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16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67 에도 시대의 난학, 쇄국 속에서 중화를 벗어나다

에도 시대의 난학, 쇄국 속에서 중화를 벗어나다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67회 - YouTube

에도 시대의 난학, 쇄국 속에서 중화를 벗어나다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67회
법률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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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강연은 함재봉의 『한국 사람 만들기 II: 친일개화파』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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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재봉은 에도 시대 일본이 난학을 통해 서양의 지식을 수용하며 중화 질서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분석합니다. 데지마를 통한 정보 수집과 번역 활동이 일본 근대화의 지적 토대가 되었음을 살피며, 당시 일본 지식인들이 서양 학문을 바라본 독자적인 시각을 탐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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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제67회 <에도 시대의 난학, 쇄국 속에서 중화를 벗어나다>에 대한 요약과 평론입니다.

<에도 시대의 난학, 쇄국 속에서 중화를 벗어나다> 요약
데지마와 네덜란드를 통한 서구 문명의 유입
에도 막부는 기독교 전파를 차단하기 위해 쇄국 정책을 폈으나, 나가사키의 인공섬 데지마(出島)를 통해 네덜란드와의 교역 창구는 열어두었다. 이를 통해 네덜란드 상관을 거쳐 서양의 과학, 의학, 지리학, 천문학 서적과 신식 문물이 지속적으로 유입되었으며, 이는 일본 지식인들이 서구 학문을 연구하는 <난학(蘭學, 란가쿠)>의 토대가 되었다.

<해체신서>와 실증적 지식의 충격
1774년 스기타 겐파쿠와 마에노 료타쿠 등은 네덜란드 해부학 서적인 <타펠 아나토미아>를 번역하여 <해체신서(解體新書)>를 출간했다. 실제 사형수 해부를 직접 참관하며 서양 해부도의 정확성을 확인한 난학자들은 수천 년간 절대적 진리로 여겨졌던 중국 전통 오장육부설과 음양오행론의 허구성을 깨달았다. 이는 사유의 중심축이 관념적 성리학에서 객관적·실증적 관찰로 이동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중화적 세계관의 탈피와 세계 인식의 확장
난학의 발전은 단순한 서양 의학 수용에 그치지 않고 지리학과 세계관의 대전환으로 이어졌다. 세계 지도를 통해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며 서양 열강이 전 세계로 팽창하고 있음을 일찍이 파악했다. 일본 지식인들은 중화 문명을 유일한 보편 문명으로 보던 시각에서 벗어나, 세계 속에서 일본의 위치와 안보를 현실적으로 고민하는 탈중화(脫中華)적 인식을 형성했다.

메이지 유신의 지적·제도적 인프라 형성
페리의 흑선(黑船)이 내항하기 이전부터 에도 사회 내부에는 난학을 통해 축적된 방대한 번역어, 과학적 사고방식, 서구 정세에 대한 정보 네트워크가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100여 년의 지적 훈련은 서양 세력의 충격 속에서도 일본이 맹목적 배척 대신 신속하게 서구 제도를 학습하고 메이지 유신으로 직결시킬 수 있었던 결정적 내부 동력이 되었다.

평론
제67회 강연은 19세기 동아시아 근대화 경쟁에서 일본이 조선이나 청나라와 다른 궤적을 그리게 된 심층적 기원을 에도 시대 난학의 축적에서 찾아낸다.

첫째, 근대화의 동력을 외세의 외적 충격에만 돌리지 않고,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성숙해 온 지적 전환의 과정으로 설명한다. 난학은 외부의 강요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실용과 실증을 중시하던 에도 학풍 속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번역과 검증의 역사였다. 저자는 <해체신서> 번역이라는 사건을 단순한 의학적 성취를 넘어 동아시아 지성사에서 성리학적 도그마가 붕괴한 문명사적 균열로 날카롭게 포착한다.

둘째, 쇄국 체제 아래에서도 중화 질서를 선제적으로 탈피했던 일본과, 소중화(小中華) 의식에 갇혀 성리학적 관념론을 더욱 심화시켰던 조선의 근본적인 차이를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조선이 정조 사후 서학을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문을 닫아거는 동안, 일본은 네덜란드라는 창구를 통해 세계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직시하고 있었다는 점을 실증적으로 드러낸다.

다만, 난학이 에도 막부의 엄격한 사상 통제와 체제 유지라는 한계 속에서 소수 엘리트 사족과 의사 계층 중심으로 진행되었다는 제약성이나, 난학의 실증주의가 훗날 제국주의적 군사 기술 지상주의로 변질되는 내적 모순에 대한 비판적 접근은 다소 보완될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 한국의 형성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동아시아의 지적 분기점을 객관적이고 구조적인 시각으로 재조명한다는 점에서 매우 탁월한 통찰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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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재봉 「한국인의 탄생」 67회

<에도 시대의 난학, 쇄국 속에서 중화를 벗어나다> 요약·평론

67회는 66회에서 다룬 에도시대의 사상과 교육 가운데 특히 <난학(蘭學)>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함재봉의 핵심 주장은 매우 선명하다.

<일본은 쇄국을 했지만 지적으로 폐쇄된 나라는 아니었다. 데지마를 통해 서양의 정보와 과학을 지속적으로 받아들였고, 이를 번역하고 검증하는 과정에서 중국 중심의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러한 지적 전환이 메이지유신의 중요한 전제였다.>

이번 회는 특히 <일본은 왜 서양문명을 받아들일 때 중국이나 조선보다 훨씬 덜 정신적 충격을 받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는 강연이라고 볼 수 있다.


1. 난학이란 무엇인가

‘난학’의 ‘난(蘭)’은 네덜란드를 뜻한다.

네덜란드의 Holland를 중국에서는 ‘화란(和蘭)’이라고 음역했고, 일본에서는 이를 ‘오란다’라고 읽었다. 따라서 난학은 문자 그대로 말하면 <네덜란드 학문>이다.

그러나 실제 의미는 훨씬 넓다.

네덜란드어를 통해 들어온

  • 의학
  • 해부학
  • 천문학
  • 지리학
  • 군사기술
  • 물리학
  • 화학
  • 국제정세

등 서양의 학문 전체를 가리켰다.

함재봉은 메이지유신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서양 학문의 상당 부분이 일본에 축적되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1853년 페리가 나타났을 때 일본인들이 처음으로 서양을 알게 된 것이 아니다.

<이미 서양을 공부하고 있던 사람들이 상당수 존재했다.>


2. 쇄국의 역설 ― 문은 닫았지만 창문은 열어 두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17세기 초반 가톨릭과 포르투갈 세력을 위험하게 보았다.

특히 규슈의 다이묘들과 기독교 세력이 결합해 막부에 도전할 가능성을 걱정했다. 그래서 포르투갈인을 추방하고 기독교를 탄압했다.

그러나 서양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는 않았다.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 대신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와의 교역을 유지했다.

그리고 나가사키 앞바다에 인공섬 <데지마>를 만들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사람들을 제한적으로 거주시키고 교역하게 했다.

함재봉이 보는 도쿠가와의 정책은 흥미롭다.

<정치적·종교적 영향은 차단하되 정보와 기술은 받아들인다.>

즉 ‘쇄국’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완전한 폐쇄가 아니라 <선택적 개방>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66회에서 제시된 일본의 특징, 즉

<외국 문명을 받아들이되 자기 정치체제를 지키려는 태도>

와 그대로 연결된다.


3. 가장 중요한 정보원 ― 『화란풍설서』

이번 회에서 특히 흥미로운 제도가 <화란풍설서(和蘭風説書)>다.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장은 매년 막부에 세계정세를 보고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세계적 무역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과 아시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상당히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이 보고서에는

  • 유럽의 전쟁
  • 왕조 변화
  • 식민지 경쟁
  • 영국과 네덜란드의 관계
  • 국제정치
  • 서양 각국의 움직임

등이 포함되었다.

