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10

동아시아의 평화와 화해 - 3 1운동 평론

동아시아의 평화와 화해 - 3 1운동 평론











신복룡이 그리는 기미년 3월1일에 있었던 일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가요? 평론.

<신복룡이 재구성한 1919년 3월 1일—사실과 해석>

결론부터 말하면, 신복룡이 서술한 내용의 뼈대는 역사학계에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사실들을 배열하여 만들어 낸 전체 그림—“민족대표들은 학생들을 남겨둔 채 태화관에 모여 스스로 체포되었으며, 일부는 처음부터 결연한 독립운동가가 아니었다”—은 일반적인 교과서 서술보다 훨씬 비판적이다. 더욱이 몇몇 세부사항은 확정된 사실이라기보다 후대 회고와 신문조서에 근거한 논쟁적 재구성이다.

1. 널리 확인되는 사실

1919년 3월 1일의 기본적인 사건 순서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 민족대표들은 처음에는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가능성을 검토했다.
  • 그러나 군중과의 충돌 및 폭력 사태를 우려해 장소를 인사동의 태화관으로 옮겼다.
  •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29명이 태화관에 참석했다.
  • 오후 2시로 예정되었으나 참석자들이 늦어 실제 선언식은 그보다 늦게 진행되었다.
  • 태화관에서는 한용운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간단한 연설을 한 뒤 만세삼창을 했다.
  • 경찰이 출동해 민족대표들을 연행했다.
  • 파고다공원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이 독자적으로 선언과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 민족대표 가운데 최린·박희도·정춘수 등 일부는 훗날 친일 활동으로 돌아섰다.

따라서 신복룡이 완전히 새로 발견한 사건은 아니다. 태화관과 파고다공원의 분리, 민족대표 29명의 체포, 학생들의 독자적인 행동, 일부 대표의 훗날 변절은 3·1운동 연구에서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당시 경찰·재판 기록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인물별 신문조서와 공판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대중적 기념에서는 이 복잡한 장면이 흔히 “민족대표가 선언서를 낭독하자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하나의 영웅적 장면으로 압축된다. 신복룡은 바로 그 압축된 기억을 풀어 민족대표와 학생·민중 사이의 거리, 지도부 내부의 온도 차이, 후대에 만들어진 전설을 드러내려 한다.

2. 파고다공원에서 누가 선언서를 읽었는가

신복룡은 학생들이 민족대표를 기다리다가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고 서술한다. 이것은 오랫동안 널리 유통된 이야기다. 그러나 정확한 낭독자와 당시 현장의 세부 순서에 관해서는 증언들이 일치하지 않는다.

파고다공원에는 학생과 시민들이 모였고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거나 그 취지가 전달된 뒤 시위가 시작되었다는 큰 틀은 분명하다. 하지만 “오후 3시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 선언서를 낭독하자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는 장면 전체를 동시대 기록으로 완전히 입증하기는 어렵다. 후대의 회고와 기념서술이 결합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사진처럼 정확히 복원된 확정적 장면도 아니다. 신복룡은 이 점을 충분히 설명하기보다는 한 가지 전승을 선택해 서사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3. 학생들이 민족대표의 불참에 분노했는가

학생들이 민족대표를 찾으러 갔고, 지도자들이 파고다공원에 오지 않은 데 불만을 가졌다는 기록과 회고는 존재한다. 신복룡이 인용한 박희도의 설명—“무저항·비폭력 방침에 따라 불가피하게 불참했다”—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층위가 있다.

첫째, 일부 학생들이 실제로 당황하거나 분노했을 가능성은 높다. 자신들은 군중 속에서 위험을 감수하는데 민족대표들은 요릿집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둘째, 그렇다고 학생운동 지도부와 민족대표가 완전히 단절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학생 지도자들은 이미 선언서 배포와 시위 준비에 참여했고, 민족대표와 일정한 연락망을 갖고 있었다. “민족대표들은 학생들을 배신했고, 학생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기다렸다”는 식으로 단순화하면 또 다른 왜곡이 된다.

신복룡은 민족대표 중심의 영웅사를 교정하는 데 성공하지만, 반대로 지도부와 학생·민중 사이의 협력관계를 지나치게 약화시킬 위험이 있다.

4. <전화통고설>은 사실인가

가장 주의해야 할 부분이다. 널리 알려진 서술은 태화관 측 또는 민족대표 측이 경찰에 연락하여 선언 사실을 알렸고, 경찰이 출동하여 이들을 연행했다는 것이다. 종래에는 태화관 주인 안순환이 종로경찰서에 전화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졌다.

그러나 누가, 정확히 몇 시에, 누구의 지시로 전화했는지를 확정할 만한 동시대 자료는 충분하지 않다. 일부 서술은 훗날의 회고에 의존한다. 신복룡이 “전화통고설은 입증되지 않았다”고 한 것은 이런 사료상의 공백을 지적한 것으로 타당하다.

그렇지만 여기서도 신중해야 한다. 전화의 정확한 경로가 불확실하다는 사실이 “민족대표들이 체포를 예상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이들은 선언서에 이름과 주소를 공개했고, 선언 후 현장에 머물렀으며, 경찰이 오자 도주하거나 저항하지 않았다. 체포를 각오한 공개적 정치행동이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즉 다음 두 명제는 구분해야 한다.

  • “민족대표들이 경찰에 직접 전화를 걸어 체포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세부 이야기는 확정하기 어렵다.
  • “민족대표들이 체포될 것을 알고도 태화관에 남아 있었다”는 판단은 상당한 근거가 있다.

5. 이것을 <자수>나 <투항>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신복룡은 <자수>라는 말은 자신이 범죄를 저질렀음을 전제로 하므로 독립운동에 적절하지 않고, <투항>은 적과 대치하다 항복한 경우이므로 역시 부적절하다고 주장한다. 이 지적은 언어적으로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특히 <투항>은 민족대표를 겁쟁이나 패배자로 규정하는 가치판단을 포함하므로 피하는 것이 옳다. <자수>도 식민통치의 법적 관점에서는 가능하지만 독립운동사의 관점에서는 부당한 표현이다. 가장 중립적인 표현은 다음과 같다.

민족대표들은 선언식을 마친 뒤 현장에 머물며 체포에 응했다.

다만 <자수>라는 말을 사용한 역사가들이 모두 독립운동을 범죄로 보았던 것은 아니다. 대체로 “도망하지 않고 스스로 신병을 경찰에 맡겼다”는 일상적 의미로 사용했을 뿐이다. 따라서 용어를 비판할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 기존 역사학 전체가 식민지 법리를 받아들였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6. 신문조서에 나타나는 소극적·타협적 발언

신복룡은 소병희가 “한일합병에 별로 찬성도 불찬성도 하지 않았다”, 정춘수가 “본래 한일합병에 반대하지 않았다”고 진술한 대목을 제시한다. 홍병기가 “선언서를 배포할 목적으로 태화관에 가서 기다렸다”고 진술한 것도 인용한다.

이 기록들은 실제로 민족대표들이 동일한 정치적 신념을 가진 집단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33인은 혁명가들로 구성된 단일한 조직이 아니라 천도교·기독교·불교 지도자들이 일시적으로 결합한 연합체였다. 독립의 의미와 투쟁 방법, 일본과의 관계에 대한 생각도 서로 달랐다.

