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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8

希修 '영성'? '깨달음'? '道'?


希修 < '영성'? '깨달음'? '道'? >
'영성', '깨달음', '道' 같은 단어들은 그야말로 텅 빈 기표가 된 것 같다. 말하는 이마다 뜻하는 바가 각기 다르고, 때로는 그저 신비주의만 풍길 뿐 자신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본인 스스로도 설명을 못 하니. 그런 것들이 상식이나 논리의 차원을 초월하기에 언어만으로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해도 설명이 아예 불가능하다면, '벌거벗은 임금님의 멋진 옷' 같은 詐欺나 환상/망상과 어떻게 구분하겠는지. 그래서, 어디까지나 나의 현재 이해 수준에서의 초기불교 관점을 소개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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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통력은 선정 (정신의 집중으로 인한 고요함. 지혜 계발의 조건이지 지혜 자체는 아님)에 수반될 수도 안 될 수도 있는 side effect일 뿐이고 지혜와는 무관하다고 분명하게 못을 박고 있는 초기불교와 달리, 타인의 심리가 어떤 상태인지, 기가 몸안 어디서 어떻게 막혀 있는지, 어디에 어떤 龍 혹은 귀신이 있는지 등을 보는 것, 특수한 감각이나 질병 치유 능력을 '영성', '깨달음', '道'라고부르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도, 한 번 재배하고 나면 땅의 힘을 소진시켜 몇 년간 땅을 쉬게 해야 한다는 인삼을 매일 먹어 가며 건강/젊음에 집착하는, 마치 보톡스 중독자의 젊음 집착과도 전혀 다르지 않은 자기 자신의 그 이기적 욕심 ('無爲', '無心', '대자연의 섭리'에 모두 거스르는)은 보지 못 한다. 이렇듯 자신의 욕망조차 보지 못 하는 수련법이라면, 그 어떤 신통력/특이공이 가능한들 그걸 '기술' 아닌 '영성', '깨달음', '道' 등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런지 나는 회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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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떤 이들은 자기 내부의 '참 나 (true self)'를 찾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얘기하는데, 결국 인도 베다전통에서 말하는 브라만-아트만이 그 뿌리. 대승불교에서는 이것을 '佛性'이라고 단어만 바꿨고. 각 존재 하나 하나가 神 (Consciousness)의 일부 (프랙탈 개념)인데 '자신이 神이라는 사실' (혹은 '자신이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기에 그 망각만 일깨우면 된다는 얘기. 그렇기에 Advaita 혹은 Nondualism이라고도 불리는 이 전통에서의 수행이라는 것은 '이승에 국한된 자아인 ego'가 하는 모든 생각을 버리고 'I am'을 되뇌임으로써 잠자고 있는 神性/佛性을 깨우는 것. 그리고 이런 철학을 이어 받은 뉴에이지는 미국에서 자기계발과 결합하여 "너는 신이기 때문에 너 자신의 감정을 신뢰해야 하고, 너는 신이기 때문에 니가 스스로를 믿기만 하면 며칠만에 백만장자도 될 수 있다!"라는 현대판 기복신앙을 낳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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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부처님은, self의 관점이나 no self의 관점에서 매사를 생각하는 일을 그만두고 오직 skillful-unskillful과 cause-effect의 두 관점에서만 생각하라고 하셨다. 초기불교에서의 '깨달음'이란, 팔정도 (초기불교에서 '道'는 팔정도를 가리킬 뿐 '대자연의 신비/섭리'가 아님)의 전체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가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사실임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즉, '부처님은 이렇다고 했는데 진짜 그런지 안 그런지 어디 한 번 보자'의 단계를 거쳐 '아~ 이래서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하셨구나! 