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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9

올곧음과 교조주의 사이에서, 『비운의 혁명가 박헌영. 고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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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곧음과 교조주의 사이에서, 『비운의 혁명가 박헌영』
고준석, 유영구 옮김, 1992

 Naturalist ・ 2021. 1. 11.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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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 특히 조선공산당 건설과 재건 과정을 살펴보며, 더욱 더 박헌영의 ’남로당’까지 이어지는 어떤 부정적 종파성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과연 혁명가로서 박헌영은 어떤 존재인지를 확인해 보고 싶어서 책을 집어 들게 되었다.



- 이 책은 식민지 시기 일본에서 민족해방투쟁을 하다 옥고를 치렀고, 해방 후에는 ‘남로당’ 그리고 월북 이후에는 ‘조선노동당’에서 활동했던 고준석 선생의 회고담에 가까운 박헌영 평전이다. 

다만 박헌영의 일상적 삶보다는 그가 보여주었던 정치 노선에 대한 평가들이 더 많이 담겨 있어 평전이라기보다는 노선에 대한 비판서에 가까운 느낌도 있다. 그렇기에 저자의 정치 노선이 문제가 될 것이다. 내용에 비춰 보면 남로당 시기에는 박헌영 노선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한국전쟁 이전에 이미 북한의 조선노동당과 선을 대고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조선노동당의 남조선정치공작위원회 위원으로 남한에서 활동하다가 일정 시점에 일본으로 탈출해 이후에 조선 사회주의 운동사와 해방 후 좌익 활동에 대한 많은 연구서를 출판하고 있다. 아마도 그런 그의 입장이기에 단순한 평전이 아닌 정치 노선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 개인의 기억에 의존하고, 이 책이 처음 출판된 1991년 상황에서 국내 연구의 결과물 역시 충분하지 않았기에 해방 이전의 조선공산당 건설 투쟁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은 많이 부족하다. 하지만 해방 이후의 개인적 경험들은 꽤나 흥미롭다. 저자가 보기에 해방 이후 박헌영은 한 편으로는 최고 지도자로 자기를 내세우기에 여념이 없었고 (개인 저작을 출판해서 보급하는 등의 활동), 다른 한 편으로는 모든 사회주의자의 통일에 기반한 조선공산당 재건이나, 민족주의자와의 연대를 통한 통일전선의 필요성 모두에 대해서 부정적 태도를 보이며 자신과 함께 했던 ‘경성꼼그룹’ 등의 소수 인원들과 사업을 결정했다고 한다. 이런 태도가 결과적으로 조선공산당 건설 그리고 이후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백남운의 신민당과의 3당 통합에 있어서도 당내 갈등과 분열을 만들어냈으며, 남로당의 고립을 가져왔다고 평가한다. 특히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 항쟁’을 시작으로 해서 본격적인 좌편향이 발현되어 결과적으로 한국전쟁 이전 남한의 혁명 세력을 사실상 괴멸로 이끈 책임이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비판한다. 하지만 이런 비판을 내린 저자가 박헌영의 비극적 운명에 대해서도 당연시하는 것은 아니다. 박헌영과 남로당에 대한 북한의 대대적인 숙청에 대해서 저자는 김일성에 의한 경쟁자 제거이자, 한국전쟁의 사실상 패전에 대한 책임 떠넘기기로 평가한다. 그리고 재판에서 말한 그 어떤 범죄도, 박헌영 반대파에 있던 자기의 눈에도 부당한 조작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래서인지 저자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과 박헌영의 최후를 떠올리는 장면들이 묘하게 교차하기도 한다.



