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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8

식민지근대화론 불편해도 이건 알자 2021. 4. 1. 함재봉과 목요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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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근대화론 불편해도 이건 알자

경제사회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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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72 views  Apr 1, 2021  #독립운동 #일제강점기 #식민지근대화론
#식민지근대화론 #일제강점기 #한국근대화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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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4. 1. 함재봉과 목요초대석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해 불편해 하지만,
역사를 정확히 마주했을 때 미래가 열립니다.

아직도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의 역사 인식과 갈등
우리는 어떻게 이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언제까지 친일파와 싸워야 할까요?
언제까지 과거를 받아들이지 못해 서로 증오하고 싸워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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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다 다이쥬(김대중)의 정체를 밝힌다 종북, 친일, 반미, 반한으로 점철된 김대중

도요다 다이쥬(김대중)의 정체를 밝힌다 종북, 친일, 반미, 반한으로 점철된 김대중

정치인 김대중
도요다 다이쥬(김대중)의 정체를 밝힌다 종북, 친일, 반미, 반한으로 점철된 김대중
천아1234 
2021. 7. 4.


도요다 다이쥬를 밝힌다 (1)

김대중(金大中) 1925. 12.3 生
창씨개명 도요다 다이쥬(豊田大中)

金大中 군복무 사실인가

죽으면서까지 회개는커녕 이 땅에 거짓의 씨앗만 남긴 金大中.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저 인간은 숨 쉬는 것 빼고는 전부 거짓말이라고 일괄한 바 있다. MB가 미필인 것은 전국민이 다 아는 사실  김대중 미필은 대개 잘 모른다. 김대중 자서전과 사이버기념관에는 6.25 당시 김대중이 목포해상방위대 해군 장교로 북괴 함정들과 학익진 등의 전술을 펼치며 함대를 지휘했다는 군복사진이 버젓이 붙어 있다.

더불어 김대중사이버기념관 연보에 아래와 같은 것이 기록 돼 있다. 1950년 6.25가 터지자 서울 출장왔던 김대중 걸어서 목포까지 왔으며 이듬해 1951년 목포흥국해운 사장에 취임한 후 사업가로 활동 무대를 넓혀 나갔다. 김대중이 둘이었나? 한 놈은 북괴군과 피터지게 싸우고, 또 한 놈은 전시에 사업가로 변신해 돈 벌고, 끝내 전향 못한 빨갱이 김대중의 뻔뻔스럽고 새빨간 거짓이며 조작이다.

김대중은 한술 더 떠 대통령 취임 전 예비역준장 송인명에게 목포해상방위대 근무 사실 증명서를 발급받는다. 이에 보다 못한 익명의 애국지사가 금년 5월 해군본부 감찰과에 김대중 군복무 사실에 대한 민원을 제기하게 된다. 해군참모총장 명의 답신에 김대중은 해군 복무는커녕 입대 사실조차 없으며 송인명이 발급한 증명서 역시 해군에서 발급한 것이 아니라고 정확히 확인해 준다.

지난 10월 타계한 경향신문 기자출신 故 손충무씨는 김대중 정체 밝히는 것에 평생을 다 받힌 열혈 애국지사다. 처음으로 김대중은 첩의 자식이라고 밝혔다가 괘씸죄에 걸려 김대중 취임 즉시 구속된 사건은 한국정치사에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김대중 사후의 자서전에서 자신은 첩의 자식이라고 스스로 밝혔다. 하지만 무고하게 옥살이 시킨 손충무씨(당시생존)에게는 끝내 사과하지 않고 죽었다. 손충무씨와 뜻을 같이하던 사람 중 김대중의 고향친구 김진하의 증언에서 김대중 해상자위대 복무 운운 실체가 제대로 드러난다.

김대중은 해방 후 남로당 간부로 활동한 사실에 의해 6.25 동란 중 미군에 의해 총살자로 분류돼 미군함정에 실려 남해 바다에서 처형될 위기에 처했다. 동 김진하가 호명에 응하지 말라고 하며 갖가지 재치를 발휘해 구명운동을 한 덕에 김대중은 겨우 살아남았고 이 사실은 일본 CIC 한국전 비밀문서에도 기록 돼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김진하 회장은 대한민국 국민이 김대중에게 너무 농락당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45년만에 신앙고백을 통해 위 내용을 처음 밝혔다는 것에서 현실적이며 사실성이 더하다. 김대중의 거짓말은 의형제이자 전쟁광 김일성은 물론 인간미 좋고 호쾌한 사람이라고 추켜세우는 인간백정 김정일에게 마저 습관처럼 튀어 나왔다.

김정일과의 대화에서 전라도 사람이라 고집이세다고 하자, 김대중 왈 내가 왜 전라도 사람입니까 김해김씨 경상도 사람입니다. 유명한 얘기다. 이래도 김대중은 자신은 평생 거짓말 한번 못해본 사람이라는 소도 하품할 개소리를 틈만 나면 지껄이며 행동하는 양심을 바로 내세운다. 김대중은 위선으로 철저하게 무장돼 있어 목적을 위해서는 부모도 고향도 경력도 삽시간에 세탁하고 위증하는 이 땅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그야말로 악의 축이다.

2012 정권재창출
도요다다이쥬 2편 김대중에게 버림받은 광주


도요다 다이쥬를 밝힌다 (2)

김대중(金大中) 1925. 12.3 生
창씨개명 도요다 다이쥬(豊田大中)

金大中에게 버림받은 光州

빛의 고을 光州 그 아름답고 전통 깊은 곳을 자신의 입신영달과 목적을 위해 씻지 못할 상처와 피로 물들인 자가 있으니 바로 만고역적 매국노 김대중이다. 5.18 광주시민의 아픔과 통곡을 외면한 채 미국으로 허겁지겁 줄행랑친 金大中.

왜 광주는 김대중에게 버림받은 도시인가 냉정한 자세로 새삼 따져볼 일이다. 놀랍게도 5.18을 민주화 운동이 아닌 폭동으로 미리 정의한 장본인이 金大中이다. 살아남기 위한 위선의 몸부림,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 시킨다 했으나 저 한목숨 구차하게 건지려 그렇게 증오하던 신군부에게 매달린 비겁한자가 김대중이며 훗날 우리가 봐야 했던 '화려한 휴가'는 맞춰지고 편집된 픽션일 뿐이다.

金大中은 5.18 하루 전 신군부에 의해 구속됐고 그해 11월 내란음모죄로 사형이 선고됐다. 우선 사형을 면하기 위한 목적으로 신군부가 추궁하는 모든 걸 그대로 인정했다. 5.18은 불순세력들의 내란에 무장 봉기이며 총과 폭약을 탈취한 자들의 폭동이었다고.

이렇게 조사에 순순히 응한 김대중이었으나 훗날 이 진술은 확 달라진다. 대통령 당선 전 김대중은 방송에 출연해 5.18 당시를 회자하며 저 역도들과는 절대 타협할 수 없었으며 차라리 내 목숨을 던지고 말겠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방송에서 뇌까린 목숨 운운은 당선을 위한 또 하나의 위선이고 새빨간 거짓이었다.

김대중의 앙망(仰望) 편지가 그 이유다. 전두환 장군이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김대중은 감방에서 대통령에게 1차 편지를 보내 목숨을 구걸했으나 단호히 거절당하고 말았다. 절대 타협할 수 없다고 했으나 신군부에 추접하게 매달렸고, 목숨을 버린다 했으나 그는 광주와 운명을 같이 하고픈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살아남았다.

수많은 생명들이 김대중 석방을 외치다 비명에 피를 흘리며 처절하게 죽어갔다. 김대중은 광주 영령들의 통곡과 함께 광주를 위해 초연히 목숨을 버렸어야 했다. 광주시민과 함께 목숨을 버리려 했다는 말은 역시 당선을 위한 거짓으로 종결된다. 이래서 거짓의 달인 김대중은 희대의 사기꾼에다 광주 5.18 최대의 변절자인 것이다.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던 光州. 후일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하늘이 내려준 성군으로 여기며 감히 그를 범접하지 못한 어질고 순수한 호남의 민초들. 그의 세 아들 홍삼트리오가 수십 수백억을 차례로 해쳐먹고 줄줄이 감방에 끌려가도 그저 사담후세인 자식들 보다는 낫다며 끝까지 김대중을 믿고 밀어주었다.

김대중은 전두환 대통령에게 다시 고뇌에 찬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 내용에도 5.18이 폭동이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편지 전문

전두환 대통령 각하
국사에 전념하신 가운데 각하의 존체 더욱 건승하심을 앙축하나이다.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본인은 교도소 재소생활이 2년반에 이르렀사온데
본래의 지병인 고관절변형, 이명 등으로 고초를 격고 있어 치료 받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각하께서 출국허락만 해 주신다면 미국에서
2~3년간 체류하면서 완전한 치료를 받고자 희망하온데 허가하여 주시면
감사천만이겠습니다. 아울러 말씀드릴 것은 본인은 앞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일체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으며  일방 국가의 안보와 정치의 안정을 해하는
행위를 하지 않겠음을 약속드리면서 각하의 선처를 앙망하옵니다.

1982년 12월 13일 金大中
(오오미 어째 울 슨상님이 요로콤 살려달라 했을까잉 아니랑께여)

오열하는 광주는 뒷전 오로지 혼자 살아남겠다는 문제의 앙망 편지다. 내용 중 '일방 국가의 안보와 정치의 안정을 해하는 행위'라고 한 것은 5.18이 단순시위 데모수준이 아니라 공권력을 무력화시키고 나아가 북괴의 지원으로 무력내전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는 것을 시인하고 반성하는 의미에서 쓴 편지라는 것이다.

5.18 이후 왜 북괴는 광주민중봉기 기념관을 세우고, 5.18 잠수함을 만들고, 역마다 5.18을 찬양하는 구호를 새겨 놓고 해마다 평양중앙노동자 회관에서 기념행사를 가지는 것인가. 올해도 어김없이 지난 5.17일 광주민중봉기 30돌 기념행사를 동 장소에서 성대하게 가졌다.

이를 근거로 아래는 광주 5.18에 관한 역설적 물음이다. 광주시민들이 과연 북한에 5.18기념관을 세우기 위해 그토록 많은 피를 흘린 것인가, 광주시민들이 과연 북한에 잠수함 명을 새겨 넣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투쟁을 한 것인가, 광주시민들이 과연 북한에 기념행사를 기대하며 폭도의 오명을 들으며 끝까지 싸웠던 것인가?

그렇다고 자신 있게 답하고 말할 수 있는 광주시민은 단 한명도 없을 것이다. 이런 연관성으로 5.18은 김대중이 구속되기 전부터 광주의 피를 재물로 삼고자 했고 북괴와 내통하며 국가전복을 꾀하고 있었다는 것이 어렵지 않게 그냥 드러나는 것이다.

김대중 살아생전 호남인들에게 특히 광주시민에게 무엇을 해줬나? 광주민주유공자증 하나 던져 놓은 것으로 할 일을 모두 했다는 것인가? 정권이 바뀌면서 5.16이 군사반란으로 5.18이 민주화운동으로 재평가 됐다. 광주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제정으로 신군부가 누리던 모든 특혜는 물론 서훈.훈장 전부 취소된 사실에 힘의 역사는 무엇이든 또 변화 시킬 수 있음을 일깨워 준다.

앙망 편지 후 곧 바로 대통령특별 사면에 의해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떠난 金大中. 여기서 주지의 사실은 당시 김대중이 20년으로 감형된 상태이지만 그때 나이로 볼 때 인생 종친 형기가 남았으나 미국에 도착하자 강제 추방했다는 거짓으로 자신의 건재를 부각시켰다.

최근 역외탈세 차단에 나선 정부는 스위스와 조세조약계정협상을 사실상 마무리해 내년 초 공식 발효되면 의심되는 계좌 내역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만약 김대중이 광주의 아픔과 발전을 외면하고 숨겨 놓은 천문학적인 돈이 튀어 나온다면, 그 날로 광주의 김대중컨벤션센터는 검은 화염으로 휩싸여 한줌의 재로 사라질 것이 뻔하다.

범세계적 싱크탱크 헤리티지재단. 미국의 수재들이 머리를 맞대고 세계적 이슈나 정책을 검토해 분석 결과를 리드해 주고 있다. 한국에 입국한 이 재단서 광주시위를 면밀히 조사한 후 단호하게 반정부무장 폭동(Riot)으로 최종 결론 내린 바 있다.

결국 빛고을 光州는 김대중의 붉은 야욕에 의해
명분도 실리도 남은 것이 전혀 없는 회색빛 도시가 돼 버렸다.


도요다다이쥬(3) 金大中 親日인가

김대중(金大中) 1925. 12.3 生
창씨개명 도요다 다이쥬(豊田大中)

金大中은 親日인가

집권 후 측근 간신모리배들과 쓰레기언론을 총동원해 원수보다 더 싫은 故박정희 前 대통령을 끊임없이 친일파로 음해한 金大中은 과연 친일사상과 전력에 흠이 없는 깨끗한 者인가.

'센세이 아노 도요다 다이쥬 데스요' 만고역적 김대중이 대통령 당선 후 목포상고 왜놈 스승 무쿠모토 이사부로에게 달려가 저처럼 정중하게 인사말을 올렸다. 왜놈 스승 이사부로는 조선총독부 교육청 훈도담임선생으로 일제강점기 내내 우리 민족에게 황국신민조선을 교육시켜 민족얼 말살에 나섰던 전형적 침략주의자다.

김대중은 중. 고 교육 모두를 일제교육청소속 학교에서 받아 日語가 자유로웠다. 졸업 후 왜놈이 경영하는 목포해운회사에 들어가 뛰어난 일본어를 앞세워 사주를 구워삶은 덕에 징용. 입대 모두 피할 수 있었고 종내는 젊은 나이에 회사를 물려받게 된다.

김대중 평민당 총재시절 민족원흉 히로히토가 저 세상으로 갔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전두환 前대통령은 일왕 조문을 꺼려했으나 매국노 金大中은 일본대사관 뒷문을 통해 몰래 들어가 90도로 깍듯이 조문을 했다. 그 누구의 조문강요도 없었고 일본정부의 공식조문 요청도 없었으나 김대중은 끝내 조문을 갔고 이것이 경향신문에 포착되어 1989. 1.9일 사진과 함께 특종보도 됐다. 민족수탈 수괴에다 전범 총책임자에 대한 조문행위는 국민정서에 반하는 명백한 친일행위다.

이런 천하의 반민족행위자 김대중이 1998년 정권을 잡은 후 공식적인 일본방문을 앞두고 아키히토 일왕의 정부공식호칭을 천황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 국내의 반대여론과 논란이 많았으나, 김대중이 강력히 밀어붙여 1998.10월 방일을 앞두고 천황으로 공식 명명하게 됐다.

김대중은 일본 공식방문 중 왜놈들과 입을 맞춰 독도해역 반을 즉시 일본에 넘겨준다. 신한일어업협정 이라는 망국적 간판 아래 독도를 포함 울릉도 33해리까지 한국.일본이 공동 관리하는 수역을 확정해 우리영해의 주권 배타적경제수역(EEZ)을 스스로 포기했다. 일본에게 독도 침탈 빌미를 제공한 이 굴욕적 협정은 친일부역(親日附逆) 행위나 다름없다.

어민들은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어선 700여척이 헐값에 강제 폐선 처리됐으며 가수정광태의 독도는 우리땅 노랫말은 금지곡으로 독도주권과 대한민국자존심을 지켜주지 못하고 사라졌다. 민족의 대동맥 경부고속도로를 일본과 뒷거래한 돈으로 건설한다 하여 공사 현장에 달려가 자빠져 누워 시위에 가담했던 金大中. 여기서 대한해협을 일본에 팔아넘겼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당시 박정희대통령은 대한해협은 물론 독도에 관한 자주권에도 완고해 일본외교부장이 2억을 들고 찾아와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고 헛소리하는 것을 박대통령이 무례한 외교관이라 소리쳤다. 이어 대통령은 차라리 독도를 부숴버리겠다며 호통을 쳐서 쫓아냈고 결국 독도는 우리 영토로 온전히 보존되면서 오히려 태평양전쟁에서 대한민국을 수탈한 보상금 8억을 따로 또 받아냈다.

