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4-16

Bitter Rivals | FRONTLINE | PBS | Official Site | Documentary Se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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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tter Rivals
Iran and Saudi Arabia

Part One  February 20, 2018  1h 56m

Part Two February 27, 2018  54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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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NTLINE investigates how a dangerous political rivalry between Iran and Saudi Arabia has plunged the Middle East into sectarian war.

Produced by

Martin Smith
Linda Hirsch
In partnership w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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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ran
Iraq
Religion and Belief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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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ivalry Behind Three Wars
The Rivalry Behind Three Wars
How Saudi Arabia and Iran fueled conflicts in Iraq, Syria and Yemen
February 27, 2018

Protestant Churches’ Contribution. to the Political Ideology of Division in SK from 1948 to 2022

Protestant Churches’ Contribution.pdf

A Critical and Theological Assessment of Protestant Churches’ Contribution to the Political Ideology of Division in South Korea from 1948 to 2022 
 
 
A thesis submitted to the University of Manchester for the degree of Doctor of Philosophy in the Faculty of Humanities 
2025  
  
Sunkyo Park  
School of Arts, Languages and Cultures  
Department of Religions and Theology  
   
 
 

2026-04-15

Nam-sik In - [호르무즈 봉쇄로 이란이 얻는 것]

(2) Nam-sik In - [호르무즈 봉쇄로 이란이 얻는 것] 어제 날짜 컬럼. 요샌 하도 바빠 컬럼 올리는 것도... | Facebook

Nam-sik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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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무즈 봉쇄로 이란이 얻는 것]
어제 날짜 컬럼. 요샌 하도 바빠 컬럼 올리는 것도 잊었다. 
1. 목표 
크게 세가지다. 
첫째, 승리의 서사다. 
한마디로 전장에서는 초토화 당하더라도 승전의 그림은 이란이 가져가겠다는 의지다. 1956년 나세르가 수에즈 국유화를 선언하고 2차 중동전쟁에 들어갔다. 전쟁에서는 이집트 군이 궤멸 수준의 참패를 겪었으나 미소의 개입으로 결국 수에즈는 이집트 땅이 되었다. 인공 운하와 자연 해협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기에 평면 비교는 어불성설이다. 그럼에도 주목했던 것은 열세의 전력을 만회하고 상황을 반전시켜 정치적 승리로 인식하게 만드는 포석이기 때문이다. 호르무즈를 통과하는 선박들이 매번 해협을 드나들 때마다 이란당국의 통제를 받는 모습 자체를 전리품처럼 내세우려 할것이다. 테헤란 시내 엥겔랍 광장에는 호르무즈에 깔아놓은 그물에 미국 미사일과 전투기가 걸려있는 걸개 그림이 걸려있다.
둘째, 금전적 이익이다. 
현재 이란은 해협통과 선박당 200만 달러 혹은 유조선 적재 석유 1배럴당 1달러씩 통항료를 톨비처럼 받겠노라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에 달러가 아닌 리얄로 받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국제해협의 통항료는 불법이다. 그러나 어떻든 향후 호르무즈는 2월 28일 이전으로 돌아가기는 힘들것 같다. 이 과정에서 이란은 선별적 통과라는 통제카드를 들고 재원 확보 수단으로 호르무즈를 활용할 수 있다. 톨비 받는 모습은 좀 궁색하다. 어쩌면 해외 동결 자산 해제나 일부 제재 해제 등을 엮어 최대 연 70억달러 예상되는 톨비 수입분을 기존 자산 회수로 상쇄시키는 협상을 할 수 있다. 더불어 1936년 몽트뢰 협약 등을 참고삼아 좌표, 예인, 환경오염 방지 등의 명목을 만들어 관리비용을 청구하는 등의 형식을 밟으면 물리적 봉쇄로 보기 약간 애매해지기도 한다. 이란은 차제에 일단 연안국 오만 그리고 필요하면 걸프 당사국과도 협의해서 UNCLOS를 갈음하는 호르무즈 통항규범을 만들겠노라 나설 수도. 
세째, 억지력이다. 
last but not least, 아니 이게 제일 중요하다고 본다. 억지력이다. 이번 전쟁에 임하는 3대 행위자들은 목적이 각자 다르다. 미국은 이란 핵문제 해결이다. 오바마가 받았던 불리한 딜을 뒤집어 엎고, 트럼프판 핵 딜을 성사시킴으로써 이란 핵무장 의지를 꺾는 것이 미국의 목표다. 다만 전쟁을 통한 해결책을 택한 것은 이스라엘의 설득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은 이란 체제교체를 목표로 한다. 그러나 어렵다는 것을 잘 안다. 따라서 체제교체를 시도하되 안될, 경우 지속 공격을 통한 이란 무력 수준 저감과 동시에 이란의 발칸화, 즉 민족 봉기 내전 유도를 통한 이스라엘의 안보 상황 개선을 목표로 한다.  
반면 이란의 목표는 명확하다. 억지력이다. 작년에 이어 이번에도 협상 중 공격을 당했기에 다시는 이 일이 반복되지 못하겠다는 목표가 확연하다. 그러려면  이란이 너덜너덜해지도록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공격자인 미국과 이스라엘을 물어뜯어 뜨거운 맛을 보게 해야 한다. 물어뜯고 (피흘리기) 놓지않기 대응이다. 미사일 교전을 지속하는 것도 일종의 억지력이지만, 이 차원에서 가장 확실한 억지 레버리지를 이란은 잡아챘다. 호르무즈다. 무력의 열세를 중립화하거나 반전시키는 카드다. 
2. 호르무즈 활용 억지전략은?