그러나 식민지 경찰의 신문조서는 그대로 마음속의 진실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피고인은 형량을 줄이고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역할을 축소할 수 있다. 경찰은 원하는 방향으로 질문하고 진술을 정리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자료는 중요하지만 다음과 같이 읽어야 한다.

신문조서는 민족대표의 실제 생각을 보여주는 자료인 동시에, 피고인이 식민지 권력 앞에서 자신을 방어한 언어를 기록한 자료다.

한용운이 끝까지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를 기준으로 나머지 32인을 모두 평가해서는 안 된다. 한용운의 영웅성과 다른 대표들의 모호함을 대비시키는 것은 극적인 서술이지만, 조직적 운동이 서로 다른 역할과 기질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놓칠 수 있다.

7. <변절자들도 있어>라는 평가는 정당한가

최린·박희도·정춘수 등이 훗날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민족대표 33인 모두가 평생 일관된 독립운동가였다”는 기념서술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훗날의 변절을 1919년 3월 1일의 행동에 소급하여 “그들은 그때부터 가짜였다”고 단정하는 것도 역사적으로 옳지 않다. 한 사람이 1919년에는 실제 위험을 감수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1930년대 이후에는 친일로 돌아설 수 있다. 역사적 인간은 일관된 영웅이나 일관된 악인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가장 정확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그들의 1919년 독립운동 참여는 실제였고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그 공로가 훗날의 친일행위를 면책하지는 않으며, 훗날의 변절이 1919년의 행위를 자동으로 허위로 만드는 것도 아니다.

종합 평론

신복룡의 글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3·1운동을 성화처럼 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민족대표와 학생·민중은 같은 목표를 공유했지만 같은 장소에서 같은 위험을 감수한 것은 아니었다. 대표들은 제한된 상징행동과 국제여론 환기를 구상했고, 학생과 시민은 거리에서 그 행동을 대중운동으로 전환했다. 3·1운동의 폭발력은 오히려 지도부의 계획을 넘어선 민중의 자발성에서 나왔다.

그러나 신복룡에게도 특유의 기울기가 있다. 그는 민족주의적 영웅화를 해체하려는 나머지 지도자들의 나약함, 불일치, 사후 변절을 전면에 배치한다. 그 결과 제한된 계획이라도 공개적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이름을 밝힌 행위가 당시에는 상당한 위험을 수반했다는 점이 작게 보일 수 있다.

신복룡이 그린 장면을 한 문장으로 평가하면 이렇다.

사건의 골격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세부 장면 가운데 일부는 논쟁적이며, 그것들을 연결해 “민족대표의 소극성과 인간적 한계”를 부각한 것은 신복룡 자신의 비판적 해석이다.

3·1운동은 33인이 만들어 민중에게 내려준 운동도 아니고, 33인이 아무 역할도 하지 않은 채 학생과 민중만이 만든 운동도 아니다. 민족대표가 점화 장치를 만들었고, 학생들이 불을 붙였으며, 이름 없는 민중이 그것을 전국적 항쟁으로 바꾸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균형 잡힌 해석이다.

이재봉 “주한미군 철수로 미국의 종속에서 벗어나자” 기독교한국신문 2501

이재봉 교수 “주한미군 철수로 미국의 종속에서 벗어나자” < 문화 < 기사본문 - 기독교한국신문
이재봉 교수 “주한미군 철수로 미국의 종속에서 벗어나자”
기독교사상 1월호 ‘특집- 미국 대통령 선거와 그 영향’ 주제로
 기자명기독교한국신문 
입력 2025.01.10 

대한기독교서회에서 발행하는 월간 「기독교사상」이 2025년 1월호를 발간하고, ‘특집- 미국 대통령 선거와 그 영향’을 주제로 다루며, 도널드 트럼프의 재선이 한반도와 세계에 미칠 영향을 심도 있게 분석했다.

류대영 함재봉의 기독교의 역할 비교

류대영 <새로 쓴 한국 기독교의 역사> 요약 평론 - Google Gemini

함재봉의 <한국 사람 만들기> 시리즈(특히 '친미기독교파')에 나타난 기독교관을 앞서 살펴본 류대영 교수의 시각과 비교하여 정리한 요약 평론입니다.

<근대적 한국인 형성과 기독교: 함재봉과 류대영의 시각 비교 평론>

<1. 서론: '한국인'을 묻는 두 가지 지적 경로>

현대 한국인의 정체성과 내면적 원형이 언제,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정치학자 함재봉과 역사학자 류대영은 모두 개화기 이후 유입된 '개신교'를 결정적 변수로 지목한다. 그러나 두 학자가 서구 기독교와 한국 근대사의 접점을 바라보는 문제의식과 가치 평가는 정반대에 가까울 정도로 선명하게 갈라진다.

함재봉은 <한국 사람 만들기>를 통해 조선이라는 유교적 전근대 사회의 한계를 돌파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적합한 근대적 주체, 즉 <친미기독교파>라는 새로운 인간형을 창출해 낸 '문명사적 도약'에 주목한다. 반면 류대영은 <개화기 조선과 미국 선교사>, <새로 쓴 한국 기독교의 역사> 등에서 그 이면에 도사린 미국 제국주의의 팽창 질서, 선교사들의 오리엔탈리즘적 인종주의, 그리고 조선인의 저항 의식을 거세한 '탈정치화와 순응주의'라는 구조적 그림자를 정밀하게 고발한다.

<2. 핵심 비교: 네 가지 쟁점>

<조선 말기의 현실 인식: 해방의 계기인가, 제국주의의 침투인가>

  • 함재봉의 시각: 19세기 말 조선을 유교적 신분제와 빈곤, 무기력이 지배하던 '문명적 막다른 골목(아비규환)'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서구 선교사를 통해 유입된 개신교는 조선인을 전근대적 예속에서 건져내어 개인의 존엄성, 만인 평등, 법치, 과학기술을 수용하게 만든 결정적인 '신의 한 수'이자 문명사적 구원의 통로였다.

  • 류대영의 시각: 조선 말기의 혼란을 인정하면서도, 선교사들의 등장을 서구 자본주의 및 미국 팽창주의(명백한 운명론)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한다. 선교사들이 베푼 시혜적 의료와 교육 이면에는 조선의 주권을 열강의 이권 각축에 종속시키고, 전통문화를 미개한 악습으로 단정하는 서구 중심적 패권주의가 작동하고 있었다고 비판한다.

<미국 선교사의 역할과 본질: 문명 전환의 촉매인가, 제국의 대리인인가>

  • 함재봉의 시각: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 초기 선교사들을 근대 서구 문명의 첨단 제도와 가치관을 이식한 '선구적 매개자'로 평가한다. 이들은 단순히 종교적 교리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영미권의 의회민주주의와 청교도적 직업윤리, 독립적 개인주의를 조선 청년들에게 주입함으로써 서재필, 윤치호, 이승만 같은 근대 엘리트를 길러냈다고 본다.

