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재봉 「한국인의 탄생」 65회
<에도 시대 일본 경제의 성장과 메이지유신> 요약·평론
65회는 앞의 63·64회에서 다룬 메이지유신의 정치적 배경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왜 일본은 서양의 충격이 왔을 때 조선보다 훨씬 빨리 근대화로 전환할 수 있었는가>를 경제적 측면에서 설명한다. 함재봉의 핵심 주장은 분명하다.
<메이지유신은 1868년에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도쿠가와 250여 년 동안 축적된 상업화·도시화·농업생산력·시장경제가 물질적 토대를 제공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동시에 역설적으로 막부가 조슈·사쓰마 같은 도자마 번을 정치적으로 억압한 결과, 중앙의 막부는 경제적으로 약해지고 주변 번들은 오히려 경제력과 군사력을 키우게 되었다고 본다.
1.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이 갈라진 길
강연은 임진왜란에서 시작한다.
함재봉은 임진왜란이 조선에 막대한 인명·재산 피해를 입혔을 뿐 아니라 이후 조선 경제가 이전 수준으로 충분히 회복하지 못했다고 본다. 반면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정권이 무너지고 도쿠가와 막부가 성립하면서 정치질서 자체가 근본적으로 재편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차이가 발생한다.
조선에서는 왕조와 정치체제가 기본적으로 유지되었다. 따라서 임진왜란 이전의 질서, 특히 중국과의 관계와 기존 사회구조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서
<정치질서 → 경제질서 → 사회질서>
가 함께 변화했다.
함재봉은 이 차이가 훗날 19세기 서구의 충격에 대한 양국의 대응능력을 갈라놓았다고 주장한다.
2. 에도 경제를 움직인 뜻밖의 제도 ― 참근교대
이번 회에서도 참근교대가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막부가 참근교대를 만든 본래 목적은 다이묘를 통제하는 것이었다. 다이묘와 가족이 에도에서 장기간 생활하게 하고, 정기적으로 영지와 에도를 오가게 만들어 재정적으로 부담을 주었다.
그런데 함재봉은 이 제도가 예상하지 못한 거대한 경제적 결과를 만들어 냈다고 설명한다.
수백 명의 다이묘와 그 가족, 수행원들이 에도에 살게 되자 거대한 소비시장이 탄생했다.
필요한 것은 단순한 식량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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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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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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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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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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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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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와 공예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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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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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과 오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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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사치품
등에 대한 수요가 폭발했다.
즉 막부가 정치적 통제를 위해 만든 제도가 시장경제를 확대시킨 것이다.
함재봉이 보는 에도의 핵심은 이것이다.
<권력이 소비를 강제했고, 그 소비가 시장을 만들었다.>
3. 에도와 오사카 ― 정치의 도시와 경제의 도시
다이묘들은 자기 번에서 생산한 쌀과 특산물을 가져와 에도 생활비로 사용해야 했다.
그러나 쌀을 그대로 가지고 소비할 수는 없었다. 결국 상품을 돈으로 바꾸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오사카가 발전한다.
각 번의 창고가 오사카에 설치되고 쌀과 특산물이 거래되었다. 함재봉은 오사카가 사실상 일본의 상업 중심지, 에도가 정치·문화의 중심지로 분화했다고 설명한다.
강연 3쪽에서는 18세기 에도의 소비경제가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상당히 인상적인 숫자들을 제시한다.
연간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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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만 통의 사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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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 통의 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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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만 개의 장자꾸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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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600개의 책 대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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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6,000개의 음식점
이 존재했다고 말한다.
또 1730년대에는 에도 인구가 100만 명을 넘어섰다고 설명한다.
숫자의 정확한 통계적 의미와 범위는 별도의 검증이 필요하지만, 함재봉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근대 이전의 일본은 결코 정체된 농업사회만이 아니었다.>
4. 사무라이가 부유한 소비자가 되면서 발생한 역설
에도 경제 발전을 이끈 계층은 역설적으로 다이묘와 사무라이였다.
그런데 이들은 직접 생산하지 않았다.
막부는 전쟁을 끝냈고 일본은 약 250년 동안 큰 내전을 겪지 않았다. 따라서 원래 전쟁을 수행해야 했던 사무라이는 점차 관료화되고 소비계층이 된다.
함재봉은 이 과정에서 사무라이의 <무사정신>이 약화되었다고 묘사한다.
전쟁할 필요가 없어졌고, 에도에서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고 책과 연극을 즐겼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 생활을 유지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다이묘와 사무라이는 상인에게 돈을 빌리기 시작한다.
여기서 신분과 경제력의 역전이 발생한다.
사회적 지위에서는
<사무라이 > 농민 > 장인 > 상인>
이라는 유교적 질서가 유지되었지만 현실 경제에서는 가장 천대받던 상인이 점점 강력해졌다.
즉
<명목상의 권력은 무사에게 있고 실제 자금력은 상인에게 있는>
사회가 형성되었다.
5. 장인과 상인의 사회적 상승
에도의 소비가 커지면서 장인들도 새로운 지위를 얻게 된다.
다이묘와 사무라이들이 화려한 생활을 하려면 고급 가구, 의복, 도자기, 장식품이 필요했다.
따라서 장인들은 단순한 천민적 생산자가 아니라 전문적인 상품 제작자로 발전한다.
함재봉은 이를 조선과 대비한다.
조선에서는 장인의 신분적 지위가 낮았지만 일본에서는 시장과 계약을 통해 장인들의 경제적·사회적 지위가 상승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은 이후 일본 산업화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 함재봉의 암묵적인 설명이다.
<수요가 기술을 만들고, 기술이 다시 경제를 키웠다.>
6. 농촌도 시장경제 속으로 들어갔다
이번 회의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는 에도 경제의 발전이 도시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도시에 집중된 다이묘·사무라이·상인에게 식량과 원료를 공급해야 했기 때문에 농업생산도 증가했다.
농민들은 단순히 먹고살 만큼 생산하는 데서 벗어나 판매를 위한 농산물을 생산하게 된다.
함재봉은 새로운 종자와 작물, 관개사업, 농업기술의 발전이 경쟁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한다.
그 결과 19세기에는 쌀 생산량이 에도 초기보다 크게 증가했다고 한다.
외국인 방문자들이 일본 농촌의 풍요로움을 보고 놀랐다는 사례도 소개한다. 간토 지방의 농촌이 잘 경작되고 풍족하며 영국 농촌보다도 훌륭해 보였다는 당시 외국인의 관찰을 언급한다.
함재봉이 강조하는 것은 <농업과 상업의 연결>이다.
농촌이 시장에 상품을 공급하고 시장에서 돈을 벌어 다시 도시상품을 소비하면서 일본 전체에 화폐경제가 확대되었다.
7. 그런데 막부는 왜 점점 가난해졌는가
여기서 이번 강연의 가장 중요한 경제적 역설이 등장한다.
<일본 경제 전체는 성장하는데 도쿠가와 막부의 재정은 오히려 악화된다.>
이유는 세금제도의 경직성이다.
막부가 전국의 생산능력을 평가해 각 번의 <고쿠다카(石高)>를 정했는데, 이후 실제 농업생산력이 증가해도 공식적인 세금 기준은 충분히 조정되지 않았다.
강연에서는 대표적인 사례로 사쓰마와 조슈를 든다.
