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16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 10만 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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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 10만 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세놀토 SENOLTO
156,249 views  Oct 5, 2026  역사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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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10만 명의 조선인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그들이 남긴 역사의 흔적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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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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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 seconds임진혜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사람이 1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0:044 seconds남원에서 진주에서 영광 앞바다에서 눈바던 아버지와 [음악] 부엌에서 밥을 짓던 어머니 이제 겨우 열살 남짓한 아이들이 새끼줄에 목이 묶긴 채 배에 실려 바다를 건넜어요.
0:1515 seconds정확히 몇 명이었는지는 지금도 학자마다 말이 다를만큼 기록이 흐릿합니다. 한 고울 두 고울 사람이 통째로 사라졌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0:2424 seconds숫자죠. 우리는 임진느란 하면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 곳곳에서 일어난 의병은 바로 떠올리는데 끌려간 그 많은
0:3131 seconds사람들이 그 뒤에 어떻게 살았는지는 배운 기억이 거의 없잖아요. 전쟁이 끝났으니 다들 고향으로 돌아왔을까요?
0:3838 seconds남의 나라에서 종으로 부려지다 이름없이 눈을 감았을까요? 남겨진 가족들은 바다 건너를 바라보며 그 사람을 얼마나 기다렸을까요? 실제
0:4646 seconds기록을 따라가 보면 우리가 막연히 떠올리던 것과는 전혀 다른 장면들이 하나 둘 나옵니다. 일본보다 훨씬 먼 바다를 건너 낯선 유럽 도시의 거리에
0:5555 seconds서게 된 사람이 있었어요. 지금도 일본의 한 신사의 이름이 모셔져 있는 사람이 있고 12살에 끌려간 소년이 남긴 그 시안은 일본에서 문화제가
1:041 minute, 4 seconds됐습니다. 몇태 뒤 조선 사신이 그들을 데리러 바다를 건넜을 때는 포구 갈 때 밭에서 한 남자가 뛰어나오며 이렇게 외쳤다고 해요.
1:121 minute, 12 seconds나는 조선 사람이요 나를 태워 주시오. 그런데 정작 그 사진들이 남긴 기록에는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문장들이 적혀 있습니다. 10만 명이
1:201 minute, 20 seconds끌려간 그 바다 건너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오늘은 기록 속에 남은 그 사람들의 발자국을 하나씩 따라가 보겠습니다.
1:301 minute, 30 seconds먼저 그 전쟁부터 들여다 보겠습니다.
1:321 minute, 32 seconds일본군은 조선에 두 번 쳐들어왔습니다. 처음 쳐들어온 임진년 전쟁과 몇태 뒤 다시 쳐들어온 정유년 전쟁이에요.이 두 전쟁은 성격이 꽤
1:411 minute, 41 seconds달랐습니다. 첫 번째 전쟁에서 일본은 한양을 거쳐 영나라까지 가겠다며 북쪽으로 밀고 올라갔어요. 땅을 차지하는게 목표였죠. 그런데 두 번째 전쟁 때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1:521 minute, 52 seconds영나라까지 가는 건 이미 어렵다는게 드러난 뒤였고 일본군은 주로 경상도와 전라도 남쪽을 휩쓸고 전어요. 그래서
2:002 minutes한 일본학자는이 두 번째 전쟁을 사람 사냥 전쟁이라고 불렀습니다. 땅보다 사람을 노린 전쟁이었다는 거죠. 조선 쪽 기록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어요.
2:092 minutes, 9 seconds남은 사람 조경남이 쓴 난중 잠록을 보면 도요토미 히데오 씨가 장수들에게 내린 명령이 나옵니다. 머리 대신
2:162 minutes, 16 seconds코를 베어보내 전공을 증명하게 하고 그다음에는 사람을 산채로 잡아도 된다고 허락했다는 거예요. 교토에 지금도 남아 있는 귀덤이 그때 베어간
2:252 minutes, 25 seconds코를 묻은 곳입니다. 그 숫자는 여기서 굳이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2:292 minutes, 29 seconds그의 가을 교토의 큰절 승려들이 모여이 무덤 앞에서 공양을 올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요. 그럼 일본은 왜 그렇게 사람을 데려가려 했을까요?
2:382 minutes, 38 seconds그무렵 일본은 100년 넘게 이어진 내전이 막 끝난 참이었습니다. 오랜 싸움에 농사 지을 사람, 성을 싸울 사람, 잠일을 할 사람이 크게
2:462 minutes, 46 seconds모자았어요. 영주들 입장에서는 조선에서 붙잡아온 사람들이 공짜일선이었던 거죠. 게다가 붙잡은 사람을 장사꾼에게 넘기면 그 자리에서
2:552 minutes, 55 seconds돈이 됐습니다. 사람을 잡는게 곧 전리품을 챙기는 일이었던 겁니다.
2:592 minutes, 59 seconds붙잡으면 일을 시킬 수 있고 일을 안 시키면 팔 수 있으니 군대가 지나가는 마을마다 사람이 사라져 갔어요. 그 사냥이 가장 처절하게 벌어진 곳
3:083 minutes, 8 seconds가운데 하나가 남입니다. 정유년 여름 일본군의 대군이 남성을 에워쌌어요.
3:133 minutes, 13 seconds조성군과 명나라 군대가 함께 성을 지켰지만 끝내 성은 무너졌습니다. 에 있던 군사와 백성들은 대부분 목숨을
3:203 minutes, 20 seconds잃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줄줄이 포로로 끌려갔어요. 오늘 이야기에 남은 사람들이 여러 번 등장하는 것도이 때문입니다.이 전쟁에서
3:283 minutes, 28 seconds남원만큼 많은 사람이 바다 건너로 끌려간 고울도 드물었거든요. 남성이 무너지고 얼마 지나지 않은 정윤년 가을 전라도 영광 앞바다 30살 선비
3:383 minutes, 38 seconds강황은 피란길의 가족을 배에 태우고 바다로 나갔다가 일본 수군에게 붙잡힙니다. 배째로 끌려가는 그 와중에 어린 아들과 딸이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 목숨을 잃었어요.
3:483 minutes, 48 seconds아이들을 잃은 아버지는 그대로 일본으로 끌려갑니다. 비슷한 무려 붙잡힌 또 다른 선비 정의득의 집안 이야기도 기록으로 전합니다.
3:563 minutes, 56 seconds일본군에게 붙잡히던 날 그의 어머니와 형수 아내와 누이가 차례로 바다에 몸을 던졌다고 해요. 끌려가 욕을 당하느니 목숨을 버리겠다는 거였죠.
4:054 minutes, 5 seconds정의득은 혼자 살아남아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두회쯤 뒤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남은 가족 없이 돌아온 그 길이 어땠을지는 진작하기도
4:134 minutes, 13 seconds어렵습니다. 그의 겨울 일본군 진영 안에서는 이런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어요. 일본 규슈의 한 영주를 따라 의사겸 승려로 종근한 게이라는
4:224 minutes, 22 seconds사람이 일기를 남겼는데 이렇게 [음악] 적었습니다. 일본에서 온갖 상인이 건너왔는데 그 가운데 사람 장사꾼도 있었다. 본진 뒤를
4:304 minutes, 30 seconds따라다니며 남녀 노소를 사들려 새끼줄로 목을 묶어 모으고는 앞으로 몰아세웠다. 걷지 못하면 뒤에서 몽둥이로 몰아치며 때려 달리게 하니
4:384 minutes, 38 seconds지옥의 옥조이 죄인을 다그치는 것이 이러할까 싶었다. 이게 끌려간 조선 사람이 남긴 기록이 [음악] 아니거든요. 끌고 간 쪽 일본 군대를
4:464 minutes, 46 seconds따라온 일본 스님이 자기 눈으로 보고 적은 겁니다. 이걸 쓴 사람이 일본 쪽 스님이었다는게 저는 좀 멈칫했습니다. 같은 편이 봐도 지옥
4:554 minutes, 55 seconds같았다는 얘기니까요. 군대 뒤에는 사람을 사고파는 장사꾼들이 따라다녔고 붙잡힌 조선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값이 매겨져 팔려 나갔습니다.이
5:045 minutes, 4 seconds사냥은 전쟁이 끝나는 순간까지 이어졌습니다. 정윤년 이듬의 가을 히데오 씨가 세상을 떠나자 일본군은 서둘러 조선에서 물러나기 시작해요.
5:125 minutes, 12 seconds그런데 돌아가는 배에도 조선 사람들이 실려 있었습니다. 남의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이 마지막 싸움을 버린 노량 회전도 바로이 철수하는 일본
5:215 minutes, 21 seconds배들을 막아서는 싸움이었어요. 그 배들 가운데 상당수가 바다를 건너갔고 그 안에 실린 조선 사람들도 함께 일본 땅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5:305 minutes, 30 seconds끌려간 사람이 모두 몇 명이었는지는 기록이 퍼져 있어서 지금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한국 학계는 10만 명 안팎으로 보고 일본 학계는 2만에서
5:395 minutes, 39 seconds3만 명이 넘는다고 봐요. 어느 쪽으로 보든 바다를 건 조선 사람이 수만 명에 이르렀다는 건 분명합니다.
5:455 minutes, 45 seconds그럼 이렇게 목에 줄이 묶여간 사람들은 어디로 갔느냐? 길은 크게 세 갈래로 나닙니다. 어떤 사람은 또 한번 팔려서 일본보다 훨씬 먼 바다
5:545 minutes, 54 seconds건너로 갔고 어떤 사람은 손해 가진 기술 때문에 일본 영주들이 일부러 데려갔고 또 어떤 사람은 아예 일본 사람이 되어 살았습니다. 첫 번째
6:036 minutes, 3 seconds길은 일본의 서쪽 끝 한구 나가사키에서 시작됩니다.
6:086 minutes, 8 seconds나가사키는 그무렵 일본에서 가장 국제적인 한구였습니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커다란 배를 타고 드나들면서 중국 비당과 은을 사고 팔던
6:176 minutes, 17 seconds곳이에요. 그런데이 한구에서 거래된 물건 가운데에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6:216 minutes, 21 seconds일본군이 끌고 온 조선 사람들이 이곳에서 다시 포르투카 상인들에게 팔려 나간 거죠. 이렇게 팔린 사람들은 중국 마카오, 말레이반도의
6:296 minutes, 29 seconds말라카, 인도의 고아, 필리핀 마닐라 같은 곳으로 실려갔습니다. 얼마나 팔렸는지 정확한 숫자는 남아 있지 않아요. 다만 전쟁 동안 한해에
6:386 minutes, 38 seconds천명이 넘는 조선 사람이 포르투카 상인에게 [음악] 팔렸다고 보는 연구가 있습니다. 마카오에는 조선 사람들끼리 모여사는 작은 공동체가
6:466 minutes, 46 seconds생겼다는 연구도 있고요. 말도 통하지 않는 남쪽 한구에서 같은 처지의 조선 사람들끼리 서로 기대며 살았던 거죠.
6:526 minutes, 52 seconds사람이 너무 많이 쏟아져 나오다 보니 값이 크게 떨어졌다고 합니다.
6:566 minutes, 56 seconds사람값이 시장에서 폭락했다는 말을 이렇게 문장으로 옮기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워지네요. 여기에는 얄구준
7:037 minutes, 3 seconds모순이 하나 있습니다. 히데오시는 전쟁을 일으키기 몇 해 전에 일본 사람을 외국에 팔아넘기는 걸 금지하는 문서를 낸 적이 있거든요. [음악]
7:117 minutes, 11 seconds포르투카 상인들이 일본 사람을 사서 해외로 데려가는 걸 맡겠다는 거였어요. 천주교 선교사들을 일본에서 내쫓겠다는 명령을 내리기 바로
7:197 minutes, 19 seconds전날다운 문서였습니다. 서양 상인과 선교사들이 일본 백성을 노예로 사가는 걸 문제 삼은 거죠. 그러니까 일본 사람을 파는 건 안 되는데 조선 사람을 파는 건 막지 않은 셈입니다.
7:307 minutes, 30 seconds자기 [음악] 백성은 지키겠다던 그 사람이 남의 나라 백성이 같은 한고에서 팔려 나가는 건 눈감은 거죠. 저는이 문서 한 장이 그
7:377 minutes, 37 seconds시대일보니 조선 사람을 어떻게 바라봤는지 보여주는 거울 같다고 생각해요. 음마전 한국 축구가 사연패를 하며 시상을 하던 장면이
7:457 minutes, 45 seconds떠오르는데 참 씁쓸합니다. 같은 사람이라도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사람으로 대접받기도 하고 물건으로 팔리기도 했던 겁니다. 그
7:547 minutes, 54 seconds한구에서 조선 사람을 산 유럽인이 직접 남긴 기록도 있습니다.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온 상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라는 사람이에요. 세 개를 한
8:028 minutes, 2 seconds바퀴 돌며 장사를 하고 나중에 그 여정을 책으로 남긴 그는 나가사케에 머물던 무려 조선 사람 다섯 명을 샀다고 적었습니다. 그 값이 다섯
8:118 minutes, 11 seconds명을 다 합쳐서 은화 열두이 핀 남짓이었다고 해요. 다섯 사람을 다 합쳐서 그 값이었다는 거죠. 그런데 카를레티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8:198 minutes, 19 seconds않습니다. 그는이 다섯 사람에게 세례를 받게 하고 인도의 고아에 이르렀을 때 풀어 주었다고 적었어요.
8:268 minutes, 26 seconds그리고 그 가운데 한 명은 자기 고향 이탈리아까지 데려갔습니다. 그는 그 사람에 대해 이렇게 썼어요. 지금은 로마에 있고 안토니오라고 불린다.
8:348 minutes, 34 seconds유럽 땅을 밟은 조선 사람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 가운데 하나입니다.
8:388 minutes, 38 seconds나머지네 사람이 고아에서 풀려난 뒤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아요. 조선의 어느 마을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이었을 텐데 전쟁에
8:478 minutes, 47 seconds붙잡히고 팔리고 풀려나서 로마의 거리를 걷게 된 거예요.이 안토니오를 두고 유명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8:538 minutes, 53 seconds벨기의 화가 루벤스가 그린 그림 가운데 한복처럼 [음악] 보이는 옷을 입은 남자를 그린 소묘가 있는데이 남자가 바로 안토니오라는 이야기예요.
9:029 minutes, 2 seconds한국에서도 꽤 널리 알려졌죠. 물론 그럴듯한 이야기입니다. 오차림도 그렇고 시기도 얼추 맞아 떨어지니까요. 근데 그림을 가지고
9:099 minutes, 9 seconds있는 미국 개술관도이 사람이 저선 사람이라고 못 박지 않았습니다. 몇 해 전에는이 사람이 중국 상인의 가능성이 크다는 연구까지 나왔어요.
9:189 minutes, 18 seconds이탈리아 어느 마을에 코리아라는 성을 쓰는 사람들이 그 후손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것도 근거가 약한 전설에 가깝습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일수록
9:279 minutes, 27 seconds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고 봐요. 진짜 기록하나가 이미 충분히 [음악] 무겁 사람을 사고파는 일을 두고 유럽 교회 안에서도 생각이 갈렸습니다.
9:359 minutes, 35 seconds나가사키에 있던 세르케이라 주교는 조선 사람을 사는 자는 교회에서 내쫓겠다고 경고했어요. 그리고 일본인 신자들에게 조선인 포로를 대사서 풀어
9:449 minutes, 44 seconds주라고 했습니다. 스페인의 한 신학자는이 매매가 합법이라는 판단을 내놓았어요. 같은 교회 안에서 한쪽은 막으려 했고 한쪽은 괜찮다고 한
9:539 minutes, 53 seconds겁니다. 그 사이에서 조선 사람들은 계속 배에 실려 나갔죠. 먼 바다로 나갔다가 돌아온 사람도 있긴 했습니다. 진주삼비 조 완벽은 일본에
10:0210 minutes, 2 seconds끌려간 뒤 일본 상인의 배를 타고 지금의 베트남인 안남까지 세 번이나 [음악] 다녀왔어요. 그리고 끝내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10:1010 minutes, 10 seconds당대의 학자 이수광이 따로 글로 남길만큼 신기한 일로 여겨졌어요.
10:1410 minutes, 14 seconds조선 사람이 베트남 땅을 밟고 돌아왔다는 거니까요. 하지만 이런 사람은 아주 드물었습니다. 사실 이렇게 기록에 이름이나 사연이 남은
10:2310 minutes, 23 seconds사람은 아주 드니다. 끌려간 [음악] 사람 대부분은 일본 어느 영주의 땅에서 농사를 짓거나 성을 쌓거나 남의 집 부엌에서 일하며 이름없이
10:3110 minutes, 31 seconds살다 갔어요. 주인이 바뀔 때마다 다른 집으로 넘겨지기도 했고요.
10:3510 minutes, 35 seconds오늘이 영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그 수많은 사람 가운데 우연히 기록이 남은 몇 사람일 뿐입니다. 그 뒤에는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훨씬 많은
10:4410 minutes, 44 seconds사람들이서 있다는 걸 기억해 주셨으면 해요. 이렇게 팔려 나간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일본 영주들이 팔지 않고 [음악] 일부러 곁에 둔 사람들도
