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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0

이태준 : 소설 <해방 전후> : 네이버 블로그

이태준 : 소설 <해방 전후> : 네이버 블로그

문학감상
이태준 : 소설 <해방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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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8. 23. 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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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전후
【해설】

   이태준(李泰俊)의 단편소설. ‘한 작가의 수기’라는 부제(副題)가 붙어 있는 <해방 전후>는 1946년 8월 문학가동맹의 기관지였던 [문학] 창간호에 발표된 이태준의 자전적 단편소설이다.

   같은 해 좌익 계열의 조선문학가동맹이 주관하는 해방 기념 조선문학상에 지하련(池河連)의 <도정(道程)>과 함께, '구 문단의 지도적 작가의 한 사람이었던 작가 자신이 새로 문학 운동과 민주주의 운동에 가담하여 투쟁하는 가운데서 체험한 바 제(諸) 사실을 기록한 것'이란 이유로 수상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 작가의 수기'란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은 이 시기의 작품으로 작가 자신의 가탁적(假託的) 인물인 주인공 '현'을 통해 해방 전과 후의 상황을 그린 작품이다. 일제의 탄압이 최고조에 달한 일제강점기 말에 최소한의 자기를 지켜내는 고뇌를 그린 후, 해방 직후의 혼돈된 상황에서 적절하고 정당한 방향을 찾아 문학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실천하는 문제를 차분하게 그려나갔다.

   특히 주인공 현과 대립적 인물로 김직원 노인을 등장시켜, 양자의 관계를 통해 옛것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태동할 수밖에 없는 해방 직후의 상황을 잘 묘파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끝으로 이태준은 월북(越北)하고, 이후 그의 문학은 이전의 작품 경향과는 전혀 다른 생경한 구호만 나열하는 목적 문학으로 바뀌고 만다.

【개관】

▶작가 : 이태준

▶갈래 : 단편소설

▶배경 :

- 시간 : 해방 전후의 1∼2년

- 공간 : 서울과 철원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의의 : 해방을 전후한 문단의 상황은 물론, 작가의 행적(문학적 전향)을 알 수 있는 작품

▶주제 :

- 해방 후 지식인의 이념적 갈등

- 일제 강점기 하의 한 문인의 갈등

▶발표 : [문학](1946)

【등장인물】

▶현 : 순수 문학자에서 해방 후 좌익 계열에 가담하는 소설가

▶김직원 : 철원에 사는 보수적이고, 완고한 유학자(儒學者-향교직원). 해방이 되자 영친왕을 모셔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성】

▶발단 : 호출장을 받고 서(署)에 출두한 현은 시국을 위해 일할 것을 강요당한다.

▶전개 : 강원도 철원으로 집을 옮긴 후 낚시로 소일하던 중 김직원을 만나 그와 교우(交友)한다.

▶위기 : 8.15 직후 친구의 연락을 받고 서울로 온다.

▶절정 : '현'은 좌익 계열의 '조선 문화 건설 중앙 협의회'에 관여한다.

▶결말 : 김직원과 대화를 통해 이념적으로 서로 화합할 수 없음을 확인한다.

【줄거리】

   『일제 말기, 무슨 사상가도 주의자도, 무슨 전과자도 아니었지만 시국에 대해 소극적이고 가급적 협조를 않던 작가 '현'은 살던 집을 세 놓고 강원도 산읍으로 들어간다. 창씨 개명이나 친일 작품 혹은 일어(日語) 창작을 거부했지만 그렇다고 대동아 전기(傳記)의 번역마저 거절하지는 못하던 그였다. 시국의 혼란을 피하기 위함이었으나 산골 역시 평온하기는커녕 일제의 감시가 더욱 심한 곳이었다. 감시의 눈을 피해 낚시로 소일하던 그는 그곳에서 김직원을 만나 교우한다.

   마침 문인 보국회에서 주최하는 문인 궐기 대회에 참석은 하지만, 자신이 연설할 차례가 다가오자 대회장을 빠져 나온다. 일제(日帝)도 길어야 1년이라는 생각에 갈피를 못 잡는 그는 자신의 문학을 반성한다. 이럴 즈음 주재소에서는 출두를 명령하여 각종 시국 집회에 참석하지 않았음을 경고한다.

   전국 유도(儒道) 대회와 관련해 김직원이 잡혀 들어가고 서울 친구의 전보를 받고 상경하던 '현'은 일제의 패망과 조선의 독립 소식을 듣는다.

   8월 17일 새벽에 서울에 도착한 그는 서울의 여러 정황에 불쾌해 한다. '조선 문화 건설 중앙 협의회'를 찾은 그는 마침 기초(起草)하고 있던 그들의 선언문을 읽고 발기인(發起人)으로 서명한다. 울려 퍼지는 '적기가(赤旗歌)' 속에 고민하던 '현'은 '조선 인민 공화국 절대 지지'라는 현수막 사건을 통해 자기 비판과 함께 정세를 판단하고, 그들의 지도자가 되어 '프로 예맹'과의 통합을 계획한다.

