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09

헐버트 회고록 | 호머 B. 헐버트 2026

헐버트 회고록 | 호머 B. 헐버트 | 알라딘


헐버트 회고록
호머 B. 헐버트 (지은이),옥성득 (옮긴이)푸른역사2026


























미리보기



책소개
호머 B. 헐버트는 한국 근대사의 산 증인 중 한 명이다. 23세이던 1886년 한국 최초의 근대적 공립학교인 육영공원의 교사로 초빙되어 와서 1909년 일제에 의해 추방되기까지 이 땅에 머물렀다는 이유만이 아니다. 단순히 체류한 게 아니었다. 선교사이기도 했고, 한국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를 저술한 교육자, 《코리아 리뷰》를 발행하고 《독립신문》 영문판을 만든 언론인, 한글과 드라비다어의 유사성에 주목한 언어학자 등 다양한 얼굴로 조선의 개화에 기여했다.

무엇보다 대한제국의 국권 수호를 위해 평생 헌신한 ‘대한미국인’이었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 사살 후 일경에게 취조받던 안중근 의사가 “조선 사람이면 단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평가했을 만큼 헐버트의 한국 사랑은 치열했다. 이제는 국사 교과서에서조차 두어 번 언급하고 지나치고 말아서는 결코 안 되는 인물이란 뜻이다.

이 책은 헐버트 박사가 1886년부터 193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겪은 파란만장한 삶과 국제 정세에 관한 통찰을, 1920년대부터 1932년 말까지 타자기로 작성한 자서전이다. 편역자는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원고를 어렵게 확보하여 일부 희미한 본문을 완성하고, 350개의 역주와 관련 사진을 더해 90여 년 만에 우리 근대사의 핵심 사료를 선보이게 되었다.

제1권은 육영공원 시험 등 본인의 체험담과 을미사변에 가담한 일본 낭인에 대한 판결문 등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당대의 굵직한 사건을 짚는 한편 실패한 고종 밀사 역할 등 한국의 국권 수호를 위한 이방인의 분투를 담았다. 아관파천에 대한 재조선 외국인들의 반응 등 한국 근대사를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데 도움을 주는 내용이 그득하다. 제2권은 미국에서 과거와 현재를 회고하면서, 일본의 야욕으로 초래된 동양의 위기와 서구의 책임을 다룬 정치철학서로 헐버트의 통찰력을 보여준다.


목차


01 한국의 부름과 독립을 위한 여정, 1886~1919년
◦ 편역자 서문 005 | ◦ 헐버트의 생애 010
◦ 연보 016 | ◦ 저자 서문 025

1부 한국과의 첫 만남
1장 한국으로의 첫 항해: 1886년 5월
2장 일본에서 한국으로: 안개 속의 항해
3장 제물포에서 서울까지: 1886년 7월
4장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갈등
5장 서울에서의 첫 여름: 1886년
6장 육영공원, 첫 세례, 한국 고대사 연구
7장 한국어와 드라비다어 비교 연구
8장 일본 내륙 여행: 1887년 여름
9장 한국어와 일본어의 기원
10장 결혼을 위해 캐나다를 거쳐 미국 방문: 1887년

2부 격동의 세계와 한국의 위기
11장 뉴욕의 결혼식과 평양 탄광 조사: 1889~1890년
12장 아시아 여행 기록: 1891년 12월~1892년
13장 성지와 유럽 여행: 1892~1893년
14장 감리교 선교사로서 서울 귀환: 1893년 10월
15장 한국의 야생동물과 민속놀이
16장 청일전쟁: 1894~1895년
17장 일본의 왕비 시해: 1895년 10월 8일
18장 을미사변의 결과: 1895년
19장 선교사들의 고종 호위: 1895년 10~11월
20장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피신: 1896년 2월~1897년 2월

3부 제국주의의 올가미와 고종 황제 밀사의 길
21장 개혁의 여명: 《독립신문》, 독립협회, 사범학교: 1896~1898년
22장 《코리아 리뷰Korea Review》 창간: 1901년
23장 독립협회의 좌절과 시베리아 횡단 여행: 1903년
24장 러시아 풍경과 《타임스Times》 특파원 위촉: 1903년
25장 러일전쟁과 파괴된 동양 평화: 1904년
26장 고종 황제의 밀사로 워싱턴행: 1905년
27장 백악관의 배신과 외교의 내막: 1905년
28장 을사늑약과 한국인을 위한 투쟁: 1905년
29장 헤이그 특사 지원과 최후의 외교 원정: 1907~1909년
30장 한일병합과 파리 강화회의: 1910~1919년
31장 국제연맹의 명암과 새 국제 질서의 모색: 1919~1932년

02 일제의 무단 통치와 정의를 위한 제언: 1853~1932년

1부 일제의 부상과 한국의 수난
1장 미국과 일본의 첫 조우: 1853~1854년
2장 일본의 급격한 변모 뒤에 숨은 비밀: 1854~1877년
3장 새로운 일본의 탄생과 야망
4장 정한론의 서막
5장 미국의 작은 전쟁, 신미양요: 1871년
6장 ‘은둔국’의 개방과 갑신정변: 1876~1884년
7장 왕비 시해의 전말: 1895년
8장 대한제국 수립과 영일동맹의 지정학: 1896~1902년
9장 러일전쟁, 극동 패권의 지각 변동: 1904~1905년
10장 을사늑약과 ‘보호정치’의 시작: 1905년
11장 통감부의 주권 침탈 심화: 1906~1907년
12장 헤이그 특사와 고종 황제의 양위: 1907년

2부 무단 통치의 실상과 독립의 외침
13장 일제의 탄압과 교회의 시련
14장 일제의 탄압과 교회의 저항
15장 한일병합: 주권 찬탈의 현장: 1910년
16장 105인 사건, 날조된 총독 살해 음모: 1911년
17장 무단 통치와 헌병 경찰 제도: 1912~1919년
18장 일본의 산둥반도 점령: 1914~1919년
19장 마지막 외교적 호소: 1919년
20장 3·1 독립 만세 운동: 1919~1920년
21장 미국에 알려진 한국 독립운동의 진상: 1919~1920년
22장 제1차 세계대전과 일본의 연합국 배신: 1916~1920년

3부 국제 정세의 변화와 평화를 위한 제언
23장 워싱턴 군축회의와 광주 학생의거: 1921~1931년
24장 만주사변과 극동 위기의 해결책: 1931~1932년
25장 일본의 중국 침략: 1914~1916년
26장 만주국 수립과 무너진 국제연맹의 권위: 1917~1932년
27장 도덕적 국제주의: 세계 평화를 위한 대안
28장 결론: 한국의 독립이 세계 평화의 관건

◦ 찾아보기
접기


책속에서


P. 60 수도 서울까지는 26마일이나 떨어져 있었고, 그곳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은 겨우 말 한 마리가 지날 만한 좁은 오솔길뿐이었다. 장마철은 코앞이었고 수은주는 화씨 90도(섭씨 약 32도)를 오르내렸다.…길모어 부인은 인력거를 타고, 우리 남자들은 안장도 없는 조랑말을 타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곧장 서울로 향했다.
P. 97 학생 한 명의 시험이 끝날 때마다 왕은 우리의 조언 없이 직접 성적을 결정했다. 성적은 ‘우수’, ‘양호’, ‘보통’, ‘불합격’의 네 단계였다. 놀랍게도 매번 왕은 학생이 보여 준 실력에 딱 맞는 점수를 주었다.
P. 117 왕은 즉시 모든 외국인 거주자를 초대하여 궁궐 내 호수에서 스케이트를 타게 했다.…호수 안 작은 섬에는 정자가 하나 있었는데, 왕과 측근들은 그곳에서 손님들이 벌이는 기묘한 동작을 지켜보았다.
P. 199 내가 감리회 선교부 산하의 출판소를 맡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갈 기회가 생겼을 때, 우리는 이를 기쁘게 수락했으며 마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분을 느꼈다.…한국이 보유한 놀라운 알파벳(한글)을 철저히 활용하는 것은 소홀히 할 수 없는 의무처럼 보였다.
P. 232 문관파가 실패했으므로 군부 파벌이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논리적인 수순이었다. 그 도구가 바로 미우라 고로였다.…그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푸는 대신 잘라 버릴 인물이었다.…일본 정부가 이 일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사실은 어떠한 역사적 분석이나 심리적 이론으로도 부정할 수 없다. 미우라가 저지른 것과 같은 범죄를 감히 독단으로 저질렀을 리도 없다. 자신의 정부가 처벌 면제를 보장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접기
P. 238 문관파가 실패했으므로 군부 파벌이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논리적인 수순이었다. 그 도구가 바로 미우라 고로였다.…그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푸는 대신 잘라 버릴 인물이었다.…일본 정부가 이 일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사실은 어떠한 역사적 분석이나 심리적 이론으로도 부정할 수 없다. 미우라가 저지른 것과 같은 범죄를 감히 독단으로 저질렀을 리도 없다. 자신의 정부가 처벌 면제를 보장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접기
P. 242 왕비의 침실 문 앞에는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서 있었다.…그들은 그를 베어 버렸고 그의 몸을 넘어 왕비의 방으로 뛰어들었다.…왕비는 처소의 한 방에서 구석으로 몰렸고 그곳에서 무참히 살해되었다. 희생자 곁에는 자객들뿐이었기에 누가 치명상을 입혔는지 아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나, 모든 정황은 일본인이 범인임을 가리킨다. 접기
P. 246 미우라는 자국 정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이번 소요가 궁궐 수비대와 국왕에게 불만을 토로하려던 일본식 훈련대 사이의 충돌로 인해 발생했다고 주장하였다. 심지어 자신이 직접 임명한 한국 군부대신으로부터, 미우라의 공모설은 근거가 없다는 내용의 공식 서한을 받아 내어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려 하기까지 했다. 그 대신은 임무를 너무 완벽하... 더보기
P. 250 수일 동안 국왕은 어느 미국 시민의 집에서 비밀리에 궁궐로 들여온 음식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였다. 국왕은 미국공사관에 전령을 보내 세 명의 미국인이 매일 밤 궁궐에 들어와 자신의 곁방에 머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전투를 위한 호위병으로서가 아니라, 적들의 음모에 대한 일종의 도덕적 장애물로서 말이다.
P. 298 서재필 의사와 같은 인물들의 활동은 여전히 용인되었으나, 국왕과 고위 관료들은 그들의 유익한 조언에 짜증을 냈다. 이는 우체국이 《독립신문》의 배송을 거부하면서 정점에 달했다. 러시아인들은 서재필 의사에게 만약 그가 이 분야에서 은퇴한다면 두둑한 보조금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P. 300 나는 (《코리아 리뷰》 사설에서) 일본이 한국의 자연스러운 친구이며 일본 내 문관파의 양식이 무관파의 무자비함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태도를 보였다. 나는 야마가타보다는 이토 히로부미를 더 신뢰했다. 물론 불안의 여지가 있었던 점은 인정하며, 나의 미국 친구들로부터 일본을 옹호하는 내 입장이 지지받기 힘들 것이라는 경고를 한 번 이상 받았다. 접기
P. 338 (1905년) 자신을 기만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일본을 변호할 수 없는 때가 왔다. 나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일본의 행위를 묵인하고 그들과 결탁하여 안락을 누리거나, 아니면 한국 인민의 권리를 옹호하며 그들이 당하고 있는 급증하는 부당함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었다. 한국 인민의 친구라는 자부심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적의 편으로 넘어갈 것인가? 내가 머물러 있을 중간 지대는 없었다. 접기
P. 340 1905년 가을, 일본이 먼저 보호국을 선포함으로써 한국을 흡수하는 과정을 시작하려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일본의 침략이 거기서 멈출 것이라는 생각은 완벽히 불가능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한국의 왕(고종)이 집권자로서 어떤 평가를 받든 간에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의 강요에 단 한 번도 자발적으로 굴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의무감에 따라 국가를 정치적 멸망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자신의 힘이 닿는 모든 일을 다했다. 그는 국제법상 일본과 대등한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서 한국의 이름이 지워지는 것에 변함없이 반대한다는 입장을 거듭 분명히 했다. 접기
P. 340 조미수호통상조약에는 체결 당사국 중 한쪽이 제3국으로부터 위협을 받을 경우, 그 위험을 알게 된 다른 쪽이 원만한 해결을 위해 ‘거중 조정good offices’을 행사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P. 343 그것은 정부의 교육직 사임과 재임용의 희망 없이 선택한 직업을 영구히 중단하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이미 한반도에서 일본인들의 사악한 수법을 폭로했기에 그들에게 ‘기피 인물persona non grata’이었고, 만약 그들이 나라를 장악한다면 어차피 그곳에서 나의 미래는 없었다. 반면, 나는 워싱턴에 왕이 자신의 인민과 왕조에 충성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기록 하나를 더 남길 수 있었다. 따라서 결정은 쉬웠다. 접기
P. 346 왕은 내각에 일을 맡기고 안방으로 물러났다. 그들 중 외부대신을 포함한 일부는 자신들도 죽을 운명이라 믿고 더 이상 저항할 용기를 내지 못했고, 결국 (을사보호조약) 문서에 서명했다. 정확한 추산에 따르면 서명은 내가 워싱턴에 도착한 후 한 시간 이내에 이루어졌다.
P. 347 한국 황제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개인적인 편지였으므로, 나는 그것을 대통령의 손에 직접 전달하고 싶었다. 나는 그를 면담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대통령이 편지를 받을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원한다면 국무부에 전달하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하려 시도했으나 그들은 지금 당장 그 문제를 처리하기에는 너무 바쁘다고 답변했다. 접기
P. 348 왜 이렇게 말하지 못했는지 항상 후회한다. “장관님, 누구도 일본과 문제를 일으키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한편으로 우리 자신을 기만하고 우리의 조약이 쓰인 종잇값만큼의 가치도 없음을 증명하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문제 사이의 선택이라면, 나는 차라리 문제를 택하겠습니다.”
P. 365 나는 한국을 방문하는 모든 저명한 미국인에게 인민들을 약탈로부터 보호하는 일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토 후작의 친구인 한 미국인 교수에게, 한국인들이 최소한 심리를 요청이라도 할 수 있는 곳이 마련되도록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고 호소했으나 전혀 반응이 없었다. 일본인들 에게 기피 인물이 아니었던 한 미국인 주교에게 찾아가, 그가 저명한 지도자로 있는 교단에 속한 기독교인 한국인들이 당한 심각한 부당 행위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제시했으나 그는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았다. 접기
P. 374 나는 헤이그로 달려가 평화회의에서 발언권을 얻고자 파견된 한국 대표단을 만났다. 그곳에서 스테드William. T. Stead를 만났고, 그는 나에게 그 도시의 평화 클럽에서 연설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이 진심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의 말로 보아 고통받는 한국인들에게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P. 378 상하이의 독일은행에 예치된 개인 자산의 잔액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한국 국왕이 비공식적으로 그 은행의 수표와 함께, 국왕 본인의 개인적 청구에 의해서만 돈을 지급하겠다는 보증서가 담긴 친필 서신을 내게 보내 왔다.…국왕은 일본인들이 그 돈을 가로챌까 두려워했고, 내가 그 돈을 인출해 미국 은행에 자신의 명의로 예치해 주기를 원했다. 접기
P. 634 이제 (1919년 3‧1운동에서) 우리는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두 가지 상반된 이상이 정면으로 충돌한 비극적 정점에 다다른다. 이는 인류의 역사에서 ‘정의Right’가 지배할 것인지, 아니면 ‘무력Might’이 지배할 것인지에 관한 숙명적인 투쟁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P. 675 일본의 어떤 정파도 군국주의를 포기할 의도가 전혀 없다. 군국주의가 없다면 일본은 4류 국가로 추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무력을 과시해야만 아시아 대륙의 일부라도 점유할 수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일본은 한국, 대만, 중국으로부터 엄청난 증오를 샀기에, 군국주의 지배력이 약화하는 순간 대륙의 모든 점유지에서 쫓겨날 것이다. 접기
P. 714 주목해야 할 점은 1929년 11월에 시작되어 한국 전역에서 일어난 놀라운 학생운동이다. 그것은 애국심의 분출이었으며 너무 뚜렷하고 보편적이어서, 이 나라의 젊은 세대가 일본의 지배에 순응해 가고 있느냐는 질문에 단번에 마침표를 찍었다.…이 운동은 한국인들이 행복하고 만족해한다는 일본의 주장이 거짓임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이 세계의 존중을 받을 권리조차 없는 겁쟁이 집단이라는 일본의 파렴치한 선전이 허구임을 만천하에 폭로한다. 접기
P. 756 최초의 ‘국제연맹’은 바벨탑이었다. 그 사건의 물리적 기록 여부와 상관없이 그 이야기는 국제주의의 철학을 담고 있다.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보다 국제연맹을 결성할 천성적인 능력이 더 컸다. 그들은 언어와 문화, 국가가 하나였다. 그러나 그들은 현재의 국제연맹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결핍, 즉 이기주의에 지배당했다.


추천글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한겨레
- 한겨레 2026년 9월 4일자 '책과 생각'
조선일보
- 조선일보 2026년 9월 5일자



저자 및 역자소개
호머 B. 헐버트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림 신청

미국의 선교사이자 교사, 역사가. 특히 한국의 역사, 언어, 문화에 대한 학문적 기여로 널리 알려져 있다. 1886년 23세의 나이로 조선 최초의 국립 근대식 학교인 육영공원Royal College 교사로 부임하였고, 1891년 한국 최초의 한글 교과서이자 세계 지리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출간하였다. 1896년에는 구전으로만 전하던 〈아리랑〉을 최초로 악보로 기록하기도 했다.
1895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일본의 만행을 세계에 고발했으며, 1896년 서재필과 함께 《독립신문》을 창간했고, 영문판 발행을 지원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저지를 위해 고종 황제의 밀명을 받아 워싱턴에 다녀오고,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지원 활동으로 일제에 의해 출국당했다. 그의 저서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1905)와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1906)는 20세기 여명기 한국의 문화적·정치적 분위기를 상세하게 담아 한국 역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 밖에도 한국 전래 동화책 《Omjee the Wizard》(1925) 및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소설 《The Face in the Mist》(1926)를 출간하기도 했다. 건국공로훈장 태극장(1950. 3. 1)과 금관문화훈장(2014. 10. 9)을 추서받았다. 접기

최근작 : <헐버트 회고록>

옥성득 (옮긴이)
저자파일
신간알림 신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UCLA 아시아 언어문화학과 임동순·임미자 한국기독교학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와 국사학과를 졸업한 후 장로회신 학대학교 신학대학과 대학원에서 신학 수업을 이어나갔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 신학교(신학석사)와 보스턴대학교 신학대학원(신학박사)에서 기독교 역사를 공부했다. 현재는 UCLA에서 한국 근현대사와 한국 종교사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대한성서공회 사》(전 3권),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 《한국 기독교 형성사》(제37회 한국기독교출판문화상 대상), 《쇠퇴하는 한국교회와 한 역사가의 일기》, 《한국교회 첫 사건들》 등이 있고, 편역서로는 《언더우드 자료집》(전 5권), 《 대한 성서공회사 자료집》(전 3권), 《마포삼열 자료집》(전 4권)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브라운 총무의 한국 여행, 1901년>,<이야기 한국 교회사 1 : 1592-1893>,<한국교회, 어디로 가나?> … 총 24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푸른역사
도서 모두보기
신간알림 신청

최근작 : <헐버트 회고록>,<다시, 마르크스를 읽어야 할 때>,<한글, 불편한 진실>등 총 324종
대표분야 : 역사 5위 (브랜드 지수 623,748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결코 잊어서는 안 되지만, 잊혀져 가는
‘대한미국인’ 헐버트가 겪은 조선의 근대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던, 다재다능 미국인
호머 B. 헐버트는 한국 근대사의 산 증인 중 한 명이다. 23세이던 1886년 한국 최초의 근대적 공립학교인 육영공원의 교사로 초빙되어 와서 1909년 일제에 의해 추방되기까지 이 땅에 머물렀다는 이유만이 아니다. 단순히 체류한 게 아니었다. 선교사이기도 했고, 한국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를 저술한 교육자, 《코리아 리뷰》를 발행하고 《독립신문》 영문판을 만든 언론인, 한글과 드라비다어의 유사성에 주목한 언어학자 등 다양한 얼굴로 조선의 개화에 기여했다. 무엇보다 대한제국의 국권 수호를 위해 평생 헌신한 ‘대한미국인’이었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 사살 후 일경에게 취조받던 안중근 의사가 “조선 사람이면 단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평가했을 만큼 헐버트의 한국 사랑은 치열했다. 이제는 국사 교과서에서조차 두어 번 언급하고 지나치고 말아서는 결코 안 되는 인물이란 뜻이다.

90여 년 만에 온전히 복원해낸 근대사 핵심 사료
이 책은 헐버트 박사가 1886년부터 193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겪은 파란만장한 삶과 국제 정세에 관한 통찰을, 1920년대부터 1932년 말까지 타자기로 작성한 자서전이다. 편역자는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원고를 어렵게 확보하여 일부 희미한 본문을 완성하고, 350개의 역주와 관련 사진을 더해 90여 년 만에 우리 근대사의 핵심 사료를 선보이게 되었다.
제1권은 육영공원 시험 등 본인의 체험담과 을미사변에 가담한 일본 낭인에 대한 판결문 등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당대의 굵직한 사건을 짚는 한편 실패한 고종 밀사 역할 등 한국의 국권 수호를 위한 이방인의 분투를 담았다. 아관파천에 대한 재조선 외국인들의 반응 등 한국 근대사를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데 도움을 주는 내용이 그득하다. 제2권은 미국에서 과거와 현재를 회고하면서, 일본의 야욕으로 초래된 동양의 위기와 서구의 책임을 다룬 정치철학서로 헐버트의 통찰력을 보여준다.

육영공원 교사에서 고종 황제의 밀사 역할까지
이 책의 매력 포인트는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역사의 이면이다. 제물포에 상륙해서 한양에 입성하기까지의 고된 여정, ‘friend’를 ‘부렌두’라 발음하는 육영공원의 수업 풍경이 그런 예이다. 그런가 하면 《동사찬요》 탐독에서 시작된 한국 고대사에 관한 흥미, 영국의 전문학술서까지 동원한 한글-드라비다어 연구는 헐버트의 학술적 관심사를 보여준다. 여기에 궁궐에 침입한 사실은 인정되지만 “누군가가 실제로 계획된 범죄를 저질렀다는 충분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민비 살해범들에게 무죄를 선고한 일본 재판의 모순을 지적하거나 필리핀을 지키기 위해 미국이 을사늑약의 무효를 호소하는 고종의 밀서를 외면하는 과정에서는 헐버트의 한국 사랑과 더불어 국제 정치에서의 ‘힘의 논리’를 절감하게 된다.

일제의 야욕 분석에서 세계 평화 대한 제시까지
국제 정치에 대한 헐버트의 식견과 통찰력을 보여주는 제2권에도 흥미로운 사실(史實)은 여럿 실려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독일과 연합국 측을 놓고 어느 편에 가세할지 저울질을 했으며, 영국은 미국의 참전을 촉구하기 위해 카리브해에 일본에 해군기지 제공을 검토했다든가 25만 명의 중국 노무자가 프랑스 전선에서 연합국을 도왔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등은 비밀조약으로 산둥반도 지배권을 일본에 넘겼다는 이야기는 국제 정치의 냉엄한 현실을 보여준다. 일본이 유대계 미국 은행가 야곱 쉬프가 제공한 차관에 힘입어 금본위제를 확립함으로써 러일전쟁의 승리를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는 분석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일본이 서구를 등진 채 문명 세계가 가장 두려워해 온 일, 즉 동양과 서양을 대립시키고 전쟁의 모체가 되는 상호 간의 의심과 적대감을 영속시키고 심화할 분열적인 움직임을 보인다는 헐버트의 지적은 이후 이어진 제2차 세계대전을 예고했다는 점에서 새삼 주목하게 된다.

책은 두툼하다. 원고량이 200자 원고지로 3,000매 가까워 700쪽이 훌쩍 넘는다. 한데 다 읽어치우는 데 들 수고로움을 걱정할 것 없다. 우리가 모르고 지나쳤던 조선 근대의 풍경, 일본에서의 이색적인 여행, 시베리아 횡단 철도 탑승기 등이 적절하게 곁들여져 의외로 술술 읽힌다. 영국 왕실의 유서 깊은 성소인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했던 그의 유언에 따라 양화진 선교사 묘원에 묻힌 육성을 귀담아 들어볼 일이다. 접기






===

호머 B. 헐버트의 <헐버트 회고록>(원제: <동양의 메아리: 극동에서의 삶의 회고록>)에 대한 요약 및 평론입니다.

<헐버트 회고록: 제국의 틈바구니에서 타자의 편에 선 목격자>

<개요 및 저자 배경> 호머 베자릴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의 회고록 <동양의 메아리: 극동에서의 삶의 회고록>은 구한말 조선의 격변기를 가장 내밀한 거리에서 지켜본 한 서구인의 증언록이다. 1886년 조선 최초의 근대식 관립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의 교사로 파한(派韓)된 헐버트는 단순한 선교사나 교육자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한글의 과학성과 우수성을 최초로 서구 학계에 체계적으로 소개한 언어학적 선각자였으며, 고종의 외교 밀사로서 제국주의 열강의 파렴치한 침탈을 폭로한 행동가였다. 이 책은 그가 1886년 입국한 이래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당한 뒤 광복 후 다시 돌아오기까지, 조선과 동아시아 정세의 격랑을 회고한 기록이다.

<내용 요약>

  1. 조선과의 첫 만남과 언어적 충격 헐버트는 쇄국에서 막 벗어난 조선에 발을 디뎠을 때 마주한 문화적 충격과 더불어, 무엇보다 '한글'이라는 문자에 매료된 과정을 담담히 서술한다. 당시 지배층조차 사대주의에 갇혀 천대하던 한글에서 알파벳을 뛰어넘는 완벽한 음소 문자의 독창성을 간파한 그는 최초의 순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士民必知)를 저술한다. 그는 조선의 민중이 지닌 잠재력을 문자 교육과 계몽에서 찾았으며, 언어를 통한 주체적 근대화의 가능성을 증명하고자 했다.

  2. 궁중의 비극과 제국주의의 민낯 회고록의 중심축은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러일전쟁, 그리고 을사늑약에 이르는 외교적 비극이다. 헐버트는 을미사변 직후 신변의 위협을 느끼던 고종을 보호하기 위해 언더우드, 에비슨 등과 함께 권총을 차고 침전을 불침번 섰던 일화를 생생히 기록한다. 이는 단순한 목격담을 넘어 야만적 폭력이 주권 국가의 심장부를 유린하는 과정을 기록한 역사적 고발이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동양 평화'라는 기만적인 명분을 내세워 조선을 식민지화해 가는 과정, 그리고 이를 방조·묵인한 영미 열강의 냉혹한 국제정치적 계산을 거침없이 폭로한다.

  3. 밀사 활동과 망명의 길 헐버트는 고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특사로 활약했다. 1905년 을사늑약 직전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조미수호통상조약에 근거한 중재를 요청하는 밀서를 전달하려 했으나, 친일적 태도를 취하던 미 국무부에 의해 문전박대당했다. 이어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을 배후에서 조율하고 지원했다. 이로 인해 통감부의 표적이 된 그는 끝내 조선에서 강제 추방당한다. 그러나 그는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서적 집필, 강연, 미 의회 증언 등을 통해 일본의 침략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4. 귀환과 영면 1949년 대한민국 정부의 국빈 초청으로 40년 만에 다시 방한했으나, 고령과 여독으로 인해 입국 일주일 만에 서거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는 그의 유언대로, 그는 현재 서울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어 있다.

<평론: 경계를 넘은 윤리적 실천과 역사적 의의>

  1. '구경꾼'이 아닌 '당사자'로서의 타자성 19세기 말 서구인들이 남긴 동양 견문록은 대개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에 갇혀 있었다. 우월한 서구 문명의 시각에서 조선을 '미개하고 정체된 은둔의 나라'로 규정하거나, 기벽(eccentricity)을 관찰하는 제국주의적 관음증이 만연했다. 그러나 헐버트의 글쓰기는 출발선부터 궤를 달리한다. 그는 관찰자나 구경꾼으로 머물지 않고 조선이라는 공동체의 비극 한가운데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그에게 조선은 계몽의 대상이자 시혜를 베풀 피식민지가 아니라, 독립된 언어와 유구한 역사를 지닌 동등한 주권체였다. 그의 시선은 서구 중심적 우월주의를 벗어나 타자의 고통에 연대하는 보편적 휴머니즘의 극치를 보여준다.

