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용기 제1권](각주해설판) - 목차
〖 범용기 제1권 - 목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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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 목사의 자서전 『범용기』(각주해설판)을 발행하며
첫머리
어릴 때 추억
경원 함양동 3년
회령에서 3년
웅기서 서울로
서울 3년
서울에서 고향에 돌아와
소학교 교사 3년
동경 3년
미국 3년
- 미국행 여권 나오고
- 여비는?
- 태평양 열 나흘
- 천사도
- 상륙과 대륙횡단
- 프린스톤 초년
- 방학이란 『뿔랭크』
- 웨스턴의 초년
- 웨스턴의 둘째 해
- 웨스턴의 제3년
- 강의환의 급서
- 교수들 기억
- 나도 졸업
- 경제공황
- 만주와 북지사변
- 어느 선교사의 편지
- 귀로에
- 동경~서울~집
돌아와 보니
평양 3년 [33-36]
- 평양에서
- 숭인상업(첫 교직ㆍ첫 살림)
- 『강도사』 되다
- 뜰가하던 자리
- 단권성경주석 말썽
- 셋째 딸 혜원이
- 신사참배
- 『숭상』 교무실
- 평양의 삼장로 인상
- 『숭상』 시대 이야기 몇 가지
- 평양의 멋
- 『만우』 평양을 떠나고
- 『숭상』 퇴진
- 모란봉 기슭에 집얻고
- 동굴 속에서
간도 3년
- 간도로
- 다시 『창꼴집』에
- 간도에 들어갔다
- 얼마남은 중국인 체취
- 『영국덕이』
- 첫 SPEECH
- 학생회와 강원룡
- 종교부 3인조와 용강동 주일학교
- 안병무 김기주 등도
- 어머님 가시다
- 집사고 다시 살림
- 순교자열전 『십자군』
- 장대인 영감
- 수학여행
- 차운수 사건
- 『은진』에서 손떼고
- 아버님 모셔보고
- 용정서 서울에
- 식구들은 다시 『창꼴집』에
- 『만우』의 옥고 – 후일담
조선신학원 발족
- 김대현 장로님
- 신학교 설립사무부터
- 조선신학원 인가
- 아버님 별세
- 조선신학원 발족
- 설립자의 고충
- 전농정에서
- 뚝섬에서
- 도농에서
- 하용 결혼하고
- 선계 결혼하고
- 혜원 졸업과 입학
- 최후 발악상
- 해방의 기쁜 소식 1945
- 해방 직후의 날들
- 미군 진주
- 전롱정 『우리집』
- 식구들 서울에
편집후기
부록 : 장공 김재준 목사 연보 및 휘호
장공 김재준 목사 연보
- 본 내용은 김경재 교수가 집필한 『김재준 평전』(2001)에 수록된 내용을 옮긴 것입니다.
1901년 9월 26일
함북 경흥군 상하면 오봉동 창꼴마을에서 김호병 씨와 채성녀 씨의 2남 4녀 중 둘째아들로 태어남
1905년 ~ 1910년
서당 훈장이셨던 부친으로부터 『천자문』, 『통감』, 『대학』, 『중용』, 『논어』, 『맹자』 등을 읽고 몸에 익히면서 가풍을 따라 유교의 세계에서 소년 시기를 자람
1910년 ~ 1915년
9살 때 경원 향동소학교 3학년에 편입, 고건원보통학교를 마치고, 회령 간이농업학교를 졸업(13~16세)
1915년 ~ 1917년
회령군청 간접세과 고원으로 취업
1917년
18세 때 장석연 씨의 맏딸 장분여와 결혼. 이후 일생을 해로하면서 3남 3녀를 낳고 기름
1917년 ~ 1920년
회령군청에서 웅기 금융조합 직원으로 전직. 웅기에서 만주, 시베리아로 망명하는 애국 지사들을 수시로 보며 가냘픈 민족 의식이 싹트기 시작
1920년
웅상 출신 청년 전도사로 서울 남대문교회 송창근 전도사의 방문을 받고, 나라와 교회를 생각하고 뜻을 품음. 웅기금융조합 사직하고 서울로 유학을 떠남
1920년 ~ 1923년
중동학교 고등과에 편입. 서울 YMCA 영어 전수과에서 영어 공부를 시작하고, 이상재ㆍ윤치호ㆍ신흥우 등의 강연을 듣고 신문화 흡수에 전력함. 톨스토이와 성 프란시스 전기 등을 탐독하고 청빈 사상에 큰 영향을 받음