강연에서는 1797년 보고서에 프랑스혁명 이후의 상황까지 기록되어 있었다고 설명한다.

즉 일본 엘리트들은 18세기 말 이미

<프랑스혁명이 일어났다는 사실>

과 유럽 국제정세의 변화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함재봉은 이것을 조선과의 결정적인 차이로 본다.


4. 네덜란드를 이용하여 가톨릭을 감시하다

도쿠가와 막부는 네덜란드인을 단순한 상인으로만 이용하지 않았다.

포르투갈·스페인 등 가톨릭 세력의 활동을 감시하는 정보원으로도 활용했다.

막부가 두려워한 것은 단순히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가 아니었다.

<선교 → 다이묘 개종 → 유럽세력과 결합 → 막부 전복>

이라는 정치적 가능성이었다.

그래서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에게 가톨릭 국가들의 움직임을 보고하도록 했다.

함재봉은 여기에서 도쿠가와 막부의 현실주의를 강조한다.

서양 자체를 모두 ‘오랑캐’라며 배척하기보다

<서양세력들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고 그 경쟁관계를 이용했다>

는 것이다.


5. 프랑수아 카롱과 『일본대왕국지』

이번 강연에서 흥미로운 인물이 프랑수아 카롱이다.

그는 프랑스계였지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서 활동했고 일본어에도 능통했다.

막부의 요구에 따라 일본의 정치·사회·군사·경제에 관한 정보를 정리했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함재봉이 소개하는 『일본대왕국지』이다.

이 책은 17세기 중반부터 유럽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일본에 대한 서양인들의 관심을 크게 높였다.

즉 정보는 일방통행이 아니었다.

<일본은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을 배웠고, 유럽도 네덜란드인을 통해 일본을 배웠다.>

함재봉은 이것을 에도 일본이 생각보다 훨씬 국제적인 정보망 속에 있었다는 증거로 본다.


6. 데지마의 의학과 서양 과학

난학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 가운데 하나는 의학이었다.

네덜란드 상인과 함께 의사들도 일본에 들어왔다.

그들이 가져온 서양 의학서와 해부학서는 일본 의사들의 강한 관심을 끌었다.

일본인들은 당시까지 중국 의학에 기반하여 인체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네덜란드 서적에 그려진 해부도가 기존 한의학의 설명과 상당히 달랐다.

여기에서 67회의 가장 극적인 사건이 등장한다.

<실제로 사람의 시체를 해부하여 어느 쪽 설명이 맞는가 확인해 보자.>


7. 스기타 겐파쿠와 『해체신서』

난학의 상징적 사건은 스기타 겐파쿠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서양 해부학서 번역이다.

스기타 겐파쿠 등 일본 의사들은 네덜란드어판 해부학서 『타펠 아나토미아』를 접했다.

그러나 책에 그려진 인체와 자신들이 배워온 중국 의학의 인체도가 너무나 달랐다.

그래서 실제 해부를 실시해 확인하려고 했다.

1771년 사형수의 시신을 해부한 결과, 그들은 서양 해부학서의 그림이 실제 인체에 훨씬 정확하게 부합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이 경험은 단순히 의학적인 충격만이 아니었다.

<중국의 책이 틀릴 수도 있다.>

라는 사실을 직접 확인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함재봉이 이번 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는 지적 전환이다.


8. 번역이라는 지적 혁명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스기타 겐파쿠와 동료들은 네덜란드어를 거의 몰랐다.

그럼에도 해부학서를 번역하기로 한다.

강연에는 당시 번역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보여주는 여러 일화가 나온다.

예를 들어 눈 위의 털을 묘사하는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하루 종일 토론한 끝에 그것이 ‘눈썹’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추측해 냈다는 식이다.

수년간의 작업 끝에 1774년 『해체신서(解體新書)』가 출간된다.

함재봉은 이것을 단순한 의학서 번역으로 보지 않는다.

<일본이 중국이라는 지식의 권위에서 독립하기 시작한 사건>

으로 본다.

‘해체신서’는 이후 일본 난학의 상징이 된다.


9. 경험과 관찰이 경전보다 중요해지다

이 사건의 의미는 방법론적이다.

중국 의학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고 서양 책에는 저렇게 적혀 있을 때 어느 쪽이 맞는가?

스기타 겐파쿠 일행은

<실제로 시체를 열어 본다.>

그리고 관찰 결과에 따라 판단한다.

이는

<경전의 권위 → 경험과 관찰>

이라는 지식의 기준 변화다.

함재봉은 바로 여기에서 근대과학적 태도의 중요한 요소를 발견한다.

중국의 전통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고,

<관찰하고 비교하여 맞는 것을 선택한다.>

이러한 태도가 훗날 서양 과학·군사·산업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10. “서양의 과학은 기독교와 별개다”

강연에서 또 하나 중요한 인물은 아라이 하쿠세키다.

그는 서양에 대해 연구하면서 서양의 과학·기술과 서양의 종교를 구별해야 한다는 식의 견해를 제시한다.

함재봉의 표현을 따르면 일본의 엘리트들은 점차

<기독교는 위험할 수 있지만 서양 과학은 배울 가치가 있다>

고 생각하게 된다.

이 구분이 매우 중요했다.

서양문명을 하나의 덩어리로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는 거부하면서 과학은 수용>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함재봉은 이를 일본식 <동도서기>에 가까운 태도로 설명한다.

본체는 일본에 두되 유용한 서양 기술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11. 요시무네와 난학의 확대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서양서적에 대한 규제를 크게 완화했다.

그 자신도 서양의 승마법, 천문학, 의학 등에 관심을 가졌다.

서양 단력법과 천문학에 관한 지식을 받아들이기 위해 네덜란드 전문가들과 접촉하게 했다.

이후 난학은 데지마라는 좁은 공간을 넘어 에도와 여러 지역으로 확산된다.

네덜란드어를 배우고 번역하는 전문 가문이 만들어지고, 서점에서도 난학 관련 서적이 유통되기 시작한다.

강연에서는 나가사키에서 전문적으로 네덜란드어 번역을 담당한 가문들이 존재했고 상당한 수의 통역관들이 활동했다고 설명한다.

즉 난학은 몇 명의 괴짜 학자의 취미가 아니라 점차 하나의 <지식 인프라>가 되었다.


12. 중국 문명의 권위에서 벗어나는 일본

67회의 결론은 난학 자체보다 더 큰 문제로 향한다.

일본인들은 오랫동안 중국에서 문자·유교·불교·의학을 배웠다.

그러나 에도 후기에는 세 가지 흐름이 동시에 발생했다.

<고학>은 주자의 권위를 의심했다.

<국학>은 중국문화보다 일본 고유의 문화를 찾았다.

<난학>은 서양과학을 통해 중국의 지식이 반드시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세 흐름이 서로 다른 방법으로

<중화질서의 지적 권위>

를 해체한 것이다.

따라서 함재봉에게 메이지유신 이전 일본은 이미 정신적으로 중국을 떠나기 시작한 사회였다.


평론

1. 이번 회의 가장 중요한 통찰 ― 근대화 이전에 ‘지식의 권위’가 바뀌었다

67회의 가장 강력한 설명은 여기에 있다.

메이지유신을 이해하려면 일본이 언제 철도와 공장을 만들었는가만 보면 안 된다.

그보다 먼저

<무엇을 진리라고 인정하는가>

가 바뀌어야 했다.

스기타 겐파쿠 일행의 해부가 상징적이다.

중국 의학과 서양 의학 가운데 어느 것이 맞는지 경전으로 결정하지 않고 실제 인체를 확인했다.

이 순간의 의미는 매우 크다.

