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27

박완서 작가와 창씨개명 : 네이버 블로그

박완서 작가와 창씨개명 : 네이버 블로그

박완서 작가와 창씨개명
차경환
2022. 12. 23. 21:02
이웃추가
1931년생 작가 박완서의 너무나 솔직한 일제 체험기 (일제 36년의 오해와 이해 9_김용삼 기자) 강연을 텍스트화 각
색, 편집했습니다.
일제시대인 1931년에 태어나셨던 작가 박완서(朴婉緖, 1931-2011)라는 분이 있습니다. 작가로서 워낙 유명한 사람이
어서 이름만 들어도 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박완서 본인이 일제시대 때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 매우 솔직
한 일종의 자서전적 작품을 발표했는데, "그 많던 싱하는 누가 다 먹었을까?"라는 책입니다.
19 4 ♣My Identity♣
책에 의하면 본인이 1931년에 태어나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본인의 어릴 적 체험을 아주 솔직하게 써놨습니다. 솔
직하게 써 놨다는 얘기는 즉, 욕을 많이 얻어먹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분이 책을 내고 나서 많은 비난에 시달리기
도 했는데, 이 책에 쓰인 체험기를 통해 일제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를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작업이 필요한 이유는 현재 일제시대를 경험하고 직접 살아보신 분들이 대부분 돌아가셔서 우리는 이러한 간접
적인 체험 때문에 일제시대를 알 수밖에 없는데, 그 시대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려면 그 시대를 직접 살았던 분들
의 이야기를 듣는 게 가장 중요한 방법이기 때문에 입니다.
이분은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1938년 7살 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서울로 이주했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개화 물이 상당히 드셔서 그랬는지 내 아이만큼은 서울에 있는 학교에다가 꼭 넣어야 하겠다 하고 작심을
하고 딸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온 것입니다.
19 4 ♣My Identity♣
그 시절에도 교육열이 높았던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박완서 어머니도 그중에 하나인데, 딸을 경성 사대문 안에 있는
학교로 보내는 게 큰 소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집안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돈이 없어서 사는 곳은 서대
문구 현저동, 지금의 서대문형무소 근처에 있는 산꼭대기에 월세방을 얻어 살면서, '내 아이는 사대문 안에 있는 학교
에 보내야 하겠다.' 해서 위장전입을 합니다.
당시 사촌이 사직동에 집이 있었는데 그곳으로 위장전입을 합니다. 왜 위장전입을 했느냐 하면 그 당시 학교의 수는
한정되어 있는데 아이를 학교에 보내려는 사람들은 많다 보니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도 입학시험을 치렀습니다. 당시
의 국민학교는 의무교육이 아니어서 월사금을 매달 80전을 내야 재학이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조선인이 내
자식을 좋은 학교에 넣기 위해서 큰 노력을 했습니다.
그래서 박완서 씨도 좋은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입학시험을 봤는데, "세 문제 중에서 두 문제를 맞혔고 한 문제
는 못 맞혔다. 그런데도 합격했다."라는 그런 내용이 작품에 자세히 실려 있습니다.
19 4 ♣My Identity♣
당시 박완서 씨가 살던 집은 서대문구 현저동 산꼭대기 집이었기 때문에, 수도연결이 되어있지 않아 물지게로 물을
배달하는 물장수에게 한지게 얼마씩 해서 물을 사 먹는 동네였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합격통지서가 위장전입 한 사
직동 친척 집으로 와서 그 합격통지서를 받기 위해 사직동 친척 집에 가봤더니 거기는 수도에서 물이 콸콸 나오고 있
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보고 "물이 이렇게 나오는구나!" 하고 충격받았다고 합니다. 즉, 일제시대 때 경성에는 상수도
가 연결되어 많은 사람이 수돗물의 혜택을 받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 시절 왜 그렇게 좋은 학교를 보내려고 노력을 했느냐 하면 좋은 학교를 나오면 좋은 직장에 취업할 수 있었기 때문
입니다. 그 시절에 좋은 직장이란, 예를 들면 총독부 같은 직장이나 그리고 일본이 통치하는 통치기관의 관료로 들어
가거나, 조선에 진출한 일본 기업에 진출하는 것이 좋은 직장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박완서의 오빠가 공부를 열심
히 해서 총독부에 취직합니다.
또 개성 옆인 개풍에 살 때는 침침한 등잔불이 고작이었는데 경성에 와보니까 대낮같이 환한 전기가 들어오더라는 대
목도 나옵니다.