  • 류대영의 시각: 선교사들의 기록과 외교 문서를 바탕으로, 이들이 일본의 한반도 강점을 묵인한 미국 정부의 현실주의 외교에 철저히 공조했음을 실증한다. 선교사들이 내세운 '정교분리' 원칙은 실상 식민 지배 권력과 충돌을 피하고 자신들의 선교 기득권을 보존하기 위한 기만적 타협책이었음을 냉정하게 폭로한다.

<근대적 인간형(친미기독교파)의 성격: 자유민주주의 시민인가, 체제순응적 보수주의자인가>

  • 함재봉의 시각: 기독교를 수용한 한국인들이야말로 오늘날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끌어낸 '성공적인 한국인(친미기독교파)'의 원형이라고 규정한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기독교적 자각이 유교적 가부장제와 계급 의식을 타파하고 자조(self-help)와 자율성을 갖춘 근대 공화국 시민을 탄생시켰다는 해석이다.

  • 류대영의 시각: 1907년 평양대부흥 운동 등에서 극대화된 신앙 형태를 '내면화된 죄책 고백'과 '사회정치적 거세'로 분석한다. 식민지 현실과 국가적 모순에 저항해야 할 에너지를 탈정치화된 개인 영성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이후 한국 보수 기독교가 독재 정권과 미국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하는 맹목적 반공주의자로 귀결되는 토대를 놓았다고 진단한다.

<현대 한국 사회에 미친 유산: 번영의 원동력인가, 분열과 우경화의 기원인가>

  • 함재봉의 시각: 한국이 식민지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세계 10대 경제강국이자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우뚝 선 배후에는 서구 기독교 문명권과의 결합이 결정적이었다고 본다. 위정척사파나 친소공산주의파 등 다른 경쟁적 정체성과의 투쟁에서 친미기독교파가 주도권을 쥐었기에 번영이 가능했다는 긍정적 역사관이다.

  • 류대영의 시각: 기독교가 한국 사회의 물질적 성장에 편승하여 대형교회 중심의 기복신앙으로 변질되었으며, 냉전 체제 하에서 국가폭력과 손잡았던 역사적 과오를 성찰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 오늘날 한국 교회가 극우 포퓰리즘, 혐오 정치, 배타적 기독교 민족주의와 결탁하여 사회적 분열을 조장하는 위기에 직면했다고 비판한다.

<3. 종합 평론: 문명사적 결과론 대 비판적 사료주의의 긴장>

함재봉의 작업은 정치철학적 거대 서사의 매력을 지닌다. 유교 문명과의 단절을 통해 한국인이 어떻게 서구적 개인으로 변모했는가를 입체적으로 추적하며, 현대 대한민국의 번영을 낳은 사상적 원류로서 기독교를 재조명한다. 그러나 역사적 인과관계를 지나치게 목적론적·승리주의적으로 구성하여, 제국주의 침탈의 폭력성과 종교적 타협을 문명화의 불가피한 비용으로 단순화한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반면 류대영의 연구는 철저한 1차 사료 비판과 탈식민주의적 시각에 확고히 서 있다. 기독교가 지닌 신화를 해체하고 그 속에 얽힌 제국주의적 이해관계와 탈정치화의 기제를 객관적으로 드러냄으로써,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의 한계를 구조적으로 규명해 낸다. 다만 교회의 과오와 제국주의적 맥락에 분석의 초점을 맞추다 보니, 신앙을 통해 실존적 자유와 민족적 주체성을 획득하고자 했던 한국인 수용자들의 자발적 역동성을 다소 협소하게 다룬 측면이 있다.

결국 두 학자의 시선은 현대 한국인을 형성한 기독교라는 동전의 양면을 비춘다. 함재봉이 기독교를 통해 이식된 '근대 자유주의 문명의 씨앗'을 올려다본다면, 류대영은 그 씨앗이 배태되고 자라난 토양에 드리워진 '제국주의와 탈정치화의 깊은 그림자'를 내려다본다. 한국 근현대사의 심층과 한국인의 정체성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함재봉의 문명사적 통찰과 류대영의 엄정한 사료주의적 비판을 반드시 교차시켜 읽어야 한다.

함재봉 교수가 자신의 저서 <한국 사람 만들기> 시리즈의 집필 배경과 '친미기독교파'의 문명사적 계보를 직접 설명하는 강연인 함재봉 교수의 한국 사람 만들기 강연을 참고해 보실 수 있습니다. 유교 문명권이었던 조선 말기에 기독교와 서구 사상이 유입되면서 어떻게 새로운 유형의 한국인이 탄생했는지에 대한 그의 고유한 시각을 직접 확인하는 데 유익한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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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어떤 ‘한국인’을 만들었는가 — 함재봉과 류대영 비교>

두 사람을 나란히 읽으면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함재봉과 류대영 모두 기독교가 조선 말 한국사회에 단순히 ‘새 종교 하나’를 추가한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교육·문자·여성·신분·정치의식까지 바꾸는 중요한 힘이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어떤 한국인을 만들었는가’를 설명하는 방식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결론부터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함재봉에게 기독교는 <유교적 조선인과 구별되는 새로운 근대적 인간형, 즉 ‘친미기독교파 한국인’을 만들어낸 문명적 프로젝트>입니다.
류대영에게 기독교는 <한국인이 근대사회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개인·인민·여성·시민의 형성에 참여한 여러 역사적 힘 가운데 매우 중요한 하나>입니다.

즉 함재봉은 ‘인간형’을 강조하고, 류대영은 ‘역사적 과정’을 강조합니다.

1. 함재봉: 기독교는 새로운 <한국 사람>을 만든다

함재봉의 『한국 사람 만들기』 전체의 출발점 자체가 현대 한국인이 하나의 단일한 전통에서 나온 존재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그는 현대 한국인의 기저를 <친중위정척사파, 친일개화파, 친미기독교파, 친소공산주의파, 인종적 민족주의파>라는 다섯 경쟁적 인간형의 계보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함재봉에게 ‘기독교인’은 단순히 일요일에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의 독특한 세계관과 생활양식을 가진 새로운 한국인입니다.

그 형성과정을 그는 아주 길게 거슬러 올라갑니다.

<칼뱅 → 제네바 → 스코틀랜드 장로교 → 네덜란드 개혁교회 → 영국 청교도 → 미국 개신교 → 미국 선교사 → 조선 개신교인>

이라는 일종의 문명사적 계보입니다.

『한국 사람 만들기 3: 친미기독교파 1』에서 함재봉은 이 칼뱅주의가 조선에 들어왔을 때 단순한 신학을 전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일상을 개혁”했고, 주자성리학에 정면으로 도전한 일종의 <문명 충돌>이었다고 서술합니다.

그가 특히 주목하는 변화는 매우 구체적입니다.

신분제에 대한 도전, 남녀차별에 대한 도전, 근대교육과 의료, 한글 사용, 교회 구성원의 선거와 자치, 그리고 외부의 강제가 아니라 개인 스스로 규율을 받아들이는 ‘규율의 내재화’입니다. 실제로 책의 제3장 목차 자체가 <근대 의료 → 근대 교육 → 신분제에 대한 도전 → 남녀차별에 대한 도전 → 조선 최초의 선거와 자치 → 한글의 재창제 → 개종과 규율의 내재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함재봉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체의 변화>입니다.