사쓰마는 공식적으로 약 77만 석의 번이었지만 실제 생산력은 약 86만 석을 넘어섰다고 하고, 조슈 역시 공식 석고는 약 36만 9천 석이었으나 실제로는 약 71만 석에 달했다고 설명한다.
즉
<경제가 성장해도 정부가 그 증가분에 충분히 과세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중앙정부의 재정력은 상대적으로 약해지고 지방 번과 상인사회의 경제력은 강해졌다.
8. 조슈·사쓰마가 오히려 강해진 이유
64회에서 함재봉은 도쿠가와 막부가 조슈와 사쓰마를 정치적으로 철저히 견제했다고 설명했다.
65회에서는 그 견제가 예상하지 못한 반대 결과를 낳았다고 설명한다.
세키가하라 이후 조슈와 사쓰마는 영지를 빼앗겼다. 그러나 기존에 자신들에게 충성하던 사무라이들을 대량으로 해고하지 않았다.
작아진 영지에 많은 사무라이가 남았다.
이들은 도시에서 먹여 살리기 어려웠기 때문에 농촌으로 내려갔다.
그래서 조슈와 사쓰마에는 농촌에 거주하면서 농민과 함께 생활하는 <향사(鄕士)> 계층이 대규모로 생겨난다.
이들이 훗날 메이지유신의 중요한 인적 기반이 된다.
강연은 사이고 다카모리, 기도 다카요시, 사카모토 료마 등과 연결되는 하급 무사세력에 주목한다.
9. 도쿠가와는 약해지고 적대 번은 강해진다
함재봉은 상당히 흥미로운 구조적 역설을 제시한다.
도쿠가와는 조슈와 사쓰마의 땅을 빼앗아 약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경제를 개혁하고 실제 생산력을 증가시키면서 경제력은 다시 커졌다.
동시에 충성스러운 사무라이 집단도 유지했다.
반면 도쿠가와 직할지역의 사무라이 숫자는 상대적으로 적고 사무라이들은 장기간 평화와 도시생활 속에서 군사적 역량이 약화되었다.
그래서 19세기가 되면
<막부는 명목상 가장 강하지만 실제 동원능력은 약해지고, 억압당했던 조슈와 사쓰마는 오히려 경제력과 군사력을 축적하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바로 이 구조가 메이지유신 때 폭발한다.
10. 덴포개혁의 실패
막부도 위기를 인식했다.
1841년경 미즈노 다다쿠니가 중심이 되어 <덴포개혁>을 추진한다.
함재봉의 설명에 따르면 개혁의 방향은 기본적으로 복고적이었다.
상업과 사치가 지나치게 발달해 무사정신이 퇴색했다고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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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 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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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 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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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 카르텔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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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을 농촌으로 돌려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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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과 유흥시설 폐쇄·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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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 규격 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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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묘 영지 조정
등을 시도했다.
그러나 강한 반발에 부딪혀 약 2년 만에 실패한다.
함재봉이 이 사건을 중요하게 보는 이유는 분명하다.
<막부가 시장경제의 발전을 과거의 질서로 되돌리려고 했지만 이미 경제는 너무 많이 변화해 있었다.>
따라서 개혁의 실패는 막부의 국가능력이 얼마나 약해졌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11. 메이지유신의 경제적 토대
이번 회의 결론은 결국 여기로 돌아간다.
19세기 서양 열강이 일본에 등장했을 때 일본은 겉보기에는 전근대적 봉건사회였다.
그러나 내부에는 이미
<대도시 + 전국시장 + 화폐경제 + 상품농업 + 상업자본 + 숙련 장인 + 출판문화 + 높은 소비수준 + 지방의 경제력>
이 형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메이지정부가 서양 제도를 받아들였을 때 처음부터 모든 것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이미 존재하던 경제적 에너지를 새로운 중앙집권국가가 조직하면 되었다는 것이 함재봉의 설명이다.
평론
1. 65회는 앞의 두 회보다 오히려 메이지유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63회와 64회가 제도와 정치세력의 설명이었다면 65회는 <왜 그 정치혁명이 실제로 성공할 수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혁명을 하겠다는 사상만으로는 근대화가 되지 않는다.
돈, 도시, 교통, 농업생산력, 상인, 장인, 숙련노동력 같은 물질적 기반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함재봉의 설명은 설득력이 크다.
메이지유신은
<봉건사회 → 갑자기 근대사회>
라는 단절이 아니라,
<에도사회 내부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던 변화를 정치혁명이 국가 차원에서 재조직한 사건>
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2. 특히 중요한 통찰은 <막부의 성공이 막부를 무너뜨렸다>는 역설이다
도쿠가와 막부는 약 250년 동안 전쟁을 억제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바로 그 평화 때문에
상업이 성장하고, 도시가 커지고, 상인이 부유해지고, 농업생산력이 높아지고, 사무라이의 군사적 성격은 약해졌다.
즉
<막부가 만든 평화가 막부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변화시켰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역사적 역설이다.
체제를 가장 성공적으로 유지했던 제도들이 장기적으로는 그 체제를 해체할 조건을 만들었다.
3. 조슈·사쓰마 설명도 이제 훨씬 설득력이 커진다
64회에서 조슈와 사쓰마를 단순히 ‘200년 복수심을 품은 번’으로 설명했을 때에는 약간 지나친 서사화라는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65회에서는 경제적 토대가 추가된다.
이 두 번은 단지 도쿠가와를 미워했기 때문에 승리한 것이 아니다.
<경제력 + 많은 사무라이 + 지방사회와 연결된 하급무사 + 막부로부터의 정치적 소외>
가 동시에 존재했다.
이렇게 보면 메이지유신에서 조슈와 사쓰마가 주도권을 잡은 이유가 훨씬 입체적으로 설명된다.
4. 다만 ‘조선은 정체, 일본은 발전’이라는 대비는 지나치게 선명하다
이번 강연에서도 함재봉은 일본과 조선을 강하게 대비한다.
일본에서는 상업·장인·농촌경제가 발전한 반면 조선에서는 상인이 천시되고 장인이 낮은 지위를 유지했으며 농촌경제 역시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다는 식이다.
이 비교는 그의 전체 논지를 이해하는 데 유용하지만 너무 직선적으로 읽으면 문제가 생긴다.
강연 자체에서도 일본 농민 전체가 부유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빈농과 가난한 지역이 분명 존재했다고 인정한다.
따라서 에도일본도 하나의 동일한 경제가 아니었고 조슈·사쓰마·오사카·에도·농촌의 상황이 매우 달랐다.
마찬가지로 조선 역시 전 지역이 동일하게 경제적 정체 상태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65회는 <차이의 방향>을 설명하는 데는 강하지만 <지역별·계층별 차이>를 설명하는 데는 상대적으로 약하다.
5. ‘사무라이 정신의 타락’ 설명은 조금 조심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함재봉은 에도에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사무라이의 무사정신이 쇠퇴했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그러나 이 표현에는 상당한 가치판단이 들어 있다.
다른 방식으로 보면 사무라이가 ‘타락’한 것이 아니라
<전사에서 행정가·지식인·소비자로 기능이 바뀐 것>
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오히려 250년 동안 전쟁이 없었다는 것은 도쿠가와체제의 엄청난 성공이기도 하다.
따라서 ‘무사정신의 쇠퇴’보다는 <사무라이 계층의 기능적 전환>이라고 보는 편이 더 중립적이다.
