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20

近代東アジア史像の再構成 / 中村 哲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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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史一般



[近代東アジア史像の再構成
中村 哲【著】 桜井書店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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内容 

欧米中心や一国中心の歴史観を乗り越えて、日本を含む東アジア資本主義の形成と発展に関する理論を組み替え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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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次

第1章 東アジア資本主義史の探究―最近の研究に依拠して
第2章 両大戦間期の東アジアと日本資本主義
第3章 日本の資本主義化と中小工業―日本資本主義形成の一特質
第4章 東アジア資本主義形成の歴史的諸条件
第5章 二〇世紀資本主義から二一世紀資本主義へ]
--- 1,000 단어, 요약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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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동아시아 역사상의 재구성> 요약 및 평론

<1. 서론 및 저술 배경>

나카무라 테츠의 <근대 동아시아 역사상의 재구성>(2000)은 냉전 해체 이후 전개된 동아시아 지역의 경제적 부상과 세계화라는 시대적 전환을 배경으로 집필되었다. 저자는 종래의 서구 중심주의적 발전 모델이나 단일 국가 단위에 매몰된 일국사적(一國史的) 시각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서구 근대를 유일무이한 표준으로 삼아 아시아를 후진적 정체 사회로 규정하던 오리엔탈리즘적 도식과, 각국의 역사적 궤적을 고립된 내적 동인만으로 설명하려던 방법론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다. 이 책은 일본, 한국, 중국, 대만 등 동아시아 각국이 상호 연계 속에서 어떻게 고유한 자본주의 체제를 형성하고 발전시켜 왔는가를 규명하는 거시적 이론 틀을 제시한다.

<2. 장별 핵심 내용 요약>

제1장 <동아시아 자본주의사 탐구: 최근 연구에 기초하여>에서 저자는 동아시아 경제사 연구의 동향을 검토한다. 서구 발전 궤적의 단순 모방이 아니라 동아시아 고유의 시장 형성 메커니즘과 자본 축적 양식을 포착해야 한다고 역설하며, 이를 비교경제사적·연관사적 시각에서 재개념화할 이론적 토대를 닦는다.

제2장 <양차 대전 사이의 동아시아와 일본 자본주의>는 전간기(1920~1930년대)에 주목한다. 이 시기는 제국주의 지배-피지배 관계라는 정치적 억압 구조 하에서도 역내 분업 체계와 무역망이 심화된 복합적 국면이었다. 저자는 식민지배의 수탈적 본질을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당시 형성된 공업화의 맹아와 시장 네트워크가 전후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구조적 연계성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단초를 추적한다.

제3장 <일본의 자본주의화와 중소공업: 일본 자본주의 형성의 한 특질>은 일본 공업화의 독자성을 중소기업과 재래 산업의 역할에서 찾는다. 서구식 거대 독점자본 중심의 설명과 달리, 농촌 공업과 중소 하청 구조가 대자본과 상호 보완하며 유연한 적응력을 제공했음을 밝힌다. 이는 서구와 다른 아시아적 산업화의 독특한 이중구조이자 생산 네트워크의 특징으로 제시된다.

제4장 <동아시아 자본주의 형성의 역사적 제조건>에서는 동아시아 사회 내부의 장기 지속적 요인을 분석한다. 집약적 소농 경제의 전통, 근면 혁명(Industrious Revolution)을 통한 고도의 노동 규율, 유교적 사회 질서와 교육열 등이 근대적 시장 경제 수용과 자본주의적 전환의 강력한 내적 자원으로 작동했음을 논증한다.

제5장 <20세기 자본주의에서 21세기 자본주의로>는 논의를 현대와 미래로 확장한다. 서구 헤게모니가 주도한 20세기형 자본주의의 한계를 짚고, 동아시아의 다원적 네트워크 자본주의가 21세기 글로벌 경제 질서에서 갖는 새로운 대안성과 과제를 조망하며 논의를 매듭짓는다.

<3. 비판적 평론>

이 저작의 가장 큰 학문적 성취는 동아시아를 지배와 종속의 이분법 혹은 개별 국민국가의 파편화된 집합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유기적인 <역내 경제 연관망>으로 재구성했다는 점이다. 서구 모델을 규범화하는 단선적 발전론에서 탈피하여, 소농 사회의 특성과 중소 제조업의 생태계가 자본주의의 독자적 경쟁력으로 전화하는 경로를 설득력 있게 포착해 냈다.

그러나 한계 역시 뚜렷하다. 역내 경제적 연계와 생산력 발전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식민지배와 제국주의적 침탈이 초래한 구조적 왜곡, 계급적 수탈, 민중의 인적·물적 피해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상대적으로 탈색될 위험을 내포한다. 경제적 합리성과 네트워크의 형성을 중심에 두는 접근법은 식민지 근대화론의 경제적 환원주의라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결론적으로 본서는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역동성을 거시적 관계망 속에서 밝혀낸 기념비적 시도이지만, 구조적 폭력과 착취의 역사성을 경제사적 효율성 분석과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을 여전히 남겨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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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代東アジア史像の再構成 — 동아시아 자본주의는 서구의 ‘늦은 모방’이었는가?>

나카무라 사토루(中村哲), 사쿠라이쇼텐(桜井書店), 2000

나카무라 사토루(中村哲, 1931–)의 <近代東アジア史像の再構成>(근대 동아시아 역사상의 재구성)은 제목 그대로 근대 동아시아를 바라보는 역사적 틀 자체를 다시 만들려는 책이다. 저자는 원래 막말·메이지유신기의 일본 경제사를 연구했으나, 1970년대 이후 일본 제국주의와 식민지 조선 경제, 더 나아가 동아시아 자본주의 전체로 관심을 확대했다. 이 책은 1992~1998년에 발표한 네 편의 논문에 2000년에 새로 쓴 제1장을 더한 것으로, 213쪽의 비교적 짧은 책이지만 문제의식은 상당히 크다.

핵심 질문은 간단하다.

“동아시아 자본주의는 서유럽 자본주의를 뒤늦게 따라간 것인가, 아니면 그 자체의 역사적 조건에서 형성된 하나의 독자적 자본주의 유형인가?”

나카무라의 대답은 후자이다.

1. 유럽중심주의와 일국사를 동시에 넘어선다

근대화에 관한 전통적인 설명은 영국을 출발점으로 삼아 산업혁명→자본주의→근대국가라는 서구의 경로를 표준으로 설정하고, 일본·중국·한국이 이 길을 얼마나 빨리 또는 늦게 따라갔는지를 묻는 경우가 많았다. 나카무라는 이런 접근 자체가 잘못된 질문일 수 있다고 본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일본·조선·중국을 각각 고립된 국민경제로 보는 것도 아니다. 19세기 후반 이후 이 지역에서는 무역, 화폐, 자본, 기술, 노동력, 식민지 지배가 서로 얽히면서 하나의 동아시아 경제권이 형성되었다. 따라서 일본 자본주의의 발전을 일본 국내에서만 설명할 수도 없고, 조선·중국의 근대화를 일본과의 관계를 제외하고 설명할 수도 없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당시 새롭게 등장하던 동아시아 경제사 연구와 연결된다. 즉 동아시아를 하나의 상호연결된 지역으로 보고, 전전과 전후를 단절시키지 않으며, 일본과 주변 아시아 경제의 경쟁뿐 아니라 상호의존 관계를 함께 보려는 흐름이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나카무라 자신에게도 있다. 그는 이전에는 ‘저개발국→중진자본주의→선진자본주의’ 같은 발전단계론을 제시한 적이 있었지만, 이 책에서는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자본주의’를 서구 자본주의와 다른 하나의 역사적 유형으로 파악하려 한다. 동시대의 경제사학자 이시이 간지(石井寛治)도 이것을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전환으로 평가했다.

2. 제1장 — 동아시아의 ‘소농사회’에서 출발한다

제1장은 책 전체의 이론적 서론이다.

나카무라는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 등의 연구를 받아들여 일본·조선·중국을 포함하는 동북아시아에서 소농경영이 매우 발달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소농사회는 서유럽과 달랐다.

서유럽에서는 근대화 과정에서 농업과 공업의 분리, 생산의 전문화가 진행되는 경향이 강했다. 반면 동아시아 농촌에서는 농민이 농사만 짓지 않았다. 농업과 방직·수공업·소규모 상업 등을 동시에 수행하는 ‘겸업·복합경영’이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이 차이가 훗날 산업화의 형태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나카무라는 본다.

일본에서는 서구로부터 도입된 근대적 대공업과 전통적 기반에서 성장한 중소·영세공업이 함께 존재하는 ‘복선형 산업화’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주장이다. 일본의 산업화를 흔히 철도, 제철, 조선, 대기업 등 국가가 주도한 근대산업 중심으로 설명하지만, 나카무라는 그 밑에 존재했던 수많은 농촌공업과 중소기업을 일본 자본주의의 본질적 일부로 본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화폐와 시장이다. 그는 구로다 아키노부(黒田明伸)의 연구를 받아들여 동아시아에서는 동전이 사용되는 지역시장과 은을 사용하는 장거리시장이 서로 다른 층위로 존재했다고 본다. 동시에 스기하라 가오루(杉原薫)의 ‘아시아간 무역’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그것만으로는 1930년대 일본 제국경제권의 급속한 팽창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즉 시장만 보아서는 안 되고, 제국과 권력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3. 제2장 — 일본 제국주의는 ‘수탈’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제2장은 이 책에서 가장 논쟁적인 부분이다.