인류의 문명을 가늠하는 기준이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로 전기가 들어오느냐 안 들어오느냐, 두 번째 상수도 하수
도가 준비되어 있느냐 안 되어있느냐를 가지고 문명의 척도를 가늠합니다. 여기서 좀 더 고급 문명을 따진다면 내가
필요할 때 수도꼭지만 틀면 뜨거운 물이 언제든지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 하는 것을 문명의 척도라고 하는데, 한국에
서 뜨거운 물이 필요할 때마다 나오는 시스템이 일반에 공급된 시기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개최 하면서 아파트들
이 많이 지으면서부터였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문명이란 무엇인가? 문명을 우리에게 선사한 것은 누구인
가 하는 것을 이런 책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19 4 ♣My Identity♣
이윽고 박완서 씨가 1938년 4월 봄에 '매동국민학교'라는 곳에 입학했는데, 입학하고 보니 학교에서 한글은 가르치지
도 않고 한마디도 쓰지도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즉, 1938년부터는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면 전부 일본어로 생각하고 일본어로 이야기하고 일본어로 글씨를 쓰고 그런
교육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곧 일본 사람이 되는 겁니다. 박완서의 동기 중에는 한글을 읽고 쓸 줄 아는 학
생은 드물었다고 합니다. 즉, 당시 조선인 중 교육을 받은 사람 들은 대부분 일본인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일제 치하에서 이렇게 학교에 다니고 교육받는다는 것은 조선인이 일본인과 동질화되어가는 과정이었고, 이런 교육
을 받은 사람 들은 대부분 일본인화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레 해방되어 우리는 다시금 한국인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와 사회에서 아
주 광범위하고 강력한 반일 교육이 시행된 이유가 바로 일본인화된 이 조선인을 다시 한국인으로 되돌리기 위해 이
런 교육이 시작되었고, 그런 반일 교육은 지금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박완서의 오빠는 총독부에 취업했는데 이것은 정말 가문의 영광이었다고 합니다.
19 4 ♣My Identity♣
그런데 오빠는 그 좋다는 총독부 직장을 6개월 만에 그만두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와타나베 철공소라는 곳에 입사합
니다. 그러니까 이제 또 집안에서는 난리가 납니다. "그 좋은 총독부는 왜 그만두고 무슨 대장간에 취업하다니 이게
말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빠의 이야기는 간단했습니다. "총독부보다 일본회사가 월급을 2배나 더 많이 주
고 나는 사무직이기 때문에 철공소 노동을 하는 게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실린 것을 보면 이 무렵까지도 사농공상의 신분 구조가 얼마나 깊이 한국인들의 머릿속에 박혀 있는지
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농공상의 신분제가 현재 다 없어졌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요즘 젊은이들 보
면 고시 공부해서 공무원 되고 싶다고 합니다. 즉, 조선 시대로 이야기하면 과거 급제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과 똑같습
니다.
박완서 씨의 큰 숙부는 친일파의 후원으로 면서기로 취업해서 면의 총무과장, 노무과장을 역임했다고 합니다. 당시
에 면서기 면의 과장이 된 것도 역시 정말 가문의 영광입니다.
또 박완서 씨는 서대문 현저동 산꼭대기에 월세방에 살다가 오빠가 취업해서 받아오는 월급과 금융 조업이라는 곳에
서 융자를 받아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 드디어 내 집 마련에 성공합니다.
19 4 ♣My Identity♣
이 금융 조합이라는 것이 자료를 찾아보면 1940년 940곳의 금융 조합이 설립되어서 활동했는데, 일제시대 서민들은
은행에 가면 대출도 잘 안 해주고 그랬는데 일본 사람들이 금융 조합이라는 것을 만들어 금융 조합 덕분에 서민들에
게 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돈을 대출해주었고 그 원금을 나눠서 갚도록 해서 서민들이 편리하게 집을 마련하고 토지
를 취득할 수도 있게끔 대출을 쉽게 내줬습니다.
그런데 학자들은 서민 생활에 그렇게 큰 도움을 준 금융 조합을 '식민지 경영의 첨병이다. 조선의 지방과 농민을 장악
하기 위해 설치했다'라고 그렇게 비난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라는 곳에서는 금융 조합을 뭐라고 설명을 해놨냐 하면 '조선총독부가 창안한 가장 효율
적인 금융지배 수탈 기관이다.' 이렇게 써 놨습니다. 그런데 정작 당시 서민들은 박완서 씨의 자전적 소설에서처럼 금
융 조합에 가서 돈이 필요할 때 돈을 대출받아 집도 사고 땅도 사고하는 혜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 기
술 해놨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대체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벌어지면서 이제 군국주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19 4 ♣My Identity♣
그래서 박완서 씨도 아침에 조회하면 '황국신민의 맹세'를 낭독하고 조선의 유명한 소프라노 가수가 "깨어졌다. 싱가
포르, 물러서라 영국아"라는 노래를 불러서 유행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양군도 함락을 자축하기 위해 밤에 등
불행렬을 합니다.
특히 남양군도에서는 고무가 많이 났는데, 그 고무가 많이 나는 것을 일본이 점령했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국민 학
생들에게 고무공을 하나씩 나눠줬는데, 그 공놀이를 하느라고 정말 시간 가는줄 몰랐다 하는데 이야기가 박완서 씨
자서전에도 쓰여 있습니다.
박완서 씨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분들도 그때 고무공을 받아서 얼마나 즐겁게 놀았는지 똑같은 증언을 많이 합니다.