2002년6.29일 제2연평해전 발발 당시 북방한계선(NLL)에 무력도발 징후가 있어 함대사령관의 선제사격 요청이 있었으나 김대중은 북한이 공격할시 반격하라는 어이없는 교전수칙을 하달했다. 국군통수권자로서 본분을 망각한 김대중의 교전수칙에 손발 묶여 싸운 우리 장병들은 故 윤영하 소령을 비롯해 6명의 전사자가 발생했으며 교전 중 손발이 잘려나가는 처참한 공격을 당해야 했다.

바로 다음날 우리 軍을 버린 김대중은 장례식 참석을 외면한 채 검은 리본은커녕 빨간 넥타이를 매고 일본으로 건너가 왜왕 아키히토 내외와 함께 월드컵 결승전을 보며 킬킬거리며 웃고 있었다. 조국을 위해 산화한 장병들 영결식에 정부관계자 단 한명도 참석치 않았고 5일장을 3일장으로 축소한 후 대통령장이 아닌 해군장으로 결정 장병들은 마지막 가는 길까지 불명예를 안고 말았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은 당시 서해교전을 제2연평해전으로 명명하고 매년 국가보훈처가 기념식을 주관하는 정부주관행사로 격상시켜 비통한 눈물로 살아온 유족들의 상처를 뒤늦게나마 어루만졌다.

김대중 집권 중인 2002. 9.7일 상암동월드컵경기장에서 펼쳐진 남북통일축구경기. 주최측은 방임된 공권력 속에 입장하는 관중들로부터 태극기를 압수하고 대신 한반도기(좌익 깃발)를 손에 쥐어주면서 조국의 태극기가 쓰레기처럼 굴러다니고 구석으로 쌓이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이래서 전쟁광 김일성이 뒈지기 전 의형제와 다름없는 김대중을 확실히 믿은 나머지 '남한은 한 세기가 지나기 전 총 한방 안 쏴도 공산화 할 수 있다'라며 자신감을 보인 것이다.

으리으리한 동교동 아방궁부터 김대중광장. 김대중도로. 김대중광주홀. 김대중역. 김대중백화점. 김대중박물관. 김대중도서관. 김대중미술관. 김대중기념관, 김대중컨벤션센터. 그리고 나라곳곳에 수없이 세워져 있는  어마어마한 김대중의 동상과 흉상들.

드러나고 확인된 진성 親日 金大中!
金大中에 비해 변변한 기념관 하나 없는 바보 대통령 두 사람.
공산당이라면 무조건 때려잡은  故이승만 건국대통령.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라고 일괄하며 김일성에게 무조건적
사과를 받아낸  故박정희 대통령. 글을 마치는 이 순간 너무나 그립다.


도요다 다이쥬를 밝힌다 (4)

김대중(金大中) 1925. 12.3 生
창씨개명  도요다 다이쥬(豊田大中)

金大中의 親北

金大中!!

정치적 야욕(野慾)에 눈이 멀어 평생을 거짓으로 덧칠한 채 끝내 붉은 옷을 벗지 못한 정치모리배로 그의 일생을 정의해야 마땅하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철저한 경계의 대상 金大中! 민족 분란의 중심에는 언제나 붉은 색의 그가 도사리고 있었다. 인생 말년(末年) 6.3 빌딩에 김정일 매머드사진을 걸어 놓고 알아듣기조차 힘든 꺼져가는 소리를 내면서도 '김정일은 죄가 없고 억울한 사람이다'를 심어 놓은 者.

오욕칠정(五慾七情)을 쉬 버리지 못해 모질고 질긴 숨통을 붙들고 구천지옥(九泉地獄)을 오가면서까지 '국민의 이름으로 들고 일어나 이명박 독재정권 심판하자'를 부르짖은 金大中!

의형제인 전쟁광 김일성을 만나 대남적화 공작금 20만불에 ‘민주화’라는 용어를 생산해 냈을 당시는 북한 노동당 6호 동지로 불렸고 대통령당선 뒤에는 북한 실질적 권력 3인자로 회자됐다. 북한은 문성근 애비 문익환 사망 이후 기념우표까지 발행했으나 5.18 내란 폭동 사주에다 햇볕퍼주기 영웅 金大中은 문익환 서열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가히 절대자의 위치였다는 것이다.

평양 금수산기념궁전 3층 중앙 홀에 안치된 김일성 미이라. 2000년 방북시 사체알현을 요구하는 북측에 의해 확인한 후 구소련 기술에 의해 무려 9억불을 들인 시체장사를 두고 감탄해 마지 않았다. 김일성.김정일 단 두 명이 2大에 걸쳐 약 700만명의 고귀한 목숨을 앗아간 백정 짓은 뒷전인 것이다. 김씨 왕조3대 김정은 세습이 이뤄지면 또 얼마나 많은 무고한 생명을 추수하듯 거둬갈는지 의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호랑이가 아니고 빨갱이다'  6.25를 지옥처럼 경험한 어른들 얘기다. 이 시각에도 북한 교화소에서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명이 생체실험실유리 상자 속에 갇혀 분수처럼 피를 토하고 진공실험에 의해 가족들간 육신이 오그라들면서 서로의 살을 손톱으로 후벼 파면서 불쌍하고 한 많은 처절한 생을 마감하고 있다. 인간 생명 존중과 존엄은 저 멀리 이렇듯 잔혹. 잔인함은 북한 체제를 유지하는 빨갱이들 즉 金大中이 찬양 경배하는 주사파에 있다.

2009.8.23일 김대중이 현충원에 묻히는 날 光州는 통곡하지 않았다. 5.18 민주화운동을 신군부가 폭동으로 정의해도 저 한목숨 살아남기 위해 방임한 사실. 여기에다 피맺힌 광주보다 오히려 5.18을 세계적 민중봉기로 더욱 선전하고 경축하는 북한정권의 광란에 광주시민은 의아스러웠으나 후일 김대중과의 연관성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광주시민은 억울한 것이다. 민주화를 위해 싸웠지 결코 북한을 위해 투쟁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울러 호남의 맹주 광주의 희망 김대중은 당연히 5.18 묘역으로 가야 했으나 사망前 이미 거부했었다. 이래서 국회의사당 영결식에는 빈 의자가 절반을 넘었고 國葬에 무색하게 국민들의 조기(弔旗) 게양을 찾아보기 힘들었으며 심지어 그날 光州까지 평상시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김대중의 대국민 선전.선동의 구호를 살펴보면 깊이 판단할 것 없이 주사파임이 그냥 드러난다. 김정일과 북한은 억울하다 독재가 다시 살아나고 빈부격차 사상 최악이며 국민도 불행해 지고 있다. 들고 일어나라, 할일 없으면 인터넷에 글이라도 쓰고 벽에다 욕이라도 해라 투쟁하라 가급적 많은 사람들을 모아 집회를 하라 분하고 억울하다 정부를 지지 못한다고 하고 시위로 독재정권 심판하라.

정권을 빼앗긴 김대중은 말년에 국가 내란을 선동한 정도가 아니라 명백히 지시하고 명령한 것이다. 지역민을 볼모로 잡고 선동과 체제전복을 꾀하는 매국노는 이 땅에 두번 다시 태어나지 말아야 한다. 이런 者가 노벨평화상을 받은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다.

현대를 앞세워 조성한 공적자금 300억불. 이중 회수 불능한 200억불이 금강산 관광이라는 그럴듯한 간판에 분단 후 최대의 남북합작 판도라 상자인 햇볕정책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공식적으로 김정일에게 갖다 바친 7억불은 할머니 효도 용돈에도 못 미치는 껌 값에 불과하다.

6.15 남북정상회담 대가로 김정일이 30억불을 요구했으나 15억불 선에서 마무리됐다는 것도 대북송금특검에 맞추려 마지못해 나온 요설(饒舌)임을 감안할 때 뒷주머니는 아직도 불룩한 것이다. 지구상 둘도 없는 왕구라 햇볕정책. 평화정착이라는 절대명분 앞에 그 누가 감히 토를 달았겠는가.

습자지 하나 말리지 못한 햇볕정책의 계승자 뇌물현. 상왕의 엄명에 정신줄을 놓고 '막 퍼주어도 남는 장사 아닙니까'라며 정말 바보천치 같은 광대놀음으로 끌려 다니다 결국 팽(烹) 당하고 말았다.

노벨상 수상 소감에서 지난 정권을 깡패정권 강도정권 운운하며 누워서 침 뱉어 버린 김대중! 수상 후 金正日 위원장이 함께 수상하지 못해 서운하다며 끝내 대한민국 자체를 외면하고 비하했다. 우리의 안보와 정신적 무장해제를 노렸던 햇볕정책이 핵공갈로 우리에게 성큼 다가왔으나 '북한에 핵무기가 있으면 어떤가. 통일 되면 전부 우리 것 아니냐'라고 아직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이제는 천길만길 침침한 음부(陰府)의 나락(那落)으로 속절없이 떨어진 만고역적 김대중! 카피해 와서 평생 우려먹은 행동하는 양심을 뒤 늦게 지옥불 속에서나마 회개하는 양심으로 바꾼다 해도 이 나라 이 조국 자유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대한 사죄는 백번 만번 부족할 뿐이다.

2012 정권재창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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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7

'제국의 사서' 이재욱과 박봉석은 '친일파'인가? - 오마이뉴스

'제국의 사서' 이재욱과 박봉석은 '친일파'인가? - 오마이뉴스


서울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 | 34화

'제국의 사서' 이재욱과 박봉석은 '친일파'인가?[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 국립도서관 ①
19.08.08 17:59l최종 업데이트 19.08.08 17:59l
글: 백창민(bookhunter)
이혜숙(sugi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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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국립중앙도서관은 1963년까지 '국립도서관'이라 불렸다. 1945년 10월 15일 문을 연 '국립도서관'은 조선총독부도서관의 시설, 장서, 사람을 그대로 승계한 도서관이다(관련 기사 : 명동 롯데백화점 주차장에서 이 표석을 본 적 있나요).

여기서 짚고 넘어갈 부분은 조선총독부도서관의 거의 모든 것을 승계한 도서관이 '간판'만 바꿔단다고 '국립도서관'으로 전환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 전환은 조선총독부에서 일하던 관료와 경찰이 미군정을 거쳐 대한민국 공무원과 경찰로 그대로 이어진 것과 무엇이 다를까.

도서관이 맞은 '해방'


▲해방은 단 25일뿐?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지만 1945년 9월 8일 미군의 진주와 함께 미군정 시대로 돌입했다. 해방이 되었지만 총독부 청사에는 ‘태극기’가 아닌 ‘성조기’가 내걸렸다. 미군 진주와 함께 뒤바뀐 이 상황을 도올 김용옥은 ‘해방은 단 25일뿐이었다’라고 표현했다. ⓒ Wikipedia관련사진보기

 
영화계의 거장 임권택은 인터뷰를 통해 그가 맞은 '해방'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남긴 바 있다.


"국민학교 때 학교에서 조선말 썼다고 모질게 때렸던 교사가 해방 후 여전히 학교에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박완서 역시 장편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그녀가 겪은 '해방'의 풍경을 이렇게 남겼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일본인 교장 선생님과 선생님들이 안 보이는 건 당연했지만 일본어를 가르치던 국어 선생님이 그냥 우리말의 국어 선생님으로 눌러앉아 있는 건 잘 이해가 안 됐다."

두 달 전까지 '사상의 관측소' 역할을 하며 '총독부도서관'으로 군림하던 곳이 간판만 바꿔 단다고 '국립도서관'이 되는 걸까. 경찰과 관료뿐 아니라 국립도서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런 모습이 우리가 겪은 '해방'의 실체는 아니었을까.

정부 수립 전에 출범한 '국립'도서관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기념식에 참석한 하지와 맥아더왼쪽부터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 중장,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원수, 이승만 대통령. 미국의 역코스(reverse course) 전략으로 인한 ‘현상유지’ 정책이 아니었다면 국립도서관의 설립 과정도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 서울대학교는 명예박사 학위 1호를 맥아더에게, 2호는 하지에게 수여했다. ⓒ 국가기록원관련사진보기
미군이 인천에 상륙한 것이 1945년 9월 8일, 서울 중앙청(옛 조선총독부)에서 교육 담당 업무를 시작한 것이 9월 11일, 미군 장교가 학무국장으로 임명된 것이 9월 14일, 공립초등학교가 다시 문을 연 것이 9월 24일, 한글 교과서 발행 원고가 승인된 것이 10월 15일이다.

국립도서관은 해방된 지 정확히 두 달만인 1945년 10월 15일 문을 열었다. 국립박물관 개관일이 1945년 12월 4일, 과학관 개관일이 1946년 2월 8일인 것을 감안하면, 국립도서관이 얼마나 빨리 문을 열었는지 알 수 있다.

국립도서관이 개관한 1945년 10월 15일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이다. 정부가 수립도 되기 전에 국가가 세운 '국립'도서관이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 제기가 있을 수 있다. 국립서울대학교 역시 같은 질문을 피할 수 없다.

물론 나라는 이어졌으되 주권을 강탈당해 정부가 수립되지 않은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국립도서관과 국립서울대학교 모두 실질적인 설립 주체는 대한민국 정부가 아닌 '미군정'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일제 통치기구와 제도, 인력을 그대로 유지한 미군정의 '현상 유지' 정책이 아니었다면 국립도서관과 국립서울대학교는 다른 방향으로 설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국립도서관 설립 주체였던 이재욱과 박봉석은 조선총독부도서관 고위직에 있던 이들이어서, 해방된 조국에서 새로운 인물을 중심으로 도서관을 설립하자는 논의가 일었다면 국립도서관 건립 양상도 달라졌을 것이다.

한국 도서관의 아버지, 박봉석


▲초대 국립도서관 부관장 박봉석국립중앙도서관 2층 문화마루 전시 공간에 새겨진 박봉석 부조.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 기간까지 국립도서관 개관, 조선도서관협회 결성, 조선도서관학교 설립과 같은 활발한 활동으로 우리 도서관의 기틀을 마련했다. ⓒ 백창민관련사진보기
국립도서관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박봉석이다. 박봉석은 '한국 도서관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1905년 8월 22일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박봉석은 1927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나와 1931년 중앙불교전문학교(동국대학교의 전신)를 졸업했다.

1931년 3월부터 조선총독부도서관에서 일하기 시작했는데, 신분은 고원(雇員)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봉석은 조선총독부도서관에 들어간 때부터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주로 분류와 편목 업무를 담당했다. 1939년 3월에는 일본 문부성 공립도서관 사서 검정시험에 합격했다. 해방이 될 때까지 조선인 중 일본 문부성이 발급한 '사서 자격증'을 보유한 사람은 박봉석과 최장수 두 사람뿐이다.

1940년 개성에 중경문고(中京文庫) 도서관 개관 준비를 맡으면서 새로운 분류표를 완성했고, 이를 조선공공도서관 도서분류표로 발표했다. 1940년 시점에 조선총독부도서관 서열 10위였던 박봉석은 1942년에는 80여 명의 직원 중 서열 3위로 뛰어올랐다. 오기야마 히데오(荻山秀雄) 관장과 이재욱 부관장에 이어 '넘버 쓰리'였던 셈이다.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16일 박봉석을 비롯한 조선인 직원은 일본인으로부터 조선총독부도서관을 접수할 것을 결의하고 도서관 장서와 시설 보존에 힘썼다. 1945년 9월 1일 박봉석은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방문했고, 건준으로부터 조선총독부도서관과 철도도서관의 유지를 요청받았다. 조선총독부도서관 접수와 건국준비위원회 접촉, 낙향한 이재욱 관장 추대 같은 일련의 움직임을 보면 박봉석은 '정무적' 감각도 상당한 인물이 아니었나 싶다.