1924년
승동교회에서 열린 장로교 연합 사경부흥회 때,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고 믿기로 결심하고 회심을 경험함. 믿은 지 3년 후 승동교회 김영구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음
1924년 ~ 1926년
함북 경흥에 귀향하여 용현소학교, 귀낙동소학교 신아산소학교에서 교사로서 어린 학생들을 가르침
1926년 ~ 1928년
일본 아오야마 학원 신학부에서 고학하면서 자유로운 학풍에서 신학 공부. 1928년 아오야마 신학부 졸업. 기독교 사상과 신앙을 주축으로 한 교육 사업에 일생을 바칠 것을 설계함. 졸업반 때 귀향하여 두만강 유역 교회를 순방 강연함
1928년 9월 ~ 1932년 5월
미국에 유학함. 1928년 9월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수업하고, 1929년 9월 미국 웨스턴 신학교에 편입학. 같은 학교에서 1932년 5월 신학사(S.T.B), 1932년 5월 신학석사(S.T.M) 학위를 받음. 미국 경제 공황에 직면하여 귀국함. 미국 유학 시절 송창근, 한경직과 특별한 신앙 동지로서의 우의를 굳건히 함
1933년 4월 ~ 1936년 4월
귀국 후 평양에서 3년을 지냄. 1933년 4월 숭인상업학교 교유에 취임하고, 평양 산정현교회 집사직으로 봉사하다가 1933년 8월 평양노회에서 강도사(講道師) 인허를 받음. 1936년 4월 신사 참배 문제와 민족 교육 금지 문제로 숭인상업학교 교유직을 사임함. 이 무렵 순교자 열전 연구에 몰두함. 평양 3년 머무는 기간 동안 송창근, 한경직, 김재준 등 젊은 소장 학자들은 평양신학교 신학 연구지 『신학지남』에 기고자로 관계를 맺게 되고, 유형기 박사의 『단권 성경 주석』 번역자로서 필화 사건에 연루되어 세 사람 연서로 성명서를 냄
1936년 8월 ~ 1939년 9월
간도 용정 은진중학교에 봉직하면서 3년을 간도에서 청년 교육에 힘씀. 1936년 8월, 은진중학교 교유에 취임. 1937년 동만노회에서 목사 안수받음. 1937년 5월부터 1938년 2월까지 월간 『십자군』을 발간함
1939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평양신학교가 폐쇄됨
1939년 9월 ~ 1940년 2월
서울 승동교회 김대현 장로의 재정을 기반으로, 조선신학원 설립 기성회가 발족(김대현, 송창근, 김영주, 차재명 중심) 설립 사무 실무 책임자로 김재준 목사가 간도 은진중학을 사임하고 설립 사무를 전담하여 추진
1940년 3월
조선신학원이 경기도 도지사 인가로서 승동교회에서 개교. 설립자 겸 원장에 김대현 장로, 이사장에 함태영 목사, 교수로서 윤인구, 김재준 임명
1941년 ~ 1944년
일제 말기 조선신학원 끝까지 지킴. 일제에 의한 관제 『조선 혁신 교단』 시절(1942)과 조선신학원과 감신의 『합동 강의』 기간 동안에도 조선신학교 교장으로서(1943~46) 학교를 지킴
1945년
해방의 기쁨과 함께 8월에 「기독교 건국 이념」 집필 발표. 9월에 천리교 본부 건물을 미군정청으로부터 인수 불하받아 동자동 교사 시대 교수로 일함. 12월에 경동교회를 설립함
1946년 3월
송창근 박사가 제4대 조선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고, 김재준은 한경직과 함께 교수가 됨. 6월 장로교 남부 총회에 의해 총회 직영 신학교로 지정
1950년 1월
『십자군』을 속간하여 1951년 8월까지 속간 30호 발간함
1950년 ~ 1951년
6ㆍ25 동란으로 같은 해 8월 송창근 학장 북으로 피랍. 1951년 3월 부산 피난 전시 대학 개강. 부산 항서교회당 및 남부민동 임시 천막 교사에서 수업.