  2. 약육강식 국제정치학에 대한 환멸과 폭로 이 회고록의 가장 강력한 비판적 힘은 서구 열강의 이중성을 까발리는 대목에서 나온다. 헐버트는 특히 자국인 미국의 실리주의적 배신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조미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필리핀 통치를 위해 한반도를 일본에 넘겨준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배신을 날카롭게 응시한다. 그는 문명화라는 미명 아래 자행된 약소국 분할과 강대국의 카르텔을 비판하며, 국제법과 외교라는 명분이 어떻게 강자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전락했는가를 통렬히 해부한다. 이는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의 국제 분쟁과 패권 다툼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3. 지식인의 책무와 실천적 저항 헐버트는 학문과 실천을 분리하지 않았다. 한글의 체계화, 한국 역사서 집필(<한국사>, <대한제국 멸망사>) 등 문화적 주춧돌을 놓는 작업과, 총을 들고 왕을 지키거나 밀서를 품고 대륙을 건너는 정치적 결단을 하나의 호흡으로 연결했다. 지식이 행동으로 전환되지 않을 때 발생하는 무력함을 그는 용납하지 않았다. 그의 기록은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불의한 침략에 맞서 기록으로 저항한 한 지식인의 분투기다.

<결론> <헐버트 회고록>은 한 세기 전 격랑의 한반도를 무대로 펼쳐진 비극의 역사를 복원하는 텍스트인 동시에, 한 인간이 특정 국가나 혈통의 경계를 넘어 어디까지 보편적 정의와 타자의 권리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가를 묻는 기록이다. 국가주의적 편협성을 떠나, 강자가 약자를 짓밟던 제국주의 시대의 폭력에 온몸으로 맞선 한 세계인의 윤리적 궤적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성찰을 던져준다.

===

호머 B. 헐버트, <헐버트 회고록> — 요약 평론

호머 B.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의 <헐버트 회고록>은 단순한 외국인 조선 체류기가 아니다. 원제는 <동양의 메아리: 극동에서의 생애 회고록>(Echoes of the Orient: A Memoir of Life in the Far East)이다. 헐버트가 1920년대부터 1932년 말까지 작성한 미출간 영문 원고를 옥성득 교수가 번역하고 약 350개의 역주와 사진을 덧붙여 776쪽으로 펴냈다. 헐버트가 처음 조선에 들어온 1886년부터 회고록을 완성한 1932년까지의 개인적 경험과 동아시아 국제정세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출간 경위와 구성은 연합뉴스 보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을 읽는 핵심 질문은 “헐버트는 왜 한국을 사랑했는가?”보다 “그는 어떤 한국이 살아남기를 원했으며, 그 목적을 위해 자신이 속한 미국과 서구 문명을 어떻게 비판했는가?”에 있다.

1. 교육자로 만난 조선

헐버트는 23세였던 1886년, 조선 최초의 근대적 관립학교인 육영공원의 영어 교사로 입국했다. 처음의 그는 서양 문명과 지식을 조선에 전달하는 미국인 교육자였다. 그러나 한국어를 익히고 조선인 학생과 관료들을 만나면서, 조선을 단순한 선교·문명화 대상이 아니라 고유한 언어와 역사적 개성을 가진 사회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가 특히 높이 평가한 것은 한글이었다. 한글이 배우기 쉽고 음운을 체계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지식의 독점을 깨뜨릴 수 있는 민주적 문자라고 보았다. 한문을 독점한 양반 계층에 의해 교육에서 배제되었던 백성과 여성도 한글을 통해 지식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글로 세계지리 교과서 <사민필지>(士民必知)를 저술한 일은 이러한 신념의 산물이었다.

이 지점에서 헐버트의 교육관은 선교사의 복음 전파를 넘어선다. 그에게 교육은 개인의 구원만이 아니라 국민의 자각과 국가의 자립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었다. 근대국가가 되려면 소수 엘리트가 아니라 일반 백성이 세계를 알아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한글 보급, 교과서 편찬, 교사 양성, 언론 활동은 서로 분리된 사업이 아니었다. 모두 한국인을 근대적 정치 주체로 만드는 작업이었다.

2. 조선에 대한 애정과 비판

헐버트는 조선인을 낭만적으로만 묘사하지 않는다. 그는 조선인의 지적 능력, 인정, 예의, 학습 능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정부의 부패, 양반의 특권 의식, 파벌주의, 행정의 무능과 보수성을 비판한다. 조선이 외세의 침략을 받은 것은 부당하지만, 내부의 취약성이 외세가 침투할 공간을 제공했다는 판단이다.

그렇다고 조선의 국권 상실을 조선인의 무능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 설명하지 않는다. 헐버트가 일본의 식민주의 논리와 갈라지는 지점이 여기다. 일본은 조선의 후진성과 정치적 혼란을 병합의 근거로 삼았다. 반면 헐버트는 한 나라의 정부가 무능하다는 사실이 다른 나라에 그 영토와 인민을 지배할 권리를 주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개혁이 필요하다는 진단과 독립할 권리가 있다는 원칙을 구별한 것이다.

그는 한국의 몰락을 지정학적 조건과 연결한다. 한국은 중국·러시아·일본 사이에 위치했고, 특히 일본이 섬나라에서 대륙 세력으로 팽창하기 위한 첫 번째 발판이 되었다. 그러나 지정학은 운명 그 자체가 아니다. 침략국의 선택, 열강의 묵인, 한국 지배층의 실패가 결합해 국권 상실이 일어났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3. 을미사변과 일본 제국주의의 실체

1895년 명성황후 시해는 헐버트에게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일본은 동양의 근대화를 이끄는 개혁 세력이 아니라, 목적을 위해 폭력과 기만을 사용하는 제국주의 국가로 드러났다. 그는 왕비가 침전에서 일본인 자객들에게 살해된 정황을 기록하고, 서구 국가들이 이 사건에 단호하게 대응하지 않은 것을 비판한다.

이 사건 이후 헐버트는 관찰자나 교육자의 중립적 위치에 머물 수 없다고 판단한다. 일본의 행위를 묵인하고 편안하게 살 것인지, 한국인의 권리를 옹호하며 부당함을 세계에 알릴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자신에게 “중간 지대는 없었다”는 고백은 회고록 전체를 관통한다.

이는 헐버트가 선교사적 중립을 포기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상당수 외국 선교사들은 선교 사업의 안전을 위해 정치 문제에 관여하지 않으려 했다. 일부는 일본 통치가 행정의 안정과 선교의 편의를 가져오리라고 기대했다. 헐버트는 그러한 중립이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는 사실상 강자의 편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선택은 종교적 신념과 정치적 실천이 분리될 수 없다는 선언이었다.

4. 고종의 밀사와 미국의 배신

회고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헐버트가 고종의 밀사로 활동한 과정이다. 1905년 고종은 일본이 강요하는 보호조약을 막기 위해 헐버트에게 미국 정부에 도움을 요청하는 밀서를 맡겼다. 그러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과 미국 정부는 한국의 호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국 국무장관은 사실상 일본과 충돌하면서까지 한국을 도울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헐버트에게 이것은 개인적인 좌절이면서 미국 외교의 도덕적 파산이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통해 미국이 한국과 우호 관계를 맺었음에도, 실제 위기에서는 조약의 정신보다 필리핀 지배와 일본과의 전략적 협력을 우선했다.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용인하는 대신 일본으로부터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를 인정받으려 했다. 헐버트는 국제법과 조약이 강대국의 이해관계 앞에서 얼마나 쉽게 무력화되는지를 체험했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된다. 고종의 특사들은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으므로 무효라고 호소했지만, 열강은 한국 대표의 공식 참가를 허용하지 않았다. 헐버트는 이들을 돕고 국제 여론을 환기하려 했으나 실질적인 성과를 얻지 못했다. 한국은 국제사회의 일원이었지만, 국제사회는 그 구성원의 권리를 동등하게 보호하지 않았다.

그는 고종의 정치적 능력을 무조건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다만 고종이 일본의 강요에 자발적으로 굴복했다는 해석에는 명확히 반대한다. 고종이 통치자로서 우유부단하고 한계가 있었더라도, 대한제국을 국제법상 독립국으로 보존하려는 의지만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종을 단순한 무능한 망국 군주로 보는 서술을 수정하는 중요한 증언이다.

5. 일본의 팽창과 ‘동양의 위기’

회고록 후반부는 개인적 회상에서 국제정치 비판으로 확대된다. 헐버트는 일본의 한국 병합을 한반도만의 사건으로 보지 않았다. 한국에서 성공한 침략이 만주와 중국, 태평양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서구 열강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묵인한 것은 평화를 얻은 것이 아니라 더 큰 전쟁을 연기한 것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그에게 제국주의는 일본만의 죄도 아니었다. 일본은 서구 제국주의로부터 군사력, 식민통치, 인종적 우월주의를 배웠다. 영국과 미국은 일본의 팽창을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도움이 되는 동안 지지하거나 묵인했다. 따라서 동아시아의 위기는 일본의 야욕과 서구의 위선이 공동으로 만들어낸 결과였다.

이러한 관점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이미 일본 제국주의의 연쇄적 팽창을 파악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헐버트는 한국 독립을 한국인만의 민족적 요구로 보지 않고, 동아시아 평화와 국제질서의 신뢰를 가늠하는 시금석으로 보았다. 한 작은 나라의 권리를 희생시켜 얻은 세력균형은 결국 더 큰 폭력을 불러온다는 주장이다.

6. 회고록의 가치와 한계

이 책의 가장 큰 가치는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이라는 미담보다 국제정치의 비대칭성을 내부자의 경험으로 폭로했다는 데 있다. 헐버트는 조선 왕실과 관료, 미국 외교관, 선교사, 일본 당국을 두루 접했다. 특히 고종의 밀사 활동과 미국 정부의 냉담한 반응은 한국 외교사의 중요한 1차 증언이다. 회고록은 <독립신문>, <코리아 리뷰>, 외교문서, 헐버트의 편지들과 함께 읽을 때 더욱 큰 사료적 가치를 가진다.

그러나 비판적으로 읽어야 할 부분도 있다. 첫째, 사건이 일어난 지 수십 년 후에 작성된 회고이므로 기억의 선택과 재구성이 개입되어 있다. 자신이 직접 목격한 일, 타인에게 들은 이야기, 나중에 해석한 국제정세를 구분해야 한다.

둘째, 헐버트에게도 19세기 미국 개신교인의 문명관이 남아 있다. 그는 한국 문화를 존중했지만 서구식 교육, 기독교 윤리, 근대국가를 발전의 기준으로 삼았다. 조선 민중을 존중하면서도 때때로 그들을 계몽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본다. 따라서 그는 제국주의에 저항한 인물이지만 모든 형태의 서구 중심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난 인물은 아니다.

셋째, 그의 강한 고종 옹호는 일본의 침략 책임을 밝히는 데 중요하지만 대한제국 내부의 계급 갈등, 농민의 삶, 동학농민전쟁, 왕실과 관료층의 책임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킬 수 있다. 헐버트가 지키고자 한 한국은 기본적으로 고종을 주권자로 하는 개혁적 독립국가였다. 아래로부터의 사회혁명이나 공화주의적 변혁이 그의 중심 관심은 아니었다.

종합 평가

<헐버트 회고록>은 조선을 칭찬한 친한파 외국인의 감상록이 아니다. 그것은 교육자였던 한 미국인이 한국의 국권 상실을 목격하면서 언론인·외교적 대리인·독립운동 옹호자로 변해가는 정치적 자기증언이다. 동시에 정의와 국익이 충돌할 때 미국이 무엇을 선택했는지를 고발하는 미국인 자신의 양심적 기록이다.

헐버트의 가장 중요한 통찰은 약소국의 멸망이 그 나라의 후진성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데 있다. 한국 내부의 부패와 무능은 분명 존재했지만,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지 않으며 미국과 서구 열강의 방관도 면책하지 않는다. 내부 책임, 침략자의 책임, 국제사회의 책임을 함께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이 책을 읽을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강대국은 흔히 평화와 문명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전략적 이익에 따라 작은 나라의 권리를 거래한다. 헐버트는 한국을 구하는 데 실패했으나 그 실패를 통해 국제정치의 본질을 증언했다. 그의 삶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부당함을 보았을 때 안전한 중립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실패할 가능성을 알면서도 피해자의 권리를 말할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헐버트의 진정한 유산은 ‘한국 사랑’이라는 감정적 표현보다 연대의 윤리에 있다. 그는 한국인을 자신이 대신 구원해야 할 수동적 민족으로만 보지 않고, 스스로 독립과 민주주의를 이룰 권리를 가진 정치적 주체로 인정하려 했다. 바로 그 점에서 <헐버트 회고록>은 조선 말기의 기록인 동시에, 제국주의와 약소국, 방관과 책임, 신앙과 정치적 양심의 관계를 묻는 현재적 저작이다.

===


===

동학 농민 혁명 - 위키백과, 甲午農民戦争 Tonghak Peasant Revolution

동학 농민 혁명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동학 농민 혁명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동학난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영화에 대해서는 동학난 (영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갑오농민전쟁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소설에 대해서는 갑오농민전쟁 (소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동학 농민 운동
날짜1894년 ~ 1895년
장소
결과동학농민군의 패배
교전국
 조선
 청나라
 동학농민군 일본 제국
지휘관
 고종
 이용태
 홍계훈
 조병갑
 이기동
청나라 광서제
청나라 이홍장
청나라 정여창
청나라 등세창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이방언
 최시형
 손병희
일본 제국 메이지 천황
일본 제국 야마가타 아리토모
일본 제국 이토 스케유키
일본 제국 노기 마레스케
천도교
주요 인물
최제우 · 최시형 · 손병희 · 박인호
전봉준
경전
동경대전 · 용담유사
해월신사 법설
의암성사 법설
교리
시천주 · 사인여천 · 인내천 · 후천개벽
역사
동학 · 동학 농민 혁명
관련 단체
천도교 중앙총부
천도교 연원회
천도교유지재단
천도교청우당
문화유산
천도교 중앙대교당 · 천도교 임실교당

v d e h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1], 동학 혁명(東學革命), 동학 운동(東學運動), 동학 농민 운동(東學農民運動) 또는 동학 농민 전쟁(東學農民戰爭)으로 불리기 시작한 동학난(東學亂)은 1894년에 동학 지도자와 동학교도 및 농민이 일으킨 무장 봉기를 가리킨다. 크게 1894년 음력 1월의 고부 봉기(1차)와 음력 4월의 전주성 봉기(2차)와 음력 9월의 전주·광주 궐기(3차)로 나뉜다.

교조 최제우의 신원 외에도 조선 양반 관리의 탐학과 부패, 사회 혼란에 불만이 쌓이다가 1892년(고종 19년) 전라도 고부군에 부임된 조병갑의 비리와 학정이 도화선이 되었다. 부패 척결과 내정 개혁, 교조 신원 등의 기치로 일어선 농민군은 흥선대원군, 이준용과 결탁했다. 전봉준은 대원군을 반신 반의하면서 민씨 세력의 축출을 위해 대원군과 손을 잡았다. 대원군 역시 민비의 제거를 위한 무력 집단이 필요하였고 농민군과 제휴하였다. 농민군 일부는 탐관오리 처벌과 개혁 외에 대원군의 섭정[2]까지 거병 명분으로 삼았다.

한편 흥선대원군과의 연대를 못마땅히 여긴 김개남은 수시로 전봉준과 충돌하다가 독자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방언은 농민운동 진압 직후 흥선대원군이 특별히 사면을 청하여 석방되었으나 민씨 계열의 관군에 살해당한다. 그밖에 최시형, 손병희 등 북접의 지도자는 남접의 거병에 쉽게 호응하지 않다가 그해 9월의 3차 봉기 때부터 움직이기 시작한다. 한편 개화파 지도자이자 망명정객인 윤치호는 동학 농민 운동을 적극 지지하여 화제가 되었다.[3]

초기에는 동학난, 동비의 난[4]으로 불리다가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 농민운동, 농민혁명으로 격상되었다.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으로도 불리며, 갑오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갑오농민운동(甲午農民運動),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이라고도 한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민씨 정권에서는 청나라군과 일본군을 번갈아 끌어들여 결국, 농민 운동 진압 후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배경

동학농민군 측에서 사용한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일본 세력과 서양 세력을 배척하고 의를 내세운다) 깃발
최시형의 인장

1882년 이후의 각종 사회 혼란과 정부의 부패로 민심이 동요하던 가운데 고부군 군수 조병갑의 횡포가 도화선이 되어 농민운동을 일으켰다. 1882년 구식 군대 폐지와 관련하여 5군영에 소속되었던 군인들에 의해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며, 이어 1884년에는 개화파의 갑신정변이 일어난다.[5]

임오군란(壬午軍亂) 때는 흥선대원군이 반란 세력을 등에 업고 궁중에 들어와 대권을 장악했다가 곧 청군에 의해 납치되었고, 1884년 갑신정변 때 궁중을 습격한 개화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청나라군에 의해 밀려남으로써 왕권은 크게 실추되었다. 뿐만 아니라 청나라와 일본이 이 변란을 계기로 조선에 진주해 세력 다툼을 벌여 조선의 자주권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었다.[5] (톈진 조약을 파기시킬만큼) 민씨 정권에서 청나라 군을 끌어들여 개화파를 진압하자, 일본은 일본대로 청나라가 조선을 무력으로 점령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조선에 병력을 대대적으로 파견하였다.

임오군란갑신정변(甲申政變) 이후 민씨 정권과 고종은 친청 정책을 펼치면서 새로운 국면을 모색했지만 급격하게 변화하는 동아시아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해 혼란은 점차 가중화되었고 전국 곳곳에서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건 민란이 끊임없이 이어졌다.[5] 급기야 그것은 1894년 3월 동학혁명으로 폭발되어 관군과 농민 사이의 전면전으로 발전하였다.[5]

개요

고부 봉기와 자진 해산

1894년 2월 15일(음력 1월 10일) 탐학한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고부군의 동학도들과 농민군들이 쟁기와 낫 등 농기구를 들고 집단으로 무장 시위를 벌였다. 이들의 움직임은 곧 중앙정부의 탐관오리들에 대한 분노로 향했다. '보국안민'과 '폐정개혁'을 기치로 내건 농민들의 기세가 걷잡을 수 없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5] 대원군은 이 기회를 이용, 동학농민군과 접선하여 손자인 이준용을 추대할 계획을 세운다.

1886년 흥선대원군은 민씨 정권이 조약을 체결하자 불만을 품은 위안스카이(袁世凱)와 결탁하여 장남 이재면(李載晃, 고종의 형,완흥군/흥친왕)을 옹립하고 재집권하려다 실패하고, 1894년 동학군과도 연합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돌아가 실현되지 못하였다.[6] 동학군 중에는 전봉준과 같이 대원군의 문하에 출입하던 인물들도 있었고, 폐정개혁과 대원군 추대, 민씨 외척세력 척결과 개화파 척결을 외치는 목소리도 강력했다. 대원군과 이준용은 민씨 정권의 부패정치와 지방에 파견된 탐관오리에 대한 반발을 주목했다.

한편 정부에서 안핵사(按覈使) 이용태를 보내 이들을 위로하고 탐관오리 처벌을 약속하자 고부군의 동학군은 해산하였다.

2차 봉기(전주성 점령)

그러나 안핵사 이용태는 첫 봉기를 ‘동학도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동비들의 뿌리를 뽑겠다”고 선언, 반란 관련자들을 ‘동비’(東匪)라 하여 동학도 취급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동학과는 상관 없는 전라북도, 충청남도 지역의 농민들을 동학도로 몰아 역적죄로 처벌하였다. 이용태의 강경책에 분개한 전봉준과 농민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총기류와 농기구 등으로 무장한 뒤, 태인 대접주 김개남, 무장(茂長) 대접주 손화중 등과 함께 봉기하였다. 이것이 ‘2차 봉기’, ‘백산 봉기’, ‘삼월 봉기’로 불리는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다.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김개남손화중을 장령(將領)으로 삼은 농민군은 1894년 음력 3월 하순에 백산에서 궐기하여 전주성을 점령한다.

한편 동학농민군은 고부의 황토현(현재의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에서 4월 7일(양력 5월 11일) 전주감영군을 격파했다. 이에 크게 놀란 조정에서는 전라도병마절도사 홍계훈을 초토사로 임명하여 봉기를 진압하도록 하였다. 정읍, 흥덕, 고창, 무장 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4월 23일(양력 5월 27일),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홍계훈이 이끄는 정부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4월 27일(양력 5월 31일) 농민군은 전주성으로 입성하였다.[7]

1894년 3월 21일 고부에서 봉기한 지 석 달 후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은 청과 일본에게 군사 주둔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갑오개혁의 시발점인 〈전주화약〉을 맺고 해산했다.[8]

전주화약과 청일 양국군의 주둔

사태가 확산되자 고종과 왕비는 당황하였다. 고종과 민씨 세력은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였고, 청이 이에 응하자 일본 역시 톈진 조약을 빌미로 군대를 동원하였다. 이처럼 외세가 개입하자 농민군과 관군은 회담을 통해 화의를 약속하고 싸움을 중단하였다.[9]

하지만 조선에 진주한 청, 일 양국군은 돌아가지 않았다. 일본은 청에게 조선의 내정 개혁을 함께 실시하자고 제의하였지만 청은 이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자 일본은 불법으로 조선 궁궐 경복궁을 침범(갑오왜란) 명성황후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흥선대원군을 앉혀 꼭두각시 정권을 탄생시켰다.[9] 김홍집, 어윤중, 박영효, 서광범 등을 중심으로 한 제1차 김홍집내각, 즉 친일 내각은 일본공사 오토리의 입김 아래 일련의 개혁조치를 취했다. 이것이 조선정부와 동학농민군과 맺은 자주적인 개혁 전주화약을 간섭한 친일내각의 갑오개혁이다.[8]

그 뒤 개혁 추진 기구로서 전주화약 당시에 설치된 교정청을 폐지 이후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고, 교정청 출신인 김홍집이 중심이 되어 내정 개혁이 단행되었다.[9]

3차 봉기와 실패

일본은 이처럼 단독으로 조선의 내정 개혁을 단행함과 동시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군을 공격하여 승리한 뒤 정식으로 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7월에 시작된 청일전쟁은 두 달 만에 구미 열강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9]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조선 정복을 위해 내정 간섭을 실시하였다.[9] 이 때문에 해산되었던 동학농민군이 외세배격에 기치를 내걸고 다시 소집되어 대일 농민전쟁을 감행했다.[9]

봉기한 농민군 제1대는 전봉준의 지휘를 받아 공주성으로 몰려들었고, 제2대인 김개남의 지휘하에 청주병영으로 진격했다. 농민군의 최종 목표는 서울로 쳐들어가 부패한 정치가와 외세를 몰아내고 나라를 바로잡는 데 있었다. 교조신원운동에서 고부 봉기, 제2차 봉기까지 전봉준과 농민군은 오직 그 날을 위해 달려갔다.[8] 하지만 관군과 일본군의 화력에 밀린 농민군은 그해 12월에 패배하여 봉기가 실패하였다.[9]

교조 신원운동과 대원군의 개입

1864년 교조 최제우를 처형하여 군문 효수하였다. 동학도는 매년 교조의 무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교조 신원 운동을 벌였다. 동학도는 매년 한성으로 상경하여 교조 신원과 포교 허용을 청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한편 1893년흥선대원군은 동학도가 상경하여 경복궁 앞에서 복합상소운동을 벌이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10] 정교1893년 2월 11일부터 2월 13일까지 3일간 박광호를 소두로 하는 약 50명의 동학교도들이 상경하여 궁궐 앞에서 교조 신원을 탄원하며 연좌시위를 벌인 사건을 대원군이 시킨 일이라고 주장하였다.[10] 이때 정교는 대원군이 은밀히 동학당 수만 명을 서울로 불러 모임을 갖고 장차 불궤를 도모하여 그의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고 진술하였다.[10]

고부 봉기 배경

1892년 전봉준이 살던 고부군조병갑이 군수로 영전하여 왔다. 그는 농민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물론 무고한 사람의 재물을 빼앗아 갈취하고 이에 대항하는 사람에게 가차없이 형벌을 가하였다.[11] 고부는 본디 비옥한 땅으로 저수지 하나로 충분했다. 그러나 조병갑은 농민에게 억지로 저수지를 짓게 해 물값을 받았다. 음란한 죄, 화목하지 못한 죄 등 여러 죄명을 만들어 벌금을 타냈고, 부친의 비석을 만든다는 핑계로 돈을 걷기도 하였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아버지의 선정비 또는 신도비를 세우는데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임지인 고부군 주민에게 세금액수를 인상하여 거둬들였다. 조병갑은 자신의 아버지 비각을 세우기 위해 농민으로부터 천 냥의 돈을 거둬들이고, 주민에게 갖가지 죄를 뒤집어 씌워 2만 냥을 벌금으로 긁어냈다. 게다가 대동미를 대신하여 돈을 거두고,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만든다고 쌀 700석을 착복하기도 했다.[11] 한편 조병갑은 중앙 조정에도 뇌물을 바쳤다. 중앙 조정에 바치는 뇌물은 의례적인 것으로 뇌물을 바치지 못하는 군수나 현감, 부사, 관찰사는 얼마 못가 파직되거나, 정부에 막대한 돈을 헌납하는 자를 군수나 현감, 부사, 감사로 임명하면 자리를 내놓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세금이 인상되자 주민의 불만은 가속화되었다. 여기에 조병갑의 학정이 심해지자 고부 주민을 대신하여 전봉준의 아버지이자 당시 훈장이던 전창혁은 농민의 요청에 따라 관청에 면세를 신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했고, 이로 인해 심하게 매를 맞고는 귀가한지 한 달 만에 장독으로 죽게 된다.[11]

학정에 시달리다 못한 고부 주민은 1893년 11월12월 두 번에 걸쳐 군수에게 감세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하지만 조병갑은 진정서를 제출하려고 온 농민 대표를 붙잡아 하옥시키고 고문을 가하는 것으로 탄원서에 대한 대답을 대신했다.[11] 이어 전라북도관찰사에게도 탄원서를 보냈지만 응답이 없었다. 탄원과 진정으로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한 농민들은 결국 힘으로 군수를 내쫓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11] 이어 일부 농민과 동학도들은 무기와 화약을 준비한다.

이에 분한 농민은 훈장인 전봉준을 선두로 1893년(고종 30) 음력 12월과 이듬해 음력 1월, 2회에 걸쳐 군수에게 시정을 진정하였으나 체포 또는 축출되었다. 이후 농민의 일부가 동학교도들과 함께 한성으로 입경하여 탐관오리 처벌과 부패 정치인 파직, 민생 구휼을 청하는 상소를 올린다.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 그는 농민 운동 당시 남접 소속 동학군 부대 지휘관들 중의 한사람이었다.

1893년 12월부터 1894년 1월에 올린 동학도 및 농민군의 상소 중 최시형의 탄핵 상소에 의해 경상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 영장(營將) 윤영기(尹泳璣) 등이 파직되었으나 이후 고관은 농민의 상소문을 검열하였고, 사태는 나아지진 않았다. 도리어 조병갑전봉준과 그의 일가를 잡아들이고, 전봉준의 부친에게 형문을 가하여 죽인다.

대원군 세력의 개입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발발하고, 청군과 일본군이 개입하자 대원군의 귀에는 농민들이 대원군을 부르짖는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대원군은 밀사를 파견하여 농민군 지도부와 접촉했다.[12] 1894년 2월 흥선대원군은 이들을 이용하기로 하고 교섭을 시도한다.

개혁 운동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의 제1차 농민봉기는 기존 정부에 대한 불만을 가진 농민들이 주도한 무장개혁 운동으로서 기존의 민씨 척족 정권을 무너뜨리고 개혁하자는 운동이다.

동학의 분열

동학교조 최제우가 잡혀 죽은 후 동학은 크게 두 파로 갈라졌다. 하나는 최시형 계열이고 또 하나는 서장옥 계열이었다.[13] 그러나 이 두 파벌 모두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법포는 다시 최시형, 손병희 직계인 북접과 다시 전봉준, 김개남을 지도자로 하는 남접으로 나뉘게 된다. 서장옥은 불교의 승려였다가 동학의 초기 제자의 한 사람이 되었던 인물이다. 서장옥이 불교 승려였던 인연으로 동학 농민군이 거병할 때는 산사의 승려들 동원이 가능하였다.

