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 만들기 4 - 친일개화파 2 | 함재봉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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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한국 사람 만들기』 시리지 제 4권으로 부제는 「친일개화파 2」다. 청일전쟁과 갑오경장이 일어나게 되는 지정학적 요인과 김옥균의 암살과 동학난 등 직접적인 요인들을 서술하고 청일전쟁과 갑오경장의 경과, 그리고 삼국간섭에서 을미사변, 단발령, 아관파천을 통하여 갑오경장이 실패하게 되는 역사를 추적한다.
목차
서론 · 15
1. 갑신정변 후 친일개화파와 일본의 대외정책 16 /
제1장 청의 조선 직할통치와 동북아 · 37
1. 오웬 니커슨 데니의 청 비판 40 /
제2장 김옥균과 박영효의 일본 망명기 · 105
1. 김옥균 108 / 1) 이재원의 밀서 108 /
1) 「건백서」 135 /2) 「대한청년보국회서문」 발표 1613) 「친린의숙」 개설 164 /4) 박영효 암살 미수 사건 165
제3장 동학난 · 169
1. 이단과 정통 172 / 1) 황건적의 난 173 / 2) 백련교의 난 176 /
제4장 청일전쟁과 갑오경장 · 241
1. 동학난과 일본 공사관 258 /
1) 대원군 대 민씨 척족 361/2) 일본의 대원군 설득 364 /3) 대원군의 민씨 척족 숙청 368 /
1) 청의 정규군 400 /2) 이홍장의 북양군 405 /3) 북양함대 409/4) 일본군 412 /
1) 러시아의 개입 요청 430 /2) 청군과의 내통 431 /3) 동학군과의 내통 432 /
1) 박영효와 서광범의 사면 555 /2) 군국기무처 폐지와 내각제 출범 560 /3) 홍범 14조 565 /4) 「내무아문 제1호 훈령」과 「교육입국조서」 568 /
제5장 삼국간섭 · 625
1. 랴오둥반도 할양 문제 628 /
제6장 갑오경장의 실패 · 701
1. 이노우에와 「이집트 모델」 7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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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2022년 9월 24일자 '북카페'
함재봉 <한국 사람 만들기 4: 친일개화파 2> 요약 및 평론
요약
함재봉의 <한국 사람 만들기 4: 친일개화파 2>는 근대 한국인의 정체성을 형성한 다섯 가지 지적·이념적 전통(친중위정척사파, 친일개화파, 친미개화파, 친소공산주의파, 친일파) 중 <친일개화파>를 본격적으로 파헤치는 두 번째 권이다. 저자는 '친일'이라는 단어가 지닌 낙인과 금기를 넘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한반도 개혁가들이 왜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일본식 근대화를 모델로 삼았는지 정치사상사적 관점에서 다룬다.
본서의 핵심은 메이지 유신의 성공 방정식과 그것이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미친 영향이다. 일본은 서구 열강의 압력 속에서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선언하고, 법치·의회제도·군제·교육·산업 등 문명개화의 전 영역을 급진적으로 재편했다. 조선의 개화파 지식인들은 정체된 성리학적 중화질서(소中华)에 매몰된 조선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일본의 근대화 모델을 이식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저자는 갑신정변(1884)을 친일개화파의 결정적 분기점으로 짚는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 개화당 인물들은 메이지 일본의 지원과 아이디어를 빌려 청나라에 대한 종속 관계를 끊고 근대 국가를 수립하려 시도했다. 비록 3일천하로 끝나고 말았으나, 이들이 제시한 14개조 개혁안은 신분제 폐지, 조세 제도 개혁, 문벌 타파 등 조선 사회의 근본적 패러다임 전환을 담고 있었다.
갑신정변 실패 후 이들 다수는 일본으로 망명하며 메이지 일본의 문물과 지적 체계를 한층 더 깊이 흡수했다. 후쿠자와 유키치 등 일본 내 문명개화론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들은 단순한 기술 도입을 넘어 사상과 제도의 근대화가 필수적임을 인식했다. 이는 이후 갑오개혁(1894)이라는 국가 체제 개편으로 이어지며 조선의 법률, 행정, 관료제, 교육 시스템의 기초를 놓았다.