- 물론 저자의 내용을 모두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소련의 대표적인 한국학 연구자이자 해방 직후 서울의 러시아 대사관에 부영사 아내였던 샤브쉬나의 회고록이나, 식민지 조선의 대표적인 사회주의 운동가 김철수 선생의 회고에서도 박헌영이 개인적 권력욕에 사로잡혔던 인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소련은 해방 이후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북한 지역 통치, 나아가 한반도를 영향권에 넣으려는 전략을 갖고 있었으며, 그를 위해 적극적 지원을 했다는 걸 생각하면, 박헌영의 개인적 동기라기보다는 남로당의 헤게모니 확보를 위해서도 적극적으로 박헌영에 대한 ‘우상화(?)’ 활동을 할 필요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김철수 선생의 회고록에서도 보이듯 당시 남로당의 집행부가 보여준 과도할 정도의 패권적 태도들, 다른 정파들에 대한 적대성 등을 생각하면 역으로 이것이 자신들에 대한 과도한 정당화로 이어지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 그보다 문제는 박헌영이 보인 정치 노선에 대한 평가다. 전체적으로 가장 중요한 국면에서 네 가지 사건이 이후 남로당의 급격한 파괴로 이어진 것은 사실이다. 1) 해방 후 조선공산당 재건에서 보여준 ‘경성꼼그룹’ 중심의 철저한 배타성. 2) 미군정의 공세에 맞선 ‘신전략’의 좌편향. 3) 3당 합당을 통한 남조선노동당 건설에서 보여준 배타성. 4) 신탁통치라는 ‘모스크바 3상 회의’에 대해 찬탁이라는 방향을 선택한 것.



- 하지만 이 평가에서는 결정적인 몇 가지 외부 조건이 빠져 있다. 예를 들어 스탈린이 보여준 일방적 의사 결정, 김일성 집권, 북한에서 우선적으로 정권을 세운다는 입장, 한국 전쟁 등등. 그리고 한국 정책을 놓고 벌어진 미국 국무부와 국방부의 충돌, 반공 매파였던 맥아더와 하지의 태도 등등. 이런 상황에서 박헌영이 취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의 폭은 좁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몇 가지 평가는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우선 박헌영이 소련과 스탈린에 대해 보여주었던 맹목적인 충성이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 있었을까 묻게 되겠지만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에서 보여주었던 많은 활동가들의 독립적 성향에 비춰볼 때도 박헌영의 소련 노선에 대한 추종은 절대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샤브쉬나 여사의 회고록에도 등장하는 부분이다) 또 하나는 철저한 배타성이다. 이는 당을 꺾어지지 않는 강철의 대오라 이해하고, 그에 따라 철저하게 볼셰비키적 당규율을 갖춰야 한다는 믿음의 결과일 수 있겠지만, 그 결과 그는 조선공산당의 전통을 철저하게 ‘경성꼼그룹’에 두고, 그와 다른 활동을 했던 이들 혹은 40년대 최악의 상태로 치닫던 일제의 폭압 속에서 전선 이탈하거나 혹은 수동적으로 전향했던 이들에 대한 극단적 배제로 이어진다. 이런 그의 모습은 이후 통일전선 건설에 있어서도 배타적인 모습으로 일관하는데 민족주의 세력에 대해서 보인 그의 모습은 사실상 35년 코민테른 7차 대회에서 나타난 ‘반제 반파시즘 통일전선’ 노선 이전의 코민테른 전략과 유사해 보인다. 철저하게 프롤레타리아트 헤게모니를 관철할 것, 밑으로부터의 통일전선이라는 7차 대회 이전의 전략은 좌편향으로서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 큰 해를 끼친 바 있다. 그럼에도 박헌영은 통일전선을 논하면서 철저하게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그가 정황의 변화나 전략 문제에서의 교훈을 충분하게 수용할 수 없었던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니게 된다. (물론 박헌영은 7차 대회 시기 감옥에 있었으나, 감옥 안에서 코민테른 주요 문헌을 보거나 들어 숙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 다행히 박헌영에 대해서는 아홉 권으로 『박헌영 전집』이 출판되어 있으니 이런 평가는 이후 전집을 읽어가면서 확인해볼 문젯거리로 생각해 둘 수 있을 듯.


