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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8

*이재봉의 법정증언 (1-14)


[법적증언⑭] 연재를 마치며 : 통일은 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법적증언⑭] 연재를 마치며 : 통일은 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연재를 마치며 : 통일은 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6월 이석기 의원의 '내란 음모' 혐의 항소심에서 내가 했던 증언에 대해 악의적으로 왜곡했던 극우신문 기자들과 치졸하게 비난했던 윤상현 새누리당 사무총장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그들 때문에 이 연재를 시작해 방학을 보람차게 보낼 수 있었다.


매주 1~2회 글을 쓰면서 많은 분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따뜻한 격려와 뜨거운 지지가 담긴 이메일에 바쁘다는 핑계로 일일이 답하지 못했던 점 이제야 양해를 구한다. 천안함 침몰에 관한 글을 올렸을 때는 왜 북한의 소행이라고 단정하느냐는 비판을 받기도 하고, 연방제통일에 관해 썼을 때는 감옥에 가게 되길 바란다는 야유를 받기도 했다.


강연 요청도 많이 받았고, 지금까지 발표한 글을 더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책으로 펴내라는 제안도 받았다. 서둘러 쓰느라 잘못된 부분을 고치고 빠진 부분을 보충할 계획을 세우면서, 우리가 왜 어떻게 통일해야 하는지 호소하는 글로 이 연재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1. 통일을 왜 이루지 못하고 있는가


한반도가 분단된 지 거의 70년이 흘렀는데도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남쪽에서나 북쪽에서나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고 외쳐오면서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크게 네 가지 배경을 들고 싶다.


첫째, 분단과 전쟁을 거치며 남북 사이에 원한과 적대감이 커졌기 때문이다. 특히 전쟁의 피해를 직접 겪은 세대는 북한을 증오하고 화해와 협력을 거부하며 '북한 타도'를 주장한다. 한쪽이 무너지지 않는 한 통일되기 어려운 상황이다.


둘째, 외세의 영향력 또는 주변 정세 때문이다. 분단이 우리의 뜻이 아니라 외세에 의해 이루어졌듯, 통일 역시 주변 강대국들의 방해를 받고 있다. 미국이든 중국이든, 일본이든 러시아든, 대외정책의 가장 큰 목표는 국가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특히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남한과 유일한 군사동맹인 미국에게 한반도 분단은 이익이 되는 구조다.


셋째, 분단을 정권 유지 및 강화에 악용해 왔기 때문이다. 특히 독재 정권들이나 극우 정권들은 분단, 반공, 안보 등을 구실로 권력에 대한 비판을 억압할 수 있기 때문에 분단은 그들의 집권 및 통치에 이익이 된다. 예를 들어, 통일이 이루어지면 국가정보원이나 군대 같은 기구의 조직, 인원, 예산 등이 줄어들 게 뻔한 데 그 지도자들이 통일을 원하겠는가.


넷째, 양쪽 위정자들이 통일을 원하더라도 자신의 체제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남쪽에서는 "체제 경쟁은 끝났다"며 자본주의만을 고집하고, 북쪽에서는 "우리식 사회주의는 필승불패"라며 사회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한, 체제 통일은 이루어질 수 없다.



▲ 지난 2002년 9월 29일 부산 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열린 부산 아시안게임 개회식에서 남북대표선수들이 단일기를 앞세우고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2. 통일에 대한 무관심과 반대가 왜 늘고 있을까


여기저기서 북한이나 통일 문제에 관해 강연하다 보면 통일에 대한 관심이 해가 흐를수록 낮아지는 것을 실감한다. 통일을 바라지 않거나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만나게 된다. 여론조사 결과는 나이가 적을수록 그리고 학력과 소득이 높을수록 통일에 관심 없거나 반대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통일을 원하지 않거나 반대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사회 혼란과 통일 비용. 한편으로는 70년 가까이 서로 다른 사상과 체제 아래서 살아온 사람들끼리 함께 살게 되면 정치 사회적 혼란이 생길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빌어먹고 굶어 죽는 사람들과 합치게 되면 천문학적인 경비가 들어갈 것이라는 경계심 때문이다. 분단된 채 잘살고 있는데 굳이 통일해서 사회 혼란 초래하며 북쪽의 거지 떼 먹여 살리려고 세금 더 낼 필요 있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통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늘어나는 데는 크게 네 가지 배경이나 이유가 있는 듯하다. 첫째, 교육과 언론을 통해 빚어지는 북한이나 통일에 대한 편견과 왜곡이다. 편견과 왜곡의 핵심엔 '북한 붕괴'와 '흡수 통일' 그리고 '사회 혼란'과 '통일 비용'이 자리 잡고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많은 정치인, 학자, 언론인들이 북한이 곧 무너질 것 같다고 예상하거나 빨리 붕괴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는데, 북한이 무너져 흡수 통일이 되면 사회 혼란이 일어나고 천문학적 통일 경비가 들어갈 것이라는 내용이다.


남한 사회에서 '통일'의 정의는 북한 체제가 무너져 남한 체제에 흡수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북한이 주장해온 연방제는 말할 것도 없고 남한이 1990년대부터 공식적으로 채택해온 통일정책의 한 단계인 국가연합조차 거부하는 역설적 현상이 나타나는 것 아닌가. 북한이 무너져 남한에 흡수되어 70년 가까이 서로 다른 체제와 환경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갑자기 함께 생활하게 되면 사회가 혼란스러워질 것은 당연하다. '거지같은 사람들'을 도우면서 같이 살려면 엄청난 비용이 들 것도 확실하다. 특히 젊은이들은 이산가족들의 고통이나 한을 잘 모르며 북한 사람들을 동포형제라고 느끼지도 못할 텐데, 물질적으로 별 부족함 없이 잘살고 있는 터에 굳이 통일해서 남남 같은 사람들을 도우며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둘째,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부터 남북 관계가 악화하면서 북한이나 통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늘었을 것이다. 특히 2008년 7월 금강산 관광객 피살, 2009년 4월 인공위성 또는 미사일 발사, 2009년 5월 2차 핵실험, 2010년 3월 천안함 침몰,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 2013년 2월 3차 핵실험 등은 북한이나 통일에 대한 거부감을 높여왔다.


셋째, 노년층을 비롯한 기성세대에서는 한국전쟁을 통해 생긴 북한에 대한 원한과 적대감 그리고 냉전에 따라 강화된 반공반북 정신이 약해지거나 사라지지 않고 강해지거나 확산되기도 한다.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고통과 끔찍한 피해를 안겨주었기에, 이미 두 세대나 흘렀지만 해마다 6월 25일이 다가오면 "잊지 말자 6·25"라는 구호와 함께 북한에 대한 적대감과 경계심을 고취시키며 안보의식을 강화하는 행사가 그치지 않고 있다.


넷째, 젊은이들은 입시 위주의 교육과 개인주의적 생활방식의 영향으로 통일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기 어렵다.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풍조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의식보다는 남들보다 잘살아야겠다는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성향을 지니게 된다. 가난한 북쪽 사람들을 도우며 그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더불어' 살아가는 통일에 거부감이나 두려움을 느끼기 쉽고 '나홀로' 살아가는 분단을 선호하는 성향이 커진다는 뜻이다.


3. 통일을 왜 해야 하는가


앞에서 통일을 원치 않는 사람들이 사회 혼란과 통일 비용을 그 이유로 꼽는다고 소개했는데, 이는 교육과 언론을 통해 확산된 통일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이다. 북한 붕괴에 따른 급진적 흡수통일은 당연히 사회 혼란을 초래하고 천문학적 경비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나 화해와 협력을 통해 국가연합이나 연방제를 거쳐 점진적으로 통일을 이루면 사회 혼란이 생길 이유도 없고 막대한 경비가 들어갈 까닭도 없다. 통일의 방법이나 경로를 북한 붕괴에 따른 흡수통일에 고정시켜 놓고 있기 때문에 빚어지는 착각인 것이다.


통일을 원하는 사람들 역시 그 당위성이나 필요성으로 대게 두 가지를 든다. 같은 민족이니까 통일해야 한다는 것과 남북이 합치면 강대국이 될 수 있다는 것. 한 핏줄의 동포 형제끼리 함께 살아야 한다는 데 싫어할 사람은 거의 없을 테고, 지금까지 강대국들의 지배나 눈치를 받고 살아온 터에 힘을 합쳐 약소국의 설움을 떨쳐버리고 떳떳하게 잘 살아보자는 데도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둘 다 절실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같은 핏줄끼리 떨어져 사는 것보다 함께 사는 것이 더 좋을 것이야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가족 안에서조차 부부나 부모자식 또는 형제자매 사이에도 직장이나 교육 문제 등으로 떨어져 사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물며 남쪽 5000만과 북쪽 2500만이 한 민족이라고 꼭 한울타리 안에서 함께 살아야 할까. 그것도 나라 밖으로는 국경이 낮아지거나 무너지고 안으로는 중앙에 집중된 권력이 지방으로 분산되는 세계화와 지방화 시대에.


이 세상엔 약 2000종의 민족이 200개 정도의 국가를 이루고 있으며 이른바 한 민족으로만 형성된 국가는 20개 안팎이다. 평균 10종의 민족이 1개의 국가를 이루고 있는 셈인데, 우리는 한 민족이 두 개의 국가를 갖고 있지만, 같은 민족끼리 한 국가를 만들겠다는 욕구 때문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이 그치지 않고 있다는 점도 고려하자. 따라서 나는 남북이 국토나 체제를 하나로 합치지 않더라도, 적대 관계를 풀고 서로 협력하며 자유롭게 연락하고 오갈 수 있다면 이미 통일은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주장해온 '21세기형 통일'이다.


강대국을 지향하는 것도 선뜻 내키지 않는다. 개인이든 국가든 힘이 커질수록 남을 사랑하고 배려하기보다는 남을 멸시하며 못살게 굴기 쉽기 때문이다. 나라 안에서는 조그만 권력이나 재력이라도 붙잡고 있으면 거들먹거리며 힘없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등치는 일을 흔히 볼 수 있고, 나라 밖에서는 대국이라고 약소국들 내정에 오만하게 간섭하며 여차하면 군대를 보내 으름장을 놓는 짓을 쉽게 볼 수 있지 않는가. 그들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거니와 따라하는 것은 더욱 바람직하지 않다. 남한은 분단된 상태에서도 세계 12~15위의 경제력을 자랑하고 있다. 위에서 6~7% 안에 속하니 거들먹거릴 만하다. 북한과 합쳐 세계 10등 또는 5% 이내에 들어가는 것도 좋지만, 난 우리가 완력이 커지는 강대국보다 삶의 질이 높아지는 복지국가가 되기를 더욱 소망한다.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덴마크, 스위스 등은 국토와 인구 또는 경제력과 군사력이 크지 않아도 다른 나라들에게 무시당하기는커녕 남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질 높은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내세우는 통일의 필요성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분단에 따르는 폐해가 너무 크고 통일을 이루면 얻을 편익이 몹시 크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통일 편익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한 위정자들이 뜬금없이 '통일 대박'을 외치는 것은 정치 선전이라 치부하고, 오래전부터 '통일 대박'을 주장해온 대표적 학자 두 사람의 책을 소개한다. 하나는 흡수통일을 추구하는 보수적 경제학자 신창민 교수의 <통일은 대박이다>이고, 다른 하나는 '남북연합방'을 꿈꾸는 진보적 재미동포 의학자 오인동 박사의 <밖에서 그려보는 통일의 꿈>이다.


이에 덧붙여 나는 통일을 꼭 이루어야 하는 이유로 분단의 폐해만 강조하겠다. 통일 경비가 많이 필요할 것이라는 말은 귀가 닳도록 들어왔겠지만, 분단 경비가 많이 지출되고 있다는 말은 별로 듣지 못했을 것이다. 앞에서 흡수 통일을 하지 않는다면 막대한 경비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는데, 설사 통일 경비가 천문학적으로 든다고 하더라도 분단 경비보다는 많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통일 경비는 남북이 자유롭고 평화롭게 더불어 살자는 건설적 투자비용이지만, 분단 경비는 서로 적대시하며 죽이자는 파괴적 소모비용이다. 통일 경비는 천금이라도 아깝지 않지만 분단 경비는 한 푼이라도 아깝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일시적으로 들어갈지 모를 통일 경비는 경계하면서 지금까지 70년 가까이 줄줄 새나가고 있는 분단 경비는 생활이 되고 습관이 되어버려 인식조차 못하고 있으니 얼마나 어리석고 통탄할 일인가. 거듭 강조하건대 분단이 지속됨으로써 새나가는 비용은 통일을 이룸으로써 들어갈 비용보다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훨씬 크다. 분단 때문에 생기는 피해와 고통 등 돈으로 계산하기조차 어려운 대표적 분단 폐해 몇 가지를 아래에 소개한다.


첫째, 분단 때문에 정치 발전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북한을 적으로 삼는 사람들이 가장 강조하는 게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자는 것인데, 그들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를 가장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는 현실이 참 역설적이다. 자유민주주의란 개인의 자유를 핵심 가치로 삼는 민주주의로, 개인의 자유 가운데서 가장 기본적 자유는 사상과 양심, 언론과 출판, 결사와 집회 등의 자유다. 그런데 분단을 핑계로 유지되는 국가보안법은 이러한 기본적 자유조차 심각하게 제한하며 인권을 탄압하고 있지 않은가.


친일파들이 '친북'을 '용공이적'으로 매도하며 자신들의 죄와 허물을 덮고 기득권을 지킬 수 있는 것도 분단 때문이다.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생각과 언행을 하면 빨갱이로 몰아붙이며 개념 없이 순응하고 추종하는 사회로 이끌어가는 것도 분단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요즘 '세월호' 유가족들의 단식 투쟁조차 빨갱이 짓이고 잠실 일대에서 발견되는 ‘싱크홀’조차 북한 소행이라며 억지와 궤변을 늘어놓을 수 있는 것도 분단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분단이 해소되고 통일이 되면 제한되어온 자유를 맘껏 누릴 수 있지 않을까.


둘째, 분단 때문에 군사 외교적으로 자주권을 침해받고 있다. 군대의 작전통제권까지 미군에게 맡기는 등 미국에 너무 종속적이라 "남한은 미국의 51번째 주"라는 국제적 조롱을 받는 것은 분단 때문이다. 분단이 해소되고 통일이 되어야 진정한 자주 독립국이 될 수 있다.


셋째, 분단 때문에 엄청난 국방비를 쏟아 붓고 있다. 대략 정부 예산의 15~20%다. 국방비 말고도 남북이 체제 경쟁 때문에 모든 분야에서 쓸데없이 지출하는 비용이 얼마나 많은가. 분단이 해소되고 통일이 되면 국방비를 비롯해 막대한 경쟁 비용을 줄일 수 있고, 그만큼 사회복지비를 늘릴 수 있어, 요즘 사회적으로 떠들썩한 ‘반값 등록금’ 문제도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분단 때문에 빚어지는 이산가족들의 한과 고통이 몹시 크다. 남북 사이에 일가친척끼리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고, 소식을 알아도 제대로 연락도 하지 못하며, 평생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채 죽어가는 이산가족들의 슬픔과 아픔을 달랠 수 있는 길은 분단을 해소하고 통일을 성취하는 것이다.


다섯째, 분단 때문에 여행의 자유도 제한받고 있다. 우리는 '한반도'라는 말을 즐겨 쓰지만 남한은 '완도(完島)'다. 육지와 연결된 '반쪽 섬'이 아니라 바다로만 나갈 수 있는 '완전한 섬'이란 말이다. 그러기에 해외여행을 하려면 편안한 기차나 버스를 이용하지 못하고 돈이 많이 드는 비행기나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배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민족의 영산이라는 백두산에 오르려면 중국을 거쳐 돌아가야 하는 것도 분단 때문이다.


분단이 해소되고 통일이 되면 금강산이나 백두산까지 직접 차를 몰고 찾아갈 수도 있고, 기차를 타고 러시아나 중국을 거쳐 유럽까지 나갈 수도 있다. 돈은 없어도 시간이 많다면 나라 밖으로 걸어 나갈 수도 있을 테고. 나아가 휴전선만 열리면 아시아의 섬나라 일본에서 유럽의 섬나라 영국까지 기차여행을 즐길 수도 있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해저터널처럼 일본과 남한 사이의 해저철도 건설 계획이 이미 1990년대 초부터 논의되어 왔다는 사실을 참고하기 바란다.


여섯째, 분단 때문에 주한미군이 유지되고 이를 통해 퇴폐문화가 확산되는 가운데 범죄까지 늘고 있다. 미군들이 온갖 폭행과 만행을 일삼아도 처벌은커녕 조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분단 때문이다. 분단이 해소되고 통일이 되면 주한미군에게 있어달라고 매달릴 필요가 없고, 주한미군이 유지되더라도 그들의 범죄가 크게 줄어들 것이다.


일곱째, 분단 때문에 한반도가 동아시아 긴장과 갈등의 중심에 놓여 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 사이에도 남북한이 끼어 있다. 분단이 해소되고 통일이 되어야 주변 강대국들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동아시아의 안정과 평화에 기여할 수 있다.


여덟째, 분단 때문에 징병제가 고수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건전한 남자들이라면 거의 모두 인생에서 가장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20대에 공부하거나 일하다 말고 가장 폐쇄적이고 폭력적인 집단인 군대에 불려가 2~3년 '썩어야'하는 현실이 왜 지속되는가. 적성에 맞지 않아도 불려가 자살하거나 사고를 저지르고, 차라리 자신이 죽더라도 남을 죽일 수 없다며 총칼을 들 수 없다는 평화주의자 또는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들마저 끌려가든지 감옥에 처박혀야 하는 현실도 분단에 따른 징병제 때문이다. 군대에 가기 싫어 자신의 몸을 일부러 망가뜨리기도 하고, '빽'을 쓰기도 하며, 해외로 도피하기도 하는 등 온갖 병역 비리가 저질러지는 이유도 징병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서해교전이나 천안함 침몰 또는 연평도 포격 등 남북 사이의 갈등이나 무력충돌 때문에 희생된 젊은이들보다 군대 안에서 자살과 사고로 죽어가는 젊은이들이 비교도 할 수 없이 훨씬 많다.


분단이 해소되고 통일이 되면 징병제를 모병제로 바꿔, 직업으로 군인을 선택하겠다는 젊은이, 군 생활이 적성에 맞겠다는 젊은이, 군대 가야 사람 된다고 생각하는 어른 등 원하는 사람들을 모집해 단결심과 충성심이 강한 군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통일이 되더라도 중국과 일본 등의 침략 가능성 때문에 군사력을 줄일 수 없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그런 나라들이 침략하려면 남북이 분단되어 있는 틈을 이용하지 통일된 이후에 쳐들어오겠는가. 병력 감축에 따라 기득권이 줄어들까봐 부리는 억지 논리다. 너무도 이상적이지만 비록 조그만 나라들일지라도 이 세상엔 군대가 전혀 없는 나라가 30개 안팎이라는 사실도 참고하기 바란다.


아홉째, 분단 때문에 전쟁의 가능성이 상존한다. 만에 하나 서해교전 같은 무력충돌이 전면전으로 이어진다면 남북 모두 막강한 병력과 최첨단 무기들을 가지고 있는 터에 남쪽에서든 북쪽에서든 멀쩡하게 살아남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특히 요즘 전쟁에서는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또는 팔레스타인에서 보듯, 군인들만 죽는 게 아니라 민간인들이 더 많이 죽는다. 남자들만 죽는 게 아니라 여자들도 죽고, 전쟁을 좋아하고 일으킨 사람들뿐만 아니라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까지 애꿎게 죽는다. 내가 통일운동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는 가장 큰 이유다. 분단이 해소되고 통일이 되면 끔찍한 전쟁의 가능성이 사라지거나 최소한 줄어들 것 아닌가.


4. 통일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주장하는 '21세기형 통일'은 어렵지 않게 이룰 수 있다. 남북이 적대 관계를 풀고 서로 협력하며 자유롭게 연락하고 오갈 수 있는 상태. 금강산 관광을 재개하고 개성공단을 확대하며 이산가족 상봉을 정기적으로 실현하기만 해도 절반은 이루어지는 셈이다. 시작이 반이니까. 2000년 6월 1차 남북 정상회담과 2007년 10월 2차 정상회담의 합의사항, 이른바 '6·15합의'와 '10·4선언'만 제대로 이행해도 통일의 문턱에 이르게 된다. 활발하게 교류하며 자유롭게 오가다 보면 머지않아 "어 통일이 꽤 됐네"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백낙청 선생이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에서 말하는 ‘어물어물 진행되는 통일’이다.


이런 가운데 체제 통일엔 신경 쓸 필요 없다. 통일 한반도의 체제로 남한의 천박한 자본주의도 적합하지 않고 북한의 배고픈 사회주의도 어울리지 않는다. 남북연합이나 연방제를 지향하면서, 남한은 자본주의를 지키되 사회주의 장점인 평등을 조금씩 추구하고, 북한은 사회주의를 고수하면서 자본주의 장점인 자유를 조금씩 늘려간다. 남쪽에선 빨갱이 짓이라는 논란 일으킬 것 없이 복지정책을 조금씩 확대하면 충분하고, 북쪽에선 개혁개방을 조심스럽게 확대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언젠가는, 적어도 우리 다음 세대에서는, 자연스럽게 자유와 평등이 어우러지는 복지국가 체제의 완전 통일까지 이루어질 수 있지 않겠는가.

[법적증언⑬] '6.25 전쟁'도, '한국전쟁'도 틀렸다

[법적증언⑬] '6.25 전쟁'도, '한국전쟁'도 틀렸다

분단의 원흉은 누구인가

인터넷에서 '분단의 원흉'을 검색해보면 이승만, 김일성, 미국, 소련, 일본, 중국 등이 떠오른다. '원흉(元兇)'이란 "못된 짓을 한 사람들의 우두머리"라는 뜻이니, 당시 남북한 지도자와 주변 4강대국 모두 악역을 담당하거나 주도했다는 말이다. 대체로 진보 쪽에서는 미국과 이승만이 분단을 이끌었다고 서술하는 한편, 보수 쪽에서는 소련과 김일성이 분단에 큰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역사를 인식하거나 해석하는 시각에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국사든 세계사든 역사는 승자나 강자에 의해 써지고 고쳐지며 퍼지게 되기에,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 고쳐 쓰기'나 '역사 재해석' 또는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이 벌어지는 배경이기도 하다.