유교적 조선에서는 사람의 자리가 가족·신분·성별·연령·군신관계에 의해 주어집니다. 반면 개신교에서는 개인이 직접 하나님 앞에 선다고 봅니다. 성경을 직접 읽고, 스스로 회심하며, 공동체의 지도자를 선출하고, 자발적으로 헌금하며,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규제합니다.

그래서 함재봉은 장로교의 장로 선출 같은 사건도 대단히 중요하게 봅니다. 그는 1887년 새문안교회에서 교인들이 장로를 선출한 사건을 조선 사람들이 자기 지도자를 직접 뽑은 매우 초기의 선거 경험으로 해석하고, 이를 장로교적 자치와 민주주의의 연관성으로 연결합니다.

함재봉에게는 따라서 다음과 같은 인과관계가 성립합니다.

<개신교적 개인 → 자치하는 교인 → 시민 → 민주주의적 한국인>

이것이 그의 <친미기독교파>론에서 가장 강한 주장입니다.

2. 류대영도 상당 부분 같은 현상을 본다

흥미로운 것은 류대영도 사실관계 차원에서는 함재봉이 지적하는 변화의 상당 부분을 인정한다는 점입니다.

류대영은 한말의 『죠션크리스도인회보』와 『그리스도신문』을 분석하면서 기독교 언론이 전근대적 ‘백성’이나 ‘신민’과 다른 새로운 개념으로 <인민>을 제시했다고 설명합니다.

이 인민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공정한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하고, 국가에 대해 주인의식과 공동체 의식을 갖는 존재였습니다. 또한 한글과 대중교육, 신문 보급이 그러한 새로운 인민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분석합니다.

따라서 두 사람을 여기까지만 보면 거의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문제함재봉류대영
신분질서기독교가 신분제에 도전자유·평등한 인민 개념 확산
문자한글을 통한 평민의 해방한글이 근대 인민·공동체 형성에 기여
교육근대적 인간을 만드는 핵심문명개화와 국민 형성의 수단
개인하나님 앞에 선 자율적 개인권리와 책임을 가진 인민
정치교회자치→민주주의 훈련근대국가·시민의식 형성에 기여
여성유교적 남녀질서에 도전여성의 활동영역 확대와 여성 주체 형성

그러므로 <기독교가 한국인의 근대적 주체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큰 명제에서는 두 사람이 상당히 가깝습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단계에서 갈라집니다.

3. 가장 큰 차이: 함재봉의 <단절>과 류대영의 <혼합>

함재봉은 유교와 개신교의 관계를 상당히 강하게 <대립과 단절>로 봅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주자성리학이 불교문명의 고려인을 무너뜨리고 ‘조선 사람’을 만들었듯이, 개신교가 주자성리학적 조선인에게 도전해 새로운 한국인을 만들어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의 대체 문명입니다. 그래서 ‘친미기독교파’라는 비교적 뚜렷한 인간형을 설정할 수 있습니다.

류대영에게는 상황이 훨씬 혼합적입니다.

그의 후기 연구에는 아예 <한국적 기독교>라는 범주가 있고, 대표적인 사례로 김교신을 <복음적 유자(儒者): 유교적-기독교적 정체성>이라는 제목으로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함재봉식으로 보면:

유교적 조선인 → 기독교로 개종 → 새로운 기독교적 한국인

이라는 전환이 강조됩니다.

류대영식으로 보면:

유교적·가족적·민족적 전통을 가진 조선인 + 미국 개신교 + 근대교육 + 민족주의 + 식민지 경험 → 여러 형태의 ‘한국적 기독교인’

입니다.

후자가 훨씬 잡종적(hybrid)입니다.

4. 두 번째 큰 차이: <미국>과 <기독교>를 얼마나 붙여놓는가

함재봉은 의도적으로 <친미기독교파>라고 부릅니다.

그에게 미국은 우연히 선교사를 파견한 나라가 아닙니다. 청교도·복음주의·장로교·민주주의·교육·시장경제·시민사회라는 문명적 복합체의 전달자입니다. 그래서 갑신정변 이후 일본식 근대화 프로젝트가 좌절된 뒤 미국식·기독교적 근대화가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고 설명합니다. 그의 최근 강연에서도 이를 일본식 근대화에서 미국식 기독교 근대화로의 일종의 ‘바통 터치’로 설명합니다.

류대영은 이 결합을 훨씬 조심스럽게 분해합니다.

『개화기 조선과 미국 선교사』에서 그는 <미국 정부 / 미국 선교사 / 조선 왕실 / 한국인 개종자>를 서로 다른 행위자로 구별합니다. 선교사들이 조선을 돕고자 했던 선의를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치외법권과 불평등조약이라는 제국주의적 질서의 혜택을 받았다는 사실을 동시에 봅니다.

그러므로 류대영에게는

<기독교 = 미국 = 근대 = 민주주의>

라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나는 류대영의 해석이 함재봉의 약점을 상당히 잘 보완한다고 생각합니다.

5. 세 번째 차이: 함재봉에게 ‘근대성’은 긍정적 성취, 류대영에게는 양면적 현상이다

함재봉의 서술에는 기독교가 봉건적 조선을 근대로 이끌었다는 상당히 강한 진보적 서사가 있습니다. 『한국 사람 만들기 3』의 책소개도 칼뱅주의가 유럽을 근대로 이끌었고, 그 전통을 가진 선교사들이 조선의 일상을 개혁했다고 명시합니다.

반면 류대영은 바로 그 ‘문명개화’의 어두운 면까지 추적합니다.

그가 분석한 기독교 신문들은 자유·평등·인권·한글·교육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문명개화론에는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이 들어 있었습니다. ‘문명국/야만국’, ‘진보한 민족/뒤처진 민족’이라는 위계가 있었고, 류대영은 바로 이런 세계관 때문에 일부 미국 선교사들이 훗날 일본의 조선 지배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이것은 두 사람의 차이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함재봉은 묻습니다.

“개신교가 어떻게 조선인을 근대인으로 만들었는가?”

류대영은 한 가지 질문을 더 붙입니다.

“그들이 말한 ‘근대인’과 ‘문명’이라는 개념 자체에는 어떤 권력과 제국주의적 전제가 들어 있었는가?”

6. 그래서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기독교적 한국인’도 다르다

함재봉의 <친미기독교파 한국인>을 이상형(ideal type)으로 재구성하면 이런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개인으로 서며, 신분보다 개인의 존엄을 중시하고, 남녀교육을 받아들이며, 한글로 읽고 쓰고, 자발적 결사에 참여하고, 대표를 선출하고, 스스로 규율하며, 미국적 자유주의·민주주의·근대 문명에 친화적인 사람입니다.

반면 류대영에게서 등장하는 기독교적 한국인은 그렇게 하나의 유형으로 정리하기 어렵습니다.

윤치호도 기독교인이고, 독립운동가도 기독교인이며, 친일적 기독교 지도자도 있고, 농촌운동가도 있으며, 김교신 같은 유교적 기독교인도 있고, 여성운동가도 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하나의 ‘완성된 인간형’을 수입했다기보다 새로운 언어와 제도를 제공했고, 한국인들이 그것을 서로 다르게 사용했습니다.

