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평화와 화해의 정치학 Scrapbook
문화, 의식, 운동의 면을 분석
2026-08-16
(미주) 동포민족운동 100년사 편찬위 창립총회 20030731
정경모와 선우학원의 삶을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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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모(1924~2021)와 선우학원(1918~2015) 두 인물의 삶과 사상에 대한 비교 분석입니다.
<1. 정경모와 선우학원의 삶 비교>
정경모와 선우학원은 모두 해외를 거점으로 한국 현대사의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평생을 바친 망명 지식인이자 실천적 사상가이다. 그러나 두 인물은 활동 거점, 주된 투쟁 방식, 학문적 접근 경로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활동 거점 및 망명 경로: 선우학원은 1938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일찍이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서부를 주 무대로 활동한 재미동포 1세대 지식인이다. 반면 정경모는 해방과 한국전쟁을 고국에서 겪고 정부 관료로 재직하다가, 1970년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저항하여 일본 도쿄로 망명한 재일 망명 지식인이다.
실천 방식: 선우학원은 미국 학계에서 한국학을 개척한 정치학자·사회학자로서 학술 심포지엄 조직, 영문 저술을 통한 국제 여론 환기, <선우평화재단>을 통한 기독교·진보 진영 재정 지원 등 학문적·조직적 연대에 힘썼다. 반면 정경모는 <민족시보>, <통일평론>, <씨알의 힘> 등 비타협적 언론 매체를 직접 발행하며 군사독재의 폭력성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평론가이자, 1989년 문익환 목사와 함께 평양을 전격 방문하여 <4·2 남북 공동성명>을 이끌어낸 전면적 실천가였다.
<2. 일제 식민지 시기의 경험 비교>
두 인물 모두 일제강점기 기독교적 배경과 일본 유학을 거쳤으나, 식민 지배를 체감한 계기와 대응 방식에는 결이 달랐다.
선우학원: 1919년 3·1 운동 당시 아버지가 희생되는 비극을 겪으며 어린 시절부터 반일 민족의식을 뼈저리게 형성하였다. 평양 숭인상업을 거쳐 도쿄 아오야마가쿠인(청산학원) 신학부에서 수학하던 중 조선인 유학생 독립운동에 관여하여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체포와 징집 위협을 피하기 위해 1938년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정경모: 서울 경기중학교를 거쳐 도쿄 게이오대학교 의학부 예과에 진학하여 과학도로서 근대 학문을 익혔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 제국주의의 학도병 강제 징집과 식민지 조선인의 비참한 차별 구조를 목격하며 내적 저항감을 키웠다. 선우학원이 식민지 체제 초기부터 직접적인 독립운동과 탄압으로 미국 망명을 택했다면, 정경모는 일본 본토에서 제국의 붕괴 과정을 목도하고 해방 후 서울로 귀환하여 격동기를 맞이했다.
<3. 미국에 대한 의견 형성>
두 인물 모두 미국 유학을 경험했고 서구 자유민주주의와 학문을 직접 체화했으나, 미국 패권주의와 대외 정책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확립하였다.
정경모: 미국 에모리대학에서 유학한 뒤 한국전쟁 당시 판문점 휴전회담 유엔군 측 통역장교로 복무했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 분단과 전쟁의 배경에 미국의 냉전 패권 전략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음을 현장에서 직접 확인하였다. 그는 미국이 한반도 민중의 자주적 통일보다는 자국의 동아시아 군사 전략적 이익을 위해 분단체제를 영속화하고 독재 정권을 비호했다고 보았으며, 진정한 해방을 위해서는 외세 의존적 사고를 탈피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선우학원: 버클리 대학원과 워싱턴 대학 등 미국 대학 강단에서 평생을 보내며 미국 내부의 인종차별과 제국주의적 대외 팽창 정책을 직접 관찰했다. 그는 미국 정부가 북미 간 평화협정 체결을 외면하고 군사적 압박을 지속하는 것이 한반도 긴장 완화를 가로막는 주원인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미국 시민사회와 정계를 향해 미국이 냉전적 사고를 버리고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 및 평화조약 체결에 나서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4. 한국과 북한에 대한 의견 및 시각>
두 사상가는 남북한 어느 한쪽의 체제 논리에 매몰되지 않고, 민족의 자주와 평화적 공존을 최우선 가치로 두었다.
대한민국(남한)에 대한 시각:
정경모는 군사독재 정권의 인권 유린과 분단 이데올로기 악용을 가장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는 남한 사회가 군사주의와 맹목적 반공주의에서 벗어나야 민주주의가 완성될 수 있다고 보았으며, 김대중 구명 운동과 민주화 투쟁의 선봉에 섰다.
선우학원 역시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의 독재를 규탄하며 미주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다만 그는 미국 내 동포사회의 힘을 모아 남한 민주화 세력을 재정적·정치적으로 뒷받침하는 데 주력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 대한 시각:
선우학원은 북한을 적대나 흡수의 대상이 아니라 평화적 대화와 화해를 추진해야 할 동반자로 보았다. 수차례 방북하여 학술·종교 교류를 주도하고, 1990년대 북한의 대기근 시절 인도적 식량 지원 운동을 펼쳤다. 그의 사후 유해는 평양 신미리애국열사릉에 안장될 만큼 북측과도 깊은 신뢰 관계를 유지했다.
정경모는 1989년 방북 당시 김일성 주석과 담판하여 4·2 공동성명을 도출해내는 등 북한 지도부와 직접 대화하며 통일 방안을 모색했다. 그러나 그는 북한의 세습 체제나 교조주의에 무조건 동조한 것이 아니라, 분단 극복을 위한 현실적 상대방으로서 북한을 인정하고 '연방제'와 '연합제'의 절충을 통한 점진적·단계적 평화 통일을 주장했다.