1945년 10월 1일 오기야마 히데오 관장으로부터 도서관 운영권을 넘겨받았고, 10월 15일 아침 9시 이재욱을 관장으로 박봉석을 부관장으로 국립도서관을 개관했다. '국립도서관'이라는 이름은 박봉석과 미군정 문교부 최승만 교화과장이 정했다.

해방 직후에는 무슨 책이건 우리 글로 된 책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강준만은 해방 이후 '유흥계'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호황을 누린 분야가 '출판계'였다며 당시 상황을 '출판의 둑이 터졌다'라고 표현했다. 박봉석은 '문헌수집대'를 만들어 거리에서 뿌려지고 판매되는 인쇄물을 수집했다. 훗날 건국사의 귀중 자료가 될 것을 생각한 조치인데, 이렇게 모인 자료를 해방 1주년 전시회를 통해 공개하기도 했다.

1945년 12월 10일부터 1946년 5월 11일까지는 법률도서를 법제도서관으로 이관하려는 미군정의 조치로부터 도서관 장서를 지켰다. 1946년 4월 1일에는 '조선도서관학교'를 설립해서 사서 양성에 힘썼다. 조선도서관학교는 조선인 스스로 도서관 인력 양성을 위해 설립한 최초의 교육기관이다. 박봉석은 1945년 조선도서관협회와 1947년 조선서지학회 결성을 주도하고 조선십진분류표와 조선동서편목규칙을 발표하며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박봉석 띄우기 '제대로' 하자


▲박봉석이 서훈받은 은관문화훈장문화예술 발전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수여하는 문화훈장에는 금관, 은관, 보관, 옥관, 화관이 있다. 은관문화훈장은 2등급 문화훈장이며, 박봉석은 2003년 10월 도서관인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이 훈장은 국립중앙도서관 2층 문화마루에 전시되어 있다. 도서관인 중에는 마을문고 운동을 활발히 전개한 엄대섭이 2004년 두번째로 은관문화훈장을 서훈받았다. ⓒ 백창민관련사진보기
박봉석을 띄우고 싶어서였을까. 박봉석을 다룬 책마다 박봉석이 만든 조선공공도서관 도서분류표가 "당시 여건으로는 신분상 위험이 따르는 일"이며 "냉혹한 일본의 침략정책 밑에서 박봉석의 굳은 민족의식을 엿볼 수 있는 흔쾌한 일"이라는 서술이 넘쳐난다. 박봉석이 일본 다음에 '조선문'을 배치한 이 분류표가 그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드러내는 지점일까?

박봉석은 조선공공도서관 도서분류표를 1940년과 1941년에 걸쳐 <문헌보국>(文獻報國)을 통해 공개 발표했다. <문헌보국>이 어떤 매체인가. 바로 서슬 퍼런 조선총독부도서관의 '기관지'다. 총독부뿐 아니라 특고경찰이 감시의 눈빛을 번득이는 상황에서 민족의식이 엿보이는 분류표를 공개적인 지면을 통해 발표하는 게 가능했을까?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박봉석이 신분상 위험이 따르는 분류표를 만들어 조선총독부도서관 기관지에 발표까지 했다?

박봉석은 <문헌보국>에 발표한 조선공공도서관 도서분류표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신동아 건설의 가을, 우리 조선 도서관계도 그 박차를 가해야 하나 발랄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다." 박봉석이 '조선 도서관계도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언급한 '신동아 건설'은 일제가 부르짖은 '대동아공영권'을 지칭했을 것이다.

박봉석이 만든 조선공공도서관 도서분류표는 그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드러내는 대목이 아니라 사서로서 그가 지닌 열정과 성실함을 보여주는 지점이 아닐까. 박봉석에 대한 '조명'은 좋지만 '오버'하진 말자.

'한국 도서관의 아버지', '한국의 멜빌 듀이', '도서관 사상가'... 박봉석에 대한 헌사와 찬사는 넘치지만 정작 그의 '사상'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전집'은 출간조차 되지 않았다. 한국 도서관과 문헌정보학계의 게으름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박봉석을 띄우는 것은 좋다. 이왕 띄우려면 그의 사상을 제대로 살필 수 있는 '전집'이라도 내자.

'한국 도서관의 아버지'인 박봉석이 이럴진대, 다른 사람은 말해 무엇하랴. 초대 국립도서관장 이재욱의 저술을 모은 <이재욱 전집>도 도서관이나 문헌정보학계가 아닌 '영남민요연구회'에서 출간했다.

이재욱은 왜 철저히 잊혔을까


▲초대 국립도서관장 이재욱1905년 9월 20일 대구에서 태어난 이재욱은 대구고등보통학교와 경성제국대학 조선어문학과를 졸업했다. <봄은 고양이로다>를 쓴 시인 고월 이장희가 그의 삼촌이며, 중추원 참의를 지낸 대구의 대표적 친일파 이병학이 그의 조부다. 1931년부터 조선총독부도서관에서 일했고, 경성방송국 라디오에 출연, 독서와 도서관 프로그램을 담당하기도 했다. ⓒ 백창민관련사진보기
국립중앙도서관 '서고 견학'을 다녀온 적이 있다. 견학 과정에서 관람객의 질문이 나왔다. 국립중앙도서관 2층 문화마루 전시 공간에서 '초대 관장이 아닌 부관장인 박봉석을 기리는 이유가 뭐냐'는 것이다. 그때 견학을 돕던 담당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박봉석은 사서이고 관장은 사서가 아니라서 그렇다'라고. 사서여서 기리고 사서가 아니어서 기리지 않는다는 설명도 이상하지만 담당자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다. 박봉석뿐 아니라 초대 관장인 이재욱 또한 '사서'다.

이재욱은 국립도서관 역사상 유일한 '사서 출신 관장'이다. 대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우현서루'(友弦書樓)라는 도서관을 접한 이재욱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선어문학과를 졸업했다. 1931년 조선총독부도서관에 촉탁으로 들어가 '사서'를 거쳐,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도서관 서열 2위인 '부관장'이 되었다.

1905년 박봉석과 같은 해에 태어난 이재욱은 조선총독부도서관에도 1931년 같은 해에 들어갔다. 동갑내기에 입사동기인 셈인데, 이재욱의 승진이 더 빨랐다. '제국대학' 출신인 데다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조부 이병학의 '후광'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식민지 도서관에서 보기 드문 '출세'를 한 걸 보면 이재욱이나 박봉석 모두 '능력'을 인정받았던 모양이다.

오기야마 히데오 관장이 와병 중일 때는 부관장인 이재욱이 총독부도서관을 이끌기도 했다. 이재욱은 1945년 초 조선총독부도서관을 그만두고 고향인 대구로 내려가 경북도청에서 일하다가 해방 이후 박봉석을 비롯한 국립도서관 직원의 추대를 받아 초대 국립도서관 관장이 되었다.

1935년 <농촌도서관의 경영법>을 한성도서주식회사를 통해 출간하고, 해방 후 1947년에는 <독서와 문화>를 조선계명문화사를 통해 출간했다. 이재욱이 남긴 글을 살펴보면 국문학과 민속학, 서지학, 도서관학 분야에서 상당한 식견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이재욱은 조선어문학회와 진단학회, 조선서지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46년 박봉석에 이어 조선도서관협회 2대 회장을 맡았다. 박봉석 부관장과 함께 '조선도서관학교'를 만들어 강사로도 활동했다.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그는 도서관 분야 '강습회'에서 빠지지 않는 강사였다. 특히 1939년부터 1943년까지 조선도서관연맹 주최로 열린 도서관 강습회에서 이재욱은 강사로 나선 '유일한' 조선인 사서였다.

그가 가진 실력이나 존재감으로 볼 때 이재욱은 박봉석에 필적하면 필적했지 부족한 사람이 아니다. 박봉석이 도서관학을 중심으로 전문성을 키운 사람이라면 이재욱은 도서관학뿐 아니라 여러 학문 분야를 넘나들며 팔방미인 같은 재능을 뽐낸 사람이다. 도서관 분야 안에서는 박봉석이, 도서관 분야 밖에서는 이재욱에 대한 평가가 높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찌 된 일인지 이재욱은 잊혔다.

박봉석 역시 오랫동안 잊혔지만 그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면서 '한국 도서관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이재욱은 지금도 잊힌 존재다. 이재욱이 철저히 잊힌 이유는 뭘까? 그가 '친일파'라서? 그의 실력이 부족해서? 그가 '납북'되었기 때문에?

이재욱이 일제 강점기 도서관 분야에서 조선인 중 최고위직에 있었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했다. 박봉석은 조선총독부도서관 서열 3위였는데, 서열 2위인 이재욱은 '친일파'이고 서열 3위인 박봉석부터는 '친일파'가 아닌 걸까?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이재욱이 '친일파'라면 박봉석도 '친일파'의 혐의를 벗기 어려울 것이다.

이재욱의 실력이나 경력이 박봉석에 못지않거나 그 이상임은 앞에서 설명했다. 이재욱과 박봉석은 한국전쟁 과정에서 '행방불명'되었는데, 둘 다 '납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납북 여부도 이재욱이 잊힌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재욱이 철저히 잊힌 것은 의아하기까지 한데, 그가 행방불명된 후 가족이 미국으로 이주한 것도 이유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도서관과 문헌정보학계의 '무관심'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도서관인을 발굴하고 도서관 역사를 조명하는 데 우리 도서관이 무심하고 게으른 것이 가장 큰 이유 아닐까. 늦었지만 2005년 10월 19일 한국도서관협회는 창립 60주년을 맞아 이재욱에게 공로패를 수여했다.

'제국의 사서' 이재욱과 박봉석은 '친일파'인가


▲이재욱 전집 영남민요연구회가 펴낸 <이재욱 전집>. 이재욱이 펴낸 <농촌도서관의 경영법>, <독서와 문화>, <동요집>, <영남전래민요집>를 모두 수록한 전집이 2013년 출간되었다. 도서관인뿐 아니라 서지학자, 민요학자, 국문학자로서 이재욱의 면모를 알 수 있다. ⓒ 백창민관련사진보기
해방 직후 박봉석이 일제로부터 장서와 시설을 지키고 국립도서관으로 전환한 것은 공적으로 치하해 마땅하다. 하지만 박봉석이 '사상 관측소' 역할을 한 조선총독부도서관에서 서열 3위까지 오른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조선총독부도서관 부관장이었던 이재욱 역시 마찬가지다. 도서관에 대한 열정과 업무 능력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지만 이들이 몸담은 조직이 일제 통치 기구의 하나였음을 고려할 때 당황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이재욱은 조선총독부 직원록에 1937년부터 이름이 나타난다. 처음에는 '촉탁'이라고 나오는데 조선인 중에 가장 수당을 많이 받았다. 1939년에는 '촉탁'이 아닌 '사서'로 기록이 나오는데, 총독부도서관에서 일한 조선인 중 가장 먼저 '사서'가 된 것으로 보인다. 총독부도서관에 들어간 지 8년 째인 1939년부터 이재욱은 오기야마 히데오 관장에 이어 두 번째로 관등이 높았다.

1940년에는 이재욱과 함께 박봉석이 '사서'로 기록된다. 1941년 직원록부터는 조선인 이름이 사라지고 일본식 이름만 나타나는데, 사서 '아오키 슈조'(靑山修三)가 이재욱이고, 사서 '와야마 히로시게'(和山博重)가 박봉석이다. 개정조선민사령에 의해 1940년 2월 11일부터 '창씨개명'이 시행되는데, 이재욱과 박봉석 모두 1941년 직원록 작성 이전에 창씨개명을 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총독부 소속 기관에서 일하면서 창씨개명을 피하기 어려웠을 테고 창씨개명 여부가 친일 부역의 잣대는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식민지 조선에서 '사상 통제'를 주도한 조선총독부도서관에서 고위직에 있던 조선인이라는 점은 당혹감을 안긴다.

일제 강점기 공직자의 관등은 친임관(親任官), 칙임관(勅任官), 주임관(奏任官), 판임관(判任官) 4종류였다. '친임관'은 천황이 직접 임명한다는 의미로 조선에서는 조선 총독과 정무총감 두 사람이 여기에 해당한다. '칙임관'은 총독부 국장과 각도 도지사 같은 고관이다. 고등관 1등급과 2등급이 칙임관에 해당하는데 지금으로 치면 중앙부처 차관과 국장급이다. 칙임관 이상은 '각하'라고 불렸다.

'주임관'은 고등관 3등급부터 9등급까지다.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하거나 판임관에서 승진해야 주임관이 될 수 있었다. 주임관 중 참사와 부참사는 1945년 서기관과 사무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군수도 주임관이었는데, 주임관 이상을 '고등관'이라고 했다. '판임관'은 고위직이 아닌 일반 직원으로 지금의 6급 이하 공무원을 말한다.

조선총독부도서관 부관장 이재욱과 서열 3위 박봉석의 '관등'은 어느 정도였을까? <조선총독부 직원록>에는 1942년부터 오기야마 히데오 관장만 표기하고 직원의 관등은 1941년까지만 기록이 남아 있다. 1941년 이재욱은 사서 관직 4등급, 박봉석은 6등급이었다. <조선총독부도서관 직제>를 살펴보면 관장은 주임관, 사서는 판임관이다. 이재욱과 박봉석은 판임관인 사서였는데 관등은 이재욱이 더 높았다. 해방 즈음에는 이재욱과 박봉석 모두 사서 2등급과 4등급까지 각각 승진했을 가능성이 있다.

해방 후 남조선노동당은 '주임관 이상'을 친일파로 규정했다. 해방 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1947년 3월 13일 '부일협력자, 민족반역자, 전범, 간상범에 대한 특별법률조례'(이하 특별조례)를 상정하고 7월 2일 최종안을 확정했다. 특별조례에 따른 부일협력자는 10~20만 명, 민족반역자는 약 1천 명, 전범은 2~3백 명, 간상배는 1~3만 명으로, 총 20만 명 정도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추산됐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특별조례는 미군정 장관이 인준을 거부하면서 시행되지 못했다. 이후 제헌국회에서 만든 '반민족행위처벌법'(이하 반민법)에서는 '칙임관 이상'의 관리를 '친일파'로 규정했다.

남조선로동당의 규정,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특별조례, 반민법 어느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이재욱과 박봉석은 친일파로 '단죄'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당시 친일파 청산 기준이 '최대치'가 아닌 '최소치'에 가까웠다는 점은 생각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재욱과 박봉석이 '사상의 관측소' 역할을 하던 조선총독부도서관의 고위직 조선인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우리가 프랑스처럼 '엄격한' 과거 청산을 했다면 이재욱과 박봉석은 '부일협력자'에 포함되었을 수 있다. 친일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우리는 과학자와 건축가, 사서 같은 '테크노크라트'의 친일과 부역에 대해 관대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데 이 부분 역시 짚고 넘어 가야 하지 않을까.

해방 후 최린은 반민법정에서 "민족 앞에 죄지은 나를 광화문 네거리에서 사지를 찢어 죽여라"라는 말을 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민족대표 33인의 하나로 활약하다가 변절한 최린은 그렇게 자신의 친일과 부역을 사죄했다.