   좌익과 우익의 반탁, 찬탁 데모로 어수선한 가운데 김직원이 다시 나타나 서울을 떠난다고 말한다. 그를 보며 '현'은 중국의 문인 왕국유(王國維)를 생각한다.』

 

   『현은 무슨 사상가도, 주의자도, 무슨 전과자도 아니었다. 시골 청년들이 어떤 사건으로 잡히어서 가택 수색을 당할 때, 그의 저서가 한두 가지 나온다든지, 편지 왕래한 것이 한두 장 불거진다든지, 서울 가서 누구를 만나 보았느냐는 심문에 현의 이름이 끌려든다든지 해서, 청년들에게 제법 무슨 사상 지도나 하고 있지 않나 하는 혐의로 가끔 오너라 가너라 하기 시작한 것이 인젠 저들의 수첩에 준요시찰인(準要視察人) 정도로는 오른 모양인데, 구금을 할 정도라면 당장 데려갈 것이지 '호출장'이니 '시달서'니가 아닐 것은 짐작하면서도 번번이 불안스러웠고 더욱 이번에는 은근히 마음 쓰이는 것이 없지도 않았다.

   일반 지원병 제도와 학생 특별 지원병 제도 때문에 뜻 아닌 죽음이기보다, 뜻 아닌 살인, 살인이라도 내 민족에게 유일한 희망을 주고 있는 중국이나 영미나 소련의 우군을 죽여야 하는, 그리고 내 몸이 죽되 원수 일본을 위하는 죽음이 되어야 하는, 이 모순 된 번민으로 행여나 무슨 해결을 얻을까 해서 더듬고 더듬다가는 한낱 소설가인 현을 찾아와 준 청년도 한둘이 아니었다.

   현은 하루 이틀 동안에 극도의 신경 쇠약이 된 청년도 보았고, 다녀간 지 한 일주 일 뒤에 자살하는 유서를 보내온 청년도 있었다. 이런 심각한 민족의 번민을 현은 제 몸만이 학병 자신이 아니라 해서 혼자 뒷날을 사려해 가며 같은 불행한 형제로서의 울분을 절제할 수는 없었다. 때로는 전혀 초면들이라 저 사람이 내 속을 떠보려는 밀정이나 아닌가 의심하면서도, 그런 의심부터가 용서될 수 없다는 자책으로 현은 아무리 낯선 청년에게라도 일러주고 싶은 말은 한 마디도 굽히거나 남긴 적이 없는 흥분이곤 했다.

   그들을 보내고 고요한 서재에서 아직도 상기된 현의 얼굴은 그예 무슨 일을 저지르고만 불안이었고, 이왕 불안일 바엔 이왕 저지르는 바엔 이 한 걸음 절박해 오는 민족의 최후에 있어 좀더 보람있는 저지름을 하고 싶은 충동도 없지 않았으나, 그 자신 아무런 준비도 없었고, 너무나 오랫동안 굳어 버린 성격의 껍데기는 여간 힘으로는 제 자신이 깨트리고 솟아날 수 없었다. (하략)』

 

   『문단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는 소설가 현한테로 경찰서의 시달서가 날아들었다. 호출장이 위압적이라 해서 바뀐 것인데, 이를 받고 보면 미상불 불안하다. 무슨 죄가 있대서가 아니라 시국이 험한 판에 무슨 꼬투리를 잡아 책할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동대문서 고등계의 쓰루다 형사는 현에게 시국에 협력하지 않는 걸 지적하며 누구라도 방관적 태도는 용서받지 못할 거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현은 적당히 핑계 대고 물러 나와 출판사로 향했다. 일본을 위한 번역을 맡고 있는 일이 여간 꺼림칙하지 않았다. 전세는 기울어 연합국의 승리가 예견되는 시점이기에 더욱 그랬다.

   궁리 끝에 솔가하여 강원도 어느 산골로 내려갔다. 믿고 찾아온 사람은 서울로 장기 출장을 가고, 그의 소개로 향교 직원인 상투 튼 노인 김직원의 배려를 입게 되었다. 징용이나 면해볼까 했던 기대가 물거품이 될는지 모른다. 켕기는 마음으로 낚시에 소일삼으려 했으나 그 또한 여의치 않았다.

   한가하게 낚싯대나 들고 나가는 게 순사부장 눈을 거슬렸던 것이다. 마침 서울에서 '문인보국회'명의로 궐기대회에 참가해달라는 장문의 전보가 날아들었다. 주재소와 방공 감시초장인 우편국장이 어서 올라가라고 채근한다. 강직한 성품의 김직원도 징용 면하려거든 뻗대지 말라는 충고가 있어 도리 없이 상경을 해야만 했다.

   대회장 부민관 단상은 으리으리했다. 국민복에 예장을 단 총독부, 조선군 무슨 각하에다 일본 작가, 만주국 작가가 대거 착석해 있다. 현은 국방색 아닌 옷에 각반도 치지 않은 차림새로나마 단상에 올라 대회 순서 하나를 맡아야 했는데 그것이 아주 못마땅했다. 현은 대회장을 살그머니 빠져나와 변소에 숨었다가 칼 찬 발짝 소리 때문에 질겁을 한다.

