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덕궁 내전의 대조전 뒤편에 있었던 징광루 澄光樓, 즉 경훈각 景薰閣 일곽의 정면 사진이다. (조선 후기에는 왕실에 내려오던 귀중한 서적 등을 보관하는 서고 등으로도 사용되었다.)
따라서 1898년 선교사들의 고종 호위와 연관된 집옥재와 상관 없는 건물이므로, 사진과 더불어 설명도 삭제해야 합니다. 참고로 이 사실을 알려준 JiHoon Suk석지훈 샘이 올린 경훈각 사진(사진 2)을 다시 올린다.
이런 착각이 일어난 것은 1) 경복궁과 창덕궁 건물들에 대한 나의 무지, 2) 아래 원본(사진 3)에 집옥재를 여름 궁전이라 잘못 설명하고, 이 문제의 건물은 왕실 도서관이라 설명했으므로, 나는 두 설명이 바뀌었다고 판단했고, 두 건물이 인접했다고 잘못 추측했기 때문입니다.
잡지 The Christian Herald and Signs of Our Times 의 실수, 글을 쓴 홀 부인의 실수, 사진 촬영자와 인화자의 실수(징광루와 다른 기와집이 겹쳐서 이중 인화됨), 나의 실수가 겹쳐서 일어난 일이니 양해 바랍니다. 물론 집옥재 옆에 팔우정이 붙어 있고, 그 뒤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9월 16일 감리교신학대학교는 故 김경일 전도사가 1900년 11월 경성 달성회당(현 상동교회)에서 기록한 『신학회(神學會)』 제3권과 1905년 4월 작성한 『신학회(神學會)』 제5권 등을 기증받았다.
그런데 "이번 기증 자료의 역사적 가치를 이해하는 데 있어, 특히 주목할 사건은 1899년 2월 감리교 신학교육 과정에서 ‘신학회(神學會)’라는 명칭이 최병헌을 비롯한 한국인 사역자들에 의해 직접 결정된 일이다.
이덕주 명예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 교회사)는 “장로교가 1901년 평양신학교를 설립하고 ‘신학교’라는 명칭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이전에, 감리교는 이미 1888년 ‘Theological Department’를 시작으로 1899년에는 ‘신학(神學)’, ‘신학과(神學科)’, ‘신학회(神學會)’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특히 1899년 2월 열린 신학교육 모임에는 최병헌을 비롯한 한국인 사역자들이 참여하여 모임의 명칭을 논의하였으며, 투표를 통해 ‘신학회(神學會)’라는 이름을 결정하였다. 당시 선교사들은 이를 ‘Theological Association or Club’으로 기록하였다. 이는 ‘신학회’라는 명칭이 단순히 선교사들에 의해 정해져 한국인들에게 전달된 것이 아니라, 한국인 사역자들이 신학교육의 주체로 참여하여 자신들의 모임에 스스로 이름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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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나 ‘신학교’라는 용어는 1870년대 후반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정착했다. 중국 개신교에서는 초기부터 ‘신도’(神道), ‘천도’(天道) 등의 용어가 사용되었고, 이후 ‘신학’(神學)이 학문적 명칭으로 자리 잡았다.