조선총독부도서관을 그대로 '승계'해서 문을 연 국립도서관은 '사상 통제 기관'으로 기능했던 자신의 과거에 대해 어떤 '반성'을 했을까. 국립도서관의 개관일을 1945년 10월 15일로 정하면 그것으로 조선총독부도서관 시절의 과거는 '청산'되거나 '단절'되는 것인가. 국립도서관뿐 아니라 '제국의 사서'이자 일제 강점기 지도적 위치에 있던 도서관인들이 식민 통치 기구에서 일한 과거에 대해 아무런 입장 표명이 없었다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도서관의 식민 잔재 어떻게 '청산'할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위촉장 수여 및 간담회2005년 5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성대경과 위원에게 위촉장을 수여하고 간담회를 진행했다. 이 날부터 2009년 11월 30일까지 4년 6개월 동안 활동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25권 분량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를 발간했다. ⓒ 정부기록사진집관련사진보기
해방 직후에 이뤘어야 하지만 우리는 해방 후 지금까지 제대로 식민 시대를 청산하지 못했다. 이루지 못한 과제는 계속 우리 발목을 붙잡아 해방 75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우리는 '청산'을 이야기한다.

식민 시대의 청산은 인적, 물적 청산을 바탕으로 제도와 문화적 청산까지 방향을 잡아 진행해야 했다. 하지만 인적, 물적 청산이 불가능해진 이 시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청산을 해야 할까. 과거에 대한 '역사적 청산'을 통해 '교훈'을 되새기고, 식민의 잔재 중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를 설정해서 그로부터 '탈피'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청산 과제가 아닐까.

해방 후 일본인이 떠나자 촉탁이나 하급 고원으로 일하던 조선인이 도서관 운영을 맡았다. 도서관 상층을 구성하던 일본인의 공백을 하층에서 일하던 조선인이 메웠다. 일종의 신분 상승이 이뤄진 셈이지만 갑자기 도서관을 맡게 된 조선인들은 어떻게 도서관을 운영했을까?

급한 대로 조선어로 된 장서를 수집하고, 조선에 맞는 분류 체계를 도입하고, 도서관학에 대한 지식도 습득하는 등 해방 조국의 실정에 맞는 도서관을 위해 분주했을 것이다. 넘치는 의욕에도 그들이 아는 도서관 지식은 일제가 이식한 틀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여기서 궁금한 점은 그들이 도서관 업무를 배우고 익힌 일제 식민 시대의 경험과 유산이 우리 시대 도서관에 얼마나 이어지고 어떻게 제도화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우리가 청산할 잔재와 적폐인지 구분조차 쉽지 않지만 지금이라도 이런 작업을 하지 않으면 우리 후손도 '청산'하지 못한 과거를 트라우마처럼 안고 살 것이다.

(* ②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는 격주로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국립도서관'을 다룬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①편입니다.