10:5210 minutes, 52 seconds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영주들이 탐내는 무언가가 있었거든요.
10:5810 minutes, 58 seconds일본 영주들이 가장 탐낸 건 흙을 다루는 기술이었습니다. 그무렵 일본에서는 차를 마시는 다도가 무사들
11:0611 minutes, 6 seconds사이에서 크게 유행했어요. 좋은 차사발 하나가 성하나값에 만모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죠. 그런데 일본은 아직 단단하고 하얀 그릇을 구원내는
11:1411 minutes, 14 seconds기술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니 조선 도공들은 영주들 눈에 귀한 보물처럼 보였을 거예요. 재미있는 건 일본 무사들이 그토록 귀하게 여긴 첫사발
11:2311 minutes, 23 seconds가운데 조선에서 건너간 그릇이 많았다는 겁니다. 조선에서는 막쓰던 평범한 사발이 일본에 건너가서는 최고의 차사발로 대접받았어요. 그런
11:3211 minutes, 32 seconds조선 사발 가운데 하나는 지금 일본 국보로 지정된 교토의 한절에 모셔져 있습니다. 조선 사람들이 무심히 빚던
11:3911 minutes, 39 seconds그릇이 바다 건너에서는 보물이 된 거죠. 그 그릇을 만들던 사람들을 직접 데려가고 싶어 한 영주들의 마음도 여기서 나왔습니다.
11:4711 minutes, 47 seconds일본에서도이 전쟁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다만 이건 [음악] 전쟁이 끈다고 규슈 곳곳에 감마가 늘어난 결과를 두고 붙인 별명이에요.
11:5611 minutes, 56 seconds도공을 데려가려고 전쟁을 일으켰다는 뜻은 아닙니다.이 부분은 오해가 많아서 짓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요.
12:0212 minutes, 2 seconds그 도공들 가운데 가장 이름이 높은 사람이 이산평입니다. 그는 사가의 영주 나베시마군에게 끌려가 처음에는
12:0912 minutes, 9 seconds한 가신의 땅에서 지내다가 지금의 아리타 지역에 자리를 잡았어요.
12:1312 minutes, 13 seconds일본에서는 가나가의 삼베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그리고 아리타 근처 이즈미야마라는 산에서 하얀 자기를 구울 수 있는 좋은 돌을
12:2212 minutes, 22 seconds찾아냅니다.이 돌을 캐서 빠으면 백자의 원료가 되는 거죠. 이산평은이 원료로 아리타를 자기를 굽는 마을로 키워냈습니다. 그보다 앞서 근처
12:3012 minutes, 30 seconds감마에서 이미 자기를 구었다는 학설도 있어서 그를 일본 최초에 자기를 만든 사람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12:3712 minutes, 37 seconds그래도 원료를 찾아내 한 마을의 산업으로 키운 사람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별로 없어요. 그는 끌려온 뒤 60년 가까이 아리타에서 그릇을 구우며 살다가 그 땅에 묻였습니다.
12:4712 minutes, 47 seconds그렇게 아리타에서 구운 자기는 다시 바다를 건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이 그릇에 사가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과 중동으로 대량
12:5612 minutes, 56 seconds수출되기 시작했어요. 한 번에 수만 개 단위로 주문이 들어올 정도였다고 합니다. [음악] 유럽 왕실과 귀족들의 궁전 장식장에 아리타 자기가
13:0413 minutes, 4 seconds올라갔죠. 끌려간 사람의 손에서 나온 그릇이 끌려간 사람들이 팔려 나가던 그 바닷길을 따라 유럽까지 간 겁니다. 한쪽 배에는 사람이 실렸고
13:1213 minutes, 12 seconds다른 쪽 배에는 그 사람들이 빚은 그릇이 실렸던 거예요. 남원에서 끌려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정유년에 남원성이 무너졌을 때 사스마의 영주
13:2113 minutes, 21 seconds심마주군이 남 사람명 남짓을 붙잡아 갔어요. 그 가운데 심당길이라는 도공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규슈 남쪽
13:2813 minutes, 28 seconds90키노라는 바닷가에 내렸다가 몇테 뒤 나의시로가와라는 마을로 옮겨가 자리를 잡았어요. 그리고 마을에 당군을 모시는 사당을 세웁니다.
13:3613 minutes, 36 seconds옥상궁이라는 이름이었어요. 남의 나라 땅 한가운데 우리 시조를 모시는 사당을 [음악] 세운 거죠.이 이 마을 사람들은 그 뒤로도 오랫동안 조선마을 쓰고 조선 옷을 입었습니다.
13:4613 minutes, 46 seconds일본이 근대 국가로 바뀌는 메이지 시대까지 그 풍속을 지켰다고 해요.
13:5013 minutes, 50 seconds사스마의 영주가이 마을을 보호하며 도자기를 굽게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혼슈 서쪽 끝 하기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13:5813 minutes, 58 seconds모리가문이 데려간 조선 도공 이경은 나중에 무사대우를 [음악] 받고 새 이름을 얻었는데 그 이름에 고려라는 말이 들어갔다고 전해집니다. 일본
14:0614 minutes, 6 seconds이름을 받으면서도 자기가 어디서 갔는지는 이름 속에 남긴 셈이죠.
14:1014 minutes, 10 seconds규슈 후쿠호가에 다카토리 감아도 구로다가문이 데려간 조선도공이 [음악] 연곳입니다. 하기의 그릇은 지금도 일본 다도에서 손꼽히는
14:1814 minutes, 18 seconds차그릇으로 대접받습니다. 지금 일본에서 이름난 가마 가운데 상당수가 이렇게 조선 사람의 손에서 시작됐어요. 일본 사람들이 귀하게
14:2614 minutes, 26 seconds여기는 그릇의 밑바닥에 끌려간 조선 도공들의 손잡국이 남아 있는 셈이죠. [음악] 흙만 데려간게 아니었습니다.
14:3514 minutes, 35 seconds글도 데려갔어요. 앞에서 아이들을 바다에서 잃은 선비 강황.
14:3914 minutes, 39 seconds기억하시죠? 그는 처음에 시코의 오즈라는 곳에 갇혀 있다가 교토 근처 후심미로 옮겨집니다. 그리고 거기서 후지와라 세이카라는 학자를 만나요.
14:4914 minutes, 49 seconds세이카는 원래 승녀였는데 유학에 깊이 빠져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금세 가까워졌어요. 세이카를 따르던
14:5614 minutes, 56 seconds아카마스 히로미치라는 영주도이 모임에 함께했습니다. 강황은 포로신 분이었지만 세이카에게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스승 같은 존재였던 거죠.
15:0415 minutes, 4 seconds강황은 세이카와 함께 유학의 기본 경전인 사서 오경을 일본 사람들이 읽기 좋게 풀어쓰는 작업을 했습니다.
15:1115 minutes, 11 seconds한문에 일본식 읽기 표시를 달아주는 일이었어요.이 작업이 일본에서 성리하기 자리를 잡는데 한 축이 됐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두 사람이
15:1915 minutes, 19 seconds주고받은 글을 모은 책이 지금도 일본 덴니 대학에 남아 있어요. 아이들을 바다에 잃고 끌려온 포로가 끌고 간 나라의 한문에 뿌리를 내려준
15:2815 minutes, 28 seconds셈입니다. 비슷한 길을 간 사람이 또 있습니다. 이진영이라는 선비는 일찍 끌려가 일본에서 학문을 익혔고 훗날 기슈 지역 영주의 학문 스승이
15:3615 minutes, 36 seconds됐어요. 기슈의 영주는 도쿠가와 집안 사람이었습니다. 조선의 선비가 일본 최고 권력문의 아이를 가르친 거죠.
15:4315 minutes, 43 seconds칼로 끌려간 사람이 붓으로 그 나라를 가르치는 자리에 선 겁니다. 그의 아들도 대를 이어 기슈의 유학자가 됐어요. 아버지가 끌려간 땅에서 아들이 학문의 집안을 일군셈이죠.
15:5315 minutes, 53 seconds강황은 3년 가까이 일본에 붙잡혀 있다가 끝내 함께 잡혀온 일행 30서른 여명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붙잡혀 있는
16:0116 minutes, 1 second동안에도 일본의 지리와 군사, 영주들의 사정을 [음악] 몰래 적어 조선 조정에 보내려 했었어요. 포로 신분으로 적국을 살핀
16:0916 minutes, 9 seconds첩보 보고서였던 셈이죠. 돌아온 뒤에는이 글들과 함께 일본에서 겪은 일을 기록으로 남깁니다. 그가 그 기록에 처음 붙인 제목은
16:1716 minutes, 17 seconds건거록이었습니다. 죄인을 씻는 수레라는 뜻이에요. 살아돌아온 사람이 자기록에 죄인의 수레라는 이름을 붙인 겁니다.이 책은 그가 세상을 떠나고
16:2616 minutes, 26 seconds한참 뒤 제자가 펴내면서 간양녹록으로 이름이 바뀌어요. 흉로에 붙잡혀 양을 치면서도 절개를 지켰다는 옛 중국
16:3316 minutes, 33 seconds사람 소무의 이야기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강항은 돌아왔습니다.
16:3716 minutes, 37 seconds하지만 돌아오지 않고 그 땅에서 아예 일본 사람이 되어 살아간 이들도 많았어요.
16:4416 minutes, 44 seconds세 번째 길을 걸은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어요. 대부분 아주 어린 나이에 끌려갔다는 겁니다.
16:5016 minutes, 50 seconds어른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고향 말과 기억을 붙들고 있지만 아이들은 낯선 땅의 말과 풍습을 스펀지처럼
16:5716 minutes, 57 seconds빨아들이거든요. 그래서 어려서 끌려간 아이들일수록 일본 사회 깊숙히 섞여들었고 그 가운데 몇몇은 일본 사람들도 놀랄만큼 높은 자리에
17:0517 minutes, 5 seconds올랐습니다. 일곱살에 끌려간 김여철이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17:0917 minutes, 9 seconds임진년 전쟁 때 오키타 히데이에라는 일본 장소의 군대에 붙잡혔어요.
17:1417 minutes, 14 seconds오키타는 히데요 씨가 아끼던 젊은 영주였는데이 아이를 데려가 자기 아내에게 맡깁니다. 아내는 히데오시의 양였던 고이메라는 여인이었어요.
17:2317 minutes, 23 seconds아이는 그 집에서 자라다가 다시 가가 지역을 다스리던 마에다 가문의 여인 손에 맡겨집니다. 조선 아이가 일본 최고 권력자의 집안을 차례로 거치며
17:3217 minutes, 32 seconds자란 거죠.이 이 아이는 자라서 와키타라라는 무사 집안의 사위가 됩니다. 이름도 와키타 나오타로 바꿨어요. 그리고 일본 전국 시대의
17:4017 minutes, 40 seconds마지막 큰 싸움이었던 오사카 전투에 나가 공을 세웁니다. 그 덕분에 노봉이 크게 늘었고 가가의 중심도시 가나자와 시내 행정을 맞는 마치부교라는 자리에까지 올라요.
17:5117 minutes, 51 seconds우리로 치면 시장쯤 되는 자리입니다.
17:5317 minutes, 53 seconds일본 전통 연작인 낸도 뛰어났고 지금도 가나자와에 남아 있는 정원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조선에서 끌려간 아이가 일본 무사 사회 한가운데에서
18:0218 minutes, 2 seconds출세를 한 거예요. 그가 공을 세운 오사카 전투가 어떤 싸움이었는지 보면 좀 묘한 기분이 듭니다.이 싸움은 도쿠가와 이에스가 히데오시의 아들을
18:1018 minutes, 10 seconds무너뜨린 싸움이었거든요. 조선을 쳐들어와이 아이를 끌고 가게 만든 바로 그 히데오시의 집안이이 싸움으로 끝장이 납니다. 그리고 그 싸움터에
18:1918 minutes, 19 seconds도크가와 편 마이다 가문의 무사로 나선 사람이 그 전쟁에 끌려온 조선 소년이었던 거죠. 역사가 참 기묘하게 돌아간 셈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눈길를 끄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18:3018 minutes, 30 seconds평생 일본 이름으로 살던 그가 말년에 자기 원래 이름인 여철, 여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무슨 마음이었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18:3818 minutes, 38 seconds않습니다. 저는 이걸 고향을 그리워했다고 함부로 단정하고 싶지는 않아요. 다만 이른이 넘도록 일본 사람으로 산 사람이 마지막에 조선에서
18:4618 minutes, 46 seconds받은 이름을 다시 꺼내 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많은 걸 생각하게 됩니다. 홍호현이라는 소년도이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진주 성사이
18:5418 minutes, 54 seconds벌어지던 무렵 경상도 산청 근처에서 사과의 영주 나베시마군에게 붙잡혔어요. 12살이었습니다. 그는 교토의 큰 절들에서 공부를 하며
19:0319 minutes, 3 seconds글씨와 학문을 익혔고 이름난 서해가 되어 사가의 영주 나베시마 가스시계의 곁을 지켰어요. 영주가 가장 믿는
19:1019 minutes, 10 seconds측근이 된 거죠. 그리고 말년에 고향에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길을 떠났다가 영지 경계에서 다시 불려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19:1819 minutes, 18 seconds이건 기록이라기보다 전에 오는 이야기라서 그대로 믿기는 어려워요.
19:2219 minutes, 22 seconds그래도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오래 전해 왔다는 것 자체가 그의 삶이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의 마지막도 일본
19:3019 minutes, 30 seconds부사의 방식 그대로였습니다. 끌려간지 예수쯤 지난 어느 봄 죽은 나베시마 가스 시계가 세상을 떠납니다. 이른 여섯살이 된 홍오여는 사과의
19:3919 minutes, 39 seconds아미다지라는 절에서 붓을 들어 글자 하나를 크게 써요. 참을 인. 그 아래에 작은 글씨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참으면 마음에 보배가
19:4719 minutes, 47 seconds되고 참지 못하면 [음악] 몸에 재앙이 된다. 그리고 죽은의 뒤를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이 글씨가 지금 사가연의 문화재로 지정되
19:5519 minutes, 55 seconds있는 그 글씨예요. 죽은이 세상을 떠나면 가까운 가신이 뒤따라 목숨을 끊는 걸 순사라고 하는데 그무렵 일본
20:0220 minutes, 2 seconds무사 사회에서는 이걸 충성의 진표처럼 여겼어요. 홍우연은 그 길을 택했습니다. 여태 뒤 막부는이 순사를 법으로 금지하게 되는데요. 그러니
20:1120 minutes, 11 seconds그는이 오래된 풍습의 거의 끝자락에서 주군을 따라간 셈입니다. 조선 아이로 태어나 이본 무사의 방식으로 생을 마친 거죠. 여인들의 길도
20:1920 minutes, 19 seconds있었습니다. 오타 줄리아라고 불린 조선 여인이 있어요. 어린 나이에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에 붙잡혀 일본으로 [음악] 갔습니다. 고니시는
20:2720 minutes, 27 seconds천주교를 믿던 영주였는데 그 집안에서 자한 소녀도 세례를 받고 줄리아라는 이름을 얻었어요. 그녀는 훗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성에서 시중을
20:3620 minutes, 36 seconds드는 시녀로 일하게 됩니다. 조선에서 끌려온 소녀가 일본 최고 권력자의 성안에서 살게 된 거죠. 그런데 이에야스가 천주교를 금지하면서 그녀의
20:4420 minutes, 44 seconds삶이 뒤집힙니다. 신앙을 버리라는 명령을 거부한 줄리아는 도쿄 남쪽 바다의 외딴 섬들로 차례차례 유배를 가요. 마지막에 간 섬이 고주시마라는
20:5320 minutes, 53 seconds작은 섬이었습니다. 도쿄에서 배를 타고 한참을 가야 닿는 바다 한가운데 화산 섬이에요.이 섬 사람들은 그 뒤로 400년 가까이 섬 안에 있는
21:0121 minutes, 1 second돌탑파나를 줄리아의 무덤이라 여기며 모셔왔어요. 지금도 해마다 줄리아를 기리는 축제가 열립니다. 한 때는 그
21:0821 minutes, 8 seconds무덤의 흙을 한국 천주교 성지로 옮겨와 모시기도 했어요. 그런데 최근 연구를 보면 그녀는 그 섬에서 죽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유베에서 풀려나
21:1721 minutes, 17 seconds나가사키로 옮겨갔고 오사카에서 그녀를 돕고 있다는 한 신부의 편지가 그녀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에요. 섬 사람들이
21:2421 minutes, 24 seconds정삼껏 모셔온 무덤에 정작 그녀는 없었던 셈입니다. 그래도 저는 그 섬 사람들의 마음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는
21:3121 minutes, 31 seconds않아요. 낯선 섬에 홀로 끌려온 조선 여인은 400년 동안 사람들이 있었다는 거니까요. 신앙 때문에 목숨을 잃은 조선 사람도 있었습니다.
21:3921 minutes, 39 seconds권 빈첸시오라는 사람은 어려서 고니시군에게 붙잡혀 일본에 왔고 13살의 세례를 받아 천주교 전도사가
21:4721 minutes, 47 seconds됐어요. 그리고 천주교 박해가 거세지던 때 나가사키에서 불에 타 순교했습니다. 훗날 로마 교황청은 그를 복자로 올렸어요. 그와 함께
21:5521 minutes, 55 seconds복자가 된 사람들 가운데 조선 사람이 여러 명 있었다는 기록이 전합니다.
21:5921 minutes, 59 seconds이렇게 일본 땅에 남아 저마다의 삶을 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렇다면 조선 조정은 이들을 데려오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데려오려고 했습니다.
22:0822 minutes, 8 seconds그런데 그 과정을 들여다 보면 우리가 생각하던 것과는 조금 다른 장면들이 나옵니다.
22:1522 minutes, 15 seconds전쟁이 끝나고 몇 뒤 사명 대사가 바다를 건 의병을 이끌던 그 스님이 그는 교토처 후심미성에서 새로 일본의
22:2322 minutes, 23 seconds실권을 진 도쿠가와 이에아스를 만나 단판해 버렸고 끌려간 조선 사람 3천여 명을 데려왔다고 전해집니다.