1951년 4월
학교명을 한국신학대학으로 변경, 김재준 목사 학장 서리에 취임
1953년
장로교가 보수적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분열. 장로회 37회 대구 총회에서 김재준 목사직 파면 선언, 한국신학대학 총회 인준 취소, 한신 출신 교회 취임 거부, 이미 위임된 한신 출신 목사들의 노회 재심 등을 불법적으로 결의. 대구 37차 총회의 불법성에 저항하여, 같은 해 6월 서울 동자동 한국신학대학 강당에서 장로회 38회 호헌총회를 개최. 기독교장로회 탄생
1953년 ~ 1957년
서울 환도 후 동자동 교사에서 학장 서리 겸 교수로서 봉직
1958년 ~ 1959년
1957년 12월, 수유리 한국신학대학 새 캠퍼스로 입주. 김재준 목사 제6대 학장으로 취임. 캐나다 연합교회 초청으로 순회 답방(1958.8~1959.9)
1959년 5월
밴쿠버에 소재한 브리티시 콜럼비아 주립대학교 유니온 칼리지에서 명예신학박사 수여받음
1961년
5ㆍ16 군사정변으로 군사 정권에 의해 60세 정년제 강행으로 동년 9월 한국신학대학 학장직 및 교수직에서 강제 퇴임. 쌍문동 국민주택으로 이주함
1961년 8월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이 됨
1965년 4월
한국신학대학 명예학장으로 추대됨. 9월에 기독교장로회 총회 총회장으로 추대됨. 한신학원 제7대 이사장으로 피선(1966.9~1970.9)
1965년
한ㆍ일 굴욕 외교 반대 국민 운동을 한경직 목사와 주도하여 영락교회에서 대중 강연, 교회의 대사회 참여 운동 시작
1970년 9월
월간지 『제3일』 창간. 박형규, 현영학, 서광선, 이문영, 문익환, 문동환, 이우정 등이 동인으로 참여
1972년
국제엠네스티 한국위원장이 됨. 12월에 유신헌법이 발포됨
1973년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장으로 추대됨.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공동의장(김재준, 함석헌, 천관우, 지학순, 이병린)
1974년 3월
캐나다로 출국. 11월에 북미주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의장직 수임(2회 연임)
1974년 10월
캐나다에서 『제3일』 속간. 1981년 6월호까지 속간 60호 발간
1975년
북미주한국인권수호협의회 명예회장으로 추대됨
1983년 9월
귀국
1983년 ~ 1985년
전국 국토 순례. 『재야 원로 모임』에 참여하여 민주화 운동과 평화 통일 운동을 지속함
1987년 1월
고문으로 살해당한 고 박종철 군 국민추도회 발기인이 됨. 함석헌과 함께 「새해 머리에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유언으로 남김
1987년 1월 27일
서울 한양대학교 부속병원에서 87세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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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 목사의 자서전 <범용기> 1권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 직후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기 속에서 한 사상가이자 목회자,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아낸 저자의 발자취를 담은 기록이다. 본 서는 저자의 유년 시절부터 청소년기의 방황과 결혼, 서울과 일본 및 미국에서의 유학 생활, 그리고 귀국 후 평양과 간도에서의 교육 및 목회 활동을 거쳐 조선신학원(현 한신대학교)의 설립과 해방을 맞이하기까지의 과정을 연대기적으로 추적한다. 이를 통해 개인의 역사를 넘어 한국 기독교 형성과 신학적 갈등, 그리고 민족의 수난사를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저자의 삶은 함경북도 경원의 <창꼴집>이라는 대가족적이고 유교적인 환경에서 출발한다. 조부와 부모의 영향 아래 서당과 신식 학교를 거치며 자란 유년기의 경험은 향후 그의 인성과 사상적 기초를 형성하는 자양이 된다. 청소년기 회령과 웅기를 거쳐 서울로 진출한 저자는 1920년대 서울의 역동적인 풍경과 YMCA 등을 접하며 근대적 지성과 기독교 신앙을 본격적으로 수용하고 세례를 받는다. 이후 소학교 교사 생활을 거쳐 감행한 일본 동경 유학과 미국 프린스턴 및 웨스턴 신학교로의 유학은 그의 학문적 지평을 세계적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산학원에서의 고학 생활과 미국에서의 경제공황기 유학은 그에게 단순한 학문 탐구를 넘어 세계사적 현실을 몸소 체험하게 만들었다. 