이렇게 그 시대를 실제 살았던 사람들은 일제가 정말로 그렇게 악랄했는지 아닌지 모두 다 알고 계신데, 당시를 직접
살았고 체험하신 분들이 지금은 모두 돌아가시고 없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고 전황이 점점 불리해지면서 폭격에 대비해서 방공 연습을 했고, 그리고 여성들이 대피할 때
긴 치마를 입고 뛰어가다 넘어지면 다친다고 해서 몸빼 바지를 교복처럼 의무적으로 착용을 하기 시작을 했으며 또
어느 날부터는 쌀, 운동화, 고무신 같은 것이 배급제로 바뀌고 생필품이 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고무신 같은
것은 애국반을 통해 한 반에 한두 켤레 나오면 제비를 뽑아 나눠 가졌다는 그런 내용도 나옵니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박완서 씨의 창씨개명 체험기입니다.
19 4 ♣My Identity♣
박완서를 일본어로 발음하면 '보쿠엔쇼(ボクエンショ)'가 됩니다. 그래서 자기는 학교 가서 일본인 담임이 출석을 부
를 때, 다른 조선 학생들은 전부 창씨개명을 해서 '하나코' '하루에' 이런 일본 이름으로 부르다가 박완서는 '보쿠엔쇼'
이러니까 그게 너무나 창피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집에 가서 "나도 창씨개명을 하게 해달라 하고 어머니를 막 졸랐
다."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또 분명한 것은 "한 반에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아이가 서너 명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불구
하고 학교에서 혹은 일본 선생님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어떤 압력도 받은 적이 없다"라고 본인의 글에 써
놨습니다.
또 박완서 씨의 고향인 '경기도 개풍 박적골에도 박완서 씨의 박씨 집안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 모두 다 창씨개명
을 했다'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19 4 ♣My Identity♣
집안의 호주인 박완서 씨의 할아버지가 "나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창씨개명은 절대로 안 된다."라고 선언했기 때문
에 창씨개명을 못 했고, 그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박완서 씨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오빠가 호주
를 승계했는데, 그런데 오빠도 창씨개명을 안 한다고 해서 자기 집사람들은 창씨개명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의견은 달라서 어머니가 바라는 출세라는 것은 바로 일본의 그늘에서 그들에게 협조해서 좋은 직장
들어가고 그런 것이 어머니의 소원인데, 그렇게 되려면 우리도 창씨개명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오빠를 설득했다고 합
니다,
우리는 일본 사람들이 창씨개명을 강요했기 때문에 우리가 창씨개명을 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데, 사실은 들여다보
면 그렇지 않은 사례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생활 여건은 점점 더 어려워져서 이제는 지원병 제도라는 것을 운영하다가 마지막에는 징
병제도를 운영해서 이제 조선인 사람들도 징병해서 전쟁터에 내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지원병 제도가 징병제
도로 바뀌면서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고, 우리는 징병제를 공짜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일본 중앙정계의 국회의
원 의석을 27석 얻는 대가로 징병제를 했다는 이야기는 지난번에 이미 언급했습니다.
19 4 ♣My Identity♣
이 무렵 국민학교 졸업을 앞둔 박완서 씨는 그 당시 엘리트 수재들만 들어갔다는 '경기고녀( 경기고등 여학교)'는 실력
이 안 돼서 못 들어가고 숙명고녀(숙명 고등여학교)에 지원해서 합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 입시를 앞둔 모든
조선 사람들이 합격을 빌기 위해 단체로 신사참배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국민학교 졸업식이 끝난 후에도 단체로
신사참배를 해서 즉, 그러니까 이 무렵의 조선인들은 모두 일본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전황이 이제 점점 어려워져서 '고녀' 즉, 지금의 여중·고생들마저도 군수품 제조에 동원하기 시작했다고 합니
다.
19 4 ♣My Identity♣
그래서 오전에 2교시 수업을 한 다음, 여학생들 교실은 군수품 공장으로 변해서 군복에 단추를 달고, 솔방울을 채집해
서 솔방울 기름을 짜서 군대로 보내고 그런 일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등교할 때는 구급낭을 휴대하고 등교했는
데, 그 구급낭 안에는 구급약과 지혈용 삼각건, 그리고 이름과 주소 혈액형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식량난이 닥쳐서 쌀 대신 콩깻묵을 배급해서 쌀을 구하러 다녔고, 식량이 모자라니까 딸 가진 집안은 한 식구라도 입
을 덜기 위해 14살 15살 먹은 애들을 시집보내고 그런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박완서 씨 어머니는 등화관제(燈火管制 :야간에 적의 공습 따위에 대비해 등불을 가리거나 끄게 하는 것)를 할 때면
"일본 놈들 폭삭 망하는 꼴을 봤으면 좋겠다"라고 얘기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 아들이 일본인 회사에 다니면서
월급을 많이 받고, 일본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것을 그렇게 또 즐거워하셨다"라고 합니다.
2학년에 지나갈 무렵 서울에 있는 사람들을 지방으로 소개(疏開: 공습 등 재난에 대비해 도시나 밀집 지역의 주민이
나 시설 따위를 분산하는 것). 하기 시작했답니다.
19 4 ♣My Identity♣
그래서 본인은 개성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학교를 이전 하는 학생들은 내가 이전하는 도시에서 가고 싶은 학교
를 지정하면 그 학교로 전학을 시켜 줬다고 합니다.