그게 바로 이 얘기였구나! 이제 보니 진짜네!'하고 direct knowledge를 얻는 것을 말한다. 45년간 부처님이 남긴 가르침을 사성제라는 단어로 대표하기도 하고, 그러나 핵심 교리는 12연기이기에, "사성제를 깨닫는다", "12연기를 깨닫는다"고 표현해도 틀린 얘기는 아닌데, 암튼 중요한 것은 현상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재발견 혹은 확인하는 것 - 단순히 논리적 이해에서 그치지 않고. 다시 말해, 신비적인 게 전혀 아니라는 얘기다. (당신의 가르침은 "쥔 주먹"이 아니라 "편 손바닥" 같은 것이어서, 비밀스러운 것도 신비적인 것도 없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Direct knowledge까지 얻고 난 후! 모든 관념과 노력마저도 놓는 것은 '윤회라고 불리는 강의 건너편=해탈에 다다랐으니 이제 뗏목에서 내림'인 것이고. (무조건 생각/이성을 버리라고 말하는 다른 전통들과 달리, 강의 건너편에 도달도 하기 전에 생각/분별을 포기하면 평범한 인간보다도 의식수준이 오히려 더 낮아져 축생으로 윤회할 뿐이라고 아비담마는 가르친다. 분별력/통찰력 없는 평정심은 동물의 마인드일 뿐 '영적인' 것이 아님.) 요약하여, 선정의 도움을 받아 지혜를 계발( =탐진치 제거)해 나가다 보면 direct knowledge를 거쳐 해탈하는 것이고, 신통력은 지혜나 해탈과는 별개라는 것이 초기불교의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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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깨달음'을 초기불교에선 4수준으로 나누는데, 첫번째 수준의 깨달음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지적 이해가 필수) 없이 선정만 닦아 무색계에 태어날 경우, 무색계에선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할 수 있는 몸이 없어 영원에 가까운 그 세계의 미아가 되는 형국이 됨. 그 이후로는 아래 차원으로 떨어질 테고. 지적 이해나 분별력/통찰력 계발 없이 선정만 닦는 어리석음에 동반되는 첫째 위험. 둘째 위험은 走火入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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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통은 불교라는 단어를 들으면 '자비'를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초기불교에서 '자비'는 업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달린 것이며, '선행'이나 '사랑'이라는 의미로 흔히 오해!하는 '자비'는 우리를 해탈시켜 주지 못 함. 탐과 진도 어리석음/치에서 기인하고 해탈 직전의 최후/최고 차원에까지 남아 있는 것 역시 어리석음과 들뜸. 그렇기에 해탈은 궁극적으로 '지혜'의 계발에 달려 있음.
(2) '지혜'의 정확한 의미는, 흔히 생각하듯 '보고도 못 본 척, 알아도 모르는 척, 이길 수 있지만 져 주는' 그런 condescending한 처세술이 아니라, '탐진치 없는 분별력/통찰력'을 뜻함. '생각 없음'이 미덕이 아니고 무조건 '긍정적'으로만 생각하는 것도 미혹/망상/게으름이며, '해로운 마음부수'에 물들지 않은 생각/사유인가?가 중요한 것.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942321206139963&set=a.906304756408275&type=3&theater)
(3) 모든 존재가 각자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한 최대 '피해자'가 되며 그 누구도 자기 업의 결과를 비껴갈 수 없다는 이 사실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바로 세상 모든 존재들에 대한 '자비'의 근원. Compassion이라는 것은 환자를 대하는 의사의 마음과도 같다고 틱낫한스님은 말씀하셨는데, 상대의 어리석음=병균을 어리석음=병균이라 보아야 상대의 질병=고통에 도움을 줄 수 있지, 상대의 어리석음을 부인/합리화해 주는 人情은 '자비'가 아님. 아기 잃은 젊은 어머니가 울며 석가모니 부처님을 찾아왔을 때 부처님이 하신 일은, 아기를 살려 주거나 함께 울어 주거나 그 여인을 따뜻하게 위로해 준 것이 아니라, "마을에 내려가 일가친척 아무도 죽은 적 없는 집에서 겨자씨를 얻어 오라"고 말한 것.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 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해탈 후 돌아가실 때까지 무려 45년간 온갖 오해와 모욕 속에서도 끊임없이 가르침을 펼친 것. 이런 것이 바로 부처님의 '자비'.