박완서 작가와 창씨개명 : 네이버 블로그

박완서 작가와 창씨개명 : 네이버 블로그

박완서 작가와 창씨개명
차경환
2022. 12. 23. 21:02
이웃추가
1931년생 작가 박완서의 너무나 솔직한 일제 체험기 (일제 36년의 오해와 이해 9_김용삼 기자) 강연을 텍스트화 각
색, 편집했습니다.
일제시대인 1931년에 태어나셨던 작가 박완서(朴婉緖, 1931-2011)라는 분이 있습니다. 작가로서 워낙 유명한 사람이
어서 이름만 들어도 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박완서 본인이 일제시대 때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 매우 솔직
한 일종의 자서전적 작품을 발표했는데, "그 많던 싱하는 누가 다 먹었을까?"라는 책입니다.
19 4 ♣My Identity♣
책에 의하면 본인이 1931년에 태어나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본인의 어릴 적 체험을 아주 솔직하게 써놨습니다. 솔
직하게 써 놨다는 얘기는 즉, 욕을 많이 얻어먹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분이 책을 내고 나서 많은 비난에 시달리기
도 했는데, 이 책에 쓰인 체험기를 통해 일제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를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작업이 필요한 이유는 현재 일제시대를 경험하고 직접 살아보신 분들이 대부분 돌아가셔서 우리는 이러한 간접
적인 체험 때문에 일제시대를 알 수밖에 없는데, 그 시대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려면 그 시대를 직접 살았던 분들
의 이야기를 듣는 게 가장 중요한 방법이기 때문에 입니다.
이분은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1938년 7살 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서울로 이주했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개화 물이 상당히 드셔서 그랬는지 내 아이만큼은 서울에 있는 학교에다가 꼭 넣어야 하겠다 하고 작심을
하고 딸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온 것입니다.
19 4 ♣My Identity♣
그 시절에도 교육열이 높았던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박완서 어머니도 그중에 하나인데, 딸을 경성 사대문 안에 있는
학교로 보내는 게 큰 소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집안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돈이 없어서 사는 곳은 서대
문구 현저동, 지금의 서대문형무소 근처에 있는 산꼭대기에 월세방을 얻어 살면서, '내 아이는 사대문 안에 있는 학교
에 보내야 하겠다.' 해서 위장전입을 합니다.
당시 사촌이 사직동에 집이 있었는데 그곳으로 위장전입을 합니다. 왜 위장전입을 했느냐 하면 그 당시 학교의 수는
한정되어 있는데 아이를 학교에 보내려는 사람들은 많다 보니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도 입학시험을 치렀습니다. 당시
의 국민학교는 의무교육이 아니어서 월사금을 매달 80전을 내야 재학이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조선인이 내
자식을 좋은 학교에 넣기 위해서 큰 노력을 했습니다.
그래서 박완서 씨도 좋은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입학시험을 봤는데, "세 문제 중에서 두 문제를 맞혔고 한 문제
는 못 맞혔다. 그런데도 합격했다."라는 그런 내용이 작품에 자세히 실려 있습니다.
19 4 ♣My Identity♣
당시 박완서 씨가 살던 집은 서대문구 현저동 산꼭대기 집이었기 때문에, 수도연결이 되어있지 않아 물지게로 물을
배달하는 물장수에게 한지게 얼마씩 해서 물을 사 먹는 동네였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합격통지서가 위장전입 한 사
직동 친척 집으로 와서 그 합격통지서를 받기 위해 사직동 친척 집에 가봤더니 거기는 수도에서 물이 콸콸 나오고 있
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보고 "물이 이렇게 나오는구나!" 하고 충격받았다고 합니다. 즉, 일제시대 때 경성에는 상수도
가 연결되어 많은 사람이 수돗물의 혜택을 받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 시절 왜 그렇게 좋은 학교를 보내려고 노력을 했느냐 하면 좋은 학교를 나오면 좋은 직장에 취업할 수 있었기 때문
입니다. 그 시절에 좋은 직장이란, 예를 들면 총독부 같은 직장이나 그리고 일본이 통치하는 통치기관의 관료로 들어
가거나, 조선에 진출한 일본 기업에 진출하는 것이 좋은 직장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박완서의 오빠가 공부를 열심
히 해서 총독부에 취직합니다.
또 개성 옆인 개풍에 살 때는 침침한 등잔불이 고작이었는데 경성에 와보니까 대낮같이 환한 전기가 들어오더라는 대
목도 나옵니다.
인류의 문명을 가늠하는 기준이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로 전기가 들어오느냐 안 들어오느냐, 두 번째 상수도 하수
도가 준비되어 있느냐 안 되어있느냐를 가지고 문명의 척도를 가늠합니다. 여기서 좀 더 고급 문명을 따진다면 내가
필요할 때 수도꼭지만 틀면 뜨거운 물이 언제든지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 하는 것을 문명의 척도라고 하는데, 한국에
서 뜨거운 물이 필요할 때마다 나오는 시스템이 일반에 공급된 시기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개최 하면서 아파트들
이 많이 지으면서부터였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문명이란 무엇인가? 문명을 우리에게 선사한 것은 누구인
가 하는 것을 이런 책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19 4 ♣My Identity♣
이윽고 박완서 씨가 1938년 4월 봄에 '매동국민학교'라는 곳에 입학했는데, 입학하고 보니 학교에서 한글은 가르치지
도 않고 한마디도 쓰지도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즉, 1938년부터는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면 전부 일본어로 생각하고 일본어로 이야기하고 일본어로 글씨를 쓰고 그런
교육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곧 일본 사람이 되는 겁니다. 박완서의 동기 중에는 한글을 읽고 쓸 줄 아는 학
생은 드물었다고 합니다. 즉, 당시 조선인 중 교육을 받은 사람 들은 대부분 일본인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일제 치하에서 이렇게 학교에 다니고 교육받는다는 것은 조선인이 일본인과 동질화되어가는 과정이었고, 이런 교육
을 받은 사람 들은 대부분 일본인화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레 해방되어 우리는 다시금 한국인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와 사회에서 아
주 광범위하고 강력한 반일 교육이 시행된 이유가 바로 일본인화된 이 조선인을 다시 한국인으로 되돌리기 위해 이
런 교육이 시작되었고, 그런 반일 교육은 지금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박완서의 오빠는 총독부에 취업했는데 이것은 정말 가문의 영광이었다고 합니다.
19 4 ♣My Identity♣
그런데 오빠는 그 좋다는 총독부 직장을 6개월 만에 그만두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와타나베 철공소라는 곳에 입사합
니다. 그러니까 이제 또 집안에서는 난리가 납니다. "그 좋은 총독부는 왜 그만두고 무슨 대장간에 취업하다니 이게
말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빠의 이야기는 간단했습니다. "총독부보다 일본회사가 월급을 2배나 더 많이 주
고 나는 사무직이기 때문에 철공소 노동을 하는 게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실린 것을 보면 이 무렵까지도 사농공상의 신분 구조가 얼마나 깊이 한국인들의 머릿속에 박혀 있는지
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농공상의 신분제가 현재 다 없어졌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요즘 젊은이들 보
면 고시 공부해서 공무원 되고 싶다고 합니다. 즉, 조선 시대로 이야기하면 과거 급제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과 똑같습
니다.
박완서 씨의 큰 숙부는 친일파의 후원으로 면서기로 취업해서 면의 총무과장, 노무과장을 역임했다고 합니다. 당시
에 면서기 면의 과장이 된 것도 역시 정말 가문의 영광입니다.
또 박완서 씨는 서대문 현저동 산꼭대기에 월세방에 살다가 오빠가 취업해서 받아오는 월급과 금융 조업이라는 곳에
서 융자를 받아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 드디어 내 집 마련에 성공합니다.
19 4 ♣My Identity♣
이 금융 조합이라는 것이 자료를 찾아보면 1940년 940곳의 금융 조합이 설립되어서 활동했는데, 일제시대 서민들은
은행에 가면 대출도 잘 안 해주고 그랬는데 일본 사람들이 금융 조합이라는 것을 만들어 금융 조합 덕분에 서민들에
게 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돈을 대출해주었고 그 원금을 나눠서 갚도록 해서 서민들이 편리하게 집을 마련하고 토지
를 취득할 수도 있게끔 대출을 쉽게 내줬습니다.
그런데 학자들은 서민 생활에 그렇게 큰 도움을 준 금융 조합을 '식민지 경영의 첨병이다. 조선의 지방과 농민을 장악
하기 위해 설치했다'라고 그렇게 비난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라는 곳에서는 금융 조합을 뭐라고 설명을 해놨냐 하면 '조선총독부가 창안한 가장 효율
적인 금융지배 수탈 기관이다.' 이렇게 써 놨습니다. 그런데 정작 당시 서민들은 박완서 씨의 자전적 소설에서처럼 금
융 조합에 가서 돈이 필요할 때 돈을 대출받아 집도 사고 땅도 사고하는 혜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 기
술 해놨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대체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벌어지면서 이제 군국주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19 4 ♣My Identity♣
그래서 박완서 씨도 아침에 조회하면 '황국신민의 맹세'를 낭독하고 조선의 유명한 소프라노 가수가 "깨어졌다. 싱가
포르, 물러서라 영국아"라는 노래를 불러서 유행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양군도 함락을 자축하기 위해 밤에 등
불행렬을 합니다.
특히 남양군도에서는 고무가 많이 났는데, 그 고무가 많이 나는 것을 일본이 점령했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국민 학
생들에게 고무공을 하나씩 나눠줬는데, 그 공놀이를 하느라고 정말 시간 가는줄 몰랐다 하는데 이야기가 박완서 씨
자서전에도 쓰여 있습니다.
박완서 씨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분들도 그때 고무공을 받아서 얼마나 즐겁게 놀았는지 똑같은 증언을 많이 합니다.
이렇게 그 시대를 실제 살았던 사람들은 일제가 정말로 그렇게 악랄했는지 아닌지 모두 다 알고 계신데, 당시를 직접
살았고 체험하신 분들이 지금은 모두 돌아가시고 없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고 전황이 점점 불리해지면서 폭격에 대비해서 방공 연습을 했고, 그리고 여성들이 대피할 때
긴 치마를 입고 뛰어가다 넘어지면 다친다고 해서 몸빼 바지를 교복처럼 의무적으로 착용을 하기 시작을 했으며 또
어느 날부터는 쌀, 운동화, 고무신 같은 것이 배급제로 바뀌고 생필품이 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고무신 같은
것은 애국반을 통해 한 반에 한두 켤레 나오면 제비를 뽑아 나눠 가졌다는 그런 내용도 나옵니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박완서 씨의 창씨개명 체험기입니다.
19 4 ♣My Identity♣
박완서를 일본어로 발음하면 '보쿠엔쇼(ボクエンショ)'가 됩니다. 그래서 자기는 학교 가서 일본인 담임이 출석을 부
를 때, 다른 조선 학생들은 전부 창씨개명을 해서 '하나코' '하루에' 이런 일본 이름으로 부르다가 박완서는 '보쿠엔쇼'
이러니까 그게 너무나 창피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집에 가서 "나도 창씨개명을 하게 해달라 하고 어머니를 막 졸랐
다."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또 분명한 것은 "한 반에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아이가 서너 명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불구
하고 학교에서 혹은 일본 선생님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어떤 압력도 받은 적이 없다"라고 본인의 글에 써
놨습니다.
또 박완서 씨의 고향인 '경기도 개풍 박적골에도 박완서 씨의 박씨 집안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 모두 다 창씨개명
을 했다'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19 4 ♣My Identity♣
집안의 호주인 박완서 씨의 할아버지가 "나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창씨개명은 절대로 안 된다."라고 선언했기 때문
에 창씨개명을 못 했고, 그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박완서 씨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오빠가 호주
를 승계했는데, 그런데 오빠도 창씨개명을 안 한다고 해서 자기 집사람들은 창씨개명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의견은 달라서 어머니가 바라는 출세라는 것은 바로 일본의 그늘에서 그들에게 협조해서 좋은 직장
들어가고 그런 것이 어머니의 소원인데, 그렇게 되려면 우리도 창씨개명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오빠를 설득했다고 합
니다,
우리는 일본 사람들이 창씨개명을 강요했기 때문에 우리가 창씨개명을 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데, 사실은 들여다보
면 그렇지 않은 사례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생활 여건은 점점 더 어려워져서 이제는 지원병 제도라는 것을 운영하다가 마지막에는 징
병제도를 운영해서 이제 조선인 사람들도 징병해서 전쟁터에 내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지원병 제도가 징병제
도로 바뀌면서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고, 우리는 징병제를 공짜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일본 중앙정계의 국회의
원 의석을 27석 얻는 대가로 징병제를 했다는 이야기는 지난번에 이미 언급했습니다.
19 4 ♣My Identity♣
이 무렵 국민학교 졸업을 앞둔 박완서 씨는 그 당시 엘리트 수재들만 들어갔다는 '경기고녀( 경기고등 여학교)'는 실력
이 안 돼서 못 들어가고 숙명고녀(숙명 고등여학교)에 지원해서 합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 입시를 앞둔 모든
조선 사람들이 합격을 빌기 위해 단체로 신사참배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국민학교 졸업식이 끝난 후에도 단체로
신사참배를 해서 즉, 그러니까 이 무렵의 조선인들은 모두 일본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전황이 이제 점점 어려워져서 '고녀' 즉, 지금의 여중·고생들마저도 군수품 제조에 동원하기 시작했다고 합니
다.
19 4 ♣My Identity♣
그래서 오전에 2교시 수업을 한 다음, 여학생들 교실은 군수품 공장으로 변해서 군복에 단추를 달고, 솔방울을 채집해
서 솔방울 기름을 짜서 군대로 보내고 그런 일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등교할 때는 구급낭을 휴대하고 등교했는
데, 그 구급낭 안에는 구급약과 지혈용 삼각건, 그리고 이름과 주소 혈액형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식량난이 닥쳐서 쌀 대신 콩깻묵을 배급해서 쌀을 구하러 다녔고, 식량이 모자라니까 딸 가진 집안은 한 식구라도 입
을 덜기 위해 14살 15살 먹은 애들을 시집보내고 그런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박완서 씨 어머니는 등화관제(燈火管制 :야간에 적의 공습 따위에 대비해 등불을 가리거나 끄게 하는 것)를 할 때면
"일본 놈들 폭삭 망하는 꼴을 봤으면 좋겠다"라고 얘기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 아들이 일본인 회사에 다니면서
월급을 많이 받고, 일본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것을 그렇게 또 즐거워하셨다"라고 합니다.
2학년에 지나갈 무렵 서울에 있는 사람들을 지방으로 소개(疏開: 공습 등 재난에 대비해 도시나 밀집 지역의 주민이
나 시설 따위를 분산하는 것). 하기 시작했답니다.
19 4 ♣My Identity♣
그래서 본인은 개성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학교를 이전 하는 학생들은 내가 이전하는 도시에서 가고 싶은 학교
를 지정하면 그 학교로 전학을 시켜 줬다고 합니다.
그래서 박완서 씨는 개성에 있는 '호수돈고녀'로 전학해서 그해 여름에 일본이 패망해서 해방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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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되니 박완서 씨의 큰 숙부가 일제 치하에서 면서기로 취업해서 일했기 때문에 졸지에 친일파 집안이 된 것입니
다. 그렇게 친일파 집안으로 낙인찍혀서 마을 청년들이 몽둥이를 들고 "이놈 친일파 집안" 하면서 집안의 가재도구를
부수고 그랬는데 알고 보니 그 사람들이 모두 다 창씨개명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창씨개명한 사람들이, 박완
서 씨의 책에 의하면 '도쿠야마' '아라이' '기무라'로 창씨개명한 청년들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박완서 씨의 집안을
친일파 집안이라고 때려 부순 겁니다.
그런 혼란이 벌어진 와중에 박완서 씨의 작은 숙부는 남대문시장에서 장사했는데, 일본 사람들이 놓고 간 적산가옥
한 채를 어떻게 했는지 재빨리 차지했다고 합니다. 해방의 혼란에 와중에도 챙길 건 다 챙긴 겁니다.
그럼 창씨개명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19 4 ♣My Identity♣
한국인의 이름은 본관이 있습니다. 본관(本貫)은 그 일족이 처음 시작된 일족의 발상이 된 지역입니다. 예를 들어 광산
김씨라고 하면 전라남도 광산구가 시조의 고향으로 그 김씨가 그곳에서 처음 생겼다고 해서 본관이라고 하고, 성(姓)
은 아버지의 부계 혈통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일본은 부계 혈통을 나타내는 성이 없습니다. 단지 집안을 나타내는 씨(氏)만 존재합니다. 일본은 1870년까지
사무라이(武士) 계급 이하는 씨명도 없었는데, 1875년 메이지 유신 이후 전 국민은 모두 '씨'를 사용하라고 해서 비로
소 평민들도 '씨'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일본의 '씨'라는 것이 우리는 아버지의 핏줄을 나타내는 것이 '성'인데 반해 일본에는 혈통을 나타내는 것이 없
고 그냥 가계(家系)를 나타내는 이름인 '씨'만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렇게 일본의 성씨 제도와 한국의 성씨
제도는 완전히 달라서 일제시대 한국의 주요 성씨는 260개 정도였는데 일본에서 씨명은 30만 개가 넘습니다.
19 4 ♣My Identity♣
한국의 성은 아버지 혈통의 표식이기 때문에 딸자식이 출가해도 본인의 성이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씨명
은 일가족이 모두 같은 씨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우리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딸이 다른 집안의 남편에
게 시집가면 남편 집안의 씨명에 따라 그녀의 성이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일본은 주로 지형이나 지명 또는 직업을 씨명으로 많이 사용합니다. 가마야마(釜山,부산), 기우라(木浦,목포)
등이 지명을 이용한 씨명이고, 야마시타(山下 산 아래). 다나카(田中, 밭 가운데) 등이 그것입니다. 따라서 절대 성이
바뀌지 않고, 동성동본끼리는 혼인도 하지 않고 성이 다른 집안의 아이는 입양하는 관습이 전혀 없던 조선전통과 일
본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런데 본관과 부계의 성을 따르는 한국의 성씨 제도는 원래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전부 중국의 것을 도입한 것입니
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성+이름 두자=석 자로 되어 구성되어 본관 어디 어디이다'라고 하는 건 전부 중국식입니
다.
19 4 ♣My Identity♣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라는 조선학자의 책에 의하면 "한반도에 중국식 성씨가 보급된 시기는 고려 초기부터였고,
초창기에는 지배계층만 중국 성씨를 사용했고, 조선 초기 전 인구의 90%는 성씨가 없었습니다. 성씨가 정착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부터라는 것" 입니다. 즉, 우리가 현재 신줏단지 모시듯 집에 가지고 있는 족보는 거의 95% 이상이 일제
시대 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19 4 ♣My Identity♣
"내가 서읍(西邑)에 있을 때, 많은 사람이 족보를 가져와 보아 달라고 했으나 그 중 열에 하나도 진짜가 없다. 이는 한
때 세속에 불과한 것으로 믿을 것이 못 된다." 왜냐하면, 모두 가짜로 날조했기 때문입니다.
또 대만 국민 정치대학의 김근식 교수가 있는데 이분의 연구에 의하면 "김씨, 이씨, 박씨 3대 성이 한국 인구의 대부분
을 차지하는 이러한 현상은 정상적인 친족 관계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즉, 평민이나 천민 등 많은 사람이 그냥
김씨 박씨 이씨를 마구 갖다쓰는 참칭(僭稱)을 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했다." 이것이 학자들이 연구결과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왜 이렇게 김씨 박씨 이씨가 많을까요? 바로 민적법(民籍法)이라는 것에 그 비밀이 있습니다
19 4 ♣My Identity♣
1894년 갑오개혁을 하면서 갑오개혁의 개화파들이 성씨가 없는 사람들에게 성씨를 사용하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니냐
고 해서 성씨 사용을 시킬까 말까 하던 중에 그 양반들이 반대합니다. "노비나 천민들이 무슨 성이 필요하노? 그냥 개
똥이 쇠똥이 마당쇠 이렇게 부르면 됐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통감부 시절인 1909년 일본 사람들이 "노비나 천민이나 모두 다 같은 사람이니, 이 사람들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모두 똑같이 인간다운 예우를 받는 이름을 가져야 한다."라고 민적법이라는 것을 법제화했습니다. 그 당시는 대
한제국이 살아있었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은 통감부에서 민적법을 만들어 대한제국에 강제해서 1909년에 법이 통과
된 것입니다.
그런데 시행 과정에서 노비나 천민 따위 사람들에게 "너희들도 이제부터 성을 사용하라"라고 했는데, 그런데 애초부
터 성이 없었기 때문에 그러다 보니 노비들이 자기 주인의 성과 본관을 대부분 따랐던 것입니다. 또 양반이 자기 집안
의 노비를 해방하면서 너는 앞으로 김씨 해라 그러면 김씨가 되었던 것이고, 그리고 성이 없던 노비 천민이나 무성 층
의 대부분이 김씨, 이씨, 박씨로 신고를 했다. 그래서 김,이,박씨가 더욱 비대해졌다는 것입니다.
조선 시대 노비로 태어나거나 천민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이름도 참 걸쩍지근했습니다. 마당쇠 개똥이 쇠돌이 도야지
그런 식으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19 4 ♣My Identity♣
여자노비(婢)의 경우는 대부분 태어난 달을 따라서 삼월이 사월이 구월이 이렇게도 지었고 또 촉새냔(足金蓮) 작은년
언년이, 간난이 이런 식이었고, 남자노비(奴)는 돌쇠, 마당쇠, 개똥이, 개떡이, 강아지, 똥개, 도야지, 두꺼비 같은 동물
이름은 물론 어린놈, 뒷간이, 개부리, 소부리, 개노미, 개조지 같은 아주 천한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것을 보고 일본 사람들이 "같은 인간으로서 이게 말이나 되느냐?" 고 해서 1914년 조선총독부가 "노비나 천민에게
부여된 가축이나 가축의 분뇨, 사물, 태어난 월 따위를 표명하는 등 인간다운 품위를 갖추지 못한 이름은 민적에 등록
시켜주지 않는다"라고 해서 비로소 "노비 천민에게도 양반과 다름없는 품위 있는 이름을 부여한 사람은 바로 일본 사
람들이었다"라는 것입니다.
19 4 ♣My Identity♣
이때부터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한 사적 자치의 주체로서의 개인임을 일본 사람들이 법적으로 보장해준 것입니
다. 그 이전까지 그 시대에 태어난 남자 노비나 천민 여자 노비들은 성은 물론이고 제대로 된 이름조차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양반 쌍놈의 신분 계급제도를 법적으로 철폐시켜준 것은 한국인이 아니라 다름 아닌 조선총독부였던 것입니
다.
또한, 조선 시대 여성은 이름이 없었습니다. 외국 선교사들이 조선에 와서 보니 여자들이 성은 있는데 이름은 없고 그
래서 얘들을 어떻게 불러야 하나 고민하다가 모두 서양 이름을 붙여준 것입니다.
너는 헬렌(Helen)을 해라, 너는 낸시(Nancy), 이런 식으로 이름을 붙여서 이화여대 총장 이름이 김활란(金活蘭,1879-
1970)이 되었습니다. 헬렌(Helen)을 한자로 표기하니까 활란(活蘭)이 된 것입니다. 김활란 여사의 영문 이름은
Helen, Kim 입니다. 또 여성 독립운동가 하란사(河蘭史,1872-1919)라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낸시(Nancy)입니다. 낸
시를 한자로 표기해서 란사(蘭史)가 되었습니다.
조선 시대 호적에 여성의 이름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19 4 ♣My Identity♣
양반 가문의 경우조차도 성 또는 씨만 존재했습니다. 예를 들면 김씨 부인, 박씨 부인 안성댁, 부산댁 이렇게 불렀을
뿐 이름이 없습니다. 간혹 여성의 이름이 있는 예도 있었지만, 호적등록은 불가능했습니다. 이것은 조선 시대에서 여
성을 사회적으로 공인된 인격체로서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조선 사람의 절반에 해당하는 여성들에게도 민적법을 시행해서 이 땅의 모든 여성에게도 남성과 같은 성과 이
름을 민적에 기재하도록 의무화한 것은 일본 사람들입니다. 즉, 여성을 법적으로나 사회적인 인격체로 공인해준 것
은 일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진정한 여성 해방은 바로 일본 사람들이 시켜 줬다는 사실을 왜 이 땅의 국민은
잘 모르거나 인정을 안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도 뭐 대륙침략 야욕에 활활 불탄 일제가 조선에 병참기지 만
들고 수탈 잘 하려고 그랬을까요?
재미있는 것은 1911년 11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24호에 의해 조선인은 내지인과 혼동할 수 있는 일본식 성명은 사
용하지 못하도록 법적으로 강제했습니다. 그 이유는 드디어 한일합방에 되어 일본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일본 세상에서 조선 사람들도 출세하려고 보니 일본 이름을 쓰는 게 더 유리합니다. 그래서 조선 사람 중에 많은 사람
이 일본 이름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19 4 ♣My Identity♣
이렇게 되니 이 사람이 과연 일본 사람인지 조선 사람인지 구분할 수 없습니다. 사실 지구상에 가장 외모가 비슷한 것
이 일본인과 한국인입니다. 지금도 일본 도쿄 한복판에 가서 가만히 서 있으면 이 사람이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 잘
모릅니다. 거기다 일본어를 좀 잘하면 그냥 일본 사람입니다.
거기다 이름마저 '와타나베' '고바야시' 이런 식으로 하면 일본 사람과 조선 사람이 분간하기가 어려우니 1911년도에
는 일본 이름을 쓰지 못하도록 규제한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인 중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이나 일본인과 사업하
는 사람들이 나는 일본 이름을 쓰고 싶은데 왜 일본 이름을 못 쓰게 하는 거냐? 하고 항의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
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일본 기업들이 조선에 진출해서 일본인과 거래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과 교제하고 거래하려면 나도
일본 이름을 쓰고 싶은데 왜 일본은 못쓰게 합니까? 하고 계속 이의제기를 하니까 1937년 이후 태어난 신생아 에게
만 일본식 이름을 허용을 해주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되니 왜 아이들만 되고 어른은 안 되냐? 하고 시비를 거는 조선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이때 당시의 조선총독부의 정무 총감인 오노 로쿠이치로(大野緑一郎, 1887-1985)라는 사람이 " 이렇게 많은 민원이
쇄도하니, 조선인이 일본 이름을 쓰고 싶다는데 우리가 그것까지 막을 필요가 뭐 있겠느냐? 일본 이름도 쓰게 해주
자" 바로 이것이 '창씨개명'의 시작입니다. 민족 말살 어쩌고 하는 따위 그런 엉터리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서 오키나와현(沖縄県)의 사례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19 4 ♣My Identity♣
1872년 이전까지는 오키나와가 류큐 왕국(琉球國)이라고 해서 독립왕국이었습니다. 그런데 메이지 유신 때인 1879
년 류큐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으로 만들면서 일본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키나와 사람들이 먹고살기 위
해 일본 본토로 왔는데 당시 오사카 일대 공장과 상점이 많은 그런 곳에 취업하러 갔습니다.
문제는 새롭게 일본인 된 오키나와가 예전 류큐국이라고 해서 조선과 똑같이 중국에다 책봉을 받고 조공을 바치는 나
라였고 한자를 사용한 나라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일본말도 못 하고 이름도 물어보니 조선처럼 중국식
으로 되어있으니 그때 일본 사람들이 오키나와가 이미 일본 땅이 되었는데도 얘네들이 아직 일본어도 잘하지 못하고
이름도 이상하니 오키나와 사람이라고 해서 일본 사회에서 차별받게 되지 않겠느냐 해서 오키나와의 학교에서는 일
본어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오키나와 사람들의 이상한 중국식 이름을 전부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게 했습니다.
바로 그 오키나와에서 썼던 제도를 조선에다 그대로 도입한 것입니다.
'창씨(創氏)'라는 것은 조선의 성을 일본식 '씨'로 바꾸는 것이고 '개명(改名)'이라는 것은 '이름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
래서 '창씨'는 의무적이었지만 '개명'은 별도였습니다.
19 4 ♣My Identity♣
그래서 1939년 11월 10일 미나미 지로(南 次郎, 1874-1955) 총독이 본국 정부와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조선에 일본
식 씨명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그러니까 일본 본국에서 "야 이거 무슨 이름까지 바꾸게 하냐, 조선 사람들이 전부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면 그게 조
선 사람과 일본 사람인지 구분이 되냐"고 반대했고 또 조선총독부의 관리들도 그런 식으로 이름을 바꾸면 어떻게 관
리를 하느냐 했고 치안을 담당하던 총독부 경찰들도 띠매고 반대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일본 정부 역시도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지금 우리가 정작 황국신민이니 내선일체라고 하면서 조선 사람도 일본 사람들과 동등한 예우
를 한다고 하면서 왜 조선 사람은 일본 사람과 이름이 달라야 하나? 불만이 많으니까 안 되겠다. 그래서 일본 사람과
똑같이 예우해 주고 이름도 일본 사람과 똑같이 만들자 해서 이 제도를 도입한 것입니다.
그래서 1940년 2월 11일~8월 10일까지 의무적으로 씨를 정해서 제출하라. '창씨(創氏)'는 의무적으로 하고 '개명(改
名)'은 너희 맘대로 해라. 이렇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 일본의 척식성(拓殖省) 관리들도 "일본 사람들은 차치하더
라도 조선 사람들도 반대한다던데 당신이 어떻게 하려고 이런 짓을 하냐"며 난리가 났습니다.
어찌 되었건 이 제도가 시행되면서 조선 사람들은 두 가지로 반응했습니다.
19 4 ♣My Identity♣
위에 이야기 한 대로 필요 때문에 일본 이름이 필요한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자진해서 창씨를 했습니다. 그러나 "아니
내가 지금까지 써온 성씨를 누구 맘대로 바꾸라고 하는 거야?" 하고 극렬하게 저항 한 사람들도 있어서 어떤 집안에
서는 자살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총독부에서는 강제하는 게 아니라고 해명을 했고, 조선인들이 지금까지 계속 일
본식으로 이름 쓰게 달라고 민원을 넣어놓고 정작 하라고 했더니 또 마구 반발하니 일이 좀 이상하게 되었습니다.
19 4 ♣My Identity♣
창씨를 제출하는 기간이 1940년 8월 10일까지였는데 5월까지 참여율이 7.6%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렇다 보니 총
독부가 행정력과 경찰력을 총동원해서 협박 강요해서 신고 마감 때까지 79.3%가 참여했다고 학계에서는 주장합니
다.
이 과정에서 뭐 강제가 있었느냐 없었느냐 얘기를 하는데 강제가 왜 없었겠습니까. 창씨개명을 자발적으로 한 사람
도 있었지만, 창씨개명을 하기 싫다고 하면 통상 행정이라는 것은 새로운 제도가 도입되면 새 제도를 시행하기 위해
무언의 압력이 들어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현대의 백신패스 정책을 보십시오
19 4 ♣My Identity♣
결국, 끝까지 신고하지 않은 20%가 있습니다. 이 20%는 원래 자기 성이 씨가 되어서 그것이 그대로 굳어져 버렸습니
다. 그래서 조선인들은 처음에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게 할 때는 왜 못하게 하느냐 우리도 일본 이름 쓰고 싶
다고 하더니, 소원대로 이제 이름 바꾸라고 하니 이제 또 반발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이러면서 창씨개명을 어떻게든
지 일본식으로 개명을 강제하는 무언의 압력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19 4 ♣My Identity♣
그리고 해방이 되고 창씨개명이 법적으로 폐지된 것은 1946년 10월 23일입니다. 미군정청 법령 제122호로 조선 성
명 복구령에 따라 창씨개명에 의해 바뀌었던 이름이 원래 본래 이름으로 돌아온 것은 해방이 되고 나서도 1년 2개월
후의 일이었습니다.
19 4 ♣My Identity♣
그러면 창씨개명을 조선인들이 반대했다고 하는 그 내면의 논리는 무엇일까요?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냈던 이성무 원
장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성씨 제도를 연구했는데 이분이 남긴 그 논문의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한국 족보
중 80%는 시조가 중국에서 온 사람이다"라고 기록을 해놨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주자 성리학에 따라 우리
는 중국이 되는 것이 가장 큰 영광이었던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야말로 사대 모화사상이 세계 우주관을 지배하고 있던 소중화라는 조선에서 "우리 조상은 중국에서 온 사람이다"라
고 하면 그만큼 그 집안의 권위는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성씨가 노(盧) 씨들입니다. 노씨들은 자기들이 강태공의 후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노 씨
중에 대통령이 두 명이 배출되었습니다. 노태우(盧泰愚), 노무현(盧武鉉).
중국의 노씨 집안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우리의 후손들이 조선으로 건너가서 대통령을 두 명이나 배출했다" 해서 노
태우 대통령이 퇴임한 후 2000년 6월 중국 산둥성 지난시 창칭구에서 열린 '세계 노 씨 대회'에 참가를 해서 '선조의 고
귀한 뜻을 높이 받들 것이다'라는 휘호를 써서 그것을 중국 노 씨 집성촌에 현판으로 걸어 놨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기가 대통령 재임 기간 중인 2003년 중국 저장성 둥양시 노택(盧宅) 관리위원들이 청와대를 방문
해 또 다른 종친 노무현 대통령을 예방하고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고, 지금도 우리나라의 노 씨 중앙종친회는 조상을
찾아가는 종친회 중국여행을 매년 두어 차례씩 주관한다고 합니다. 또 반기문(潘基文) 씨가 UN 사무총장에 올랐을
때 중국 허난(河南)성의 판(潘의 중국어 발음) 씨 집성촌에서도 야 우리 반 씨들이 세계의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하며
대잔치가 벌어지고 난리가 났습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족보를 들춰보면 우리는 모두 중국인입니다. 성씨만 그런 게 아니고 심지어 이름까지도 중국식으
로 창씨개명 했습니다. 그 증거를 제시합니다.
19 4 ♣My Identity♣
고려말 조선 출범에 저항했던 성리학자 정몽주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름이 '몽주(夢周)' 입니다. 몽주라는 것은 '꿈
(夢)속에서라도 주(周)나라를 보겠다'라고 해서 '몽주'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조선 개국의 일등 공신인 정도전(鄭道傳)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을 풀이하면 도(道)를 전(傳)한다는
뜻인데 이 사람이 이야기하는 '도'라는 것은 주자 성리학의 '도'인데, 조선을 동주(東周)로 만드는 '도'를 전하기 위해 정
도전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성웅으로 떠받드는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아버지가 아들을 넷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을 아주 엄청나게
흠모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들들 이름을 지을 때 삼황오제의 이름을 한 글자씩 빌려다 이름을 지었는데, 삼황오
제란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요임금, 순임금 뭐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첫째 아들은 복희씨(伏羲氏)의 희(羲)자를 따서 희신(羲臣)으로 지었고 둘째는 요(堯)임금 이름을 빌려서 요신
(堯臣)이라고 짓고 세째는 순(舜)임금 이름을 따서 순신(舜臣)이라고 지었고 네째는 우(虞)임금 이름을 따서 이우신(虞
臣)으로 했습니다. 즉, 이런 것은 모두 중국식 이름입니다. 즉, 한국인들이 지금까지 쓰고 있는 현재의 이름은 중화 방
식으로 창씨개명을 해서 중국 문명에 투항한 결과물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제국이 망하고 일본인들이 들어와 가만히 보니 이것들이 지금 세상이 바뀌었는데 아직도 중국을
추종하는 이름을 쓰고 있네? "너희 이제 중국 세상은 끝나서 앞으로는 일본 세상으로 들어와라" 그렇게 해서 이름을
바꾼 게 창씨개명입니다.
19 4 ♣My Identity♣
그런데 이름을 바꾸라고 하는 주체가 조선인들이 그렇게 오매불망 상국으로 여기던 중화 문명의 중국이 아니라 그냥
게다짝이나 끌고 다니고 훈도시나 차고 다니던 오랑캐 왜놈이 감히 우리네 이름을 바꾸라고 하니까 짜증이 났고 저항
을 했던 것입니다.
일제시대 때 조선인의 80%는 창씨개명을 했지만 20%는 끝까지 창씨개명을 안 했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중화 방식
을 고수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미국이나 유럽에 가서 한자로 된 이름으로 된 명함을 주면 "중국 사람이세
요?" 하고 묻습니다. 즉, 이름만 가지고는 중국인인지 한국인인지를 구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조선 사람들은 초기에 소중화라는 세상 속에서만 살다가 결국 명나라가 망하고 드디어 청나라가 들어섰습니다. 하지
만 조선 양반들이 생각하기에 저 위대한 중화 문명이 청나라 오랑캐 야만인에게 갔을 리가 없다. 따라서 중화 문명의
정수는 오매불망 중국을 사랑하는 조선으로 강림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선의 소중화 주의는 이후 조선 중화주
의로 발전합니다.
19 4 ♣My Identity♣
그래서 중국에서는 이미 모두 없어진 주자 성리학적인 '제사제도', '족보 제도' 이런 것을 한국이 더 잘 유지하고 있습
니다. 심지어 빼도 박도 못 하게 한국인들의 족보의 80%가 모두 자기 조상이 중국에서 왔다고 써놨습니다. 그리고 지
금 우리가 쓰고 있는 본관과 성으로 되어있는 우리네 이름조차도 사실 우리의 것이 아니라 중국 것이라는 사실입니
다.
이렇게 되어있으니 중국 지도부가 이런 것을 보고 "한국 너희들은 대체 뭐 하는 놈들이냐?, 너희들 족보를 봐라. 너희
들의 뿌리는 중국 사람이다. 즉 중국인의 후예들인데 무슨 엉뚱하게 한미동맹 따위를 하나? 빨리 한미동맹을 깨고 나
와서 중화의 본고장인 중국에 투항하라!." 이것이 '한중동조론' 입니다.
19 4 ♣My Identity♣
당시 조선 사람들이 일제시대 창씨개명에 대해 그렇게 발끈하고 나선 이유가 무엇일까요? 삼국시대만 해도 사람들
이름이 뭐 '연개소문' 이나 '거칠부' 그랬습니다. 중화의 방식으로 조선인들은 전부 창씨개명을 했는데 일본 사람들이
일본방식으로 하라고 그러니까 모두 들고 일어나서 반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중국이 저런 식으로 대한민국을 모욕하는 얘기를 대놓고 해도 우리가 중국에 대해 뭐라고 항의하고 규탄
한 적 있습니까? 그에 반해 일본에서 뭐 요만한 얘기만 나와도 온 국민이 그냥 길길이 날뛰면서 불매운동을 하면서 가
지 않습니다. 사지 않습니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창씨개명이란 이름을 어떤 식으로 바꾸겠다는 그 시도는, 조선인이 중화 문명과 일본 문명의 중간에 서서 어디로 가
야 하는지에 대해 가늠하는 하나의 시험대였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해야 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박완서 씨 본인의 체험에 의하면 일제시대 때 일본 담임 선생님이었지만 어린 박완서가 창씨개
명 안 해도 너 왜 창씨개명 안 했어 하고 불러서 때리거나, 창씨개명 하라고 협박을 당한 사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창씨개명하게 해달라고 자기네들이 다 원해 놓고 조선인들은 대체 왜 그랬을까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배후에는 우
리는 이미 중국 방식으로 창씨개명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19 4 ♣My Identity♣
우리는 냉정하게 현재 우리의 좌표는 뭐고 우리가 서 있는 저희 현실은 어디인지? 우리가 지금 이렇게 단발을 하고 양
복을 입고 휴대전화 하나씩 다 들고 다니지만, 아직도 우리의 인식 속에는 조선 시대의 도포 자락 휘날리던 그 시대의
DNA가 고스란히 살아있는 것은 아닌지 냉정한 자기반성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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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의 소설가
    박완서
    朴婉緖|Park Wan-suh
    출생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묵송리[3]
    사망
    2011년 1월 22일 (향년 79세)
    본관
    직업
    학력
    배우자
    호영진 (1925년 - 1988년; 사별)
    자녀
    1남 4녀
    종교
    무종교 → 가톨릭 (세례명: 정혜 엘리사벳)[6]
    데뷔
    1970년 《나목》
    수훈
    금관문화훈장[7] (2011년 추서)