억지 이론의 고전적 틀로 살펴보자. 
첫째, 능력(capability)이 있는가? 충분하다. 호르무즈 지형상 압도적인 해군력이 없어도 된다. 작은 기뢰, 드론, 소형고속정 등으로 해협 항행대 타격은 얼마든 가능한 지형이다. 굳이 중장거리 탄도미사일은 해협봉쇄에 필요없다. 
둘째, 의지(resolve)는 확고한가? 전쟁 전에는 의지가 없었다. 늘 말로는 봉쇄를 위협했지만 한번도 제대로 실행한 적은 없었다. 왜냐고? 득보다 실이 컸기 때문이었다. 해협 봉쇄를 실제로 하게될 경우 자기들 배도 제한받고, 이웃 걸프국가들의 생명선을 끊는 일이다. 아무리 사이가 안좋다 해도 마주하고 살아야 할 미래를 내다보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호르무즈 카드는 일종의 전쟁방지 억지책이었다. 그러나 일단 전쟁이 일어난 이상 모든게 달라졌다. 이제는 걸프 왕정도 타격하고, 실제로 쎄게 호르무즈를 잡아챔으로써 다음 단계의 억지 전략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그렇기에 미국과 이스라엘이 호르무즈로 인해 최대한 곤경에 처하도록 상황을 이끌어갈 것이다. 협상 단계에 접어들면 호락호락하게 양보할 것 같지 않다. 암튼 이란은 미국이 괜히 이란을 건드렸음을 자각하게 해주는 가장 쉬운 수단이 호르무즈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셋째, 직접 타격 대신 비용부과(cost imposition)다. 이란이 호르무즈 항행 선박에 대해 직접 타격을 해서 무력으로 봉쇄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대신 이란 혁명수비대 해군은 항행을 원하는 선박에게 협박성 무선 하나로 실질적 봉쇄 효과를 노릴 수 있다. 딱히 무력을 사용하지는 않는데, 아무도 들어가려 하지 않는 상황이다. 바로 보험, 유가, 여론에 영향을 줌으로써 간접 비용을 높이고 이를 통해 억지력을 만들어내는 포석이다. 특히 미국의 역봉쇄 국면에서 이 지점이 주목된다. 즉 이란은 혁명수비대 극초단파 라디오 교신만으로도 실질적 봉쇄가 가능하지만 미국은 항모강습단을 비롯 군 자산을 대규모로 투입해야 하기 때문에 비대칭적 봉쇄전이 되는 그림이다.  
3. 통할까?
미국과 이스라엘이 시작한 전쟁은 비대칭적 열세인 이란으로 하여금 결국 호르무즈 카드를 선택하게 했다. 미사일 계산에서 이란이 의외의 능력을 보이면서 드론 포함 공격 자산 억지력과 더불어 호르무즈 억지력도 갖게 된 셈이다.
쉽지 않겠지만 미국은 호르무즈 자유항행의 그림을 얻어내지 못하면 상황을 종료시킬 마땅한 수가 없다. 적어도 호르무즈는 의제 능력 평가에서 이란이 우위다. 그렇다면 미국은 의제 능력 우위인 우라늄 농축에서 일정부분 양보를 하며 서로 수렴점을 찾아내야 한다. 미국은 이란의 20년간 농축중단을 요굿했고, 이란은 5년중단 의지를 내놓았다. 
미국과 이란은 둘 다 전쟁을 끝내는게 이익에 부합한다. 그러므로 서로 승리했다고 믿게 만드는 산식을 찾아내어야 한다. 생각보다 호르무즈가 강력한 의제이기에 새 국면이다. 묶였던 배들이 줄지어 호르무즈를 나오는 장면이 연출될 경우, 미국과 이란 모두 각자 승리했다는 서사를 들이밀 수 있다. 만일 협상이 지지부진할 경우, 한국 입장에서는 애매하게 봉합되고 이란의 통제권 속에서 선별 통항이 지속되는 상황이 최악이다. 이 때는 미국과 이란 모두 확전의 함정에 빠지게 되고 2단계 가공할만한 공습이 시작될 수 있다. 미국의 외교관들은 협상 타결쪽에 방점을 찍는 반면, 정치인들이나 학자들은 확전에 무게를 두고 있다.  
곧 재개될 것으로 보이는 미-이란 협상에서, 쉽지는 않겠지만 제발 호르무즈를 뚫어 동맥경화상황을 해소하는 결론이 양측으로부터 나오면 좋겠다.  
덧. 벌써 10년. 
'신중동천일야화'라는 타이틀로 글을 쓰기 시작한지 꼭 10년하고 1개월을 썼다. 대략 한달에 한번씩 매번 기고 요청을 받았고 때론 6주 간격으로 쓰기도 했으니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못해도 80-100편 정도 쓴 듯 하다. 이젠 소재의 고갈이 될법도 한데, 늘 쓸 이야기가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이 지역이 어지럽고 끝간데 없는 혼돈의 신호를 보냈기 때문이리라.
Soung Yon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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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hor
항상 고견에 감사드립니다.^^
Reply
손의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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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hor
미국에는 미안하지만, 그동안 그 해협이 이란과 관련성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바다라는 생각을 하던 저 같은 사람들에게 그곳은 이란이 뭔가를 할수 있는 곳이라는 인식을 심어준것 만으로도, 한수 접고 들어가는 상황으로 이해 합니다.
Reply
Intaek Ch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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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hor
10년! 줄쳐가며 잘 읽고 있습니다. 많이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Reply
Wycliff Lu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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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아침마다 페북 열때면 교수님 새 포스팅이 올라오지 않았나부터 봅니다.
공부 잘 하고 있습니다. ^^
Reply
Wonjun J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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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이란은 폭격으로 막심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 질질 끌고가는 협상 전략을 펴지 않을까 추측했었습니다. 그래서 협상이 지지부진 오래 가지 않을지 걱정이었어요.
Reply
Sungjun 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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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껜 죄송하지만, 중동과 비슷하게 정치적으로 얽히고 섥혀있으며 한국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문제가 세계에 깔려있다는 게 더 알려지길 바라고 있습니다 ㅠ 중동이 그나마 가까운데도 교수님 통해 이제서 알려지지만, 사실 모든 곳에는 분쟁과 갈등이 있는데 ㅠㅠ
Reply

