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06

윤동주 연구 | 마광수 |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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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연구
마광수 (지은이)철학과현실사2005-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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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들어가는 말
Ⅰ.서론
1.연구 방향
2.연구사의 검토
3.접근 방법의 고찰-'상징'의 이해

Ⅱ.작품에 나타난 상징적 표현의 분석
1.자연 표상으로서의 상징
2.시대 및 역사적 상황의 상징
3.내적 갈등과 소외의식의 상징
4.사랑과 연민의 상징
5.종교적 표상으로서의 상징

Ⅲ.결론
1.각 상징 유형에 나타난 윤동주의 의식세계
2.윤동주 시의 총제적 특질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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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마광수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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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서울 출생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현재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1977년 『현대문학』에 시 「배꼽에」, 「망나니의 노래」, 「고구려」 등 6편의 시가 추천되어 시단에 데뷔
1989년 『문학사상』에 장편소설 「권태」를 발표하여 소설가로도 데뷔
2017년 9월 5일 타계

주요 작품

- 문학이론서
『윤동주 연구』, 『상징시학』, 『카타르시스란 무엇인가』, 『문학과 성』, 『시학』, 『삐딱하게 보기』, 『연극과 놀이 정신』, 『마광수 문학론집』 외

- 시집
『가자... 더보기

최근작 : <왜 뱀은 구르는 수레바퀴 밑에 자기머리를 집어 넣어 말벌과 함께 죽어 버렸는가?>,<추억마저 지우랴>,<마광수 시선> … 총 94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철학과현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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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철학과 현실 2026.봄>,<철학과 현실 2025.겨울>,<철학과 현실 2025.여름>등 총 433종
대표분야 : 철학 일반 16위 (브랜드 지수 36,257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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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작품들에 관심가진 사람이라면 이거 꼭 읽어보는게 좋음.
MAKWANGSOO 2017-02-26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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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편히 쉬십쇼.
UGK4LIFE 2017-09-06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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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분석도 훌륭하고 에로티시즘적 분석도 합리적인 어조로 일관되어 있다. 다만 퇴고 과정에서의 여제자 착취는 역겹다.
낫또맛있다 2015-10-12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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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를 최연소 교수로 임용될 수 있게끔 한 그 박사논문이라는데, 세월 탓인가 아니면 이미 마광수의 윤동주가 우리에게 익은 탓인가 천재적이라는 느낌은 못 받았다. 다만 해석이 합리적이라는 건 분명하다.
초연 2017-04-03 공감 (0)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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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연구> (마광수) 요약과 평론
1. 서론: 연구의 배경과 목적

마광수의 <윤동주 연구>는 1983년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논문으로 발표된 후 서적으로 출간된 글이다. 이 연구가 지니는 문학사적 의의는 대단히 독보적이다. 마광수가 이 논문을 발표하기 전까지 한국 문단과 학계에서 윤동주는 주로 <항일 민족시인> 혹은 <순결한 청년 지사>라는 단일한 프레임 안에서만 소비되었다. 기존의 비평가들은 그의 시를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에 끼워 맞춰 극단적인 저항시로 해석하거나, 반대로 작품의 역사성을 배제한 채 지나친 형식주의적 분석에만 몰두하는 양극단의 태도를 보였다.

마광수는 이러한 이분법적이고 표피적인 정서 추종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는 윤동주의 생애에 과도하게 부여된 신화적 위인을 걷어내고, 텍스트 자체의 문맥에 나타난 상징적 표현 체계를 미시적으로 분석했다. 이를 통해 시대적 배경과 시인의 내밀한 정신세계를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윤동주 시의 본질을 총체적으로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2. 본론: 작품에 나타난 상징적 표현의 분석

마광수는 윤동주의 시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로 <부끄러움>과 <자가치유적 상징>을 제시한다. 그는 윤동주의 시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자연, 상황, 종교적 시어들을 다섯 가지 상징 유형으로 분류하여 구체적으로 분석했다.

자연 표상으로서의 상징: 윤동주의 시에서 <하늘>, <바늘>, <별>, <달> 등의 자연물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이는 시인이 도달하고자 하는 절대적 순결성이나 초월적 자아를 투영하는 매개체이다. 특히 <별>은 어둠이라는 부정적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자아를 비추는 성찰의 등불로 기능한다.


시대 및 역사적 상황의 상징: <밤>, <겨울>, <바람> 등은 일제강점기라는 가혹한 역사를 상징한다. 마광수는 윤동주가 이러한 시대적 고통을 거칠고 직설적인 구호로 외치는 대신, 내면의 심상으로 침잠시켜 예술적으로 승화했음에 주목했다.


내적 갈등과 소외의식의 상징: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우물>, <거울>, <길>은 자아분열과 소외의식을 드러내는 장치다. 우물이나 거울 속의 자아를 바라보며 느끼는 미움과 가엾음은, 행동하지 못하는 지식인의 병적인 자기애(나르시시즘)와 내면적 갈등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사랑과 연민의 상징: 가상의 여인이나 이웃을 향한 시선에서 나타나는 상징들은 시인이 지닌 인간주의적 면모를 드러낸다. 이는 나약한 자아에 대한 연민에서 시작하여 타인과 민족을 향한 보편적 사랑으로 확장된다.


종교적 표상으로서의 상징: 기독교적 가치관에서 기인한 <십자가>, <골고다>, <슬픈 족속> 등의 시어는 속죄양 의식을 정형화한다. 마광수는 윤동주가 현실의 고통을 종교적 순교 정신을 통해 극복하려 했으며, 이 과정에서 자학에 가까운 치열한 양심의 가책이 발생했다고 보았다.

마광수는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윤동주의 저항을 외부 세계를 향한 거친 투쟁이 아닌, 자기 내면 및 본능적 자의식과의 끊임없는 싸움으로 정의했다. 겉치레나 이데올로기적 허세가 없는 쉽고 순수한 시어로 인간 본연의 고뇌를 정직하게 기록했기 때문에 윤동주의 시가 시대를 초월한 생명력을 얻었다는 것이 이 연구의 결론이다.
3. 평론: 억압적 신화화를 깨뜨린 유미주의자의 통찰

마광수의 <윤동주 연구>는 한국 비평사에서 박제화되어 가던 한 시인의 영혼을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내린 기념비적인 평론이다. 기존 학계가 윤동주를 애국주의라는 거대한 거울 앞에만 세워두려 했을 때, 마광수는 그 거울을 깨뜨리고 시인의 내면에 도사린 나약함, 불안, 그리고 자학적 나르시시즘의 궤적을 추적했다.