(4) 분별력/통찰력 없이 마음이 무디고 게으른 데에서 기인하는 '좋은 게 좋은 거' 식의 평정심/人情은 불교에선 오히려 '악'. (불교에서 '선'/'악' 개념은 해탈에 도움이 되는가?, 즉 지혜가 그 기준.) 살면서 지은 과보는 현생에서든 내생에서든 받게 되지만, 어느 차원/세상으로 윤회하느냐는 죽을 때의 의식상태가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데, '분별력/통찰력 없는 평온'은 惡處로의 윤회를 이끈다고. 숨거두는 순간까지 욕심/집착이나 증오/원한을 마음에 품고서 죽는 것이 물론 최악이고, 생전에 지혜를 안 닦아 정신이 흐린 상태로 '평온'하게 죽는 것도 악처로 윤회한다고. (실제로 대부분의 인간이 다음 번에 축생으로 태어난다 함.) 분별력/통찰력이 남아 있을 때 선정에 들어 그 상태에서 죽거나, '내 몸 = 나'라는 집착을 놓고서 몸의 감각이 사라지고 숨이 끊어져 가는 것을 관찰/관조하면서 눈감으면 이상적. (평소 수행 안 했는데 임종 닥쳐 갑자기 이게 될 리는 물론 만무.) 그러므로 임종이 가까운 환자 곁에서 울거나 소란/심란하게 하면 안 된다고.
(5) '축생'하면 우린 보통 포유류나 조류만 생각하지만, 글자 그대로 모든 형태/종류의 생명체를 전부 합해야.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얼마나 드물고 귀한 기회인지 알 수 있음.
(6) 의식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묶이지 않기에, 인간으로 살면서도 선정 (정신의 집중으로 인한 고요함. 분별력/통찰력 계발의 조건)을 통해 다른 차원을 경험할 수 있다고. 다만, 자신의 근기를 실제로 극복하고서 한 차원 상승하여 윤회하기는 단순 '경험'보다 훨씬 어려우며, 해탈은 궁극적으로 선정 아닌 지혜에 달려 있음. 어쩌면 저 31개 차원들이 물리적으로 서로 동떨어진 공간에 존재하다기보다 라디오 주파수들처럼 겹쳐서 존재하는데 인간의 감각+의식으로는 다른 차원을 감지 못 하는 것일 뿐인지도. 똑같이 인간계에 살아도 보다 높은 수준의 의식을 유지하며 사는 사람이 '우월'하고, 낮은 의식 수준의 생명을 죽이는 죄보다 높은 의식 수준의 생명을 죽이는 죄가 더 무거움.
(7) 눈에 보이는 인간/동물 이외의 존재들을 무조건 神/靈이라고 우린 부르지만, 어느 특정 神/靈이 저 많은 차원들 중 대체 어느 차원의 존재인지 그 누구도 알 방법이 없음. 어떤 무당/종교가 말하는 神/靈이 실은 인간보다도 저열한 존재인 아수라/아귀일 수도 있는 것이고, 인간보다는 좀 '우월한' 존재라 해도 여전히 인간처럼 감각적 욕망의 노예일 뿐인 그런 '허영 덩어리'의 神/靈일 수도 있는 것. 그러니, 神/靈과 소통할 수 있는 靈媒 (medium, channeler)라고 해서 평범한 인간보다 '영적으로 우월한' 존재도 아니고, 그런 '능력'이나 神/靈 숭배가 지혜/해탈에 도움이 되는 것도 전혀 아님. 소위 말하는 영적 체험과 신통력은 선정의 side effect ('지혜'의 side effect도 아닌 '선정'의 side effect)이며 전생과 관련있을 뿐 지혜 자체와는 무관하니, 영적 체험이나 신통력에 아무 의미도 두지 말 것을 아비담마는 강조. ('영성'이라는 것에 대해 신비주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으면, 잔재주로 사람 현혹하는 사이비에 넘어가거나 주화입마 걸리기 십상.)
(8) 암튼 초기불교에 의하면, 내게 잘못한 이를 내가 용서해 준다고 해서 그가 그 악업으로부터 해방되는 것도 아니고 제사를 지내 준다고 해서 좋은 곳으로 윤회하는 것도 아니며, 업과 윤회에 영향을 끼치지 못 함. 그러니 각자 자기 수행에 집중하라고, 수행보다 더 큰 '선업'은 없다고 초기불교는 가르침. 무려 부처님조차 타인을 구해 줄 수 없다고, 당신을 구원하는 건 오로지 당신 자신의 수행뿐이라 하셨음.
(9) 중국 도교에만 있는 줄 알았던 龍이 불교에도 나오니 재밌는데, #5 인간계 바로 위 #6 매트릭스인 사대왕천 신들이 龍을 지배한다고. (기공하시는 분들은 용을 키우네 뭐네 이런 말들을 실제로 하심. 그땐 뭔소린가 했었음.) 또 어떤 분 말씀으로는 陰陽 원리는 욕계에서만 작용한다고.