63·64·65회를 함께 읽으면
이 세 회는 사실 하나의 연속된 설명이다.
63회는
<에도시대의 정치제도와 참근교대>
를 설명했다.
64회는
<조슈·사쓰마와 도쿠가와 사이의 정치적 갈등>
을 설명했다.
그리고 65회는
<그 체제 속에서 성장한 시장경제와 지방 번의 경제력>
을 설명한다.
따라서 세 회를 합치면 함재봉의 메이지유신론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도쿠가와는 지방세력을 통제하기 위해 참근교대와 각종 견제장치를 만들었다. 그 체제는 장기간의 평화를 만들어 도시·상업·농업·소비경제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경제가 성장하면서 막부의 재정과 군사력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조슈·사쓰마 같은 주변 번은 경제력과 사무라이 인력을 축적했다. 서구의 충격이 오자 이 세력들이 기존 균형을 무너뜨리고 메이지유신을 일으켰다.>
이 설명의 핵심은 <메이지유신 이전에 이미 일본 내부에서 근대화의 상당한 조건이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데 있다.
종합 평가
65회는 함재봉의 일본 근대화 설명에서 상당히 중요한 회차다.
특히 좋은 점은 메이지유신의 원인을 ‘일본인이 서양을 빨리 배웠기 때문’이라는 문화론으로 단순화하지 않고 <경제구조>를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이번 강연을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메이지유신을 가능하게 만든 힘은 1868년에 생긴 것이 아니라, 에도의 시장과 오사카의 상인, 번의 농업생산력, 지방의 하급사무라이 속에서 이미 수백 년 동안 축적되고 있었다.>
그리고 함재봉의 더 큰 관심사는 결국 조선으로 돌아간다.
<왜 일본의 개화파는 서양의 충격을 국가혁명으로 전환할 수 있었는데 조선의 개화파는 그렇게 하지 못했는가?>
65회가 제시하는 답은 <사상의 차이보다 먼저 경제·사회적 토대의 차이를 보라>는 것이다.
이 점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다만 앞으로 함재봉이 조선의 경제를 설명할 때 <에도 일본의 역동성은 크게 강조하면서 조선 후기 경제의 변화는 과소평가하지 않는가>를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바로 그 비교가 이 시리즈의 일본론을 평가하는 중요한 시험대가 될 것이다.
Tran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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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음악] 한국인의 탄생의 함재봉입니다. 오늘은에도 시대의 경제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임진외란으로 인해서 조선의 [음악] 경제가
초토화되고 사실 조선은 다시는 조선이 몰락할 때까지 [음악]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임진회란 이전의 경제력을 회복을 못 합니다. 아니면에도
시대, 그러니까 임진 이후에 벌어지는에도 시대의 일본 경제는
번창을 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조선에 비할 바 없이 번창을
하고 바로 그랬기 때문에 근대가 도래하고 서양이 도래하면서
서구 열강이 도래하면서 일본은 훨씬 더 능동적으로 빨리 그 서양의
근대화를 받아들일 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메이지 유신이죠. 그러니까 메이지 유신이 성공을 하고 조소는
근대화를 자체적인 근대화에 성공하지 못하는 그 근본적인 차이를 우리가
이해할 수 이해하기 [음악] 위해서는 어에도 시대의 경제를 한번 들여다봐야
합니다. 한국인의 탄생 [음악]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음악] 동부가 역사의 아이러니 중에 하나가
어 임진회란이 끝난 다음에 막상 임진회란의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어 이로 말할 수 없는 그 살상과
그다음에 어 국토의 그
파괴를 경험한 조선은 오히려 조선 왕조가 명맥을 이어갑니다.
중국의 명나라는 그리고 일본의
도토도미 정권은 몰락을 합니다. 임진란의 여파 때문에 그렇죠.
명나라는 조선을 돕겠다고
엄청난 군사를 일으키고 막대한 재정을 쓰면서 결국은 몰락을 하기 시작하는
거고 바로 임진회란 도중에
만주에서 부상을 하기 시작한게 누르하치입니다. 그래서 누르치가 급격히 부상을 하기
시작하고 명이 약해진 틈을 타서 그의 어 아들 대에 가서 결국은 어
도르곤이 명을 치고 청을 수립을 합니다.
1644년이죠. 또 1번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오 씨의 어 부장 그니까 도요토도미가 가장
믿었던 어 그 다이묘들 중에 하나였던 도크가와 이아스가 도토미가 죽자 그의
아들 어린아들이 정권을 물려봤는데 그 어린아들을 배신을 하고 도유도미를
배신을 하고 정권을 잤습니다. 그러므 그러도
임진 회란을 일으켰던 정권이 몰락하고 정권 교체가 일어납니다.
사실 조선이 조선이 그 세 나라 중에서 유일하게 그
정권이 유지되면서 전혀 새로운
중국의 정권과 전혀 새로운 일본의 정권과 어떻게 어떤 관계를
수립하느냐이 과정에서 사실은 과거의 기억 때문에
과거의 임진회라는가 이런 것 때문에 아주 복잡한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게 되고 궁극적으로 쇠곡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 나라의 관계를
가급적으로 극소수하고 최국으로 갈 수밖에 없고 그것이 조선이 19세기
말에 와서 조선이 결국은 자체적인 근대와에 실패하는 서구 열강의 도래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반면에 일본에서는
독구가 정권을 잡으면서 완전히 경제, 사회, 정치를
바꿔 버립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새로운
일본의 정치 체제, 일본의 새로운 경제 체제, 그다음에 사회 체제가
그것이 결국은 일본으로 하여금 보다 더 능동적으로
서구의 도래에 서세 동점의 시대에 보다 적극적으로
어 대응할 수 있는 그런 기반을 마련해 줍니다.
일본의 경제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를 조선의 경제, 임진회란 이후의 경제나
일본의 경제가 비슷했을 거다. 또 중국의 경제까지도 다 유교에 기반한
문명이고 다 농업 기반 사회고 그러니까 굉장히 비슷할 거라고
생각하기가 쉽지만 사실은 임진외란 이후에
청 일본 조선의 경제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특히 일본의 경제는 조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풍적했습니다. 청의 경제도 조선보다는 풍족했지만
일본만큼 풍족하지는 사실은 않았습니다.이 차이가이 세 나라가 근대화를 이루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어
차이를 드러내는 요소가 됩니다.에도 에도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상업의
발달입니다. 일본도 유교를 받아들이죠. 유교 사회입니다. 그래서
사실 사농 공상 그니까이 상업이 발달을 안 할 거 같은데 조선은 절대
안 했죠. 상인이 가장 천한 집종으로 생각을 했기 때문에 이윤을 추구한다라는 것이 굉장히 천한
일이다. 그래서 선비가 4 4대부가 제일 위고 그렇죠. 그다음에 농부,
그다음에 공해. 공해라는게 이제 장인들이죠. 여러 가지 물건들 만들고 하는
그다음에 이제 상인이 가장 저속한 계층 이렇게 돼 있었던 거죠. 근데
일본도 겉으로는 그렇습니다. 이론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상업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면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참근 교대
산킹고타이라는 그 도구가 만들어 놓은 특유의 인질
제도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각 번의 다이묘의 [음악]
정부인과 후계자는 어려서부터 무조건에도 지금의
도쿄에 그니까 자기네 [음악] 도크가와의 자기네 수도였죠. 그 에도에 와서 살도록 했었죠.