분단의 시기와 관련해서도 혼란이 빚어진다. 1945년 8월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1953년 7월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1945년 8월 확정된 38선을 따라 처음으로 국토가 분단되었는데, 1953년 7월 그어진 휴전선이 현재 남북한의 국경선으로 돼버렸기 때문이다.


분단의 원흉이나 시기에 대해 이견과 혼란이 생기는 데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분단에 대한 각자의 정의가 다르고, 역사에 대한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의 시각과 가치관에 큰 차이가 있으며,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이 가운데 의도적 역사 왜곡은 천벌을 받을 짓이다. 분단이 6·25 전쟁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은 분단의 원흉이 김일성이나 소련 또는 중국이라고 주장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해방과 동시에 분단이 이루어졌다거나 분단이 1945년 38선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하면서, 또는 2014년이 분단 69주년이라는데 동의하면서, 분단의 원흉을 김일성과 소련 또는 중국이라고 말하는 것은 억지를 부리거나 악의적으로 역사 왜곡을 하는 것이다. 38선은 미국이 1945년 8월 조선 사람들 아무도 모르게 소련에 제안하고 소련이 받아들임으로써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분단과 관련해 언론 오보가 역사 왜곡으로 이어진 경우도 있다. 1945년 12월 미국, 영국, 소련의 외무장관들이 모인 이른바 '모스크바 3상회의(三相會議)'에서 미국의 끈질긴 요구에 소련이 마지못해 응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그 회의가 끝난 12월 27일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이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는데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했다고 정반대로 엄청난 오보를 함으로써, '반탁(反託: 신탁통치 반대), 반소(反蘇: 소련 반대)' 운동이 전개되고, 우리 역사책에도 그렇게 왜곡 서술되어온 것이다.


한반도가 1945년 8월 미국이 제안한 38선에 의해 분단되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미국이 늦어도 1943년부터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를 영국과 소련에 제안하고 주장하면서 조선의 즉시 독립을 반대했다는 사실은 우리 현대사를 어느 정도 공부한 사람들에겐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분단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제대로 말하기 어려웠던 것은 친미 반공의 사회구조 안에서 무지와 오해 그리고 왜곡과 억지가 어우러져왔기 때문이다. 미국이 '분단의 원흉'이라는 아주 기본적이고 엄연한 사실을 아래서 밝힌다.


1. 한반도 분단의 유형과 과정


분단은 크게 세 가지 유형 또는 과정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1945년 8월 해방과 거의 동시에 38선에 의해 국토가 남북으로 잘렸다. 둘째, 1948년 8월 남쪽에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대한민국이 들어서고 9월 북쪽에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세워짐으로써 서로 다른 이념과 사상에 의해 체제가 나뉘어졌다. 셋째, 1950년 6월부터 1953년 7월까지 6·25전쟁으로 같은 민족이 원수처럼 갈리게 되었다.


한반도는 이렇게 1단계 국토 분단 또는 지리적 분단이 이루어지고, 2단계 체제 분단 또는 정치적 분단으로 강화되었으며, 3단계로 민족 분단으로 굳어졌다. 여기서 아무런 수식어를 붙이지 않고 분단을 말하면 당연히 국토 분단을 가리킨다. 국토 분단을 통해 서로 다른 체제가 들어서게 되고, 이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 민족까지 갈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2. 해방되기 전에 이루어진 국토 분단


우리는 흔히 해방과 동시에 분단되었다고 말하는데,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해방되기 전에 먼저 분단되었다. 해방은 일본 천황이 공식적으로 항복을 선언한 1945년 8월 15일 찾아왔지만, 분단은 일본군이 미군에 은밀하게 항복 의사를 전한 직후인 1945년 8월 10일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이 미군에 항복의 뜻을 전한 때는 8월 6일 히로시마에 이어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맞은 직후였다. 소련이 8월 8일 일본에 전쟁을 선포하고 한반도로 진격해오기 시작한 때와 겹치기도 했다. 미국은 막 실험에 성공한 핵무기를 떨어뜨리면 일본이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 예상했어도, 그렇게 즉시 항복할 줄은 짐작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일본의 갑작스러운 항복 의사를 받고 오히려 당황했던 것이다.


미국 국무부와 군부는 8월 10일 일본군의 항복을 받을 계획을 세우면서 조선지도에서 38선을 찾아냈다. 38선 북쪽에서는 소련군이 항복을 받고 남쪽에서는 미군이 항복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은 될수록 조선 북쪽 멀리까지 올라가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싶었지만, 바다 건너 오키나와 및 필리핀에 있던 미군들이 군함으로 조선에 이르려면 거의 한 달이 걸려야 했다. 이에 반해 소련군은 미국이 오래전부터 부탁한대로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이미 조선으로 진격해 남쪽으로 내려오는 중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조선의 절반이라도 차지하기 위해 소련군이 38선에서 멈출 것을 제안했던 것이다. 38선 이남이 이북보다 땅덩어리는 조금 작아도 수도 서울 및 인천과 부산 등 큰 항구를 갖고 있어 어느 정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소련이 훨씬 더 남쪽까지 내려올 수 있었고 그렇게 하겠다고 주장하리라 짐작했는데, 소련은 뜻밖에 이 제안을 받아들여 미군이 조선에 들어오지도 않은 터였지만 38선에서 남하를 중지했다.


산이나 강을 따라 이루어진 자연적 경계선도 아니요, 생활이나 풍습이 달라 문화적으로 차별되는 경계선도 아니라, 단순히 토지 측량을 위해 지도에 그려놓은 38선으로 남북이 나뉘게 된 이유다. 한 마을에서 큰집은 북쪽에 작은집은 남쪽에, 또는 한 집에서도 안채는 북쪽에 뒤채는 남쪽에 속하게 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게 된 까닭이기도 하다. 소련군은 북쪽으로 8월 9일 들어왔지만 미군은 한 달 뒤인 9월 8일에야 남쪽에 도착함으로써, 해방된 뒤에도 38선 이남에서는 일본군과 친일파들이 활개 칠 수 있었던 배경의 하나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미국과 소련이 국토 분단의 공범이지만, 정확하게 얘기하면 미국은 38선을 '먼저 제안한 주범'이고 소련은 그 '제안을 받아들인 종범'이다. 미국이 '분단의 원흉'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역사에 대한 시각과 가치관에 따라, 미국과 소련의 조선 점령 및 분단에 빌미를 준 침략자 일본도 분단에 큰 책임이 있고, 힘이 약해 일본에 침략당한 우리 조상들도 분단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말이다.



▲ 한국전쟁 당시 38선 경계표시판 ⓒ프레시안 자료사진


3. 침략자 일본이 아니고 피해자 조선이 분단된 이유


여기서 우리가 꼭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있다. 왜 침략자 일본이 아니고 피해자 조선이 분단되었는지. 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이 분단되었다. 1945년 이후엔 미국이 전쟁을 가장 좋아하고 가장 많이 하는 나라가 되었지만, 그 이전엔 독일이 그랬다. 다른 나라들이 견제하기 어려울 만큼 군사력이 강하니까 호전적으로 된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못하도록 분단시킨 것이니, 독일은 전쟁이란 범죄에 분단이란 처벌을 받은 셈이다. 그러면 아시아 대부분의 국가를 침략하고 미국까지 폭격한 전범 국가 일본이 분단이란 처벌을 받아야 했어야지, 힘이 약해 항상 침략만 받아온 피해자 우리가 오히려 분단까지 되었으니 얼마나 분통 터질 일인가. 더구나 일본은 땅덩어리가 길쭉해서 자르기도 쉬운데 말이다.


어느 나라든 전쟁에서 승리하면 전리품 즉 적에게서 빼앗는 물품을 챙기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미국은 1898년 스페인과 전쟁을 벌여 승리한 뒤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쿠바,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 등을 전리품으로 차지했다. 쿠바는 1959년 카스트로와 게바라 등이 혁명에 성공해 지금은 북한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반미적인 국가가 되었고, 푸에르토리코는 머지않아 미국의 51번째 주가 될 가능성이 매우 큰 자치령이 되었으며, 괌은 미국의 주와 마찬가지지만 아직 정식으로 편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군사기지로 잘 활용되고 있다. 그리고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통치를 받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침략과 점령을 당했지만 1946년 7월 독립했다. 필리핀 사람들이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것은 지난날 미국의 식민통치 영향 때문이다.


이렇듯, 미국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이겼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지 조선은 당연히 미국이 차지했어야 할 전리품이었다. 그런데 소련이 자청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끈질긴 요구를 받고 한반도로 내려오던 참이었으니, 미국이 전리품 조선을 소련과 38선으로 나누어 점령하게 된 것이다. 바꿔 말하면 패전국 일본은 미국이 통째로 차지했다 물러가는 바람에 온전한 모양으로 남았고, 전리품 조선은 소련과 나눠 점령하는 바람에 분단의 상처를 입은 것이다.


4. 신탁통치 결정과 체제 분단


다음은 조선의 신탁통치에 관해 미국 국무부가 비밀 해제하고 공개한 외교문서에 나오는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첫째, 미국이 일본과 한참 전쟁을 벌이던 1943년 3월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워싱턴을 방문한 이든(Anthony Eden) 영국 외상에게 일본이 항복하면 조선을 국제적 신탁통치 아래 두자고 제안했다. 이든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둘째, 미국·영국·중국의 정상들이 1943년 11월 만난 카이로 회담의 속편이랄 수 있는 미국·영국·소련의 정상들이 1943년 12월 만난 테헤란 회담에서 루스벨트는 조선 사람들이 자치정부를 꾸리고 유지할 능력이 아직 없으므로 40년간 식민통치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간단히 동의했다.


셋째, 미국·영국·소련의 수뇌들이 1945년 2월 만난 얄타 회담에서 루스벨트는 필리핀 사람들이 자치정부를 준비하는 데 약 50년이 걸린 경험에 비추어 조선 사람들은 적어도 20~30년 신탁통치를 받아야 할 것 같다고 주장했다. 이에 스탈린은 신탁통치 기간이 짧을수록 좋다고 대응했다.


넷째, 미국·영국·소련의 외무장관들이 1945년 12월 모인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국 대표는 조선에 5년간 신탁통치를 실시하고, 5년 더 연장하자고 제안했다. 소련 대표는 조선 문제에 강대국들이 꼭 개입해야 한다면, 조선 사람들이 먼저 임시정부를 세우도록 하고 그를 미국·영국·소련·중국 등 4대국이 후원하는 것으로 그치자고 하면서, 연장 없이 한 번만 실시하자고 수정 제안했다. 이게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과다.


소련의 제안대로 조선에 대한 5년 후견제 또는 신탁통치안이 채택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이 40년, 20~30년, 5년씩 두 번 실시하자고 줄기차게 주장해온 것을 소련은 5년 한 번만 실시하자고 마지못해 응했다. 미국은 조선의 즉시 독립을 주장했는데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고 알려진 데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의 엄청난 오보와 미군정의 교활하고 악의적인 방치가 어우러진 왜곡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칫 '반미 친소(反美 親蘇)' 감정을 갖기 쉽다. 미국은 신탁통치를 내세워 조선의 자주독립을 늦추려고 한 반면, 소련은 조선의 자치정부를 앞세워 즉각 독립을 추구했기 때문에. 그러나 방법과 과정이 달랐을 뿐, 어떻게 하면 조선 땅에 자신에 의존적이거나 종속적인 나라를 세울 수 있을까 하는 목표에 초점을 맞춘 것은 미국이나 소련이나 마찬가지였다.


일제하에서부터 해방정국에 이르기까지 조선 사람들이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를 원했던 것은 너무도 지당하고 합리적 선택이었다. 자본주의의 폐해인 제국주의 침략과 수탈을 뼈저리게 경험했으니 말이다. 북쪽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남쪽의 미군정 아래서도 압도적으로 사회주의 체제를 선호했다는 당시 여론조사 결과가 이를 잘 보여준다.


따라서 미국의 속셈은 이러한 조선에 대해, 될수록 오랫동안 신탁통치를 실시하면서 사회주의 대신 자본주의 체제를 지향하는 친미 정부가 들어서도록 하는 것이었다. 4대국 가운데 당시 중국은 장개석 정부였으므로 자본주의 체제가 3:1로 우세했기 때문이다. 반면 조선에 외세가 개입하지 않으면 자연스레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친소 정부가 들어설 것이 뻔했기 때문에, 소련은 조선의 즉각 독립을 바라며 신탁통치를 반대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이 1945년 9월부터 1948년 8월까지 남쪽에서 신탁통치가 실시되었다고 오해하는데, 그때 실시된 것은 신탁통치가 아니라 미군정이었다. 남쪽에서든 북쪽에서든 한반도에서 신탁통치가 실제로 실시된 적은 없다.


1946년 3월부터 미국과 소련은 신탁통치 실시를 준비하기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를 열게 되는데, 조선 사람들 가운데 누구와 협의할 것인가에 대해 의견이 엇갈렸다. 미국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통과된 신탁통치 안에 대해 찬성했든 반대했든 남북의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를 참가시키자고 했고, 소련은 신탁통치에 관해 협의하는 자리에 신탁통치를 반대한 정당과 사회단체를 어떻게 참가시킬 수 있느냐고 맞섰던 것이다.


해방 직후 조선에는 온갖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는데 숫자로 따지면 우익 성향의 단체가 좌익 성향의 단체보다 많았다. 그런데 앞에서 밝힌 것처럼 신탁통치는 미국이 줄기차게 주장해온 반면 소련은 소극적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우익들은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좌익들은 찬성했다. 따라서 미소 공동위원회에 모든 단체를 참여시키면 미국에 유리하고, 찬탁한 단체만을 참여시키면 소련에 유리하게 되었다.


신탁통치를 반대한 단체들의 참여 문제에 관해 1947년 5월부터 열린 두 번째 미소 공동위원회에서도 두 나라의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다. 이에 미국은 미소 공동위원회를 일방적으로 결렬시키고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떠넘겼다.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안은 미국에 의해 줄기차게 제기되었다가 미국에 의해 일방적으로 폐기된 것이다.


거듭 강조하건대, 애초에 미국이 신탁통치를 제기하고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조선의 독립을 미루어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조선에 친소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막기 위해서요, 소련이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소극적이었던 까닭은 조선의 독립을 앞당겨 친미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또한 미국이 신탁통치 실시를 준비하기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에 신탁통치안에 반대했던 단체들까지도 참여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수적으로 우세한 우익 성향의 단체들을 끌어들여 조선에 친미 정부가 들어서도록 하기 위해서요, 소련이 찬성했던 단체들만 참여시켜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 것은 좌익 성향의 단체들을 앞세워 친소 정부가 들어서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이나 소련이나 염불보다 잿밥에 마음을 두기는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미국이 비난을 무릅쓰고 일방적으로 미소 공동위원회를 결렬시키면서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떠넘긴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국제 상황을 대강이나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유럽에서 세계 제1의 패권 국가로 군림하던 영국과 프랑스는 물론 이에 맞서 패권을 추구하던 독일과 이탈리아 등 승전국이든 패전국이든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영국과 독일 그리고 프랑스를 비롯한 세계 강국들이 겨우 30년 사이에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급속하게 퇴조한 반면, 상대적으로 전쟁의 부담이나 피해가 적었던 미국은 세계의 새로운 지도적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이렇게 세계 최강대국이 된 미국은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힘의 공백을 채울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이러한 미국에 정면으로 맞서는 나라가 나타났다. 마르크스주의를 바탕으로 자본주의의 멸망을 주장하며 정치, 경제, 군사적 능력에서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를 기록하는 소련이었다. 소련은 그리스에 공산주의를 전파하고 소련의 영향권 아래 들어 있던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등으로 하여금 그리스 공산주의자들을 지원해 권력을 장악하도록 시도하는 등 공산주의 확장을 꾀하였다. 그리스뿐만 아니라 터키에도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설 가능성이 높아지자, 두 나라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해왔던 영국은 미국에 협조를 요청했다. 영국은 붕괴 위기에 처해 있는 두 나라를 공산 세력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는 경제적 군사적 능력이 없으니 미국이 나서서 소련의 침투를 막아 달라는 것이었다.


미국의 대응으로 나온 것이 1947년 3월 발표된 트루먼 선언 (Truman Doctrine)이다. 소련의 세력 확장에 맞서 자유국가를 지원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중동지역의 관문이랄 수 있는 두 나라가 공산화되면 중동지역에서 서구 세력의 우위를 유지하기 어렵게 될 뿐만 아니라, 중동의 석유자원도 소련의 영향권 아래 놓일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트루먼 선언의 후속 조치로 나온 것이 3개월 뒤인 1947년 6월 발표된 마셜 계획 (Marshall Plan)이다. 공산주의 팽창으로부터 유럽을 지키기 위한 경제적 처방으로, 전쟁에 의해 황폐화된 유럽 경제를 복구하고 나아가 경제 혼란을 틈타 공산 세력이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서유럽에 전폭적인 경제 지원을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렇듯 1947년 무렵 미국은 유럽 지역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어서 한반도에 신경 쓰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발을 빼자니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잃어버릴 것 같았다. 당시 미국의 의회나 군부는 한반도가 그리스나 터키보다 전략적으로 덜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국무부는 1947년부터 한반도에 친소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막으면서도 명예롭게 물러날 수 있는 수단을 강구했는데, 고심 끝에 나온 계책이 바로 미소 공동위원회를 결렬시키고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넘기는 것이었다.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던 유엔을 통해 한반도를 관리하겠다는 속셈이었다. 그 무렵 작성된 미국의 외교문서도 밝히고 있듯이, "미국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조선에서 소련의 지배를 막는 일이요, 조선의 독립은 2차적 목표"였던 것이다.


유엔에서는 미국의 의도대로 한반도 문제가 처리되었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하여 이른바 비동맹 세력으로 유엔에 진출할 때까지는 유엔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이 내놓은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설치안에 소련이 반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48년 5월 남한에서만 총선거가 강행되고 이를 통해 1948년 8월 남쪽에 대한민국이 들어서고, 이에 맞서 1948년 9월 북쪽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들어섬으로써 체제 분단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참고로 이 과정에서 위와 같은 단독선거를 통한 분단 고착을 막겠다고 저항했던 운동의 하나가 1948년 4월 제주도에서 일어난 '4·3항쟁'이요, 이 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며 제주도행 배에 오르는 것을 거부한 군인들의 저항이 이른바 '여수 순천 반란 사건'이다.


정리하면 미국은 신탁통치를 줄기차게 제안했다가 미소 공동위원회를 일방적으로 결렬시켰으며,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떠넘겨 남한에서의 단독선거를 강행토록 함으로써, 한반도 국토 분단에 이어 체제 분단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국토 분단에서와 마찬가지로 체제 분단에서도 미국이 주범이고 소련은 종범이었던 것이다.


5. 6·25전쟁과 민족 분단


1950년 6월부터 1953년 7월까지 약 3년간의 전쟁을 통해 같은 민족이 원수처럼 갈리는 민족 분단이 이루어진 사실은 이미 앞에서 얘기했다. 북한군의 남침으로 일어난 전쟁이니 김일성이 민족 분단의 원흉이라는 점도 거듭 밝힌다.


(1) 전쟁의 명칭에 관해


우리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이름 짓는 데 날짜를 포함하기 좋아한다. '3·1절', '4·3제주항쟁', '4·19혁명', '5·16쿠데타', '5·18광주항쟁', '6·25전쟁', '8·15광복절' 등으로 말이다. 나는 이게 좀 불만스럽다. '3·1절', '5·16쿠데타', '8·15광복절' 등과 같이 어떠한 일이 일어나 그 행위가 오래 지속되지 않고 하루에 끝났다면 이런 명칭도 괜찮다. 그러나 '4·3제주항쟁', '4·19혁명', '5·18광주항쟁', '6·25전쟁'처럼 운동이 이틀 이상 지속되었다면 어느 특정한 하루를 잡아 명칭을 정하는 게 바람직한지 의문이다.


특히 '6·25전쟁'은 몇 달도 아니고 몇 년 동안 지속된 것이다. 게다가 전쟁이 6월 25일 갑자기 시작된 것도 아니다. 남쪽 안에서 일어난 이념 갈등은 빼더라도, 1949년부터 38선 일대에서 남북의 군대가 격렬하게 충돌한 적이 적지 않았다. 미군이 이 땅에 발을 디딘 1945년 9월부터 1950년 6월 이전에 분단에 따른 갈등과 투쟁 때문에 거의 10만 명이나 죽었는데, 전쟁이 1950년 6월 25일 갑자기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것도 부적절하고 '6·25전쟁'이라 이름 붙인 것도 어색하다. 이 명칭엔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경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북한 괴뢰군이 남침을 시작했다"는 점을 세뇌시키기 위한 의도가 배어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한국사에서나 세계사에서나 무슨 전쟁이 일어난 시기를 공부할 때 연도를 넘어 날짜에다 요일과 시각까지 암기한 적이 또 있는가.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그 배경과 이유보다 언제 누가 시작했는지에만 초점을 맞춘 역사 인식을 강요당한 셈이다.


참고로, 북한은 이 전쟁을 '조국해방전쟁'이라 부르는데, 미국이 점령해서 식민통치하고 있는 조국의 남쪽을 해방시켜 통일한다는 취지와 목표를 드러낸 이름이다. 미국은 '한국전쟁 (The Korean War)'이라고 하는데, '베트남전쟁'이나 '이라크전쟁'처럼 전쟁이 일어난 장소를 포함시킨 명칭이다. 중국은 '항미원조 (抗美援朝) 전쟁'이라 부름으로써 '미국에 대항해 조선 (북한)을 도와준 전쟁'이라는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 유럽의 한 학자는 '한국전쟁'이라 표기하는 것도 전쟁의 성격을 왜곡시킬 수 있다며, '한국에서의 전쟁 (War in Korea)'이라고 이름 붙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전쟁'이라고 하면 남북한만 전쟁을 벌인 것 같은 인상을 주기 쉬운데, 전장은 한반도지만 전쟁 주체는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진영이었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전쟁'이라고 불러야 더 정확하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미국이 2003년 이라크를 침략해 전쟁을 벌일 때 남한 언론은 하나도 빠짐없이 '이라크전쟁'이라 썼지만, 미국 언론은 'War in Iraq (이라크에서의 전쟁)'로 표기한 경우가 많았다는 점도 참고하기 바란다.