22:3022 minutes, 30 seconds그 뒤로도 조선은 새 차례나 일본의 사신을 보냈어요.이 이 사신단 이름에는 데려온다는 뜻에 쇠환이라는 말이 붙었습니다. 끌려간 사람들을
22:3822 minutes, 38 seconds데려오는게 사신단의 중요한 임무였던 거죠. 조선 입장에서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어요. 나라를 짓밟은 원수의 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거니까요.
22:4722 minutes, 47 seconds그래도 끌려간 백성들을 데려오고 다시 쳐들어오지 못하게 일본의 성내를 살피려면 길을 다시 터야 했습니다.
22:5422 minutes, 54 seconds일본 쪽에서도 새로 권력을 잡은 도쿠가와 가문이 조선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포로를 돌려보내는 일이 두 나라가 다시 말을
23:0223 minutes, 2 seconds트는 조건처럼 된 겁니다. 이렇게 시작된 사신길은 나중에 조선 통신사로 이어집니다. 조선 사신들이 에독까지
23:0923 minutes, 9 seconds가는 길마다 일본 사람들이 몰려나와 글씨와 그림을 받아가던 그 통신사여.
23:1423 minutes, 14 seconds그 화려한 문화교류의 출발점에는 끌려간 백성들을 찾아나선 쓸쓸한 사신 길이 있었던 셈이에요. 첫 번째 사신단이 일본을 떠나던 날 오사카
23:2323 minutes, 23 seconds포구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사신 경섬이 남긴 해사록에 나오는 장면이에요. 귀국하는 배가 떠나려는데 일본인 남편을 속이고 몰래 빠져나와
23:3223 minutes, 32 seconds사신행렬로 뛰어든 여인도 있었고 칼을 쥐고 아내를 막아서는 일본인 남편도 있었습니다. 남자와 여자 수십명이 그렇게 폭으로 쏟아져 나왔다고 해요.
23:4123 minutes, 41 seconds그렇게 애를 써서 그에 데려온 사람이 10000여명이었습니다.
23:4523 minutes, 45 seconds경섬은 이걸 두고 아홉 마리 소의 털 가운데 하나를 뽑은 것과 같다고 한탄했어요. 끌려간 사람에 비하면 너무나 적었다는 거죠. 왜 그렇게
23:5323 minutes, 53 seconds적었을까요? 경은 두 가지를 적었습니다. 일본인 주인들이 앞다 포로를 숨겼다는 거. 그러니까 막보가
24:0024 minutes돌려보내라고 해도 각 영주와 주인들이 쉽게 내놓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포로들도 이미 그곳에 사는 것을 편하게 여기게 됐대다는 것이에요. 그
24:0924 minutes, 9 seconds뒤로 사신단이 갈 때마다 데려오는 사람은 더 줄어듭니다. 두 번째 사신단이 데려온 사람은 첫 번째 1/4도 안 됐고 세 번째는 그
24:1724 minutes, 17 seconds절반에도 못 미쳤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끌려간 사람들은 그 땅에 뿌리를 내렸고 고향은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사명대사가 데려온 사람과
24:2624 minutes, 26 seconds세차례 사신단이 데려온 사람 스스로 목숨을 걸고 탈출한 사람까지 모두 합쳐도 돌아온 사람은 6,에서 7,명
24:3324 minutes, 33 seconds남짓으로 봅니다. 한국 학계 추정대로라면 열에 하나도 돌아오지 못한 셈이고 일본 학계에 적은 추정으로 봐도네 명 가운데 한 명
24:4124 minutes, 41 seconds골밖에 안 돼요. 두 번째 사신단의 기록에는 그 사정이 더 자세하게 나옵니다. 사신 이경직이 남긴 부상록이에요. 이경직은 끌려간
24:4924 minutes, 49 seconds사람들을 만나보고 나이에 따라 반응이 다르다는 걸 알아니다. 15살이 넘어 끌려온 사람들은 돌아가자는 말에 먼저
24:5724 minutes, 57 seconds이렇게 물었어요. 지금 조선 살림은 어떻습니까? 돌아가서 먹고 살 수 있느냐를 먼저 따진 거죠. 반면 열살 전에 끌려온 사람들은 말투도 몸짓도
25:0525 minutes, 5 seconds[음악] 이미 완전히 일본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고향마을 잊어버린 거예요. 그 가운데 창원 출신 김개금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25:1325 minutes, 13 seconds12세 살에 끌려와서 조선말을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고 해요. 사신이 돌아가자고 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20여년 동안 은혜를 입은 주인을 저버릴 수 없습니다.
25:2325 minutes, 23 seconds끌려온 아이가 어른이 되는 동안 붙잡아온 사람이 은인이 되어 있었던 거죠. 20년 은혜라는 말에서 뭐라고 할 말이 없어지더라고요. 남 선비의
25:3125 minutes, 31 seconds아들 길은 13살에 끌려와 부잣집 상인의 사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도 돌아가자는 말 앞에서 쉽게 답하지 못했어요.
25:4025 minutes, 40 seconds사람들을 붙잡아 두려는 소문도 돌았습니다.이 본인 주인들은 포로들에게 이렇게 겁을 줬어요.
25:4525 minutes, 45 seconds조선에 돌아가면 죽임을 당하거나 외딴 섬으로 보내진다. 사신들이 너희를 데려가서 자기 종으로 부릴 거다.
25:5225 minutes, 52 seconds주인이 숨기니까 못 오고 못 오는 사이 일본에서 가정을 꾸리고 가정이 생기니까 이제는 안 오게 되는 거예요. 세월이 그렇게 사람을 붙잡아
26:0026 minutes두었습니다. 세 번째 사신다니 에도에 머물던 겨울에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사신 강중이 남긴 동사록에 나오는 이야기예요. 전라도
26:0826 minutes, 8 seconds한평 양반 최홍의 아내 춘이라는 여인이 두 아들을 데리고 사신을 찾아옵니다. 그녀는 고향이 돌아가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아들 순위가
26:1726 minutes, 17 seconds문제였습니다. 순는 일본에서 일본인 아내를 얻어 아이까지 있었고 갚아야 할 빛도지고 있었거든요. 어머니는 아데고 함께 가고 싶은데 아들은
26:2526 minutes, 25 seconds아내와 아이와 빚을 두고 떠날 수가 없었던 거죠. 어머니와 아들이 서로 붙들고 통곡했다고 합니다. 보다못한 사신들이 쌀을내어 빚을 갚게 해줬고
26:3426 minutes, 34 seconds순위는 나중에 뒤따라가겠다고 약속했어요. 그 약속이 지켜졌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의 사신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돌아가기를
26:4226 minutes, 42 seconds원하는 자가 전혀 없었다. 어머니가 살아 있다는 걸 알고도 형이 보낸 편지를 받고도 돌아가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리고 사신은 남은
26:5126 minutes, 51 seconds사람들을 두고 오랑캐풍속에 물들었다고 나무었습니다. 데리러 간 사람의 눈길부터가 차가웠던 거죠. 그럼 돌아온 사람들은 어떻게 됐느냐?
26:5926 minutes, 59 seconds스스로 목숨을 걸고 탈출해 온 사람들에게는 조정이 부역을 면해 주는 등 나름의 대우를 했습니다. 남원에서 붙잡혔던 노인이라는 선비는 중국배의
27:0727 minutes, 7 seconds몸을 숨겨 일본을 빠져나온 뒤 중국 푸쟁과 베이징을 거쳐 먼기를 돌아냥까지 돌아왔고 그가 남긴 일기는
27:1427 minutes, 14 seconds지금 보물로 지정돼 있어요. 그런데 사신이 한꺼번에 데려온 사람들은 사정이 달랐습니다.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어요. 사신들이
27:2327 minutes, 23 seconds데려온 사람들을 부상 근처에 내려놓고 그냥 떠나 버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고향까지 가는 길조차 막막했던 거죠. 더 아픈 일도
27:3027 minutes, 30 seconds있었습니다. 일본에서 돌아온 박수영이라는 사람은 적에게부터 나라를 배반했다는 죄로 처형됐어요.
27:3627 minutes, 36 seconds끌려갔다가 돌아온 사람이 반역자로 몰린 겁니다. 좀 씁쓸합니다. 끌려간 사람들 가운데에는 살아남으려고 일본군 밑에서 일한 사람도 있었을 거예요.
27:4527 minutes, 45 seconds그 사정을 조선은 너그럽게 봐주지 않았습니다. 유교의 저리를 중요하게 여기던 사회에서 적에게 붙잡혀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흠이
27:5327 minutes, 53 seconds됐거든요. 돌아온 사람들은 그런 눈길 속에서 차별과 멸시를 견뎌야 했습니다. 방황이 자기 기록에 죄인의 수레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가 여기
28:0128 minutes, 1 second있어요. 붙잡혔던 것도 살아서 돌아온 것도 부끄러움이 되는 사회였던 거죠.
28:0628 minutes, 6 seconds그 시대 기준으로 저리를 따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고 보실 수 있습니다.
28:1028 minutes, 10 seconds물론 맞는 말씀이기는 합니다. 나라를 지키다 목숨을 바친 사람들도 그만큼 많았으니까요. 근데 끌려간 사람 대부분이 누구였는지 한번 생각해
28:1928 minutes, 19 seconds보시면 칼 한번 잡아본 적 없는 농민과 여인과 아이들이었거든요. 그 사람들에게 저리를 묻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고 저는 봅니다.
28:2728 minutes, 27 seconds그래서 열이 남았습니다. 일본이 놓아주지 않은 사람, 스스로 남기로 한 사람, 돌아가도 설자리가 없었던 사람이 뒤섞여서요. 붙잡아 두려는 나라와 데려와도 반기지 않는 나라.
28:3828 minutes, 38 seconds그 사이에서 수많 사람들이 바다 건너편에 남게 된 겁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흔적은 지금도 일본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28:4828 minutes, 48 seconds일본 여행 가서 아리타 그릇 한 번쯤 보신 분들 계실 거예요. 그 아리타에 가면 도잔 신사라는 신사가
28:5528 minutes, 55 seconds있습니다.이 신사에는 사가의 영주 나베시마 나오시계와 함께 2, 3평이 신으로 모셔져 있어요. 신사 입구에는
29:0229 minutes, 2 seconds하얀 자기로 만든 도리이가서 있습니다. 에이지 시대에 아리타 사람들이 직접 구워 세운 거예요.
29:0829 minutes, 8 seconds보통 도리인이는 나무나 돌로 만드는데 여기는 도자기로 만든 거죠. 해마다 5월 4일이면 2, 3평을 도자기에
29:1529 minutes, 15 seconds시조로 기리는 제사가 열려요. 신사 뒤쪽 산 위에는 2, 3평을 기리는 커다란 비속도서 있습니다. 아리타 자기 300년을 맞아 마을 사람들이
29:2429 minutes, 24 seconds세운 비석이에요. 그 비석 앞에 서면 아리타 마을과 굴뚝들이 내려다 보인다고 합니다. 아리타에서는 해마다 봄에 도자기 축제가 열리는데 올해도
29:3329 minutes, 33 seconds1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2, 3평의 후손는 지금 14대째 대를 이어 그 이름을 지키고 있어요. 끌려간 도공 한 사람이
29:4129 minutes, 41 seconds일으킨 마을이 400년이 지난 지금 [음악] 일본에서 성고피는 도자기 마을이 된 겁니다. 남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던 나의 시로가와 지금의 미아마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29:5129 minutes, 51 seconds[음악] 당군을 모셨던 옥상궁은 옥산 신사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그 자리에 있어요. 나중에 모시는 신이 도자기의
29:5829 minutes, 58 seconds신으로 바뀌긴 했지만 남은 사람들이 세운 사당이 400년 동안 사라지지 않은 거죠. 심당길의 후손이 대를 이어온 심수관 감아도 지금 문을 열고
30:0730 minutes, 7 seconds손님을 맞습니다. 그 가운데 14대 심수관은 한국과 특히 인연이 깊은 사람이었어요. 그는 일본 사람으로서는
30:1430 minutes, 14 seconds처음으로 대한민국 명예 총영사가 됐습니다. 그리고 조상이 떠나온지 400년이 되던 남원에서 부시를
30:2130 minutes, 21 seconds가져가에 옮겨붙였어요. 남원의 불로 사스마의 그릇을 구운 겁니다. 그 해 미야마에서는 조선 도공들이 건너온지
30:2930 minutes, 29 seconds400년을 기리는 큰 행사가 열렸고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갔어요.
30:3430 minutes, 34 seconds일본의 이름난 소설과 시바 탈로는 그를 모델로 고향을 입기 어렵습니다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어요.
30:4030 minutes, 40 seconds그는 몇 해 전 아은이 넘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지금은 15대가 그 이름을 입고 있습니다. 같은 마을에서 전혀 다른 길을 간 후손도
30:4930 minutes, 49 seconds있었습니다. 박무덕이라는 아이가이 마을에서 태어났어요.네 네살 때 아버지가 무사신분을 사서 집안의 성을 일본식인 도고로 바꿉니다. 그 아이가
30:5830 minutes, 58 seconds자라서 도고 시계놀이라는 일본 외모 대신이 [음악] 돼요. 그것도 태평양 전쟁을 시작할 때 외모 대신이었고 전쟁을 끝낼 때도 다시 외모
31:0631 minutes, 6 seconds대신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A급 전범으로 재판을 받아 금고 20년을 선고받았고 감옥에서 병으로
31:1431 minutes, 14 seconds세상을 떠났어요.이 사람을 두고 조선의 후손이 일본의 전쟁을 이끌었다며 손가락질하는 분들도 계실 거예요. 물론 그렇게 보실 수
31:2231 minutes, 22 seconds있습니다. 전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음악] 자리에 있었던 건 분명하니까요. 근데 한번 생각해 보시면이 사람의 조상은 원해서 그
31:2931 minutes, 29 seconds마을에 간게 아니었거든요. 끌려간 사람들의 후손이 300년 가까이 일본 땅에서 살다 보니 그 나라의 한가운데에 서게 된 겁니다. 한
31:3731 minutes, 37 seconds마을에서 한 사람은 남원의 부씨를 가져가 그릇을 굽고 한 사람은 일본의 전쟁을 지휘하는 자리에 섰어요.
31:4431 minutes, 44 seconds저는이 [음악] 두 사람을 미담이나 비난 어느 한쪽으로 몰아가기보다 끌려간 사람들의 400년이 얼마나 여러 갈래로 흘러갔는지를 보여주는
31:5231 minutes, 52 seconds장면으로 보고 싶습니다. 홍호연의 그씨도 한국 땅을 밟은 적이 있어요.
31:5631 minutes, 56 seconds그가 남긴 글씨가 사가연 문화재로 지정되던네. [음악] 그 유무이 잠시 한국에 와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12살에 끌려간 아이가
32:0532 minutes, 5 seconds몸으로는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그씨로만 400년 만에 구양땅을 밟은 셈이죠. 끌려간 사람들을 기억하는 곳은 일본에 더 많습니다.
32:1332 minutes, 13 seconds고즈시마에서는 지금도 줄리아 축제가 열리고 강황이 갇혀 있던 오지에는 그를 길이는 비석이 세워져 있어요.
32:2032 minutes, 20 seconds그 비석은 오즈 씨가 직접 세운 겁니다. 조선비가이 고장에서 일본 학문의 씨앗을 뿌렸다는 걸 자랑으로
32:2732 minutes, 27 seconds여긴 거죠. 아리타와 미아마의 신사와 가마도 마찬가지고요. 일본 사람들이 자기 마을의 뿌리로 이들을 기억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이들이 떠나온
32:3632 minutes, 36 seconds곳은 어떨까요? 남원, 영광, 산청, 진주, 창원, 한평이 사람들의 고향 이름입니다. 물론 우리 쪽에도 흔적은
32:4432 minutes, 44 seconds있어요. 강항의 고향 영광에는 [음악] 그를 모신 서원이 있고 남원에는 남원 성 싸움에서 죽은 사람들을 함께 묻은 무덤이 있습니다.
32:5232 minutes, 52 seconds다만 그 기억은 주로 나라를 위해 싸운 사람, 절개를 지킨 사람을 향해 있어요. 끌려가서 돌아오지 못한 농민과 아이들. 그 땅에서 일본
33:0133 minutes, 1 second사람으로 살다 간 사람들을 기억하는 흔적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생각해 보면 마음이 조금 복잡해집니다. 저는
33:0833 minutes, 8 seconds개인적으로는 누구 타시냐를 따지는 것보다 누가이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느냐가 더 아프다고 생각을 합니다.
33:1533 minutes, 15 seconds끌려간 쪽의 고향밥보다 끌고 간 쪽의 마을이 이들의 이름을 더 오래 불러왔다는 게요. 다행히 최근 들어서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어요. 몇
33:2333 minutes, 23 seconds해 전 한 방송사가 홍연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다뤘고 그 영상은 요즘 다시 올라와서도 많은 사람이 찾아보고
33:3033 minutes, 30 seconds있습니다. 남원에서는 심수강 가문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고요. 400년 전 바다를 건너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33:3733 minutes, 37 seconds이제야 조금씩 이쪽으로 건너오고 있는 셈입니다. 끌려간 사람들은 그렇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그릇과 글과 이름 속에 섞여 남았을 뿐이죠.
33:4733 minutes, 47 seconds그럼 지금까지 세상 놀란 토끼 세월토 바피디였습니다. 구독,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제국의 후예들 - 대한제국 후예들의 삶으로 읽는 한반도 백년사| 정범준 2006