<권위보다 관찰을 신뢰한다.>

이 태도가 근대과학을 수용하는 정신적 조건 가운데 하나였다는 함재봉의 설명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2. ‘쇄국 = 폐쇄’라는 통념을 수정한 것도 매우 유익하다

일본사를 간략하게 배우면

<에도시대 = 쇄국>
<메이지유신 = 개국>

이라는 구도가 만들어지기 쉽다.

그러나 67회는 그 사이를 연결한다.

일본은 서양인의 자유로운 출입은 막았지만

<정보·서적·과학·기술은 계속 받아들였다.>

그 때문에 1850년대 서양열강이 본격적으로 들어왔을 때 완전히 낯선 문명을 처음 접한 것이 아니었다.

이 설명은 메이지유신의 ‘갑작스러운 성공’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3. 조선과의 비교에서는 역시 조심해야 한다

함재봉의 논리는 이번에도

<일본 = 선택적 개방>
<조선 = 지적 폐쇄>

라는 대비로 흘러간다.

차이는 분명 존재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도 서학·천문학·의학·지도·세계지리 등에 관한 지식이 중국을 통해 들어왔고 이를 연구했던 지식인들도 있었다.

따라서 차이를

<일본에는 서양지식이 있었고 조선에는 없었다>

라고 규정하면 지나치다.

더 정확한 질문은

<왜 일본에서는 그러한 서양지식이 난학이라는 비교적 지속적이고 제도적인 학문 공동체로 발전했지만 조선에서는 그렇게 되지 못했는가?>

이다.

오히려 이 질문이 훨씬 중요하다.


4. 난학과 메이지유신 사이에도 거리가 있다

난학이 메이지유신에 중요한 지적 자산을 제공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난학 → 메이지유신>

이라는 직선적 인과관계로 보아서는 안 된다.

난학자 대부분이 막부를 무너뜨리려 한 혁명가였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당수는 막부 관료나 번의 의사·학자였다.

따라서 난학이 제공한 것은

<혁명의 이념>

이라기보다는

<서양을 이해하고 번역하고 평가할 수 있는 지적 도구>

였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이 구별은 중요하다.


66회와 67회를 함께 읽으면

66회는 일본 내부에서 주자학·고학·국학·불교·신도가 서로 경쟁하며 <중국 사상을 일본식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을 설명했다.

67회에서는 난학이 등장해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이제 질문은

<중국의 사상을 어떻게 일본화할 것인가?>

에서

<중국의 지식 자체가 옳은가?>

로 이동한다.

따라서 두 회를 연결하면 다음과 같은 지적 발전이 보인다.

<주자학 수용>
→ <주자학 비판>
→ <고학>
→ <국학>
→ <난학>
→ <중국 중심 지식체계의 상대화>
→ <서양과학의 직접 수용>

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물론 실제 역사는 이렇게 일직선으로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함재봉의 논리를 이해하는 데는 이 구조가 유용하다.


63~67회의 전체 구조

이제 다섯 회를 함께 놓으면 함재봉이 왜 메이지유신을 그렇게 길게 설명하는지 분명해진다.

63회: <도쿠가와 정치체제와 참근교대>

64회: <조슈·사쓰마라는 막부 반대 정치세력>

65회: <에도의 시장경제와 지방 번의 경제력>

66회: <교육·문해력·주자학·국학 등 사상적 다양성>

67회: <난학과 서양 과학>

즉 함재봉은 메이지유신을 하나의 사건으로 보지 않는다.

<정치적 기반 + 경제적 기반 + 교육적 기반 + 사상적 기반 + 과학적 기반>

이 수백 년 동안 축적된 뒤 19세기 국제정세의 충격을 만나 폭발한 것으로 설명한다.

이것은 그의 메이지유신론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부분이다.


종합 평가

67회는 66회와 함께 함재봉의 일본론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부분에 속한다.

특히 스기타 겐파쿠의 해부와 『해체신서』의 번역 과정은 메이지유신 이전 일본의 정신적 변화를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서양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중국의 권위를 상대화하고, 서로 다른 지식체계를 비교하고, 실제 경험으로 어느 것이 더 정확한지를 판단하는 능력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것이 함재봉이 말하는 일본 근대화의 깊은 지적 토대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일본의 근대화는 페리의 흑선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에도의 번역가와 의사들이 네덜란드 책을 펼쳐 놓고 중국의 지식과 실제 세계가 맞는지를 의심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함재봉의 설명을 비판적으로 읽는다면 다음 질문을 계속 붙들어야 한다.

<왜 조선에서도 서양 지식은 들어왔는데 일본의 난학과 같은 지속적 지식공동체가 만들어지지 못했는가?>

단순히 ‘조선인은 폐쇄적이고 일본인은 개방적이었다’고 답하면 설명이 너무 쉬워진다. 국가의 지식 통제 방식, 상업 출판시장, 전문직 집단, 교육제도, 중국과의 관계, 지식인의 사회적 위치 등의 차이를 함께 보아야 한다.