<종합 분석>
선우학원과 정경모는 20세기 한국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각각 미국과 일본이라는 제국의 중심부에 위치하면서도, 결코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조국의 분단 극복과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해외 디아스포라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준다. 선우학원이 학문과 재정적 연대, 북미 평화협정 촉구를 축으로 하는 제도적·조직적 통일운동을 전개했다면, 정경모는 날카로운 언론 평론과 역사적 방북 결행을 통해 남북 냉전 체제의 균열을 낸 비타협적 저항 지식인의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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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모(1924–2021)와 선우학원(1918–2015)을 나란히 읽으면, 두 사람은 흔히 <해외의 친북·통일운동가>라는 한 범주에 묶이지만 실제 지적 형성과정은 꽤 다릅니다. 선우학원은 <식민지 청년 → 미국 이민 지식인 → 미국 내부의 비판적 통일운동가>의 길을 걸었고, 정경모는 <식민지 청소년 → 일본·미국 유학생 → 한국전쟁의 미국 군사체제 내부 경험 → 남한 생활 → 일본 망명 통일운동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 차이를 중심으로 보아야 두 사람의 미국관과 북한관도 제대로 이해됩니다.
1. 두 사람의 삶: 비슷한 목적지, 상당히 다른 길
선우학원은 1918년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1945년 해방 때 이미 27세였고, 인격과 세계관의 중요한 부분이 식민지기에 형성되었습니다. 일본 유학을 거쳐 1938년 미국으로 건너갔으므로, 약 스무 살까지 식민지 조선에서 살다가 이후 삶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낸 사람입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학자가 되었으며, 1960년대 초에는 한국에서 연세대와 <Korea Herald> 등에 관여한 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대학 교수로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반면 정경모는 1924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징집을 피하려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대 의학부에서 공부했고, 해방 후 귀국했다가 미국 에모리대에서 화학을 공부했습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미국 측 군사기구에서 일하게 되어 도쿄와 판문점에서 통역업무까지 경험했습니다. 이후 한국에서 1956~1970년을 살다가 박정희 체제에 반대하여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사실상 반세기 동안 망명생활을 했습니다.
따라서 아주 간단히 말하면,
| 선우학원 | 정경모 | |
|---|---|---|
| 출생 | 1918 평양 | 1924 서울 |
| 식민지 경험 | 청년기까지 충분히 경험 | 소년·청년기 경험 |
| 일본 | 초기 유학 경험 | 전쟁 말기 유학, 이후 망명지 |
| 미국 | 1938년 이후 삶의 중심 | 유학·한국전쟁 경험의 중요한 무대 |
| 남한 생활 | 비교적 짧음 | 해방 후와 1956~70년 상당 기간 |
| 통일운동의 기반 | 재미동포 사회 | 일본의 재일·한국 민주화 네트워크 |
| 최종 위치 | 미국 | 일본 |
결국 선우학원은 <이민자 지식인>이고 정경모는 훨씬 더 <망명 지식인>에 가깝습니다.
2. 일제 식민지 경험: 두 사람의 공통된 출발점과 차이
이 비교가 가장 중요합니다.
두 사람 모두 식민통치를 단순히 역사책에서 배운 세대가 아닙니다.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법적·정치적 위계가 존재했던 사회를 자기 생애 속에서 경험한 세대>입니다.
하지만 여섯 살의 나이 차이가 상당히 큽니다.
선우학원
1918년생 선우학원에게 식민지는 거의 <성인이 될 때까지의 전 세계>였습니다. 1938년 미국으로 떠날 때 이미 스무 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민족주의에는 어린 시절의 피해기억만 아니라 청년기의 정치적 자각이 들어 있습니다. 그의 회고록에서 <아리랑>이 반복적으로 중요한 상징이 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식민지 조선인은 자기 나라가 없고, 해외에 나가면 독립된 국민국가의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경험이 중요했습니다. 제2차대전 중 재미 한인들이 미국 정부를 상대로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설득해야 했다는 그의 회고도 이 맥락입니다. 미국 국무부가 한국의 독립국가 능력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기억은 그의 미국관 형성에 특히 중요합니다.
즉 선우학원의 식민 경험은
<일본에 대한 반감 → 민족자결에 대한 강한 집착 → 어느 강대국에도 한국 운명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
으로 연결됩니다.
정경모
정경모에게도 식민지는 결정적이지만 조금 다릅니다. 그는 1924년생이므로 식민지 전반부보다는 <전시동원체제가 극단화한 1930년대 말~1945년>을 청소년으로 경험했습니다.
더구나 징집을 피하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했다는 그의 생애에는 묘한 역설이 있습니다. 일본은 식민 지배국이지만 동시에 그가 직접 생활하고 공부하고 인간관계를 맺은 사회였습니다. 훗날 일본 여성과 결혼하고 일본에서 반세기를 살았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정경모의 일본관은 단순한 <일본인 혐오>로 가지 않습니다.
그에게 문제는 일본인 개인이라기보다
<일본 제국주의와 국가권력>
입니다.
이 점에서 그의 민족주의에는 상당히 강한 <구조적 역사인식>이 있습니다.
3. 미국관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여기서 두 사람이 가장 흥미롭게 갈라집니다.