나카무라는 양차대전 사이 일본의 놀라운 공업발전이 동아시아를 지배하고 수탈한 측면을 가진 동시에 주변 지역의 자본주의적 변화를 촉진한 측면도 있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식민지 조선에서 공업화가 진행되고 조선인 자본 역시 일정하게 성장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중국에서도 자본주의적 경제관계가 확대되었으며, 그러한 경제적 변화를 국민정부를 비롯한 새로운 정치세력의 성장과 연결시킨다. 나카무라는 이러한 전간기의 변화가 훗날 동아시아의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을 가능하게 만든 역사적 전제의 하나였다고 본다.

여기서 매우 조심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식민지기에 공업화가 있었다”는 명제와 “식민지배가 조선을 발전시켰다”는 명제는 동일하지 않다.

식민지하에서도 철도·공장·금융·도시·시장·기업이 성장할 수 있다. 동시에 그 산업화가 누구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졌는가, 소유권과 이익이 누구에게 돌아갔는가, 조선인이 어떤 정치적 권리를 가졌는가, 지역 간·계층 간 불균형은 어떠했는가는 별도의 문제이다.

나카무라의 공헌은 식민지 경제를 ‘오직 수탈’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하지 않고 실제 경제구조의 변화를 분석 대상으로 끌어들였다는 데 있다. 그러나 반대로 경제적 ‘발전’이라는 개념이 식민지배의 강제성과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희석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 긴장은 오늘날에도 식민지 경제사를 읽을 때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4. 제3장 — 일본 자본주의의 숨은 주역, 중소기업

이 장은 이 책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부분이다.

일본 산업화의 특징은 대기업만이 아니라 방대한 중소·영세기업의 발전이었다. 나카무라는 이들이 서구 기술을 그대로 복제하지 않고 단순화·개조하여 재래산업에 적용했다고 본다. 또한 농촌에서 공급되는 값싼 노동력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그 결과 일본은 서구식 대공업만 성장한 것이 아니라 재래산업이 근대적 생산기술을 흡수하면서 함께 성장하는 독특한 산업구조를 형성했다.

그러나 여기에 동아시아적 모순이 존재한다.

일본의 중소공업이 성장하면서 19세기 말부터 1910년대에 걸쳐 조선과 중국 등 주변 아시아가 일본 상품의 시장으로 편입되었다. 일본의 산업화가 주변지역의 재래산업을 압박하거나 쇠퇴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 국내에서는 산업발전이었지만 동아시아 전체에서는 불균등한 발전이었다.

따라서 일본의 ‘경제기적’은 일본의 국민적 특성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그것은 동아시아 시장이라는 공간과 함께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지점에서 이 책의 ‘일국사를 넘어서자’는 주장이 가장 구체적인 의미를 갖는다.

5. 제4장 — ‘동아시아 자본주의’라는 별도의 유형

제4장은 책의 이론적 중심이다.

나카무라는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을 단순히 “서양을 따라잡았다”고 설명해서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19세기 유럽 자본주의와 다른 새로운 자본주의 유형으로 이론화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가 중요하게 보는 요소는 소농경제의 발전, 토지개혁, 중소·영세기업의 큰 비중, 도시 비공식부문의 형성과 축소, 외국자본을 통제할 수 있는 국가의 능력 등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본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일본을 ‘먼저 서구화한 나라’로 놓고 한국·대만·중국이 그것을 뒤따랐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일본 역시 애초부터 동아시아 자본주의라는 더 큰 유형의 한 변형이었다고 본다.

이 관점은 일본의 특수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일본특수론’과 일본을 단순히 서양화에 성공한 모범생으로 보는 근대화론을 동시에 비판한다.

6. 제5장 — 20세기 자본주의에서 21세기 자본주의로

마지막 장은 경제사에서 미래 전망으로 이동한다.

나카무라는 레닌의 <제국주의론>을 수정한다. 제1차 세계대전 무렵의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이자 사회주의로 넘어가는 직접적인 전야로 보기보다는, 19세기 자본주의에서 ‘20세기 자본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로 이해한다.

그에게 20세기 자본주의는 사회주의 체제, 복지국가, 국가개입, 조직노동 등이 공존했던 체제였다. 그런데 사회주의권이 붕괴하고 복지국가가 위기에 놓인 1990년대 이후 세계는 다시 ‘21세기 자본주의’로 이행하고 있다고 본다.

그는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확대가 자연환경을 파괴할 위험을 경고하는 동시에, 자본주의 내부에서 다른 사회로 넘어갈 가능성도 찾는다. 노동의 인간화, 제조업의 지식집약화, 비영리조직의 확대 등이 그런 변화의 징후라고 보았다.

2000년에 쓰인 전망으로서는 흥미롭다.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디지털 플랫폼, 금융화, 글로벌 가치사슬, 중국의 부상 같은 요소를 충분히 예견하지 못했다. 특히 비영리조직이나 ‘노동의 인간화’가 21세기 자본주의의 중심적 변화가 될 것이라는 기대는 다소 낙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환경적 한계와 자본주의의 세계적 확대가 동시에 진행될 것이라는 문제의식은 오히려 이후 더욱 중요해졌다.

평론 — 이 책의 가장 큰 공헌과 세 가지 한계

이 책의 최대 공헌은 ‘동아시아는 왜 서구처럼 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왜 동아시아가 서구와 다른 방식으로 자본주의화되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었다는 데 있다.

질문의 변화가 중요하다.

전자는 서구를 기준으로 놓는다. 후자는 복수의 자본주의 발전경로를 인정한다.

나카무라는 마르크스주의 경제사학자이면서도 마르크스나 레닌의 정식을 그대로 반복하지 않는다. 실제 동아시아의 역사에 맞지 않는다면 이론을 수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시이 간지도 나카무라가 기존 마르크스주의의 도식을 벗어나 ‘중진자본주의’, ‘동아시아 자본주의’ 같은 새로운 개념을 만들려 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세 가지 문제도 있다.

첫째, ‘동아시아 자본주의’를 하나의 유형으로 묶는 순간 일본·중국·조선·대만 사이의 엄청난 차이가 약화될 위험이 있다. 소농사회와 중소기업이라는 공통점만으로 이 지역을 하나의 자본주의 유형으로 묶을 수 있는지는 계속 검토해야 한다.

둘째, 경제적 상호작용과 제국주의적 지배의 관계가 충분히 정리되지 않는다. 일본의 산업화가 조선·중국의 시장 확대와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은 중요한 통찰이지만, ‘상호의존’이라는 말이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비대칭성을 가려서는 안 된다.

셋째, ‘동아시아의 고유한 역사조건’을 너무 오래 지속되는 문화적·구조적 특징으로 볼 위험이 있다. 이시이 간지도 이 점을 비판하면서, 자본주의의 여러 유형은 처음부터 서로 다른 고정된 길을 걸었다기보다 특정한 세계사적·구조적 조건 속에서 역사적으로 분기했다고 보는 편이 낫다고 지적한다.

이 비판은 상당히 중요하다. ‘동아시아형’을 강조하다 보면 역설적으로 새로운 동아시아 특수론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종합 평가

<近代東アジア史像の再構成>은 완성된 ‘동아시아 자본주의 이론’을 제시한 책이라기보다 그것을 만들기 위한 중간 결산에 가깝다. 실제로 나카무라는 이후 <東アジア資本主義形成史>라는 연구를 계속하여 2005년 <東アジア近代経済の形成と発展>, 2006년 <1930年代の東アジア経済>, 2007년 <近代東アジア経済の史的構造>로 연구를 확대했다.

이 책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의 자본주의는 서양 자본주의의 동아시아판이 아니며, 한국·중국 역시 일본을 뒤따른 후발주자에 불과하지 않다. 이들은 소농경제, 재래산업, 중소기업, 국가, 역내무역, 식민지와 제국이라는 상호관계 속에서 하나의 동아시아적 자본주의 세계를 만들어 왔다.”

그래서 이 책의 진정한 중요성은 일본경제사에 있지 않고 ‘동아시아를 하나의 관계사로 보는 방법’에 있다.

특히 조선 근대사를 이해할 때도 유용하다. 조선을 ‘일본에 의해 근대화된 식민지’라고 보는 관점과 ‘식민지 수탈 때문에 경제발전이 전혀 불가능했다’고 보는 관점 사이에서, 나카무라는 제3의 질문을 제시한다. 즉 식민지 지배라는 비대칭적 권력구조 속에서도 자본주의적 산업화와 조선인 경제주체의 성장이 어떻게 동시에 발생했는지를 묻는다. 중요한 것은 그 변화를 식민지배의 공로나 정당성으로 환원하지 않고, 누가 통제하고 누가 이익을 얻었으며 어떤 구조가 해방 이후까지 이어졌는지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2000년에 출간되었지만, 지금도 <일본 자본주의–식민지 조선–중국 경제–전후 동아시아 발전>을 하나의 장기적 구조 속에서 읽기 위한 좋은 출발점이다. 그리고 최근 읽으신 <동아시아 자본주의―마르크스주의적 접근>이나 <동아시아 마르크스주의―과거·현재·미래>와 연결해서 읽으면 더욱 흥미롭다. 나카무라가 1990년대에 제기했던 질문, 즉 “마르크스주의가 유럽의 역사경험을 보편적 경로로 간주하지 않고 동아시아의 독자적 역사경로를 어떻게 이론화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그 후 20여 년 동안 어떻게 계승·수정되었는지를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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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자 김구 | 정안기 |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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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자 김구
정안기 (지은이)미래사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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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김구는 과연 자신의 시대와 역사를 책임질 만한 ‘소명의 정치가’였는가, 아니면 권력욕에 사로잡힌 ‘권력정치의 화신’이었는가. 그동안 김구는 진정한 민족주의자, 민족통일의 상징, 겨레의 큰 스승으로 거족적인 존숭을 받으며 불가침의 신성을 간직한 역사인(歷史人)으로 자리매김해왔다.