이 비평의 가장 큰 미덕은 원전 실증주의와 심리주의 비평의 영리한 결합에 있다. 마광수는 거창한 외래 이론을 무분별하게 대입하기보다, 윤동주의 텍스트 자체를 철저하게 파고들었다. 윤동주 작품에서 <부끄러움>이라는 시어가 무려 10편 이상 반복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이를 식민지 지식인의 단순한 무기력증이 아닌 인간 실존의 본질적 고뇌로 격상시킨 점은 탁월하다. 윤동주가 지닌 청교도적 수줍음과 마광수 고유의 유미주의적 취향은 극단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그 극과 극의 만남이 윤동주 시에 내재한 섬세한 <인공적 미학>과 <정직성>을 포착해 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시대적 한계로 인한 아쉬움도 존재한다. 상징의 분류학적 분석에 지나치게 치중한 나머지, 개별 작품이 지닌 유기적 역동성이나 통시적 변화 과정이 다소 평면적으로 다뤄진 경향이 있다. 또한, 내면 심리 분석에 무게중심을 두다 보니 윤동주가 맞닥뜨렸던 구체적인 역사적 타자(일제 통치 말기의 전시 동원 체제 등)와의 거칠고 구체적인 마찰음이 다소 탈정치화되어 소거된 측면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구는 윤동주라는 텍스트를 민족주의의 프로파간다(선전 선동)로부터 해방시켰다. 마광수는 웅변조의 거대 담론이 판치던 한국 문학계에, 잘난 척하지 않는 쉽고 순수한 문학이 어떻게 인간의 가장 깊은 심연을 건드릴 수 있는지 윤동주를 통해 증명해 보였다. 지식인의 위선과 교조주의를 혐오했던 마광수의 평론관이 가장 학술적이면서도 유려하게 녹아든, 한국 작가론의 고전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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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의 <윤동주 연구>는 문학 연구서이면서 동시에 마광수 자신의 문학관이 강하게 드러나는 책으로 보아야 합니다. 먼저 책의 성격과 핵심 논지를 확인한 뒤, 요약과 평론을 함께 쓰겠습니다.

<마광수, 『윤동주 연구』 — 1,000단어 요약+평론>

<1. 책의 성격>

마광수의 『윤동주 연구』는 그의 문학박사학위 논문을 바탕으로 한 윤동주론이다. 마광수는 연세대 국문학과와 대학원을 거쳐 「윤동주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고, 이후 연세대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그의 저술 목록에서도 『윤동주 연구』는 『상징시학』, 『카타르시스란 무엇인가』, 『문학과 성』 등과 함께 문학이론서 계열에 속한다.

이 책은 우리가 흔히 아는 ‘민족시인 윤동주’의 이미지를 단순히 반복하는 책이 아니다. 물론 윤동주가 식민지 말기의 청년 지식인으로서, 일본 제국주의 아래에서 고통과 부끄러움과 저항 의식을 지녔다는 점은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그러나 마광수의 관심은 윤동주를 정치적 저항시인으로만 규정하는 데 있지 않다. 그는 윤동주의 시세계 안에 있는 내면성, 순결성, 죄의식, 자기응시, 죽음 의식, 동경, 종교적 감수성, 상징 구조를 분석하려 한다.

따라서 이 책의 핵심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윤동주는 민족 저항의 상징이기 이전에, 자기 내면의 부끄러움과 순결에 집착한 서정적·종교적 시인이다.>

마광수는 윤동주의 시를 외부 현실의 직접적 반영으로만 보지 않고, 내면 심리와 상징의 구조 속에서 읽는다. 이것이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2. 윤동주의 핵심 정서: 부끄러움>

윤동주 시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정서는 ‘부끄러움’이다. 「서시」의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는 구절은 윤동주 전체를 대표하는 문장처럼 읽혀왔다. 마광수 역시 이 부끄러움을 윤동주 시세계의 핵심으로 본다.

그러나 여기서 부끄러움은 단순한 도덕적 반성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 전체를 향한 자기검열이다. 윤동주는 자신이 식민지 현실 속에서 충분히 저항하지 못한다는 정치적 부끄러움도 느끼지만, 그보다 더 근원적으로는 인간으로 태어나 욕망과 나약함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 자체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마광수식으로 말하면 윤동주의 부끄러움은 ‘윤리적 감정’인 동시에 ‘미학적 감정’이다. 그는 세속적 욕망, 타협, 더러움, 폭력, 자기기만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윤동주의 시에는 자주 하늘, 별, 바람, 밤, 십자가, 길, 자화상 같은 이미지가 등장한다. 이 이미지들은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자기 정화와 자기 심판의 상징이다.

이 점에서 윤동주는 적극적 투사의 시인이라기보다, 자기 내면에서 끊임없이 재판을 받는 시인이다. 마광수의 윤동주론은 바로 이 내면 재판의 구조를 드러내려 한다.

<3. 순결성과 자기분열>

윤동주의 또 다른 핵심은 순결성이다. 그는 더럽혀지지 않은 세계를 꿈꾼다. 하지만 현실은 이미 더럽혀져 있다. 식민지 현실은 폭력적이고, 조선 청년 지식인의 삶은 무력하며, 개인의 내면도 완전히 순수하지 않다. 여기에서 윤동주의 자기분열이 생긴다.

윤동주는 순결을 원하지만 자신이 순결하지 못하다고 느낀다. 그는 저항하고 싶지만 충분히 저항하지 못한다고 느낀다. 그는 신앙적 구원을 갈망하지만 확신 속에 편안히 머물지 못한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밝음과 어둠, 별과 밤, 순수와 죄, 소망과 절망이 함께 존재한다.

마광수는 이러한 긴장을 윤동주의 시적 동력으로 본다. 윤동주의 시는 단순히 맑고 깨끗한 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맑음은 어둠과 죄의식이 있기 때문에 생긴다. 별이 빛나는 것은 밤이 있기 때문이다. 윤동주의 순결성은 현실을 모르는 순진함이 아니라, 현실의 더러움을 깊이 의식한 사람의 고통스러운 이상주의다.

<4. 종교적 감수성과 죽음 의식>

윤동주의 시에는 기독교적 감수성이 강하게 흐른다. 십자가, 죄, 속죄, 희생, 하늘, 기도 같은 이미지가 반복된다. 마광수는 이를 윤동주의 시세계 형성에서 중요한 요소로 본다.