    1. 개요2. 생애3. 신앙4작품 목록
    4.1. 장편소설4.2. 단편소설4.3. 기타
    5. 문학사적 의의6. 여담7. 수상 이력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pimg 77481813562...

    대한민국의 소설가. 한국의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거장 중 한 명이다.

    2. 생애[편집]

    1931년,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묵송리 박적골#에서 반남 박씨 집안의 1남 1녀 중 둘째로 출생했다. - 오창공파 부: 泳魯 조부: 胄陽

    박완서가 3살 때인 1934년에 아버지가 맹장염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기 때문에 빈 자리를 크게 느끼지 않고 자랐다. 특히 할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박완서는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일본식 음독으로 보쿠엔쇼라고 불린 적은 있을지언정 이름을 고치는 일 없이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8]

    하지만 딸을 좋은 학교에 보내고 싶었던 어머니의 강력한 요구로, 1938년 개성에서 경성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교육열이 강한 어머니 덕분에 동네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소학교부터 경성의 명문학교에 다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딸에게는 교육의 기회를 거의 주지 않던 시대인데도 어머니가 박완서의 교육에 열성을 보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어머니의 외사촌자매들은 서울에서 신교육을 받았는데, 어머니는 어린 시절 자기와는 다르게 학교에 다니는 그 친척들을 무척 부러워했기 때문에 자기 딸만큼은 신교육을 받기를 원했다. 그리고 박완서의 아버지의 사망과 관련된 사연이 그 두 번째 이유인데, 사실 아버지의 사인인 맹장염은 그 시절 의학 수준으로도 수술만 받으면 충분히 치료할 수 있는 병이었다. 그런데 봉건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던 박완서의 할아버지가 병원에 가지 못하게 하고 침과 한약만으로 치료하기를 고집하다가 끝내 맹장이 터져 복막염으로 사망한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남편의 죽음은 전부 시가(媤家)의 고루한 분위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치를 떨었고, 자식들이 그런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해방 1년전인 1944년 숙명고등여학교에 입학했으나, 바로 다음 해에 일제의 소개령으로 인해 개성으로 이사하여 호수돈고등여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고향으로 가 보니 어렸을 때 놀던 친구들이 위안부로 잡혀갈까봐 모두 서둘러 결혼한 것을 보고 정말 놀랐다고 한다. 경성에서 살 때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경성 학교와 지방 도시 학교 간의 환경적인 괴리가 꽤나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개성에서 살던 중 해방을 맞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숙명여자중학교[6년제]를 다니게 된다. 당시 친하게 지냈던 친구 중 한 명이 바로 소설가 한말숙으로, 졸업 이후에도 절친한 사이를 유지했다고 한다. 또한 박완서의 반 담임 교사가 소설가 박노갑 이었기에 문학적으로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박노갑은 그 시기의 어린 학생들이 쓰기 쉬운 감성적인 문장을 지양하고 사실적이고 경험이 실린 글을 쓸 것을 강조했는데, 훗날 박완서는 정작 그런 말을 들었던 고등학생 때는 스승인 박노갑의 소설을 읽으면서 참 재미가 없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 뒤 1950년 6월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였으나, 한 달도 못 되어서 6.25 전쟁이 발발한다.[10] 전쟁이 일어난 직후에는 서울이 조선인민군의 점령 아래에 있게 되었지만 박완서네 가족은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물러 있었을 뿐만 아니라 8월까지는 학교도 계속 다녔다. 당시 박완서는 공산주의에 호의적이었지만, 상황을 지켜보면서 점차 회의를 느끼고 학교에도 출석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전쟁으로 오빠와 숙부를 잃고 말았으며, 이 때문에 가장으로서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현 신세계백화점 본점 건물에 들어선 미8군 PX의 초상화부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곳에서 박수근 화백을 알게 된다. 이후 같은 건물을 사용한 서울 동화백화점에서 일하다 같은 동화백화점 측량기사였던 서울토박이 집안 출신인 호영진과 1953년 결혼했으며, 1남 4녀의 자식을 두었다.