귀국 후 평양 숭인상업학교와 간도 은진중학교에서의 교직 생활은 신사참배 강요라는 일제의 종교적·민족적 압제 속에서 신앙의 정조를 지키며 강원룡, 안병무 등 후학을 양성하는 실천적 역사의 장이었다. 마침내 김대현 장로와의 만남을 통해 조선신학원을 발족하고 전개해 나가는 과정은 보수적 교권과의 긴장 속에서도 한국 고유의 주체적 신학을 정립하려는 투쟁의 기록이며, 이 여정은 1945년 해방의 감격과 혼란 속에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 자서전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은 역사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개인이 겪은 실존적 고뇌와 선택을 담담하면서도 정직한 필치로 서술했다는 점에 있다. 저자는 자신을 영웅화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범용(凡庸)한 사람의 기록'이라는 서명에 걸맞게 인간적인 한계와 고뇌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특히 일제강점기 말기의 신사참배 압박과 단권성경주석을 둘러싼 교단 내 신학적 갈등은 저자가 겪은 사상적 수난의 깊이를 보여준다. 그는 전통적인 근본주의 신학의 배타성에 맞서 역사적·비판적 성서 연구의 길을 열고자 했으며, 이는 한국 개신교 신학의 다양성과 성숙을 이끈 기념비적 사건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또한, 간도 은진중학교 시절 학생회 활동을 하던 강원룡이나 안병무 같은 인물들과의 교류는 그의 교육적 거목으로서의 면모를 확인시켜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서는 연대기적 나열과 단편적인 삽화 중심의 구성으로 인해, 특정한 신학적 쟁점이나 사상적 전환점에 대한 깊이 있는 이론적 성찰이 다소 파편화되어 나타난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각 장의 소제목들이 보여주듯 사건과 장소의 이동이 빈번하여, 독자가 그의 내면적 사상의 심화 과정을 거시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행간을 읽어내는 노력이 요구된다.
결론적으로 <범용기> 1권은 한 기독교 지도자의 사적 연대기를 넘어, 식민지 지식인이 어떻게 세계적 지성을 흡수하고 이를 국내의 척박한 현실 속에서 토착화·제도화했는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다. 종교와 교육, 민족운동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그가 보여준 실천적 삶은 오늘날 한국 교회와 사회가 직면한 근본주의적 도그마와 역사의식의 부재를 매섭게 성찰하도록 유도하는 지혜의 거울이다.
<범용기 1―새 역사의 발자취>
장공 김재준 지음
요약·평론
‘범용한 사람’이 기록한 비범한 시대
『범용기』의 제목은 한자로 ‘凡庸記’, 곧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의 기록이라는 뜻이다. 한국기독교장로회의 형성과 한신대학교 설립에 중심적으로 참여하고, 한국 교회의 신학 논쟁과 민주화운동을 이끈 김재준의 생애를 생각하면 지나치게 겸손한 제목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제목에는 그의 독특한 자기이해가 담겨 있다. 그는 자신을 영웅이나 성인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대의 흐름 속에 던져진 한 평범한 인간이 어떻게 신앙을 배우고, 판단하고, 실패하고, 책임을 감당했는지를 기록하려 한다.
김재준은 글을 쓴다는 것은 쓴 사람이 자기 삶에 책임지는 일이며, 과거에 쓴 글은 언제든 자신을 고발한다고 말한다. 이 고백은 『범용기』 전체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이 책은 성공한 종교 지도자가 자신의 업적을 정리한 공적서가 아니다. 한 인간이 자신의 과거를 다시 바라보며 무엇이 진실이었고 무엇이 미숙했는가를 묻는 양심의 기록이다.
그렇지만 『범용기 1』은 개인적인 추억에만 머물지 않는다. 김재준의 삶이 일제강점기, 식민지 교육, 일본 유학, 미국 신학 수학, 귀국 후 한국 교회의 신학적 갈등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한 목사의 자서전인 동시에 20세기 전반 한국 개신교 지성사의 내부 기록이다.