결국 이 책이 추적하는 친일개화파의 본질은 '일제에 국권을 넘긴 부역자'가 아니라, 전통적 성리학 질서와 청나라 중심의 지배 체제를 극복하고 근대적 주권국가와 시민을 창조하려 했던 '근대화의 선구자들'이다. 저자는 그들의 시도가 한일병합이라는 비극적 종국으로 이어졌을지라도, 오늘날 한국의 행정·법률·교육·산업 제도의 기틀에는 이들이 일본을 통해 이식한 서구식 근대 제도의 유전자가 강력하게 남아있음을 증명한다.
평론
함재봉의 <한국 사람 만들기 4: 친일개화파 2>는 한국 근현대사 연구에서 오랫동안 성역이자 금기로 남아있던 '친일개화'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다룬 담대한 사상사적 시도다. 한국의 주류 역사학이 '친일'을 민족적 배신과 도덕적 죄악이라는 단순한 프레임으로만 해석해 온 한계를 넘어, 저자는 당시 지식인들이 직면했던 냉혹한 국제정치적 현실과 사상적 선택의 맥락을 치밀하게 복원한다.
이 책의 가장 뛰어난 지점은 '근대성'과 '민족주의'의 복잡한 얽힘을 명확히 갈라냈다는 데 있다. 19세기 말 조선에 요구된 시대적 과제는 '근대국가 수립'과 '국권 수호'라는 두 축이었다. 그러나 주체적 근대화 역량이 턱없이 부족했던 조선에서 친일개화파는 일본이라는 현실적 징검다리를 통해 서구 문명을 수용하는 길을 택했다. 저자는 이들의 선택을 감정적 배신이 아닌, 당시 동아시아 지적 네트워크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문명사적 선택'으로 재해석한다.
또한 저자의 서술 방식은 정치사상사적 통찰이 돋보인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이 조선 개화파의 지적 지형에 미친 영향, 김옥균과 박영효 등이 지닌 현실적 한계와 비전의 깊이를 담담하게 추적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역사적 인물들을 도덕적 잣대가 아닌 '시대의 격랑 속 연기자'로 바라보게 만든다.
다만 본서가 지닌 한계도 명확하다. 친일개화파의 사상적·제도적 기여를 입증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가졌던 정략적 경솔함과 일제 imperialism(제국주의)의 침략적 본질에 대한 안이한 인식이 초래한 국가적 비극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태도를 취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일본의 근대화 모델이 지닌 자국 중심적 제국주의 속성을 친일개화파가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은 이들의 결정적 한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현대 대한민국이 누리고 있는 근대적 법치, 관료제, 교육, 산업 체제는 과연 어디서 왔는가? 저자는 민족주의적 신화에 가려진 한국 근대성의 진정한 기원을 직시하라고 요구한다. 탈이념적·탈감정적 역사 인식을 지향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새로이 이해하게 만드는 강력한 지적 자극제다.
함재봉의 『한국 사람 만들기 4―친일개화파 2』는 1884년 갑신정변 실패 이후부터 1896년 아관파천에 이르는 조선의 격동기를 다룬다. 2022년에 출간된 850쪽의 대작으로, 청의 조선 지배 강화, 김옥균 암살, 동학농민전쟁, 청일전쟁, 갑오경장, 삼국간섭, 을미사변, 단발령과 아관파천을 하나의 연속된 역사로 재구성한다.
이 책은 친일개화파를 단순한 ‘친일파의 선구자’로 규정하지 않는다. 함재봉이 말하는 친일개화파란 일본에 대한 충성심을 가진 집단이라기보다,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을 서양 근대문명을 배우는 통로이자 국가개혁의 모델로 선택한 조선 지식인과 정치인들이다. 이들은 중국 중심의 중화질서를 벗어나 일본을 통해 서양의 군사·산업·교육·법률·정치제도를 받아들여야 조선이 생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함재봉의 전체 시리즈는 근대 한국인의 정체성이 친중 위정척사파, 친일개화파, 친미기독교파, 친소공산주의파, 인종적 민족주의파라는 다섯 인간형의 충돌과 혼합 속에서 형성되었다고 본다.
