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25

영화 가네코 후미코 - 박열 - 줄거리 평론 비교

영화 가네코 후미코 줄거리 및 평론 - Google Gemini




세진님, 요청하신 영화 <가네코 후미코: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金子文子 何が私をこうさせたか, 하마노 사치 감독)의 줄거리와 평론입니다.

<작품 정보>

감독: 하마노 사치

주연: 나하나(가네코 후미코 역), 코바야시 카츠야(박열 역)

개봉: 2026년 / 121분

<줄거리 요약>
1923년 간토대지진 직후, 일본 제국주의 정권은 혼란 수습과 조선인 학살에 대한 비판을 덮기 위해 조선인 혁명가 박열과 그의 동지이자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를 천황 암살을 획책했다는 대역죄로 날조 기소한다. 법정에서 거짓 무죄를 호소하는 대신 국가 권력의 모순을 정면으로 고발한 두 사람에게 대심원은 사형을 선고하지만, 곧이어 일왕의 은사(사면) 형태로 무기징역 감형 처분을 내린다.

그러나 후미코는 국가 권력이 시혜처럼 베푸는 감형장을 찢어버리며 천황제에 대한 굴복을 단호히 거부한다. 도치기 여자형무소로 이송된 후미코는 옥중에서도 전향과 순응을 강요하는 간수, 교화사, 특고경찰의 압박에 맞서 타협 없는 단독 투쟁을 이어간다. 영화는 사형 판결 직후부터 1926년 7월 23일 스물셋의 나이로 옥중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역사 속에 공백으로 남아 있던 <121일간의 기록>과 후미코가 남긴 단가(短歌)들을 바탕으로 그녀의 결단을 응시한다.

<작품 평론: 타협 없는 실존과 주체적 저항의 기록>
<1. 박열의 '동반자'를 넘어선 독립적 사상가의 복원>
기존 미디어가 가네코 후미코를 식민지 조선 청년 박열을 사랑한 헌신적 조력자의 틀에 가두곤 했던 것과 달리, 이 작품은 후미코를 철저히 독립된 아나키스트이자 허무주의 사상가로 화면 중심에 세운다. 가부장제의 학대와 빈곤, 제국주의적 억압 속에서 단련된 그의 사상은 타인에게 의탁한 신념이 아니라 온몸으로 체득한 실존적 반역이다. 포스터에 적힌 <현존하는 모든 것을 때려 부수는 것이 나의 직업이다>라는 선언처럼, 작품은 기존 질서 전체를 부정했던 후미코의 치열한 내면을 가감 없이 담아낸다.

<2. 시혜적 권력에 대한 거부와 죽음의 자유>
영화의 핵심 동력은 국가가 베푸는 생명 연장(은사)을 거부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권력은 감형을 통해 체제의 관용을 선전하고 후미코를 순종적인 복종자로 만들려 하지만, 후미코는 이를 단호히 거절한다. "손발이 부자유할지라도 죽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죽음은 자유다"라는 그의 시구처럼, 후미코에게 자사는 절망에 의한 도피가 아니라 권력이 빼앗을 수 없는 마지막 주체적 선택이자 투쟁의 완성이 된다.

<3. 밀실의 침묵을 찢는 시(詩)적 울림>
여성의 주체성과 저항의 역사를 집요하게 기록해 온 하마노 사치 감독은 화려한 시대극의 외피를 걷어내고, 차가운 독방 안에서 벌어지는 팽팽한 심리적 긴장에 집중한다. 배우 나하나의 결연한 눈빛과 후미코가 남긴 단가들이 겹쳐지며, 100년 전 한 청년이 감내해야 했던 고독과 신념의 무게를 현대의 관객에게 묵직하게 전한다. 국가와 체제가 개인의 존엄을 억압할 때 인간은 어디까지 저항할 수 있는가를 묻는 처절하고도 숭고한 헌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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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가네코 후미코—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金子文子 何が私をこうさせたか>, 하마노 사치(浜野佐知) 감독, 2025

이 영화는 2026년 2월 일본에서 개봉한 121분짜리 전기영화다. 주인공은 일본의 아나키스트이자 허무주의자였던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1926)이며, 특히 박열과 함께 대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은 뒤 감옥에서 죽기까지의 마지막 121일을 중심으로 한다. 감독 하마노 사치는 가네코를 단순히 <박열의 일본인 연인>으로 다루지 않고, 독립된 사상가이자 국가권력에 맞선 여성으로 복원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1. 줄거리

가네코 후미코는 1903년에 태어났다. 아버지가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 어린 시절에는 법적 호적도 없는 <무적자(無籍者)> 상태였다. 가정에서도 안정된 보호를 받지 못했고, 9세 무렵 조선에 살던 친척 집으로 보내진다.

그러나 조선에서의 삶도 평탄하지 않았다. 친척 집에서 심한 차별과 학대를 받았으며, 동시에 일본 식민지배 아래 조선인들이 겪는 차별을 직접 목격한다. 특히 1919년 3·1운동은 후미코에게 중요한 경험이 된다. 자신을 학대한 일본인 가족과 식민지배를 당하는 조선인들의 모습을 함께 보면서, 개인적인 억압과 국가적 억압 사이의 연관성을 깨닫기 시작한다.

일본으로 돌아온 뒤 도쿄에서 노동과 학업을 병행하면서 여러 사상을 접한다. 기독교에서 사회주의로, 사회주의에서 아나키즘으로 이동하고 궁극적으로는 허무주의적 사상에 접근한다.

그 과정에서 조선인 독립운동가 박열을 만난다.

두 사람은 연인이 되는 동시에 사상적 동지가 된다. 일본 제국주의와 천황제, 식민주의를 비판하고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해 활동한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발생한다.

지진 직후 일본에서는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대규모 조선인 학살이 벌어진다. 이 혼란 속에서 박열과 가네코도 체포된다.

당국은 이들을 황태자 암살을 계획한 폭탄 음모 사건과 연결시키고 결국 <대역죄>를 적용한다.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단순히 자신들은 무죄라고 항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일본 천황제와 국가권력 자체를 법정에서 공개적으로 공격하면서 재판을 일종의 정치적 투쟁의 장으로 바꾸었다.

1926년 3월 두 사람에게 사형이 선고된다.

얼마 뒤 천황의 은사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지만, 가네코는 이 은사장을 찢어버린다. 자신을 죽이겠다고 판결한 국가로부터 다시 목숨을 <선물받는 것> 자체를 거부한 것이다.

이 영화는 여기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가네코는 도치기 여자형무소에 수감된다. 국가권력은 그녀에게 천황의 은혜에 감사하고 충성의 태도를 보일 것을 요구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거부한다.

영화는 이 마지막 121일 동안 가네코의 외부 행동보다 내적인 투쟁을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1926년 7월 23일, 23세의 가네코 후미코는 독방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된다. 공식 기록은 자살이다. 영화 역시 기본적으로 이 기록을 따른다.


2.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 <박열의 여자>가 아닌 가네코 후미코

한국에서는 가네코 후미코를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2017)을 통해 알게 된 사람이 많다.

그러나 하마노 사치는 바로 그 관점을 뒤집으려 한다.

『박열』에서는 자연스럽게 박열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고 가네코는 매우 강렬한 인물이지만 결국 박열과의 관계 속에서 등장한다.

반면 『가네코 후미코—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의 질문은 다르다.

<박열은 가네코에게 누구였는가?>가 아니라

<가네코는 스스로 어떤 사람이었는가?>

를 묻는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 박열은 중요한 사람이지만 중심은 아니다. 영화의 진정한 상대역은 박열이 아니라 <국가>다.

가네코 대 일본제국.

여기에 이 영화의 독특한 힘이 있다.


3. 제목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이 제목은 단순히 불행한 어린 시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왜 이런 반역자가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가깝다.

영화가 제시하는 답은 하나가 아니다.

가족의 학대, 여성차별, 가난, 무적자라는 사회적 배제, 일본 사회의 계급질서, 식민지 조선에서 목격한 민족차별, 천황제 국가의 폭력 등이 겹겹이 쌓인다.

따라서 가네코의 반항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정치적 신념이 아니다.

<삶 전체가 그녀를 국가와 사회질서에 대한 근본적 회의로 밀어붙였다>는 것이 영화의 해석이다.

하마노 감독 역시 가네코가 일본 사회의 여러 차별에 맞섰다는 점을 자신의 여성 영화감독으로서의 경험과 연결해 설명했다.


4. 가네코의 사상은 단순한 조선 독립운동이 아니다

한국에서 가네코를 기억할 때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그녀가 조선 독립운동에 깊은 공감을 가졌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녀를 단순히 <일본인 친한파 독립운동가>로 이해하면 사상의 상당 부분을 놓친다.

가네코는 일본 제국주의만 반대한 것이 아니다.

그녀의 문제는 훨씬 근본적이었다.

