만 아니라 지식인도 청와의 전쟁을 지지했다. 예를 들어, 대청전쟁에 대해 후쿠자와 사키요시 는 “분노[문명과 야만]의 전쟁” [ 주석 34 ] 로 자리매김(『시사신보』 1894년 7월 29일), 우치무라 감조 는 “의전”으로 자리매김했다 [ 78 ] . 덧붙여 우치무라와 마찬가지로 10년 후의 러일전쟁으로 비전[반전]의 입장을 취하는 다나카 마사조도 , 대청 전쟁을 지지하고 있었다 [ 79 ] . 그러한 일종의 전쟁열은 민간의 용용운동의 확산, 후쿠자와와 유력재계인 등에 의한 군자금 헌납 에도 나타났다. 청와의 전쟁은 바로 거국 일치의 전쟁이었다.

6월 5일 참모본부 내에 사상 처음으로 대본영이 설치되어 형식 상전 시 에 이행했다. 8월 4일 대본영이 '작전대 방침'을 완성시켜 다음날 천황에 상주했다. 대방침에서는 발해만 연안에 육군 주력을 상륙시켜 청과 암수를 결심하는 것( 예결 )이 목적으로 되어 이를 위한 작전이 2기로 나뉘었다. 제1기 작전은 조선에 제5사단 을 보내 청군을 견제, 나머지 육해군이 출동 준비와 국내 방위, 해군이 청의 북양수사(북양함대) 소토와 황해 ·발해만의 제해권 장악으로 꼽혔다. 제2기 작전은, 제1기 작전의 진행, 즉 제해권으로 3개가 상정되었다. (갑)제해권을 장악했을 경우, 직예평야( 베이징 주변)에서 결전을 수행, (을)일본근해만 제해권을 확보한 경우, 조선에 육군을 증파해, 조선의 독립 확보에 노력, (병)제해권을 잃은 경우, 조선에 남겨진 제5사단을 원조하면서 8월 14일 , 한반도 남부에 대기중인 연합 함대 에서 '자중노책'을 취하면 타전된 대본영은, 제2기 작전을(을)으로 진행하기로 하고, 각 사단장에게 훈시했다( 제3사단 에는 출동 명령). 31일, 오오모토영은, 「동계 작전 대방침」을 정해, 상기 「작전 대방침」의 (을)를 (갑)으로 변경해, 직예 결전을 실시하기로 했다. 그러나 실제로 제해권을 아직 장악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1) 직예결전의 근거지로 여순반도 공략 확보, 2) 청군을 남만주로 끌어들이기 위한 양동작전( 봉천 공격)을 실시, 3) 양동작전 준비로 청군이 집결하는 평양 을 공략한다고 했다. 다음 9월 1일 , 우선 3)를 실시하기 위해, 제1군이 편성되었다.

또한 당시의 전쟁지도는 정치 주도였다 [ 80 ] . 천황의 특지에 의해, 본래 멤버가 아닌 야마시타 추원 의장 과 이토 총리와 육안 외상이 대본영에 열석하고 [ 주석 35 ] , 이토 총리는 서양 열강의 의견을 근거로 한 의견서를 제출하기도 했다(산동 작전의 실시 결정과 대만 공략에 크게 영향).

정치가 군사를 리드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첫째로 통수권 독립의 제도를 만든 당사자였기 때문에, 동 제도의 목적과 한계를 알고 있어, 실정에 맞지 않는 케이스로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을 들 수 있다. 두 번째 요인은 지도층의 성격을 포함한다. 당시의 지도층은 정치와 군사가 미분화의 에도 시대 에 태어나 자란 무사 출신으로, 메이지 유신 후 각각의 개성과 우연 등에 의해 정치와 군사로 진로가 나뉘었다. 따라서 정치 지도자는 군사에, 군사 지도자는 정치에 일정한 견식을 가지고 있고, 또한 양자는 제국주의하의 국제 환경의 상황 인식이 거의 일치하는 것과 동시에, 정치의 우위를 자명하고 있었다( 육군 대학교 · 해군 병학 졸업의 전문직 의식을 가지는 엘리트 군인이 군사 지도자에게 올라가고 있지 않다). 관련하여 번벌 의 존재도 꼽히고 군사에 대한 '정치의 우위' 즉 '번벌의 우위'이기도 했다. 덧붙여 그러한 요인은, 러일전쟁 후 상당히 잃어버렸지만,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소위 「다이쇼 데모 클래시」를 거쳐 의회 제민주주의 가 뿌리 내릴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1930년대 초의 세계 공황 후에 군에 의한 주도로 시프트하게 된다.

일본에 비해 광대한 국토와 막대한 병력을 가진 청은 1884년 당시 압도적으로 우세하다고 여겨졌다 [ 81 ] .

그러나, 거국 일치의 일본과 교전하는 청은, 원래 평시부터 외교와 군사가 불통일이었다. 광서제 의 친정하, 외교·양무(광산이나 철도에 관한 정책 등)를 소관하는 총리 학문 ( 경친왕 등)과 군무를 소관하는 군기처 ( 예친왕 등)가 분리된 채로 있었다(개전 후 9월 29일 , 전쟁지도를 위해 외교와 군사를 통괄하는 포스트가 신설. 게다가 외교가 일체화되지 않았다. 무역항 전체를 관할한다고는 해도, 결정권이 없는 총리 학문(수도 베이징 )과 천진항 에 한정된다고는 해도, 함차 대신으로서 전권을 가지는 북양통상 대신 이홍장(천진)이 2원적으로 외교를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대조선 ​​외교는 대러시아 협상에서 양보를 끌어낸 이리조약 체결년인 1881년 (광서 7년) 이후 예부 에서 병권을 가진 북양통상대신의 직할로 이행해 조선에서 총리 조선 교섭통상사의를 맡은 조세개와 밀접하게 연락을 했다.