매천야록을 쓴 황현의 《오하기문 梧下記聞》에 따르면 "처음 동학에서는 그 무리를 포(布)라고 불렀는데 법포(法布)와 서포(徐布 또는 西布)로 나뉘었다. 법포는 최시형을 받드는데 법헌이라는 최시형의 호에서 이름을 따왔다. 서포는 호서 혹은 서장옥(서인주)의 성을 따서 서포라 불렀다. 서장옥은 수원 사람으로 최시형과 함께 교조 최제우를 따라 배웠다. 최제우가 죽자 각기 자기 도당을 세워 서로 전수하면서 이를 포덕이라 하였다.[13] 이들은 동학이 궐기할 때 서포가 먼저 일어나고 법포가 뒤에 일어나기로 약속하였기 때문에 서포는 또 기포(起布)라 하고 법포는 좌포(坐布)라 불렀다. 전봉준이 주동하여 일어날 적에는 모두 서포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14] 남접은 서포의 한 갈래였다.

동학농민전쟁 후 살아남은 손병희는 최시형의 둘째 사위이자 후계자로, 최시형 사후 동학은 다시 내분을 거듭하다가 천도교일진회로 분열되기에 이른다.

동학 농민군의 파벌

동학 농민군은 남접과 북접, 서포(또는 호서남접)의 세 갈래의 파벌이 있었다.

남접

남접은 전라도 지역에서 일어났던 동학농민군으로 처음 거병한 집단을 말한다. 남접은 접주인 전봉준, 무장 대접주인 손화중 및 태인 대접주인 김개남을 최고 지도자로 나뉘어 있었다. 전라남도, 전라북도에 영향을 미쳤으며 지도자들은 현지 출신 접주들 보다는 주로 고창, 태인, 전주, 옥구, 금구 등 전라북도 북부와 서부 출신들이 많았다. 경상북도성주군, 칠곡군, 경상남도 하동군 지역도 남접의 세력권이었다.

전주화약이후 전봉준은 호남우도, 김개남은 호남좌도를 호령하였다. 사진은 김개남이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될 때의 모습
온건파인 무장 대접주 손화중은 같은 온건파인 전봉준에게 자신의 조직을 통솔하도록 맡겼고, 강경한 혁명파인 김개남은 혁명을 함께 하면서도 때론 독자적으로 움직인다. 전주화약 이후에는 전봉준이 금구에 대도소를 두고 전라우도를 호령하고, 김개남은 남원에 대도소를 두고, 전라좌도를 호령하면서 전봉준과 달리 독자적 행동을 하였다.[15]
김개남은 내가 왕사(王事)에 협력하자고 권고했지만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처음에는 상의한 바가 있었지만 끝에는 결단코 상관하지 않았다.[16]
 
전봉준, 〈전봉준공초(全琫準供草)〉

김개남전봉준에게 호응하면서도 흥선대원군을 섭정으로 올리는 것과, 근왕주의적인 사상을 가졌던 점을 못마땅히 여겨, 전봉준과 수시로 충돌하였다. 이는 전봉준이 체포된 뒤 일본 영사관 형문장에서 진술한 공소장에도 일부 언급되고 있다.

북접

북접은 충청북도 보은군과 충북 이북 지방의 파벌로 법포 또는 좌포라고도 불렸다. 최제우의 정통 직계를 자처하는 집단으로 대도주인 최시형손병희, 손천민 등이 속했다. 충청북도 보은군, 논산군 일대에 영향력을 미쳤다.

당시에 동학의 주요 지도자였던 오지영의 진술에 따르면, 최시형은 호남의 전봉준과 호서의 서장옥은 나라의 역적이고 사문난적이다 라 규정하고, 동시에 남접의 농민군을 칠 예정이었다.[17] 당시 남접의 지도자인 김개남 등은 조선 정부를 부정하고 스스로 개남국왕(開南國王)이라 칭하였다.

최시형 이하 북접 지도부는 포교의 자유를 얻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1차 봉기 때에도 북접은 참가하지 않았다.[18] 남접과 달리 북접은 중농 이상이 많아 개혁에 관심이 없었다.[18] 북접의 목적은 최제우의 명예 회복과 동학의 포덕 자유 허용이 목적이었다. 북접은 최대한 정치적 문제에서 회피하려 했고, 흥선대원군과의 연결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다. 남접이 3차 봉기를 준비하자, 북접은 남접 농민군을 공격하려고까지 했다.[18] 그러다가 그해 9월 최시형이 제자들의 간곡한 설득을 하면서 참여하게 되었다.

서포 또는 호서남접

최제우 사후 동학은 법포와 서포로 나뉘었다. 법포는 최시형을 받드는데 법헌이라는 최시형의 호에서 이름을 따왔다. 서포는 서장옥을 받든다.[13] 서포는 다른 이름으로 호서남접으로 불렸다.[19] 충청북도 청주충청남도 지역에 위력을 떨쳤다.

서포에는 북접에서 급진적이라는 이유로 파면당한 이들 일부가 가담해 왔는데, 남접의 근거지인 전라도 보다는 서포가 활동하는 충청남도 아산, 보령 지역이 더 가까운 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밖에 동학 농민군의 영향력은 황해도 일대, 경상북도 성주군칠곡군, 고령군, 경상남도 하동군 일대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구호와 거사 목적

동학 농민군이 거병한 대의는 부패관리 축출과 탐관오리 처벌이 목적이었다. 동학농민군의 구호는 '보국안민', '제폭구민' 등으로 유교적인 충군, 애민 사상을 담고 있었다.[20]

1894년 가을에 이르러 동학 농민군은 항일의병적인 성격으로 변화한다. 이를 두고 서울대학교 교수 유영익은 그해 가을의 동학 봉기를 "일본군을 쫓아낼 목적으로 궐기한 구한말 최초의 본격적인 항일 의병운동이었다.[20]"라고 하였다. 부패한 집권층 타도, 민씨 정권 축출을 목적으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은 항일 의병전쟁, 독립운동적인 성격으로 변모하였다.

봉기 직전

1893년 말부터 1894년 1월 초, 거사를 앞두고도 남접 내부에서도 거사를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쉽게 단안을 내리지 못했다. 남접의 실력자인 손화중 역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전봉준은 '이런 저런 부패가 있는데 어찌 우리가 이렇게 가만히 있어서 되겠습니까? 우리 국민으로써 어차피 피해다니면서 교를 형성하고 교세를 확장하고 있는 차에 이 기회에 나서서 정치를 바로잡도록 해주는 것이 좋은 것 아니요. 취지가 맞다고 생각하면 다같이 동참해서 힘이 되어 주시고, 접주님이 주관을 해주시요.[21]'라고 하였다.

그런데 손화중은 쉽게 승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직은 시기 상조입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니까 더 있으면 자연히 그럴 때가 닥칠 수 있다. 그때를 맞춰서 해야지 지금 해서는 안된다'하고 전봉준을 설득하였다.[21] 농민 운동 직전에 거사에 동학 내 강경파였던 남접 내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북접을 이끌던 최시형김개남 등의 개남국왕설 소문이나 전봉준 일파가 흥선대원군과 결탁한 것을 상당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일본군이 관군과 함께 농민군을 압박하자, 최시형 등은 처음에는 협상론인 화전론(和戰論)을 펼치다가, 마침내 현실상황의 급박함을 인식하여 스스로 자신의 주장을 포기하고 북접을 전봉준의 무장투쟁 노선에 동참시켰다.[17] "인심이 즉 천심이고 이는 천운이 이르는 바이다. 고로 너희들은 도중(道衆)을 동원하여 전봉준과 협력, 이로써 교주의 원한을 풀어 드리고 나아가 우리 도의 큰 뜻을 실현시키라!" 이로써 손병희 등이 이끄는 북접이 남접과 힘을 합쳐 봉기[17] 에 가담했다.

결과와 전개 과정

제1차 봉기

1차 봉기 창의와 사발 통문 살포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사발통문(격문)

동학 농민군의 봉기는 1894년 2월 15일(음력 1월 10일)에 시작되었다. 이날 새벽 1천여 명의 농민군은 이마에 흰 띠를 두르고 죽창과 농기구를 무기로 삼아 말목장터에 집결하였다.[22] 마침내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20명의 농민 지도부는 동학교도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렸다. 사발통문의 내용은 고부군수 조병갑을 처단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주영까지 함락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는 바로 농민과 관의 대대적인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22]

전봉준은 그 전날 밤에 태인의 최경선과 함께 3백여 명의 농민들을 이끌고 야음을 틈타 40리 길을 행군하여 말목장터에 미리 당도해 있었다.[22] 대열을 가다듬은 농민군은 가장 먼저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리고 무기고를 부수고 무장한 후 그 동안 억울하게 빼앗겼던 세곡들을 창고에서 꺼내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22]

첫 전투의 최고 지도자는 전봉준 외에도 남접에는 손화중이 최고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고, 서포에는 서장옥이 최고 지도자였다. 무장 기포에서 황토현 전투까지는 손화중 등 각 접주들이 연합해서 싸웠는데, 황토현 전투 이후 손화중은 전봉준을 대장군으로 임명한다. "전투에서는 당신이 다 관장을 하고, 그 자문은 나한테 얻어서 시행만 하시오.[23]"라고 했다.

고부군청 점령과 안핵사 파견

이리하여 농민군은 전봉준을 선두로 수백 명이 1894년(고종 31) 2월 15일 만석보를 파괴하고 고부 관아로 갔다. 이에 놀란 군수 조병갑은 도망을 갔고, 농민군은 관아를 습격·점령하여 무기를 탈취한 후 수탈에 앞장선 아전을 처단하였다. 더 나아가,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을 탈취하여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농민들은 사후의 계획을 세워놓지 않아 곧 신임 군수 박원명의 온건한 무마책에 해산하였다. 또한 무력 봉기와 정치적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는 최시형을 비롯한 지도부의 거병 반대와, 농민군에 대한 초기의 방관적 대응도 작용했다.

고부군수 조병갑을 생포하는 일은 실패하였다. 조병갑은 농민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전주감영으로 피신했기 때문이다.[22] 고부 관아를 농민군이 점령했다는 소식을 들은 조정은, 조병갑을 처벌하고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삼고 용산현감 박원명을 신임 군수로 임명하여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22]

조선 말기 민란이 곳곳에서 일어났지만 대개는 조정에서 안핵사(按覈使)를 보내면 평정되는 것이 상례였다. 안핵사 이용태가 내려와 화약을 청했고 동학 농민군 대표들과 면담 후, 동학 농민군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기로 하고 동학 농민군은 자진해서 해산한다. 이것이 '제1차 동학 농민 운동'으로, 고부 봉기, 1차 봉기, 정월 봉기 등으로 부른다.

제2차 봉기

안핵사 이용태의 탄압과 재궐기

그러나 머지 않아 안핵사 이용태는 위 사건을 동학도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동비들의 뿌리를 뽑겠다고' 선언, 반란 관련자들을 동비(東匪)라 하여 동학도로 취급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동학과는 상관 없는 일반 전라북도충청남도 지역의 농민도 동학도로 몰아 역적죄로 혹독히 탄압하였다. 이에 고부의 상황은 바뀌게 된다. 이용태의 탄압에 분개한 전봉준과 농민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총기류와 농기구 등으로 무장한 뒤, 무장(茂長)의 김개남, 손화중 등과 함께 봉기하였다. 이것이 2차 봉기, 백산 봉기, 삼월 봉기 등으도 불리는 '제2차 동학 농민 운동'이다.

이때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은 세를 확대하여 백산으로 이동하여 그곳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리고 안핵사로 내려온 이용태가 동학교도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자행하자, 그 해 3월 전봉준은 인근 각지의 동학교도들에게 통문을 보내 봉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따라 백산에 집결한 농민군은 일시에 1만으로 불어났다.[22] 집결한 교도들에 의해 농민군의 동도대장으로 추대된 전봉준은 손화중과 김개남을 총관령, 김덕명과 오시영을 동도대 총참모, 최경선을 총솔장, 송희옥과 정백현을 비서로 삼고 조직적인 전투 준비에 돌입했다.[22] 그는 싸움에 앞서 살인과 재물 탈취를 금지하고, 일본군과 권력 귀족들을 몰아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4대 강령을 발표하고, 규범 12조로 농민군의 규율을 바로 잡고 군사 훈련을 강화하였다.[22]

전봉준을 총대장, 김개남(金開男)·손화중(孫和中)을 장령(將領)으로 삼은 농민군은 1894년 음력 3월 하순에 백산에 모여 다음과 같은 농민군의 4대 명의(四大名義)[24]와 봉기를 알리는 격문을 발표하고, 민중의 궐기를 호소했다.

  1. 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을 해치지 말라.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먹지 말라.]
  2. 충효를 온전히 하여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라.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
  3. 왜양(倭洋)을 축멸하고 성군의 도를 깨끗이 하라. [일본 오랑캐를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 잡는다.]
  4. 병을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여 권귀(權貴)를 멸하라. [군사를 몰아 서울로 쳐들어가 권세가와 귀족을 모두 제거한다.]

이에 정읍시 태인·김제시 금구(金溝)·부안 등지에서 농민이 합세하여 그 수가 수천에 달했다. 그러나 전봉준이 창의할 때의 강령 중 부패한 외척을 내쫓는다는 것과 흥선대원군을 섭정으로 다시 추대한다는 조항에 일부 농민군은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고종과 왕비를 축출할 것을 기대한 자들도 당황했다. 전봉준은 오늘의 이 사태를 불러온 것은 민씨 척족과 탐관오리지 임금이 아니므로, 그들만 몰아내면 되는 것이라며 이들을 안심시켰다.

각지의 궐기

전투 태세를 갖춘 농민군은 5월 8일(음력 4월 4일) 부안을 점령하고, 5월 11일(음력 4월 7일) 황토현에서 관군을 대파하는 한편 정읍, 흥덕, 고창 지역을 습권하였다. 그리고 영광, 함평, 무안 일대를 거쳐 마침내 5월 31일(음력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하였다.[25]

동학군은 전라도에만 국한되지 않고 외부로 확산되었다. 충청도의 회덕, 논산 일부 지역과 경상도의 성주, 칠곡, 대구, 하동에서도 동학교도들이 궐기하였다. 다만 농민군의 세력이 보은군 이북으로는 상륙하지 못했는데, 이들과 달리 동학교주 최시형 등은 민란에 다소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민란을 일으키다가 잘못하면 교조 최제우의 명예회복은 실패로 돌아갈 것이고, 자칫하면 역도로 몰려 교세에 탄압을 가져올 것이라고 내다봤기 때문이었다.

금구 원평 전투와 전주성 입성

이후 농민군은 전주성 함락을 목표로 음력 4월 초 금구 원평에 진을 쳤다. 실제로는 농민군의 구성원은 대부분 일반 농민이었고, 동학교도는 비교적 적었다. 농민군은 탐관오리의 제거와 조세 수탈 시정을 주장하였으며, 균전사(均田使)의 폐지를 촉구하였다.

고부의 황토현에서 감영 군대를 물리쳐 황토현 전투를 승리로 이끈 농민군은, 중앙에서 파견된 정부군을 유인하기 위해 남쪽으로 향하였다. 여기에 자극을 받은 조정에서는 당시 전라병사 홍계훈을 초토사로 임명하여 봉기를 진압하도록 하였다. 정읍, 흥덕, 고창, 무장 등을 점령한 농민군은 5월 27일(음력 4월 23일),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홍계훈이 이끄는 정부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5월 31일(음력 4월 27일), 이 기세를 몰아 농민군은 전주성으로 입성하였다.

동학군의 힘이 점차 강성해지자 조정은 청국군을 요청하였고, 청국군이 인천에 상륙하자 텐진 조약을 빙자하여 일본군도 조선에 진출하였다. 이렇듯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워지자 동학군과 관군은 화의를 약속하고 교섭에 들어갔다.[25]

그러나 정부군은 완산에 머물면서 포격을 계속했고, 동학군은 여기에 대항할 만한 병기가 없어 500명의 전사자를 내는 참패를 당했다. 홍계훈은 이미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이던 고부군수, 전라감사, 안핵사 등이 징계를 당했으며 앞으로도 관리의 수탈을 감시하여 징계하겠다는 것을 밝혔고, 한편으로는 청나라 군대가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도착하였으며 일본의 군대도 조선 내 자국민 보호를 핑계로 청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출병하기로 했음을 알렸다. 6월 8일 청나라의 원군이 아산만에 도착하고, 뒤따라 일본 정부는 톈진 조약(1885년)에 따라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6월 7일 출병할 것을 결정하였다.

전주 화약과 정치 개혁안 상정

동학군은 여러 차례의 통문(通文)과 원정(原情)[26], 폐정개혁 요구안을 제시하면서 삼정(三政)의 개혁을 촉구하였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최소한 다음과 같은 농민군의 개혁 요구를 확인할 수 있다. 4월 4일 부안을 점령한 농민군은 법성포 이향에게 '동학군통문' 9개조를 보냈다.

1894년 5월 22일(음력 4월 18일) 전봉준은 비협조적이던 나주 관아의 호장, 이방, 서리 등에게 공문을 발송하였다.

전하께 아뢰어 국태공(흥선대원군)을 모셔다가 나라일을 보도록 하려 함으로써 아첨하고 비루한 자들을 모조리 파면시켜 내쫓으려는 것이니, 우리의 본의는 여기에 그칠 뿐이다.
 
나주 감영에 보낸 사발통문의 일부

이보다 앞선 5월 20일(음력 4월 16일) 영광군에서 창의소 명의로 완영유진소에 보낸 통문에서도 '국태공께 감국케 하여 위로는 공사를 보전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편안케 한다'고 하였다.

5월 23일(음력 4월 19일) 전봉준은 중앙군을 이끌고 내려온 초토사 홍계훈에게 정장을 보냈는데 '억조(億兆)가 마음을 같이 하고 온 나라가 의논을 모아 국태공을 모시고 부자 사이의 윤리와 군신 사이의 의리를 온전히 하여 아래로는 여민을 편안히 하고, 위로는 종묘사직을 보전하는 것이 우리의 지극한 소원입니다. 장차 죽음으로써 맹세하고 변치않을 것이오니 엎드려 비옵건대 굽어 살피소서'라는 내용이었다.

홍계훈은 동학 농민군을 일망타진하려 내려왔다가 정장의 내용을 보고 놀라 멈칫하였다. 홍계훈은 이들과 면담을 추진했고 바로 전봉준외 농민군 지도부는 초토사 홍계훈에게 '호남유생원정' 8개조를 제시하였으며, 5월 초 전주화약 직전 전주화약의 조건으로 초토사 홍계훈에게 27개조를 추가로 제시하였다.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철수한 후 5월 11일경 순변사 이원회에게 '전라도유생등원정' 14개조와 5월 17일경 '원정열록추도자' 24개조, 그리고 5월 20일경 장성에서 전라감사 김학진에게 '개혁안' 13개조 등을 제시하였다.[27]

  1. 동학교도와 정부는 서정(庶政)에 협력할 것
  2. 탐관오리 숙청
  3. 횡포한 부호 처벌
  4. 불량한 유림과 양반 처벌
  5. 노비문서 소각
  6. 7종의 천인에 대한 대우 개선, 백정이 쓰는 평량갓(平凉笠)을 없앤다.
  7. 과부 재가 허락
  8. 이름 없는 잡세 폐지
  9. 인재 등용, 문벌 타파
  10. 일본과 간통하는 자 엄벌
  11. 공사채(公社債) 면제
  12. 토지 평균 분작
    폐정개혁 12개조

그런데 서울대학교 교수 유영익에 의하면 이 때의 폐정개혁 12조는 허구라 한다. 유영익은 자신의 제자 중 한 사람이 동학농민운동을 다룸에 있어서 다른 한 명의 공동집필자와 함께 이른바 '동학 12개조 폐정개혁안'이란 것이 허구라고 밝혀냈다고 주장하였다.[28]

전주성에서 철병했으나 이미 청군일본군은 조선 내에 진입한 상태였다. 한편 홍계훈은 전주화약 이후에도 이들을 역적으로 취급했다. 이에 전봉준6월 7일(음력 5월 4일)에 항의문을 보내는데, '태공을 받들어 나라를 감독토록 함은 그 이치가 심히 마땅하거늘 왜 이를 불궤라고 하느냐?'라고 하였다.

12조 개혁안의 진위 문제

한편 이때 제출된 12개조 개혁안은 진위 여부가 불확실하다는 이견이 제기되었다. 서울대학교 교수 유영익은 "내가 국사교과서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 계기는 2002년 어느 날 나의 한 제자가 내 연구실로 찾아와 자기가 고등학교 검인정 근현대 교과서를 집필했다고 자랑하면서 교과서 집필 과정에서 겪은 실화 한 토막을 털어놓았을 때이다."라고 고백하였다.[20]

유영익에 의하면 "그 제자는 동학농민운동을 다룸에 있어 다른 한 명의 공동 집필자[20]와 함께 이른바 '동학 12개조 폐정개혁안'이란 것이 허구임을 알기 때문에 애당초 그 개혁안을 교과서에 싣지 않기로 작정했는데 당시 교육인적자원부에서 집필자들에게 시달한 '국사 교육내용 전개의 준거안'에 그 개혁안을 의무적으로 인용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 교과서에 실었다고 고백했다.[28]' 한다.

유영익에 의하면 폐정 12개조 개혁안은 출처가 불확실하다 한다. 그에 의하면 '나는 12개조 개혁안이란 것이 1940년에 어느 무명의 역사가(오지영)가 역사소설 동학사라는 책에 임의로 삽입한, 역사상 존재하지 않는 자료임을 논문을 통해 입증했기 때문에 이 고백을 듣고 깜짝 놀랐다.[28]'고 한다.

교육부가 '국사 교육내용 전개의 준거안'이라는 것을 내세워 사실에 어긋나는 비진리를 국사교과서에 싣도록 강요한 사실에 분개하였다. 이 얘기를 듣고 나서부터 나는 우리나라 교육부가 일본 문부성 못지 않게 역사 왜곡을 자행한다고 생각했고 그 후로 일본 정부의 역사 왜곡에 대해 입을 다물게 되었다[28]'고 고백하였다. 반면,이러한 주장에 대해 동학농민운동사를 전공한 박맹수 원광대 교수는 "오지영의 '역사소설 동학사'는 픽션으로서 소설이 아닌 회고록 성격의 글"이라며 유 교수 의견을 정면 반박했다.

박 교수는 "오지영은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 지도자 출신으로 갑오년에 체험했던 바를 회고록 형식으로 글을 쓴 것"이라며 "확인되는 사료들로 봐서 동학농민운동 당시 이미 27개 조항 요구안이 있었음이 확인된다"고 설명하였다.

집강소 설치

6월 11일(음력 5월 8일) 관군과 2차 강화를 맺은 뒤 대부분의 농민은 철수했으나 동학군은 교세 확장을 구호로 그들의 조직을 각지에 침투시키고 전라도 53군에는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 개혁에 착수하였다.

교섭에 들어간 전봉준은 폐정 개혁을 골자로 하는 27개조에 달하는 조건을 내놓았고 이에 관군 대표인 홍계훈이 무조건 수용함으로써 전주화약이 성립되었다. 동학군은 각 지방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잘못된 정치의 개혁을 위한 지방 의회 겸 행정 관청으로 삼았다.[25] 특히 김개남은 5~6만의 농민군을 이끌고 집강소 설치에 반대하던 남원 부사 이용헌과 나주의 현령을 살해하고, 그곳에도 집강소를 설치했다.

집강소의 행동 강령은 12개조이다. 양반 중심 사회를 혁파하고, 신분 차별을 폐지하며, 인습에 갇혀 사는 여성을 해방하여 농민 생활을 풍족하게 만드는 것을 골자로 했다. 이와 같은 강령은 17세기 이래 진보적인 실학자가 내걸었던 개혁안과 1884년 김옥균 등의 개화파가 주장했던 정책보다 진보한 내용이었다.[25] 시대를 멀리 내다본 전봉준의 개혁 사상은 성리학 국가인 조선 왕조에서 수용할 수 없는 혁명적 기치를 내걸고 있었다.[25] 그러나 전봉준은 이번 기회에 고종명성황후를 폐위하자는 일부 강경파의 견해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제2차 봉기의 성격

이 중 제2차 봉기는 흥선대원군전봉준을 사주했거나, 적당한 때를 알렸다는 주장도 있다. 이상백에 의하면 '대원군은 전봉준의 처족 8촌이자 전주대도소 도집장 송희옥을 선공주사로 임명하고 대원군의 측근인 박동진정인덕은 이 송희옥과 접선하여, 전봉준에게 밀지(密旨)를 보내 대원군의 뜻에 따라 재봉기할 것을 주문하였던 것이다.[29] 김개남에게는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을 통하여 전 승지 이건영과 접촉하고 이건영은 김개남을 만났다.[29]'는 것이다.

일본군의 개입

톈진 조약이 파기됨에 따라 청군과 함께 조선에 진주한 일본은 힘으로 내정 개혁을 단행하려 했고, 이 때문에 청일 전쟁이 일어났다. 조선시대의 사대주의에 불만을 품었던 개화파 정치인들은 일본을 적극 지지하였다. 또한 일부 개화파는 일본을 이용하여 선진 문명을 받아들여서 빨리 개화, 변혁을 꾀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동학 농민군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경계심을 느낀 고종은 신하에게 직접 "청에 도움을 요청, 청군을 이용해서 이들을 진압하게 하자"는 제안을 한다. 그러나 청나라군의 유입을 경계한 일본 역시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킨다.

동학군의 세력 형성을 경계한 고종과 민씨 척족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한다. 이때 안경수는 일본, 민영준은 청나라와의 외교 교섭을 통한 동학난의 수습에 적극 앞장섰다.[30] 민씨 정권은 청나라에 사절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였다.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은 관군과 함께 '동비 색출'에 나선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 조정을 장악하였다. 보국안민과 외세배격을 기치로 내걸었던 동학은 일본의 국권 침탈 행위에 분개하며 다시 한 번 봉기했다. 그러나 동학 농민군의 궐기 목적에 폐정개혁과 민씨 척신세력 처벌, 대원군 옹립이라는 조항이 들어있음을 접한 민비는 동학군에 대한 대대적인 진압을 계획한다. 또한 양반 사대부들은 최제우가 사이비 종교를 만들다가 혹세무민죄로 처형당한 것을 근거로 들어 동비를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동학농민군의 세력은 전라남북도와 충청남도, 그리고 경상북도 일부 지역에서 맹위를 떨쳤다. 충청도의 노론 위정척사파 계열 양반들과 보수적인 영남 남인들은 자체적으로 의병을 창의하여 동학군과 교전을 벌였다.

대원군의 접촉 시도

대원군과 전봉준의 연합

흥선대원군.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1890년부터 1892년 무렵 한때 흥선대원군의 식객으로 있었다.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농민군의 온건파와 비밀리에 연락한 흥선대원군은 동학군 내의 온건파가 대원군을 받들 것을 주장한다는 점을 주목했다.[2] 1894년 6월 흥선대원군은 손자 이준용과 함께 동학 농민군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계획을 수립한다. 대원군파가 농민군을 상경시키고, 청국군을 끌어들여 일본군을 격퇴하고 개화파를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하려는 계획은 당초 이준용, 이태용, 박준양의 시국대처 논의 속에서 그 윤곽이 짜여졌다.[2][31]

당시 박준양은 이준용에게 관직을 쉬고 외국으로 나가 10년 동안 견문을 넓혀 명망을 얻은 이후에 돌아올 것을 권하였다. 그 동안 고종은 노쇠하게 되고 왕세자(순종)도 그다지 큰 덕이 없으니 그때에 외국 명망과 국내의 관심은 자연히 이준용에게 쏠릴 것이고, 그러면 그다지 노력하지 않고도 권력을 쥘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2]

그러나 이태용은 큰일을 도모할 경우에는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서, 여러 사람의 기대가 모두 대원군을 향하고 있고, 더욱이 동학군이 대원군을 받들겠다는 주장을 펴면서 봉기하고 있는 지금, 그들로 하여금 수십만 대중을 동원하여 올라오게 한다면 진실로 사람의 무리가 하늘을 이긴다고 하듯이 일본군이 비록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2] 이어 이태용은 이준용에게 한편으로 일본군을 만류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 밤을 재촉하여 군중을 올라오게 한다면 손바닥을 뒤집듯이 일이 쉬워질 것이라고 제안하였다.[2] 두 사람의 제안을 이준용대원군에게 알렸고, 대원군은 이태용의 안을 지지하여 박동진과 박세강에게 수십만 대중을 규합하여 속히 올라오게 하였다.[2] 한편 전봉준 등은 일본군의 유입으로 농민군이 분기탱천해 있음을 대원군에게 알려왔다.

손화중 등 타 지도자들 포섭

흥선대원군이 포섭한 동학 농민군 지도자 중에는 손화중도 있었다. 손화중의 부인인 유씨가 임종 직전에 남긴 증언에 의하면 손화중도 대원군을 만나고[23], 그의 서신도 받았다고 한다.[23]

손화중의 부인 유씨에 의하면 손화중은 '봉기 중 서울을 다녔는데, 대원군과 직접 상면을 했다[23]'고 한다. '그때 대원군의 서신도 받아 갖고 있었는데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23]'는 증언을 했다.