선우학원: <미국을 사랑하면서 미국에 실망한 사람>
선우학원에게 미국은 처음부터 적대국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미국은
- 식민지 조선을 탈출할 수 있게 해준 곳
- 공부할 수 있게 해준 곳
- 학자로서 직업을 갖게 해준 곳
- 가족을 이루고 평생 살아간 나라
였습니다. 1938년 미국에 온 뒤 교수로 장기간 활동했다는 그의 경력 자체가 이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선우학원의 반미 비판을 단순한 <반미주의>라고 하면 중요한 것을 놓칩니다.
그의 질문은 오히려
<미국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민족자결의 원칙을 왜 한국에서는 적용하지 않았는가?>
였습니다.
미국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미국 민주주의의 이상을 몰라서 비판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과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 사이의 모순>을 문제 삼은 것입니다.
여기에 냉전이 결정적입니다.
해방 이후 한국이 곧바로 독립적 민족국가가 되지 못하고 미·소 점령과 냉전 속에서 분단되었다는 사실을 선우학원은 한국 현대사의 근본적 비극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그의 <중립화 통일론>도 자연스럽습니다.
한국이
미국 진영에도,
소련·중국 진영에도
완전히 편입되지 않고,
<강대국 경쟁에서 벗어난 자주적 국가>
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4. 정경모의 미국관: 훨씬 더 급진적으로 변한다
정경모에게는 특별한 경험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 군사체제 안에 들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미국 유학생이던 그는 전쟁이 터지자 도쿄의 미군 관련 조직에서 근무했고 판문점 휴전회담의 통역업무도 경험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특이한 위치입니다.
그는 미국을
밖에서 비판한 사람이 아니라
<한국전쟁을 수행하는 미국의 체제 안에서 보았던 사람>
입니다.
그런데 훗날 그의 역사해석은 급격히 비판적으로 변합니다.
<시대의 불침번>에 대한 동시대 서평에서도 그의 역사인식을 관통하는 핵심이 <미국과 일본의 한반도 지배전략>이라는 점이 지적되었습니다. 특히 그는 한국전쟁을 단순히 <김일성이 먼저 침략했다>는 수준에서 이해해서는 안 되고 미·소 냉전과 미국의 전략을 함께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두 사람의 미국 비판을 구별하면 이렇습니다.
<선우학원>
미국 민주주의의 이상과 미국 외교정책의 모순을 비판
<정경모>
미국 자체를 한반도 현대사를 규정해온 제국주의적 구조로 보는 경향
정경모 쪽이 훨씬 급진적입니다.
5. 남한에 대한 시각
두 사람 모두 <대한민국 자체를 부정한다>고 정리하면 지나치게 단순합니다.
그들이 가장 강하게 반대한 것은
<대한민국 = 반공국가 = 군사독재 = 미국의 동맹체제>
라는 결합이었습니다.
선우학원은 한국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참여했고, 미국에서 한국의 권위주의 체제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미국 정책을 계속 비판했습니다. 그의 저술 목록에도 한국의 억압적 국가와 교회의 저항, 미국의 아시아정책 등을 다룬 저술이 나타납니다.
정경모에게는 이것이 훨씬 개인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실제로 1956~70년 한국에서 살았고 박정희 체제와 충돌한 뒤 일본으로 나가게 됩니다. 이후 김대중 납치사건 구명운동, 김지하 석방운동 등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므로 정경모에게 남한 권위주의는 이론이 아니라 <자신을 고국 밖으로 밀어낸 체제>였습니다.
이것이 두 사람의 중요한 차이입니다.
선우학원은 남한을 주로 <해외에서 바라본 비판적 디아스포라 지식인>이었고,
정경모는 남한 사회 안에서 직접 살아본 뒤 <망명한 정치적 반대자>였습니다.
6. 그렇다면 북한은 어떻게 보았는가
두 사람의 가장 논쟁적인 부분입니다.
공통점부터 말하면 두 사람 모두 북한을
<전체주의 독재국가이므로 제거되어야 할 대상>
으로 보는 냉전적 관점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북한을 무엇보다
<분단된 민족의 다른 절반>
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북한과의 대화와 교류 자체를 불온시하는 남한의 국가보안법적 사고방식에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정도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정경모
정경모는 1989년 문익환과 함께 평양을 방문했고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장 허담과 <4·2 공동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 사건은 이후 남북 민간 통일운동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그의 기본 관점은
<북한이 선이고 남한이 악이다>
라기보다는
<남북 어느 한쪽의 국가 정통성이 민족 전체를 독점할 수 없다>
에 더 가깝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에게 최상위 범주는 <체제>보다 <민족>입니다.
대한민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보다
<분단 이전의 조선 민족>
이 논리적으로 먼저 존재합니다.
7. 선우학원은 북한에 한층 더 가까워진다
선우학원 역시 출발점은 <민족주의적 중립·평화통일론>이었습니다.
그런데 말년으로 갈수록 북한과의 관계는 정경모보다 훨씬 가까워집니다. 북한은 그를 통일운동가로 높이 평가했으며 사후 유해가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습니다.
물론 이것만으로
<선우학원은 북한의 모든 정책을 지지했다>
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앞서 살펴본 그의 여러 저술을 함께 읽으면 분명한 비대칭이 있습니다.
남한과 미국의
- 독재
- 군사주의
- 제국주의
- 분단 책임
에 대해서는 상당히 구체적이고 날카롭게 비판하는 반면,
북한의
- 일당체제
- 정치적 억압
- 수령체제
- 인권 문제
에는 같은 정도의 비판적 분석을 적용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선우학원 사상의 중요한 약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정경모에게도 비슷한 문제가 있지만 선우학원에게서 더 두드러집니다.