일본에서도 초기에는 theology를 ‘신리학’(神理學) 등으로 번역하는 사례가 있었으나, 1870년대에 들어 ‘신학’이 점차 대표적인 번역어로 정착했다. 신학교육기관 역시 처음에는 ‘신학숙’(神學塾) 등의 명칭을 사용했지만, 1877년 도쿄에 도쿄잇치신학교(東京一致神学校, Tōkyō Itchi Shingakkō)가 설립되면서 ‘신학교’(神學校)가 근대적 신학교육기관의 명칭으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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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한국에서 1899년 2월 최병헌 등이 ‘신학회’(神學會)라는 명칭을 채택한 것은 한국 개신교 신학 용어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그러나 이것을 한국에서 ‘신학’이라는 용어가 독자적으로 만들어진 사건으로까지 확대해서 평가할 필요는 없다. 최병헌은 이미 1880년대 일본을 방문한 경험이 있었으며, 1890년대 한국에서는 일반 학문 분야뿐 아니라 개신교계에서도 중국과 일본을 거쳐 형성된 근대 한자어와 기독교 용어가 활발하게 유입되고 있었다. 따라서 ‘신학’이라는 용어 역시 이러한 동아시아의 지적·언어적 교류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후 1900년 창간된 『신학월보』는 ‘신학’이라는 말을 한국 개신교계에 확산하고 정착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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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가 1890년 요코하마에서 간행한 『한영영한자전』(韓英英韓字典, A Concise Dictionary of the Korean Language)과 게일(James S. Gale)이 1897년 역시 요코하마에서 간행한 『한영자전』(韓英字典, A Korean-English Dictionary)에는 ‘신학’이나 ‘신학교’가 표제어로 채택되지 않았다. 언더우드의 사전은 한영부와 영한부로 구성되어 있었고, 게일의 『한영자전』 초판은 약 3만 5천 개의 어휘를 수록한 당시로서는 상당히 방대한 사전이었다. 따라서 1890년과 1897년에 나온 두 주요 한국어 사전에서 ‘신학’과 ‘신학교’가 독립된 표제어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적어도 1890년대까지 이 용어들이 한국어에서 아직 충분히 일반화되거나 표준화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중요한 지표로 볼 수 있다.
장로교회의 언더우드의 한영자전과 게일의 한영자전이 '신'학이나 '신'학교를 채택하지 않은 이유를 묵상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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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개신교는 God을 ‘神’으로 번역하여 사용했으므로 theology를 ‘神學’, theological seminary를 ‘神學校’라고 부르는 것이 언어적으로 자연스러웠다. 반면 한국 개신교는 God을 ‘하ㄴ.님’으로 번역하여 사용하면서도 학문과 교육기관의 명칭에서는 ‘하ㄴ.님학’이나 ‘하ㄴ.님학교’가 아니라 일본에서 이미 통용되던 한자어인 ‘신학’과 ‘신학교’를 받아들였다. 따라서 한국 개신교의 ‘신학’이라는 말 자체가 처음부터 한국적 하나님 용어와 완전히 일치했던 것은 아니다. 만일 ‘하ㄴ.님학’과 같은 토착적 명칭을 사용했다면 한국 기독교 신학의 언어적 성격도 다소 달라졌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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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감리교신학대학교가 자신의 역사에서 ‘신학’ 또는 ‘신학교’라는 명칭의 선구성을 강조하거나 ‘최초의 대한민국 신학교’라는 타이틀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때에는 좀 더 넓은 동아시아적 맥락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신학’과 ‘신학교’는 어느 한 한국 교단이나 학교가 처음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19세기 중국과 일본 개신교에서 형성·변화해 온 근대 기독교 어휘를 한국 교회가 수용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제강점기 신학교육의 역사를 돌아보면, 신학을 공부했다는 사실 자체가 언제나 시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나 책임 있는 실천을 보장한 것도 아니었다. 감리교 신학교 출신 가운데 일제 말기 식민권력의 전시체제에 협력한 인사들이 존재했다는 사실 역시 그러한 역사적 성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런 역사에 비추어 보면 학교의 정체성은 ‘최초’라는 명칭보다 어떤 신학을 가르치고, 질문과 비판과 학문적 토론을 얼마나 보장하는가에 의해 평가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어제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변선환 학술세미나’를 둘러싸고 행사가 방해받는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면, 사건의 구체적인 경위와 책임을 확인하는 동시에 그것이 신학교에서 보장되어야 할 학문적 토론과 신학적 다양성이라는 원칙에 어떤 문제를 제기하는지 물을 필요가 있다. ‘신학’이라는 이름을 누가 먼저 사용했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늘 그 학교 안에서 신학적 질문과 토론이 실제로 가능한가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애재라. ‘신학’이라는 이름의 역사는 오래되었으나, 정작 신학적 질문과 토론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그 이름의 선구성을 자랑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감리교신학대학교는 이 책들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할 때이다.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이라고 부릅시다”, 127년 전 조선인 감리교 목회자들이 투표로 정해 국가등록문화유산급 희귀본 성경, 『구약젼셔』까지 기증....3대 이은 모교 사랑 결실 KMC뉴스 입력 2026.09.16
대한민국 최초의 신학교 감리교신학대학교(이하 감신대, 총장 유경동)는 故 김경일 전도사 1900년 11월 경성 달성회당(현 상동교회)에서 기록한 『신학회(神學會)』 제3권과 1905년 4월 작성한 『신학회(神學會)』 제5권, 그리고 1911년 발행된 최초의 순한글 완역 구약성경인 『구약젼셔』를 손자인 김태식 목사(1972년 입학)로부터 기증받았다고 밝혔다.