하지만 윤동주의 기독교성은 교리적 확신이라기보다 정서적·상징적 구조에 가깝다. 그는 죄의식이 강하고, 자기희생의 이미지를 반복하며, 순결한 죽음을 통해 더러워진 현실을 넘어가려는 충동을 보인다. 「십자가」 같은 시에서는 고난과 희생의 이미지가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윤동주의 죽음 의식도 이와 연결된다. 그의 시에서 죽음은 단순한 생물학적 종말이 아니다. 그것은 순결을 보존하는 방식이기도 하고, 더러운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마지막 형식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을 지나치게 낭만화하면 위험하다. 그러나 윤동주의 시적 세계 안에서 죽음은 공포와 매혹을 동시에 가진다.

마광수는 이런 점에서 윤동주를 단순한 애국시인으로 축소하지 않는다. 그는 윤동주를 죽음, 죄, 순결, 자기희생의 상징체계 속에서 읽는다.

<5. 마광수식 윤동주 해석의 특징>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은, 마광수가 훗날 대중적으로 알려진 ‘성 해방론자’ 또는 ‘즐거운 사라의 작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데 있다. 마광수는 일반적으로 성적 자유, 위선 비판, 개인주의, 쾌락주의의 이미지로 기억된다. 그는 소설 『즐거운 사라』 필화 사건으로 구속과 해직을 겪었고, 이후 한국 사회의 도덕주의와 검열 문제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런데 『윤동주 연구』의 마광수는 매우 진지한 문학 연구자다. 그는 윤동주를 가볍게 다루지 않는다. 시어, 이미지, 상징, 주제, 정서 구조를 세밀하게 분석한다. 훗날의 마광수가 ‘금기 파괴’의 작가였다면, 이 책의 마광수는 ‘순결과 죄의식’을 분석하는 연구자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단절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깊은 연결도 있다. 마광수는 평생 한국 사회의 도덕적 위선을 비판했다. 그는 억압된 욕망을 드러내고, 거짓 순결주의를 공격했다. 그런데 윤동주 연구에서 그는 진짜 순결성과 가짜 도덕주의를 구별하려 한다. 윤동주의 순결은 사회가 강요한 도덕 규범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고통스러운 진실성에서 나온다.

이 점에서 마광수는 윤동주를 자기 방식으로 사랑한 셈이다. 윤동주는 마광수가 공격했던 위선적 도덕주의자가 아니다. 윤동주는 자기 자신을 가장 먼저 심판한 사람이다. 그래서 마광수에게 윤동주는 억압적 도덕의 시인이 아니라, 내면 진실성의 시인이다.

<6. 이 책의 강점>

첫째, 이 책은 윤동주를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으로만 읽는 해석을 보완한다. 한국 사회에서 윤동주는 흔히 식민지 저항의 상징으로 소비된다. 물론 그 해석은 틀리지 않다. 윤동주의 삶과 죽음은 식민지 권력과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윤동주 시의 힘은 정치적 메시지에만 있지 않다. 그의 시가 오래 남는 이유는 정치 구호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부끄러움과 순결 욕망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마광수는 바로 이 점을 잘 포착한다.

둘째, 시의 상징 구조를 세밀하게 읽으려는 장점이 있다. 별, 하늘, 바람, 밤, 길, 자화상 같은 이미지를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윤동주의 내면세계를 구성하는 반복적 상징으로 본다. 이것은 윤동주 시를 더 깊이 읽게 해준다.

셋째, 윤동주를 지나치게 성인화하지 않는다. 윤동주는 완성된 성자가 아니라, 괴로워하고 흔들리고 자기 자신을 미워한 청년이다. 이 점을 볼 때 윤동주는 더 인간적이고 더 가까워진다.

<7. 한계와 비판>

그러나 이 책에도 한계가 있다.

첫째, 내면성에 집중하다 보면 식민지 현실의 구체성이 약해질 수 있다. 윤동주의 부끄러움은 개인적·종교적 죄의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식민지 조선 청년의 역사적 부끄러움이다. 일본어 사용 강요, 창씨개명, 전쟁 동원, 조선어 말살, 지식인의 무력감 같은 구체적 조건을 충분히 함께 보아야 한다. 윤동주의 내면은 역사 밖의 내면이 아니다.

둘째, ‘순결성’ 중심의 해석은 윤동주를 너무 깨끗한 시인으로 고정할 위험이 있다. 윤동주는 순결을 꿈꾸었지만, 그 순결은 불안과 욕망과 두려움 속에서 나온다. 윤동주를 순결의 시인으로만 읽으면, 오히려 그의 복잡한 인간성이 약해질 수 있다.

셋째, 마광수 자신의 미학적 관심이 윤동주 해석에 투사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다. 마광수는 문학에서 위선 없는 자기표현을 중시했다. 그래서 윤동주의 부끄러움과 순결도 ‘진실한 자기표현’이라는 방향으로 읽는다. 이 해석은 매력적이지만, 윤동주의 역사적·공동체적 차원을 충분히 담아내지는 못할 수 있다.

<8. 전체 평가>

『윤동주 연구』는 마광수의 저작 가운데 대중적으로 가장 자극적인 책은 아니지만, 그의 문학적 기초를 보여주는 중요한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 마광수가 단순히 기성 도덕에 반항한 작가가 아니라, 한국 현대시의 내면 구조를 진지하게 분석한 국문학자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책은 윤동주를 다시 읽게 한다. 윤동주는 단순히 “일제에 저항한 순국시인”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엄격했던 청년, 죄의식과 순결 욕망 사이에서 흔들린 시인, 식민지 현실 속에서 부끄러움의 언어를 끝까지 붙든 사람이다.

가장 중요한 평가는 이것이다.

<마광수의 『윤동주 연구』는 윤동주를 민족의 기념비에서 한 인간의 내면으로 다시 데려오는 책이다.>

그 점에서 이 책은 지금도 의미가 있다. 윤동주를 너무 숭고하게만 읽으면 그는 박제된다. 반대로 윤동주를 내면의 고통과 자기분열 속에서 읽으면, 그는 오늘의 독자에게 다시 살아난다. 마광수의 공헌은 바로 여기에 있다. 윤동주를 존경의 대상에서 해석의 대상으로, 기념의 시인에서 고뇌하는 인간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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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가벗고 몸 하나로 뭉치자 | 마광수 | 알라딘

빨가벗고 몸 하나로 뭉치자 | 마광수 | 알라딘


빨가벗고 몸 하나로 뭉치자
마광수 (지은이)시대의창2007-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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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정신보다는 육체에, 질서보다는 자유에, 관념보다는 감성에, 도덕보다는 본능에 가치를 두는' 작가의 성 이데올로기를 직설적인 언어로,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작가가 직접 그린 20여 점의 삽화도 함께 실렸다. 시와 소설, 문학이론서 그리고 각종 칼럼 등에서 마광수 교수가 일관되게 추구해온 '야한 정신'을 전면에 내세운 시집.