Ho Jong-suk - Wikipedia

Ho Jong-suk - Wikipedia

Ho Jong-suk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Ho Jong-suk
Ho in 1945
Chief Justice of the
People's Supreme Court
2nd term
In office
28 October 1959 – 24 June 1960
Preceded byKim Ha-un
Succeeded byKim Ik-son
Minister of Justice
2nd term
In office
18 September 1957 – 31 August 1959
PremierKim Il Sung
Succeeded byPost abolished
1st term
In office
3 August 1957 – 18 September 1957
PremierKim Il Sung
Preceded byHong Ki-ju
Minister of Culture and Propaganda
1st term
In office
9 September 1948 – 3 August 1957
PremierKim Il Sung
Preceded byPost established
Succeeded byHan Sol-ya as Minister of Education and Culture
Personal details
BornHo Jong-ja
16 July 1908
Died5 June 1991 (aged 82)
Pyongyang, North Korea
PartyWorkers' Party of Korea
Parent
OccupationPolitician, activist
Korean name
Hangul
허정숙
Hanja
許貞淑
RRHeo Jeongsuk
MRHŏ Chŏngsuk
Birth name
Hangul
허정자
Hanja
許貞子
RRHeo Jeongja
MRHŏ Chŏngja

Ho Jong-suk (Korean허정숙; 16 July 1908 – 5 June 1991) was a prominent female figure in the Communist Party of Korea and in the sexual liberation movement of Korea under Japanese rule.[1] From 1948, she served multiple offices in North Korea, including the Minister of Health and Chief Justice of the Supreme Court of North Korea.

Biography

She was born Hŏ Jŏng-ja (허정자),[2] the daughter of Ho Hon. In her early years, Ho went to Japan to study in Kwansei School in Tokyo. She later left and in her next years Ho went to the Shanghai International Settlement of Republic of China where she was given an entrance to Shanghai Foreign High School where she graduated.[3] Later she returned to her country. In 1921, she participated in the women Movement and joined the Korean Communist Party.

At that tim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decided to make the Communist Party illegal. She avoided persecution for participation in the Communist Party. Later in 1924, she was introduced to International Women's Day, in March 1925, she went to a Women's Day event in Seoul. In 1927 she was a founding member of Geunwoohoi [ko] and also participated to Singanhoe (신간회).[4]

Ho also was in favor of "Unrelated Love and Sex". Her opinion was denounced in Korean society because at that time, the vestiges of fundamentalist Confucianism remained in the Koreas.

