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16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74 가쓰 가이슈에서 조슈 파이브까지 근대 일본의 설계자들

가쓰 가이슈에서 조슈 파이브까지 근대 일본의 설계자들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74회 - YouTube

가쓰 가이슈에서 조슈 파이브까지 근대 일본의 설계자들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74회
법률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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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강연은 함재봉의 『한국 사람 만들기 II: 친일개화파』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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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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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한국인의 탄생의 함재봉입니다. 어 오늘은 독구가와 막부가 천왕부하고
[음악] 손을 잡으면서 공무합책 고부가의 정책을 통해서 손을 잡고 노자마다이며
[음악] 조수나 사스마 같은 전에는 적대 세력으로 간주했던 그 번들하고도 손을
잡고 번들의 손발을 묶었던 참근 교대 이런 제도도 [음악] 풀어주고 인질
제도 같은 것도 풀어주고 그럼으로써 자유롭게 각자가 국방을 을 강화시키고
그리고 국론 통일을 이룰 수 있도록 이제 그런 장치를 마련을 합니다.
그런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러는 가운데
오늘은 이러한 엄청난 정치적인 변화 속에서도 그리고 [음악] 계국을
반대하는 강력한 전왕위 세력들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에도
막부는 강력한 개방 정책을 계속해서 추진합니다. 조건가 막부에 맞서고
있었을뿐만 아니라 존왕이 파무라이들의 온상이었던 조슈하고 샀으마도
경쟁적으로 외국의 [음악] 유학생을 보내고 하면서 개방 정책을 펼치기 시작을
합니다. 오늘은 막부와 조수 사스마가 어떻게
경쟁적으로 개방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는지 [음악]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인의 탄생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1854년에 네덜랜드는 좀빙호라는 자기네 군남한 척을
독구와 막부에 기증을 합니다. 원래 독구가 막부는
처음부터 계곡을 하면서부터 서양의 첨단이 해군역 이게 얼마나 중요하다는
걸 알고서 당연히 알았겠죠.이 이 폐리의 흑선이 오고 이런 거를 거대한 전함들이 오고 하는 걸 봤기 때문에
어떻게서든지 그 기술을 그 서양 해군역을 자기도 좀 갖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래서 어 네덜랜드에 우선 네덜랜드에 이제 얘기를 했죠.
뭐예요? 왜냐면 돼지마섬을 통해서 도구와 막부 내내 280년 동안 가장
그래도 거의 유일하게 막보하고
협력을 헤어오둔 나라가 바로 네덜랜드 아닙니까? 네덜랜드 동인도 회사의 상관장이 나가사기 돼지마에 있었으니까
그 사람들을 통해서 뭐 어 그 풍설도 받고 이러면서 깊은 어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었기 때문에 자 그러면 이제 개항을 했고 미국 때문에
개항은 했지만 그래도 가장 익숙하고 가장 의지할 만한 외세는 역시 네덜랜드였죠. 그래서 네덜랜드 보고
군남주 건조해서 우리가 사겠다고 군함을 달라 그럽니다. 그런데 1853년에는 바로 뭡니까? 크림
전쟁이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었고 네덜랜드는 따라서 그 전쟁에 참여하느라고 전혀 전혀 무슨 군함을
또 따로 뭐 일본에 팔고 이럴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참 처음에
이제 그 독구가 막부가 요청을 했을 때는 들어 주지 못하다가 미안하니까
1854년에 작은 배지만 그래도 배 하나를 전빙호를 보내서
성의를 표시합니다.이 전빙호가 왔을 때 그 배를 끌 몰고 온 사람이
파비우스 대령이라는 네덜랜드의 어 장교였습니다. 해군 장교였습니다.이
이 사람은 배를 끌고 와서 거의 반년 동안을 일본에 머물면서 일본 사람들
수병들이죠. 200명을 훈련을 시키면서 조선 기술, 항해술 이런 거를 가르칩니다. 그리고는 돌아갔다가
다시 좀를 이끌고 와서 이번에는 아예 네덜랜드 수병까지 20명을 대동하고
와서 또 일본 사람들한테 배를 어떻게 운영하고 군함을 서양식으로 군함을 어떻게 운영하고 이런 거를 이제 전부
다 가르쳐 주는 거죠. 사실 한때 최고의 그 해군역을 갖고 있었던
네덜랜드의 장교들이 와서 수병들이 와서 어 일본 어 수병들을 이제
훈련을 시키는 겁니다. 그리고는 두 번째 왔을 때는 아예이 강꼬마루를
기증을 하고 갑니다. 그래서 강마루는 어 정 최초의 전기선이고 외륜선
이렇게 큰 그 미국의 미시피 강에 보면은 이렇게 큰
그 물레방아 바퀴 같이 돌아가는 거를 통해서 그 동력을 그러니까 움직이는 그런 배를
그 이제 외륜선이라 그러는데 최초의 외륜선 증기 외륜선입니다. 그
범선이기도 하고 도담배도 있고 같이 그 동력을 이용해서 움직이는 배인데이
배를 1857년 3월에 일본 사람들이 처음으로 서양 사람들의
도움을 안 받고 나가사기에서 애도까지 처녀 항해를 합니다. 해군을 어떻게
운영 군함을 어떻게 운용하는지 서양식 근대 배를 어떻게 운영하는지
일본이 터를 하기 시작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후로 1859년까지
네덜은 여러 척의 군함을 일본에다 팔고 일본 해군이 성장하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이 이 강꼬마루가 왔을 때 처음부터 강마루를
인수받고 거기서 일본 사람들이 훈련을 이제 네덜랜드 장교와 수병들한테
훈련을 받을 때 그때의 일본측 책임자가 바로 가스갈이슈라는
인물입니다.이 가스갈이슈라는 사람 정말 대단한 인물입니다.이 이이 사람은 요시다 쇼인과
같이 사쿠마 쇼잔이라는 그 당대에 진짜 앞서가던 그 사람의 제자입니다.