그러나 그는 과연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 헌신할 만한 정치적 자질과 윤리를 갖춘 인물이었는가. 자신의 신념이 초래할 결과를 감당할 만한 정치적 이성과 인격을 갖춘 지도자였는가. 그의 남북협상은 과연 민족통일의 대의를 실천한 고뇌에 찬 결단이자 위대한 발걸음이었는가.

이 연구는 막스 베버의 ‘소명의 정치론’을 이론틀로 삼아 김구의 남북협상을 재구성·재평가한다. 이른바 ‘베버 프레임’은 ‘통일의 화신 김구’ 신화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함께 그의 정치적 선택과 행위를 합리적으로 평가하는 논의틀을 제공한다.


목차


책머리에

프롤로그
소명으로서의 정치
남북협상 전후사의 재구성
김구 남북협상의 패러독스
기존 연구의 한계와 재해석
연구의 대상·관점·방법

제1부 전사前史

1. 미·소공위의 동상이몽과 권력정치
모스크바협정과 해방정국의 균열
예비회담에서 드러난 미·소의 동상이몽
제1차 미·소공위의 대립과 결렬
협상 재개와 심화되는 상호 불신
제2차 미·소공위의 예견된 파국
반탁정치와 강대국 협력의 붕괴
한국 문제의 UN 이관과 국제화
UN 소총회 결정과 통일 구상의 좌절
갈무리
2. 기획·연출의 남북연석회의
미·소공위 결렬의 충격과 파장
단정과 통일을 둘러싼 이중전략
대남공작과 정치세력 포섭
남한 정치세력 접촉과 협상 프레임
김구 포섭과 정치적 정당성 확보
남북연석회의 기획과 정치적 설계
남북연석회의 실행과 연출된 정치 공간
남북연석회의 성격과 권력정치적 함의
갈무리
3. 권력정치로서의 남북협상
미·소공위기 김구의 정치 노선
이승만과의 정치적 바게닝
장덕수 암살의 정치적 분기
남북협상을 둘러싼 권력적 셈법
‘2월 서신’과 협상 명분의 형성
‘3월 서신’의 정치적 정략성
‘백지환원’의 정치적 함의
두 정객의 북행과 동상이몽
갈무리

제2부 본사本史

4. 준비된 잔치의 슬픈 춤사위
무책과 상책의 북행길
연출된 회의의 개막과 진행
형식적 참여와 공허한 축사
현실로 드러난 이승만의 경고
성과 없는 ‘4김 회담’의 실상
남북지도자협의회와 공동성명
김일성의 자신감과 정치적 과시
귀환·보고와 정치적 파장
갈무리
5. 남북연석회의의 ‘붉은 공문서’들
서신 정치와 남북협상의 개시
현실을 조직하는 붉은 언어들
형식화된 토론과 예정된 결론
찬양과 동원의 수사학
공산 통일의 선전·동원 텍스트
군중과 문서의 연출된 결합
붉은 공동성명서와 협상의 귀결
갈무리
6. 늙은 정객의 향수와 심리전
평양의 ‘마타 하리’ 안신호
영천암·송태산장 ― 기억의 정치학
만경대혁명자유가족학원 ― 감동의 연출
김일성 생가 ― 연출된 검박함
메이데이 행사 ― 전율의 무력시위
강량욱 목사 ― 관용의 정치 연출
대동강 쑥섬 ― 어죽 잔치의 속내
김일성 독대 ― 결정의 순간
갈무리

제3부 후사後史

7. ‘공화국의 이름 없는 꽃’ 성시백
대남공작의 대서사 〈붉은 단풍잎〉
베일에 싸인 성시백의 정체
사료에 비친 성시백의 실루엣
대남공작의 조직과 은밀한 활동
경교장에 스며든 붉은 그림자
해방공간의 임꺽정, 홍명희
공작망의 연결 고리, 안우생
성시백의 체포·심문 그리고 최후
갈무리
8. 공산통일을 향한 대폭주
방북 보고서와 폭주의 서막
5·10 총선 보이콧과 분쇄 전략
설계된 제안과 제2차 남북협상
연쇄적 파국과 협상의 후폭풍
‘김구·유어만 대화록’의 재해석
대한민국 정통성 부정과 인식 전환
UN의 정부 승인과 반(反)대한민국 캠페인
여순반란의 배후와 붉은 합작의 그림자
한독당의 분열·혼란과 좌경화
갈무리
9. 남북연석회의와 기억의 정치
정치적 오브제로 재구성된 김구
‘민족의 태양’ 김일성 서사의 형성
〈로동신문〉, 김구 서사의 재편
‘청사(靑史)’로 기록된 남북연석회의
역사화 매체와 서사의 제도화
영화 〈위대한 품〉과 시청각 정치
쑥섬과 기억의 물질화·공간화
남북협상의 상징화와 기념화
갈무리