여기에서 나는 두 사람의 차이를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함재봉은 기독교가 한국인을 ‘만들었다’고 강조하고, 류대영은 한국인이 기독교를 받아들여 자신을 ‘다시 만들었다’고 강조한다.>

7. 그런데 두 관점을 합치면 오히려 더 좋은 설명이 된다

나는 이 두 설명을 어느 하나만 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함재봉의 장점은 <기독교가 인간의 일상을 얼마나 깊숙이 바꾸었는가>를 매우 예리하게 포착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단지 예수를 믿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글을 배워라. 성경을 직접 읽어라. 술과 도박을 끊어라. 딸도 학교에 보내라. 첩을 두지 마라. 헌금하라. 회의에 참석하라. 장로를 선출하라. 다른 신분의 사람과 함께 예배하라.”

이런 실천을 계속 요구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정말로 새로운 <habitus>, 즉 새로운 생활습관을 가진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류대영의 설명을 붙이지 않으면 함재봉의 이야기는 지나치게 매끄러운 <칼뱅 → 미국 → 선교사 →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직선적 계보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실제 역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한국 개신교는 민주주의자를 만들었지만 권위주의자도 만들었습니다. 신분평등을 가르쳤지만 교회 안에 새로운 위계도 만들었습니다. 여성교육에 크게 기여했지만 가부장적인 교회도 만들었습니다. 민족독립운동에 참여했지만 식민권력에 협력하기도 했습니다. 자유를 가르쳤지만 강력한 반공주의와 국가주의와 결합하기도 했습니다.

류대영은 바로 이 <모순>을 더 잘 보여줍니다.

결론: 나는 이렇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두 사람의 차이를 하나의 도식으로 압축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함재봉>
칼뱅주의 → 미국 개신교 → 선교사 → 조선의 일상혁명 →
개인·평등·교육·한글·자치·민주주의 → <친미기독교파라는 새로운 한국인>

반면

<류대영>
미국 개신교 + 제국주의적 국제질서 + 조선의 사회구조 + 한국인의 능동적 수용 + 민족주의·유교·식민지 경험 →
다양한 형태의 <한국적 기독교인>

따라서 제가 보기에는 <‘한 유형의 한국인’을 설명하는 이론으로서는 함재봉이 훨씬 대담하고 선명하고, 실제 역사적 인간의 복잡성을 설명하는 데에는 류대영이 더 설득력 있습니다.>

특히 함재봉의 가장 흥미로운 통찰은 <기독교를 믿음의 내용이 아니라 인간을 훈련하는 사회제도로 본 것>입니다. 반면 류대영의 가장 중요한 교정은 <그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모두 같은 인간이 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둘을 결합하면 한국 근현대사의 매우 중요한 하나의 인간형을 다음처럼 정의해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적 근대 한국인>은 하나님 앞의 개인, 교육받은 평민, 한글 독자, 자발적 결사체의 구성원, 민족국가의 시민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동시에 획득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교적 가족주의를 완전히 버리지 않았으며, 민족주의·미국주의·반공주의·민주주의를 시대에 따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결합했다.

이 마지막 문장이 함재봉의 <친미기독교파>를 류대영의 역사학으로 보정했을 때 나타나는, 가장 현실적인 ‘한 유형의 한국인’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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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마르크스를 읽어야 할 때 - 그가 선택한 인간 구원의 길 류대영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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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조선과 미국 선교사 류대영 2004

 개화기 조선과 미국 선교사

류대영 (지은이)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2004




목차

간행사 : 윤경로
또 한 그루의 나무를 심으며 : 류대영

시작하면서

제 Ⅰ 부 미국의 한반도 진출과 미국 선교사

제 1 장 미국의 한반도 진출
1. 미국의 북태평양과 동아시아 진출
2. 조선의 개항과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입장
1) 조선의 개항
2)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입장
3. 조선에 온 미국 : 환상과 실체
1) 환상의 근원
2) 환상의 실체

제 2 장 미국 선교사와 미국 정부
1. 선교사와 미국의 한반도 정책
1) 선교의 자유에 대한 미국 정부의 태도
2) 미국 정부, 미국 선교사, 그리고 조선 정부
2. 선교사의 정치개입 문제
1) 국무부의 입장과 1897년 경고 회람
2) 회람 이후 독립협회 사태까지

제 Ⅱ 부 불평등 조약, 치외법권, 그리고 선교사업

제 3 장 초기 조약들과 기독교 선교의 문제
1. 개항과 기독교 전파의 문제
1) 일본, 서양, 그리고 기독교
2) 조미수교와 척사론
2. 조미조약 체결과 기독교 문제
1) 수교 협상과 "불립교당"문제
2) 고종 및 양무적 관료들의 기독교관
3. 조영조약과 미국 선교사의 조선 진출
1) 조영조약이 보여준 변화
2) 미국 선교사들의 조선 진출
4. 조불조약과 그 파급효과
1) 조불조약 체결과 신교의 자유 문제
2) 조불조약 이후

제 4 장 치외법권, 내지거주, 그리고 선교사업
1. 여권과 치외법권
1) 여권과 내지여행
2) 치외법권과 내지거주 문제
2. 막을 수 없는 불법, 넓혀지는 과정
1) 1888년의 선교금지 조치
2) 풀려 가는 기독교 금지
3. 대구(1890~1901)
1) 사건의 자연스런 시작
2) 사건의 불가피한 결말

제 Ⅲ 부 미국 선교사와 제국주의 침략기의 조선 정치

제 5 장 왕실과 미국 선교사
1. 민왕후 시해부터 춘생문 사건까지
1) 왕을 지키려는 선교사들
2) 사건 이후
2. 의화군 문제
3. 고종과 민왕후, 그리고 선교사들의 계산
1) 교차하는 이해관계
2) 부국강병을 위하여
3) 왕권을 위하여

제 6 장 개화, 제국주의 침략, 그리고 미국 선교사
1. 급진 개화파와 미국 선교사
1) 김옥균
2) 박영효와 서광범
3) 개화자강, 일본, 그리고 기독교
2. 기독교 개혁가들과 미국 선교사
1) 서재필과 윤치호
2) 국내 개종자들
3. 미국 선교사와 일본 제국 주의 침략
1) 망해가는 나라, 구원받는 영혼들
2) 대부흥, 그리고 국권상실

맺으면서
에필로그
참고문헌
찾아보기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류대영 (지은이)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버지니아의 유니언신학교와 하버드대학교를 거쳐 밴더빌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성서 신학, 기독교 역사, 미국사를 주로 공부했다. 서양사학적 방법론으로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조명하는 일에 중점을 두면서, 《새로 쓴 한국 기독교의 역사》(2023), 《한국 기독교 역사의 재검토》(2019),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2009), 《개화기 조선과 미국 선교 사》(2004), 《북한 종교의 새로운 이해》(공저, 2002), 《초기 미국 선교사 연구》(2001), Protestant Christianity in Modern Korean History(Institute of the History of Christianity in Korea, 2026), A History of Protestantism in Korea(Routledge, 2022) 등의 책을 출간했다. 한동대에서 기독교, 역사, 고전을 가르치다 은퇴했다. 접기

최근작 : <다시, 마르크스를 읽어야 할 때>,<새로 쓴 미국 종교사>,<새로 쓴 한국 기독교의 역사> … 총 16종 (모두보기)



마이리뷰


    
동상이몽..  

