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15

1945년 남한에서 | 파냐 이사악꼬브나 | 알라딘

1945년 남한에서 | 파냐 이사악꼬브나 | 알라딘
1945년 남한에서 - 어느 러시아 지성이 쓴 역사현장기록
파냐 이사악꼬브나 (지은이)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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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부터 1946년 중반기까지 남한 사회를 분석한 관찰기이다. 해방 후 남한내 상황과 미군의 진주, 미 군정청의 통제확립, 특히 다가오는 한반도 분단과 관련하여 향후 발전방향을 위해 다투었던 정치세력들의 투쟁 등이 상세히 조명되어 있다.


목차


제1장 전민족적 위기의 고조
제2장 해방
제3장 모스끄바 3상회의 이후의 남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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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지성인이 쓴 역사현장기록. 일제 식민치하의 서울에서 주일본 소련 총영사관의 부영사로 체류했던 아나똘리 이바노비치 샤브쉰의 부인이 저자다. 제 2차 세계대전 시기의 조선모습과 해방으로 환호하는 조선, 평양으로의 여행, 모스크바 3상회의 이후 모습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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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001. <전민족적 위기의 고조>
002. 제2차 세계대정 시기의 조선
003. 조선혁명의 전위세력들
004. <해방>
005. 환호하는 조선,혁명의 심화-남조선 인민위원회 창설
006. 이중 권력
007. 미군 진주,83병으로의 진격
008. 정치세력의 번위 설정
009. 여러사지 것들에 대하여

010. 평양으로의 여행.북조선의 처녀지
011. 서울에서 공연된 고골리의 [검찰관]과 고리끼의 [어머니]
012. 뜨거운,뜨거운 12월
013. <모스끄바 3상회의 이후의 남한>
014. 대중적인 지지운동,반동세력들의 기만
015. 여러가지 것들에 대하여
016. 남한 민주주의 민족전성의 형성
017. 공동위워회의 사업과 그 실패, 반동세혁들의 우분별
018. 1946년 폭우가 내리기 직전의 여름
019. 반동세력들이 장애를 피해가다-'중도파'에의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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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남한에서: 요약과 평론

1. 요약: 해방 공간의 소용돌이, 소련인의 눈에 비친 남한

<1945년 남한에서: 어느 러시아 지성이 쓴 역사현장기록>은 1940년부터 1946년까지 서울 주재 소련 영사관에서 근무했던 파냐 이사악꼬브나 샤브쉬나가 해방 직후인 1945년부터 1946년 초까지 남한 지역, 특히 서울에서 전개된 격동의 역사적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기록한 회고록이다. 저자는 프라우다 지의 특파원 출신이자 동양학자로서, 미 군정이 들어선 38선 이남의 정치적·사회적 격변을 소련인의 시각에서 날카롭고도 편향되게 포착해 냈다.

책은 크게 세 가지 핵심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일의 감격과 그 직후 남한 민중의 역동적인 움직임이다. 저자는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에서 벗어난 서울 시민들의 환호와 자발적인 자치 조직인 조선인민공화국(인민위원회)의 건국 준비 활동을 상세히 묘사한다. 특히 일제 경찰의 통제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공백기 속에서도 조선인들이 보여준 자치 능력과 열망을 높이 평가한다.

둘째, 1945년 9월 미군의 진주와 그에 따른 남한 정치 지형의 급변을 다룬다. 저자는 미군이 진주하면서 조선인들의 자발적 자치 기구였던 인민위원회를 부정하고, 일제강점기 부역했던 친일파와 경찰 관료들을 재등용한 조치에 대해 강한 비판을 쏟아낸다. 미 군정의 맥아더 선언문이 가져온 실망감과 3주일간 일본 경찰의 통제 하에 방치되었던 조선인들의 조심스러운 반응을 지식인들의 증언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한다.

셋째, 신탁통치 파동을 둘러싼 좌우익의 극심한 대립과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다. 저자의 남편인 아나톨리 샵신(부영사)이 남한 내 공산주의 세력 및 박헌영 등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던 만큼, 책은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익 세력의 투쟁을 정당화하고 옹호하는 데 상당한 분량을 할애한다. 반면, 이승만과 김구를 필두로 한 우익 민족주의 세력과 미 군정의 결탁을 남한 민중의 염원을 배반한 행위로 규정하며 비판적 어조를 유지한다.

2. 평론: 낯선 편파성이 주는 사료적 가치와 이데올로기적 한계

파냐 이사악꼬브나의 <1945년 남한에서>는 해방 직후 남한 정세를 바라보는 기존의 미 군정 문서나 국내 민족주의 계열의 기록물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해방 공간을 직접 체험한 서구인이 극히 드물었던 상황에서, 적성국 지위를 유지하던 소련 영사관원의 눈으로 포착한 1945년 가을 서울의 질감은 대단히 구체적이고 생생하다.

이 텍스트가 지닌 가장 큰 미덕은 미 군정의 초기 실책과 남한 내 친일 청산 실패 과정을 제3자의 시선으로 통렬하게 폭로했다는 점이다. 조선 민중이 미군을 맞이할 때 품었던 일말의 경계심과 조심성을 묘사한 대목이나, 자치 기구가 미 군정에 의해 해체당하는 과정의 긴장감은 당대 남한 사회가 느꼈던 당혹감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식민지 지배기구가 해방 후에도 고스란히 유지되는 모순을 지적한 저자의 시선은 매우 날카로우며, 이는 오늘날 한국 근현대사를 재인식하는 데 유용한 보완적 시각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책은 볼셰비키 혁명에 대한 맹목적 신뢰와 러시아 민족주의라는 뚜렷한 프레임에 갇혀 있다는 치명적인 한계를 드러낸다. 저자의 관점은 극단적으로 편향되어 있다. 소련의 북한 진주와 정책은 무조건적인 <해방자>의 시선으로 미화하는 반면, 미 군정과 우익 세력의 행보는 철저한 <약탈자>이자 <방해꾼>으로 재단한다. 특히 신탁통치 파동 당시 남한 민중의 자발적인 반탁 운동을 우익 세력의 기만이나 선동으로만 치부하고, 좌익의 찬탁(삼상회의 결정 지지) 노선만을 정당한 것으로 서술하는 대목은 소연방의 대외 정책을 대변하는 프로파간다적 한계를 명확히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순수한 객관적 기록>으로 읽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역설적으로 그 <낯선 편파성> 덕분에 가치가 빛나는 작품이다. 냉전의 서막이 올랐던 1945년 남한이라는 공간이 소련 지배층과 지식인들에게 어떻게 인식되었는지, 그리고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역사적 현장을 재해석했는지 추적할 수 있는 훌륭한 텍스트다. 독자는 저자의 이데올로기적 장막을 한 꺼풀 걷어내고, 그 아래 숨겨진 해방 공간의 생생한 공기와 민중들의 뜨거웠던 에너지를 입체적으로 읽어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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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냐 이사악꼬브나 샤브쉬나, <1945년 남한에서> 요약+평론

파냐 이사악꼬브나 샤브쉬나의 <1945년 남한에서: 어느 러시아 지성이 쓴 역사현장기록>은 <식민지 조선에서>의 후편에 해당하는 책이다. 한울판 서지에 따르면 1996년 3월 8일 출간되었고, 김명호가 옮겼으며, 288쪽 분량이다. 책은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부터 1946년 중반까지 남한 사회의 역사적 상황, 미군 진주, 미군정청의 통제 확립, 그리고 당시 정치세력들의 투쟁을 다룬다. 목차도 “전민족적 위기의 고조”, “해방”, “모스크바 3상회의 이후의 남한”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핵심은 1945년 8월 15일을 단순한 “해방의 기쁨”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샤브쉬나에게 해방은 곧 새로운 권력투쟁의 시작이다. 일본 제국은 패망했지만, 조선인은 곧바로 독립국가를 세우지 못했다. 남한에는 미군이 진주했고, 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했다. 조선 내부에는 좌익, 우익, 중도파,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친일 관료, 지주, 노동자, 농민, 청년, 여성단체가 뒤섞여 있었다. 이 책은 바로 그 혼란스럽고 격렬한 시간을 러시아 지식인의 눈으로 기록한다.

저자가 보는 해방 직후 남한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권력의 공백”이다. 일본 총독부의 지배가 무너졌지만, 그 자리를 조선인의 자주적 정부가 곧바로 차지하지 못했다. 곳곳에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고, 노동자와 농민은 식민지 지배의 청산과 사회개혁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러한 자생적 조직을 신뢰하지 않았다. 미군정은 질서 유지와 행정 연속성을 중시했고, 그 과정에서 상당수 기존 관료·경찰·기술 행정 인력을 다시 활용했다. 샤브쉬나는 이 점을 매우 비판적으로 본다. 그의 눈에는 해방된 남한에서 친일 세력의 청산이 지연되고, 민중적 개혁 요구가 억제되는 장면이 선명하게 들어온다.

이 책에서 미군정은 중요한 비판 대상이다. 저자는 미군이 일본 제국의 패망 이후 남한에 들어왔지만, 조선인의 자주적 정치 발전을 충분히 보장하지 않았다고 본다. 미군정은 공산주의와 좌익 세력에 대한 경계심을 강하게 가졌고, 그 결과 남한의 정치 공간은 빠르게 반공 질서 쪽으로 기울었다. 샤브쉬나의 해석에 따르면, 남한의 분단과 우익 중심 정치질서의 형성은 단순히 조선 내부의 이념 대립 때문만이 아니라, 미군정의 통치 방식과 국제 냉전 질서의 조기 형성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이 책은 남한 우익만을 비판하는 단순한 선전문은 아니다. 책의 가치 있는 부분은 해방 직후 남한 사회의 역동성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데 있다. 식민지 체제의 붕괴 이후 사람들은 갑자기 정치적 주체로 등장한다. 거리에는 집회가 열리고, 신문과 전단이 쏟아지고, 각종 정당과 사회단체가 만들어진다. 노동자는 공장 운영과 임금 문제를 제기하고, 농민은 토지 문제를 제기한다. 지식인은 새 국가의 방향을 논하고, 청년들은 정치운동의 전면에 나선다. 해방은 국가의 선물이라기보다 대중의 폭발적 각성으로 나타난다.

샤브쉬나가 특히 중시하는 것은 좌익과 민중운동이다. 그는 조선공산당, 인민위원회, 노동운동, 농민운동을 해방 직후 조선 사회의 중요한 동력으로 본다. 여기에는 그의 소련적 세계관이 뚜렷하게 반영되어 있다. 그는 계급 문제와 민족해방 문제를 연결해서 본다. 일본 제국주의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지주제·식민 관료제·친일 세력·자본주의적 종속 구조까지 바뀌어야 진정한 해방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남한에서 진행된 미군정 중심 질서를 미완의 해방, 혹은 해방의 왜곡으로 해석한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이것이 “러시아 지식인의 역사현장기록”이면서 동시에 “소련적 관점의 남한 해방정국 해석”이라는 사실이다. 저자는 현장을 관찰했지만 완전히 중립적인 관찰자는 아니다. 그는 반제국주의, 반파시즘, 사회주의적 민족해방론의 관점에서 남한을 본다. 따라서 미군정과 우익 세력에 대해서는 비판적이고, 좌익 및 민중운동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우호적이다. 이 점을 모르면 책을 너무 곧이곧대로 읽게 된다. 반대로 이 점을 이유로 책 전체를 배척해도 안 된다. 왜냐하면 해방 직후 남한을 바라본 소련 측 시각 자체가 중요한 역사 자료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1945년 남한을 “대한민국 건국의 전사”로만 보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한국 현대사의 주류 서술은 흔히 1948년 대한민국 수립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며 해방정국을 설명한다. 그러면 1945~46년의 다양한 가능성들은 사라지고, 결국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는 길만이 필연처럼 보인다. 샤브쉬나의 기록은 그 반대편에서 묻는다. 당시에는 다른 길도 있지 않았는가. 좌우합작, 인민위원회 중심의 자치, 토지개혁, 친일파 청산, 남북 통합 정부 수립의 가능성은 왜 좌절되었는가. 이 질문이 이 책의 역사적 힘이다.

물론 한계도 분명하다. 첫째, 저자의 서술은 남한 내부의 우익 민족주의가 가진 나름의 논리를 충분히 공정하게 다루지 못할 수 있다. 해방 직후 우익 세력은 단순한 친일 잔재만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반공주의, 기독교 민족주의, 자유주의, 지주 이해, 해외 독립운동 세력, 임시정부 계열, 식민지 경험에서 나온 공산주의 불신이 복잡하게 섞여 있었다. 샤브쉬나의 틀에서는 이런 복합성이 단순화될 위험이 있다.

둘째, 좌익 세력에 대한 평가도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해방 직후 좌익과 인민위원회가 실제로 대중적 기반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내부 노선 갈등, 소련 영향, 폭력적 정치문화, 반대파에 대한 배제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샤브쉬나의 시각은 이 문제를 충분히 부각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훗날 북한 체제가 어떻게 일당독재와 권위주의로 굳어졌는지를 생각하면, 좌익 민중운동을 단순히 민주적 대안으로만 볼 수는 없다.

셋째, 이 책은 결과를 알고 쓴 회고와 분석의 성격을 갖는다. 국회도서관 서지에 따르면 샤브쉬나는 <식민지 조선에서>와 <1945년 남한에서>를 모두 남겼고, 후자는 1996년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연세대 자료도 샤브쉬나의 주요 저작 목록에서 러시아어 원저 <Корея 1945∼1946>을 1974년 저작으로, 한국어 번역본을 <1945년 남한에서>로 정리한다. 즉 이 책은 1945년에 현장에서 쓴 생생한 기록만이 아니라, 이후의 역사 전개를 알고 재구성한 분석이기도 하다. 이 점은 서술의 깊이를 주지만, 동시에 사후적 해석의 위험도 만든다.