국가, 천황, 권위, 가족제도, 남성 지배, 자본주의적 착취 등 인간 위에 군림하는 거의 모든 제도적 권위를 의심했다.

그래서 박열과의 관계도 흥미롭다.

두 사람의 사랑은 민족을 초월한 낭만적인 한일 연애라기보다는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

는 공동의 정치적·윤리적 신념에서 나온 동지관계였다.

이 때문에 가네코에게 조선의 해방은 일본과 조선이라는 두 민족 사이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지배하는 인간과 지배당하는 인간 사이의 문제>였다.


5. 영화가 마지막 121일에 집중하는 이유

영화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선택이다.

가네코의 어린 시절이나 박열과의 격렬한 활동기가 훨씬 드라마틱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영화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를 선택한다.

사형판결도 났고 조직도 해체됐으며 박열과도 떨어져 있다.

남은 것은 한 명의 여성과 국가기관뿐이다.

따라서 영화의 핵심 갈등은 행동이 아니라 <복종 여부>다.

국가는 말한다.

<네 생명을 살려주었으니 감사하라.>

가네코는 말한다.

<나는 당신에게 내 생명을 맡긴 적이 없다.>

그래서 은사장을 찢는 행동은 영화 전체를 압축하는 상징이 된다.


6. 죽음은 패배인가

여기서 영화는 매우 어려운 문제에 도달한다.

가네코가 결국 자살했다면 국가권력이 승리한 것인가?

영화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육체적으로는 국가가 그녀를 감옥에 가두었지만, 마지막까지 <내가 내 삶의 주인이다>라는 권리를 넘겨주지 않았다는 식으로 그녀의 죽음을 해석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는 비판적 거리가 필요하다.

자살을 지나치게 <최후의 자유>나 <완전한 저항>으로 미화하면 실제 인간 가네코가 경험했을 절망과 고통을 낭만화할 위험이 있다.

더구나 형무소에서의 마지막 121일에 대해서는 사료가 매우 제한적이다. 한 일본 관객의 평가에서도 남아 있는 자료가 주로 가네코의 단가(短歌) 등 제한적인 기록이어서, 감옥 안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상당 부분 알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따라서 영화의 감옥 장면 상당 부분은 역사적 재구성이면서 동시에 감독의 상상이다.

이 점은 영화를 역사적 기록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중요하다.


7. 일본 영화라는 점도 중요하다

이 작품의 의미 가운데 하나는 <한국인이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영화>가 아니라 <일본 감독이 일본 국가권력에 반역한 일본 여성의 이야기를 만든 영화>라는 사실이다.

가네코의 존재는 일본 제국주의의 가해자/피해자 구도를 조금 복잡하게 만든다.

일본인이라고 모두 제국의 지배자였던 것은 아니었고, 조선인이라고 모두 동일한 방식으로 식민지를 경험했던 것도 아니다.

가네코는 일본인이면서 일본 제국의 질서에서 철저하게 주변화된 여성이었다.

바로 그런 사람이 조선에서 또 다른 피억압자를 발견했다.

여기에서 그녀의 조선에 대한 연대는 단순한 동정과 다르다.

<당신이 당하는 억압과 내가 당하는 억압의 근원에는 같은 지배 논리가 있다>

는 인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8. 『박열』과 비교하면

두 영화는 서로 경쟁하기보다는 상당히 좋은 짝을 이룬다.

『박열』이

<박열과 가네코가 일본 국가권력을 조롱하며 벌이는 정치적 법정극>

이라면,

『가네코 후미코—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는

<모든 동료와 분리된 뒤 한 인간이 국가권력 앞에서 마지막까지 자기 자신을 지키는 내면극>

에 가깝다.

전자가 두 사람의 <공동투쟁>이라면 후자는 한 사람의 <고독한 투쟁>이다.

그래서 이미 『박열』을 본 사람에게도 이 영화는 상당히 다른 가네코를 보여준다.


9. 평론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가네코 후미코를 민족화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한국에서는 그녀를 <조선을 사랑했던 일본 여성>로 기념하고 싶은 유혹이 있고, 일본에서는 <특이한 여성 아나키스트> 정도로 축소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가네코는 어느 쪽에도 편안하게 들어맞지 않는다.

그녀가 제기한 질문은 훨씬 위험하다.

<국가는 인간에게 왜 복종을 요구할 권리가 있는가?>

<천황이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가?>

<가족·민족·국가라는 이름으로 개인을 희생시켜도 되는가?>

그리고 궁극적으로,

<한 인간은 자신의 삶을 누구에게도 양도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가?>

가네코 후미코가 100년 뒤에도 불편한 인물로 남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포스터의 문구가 이 영화를 매우 정확하게 압축한다.

<現に在るものをぶち壊すのが私の職業です>

즉,

<지금 존재하는 것을 부숴버리는 것이 나의 직업입니다.>

그녀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남긴 정치가는 아니었다. 바로 이것이 그녀의 사상의 한계이기도 하다. 무엇을 파괴할 것인지는 명확하지만, 그 뒤 무엇을 만들 것인지는 훨씬 흐릿하다.

그럼에도 가네코의 역사적 가치는 다른 데 있다.

그녀는 23년밖에 살지 않았지만 <민족의 경계를 넘어 억압받는 사람이 다른 억압받는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 가능하다는 드문 사례를 남겼다.

그래서 이 영화는 단순한 <박열의 연인 이야기>도, 일본 아나키스트의 전기도 아니다.

<식민주의·가부장제·국가주의의 여러 층위에서 주변부에 놓였던 한 여성이 끝까지 자기 삶의 주권을 주장한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100년 전의 가네코 후미코는 여전히 상당히 현대적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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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영화 박열 줄거리 평론, 2) 두 영화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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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님, 요청하신 한국 영화 <박열>의 줄거리 요약 및 평론과 하마노 사치 감독의 <가네코 후미코: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와의 비교 분석입니다.

<1. 한국 영화 '박열' (2017, 이준익 감독)>

<작품 정보>

감독: 이준익

주연: 이제훈(박열 역), 최희서(가네코 후미코 역)

개봉: 2017년 / 129분

<줄거리 요약>
1923년 간토대지진 직후, 일본 내각은 사회적 혼란을 덮고 조선인 학살(간토 대학살)에 쏠린 비판을 피하기 위해 시선을 돌릴 배후 세력을 찾는다.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는 도쿄에서 아나키스트 단체 '불령사'를 이끌던 조선 청년 박열을 지목해 천황 암살을 모의했다는 '대역죄' 혐의로 몰아세운다.

일본 권력의 정치적 의도를 간파한 박열과 그의 사상적 동지이자 연인인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는 피하거나 변명하는 대신, 법정을 무대로 삼아 제국주의의 위선과 조선인 학살의 진실을 전 세계에 폭로하기로 결심한다. 두 사람은 조선 예복 착용, 피고인과 판사의 동등한 좌석 배치 등을 요구하며 재판정을 권력 풍자의 장으로 바꾼다. 사형 판결 이후 일왕의 은사로 무기징역 감형이 내려지지만, 두 사람은 타협 없이 자신들의 신념을 지킨다. 영화는 후미코의 옥중 죽음과 끝까지 살아남아 저항을 이어가겠다는 박열의 다짐으로 맺어진다.

<작품 평론: 풍자와 연대로 일궈낸 반제국주의 법정극>
이준익 감독의 <박열>은 한국 독립운동사 영화의 전형적인 비장미나 민족주의적 신파에서 과감히 벗어난 작품이다. 영화는 박열을 초월적 영웅으로 미화하지 않고, 체제의 모순을 조롱하며 법정을 하나의 거대한 극장으로 전복시킨 전략적 아나키스트로 묘사한다.

특히 일본인 여성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를 민족주의의 주변부 인물이 아닌, 독립된 주체이자 사상적 동등자로 전면에 배치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국적과 민족을 초월한 두 사람의 연대는 제국주의라는 거대한 폭력 기구에 맞서는 보편적 자유와 인간 존엄의 가치를 경쾌하면서도 묵직하게 설득해 낸다.

<2. 두 영화의 비교 분석: '박열' vs '가네코 후미코: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시선의 중심과 서사적 초점>

<박열>: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라는 두 인물의 상호작용과 '불령사' 동지들의 연대에 초점을 맞춘다. 간토대지진 직후부터 재판이 진행되는 1923~1926년의 법정 투쟁 과정이 서사의 중심축이다.

<가네코 후미코: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철저하게 가네코 후미코라는 단독자의 내면과 실존에 카메라를 둔다. 사형 판결 이후 도치기 여자형무소로 이송되어 1926년 7월 23일 자사에 이르기까지, 기존 기록에서 공백으로 남아 있던 <121일간의 옥중 투쟁>을 정밀하게 복원한다.

<장르적 문법과 톤앤매너>

<박열>: 대중 영화의 리듬감을 갖춘 시대극이자 법정 드라마의 형태를 취한다. 일본 제국주의 권력의 부조리를 폭로하는 과정에서 통쾌한 풍자와 유머, 역동적인 연대감을 적극 활용한다.