6You, 崔明淑 and 4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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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in Kang

명쾌합니다! 아직도 불교 공부하려면 한자를 잘하고 불교한자를 제대로 익혀야한다고 믿는 분들이 태반이니... 한국어로 초기불교 소개하시는 분들도 결국 한자어에 의존 안 할수는 없는 노릇이거든요

2020-06-14

Kang-nam Oh - ‘바른 말[正語]’

(1) Kang-nam Oh - ‘바른 말[正語]’ 미래통합당 원내대표 배현진 의원이 6월9일자 논평에서 북한 김여정의...





Kang-nam Oh
4 hrs ·



‘바른 말[正語]’

미래통합당 원내대표 배현진 의원이 6월9일자 논평에서 북한 김여정의 하명(下命)에 한국 정부가 굴종적 태도를 보이는데, 국민들이 분노하는 것은 이런 하명에 순응하는 우리 정부의 태도라고 하였다. 야당 대변인의 입에서 나오는 이런 험악한 발언을 듣게 되니 21대 국회는 뭔가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가 허물어지는 것 같은 허탈감을 느끼게 된다.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는 속담이 있다. 이 속담을 생각하니 부처님이 가르치신 “바른 말”이라는 것이 생각난다.

부처님이 성불하시고 처음으로 가르치셨다는 것이 이른바 ‘네 가지 진리와 여덟 겹의 바른 길’[四諦八正道]이다. 네 가지 진리란 삶이 괴로움이라는 것, 그 괴로움은 집착에서 온다는 것, 집착을 끊고 괴로움을 없앨 수 있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따라야 할 길이 있다는 것, 줄여서 고집멸도(苦集滅道)라고 한다. 그리고 이 길이 바로 ‘여덟 겹의 바른 길’(八正道)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따라야 할 여덟 겹의 바른 길 중에는 ‘바른 말[正語]’을 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전통적으로 바른 말이란 거짓이 없이 진실한 말, 시의적절한 말, 경우에 합당한 말, 남에게 용기를 주는 말, 뒤에서 수근 거리지 않는 말, 불화를 가져오지 않는 말 등을 뜻한다고 한다. 이 중에서 요즘 특히 내 마음에 와 닿는 대목은 바른 말이 바로 ‘불화를 가져오지 않는 말’이란 풀이이다.

아무리 진실한 말이라고 하더라도 그 말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고 사회에 분란이 생긴다면 그 말은 ‘바른 말’일 수가 없다고 하는 해석이다. 결국 어느 말이 바른 말이냐 바르지 못한 말이냐 하는 것을 판가름하는 최종의 기준은 그 말 때문에 우리 주위에 화해와 사랑과 평화의 분위기가 생기는가, 불화와 미움과 반목의 싸늘함이 조장되는가 하는 데 달렸다는 뜻이다.

물론 불화를 가져오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해서 비판적(critical)이기를 그만 두라는 뜻은 아니다. 비판적 태도가 없는 사회는 성숙하고 창조적인 사회일 수 없다. 부처님 스스로도 우리에게 무비판적인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다만 비판을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사이에 평화와 화해의 다리를 놓는 건설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기에 앞장서기로 된 종교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일상적으로 하는 말의 영향력이 큰 정치인들이나, 또 말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언론도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 기울일 수 있다면 우리 주위가 어떻게 달라질까?

“주님, 저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삼아주시옵소서.
미움이 있는 곳이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불화가 있는 곳에 하나 됨을,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참됨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씨 뿌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 프란체스코의 이런 기도도 결국 우리 중에 화해와 사랑과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는 염원을 읊은 게 아니었던가? 너무 고매한 말을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까지 든다.

배현진 의원 뿐 아니라 바른 말을 하지 못한 20대 국회의원들이 대거 낙선된 이번 4.15 총선의 민의를 읽을 줄 아는 의원들이라면 더욱 생산적인 21대 국회를 위해 입이 비뚤어졌어도 바른 말을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입이 비뚤어져 있지 않다면 더더욱 그러해야 하지 않겠는가. *




95강길모, Woo Fa and 93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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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구 그것들은 마음도 비뚤어져이습니다


Jeonglyeul Jang 그러게 말입니다!