   어떻든 현은, 가네무라 순사가 상경 길에 고쳐달라던 회중시계를 손보아서 시골로 내려갔다. 당국에서는 잠시 잠잠하더니 주재소 호출이 또 떨어졌다. 순사부장은 현을 경방단이나 방공 감시에도 뽑지 않는 것은 나라를 위해 글을 쓰라는 뜻이었는데 협력이 없다고 다그친다. 낚시질은 그만두라는 엄명이다.

   현은 더욱 의기소침해져 김직원 영감과만 자주 왕래한다. 그는 보수적인 사람이라 국호를 대한으로 되찾고, 영친왕으로 하여금 조선인 부인을 얻게 해 전주 이씨 왕조를 복고했으면 하는 희망을 피력한다. 그 또한 군청에서 춘천서 열리는 유생대회 참가를 종용받고 있으나 거절한다. 상투며 복색을 바꾸라는 청에도 나이든 핑계로 회피한다. 결국 읍으로 불려나간 후 돌아오지 않는다.

   김직원이 유치 당한 지 나흘째 날이 8월 15일이었다. 현은 서울 친구로부터 다급히 상경하라는 전보를 받고 올라가는 버스 속에서 일본 패전 소식을 듣는다. 꿈인가 생시인가 싶지만 서울 거리는 여전히 일본군의 삼엄한 경계 아래 놓여 있었다.

   그는 먼저 자신이 연을 맺고 있는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를 찾아갔다. 이후 국내 정세는 하루가 다르게 급변해갔다. 차차 미군이 진주하고, 이에 따라 망명 정객, 독립 투사들이 속속 귀국했다. 수없는 정파가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사이에 좌우익 대립이 첨예해졌다. 삐라가 난무했다. '조선문화건설'에 대립되는 좌익 문학인들의 '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이 조직되어 문인들도 두 파로 쪼개졌다.

   게다가 '문협' 내에도 이탈파가 생겨 의장이나 서기장의 허락도 없이 공공연히 '조선인민공화국 절대 지지'란 플래카드가 나붙어서 현이 나서서 철거했다. 이러자 현을 아끼는 동료 문인들은 현이 이용만 당하는 꼴이니 문협을 탈퇴하라고 권유한다. 게다가 삼상회의의 조선 신탁 통치안이 선포되자 서울 거리는 찬탁과 반탁 데모로 영일이 없다. 현은 친구와 함께 반탁 강연에 나섰고 그 원고가 어느 신문에 게재되기도 했다. 그러나 차츰, 이 견해가 국제 정세상 현명한 판단이 아님을 깨닫고는 찬탁으로 기울었다. 이것이 항간의 화젯거리가 된 모양이었다.

   어느 날, 김직원이 회관으로 현을 찾아왔다. 현은 여간 반가운 게 아니어서 음식점으로 모셨다. 그때 노인은 유치 당해서 상투가 잘릴 뻔한 걸 가까스로 모면한 전말이며, 현의 식솔이 철원까지 나와 기다린다는 소식을 들려준다. 그러다가 현을 보고 공산당으로 넘어갔느냐고 힐문한다. 아니라고 했지만, 공산당이 조선 독립을 방해한다며 현의 태도를 못 미더워한다.

   한동안 김직원이 소식을 끊더니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 탁치 문제로 시끄러울 때였다. 그가 전날의 정리 때문에 인사를 아니 할 수 없어 왔다는 말을 하며 배웅도 한사코 사양하고 분연히 떠나갔다. 현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청나라의 우국지사 왕국유를 떠올려본다. 바람은 차나 부드러운 봄바람이 느껴지는 철이다. 동료들이 '프로예맹'과의 합동도 성사시켜 '전국문학자대회' 준비에 골몰해 있는 사이에 현은 담배를 꺼내 문다.』

【감상】

   이 소설은 작가 이태준의 1943∼1945년 사이의 삶이 직접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자전적 성격이 강한 작품이다. 비록 현이란 이름의 등장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작가가 광복 전 낙향했던 철원이 배경으로 설정되어 있고, 광복 후 전국문학자대회니, 신탁통치를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의 문학인들의 모임이 그대로 서술되고 있다는 점에서 자전적인 성격을 벗어날 수 없다. 소설 속에서는 김직원으로 대표되는 보수적 민주주의 경향과 사회주의편에 서는 현의 입장이 화해를 이루지 못함으로써 해방공간의 혼돈과 대립을 반영하고 있다.