제국의 후예들 | 정범준 | 알라딘


제국의 후예들 - 대한제국 후예들의 삶으로 읽는 한반도 백년사
정범준 (지은이)황소자리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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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근대와 일제강점기를 지나오며 조선의 왕조는 무너졌고 그 후손들은 지금까지도 불우한 삶을 이어오고 있다. 만화와 드라마에서 상상된 황실은 화려한 외양을 자랑하고 로맨스가 난무하는 공간으로 그려지지만, 실제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일본을 떠돌다 2005년 시신이 되어서야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 영친왕의 아들 이구가 그 대표적인 경우.

이 책은 기존 언론의 선정적인 태도와 대중의 동정 섞인 시각을 배제하고 지난 100년간 펼쳐진 이들 황손들의 역사를 실증적으로 복원하고자 한다.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과 그의 일본인 왕비 이방자(본명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의친왕 이강과 덕혜옹주, 이구와 그의 전 부인 줄리아 뮬록과 민갑완 등의 일생을 각 장마다 담아냈다.

마치 영화 같은 느낌마저 전해주는 이들의 비극적이고 애절한 역사가 먼저 눈에 띈다. 고종의 고명딸인 덕혜옹주는 망국의 공주라는 심리적 압박으로 인해 정신분열증에 시달렸고, 일본인 황후 이방자는 한·일 간의 불협화음을 감내해야 했다. 한편 MIT를 나온 청년 건축가로 성장한 이구는 푸른 눈의 여성 줄리아와 사랑에 빠지지만 황실을 복원해야 한다는 주변의 압박에 그녀를 매몰차게 버리기도 한다.

그동안 황손들에 대해 잘못 알려졌던 사실들을 르포라이터 경력을 지닌 지은이의 치밀한 자료 조사로 바로잡은 것도 주목할 부분. 이방자의 석녀(石女)설, 덕혜옹주가 남편에게 구타당해 유산을 했다는 설 등의 오류를 공개한다. 또한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이강에 대한 또다른 평가, 해방 후 주저없이 일본인으로 귀화한 황족의 이야기 등에서 "민족의식의 구심점", "거지가 된 왕자" 등 기존 황실에 대한 비뚤어진 인식을 지적한다.


목차


프롤로그

1장 고난의 황태자 - 영친왕 이은
일본 황태자의 방한 / 타국의 밤 / 황태자의 탄생 / 단 한 번의 만남 / 황태자의 유년 / 낙선재의 조약돌 / 엄 황귀비의 흥거 / 가례를 올리다 / 민갑완, 잔인한 날들의 시작 / 이어지는 불행 / 상하이로 망명을 떠나다 / 싹트는 민족의식 / 유럽 여행 / 그대에게 구하는 바 없노라 / 차라리 죽기로 마음먹다 / 제왕의 풍모 / 전쟁의 소용돌이 / 사라져라 번뇌어 / 해방 혹은 종전 / 신정부에 충성을 다하겠다 / 영친왕저 문제 / '일본인'이 되다 / 약해지는 황태자 / 다시 쓰러지다 / 세 번의 통곡와 영면

2장 두 조국의 사이에서 - 이방자
유년의 기억 / 엄격한 황실 교육 / 약혼 발표 / '기막힌 법' 황실전범 / 추모시와 연가 / 신혼의 황복 / '석녀' 이방자 / 첫 방한 / 첫 아들 진을 하늘로 보내고... / 새로운 신앙 / 국상을 치르다 / 이구의 탄생 / 휩쓸려가는 사람들 / 해방과 6.25 / 남편의 분노를 보다 / 막다른 곳 / 일본이여 안녕, 일본이여 안녕 / 문화재보호법 / 쪽발이 물러가라 / 고독한 이를 위해 기도해 달라 / 장애인 복지사업 / 명휘와 가혜 / 애끓는 모정 / 여로의 끝

3장 황태자 아들과 탄광부의 딸 - 이구와 줄리아
폭풍우 속의 출발 / 미국 생활 / 줄리아라는 여성을 만나다 / 처음 밟은 한국 땅 / 다툼과 균열 / 분노와 배신감에 휩싸여 한국을 떠나다 / 아리타 기누코 / 사기 사건에 휘말리다 / 영구 귀국 / 줄리아의 마지막 편지 / 아카사카에 지다

4장 덕수궁의 금지옥엽 - 덕혜옹주
황제의 여인과 자녀들 / 덕수궁의 꽃이 태어나다 / 황제의 밀약 / 아버지 고종 황제의 붕어 / 끌려가는 옹주 / 순종 황제의 붕어 / 고아가 된 덕혜옹주 / 병이 시작되다 / '고아들'의 결혼 / 아기씨에 대한 추억 / 병의 재발 / 그들은 정말 사랑했을까 / 언니의 기억 / 김을한의 충격적인 증언 / 이혼이 성립되다 / 정혜의 죽음 / 성대한 환대 / 덕수궁의 꽃이 지다

5장 극과 극의 평가를 받은 왕자 - 의친왕 이강
불우한 탄생 / 보빙대사 활동 후 귀국 / 유럽 순유는 없었다? / 역모에 연루되다 / 이토 히로부미의 계략 / 신변의 위협 / 엇갈리는 평가 / 배일과 울분의 나날 / 3.1운동과 그의 역할 / 가장 빛나는 불꽃 / 정운복의 역할 / 유고에 담긴 뜻 / 다시 어둠 속으로 / 경비관계철 / 그의 최후 / 의친왕비의 부덕

6장 일본인이 된 황족 - 이건
출생의 비밀 / 일본식 교육 / "나는 천황을 존경하기로 결정지었다" / 재빠른 적응 / 이혼과 소송

7장 원폭에 희생된 미남 황손 이우
운현궁의 새주인 / 일본 유학 / '민족과 해협' / 박영효의 기지와 열성으로 결실을 맺은 결혼 / "나는 일본 것이라면 병적으로 싫습니다" / 안타까운 죽음

8장 남아 있는 황실의 후예뜰
황실 재산 몰수 / 의친왕의 12남 9녀 / 살아 있는 황손들

에필로그
참고문헌
주석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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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1963년 11월 22일 이은 일가는 영구 귀국했다. 이구는 줄리아에게 '이제 한국은 왕도 왕자도 없는 사회이고 건설과 발전의 의욕이 높은 나라이므로 (...) 한국의 발전에 기여하며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가자'고 약속했다. 물론 줄리아는 동의했다. 이구 부부는 한남동 외국인 아파트와 낙선재를 오가며 한국 생활을 시작했다.

이구는 '평범한 시민'으로 살고 싶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첫 방한 때도 기자들에게 '한 사람의 '서민'으로 이땅에서 일했으면......' 하는 소망을 피력했었다. 하지만 그런 소박한 소망마저 자신의 뜻대로 이룰 수 없었다. 황실의 친인척과 종친들에게 이구는 '평범한 시민'이 아니었다.

(...) 더욱 참기 힘들었던 것은 종친회의 이혼 강요였다. 종친들은 이구에게 황손으로서의 의무를 요구하며 줄리아에게 이혼을 강요했다. 영친왕이 일본 여자와 결혼하여 피를 흘렸는데 이구마저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종친들의 강요는 이구가 귀국한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 '이유도 모른 채 1964년 4월에 난 미국으로 보내졌습니다. 아무 설명도 없이 미국에 가 있으면 나중에 부르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난 6개월 동안 미국에 있는 아파트에서 혼자 지냈어요. 한국에 돌아오라는 연락이 오거나 남편이 미국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리면서요. 당신(이구)에게 새로운 여자를 들이기 위해 나를 미국으로 보냈다는 걸 알게 된 건 한참 후의 일이었습니다.' - 본문 267~269쪽에서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정범준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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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인 1977년, 부산으로 이주했다. 부산에서 초?중?고를 다 졸업했다. 추첨으로 1986년 금성(錦城)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결과적으로 내 인생에 제일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 됐다. 그곳에서 나는 평생의 지기(知己)를 만났다. 금성고 졸업(1989년)은 롯데 자이언츠 창단 어린이회원 활동(1982년)과 함께 내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경력이다.
서울대 국문학과를 졸업(1997년 8월)했고,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에서 잠시 공부했다(2000년 1학기). 2000년 5월 〈넷벤처〉라는 잡지사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는데 7개월 만에 잡지가 폐간되어 실업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 후 일자리를 구할 때마다 함께 일하게 된 동료와 상사들이 한결같이 좋았다.
지금까지 《제국의 후예들》, 《이야기 관훈클럽》, 《거인의 추억》, 《작가의 탄생》, 《마흔, 마운드에 서다》, 《흑백 ‘테레비’를 추억하다》, 《돌아오라 부산으로》, 일곱 권의 책을 냈다. 이 책은 정범준이란 필명을 건 여덟 번째 책이다. 이 필명에는 나를 포함한 네 사내의 인연과 우정이 깃들어 있다. 접기

최근작 : <이광환 야구 이야기>,<흑백 테레비를 추억하다>,<마흔, 마운드에 서다> … 총 7종 (모두보기)
정범준(지은이)의 말
그동안 언론이나 방송은 그들의 불우한 삶에만 초점을 맞춰왔다. 황손 아무개가 양로원에서 쓸쓸히 죽었다거나, 무허가 단칸방에 머물고 있다는 식이었다. 나에겐 영친왕, 의친왕, 덕혜옹주, 이방자 등 주요인물의 생에에 대한 올바른 고증과 복원이 훨씬 시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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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는 언제 끝이 났는가? 어정쩡한 연결고리에 대하여



순종은 조선의 마지막 '왕'인가? 아니면 대한제국의 두번째이자 마지막 '황제'인가? 재위시 '융희'라는 연호를 사용했던 순종은 대한제국의 두번째이자 마지막 황제임에는 틀림 없지만, 조선의 마지막 '왕'이라는 표현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우리가 흔히 '국치일'로 기억하는 1910년 8월 27일의 한일합방을 통해 일제는 대한제국의 국호를 조선으로, 황제를 '왕'으로 격하시켰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으니 한국이라는 나라는 없어져버린 것이 아니라, 일제는 조선의 '왕'을 비록 꼭두각시이기는 하지만 그대로 둠으로써 그들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조선백성들의 저항을 조금이나마 무마시키려 한 것이다. 물론 그들의 임금을 '천황'이라하고 '천자'와 제후인 '왕'의 봉건관계가 더 익숙한 일본의 입장에서는 식민지 조선을 그대로 일본과는 분리된 제후국 정도의 '국가'로 인식하는데는 모순이 없었나 보다.