남접의 분열

그러나 남접 내에서도 이견을 보인다. 대원군 가문의 식객 출신이었던 전봉준을 비롯해서 폐정개혁과 외척 세도가의 퇴출, 대원군 옹립을 목적으로 하던 남접의 온건파와 왕조 자체를 부정한 김개남 일파는 갈등한다. 이는 농민군 내부의 파벌 갈등, 알력으로 발전한다.

대원군 일파와 모의

이에 따라 대원군과 함께 대원군파의 중심이었던 이준용은 관직을 내무협판에서 통위사로 옮겨 병권을 장악, 불시의 병력 사용에 대비하고 다수의 장정들을 모아 대궐 내에 은닉하여 일본군대가 북진하여 병력이 허약해진 틈을 노려 농민군과도 내외 상응하여 거사하려고 하였다. 농민군이 금강에 이르러 그 기세가 놀랄 만하면 이준용은 이들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32] 병력을 일으켜 한성을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동학농민군과 사전에 계획을 짠 뒤, 이준용이 토벌을 명분으로 부대를 구성하면 동학농민군은 빠진다는 계획이었다. 이준용은 이들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출진명령을 얻어, 군병과 수백 명의 역사(力士)를 대동하고 과천, 수원 사이에 개부하여 오히려 일을 꾸며 합세 회군하여 서울로 들어와 사람들이 놀라고 왕이 피난할 때를 타서 한편으로는 그 부하인 통위영 병대[32]를 동원하려 했다.

대원군과 이준용의 계획은 "농민군이 재기하면 그 토벌을 핑계로 군사를 일으켜서 개화정부를 전복하고 정권을 잡으려던 것으로 재기병을 촉구하는 밀사를 보냈던 것[33]"이었으며, 또 만일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러 내려가게 되면 즉각 해산하였다가 그 해 11~12월 경에 강이 결빙하기를 기다려 청국병이 오게 될 형편이 되면 협력하여 일본군을 격퇴하고 정부를 갱신하고 새로운 왕을 세우려는 것이었다. 이준용은 농민군에게 거병하여 한성에 오면 자신은 동학군을 진압하는 척할 것이니 적절히 싸우는 척하다 해산하라고 자신을 찾아온 일부 동학군 지도자에게 알렸다.

이준용이 이끄는 통위병 영대로서 왕실을 장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수인들을 지휘하여 김홍집, 조희연, 김가진, 김학우, 안경수, 유길준, 이윤용 등을 죽이고 정부를 전복하여 정권을 장악한 뒤 고종을 상왕으로 추대하고, 왕비와 태자를 폐하여 이준용을 왕위에 올리기로 결정하였다.[32] 한편 흥선대원군이준용의 거사에는 위정척사 계열 유학자도 동의하고 있었으므로 이준용은 전봉준과 동학군 지도자에게 이 점을 설명했다.

대원군, 이준용의 음모 탄로

흥선대원군이준용 등은 동학 농민군이 궐기하여 비상사태를 만든 후, 사람들을 동원, 올라온 대중을 한편으로는 서울 근방에 배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울로 들여보내 종로에 도회시켜 만인소청을 설치하고 서찰을 정부에 투여하여 각국 공관에 조회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34] 그러면 한두 사람의 일이 아니고 수십만 명의 일이고 또 외국에 어떠한 해를 끼치는[32] 일도 아니기 때문에 외국에서도 아무 말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34] 일이 이루어지면 사신을 밀파하여 청국군에게 알려 앞으로의 시비에 대비하게 하고, 만일 일본군이 먼저 움직이면 일단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1894년 10월 중에 청국군이 나오는 것을 기다려 힘을 합쳐 협공하면 일본군을 격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34]

그리고 대원군파의 사람을 중심으로 신정부를 구성하여 박준양을 영의정에, 이태용과 김모를 각각 좌의정, 우의정에 앉히려고 하였으며, 고운정을 충청감사나 영남감사에, 그리고 고종주를 전라감사에 임명하려고 하였다.[34]

8월 24일 청·일의 평양성 전투에서 기대했던 청나라의 패배소식이 알려진 후 대원군측의 일부 인사가 '정변계획'을 유보하자고 주장하자[33], 이준용은 머뭇거렸다. 이에 대원군의 측근인 박동진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33]

대사는 시기를 잃지 말아야 하는데 오늘날의 물망이 모두 노대감(대원군)을 따르고 하물며 또 동학당은 상봉국태공(上奉國太公)의 설로 창의한 자들이다. 만약 몇십만 명을 이끌고 권토중래한다면 실로 소위 인중승천(人衆勝天)[35] 인바 일본군이 움직인다 한들 어쩌겠는가.[33]

동학농민군의 주장 중 농민군이 폐정개혁을 요구하는 가운데 대원군의 감국(섭정)도 요구하고 있었다.[33]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 사전모의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농민군이 폐정개혁을 요구하는 가운데 대원군의 감국도 요구하고 있었음을 주목한 대원군측이 농민군을 이용하여 일본군과 친일개화파를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하려 했음을 시사해준다.[33]

그러나 대원군과 이준용의 정변 음모는 일본 공사관의 첩보망에 걸려 실패로 돌아간다. 흥선대원군이준용은 일본 공사관에 소환되었고 청나라와 손잡고 일본군을 축출하려는 의도를 추궁당한다.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 공사관은 1894년 9월 일본 본국에 연락하여, 일본군 병력을 증원하여 경상남도 동래군부산항을 통해 파견한다.

제3차 봉기

제3차 봉기 궐기

1894년 9월 전봉준, 김개남 등은 다시 사발통문을 띄워 궐기를 호소하였다. 전라도, 충청남도 등지에서는 남접과 서포 소속 동학군과 농민군이 궐기하였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남접은 교주 최시형의 북접에 도움을 청해 연합 전선을 폈다. 제2차 봉기에 동원된 농민군은 남접 10만과 북접 10만을 합해 약 20만 병력이었다.

동학 농민군의 일부가 흥선대원군과도 내통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민씨 내각의 조선 조정은 농민군을 제거할 계획으로 일본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에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손병희, 최경선, 김덕명, 최시형, 성두환, 김낙삼, 김두행, 손천민, 김봉득, 김봉년, 유한필 등이 전라북도 전주부 삼례역 역촌에서 다시 새로운 봉기를 일으켰다. 일본군의 왕궁 점령에 분격한 농민군은 이 해 음력 9월 척왜(斥倭)를 구호로 내걸고 재기하였다. 이제는 내정 개혁을 목표로 하지 않고 일본과의 항쟁이라는 반외세가 거병의 주요 목표였다. 이를 '제3차 동학 농민 운동'으로, 9월 봉기 또는 제3차 봉기, 삼례봉기로도 부른다.

타협론과 결사항전론의 대립

손병희, 농민전쟁 패전 후 교단을 수습하였다.

제1차, 제2차 봉기의 휴전은 동학군에 불리하여 정부는 강화 조건을 이행하지 않는 한편, 청군은 물론 일본군도 6월 9일(음력 5월 6일)부터 1만의 군대로 인천에 상륙하였다. 1894년 7월 23일(음력 6월 21일) 새 내각이 친일 인사들이 있자, 일본은 외교통인 이노우에 가오루를 새 주일 조선 공사로 임명했다. 7월 25일(음력 6월 23일) 드디어 청일전쟁을 일으키는 등 험악한 정세를 조정하였다.

이에 동학군은 10월 12일(음력 9월 14일) 삼례에서 회의를 연 결과 전봉준·김개남 등의 과격파는 최시형·이용구(李容九) 등 온건파의 타협론을 거부한다. 그 뒤 전봉준이 4천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삼례에서 일본군을 몰아낸 뒤 남접과 북접의 연합을 시도했다. 전봉준공주-수원-서울 북상로를 선택하고 남원에 주둔한 김개남은 금산- 청주 -서울로 진격로를 정한다. 그동안 전봉준의 봉기에 반대 입장을 보였던 손병희는 교주 최시형의 승인 하에 충청도 농민군(북접)을 이끌고 청산(靑山)에 집결하여 논산(論山)에 합류했다.[36] 그로써 김개남 대신 음력 10월에 북접의 손병희논산에서 합류하여, 남접 1만과 북접 1만을 합해 총 2만여 군세를 이루게 되었다. 이들 남북연합 농민군은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해 일본군의 병참기지를 습격하고 전신줄을 절단하면서 서울을 향해 북상하다가 공주를 총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조선 조정과 일본군은 신정희, 허진, 이규태, 이두황 등에게 3,200명의 관군과, 일본군 미나미 고시로가 이끄는 2,000명의 일본군을 이끌고 맞섰다.

공주성 진입 지연

6월 말, 일본은 이 기회에 조선에서 청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려고 전쟁을 시작했다. 청일전쟁은 일본도 청나라도 아닌 조선 땅에서 벌어졌다. 9월 16일(음력 8월 17일), 평양 전투에서 일본은 승리를 거두었다. 평양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외세가 판을 치는데도 무기력한 정부를 본 전봉준과 농민군 지도부는 9월 12일, 마침내 2차 기병을 결정했다.[18] 농민군은 공주를 손에 넣고 곧장 서울로 진격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출발이 늦어지는 바람에 정부군과 일본군 연합군이 먼저 공주에 입성했다.[18]

농민군이 늦어진 이유는 전쟁을 원치 않는 동학 북접 교단의 비협조 때문이었다.[18] 최시형 이하 북접 지도부는 포교의 자유를 얻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1차 봉기 때에도 북접은 참가하지 않았다.[18] 전주성을 함락시키고 호남 일대에 집강소를 두어 한국 최초의 농민자치를 실행한 것은 전적으로 남접 농민군의 힘이었다. 남접과 달리 북접은 중농 이상이 많아 그만큼 개혁에 관심이 없었다.[18] 남접이 2차 봉기를 준비하자, 북접은 남접 농민군을 공격하려고까지 했다.[18] 9월 하순, 제자들의 간곡한 설득에 최시형은 마지 못해 합류를 허락했다.[18] 논산에서 북접군과 남접군이 합류한 것이 10월 9일이니 봉기 결정 후 한 달을 끈 셈이었다.[18]

일본군과의 전투

농민군과 조일 연합군은 11월 20일(음력 10월 23일)부터 23일(26일)까지 공주 이인포효 등지에서 제1차 접전을 벌였고, 농민군은 크게 패배해 후퇴했다.농민군은 곰티와 검상 마을, 곰내, 하고개, 주미산 방면을 공격했다. 홍성 농민군은 금강 건너편의 유구 쪽에서 맞섰으나 세성산 전투에서 패배해 후퇴했다. 농민군은 다시 진열을 정비하고, 12월 5일(음력 11월 9일) 남접과 북접 연합군 1만여 명이 공주 우금치를 향해 돌진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동학 농민군은 숫적으로만 우세할 뿐 훈련을 받은 군인도 아니었고, 병기도 원시적이어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10월 중순 10만 부대로 공주성을 포위하고 대공격전을 전개하였으나 패퇴하였고, 11월 다시 공주 부근의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하여 후퇴하게 된다. 그리고 나머지 농민군도 금구 싸움을 마지막으로 일본군과 관군에 진압되어 전봉준은 쫓기는 신세가 된다.

우금치, 공주 전투, 청주 전투 패전과 퇴각

12월 5일(음력 11월 9일) 전봉준은 드디어 총공격을 명령했다. 농민군 주력 부대가 우금치를 목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금치는 견준산과 주미산이 만나 만든 가파른 고개로 개금티라고도 부른다. 물밀 듯 올라오는 농민군에게 정부군과 일본군의 최신 무기가 불을 뿜었다.[37] 시간이 갈수록 농민군의 패색이 짙어갔다.[37]

수만이나 되는 비도(匪徒)가 4,50리에 걸쳐 길을 쟁탈하고 산봉우리를 점거하여 성동추서(聲東趨西), 섬좌홀우(閃左忽右)하면서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고 죽음을 무릅쓰고 앞을 다투어 올라오니 저들은 무슨 의리이고 무슨 담략인가. 그 정황을 말하고 생각하면 뼈가 덜리고 가슴이 서늘하다. 만약 병력이 전후좌우에서 방비하지 못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다면 맹렬히 밀어붙이는 기세에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을 것이고, 결국 그들을 막아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37]

정부군의 좌선봉장 이규태는 나중에 이렇게 실토했다.[37] 주력부대가 우금치에서 결사 항전하는 동안 농민군 일대는 공주로 향했다.[37] 들은 공주 감영을 배후에서 치기 위해 봉황산을 공격했다. 조를 짜서 조별로 공격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감영을 눈앞에 두고 수없이 많은 동학 농민군이 눈을 부릅뜬 채 쓰러져갔다. 시체가 산같이 쌓이고 이루어 금강으로 흘러들어갔다.[15]

한편 김개남의 동학농민군은 전주를 거쳐 금산을 점령하고, 신탄진을 거쳐 청주로 진격하였으나 청주전투에서 일본군에 패하고 후퇴하였다.

패전과 실패

12월 10일(음력 11월 14일) 새벽, 적의 기습공격을 받고 농민군은 논산으로, 다시 전주로 후퇴했다. 전열을 가다듬어 원평, 태인에서 결전을 벌였지만 역시 패했다. 전봉준은 직속부대만 남기고 농민군에게 해산명령을 내렸다.[15]

곧이어 정부군 측의 소탕작전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죄없는 양민까지 마구잡이로 체포, 학살하고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었으며 부녀자를 능욕했다. 그동안 쌓아 올린 농민적 사회경제의 기반은 여지없이 무너져나갔다.[15] 백양사에 숨어 동정을 살피던 전봉준은 정부군이 살육에 정신 없는 틈을 타서 직속부대를 서울로 잠입케 하고 세 명의 부하와 함께 순창으로 갔다.[15]

동학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관군과 일본군 연합군은 전봉준을 생포하면 막대한 상금을 준다는 포고문을 내걸었다. 전봉준은 정읍과 순창 등지를 전전하며 몸을 숨겼다. 그러나 과거 자신의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어 12월 28일(음력 12월 2일) 한양으로 압송되었다.[38]

체포와 최후

김개남은 12월 27일(음력 12월 1일) 태인에서 친구인 임명찬의 밀고로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된 후 처형된다. 1894년 12월 28일(음력 12월 2일) 순창에서 전봉준은 상금에 눈 먼 옛 동지김경천의 배신으로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일본군에 의해 서울의 일본영사관으로 호송되었다. 그 후 법무아문으로 넘겨져 1895년 3월 5일(음력 2월 9일)부터 4월 4일(음력 3월 10일)까지 5차례 심문을 받았다.[15] 법무아문에서는 고문을 가하며 대원군전봉준의 관계를 캤지만 그는 일절 대원군을 언급하지 않았다. 체포된 전봉준은 심문을 받으면서 자신의 정치적 구상을 이렇게 밝혔다.

  • "서울에 쳐들어온 후 누구를 추대할 생각이었는가?[39]"
  • "일본병을 물러나게 하고 악간(惡奸) 관리들을 축출해서 임금 곁을 깨끗이 한 후에 몇 사람 주석(柱石)의 선비를 내세워 정치를 하게 하고 우리는 곧장 농촌에 들어가 상직(常職)인 농업에 종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국사를 들어 한 사람의 세력가에게 맡기는 것은 크게 폐해가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몇 사람의 명사에게 협합(協合)해 합의법에 의해서 정치를 담당하게 할 생각이었다.[39]"

전봉준은 대원군과의 관계를 완강하게 부인하였다. 그러나 김개남 등은 대원군과의 관계를 진술하였고 즉각 처형된다. 결국 1895년 4월 23일(고종 32년 음력 3월 29일) 재판장전봉준 외 체포된 동학농민군 지도부에게 부대시참을 선고했다. 전봉준은 무릎을 치고 일어나면서 외쳤다.[15] 전봉준은 자신이 역적이 아님을 들어 역적의 누명을 쓰는 것은 억울하다고 호소하였다.

정도를 위해 죽는 것은 조금도 원통할 바 없으나 오직 역적의 이름을 받고 죽는 것이 원통하다.[15]

1895년 4월 23일(음력 3월 29일)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성두한 등과 함께 사형에 처해졌다. 이로써 동학 농민봉기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38] 한편 일부 농민군 지도자는 흥선대원군의 특별 사면 탄원으로 석방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 공에 눈이 먼 고향 사람의 손에 의해 민씨 정권 인사들에게 넘겨져 대부분 처형당했다. 죽기 전, 전봉준은 시 한 수를 지어 자신의 회한을 읊었다.

때를 만나서는 천하도 힘을 합하더니 / 時來天地 皆同力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 運去英雄 不自謨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길이 무슨 허물이야 / 愛民正義 我無失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 / 愛國丹心 誰有知[15]

한편 김개남 등 일부는 태인 산내면 종송리에 있는 매부 서영기의 집에 숨어 있다가 친구 임병찬의 고발로 전주에 있는 강화영의 중군인 황헌주에게 잡혀 불법으로 전주 서교장에서 처형당했다.[40] 나머지 인사들은 시골에 숨어살거나 술주정꾼 행세를 하면서 겨우 의심을 피해 생존하였다. 농민전쟁의 실패와 함께 동학 농민군을 이용하여 명성황후를 타도하고 이준용을 추대하려던 흥선대원군의 재집권 기도도 수포로 돌아갔다.

주요 전투

황토현 전투

농민군이 전북 정읍 황토현 일대에서 관군을 무찌르고 첫 승리를 거둔 전투로 후에 황룡촌 전투에서도 승리하게 되었다. 농민군이 봉기하고 태인과 부안 관아를 잇따라 점령하자 조정에서 전라감사 김문현, 영관 이경호 등이 영내 잡색군 등 총 1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와 정읍 황토현에서 격돌했다. 4월 7일 새벽 농민군은 관군에게 포를 쏘아 혼란에 빠뜨린 뒤 미처 대처하지 못한 관군을 추격해 패전시켰고 이 과정에서 영관 이경호가 농민군들에게 체포되어 전사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농민군은 사기가 충천하게 되었고 전주로도 진격할 수 있었다.

황룡천 전투

전주성 전투

이인 전투

태인 전투

우금치 전투

1894년 음력 11월 공주 남쪽의 우금치(牛禁峙)에서 관군 및 일본군과 큰 격전을 벌였다. 약 1주일 간 50여 회의 공방전을 벌인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500여 명의 생존자가 전주 남쪽의 금구 원평(院坪)으로 후퇴하였다.

농민군은 무너미 고개와 이인 쪽에서 맞서 관군을 밀어붙이고 조일 연합군은 모리오 마사이치 대위가 지휘하는 관군을 우금치 옆 뱁새울 앞산에 주둔하고 우금치, 금학동, 곰티, 효포 봉수대에 관군을 배치했다. 농민군은 이 곳을 집중 공격했으나 고갯마루 150미터 앞까지 조일 연합군의 우세한 무기의 포탄과 총탄이 비오듯 쏟아져 내려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기동조병완이 농민군의 좌측과 우측을 공격해 농민군은 큰 사상자를 내고 공주 동남쪽 봉우리로 후퇴했다. 농민군 1대가 봉황산으로 진격해 공주감영을 공격하려 했으나 하고개와 금학골 골짜기에서 관군의 공격으로 실패했다. 이로써 농민군은 4일 간의 제2차 접전에서도 패배했고, 전봉준은 군인, 이서, 상인들에게 지지를 크게 얻지 못했다. 조일 연합군은 12월 10일(음력 11월 14일)에 노성 주둔 농민군을 공격해 농민군은 대촌 뒷산과 소토산으로 계속 후퇴해 사기까지 떨어졌다. 12월 23일(음력 11월 27일) 최후의 전투인 태인전투에서도 전봉준 장군의 주력부대로서는 일본의 신식 무기에 다수의 전사자를 낳고 패배하였다.

1894년 12월 체포되어 한성부로 압송되는 전봉준 (교자에 포박되어 앉아있는 이)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지역 각지에서 많은 접주들이 항거하여 봉기하였으나 그 규모는 소수였고, 전봉준의 부대만이 대규모로서 호남의 5천명을 이끌고 일본군 수만 명을 상대로 항전을 벌였으나 전략 미숙과 병기류를 충분히 갖추지 못하여 마침내 일본군을 끌어들인 조선 조정의 관군과 일본군 연합군에 의해 패하고 말았다. 마침내 음력 11월에 전봉준 등은 순창에서 체포되어 한성부로 압송된 후 일본 공사 또는 조선 의금부의 재판을 받고 이듬해 사형되었으며(1895년 음력 3월), 이후 조일 연합군의 호남 일대의 농민군 대학살전이 일어났다.[41] 이로써 동학농민전쟁은 거병한 지 1년 만에 실패로 끝났다.

조선군의 전쟁 범죄

동학농민운동 당시 조선군백성들을 상대로 전쟁범죄를 저지른 적도 있었는데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러 전주로 내려온 경군 병사들은 3달 전부터 월급을 못 받은 상태라 군기고 뭐고 없이 백성들을 상대로 잔인하게 약탈강간을 저지르는 것이 도적떼보다 더 심했기 때문에 민중이 일본군의 주둔을 희망한 적이 있을 지경이었으며 진위대 역시 임무에는 관심이 없고 국왕의 군대라는 것을 앞세우면서 민중에게 강도질과 폭행을 일삼았다. 여자에게는 성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모자라 민중에게 부당한 세금을 거두는 탐관오리의 사냥개가 되어 자신들이 지켜야 할 시민의 집에 밤에 몰래 쳐들어가서 총으로 쏘아 죽이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이토 히로부미가 진위대의 해산 명령을 내리자 조선인이 손을 들고 경축한 일도 있었다.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한 승려

불교 승려들도 참여하였다. 여기에는 농민군의 주요 파벌 중 하나인 서포의 지도자 서장옥이 불교 승려 출신인 점이 작용하였다.

농민군 지도자 중에는 승려 출신의 접주도 있었다. 충청남도에서 활동한 남접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서장옥(서인주)은 승려 출신으로, 최시형과 함께 최제우의 제자가 되었다. 최시형과 동문인 일반 접주였지만, 최시형의 제자들에 비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42]

서장옥은 일찍이 승려로 30여 년을 수행하다가 동학에 투신하여 1894년 전봉준과 함께 창의하니, 호서남접 혹은 서포라고 불렸다.[19]

1893년 2월의 집회 때 남접에서는 북접이 주최하는 보은 집회의 동정을 살피려고 긍엽(亘葉)이라는 승려를 파견하였다. 농민전쟁에는 서장옥과 수많은 승려가 참여하였다. 즉 원평의 남접 호남세력과 서포의 연합 집회에 불갑사의 인원(仁原), 선운사의 우엽(愚葉), 백양사의 수연(水演) 등 호남 지방 승려가 가담하였다.[43] 그밖에 충청남도 산사의 일부 승려도 서포에 가담하였다.

진압 이후

1907년 고종의 특지로 북접의 최시형 등 일부는 신원되었다. 그러나 전봉준김개남 등은 1910년(융희 4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도 복권되지 못하였다. 일부 농민군은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산중에 은신하거나 항일 의병 전쟁에 흡수되기도 했다.

기타 활동

대원군파와 연결

대원군파는 1894년 7월경부터 일본 세력을 퇴치하기 위해 청지방의 사회세력과 평양의 청나라군의 협력을 받으려 하였다.[44] 이때 동학 농민군에게도 사람을 보내 협력을 요청했다.

구체적으로 대원군은 동학농민군, 지방의 토호세력, 양반유림, 공신의 자손들, 보부상 등에게 밀사를 파견하여 의병보익와 군수지원을 촉구하였다.[45]

개화파 제거 기도에 참여

서울에서 동학 농민군 일부와 대원군파는 은밀히 자객을 동원하여 개화파의 중진인물인 김홍집, 김학우, 김가진, 안경수, 조희연, 유길준, 김종한, 이윤용 등을 암살하려 하였다.[45] 농민군은 이 계획에 협조한다.

이 암살계획은 동학농민군이 이준용 휘하의 통위영과 협력하여 서울을 공격하기로 하였던 1894년 8월 중순경에 실천에 옮겨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군국기무처 내에서 대원군과 이준용의 반란 모의를 조사하자고 주장했던 김학우를 암살하는데 그침으로서 제한적인 결실만을 거두었다.[45] 이후 농민군은 감쪽같이 빠져나갔고 흥선대원군을 체포할 수 없었던 내부에서는 이준용을 체포하여 의금부에 감금하였다.

평가

동학농민운동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두고 농민이 주축이 된 “반봉건·반외세 농민항쟁”이다. 동학은 신분제 혁파를 주장했기에 혼란한 구한말에 가난한 농민이 의지할 수 있는 종교였다.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으로 결국 실패했으나, 3.1운동으로 계승되었다.

동학농민전쟁은 동학이라는 종교 조직의 지도로 일어난 농민 항거라는 점과, 외세 배척을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조선의 기존 민란과 다르다.

당시의 역사적 배경에서 동학농민운동은 몇 가지 한계도 가지고 있다.[46]

첫째, 농민군은 관군과 외세에 맞설 효과적 무기와 병력이 부족하였다. 둘째, 기득권을 가진 향촌사회의 지주·부호·양반이 구성한 민보단(民堡團)등의 저항을 과소 평가하였다. 셋째, 사회 개혁을 위한 혁명을 수행하면서도 대원군에 의지하였다.[47]

더구나 동학군 내 과격파는 왕조를 부정하고 새 정부를 구성하려 시도한 반면, 온건파의 전봉준 등은 흥선대원군과 협력하는 등, 내부에서도 의견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봉준이 백산에서 전라감사에게 내놓은 개혁요구서와 전주화약을 맺기 직전 관군 최고사령관 홍계훈에게 보낸 탄원서에는 대원군이 다시 권좌에 복귀하기를 바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47]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오 동학 농민 운동은 애국적이고 애민적인 동기에서 일어난 구한말 최대의 농민 중심의 항쟁이었다. 한편, 농민군이 근대적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사회혁명이나 계급전쟁을 꿈꾸었다는 역사가의 견해도 있다.[46]

결국, 동학농민전쟁은 순박하고 애국적인 농민층의 자기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때의 실패경험을 바탕으로 농민의 반일애국주의가 다음 시기의 의병운동에 양반유생과 더불어 참여하는 저력을 발휘하였다. 내정 개혁 요구는 갑오개혁에 부분 반영되었다. 과부의 재가 허용과 신분제 폐지 등이 있다.[46] 그러나 이 개혁은 농민의 소망이었던 토지 개혁을 누락했기 때문에 많은 호응을 얻지 못했다.[46] 또한 김개남 등 과격파가 국왕을 참칭한 점과 전봉준 등 온건파가 흥선대원군과 내통한 점 때문에 대중의 전폭적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

더욱이 유럽의 시민혁명과 달리 농민 항쟁 운동의 주 발생지가 특정 지역이다 보니 현대에 와서도 지역 혐오 세력이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특히 뉴라이트가 동학 농민군 내부에서 성행한 방탄 부적과 같은 비과학적 부분을 들추며, 과학 시대인 현대의 관점을 반영하여 폄하하는 중이다.

관련 인물

대원군과 전봉준

1888년(고종 25) 무렵 전봉준은 손화중(孫和中)과 접촉했다.[48] 그리고 그의 인도로 동학에 입도한다. 1890년 무렵 전봉준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그의 용무지지(用武之地)로서 동학 교문이 있음을 발견하고", 서장옥(徐璋玉)의 막료인 황하일(黃河一)의 소개로 동학에 입교했다. 뒷날 동학 농민 운동의 실패로 관군에 체포된 뒤 1895년 일본 영사관에서 있었던 제2차 재판에서 "동학은 수심(守心)하여 충효(忠孝)로써 근본을 삼고 보국안민(輔國安民)하려는 것이었다. 동학은 수심경천(守心敬天)의 도(道)였다. 때문에 나는 동학을 극히 좋아했다"고 하여 스스로 동학에 입교하게 된 경위를 밝혔다.