역시 사쿠마 쇼단의 제자입니다. 그 왜 그 서양 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된다 그러고 서양식 말한 장만 타고 다니다가 결국은 전왕위파들한테 암살당하는 그렇지만은
요시사 쇼인한테 편지를 해서 배를 타고 미국을 가라고 미랑을 적극 권장했었던 바로 그 샤쿠마 소단의 또
다른 제자는 바로 가스 가이슈입니다. 가스가이슈는 쇼근 에도에서 쇼근의
하다모또 하다모또라는게 이제 그 무장들입니다. 그 쇼은 다이묘들의 가장 높은 무장을
하다모토라 그러는데 그 하다모토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애도에서 자라면서 난가구를
배우고 서양의 군사을 공부를 합니다. 그리고 말씀드린 대로 사쿠마 쇼잔한테 사사를 하고요. 그리고 1850년에는
사설학교를 세워서 서양의 군사학을 자기가 가르킵니다.
그리고 1855년에 네덜랜드의 도움으로 드디어 일본이
그렇죠. 이제 간꼬마루 같은 거를 받고 그러면서 훈련을 받고 그러면서
결국은 자기네가 나가사기 해군 전습라는 거를 엽니다.에도 막부가
그때에 거기 전습에 오는 전습생 그 훈련받으러 오는 일본
미래 수병들의 감독관이 됩니다. 가스가이슈는 나중에 사카모토료마
그죠. 메이주신의 결정적인 역할을 조슈와 사스마번의
화해를 이끌어내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선중 팔책이라는 거를 써서
일본의 헌법에 어 효시가 되는 그런 거를 써내고 하는 바로 그 유명한 어
사과모또 료마도 바로 나중에이 가스 가이슈한테 절대적인 영향을 받습니다.이 이
가스가 이슈가 또 하나 나중에 역할을 하게 되는 거는 사회고 다까모리가 사스마의 군대를 이끌고 도구가와
막부와 마지막 결전을 보신 전쟁 때 결전을 이루면서 그때 에도성을
둘러싸고 에도성을 막는 거는 가스가이었고 그걸 공격하는 것이 살고
다가머리였습니다. 그래서이 그게 마지막 전쟁이었 전투였을 수가 있는데
그 보신 전쟁에 그러니까 막보와 천왕군하고 사이에 그 메이지신군하고
사이에 마지막 전쟁일 수가 있었는 전투였었는데 만약에 그 전투가 일어났었으면은
에도성이 완전히 파괴가 되고 엄청난 살상이 일어날 수 있었는데 그때에
가스가이슈하고 사이고가 화해를 해서 사 가스가이슈가에도
성문을 열어줌으로써 마지막 피흘림 없이 자연스럽 럽게 평화롭게 정권
이향이 일어나면서 메주위신이 일어납니다.이 가스가이슈가 사이거와 그런 합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가스가이슈하고 사이고가 그 전에 몇 년 전에 만난 적이 있는데
그 만났을 때 서로 한쪽은 개화 개국파고 그렇죠. 가스는 당연히
개국파고 도구가와 막부 밑에서 큰 역할을 해군을 길러내고 있고 그런 서양식
해군을 길러내고 있는 그런 역할 하는 사람이고 사회고는 지금 사스마의 군대를 끌고 와서 조항 양육파를
대표하는 사람인데 그때에 서로가 만나서 대화를 나누면서
상대방의 인품과 그 큰 인물의 감복을 서로가 합니다.
그때 그래서 이미 그때에 서로가 한번 완전히 서로 이념이 다르고 나라의
미래를 구상하는 방 그 방향도 저 전혀 달랐지만 서로 인품에 완전히
매료된 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에도송을 놔두고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그때 둘이서 가스가 이슈하고 사이고가 화해를함으로써에도
성문을 열어 줌으로써 평화롭게 정광 교체가 일어나는 길을 틀린게 바로 가스가이슈입니다.