- 갑신정변 이후의 친일개화파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급진개화파는 망명하거나 정치적으로 몰락한다. 조선에서는 청의 영향력이 오히려 강화된다. 위안스카이를 중심으로 한 청의 세력은 조선의 외교와 내정을 감독하면서 조선을 사실상 속국처럼 다룬다. 조선 왕실은 청에 의존하여 개화파를 억압했고, 미국을 비롯한 서양 국가들은 조선의 독립을 적극적으로 보장할 의사를 보이지 않았다.
함재봉은 이 시기를 조선이 스스로 근대화할 기회를 잃어버린 시간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친일개화파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일본에 망명한 박영효는 정치개혁안을 계속 작성하고 교육기관을 세우며 재기를 준비했다. 서재필과 서광범은 미국으로 건너갔고, 윤치호 역시 중국과 미국에서 새로운 사상과 제도를 경험했다. 이들에게 망명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새로운 근대적 인간으로 재형성되는 과정이었다.
김옥균은 일본에서 조선의 독립과 개혁을 계속 주장했지만 일본 정부는 점차 그를 외면했다. 일본은 조선 개화파의 이상보다 자국의 외교적 이익을 우선했다. 결국 김옥균은 1894년 상하이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된다. 그의 시신은 조선으로 보내져 능지처참에 준하는 모욕을 당했다. 함재봉은 김옥균 암살을 개인적 비극이면서 동시에 청과 조선 왕실의 반개화적 결속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본다.
- 동학농민전쟁과 조선 국가의 붕괴
1894년 동학농민군의 봉기는 탐관오리의 수탈과 지방행정의 부패, 신분질서의 모순에서 비롯되었다. 농민군은 단순히 종교적 광신이나 반외세 감정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무능하고 부패한 국가를 개혁하려는 정치적 요구를 제시했다. 전봉준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관리의 횡포를 바로잡고 신분적 차별을 없애며 백성의 생존을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농민군을 진압할 능력이 없었다. 정부가 청에 파병을 요청하자 일본도 톈진조약을 근거로 군대를 보냈다. 농민봉기가 국제전쟁의 도화선이 된 것이다. 농민군이 전주화약을 통해 일시적으로 해산했는데도 일본군은 철수하지 않았다. 일본은 조선 왕궁을 점령하고 친일적 개혁정부를 세운 뒤 청과 전쟁을 시작했다.
함재봉의 설명에서 동학농민전쟁은 조선 민중의 자발적 개혁운동인 동시에 조선 왕조의 국가능력 부재를 폭로한 사건이다. 조선 정부는 국내의 사회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외국군을 불러들였다. 그 결과 백성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오히려 외세의 침입을 초래했다. 이 과정에서 동학농민군은 반봉건 개혁세력인 동시에 일본의 침략에 맞서는 항일세력으로 전환되었다.
다만 함재봉의 관심은 농민군의 사회경제적 세계보다 개화파와 국제정치에 더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농민들이 구상했던 아래로부터의 근대화가 충분히 조명되지 않는다는 한계가 있다.
- 청일전쟁과 동아시아 질서의 전복
청일전쟁은 조선의 지배권을 둘러싼 청과 일본의 전쟁이었다. 하지만 함재봉은 이를 단순한 양국 간 군사충돌이 아니라 동아시아 문명질서가 뒤집힌 사건으로 본다. 오랫동안 조선 지식인에게 중국은 문명의 중심이고 일본은 주변의 ‘왜’였다. 그런데 메이지유신을 통해 서양식 군대와 산업국가를 건설한 일본이 청을 압도적으로 패배시켰다.
이 전쟁으로 조선과 청의 전통적인 종속관계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내세웠지만, 그것은 조선을 진정한 자주국가로 만들기 위한 독립이 아니었다. 일본이 말한 조선 독립은 청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일본의 영향권에 편입하기 위한 외교적 언어였다. 따라서 청일전쟁은 조선이 중국으로부터 독립한 사건인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에 종속되기 시작한 사건이라는 이중성을 갖는다.