아무튼 순종이 붕어한 1926년 이후 황태자에서 세자로 격하되었던 '영친왕' 이은이 조선의 28대 국왕으로서 왕위를 이었고, 1945년 일본이 미국에 패하고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천황'만 남겨두고 모든 왕공족 제도가 폐지되면서 '평민'으로 격하될때까지 이은은 명목상 조선의 왕으로 남겨져 있었던 것이다. 비록 식민지였지만 일국의 왕이 볼모로서 식민지 종주국의 일개 장교로(나중에는 중장까지 진급했다지만) 복무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국민에게는 참을 수 없는 수치이지만, 왕위를 강제로 빼앗긴 것도 공식적으로 퇴위하지도 않은채, 정적인 이승만에 의해 귀국을 방해당하고 조선왕조의 법적/제도적인 청산도 없이 대한민국이 건국된 것은 뭔가 허술해 보인다.

건국한지 60년이나 된 '대한민국'이 아직도 일제 잔재와 친일파 정리의 해묵은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음은, 부패/무능한 임금의 목을 쳐본 민주주의 쟁취의 경험도 조선왕조의 완전한 단절이나 계승도 없이, 친일부역자에 대한 청산도 독립투사에 대한 평가도 거치지 않고 미군정에 의해 갑자기 탄생한 '공화정' 자체가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몇달전 한겨례21에서 우연히 만난 '대한제국 마지막 황손 이우, 야스쿠니에 있다'라는 기사를 읽은 후 관심을 가지게 된 '대한제국' 후손들의 삶과 행적을 살펴보다 우연히 '정범준'이라는 필명을 쓰는 같은 세대 작가의 책을 접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방대한 자료를 근거로 최대한 객관적으로 과대평가나 폄훼없이 여러 인물들의 행적에 대해 소상히 쓴 노력이 돋보였고, 또한 능력이나 의지와 무관하게 도도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거친 파도를 헤쳐가다 좌절한 황실 식구들에 대한 연민이 가슴에 절절하게 와닿았다.

개인적으로 가장 매력적인 '왕자'로 호감을 가지고 있던 '의친왕' 이강공과 운현궁으로 입적된 그의 차남 이우공의 행적에서, 의친왕이 상해 탈출에 성공했다면, 또는 이우공이 히로시마로 떠나지 않고 살아서 해방을 맞았다면 오늘의 우리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부질없는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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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 지영이 아빠 2007-08-28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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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근대화가 그려낸 단면



정범준 씨가 쓴 <제국의 후예들>은 고종의 직계 후손들(영친왕 이은, 의친왕 이강, 덕혜옹주, 이건, 이구 등)이 대한제국이 몰락해 버린 이후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에 대해서 인물별로 통시대적으로 조망하고 있다.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리면서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조선 왕조의 마지막 왕족들이 실상은 어떠한 삶을 살아갔는가에 대해서 저자는 다른 나라의 왕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면서도 정작 우리나라에 있었던 왕실이나 왕족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지도 못한 채 잠깐의 화제거리로만 등장하고 마는 현실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삼아 그가 나름대로 조사한 내용과 인터뷰 내용 등을 기반으로 그네들의 삶에 대해서 접근해 가고 있는 것이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후예들이 과연 왕조가 몰락한 이후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에 대해서 인물사적으로 접근해서 참고해서 보기에는 나름대로 괜찮은 내용들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의 이행 그리고 그 이후에 근대화가 착실하게 진행되어 실패하지 않고, 고종의 구상대로 입헌군주제의 틀이 뿌리를 내렸다면 왕족으로서 그네들이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방식은 분명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기에 그네들은 오히려 일반인들보다 더 무거운 짐을 얹고 일생을 살아야 했음을 저자는 조사한 바를 토대로 조용히 보여주고 있다. 몰락한 왕조의 왕족들의 일생은 분명 우리네 근대의 슬픈 자화상 중 하나를 보여주는 것이기에 읽는 내내 씁쓰름한 감을 지울 수 없었던 것 같다. 덧붙여 왕실이나 왕족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된 데에는 한국의 근대 역사에 있어서 입헌군주정의 논의가 영향력을 상실하고 아예 자취를 감추게 것과 동시에 민주주의나 공화정 혹은 사회주의 등으로 정체(政體)에 대한 관심을 돌리게 된 것과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는 한 국가의 몰락에 대해서 어찌 되었든 간에 책임을 질 수 밖에 없는 군주 및 그의 측근들에 대한 실망과 환멸이 반영된 것으로도, 왕족들이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 한 명의 시민 혹은 국민으로 인식하게 되는 가운데 근대 사회의 사회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타인에 대한 무관심으로 바뀌어 버린 것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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沈香 2006-09-30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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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님, 요청하신 정범준 작가의 <제국의 후예들> 요약과 평론입니다.

[요약] 제국의 후예들: 몰락한 왕조의 혈족과 격동의 백년사

<제국의 후예들>(정범준 저, 2006)은 1897년 대한제국 선포부터 몰락, 식민지기, 해방, 분단,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구 황실 일가의 개인적 삶의 궤적을 추적하여 한반도 근현대사 100년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한 역사 르포르타주다. 저자는 황실의 거시적 정치사나 제도사 대신 고종과 순종, 의친왕 이강, 영친왕 이은, 덕혜옹주, 이우, 이구 등 왕족 개개인의 선택과 비극적 운명에 초점을 맞춘다.

대한제국은 일제에 의해 국권을 강탈당하면서 왕공족(王公族)이라는 기형적 신분 체제로 편입되었다. 이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체제 안정과 내선일체 홍보를 위한 도구로 활용되었다. 영친왕 이은은 불과 열한 살의 나이에 인질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도일하여 일본 황족 마사코(이방자)와 정략결혼을 맺었고, 철저히 일본 군인으로 육성되었다. 고종의 막내딸 덕혜옹주 역시 어린 나이에 대마도 번주 가문의 소 다케유키와 정략결혼을 치렀으며, 망국의 울화와 정신질환, 이혼과 딸의 실종이라는 극단적 비극을 겪었다.

반면 황실 내부의 대응은 일률적이지 않았다. 의친왕 이강은 상해 임시정부 탈출을 기도하는 등 끊임없이 항일과 독자적 노선을 모색했고, 그의 아들 이우는 일본 육군 장교가 되어서도 한국인 정체성을 고수하려 분투하다 히로시마 원폭으로 생을 마감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도 후예들의 비극은 종결되지 않았다. 공화정을 선포한 이승만 정권은 황실의 복권 가능성을 경계하며 이들의 귀국을 가로막고 황실 재산을 국유화했다. 제국의 후예들은 조국과 일본 양쪽 모두에서 버림받은 무국적 상태의 디아스포라로 전락했다. 1963년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서야 영친왕 부부와 덕혜옹주는 귀국할 수 있었으나, 이미 병마와 노환으로 심신이 황폐화된 상태였다. 마지막 황세손 이구는 미국과 일본을 떠돌며 건축가이자 사업가로서의 정체성과 '황세손'이라는 굴레 사이에서 방황하다 2005년 도쿄의 한 호텔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책은 이들의 엇갈린 궤적을 꼼꼼한 사료와 구술을 통해 담아내며, 국가와 개인의 정체성이 충돌하는 비극의 현장을 세밀하게 드러낸다.

[평론] 비운의 왕조를 넘어선 보편적 경계인의 초상

정범준의 <제국의 후예들>은 한국 근현대사 서술에서 오랫동안 양극단으로 소비되던 황실 담론—식민지 근대화론의 무능한 공범이거나, 감상주의적 민족주의의 순교자—을 벗어나 개인의 실존적 조건에 밀착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성취를 지닌다.

책의 가장 뛰어난 미덕은 황실 인물들을 탈신화화하는 동시에 탈악마화했다는 점이다. 저자는 황실이 지녔던 무능과 구체제의 한계를 숨기지 않으면서도, 거대한 제국주의 폭력과 근대 국민국가 수립이라는 이중의 격랑 속에서 개인이 겪어내야 했던 고통을 정밀하게 기록한다. 영친왕과 이구의 삶은 특정 국가의 충성스러운 신민이 되기를 강요받았으나 끝내 온전한 국민으로 정착하지 못한 전형적인 '경계인'의 비극을 드러낸다.

세계사적 시각에서 볼 때, 이들의 삶은 20세기 합스부르크, 로마노프, 오스만 등 몰락한 유라시아 제국 황족들의 유랑사와 정확히 궤를 같이한다. 국가라는 울타리가 해체되었을 때 국적과 정체성을 강제로 박탈당한 이들은 제국주의 권력의 선전 도구로 소비되다가, 냉전과 민족주의 공화정의 대두 속에서는 기피와 배제의 대상이 되었다. 이승만 정권이 취했던 배타적 봉쇄와 대중의 냉담은 '단일민족'과 '국민국가'라는 단일한 틀에 포섭되지 않는 경계인을 어떻게 지워버리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아쉬운 지점은 풍부한 일화와 기록에 비해 제국주의와 탈식민주의, 그리고 초국가적 정체성에 대한 구조적이고 비판적인 분석이 다소 약하다는 점이다. 사료의 나열이 종종 개인의 기구한 운명론으로 귀결되는 경향이 있어, 역사적 사건들이 빚어낸 구조적 폭력성보다는 개인의 한탄과 비장미가 두드러지는 순간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국가주의적 애국심이나 맹목적 민족의식의 렌즈를 걷어내고 읽을 때 훨씬 깊은 울림을 준다. 특정 국가나 민족이라는 협소한 범주를 넘어, 20세기 야만의 시대에 국가와 체제의 폭력 아래 부유해야 했던 한 인간 집단의 실존적 비극을 다룬 '보편적 인간의 기록'으로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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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범준 《제국의 후예들》(2006) — 1,000단어 요약과 평론

부제: 대한제국 후예들의 삶으로 읽는 한반도 백년사 황소자리, 2006년, 559쪽

브런치

정범준의 《제국의 후예들》은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 이후 황족들이 어떻게 살아갔는지를 추적한 역사 르포이자 집단전기이다.

이 책의 핵심은 황실의 복권이나 왕정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제국이 사라진 뒤에도 계속된 황족들의 삶을 통해 식민지배, 해방, 분단, 공화국 수립의 역사를 다시 읽는 데 있다.

저자는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의친왕 이강, 덕혜옹주, 이구와 줄리아 뮬록, 이건과 이우 등 황실 구성원들의 생애를 재구성한다. 당대 신문과 문헌, 회고록, 후손 인터뷰 등을 활용하면서 기존의 감상적이고 부정확한 황실 이야기를 교정하려는 태도를 취한다.

국사편찬위원회
+1

1. 핵심 문제의식 — 제국이 무너진 뒤 황족은 어떻게 되는가

대한제국은 1897년 성립해 1910년 일본에 병합되었다. 그러나 황실 구성원들은 제국과 함께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식민지배 아래에서 일본 황실에 종속된 특수 신분으로 살아야 했고, 1945년 이후에는 공화국 체제 속에서 왕조의 유물처럼 취급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황족들이 두 체제 모두에서 정치적으로 불편한 존재였다는 사실이다.

일제에 그들은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홍보할 수 있는 상징이었고, 해방 이후 한국 정부에는 국민통합을 방해할 가능성이 있는 구왕조의 잔재였다.

저자는 이러한 정치적 조건 때문에 황족들이 특권을 누리는 동시에 자유를 잃었으며, 결국 신분과 재산, 정체성마저 흔들리게 되었다고 서술한다.

2. 영친왕 이은 — 일본 제국에 편입된 조선의 황태자

영친왕 이은(1897~1970)은 이 책의 중심인물이다.

1907년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일본 황실과 군부의 교육을 받았고, 일본 육군 장교가 되었다. 1920년 일본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곧 이방자와 결혼했다.

그의 인생은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황태자가 일본 제국의 제도 속에 편입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은은 일본 황실과 가까운 생활을 했고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만으로 그를 자발적인 친일 인물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정치적 자유가 극히 제한된 인물이었다.

동시에 그를 독립운동가로 미화할 근거도 충분하지 않다.

저자가 보여주는 이은은 영웅도 반역자도 아닌, 일본 제국에 종속된 황태자라는 모순된 신분을 끝까지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하자 그는 제국의 보호를 잃었다. 그러나 독립한 조국도 그를 흔쾌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 시절 귀국이 실현되지 않았고, 박정희 정부 때인 1963년에야 병든 몸으로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의 생애는 한 개인이 두 국가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얼마나 오랫동안 자신의 삶을 통제당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3. 이방자 — 식민지 정략결혼에서 사회복지 활동으로

이방자(1901~1989)는 일본 황족으로 태어나 조선의 황태자비가 된 인물이다.

그녀의 결혼은 일본의 조선 병합 이후 양국 황실을 결합하여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정치적 목적과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범준은 이방자를 단순한 제국주의의 대리인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녀는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식 교육을 받았지만, 남편과 함께 조선 황실의 몰락을 경험했다. 패전 이후에는 일본 황족으로서의 지위도 상실했다.

특히 저자는 일본이 대한제국 황실의 후손을 끊기 위해 출산할 수 없는 여성을 일부러 영친왕과 결혼시켰다는 이른바 '석녀설'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실제로 이방자는 두 아들을 출산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이방자는 장애인 교육과 복지에 헌신했다. 그의 활동은 과거의 황족이라는 신분을 넘어 사회적 책임을 실천한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헌신이 결혼의 식민지 정치적 성격을 소멸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삶에는 제국주의 정책의 수혜자이자 피해자라는 두 측면이 공존한다.

4. 이구와 줄리아 — 왕조의 혈통과 개인의 사랑

이은과 이방자의 아들 이구(1931~2005)는 미국에서 교육받고 건축 분야에서 활동했다.

그는 미국인 줄리아 뮬록과 결혼했지만, 한국 황실의 후손이라는 지위 때문에 결혼생활에 심한 압박을 받았다.