그래서 박완서 씨는 개성에 있는 '호수돈고녀'로 전학해서 그해 여름에 일본이 패망해서 해방되었다고 합니다.
19 4 ♣My Identity♣
해방되니 박완서 씨의 큰 숙부가 일제 치하에서 면서기로 취업해서 일했기 때문에 졸지에 친일파 집안이 된 것입니
다. 그렇게 친일파 집안으로 낙인찍혀서 마을 청년들이 몽둥이를 들고 "이놈 친일파 집안" 하면서 집안의 가재도구를
부수고 그랬는데 알고 보니 그 사람들이 모두 다 창씨개명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창씨개명한 사람들이, 박완
서 씨의 책에 의하면 '도쿠야마' '아라이' '기무라'로 창씨개명한 청년들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박완서 씨의 집안을
친일파 집안이라고 때려 부순 겁니다.
그런 혼란이 벌어진 와중에 박완서 씨의 작은 숙부는 남대문시장에서 장사했는데, 일본 사람들이 놓고 간 적산가옥
한 채를 어떻게 했는지 재빨리 차지했다고 합니다. 해방의 혼란에 와중에도 챙길 건 다 챙긴 겁니다.
그럼 창씨개명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19 4 ♣My Identity♣
한국인의 이름은 본관이 있습니다. 본관(本貫)은 그 일족이 처음 시작된 일족의 발상이 된 지역입니다. 예를 들어 광산
김씨라고 하면 전라남도 광산구가 시조의 고향으로 그 김씨가 그곳에서 처음 생겼다고 해서 본관이라고 하고, 성(姓)
은 아버지의 부계 혈통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일본은 부계 혈통을 나타내는 성이 없습니다. 단지 집안을 나타내는 씨(氏)만 존재합니다. 일본은 1870년까지
사무라이(武士) 계급 이하는 씨명도 없었는데, 1875년 메이지 유신 이후 전 국민은 모두 '씨'를 사용하라고 해서 비로
소 평민들도 '씨'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일본의 '씨'라는 것이 우리는 아버지의 핏줄을 나타내는 것이 '성'인데 반해 일본에는 혈통을 나타내는 것이 없
고 그냥 가계(家系)를 나타내는 이름인 '씨'만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렇게 일본의 성씨 제도와 한국의 성씨
제도는 완전히 달라서 일제시대 한국의 주요 성씨는 260개 정도였는데 일본에서 씨명은 30만 개가 넘습니다.
19 4 ♣My Identity♣
한국의 성은 아버지 혈통의 표식이기 때문에 딸자식이 출가해도 본인의 성이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씨명
은 일가족이 모두 같은 씨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우리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딸이 다른 집안의 남편에
게 시집가면 남편 집안의 씨명에 따라 그녀의 성이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일본은 주로 지형이나 지명 또는 직업을 씨명으로 많이 사용합니다. 가마야마(釜山,부산), 기우라(木浦,목포)
등이 지명을 이용한 씨명이고, 야마시타(山下 산 아래). 다나카(田中, 밭 가운데) 등이 그것입니다. 따라서 절대 성이
바뀌지 않고, 동성동본끼리는 혼인도 하지 않고 성이 다른 집안의 아이는 입양하는 관습이 전혀 없던 조선전통과 일
본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런데 본관과 부계의 성을 따르는 한국의 성씨 제도는 원래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전부 중국의 것을 도입한 것입니
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성+이름 두자=석 자로 되어 구성되어 본관 어디 어디이다'라고 하는 건 전부 중국식입니
다.
19 4 ♣My Identity♣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라는 조선학자의 책에 의하면 "한반도에 중국식 성씨가 보급된 시기는 고려 초기부터였고,
초창기에는 지배계층만 중국 성씨를 사용했고, 조선 초기 전 인구의 90%는 성씨가 없었습니다. 성씨가 정착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부터라는 것" 입니다. 즉, 우리가 현재 신줏단지 모시듯 집에 가지고 있는 족보는 거의 95% 이상이 일제
시대 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19 4 ♣My Identity♣
"내가 서읍(西邑)에 있을 때, 많은 사람이 족보를 가져와 보아 달라고 했으나 그 중 열에 하나도 진짜가 없다. 이는 한
때 세속에 불과한 것으로 믿을 것이 못 된다." 왜냐하면, 모두 가짜로 날조했기 때문입니다.