[출처] 올곧음과 교조주의 사이에서, 『비운의 혁명가 박헌영』|작성자 Naturalist

고준석 - 高峻石, 1910 ~ 1994 우남위키 + books

고준석 - 우남위키


고준석
최근 수정 : 2022년 10월 6일 (목) 16:47
분류: 재일교포
공산주의자
남로당
북로당
친일파
제주도 출신
조선공산당


고준석(高峻石, 1910.11.15[1] ~ 1994[2])는 제주도 출신으로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에서 수학했고,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1938년 1월 마르크스주의의 연구 실천과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기도하다가 동경형사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의 형을 받았다.[1] 1944년 5월 서울로 와서 조선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京城日報) 기자를 지냈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에 가입했고, 남로당 당원이면서 북로당 노선을 지지했다. 1948년 남북협상 당시 북한을 방문했으나 서울로 돌아왔다. 6.25 전쟁 통에 아내가 사망하자 일본으로 밀항했다. 이후 일본에 거주하며 다수의 일본어 저서를 남겼다. 고영민이라는 가명을 쓰기도 했다.

고준석(高峻石, 1910 ~ 1994)


목차1약력
2생애
3고준석의 김일성에 대한 증언3.1오기섭(吳琪燮)이 김일성이 가짜라는 문건을 배포했다는 증언
3.2고준석도 임해도 김일성의 전력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4저서
5참고 자료
6함께 보기
7각주
약력



파일의 설명
1939-09-27일자 일본 동경형사지방재판소의 고준석 판결문.

출처 : 재일조선인관계자료집성4(2)권 治安維持法違反事件判決その他 pp.24~25 고준석 사건
被告人高峻石に対する治安維持法違反事件 予審終結決定 / (東京刑事地方裁判所報告) / (『思想月報』 六十三号昭和十四年九月)
高峻錫(30/全羅南道 濟州島 舊左面 杏源里 790番地, 東京市 中野區 高根町 1番地 本領信治郞 方)

===
1939-09-27일자 일본 동경형사지방재판소의 고준석 판결문.[3]1910년 전라남도 제주도 구좌면 행원리 790번지(全羅南道 濟州島 舊左面 杏源里 790番地) 줄생[4]
동경 대성중학을 나왔다고 함.[5]
1935년 4월 제2 와세다(早稻田) 고등학원 입학.[4]
1937년 4월 와세다(早稻田) 대학 정치경제학부 경제학과 진학.[4]
1938년 1월 30일 동경 유학생연합이 개최한 졸업생 환송회에서 와세다 대학(早大) 고준석이 감상담을 발표함.[6]
1938년 8월 15일 2학년에 재학중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도쿄 경시청에 체포됨.[2]
1939년 10월 30일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선고받음.[1]
1944년 5월 서울로 와서 조선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京城日報) 정경부 기자로 활동하다 해방을 맞음.[2]
1945년 9월 조선공산당에 입당.[2]
1946년 2월 21일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 민전[民戰])[7] 산하 경제대책연구위원회(經濟對策 硏究委員會) 위원으로 선임됨.[8][9]
1946년 산업노동조사연구소(産業勞働調査硏究所) 소장[10]
1947년 5월 서울에서 북로당(北勞黨)을 지지하는 『우리 신문』[11] 정치부장과[12] 주필이 됨.[2][13]박갑동은 『우리 신문』은 김일성이 직파한 거물 간첩 성시백이 대남공작을 위해 창간한 신문이라 증언했다.[5]1947년 8월 2일 『우리 신문』 노방환(盧梆煥) 사장과 함께 경무부 수사국에 검거되었다[14] 조사를 마치고 8월 4일 석방됨.[15][12]
1947년 8월 25일 고준석 등의 피검 사례를 들어 조선신문기자회서 언론계의 안전보장을 하지 중장에게 건의함.[16]
1948년 4월 남북협상 취재 차 방북. 남로당 당원이면서 북조선 노동당에 가입, 북로당 노선에 동조.[2]
1948년 8월 북한 해주에서 열린 남한지역 대의원 선거에 참여하기 위해 비밀리에 다시 월북했다가 서울로 돌아옴.[17]