(2) 전쟁의 성격에 관해


앞에서 북한의 '조국해방전쟁'이란 이름을 소개하며 "남조선을 해방시켜 통일한다는 취지와 목표"를 드러낸 것이라고 했듯이, 6·25전쟁은 분명히 '통일을 위한 전쟁'이었다. 그런데 2005년 강정구 동국대 사회학 교수가 한 인터넷신문에 기고한 <맥아더를 알기나 하나요>라는 제목의 글에서 "6·25전쟁은 통일전쟁이면서 동시에 내전이었다"고 썼다가 검찰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고 대학에서 직위 해제된 적이 있다. 이에 앞서 2001년엔 김대중 대통령이 6·25전쟁을 "무력에 의한 통일 시도"라며 앞으로는 결코 무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반드시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한데 대해 국회에서는 북한의 입장만을 대변했다며 대통령직을 사퇴하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6·25전쟁을 '침략전쟁'이라고 해야지 어떻게 '통일전쟁'이라고 하느냐는 억지였다. 1945년 9월 남쪽에 들어온 미군이 "점령군인가 해방군인가" 하는 불순하고도 무식한 질문과 마찬가지로. 점령군도 되고 해방군도 되었듯이, 침략전쟁도 되고 통일전쟁도 된다. 둘의 성격이 서로 다르거나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하며 보완적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분명히 '남침'과 '전쟁'이라는 방법으로 '적화'와 '통일'이라는 목표를 이루고자 했다. 그러면 이게 통일을 위한 전쟁이지 분단을 위한 전쟁이었단 말인가.


보수주의자들은 6·25전쟁을 북한이 남한을 적화하기 위해 기습 침략을 감행한 전쟁이라고 한다. 맞다. 진보주의자들 가운데 6·25전쟁을 북침전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을지 모르겠는데, 김대중 대통령이나 강정구 교수는 분명히 6·25전쟁을 북침전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물론 한국전쟁을 1950년부터 시작된 '6·25전쟁'으로 한정하지 않고 분단 이후 시작된 전쟁으로 범위를 넓혀 본다면 미국이 전쟁을 부추긴 점도 있고, 남침이 먼저냐 북침이 먼저냐 따지기가 애매하거나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6·25전쟁'만 떼어놓고 본다면 북한이 남한을 공산화하기 위해 먼저 침략을 저지른 남침전쟁이다. 그렇다고 적화통일은 통일이 아니고, 침략전쟁은 통일전쟁이 아니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통일은 여러 가지로 추구할 수 있다. 평화적 수단에 의한 통일도 있고, 전쟁에 의한 통일도 있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확장하기 위한 녹화(綠化) 통일도 있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퍼뜨리기 위한 적화(赤化) 통일도 있다. 서로 다른 두 체제가 공존하며 수렴될 수 있는 통일도 있고, 한 체제는 반드시 없어져야 할 통일도 있다. 이 가운데는 바람직한 통일도 있고 꼭 피해야 할 통일도 있다.


6·25전쟁은 무력에 의한 통일 시도였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퍼뜨리기 위한 적화통일 시도였다. 수단과 방법이 나빴어도 통일을 위한 전쟁이었고, 추구하는 목표와 가치가 달랐어도 통일을 위한 전쟁이었다. 김 대통령이나 강 교수가 이러한 통일 시도의 방법과 목표를 바람직하다고 했다면, 나를 비롯해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비난받을 수 있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혐오하는 사람들에게 위협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런데 6·25전쟁이 통일전쟁 또는 통일 시도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가 도대체 왜 시빗거리가 되는지 기가 막힐 뿐이다.


1950년대에는 남쪽에서나 북쪽에서나 무력에 의한 통일을 추구하다가, 남쪽에서는 실행에 옮기지 못했고 북쪽에서는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앞으로는 남쪽에서든 북쪽에서든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에 의한 통일은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 게 중요하지, 통일전쟁이냐 아니냐라는 말도 되지 않는 시비는 없어져야 한다.


(3) 미국과 중국의 참전에 관하여


미국은 남쪽을 살렸고 중국은 북쪽을 구했다. 미국이나 중국이나 자신들이 추구하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지키기 위해 각각 남쪽과 북쪽에 군대를 보냈다.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2~3개월 만에 끝나고 사회주의로의 통일이 이루어졌을 것이며, 중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5~6개월 만에 끝나고 자본주의로의 통일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두 나라의 개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 남북이 각각 자신의 체제를 지킬 수 있었다는 점이요, 부정적으로 평가하면 빨리 끝났을 전쟁이 확대되고 그에 따라 희생자가 엄청나게 늘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강정구 교수가 6·25전쟁을 통일전쟁이라고 부른 것보다 미국의 개입이 없었으면 전쟁이 빨리 끝났을 테고 사람들이 덜 죽었을 것이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 더 큰 비난과 처벌을 받았는데, 미국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유명한 정치학자가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을 정당화하거나 미화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1950년부터 1952년까지 한국전쟁에 미군포병 연락장교로 참여했다가 1968년 <The Korean Decision> (한글 번역본: <미국의 한국 참전 결정>) 이라는 책을 펴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글렌 페이지 (Glenn Paige) 하와이대 정치학 교수가 1977년 자신의 책을 스스로 비판하며 하나의 폭력에 대해 또 다른 폭력으로 대응한 것을 반드시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반성했던 것이다. 미국의 개입 때문에 중국까지 참전하여 전쟁의 규모가 커지고 남북 양쪽에서 수백만 명이 죽게 된 것을 바람직하다고만 할 수 있느냐는 뜻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그의 책 <To Nonviolent Political Science: From Seasons of Violence>가 1999년 안청시 서울대 정치학교수와 정윤재 한국정신문화원 정치학교수에 의해 <비폭력과 한국정치>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판되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지금은 남한이 북한보다 정치적으로 훨씬 자유롭고 경제적으로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풍요롭다. 쉽게 말해 체제 경쟁은 끝났다. 그러기에 남한에는 그때 수백만 명이 죽었을지라도 사회주의 체제에 흡수되지 않았던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1940~50년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북쪽이 남쪽보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또는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모든 분야에서 더 안정되어 있었고 훨씬 개혁적이었으며,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 체제를 원했었다. 따라서 지금의 기준이 아닌 당시의 상황을 바탕으로 한다면 엄청난 인명의 희생을 막고 사회주의 체제로의 통일을 바랐을 사람들이 많았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4) 전쟁의 피해에 관하여


6·25전쟁의 피해와 관련하여 1998년 논란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당시 대통령 정책자문 기획위원장이던 최장집 고려대 정치외교학교수가 오래전 발표했던 논문에서 "한국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북녘 인민들이었다"고 쓴 구절에 대해,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층은 무슨 빨갱이 같은 소리냐며 흥분했던 것이다.


6·25전쟁을 통해 남북 모두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인민군에 의한 남쪽 양민의 피해만 큰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오래전부터 '노근리'를 통해 밝혀지고 있듯이, 남쪽 양민들은 미군과 국방군에 의해서도 끔찍한 피해를 당하지 않았는가. 따라서 친북이나 반공이라는 감정을 떨쳐버리고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최 교수의 주장은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미군 조종사들이 북한을 공격할 때 더 이상 폭격할 목표물을 찾지 못할 정도였다면, 6·25전쟁 중 북쪽의 피해가 어느 정도였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스페인 출신의 세계적인 화가 피카소가 1951년 6·25전쟁을 소재로 그린 스케치가 있다. '조선에서의 학살 (The Massacre in Korea)' 이란 제목이 붙은 이 그림은 벌거벗은 임산부들과 아이들을 향해 총칼을 겨누고 있는 군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그림을 보면 언뜻 인민군들이 남한 양민을 학살하는 것을 떠올리기 쉽겠지만, 1950년 10월 38선을 넘은 미군들이 황해남도 신천에서 52일 동안 머무르며 당시 신천군 인구의 4분의 1에 달하는 무고한 양민을 잔인하게 죽였다는 사실을 고발한 것이다.


미국은 6·25전쟁 중에 북한이 1세기 동안 걸려도 복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철저히 파괴하려 했다고 한다. 북한의 모든 산업시설을 초토화하여 휴전협정이 맺어진 이후에 북한이 피해 복구를 쉽게 하지 못하고 경제개발에 어려움을 겪으면,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보다 못하다고 선전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렇게 북한은 전쟁을 통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어느 쪽 군인들이 먼저 전쟁을 시작했느냐는 문제와 어느 쪽 양민들이 더 큰 피해를 입었느냐는 문제는 분명히 별 개의 문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5) 전쟁의 경과와 결과


한국전쟁이든 6·25전쟁이든 1953년 끝났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쟁이 '실질적으로는' 끝났을지라도 '법적으로는' 종결되지 않았다. 1953년 7월 맺어진 것은 전쟁을 쉬거나 멈춘다는 휴전 또는 정전협정이었지, 전쟁을 끝내거나 평화를 추구하자는 종전 또는 평화협정이 아니었다. 61년이나 지나도록 전쟁을 완전히 끝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남한과 중국은 1992년 적대 관계를 풀었지만, 북한과 미국은 아직 국교를 정상화하지 못하고 있으며, 남북관계는 불안정하다. 따라서 진보세력이든 보수세력이든 앞으로 6·25전쟁을 생각하거나 기념하면서, 전쟁을 언제 누가 왜 먼저 시작했는지 따지면서 상대방에 대한 원한이나 적대감을 키우기보다는 왜 아직까지 휴전 또는 정전협정을 종전 또는 평화협정으로 바꾸지 못하고 있는지 반성하면서 어떻게 평화와 통일을 진전시켜야 할지 고민해보는 게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법적증언⑫] 반미, 분단 직후부터 일어난 자주운동

[법적증언⑫] 반미, 분단 직후부터 일어난 자주운동

반미든 친미든, 국익에 따라 움직여야


남한에서 '반미(反美)'는 '용공이적(容共利敵)'이 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 미국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공산주의 정권의 주장이나 정책을 받아들이거나 동조하는 일이며, 북한과 미국이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논리다. 반미와 친북은 동전의 양면처럼 한 몸통이 되어버린 것이다.


냉전 시대 남한 대외정책의 기조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친미 반공'이었다. 냉전 종식 이후 지금까지도 미국과 친하게 지내며 북한 공산주의를 반대한다는 노선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남한의 인식이나 행위를 정확하게 표현하면 친미가 아니라 '숭미(崇美)'와 '종미(從美)'였다. 미국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뛰어넘어 미국을 숭상하며 추종했다는 뜻이다. 국제사회에서 남한이 미국의 한 주처럼 비추어져 '51번째 주 (the 51st state of the USA)'라는 빈정거림을 받게 된 배경이다.


예를 들어, 미군은 1945년 9월 우리 땅에 들어오면서 자신들을 '점령군 (occupation forces)'이라고 성격을 분명히 밝히고 정부 문서에도 그렇게 표현했다. 그러나 남한 정부는 미군이 해방군인지 점령군인지 대답하라는 설문조사까지 하면서, 점령군이라 부르면 빨갱이로 낙인찍었다. 1960년대엔 장관 임명조차 주한미국대사에게 미리 보고하며 양해를 구했는데, 미국은 '내정 간섭'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조심스러워했지만, 남한 정부는 미국의 '충고와 조언'을 지속적으로 받고 싶다며 매달리다시피 한 적도 있다.


남한의 독재정권들은 국민의 지지보다 미국의 승인을 통해 정부의 합법성과 정통성을 얻었기 때문에, 미국에 대한 비판은 남한 정부에 대한 도전이자 북한 정부에 대한 동조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주한미군의 범죄와 만행에 분노하며 '주한미군 철수'를 외쳐도 빨갱이로 매도되었다.


반미운동은 1945년 분단 직후부터 자생적으로 시작되었다. 흔히 얘기하듯 1980년 5월 광주항쟁 이후 갑자기 일어난 것도 아니고, 북한의 사주나 조종에 따라 전개된 것은 더욱 아니다. 반미운동이 결과적으로 용공이적으로 될 수는 있을지라도, 결코 종북이 될수는 없는 것이다. 남한에서 반미운동이 언제부터 왜 어떻게 펼쳐졌는지 알아본다.


1. 반미의 의미


반미에 관해 논의하려면 이에 대한 개념부터 알아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똑같은 사건을 두고 한쪽에서는 반미라고 주장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반미가 아니라고 반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85년 5월, 광주학살과 관련해 미국의 공개 사과를 요구하며 서울의 미국문화원 도서관을 3일간 점거했던 70여 명의 대학생들은 "우리는 반미가 아니다"라고 주장했지만, 그 후 언론계나 학계에서는 그 사건을 1980년대 전반기 "반미운동의 절정"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2002년 6월, 경기도 양주에서 여중생 2명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죽었는데 그 운전병들이 무죄 판결을 받자, 죽은 여중생들을 추모하며 한미행정협정 (SOFA) 개정을 요구하는 촛불시위가 2003년까지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그 무렵 촛불시위가 반미냐 아니냐는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고, 촛불시위가 추모행사로 끝나야지 반미데모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반미의 개념이 명확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여기서 '반미'의 '반'은 반대한다는 뜻이고 '미'는 미국을 가리키는데, 미국의 어떠한 점에 어떻게 반대하는 것이 반미일까.


첫째, '반대'는 태도나 행위의 강도(强度)와 관련 있다. 비판이나 항의에서부터 증오감의 표출이나 테러 행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태도나 행위가 포함될 수 있는데, 미국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모두 반미로 볼 것인지 아니면 미국에 대한 정당한 비판은 반미로 간주하지 말아야 할 지 따져봐야 한다. 미국에 대한 비판과 반대를 구별할 경우, 어디까지 '비미(批美)'이고 어디부터 '반미'인지 명확한 경계선을 긋기 어렵다. 흔히 미국에 대한 반대는 미국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둘째, '미국'은 태도나 행위의 대상이나 목표와 관련 있다. 미국이라는 나라 또는 정부, 기관이나 정책, 사회나 사람, 문화나 전통, 가치나 상징, 권력이나 영향력 등이 포함될 수 있는데, 미국의 어떠한 단편적인 것만 반대해도 반미로 볼 것인지 미국의 모든 측면을 반대해야 반미로 규정할 것인지가 문제다. 전자를 따른다면 세계 모든 나라에서 반미를 찾을 수 있고, 후자를 따른다면 지구 어디에서든 반미를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다. 미국 문화의 상징인 맥도널드 햄버거를 사먹고 코카콜라를 마시면서 성조기를 찢거나 미국문화원에 화염병을 던지는 사람을 두고 그의 친미적 태도와 반미적 행위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혼란이 생길 수도 있다.


셋째, '반미'라는 말 뒤에 '운동', '주의(主義)', '감정' 등의 말을 붙여쓰기 마련인데, 이는 태도나 행위의 빈도 또는 지속성과 관련 있다. 미국에 대한 일시적 비판이나 반대도 반미로 볼 수 있는지 미국에 대한 지속적 혹은 체계적인 비판이나 반대만 반미로 규정할 것인지가 문제다.


이와 관련하여, 미국에서는 '반미 (anti-Americanism)'와 '비미 (criticism of the United States)'를 구별하여 쓰는 경향이 큰데 반하여, 남한에서는 '반미주의'와 '반미감정'이라는 말을 구별하여 쓰는 경향이 크다. 여기서는 편의상 '반미'와 '비미' 및 '반미주의'와 '반미감정'을 구별하지 않고, '반미'를 넓은 의미에서 "미국이라는 나라 또는 미국의 어떠한 측면에 대하여 부정적인 태도나 행위를 취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2. 반미의 유형과 종류


반미는 세계적으로 어제오늘 나타난 게 아니라 미국이 독립을 선언하기 전부터 생긴 현상이요, 어느 특정 지역이나 민족에게만 쌓인 게 아니라 세계 모든 지역의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 쌓여 왔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등장하면서 “지구상에서 가장 증오받는 나라”가 되었으며, 미국을 증오하는 것은 세계 사람들이 "가장 즐기는 놀이"가 되어버렸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멕시코의 작가 겸 외교관이었던 카를로스 푸엔떼스 (Carlos Fuentes)가 미국을 "안에서는 민주주의 국가라도 밖에서는 제국주의 국가이며, 자국에서는 지킬박사 같은데 타국에서는 하이드씨 같다"고 묘사한 데서 드러나듯, 세계적 패권을 추구하고 유지하기 위한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 또는 일방적이고 호전적인 대외정책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반미는 오랜 역사와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대략 다음과 같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쟁점별로 '정치적' 반미와 '문화적' 반미가 있다. 앞의 것은 미국의 특정한 정책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발전된 반면, 뒤의 것은 미국의 전통이나 문화 또는 미국인들의 사회생활에 대한 경멸이나 거부에 바탕을 두고 있다.


둘째, 반미의 강도와 관련하여 '온건한' 또는 '감정적' 반미와 '급격한' 또는 '이념적' 반미로 나눌 수 있다. 앞의 것이 미국의 특정한 정책이나 미국인들의 행태에 관한 일시적 비판이라면, 뒤의 것은 미국의 사악한 제국주의에 대한 강한 비난이나 본질적 반발이다.


셋째, 반미를 주도하는 사람들에 따라 먼저 민간 차원의 반미와 정부 차원의 반미로 나눌 수 있으며, 앞의 것은 다시 '엘리트' 반미와 '대중적' 반미로 나눌 수 있다.


넷째, 반미의 특성과 관련하여 '정책적' 반미와 '도구적' 반미 그리고 '이념적' 반미로 나눌 수 있다. '정책적' 반미는 미국 정부의 특정 정책이나 행위에 대한 적대감이 분출된 것으로 가장 일반적인 반미의 유형이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이스라엘 지지, 베트남 전쟁, 이라크 침략 등에 대한 비난이나 분노를 들 수 있다. '도구적' 반미는 어느 정부가 민족주의를 표방함으로써 국민의 지지와 단결을 유도하거나, 정부에 대한 국내외의 불만이나 비판을 잠재우기 위하여 정부 차원에서 미국을 비판하거나 공격하는 것이다. 이러한 반미는 주로 독재주의 또는 권위주의 정권에서 발전되어 왔다. '이념적' 반미는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 그리고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거부감이나 적대감에서 표출된 것으로 주로 과거의 동유럽이나 제 3세계에서 발전되어 왔다.


3. 미국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 변화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아마 1980년 이후 남한 사회에서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온 문제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우리는 분단과 전쟁을 겪고 냉전 시대를 거치면서 친미 반공의 틀 속에 갇혀 미국이 글자 그대로 '아름다운 나라'라고만 믿어왔다. 교육과 언론을 통해 그렇게 세뇌당하고 강요받아온 것이다. 한미 관계를 흔히 '피로 맺어진 동맹'이란 뜻의 '혈맹' 관계라고 표현하며 미국을 '은인의 나라'로 생각해온 데는 다음과 같은 인식이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첫째, 미국인들은 19세기 말부터 조선 땅에 기독교를 뿌리내리고 서양식 병원과 학교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항일 민족 투쟁을 지원했다. 둘째,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을 패퇴시킴으로써 1945년 8월 조선의 해방을 불러왔다. 셋째, 한국전쟁 중 군대를 파견하여 남한의 공산화를 막았다. 넷째, 한국전쟁 이후 막대한 양의 군사 및 경제 지원을 하여 남한의 재건을 도와주었으며, 남한 최대의 무역 상대국으로 남한의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다섯째, 주한미군을 유지해 북한의 남침을 저지하면서 남한의 안보를 책임져 왔다.


이에 반해, 미국이 '추한 나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반미주의자로 낙인찍히고 '불온한 사상'이나 '용공이적 행위'와 연결되어 처벌을 받기 쉬웠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나라 안팎으로 민주화와 탈냉전을 겪으면서 미국의 역할을 부정적으로 해석하거나 비판하는 이른바 '반미'가 확산되어 왔다. 다음과 같은 역사의 재해석 또는 미국에 대한 재인식을 바탕으로 불평등한 한미 관계를 바로 잡고 미국으로부터 진정한 자주독립을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온 것이다.


첫째, 미국은 스페인에게서 뺏은 필리핀을 식민지로 확보하기 위해 1905년 일본과 '태프트-카쓰라 밀약'을 맺어 조선을 일본에 넘겼다. 둘째, 1945년 8월 38선을 확정하고 1948년 남한 단독선거를 주도함으로써 한반도의 분단을 주도하고 고착시켰다. 셋째, 남한의 독재정권들과 군사쿠데타까지 지원함으로써 남한 민주화를 방해했다. 넷째, 초국적 기업들을 통해 남한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한편 시장 개방을 강압적으로 요구해왔다. 다섯째, 미군을 주둔시킴으로써 '양키 물질주의' 혹은 폭력과 섹스로 상징되는 '미군 (GI) 문화'를 유입시켜 남한 사회의 도덕적 타락과 퇴폐를 이끌며, 남북한 사이의 화해와 협력 및 평화 통일을 가로막아 왔다.


4. 남한 반미운동의 역사와 과정


1980년 5월 광주항쟁 이후 우리 사회에서 반미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남한은 1970년대까지 "반미의 무풍지대"였다거나 세계에서 "양키 고우 홈"이란 구호가 외쳐지지 않은 유일한 나라였다는 말이 많이 나왔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 혹은 반미감정이 1980년대 이전에는 거의 없었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반미감정은 1945년 한반도의 분단과 함께 표출되었기 때문이다. 1980년 이전에도 "반미의 무풍지대"가 아니었고, 언제든지 반미의 미풍은 있었으며 때로는 강풍이나 돌풍도 불었다. 그러다 광주항쟁을 계기로 반미의 폭풍 혹은 태풍이 불어닥친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남한에서의 반미운동은 1945년부터 1970년대까지 주로 지식인들에 의하여 소규모로 그리고 간헐적으로 일어났지만, 1980년대부터는 일반 대중이 참여하여 대규모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왔다.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미국의 지나친 간섭과 부당한 압력 그리고 주한미군의 한국군 작전통제권 소유 및 주둔군지위협정 (SOFA)을 비롯한 불평등한 한미관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며, 가장 큰 배경은 1980년대에 일어난 민중운동과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시민운동에 따른 시민사회의 발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지난 2002년 12월 14일 서울시청에서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여중생들을 추모하고 미국을 규탄하는 '주권회복의 날, 10만 범국민 평화대행진'이 열렸다. 참가자들이 성조기를 찢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프레시안 자료사진


(1) 1940년대 한반도의 분단과 미 군정에 대한 반대


남한에서 최초의 반미데모가 일어난 것은 1945년 9월 8일 미군들이 인천에 착륙한 지 이틀만이었다. 약 500명의 한국인들이 미군들을 환영하기 위해 인천항에 모여들 때 일본 헌병이 총을 쏴 한국인 2명이 사망하고 10여 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일어난 데 이어, 이틀 후에는 2명의 한국인 학생들이 일본 경찰과의 충돌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렇듯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한 이후에도 35명의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에 의해 죽은 반면, 단 1명의 일본인도 한국인들의 손에 의해 죽은 일은 없었다. 하지(Hodge) 미군 사령관은 질서 유지를 목적으로 한국인들로부터 극도로 증오받고 있던 일본 관리들을 그대로 유임하도록 조치했는데, 이러한 '결정적 실수'에 대한 항의로 미군들이 한반도에 착륙하자마자 반미데모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나아가 "미 점령군에 대한 어떠한 적대 행위도 사형선고를 포함한 중대한 처벌을 받을 것"이라는 매카써 (MacArther) 연합군 총사령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의 항의데모는 계속되었다.