In 1936, she went to China where she participated in the Korean National Revolutionary Party (조선민족혁명당).[3] In 1938, she went to Hebei, participated in Chosen Independence alliance [ko], an Anti-Japanese Korean resistance Group.[3] In 1945, she went to Seoul but she left for North Korea to avoid right-wing terrorism. In 1948 she participated in the North Korean government. She served as Minister of Culture in 1948–1957, and Minister of Justice in 1957.[5]

Ho served as the Chief Justice of the Supreme Court of North Korea between 28 October 1959 and 1960.[6][7]

Bibliography

  • Within gracious love (은혜로운 사랑 속에서)
  • In the days of democratic nation-building (민주건국의 나날에)
  • Reflecting on the great history of love (위대한 사랑의 력사를 되새기며)

See also

References

  1.  Barraclough, Ruth (2015) Red Love in Korea: Rethinking Communism, Feminism, Sexuality. In: Barraclough R., Bowen-Struyk H., Rabinowitz P. (eds) Red Love Across the Pacific. Palgrave Macmillan, New York. ISBN 978-1-349-57079-9
  2.  Ho Jong-suk (in Korean)
  3.  Ho Jong-suk (in Korean)
  4.  Ho Jong-suk
  5.  "Korea North Ministers".
  6.  Scalapino, Robert A.; Lee Chong-Sik (1972). Communism in Korea: The society. Vol. 2.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p. 1366. ISBN 978-0-520-02274-4.
  7.  Service, United States. Foreign Broadcast Information (1960). Daily Report: Foreign Radio Broadcasts.

사회주의 여성운동가 허정숙(1903~1991)의 활동과 사상에 대한 재고찰 - 백숙현 - 서울대학교 : 논문 - DBpia

사회주의 여성운동가 허정숙(1903~1991)의 활동과 사상에 대한 재고찰 : 콜론타이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 백숙현 - 서울대학교 : 논문 - DBpia

사회주의 여성운동가 허정숙(1903~1991)의 활동과 사상에 대한 재고찰 : 콜론타이와의 비교를 중심으로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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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onsideration of the Activities and Thoughts of a Socialist Women's Activist Heo, Jeong-sook (1903-1991) : Focusing on the comparison with Alexandra M. Kollontai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위논문
저자정보
백숙현
(서울대학교, 서울대학교 대학원)