박호 정부에서 서행의 군사학, 천체학, 지리, 과학 이런 거를 하는 학교를
또 설립을 하자고 그렇게 강력하게 권 권유를 해서 1857년에에도
막부는 반쇼시라베쇼라는 즉 야만인 교육, 야만인의 학문을
가르키는 학교라고 이름을 해서 최초의
일본의 최초의 서양학문 문을 전문적으로 가르키는 학교를 엽니다. 이것도 가스가 이슈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사쿠마 쇼산 같은 선생의 영향을 받고 그렇죠. 그리고 요시다
쇼인 같이 같은 스승 밑에서 사사했던
여시다 쇼인 같은 사람 의고 그런 거를 다 이어받은이
어 가스가이쇼는 일본의 해군도 기르고
그리고 일본 최초의 서양 학문을 가르키는 전문학교를 세우도록 합니다.
1860년이 되면은 박후가
어 독구가 막부가 미국의 사절단을 파결하려 그럽니다. 그래서
1858년에 해리스약을 맺었기 때문에 사실은 그때부터 처음부터 처음부터
처음부터 사절단을 파견하려고 그럽니다. 그니까 미국에선 해리스가 와서 아예 영사로 상주를 하고 있는데
그렇지만 일본은 워싱턴에 상주할 수 있는 영사를 보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죠. 뭐 영어를
그렇게 잘하거나 무슨 그 근대식 외교를 알아 가지고 거기에 가서
제대로 영사 역할을 외교관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던 없었고 뭐
거기 가서 집을 사 가지고 뭐 이런 제대로 된 어 그 공관을 유지할 수
있는 영향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때는 못 보냅니다. 근데 일단 사절단이라도 보겠다 그래 갖고 그때에
그 해리스 조약을 타결하자마자 사실 일본 협상단측에서는 그럼 우리가
대사는 영사는 못 보내더라도 사절단을 파견하는 것은 어떻겠는가 물어봅니다.
그러면서 그때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미국은이 조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세차례나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이제
조약이 체결되었으니이 조약의 비준을 위하여 이번에는 우리가 워싱턴의 사절단을 파견하는 것은 어떻겠는가라고
해리스한테 물어봅니다. 그러니까 페리제독이 두 번 오고 그다음에
계속해서 사절단이 와서 조약을 맺으러고 헤리스가 또 와서 상주하면서 또 제약을 조약을 갖다가 또 협상을
하고 그러고 보면은 일본 입장에서선 그랬던 거죠. 아니 이거는 양국이
교육 저 교류를 하는데 우리는 한 번도가 본 적이 없고 미국 사람들만 계속 해서 하니까 우리도 한번
보내는게 어떻겠냐 그랬더니 아주 해리스가 너무 좋아하죠. 그래서
해리스가 이렇게 그날 그때를 기록합니다.
일본측은 만일 내가 원한다면 자신들의 증기선에 타절단을 태워서 캘리포니아를
경유하여 워싱턴에 보낼 수 있다고 제안했다. 나는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일본이
최초로 조약을 체결한 나라이기 때문에 일본의 첫 사절단이 미국을 방문하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라고 답하였다. 그런데이
파견은 일본 내 전국의 혼란놀이라서 계속 미뤄지고 결국은 2년 후인
1860년이 돼서야 그 사절단 파견이
성사가 됩니다. 그래서 1859년 9월에 박쿠후는 견미사절단을
꾸리고 거기에 뭐 어 정사에는 신미사오키 부사에 모라기 놀이마사
그다음에 감독관의 이제 오그리 다마사라는 사람들을 임명을 합니다. 그때에 그때에 부사에 임명됐던
무라가키 견미 사절단이라고 처음 견미 미국을 보러 가는 사절단이죠.
견미사절단의 부사에 명됐던 물학기는 자신의 일기에다가 이렇게 써
놓습니다. 우리는 옛날에 당나라로 사절단을 파견하였지만 그 이웃 나라는
좁은 바다만 건면 닿을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황국으로부터 수많리
떨어져 있으며 그쪽이 낮을 때 여기는 밤이다. 나는 내 딸들에게 남자는
이처럼 막중하고 전례가 없는 책임을 짐으로써의 이름을 떨치는 것보다 더 큰 영광이
있을 수 없다고 자랑하였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나같이 부족한
사람이 외국에 가는 최초의 사절단에 임명되다니 내가 만일 쇼근의 영을
올바로 집행하지 못한다면 우리 황토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구력을 당할 것이다라는 걱정이 들었다. 바로 그때
달빛이 너무 청명하여 나는 쇼근의 신임에 감사하며 엄숙히 술잔을
들었다. 제가 이거를 읽는 이유는 1876년
강화도조약을 통해서 처음으로 조선하고 일본이 교류를 맺고 그렇죠. 수결을
하고 그때 김기수가 최초의 수신사로 일본에 갑니다.