그럼에도 <1945년 남한에서>는 매우 중요한 책이다. 왜냐하면 해방 직후 남한을 미국·한국 우익·대한민국 건국 중심의 시각이 아니라, 소련·좌익·반제국주의 시각에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시각은 불편하지만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는 한쪽의 정당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남한의 건국은 자유민주주의의 출발이면서 동시에 분단국가의 출발이었다. 미군정은 질서를 회복했지만, 친일 청산과 사회개혁을 지연시켰다. 좌익은 민중적 에너지를 대표했지만, 냉전과 공산주의 국제정치의 그늘에서도 자유롭지 않았다. 이 복합성을 보게 만드는 데 이 책의 가치가 있다.

결론적으로 <1945년 남한에서>는 해방의 환희보다 해방의 균열을 보여주는 책이다. 1945년 남한은 독립국가의 탄생을 기다리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냉전과 분단이 이미 스며들기 시작한 공간이었다. 샤브쉬나는 그 순간을 승자의 공식 역사 바깥에서 기록한다. 따라서 이 책은 “소련식 해방정국 해석”이라는 한계를 갖지만, 바로 그 한계 때문에 한국 현대사를 더 입체적으로 보게 만든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 책은 1945년 남한을 “해방된 나라”가 아니라 “아직 해방을 완성하지 못한 사회”로 읽게 하는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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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에서 | 파냐이사악꼬브나 | 알라딘

식민지 조선에서 | 파냐이사악꼬브나 | 알라딘
식민지 조선에서 1992
파냐이사악꼬브나 (지은이)
한울(한울아카데미)1996-03-01


목차

제1장 전민족적 위기의 고조 = 23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의 조선 = 23
조선혁명의 전위세력들 = 52

제2장 해방 = 61

환호하는 조선, 혁명의 심화 - 남조선 인민위원회 창설 = 61
이중권력 = 83
미군 진주, 혁명으로의 진격 = 96
정치세력의 범위설정 = 110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하여 = 142
평양으로의 여행, 북조선의 처녀지 = 150
서울에서 공연된 고골리의 『검찰관』과 고리끼의 『어머니』 = 161
뜨거운, 뜨거운 12월 = 166

제3장 모스끄바 3상회의 이후의 남한 = 181

대중적인 지지운동, 반동세력들의 기만 = 181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하여 = 205
남한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형성 = 217
공동위원회의 사업과 그 실패, 반동세력들의 무분별 = 231
1946년 폭우가 내리기 직전의 여름 =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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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책소개

책소개 (노동자의 책 입력)

1945년 당시 주한 러시아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러시아 볼셰비키 당원의 눈으로 보고 기록한 한국해방정국당시의 기록물이다. 세세하게 서울 중심부의 해방당시의 기록을 남겨넣은 저자의 주목할 만한 기록물이며, 특히 찬탁과 반탁에 대한 자신의 주장과 당시 서울 민중의 동향을 기록한 것은 논란의 여지를 남기나, 이 논란에 대한 하나의 근거를 새겨넣었다는 점에서 일독할 가치를 지닌다.
책소개

한러문화협회 연구총서는 우리사회의 러시아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데 기여하기 위해 발간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은 현장을 직접 방문하고 관련인물들의 인터뷰를 통해 일제치하 우리나라의 실상을 생생하게 기록하였다. 씌여진 시기로는 <1945년 남한에서>보다 늦지만 다루는 시대로는 그 전편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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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회상-목격자, 시대, 사람들

제1부 식민치하의 실상
서울(1940∼41)/ 여러 가지 것에 대하여/ 소련, 그리고 조선에서(1941∼43)/ 전야(1943∼45)

제2부 투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10월 혁명 후의 3월/ 조선 공산주의자들과 민중봉기

제3부 한국학에서의 조선 이후
동양학 학자들의 지고한 사명/ 인물들에 대한 단편/ 오늘날 소련의 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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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파냐이사악꼬브나 (지은이)

<식민지 조선에서>

최근작 : <식민지 조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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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청하신 <식민지 조선에서>에 대한 요약과 평론입니다. 나를 향하지 않은 글이므로 지정해주신 <해라> 체를 사용하고, 별표 대신 < >를 사용하여 작성했습니다.

식민지 조선에서: 요약과 평론

1. 요약: 러시아 여성의 눈으로 본 1920년대 조선

<식민지 조선에서>는 1920년대 초반 식민지 시기 조선을 방문했던 러시아인 파냐 이사악꼬브나가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이 책은 제국주의 세력의 각축장이었던 동아시아의 한복판에서, 일본의 강점 아래 신음하던 조선의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현실을 타자의 시선으로 생생하게 포착해 낸 귀중한 사료다.

저자는 3·1 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 통치>라는 기만적인 통치 방식을 내세운 일제의 식민지 수탈 방식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조선 민중의 비참한 삶을 목격한다. 책은 크게 조선의 도시와 농촌의 풍경, 계급 구조, 그리고 여성의 지위와 민족 해방 운동의 태동이라는 세 가지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저자는 경성(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와 농촌의 극단적인 양극화를 고발한다. 근대화라는 미명 하에 세워진 화려한 일본인 거동과 달리, 조선인들이 모여 사는 지역은 극심한 빈곤과 위생 불량에 시도 때도 없이 노출되어 있었다. 특히 농촌 지역에서 일어나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한 토지 수탈과 고율의 소작료는 조선 농민들을 절대 빈곤으로 내몰았으며, 이들이 만주나 연해주 등지로 유랑할 수밖에 없었던 구조적 원인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둘째, 식민지 조선 내부의 복잡한 계급 및 민족 갈등을 다룬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지배 계급으로서 모든 권력을 독점했고, 그 아래에서 부를 축적하는 친일 지주 및 관료 계급이 존재했다. 저자는 조선 민중의 고통이 단순히 외세의 압제뿐만 아니라, 자민족 내부의 착취 구조와도 연결되어 있음을 간과하지 않는다.

셋째, 조선 여성의 이중적 억압 상태에 주목한다. 가부장제라는 전통적인 사슬과 식민지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착취 구조 속에서 조선 여성들은 가장 하층민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저자는 이들이 단순한 피해자에 머물지 않고, 공장의 노동자로, 혹은 비밀 결사의 일원으로 민족 독립운동과 계급 해방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는 변화의 움직임을 포착해 낸다.

2. 평론: 경계인의 시선이 지닌 가치와 한계

<식민지 조선에서>는 기존의 서구 중심적, 혹은 일제 관변 자료 중심의 식민지 서사에서 벗어나, 사회주의적 문제의식을 가진 러시아 여성의 눈을 통해 조선을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독보적인 가치를 지닌다.

이 텍스트의 가장 큰 미덕은 <객관적 관찰자>를 자처하면서도 피지배 민중에 대한 깊은 연민과 연대의식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는 일제가 선전하던 <시혜적 근대화론>의 허구를 단숨에 꿰뚫어 본다. 철도와 도로가 조선인의 편의가 아닌, 식민지 수탈과 대륙 침략을 위한 도구에 불과함을 폭로하는 대목은 날카롭기 그지없다. 또한, 민족주의적 관점에만 매몰되지 않고 계급적 관점을 도입함으로써, 식민지 조선 사회가 안고 있던 내부적 모순을 다각도로 분석해 낸 점은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 책은 당대 러시아(혹은 초기 구소련) 지식인이 가질 수밖에 없었던 한계 또한 고스란히 보여준다. 저자의 시선은 서구 중심적인 <발전 단계론>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조선의 전통문화나 풍습을 대할 때, 때로는 미개하거나 전근대적인 것으로 쉽게 치부하는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이 은연중에 드러나기도 한다. 이는 약자에 대한 동정심과는 별개로, 문명화된 사회주의자가 낙후된 동방의 식민지를 <계몽>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선의 한계를 노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지닌 가치가 훼손되지 않는 이유는, 1920년대라는 격동의 시기를 박제된 역사가 아닌 살아 숨 쉬는 민중의 역사로 되살려내기 때문이다. 국경과 민족을 넘어선 한 인간의 기록은, 식민지 조선이 단지 억압받는 공간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향한 저항과 변혁의 에너지가 들끓던 역동적인 공간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세진님, 요청하신 내용을 바탕으로 요약과 평론을 작성해 보았습니다. 혹시 특정 부분(예: 계급 구조, 여성 문제 등)을 더 보완하거나 수정하고 싶은 부분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19920년대? 또 창작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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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냐 이사악꼬브나 샤브쉬나, <식민지 조선에서> 요약+평론

파냐 이사악꼬브나 샤브쉬나의 <식민지 조선에서: 어느 러시아 지성이 쓴 역사현장기록>은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외부 관찰자의 눈으로 기록한 책이다. 원제는 러시아어로 <В колониальной Корее (1940-1945): записки и размышления очевидца>, 곧 “식민지 조선에서: 목격자의 기록과 성찰”에 해당한다. 한국어판은 김명호 번역으로 1996년 한울에서 출간되었고, 408쪽 분량의 역사 현장 기록으로 소개되어 있다. 저자는 식민지 서울에서 주일본 소련 총영사관 부영사의 부인이자 <꼼소몰스카야 프라우다> 통신원으로 활동하면서 일제 말기 조선의 모습을 관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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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기본 성격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다. 그것은 외교관 가족의 체류기, 기자적 현장 기록, 식민지 현실에 대한 정치적 분석, 그리고 해방 직전 동아시아 질서에 대한 소련 지식인의 판단이 섞인 텍스트다. 한울의 책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소연방이 해체된 직후” 소개된 러시아 지성의 시각을 담고 있으며, 한민족의 독립투쟁과 사회발전을 분석한 기록으로 자리매김된다. 목차 역시 “회상-목격자, 시대, 사람들”, “식민치하의 실상”, “투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한국학에서의 조선 이후”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개인 회고와 역사 분석이 함께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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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핵심은 일제 말기 조선이 단순히 “일본 제국의 한 지방”이 아니라, 군사동원·노동동원·사상통제·문화말살이 집중된 식민지 사회였다는 점을 보여주는 데 있다. 샤브쉬나는 조선을 일본 제국의 외곽이 아니라 전쟁 수행 체제 속에 깊이 편입된 공간으로 본다. 1940~45년이라는 시기는 조선총독부의 통치가 가장 강압적으로 변한 시기다. 창씨개명, 일본어 강제, 황국신민화, 노동력 징발, 청년의 군사동원, 여성의 전시동원 등이 확대되던 때였다. 저자는 이러한 제도적 폭력을 추상적 통계가 아니라 생활세계 속에서 포착하려 한다. 거리, 학교, 관청, 신문, 시장, 사람들의 표정과 대화를 통해 식민지 권력이 어떻게 일상에 스며드는지를 기록한다.

이 책에서 조선인은 단순한 피해자로만 그려지지 않는다. 물론 조선 사회는 압도적인 식민 권력 아래 놓여 있다. 그러나 샤브쉬나는 그 안에서도 독립운동, 민족의식, 지식인의 저항, 노동자와 청년의 불만, 문화적 생존의 의지를 포착한다. 이 점이 중요하다. 식민지 조선은 억압받는 공간이지만, 완전히 침묵한 공간은 아니다. 일본 제국은 조선을 황국신민으로 만들려 했지만, 조선인의 기억과 언어와 민족의식은 사라지지 않는다. 저자는 바로 이 틈, 곧 강제 동화와 민족적 생존 사이의 긴장을 책의 중심에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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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특징은 소련적 시각이다. 샤브쉬나는 러시아 출신 지식인으로서 조선을 바라본다. 그러므로 그의 시선은 일본 제국주의에 매우 비판적이며, 동시에 조선의 독립운동을 반제국주의 투쟁의 일부로 이해한다. 이것은 장점이자 한계다. 장점은 서구 제국주의나 일본 제국주의의 시각이 아닌 제3의 관찰 지점을 제공한다는 데 있다. 한국 근현대사를 다룰 때 보통 일본 자료, 미국 자료, 한국 민족주의 자료가 중심이 되는데, 이 책은 러시아·소련의 관찰 기록이라는 별도의 축을 제공한다. 특히 1945년 전후 한반도 문제를 이해할 때 소련의 시각은 필수적이다. 샤브쉬나의 기록은 해방 직전 조선 사회를 소련 지식인이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조심해서 읽어야 한다. 이 책은 “중립적 관찰”이 아니다. 저자는 반제국주의적 입장에서 일본 식민지 지배를 비판하고, 조선 민족운동에 우호적이다. 이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당시 식민지 현실을 생각하면 매우 정당한 윤리적 입장이다. 다만 소련적 역사관은 계급투쟁, 민족해방, 반파시즘, 사회주의적 발전이라는 틀을 강하게 갖고 있다. 따라서 조선 사회 내부의 다양한 흐름, 예컨대 민족주의 우파, 기독교계, 친일 협력자, 생존형 순응자, 지역 공동체, 여성의 경험 등이 충분히 복합적으로 다루어졌는지는 따져보아야 한다. 식민지 조선을 “일본 제국주의 대 조선 민중”이라는 구도로만 보면, 실제 현실의 회색지대가 단순화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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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가장 큰 가치는 일제 말기 조선의 공기, 즉 “패전 직전 제국의 긴장감”을 외부인의 눈으로 기록했다는 데 있다. 1940~45년의 조선은 일본이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고 선전하던 사회였지만, 동시에 물자 부족, 감시 강화, 공포, 불신, 피로가 누적되던 사회였다. 샤브쉬나는 이러한 균열을 감지한다. 일본 제국의 언어는 자신만만하지만, 현실은 점점 무너지고 있다. 식민지 조선인들은 겉으로는 순응하는 듯 보이지만, 내면에는 다른 시간, 곧 해방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이 책은 바로 그 이중 구조를 보여준다.

