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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후예들 - 대한제국 후예들의 삶으로 읽는 한반도 백년사| 정범준 2006
제국의 후예들 - 대한제국 후예들의 삶으로 읽는 한반도 백년사
정범준 (지은이)황소자리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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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근대와 일제강점기를 지나오며 조선의 왕조는 무너졌고 그 후손들은 지금까지도 불우한 삶을 이어오고 있다. 만화와 드라마에서 상상된 황실은 화려한 외양을 자랑하고 로맨스가 난무하는 공간으로 그려지지만, 실제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일본을 떠돌다 2005년 시신이 되어서야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 영친왕의 아들 이구가 그 대표적인 경우.
이 책은 기존 언론의 선정적인 태도와 대중의 동정 섞인 시각을 배제하고 지난 100년간 펼쳐진 이들 황손들의 역사를 실증적으로 복원하고자 한다.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과 그의 일본인 왕비 이방자(본명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의친왕 이강과 덕혜옹주, 이구와 그의 전 부인 줄리아 뮬록과 민갑완 등의 일생을 각 장마다 담아냈다.
마치 영화 같은 느낌마저 전해주는 이들의 비극적이고 애절한 역사가 먼저 눈에 띈다. 고종의 고명딸인 덕혜옹주는 망국의 공주라는 심리적 압박으로 인해 정신분열증에 시달렸고, 일본인 황후 이방자는 한·일 간의 불협화음을 감내해야 했다. 한편 MIT를 나온 청년 건축가로 성장한 이구는 푸른 눈의 여성 줄리아와 사랑에 빠지지만 황실을 복원해야 한다는 주변의 압박에 그녀를 매몰차게 버리기도 한다.
그동안 황손들에 대해 잘못 알려졌던 사실들을 르포라이터 경력을 지닌 지은이의 치밀한 자료 조사로 바로잡은 것도 주목할 부분. 이방자의 석녀(石女)설, 덕혜옹주가 남편에게 구타당해 유산을 했다는 설 등의 오류를 공개한다. 또한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이강에 대한 또다른 평가, 해방 후 주저없이 일본인으로 귀화한 황족의 이야기 등에서 "민족의식의 구심점", "거지가 된 왕자" 등 기존 황실에 대한 비뚤어진 인식을 지적한다.
목차
프롤로그
1장 고난의 황태자 - 영친왕 이은
일본 황태자의 방한 / 타국의 밤 / 황태자의 탄생 / 단 한 번의 만남 / 황태자의 유년 / 낙선재의 조약돌 / 엄 황귀비의 흥거 / 가례를 올리다 / 민갑완, 잔인한 날들의 시작 / 이어지는 불행 / 상하이로 망명을 떠나다 / 싹트는 민족의식 / 유럽 여행 / 그대에게 구하는 바 없노라 / 차라리 죽기로 마음먹다 / 제왕의 풍모 / 전쟁의 소용돌이 / 사라져라 번뇌어 / 해방 혹은 종전 / 신정부에 충성을 다하겠다 / 영친왕저 문제 / '일본인'이 되다 / 약해지는 황태자 / 다시 쓰러지다 / 세 번의 통곡와 영면
2장 두 조국의 사이에서 - 이방자
유년의 기억 / 엄격한 황실 교육 / 약혼 발표 / '기막힌 법' 황실전범 / 추모시와 연가 / 신혼의 황복 / '석녀' 이방자 / 첫 방한 / 첫 아들 진을 하늘로 보내고... / 새로운 신앙 / 국상을 치르다 / 이구의 탄생 / 휩쓸려가는 사람들 / 해방과 6.25 / 남편의 분노를 보다 / 막다른 곳 / 일본이여 안녕, 일본이여 안녕 / 문화재보호법 / 쪽발이 물러가라 / 고독한 이를 위해 기도해 달라 / 장애인 복지사업 / 명휘와 가혜 / 애끓는 모정 / 여로의 끝
3장 황태자 아들과 탄광부의 딸 - 이구와 줄리아
폭풍우 속의 출발 / 미국 생활 / 줄리아라는 여성을 만나다 / 처음 밟은 한국 땅 / 다툼과 균열 / 분노와 배신감에 휩싸여 한국을 떠나다 / 아리타 기누코 / 사기 사건에 휘말리다 / 영구 귀국 / 줄리아의 마지막 편지 / 아카사카에 지다
4장 덕수궁의 금지옥엽 - 덕혜옹주
황제의 여인과 자녀들 / 덕수궁의 꽃이 태어나다 / 황제의 밀약 / 아버지 고종 황제의 붕어 / 끌려가는 옹주 / 순종 황제의 붕어 / 고아가 된 덕혜옹주 / 병이 시작되다 / '고아들'의 결혼 / 아기씨에 대한 추억 / 병의 재발 / 그들은 정말 사랑했을까 / 언니의 기억 / 김을한의 충격적인 증언 / 이혼이 성립되다 / 정혜의 죽음 / 성대한 환대 / 덕수궁의 꽃이 지다
5장 극과 극의 평가를 받은 왕자 - 의친왕 이강
불우한 탄생 / 보빙대사 활동 후 귀국 / 유럽 순유는 없었다? / 역모에 연루되다 / 이토 히로부미의 계략 / 신변의 위협 / 엇갈리는 평가 / 배일과 울분의 나날 / 3.1운동과 그의 역할 / 가장 빛나는 불꽃 / 정운복의 역할 / 유고에 담긴 뜻 / 다시 어둠 속으로 / 경비관계철 / 그의 최후 / 의친왕비의 부덕
저자 및 역자소개
정범준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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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인 1977년, 부산으로 이주했다. 부산에서 초?중?고를 다 졸업했다. 추첨으로 1986년 금성(錦城)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결과적으로 내 인생에 제일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 됐다. 그곳에서 나는 평생의 지기(知己)를 만났다. 금성고 졸업(1989년)은 롯데 자이언츠 창단 어린이회원 활동(1982년)과 함께 내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경력이다.
서울대 국문학과를 졸업(1997년 8월)했고,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에서 잠시 공부했다(2000년 1학기). 2000년 5월 〈넷벤처〉라는 잡지사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는데 7개월 만에 잡지가 폐간되어 실업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 후 일자리를 구할 때마다 함께 일하게 된 동료와 상사들이 한결같이 좋았다.
지금까지 《제국의 후예들》, 《이야기 관훈클럽》, 《거인의 추억》, 《작가의 탄생》, 《마흔, 마운드에 서다》, 《흑백 ‘테레비’를 추억하다》, 《돌아오라 부산으로》, 일곱 권의 책을 냈다. 이 책은 정범준이란 필명을 건 여덟 번째 책이다. 이 필명에는 나를 포함한 네 사내의 인연과 우정이 깃들어 있다. 접기
최근작 : <이광환 야구 이야기>,<흑백 테레비를 추억하다>,<마흔, 마운드에 서다> … 총 7종 (모두보기)
정범준(지은이)의 말
그동안 언론이나 방송은 그들의 불우한 삶에만 초점을 맞춰왔다. 황손 아무개가 양로원에서 쓸쓸히 죽었다거나, 무허가 단칸방에 머물고 있다는 식이었다. 나에겐 영친왕, 의친왕, 덕혜옹주, 이방자 등 주요인물의 생에에 대한 올바른 고증과 복원이 훨씬 시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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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는 언제 끝이 났는가? 어정쩡한 연결고리에 대하여
순종은 조선의 마지막 '왕'인가? 아니면 대한제국의 두번째이자 마지막 '황제'인가? 재위시 '융희'라는 연호를 사용했던 순종은 대한제국의 두번째이자 마지막 황제임에는 틀림 없지만, 조선의 마지막 '왕'이라는 표현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우리가 흔히 '국치일'로 기억하는 1910년 8월 27일의 한일합방을 통해 일제는 대한제국의 국호를 조선으로, 황제를 '왕'으로 격하시켰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으니 한국이라는 나라는 없어져버린 것이 아니라, 일제는 조선의 '왕'을 비록 꼭두각시이기는 하지만 그대로 둠으로써 그들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조선백성들의 저항을 조금이나마 무마시키려 한 것이다. 물론 그들의 임금을 '천황'이라하고 '천자'와 제후인 '왕'의 봉건관계가 더 익숙한 일본의 입장에서는 식민지 조선을 그대로 일본과는 분리된 제후국 정도의 '국가'로 인식하는데는 모순이 없었나 보다.