<가네코 후미코: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독방이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정적이고 치열한 심리 드라마의 형식을 띤다. 후미코가 남긴 단가(短歌)를 낭독하며 그의 실존적 고뇌와 허무주의적 저항 의지를 시적(詩的)이고 묵직한 호흡으로 응시한다.

<저항과 '죽음'을 다루는 태도>

<박열>: 박열의 "나는 살아남아 끝까지 싸우겠다"는 생존 의지와 후미코의 결단이 대비를 이루며, 역사적 진실을 남기려는 '기록과 폭로'로서의 투쟁에 무게를 둔다.

<가네코 후미코: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국가 권력이 시혜처럼 내민 '은사(감형)'를 거부하고, 체제의 통제에 온몸으로 맞서 주체적으로 선택한 '죽음의 자유'를 탐구한다. 박열의 파트너라는 위치를 넘어 가부장제와 천황제 전체를 부정했던 급진적 아나키스트의 완성된 자의식을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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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영화 박열 줄거리 평론, 2) 두 영화의 비교

1) 한국 영화 『박열』 줄거리와 평론

이준익 감독의 『박열』(2017)은 제목만 보면 조선인 아나키스트 박열의 전기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일본 제국을 상대로 벌인 공동의 정치극>에 더 가깝다. 영화는 1923년 관동대지진 뒤 벌어진 조선인 학살과 일본 정부의 책임 회피를 중심 사건으로 삼는다.

박열은 도쿄에서 인력거를 끌며 생활하면서 조선인과 일본인 아나키스트들과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한다. 그는 천황제와 식민지배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급진적 청년이다. 그런데 그의 시 「개새끼」에 매혹된 일본 여성 가네코 후미코가 그를 찾아온다. 후미코 역시 국가와 천황, 가족제도와 권위에 반감을 가진 아나키스트다.

두 사람의 만남은 전형적인 연애영화와 다르다. 서로에게 순종하거나 소유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우고 동지가 된다. 영화에서 두 사람은 장난스럽고 거칠고 때로는 우스꽝스럽다. 이것은 이준익 감독의 중요한 선택이다. 독립운동가를 엄숙한 성인으로 만들기보다 살아 있는 젊은 반역자로 그린다.

그러던 중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발생한다. 혼란 가운데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이 방화한다>는 유언비어가 퍼지고 일본 군·경과 자경단에 의해 수많은 조선인이 살해된다.

영화는 일본 정부가 이 학살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박열을 이용했다고 해석한다. 박열이 이전부터 황태자 공격을 위한 폭탄 입수를 모색했던 사실을 확대하여 <천황가를 전복하려는 조선인의 거대한 음모>를 만들어냄으로써, 관동대학살에서 세간의 관심을 돌리려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역전이 시작된다.

박열은 정부의 의도를 눈치채면서도 도망가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말하자면,

<그렇다면 당신들이 만들어준 무대를 우리가 이용하겠다>

는 태도를 취한다.

후미코도 함께 대역죄 피고인이 되기를 선택한다.

따라서 재판은 일본 제국이 박열을 심판하는 장소에서 박열과 후미코가 <일본 제국을 심판하는 장소>로 뒤집힌다.

두 사람은 법정에서 천황의 권위를 조롱하고, 조선인 학살을 폭로하고, 일본 제국의 도덕적 정당성을 공격한다. 재판에서 황제와 황태자를 상징하는 복장을 요구하는 등의 행동도 이 정치적 연극의 일부가 된다.

결국 두 사람에게 사형이 선고되지만 곧 무기징역으로 감형된다. 후미코는 감형을 천황의 은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후 두 사람은 떨어져 수감되고, 후미코는 1926년 감옥에서 죽는다. 박열은 장기간 복역하다 해방 이후인 1945년에 석방된다.

이 영화의 핵심은 <독립운동>보다 <제국의 권위 파괴>다

『박열』을 단순한 항일영화로 보면 영화의 절반만 보는 셈이다.

박열과 후미코는 일본인은 악하고 조선인은 선하다는 민족주의적 구도로 움직이지 않는다. 후미코 자신이 일본인이고, 불령사에도 일본인 동지가 존재한다.

두 사람이 공격하는 대상은 <일본인>이 아니라

<천황제·식민주의·국가권력이 인간을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

그 자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일반적인 독립운동 영화보다 훨씬 아나키즘적이다.

<관동대학살>을 배경이 아니라 정치의 핵심으로 만든 점

영화에서 정말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폭탄사건보다 관동대학살이다.

박열 사건은 일본 정부가 학살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조선인을 위험한 집단으로 만드는 데 이용된다. 실제 영화도 이 학살을 은폐하려는 국가의 정치적 필요와 박열의 대역사건을 직접 연결한다.

따라서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꽤 현대적이다.

<국가는 위기에 처했을 때 누구를 희생양으로 만드는가?>

지진이라는 자연재난이 순식간에 인종적 폭력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박열』은 단순한 역사극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영화의 가장 훌륭한 인물은 사실 후미코다

흥미롭게도 제목은 『박열』인데 가장 강렬하게 남는 인물은 가네코 후미코다.

최희서가 연기하는 후미코는 박열에게 끌려다니는 일본 여성이 아니다. 오히려 처음부터 자신의 사상을 가지고 박열을 선택한다.

그래서 두 사람의 관계는

<독립운동가와 그를 사랑한 일본 여자>

가 아니라

<서로 독립적인 두 반역자가 만난 것>

에 가깝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박열』 이후 한국에서 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 영화에는 한계도 있다. 후미코가 워낙 매력적인 인물로 만들어지다 보니 그녀의 어린 시절 학대, 조선 체험, 사상적 변화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일부 평론에서도 후미코가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면서도 그녀의 사상적 동기가 충분히 탐구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바로 그 빈자리를 새 일본 영화 『金子文子 何が私をこうさせたか』가 파고든다고 볼 수 있다.


2)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비교

두 영화는 같은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다루지만 시선은 거의 반대 방향이다.

『박열』(2017)『가네코 후미코』(2026)
제작국한국일본
중심인물박열 + 후미코가네코 후미코
핵심 시대관동대지진부터 재판후미코의 생애 + 마지막 121일
핵심 사건관동대학살과 대역사건후미코가 왜 반역자가 되었는가
주된 상대일본 제국정부국가·천황제·가부장제·권위
박열의 위치주인공후미코 인생의 중요한 동지
후미코의 위치공동주인공에 가까움절대적 중심
영화적 성격정치극·법정극·블랙코미디전기극·심리극·감옥극
중심 질문<어떻게 제국의 재판을 역이용할 것인가?><무엇이 한 여성을 반역자로 만들었는가?>

가장 큰 차이 1: <사건>과 <인간>

『박열』은 사건 중심이다.

관동대지진 → 조선인 학살 → 정부의 은폐 → 박열 사건 → 재판이라는 상당히 명확한 정치적 인과관계가 있다.

반면 『가네코 후미코』는 인간 형성의 과정에 관심이 있다.

<왜 후미코는 천황을 미워하게 되었는가?>

<왜 조선인의 처지에 공감했는가?>

<왜 죽음보다 국가의 은사를 더 모욕적으로 느꼈는가?>

따라서 『박열』이 <역사적 사건 속의 후미코>라면 새 영화는 <후미코의 내면에서 바라본 역사>다.


차이 2: 박열과 후미코의 관계도 달라진다

『박열』에서는 두 사람이 거의 대등한 공동주인공이다.

영화의 매력도 둘의 관계에서 나온다. 농담하고 싸우고 사랑하고 함께 국가를 조롱한다.

그래서 『박열』의 핵심 단위는 <박열–후미코>다.

그러나 새 영화에서는 이 결합이 해체된다.

박열을 떼어내고 후미코를 혼자 세운다.

이 변화는 상당히 중요하다.

『박열』을 보고 나면 우리는 흔히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과 함께 싸운 훌륭한 일본인 여성>

이라고 기억한다.

그러나 새 영화는 질문한다.

<박열을 만나기 전에도 가네코 후미코는 이미 누구였는가?>

그녀의 무적자 경험, 가족의 학대, 조선 생활, 여성으로서의 억압 등이 먼저 있었고, 박열은 그렇게 형성된 후미코가 만난 사상적 동지라는 것이다.

이것은 후미코의 역사적 주체성을 상당히 크게 회복한다.


3. 두 영화에서 조선의 의미도 다르다

『박열』에서 조선은 주로 <식민지배와 관동대학살의 피해자>다.

따라서 정치적 질문은 일본 제국이 조선인에게 무엇을 했는가에 집중한다.

반면 새 영화에서 조선은 후미코 자신의 사상이 만들어진 중요한 공간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 조선에서 일본인 가족에게 학대를 받으면서 동시에 조선인이 일본인에게 차별받는 광경을 본다.