그가 철저한 공산주의자였음에도 북한으로 가지 않고 남한에 남은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공산주의자였던 탓에 좌익 폭동이나 6.25 전쟁을 거치며 자주 구금되기도 하고 어려움도 겪다가 일본으로 밀항했다. 남한이 공산주의자들 생리에 맞을 수가 없었던 것은 당연하지만, 거물 남파간첩 성시백과도 연계되어 있던 그가 왜 북한이 아닌 원수의 나라 일본에 가서 사는 길을 택했는지도 의문이다. 그가 일본어로 남긴 많은 저서들에 자신의 공산주의 운동을 좌절시킨 미군정이나 이승만과 한국 정부에 대한 비판만 가득할 뿐, 공산주의자들 때문에 북한 주민들과 한국인들이 겪은 엄청난 고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이 철저히 외면하고있다.
생애어느 혁명가의 가족을 위한 진혼 1989.06.02 한겨레 5면
빈농의 아들로 항일운동…‘어느 혁명가의 수기’ 등 집필 제주일보 2018.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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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농의 아들로 항일운동…‘어느 혁명가의 수기’ 등 집필 : 제주일보 2018.08.06
고준석의 김일성에 대한 증언

고준석(高峻石)이 1948년 4월 남북협상 취재차 평양을 방문했다가, 일본에서부터 친했던 친구 북로당 농민부장 임해(任海, 본명 任吉鳳)를 찾아가서 북한의 지도자들에 관해 문답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오기섭(吳琪燮)이 김일성이 가짜라는 문건을 배포했다는 증언

평양에 간 고준석이 임해(任海)에게 이북 지도자들에 관해 알려달라고 하자 오기섭(吳琪燮, 1903-?)이 김일성이 가짜라는 문서를 당 하부 조직에까지 배포했다가 자아비판을 당했다는 말을 했다.[19] 이로보아 해방 직후 북한에서도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은밀히 돌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고준석(高峻石, 1910~1994) 지음, 정범구 옮김, 《해방 1945-1950 - 공산주의 운동사의 증언》 (한겨레, 1989년) pp. 220~221
"박헌영 파인 오기섭이 당 제2차 대회에서 자기비판을 했습니다. 그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책임비서였던 당시부터 분파주의 활동을 하여 김일성 동지를 가짜라고 하는 문서를 당 하부 조직(당 세포)에까지 유포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당 제2차 대회에서 자기비판을 요구당했는데, '나는 조선의 트로츠키스트입니다. 이것을 자기비판하겠습니다' 하고 말하는 오기섭에게 김일성 동지가, '지금의 오기섭 동지의 말은 자기비판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비판이란 것은 자신이 이러저러한 일을 했기 때문에 나쁘다고 구체적으로 말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힐책했습니다. 그로부터 황해도 도 당부 책임자 - 이 동지는 김일성 동지와 함께 빨치산 투쟁을 한 경력의 소유자입니다 -가 일어나서, 수첩의 페이지를 뒤적이며 김무정 동지가 모월 모일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말했는지 수많은 구체적 사실을 들어 김의 분파주의 언동을 지적하여 자기비판을 요구했습니다. 김무정이 박헌영 파라는 것은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그의 구체적인 분파주의 언동이 폭로되었으므로 이 마음이 약한 장군은 시종 머리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고준석도 임해도 김일성의 전력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고준석 본인도 김일성의 전력에 대해 잘 몰라 임해에게 이에 대해 물었으나, 임해도 그의 전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김일성의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뛰어나다는 식의 말 밖에 하지 못한다. 고준석이나 임해 모두 김일성이 해방 전 어디서 뭘 하다 온 사람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소련이 지도자로 내세우니 그냥 맹종하고 있는 수준이다.고준석(高峻石, 1910~1994) 저, 정범구 역, 《해방 1945-1950 - 공산주의 운동사의 증언》 (한겨레, 1989년) pp.221~222.
임해(任海) 동지, 김일성 동지는 어떤 인물입니까? 우리들은 그가 해방 전에 반일 빨치산 투쟁을 한 것 이외는 모르고, 특히 인간적인 면에 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 우리들은 남조선에서 박헌영 일파에 의해서 배제되어 있는 관계로, '물에 빠진 자 는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기분으로 김일성 동지를 지지하게 되었지만, 박헌영 일파에 대한 대항 의식만으로 언제까지나 김일성 동지를 지지할 수는 없으니까요......”