아마 이 점까지 분석할 때 함재봉의 <일본은 왜 성공하고 조선은 왜 실패했는가>라는 큰 비교사적 주장의 강점과 한계를 가장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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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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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한국인의 탄생의 함재봉입니다. 오늘은 어 일본의
란각 난학이라는 거에 대해서 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들어보신 분들도 있을
거고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은이 난학이라는 것은 네덜랜드의
난인데요. 그니까 영어로 더치스터디라 그럽니다. 그러니까는 그 화란 우리가
보통 어 한자로 그 네덜랜드를
화란이라고 표기를 합니다. 중국 사람들이 이렇게 시작한 겁니다. 왜냐면 중국 중국 사람들이 화란이라고
쓰고 그걸 발음하는 거는 허란입니다. 그게 헐랜드란 뜻이 되는 거죠.
그래서 헐란드를 음역을 허울란으로 했던 건데 어쨌든 거기에서 그 란을 따와 갖고 일본 사람들이 이제 화란을
오란다라고 읽었던 거고 그래서 그 란 란이 어
그 네덜랜드를 뜻하는게 됐습니다. 그래서 네덜랜드의 학문 난이라는게
일본의 성학이 시작합니다. 일본은 어떤 의미에서 쇠국을 하지만 쇠국
아닌 쇠국이었습니다. 네덜랜드의 학문이
즉 서양의 학문이이 난학을 통해서 일본에
널리 보급이 됩니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 때 계곡을 하기 전에
이미 서양 학문이 엄청나게 많이 들어와 와 있었습니다.
따라서 일본이 근대화를 하는데 있어서 그만큼 큰 자산이 됐었습니다. 그럼
오늘은 그 난학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디서 들어와서 어떻게 퍼지게 됐고
누가 그걸 이용했었는지 배웠는지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인의 탄생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어 도쿠가와이아스가 권력을 잡고 그리고
세국을 곧바로 진행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 정권이 안정되기 시작하면서
될 때를 기다려서 1639년부터 본격적으로 본격적으로 쇠국을
시작합니다. 사실은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어 네덜랜드뿐만 아니라 포트
상관 자기네 무역 센터죠. 무역 지점을 어 유지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1639년부터는 본격적인 쇠곡 정책으로 들어가면서
포르스갈은 이제 완전히 축출이 되고 네덜랜드의 상관장, 네덜랜드 동인도
회사의 상관장만 남게 됩니다. 그리고 일환으로 그 상관을 아예 이번에는
나가사기에다가인 나가사기 한부에 인공섬을 지어 놓고
그 인공섬에다가이 사람들을 사실 말하자면 가둬 놓는 거죠. 다리 하나로 육지랑 연결을 해
놨지만 허락을 받고 나올 수 나와야 됐었고
일본 사람들이 들어갈 때도 허락을 받고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철저하게 교류를 제한을
했었죠. 그런데이 사람들이 일본이 독구가와 막부가
쇠곡을 한다고 하면서도이 대지마섬이라는 거에도 유지했던 이유는
바깥 세상에 대한 소식을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서었습니다. 요구가와의
지도자들의 입장에서는 자기네가
서양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쇠국을 하려고 했지만은
서양의과의 모든 교리를 끊어 버리면 서양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서양의 뉴스에 대해서도 무지해질 수밖에 없죠. 그러니까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서 네덜랜드 동인도 회사 당시 세계 최고의 그 무역
회사였었죠. 그 회사의 무역 지점 하나만큼은 유지를 하고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이 상관 상관이 와서 그러니까 뭐
장사하는 사람들이 와서 네덜랜드 동인도 회사 직원들이 와서 여러 가지 교육도 할 수가 있고 그렇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1년에 한 번씩 1년에 한 번씩 네덜랜드 동인도
회사가 전 세계를 주름잡으면서 긁어 모을 수 있는 모든 정보들을
그거를 일모 교연학의 책으로 한 권으로 정리를 해서 1년에 한 번씩
그 책을 가지고에도 지금 도쿄로 가서 쇼근한테
그 책을 보여 주는 그것이이 네덜랜드 동인도 회사의 데지마섬 지점
상관장이 장의 임무였었습니다. 그
보고서 이름이 오란다 풍설서입니다. 화란 풍설서. 활란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활란에서 모 수집한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에 대한 책 이렇게 되겠죠. 이것을 매년 이제 보고를 하기
시작하는데 지금이 사진에서 보실 수 있는 거는 1797년에
당시 네덜랜드 상관장이었던 지헨미라는 사람이 작성을 해서 쇼
당시 쇼근한테 보여줬던 그 풍설서의 일부분입니다. 그런데 그 풍설서의
내용이 뭐였었냐면은 프랑스 혁명 이후에 여러분 프랑스 혁명이 언제입니까? 1789년에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1797년이면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지 8년 만에
네덜랜드 장관장이 모든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던 상황. 그리고 그
이후에 유럽이 어떻게 변하고 있었고 특히
이때에 이제 영국이 영국도 동인동 회사를 차리고 네덜랜드도 동인동
회사가 있고 그러면서이 둘이 재해권을 세계의 무역 재패를 위해서 네덜랜드하고 영국이 치열하게 싸우죠.
영국하고 네덜랜드가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던 내용까지도 전부 다 적어서
쇼근한테 보고를 합니다. 사실 처음에는요. 바꾸 초기에는이 풍설서를
쓰게 하는 이유가 특히이 독구가 막부가 관심 있었던 것은
포르트갈의 소식이었습니다. 포르트갈은 이미 도구가와 훨씬 이전부터 그렇죠.
도돔이 그 이전부터 오다노브나가 이럴 때부터 이미 규에
와서 전교를 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 전교를 통해서 일본에 수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생겼고 그 사람들을 기리스탄이라고 불렀습니다. 크리스천을 이제 일본식으로 발음해서
기리스탄이었었던 거죠. 그런데 도크가와 입장에서는 결국은 도요토미를
격퇴하고 이기고 도요토미 가문으로부터 권력을 뺏고 나서는 도미에 충성했던
수많은 규슈의 세력들을
제압을 해야 됐었고 그러는 과정에서이 교슈의 사람들이 포르투갈하고 그
선교를 해 줬던 그 포르투갈하고 굉장히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거를 알았기 때문에 그 폴트가의
관계를 끊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진짜로 도구가와 막부에서는
교수 같은 데리스탄들이 크리스천들이 포르투갈과 손을 잡고서는 자기네
도구가를 무너뜨릴 그런 음모를 획색하고 있다. 이런 생각을 늘
했었습니다. 이게 뭐냐면은 나중에 조선에서
천주교에 대한 거대한 박해가 시작되니까 황사형이 황사형 백서라는
걸 쓰면서 뭐라 그럽니까? 프랑스 왕한테 편지를 쓰면서 제발 우리나라의
군대를 끌고 쳐들어와서이 우리를 타 박해하는이 정부를 쫓아내
달라고 하는게 그게 황사형 백서입니다. 물론 그거는 이제 잡혔기 때문에 무효로 돌아 저
결국은 실행으로 옮기지는 못했었지만 말하자면 그 당시에
일본도 그렇고 조선도 그렇고 중국도 그렇고이 서양의 선교사라는 사람들이
도대체 와서 하는게 뭔지 전교를 한다 그러는데 우선 전교하는 거 자체도
싫었죠. 자기네 유교, 뭐 불교 이런 전통 그 신앙 체계가 있고 그랬는데
그걸 자꾸 부정을 하면서 엉뚱한 종교를 갖다 대니까 그것도 싫었던
거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뒤에 도살이고 있는 선교사들이 주로 어디 어디 사람들이니까 영국 프랑스 독일
전부 다 어디 사람들입니까? 제국주의 강력한 소구 열강의 앞잡이들이었죠.
그렇게 생각을 했던 겁니다. 그래서이 사람들은 아 언제라도가 와도 그렇게 생각했던