여기서 매우 독특한 윤리적 인식이 형성된다.

<나는 일본인이지만 일본 사회의 피해자이며, 동시에 일본인이 조선인을 억압하는 것도 보고 있다.>

그래서 후미코는 피해자라는 위치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자신에게 가해진 억압과 일본 제국이 조선인에게 가하는 억압 사이에서 <구조적 유사성>을 발견한다.

이것이 그녀가 단순한 친한파가 아니라 아나키스트가 되는 중요한 이유다.


4. 두 영화가 국가를 공격하는 방식

『박열』은 국가를 <웃음>으로 무너뜨린다.

박열과 후미코는 재판을 엄숙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국가가 자신들을 무서운 테러리스트로 만들어내려고 할수록 두 사람은 그 연극을 더 크게 만든다.

그래서 『박열』에는 독특한 유머가 있다. 사형을 앞둔 영화인데도 상당 부분이 우습다. 실제 평론에서도 이 영화의 비극적 소재와 경쾌하고 파격적인 서술 방식이 특징으로 지적됐다.

새 영화는 반대다.

웃음이 사라진 자리에서 국가와 개인이 일대일로 맞선다.

<감형해 주겠다.>

<거부한다.>

<살려주었으니 감사하라.>

<당신에게 살려달라고 한 적이 없다.>

이런 구조다.

『박열』의 저항이 <공개적이고 공연적인 저항>이라면, 『가네코 후미코』의 저항은 <내면의 주권을 넘겨주지 않는 저항>이다.


5. 한국 영화와 일본 영화라는 차이

이것도 상당히 흥미롭다.

한국의 『박열』은 일본 제국이 조선인에게 저지른 국가폭력을 일본인 가네코와 함께 폭로한다.

반면 일본의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 사회 내부에서 태어난 반역자를 통해 <일본 국가가 자국민에게 무엇을 요구했는가>를 묻는다.

그래서 두 영화를 함께 보면 가해자/피해자의 단순한 민족 구도가 무너진다.

일본인 후미코는 식민지배의 지배민족에 속하면서도 일본의 가부장제와 국가질서에서는 주변인이었다.

조선인 박열은 식민지 피지배민족이지만, 후미코와의 관계에서는 보호받는 피해자가 아니라 그녀와 대등한 동지다.

이 점에서 두 영화는 한일관계를 다룬 다른 많은 영화보다 훨씬 흥미롭다.


6. 어느 영화가 후미코를 더 잘 이해하게 하는가

후미코라는 사람을 이해하려면 당연히 새 일본 영화가 더 깊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박열』도 후미코를 매우 매력적으로 발견한 영화였다.

그래서 나는 두 영화를 이런 관계로 보고 싶다.

<『박열』이 가네코 후미코를 발견한 영화라면, 『가네코 후미코』는 그 발견된 인물을 박열에게서 다시 독립시키는 영화다.>

이것은 두 영화의 경쟁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2017년 한국 영화가 던진 질문을 9년 뒤 일본 영화가 다른 방향에서 이어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7. 두 영화를 함께 보면 더 크게 보이는 것

두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사실 <한일 화해>라는 말보다 더 근본적인 무엇이다.

박열과 후미코는 서로의 민족을 화해시키려 만난 사람들이 아니다.

두 사람은

<국가가 인간을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분류하고 지배하고 죽일 권리가 있는가?>

라는 질문에서 만난다.

그래서 두 사람의 연대에는 민족주의를 넘어가는 힘이 있다.

관동대학살에서는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이 죽었다.

후미코는 바로 그 순간 조선인이 아니면서도 조선인의 편에 선다.

그것은 “한국을 좋아했기 때문”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누구도 출생한 민족이나 국가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훨씬 급진적인 윤리 때문이다.

그래서 이 두 영화는 한일관계의 역사영화인 동시에 <국가와 개인>, <민족과 인간>에 관한 영화다.

최종적으로 보면

『박열』의 가장 강력한 장면은 <두 사람이 함께 국가를 조롱하는 순간>이고,

『가네코 후미코』의 가장 강력한 순간은 <모든 사람이 사라지고 후미코 혼자 국가와 마주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영화를 차례로 보면 한 사람의 모습이 완성된다.

<박열과 함께 있을 때의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이 없어도 가네코 후미코였던 사람>.

나는 후자가 특히 중요하다고 본다. 가네코를 단순히 <조선 독립운동을 도운 양심적인 일본인>으로 기억하면 그녀를 너무 작게 만드는 셈이다. 그녀는 조선 독립보다 더 근본적으로 <인간 위에 군림하는 권위 자체>를 문제 삼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점을 이해하고 나면 박열과 후미코의 관계도 더 깊어진다. 두 사람은 <한국 남자와 일본 여자>가 국경을 넘어 사랑한 사례라기보다, <서로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함께 제국에 맞설 수 있었던 두 독립적인 인간>이었다. 그것이 두 영화를 함께 볼 때 가장 오래 남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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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중/김은국은 식민지 시기를 어떻게 경험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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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중은 식민지 시기를 어떻게  경험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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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통일운동가 김낙중(1931~2020)의 생애에서 식민지 시기(일제강점기)는 그의 사상적 원형과 '절대적 평화주의'가 싹튼 가장 결정적인 형성기였다. 그는 전시 체제하의 참혹한 사회적 환경을 목도하고 개인적인 죽음의 위기를 겪으며 일찌깃 삶과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품게 되었다.

김낙중의 식민지 시기 경험은 크게 세 가지 축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1. 전시(戰時) 체제하에서의 유년기와 전쟁의 체화

김낙중이 태어난 1931년은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대륙 침략과 군국주의 광풍을 본격화하던 해였다. 그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전쟁 통에 태어나 화약 냄새를 맡으며 자랐다>고 증언할 만큼, 유년기 전체가 일제의 침략 전쟁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었다.

6살 무렵에는 중일전쟁을 위해 대륙으로 날아가는 일본 전투기들을 바라보았고, 식민지 민중이 전쟁 동원 체제 속에서 겪는 수탈과 압제를 온몸으로 체감하였다. 이러한 유년의 기억은 향후 그가 어떠한 종류의 폭력과 전쟁도 거부하는 '절대적 평화주의자'로 성장하는 감성적·환경적 배경이 되었다.

2. 근로동원을 피하기 위한 진학과 식민지 교육

일제 말기 태평양전쟁이 극에 달하자 일제는 인적·물적 수탈을 강화하며 인문계 중학생들을 전쟁 물자 생산을 위한 '근로동원'으로 강제 차출하였다.

당시 소년 김낙중은 징용과 근로동원을 피하기 위해 학업 실습지라는 명목으로 강제 동원에서 제외되던 경성농업중학교(현 서울시립대학교의 전신)에 진학하였다. 이는 식민지 당국의 강압적인 전학·동원 체제 속에서 어린 나이에 터득한 생존 방식이자 일제 강점 말기 민중이 겪어야 했던 왜곡된 일상의 단면이었다.

3. 폐병(폐결핵)과 사상적·종교적 탐구의 시작

식민지 시기 말기인 16세 무렵, 김낙중은 당시 치명적인 불치병으로 여겨지던 폐병(폐결핵)에 걸려 죽음의 기로에 섰다. 반에서 1등을 다투던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어차피 죽을 인간이 왜 태어났는가", "어떻게 살아야 참된 삶인가"라는 자아와 존재에 대한 열병 같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죽음의 공포와 식민지 현실이라는 이중의 암담함 속에서 그는 남대문도서관을 다니며 철학과 종교 서적을 탐독하였다.

  • 종교와 철학의 섭수: 일요일 아침에는 새문안교회에서 기독교의 '사랑'을 배웠고, 오후에는 조계사를 찾아 불교의 '자비'를 들었으며, 유교의 '인(仁)'과 노장사상을 접했다. 또한 YMCA 등에서 함석헌 선생의 강의를 들으며 민족과 인간에 대한 의식을 넓혀갔다.

종합적 의의

김낙중에게 식민지 시기는 단순히 일제의 억압을 받던 시대를 넘어, 전쟁의 참상과 죽음의 위기 속에서 사상적·인간적 자아를 확립한 시기였다.

일제강점기 말에 형성된 동양과 서양의 성찰적 사상, 그리고 생명에 대한 고뇌는 해방 이후 그가 한국전쟁의 비극을 목도한 뒤 "서로 죽이지 않고 더불어 사는 길"을 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통일·평화운동에 평생을 바치게 만든 기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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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중의 식민지 경험은 <강한 민족차별의 체험>이나 <항일운동의 체험>이라기보다, <전쟁으로 점점 잠식되어 가는 식민지의 소년 생활>이라는 점이 더 중요합니다. 그는 1931년생이므로 해방 당시 만 14세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리영희(1929년생)나 김은국(1932년생)과 거의 같은 ‘식민지 말기 소년 세대’에 속합니다.