아무튼 순종이 붕어한 1926년 이후 황태자에서 세자로 격하되었던 '영친왕' 이은이 조선의 28대 국왕으로서 왕위를 이었고, 1945년 일본이 미국에 패하고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천황'만 남겨두고 모든 왕공족 제도가 폐지되면서 '평민'으로 격하될때까지 이은은 명목상 조선의 왕으로 남겨져 있었던 것이다. 비록 식민지였지만 일국의 왕이 볼모로서 식민지 종주국의 일개 장교로(나중에는 중장까지 진급했다지만) 복무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국민에게는 참을 수 없는 수치이지만, 왕위를 강제로 빼앗긴 것도 공식적으로 퇴위하지도 않은채, 정적인 이승만에 의해 귀국을 방해당하고 조선왕조의 법적/제도적인 청산도 없이 대한민국이 건국된 것은 뭔가 허술해 보인다.
건국한지 60년이나 된 '대한민국'이 아직도 일제 잔재와 친일파 정리의 해묵은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음은, 부패/무능한 임금의 목을 쳐본 민주주의 쟁취의 경험도 조선왕조의 완전한 단절이나 계승도 없이, 친일부역자에 대한 청산도 독립투사에 대한 평가도 거치지 않고 미군정에 의해 갑자기 탄생한 '공화정' 자체가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몇달전 한겨례21에서 우연히 만난 '대한제국 마지막 황손 이우, 야스쿠니에 있다'라는 기사를 읽은 후 관심을 가지게 된 '대한제국' 후손들의 삶과 행적을 살펴보다 우연히 '정범준'이라는 필명을 쓰는 같은 세대 작가의 책을 접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방대한 자료를 근거로 최대한 객관적으로 과대평가나 폄훼없이 여러 인물들의 행적에 대해 소상히 쓴 노력이 돋보였고, 또한 능력이나 의지와 무관하게 도도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거친 파도를 헤쳐가다 좌절한 황실 식구들에 대한 연민이 가슴에 절절하게 와닿았다.
개인적으로 가장 매력적인 '왕자'로 호감을 가지고 있던 '의친왕' 이강공과 운현궁으로 입적된 그의 차남 이우공의 행적에서, 의친왕이 상해 탈출에 성공했다면, 또는 이우공이 히로시마로 떠나지 않고 살아서 해방을 맞았다면 오늘의 우리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부질없는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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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 지영이 아빠 2007-08-28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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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근대화가 그려낸 단면
정범준 씨가 쓴 <제국의 후예들>은 고종의 직계 후손들(영친왕 이은, 의친왕 이강, 덕혜옹주, 이건, 이구 등)이 대한제국이 몰락해 버린 이후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에 대해서 인물별로 통시대적으로 조망하고 있다.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리면서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조선 왕조의 마지막 왕족들이 실상은 어떠한 삶을 살아갔는가에 대해서 저자는 다른 나라의 왕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면서도 정작 우리나라에 있었던 왕실이나 왕족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지도 못한 채 잠깐의 화제거리로만 등장하고 마는 현실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삼아 그가 나름대로 조사한 내용과 인터뷰 내용 등을 기반으로 그네들의 삶에 대해서 접근해 가고 있는 것이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후예들이 과연 왕조가 몰락한 이후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에 대해서 인물사적으로 접근해서 참고해서 보기에는 나름대로 괜찮은 내용들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의 이행 그리고 그 이후에 근대화가 착실하게 진행되어 실패하지 않고, 고종의 구상대로 입헌군주제의 틀이 뿌리를 내렸다면 왕족으로서 그네들이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방식은 분명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기에 그네들은 오히려 일반인들보다 더 무거운 짐을 얹고 일생을 살아야 했음을 저자는 조사한 바를 토대로 조용히 보여주고 있다. 몰락한 왕조의 왕족들의 일생은 분명 우리네 근대의 슬픈 자화상 중 하나를 보여주는 것이기에 읽는 내내 씁쓰름한 감을 지울 수 없었던 것 같다. 덧붙여 왕실이나 왕족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된 데에는 한국의 근대 역사에 있어서 입헌군주정의 논의가 영향력을 상실하고 아예 자취를 감추게 것과 동시에 민주주의나 공화정 혹은 사회주의 등으로 정체(政體)에 대한 관심을 돌리게 된 것과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는 한 국가의 몰락에 대해서 어찌 되었든 간에 책임을 질 수 밖에 없는 군주 및 그의 측근들에 대한 실망과 환멸이 반영된 것으로도, 왕족들이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 한 명의 시민 혹은 국민으로 인식하게 되는 가운데 근대 사회의 사회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타인에 대한 무관심으로 바뀌어 버린 것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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沈香 2006-09-30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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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님, 요청하신 정범준 작가의 <제국의 후예들> 요약과 평론입니다.
[요약] 제국의 후예들: 몰락한 왕조의 혈족과 격동의 백년사
<제국의 후예들>(정범준 저, 2006)은 1897년 대한제국 선포부터 몰락, 식민지기, 해방, 분단,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구 황실 일가의 개인적 삶의 궤적을 추적하여 한반도 근현대사 100년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한 역사 르포르타주다. 저자는 황실의 거시적 정치사나 제도사 대신 고종과 순종, 의친왕 이강, 영친왕 이은, 덕혜옹주, 이우, 이구 등 왕족 개개인의 선택과 비극적 운명에 초점을 맞춘다.
대한제국은 일제에 의해 국권을 강탈당하면서 왕공족(王公族)이라는 기형적 신분 체제로 편입되었다. 이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체제 안정과 내선일체 홍보를 위한 도구로 활용되었다. 영친왕 이은은 불과 열한 살의 나이에 인질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도일하여 일본 황족 마사코(이방자)와 정략결혼을 맺었고, 철저히 일본 군인으로 육성되었다. 고종의 막내딸 덕혜옹주 역시 어린 나이에 대마도 번주 가문의 소 다케유키와 정략결혼을 치렀으며, 망국의 울화와 정신질환, 이혼과 딸의 실종이라는 극단적 비극을 겪었다.
반면 황실 내부의 대응은 일률적이지 않았다. 의친왕 이강은 상해 임시정부 탈출을 기도하는 등 끊임없이 항일과 독자적 노선을 모색했고, 그의 아들 이우는 일본 육군 장교가 되어서도 한국인 정체성을 고수하려 분투하다 히로시마 원폭으로 생을 마감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도 후예들의 비극은 종결되지 않았다. 공화정을 선포한 이승만 정권은 황실의 복권 가능성을 경계하며 이들의 귀국을 가로막고 황실 재산을 국유화했다. 제국의 후예들은 조국과 일본 양쪽 모두에서 버림받은 무국적 상태의 디아스포라로 전락했다. 1963년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서야 영친왕 부부와 덕혜옹주는 귀국할 수 있었으나, 이미 병마와 노환으로 심신이 황폐화된 상태였다. 마지막 황세손 이구는 미국과 일본을 떠돌며 건축가이자 사업가로서의 정체성과 '황세손'이라는 굴레 사이에서 방황하다 2005년 도쿄의 한 호텔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책은 이들의 엇갈린 궤적을 꼼꼼한 사료와 구술을 통해 담아내며, 국가와 개인의 정체성이 충돌하는 비극의 현장을 세밀하게 드러낸다.
[평론] 비운의 왕조를 넘어선 보편적 경계인의 초상
정범준의 <제국의 후예들>은 한국 근현대사 서술에서 오랫동안 양극단으로 소비되던 황실 담론—식민지 근대화론의 무능한 공범이거나, 감상주의적 민족주의의 순교자—을 벗어나 개인의 실존적 조건에 밀착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성취를 지닌다.
책의 가장 뛰어난 미덕은 황실 인물들을 탈신화화하는 동시에 탈악마화했다는 점이다. 저자는 황실이 지녔던 무능과 구체제의 한계를 숨기지 않으면서도, 거대한 제국주의 폭력과 근대 국민국가 수립이라는 이중의 격랑 속에서 개인이 겪어내야 했던 고통을 정밀하게 기록한다. 영친왕과 이구의 삶은 특정 국가의 충성스러운 신민이 되기를 강요받았으나 끝내 온전한 국민으로 정착하지 못한 전형적인 '경계인'의 비극을 드러낸다.