   그가 갖고 있는 순수열정이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 민족적 단결과 통합을 계속 기대한다는 점에서 철저한 공산주의자가 되지 않았음이 드러나고, 조직적이고 의도적 단체의 구성을 강행하려는 공산주의 젊은 문필가들을 오히려 나무라고 민주진영과의 통합을 역설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분명한 태도나 선택이 유보된 전향성을 드러낸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 소설은 해방공간에서 빚어지고 있었던 문필가들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며, 작가의 지향이 소극적이고 불분명한 채 순수열정만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러나 냉전체제가 고착화되고 한국전쟁 이후의 정세가 대립으로 굳어지면서 작가의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어느 쪽에서도 쉽게 용납되지 않았으며, 그의 고뇌가 오히려 북한에서는 회색적 태도나 부르주아적 사고로 지탄받아 숙청의 빌미가 되었다는 점에서 안타깝다.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8ㆍ15 해방을 전후하여 작가 '현'에 대하여 기록한 소설이다. 작가 '현'은 바로 이태준 자신이기도 한 것이다.

   작가 '현'의 해방 전 자신의 작품과 삶의 태도에 대한 반성, 그리고 해방 후의 적극적 변화, 즉 좌익 계열의 문학 단체에 관여한, 해방 전 그렇게도 존경해 마지않았던 김 직원의 설득에 대해 자신의 방향 전환을 옹호하고 있는 한 문학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태준 자신의 자전(自傳) 소설이라 할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의 해방을 전후한 행적과 함께 그가 북(北)을 택한 이유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일제 말기, 시국 문제에 협력하지 않고 버티던 작가 '현'은 더 이상의 시달림을 피해 철원으로 낙향한다. 그러나 낚시로 소일하는 그에 대한 감시의 눈초리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한가지 낙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김 직원'과의 만남이다. 그는 '현'의 가슴에 지사적(志士的) 용모와 행동으로 뚜렷하게 각인된다. '현'은 그를 우러러보기까지 하게 된다.

   '김직원'과의 갈등은, 8․15 해방이 되고부터이다. 8월 16일 서울의 친구 전보를 받고 급히 상경하면서 '현'은 해방의 소식을 듣는다. 17일 아침에야 서울에 온 그는 재빨리 문단의 주도권을 쥐려는 여러 문인 친구들의 계획에 참여하게 되고, 그들이 좌익 계열이라는 것을 알고도 주도적으로 나선다. 비록 소련에 대한 거부감이 있고 대세에 밀려가는 자신의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영친왕을 모셔다 왕으로 섬겨야 한다는 '김 직원'의 논리에는 정면으로 맞서 자신의 주의(主義), 주장을 편다. '현'은 자신의 해방 전 문학적 성향을 반성하기도 하고, 친일 분자들의 소행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김 직원'과의 결별이다. 강원도 산읍에서 그를 만났을 때, 시골 향교를 지키며 시국에 대해 자신보다 한층 저항적인 '김 직원'에 대해서 '현'은 "상종(相從)한다기보다 모시어 볼수록 깨끗한 노인이요, 이 고을에선 엄격히 존경을 받아야 옳은 유일한 인격자요, 지사"로 인식했다. 그러나 해방 후 좌익 문인 단체에서 활동하면서부터 '현'은 '김 직원'을 ‘돌과 같이 완강한 머리’ 혹은 ‘이 세계사의 대사조(大思潮) 속에 한 조각 티끌처럼 아득히 가라앉아 가는 모습’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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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소설가)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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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
李泰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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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이규태(李奎泰)[1]
상허(尙虛), 상허당주인(尙虛堂主人)
본관
장기 이씨(長鬐 李氏)[2]
출생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
(현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철원읍 산명리)
사망
몰년 미상(1974년 이후)
국적
학력
서당 (한문 / 수학)
사립 봉명학교 (졸업)
철원간이농업학교 (1학년 / 중퇴)
휘문고등보통학교 (4학년 / 퇴학)
조치대학 (예과 / 중퇴)

1. 개요2. 생애
2.1. 광복 이전2.2. 광복 직후의 행적2.3. 최후
3. 주요 작품4. 기타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소설가. 소설의 완성도가 높기 때문에 '조선의 모파상'이라는 별명도 있으며 일반적으로 '한국 근대 단편 소설의 완성자'라고 불린다. 당대에 "시에는 정지용, 문장에는 태준"이라는 말이 있었다. 정지용은 그의 '지용문장독본'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남들이 시인 시인 하는 말이 너는 못난이 못난이 하는 소리 같이 좋지 않았다. 나도 산문을 쓰면 쓴다. - 태준만치 쓰면 쓴다고 변명으로 산문 쓰기 연습으로 시험한 것이 책으로 한권은 된다.

이태준은 자신의 저서 <문장강화(講話)>에서 주장한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에 따라 소설을 썼다.[3] 실제 이태준의 소설은 2020년대에 와서 읽어도 누가 따로 설명하지 않는 한 1930년대 소설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문장과 구성이 현대 소설과 비슷하다.