군사도 외교와 마찬가지로 개전시 일체화되지 않았다. 상비하는 육해군의 병권이 분산되어 있었던 것도 있고(실질적인 사병 화), 당초 일본과의 개전은 국가를 든 전쟁이 아니라 북양통상대신이 지휘하는 것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장관인 리는 원래 발해 연안의 3성( 직예 · 산동 · 봉천 )의 해방과 그를 위한 병권, 3성 총독 에게 훈령할 수 있는 권한, 조선 출병의 권한을 부여받았다. 또 북양수사( 북양함대 )를 통감함과 동시에 사비를 던져 편성한 용군 중 하나, 이른바 북양육군 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개전 후, 성경 장군 송경 에 예속하는 동삼성 의 연군(정규군 8기 의 흐름을 끄는 정예부대)도 전선에 투입되었으므로, 2원 통수에 빠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 때문에 12월 2일 , 함차대신 리우츠이치산카이관 이동의 전병권이 주어졌다.

이처럼 외교와 군사가 착綜하는 청에는 개전 직전, 이와 관료의 일부, 서태후 등의 무시할 수 없는 전쟁 회피파가 있었다. 7월 16일 군기처와 총리담문 등의 합동회의에서는 개전 자중을 결론으로 ​​삼아 18일 상주됐다. 그 일도 있어 리는, 결과적으로 병력을 순차 투입해 버린다. 그러나 9월 15일 평양에서 패하면 전략 을 크게 전환했다. 19일 상주문에 의해 닛신전쟁에 대해 북양통상대신이 지휘하는 전투에서 국가를 꼽은 전쟁으로 다시 자리를 잡고 지구전을 취하도록 제안했다. 지구전에서 서양 열강의 조정을 기대하고, 그 후 일본과의 강화에 임하는 구상이었다. 9월 29일친왕 에게 외교·군사를 통괄하는 가장 중요한 권한이 주어지는 등 드디어 청나라에서도 국가를 들고 싸우는 체제가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요한 병력에도 문제가 있었다. 공수를 좌우하는 제해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해군력은 증강이 진행되지 않았다. 게다가 군사사가는 해군이 무잔한 패배를 피운 배경으로 군 간부의 부패(포탄의 화약을 전매해 모래로 바꾸고 있던 등)를 꼽고 있다 [ 82 ] .

예를 들어 청의 4함대(북양·남양·복건·광동) 중 전투능력이 가장 높은 북양함대조차 개전 4년 전인 1890년 (메이지 23년)에 취역한 순양함 ' 평원 '( 배수량 2,100t)이 마지막으로 배치된 신조함이었다. 실질적으로 제해권의 귀추를 결정한 황해 해전 에서는, 1892년 (메이지 25년)에 취역해, 광동 수사( 광동 함대 )로부터 편입되고 있던 「광병」(배수량 1,000t)이 참가하지만, 대하는 일본 함대는, 1891년 (메이지 24년) 이후에 취역한 순양함 6척(모두 평원을 웃도는 배수량으로, 4척이 4,200t급) [ 주석 36 ] 이 참가했다.

문제는 해군력뿐만 아니라 육군력에도 있었다. 개전시 상비군의 연군과 용군에는 보 862영(1영당 평균 350명), 말 192영이 있었고, 그 후 신모병 부대가 편성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여러 부대 사이에는 사기나 연도나 장비 등의 차이가 있어 문관의 지휘로 실전에 참여하는 부대도 있는 등 근대화된 일본군과 대조적인 측면이 많았다. 덧붙여 청의 육병은, 자주 전투로 흔들리지 않고, 곧 일본측에 「약병」이라고 보여졌다(일본의 종군 기자 는, 청의 약병만, 키구치 코다이라 등 일본병의 충용 미담 을 보도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후자의 이미지를 조국을 위해서 싸우는 숭고한 병사 로 했다 .

전비와 동원

전비

전비는 2억 3,340만엔(현재 가치로 환산하여 약 2조 3,340억엔)(내역: 임시군사비 특별회계 지출 2억48만엔, 일반회계 의 임시사건비 79만엔, 임시군사비 3,213만엔)로 개전 전년도의 일반회계 결산액 83 ] . 그 중 임군특별회계(1894년 6월 1일~1896년 3월 말일)의 지출액 구성비는 육군비가 82.1%(인건비 18.4%, 양식식비 12.4%, 피복비 10.8%, 무기탄 약비 5.6%, 운송비 16.9%, 기타 18.0%), 해군비가 17.9%(인건비 1.1%, 함선비 6.4%, 무기탄약비· 수뢰 비 5.0%, 기타 5.4%)였다 [ 84 ] . 임군특별회계의 수입액은 2억2,523만엔이며, 주요 내역이 공채금 (내채) 51.9%, 배상금 35.0%, 1893년도의 국고 잉여금 10.4%였다(임군특별회계의 잉여금 2,475만엔). 덧붙여 1893년도 말 일본은행을 포함한 전국은행 예금액이 1억152만엔이었기 때문에, 위의 군사공채 1억1,680만엔의 인수가 쉽지 않고, 국민의 애국심에 호소함과 동시에 지역별로 할당하는 등에 의해 공채 모집이 추진되었다.

1894년(메이지 27년) 8월 16일, 군사 공채 조례가 공포되었다(칙령)(5000만엔을 한도로 한다). 8월 17일, 대장성은, 군사 공채 조례에 의한 군사 공채 3000만엔의 모집을 공시했다(고시). 9월 10일부터 발행, 응모액은 7700만엔여에 달해, 실수액은 3006만엔. 8월 18일, 오쿠라 대신 와타나베 국무는, 관동 동맹 은행 간사 시부자와 에이치·야마모토 나오야·야스다 요시지로 대리 하세가와 치조를 모방해, 군사 공채 모집에 대해 협력을 요청했다. 또 8월에 와타나베 조상은 각 지방관에 대해 군사공채 조례에 관하여 관내의 유지에 응모하도록 내훈했다. 11월 22일, 두 번째 내훈. 11월 21일, 이토 총리, 와타나베 조상은, 도쿄의 은행가 5명(소다 히라고로·나카가미가와 히코지로·야마모토 나오야·소노다 타카요시·야스다 요시지로)를 모방해, 군사 공채 모집 방법을 협의했다. 11월 22일, 대장성은, 군사 공채 5000만엔의 모집을 공포했다(성령). 응모액은 9030만엔여, 실수액은 4763만엔엔.