황실의 혈통을 이어야 한다는 기대는 개인의 결혼과 행복보다 우선시되었다. 부부는 결국 이혼했고, 이구의 삶도 불행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가 2005년 도쿄에서 사망한 것은 대한제국 직계 황실의 역사에서 하나의 상징적인 종결점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이야기의 중요한 주제는 왕조가 몰락한 뒤에도 혈통과 가문의 관념이 개인을 계속 지배했다는 사실이다.

왕정은 사라졌지만, 왕조적 사고방식은 가족 내부에서 여전히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5. 덕혜옹주 — 식민지배와 여성의 비극

덕혜옹주(1912~1989)는 고종의 딸로,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녀는 일본 귀족 소 다케유키와 결혼했으나 정신질환을 겪었고, 오랜 세월 일본에서 생활했다. 1962년 귀국한 뒤에는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냈다.

덕혜옹주의 삶은 흔히 일본 제국주의가 파괴한 한 여성의 운명으로 소개된다.

그러나 정범준은 그녀에 관한 여러 소문과 과장된 이야기를 검토한다. 남편의 폭력, 결혼생활, 질병의 원인 등에 관해 대중적으로 알려진 이야기들 가운데 충분히 입증되지 않은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역사서술에서 매우 중요하다.

덕혜옹주가 정치적 환경 때문에 고통받았다는 사실과, 그녀의 모든 불행이 특정한 일본인의 악행에서 직접 발생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비극은 식민지배의 폭력뿐 아니라 황실의 가부장제, 여성의 제한된 선택권,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대응이 결합된 문제로 읽어야 한다.

6. 의친왕 이강 — 저항하는 황족인가, 무력한 귀족인가

의친왕 이강(1877~1955)은 영친왕과 달리 일본의 지배에 반감을 보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특히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탈출하려던 사건은 그의 생애에서 중요한 장면이다. 그러나 탈출은 실패했고 그는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일부에서는 그를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애국적 황족으로 평가하지만, 다른 연구자들은 그의 정치적 활동과 실제 영향력을 제한적으로 해석한다.

정범준은 이러한 상반된 평가를 비교하면서 의친왕을 일방적으로 미화하지 않으려 한다.

그의 생애는 식민지배에 대한 개인적 반감이 반드시 조직적인 민족해방운동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황족이라는 신분이 독립운동에서 정치적 상징성을 갖는 동시에 실제 행동을 제약할 수도 있었음을 드러낸다.

7. 이건과 이우 — 일본화와 조선인 정체성 사이

의친왕의 아들 이건(1909~1990)과 이우(1912~1945)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살아갔다.

이건은 일본식 교육과 생활방식에 적응했고, 패전 후에는 일본에 정착해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반면 이우는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일본에 대한 반감을 상대적으로 강하게 유지한 인물로 소개된다. 그러나 그 역시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고, 1945년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로 인한 피해를 입어 사망했다.

두 사람의 비교는 식민지배 아래 황족들에게 주어진 선택의 복잡성을 보여준다.

일본에 적응하는 것은 생존의 한 방법이었지만, 그것은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충돌했다. 반대로 일본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더라도 제국의 군사제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8. 평론 — 이 책의 역사학적 의의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황실사를 민족주의적인 영웅담이나 비극담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노력이다.

첫째, 저자는 황족들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식민통치의 복합성을 보여준다. 일본의 지배는 단순히 폭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결혼, 교육, 군복무, 신분제도 등의 방식으로 황실 구성원들을 제국 체제에 편입시켰다.

둘째, 해방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의미를 갖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황실의 후예들에게 1945년은 일본 지배로부터의 해방인 동시에 법적 지위와 경제적 기반의 붕괴였다.

셋째, 잘못된 역사적 소문을 검토한다. 이방자의 출산 능력에 관한 이야기나 덕혜옹주의 결혼생활을 둘러싼 속설에 대한 비판은 역사적 사실과 민족적 감정을 구별하려는 시도이다.

이 책은 상당한 분량의 주석과 다양한 자료 조사, 후손들에 대한 인터뷰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있다.

황소자리 - 예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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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비판적으로 검토할 부분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황실의 비극을 강조하는 서술이 자칫 대한제국의 정치적 책임을 희석할 위험이다.

고종과 대한제국의 지배층은 단순히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자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국가권력을 행사한 통치집단이었으며, 대한제국 내부의 정치적 갈등과 제도적 한계에 대해서도 책임을 갖는다.

또한 황실 구성원들은 식민지시대의 일반 조선인들과 달리 상당한 물질적 특권을 누렸다. 이들의 고통이 실제였다고 해서 그러한 신분적 불평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구별해야 할 것은 통치자로서의 책임과 통치자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개인에게 가해진 고통이다. 두 문제를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9. 일본 황실과의 비교 — 왜 한쪽은 살아남고 다른 쪽은 사라졌는가

이 책에서 더 발전시킬 수 있는 흥미로운 문제는 일본 황실과 대한제국 황실의 운명을 비교하는 것이다.

1945년 일본은 패전했지만 천황제는 폐지되지 않았다. 쇼와 천황은 정치적 권력을 상실했으나 국가의 상징으로 남았다.

반면 대한제국 황실은 일본의 패전과 한국의 독립에도 불구하고 복구되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천황제가 새로운 헌법질서 안으로 편입되었지만, 한국에서는 공화주의와 왕조의 단절이 새로운 국가의 정통성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었다.

특히 이승만 정부는 대한제국 황실을 새로운 국가의 상징으로 활용하려 하지 않았다. 구왕조의 후예들은 정치적으로 불필요하거나 잠재적으로 불편한 존재였다.

다만 한국에서 왕정복고가 일어나지 않은 이유를 이승만 개인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화주의 전통, 독립운동의 변화, 해방 후 정치세력의 구성, 왕정복고를 지지하는 실질적 사회세력의 부재 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비교는 왕조의 존속 여부가 왕실 구성원의 개인적 덕성보다 국가의 정치적 정통성과 제도적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0. 종합 평가 — 황실의 몰락은 누구의 비극인가

《제국의 후예들》은 황실의 영광을 되살리려는 책이라기보다 역사의 거대한 변화 속에서 개인이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읽을 수 있다.

그렇지만 역사적 평가에서는 세 가지를 구분해야 한다.

대한제국의 멸망은 한 국가가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주권을 상실한 사건이다. 황실의 몰락은 오랫동안 특권을 누렸던 지배집단이 정치적·사회적 지위를 상실한 사건이다. 그리고 황실 구성원들의 개인적 불행은 국가와 왕조의 운명에 얽매인 인간들이 겪은 고통이다.

이 세 사건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동일하지 않다.

왕조가 사라진 것을 반드시 민족 전체의 비극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왕조가 사라졌다는 이유로 그 구성원들의 인간적 고통을 무시하는 것도 정당하지 않다.

정범준의 성과는 바로 이 마지막 문제를 역사서술의 중심으로 가져온 데 있다.

한 가지 더 중요한 점은 황실 후손들의 이야기가 한국과 일본을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로 양분하는 시각의 한계를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일본 황족이었던 이방자는 한국에서 장애인 복지를 위해 헌신했고, 조선 황족이었던 이건은 일본인으로 살기를 선택했다. 조선인의 정체성을 유지했던 이우는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다.

이러한 모순은 제국주의가 단지 영토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체성과 가족관계까지 재편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결론적으로 《제국의 후예들》의 가치는 대한제국 황실의 정치적 복권이 아니라, 식민지배와 국민국가 형성 과정에서 인간이 겪은 모순된 경험을 구체적인 생애를 통해 보여준다는 데 있다.

역사학적으로는 대한제국 황실의 책임 문제와 황족들의 개인적 삶을 분리하여 평가하면서 읽을 때 가장 생산적인 책이다.

자료 범위: 이 평론은 책의 공개 목차, 출판사 소개, 2006년 당시 서평과 역사적 배경에 근거한 재구성이다. 559쪽 본문 전체를 직접 대조한 정밀 독해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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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 "낙태죄" 단상 2016

Park Yuha - "낙태죄" 단상 일본근현대 소설중 적지 않은 소설들이, 알고보니 "여자친구가 임신을 하게 되어... | Facebook


Park Yu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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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단상

일본근현대 소설중 적지 않은 소설들이, 알고보니 "여자친구가 임신을 하게 되어 당황해 허둥지둥하는 남자 이야기", 라고 단언한 여성평론가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평론집 제목을 "임신소설"이라고 붙였다.
거기서 주목한 건 개인의 사생활에 국가가 관여하는 사태. 낙태를 "불법"(불법이란, 나라가 정한 규범을 따르지 않는다는 뜻이다)으로 정한 일본의 "법"이 어떤 식으로 한 시대의 남녀를 당황하게 만들고, 울고 웃게 만들고, 때로 서로 미워하게 만드는지에 관한 고찰이었다.
그녀의 리스트엔 무라카미 하루키도 올라 있었다.
나는 그녀의 개념을 빌려 일본에서 문호대접을 받는 모리오가이의 <무희>도 "임신소설"이라고 지적한 적이 있다. <무희>는, 일본남성이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서양여성을 버린 최초의 소설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낙태"라는 사태는 여성만의 일이 아니다. 반세기 전 영화 "젊은이의 양지"에선 임신한 애인을 죽이는 남성까지 등장한다.
이 경우엔 부잣집 여성과 결혼하기 위한 욕망이 시킨 일인데, 그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보통 정도의 감성을 가진 남성이라면, 여자친구 임신은 당연히 남의 일이 아니다. 물론 결혼한 남성에게도.
그래서 나는, 여성들의 "자기결정권"도 중요하지만, 남성들도 나서서 새로운 악법이 생기는 걸 반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장 사적인 공간에서의 개인의 일에 관한 선택은 개인에게 맡겨라!"고.
아참, 이 법은 일본이 메이지유신과 함께 "부국강병
"을 위해 만들고 1907년에 형사처벌 대상으로 한 "낙태죄"를 이어받은, 이른바 "일제잔재"다. 물론 이 법을 만든 건 남성들이다
.








Park Yu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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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docs.google.com/.../1FAIpQLSc3Rx2PDHY.../viewform...


DOCS.GOOGLE.COM
보건복지부 의료법 개정 입법예고안 철회! 형법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기자회견 공동성명
보건복지부 의료법 개정 입법예고안 철회! 형법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기자회견 공동성명



유동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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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hor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Kyu Hyun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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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hor

斉藤美奈子평론가 말씀이시군요. 기억에 새롭습니다.



이석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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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hor

서명 완료^^
Joan Baez - We Shall Overcome (BBC Television Theatre, London - June 5, ...
https://youtu.be/nM39QUiAs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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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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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닌데 말입니다. 단지 낙태를 할수 있는 자유를 달란 문제가 아니라 낙태를 여자 스스로 할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에 복잡한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산부인과학회는 생명의 고귀한 존엄성을 지키고저 낙태시행을 앞으로 안하겠다고 천명했습니다. 돈벌이가 문제가 아니라 의사도 인간이기에 태아를 죽일수 없다는겁니다. 그 상태에서 낙태를 스스로 어떻게 할수 있는지요. 일제잔재가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낙태는 기독교사상과 맞물려서 이미 법으로 금지하는나라가 많지요. 그리고 남자가 이법을 만들었다니 그것도 좀 안타까운것이 그것뿐 아니라 이 세상 대부분의 법은 남자가 만들었지요 ....박교수님 조금 페미니즘 경향이 있으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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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ed



Park Yuha
·


Muse Cecilia
물론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요. 제가 이 문제를 굳이 포스팅한 건 일단은 지금 열심히 나서서 노력하는 사람들 에게 힘을 보태고 싶었기 때문이고요, 지금은 이 문제를 두고 논쟁을 할 여유가 별로 없어요. 제 문제가 일단락 되면 기회 봐서 다시 의견 말씀 드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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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


이기택그렇겠지요. 이 문제는 당사자 뿐 아니라 제삼자가 꼭 개입해야 하니 더욱 쉬운 문제가 아니네요. 결국 생명이란 무엇인지, 낙태란 무엇인지 종교가 왜 금지 하는지 등등 본격적인 논의가 필요하지요.
외형상 똑같이 금지해도 이유는 다를 수 있습니다. 저는 일본이 금지 하는 이유를 말했을 뿐이고요.
그리고 저 완전한 페미니스트입니다. 말씀대로 이 세상 대부분 법을 남자위주로 만들었으니 조금씩 고쳐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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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

·

by author

재검토하기로 되었다는군요. 일단 다행입니다.
http://mn.kbs.co.kr/mobile/news/view.do?ref=A&ncd=3363061


MN.KBS.CO.KR
‘불법 낙태수술’ 의사 처벌 강화 백지화
‘불법 낙태수술’ 의사 처벌 강화 백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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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 Hw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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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방법이 참 좋겠다 싶네요.. ^^
-> "상대방의 "동의 없는" 사정을 금지하고 위반시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
http://m.pressian.com/m/m_article.html?no=142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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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익 - 위키백과,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 육군 중장

홍사익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홍사익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홍사익
洪思翊
출생일1889년 3월 4일
출생지조선 경기도 안성군 소촌면 내소촌 (現 대한민국 경기도 안성시 대덕면)
사망일1946년 9월 26일(57세)
사망지필리핀 마닐라 포로수용소
국적일본
본관남양(南陽)
부모홍이유(부)
배우자조숙원(사별), 이청영(재혼)
자녀홍국선(장남)
홍현선(차남)
홍달선(삼남)
친척홍사용(형)
복무대한제국 육군
 일본 제국 육군
복무기간1909년~1910년
1914년 5월 28일~1946년 9월 26일
근무도쿄 제1사단 제1연대
일본군 보병 제1연대 중대장
관동군 사령부 참모부 제3과
최종계급대한제국 육군 참위
일본군: 중장
지휘일본군 보병 제3연대 대대장
일본군 보병 제108여단 여단장
일본 남방군 총사령부 병참총감
주요 참전중일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홍사익과 그 가족

홍사익(洪思翊, 1887년 2월 2일~1946년 9월 26일)은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의 군인이며,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 육군 중장을 지냈다. 조선인 출신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일본 육군대학 출신이며,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에 필리핀 마닐라 국제 군사 재판에서 전범으로 처형되었다.

과거 제도에 뜻을 두었다가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족숙 홍중유(洪中裕)의 권고로 군인이 되기로 결심, 1905년(광무 8년) 9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1909년(융희 3년) 9월 졸업, 대한제국 육군 참위로 임관되었다가 1907년 군대 폐지로, 1909년 9월 국비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 3학년에 편입학했다.

1912년 12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입학해 1914년 5월 28일 제26기로 졸업하고 견습사관을 거쳐 같은 해 12월 소위로 임관하여 육군 중장까지 올라갔으며, 집안이 양반 출신이다.그는 태평양 전쟁 당시 창씨개명을 거절하였으나 별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1944년 남방총군 사령부 병참감으로 부임하여 연합군 포로수용소장을 겸직, 연합군 포로를 감독하였다. 일본 패전 후에도 계속 일본군에 남아있다가 1946년 처형되었다. 2차대전 종전 이후 그는 포로수용소의 지휘관으로서 연합군측 포로에 대한 부하들의 잔학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연합국의 전범법정에 섰으나, 변명을 거부하고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한국에서는 이승만의 미움을 받아 아들이 연좌되어 한국은행에서 파면되었지만, 1980년대 언론인 송건호에 의해 재평가, 재조명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홍우원의 후손이다. 경기도 안성 대덕 출신으로, 본관은 남양 홍씨이다.