450여쪽의 내용을 어느 것 하나 낭비되는 글 없이 꽉꽉 채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읽는이로 하여금 쉽지 않는 길을 걷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길은, 참고 걸어가서 그 종국에 이르렀을 때 쓰여진 내용을 꽉 채우고도 넘치도록 부어지는 듯한 깨달음, 통찰, 배움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가능한 것일게다. 이 책은 그렇게 꽉 채워져 있고, 또 채워지도록 한다. 마지막 결론 부분을 읽는 것은 딱딱한 역사로도 가슴이 설레이게 만들 수 있구나 하는 느낌을 안겨주었다. 참 잘 읽었다. 이 모든 내용을 머리 속에 다 기억하고 언제든 꺼내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구한말 문명개화를 꾀하고자했던 조선 조정, 고종과 그를 둘러싼 여러 정치 세력들의 움직임과 조선을 향하고 있는 세계 열강들, 그런 것과는 아랑곳이 종교적 열심을 최우선에 안고 영혼구령의 열정으로 기독교 선교의 기치를 올렸던 미국의 선교사들, 이들의 역학관계가 보여주는 제국주의적 힘의 구도. 미국 선교사들이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보여준 서구 문명의 영향력과 그것을 받아들인 조선의 지식인들의 다른 꿈, 조선의 미래를 향했던 그들의 노력과 선교사들의 종교적 희망이 빚어내는 또 다른 갈등 양상. 이것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지면서 개화기의 역사가 총체적으로 드러난다. 때로는 거대한 담론으로 그러나 때로는 한 개개인의 세세한 이야기들을 통해서. 이렇게 적어가면서도 한숨이 나오는 것은 이것만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꽉찬 알맹이들 때문이다.

USA 라는 나라에 대한 아련한 동경이 만들어낸 미국이라는 이름을 보더라도 한국에게 있어 미국은 뭔가 아름다움의 대상, 추구의 대상이 되어온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것이 가깝게는 6.25를 겪으면서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통해 극단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생산되고 고착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실상 그러한 이미지, 실제적 영향력은 그 오래전부터 역사의 흔적 가운데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유산처럼 쌓여진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개화기 조선에 들어온 미국 선교사들과 그들이 행한 인도적 차원, 종교적 차원의 여러 가지 일들이 양산한 긍정적 이미지들과, 철저히 상업적 자본주의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가운데 정치적 제국주의의 침략을 피해가며 정교분리의 허울을 통해 선한 나라의 이미지를 쌓아간 미국 국무부와 한국 주재 공사관의 노력은 이미 조선 조정에게 미국에 대한 환상을 낳기에 충분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반 조선 민중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100여년지 훌쩍 지난 지금도 여전히 미국을 외치고 미국을 따라가기에 여념이 없는 한국의 현실은 개화기에서부터 이미 그 역사적 노정을 암시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환상은 너무나 순진해 보인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쩌면 인간은 알면서도 애써 그 앎을 무시하면서 환상을 추구하며 사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앎 자체가 없을 경우도 허다하겠지만. 그래서 앎을 두려워하는지도 모른다. 알아버리는 순간, 환상의 묘약은 사라져 버리니. 현실을 마주하기에는 내가 감당해야할 책임이 너무나 커 보이기에.

그루터기 2010-01-12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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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조선과 미국 선교사: 요약과 평론>

<1. 서론: 신화화된 초기 선교의 탈구축>

류대영의 <개화기 조선과 미국 선교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4)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개화기 조선에 진출한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의 활동과 사상을 역사학적·사회정치학적 시각에서 엄밀하게 분석한 역작이다. 오랫동안 한국 교계의 주류 담론은 초기 미국 선교사들을 조선의 암흑기를 밝힌 순수한 복음 전파자이자 근대화의 은인으로 묘사해 왔다. 반면 민족주의 진영 일각에서는 이들을 제국주의 침략의 앞잡이로만 규정하는 단선적 시각에 머물렀다. 저자는 이러한 이분법적 신화를 탈피하여, 당시 미국 사회의 지적·신학적 배경과 미국의 동아시아 외교 정책이라는 거시적 맥락 속에서 선교사들의 실제 궤적을 객관적으로 복원한다.

<2. 핵심 내용 요약>

<미국 제국주의 팽창과 선교 운동의 태동> 19세기 후반 미국은 서부 개척을 완료하고 산업화를 거치며 대외 팽창주의로 전환하던 시기였다. 이때 미국의 대외 선교는 단순한 종교적 열정을 넘어,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 담론과 백인의 문명화 사명(White Man's Burden)이라는 문화적 제국주의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조선에 파견된 북장로회와 북감리회 선교사들은 보수적 복음주의 신학과 함께 서구 문명에 대한 절대적 우월감을 내면화한 인물들이었다.

<조선 조정의 수용 전략과 초기 접촉> 고종과 조선 정부는 기독교 신앙 자체를 원했다기보다는, 서구 열강의 군사적·외교적 지원과 근대 기술 도입을 위한 지렛대로 선교사들을 활용하고자 했다. 알렌(Horace N. Allen),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등 초기 선교사들은 병원과 학교 설립을 통해 합법적 거점을 확보했다. 선교사들은 조선 왕실의 신임을 얻어 정치적 조언자 역할을 수행하는 한편, 미국 외교관이나 사업가들과 결탁하여 이권 개입에 관여하기도 했다.

<정교분리 원칙의 기만성과 비정치화 전략>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며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격변하자 선교사들의 태도는 급격히 변화했다. 초기에는 조선의 주권과 개혁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으나, 미국 정부가 가쓰라-태프트 밀약 등을 통해 일본의 조선 지배를 묵인하는 현실주의 외교 노선을 채택하자 선교사 다수 역시 이에 순응했다. 선교사들은 한국인 신자들에게 '정교분리'와 '세속 권력에 대한 복종'을 강력히 주입했다. 이는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원칙이라기보다는, 일본이라는 새로운 지배 권력과 마찰을 피하고 선교 기득권을 보존하기 위한 현실적 타협이었다.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으로 대표되는 개인 영성과 죄책 고백 중심의 신앙 부흥은, 정치적 파국 앞에서 교인들의 사회정치적 에너지를 내면화하고 탈정치화하는 효과를 낳았다.