동원(군부의 대규모 고용)

도쿄 아오야마 정차장에서 출정하는 육군 보병 제3연대 . 1894년 9월 26일.

1893년 (메이지 26년), 육군이 전시편제를 개정해, 다음해부터 신편성이 적용되었다. 그 1894년도 동원 계획에서는 야전 7개사단 [ 주석 38 ]병수부 , 수비제부대(홋카이도의 둔전병 단 포함) 등 인원 220,580명, 말 47,221마리, 야전포 294문을 동원할 수 있는 태세였다 [ 85 ] . 덧붙여 동원 계획상, 전시의 한 개 사단은, 18,500명과 말 5,600마리로 편제되게 되어 있었다.

실제의 동원( 충원 소집 )은, 6월 5일제5사단 의 보병 제9여단으로부터 시작되어, 7월 12일 에 나머지의 보병 제10여단이 계속되었다(한반도의 지형등이 고려되어, 야전 포병 연대의 장비가 야포 에서 산포 로 변경). 7월 24일제6사단이 , 8월 4일제3사단이 , 8월 30일제1사단이 동원에 들어갔고, 또 10월 상순에 제2사단이 동원을 마쳤다 [ 주석 39 ] . 근위사단10월 8일 전투부대의 동원이 끝났지만 파병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병준부 등을 포함한 동원의 완료가 이듬해 2월 16일이 되었다. 제4사단12월 4일 전투부대의 동원이 끝나고 이듬해 3월 초순에 동원이 완료됐다. 그 후, 요가 평원에서의 작전이 완료되면(1895년 3월 9일다소다이 를 공략), 제2기 작전( 직예 결전)의 준비가 시작되었다. 3월 16일 에 참모 총장 고마츠미야 아키히토 친왕 육군 대장이 정청대 총독에 맡겨 직예 결전에서 선진을 맡는 근위사단과 제4사단이 히로시마에서 요동반도로 향했다.

최종적으로 계획을 상회하는 240,616명이 동원되었으며, 그 중 174,017명(72.3%)이 국외로 출정했다. 다만 제4사단 등 실전을 경험하지 않은 채 귀국한 부대도 있다. 또, 문관 등 6,495명, 주로 국외에서 운반에 종사하는 민간인의 군부 [ 주석 40 ] 10만명 이상(153,974명이라고 하는 숫자도 있다)의 비전투원도 동원했다(10년 후의 러일전쟁에서는, 군부(민간인)의 고용에 대신, 병역 경험이 없는 미병 경험이 없다. 또한 20-32세의 병역연령층 에 대해 전투원의 동원률 5.7%(국외동원률 4.1%)로 추계된다 [ 주석 41 ] .

근대 육군의 모델인 불독의 육군은, 철도와 운하를 사용할 수 없는 곳에서 물자 수송을 말에 의지하고 있으며, 또 일본 육군은 독일 육군을 모범으로 병수 수송 계획을 세우고 있었음에도, 물자의 운반을 사람( 배부자 (쇼이코) 와 일륜차, 오하 치차 )에 의지 했다 ] 에 있었다. 특히 말의 제약은 최초로 출동한 제5사단에서 강했다. 동사단은 징마관구 내의 말이 적었던 적도 있어 승마 669마리와 쓰마 789마리의 동원에 머물렀다(위와 같이 장비에서 야포를 제거했기 때문에 포병용 혼마 0마리). 게다가 도보차량(오하치차)을 준비하지 않고, 현지 징발의 조선인 남편과 말이 종종 도망했기 때문에, 병수 부 소속의 군부 1,022명(전투 부대소 속을 포함한 군부 총계 5,191명)이 다마를 당기고, 등받이로 물자를 운반하는 것만으로 부족했고, 때로 전투원도 병수부의 물자 운반에 종사했다.

군기(전지 군법 회의에서의 처벌자 수)

전지 군법회의 에 의한 처벌자가 1,851명 있었다 [ 86 ] . 그 중 군인이 약 30%, 군부가 약 70%를 차지하고, 전체 20%에 해당하는 370명(중죄 3명)이 육군 형법 위반으로, 나머지 8할의 1,481명(중죄 38명)이 형법 등 기타 법령 위반이었다.

국외동원 육군군인 174,017명 중 500명대(0.3% 전후)가 처벌됐다. 내역은 대관관 폭행이 6명(중죄 3명), 도망죄가 11명(군인 이외는 307명)이었다. 평시의 생활과 멀리 떨어진 전장 중에서도, 군기는 대체로 유지되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다만, 전지군법회의에 걸리지 못한 여순 학살 사건이 발생하고 있어 1894년(메이지 27년) 6월 29일자 의 참모 총장으로부터 혼성 여단장 앞으로의 훈령 “양식 등의 운반은 모두 징발의 재료를 사용할 것”을 받아 “대략, 통행의 소 말은 짐을 싣고 가면 거절에 관계없이 유키를 압장한다”(스기무라 쇼 “메이지 27년 주한 고심록”) 같은 행위가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었다. 또 피의자 를 특정할 수 없는 등 처벌에 이르지 못한 형법범죄 등도 당연히 있었다고 생각된다.

일본군의 손해

전사자

700명 이상의 전몰자를 낸 제3사단의 진혼을 위해 나고야시 중심지에 지어진 닛신 전쟁 전몰 기념비 [ 87 ]

참모본부메이지 27년 청전사」에서는 군인·군속의 전사 1,132, 전상사 285, 병사 11,894, 전상병 3,758, 합계 13,488명, 복역 면제(질병, 형벌 등) 3794명으로 전체의 감모 8 ] . 이에 따르면, 군인·군속의 전사, 전상사, 병사의 합계 사자수는 13,311명이 된다.

역사학자 이노우에 키요시 는 1961년의 저서로 일본 육군 12만명 중 전사자수는 5417명으로 한다 [ 89 ] .