특히 신학회 내용을 정리한 신학회(神學會) 제3권의 필기에는 당시 스크랜턴, 존스, 노블, 케이블 등 미국 선교사들의 강의를 당시 신학생들이 ‘성서개론, 조직신학, 교회사, 전도법’ 등의 한글 학술용어로 학습한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번 기증 자료의 역사적 가치를 이해하는 데 있어, 특히 주목할 사건은 1899년 2월 감리교 신학교육 과정에서 ‘신학회(神學會)’라는 명칭이 최병헌을 비롯한 한국인 사역자들에 의해 직접 결정된 일이다.
이덕주 명예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 교회사)는 “장로교가 1901년 평양신학교를 설립하고 ‘신학교’라는 명칭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이전에, 감리교는 이미 1888년 ‘Theological Department’를 시작으로 1899년에는 ‘신학(神學)’, ‘신학과(神學科)’, ‘신학회(神學會)’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특히 1899년 2월 열린 신학교육 모임에는 최병헌을 비롯한 한국인 사역자들이 참여하여 모임의 명칭을 논의하였으며, 투표를 통해 ‘신학회(神學會)’라는 이름을 결정하였다. 당시 선교사들은 이를 ‘Theological Association or Club’으로 기록하였다. 이는 ‘신학회’라는 명칭이 단순히 선교사들에 의해 정해져 한국인들에게 전달된 것이 아니라, 한국인 사역자들이 신학교육의 주체로 참여하여 자신들의 모임에 스스로 이름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사건은 한국 감리교 신학교육이 단순히 서양의 신학교육을 수용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한국인 사역자들이 자신의 언어와 문화적 맥락 속에서 신학을 이해하고 조직화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Theological’이 ‘신학(神學)’으로 번역되고, 이후 ‘신학회’, ‘신학과’, ‘신학교’ 등의 용어가 형성·정착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국 기독교의 언어사와 신학교육사 측면에서도 중요한 사건이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이번에 기증된 각 권의 필기 자료는 더욱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이 자료에는 당시 신학생들이 배우고 기록한 신학적 내용뿐 아니라, 한국에서 근대적 신학교육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당시 신학생들이 새로운 신학적 개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했는지를 보여주는 현장성 높은 기록이 담겨 있다.
따라서 이 필기 자료는 단순한 개인의 수업 노트나 오래된 문헌을 넘어, 한국인 사역자들이 신학교육의 주체로 성장하고 ‘신학’이라는 개념과 그 명칭을 자신의 언어로 정립해 가던 역사적 현장을 증언하는 귀중한 사료라 할 수 있다. 특히 1899년 ‘신학회’라는 명칭을 한국인 사역자들이 직접 결정했던 역사적 맥락과 함께 살펴볼 때, 이번 기증 자료는 한국 감리교 신학교육의 기원과 발전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서 그 가치가 더욱 크다.