8. 왜 이런 비대칭이 생겼을까
여기에서 두 사람을 오늘의 기준만으로 판단해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식민지 → 해방 → 분단 → 전쟁 → 군사독재>
라는 경험 순서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이들에게 최초의 원죄는 <공산주의>가 아니었습니다.
최초의 원죄는
<식민지배와 민족의 주권 상실>
이었습니다.
그 다음 원죄가
<강대국에 의한 분단>
이었습니다.
따라서 사고의 우선순위가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의적 북한 비판과 다릅니다.
오늘날 우리는 북한을 볼 때 먼저
<독재인가 민주주의인가?>
를 묻습니다.
두 사람은 먼저
<왜 민족이 둘로 갈라졌는가?>
를 물었습니다.
이 차이는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9. 가장 결정적인 차이: 선우학원은 1918년생, 정경모는 1924년생
제가 두 사람을 비교하면서 특히 주목하게 되는 부분입니다.
선우학원은 1918년생이므로 식민지 조선에서 <성인이 된 사람>입니다.
정경모는 1924년생이므로 식민지에서 성장했지만 해방 때 21세였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미국에 대한 비판은 정경모가 더 구조적이고 급진적입니다.
왜일까요?
식민지 경험 자체만으로 미국 비판이 생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경모에게 결정적이었던 것은
<식민지 경험 + 한국전쟁 + 미군 내부 경험 + 이승만·박정희 시대 + 일본 망명>
이 연속해서 쌓였다는 점입니다.
반면 선우학원에게는
<식민지 경험 + 미국 이민자의 삶 + 미국 민주주의 경험 + 재미 독립운동·통일운동>
이 축적되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을 비판하면서도 두 사람이 서 있는 위치가 다릅니다.
10. 두 사람의 사상을 한 문장씩 압축한다면
선우학원:
<한국인은 일본 식민지배에서 벗어났지만 강대국 냉전체제에서 아직 완전히 해방되지 않았다. 남북은 외세 의존을 벗어나 평화적으로 통일해야 한다.>
정경모:
<한국 현대사의 분단과 독재를 이해하려면 남북의 이념대립만 볼 것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에서 미국의 동아시아 지배체제로 이어지는 구조를 보아야 한다.>
둘의 공통된 핵심은 결국
<민족자주>
입니다.
그러나 선우학원에게 그것은 <디아스포라 민족주의와 중립화 통일론>으로 발전했고, 정경모에게는 <제국주의 비판과 남북 민족연합적 통일론>으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1. 제가 보는 두 사람의 가장 큰 장점과 한계
두 사람의 장점은 한국 현대사를 <남한 국가의 시각만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945년을 완전한 해방이라고 보지 않고,
1948년을 역사의 자연스러운 귀결로 보지 않고,
한국전쟁을 단순한 남북 두 정부의 전쟁으로 보지 않았으며,
미국·일본·소련·중국이라는 국제구조 속에서 한국 현대사를 보았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중요한 통찰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장점이 한계로 바뀌기도 했습니다.
<민족과 외세>라는 틀이 너무 강해지면서
<남한과 북한 각각의 내부에서 국가가 자기 국민에게 무엇을 했는가>
라는 문제가 상대적으로 작아집니다.
특히 북한을 분석할 때 그렇습니다.
미국이 북한을 어떻게 압박했는가는 매우 자세히 보면서,
북한 국가가 북한 주민에게 무엇을 했는가는 상대적으로 희미해집니다.
따라서 저는 두 사람을 <친북 지식인>이라고 단순하게 분류하기보다는
<식민지 경험에서 출발하여 냉전적 분단체제 자체를 문제 삼은 민족주의적 해외 지식인>
이라고 부르는 편이 훨씬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민족주의적 렌즈 때문에 <북한 체제 자체에 대한 비판적 거리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평가 역시 함께 해야 합니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두 사람이 거의 같은 역사적 결론에 도달했는데도, 그곳에 이르는 길은 반대였다는 것입니다.
<선우학원은 미국에서 70여 년을 살면서 미국 중심의 냉전질서를 비판하게 되었고, 정경모는 미국의 군사체제를 직접 경험하고 한국에서 살다가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미국 중심의 한반도 질서를 비판하게 되었습니다.>
이 차이가 두 사람을 함께 읽을 때 가장 중요한 비교점이라고 봅니다.
특히 다음 단계로는 <두 사람과 박한식>을 함께 놓으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세 사람 모두 미국에서 또는 미국과 밀접하게 살면서 북한을 이해하려 했지만, <선우학원=민족주의적 통일운동가, 정경모=반제국주의적 역사비평가, 박한식=학문적·문화론적 북한 이해>라는 상당히 다른 세 유형이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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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평전 | 역사 인물 찾기 15 | 김형수2004
문익환 평전 | 역사 인물 찾기 15
김형수 (지은이)실천문학사2004

































미리보기
책소개
신학자로, 목회자로, 시인으로, 무엇보다도 실천하는 예언자로 살았던 문익환의 평전. 문익환 목사의 사망 10주기를 맞는 시점에서 시인이자 소설가인 지은이 김형수는 5년간의 자료와 대담을 통해 우리 시대의 걸출했던 한 영혼의 존재를 그려냈다.