방위 핸드북(1992년 아사운 신문사 )에 따르면 전사·전상사 1,567명, 병사 12,081명, 변사 176명, 총 13,824명(전상 3,973명) [ 90 ] .

군부의 손해

역사학 자의 하라다 케이이치 는 2007년 저서로, 참모본부 『 메이지 하치 78년일 청전사 에는 전동원력 24만616 [ 91 ] , ] 라는 점에서 군부도 무장한輜重 수졸 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포함하면 일본군의 동원은 39만 5000명이었다고 한다 [ 92 ] . 하라다는 군부의 사망자 수는 조사되지 않았지만 7000명 이상으로 추정한다 [ 92 ] .

병사자

육군성 의무국편 『메이지 278년역 육군위생사호』에 의하면, 일청전쟁과 대만평정(대만 정복전쟁)을 아울러 육군의 총 환자 284,526명, 총병사자 20,159명(그 각기 이외 16,095명, 79.8 % ) . 흔히 논의가 된 각기 에 대해서는 환자 41,431명, 사망자 4,064명(그 중 조선 142명, 청 1,565명, 대만 2,104명, 내지 253명 [ 주석 43 ] )이었다. 또한 각기 문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육군에서의 각기 대유행을 참조하십시오.

당시 한반도 는 위생상태가 나쁘기도 하고, 또 개발도상국 에서 일본과 달리 화장지가 부족했다(당시 일본에서는 야마무라 가 아닌 한 보급되어 있었다) 때문에 전지에서 전염병이 일어났다 [ 주석 44 ] . 특히 대만에서는 더운 계절에 게릴라전 에 휘말렸기 때문에 [ 주석 45 ] , 근위사 단장키타시라카와 미야노 히사 친왕 육군 중장이 말라리아에서 진몰해 [ 주석 46 ] , 근위 제2 여단장 야마네 신성 육군 소장도 전병사했을 정도였다 [ 주석 . 다만, 히로시마 대본영 에서 참모총장 의 아리스가와 미야 쿠니히토 친왕 육군 대장이 장티푸스 를 발병한 등 국내도 안전하지 않았다. 전지 입원 환자에서 병사한 13,216명 중 5,211명(39.4%)이 콜레라 에 의한 것이었다(육군성편 「제7편 위생」 「메이지 278년 전역 통계」) [ 94 ] . 이어서 소화기 질환 1,906명(14.4%), 각기 1,860명(14.1%), 이질 1,611명(12.2%), 장티푸스 1,125명(8.5%), 말라리아 542명(4.1%), 동상 88명(0.7%).

가장 희생자를 낸 콜레라는 1895년 3월에 발생하여 기온이 상승하는 7월에 피크가 되어 가을구까지 유행했다 [ 주석 48 ] . 출정 부대의 개선에 의해 국내에서 콜레라가 대유행한 적도 있어 [ 주석 49 ] , 그 후, 요시마 (히로시마)·히코시마(시모노세키)·사쿠라지마(오사카)의 3개소에서의 검역이 철저하게 되었다 [ 주석 50 ] (덧붙여 일본의 콜레라 사망자수는 1894년 314명, 1895년 40,241명, 1896년 908명으로 추이하였고, 특히 '95년 사망자수는 닛신 전쟁의 전몰자 수를 크게 웃돌았다 [ 주석 51 ] ).

동상

당시 육군은 충분한 장비와 엄한지에서의 올바른 방한 방법을 숙지하지 않았다. 게다가 비전투시의 병사는 딱딱하고 신었을 때의 기분이 나쁜 군화보다 초신을 신는 것이 많아, 또 물자 운반을 담당한 민간인의 군부는 군화를 지급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많은 병사와 군부가 동상 에 걸려 상당한 전력 저하를 초래했다. 동상은 산동반도 에서의 위해위 공략전 [ 주석 52 ] , 대륙에서의 겨울영, 요하평원의 작전 [ 주석 53 ] 등에서 다발했다. 이 때문에 전후에 그러한 전훈을 바탕으로 방한구 연구와 동계훈련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후년, 대러시아전을 상정한 훈련 중에 일어난 것이 야코다 유키중행군 조난 사건 이다.

민간인의 피해

일본군은 전지에서 식량을 조달할 때 대가를 지불하고 있으며, 현지 민간인에 대하여 약탈 등의 행위가 전무하다는 견해가 있다. 특히 군의 규율은 구미를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다 [ 주석 54 ] . 이는 당시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인정되어 열강의 개입을 막기 위해 엄격하게 국제법 을 준수하고 포로의 취급에 관해서도 모범을 나타낼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며 [ 95 ] 동양 의 군자국 ( 덕의와 예의를 중시하는 나라)로 불렸다. 현지 사람들과의 관계도 양호하고, 예를 들면 일본군이 한반도를 북상할 때, 밭에서 농작업 중인 농민을 만나거나 하면, 그 작업을 돕는 등의 미소짓는 이야기도 남겨졌다(호사카 전 게시).

다만, 그러한 빛과 달리 그림자 부분도 있었다. 지방 출신자로 저학력 자가 대부분의 병사들은, 철도가 없는 도로가 나쁜 전지에서, 보급선이 늘어났기 때문에 식량을 약탈해(징발이 약탈로 바뀌고, 저항하는 청국인 를 때리는 행위 '대유쾌'라고 표현한 군부도 있었다 . 55 ] . 또 만주 전투에서는 시가(타소다이)를 불태우고 있어 전시 국제법 을 적용하지 않은 대만평정에서는 마을 덩굴로 아이도 참가하는 게릴라전대해 예방·징벌적인 살육 ( 사츠 리쿠) 과 취락의 소이가 보통 전투수단이 되었다 .

전시 경제

전시 경제에 대해 후년, 재계의 오고쇼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개전 당초의 예상에서는 전쟁[전비 조달] 때문에 돈 막힘이 심하고, 어느 장사도 불경기가 된다고 하기 때문에 모두 저자세를 취했다 [ 주석 57 ] . 그런데 전쟁이 진행되자 의외처럼 불경기는 커녕 오히려 호경기의 유양이었다.- 종합잡지 ' 태양 ' 1897년 1월 20일호. 다카하시 (1973), 245쪽.