거죠.이 포르투갈하고의 관계를 끊어야 된다. 왜냐면 아 포르투갈이 크리스천들을 심어 놓고서이
크리스천들을 이용해 갖고 우리 정권을 전복하려고 그러 그럴 수도 있다. 그랬기 때문에 그 의심이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포르투갈에 대해서 감시를 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그걸 누구한테 맡기느냐?
개신교 국가였던 네덜랜드의 동인도 회사 사람들한테 맡기는 거죠.
그러니까 이미 네덜란드하고 네덜랜드는 개신교고이 개신교들하고
카톨릭들이 엄청나게 유럽에서 전쟁하고 있다는 거를 알았기 때문에 아
포르투갈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네덜랜드 사람들을 고용을 해야 되겠다. 천주교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개신교를 들여와야겠다. 이용을 해야겠다. 이렇게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네덜랜드가 포르트가를
제외시켜 버리고 네덜랜드만이 일본하고 이제 앞으로 교육을 할 수 있다라는 그 허락을 맡아낸 것이 어
프랑스와 카롱이라는 그 네덜랜드 동인도 회사의 어
직원이었었습니다.이 이 사람이 1640년에 처음으로
에도에 가서 에도에 가서 자기 회사를 대표해서 에도에 가서 당시 쇼근을
만났을 때 그때 쇼근이 앞으로는 스페인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보고를
하라 이렇게 명령을 받습니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이제 본격적으로 환란 풍설서를 어 쓰기 시작 제출을
하기 시작을 합니다. 재밌는 사실은요.이 카롱은 프랑스 사람입니다.
프랑스의 위근노, 그러니까 프랑스의 개신교도였었습니다.
그러니까 프랑스의 개신교도였는데 프랑스에서 카톨릭으로부터이 개신 교도들이 박해를 받으니까 그
개신교들이 어디로 갑니까? 네덜랜드로 가는 거죠. 그래서 네덜랜드에 가서
네덜랜드 동인도 회사에 취직을 하는 거고 그 사람이 그 사람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일본에 이제 파견을 하는 겁니다. 근데 워낙 언어의 제주가 있고 그래서 일본 말을
유창하게 하게 되고 그런답니다. 카롱이 프랑스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네덜랜드 동인도 회사의 지점장이 일본 지점장이 될 수
있었다라는 것은 전부 다 똑같은 칼뱅주의 개신교도들입니다.
그러니까이 사람들은 옷도 똑같이 있고 사고 방식도 똑같고 당연히 신앙이
똑같고 그러니까 서로를 도와주고 보호해 주고 같이 잡니다. 그러니까 영국의 청교드들도 ත්‍ර타하면은
네덜랜드로 도망으로 오고 프랑스의 위근노들도 껄타오면은 네덜랜드로 오고 이제 그랬던 거죠.
그리고 네덜랜드가 항상 인력이 필요하고 제주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니까 그 동인도 회사를 통해서
전 세계에다가 이제 뿌리는 사람들을 뿌려 놓는 이제 그런 일이 되는 그런
어 셈이 되는 거죠. 그래서 1633년에는 이제 데지마의 이인자로
승진을 하고 그런데 1636년에 네덜랜드 동인도 회사의 사무총장
회장이 전 세계에 자기네 회사들이 지점들이 나가 있는데
각 지점장들 보고 당신들이 지금 거주하면서 상주하면서
무역을 하고 있는 거래를 하고 있는 그 나라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수집해서 책을 써서 제출을 하라 이럽니다. 그래서 그때에
그때에이 카롱이 자료를 모으기 시작하고 글을 쓰기 시작해서 1646년 4 1645년에
위대한 일본 왕국에 대한 묘사라는
책을 처음에는 회사 연역의 불록같이 회사 카톨록에
불록같이 넣었다가 그다음에는 1661년에 단행본으로 출출 출간을
합니다. 그래서이 책이 독일어, 프랑스, 영어로 번역이 되면서 유럽,
유럽의 전체에 퍼집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일본에 대한 서양
사람들의 그 지식, 관심, 호기심은 이미 17세기 초반에 네덜랜드
동인도를 회사를 통해서 촉발이 됩니다. 대일본 왕국에 대한 책.이
이 책에 보시면요. 우선 당시 일본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사건들에 대한 자세한 얘기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표적인 것이 거기에 사파가 있는데 그 사파가
뭐냐면은여 뭐 사파들이 굉장히 많은데 지금 보여 드리는이 사파는
오사가 전투에 대한 겁니다. 오사가 전투라는게 오사과 성 전투라는게 뭐냐면요.
도구가와 새끼가라 전투에서 서군을 격파하고 도토미파를 격파를
하고 그리고 정권을 잡습니다. 그런데 도요더미의 여섯 살짜리 아들 도요더미
히대요리를 죽이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 히대요리는 여전히 자기네 송인
오사카송에서 사합니다. 그런데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결국은
도크가와 그 성을 공격 포위해서 공격을 해서 결국은 그 히데오리하고
그 어머니를 죽입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도구가 가문에 저 도돔이
가문에 씨를 말려 버리는 거죠. 그 전투의 장면을 그러니까 이러 이러한
사건들이 있었다라는 일본의 역사까지도 카롱이 다 소개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또 그 당시에 그 지도가 실인데 지도에 보시면은
일본 일본도 있지만 그 옆에 코레아 그래갖고 조선도
지도에 나옵니다. 일본어를 유창하기 구사하고 외교도 잘하는 카롱은 1636년에는
에도에 가서 쇼근을 아련하면서요. 당시 이제 복잡해서 말씀은 잘 안
자세히 안 드리겠지만은 피터 나이트라고 그 당시 네덜랜드 동인동 회사의 지점에 와 있던 사람이이
사람이 잘못을 저질러서 쇼근이 화가 나서 그 사람을 애도에다 가둬 놓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동료를 구출하러 가기 위해서 카롱이 가면서
가서 협상을 하고 근데 협상을 좀 쉽게 하기 위해서
선물로 그 당시에 네덜랜드에서 만든 어이 회전하는 등이 있습니다. 이렇게
돌아가는 회전하는 등이 있는데 지금 사진에서 보시는이이 등입니다.이 등을
선물로 쇼분한테 그걸 받칩니다. 그래서 결국 이제 그 사람이 풀려나는데 지금 그 등이
니코에 있는 동조궁이라데 있습니다. 그 동조궁이 뭐냐면은
도구가와 이에아스 도구가와 막부를 수립한 도구가와 이에아스를
모시는 절입니다. 그 절에 지금 네덜랜드 동인도
회사에서부터 쇼근이 선문을 받았던이 화려한 그 당시의 네덜랜드 등이
지금도 거기에 걸려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1639년부터 본격적인
이제 쇠곡 정책이 어 그 추진이 되기 시작하면서 그때 이제 포르트 상인들이
다 쫓겨나기 시작하고 어 그
히라도의 섬에 있었던 네덜랜드 동인동 회사의 창고들까지도
전부 다 불태워집니다. 그 창고들을 불태운 이유가 뭐였냐면요. 그 창고가
1638년에 세워졌기 때문에 창고에다가 앞에다가 문 위에다가
뭐라고 썼냐면은 1638AD라고 썼습니다. AD라는게
기원 후 기원전이 BC고 기원 후가 AD 아닙니까? 아노미네.
주님이 오신 후 이런 뜻이 되는 거죠.
오오신 해가 되는 거죠. 그러니깐 이게 기독교에서
유래하는 말이죠. 그렇죠? 그러니까는 일본 막부가 이놈들 우리 너희들
기독교 얘기 하면 안 된다. 해서 그러니까 얼마나 지독한 쇠곡으로 들어가기 시작하고 반기독교 철저하게
기독교를 탄압하는 정책으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들어갔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 이제 히라도섬을 다해서 다
쫓아내고 거기 있는 물분들을 다 불태우고 포르투 가리고 네덜랜드를 다
쫓아내지만 네덜랜드는 결국은 다시 협상을 해
갖고 1641년에 데지마섬이라는 그 인공섬을 만들어서
거기로 로 옮겨갑니다. 프랑스웨카롱의 뒤를 이은 어 그 네덜란드 상관장
데지마 상관장이 막스밀리안 르메입니다. 근데 사실 이름을 보면이 사람들 프랑스 사람 같습니다.
그러니까 참 밀접하게이 개신교도들끼리 같이 그 활동을 했었다는 거를 우리가
짐작할 수가 있는데요. 막스밀리언 르메르는 1641년
10월 18일 날 자기 일기에 아예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황제를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선교사 등이 일본 내에서 비밀리에