한편, 한국인들이 35년에 걸친 일본의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났지만 즉시 독립이라는 꿈은 실현되지 않은 채 38선을 따라 분단이 굳어지고 있었다. 일본 식민통치 구조의 연장에 불과한 미 군정은 많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반미감정을 갖도록 이끌었다. '해방군'이 억압자로 바뀌는 가운데 한국인들에게 일본 식민주의자들과 미군들의 실질적 차이점은 피부색뿐이었던 것이다. 미군 점령에 대한 한국인들의 좌절과 분노는 1945년 9월 중순부터 더욱 심각한 항의 시위로 발전되기 시작했다. 미군들은 대개 과거에는 친일파였으며 영어를 잘하는 부유한 한국인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비밀 여론조사에 따르면 시간이 흐를수록 다수의 한국인들이 반미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2) 1948년 단독총선거와 1950년 6·25전쟁의 영향


1947년 9월 한반도의 통일과 독립에 관한 미소 공동위원회 2차 회의가 결렬되자 미국은 소련의 '전술'을 비난하며 한반도 문제를 일방적으로 '부적절하게' 유엔으로 떠넘겼다. 결국 38선 이남에서만 미군정이 계획한 대로 1948년 5월 총선거를 실시하게 되었는데, 이는 한반도의 분단을 영구화할 것이라고 생각한 대다수 한국인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김구는 한국인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외국군들이 즉각적으로 한반도에서 철수할 것을 주장했고, 김규식은 외국군대가 철수하고 남북 지도자들이 협상을 이루기 전에 선거를 실시하는 것은 반대한다고 했다. 공산주의자들을 포함한 좌익 세력들은 유엔 한국임시위원회가 미국 제국주의의 첩자라고 비난하며 폭력으로 선거를 거부했다.


한국인들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한 메논 (Menon) 위원장은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가 유엔의 기본 목표인 한반도의 독립과 점령군들의 철수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며, 단독선거안의 철회를 주장했다. 그러나 1948년 5월 10일 선거가 실시되고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는데, 유엔 한국임시위원회와 남한 단독선거에 대한 반대는 이승만 정부 수립 이후 반체제 및 반미투쟁으로 발전되었다. 특히 좌익 세력은 1948년 10월부터 1949년 1월까지 제주, 여수, 순천 등에서 '항쟁' 또는 '반란'을 주도했다.


이런 터에 6·25전쟁은 대다수의 남한 사람들을 반공과 친미로 이끄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북한의 남침은 남한 사람들에게 북한에 대한 적대감을 불러일으켰고, 미군들의 참전과 남한의 전후 복구를 위한 미국의 원조는 미국에 대한 호의적 인상을 심어 주었다. 북한은 악마로 간주되고 미국은 천사처럼 생각되었던 것이다. 미국에 대한 한자 표기를 해방 이전에는 일본인들처럼 '米國'이라고 하다가, 미 군정 기간에는 '米國'과 '美國'을 함께 썼으며, 전쟁 이후에는 '美國'으로만 쓰게 된 것도 미국에 대한 호의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고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반공 친미적 사회구조가 정착되어 가는 가운데 좌익 세력이 월북하거나 지하로 잠적하여 이념적 반미운동은 전혀 일어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기지 주변에 사는 한국인들에 대한 미군들의 범죄가 점증함에 따라 1950년대 말부터 반미감정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1950년대 중반에는 휴전 반대 및 남한 내 미국 경제인들에 대한 조세 문제에 관한 논란 등으로 남한에 '반미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이에 1955년 9월 미국 국무부 극동문제담당 차관보가 주미한국대사를 불러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남한 언론에 나타나고 있는 미국에 대한 비판은 (중략) 우리에게 극도로 불유쾌하며, 우리는 미국에 대한 이러한 지속적인 비판이 우리의 관계를 해치고 비생산적이라고 생각한다."


(3) 1960년대 4월혁명과 민족주의의 발흥


1960년 3·15 부정 선거는 4월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주한미국대사와 주한미군사령관 그리고 중앙정보국 남한 책임자까지 동원된 조직적인 미국의 개입은 이승만의 하야에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많은 한국인들은 독재정권의 전복이라는 목표에 도취되어 그러한 미국의 내정간섭에 불만이나 분노를 터뜨리기는커녕 열렬하게 환영했다.


4월 혁명이 초래한 가장 두드러진 사회현상 중의 하나는 민족 자주운동의 발흥이었으며 그것은 대체로 통일운동의 전개와 함께 표출되었다. 통일론의 전개는 대부분 자주와 평화를 바탕으로 남북한 교류나 중립화를 표방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초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족의 자주는 외세의 배격을 의미했으며 외세의 배격은 주한미군 철수가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1960년 9월 혁신 세력을 중심으로 <민족 자주통일 중앙협의회>가 발기된 데 이어, 대학생들의 통일 논의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에 장면 총리가 정부의 정책과 다른 통일운동에 대해서는 선도하되 과격한 행동은 법에 따라 처단할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혁신 세력과 학생들의 통일 논의는 중단되지 않았다. 11월엔 연세대학교 학생들이 학내 분규와 관련해 미국인 이사장과 총장 서리의 본국 소환을 외치며 미국대사관 앞에서 데모를 벌였다. "나라와 학원의 민주화는 달러가 보증해 주지 않는다"며 "달러가 가져오는 노예근성"부터 막아야 한다는 연세대 학생들의 결의에서 볼 수 있듯이, 4월 혁명은 통일운동뿐만 아니라 학생운동에까지 민족 자주의식을 불어넣었던 것이다.


1961년 2월엔 한미경제협정 체결과 관련하여 "양키 고우 홈!" 구호와 함께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반미운동이 전개되었다. 혁신 정당과 진보적 사회단체 및 대학생들은 그 협정이 남한의 경제적 예속을 제도화시키며 미국이 남한의 내정에 공식적으로 간섭할 수 있게 하는 불평등조약이라며, 전국적으로 <반대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그 협정의 즉각 철회와 비준 거부를 요구했던 것이다. 또한 그 무렵 거의 매일 일어나는 미군들의 만행과 범죄 때문에 2월 중순부터 한미행정협정 (SOFA) 체결을 촉구하는 데모가 주한미군부대 종업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러한 민족 자주운동은 5‧16 군사쿠데타로 중단되었다. 4월 혁명의 영향으로 민족주의가 발흥하고 이와 함께 전개되는 통일운동과 반미 자주운동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지 못하는 장면에게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던 미국은 남한의 정치 안정과 미국의 안보 이익을 지속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허약한 장면 정부를 대체할 강력한 군사정권을 필요로 했다. 물론 미국이 장면 정부의 대안으로 계획했던 군사 정부가 박정희가 주도했던 쿠데타는 아니었지만, 미국은 합법적인 장면 정부를 지지한다고 공식적으로 표명하면서도 쿠데타를 저지하거나 반대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쿠데타에 성공하자마자 반공을 강조하면서 통일운동을 철저히 탄압했는데, 한미경제협정에 반대했거나 주한미군 철수 및 북한과의 교류를 주장했던 사람들을 용공이적 행위자로 체포했다.


1965년 한일 외교정상화를 전후하여 반미감정은 다시 폭발했다. 한일 외교정상화에 대한 항의데모는 깊은 반일감정에서 촉발된 것이었지만, 그렇게 졸속적이고 굴욕적인 국교 수립이 미국의 압력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반미감정도 함께 분출된 것이다.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대규모 항의데모에 박정희 정권은 1964년 6월 서울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주한미군사령부는 데모 진압을 위한 병력 차출을 승인했다. 결국 계엄령하에서 국교정상화가 조인되지만, 그 비준을 저지하기 위한 항의데모는 1965년 2월부터 8월 위수령이 선포될 때까지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반미감정은 지속적으로 분출되었으며, 시위 구호 가운데 하나는 "양키 입 닥쳐"였다. 졸속적이고 굴욕적인 한일협정에 대한 미국의 압력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박정희 정권 아래서 반공정책은 더욱 강화되어 미국에 대한 심한 비판은 반공법이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되었기 때문에 반미감정의 표출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1960년대 중반 주한미군기지 주변에서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범죄가 증가하자 인권단체 등에서 한미행정협정을 개정하라는 성명 등을 발표하지만 반미운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시민사회가 거의 발달되지 않았던 탓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


(4) 1970년대 유신체제 하에서의 저항운동


1970년대는 남한 정치사에서 가장 혹독하고 어두운 시대였다. 박정희는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에 긴급조치를 추가하여 소위 '한국적 민주주의'를 펴나갔다. 억압적인 유신체제는 정부는 물론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들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허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미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거의 표출될 수 없었다.


그러다 1970년대 중반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 계획이나 미국 중앙정보국의 청와대 도청 사건 그리고 남한의 인권 문제 등과 관련하여 남한과 미국 사이에 외교적 마찰이 빚어지고 양국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자 여당 정치인들이나 친정부 지식인들이 미국을 비난했다. 비록 일시적이었지만 '공식적 친미'가 퇴조하면서, 대외적으로는 국민의 지지와 단결을 유도하고 대내적으로는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만과 비판을 잠재우기 위하여 정부 관리들이 미국을 비판하거나 공격하는 '도구적 반미'가 등장한 것이다. 예를 들어, 박정희에 의해 임명된 유정회 소속의 한 국회의원은 미국을 '세계적 제국'이라고 부르며 미국의 대외정책을 '신식민주의'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유신 정권 아래서 재야인사들과 학생들이 민주화 투쟁을 전개하는 가운데 일단의 '혁명주의자'들이 남한을 미국의 '신식민지'로 간주하며 '이념적' 반미 자주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 당시 라틴아메리카에서 발달한 '종속이론'의 영향을 받아 남한에서도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미국의 제국주의에 대한 종속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혹독한 탄압으로 운동권에서조차 반미 자주의식을 공개적으로 표출하기는 어려웠다.


이에 대학생들은 반정부 반미 문화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데모가 금지된 상황에서 저항의식을 고무시키는 탈춤이나 마당극 등을 통해 남한의 독재와 외세의 개입을 풍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통적인 탈춤에서 유신체제나 미국은 억압자로 풍자되었으며, 미국은 한국인들에 대한 '착취자'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또한 많은 작가들은 미국의 퇴폐문화가 남한에 유입되는 현상을 비판했는데, 억압적인 유신체제가 학생들의 저항 방법을 바꾸었듯이, 작가들은 이른바 '자체 검열'을 통해 덜 정치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던 것이다.


(5) 1980년대 광주항쟁의 영향


1980년 5월 광주학살과 1980년대의 남한 상황은 반미와 관련해 엄청난 변화를 불러왔다. 첫째, 광주학살과 전두환 정권에 대한 미국의 동조와 지지에 따라 미국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었다. 미국이 남한의 민주화에 도움을 주리라 기대했었지만 오히려 군사독재를 지지한 데서 미국에 대해 배반감을 맛보기 시작한 것이다. 심리학의 '좌절-공격 이론'이 제시하듯, 박정희의 죽음이 민주화를 불러오지 못하고 새로운 군사정권이 등장함에 따라 미국의 도움을 통한 민주화에 대한 기대는 좌절로 바뀌었으며 이 좌절감은 반미감정의 폭발이라는 공격 행위로 이어진 것이다.


둘째, 급속적인 경제 성장에 따라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줄어들면서 미국에 대한 종속이나 불평등 관계에서 벗어나려는 민족 자주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셋째, 사회 각 분야에서 시작된 민중운동이 반미운동으로 발전되었다. 민중운동의 세 가지 목표는 군사독재를 물리치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며, 외세의 지배로부터 실질적인 자주독립을 쟁취하고, 외세의 간섭 없이 민족통일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민중운동은 반외세 민족 자주운동 또는 반미운동과 함께 전개되었다.


대학생들은 흔히 미국문화원에 불을 지르거나 성조기를 찢는 등 다양한 형태로 반미감정을 표출시킨 반면, 지식인들과 문화예술인들은 민중 문화운동을 발전시키며 작품 활동을 통해 반미감정을 나타내는 경향이 컸다. 대학의 대자보나 현수막에는 미국의 한자 표기를 美國 대신 흔히 '米國'이나 '尾國'으로 했으며, 출판물에 연도를 표시할 때는 서기 (西紀) 보다 단기 (檀紀)를 쓰거나 '분단 조국 00년', '반미 항전 00년', '통일 진군 00년', '해방 투쟁 00년', '나라 찾기 00년' 등을 씀으로써 반미 자주의식을 고취시켰다. 특히 '북한 바로 알기 운동'과 통일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미국이 통일의 걸림돌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6) 1990년대 군사정권의 종식과 정치문화의 변화


1992년 12월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많은 사람들은 그를 30년 이상 지속되었던 군사독재를 청산하고 남한의 민주화를 이끌 문민 지도자로 환영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재야단체에서는 그의 집권이 군사정권의 연장일 뿐이라며 선거 결과에 불만을 표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 초기에 일련의 개혁정책을 수행한 뒤에도 학생들은 그가 선거 과정에서 미국의 절대적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김영삼 정부 역시 보수적 친미정권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80년대 반미 자주운동은 민중운동과 함께 발전되었기 때문에 1990년대 민중운동의 쇠퇴는 반미 자주운동의 약화를 초래했다. 문민정부의 등장과 신속한 민주화로의 이행은 최소한 미국이 남한의 군사독재를 지원한다는 대중적 인식을 떨쳐 버릴 수 있었다. 그 결과 반미 자주운동의 강도는 약해졌으며, 반미 행위의 빈도는 줄어들었고, 과거에 비해 비폭력적으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문민정부 아래서도 반미운동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는데, 1990년대에 표출된 반미감정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1980년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개입 의혹이 미국의 비밀문서들을 통해 사실로 밝혀졌다. 1990년대까지 해마다 5월이면 광주를 중심으로 거의 전국적으로 열렸던 광주항쟁 기념식이 미국의 공개 사과를 요구하지 않고 끝난 적이 없다. 예를 들어, 광주 시내에 있던 미국문화원이 잦은 데모에 못 이겨 1990년 6월 광주 변두리 지역으로 이사했지만 그곳에서도 유지하기 곤란해 완전히 폐쇄되고 말았다.


둘째, 1980년대 후반부터 전개되기 시작한 '반미 반전반핵 평화투쟁'은 미국이 한반도의 통일을 저해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일부 학생들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1996년 8월 연세대학교에서 빚어졌던 이른바 '한총련 사태'에서 보듯이, 해마다 8월이면 '범청학련 통일 대축전' 행사를 개최하여 주한미군 철수 운동을 비롯한 '반미 구국투쟁'을 벌여 왔다.


셋째, 미국이 1980년대 중반부터 남한의 농산물시장 개방을 지속적이고 강압적으로 요구해온 데 대하여, 농민들을 중심으로 '쌀시장 지키기 운동'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이 운동이 남한 사회에서 얼마나 커다란 지지를 받았는지 보여 주는 일화가 있다. 1991년 농협이 쌀 수입 반대 서명운동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 약 40일 동안에 남한 인구의 거의 3분의 1에 해당되는 1300만 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음으로써, 최단 기간에 최다의 서명을 받은 세계 기록을 세워 1991년 <기네스북>에까지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넷째, 주한미군들의 한국인에 대한 만행과 범죄가 줄어들지 않았다. 이러한 범죄는 1945년 미군들이 주둔하면서부터 일어났지만, 1992년 '윤금이 사건'에서처럼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반미운동이 확산된 적은 없었다. 동두천의 한 윤락여성이 벌거벗겨져 성기와 항문에 우산과 콜라병이 꽂혀 있고 온몸에 가루 세제가 뿌려진 채 시체로 발견된 이 사건은 해가 바뀌도록 각계각층의 각종 항의집회를 초래했으며 미국대통령에게 항의 엽서 보내기운동으로까지 발전했다.


과거에는, 특히 1960년대 중반에, 이러한 비슷한 사건이 미군기지 주변에서 거의 매일 일어나다시피 했어도 기껏해야 동료 여성들이 부대 정문 앞에 가서 데모 한 번 벌이고 위로금을 조금 받아 장례를 지내주면 그만이었다. 그때에는 소위 기지촌 여성들이 같은 한국인들에게도 경멸의 대상 밖에 되지 않았지만, 한 세대가 지난 1990년대에는 사회운동의 발전에 힘입어 그들이 외세의 지배에 의한 피해자라는 인식이 확산된 것이다. 미군들은 헤어져야 할 남이지만 그들은 우리가 껴안아야 할 핏줄이라는 새로운 민족주의 운동도 일어났는데, 1990년대 여대생들이 방학 중에 동두천과 의정부를 중심으로 벌였던 '기지촌 봉사활동'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7) 2000년대 시민운동의 발달과 대중적 반미운동


1990년대부터 각종 시민운동이 본격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반미운동 역시 더 대규모로 조직적이고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한편으로는 경제성장 및 국제사회에서의 지위 격상에 따라 미국의 간섭이나 미국에 대한 종속으로부터 벗어나야겠다는 민족 자주운동의 성격을 띠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적 냉전 종식에 따른 한반도 통일 운동과 결합되어 남북 사이의 민족 공조를 바탕으로 하는 외세 배격 운동으로 전개되어온 것이다.


몇 가지 사례만 든다. 2002년 2월 미국에서 열린 동계올림픽에서 남한의 빙상 선수가 미국 선수에게 금메달을 빼앗기는 사건이 일어나자 인터넷에 반미 사이트가 100여 개나 생기면서 맥도널드를 비롯한 미국계 음식점의 매출이 크게 줄어드는 등 "반미 감정이 해방 이후 최고조에 달했다"는 말이 나왔다. 2002년 1월 부시 미국대통령이 국정연설을 통해 북한이 '악의 축'을 이루는 한 국가라며, 미국의 안전을 위해 필요하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다고 공언하자, 남한의 진보적 시민단체들은 이를 비판하는 선언문이나 성명서를 내고 미국대사관 앞에서 항의시위를 벌였다.


2002년 6월 경기도 양주에서 여중생 2명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죽었는데 그 운전병들이 무죄 판결을 받자 죽은 여중생들을 추모하며 한미행정협정 (SOFA) 개정을 요구하는 촛불시위가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하고 미국의 요구로 한국 정부가 이라크 파병을 결정하자 전쟁 및 파병 반대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2008년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협상 반대를 위한 촛불시위가 3개월 이상 지속되었다. 고등학생들과 가정주부들까지 대거 참여하고 가족 단위의 참가도 많은 가운데, 연예인들이 주도하는 '문화제' 성격의 시위도 벌어졌다. 1990년대까지는 주로 '운동권'에서 전개되던 반미운동이 2000년대 들어서는 각계각층으로 대중화한 것이다.


5. 반미운동의 전망


미국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온 세계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러한 미국과 남한은 국력의 차이가 워낙 크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평등한 관계를 맺기 어렵다. 따라서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간섭이나 압력이 존재하는 한 한국인들의 반미 자주운동은 계속될 것이다.


첫째, 주한미군으로부터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완전히 되찾아오고 남한이 독자적으로 또는 주도적으로 국가안보 전략을 세울 수 있을 때까지는 한미동맹의 심각한 불평등성이 자주의식을 고취시키지 않을까. 또한 주한미군이 완전히 물러날 때까지는 주한미군들의 범죄가 그치기 어려울 것이고 이는 주둔군지위협정의 불평등성에 관한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반미감정을 자극하지 않을까.


둘째, 한반도에서 분단이 지속되는 한 미국은 '분단의 원흉'이나 '통일의 걸림돌'이라는 인식이 지워지기 어려울 것이다. 분단에 따른 반미감정과 통일을 위한 자주의식이 결합되어 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반미 자주운동이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뜻이다.


셋째, 미국의 일방적이고 호전적인 대외정책이 바뀌지 않는 한 반전의식에 따른 반미감정이 수그러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20세기 내내 이 지구상에서 미국처럼 많은 전쟁을 치른 나라는 없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지금까지 거의 80번이나 다른 나라들을 폭격하거나 군사적으로 침략했다. 반세기가 넘도록 해마다 한 두 차례 폭격이나 침략을 한 셈인데,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략을 앞두고 남한의 평화운동 단체들이 한국군의 이라크파병 반대와는 별도로 세계 각지의 평화운동 세력과 더불어 조직적으로 반전반미 시위를 벌였던 것처럼, 미국의 그칠 줄 모르는 폭격이나 침략 행위는 미국에 대한 한국인들의 부정적 인식을 높일 것이다.


아무튼 남한 반미운동의 가장 큰 배경은 불평등한 한미 관계에 있고 핵심 목표는 미국의 간섭을 배제한 자주적 민족통일에 있다. 따라서 주한미군의 완전한 철수가 당분간 이루어지기 어렵다면, 먼저 주둔군지위협정의 개정과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 환수 등의 조치라도 서두르는 게 바람직하다.