세계사적 시각에서 볼 때, 이들의 삶은 20세기 합스부르크, 로마노프, 오스만 등 몰락한 유라시아 제국 황족들의 유랑사와 정확히 궤를 같이한다. 국가라는 울타리가 해체되었을 때 국적과 정체성을 강제로 박탈당한 이들은 제국주의 권력의 선전 도구로 소비되다가, 냉전과 민족주의 공화정의 대두 속에서는 기피와 배제의 대상이 되었다. 이승만 정권이 취했던 배타적 봉쇄와 대중의 냉담은 '단일민족'과 '국민국가'라는 단일한 틀에 포섭되지 않는 경계인을 어떻게 지워버리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아쉬운 지점은 풍부한 일화와 기록에 비해 제국주의와 탈식민주의, 그리고 초국가적 정체성에 대한 구조적이고 비판적인 분석이 다소 약하다는 점이다. 사료의 나열이 종종 개인의 기구한 운명론으로 귀결되는 경향이 있어, 역사적 사건들이 빚어낸 구조적 폭력성보다는 개인의 한탄과 비장미가 두드러지는 순간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국가주의적 애국심이나 맹목적 민족의식의 렌즈를 걷어내고 읽을 때 훨씬 깊은 울림을 준다. 특정 국가나 민족이라는 협소한 범주를 넘어, 20세기 야만의 시대에 국가와 체제의 폭력 아래 부유해야 했던 한 인간 집단의 실존적 비극을 다룬 '보편적 인간의 기록'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정범준 《제국의 후예들》(2006) — 1,000단어 요약과 평론
부제: 대한제국 후예들의 삶으로 읽는 한반도 백년사 황소자리, 2006년, 559쪽
정범준의 《제국의 후예들》은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 이후 황족들이 어떻게 살아갔는지를 추적한 역사 르포이자 집단전기이다.
이 책의 핵심은 황실의 복권이나 왕정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제국이 사라진 뒤에도 계속된 황족들의 삶을 통해 식민지배, 해방, 분단, 공화국 수립의 역사를 다시 읽는 데 있다.
저자는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의친왕 이강, 덕혜옹주, 이구와 줄리아 뮬록, 이건과 이우 등 황실 구성원들의 생애를 재구성한다. 당대 신문과 문헌, 회고록, 후손 인터뷰 등을 활용하면서 기존의 감상적이고 부정확한 황실 이야기를 교정하려는 태도를 취한다.
1. 핵심 문제의식 — 제국이 무너진 뒤 황족은 어떻게 되는가
대한제국은 1897년 성립해 1910년 일본에 병합되었다. 그러나 황실 구성원들은 제국과 함께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식민지배 아래에서 일본 황실에 종속된 특수 신분으로 살아야 했고, 1945년 이후에는 공화국 체제 속에서 왕조의 유물처럼 취급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황족들이 두 체제 모두에서 정치적으로 불편한 존재였다는 사실이다.
일제에 그들은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홍보할 수 있는 상징이었고, 해방 이후 한국 정부에는 국민통합을 방해할 가능성이 있는 구왕조의 잔재였다.
저자는 이러한 정치적 조건 때문에 황족들이 특권을 누리는 동시에 자유를 잃었으며, 결국 신분과 재산, 정체성마저 흔들리게 되었다고 서술한다.
2. 영친왕 이은 — 일본 제국에 편입된 조선의 황태자
영친왕 이은(1897~1970)은 이 책의 중심인물이다.
1907년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일본 황실과 군부의 교육을 받았고, 일본 육군 장교가 되었다. 1920년 일본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곧 이방자와 결혼했다.
그의 인생은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황태자가 일본 제국의 제도 속에 편입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은은 일본 황실과 가까운 생활을 했고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만으로 그를 자발적인 친일 인물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정치적 자유가 극히 제한된 인물이었다.
동시에 그를 독립운동가로 미화할 근거도 충분하지 않다.
저자가 보여주는 이은은 영웅도 반역자도 아닌, 일본 제국에 종속된 황태자라는 모순된 신분을 끝까지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하자 그는 제국의 보호를 잃었다. 그러나 독립한 조국도 그를 흔쾌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 시절 귀국이 실현되지 않았고, 박정희 정부 때인 1963년에야 병든 몸으로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의 생애는 한 개인이 두 국가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얼마나 오랫동안 자신의 삶을 통제당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3. 이방자 — 식민지 정략결혼에서 사회복지 활동으로
이방자(1901~1989)는 일본 황족으로 태어나 조선의 황태자비가 된 인물이다.
그녀의 결혼은 일본의 조선 병합 이후 양국 황실을 결합하여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정치적 목적과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범준은 이방자를 단순한 제국주의의 대리인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녀는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식 교육을 받았지만, 남편과 함께 조선 황실의 몰락을 경험했다. 패전 이후에는 일본 황족으로서의 지위도 상실했다.
특히 저자는 일본이 대한제국 황실의 후손을 끊기 위해 출산할 수 없는 여성을 일부러 영친왕과 결혼시켰다는 이른바 '석녀설'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실제로 이방자는 두 아들을 출산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이방자는 장애인 교육과 복지에 헌신했다. 그의 활동은 과거의 황족이라는 신분을 넘어 사회적 책임을 실천한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헌신이 결혼의 식민지 정치적 성격을 소멸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삶에는 제국주의 정책의 수혜자이자 피해자라는 두 측면이 공존한다.
4. 이구와 줄리아 — 왕조의 혈통과 개인의 사랑
이은과 이방자의 아들 이구(1931~2005)는 미국에서 교육받고 건축 분야에서 활동했다.
그는 미국인 줄리아 뮬록과 결혼했지만, 한국 황실의 후손이라는 지위 때문에 결혼생활에 심한 압박을 받았다.
황실의 혈통을 이어야 한다는 기대는 개인의 결혼과 행복보다 우선시되었다. 부부는 결국 이혼했고, 이구의 삶도 불행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가 2005년 도쿄에서 사망한 것은 대한제국 직계 황실의 역사에서 하나의 상징적인 종결점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이야기의 중요한 주제는 왕조가 몰락한 뒤에도 혈통과 가문의 관념이 개인을 계속 지배했다는 사실이다.
왕정은 사라졌지만, 왕조적 사고방식은 가족 내부에서 여전히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5. 덕혜옹주 — 식민지배와 여성의 비극
덕혜옹주(1912~1989)는 고종의 딸로,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녀는 일본 귀족 소 다케유키와 결혼했으나 정신질환을 겪었고, 오랜 세월 일본에서 생활했다. 1962년 귀국한 뒤에는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냈다.
덕혜옹주의 삶은 흔히 일본 제국주의가 파괴한 한 여성의 운명으로 소개된다.
그러나 정범준은 그녀에 관한 여러 소문과 과장된 이야기를 검토한다. 남편의 폭력, 결혼생활, 질병의 원인 등에 관해 대중적으로 알려진 이야기들 가운데 충분히 입증되지 않은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역사서술에서 매우 중요하다.
덕혜옹주가 정치적 환경 때문에 고통받았다는 사실과, 그녀의 모든 불행이 특정한 일본인의 악행에서 직접 발생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비극은 식민지배의 폭력뿐 아니라 황실의 가부장제, 여성의 제한된 선택권,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대응이 결합된 문제로 읽어야 한다.
6. 의친왕 이강 — 저항하는 황족인가, 무력한 귀족인가
의친왕 이강(1877~1955)은 영친왕과 달리 일본의 지배에 반감을 보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특히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탈출하려던 사건은 그의 생애에서 중요한 장면이다. 그러나 탈출은 실패했고 그는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일부에서는 그를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애국적 황족으로 평가하지만, 다른 연구자들은 그의 정치적 활동과 실제 영향력을 제한적으로 해석한다.
정범준은 이러한 상반된 평가를 비교하면서 의친왕을 일방적으로 미화하지 않으려 한다.
그의 생애는 식민지배에 대한 개인적 반감이 반드시 조직적인 민족해방운동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황족이라는 신분이 독립운동에서 정치적 상징성을 갖는 동시에 실제 행동을 제약할 수도 있었음을 드러낸다.
7. 이건과 이우 — 일본화와 조선인 정체성 사이
의친왕의 아들 이건(1909~1990)과 이우(1912~1945)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살아갔다.
이건은 일본식 교육과 생활방식에 적응했고, 패전 후에는 일본에 정착해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반면 이우는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일본에 대한 반감을 상대적으로 강하게 유지한 인물로 소개된다. 그러나 그 역시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고, 1945년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로 인한 피해를 입어 사망했다.