실제로 개전 당초의 비관적인 전망과 달리 전시경제는 과도하게 운영되었다 [ 96 ] . 그 요인으로는 1) 일청전쟁이 비교적 단기적이고 소규모였던 것을 들 수 있다. 이 때문에 병역적령층(20-32세)의 동원률이 5.7%(추계치) 에 그쳤고, 그 대부분이 10개월 이내에 복원 했다. 2) 당시의 일본은 잠재적으로 과잉노동력이 적지 않고, 특히 주요 산업의 농업 [ 주석 58 ] 에서 그 경향이 강했다. 게다가 농촌이나 농산촌 등에서 과잉노동력이 체류하는 가운데(도쿄에서 차남이 남는 등 도시도 일자리가 적었다), 출정병사 유수택에의 농작업 지원도 있었다. 결국 전시하에 농업생산액(실질)이 증가했다 [ 주석 59 ] .

3) 가장 우려된 것이 무기나 탄약 등 군수품 수입증가에 따른 국제수지 적자화( 정화 유출)와 그 증대였다. 정부는 가능한 한 국산품을 조달했지만 여전히 전비의 약 1/3이 외국에 지급되는 상태였기 때문에 민수품 수입을 억제했다. 그러나 수출의 성장과 [ 주석 60 ] , 전지의 지불로 일본의 화폐가 원활하게 유통된 것도 있어, 결과적으로 국제수지는 대폭적인 적자에 빠지지 않고 [ 주석 61 ] , 정화 준비액도 격감하지 않았다 [ 주석 62 ] .

그러나 전쟁의 영향은 산업 등에 따라 다릅니다 [ 97 ] . 상업에 대한 악영향은 민수품의 물류를 멈춘 선박 부족(개전으로 국내 선주의 기선 이 거의 징용) [ 주석 63 ] 을 제외하면 큰 것이 없었다. 공업에 대한 악영향은 원료고 등 상업보다 컸지만 전체적으로 타격이 작았다. 오히려 무기 관련업과 면사 방적업 등 병참에 관련된 산업은 특수 로 활황을 보였다. 다만, 전비조달(다액의 군사공채 발행)을 위한 자금통제에 의해 철도부설 기공연기 등 신규사업이 억제되었다.

포로

경호에 해당하는 순사의 대검을 빼앗고 베기 등의 폭행을 일한 포로를 처형하는 일본군을 그린 우키요에

닛신 전쟁에서는 청군에서는 1790명이 포로 로 잡히고, 그 대부분이 일본 국내의 각 절에 수감되어 특히 노동을 부과할 수 없이 강화 후에는 귀국했다. 이 전쟁 자체가 일본군의 연전 연승에서 단기간에 수렴한 것으로부터의 일본병의 포로가 소수인 것은 확실하지만 청으로부터 인도된 것은 11명, 그 중 10명은 군부였다. 이는 청군은 통신의 미숙이나 중앙의 위령이 각 부대에 닿지 않고 말단이 폭주해 포로를 취하지 않고 살해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영향

개요

펀치 풍자 그림. 소국의 일본이, 대국의 청나라를 깨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제국주의 시대에 열린 일청전쟁은 청나라의 위신실추 등 동아시아 정세를 격변시켰을 뿐만 아니라 닛신 양교전국과 전쟁을 유발한 조선 삼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근대일본은 대규모 대외전쟁을 처음 경험함으로써 '국민국가'로 탈피해 이 전쟁을 전기로 경제가 비약했다 [ 주석 64 ] . 또 전후 번벌정부민당 측 일부가 제휴하는 가운데 적극적인 국가운영으로 전환(재정과 공공투자가 팽창)함과 동시에 현안이었던 각종 정책의 대부분이 실행되어 산업정책과 금융제도와 세제체계 등 이후 정책제도의 원형이 만들어지게 된다 [ 98 ] . 게다가 청나라의 배상금 등을 바탕으로 확장한 군비러일전쟁 을 맞이하게 된다.

대조적으로 패전국의 청은 전비조달과 배상금 지급을 위해 유럽 열강으로부터 다액의 차관 ( 관세 수입을 담보로 하는 등)을 받았고, 또한 요충의 일부를 조차지 로 잃었다. 그 후 의화단의 난으로 반식민지화가 진행되어 멸망(辛亥革命)으로 향하게 된다. 청의 ' 책봉 ' 아래에서 벗어난 조선에서는 일본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가운데 갑오개혁이 이루어지지만 삼국간섭에 굴복한 일본의 정치적·군사적 존재감 저하나 친노파 쿠데타 등에 의해 개혁이 실속됐다. 1897년 (메이지 30년, 광서 23년) 한반도에서 일본이 정치적으로 후퇴하고(위의 개전 원인에서 보고 전승국의 일본도 청과 같이 좌절) 만주 에 러시아가 군사적 진출을 하지 않은 상황 아래 대한제국이 성립하게 된다.

일본 전쟁 전후

현대 국민 국가의 형성

도쿄 히비야 에 가설된 전승 축하의 개선문. 1895년 5월 30일.

헌법발포 (1889년), 부분적인 조약개정 (1894년 일영통상항해조약 에서 영사재판권 철폐), 일청전쟁(1894-95년)의 3점 세트는 탈아입유럽 의 첫걸음이었다 [ 99 ] . 특히 근대적 전쟁의 수행과 그 승리는 제국주의 시대의 국제 사회에서 큰 의미를 가졌다 [ 주석 65 ] . 다만, 구미의 대국에서 일본의 「공사관」이 「대사관」으로 격상되는 것은, 러일 전쟁 후이다. 또 개전을 계기로 국내 정국이 크게 바뀌었다. 중의원에서 내각탄핵상주안을 통과하는 등 이토 내각에 대한 대결 자세를 취해 온 대외경육파 등도 이 내각의 전쟁지도를 전면적으로 지원했다. 즉, 역대 내각과 반정부파의 의원이 대립해 온 제국 의회 초기의 혼돈으로 한 정치 상황이 일변한 것이다(전시하의 정치 휴전.전후도 1895년 11월에 이토 내각(번벌)과 자유당 제휴, 제9의회에서 일본 권업 은행 제3편 등 중요법안을 포함한 과거 최다 93법안이 성립).