백철에 의하면 그가 화북지구 사령관 재직 당시, 화북 형대의 일본 관헌 이나 일본 거류민들은 다른 데서처럼 조선 사람을 반도인이라 부르고 함부로 다루지는 못하였었다 한다.

생애

생애 초기

출생과 가계

1887년 2월 2일 경기도 안성군 소촌면 내소촌(현 안성시 대덕면 소현리 소촌마을 부락)에서 자작농 홍이유(洪理裕)와 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년대는 불분명하여 1887년생 설과 1889년생 설, 1890년생 설, 1886년생 설 등이 있다. 또한 생일도 2월 2일생 설과 3월 4일생 설이 있다. 호적상 생년월일은 1887년 2월 2일이고, 묘비문에 기록된 생년월일은 1889년 3월 4일이다.그의 집안은 토홍계 후손으로, 가난하지만 양반 집안이었다고 한다. 그의 선조는 조선 숙종 때의 남인 붕당의 지도자였던 남파 홍우원이었다. 또한 중추원 참의를 지낸 정교원과 사돈관계이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몰락하여 아버지 홍이유의 대에는 농민으로 전락했다.

명성황후의 여동생의 아들인 이종조카 정갑진이 홍사익의 사촌 처남이었다. 그러나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20년 가까이 차이나는 맏형 홍사용(洪思容) 손에 양육되었다.

어려서 한학을 배웠으며, 1903년(광무 6년) 용인군 출신 조숙원과 결혼하였다. 결혼 직후 그는 출세의 길을 찾아 한성부로 상경을 했다. 그는 한자 지식과 성리학에 능했는데, 후일 송건호는 한학에도 대단히 유식했던 모양이다. 따라서 한학이 인격형성의 기반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평하기도 했다. 그는 한학 수학 중 사서삼경을 모두 암기했다 한다.[1] 소년시절 과거 시험에 뜻을 두었으나 그가 소년일 때 과거 제도가 폐지되었으므로, 그는 집안 족숙 아저씨뻘 되는 정3품 육군무관학교 교관인 당시 대한제국 육군 정위(正尉) 홍중유(洪中裕)의 권고로 군인이 될 결심을 하게 되었다.

1905년(광무 8년) 9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에 재학 중 능력을 인정받고 1909년(융희 3년) 9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제국 육군 참위로 임관되었다. 그러나 그가 육군무관학교 2학년 재학 중이던 1907년 7월 30일 대한제국 군대는 사실상 폐지되었고, 1909년 9월에는 한국통감부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폐지해버려서 같은 달 9월 그는 일본으로 유학, 도쿄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陸軍中央幼年學校) 예과 3학년으로 편입학하게 된다.

일본 유학

편입과정에서 이응준, 김석원과 함께 국비 유학생으로 뽑혔는데, 이는 황족인 영친왕이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로 유학을 떠나게 되면서 유학 동반자로 선발된 것이다. 그밖에 홍사익의 동기로는 지청천, 신태영, 소설가 염상섭의 형 염창섭 등이 있었다. 한편 그는 학비 조달에 애로사항을 겪었고, 송건호는 그가 직접 일을 해서 학비를 조달했다 한다. 송건호에 의하면 그는 일하며 배우는 것으로 일상생활을 삼았다 한다. 그는 아르바이트와 노동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하였다. 그러나 1909년부터 그는 기호흥학회에 매달 1환(一圜)씩의 성금을 기부하였다.

그의 학교 성적은 같은 교육구대에서는 상위권이었으며, 학업성적은 전교생 20등 안팎이었다. 육사 동급생 중 홍사익은 석차가 22등이었고, 이응준이 다음으로 32등이었다.[2] 일본 육사 재학 당시 그는 동아리 활동으로, 주로 문학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그는 작문을 잘 하였는데, 그의 글재주가 뛰어나다 하여 그가 지은 작문과 시는 생도자격으로 일본 천황 앞에서 직접 낭독하기도 했다. 그의 동기들은 그에게 시인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1910년(융희 4년) 10월 2일 한일 합방 조약 당일, 조선의 국권 피탈에 충격받은 조선인 유학생인 홍사익과 그의 동기 이응준, 이청천, 1기수 아래 김석원,3기수 선배 김광서 등 조선인 후보생들은 그날 밤 아오야마 묘지에 모여 향후의 대책을 논의했다. 그 중 어떤이는 분개하여 즉시 휴학, 자퇴하자 하였으나 홍사익은 아직 배울 것이 많으니 배우고, 본받을 것은 본받아 보다 많은 실무와 실전을 쌓고 그만두자고 하였다. 회의에서 이들은 의무 복무기간인 2년~4년만 채우고 그만두기로 하였다. 그러나 홍사익은 1914년과 1916년 다른 동기, 후배들이 그만둘 때 그만두지 않았다.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 예과 3학년 편입한 이후 1912년 5월 졸업했다. 그리고 1912년 12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입학해 1914년 5월 28일 육사를 제26기로 졸업하고 견습사관을 거쳐 같은 해 12월 일본군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그와 같은 동기생으로 함께 졸업한 한국인은 13명이었는데, 이 가운데는 독립운동가 지청천과, 이응준, 신태영, 조철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3] 일본육사 수학 당시 그는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였다. 1912년 12월 일본육사 입학 시 제26기생 766명 중 조선인은 홍사익을 포함 13명이었고, 홍사익은 조선인 학생 중에서 성적이 1위였다. 1914년 5월 일본육사 26기생 739명 졸업 당시 홍사익은 전교 22등이었고, 군번은 보병 22번 번호를 부여받았다.

군인 활동

엘리트 군인으로 성장

1920년 12월 16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홍사익. 일본육군대학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는 기사 내용이다.

육사 졸업성적이 매우 우수해 고위장교로 출세할 수 있는 엘리트코스인 속칭 '아카사카의 보 1'인 도쿄 제1사단 제1연대에 배속되었다. 1918년 7월 일본 제국 육군 중위로 진급했다. 1920년 12월에는 일본 육군의 최고급 엘리트 양성 코스인 일본 육군대학교에 제35기로 입학해 3년간 수학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26기 졸업한 동기생 742명 중에서 육군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66명에 불과한데 일제강점기 기간동안 일본 육군대학에 입학한 조선인은 영친왕, 이건, 이우와 홍사익 네 명 뿐이다.[4][5] 이들 4명 가운데 3명은 모두 왕족이므로 평민 출신은 홍사익 단 한 명이었다.[6]

이른바 왕공족 출신이 아닌 한국인 장교로서 이 엘리트 코스를 거친 사람은 홍사익 한 사람 뿐이었다.[7] 그가 뒷날 장관급(將官級) 장교의 대열에 끼이게 된 것도 바로 육대 출신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7] 1923년 11월 29일 육군대학을 수료하였다. 원대인 보병 제l연대 로 복귀한 뒤, 1924년 3월 대위로 승진, 중대장으로 복무했다.[7]

1923년 9월 일본에서 관동 대지진이 발생하자, 성난 이재민들 사이에서는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타거나 음모를 꾸민다는 루머가 확산되었다. 홍사익의 가족은 은신처에 숨어 화를 모면하였다.[8] 이는 그대로 동아일보에 보도되었다.

1924년 3월 육군 대위로 진급해 일본군 보병 제1연대 중대장을 지냈다. 1925년 5월 육군참모본부에 배속되어 전쟁사 편찬과 관련된 업무를 맡았다. 1926년에는 육군 소좌(소령)로 진급하고 1929년 일본 육군 보병 제3연대의 대대장으로 복무했다. 1931년 8월 육군보병학교 교도대대 교관이 되었다. 보병학교 교관으로 재직 중에 만주사변(滿洲事變)이 터지자 그는 만주 중앙육군훈련처 교관으로 부임하였다. 만주 육군중앙훈련처 교관으로 있을 때, 홍사익은 조선인들도 장교에 응시, 임관할 수 있도록 지원 제도를 고쳤다. 1933년 4월 관동군사령부에 배속되어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군 고문으로 파견되었다.

만주국이 장교 요원 훈련기관 목적으로 설치한 육군중앙훈련처(펑텐군관학교)를 지도, 감독했다. 특히 만주국군 고문으로 있는 동안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 청년들의 만주국군 장교 진입을 제도화했다. 중앙육군훈련처의 입학 자격을 일본계, 몽골계, 만주계로 제한해 놓은 규정을 일부 고쳐 우선 현역으로 만주국군에 들어와 있던 조선인 사병들이 장교가 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고, 이듬해 군관 학생 입학대상에 조선계를 포함시켜 모집공고를 내도록 조처했다. 1934년 1월에는 훈4등 서보장을 받았다.

1934년 8월 일본군 육군 중좌로 진급하면서 만주 주둔 일본군 관동군사령부 참모부에서 군무했다. 이후 1936년까지 관동군 사령부 참모부 제3과에 근무하며 재만조선인을 일본 국민의 일부로서,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에 적극 협력하도록 하는 사무를 담당했다. 그는 지휘관으로 파견될 때마다 일본어와 한국어로 두번 취임인사를 했다. 그의 취임인사 내용은 나는 조선인인 홍사익이다. 지금부터 천황폐하의 명령에 의해 지휘권을 가진다. 이의가 있거나 불복하겠다는 자가 있으면 나오라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조선인임을 숨기지 않았다.

중일전쟁기 활동과 화북으로 부임

1936년 8월 일본 육군보병학교 연구부 주임 겸 교육대 교관으로 전근했고, 이듬해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을때인 11월 육군보병학교 군견육성소장을 겸임했다. 같은 해 12월 중지나 파견군사령부에 배속을 받아 중국전선으로 파견되었다. 상하이로 부임 직후, 홍사익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추적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미 임정 수뇌부는 윤봉길 의거가 있은 뒤, 이미 상해를 떠나 항주·진강·난징 등을 전전하고 있었고, 중·일 전쟁이 터진 뒤에는 장졔스 정부를 따라서 다시 대이동을 계속, 한커우를 거쳐 홍사익이 상해에 부임했을 때는 후난성 창사(湖南省艮沙)에 도착했다.[9] 같은 달 관동군 근무시절의 공로를 인정받아 만주국이 주는 훈3위 '경운장'이라는 훈장을 받았다.

1938년 2월 중지나파견군 특무부원 신분으로 상하이에 파견되었고, 3월 육군 대좌로 진급했다. 같은달 중일전쟁 시기 중 일본과 중국 측의 임시 협상단체인 흥아원(興亞院) 조사관으로 발령받아 상하이의 화중연락부에서 근무했다. 흥아원이란, 중일전쟁 당시 중국 현지에서 중국과 교섭을 담당하던 일본의 특수기관을 말한다. 이 기관은 원래 행정에 해당되므로 문관이 수행해야할 업무지만 일본 육군내 황도파가 주도한 1936년 2.26 쿠테타 사건으로 정치에 개입하면서 변질되어 육군 현역 장교가 정보수집과 정치적 공작을 전담하는 특무기관 역할을 수행했다. 여기서 홍사익은 흥아원 제1국장으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공작활동을 했다.

1940년 8월 유수(留守) 제1사단 사령부를 거쳐 1941년 3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고, 북지(北支) 파견사령부에 배속되어, 중국 허베이성에 주둔한 북지사령부 예하 보병 제108여단 여단장으로 부임하였으며, 중국 화북일대의 중국 팔로군 제18전방총사령부(제18전총)를 상대로 전투를 치렀다. 여기서 중국 팔로군 제18전총에는 윤세주 등이 이끄는 조선민족혁명당 산하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당시 홍사익은 108여단을 이끌고 중국 팔로군과 교전하였으며, 태항산 산맥 일대와 주변 지역에서 치열한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특히 1941년 12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팔로군과 함께 허베이성 타이항산맥(태항산맥)의 ‘호가장 전투’와 인근의 '형태 전투'에서 일본군과 치열하게 교전했었다. 이 전투로 조선의용대 대원인 손일봉, 최철호, 박철동, 왕현순 등 4명이 전사하고 김세광 대장과 김학철 대원이 총상을 입고 일본군 포로가 되었다.

백철에 의하면 그가 화북지구 108여단 여단장이자 화북지구 사령관으로 있을 때, 화북지역의 조선인 이민자들은 오히려 그의 덕에 일본인들이 함부로 대접하지 못했다고 한다. 백철은 그가 108 여단 의 여단장 으 로 화북 태항 산 전투 에 임한 것은 1941년 3월에서 1942년 4월까지이다. 이 때 형대에 사령부를 설치한 일본군 여단의 여단장 은 조선인 홍사익 소장 이었으므로, 형대 에 거류 하는 조선 사람들은 공연히 코가 우뚝 하였었다. 아닌게 아니라 형대의 일본 관헌 이나 일본 거류민 들 도 다른 데서처럼 조선 사람 을 반도인이라 부르고 함부로 다루지는 못하였었다. 홍사익 각하의 간접적 인 덕택임이 분명했다는 것이다. 백철은 그를 각하 라고 특별히 존칭을 붙이기도 했다.

1942년 4월부터 1944년 3월까지 일본군 전차대, 경장갑차대 조종 및 사격훈련을 담당하는 일본 육군 공주령학교 간사(부교장)로 근무했다. 이때 그는 조선에서의 징병제 실시를 가리켜 일본 국민이 될 기회를 얻는 것이며, 천황폐하를 위한 보국(報國)의 기회라는 주장을 논설과 담화로 펼쳤다.

태평양전쟁기 활동

태평양 전쟁 중에 중국에서 여단장 및 일본 육군 공주령학교 부교장 등으로 근무하다가, 1944년 3월 필리핀에 주둔한 일본 남방총군(南方總軍) 총사령부의 병참총감에 임명되었고, 약 10개월간 연합군 포로수용소 소장을 겸직하면서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했다. 같은 해 10월 일본군 육군 중장으로 진급했다. 그의 필리핀 부임이 보도되자, 필리핀으로 가기 전 매일신보의 기자 겸 일본 도쿄특파원 김을한이 도쿄의 숙소로 찾아와 홍사익에게 이번이 마지막 기회이니 일본군 탈영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홍사익은 내가 탈출하여 독립군에 가담하지 않는 것은 나를 알아준 일본에 대한 의리 때문만이 아니다. 지금 조선인이 수십만 명이나 동원되어 있는데, 명색이 조선인으로 최고지위에 있다는 내가 만일 배신을 한다면 병사들은 물론 징용된 노무자들까지 보복을 받을 것이다. 나만을 생각해서 그런 경솔한 짓을 할 수가 없다며 거절했다.

한편 그는 여러 번의 일본군 탈영 권고와 한국 광복군 측의 영입 제의에도 불구하고 거부하고, 탈주를 거부했다. 홍사익은 광복군 사령관인 지대형(이청천의 본명), 참모장 이범석 등으로부터 계속 중경 광복군으로 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비밀로 함구하고 있다가 아들 홍국선에게 밝혔다. 그가 북지나 사령부의 여단장으로 있을 때 이청천, 이범석 등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는 그때마다 이청천, 이범석의 제의를 물리치고 나는 이 제복에 충성하고 싶다고 반복하였다. 송건호에 의하면 그의 아들 홍국선 역시 홍사익의 필리핀 부임이 확정되자, 아버지 홍사익에게 광복군으로 갈 것을 여러번 권고했지만 홍사익은 거절했다 한다.

종전 후

체포와 투옥

1946년 전범법정에서의 홍사익 (오른쪽 끝)

1945년 8월 10일 일본의 패망과 동시에 조선 해방 결정이 내려지자, 필리핀 루손섬 산중에 있던 그의 부관은 당신의 조국 조선이 독립된 것을 축하한다는 인사하였지만, 그는 표정 변화 없이 나는 아직 제복을 입고 있다. 제복을 입고 있는 한 나는 이 제복에 충성하고 싶다고 답했다.