<선교사들의 조선관: 인종주의와 오리엔탈리즘> 저자는 선교사들이 본국에 보낸 편지와 보고서, 잡지 기고문을 면밀히 추적하여 그들의 내면에 자리 잡은 조선관을 폭로한다. 그들은 조선의 전통문화와 종교를 '미신적이고 열등한 것'으로 단정했으며, 조선인을 '게으르고 무기력하며 도덕적으로 타락한 미개인'으로 타자화했다.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은 일본의 식민 통치가 조선의 봉건적 후진성을 극복하는 데 오히려 유익할 수 있다는 인식으로 이어지는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3. 비판적 평론>

<사료의 엄밀성과 탈식민주의적 통찰> 이 책의 가장 독보적인 학문적 기여는 미국 측 1차 사료(미국 해외선교본부 문서, 선교사 일기, 서신, 외교관 기록 등)를 철저하게 발굴하여 교차 검증했다는 점이다. 감상적인 일화나 회고록에 의존하지 않고, 선교사들이 실제로 어떤 언어로 본국과 소통했고 조선 사회를 어떻게 규정했는지를 실증적으로 증명했다. 이는 한국 교회사 연구가 서구 선교사의 시선에 포섭되어 있던 '식민화된 지식'을 탈피하여 주체적이고 비판적인 역사학으로 도약했음을 보여준다.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의 기원 규명> 이 저작은 오늘날 한국 보수 교회의 지배적 특성인 친미주의, 근본주의적 문자주의, 그리고 사회적 모순에 침묵하는 개인 구원 중심주의가 어디서 배태되었는지를 역사적으로 규명한다. 미국 선교사들이 이식한 '정치와 종교의 분리' 담론이 실상은 체제 순응적 이데올로기였음을 밝혀냄으로써, 한국 기독교가 현대사에서 독재와 불의에 순응했던 구조적 기원을 설득력 있게 설명해 낸다.

<아쉬움과 한계> 다만 선교사들의 인식과 지배 질서에 연구의 초점을 맞추다 보니, 그들과 접촉했던 한국인 수용자들의 능동적 반응과 번안 과정은 상대적으로 덜 부각되었다. 한국인들은 선교사들의 서구 중심주의를 단순히 맹종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통해 평등사상을 발견하고 이를 계몽운동이나 민족운동의 동력으로 독자 변용한 측면이 존재한다. 선교사와 한국인 주체 사이의 복합적인 상호작용과 긴장 관계를 더 두텁게 다루었더라면 한층 더 입체적인 통사가 되었을 것이다.

<4. 결론>

<개화기 조선과 미국 선교사>는 한국 개신교의 출발점에 드리워진 제국주의적 그림자와 타협의 흔적을 냉정하게 직시하도록 이끄는 기념비적 저술이다. 선교사들을 무조건적 성자로 칭송하는 교조적 역사관과 이들을 침략자로 매도하는 단순한 민족주의를 모두 넘어서, 근대 전환기 종교와 제국이 교차한 복합적 실상을 정직하게 응시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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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대영, 『개화기 조선과 미국 선교사』 — 1,000단어 요약·평론>

류대영의 『개화기 조선과 미국 선교사: 제국주의 침략, 개화자강, 그리고 미국 선교사』는 2004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출간된 505쪽의 연구서다. 1880년대 개항기부터 1910년 국권상실까지 미국 선교사들을 단순한 종교인으로 보지 않고, 조선·미국·일본이라는 국제정치의 삼각관계 속에서 분석한다. 전체는 <미국의 한반도 진출과 미국 선교사>, <불평등조약, 치외법권, 그리고 선교사업>, <미국 선교사와 제국주의 침략기의 조선 정치>의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을 관통하는 질문은 비교적 명확하다.

“개화기 미국 선교사들은 제국주의의 대리인이었는가, 조선의 근대화와 독립을 돕는 사람들이었는가, 아니면 복음전도를 가장 우선시했던 종교인이었는가?”

류대영의 대답은 어느 하나가 아니라 “이 세 가지 성격이 서로 얽혀 있었다”는 것이다.

<1. 조선이 기대했던 미국과 실제의 미국>

책의 첫 부분에서 류대영은 미국 선교사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미국의 태평양 진출부터 설명한다. 미국은 대륙 팽창 이후 태평양을 건너 중국과 동아시아 시장으로 진출했고, 조선과의 관계도 이러한 미국의 확대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단순히 ‘우호적인 두 나라의 만남’으로 보지 않는다.

여기서 저자가 흥미롭게 분석하는 것이 조선 지배층의 ‘미국에 대한 환상’이다. 청·일본·러시아 사이에서 생존해야 했던 조선은 멀리 떨어져 있고 직접적인 영토 야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미국을 잠재적인 보호자로 생각했다. 특히 고종과 개화파 가운데 일부는 미국이 일본이나 러시아를 견제해 조선의 독립을 지켜줄 수 있다고 기대했다.

그러나 실제 미국 정부에게 조선은 핵심적인 전략적 이해관계가 아니었다. 미국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일본과 충돌할 생각이 없었다. 결국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과정에서도 미국은 이를 저지하지 않았다.

따라서 류대영은 ‘조선이 생각한 미국’과 ‘실제 미국의 국익’ 사이의 간극을 강조한다. 이것은 선교사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하다. 조선인은 미국 선교사를 단순히 목사나 의사로만 보지 않고 거대한 서양 강국 미국과 연결된 사람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2. 선교사와 미국 정부는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류대영은 여기서 곧바로 “선교사=미국 제국주의”라고 결론짓지 않는다.

오히려 미국 정부와 미국 선교사 사이에 상당한 긴장이 있었다고 강조한다. 미국 국무부는 선교사들이 조선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여 외교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특히 1897년 국무부가 선교사들의 정치개입을 경고한 회람을 보낸 사실을 중요하게 다룬다. 책이 제2장 전체를 <미국 선교사와 미국 정부>에 할애하는 이유다.

선교사들 역시 하나의 통일된 집단이 아니었다. 알렌처럼 외교와 경제적 이해관계에 깊이 관여한 사람도 있었고, 언더우드·아펜젤러·헐버트처럼 교육·선교·한국 문제에 각각 다른 방식으로 참여한 사람들도 있었다.

따라서 선교사와 미국 정부를 동일시하면 당시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들이 미국의 힘과 무관했던 것도 아니다. 이것이 류대영의 중요한 지적이다.

<3. 치외법권이라는 선교의 ‘보이지 않는 보호막’>

이 책에서 특히 뛰어난 부분은 선교 확대를 단순히 ‘복음의 열정’으로 설명하지 않고 불평등조약과 치외법권이라는 국제정치적 조건을 연결한 것이다.

1882년 조미조약 자체는 미국 선교사들에게 조선에서 자유롭게 전도할 권리를 보장한 조약이 아니었다. 이후 조영·조불조약 등과 최혜국조항의 적용을 통해 외국인의 종교활동 영역이 조금씩 넓어졌다. 초기 미국 선교사들은 정식으로 선교할 자유를 확보하기 전 교육과 의료사업을 통해 활동공간을 만들었다.

그런데 선교사들은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았다. 조선 정부의 법적·행정적 통제력이 그들에게 완전히 미치지 못했다. 내지여행과 거주도 원칙과 현실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선교사들은 때로는 기존 조약의 범위를 넘어서 활동했고, 조선 정부는 그러한 활동을 충분히 통제하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이미 벌어진 사실이 관행이 되고 관행이 새로운 권리가 되는 식으로 선교 영역이 넓어졌다. 저자가 제4장에 <막을 수 없는 불법, 넓혀지는 지평>이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을 붙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는 기독교 선교와 제국주의의 관계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선교사가 반드시 제국주의 침략을 의도해야만 제국주의와 관계되는 것은 아니다. 선교사는 개인적으로 조선을 사랑하면서도 서구 열강이 만든 불평등한 국제질서로부터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4. 고종은 왜 선교사들과 가까워졌는가>

류대영은 선교사와 조선 왕실의 관계도 낭만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명성황후 시해 이후 고종은 자신의 신변과 왕권 자체가 위험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서양인 선교사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일종의 보호막이 될 수 있었다. 실제로 일부 선교사는 왕실과 매우 가까운 관계를 형성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것을 고종이 기독교에 특별한 신앙적 호감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지 않는다.