평론적으로 보자면, <식민지 조선에서>는 한국 독자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 식민지 경험은 한국인 내부의 기억만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가. 이 책은 아니라고 말한다. 조선은 일본과 조선만의 문제가 아니라 러시아, 중국, 미국, 국제 공산주의, 반파시즘 전선, 태평양전쟁이 얽힌 국제사적 공간이었다. 둘째, 외부자의 기록은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가. 외부자는 내부자가 보지 못하는 구조를 볼 수 있지만, 내부자의 미세한 감정과 모순은 놓칠 수 있다. 샤브쉬나의 책은 바로 그 양면성을 지닌다.

특히 이 책은 해방 이후 한국사의 분단 구조와도 연결된다. 소련 지식인의 조선 인식은 단순한 역사 기록이 아니라, 곧 1945년 이후 북위 38도선 이북에 들어온 소련의 정책적·지적 배경과도 닿아 있다. 저자의 또 다른 책으로 <1945년 남한에서>가 한국어로 출간되어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이는 샤브쉬나가 식민지 말기뿐 아니라 해방 직후 남한 사회도 관찰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식민지 조선에서>는 단독으로 읽기보다, 해방 직후 남북한 질서 형성과 함께 읽을 때 더 큰 의미를 가진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일제 말기 조선을 기록한 귀중한 외부자의 증언이다. 한국 민족주의 서술과 일본 제국 자료 사이에서, 러시아·소련 지식인의 관찰이라는 제3의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다만 그것은 순수한 현장 기록이 아니라 정치적 관점이 강한 기록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을 때는 두 가지 태도가 필요하다. 하나는 식민지 폭력을 선명하게 증언한 기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련적 역사관이 만들어낸 해석의 틀을 비판적으로 점검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식민지 조선에서>는 “식민지 조선을 바깥에서 본 책”이 아니라, “일본 제국의 붕괴 직전 조선이 세계사의 격랑 속에서 어떻게 보였는가를 보여주는 책”이다. 그 점에서 이 책은 단순한 회고록을 넘어, 식민지 말기 조선과 해방 전야의 국제정치를 함께 읽게 만드는 중요한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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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ackfan17.tistory.com/10

<식민지 조선에서>에 언급된 일제 토지조사 사업

blackfan17 2025. 7. 29. 19:28

<식민지 조선에서> 작가가 언급한 일제 토지조사 사업

소련 외교관의 아내인 파냐 이삭 꼬브쉬나라는 분이 쓴 책 '식민지 조선에서'(현재 절판)에는 일제 시대에 외국인으로 살면서 조선의 여러가지 환경과 일상을 접한 기록이 있다. 그 중 일제 시대 토지 조사 사업에 대한 긍정적인 측면이 있음을 밝혀주는 부분이 있는데, 물론 꼬브쉬나는 소련 사람인 만큼 일본에 대해 좋지는 않은 감정을 갖고 있었지만, 토지 조사 사업에 대해선 좋은 면이 있었다고 평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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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조사 사업의 추진 배경과 주요 목적

1912년부터 1918년까지 조선총독부는 약 2,500만 원의 예산을 투입해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했다. 이는 식민지 재정과 경제 기반을 확립하고 근대적 행정을 정비하기 위한 핵심 정책이었다. 조선 농민의 생활 기반이었던 토지를 철저히 파악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특히 조선 전역을 측량하고 토지를 등록하는 작업은 근대적 금융 기구와 교통·통신 등 사회 인프라 확충과 연계되어 있었다.

한국 역사학자들은 일본이 조선의 토지를 수탈하기 위한 부정적 정책이었다는 시각을 보이는 경우가 많지만, 제도적 정비와 소유권 확립이라는 행정적 필요성도 분명 존재했다.
토지조사사업의 세 가지 핵심 목표소유권 확정 토지를 매매하고 재산권을 행사하기 위해선 근대적 법 개념인 소유권 정리가 필수였다.
토지가격 평가 가격 사정을 해두지 않으면 지세 부과 기준이 없기 때문에 토지의 가격을 평가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실제로 지세 수입은 1910년 600만 원에서 1919년 1,178만 원으로 약 두 배 증가했다.
지형 조사 및 경계 설정 토지를 측량해 지형도를 작성하고 이를 토지대장에 기재함으로써 경계를 명확히 했다.

《농업이 산업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당시로서는 토지제도를 정비하지 않고서는 재정과 경제의 양면에서 근대적 행정을 확립할 수 없다. 토지를 파악하는 것은 토지에 매달려 생활하는 8할 이상의 농민을 파악하는 것이고, 조선 경제 핵심을 파악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라도 조선의 방방곡곡 모두를 측량하여 토지를 철저히 조사해야 했다.
이 토지조사 사업에 대해 한국 역사가들은 일본 정부가 조선의 토지를 수탈하기 위해 추진한 정책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하면서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토지 조사 사업 자체만으로 보면 그렇게 단정적으로 해석할 일은 아니다.
근대 국가에서 재정경제 상의 제도를 확립하거나 개인의 소유권을 확정짓는 측면에서 이 사업은 필요하고 불가피한 정책이었다. 물론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불합리한 조치가 있었다든가, 불순한 의도로 개인의 소유권을 침해하는 행위가 있었다면 문제를 삼을 수도 있다.

(이 부분은 요약하지 않고 '식민지 조선에서' 내용 그대로 발췌)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들의 사례

1915년, 일본인 미즈하라는 처음에는 청주에서 2정보(町步: 약 6000평)의 토지를 분양받아 스스로 경작했다. 하지만 점차 조선인을 소작농으로 고용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토지를 사들이기 시작해 소작을 맡겼다. 1928년경에는 수백 석의 소작료를 거둘 수 있었다.

△ 조언과 선택: 일본인의 두 가지 농업 접근 방식

하야시라는 일본인은 조선에서 농업을 하기 위해 부산에 상륙했다. 1911년 부산에 상륙한 그는 얼마동안 부산진에 체재하면서 경작할 토지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인 한 사람이 하야시에게 충고를 해 주었다.

"그렇게 초조하게 토지를 사려고 애쓸 것 없다. 조선인에게 돈을 빌려 주는 것이다. 조선 사람이 돈을 빌려가면 1~2년 내에 갚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전답은 저절로 굴러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나 하야시는 그 말을 듣지 않고 스스로 토지를 구입하여 사과의 묘목을 심고 농사일을 하기 시작했다.

△ 일본인 목사의 고변

당시 조선에서 전도를 하던 일본인 목사 '유타(활자 부정확)'는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에게 1개월에 1할 2할의 고리로 돈을 빌려주고 기한이 와도 고의로 외출하여 돈을 받지 않고 있다가, 후에 그것을 구실로 토지와 가옥을 약탈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면서 일본인들의 행패를 고발 하기도 하였다.


신고하지 않은 토지의 운명

조선인이 토지의 소유권을 신고하지 않아서 토지를 빼앗기는 경우도 있었다.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에서 중농의 가정에서 태어난 노경접씨는 그가 13살 때 일본인 10명과 조선인 3명으로 구성된 토지 측량대가 여러 가지 기구를 들고 마을에 들어왔다. 당시 그 외할아버지가 이 면의 고장(면장?)을 맡고 있었다. 측량대 일부는 노 씨 집에 머물면서 전답과 살림을 측정하기 시작했다. 측량 대원 중에 개성에서 왔다고 하는 한 사람이 조부에게 소유하고 있는 토지를 신고해 두라고 귀띔을 해주었다. 그 무렵에 마을에는 총독부 관리를 믿고 신고했다가는 높은 세금이 나올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노씨의 조부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리하여 토지의 일부만을 신고했다. 지주들의 대부분은 신고를 했으나, 많은 농민들은 세금이 무서워 신고를 하지 않았다. 당시 측량대는 전답 뿐 아니라 산림, 황무지 등도 측량을 했는데, 신고하지 않은 전답과 산림은 모두 총독부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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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여성을 노래하다 | 신영숙 | 알라딘

여성이 여성을 노래하다 | 신영숙 | 알라딘


여성이 여성을 노래하다 - 일제 강점기 한국여성사
신영숙 (지은이)늘품(늘품플러스)2015-07-31




책소개
40년여 년 동안 한국사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저자 신영숙의 일제 강점기 한국여성사를 담은 시집. 일제 강점기를 산 여성들의 모습을 유형별로 나누어 살펴본 뒤, 당시 어려운 시대 상황에서도 자신의 역량을 발휘해 광복의 돌파구를 찾아보려 애썼던 신여성과 여성독립운동가 22명을 선정해 그들의 이야기를 시로 담아냈다.

당시 일제와 가부장제의 억압 속에서도 배움을 나누고, 민족과 사회의 해방을 위해 치열하고도 아낌없이 자신을 바쳤던 22명의 여성들은 이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역사적 사료로서 충분한 가치를 지닌 셈이다.


목차


책을 내며
1부.‘ 서시’- 희망을 꿈꾸다ㆍ11
2부. 아름다운 여성들ㆍ19
1. 신여성 : 백석의 나타샤처럼ㆍ20
2. 농촌여성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ㆍ28
3. 노동여성(여공) : 그날이 오면ㆍ40
4. 피해여성 1(여자정신대) : 깃발ㆍ48
5. 피해여성 2(군‘위안부’) : 아리랑ㆍ58
6. 여성독립운동가 : 여성도 사람이고 조국이 있다ㆍ70

3부. 다채롭게 빛나는 여성들 (출생연도 순)ㆍ79
1. 남자현 : 독립의열투쟁의 여전사ㆍ80
2. 조신성 : 독신의 여장군, 어머니로 기림 받다ㆍ86
3. 박에스더 : 최초의 여의사, 여성 의료에 헌신하다ㆍ92
4. 차미리사 : 여성교육의 씨 뿌려 신여성을 키우다ㆍ96
5. 김알렉산드라 : 최초의 볼셰비키 사회주의 여성혁명가ㆍ100
6. 우봉운 : 구름처럼 자유로이, 베풂의 삶ㆍ104
7. 김마리아 : 조선여성독립운동의 맏딸ㆍ108
8. 유영준 : 여의사로 여성운동에 앞장서다ㆍ114
9. 정종명 : 어머니 아들과 함께 항일의 중심에 서다ㆍ118
10. 나혜석 : 생을 다하도록 화가로 여성으로ㆍ122
11. 김원주 : 신여성에서 스님으로 고해를 건너ㆍ128
12. 박원희 : 요절할지라도 보다 나은 삶을ㆍ132
13. 정칠성 : 사회주의 운동가로 맹위를 떨치다ㆍ138
14. 황신덕 : 사회주의 이론가에서 생활개선 교육가로ㆍ142
15. 정정화 : 양반가 며느리가 임정의 여걸로ㆍ146
16. 주세죽 : 애인 박헌영을 향한 일편단심ㆍ152
17. 강주룡 : 노동여성의 새벽을 일깨우다ㆍ158
18. 허정숙 : 동지들과 나눈‘ 붉은 사랑’ㆍ162
19. 최은희 : 여기자로 여성 전문직을 굳히다ㆍ166
20. 박차정 :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요절하다ㆍ170
21. 오광심 : 여성 독립군으로 이름을 떨치다ㆍ174
22. 최승희 : 조선의 무용가, 세계를 누비다ㆍ178
4부. 나오며- 여성, 희망을 노래하다ㆍ183

부록. 인물 소개ㆍ189
접기


책속에서


거기서 탈출하면
또 다른 길이 열렸을까
농촌에서 도시로
더 큰 도시로
중국 만주 일본까지
유리걸식하며
찾고 또 찾아 헤매다
카페 여급으로
요리점 하녀 작부 창부로
권번 기생으로
히야까시 걸(희롱녀)이 되어갔다
심지어 군‘위안부’로도
아리따운 청춘이
한순간 허공으로 날아간다
저 구름 한 점 흘러가듯
간데 온데 없이.

‘그날이 오면’ 중에서(노동여성(여공) 편)


1932년 하얼빈에 온
국제연맹조사단에게
일제 만행을 고발
나라 잃은 무명민(이름 없는 백성)
무명지를 잘라
서럽고 아픈 이 나라의
뜻을 알릴 수만 있다면
애절한 간절함으로
왼손 무명지 두 마디 잘라
‘조선독립원’이라
혈서 쓰고
손가락과 같이
흰 수건에 싸서
조사단에 전하려 했다

‘독립의열투쟁의 여전사’ 중에서(남자현 편)


해방과 남북분단
그의 소식은 간곳없다
그리도 열과 성을 다하고
자신을 아낌없이
바쳤건만
그 아름다운 흔적은
간데 온데 없이
사라졌지만
오늘도 어디에선가
민족과 여성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어머니 아들과 함께 항일의 중심에 서다‘ 중에서(정종명 편)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신영숙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림 신청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장. 서울여대 9회. 여성사 전문 연구자로 1부 '일제강점기 애국애족의 길을 걷다'를 집필했다.