함경북도의 유교적 가정
김재준은 1901년 함경북도 경흥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 세계는 기독교보다는 유교적 질서와 전통적 농촌생활에 가까웠다.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고 동양고전을 접한 경험은 이후 그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그는 기독교인이 된 뒤에도 유교와 동양문화 전체를 미신이나 이교로 배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통적 선비정신에서 정직, 절제, 책임감, 의리를 발견했다.
『범용기 1』에서 고향은 단순한 출생지가 아니다. 그것은 그의 언어와 정서, 인간관계와 도덕적 감각이 형성된 장소다. 김재준은 후일 서구 신학을 깊이 공부했지만 서구인이 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의 신학은 동양적 교양을 버리고 서양 교리를 수입한 결과가 아니라, 한국인의 역사 경험 속에서 기독교 복음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노력으로 발전했다.
이 점에서 그의 자서전은 한국 개신교의 일반적 회심 서사와 조금 다르다. 흔히 회심 이전의 전통문화는 어둠, 회심 이후의 기독교는 빛으로 단순하게 대비된다. 그러나 김재준은 이전의 삶 전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전통을 파괴하는 외래 신앙이 아니라 전통의 장점과 한계를 새롭게 성찰하게 하는 자유의 경험이었다.
회심과 인격적 자유
청년 김재준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과정은 『범용기 1』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의 회심은 강렬한 신비체험이나 기적보다 죄책감과 내적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경험에 가까웠다. 그는 기독교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신분이나 가문, 관습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독립된 인격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자유는 자기 욕망을 마음대로 실현하는 개인주의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유로워진 사람은 동시에 이웃과 역사에 책임을 져야 한다. 자유와 책임은 분리되지 않는다. 이 인격주의적 신앙은 훗날 그가 교권과 독재권력에 맞서게 되는 정신적 뿌리가 된다.
그는 성경과 교회의 권위를 중요하게 여겼지만 인간의 양심과 이성을 포기하는 복종을 신앙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교회가 어떤 결정을 내렸더라도 그것이 복음과 양심에 어긋난다면 질문해야 한다. 『범용기 1』은 이러한 태도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젊은 시절부터 형성된 것임을 보여준다.
일본 유학과 신학적 탐구
김재준은 신학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한국의 지식인에게 일본은 식민통치국이면서도 근대 학문과 서구사상을 접할 수 있는 통로였다. 그는 일본의 신학교에서 공부하며 한국 교회에서 접하기 어려웠던 현대 신학과 성서연구 방법을 배웠다.
일본 유학은 그에게 두 가지 긴장을 남겼다. 하나는 식민지 조선인으로서 일본 제국 안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정치적 긴장이며, 다른 하나는 전통적 신앙과 현대 학문 사이의 신학적 긴장이었다. 그는 이 두 긴장을 회피하지 않았다.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학문을 거부하거나, 현대인이 되기 위해 신앙을 버리는 양자택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를 증언하는 책으로 믿으면서도, 그것이 역사적 상황에서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성경은 경건하게 읽어야 할 뿐 아니라 문학적·역사적·비판적으로 연구해야 했다. 이러한 입장은 훗날 한국 장로교 내부에서 심각한 논쟁을 일으켰다.
그의 신학적 태도는 ‘의심을 통한 불신’이 아니라 ‘질문을 통한 성숙한 믿음’이었다. 그는 질문하지 않는 믿음이 강한 믿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외부 권위에 의존하여 질문을 금지하는 신앙은 현실의 도전을 견디지 못한다고 보았다.