국익을 위해서는 친미도 필요하고 반미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에 앞서 미국을 바로 알아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미국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게 더욱 중요하다. 지미(知美)를 바탕으로 상황에 따라 친미도 하고 반미도 하면서 궁극적으로 용미(用美)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제 정부는 시민사회의 반미 자주운동을 종북으로 매도하거나 이적용공으로 처벌하기보다 오히려 이를 이용해 더욱 건전하고 바람직한 한미 관계를 추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법적증언⑪] 연방제 통일에 대한 오해와 진실

[법적증언⑪] 연방제 통일에 대한 오해와 진실

 [이재봉의 법정증언] 연방제보다 바람직하면서도 실현 가능성 높은 통일 방안 있나

법정에서 증언하면서 북한의 연방제통일 방안에 관해 얘기할 때는 살짝 긴장하면서도 가장 큰 쾌감과 보람을 느낀다. 남한에서 연방제통일을 지지하면 '종북좌파 1등급'으로 매도당하며 '이적 행위'로 처벌받기 쉬운데, 판검사들 앞에서 당당하게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선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가장 많이 걸려드는 '3대 이적행위'는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고,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며, 연방제통일을 지지하는 것 같다. 남한의 법에 관해 비판적 목소리를 내면 '반정부', 미국의 군대에 관해 부정적으로 외치면 '반미', 북한의 통일 방안에 관해 긍정적으로 얘기하면 '친북' 등, 모두 '적을 이롭게 하는 행위'로 처벌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과거 '한총련'이나 '범민련' 등의 통일운동단체들이 '불법 단체'나 '이적 단체'로 판정받은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가 연방제통일을 지지한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연방제통일에 관해 언제 어디서든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선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통일을 이루어야 할 텐데, 이보다 더 바람직하면서도 실현 가능성이 높은 통일 방안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정책이든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상대를 고려해야 하는 통일 방안은 적어도 두 가지 요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하나는 바람직해야 한다는 점이요, 다른 하나는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바람직하지만 이루기 어려운 방안은 환상이나 공상에 머무르기 쉽고, 실현하기 쉽지만 바람직하지 않은 방안은 최악으로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체제 경쟁은 끝났다"며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 통일해야 한다는 남한과 "우리식 사회주의는 필승 불패"라며 사회주의를 끝까지 지키겠다는 북한이 협상을 통해 체제를 하나로 합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65년 이상 서로 다른 사상과 체제를 지켜온 남한과 북한 가운데 어느 쪽이 자신의 사상과 체제를 스스로 양보하겠는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의 통일은 남쪽엔 바람직할지라도 북쪽은 흡수통일이라며 거세게 반발하고, 사회주의로의 통일은 북쪽엔 바람직할지라도 남쪽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체제 통일이 평화적으로 실현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말이다. 북한의 붕괴가 가능성도 낮고 바람직하지도 않은 터에, 실현 가능성만 놓고 본다면 전쟁에 의한 통일보다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없다. 그러나 전쟁은 어느 쪽이 이기든 양쪽 다 불바다와 잿더미로 만들 것이 뻔하기 때문에, 반드시 피해야 할 최악의 선택이다. 이런 상황에서 두 체제가 공존하는 연방제 말고 무슨 방법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 

이렇게 연방제통일을 지지하고 선전하면 판검사들도 대체로 수긍하는 듯한데, 가끔 깐깐하게 반대신문에 나서는 검사를 만나기도 한다.  

"서로 다른 두 체제가 공존하는 것을 통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물론 통일이란 '하나로 합치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두 체제가 공존하는 것은 완전한 통일이 아니죠. 통일할 바에야 모든 것을 하나로 합치는 게 가장 바람직하지만, 그게 평화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같이 사는 게 분단된 채 으르렁거리는 것보다 백번 낫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그토록 중시하는 민주주의도 목표를 향한 절차이듯이, 통일도 종점을 향한 과정으로 생각한다면 연방제도 분명히 통일로 볼 수 있는 것이죠. 특히 나라 밖으로는 국경이 낮아지는 세계화가 진행되고 안으로는 중앙에 집중된 권력이 분산되는 지방화가 추진되는 21세기에, 한울타리 안에 하나의 체제와 한 사람의 대통령만 고집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럼 서로 다른 두 체제가 공존하는 통일이 이루어진 사례가 있습니까?"  

"우선 지구상에 있는 약 200개 국가 가운데 분단되었다가 통일된 국가가 얼마나 되겠어요? 기껏 서너 개 나라에요. 그중에서 연방제통일 사례를 꼽으라면 없지만, 중국의 '일국양제 (一國兩制)'가 연방제와 같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97년 영국으로부터 홍콩을 그리고 1999년 포르투갈로부터 마카오를 되찾아, 본토에서는 사회주의 체제를 지키면서 홍콩과 마카오에서는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도록 하고 있잖습니까. 그리고 대만에도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도록 보장하겠다면서 통일하자고 제안하고 있고요."

어떤 때는 엄숙한 법정의 준엄한 판검사들 앞에서 너무 건방을 피우며 객기를 부리는 경우도 있다. "저는 이러한 이유로 연방제통일을 분명히 지지합니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받아야 한다면 기꺼이 받겠습니다. 그러나 연방제통일보다 더 바람직하고 실현 가능성이 높은 통일 방안을 내놓고 감옥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평화적 통일을 원한다면 연방제통일에 대해 공개적으로 토론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북한이 먼저 제안했다고 해서 금기하며 반대만 하라는 것은 억지요 횡포다. 좋은 점은 받아들이고 나쁜 점은 비판하면서 더 이상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통일 방안을 모색하고 마련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까지 몇 차례 조금씩 수정하면서 1960년부터 50년 이상 지속적으로 제안하고 주장해온 연방제통일 방안을 소개한다.

1. 연방제의 의미와 배경 

연방제는 연방정부 또는 중앙정부와 연방을 구성하는 지방정부들 사이의 권력이 분립된 정부 형태를 가리킨다. 가장 큰 특징은 각 정부가 서로에 대해 실질적이고 독립적인 권력을 가지며 인민에게 직접 권력을 행사한다는 점이다. 저마다 배경과 성격이 조금씩 다르지만 지구상엔 연방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가 미국, 러시아, 독일, 캐나다, 스위스, 오스트리아, 호주, 멕시코, 아르헨티나, 말레이시아 등 20여 개에 이른다. 

물론 이들 국가들이 연방제를 취하고 있는 배경과 북한이 연방제를 제안해온 배경은 다르다. 예를 들어, 미국은 1776년 독립을 전후해 동부 13개 주가 각각 독립성을 지니고 우호와 친선 관계를 유지하는 국가연합의 형태를 취하다 영국과의 전쟁을 거치면서 독립된 주들이 하나의 국가로 뭉칠 필요성을 느끼고 1789년부터 연방 형태로 발전하였다. 이에 반해 북한은 남한과 사상 및 체제가 달라 하나의 국가로 합치기 어렵기 때문에, 남북이 안으로는 각각 체제가 다른 지방정부를 유지하면서 밖으로는 군사권과 외교권을 합쳐 하나의 연방국가로 만들자고 제안해왔다. 미국은 똑같은 이념과 체제를 지닌 주들이 대내적으로 각각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대외적으로 하나의 강력한 국가 체제를 이루기 위해 연방제를 택하였다면, 북한은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를 가진 남북 정부가 일시에 완전한 통일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연방제를 취하자는 것이다. 

북한이 제안해온 연방제통일 방안의 배경은 중국이 대만에 제안해온 일국양제통일 방안의 배경과 비슷하다. '일국양제'는 '일개국가 양종제도 (一個國家 兩種制度)'를 줄인 말로 하나의 국가 안에 서로 다른 두 제도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사회주의 중국은 1997년 영국으로부터 홍콩을 그리고 1999년 포르투갈로부터 마카오를 환수해, 이들 지역에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보장해주고 있다. 나아가 대만에 대해서도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도록 자치권을 부여하겠다며 통일을 이루자고 제안해왔다. 여기서 북한의 연방제와 중국의 일국양제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를 당장 하나로 합치기 어렵기 때문에 당분간 두 체제를 공존시키자는 배경과 내용이 같다. 그러나 북한의 연방제에서는 남쪽 자본주의 지방정부와 북쪽 사회주의 지방정부가 동등한 지위로 수평적 관계를 이루지만, 중국의 일국양제에서는 본토의 중앙정부에 대만, 홍콩, 마카오 등의 지방정부가 종속되는 수직적 관계를 형성하는 게 다르다. 

2. 연방제통일 방안의 변화와 내용 

(1) 1960년의 '남북련방제' 창설 제안 

김일성은 1960년 8월 15일 해방 15주년 경축대회에서 처음으로 연방제통일 방안을 제안했는데, 일종의 조건부였다. "자유로운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는 방법으로" 통일을 추구하되, 만약 남쪽이 "공산주의화될까 두려워서" 자유로운 남북 총선거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과도적인 대책으로" 연방제를 실시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연방제를 통해 "남북의 접촉과 협상을 보장함으로써" 서로 간에 협조하면서 불신이 사라질 때 자유로운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여 "조국의 완전한 평화적 통일을" 이루자고 했다. 그의 제안을 그대로 아래에 옮긴다.

"우리 조국의 평화적 통일은 반드시 자주적으로 어떠한 외국의 간섭도 없이 민주주의적 기초 우에서 자유로운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는 방법으로 해결되여야 합니다.(중략) 남조선의 위정자들은 또한 자유로운 남북총선거는 ‘용공’으로 되며 ‘적화’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합니다.(중략) 어떠한 외국의 간섭도 없이 민주주의적 기초 우에서 자유로운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는 것이 평화적 조국통일의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길이라는 것은 론박할 여지가 없습니다.(중략) 만일 그래도 남조선 당국이 남조선이 공산주의화될까 두려워서 아직도 자유로운 남북 총선거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면 먼저 민족적으로 긴급하게 나서는 문제부터 해결하기 위하여 과도적인 대책이라도 세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대책으로서 남북조선의 련방제를 실시할 것을 제의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련방제는 당분간 남북조선의 현재 정치제도를 그대로 두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의 독자적인 활동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두 정부의 대표들로 구성되는 최고 민족위원회를 조직하여 주로 남북조선의 경제문화 발전을 통일적으로 조절하는 방법으로 실시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련방제의 실시는 남북의 접촉과 협상을 보장함으로써 호상 이해와 협조를 가능하게 할 것이며 호상간의 불신임도 없애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였을 때에 자유로운 남북 총선거를 실시한다면 조국의 완전한 평화적 통일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고 우리는 인정합니다." 

지금은 물론 1960년대에도 북한이 남한보다 인구가 훨씬 적었는데, 김일성이 이렇게 당당하게 '자유로운 남북 총선거'를 거듭해서 강조했던 배경이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첫째, 그때는 북한이 거의 모든 면에서 남한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특히 김일성이 위와 같은 제안을 했던 1960년 8월은 남한에서 4월 혁명이 일어난 지 4개월이 지난 때로, 정치가 불안한 데다 경제적으로도 북한보다 훨씬 뒤떨어져 있었다. 그러기에 김일성은 "오늘 남조선의 민족경제를 바로 잡으며 도탄에 빠진 인민들의 생활을 개선하는 것은 가장 긴급한 문제"라며 연방제를 통해 "남북조선의 경제 문화 교류와 호상협조를 보장함으로써 남조선의 경제적 파국을 수습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조선의 수백만 실업자들과 빌어먹는 어린이들의 비참한 처지를 우려하며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 남조선 동포들의 내일의 운명을 조금이라도 근심한다면 그 누구도 남북 사이의 경제교류와 경제적 협조를 반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정치문제를 젖혀놓고라도 먼저 남조선 동포들을 굶주림과 가난에서 구원하여야 할 것입니다. 남북 사이의 경제교류와 함께 문화교류를 널리 실시하며 인민들이 자유롭게 오고갈 수 있게 되여야 합니다."

1990년대부터는 거의 모든 면에서 앞서있고 특히 경제적으로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부유한 남한이 북한에 위와 비슷한 말을 하게 되었지만, 1960년대에는 북한이 남한에 위와 같이 적극적이고 공세적으로 교류를 주장할 만큼 체제에 대한 우월감과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김일성은 '자유로운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면 남한 사람들도 정치적으로 더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더 앞선 북한 체제를 선호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둘째, 지금까지 남한에서 흔히 평가해온 대로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을 위해 일종의 기만전술 또는 음흉한 술책으로 '자유로운 남북 총선거'를 제안했을 수도 있다. '남북련방제'의 전제조건 가운데 하나는 남쪽이든 북쪽이든 한반도 안의 외국 군대는 모두 철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북쪽에서는 해방 직후 들어왔던 소련군이 1948년까지 철수했고 한국전쟁 중에 들어왔던 중국군은 1958년까지 철수했지만, 남쪽에서는 미국군이 지금까지 주둔하고 있다. 그래서 김일성은 "미국군대를 내쫓고 나라를 평화적으로 통일"하자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남북이 서로 병력을 크게 감축할 것을 제안했다.  

"남북 사이의 관계를 개선하며 특히 남조선의 경제생활을 정상화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군대를 줄이는 것입니다. 지금 남조선에서 방대한 군대의 유지는 인민들에게 가장 큰 부담으로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군을 남조선에서 물러가게 하고 남북조선의 군대를 각각 10만 또는 그 아래로 줄일 것을 계속 주장합니다.(중략)우리나라에서 20만 군대만 가지면 민족보위 임무는 얼마든지 담당할 수 있습니다." 

앞의 인용문에서 김일성은 남북의 병력을 각각 10만 이하로 감축하자고 '계속' 주장한다고 했는데, 실제로 북한은 1954년부터 이러한 내용을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1953년 7월 한국전쟁 휴전협정에 따라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1954년 4~6월 개최된 제네바회의에서 북한 대표가 "남북 양쪽의 군대 수효를 축소시키되 각측 군대의 수효가 10만 명을 넘지 않게 할 것"을 제안했던 것이다. 그 무렵엔 북한이 남한보다 정치 경제 분야에서 앞섰을 뿐만 아니라 군사력에서도 강했기 때문에, 남한에서 미군이 철수하고 남북 양쪽이 병력을 감축하면 우세한 군사력으로 남한을 공산화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2) 1970년대의 '고려련방공화국' 통일 방안 

1971년 8월 김일성이 남한의 모든 정당 및 사회단체 등과 아무 때나 접촉해 협상할 용의가 있다며 폭넓은 남북대화 방침을 제시함에 따라, 1971년 9월 남북 사이에 최초로 적십자회담이 열렸다. 그리고 1972년 5월 박정희의 지시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나 남북 사이에 분단 이후 처음으로 통일과 관련된 합의를 이루어냈다. 두 달이 지난 7월 4일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되었기 때문에 흔히 '7·4 남북공동성명'으로 불리는 남북 최초의 합의 사항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그리고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해야 한다. 이 공동성명은 자주, 평화통일, 민족 대단결이라는 '조국통일 3대원칙'으로 불리게 되었지만, 남북 당국은 이를 정권 유지 및 강화에 악용함으로써 빛을 보지는 못하게 되었다.

이에 김일성은 1973년 6월 "민족의 분렬을 방지하고 조국을 통일하자"는 연설에서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5대 방침'을 제시하면서 1960년 8월 제안했던 '남북련방제'를 보완한 '고려련방공화국' 통일 방안을 발표했다. 여기서 5대 방침이란 다음과 같다. ① 남북 사이의 군사적 대치상태와 긴장상태 완화. ② 남북 사이의 다양한 합작과 교류 실현. ③ 남북의 각계각층 인민들과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들로 구성되는 대민족회의 소집. ④ 고려 련방공화국의 단일국호에 의한 남북련방제 실시. ⑤ 단일한 국호에 의한 유엔가입. 여기서 가장 중요한 내용인 연방제 실시에 관한 김일성의 말을 그대로 옮긴다.

"오늘 나라의 통일을 앞당기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것은 단일국호에 의한 남북련방제를 실시하는 것입니다.(중략) 우리는 조성된 조건에서 대민족회의를 소집하고 민족적 단결을 이룩한데 기초하여 북과 남에 현존하는 두 제도를 당분간 그대로 두고 남북련방제를 실시하는 것이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방도로 된다고 인정합니다. 남북련방제를 실시하는 경우 련방국가의 국호는 우리나라의 판도 우에 존재하였던 통일국가로서 세계에 널리 알려진 고려라는 이름을 살려 고려련방공화국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위 인용문을 통해 1960년 8월 제안한 '남북련방제' 통일 방안과 1973년 6월 내놓은 '고려련방공화국' 통일 방안의 큰 차이점으로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 1960년엔 "두 정부의 대표들로 구성되는 최고 민족위원회를 조직하여" 연방제를 발전시키자고 했는데, 1973년엔 "대민족회의를 소집하고 민족적 단결을 이룩"하여 연방제를 실시하자고 했다. 당국자들만 참여하는 폐쇄적이고 협소한 기구보다는 "각계각층 인민들과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들"이 두루 참여하는 개방적이고 광범위한 기구를 통해 통일을 추진하자는 것이다.

둘째, 연방국가의 국호를 '고려'라고 정하자는 것이다. 북한은 1973년부터 연방국가 또는 통일국가의 이름을 고려로 부르자고 제안해왔는데 그 배경은 다음과 같다. 고려는 오랫동안 존재해온 "우리나라 최초의 통일국가" 이름으로 세계에 널리 알려진 '코리아'라는 말도 여기에서 나왔기 때문에, 남북 어디에서든 잘 통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 민족의 감정에도 맞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북한이 고려를 "우리나라 최초의 통일국가"라고 한 것은 남북의 역사 인식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남한에서는 대개 신라를 최초의 통일국가로 간주하는 반면, 북한에서는 고려를 최초의 통일국가로 주장한다. 신라가 외세인 당나라를 끌어들여 같은 민족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도 잘못이요, 그 결과 광대한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을 잃게 된 것도 잘못이라는 것이다. 특히 당나라를 끌어들인 것을 두고 "사대주의적 범죄행위"요 "반민족적 엄중한 죄과"로 비난한다. 신라는 당과 함께 타도됐어야 할 침략세력이요, 고구려는 백제와 더불어 그에 맞서 투쟁한 주체세력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만나는 모습. ⓒ연합뉴스
참고로, 삼국통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북한에서 새롭게 생긴 것은 아니다. 독립투사 및 역사학자로서 남한에서도 널리 존경받는 단재 신채호는 삼국통일에 대해 "반도적 통일은 결코 통일이라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이를 주도한 김춘추와 김유신을 두고 "다른 민족을 불러들여 같은 민족을 멸망시킨 것은 원수를 끌어들여 형제를 죽인 것과 다를 게 없는 사람들 (異種을 招하여 同種을 滅함은 寇賊을 引하여 兄弟를 殺함과 無異한 者)"이라고 비난했다.

북한은 이러한 역사관으로 김춘추와 김유신을 "사대주의자"나 "반역자"로 평가하며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고려를 최초의 통일국가라고 주장하며, 앞으로 연방제로 통일하면 통일국가의 이름을 북쪽이 쓰고 있는 조선이나 남쪽이 사용하는 한국이 아니라 제3의 국호인 고려로 정하자는 것이다. 남한은 궁극적으로 흡수통일을 추구해왔기 때문에 새로운 국호를 준비할 필요가 없었지만 생각해볼 만한 대목이다.

(3) 1980년대의 '고려민주련방공화국 창립 방안' 

김일성은 1980년 10월 조선로동당 제6차 당대회에서 고려민주련방공화국 창립 방안을 내놓았다. 1960년의 '남북련방제' 및 1973년의 '고려련방공화국' 통일 방안을 구체적으로 보완하고 체계적으로 다듬은 통일정책의 완성판이라고 할 수 있다. 핵심 내용은 "북과 남에 있는 사상과 제도를 그대로 두고 북과 남이 련합하여 하나의 련방국가를 형성하는 것"이 조국을 자주적이고 평화적으로 통일하는 "가장 현실적이며 합리적인 방도"라는 것이다. 그의 말을 옮긴다. 

"해방후 오늘까지 북과 남에는 오랜 기간 서로 다른 제도가 존재하여 왔으며 거기에서는 서로 다른 사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에서 민족적 단합을 이룩하고 조국통일을 실현하려면 어느 한쪽의 사상과 제도를 절대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북과 남이 제각기 자기의 사상과 제도를 절대화하거나 그것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려 한다면 불가피적으로 대결과 충돌을 가져오게 되며 그렇게 되면 도리어 분렬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중략) 

한 나라 안에서 서로 다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같이 살 수 있으며 하나의 통일국가 안에 서로 다른 사회제도가 함께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상과 제도를 결코 남조선에 강요하지 않을 것이며 오직 민족의 단합과 조국통일을 위하여 모든 것을 복종시킬 것입니다. 우리 당은 북과 남이 서로 상대방에 존재하는 사상과 제도를 그대로 인정하고 용납하는 기초 우에서 북과 남이 동등하게 참가하는 민족통일정부를 내오고 그 밑에서 북과 남이 같은 권한과 의무를 지니고 각각 지역자치를 실시하는 련방공화국을 창립하여 조국을 통일할 것을 주장합니다. 련방 형식의 통일국가에서는 북과 남의 같은 수의 대표들과 적당한 수의 해외동포 대표들로 최고 민족련방회의를 구성하고 거기에서 련방상설위원회를 조직하여 북과 남의 지역정부들을 지도하며 련방국가의 전반적인 사업을 관할하도록 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중략) 고려민주련방공화국은 어떠한 정치군사적 동맹이나 쁠럭에도 가담하지 않은 중립국가로 되여야 합니다." 

위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남북이 상대방의 사상과 제도를 인정하면서 연방국가를 세운다. 둘째, 남북은 같은 권한과 의무를 지니고 각각 지역자치제를 실시한다. 셋째, 남북의 대표들과 해외동포 대표들로 '최고 민족련방회의'를 구성하고, 거기서 조직한 '련방상설위원회'가 연방국가의 통일정부로서 나라와 민족의 전반적인 사업을 관할한다. 넷째, 통일국가의 국호는 '고려민주련방공화국'으로 정한다. 다섯째, '고려민주련방공화국'은 대외적으로 중립국이 된다. 

따라서 이와 같은 1980년의 통일 방안을 1960년 및 1973년의 통일 방안과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이 몇 가지 다른 점을 찾을 수 있다. 첫째, 1980년의 통일 방안은 이전의 통일 방안보다 구체적이고 체계적이다. 둘째, 이전의 연방제가 남북 총선거를 통해 완전한 통일국가를 이루기 위한 과도적 대책이나 일시적 대안이었다면, 1980년의 연방제는 최종 단계 또는 궁극적 목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셋째, 국호와 관련하여 1960년에는 언급하지 않았고, 1973년에는 '고려련방공화국'이라고 했는데, 1980년에는 '고려민주련방공화국'이라고 고쳤다. 넷째, 연방정부의 조직과 관련하여 1960년에는 '최고 민족회의'를, 1973년엔 '대민족회의'를, 1980년에는 '최고 민족련방회의'와 '련방상설위원회'의 설치를 제안하였다. 다섯째, 연방정부를 구성할 대표와 관련하여 1960년에는 당국 대표들로 국한하였지만, 1973년에는 각계각층 인민들과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들도 포함했으며, 1980년에는 해외동포들에게까지 확대하였다. 여섯째, 연방국가의 외교강령 또는 대외정책과 관련하여 1980년의 통일 방안에서는 중립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중립화 통일은 1940년대부터 미국과 남한에서 먼저 논의되었으며, 2005년 2~3월 노무현 대통령이 여러 차례 제기했던 '동북아 균형자 역할'의 대안으로도 고려해볼 수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북한의 제안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한 당국이 연방국가의 성격으로 "어떠한 정치군사적 동맹이나 쁠럭에도 가담하지 않은 중립국가"를 내세우는 데는 "내적 요인과 함께 외적 요인"을 바탕으로 "력사적 경험과 현실적 요구로부터" 그 당위성을 찾고 있는데, 2003년 평양출판사에서 펴낸 <조국통일문제 100문 100답>에 나오는 내용을 아래에 옮긴다. 