그때에 1차 수신사로 갔을 때 갈 때에 그때의 김기수는 일기에다가
내가 도대체 여기를 왜 가냐?이 이 서양 이상한 놈들을 만나 갖고 내가
뭐를 할 수 있고 나는 안 가고 싶은데 어쩔 수 없이 가라 그러니까 나는 갈 수밖에 없다라면서
그 그런 모습을 보입니다. 그때 박규수가 옆에서 있으면서 내가
나이만 적었더라도 나는 내가 갔으면은 참 난 정말 너무나 가고 싶고 보고 싶고 알고 싶고 하는데 나는 못
가는게 한스럽다고 박규수는 또 자기 일했었습니다. 근데 저는이 두 가지를
김기수의 일기와 지금 문화기의 일기를 보면서
어떻게 거의 똑같은 일을 맞이할 때 처음으로 외국과 수교를 해서 거 그
수교한 나라에 자기가 사신으로 파견이 됐을 때에 그거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저렇게 김기수는 너무나도 소극적이고
하기 싫은 거를 억지로 해야 되는 거 야만인의 나라의 지금 내가 왜 가야 되는지 모르겠다라는 거하고이
부산은 어 정말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게이 5대을 누리는 내가 이런
엄청난 기회가 나한테 주어졌고 이런 기회를 하기 내가 부족하지만 그래도
나한테 이런 믿음을 주고 나를 이런 자리에 임명을 해 준 추억군한테 정말
감사를 드리면서 내가 혼자 앉아서 술잔을 달밤네
술잔을 올리는 그런 모습을 보였습니다. 조선과 일본의 계국의 양상이 이렇게 달랐었습니다.
1860년 2월 9일 이른일곱명 규모의 견미 사절단이 신나가와 항해서
미군이 제공한 퍼탄호에 승선을 합니다.이 이 퍼탄호라는게
미국하고 일본에 끊임없이 등장을 합니다. 기억하시죠? 요시자 효인이
배를 타고 오밤중에 몰래 승선을 하려고 가는 그 유명한 웃기에 나오는
그 그 배도 그것도 파워하탄고 그 올 그 승선하려다 결국은 미국 수병한테
잡혀서 뜻은 못 이루지만 그다음에 간나거저액을 맺은 것도 퍼탄호
선상에서 맺었던 거고 이번에 이제 또 그러면 그러면
미국의 최초의 1번 사절단이 이
일본 최초의 공식적인 외교 사절단이죠.
그 사람들이 미국을 갈 때에 아직 태평양을 건너갈 만한 배가
일본에는 없기 때문에 미국이 또 군남인 퍼탄호를 제공을 하고 일본의
사절단이 그 퍼하호를 타고서 이제 갑니다. 그런데
그때에 그때에 카스가이슈 밑에서 훈련을 받았던 일본 수병들이 다 있을
거 아닙니까?이 이 사람들이 뭐라 그러냐면 우리가 지금 아직은 실력이
안 돼서 우리의 정사, 대사들은 미국 군함을 안전상 미국 군함을 타고 갈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우리가 명세기 몇 년 동안 훈련을 받았고 우리도 어쨌든 서양 배를이 근대식 배를
움직이는 방식을 우리가 알았으니까 우리도 자존심이 있지.
그리고 한번 우리도 해 봐야 되는 거 아니냐? 그러면서 네덜랜드로부터 산 갓린마루라는 배에
배에 타서 일부 사절단은 그 배를 타고
파워탄호를 따라가기로 합니다. 그래서 일부는
네덜랜드로부터 산 최초의 그 스크루식 그 전기선입니다.
갓린마루에 타서 따라가기로 합니다.이 이 갓님마루는 1853년에
바쿠가 네덜랜드에 주문을 해서 1857년 9월 1일 날 인도받은
일본 최초의 서양식 스큐루를 장착한 군함이었습니다. 그래서이 갓닌마루가
퍼우해탄호를 뒤따라갑니다. 무려 4개월 동안 항해를 해서
태평양을 건너니다. 그러니까 그 작은 배에
올라타서 거기에 일본 사람들만 일본인들만 타서
갑니다.이 사진은 지금 그 갓님마루에 탔던 그 선원들입니다.
그 선원 중에 그 사진에 보시면 맨 오른쪽 끝에 앉아 있는 사람이 누구냐면 그게 후쿠사와 유키치입니다.
후쿠사와 유키치는 나가스본이란 조그만 번에 정말 학급 무사로 태어나서
아들로 태어나서 그렇지만 똑똑해서 란가구를 배웠고 란가구를 배워 가지고
아주 네덜랜드 말을 유창하게 하게 됩니다. 그런데 간학가와 조약을 통해서 처음으로 간학가와 개항을 하고
거기에 외국 사람들이 왔을 때 후쿠사와는요. 어, 자기가 내가 여태까지 배웠던 네덜는 말을 좀 가서
과실을 해 봐야지 하고는 간나카 항에가 갖고 말을 거는데
거기서 네덜랜드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전부 다 영어만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어, 이게
영어를 배워야 되는 거구나. 영어가 중요한 말이구나. 네덜랜드 말이 중요한게 아니라 그러서 그때부터
그렇게 영어를 공부하려고 무지를 쓰는데 사실 방법이 없었겠죠.
그러니까는 미국에 처음으로 미국의 견미 사절단이 간다고 발표가 났을 때
그러면 그리고 갓마루라는 거가 따라간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때에
후크사와는 갓마루 선장을 찾아가 가지고 사정사정을 해서 저 제발이 배
좀 타서 미국 좀 한번 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그 배 탑니다.