미국 유학과 보수신학의 중심부
김재준은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신학교와 웨스턴신학교 등에서 수학했다. 이 시기는 미국 장로교 안에서도 근본주의와 현대주의가 격렬하게 충돌하던 때였다. 그는 보수 장로교 신학의 중심부에서 공부했지만, 성경의 문자적 무오성을 신앙의 절대 기준으로 삼는 입장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에게 미국 유학은 서구신학을 그대로 한국에 옮겨오는 과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 교회 안에도 역사와 문화에 따라 다양한 신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시간이었다. 그는 선교사들이 전해 준 장로교 신앙을 기독교의 유일한 형태로 여기지 않았다. 선교사 역시 특정 시대와 교단의 신학을 가진 인간이며, 그들의 해석도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깨달음은 한국 교회의 신학적 자립이라는 문제로 이어진다. 한국 교회는 서구 선교사의 교리를 반복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되고, 한국의 역사와 문화, 민족의 고통을 자신의 신학적 질문으로 삼아야 한다. 김재준이 후일 조선신학교 설립에 참여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귀국과 한국 교회의 현실
귀국한 김재준이 마주한 한국 교회는 신앙적으로 열정적이었지만 신학적 자유와 학문적 깊이가 충분하지 않았다. 교회는 성경을 사랑했지만, 성경에 대한 역사적 질문을 불신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했다. 선교사들의 권위도 여전히 컸다.
김재준은 이런 상황에서 신학 교육과 저술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정답을 암기시키기보다 스스로 질문하도록 가르치려 했다. 신학교는 교단에 순종하는 목사를 생산하는 곳이 아니라 복음과 시대를 함께 읽는 자유로운 인격을 기르는 곳이어야 했다.
그는 일부 선교사와 교회 지도자들이 성경비평과 현대신학을 위험한 자유주의로 몰아붙이는 태도를 비판했다. 그러나 『범용기』에서 그는 이들을 단순히 악인으로 그리지 않는다. 보수적인 선교사들과 목회자들도 나름대로 복음과 교회를 지키려 했음을 인정한다. 문제는 그들이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을 기독교 자체와 동일시하고 다른 해석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1930년대 ‘아빙돈 단권 성경주석’ 사건은 이러한 충돌을 상징한다. 현대 성서학의 성과를 수용한 이 주석서를 둘러싸고 김재준을 비롯한 신학자들이 자유주의자로 공격받았다. 그는 송창근·한경직 등과 함께 해명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훗날 김재준을 둘러싸고 벌어진 더 큰 성서관 논쟁의 전조였다. 김재준은 당시 경험을 통해 한국 교회에서 신학 논쟁이 학문적 토론보다 교권과 정통성 판정의 문제로 변질될 위험을 보았다.
조선신학교와 신학적 자립
『범용기 1』의 후반부에서 중요한 사건은 조선신학교의 설립이다. 일제 말기 선교사들이 떠나고 기존 신학교육이 위기에 처하자 한국인 스스로 교역자를 양성해야 할 필요가 커졌다. 김재준은 조선신학교 설립과 교육에 참여하며 한국인에 의한 신학 교육의 길을 열었다.
조선신학교는 단순히 평양신학교를 대신하는 임시기관이 아니었다. 김재준에게 그것은 한국 교회가 서구 선교사의 보호와 통제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신학을 시작하는 장소였다. 그는 현대 성서학을 가르치고, 학생들에게 학문과 신앙을 함께 추구하도록 했다.
그러나 일제 말기의 상황은 복잡했다. 신학교육을 계속하려면 식민지 당국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고, 신사참배와 황민화 정책의 압박도 피할 수 없었다. 『범용기』의 가치는 이런 시대를 단순한 영웅과 배신자의 대립으로 그리지 않는 데 있다. 그는 당시 사람들이 제한된 선택지 안에서 어떤 타협과 저항을 했는지를 회고한다.
다만 김재준 자신의 일제 말기 행적과 판단에 대해서는 좀 더 철저한 자기비판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가능하다. 자서전은 자신의 동기와 상황을 설명하는 데는 강하지만, 그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였는지까지 충분히 보여주지는 못한다.
문체와 자서전의 특징
『범용기 1』의 문체는 화려하지 않다. 사건을 과장하거나 자신을 중심인물로 내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과의 만남, 작은 일화, 여행, 학업, 교회생활을 담담하게 기록한다. 제목 그대로 ‘범용한’ 생활의 기록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담담함 속에는 강한 윤리적 긴장이 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예정된 영웅담으로 만들지 않는다. 선택의 순간마다 자신이 무엇을 보고 어떻게 판단했는지를 설명한다. 그에게 신앙은 초자연적 섭리를 사후에 발견하는 일이기보다, 불확실한 현실에서 양심을 따라 결단하는 행위다.