홍사익이 속한 필리핀 주둔군은 1945년 8월 루손섬 산악지대에서 고립된 상태로 유격전을 벌이다가 패전을 맞았다. 홍사익은 전쟁이 끝나면 고향(경기도 안성)에 돌아가 중학교 수학 교사로 조용히 살고 싶어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전범으로 체포되어 필리핀 전범재판에 회부된다. 그 이유는 1944년 필리핀에서 포로수용소 소장으로 근무했을 때, 1944년 12월 필리핀에 주둔하고 있던 남방총군 제14방면군 병참감 재직 시의 연합군 포로에 대한 불법처우와 포로학대, 살해의 원인 제공혐의 때문이었다.[10] 1945년 12월 19일에 다른 일본군 장성 22명과 함께 체포된 그는 마닐라 포로수용소에 투옥되었다. 1946년 1월 7일부터 재판에 들어갔으며, 이후 포로수용소 관련 고소 고발이 10여 건에 달했다. 그는 연합군 포로수용소 소장으로 1년간 재직하였으나, 포로수용소의 책임자로서 연합군측 포로에 대한 부하들의 학대, 인권유린 행위에 대해 규탄받았다. 그는 다른 역대 포로수용소장들과 달리 홀로 책임을 지고 연합국의 군사재판정에 섰지만, 그러나 자신에 대한 변명을 거부하고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사형선고와 최후

일본 전쟁범죄자를 처벌하는 마닐라 국제 군사 재판에서 '포로학대 살해' 죄목으로 B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1946년 4월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무렵 당시 국내에서는 일본 육사 동기생들을 중심으로 '홍사익 구명운동' 등을 비롯해 각 언론사에서도 구명운동 등 벌였으나 무위로 끝나고[10], 그의 아내와 아들 내외는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를 찾아가 선처를 호소하였으나 거부되었다. 안성군 주민들 또한 홍사익 사면 탄원서를 올렸지만[11], 이 역시 묵살되었다.

형량이 과도하다는 등 일본 극우 세력의 여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46년 9월 26일 필리핀 마닐라 전범수용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일본군 군복을 입은 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10] 그는 항소를 포기하고 최종상고심에서 사형을 받았다. 사형 판결이 확정되고도 그는 나는 갑종에 합격했다고 외쳐 다른 피고와 방청객이 침묵했고, 일본어 통역관에게서 내용을 들은 미군 군법무관들이 놀랐다. 일본어로 갑종합격과 교수합격이라는 단어의 발음이 같은 점을 이용한 풍자였다. 홍사익 외에도 당시 15명의 조선인 일본군 고위 장교들은 사형 처분을 받고, 그와 함께 당일 교수형과 총살형에 각각 처해졌다. 그가 최후로 참관인들에게 부탁한 것은 구약성서 시편 51편의 낭송이었다고 한다.[12] "…내가 죄악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12]"

그는 체포 직후, 일본 국적을 포기하는 것은 어떠냐는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하였다. 홍사익은 태평양 전쟁 종전 당시 BC급 전범 가운데 유일하게 일본군 내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한국인이었다.[13] 생전에 막사와 진중에서 쓴 몇편의 시와 수필, 기행문이 있었지만, 일본군을 미화할 수 있다는 이유로 조선 주둔 미군과 필리핀 주둔 연합군에 의해 전부 압수되어 소각당했다.

사후

당시 일본은 패전 직전이었고, 작전권이 없는 참모부대인 보급부대 지휘관인 그가 B급 전범으로 몰려 사형당한 것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이 나타났다. 이후 일본에서는 홍사익 평전과 홍사익의 재판 처형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논설이 종종 출간되었다. 홍사익의 시신은 미군의 비밀지령 293호에 의해 다른 일본군인 및 일본군 협력자의 시체들과 함께 화장되었고, 유골 가루는 비밀리에 미해군에 의해 바다에 뿌려졌다.

그의 유품 중 손목시계와 저금통장, 안경집 등은 일본군 측 변호인을 통해 일본 육군이 보관하고 있다가 1947년 6월 19일 일본 외무성이 그의 아들 홍국선에게 전달했다. 순종이 내린 군인 칙유 칙서와 일본 황태자 다이쇼에게 선물로 받은 은 손목시계는 후일 그의 아들 홍국선에게 전달되었다. 그의 다른 유품은 미군 헌병장교 이반 케이가 받았는데 자신의 아들에게 전해달라고 건넨 시계와 칙서였다. 퇴역 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살던 이반 케이는 이웃에 거주하는 일본 사람에게 이 성서와 시계의 유족을 찾아서 주라고 맡겼다. 그 일본인의 여러번의 수소문 끝에 그의 아들 홍국선에게 전달되었다.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후처 이청영은 모든 공직에서 해임되고 사립학교 교사 채용도 번번히 거부당했다. 이청영은 지인을 통해 일본 내의 남편의 육사 동기, 선후배 및 남편의 지인들에게 편지 서신과 연락을 하여, 생활고와 일본 혹은 미국으로의 망명 도움을 호소하였다. 이청영의 탄원서와 홍사익의 육사 동문들의 연명 탄원서는 일본 총리 요시다 시게루에게도 전달되었다. 이청영은 홍사익의 일본육사 동문들 및 지인들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망명하여 생활하다가, 아들 홍현선이 유학 중인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홍사익 외에도 그와 같이 일본군 신분으로 체포된 90여 명의 한국인 일본군 장교들은, 1945년 12월 19일부터 1952년 4월 6일까지 필리핀 육군교도소와 일본 도쿄의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났다. 이들 중 40명은 1950년 이전에 석방되었지만, 50여 명은 필리핀 육군교도소에서 일본 동경 스가모 형무소로 이감되어 계속 복역하였다. 이들 종신형을 받은 홍진묵(洪鎭默) 외 9명의, 징역 20년형을 받은 윤동구(尹東구)외 4명, 징역 18년형을 받은 박철수(金喆洙)외 3명, 징역 15년형을 받은 박창호외 14명, 징역 12년형을 받은 정봉길(鄭奉吉)외 5명, 징역 10년형을 받은 조수현(趙壽鉉)외 7명, 그밖에 병이 있어 필리핀 군병원에 후송중인 복역자 2명 등 50여 명의 한국인 장교들은 1952년 4월 6일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임용순(任容淳)외 12명의 국회의원의 사면, 탄원 석방으로 풀려나 귀국했다.

1966년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14]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군인 부문에 포함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후일 그의 묘는 유품을 담은 빈 관과 함께 부인 조씨의 묘 옆에 조성되었고, 비석은 그 후 1979년 4월에 세워졌다.

사상과 신념

그는 조선인이 일본에 협력하면, 나중에 조선인들도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 협력하면 조선인도 일본인과 동등한 국민으로 대접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들 홍국선이 중고등학교 시절 조센징이라는 이유로 이유없는 멸시와 조롱, 따돌림을 당해 괴로워했고 아버지에게 어째서 우리들은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합니까라며 호소했다.

그러자 홍사익은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또 조급히 해결되리라고 생각할 수도 없는 문제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 기회에 조사해왔지만 일본인과의 관계는 아일랜드인과 영국인 사이와 매우 비슷한 문제가 있다. 따라서 아일랜드인의 방식이 우리에게 참고가 될 것이다. 아일랜드인은 영국에서 어떤 취급을 받더라도 절대로 아일랜드인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를 소개할 때는 반드시 또렷하게 나는 아일랜드인인 아무개 올시다라고 말한다. 너도 그렇게 하여 어떤 때에나 반드시 나는 조선사람 홍국선입니다라고 말하여 결코 자기가 조선 사람이라는 말을 생략해서는 안된다'라고 답했다.

그는 아버지가 일본군 고위 장교로 근무하는 것에 반감을 품는 이들이 있다는 아들 홍국선의 질문에 그는 일본에 협력할 것은 협력하여 동등한 국민임을 입증하는 것이 조선인의 권리 획득에 도움되는 길이라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창씨개명 거부

정미7적으로 꼽히는 이병무와 일본 육군 중장을 지냈던 홍사익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15] 홍사익은 조선식 성명을 지키고, 조선인임을 인정하더라도 국민, 시민이 될 수 있으며, 다민족 일국가를 이루는 것이 강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조선총독부 역시 그들에 대해 창씨개명을 권고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일제가 이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하지 않은 것은 창씨개명이 강제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도구로 삼기 위해서였다[15]는 시각도 있다.

평가와 비판

그는 돈 욕심이 없었고, 공직생활 중 뇌물을 받지 않고 재물이 없어 그의 가족은 가난하였다. 홍사익은 '일본 제국에 충성을 다한, 개인적으로는 훌륭하고 청렴결백한 인물'이라는 평가가 있으나[16], 태평양전쟁 말기, 필리핀에서 포로수용소장으로 있으면서 연합군 포로들의 학살을 묵인했다는 점에 대한 비판이 있다.

언론인 송건호(宋建鎬)는 그를 가리켜 "그는 평생동안 이재에는 무관심했던 사람"이라 평하기도 했다.

송건호는 그에 대한 비판을 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송건호는 일본의 한국민족에 대한 식민통치는 한국민족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정책으로 일관되어 있었으며 한국인을 한국민족이라 부르지 않고 ‘반도인’이라고 했으며 일본을 ‘내지’라고 추켜세우는 판이었으므로 한국인으로서는 같은 동족이 중장까지 승진한데 대해서 오히려 민족적 긍지를 높여주는 구실을 했으며 홍장군을 친일파로 욕하고 싶은 심정은 아니었다. 따라서 일제시대의 홍장군을 보는 눈과 해방후에 홍장군을 평하는 가치판단은 묘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1962년 8월 경향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을 비롯한 한국의 언론에는 홍사익 사망일 직전 그를 추도하는 칼럼, 기사를 송고했지만 대부분 압수, 검열삭제되었다.

가족

첫 번째 부인으로 조숙원이 있었지만, 조숙원은 오랜기간동안 병상에 누었다가 1943년에 병사했다고 한다. 첫째 아들인 홍국선은 와세다 대학 출신으로 광복 후 한국은행에 근무하다가 1984년에 고향 경기도 안성에서 죽었고, 오늘날 안성에는 홍씨 문중산에 「남양공홍사익 배한양조씨지묘」라는 오석 묘석이 서 있는데 시신 아닌 유품을 묻은 것이라 한다.[17]

후처로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 출신의 이청영이라는 부인이 있는데, 그녀 소생의 둘째 아들 홍현선이 있다고 한다. 전시 체제 때는 일본에 거주했었으나 일제 패망 이후에는 국내로 돌아와 거주했지만, 이승만 대통령 이하의 대한민국 정부는 홍사익 가족들에 대해 반기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한국전쟁 후 '친일파의 가족'이라는 주변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 부인 이청영은 미국으로 떠나려고 했을 때, 여비가 없어서 생각다 못해 일본 수상에게 편지를 보냈다. 부인의 편지를 받고 당시 일본 수상이던 요시다 시게루는 곰곰이 생각하다 비서를 불러 '100만엔을 송금해 주라.'고 했다고 한다. 홍사익 부인은 그 돈으로 미국으로 떠날 수 있었다고 한다. 둘째 아들 홍현선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유학했고, 부인 역시 아들하고 같이 로스엔젤레스에서 살다가 1978년 교통사고로 죽었다.[17]

  • 아버지: 홍이유(洪理裕)
    • 형: 홍사용(洪思容, 1870년~?)
    • 누나: 남양 홍씨
    • 형: ?
  • 부인: 조숙원(趙淑元, 1885년~1943년)
    • 아들: 홍국선(洪國善, ?~1984년)
  • 부인: 이청영(李淸榮, 1907년~1978년)
    • 아들: 홍현선(洪顯善, ?~1978년)
    • 아들 홍달선(洪達善)

일화

그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떳떳히 조선인임을 밝히면서도 일본군에서 장성까지 오른 인물이었는데 이는 왕족이 아닌 자로서는 유일한 사례다. 물론 여기에는 다른 설명도 있어서,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일제가 '창씨개명이 강제적인게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도구'로 그의 존재를 이용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존재하기도 한다.[18]

이승만은 그를 유독 미워하였다고 한다. 홍사익의 아들 홍국선은 일본에 유학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은행에 근무하다가 조선은행의 후신인 한국은행에 근무하였다. 그러나 홍국선이 한국은행에 근무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해고하라는 명령을 내려 파면당했다.

그는 박승환(朴承煥)과 친일파로 알려졌던 김태덕(金泰德)의 딸을 중매시킨 뒤, 결혼까지 주선해 주었다.

같이 보기

관련 자료

참고 문헌

  • 김윤식, 《일제말기 한국인 학병세대의 체험적 글쓰기론》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 이기동, 《비극의 군인들 : 일본 육사출신의 역사》 (일조각, 1982)
  • 조만제 외, 《내가 겪은 건국과 갈등》 (도서출판 선인, 2004)
  • 산보철, 《홍사익 중장》 (은행계, 1986)
  • 최서영, 《내가 본 현장 여울목 풍경》 (도서출판 선, 2009)
  • 권오기, 若宮啓文 공저, 《한국과 일본국》 (샘터, 2005)

각주

  1. 두 조선인(朝鮮人) 세계한인신문
  2. 김윤식, 《20세기 한국작가론》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53페이지
  3. 역사문제연구소 (1995년 3월 1일). 《인물로 보는 항일무장투쟁사》. 서울: 역사비평사. 146쪽쪽. ISBN 8976962249.
  4. 정범준 (2006년 5월 25일). 《제국의 후예들》. 서울: 황소자리. 490쪽쪽. ISBN 8991508189.
  5. 길윤형 (2006년 8월 24일). “황실, 친일과 항일 사이”. 《한겨레21》 (제624호).
  6. 정범준 (2006년 5월 25일). 《제국의 후예들》. 서울: 황소자리. 552쪽쪽. ISBN 8991508189.
  7. 박성수, 《독립운동사의 제문제》 (범우사, 1992) 258페이지
  8. "洪思翊君은 無事" 동아일보 1923년 9월 19일자 4면, 사회면
  9. 박성수, 《독립운동사의 제문제》 (범우사, 1992) 268페이지
  10. 전봉관 (2009년 9월 16일). “[제국의 황혼 '100년 전 우리는'][2]마지막 무관생도 홍사익·지대형·이응준[정정내용 있음]”. 조선일보. 2009년 10월 1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1월 21일에 확인함.
  11. "安城에서 日人들에 잡혀가", 경향신문 1962년 8월 15일자 5면, 생활문화면
  12. <시론> 친일파 홍사익 문화일보 2002년 3월 13일자
  13. 길윤형 (2007년 3월 7일). “B·C급 전범 히로무라 가쿠라이 “나는 억울하다””. 《한겨레21》 (제650호).
  14. 야스쿠니신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
  15. 백유선, 《한국사 콘서트》 (두리미디어, 2008) 314페이지
  16. “홍사익 이야기”. 2006년 1월 1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8월 2일에 확인함.
  17. “홍사익 이야기”. 2006년 1월 1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8월 2일에 확인함.
  18. (http://www2.ktrwa.or.kr/new/new_webzine/index.php?idx=440&schYear=2007&schMonth=5 보관됨 2013-12-12 - 웨이백 머신 군자는 궁해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 전범(戰犯) 홍사익 중장의 의연한 최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