문장가로서도 유명하다. 이오덕이 아래처럼 극찬했던 소설가이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문장력은 물론이고 삶을 절실하게 전달하는 표현력도 겸비한 작가였다.
문장이 아주 정확하여 어디 한 자리도 빈 틈이 없다. 역시 글을 갈고 다듬기를 남달리 애써 한 장인의 솜씨가 보인다.
ㅡ 이오덕(1992), 우리글 바로쓰기 2, 서울: 한길사, pp. 445

보통의 작가로서는 체험을 넘어서고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이런 삶의 이야기가 이토록 진실한 느낌으로 가슴에 와닿는 것은 실지 현장의 조사기록과 관찰을 성심껏 했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능숙한 우리 말 쓰기에다가 남다른 글 다듬기의 노력이 있었으리라 본다.
ㅡ 이오덕(1992), 우리글 바로쓰기 2, 서울: 한길사, pp. 450

2. 생애[편집]

2.1. 광복 이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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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 일가. 소남(둘째딸), 소명(맏딸), 부인 이순옥, 유진(차남), 이태준, 소현(막내딸), 유백(장남)

1904년 11월 4일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현 철원군 철원읍 산명리[4])에서 아버지 이창하(李昌夏, 1876 ~ 1909. 8)와 어머니 순흥 안씨(? ~ 1912) 사이의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5] 아버지 이창하는 1904년 덕원감리서 주사(德源監理署主事), 철원공립보통학교 교원 등을 역임한 개화파 지식인이었다.

1909년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였으나 그해 8월 아버지의 별세로 귀국하다가 함경북도 회령군 관해면 사리 배나루마을(현 청진시 이진동)에 정착하였는데 이곳에서 서당을 다니며 한문을 수학했다. 1912년 어머니마저 별세하여 천애고아가 된 그는 외조모와 함께 아버지의 고향인 철원군 서변면 율이리(현 철원군 철원읍 율이리) 용담마을로 내려갔고 그곳에 있는 친척집에 맡겨졌다.

1915년에는 경기도 이천군 안협면에 있는 5촌 당숙(堂叔)의 집에 입양되었다가 같은 해 다시 용담으로 돌아와 또다른 5촌 당숙인 이용하(李龍夏)의 집에서 거처하면서 철원 사립봉명학교에 입학했다. 1918년 3월 봉명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그는 읍내에 있는 간이농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한 달 뒤 가출하여 여러 곳을 방랑하다 원산부 등지에서 객주집 사환 등의 일을 하며 2년을 보냈는데 이때 외조모가 찾아와 그를 보살폈는데 이 즈음 그는 문학서적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얼마 뒤 인척 아저씨가 거주한다는 만주 안동현에 갔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상경하였다. 1920년 4월 배재학당 보결생 모집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나 입학금 마련이 어려워 결국 등록하지 못했다. 이후 낮에는 상점 점원으로 일하고 밤에는 야학에 나가 공부하면서 주경아독을 하였다. 1921년 4월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고학생이지만 비교적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6]

그러다가 4학년 병조(丙組)에 재학 중이던 1924년 동맹휴학을 주동한 혐의로 퇴학당했다.# 같은 해 가을 휘문고등보통학교 친구인 김연만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1925년 일본에서 단편 〈오몽녀〉를 '조선문단'에 투고하여 입선하여 데뷔했다. 1926년 4월 조치대학 예과에 입학하였는데 신문 및 우유 배달 등을 하면서 고학하였기 때문에 매우 궁핍한 생활을 영위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1927년 11월 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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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의 〈이태준 초상〉(1928)

귀국 후 1929년 잡지 《개벽》 등 여러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하였는데 이때 이상의 천재성에 주목해 그에게 를 쓸 것을 권유했고 당시 조선중앙일보 사장 여운형에게 부탁해서 이상의 시를 신문에 내도록 도와주었는데 그렇게 해서 나온 시가 오감도다.[7]

일제강점기에는 카프의 경향파 문학과는 거리를 두었는데 일제 말엽에는 극도의 빈곤과 공습에 따른 사전 소개로 시골에서 낚시나 하고 살게 되었다. 저 시절을 반영하고 먼저 간 현진건을 추억하면서 쓴 작품들이 토끼이야기, 해방전후 등[8]이 있다. 일제 연간에 비겁한 지식인의 표상이라고 나중에 욕을 먹었지만 중편 해방 전후는 당대 지식인의 모습을 잘 드러냈다고 해방 후 문학상을 받았다.

광복 전까지는 철원에 머물렀다.

2.2. 광복 직후의 행적[편집]

8.15 광복 후에는 주로 좌익 계열에서 활동하고 6.25 전쟁 이전에 소련이나 발전하는 북한을 방문차 월북하였다. 그렇게 이태준은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 부위원장, 북조선예술문학예술총연맹 부위원장을 역임했으며, 6.25 전쟁 전에도 여러 번 김일성을 찬양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싸우자! 목을 걸구 싸우자! 우리 뒤엔 얼마든지 큰 힘이 있다! 우리 농군이나 노동자두 잘살 수 있는 조선이 되도록 도와 주는 나라두 있다! 성필 씨 같은 사람두 하나는 아니다! 김일성 장군 이하 북조선인민위원회가 모두 우리 편이다! 아니, 남조선에도 온통 우리 농민들이다. 또 거기 지도자들 중에도 우리 편은 한둘이 아닐 것이다! 싸우자 목을 걸고!' 「농토」(1948) 中에서