또한 이 책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목회자, 선교사, 신학자, 교인, 가족, 학생들과의 관계를 통해 한국 교회사 내부의 연결망이 드러난다. 유명 인물의 공식 전기에서는 보이지 않는 작은 만남과 감정, 오해와 우정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
책의 장점
첫째, 『범용기 1』은 김재준 신학의 사상적 형성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성서비평 수용, 신학의 자유, 한국적 신학의 필요성은 외국 이론을 추상적으로 받아들인 결과가 아니었다. 유교적 가정, 회심, 일본과 미국 유학, 식민지 현실, 선교사와의 갈등이 축적되어 형성된 것이다.
둘째, 한국 기독교사를 내부자의 목소리로 들려준다. 공식 교회사에서는 교단의 창립과 논쟁의 결과가 중심이 되지만, 『범용기』에서는 그 과정에 참여한 사람들이 무엇을 걱정하고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가 보인다.
셋째, 그의 자기 서술에는 비교적 절제된 겸손이 있다. 그는 자신을 예언자나 민주투사로 미리 규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는 후대의 추모자들이 김재준을 지나치게 이상화하는 것과 대조된다.
한계와 평론
그러나 자서전은 어디까지나 자기 기억의 산물이다. 김재준은 자신이 경험한 사건을 자신의 시각에서 선택하고 배열한다. 성서관 논쟁이나 교단 갈등에서 자신의 입장은 합리적이고 개방적인 것으로, 반대편은 폐쇄적이고 교권적인 것으로 보이기 쉽다. 실제로 보수 장로교인들이 느낀 신앙적 위기와 식민지·공산주의 경험에서 생긴 불안도 더 깊이 고려할 필요가 있다.
또한 ‘범용’이라는 자기비하는 진실한 겸손인 동시에 독자를 설득하는 수사일 수 있다. 자신을 평범한 사람으로 낮춤으로써 오히려 그의 도덕적 권위가 강화된다. 그는 공적 영향력이 매우 컸던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내린 결정의 정치적·제도적 결과도 개인의 선의와 별도로 평가해야 한다.
가족생활에 대한 서술도 공적 활동에 비해 제한적이다. 학업과 교회, 신학논쟁에 집중하면서 아내와 가족이 감당한 희생은 상대적으로 배경으로 물러난다. 이는 당시 남성 지식인의 자서전에서 흔히 나타나는 한계다.
무엇보다 『범용기 1』을 김재준의 후일 민주화운동 경력만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1권에서 더 중요한 것은 정치투사 김재준이 아니라 자유로운 인격과 주체적 신학을 찾아가는 청년 김재준이다. 그의 민주화운동은 갑작스러운 정치적 전향이 아니라, 젊은 시절부터 형성된 양심의 자유와 역사적 책임의식이 사회적으로 확장된 결과였다.
종합 평가
『범용기 1―새 역사의 발자취』는 한 위대한 인물의 성공담이라기보다 한 신앙인이 자유로운 인간으로 형성되어 가는 과정의 기록이다. 김재준은 유교적 전통, 기독교 회심, 일본과 미국의 신학,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통과하면서 어느 하나에 맹목적으로 복종하지 않는 태도를 배웠다.
그가 남긴 핵심 유산은 특정한 신학 이론만이 아니다. 신앙인은 성경과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스스로 생각해야 하며, 교회의 명령보다 양심의 책임을 더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정신이다. 또한 한국 교회는 외국 신학을 반복하는 데 머물지 않고 자기 역사와 현실을 신학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요구다.
이 책의 담담한 제목과 문체 뒤에는 매우 급진적인 인간관이 있다. 인간은 어떤 교권이나 국가권력에도 완전히 예속될 수 없는 자유로운 인격이며, 그 자유는 역사에 대한 책임으로 나타나야 한다. 『범용기 1』은 바로 그 자유와 책임이 한 인간 안에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보여주는 한국 기독교 지성사의 중요한 자서전이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범용기 1』은 자신을 평범한 사람이라 부른 김재준이 전통과 근대, 신앙과 학문, 교회와 역사 사이를 통과하며 자유로운 양심의 신학자로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