무슨 활동을 하는가에 대해 알려 주는 것이다. 그니까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네가 일본과의 교육을 독점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스페인하고 포르트갈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고 따라서 혹시 일본의 독구가와 정부를 막부를 전복하려는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게 아닌가 이런 동향을 정확하게 조사를 해서
보고를 하는 것이 자기네 임무라는 것을 너무나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일본의 독구가와 막부는요
1641년부터 1859년까지
무려 218년 동안 매년 데지마의 네덜랜드 상관장으로부터
활풍설서 보고서를 받았습니다. 받아서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일본의
지식인들과 뭐 일본의 높은 관료들은 당연히 다 같이 들여다 봤겠죠.
그것이 널리 퍼집니다. 따라서 1648년에 베스트랜 조약이라는 것이
맺어졌다. 그러니까 그 30년 전쟁이 끝나고 결국은
유럽에서의 종교 전쟁을 종결시키는 베스트랜 조약이 1648년에 맺어졌다는 사실. 또 1755년에
리즈 대지진이 일어나서 리즈본에 있는 교회가 교회에 수백명의 교인들이
있는데 그게 무너져서 참사가 일어났다라는 소식.이 이 국제정치적으로 국제
외교적으로 너무나도 중요한 정보들을 일본의 엘리트들은
독구업 막부 200 여년 내내
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이 가능했던 건요.
얼마나 독구가와 막부가 사실 개방적이었었는지를여여
여지없이 보여줍니다. 진짜 말이 쇠국이지 이렇게 개방적이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비록 비록 한 나라 네덜랜드의
상관만 와서 있게끔 했지만 거기를 통해서 들어올 수 있는 지식을 전부
다 빨아들립니다. 그 당시 일본의 정책을 이끌었던 아에
하쿠색끼라는 유명한 정치가 있습니다. 근데이 사람이 또 학자합니다. 특히
정치에서 물러나서는 학자가 돼서 책을 쓰기 시작하는데 서양에 대해서 책을
씁니다. 그러면서 서양 기문이라는 책을 썼는데 거기에서 이렇게 써
놓습니다. 서양의 과학은 기독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일본의 이익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적극 도입해야 된다.라고 주장을 합니다. 일본의 최고 정치가
명세기 쇠곡을 하고 있는 나라의 최고 정치가 하는 얘기가 야, 지금
네덜랜드 상관장을 통해서 우리가 이런 거를 접하고 있는데 가만 보니까이
사람들이 가져오는이 학문들은이 사람들의 과학은 전혀 기독교와는
상관이 없다. 별개로 생각해야 된다. 그러니까 자꾸 이상한 서양 이념이
침투해 들어온다. 이런 거 이런 것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이거는
순수하게 우리가 배워야 되는 것이다. 비록 서양 오랑캐들의 것이지만 이거는
분명히 우리가 배워야 되는 것이다. 서양의 이상한 종교인 우리가 경계해야
되는 서양의 기독교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라고 아예
일본 최고 엘리트들이 그렇게 인식을 하고 그렇게 책에다가 씁니다. 그래서
결국은 뭡니까? 일본식의 동도석기가 생기는 거죠. 그러니까 나중에 그거를
뭐 중국에서는 우리는 동도석기라 그러고 조선에서는 동도서기 그다음에 중국에서는 중체서용
그죠? 본체는 중국 거고 그 기술은 서양 거다. 일본에서 뭐라
합니까? 화양제. 혼은 일본 거지만
제주 기술은 서양거를 쓴다라는 이제 절충들이죠.
그러한 인식이 일본에서는 굉장히 일찍부터
중국의 중소형론보다 훨씬 일식 일찍 인식이 들기 시작하고 물론 조선에
비해서 조선의 동동도석에 비해서도 훨씬 앞섭니다. 서행의 학문은
객관적인 걸로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한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어 19세기에 오면 이제 그
하시모토사나이라는 흑구입번의 사무라이데이 사람은 아예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우리는 서양의
기계와 기술은 받아들이고 그 대신 우리의 윤리 도덕은 지킬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제 후쿠시마 어 그 지진 났던 그 원전
후쿠시마 원전 사태 났던 그 후쿠시마 아 현 지금은 후쿠시마 현인데
그 독고가 시대는 그게 시학가와 번이었습니다. 그 시락가와 번의
다이묘였던 마스다이라 사다노브는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서양
오랑캐들은 과학을 발전시켰다. 특히 천문학, 지리, 무기, 내과 외과
등의 분야에 있어서는 오랑캐들로부터 배울 것이 많이 있다. 어떤 때는 그러나 쓸모없는 호기심만 유발하고
옳지 않은 견해를 퍼트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을 막고자 한다면 오히려 더 퍼트리는 결과만
가져올 것이다. 따라서 그런 학문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자들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을 맡기 위한 모든 조처를
취해야 한다. 마스다이라 사단노브는요. 마스다이라가 뭐냐면 도구가와랑 같은 집안입니다.
도구가와도 원래 마스다이라는 성으로 태어났었습니다. 같은 집안입니다.
그러니까 일본을 동시에 통치하고 있는 그 집안입니다. 그리고이 사람이
마크의 로주 수포의 최고 말하자면 영의정 총리까지도 여기만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일본의 지도부분은 최고위의 층에서부터
일 일반 사무라이들에 이기까지 아 서양거를 배워야 된다는 인식이 이미
17세기부터 18세기 19세기 내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법률 방송이 출관하는 시사 교양지 법치와 자유는 우리 사회가 증면하고
있는 법치의 문제들을 가장 냉철한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는 정론지입니다.
2026년 대한민국의 오늘을 가장 정확하게 깊이 있게 읽어볼 수 있는
법치와 자유를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온라인으로도 편하게 읽어 보실
수 있습니다.
대지말을 통해서 이제 들어온 지식이 뭐 국제 정세 이런 것만이 오는게 아니었습니다.
재밌는 것은이이 사람들이 이제 그 네덜랜드 사람들이 거기서 상인들이
살고 있으니까 아주 상주를 하는 거니까 그 사람들을 치료해 주기 위해서 네덜랜드 의사들도 같이 상주를
합니다. 근데이 의사들이 이제 엄청난 역할들을 하기 시작을 하는데 이런
사람들이 이제 서양의 의학 서적 같은 거를 전부 다 가지고 들어옵니다. 그러면 서양의 의학 서적들이 그 당시
이제 서양의 의학의 해부학 이런 거를 통해서 급격히 발전을 하는 거고 그런 것을 해부도를 그린 책들 같은 거를
이제 마구 찍어내기 시작했을 때에 그런 책들이 이제 돼지마섬에 오는 거고 그걸 가지고 이제 돼지마섬에
있는 네덜랜드 의사들이 그걸 가지고 공부도 하고 뭐 사람들 치유도 하고 치료도 하고 그러지 않겠습니까?이 이
책들이 돼지마섬에 다리를 건너서 나가기 시에 퍼지기 시작하고 나가사기
시에는 아예 난학 란각구 책 네덜랜드
책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서점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거기에
가서 일본 사람들이 서양 책을 접하기 시작하고 서양의
첨단 기술들을 배우기 시작을 합니다. 1720년에는요.
8대 수호군 어 독구가 요시문에는요.
완전히 서양 책에 대한 제한을 수입 제한을
완전히 협해 버립니다. 본인은 서양의 승마 기술에 대해서 관심을 갖습니다.
그래서 네덜랜드 사람 보고 아예 와서 서양식 승마를 시범을 보이라 그래서
에도에 와서 네덜랜드 사람들이 와서 서양식 승마 기술을 선거이게 하고 또
뭐 중국으로부터는 식물학자들을 초청을 하고 그리고 서양식 단력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일본의 젊은 학자들은 또 돼지마섬으로 나가사기로 보내서
네덜랜드 학자들하고 같이 서양식 단력을 연구하도록 하고 그럽니다.
사실이 과정을 통해서 일본은
난구를 꼽히면서 서양을 너무나도 깊이 있게 배웁니다. 중국에
비해서도 조선에 비해서도 아예 비교할 사실 비교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깊이 있게
서양과 교류를 하고 서양의 학문 사상 기술
이런 것들을 흡수를 합니다.이 이 난가구가 확산되는데 두 가지 경로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요.이 네덜랜드어를 번역을 그러니까 아예 나가사계에는요.