그러나 <농토>는 토지개혁을 주제로 글을 써내라는 당의 지시에 따라 쓴 것이고 여러 번의 검열과정을 거치면서 실제 이태준이 쓴 글과 상당 부분 달라졌다는 서정범의 진술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카프와 대립각을 세운 순수문학의 대표 단체인 구인회를 결성하고 주도했던 이태준의 "급작스런 변신과 북행"[9]은 당대의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애초에 이태준의 해방 전 글에선 좌파적 가치관이 전무하며 오히려 그쪽 사상을 적대하는 장면이 많다. 그리고 이태준은 해방 전에 쓴 장편소설에서 근대적 계몽주의에 경도된 모습을 수시로 드러냈다. 민혜숙은 "기독교인 주인공을 중개자로 내세워 농촌계몽과 사회변혁, 이상사회의 실현이라는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고 있다"고 평가했다.[10]

이태준 본인을 주인공으로 하여 쓴 자전소설 <해방전후>에는 공산주의를 경계하는 근대적 민족주의자가 민족 대단결이라는 대원칙을 위해 공산주의자들과 협력하겠다고 선언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현은 그들의 태도와 주장에 알고 보니 한 군데도 이의를 품을 데가 없었다. "장래 성립할 우리 정부의 문화, 예술 정책이 서고, 그 기관이 탄생되어 이 모든 임무를 수행할 때까지, 우선, 현단계의 문화 영역의 통일적 연락과 각 부문의 질서화를 위하여"였고 "조선문화의 해방, 조선문화의 건설, 문화전선의 통일" 이것이 전진구호였던 것이다. 좌우를 막론하고 민족이 나아갈 노선에서 행동통일부터 원칙을 삼아야 할 것을 현은 무엇보다 긴급으로 생각한 것이요, 좌익작가들이 이것을 교란할까 보아 걱정한 것이며, 미리부터 일종의 증오를 품었던 것인데 사실인즉 알아 볼수록 그것은 현 자신의 기우였었다. 아직 이 이상 구체안이 있을 수도 없는 때이나 이들로서 계급 혁명의 선수를 걸지 않는 것만은 이들로는 주저나 자중이 아니라, 상당한 자기비판과 국제노선과 조선민족의 관계를 심사숙고한 연후가 아니고는, 이처럼 일견 단순해 보히는 태도나 원칙만엔 만족할 리가 없을 것이었다. 현은 다행한 일이라 생각하고 즐겨 그 선언에 서명을 같이 하였다.[11]

강진호는 "좌우로 분열되어 상쟁하는 민족의 현실 앞에서 ‘계급보다는 민족의 비애’에 더 솔직했던 이태준은 ‘민족의 대동 단결’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생각했고, 자연스럽게 그런 구호를 앞세운 좌익에 이끌렸다"고 평가했다.[12] 하지만 식민지 근대가 아닌 제대로 된 근대를 경험하지도 못했고, 좌파 사상이 무엇인지 제대로 판별조차 못했던 인물이 좌파 세력에 가담한 것은 "주체의 내면적 요구와 성찰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급변하는 상황을 추수한 것"이었다고 봤다.[13]

2.3. 최후[편집]

1957년 종파분자 및 해당 행위로 비판을 받고 숙청되었다. 비판을 받은 이유가 참 가관인데 이태준이 쓴 소설은 전쟁 당시 북한 상공에서 추락한 개념없는 미군조종사를 비꼰 '반미소설'이었지만 북한 당국에서 공화국에서는 포로를 학대한 적이 없는데 여기 나온 인물은 미군포로를 위협한다며 미국이 공화국을 침략할 명분을 주었다며 반동분자라고 몰아갔다. 숙청된 후 황해도 해주시에 인쇄공으로 배치되었으나 1974년 다시 강원도 장동탄광 노동자지구로 재추방되었으며 이후 고철 수집 등을 하면서 힘겹게 살다가 아내가 죽은 뒤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 관련 기사[14] 1978년 자강도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설이 존재한다.

남한에서도 해방 후 좌익 활동과 월북으로 인해 금기시되다가 1988년 해금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1988년 이전에는 피치 못할 경우 '이○준' 정도로 언급되는 정도였고 당시 그에 대한 연구를 하던 어느 학자는 이태준의 고향인 철원군 사람들에게 욕설과 같이 모욕도 당했던 적도 있다. 박헌영김원봉처럼 남북 모두에서 외면당하는 그런 부류가 되었다.

북한이탈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이태준의 여러 작품들은 북한에서 문학을 동경하는 학생들에 의해 비밀리에 읽히고 있다고 한다. 위에 언급된 이태준 일가의 최후도 그런 문학도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이다.

1962년의 증언에 따르면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수복했을 때 피난가지 못하고 강동군 승호리에 숨어 있었는데 부인을 통해 귀순교섭을 해 왔지만 중공군의 갑작스런 개입으로 실현되지 못했다고 한다. 관련 기사 90년대 초반 신동아에 소개된 선우휘의 증언에 따르면 전쟁 중 적어도 두 번 정도 남한으로 데려오려는 공작이 있었다고 한다.