김낙중 자신의 훗날 회고를 보면 그가 식민지 시기를 기억하는 핵심어는 <전쟁>입니다. 그는 “내가 태어난 해에 일본이 중국을 침략해 만주사변을 일으켰다”고 회상하고, 자신의 어린 시절을 사실상 전쟁과 함께 시작된 삶으로 설명합니다. 여섯 살 무렵에는 일본 군용비행기들이 중국 쪽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보았다고 기억합니다. 즉 식민지라는 정치적 개념보다 먼저 어린 김낙중에게 들어온 것은 <비행기·군대·전쟁 분위기>였습니다.

1. 파주의 농촌 소년에게 식민지는 처음부터 ‘일상’이었다

김낙중은 1931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에게 일본의 지배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조선은 이미 일본제국의 일부였으므로, 어린 시절의 학교·행정·언어·전쟁동원 체제가 모두 당연한 생활환경이었습니다.

이 점은 1917년이나 1922년생처럼 식민지 중기에 학교교육을 받고 청년기에 일본 유학까지 갈 수 있었던 세대와 상당히 다릅니다.

김낙중 세대가 세상을 의식하기 시작한 1930년대 후반부터는 일본제국 자체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급속히 군사화되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 식민지 근대란 철도, 학교, 도시문화 같은 것보다도 <전쟁국가의 일상화>와 훨씬 밀접하게 기억되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훗날 평화주의를 이해하는 데 상당히 중요합니다.

2. 가장 흥미로운 경험은 ‘근로동원을 피하기 위해 농업학교를 선택했다’는 점입니다

식민지 말기의 김낙중 경험에서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는 일제 말기에 <경성농업학교>에 진학했습니다. 훗날 그는 그 이유를 매우 현실적으로 설명했습니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반 중학교 학생들이 근로동원에 끌려가게 되었는데, 농업학교 학생들은 학교의 실습농장에서 일하고 기숙사 생활을 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근로동원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농업학교를 택했다고 회고했습니다.

이 대목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흔히 일제 말기 조선인의 경험을

<일제의 강제 → 조선인의 저항>

이라는 이분법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김낙중의 기억은 훨씬 생활사적입니다.

소년과 가족에게 우선적인 문제는 거대한 ‘항일’ 담론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동원을 피하고 학교를 계속 다닐 것인가>

였습니다.

즉 식민지 조선의 일상에는 협력과 저항 사이에 매우 넓은 <적응·회피·생존의 영역>이 있었습니다.

김낙중의 농업학교 선택은 바로 그 좋은 사례입니다.

3. 그런데 농업학교에서도 전쟁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흥미롭게도 근로동원을 피하려고 농업학교에 갔지만, 학교생활 자체가 이미 전시체제 안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농장에서 노동을 했고 기숙사 생활을 했습니다. 이는 전쟁 말기의 교육이 단순한 교과교육이 아니라 생산과 노동을 포함하는 체제로 바뀌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김낙중의 회고에서도 학교는 자유롭게 공부하는 공간이라기보다 전쟁경제에 연결된 생활공간으로 나타납니다.

게다가 그는 그곳에서 폐병에 걸렸습니다.

건강이 악화되어 학교를 그만두고 파주의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회복한 후 서울로 다시 올라왔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서울중학교 2학년에 편입해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청소년기의 경계선에는 아주 선명한 단절이 있습니다.

<경성농업학교 — 일제의 전쟁체제>
→ <폐병과 귀향>
→ <1945년 해방>
→ <서울중학교 — 새로운 대한민국의 학교>

입니다.

4. 그런데 그의 회고에는 ‘일본인에 대한 강렬한 원한’이 전면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이 김낙중의 식민지 경험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점입니다.

<굽이치는 임진강>과 훗날 인터뷰를 보면, 어린 시절의 일본인을 악인으로 유형화하거나 일본인 교사에게 받은 민족적 모욕을 중심으로 자기 정체성을 설명하는 방식이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은 “차별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자료만으로는 그가 일본인 교사나 학생과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를 가졌는지, 창씨개명·황국신민서사·신사참배·일본어 상용 등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까지 충분히 확인되지 않습니다. <굽이치는 임진강>에는 ‘소년시절’이라는 별도의 장이 있지만, 현재 온라인에서 확인되는 서지 정보만으로는 그 장의 전체 내용을 읽을 수 없습니다. 책은 1985년 삼민사에서 406쪽으로 출간되었고 제2장이 <소년시절>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과장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공개되어 있는 그의 자기회고에서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일본인이 나를 차별했다>

라기보다

<나는 전쟁 속에서 태어나 전쟁 속에서 자랐다>

입니다.

이 차이는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5. 김은국의 <잃어버린 이름>과 비교하면 차이가 더 분명합니다

김은국은 1932년생이므로 김낙중보다 한 살 아래입니다.

그런데 <잃어버린 이름>에서 식민지 경험의 중심은 <민족적 굴욕>입니다.

일본식 이름을 강요받고, 조선인의 이름과 자존심을 빼앗기며, 학교와 국가가 한 소년에게 “너는 일본인이 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경험이 서사의 중심입니다.

김낙중에게는 상당히 다릅니다.

그의 기억에서는

<민족적 굴욕>보다 <전쟁과 동원>

이 더 전면에 나옵니다.

간단히 비교하면 이렇습니다.

김은국김낙중
출생19321931
식민지 경험의 중심민족적 모욕전쟁과 동원
기억의 대표 장면창씨개명·학교군용비행기·근로동원
일본제국의 모습조선인의 정체성을 빼앗는 국가소년까지 전쟁에 끌어들이는 국가
훗날 문제의식잃어버린 민족정체성전쟁과 폭력의 거부

물론 김은국의 작품은 소설이고 김낙중의 것은 회고이므로 직접 동일선상에 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같은 연령대의 두 사람이 식민지 말기를 기억하는 방식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롭습니다.

6. 그리고 이것이 훗날 김낙중의 평화주의와 연결됩니다

김낙중의 생애 전체를 생각하면 식민지 경험의 의미는 1945년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1931년 만주사변 무렵 태어나고
→ 중일전쟁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 태평양전쟁기에 중학생이 되고
→ 1945년 일본 패전을 경험하고
→ 불과 다섯 해 뒤 1950년 한국전쟁을 경험합니다.

즉 그의 생애 첫 20년 가운데 거의 전부가

<만주사변 → 중일전쟁 → 태평양전쟁 → 해방과 분단 → 한국전쟁>

이라는 연속적인 폭력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김낙중의 경우에는 식민지 경험과 한국전쟁 경험을 별개로 떼어놓으면 오히려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에게는 아마도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킨 전쟁>과
<남북한이 서로 죽인 한국전쟁>

사이에 하나의 근본적인 공통점이 보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즉 <국가와 이념이 인간에게 서로 죽이라고 명령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그의 회고를 토대로 한 제 해석입니다. 김낙중 자신이 정확히 이 문장으로 설명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어린 시절을 “전쟁 통에 태어나 화약 냄새를 맡으며 자랐다”고 회고하고, 훗날 한국전쟁을 경험한 뒤 극단적인 평화통일운동에 뛰어든 그의 생애를 연결하면 상당히 설득력 있는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7. 그래서 김낙중의 식민지 회고가 특별합니다

앞서 함께 살펴본 여러 회고록과 비교하면 김낙중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는 식민지 시절을 <일본에 대한 원한을 형성한 시대>로 기억하기보다는 <전쟁이 인간의 삶을 지배하기 시작한 시대>로 기억합니다.

이것은 작은 차이가 아닙니다.

그의 나중 행동을 설명하는 출발점이

<반일민족주의>가 아니라
<반전평화주의>

쪽으로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김낙중의 <굽이치는 임진강>을 식민지 생활사 자료로 읽는다면 저는 다음 문장을 가장 핵심적인 평가로 삼겠습니다.