함재봉은 이 모순을 인정하면서도 청의 지배가 끝났다는 사실과 일본을 통한 근대제도의 도입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한다. 여기에서 그의 해석은 기존 민족주의 역사학과 뚜렷이 갈린다. 민족주의 역사학이 일본의 침략성과 조선 민중의 저항을 중심에 놓는다면, 함재봉은 조선의 구조적 무능과 개화파의 근대화 노력을 더욱 강조한다.
- 갑오경장―근대국가를 만들려는 시도
청일전쟁을 배경으로 김홍집·박영효·서광범 등 개화파가 권력의 중심에 복귀하면서 갑오경장이 시작된다. 군국기무처가 설치되고 신분제 폐지, 과거제 폐지, 재정 일원화, 조세제도 개편, 고문과 연좌제 폐지, 조혼 금지, 과부의 재가 허용 등 광범위한 개혁이 추진된다. 이후 내각제와 근대적 행정기관이 도입되고, 홍범 14조와 교육입국조서가 발표된다. 책은 청일전쟁과 갑오경장에 약 500쪽을 할애할 만큼 이 부분을 핵심으로 다룬다.
함재봉에게 갑오경장은 한국 근대국가의 기본 골격을 세운 결정적 사건이다. 오늘날 당연하게 여기는 법 앞의 평등, 능력에 따른 관리 선발, 근대교육, 독립적 재정, 중앙집권적 행정체계가 이 시기에 제도화되기 시작했다. 조선의 유교적 신분국가를 국민국가로 바꾸려는 혁명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개혁에는 근본적인 모순이 있었다. 개혁의 상당 부분이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일본 정부의 압력 아래 추진되었다. 개혁을 주도한 조선인 관료들에게 자율적 개혁 의지가 있었다고 해도, 개혁의 정치적 기반은 일본의 군사력이었다. 따라서 갑오경장은 자주적 근대화와 식민주의적 강제가 분리될 수 없을 정도로 뒤얽힌 사건이었다.
또한 개혁은 백성의 참여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분제 폐지와 같은 혁명적 조치가 시행되었지만 농민군은 진압되었고, 개혁의 주체는 소수 엘리트 관료와 일본인 고문이었다. 제도는 근대적이었지만 정치 과정은 민주적이지 않았다. 이것이 갑오경장이 사회적 지지를 확보하지 못한 중요한 이유였다.
- 삼국간섭과 일본의 후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랴오둥반도를 획득했지만 러시아·독일·프랑스의 삼국간섭으로 이를 반환해야 했다. 일본의 힘이 서양 열강보다 약하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조선 왕실은 러시아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명성황후는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이용하려 했다.
이에 일본 세력은 1895년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이 사건은 일본의 조선정책이 문명개화의 후원자라는 외피를 벗고 노골적인 폭력과 제국주의로 나아갔음을 보여준다. 일본인과 조선인 협력자들이 궁궐에 침입하여 왕비를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한 행위는 친일개화파의 도덕적·정치적 기반을 치명적으로 파괴했다.
뒤이어 시행된 단발령도 개혁의 정당성을 더욱 약화시켰다. 개화파는 머리 모양의 변화를 근대적 위생과 문명의 상징으로 여겼지만, 백성에게 상투는 유교적 효와 신체관에 연결된 것이었다. 국가가 강제로 머리를 자르게 한 것은 생활세계에 대한 폭력으로 받아들여졌다. 을미의병이 일어나고 반일감정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으로 친일개화파 정부는 붕괴한다. 갑오경장도 사실상 중단된다. 일본이라는 외세에 의존해 개혁을 추진했던 개화파는 일본의 힘이 약해지자 함께 몰락했다. 개혁의 내용이 아무리 앞선 것이어도 자주성과 대중적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하면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책의 성과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국내정치와 국제정치를 하나의 시야에서 본다는 점이다. 갑오경장을 몇몇 개화파 인물의 사상이나 일본의 침략정책만으로 설명하지 않고, 청·일본·러시아·미국의 세력관계와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 조선의 전략적 가치 상승까지 연결한다. 조선의 근대사는 조선 내부에서만 전개된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재편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둘째, 친일개화파를 결과만으로 심판하지 않고 그들이 처했던 선택의 조건을 복원한다. 1910년 병합 이후의 친일파와 1880~1890년대 개화파를 동일하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김옥균과 박영효가 일본을 선택한 것은 조선을 일본에 넘기려는 목적이 아니라 일본을 모델로 조선을 개혁하고 독립시키려는 목적에서 출발했다. 그들의 판단은 실패했지만, 처음부터 매국을 목표로 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셋째, 함재봉은 근대화가 순수한 민족 내부의 힘으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통념에 도전한다. 근대 한국의 제도와 사상은 중국·일본·미국·러시아와의 접촉과 경쟁을 통해 형성되었다. ‘순수한 한국적 근대’는 존재하지 않으며, 한국인은 외래 문명을 선택하고 번역하고 충돌시키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이 시리즈의 중요한 통찰이다.