“나는 김일성 동지는 현재의 북조선 간부들 중에서는 뛰어난 지도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이론 수준도 높고, 특히 판단력이 뛰어납니다. 나는 당 중앙 농민부장 때에 때때로 회의에서 내가 쓴 원고를 읽어나가곤 했습니다만, 김일성 동지는 나의 잘못된 곳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쓴 것이 다른 동지들로부터 잘못된 곳을 지적당한 일은 거의 없었으므로, 그만큼 김일성 동지는 이론적 수준도 높고 판단력도 뛰어나 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김일성이 뛰어난 지도자라는 임해의 말과는 달리 해방 직후 김일성대 부총장으로 재직하며 김일성에게 직접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친 박일(朴一,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1911~2001)은 당시 김일성의 지적 수준이 높지 않았고, 한국말도 잘 못해 가르치는데 애를 먹었다고 하였다.
박일#한국 방문과 김일성에 대한 증언
저서

다수의 일본어 저서가 있다.



재일조선인관계자료집성4(2)권 治安維持法違反事件判決その他 pp.24~25 고준석 판결문.被告人高峻石に対する治安維持法違反事件 予審終結決定 / (東京刑事地方裁判所報告) / (『思想月報』 六十三号昭和十四年九月)高峻錫(30/全羅南道 濟州島 舊左面 杏源里 790番地, 東京市 中野區 高根町 1番地 本領信治郞 方),고준석(高峻石, 1910 ~ 1994) : 동경형사지방재판소 수형인명부 - 국가기록원
일제의한국침략사료총서 > 最近에 在支 不逞朝鮮人의 策動狀況에 관한 건 > [昭和11年부터 昭和16年까지 在住朝鮮人의 治安維持法 違反事件]參考資料 送付의 건 p.7高峻石, 李城佑, 宋君瓚, 黃炳仁재일조선인관계자료집성4(1)권 社會運動の狀況(昭和13) 1938 內務省警保局p.56 : 李相敦, 高峻石(早稻田大 政經部 2年/早大우리同窓會 委員會 代表), 宋君讚, 全德?, 金景憙, 李成佑(早大生 共産主義者), 徐烟坤, 金大中(早稻田大學 法學部), 韓啓東(早稻田大學 法學部), 趙鐘輝(第一早高 1年),재일조선인관계자료집성4(1)권 社會運動の狀況(昭和14) 1939 內務省警保局p.57 : 李相敦, 高峻石(早稻田大學 政經部 2年生/早大우리同窓會 委員代表), 宗君讚, 金德淵, 金景憙, 李成佐, 徐炳坤 등 共産主義 일파濟州抗日獨立運動史 제주도지편찬위원회, ([제주] : 제주도, 1996) 1204p.pp.1049~1052 : IV. 국외항쟁 사료 / 1. 일본에서의 항일운동 / 3) 학생운동 / (2) 고준석, 전인택
함께 보기박갑동
임해(任海)