그러니까는에도 와서 자기 부인과 아들이 살고 그리고 다이며들 본인들도
2년에 한 번씩은 무조건에도 와서 살아야 됐기 때문에 자기네가 에도에서
살기 위해서 거대한 저택들을 짓고 경쟁적으로 다른 번보다 우리가 더 잘
산다 이런 거를 보이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거대한 번저들을 지어 놓고
그리고 이제 거기서 사는 사람들의 생활이라는 것이 딱히 할게 없습니다. 사실은 사취하고 향락을 누리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거죠. 그 과정에서 도쿄가
건축에서부터 가구에서부터 옷, 음식, 술, 문학, 연극 모든
면에서 엄청난 수요를 창출하게 됩니다.이 다이묘의 가족들,이 귀족들이 전부 다
한 도시에 수천 명이 수만 명이 모여 갖고 소비를 하기 때문에. 그러니까이
소비를 이제 어떻게 충족시키느냐, 그 물자를 어떻게 대느냐이 과정에서
일본의에도 시대의 경제가 일어납니다. 각 번의 다이며들은 그 번저들을
유지하고 자기 가족들의 그 사치스러운 애도 도쿄 생활에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기 번에서 나는 쌀과 특물을 이제 오사가에 있는 쌀수들한테 가서
갖다 파는 거죠. 그래서 오사가에는 지금이 사진에서도 보보실 수 보시듯이
쿠라야시키라는 그 각 번마다 창고겸
사무실이 있습니다. 이게 뭐냐면은 자기 [음악] 번에서 올라오는 쌀과 특산물들을
보사가 시장에 갖다 [음악] 팔기 위해서 그 일을 하는 자기네 번에서
오는 직원들과 그리고 그 물건들을 저장해 놓는 거대한 창고들이 오사가에
즐하게 늘어서기 시작합니다.이 과정에서 오사가는 상업의 도시로 뜨고
부상을 하고 도쿄는 정체 도시로 문화의 도시로 이제 부상을 하게 되는 거죠. 지금까지도 일본 경제의
특색입니다. 18세기가 되면은 에도에는 연간 80만 통의 삭개,
10만 통의 간장, 1800만 개의 장자꾸러미,
600개의 책 대여소. 그니까 책방이죠.
책을 읽을 수 있는 빌려줘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책소가 600개가 있습니다.
그리고 음식점이 6,여기가 있습니다. 1731년이 되면 에도의 인구가
100만을 넘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이 에도의 인구의
절반은 귀족들, 사무라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죠.
절반은 상인들 그리고 장인들이었습니다. 에도에는
음식, 옷 이런 것이 유행을 해서 전국적으로 유행이 진원지가 되고요.
그리고 문학과 예술의 중심입니다. 왜냐면이
귀족들이 다묘 집안들이 와 갖고 할 일이 없기 때문에 그러면 뭐가
발달합니까? 먹론 먹고 마시고 해야 되고 좋은 집에서 좋은 옷을 입지만은 또 여가 활용을 하기 위해서 뭘
합니까? 역시 책을 특히 문학을 읽기 시작을 하고 그 문학을 공연하는
우리가 어 극장을 가고 뭐 어
넷플릭스를 보고 하듯이 그 당시에 엄청난 극장들이
에도에 생기기 시작합니다. 지금요 그림을 보시면 1858년
어 이치무라자 극장이라는 당대 가장 큰 극장이었었습니다. 극장에서
시바라쿠라는 연극을 공유하는 장면을 딱 그때 누가 기록을 해 놓은
겁니다. 그림으로 기록을 해 놨습니다. 사실 서울이나
당시 한양이나 베이징에서도 중국의 베이징 연경에서도 참 보기
힘든 그런 관경이었습니다. 자, 그러면이 경제가 이런 이런
상업이 발달하는 거에 가장 큰 정치 사회적인 효과는
무엇이었을까? 무사들은
사무라이들은 아주 잘 살았죠.이 이 다이묘 계급은 특히 아주 굉장히 잘 살았죠. 문제는 뭡니까?이
이 호화로운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이묘들이 빚을지기 시작을 합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소출량이 많은 영지를 갖고 있는 그런 다이며들이 아닌 바에는
이런 삶을 이런 저택을 애도에서 유지하면서
경쟁적으로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삶을 산다는 거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떡합니까? 오사가의 상인들로부터 돈을 빌리기 시작을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일본의 사무라이들이에도 시대를 거치면서 부시도, 무사도의
정신은 점점 점점 흐려지고 어차피 전쟁도 안 하죠. 200년 동안 평화입니다. 전쟁도 안 하고 그리고
서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어떻게 보면 독구가와 노렸던 바로 그겁니다.
도구가와가 전국의 다이어들을 전부 다 애도로 끌어들여서 사치스러운 삶을
살게 해 주고 맛있는 거 먹고 좋은 옷 입고 그리고 재밌는 책 읽고
재밌는 연극 보고 이렇게함으로써 점점점 자기 본연의 역할이었던
뭡니까? 무사로서의 역할은 잊어버리게 되고 무사로서 훈련도 안 하고 무사로
따라서 전쟁도 없고 그러니까 더군다나는 무사도 부시도 정신은 점점 점점점 흐려지는 겁니다. 메이지
유신과 어떻게 연관이 있냐면요. 특히이 에도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것은 제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심판다이며와 후다이다이며 즉 도구가와
편에 섰던 사람들 도구가와 새끼가라 전투에서 이길 때 도구가와 편이서
도구와가 특별하게 대접을 해 주는 가깝게 그니까 정부에도 참여할 수
있게 해 주고 영지도 많이 주고 하면서 가깝게 데리고 있었던이
신판다이며하고 후다이다 다이묘 사람들이 더욱더 애도의 생활을 들리게
즐겁게 즐기게 되고 조수하고 사스마 같이
도구가와의 맞었던 새끼가 전투 서군이었던 사람들
도요도미한테 충성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은 패배하고 정권을 돕고가 잡음으로써 완전히
세력을 잃게 되는 거죠. 그리고이 사람들을 이제 도자마다 다이묘라 그래
갖고 여러 가지로 억압을 합니다. 땅도 뺐고 그렇죠. 그러면서 권력에
그 국가 경영에 참여도 못 하게 하고 이러면서 여러 가지로 이제 차별 정책을 피는 거죠. 그러니까
조슈나 사스마는 더군다나 애도에서 굉장히 멀고 그렇죠. 그러면서이
사람들은 더군다나 가면은 뭐 에도에 가면 뭐 합니까? 그야말로 인질이죠.
드러내 놓고 임질입니다.이 사람 인질입니다. 그러니까는 별로 그렇게 가서 즐기지도 않습니다.