3. 주요 작품[편집]

<오몽녀>(1925)
<무서록>
<복덕방>[15]
<가마귀>[16]
<밤길>
<영월영감>
<토끼 이야기>
<고향>(1933)
<제이의 운명>
<농군>(1939)
<문장강화>(1940)[17][18][19]
<돌다리>(1943)
<해방전후>(1946)
<쏘련기행>(1947)[20]
<농토>(1948)
<먼지>(1950)
[21]
<행복>
<달밤>[22]
<패강랭>(1938)
<사상의 월야>(1946)

4. 기타[편집]

저작권이 꼬인 구보 박태원과 다른 이유로 전집이 나올 가능성이 매우 낮은 작가인데 소련과 북한에 경도된 채 쓴 후기 작품들은 일제강점기 이광수의 친일 작품 수준으로 노골적이고 당연히 문학성도 떨어져서 출판사들이 굳이 긁어모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2009 개정 교육과정 천재교과서 중학교 국어 4 검정교과서에 '돌다리'가 수록되었으며 2015 개정 교육과정 해냄에듀 문학 교과서, 미래엔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달밤'이 수록되었다.

수능 연계 교재인 EBS 수능특강, 수능완성에도 여러 차례 작품이 수록되었다. 2018학년도 수능특강에 소설 '달밤'이, 수능완성에 소설 '패강랭'이 수록되었다. 2020학년도 수능특강에 소설 '복덕방'이 수록되었다. 2022학년도 수능특강에는 소설 '돌다리'가, 2023학년도 수능특강에는 소설 '달밤'이 수록되었다. 2024학년도 수능특강에 소설 '복덕방'이 다시 수록되었으며, 2025학년도 수능특강에는 자전적 소설 '해방 전후'가 실렸다. 자전적 인물인 '현'이 강원도 어느 산읍에 지내면서 강직한 시골 노인 '김 직원'과 교유하는, 해방 전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수록되지 않은 해방 뒤의 이야기에서는, '현'이 좌익 문인 단체에 가입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김 직원'이 서울로 찾아와 '현'의 마음을 돌리려 한다. 그러나 결국 둘은 서로의 생각이 일치할 수 없음을 깨닫고 작별하게 된다. 해방 후의 이야기는 작가 이태준이 이전의 태도와는 다른 선택을 했던 이유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48번지에는 이태준이 월북하기 전까지 글을 집필한 '상허 이태준 고택'이 있으며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11호이기도 하다. 1999년 외종손녀(이태준의 누나의 외손녀) 조상명이 1933년 이태준이 지은 당호인 '수연산방'을 내걸고 찻집을 열었다. 1992년 상허학회가 조직되어 이태준에 대한 연구를 이끌고 있다.

동화도 꽤 많이 썼는데 일부 동화와 재밌는 단편들을 묶어 어린이용 책으로 남한에서 출간된 적이 있다.

여담으로 건담 시리즈가 나오기도 한참 전에 이 만화에 등장하는 설정인 뉴타입과 유사한 개념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소련 기행이라는 수필에서 언급된다.
전략
"이해가 필요없는데서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반드러워질까?

(중략)

인간이 위선과 비굴에 빠지지 않으면 안될, 불순한 이해관계를 제거해 놓은 소비에트는 비단, 경제나 문화 뿐이 아니라 인류 자체에 거대한 변혁을 일으킨 것이다. 마치 중세기의 르네상스가 봉건 체제 속에서 말살되었던 인류의 자아를 위한 각성이었듯이, 쏘비에트는 인류가 다시 자본의 노예로부터 풀려나와 노예의 근성을 뽑아버리고 절대 평등에 의한 진정한 평화향, 계급 없는 전체적 사회의 성원으로서 새타입 인간의 창조인 것이다. 영원히 축복 받을 인간의 위대한 재탄생인 것이다."

불순한 이해관계를 제거 = 오해없는 상호 이해, 인류의 자아를 위한 각성 = 이를 통한 인류의 진보, 새타입 인간 = 이로 인해 새롭게 진보한 인류인 뉴타입. 건담의 원작자 토미노 요시유키가 설정한 뉴타입의 개념과 거의 일치한다.

