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의 전력과 청군의 선전전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34회
법률방송
20,766 views Aug 2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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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간에는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청일전쟁에서의 일본군과 청군의 차이를 알아볼까 합니다. 근대화를 이룬 일본군의 전력은 어느 정도였는지 또 청일전쟁에서 가장 큰 전투 중의 하나인 황해해전에서 일본군의 전략과 전술을 살펴보고, 계속되는 패배에 청군은 어떻게 반응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또 이 전쟁을 바라보는 서구 열강들은 이를 어떻게 해석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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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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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안녕하십니까. 한국인의 탄생의
제재봉입니다. 어 지난 시간에는 우리가 그 평양 전투를 앞두고
대원군이 어떻게 개혁을 하기 싫은데도 불구하고 갑을 경장을 맡게 되면서
뭔 무슨 계획을 갖고 있었고 어떻게 해서 청군과 내통을 하고 동학권과
내통을 하고 그런 얘기를 살펴봤고 그다음에 이제 어 평양 전투에 대해서
어 봤습니다. 오늘은 그 평양 전투를 치르는 과정에서 일본군이 보여준 그 놀라운
전략, 전술, 기동력, 조직 어이 부분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즉 레이지션을 통해서 짧은 기간 동안에 전력을 키울 수 있었는가를 살펴보고 반면에
어 청구는 그 전략적 열쇠를 어떻게
만해했는지 만해라는 말이 좀 웃었지만 사실은 거짓 선전을 통해서 전쟁
내내지는 전쟁을 계속해서 자기네는 이긴다 그러면서 선전을 펼쳤습니다.
그 내용에 대해서 살펴보고 그리고 이제 그 최초의 대규모 해전인 황해
회전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인의 탄생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음악]
독일 신문은 어 전쟁 초기에 어 성환
전투 풍도회전 어 이런 전투를 치르는 천군과 일본 일본군을 보고 이런 어
보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30년 전 일본이 깊은 고립에서 깨어나 서구 문명에 자신을 접목시켰을
때부터 첫 과제는 육군의 재편이었다. 그 결과는 실로 경의롭다.
일본 육군은 실제로는 유럽의 군대이며 그 어느 육군 사단도 자꾸 준비가 안
된듯한 기병을 제외하고는 유럽 대륙의 어느 마을의 길거리를 행진한다면
처음에는 동양 군대인지도 사람들이 모를 것이다. 독일 시문이 이렇게 어
그 보도를 했고요. 그다음에 런던의 타임즈는 이렇게 보도를 합니다.
일본군은 용감하고 규율이 잡혔고 인내할 줄 알고 열정적이어서 비록
중국군이 유럽의 장교들에 의해서 훈련된 훌륭한 군인들이라 하더라도
지금 현재로는 일본군의 200년은 뒤졌다. 그리고 전쟁의 승리란 꼭
강한 자가이기는 것은 아니지만 군인을 판단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볼 때
조선에서 일본은 손쉽게 중국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벌써 전쟁 초기부터
이러한 분석들이 나오기 시작을 합니다. 자, 그러면 일본군은 어떻게 형성됐는가? 일본군은 1872년부터
징집을 시작했죠. 그러니까 메지우신에 대해서 말씀드릴 때 잠깐 언급을 했었지만은 1868년 메이지신을 하고
그리고 사무라이 사무라이라는 전쟁 전문가 계층을 없애 버리고 그리고
징집을 시작해서 전 국민의 상대로 징집을 시작해서 근대군을 편성하기
시작하는게 그게 1872년입니다. 이때부터 군복무 기간은 3년, 예비군
4년. 어 이렇게 하고 그리고 이제 병사들에게는
그 무라타 단발 어 후장식 장총 당시로서는 첨난 장총을 개발을 해서
자기네가 그 전 군에 이제 보급을 하기 시작을 합니다. 모든 거를 주기
역할을 하기 시작하고요. 육군은 여섯 개 사단. 어 그 그리고 동시에
전장에서 즉각즉각 그 상황에 대응하는 전술를 펴고하는 거는 철저하게
본인들한테 그거를 믿고서 맡깁니다. 대신 철저하게 훈련을 하고 그리고
믿고 맡깁니다. 이런 것이 충분하고의 아주 결정적인 차이들이 되겠습니다.