    결혼한 뒤로도 독서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평온한 생활이 이어지다 보니 글을 쓸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68년 열린 박수근의 유작전을 보고 그에 대한 증언의 욕구가 치솟으면서 글을 쓸 결심을 하게 된다.
    처음에 제가 시작한 거는 소설이 아니라 전기였어요. 박수근 전기를 써야겠다. 투고하게 된 것도 처음부터 <여성동아>였던 게 아니에요. 여성동아에서는 7월달에 여류장편소설 마감이 있고, 또 <신동아>가 있지요. 지금은 교양지도 많지만 그때 신동아가 아주 고급 교양지였습니다. 거기서는 논픽션 공모를 했어요. 그것이 5월이 마감인데, 이듬해 1969년이었을 거예요. 논픽션은 기럭지가 길지 않아요. 여류 장편은 1,200매 이상이어야 되는데 이거는 300, 400매만 해도 되고. 그래서 저기다 내야지 하고 쓰기 시작했어요. 써 보려고 하니까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게 너무 없는 거예요. 그냥 PX에서 그런 일 있었고, 같이 차를 마시면서 어딜 사냐, 창신동 살고.. 이런 얘기 외에는. 쓸 거라곤 나 같은 거한테 그렇게 막 취급받고 화가로서는 우중충한 데 앉아서 그리면서 얼마나 모욕스러웠을까, 고거 원고지 10장도 안 되는 거예요. 논픽션이면 그 사람이 어쩌고저쩌고 다 있어야잖아요. 그런데 아는 것도 거의 없어요.

    그러니까 자꾸 쓰다가 빗나가면서 내가 상상한 걸 보탤 적이 있어요. 그럴 때는 즐겁게 써져요. 원고지에다가 쓸 때니까 하루 대여섯 장만 써야지 했는데, 20장도 써지는 날이 있어. 보면 막 내가 보태는 거야. 고 다음날 계속해서 쓰려고 어제 거 읽어 보면, 이건 아닌 거예요. 진짜만 추리고 나면 뼈대만 남고. 말보다는 거짓말을 보태니까 잘 써진다 싶어요. 거짓말을 시키는 게 내 소질이라는 걸 느꼈어요. 그때는 생각도 못했지만, 쪼끔 어려운 말로 하면 상상력이죠. 사실에다 상상력을 보태야지 사실의 뼈대만 갖고 쓰는 건 난 도저히 재미가 없구나.

    그런데 만약 논픽션에 냈는데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지면 당선이 됐다가도 취소가 되는 거 아니에요? 거기 규정이 있어요. 논픽션이라는 말 자체가 그렇잖아. 그러면 허가받은 거짓말이라는 건 뭐냐. 픽션이 나에게 맞는구나. 아, 거짓말을 보태니까 이렇게 즐겁고. 쓰는 게 즐거워야 되잖아요? 그래 갖고 쓰던 걸 아주 파기를 해 버렸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날짜도 좋더라고. 내가 그 해, 1970년 초였을 것 같애요. 5월달에 낼려고 쓰던 거를 2,3월 됐을 때 다 찢어버리고는 느닷없이 소설로 바꿨어요. 그거는 1,200장이나 되고 마감은 7월이었습니다. 그렇게 안 나가던 붓이 방향 전환을 하고 나니까 너무너무 빨리 써지는 거예요.

    그렇게 써낸 글이 바로 박완서의 데뷔작,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 당선작인 <나목>이었다. 실로 대단한 점은 처음 쓰는 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습작도 퇴고도 없이 단 한 번에 장편소설 분량을 주욱 써 낸 글로 당선되었다는 것이다. 박완서는 당시 글을 쓰면서 두 가지 생각을 했다고 한다. 첫째는 상금 50만 원을 타서 남편한테 나도 돈 벌어왔다고 자랑하고 싶다는 것과, 둘째는 딸을 잘난 사람으로 키우고 싶어한 어머니를 기쁘게 해 주고 싶다는 것. 고생만 하고 막상 공모에서 떨어지면 창피하니까 자식들 몰래 학교 간 뒤나 밤에 주로 글을 썼는데, 졸릴 때 자신을 격려해 준 것이 바로 그 50만 원과 어머니 생각이었다고 한다.
    질문자: 처음 써 보는데 1,200매를 다 쓸 수가 있었어요, 선생님?
    박완서: 그러믄요. 네.
    질문자: 습작을 안 하셨잖아요?
    박완서: 습작 안 해도 책 많이 읽으면 돼요.[11]
    박완서는 그 때까지만 해도 부끄러운 기억이었던 PX 생활이 오히려 작가로서 이름을 얻을 수 있게 해 주는 등 자신에게 좋은 것들을 많이 가져다준 것 같다고 말했다.

    이후 다양한 작품을 왕성하게 발표했다. 전쟁 당시의 상황을 다룬 나목과 목마른 계절, 중산 삶을 다룬 도시의 흉년과 휘청거리는 오후 등의 작품을 비롯해 억압받는 여성 문제를 다룬 살아 있는 날의 시작, 서 있는 여자나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추리소설의 기법으로 씌어진 욕망의 응달, 독립투사와 친일파의 자손 문제를 다룬 오만과 몽상, 자신의 인생을 소재로 한 자전적 소설이자 대표작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등을 발표했다. 말년의 작품들은 그 동안 갈고닦아 온 날카로운 안목과 글솜씨의 정수가 그득한, 이른바 노년문학의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0년 '그 가을의 사흘 동안'으로 한국문학작가상을, 81년 '엄마의 말뚝 2'로 이상문학상을, 90년과 91년 '미망'으로 대한민국문학상과 이산문학상을, 93년 중앙문화대상을, 같은 해에 '꿈꾸는 인큐베이터'[12]로 현대문학상을, 94년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으로 동인문학상을, 95년 '환각의 나비'로 한무숙문학상을, 97년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로 대산문학상을, 99년 '너무도 쓸쓸한 당신'으로 만해문학상을, 2000년 인촌상을, 01년 '그리움을 위하여'로 황순원문학상을, 06년 호암상을 수상했다.

    2006년에는 전쟁 때문에 졸업하지 못했던 모교 서울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 수여를 제의하여 받아들였다. 서울대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한국인으로서는 7번째. 박완서의 인사말 자녀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아들 위로 딸이 4명 더 있는데, 그 사람들 중 맏딸은 수필가 호원숙, 셋째 딸은 서울대 의대 호원경 교수다.

    2008년 촛불시위 당시에 시위대와 정부 양쪽을 비판하는 발언을 하였다. 이로 인하여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 양쪽에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중도의 길을 걷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케이스. 2010년 천안함 피격 사건 당시 정부를 믿는다고 발언하였고, 4대강 정비 사업에 대하여는 정부가 잘 설명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2011년 1월 22일, 경기도 구리시 자택에서 담낭암 투병 중 향년 79세로 사망하였다. 평소 자신이 죽은 후 찾아오는 가난한 문인을 잘 대접하고 절대로 부의금을 받지 말라 당부했다고 한다. 묘는 남편과 아들이 묻힌 용인 천주교 공원묘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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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10월 20일, 탄생 80주년을 맞아 구글 두들이 만들어졌다.

    3. 신앙[편집]

    본래는 무교였으나 1984년에 가톨릭 세례성사를 받았다. 1988년 5월 11일, 남편이 63살의 나이에 폐암으로 사망하고, 같은 해 8월 31일 아들이 사고[13]로 25살의 나이에 요절했다.[14] 이후 큰 슬픔에 빠져 묵주를 집어던졌다고 한다.[15] 따라서 이 때의 절망은 그야말로 극심했으며, 큰딸의 회고에 의하면 아들을 앗아간 절대자에 대한 분노로 불교로 개종하겠다고 박완서가 펄펄 뛰었다고 한다. 이 때 쓴 일기 묶음이 그녀의 절망과 고통이 뼈저리게 느껴지는 〈한 말씀만 하소서〉[16]글 중 일부 세례명은 앞에서 봤듯이 '정혜 엘리사벳'[17]. 살아생전에 아주 독실한 신자였다고 하며, 종교가 같은 동료 작가 최인호 등과 함께 생전에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보에 자신의 신앙칼럼을 틈틈이 기고하기도 했다.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박완서/작품 목록 문서
     참고하십시오.

    4.1. 장편소설[편집]

    4.2. 단편소설[편집]

    •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1974) - 1976년 출간된 첫 번째 소설집의 표제작. <세모>, <어떤 나들이>,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 <부처님 근처>, <지렁이 울음소리>, <주말농장>, <맏사위>, <연인들>, <이별의 김포공항>, <어느 시시한 사내 이야기>, <닮은 방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재수굿>, <카메라와 워커>, <도둑맞은 가난>, <서글픈 순방>, <겨울 나들이>, <저렇게 많이!>의 18편의 단편과 콩트 <다이아몬드>가 수록되어 있다.
    • 도둑맞은 가난 (1975)
    • 배반의 여름 (1976) - 1978년 출간된 2번째 소설집의 표제작. <어떤 야만>, <포말의 집>, <배반의 여름>, <조그만 체험기>, <흑과부>, <더위먹은 버스>, <상>, <여인들>, <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 <낙토의 아이들>, <꿈과 같이>, <공항에서 만난 사람>, <집보기는 그렇게 끝났다>의 13편의 단편과 콩트 <화랑에서의 포식>이 수록되어 있다.
    • 엄마의 말뚝 (1980~1991) - 3편으로 된 연작이자 1982년 출간된 3번째 소설집의 표제작. <엄마의 말뚝 1>, <엄마의 말뚝 2>, <그 가을의 사흘 동안>, <우리들의 부자>, <천변풍경>, <육복>, <추적자>, <침묵과 실어>, <내가 놓친 화합>, <황혼>의 10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 그 가을의 사흘 동안 (1980)
    • 꽃을 찾아서 (1986) - 1986년 출간된 4번째 소설집의 표제작. <꽃을 찾아서>, <재이산>, <아저씨의 훈장>, <저녁의 해후>, <비애의 장>, <어느 이야기꾼의 수렁>, <해산바가지>, <울음소리>, <애보기가 쉽다고?>, <무서운 아이들>, <저물녘의 황홀>, <그의 외롭고 쓸쓸한 밤>,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알건만>의 13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 저문 날의 삽화 (1987~1988) - 5편으로 된 연작이자 1991년 출간된 5번째 소설집의 표제작. <로열 박스>, <무중>, <소묘>, <초대>, <저문 날의 삽화 1>, <저문 날의 삽화 2>, <저문 날의 삽화 3>, <저문 날의 삽화 4>, <저문 날의 삽화 5>,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 <가>, <우황청심환>, <엄마의 말뚝 3>,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의 14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 꿈꾸는 인큐베이터 (1993)
    •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1993)
    • 너무도 쓸쓸한 당신 (1997) - 1998년 출간된 일곱 번째 소설집의 표제작. <마른 꽃>, <환각의 나비>, <참을 수 없는 비밀>, <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 <너무도 쓸쓸한 당신>, <그 여자네 집>, <꽃잎 속의 가시>, <공놀이하는 여자>, <J-1 비자>의 9편의 단편과 콩트 <나의 웬수덩어리>가 수록되어 있다.
    • 그리움을 위하여 (2001)
    • 친절한 복희씨(2006) - 2007년 출간된 8번째 소설집의 표제작. <그리움을 위하여>, <그 남자네 집>, <마흔아홉 살>, <후남아, 밥 먹어라>, <거저나 마찬가지>, <촛불 밝힌 식탁>, <대범한 밥상>, <친절한 복희씨>, <그래도 해피 엔드>의 9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 기나긴 하루 (2012) - 사후에 출간된 마지막 소설집으로, 말년에 발표된 단편들인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빨갱이 바이러스>, <갱년기의 기나긴 하루>가 수록되어 있다.

    4.3. 기타[편집]

    • 마지막 임금님
    •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 달걀은 달걀로 갚으렴
    • 나의 아름다운 이웃
    • 한 말씀만 하소서 - 1994년 출간 6번째 작품집의 표제작으로, 일기 <한 말씀만 하소서>와 함께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가는 비, 이슬비> <티타임의 모녀>, <꿈꾸는 인큐베이터>, <오동의 숨은 소리여>의 5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 옥상의 민들레꽃 - 동화 형식의 단편소설. 자살과 부동산 문제 등의 사회 문제가 소재로 쓰였다. 중1 국어 교과서에도 수록되었다. 작중에서 그저 오로지 물질만 생각하는 어리석고 막돼먹은 어른들이 한트럭[19]인 데서 문화 지체황금만능주의를 보여주는 예로도 볼 수 있다.
    • 10주기 추모 에세이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 '정확하고 완전한 사랑의 기억'(맏딸 호원숙 작가)
    •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미출간 원고 수록 에세이, 2024년 발간)

    5. 문학사적 의의[편집]

    '한국 문단에 박완서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수많은 여성 작가들에게 얼마나 든든한 희망이었는지 선생님은 아실까요. 아이 다섯을 키우던 전업주부가 마흔의 나이에 등단하여 한국 문학의 거목으로 우뚝 솟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지요. 선생님은 40년 동안 끊임없이,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써 오셨습니다. 예순에도, 칠순에도, 여든이 되실 때까지도 영원한 ‘현역’이셨습니다. 감히 그만큼 훌륭해지고 싶다는 말은 못해도 박완서 선생님만큼 오랫동안 쓰고 싶다는 바람을 가슴에 품은 후배 작가들이 저 말고도 참 많습니다. (중략) 재미와 뼈대가 함께 있는 주옥같은 소설들을 읽게 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박완서’라는 크고 높고 따뜻한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 산골짜기를 흐르던 시냇물과, 산새들의 지저귐, 또르르 발밑을 굴러가던 도토리의 빛깔을 오래오래 기억하겠습니다.

    언제든 찾아가 기대고 싶은 우리 문학의 가장 중요한 기둥.

    지치고 길을 잃었을 때 박완서 작가님의 책을 펼치면 안쪽에서 찰랑찰랑 천천히 차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여전한 생생함으로 힘을 보태어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남성 중심으로 이루어진 문학사 쪽에서, 여성 문학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선언한 작가라고 여겨도 무방하다. 물론 그녀 이전에 여성 문학가가 없는 건 아니지만[20]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은희경공지영배수아김애란김숨황정은편혜영신경숙한강 등 여성 문학가들의 등장이 이루어지기 전의 시대에는 월등히 여성 문학가보다는 남성 문학가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자전적인 세계 의식이 문학에 녹아 들어간 <나목>으로 등단한 이후 그녀는 남편과 아들이 사망하였을 당시에 잠시 절필했던 때를 제외하고 매년 쉬지 않고 집필 활동을 했다.

    박완서의 글은 자전적인 체험 의식을 바탕으로 해서 쓰인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전부의 문학이 그런 것은 아니나, 작가 자신의 일생을 바꿀 정도로 가장 강렬한 경험이었던 6.25를 바탕으로 한 작품들이 유독 많다는 점을 들어서 '소설'이라기보다는 자전적 회고에 가까운 '수필형 소설'이라는 평가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작가의 작품 활동을 지나치게 한쪽 방향으로 보는 시각으로, 박완서라는 작가는 자전적 체험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 단위인 '가족'을 통해 시대와 국가, 그 안에 속한 사람들을 날카롭게 해부해낸 작가라는 게 적절한 평가일 것이다. 6.25에 대한 자전적 체험 뿐만 아니라, 익히 알려진 분단국가로서의 현실, 가부장적 가정 구도, 전후 한국사회를 지배했던 반공주의, 여성, 중산층 등 6.25 전후를 비롯하여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 아래있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정신을 예리하게 관찰한 작품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작품을 접하기 전, 박완서라는 작가 본인의 넉넉한 이미지나, 주제 의식, '여성작가'의 작품이니 지나치게 감성적일 거라는 생각을 가지기 쉽지만, 실제로는 섬세한 감성과 더불어 사람들 내부의 욕망과 이기심과 같은 굴곡진 인간상에 대한 메스 같은 날카로운 묘사에 놀라게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겉으로는 풍요롭고 넉넉한 물질과 안락하고 안정적인 삶을 구가하는 80~90년대의 중산층 사람들의 내면에는 그 안정적 삶을 구가하는 것으로 현실의 두려움과 내적인 비틀림을 억누르고 감추려고 하는 면모가 있으며, 그들 내부에는 다양한 욕망과 인간군상이 녹아들어 있음을 적나라하고 탁월하게 묘사한다. 동시에 그들의 이러한 모습을 단지 정당화하거나, 혹은 부정적으로만 그리지 않고, 담담하면서 섬세한 필치로 사회 내부에서 하루를 살아가는 인간의 내면이라는 무엇인가? 라는 문제의식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면을 보인다.