이우송 천성 버리기가 그래서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처음 길(배움)을 잘못 든데다 자성의 기회마저 없으면 벌거벗은 임금으로 살다 끝나지 않을는지요.


황호건 창 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말은 상대를 빛나게 합니다. 상대에게 말했을 때 그 말이 그에게 빛을 발할 수 있는 불씨가 되고 그 불씨를 살려 더욱 빛을 발하게 하는 말, 살리는 생명의 빛이 되는 말을 합시다. 상처를 주고 비난하며 헐뜯어 혼란을주고 어둠을 주고 허무를 주는 말은 말이 아니라 개 짖는 소리 입니다.
배현진 같이 하는 말은 썩을 잡 것 암캐 짖는 소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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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호 나베라는 성가신 모기를 탁 잡았더니 그자리에 지니라는 모기가 또 나타나 윙윙거린다 어째야쓰까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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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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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택희 제임스강 참으로 동감이오~~~
진정 보수다운 보수가 태동하길 바랍니다.

김구나 안중근이 다시 오셔서라도!



장택희 대깨문이란 소리를 듣더라도
할 말은 하자며

하루 한두건 정도
페북 포스팅을
대사회 발언의 창구로 삼고 있는데...

'불화를 가져오지 않는 말'...
곰곰히 새기며 노력해 봐야겠습니다.


팔정도를
새삼 일깨워 주셔서 고맙습니다.

성 프란체스코 기도문도요!^&*

Ps. *되새길 부분은...

아무리 진실한 말이라고 하더라도 그 말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고 사회에 분란이 생긴다면 그 말은 ‘바른 말’일 수가 없다고 하는 해석이다. 결국 어느 말이 바른 말이냐 바르지 못한 말이냐 하는 것을 판가름하는 최종의 기준은 그 말 때문에 우리 주위에 화해와 사랑과 평화의 분위기가 생기는가, 불화와 미움과 반목의 싸늘함이 조장되는가 하는 데 달렸다는 뜻이다.

물론 불화를 가져오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해서 비판적(critical)이기를 그만 두라는 뜻은 아니다. 비판적 태도가 없는 사회는 성숙하고 창조적인 사회일 수 없다. 부처님 스스로도 우리에게 무비판적인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다만 비판을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사이에 평화와 화해의 다리를 놓는 건설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김시철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가르침을 받고 갑니다.

2020-05-02

정토 사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정토 사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정토 사상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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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e Land Mandala (Kyushu National Museum).jpg
정토 사상(淨土思想)은 아미타불과 같은 부처나 미륵보살과 같은 보살들이 거주하고 있는 청정한 세계인 정토(淨土 · Pure land)에 대해 전개된 대승불교의 사상이다.

개요[편집]

오늘날 일반적으로 정토라고 하면 아미타불의 극락정토(극락)를 지칭하는 것으로 일반화되어 있으며,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는 가르침이 정토교(淨土敎 · Pure Land Buddhism)이다.[1] 즉, 일체의 번뇌와 더러움을 벗어나 오탁(五濁)과 지옥·아귀·축생의 삼악도가 없고, 부처님이나 보살이 사는 청정한 국토에 왕생하여 깨달음을 얻는다고 설하는 종교이다.
대승불교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교의 또는 관념은 반야의 지혜와 부처의 자비이다. 이 중에서 자비의 관념은 모든 부처들의 중생구제(衆生救濟)의 뒷받침이 되는 관념이다.[1] 타력 신앙에 속한, 윤회하고 있는 중생을 구원하는 자비로운 부처라는 구제불(救濟佛) 사상이 일어난 것은 불탑(佛塔)을 신앙하는 재가(在家)의 사람들이 스스로는 교법(敎法)의 실행을 할 수가 없으나 부처의 자비로 구원을 받고 싶다는 종교적 욕구에 응한 것인데, 이들 구제불이나 보살들이 사는 곳을 정토(淨土)라 하였다.[1]
예를 들어 아미타불의 서방극락정토(西方極樂淨土), 약사불(藥師佛)의 동방정유리세계(東方淨瑠璃世界), 미륵불(彌勒佛)의 도솔천관음보살의 보타락산(普陀落山) 등이 정토의 예이다.[1] 이들 특정한 정토들에 대해서 현실세계를 청정하지 못한 세계, 즉 예토(穢土)라 한다.[1]
그러나 대승경전인 『유마경』(維摩經)을 보면 "만약 보살이 정토를 얻고자 원한다면 우선 그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한다.[1] 마음이 깨끗하면 정토도 깨끗하다"라고 설명되어 있듯이, 마음만 청정(淸淨)하면 예토나 정토나 모두 같은 것으로 되어 있다.[1]