목차
프롤로그
제1장 문익환의 선사시대
원점 / 그의 기원을 찾아서 / 문익점에게 / 19세기로부터의 망명자들 / 국경의 밤 / 북간도에 온 그리스도
제2장 점화된 불꽃
거장들이 태어나던 땓 / 최초의 기억들 / 어린 날 / 릴케처럼 / 좌절을 배우다
제3장 광야에서
바람 속에 묻힌 삼촌 / 모진 바람에도 거세지 않은 용정 사투리 / 바람의 관측자 / 평양시절 / 솥에서 뛰어 숯불에 내려앉다 / 신을 우롱한 대지
제4장 외길의 시작
동경에서 발견한 존재의 비참성 / 연분홍 코스모스에게 / 짧은 희망 긴 절망 / 윤동주를 잃고 / 8월의 카오스 / 슬픈 남하
제5장 한없는 침묵과 고독의 성
분단의 아침을 맞으면서 / 종교도 시대 위에서 집을 짓는다 / 침묵의 지대 / 미국행 여객선 / 그대들은 혼자가 아니다 / 1950년 여름, 서울 / 판문점으로 날아간 비둘기 두 마리 / 역사의 막다른 골목에서
제6장 시정신 예언자 정신
세기의 방랑자 / 마지막 귀향 / 불치의 감탄사로 말하라 / 뼈아픈 후회 / 사월이 닫히는 소리 / 완전주의자의 꿈 / 한국인에서 히브리인으로
제7장 두드려라 부서질 것이다
너무 늦게 반환점을 지나며 / 저자거리로 나오다 / 새삼스런 하루 / 히브리서 11장 1절 / 야만의 시간, 1974 / 장준하 충격 /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 57년만의 만세운동
제8장 꿈을 비는 마음
난형난제 / 신나는 법정 / 장미들의 반란 / 첫 번째 감옥, 22개월 / 불발이 된 '생의 피날레' / 두 번째 감옥, 15개월
제9장 예언자적 질주
겨울이 긴 나라의 봄은 아름답다 / 하, 그림자가 없다 / 지옥의 한 철 / 도봉산 1호 / 계엄령 속의 눈 / 세 번째 감옥, 31개월
제10장 고독 속에서 불타는 연대기
재야의 사령탑에 오르다 / 네 번째 감옥, 26개월 / 신랑이 신부의 방을 찾듯이 / 그 해 늦봄의 풍경 / 때 묻은 십자가
제11장 거인
잠꼬대 아닌 잠꼬대 / 두 세기 사이의 아시아 / 일본에서 / 북경에서 평양으로 / 파란과 신명의 축제 / 일파만파 / 발자국을 흐트러뜨리지 말자 / 다섯 번째 감옥, 19개월
제12장 황혼이 없는 생애
통일의 르네상스 / 여섯 번째 감옥, 21개월 / 발바닥으로 이칠 거야 / 폐허의 숲을 헤치며 / 비둘기들의 장례식 / 울지 않는 기념비
에필로그 삶의 환희! 삶의 슬픔!
후일담 낡은 수첩
접기
책속에서
'모든 것은 좋습니다. 좋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악은 무엇인가? 악은 악용된 선이 아니겠어요?'
어떤 절망의 자리에도 문익환의 언어가 놓이면 비관적 상황이 순식간에 역전되고는 했다. 그러한 능력은 아마도 어려서부터 발휘된 탁월한 신학자적 자질에서 나왔을 터이다. 기어이, 역사는 '문자'가 아니라 '발바닥'으로 쓰는 것이라고 믿었으니, 이제는 아무도 되돌릴 수 없다.
그가 추구했던 불확실한 가치들, 그가 '잠꼬대'인 양 언표한 온갖 시기상조의 전망들은 지금, 시대와 언어의 핏속에 깨끗이 녹아들어 순환되는 중이다. 그러나 그의 발바닥을 가슴으로 수락했던 한국의 고단한 골목골목들은 오늘도 숨죽인 채 웅변하는지 모른다. -제1장 '문익환의 선사시대' 중에서 접기
"거짓투성이의 현실에서 진실은 꿈일 수밖에 없는 것, 사슬에 묶인 노예에게 해방과 자유는 꿈의 세계일 수밖에 없는 것, 그는 꿈을 꾸는 게 아니라 사는 사람이었다."-546쪽 - 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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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내 책과 같은 시기에 나왔는데, 서점에서 사람들을 붙잡고 “내 책은 안 사도 좋으니 이 책은 꼭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었다. 보수 기독교인들에게 강추.
- 김두식 (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한 기독교 평화주의자가 사는 법
- 김두식 (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저자 및 역자소개
김형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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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으며, 1985년에 시로 등단하여 평론과 소설을 써 왔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정열적인 작품 활동과 치열한 논쟁을 통한 새로운 담론 생산은 그를 1980년대 민족문학을 이끌어 온 대표적인 시인이자 논객으로 불리게 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집 『빗방울에 대한 추억』, 소설집 『이발소에 두고 온 시』, 그 외 『문익한 평전』 등이 있다.