지도교수
한정숙
발행연도
2020
저작권
서울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이용수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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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허정숙(1903~1991)의 삶과 이론을 재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러시아의 볼쉐비키 혁명가이자 마르크스주의 여성주의자인 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콜론타이(1872~1952)와 허정숙의 이론을 비교 분석하였다. 1903년 함경북도 명천에서 민족변호사 허헌의 딸로 태어난 허정숙은 다양한 방면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초기에는 여성계몽운동에 힘썼으나 해외 유학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 사회주의 여성운동을 처음부터 주도하며 대표적인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로 부상했다. 그녀는 탁월한 이론가이자 운동가로서 조선 여성을 둘러싼 자본주의, 가부장제, 제국주의라는 삼중 억압을 돌파하고자 노력했다. 그녀는 언론인이자 논객, 운동가로서 투쟁했지만, 직접 총을 들고 일제와 싸운 무장 항일 혁명 투사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계열의 통일전선기관인 ‘근우회’의 핵심 리더로 활약했으며, 광주학생운동 관련 제2차 ‘여자학생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36년부터 중국에서 ‘조선독립동맹’ 소속으로 광복 때까지 일제와 싸웠으며, 해방 이후, 북한 정권수립에 기여했다. 이러한 경력과 뛰어난 업무 능력을 바탕으로 하여 허정숙은 북한의 고위 정치인의 자리에 올랐다. 김일성 중심으로 권력이 재편되는 종파투쟁 과정에서 정치적 위기를 겪으며 일선에서 물러났으나, 이후 대남활동에 주력하며 재기에 성공하였다. 허정숙은 사망 당시 북한에서 여성으로서는 최고인민회의 최다선 대의원이자 가장 오랫동안 정치일선에 있었다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또한 세계 최초의 여성 문화상, 사법상, 최고재판소장이라는 타이틀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이를 반영하듯 1991년 6월 숙환으로 사망한 허정숙의 장례는 국장으로 거행되었다. 비록 식민지 시기부터 추구한 여성해방과 민주주의 실현의 목표를 이루지 못했지만, 자신이 선택한 체제의 한계 내에서 적지 않은 업적을 달성하였다. 이 땅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여성운동 민족해방에 이어 사회주의 정권 수립 기여라는 괄목할 만한 업적을 세운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본고는 허정숙과 콜론타이의 여성주의 이론을 비교 분석하였다. 비슷한 삶의 행보로 인해 허정숙이 ‘조선의 콜론타이’로 명명되어왔지만, 둘의 이론이 본격적으로 함께 논의된 바 없기 때문이다. 논의는 크게‘여성억압의 토대와 여성해방의 방법론’ ‘바람직한 여성상’, ‘성도덕과 성애관’세 가지의 주제로 나누어 진행하였다. 비교 결과, 여성해방의 방법론에서 허정숙이 계몽주의자의 면모를 더 많이 보이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허정숙은 최종적으로는 사회변혁을 통해서만 진정한 여성해방이 가능하다고 보았지만, 조선의 현실은 봉건적 인습이 심각하여 여성들의 인권회복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녀는 이중반역 운동이라는 단계적인 여성운동의 방향을 설정하였고, 그 과정에서 여성계몽과 교육을 주요 의제로 설정하였다. 반면, 콜론타이는 여성계몽을 중시하기는 했지만,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의 논의에는 전혀 동조하지 않았다. 두 번째로 바람직한 여성상에 대해서도 두 사람은 약간의 차이를 보였다. 콜론타이도 여성의 감정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으나 허정숙은 여성의 감정을 이론의 전면에 내세울 정도로 강조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는 인간을 감정적인 존재로 파악한 허정숙의 인간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허정숙만의 독창적인 페미니즘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생각하는 ‘성도덕과 성애관’에서 콜론타이가 철저히 사회주의에 토대를 둔 것과 달리 허정숙에게서는 사회주의와 부르주아적 성애관이 공존함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엘렌 케이에 대한 허정숙의 긍정적인 평가에 근거한다. 그런데, 이러한 차이들은 혁명정권을 이룩한 러시아와 삼중의 억압이 혼재된 식민지 조선이라는 당대 사회의 차이에서 기인한 면도 있다. 다른 사회적 배경에서 비롯된 두 사람의 시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라는 큰 틀 안에서 여성의 성해방과 자유, 독립성을 추구했다는 면에서 두 사람은 공통점을 보였다. 결론적으로 본고는 두 사람 모두 여성문제의 상대적 독자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론을 제시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의 지평을 확장시켰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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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여성운동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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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사
#Jeong-sook
#socialist women''s activist
#Alexandra M. Kollontai
#Women''s Liberation Theory
#Feminist History
목차
제 1 장 서론 1
제 1 절 문제제기 1
제 2 절 이론적 배경 5
제 3 절 선행연구 검토 11
1. 허정숙의 생애관련 연구 11
2. 허정숙의 여성해방론 관련 연구 13
3. 허정숙과 콜론타이 연관성에 관한 연구 15
제 2 장 허정숙의 생애와 활동 20
제 1 절 생애초기와 여성계몽운동가 시절(1903~1921) 20
1. 가정환경 20
2. 조선여자교육협회 활동(1920~1921) 21
제 2 절 해외 유학과 사회주의 입문 및 발전기(1922~1929) 24
1. 상해(1922.3~9)와 고베(1922. 9. ~1924. 3)에서의 유학 26
2. 조선여자동우회와 경성여자청년동맹 활동기(1924~1925) 29
1) 사회주의 여성해방 이론가 29
2) 조선여성동우회(1924.5.24.) 결성 31
3) 조선최초의 단발식과 단발선언문 33
4) 경성여자청년동맹 (1925. 1. 21) 활동 35
3. 언론인이자 사회주의 운동가 (1925~1926) 38
1) 동아일보 최초의 여기자이자 신여성 편집인 38
2) 형평운동과 반기독교운동 40
4. 미국체류와 반자본주의적 사상의 심화(1926-27) 42
5. 근우회 활동과 투옥 생활(1927~1932) 46
1) 근우회 활동 (1927.11~1930.1) 46
2) 서울여학생만세운동 (1930.1.15~16) 50
3) 투옥생활 (1930. 3. 15 ~ 1932. 3. 18) 53
제 3 절 의업활동기와 중국 무장혁명투쟁기 55
1. 의업활동기(1932~1936) 55
2. 중국망명과 무장항일투쟁 (1936.11~1945.8.15) 57
1) 조선민족혁명당(1936~1938) 58
2) 화북조선청년연합회(1938~1942) 59
3) 1942년 5월 ‘반소탕전’ 60
4)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1942.7.10.~1945.8.15) 61
제 4 절 북한 내 엘리트 정치인으로의 활약 65
1. 북한 정권 수립에의 기여 65
2. 세계 최초의 여성 문화선전상 67
3. 한국 전쟁기 (1950. 6.25~1953. 7. 27) 68
4. 종파사건 위기 이후 정계 복귀 (1972. 8~1989. 4.3) 69
5. 성공한 여성 정치인 70
6. 여성조직의 최고지도자 73
제 5 절. 소결 76
제 3 장 허정숙과 콜론타이의 여성해방론 비교 78
제 1 절 여성억압의 토대와 여성해방의 방법론 79
1. 콜론타이의 논의 80
1) 여성억압의 토대 80
2) 여성해방의 방법론 83
2. 허정숙의 논의 85
1) 여성억압의 토대와 조선여성의 현실 85
2) 여성해방의 방법론 89
(1) 이중 반역 운동 89
(2) 첫 번째 단계: 개성 회수 운동 90
(3) 여성교육(여성계몽)과 경제적 독립을 통한 인격 회복 92
(4) 두 번째 단계: 계급투쟁을 통한 신사회 건설 96
제 2 절 바람직한 여성상 99
1. 콜론타이의 논의 99
2. 허정숙의 논의 103
제 3 절 성도덕과 성해방에 관한 논의 108
1. 러시아의 시대배경과 콜론타이의 논의 109
1) 러시아의 시대적 배경 109
2) 콜론타이의 논의 111
2. 식민지 조선의 시대배경과 허정숙의 성도덕과 성애관 116
1) 조선의 여성사회주의자들 116
2) 허정숙의 논의 120
(1) 정조 논쟁 120
(2) 명사들의 연애관 124
제 4 절 소결 127
제 4 장 결론 131
제 1 절 연구 결과 131
제 2 절 연구의 함의와 후속 연구 과제 137
참 고 문 헌 139
Abstract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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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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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조선로동당 비서국 비서
허정숙
許政淑 | Ho Jong Suk
허정숙
출생
사망
1991년 6월 5일 (향년 88세)
국적
북한 국기
 북한
 (1948 ~ 1991)
본관
학력
최종 당적
군사경력
복무
최종 계급
참전