그래서 같이 4개월 동안 항해를 해서 물론 중간에 사절단과 같이 하와이에
들려서 거기 어 하와이의 국광 카메아하메아 4세 어를 만나고 그리고
또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뭐 이제 크게 선대한 대접을 받고 거기 샌프란시스코
시장이 주최하는 만찬에도 가고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다시 내려와서 동해안으로가 갖고 5월 15일
워싱턴에 도착해서 뮤캐논 대통령을 만나서 그 비준서를
일미 화친 조약의 비준서를 전달을 하고 그럽니다.
그리고이 사절단은 어 25일 동안 워싱턴에 체류하면서 뭐 스미소니안도
가보고 미국 국회의상도 가보고 박물관 이런 거를 다 보고 미국의 곳곳에
있는 조선소 이런 거를 다 견악을 합니다. 6월 6일에서 16일까지 필라델피아도 가보고 그리고 16일 날
오후에 뉴욕에 도착을 합니다. 당시 뉴욕에서는요.이
일본 사절단을 환영을 하기 위해서 대규모 [목을 가다듬음] 퍼레이드를 준비를 합니다. 그
퍼레이드를 가기 위해서 무려 50만 인파가 나옵니다. 그러면서 최초의
아시아 국가의 사절단이 왔다 그래 갖고 엄청난 인파가 몰려 갖고 그 열렬히 환영을하고요. 그때에 그때에
미국의 대문호 미국을 미국 사람들의 정신을 가장 잘 대표한다는 미국의
대시인 월트위트만이 그때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월트위트만의 여러 시 중에 제일 유명한 시 중에 하나가 브러드웨이 패전트인데 그 브러드웨이 뉴욕의
브러드웨이에서 축제가 벌어지는 거에 대한 그런데 그게 바로 일본 사절단을
환영하는 그 퍼레이드가 벌어지는 거를 기념해서 쓴 시가 미국의 월트웨
위트만의 대표적인 시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이 사절단은 6월 29일 날 뉴욕을 출발을 해서
대서양을 횡단해서 희망봉을 돌아서 마타비아 자카르타죠. 그러니까
네덜랜드 동인동 회사에 아시아 본부가 있는 자카르타 옛날 이름 바타비아인데 거기를 들러서
홍콩을 경유해서 11월 9일 날 신하와에 도착합니다. 떠난지 7개월
만에 귀국을 하는 겁니다.
법률 방송이 출관하는 시사 교양지 법치와 자유는 우리 사회가 증면하고
있는 법치의 문제들을 가장 냉철한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는 정론지입니다.
2026년 대한민국의 오늘을 가장 정확하게 깊이 있게 [음악] 읽어볼
수 있는 법치와 자유를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온라인으로도 편하게
읽어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후크사와 유키치는이 갓린마루를 타고 갔지 않습니까?
갓마루를 타고 간 선원들은 워싱턴까지 갈 수가 없었습니다. 갓님마루까지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을 해서 샌프란시스코에 한 달만 머물다가 다시 간마루를 타고서 다시 태평경을 건너서
돌아와야 했었던 거고 사절단하고 다른 사람들만 이제 미국이 제공하는 군함을 타고 뉴욕을 해 갖고 이제 대서
건너가고 이렇게 돌아오는 거죠. 그런데 그때에 그때에 후크사유키츠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자기가 있는 돈을 다 긁어 먹고 남들의 돈도
빌려 가지고 영어로 된 교과서들을 책들을 살 수
있는 대로 다 삽니다. 지리, 역사, 교과서, 미국의 고등학교 교과서 이런
것들을 전부 다 그때 삽니다. 그리고 그때에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사진관에
가서 그 사진관에서 그 사진관의 딸 13사짜리
딸하고 사진을 좀 찍어도 되겠냐? 그래서 사진을 찍습니다. 그 사진이
지금 남아 있는 그 유명한 후크사와는 김모노 사무라이 김모노를 입고 앉아 있고 옆에 앨리스 그 사진관 딸이서
있는 그 유명한 사진이 이때 만들어지는 겁니다. 후크사회의이
탐구력,이 호기심 이거를 영어를 배워야 되겠다라고 해서
어떻게서든지 일본에서는 그 당시 너무나 구하기 힘들 힘들었던 거의
불가능했던 그 영어로 영어 공부할 수 있는 교재들을 이때 다 사옵니다.