[1] http://www.sanghur.net/tjlee_01.htm[2] 용담파 10세 규(奎) 항렬. 장기 이씨는 전국적으로 200명 안팎에 불과할 정도로 희귀 본관이다. 장기 이씨 가계도는 국립중앙도서관이나 정독도서관이 아니라 부천역 인근에 있는 족보도서관(사설)이 소장하고 있다. 다만 이태준의 본관이 장수 이씨(長水 李氏)라는 이야기도 있다.(참고 포스팅)[3] 하나의 사물과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선 가장 적합한 하나의 단어만이 있다는 이태준의 주장. 사실 최초의 일물일어론자는 귀스타브 플로베르이며 <보바리 부인>이 여기에 입각해 쓰인 리얼리즘 소설이다.[4] 비무장지대에 있는 주민 미거주지역이다.[5] 어머니 순흥 안씨는 아버지의 후실 부인이다. 아버지의 정실 부인은 한양 조씨로 슬하에 이규덕(李奎悳)이라는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6] 당시 정지용·박종화가 선배로, 이병기가 스승으로 있었다.[7] 이태준이 아니었으면 오감도는 발표되지 못했을 작품이었다. 하도 독자들의 반발이 심해서(심지어 이 시를 쓴 사람을 찾아내서 죽이겠다는 협박도 있었다고 한다.) 이태준은 사무실에 오감도 원고를 갖고 갈 때 항상 사표를 같이 들고 다녔다.[8] 해방전후의 묘사를 빌리자면 일 안 하고 낚시나 다닌다고 순사에게 혼나고 엄한 사상범들 가방 속에서 이태준의 책이 나와서 곤욕을 겪고 아는 선배 부탁으로 라바울 승전기나 끄적거리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9] 강진호(2004), 한 근대주의자의 신념과 좌절. 해방 후 이태준 소설의 변모 양상, 돈암어문집(17), pp. 192[10] 민혜숙(2017), 사회변혁의 중개자로서 기독교인 이미지 연구. 이태준 장편소설을 중심으로, in: 현대소설연구(67), pp. 355[11] 이태준(1995), 해방전후, in: 이태준(1995), 이태준 문학전집 3, 서울: 깊은샘, pp. 36[12] 강진호(2004), 한 근대주의자의 신념과 좌절. 해방 후 이태준 소설의 변모 양상, 돈암어문집(17), pp. 193[13] 강진호(2004), 한 근대주의자의 신념과 좌절. 해방 후 이태준 소설의 변모 양상, 돈암어문집(17), pp. 193[14] 이태준 자신이 누구보다도 아끼던 자식들도 강제이혼, 행방불명, 사망 등으로 일가가 흩어졌다.[15] 문장도 문장이거니와 주제도 오늘날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쭉 존재할 노인들의 소외 문제를 다룬 작품이기 때문에 1937년의 작품이라는 게 느껴지지 않는다. 여담으로 여기서 나오는 영감과 속물적이기 그지없는 무용수 딸의 모델이 무용가 최승희와 그의 아버지 최준현이라는 추측이 많다.[16] 1937년에 출간된 단편집의 표제작이기도 하다. <색시>, <우암노인>, <3월>, <손거부>, <까마귀>, <순정>, <바다>, <점경>, <철로>, <장마>, <복덕방> 등 11편이 수록되었다.[17] 시집이나 소설이 아니고 글 쓰기 지침서다. 강화(强化)가 아니다. 만약 이 문장강화(文章强化)였다면 그저 문장의 묘사를 짙고 강하게 나타낸다는 의미가 되었을 것이다. 이태준의 문장강화(文章講話)는 '문장 강의를 하듯이 쓰인 이야기'란 뜻이다. 원래 강화(講話)가 '강의하듯이 말하는 이야기'라는 뜻이지만 이건 책이라서 '쓰인'으로 의역하였다. 월북 작가의 책이지만 여러 번 재판을 하여 21세기에도 서점에서 구할 수 있다. 오래 전 나온 책이나 글을 쓰고자 하는 이에게는 이만한 책이 아직 없다.[18] 이 책이 얼마나 권위가 있었느냐면 문장강화에 자신의 글이 실렸느냐 안 실렸느냐가 당시 문장가들의 필력의 잣대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실제로 구판 대신 신판이긴 하지만 당대에 이름을 날린 저자들의 글이 많이 수록되었다. 요즘 기준에선 한자가 많아 힘들 수도 있고 촌티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책의 해석을 곁들이면 수록된 글의 저자들이 얼마나 저명한 이들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19] 독립운동가이자 공산당 지도자인 김두봉도 이 책에 글이 실렸다. 다만 좋은 글의 기준이 아닌 장황하고 안좋은 글의 기준이긴 하지만 말이다.[20] 평양 조소문학협회의 주선으로 1946년 레닌그라드 대외문화협회를 방문하면서 쓴 기행문. 여담으로 갈 때는 비행기, 귀환 때는 열차를 이용했다. 모스크바, 레닌그라드뿐 아니라 스탈린그라드트빌리시예레반까지도 다녀왔다. 2016년 한국에서 출판된 이태준 전집 시리즈에서는 이것과 함께 중국 기행도 같이 실렸다.[21] 월북 후 북한 문화예술지에 기고한 작품이다.[22] 이를 표제작으로 1934년에 단편집이 출간되었다. <불우선생>, <결혼의 악마성>, <서글픈 이야기>, <기생 산월이>, <봄>, <아담의 후예>, <어떤 날 새벽>, <코스모스 이야기>, <꽃나무는 심어놓고>, <달밤>, <아무 일도 없소>, <실락원 이야기>, <은희부처>, <촌뜨기>, <천사의 분노>, <미어기>, <마부와 교수>, <어떤 화제>, <만찬> 등 19편이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