에도의 문화와 그나마 거리를 두게 됩니다. 그러면서 덜 사치스럽고
덜 상어가 되는 것이 조하고 사승합니다. 그러니까 사무라이 정신이 더 살아 있고
사사치와 향락 이런 거를 금기시하죠. 무사도 정신이 그 무사도 정신이
훨씬에도 시대 200년을 통해서 계속해서 살아 있는 데가 조주하고 사스마입니다. 조슈하고 사스마가
나중에 힘을 합쳐서 도구가를 무너뜨리면서 메이지 유신을 일으키게
될 수 있는 근본적인 원인 중에 하나입니다.에도 에도 시대에 이렇게 상업이 발달하고
화폐 경제가 어 번창을 하면서에도 같은 또는 오사카 같은 그런 도시의
풍경만 바뀐게 아니라 농천에 삶도 완전히 바꿔 놓습니다. 우선
다이묘들이 이제 사치스러운 생활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사치소로는 생활 하기 위해서 이제 가구가 됐든지 뭐이
도자기가 됐든지 다를 하기 위해서 다이들이라든가 그 화려한 자로 만든 이런 장애라
이런 것들을 이들이 필요하게 되는데 그게 전부 다 장인들이 있어야 되는 거죠. 그러니까 장인들이
제대로 대접을 받고 제대로 보수를 받고 그리고 다이며들하고 아예 계약을
체결하면서 일을 하면서 장인들의 경제적 수준만 올라가는게
아니라 사회적 지위도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조선과 같이 장인들이
끝까지 천인으로서 남아 있었던 굉장히 천대를 받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대접을 받습니다. 그리고 농민들의
생활도 그 향상이 됩니다. 그러니까는 어 물론 뭐 그 변방에는
[목을 가다듬음] 참 여전히 가난하고 그야말로 이제 농로 수준의 그러한 어
삶을 사는 농부들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대도시 에도나 오사 부분의 그 농부들은 어떻습니까?
굉장히 부요해지기 시작합니다. 워낙 사업이 발달되고 또 자기네가 생산하는
뭐 쌀이 됐든 뭐가 됐든지를 전부 다 끊임없이 사 드리고 다이묘들이나 뭐
사무라이들이나 이런 대도시에서 [음악] 끊임없이 그 식량을 공급을 해야 되니까 대도시
부분에 부분에 특히 어 살았던 농민들의 [음악] 삶이 대폭 향상이
되기 시작합니다. 또 하나 재밌는 거는 뭐냐면 이것도 이제 나중에 메이지 유신으로 가는데 특히 조주나
사스마의 경우에 특히 해당이 되고 굉장히 중요한 요소가 되는데 뭐냐면은
어 사무라이들이 그러니까 다이묘들이 점점 점점 자기네 영지에서 지내지
않고 그죠 수도에 가서 지냅니다. 자꾸 어떻게서 수도에 가서 지내기다
지내 지내고 그리고 설사 자기네 동네에 돌아가더라도
그 성이 있고 그 성주위에 있는 사무라이들이 사는 조카마치라는 그
도시 도시죠 거기도 그런 데서 살지 저 시골에까지 내려가질 않습니다.
근데 이게 참 재밌는 효과가를 일으키는데 뭐냐면 이렇게 됨으로써
일본의 농촌들의 농민들의 자치권이 향상이 됩니다. 니까이 농천에서
농천에서 농부들의 목소리가 강해지고 그리고 또 이따가 말씀을 드리겠지만은
특히 조수하고 사스마에만 남아 있었던 향사
고시 그러니까 시골에 사는 사무라이들이 있었습니다.이 이 향사가 누구냐면 이게 바로 사이고
다까모리 기도다요시 우크보도시미치 야마가따리또모
이또 히로비 같은 하급 사무라이들입니다. 근데이 사람들은 지금 조수하고 사스마에만 있습니다.이
사람들이 나중에 힘을 합쳐서 매지 유신을 또 일으킵니다. 그러니까는
대도시 중심에 사치스러운 삶을 살면 살아갈수록
점점 농촌에서는 자치권이 향상이 되고 그 자치 중에서도
그래도 하급 사무라이도 역시 사무라이는 사무라이니까 그런 농천
마을에서 어느 정도의 지위를 유지하는
그 향사 일본 말로 고시라 그럽니다.이 이 사람들이 메이지
유신을 또 일으키는 주도 세력이 됩니다. 임진회란 이후 조소는 다시는 임진회란
이전의 경작지를 확보를 못 합니다.
임진회를 통해서 경작제 2가 파괴가 되는데 그것을 복구를 못시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기술력의 부적도 있었고 그렇지만 못보다도 중요했던 것은 부패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쟁이나 재해가 나면은 그 땅 그 어떤 특정 농토는 3년간은
세금을 면제를 해 주죠. 당연히 물건이나 나지를 않 않으니까. 그런데
그러면 3년 후에는 다시 세금을 걷기 시작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못 걷습니다. 누구 걸 못 걷느냐?
권문세가 높은 사람거는 못 걷습니다. 재개가 안 됩니다. 한번 면제가 되면
그러니까 가음 갈수록 점점 힘없는 사람들의 질 나쁜 땅에서만 세금을 걷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국가의 세수 기반이 대폭 쪼그라들면서 조선이
다시 투자를 해 갖고 간척 사업을 하고 이런 것도 못 합니다. 반면에
일본은 간척 사업을 하고이 영지들의 영주들이 영주들이 다이묘들이
경쟁적으로 하면서 간첩 사업을 하고 종자계량을 하고 시비법을 발달시키고
걸음 주고 하는 거를 발달시키고 그리고 새로운 파종 새로운 벼 온갖
식물 이런 거를 갖다가 곡식을 새로운 개발을 해서 경쟁적으로 더군다나 이런
거를 많이 재배를 해서 많이 오사카 시장에 갖다 팔아야 그걸 가지고
도쿄에 가서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가 있으니까 경쟁적으로 농업을 발단시킵니다. 19세기가 되면
일본에서 나오는 쌀 소출량이 에도시대 초기의 소출량이 두 배가
됩니다. 그리고 징세율은 그 대신에 징세율은
굉장히 낮습니다. 왜?에도 에도 시대 초기에이
영지에서는 뭐 10만석이 난다. 그럼 10만석 중에
만석 이만석은 세금으로 바친다. 그럼 즉 10% 20% 세금으로 바친다.
이렇게 딱 해 놓지 않습니까? 그리고는 이거를 다시 고치지 않습니다. 그니까 이게 중앙정부의
힘이 약해지는 거죠. 사실은. 그러니까 이거를 수정을 못 하니까는 아무리 소출량이 늘어도 정부의 세율은
똑같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점점 점점
일반 그 현 농지에 살고 있는 백성들한테 돌아가는 그 곡식의 양은
훨씬 더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조선의 농민들은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우리가 뭐 진주민란 홍경내에 난 뭐 온갖 뭐 동학난은 물론이고 이런
난들이 일어나는 것이 너무나 생활이 힘들어지고 그렇죠. 삼정의 물란 이런
거를 통해서 너무나 힘들어져서 들고 일어나는데 일본에서는
농민들의 생활이 조선과는 비할 수 없이 풍요롭습니다. 일본의
농촌이 얼마나 번영을 하고 있었는지는 우리가 그 당시 외국 사람들의
목격담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영국의 초대 총영사를 일본 총영사를 지낸
러드 엘크라는 사람은 간또 평야 관동 평야죠. 간또
평야니까 지금에도에도 지방이 간또라 그러지 않습니까? 그
간또 평화를 가서 보고는 평화, 풍요, 만족, 영국보다 더
완벽하고 세심하게 경작되고 유지되는 농천, 영국보다도 더 많은 관상수로
장식되어 있는 풍경을 보았다면서 극찬을 합니다. 영국의 일본
총영사관의 이등관이었던 어 휴미트라는 사람은
카가 지방을 가서 돌러본다면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우리는이 나라가 얼마나 풍요로운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보다 더 행복한 백성들을 찾기 힘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사무라이들 그러니까 일반 사무라이들입니다.이 다이묘 계급이
아니라 그 밑에서 이제 다이묘들을 어 그 위해서 그 봉사하던 그
사무라이들의 삶은 점점 점점 공색해집니다. 왜 그러냐면 무사
계급은 다이묘들로부터 봉급을 받습니다. 그야말로
봉급입니다. 봉토를 받고 봉급을 받는데 그 봉급이나 봉토는 초기 역시
세율과 똑같이 초기와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감은 갈수록
사실에도 시대의 사무라이들의 삶 삶은 더 궁핍해집니다.