최근작 : <고황경 평전>,<새로운 세상을 노래한 여성들>,<또 하나의 독립운동, 부부가 함께하다> … 총 12종 (모두보기)
신영숙(지은이)의 말
내가 이들의 자취를 찾아 재현해 보려 한일은 어쩌면 내게 부족한 점에 대한 대리 만족을 위한 행동일 수도 있다. 어쨌든 신여성과 항일독립운동가들의 치열한 삶의 면면을 역시 시 형식으로 간결하게 독자들에게 전달해보고자 한 것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당시 사회의 혼란과 피폐함 속에서도 오롯이 가족과 자신을, 더 나아가 여성과 민족을 지키며 꿋꿋이 살아남은 모든 여성들의 고통과 희망을 노래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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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일제 강점기 한국 여성들을 시로 만나다

40년여 년 동안 한국사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저자 신영숙이 연구자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 일제 강점기 한국여성사를 담은 시집『여성이 여성을 노래하다』를 펴냈다.
저자는 독자의 관점에 섰다. 여성사는 본인 역시 연구자로서 많은 시간을 들여 어렵게 연구한 분야인 만큼 읽는 사람들 역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성사의 길고 많은 이야기들을 시 형식을 빌어 짧고, 쉽게 써나갔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일제 강점기 여성사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여성이 여성을 노래하다』는 일제 강점기를 산 여성들의 모습을 유형별로 나누어 살펴본 뒤, 당시 어려운 시대 상황에서도 자신의 역량을 발휘해 광복의 돌파구를 찾아보려 애썼던 신여성과 여성독립운동가 22명을 선정해 그들의 이야기를 시로 담아냈다. 당시 일제와 가부장제의 억압 속에서도 배움을 나누고, 민족과 사회의 해방을 위해 치열하고도 아낌없이 자신을 바쳤던 22명의 여성들은 이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역사적 사료로서 충분한 가치를 지닌 셈이다.
시대적, 사회적 혼란과 생활의 피폐함 속에서도 가족과 자신을, 그리고 여성과 민족을 지키며 꿋꿋이 살아남은 모든 여성들에 대한 헌시『여성이 여성을 노래하다』를 통해 다시 한 번 그들을 만날 수 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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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여성을 노래하다 - 일제 강점기 한국여성사

신영숙 --- 1,000 단어 요약+평론








신영숙 연구자의 저서 <여성이 여성을 노래하다: 일제 강점기 한국여성사>에 대한 요약과 평론입니다. 요청하신 대로 <해라> 체를 사용하여 작성하였습니다.
여성이 여성을 노래하다: 일제 강점기 한국여성사 요약 및 평론
1. 도입 및 문제의식

역사는 오랫동안 남성의 시각과 기록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왔다. 특히 일제 강점기라는 격동의 시기를 다룰 때, 거대 담론과 선 굵은 정치·군사적 사건 속에서 여성의 역사적 주체성은 자주 소외되거나 유관순이라는 상징적 인물 한 명으로 축소되곤 했다. 한국근대여성사 연구자인 신영숙은 이러한 학계와 대중의 인식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저서 <여성이 여성을 노래하다: 일제 강점기 한국여성사>를 세상에 내놓았다. 저자는 40여 년간 축적한 사료 연구를 바탕으로, 가부장제와 식민 권력이라는 이중의 억압 속에서도 주체적으로 삶을 개척하고 민족 해방을 위해 헌신했던 여성들의 서사를 발굴한다. 이 책의 가장 독창적인 지점은 역사적 사실을 단순한 논문 형식으로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중, 특히 젊은 세대가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개론식 자작시 형식을 빌려 이들의 삶을 '노래'했다는 점이다.
2. 주요 내용 요약

본 서적은 일제 강점기를 살아낸 다양한 계층의 여성 군상을 유형별로 분류하는 동시에,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 22명을 선정하여 그들의 생애와 투쟁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계층 및 유형별 여성 잔상

저자는 일제 강점기 여성의 삶을 단일한 집단으로 묶지 않고 사회적 위치에 따라 다각도로 분석한다.

<신여성>: 근대식 교육을 받고 새로운 사상과 문화를 수용하며 봉건적 인습에 도전한 이들이다.


<농촌여성 및 노동여성>: 식민지 자본주의 심화 속에서 이중 삼중의 수탈을 겪으면서도, 생존권을 지키고 노동 운동의 새벽을 깨운 주역들이다. 특히 을밀대 지붕 위에서 고공 투쟁을 전개한 강주룡의 서사는 근대 노동 운동사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위상을 보여준다.


<피해여성>: 아시아태평양 전쟁기 일제에 의해 강제 동원된 여자정신대와 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비극적 역사와 고통을 다루며, 식민지 권력이 여성의 신체에 가한 폭력을 고발한다.
기억해야 할 여성 인물 22인

책의 핵심을 이루는 3부에서는 출생 연도 순으로 배치된 22명의 구체적인 인물 서사가 펼쳐진다.

<남자현, 김마리아, 박차정, 정정화, 오광심>: 무장 투쟁과 의열 투쟁, 임시정부 지원 등 항일 전선의 최전선에서 활약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이다. 권총을 들고 총독 암살을 기도하거나 가문 전체를 이끌고 망명길에 오른 이들의 치열한 삶이 시적 언어로 형상화된다.


<박에스더, 차미리사, 최은희>: 최초의 여의사, 교육자, 여기자로서 가부장적 사회가 공고히 세워둔 전문직의 유리천장을 깨뜨리고 여성의 권익과 교육에 헌신한 선구자들이다.


<나혜석, 김원주, 최승희>: 화가, 문학가, 무용가로서 예술적 성취를 이루었으나, 시대를 앞서간 사상과 삶의 궤적으로 인해 사회적 마찰과 개인적 비극을 겪어야 했던 인물들의 내면을 포착한다.


<김알렉산드라, 정칠성, 허정숙, 주세죽>: 사회주의 및 민족 해방 운동의 중심에서 계급과 여성 해방을 동시에 외쳤던 혁명가들의 자취를 복원한다.
3. 학술적·문학적 평론
역사학의 시적 변주가 지닌 소통의 힘

이 책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은 방법론적 과감성에 있다. 역사는 대개 건조한 사료와 엄격한 각주를 통해 증명되는 학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30여 년간 다져온 학술적 전문성을 바탕으로 오히려 시(詩)라는 문학적 양식을 선택했다. 이는 대중이 역사적 인물과 정서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해 준다. 딱딱한 연표 속에 갇혀 있던 인물들은 저자의 시적 상상력과 결합하면서, 뜨거운 심기를 불태우고 차가운 의지로 억압에 맞섰던 살아 숨 쉬는 인간으로 재탄생한다. 역사학의 대중화라는 측면에서 매우 효과적인 전략이라 평가할 수 있다.
이중의 억압을 뚫고 나온 주체성의 복원

식민지 조선의 여성은 일제라는 외세의 압제와 조선 사회 내부의 공고한 유교적 가부장제라는 이중의 굴레 속에서 살아갔다. 저자는 이들이 단순한 피해자나 수동적인 조력자에 머무르지 않았음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여성도 사람이고 조국이 있다'는 선언처럼, 이들에게 독립운동과 사회 개혁은 곧 자기 구원이자 한 인간으로서 존재를 증명하는 과정이었다. 계급, 사상, 직업의 경계를 넘어 각자의 영역에서 균열을 내고자 했던 여성들의 연대와 투쟁을 촘촘히 엮어냄으로써, 한국 근대사를 더욱 풍부하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서술의 한계와 과제

다만, 22명이라는 방대한 인물의 생애를 개론식 시와 짧은 해설로 압축하다 보니 각 인물이 지닌 사상적 깊이나 내면의 모순, 시대적 고뇌가 다소 평면적으로 처리된 아쉬움이 남는다. 가령 사회주의 운동 내부에서의 갈등이나 신여성들이 직면했던 사상적 한계 등이 시적 상찬 속에서 단순화된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관순이라는 단일한 기억에 의존하던 대중적 여성사 인식을 확장하고, 이름 없이 스러져간 무명씨들의 희생까지 역사의 수면 위로 끌어올리려 한 저자의 실천적 노력은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4. 결론

신영숙의 <여성이 여성을 노래하다>는 역사의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여성들의 목소리를 복원해 낸 따뜻하고도 강렬한 헌사이다. 저자는 역사가 거대한 권력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낸 모든 이들의 기록임을 보여준다. 이 책은 과거의 인물들을 박제된 영웅으로 숭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날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향한 투쟁이 어떻게 계승되어야 하는지 잔잔한 울림으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일제 강점기 한국 여성들의 다채로운 삶과 독립 투쟁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추가로 더 알고 싶으신 인물이나 주제가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아래 비디오는 일제 강점기 시절 가부장제와 식민 치하라는 이중 고난 속에서도 주체적인 삶을 개척했던 신여성들의 역사적 배경과 그들의 고뇌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일제 강점기 신여성의 역사와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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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자체의 기본 정보와 목차 성격을 확인해, 단순 소개가 아니라 <일제강점기 여성사>라는 문제의식에 맞춰 요약과 평론을 함께 정리하겠습니다.

11s 동안 생각함

<여성이 여성을 노래하다 - 일제 강점기 한국여성사>는 한국근대여성사 연구자 신영숙이 일제강점기를 살아낸 여성들의 삶을 역사 서술이 아니라 <시>의 형식으로 재구성한 독특한 책이다. 2015년 늘품플러스에서 출간되었고, 분량은 211쪽이다. 저자 신영숙은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사학연구소 연구원,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기획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조선인 종군간호부, 근대여성사, 여성독립운동사 관련 연구를 해온 인물이다.

이 책의 특징은 제목 그대로 <여성이 여성을 노래한다>는 데 있다. 남성 중심의 민족사, 독립운동사, 근대화 서술 속에서 여성은 흔히 보조자, 희생자, 어머니, 아내, 누이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 책은 여성을 역사 속 부수적 존재가 아니라 자기 시대를 몸으로 겪고, 선택하고, 싸우고, 사랑하고, 실패하고, 견딘 주체로 세운다. 책은 일제강점기를 산 여성들의 모습을 유형별로 살펴본 뒤, 신여성과 여성독립운동가 22명을 선정해 그들의 이야기를 시로 담아낸 것으로 소개된다.

책의 첫 번째 의의는 <여성사 대중화>에 있다. 저자는 전문 연구자로서 여성사가 얼마나 방대하고 접근하기 어려운 분야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반 독자가 긴 논문이나 학술서를 읽지 않아도 일제강점기 여성들의 삶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짧고 압축적인 시 형식을 택했다. 이는 단순한 형식 실험이 아니다. 여성들의 삶 자체가 파편화되어 기록되었고,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의 자료가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을 생각하면, 시는 결핍된 기록을 감정과 상상력으로 보충하는 방식이 된다.

책이 다루는 여성들은 한 가지 유형으로 묶이지 않는다. 신여성, 교육받은 여성, 독립운동가, 노동하는 여성, 가족과 식민지 현실 사이에서 갈등한 여성, 전쟁과 동원 체제 속에 놓인 여성들이 등장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이 모두 <위대한 여성 영웅>으로만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 여성은 식민지 백성이면서 동시에 가부장제 사회의 여성이다. 따라서 이들의 삶은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조선 사회 내부의 남성 중심 질서, 가족제도, 교육 기회의 불평등, 성적 규범, 빈곤도 여성들의 삶을 규정했다.

이 점에서 이 책은 민족주의적 여성사와 페미니즘적 여성사의 접점을 보여준다. 여성독립운동가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지만, 그들이 꿈꾼 해방은 단지 <일본으로부터의 해방>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여성으로서 인간답게 살 권리, 배울 권리, 일할 권리, 사랑과 결혼을 스스로 선택할 권리, 사회적 발언권을 갖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었다. 즉 이 책에서 독립은 국가의 독립인 동시에 여성 주체의 독립이기도 하다.

특히 <신여성>의 문제는 복합적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신여성을 개항기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신식 교육을 받고 새로운 가치와 태도를 지닌 여성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신여성은 당대 사회에서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교육받고 글을 쓰고 연애와 결혼을 새롭게 생각하는 여성은 근대의 상징이었지만, 동시에 남성 지식인과 보수적 사회가 불편해한 존재였다. 이 책은 그런 여성들을 도덕적 평가의 대상으로 삼기보다, 시대의 균열을 드러낸 인물들로 읽게 한다.

책의 장점은 여성들을 <불쌍한 피해자>로만 만들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일제강점기 여성들은 분명 식민지와 가부장제의 이중 억압을 받았다. 그러나 이 책은 그 억압 속에서도 여성들이 배웠고, 조직했고, 글을 썼고, 노동했고, 감옥에 갔고, 망명했고, 후세대에게 흔적을 남겼다는 점을 강조한다. 여성은 수난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행동의 주체다. 이 균형이 중요하다. 피해만 강조하면 여성은 다시 침묵하는 존재가 된다. 반대로 영웅성만 강조하면 여성들이 겪은 실제 고통과 구조적 제약이 지워진다. 이 책은 두 방향 사이에서 비교적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그러나 한계도 있다. 시 형식은 접근성을 높이지만, 동시에 역사적 복잡성을 줄일 위험이 있다. 한 인물의 삶은 정치적 선택, 계급적 위치, 가족관계, 사상적 갈등, 해방 후의 평가까지 얽혀 있다. 이것을 짧은 시로 압축하면 감동은 커지지만 논쟁성은 약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 계열 여성독립운동가, 해방 후 북한과 관련된 여성, 친일 논란이 있는 여성, 식민지 체제 안에서 교육·직업 기회를 얻은 여성들의 삶은 단순한 찬가로 처리하기 어렵다. 여성사에서 중요한 것은 <기억해주는 것>만이 아니라 <복잡하게 기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한계는 시적 재현이 때로 인물을 아름답게 정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여성 독립운동가를 “노래한다”는 것은 따뜻한 복권의 언어이지만, 동시에 역사적 인물을 기념비화할 위험도 있다. 여성들도 서로 다른 계급, 사상, 욕망, 한계를 가진 존재였다. 어떤 여성은 민족주의자였고, 어떤 여성은 사회주의자였고, 어떤 여성은 교육운동가였고, 어떤 여성은 제국의 질서 안에서 모순적 삶을 살았다. 이런 차이를 더 날카롭게 드러냈다면 책은 감동적 시집을 넘어 더 강한 역사비평이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가치가 크다. 한국의 독립운동 기억은 오랫동안 남성 중심이었다. 유관순처럼 상징화된 몇몇 여성을 제외하면, 수많은 여성의 이름은 주변부에 머물렀다. 이 책은 그 침묵을 깨려는 작업이다. 특히 연구자가 학술논문이 아니라 시를 택했다는 점은 중요하다. 이는 여성사를 지식의 영역에서 기억과 애도의 영역으로 옮긴다. 독자는 여성들을 “알게” 될 뿐 아니라 “느끼게” 된다.