그에 따르면 도덕이나 정의는 인간의 질투심.적개심에 그 뿌리를 두고 흑백논리로 선악을 가르는 잔인한 덕목이 되기 쉽고, 법과 통념을 앞세운 욕망의 억제와 길들이기를 통해 획일과 비굴을 낳게 마련이다. 야한 정신은 이러한 지배 질서의 폭압에 맞서는 야인(野人)의 정신이다.


목차


1. 당신의 몸 전체를 주셔요
잔혹한 사랑
몸 전체로 사랑을
고독에
그때 그 여인
첫눈에 반하다
자유연애
오, 너의 빨음직한 젖꼭지여!
즐거운 식사
나르시시즘 만세
중년의 우울
불안한 것은 아름답다
엄마와 시녀
낙원으로의 회귀
정액 아이스케이크
넌 징그러워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
도시에
여자가 더 나아
더보기



책속에서


몸 안 주고 거드름 떠는 년은 북에서 내려온 간첩이다

왜 몸을 안 주니?
너 혹시 북에서 내려온 간첩 아냐?
요즘 섹스 안 하고 처녀 폼 잡는 년이 어디있어?

넌 결벽증 환자거나
불감증 환자거나
성 불구자거나
간첩인 게 분명해.

치사하고 더러워서 너하곤 안 한다.
깔리고 깔린게 야한 여자야

넌 이상한 년
넌 정신병자
넌 지옥에 갈 나쁜 년

섹스 안 하고 거드름 떨면서
어디 잘 먹고 잘 살아봐라
평생 시집도 못 갈 이 병신아. 접기
구애(求愛)

과잉된 감정으로 나를 괜히 포장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나는 지금 몹시 외로워 사랑하고 싶다.

나는 나의 현실이 너무나도 명백하게 객관화되었을 때,
너무나 역겨운 현실의 냄새에 무방비 상태로
금세 취해버리고 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서 힘겨운 한숨 정도로는 너무나 힘들다고 느낄 때,
나는 사랑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나는 지금
순간을 아름답게 타오르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마는 불나비처럼,
내 안의 무언가를 태워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화약 냄새는 피 냄새보다 덜 비릿하니까.

지금 내겐,
같이 소리지르고,
서로가 서로의 냄새를 맡고,
서로가 서로를 정성스레 핥아주는,
그런 섹스가 필요하다.

Love is touch,
Love is feeling.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마광수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림 신청


1951년 서울 출생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현재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1977년 『현대문학』에 시 「배꼽에」, 「망나니의 노래」, 「고구려」 등 6편의 시가 추천되어 시단에 데뷔
1989년 『문학사상』에 장편소설 「권태」를 발표하여 소설가로도 데뷔
2017년 9월 5일 타계

주요 작품

- 문학이론서
『윤동주 연구』, 『상징시학』, 『카타르시스란 무엇인가』, 『문학과 성』, 『시학』, 『삐딱하게 보기』, 『연극과 놀이 정신』, 『마광수 문학론집』 외

- 시집
『가자... 더보기

최근작 : <왜 뱀은 구르는 수레바퀴 밑에 자기머리를 집어 넣어 말벌과 함께 죽어 버렸는가?>,<추억마저 지우랴>,<마광수 시선> … 총 94종 (모두보기)
마광수(지은이)의 말
나는 끓어오르는 성욕을 달래기 위해서 글을 쓴다. 너무나 아파서 글을 쓴다. 쓸쓸하고 고독해서 글을 쓴다. 죽기 싫어서, 아니 죽지 못해서 글을 쓴다. 꼭 한 장르만 붙들고 늘어질 필요도 없다. 시든, 소설이든, 수필이든, 평론이든,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장르든간에 상관없다. 나는 무엇이건간에 쓴다. 내가 쓴 글이 독자에게 감동을 주든 못 주든, 철학적 이념이나 형이상학적 계시를 내포하든 내포하지 않든, 나는 그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나는 그냥 '배설'할 뿐이다.

... 문학은 혼자서 하는 고통스런 배설이어야 한다. 작당을 해서 되는 것도 아니요, 토론을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 문단을 보면 너무나 인간적 유대관계에 휘말려 들고 있다. 그러다보니 내놓는 문학작품들이 고통스런 배설물이 아니라 팔려고 내놓은 수공예품들 같다. 지나치게 매스컴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유명'해지려고 애를 쓴다. 독자들에게 영합하고 평론가들에게 아부하려고 애를 쓴다.

작가는 작품을 쓰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시를 쓰고 소설을 쓰면 그만이지 그 이상의 것을 바라거나 남들 눈치를 봐서는 안 된다. 무엇 때문에 시류에 연연해하고 매스컴이나 평론가들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는가. 또 왜 그리 작가의 '품위'와 세석족 명예에 집착하는가.

작가도 물론 먹고 살아야 하는 존재이니 작품이 좋은 평을 받고 많이 필리기를 바라는 것이 뭐 어떠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내 생각엔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 밑천이 많으면 장사는 그럭저럭 굴러가게 되어 있다. 먹은 게 많으면 그럭저럭 똥이 나오게 되어 있다. 그런데 요즘 작가들 상당수는 먹은 게 없이도 계속해서 똥을 누려고 한다. 밑천도 없는데 세 치 혓바닥으로 잘도 장사를 해댄다.

시의 경우 '정직한 배설'은 특히나 중요하다. 시는 소설에 비해 변비증 걸린 환자처럼 낑낑거리며 간신히 배설해 놓은 '함축적인 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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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의 뇌구조 | 마광수 |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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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의 뇌구조 - 마교수의 위험한 철학수업
마광수 (지은이)오늘의책2011-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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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마광수. 그가 수업 중 간간히 내뱉는 ‘야함’에 대한 철학적 아포리즘. 이 책에서 마광수 교수는 말한다. “명예, 돈, 권력 등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여러 가지로 많지만 그것은 결국 성욕과 식욕의 원활한 충족을 위한 준비단계에 불과하다”고.

그는 우리가 흔히 ‘공부를 열심히 하면 배우자의 외모가 바뀐다’고 빙빙 돌려 말하고 있는 이 세상 돌아가는 법칙을 그만의 직설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그는 말한다. “남자든 여자든 이성을 볼 때 우선 상대방을 성적 대상으로 파악하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항상 ‘마음’이니 ‘영혼’이니 부르짖으며 ‘정신적 사랑’을 희구하는 척 한다. 모든 만남의 밑바탕은 상대방의 외모에 대한 ‘관능적 경탄’에서 비롯되는데 말이다. 도대체 상대방의 마음이나 영혼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는 항상 이런 식으로 솔직하다. 그래서 욕을 먹는다. 밤에는 야동을 보고 낮에는 야동을 단속하는 인간의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태도를 비꼬면서 “좀 더 솔직해지자”고 부르짖는다. 마광수 교수는 이미 대중 앞에서 가식은 물론 마음의 팬티까지 벗어 던졌다. 남은 것은 독자 자신도 책과 마주앉아 마음의 팬티를 벗어 던지는 것뿐이다.