    익히 알려진 장편뿐만 아니라, 단편에서는 작가의 이러한 시각들이 잘 드러난다. 다만 작가가 자신의 눈에 비친 세계라는 작품 속 시각에 철저히 입각하여 작품을 전개하기에, 이를 회고와 체험의 범위 안쪽으로만 생각하기 쉬워서 위와 같은 평가들이 나오는 것으로 보는게 타당할 듯 하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나'와 오빠가, 일찍 남편을 떠나보내고 자녀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출세시키려고 마음먹은 어머니에 이끌려 어머니와 같이 서울로 이사를 가고(남편이 서양식 병원에 가지 않고 기존 전통적인 치료를 고집하다가 죽은 영향도 컸을 것이다.), 나와 오빠를 성공시키기 위해 (특히 '나'를 구세대적인 여성상과 반대쪽에 위치하는 '신여성'이 되게 하기 위해.) 죽도록 고생하는 어머니와 서울에서 사춘기를 보내며 성장하는 나와 오빠, 일제 강점기에서 겨우 살아남았으나 6.25에 의해 오빠가 죽고 고향은 이제 갈 수 없게 된 박완서의 자전적인 경험은 박완서의 소설 전체를 관통한다.

    전쟁은 끝났지만 6.25는 여전히 박완서의 소설에서 계속 살아 숨쉬고 있으며, 분단이라는 거대한 현실에 좌절하면서도 맞서고 거역하려는 모습이 계속 묘사된다. 일제강점기와 6.25, 해방과 분단, 봉건문화와 근대 신문화, 구여성과 신여성, 농민과 노동자 등 한민족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 중 하나인 근대화 - 일제강점기 - 6.25 - 분단세대의 혼란스럽고 다채롭던 시대상과 가치관이 박완서의 소설에서 살아숨쉬고 있으며, 아직 6.25의 영향으로 통일이 되지 않고 분단 상태인 오늘날까지에도 이러한 시대상과 가치관들은 박완서의 소설에서 사라지지 않고 빛을 발한다고 여겨진다. 단순히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지금까지도 쭉 이어져 오고 있는 정서라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박완서 작가 자신이 소설은 이야기라는 믿음을 가지고 쓰고 있기 때문인지 '-다우' 라는 어미형을 쓰기도 하며[21], 서술자가 청자에게 말하는 형식으로 짜여진 소설[22]도 존재한다. 또한 대다수의 소설은 여성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페미니즘적을 논하기 이전에 그녀의 글은 여성으로서의 세계의 인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근래의 글에서는 여성이기 이전에 어머니라는 존재로 다루어지는 경향이 크다.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 등지에 작품 일부가 수록되었다.[23]

    6. 여담[편집]

    • 박완서는 인공 치하 서울대학교에서 국문학과 강의를 계속해서 들었고, 북한을 찬양하는 강의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녀를 완전히 바꾸는 사건이 있었으니, 아버지 없이 커온 그녀에게 있어, 머리도 좋고 공부도 많이 해 '영웅'이었다고 회고할 만큼 그녀의 우상이었고 각별했던 친오빠[24]가 북한의 의용군에 끌려가는 변고를 당했다. 부상을 입고 탈주한 뒤 미처 피난하지 못했던 가족들이 남아있던 서울로 돌아왔으나 부상 후유증으로 결국 사망한다. 결국 오빠의 조카들과 늙은 어머니를 먹여살리기 위해 남겨진 올케와 박완서가 가장이 된다. 박완서가 겪었던 공산주의 지배 하에서의 고난은 이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공산주의의 인간성(개성)의 말살에 대해 비판하는 등 공산주의 이념에 반대하는 계기가 된다.
      '이십 대에 코뮤니스트가 아니면 하트가 없다'는 말마따나 오빠는 코뮤니스트였는데 막상 전쟁의 참상을 겪더니 모든 인텔리들이 그렇듯이 코뮤니즘에 회의를 느껴 사상적 방황을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의용군으로 끌려나가더니 928 때 도망쳐서 거지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더군요. 그런데 피해망상증과 공포로 정신이 완전히 망가진 것 같았어요(육체도 허물어졌지만). 그러다가 참으로 어처구니없게도 오발 사고로 총상을 입고 세상을 떠났지요. 나는 아버지가 일찍부터 안 계셨기 때문에 단 한 혈육인 오빠에게 많이 의지하고 살았는데, 아, 참으로 끔찍했어요. 오빠의 생각들로 지금도 가위눌리고, 하도 악몽을 꾸니까, '써버리면 악몽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겠지' 하고 좀 써버리려고 해도 너무 가까운 사람이어서인지 잘 써지지가 않아요.
    • 나목으로 등단하였을 당시의 나이는 39세. 그 전까지는 전업주부로 살며 자식들에게도 비밀로 하고 몰래 집필했다고 한다. 집에서 일기를 쓰는 모습도 본 적이 없던 자식들은 어머니의 등단 소식에 매우 놀랐지만 이내 응원해 주었다고 한다. 당시 원고를 받았던 기자도 40세의 전업주부가 이런 작품을 썼다는 것을 믿지 못해 직접 찾아와 본인이 썼는지 증명하라고 해 집필 당시 적어둔 메모 등을 보여주어 증명했다고 한다.
    • 초기 박완서의 작품은 극단적으로 6.25가 배경인 것이 많다. 그 외에 남자가 잘 없는 모계 중심의 가정인 경우도 꽤나 흔하다. 한국 전쟁 당시 박완서가 겪었던 경험, 즉 오빠의 죽음과 남겨진 가족들에 관한 이야기는 그녀의 대표작 <엄마의 말뚝>에서 형상화되었다. 작품 속에 그녀의 진짜 이야기라고 할 만큼 특유의 경험이 그대로 실려있으며, 특히 오빠의 죽음과 배경 설명이 거의 그대로다. 단, 소설 속에서 서술자의 오빠는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죽는다.
    • 이외에도 박완서의 작품은 몇 가지 주제로 나눌 수 있다. 상술한 6.25 전쟁 전후소설과 가족의 죽음, 미군에 의한 양갈보 문제와 성 상품화 비판을 다룬 소설, 중산층이 화자로 나와서 이들의 속물성과 허물을 거론하고 물질만능주의적 세상을 비판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이외 모성애, 여성 주부의 고달픔[25], 생명의 소중함, 민주화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풀이 좁다면 좁다고도 할 수 있는데 이는 자전적 소설이라는 박완서의 소설 특징 때문일지도 모른다.
    • 출판사 쪽에서는 근래 보기 드문 성실한 작가로 소문났었다. 그리고 특별한 이윤을 취하지 않는 작가로도 알려졌다. 물론 과도한 인세를 요청한 모 작가 때문에 더욱 두드러지는 이야기이겠지만, 네임밸류에 비하면 과도한 인세 요청은 잘 하지 않고 오히려 집필에 신경 쓴 편이라서, 출판계에서 박완서의 평은 좋다.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도서관에 박완서 기념관이 마련되어 있다. 참조구리역에서 멀지 않으므로 평소 박완서에 대해 관심 많은 분들은 찾아가기 좋기는 하나, 정말 볼 게 없다. 하다 못해 흔한 시청각 자료도 운영치 않고 있다. 그냥 친필 원고 몇 개랑 책 전시 몇 개가 전부. 기념관을 더 알차게 꾸며서 운영했으면 하는 바람.
    • 그 나이 작가로는 드물게 일찍부터 워드프로세서로 작업했던 작가이기도 하다.
    • 가수 이적과도 인연이 있다. 중학교 3학년이던 이적이 용돈을 군것질에 몽땅 탕진하고, 어머니께 이를 무마하고자 시 한 편을 집필했는데, 그의 어머니가 이를 보고 감동하여 이 시를 다시 박완서에게 보내었고, 그녀도 중학생이 어떻게 이런 시를 썼냐며 감탄했다고 한다. 다음은 그 시의 내용의 일부다.
      습한 얼굴로
      AM 6:00이면
      시계같이 일어나 쌀을 씻고
      밥을 지어
      호돌이 보온 도시락통에 정성껏 싸
      장대한 아들과 남편을 보내놓고
      조용히 허무하다.
      (중략)
      - 엄마의 하루
    • 2010년대 후반 들어 대학교 대나무 숲에 가난을 간증하거나, "가난이 스펙이다"라고 말하는 등의 망언이 올라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에 대해 박완서의 "도둑맞은 가난"의 문구가 올라와 일침을 가하곤 한다.
      "부자들이 가난을 탐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에 안 차 가난까지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 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도 느껴 보지 못한 깜깜한 절망을 가난을 도둑맞고 나서 비로소 느꼈다"
    • 선배 작가 박경리와 친분이 깊어서 박경리의 장례식에서 울면서 조사를 읽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친했던 것은 아니다. 등단하고 얼마 후 박경리와 알게 되었지만 같은 세대인데도(박경리가 박완서보다 5살 많음) 쉽게 친해지지 못했다. 자신은 막 등단한 신인인데 박경리는 이미 유명한 작가라 함부로 다가가기 어려운 대상으로 느꼈다고 한다. 그런데 남편과 아들을 연달아 잃고 슬픔에 빠져 집에서만 지내던 때, 친분이 있던 출판계 인사들이 찾아와 싫다는 사람을 잡아끌고 다짜고짜 강원도 원주에 있는 박경리 집으로 데려갔다.[26] 그 무렵 다른 사람들은 박완서를 보면 으레 위로의 말을 건네곤 했는데, 극심한 절망감에 빠져있던 박완서는 그런 위로의 말이 너무 싫었다. 하지만 박경리는 어설픈 위로의 말 같은 건 하지 않고 직접 농사지은 채소로 밥을 차려주며 많이 먹으라는 말만 했다. 박완서는 그런 박경리의 태도에 오히려 큰 위로를 받아 울면서 밥을 먹었고 그 후로 친한 사이가 되었다.
    • 다른 문인과의 교류도 상당히 잦고 정부와 문인 협회 등에서 보내주는 여행 등에 자주 참석한 것으로 추정된다.

    7. 수상 이력[편집]

    제5회 이상문학상 수상
    유재용
    (1980)
    박완서
    엄마의 말뚝 2
    (1981)
    최인호
    (1982)
    제38회 현대문학상 수상
    이문열
    (1992)
    박완서
    꿈꾸는 인큐베이터
    (1993)
    윤후명
    (1994)
    제25회 동인문학상 수상
    송기원
    (1993)
    박완서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1994)
    정찬
    (1995)
    제1회 황순원문학상 수상
    박완서
    그리움을 위하여
    (2001)
    김원일
    (2002)

    8. 관련 문서[편집]

    [1] 사진작가 김종구가 찍은 사진으로, 박완서 본인이 이 사진을 좋아해 서재에 걸어두기도 했다. 장례식 당시 영정사진으로 쓰였다.[2] 호적상 생일은 10월 20일이지만 9월 15일이 진짜 생일이라고 본인의 구술집을 펴내며 밝혔다.[3] 現 개성시 개풍구역 묵송리[4] 25세손 '서(緖)' 항렬이다.[6년제] 5.1 5.2 당시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분리되기 전인 6년제 구제중학교 과정이다.[6] 생전 매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장례식 역시 천주교 식으로 치러졌고 이후 천주교 용인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신앙 문단 참조.[7] 1998년 보관문화훈장을, 2003년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8] 의외로 당시 교사들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고 닦달을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10] 1950년은 6월에 입학을 하도록 한 유일한 해였다. 일제강점기 때는 4월 신학기제였는데, 해방 후 미군정 시기 미국식으로 9월 신학기제가 실시되었다. 이후 9월 신학기제가 실정과 맞지 않아 다시 4월 신학기제로 돌아가기로 결정되었는데, 학년도를 5개월을 단축해야 하는 무리한 점이 있어 과도기적 조치로 1950년에는 6월에 입학하도록 한 것이다.[11] 이상 두 부분은 2012년 출간된 '박완서: 못 가 본 길이 더 아름답다, 1931~2011'을 인용했다.[12] 남아 선호 사상과 80-90년대의 여아낙태 문제를 다룬 소설이다.[13] 교통사고는 아니라고 한다. #[14] 박완서에게는 딸만 넷을 얻고서야 태어난 아들로 각별히 귀한 자식이었던 호원태는 당시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마취과 레지던트 과정에 있었다. 왜 당시 비인기과였던 마취과를 선택했냐는 박완서의 질문에, 마취과 의사는 환자가 잠들어 있는 동안만 환자를 돌보고 환자가 깨어나면 떠나기에 환자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기 어려워서 쓸쓸한 느낌이 있고 자신은 그 쓸쓸함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고 한다.[15] 박완서는 남편이 사망하기 전부터 이미 부부가 함께 천주교 세례성사를 받은 상태였다.[16] 미사 중 영성체 전 기도문이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이다.[17]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축일 9월 20일)은 성 정하상 바오로의 여동생으로, 1984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된 한국 103위 순교성인에 포함되어 있다. 세례명까지 같이 부르려면 '박완서 정혜 엘리사벳'이라고 하면 된다.[18] 아들의 요절 이후 발표한 작품이다. 미혼모가 어린 아들의 양육권을 지키기 위해 아들의 친부와 그의 가족들과 싸우는 이야기인데,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혈육의 정에 대한 묘사가 매우 절절하다.[19] 특히 그 중에서도 주인공의 모친이라는 양반이 가장 문제이다. 이 사람은 과연 친모인 게 사실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주인공도 듣는 앞에서 대놓고 전화 통화로 막말을 지껄이는 정신나간 모습을 보였는데, 다른 집들이나 동창들은 전부 애가 하나 아니면 둘인데 본인만 셋인 게 창피해 죽겠다면서 전화로 애도 듣는 자리에서 이딴 뒷담화를 까면서 떠벌리고 앉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건 그 전화를 한 날이 어버이날이었는데, 형과 누나와 본인 모두 아침에 카네이션을 달았는데, 주인공 본인이 건넨 카네이션은 휴지통에 버려져 있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더 이상 삶의 가치를 못 느낀 주인공은 이전에 두 명의 할머니들이 그랬듯이 본인도 투신자살을 하러 옥상으로 올라갔다가 그 곳에 피어난 민들레 한 송이를 보고는 희망을 얻고 본인의 결심을 철회하고 귀가했으며, 그런 주인공을 보고 엄마가 그제서야 펑펑 울면서 안아 주면서 뒤늦게나마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20] 대표적으로 한국문학계의 대모 박경리 선생이 있다.[21]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그 여자네 집.[22]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23] 그런데 정작 박완서 작가는 생전에 자신의 작품이 교과서 등지에 인용되는 것을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이른바 수능, 진학 문제풀이의 용도로 문학 작품의 심오한 이해 없이 이용되는 것을 경계한 것. 오죽하면 작품을 칼로 재단하는 것 같다는 투의 발언도 한 적이 있다. 비슷한 사례로 김영하와 이외수가 있다. 이외수는 자신의 작품을 문제로 낸 것을 풀었는데 맞는 답이 거의 없었다고.[24] 전쟁 이전 좌파적 사상에 잠시 발을 담근 적이 있다고 한다.[25] 남편이 무능하거나 신경질적이게 나오거나, 아예 별거하거나 고인인 경우가 있다. 특히 시어머니가 치매에 걸려서 이에 대해 갈등했다가 모성애의 관점으로 해결하는 내용이 많다.[26] 박경리도 박완서와 똑같은 슬픔을 체험한 인물이었다. 6.25때 남편을 사실상 잃었고(정확히는 실종), 아들은 당시의 열악한 시대상에 따른 의료 사고로 일찍 떠나보낸 것이다. 박경리의 초기 단편인 <불신시대>는 그러한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쓰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