에필로그
남북협상의 정치적 유산
가변과 불변의 정치노선
권력의지와 정치적 귀결
권력정치의 화신, 김구
원한과 저주의 정치학

부록
미주
참고 문헌
인명 색인
접기


책속에서


P. 6~7 그동안 김구는 한국적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신화화되어왔다. 그러나 이 연구는 그를 민족주의의 신화가 아니라 권력의 획득·분배·유지를 둘러싼 현실 정치의 행위자로 파악한다. 실제로 그는 일정기 ‘민족의 십자군’을 자처하는 급진적 테러리스트로 활동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상해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는 유토피언에서 단숨에 임시정부의 핵심 지도자로 부상했다. 1945년 환국 이후에는 임정 주석과 한독당 중앙집행위원장 직함을 내세워 우익 정계를 주도했으며, 해방정국에서 이승만에 맞설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정치지도자였다. 따라서 이 연구는 “세계적인 테러리스트”(1946년 11월 7일 김구를 인터뷰했던 〈시카고 선Chicago Sun〉wl 기자 마크 게인Mark Gayn은 저서에서 김구를 ‘세계적으로 유명한 암살자’이자 한국 우익을 대표하는 인물이라 소개했다. 마크 게인 지음·까치편집부 옮김[1986], 『해발과 미군정』, 까치, 115~116쪽)이자 강렬한 민족주의자로 인식되어온 김구의 정치활동을 실증적으로 재구성·재해석·재평가하고자 한다.
_ 「책머리에」 중에서 접기
P. 21~22 남북협상 이후 김구는 북로당·남로당과 연대해 ‘남조선단독선거반대투쟁전국위원회’를 결성하고 5·10 총선 분쇄 투쟁에 나섰다. 그는 ‘공산당 제5열’이라는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소 양군 철수, 총선 무효, 남북 총선, 통일정부 수립 등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반정부 캠페인에 몰두했다. 아울러 화평통일이라는 언사로 연공합작의 기만성을 은폐하고, UN의 정부 승인 저지와 여순반란 사주·합작을 도모했다. 또한 “남한에 정부가 서더라도 곧 소련에 의해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이라는 발언에서 드러나듯, 그에게 대한민국은 ‘어차피 적화될 나라’였다. 송남헌 역시 “대한민국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 보았다”고 회고했다. 결국 남북협상은 단순한 협상이 아니라 연공합작·공산통일을 향한 정치적 출발점이었다.
1980년대 남한에서 발생한 정치적 급변 사태 및 종북주사파의 등장과 맞물려 김일성은 1986년 남북연석회의의 역사화·상징화·물질화에 착수했다. 특히 1948년 5월 남측 대표들과 연공합작의 ‘혁명적 의리’를 확인했던 대동강 쑥섬을 혁명사적지로 조성하고, 그곳에 높이 세운 ‘통일선전탑’에는 ‘김구’라는 두 글자를 새겨 넣었다. 이러한 서사화 작업은 김일성을 현명하고 자애로운 민족의 영도자로 부각시킨 반면, 김구는 추레하고 교양 없는 “망령 든 늙은이”로 격하시켰다. 북한에서 김구는 체제의 정통성과 지도자 우상화를 위한 정치적 미장센이자 희화화된 인물이다. 요컨대 김구의 남북협상은 김일성 우상화의 정치적 무대이자 대남공작의 역사적 플랫폼으로 기능했다. 다시 말해 남한 우익의 상징적 지도자 김구를 정치적으로 연공합작 노선으로 유인·포섭·재배치하는 데 성공한 북한 통일전선전술의 대표적 사례였다.
_ 「프롤로그」 중에서 접기
P. 275~276 1948년 4월 남북협상은 김구의 역사적 결단과 민족적 열망이 빚어낸 사건으로 기억되어왔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북로당 남한 총책 성시백, 이른바 ‘권위 있는 선’이 존재했다. 그는 중간파를 포섭하고 인맥 네트워크를 확장하며 협상을 공론화했다. 또한 김구의 측근 네트워크를 매개로 그를 ‘연공합작’으로 돌려세웠다. 평양에서 감정의 정치가 인식과 판단을 흔들었다면, 성시백은 배후에서 이를 설계·조정하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암약했다. 성시백은 ‘이름 없는 꽃’이라는 혁명 서사의 영웅이 아니라 사전에 기획된 정치공작의 상징이었다. 결국 남북협상은 단순한 회담이 아니라 감정과 공작이 맞물린 정치 과정이었으며, 성시백은 이를 움직인 ‘붉은 그림자’였다.
_ 「7. ‘공화국의 이름 없는 꽃’ 성시백」 중에서 접기
P. 370~371 김구의 강렬한 권력의지는 개인적 결핍과 원념怨念이 변형된 보상심리의 산물이었다. 그는 황해도 해주에서 군역전軍役田을 붙여 살던 “완전히 패를 찬 상놈”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나 곰보 얼굴에 왜소한 체구, 남다른 먹성 그리고 “상놈 서당” 수준의 빈약한 교육 환경에서 성장했다. 역내 토반土班들의 천대와 멸시, 그리고 가혹한 가정폭력은 열등감과 모멸감을 내면화시켰고, 이러한 뒤틀린 정동은 점차 외부를 향한 적대와 복수의 충동으로 전환되었다. 그 폭발적 분출은 1896년 “치하포 사건”에서 표면화되었다. 이는 억눌린 감정의 외벌화外伐化를 알리는 신호탄이었으며, 이후 그의 권력의지는 존재론적 열등감을 극복하고 자기 정체성을 입증하려는 보상심리로 작동했다.
그는 유년기 이래 “상놈의 껍질을 벗고 월등한 양반이 되겠다”고 갈망했다. 스스로 ‘영웅심과 공명심 속에 오랜 원한을 갚고자 했다’고 토로했듯, 그의 내면에는 신분적 모멸과 열등감이 깊이 각인돼 있었다. 동학 입교 역시 신분적 굴레를 벗고 위세와 권위를 획득하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는 모멸과 수치의 기억을 복수의 에너지로 전환했고, 이는 권력의지의 원천으로 작동했다. 상해임정의 문지기에서 주석에 이르기까지의 정치적 상승은 존재론적 열등감을 보상하려는 자기 증명의 과정이었다. 임정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하고 권위를 제도화하는 상징적 공간이었고, 임정봉대론 역시 자기 정체성의 연장이었다. 1945년 환국 후 경교장에서 연출한 ‘제왕의 귀환’도 바로 이러한 보상심리의 정치적 표출이었다.
_ 「에필로그」 중에서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정안기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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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대학(京都大學)에서 일본경제사 연구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학술진흥재단(JSPS) 특별연구원,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서울대학교 객원연구원을 거쳐 현재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과 한국연구재단(NRF) 인문사회학술연구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테러리스트 김구』(미래사, 2024), 『충성과 반역』(조갑제닷컴, 2020), 공저로는 『김창룡 재조명』(이승만북스, 2026),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미래사, 2020), 『반일 종족주의』(미래사, 2019) 등이 있다.

최근작 : <반역자 김구>,<김창룡의 재조명>,<테러리스트 김구> … 총 14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해체돼야 할 ‘민족통일의 화신 김구 신화’

‘테러리스트 김구’를 정조준한 학자, 이번엔 ‘반역자 김구’로 돌아오다
강렬한 민족주의자와 국가 반역자, 환상적 부조화에 대한 비판적 성찰

2026년은 백범 김구 탄생 150주년을 맞는 해다. 유네스코(UNESCO)는 겨레의 큰 스승이자 독립운동가인 그의 업적을 기리며 ’김구 탄생 150주년 기념해(150th anniversary of the birth of Kim Koo)’로 공식 지정했다. 유네스코는 “백범 김구 선생은 해방 이후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아닌 ‘높은 문화의 힘’을 통해 인류 전체에 행복을 주는 ‘문화국가’를 꿈꾸었다”며 “‘평화의 방벽을 인간의 마음속에 세워야 한다’는 유네스코 헌장 정신은 인류 불행 원인을 ‘인의(仁義)와 자비, 사랑 부족’으로 보고 문화를 통해 이를 극복하고자 했던 김구 선생의 철학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이번 기념해 지정은 그의 선구적인 평화 사상과 문화다양성 존중의 가치를 국제사회가 공인한 결과”라고 취지를 밝혔다.

이처럼 대한민국은 김구라는 상징을 반복 호출해온 기억의 공간이다. 사후 7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김구는 여전히 한국인을 훈육하는 ‘민족의 스승’으로 군림하고 있다. 해마다 그의 혼백은 민족의 정령으로 소환되며, 정치적 판단보다 감정의 언어로 해석돼 불가침의 신성으로 재현된다.
1948년 4월 남북협상 참여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단독정부는 안 된다”는 선언은 김구를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이승만보다 더 높은 도덕적 상징으로 끌어올렸다. 그 결과 김구는 이성보다 감정으로 민족주의를 실천한 민족의 거성, 평화와 통일의 십자가를 짊어진 민족의 메시아로 신격화되었다.
그러나 김구 신화에는 ‘붉은 균열’이 존재한다. 대·한·민·국·반·역·자.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김구 암살자로 두고두고 비난받는 안두희의 입을 통해 드러난다. 안두희는 김구와 그 주변을 공산당과 협력하는 세력으로 인식했고, “나에 대한 반동은 국가와 민족에 대한 반역”이라는 발언을 통해 김구를 ‘대한민국 반동’으로 확신했으며, “영감과 나라를 바꾸자”는 심정으로 그 판단을 행동으로 옮겼다고 밝혔다.
2024년 『테러리스트 김구』를 통해 시대의 금기를 건드리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저자 정안기가 2년 만에 『반역자 김구』를 통해 ‘국민 영웅’으로 비춰지고 있는 백범 김구에 대한 또 하나의 탈신화화에 도전한다. 2년 전 ‘테러리스트와 국부라는 환상적 부조화에 대한 비판’을 시도했던 저자는, 이번에는 ‘강렬한 민족주의자와 대한민국 반역자라는 환상적 부조화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 나선다.
저자는 특히 김구의 귀국 이후 이루어진 ‘남북협상’을 단일 사건이 아니라 그 전후의 정치적 맥락에서 재구성하고, 막스 베버의 ‘소명의 정치론’을 적용해 그의 정치적 자질과 윤리를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이 책은 남북협상 자체뿐 아니라 전사(前史)와 후사(後史)까지 종합적으로 검토한 후 결론을 내린다.
그동안 김구의 행보는 통일 지향으로도, 대한민국 건국 부정으로도 해석되어왔지만 두 관점을 통합적으로 분석한 연구는 드물었고, 감정에 치우친 접근은 평가의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이 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해 그의 정치적 선택과 역사적 귀결을 ‘도덕과 신화의 언어’에서 ‘역사와 정치의 영역’으로 되돌려놓고자 한다.

남북협상에 나선 ‘정치가로서의 김구’에 대한 평가 기준은 막스 베버(Max Weber)가 설파한 ‘소명으로서의 정치’다. 베버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이는 소명으로서의 정치가에 대한 자질로 열정(Passion)과 책임감(Responsibility), 균형감각(Proportion)을 제시한 바 있다. 요컨대 정치가는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이성을 동시에 구현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 베버의 통찰이다. 그에게 정치가는 선의를 좇는 도덕가가 아니라 주어진 현실에서 최선의 결과를 빚어내는 장인이었다. 그가 말한 ‘소명’은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내면의 소리에 따라 현실의 악마와 맞서는 정신적 부름(Spiritual calling)’이었고, 정치는 신념과 현실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었다.

이 책은 김구의 남북협상을 이념적 찬양이나 일방적 비판에 머물렀던 기존의 감성적·이념적 서사 대신, ‘베버 프레임’으로 다층적·복합적·가치중립적 관점에서 실증 분석한다. 이는 정치적 선택의 윤리성과 현실성 사이에서 동태적 균형을 모색하는 정치가의 자기 성찰을 조명한다는 점에서 현대적 시사점을 지닌다.
혼돈으로 가득했지만 진공 상태였던 해방 공간에서, 미국은 동유럽의 사례를 교훈 삼아 신탁통치를 통해 한국인들의 근본적 자유를 보장하고 통일독립과 자유민주주의를 이식하는 동시에 소련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주도권을 확보하려 했다. 하지만 김구의 반공·반탁은 소련에 대한 미국의 협상 공간을 제약하고 교섭력 약화를 초래했다.
김구의 반공·반탁은 미국의 옆구리를 파고드는 ‘가장 뼈아픈 비수’였고, 미·소공위라는 ‘자주독립의 사다리’를 걷어찬 ‘기회주의적 정치가’의 표본이었다. 김구의 반공·반탁운동은 해방 직후 임시정부가 유일한 정권 수임 기관이 돼야 한다는 임정봉대 노선과 결합된 권력정치의 전형이었다. 분단은 미·소 대립이라는 국제정치 산물을 넘어 김구의 권력정치와 상호작용한 결과였다.
김구의 남북협상 성립 과정에서 드러난 정치적 탄력성 역시 이상과 신념의 일관성이라기보다 정치적 주도권을 둘러싼 권력투쟁 결과였다. 즉, ‘소명으로서의 정치’라기보다 정략과 생존이 교차하는 권력정치의 전형에 가까웠다. 그의 남북협상은 민족주의적 결단이라기보다 북로당의 대남전략과 임정봉대의 권력 구상이 복합적으로 맞물린 산물이었다.