그러나 전봉준1890년 운현궁을 찾아갔다. 이후 1890년대 초반 전봉준은 운현궁에서 흥선대원군의 문객 생활을 하였다.[49] 1892년 초 전봉준은 운현궁 문객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고향인 전라북도 고부군으로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동리 서당의 훈장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1893년 2월 전봉준한성부로 올라가 흥선대원군을 방문하였다.[48] 대원군은 잠시 식객으로 있었던 전봉준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때 전봉준은 흥선대원군에게 "나의 뜻은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한번 죽고자 하는 바"라고 말했다고 한다.[48] 이로부터 세간에는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 무슨 밀약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48]

전봉준과 천우협

한편 기요후지 고시치로(清藤幸七郞)의 저서 《천우협》(千佑俠, 덴유쿄)에서는 1894년 6월 27일에 부산을 통해 조선에 들어온 일본의 정치 폭력 조직 천우협 회원 일부가 전봉준을 만나 동학 동민 운동을 지원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천우협》에 나타난 만난 곳과 〈동도(東徒)의 죄인 전봉준 공초〉에 나타난 장소가 다르며, 〈동도(東徒)의 죄인 전봉준 공초〉에서는 당시 전봉준을 따른 군세는 고작 20여 명이었음에도 《천우협》에서는 5백여 명으로 기술하여 그 수치가 매우 차이가 크다. 결정적으로 《천우협》에 나타난 시기인 6월부터 8월 말까지는 전혀 전투가 없었음에도 《천우협》에서는 천우협 회원들과 전봉준 일동이 협조하여 관군을 격파했다고 하였다.[50] 전봉준은 흥선대원군 계열 외에도 민씨 정권을 타도하고 청나라 세력을 몰아낼 목적으로 천우협의 회원들로부터도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의 폭력 조직 천우협은 팔굉일우를 바탕으로 아시아에 대한 침략을 바닥에 깔고 있는 조직으로 다른 나라의 독립이나 부국 강병을 도울 만한 조직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천우협》이 전봉준이나 동학군을 도우려 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낮다는 시각도 있다.[출처 필요]

한편 동학측 자료에서도 전봉준과 천우협(天佑俠)의 접촉을 확인해주고 있는데 『천도교 창건사』에 의하면 "일본인 다케다 한시(武田範之) 등 15명이 금시계 1개와 마노(瑪瑙)[51] 하나를 보내어 믿음을 보이고 면회를 청한 즉 전봉준이 거리낌 없이 이들을 면담하고 시국을 서로 논하였다[52]'하여 전봉준과 천우협 측의 면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민씨 세력이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일 때만 해도 천우협은 동학 농민 운동에 호의적이었지만, 일본군까지 진압에 끌어들이게 되자 다소 애매한 입장을 표명하였다. 동학 농민 운동이 완전히 진압되어 사태 수습이 어렵다고 여겨지자 천우협은 동학과의 관계를 끊었다. 그러나 동학 농민 운동이 진압된 뒤 천우협은 다시 동학측과 사람을 주고받으며 교류를 한다.

흥선대원군의 농민운동 사주

한편 흥선대원군이 동학 농민군에게 거병을 사주했다는 것은 러시아의 외교관의 비밀 편지에도 나타난다.

나는 나의 정보원을 통해 다음과 같은 첩보를 받았다. 임금의 아버지(대원군)가 주모자로 나서서 중대한 폭동을 조성하고 있으며, 이 폭동은 오는 여름 혹은 아무리 늦어도 가을 이전에 폭발할 것이며, 공모자와 대리인들이 일본과 중국에서 무기를 구입하고 있으며 이미 4천여정의 소총이 구매되었는바, 그 중 일부는 일본에서 나왔고 소수의 일본인이 이에 가담하여 일을 같이 꾸미고 있으며, 이 음모에 대해 일본 정부는 전혀 모르고 있다.[53]
 
1894년 2월 21일, 주일본 러시아 공사 미하일 히트로포(Mikhail Hitrovo)가 주조선 러시아 공사 칼 베베르(Karl L. Weber)에게 보낸 비밀 정보

한편 흥선대원군은 동학 농민운동이 진압된 뒤, 농민군의 한 사람인 이방언이 처형당하기 전에 살려주었다. 그러나 이방언은 고향으로 내려다가다 전라도관찰사가 잡아다가 그 아들과 함께 불에 태워 죽였다.

그 증손자의 증언에 의하면 '대원군과 접선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증거로서 석대전이 끝나고 그 양반이 잽혀서 나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자기조 사형 아니면 무죄 방면, 지금 나온 재판 기록에 엊그저께가지도 총무처 기록보관소에서 재판기록 책을 보냈습디다. 그 양반은 무죄 방면이 되지 않았습니까? 무죄 방면이 될 수가 없는 분이었는데. 그렇게 된 것은 대원군이 주선을 해서 무죄 방면을 받았다.[54]'고 한다. 이어 이방언의 증손자의 증언에 의하면 '그래가지고 (이방언이) 고종 앞에까지 가서 귀화초식이란 말이 뭔 말인지는 모르지만, 돌아올 때[54] 귀자, 될 화자, 풀 초자, 먹을 식자, 귀화초식의 승봉을 받고, 나락 평정이 되면 다시 부를 테니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때 국가에 공을 세워라 하는 크나큰 은전을 입고 내려왔는데[55]'라는 것이다.

이방언과 흥선대원군과의 관련설은 송기숙이 녹두장군에도 썼듯이 꾸준히 이야기꺼리가 되고 있다. 이런 관계로 하여 이방언은 무죄 방면되었다는 것이다.(총무처 기록보관소 발행의, 동학관련판결문집 참고). 그러나 이방언은 놓여 나와도 곧바로 고향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55]

이방언의 증손의 증언에 의하면 '동학은 피차가 출혈이 많고 사상자가 많이 나서 여기로 바로 못 오시고 회천면에 있는 보성 군수에게로 갔대. 보성 군수가 이상한 것이 그 말이 맞어들어가. 거시기를 보면 보성 군수가 재판을 받았어요. 군수도 동학에 협조했다고 해가지고. 근데 보성 군수도 무죄 방면을 했어. 그 사람도 동학에 협조한 사람이여. 보성 군수의 협조로 보성군 회천면 쇳대에 은신해 있다가 전라 감사의 재체포령에 의해서 잽혀가지고 장흥 장대에서 자기 외아들 성호와 같이 동참을 당하셨어요. 지금 성운고등학교 자리라고 그럽디다. 그러니까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총살도 아니고 효수도 아니고 산 사람을 묶어놓고 그 위에다.[55]' 흥선대원군의 탄원으로 살아난 이방언은 전라도 관찰사에 의해 처형당한다. 이방언은 짚을 씌워 불에 태워죽이는 분살형을 당했던 것이다. 그래도 시신을 집안 어른들이 수습해서 묘를 쓴 것은 여느 농민군 지도자들의 경우보다 나은 편이었다.[55]

김구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김구는 동학군을 지휘했다. 지도자 최시형의 지시를 받고 황해도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습격하였으나 끝내는 관군에게 패퇴하고 몸을 숨겼다.

기타

윤영렬, 동학농민군 진압군 지휘관의 한사람이다.
윤치소 내외, 동학 농민군 진압 의병장의 한 사람이다.
박성빈, 동학농민군의 고령, 성주지역 접주였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사헌부감찰인 윤치소(尹致昭)는 아산 출신 조중양과 함께 300명 정도를 모아서 의병[56]을 조직하고 창의통문을 천안, 아산, 온양 지역에 돌리고 천안 지역에서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그는 일제하 대지주이자 사업가로서 친일로 변신, 해평 윤씨 일족인 윤웅렬, 사촌인 윤치호 등과 함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57] 윤치소는 후일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이 되는 윤보선, 경기도지사를 지낸 윤원선의 아버지였다. 한편 동학농민군 고령, 성주 지역의 접주로 활동하다 체포, 사형을 모면한 박성빈대한민국의 5~9대 대통령을 지낸 군인 출신 정치인 박정희의 아버지이자 총리 김종필의 처조부가 된다.

1894년 10월 토포사 윤영렬은 아산(牙山)에 사는 조중석(趙重錫)과 함께 장정 300명을 모아 천안군 목천면에 출몰한 도적을 토벌하였다. 이후 동학 농민 운동의 토벌에 참여한다. 윤영렬1894년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조중양과 함께 토벌군에 별군관으로 차출되었다.[57] 별군관으로 차출된 그는 관군 외에도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어 관군과 의병 병력을 이끌고 충청남도 아산천안 일대의 동학 농민군토벌에 참여하였다. 윤영렬윤보선 대통령의 할아버지였다. 그런데 상하이에 망명중이던 윤치호는 동학 농민운동을 적극 지지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실패 원인

민씨는 2차 봉기 때는 청나라군을 끌어들였고, 3차 봉기 때는 일본군을 끌어들여 교전케 하였다. 2차 봉기 때에는 전주 화약을 체결하였지만 3차 봉기때는 일본군과 조선 관군, 청나라군과 관군 연합군의 화력을 당해내지 못하였다.

또한 정권 전복을 원치 않는 북접의 반발과 왕실을 부정하는 남접 내 급진파의 존재 역시 농민군의 내분을 불러왔다. 동학군 남접이 2차 봉기를 준비하자, 북접은 남접 농민군을 공격하려고까지 했다.[18] 남접과 서포의 군사에 대한 북접의 비협조 역시 농민군의 활동을 어렵게 했다. 논산에서 북접군과 남접군이 합류한 것이 10월 9일이니 봉기 결정 후 한 달을 끌었다.[18] 북접과의 연합에 너무 시간을 소비했고, 또 남원의 김개남 부대가 독자 행동을 한[15] 것 역시 세력 약화의 한 원인이었다.

《전봉준공초》(全琫準供草)

전봉준공초》(全琫準供草)는 전봉준이 체포된 후 다섯 차례 진행된 전봉준에 대한 법정 심문 기록이다. 법부아문의 재판관과 일본 영사가 배석한 가운데 1894년 2월 9일부터 3월 10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심문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부나 일본측에서 가장 중점을 두고 추궁한 것이 농민운동과 흥선대원군과의 관계였다. 그러나 전봉준은 대원군과 동학혁명과의 관련성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는 등 혁명가로서의 의연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갑오동학혁명의 원인 및 경과, 농민군의 인적 구성, 전봉준과 동학의 관계, 동학의 교리 ·조직 ·교세 및 농민운동에 미친 영향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두 책 모두 원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돼 있다.

서광범: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전봉준: 전봉준(全琫準)이다.

서: 전명숙(全明淑)이라는 자는 누구냐?

전: 명숙은 나의 자(字)다.

서: 전녹두는 누구냐?

전: 사람들이 나를 그리 부른다.

서: 왜 난을 일으켰으냐?

전: 어찌하여 날보고 난을 일으켰다 하느냐? 작란(作亂)을 하는 것은 바로 왜놈에게 나라를 팔아먹고도 끄떡없는 부패한 너희 고관들이 아니냐?

서: 관아를 부수고 민병을 일으켜 죄없는 양민을 죽게한 것이 난이 아니고 무엇인가?

전: 일어난 것은 난이 아니라 백성의 원성이다. 민병을 일으킨 것은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함이요 백성의 삶에서 폭력을 제거코자 했을 따름이다.

서: 그리하면 지방의 방백수령을 혼내주면 됐지 왜 서울에 입성코저 했는가?

전: 국체를 무시하고 궁궐을 침범한 왜놈들을 응징코저 한 것이다.

서: 그럼 서울에 살고 있는 외국인을 다 내쫓고자 했는가?

전: 아니다. 외국인은 통상만 하면 되는 것이다. 헌데 왜놈들은 군대를 주둔시켜 나라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는 것을 그대들은 아직도 모르고 있단 말이냐? 어찌 뿌리가 썩었는데 가지를 친다함이 의미가 있을손가?

서: 너는 동학의 괴수(魁首)냐?

전: 나는 의를 펴고자 일어났을 뿐이다. 동학의 괴수라 함은 가당치 않다.

서: 동학엔 언제 입당하였느냐?

전: 삼년전이다.

서: 왜 입당하였는냐?

전: 사람의 마음을 지키고(守心) 하늘님을 공경하는 것(敬天)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서: 동학의 주의(主意)가 무엇이냐?

전: 보국안민(輔國安民)이다.

서: 그렇대면 그대는 하늘님을 공경하는 것 보다는 보국안민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동학이라는 조직을 이용한 것밖에 더 되느냐?

전: 동학은 본시 우리 해동 조선땅에서 일어난 것이며 그 도학(道學)에 종교와 정치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서: 송희옥(宋喜玉)을 아는가?

전: 면식은 있을지 모르나 나는 그 자를 알지 못한다.

서: 송희옥이 전라일도 도집강(都執綱)이요 너의 가까운 친척이라는데도 알지 못한단 말이냐?

전: 그는 본시 부랑자로 홀왕홀래했을 뿐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

서: 송희옥의 기서(奇書)에 의하면 너의 재차 기포는 국태공(國太公) 대원군과의 밀약에 의한 것이라는데 그것이 사실이냐?

전: 어찌 척양척왜가 대원군 한사람의 주장일까보냐? 그것은 만백성이 원하는 바이다. 내 창의문에 써있는 몇구절로써 그런 억측을 일삼는 것은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대원군은 우리의 의거가 해산되기만을 효유했을 뿐이다. 우리의 의거는 대원군과 하등의 관련도 없다.

서: 너는 대원군을 서울 운현궁에서 만난 적이 있다는데?

전: 유언비어일 뿐이다. 나는 대원군을 만난 적이 없다.

서: 동학에 남접 북접이 있다는데 그 구별은 무엇이뇨?

전: 그것은 호남과 호서의 지역적 구별일뿐 동학이 두개인 것은 아니다. 동학은 삼십년전 경주에 살던 최제우(崔濟愚)로부터 시작하였고 동학의 모든 접주는 최법헌(崔法軒)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최법헌이 팔도(八道)의 접주의 직책을 총괄한다.

서: 최법헌이 누구인가?

전: 해월 최시형이다. 이름은 최경상이다.

서: 그럼 너도 기포의 허락을 최법헌으로부터 받았는가?

전: 진리를 펴는데 무슨 허락이 필요한가? 충의(忠義)란 본심(本心)이다. 그대 발 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그대는 그것을 허락을 받고 치우겠는가?

《전봉준공초》(全琫準供草)


갤러리

같이 보기

기타

관련 서적

  • 부산예술문화대학동학연구소, 《해월 최시형과 동학 사상》 (예문서원, 1999)
  • 조광환, 《소통하는 우리역사》 (살림터, 2008)
  • 임종국, 《실록 친일파》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돌베개, 1991)
  •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 5》 (역사비평사, 2003)
  •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경인문화사, 2007)
  • 김중현·이희근 외 공저, 《불멸의 15인 시공 초월 맞장 인터뷰》 (서해문집, 2008)
  •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 4》 (역사비평사, 1995)
  • 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1997년 겨울호 (역사비평사, 1997)
  • 배항섭, 《조선후기 민중운동과 동학농민전쟁의 발발》 (경인문화사, 2002)
  • 신복룡, 《한국사 새로 보기》 (도서출판 풀빛, 2001)
  • 장영민, 《동학의 정치 사회운동》 (경인문화사, 2004)
  • 이돈화, 《천도교 창건사》 (천도교중앙종리원, 1950)

참고 자료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동학혁명〉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각주

  1. 본 사건과 동학의 관련성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는 의견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1894(갑오) 농민전쟁(또는 혁명이나 운동)' 등이 적합하다는 의견도 있음. 왕현종, 동학농민전쟁 용어 및 성격 토론: 1894 농민봉기 어떻게 부를 것인가, 1990년 8월, 가을호(통권 12호), 357-364면 참고
  2.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 5》 (역사비평사, 2003) 241페이지
  3. 윤치호의 삼촌 윤영렬과 사촌 동생 윤치소는 의병을 일으켜 동학농민군과 교전하였다.
  4. 동학 농민군은 동비(東匪), 동학 비적으로 비하해서 불렀다.
  5.  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도서출판 들녘, 1996) 436페이지
  6. 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도서출판 들녘, 1996) 442페이지
  7. 역사학연구소 <강좌 한국근현대사> 풀빛 1996.8.29 p56
  8.  박은봉, 《한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3) 258페이지
  9.  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도서출판 들녘, 1996) 437페이지
  10.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2007.4, 경인문화사) 315~316쪽.
  11.  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도서출판 들녘, 1996) 448페이지
  12. 임용한, 《난세에 길을 찾다》(시공사, 2009) 306페이지
  13.  임혜봉, 《한권으로 보는 불교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4) 265페이지
  14. 임혜봉, 《한권으로 보는 불교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4) 266페이지
  15.  박은봉, 《한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3) 261페이지
  16.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3g1441b
  17.  양필승, 세계사 속에서 전봉준:한국민족주의의 형성과 문명사적 위기, 중앙일보 WIN, 1996년 7월호
  18.  박은봉, 《한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3) 259페이지
  19.  임혜봉, 《한권으로 보는 불교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4) 267페이지
  20.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2:개신교 입국에서 을미사변까지》 (인물과 사상사, 2007) 272페이지
  21.  역사문제연구소, 《다시 피는 녹두꽃》 (역사비평사, 1994) 138페이지
  22.  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도서출판 들녘, 1996) 449페이지
  23.  역사문제연구소, 《다시 피는 녹두꽃》 (역사비평사, 1994) 139페이지
  24. 농민군의 강령에 해당
  25.  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도서출판 들녘, 1996) 450페이지
  26. 사정을 하소연함 네이버 한자사전 2011년 6월 22일 확인
  27. 김광재,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적 의의, 2002년 2월, 동학연구 제11집, 99-126면 중 104면
  28.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2:개신교 입국에서 을미사변까지》 (인물과 사상사, 2007) 273페이지
  29.  이상백, 동학당과 대원군, 1962
  30. 윤효정, 《대한제국아 망해라》 (박광희 역, 다산초당, 2010) 397페이지
  31. 주한일본공사관기록 8 58~60쪽
  32.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 5》 (역사비평사, 2003) 242페이지
  33.  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1997년 겨울호 (역사비평사, 1997)167페이지
  34.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 5》 (역사비평사, 2003) 243페이지
  35. 사람 대중이 하늘을 이긴다.
  36. 제1차 봉기 때에는 최시형도 반대 입장을 보였다. 신복룡 (2001년 12월 20일). 《한국사 새로 보기》, 초판 2쇄, 서울: 도서출판 풀빛, 168~179쪽. ISBN 89-7474-870-3.
  37.  박은봉, 《한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3) 260페이지
  38.  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도서출판 들녘, 1996) 452페이지
  39.  박은봉, 《한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3) 262페이지
  40. 역사문제연구소, 《다시 피는 녹두꽃》 (역사비평사, 1994) 175페이지
  41. 일본군 동학농민 학살 '진중일지' 공개. 2001년 5월 31일. 2023년 4월 7일에 확인함.
  42. 부산예술문화대학동학연구소, 《해월 최시형과 동학 사상》 (예문서원, 1999) 246
  43. 임혜봉, 《한권으로 보는 불교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4) 268페이지
  44.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2007.4, 경인문화사) 318쪽
  45.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2007.4, 경인문화사) 319쪽
  46.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동학혁명〉
  47.  서울로 끌려간 녹두장군 전봉준 끝까지 대원군 감싸다 처형돼 보관됨 2019-10-14 - 웨이백 머신 중앙일보
  48.  Daum백과사전 중 전봉준의 출신 및 배경[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49.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30쪽
  50. 임종국 (1991년 2월 1일). 실록 친일파.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서울: 돌베개. 23~24쪽쪽. ISBN 89-7199-036-8.
  51. 보석의 일종
  52. 한상일, 「동학과 일본 우익:천우협(天佑俠)과의 제휴에 관한 고찰
  53. 유영익, 「갑오농민봉기의 보수적 성격
  54.  역사문제연구소, 《다시 피는 녹두꽃》 (역사비평사, 1994) 249페이지
  55.  역사문제연구소, 《다시 피는 녹두꽃》 (역사비평사, 1994) 250페이지
  56. 동학농민운동 토벌군
  57.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 4》 (역사비평사, 1995) 268페이지

외부 링크



==


甲午農民戦争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甲午農民戦争

甲午農民戦争の始まりとともに広まった全琫準の檄文
1894年1月10日-1895年3月29日
場所朝鮮王朝全羅道忠清道
結果東学党の敗北
衝突した勢力
 朝鮮
清の旗
東学党大日本帝国の旗 大日本帝国
指揮官
 高宗
 李容泰朝鮮語版
 洪啓薰朝鮮語版
 李学承
 具相祖
 成夏泳
 張容鎮
 李基東朝鮮語版
 李圭泰
清の旗 光緒帝
清の旗 李鴻章
清の旗 叶志超中国語版
清の旗 衞汝貴中国語版
清の旗 馬玉昆中国語版
 全琫準
崔時亨
孫秉熙
金開南朝鮮語版
孙华仲
李邦彦
崔景善
金德明
大日本帝国の旗 明治天皇
大日本帝国の旗 山縣有朋
大日本帝国の旗 伊東祐亨
大日本帝国の旗 乃木希典
戦力
朝鮮軍 3,000人-50,000人南部15,000人-300,000人
北部10,000人-300,000人
500人-3,000人
被害者数
6,000人戦死数万人死亡200人戦死
東學農民革命
各種表記
ハングル동학농민혁명
漢字東學農民革命
発音トンハンノンミヌンドン
日本語読み:とうがくのうみんうんどう
ローマ字Donghak nongmin undong
英語表記:Donghak Peasant Revolution
テンプレートを表示

甲午農民戦争(こうごのうみんせんそう)は1894年甲午)に李氏朝鮮で起きた李氏朝鮮王朝に対する農民暴動、内乱である。主要な関与者に東学の信者がいたことから東学党の乱(とうがくとうのらん)とも呼ばれる。

李朝の統治理念である儒教朱子学)思想を揺るがす、身分差別を否定する内容が含まれる新興宗教「東学」を1860年から布教しだした第1世教主崔済愚が、1863年に李氏朝鮮王族や支配層である士族(両班)の怒りを買って捕らえられ、翌1864年に「邪道亂正」の罪で処刑された[1]。そして、第2世教主崔時亨は東学の公認を求めたが、同様に李朝から強く弾圧された。そして、彼らの取締りを口実にした朝鮮官吏の収奪が更に横行するようになると、李氏朝鮮の虐政が甲午農民戦争へ発展する火種となった。東学党は困窮する朝鮮農民に布教された反西学(反キリスト教)の新興宗教一派であり、彼らによる李氏朝鮮の上位層による収奪への反発・経済改革要求から朝鮮南部で大きな運動に発展し、暴動は南部を中心に全土に波及した[1][2]。蜂起した農民軍の相手は主に朝鮮官軍、守城軍、民堡軍(両班の持つ民兵・自衛組織)だった。この暴動への対処として、朝鮮王朝はに救援を要請した。すると大日本帝国済物浦条約による自国民保護を理由に清朝との天津条約の手続きをふんで、共同で農民反乱を鎮圧することを名目とし、清の参戦と同時に朝鮮に出兵した。これに危機感を強めた朝鮮の招討使である洪啓薫は農民軍の幣政制改革案を受け入れるフリをして農民軍を解散させた(全州和約)。しかし、大日本帝国は乱民が起きるは朝鮮内政に問題あるとし、朝鮮の内政改革を清と合同で行うことを提案するも、清は拒否。日本軍は単独で朝鮮を自国の影響下におくことを狙い、村田銃を装備する歩兵を中心に王宮(景福宮)に侵攻し短時間で占領。清との対立は激化し、後に日清戦争に発展する。

なお、日本軍が朝鮮の内乱自体に介入したのは日清戦争中の清軍大敗後からとなる[3]。農民軍は戦う相手を「圧制者である朝鮮王朝」から「侵略者である日本軍」へと変えて再蜂起し、日本軍と戦うこととなった[4]。そのため、大韓民国では東学農民運動東学農民革命동학농민혁명)と呼ばれ、日本への民衆独立運動の始まりと評する声もある[5][6]。通説では、「斥倭洋」といったスローガンの中心化等を基に第一次蜂起から二次蜂起にかけて李朝朝鮮の圧制に対する反封建運動から抗日運動に転換していったとされている[7]。ただし、朴孟洙は「斥倭洋」「逐滅洋倭」といった反侵略の言葉と思想が初期からあり、抗日・排西洋の姿勢は一貫していて非暴力的抗議活動から日本軍の武力進出により武力蜂起に発展したとものとしている[8]

第一次蜂起

1860年代から朝鮮は変革の時代を迎えていた。これに1880年代以降、国内の動乱期を乗り越えた日本やアメリカ合衆国西欧列強が加わり、次の時代に向けた模索の中で混乱の時期を迎えていた。

閔氏政権(高宗の妃とその一族による政権)の重税政策、両班たちの間での賄賂と不正収奪の横行、そして1876年日朝修好条規(江華島条約)をはじめとした閔氏政権の開国政策により外国資本が進出してくる等、当時の朝鮮の民衆の生活は苦しい状況であった。朝鮮政府の暴政に対し次のような詩が朝鮮国内に広く伝昌されていた。

全琫準

朝鮮の改革を巡っては、壬午事変甲申政変のような政変があったが、いずれも蜂起は失敗に終わった。こうした中で政権を手にしていた閔氏は、自らの手で改革を行うことができずにいた[9]。このつけは全て民衆に振り向けられ、民衆の不満は高まり、1883年から各地で農民の蜂起(民乱)が起きていた。そのような中、1894年全羅道古阜郡で、郡守の趙秉甲朝鮮語版が水税の横領を起こし、その横領に対して全羅道観察使に哀願を行った農民が逆に逮捕される事件が起きた[10]。この事件により、同年春に、崔済愚の高弟で東学党の二代目教祖となった崔時亨が武力蜂起し、甲午農民戦争に発展した。反乱軍は全琫準という知将を得て5月には全州一帯を支配下に置いた。全琫準とその同志20人は、以下の4か条を決議し、「沙鉢通文」[注 1]に署名した[11]

一、古阜郡庁を襲撃し、趙秉甲を梟首すること。
一、軍器倉と火薬庫を占領すること。
一、郡守に諂い人民の財物を収奪した強欲な役人を懲罰すること。
一、金州城を陥落させソウルに進撃すること。

古阜郡の民乱も当初は他の民乱と変わるところはなく、自分達の生活を守ろうとするものでしかなかった。しかし、この民乱の指導者に成長した全琫準を含め農民の多くが東学に帰依していたことから、この東学の信者を通じて民乱が全国的な内乱に発展してゆく。

全琫準は下層の役人であった。しかし、17世紀から普及し始めた平民教育で、全琫準のような非両班知識人が形成されていた。この全琫準が発した呼びかけ文が東学信者の手で全道に撒かれ、呼びかけに応じた農民で、数万の軍勢が形成された。彼らは全羅道に配備されていた地方軍や中央から派遣された政府軍を各地で破り、5月末には道都全州を占領するまでに至った。

これに驚いた閔氏政権は、5月30日に清国に援軍を要請。これに脅威を感じた日本は6月2日に朝鮮出兵を決定し、同月4日に清国に対し即時撤兵を要求したが拒否される[2]天津条約にもとづき、日清互いに朝鮮出兵を通告。日本は6月6日に出兵を発動し清国軍の朝鮮撤兵を再度要求、翌7日に清駐韓国公使が清国の属領保護のための派兵であるとその正当性を主張し、8日に清国軍が朝鮮牙山に上陸、12日に日本軍が在留邦人保護を名目に仁川に上陸、7月16日には漢城近郊に布陣して清国軍と対峙することになった[2]。朝鮮の魚大蔵大臣[12]によれば「朝鮮ノ人ハ、ソラ大変ガ起タ、此東学党ハ一時起ッタガ早ヤ治ッタ、何トモナイ、ト言イ触ラシテ支那兵モ早ク返エサナケレバナラヌ。日本兵モ返エサナケレバナラヌ」としたことにより、逆に状況を悪化させてしまったという。これに対し、招討使の洪啓薫は全琫準は幣政改革条目を受け取り、農民軍を解散させたという全州和約を結ぶが、それによって改革させた形跡はなく、全琫準は騙されたと証言している[13][14]。全州和約によって、改革されたとする一次史料は発見されていないが、閔氏政権が農民の提案を基に全州和約を作成し締結したとし[15]、和約で従来の地方政府が復活、同時に農民側のお目付け役「執綱所」が設けられ、全羅道に農民権力による自治が確立したとする説がある。

日清戦争

大院君

反乱が収束し、朝鮮は日清両軍の撤兵を申し入れるが、両国は受け入れずに対峙を続けた。日本は清に対し朝鮮の独立援助と内政改革を共同でおこなうことを提案し、イギリスも調停案を清へ出すが、清は「日本の撤兵が条件」として拒否[16][17]

日本は朝鮮に対して、「朝鮮の自主独立を侵害」する清軍の撤退と清・朝間の条約廃棄(宗主・藩属関係の解消)について3日以内に回答するよう申入れた。この申入れには、朝鮮が清軍を退けられないのであれば、日本が代わって駆逐する、との意味も含まれていた[18]。これに朝鮮政府は「改革は自主的に行う」「乱が治まったので日清両軍の撤兵を要請」と回答。