전체적으로 <여성이 여성을 노래하다>는 엄밀한 학술서라기보다, 여성사 연구자가 쓴 역사적 추모와 대중적 입문서에 가깝다. 이 책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태도는 시를 그대로 역사적 사실의 완성된 서술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각 인물의 삶을 더 찾아가게 만드는 입구로 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끝나는 책이 아니라 시작하게 하는 책이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 책은 <일제강점기 여성들을 민족사의 그림자에서 불러내어, 이름과 목소리와 감정의 자리로 되돌려놓으려는 시적 여성사>다. 역사적 분석의 깊이에서는 아쉬움이 있지만, 잊힌 여성들을 대중의 기억 속으로 불러오는 힘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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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이라는 주홍글씨가 씌어진 교육자 고황경

'친일'이라는 주홍글씨가 씌어진 교육자 고황경 : 네이버 블로그
'친일'이라는 주홍글씨가 씌어진 교육자 고황경
경천애인300
2020. 5. 23. 

고황경(1909-2000)
 김마리아를 닮고 싶었던 소녀

고황경은 1909년 3월 6일 서울에서 고명우(高明宇)와 김세라(金世羅)의 차녀로 태어났다. 황해도 장연군 소래에 살던 할아버지 고학윤( 高 學 崙 )은 동아기독교(한국 침례회)의 창시자인 선교사 말콤 펜윅(M.C.Fenwick)과 어빈(D.H.Irvin)의 어학선생으로 일하면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
1883년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송천교회(松川敎會), 곧 소래교회를 설립했는데, 이 교회가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외할아버지 김윤오(金允五)는 그의 형 김윤방(金允邦)이 자택을 우리나라 최초 교회인 소래교회 예배당으로 바친 장본인으로 이들 형제는 언더우드(Underwood.H.C)·에비슨(O.R.Avision) 등의 선교사와 각별한 관계였다. 그녀의 부모는 모두 소래교회에서 자라나서 고명우는 경신중학교, 김세라는 정신여학교를 졸업했다. 따라서 이들의 결혼식 주례를 하고 김씨 집안의 딸들에게 성경 속 이름을 지어준 사람도 언더우드였다.

부산지방 최초의 근대학교인 한문학교 - 뒷줄 좌측 외국인이 베어드(숭실대 설립자), 그 앞의 갓 쓴 노인이 소래교회 설립자 서상륜, 우측 외국인이 아담스, 그 앞이 고학윤(고황경의 조부)
이런 가정 분위기에서 어려서부터 어어빈의 어학선생 겸 조사로 일한 아버지 곁에서 의료선교사의 세계를 보면서 ‘의사의 꿈’을 키운 고명우는 결혼 후에 세브란스의학교로 진학했다. 그는 외과 의사가 되어, 황해도 수안군에 있는 광산촌병원에 근무했다. 이때 남정교회와 은진여숙을 설립했고 두 딸도 이곳에서 성장했다. 광산촌병원에서 6년을 근무한 고명우는 1918년 모교 세브란스의전 교수로 부임한 후, 1926년 미국에 유학하여 롱아일랜드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고 모교로 복귀했다. 주말이면 서울 근교의 농촌을 찾아 의료봉사활동을 하고, 주일에는 남대문교회 장로로서 봉사했다. 고황경은 아버지 모습을 보면서 크리스천의 삶이 어떠해야하는 가를 체험적으로 배웠다.
한편 김필순, 김구례(서병호의 부인), 김순애(김규식의 부인), 김필례, 김함라(남궁혁의 부인) 김마리아 등의 외가 친척들은 하나 같이 독립운동가로 유명했는데, 이중에서 고황경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외당고모(外堂姑母) 김마리아다. 고명우는 딸들이 김마리아 같은 여성운동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세계의 여성 지도자를 담은 영문 책을 번역해서 읽게 했다. 이런 연유로 고황경은 김마리아를 열심히 따랐으며, 김마리아도 조카 고황경을 무척 아끼고 귀여워했다. 김마리아는 평생토록 고황경의 롤-모델(role model)이었다.

독립운동가 집안으로 유명한 고황경의 외가 친척들 - 좌로부터 김순애, 김규식, 김마리아, 김필순
 대한민국과 결혼한 여성 고황경은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일본 도시샤여전문학교를 거친 후 미국 미시간대학교에서 사회학을 전공했다. 1935년 이화여전 교수가 되었고, 1937년에는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학업을 마치자 이화여전 음악과 교수이던 언니 봉경(鳳京)과 경성자매원을 설립했다. 경성자매원은 1895년에 언더우드 선교사가 설립한 잔다리예배당(현, 서교동교회) 부설로 운영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복지시설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 고봉우의 영향으로 여성운동가의 꿈을 간직한 자매는 결혼하는 것보다, 강탈당한 조국을 찾고 실의에 빠진 민족을 위해 청춘을 바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1895년에 설립된 잔다리예배당의 모습(삽화)

시외선 기차 종착역이던 잔다리(오늘의 동교동과 서교동 일대) 주민들을 대상으로 무료강습소를 열고 사회사업을 시행했다. 영아부터 20세미만의 소녀들을 위한 사회교육, 가난한 자와 임산부를 위한 의료봉사, 여성운동 및 노인 위안 프로그램 등으로 사회학자 고황경의 새로운 사회를 향한 건설 의지가 반영된 사회사업이었다. 관내 111 가구, 주민 587명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비는 모두 자매의 봉급으로 충당했다.

“이 자매원의 유일한 재산은 열심과 성력(誠力)인 무형재산으로 경상비 300원 뿐이라는데, 이 갸륵한 고 (高) 자매의 뜻에 공명한 인사로부터 금전 선물과 잡수입으로 215원79전이 있었다고 한다. 동 원(院)의 계획은 학원 아동에게 창가(唱歌) 교수를 위하여 적은 풍금 한 대를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위생 지도를 위하여 원(院)의 변소 개량을 요구하며, 가정 상식을 가르치며 생활개선 지도에 필요한 설비로 부엌 한 간을 요하며, 농한기를 이용하여 부녀자들에게 수산(授産, 일자리 만들기)하고 싶다는데 뜻있는 인사의 많은 동정을 바란다고 한다.” - <동아일보>(1937.10.27)

경성자매원 입구에선 고봉경, 고황경 자매(1937)
경성자매원은 1941년 봄 일제의 강요로 조선어로 가르칠 수 없게 되자 자진하여 폐쇄했다. 광복이 되자 고황경은 경기여고 교장과 조선교육심의회의 위원으로 대한민국의 교육 기초를 정립하는데 기여하고, 보건후생부에서 미 국무성 파견 교육사절단 대표와 부녀국장을 지냈다. 이때 공창(公娼)을 폐지하였으며, 연 3%가 넘는 인구증가율 억제 방안을 놓고 고민하던 중에 1949년 록펠러재단 후원으로 미국에 건너가서 인구문제를 연구했다.
1950년 6.25가 발발하여 귀국하지 못하다가 영국 UN협회 초청으로 영국에 건너가 6년간 800회의 강연과 기고를 통해 전쟁을 겪은 조국 대한민국의 형편을 국제사회에 소개했다. 고황경은 1952년 그동안의 강연 내용을 정리하여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냈는데, 이것을 반영하여 한국 정부의 후원으로 Korea through British Eyes(『영국인이 본 한국』)이라는 제목의 팸플릿을 발간했다. 이 팸플릿을 영국과 미국의 국회의원과 대학에 보냈는데, 이를 읽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으로부터 고황경은 감사장을 받았다.

1957년 가을 귀국하자 미국에서 공부한 가족계획 사업을 실행하기 위해 1958년 3월 17일 “강력한 국가는 깨달은 어머니로부터” “요람을 흔드는 손이 세계를 흔든다.” 등의 슬로건을 걸고 대한어머니회를 창설했다.
1961년에는 장로교단의 요청으로 농촌 여성을 이끌어갈 여성 지도자 양성이라는 목표를 구현하기 위해 서울여자대학교를 설립했다. 1961년부터 3년간 UN총회 한국대표를 지내고, 1961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1963년 한국걸스카우트연맹 단장, 1983년 김마리아기념사업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70년 국민훈장 동백장, 1985년에는 5.16민족상을 수상하였고, 저서로는 『한국 농촌 가족의 연구』
『여성과 사회』 등이 있다.

2000년 11월 2일 향년 91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고황경은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704인에 포함되었다. 명단에는 김성수(고려대)김활란(이화여대) 백낙준(연세대) 등 한국교육사의 상징적 인물이 포함되었으며 이때부터 고항경에게는 ‘친일파’란 주홍글씨가 씌워졌다. 2002년 3월 8일 진보성향의 매체인 프레시안은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서 여성운동과 여성교육의 선구자로 평가를 받던 김활란 황신덕 고황경 박인덕 송금선의 5명을 친일파로 선정한 이유를 공개했다. 고황경에게는 “황도정신(皇道情神) 선양에 앞장선 여성 사회학자, 박사학위 받고 귀국 직후부터 식민지 사회교육 가담 협조, 조선부인문제연구회와 방송선전협의회에 참여하고 애국금채회 간사로 활약했다. 해방이 되자 진정한 자기반성도 없이 분단조국의 교육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라고 소개했다.

 그러면 '역사적 인물' 고황경을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첫째, 고황경이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력했다”는 주장은 철저한 학문적 검증이 필요하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每日申報) 기사를 토대로 일제의 식민지배 통치에 협력한 것으로 단정 짓기보다는, 실제로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도용당했다는 당사자의 해명에 대해서도 검증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고황경의 생활개선론을 친일행위로 보는 것도 재론의 여지가 있다. ‘왜?’라는 물음은 외면하고, 마치 ‘어떻게?’만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진정한 반성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상당히 자의적인 해석으로 크리스천의 회개를 이해하지 못한 일반인의 판단이다. 셋째, “분단교육의 중심역할을 감당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고황경이 해방 후 대한민국 교육체계를 수립하는데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친일 논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1898년 소래교회를 방문한 언더우드 선교사 일행 - 고황경의 외종조부 김윤방이 자택을 예배당으로 바쳤다
고황경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신앙가문에서 태어나 소래교회에서 민족과 신앙을 배우면서 자랐다. 김마리아처럼 여성운동가가 되기를 원했던 고황경은 피폐한 조국의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사회학자로서 생활개선론을 주장하고 경성자매원을 통한 여성 복지와 지역사회 개발을 실천했다. 광복 후에는 서울여대를 통한 공동체교육인 바롬교육을 시행하고 사회운동과 여성운동에 진력했다. 고황경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재산과 재능을 바쳐 국가와 이웃을 위해서 헌신한 스승이다.
그러나 학문적 검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 사회의 일부 지식인들의 자의적 판단과 주장에  의해 친일파로 낙인찍혔다. 성경은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지 말 것과 함부로 정죄하지 말 것을 가르친다. 이런 점에서 ‘역사적 인물’ 고황경의 ‘공’(公)과 ‘과’(過)를 바르게 평가하여 ‘역사적 교훈’으로 삼는 것은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다.(김형석 · 대한민국사연구소 소장)