"고려민주련방공화국이 견지하여야할 활동원칙은 자주, 민주, 중립, 평화이다.(중략) 고려민주련방공화국은 국가활동에서 중립로선을 견지하여야 한다. 련방공화국이 중립로선을 견지하여야 하는 것은 두 가지 요인에 의하여 규제된다. 그 하나는 련방공화국이 서로 다른 사상과 제도를 가진 두 지역 사이의 련방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사정과 관련된다. 련방공화국은 서로 다른 사상과 제도를 가진 북과 남 사이의 련방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어느 특정한 나라에 편중하는 정책을 실시하거나 어떤 정치군사 동맹이나 쁠럭에 가담하면 불가피하게 통일국가 내부에서 모순이 생기고 분쟁이 발생할 수 있으며 결국 련방국가 자체의 존재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이처럼 련방공화국이 서로 다른 사상과 제도 우에 형성되는 것만큼 대외적으로 중립로선을 견지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고려민주련방공화국이 중립국가로 되여야하는 것은 이런 내적 요인과 함께 외적 요인에도 기인된다. 국제관계에서는 나라들 사이의 리해관계가 복잡하게 엉켜있고 세력권 쟁탈을 위한 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과 간섭이 끊임없이 강화되고 있다. 더우기 우리 민족은 력사적으로 외세의 침략을 받아왔다. 이런 형편에서 통일국가가 자기의 존립을 보존하고 민족적 번영을 이룩하기 위하여서는 대외적으로 중립로선을 견지하여야 하며 친선과 호의로 대하는 모든 나라들과 친선협조 관계를 맺어야 한다.(중략) 

고려민주련방공화국은 중립국가이다. 세계에 련방국가들은 많지만 대외적으로 중립정책을 실시하는 나라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나라들도 있다. 우리의 경우에는 련방국가가 대외적으로 중립로선을 견지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서로 다른 두 제도에 기초하여 창립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련방국가가 존립하는 한 항구적으로 중립국가로 되어야 한다." 

이렇듯 '고려민주련방공화국 창립 방안'은 상당히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다듬어진 통일 방안으로 그 내용도 바람직하고 현실적인 측면이 많다. 그러나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문제다. 남한이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크게 두 가지로, 하나는 남한에서 국가보안법을 철폐하여 민주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한미군을 철수하여 한반도에서 긴장을 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일성이 이를 발표했던 1980년은 남한에서 광주민주항쟁이 무참하게 진압되고 폭압적인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이 들어서면서 민주화가 절실한 때였다. 그러나 북한 역시 1인지배 또는 수령독재 체제를 이끌면서 남한의 민주화만 요구한 것은 분명히 설득력을 지닐 수 없었다. 또한 남한에서는 2014년 현재까지도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논의는 이른바 '금기의 성역'으로 남아있는데 그 무렵에는 더욱 심했다. 주한미군 철수는 북한에 의한 적화통일로 이어질 것이라는 의혹과 불안이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이다. 남한의 보수계층이 북한의 통일 방안을 '음흉한 적화통일 전략'이라고 비난하는 가장 큰 배경이다.

(4) 1990년대의 '낮은 단계의 련방제' 통일 방안 

김일성은 1989년 3월 평양을 방문한 남한의 문익환 목사와 만나 통일 방안에 관해 얘기하면서 연방제에 의한 통일은 "단번에 실현시킬 수도 있고 점차적인 방법으로 실현시킬 수도 있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단번에' 실현되는 연방제가 '높은 단계'라면 '점차적인 방법'으로 실현되는 연방제의 초기 단계가 '낮은 단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이 이를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은 1991년 1월 신년사를 통해서다. 남북에 서로 다른 두 제도가 존재하는 실정을 감안하여 "누가 누구를 먹거나 누구에게 먹히우지 않는 원칙에서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두 개 제도, 두 개 정부에 기초한 련방제방식"으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 "고려민주련방공화국 창립 방안에 대한 민족적 합의를 보다 쉽게 이루기 위하여 잠정적으로는 련방공화국의 지역자치정부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며 장차로는 중앙정부의 기능을 더욱 더 높여 나가는 방향에서 련방제통일을 점차적으로 완성하여야 한다." 

그는 나아가 1993년 4월 '전민족 대단결 10대강령'을 발표하면서 "북과 남은 현존하는 두 제도, 두 정부를 그대로 두고" 모든 민족성원들을 대표할 수 있는 통일국가를 창립해야 한다고 했다. 조금 더 자세히 소개하자면, "북과 남이 서로 상대방의 제도와 사상을 그대로 인정하고" 공존공영을 도모하며 "우선 북과 남이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나가면서" 평화통일을 지향해 나가자는 것이다. 

따라서 '낮은 단계의 련방제'는 남북이 각각 자치정부를 이끌면서 당장 군사권과 외교권을 합쳐 중앙정부 또는 연방정부를 이루기 어렵기 때문에, 정치와 경제 그리고 군사와 외교 분야에서 현재의 기능과 권한을 그대로 지니면서 그 위에 민족통일기구를 설치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연방제를 '단번에' 실현하기 어렵다면 '점차적으로' 실현하자는 취지다.

위와 같은 1990년대의 통일 방안에는 남한의 흡수통일에 대한 경계나 두려움이 배어있다.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된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붕괴, 특히 동독의 붕괴에 따른 서독의 흡수통일 및 소련의 해체 등을 지켜보면서 북한 체제의 유지에 대한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래서 김일성은 1991년 1월 신년사에서 "누가 누구를 먹거나 누구에게 먹히우지 않는 원칙에서"라는 말을 하지 않았겠는가. 나아가 1993년 4월의 '10대강령' 5번째 항목에서는 "서로 상대방에 자기의 제도를 강요하려 하지 말아야 하며 상대방을 흡수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주장했다. 이는 북한이 남한을 흡수하지 않겠다며 남한을 안심시키는 게 아니라 남한에게 북한에 대한 흡수통일을 추구하지 마라는 경계심을 드러낸 것이다. 1980년의 '고려민주련방공화국 창립 방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사상과 제도를 결코 남조선에 강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것과 비교해보기 바란다.  

또한 '10대강령'의 7번째 항목에서 "통일되기 전에는 물론 통일된 후에도 국가적 소유, 협동적 소유, 사적 소유를 인정하고 개인 또는 단체의 자본과 재산, 외국자본과의 공동 리권을 보호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역시 남쪽 자본주의의 영향으로부터 북녘 사회주의 체제를 지키겠다는 불안감 섞인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1960~80년대의 통일 방안이 궁극적으로는 남한을 흡수하려는 '공세적 연방제'였다면, 1990년대부터의 통일 방안은 남한에 흡수당하지 않기 위한 '수세적 연방제'라고 해석하는 배경이다. 

참고로, 1993년의 '전민족 대단결 10대강령'은 남한에서 '7·4 남북공동성명'으로 불리는 1972년의 '조국통일 3대원칙' 및 1980년의 '고려민주련방공화국 창립 방안'과 함께 북한에서 '조국통일 3대헌장'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북한은 이를 "조국통일의 근본원칙과 방도들을 전일적으로 체계화하고 집대성한 조국통일의 3대헌장"으로 부르며, 2001년 평양의 관문으로 불리는 락랑구역 통일거리 입구에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이라고 이름 지은 거대한 조형물을 세웠다. 남한 당국은 공식적으로 연방제통일을 거부하기 때문에 북한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들르지 못하게 하는 곳이다. 

3. 남한의 연합제안과 북한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 : 공통점과 차이점

남한의 통일정책은 1994년 김영삼 정부 때 만들어진 '민족공동체통일 방안'이다. 이는 자주, 평화, 민주의 3대 원칙을 바탕으로 화해협력, 남북연합, 완전통일이라는 3단계를 거쳐 통일을 실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점진적으로 통일을 추구한다는 것은 실현 가능성과 관련해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그러나 마지막 단계인 통일국가의 형태를 "자유, 인권, 행복이 보장되는 민주국가"로 규정하여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북한을 흡수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냄으로써 북한의 비난과 반발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김영삼은 1994년 8월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남북 사이에 체제경쟁이 끝났다고 선언하면서, "우리의 자유민주주의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수호될 것입니다..... 통일을 추진하는 우리의 기본철학 역시 자유와 민주를 핵심으로 하고 있습니다"고 주장함으로써, 반드시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못 박았다. 궁극적으로 남한이 북한을 흡수통일하겠다는 의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한 것이다. 더구나 통일이 예기치 않은 순간에 갑자기 닥쳐올 수도 있다는 발언은 북한 체제의 조기 붕괴를 바라며 흡수통일을 강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북한은 1994년 11월 <로동신문>을 통해,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의 통일이 "북과 남의 대결과 충돌, 동족상쟁"을 유발시킬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은 "남조선에 세워진 식민지 파쑈체제를 우리 공화국에까지 확대연장해 보겠다는 것이며 결국 전쟁으로 '승공통일'의 꿈을 실현해 보겠다는 것"이라며, 오히려 "'문민'독재자는 상종할 대상이 아니라 타도 대상"이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다 2000년 6월 김대중과 김정일이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갖고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고 합의했다. 1994년 김영삼 정부가 발표한 '민족공동체통일 방안'의 2단계인 '남북연합'과 1989년~1991년 김일성이 주장한 낮은 단계의 연방제 사이에 있는 공통점을 바탕으로 통일을 추구하자는 것이었다.

연합제는 남북이 대외적으로 각각 주권을 유지하는 독립국으로 서로 다른 체제와 정부를 유지하며 통일 지향적인 협력관계를 발전시키는 국가연합의 형태를 뜻한다. 그리고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남북이 서로 다른 정부와 제도를 유지하면서 각각 정치, 군사, 외교권을 비롯한 현재의 기능과 권한을 지니되 그 위에 민족통일기구를 설치하여 하나의 연방국가를 이루는 형태다. 

두 통일 방안의 공통점은 남북이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를 지향하고 유지해왔기 때문에 급격하게 통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가능성도 높지 않다고 생각하여 잠정적으로 각각의 이념과 체제 그리고 제도와 정부를 유지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두 방안 모두 통일의 최종 형태가 아니라 과도기적 형태라는 점이다. 즉, 통일의 모습이 아니라 통합을 준비해 나가는 과정이나 방법을 가리키는 것이다. 둘째, 두 방안 모두 2체제 2정부를 유지하면서 두 정부 사이에 협력체제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남북 정부가 정치, 군사, 외교권을 각각 갖고 협력기구를 운영해 나간다는 것이다. 셋째, 이러한 중간 단계에서 정치, 군사, 경제, 사회 등 각 분야별 대화와 교류협력을 통해 통일의 기반을 넓혀나간다는 것이다. 

두 통일 방안의 가장 큰 차이점은 국가연합이 대외적으로 두 개의 국가인데 반하여,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대외적으로 하나의 국가라는 점이다. 즉, 연합제는 연립주택처럼 2개의 독립국가가 나란히 붙어서 협력하는 형태인 '2국가 2정부 2체제'라고 할 수 있고,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한 지붕 두 가족처럼 밖으로는 1개의 독립국가를 이루면서 안으로는 2개의 지역정부가 협력하는 형태인 '1국가 2정부 2체제'라고 말할 수 있다.

4. 연방제통일 방안에 대한 평가 

남한에서는 북한이 제안해온 연방제에 관해 오해와 불신 그리고 거부감이 매우 크다. 6·25전쟁을 비롯한 북한의 침략이나 여러 가지 도발 때문일 수도 있고, 북한에 대한 왜곡과 편견 탓일 수도 있으며, 북한을 인정하지 않거나 평화통일을 바라지 않는 극우 수구 세력의 반발 때문일 수도 있다. 

앞에서 얘기했듯, 북한이 1960~80년대에 제안한 통일 방안이 궁극적으로는 남한을 흡수하려는 '공세적 연방제'였다면, 1990년대부터 제안해온 통일 방안은 남쪽에 흡수당하지 않기 위한 '수세적 연방제'다. 과거엔 북한의 국력이 남한보다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연방제를 거쳐 궁극적으로 남한을 적화통일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겠지만, 1990년대부터는 북한이 모든 면에서 남한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뒤처져 있기 때문에 연방제를 통해 남한에 흡수되지 않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처지가 변하고 연방제의 내용도 바뀌었는데, 낮은 단계의 연방제마저 적화통일 전략의 일환이라며, 기어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만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분단 상태를 고수하자는 억지와 다름없다. 북한이 남한보다 돈이 많은가 군사력이 강한가 아니면 사람이 많은가. 무슨 수로 적화통일을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요약하자면, 연방제는 남북이 당분간 서로의 사상과 체제가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여, 남한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유지하고 북한은 인민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지키며, 한 지붕 아래 두 집 살림을 차리는 식으로나마 통일을 추구해보자는 것이다. 1994년 김영삼 정부가 발표한 '민족공동체통일 방안'의 2단계인 '남북연합'은 역시 같은 취지로 남북이 각각 자신의 사상과 체제뿐만 아니라 독립성과 자주성까지 유지하며 유럽연합 (EU)처럼 가까이 지내며 긴밀하게 협력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통일 방안의 공통점을 바탕으로 통일을 추구하자는 게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의 합의 사항이다.

그러나 이렇게 건설적이고 바람직한 정상 간의 합의마저도 남한의 이명박-박근혜 극우 정부는 지키지 못하겠다고 한다. 평화 통일을 거부한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남한 당국이 통일과 관련한 정부 부처나 기구 또는 무슨 회의 등을 아무리 많이 조직하고 강화한들, 6·15 남북정상회담의 합의사항 또는 오인동 재미동포 의사가 이름 붙인 대로 '남북연합방'을 따르지 않는다면 협상을 통한 평화 통일이 가능하겠는가. 

[법적증언⑩] 북한 붕괴, 가능성도 낮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법적증언⑩] 북한 붕괴, 가능성도 낮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재봉의 법정증언] 김일성 사후 10년 만에 붕괴한다던 북한, 지금은?

1994년 8월 유학을 마치고 9월부터 경상도의 한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일하게 되었다. 처음 맡은 과목은 <북한 사회의 이해>라는 교양강좌. 담당 강사가 있었는데 수강 신청자가 넘쳐 학급을 둘로 나누는 바람에 한 강좌가 나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수강 신청이 폭주한 배경은 7월의 김일성 사망이었다. 북한을 50년간 통치해온 그가 죽었으니 머지않아 북한이 무너질 텐데 통일에 대비해 북한을 공부하자는 것.


미국 유학 10년 동안 미국정치와 국제관계 등의 분야를 주로 공부하면서 한미관계에 대해 학위논문을 쓴 터라, 북한 관련 수업을 맡기 어렵다고 주임교수에게 말했더니 그의 반응이 재미있었다. "한국인이 정치학을 전공하면 북한 연구는 기본이지요." 한국인 정치학자의 기본을 갖추면서 먹고 살기 위해 북한 강의를 담당하게 되었다.


수업 첫날 설렘과 긴장을 달래며 200여 명의 학생들 앞에 섰다. 먼저 담당 강사가 바뀐 점에 대해 양해를 구했다. "대타(代打)가 홈런 친다"는 한 학생의 격려에 "홈런은 못 치더라도 안타는 날리겠다"고 대꾸했다. 그리고 북한에 관한 무식함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강의 준비에 최선을 다하겠노라 다짐했다. 도서관과 서점을 뒤져 북한 관련 책을 싹쓸이하다시피 구해 밤을 밝히며 읽어나갔다. 다음 학기엔 내 이름으로 개설된 강좌에도 수백 명이 몰렸다. 내 강의가 좋아서가 아니라 김일성 사망과 북한 붕괴 가능성이 북한 공부에 대한 특수(特需)를 불러온 것이다.


1996년 3월부터 원광대학교에 교수로 자리 잡으면서도 <북한 사회의 이해>라는 교양강좌를 맡게 되었다. 고참 교수로부터 물려받은 과목인데 여기서도 수강생이 넘쳐 다음 학기엔 강좌 수도 늘리고 야간강좌까지 개설했다. 1995~96년부터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북한 식량난 때문에 곧 폭동이 일어나 체제가 붕괴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북한에 대한 관심이 커진 덕분이었다.


그 무렵 북한 전문가들은 여기저기서 북한이 곧 붕괴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96년의 한 정치학회에서는 "북한이 지금 붕괴되고 있는 중"이라며 "빠르면 3년 늦어도 10년 안에 남쪽에 의한 흡수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에 찬 발표가 나왔다. 통일부 산하 민족통일연구원은 1996년 펴낸 <북한 사회주의체제의 위기 수준 평가 및 내구력 전망>이라는 연구보고서에서, 2001~2008년 사이에 북한 체제가 무너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북한이 국제적으로 도덕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국제적인 경제협력 관계가 미약하며, 식량과 유류 등 안보자원을 원활하게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등을 붕괴 요인으로 들면서.


1997년 2월 황장엽 조선로동당 비서가 북한을 탈출하자 '북한 붕괴론'은 절정을 이루었다. 그해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대부분의 신문과 방송에서는 당선자가 첫 통일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전망을 쏟아냈고, 후보자 토론회에서는 "북한이 붕괴되어 통일되면 북한 지도자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는 질문이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난 북한 붕괴가 가능성도 낮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듯, 북한에 대해 겨우 2~3년 공부한 초보자가 전문가들에게 대드는 꼴이었다. 북한 관련 학회엔 중앙정보부 후신이요 국가정보원 전신인 안전기획부 요원들이 가끔 참석해 나더러 학생운동권 출신이냐고 물으며 왜 그렇게 친북적인 내용의 논문을 발표하는지 시비를 걸기도 했다.


어느 날 수업 시간엔 한 여학생이 걱정스레 물었다. "교수님, 학계나 언론계 모두 북한이 곧 붕괴될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교수님만 아니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만약 붕괴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그럼 교수 그만둬야죠." 그렇게 객기를 부린지 20년 가까이 흘렀는데 아직 가난한 친북학자의 밥줄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그 대답 때문에 정년퇴임 전에 옷 벗을 일이 생길 것 같지도 않다.


1998년 10월 북한을 방문해 일주일간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험한 꼴을 많이 보았다. "북한 경제가 바닥을 쳤다"는 말이 나돌 만큼 몹시 어려운 때였다. 추석날조차 평양 시내를 거니는 사람들의 행색이 너무 초라했다. 황해북도 사리원의 한 육아원에선 방마다 그야말로 산송장처럼 피골이 상접한 아이들이 누워있었다. 평양을 떠나며 심각하게 고민해보았다. 북한 붕괴는 가능성도 낮고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주장해왔는데, 이렇게 기본적으로 먹고살기조차 힘들다면 차라리 무너지는 게 좋지 않을까. 남쪽 사람들 눈칫밥이라도 얻어먹으며 살아남는 게 굶어 죽는 것보다 낫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남쪽에 돌아온 뒤에도 북한 붕괴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을 빼거나 고쳐야 할지 한참 고민했다. 해외의 친북 교수들에게까지 자문을 구하면서.


마침 조선족 유학생이던 작가 장영철이 1997년 펴낸 <당신들이 그렇게 잘났어요>라는 책을 읽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붕괴를 통한 흡수통일은 바람직하지 않으리라고. 연변에서 온 동포 직업연수생들이 남한에서 얼마나 차별받고 멸시당했으면 집으로 돌아가며 "만약 전쟁이 다시 한 번 난다면 총을 들고 선참으로 한국에 와서 한국놈들을 쏴 죽이겠다"는 악담을 퍼부었겠는가. 일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겠다며 고국 땅을 밟았던 사람들이 그 정도라면, 떼거리로 내려와 빌어먹을 북쪽 사람들이 남쪽의 잘난 사람들에게 어떠한 대접을 받을 것인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00년대 들어와서도 북한 붕괴론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게다가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북한 붕괴를 기대하거나 겨냥하면서 대북정책을 세우는 것 같다. 대통령이 "통일은 도둑같이 올 것이다"며 통일 기금을 조성하자고 하거나, 국민이 통일되면 사회혼란이 일어나고 천문학적인 경비가 들어가리라고 생각하는 것 모두 북한 붕괴에 따른 흡수통일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북한 붕괴가 가능성도 낮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주장을 1990년대 중반부터 지속적으로 주장해왔는지 아래에 밝힌다.


1. 붕괴의 개념과 종류


북한의 붕괴에 관해 제대로 논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붕괴’라는 말의 개념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다. 붕괴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정권 또는 정부가 무너지는 것. 둘째, 체제 또는 정치경제구조가 무너지는 것. 셋째, 국가 또는 국민이 무너지는 것. 이를 북한에 적용하면, 김정은 정권의 붕괴, 사회주의체제의 붕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붕괴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정권 또는 정부의 붕괴는 최고 권력자가 쿠데타에 의해 쫓겨나거나 갑작스럽게 죽음으로써 통치 권력에 공백이 생기거나 지도자가 바뀌는 것을 뜻한다. 이 경우 권력 엘리트는 바뀌어도 일반적으로 정치와 경제체제의 기본적인 특징은 그대로 유지된다. 이는 선진국에서든 후진국에서든 자본주의 국가에서든 사회주의 국가에서든 드물지 않게 일어났다. 남한에서도 1960년 4월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었으며, 1979년 10월에는 부산과 마산의 시민항쟁에 따라 박정희 정권이 붕괴되었다. 북한의 김정은 정권 역시 쿠데타나 대중봉기에 의해 언제든 붕괴될 수 있다.


둘째, 체제 또는 정치경제구조의 붕괴는 정치 및 경제적 틀이 급격하게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반드시 정권의 변화를 전제하지는 않지만 최고 권력자 및 권력 엘리트의 교체보다는 훨씬 포괄적이다. 1980년대 중반 중남미 및 아시아 국가들에서 민주화의 물결을 타고 독재체제가 민주체제로 바뀐 것이나, 1980년대 말 동유럽 사회주의권에서 물질적 풍요에 대한 동경에 따라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가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로 바뀐 경우를 들 수 있다. 북한이 급속도로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면 사회주의체제가 무너질 수 있다.