무엇보다 세상에서는 청와의 개전이 당황과 긴장으로 맞이했다 [ 100 ] .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중국을 숭배해도 내려다 보는 감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메이지 천황이 청나라와의 전쟁을 순환 것처럼 닛신 전쟁의 발발에 당황하는 국민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승리의 보도가 잇달아 닿자 국내는 크게 솟아나서 전승 축하 회 등 빈번히 진행되어 '제국 만세'가 유행어가 되었다. 전후의 개선 행사도 번성하고 잠시 후 각지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전시중, 남아의 놀이가 전쟁 일색이 되어, 소년 잡지에 전쟁 정보가 넘쳐, 아동이 청국인에게 자갈을 던지는 사건도 일어났다 [ 101 ] . 다만, 육안종광 과 같이 제어가 어려운 호전적 애국주의( 배외주의 )를 위태롭게 하기 위해 정자도 있었다 [ 102 ] .

국민을 향해 가장 많은 전쟁 보도를 한 것이 신문이었다. 신문사는 비용 증가가 경영에 어려웠지만 종군 기자 를 보내는 [ 주석 67 ] 등 전쟁 보도가 강했던 ' 오사카 아사히 신문 '과 ' 중앙 신문 '이 발행 부수를 늘려 반대로 전쟁 보도가 약했던 ' 우체보지 신문 ' ' 매일 신문 ' ' 야마토 신문 ' 몰락 또 충용미담( 서남전쟁 이전과 달리 징병된 '무명' 병사의 영웅화) 등 독자를 열광시킨 전쟁보도는 신문·잡지에서 세계를 인식하는 습관을 정착시키면서 보도기관 의 발달을 촉구했다 [ 103 ] . 그 보도기관은 일면적인 정보를 증폭하고 전하는 등 사람들의 가치관을 단일화해 버릴 위험성을 가졌다. 예를 들어 신문과 잡지는 청나라가 일본보다 문화적으로 늦었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전했다(개명적인 근대국가로 일본을 예찬). 국민 측도 그런 대외멸시 기사를 요구했다.

일청전쟁은 근대일본이 처음 경험한 대규모 대외전쟁이며, 이 체험을 통해 일본은 근대적인 국민국가 로 탈피했다 [ 104 ] . 즉, 히야마 유키오가 지적한 '국민'의 형성이다(전쟁의 통합작용 [ 주석 69 ] ). 예를 들어 전쟁 수행 과정에서 국가 는 사람들에게 '국민'으로서의 의무와 공헌을 요구했고, 그 사람들은 국가와 군대를 일상적으로 의식함과 동시에 스스로 일원이라는 인식을 강화했다. 전쟁의 통합작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오 모토 아츠시 로서의 메이지 천황 이며, 천황과 대본영히로시마 이전은 국민에게 천황 친정을 강하게 인상했다 [ 105 ] . 반면 청과의 교전과 그 승리는 일본인의 중국관에 큰 영향을 주어 중국 멸시의 풍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전장의 편지에 다양한 중국관이 적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은 것은 일면적이고 차별적인 중국관이었다 [ 106 ] . 덧붙여 국내가 일청전쟁에 흥분하고 있을 때, 우에다 만년 이 한어 세계로부터 탈각한 국어 의 확립을 창도해, 한층 더 영토 확대(대만 취득) 등에 근거해 표준어 의 창출을 제기했다 [ 107 ] .

재정·공공투자의 팽창과 경제발전

닛신 전쟁이 한층 떨어지자 영토·배상금 등에서의 승패 낙차 실감 ] 나 배상금의 사도나 삼국 간섭 이나 러시아의 시베리아 철도 건설( 남하 정책 에의 경계) 등을 배경으로, 정부 내에서 전후 경영에 관계되는 의견이 나왔다. 1895년 (메이지 28년) 4월 , 야마가타 아리모토가 “군비 확충 의견서”를 상주해, 8월 15일오쿠라 대신 마츠카타 정의 가 “재정 의견서”(군확과 식산 흥업 을 주장) [ 주석 71 ] 를 각의에, 11월 후임의 와타나베국 무사시상이 '재정의견서'를 각의에 제출했다. 정부는 와타나베안을 약간 수정한 '전후 재정계획안'(1896-1905년)을 제9의회(1895년 12월 25일 소집)에 참고자료로 제출했다.

그 후, 일반 회계의 세출 결산액이 개전 전인 1893년 (메이지 26년)도 8,458만엔(군사비 27.0%, 국채비 23.1%)부터 1896년 (메이지 29년)도 1억 6,859만엔(군사비 43.4%, 국채비 18.1%)으로 두배로 늘었고, 다음 1897년도부터 러일전쟁 중인 1904년 (메이지 37년)도까지 2억엔대로 추이했다 . 108 ] . 세출증대에 따른 세입부족이 3회의 증세, 잎담배 전매제 도, 국채 [ 주석 72 ] 로 보충되어(전전, 중의원의 반대 다수로 증세가 곤란한 상황과 일변), “이후의 일본의 세제체계의 기본적인 원형을 형성했다” [ 주석 73 ] 로 된다. 또한 공공투자도 1893년도 3,929만엔에서 1896년도 6,933만엔으로 76.4% 증가하여 다음 1897년도부터 1억엔 대로 추이 했다 .

재정과 공공투자의 팽창에 나타난 적극적인 정책자세( 부국강병 의 추진)는 [ 주석74 ] ,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전후 경제발전의 주인이 되었다 [ 주석75 ] . 예를 들어, 일청전쟁(군사·전시경제의 양면)에서 해운 의 중요성을 인식한 일본은 1896년 (메이지 29년) 3월 24일 의 ' 항해장려법 '·' 조선장려법 ' 공포 및 선원 양성시책 등에 의해 해운을 발전하게 된다 [ 주석 76 ] . 덧붙여 재정상, 배웅되어 온 제2의 제국대학 이 1897년의 칙령 으로 교토에 설치되는 것, 즉 교토제국대학의 창설 이 정해졌다 [ 주석 77 ] .