또 대만 국민 정치대학의 김근식 교수가 있는데 이분의 연구에 의하면 "김씨, 이씨, 박씨 3대 성이 한국 인구의 대부분
을 차지하는 이러한 현상은 정상적인 친족 관계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즉, 평민이나 천민 등 많은 사람이 그냥
김씨 박씨 이씨를 마구 갖다쓰는 참칭(僭稱)을 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했다." 이것이 학자들이 연구결과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왜 이렇게 김씨 박씨 이씨가 많을까요? 바로 민적법(民籍法)이라는 것에 그 비밀이 있습니다
19 4 ♣My Identity♣
1894년 갑오개혁을 하면서 갑오개혁의 개화파들이 성씨가 없는 사람들에게 성씨를 사용하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니냐
고 해서 성씨 사용을 시킬까 말까 하던 중에 그 양반들이 반대합니다. "노비나 천민들이 무슨 성이 필요하노? 그냥 개
똥이 쇠똥이 마당쇠 이렇게 부르면 됐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통감부 시절인 1909년 일본 사람들이 "노비나 천민이나 모두 다 같은 사람이니, 이 사람들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모두 똑같이 인간다운 예우를 받는 이름을 가져야 한다."라고 민적법이라는 것을 법제화했습니다. 그 당시는 대
한제국이 살아있었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은 통감부에서 민적법을 만들어 대한제국에 강제해서 1909년에 법이 통과
된 것입니다.
그런데 시행 과정에서 노비나 천민 따위 사람들에게 "너희들도 이제부터 성을 사용하라"라고 했는데, 그런데 애초부
터 성이 없었기 때문에 그러다 보니 노비들이 자기 주인의 성과 본관을 대부분 따랐던 것입니다. 또 양반이 자기 집안
의 노비를 해방하면서 너는 앞으로 김씨 해라 그러면 김씨가 되었던 것이고, 그리고 성이 없던 노비 천민이나 무성 층
의 대부분이 김씨, 이씨, 박씨로 신고를 했다. 그래서 김,이,박씨가 더욱 비대해졌다는 것입니다.
조선 시대 노비로 태어나거나 천민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이름도 참 걸쩍지근했습니다. 마당쇠 개똥이 쇠돌이 도야지
그런 식으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19 4 ♣My Identity♣
여자노비(婢)의 경우는 대부분 태어난 달을 따라서 삼월이 사월이 구월이 이렇게도 지었고 또 촉새냔(足金蓮) 작은년
언년이, 간난이 이런 식이었고, 남자노비(奴)는 돌쇠, 마당쇠, 개똥이, 개떡이, 강아지, 똥개, 도야지, 두꺼비 같은 동물
이름은 물론 어린놈, 뒷간이, 개부리, 소부리, 개노미, 개조지 같은 아주 천한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것을 보고 일본 사람들이 "같은 인간으로서 이게 말이나 되느냐?" 고 해서 1914년 조선총독부가 "노비나 천민에게
부여된 가축이나 가축의 분뇨, 사물, 태어난 월 따위를 표명하는 등 인간다운 품위를 갖추지 못한 이름은 민적에 등록
시켜주지 않는다"라고 해서 비로소 "노비 천민에게도 양반과 다름없는 품위 있는 이름을 부여한 사람은 바로 일본 사
람들이었다"라는 것입니다.
19 4 ♣My Identity♣
이때부터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한 사적 자치의 주체로서의 개인임을 일본 사람들이 법적으로 보장해준 것입니
다. 그 이전까지 그 시대에 태어난 남자 노비나 천민 여자 노비들은 성은 물론이고 제대로 된 이름조차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양반 쌍놈의 신분 계급제도를 법적으로 철폐시켜준 것은 한국인이 아니라 다름 아닌 조선총독부였던 것입니
다.
또한, 조선 시대 여성은 이름이 없었습니다. 외국 선교사들이 조선에 와서 보니 여자들이 성은 있는데 이름은 없고 그
래서 얘들을 어떻게 불러야 하나 고민하다가 모두 서양 이름을 붙여준 것입니다.
너는 헬렌(Helen)을 해라, 너는 낸시(Nancy), 이런 식으로 이름을 붙여서 이화여대 총장 이름이 김활란(金活蘭,1879-
1970)이 되었습니다. 헬렌(Helen)을 한자로 표기하니까 활란(活蘭)이 된 것입니다. 김활란 여사의 영문 이름은
Helen, Kim 입니다. 또 여성 독립운동가 하란사(河蘭史,1872-1919)라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낸시(Nancy)입니다. 낸
시를 한자로 표기해서 란사(蘭史)가 되었습니다.
조선 시대 호적에 여성의 이름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19 4 ♣My Identity♣
양반 가문의 경우조차도 성 또는 씨만 존재했습니다. 예를 들면 김씨 부인, 박씨 부인 안성댁, 부산댁 이렇게 불렀을
뿐 이름이 없습니다. 간혹 여성의 이름이 있는 예도 있었지만, 호적등록은 불가능했습니다. 이것은 조선 시대에서 여
성을 사회적으로 공인된 인격체로서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조선 사람의 절반에 해당하는 여성들에게도 민적법을 시행해서 이 땅의 모든 여성에게도 남성과 같은 성과 이
름을 민적에 기재하도록 의무화한 것은 일본 사람들입니다. 즉, 여성을 법적으로나 사회적인 인격체로 공인해준 것
은 일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진정한 여성 해방은 바로 일본 사람들이 시켜 줬다는 사실을 왜 이 땅의 국민은
잘 모르거나 인정을 안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도 뭐 대륙침략 야욕에 활활 불탄 일제가 조선에 병참기지 만
들고 수탈 잘 하려고 그랬을까요?