- 비판적 평가
그러나 함재봉의 서술은 개화파를 지나치게 근대문명의 선구자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근대적 제도를 지향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의 정치적 선택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개화파가 일본의 침략적 성격을 충분히 경계하지 못했거나, 알고도 일본군의 힘을 이용했다면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함재봉은 조선 왕실과 위정척사파의 무능, 청의 간섭을 강하게 비판하지만 일본 제국주의가 처음부터 조선의 독립보다 자국의 패권을 우선했다는 점은 상대적으로 약하게 다룬다는 인상을 준다. 일본은 근대문명의 전달자이면서 동시에 군사적 침략자였다. 이 두 얼굴 중 하나를 약화하면 갑오경장의 본질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또한 개화파 중심의 서술에서는 동학농민군과 민중이 근대의 주체가 아니라 개혁을 촉발하거나 방해하는 배경으로 밀려나기 쉽다. 그러나 동학농민군 역시 탐관오리 처벌, 신분차별 철폐, 토지와 조세의 개혁을 요구했다. 엘리트 개화파가 위로부터 근대국가를 만들려 했다면 농민군은 아래로부터 정의로운 공동체를 만들려 했다. 한국의 근대는 두 흐름의 충돌과 좌절을 함께 보아야 한다.
무엇보다 ‘친일개화파’라는 이름은 설명과 오해를 동시에 낳는다. 당시 일본을 배우려 했다는 의미의 ‘친일’과 식민지 지배에 협력했다는 의미의 ‘친일’은 구별되어야 한다. 그러나 둘 사이에 아무런 역사적 연속성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일본의 힘을 빌려 근대화하려는 전략은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로 변해가면서 결국 조선의 주권을 훼손하는 통로가 되었다.
- 결론
『한국 사람 만들기 4』는 친일개화파를 찬양하는 책도, 단순히 변호하는 책도 아니다. 이 책은 조선 말기의 개화파가 왜 일본을 선택했고, 그 선택이 어떻게 갑오경장이라는 근대개혁을 가능하게 했으며, 동시에 왜 일본 제국주의와 결합하여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추적한다.
친일개화파의 비극은 그들이 근대화를 원했다는 데 있지 않다. 조선을 개혁할 국내 정치기반과 대중적 지지를 만들지 못한 채 외국의 군사력에 의존했다는 데 있다. 일본을 이용해 조선을 독립시키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일본이 조선을 이용하도록 만들었다.
이 책이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약소국은 강대국이 제공하는 제도·기술·안보를 받아들이면서 어떻게 정치적 자율성을 지킬 수 있는가. 개혁의 내용이 옳다면 외세의 힘을 빌려도 되는가. 국민의 참여 없이 엘리트가 추진하는 근대화는 정당하고 지속 가능한가.
함재봉은 친일개화파를 통해 한국 근대사의 불편한 진실을 드러낸다. 한국의 근대는 순수한 자주독립운동만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일본이 이식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개화와 침략, 자주와 의존, 문명과 폭력이 서로 얽힌 모순적 과정이었다. 이 모순을 직시하게 한다는 점에서 『한국 사람 만들기 4』는 논쟁적이지만 읽을 가치가 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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