고종에게 선교사들은 서양의 의료·교육·기술과 미국이라는 외교적 자원을 연결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즉 ‘부국강병’과 왕권 보존에 필요했다.

반대로 선교사들에게도 왕실과의 관계는 유리했다. 왕실과 가까워질수록 기독교와 선교사업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고 활동영역도 확대되었다.

따라서 류대영은 고종과 선교사의 관계를 ‘서로 호감을 가진 좋은 사람들의 만남’보다 ‘상호 이해관계가 교차한 관계’로 본다. 책의 목차도 이를 정확하게 <고종과 민황후, 그리고 선교사들의 계산―교차하는 이해관계>라고 표현한다.

<5. 김옥균·서광범·서재필·윤치호와 기독교>

책 후반은 내가 보기에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류대영은 개화와 기독교의 관계를 추적하기 위해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윤치호 등을 등장시킨다.

이들에게 기독교는 반드시 처음부터 개인적 신앙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19세기 말 동아시아에서 기독교는 ‘서양 문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교육·과학·의학·개인의 권리·남녀관계·국민교육·사회개혁 등이 기독교라는 통로를 통해 들어왔다. 따라서 일부 개화파에게 기독교는 조선을 부강하게 만들 수 있는 문명적 자원이었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 모순이 있다.

서구 문명을 받아들여야 일본의 지배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서구 문명 자체가 제국주의적 세계질서의 산물이기도 했다. 일본 역시 서구식 근대화를 통해 제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화=서구화=기독교=독립’이라는 단순한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6. 가장 역설적인 장면―‘대부흥과 국권상실’>

책의 마지막 부분은 1900년대 일본의 한국 병합 과정과 기독교의 급성장을 함께 바라본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을 전후하여 한국 개신교는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기에 대한제국은 일본에게 외교권과 주권을 빼앗기고 있었다.

류대영은 이 두 사건을 단순한 우연으로 보지 않는다.

일부 선교사들은 정치적 독립운동보다 개인의 회개와 영혼구원을 강조했다. 미국 정부 역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과 대결할 뜻이 없었다. 따라서 국권을 회복하려는 한국인들의 정치적 열망과 선교사들이 요구하는 비정치적·종교적 신앙 사이에는 긴장이 생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부흥운동을 ‘민족운동을 무력화한 친일적 종교운동’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류대영의 입장은 아니다. 부흥운동을 통해 형성된 교회조직, 교육, 문해력, 공동체, 지도자들은 이후 독립운동의 중요한 사회적 기반이 되기도 했다.

결국 ‘망해가는 나라’와 ‘구원받는 영혼’이 동시에 존재했다. 책 마지막 소제목인 <망해가는 나라, 구원받는 영혼들>, <대부흥, 그리고 국권상실>은 이 책 전체의 문제의식을 응축한다.

<평론―‘선교사=제국주의자’와 ‘선교사=한국의 은인’을 동시에 넘어선다>

이 책의 가장 큰 학문적 장점은 두 가지 상반된 한국 근대사의 기억을 모두 비판한다는 데 있다.

보수적 한국 교회사에는 언더우드·아펜젤러·알렌·헐버트 등을 한국을 위해 희생한 선교사로 기억하는 전통이 강하다. 반대로 탈식민주의적 해석에서는 선교사를 서양 제국주의의 문화적 선봉대로 보는 경향이 있다.

류대영은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않는다.

미국 선교사들이 의료·교육·출판과 새로운 사상을 전하고 조선인들과 깊은 인간적 관계를 형성했으며, 일부는 일본의 침략에 비판적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동시에 그들이 치외법권을 가진 특권적 외국인이었으며 서양 문명의 우월성을 상당 부분 당연시했고, 미국의 힘이 만들어준 안전한 공간에서 활동했다는 사실도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선교사를 “제국주의의 앞잡이였는가, 한국의 은인이었는가?”라고 묻는 것 자체가 잘못된 질문일 수 있다.

한 사람이 조선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문명적 우월의식을 가질 수 있었고, 일본의 침략을 반대하면서도 미국의 제국주의적 세계질서에는 별다른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있었으며, 한국인의 독립을 동정하면서도 선교사업을 보호하기 위해 정치적 중립을 요구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2004년 출간 당시의 서평에서도 이 책은 선교사를 목사에 한정하지 않고 의사·교사·정치고문·외교적 행위자로 조명하고, 국내에서 충분히 활용되지 않았던 방대한 영문 자료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반면 북·남장로회, 북·남감리회 등 미국 선교사 내부의 차이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으며, 미국 선교사와 캐나다·호주 선교사의 차이도 더 분석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새로 쓴 한국 기독교의 역사』와 연결해서 보면>

앞에서 살펴본 2023년의 『새로 쓴 한국 기독교의 역사』와 함께 읽으면 류대영의 문제의식이 더욱 선명해진다.

2004년의 이 책에서 이미 류대영은 한국 기독교사를 ‘선교사 영웅사’에서 떼어내 국제정치사와 사회사 속에 집어넣고 있었다. 2023년 책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선교사 중심의 역사 자체를 줄이고 한국인 신자들의 능동적 역할을 더욱 강조한다.

따라서 두 책 사이에는 약 20년에 걸친 하나의 지적 이동을 볼 수 있다.

<2004년>: “미국 선교사들은 실제로 어떤 국제정치적 조건 속에서 행동했는가?”

에서

<2023년>: “그렇다면 한국 기독교를 왜 선교사를 중심으로 이야기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으로 이동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세진 님이 최근 읽고 계신 신복룡의 ‘외부의 시선으로 본 조선’ 및 함재봉의 개화기 해석과 연결하면 이 책은 특히 중요하다. 미국 선교사가 본 조선은 단순한 관찰자의 조선이 아니었다. 그들은 조선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동시에 조선 사회 자체를 변화시키는 행위자였다. 그래서 이들의 기록에는 ‘조선의 실제 모습’과 ‘문명화되지 않은 조선을 바라보는 19세기 미국 개신교인의 시선’이 겹쳐 있다.

결국 『개화기 조선과 미국 선교사』가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의 근대화는 서양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한 자강의 과정이었지만, 그 자강에 필요한 지식·제도·종교 자체가 제국주의적 세계질서를 통해 들어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침략’과 ‘근대화’를 어디까지 분리해서 말할 수 있는가?”

바로 이 역설 때문에 이 책은 일반적인 한국 교회사보다 오히려 신복룡·함재봉·헐버트·하야시 다다스·무쓰 무네미쓰 등을 함께 읽고 있는 현재의 독서 흐름에 더 잘 맞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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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쓴 미국 종교사 류대영 2024

 새로 쓴 미국 종교사

류대영 (지은이)푸른역사2024-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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