김구의 남북연석회의 참석 자체부터 ‘통일의 이상’에 따른 주도적 결단이라기보다는 주도권을 상실한 종북적 대응, 곧 ‘정치적 들러리의 선택’에 가까웠다. 1947년 후반 이후 정치적 고립과 권력 기반이 흔들리는 국면에서 남북협상을 통해 새로운 정치적 공간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협상 과정에서도 구체적 전략도 복안도 없이 민족 정서에 의존해 정치적 책임과 준비를 결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더구나 당초 계획과 달리 김구의 요청으로 회의 규모를 확대해 협상이라는 본래 목적보다 정치적 시위성과 이벤트성을 강화한 형태로 변질되었다. 남측 대표단을 ‘준비된 잔치의 들러리’로 만든 구조적 책임 역시 김구에게 있었다.
이는 최근 공개된 소련공산당 기밀문서와 레베제프 일기 등을 종합하면 더욱 뚜렷해진다. 당시 남북연석회의는 김구·김규식과 김일성·북로당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소련군정이 배후에서 치밀하게 기획·연출·감독한 정치적 이벤트에 불과했다.
소련은 김구의 참석을 유도하기 위해 회의 형식과 일정 변경, 돌발 상황에 대비한 비상대책까지 마련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 김일성·북로당은 소련군정의 기획·연출을 집행하는 정치적 에이전트에 머물렀다. 연석회의는 외세의 통제 아래 연출된 정치 무대였다. 이 ‘이벤트’에 가장 필요했던 인물이 김구였고, 소련군정은 김구를 평양으로 ‘유인’하기 위해 치밀한 공작을 펼쳤다.
정치 이벤트에서 제대로 된 결과물이 나올 리 만무했다. 1948년 4월의 남북연석회의는 통일 협상이라기보다 ‘붉은 공문서’를 생산·공인한 회의였다. 이때 채택된 결정서·격문·요청서와 남북지도자협의회 공동성명은 사전에 설계된 정치노선을 문서화한 결과물이었다. 이 과정에서 김구는 협상의 주체라기보다 ‘붉은 공문서’를 보증하는 공증인에 가까웠다. 남북연석회의에서 발표한 남한 단선·단정 반대, UN한위 철거, 미·소 양군 철수, 민주주의 통일정부 수립 등 이른바 ‘4원칙’은 형식적으로는 민족자주와 통일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소련의 대남 적화노선을 정당화하는 문서적 장치였다.
소련과 북한은 김구를 ‘구워삶기’ 위해 그가 과거 정혼했던 도산 안창호의 여동생 안신호에게 시중을 들게 하고, 김구가 살며 인연을 맺었던 곳들을 미리 정비해놓는 치밀함을 보였다. 김일성은 연석회의에 앞서 프락치를 통해 김구의 식성까지 상세히 파악한 뒤 매끼 녹두묵과 김을 식탁에 올리게 했다.
김구는 일부러 검박하게 꾸며놓은 김일성 생가와 비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좋은 대우를 받는 것처럼 연출한 혁명자유가족학원 등이 있는 ‘혁명의 성지’ 만경대를 방문하고, 자신의 처지와 비교하며 감동을 받는다. 5월 1일 참관했던 메이데이 군사 퍼레이드는 호전적이고 위협적인 분위기로 마무리하며 무력시위를 펼쳤다. 그럼에도 김구는 돌아온 뒤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부정하면서 미군 철수를 줄기차게 주장하기도 했다.
이 책은 특히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메이데이 다음 날 ‘쑥섬 야유회’의 전모를 공개함으로써 남북연석회의라는 거창한 슬로건에 가려진 북한의 속내를 정확히 짚는다. 이 모임은 ‘김구’라는 정치적 대어를 ‘연공합작’으로 엮어내려는 ‘정치적 어죽 잔치’에 가까웠고, 친선이라는 형식과 달리 정치적 포섭을 지향한 정략적 성격을 띠었다.
5월 3일 오후 김구는 김일성과 단독면담을 갖고 대남송전·통수, 조만식 석방·월남, 한독당원 석방, 정치적 피난처 제공 등을 논의했다. 김일성은 한독당원 석방 요구에 대해 테러분자라며 거부했는데, 이는 김구·한독당이 1946년 이래 북한 지도부를 겨냥한 테러 공작과 연계돼 있음을 시사한다. 김구가 정치적 망명과 함께 안창호의 고향 인근 과수원 제공 및 집필 지원을 요구하는 등 단독면담은 단순한 의견 교환을 넘어 정치적 선택지를 재구성하는 과정이었고, 김일성의 치밀한 포섭 전략이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음을 보여준다.

후사에서는 일제시대와 그 이후까지 각종 암살과 공작을 펼쳤던 김구를 향한 북한의 특별공작 과정과 근거, 이유 등을 분석한다. 김일성은 대표성과 정통성도 없는 임정봉대의 제도화를 위해 암살과 폭력을 주저하지 않았던 김구를 남한 정계의 취약한 고리로 인식했다. 그런 가운데 추진된 김구의 남북협상은 결국 ‘통일을 향한 마지막 몸부림’이기보다는 소련의 구상과 북로당의 정략이 결합된 정치적 이벤트에 철저히 이용당한 꼴이 되었다. 김구의 평양행은 미국과 이승만에게 타격을 주었고, 김일성은 이익을 얻은 반면 김구는 그렇지 못했다.
북한에서 돌아온 김구는 유엔 결의에 의한 남한만의 5·10 단독선거를 반대하면서, 이승만과 미군정이 분단 정권 수립을 위해 실시한 선거이자 다수의 정치세력이 배제된 불공정한 엉터리 선거로 규정했다. 오히려 그와 한독당은 ‘통일정부’를 표방한 북한의 ‘인공’ 수립에 합력하며 간접적으로 참여했다.
김구는 심지어 당시 주한 중국 총영사였던 유어만(劉馭萬)과의 대화에서 “지금 잠시 남한에 정부가 수립되었다 하더라도 머지않아 소련에 의해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게 될 것”이라는 충격적 발언을 했다. 부통령 취임 권유에는 “어차피 적화될 나라의 부통령”이라며 거절하기도 했다. 이승만·이시영의 정·부통령 취임 후에도 김구는 이를 ‘반 조각 정부’로 규정해 정통성을 부정했다. 이후 김구와 한독당은 ‘공산당 제5열’이라는 비난과 함께 심각한 내분에 휘말렸다.
오랜 후인 1986년, 김일성의 특명으로 ‘김구의 남북협상’과 ‘김일성의 남북연석회의’ 역사화 작업이 추진됐다. 북한 선전 매체는 김일성을 탁월한 영도력과 포용력을 지닌 지도자로 부각하는 한편, 김구는 ‘감화와 전향’의 객체로 재구성했다. 여기서조차 김구의 남북협상은 북한 체제의 정통성과 김일성 우상화를 위한 정치적 오브제로 전락했다.
1980년대 후반 종북 주사파는 친일 미청산을 모든 사회악의 근원으로 규정하는 ‘해방전후사’ 인식을 바탕으로 이승만을 폄하하고 김구를 신화화하기 시작했다. ‘김구 띄우기와 이승만 깎아내리기’는 이들의 역사 공작 가운데 가장 성공한 사례였지만, ‘통일의 화신 김구’ 프레임은 김일성에 의해 창작된 서사에 가깝다. 결국 오늘날 유통되는 ‘김구 신화’는 김일성의 구상과 종북 주사파의 연출이 결합된 ‘역사 공작’의 산물이다.