두 사람의 비교는 식민지배 아래 황족들에게 주어진 선택의 복잡성을 보여준다.
일본에 적응하는 것은 생존의 한 방법이었지만, 그것은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충돌했다. 반대로 일본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더라도 제국의 군사제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8. 평론 — 이 책의 역사학적 의의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황실사를 민족주의적인 영웅담이나 비극담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노력이다.
첫째, 저자는 황족들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식민통치의 복합성을 보여준다. 일본의 지배는 단순히 폭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결혼, 교육, 군복무, 신분제도 등의 방식으로 황실 구성원들을 제국 체제에 편입시켰다.
둘째, 해방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의미를 갖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황실의 후예들에게 1945년은 일본 지배로부터의 해방인 동시에 법적 지위와 경제적 기반의 붕괴였다.
셋째, 잘못된 역사적 소문을 검토한다. 이방자의 출산 능력에 관한 이야기나 덕혜옹주의 결혼생활을 둘러싼 속설에 대한 비판은 역사적 사실과 민족적 감정을 구별하려는 시도이다.
이 책은 상당한 분량의 주석과 다양한 자료 조사, 후손들에 대한 인터뷰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있다.
그러나 비판적으로 검토할 부분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황실의 비극을 강조하는 서술이 자칫 대한제국의 정치적 책임을 희석할 위험이다.
고종과 대한제국의 지배층은 단순히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자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국가권력을 행사한 통치집단이었으며, 대한제국 내부의 정치적 갈등과 제도적 한계에 대해서도 책임을 갖는다.
또한 황실 구성원들은 식민지시대의 일반 조선인들과 달리 상당한 물질적 특권을 누렸다. 이들의 고통이 실제였다고 해서 그러한 신분적 불평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구별해야 할 것은 통치자로서의 책임과 통치자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개인에게 가해진 고통이다. 두 문제를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9. 일본 황실과의 비교 — 왜 한쪽은 살아남고 다른 쪽은 사라졌는가
이 책에서 더 발전시킬 수 있는 흥미로운 문제는 일본 황실과 대한제국 황실의 운명을 비교하는 것이다.
1945년 일본은 패전했지만 천황제는 폐지되지 않았다. 쇼와 천황은 정치적 권력을 상실했으나 국가의 상징으로 남았다.
반면 대한제국 황실은 일본의 패전과 한국의 독립에도 불구하고 복구되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천황제가 새로운 헌법질서 안으로 편입되었지만, 한국에서는 공화주의와 왕조의 단절이 새로운 국가의 정통성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었다.
특히 이승만 정부는 대한제국 황실을 새로운 국가의 상징으로 활용하려 하지 않았다. 구왕조의 후예들은 정치적으로 불필요하거나 잠재적으로 불편한 존재였다.
다만 한국에서 왕정복고가 일어나지 않은 이유를 이승만 개인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화주의 전통, 독립운동의 변화, 해방 후 정치세력의 구성, 왕정복고를 지지하는 실질적 사회세력의 부재 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비교는 왕조의 존속 여부가 왕실 구성원의 개인적 덕성보다 국가의 정치적 정통성과 제도적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0. 종합 평가 — 황실의 몰락은 누구의 비극인가
《제국의 후예들》은 황실의 영광을 되살리려는 책이라기보다 역사의 거대한 변화 속에서 개인이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읽을 수 있다.
그렇지만 역사적 평가에서는 세 가지를 구분해야 한다.
대한제국의 멸망은 한 국가가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주권을 상실한 사건이다. 황실의 몰락은 오랫동안 특권을 누렸던 지배집단이 정치적·사회적 지위를 상실한 사건이다. 그리고 황실 구성원들의 개인적 불행은 국가와 왕조의 운명에 얽매인 인간들이 겪은 고통이다.
이 세 사건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동일하지 않다.
왕조가 사라진 것을 반드시 민족 전체의 비극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왕조가 사라졌다는 이유로 그 구성원들의 인간적 고통을 무시하는 것도 정당하지 않다.
정범준의 성과는 바로 이 마지막 문제를 역사서술의 중심으로 가져온 데 있다.
한 가지 더 중요한 점은 황실 후손들의 이야기가 한국과 일본을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로 양분하는 시각의 한계를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일본 황족이었던 이방자는 한국에서 장애인 복지를 위해 헌신했고, 조선 황족이었던 이건은 일본인으로 살기를 선택했다. 조선인의 정체성을 유지했던 이우는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다.
이러한 모순은 제국주의가 단지 영토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체성과 가족관계까지 재편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결론적으로 《제국의 후예들》의 가치는 대한제국 황실의 정치적 복권이 아니라, 식민지배와 국민국가 형성 과정에서 인간이 겪은 모순된 경험을 구체적인 생애를 통해 보여준다는 데 있다.
역사학적으로는 대한제국 황실의 책임 문제와 황족들의 개인적 삶을 분리하여 평가하면서 읽을 때 가장 생산적인 책이다.
자료 범위: 이 평론은 책의 공개 목차, 출판사 소개, 2006년 당시 서평과 역사적 배경에 근거한 재구성이다. 559쪽 본문 전체를 직접 대조한 정밀 독해는 아니다.
Park Yuha - "낙태죄" 단상 2016
Park Yuha
"낙태죄" 단상
일본근현대 소설중 적지 않은 소설들이, 알고보니 "여자친구가 임신을 하게 되어 당황해 허둥지둥하는 남자 이야기", 라고 단언한 여성평론가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평론집 제목을 "임신소설"이라고 붙였다.
거기서 주목한 건 개인의 사생활에 국가가 관여하는 사태. 낙태를 "불법"(불법이란, 나라가 정한 규범을 따르지 않는다는 뜻이다)으로 정한 일본의 "법"이 어떤 식으로 한 시대의 남녀를 당황하게 만들고, 울고 웃게 만들고, 때로 서로 미워하게 만드는지에 관한 고찰이었다.
그녀의 리스트엔 무라카미 하루키도 올라 있었다.
나는 그녀의 개념을 빌려 일본에서 문호대접을 받는 모리오가이의 <무희>도 "임신소설"이라고 지적한 적이 있다. <무희>는, 일본남성이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서양여성을 버린 최초의 소설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낙태"라는 사태는 여성만의 일이 아니다. 반세기 전 영화 "젊은이의 양지"에선 임신한 애인을 죽이는 남성까지 등장한다.
이 경우엔 부잣집 여성과 결혼하기 위한 욕망이 시킨 일인데, 그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보통 정도의 감성을 가진 남성이라면, 여자친구 임신은 당연히 남의 일이 아니다. 물론 결혼한 남성에게도.
그래서 나는, 여성들의 "자기결정권"도 중요하지만, 남성들도 나서서 새로운 악법이 생기는 걸 반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장 사적인 공간에서의 개인의 일에 관한 선택은 개인에게 맡겨라!"고.
아참, 이 법은 일본이 메이지유신과 함께 "부국강병
"을 위해 만들고 1907년에 형사처벌 대상으로 한 "낙태죄"를 이어받은, 이른바 "일제잔재"다. 물론 이 법을 만든 건 남성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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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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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docs.google.com/.../1FAIpQLSc3Rx2PDHY.../viewform...
DOCS.GOOGLE.COM
보건복지부 의료법 개정 입법예고안 철회! 형법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기자회견 공동성명
보건복지부 의료법 개정 입법예고안 철회! 형법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기자회견 공동성명
유동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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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Kyu Hyun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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斉藤美奈子평론가 말씀이시군요. 기억에 새롭습니다.