1. 개요2. 생애3. 장의위원회 구성4. 여담

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의 항일운동가, 마르크스주의 여성주의론자. 동아일보 언론인, 중국 팔로군 정치지도원 등을 지냈다.

광복 이후 북한 정권 수립에 관여한 정치인이기도 하며, 전 최고재판소장을 맡았다.

조선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로 불리곤 한다.

2. 생애[편집]

1902년 7월 16일 서울 종로방 관철동에서 허헌의 차녀[2]로 태어났다. 본명은 허정자(許政子), 아호는 수가이.

1913~1917년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평양여자고등학교에 다녔다. 1918~1919년 즈음 이화여자전문학교에 다니다가 일본 간사이로 유학을 갔다왔다.

1922년 중국 상하이 유학 시절 박헌영주세죽임원근 등과 만나 공산주의 사상에 빠져들었다. 이 중 임원근과는 연인 사이가 되었다. 1922년 임원근과 박헌영이 공산주의 전파를 위해 국내로 잠입하다 검거되어 평양형무소에서 1년 반을 복역하고 1924년 1월 출소하였는데, 이때 주세죽과 함께 흰옷을 지어 형무소 밖에서 이들을 마중했다.

1924년 여름 부모님의 허락도 받지 않고 임원근과 결혼했다. 집안 어르신들이 노발대발했지만 정작 부모인 허헌과 정보영은 오히려 감싸주었다.

1925년 아버지 허헌이 사장 대리로 있었던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1924년 조선일보에 입사한 최은희 기자에 이어 조선에서 손꼽는 초창기 여성 기자이자 동아일보 첫 여성 기자라 할 수 있다. 동아일보에서 학예부와 부녀부, 사회부를 동시에 맡았지만 모두 훌륭히 소화해냈고, 남성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산악과 교통편이 불편한 농촌 현장의 취재에도 직접 뛰어다녔다. 물론 남편 임원근도 동아일보에 근무하고 있었으므로 사내커플이다.

한편 이때 주세죽, 박정덕 등과 함께 경성여자청년동맹(京城女子靑年同盟)을 조직하여 활동기도 하였다. 전 세계 무산자 부녀들의 기념일인 국제무산부인기념일 행사에 김조이, 박희자, 주세죽, 박원희, 김희자 등과 함께 연사로 참석하고, '국제부인데이의 의의와 여성운동'이란 주제로 강연한 뒤, 동아일보에 '국제부인(國際婦人) 데이에 – 3월 8일은 무산 부녀들의 단결적 위력을 나타내인 날로써 세계 각국의 무산 부녀들이 국제적으로 기념하는 날이다'라는 칼럼을 기고하였다.
3월 8일은 무산 부녀들의 단결적 위력을 나타내인 날로써 세계 각국의 무산 부녀들이 국제적으로 기념하는 날이다. 오래인 성상(星霜) 동안에 여러 가지로 미명(美名)의 마수제(魔睡劑)를 가지고 횡포와 우월권을 마음껏 행사하는 부르주아 계급에게 굴종을 인종(忍從)하며 살아오던 부녀의 무리가 전제 정치와 자본 계급에 반항하여 맹연히 분기한 날이다. 이리하야 부녀들은 규율있는 조직 하에서 자아의 진용을 정제하고 여성의 단결적 위력을 나타내며 일반 부녀들에게 계급적 각성과 해방적 의식을 갖게 하야써 인간으로서의 부인의 지위와 인권을 찾게 하는 날이다.” — 동아일보 1925년 3월 9일자

그러나 1925년 5월 "철필구락부 임금 인상 투쟁"에 가담한 후 임원근과 함께 동아일보에서 퇴사하게 되었다. 여기자로 활동한 지 몇 달도 안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1925년 12월 제1차 조선공산당 탄압 사건 때에는 남편 임원근이 구속되었다. 그렇게 남편이 구속되고 아버지 허헌이 사위의 변론에 힘쓰고 있을 때, 다른 남자를 만나고 다녔다. 그러다 북풍회의 송봉우와 동거를 시작하여 경성을 뒤흔든 대형 스캔들을 일으켰다. 남편에게 찾아가 이혼장을 내밀며 이혼을 요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붉은 연애' 행각에 대해서 공산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의 입방아를 찧었는데, 허정숙은 이에 대해 오히려 당당하게 맞서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조는 무엇이며 누가 만들었느냐. 남자들은 여러 여자를 으로 두고 술집 여자와도 놀아나면서, 왜 여자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느냐."
"성적 해방과 경제적 해방이 극히 적은 조선 여성에게 사회가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여성의 본능을 무시하는 행위다."