정부가 지정하는 네덜랜드의 책들을 1번 말로 옮기는 그 번역 가문들이
있었습니다. 아가사키의네 가문을 지정을 해서
당신들은 대를이어서 네덜랜드 말을 배워 갖고 네덜랜드
글을 배워서 네덜랜드의 상관장이 가지고 오는 네덜랜드 서적들을 전부 다 일본말로 번역을
하도록 합니다. 그게 그 집안에 그네 가문의 아주 그 존재 이유였었습니다.
임무였었습니다. 자기 밑에 또 다른 12 가문을
고용을 하면서 그러면서 이제
하청을 주는 거죠. 하총을 주면서 나가기에는이 네덜랜드를 유창하게 하고
그거를 글로 옮길 수 있는 일본말로 옮기는 그런 가문들이 생기고 그런
서점들이 생기면서 완전히 서양 학문을 빨아들이는 문으로서 나가사기가 작동을
하기 시작을 합니다. 1690년에서 1692년 2년 동안 돼지마에 상조하고 있었던
독일 의사 캠퍼라는 유명한 독일 의사가 있습니다.이 이 캠퍼라는 사람은 일본에 대한 놀라운 책을
썼습니다. 그래서이 사람도 지금 여기 보시는 그림들은 뭐냐면 우선 어이 책
쓴 책에 나온 사파는 뭐냐면 에도에 가서 그 쇼근 앞에 가서 쇼근을
아연하고 있는 그 장면을 그린 거고 그 또이 말들이
이렇게 긴 행렬이 있는 거는 이게 뭐냐면 바로 참근 교대 산킹 곧다이를
하고 있는 장면이죠. 그러니까 어느 다이묘가 이제 또 참근 교대를 하러 애도로 오는 그런
장관이 연출되는 것을 보고서 캠퍼가 그거를 이제 그림으로 그려 놨던 거고
그다음에 당시 일본의 글이 어떻다라는 걸 이제 번역을 어떻게 해야 되는 거 발음을 어떻게 해야 되는 거를이
도쿄로 만들어서 어 만들어 놓은 거 그다음에 일본의 종교에 대해서이 불교에 대해서
소개를 하고 이제 이런 여러 가지 역할을 하는데이 캠퍼가 가
책에다가 당시에 나가사기에서 네덜랜드어 번역을
전담하는 전문 번역사만 140명이나 있었다 그럽니다. 그러면 첫 번째 경로는 이제 네덜랜드어를 전문적으로
번역하는 임무를 지정받은 이제네 가문 그 그밑에 있는 12 가문이었고 두
번째는 사실은 더 놀라운 그리고 더 유명하게 알려진 또 다른
경로가 있었습니다. 그게 누구냐면 스키다 캠파구라는 의사를
비롯해서 네덜랜드의 의수를 전문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일본 의사들 여섯 명이
있었습니다.이 이 스키타 캠바꾸는 자기 친구들하고 나가사에 가서 내가사계 책방에서 이제 네덜랜드
책들을 이렇게 둘다가 거기에서 당시에 타펠 아나토미아라고
그 독일에 있 독일의 이제 유명한 쿨무스라는 독일의 의학자가 당시 최첨단
서양 의학을 이제 그 내용을 전술를 한 거죠. 그래서 거기에 이제 자세한
그림들을 그리고 해부도를 이제 집어넣습니다.
그걸 이제 네덜랜드로 번역한 책이 돼지마에 와 있었던 거를 그 나가게
흘러나온 거를 그거를 스키타 캠파크가 이제 한의원이었으니까 한의사였으니까
전통 한의사가 가서 그걸 보고서
해부도를 이렇게 들었다 봅니다. 그래서 해부도를 들여다보거든요.이 사람들이
야 우리는 지금 여태까지 오장 육부가 있고 뭐 기 혈이 있고 이런 거를
배웠었는데 아니 도대체이 에보도라는 건 이게 도대체 뭐냐?
우리가 알고 있는 인체의 모습과 우리가 여태까지음음 음향 오행사를 해 갖고 배웠던 그 화타의 이론 이런
거를 통해서 배웠던 그 모든 내용하고 너무나도 다른 인체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거를 보고이 사람들이요. 이거 확인을 해 봐야 되겠다
그럽니다. 그래서 1771년 3월에이 사람들이
나가사기의 관려한테 가서 허가를 맞습니다. 무슨
허가를 맞냐면요. 우리가이 내용이 맞는지 안 맞는지이
독일 의사가 해부도를 그려 놨는데 이게 맞는지 안 맞는지를 확인을 좀
하고 싶은데 그럼 우리도 해를 해야 될 텐데 해를 어떻게 하느냐?
그래서 어떻게 하냐면요. 다음번에 누가 혹시
죄를 지어서 사형을 당하면은 그 사형된 그 사형수의 시체를 우리한테
좀 넘겨 달라. 그러면 우리가 그걸 가지고 해부를 해서 한번 확인을 해
보겠다 이럽니다. 그래서 실제로 1771년 3월에 그 허가를 받고서
그리고 그 해부를 실시를 합니다. 그런데 당연히 해부를 누가 합니까?
해부를 할 줄 아는 사람은 그 당시 백정들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정을 한 사람을 데려와 갖고
해부를 하도록 합니다. 그때의 그 장면을 본인이 스키다 캠바고가
자세하게 기록을 해 놨습니다. 이날 처형된 사체는 교도 출신의 50세
여자로 대를 범했다고 한다. 초학계 그러니까 해부는
도라마스라는 자가 솜씨가 뛰어나다고 해서 그날 이날도 그에게 맡기기로 되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몸이 아파서
그의 할아버지라는 노인이 대신 나왔다. 그는 아흔살인데도 아주 건장했다. 젊었을 때부터 여러 명을
후학게 해봤다고 했다. 그때까지 후학회는 이런 사람들에게 맡혔었다.
이들은 후학계를 참관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폐입니다. 이것은 간장.
이것은 신장입니다라고 인체 내부를 펼쳐놓고 보여 주었다.이를 보고만 온
사람들이 돌아와서는 우리들은 직접 내장을 парат사치 관찰 확인했다고 말한 거 같다. 본뒤 내장에 이름이
쓰여 있지 않으므로 후학계를 하는 사람들이 가르치는 것을 보고 아 그런가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그때까지의 관리였던 거 같다. 그날도 그 노인이
심장, 간장, 담낭, 위 그 밖에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는 장기
이것저것을 가르키며 이것들의 이름은 모르지만 저는 젊었을 때부터 후학
여러 명의 배 안을 봤는데 여기는 이런 것이 있었고 저기는 이런 것이
있었다 하면서 보여주었다. 나중에 확실히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것들은
타펠 아나토미아의 해부도와 대조에 생각하면 동맥과 정맥 혈관 사이에 두
개의 줄기와 부신 등이었다. 노인은 또 지금까지 후학계를 보러 온 의사분들에게 여러 가지를 보여주었지만
누구 한 사람 이것은 뭐냐 저것은 뭐냐고 의심을 가지고 물어본 분은 없었습니다라고 했다. 이날 류타크와
나 우리 둘이 가지고 간 오란다 책의 해부도와 인체 내부를 하나하나 대조해
본 결과 어느 하나도 해부도와 다르지 않았다. 고서에서 설명하는 폐의 육엽
양이 간의 좌삼협 우사협 등과 같은 구별도 없고 장이나 위의 위치와 그
형태도 한방의 설는 크게 달랐다. 관해인
오카다 요센 후지모토 리츠센 두 분은 그때까지 일곱여덟 차례나 후학계를
참관하셨다고 들었는데 한방의 설는 크게 달랐기 때문에 그때마다 의문이
풀리지 않아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적어 놓으셨다. 그리고 이분들이 중국인과 유럽인의 신체 구조가 다르다는
말인가라고 쓴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날 후학계가 끝난 뒤 뼈의
형태도 보기 위해 형장 바닥에 널려 있는 뼈등을 주어 충분히 살펴봤다.
역시 중국의 설는 크게 달랐다. 그러나 오란다 헤브도와는 조금 더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모두 놀라 버렸다. 서양의 해부도와 실제
자기네가 해부를 해 보면서 그걸 비교를 하면서 서양 것이 맞다라는 것을 확인을 합니다. 그래서
스키타 겜바크 동료들은요. 그 해부를 보고 난 다음에 그다음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결의를 합니다.이 책을 우리가 번역을 하자. 1번 말로
번역을 해야겠다.라고 결의를 합니다. 문제는
스키타 캠바꾸 본인을 포함해서 그중에 아무도 네덜랜드어를 한 마디도 할 줄
안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에 도전을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또 써 놨습니다. 나는 저쪽 나라의 해부서를 입수해 직접 실체 인체와 대조해 본 결과
지금까지 동양의 설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아 놀라기도 했고 감심도 했다. 감탄했다는 거죠. 어떻게
해서든 이런 사실만이라도 세상에 확실히 알려 실제 치료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고 세상 의사들의 일에도
개발이 있도록이 책을 하루라도 빨리 그런 용도에 쓸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그 외엔 바라 것이 없었다.
라면서 이때부터 눈물겨운 번역의
과정이 시작이 됩니다.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제 번역하는
과정에서이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었다라는 거를 적어 놓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의인 브라운은
눈위 위에 나 있는 털이 문장 하나도 무슨 뜻인지를 몰라 긴 봄날 하루