이석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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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hor
서명 완료^^
Joan Baez - We Shall Overcome (BBC Television Theatre, London - June 5, ...
https://youtu.be/nM39QUiAsoM
Reply
이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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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닌데 말입니다. 단지 낙태를 할수 있는 자유를 달란 문제가 아니라 낙태를 여자 스스로 할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에 복잡한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산부인과학회는 생명의 고귀한 존엄성을 지키고저 낙태시행을 앞으로 안하겠다고 천명했습니다. 돈벌이가 문제가 아니라 의사도 인간이기에 태아를 죽일수 없다는겁니다. 그 상태에서 낙태를 스스로 어떻게 할수 있는지요. 일제잔재가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낙태는 기독교사상과 맞물려서 이미 법으로 금지하는나라가 많지요. 그리고 남자가 이법을 만들었다니 그것도 좀 안타까운것이 그것뿐 아니라 이 세상 대부분의 법은 남자가 만들었지요 ....박교수님 조금 페미니즘 경향이 있으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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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ed
Park Yu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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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e Cecilia
물론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요. 제가 이 문제를 굳이 포스팅한 건 일단은 지금 열심히 나서서 노력하는 사람들 에게 힘을 보태고 싶었기 때문이고요, 지금은 이 문제를 두고 논쟁을 할 여유가 별로 없어요. 제 문제가 일단락 되면 기회 봐서 다시 의견 말씀 드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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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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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택그렇겠지요. 이 문제는 당사자 뿐 아니라 제삼자가 꼭 개입해야 하니 더욱 쉬운 문제가 아니네요. 결국 생명이란 무엇인지, 낙태란 무엇인지 종교가 왜 금지 하는지 등등 본격적인 논의가 필요하지요.
외형상 똑같이 금지해도 이유는 다를 수 있습니다. 저는 일본이 금지 하는 이유를 말했을 뿐이고요.
그리고 저 완전한 페미니스트입니다. 말씀대로 이 세상 대부분 법을 남자위주로 만들었으니 조금씩 고쳐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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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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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hor
재검토하기로 되었다는군요. 일단 다행입니다.
http://mn.kbs.co.kr/mobile/news/view.do?ref=A&ncd=3363061

MN.KBS.CO.KR
‘불법 낙태수술’ 의사 처벌 강화 백지화
‘불법 낙태수술’ 의사 처벌 강화 백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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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 Hw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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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방법이 참 좋겠다 싶네요.. ^^
-> "상대방의 "동의 없는" 사정을 금지하고 위반시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
http://m.pressian.com/m/m_article.html?no=142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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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익 - 위키백과,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 육군 중장
홍사익
洪思翊 | |
|---|---|
| 출생일 | 1889년 3월 4일 |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안성군 소촌면 내소촌 (現 대한민국 경기도 안성시 대덕면) |
| 사망일 | 1946년 9월 26일(57세) |
| 사망지 | 필리핀 마닐라 포로수용소 |
| 국적 | 일본 |
| 본관 | 남양(南陽) |
| 부모 | 홍이유(부) |
| 배우자 | 조숙원(사별), 이청영(재혼) |
| 자녀 | 홍국선(장남) 홍현선(차남) 홍달선(삼남) |
| 친척 | 홍사용(형) |
| 복무 | 대한제국 육군 |
| 복무기간 | 1909년~1910년 1914년 5월 28일~1946년 9월 26일 |
| 근무 | 도쿄 제1사단 제1연대 일본군 보병 제1연대 중대장 관동군 사령부 참모부 제3과 |
| 최종계급 | 대한제국 육군 참위 일본군: 중장 |
| 지휘 | 일본군 보병 제3연대 대대장 일본군 보병 제108여단 여단장 일본 남방군 총사령부 병참총감 |
| 주요 참전 | 중일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

홍사익(洪思翊, 1887년 2월 2일~1946년 9월 26일)은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의 군인이며,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 육군 중장을 지냈다. 조선인 출신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일본 육군대학 출신이며,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에 필리핀 마닐라 국제 군사 재판에서 전범으로 처형되었다.
과거 제도에 뜻을 두었다가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족숙 홍중유(洪中裕)의 권고로 군인이 되기로 결심, 1905년(광무 8년) 9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1909년(융희 3년) 9월 졸업, 대한제국 육군 참위로 임관되었다가 1907년 군대 폐지로, 1909년 9월 국비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 3학년에 편입학했다.
1912년 12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입학해 1914년 5월 28일 제26기로 졸업하고 견습사관을 거쳐 같은 해 12월 소위로 임관하여 육군 중장까지 올라갔으며, 집안이 양반 출신이다.그는 태평양 전쟁 당시 창씨개명을 거절하였으나 별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1944년 남방총군 사령부 병참감으로 부임하여 연합군 포로수용소장을 겸직, 연합군 포로를 감독하였다. 일본 패전 후에도 계속 일본군에 남아있다가 1946년 처형되었다. 2차대전 종전 이후 그는 포로수용소의 지휘관으로서 연합군측 포로에 대한 부하들의 잔학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연합국의 전범법정에 섰으나, 변명을 거부하고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한국에서는 이승만의 미움을 받아 아들이 연좌되어 한국은행에서 파면되었지만, 1980년대 언론인 송건호에 의해 재평가, 재조명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홍우원의 후손이다. 경기도 안성 대덕 출신으로, 본관은 남양 홍씨이다.
백철에 의하면 그가 화북지구 사령관 재직 당시, 화북 형대의 일본 관헌 이나 일본 거류민들은 다른 데서처럼 조선 사람을 반도인이라 부르고 함부로 다루지는 못하였었다 한다.
생애
생애 초기
출생과 가계
1887년 2월 2일 경기도 안성군 소촌면 내소촌(현 안성시 대덕면 소현리 소촌마을 부락)에서 자작농 홍이유(洪理裕)와 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년대는 불분명하여 1887년생 설과 1889년생 설, 1890년생 설, 1886년생 설 등이 있다. 또한 생일도 2월 2일생 설과 3월 4일생 설이 있다. 호적상 생년월일은 1887년 2월 2일이고, 묘비문에 기록된 생년월일은 1889년 3월 4일이다.그의 집안은 토홍계 후손으로, 가난하지만 양반 집안이었다고 한다. 그의 선조는 조선 숙종 때의 남인 붕당의 지도자였던 남파 홍우원이었다. 또한 중추원 참의를 지낸 정교원과 사돈관계이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몰락하여 아버지 홍이유의 대에는 농민으로 전락했다.
명성황후의 여동생의 아들인 이종조카 정갑진이 홍사익의 사촌 처남이었다. 그러나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20년 가까이 차이나는 맏형 홍사용(洪思容) 손에 양육되었다.
어려서 한학을 배웠으며, 1903년(광무 6년) 용인군 출신 조숙원과 결혼하였다. 결혼 직후 그는 출세의 길을 찾아 한성부로 상경을 했다. 그는 한자 지식과 성리학에 능했는데, 후일 송건호는 한학에도 대단히 유식했던 모양이다. 따라서 한학이 인격형성의 기반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평하기도 했다. 그는 한학 수학 중 사서삼경을 모두 암기했다 한다.[1] 소년시절 과거 시험에 뜻을 두었으나 그가 소년일 때 과거 제도가 폐지되었으므로, 그는 집안 족숙 아저씨뻘 되는 정3품 육군무관학교 교관인 당시 대한제국 육군 정위(正尉) 홍중유(洪中裕)의 권고로 군인이 될 결심을 하게 되었다.
1905년(광무 8년) 9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에 재학 중 능력을 인정받고 1909년(융희 3년) 9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제국 육군 참위로 임관되었다. 그러나 그가 육군무관학교 2학년 재학 중이던 1907년 7월 30일 대한제국 군대는 사실상 폐지되었고, 1909년 9월에는 한국통감부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폐지해버려서 같은 달 9월 그는 일본으로 유학, 도쿄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陸軍中央幼年學校) 예과 3학년으로 편입학하게 된다.
일본 유학
편입과정에서 이응준, 김석원과 함께 국비 유학생으로 뽑혔는데, 이는 황족인 영친왕이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로 유학을 떠나게 되면서 유학 동반자로 선발된 것이다. 그밖에 홍사익의 동기로는 지청천, 신태영, 소설가 염상섭의 형 염창섭 등이 있었다. 한편 그는 학비 조달에 애로사항을 겪었고, 송건호는 그가 직접 일을 해서 학비를 조달했다 한다. 송건호에 의하면 그는 일하며 배우는 것으로 일상생활을 삼았다 한다. 그는 아르바이트와 노동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하였다. 그러나 1909년부터 그는 기호흥학회에 매달 1환(一圜)씩의 성금을 기부하였다.