1926년 5월에는 아버지와 함께 세계일주에 나섰다.[3] 그러나 바로 귀국하지 않고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 1년 머무르면서 공부하였다.

1927년에는 귀국하여 근우회에서 일하다가 1930년 서울 여학생 운동 지원 사건(근우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다. 체포 당시 임신 중이었고, 감옥에서 송봉우의 아이를 낳았다. 그 후 출산 후유증을 이유로 하여 보석으로 나왔다가 1931년 다시 재수감되었다.

그러다가 송봉우가 공산당 사건으로 투옥되어 전향하자 송봉우를 걷어차 버렸다. 그 뒤에는 의사이면서 조선일보 논설위원이었던 신일룡과 사귀어 셋째 아들을 낳았다.

1936년에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옌안의 조선독립동맹에 소속되어 공산주의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하였다. 이때 조선의용군의 최창익과 다시 결혼하였고 두 아이를 낳았다.

1940년 항일군정대학 정치군사과를 졸업했고, 1941년 팔로군 제120사 정치지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어 1942년 조선혁명군정학교 교육과장 및 독립동맹 집행위원을 지냈다.

1945년 광복 이후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38도선 이북으로 월북, 남북을 오가며 활동했다. 그러는 사이에 남편 최창익은 다른 여성과 바람이 났는데, 1946년 최창익이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허정숙에게 이혼을 요구하자, 쿨하게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최창익의 결혼식에 가서 축사까지 낭독하였다.

1946년 2월에 북조선공산당 선전부 부부장에 임명, 1946년 11월 신민당과 북조선공산당이 합당하여 북조선로동당이 창당된 조선로동당 제1차 당대회에서 간부부장에 선출되었으며 19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 선전국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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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남북연석회의에서 연설하는 허정숙.

결국 1948년 4월의 남북 협상에 북측의 여성계 대표로 참여한 뒤 북한에 정착했다. 1948년 9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1기 대의원이 되었고, 38선 이북의 북한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초대 내각 문화선전상에 선출되었다.

문화선전상으로 재임하던 시절 최승희와 마찰이 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최승희를 없애 버리는데 성공했다. 물론 최승희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최승희는 허정숙뿐만 아니라 다른 당 간부들, 심지어 김일성하고도 툭하면 싸워댔고, 많은 사람의 공적이 되었기 때문에 최승희의 숙청이 허정숙의 공로만은 아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6월 28일 서울로 내려와 리승엽 등과 서울에 체류하며 KBS 방송국을 점령하고 선전, 홍보, 문화 활동과 각종 홍보물 인쇄, 방송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그해 9월 15일 더글라스 맥아더의 인천 상륙 작전 이후 인민군이 밀리기 시작하자 북녘으로 황급히 도주했다. 그해 10월 12일에 평안남도 덕천군을 거쳐, 임시수도인 강계시까지 가는 일이 생겼으나, 12월 6일에 인민군이 평양을 탈환하면서 다시 내려왔다.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을 지냈다.

1956년 8월 종파사건 때 전남편인 최창익이 김일성에게 맞섰으나, 전남편인 최창익을 비판하여 숙청을 면하였다. 본인 역시 연안파였음에도 그러했다. 전 남편과 사이가 안 좋긴 했지만 개인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보복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는게 이후에도 쭉 김일성에게 충성해서 연안파임에도 숙청되지 않고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 추측의 범주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기는 한데, 독립운동가 변호사로 유명했던 허헌을 굉장히 존경한 김일성이 그 딸에게 예우를 해준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결국 숙청된 최창익과 달리 본인은 계속 중용되었고, 1957년 8월 3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문화선전상에서 해임, 사법상에 임명되었으며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사법상에 재선되었다. 1957년 1월, 대외문화련락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어 1960년 12월까지 겸임하였다. 1958년 6월 30일, 50세 생일을 기념하여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1959년 8월 31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사법성이 폐지됨에 따라 사법상에 물러났다. 1959년 10월, 최고인민회의 2기 6차 회의에서 김하운의 뒤를 이어 중앙재판소장에 선출되었으며 1960년 11월 24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익선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후 중앙도서관 관장을 역임하다가 북한법상 은퇴 나이인 55세가 넘었다는 이유로 1차적으로 은퇴를 했다.