7月23日午前2時、日本軍混成第九旅団(歩兵四箇大隊など)が郊外の駐屯地龍山から漢城(現在のソウル)に向かい、うち一箇連隊が漢城に入り、午前4時半過ぎ頃には国王高宗が居住し政府が置かれる王宮を包囲、やがて門を破壊して侵入を開始、警備の朝鮮兵と数時間の銃撃戦の末、王宮を占領、国王を捕えた[19]。日本軍は大院君を擁して入闕し、国王高宗に迫って大鳥公使立会いの下に国政と改革を大院君に委任しその全てを大鳥公使と協議することを約束させた[19]。そして新政権は朝鮮政府に代わって牙山の清軍を撤退させるよう日本に要請することとなった。25日、豊島沖海戦、29日に成歓の戦いが行われ交戦状態となる。31日に清国政府が駐北京日本公使小村寿太郎に国交断絶を通告[2]8月1日に日清両国が宣戦布告をし、日清戦争が勃発した。

第二次蜂起

全琫準(ぜんほうじゅん、チョン・ボンジュン)は日清両国が軍を派遣して間もない7月には既に第二次蜂起を起こそうとしていた。しかし、全琫準供草[20]によれば、全琫準が病気だったこと、多くの民を一時に動かせなかったこと、新穀が未収穫だったため、自然に蜂起が10月になったとある。他に、平和的な解決を望む東学の上層部の説得に時間が掛かったとする説もあるが出展不明。この時期には日本は李氏朝鮮の閔氏政権下の新政府と友好関係となっており、日清戦争は既に日本勝利という大勢を決していた。李氏朝鮮政府の依頼を受け、ここから初めて日本側は東学勢力へ目を向けた。農民軍もこれ以前の相手は主に朝鮮官軍、守城軍、民堡軍(両班の士族)だった[3]1894年11月末に忠清道公州の牛金峙(ウグムチ、우금치)で農民軍は日本軍・朝鮮軍と初衝突するが、近代的な訓練を受けた日本軍に全琫準等はあえなく敗北する。日本軍・朝鮮官軍の圧倒的勝利で終ったこの戦闘を牛金峙の戦い英語版[21]という。牛金峙で日本に敗北した農民軍等は全羅道に逃げた。全琫準と同志達は淳昌で再起の機会をうかがっていたが、1895年初頭に捕えられ、漢城で処刑された。なお、この乱鎮圧で、川上操六参謀本部次長は「東学党に対する処置は 厳烈なるを要す、向後悉く殺戮すべし」との電文を朝鮮兵站線の日本軍司令部に送り、日本軍は3万人とも5万人ともいわれる農民を殺戮したとする説もある[22][23]

ある大隊長は「多く殺すの策」「探し出して殺す」作戦を展開したと講話し、日本軍のある従軍日誌には、負傷の生捕り十名を「帰舎後、生捕りは、拷問の上、焼殺せり」、捕えた7名を「城外の畑中に一列に並べ、銃に剣を着け(略)軍曹の号令にて一斉の動作、これを突き殺せり」との記録がある[24]

東學黨征討略記[25]によれば、東学党には信奉者、脅迫されて一時的に参加している者、偽東学党の3種類あり、偽東学党が頗る多いとの調査報告がある。偽東学党の大半は砂金鉱夫で、田畑、道路、橋梁など、そこかしこに穴をほって荒らすので農民の損害が出たので禁止されたため、東学党を称して剽掠をするようになったのだという。また、別の東學黨征討略記[26]によれば、「通譯官ヲシテ問ハシムレハ皆曰ク東匪ノ爲メ家ハ燒カレ財貨ハ奪ハレ兒女ハ殺サレ妻ハ掠取サレテ死處ヲ知ラス願クハ我々ヲ救濟セヨト(通訳官に尋ねさせると、皆が口をそろえてこう言った。"東学党によって家は焼かれ、財産は奪われ、子や娘は殺され、妻は連れ去られて生死もわからない。どうか我々を救ってほしい"」と、剽掠の様子が記録されている。

大院君は対立する閔氏政権によって投獄されていた東学の幹部2名を釈放し、1人を内務衙門主事に1人を議政府主事に採用し、忠清道に居る名士豪族に密使を送って、東学の扇動を命じた。また密使は、忠清道の東学幹部箕準、徐長玉に、全羅道の東学幹部全琫準、宋喜玉に、それぞれ会って東徒の召集を促し、慶尚道においては直接に東徒の糾合を呼びかけた。呼びかけにより10、11月に相次いで蜂起する。そして大院君は、東学には数十万で大挙して漢城に来るように命じ、平壌の清軍と共に南北から挟み撃ちにして日本人を駆逐する策を実行するように指示した。これらの事実が、日本の平壌攻略によって得た多数の書類から発見された(東学党事件ニ付会審ノ顛末具報 明治28年9月20日の別紙第二号)。その後も大院君と李埈鎔扇動教唆の手紙を発見し、また後に逮捕された部下たちの供述によって発覚し、日本公使の追及によって、大院君、李埈鎔が認め謝罪した[27][注 2]。これらはあくまで日本側資料であるが、このように第二次蜂起は、全くの純粋な民衆反乱ではなく、日本を清と東学の力で放逐せんとした大院君の思惑も働いている可能性がある。

一方で、本来の反乱側との和約では全羅道においては反乱側の要求を容れたはずであった[15]。しかし既に、日本の漢城における公館費用は朝鮮側負担となり日本が朝鮮に要求する改革のためにも費用がかかり、また、日清戦争は朝鮮の要請に日本が応じたという建付けであるため当面の日本軍費用は日本が負担するとしてもその他にも様々な費用を日朝どちらがどれだけ負担するのかという問題が生じ、朝鮮側は反乱側に対する約定を守ろうとしなくなっていた。また、日本軍より陸奥外相に届いた連絡では、全羅道で東学党のために朝鮮政府側の租税の徴収が出来なくなっていること、これでは結局は日本の利益を害し日本の目的を達成できなくなるとして、鎮定のために追加の兵を出すことを要請している[28]。民衆反乱は、日清戦争の戦費調達のための重税が朝鮮民衆に新たな負担としてのしかかり、その必然的結果であった可能性もある。

戦後

1906年全羅南道珍島郡で処刑された無名の反乱指導者とみられる遺骨が韓国統監府技師の佐藤政次郎により、母校の札幌農学校に搬出された[29]。「韓国東学党の頭領」と記された頭骨は長らく北海道大学古河記念講堂で段ボール箱に放置され、1995年に発見された。

韓勝憲弁護士らの「東学農民革命記念事業会」が返還運動を展開し、1996年5月31日に韓国に戻り全州歴史博物館に収蔵された[30]。2019年時点では、東学革命記念緑豆館の敷地内に埋葬する計画が立てられている[31]

世界の記憶

東学農民革命のアーカイブは2023年に世界の記憶に登録された[32]

脚注

注釈

  1.  「沙鉢」はどんぶりのようなもので、それを俯せて描いた円を中心に参加者の名前を放射状に書いた文書で、日本の唐傘連判状に近い
  2.  原文: 大院君·李埈鎔ハ深ク慙愧スル所アリテ爲之屢々當館ニ就キ其不始末ヲ謝シタルナリ
    現代文: 大院君と李埈鎔は深く恥じ、度々日本公使館を訪れてその不始末を謝罪した。

出典

  1.  糟谷憲一(著)、武田幸男(編)「朝鮮近代社会の形成と展開」『朝鮮史』、山川出版社、2000年8月、223-227頁、ISBN 4-634-41320-5
  2.  末光欣也『台湾の歴史:日本統治時代の台湾:一八九五-一九四五/四六年:五十年の軌跡』致良出版、2007年11月1日、668-9頁。
  3.  【コラム】東学が抗日闘争だって?=韓国(1)”. 中央日報 - 韓国の最新ニュースを日本語でサービスします. 2023年10月4日閲覧。
  4.  歴史は生きている 日清戦争は景福宮で始まった”. 朝日新聞DIGITAL. 朝日新聞社. 2023年12月16日閲覧。
  5.  韓国高校歴史教科書における東学農民運動の叙述の変遷”. 立命館学術成果リポジトリ. 立命館大学. 2023年12月16日閲覧。
  6.  百周年をむかえた甲午農民戦争”. 大阪産業大学. 2023年12月16日閲覧。
  7.  朴孟洙. 日本近代と韓国の関係 ―東学思想,甲午農民戦争,日清戦争を中心に一”. 北海道大学. p. 30. 2023年12月19日閲覧。
  8.  朴孟洙. 近代 日本 と韓国(北朝鮮)に おける東学思想及び甲午農民戦争に関する先行研究の到達点 と問題点”. 国際日本文化研究センター. 2023年12月19日閲覧。
  9.  朴垠鳳『わかりやすい朝鮮社会の歴史』
  10.  佐野袈裟美『支那近代百年史 上巻』1939年。
  11.  東学農民戦争と日本, p. 120
  12.  朝鮮国王及諸大臣ニ内政改革ヲ勧告ノ件/13 第拾号 〔東学党討伐ニ付総理外務度支三大臣トノ対談〕 P10”. www.jacar.archives.go.jp. 2025年8月10日閲覧。
  13.  朴宗根 (04 1962). “甲午農民戦争(東学乱)における「全州和約」と「幣政改革案」”. 歴史評論 (140号): 40~49.
  14.  한국사료총서 < 한국사 총설 DB”. db.history.go.kr. 2025年8月10日閲覧。
  15.  『新版 世界各国史2 朝鮮史』山川出版社、2000年、242頁。ISBN 978-4634413207
  16.  陸奥宗光『新訂 蹇蹇録 日清戦争外交秘録』中塚明校注、岩波書店〈新訂ワイド版岩波文庫255〉、1994年。
  17.  佐々木隆『明治人の力量』講談社〈講談社学術文庫1921:日本の歴史21〉、2010年。
  18.  岡本隆司『世界のなかの日清韓関係史 交隣と属国、自主と独立』講談社〈講談社選書メチエ〉、2008年、152頁。
  19.  描かれた日清戦争 ~錦絵・年画と公文書~ | 日清戦争とは”.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2023年12月18日閲覧。
  20.  한국사료총서 < 한국사 총설 DB”. db.history.go.kr. 2025年8月9日閲覧。
  21.  日名子健二「日清戦争下における公州牛禁峙の戦い-李氏朝鮮政府軍と東学農民軍の戦い-」」『福岡市総合図書館 2022年度利用者研究成果』2022年。
  22.  東学農民戦争と日本, p. 65
  23.  信長 正義. 南小四郎の日本軍後備歩兵第 19 大隊と東学農民軍殲滅”. 神戸学生青年センター. 2023年12月19日閲覧。
  24.  井上勝生「東学農民戦争, 抗日蜂起と殲滅作戦の史実を探究して --韓国中央山岳地帯を中心に--」『人文學報』、京都大學人文科學研究所、2018年3月30日。
  25.  동학농민혁명자료총서 < 한국 근대 사료 DB”. db.history.go.kr. 2025年8月9日閲覧。
  26.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 한국 근대 사료 DB”. db.history.go.kr. 2025年8月9日閲覧。
  27.  朝鮮国王及諸大臣ニ内政改革ヲ勧告ノ件/28 1895〔明治28〕年4月8日から明治28年6月15日 P27”. www.jacar.archives.go.jp. 2025年8月10日閲覧。
  28.  慶尚道に東学党蜂起せり 林外務次官”.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2023年12月19日閲覧。
  29.  東学農民戦争と日本, p. 2
  30.  東学農民戦争と日本, p. 176
  31.  東学農民革命軍指導者の遺骨をめぐる訴訟の理由とは?”. ハンギョレ (2019年5月24日). 2019年5月24日閲覧。
  32.  UNESCO Memory of the World Register”. UNESCO. 2023年5月27日閲覧。

参考文献

  • 梶村秀樹『朝鮮史 新書東洋史10』〈講談社現代新書〉。
  • 池田敬正佐々木隆爾『教養人の日本史(4) 江戸末期から明治時代まで』社会思想社〈教養文庫〉。
  • 『クロニック世界全史』講談社。
  • 『ジャパン・クロニック 日本全史』講談社。
  • 武田幸男宮嶋博史馬渕貞利『朝鮮 地域からの世界史1』朝日新聞社。
  • 『錦絵の中の朝鮮と中国』岩波書店。
  • 『日本近現代史3 日清・日露戦争』岩波書店。
  • 中塚明井上勝生朴孟洙『東学農民戦争と日本』高文研、2013年。ISBN 978-4-87498-516-8
    • 中塚明、井上勝生、朴孟洙『新版 東学農民戦争と日本』高文研、2024年。ISBN 978-4-87498-877-0
    • 愼蒼宇『朝鮮植民地戦争 甲午農民戦争から関東大震災まで』有志舎、2024年。

関連項目

==


Tonghak Peasant Revolution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Tonghak Peasant Revolution
Part of 19th-century peasant rebellions in Korea
Date11 January 1894 – 25 December 1895
Location
Result
Belligerents
 Joseon
 Qing dynasty
 Donghak Japan
Commanders and leaders

 King Gojong
 Queen Min  X
 Yi Yongtae
 Hong Gye-hun
 Yi Hakseung
 Gu Sangjo
 Seong Hayeong
 Jang Yongjin
 Yi Gidong
 Yi Gyutae

 Guangxu Emperor
 Li Hongzhang
 Ye Zhichao
 Wei Rugui Executed
 Ma Yukun
 Jeon Bongjun Executed
 Kim Gae-nam  Executed
 Son Hwajung
 Choe Gyeongseon
 Kim Deokmyeong
 Choe Sihyeong
 Son Byong-hi
 Kim Heung Seob

 Emperor Meiji
 Yamagata Aritomo
 Itō Sukeyuki
 Kawakami Soroku
 Nogi Maresuke

 Oshima Yoshimasa
Strength
3,000–50,000 Korean soldiers15,000–300,000 Southern Jeob rebels
10,000–300,000 Northern Jeob rebels
500–3,000 Japanese soldiers
Casualties and losses
6,000 Korean soldiers killedTens to hundreds of thousands killed from both Jeobs200 Japanese soldiers killed
Tonghak Peasant Revolution
Hangul
동학 농민 혁명
Hanja
東學農民革命
RRDonghak nongmin hyeongmyeong
MRTonghak nongmin hyŏngmyŏng

The Tonghak Peasant Revolution[a] (Korean: 동학 농민 혁명) took place between 11 January 1894 and 25 December 1895 in Korea. The peasants were primarily followers of Donghak, a Neo-Confucian movement that rejected Western technology and ideals.

The Revolution began in the province of Gobu-gun. In the early 1890s, Jo Byeong-gap [ko], nominated magistrate of the gun in 1892, enforced harsh, oppressive policies upon the local peasant population. Correspondingly, in March 1894, a group of peasants led by Jeon Bong-jun and Kim Gae-nam began an uprising against local authorities. The initial revolt was suppressed under Yi Yong-tae, and Jeon Bong-jun fled to nearby Taein. Jeon gathered an army in Mount Paektu and recaptured Gobu in April. The rebels then defeated governmental forces in the Battle of Hwangtojae and the Battle of the Hwangryong River. Jeon then captured Jeonju Fortress and fought in a siege against Hong Gye-hun's government forces. In May, the rebels agreed on a truce through the Treaty of Jeonju [ko]. However, an unstable peace continued throughout the summer.

The alarmed government requested the Qing dynasty for military intervention, to which the Qing responded with a deployment of 2,700 soldiers. Angered that the Qing government had not informed them before intervening (as promised in the Convention of Tientsin), Japan started the First Sino-Japanese War.[1] The war resulted in an expulsion of Chinese influence in Korea and also signaled an end to the Self-Strengthening Movement in China itself.

Growing Japanese dominance in the Korean Peninsula caused anxiety amongst the rebels. From September to October, the Southern and Northern leaders negotiated the plans for the future in Samrye. On 12 October, a coalition army of Northern and Southern Jeobs was formed, and the army, numbering 25,000–200,000 (records differ), attacked Gongju. After several battles, the rebel army was decisively defeated in the Battle of Ugeumchi, and the rebels were again overthrown in the Battle of Taein. Hostility continued deep into the spring of 1895. The rebel leaders were captured in various locations in the Honam Region, and most were executed by a mass hanging in March.

Background

During the late 19th century, Korean society faced various social problems such as inequality, corruption, and excessive taxation. These problems later sparked a series of peasant-led rebellions,[2] which began with the Gwanseo Peasant War. These events weakened the Joseon government and undermined its control over various regions of Korea outside of Hanseong.[3]

Founding of Donghak

Various secret societies formed, apart from the rebellions, including the Salbangye, 'Association of the Killers of the Yangban (aristocrats),' the Saljugye, 'Association of the Killers of the (slave's) masters,' the Salryakgye, 'Association of Killers and robbers,' the Geomgye, 'Sword association,' the Judogye, 'Association of the drunk,' the Yudan, 'League of Wanderers', and the Nokrimdang, 'Group of the Green Woods' (Nokrimdang were 'noble thieves,' who stole from the rich and gave to the poor).[4]

In this turbulent age, the Donghak religion was formed. Its founder, Choe Je-u, described the founding of the religion, which Choe Sihyeong, the second Donghak leader, later transcribed:

By 1860, I heard rumours that the people of the West worship God, care not for wealth, conquer the world, build temples, and spread their faith. I was wondering whether I, too, could do such a thing. On an April day, my mind was unnerved, and my body trembled... Suddenly, a voice could be heard. I rose and asked who he was.

"Do not fear nor be scared! The people of the world call me Hanulnim. How do you not know me?" Said Hanul. I asked the reason he had appeared to me. "...I made you in this world so that you could teach my holy word to the people. Do not doubt my word!" Hanulnim replied. "Do you seek to teach the people with Christianity?" I asked again. "No. I have a magical talisman... use this talisman and save the people from disease, and use this book to teach the people to venerate me!"[5]

Donghak was a mixture of various religions. Its core tenets and beliefs (monotheism, sacred books, organized religion) are similar to Christianity. Choe himself said that "the meanings [between Christianity and Donghak] are the same; only the words are different".[6][7] The Donghak conversion rite, in which hundreds of people gathered in an open place and knelt before a cup of clean water, was partly influenced by the Christian baptism ritual.[8]

However, many direct influences were from shamanism and folk beliefs. Witnesses record that Choe Je-u participated in animistic rituals to mountain deities. His chants and the Sword Dance were also derived from shamanism.[9][10]

Certain beliefs were unique to Donghak. Choe Je-u said that "All humans are Hanulnim". Choe promoted human equality and created certain ideologies, such as the belief that the world was a cycle of 5,000 years (Jeoncheon and Hucheon) and that this cycle was ending to make way for a new world.[11] This made Donghak potentially dangerous to the Joseon Dynasty, which banned the religion and executed Choe in 1864 for 'Tricking and Lying to the Foolish People.'[12]

Nevertheless, Donghak spread across Gyeongsang Province by the 1870s, causing the need for a better organization. Donghak was organized into 'Jeob' and 'Po.' A 'Jeobju' administered a 'Jeob.' [b] For example, Jeon Bong-jun, the leader of the revolution, was Jeobju of Gobu. Under a Jeobju was a 'Myeonjeobju.' In large towns (such as Taein or Jeonju) were a 'Great Jeobju,' as Kim Gae-nam was the Great Jeobju of Taein. Various Jeobs were organized into a 'Po,' and a 'Poju' led a Po. The 'Gyoju,' at the time Choe Sihyeong, led the whole Donghak religion.[13]

Yi Pil-je's Revolt

In 1871, Yi Pil-je, Jeobju of Yeonghae, revolted using the Donghak infrastructure. The revolt failed but proved that Donghak was dangerous to the feudalistic Korean society.[14]

Yi Pil-je's Revolt seriously undermined Donghak in Gyeongsang Province, causing Choe Sihyeong to spread the religion to the populous provinces of Chungcheong and Jeolla. Choe wandered around these two provinces, spreading Donghak. Son Hwa-jung [ko] was one of the first to convert in 1881, and he converted Jeon in 1891. Son Byong-hi was converted in 1882 by Choe, as did Kim Gae-nam in 1890.[15][16] As seen below, he claimed conversion in 1891.

Gyojo Shinwon movement

By the 1890s, Donghak believers began a petition to overturn the 1863 Choe Je-u's execution charges. The religion was split by this time into the 'Northern Jeob' and the 'Southern Jeob.' Seo Inju, leader of the Southern Jeob, asked Choe Sihyeong, the Gyoju, for a petition. Choe did not answer the request, presumably remembering the effects of Yi Pil-je's Revolt on Donghak in Gyeongsang.[17] Seo Inju and the Southern Jeob independently held a petition to free imprisoned Donghak believers and to restore the honor of Choe Je-u, which was not easily granted. In November 1892, Jeon Bong-jun led the Samrye Petition, petitioning for:

  1. Do not ban Donghak.
  2. Expel all Western missionaries and merchants.
  3. Kill corrupt officials.[18]

In December, there was another petition in the market of Boeun. Many Southern Jeob believers thought they should march into Seoul and petition before the king, but Choe Sihyeong finally quelled the Boeun petition, instead penning a letter to King Gojong:[19]

We... are determined to follow this new doctrine (Donghak) only because we want people to reform themselves, to be loyal to their king, to show filial piety to their parents, to respect their teachers, and to show friendship to their fellow men.[20]

In response, Gojong ordered the Northern messengers to "go to your homes. If you do, I may grant your plea". Meanwhile, Seo Inju and the Southern Jeob were threatening Westerners and Japanese with bodily harm, saying, "If you do not flee by March the seventh, we shall all kill you. You are causing injustice in a foreign land." This was attached to American, French, and Japanese legations, Christian churches and schools, and districts with a large number of foreigners taking residence.[21]

Jeon Bong-jun, the leader of the revolution

Jeon Bong-jun, meanwhile, led his followers into Boeun, which became the most violent and revolutionary petition in the Gyojo Shinwon Movement. His followers all wore blue clothes with red gloves. About 80,000 believers, with the flags "Expel Westerners and Japanese," gathered in the market and built an earthen fortress. Revolutionary thoughts include, "In other countries, the people hold councils and decide upon the government. This petition is like that. Why suppress it?"[22] formed. The petition was also more extreme. The requests were:

  • Reclaim the honour of founder Choe Je-u.
  • Cease the persecution of Donghak believers.
  • Chase away colonial powers.
  • Cease all imports of foreign merchandise, wear cotton, and use necessities made in Korea.
  • Dispose of the Min family of oligarchical power.
  • Lower taxes.
  • Ban the inflation-causing Dangojeon coin.
  • Stop illegal taxation.[23]

Northern Jeob leaders, such as Choe Sihyeong and Son Byong-hi, feared that the government would execute Donghak believers and stopped the petition within three days. Jeon Bong-jun returned to Gobu.[24]

Gobu Revolt

The rebellion's immediate cause was the conduct of Jo Byeong-gap [ko], the ruling official of Gobu. After his capture, Jeon gave a detailed account of Jo's misdeeds:

  • He built the Manseokbo Reservoir under the existing Min Reservoir (now Yedeung Reservoir). He took water taxes from the peasants, two sacks of rice for using the upper reservoir, and a sack of rice for using the lower reservoir. He collected seven hundred sacks of rice in total.
  • He promised peasants who farmed abandoned land would be exempt from taxes for five years, but he forced them to pay taxes in the autumn of 1893.
  • He fined affluent peasants for dubious crimes, including 'infidelity,' 'lack of harmony,' 'adultery,' and 'needless talents,' by which he collected 20,000 nyang (nyang a unit of Korean currency, equivalent to seventy US dollars, making 20,000 nyang comparable 1.4 million U.S. dollars[25]).
  • He taxed a thousand nyang (the equivalent of 700 thousand US dollars) to build a monument to his father, Jo Hugyun, who had been the magistrate of Taein.
  • To send sacks of rice to the government, he sent only sacks of spoiled rice to Seoul, taking unspoiled sacks for himself.
  • While he was building the reservoir, he heedlessly cut down trees centuries old and did not give any wages to the workers.[26][27]
Sabal Tongmun code, made by twenty rebels of Jeongeub, Gobu, and Taein, including Jeon Bong-jun

Of these, the construction of the Manseokbo reservoir caused the most fury. Yedeung Reservoir had caused the Baedeul fields to not suffer from starvation ever since Yedeung was built. However, the construction of the new reservoir blocked creeks in the region, causing widespread damage through flooding.[27]

Donghak believers and angered peasants began forming a rebel army. They used the Sabal Tongmun, whose names were written around a circular cone to form a circle. The Sabal Tongmun made the leader of the writers unclear (because it was impossible to know who had signed their name first). On 10 January 1894, a thousand rebels gathered in an abandoned horse ranch. Splitting into two armies, they destroyed three of the four gates of Gobu and occupied the government office. Jo fled Gobu to Jeonju (he was exiled after the war ended and returned from his exile to become a judge).[28]

For a week, the rebels destroyed prisons and freed innocent prisoners, armed themselves with weapons from the local armory, punished corrupt officials who had been captured, returned taxed and fined property to original owners, and destroyed Manseokbo Reservoir.[29] However, the crisis ended when Jo was replaced by Park Won-myeong, who convinced the rebels to disband.[30]

First revolt

Jeon and Kim went south to Mujang, where they met Son Hwa-jung. The rebels organized adequately in Mujang, and on 20 March, the 4,000 rebels of Mujang turned towards Mount Baek, Gobu. While camped in Mount Baek, the army grew to tens of thousands. Choe Deokyeong's 300 peasants joined them from the north. Here, the aphorism came: "When sitting, a white mountain; when standing, a bamboo mountain." (rebels mostly wore white and used bamboo spears. The term may have appeared earlier, however, as Mount Juk, meaning 'bamboo mountain,' could only be seen when standing, as it was covered by smaller Mount Baek, 'white mountain.') On 22 March, the rebels destroyed the reservoir and burned down governmental offices and storage.[31]

The rebels camped for four days in Gobu, and new rebels joined them daily. After making Jeon Bong-jun the leader and Kim Gae-nam and Son Hwa-Jung as generals, the rebels occupied Taein (1 April) and Buan (4 April). The leaders also ordered the rebels to follow the four guidelines:

  1. Do not kill the innocent, and refrain from eating farm animals.
  2. Open the Hucheon through loyalty and piety and appease the people.
  3. Defeat every single barbarian of Japan and purify the holy land.
  4. Drive the army into Seoul and kill every member of the Min family.[32]

The rebels also "did not seek alcohol and women and did not smoke tobacco."[33][full citation needed] They did not forcefully take food but paid for them in money.[34]

Battle of Hwangtojae

The government sent Yi Gyeonghyo to quell the rebellion and made an emergency army of 700 soldiers and 600 merchants. The 10,000 rebels lured governmental forces into Hwangto Pass. In the dawn of April the 7th, the governmental soldiers charged into the rebel camp but found it empty. Soldiers were in chaos. Suddenly, the rebels, moving under the cover of fog, emerged from the mountains and attacked the governmental forces, killing a thousand soldiers. Most of the rebels were unharmed in the thus concluded Battle of Hwangtojae.[12]

Battle of Hwangryong River

By 17 April, however, Jeon turned south to Yeonggwang, where Hong Gyehun's governmental troops were waiting. Jeon attempted to lure the troops to Jangseong, and General Yi Hakseung chased after them. Yi Hakseung attacked while the rebels were camped on the Hwangryong River, eating lunch. The rebel leader Yi Bangeon envisioned a new strategy. The rebels fled to the mountains, then ran downhill, rolling thousands of Jangtae, or chicken cages. The Jangtae blocked most bullets, thus rendering the government's superior weapons useless. Moreover, Jeon placed the rebel army so that they would divide Yi Hakseung's troops into three separate divisions. Yi Hakseung ordered the troops to use their cannons. Still, they did not work because the pro-rebel villagers had put water inside the cannons (following the incident, rumours spread throughout the government forces that a ghost had destroyed the cannons). More than 300 governmental forces but only two rebels died in the Battle of Hwangryong River.[35][36]

Siege of Jeonju Fortress

After the Hwangryong, a royal messenger brought bribes to quell the rebellion to Jeon. Jeon killed the messenger but took the needed money. Jeon then turned north and occupied Jeonju, the largest city in Jeolla province. not choosing to take Naju to the south. Hong Gyehun quickly returned north, beginning the Siege of Jeonju Fortress.[37][38]

Meanwhile, on 29 April, the administrator of Jeonju, Kim Mun-hyeon, appeared in Gongju and told the government of the fall of Jeonju. Unable to control the rebellion, the government of Joseon formally requested military assistance from Japan and China. On 3 May, 1,500 Qing Dynasty forces appeared in Incheon. The same day, 6,000 Japanese forces landed in Incheon. The Japanese inquired why the Qing had not notified the Japanese government by the Convention of Tientsin, and soon caused the First Sino-Japanese War.[1][39]

Treaty of Jeonju

On 7 May, Kim Hak-jin, the new administrator of Jeonju, ordered Hong to make peace with the rebels. The rebels, suffering from lack of food, accepted.[c] This came to be called the Treaty of Jeonju (全州和約)[40] or Jeonju Truce. Hong accepted twelve rebel requests:[41][42][43]

  1. Accept the Donghak religion.
  2. Punish corrupt officials.
  3. Punish those who became illegally rich.
  4. Punish corrupt Yangban and Seonbi.
  5. Free all slaves.
  6. Free the Cheonmin class, and cease the branding of butchers.
  7. Legalize the remarriage of widows.
  8. Lower taxes.
  9. Pick politicians based on qualities, not families.
  10. Punish those who cooperate with the Empire of Japan.
  11. Illegalize debts.
  12. Give their land to all peasants.