그의 학교 성적은 같은 교육구대에서는 상위권이었으며, 학업성적은 전교생 20등 안팎이었다. 육사 동급생 중 홍사익은 석차가 22등이었고, 이응준이 다음으로 32등이었다.[2] 일본 육사 재학 당시 그는 동아리 활동으로, 주로 문학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그는 작문을 잘 하였는데, 그의 글재주가 뛰어나다 하여 그가 지은 작문과 시는 생도자격으로 일본 천황 앞에서 직접 낭독하기도 했다. 그의 동기들은 그에게 시인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1910년(융희 4년) 10월 2일 한일 합방 조약 당일, 조선의 국권 피탈에 충격받은 조선인 유학생인 홍사익과 그의 동기 이응준, 이청천, 1기수 아래 김석원,3기수 선배 김광서 등 조선인 후보생들은 그날 밤 아오야마 묘지에 모여 향후의 대책을 논의했다. 그 중 어떤이는 분개하여 즉시 휴학, 자퇴하자 하였으나 홍사익은 아직 배울 것이 많으니 배우고, 본받을 것은 본받아 보다 많은 실무와 실전을 쌓고 그만두자고 하였다. 회의에서 이들은 의무 복무기간인 2년~4년만 채우고 그만두기로 하였다. 그러나 홍사익은 1914년과 1916년 다른 동기, 후배들이 그만둘 때 그만두지 않았다.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 예과 3학년 편입한 이후 1912년 5월 졸업했다. 그리고 1912년 12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입학해 1914년 5월 28일 육사를 제26기로 졸업하고 견습사관을 거쳐 같은 해 12월 일본군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그와 같은 동기생으로 함께 졸업한 한국인은 13명이었는데, 이 가운데는 독립운동가 지청천과, 이응준, 신태영, 조철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3] 일본육사 수학 당시 그는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였다. 1912년 12월 일본육사 입학 시 제26기생 766명 중 조선인은 홍사익을 포함 13명이었고, 홍사익은 조선인 학생 중에서 성적이 1위였다. 1914년 5월 일본육사 26기생 739명 졸업 당시 홍사익은 전교 22등이었고, 군번은 보병 22번 번호를 부여받았다.
군인 활동
엘리트 군인으로 성장

육사 졸업성적이 매우 우수해 고위장교로 출세할 수 있는 엘리트코스인 속칭 '아카사카의 보 1'인 도쿄 제1사단 제1연대에 배속되었다. 1918년 7월 일본 제국 육군 중위로 진급했다. 1920년 12월에는 일본 육군의 최고급 엘리트 양성 코스인 일본 육군대학교에 제35기로 입학해 3년간 수학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26기 졸업한 동기생 742명 중에서 육군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66명에 불과한데 일제강점기 기간동안 일본 육군대학에 입학한 조선인은 영친왕, 이건, 이우와 홍사익 네 명 뿐이다.[4][5] 이들 4명 가운데 3명은 모두 왕족이므로 평민 출신은 홍사익 단 한 명이었다.[6]
이른바 왕공족 출신이 아닌 한국인 장교로서 이 엘리트 코스를 거친 사람은 홍사익 한 사람 뿐이었다.[7] 그가 뒷날 장관급(將官級) 장교의 대열에 끼이게 된 것도 바로 육대 출신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7] 1923년 11월 29일 육군대학을 수료하였다. 원대인 보병 제l연대 로 복귀한 뒤, 1924년 3월 대위로 승진, 중대장으로 복무했다.[7]
1923년 9월 일본에서 관동 대지진이 발생하자, 성난 이재민들 사이에서는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타거나 음모를 꾸민다는 루머가 확산되었다. 홍사익의 가족은 은신처에 숨어 화를 모면하였다.[8] 이는 그대로 동아일보에 보도되었다.
1924년 3월 육군 대위로 진급해 일본군 보병 제1연대 중대장을 지냈다. 1925년 5월 육군참모본부에 배속되어 전쟁사 편찬과 관련된 업무를 맡았다. 1926년에는 육군 소좌(소령)로 진급하고 1929년 일본 육군 보병 제3연대의 대대장으로 복무했다. 1931년 8월 육군보병학교 교도대대 교관이 되었다. 보병학교 교관으로 재직 중에 만주사변(滿洲事變)이 터지자 그는 만주 중앙육군훈련처 교관으로 부임하였다. 만주 육군중앙훈련처 교관으로 있을 때, 홍사익은 조선인들도 장교에 응시, 임관할 수 있도록 지원 제도를 고쳤다. 1933년 4월 관동군사령부에 배속되어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군 고문으로 파견되었다.
만주국이 장교 요원 훈련기관 목적으로 설치한 육군중앙훈련처(펑텐군관학교)를 지도, 감독했다. 특히 만주국군 고문으로 있는 동안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 청년들의 만주국군 장교 진입을 제도화했다. 중앙육군훈련처의 입학 자격을 일본계, 몽골계, 만주계로 제한해 놓은 규정을 일부 고쳐 우선 현역으로 만주국군에 들어와 있던 조선인 사병들이 장교가 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고, 이듬해 군관 학생 입학대상에 조선계를 포함시켜 모집공고를 내도록 조처했다. 1934년 1월에는 훈4등 서보장을 받았다.
1934년 8월 일본군 육군 중좌로 진급하면서 만주 주둔 일본군 관동군사령부 참모부에서 군무했다. 이후 1936년까지 관동군 사령부 참모부 제3과에 근무하며 재만조선인을 일본 국민의 일부로서,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에 적극 협력하도록 하는 사무를 담당했다. 그는 지휘관으로 파견될 때마다 일본어와 한국어로 두번 취임인사를 했다. 그의 취임인사 내용은 나는 조선인인 홍사익이다. 지금부터 천황폐하의 명령에 의해 지휘권을 가진다. 이의가 있거나 불복하겠다는 자가 있으면 나오라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조선인임을 숨기지 않았다.
중일전쟁기 활동과 화북으로 부임
1936년 8월 일본 육군보병학교 연구부 주임 겸 교육대 교관으로 전근했고, 이듬해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을때인 11월 육군보병학교 군견육성소장을 겸임했다. 같은 해 12월 중지나 파견군사령부에 배속을 받아 중국전선으로 파견되었다. 상하이로 부임 직후, 홍사익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추적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미 임정 수뇌부는 윤봉길 의거가 있은 뒤, 이미 상해를 떠나 항주·진강·난징 등을 전전하고 있었고, 중·일 전쟁이 터진 뒤에는 장졔스 정부를 따라서 다시 대이동을 계속, 한커우를 거쳐 홍사익이 상해에 부임했을 때는 후난성 창사(湖南省艮沙)에 도착했다.[9] 같은 달 관동군 근무시절의 공로를 인정받아 만주국이 주는 훈3위 '경운장'이라는 훈장을 받았다.
1938년 2월 중지나파견군 특무부원 신분으로 상하이에 파견되었고, 3월 육군 대좌로 진급했다. 같은달 중일전쟁 시기 중 일본과 중국 측의 임시 협상단체인 흥아원(興亞院) 조사관으로 발령받아 상하이의 화중연락부에서 근무했다. 흥아원이란, 중일전쟁 당시 중국 현지에서 중국과 교섭을 담당하던 일본의 특수기관을 말한다. 이 기관은 원래 행정에 해당되므로 문관이 수행해야할 업무지만 일본 육군내 황도파가 주도한 1936년 2.26 쿠테타 사건으로 정치에 개입하면서 변질되어 육군 현역 장교가 정보수집과 정치적 공작을 전담하는 특무기관 역할을 수행했다. 여기서 홍사익은 흥아원 제1국장으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공작활동을 했다.
1940년 8월 유수(留守) 제1사단 사령부를 거쳐 1941년 3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고, 북지(北支) 파견사령부에 배속되어, 중국 허베이성에 주둔한 북지사령부 예하 보병 제108여단 여단장으로 부임하였으며, 중국 화북일대의 중국 팔로군 제18전방총사령부(제18전총)를 상대로 전투를 치렀다. 여기서 중국 팔로군 제18전총에는 윤세주 등이 이끄는 조선민족혁명당 산하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당시 홍사익은 108여단을 이끌고 중국 팔로군과 교전하였으며, 태항산 산맥 일대와 주변 지역에서 치열한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특히 1941년 12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팔로군과 함께 허베이성 타이항산맥(태항산맥)의 ‘호가장 전투’와 인근의 '형태 전투'에서 일본군과 치열하게 교전했었다. 이 전투로 조선의용대 대원인 손일봉, 최철호, 박철동, 왕현순 등 4명이 전사하고 김세광 대장과 김학철 대원이 총상을 입고 일본군 포로가 되었다.