수상 : 2016년 만해문학상
최근작 : <삶은 그렇게 물길 따라 흐르고>,<[큰글자도서] 김남주 평전>,<신영일 평전> … 총 48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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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개인적으로는 평전이 '너무 많이'출간되는 것이 바람직스럽다라고 생각하는 편은 아니고, 그런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긴 하다. 하지만 어쨌건, 그런 생각과는 별개로 책을 구입한 이유는 순전히 책 표지의 사진 때문이었다. 대학 입학당시 무슨 일로 붙어있던 것인지 기억은 안나지만, 하여간 학회실 여기저기에 붙어있던 행사 홍보 포스터(?)의 배경사진이... 더보기
率路 2006-10-21 공감 (3) 댓글 (0)

통일을 위한 그 누구보다의 열정..!! 요즘세대 , 요즈음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대부분이 통일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있다. 물론 나도 그와같은 아직은 부끄러운 젊은 세대이다. 아무리 경제가 어려워도,아무리 살기가 힘들어져가도 우리가 북한에서 헐떡이고 있는 같은핏줄 같은 민족의 삶을 조금이라도 느낄수 있을까? 또한 부끄럽기 마찬가지이기는 386... 더보기
윤식 2005-09-17 공감 (5) 댓글 (0)
잠꼬대하는 것 같더니 훌쩍 담을 넘어버린 사람. 그와 그나마 한 시대를 잠깐이라도 살았던 것이 영광이 되면서도, 보다 더 가깝게 가지 못했던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800여 쪽에 이르는 평전의 곳곳을 채우는 그의 열정과 사랑. 그의 마음을 평전에 담아 놓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떠나는 사람 누구나가 몇 글자라도 남기는 것은 아니니... 더보기
解願 2004-11-23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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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두꺼워서 거부감 들었지만 막상 읽어보니 정말 재밌는 책이라는것을 느껴요 !!
이요 2009-12-23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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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처럼 살다간 문목사의 일대기를 통해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눈을 드게 될
gidon 2007-11-20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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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윤동주 등 그 당시 지식인들의 생과 좌절, 의지를 알 수 있는 명저. 추천
hchung 2009-04-19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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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타적이지 않는 신학자. 예수님와 너무나 다른 요즘의 기독교가 반추해봐야할 인
피오키오 2009-06-22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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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보기 어렵게 만들었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손목에 엄청난 부담을 줍니다. 다음 번에는 다른 판본으로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사지는 않겠지만^^
봉천동 2014-12-23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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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평전' 못지않은 전기문학의 수작
대학 새내기 때로 기억한다. 93년 5월 성대 금잔디광장, 김귀정 열사 2주기 추모식에서 문익환 목사님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뵀던 것이. 하지만 그 새내기가 '민주화'와 '문익환'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치기도 전인 그 이듬해 목사님은 훌쩍 저 세상으로 떠나버렸다.
그렇게 10년이 흘렀고 '문익환 평전'이 나온다는 소식에 우선 기뻤다. 최소한 추상적이었던 문 목사님의 실체를 조금이나마 접근할 수 있으리란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그나마 문 목사님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조차 너무나 단편적이었다는 걸 스스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 평전의 매력은 문 목사님의 파란만장했던 인생 역정뿐 아니라 글쓴이 김형수 시인의 화려한 문체에 있다. 마치 한 편의 문학작품을 읽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그의 문체는 딱딱한 글이란 편견을 없애기에 충분했다. 간혹 '미화'로 여겨질 정도로 감상적으로 흐른 부분이 없지 않지만 5년여에 걸쳐 사전 취재한 글쓴이의 땀과 노력이 이를 상쇄하기에 충분했다.
늦봄처럼, 거의 인생 막바지에 와서야 세상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문 목사님이기에 거의 베일에 가려진 그의 인생 초중반부를 다룬다는 것은 거의 맨땅에 헤딩하기에 가까웠으리라. 더구나 일제강점기부터 8.15해방, 6.25전쟁, 4.19혁명, 5.16쿠데타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로 가득 찬 한반도 격동기를 상대적으로 조용히 보낸 문 목사님의 감춰진 인생 행로를 쫓기란 쉽지 않았으리라. 바로 이 부분이 국내외를 넘나든 필자의 취재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특히 유년기와 청년기는 시인 윤동주, 중장년기는 장준하의 삶을 각각 문 목사님과 대비시키며 풀어나간 부분은 정말 감탄스러울 정도다. 이를 통해 문 목사님이 민주화 운동 진영의 전면에 등장하는 계기가 된 76년 3.1민주구국선언사건이 결코 충동적이거나 우연의 결과물이 아니며, 이미 오랜 기간 쌓아온 민족주의 의식이 바닥에 깔렸음을 강조한다.
아직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간 인물을 제대로 다룬 평전이나 전기가 많지 않은 현실이지만, 적어도 '문익환 평전'은 '전태일 평전'과 더불어 뛰어난 수작으로 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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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처럼 2004-05-02 공감(1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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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열정의 인간 문익환
과연 한 인물의 평가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걸까? 초창기의 일화나 성장기의 투쟁 아니면 마지막의 화려한 불꽃으로 마무리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클래식과 같이 두고두고 묵혀서 장맛이 나는 그 때가 되어서야 인정을 받는 것일까. 주변의 같이 어울리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나름대로의 평가가 이루어 지지만 한시대에 족적을 남긴 인물이라면 그 인물의 일대기를 읽고 나서야 전체적으로 평가가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답변이 맞지 않을 까 생각에 문익환평전에 손이 갔다. 이름이 나기 시작한 것이 방북활동으로 시끌법석이 되서야니 친북활동가로서의 과격한 이미지가 최소한 나에게는 그의 인상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한시대가 아니라 한 때의 조망으로만 평가되어진 것이라면 당연히 바꾸어야 하지 않을 까. 이것이 이 책을 선택한 동기인데 처음장부터 저자의 만만찮은 논리와 의식의 흐름을 접하면서 서서히 그의 말마따나 역사속의 개인을 보는 나의 안목도 바뀌어 갔다. 거창하게 20세기의 거함과 21세기의 래함을 말하기 전에 하나의 획을 긋는 시대의 전환점에 한 족적을 남기고 간 인물의 체험을 나눠보는 것이야 말로 겨우 한번씩 밖에는 체험해 보지 못하는 인간의 미약함에 무게를 더하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20세기에 결코 인류가 한세기동안에 겪을 수 없는 기절하리 만치 수많은 대단한 사건들이 스펙트럼처럼 펼쳐졌었고 한국도 그 소용돌이 속에서 결코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 사이에 우리는 근대와 현대를 거치며 해방과 분단의 아픔을 거쳐 통일이라는 거대한 문제에 봉착하고 있으며 그 해결의 중심에 문익환이 방점을 찍고 있는 것이다. 문익환의 외부에 알려진 활동기간은 1976년 3.1구국선언으로부터 1994년 1월 서거할 때까지 감옥수감기간을 제외하고 치면 겨우 1,100일 정도의 나날에 청년처럼 가슴이 뜨거운 열정의 인간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천번을 만나도 스쳐가는 사람이 있고 한번을 만나도 심장에 남는 사람이 있다는 노랫말처럼 그가 잊혀지지 않고 기억되어 지는 것은 남들처럼 명예나 지위에 대한 것 때문이 아니라 오직 민중사랑에 대한 그의 열정 때문인 것이다. 이책이 단순히 문익환이 살고 겪었던 나날들에 대한 전기가 아니고 평전의 형태를 띄는 것은 그러한 열정이 남다르고 우리 가슴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가 맞이한 21세기에는 결단코 이루어져야 만 하는 통일에 대한 희망과 그 방법이 20세기에 그가 남긴 족적을 되돌아 보면서 그 답을 찿아보는 것 처럼 의미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 이러한 점 때문에 이 출판사의 역사인물찾기 15편이 나오는 중에 한국인의 평전이 2편을 차지하고 그중의 한사람이 문익환이 되었을 것이다.