목차


Ⅰ. 마광수의 세계관
이 세상은 섹스로 이루어져 있다 “섹스 없이는 먹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모두 동식물이 번식을 위해 섹스를 하여 생산해놓은 씨앗, 열매, 고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식욕 이전에 성욕이고 성에 고프지 않을 때 건강한 정신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Ⅱ. 마광수의 여성관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저는 손톱이 무지 긴 여자한테 맥을 못 춥니다. 그리고 그로테스크한 화장과 현란한 피어싱, 염색, 뾰족 구두 등.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속’이 야해야 한다는 것이죠. 또 핥고 잘 빨아야 해요.”

Ⅲ. 마광수의 섹스관
섹스는 재밌는 놀이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섹스 왜 했냐’ 물으면 ‘허무해서 그랬다’는 식으로 쓰는 수법. 대표적으로 무라카미 류가 그렇지. 나는 그게 아니거든. 성은 무조건 즐겁다는 거야. 그래서 명랑하게 나가잖아.『돌아온 사라』도 얼마나 명랑해. 사회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섹스로 도피한다는 건 핑계야. 면죄부를 받는 수단이지. 신나게 야하게 묘사한 뒤에 ‘아, 허무하다’ 이거면 돼? 섹스는 만날 소외되어 있을 때만 하나? 즐거울 때도 하지. 나는 다만 섹스는 즐겁다 이거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지 않아?”

Ⅳ. 마광수의 문학관
한국은 문화적으로 촌스럽다 “나한테 문학은 그냥 카타르시스야. 나도 좋고 독자도 좋자 이거지. 나도 대리배설하고 너희도 대리배설해라 이거야. 교훈? 그런 거 없어. 문학은 오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냐. 인문학을 공부하다 보니까, 소설이고 뭐고 사랑 빼면 시체야. 근데 사랑이 뭐야, 따지고 보면 성욕이야.”

Ⅴ. 마광수의 추억관
내가 흡입한 여자들 “『즐거운 사라』에 나오는 국문과 교수 ‘한지섭(사라 애인)’은 저의 분신이죠. 실제로 홍대 교수 시절, 사라 같은 미술대 여학생과 진한 연애를 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제자들과 연애를 가장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즐거운 사라』필화 사건 이후론 사건 후유증 때문에 쭉 굶었지요.”

Ⅵ. 마광수의 철학관
권태는 권태를 낳고 변태는 창조를 낳는다 “쾌락은 어떤 쾌락이든지 질리게 되어 있어. 그러나! 섹스만은 안 질린다. 인생도 뭐든 질려. 심지어 밥도 먹다 보면 질려. 하지만 섹스 자체는 절대 안 질려. 물론 한 여자 한 남자하고만 하면 질리겠지. 당연한 거 아냐? 사랑을 해도 권태가 있잖아. 권태와 변태. 권태로워지면 변태로워지고, 변태로워지면 창조가 나온다. 그게 내 명제야.”

Ⅶ. 마광수의 미술관
예술은 ‘위압적 양심’과 ‘격노하는 본능’을 비폭력적으로 중재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손으로 비비고 문지르며 나이프로 긁어댈 수도 있는 캔버스 작업은 내게 진짜로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선물해주었다. 그림이 잘되고 못되고를 떠나 우선 나 스스로 카타르시스의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 붓을 휘둘러대었는데, 그러다보니 캔버스 작업은 대부분 즉흥성에 의존한 것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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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15 우리는 평생 동안 완벽한 성욕의 충족을 찾아 헤매며 살아간다.
P. 19 육체가 배고플 때 정신이 맑아질 수는 없다. 육체가 배부르면 느긋해지고 객관적이고 철학적이 된다. 머지않은 미래에 가서는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 섹스를 즐기는 돼지가 더 낫다’로 가치관이 바뀔 것이다.
P. 41 내가 늘 이야기하는 페티시가 새빨간 매니큐어를 바른 긴 손톱이다. 20년 전에 그런 이야기를 하면 변태라고 욕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네일숍이 많아지고 네일아트가 유망직종으로 꼽힐 정도가 되었다.
P. 49 젊었을 때는 성형수술을 골 백번해서라도 아름다운 여자(또는 남자)가 되어야 한다. 요즘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지성’이 아니라 ‘미모’이다.
P. 64 나는 페티시스트(fetishist)이다. 페티시스트들은 특히 허무주의적인 성향이 많다. 죽음에 대한 그리움, 죽어 없어져 영원히 물질화되고 싶어 하는 원초적 소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살아있는’ 여인의 육체보다 긴 모조손톱이나 스타킹, 특이한 장신구, 굽이 아주 높은 하이힐 등 ‘물질’로 된 그녀의 부속품에 더욱 집착한다. 그러면서 영원히 무화(無化)되어 없어져버리는 것 같은 쾌감을 맛본다. 접기
P. 78 ‘정신적 쾌락’이 일종의 악(惡)에 속한다고 보는 이유는 그 ‘정신적 쾌락’의 정점에 ‘종교’가 있기 때문이다. 인류는 언제나 종교적 도그마 때문에 고통 받았다.
P. 86 정치적, 문화적으로 후진된 사회일수록 도덕만능주의 경향이 강하고 육체보다 정신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P. 129 엄밀히 말해 모든 인간은 이성이라는 권위에 복종하는 대가로 문명생활이라는 팁을 받아먹고 살아가는 마조히스틱한 체질의 노예라고 할 수 있다.
P. 153 나는 인간의 역사가 놀이의 시대에서 노동의 시대로, 그리고 노동의 시대에서 다시 놀이의 시대로 이행되어 간다고 본다.
P. 161 현재적 욕구에 정직하되 ‘길게 보고’ 살며 ‘두고 보자’ 정신으로 나가야 한다. ‘두고 보자’ 정신은 절대로 복수의 정신이 아니다. 시류를 초월해 주변의 유행사조에 연연해 하지 않고 시대를 앞서가는 정신이 바로 ‘두고 보자’ 정신이요. 천진난만한 솔직성과 직관력을 지닌 천재의 정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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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마광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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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서울 출생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현재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1977년 『현대문학』에 시 「배꼽에」, 「망나니의 노래」, 「고구려」 등 6편의 시가 추천되어 시단에 데뷔
1989년 『문학사상』에 장편소설 「권태」를 발표하여 소설가로도 데뷔
2017년 9월 5일 타계