셋째, 국가 또는 국민의 붕괴는 국민이 외부로 집단 탈출을 감행함으로써 국가의 존립 기반이 사라지는 것을 뜻한다. 전쟁이나 재난 등에 따른 신체적 탈출뿐만 아니라 정권 및 체제에 대한 신뢰 부족에 따른 정신적 탈출도 포함된다. 1989년 11월 동독인들이 베를린장벽을 넘거나 이웃 나라들을 통해 서독으로 집단 탈출한 것이나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된 경우를 들 수 있다. 북한 인민이 김정은 정권 및 사회주의체제에 대한 불만이나 굶주림에 의한 좌절 또는 외부 세계에 대한 동경 등으로 남한이나 중국으로 집단 탈출을 하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도 붕괴될 수 있다.


2. 북한 붕괴론, 언제부터 나왔는가


첫째, 1980년대 말부터 동유럽 사회주의체제가 몰락하면서 1990년 동독이 무너져 서독에 흡수되고 1991년 소련이 해체되자, 북한도 곧 붕괴될 것이라는 기대 섞인 전망이 나왔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동독보다 훨씬 뒤떨어진 북한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둘째, 1994년 7월 김일성이 죽자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고 50년 동안 통치해온 지도자가 사라졌으니 북한 체제도 곧 무너질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994년 10월 미국이 북한에 경수로 제공을 약속하며 제네바 합의를 이루어놓고 2002년까지 터만 고르고 있었던 배경이다.


셋째, 1995년 북한에서 "100년 만의 물난리"가 일어나 식량난이 세상에 알려지고, 1996년에도 엄청난 수해를 당하면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속출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곧 식량 폭동이 일어나 북한이 무너질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미국의회에서는 "북한의 붕괴는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시기와 방법의 문제일 뿐이다"는 증언이 나왔고, 남한의 학계와 언론계에서도 북한이 곧 붕괴될 것이라는 주장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넷째, 1997년 황장엽 조선로동당 비서의 망명에 이어 외교관들의 망명이 줄을 잇고, 지식인들까지 탈북자 대열에 합류하자 북한 체제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있겠느냐는 전망이 나왔다. 김영삼 대통령이 남북 사이에 체제경쟁이 끝났다고 선언하며, "통일이 예기치 않은 순간에 갑자기 닥쳐올 수도 있다"고 공언했던 배경이다.


1997년 말부터 남한도 외화 부족에 따른 경제난을 겪는 가운데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 북한 붕괴에 따른 흡수통일은 남한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북한이 붕괴될 위기에 처하더라도 막아야 한다는 의견을 국가정보원 고위관리가 드러내기도 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는 북한 붕괴론이 수그러들었다.


다섯째, 2008년부터 김정일의 건강 이상설이 퍼지면서 10여 년 만에 다시 북한 붕괴론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이에 2010년 이명박 대통령은 "통일은 도둑같이 올 것"이라며 뜬금없이 '통일세'를 언급하고 통일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통일 항아리' 사업을 전개했다.



▲지난 2011년 12월 20일 북한 <조선중앙TV>가 공개한 고(故)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시신 모습. ⓒ연합뉴스

여섯째, 2011년 12월 김정일이 죽고 김정은이 권력을 잡자 북한 붕괴론은 더욱 힘을 얻었다. 김일성이 사망한 1994년 아들은 50대 초반의 나이로 후계자가 된 지 20여 년이나 되었지만, 김정일이 사망한 2011년 아들은 20대 후반의 나이에 후계자 수업을 받은 지 2년밖에 되지 않았기에 정권 불안이 제기된 것은 당연했다. 그런 터에 2013년 12월 제 2인자로 알려진 장성택이 처형되자 체제 불안정에 따른 붕괴론이 고조되었다. 남한에서 국가정보원장이 "자유 대한민국 체제로의 조국 통일"을 주장하고 대통령이 "통일은 대박"이라고 외친 배경일 것이다.


3. 북한 붕괴론, 누가 왜 퍼뜨리기 시작했는가


북한 붕괴론은 전쟁 도발설이나 한반도 위기설과 함께 여러 경로를 통해 제기되어 왔다. 주로 미국과 남한의 정보부처나 군부에서 주장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미국의 중앙정보국 (CIA)과 국방부가 북한의 붕괴 및 남침 가능성을 가장 빈번하게 또는 주기적으로 주장해왔다.


첫째, 존 도이취 (John Deutch) 중앙정보국장은 1996년 2월 하원 정보위원회 청문회에서 북한의 정치 경제적 상황 악화가 김정일 정권을 급속하게 붕괴시킬 수 있으며, 이에 따라 북한이 전쟁을 도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증언했다.


둘째, 윌리엄 페리 (William Perry) 국방부 장관은 1996년 3월 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북한이 식량 및 전력 부족 때문에 상황이 계속 나빠지고 있다며, 이 때문에 당시 한반도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라고 주장했다.


셋째, 개리 럭 (Gary Luck) 주한미군사령관은 1996년 3월 하원 국가안보위원회에서 북한의 심각한 경제상황과 식량난을 볼 때 붕괴는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시기와 방법의 문제일 뿐"이라고 증언했다. 북한이 그러한 내부 문제에 대한 관심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남한을 공격할지 모르기 때문에, 남한에 요격미사일을 배치하는 게 필수적이라고 덧붙였다. 상원 군사위원회에서도 북한 붕괴 및 전쟁 도발을 강조하며, 1997년의 국방예산 삭감을 반대했다. 군인답게 에둘러 말하지 않고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은 것이다.


넷째, 존 틸러리 (John Tillery) 주한미군사령관도 1997년 3월 하원 국가안보위원회에서 북한의 붕괴와 남침을 우려하며, 1998년의 국방예산 증액을 요구했다. 그리고 남한 정부에 대해서는 1998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미군주둔 비용분담금을 늘리도록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위와 같은 북한 붕괴론이나 전쟁 도발설은 정보나 국방 분야 책임자들의 업무 성격상 실제로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것일 수도 있고, 그들의 '밥줄'을 지키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냉전 종식 이후 러시아의 군사 위협이 줄어들면서, 관련 부서들의 예산을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예산 삭감을 막기 위해 북한 붕괴론을 이용해 왔다는 뜻이다. 북한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면 남침 가능성이 높아지고, 전쟁이 일어나면 정보국이나 국방부의 예산이 늘거나 최소한 줄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해마다 3~4월 무렵 의회에서 예산을 심의하는데, 이에 앞서 청문회를 열어 관련부서 책임자들의 증언을 듣는다는 사실도 참고하기 바란다.


또한 워싱턴에서 흘러나오는 북한 붕괴 및 전쟁 도발 가능성에 관한 주장은 남한에서 반미감정과 함께 일고 있는 주한미군 철수론을 잠재우고 남한 정부에 미군 주둔 비용분담금 증액을 요구하며 남한에 무기를 더 많이 팔기 위한 속셈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1994년 3월 윌리엄 페리 국방부 장관은 북한 핵무기개발 의혹을 구실로 전쟁 불사를 주장하며 남한에 패트리엇 미사일과 AH-64 아파치헬기 및 브래들리전차 등 새로운 무기들을 들여놓도록 이끌었다. 1996년 3월 북한 붕괴 및 남침 가능성이 제기된 직후에는 주한미군 참모장 출신의 존 싱글러브 (John Singlove) 장군이 서울을 방문해 북한의 대남 미사일공격을 대비하기 위해 새로운 미사일체계를 도입해야 한다고 압력을 넣었다. 1997년 4월 북한 붕괴 및 전쟁 도발설이 흘러나온 뒤에는 윌리엄 코언 (William Cohen) 국방부장관이 서울에 와서 한미 간에 무기의 상호 운영성을 내세우며 남한이 러시아제 미사일 대신 미제 패트리엇 미사일을 구입해야 한다고 강권했다.


실제로 남한은 1996년 한 해 동안 10억 달러가 넘는 무기를 미국에서 사왔으며 1997년에도 그 액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냉전이 끝남에 따라 위상 약화와 함께 예산삭감 압력을 받아온 미국 중앙정보국과 국방부 그리고 위축될 우려가 있는 군수산업계에 북한 붕괴론과 전쟁 도발설이 왜 필요한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남한의 안전기획부와 국방부도 필요할 때마다 북한 붕괴론을 흘리면서 남침 가능성을 경고해 왔다. 예를 들어, 1996년 안전기획부법 재처리 및 국가보안법 개정 문제가 불거지자, 북한 붕괴론과 전쟁도발설이 흘러나왔고, 곧 안전기획부법 개정안이 날치기로 통과되었다. 그리고 국방부가 1996년 군비 현대화 및 지속적인 국방비 증액을 추진할 때도 북한 붕괴론과 전쟁도발설이 제기되고 1997년 국방예산은 무려 13%나 늘었다.


대통령,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 등의 선거운동 기간에도 반북 분위기를 고조시켜 공안정국을 강화하는 데 북한의 전쟁 도발설은 적지 않은 효과를 거두었다. 비판 세력을 억압하며 정권을 강화하는 데 남북 사이에 갈등과 긴장을 조성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도 드물었다. 북한 붕괴 및 남침 가능성을 흘림으로써 북한의 자극을 이끌어내고 그것을 구실로 총화단결을 외치며 정부에 부정적인 여론을 잠재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4. 북한 붕괴론의 근거와 내용


미국에서든 남한에서든 199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제기된 북한 붕괴론의 근거는 다음과 같이 크게 다섯 가지였다.


첫째, 정치적으로 김정일 체제가 불안하다. 김일성은 항일운동 지도자로서 정통성과 강력한 카리스마가 있었지만, 김정일은 아버지의 권력을 물려받았을 뿐 정통성과 카리스마가 부족하다. 군부의 도움을 받아 물리적 힘으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둘째, 경제적으로 총체적 파탄 상태에 있다. 지속적인 마이너스 성장과 ‘경제 3난’이라 불리는 극심한 식량 부족, 에너지 부족, 외화 부족의 악순환으로 경제가 자력으로 회복될 수 없다. 특히 식량난에 따른 대규모 식량 폭동의 가능성이 크다.


셋째, 사회적으로 통제체제가 느슨해졌다. 부정부패가 심해지고 상호감시 체제가 이완되어 사회규율과 질서가 무너짐으로써 탈북자가 증가하고 있다.


넷째, 정신적으로 국가 이데올로기가 실종되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함께 역사적으로 폐기되었고, 주체사상은 경제파탄으로 설득력을 잃었는데, 새로운 통치 이데올로기가 아직 정립되지 못하고 있다.


다섯째, 대외적으로 국제적 고립이 지속되고 있다. 테러, 인권탄압, 국제법 위반, 핵무기 개발 등으로 다른 나라들이 북한과의 협력을 기피하는 터에 당이나 정부가 밀수와 위폐 발행까지 주도해 국가의 윤리적 기초마저 무너졌다.


붕괴 과정과 관련하여, 주한미군사령부는 1997년 북한이 경제난, 사회적 불안, 신구 세대 간의 갈등, 국제적 고립 등으로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며, "외롭게 남아있는 폐쇄적이고 군국주의적이며 스탈린주의적인 사회"가 7단계로 와해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1단계로 자원이 고갈되면, 2단계로 산업이 마비되고, 3단계로 통제력이 상실되며, 4단계로 대중통제가 강화될 것이다. 5단계로 인민의 저항이 생기고, 6단계로 지배세력이 분열되면, 7단계로 권력투쟁을 거쳐 집단지도체제가 들어설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로부터 9년이 지난 2006년 미국의 국제문제 전문가 로버트 캐플런 (Robert Kaplan) 역시 <The Atlantic Monthly> 10월호를 통해 위와 거의 똑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5. 북한 붕괴론에 대한 나의 비판


북한의 붕괴 가능성에 대해 객관적이고 체계적으로 연구하기가 쉽지 않다. 워낙 폐쇄된 사회라 정확한 자료가 부족하고 심층적 접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른바 '내재적 접근 및 분석방법'을 통해 다음과 같이 북한 붕괴론을 반박하고 싶다.


첫째, 동유럽 붕괴와 북한 붕괴에 관하여. 북한보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앞섰던 동독도 붕괴되었는데, 북한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주장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그러나 동독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와 북한을 포함한 동아시아 사회주의 사이엔 적어도 두 가지 차이점이 있다.


첫째, 동유럽 지도자들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소련군의 점령과 함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도입한 '강요된' 공산주의자들이었다면, 동아시아의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민족해방운동의 수단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받아들인 '자생적' 또는 '민족적' 공산주의자들이었다. 둘째, 동유럽 국가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따르며 '종속적' 처지에서 소련의 지지를 받았다면, 북한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변용하며 '자주적' 입장에서 소련과 중국이라는 양대 사회주의국가의 지원을 이끌어 냈다. 따라서 동유럽 국가들은 소련군이 철수하면서 더 이상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자 무너지고 말았지만, 북한은 소련의 지원 중단에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을지라도, 나름대로 자립 경제의 기반 위에서 중국의 지원을 받으며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둘째, 김정일의 카리스마와 권력 기반에 관하여. 남한에서는 김정일이 권력을 물려받는 과정에서 정통성을 얻지 못했다고 평가하지만, 정권이나 체제의 정당성 여부는 그 나라의 정치나 역사 또는 문화적 전통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북한은 지금까지 정통 사회주의를 따르지 않고 민족주의와 유교사상을 접합한 민족적 유교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해 왔다. 최고지도자인 수령을 아버지로 그리고 조선로동당을 어머니로 비유하는 가족사회 또는 국가에서, 김일성 일가는 조선의 독립과 해방에 몸 바친 혁명가족으로서 '전형적인 모범가족'으로 선전되는 가운데, 아버지가 죽은 뒤 아들이 수령 자리에 오른 것을 북한 인민은 당연하게 받아들일지 모른다. 더구나 김정일은 1970년대 초부터 후계자 또는 실질적 통치자로서의 위상을 확보하고 권력을 행사해 왔으며, 김일성이 살아 있을 때인 1990년대 초부터 병력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군대를 앞세우는 나라에서.


셋째, 경제난과 식량 폭동에 관하여. 북한이 심각한 경제난에 빠졌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우리는 경제난의 원인으로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비효율성을 꼽지만, 북한은 미국의 봉쇄와 경제 제재 그리고 자연재해 등을 내세운다. 인민들은 식량난이 미국 때문이라는 선전을 듣고, 남한의 천박한 자본주의보다는 '우리식 사회주의'가 낫다는 사상교육을 받기 마련이다.


그리고 북한처럼 모두가 가난한 '절대적 빈곤' 상태에서는 권력에 대한 불만이 잘 생기지 않는다. 1960년대 남한에서 "배고파 못살겠다"는 말이 나왔어도 커다란 불만이 없었듯이. 1980년대부터 경제력이 급상승한 남한에서 그래 왔듯이 빈부 격차에 따른 '상대적 박탈'을 느낄 때 체제에 대한 좌절과 분노가 표출되기 쉽다. 또한 1970년대 남한의 박정희 군사독재 체제에서처럼 불만이나 분노가 생겨도 감시와 통제가 심하고 시민사회가 발달하지 않은 사회에서는 집단행동으로 이어지기 어렵고 더구나 대규모 폭동으로 연결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북서유럽처럼 민주주의가 잘 발달된 열린 사회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잘 일어나지 않는다. 국민은 불만을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고, 정부는 여론을 잘 받아들여, 데모의 필요성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처럼 폐쇄적인 독재국가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날 수 없다. 정보가 통제되고 자유가 제한되어 불만 표출이 어렵고, 데모를 하더라도 그에 대한 탄압과 처벌이 너무 가혹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남한처럼 민주주의가 어설프게 발전해 완전히 열리지도 않고 꽉 닫히지도 않은 어정쩡한 사회에서 데모가 자주 일어나는 이유요, 북한에서 식량 폭동이 일어나기 어려운 배경이다.


넷째, 사회 통제체제 이완과 탈북자 증가에 관하여. 사실 1980년대 말부터 노동자계층의 탈북이 급증하고, 유학생 및 작가나 교원 등 지식층뿐만 아니라, 외교관이나 당비서를 포함한 지배층의 망명까지 줄을 이었다. 그러나 '지식층의 이반'이든 '지배층의 동요'든 그들 모두 정권이나 체제에 불만을 품고 북한을 탈출한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자신들의 잘못에 따른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소외감으로 탈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본 언론인 시게무라 도시미츠가 "요컨데 북조선 망명자의 대부분은 그 체제에서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소외되어 생명의 위기에 직면하였기 때문에, 탈출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다. 굳이 말하자면 북조선이란 사회에서 출세와 승진에 실패한 사람들이다"고 말했듯이.


이와 관련해, 남한에서도 죄를 저지르고 해외로 도피한 사람들이 적지 않고, 정치적 탄압이나 경제적 어려움을 피해 망명이나 이민의 길을 택한 사람들도 많다. 1970년대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 권력서열 2위로까지 불리던 중앙정보부장을 비롯해 주미 한국대사관의 공보관장 및 대사관에 파견된 중앙정보부 요원 등이 무더기로 미국에 망명했고, 육군사관학교장 및 외무부 장관을 지낸 종교지도자까지 북한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망명과 월북사건들을 남한 체제붕괴의 가능성과 연결시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섯째, 국가 이데올로기 실종에 관하여. 북한 당국은 1995년 중반부터 '붉은기 사상'과 '고난의 행군'을 강조해왔다. 미국이나 남한이 '자본주의'의 부정적 이미지를 벗기 위해 '시장경제 체제'라는 말을 즐겨 쓰듯, 북한은 주체사상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혁명과 고난을 강조하며 정권강화 및 체제유지에 힘써왔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여섯째, 국제적 고립에 관하여. 북한이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나라로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지만, 미래의 초강대국 중국을 지속적인 후원자로 두면서, 과거의 초강대국 러시아와는 우호관계를 회복했다. 만에 하나 북한이 붕괴 위기에 처하더라도 이들 강대국들은 자신들의 안보를 위해 가만히 있기 어렵다.


특히, 중국은 '순망치한 (脣亡齒寒)' 즉 입술(북한)이 없어지면 이(중국)가 시리다는 생각으로,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내세우며, 북한이 필요로 하는 전력의 80~90%와 막대한 식량을 지원해왔다. 북한 체제나 지도자들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자국의 안보를 위해 대북지원을 하는 것이다. 미국이 유엔을 앞세우고 남한과 일본을 끌어들여 북한을 봉쇄하고 경제제재를 강화해도 북한을 붕괴시키기 어려운 배경이다.


6. 북한 붕괴, 바람직하지도 않다


앞에서 북한의 붕괴 가능성에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가능성이 낮다는 점을 드러냈는데, 만약 붕괴되더라도 남한 사람들이 기대하는 대로 흡수통일이 이루어질 가능성도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전 글에서 북한 붕괴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을 대강 얘기했지만,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한다.


첫째, 북한이 붕괴될 위기에 놓이면 중국이 가장 먼저 들어갈 것이다. 약 1500km의 국경을 마주하며 북한 구석구석에 엄청난 투자를 해놓고 있는 터에, 중국과 북한은 전통적으로 '이와 입술의 관계 (脣齒關係)'임을 주장하며 개입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말이다. 북한이 무너지면 미군이 압록강-백두산-두만강으로 이어지는 경계선까지 올라가 주둔하기 쉬운데 중국이 이를 용인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과거엔 정부를 세운 지 1년도 되지 않은 1950년 한국전쟁에서 세계 최강 미국에 맞서 북한을 도왔으며, 지금은 미국의 견제와 포위 정책에 맞닥뜨린 중국이다.


둘째, 북한이 붕괴될 조짐이 보이면 미국이 동북아시아의 안정과 북한 핵무기의 안전한 관리를 이유로 유엔을 앞세우거나 단독으로 북한을 점령하겠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남한과 '북한 급변사태 대비계획'을 가동해 북한을 점령하려 할 수도 있고. 아무튼 남한은 헌법에 한반도 전체를 자신의 영토로 규정하고 있지만, 북한은 유엔에 가입한 국제법상 엄연한 독립국이다.


셋째, 북한이 위기에 처하면 군부 강경파의 결사항전에 따라 제2의 한국전쟁 또는 최소한 게릴라투쟁이 전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남한 지도자들이 통일 되면 북한 통치자들에게 응당한 처벌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공공연히 하는 마당에, 100만이 넘는 병력과 첨단무기를 가지고 있는 북한 지배층이 남한에 순순히 투항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넷째, 흡수통일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북한이 남한에 고이 접수될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한의 붕괴가 외세의 개입이나 무력충돌 없이 남한에 의한 흡수통일로 이어진다 할지라도, 남한은 혼란을 수습하고 탈북자들을 껴안을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부족하다.


2014년 현재 2만 명 남짓의 탈북자 가운데 약 80%가 극심한 빈곤으로 정부의 기초생활 보호를 받고 있는 데다, 남쪽 사람들의 편견과 차별 그리고 냉대 때문에 심리적 고통을 더 심하게 겪고 있다고 한다. 이들 중엔 남쪽 생활에 큰 불만을 품고 캐나다나 호주 등 다른 나라로의 이민을 바라는 사람들도 많고, 합법적으로 북쪽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듯하다. 이렇게 2만여 명의 탈북자도 제대로 껴안지 못하는 터에 북한이 붕괴되면 생길 2천만여 명의 ‘빌어먹을 사람들’을 어떻게 수습하겠는가.


7. 북한 붕괴론에 관한 제안


북한 붕괴론은 북한의 상황에 대한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분석에 의해 나오기보다는 북한 체제나 지도자들에 대한 거부감이나 적개심에서 제기된 경향이 크다. 예측이 아니라 희망사항이란 뜻이다. 북한 붕괴가 바람직한 결과를 불러올 것 같다면 가능성이 낮아도 붕괴를 유도하거나 촉진시킬 수 있는 정책을 세우는 게 좋고, 반대로 붕괴의 결과가 바람직하지 않을 것 같으면 가능성이 높아도 붕괴를 막거나 늦출 수 있는 정책을 펴는 게 좋다.


물론 단 1%의 가능성이 실현될 수도 있고 99%의 가능성도 실현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북한의 붕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당연히 대책을 세워놓아야 한다. 중국이나 미국 등 외세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전쟁을 피하며, 사회혼란을 방지할 수 있는 대책을 수립하며, 북한 주민들이 중국보다 남한을 선호할 수 있는 방안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실익도 없이 북한을 자극하지 않도록 반드시 은밀하게.