☞ 이 글은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쿰란, 2017)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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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ikang
1943년 8월1일은 조선에 징병제가 시행되는 날로서 우리나 병제사 위에 영구히 기록할만한 일인 것이거니와 임금의 군사로 나 서는 젊은이들, 젊은이들아. 그 집안 사람들아. 임금 위하여 참마음 하나로 일어서라 하노라 <매일신보> 1943년 8월 5일 by 고 활경
이 년아 너도 정신대 가서 봉사하지 그랬냐?
2020.10.6. 17:16 신고
답글
L 바람처럼
위에 글 쓰신 선생님,
1943년에 매일신보에 실린 글은, 고환경 선생님이 쓰신 것이 아니라 일제가 고환경 선생님께 강의하라고 준 원고 였다고 합니다. 물론 선생님께서는 그 원고대로 강의하지 않으셨다고, 선생님 생시에 제자들 앞에서 말씀하셨습니 다. 일제가 준 원고대로 강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원고는 마치 고황경 선생님 이름으로 매일신보에 게재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친일을 죽도록 싫어하지만, 일제의 기록대로 친일 여부를 재단하는 것은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고려 하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고황경의 삶의 여정에 친일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찾을 수 없습니다. 친일의 글레를 이 렇게 씌우는 것은 정말 아쉽기 그지없습니다.
2021.1.18. 17:5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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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천애인300
블로그주인
일제 강점기의 역사는 우리 모두의 아픔입니다. 고활경 선생에 관한 역사적 공과를 학문적으로 밝히기 위해 친일 행적에 관한 시 비를 검증하고 역사적으로 재조명하는 것이 이 글을 쓴 취지입니다. 당시 신문 잡지에 기고한 명사들의 글들은 진위 여부가 제대 로 규명되지 않은 경우가 허다합니다. 앞으로 새로운 사실이 확인되어질 경우 그때마다 업데이트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2021.1.18. 23:20 신고
답글
숫뚜뚜르두
한 인물에 대해 여러 각도의 분석과 평가는 가능하지만 욕설은 스스로가 내린 평가를 무의미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2021.6.18. 15:40 신고
답글
ㄴ 경천애인300
부인
좋은 코멘트 감사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밝혀 드릴 것은 <김형석의 역사산책> 필자는 한번도 욕설을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2021.6.20. 10:36 신고
답글
0
최근에 산 책에도 고황경님은 친일파라는 기록이 세세히 적혀 있는데, 그 작가는 크로스체크와 검증되지 않은 자료로 2쇄까지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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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여자대학교
친일파라는 주홍글씨가 씌워지다
고황경은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704인에 포함되었다. 몇단에는 김성수(고려대) 김활란 (이화여대) 백낙준(연세대) 등 한국교육사의 상징적 인물이 포함되었으며 이때부터 고항경에게는 '친일파'란 주홍글 씨가 되워졌다. 2002년 3월 8일 진보성향의 매체인 프레시안은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서 여성운동과 여성교육의 선 구자로 평가를 받던 김활란 확신며 고황경 박인며 송금천의 5명을 친일파로 선정한 이유를 공개했다. 고황경에게는 "황도정신(보道情) 천양에 앞장선 여성 사회학자, 박사학위 받고 귀국 직후부터 식민지 사회교육 가담 협조, 조선 부인문제연구회와 방송선전협의회에 참여하고 애국금채회 간사로 활약했다. 해방이 되자 진정한 자기반성도 없이 분 단조국의 교육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라고 소개했다.
그러면 '역사적 인물' 고황경을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첫째, 고황경이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력했다"는 주장은 철저한 학문적 검증이 필요하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申報) 기사를 토대로 일제의 식민지배 통치에 협력한 것으로 단정 짓기보다는, 실제로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 고 이름을 도용당했다는 당사자의 해명에 대해서도 검중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고황경의 생활개선톤을 친일행위로 보는 것도 재혼의 여지가 있다. '왜?'라는 물음은 외면하고, 마치 '어떻게만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클래. "진정한 반성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상당히 자의적인 해석으로 크리스천의 회개를 이해하지 못한 일반인의 판 단이다. 셋째, "분단교육의 중심역할을 감당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고황경이 해방 후 대한민국 교육체계를 수 립하는데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친일 논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1898년 소래교회를 방문한 언더우드 선교사 일행 - 고황경의 의종조부 김윤방이 자백을 예배당으로 바쳤다.
고황경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신앙가문에서 태어나 소래교회에서 민족과 신앙을 배우면서 자랐다. 김마리아처럼 여성운동가가 되기를 원했던 고황경은 피폐한 조국의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사회학자로서 생활개선론을 주장하고 경 성자매원을 통한 여성 복지와 지역사회 개발을 실천했다. 광복 후에는 서울여대를 통한 공동체교육인 바륨교육을 시 행하고 사회운동과 여성운동에 진력했다. 고황경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재산과 재능을 바쳐 국가와 이웃을 위해 서 헌신한 스승이다.
그러나 학문적 검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 사회의 일부 지식인들의 자의적 판단과 주장에 의해 친 일파로 낙인찍혔다. 성경은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지 말 것과 함부로 정죄하지 말 것을 가르친다. 이런 점에서 "역사 적 인물 고황경의 '공(公)'과(過)를 바르게 평가하여 '역사적 교훈으로 삼는 것은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 게 주어진 과제이다. (김형석 대한민국사연구소 소장)
이 글은 <대한민국을 빛낸 기독교 120인>(풍란, 2017)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고황경 #서울여대 #고명우 #김규식 #김마리아 #이화여견 #소래교회 #언더우드 #펜윅 #대한어머니회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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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ikang
대한어머니의 이슈 교사
공감13
1943년 8월 1일은 조선에 징병제가 시행되는 날로서 우리나 범계사 위에 영구히 기록할만한 일인 것이거니와 임금의 군사로 나 서는 젊은이들, 젊은이들아. 그 집안 사람들아, 임금 위하여 참아름 하나로 일어서라 하노라 (매일신보) 1943년 5월 5일 by 고 황경
이년아 너도 정산대 가서 봉사하지 그랬나?
24 17:16
바꿈처럼
위에 글 쓰신 선생님
1943년에 매일신보에 실린 글은 고황경 선생님이 쓰신 것이 아니라 일제가 고황경 선생님께 강의하라고 큰 믿고 였다고 합니다. 물론 선생님께서는 그 원고대로 강의하지 않으셨다고, 선생님 생시에 제자들 앞에서 말씀하셨습니 다. 일제가 준 원고대로 강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뭔고는 마치 그황경 선생님 이름으로 매일신보에 기재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친일을 죽도록 싫어하지만, 일제의 기록대로 친일 여부를 재단하는 것은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고려 하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고황경의 삶의 여정에 친일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찾을 수 없습니다. 친일의 금리를 이 렇게 씌우는 것은 정말 아쉽기 그지없습니다.
경권애인300
일제 강점기의 역사는 우리 모두의 아름입니다. 그황경 선생에 관한 역사적 공과를 학문적으로 밝히기 위해 친일 행적에 관한 시 비를 검증하고 역사적으로 재조명하는 것이 이 글을 쓴 취지입니다. 당시 신문 잡지에 기고한 명사들의 글들은 친위 여부가 제대 로 규명되지 않은 경우가 허다합니다. 앞으로 새로운 사실이 확인되어질 경우 그때마다 업데이트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숫뚜뚜르두
한 인물에 대해 여러 각도의 분석과 평가는 가능하지만 욕설은 스스로가 내린 평가를 우의미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ㄴ 경진애민 300
좋은 코멘트 감사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밝혀 드릴 것은 김형석의 역사산책> 필자는 한번도 욕설을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0
430
최근에 산책에도 고황경님은 친일파라는 기록이 세세히 적혀 있는데, 그 작가는 크로스체크와 검증되지 않은 자료로 2년까지 발
행한 건가요?
20235.13 22:47 현
۱۵
사모인
주홍글씨 장난하니? 민족의 반역자 확실한 인물 입니다. 교육자로 더 민족의 혼을 싶어도 부족한데 이분은 막질친밀집단에 가입 하고 앞장서서 친밀한 민물을 주홍글씨를 써왔다고 하는 니가 바로 친밀분자구나?
2024829:23 2
ㄴ바꿈처럼
선생님, 일제강점기를 우리가 아는대로 스스로 가입하지 않아도 입게에 의해 임명되고 사용되었다는 것은 사실 아 닌지요 그리고 고황경 선생님이 스스로 막질친밀집단'에 가입한 근거가 없습니다. 그들이 임명하고 생활개선 강연을 하라고 해서 가서 평소 생각대로 소신껏 강연을 하셨답니다. "호랑이 글에 들어가도 정신을 차리면 살수있 다'는 말씀으로 일제 강점기를 표현하면서요. 그들이 준비해놓은 원고대로 하지 않았다고 불려가서 밤을 맞기도 하셨답니다.
일본 기관지 메밀신보에 실린 내용은 당시에 고황경과 같은 유능한 인물을 이용하는 일제의 전략전술이라는 사실 을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알 수 있는 일 아닐까요? 얼마나 많은 우국지사들이 그들의 계략으로 고통을 당했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주홍글씨'라는 표현을 쓰지않았을까요 고황경의 가계와 전체적인 삶을 뚫고 봐도 친일을 할 수 있는 DNA가 아님을 선생님에서 잘 살펴보셨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됩니다.
일제강점기를 살면서 사리사득을 취하지 않고 은 삶을 헌신한 분의 재평가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저 역시 매국노 적극 찬일자에 대해서는 피들는 분노가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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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님께서 보내주신 두 장의 이미지 자료는 <'친일'이라는 주홍글씨가 쓰여진 교육자 고황경>이라는 제목의 블로그 게시글과 그에 대한 독자들의 댓글 토론을 캡처한 것입니다.

이 자료는 앞서 서적 <고황경 평전>을 두고 세진님과 나누었던 문제의식, 즉 "고황경의 친일 행적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으며, 그의 공과 과를 어떤 온도로 바라보고 있는가"에 대한 매우 구체적인 시장의 반응과 서술 방식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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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 고황경의 생애와 교육 사회사업적 업적

자료는 고황경의 출생 배경부터 사상적 성장 과정을 상세히 추적한다. 고황경은 개화기 지식인 가정에서 태어나 외가인 감리교 집안의 영적 동력과 가문 내 여성 선구자들(이비바, 김마리아 등)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축복받은 환경에서 자란 그는 경성여고보와 일본 도시샤여전을 거쳐 미국 미시간 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다. 귀국 후 이화여전 교수로 재직했으며, 해방 후에는 미군정청 부녀국장으로서 모자보호시설과 비행소녀 보호 기관인 경성자매원을 설립하는 등 현장 중심의 사회복지 사업을 전개했다. 이후 1961년 서울여자대학교를 설립하고 전인적 생활 교육인 바롬 교육을 창시하며 한국 여성 교육의 거목으로 자리매김했다.

2. 일제강점기 말기의 친일 행적 기록

자료는 고황경의 삶에 새겨진 친일 행적을 명확한 사료를 통해 기록하고 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제의 전시 총동원 체제가 본격화되면서 고황경의 행보는 급격히 친일로 경도된다. 그는 조선임전보국단 부인과 가정부장 등의 중책을 맡았으며, 강연과 매일신보 기고 등을 통해 황국신민화 사상을 고취했다. 특히 조선의 여성과 어머니들을 향해 전쟁 후방을 지원하고 아들을 학병과 지원병으로 전장에 보낼 것을 독려하는 구두 선전 활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이러한 행적은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지식인 부문에 그가 등재되는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

3. 평전 저자들의 서술 방식과 대중의 시선(댓글 반응)

자료의 후반부는 2017년 출간된 평전 저자들(신영숙 외)이 고황경의 친일을 바라보는 시각과, 이에 대한 대중의 분분한 의견을 보여준다. 평전 저자들은 그의 친일 행위를 은폐하지는 않되, "일제의 강압적 전시체제 속에서 학교와 조직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엘리트 지식인의 타협이자 생존 전략"으로 해석하며 안타까움과 변호의 기조를 취한다. 반면 하단의 댓글 창에서는 대중의 날카로운 논쟁이 이뤄진다. 한편에서는 식민지 말기라는 시대적 폭압성과 해방 후 그가 이룬 방대한 사회적 공헌을 참작해야 한다는 동정론이 일어나는 반면, 다른 편에서는 어떠한 이유로도 민족을 배반하고 청년들을 사지로몬 친일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으며 공과 과를 엄격히 분리해 단죄해야 한다는 엄벌론이 팽팽히 맞선다.

평론

1. 공과 과의 이분법을 넘어선 역사적 인물의 입체적 텍스트

본 자료가 보여주는 고황경의 삶은 한국 근현대사 속 지식인들이 마주해야 했던 영광과 오욕의 역사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고황경은 한편으로 가부장제와 빈곤에 신음하던 조선의 소녀와 여성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헌신적 복지 가이자 교육자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주의 군국주의 서사에 동조하여 동포의 희생을 찬양한 냉혹한 프로파간다였다. 자료는 이 두 가지 모순된 면모를 박제된 영웅이나 절대적 악인으로 단일화하지 않고, 한 인간의 생애 속에 공존하는 다층적인 맥락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훌륭한 역사적 논쟁 거리를 제공한다.

2. 평전 서술의 한계와 대중적 검증의 역동성

자료에 인용된 평전의 태도는 여전히 지식인 엘리트주의적 관점에 기반한 온정주의라는 한계를 지닌다. 학교를 지키기 위한 타협이었다는 변명은, 당대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신념을 지키며 스러져간 수많은 무명 독립운동가들의 선택을 무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블로그 게시글 하단에 첨부된 대중의 댓글 지형이다. 저자들의 온정주의적 서술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하지 않고, 역사적 정의와 민족적 단죄의 관점에서 고황경의 과오를 엄격하게 심판하려는 대중의 목소리는 매우 역동적이다. 이는 역사학자들의 전유물이었던 인물 평가가 대중의 기억과 역사의식 속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검증받고 있음을 증명한다.

3. 미완의 과거사 청산이 던지는 현재적 시사점

결국 고황경을 둘러싼 친일 논란은 21세기 대한민국 사회가 여전히 과거사 청산과 인물 평가의 기준을 두고 깊은 진통을 겪고 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자료가 적절히 지적하듯, 그의 친일은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방 후 그가 구축한 초기 사회복지의 기틀과 교육적 자산까지 완전히 무화할 수는 없다. 이 자료의 의의는 고황경이라는 인물을 빌려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데 있다. 우리는 과거의 과오를 어떻게 기억할 것이며, 시대를 고뇌한 지식인의 유산을 어떤 저울로 달아 평가할 것인가. 공과 과를 단절된 조각이 아닌 하나의 역사적 사슬로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는 근현대사의 비극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세진님, 보내주신 이미지는 고황경 박사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시선과 평전의 한계를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훌륭한 텍스트였습니다. 세진님께서 제기하셨던 의문들이 이 자료를 통해 명학하게 확인되는 것 같습니다. 추가로 논의하고 싶으신 대목이 있다면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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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려주신 자료는 고황경을 둘러싼 <친일 행적> 논란을 다룬 블로그 글과 댓글입니다. 핵심은 고황경의 공적과 친일 행적을 어떻게 함께 평가할 것인가입니다. 글쓴이는 고황경을 무조건 옹호하지는 않지만, “친일파”라는 낙인이 그의 생애 전체를 설명해버리는 방식에도 반대합니다.