헌데 이후 김일성의 지시로 1972년 7월,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서기국장에 임명,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75년 3월, 여맹 중앙위원회 비서장에 임명되어 1978년 12월까지 재임하였다. 1977년 12월,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상설회의 부의장에 재선되었으며 1978년 8월, 조국전선 의장에 임명하여 죽을 때까지 재임했다.

1976년 9월 최용건 장의위원, 1977년 6월, 강장수 장의위원에 위촉되었다. 1981년 11월, 당중앙위원회 비서 겸 근로단체부장에 임명되었으며 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장 및 조평통 부위원장이 되었다. 1982년 2월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부의장직을 사퇴하였고, 2월 28일 제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당선, 최고인민회의 제7기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이어 제7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82년 3월, 전창철 장의위원,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3년 1월 강량욱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4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에 임명되었다. 그해 3월에는 김일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6년 11월 2일 제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당선, 최고인민회의 제8기 대의원이 되었다. 또한 조선민주여성동맹 대표단장에도 선출되었다. 1987년 8월, 박영순 장의위원,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9년 조평통 부위원장 및 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회 위원장에서 해임되었으며 근로단체비서에서도 물러나 김중린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했다. 1990년 8월 15일, 조국통일상 1차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1991년 6월 5일 오후 3시 30분에 8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당중앙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 정무원은 공동명의로 다음과 같은 부고를 발표하며 그녀를 찬양했다.
허정숙동지는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 끝없이 충실한 혁명전사이며 조국의 통일독립과 사회주의공산주의 건설을 위하여 한생을 바쳐 싸운 녀성활동가이다. (...) 동지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제시하신 자주적인 조국통일방침을 높이 받들고 북과 남의 모든 애국적력량을 굳게 단합시키며 분렬된 조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적극 투쟁하였다. 동지는 우리 당의 주체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당과 수령에게 무한히 충실하였다.

2016년 5월, 7차 당대회 개회사에서 김정은은 '조선로동당의 강화발전과 사회주의 위업의 승리를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한 충직한 혁명동지'의 한 사람으로 허담연형묵김중린김국태김용순김양건전병호박송봉리찬선리제강리용철강량욱리종옥김락희안달수와 함께 허정숙을 언급하였다.

3. 장의위원회 구성[편집]

4. 여담[편집]

  • 4명의 남편(임원근, 송봉우, 신일룡, 최창익)에게서 서로 성씨가 다른 자녀들을 여러 명 두었다. 장건상에 의하면 남편만 7명이라 한다. "사랑 없는 성관계도 가능하다"고 주장해서 화제가 됐다. 이한영의 증언에 따르면 아들 중 하나인 허묵은 조선로동당 대남연락부[4] 과장으로 백건우윤정희 납치 공작에 동원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공작원 할머니[5]가 "왔어요."라고 하면 숨어있던 공작원들이 튀어나와 끌고가기로 한 것을 "다들 어디 갔나."라고 다른 신호를 보내는 바람에 공작원들이 눈치만 살피면서 나오지 못하고, 혼자서 나선 허묵이 괜히 북한 사람인 걸 티내는 바람에 경악한 윤정희가 그대로 미국영사관으로 달아나버리면서 실패했다고 전해진다.
  • 1921년에는 한국 여성 최초로 단발 머리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머리를 자르면 죽는 줄 아는 신체발부 수지부모를 외치는 유교 문화가 생생하게 있는 시절이었다. 이 때문에 단발머리=공산주의자라는 인식도 생겨서 군벌혼전 중에서는 단발머리 여자만 보이면 참수하기도 했다.
  •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 당시 북측 대표로 참석했는데, 평양을 방문한 동아일보 송건호 주필이 소개를 받고 "나는 동아일보 송건호라고 하는데 선생님 동생을 잘 알고 친합니다."라고 친근감을 표시했다. 그러자 허정숙은 “그래요”라고 한 마디하더니 입을 다물고 굳은 표정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반응을 보인 이유는, 그녀의 여동생인 허근욱은 북한 체제에 반감을 가지고 1.4 후퇴 당시 남편과 함께 월남했기 때문이었다.
  • 최후까지 김씨 정권에 충성하며 살아남은 행적에서는 느껴지지 않지만, 정상진 등의 인사들은 허정숙의 인품 등을 꽤나 높게 평가했다. 독재정권에 부역하며 그 유지와 연장에 도움을 주면서도 자기 자신은 온건파로써 남으려 한 김재익이나 저우언라이같은 이들과 비슷한 길을 걸은 셈이다. 다만 허정숙은 그 정도로 넓은 영향력을 가지지는 못했다.
[1] 판도좌랑공파(版圖佐郞公派) - 용진공파(龍津公派) 31세손[2] 언니가 일찍 죽었으니 사실상 맏딸이다.[3] 세간의 여론을 피해 허헌이 딸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갔다는 말도 있다. #[4] 이름과 달리 대외 공작을 담당하는 정보기관이다.[5] 박인경. 이응노 화백의 두 번째 아내로, 현재까지도 뻔뻔하게 한국에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