법률 방송이 출간하는 시사 교양지 법치와 자유는 [음악] 우리 사회가
증면하고 있는 법치의 문제들을 가장 냉철한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는
정론지입니다. 6년 대한민국의 오늘을 가장 정확하게
깊이 있게 읽어볼 수 있는 법치와 자유를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온라인으로도 편하게 읽어 보실 수 있습니다.
일본 정부도 독구가와 정부도 이제 여러 가지 경제적으로 지금 이게
사무라이들도 그렇고 지탱하기 어려운 측면들이 생기기 시작하니까 1841년에
박후의 최고 결정 그 정책 결정 기관을 이제 로즈 노중이라 그랬는데이
로즈의 어 수장이 누구였었냐면은 미즈노 다군이라는 유명한 정치인이었었습니다.
다근이가 우리가 너무 상업이 발달하고 있다.
지금 상업이 너무 발달하고 사무라이 정신이 자꾸 퇴색을 하고 있고 그러면서 너무 사치스러운 삶을 살살
살살고 있고 도시에서는 이런 것을 옛날에 부시도 옛날에 무사도 정신으로
돌려놓고 그래야 되겠다 그러면서 덴포 개혁이라는 유명한 개혁을 과감한 개혁을 일으킵니다. 물가를 정부의 멀
명령으로 인위적으로 낮추려고 합니다. 그리고 도매상들이 그러니깐이 오사가에
있는 쌀 도매상 이런 사람들이 카르텔를 형성하고 있어서이 사람들 때문에 물가가 올라간다라고 해서이
카르텔들을 강제로 해체시켜 버리고 그럽니다. 그러니까는
상업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는이
선비나 사무라이들이 할 수 있는 바로 그런 그런
식의 전형적인 개혁입니다. 에도의 인구가 자꾸 늘어나고 각 영지의
소출량은 식량 생산량은 자꾸 부족한 거 같고 이게 뭔가 농민들이 자꾸
불법으로 영지를 이탈한다. 그래서 모든
농민들한테 무조건 자기 농지에서 자기 영제에서 절대로 소속 영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라고 그러면서 다 자기 영제로 돌아가라. 이런 영을 내립니다. 인반령이라 그러는데요.
그리고 아까 보여 드렸던 그 에도의 극장들 있죠? 이런 거를 다 닫아 버립니다.
검약한 풍석을 장려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래서 극장들을 아예 교회로 빼버리고 서민극을 또 하는 라국거라는
것들이 있었는데 이런 것도 다 폐쇄를 해 버립니다. 옷과 두 발, 집의 장식, 뭐 인형
이런 사치품물 다 어떻게 어떤 규격으로 만드는지 또 규격을 다
정부가 정하기 시작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다이묘들의 영지를 넓히기
위해서이 오사나 도쿄 주변에 있는 그 땅들을
다이묘들 다른 다이묘들의 땅 그리고 그 다이묘들 밑에 있었던 하타모토라고 다이묘들을 이제 가장 충성하는 제일
높은 사무라이 계급들인데이 사람들의 땅을 정부가 자꾸 몰수를 하려 그럽니다. 결국은 엄청난 반대에
부딪혀서 그죠. 2년 만에이 덴보 기혁이 완전히
실패하고 미즈노가 물러납니다. 그러니깐
덴보 개혁이 일어날 때가 되면 에도의 도구가와 막부의 경제력이 얼마나
수락하고 있었는지 그걸 단적으로 보여 주는게 덴보의
개혁이고 결국은 덴보 개혁이 실패를 하면서
도크가와의 막부의 경제력은 다시는 회복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10년 후에 딱 회리 제독이 나타나고 서양 열강이
일본을의의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을 때에 여기에 그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막부의 경제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독구가 받고 막부는 이렇게 경제적으로
힘이 들고 개혁에도 실패하고 있는데 막상
독구가와의 저항을 했었던 조주하고 사스마에는
그 두 번에서는요. 우선 지리적 조건도 참 좋았고 그리고
뛰어난 지도자들을 제 계속해서 배출을 합니다. 그러면서 박쿠후가 그렇게
강력하게 제재를 하고 억누르고 땅도 뺏고 했는데도에도 시대 내내 힘을
기릅니다. 각 다이묘의 270개 영지가 있지 않습니까? 그
각 다이묘의 번 영지들을 뭐 그 크기를 뭘로 측정을 하냐면은
곡구닷가라는 걸로 했습니다. 고구 닷가가 뭐냐면 소출량입니다. 곡구라는
건 석. 그렇죠? 그래서 닭가는 이제 높을 고자 그러니까
나오는 쌀의 양입니다. 그 영지에서 그 영지가 그 번이 갖고 있는 그
농토에서 나오는 쌀의 양을 딱 측정을 해서 정해 놓습니다. 그래서
1650년 그러니까 도구가와 정권을 잡고 막부가 정권을 잡고 50년이
지난 도구가와가 초기에 이제 안전기에 딱 들어갈 때쯤 그때쯤
전국적으로 국구닷가를 측량을 합니다. 전국의
소출량이 곳가 2,600만 석으로 나옵니다.
조사가 됩니다. 그리고 쇼근이 도크가와 쇼군이 직접 통치하는 영지
지금 에도를 중심으로 하는 그 영지 일본에서 가장 큰 당연히 가장 큰 영지였죠. 그 영지에서 소출 그
나오는 쌀의 양은 420만석이었습니다. 오모데닷가라는게 있습니다. 이게
뭐냐면 공식적인 그 1650년에 딱 정한 소출량입니다. 그럼 여기
보시면은 예를 들어서 가나자와 가가 지역의 가나자와의 소출량이
102,700석. 그다음에 조수번을 [음악] 보시면은
36만 9천석 가고시마 사스마번을 보시면 77만 석입니다. [음악]
그런데 이게 1650년 대정을 했던 거고 그다음에 측정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실제 쌀양은
각 법마다 자기네가 측정하라는데 실제 생산량은
원래 공식적인 생산량보다 훨씬 많아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보시면은
어 사스마의 사스마는 원래는 공식적으로 77만석이었는데
지스닷가 즉 실제고 실제 측량은 86만9,500입니다.
그리고 여기 조슈번에도 밑에도 아홉 번째 조슈번 것도 보시면은 공식적으로론는 36만9천석인데
실질적으로는 71만 3천석입니다. 근데이 그러니까 엄청난 차이가 있는
거죠. 그러니까 세금은 원래 측정했던 곳과만 따져서 하는
거기 때문에 굉장히 적게 나가는 거죠. 세요. 그 번에 돌아가는
그 소출량은 훨씬 많은 겁니다. 맨 오른쪽에 영주 등급 해서 제가 도자마
신판 후다이 이렇게 나지 않습니까? 기억하셔야 될게 도자마번인 그 도자마
한이란 번들이 뭐냐면은 독구가한테 맞었던 그래서 독구가 어떻게든지 제하려고 했던 번들입니다. 근데이
번들이 가가 사스마 무스 이게 다 1 2 3입니다.