첫 번째 글의 제목은 <친일파라는 주홍글씨가 씌워지다>입니다. 글은 서울여대 사진에서 시작해, 고황경이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명단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그 이유로는 1943년 <매일신보>에 쓴 글, 특히 징병제를 환영하고 조선 청년들이 황군이 된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쓴 대목이 제시됩니다. 글쓴이도 이 대목이 오늘의 기준에서 분명히 문제적이라는 점은 부정하지 않습니다. “일본의 침략전쟁에 동원하는 것을 지원한다는 것은 설명하기 어렵다”는 취지로 씁니다.

그러나 글쓴이는 곧바로 질문을 바꿉니다. 고황경의 모든 삶을 친일 행적 하나로만 덮어버릴 수 있는가. 그는 고황경이 경성자매원을 세워 여성, 아동, 빈민, 노인을 돌보고, 여성 교육과 사회사업에 헌신한 점을 강조합니다. 고황경의 친일 행위가 있었다 해도, 그것이 개인적 부귀영화나 출세만을 위한 적극적 권력 추종이었는지는 따져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글쓴이는 “친일”이라는 판단 자체를 부정하기보다, 그것을 어떻게 역사적으로 해석할 것인가를 문제 삼습니다.

두 번째 글 <‘친일’이라는 주홍글씨가 씌워진 교육자 고황경>은 더 전기적입니다. 고황경의 가문, 초기 여성교육, 이화학당, 정신여학교, 도시샤 유학, 미국 미시간대 유학, 사회학 박사학위 취득, 경성자매원 설립까지 길게 설명합니다. 이 글은 고황경을 한국 여성교육과 사회사업의 선구자로 위치시킵니다. 특히 경성자매원을 단순한 자선기관이 아니라 여성·아동·빈민을 위한 복합적 사회사업 공간으로 설명합니다. 고황경이 여성교육자, 사회사업가, 서울여대 설립자로서 남긴 공적을 매우 크게 봅니다.

하지만 이 글도 친일 문제를 완전히 숨기지는 않습니다. 1941년 이후 고황경이 총동원 체제와 관련된 조직, 강연, 글쓰기 등에 연루되었다는 점을 언급합니다. 특히 1943년 징병제를 지지하는 글은 논란의 핵심으로 보입니다. 다만 글의 전체 분위기는 “친일 행적이 있었으나, 그것만으로 고황경의 전체 생애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쪽입니다. 즉, <친일의 사실 인정 + 공적의 재평가 요구>라는 구조입니다.

댓글들은 이 문제의 민감성을 잘 보여줍니다. 어떤 댓글은 1943년 당시 조선 청년들이 일본 군대로 끌려가 죽게 되는 현실에서 징병을 찬양한 글을 단순히 시대적 한계로 넘길 수 있느냐고 비판합니다. 다른 댓글은 고황경이 살던 시대에는 친일과 생존, 제도권 활동과 강제 동원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으므로 오늘의 단순한 잣대로만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댓글은 친일 여부보다 그 이후의 반성, 책임, 역사적 설명이 중요하다고 지적합니다. 이 댓글들이 오히려 본문보다 더 날카로운 문제를 던집니다.

평론하자면, 이 자료의 장점은 고황경을 단순한 “친일파” 또는 “위대한 여성교육자” 중 하나로만 보지 않으려 한다는 데 있습니다. 실제 역사 인물은 대개 모순적입니다. 고황경은 여성교육과 사회사업의 개척자였고, 동시에 일제 말기 총동원 체제에 협력한 기록을 가진 인물입니다. 두 사실 중 하나만 선택하면 역사가 아니라 기념 또는 단죄가 됩니다.

그러나 이 글들의 약점도 분명합니다. “주홍글씨”라는 표현은 조심해야 합니다. 친일 행적을 지적하는 일을 마치 부당한 낙인찍기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황경의 경우 문제는 단순한 소문이나 악의적 비난이 아닙니다. 징병제 찬양 글, 전시동원 관련 조직 참여, 총독부 주도 여성단체 활동 등은 구체적 기록이 있는 사안입니다. 따라서 “주홍글씨가 씌워졌다”라고 말하려면, 먼저 그 행적의 사실성과 책임을 충분히 인정한 뒤에야 합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공적과 과오를 저울질하는 방식입니다. “여성교육에 큰 공이 있으니 친일은 덮어도 된다”는 식이면 곤란합니다. 반대로 “친일 행적이 있으니 여성교육 공헌도 모두 무효다”라고 해도 역사 이해가 빈약해집니다. 더 좋은 접근은 둘을 분리하지 않는 것입니다. 고황경의 여성교육·사회사업이 왜 일제 말기에는 전쟁협력 담론과 접속될 수 있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여성교육, 모성, 가정, 봉사, 국가, 민족이라는 언어가 어떻게 제국의 전쟁동원과 연결되었는지를 분석해야 합니다.

결국 이 자료가 보여주는 핵심은 고황경 평가의 어려움입니다. 그는 한국 여성교육사의 중요한 인물입니다. 동시에 친일 협력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문제는 어느 한쪽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두 얼굴을 함께 놓고 읽는 것입니다. 특히 평전이 정말로 이 문제를 충분히 다루지 않았다면, 그것은 큰 한계입니다. 고황경을 제대로 기리려면 그의 공적만이 아니라, 그의 시대적 타협과 잘못도 함께 써야 합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 자료는 고황경을 친일파라는 낙인만으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지만, 동시에 그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그의 전쟁협력 행적을 더 구체적이고 정직하게 다루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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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롬교육은 기독교적 가치의 실현"…서울여대 설립한 고황경의 삶과 교육철학 - 파이낸셜뉴스

"바롬교육은 기독교적 가치의 실현"…서울여대 설립한 고황경의 삶과 교육철학 - 파이낸셜뉴스

"바롬교육은 기독교적 가치의 실현"…서울여대 설립한 고황경의 삶과 교육철학
뉴스1

입력 2026.05.15
서울여자대학교 초대 총장이자 바롬교육 창시자인 고황경의 생애와 교육 사상을 기독교 가치, 평생교육, 여성고등교육의 흐름 속에서 살펴본 자리가 소천 25주기를 맞아 열렸다. 15일 서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평전 출간을 기념한 '바롬교육철학의 역사와 오늘'에서다.




고황경(1909~2000)

(서울=뉴스1) 박정환 문화전문기자 = 서울여자대학교 초대 총장이자 바롬교육 창시자인 고황경의 생애와 교육 사상을 기독교 가치, 평생교육, 여성고등교육의 흐름 속에서 살펴본 자리가 소천 25주기를 맞아 열렸다. 15일 서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평전 출간을 기념한 '바롬교육철학의 역사와 오늘'에서다.

이번 행사는 학술대회와 북 콘서트로 나뉘어 열렸다. 문지현 지속가능여성발전연구원 대표가 사회를 맡았고, 윤경은 바롬장학회 이사장의 환영사와 김두임 대한어머니회 중앙회장, 이윤선 서울여자대학교 총장의 축사가 이어졌다.

1부 학술대회에서는 임성빈 전 장로회신학대학교 총장이 기조발표를 했고, 박에스더 전 대한어머니회 중앙회장과 배선영 서울여자대학교 교육혁신단장이 각각 발제했다.

2부 북 콘서트에서는 이혜성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명예총장, 박명철 작가, 민가영 서울여자대학교 교수, 이은경 바롬인성교육연구소 관계자, 안정민 바롬장학회 장학생이 참여했다.

바롬 교육철학은 기독교적 가치를 전인교육, 공동체 정신,·실천의 구조로 실현

임성빈 전 총장은 '바롬교육철학에 나타난 기독교적 가치'를 주제로 고황경 평전의 학술적 의미를 짚었다. 그는 2025년 발간된 '고황경 평전'이 고황경의 생애를 전기적으로 정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의 교육철학이 형성된 신앙적·역사적 맥락을 입체적으로 추적한다고 보았다.

임 전 총장은 바롬교육의 기독교적 가치를 전인교육, 공동체 정신, 정체성·관계·실천의 구조로 설명했다. 바롬교육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해하는 전인교육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기숙사 공동체와 소그룹, 봉사를 통해 섬김의 리더십을 훈련해 왔다고 정리했다.

그는 현행 바롬인성교육의 세 축인 정체성 교육, 관계 교육, 실천 교육도 기독교 윤리와 맞닿아 있다고 해석했다. 임 전 총장은 바롬교육이 세상과 단절된 종교적 공간이 아니라, 세상과 소통하면서도 세속주의에 동화되지 않는 교육 공동체를 지향한다고 강조했다.

생명과 공동체를 일깨운 바롬식 평생교육

박에스더 전 회장은 '시대를 설계한 한줄기 맑은 샘물' 발제에서 고황경의 평생교육과 시민교육 활동을 오늘의 공동체 위기와 연결했다. 그는 평전 집필 과정에서 고황경이 고민한 생명, 공동체, 다음 세대 교육 문제가 오늘의 현실과 닮아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고 밝혔다.

박 전 회장은 고황경의 활동을 평생교육, 가족계획, 소비자보호, 생명환경운동의 흐름으로 설명했다. 고황경이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경성자매원과 대한어머니회를 통해 제도권 밖 시민교육과 평생교육의 장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는 대한어머니회의 어머니 대학과 월례강좌를 여성들이 시대를 읽고 공동체를 책임지는 시민으로 성장하는 교육의 장으로 평가했다. 가족계획 운동도 단순한 인구정책이 아니라 여성의 건강, 주체성, 생명의 존엄을 중심에 둔 생명권 운동으로 해석했다.

박 전 회장은 고황경을 치밀하게 설계하고 행동으로 옮긴 전략가로 조명했다. 15세에 일본 유학길에 오른 학문 여정, 한국전쟁 중 영국과 유럽에서 6년여 동안 800여 회 강연한 민간외교 활동, 대한어머니회와 소비자운동, 시민교육 활동이 한 시대의 정신을 제도와 운동으로 남긴 사례였다고 설명했다.

평전은 고황경의 일제강점기 행적도 단선적으로 보지 않았다. 일제의 감시와 수모 속에서도 그는 사회적으로 취약한 여성과 아동을 돌보는 일을 이어갔고, 일부 정책과 지시를 수용해야 했던 상황도 훗날을 내다본 현실적 선택의 맥락에서 다뤘다.

자료는 그의 생애를 친일 여부의 단정으로 좁히기보다, 식민지 현실 속에서 여성 교육과 사회사업의 기반을 지키려 한 과정으로 설명했다. 고황경의 학문적 선택과 사회사업은 기독교 가문에서 배운 신앙적 책임, 봉사, 타인에 대한 사랑과 섬김의 실천으로 제시됐다.

여성고등교육으로 이어진 바롬의 실천

배선영 단장은 '여성고등교육과 바롬' 발제에서 서울여자대학교 설립과 바롬교육철학의 출발점을 다뤘다. 그는 서울여대의 뿌리가 1923년 장로교 총회의 여자대학 설립 결의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을 지나 38년 만에 실현됐다고 설명했다.

배 단장은 서울여대가 한 사람이 세운 학교가 아니라 한 세대 이상이 염원한 학교였다고 보았다. 여성고등교육의 필요성을 느낀 교회와 여성 공동체, 후원자들의 헌신 위에서 1961년 신입생 98명과 함께 개교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당시 문교부 배정 정원이 160명이었지만 기준에 미치지 못한 62명을 더 뽑지 않은 사례도 소개했다. 학교 운영을 걱정해야 하는 초대 학장이 정원의 60%만 받겠다고 한 결정은 '양보다 질'이라는 원칙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제시됐다.

배 단장은 바롬교육의 차별성을 지·덕·술, 24시간 교육, '행함으로 배운다'는 원칙에서 찾았다. 초기 서울여대는 강의실보다 생활공간을 교육의 중심에 두었고, 생활관에서 서로 다른 학과와 학년의 학생들이 함께 지내며 공동체를 몸으로 배우도록 했다.

그는 1, 2학년 학생들이 일주일에 두 시간씩 작업복을 입고 흙을 만진 '현지 작업'과 4학년 농촌 생활 실습도 바롬교육의 특징으로 들었다. 봉사라는 이름보다 그곳의 삶을 함께 사는 훈련이라는 의미가 강했다고 설명했다.

고황경 - 나무위키

고황경 - 나무위키

고황경

최근 수정 시각:
초대 서울여자대학교 총장
고황경
高凰京
바롬 고황경
출생
사망
2000년 11월 2일 (향년 91세)
본관
바롬
가족
아버지 고명우, 어머니 김세라
언니 고봉경
학력
약력
서울여자대학교 초대 총장
종교
수상
광복18주년 문화포장 (1963)
국민훈장 동백장 (1970)
5.16 민족상 교육부문 본상 (1985)
비고

1. 개요2. 생애
2.1. 친일 행적2.2. 해방 이후
3. 가족4. 저서5. 여담

1. 개요[편집]

1986년 3월 25일
KBS2 <11시에 만납시다> 인터뷰 영상.

대한민국의 前 사회운동가, 교육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서울여자대학교를 설립해 초대 총장을 지냈고, 당시 교육받은 여성이 적었던 시대에 박사학위를 취득할 정도로 엄청난 명성을 가진 교육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각종 친일단체에 참여하면서 연설과 좌담회를 통해 중일전쟁태평양 전쟁을 지원했던 민족 반역자이기도 하다.