1897년 (메이지 30년) 10월 1일 , 영국 금화( 파운드 )로 수령하는 청의 배상금과 환급보 장금을 바탕으로 화폐법 등이 시행되어 은 본위제 에서 금 본위제 로 이행했다( 다만 영국의 금융가 시티 에 배상금 등을 보장해, 일본은행 의 재외 정화 로서 환전권을 발행하는 「파운드환의 본위제」=금환 본위제) [ 110 ] . 본위화폐의 전환에 의해 일본은 '세계의 은행가' '세계의 어음 교환소'가 되고 있던 영국 [ 주석 78 ] 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금융 결제 시스템의 이용, 러일전쟁에서의 전비조달(다액의 외채발행), 대일 투자 확대 등 금본위제의 장점을 누리는 것.

이상을 요약하면 일청전쟁 후 일본은 번벌정부민당 측 일부가 제휴하는 가운데 적극적인 국가운영으로 전환(재정과 공공투자가 팽창)하게 된다. 게다가 현안이었던 각종 정책의 대부분이 실행되어 산업정책(해운업진흥책 등)이나 금융제도(금본위제로 이행·일본권업은행 등 특수은행 의 잇따라 설립)나 세제체계(신세도입·담배전매제) 등 이후 정책제도의 원형이 만들어지게 된다 [ 주석79 ] .

배상금 사용

1896년 (메이지 23년) 3월 4일 , 청의 배상금과 요동 반도 환부보장금을 관리 운용하기 위해 상금특별회계법이 공포되었다 [ 111 ] . 1902년 (메이지 35년) 도말 현재, 이 특별 회계의 수입 총액이 3억 6,451만엔이 되고 있었다. 내역은 배상금이 3억 1,107만엔(85.3%), 환급보장금이 4,491만엔(12.3%), 운용이식·차증이 853만엔(2.4%)이었다. 또 이 특별회계의 지출 총액이 3억 6,081만엔으로, 공제 370만엔의 잔액이 있었다. 지출 내역은 닛신 전쟁의 전비( 임시 군사비 특별 회계 에 이입)가 7,896만엔 21.9%, 군 확비가 2억 2,606만엔 62 .6%(육군 5,680만엔 15.7%, 해군 1억 3,926만엔 38.6%, 군함 수뢰정 보충 기금 3,000만엔 8.3%), 그 외가 15.5%( 제철소 창립비 58만엔 0.2%, 운수 통신비 321만엔 0.9%, 대만 경영비 보충 1,200만엔 3.3%, 제실 어료 편입 2,000만엔 5.5%, 재해 준비 기금 1,000만엔 2.8%), 교육기금 1,000 112 ] . 이처럼 청의배상금 등은 전비와 군확비에 3억502만엔 84.5%가 사용됐다.

덧붙여 1896년도부터 1905년도의 군 확비는 총액 3억 1,324만엔이었다(단 제3기의 해군 확장 계획을 포함하지 않는 제1기와 제2기의 계획분). 사도의 구성비는, 육군이 32.4%(포대 건축비 8.6%, 영선과 초년도 조변비 16.0%, 포병 공창 공장 확장비 5.8%, 그 외 1.9%), 육육함대 계획 을 세운 해군이 67.6%(조선비 40.0 %, 조병비 21.2. 또 재원의 구성비는 청나라의 배상금·환급보장금이 62.6%, 조세가 12.7%, 공채금이 24.7%였다.

청나라 전후

서양 열강에서 대국으로 인식되고 있던 청이 일본에 패한 것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뒤흔드는 일대 사건이었다. 닛신 전쟁에 의해 열강은 청나라에 대한 인식을 지금까지의 「잠자는 사자」라고 하는 대국적인 것으로부터 바꾸게 된다.

그 청은 전비조달과 배상금 지급을 위해 열강으로부터 다액의 차관 ( 관세 수입을 담보로 하는 등)을 받았고, 또 양항 등 요충의 일부를 조차지 로 잃었다. 패배는 양무운동 의 실패를 의미하며, 대외적 위기가 높아지는 가운데, 이른바 변법파에 의해 일본의 메이지유신 에 휩싸인 변법자강운동 이 주창되고, 강유위 들은 메이지유신 을 모델로 하여 입헌군주제 에 근거한 개혁을 요구하는 상주를 실시했다 [ 113 ] . 1898년 (광서 24년), 광서제 가 변법파와 맺어 급격한 변혁(戊戌의 변법 )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실패했다(戊戌의 정변 ). 한편 1890년대 손문 들은 공화제 혁명주창해 일본, 미국 등에서 활동했다. 1890년 에는 홍인문사가 홍콩 에서 설립되었고, 손문은 1894년 하와이 에서 흥중회를 결성했다. 1895년 에 무장봉기에 실패, 일본에 망명. 닛신 전쟁 이후 증가하고 있던 일본 유학생은 1904년에는 2만명을 넘어 당시 유학생( 장병 , 청용 , 진천화 등) 사이에는 혁명사상이 침투했다. 1900년 (광서 26년) 의화단 의 난 에서는 청이 선전포고를 한 각국의 연합군에 수도 베이징 을 점령받는 비상사태가 되어 국권 의 일부 부정을 포함한 베이징 의정서 를 체결하는 등 큰 대가를 지불했다. 게다가 남하 정책을 취하는 러시아의 만주 점령을 초래했다. 이상과 같이 청은 일청전쟁에서의 패전을 계기로 반식민지화가 급속히 진행되어 최종적으로 멸망(辛亥革命)하게 된다.