엄청난 경제력이 녹구가와에 맞었던 번들이 오히려 경제력이 커집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내려다가 내려가시면은 희고 그렇죠. 직구젠, 아키, 조슈, 희젠 이런
데가 전부 다 도자마 다이어들인데 실제
소출량은 공식적인 소출량이 보다 훨씬 많습니다.이
소출량 근데 실제 소출량을 사실
알면서도 반영을 못 했던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그렇게 하면은 세금에
올라갈테니까 세금이 올라가면 어떻게 됩니까?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는 거죠. 그러니까
농민들의 저항을 각오를 해야지만이 세금을 올릴 수 있기 실질적인 그
소출량에 따라서 세금을 올릴 수가 있는데 그걸 못 합니다. 결국은 그거를 누를 수 있는 힘이 없는
거죠. 중앙 정부의 힘이 없어지는 거죠. 그러니까 감은 갈수록
특히 도자마 조수하고 사스마 같은 도자마번들이 경제력이 커지고 세금은
오히려 줄어들고 그러면서
도구가와의 친독구가와 번들보다도 더
번창하는 경제력을 갖게 됩니다. 자, 그럼 대표적으로 조수번 조수번은 이렇습니다.
모리 가문이 통치했습니다. 모리 대루모 또는 임진회란 당시에 제7군
사령관으로 조선 침공해 나섰던 사람입니다. 사실은 가장 많은 군대를
보냈던 것은 바로이 조수번의 모리 데로 데로모도입니다.이
모리도 도요토미가 죽으면서 자기 아들을 맡긴
고다이로 다섯 명의 오대로 중에 한 명이었었습니다. 그리고 새키가라 전투에서 도구가와 편에 맞서서 끝까지
도미 [음악] 가문에 충성했던 그 서군의 대장이 바로 머리였었습니다.
그래서 새끼가라 전투에서 도코가가이긴 다음에 패한 모리의 영지를 대폭
뺐습니다. 그래서 새끼가라 전투 이전까지만 하더라도요. 오늘의 히로시마 현
그리고 야마거 야마구치 현을 다 포함한 엄청난 지역 그래서 소출량이
120만 석에 이르렀습니다. 그랬던 머리에 땅을 뺏어 갖고가
120만석에서 29만석으로 줄루어듭니다. 얼마나 모리 가문을
도크가 적극적으로 억압을 하고 뺏고 제재를 했는지 알
수가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1610년 그러니까
새끼가라 전투 끝난지 딱 10년 만에 독구가와가 정권을 잡은지 모리가
충성하든 도돔이 정권이 무너진지 딱 10년 후데도 그러니까 120만석을
29만석으로 줄였는데도 국가를 1610년에 새토지 조사를 했더니
이미 소출량이 고구닷가가 모리에 조의 그 소출량이
52만5,435소 엄청나게 늘어났죠. 그러니까 어떡합니까? 근데 이걸 그대로
보했다가 안 된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정부에는 독구가 막부에는 자기네가
36만8,석만 보고를 하고 입을 담니다. 그래서
새끼가라 전투 이후에 땅은 대폭 뺏기고 그렇지만 실질
[웃음] 실질 생산량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금은
적게 축책이 됨으로써 농민들 상인들의 삶은 굉장히 풍풍여집니다.
그래서 조슈의 경제적인 기반은 오히려 점점 더 튼튼해집니다. 그리고
독구가와 조수하고 사스마를 제어를 하는 과정에서 또 하나 전혀 얘기치
않았던 전혀 의도치 않았던 결과가 일어납니다. 그게 뭐냐면 조슈와
사스마의 군사력이 굉장히 강해집니다.
이게 왜 그러냐면요. 원래 임진혜란 일어날 때만 하더라도 그러니까 도구가
저 도요도미가 대고 조주하고 사스마의 병사들을
조선에 파병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바로 조하고
샀으는 유난히 사무라이들이 많고
경제력이 강했던 번들입니다. 그랬던 번이기 때문에 독구가 권력을 잡자마자
하는게 뭡니까? 사무라이의 숫자들을 제한을 합니다.
각 번이 한이 소유할 수 있는 사무라이의 숫자가 뭐냐면 한의 규모
예를 들어서 200석당 사무라이 다섯 명 천석당 사무라이 2명 10만석당
뭐 215명 이런 식으로 아예 나라에서 정해 놓습니다. 그런데 실제 사무라의 숫자는요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렇게 많은 영지를 조슈하고 사스마가
뺏깁니다. 그러면은 당연히 사무라이 숫자도 줄었어야 되는데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 대신 어떻게 하냐면요. 그 사무라이들을 넓은 영지에 있었던 사무라이들을
오히려 작아진 영지에도 끝까지 자기의 가문에 충성하는 그 사무라이들을 다
데리고 들어옵니다. 그래서 면적당 사무라이 숫자가 바로 도크가와에
맞었던 도자마다 다이묘인 조슈하고 사스마의 경우가 훨씬 더 많아집니다.
도구가보다도 도구가와는 땅만 넓고 도구가에 충성했던 번들은 다 땅만
넓고 오히려 사무라이 숫자는 적은데 발면에 적은 반면에 조수하고 사스만은
땅을 뺏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무라이들을 없애지 않고 사무라이들
끝까지 끌어안으면서 면적당 사무라이 숫자가
독구가와 충성하는 번들에 비교할 바 없이 많아지기 시작합니다. 파스마의
시마즈 가문은 사실은 임진란 때까지만 하더라도 지금의 교수
거의 전체를 다 갖고 있었습니다. 근데 그걸 지금은 다 뺏기고 우리가 알고는 지금 가고시마 그쪽으로만
아주 작은 영지만 암게 됩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모든 사무라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는 거죠. 그래서 어느 번들보다도 조수하고 사스마가
사무라이들이 많았습니다. 너무 사무라이들이 많아지니까 조슈하고 사스마에서는
굉장히 예외적으로 사무라이들 보고 야 미안하지만 자네들 조카마치에 도시
근처에서 살 수가 없네. 다 그냥 시골로 가서 농촌에서 살아야 되네.
그래서 농촌으로 그냥 보냅니다. 그래서이 사람들이 바로 향사 고시가
되는 겁니다. 도시에 사는
사무라이들이 아니라 농촌에서 농부들과 같이 사는 일반 평민들과 같이 사는
그러한 사무라이들. 그래서 향사 고향 향자를 써서 향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조주하고 사스마의 사무라이들은 원래 향촌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
지역민들하고 끈끈한 유대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 지역의 삶을 이해하면서
거기 뿌리를 내리고 삽니다. 메이지신을 일으키게 되는 조슈의
기도닷가요씨, 사스마의 어쿠보도시미치, 사이고닷가리
이런 사람들이 전부 다 향사들입니다. 그러니까이 사람들은 애도 도쿄의 그
사치스러운 삶 이런 거 몰랐습니다. 요슈의 경우에는 사실은 영지를 뺏겨서
그 뺏긴 뺏겨서 줄어든 120만석에서 30 20 29만석으로 줄었으면은
사실은 거기에 따라서는 그 데리고 있어야 되는
사무라이 숫자의 최대 치가 6,명이어야 됐습니다. 근데 실질적으로는
11,명이나 있었습니다. 물론 경제가 뒷받침을 해 주니까 이게 가능했었던
거죠. 반면에 도구가와 가문의 방 예를 들어서 오아리의
오아리한 어 또 아이즈한 굉장히 큰 번들이 한들입니다.