늦봄 문익환!
어떠한 어려움 속 에서도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고 사랑과 꿈을 보여 준 그이기에 시대사의 인물로서의 큰 점을 알았다기 보다는 그가 남긴 찰나의 가치는 우리 민족에게 큰 족적이었음을 저자와 같이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가장 큰 소득이었으며 곳곳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저자의 한국적 사고의 오리지널리티에 동시대인으로서 전폭적인 지지와 동감을 보내기에 그 때마다 저자약력을 들쳐보곤 했음을 고백한다.
저자가 이 글을 쓰는 데 들인 노력과 정성에 다시 한번 이 책의 소중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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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호인 2004-04-25 공감(8)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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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을 위한 그 누구보다의 열정.. !!
통일을 위한 그 누구보다의 열정..!!
요즘세대 , 요즈음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대부분이 통일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있다.
물론 나도 그와같은 아직은 부끄러운 젊은 세대이다.
아무리 경제가 어려워도,아무리 살기가 힘들어져가도 우리가 북한에서 헐떡이고 있는
같은핏줄 같은 민족의 삶을 조금이라도 느낄수 있을까?
또한 부끄럽기 마찬가지이기는 386세대에대한 공감의 결여이다.
박정희를 비롯한 군부시대에 대한 타도와 항의는 우리세대에겐 너무나도 먼 옛적 이야기일뿐이다.
민주화를 위한 목숨을건 투쟁이라는것은 그저 교과서속에서 밑줄쳐서 외워야하는 한부분에 불과
할수도 있으니깐...
이러한 나의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신학자로서, 시인, 통일운동가로서....
등등의 문익환 목사님의 삶은 나에게 새로운 꿈을 주기에 충분했다.
부끄럼움을 새로운 희망으로 바꾸기에 충분ㅇ했다.
히브리사람들은 광야를 해메였지만 어쩜 우리는
지금 분단속에서 해매이고 있는지모른다는 생각이 마구든다..
무언가를 .. 무언가를....
몇일이면 갈수있는곳을 40년을 해메서야 갔던 그민족처럼말이다.
그의 잠꼬대아닌 잠꼬대 가 현실로 이루어진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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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식 2005-09-17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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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봄 문익환 목사님!!
2004.5.28
1994년 겨울, 고등학교 졸업날짜를 받아놓고 대학생인 될날을 기다리고 있던 1월달 문익환 목사님이 돌아가셨다고 했다.
부모님과 동생들과 수유리 한신대에 채려진 빈소에 들렀던 기억이 난다. 선명한 기억은 없지만 그때 유명한 사람들 조금을 보았던 것과 부모님은 많이 슬퍼하고 난 조금 슬퍼했던 그런 기억의 조각들...
10년이 지난 지금 많이 슬퍼하고 있다.
그리고 감사하고 있다. 이렇게 책으로나마 목사님을 뵙게 된것을.
열사들의 이름을 외치는 대중연설장면,,
담담히 법정앞에 서시는 모습.
김일성과 힘차게 포옹하는 장면,
철거민 아주머님과 춤추며 즐거워하는 모습,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고 시대와 민중의 한복판에 자신을 내던지는 목사님의 모습에 책을 읽는 내내 가슴에 불덩이가 하나 들어앉은 것 같았다.
때로는 눈물로 감동이 흘러나왔다.
목사님을 그간에도 좋아하기는 했으나 그냥 막연히 좋아해!! 뭐 그런거였다. 적어도 좋아하는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아야 하지 않느냐? 라는 생각에 보기에도 무섭게 두꺼운 책을 덜컥 읽어버렸다.
내가 알고있는 것보다 훨씬더 복잡하고 장대한 삶을 사셨던 목사님이 부러웠다. 부러웠다 ? 북간도 우리땅 일본 미국...식민지 시대와 분단시대를 관통해 가슴의 품을 키우고 발바닥으로 그리는 역사를 경험한 분이셨다. 늘 소년같은 아름다운 분.
어떻게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깨끗하고 당당하게 사셨던지에 대하여 이 책을 통하여 단편적으로나마 알게 되었다.