남한 당국이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자유민주주의로의 통일을 추진하겠다고 공개적으로 표명하는 것은 북한을 자극할 뿐 오히려 통일을 방해하는 악수(惡手)다. 마찬가지로 북한의 붕괴를 전제로 한 정책을 세워놓고 이를 널리 알림으로써 북한의 도발을 부추기는 것도 반드시 피해야 한다. 북한이 붕괴되어 궁극적으로 흡수되면 자유민주주의로의 통일은 저절로 이루어질 것 아닌가. 안보나 통일은 우리의 궁극 목표가 아니라 남북한이 더불어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법적증언⑨] 통일 대박'위해서는 반북·종북아닌 '친북'이어야


[법적증언⑨] 통일 대박'위해서는 반북·종북아닌 '친북'이어야


내가 '친북'인 이유



나는 '친북'이다. 법정의 판검사들과 강의실의 학생들에게 권유해온 대로, 남한의 온 국민에게도 호소한다. 친북적으로 되어달라고. 전쟁을 원치 않고 평화를 바란다면. 또는 무력통일을 추진하지 않고 평화통일을 추구한다면. 그렇다고 '빨갱이'가 될 필요는 없다. 물론 '종북'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여기서 '친북'이란 북한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뜻하고, '빨갱이'는 공산주의자를 가리키며, '종북'은 북한의 이념이나 체제 또는 지도자들을 추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친북'이나 '종북'이란 말은 아직 국어사전에 실려 있지 않지만 우리 사회에서 널리 쓰고 있기에 내 나름대로 한자를 풀어본 것이다. 참고로, 공산주의는 혁명을 통해 이루어지고 혁명은 피를 보기 마련이라, 피의 색깔 빨간색 또는 적색 (赤色)은 혁명이나 공산주의를 상징하게 되어, 공산주의자들이 속되게 영어로는 'Red', 우리말로는 '빨갱이' 또는 '적색분자(赤色分子)'로 불리게 되었다.


내가 친북이 된 것은 폭력을 거부하며 특히 전쟁을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이요, 온 국민에게 친북적으로 되어달라고 호소하는 이유는 바람직한 국가정책을 따르며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다. 1980년대부터 우리 남한의 공식적 통일정책은 북한과 화해협력을 통해 통일을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법정에서 증언하게 되면 북한의 통일정책을 거의 빠짐없이 다루게 되고, 그와 연결해 남한의 통일정책도 건드리게 된다. 그 과정에서 판검사들에게도 친북을 권유하게 되기에, 남한의 통일정책을 간단하게 소개한다.


1. 남한 통일정책의 변화


1950년대 이승만 정부는 '무력 북진통일'을 내세웠다. 북한과 전쟁을 치렀던 터라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야당 지도자를 처형하기까지 했다.


1960~70년대 박정희 정부는 '선 건설 후 통일'을 내세우며 궁극적으로 '승공통일'을 추구했다. 그 무렵 남한의 국력이 북한보다 뒤지고 정치적으로도 안정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먼저 경제성장에 치중하여 힘을 기르고 나중에 '공산주의를 무찔러 승리하는 통일'을 이루겠다는 것이었다.


1982년 전두환 정부는 통일헌법을 만들고 남북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민주공화국을 세운다는 '민족화합 민주통일 방안'을 발표하였다. 남북 대표들이 '민족통일 협의회의'를 구성하여 거기서 통일헌법을 마련하고, 확정된 통일헌법에 따라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국회와 정부를 구성함으로써 통일을 이룬다는 내용이다.


1989년 노태우 정부는 전두환 정부의 '민족화합 민주통일 방안'을 보완하고 체계적으로 다듬은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내놓았다. 자주, 평화, 민주의 3대 원칙 아래 공존공영, 남북연합, 단일민족국가의 3단계를 거쳐 통일을 실현한다는 내용이다.


1994년 김영삼 정부는 노태우 정부의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 '한민족공동체 건설을 위한 3단계 통일방안'을 발표했다. 흔히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라고 불리는데 자주, 평화, 민주의 3대 원칙을 바탕으로 화해협력, 남북연합, 완전통일이라는 3단계를 거쳐 통일을 실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통일방안은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쳐 이명박-박근혜 정부도 받아들였다. 참고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데, 김대중 대통령이 내세웠던 '햇볕정책'은 통일정책이 아니라 대북정책이었다. 북한과 관계 개선을 이룬 뒤에 통일을 준비해야지, 적대 관계도 풀지 못하면서 통일정책을 마련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취지였다.


남한의 공식적 통일정책은 전두환 정부가 형식적이나마 틀을 짜고, 노태우 정부가 체계적으로 다듬었으며, 김영삼 정부가 살짝 고친 것을 그대로 지켜오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1단계가 북한과 함께 살아가며 같이 번영하자는 '공존공영(共存共榮)' 또는 화해협력이라는 점. '진보 정부' 또는 '좌파 정부'로도 불리던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만들어진 게 아니라, 전두환-노태우 군사 정부와 김영삼 보수 정부 때 만들어지고 다듬어졌으며, 이명박-박근혜 극우 정부에서도 받아들인 통일정책의 첫 단계가 북한과 더불어 살며 화해와 협력을 이루자는 것이란 말이다.


바로 이것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고 외치며, 북한과 더불어 사는 가운데 화해와 협력을 이루겠다는 1단계 목표를 세워놓고, 북한을 '주적(主敵)'으로 삼으며 적대관계를 유지하는 게 말이 되는가. 이승만 시대처럼 전쟁을 통해 통일하거나 박정희 시대처럼 공산주의를 쳐부수고 통일하는 게 목표라면 북한에 증오심을 지니고 적대 관계를 유지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진정 화해협력을 통해 평화통일을 이루겠다면, 설사 북한이 원수 같이 굴며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대로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식량이라도 보내주면서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지 않겠는가. 적으로 삼으며 어떻게 화해하고, 친하게 지내지 않고 무슨 수로 협력할 수 있겠느냐는 뜻이다. 그렇게 할 자신이 없거든 통일정책을 폐기하든지 바꿔야 한다. 선량한 국민 특히 통일운동가들 헷갈리게 하지 말고. 내가 '친북'을 자처하며 법정에서든 강의실에서든 이를 권유하고 떳떳하게 공개적으로 호소하는 이유다.


1950~70년대 남한의 통일정책이 무력 북진통일이었을 때 반공반북은 애국이 되었고, 평화통일을 호소하면 반공법 위반으로 감옥에 갔다. 1990년대부터 통일정책이 화해협력을 통한 평화통일로 바뀌었으니, 이젠 친북 평화를 애국애족 행위로 간주하고 반북을 조장하면 처벌해야 하지 않을까.


2. 친북 통일은 대박, 반북 통일은 쪽박


2014년 1월 박근혜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면서 "통일은 대박"이란 말을 썼는데, 이 말 자체가 대박이 되었다. 통일에 관심이 없거나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내용이야 어떻든 이 말이 통일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은 셈이다.



▲ 지난 1월 6일 청와대에서 신년 기자회견을 가진 박근혜 대통령 ⓒ청와대


사실 이 말은 신창민 중앙대 경영학 교수 겸 한우리 통일연구원 이사장이 2012년 <통일은 대박이다>라는 책을 펴내면서 처음으로 썼던 말인 것 같다. 그는 통일을 빨리 이루되 통일비용을 최소화하고 통일편익을 극대화하면 매년 10% 이상의 경제성장을 기록할 수 있다며, "통일은 진정 대박"이라고 했던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단일화해야 하고, 북한 붕괴를 통한 흡수통일이 가장 효율적이며, '김씨 왕조' 체제의 허구성을 알리기 위해 북쪽에 전단을 날려 보내는 게 좋다는 등의 위험한 극우적 주장에 나는 전혀 동의할 수 없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여 '통일 대박론'을 펼친 듯하다. 그 무렵 국가정보원장이 "자유 대한민국 체제로의 조국 통일"을 주장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통일이 대박'이라는 데는 분명히 전적으로 찬성한다. 그러나 어떠한 통일이냐가 문제다. 통일의 방법이나 과정에 따라 대박을 터뜨릴 수도 있고 쪽박을 찰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화해와 협력을 통한 평화 통일을 실현할 때만 대박이고, 전쟁이나 북한 붕괴에 따른 흡수 통일이 이루어질 때는 쪽박이리라 확신한다. 친북 통일이라야 대박이고 반북 통일이면 쪽박이란 말이다.


만에 하나 전쟁을 하면 결국엔 남한이 이겨 북한을 흡수 통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양쪽이 최첨단 무기를 무수하게 가진 터에 전쟁이 터지면 남쪽이든 북쪽이든 불바다가 되고 잿더미가 될 게 뻔한데 최후의 승리를 거둔들 뭘 하겠는가. 끔찍한 쪽박이지. 전쟁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북한 붕괴에 관해 나는 1990년대 중반부터 가능성도 낮으며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주장해왔다. 북한이 무너질 것 같지 않고, 붕괴되더라도 남한에 흡수될 가능성이 크지 않으며, 흡수통일 되더라도 대박보다 쪽박이 되기 쉬우리라 예상하는 것이다. 가능성이 왜 낮은지 제대로 짚어보려면 누가 언제부터 왜 ‘북한 붕괴론’을 제기하고 퍼뜨려왔으며 왜 아직 무너지지 않고 있는지 자세히 얘기해야 하기 때문에, 바로 다음 글에서 별도로 다루겠다. 여기서는 왜 바람직하지 않고 쪽박이 되기 쉽다고 예상하는지만 간단히 밝힌다.


만약 북한이 붕괴되면 남한에 고이 흡수되리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다. "통일이 예기치 않은 순간에 갑자기 닥쳐올 수도 있다"던 김영삼 대통령, "통일은 도둑같이 올 것이다"고 했던 이명박 대통령, 그리고 "통일은 대박"이라고 외친 박근혜 대통령 등. 물론 동독이 무너져 서독에 흡수 통일되었듯, 북한이 붕괴되어 남한에 흡수 통일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난 다른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첫째, 중국이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겠는가. 안보와 경제를 이유로 북한에 가장 먼저 들어갈 수 있고 그럴 가능성이 가장 크다. 북한 사람들의 정서도 이미 남한보다는 중국 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리라 생각한다. 둘째, 미국은 북한 핵무기의 안전한 관리나 폐기를 구실로 유엔을 앞세워 개입할 것이다. 셋째, 북한 군부가 남침할 가능성은 없을까. 중국으로의 집단 망명이나 남쪽으로의 집단 투항이 여의치 않다면, 자포자기 또는 최후의 발악으로 전쟁을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넷째, 아무 탈 없이 남한에 흡수되더라도 북쪽 인민을 기꺼이 따스하게 껴안을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겸비한 남쪽 국민이 얼마나 될까. 지금까지 남쪽에 들어와 있는 탈북자 2만 명 남짓도 제대로 감싸지 못하고 냉대하면서. 그러기에 흡수통일 역시 대박보다는 쪽박이 될 가능성이 크다.


3. 반북을 조장하는 사람들


우리 사회엔 정부의 통일정책이 화해와 협력을 통한 평화 통일로 바뀌었지만 북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나 반북 감정을 신념처럼 고집하는 사람들이 많다. 무력 충돌은 남북 양쪽에 불바다와 잿더미를 안겨줄 게 뻔한 데도 '전쟁 불사'를 외치며 북한에 대한 원한과 적개심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통일을 추구하되 북한과의 화해 협력은커녕 북한을 인정조차 하지 않으며 쳐부숴야 한다는 집단이다. 북한을 적으로 삼되 북한이 사라지는 것은 원치 않는 이른바 '적대적 공존'을 통해 기득권을 지키려 하는 사람들도 있다. 분단 구조를 선호하며 통일을 반대하는 진짜 '반통일 세력'이다. 이들 때문에 세상이 변하고 정책이 바뀌어도 친북은 불온하고 범죄시되며 반북은 건전하고 애국적으로 치부되는 사회 풍조가 여전히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들을 크게 몇 가지 부류로 나누어보고 싶다. 첫째, 해방 이전 일제에 협력했던 친일파. 둘째, 북쪽의 토지개혁으로 쫓겨온 지주들과 종교탄압으로 내려온 기독교인들을 비롯한 1940년대 탈북자들. 셋째, 한국전쟁 중 북한 인민군에게 목숨이나 재산을 빼앗기는 등 피해를 당한 사람들. 넷째, 냉전 시대 반공교육에 철저히 세뇌당한 사람들. 이 가운데서도 북한에 대한 원한이나 증오심 또는 적대감을 조장하는 데 앞장서서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집단일까.


첫째, 친일파들이다. 분단 이후 남쪽에서는 이들이 처벌받기는커녕 오히려 지배 세력이 되었다. 해방 직후 1945년 9월부터 1948년 8월까지 3년간 실시되었던 미 군정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남쪽을 점령했지만 행정에 미숙했던 미군들이 일제 아래서 행정을 맡았던 친일파를 내세워 통치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심지어 일본 헌병 및 경찰조차 이용했다.


예를 들어, 1945년 9월 9일 <뉴욕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미군들이 9월 8일 인천항에 도착할 때 그들을 환영하는 조선인들에게 일본 헌병이 총을 쏴 2명이 죽고 10여명이 부상당했다. 질서 유지를 위한 미군사령관의 조치였다. 이런 식으로,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조선이 해방되었어도, 남쪽에서는 미군 도착 이후 며칠 동안 일본 경찰에 의해 조선인 수십 명이 죽었다. 일본인은 조선인들에 의해 한 명도 죽지 않았고. 미군들이 질서를 유지한답시고 일본 군인이나 경찰까지 이렇게 보호하고 이용했다면, 통치를 위해 행정 경험이 있는 조선인들은 얼마나 우대하며 활용했겠는가.


친일파는 이후 변신의 귀재들이 되었다. 전광용이 1962년 발표한 단편소설 <꺼삐딴 리>가 이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듯이. 일제 하에서는 잠꼬대도 일본어로 할 정도로 완벽한 황국 신민으로 살다가, 소련군이 진주한 뒤엔 북쪽에서 잠시 감옥 생활을 하지만 풀려나 친소파로 돌변해 영화를 누리고, 남쪽에 내려와서는 미국인들에게 아부하며 친미주의자가 되는 주인공 같은 사람이 한둘이었겠는가. 그들이 나중엔 국가권력까지 장악해 이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반공을 이용해왔으니, 에둘러 소설을 인용할 필요 없이 남한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간주되는 사람도 있다. 해방 이전엔 일본군 장교로 지내다, 미군정 때는 남쪽 군대에 몸담고 공산주의 활동을 벌이다 체포되었지만, 한국전쟁으로 살아남아 나중에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잡자마자 가장 먼저 반공을 내세웠던 박정희.


이에 남정현은 1965년 발표한 단편소설 <분지>를 통해 "민중을 위해서 투쟁한 별다른 경험이나 경륜이 없어도 어떻게 '반공'과 '친미'만을 부르짖다보면 쉽사리 애국자며 위정자가 될 수 있는 것 같은 세상"이라고 남한 사회를 묘사했다. 그리고 감옥에 갇혔다. 박정희가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직후인 1961년 7월 제정된 '반공법' 위반 혐의로. 그래서 1990년 언론인이나 역사학자로 활동하던 김삼웅, 이헌종, 정운현 등은 <친일파>라는 제목의 책을 펴내면서 다음과 같이 설파했다. "친일 세력은 민족통일보다 분단을, 민족자주보다 사대예속을, 민주주의보다 독재지배를 택했다. 이런 비정상에서만이 자신들의 입지를 확보할 수 있고, 기득권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직접 친일을 한 친일파는 물론 그들의 2세, 3세 또 그 잔당들은 지금도 우리 사회의 모든 부문에 걸쳐 실세로서 행세하고 있다."


둘째, 북쪽에서 1946년 3월 토지개혁이 실시되자 남쪽으로 쫓겨온 지주들이다.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에 따라 땅을 빼앗기고 빈손으로 내려온 사람들이라 북한에 대한 원한을 품지 않기가 어려울 것이다. 아직까지 옛 토지문서를 소중하게 간직한 채 땅 찾을 꿈에 젖어 있을 테니 북한 체제가 하루라도 빨리 무너지길 기대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북한이 붕괴되더라도 이들이 옛 땅을 쉽게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북한 당국이 1998년부터 식량난 타개책의 일환으로 농지를 확충하기 위한 토지정리 사업을 대대적으로 전개했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대자연 개조사업'이란 기치 아래 "뚝이나 몇 개 없애는 식으로 쬐쬐하게 하지 말고 지금 하는 것과 같이 10년, 50년 앞을 내다보며 대담하고 통이 크게" 하라고 지시했다. 2000년 4월 18일 <로동신문>에 실린 그의 말을 그대로 옮기니 참고하기 바란다.


"광복 후 토지개혁을 하여 지주의 소유로 되어 있던 토지를 농민의 소유로 만들었지만 토지의 면모와 구조에서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봉건시대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던 뙈기논밭들을 큰 규모의 규격포전으로 만드는 것은 농촌에서 봉건적 토지소유의 잔재를 흔적도 없이 완전히 청산하고 이 땅을 진정한 사회주의 조선의 땅답게 면모를 일신하기 위한 하나의 혁명입니다..... 이제는 옛날 지주가 토지문서를 가지고 한드레벌에 와서 자기 땅을 찾자고 하여도 찾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남조선은 벌이 많은 곡창지대이지만 토지가 개인소유로 되여 있기 때문에 우리처럼 토지정리를 할 수 없습니다."


셋째, 북쪽 당국의 종교 탄압을 못 이기고 쫓겨온 기독교인들이다. 김일성은 사실 기독교 집안에서 모태신앙을 지니고 태어났다. 아버지 김형직은 기독교 계통의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기독교도들이 중심이 된 항일 민족운동 조직인 <조선국민회>를 만들어 활동했으며, 외할아버지 강돈욱과 외삼촌 강진석은 평양 근교 교회의 장로를 지냈고, 어머니 강반석은 집사로 일하며 어린 그를 교회에 데리고 다녔다. 그가 해방 이전 일제 감옥에 갇혔을 때는 아버지의 친구 손정도 목사가 7개월 동안 옥바라지하며 석방에 큰 힘을 쏟았다.


그러나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벌이며 기독교에 부정적 인식을 갖기 시작했다. "청소년들이 예수의 교리를 절대화하게 되면 혁명에 아무 쓸모도 없는 나약하고 무기력한 존재로 될 수 있다"면서, "찬송가나 불러가지고서는 적의 화구 앞으로 돌진할 수 없으니, 찬송가를 부르는 신도들보다도 결사 전가를 부르는 투사들이 더 필요하다"고 했던 것이다.


나아가 해방 이후 북쪽에서 이른바 혁명 과업을 수행하면서 기독교인들을 비판하고 탄압하기 시작했다. 먼저 1946년 3월 토지개혁을 통해 일제와 지주들이 갖고 있던 땅을 공짜로 빼앗아 농민들에게 공짜로 나누어주었는데, 이때 기독교인들의 조직적인 저항이 있었다. 이에 김일성은 "반동적인 장로, 목사로서 땅을 안 가졌던 자가 거의 없고 놀고먹지 않은 자가 없었기 때문에 이들도 우리에게 불평을 품고 있습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1946년 11월 북쪽 전역에서 실시된 인민위원회 선거를 앞두고 선거일을 일요일로 잡은 데 대해 기독교인들이 '주일선거 반대운동'을 벌였다. 그 무렵 북쪽엔 약 2,000개의 교회에 30만 명 안팎의 기독교인들이 있었다는데, 이들의 대대적인 반대에 김일성은 그들을 사대주의자나 매국노로 몰아붙이며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남쪽으로 쫓겨온 기독교 지도자들과 그 후예들이 반공의 최전선에 서게 되었으니, 이전엔 군사독재자들의 안녕을 위해 기도해주고 요즘은 3·1절이나 광복절에 서울시청 광장에서 북한 국기나 김정일의 허수아비를 찢거나 불태우는 보수 교회 목사들이다. 이들의 가르침에 따라 신도들은 반북 투사가 되고.


물론 믿기 어려울 만큼 진짜 예수 같은 목사도 적지 않다. 세 분만 소개한다. 첫째, 손양원 목사. 일제의 신사 참배를 거부로 널리 알려진 분인데, 1948년 10월 이른바 '여수·순천 반란사건'에서 자신의 두 아들을 '빨갱이'한테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그 빨갱이 살인자를 사형 집행 전 구출해 아들로 삼았던 분이니, 한마디로 말해 인간이 아니라 신 같은 목사였다.


둘째, 김상근 목사. 노무현 정부에서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을 지낸 분으로, "아버님은 6·25 전쟁 때 북에 의해 총살을 당하셨다. 주검은 그 이상으로 비참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아버님이 '북괴군'에게 비참하게 총살을 당했으니 그 '원수'에 대한 분노와 원한 또는 증오와 적대감이 엄청 컸을 것 같은데, 오히려 북한과의 화해와 협력을 통한 평화통일 운동에 헌신해오고 있다.


셋째, 서광선 교수 겸 목사. 1960년대부터 이화여대에서 기도교학을 가르치다 1990년대엔 세계 YMCA 회장을 지낸 분이다. 내가 2008년 <두 눈으로 보는 북한>이란 책을 펴냈을 때 그분이 썼던 서평 한 대목을 요약해 옮긴다. "한국전쟁 때 개신교 목사 아버지가 북한군에게 반공목사라는 이유로 총살당한 비참한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대한민국 해군으로 북한에 총을 겨누고 싸운 사람으로서, 내 굳어진 가슴을 풀기가 너무 너무 힘들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내 머리로는 이재봉 교수의 책을 이해하고 북한의 사정을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받아들이고 있지만, 굳어질 대로 굳어진 나의 상한 마음은 풀어 지지 않는 것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대북 지원에 앞장서고 남북 화해와 통일 운동에 헌신하고 있다.


내가 외부 강연을 가장 많이 하는 장소 가운데 하나가 교회인데, 살인하지 말고 원수도 사랑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아버지나 아들을 죽인 원수까지 포용하는 게 진정한 기독교인인가, 악을 제거하거나 마귀를 몰아내듯 형제 동포마저 원수로 삼아 북한의 국기나 지도자를 불태우는 게 바람직한 기독교인인가 생각해볼 때가 많다. 저마다 주어진 환경과 시각 그리고 가치관이나 신앙관이 다를지라도 '하나님의 종'을 자처하는 목사들이라면, 원수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예수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지키고 따르지는 못할지언정 정면으로 거역하지는 않는 게 기본적 도리가 아닐까. 우리 사회 도시에든 시골에든 거리마다 골목마다 십자가를 보게 되는데, 개신교 지도자들만이라도 친북까진 하지 않고 반북을 자제한다면 한반도 평화와 통일이 훨씬 앞당겨지리라 확신한다. 바로 어제 교황이 남한을 떠나면서 우리에게 '용서와 화해'를 주문하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