바크후는요. 이렇게 해서 사절단을 보내고 하는 것뿐만 아니라 아예
1862년 11월 달에는 네덜랜드에 11명의 유학생을 보냅니다. 그니까
역시 네덜랜드죠. 제일 친했던 네덜랜드 쉽게 그 갈 수 있었던
네덜랜드였습니다. 그래서 네덜랜드에 보내서 법 항해술 의학 이런 거를
배우도록 합니다. 그중에는 니시 아마네라는 유명 후쿠사유키치와
일본의 근대화의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기여를 했던 지식인 니시아마네가
있는데이 니시아마네도 이때에 바크후가 막부가 보낸 유학생 중에 하나에
포함이 돼서 네덜랜드로 갑니다. 그래서 네덜랜드의 그 유명한 레이던 대학에가 갖고 레던대학 교수한테가
갖고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데카르트, 로크, 해겔, 칸트와 같은
인물들이 대표하는 철학 또는 과학이라고 하는 우리나라의 법에는
금지되어 있는 종교와는 별개인 이러한 분야를 탐고해 보고 싶습니다.이
주제는 매우 어려 보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우리나라의 문명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선생님한테 가서 교수한테가 갖고 내가
왜 철학을 공부하고 싶은지를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너무나 기가 막힌 문장은 얘기
아닙니까? 뭐냐면 도대체 철학이라는 건 뭔지 모르겠다라는 거죠. 그러니까
종교는 아니고 그러니까 종교는 지금 서양 종교를 일본에서 포교하는 거는 당연히 금지가 돼 있는 거고 저
카톨릭이 뭐가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일본에서는 기리스타는 철저하게 박해를 하는데 그러면 종교는 아닌데 그렇다고
그러면이 데카르트 칸트이 사람들이 하는 건 이건 또 뭔지 이거를 당신들이 철학이라고 하는데
이게 도대체 뭔지 모르겠는데 너무 어렵다라는 거예요. 문학도 아니고
종교도 아니고 그죠. 무슨 도덕도 아니고 그까
사서삼경 같은 것도 아니고 한악에서 배우는 전혀 그런게 아닌 아주 이상한 분야라는 거죠. 근데
이거는 내가 배워야 될 것 같다. 왜? 이게 우리 문명에 도움이 될 거 같다. 그래서 나한테 그거 좀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라고 도전을 합니다.이 사람이 여기서 철학이라는 걸
배웁니다. 철학이라는 걸 배우고 돌아와서 그래서 후크사와 유기치하고
같이 학회를 만들어서 같이 공부를 하면서 서양의 용어들을 전부 다 1번 말로
번역하는 역할을 하는데 바로 그중에는 대표적으로 니시아마네하고 후쿠사와
같이 번역을 한 말이 뭐냐면 필러소피를 철학이라고 번역하는게 바로 닌시
아마네하고 946키입니다. 우리가 지금 철학이라고 하는 거 일본이 일본말로 데스가구라는 그
철학이라는 개념은 니시아마네하고 후쿠사유키 제 머리에서 나온 겁니다. 그 니시아 아마네는 레이든 대학에가
갖고 철학을 공부하고 옵니다. 니시는 칸트 철학 국제법
경제학 이런 거를 다 공부를 해서 1865년에 귀고를 합니다. 독구가와
요신노부 일본의 마지막 쇼근 그죠? 미도 가문의 출미도 번
출신 마지막 어 그 쇼근이었던 어 독구가와 요시노브의 자은 역할을 하고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다음에는 1868년이 이후에는 병부송에서 그때
일하고 있던 후쿠사우키씨랑 같이 서양 철학을 일본에 소개하는데 일생을
바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니시가 번역한 말들이
영어의 그거를 예술이라고 번역하고
reason을 이성이라고 번역을 하고 사언스를 과학이라고 번역을 하고
테크놀로지를 기술이라고 번역한 거 이건 전부 다 니시아마네가 만들어낸
신조어들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필로소피를 철학이라고 번역한 것도 니시
아마네하고 후쿠크사의 기칩니다.이 도표은요 1862년부터
1867년까지 그러니까 1868년이면은 독구가 막부가 완전히 무너지고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서 메이지 정권으로 넘어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지막
5년 동안 독구가 막부가 마지막 5년 동안 얼마나 많은 수의 유학생들을 전
세계로 보냈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도표입니다.
도크가와 막부도 이렇게 노력을 했습니다.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려고
이러한 수준 이러한 차원에 이러하게 거창한 차원에 이러한 규모의 외국인
유학생 보내는 이런 일은 나중에 중국에서 이홍장이 시도를
해보고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조선에서도 뒤늦게 갑옷 경장 끝난
다음에 계속해서 [목을 가다듬음] 보내려고 애를 쓰지만 그 규모에 있어서나
깊이 있어서 전혀 필척할 수 못됐습니다. 얼마나
요소 요소의 적제 족소의 그리고 분야마다 인재가 필요하고 그 인재를
기르기 위해서는 서양의 최첨단 지식을 습득을 해오도록 해야 된다라는
것을 알고서 독구가 막부가 이런 놀라운
유학생 파견 사업을 망하는 순간까지
지속했던 것입니다. 자, 그런데 모두에서도 말씀드렸듯이 그러면 서양을
배워야 된다라는 건 독고가 막 그런게 아닙니다. 조수에서도 그럽니다.