조선전중 전후

1894년 7월 23일 (광서 20년 6월 21일 ) 일본 주도의 정변에 의해 김홍집 내각이 탄생하자 닛신 전쟁 중 어부 중이나 김정식 등 신개혁파 관료 함께 개혁이 이루어졌다(1 갑오 개혁 ) [ 114 ] . 고종 · 비파· 대원군 파 관료들의 저항이 강하기 때문에 10월 착임한 이노우에 공사의 요청에 따라 망명 중인 박영효서광범 을 더한 제2차 금내각이 발족해 개혁이 추진되었다(제2차 갑오개혁). 다음 해 4월 17일 (다음 해 3월 23일 ), 닛신 강화 조약의 조인에 의해, 조선은 청과의 종번 관계가 해소되었다(제1조). 그러나 직후의 삼국간섭 으로 일본의 위신이 실추해 6월에 제2차 금내각이 붕괴했다 [ 115 ] . 그러한 정세 아래, 10월 8일 ( 8월 20일 )에 을미 사변 (섬비암살 사건)이 일어났다. 대원군이 집정에 옹립돼 친로파가 일소되는 가운데 성립한 4차 김홍집 내각은 태양력 채용과 단발령 등 국내 개혁을 다시 진행했다. 그러나 개혁에는 정부 내뿐만 아니라 지역에 뿌리를 둔 양반유학자 들도 반발했다. 다음 1896년 ( 건양 원년) 1월 ' 위정척사 '를 내걸는 전통적인 수구파 [ 주석 80 ] 가 정권 타도를 목표로 거병했다(초기 의병 운동). 농민층을 휘말린 내란을 진압하기 위해 왕궁의 경비가 어려워졌을 때 정권에서 쫓긴 친노파가 쿠데타 를 결행했다. 친노파는 러시아 수병의 도움을 얻으면서 후를 살해당한 고종과 그 아이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2월 11일 신정부를 수립했다( 노관 파천 ). 이날 총리대신 김홍집은 광화문 밖에서 군중에게 타살당했다( 갑신정변 에서의 급진적 개화파( 독립당 )의 괴멸에 이어 온건적 개화파도 정치적으로 말살되었다). 

이처럼 닛신 개전에서 이어지는 무력을 배경으로 한 일본의 단독 진출은 닛신 강화 조약의 조인으로부터 1년도 지나지 않아 좌절했다. 즉 일본 주도에 의한 조선의 내정개혁과 '독립'(실질적인 보호국화)의 좌절이었다. 그 결과, 의화단의 난후에 러시아가 만주 를 점령하기까지의 사이,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가 코야스를 유지하게 된다. 청나라 패전 후 한반도에서 일본이 정치적으로 후퇴하고 만주에 러시아가 군사적 진출을 하지 않은 상황 아래 [ 주석 81 ] 1897년 ( 광무 원년) 10월 12일 고종황제 즉위식을 거행해 국호를 '제한'으로 '대한'으로 '대한'. 덧붙여 이 전후, 청과의 종번 관계의 상징이었던 「영은문」 및 「치욕비」라고 불리는 대청황제 공덕비 가 쓰러져, 전자의 터에 프랑스의 에트월 개선문 을 본뜬 「독립문」이 세워졌다.

기타

  • 구미의 군사적 위협을 느낀 닛신 양국은 구미로부터 무기 수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각 군(일본의 경우는 구번 )이 개별적으로 수입했기 때문에 다양한 국적·형식의 것이 혼재하여 탄약 보급과 유지보수에 지장을 주고 있었다. 1880년 (메이지 13년) 일본 육군 무라타 케이요시 가 최초의 국산 소총 개발에 성공했다. 육군은 그것을 무라타 총 이라고 명명하고 소총의 전환을 진행했다. 그 후, 동총은 개량을 진행하면서 전군에 지급되어 갔다. 닛신 전쟁 당시 무라타 총의 최신형이 전군에 넘어가지 않았지만, 탄약과 주요 부품으로 무라타 총의 신구형에 호환성이 있었기 때문에 탄약 등의 대량 생산이 이루어지면서 효율적인 보급이 가능했다.
  • 1894년 가을, 군수품이 된 쇠고기 통조림이 치솟는 것과 동시에, 도쿄 부의 통조림집이 대번성했다(24시간 조업, 직공이 하루에 3일분의 임금을 벌고, 축축된 소가 하루 150마리 정도). 우유 400g이 4 에서 10전에, 타쿠안 100통이 57엔에서 100엔 이상으로 급등했다. 서동추남 『일본식 생활사 연표』라쿠보 서방, 1983년, 94-95페이지.
  • 전후 1896년 8월 1일 , 전중에 병몰한 노히사 친왕치인 친왕 의 초상을 그린 2전과 5전의 총 4종류의 우표 가 발행되었다. 이들은 일본에서 발행된 최초의 초상 우표였다. 기념 우표 등 명이 적혀 있지 않지만 당시 신문 [ 116 ] 에서 ‘메이지 하츠하치전전 전전 기념’으로 소개된 것 외에 현재 사쿠라 일본 우표 카탈로그 ( 일본 우취 협회 편) 등에서 ‘일청 전쟁 승리 기념’ 우표로 소개되었다.
  • 청병에 비하면 일본병은 평균 신장이 1.8㎝ 낮지만, 평균 체중이 6.5㎞ 무겁고, 악력이 10㎞ 강한 등 근육량이 많아, 폐활량도 훨씬 웃돌고 있었다 [ 117 ] .

관련작품

소설
  • 진순신『강은 흐르지 않고-소설일청전쟁』(전3권) 중앙공론사, 1981년
영화

관련 항목

각주

参考文献(五十音順)

統計資料

  • 大川一司ほか『長期経済統計1 国民所得』東洋経済新報社、1974年。
  • 梅村又次ほか『長期経済統計2 労働力』東洋経済新報社、1988年。
  • 梅村又次ほか『長期経済統計9 農林業』東洋経済新報社、1966年。
  • 江見康一塩野谷祐一『長期経済統計7 財政支出』東洋経済新報社、1966年。
  • 総務庁統計局監修『日本長期統計総覧』第1巻、日本統計協会、1987年。
  • 総務庁統計局監修『日本長期統計総覧』第3巻・第5巻、日本統計協会、1988年。

外部リン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