<김낙중에게 일제강점기는 ‘일본인에게 억압받았던 어린 시절’인 동시에,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국가가 사회 전체를 전쟁에 동원하는 것이 정상처럼 되어버린 어린 시절’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점 때문에 1931년생 김낙중은 <식민지 경험 → 민족주의>라는 일반적인 궤도보다는 <식민지 전쟁체험 → 한국전쟁 → 반전·평화통일주의>라는 매우 독특한 궤도를 걷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앞서 관심을 두신 <식민지를 실제로 어린 나이에 살았던 사람들의 서로 다른 기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김낙중은 상당히 좋은 비교 사례입니다. <리영희(1929)–김낙중(1931)–김은국(1932)> 세 사람의 식민지 소년 경험만 따로 떼어 비교하면, 같은 세대가 식민지를 얼마나 다르게 기억했는지가 매우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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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駐日イスラエル大使館声明 1.... - イスラエル大使館 / Israel in Japan | Facebook

「駐日イスラエル大使館声明 1.... - イスラエル大使館 / Israel in Japan | Facebook

イスラエル大使館 / Israel in Japan

p͏t͏e͏o͏d͏o͏r͏s͏S͏n͏c͏5͏0͏a͏m͏7͏g͏7͏1͏2͏i͏3͏2͏g͏7͏1͏5͏2͏i͏h͏l͏5͏1͏9͏5͏t͏c͏f͏0͏1͏c͏u͏c͏a͏4͏f͏m͏7͏h͏g͏f͏4͏m͏c͏h͏8͏3͏a͏t͏9͏ ·


「駐日イスラエル大使館声明

1. 駐日イスラエル大使館は、E1地区に関して日本外務省が発表した談話に留意しています。

2. イスラエルは、日本との友好関係を重視しており、中東の平和と安定を重視する日本の立場を共有しています。

3. しかしながら、イスラエルの入植地が一律に国際法上違法であるとの見解には、敬意を表しつつも同意いたしかねます。法的拘束力を有する国際文書である国際連盟の「パレスチナ委任統治決議」は、ユダヤ人とこの地との歴史的な結び付き、ならびにユダヤ人の民族的郷土をこの地に再興する根拠を認めました。

4. E1地区については、今回の建設入札の公告は、長年にわたる計画策定を経て2025年に承認された決定を実施するものです。これは、既存の手続きが新たな段階に入ったものであり、新たな計画決定ではありません。また、この事業には、パレスチナ人の移動の自由と日常生活の改善を目的とする道路インフラの整備も含まれています。

5. イスラエルは、実行者が誰であれ、民間人に対する暴力を重大な問題として受け止め、その防止および実行者の責任を追及するための措置を講じています。均衡の取れた評価を行うためには、パレスチナ人によるテロやイスラエル人に対するその他の攻撃、扇動行為、さらに、パレスチナ自治政府がテロ攻撃の実行者およびその家族への金銭の支給を継続していることについても言及する必要があります。」

外務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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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oko Asano
どんだけ厚顔無恥か。10.7以前から国連は、1967年以降にイスラエルが占領地に建設した入植地は、ジュネーブ条約に違反していると述べてきた。入植者による日常的な暴力はIDFが横についている。お前らみたいな嘘つき国家はさっさと解体しろ。地球外にでも入植してくれ。

·
Noam Azoulay お前らジェノサイドやってるだろ。人類にとって大迷惑なんだよ。殺戮辞めないならイスラエルは解散しろ。


Noam Azoulay 全世界はこの暴力的なイスラエルから武装解体すべきだろう。丸腰でその土地に立っていれば良い。

小林寿太郎
「...コメントは削除」というケースが多いようだ。これというのもイスラエルによる露骨な人権蹂躙である入植地建設が原因だ。


Noam Azoulay 「じゃあ、さようなら」と言うなら日本から即時退去して国交断絶しろ。念のために言っておくが麹町にあるイスラエル大使館と広尾にある日本ユダヤコミュニティセンターについては取り壊してお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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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am Azoul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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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oshi Nishihara.
もちろん、10月7日の後なら、ユダヤ人に武器を持たせたくないと思うよな。ナチス・ドイツの元同盟国だった日本は、狂信的なイスラム主義者に囲まれた、武装もできず無防備なユダヤ人が大好きなんだろ? どうやらヨーロッパと同じように、イスラムに日本ももう乗っ取られてるみたいだな。じゃあ、さようなら。


The comment that Noam Azoulay is replying to has been deleted.


Noam Azoul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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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ji Otsuki.
お前らのイスラム系プロパガンダなんか、俺には何の影響もないよ。本当にジェノサイドが目的なら、俺たちは3分で相手を消し去ることだってできる。でも、お前ら日本人は、外国の人々を大量虐殺しただけじゃなく、相手に加えた拷問や残虐行為を楽しんでいたような連中だろ。自分たちの子供たちに自国の歴史についてまともに教えることすらできないじゃん。自分たちが恥じるべきことを山ほど抱えてるのを分かってるから、ナチスから学んだ「叩きやすい標的」であるユダヤ人に自分たちの問題を投影してるんだ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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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ji Otsuki

ハァ??イスラエルの入植拡大はジュネーブ条約違反だろ。
アメリカの武力を使って侵略行為や他国への攻撃をずっとやってきた侵略国家がイスラエル。
イスラエルのせいで石油危機も起こってるし、パレスチナやレバノンに対してジェノサイドも行なって、自分達がナチス・ドイツにやられた事をアラブ人に対してやってる。
殺戮や侵略行為をやめないならイスラエル国家は解散すべき。そして戦争犯罪者ネタニヤフをICCに突き出せ。
お前らが選ばれた民族と思ってる事自体が人類にとって大迷惑なんだよ。

田上明

네타냐후를 체포하고 국제형사재판소에 넘기세요

柳瀬要
·
日本の外務報道官談話
令和8(2026)年8月21日
ヨルダン川西岸地区情勢について
1、我が国は、ヨルダン川西岸地区のE1地区における入植地建設計画が進められていることについて、深く懸念しています。我が国を含む国際社会による累次の呼びかけにもかかわらず、イスラエル政府が入植活動を含む一方的行為を継続していることについて、改めて強い遺憾の意を表明するとともに、イスラエル政府に対し、当該計画の撤回及び入植活動の完全凍結を改めて強く求めます。
また、イスラエル政府が入植者による暴力を防止するために適切な措置を速やかに取ることを重ねて求めます。
2 、入植活動は国際法違反であり、「二国家解決」の実現を損なうものです。我が国として、「二国家解決」による中東和平の実現の重要性を改めて強調するとともに、引き続き国際社会と連携し、イスラエル政府による入植活動の阻止に向けて、あらゆる外交努力を行っていき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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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林寿太郎
·


이스라엘의 정화 건설은 처음부터 국제법을 위반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E1 정화는 점령된 동유럽 예루살렘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 동쪽 7km에 마'알 아두미 정화가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주거 지역을 분열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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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athan Livingstone
·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나타났지만, 이건 (・o・) & (・o・)가 무엇인가요? 이 진정한 이스라엘 대사관이 이런 말을 하는 건가요?
그런 식으로 그 근거에 따라 반응한다면, 당신의 나라의 진정한 성격은 이미 드러났고, 가자지구와 서방해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이미 드러나고 있으며, 이로 인해 현명한 사람들 사이에서 분노와 증오가 일어나고 있으며, 이는 "과도한 행동을 용납하지 않는 사람들"로 간주되고 있으며, "인류의 적"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그들이 그런 것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처럼 대우되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런 것에 대해 인지해야 할 것이고, 당신은 처음부터 이런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으로 볼 때, 홀로코스트 이론은 완전히 오래된 것이므로, 그들은 그런 정보를 퍼뜨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군대가 강해도 이 정도로 적을 수 있는 수를 늘리고 싶어하는 이유는 미스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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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rnando Sakamoto
·


Free Palest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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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o Komatsudani
·


다른 댓글에서 언급한 대로, 이 댓글은 실제 이스라엘 대사관의 댓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대사관의 공식 웹사이트에서 이 댓글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4"에 대해서는 E1은 예루살렘과 마'알 아두미의 큰 정착지 사이에 있죠, 그렇죠? 이 지역을 이스라엘 거주자들의 지속적인 지역으로 연결하면 라마라, 동 예루살렘, 베들레헴이 됩니다.
나는 비판의 핵심은 팔레스타인 국가의 미래 도시 및 지역 지속성이 동방으로 연결되지 않아 동방 예루살렘과 서방해안과 연결이 어렵게 될 것이며, 이는 그 국가와 연결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듣고 싶다. 또한, 정부의 일부 지지자들(재무장관 스모트리치)는 팔레스타인 국가의 설립을 방지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가지고 있다. 나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많은 지원을 제공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일부 극우 정치인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노력을 낭비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타깝게 느껴야 한다.

Ken Watari

Free Palestine.

Kuwabara Tatsumi
free Palestine

脇田清司
E1地区ってどこか?※印使っての説明あれば、もっと、一般日本国民に、判りやすいかも、その説明ない時点で、広く広報出来ると、考えにくいです。

Khadija Rachdi
·


Japan Israel Forever

Maiko Sakamoto
·
虐殺やめろ。
民間人を殺しまくってるのに何を言ってるのか。パレスチナの人たちは人間じゃないとでも言うのか?
そもそも普通に考えて、1000年以上住んでいた人たちを追い出してユダヤ人の国を建設してもよいとしたことそのものがおかしいと思えないのがおかしすぎる。
ナチスドイツでユダヤ人がされたことは到底許し難い大犯罪だが、それをされたユダヤ人がパレスチナの地で大虐殺をすることが理解できない。
教育やさまざまな場面で洗脳されてるんだろうとは思うが、イスラエルの人たちのパレスチナ人への人権認識は異常としか思えない。虫ケラを殺すのと同じと思っている。虫ケラ以下と思ってるかもしれない。
赤ちゃんだろうと殺すべき、と発言したりもしている。
即刻改めるべき。

Rieko Kuma
Free Palestine Stop genocide

Kikan Soushin
당신이 테러리스트입니다.