조왕양이 파의 온상인 조수에서도 서양문명을 배워야 된다라는 것을 깨
깨닫기 시작을 합니다. 그래서 조수 사스마도 그렇고 경쟁적으로 유학생을
보냅니다. 그런데 조슈는 1863년 처음으로 다섯 명의 청년들을
[목을 가다듬음] 영국으로 미랑을 시킵니다. 근데 미랑을 시키는 방법이 나가사키에 있는 영국 상인 토마스
글로버라는 사람한테 맡깁니다. 그 사람한테
부탁을 해서 자기네 청년들을 그 사람이 운영하는 배에 몰래 식구
미랑을 시킵니다. 사실 1854년
간학가와 조약을 통해서 일본이 공식적으로 세국 정책은 포기를 했지만
아직 각 번에서 자기가 독자적으로 알아서 외국의 유학생을 파결할 수
그럴 수는 없었던 거죠. 다 에도의 독구가 막부에 허락을 받아야 됐던
거죠. 그러니까는 그리고 사실 조주가 하겠다 그러면은 그거 토락할 리가
만무했습니다. 그러니까 몰래 해서 영국 상인 글로버한테 부탁을
합니다.이 이 토마스 글로버라는 사람은 나중에 일본의
미스비C 상사를 만드는데 도움이 됐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고 지금도
어 나가사키에 여행하신 분들은 한번 꼭가 보시면 나가사키 그 언덕에 글로버 저택이라고 지금도 그 사람들이
살 살살던 그 저택이 있습니다.이 글로벌을 통해서 조주번이 부탁을 해서
미랑을 시킵니다. 그때 미랑을 시킬 때 조슈번의
중신이었던 스후마사노스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이
사람이 우겨서 이후 학생들을 영국에 보냅니다.
수후 마사노스케는 나중에 조슈가 다시 극렬한 조왕양의 파권력을
잡으면서 그때에 유학생들을 외국에 파견하고 그랬다는
이유 때문에 할복 자살을 하도록 명을 받아서 죽을 수밖에 없는 사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이 사람은 그 전에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조수번의 젊은이들을 미랑을 시킵니다.
그때 미랑을 시키면서 이런 글을 남깁니다. 조슈는 도구가 필요하다. 도구란 인간
도구 말이다. 오늘 우리나라를 보면 많은 한들이 조항양의 운동을
지지한다. 그러나이는 일본인들의 허세에 불과하다. 언젠가는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서로 교류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가 왔을 때 우리가 아직도 서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면 우리 나라는 매우 불리해질 것이다. 그때 필요한 도구들을 준비하기 위해서 나는 노무라야키치와
야마오 요조를 영국에 보내고자 한다. 이때 선발되는 인재들이 노무라야키치
그다음에 야마오 요조 그리고 앤도킨스케이 세 사람을 먼저
보냅니다. 그리고 나중에 이또이로 구매하고 이노의 가오루를
보냅니다. 매주신 이후에 결정적인 역할을 매주신 과정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그리고 매지우신 이후에는 일본의 헌법을 만들고 총 최초
총리되신 내가 총리되심 여임하고 등등등 했던 바로 그 이도 히로부이
그리고 일본의 외무 대신을 여임하고 조선의 계국을 그렇게 종영을 하면서
김기술을 만나고 김몽집을 만나고 그러면서 조선이 빨리 계곡을 해야 된다. 우리 같이 해야 된다라는
그러면서 결국 나중에 갑경장 때 와서 조선의 개혁을 이끌려고 했던 바로 그
인노의 가오루 그때 20대 초반에 젊은 청년들로서 이때 미랑을 해서
영국에 건너갑니다. 1863년 6월 27일 날 이도하고 인노의 가오로는
먼저 간 세 사람을 뒤따라서 뒤늦게 배를 타고 미랑선을 타고 이제
건너가기 시작합니다. 이돌은 아시다시피 조슈의 하건무사 출신이었었고
그리고 요시다시인의 수가 선주에서 공부를 했었던 학생이 학생이었던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떠나면서이는 아버지한테
편지를 남깁니다. 오늘날 우리는 영국의 모든 것을 배워 와야만 하고 해군 기술을 배워야 할
절박한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가망이 없습니다. 저는 이러한 생각을 품고 저의 임무를
다하려고 3년간만 다녀오겠습니다. 이또와 인노에는 4개월에 걸친 항해
끝에 11월 4일 런던에 도착해서 먼저 도착해던 노무라 앤도 야마과
해우를 합니다.이 이 다섯 명의 젊은이를 조주가 미랑을 시켜서 영국에
유니버시티 컬리지 런던에 보내서 유학을 시킨이 다섯 명을 일컬어서
장주 오골, 조슈 오골 아니면 영어로 조슈파라 그럽니다.이
이 조슈 5파는 얼마나 일본 사람들이 그리고 그중에서도 조슈
조왕양이 파의 온상 외국주의자들이 온상인 번조차도
어떻게 해서든지 해외에서 지식을 습득을 하려고 온갖 위험과 어려움을
무릎 쓰고 파견한 젊은 일입니다.이
이 사람들은 이또히로부와 이노의 가오로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같은
나머지 세 사람도 일본의 발전에 근대화의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서 야마이오조는요 유니버시티 컬레지에서 과학과 산업을
2년간 연구를 합니다. 공부합니다. 그다음 그다음에 스커틀랜드의 글래스고에 가서 거기에서 살면서
스커틀랜드의 가장 큰 네이얼스 조선소에서 일을 합니다.