종일 매달렸으나 알 수가 없었다. 이처럼 해가 질 때까지 생각해보고 서로를 쳐다봐도 한 줄밖에 안 되는
아주 짧은 문장조차 풀 수 없었다. 또 어느 날 코 부분에서 코는
후르테해도 즉 우뚝 솟아오른 하고 있는 것이라고
쓰인 부분에 이르렀을 때다. 그런데이 말은 알 수가 없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고 생각을 맞춰봤지만 알 수
없어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즉 눈썹이라는 거, 코라는 거를 이게
뭐를 뜻하는 것인지를 아는데도 그렇게 힘이 들었답니다.
스키타 밥구를 비롯한이 의사들의 한의사들의 눈물겨운 노력 각고의 노력
끝에 3년 후인 1774년 8월에
해체신서라는 일본 제목으로
타펠 아나토미아가 완전히 번역이 돼서 나옵니다. 해체신서는 지금 일본의 국보입니다.
여기 사진에 보시는 해체신서 얼마나 치밀하게 그림을 옮겨서 그렸고
그리고 다 번역을 해냈는지 보실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난학사 4시라는 책을 스기다 캠바꾸가
씁니다. 자기가이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해체 신설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여러 가지 일들
아까 그 번역하는 과정에서 눈썹이 모고 코가 모고를 잘 몰라서 고생했다라든가
처음에 어떻게해서 이걸 쓰게 됐다는 연휴 이런 것이 다 적혀 있는게 그런 책입니다. 근데 거기에
이렇게 쓴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중국
문명에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는 일본의 모습을
우리가 엿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그때 생각했지만 오진 천왕시대의
백제의 왕인이 우리나라로 올 때 한자를 처음 전하고 책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이후 대대로 천황은 학생들을 중국에 보내 그쪽 학문을 공부하게
했다. 긴 세월이 흐른에 와서 비로써 중국인들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한학이
가능하게 됐다. 지금 처음 시작한이 학문이 갑자기 어떤 성과를 올릴 수 있겠는가? 다만
인체 구조라는 아주 중요한 것이 중국 의서에 있는 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에
대강을 어떻게 해서든 세상에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에 달리 바라는 바는 없었다. 이렇게 결심하고 번역
모임에서 해독한 부분은 그날 밤 집에 돌아와 곧바로 번역한 뒤 정서해
보아갔다. 이게 도대체 서양거가 도대체 여기서 우리가 배워서 지금
이렇게 거대하게 오랜 세월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온이 중국 학문의 절대적인이 무게나 이런 거를 이런 거
앞에서 도대체 서양거를이 정도 배워서 이게 과연 뭐가 될 것인가?
소형이 있는 일인가? 부지럽는 짓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뭐라 그럽니까? 나는 의사이기 때문에
어쨌든 신체 구조가 이렇다라는 거 그것이 중국보다는 서양 것이 해부도가
더 정 의술이 더 정확하게 파악을 하고 있다. 요것만이라도 나는 우리 의사들한테
일본 사람들한테 전달하고 싶었던 그거 하나뿐이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열심히
번역에 매달렸고 매일 모여서 의인론을 해서 토론을 통해서 코가 뭔지 눈썹이
뭔지부터 다 파악을 하면서 그거를 파악을 하고 집에 와서 그걸 정성들럽게
다시 써서 번역을 해 나가면서 3년 만에 해체 신설를 완전히 번역을 해서
출간을 합니다. 일본의에도 시대는
조선으로 치면은 임진외란
병자 호란 이후입니다. 1637년이니까 그 이후가 되겠죠.
즉 양난 이후의 조선. 그 양난 이후의 조선이 일본의에도
시대랑 똑같은 시대입니다. 같은 시기입니다. 그러면 양난 이후의 조선은 어떻게 됩니까?
양난 이후의 조선은 우암송열의 기축봉사를
효정이 받아들이면서 주자학
주자 집주에서 한 글자도 벗어나면은 사문난적이라
그러면서 절대적으로 어 그 어떤 이단도 용납을 하지 않고 조선에서는
사은 난적 해서 절대로 주사 성리에서 벗어나 할 수가
없었다면은 일본에서는 뭐
완전히 주자학을 소음없이 비판하지 않습니까? 야마사기 안사이 같은
사람은 뭐라 그럽니까? 학생들을 모아놓고서
혹시 중국이 우리나라를 쳐들어오는데 공자가
대장이 되고 맹자가 부장이 돼서 우리나라를 쳐들어오면은 그러면 우리 같이 공맹의 도를 공부하는 유생들의
입장에서는 이거 어떻게 대해야 되느냐 그러면서 학생들이 황당해서 답을 못
하니까 그러면 우리가 갑옷을 입고 변기를 들고 나가서 공맹을 쳐서
잡아서 죽임으로써 구근에 보답을 하는 거 이것이 공맹에 도다라고 얘기하는
그죠. 그다음에 못도오리 노리나 같은 사람들이 중국의
책은 뜻만 정확하고 일본 정신 혼만 뚜렷하면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얘기만 실어놓은 중국 책을 아무리 읽어도 상관이 없다. 이러한 거리를 둘 줄 알고 극복할 줄
아는 것. 이것이 일본의에도 시대의 사상입니다. 거기에
란가꾸까지 난하까지 더해지니까 이제는 완전히 중국 중화 사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모든 지적인 토대를 일본은 갖추 버립니다. 조선에서는
숙명반사이 뿌리를 내리고 주자 기회 어떤 것도 공부하면 안 되고 모든 사상을
이단시이 그 이외 모든 사상을 다 이단시했습니다.
안면 1번에서는 청의 고중학파를
수입을 해서 주자학 이전에 원시유교 우리 소위
지금 말하 원시유교 공맹 시대 춘추 시대의 그때의 유학으로 돌아가자라는
그게 고중학인데 일본도 그 움직임을 따라서고 갖고 고학의 지식 운동이
학문 운동이 전개가 되는 것이죠. 그리고 일본의 고유 사상을 찾는
곳 각국 국학 그리고
서양의 학문을 부분이나마 받아들이는 난가구를 통해서 서양의
지식을 받아들이면서 사실 일본은 이미 에더 시대부터 중화
사상, 중화 세계로부터 중화질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자체만의
세계 사상을 읽어 나가기 시작을 하는 거고 이러한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에
서구가 도래했을 때 서양이 도래했을 때 일본의 지식인들 일본의 지도자들이
재빨리 서양거를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러한
모든 자세
확신 이런 것이 일본에서는 가능했고 그랬기 때문에
메이지 유신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난각구까지 이제 더하면요. 정말로에도
시대의 사상계가 어었던가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조선하고 너무나 달랐습니다.에도
에도 시대의 경제가 조선의 경제와 달랐고에도 시대의 정치가
조선의 정치와 너무나도 달랐듯이 일본의 사상계는에도
시대의 사상계는 조선 양난 이후에 조선 후반기에 사상계와 또
판이했습니다. 판의하게 달랐습니다. 우리가 그 부분을 이해를 해야지만 왜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는가? 능동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사실 일본은 그런
의미에서 굉장히 예외적이었던 것입니다. 굉장히 예외적인 나라였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일본이 서양이 도래했을 때
아 이게 뭐다? 서구 열강이 일본문을 본격적으로
두드리기 시작했을 때 그때 아 이거를 이게 뭐고 어떻게 대처해야 된다라는
걸 알 수 있게 되는데 그중에 가장 먼저 먼저 대처하는 사람들이 누구냐면
요즘 말로 하면은 안보 전문가들입니다. 시큐리티 인텔렉추얼
국가 안보 전문 지식인이라는 계층이 가능해집니다. 그랬기 때문에
일본이 아주 구체적으로 막연히 서양의 뭐 문물을 받아들이냐 마느냐 뭐를
여느냐 그게 아니라 무엇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받아들이고를 알 수 있게
됩니다. 그 첫 번째 매개가 소위 안보 전문가들입니다. 다음 시간에는이
안보 전문가들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통해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한국인의
탄생 오늘은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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