5리는 61만 9,600석 공식석으로는 그렇죠. 그러면 어 조슈의 배가
됩니다. 그런데도 그래서 그렇다면은 12,명의 사무라이가 있어야 되는데
실제로 5,900명밖에 없었답니다. 아이즈는 23만 석기였기 때문에
고닷가가 4,명의 사무라이를 보유하고 있었어야 되는데 실질적으로론 3,명밖에 없었답니다.
주신 전야의 독구가와의 소출량은 독구가와 영지의
소출량은 700만석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전체 소출량이 3천만석 정
정도가 됐으니까 1번 전체 소출량의 1/4 정도를 독구가 영지가 갖고
있었던 거죠. 그 그 곳화카에 따른다면은
도구가와 휘하에는 직접 휘하에 사무라이가 13 14만 명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도구가와 바꾸후가
도구가와 영지에 거주하는 도구가와가 직접 통설할 수 있는 사무라의 숫자는
2만에서 3만밖에 안 됐습니다. 악구의 경제력, 군사력이
덕구가와 시대를 통해서에도 시대를 통해서 점점점 약화되고 반면에
조수하고 사스마 같은 도자마번 번 다이며 독가에 맞었던 그런 번들의
경제력이나 군사력이 점점점 강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유지될 수
있었던 거는 어디까지나 독구가와가 여전히 참근교대 창낀
고따이 같은 제도 그다음에 그 독구가와를 따르는
다이묘들의 숫자가 비교할 수 없이 많았던 거죠. 그러니까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조주하고 사스마를
견제를 할 수가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이 독극 200년 280년의 평화가
유지되는 것은 바로 절묘하게 독구가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견제 제도 그렇죠. 인질제도 그다음에 경제적인 몰수 제재어 이런
이런 거를 통해서 그게 유지가 됐었던 거죠. 그리고 사실 계속해서 유지가 될 수 있었는
뭡니까? 여기에 서구 열강이 도래하는 겁니다. 외부로부터의 충격이 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면이 외부로부터의 충격이 왔을 때에
전혀 그런 거를 고려하지 않고 바깥 세계로부터의 충격 이런 거를 고려하지
않고 고완됐든 도구가의 그 절묘 절묘했던
세력 균형 체제 280년을이 이어가던 그 세력 균형 체제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는 거죠. 그래서 그 균열이 생겼을 때에
바로에도 시대를 통해서 오히려 힘을 기르고 있 있었던 조수와 사스마가 그 경제력과
그 사무라이들과 이런 것을 이용을 해서
결국은 구태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잡게 되는 것. 그러면서 완전히 새로운
근대화의 과정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 그게 바로 메지 유신입니다. 우리가
그 메이지신의 원인들을 살펴볼 때 정치적인 측면도
있고 여러 가지 우리가 흔히 보는 정치적인 측면이 있고 그렇습니다만 저는 모든 사회 변화가 다 그렇지만이
경제적인 그 밑바탕 어 거의 절대적입니다. 그야말로 막스
식으로 얘기하면 물질적 토대가 있어야지만 되는데요. 그 물질적 토대가 어떠냐에 따라서 사실은 실제로
정치적인 상황과 사회적인 변화 이런 것이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도구가와의 그 그 머리는
놀랍습니다. 결국은 자기의 그냥 무력으로서 자기에 맞었던 번들을 완전히 휩쓸어 버리고
중앙 집권적인 통일은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거는 일본이라는 상황이
전국 시대 16세기 15세기 16세기 일본의 상황에서 그리고 17세기
초반까지 일본의 상황에서 절대로 불가능했던 거죠. 그러니까 뭐 오다노브 나가도 나왔고 도돔미
히데오시도 나오고 여러 사람들이 나와 가지고 전국 시대를 갖다 평정을 하면서 어떻게 평화를 유지하려고
하지만은 너무나 군사력들이 강하고 경제력들이 강한 번들이 여러 나라가
있었던 거죠. 일본 사람들이 자기네도 천하 전국 시대 중국의 전국 시대 춘추전국
시대한테 그 똑같은 말을 써서 전국 시대라고 하고 천하라고 말을
자기네한테 씁니다. 그러니까 이제 중국이 천자이듯이 자기네들 자꾸 천황이라 그러는 거죠. 그러니까
자기네를 천하로 보는 거죠. 그 천하가 너무나 나눠져 있었고 대단한
군농들이 할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중에서 아무리 강한 한 군벌이
나와도 군 영웅이 나와도 그 사람이 상대들을 완전히 제압해서 조선이나
중국 같이 강력한 중앙지권 체제을 못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도구가도 비록 새끼가라 전투에서 이겨서
스천화 통일이라는 걸 했지만 그 통일이라는 것은 중국의 명나라나 청나라 원나라 또 조선 이런 의미의
통일이 아니죠. 각 번들이 살아 있을 수밖에 없고 다이며들이 살아 있을
수밖에 없고 각 경제 다묘들의 각 번의 경제 사회 교육 이런 거는 각
번이 알아서 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이거를 살려두는 방법 그 살려둘 수밖에 없었고 다만 그거를 제어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고해냈던 거죠. 대표적인게 참근교대 산긴 고다이지만
이런 것들을 고안해서 어떻게든지 평화를 유지하려 그러고 그 사람 그
자기 반대 세력들을 엇 억누르고 견제를 했던 겁니다. 근데이 작전이
참 오래 갑니다. 280년 동안 가고 그 과정에서에도 시대는 놀라운 평화와
번영을 누립니다. 그렇지만 내용을 보고 있으면은 내용을 보고 있으면 오늘 말씀드린 그런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도구가와의 막부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오히려 서서히 약해지고
있었던 것이고 거기에 맞었던 조슈와 사스마의
경제력은 점점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거기에 외세의
등장, 미국의 등장, 영국의 등장으로 인해서
여러 세력들이 일본의 세력들이 합종 연행을 하기 시작하는 거죠.
독구가 잡아놨던 그 시스템에서 벗어나면서 나름대로 서로가 합종
연행을 하고 서양하고 손을 잡들은 서양하고 손을 잡고 어떤 번들은
교도에 있는 천왕부와 손을 잡기 시작하고 이러면서 완전히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새로운 질소가 나오기 시작하고 그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는 것이 메이지 유신이고 메이지 지신을 주도하는 것은이 과정에서 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이용해서 기회를 잡은 조하고 사스마였습니다.
오늘은 어 도구가와에도 [음악] 시대의 경제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경제 못지 않게에도
시대의 참 놀라웠던 점이 뭐냐면에도 시대의 사상 그리고 교육입니다.
조선과 역시 굉장히 다르고 중국과도 아주 다른에도 시대 [음악] 특유의
사상 그리고에도 시대 특유의 교육이 [음악] 모든 것이 역시 일본이
중국이나 조선보다 더 근대화에 서구 열강의 도래에 더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기반을 [음악] 제공하여 줬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어에도 시대의 사상과 어 교육 문제를 어
갖고 다시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통해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한국인의 탄생. 오늘은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함께해 주셔서 [음악]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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