백철에 의하면 그가 화북지구 108여단 여단장이자 화북지구 사령관으로 있을 때, 화북지역의 조선인 이민자들은 오히려 그의 덕에 일본인들이 함부로 대접하지 못했다고 한다. 백철은 그가 108 여단 의 여단장 으 로 화북 태항 산 전투 에 임한 것은 1941년 3월에서 1942년 4월까지이다. 이 때 형대에 사령부를 설치한 일본군 여단의 여단장 은 조선인 홍사익 소장 이었으므로, 형대 에 거류 하는 조선 사람들은 공연히 코가 우뚝 하였었다. 아닌게 아니라 형대의 일본 관헌 이나 일본 거류민 들 도 다른 데서처럼 조선 사람 을 반도인이라 부르고 함부로 다루지는 못하였었다. 홍사익 각하의 간접적 인 덕택임이 분명했다는 것이다. 백철은 그를 각하 라고 특별히 존칭을 붙이기도 했다.
1942년 4월부터 1944년 3월까지 일본군 전차대, 경장갑차대 조종 및 사격훈련을 담당하는 일본 육군 공주령학교 간사(부교장)로 근무했다. 이때 그는 조선에서의 징병제 실시를 가리켜 일본 국민이 될 기회를 얻는 것이며, 천황폐하를 위한 보국(報國)의 기회라는 주장을 논설과 담화로 펼쳤다.
태평양전쟁기 활동
태평양 전쟁 중에 중국에서 여단장 및 일본 육군 공주령학교 부교장 등으로 근무하다가, 1944년 3월 필리핀에 주둔한 일본 남방총군(南方總軍) 총사령부의 병참총감에 임명되었고, 약 10개월간 연합군 포로수용소 소장을 겸직하면서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했다. 같은 해 10월 일본군 육군 중장으로 진급했다. 그의 필리핀 부임이 보도되자, 필리핀으로 가기 전 매일신보의 기자 겸 일본 도쿄특파원 김을한이 도쿄의 숙소로 찾아와 홍사익에게 이번이 마지막 기회이니 일본군 탈영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홍사익은 내가 탈출하여 독립군에 가담하지 않는 것은 나를 알아준 일본에 대한 의리 때문만이 아니다. 지금 조선인이 수십만 명이나 동원되어 있는데, 명색이 조선인으로 최고지위에 있다는 내가 만일 배신을 한다면 병사들은 물론 징용된 노무자들까지 보복을 받을 것이다. 나만을 생각해서 그런 경솔한 짓을 할 수가 없다며 거절했다.
한편 그는 여러 번의 일본군 탈영 권고와 한국 광복군 측의 영입 제의에도 불구하고 거부하고, 탈주를 거부했다. 홍사익은 광복군 사령관인 지대형(이청천의 본명), 참모장 이범석 등으로부터 계속 중경 광복군으로 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비밀로 함구하고 있다가 아들 홍국선에게 밝혔다. 그가 북지나 사령부의 여단장으로 있을 때 이청천, 이범석 등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는 그때마다 이청천, 이범석의 제의를 물리치고 나는 이 제복에 충성하고 싶다고 반복하였다. 송건호에 의하면 그의 아들 홍국선 역시 홍사익의 필리핀 부임이 확정되자, 아버지 홍사익에게 광복군으로 갈 것을 여러번 권고했지만 홍사익은 거절했다 한다.
종전 후
체포와 투옥

1945년 8월 10일 일본의 패망과 동시에 조선 해방 결정이 내려지자, 필리핀 루손섬 산중에 있던 그의 부관은 당신의 조국 조선이 독립된 것을 축하한다는 인사하였지만, 그는 표정 변화 없이 나는 아직 제복을 입고 있다. 제복을 입고 있는 한 나는 이 제복에 충성하고 싶다고 답했다.
홍사익이 속한 필리핀 주둔군은 1945년 8월 루손섬 산악지대에서 고립된 상태로 유격전을 벌이다가 패전을 맞았다. 홍사익은 전쟁이 끝나면 고향(경기도 안성)에 돌아가 중학교 수학 교사로 조용히 살고 싶어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전범으로 체포되어 필리핀 전범재판에 회부된다. 그 이유는 1944년 필리핀에서 포로수용소 소장으로 근무했을 때, 1944년 12월 필리핀에 주둔하고 있던 남방총군 제14방면군 병참감 재직 시의 연합군 포로에 대한 불법처우와 포로학대, 살해의 원인 제공혐의 때문이었다.[10] 1945년 12월 19일에 다른 일본군 장성 22명과 함께 체포된 그는 마닐라 포로수용소에 투옥되었다. 1946년 1월 7일부터 재판에 들어갔으며, 이후 포로수용소 관련 고소 고발이 10여 건에 달했다. 그는 연합군 포로수용소 소장으로 1년간 재직하였으나, 포로수용소의 책임자로서 연합군측 포로에 대한 부하들의 학대, 인권유린 행위에 대해 규탄받았다. 그는 다른 역대 포로수용소장들과 달리 홀로 책임을 지고 연합국의 군사재판정에 섰지만, 그러나 자신에 대한 변명을 거부하고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사형선고와 최후
일본 전쟁범죄자를 처벌하는 마닐라 국제 군사 재판에서 '포로학대 살해' 죄목으로 B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1946년 4월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무렵 당시 국내에서는 일본 육사 동기생들을 중심으로 '홍사익 구명운동' 등을 비롯해 각 언론사에서도 구명운동 등 벌였으나 무위로 끝나고[10], 그의 아내와 아들 내외는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를 찾아가 선처를 호소하였으나 거부되었다. 안성군 주민들 또한 홍사익 사면 탄원서를 올렸지만[11], 이 역시 묵살되었다.
형량이 과도하다는 등 일본 극우 세력의 여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46년 9월 26일 필리핀 마닐라 전범수용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일본군 군복을 입은 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10] 그는 항소를 포기하고 최종상고심에서 사형을 받았다. 사형 판결이 확정되고도 그는 나는 갑종에 합격했다고 외쳐 다른 피고와 방청객이 침묵했고, 일본어 통역관에게서 내용을 들은 미군 군법무관들이 놀랐다. 일본어로 갑종합격과 교수합격이라는 단어의 발음이 같은 점을 이용한 풍자였다. 홍사익 외에도 당시 15명의 조선인 일본군 고위 장교들은 사형 처분을 받고, 그와 함께 당일 교수형과 총살형에 각각 처해졌다. 그가 최후로 참관인들에게 부탁한 것은 구약성서 시편 51편의 낭송이었다고 한다.[12] "…내가 죄악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12]"
그는 체포 직후, 일본 국적을 포기하는 것은 어떠냐는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하였다. 홍사익은 태평양 전쟁 종전 당시 BC급 전범 가운데 유일하게 일본군 내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한국인이었다.[13] 생전에 막사와 진중에서 쓴 몇편의 시와 수필, 기행문이 있었지만, 일본군을 미화할 수 있다는 이유로 조선 주둔 미군과 필리핀 주둔 연합군에 의해 전부 압수되어 소각당했다.
사후
당시 일본은 패전 직전이었고, 작전권이 없는 참모부대인 보급부대 지휘관인 그가 B급 전범으로 몰려 사형당한 것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이 나타났다. 이후 일본에서는 홍사익 평전과 홍사익의 재판 처형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논설이 종종 출간되었다. 홍사익의 시신은 미군의 비밀지령 293호에 의해 다른 일본군인 및 일본군 협력자의 시체들과 함께 화장되었고, 유골 가루는 비밀리에 미해군에 의해 바다에 뿌려졌다.