재미있는 것은 1911년 11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24호에 의해 조선인은 내지인과 혼동할 수 있는 일본식 성명은 사
용하지 못하도록 법적으로 강제했습니다. 그 이유는 드디어 한일합방에 되어 일본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일본 세상에서 조선 사람들도 출세하려고 보니 일본 이름을 쓰는 게 더 유리합니다. 그래서 조선 사람 중에 많은 사람
이 일본 이름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19 4 ♣My Identity♣
이렇게 되니 이 사람이 과연 일본 사람인지 조선 사람인지 구분할 수 없습니다. 사실 지구상에 가장 외모가 비슷한 것
이 일본인과 한국인입니다. 지금도 일본 도쿄 한복판에 가서 가만히 서 있으면 이 사람이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 잘
모릅니다. 거기다 일본어를 좀 잘하면 그냥 일본 사람입니다.
거기다 이름마저 '와타나베' '고바야시' 이런 식으로 하면 일본 사람과 조선 사람이 분간하기가 어려우니 1911년도에
는 일본 이름을 쓰지 못하도록 규제한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인 중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이나 일본인과 사업하
는 사람들이 나는 일본 이름을 쓰고 싶은데 왜 일본 이름을 못 쓰게 하는 거냐? 하고 항의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
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일본 기업들이 조선에 진출해서 일본인과 거래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과 교제하고 거래하려면 나도
일본 이름을 쓰고 싶은데 왜 일본은 못쓰게 합니까? 하고 계속 이의제기를 하니까 1937년 이후 태어난 신생아 에게
만 일본식 이름을 허용을 해주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되니 왜 아이들만 되고 어른은 안 되냐? 하고 시비를 거는 조선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이때 당시의 조선총독부의 정무 총감인 오노 로쿠이치로(大野緑一郎, 1887-1985)라는 사람이 " 이렇게 많은 민원이
쇄도하니, 조선인이 일본 이름을 쓰고 싶다는데 우리가 그것까지 막을 필요가 뭐 있겠느냐? 일본 이름도 쓰게 해주
자" 바로 이것이 '창씨개명'의 시작입니다. 민족 말살 어쩌고 하는 따위 그런 엉터리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서 오키나와현(沖縄県)의 사례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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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이전까지는 오키나와가 류큐 왕국(琉球國)이라고 해서 독립왕국이었습니다. 그런데 메이지 유신 때인 1879
년 류큐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으로 만들면서 일본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키나와 사람들이 먹고살기 위
해 일본 본토로 왔는데 당시 오사카 일대 공장과 상점이 많은 그런 곳에 취업하러 갔습니다.
문제는 새롭게 일본인 된 오키나와가 예전 류큐국이라고 해서 조선과 똑같이 중국에다 책봉을 받고 조공을 바치는 나
라였고 한자를 사용한 나라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일본말도 못 하고 이름도 물어보니 조선처럼 중국식
으로 되어있으니 그때 일본 사람들이 오키나와가 이미 일본 땅이 되었는데도 얘네들이 아직 일본어도 잘하지 못하고
이름도 이상하니 오키나와 사람이라고 해서 일본 사회에서 차별받게 되지 않겠느냐 해서 오키나와의 학교에서는 일
본어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오키나와 사람들의 이상한 중국식 이름을 전부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게 했습니다.
바로 그 오키나와에서 썼던 제도를 조선에다 그대로 도입한 것입니다.
'창씨(創氏)'라는 것은 조선의 성을 일본식 '씨'로 바꾸는 것이고 '개명(改名)'이라는 것은 '이름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
래서 '창씨'는 의무적이었지만 '개명'은 별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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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1939년 11월 10일 미나미 지로(南 次郎, 1874-1955) 총독이 본국 정부와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조선에 일본
식 씨명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그러니까 일본 본국에서 "야 이거 무슨 이름까지 바꾸게 하냐, 조선 사람들이 전부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면 그게 조
선 사람과 일본 사람인지 구분이 되냐"고 반대했고 또 조선총독부의 관리들도 그런 식으로 이름을 바꾸면 어떻게 관
리를 하느냐 했고 치안을 담당하던 총독부 경찰들도 띠매고 반대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일본 정부 역시도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지금 우리가 정작 황국신민이니 내선일체라고 하면서 조선 사람도 일본 사람들과 동등한 예우
를 한다고 하면서 왜 조선 사람은 일본 사람과 이름이 달라야 하나? 불만이 많으니까 안 되겠다. 그래서 일본 사람과
똑같이 예우해 주고 이름도 일본 사람과 똑같이 만들자 해서 이 제도를 도입한 것입니다.
그래서 1940년 2월 11일~8월 10일까지 의무적으로 씨를 정해서 제출하라. '창씨(創氏)'는 의무적으로 하고 '개명(改
名)'은 너희 맘대로 해라. 이렇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 일본의 척식성(拓殖省) 관리들도 "일본 사람들은 차치하더
라도 조선 사람들도 반대한다던데 당신이 어떻게 하려고 이런 짓을 하냐"며 난리가 났습니다.