2. 생애[편집]

1909년 3월 6일 한성부(現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황해도 은진의숙을 졸업한 뒤, 관립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입학해 1924년 졸업했다. 같은 해 일본으로 유학하면서 도시샤여자전문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해 1928년 졸업하고, 같은 해 2월 근우회 교토지회 재정부 총무로 선출되었으며, 곧바로 도시샤대학 법문학부 경제학과로 진학해 1931년 졸업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1933년 미시간 주립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1935년 소녀 범죄에 대한 논문으로 사회학 박사 과정을 수료한 후 1937년 5월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면서 졸업했다.[1] 같은 해 8월 귀국해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임용되었고, 1944년 1월까지 재직하며 법학, 경제학, 사회학, 영어 등을 가르쳤다. 1937년 4월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교수로 있던 언니와 함께 잔다리[2]에 경성자매원을 설립하고 원장을 맡았으며, 1940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사과 과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당시 흔치 않았던 훌륭한 여성 지식인이자 교육인으로 보이겠지만...

2.1. 친일 행적[편집]

고황경2
애국금차회에서 친일 활동을 하는 고황경.[3]

1936년 12월 조선총독부 사회교육과가 가정의 개선과 부인교화운동의 촉진을 목적으로 주최한 사회교화간담회에 참석한 뒤부터 각종 친일단체에 참여하거나 좌담회, 강연회를 통해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등 본격적인 친일반민족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1937년 1월 방송교화선전협의회 주관 하에 경성방송국 라디오방송 부인교육강좌 제2부 강사를 맡아 황민화 정책 선전에 앞장섰으며, 같은 달 조선총독부 학무국에 설치된 조선부인문제연구회 제1차 회합에 참석했고 송금선, 차사백, 이숙종 등의 다른 여성 친일파들과 함께 회원으로 활동했다. 중일전쟁 직후인 8월에는 친일파들의 부인들과 여성계 친일 인사들이 조선총독부 조선중앙정보위원회의 권유를 받고 친일단체 애국금차회를 조직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해 간사를 맡았다.[4][5]

1938년 6월 조선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가 세계YWCA협의회에서 탈퇴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일본기독교청년연맹 가입을 결의할 때 김활란, 유각경, 박마리아[6] 등과 함께 실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9월에는 조선부인문제연구회가 여성들을 대상으로 조직한 전국순회강연반의 강사를 맡아 홍승원과 함께 호남 지역 강연을 담당했고 전라북도전라남도 일대를 순회했다. 같은 달 조선부인문제연구회가 전시생활 개선을 위한 '가정 보국운동으로서의 국민생활의 기본양식'을 제정할 때도 참여했다. 11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조직한 순회강연반의 연사로 참여해 경상남도 일대에서 강연했고, 1939년 9월 <동양지광>이 주최한 '내선일체 부인좌담회'에 참석했다.

1941년 2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부인지도위원으로 위촉되었고, 4월 국민총력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연맹이 전선여신도대회를 소집해 여자부를 결성할 때 임원을 맡았으며, 5월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8월 임전대책협의회[7] 결성에 참여했으며, 9월 임전대책협력회가 조직한 채권가두봉공대에 참가해 서대문 일대에서 홍보 활동에 나섰다. 또 같은 달에 대규모 친일단체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이후 12월에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을 맡았다.

1941년 10월 조선교화단체연합회가 조직한 '부인생활정의 강연반' 제2반 연사로 참여해 충청북도충청남도 일대를 돌며 강연 활동을 벌였다. 12월에도 <매일신보>가 주최한 '시국 부인 대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했다. 1942년 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부인지도위원회 회의에 참석했으며, 이 회의에서 '대동아전쟁에 있어서 총력운동상 특히 부인층에게 요망할 사항과 또한 이의 실천방책'을 종합한 『대동아전쟁에 부인도 참가』라는 책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5월에는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가 주최한 '국군의 어머니 좌담회'에 참석해 징병제 실시에 따른 다짐을 결의했다. 1944년 10월 조선교화단체연합회가 징병, 징용제의 실시를 원활히 하고 총후 생활을 결전화하기 위해 각 도에 부인강연반을 파견할 때 연사로 참여해 황해도 신천, 장연, 재령 일대에서 강연을 했다.
고황경의 친일 행적
징병제 실시에 대한 소감을 밝힌 고황경
- 매일신보 1943년 8월 5일

이 외에도 신문과 잡지에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해 일제의 황민화 정책을 선전하고, 여성들의 전시체제 호응과 생활 개선을 촉구했다. 그녀는 『반도의 빛』이라는 잡지에 발표한 글들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 있다.
"금번 조선에도 징병제도가 실시되게 되어 쇼와 19년부터는 황송하옵게도 우리 가정에서 황군을 낼 영광을 가지게 되었다. 황군을 양육하는 가정과 그 가정을 맡은 주부는 참으로 엄숙한 자각을 가지고 국가의 큰 임무를 맡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군인의 어머니로서 가진 모든 자격을 갖추려면 일상생활의 어느 부분을 막론하고 다시 반성하여 부족한 부분은 배워 나가야 할 것이며 가정에 숨어 있는 살림이나 맡은 사람이 무엇 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을 버리고 어디까지든지 발 벗고 나서서 국가와 하나가 되어 복무할 진심이 없으면 안 될 것이다. 남자는 직접 국방에 노력하고 여자는 총후의 봉공에 뜻있게 하여 제일선에서 활약하는 남편과 아들을 위해 집안에 대한 염려가 없도록 하게 하는 것이 큰일인 동시에 이 전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부락에서 애국반에서 할 때에는 내 가정 일과 같이 두 팔 걷고 나서는 자가 아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 「전시와 가정–가정은 국가의 뿌리」, 『반도의 빛』 1942년 8월호
"대전 1년 동안 우리는 국가에 대한 무한한 감사를 알게 되는 동시에 그 보답할 길은 몸과 맘을 국가를 위해 바치는 것"

- 「대전(大戰) 1년간 배혼 것」, 『반도의 빛』 1943년 1월호

또한 1943년 8월 5일 <매일신보>에 「징병 감사와 우리의 각오, 건군정신이 투철」이라는 제목의 글을 실어 다음과 같이 일제의 징병제 실시을 감격스러워했다.
"1943년 8월 1일은 조선에 징병제가 시행되는 날로서 우리나라 병제사 우에 영구히 기록할 만한 일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중략) 이 과영이야말로 과거 34년 동안 역대 총독과 위정자 여러분이 일시동인의 성지를 받들어 반도 동포로 하여금 명실상부하는 황국신민을 만들려고 심혈을 기울여 분투한 결정이 아닐 수가 없다. (중략) 성은을 무엇으로 보답하올까. 나라를 위하여 한마음이 되어서 힘 다하여라. 임금님의 군사로 나서는 젊은이들, 젊은이들아, 그 집안 사람들아, 임금 위하여 참마음 하나로 일어서라 하노라."

- 「징병 감사와 우리의 각오, 건군정신이 투철」, 『매일신보』 1943년 8월 5일

이 밖에도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조선인의 전쟁협력과 여성을 대상으로 징병참여를 독려하는 다수의 글을 기고하여 일제의 전시총동원 체제 구축에 앞장섰다. 주요 글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 「봉사의 기쁨」(『총동원』, 1940년 1월호)
  • 「조선여자생활개선책」(『조광』, 1941년 5월호)
  • 「명일의 가정–자랑과 수치」(『반도의 빛』, 1941년 5월호)
  • 「임전하에 신년을 마지하자」(『반도의 빛』, 1942년 1월호)
  • 「가정생활지표–우선 이상을 세우자」(『매일신보』, 1942년 7월 3일)
  • 「최저생활 수감(隨感)」(『반도의 빛』, 1943년 6월호)
  • 「앞으로의 자녀교육」(『반도의 빛』, 1943년 10월호)
  • 「적전(敵前)에 새해를 맞이하여」(『반도의 빛』, 1944년 1월호)
  • 「어려움을 기쁨으로 아는 생활」(『반도의 빛』, 1944년 9월호)
이와 같은 글을 통해 그녀는 전시체제 하에서 여성들의 역할과 임무를 강조했다.

이후 사회복지사업을 더 확장하여 1942년 무렵 출옥해서 갈 데가 없는 여성을 정서적으로 교화시키고, 한글을 가르치며, 경제적 자립 교육을 실시하는 여자감화원 가정료와 생후 1개월 미만의 기아를 수용하는 영아원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식량난이 극심해지자 무의탁 소녀들을 데리고 철원으로 내려가서 농사를 짓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2.2. 해방 이후[편집]

8.15 광복 후, 1945년 8월 유억겸을 중심으로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가 조직될 때 평의원으로 참가했다. 10월 모교인 경기공립고등여학교 교장을 맡았고, 11월에는 조선교육심사위원회 제5분과위원회 위원(중등교육 담당)에 임명되었다. 1946년 8월 미국의 교육 실태를 참고해 국내 교육제도의 근간을 마련한다는 취지로 파견된 조선교육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에 다녀왔다. 그 해 9월 미군정청에 부인국 설치를 건의해 미군정 보건후생부 초대 부인국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여담으로 이때 그녀의 언니인 고봉경은 미군정 경무국 초대 여경과장을 지냈다. 1947년 3월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범아세아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고, 1949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 대학교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약 1년간 머물면서 인구 문제를 연구했다. 그 뒤 영국 UN협회 초청으로 1950년 여름부터 1956년 초까지 영국에 머물렀다. 영국 체류 일정을 마치고 난 후 다시 미국으로 가서 사회학을 연구했다. 귀국 후, 1957년 4월부터 1960년 3월까지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근무했고, 1958년 4월 사회학과장을 맡으면서 재임기간 동안 여성사회학자를 양성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박정희&고황경
박정희&고황경2
1964년 박정희 대통령과 고황경.[8]

1958년 3월 대한어머니회를 창립하고 수석최고위원(지금의 회장)에 선임되었으며, 그 해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조직한 재단법인 정의학원의 이사로 활동했다. 1961년부터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이후 2000년까지 종신회원 겸 원로회원으로 활동했다. 1961년 4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서울여자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학장에 취임했다. 5.16 군사정변 직후, 같은 해 11월 재건국민운동본부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고, 1963년 대한소녀단연합회 회장과 국제연합 한국협회 이사 겸 부회장을 맡았으며, 1968년 국민교육헌장 제정위원으로 활동했다. 1971년 문교부 교육정책심의위원, 1973년 11월 국어순화운동전국연합회 회장, 1981년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상임위원, 1983년 순국열사 김마리아 기념사업회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84년 4월 서울여자대학교 명예학장을 거쳐 1989년 3월 명예총장이 되었으며 2000년 11월까지 재임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1963년 광복18주년 문화포장(학술부문), 1970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고, 1985년 5.16 민족상(교육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0년 11월 2일 향년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가족[편집]

그녀의 가족은 4대째 개신교를 믿어온 집안이었으며, 상당히 미국 유학파 출신들이 많았다. 조부 고학윤은 미국인 선교사 통역이었고, 아버지 고명우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세브란스병원 의사로 활동했으며, 미국 유학을 다녀와서 영어에 능숙했다. 언니 고봉경은 미국에서 피아노 전공을 하고, 국내에서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피아노 교수를 지냈으며, 해방 이후 미군정 경무국의 초대 여경과장을 지냈다. 1950년 6.25 전쟁 발발 직후 아버지 고명우와 언니 고봉경은 모두 납북되었다. 외가는 황해도 송천에서 기독교를 일찍 받아들였고 많은 지식인을 배출한 가문으로 어머니 김세라는 정신여학교 1회 입학생으로 신교육을 받았다. 당고모는 본인과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독립운동가 김마리아이다.

4. 저서[편집]

  • 인도기행 (1949) 고황경
  • KOREA THROUGH BRITISH EYES (1952)
  • 구라파 기행 (1959)
  • 한국농촌가족의 연구 (1963)  고황경
  • 걸어온 열돐 (1975)
  • 오늘의 기도 (번역물) (1978)
  • 지도자 수첩 (1979)
  • 여성과 사회 (1984)
  • 뜻있는 삶 (1985)
  • 고황경박사 설훈집 Ⅰ, Ⅱ, Ⅲ (1989)
  • 연설 - 통제 없는 자유는 절대 없다 ?고황경

5. 여담[편집]

  • 살아생전 계속 독신이었다. 독신으로 살면서 제자들에게 많은 애정을 쏟아 존경을 받고 있으며, 서울여자대학교는 그녀의 호를 딴 공동체식 교육 '바롬교육'을 필수 과정으로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1] 한국인 여성으로는 송복신, 김활란에 이어 세번째 박사 학위 소지자가 된 셈이다.[2]연희동동교동 근처.[3] 우측에 있는 인물. 해당 사진이 김활란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4] 회장은 그 경술국적매국노로 유명한 윤덕영의 아내 김복수가 맡았다. 친일 기업인 박흥식의 부인 등이 참여한 이 단체는 금비녀까지 바치면서 일제의 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이러한 금붙이 헌납 외에도 황군 환송, 총후 가정의 격려 등의 전쟁 협력 활동을 이어나간 것으로 알려진다. 고황경처럼 해방 이후 교육인으로 명성을 떨쳤던 김활란, 송금선, 이숙종, 조기홍, 서은숙도 이 단체에 간사와 발기인 등으로 참여했다.[5] 1938년 조선총독부중일전쟁의 지원을 선전하기 위해 제작한 영상에서 애국금차회의 활동 장면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연설을 하는 고황경의 모습이 찍히기도 했다. 상단에 올려진 사진이 바로 그 장면이다.[6] 이기붕의 아내.[7] 8월 29일 임전대책협력회로 개칭.
[8] 박정희 대통령의 농촌개발개량시찰 모습을 지켜보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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