함께 기증된 1911년 대영성서공회가 발행한 『구약젼셔』 순한글 구약 완역본은 국가등록문화유산 제671호와 동일한 판본의 희귀 원본이다. 기증자 김태식 목사는 “할아버지의 흔적이 담긴 유산이 개교 140주년을 맞은 모교로 돌아가 '이 민족에게 자유와 빛을' 전하려 했던 초기 감리교 목회자들의 헌신과 노력을 되새기고 당시 교회사와 국어사학을 연구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소회를 밝혔다.
유경동 총장은 “박물관에 갇힌 고서가 아니라, 신학회 졸업생인 고 김경일 전도사님께서 평생 설교와 묵상에 쓰신 믿음의 유산이자 세계적으로 각광 받는 K-신학의 뿌리를 밝혀주는 사료라는 점에서 후학과 성도들에게 큰 감동과 도전을 준다” 며 “소중한 유물을 모교에 기증해 주신 김태식 목사님과 고 김경일 전도사님의 그 뜻을 소중하게 받들어 1887년 시작된 감신 신학의 정통성을 입증하는 이 귀중한 유물들을 학계와 협력해 연구하고, 전시 및 학술 심포지엄을 통해 감리교 신학의 역사적 위상을 대내외에 널리 알릴 것”이라고 화답했다.
[문의] 감리교신학대학교 대외협력실 02-361-9250
감리교신학대학교 도서관 02-361-9232
127년 전 신학회 재학생 故 김경일 전도사의 육필 원고 『신학서』 및 『신학회』 필기 2권 전체 컷神學書 三卷1899년부터 ‘신학회’라는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1900년 11월 12일 ‘신학회’(감리교신학대학교 전신) 내용을 김태식 목사님의 조부 김경일 전도사가 붓글씨로 기록, 주요 내용은 쥬강성 일천구배년 십일월 이십일 경성 달성회당(현 상동교회)에서 신학과를 개회 할새 장로사 시크란돈씨(William Benton Scranton), 목사 조원시씨(George H. Jones), 로볼씨(W A Nobel) 삼씨가 쥬리하시고, 김창식, 최병헌 량시가 긔도하시고 시학과정을 작성하니, 一半 김창식, 김긔범, 최병헌, 노병선 등, 二半은 전봉은, 전봉은, 고시영, 강인철, 김경일 등 모두 합하여 심십일이라 기독되어 있다. 신학서의 내용은 일과 평혼론, 이과 신학, 삼과 서경전, 사과 성교회사기, 오과 전도직무로 되어 있다.
127년 전 신학회 재학생 故 김경일 전도사의 육필 원고 『신학서』 및 『신학회』 필기 2권 전체 컷神學會 五卷1905년 4월 神學會 五卷의 내용은 각종 신학에 대한 여러 담당교수들의 강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즉 소목사훈, 로블장로소훈, 무목사훈, 케블장로사훈, 시목사훈 등으로 되어 있는데 소목사는 W.C.Swearer 교수, 로블 장로사는 W.A. Nobel 교수, 케불장로사는 E.M. Cable 교수, 시목사는 W.B.Scranton 교수를 두고 하는 말이다. 강의 내용은 한국 초창기 신학교육이 신론, 성서개론, 조직신학, 실천신학, 삼위일체론, 교회사, 비교종교론, 인식론 등 모든 분야를 포함해서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서개론, 조직신학, 교회사' 등 한글 학술 용어가 정갈한 한글 붓글씨로 기록된 필기 내부 쪽 근접 컷
1911년 대영성서공회 발행 순한글 완역 『구약젼셔』 희귀본 원본 표지성경(구약) 1-6권1911년 대영셩셔공회에서 간행된 최초의 한글 구약전서, 이 자료는 단순히 오래된 성경이 아니라 한국 개신교 성서 번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원본은 2권으로 간행되었고, 김경일 전도사는 총 6권으로 분책 제본하여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