야간으로는 앤드슨 컬레지라는 대학을 또 다닙니다. 그리고 귀국을 합니다. 귀국에서는
어떡합니까? 요코하마의 조선서를 세우고 운영을 하고 공부 장관을 여임하고 도쿄 공학부의
전신인 공부대학교 고부다이구를 설립을 합니다. 고부다이구는
공부대학교는 1874년에서 85년 사이에 47명의 외국 교수들을
초청해서 일본 학생들을 가르치도록 합니다. 그리고 야마오는 또 청각
장애인들을 위한 교육에도 헌신을 합니다. 노무라이야키치는 2년간 런던 대학에서 역시 공부를
하고 토목공학과 광산학을학을 전공을 합니다. 그리고 1868년에 귀국을
해서 대장성에 들어가서 일본 철도 건설를 추정합니다. 그래서
노무라이야키치는 일본 철도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앤도스케은 1866년에 귀국해서 1881년부터
1883년에 일본 조폐국에서 근무하면서 1881년에
조폐 국장이 됩니다. 조폐 개혁을 통해서 일본의 화폐를 통일하고 하는
일을 만들어 내으로써 일본 조폐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요 5파가 가장 극명하게
일본 역사의 흔적을 남기지만
두고와 박구 후가 보내는 보낸 그 유학생들 닌시아만네 그다음에 또
서단을 보내서 후쿠사유키지 같은 사람이 만들어지고 하는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일본은 철저하게 존항이 그러니까 한쪽으로는 는
나라를 지키겠다. 서양을 이겨야겠다.라는
라는 그 생각과 그 결기와 그 열정을
가진 젊은이들이 그 젊은이들을 외국에 보내서 외국에서 가장 첨단
가장 서양의 첨단 과학과 기술과 학문과 지식을 습득을
해서 돌아와서 그것을 그대로 일본에 심도록
하는 어떻게 보면 폭설 아닙니까? 자기 거를 지키기 위해서 외국거를
마음껏 받아들인다라는 거. 우리 걸 지키려면 외국 거를 막아야
되는 거, 거절해야 되는 거라고 보통 우리가 생각하기 쉬운데 일본이 메이주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그렇게 흔히 생각하는 외국거를 외국을 이기려면 외국을 거부해야
된다라는게 아니라 외국을 이기려면은 그 외국의 가장 앞선 지식을 기술을 과학을
우리도 가져야 되겠다라는 그 놀라운 해안이죠. 어떻게 그런 결론을 내려갖고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서 가장 애국적이고 가장 자기 정체성 강하고
가장 우리나라를 지켜야겠다라는 젊은이들을
선발한 또이 젊은이들이 다친 사고를 하는게 아니라 완전히 열린 사고를 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서양 사람들한테
가서 학자들한테 가서 에거를 하면서 나한테 이런 것 좀 가르쳐 주세요. 저런 것 좀 가르쳐 주세요. 우리나라에 이런 거 없는데 내가 배워
가야지. 우리 문명이 삽니다. 라면서 배워 오게 해서 또 그 사람들을
사장시켜 버리거나 배척하거나 차별하는게 아니라 어떡하는 겁니까?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그거 배웠어.
그럼 너 조폐국 맡아서 해 봐. 너 광상국 맡아서 해 봐. 철도 지어 봐.
외교해 봐. 조선소 만들어 봐. 이런 거를 하는 거죠.
그러니까 일본이 불같이 일어날 수가 있었던 겁니다. 정말로 다른 나라에서 보기 힘든 그리고 특히 조선말에
우리가 볼 수 없었던 조선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었던 이상한 혼합입니다. 조합입니다. 우리 거 지키고 우리
거에 대한 자랑스러움 그리고 외국 외세가 우리를 침탈하는 거에 대한 분노
우리 거를 못 지키는 사람들에 대한 그 분노 이런 거를 어떻게 수환을
시키냐면 외국거를 많이 배워서 더 강해지자. 그래서 우리 거를
지키자라고 하는 이상한 사상적 조합이 만들어진게 그게 메이지 유신네
사상입니다. 사실 그때나 지금이나 어떤 나라에서도
그 이상한 사상의 혼합은 나오기 힘듭니다.
근데 일본이 그거를 만들어 낸 순간
해외 유학생들을 보낼뿐만 아니라 돌아와서 철저하게 그
사람들을 활용을함으로써 1번이 단숨의
근대화를 달성을 하고
한 세대만의 선진국으로 발도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네.
오늘은 어 덕구가 막부하고 조수번이 어떻게 경쟁적으로
해외 유학들을 보내면서 인재를 양성을 했는가를 한번 [음악] 살펴보았고요.
다음 시간에는 이제 사스마번문을 포함한 다른 번에서도 어떻게 유학생들을 보내 가지고 해외의 지식을
빨아들이려고 했는가를 살펴봅니다. 그리고이어서
정말로 조왕양이를 주장하는 그 사무라이들하고
해외 유학을 갔다 온 사무라이들이 사무라이들이 어떻게 서로가 그러면
만나서 어떻게 협력을 하면서 독구와 막보를 타도를 하고 메이지소의
왕정복고를 이루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사적인 사건과 [음악] 인물들을 통해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한국인의 탄생. 오늘은 이만 [음악]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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