Hiroshi Yoshida

Satoshi Nishihara
·


くだらない綺麗事を並べてもイスラエルが行った現実の行為と相当解離しているわけ。あれだけの大量無差別虐殺をやっておいてこんな中身のない声明だしてもなんの意味もない。くだらない茶番声明を出すくらいならガザへの謝罪の1つくらいしたらどうか?



Hayato Yamakami
·
事情はそれぞれにあるんだろうけど、世界的にみて、世界の平和が乱される原因の一つにイスラエルがある、と考える人が少なくない。これは長期的にみて、ものすごい損失だと思うよ。いくら権力や金を手にしても尊敬されないのでは、民族のブランディングとしては大失敗じゃないかな。

Alex Alpha

そりゃおまえ等の問題で、おまえら自身によるものだ。

Hiroshi Yamamoto

じゃあ国交を絶って下さい。日本にはそのほうが将来的にメリットですかな。
巻き込まれるのはごめん被りたい。
ジェノサイドに巻き込まれるのはお断り。

宮谷美千男
嘘しか書かんなこのシオニスト連中は。
『民間人に対する暴力を重大な問題として受け止め、その防止および実行者の責任を追及するための措置を講じています。』
パレスチナの無辜の市民を殺しまくってるネタニヤフとか連立組んでる急進右派の異常者たちをとっとと逮捕しなさい、その言葉が本当だというなら。
お前らはどんな些細な事でも、またはない話をでっち上げてでも事あるごとに停戦破棄をしてジェノサイドを繰り返す、とにかく重篤な病人ばかりだ。もしくは純然たるサイコパスか。
すぐにジェノサイドをやめろ。そして国内の不正にきちんとメスを入れろ、関係ない国外のトラブルに責任を転嫁させないように。

Avery Fane
戦争やめろう

幹夫石黒
·
イエスが答えて言われた、「ある人がエルサレムからエリコに下って行く途中、強盗どもが彼を襲い、その着物をはぎ取り、傷を負わせ、半殺しにしたまま、逃げ去った。
31 するとたまたま、ひとりの祭司がその道を下ってきたが、この人を見ると、向こう側を通って行った。
32 同様に、レビ人もこの場所にさしかかってきたが、彼を見ると向こう側を通って行った。
33 ところが、あるサマリヤ人が旅をしてこの人のところを通りかかり、彼を見て気の毒に思い、
34 近寄ってきてその傷にオリブ油とぶどう酒とを注いでほうたいをしてやり、自分の家畜に乗せ、宿屋に連れて行って介抱した。
35 翌日、デナリ二つを取り出して宿屋の主人に手渡し、『この人を見てやってください。費用がよけいにかかったら、帰りがけに、わたしが支払います』と言った。
36 この三人のうち、だれが強盗に襲われた人の隣り人になったと思うか」。
37 彼が言った、「その人に慈悲深い行いをした人です」。そこで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も行って同じようにしなさい」。

昆布佳久
·
그것은 고통스럽지 않나요?

Salma Miyuki Tago
女性子供をあんだけ殺めといてどの口が。日本を巻き込むな、出ていけ。

Mahmud Hasan
イスラエルはテロリストだ。

Akamatsu Junichi
·クズが!
 早く日本から出て行ってくれ

宮澤盛夫
ヒトラーにされたことを一番やっちゃいけない人たちが一番やっている。

根布谷悟

貴国は、あと何人殺せば気が済みますか?

Neo Nagai
ネタニヤフを司法に引き渡してから人間の言葉しゃべれよ

Kobayashi Ichiro
인종학살을 멈춰라! 이스라엘은 결국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Ryuichi Imori
·


이스라엘이 감염이 시작된 즉시 첫 번째로 백신을 접종한 것 같지만, 이 글로벌 위기에 있어서는 아마도 중국당(중국 공산당) 편에 서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시장 조작으로 미국-이스라엘 관계를 연장시키는 트럼프를 지지하고 있다.
당신은 시온주의자인가, 아니면 복음주의 기독교인인가?
당신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 같지만, 지금 바로 붕괴의 비전만을 가지고 있다.
당신은 아마도 내가 일본 정부를 어떻게 움직였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살아남을 의지가 있는가?

Hiroshi Otomo

안녕히 가세요

Koji Okuda
カナンの地
神が約束した土地の
異民族を滅ぼすという
行為は
民主主義社会と共存し得ません。

Kazushi Matsumoto
つまり入植を強行するという宣言か。

Koji Sasage
·


高度な外交、政治の問題なのでコメントはしません

噴照骨胡
·


#イスラエル政府 は、これ、#日本政府 に言ってるの?
それとも、我々 #日本国民 に脅しを掛けてるの?
お返事、ください。

猪瀬保宏
·


ずる賢いユダヤの商人は消滅すべし。

菊池良男
日本も敵に…あなた方の行為…『正当ですか
日本が『戦争したいと
考えてください
『戦争をして、滅ぼされますか
『原爆2発
考えてもらえません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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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
·


弁名に過ぎません。私は韓国人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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沼田直人
·


出てけえーっつ!亡びろーうっ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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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uki Kinoshita
·


イスラエルのここ日本での情報戦は、完全に負けていますね。
以上の口汚いコメントだらけ。
アルジャジーラやガザ保健当局を垂れ流ししてるオールドメディアのせいでしょうか。
忍耐をもって、日本での情報発信を祈り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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トラ ディラン キャンドラトヨ
·


日本人様へ
これどもいいのかこうなことっ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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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ko Yanagisawa
·


ふざけるな!嘘つき!ガザでやってるパレスチナ人への許し難い暴力、殺戮がまるでないかのような言い分じゃないか!恥を知れ!国連決議?そもそもそんなものパレスチナ人は認めていたの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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サン えむえむ
·


ナチスイスラエル死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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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ulana Muhammad
·


팔레스타인인들이 당신의 식민지 정권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는 것만으로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면, 어떻게 자신들을 아이들과 임신한 살인자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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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이스라엘 대사관 성명 1.... - 이스라엘 대사관 / Israel in Japan | Facebook

딸이 전하는 아버지의 역사 | 이흥섭 2023

[전자책] 딸이 전하는 아버지의 역사 | 이흥섭 | 알라딘

딸이 전하는 아버지의 역사
이흥섭 (지은이),번역공동체 잇다 (옮긴이)논형2023-



종이책의
미리보기
입니다.






































책소개
일제 강점기 한 조선인 강제징용자의 이야기. "나는 조선인입니다. 1928년에 태어났고 일본에 온 지 33년이 됩니다. 현재 중학교 3학년이 된 딸이 있습니다. 딸아이가 아버지의 역사를 쓰고 싶다고 해서, 일본에서 살게 된 33년 동안의 지난 시간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1978년 저자의 말에서)"

이흥섭의 말이 책의 형태로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출간에 관여한 사람들에게 하나의 '사건'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사건'이란 그것 이전과 이후가 같을 수 없는 어떤 구부러짐을 만들고, '사건'을 겪어낸 사람들로 하여금 그로 인한 변화를 새로운 삶으로 받아들여 긍정하도록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흥섭이 고향을 상실한 바로 그곳에서, 다시금 삶을 이어 나가고, 자신의 목소리를 일본 사회 내부로 발신할 수 있었던 것은 익명의 조력자들 덕분이며, 그들 또한 출간 작업에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이흥섭의 이야기를 자신들의 구체적인 삶에 끌어들이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중학생이었던 딸 이동순은 아버지 이흥섭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한 줄 한 줄 자신의 문장으로 담아낸 '공감적 기록자'라고 할 수 있다. 강제 징용 당시, 자기와 비슷한 또래였을 열일곱 살 아버지를 그의 증언 속에서 만나고, 생경한 이야기를 글로 기록하는 경험은 전전(戰前) 조선의 식민지 소년과 전후 일본의 고도경제 성장기를 살아가는 한 소녀의 삶을 어긋난 채로 이어주는 의미를 지닌 것이다. 경험이 말과 글로 표현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당사자만의 것이 아니라, 듣는 이들의 것이기도 하다.