그의 유품 중 손목시계와 저금통장, 안경집 등은 일본군 측 변호인을 통해 일본 육군이 보관하고 있다가 1947년 6월 19일 일본 외무성이 그의 아들 홍국선에게 전달했다. 순종이 내린 군인 칙유 칙서와 일본 황태자 다이쇼에게 선물로 받은 은 손목시계는 후일 그의 아들 홍국선에게 전달되었다. 그의 다른 유품은 미군 헌병장교 이반 케이가 받았는데 자신의 아들에게 전해달라고 건넨 시계와 칙서였다. 퇴역 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살던 이반 케이는 이웃에 거주하는 일본 사람에게 이 성서와 시계의 유족을 찾아서 주라고 맡겼다. 그 일본인의 여러번의 수소문 끝에 그의 아들 홍국선에게 전달되었다.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후처 이청영은 모든 공직에서 해임되고 사립학교 교사 채용도 번번히 거부당했다. 이청영은 지인을 통해 일본 내의 남편의 육사 동기, 선후배 및 남편의 지인들에게 편지 서신과 연락을 하여, 생활고와 일본 혹은 미국으로의 망명 도움을 호소하였다. 이청영의 탄원서와 홍사익의 육사 동문들의 연명 탄원서는 일본 총리 요시다 시게루에게도 전달되었다. 이청영은 홍사익의 일본육사 동문들 및 지인들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망명하여 생활하다가, 아들 홍현선이 유학 중인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홍사익 외에도 그와 같이 일본군 신분으로 체포된 90여 명의 한국인 일본군 장교들은, 1945년 12월 19일부터 1952년 4월 6일까지 필리핀 육군교도소와 일본 도쿄의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났다. 이들 중 40명은 1950년 이전에 석방되었지만, 50여 명은 필리핀 육군교도소에서 일본 동경 스가모 형무소로 이감되어 계속 복역하였다. 이들 종신형을 받은 홍진묵(洪鎭默) 외 9명의, 징역 20년형을 받은 윤동구(尹東구)외 4명, 징역 18년형을 받은 박철수(金喆洙)외 3명, 징역 15년형을 받은 박창호외 14명, 징역 12년형을 받은 정봉길(鄭奉吉)외 5명, 징역 10년형을 받은 조수현(趙壽鉉)외 7명, 그밖에 병이 있어 필리핀 군병원에 후송중인 복역자 2명 등 50여 명의 한국인 장교들은 1952년 4월 6일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임용순(任容淳)외 12명의 국회의원의 사면, 탄원 석방으로 풀려나 귀국했다.
1966년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14]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군인 부문에 포함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후일 그의 묘는 유품을 담은 빈 관과 함께 부인 조씨의 묘 옆에 조성되었고, 비석은 그 후 1979년 4월에 세워졌다.
사상과 신념
그는 조선인이 일본에 협력하면, 나중에 조선인들도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 협력하면 조선인도 일본인과 동등한 국민으로 대접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들 홍국선이 중고등학교 시절 조센징이라는 이유로 이유없는 멸시와 조롱, 따돌림을 당해 괴로워했고 아버지에게 어째서 우리들은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합니까라며 호소했다.
그러자 홍사익은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또 조급히 해결되리라고 생각할 수도 없는 문제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 기회에 조사해왔지만 일본인과의 관계는 아일랜드인과 영국인 사이와 매우 비슷한 문제가 있다. 따라서 아일랜드인의 방식이 우리에게 참고가 될 것이다. 아일랜드인은 영국에서 어떤 취급을 받더라도 절대로 아일랜드인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를 소개할 때는 반드시 또렷하게 나는 아일랜드인인 아무개 올시다라고 말한다. 너도 그렇게 하여 어떤 때에나 반드시 나는 조선사람 홍국선입니다라고 말하여 결코 자기가 조선 사람이라는 말을 생략해서는 안된다'라고 답했다.
그는 아버지가 일본군 고위 장교로 근무하는 것에 반감을 품는 이들이 있다는 아들 홍국선의 질문에 그는 일본에 협력할 것은 협력하여 동등한 국민임을 입증하는 것이 조선인의 권리 획득에 도움되는 길이라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창씨개명 거부
정미7적으로 꼽히는 이병무와 일본 육군 중장을 지냈던 홍사익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15] 홍사익은 조선식 성명을 지키고, 조선인임을 인정하더라도 국민, 시민이 될 수 있으며, 다민족 일국가를 이루는 것이 강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조선총독부 역시 그들에 대해 창씨개명을 권고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일제가 이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하지 않은 것은 창씨개명이 강제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도구로 삼기 위해서였다[15]는 시각도 있다.
평가와 비판
그는 돈 욕심이 없었고, 공직생활 중 뇌물을 받지 않고 재물이 없어 그의 가족은 가난하였다. 홍사익은 '일본 제국에 충성을 다한, 개인적으로는 훌륭하고 청렴결백한 인물'이라는 평가가 있으나[16], 태평양전쟁 말기, 필리핀에서 포로수용소장으로 있으면서 연합군 포로들의 학살을 묵인했다는 점에 대한 비판이 있다.
언론인 송건호(宋建鎬)는 그를 가리켜 "그는 평생동안 이재에는 무관심했던 사람"이라 평하기도 했다.
송건호는 그에 대한 비판을 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송건호는 일본의 한국민족에 대한 식민통치는 한국민족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정책으로 일관되어 있었으며 한국인을 한국민족이라 부르지 않고 ‘반도인’이라고 했으며 일본을 ‘내지’라고 추켜세우는 판이었으므로 한국인으로서는 같은 동족이 중장까지 승진한데 대해서 오히려 민족적 긍지를 높여주는 구실을 했으며 홍장군을 친일파로 욕하고 싶은 심정은 아니었다. 따라서 일제시대의 홍장군을 보는 눈과 해방후에 홍장군을 평하는 가치판단은 묘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1962년 8월 경향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을 비롯한 한국의 언론에는 홍사익 사망일 직전 그를 추도하는 칼럼, 기사를 송고했지만 대부분 압수, 검열삭제되었다.
가족
첫 번째 부인으로 조숙원이 있었지만, 조숙원은 오랜기간동안 병상에 누었다가 1943년에 병사했다고 한다. 첫째 아들인 홍국선은 와세다 대학 출신으로 광복 후 한국은행에 근무하다가 1984년에 고향 경기도 안성에서 죽었고, 오늘날 안성에는 홍씨 문중산에 「남양공홍사익 배한양조씨지묘」라는 오석 묘석이 서 있는데 시신 아닌 유품을 묻은 것이라 한다.[17]
후처로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 출신의 이청영이라는 부인이 있는데, 그녀 소생의 둘째 아들 홍현선이 있다고 한다. 전시 체제 때는 일본에 거주했었으나 일제 패망 이후에는 국내로 돌아와 거주했지만, 이승만 대통령 이하의 대한민국 정부는 홍사익 가족들에 대해 반기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한국전쟁 후 '친일파의 가족'이라는 주변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 부인 이청영은 미국으로 떠나려고 했을 때, 여비가 없어서 생각다 못해 일본 수상에게 편지를 보냈다. 부인의 편지를 받고 당시 일본 수상이던 요시다 시게루는 곰곰이 생각하다 비서를 불러 '100만엔을 송금해 주라.'고 했다고 한다. 홍사익 부인은 그 돈으로 미국으로 떠날 수 있었다고 한다. 둘째 아들 홍현선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유학했고, 부인 역시 아들하고 같이 로스엔젤레스에서 살다가 1978년 교통사고로 죽었다.[17]
- 아버지: 홍이유(洪理裕)
- 형: 홍사용(洪思容, 1870년~?)
- 누나: 남양 홍씨
- 형: ?
- 부인: 조숙원(趙淑元, 1885년~1943년)
- 아들: 홍국선(洪國善, ?~1984년)
- 부인: 이청영(李淸榮, 1907년~1978년)
- 아들: 홍현선(洪顯善, ?~1978년)
- 아들 홍달선(洪達善)
일화
그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떳떳히 조선인임을 밝히면서도 일본군에서 장성까지 오른 인물이었는데 이는 왕족이 아닌 자로서는 유일한 사례다. 물론 여기에는 다른 설명도 있어서,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일제가 '창씨개명이 강제적인게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도구'로 그의 존재를 이용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존재하기도 한다.[18]
이승만은 그를 유독 미워하였다고 한다. 홍사익의 아들 홍국선은 일본에 유학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은행에 근무하다가 조선은행의 후신인 한국은행에 근무하였다. 그러나 홍국선이 한국은행에 근무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해고하라는 명령을 내려 파면당했다.
그는 박승환(朴承煥)과 친일파로 알려졌던 김태덕(金泰德)의 딸을 중매시킨 뒤, 결혼까지 주선해 주었다.
같이 보기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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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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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윤형 (2007년 3월 7일). “B·C급 전범 히로무라 가쿠라이 “나는 억울하다””. 《한겨레21》 (제6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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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2.ktrwa.or.kr/new/new_webzine/index.php?idx=440&schYear=2007&schMonth=5 보관됨 2013-12-12 - 웨이백 머신 군자는 궁해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 전범(戰犯) 홍사익 중장의 의연한 최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