주요 작품

- 문학이론서
『윤동주 연구』, 『상징시학』, 『카타르시스란 무엇인가』, 『문학과 성』, 『시학』, 『삐딱하게 보기』, 『연극과 놀이 정신』, 『마광수 문학론집』 외

- 시집
『가자... 더보기

최근작 : <왜 뱀은 구르는 수레바퀴 밑에 자기머리를 집어 넣어 말벌과 함께 죽어 버렸는가?>,<추억마저 지우랴>,<마광수 시선> … 총 94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인간의 행복 조건에 대한 위험한 단언

돈, 건강, 친구, 직업, 신앙, 배우자, 명예, 권력, 정신적 만족… 많은 예술가와 학자가 제시하는 행복의 조건을 누가 전적으로 부정할 것인가. 가중치를 어디에 두는가의 문제이지 결국 같은 재료의 다른 요리일 뿐일 것이다. 마광수 교수의 행복 레서피에는 주재료가 한 가지다. 동물적 본능의 충족. 그중 단연 ‘섹스’.
그에게 동물적 인간 대 정신적 인간이란 이분법적 개념 사이의 갈등이란 없다. 그에겐 ‘육체적 쾌락만이 선(善)’이며, 진정한 행복은 야한 섹스로부터 오는 부산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물적 본능의 핵심인 섹스에 대한 우리 사회의 도덕적 잣대, 제도적 규제는 성적 본능의 삐뚤어진 발산만 낳는 지배층의 무기일 뿐이다.
그는 본문에서 “극단적 쾌락주의(원나잇스탠드, 그룹섹스, 부부교환 섹스 등)를 악덕으로 공격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결국 죽을 때까지 쾌락을 좇아 살아가는 존재다. 그러므로 갖가지 보수적 윤리와 도덕에 기초하는 성에 대한 금기는 하루빨리 없어져야 한다. 스와핑이나 SM섹스, 그리고 성적 표현물에 관한 각종 규제가 풀리면 강간 같은 것은 차츰 없어지게 되고 성범죄도 줄어들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종교나 이데올로기는 성적 권태를 벌충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에 불과하다. 우울증과 권태를 포함한 현대인의 정신적 고통 또한 성적 불만족이 원인이라고 본다. 그의 존재 기반, 행복의 조건은 절대적으로 섹스다. 그는 말한다. “나는 섹스한다, 그래야만 내가 존재한다.”

마광수가 솔직한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척’하는 것인가
그는 우리가 차마 입으로 말하지 못하는 은밀한 욕망의 버벌(verbal) 배설구인가

마광수 교수에게 ‘인간에게 동물적 본성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이를 이성으로 적절히 통제해야 이 사회가 유지되지 않겠냐’라는 식의 절충안을 내밀 틈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즐거운 사라』(1991년) 외설시비로 1992년 검찰에 구속되는 사건을 대표로 그의 지금까지 행보는 ‘성(性)’과 관련된 우리 시대의 통념에 극단적으로 대립했다.
그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란 말은 관념적 굴레일 뿐 실상 인간은 ‘개인적’ 동물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 책『마광수의 뇌구조』에서도 국가가 통제하는 지금의 일부일처제의 결혼제도를 부정하는 대신, 개인이 언제 어디서든 자유롭게 성욕구를 표출할 수 있도록 사회제도 및 가치관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사랑’을 ‘성욕’의 다른 이름으로 보며, 궁극적 성적 만족은 종족보존의 욕구를 극복할 때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성적 표현과 관련해 우리 시대 문학적, 미적 기준을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소위 포르노그라피에서 통용되는 성 용어를 이 책에서도 노골적으로 사용한다.
그는 흔히 도덕적 정화를 뜻하는 ‘카타르시스’를 ‘사디스틱한 성욕과 마조히스틱한 성욕의 대리배설’로 재정의하며, 부도덕한 쾌락 욕구의 직접적 배출이 허용되지 않는 현실에서 간접적으로나마 배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문학(예술)의 목적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얼굴보다는 마음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구호는 지극히 위선적일뿐 아니라 ‘마음’이나 ‘영혼’을 부르짖으며 ‘정신적 사랑’ 운운하는 것은 헛된 짓이라고 비난한다. 게다가 여자가 남자에게 사랑받으려면 자칫 천박해 보일 정도로 야하고 진하게 화장해야 한다는 도발적 제안을 하는가 하면, ‘밤에는 포르노 보고 낮에는 금욕주의적인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는’ 한국 사회의 이중성을 질타하면서 이는 문화 후진국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꼬집는다.

마광수는 변태다

그의 사고는 ‘정상적’이지 않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일반적’이지 않다는 의미에서 그는 변태다. 권태는 변태를 낳고 변태는 창조를 낳는다는 그의 주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관능적 허기증을 앓고 있는 그가 변태적 판타지를 긍정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 아닌가.
“하이힐처럼 뾰족하고 시스루룩처럼 엿보이며, 임자있는 사람과의 데이트처럼 아슬아슬하고 사팔뜨기 눈처럼 짝짝이(언밸런스)이고 젖꼭지를 피어싱해 어쩐지 으스스하며, 파운데이션을 두텁게 발라 목과 얼굴이 분리된 과장스러움”을 아름답다고 말하고 그런 여자를 아름다운 여자라고 지칭하는 그의 여성관은 변태스럽다. (아니 후각, 촉각 등 오감 전체가 그렇다.)
“알고 보면 사랑은 별 게 아니다. 사랑은 오로지 육체적으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접촉감’일 뿐이다. Love is Touch! 사랑은 무조건 주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만지는 것이다. 사랑은 영혼의 대화가 아니라 살갗끼리의 대화이다. 사랑은 정신적 신뢰감이 아니라 육체적 신뢰감이다. 사랑은 살갗끼리의 접촉이지 성기끼리의 접촉만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그의 사랑관은 변태스럽다.
“나의 외로움, 나의 사랑, 내가 살아가는 실존적 이유의 정체가 ‘섹스’라는 것을 파악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남이 뭐라고 하든, 나의 심리가 혹 변태든 아니든, 나로서는 어쩔 수 없다. 그것이 나의 존재 이유이며 살아가는 방법이며 목표이기 때문에”라고 육체를 가진 한 인간으로서 읊조리는 그의 내밀한 고백도 어쩐지 변태스럽다.
마광수, 그의 뇌구조는 정말 변태스러운가. 접기



가장 쉬운 마광수 입문기! 마광수는 재평가받아야 마땅하다, 마교수님 화이팅!!
yusilva 2011-10-04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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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했는데...역시나...
컴온타스 2014-06-19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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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의 주장은 일관되기에 존중받아 마땅하다. 옳고 그름 혹은 좋고 나쁨을 떠나



소설가나 교수가 법정에 불려가 재판을 받는건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시대의 금기를 거슬린 자들은 어김없이 소환을 당했다. 그렇다. 시기를 잘못 골라 태어나는 바람에 감옥에 가기도 했다는 말이다. 만약 마 교수가 지금 30대 초반이었다면 종횡무진 활약했을 것이다. 당연히 젊을 테니 못생김도 지적인 모습으로 감추어지고 말빨이야 두말할 것 없으니 날아다닐 것이니 무조건 섭외 1순위였을 것이다. 그러나 불헹하게도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군사독재시절이었고 박정희가 물어난 뒤에도 한참동안이나 그 망령이 떠돌고 있었다.