김구는 과연 자신의 시대와 역사를 책임지기에 충분한 공덕심을 갖춘 ‘소명의 정치가’였는가, 아니면 권력욕에 사로잡힌 ‘권력정치의 화신’이었는가? 1949년 6월 비극적 종말로 막을 내린 김구 권력정치의 더 상세한 내막은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저자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20세기 ‘소명의 정치가(Politics as a vocation)’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독립 정신과 건국 운동을 재조명하고, 그 역사적 의의를 올바르게 평가하는 데 작은 디딤돌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저자는 특히 1,364개나 되는 미주를 통해 철저히 사료에 바탕한 주장으로 ‘김구 신화’를 해체하고 있다.
김구는 1946년 12월 말 모스크바협정 발표 직후부터 반공·반탁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좌우 대립을 격화시키고, 정치세력들의 균형을 뒤흔드는 ‘극우분열주의 정치’를 통해 미군정 통치 주권에 도전했다. 이 과정에서 정치적 폭력과 함께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 제거를 목표로 암살단을 북파하기도 했다.
1947년 6월의 반공·반탁 시위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 결렬과 분단 고착화의 결정적 분기점으로 작용했다. 김구의 선택은 자주독립이라는 명분과 달리 정치적 분열을 심화시켰다. 단독선거 및 단독정부 반대에서 찬성, 그리고 남북협상에 이르는 그의 잇따른 노선 변화는 미·소공위 결렬, 한국 문제 UN 이관, 단독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연쇄 반응을 촉발하는 핵심 변수로 작용했다.
김구에게 북한은 ‘도저히 합작할 수 없는 빙탄(氷炭)’ 같은 존재였지만,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아닌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면서 노선을 전환하고 남북협상에 나선다. 그러다 ‘북조선과 내통했다’는 의혹까지 받게 되지만, 결국 1948년 4월 평양으로 갔던 김구의 남북협상은 낭만적인 통일정부 수립과 민족주의적 이상의 실천이라기보다, 한국민주당 정치부장 장덕수 피살 사건의 여파로 남한 단독선거에서 김구의 한국독립당 승리 가능성이 줄어들면서 김일성과의 정략적 이해가 맞물린 권력정치의 산물이었다.
1948년 4월 김구의 평양행은 단순한 정치 일정이 아니라 감정과 기억을 겨냥한 정치심리전의 무대였다. 약 30년 만의 귀향길에서 그를 맞은 것은 논리와 토론이 아니라 인물·공간·장면이 치밀하게 배치된 감정의 연출이었다. 비공식 일정은 감동과 위압을 교차시키며 그의 향수와 기대, 불안과 동경을 자극했고, 이는 내면의 구조적 결핍과 맞물려 그의 인식과 판단을 뒤흔들었다. 결국 남북협상은 협상의 외피를 쓴 정치심리전이었고, 그 귀결은 남한 우익의 거두 김구를 반공에서 연공으로, 대한민국 건국 노선에서 반(反)대한민국 노선으로 돌려세우는 데 있었다.
실제로 남북협상에서 돌아온 김구는 북로당·남로당과 연대해 ‘남조선단독선거 반대투쟁전국위원회’를 결성하고 5·10 총선 분쇄 투쟁에 나섰다. 그는 ‘공산당 제5열’이라는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소 양군 철수, 총선 무효, 남북 총선, 통일정부 수립 등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반정부 캠페인에 몰두했다. 아울러 화평통일이라는 언사로 연공합작의 기만성을 은폐하고 UN의 정부 승인 저지와 여순반란 사주·합작을 도모했다.
이러한 급작스런 김구의 노선 전환은 ‘반공 민족주의자 김구’라는 기존 이미지와 충돌하며 ‘남북협상의 패러독스’를 낳게 된다. 기존 시각은 김구의 남북협상 참여를 우익진영·미군정·UN한위에 대한 실망과 민족주의적 소신의 결과로 보지만, 이후 행보를 종합하면 그의 전향은 단순한 민족주의의 변주가 아니라 정치적 현실주의에 따른 정략적 선택에 가깝다. ‘우익적 김구’와 ‘민족적 김구’ 사이의 단절과 긴장, 그 간극이야말로 남북협상의 본질을 드러낸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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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가치조차 없는 책
스노우 2026-08-15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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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기어스 반역의 루루슈 생각도 나고.. 반역자라는 어감이 그다지 나쁘게 안 느껴져서 네이밍이 아쉽네요. 테러리스트 김구가 좋은데.
하늘의아치 2026-08-13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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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가 어째서 킬구라 불리우는지 역겨운 그의 실체를 까발리는 명저입니다
신봉석 2026-09-20 공감 (0) 댓글 (0)

정의연이 보수 언론의 집중 공격을 받게 된 이유 박노자 2020

정의연이 보수 언론의 집중 공격을 받게 된 이유

정의연이 보수 언론의 집중 공격을 받게 된 이유
수정 2020-06-11 
‘위안부 운동을 말하다’ 전문가 릴레이 기고
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
운동의 분열 기다려온 이들 관심은
전시 성폭력 문제 해결 아닌 한미일 동맹

지난달27일 낮 서울 종로구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서 26일 별세한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추모하는 꽃과 영정이 놓여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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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말기에 자행된 전쟁 범죄 중에서도 ‘위안소’ 운영은 특별한 위치를 점한다. 난징 대학살이나 마닐라 대학살, 미국이나 영국 출신의 연합군 포로 학대 등이 대개 하나의 특정 국가나 몇 국가의 시민을 상대로 한 행위였다면, 식민지 내지 피점령 지대에서 저질러진 강제적 성착취 피해자들은 세계 각국의 여성들이다. 절반 정도는 조선인이라고 보는 게 통설이지만 그 밖에 중국인에서 네덜란드인과 오스트레일리아인까지, 그야말로 만국의 여성을 상대로 한 범죄행각이었다. 전시 성폭력 자체는 대부분의 전쟁에 수반되었지만, 근대적 군대가 조직적으로 관리하는 감금형 성착취는 아무래도 일본군 이외에는 근현대사에서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만큼 ‘위안부’ 피해자들의 역사는 특별하다.

동시에 ‘경제 대국’ 일본의 세계적 위상은 1990년대 이후 ‘위안부 문제’의 국제적 부각으로 ‘위축’됐다. ‘위안부 문제’가 세계 보편적인 이슈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일본을 지금도 안보·군사 차원에서 일종의 보호령처럼 ‘관리’하고 있는 미국의 하원마저도, 2007년에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를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을 정도였다. 일본은 여전히 유럽의 여론을 대단히 중시하는데, 유럽연합 의회도 같은 2007년에 비슷한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일본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로 인식되고 있는 미국, 유럽에서도 ‘전시 일본’이라고 한다면 가장 먼저 ‘성노예 문제’가 떠오를 정도로 ‘위안부 문제’가 1990년대 이후 젠더 감수성의 고양이라는 국제적 대세를 타고 대중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일본의 집권 우익으로서는 아주 크게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일본의 집권 우익을 이 정도로 긴장시킨 여러 운동단체 중에서 정대협·정의연의 국제적 활약은 가장 두드러졌다. 운동 초기에 정대협 활동가들이 ‘위안부’ 피해자들을 종종 ‘우리 민족의 순결한 딸’로, 민족주의적 방식으로 재현시키려 했을 때, 일본의 집권층은 크게 걱정할 것이 없었다. 이미 주류가 되어버린 일부 ‘페미니스트’ 학자들을 포함하여 제도권 지식인들을 동원해 여성들의 주체성을 ‘민족’에 종속시키고 ‘순결’을 강조하는 한국 민족주의를 적당히 비판하면 될 일이었다.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한 운동의 치명적 약점을 정확히 파헤쳐 공략하는 대응 전략이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한국 운동가들의 담론은 업그레이드되었다. 그들은 가부장적 어감이 강한 ‘민족의 딸’이 아닌 보편적 ‘여성’의 인권에 초점을 맞추었고 나아가 모든 일본군 피해자와의 국제 연대를 모색했다. 더 나아가서는 베트남에서의 한국군의 성폭력 문제 등 자국의 범죄를 문제로 삼을 만큼 탈민족주의적·보편주의적 면모를 보였다. 이 운동은 ‘위안부 문제’를 지금처럼 세계의 주요 인권 문제로 국제적으로 각인시키고 일본 우익을 수세로 몰아넣었다. ‘한국 민족주의’를 비판하기는 매우 쉽지만, 보편주의적·인권적 문제 제기에 대한 대응 전략을 그들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세계 각처 소녀상 건립을 집요하게 방해하면서 그저 때를 기다렸다. 이번처럼 운동의 내부 분열이 그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는 순간을 기다렸던 것이다. 결국 그 순간이 왔다. 물론 이 분열에 대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운동의 지도자들이 져야 마땅하다. 무엇보다 ‘의혹’에 대한 수사 결과부터 기다려야 하지만, ‘위안부’ 피해 당사자와의 동등한 소통의 부족부터 운동 사회 내에서의 패권적 태도, 조직의 미숙한 운영까지 이미 명확히 드러난 문제들이다. 앞으로는 이 문제들을 화두 삼아 시민단체들이 좀 더 민주적이고 평등하고 투명한 운동의 방식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과연 시민운동 지도자들의 정치권 입문이 운동에 도움이 될지도 집중적 성찰의 대상에 올라야 할 것이다. 운동의 명망가 한 사람이 제도권 정치인이 되는 순간, 운동 전체가 정쟁에 휘말릴 위험성이 생긴다. 차라리 외부에서 정치권을 압박해서 피해 당사자들의 인권 회복을 요구하는 것이 더 나은 운동 전략이었을 것이다.
운동가들은 이렇게 공격을 받을 만한 약점들을 드러냈지만, 지금의 공격들은 결코 ‘위안부’ 피해 당사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지금 정의연을 마녀사냥 하듯 공격하는 보수 언론들은 일본의 집권 우익과 이념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여러모로 가까운 만큼 전시 성폭력 문제 해결을 위해 신경을 써본 적이 없다.