Following the truce, the rebels climbed out of the fortress using ladders, and Hong entered the empty fortress.[44][45]

Both sides celebrated their 'victory'. Hong held a feast with his soldiers inside Jeonju Fortress, while the rebels sang the Geomgyeol, a Donghak religious hymn which begins:

Good times, good times, these are good times. These are the best times to come. What must be done if not to use the Thousand Dragons Blade. [46]

Summer of 1894

Establishment of the Local Directorates (Jipgangso)

The summer of 1894 was marked by rebel rule over most of Southwest Korea. Jeon Bong-jun established the Jeollajwaudo Daedoso (Great Capital of the Two Jeolla Provinces) in Jeonju and built Jibgangso in most towns. In Naju, Namwon, and Unbong, however, the rebels met fierce resistance from landowners. Jeon had not subdued these southern cities, as he went north after the Battle of the Hwangryong. Choe Gyeong-seon [ko] attacked Naju with 3,000 rebels, and the landowners of Naju began to fortify Naju against rebel attacks. Jeon met the Naju landowners and convinced them to allow Jibgangso construction in Naju. However, Naju was still not under complete rebel control and later became the center of rebel persecution. In Namwon, Kim Kaenam also battled landowners with 3,000 rebels, took the fortress, and hanged Kim Yongheon, the anti-rebel leader. Unbong surrendered at the sight of the rebels.[47] Remaining Jibgangso include Daechang High School in Yecheon, Jinnam Office in Yeosu, Geumseong Office in Naju, Mujang Hall in Mujang (preserved by Mujang magistrates as a historical relic), and Yeosan Office in Yeosan (now a town hall).

The Jeobju of the town and his assistant, the Jeobsa, administered a Jibgangso agency. Under the Jeobju were the Seogi, the Seongchal, the Jibsa, the Posa, and the Dongmong. For deciding on matters, there was a council, with the Jeobjang and Jeobsa at its head, who voted on town matters. Yi Yihwa sees this as a rudimentary democracy.[48]

Among the Seogi, Seongchal, the Jibsa, and the Dongmong, the Seogi were scribes who kept records of the activities and decisions of the Jibgangso. They also reprinted orders and publications from the rebel leaders, displayed them on marketplaces, and gave them to the people. Most Seogi were progressive Yangban, as the scribes had to have literacy.

Meanwhile, the Seongchal were town police who administered the law and reported corrupt officials or Yangban to the Dongmong and Posa. Most Seongchal were killed in the Second Revolt.

Dongmong were young men who were arrested, imprisoned, or even flogged those reported by the Seongchal. They also had a powerful hatred for Yangban, often castrating them and using Yangban women to light candles or pour water. Dongmong also led to a curious marriage practice called 'three-day marriage.' Dongmong, searching for partners, hung white scarves on the door of the house of a Yangban who had an unmarried daughter. This meant that the daughter had to marry the Dongmong. To escape the forced marriage, fathers often found another suitable young man and made the daughter marry him within three days in secret. By November, three-day marriage had become so prevalent that the only virgins left were girls under fourteen years of age.[49] Posa, tiger hunters who served effectively as soldiers, cooperated with the Seongchal and Dongmong to fight against the Yangban resistance.

The rebels referred to their cause as the Dongdo (another name for 'Donghak') and their army as the Dongdo Euibyeong, the "Righteous army of Donghak." Rebels called themselves 'Hajeob,' after the lowest Donghak initiate, and called any other person, even children, 'Jeobjang,' a rendering of Jeobju.

Second revolt

While the First Sino-Japanese War raged on, Japanese troops occupied Seoul and made a pro-Japanese government there. Before the Battle of Pyongyang, Jeon's strategy seemed to crush the fleeing Japanese from the South while the Chinese soldiers chased them from the North. However, his prediction was proved wrong, with a major Chinese defeat in Pyongyang. Jeon decided he should defeat the Japanese by taking control of Korea and severing Japanese supply lines. However, he knew he would have to get the support of the Northern Jeob, who commanded all Donghak outside Jibgangso-controlled areas.[50]

Choe Sihyeong was staunchly anti-rebel, as he feared that a large-scale rebellion based on the Donghak religion would end with the destruction of Donghak. The Northern Jeob had to fight against the largely Southern Jeob rebels to escape persecution. Here is an excerpt of his words:

The government does not know the difference between medicine (Northern) and poison (Southern). They will burn the stones (Southern) and the jade (Northern)... Hence, we must prove our allegiance to the king by conquering the South.[51]

Samrye Council

On 14 September, Northern and Southern leaders gathered in Samrye. It is said that Jeon rode a white horse in this meeting.[52] The Northern flags said 'Conquer the South,' while Southern ones said 'Conquer the Foreigners' or 'Protect the Nation.' After a month of negotiations, on 12 October, Choe Sihyeong finally cried out to the Northern Jeob: "Shall we die while seated?".[2]

The Northern leader, Son Byong-hi, led 10,000–100,000 Northern Jeob followers as the General of the Northern Jeob. Jeon also led 12,000–100,000 Southerners as the General of the Southern Jeob (most recent estimates give a total army of about 50,000). However, Kim Kaenam was absent; he led 5,000 rebels in an attack on Cheongju. Together, they marched north to Gongju, the capital of Chungcheong Province. As they marched, Jeon said:

Son Byong-hi, leader of the Northern Jeob

We shall not eat dogs or chicken. The meat of a dog weakens and maddens us, and we are born from the power of Mount Gyeryong, the Rooster Dragon mountain. Eating chicken shall weaken that power.[26]

Battle of Ugeumchi

Although the army had started with 40,000 rebels, when they camped at Non Stream, 12 kilometers south of Gongju, the army was 10,000; peasants joined them as they marched. There were also 50 Chinese soldiers, who had fled from the Sino-Japanese War. Inside the Fortress of Gongju were perhaps 3,000 governmental forces led by Gu Sangjo, Seong Hayeong, Jang Yongjin, and Yi Gidong, and some 400 Japanese soldiers led by Colonel Moriya.[53]

The Donghak army's strategy was to surround Gongju from Buyeo and Nonsan. On 23 October, a rebel battalion took Yiyin and Hyopyo, four kilometers south of Gongju.[54][55]

On 24 and 25 October, the Battle of Ung Pass, or Ungchi, occurred between rebels and a coalition army of Japanese soldiers, governmental forces, and anti-rebel guerrillas. Ungchi was a pass that led straight to Gongju, a crucial location for the rebels. However, the rebels were not able to take Ungchi. Most were armed with only bows and arrows, spears, swords, and seventeenth-century-style muskets, which could not defeat the coalition's superior firepower. The Northern Jeob experienced severe casualties in Ungchi because they lacked proper training in war.[54][56]

The rebels retreated south to Nonsan. Jeon and Son decided to capture Gongju through a different pass: Ugeum Pass, or Ugeumchi.[54]

On 8 November, two battalions lured governmental forces so that the major rebel forces would not meet a large governmental army in Ugeumchi.[57] At 3:00 in the afternoon, the rebels concentrated the governmental forces in Yiyin and Hyopyo, where 10,000 rebels were. The other 200,000 rebels were crossing Ugeumchi. However, they encountered a Japanese battalion of 280 soldiers. The Japanese gathered the Korean forces into Ugeumchi. After a night passed, the two armies clashed in Ugeumchi at the dawn of 9 November.[57]

Jeon placed his army so the rebels stretched sixteen kilometers from Panchi to Mount Bonghwang. Jeon was at the center of this line, surrounded by flags and riding his white horse. The government forces defended the sides (Hyopyo, Ungchi, Mount Bonghwang) while the Japanese were stationed in Ugeumchi proper. At 10:00 am, the rebels charged at Ugeumchi.[57]

Because of their weak weapons, they were unable to cross Ugeumchi. The Japanese used cannons and rifles and had proper military training. Although small groups of rebels crossed the 'death line' more than forty times, they were all shot down. After one charge at the Japanese, only 10,000 of the original 200,000 rebels were left. After the following charge, there were 3,000 rebels left. When the rebels finally retreated on 10 November, only 500 out of an army of 200,000 remained.[57]

Meanwhile, in Hyopyo, the 10,000 rebels captured various peaks, but the Japanese instantly reinforced them whenever the governmental forces seemed to break. By 10 November, both armies retreated to Nonsan. The Battle of Ugeumchi was over. A spectator of the battle expressed the battle:

And we finally destroyed the thieving raiders... It was as if the stars themselves were falling from the sky, and the autumn leaves were being scattered on the lands.[22]

Retreat from Gongju

Jeon and his 500 remaining rebels retreat south from Gongju while the allied forces of the Joseon Army and the Imperial Japanese Army pursue them. They arrived in Nonsan to rendezvous with the other Donghak peasants defeated by government and Japanese troops. But they were defeated and forced back to Jeonju Fortress to gather an army of 8,000 rebels. However, they abandoned the fort because of the lack of supplies and retreated to Wonpyeong and Taein, the rebel center, to reorganize their army.

On 25 November, the Japanese caught up with the rebels and camped in Mount Gumi. Despite rebel strategic superiority, the Japanese firepower annihilated both the rebels and the city of Taein. A historian, Park Eunsik, recorded "nothing left in Taein for 40 kilometers". Forty civilian houses, along with perhaps 400 rebels, were killed.[58]

After the Battle of Taein, on 28 November 1894, Jeon formally dissolved the Donghak Army. The rebels cried: "We thought Jeon Nokdu (Jeon's nickname) would save us, but now we are all going to die." Jeon answered: "War is a game of luck. Why is it that you blame me?".[59] He then dressed up as a peasant and headed east.[citation needed]

Battles outside the main front

Jeolla

Jeolla Province was the revolution's center, completely seized by the rebels. They formed the core of the Anti-Japanese Frontier and often aided Gyeongsang and Chungcheong rebels. Kim Inbae of Gwangyang and Yi Bangeon of Jangheung formed the core of South Jeolla rebels.[citation needed]

Namwon and Unbong

Namwon and Unbong were ruled by Kim Gae-nam's rebels. However, Kim Gae-nam had gone to attack Cheongju far to the north, and in his absence, the governmental soldiers attacked Namwon. On 13 November, the rebels were driven away from the outskirts of Namwon in a small battle. The 3,000 rebels fled to Namwon Fortress. Jo Byeongho, the governmental leader, led 2,000 soldiers armed with modern weapons to besiege Namwon. Although the fortress was bombed and shelled, the rebels did not come out. Finally, the governmental troops stacked hay around the east, west, and south walls and burned the hay. The wooden doors burned along, and the rebels fled through the north door. Hundreds of rebels were killed in the Siege of Namwon.[60]

Jindo

In Jindo, the third largest island of Korea (after Jeju and Geoje), Na Chihyeon of Naju converted the population to Donghak in January 1892. After the fall of Jeonju Fortress, the Jindo magistrate Yi Heuiseung (who, like Jo, built two monuments to himself[61]) fled. However, Confucian scholars maintained order on the island through an army called Suseonggun. In July, Son Haenggwon assaulted Susseonggun bases, taking matchlock rifles, swords, bullets, gunpowder, and tridents. At a similar time, Park Jungjin attacked the Suseonggun at Shimijang village. He was killed, and his daughter captured; descendants destroyed the family tree and burned down the house.

After the arrival of new officials, the Jindo rebels joined the Naju rebels. Most were captured and returned to Jindo. On 10 October, 1,322 soldiers, composed mainly of slaves and lower officials, were sent to defend Jindo against possible rebel attacks.

In December, rebels who had fought under Yi Bangeon hid in Jindo after the Battle of Seokdae Fields. However, the rebels had lost all military power and were captured and imprisoned. On 27 December, Japanese soldiers executed fifty rebels. Cheondoism remained in Jindo until the 1950s.[62]

Gyeongsang

Gyeongsang Province had a solid Confucian influence, and the casualties of Yi Pil-je's Revolt in 1871 were still fresh. It took until August for Gyeongsang rebels to begin revolting. Suppression of revolts was an organized effort, with Toposa officials specializing in anti-rebel campaigns.

Jinju

The forces of the Southwest coasts of Korea were unique in that the Jeolla and Gyeongsang Provinces cooperated to attack Jinju Fortress. They are collectively termed under the name 'Jinju Rebels.'

On 7 May, Kim Inbae, the Great Jeobju of Geumgu, built a Jibgangso in Suncheon, Jeolla Province. On 1 September, Kim crossed the Gyeongsang-Jeolla boundary. His strategy was to charge through the southern coastline to Busan and thus grasp the Japanese-Korean borderline.

Meanwhile, Hadong and Jinju, who were Kim's targets, were experiencing rebel activities. Hadong rebels were chased west by the government, joining Kim Inbae. With the guidance of the Hadong rebels, Kim Inbae captured Hadong on 7 September.

The leadership recruited rebels in Jinju by sending out public documents in significant markets. On 8 September 1894, 7,000 rebels gathered in Sugok Market and established the Chungyeong Daedoso, a center of rebel activities. By 17 September, a joint army of Suncheon and Jinju rebels had captured the Jinju fortress.

The rebels held flags signaling their Po and Jeob and spread manifestos titled To the People of the Towns of Gyeongsang throughout nearby villages. The manifesto said the following.

  • The state is the people, and the people are the state.
  • We have had a council in Jinju to punish the Japanese invasion.
  • All believers in Donghak must rise and punish corrupt officials who support the Japanese.
  • Report anti-rebel armies to the Chunggyeong Daedoso.

In response to the fall of the Jinju Fortress, the government sent Ji Seokyeong as Toposa of Jinju, a government official who specialized in suppressing the Donghak revolutions.

On 10 October, 400 rebels gathered in Mount Geumo, a few kilometers west of Jinju, where Japanese forces ambushed them. Although the rebels lost more than seventy men in the Battle of Mount Geumo, the rebels still held Jinju Fortress.

On 14 October, 5,000 rebels defended Mount Goseong Fortress against the Japanese. Using the fortress, the rebels fought fiercely against Colonel Suzuki's Japanese battalion but were ultimately defeated by Japanese firepower. One hundred eighty-seven rebels were killed, causing Mount Goseong to be called Mount Gosireong after the sound that a decomposing corpse makes when it rains. The remnants of the rebels fled to Mount Jiri, where they became the Righteous Army.[63]

Chungcheong

Chungcheong rebels were under the command of Son Byong-hi, who led the Northern Jeob into battle at Ugeumchi. After the defeat at Ugeumchi, Son continued the rebellion until the Battle of Jonggok on 18 December. Chungcheong was the location of the December battles.

Cheongju

Rebel leader Kim Gae-nam, also known as 'King Gae-nam', fought in the Battle of Cheongju

On 9 October, before the Council of Samrye had reached its conclusion, there was a minor skirmish in Daejeon, at the time a small village called Hanbat, between rebels and governmental forces. This came to be called the Daejeon Massacre. Seventy-eight rebels gave 78 government soldiers alcohol, then killed them while drunk.[64]

Meanwhile, the city of Cheongju was the Donghak division commanded by the Great Jeobju, Son Cheonmin. Kim Gae-nam and Son Cheonmin cooperated to attack Cheongju in the Battle of Cheongju on 9 December 1894. Because Kim did not fight at Ugeumchi, his army of 25,000 was still strong.

When Jeon and Son gathered the rebel forces in Samrye, Kim did not cooperate. He began his attack only after the Battle of Ugeumchi, and by 9 December, he reached Cheongju Fortress.

Kim's opponent was Kuwabara Eiziro and his Japanese battalion, along with governmental troops with little morale. Kim's 15,000 men attacked from the South, while Son Cheonmin's 10,000 attacked from the North. The defenders of Cheongju lacked morale due to the Daejeon Massacre, and Kim nearly broke through the south door. Eiziro suddenly assaulted the rebels, and Kim retreated to Muneui.

Two hundred rebels were killed in the Battle of Cheongju. The rebels also lost large amounts of weaponry, including many rebel banners, thousands of bows and arrows, 140 rifles, 2,000 flintlock muskets, 150 kilograms of gunpowder, two cannons, and 50 horses.[65] After the Battle of Cheongju, Kim went south to Muneui but was defeated again. He went into hiding, just as Jeon Bong-jun did.

Northern Chungcheong

Although Choe Sihyeong had banned rebel activities among the Northern Jeob during the spring of 1894, many Chungcheong rebels were Northern Jeob. By 22 March, rebels of Hoenggang, Yeongdeung, Cheongsan, Boeun, Okcheon, Jinjam, Muneui, Goesan, and Yeongpung were already giving the wealth of the rich to the poor, and beat and castrated corrupt Yangban. However, the Chungju rebels temporarily stopped activities due to the beginning of the Sino-Japanese War.

The Battle of Pungdo and the Battle of Seonghwan were both fought in Chungcheong Province, and the war sparked anti-Japanese sentiment among the former rebels. In July, 1,000 rebels wandered through various towns, building earthen fortresses in preparation for a Japanese invasion of Chungcheong. The rebels took weaponry from the governmental storages and trained themselves. In August, a small battle was between the Northern and the Southern Jeob.

On 12 October, Choe Sihyeong ordered the Northern Jeob to revolt. The rebels of Northern Chungcheong organized under the Jeob and Po and began active revolts.

More than a hundred battles took place in Northern Chungcheong in this period. The Gwandong Po won against a Japanese battalion in the Battle of Goesan under the leadership of Sim Songhak. The rebels then reached Boeun, thus severing all direct roads between Seoul and Jeolla. The revolt flared even greater when Son Byong-hi joined the Northern Chungcheong rebels. Survivors of the Battle of Taein joined the rebels as well.

On 18 December, 2,600 rebel forces gathered in Jonggok. The rebels included the great Northern leader Son Byeonghui, whose family lived near Jonggok, and the patriarch of Donghak, Choe Sihyeong. Japanese sources report that the rebels were cooking meals when the Japanese attacked them. Because of the surprise attack, the rebels were not able to put up a suitable defense, leading to 2,500 rebels out of 2,600 being killed. (Some scholars prefer the term Jonggok Massacre.) Both Choe and Son survived but fled towards the South. Minor skirmishes continued in this region until 28 December.[66]

Battle of Mount Seseong

The rebels of Cheonan, Hongseong, and northwestern Chungcheong were defeated in the Battle of Mount Seseong. This battle was also the key to Jeon Bong-jun's plan to capture Seoul.

In August, 1,500 rebels revolted in Cheonan and took governmental weapons. After organizing their army in Mount Soto, the rebels camped in Mount Seseong with their newfound weaponry. Mount Seseong was more of a low hill, 22 meters high, defended by a low wall, which has been in use since the Proto-Three Kingdoms Age. The rebel leaders were Kim Yongheui, Kim Hwaseong, Kim Seongji, Kim Bokyong, Kim Yeongu, and Won Keumok.

On 18 November, two Japanese platoons were located on the northern slopes, another platoon to the northeast and another to the southeast. At dawn, the southeast platoon ambushed the rebels, who resisted for two hours, aided by their superior knowledge of the terrain. However, they were forced to retreat to the west, where they were ambushed again by the two northern platoons.[67]

Three hundred seventy rebels were killed, 770 were wounded, and 17 were captured. The rebels also lost 140 guns, two trumpets, 228 spears, 26,500 Chinese bullets, 30 flags, 226 sacks of rice, and 13 sacks of barley. Kim Bokyong was captured and executed on the spot, and the other leaders were executed on 24 and 27 November. The hill was known as Mount Siseong, meaning 'Mountain washed with blood.'[68]

Gyeonggi

Because Gyeonggi was very close to Seoul, rebel activities in Gyeonggi were few. The largest Gyeonggi rebel groups, numbering 1,000 rebels, were in Yicheon, Yeoju, Anseong, and other parts of Southeastern Gyeonggi. The Gyeonggi rebels retreated south to Chungcheong, joining the rebels of Northern Chungcheong. Most were killed in the Battle of Jonggok (see above).

Gangwon

Gangwon rebels can be divided into two groups: the rebels of Gangneung and the rebels of Hoengseong and Wonju. Rebels from Northern Chungcheong or Gyeonggi occasionally crossed into Wonju. Gangwon rebels were especially marked by guerrilla warfare.

Gangneung and Pyeongchang

In these regions, rebels would occupy Gangneung, then flee to mountainous locations such as Pyeongchang, then return to Gangneung.

In September, more than 1,000 rebels attacked Gangneung, which lacked defenses. The rebels gave one sack of rice to each peasant by taking the wealth of the rich and built strongholds in most marketplaces. The rebels formed their court, lowered taxes, and punished corrupt Yangban and rich Sangmin.

On 7 September, an anti-rebel battalion led by Yi Hoewon assaulted the sleeping rebels in the rainy dawn. Twenty rebels were killed, and Yi's forces took seven guns, 157 spears, and two horses. The rebels passed the Daegwanryeong Pass into Pyeongchang.

By late September, the rebels had reorganized and recaptured Gangneung. they also occupied Pyeongchang, Yeongweol, and Jeongseon. In response, the Japanese army sent Captain Ishimori against the Gangneung rebels on 3 November. On 5 November, 10,000 rebels had a two-hour-long battle against Ishimori's troops but were ultimately defeated. The rebels fled to Jeongseon.

On 6 November, the governmental troops killed ten rebels in Jeongseon and burned down 70 houses. The rebels again fled to Pyeongchang.

Ishimori fought against 3,000 rebels in Pyeongchang on 1 December 1894. The rebels scattered after an hour of battle. Seventy rebels were instantly killed, 30 died from their wounds, and ten prisoners were killed for attempted rebellion. The Gangneung rebels ceased to exist after this battle.

Hoengseong, Wonju, and Hongcheon

Rebels of these regions were primarily guerrillas in mountainous terrain. The rebel leader was the legendary Cha Giseok, the Great Jeobju of the Gwandong Region. He led 1,000 rebels, who punished corrupt Yangban and collected taxes from merchants. It is said that Cha killed hundreds of Yangban.

On 13 October, Cha attacked Dongchang, where the taxes collected in Gangwon were brought to Seoul by boat. He burned down Dongchang and gave the taxes to the peasants. The magistrate of Hongcheon reports that after the destruction of Dongchang, more and more people joined Cha's army.

The government asked Maeng Yeongjae, a Confucian scholar, to conquer Cha's 'crowd of roving thieves.' Maeng, suppressing the rebels of Yicheon at the time, gladly obliged. On 21 October, Maeng and Cha battled in the Jangya Fields, in which more than 30 rebels were killed. The rebels fled to Seoseok, into the 'Seonang Pass.' It was so named because there was an altar to the deity Seonangshin in the past.

On 22 October, 2,000 rebels were killed in the consequent Battle of Jajak Pass, the largest battle in Gangwon Province before the Korean War. The rebels lacked guns, and they used birch branches as weapons. They also lacked pots and cooked rice over cattle hide. Because of the narrowness of the pass, the rebels were crowded, and it was easy for Maeng's troops to fire into the camp and kill the rebels. Maeng himself reports that "it was impossible to see how many died," but descendants have estimated 1,800~2,000. Descendants also note that the battle continued for three or four days. The Seonang Pass was renamed Jajak Pass because the blood made a 'Jajak' sound as it rolled down the pass.

On 26 October, the survivors, including Cha, regathered. On 11 November, they began the Battle of Mount Odae, in which Maeng's soldiers surrounded Mount Odae and began to climb it and defeat the rebels inside. One hundred rebels were killed, and 40 houses were burned. Cha was captured on 14 November and beheaded for treason in Chuncheon.

Hwanghae

1893, the Joseon Dynasty banned gold mining in Hwanghae Province. Although Hwanghae leaders, such as Kim Gu the 'Baby Jeobju' (Kim Gu was eighteen at the time, compared to the 40-year-old Jeon Bong-jun or the 32-year-old Son Byong-hi), were believers in Donghak, most of the rebels were gold miners. Lieutenant Suzuku classified Hwanghae rebels in three ways:

  1. True Donghak, "who mutter incantations and believe that their faith shall cure diseases, bring wealth, and lengthen life."
  2. Temporary Donghak, "who do not believe the teachings... but join the Donghak religion."
  3. False Donghak, "those... who hate foreigners... are suppressed by local magistrates, suffer from inflation, or can no longer mine for gold. Most are gold miners, and that is because... gold mining was banned last year, and... they no longer have money, and they wish for revenge".[69]

Haeju

Haeju was one of the two provincial capitals to fall to the rebels (the other being Jeonju). The defeat of the Haeju rebels is documented in Lieutenant Suzuku's Conquest of the Donghak of Hwaghae.

By 27 November, the rebels had captured most of the Hwanghae coast, including Haeju, without a significant battle. However, at the dawn of 27 November, 400 rebels camped on Pyeongsan were assaulted by governmental forces and fled south to Nucheon. Knowing that the Japanese and the government troops were chasing them, they hurriedly ran to Nucheon. Suzuku captured many Donghak food supplies in Nucheon, including "hundreds of sacks of millet." [69]

On 29 November, Suzuku captured the town of Gajichon. However, there were no men in Gajichon. When the women of Gajichon were interrogated, they revealed that all grown men had been ordered to go to the town of Onjeong. Suzuku's soldiers burned four sacks of rice cakes in Gajichon.

The Japanese reached Onjeong, only to find it empty. The magistrate of Onjeong said that the rebels had never come and that they were to go to Haeju rather than Onjeong. Haeju, too, was empty. The governor of Hwanghae said that "every town outside of Haeju is full of thieves... two-thirds of all towns in Hwanghae are full of the Donghak raiders".[69]

With the guidance of the officials of Haeju, the Japanese defeated hundreds of rebels in the hour-long Battle of Gohyeonjang, killing "tens of thieves." [69] They also captured and beheaded several rebels and burned five houses.

Kim Gu and his rebels sought to reoccupy Haeju and attacked Japanese scouts at 6:00 am on 2 December 1894. The battle continued until 8:00 when the rebels finally fled. Tens of rebels were again killed, and many were captured. Suzuku discovered a manifesto from the captured rebels written by Choe Sihyeong, the Donghak patriarch. The manifesto proved that the Haeju rebels were under the command of Choe Sihyeong and the Northern Jeob leaders.

The rebels gathered in Cheongdan, 2.5 kilometers away from Haeju. Seven thousand rebels were camped in the east and the South, and 400 were hidden in the pine forests. Ten thousand were camped 400 meters away, and 14,000 were camped a kilometer away. Because the rebels lacked rifles and other modern weaponry, they were crushed after three Japanese strikes. However, the rebels did not retreat. Because the Japanese also lacked ammunition due to the large number of rebels, they finally directly charged at the rebels. Although the rebels only had old-fashioned muskets, the superior numbers of the rebels wore out the Japanese soldiers. The rebels fled and were chased for 600 meters. Minor skirmishes continued until January 1895, and Kim Gu hid in the house of An Taehun, a Catholic and the father of An Junggeun, until 1896.[69]

Pyongan and Hamgyong

Pyongan Province had little rebel activity. It suffered extreme casualties in the First Sino-Japanese War, especially at the Battle of Pyongyang. There were occasional reports of rebels killing magistrates or attacking Japanese support lines, but such instances were rare. Also, there were only two Jeobju for all of Pyongan, compared with seven for Hwanghae and Gyeonggi, ten for Gangwon, seventeen for Chungcheong, nineteen for Gyeongsang, and twenty-five for Jeolla.[3]

There were minor incidents of rebellions in Hamgyong:

My grandfather died at thirty-nine. Our home was Haunseung Village, Suha Township, in Dancheon County. There and in Samsu, my grandfather caused a Donghak rebellion. But [he was defeated] and fled to a village called Neuteulgol where slash-and-burners lived. He hid in a potato container, but two Japanese soldiers opened the lid and ordered him to come out. So, he commits suicide by splitting his stomach open with a dagger. [70]

Fall

The capture of Jeon Bong-jun. He is in the center, seated in a carriage because his legs were broken in the escape attempt.