어찌 되었건 이 제도가 시행되면서 조선 사람들은 두 가지로 반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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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이야기 한 대로 필요 때문에 일본 이름이 필요한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자진해서 창씨를 했습니다. 그러나 "아니
내가 지금까지 써온 성씨를 누구 맘대로 바꾸라고 하는 거야?" 하고 극렬하게 저항 한 사람들도 있어서 어떤 집안에
서는 자살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총독부에서는 강제하는 게 아니라고 해명을 했고, 조선인들이 지금까지 계속 일
본식으로 이름 쓰게 달라고 민원을 넣어놓고 정작 하라고 했더니 또 마구 반발하니 일이 좀 이상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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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를 제출하는 기간이 1940년 8월 10일까지였는데 5월까지 참여율이 7.6%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렇다 보니 총
독부가 행정력과 경찰력을 총동원해서 협박 강요해서 신고 마감 때까지 79.3%가 참여했다고 학계에서는 주장합니
다.
이 과정에서 뭐 강제가 있었느냐 없었느냐 얘기를 하는데 강제가 왜 없었겠습니까. 창씨개명을 자발적으로 한 사람
도 있었지만, 창씨개명을 하기 싫다고 하면 통상 행정이라는 것은 새로운 제도가 도입되면 새 제도를 시행하기 위해
무언의 압력이 들어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현대의 백신패스 정책을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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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끝까지 신고하지 않은 20%가 있습니다. 이 20%는 원래 자기 성이 씨가 되어서 그것이 그대로 굳어져 버렸습니
다. 그래서 조선인들은 처음에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게 할 때는 왜 못하게 하느냐 우리도 일본 이름 쓰고 싶
다고 하더니, 소원대로 이제 이름 바꾸라고 하니 이제 또 반발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이러면서 창씨개명을 어떻게든
지 일본식으로 개명을 강제하는 무언의 압력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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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해방이 되고 창씨개명이 법적으로 폐지된 것은 1946년 10월 23일입니다. 미군정청 법령 제122호로 조선 성
명 복구령에 따라 창씨개명에 의해 바뀌었던 이름이 원래 본래 이름으로 돌아온 것은 해방이 되고 나서도 1년 2개월
후의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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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창씨개명을 조선인들이 반대했다고 하는 그 내면의 논리는 무엇일까요?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냈던 이성무 원
장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성씨 제도를 연구했는데 이분이 남긴 그 논문의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한국 족보
중 80%는 시조가 중국에서 온 사람이다"라고 기록을 해놨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주자 성리학에 따라 우리
는 중국이 되는 것이 가장 큰 영광이었던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야말로 사대 모화사상이 세계 우주관을 지배하고 있던 소중화라는 조선에서 "우리 조상은 중국에서 온 사람이다"라
고 하면 그만큼 그 집안의 권위는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성씨가 노(盧) 씨들입니다. 노씨들은 자기들이 강태공의 후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노 씨
중에 대통령이 두 명이 배출되었습니다. 노태우(盧泰愚), 노무현(盧武鉉).
중국의 노씨 집안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우리의 후손들이 조선으로 건너가서 대통령을 두 명이나 배출했다" 해서 노
태우 대통령이 퇴임한 후 2000년 6월 중국 산둥성 지난시 창칭구에서 열린 '세계 노 씨 대회'에 참가를 해서 '선조의 고
귀한 뜻을 높이 받들 것이다'라는 휘호를 써서 그것을 중국 노 씨 집성촌에 현판으로 걸어 놨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기가 대통령 재임 기간 중인 2003년 중국 저장성 둥양시 노택(盧宅) 관리위원들이 청와대를 방문
해 또 다른 종친 노무현 대통령을 예방하고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고, 지금도 우리나라의 노 씨 중앙종친회는 조상을
찾아가는 종친회 중국여행을 매년 두어 차례씩 주관한다고 합니다. 또 반기문(潘基文) 씨가 UN 사무총장에 올랐을
때 중국 허난(河南)성의 판(潘의 중국어 발음) 씨 집성촌에서도 야 우리 반 씨들이 세계의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하며
대잔치가 벌어지고 난리가 났습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족보를 들춰보면 우리는 모두 중국인입니다. 성씨만 그런 게 아니고 심지어 이름까지도 중국식으
로 창씨개명 했습니다. 그 증거를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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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조선 출범에 저항했던 성리학자 정몽주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름이 '몽주(夢周)' 입니다. 몽주라는 것은 '꿈
(夢)속에서라도 주(周)나라를 보겠다'라고 해서 '몽주'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조선 개국의 일등 공신인 정도전(鄭道傳)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을 풀이하면 도(道)를 전(傳)한다는
뜻인데 이 사람이 이야기하는 '도'라는 것은 주자 성리학의 '도'인데, 조선을 동주(東周)로 만드는 '도'를 전하기 위해 정
도전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성웅으로 떠받드는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아버지가 아들을 넷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을 아주 엄청나게
흠모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들들 이름을 지을 때 삼황오제의 이름을 한 글자씩 빌려다 이름을 지었는데, 삼황오
제란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요임금, 순임금 뭐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첫째 아들은 복희씨(伏羲氏)의 희(羲)자를 따서 희신(羲臣)으로 지었고 둘째는 요(堯)임금 이름을 빌려서 요신
(堯臣)이라고 짓고 세째는 순(舜)임금 이름을 따서 순신(舜臣)이라고 지었고 네째는 우(虞)임금 이름을 따서 이우신(虞
臣)으로 했습니다. 즉, 이런 것은 모두 중국식 이름입니다. 즉, 한국인들이 지금까지 쓰고 있는 현재의 이름은 중화 방
식으로 창씨개명을 해서 중국 문명에 투항한 결과물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제국이 망하고 일본인들이 들어와 가만히 보니 이것들이 지금 세상이 바뀌었는데 아직도 중국을
추종하는 이름을 쓰고 있네? "너희 이제 중국 세상은 끝나서 앞으로는 일본 세상으로 들어와라" 그렇게 해서 이름을
바꾼 게 창씨개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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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름을 바꾸라고 하는 주체가 조선인들이 그렇게 오매불망 상국으로 여기던 중화 문명의 중국이 아니라 그냥
게다짝이나 끌고 다니고 훈도시나 차고 다니던 오랑캐 왜놈이 감히 우리네 이름을 바꾸라고 하니까 짜증이 났고 저항
을 했던 것입니다.