그럼 나는 이제?
목사님은 내가 계속 책 주변을 맴돌며 눈물짓고 기뻐하며 그만 바라보고 있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을 것이니..
세상에 나가서 나도 예수가 되기를, 나도 전태일이 되기를, 서로 사랑하고 섬기기를 , 서로 '고무, 찬양'하기를 바라실 것이니..
삶이 고단하고 의미를 잃어갈때 역사와 민족의 희망을 다시 돌아보라고 날 채찍질해주는 가슴 뻐근한 분을 한분 더 가슴에 새겼다.
"천번을 만나도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있고 한번을 만나도 심장에 남는 사람이 있다." 책의 한글귀처럼 심장을 쿵쿵 울리는 그분을 새기고 앞으로의 나의 구체적 삶을 고민해야겠다.
김형수 님께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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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찐빵 2004-12-11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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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러 오신 분
그러니까, 개인적으로는 평전이 '너무 많이'출간되는 것이 바람직스럽다라고 생각하는 편은 아니고, 그런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긴 하다. 하지만 어쨌건, 그런 생각과는 별개로 책을 구입한 이유는 순전히 책 표지의 사진 때문이었다. 대학 입학당시 무슨 일로 붙어있던 것인지 기억은 안나지만, 하여간 학회실 여기저기에 붙어있던 행사 홍보 포스터(?)의 배경사진이 바로 이 책 표지의 사진과 동일한 사진이었다. 행사가 끝나고도 꽤나 오랫동안 떼어지지 않고 붙어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럼에도 언제나 그 포스터에 눈이 갔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그 사진 속 인물에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곰곰히 옛 기억을 반추해보면 흥미로운 것은 어렸을 때부터 굉장히 보수적인 분위기에서 자랐던 나였지만(단적으로 만26년 조선일보 독자란게 그 예다. 더군다나 중딩때부터 고딩때까진 그냥 독자도 아닌 '열독자'였으니ㅋ) 문익환 목사님에 대해 나쁘게 이야기하는 사람을 본적도 없고, 나 또한 유독 문목사님에 대해서는 '빨갱이'라는 생각을 한번도 해본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책을보며 모든 사람을 '섬기러 오신'듯 행동하신, 때문에 언제나 자신을 낮추어 세상을 아름답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하신 그 분의 파란만장하면서도 일관된 일생이, 그 수많은 흑색선전마저 그 분의 모습을 왜곡시키지 못하도록 만든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평전을 쓴 김형수씨의 직업은 문인이다. 이러한 저자의 배경은 책의 강점이기도 하고 약점이기도 하다. 정말이지 이런 인생이 있을수 있나 싶을 정도로 우리의 20세기를 그 한몸에 온전히 담아낸 문목사님의 일생을 정말이지 드라마틱하게 서술하여 평전에 감동과 재미를 준 것은 그 배경이 강점으로 작용한 측면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주변의 몇몇 분이 평하시는바대로 독자에 따라선 문체가 영 취향에 안 맞는 경우도 있겠다싶은 생각은 든다.(그렇다고 몇몇 평전들처럼 한 개인에 대한 찬양 일변도로 가지는 않는다)
우리가 아는 문익환 목사님의 모습은 1976년 59세 나이로 '3.1민주구국선언'성명서를 작성한 것이 처음이다. 하지만 책은 우리가 아는 문목사님의 모습만큼이나 우리가 알기 이전의 문목사님 모습이 중요하다며 그 분의 일생에 대해 자세하고 극적으로(?) 서술해 나간다. 자신의 컴플렉스를 자랑스럽게 내세우며 그 컴플렉스를 하나, 둘 극복해가던 그 분의 모습, 그 고생스럽고 위험했던 저항의 공간마저도 웃음의 공간, 해학의 공간으로 녹여버릴 만큼 그 분의 광대한 '사랑'은 정말 인상적이었다.(참고로 문익환 목사님께선 생전에 이렇게 말씀하셨단다. "모든 것은 좋습니다. 좋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악은 무엇인가? 악은 악용된 선이 아니겠어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우리의 80년대는 문익환 목사님으로 흘러들어가 문익환 목사님으로부터 다시 나온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리라는 생각이 든다. 80년대는 문 목사님 만큼 가능성이 존재 했고, 문목사님 만큼 한계가 있지 않았을까. 넘치는 정열과 헌신, 사랑과 휴머니즘은 80년대의 가능성이었지만, 분명 너무도 순진하셨고, 다소 감상적이셨던 부분 또한 없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분을 단순히 진보적 민족주의자 정도의 구획에 가두는 것은 그 분에 대한 모독이기도 하고 그 시대에 대한 모독이기도 한 듯 싶다. 그 분은 단순한 사상적 구획설정을 뛰어넘는 수준의 사고와 그 무엇보다도 정력적인 실천을 하셨던 분이시기에.
여담이다만, 문목사님의 인생은 그 출생부터 한국 현대사와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에 있으셨던지라 책은 '한 유력한 재야 운동가를 중심으로 본 한국현대사'수준이다. 한국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책은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인다. 물론 그보다 중요한건 그 분의 정말이지 '위대한'일생이겠지만. 엔간하면 평전은 추천 안하는데, 이 책만큼은 예외로 하고 싶을만큼 괜찮았다.
ps.문목사님 사진을 보며 느낀건데, 40세 이후의 얼굴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링컨의 말이 정말이지 옳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울러 나도 그렇게 늙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는. 내가 가진 소망 중 가장 실현불가능 한 소망인듯ㅋ-_-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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率路 2006-10-21 공감(3)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