마광수는 프로이드식 접근을 택하고 있다. 인간의 원천은 성욕과 식욕이며 모든 말과 생각의 형태의 변행에 지나지 않는다. 도리어 성욕에 집중함으로써 헛된 욕망을 물리칠 수 있다. 곧 돈이나 권력같은 허깨비에 불과한 잡욕망에 휘둘리기보다 본래의 욕망에 치중함으로써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를테면 길고 가느다른 여성의 손가락이나 손톱에 환장하는 것이 태극기를 휘두르고 박근혜 만세를 외치며 눈물짓는 집회 참가자보다 백배 천배 훌륭하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일관되기에 존중받아 마땅하다. 옳고 그름 혹은 좋고 나쁨을 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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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지 2017-02-24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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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의 뇌구조




나는 마광수 교수님의 수업을 직접 들었던 학생으로서 교수님은 굉장히 밝고 솔직하고 재미난 분이셨다. 또한 신사다우면서도 권위주의적이지도 않아 학생들에게 먼저 다가가 편하게 대해주셨고(나는 남학생이었음에도) 수도 그래서 아주 인기가 많았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먼저 하는 것은 마광수 교수님의 책, 그것도 오래전에 출간된 책(즐거운 사라,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만 읽고(심지어는 읽지도 않고) 마광수 교수님을 마치 성직자가 신도를 유혹해 범죄를 저지르는 변태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마광수의 뇌 구조는 마 교수님이 그동안 야한 여자가 좋다거나 즐거운 사라 등으로 이끌어냈던 성담론의 이유와 철학을 담고 있다. 만약에 섹스교가 생긴다면 그 바이블 정도 될 것 같다.







먼저 성담론을 이끌어낸 데에는, 마 교수님의 출생과 성격에 상당 부분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마 교수님의 집안은 주변의 부당한 압력으로 몰락한 ‘선비가문’이 아니었기에 애초부터 반드시 되살려야 할 오기를 갖지 않을 수 있었다. 이는 빨치산 이력으로 몰락한 영남 선비 이문열이 갖고 있었던 오기와 의지를 되새기면 쉽게 이해가 된다. 그러기에 마 교수님은 세상을 좀 더 너그럽고, 비권위, 비관념적으로 볼 수 있었다. 비관념적이었기에 있는 그대로 우리 사회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성행위임을 알 수 있었고, 비권위적이었기 때문에 솔직하게 그것을 주장할 수 있었다.







이는 마 교수님의 직업이 교수라는 것을 걸고넘어지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교수는 가장 보수적인 직업에 속한다. 또한 가장 관념적인 집단이다. 그런 사회에서 솔직하게 성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큰 의미가 될 수 있었다. 밤에는 야동을 보고, 낮에는 야동을 단속하는 사회의 이중성을 고발하는 것은 곧 경직된 교수집단과 보수성 양측을 모두 공격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수는 그를 격렬히 공격했고 진보는 보수의 공격 측면에서 또 격렬히 옹호했던 것이다.







보혁논쟁을 떠나서, 관념적 쾌락이 위험한 이유는 정신적 쾌락의 정점에는 일종의 ‘종교’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종교는 도그마로서 인간을 구속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억압이 강한 곳일수록 육체보다 정신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머리를 짧게 깎기를 강요하는 곳일수록 억압이 강한 곳인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머지않은 미래에 가서는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 섹스를 즐기는 돼지가 더 낫다'로 가치관이 바뀔 것’이라는 주장은 경청해 볼만하다(p.19)







이 책은 세 가지 측면에서 읽어야 하는데, 솔직함의 측면에서 예를 든 내용들(페티시, 야한 여자), 비권위 측면에서의 내용들(유연적 사고), 비관념 측면에서의 내용들(놀이사회, 정신적인 쾌락보다 육체적인 쾌락의 중시) 등이다. 많은 이들이 그저 첫 번째 측면에서 든 내용 페티시나 야한 여자의 예만 보고 비난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시대가 변해 이제는 성이 어느 정도 사회의 공적인 측면으로 부각되었다. 문학으로는 장정일이 있고 연극으로는 교수와 여제자 등이 있다. 마 교수님처럼 되자는 것이 아니라 마 교수님의 생각도 존중해 보자는 뜻이다. ‘무조건 치밀어 오르는 욕구에 따라 행동하자는 말은 아니다. 인류는 그러한 야수성 정도는 막을 수 있을 만한 문화적 대리배설 장치를 개발해냈다. 내가 강조하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이중적 의식구조는 위험하다는 것이다. 개인의 본능적 욕구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것을 자유롭게 담론화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짜 도덕이 이루어진다. 참된 도덕이란 '솔직성'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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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빛 2011-08-30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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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의 뇌구조


이 책의 저자인 마광수는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저자를 처음 알게된것은 즐거운 사라를 통해서였다. 그후 나는 야한여자가 좋다 등을 통해서였다. 그후 그의 작품과 관련된 외설에 대한 문제로 메스컴을 오르내릴 때 등을 통해서였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야한 여자는 보다 솔직하게 스스로의 본능을 드러내는 사람, 자연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는 사람,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을 천진난만하게 원시적인 정열을 가지고 가꿔 가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저자는 공공연하게 체질상 성욕이 명예욕보다 훨씬 더 강한 사람이라 이야기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글을 읽어보면 성욕에 보다 충실한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처음 그의 이름을 들었을 때는 그의 사상에 관심이 있기보다는 그가 일으킨 이슈에 관심이 있었다. 도대체 어떤 책을 썼기에 수감생활까지 하게 되었나 궁금해 하면서 그의 책을 접할 수 있었다.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가 불러 일으킨 외설 시비는 평소 예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을 무척 고통스럽게 만들었을 법하다. 그 관계에 대해 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이 이미 확고한 신념을 가진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야 어느 쪽이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발산하는 것으로 족하겠지만 말이다. 나역시 누가 답을 요구한 것도 아니건만 주제넘게 그런 고통을 느꼈던 사람들 중의 하나다. 당시 사회분위기도 그랬지만 책을 읽는 나부터가 어렸기 때문에 그의 책을 이해했다기보다는 충격을 받은 기억만 난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그의 속도를 사회가 발맞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성문화가 개방적으로 바뀌었고, 심지어 개그프로그램에서 마광수 교수를 흉내 내는 개그맨이 있을 정도로 그의 인기가 높아졌다.