그들도, 그들을 은근히 지원하는 일본 보수 언론들도 원하는 것은 눈엣가시였던 운동세력들이 제거되어 ‘과거 문제’에 대한 ‘부담’ 없이 중국이나 북한을 겨냥하는 한·미·일 동맹이 강화되는 것이다. 마녀사냥 주도 세력의 진정한 의도가 여성 인권이나 평화와 먼 만큼, 지금 집중포화를 당하는 운동세력들이 내부 문제를 안고 있다 해도 그들을 응원할 필요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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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일교 - 저를 빨갱이라 부르는 분들의 댓글이 참 거시기 합니다.

진일교 - 저를 빨갱이라 부르는 분들의 댓글이 참 거시기 합니다.| Facebook


진일교
20 hou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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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빨갱이라 부르는 분들의 댓글이 참 거시기 합니다. 
한 번 밝혔는데도 같은 말이 돌아옵니다. 이번에는 제시하시는 근거를 하나씩 짚겠습니다. 다만 그 전에 한 가지만 확인하고 시작하겠습니다.
공산주의는 감정이 아니라 정의(定義)가 있는 말입니다. 생산수단을 국가가 소유하고, 사유재산을 폐지하고, 한 정당이 권력을 독점하는 체제를 가리킵니다. 그러니 누군가를 공산주의자라 부르려면 그가 이 셋 중 무엇을 주장했는지를 대야 합니다. 그런데 제게 제시된 일곱 가지 근거 가운데 이 셋을 건드리는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역사 인식, 애도, 정당 지지, 복지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씩 보겠습니다.
첫째, 오일팔을 폭동이 아니라 민주화항쟁이라 부르니 빨갱이라는 주장입니다. 대한민국 법은 그것을 '민주화운동'이라 부릅니다. 1995년에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1997년에 국가기념일이 되었습니다. 같은 해 대법원은 신군부의 행위를 내란으로 판결했습니다. '항쟁'은 광주에서 오래 써 온 말이고, '민주화운동'은 법이 쓰는 말입니다. 둘 다 같은 사실을 가리킵니다. 시민이 국가폭력에 맞섰다는 사실입니다. 반대말은 '폭동'인데, 그것은 법정에서 이미 부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윤석열 전 대통령도 취임 후 세 해 연속 오월 기념식에 참석해 "오월 정신은 자유민주주의 헌법 정신 그 자체"라고 말했습니다. 이 기준이라면 그분도 빨갱이가 되어야 합니다. 헌법 전문에 넣는 문제도 이미 국회에 올라왔던 일입니다. 어느 정도 합의에 이르다가 정치적 이유로 미뤄지고 있을 뿐입니다. 
둘째, 세월호 배지 착용에 대해 시비를 거는 분들이 있습니다. 세월호 배지 착용은 주장이 아니라 애도입니다. 그 특별법은 여야 합의로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슬퍼하는 것이 이념이라면 그 표결에 참여한 국회 전체가 빨갱이입니다. 목사가 죽은 아이들을 기억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직무입니다. 저는 그 일을 부끄러워할 생각이 없습니다.
셋째, 민주당을 지지하고 특정 의원을 지지한다는 것입니다. 합법 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헌법이 보장한 권리입니다. 그리고 이 논법은 방향만 바꾸면 그대로 되돌아옵니다. 그렇다면 국민의힘 지지자는 모두 파시스트입니까. 그런 말을 제가 한다면 여러분은 정당하게 화를 내실 것입니다. 저도 같은 이유로 화를 냅니다. 덧붙이자면 기본소득도 공산주의가 아닙니다. 돈을 나눠 주고 시장에서 각자 쓰게 하는 제도이니, 생산수단은 그대로 사유(私有)로 남습니다. 석유 수익을 주민에게 나눠 주는 알래스카는 미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주에 속합니다. 찬반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그것은 재정 논쟁이지 체제 논쟁이 아닙니다.
넷째, 제가 친북친중이라는 것입니다. 제 글의 어떤 부분에서 그런 느낌을 받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북한이 수만금을 준다 해도 가서 살 곳이 못 된다고 썼고 지금도 같은 생각입니다. 한국은행 추정으로 북한의 1인당 국민총소득은 우리의 28분의 1입니다. 같은 민족이 다른 체제를 택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저는 그 숫자를 근거로 공산주의를 실패로 판정합니다. 친중이라는 말도 묻고 싶습니다. 제가 언제 중국 공산당을 옹호했습니까. 한중 수교는 1992년 노태우 정부가 했고, 중국은 지금 우리 반도체와 자동차의 최대 시장입니다. 중국과 거래하는 것이 친중이라면 대한민국 기업 전체가 친중입니다.
다섯째, 한국은 이미 공산화되었고 나는 변종 공산주의자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사실 하나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이 주장의 특징은 반증이 불가능하다는 데 있습니다. 자유가 없으면 공산화의 증거이고, 자유가 있으면 위장의 증거입니다. 어떤 사실을 가져와도 같은 결론으로 돌아오는 주장은 논증이 아니라 신념입니다. '변종'이라는 수식어가 필요하다는 것 자체가, 원래 정의에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고백입니다. 굳이 확인하자면 우리에게는 등기부등본이 있고 주식시장이 있고 상속이 있습니다. 정권은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산화된 나라에서는 이런 글을 쓴 사람이 다음 날 사라집니다. 저를 빨갱이라 부르는 분들이 아무 일 없이 그 말을 계속하고 계시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나라가 공산화되지 않았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여섯째, 제가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을 미화한다는 것입니다. 미화가 아니라 애도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 개인의 입장이 아니라 국가의 입장입니다. 제주 4·3 특별법은 1999년 말 국회를 통과해 2000년부터 시행되었고, 2003년 대통령이 공식 사과했으며, 2014년 박근혜 정부에서 국가추념일로 지정되었습니다. 여순사건 특별법은 2021년 6월 국회를 통과해 2022년 1월 시행되었고, 위원회 위원장은 국무총리입니다. 그러니 제가 미화를 하고 있다면 대한민국 정부가 먼저 했습니다. 다만 구분은 분명히 해 두겠습니다. 남로당 계열 군인들의 무장 반란을 옹호하는 것과, 그 진압 과정에서 재판도 없이 죽은 민간인을 기억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저는 앞의 것을 하지 않습니다. 뒤의 것만 합니다. 반란군에게 죽은 경찰과 주민도 똑같이 희생자입니다. 그리고 진압 과정에서 그보다 훨씬 많은 민간인이 죽었습니다. 이 두 사실 중 하나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미화하는 쪽은 그쪽입니다.
마지막으로, 부자 돈을 빼앗아 나눠 주는 포퓰리즘이 공산주의라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소유의 문제이고 재분배는 세율의 문제입니다. 축이 다릅니다. 세율을 정하고,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 정부이고, 정책의 차이입니다. 만약 재분배가 공산주의라면, 1977년 의료보험을 시작한 정부도, 1989년 전 국민 의료보험을 완성한 정부도, 1986년 국민연금법을 만든 정부도 모두 공산주의 정부였다는 말이 됩니다. 그분들을 그렇게 부르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 헌법은 34조에서 사회보장을 국가의 의무로 정하고, 119조 2항에서 경제의 민주화를 말합니다. 저는 무한정 나눠 주자고 한 적이 없습니다. 재정은 유한하고 세금은 아픕니다. 그 논쟁은 '얼마나'의 논쟁이어야지 '너는 빨갱이냐'의 논쟁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이천 년 동안 구제를 해 온 것을 두고 교회가 공산주의였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제시된 일곱 가지 근거 가운데 공산주의의 정의에 닿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 목록이 증명하는 것은 제 사상이 아니라, '빨갱이'라는 말이 이제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두려움 자체를 조롱할 생각은 없습니다. 전쟁을 겪은 세대의 불안은 실제이고, 그것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그래서 제안 하나를 드립니다. 저에게 이렇게 물어 주십시오. "생산수단의 국유화에 찬성합니까." "일당독재를 지지합니까." "북한 체제를 지지합니까." 세 질문 모두에 저는 아니라고 답합니다. 그다음에 세금이든 복지든 대북 정책이든 얼마든지 다투십시오. 저는 그 다툼을 피하지 않습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말이 너무 쉽게 쓰이면 그 말은 힘을 잃습니다. 아무에게나 붙는 꼬리표는 결국 아무도 가리키지 못합니다. '빨갱이'라는 말이 지금 그렇게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정말로 위험한 사람이 나타났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무엇이라 불러야 합니까. 저는 그것이 더 걱정입니다.
그러니 저를 무엇이라 부르지 마시고,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말씀해 주십시오. 어느 글의 어느 문장이 잘못되었는지 짚어 주시면 저는 얼마든지 답하겠습니다.
참고로 음모론자는 좌나 우나 다 싫어합니다. 팩트체크 안된 카더라 통신도 마찬가지구요. 
늘감사.
* 저도 이종성 목사님 따라서 대학때 사진 하나 투척합니다. 고등학교 까까머리는 아니지만요.. 벌써 30년 전이네요. ^*^
오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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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무시하세요. 어차피 논리적으로 설명을 하셔도 저들은 무슨말인지 모르고 그냥 싫다는 얘기예요. 차단하시는게 나아요.
Reply
전경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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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잡을데 없는 글이지만 효과가 없습니다. 미친놈들은 설득이 아닌 매가 약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무조건 빨갱이니 뭐니 하면서 광분하는 무리를 같은 사람으로 보고 정상적으로 대응해주는것 자체가 낭비입니다.
Reply