Although Jeon Bong-jun officially disbanded the rebel army after the Battle of Taein, many other commanders did not disband their respective armies until December. On 1 December, Son Hwa-jung and Choe Gyeong-seon disbanded their rebel armies in Gwangju and went into hiding. The same day, the great rebel leader Kim Gae-nam was captured. Kim had been betrayed by a friend named Yim Byeongchan and captured by 80 governmental soldiers who surrounded the house of Kim's brother-in-law. Kim was dragged to Naju. On 13 December, he was put to death by beheading, and his corpse was ripped apart in five. The magistrate of Naju ate Kim's intestines and liver.

On 2 December, Jeon Bong-jun was also captured in a village called Pinori in modern Sunchang (see left), betrayed by his lieutenant Kim Gyeongcheon. Jeon suspected Kim had betrayed him and leaped out of the two-story house holding his musket. However, the house was surrounded by governmental soldiers, and he was hit many times with large sticks, causing him to break his legs. Jeon was imprisoned and taken to Seoul. Kim Gyeongcheon went into hiding because he feared that the rebels would kill him. Trials were not held because the government wanted to immediately put Jeon, Son Hwa-jung, Choe Gyeong-Seon, and Kim Deokmyeong on trial. (these four, along with Kim Gae-Nam, are known as the Five Donghak Generals)

Also, by December, the Anti-Japanese Frontier had been pushed down to the southern coast of Korea. On 7 December, the Japanese finally killed Kim Inbae, the Great Jeobju of Geumgu, who had aided the Jinju rebels in the Battle of Gwangyang Fortress. Kim Inbae's head was tied to a pole and displayed in Gwangyang. However, in Jangheung, the rebel leader Yi Bangeon captured Gangjin on 7 December. On 11 December, Son Hwa-jung was also arrested.

Meanwhile, the Japanese were attacking Yi Bangeon and the Jangheung rebels, forming the region's last organized rebel army. On 15 December, the final major battle in Jeolla Province, the Battle of the Seokdae Fields, was fought between Yi Bangeon's rebels and the Japanese. This battlefield is now one of the Four Battlefields of the Donghak Revolution. Thirty thousand rebels were present, and 2,000 were killed. As the 800 Japanese soldiers moved through Yeongam, Gangjin, Haenam, and Jindo Island, they engaged in a scorched-earth strategy, killing 600 civilians and burning villages and sacks of rice. Yi Bangeon was finally captured in Christmas 1894 and beheaded with his son in Seoul.[71][72] With the death of Yi Bangeon, the rebels had been completely exterminated, except for 30 rebels who hid in Mount Daedun.

Sometime in December, Choe Gyeong-seon was also captured. On 1 January 1895, the last rebel leader, Kim Deokmyeong, was captured in Wonpyeong. The four leaders were put on trial, and Jeon Bong-jun's testimony during the trials formed the Testimony of Jeon Bong-jun. In his testimony, Jeon emphasized that Donghak believers formed only a small fragment of the rebels, the majority being peasants seeking vengeance. However, he also explained the theology of Donghak to the court. He also denied connections with the Great Regent Heungseon.[73]

On 29 March, the four leaders were hanged for treason. Later, Confucian scholars stole the bodies, beheaded them, and displayed the heads in public. Only Choe Gyeong-seon's body has been identified, and the locations of the other three are unknown.

The last battle in the Donghak Revolution was the Battle of Mount Daedun on 17 February. The 30 rebels held the mountain for three days until a Japanese battalion attacked them by climbing up the rocky cliffs. Only a young child survived. However, rebels were still killed in 1895 in various ways. Those included:

  • Chaining rebels together, then burying them alive in a pit
  • Chaining rebels together, then drowning them in the sea. The coast was said to be littered with corpses.
  • Piercing the skull with a sharp wooden stick, then burning the stick so that the brain would explode.
  • Ripping apart rebels by using horses or cows
  • Shredding a rebel to parts using a chariot
  • Piercing the stomach with a bamboo stick
  • Cutting open the chest and eating the liver and intestines
Choe Si-hyeong before execution

Meanwhile, the Northern leaders Choe Sihyeong and Son Byong-hi had fled after the defeat at Jonggok. In January 1898, Choe and Son escaped arrest because Kim Yeonguk had been misidentified for Choe Sihyeong. In April 1898, however, Choe was captured and put on trial. Because the government wished to execute Choe before he died of disease, the trials were speedily done. Son Byong-hi and a group of other believers attempted to free Choe by bribing the judges with land, but Choe was executed after a month. He was buried in the cemetery with a small marker saying 'Donghak Ringleader Choe Sihyeong.' That night, Son and the others secretly entered the cemetery and took Choe's body. Choe was reburied in Gwangju.

Legacy

A part of the rebel requests, including the remarriage of widows and the freeing of enslaved people, was included in the Gabo Reform. However, the reform was not supported because it did not have land reform, which was the peasants' greatest need.

Many rebels later joined the Righteous Army. The 1895 Righteous Army was led by Confucian scholars who killed rebels when they attempted to enter. However, the Righteous Armies of 1905 and 1907 were almost entirely composed of rebels. For example, Yu Eunshik of Chungju killed his lieutenant when he revealed himself as a former rebel.[74] Jeon Haesan, the most famous of the Jeolla Righteous Army leaders, was often called the 'son of Jeon Bong-jun' and participated in more than 70 battles from 1905 to 1910 against the Japanese before he was hanged in 1910. However, in his War Diary of Jeon Haesan, Jeon Haesan says that he "did not like to be called the 'son of Jeon Nokdu'(Jeon Bong-jun's nickname)," presumably meaning he was not Jeon Bong-jun's son.[75] However, the current edition of the North Korean history textbook claims that 'the patriotic line' descends from Jeon Changhyeok (Jeon Bong-jun's father and Gyojo Shinwon leader) through Jeon Bong-jun to Jeon Haesan. The South Korean Ministry of Education claims that this is North Korean textbook revisionism to glorify Kim Il Sung by comparing the Kim family to the Jeon family.

Many former rebels became nationalists and independence activists. The tiger hunter Hong Beomdo, whom Donghak influenced, became a guerrilla leader of Manchuria. Kim Gu the 'Baby Jeobju,' who fought at the Battle of Haeju, became a profound nationalist and one of the most respected Korean leaders.

The Donghak religion also experienced a profound change. With the death of Choe Sihyeong, Son Byong-hi became the third patriarch. To escape persecution as 'rebels,' he renamed Donghak 'Cheondoism' and fully established the 'Human is Hanulnim' doctrine, thus making Cheondoism a fully pantheistic religion (Choe Je-u seems to have been a panentheist). Cheondoism was legalized in 1905, but Son was imprisoned in 1919 for leading the March 1st Movement and died in prison. Son's son-in-law, Bang Jeonghwan, was also a Cheondoist who became a famous child activist and founded the Children's Day in Korea.[76] The artist Suh Yong-sun drew a work titled Donghak Peasant Revolution on canvas using acrylic paint.[77]

Controversies

Role played by Donghak

There is an ongoing controversy about the naming of the revolution, connected to the exact role that the Donghak religion played in the revolution. Theories include:

  1. The revolution was fundamentally based on the Donghak religion and should thus be called the 'Donghak Rebellion' or the 'Donghak Revolution.' This argument is based on the fact that every pre-1922 source called the 'Donghak Rebellion,' and every major leader was a Jeobju or Poju. This was the stance by South Korea when it was ruled under a military junta.[78][79]
  2. The revolution was fundamentally based on the peasants who were suppressed by the government and should thus be called the 'Peasant Rebellion of 1894', the 'Peasant Revolution of 1894', or the 'Peasant War of 1894'. This argument is based on Jeon Bong-jun's testimony: "There were many angered peasants and few Donghak." This is the official stance made by North Korea.[78]
  3. The rebel leaders were Donghak believers, but the armies were aggravated peasants. They should thus be called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Donghak Peasant Rebellion,' 'Donghak Peasant War,' or the 'Donghak Peasant Movement.' Jeon testified, "Our leaders were Donghak, but the army were peasants." This is the current South Korean position.[78]

Role played by the Great Regent Heungseon

The role played by King Gojong's father, the Great Regent Heungseon, is open to controversy. Jeon Bong-jun first met Heungseon in 1890 in Unhyeon Palace. Jeon lived with the Great Regent Heungseon from 1890 to 1892 and revisited him in February 1893.[80] In the meeting, Jeon said to the Heungseon: "I wish to die for the country and the people."[80] There were many rumors that the Heungseon had secretly caused the rebellion in this meeting.

It is also said that the Heungseon (or occasionally Gojong himself) sent a messenger to Jeon after the Jeonju Truce, asking him to drive out the Japanese. This has not been confirmed. For evidence, the message of Mikhail Hitrovo, the Russian envoy to Japan who sent his message to the Russian envoy to Korea a month before the start of the revolution, is often cited:

[The Great Regent] is planning a great riot as its leader, beginning in summer or autumn. Already, the leaders are buying weapons from China and Japan, and 4,000 rifles have already been purchased. A few are from Japan, and a few Japanese have joined this scheme, of which the Japanese government knows nothing about.[citation needed]

Great Regent Heungseon in 1869

In A History of Donghak, Oh Jiyeong claims that the Great Regent attempted a massacre of pro-Japanese politicians in August 1894, simultaneous with the time when Jeon had planned an attack on Seoul.[49]

During his execution, Kim Gae-nam testified that Jeon had been secretly meeting the Great Regent Heungseon. However, the other four leaders refused to connect the Great Regent with the revolution.[81]

Connections with Genyosha

The Japanese historian Seito argued that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had been backed by a Samurai group named Genyōsha, who landed in Busan on 27 June 1894.[82] The claim is however heavily contended by Korean historians.

Seito's account is generally regarded as pseudohistorical by Korean historians. Jeon only had 20 followers at the beginning of the Gobu Revolt, compared with 600 in Seito's account. Also, Seito's list of battles and Jeon Bong-jun's account in the Jeon Bong-jun Gongcho are different. Additionally, Seito records that an alliance of rebels and Genyosha defeated governmental forces from June to August, in which Jeon would install Jibgangso agencies. However, certain Korean historians such as Yi Yihwa and Japanese historians generally regard Saito's account to be partially valid, especially as there was a large body of Japanese soldiers in Korea at the time.

In The Founding of Cheondoism, it is recorded that two Japanese men named Danaka Jiro and Dakeda Hanshi and their fifteen followers, holding dynamite, gave Jeon a gold watch and a horse and had a council with Jeon, which was done not with translation but by using written sentences (both knew Chinese characters). The Japanese asked Jeon to ally with Japan and drive out China to make Korea genuinely independent. Later, in 1895, Danaka attempted to free the imprisoned Jeon and take him to Japan, but Jeon refused, calling Japan "my enemy" and saying, "It is not my purpose to seek my petty life through the hands of an enemy." He also said, "I am your enemy, and you are my enemy." [83] However, Jeon also asked the Genyosha to attempt to protect the rebels from execution.

The Great Regent Heungseon has hired ronin, or former Samurai, to kill political enemies. It has also been speculated that it was Genyosha members who killed Empress Myeongseong, the last queen of Korea.[12]

War crimes by Donghak rebels

The Donghak rebels committed heinous war crimes out of vengeance against the ruling castes. Due to the violent nature of the rebellion, Choi has denied his direct involvement to Jeon and the peasant rebels. The war crimes are not only limited to arson and pillages, but also included frequent rapes and torture. This was well recorded in Ohagimun, which was written by Hwang Hyeon, a late Joseon scholar.[84]

Controversy over compensation

Due to the war crimes and the rebellious and cultish nature of the rebellion, controversies rose in South Korea because Jeollabuk-do has decided to give cash compensations to descendants of Tonghak rebels. [85]

Folk songs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gave way to various folk songs. The most famous is the Oh Bird, Oh Bird, Oh Roller (the 'roller' being mentioned is the oriental dollarbird).

Oh bird, oh bird, oh roller

Do not sit in the Nokdu fields.

When the Nokdu flower falls

The jelly seller weeps.

Oh bird, oh bird, oh roller

Why did you come out

The pine and bamboo leaves are green.

We thought it was summer.

But it is freezing with snow.[86]

In this song, the 'roller' are the Japanese soldiers (who wore blue uniforms). The 'Nokdu Fields' is Jeon Bong-jun, and 'When the Nokdu Flower Falls' is the execution of Jeon Bong-jun. The 'jelly sellers' are the peasants of Korea. 'Summer' refers to the Hucheon, the Donghak concept of Paradise, and 'winter' refers to the persecution of the rebels. 'Why did you come out' refers to the peasants' anger at foreign intervention. This song is sung all over Korea and seems to have been first sung at the execution of Jeon. There are many versions of this song, with different lyrics.[36]

Another song was sung in September, at the revolution's zenith, but was soon forgotten after the fall of the rebels. This contrasts the Oh Bird, Oh Bird, Oh Roller above.

Gabose gabose

Eulmijeok georida

Byeongshin doemyeon

Byeongshin nanda[citation needed]

This is a wordplay. The first line, 'Gabo,' can mean 'Let us go' and '1894'. 'Eulmi' refers to 'slow' and '1895', and 'Byeongshin' refers to 'Destruction' and '1896'. This song's literal meaning is 'Let us go in 1894, for if we do not win by 1895, we shall be destroyed by 1896.'[citation needed]

Son Hwa-Jung and the Buddha's Navel

The Dosol Cliff Buddha has been connected to Son Hwa-jung and the rebels, and the legend surrounding it appears in the 1940 History of Donghak, meaning that the legend was already existent at the time. It is one of the few legends relating to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87]

In 1820, a few days after Yi Seogu became governor of Jeolla, Yi went south to Seonun Temple, Mujang, to see what was inside the navel of the Stone Buddha of Dosol Cliff. But as he was opening the navel, thunder struck, he could not read the parchment inside but had to seal the navel again. He had only read the first line: "Yi Seogu, governor of Jeolla, will read this." No one dared read the parchment, for they feared the thunder.

In August 1893, in the Jeob of Jeongeub, there were words about the parchment of the Buddha. Son Hwajung said he would like to read it, if only for the thunder. Then, the believer Oh Hayeong said they should not worry about the lightning: "I hear that when such parchments are hidden, the hider casts lightning spells so that people cannot read it. I do not think anything will happen. The lightning spell will already have been cast when Yi Seogu attempted to open the seal, and the spell will have been gone. We must open it when it is time, and I shall take all responsibility."

So they gathered thousands of coils of ropes and hundreds of hammers, crushed the navel of the Buddha, and took out the parchment inside. They had imprisoned the Buddhists in fear of intervention, and they reported the Donghak believers to the government. That day, the magistrate of Mujang captured hundreds of Donghak believers, with Gang Gyeongjun, Oh Jiyeong, and Go Yeongsuk at their heads. The magistrate of Mujang ordered the Donghak believers to hand over the parchment and reveal the location of Son Hwajung. They were beaten and flogged until their bodies were hunks of flesh. But the parchment was with Son Hwajung to the north, as were the other leaders, and after ten days of torture, the three leaders were executed for murder and thievery, and the others were flogged and sent away.[49][88]

Later stories claim that the parchment in question was a secret guideline on revolutions that was written by Chŏng Yagyong, a Silhak scholar, and that Jeon Bong-jun modeled the revolution after the book. Others claim that the parchment's destiny was to bring the downfall of the Joseon Dynasty.[12]

The current Dosol Cliff Buddha has a squarely shaped hole in place of the navel.

Film

Fly High Run Far, a 1991 South Korean film directed by Im Kwon-taek, tells about the Revolution.

Nokdu Flower, a historical drama of SBS in 2019, directed and written by Shin Kyung-soo, Jung Hyun-Min, tells about Baek Yi-kang (this is an unreal character in history) join in Donghak Peasant Revolution.

Further reading

  • Biography of Jeon Bong-jun, Sin Bokryong, 1996
  • Donghak Peasant Rebellion and the Gabo Reform, Il Jogak, 10 November 1998
  • Donghak Revolution and Novels, Chae Gilsun, 2006
  • Folk Movements of the Late Joseon Dynasty and the Causation of the Donghak Peasant War, Bae Hangseob, 5 July 2002
  • Political and Societal Movements of Donghak, Jang Yeongmin, 30 December 2004
  • An Understanding of the Donghak Ideology, Sin Ilcheol, 1995

See also

Notes

  1.  Also known as the "Donghak Peasant Movement" (동학 농민 운동; 東學農民運動; donghak nongmin undong), the "Donghak Rebellion", the "Peasant Revolt of 1894", and the "Gabo Peasant Revolution".
  2.  Jeobju (접주; 接主) and Jeob (; )
  3.  During the siege, the rebels invented a cuisine that became known as Jeonju bibimbap [ko]

References

  1.  McClain 2002, p. 297.
  2.  Yi 2012, p. 21.
  3.  South Korea government 1976, pp. 128.
  4.  Yi 2012, pp. 21–22.
  5.  Yu 2011b, p. 359.
  6.  "[오복만땅] 홍익인간의 단군사상부터 '인내천' 동학사상까지". 4 November 2018.
  7.  "S[오복만땅] 최제우의 이름에는 동학의 깊은 뜻이…". 6 April 2018.
  8.  "Cheondoist Seoul District". Retrieved 25 January 2013.
  9.  "[이재명의 NEWS 뒤집어보기]여시바위골과 울산 동학, 그리고 꺼지지 않는 입화산의 촛불". 6 August 2018.
  10.  "[경북의 혼] 제2부-신라정신 4)신라정신 바탕이 된 풍류". 13 May 2011.
  11.  Naver "Encyclopedia of Korean History>Joseon>Hucheon Gaebyeok" (in Korean). Retrieved 5 January 2013.
  12.  Park 2009d, p. ???.
  13.  Naver "Encyclopedia of Korean History>Joseon>Jeob.Po" (in Korean). Retrieved 5 January 2013.
  14.  Naver "Dusan Encyclopedia>Yi Pilje's Revolt" (in Korean). Retrieved 25 January 2013.
  15.  Naver "Internet Biography of Son Byeongheui" (in Korean). Retrieved 24 January 2013.
  16.  Jeon Bongjun Gongcho (The Testimony of Jeon Bongjun).
  17.  Naver "Encyclopedia of Korean History>Joseon>Gyoju Shinwon Movement" (in Korean). Retrieved 5 January 2013.
  18.  Yi 2012, p. 74-75.
  19.  Naver "Encyclopedia of Korean History>Joseon>Gyoju Shinwon Movement" (in Korean). Retrieved 5 January 2013.
  20.  Lone & McCormack 1993, p. ???.
  21.  Yi 2012, pp. 69–70.
  22.  Hwang 1910, p. ???.
  23.  Yi 2012, p. 77.
  24.  Yi 2012, pp. 76–77.
  25.  Shin Byeongju. "Shin Byeongju's Finding Roads in History (32)Currency of the Joseon Dynasty". Segye Daily. Retrieved 28 March 2013.
  26.  Yi 2012, p. ???.
  27.  "Jeongeub Donghak Peasant Revolution>A Shortened Revolution History>The Misconduct of the Gobu Magistrate".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3 January 2015. Retrieved 29 March 2013.
  28.  Yu 2011b, p. 276.
  29.  Naver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and History>Gobu Minlan" (in Korean). Retrieved 6 April 2013.
  30.  Yi 2012, pp. 95–102.
  31.  Yi 2012, pp. 108–109.
  32.  Yi 2012, p. 112–113.
  33.  The Tokyo Daily. 1894. {{cite news}}: Missing or empty |title= (help)
  34.  Yi 2012, pp. 114–115.
  35.  Yi 2012, p. 120.
  36.  Gwak 2011, p. ???.
  37.  "'전주화약일'은 동학농민혁명의 오점, 국가기념일 절대 안돼".
  38.  "동학농민군의 전주 입성".
  39.  Boulger & Hazeltine 1893, p. ???.
  40.  ko:전주화약
  41.  ""동학농민군이 집강소에서 폐정개혁안을 실천했다"는 교과서 서술은 잘못". 2 August 2017.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12 April 2021. Retrieved 12 April 2021.
  42.  "전주 하면 이곳, 동학혁명기념관이지요". 10 March 2014.
  43.  "'동학농민혁명과 전주화약'…국회의원회관서 23일 학술대회". 15 September 2016.
  44.  "전주성 철병에 관한 논점". 26 January 2020.
  45.  "동학농민혁명, 민주자치와 평화시대를 열었다". 8 May 2018.
  46.  Choe 1862, p. ???.
  47.  Naver "Encyclopedia of Korean Ethnic History>History>Modern>Jibgangso" (in Korean). Retrieved 10 January 2013.
  48.  Yi 2012, p. 265.
  49.  Oh 1987, p. ???.
  50.  Yi 2012, p. 87.
  51.  Yi 2012, p. 186.
  52.  Yi 2012, p. 89.
  53.  Naver "Encyclopedia of Korean Ethnic History>History>Modern>Battle of Ugeumchi" (in Korean). Retrieved 11 January 2013.
  54.  Yi 2012, p. 103.
  55.  "Doopedia-우금치전투". Retrieved 5 August 2013.
  56.  "Encyclopedia of Korean Ethnic History-우금치전투".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4 October 2013. Retrieved 5 August 2013.
  57.  Yi 2012, pp. 105–108.
  58.  "Donghak Peasant Revolution Memorial". Retrieved 11 January 2013.[permanent dead link]
  59.  Yi 1894, p. ???.
  60.  Yi 2012, pp. 243–244.
  61.  "Encyclopedia of Jindo Culture – Yi Heuiseung (Modern Jindo Official)".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11 May 2013. Retrieved 31 March 2013.
  62.  "Encyclopedia of Jindo Culture – Donghak Peasant Revolution".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11 May 2013. Retrieved 31 March 2013.
  63.  "Encyclopedia of Hadong>Battle of Mount Goseong Fortress". Retrieved 14 January 2013.
  64.  Naver "Second Revolt of the Gabo Peasant War" (in Korean). Retrieved 15 January 2013.
  65.  "Digital Encyclopedia of Cheongju>Battle of Cheongju Fortress".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11 May 2013. Retrieved 15 January 2013.
  66.  "Digital Encyclopedia of Chungju>Donghak Peasant Revolution".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11 May 2013. Retrieved 15 January 2013.
  67.  "Culture Contents.com>Battles/Diplomacy>Korean Battles>Battle of Mount Seseong". Retrieved 7 April 2013.
  68.  Yi 2012, pp. 251–253.
  69.  Yi 2012, p. 308.
  70.  History Controversies Study Agency 1994, pp. –.
  71.  "Battle of the Seokdae Fields, Jangheung" (in Korean). Retrieved 17 January 2013 via Naver.
  72.  "Yi Bangeon, Encyclopedia of Koreans". 1838. Retrieved 17 January 2013.[permanent dead link]
  7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역사>근대사>전봉준공초 (in Korean). Retrieved 5 July 2013 via Naver.
  74.  Choe 2007, p. 176.
  75.  Naver "Jeon Haesan Jinjung Ilgi, Encyclopedia of the Culture of Korea" (in Korean). Retrieved 23 January 2013.
  76.  Park 2009e, p. ???.
  77.  Naver "Naver Cast:Today's Korean-Suh Yong-sun" (in Korean). Retrieved 7 April 2013.
  78.  Choe Hwaju (24 June 2013). "'Historical facts' do not talk on their own". The Hankyoreh. Retrieved 5 July 2013.
  79.  Naver "Naver Encyclopedia-Donghak Movement" (in Korean). Retrieved 15 July 2013. "Although there is a theory that postulates that the Donghak was only a motivation for a few extremists, or that it only acted as a device for peasants to express their already existing desire for change, it misrepresenting Donghak's role as an ideological start or the religion of the leading rebels."
  80.  "Daum Encyclopedia>Jeon Bongjun" (in Korean). Retrieved 19 January 2013.
  81.  "Doopedia-The Second Donghak Revolution". Retrieved 15 July 2013.
  82.  玄洋社社史編纂会 1977 『玄洋社社史』近代資料出版会=History of Genyosha(written in Japanese)
  83.  Misang 1999a, p. 327.
  84.  황현; 김종익 (2016). 오동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기록하다: 황현이 본 동학농민전쟁. 고양: 역사비평사. ISBN 978-89-7696-291-1.
  85.  https://weekly.khan.co.kr/article/202608271706001
  86.  Yu 2005, p. ???.
  87.  Misang 1999b, p. 345.
  88.  Yu 2011a, p. ???.

Bibliography

Books are sorted by author's family name, the last part in English, and the first part of a Korean name.

Specific books

  • Yi, Yihwa (2012). 동학농민운동(평등과 자주를 외친)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Claiming for Equality and Statehood] (in Korean). illustrated by Kim Tae-Hyun. Seoul: Safari. p. 327. ISBN 9788-9648-0765-1.
  • History Controversies Study Agency (1994). 다시 피는 녹두꽃 [The Nokdu Flower Blooms Again: Testimony of Donghak Peasant Descendants] (in Korean). 역사비평사, History Bipyeongsa. pp. 1–400. ISBN 9788-9769-6223-2. 학농민군 후손 60여인의 생생한 증언을 모았다

Surveys

  • Lone, Stewart; McCormack, Gawan (1993). Korea Since 1850. Australia: Longman Cheshire Pty Limited. p. 226. ISBN 9780-3120-9686-1.
  • Boulger, Demetrius Charles; Hazeltine, Mayo W. (1893). "The War with Japan and Subsequent Events". China. Kessinger Publishing (reprint 2010). pp. 1–550. ISBN 9781-1633-3067-8.

Other books

  • Misang, John (1999a). 미상 [The Founding of Cheondoism] (in Korean).
  • Misang, John (1999b). 미상 [Korean Folk Culture] (in Korean).
  • South Korea government (1976). 미상 [Social Study Topographical Textbook] (in Korean). pp. 1–128.
  • Choe, Sihyeong (1862). 용담 유사 : 수운 가사 [Yongdam Yusa] (in Korean). 대원 출판사, Daewon Publisher. ISBN 8972616087.
  • 세종 출판 기획; Sejong Chulpan Kihoek (2000). 용담 유사 : 수운 가사 [Yongdam Yusa] (in Korean). 대원 출판사, Daewon Publisher. pp. 1–141. ISBN 9788-9726-1608-5.
  • Hwang, Hyeon (1910). 오하기문 [Ohagimun] (in Korean). translated by 김종익 (1994?). 역사비평사, History Bipyeongsa. pp. 1–351. ISBN 8976962222. 매천(梅泉) 황 현이 19세기 당쟁.세도정치의 폐해, 동학농민전쟁, 일제 침략 항일의병활동 등 한시대를 묘파한 "오하기문" 번역서
  • Oh, Jiyeong (1987) [1940, Yeongchang Seogwan (?)]. 동학사(대광민속총서 1) [A History of Donghak] (in Korean). 대광문화사, Daekwang Cultural History. pp. 1–243. ISBN 9788-9705-1022-4.
  • Yi, Deokil (1999). 미상 [A History of Controversies] (in Korean).
  • Yi, Guytae (1894). Diary of the Reconnaissance Head of the South (in Korean).
  • Yu, Eunshik. The Conservative Nature of the Rebellion of 1894 (in Korean).
  • Yu, Hongjun (유홍준) (2011a). 남도 답사 일번지 [The First in the South].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Exploring my Cultural Heritage] (in Korean). Vol. 1. Changbi. pp. 1–348. ISBN 9788-9364-7201-6.
  • Yu, Hongjun (유홍준) (2011b). 산은 강을 넘지 못 하고 [Mountains Cannot Cross Rivers].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Exploring my Cultural Heritage] (in Korean). Vol. 2. Changbi. pp. 1–466. ISBN 9788-9364-7202-3.

Manhwa (만화) and Books for Children

  • Choe, Yongbeom (2007).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Reading Korean History in One Night] (in Korean). Seoul: Paper Road. pp. 1–426. ISBN 9788-9958-2663-8.
  • Gwak, Eunju (2011). 최제우 동경대전(만화)(서울대선정 인문고전 50선 21) [Choe Jeu's Donggyeong Daejeon (Manhwa)] (in Korean). Junior Kim Yeongsa. pp. 1–215. ISBN 9788-9349-3327-4.
  • Park, Eunbong (2009d). 한국사 편지. 4(12살부터 읽는 책과함께 역사편지) [ABC of Korean History (4)] (in Korean). 책과함께어린이, Books for Children. pp. 1–260. ISBN 9788-9912-2147-5.
  • Park, Eunbong (2009e). 한국사 편지. 5(12살부터 읽는 책과함께 역사편지) [ABC of Korean History (5)] (in Korean). 책과함께어린이, Books for Children. pp. 1–300. ISBN 9788-9912-2148-2.
  • Yu, Gyeong-won, 유경원 (2005). 이현세의 만화 한국사 바로보기. 9(조선시대) [Quick view of Yi Hyeonse Manhwas about Korean History. 9 (Joseon Dynasty)] (in Korean). 녹색지팡이, Noksaek Jipangi. pp. 1–235. ISBN 9788-9914-8109-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