이 책은 저자가 그때그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념을 기록한 책이다. 세계관, 여성관,섹스관, 문학관, 추억관, 철학관, 미술관 등 여섯가지 범주로 나누어 글을 모아놓았다. 이 책은 각 내용들이 비교적 길지 않은 내용들이라 어렵지 않게 읽혀져서 좋았다. 책을 읽기전 저자의 뇌구조가 사실 궁금했다. 저자는 “명예, 돈, 권력 등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여러 가지로 많지만 그것은 결국 성욕과 식욕의 원활한 충족을 위한 준비단계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아름다움’의 본질을 ‘순수미’보다는 ‘관능미’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관능미’가 단지 퇴폐적이고 현실도피적인 아름다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야한 아름다움’이 결코 사치와 퇴폐의 상징으로 매도돼서는 안 된다. 인간 모두가 ‘본능적 욕구의 당당한 노출’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관능미를 능동적으로 가꿔나갈 수 있을 때, 세계는 비로소 상쟁(相爭)을 멈추고 사랑의 낙원으로 바뀌어질 수 있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장한다. 자신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을 넘어서기 위해 저자가 일생 동안 길어 올린 깊은 사유들을 정리한 이 책은 무엇보다 기존의 패러다임에 대해 삐딱한 눈길을 보냈다는 점이 남다르다. 형식과 내용 면에서 모두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한 작가가 생각하는것들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는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성적인 잣대도 어쩌면 시대에 따라 변할것이며 도덕적 가치관 또한 그럴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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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n 2011-08-23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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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의 뇌구조



다소 지나치다 싶을 수도 있는 마광수 교수님의 성을 중심으로 한 담론과 예술관은 사실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예전에는 미처 상상할 수도 없는, 아니 모두들 알고는 있지만 역사의 이면에 감춰놓은 또 다른 얼굴들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리 별날 것도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본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런 사람도 있다고 인정하면 그뿐인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한국사회, 혹은 한국사회를 자기들 뜻대로 움직이고 싶은 어떤 무리들이 마 교수님을 희생양 삼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뒤에 숨어 온갖 파렴치하고 더러운 짓은 다하고 있을 것인지도. 그런 점에서 보면 마 교수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매한 입장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신념이 강할수록 그것은 더욱 이용가치가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추측도 불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내 생각에 마 교수님의 이론이나 성 담론들이 이제는 더 이상 화제가 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쩌다 뉴스의 한 면을 장식할 수는 있어도 대중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한다. 다르게 생각해본다면 대중들이 그만큼 성이나 삶에 대해 개방적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더욱 더 자유로운 자유와 자율을 위해서 계속 글을 써 나가실 것 같은 생각도 든다.

누구나 다 칭송하고 제대로 알지는 못하더라도 다 그러니까 나도 훌륭하게 생각한다고 여겨지는 작가들이나 작품들에 대해 쓴소리, 혹은 자신만의 생각을 펼치는 마 교수님의 글이 마음에 들었다. 이를테면 톨스토이나 조정래, 박경리 작가님 같은 분들의 글을 나름대로 설교 이상의 것으로 평가하지 않는 그런 것? 다양한 관점과 생각이 부족한 세상이니 최소한 재미있지는 않은가? 마 교수님의 생각과 삶이 보편적이지 않아 보이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솔직하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 솔직해졌을 때 불어닥칠 후폭풍을 두려워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많은 신진 작가들이나 개성 넘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처럼 떠들어대고 있기는 하지만 세상에 미치는 여파가 미미한 것으로 봤을 때 한 시절을 시끄럽게 했던 마 교수님과 같은 분들이 쉽게 다시 세상에 나오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의 치부는 그만큼 더 견고한 방어막을 갖고 더 썩어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야 할까? 드러낼수록 더 깨끗해질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언제 입증해보일 수 있을까?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무료로 제공 받아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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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보는사람 2011-10-28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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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의 뇌구조


우리나라 교수들은 목에 힘을 주고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권위를 세우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지식인의 대표이기도 하기때문이다. 우리나라 지식인의 대표중에 작가도 있다.작가들 또한 우리나라 문학을 이끄는 선두주자이기에 그들의 글에 따라 사회풍조가 변화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의 도덕군자적인 흐트려지지 않는 모습이 떠오른다.

마광수는 대학교수이다. 더군다나 책을 내었다. "즐거운 사라" 라는 점잖은 사람이 말해서는 안되는 내용이다. 흔히 우리나라 지식인들은 사적으로는 바람을 피우더라도 공적으로는 아주 도덕인체 한다. 하지만 마광수의 발언때문에 많은 이들이 충격을 받았다. 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하였기 때문이다. 뇌구조에서는 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솔직한 것은 좋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예전부터 살아오면서 잠재되어 오는 도덕적인 관점에서 볼때 놀랍기도 하다. 남자들은 야한 여자가 좋을 것이다. 말로는 마음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 마음또한 어느정도의 미모가 있을때 한에서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성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자라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광수의 거침없는 발언들은 감당하기 힘들기도 하다.


어느정도는 마광수의 발언에 공감할 때도 있다. 자기를 꾸밀줄 아는 여자가 그렇지 않는 여자들에 비해 부지런하다는 것에는 공감하며 또 공감한다. 또 사랑은 길면 그리 아름답지 않다는 것에도 공감한다. 하지만 마광수도 다른 작가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다른 작가들이 자신의 글들과 다르다고 마광수의 글에 비난을 한다고 미워하면서 자신또한 다른 작가를 좋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완전히 솔직하고 싶으면 자신의 글과 다른 글을 쓰고 있는 내용이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솔직한것은 나의 생각도 이해받아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글도 함께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책의 내용이 좋고 나쁨보다는 그 내용을 읽은 독자가 어떻게 또한 무엇을 받느냐에 따라 책이 좋고 나쁨이 결정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광수는 교수이면서도 그냥 자연인의 뇌구조를 가진 듯 하다.


(이 서평은 "오늘의 책" 출판사로부터 무료로 제공 받아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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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5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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