전해오는 이야기[편집]

불교에서는 세속인이 살고 있는 사바(娑婆) 세계인 예토(穢土)와 대비되는 곳으로서 부정잡예(不淨雜穢)가 사라진 청정한 불국토(佛國土)라고 한다. 자연 환경이 좋고 물질이 풍부하여 개개인의 인격 완성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는 모든 환경과 조건을 갖춘, 부처가 마련한 큰 불도 수행의 도량으로 누구나 다 성불하여 지혜와 자비를 완전히 실현할 수 있는 곳이다.
불경에서 말하고 있는 정토에는 미륵정토, 약사여래의 유리광 세계, 비로자나불의 연화장 세계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서방 극락정토이고 아울러 이러한 정토에 태어나겠다는 것이 정토신앙인데, 이는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에 근거한 것으로 부처의 본원력(本願力)에 의지하여 정토왕생하려는 것이다. 대표적인 정토신앙이 극락 왕생을 위한 아미타 신앙으로 『무량수경』(無量壽經)・『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아미타경』(阿彌陀經)의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 잘 나타나 있다.
아미타불은 서방 극락정토에서 설법하고 있는 부처로서 산스크리트 아미타유스(Amitāyus) 또는 아미타바(Amitābha)를 소리나는 대로 적은 것으로 아미타유스는 무량수, 아미타바는 무량광(無量光)으로 번역하고 있다. 아미타불은 부처가 되기 전 48서원(誓願)을 세웠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18원으로 “지극한 마음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열번만 불러도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해 극락 왕생할 수 있게 한다.” 는 것이다.
이는 염불왕생(念佛往生)의 원이라고도 하여 정토신앙 형성의 핵심이 되는 구절임. 중국에는 2세기경부터 정토 관계 경전이 번역되기 시작하여 5세기경에는 거의 모든 경전이 번역되었고, 선도(善導)는 『정토삼부경』을 중심으로 중국 정토교를 대성시키고 있다.
한국에서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원광(圓光)이 처음으로 정토사상을 도입했다고 추정되고 있는데, 그 뒤 자장(慈藏)・원효(元曉)・의상(義湘)・의적(義寂)・태현(太賢)・경흥(憬興) 등을 통하여 활발한 교학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아울러 정토신앙은 쉽게 실천할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민간에 널리 전파되었다.
당시 신라는 계속된 전쟁 속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릴 때 아미타불은 그 두려움을 없애줄 뿐만 아니라 죽은 자를 극락왕생시킨다는 믿음으로 민간에 널리 퍼져 나갔으며, 아울러 『삼국유사』에 전하는 많은 설화를 통해서도 당시에 유행했던 아미타신앙을 엿볼 수 있다. 이렇듯이 불교에서는 낙원을 정토로 지칭하며 부처·보살이 가는 청정(淸淨)한 세상으로 곧 불교의 이상사회를 말한다. 이곳은 자연적 환경과 물질적 풍요를 누릴 뿐만 아니라, 누구나 자비와 지혜로 충만한 삶을 사는 사회라고 전해지고 있다.[2]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 이동:       종교·철학 > 세계의 종교 > 불 교 > 불교의 사상 > 초기 대승불교의 사상 > 정토사상,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2.  『삼국유사(三國遺事)』,『신라정토사상사(淨土思想史)연구』(안계현, 아세아문화사, 1979),『정토사상(淨土思想)』(홍윤식, 한겨레출판사, 1980),「신라백월산이성설화(新羅白月山二聖說話)의 연구」(김영태, 『불교사학논총』, 1965),「신라의 미타사상(彌陀思想)」(김영태, 『불교학보』 12, 1975) 참고

참고 문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