조성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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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타령을 하는자들이 오히려 빨갱이가 아닐까요?
전쟁과 폭력을 추구하는자들이 그들 집단들이지요.
법치국가에서 법을 지켜내고 민주주의와 평화를추구하는 쪽을 향해 빨갱이라고 몰아세우는게 너무 우습지요.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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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신학대학교가 2026년 영성수련회 강사로 이호 목사를 초청했습니다. 먼저 밝혀 둘 것이 있습니다. 이호 목사는 제 학부 동기입니다. 총장님은 제 은사이시고, 신학교에는 저와 깊은 인연이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편해질 수 있는 글을 쓰는 이유는 제 사랑하는 모교가 극우의 온상으로, 시대정신에서 뒤떨어진 학교로, 신앙을 정치화하는 학교로 오해받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침신대 출신 목회자를 모교 강단에 세우는 것이 무슨 문제냐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침례신학대를 졸업한 우리 교단의 동문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을 보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이호 목사는 현재 ‘거룩한 대한민국 네트워크’ 대표이며, 히즈코리아TV 주강사와 뉴데일리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대표 강의는 「하나님의 기적, 대한민국 건국」이고, 『친일청산에 대한 성서적 입장』, 『북한을 자유케 하라』, 『이승만의 토지개혁과 교육혁명』 등을 썼습니다. 2015년 조선일보는 그를 “건국 주역 이승만”을 재조명한 목사로 소개했고, 영화 「건국전쟁」의 제작 과정에도 자문으로 참여했습니다. 국회조찬기도회를 비롯해 전국 애국 집회의 단골 강사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비방이 아니라 본인이 공개한 이력입니다. 다만 그 이력이 특정한 정치적 노선 위에 서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어떤 분은 그래도 순수하게 학생들에게 도전이 되는 설교를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번 수련회의 구성 자체가 그 기대를 뒷받침해 주지 않습니다. 포스터의 주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한반도를 자유케 하라”는 그의 저서 『북한을 자유케 하라』의 문장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첫 번째 설교 제목 “있는 그대로의 십자가” 역시 그의 설교집 제목과 같습니다. 세 번째 설교 “1919 필라델피아”는 1919년 4월 이승만·서재필 등이 필라델피아 리틀극장에서 연 제1차 한인회의를 가리키는데, 이는 그가 오랫동안 이승만 서사의 출발점으로 삼아 온 소재입니다. 네 번째 “북한의 역사와 복음통일”은 그가 즐겨 쓰는 “종북의 영”이라는 언어가 등장할 가능성이 높은 주제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혹시 시국 강연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걱정이 아닙니다. 네 번의 설교 중 최소 세 편이 그의 기존 강연 콘텐츠와 겹치는, 상당히 예측 가능한 구성이라는 뜻입니다. 게다가 영성수련회입니다.
그의 주장은 지나치게 이념적입니다.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기독교의 패악질을 옹호하기도 하죠. 성경 말씀을 읽지만 결국 정치적 아젠다를 넘어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런 그를 추켜올리며 강단에 세운다는 것은 검증을 하지 못했거나 그의 견해에 동의한다는 의미겠지요. 그게 아니라 만약 역사와 정치를 다루어야 한다면, 그것은 일방적 선포가 아니라 반론과 질문이 보장된 학술의 형식이어야 합니다. 교단을 대표하는 신학교가 신중하지 못하면, 학교 자체가 같은 편향을 공유한다고 읽힙니다.
몇 해 전 데이비드 차(차형규)의 일이 겹쳐 떠오릅니다. 그가 표절과 직통계시 논란 이후 침신대 교수들의 지도를 받고 침신대 대학원에 진학하겠다고 밝히며 침신대의 이름에 기댔던 시기가 있었고, 대학예배 강단에서 학교를 사랑하고 빛내는 학생으로 소개된 적도 있었습니다. 이후 그는 부적절한 관계와 선교회 재정 유용을 인정하고 대표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이미 문제가 제기되고 있던 사람에게 학교의 신뢰를 빌려주었다가 뒤늦게 수습에 나섰던 경험을, 우리는 배우지 않았습니까.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학교의 강단은 교단의 미래가 서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늘감사.
* 이글을 보고 어떤 이들은 저를 빨갱이라고 하겠지요. ㅜㅜ 그럼에도 저는 제발 학교 강단에 말씀 전하는 이를 선정할 때 진보와 보수, 좌우를 떠나 지나치게 치우친 이들은 좀 걸러냈으면 좋겠습니다. 그 여파와 부끄러움이 너무 크지 않습니까? 좋은 설교가가 얼마나 많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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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하려거든, 비판받을 각오로
성경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면서 가장 자주 오독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비판하지 말라"(마 7:1)는 말씀인데 많은 이들이 이 말씀을 어떤 판단도 하지 말라는 침묵의 명령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절에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7:2). 이 말씀은 비판의 금지가 아니라 비판의 조건입니다. 네가 남에게 들이대는 그 자를 그대로 네게도 들이댈 터이니, 그 자를 함부로 만들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판단 자체를 거두라는 것이 아니라, 판단의 저울을 바로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판은 금지된 것이 아니라 값비싼 것입니다. 값을 치를 각오가 없는 사람은 그 자리에 서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그래서 저는 글을 쓸 때 몇 가지를 스스로에게 요구합니다.
첫째, 정제된 언어를 쓸 것. 조롱과 혐오와 모욕의 언어는 그 순간 저를 우쭐하게 하고 감정을 시원하게 하지만 글의 수명을 끊습니다.
둘째, 상대에 대한 예의를 지킬 것. 비판의 대상도 하나님의 형상이며, 그도 언젠가 내 글을 읽습니다.
셋째, 사실을 먼저 확인할 것.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다 하였고(잠 18:13), 송사에서는 먼저 온 사람의 말이 옳아 보이나 상대가 와서 밝힌다고 하였습니다(잠 18:17).
넷째, 논리적으로 정연할 것. 감정은 글의 온도이지 근거가 아닙니다.
다섯째, 내 이름으로 쓸 것. 책임지지 않는 말은 비판이 아니라 투척입니다. 그래서 제글른 대부분 전체공개이고 공유도 가능합니다
이 다섯 가지는 상대를 위한 배려이기 이전에 저 자신을 지키는 울타리입니다. 언어가 거칠어지는 순간 논지는 사라지고 태도만 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태도가 무너진 글은, 내용이 옳아도 아무도 설득하지 못합니다.
최근 제 대학동기가 모교 영성수련회 강사로 선정된 것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쓴 뒤에 그 사실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그를 지지하는 몇몇 분들이 제 글의 논지를 반박하는 대신 글쓴 저를 공격했습니다. 메시지가 아니라 메신저를 겨냥한 것이죠. 처음 보는 이에게 반말을 던지고, 마치 자신이 심판대 위에 앉은 것처럼 사람을 깔보는 말투가 이어졌습니다. 제글을 자신의 피드에 올려 놓고 여럿이 몰려와 에워싸는 방식도 있었습니다. 사실 이런 방법에 저는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습니다. 다만 안타까웠습니다. 그런 방식은 그들이 지키려던 것을 지켜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집단으로 조리돌리는 순간 먼저 그 자신이 무너집니다. 논박할 내용이 없어서 사람을 공격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그가 지키려던 대상이 무너집니다. 거친 옹호는 옹호가 아니라 짐입니다. 조롱으로 방어된 사람은 그 조롱과 함께 기억됩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속한 공동체가 무너집니다. 한 사람의 말투는 그 사람의 인격이지만, 여럿의 같은 말투는 그 공동체의 문화로 읽힙니다. 그 공동체가 앞으로 무슨 옳은 말을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때 보았던 태도를 먼저 떠올릴 것입니다.
저는 글을 쓸 때 퇴고를 거치면서 저부터 다시 살핍니다. 남을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자신을 정죄하게 된다는 말씀 앞에서 그리고 형제의 눈 속 티끌을 말하기 전에 내 눈의 들보를 먼저 빼라는 말씀 앞에서 저 역시 예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판하는 자는 언제나 다음 순서로 비판대에 섭니다. 그것이 이 일의 규칙이고, 저는 그 규칙에 동의합니다. 그래서 제가 쓴 글에 대한 반박은 언제든 환영합니다. 사실이 틀렸다면 고치겠고, 논리가 성기다면 승복하겠습니다.
다만 오시려거든 논리로 오십시오. 저는 반말과 조롱에는 답하지 않습니다. 답할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은 대화의 형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제된 언어와 최소한의 예의, 확인된 사실과 정연한 논리. 이 네 가지를 갖춘 반박이라면 저는 기꺼이 오래 이야기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비판은 힘을 얻고, 우리는 서로에게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늘감사.
* 캡쳐 설명 : 저는 이분을 잘 몰랐는데 유명 토론배틀에서 우승했던 분이라는군요. 그런데 저에 대한 표현들을 보니 이분은 토론은 사라지고 배틀만 남은 듯 합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용혜인의원을 지지했던 이유를 설명해야겠네요. ^*^ 그리고 제가 이호 목사를 질투한다고? 제 자존감이 그렇게 낮지 않아요. 이분의 뜬굼포 멘트에 실소를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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