각주
  1. 이동:1.0 1.1 1.2 고준석(高峻石, 1910 ~ 1994) : 동경형사지방재판소 수형인명부 - 국가기록원
  2. 이동:2.0 2.1 2.2 2.3 2.4 2.5 빈농의 아들로 항일운동…‘어느 혁명가의 수기’ 등 집필 제주일보 2018.08.06
  3. 재일조선인관계자료집성4(2)권 治安維持法違反事件判決その他 pp.24~25 고준석 사건 : 被告人高峻石に対する治安維持法違反事件 予審終結決定 / (東京刑事地方裁判所報告) / (『思想月報』 六十三号昭和十四年九月) : 高峻錫(30/全羅南道 濟州島 舊左面 杏源里 790番地, 東京市 中野區 高根町 1番地 本領信治郞 方)
  4. 이동:4.0 4.1 4.2 파일:1939-09 고준석 판결문.pdf
  5. 이동:5.0 5.1 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105 중앙일보 1990.05.16 : 박갑동, 『통곡의 언덕에서 : 남로당 총책 박갑동의 증언』, (서당, 1991년 05월 01일)
  6. 卒業生送別會(졸업생송별회) 盛大(성대)히 擧行(거행) 1938.02.02 조선일보 2면
  7.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8. 斯界의 권위를 총망라, 民戰의 교육, 경제대책위원 자유신문 1946년 02월 26일 1 면 7단 / 斯界의 권위를 총망라, 民戰의 교육, 경제대책위원 자유신문[自由新聞] 1946년 02월 26일 - 국립중앙도서관
  9. 민전, 교육및 문화대책연구회위원과 경제대책위원회위원 선정 서울신문 1946년 02월 26일 : 高鉉錫은 자유신문 기사와 비교하면 高駿石(高峻石)의 착오로 보임.
  10. 産勞調査所被襲, 藏書·什器等奪去破壞, 警察의 私設團體帶同은 不當, 警務責任者談 수산경제신문[水産經濟新聞] 1946년 11월 21일 2면 5단
  11. 「우리신문」은 1947년 2월 10일 노방환(盧梆煥, 盧柳煥은 착오임)이 편집발행 겸 인쇄인으로 창간한 좌익계열 일간지다. 좌익이 미소공동위원회 2차 대회를 앞두고 발간한 신문. 5.10 선거가 종료된 1948년 5월 26일 신문 및 정기간행물 발행법을 위반한 혐의로 폐간됨. 미군정을 비방했다는 혐의로 편집국장 박소붕과 편집인 강노철(姜老轍) 역시 군정에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다.
  12. 이동:12.0 12.1 『우리신문』 盧社長等 釋放 조선중앙일보(유해붕)[朝鮮中央日報(유해붕)] 1947년 08월 06일 2면 8단
  13. 北韓傀儡(북한괴뢰) 閣僚異動(각료이동)의 黑幕(흑막) 1959.11.08 동아일보 6면
  14. 우리신문 盧社長等 拘束 : 金容鎭, 盧梆煥, 高駿石 독립신보[獨立新報] 1947년 08월 05일 2면 8단
  15. 被檢記者釋放 : 盧梆煥, 高峻石, 金蓉鎭 독립신보[獨立新報] 1947년 08월 06일 2면 9단
  16. 民主言論界의 安全保障을, 朝鮮新聞記者會서 하中將에 建議 민주중보[民主衆報] 1947년 08월 27일 2면 1단
  17. 고준석(高峻石)저, 정범구 역, 《해방 1945-1950 - 공산주의 운동사의 증언》 (한겨레, 1989) p. 233.
  18. 지금의 마이니치 신문(毎日新聞)이다.
  19. '가짜 김일성' 설은 박헌영이 원조? 프레시안 2012.02.27
  20. 박헌영에 관한 첫 연구서 [중앙일보 1992.03.01 종합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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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峻石 · 1985 · ‎내용 미리보기




日本の侵略と民族解放闘争 -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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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峻石 · 1983 · ‎내용 미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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統一への胎動と朝鮮革命 -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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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峻石 · 1984 · ‎내용 미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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抗日言論闘争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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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峻石 · 1976 · ‎내용 미리보기




アリラン峠の女: ある女性革命家への回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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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峻石 · 1989 · ‎내용 미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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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後朝.日関係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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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峻石 · 1974 · ‎내용 미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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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朝鮮現代史入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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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n-sŏk Ko · 1988 · ‎미리보기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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越境: 朝鮮人.私の記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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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峻石 · 1977 · ‎미리보기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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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革命運動史: 第3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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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峻石 · 1983 · ‎미리보기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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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革命家群像: 歴史と人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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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峻石 · 1990 · ‎미리보기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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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現代史入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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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峻石 · 1987 · ‎미리보기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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アリラン峠の女: ある朝鮮女性革命家への回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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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峻石 · 1974 · ‎미리보기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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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1945-1950: 공산주의 운동사 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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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日成体制の形成と危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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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峻石 · 1993 · ‎미리보기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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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憲永と朝鮮革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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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峻石 · 1991 · ‎미리보기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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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人・私の記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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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峻石 · 1971 · ‎미리보기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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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革命運動史: 第1卷 (日本の侵略と民族解放闘争) -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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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 ‎미리보기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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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 의 형명가 박 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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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峻石 · 1992 · ‎미리보기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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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言論抵抗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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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峻石 · 1974 · ‎미리보기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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