목차


한국의 독자에게/ 역자서문/ 들어가는 글

I 먼 여행의 시작

<어느 날 갑자기>

1944년 5월 / 어두운 해협을 건너/ 처음 간 일본/ 조국 황해도 곡산의 기억/ 도착한 첫날 밤이 지나고/ 군대식 훈련/
탄광 광부가 되어/ 린치를 목격하다

<강제노동의 날들>

갑자기 금지된 오봉 외출/ 탈주를 향한 의지/ ‘비국민’이라는 낙인/ 이중의 차별 속에서/ 외출 조가 돌아왔다/ 식당 감시인의
수가 늘다/ 세 명의 탈주자/ 식당에서 생긴 일/ 갱 안에서 하는 일/ 누룽지의 비밀/ 대본영의 거짓발표/ 고향을 향한 그리움/
도시락/ 갱 안의 고된 작업/ 첫 급료

II 해협이 보이는 곳까지

조국에서 온 편지/ 탈주를 향해/ 11월부터 급료가 오르다/ 탈주계획/ 마지막 식사/ 외출 허가가 떨어지다/ 결행/ 운명의 버스를
타고/ 버스 안에서 생각한 것들

III 보이지 않는 조국을 가슴에 품고

<탄광 도망자>

가라쓰 거리/ 어둠을 헤매다 맞닥뜨린 위병소/ 메모 한 장에 의지해서/ 다리 위에서의 만남/ 하얀 쌀밥에 김치/ 무사히 숙소에
들어가다/ 새로운 이름으로

<나는 살아간다>

뱃짐 하역작업/ 후쿠오카현의 작은 어촌으로/ 더 서쪽으로/ 다타라 청년학교/ 세 번째 탈주/ 소나무즙의 기억/ 이타즈케
비행장 정비원이 되어/ 다시 몸을 숨기다/ 드럼통 비/ 처음 타보는 기차/ 삼백 엔에 사들인 정보/ 조선총독부의 만행/
인간으로서의 외침

IV 옥음방송을 기다리다

아버지의 이야깃거리/ 일본의 야망/ 여모루 마을/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폭투하/ 일본인 나카가와 씨/ 옥음방송/ 조선을
그리워하다/ 태어난 고향/ 일본의 무조건항복

V 귀국을 향한 기대

1945년 8월 16일 아침/ 나카가와 씨의 / 귀국을 생각하다/ 일 잘하는 가이모토 씨/ 막걸리를 마시다/ 작별인사/ 귀국의
첫발/ 하카타항에 북적거리는 군중/ 항구의 모습/ 타다 남은 마구간과 수상경찰서/ 귀국에 대한 큰 오산/ 수상경찰서의
계단 아래/ 마구간으로 향하다

후기[제1편]
아버지의 삶을 가슴에 품고 | 이동순/ 글을 마치며 | 이흥섭/ 체험기를 청하며 | 무로타 다쿠오

후기[속편]
이흥섭 씨와의 만남 | 가와구치 사치코 / 해설 | 무로타 다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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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이흥섭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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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황해도 곡산(谷山)에서 태어나, 1944년 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갔다. 사가현(佐賀縣) 도쿠스에(德須惠)의 탄광에서 강제노동을 하다가, 1945년 1월 1일에 탄광에서 탈주했다. 해방 후, 하카타(博多)항에서 귀국하려 했으나 귀향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각지에서 육체노동을 하다가, 1970년 오사카부(大坂府) 이케다시(池田市)에 정착하여 고철상을 운영했다. 2014년 10월 18일 작고하였다.

최근작 : <딸이 전하는 아버지의 역사> … 총 2종 (모두보기)

번역공동체 잇다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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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들과 단어들 사이를 수없이 오가며 있을 법하지 않은 질문들을 던지고, 앞뒤가 맞지 않는 대답을 하면서 만들어지는 작은 변화의 과정을 기꺼이 즐기는 모임. 역사와 역사 밖의 이야기, 영화와 문화 등 각자의 관심 영역을 통해 일본을 이해하고자 하는 김해진, 김수용, 경혜진, 심아정이 함께 하고 있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나는 조선인입니다. 1978년에 쉰 살이 되었습니다. 일본 연호로는 쇼와 3년(1928년)에 태어났고 일본에 온 지 33년이 됩니다. 1944년 5월에 일본 땅을 밟았습니다. 현재 중학교 3학년이 된 딸이 있습니다. 지금은 저와 중학교 3학년인 딸, 이렇게 둘이 살고 있습니다. 딸아이가 아버지의 역사를 쓰고 싶다고 해서, 일본에서 살게 된 33년 동안의 지난 시간들에 대해 지금부터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1978년 저자의 말에서>

일제 강점기 한 조선인 강제징용자의 이야기

이흥섭의 말이 책의 형태로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출간에 관여한 사람들에게 하나의 ‘사건’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사건’이란 그것 이전과 이후가 같을 수 없는 어떤 구부러짐을 만들고, ‘사건’을 겪어낸 사람들로 하여금 그로 인한 변화를 새로운 삶으로 받아들여 긍정하도록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흥섭이 고향을 상실한 바로 그곳에서, 다시금 삶을 이어 나가고, 자신의 목소리를 일본 사회 내부로 발신할 수 있었던 것은 익명의 조력자들 덕분이며, 그들 또한 출간 작업에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이흥섭의 이야기를 자신들의 구체적인 삶에 끌어들이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중학생이었던 딸 이동순은 아버지 이흥섭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한 줄 한 줄 자신의 문장으로 담아낸 ‘공감적 기록자’라고 할 수 있다. 강제 징용 당시, 자기와 비슷한 또래였을 열일곱 살 아버지를 그의 증언 속에서 만나고, 생경한 이야기를 글로 기록하는 경험은 전전(戰前) 조선의 식민지 소년과 전후 일본의 고도경제 성장기를 살아가는 한 소녀의 삶을 어긋난 채로 이어주는 의미를 지닌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경험이 말과 글로 표현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당사자만의 것이 아니라, 듣는 이들의 것이기도 하다.
전편인 <증언>이 강제연행, 그리고 탄광에서의 고된 노동의 경험과 탈주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속편인 <전후>는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이 일본 땅에서 겪었던 ‘해방 당일’과 ‘해방 직후’의 일상이 어떠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조국이나 고향은 돌아가야 할 곳이었지만 돌아갈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전후에 조선인들이 일본에 얕은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게 된 동기는 그들 각각이 조우했던 전후의 상황이 보여준 다채로운 결만큼이나 다양하다는 것을 이흥섭의 경험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오사카의 교사들과 출판관련자 등의 일본인들이 이흥섭과 그의 경험에 적극적으로 관계 맺는 과정은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의 동시적인 해방’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탈식민화’라는 것이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전후 공식적인 역사교육에서 배제된 강제징용의 역사를 이흥섭의 증언을 통해 알게 된 일본인들이 그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하고, 교육의 장으로 그의 경험담을 가져오거나, 증언을 들은 학생들이 연극으로 그의 경험을 재현하는 동안 두 번째 글은 또 다른 책으로 묶여 나오게 된다. 이러한 경위에 주목한다면, 두 권의 책은 전후 일본의 평화교육과 인권교육에 있어서 국민의 이름으로 동원된 이들이 겪은 패전 직전과 직후의 사회적 경관에 대한 살아있는 텍스트로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 책은 이흥섭이 고초를 겪은 탄광노역의 경험에만 천착하지 않고, 그와 같은 처지에 놓여 있던 징용 노동자들이 해방 직후의 정세를 어떻게 겪어냈는지를 규명해 주는 하나의 실마리가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옮긴이의 글에서>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본에 오게 된 이흥섭이 얼마나 성실하고 힘차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우리의 선배이며 이웃으로서 일본사회에 얼마나 많은 것을 남겨주었는지를 알리고 싶었다.
이흥섭의 경험을 고국 사람에게 알리려 했던 마음 한켠에는, 그의 고향인 황해도 곡산 사람까지도 읽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런 일이 가능할까 생각하던 중, 올해 4월 27일 판문점선언을 계기로, 언젠가는 그 길도 열릴 것이라는 새로운 희망이 싹 트게 되었다. 한글을 아는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이 읽히기를 바란다. <가와구치 사치코(川口祥子)>

처음 이 체험기를 부탁한 것은 1977년 겨울방학 전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나는 이흥섭 씨의 딸 동순의 3학년 담임을 맡았습니다. 나는 당시 사회과목을 가르쳤는데, 학생들에게 ‘부모의 역사’ ‘전쟁체험’ 등을 2학년 역사수업 숙제로 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겨울방학에 동순에게 특별히 ‘아버지의 역사’를 써보지 않겠냐고 제안하게 되었습니다.
그 해 겨울방학 동안, 1944년 5월 18일에 일본에 와서 8월 오봉까지의 3개월간의 일을 아버지가 말하고 딸이 받아쓰는 형식으로 초고가 완성되었습니다.
1985년 여름 글이 완성될 때까지 8년 사이에 기쁜 일과 안타까운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재일조선인 1세의 증언 중에 이 정도로 자세하고 잘 정리된 글이 또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원고를 손에 쥐었을 때의 기쁨과, 8년간에 걸친 이흥섭 씨의 노고에 대한 감사함이 마음속에 가득했습니다.
체험기를 쓴 고통과 노력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는 이 체험기를 향후 재일조선인 교육의 중요한 자료로써 소중하게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이 책을 읽었으면 합니다.
<무로타 다쿠오(室田卓雄)>

[미디어 소개]
☞ 조선일보 2018년 12월 1일자 기사 바로가기 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