일제시대 때 조선인의 80%는 창씨개명을 했지만 20%는 끝까지 창씨개명을 안 했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중화 방식
을 고수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미국이나 유럽에 가서 한자로 된 이름으로 된 명함을 주면 "중국 사람이세
요?" 하고 묻습니다. 즉, 이름만 가지고는 중국인인지 한국인인지를 구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조선 사람들은 초기에 소중화라는 세상 속에서만 살다가 결국 명나라가 망하고 드디어 청나라가 들어섰습니다. 하지
만 조선 양반들이 생각하기에 저 위대한 중화 문명이 청나라 오랑캐 야만인에게 갔을 리가 없다. 따라서 중화 문명의
정수는 오매불망 중국을 사랑하는 조선으로 강림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선의 소중화 주의는 이후 조선 중화주
의로 발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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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중국에서는 이미 모두 없어진 주자 성리학적인 '제사제도', '족보 제도' 이런 것을 한국이 더 잘 유지하고 있습
니다. 심지어 빼도 박도 못 하게 한국인들의 족보의 80%가 모두 자기 조상이 중국에서 왔다고 써놨습니다. 그리고 지
금 우리가 쓰고 있는 본관과 성으로 되어있는 우리네 이름조차도 사실 우리의 것이 아니라 중국 것이라는 사실입니
다.
이렇게 되어있으니 중국 지도부가 이런 것을 보고 "한국 너희들은 대체 뭐 하는 놈들이냐?, 너희들 족보를 봐라. 너희
들의 뿌리는 중국 사람이다. 즉 중국인의 후예들인데 무슨 엉뚱하게 한미동맹 따위를 하나? 빨리 한미동맹을 깨고 나
와서 중화의 본고장인 중국에 투항하라!." 이것이 '한중동조론' 입니다.
19 4 ♣My Identity♣
당시 조선 사람들이 일제시대 창씨개명에 대해 그렇게 발끈하고 나선 이유가 무엇일까요? 삼국시대만 해도 사람들
이름이 뭐 '연개소문' 이나 '거칠부' 그랬습니다. 중화의 방식으로 조선인들은 전부 창씨개명을 했는데 일본 사람들이
일본방식으로 하라고 그러니까 모두 들고 일어나서 반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중국이 저런 식으로 대한민국을 모욕하는 얘기를 대놓고 해도 우리가 중국에 대해 뭐라고 항의하고 규탄
한 적 있습니까? 그에 반해 일본에서 뭐 요만한 얘기만 나와도 온 국민이 그냥 길길이 날뛰면서 불매운동을 하면서 가
지 않습니다. 사지 않습니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창씨개명이란 이름을 어떤 식으로 바꾸겠다는 그 시도는, 조선인이 중화 문명과 일본 문명의 중간에 서서 어디로 가
야 하는지에 대해 가늠하는 하나의 시험대였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해야 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박완서 씨 본인의 체험에 의하면 일제시대 때 일본 담임 선생님이었지만 어린 박완서가 창씨개
명 안 해도 너 왜 창씨개명 안 했어 하고 불러서 때리거나, 창씨개명 하라고 협박을 당한 사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창씨개명하게 해달라고 자기네들이 다 원해 놓고 조선인들은 대체 왜 그랬을까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배후에는 우
리는 이미 중국 방식으로 창씨개명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19 4 ♣My Identity♣
우리는 냉정하게 현재 우리의 좌표는 뭐고 우리가 서 있는 저희 현실은 어디인지? 우리가 지금 이렇게 단발을 하고 양
복을 입고 휴대전화 하나씩 다 들고 다니지만, 아직도 우리의 인식 속에는 조선 시대의 도포 자락 휘날리던 그 시대의
DNA가 고스란히 살아있는 것은 아닌지 냉정한 자기반성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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