프랑스에서 나오는 신문에서는 이렇게 분석을 또 합니다. 두 군대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고 모든 장점은 후자 즉 1번측이 갖고 있다. 지난
25년 동안 일본은 승리하려는 놀라운 정신과 지향점과 지도력에 있어서
완벽한 일치를 이으로써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단합성으로 무장한 실로
균일한 육군을 창설하였다. 일본인들은 조금씩 외국인 고문들이나
기술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신들의 의도를 심기지 않는다. 그러니까 일본이 서양 것을 선진국 것을 마대로
받아들이면서 그거를 이제 자기네가 응용을 하기 시작하고 자신감이 생기면서 벌써 이때부터 외국 전문가
기술자들한테 의존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어이 친구들이 이런 걸 보이네 하면서
서양신문들이 벌써 인식을 하기 시작합니다. 해군은 요코스카, 구레, 사세보 등의 세 개 기지를 건설을
하고 각 기지에는 어 전함 네척으로 구성된 소함대를 또 어 하나씩 주둔을
시킵니다. 나가사키에는 지금도 있지만 어 커다란 그 거대한
조선소를 만들어서 자체적으로 군함을 건조하기 시작을 합니다. 육군은 당시
유럽에서 최강이라고 하는 프로이센의 육군을 그대로 따오는 거고 그리고 해군은
전 세계 최강이라는 영국의 해군은 내 모델을 따옵니다. 그러니까
이와꾸라사절단 그 이후에 끊임없는 유학을 통해 가지고 정확하게 전 세계 어떤 나라가
무슨 경쟁력을 갖고 있는지를 다 알아 가지고 입군사관학교는 독일, 교육은
미국 이런 식으로 아주 정확한 취사 선택을 하면서 각 분야를 키워 나갑니다. 전략은 알프레드 마한이라고
미국의 유명한 그 전략가 있죠. 미국판 그랜드 스타티지 전략을 짰든
마한이고 아직도 고전 중에 고전입니다. 그런데 마한 제독의
저술은 전 세계에서 다른 어떤 언어보다도 일본어로 더 많은 번역이
돼 있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일본 사람들은 당시 최고의
기술과 전술과 그리고 전략을 흡수를 합니다. 일본 6군의 청일
전쟁의 전략은 이렇습니다. 전쟁 시작되자마자 일주일 만에 전략을 확
확정을 해 버립니다. 그래서 병력을 제1군 2군으로 나누어서 야마가다리
도모가 1군을 이끌고 조선에 상륙해서 북진을하하기로 했고요. 그래서 평양을
탈란을 하고 그리고 이제 암록강을 건너서 만주로 들어가는 거죠. 오야마오가 지휘하는 이군 야오똥반도의
류순해군 기지를 점령해 갖고 그 후에 이제 베이징으로 어 향해 가는 거고
그다음에 만주에서 1 2군이 합려해 갖고는 그리고는 로에서 산동반도로
건너와서 외하회의 청원 기지 어 북양함대의 기지를 공략하는 방식으로
해서 전체적인 전략을 처음부터 정확하게 짜고 그걸 그대로 수행을 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반면에 청의 전략은 이런 겁니다.
뭐 전투 몇개 지더라도 결국은 장기전, 소모전을 통해서 하면은
일본이 아무리 초기에 전투 몇게 이기더라도 승리할 방법이 없다. 그러니까 자기네는 지면은 후퇴하고
내륙으로 후퇴하고 후퇴하고 후퇴하고 그러면은 결국은 일본이 어 항복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을 한 거죠. 그니까 장기전으로 가면은
물자나 인구나 모든 거에 있어서 절대로 일본이 중국을 이길 수 없다.
사실 그것이 중국의 청의 유일한 전략이었었습니다. 노보의 브레미아라고 러시아의 신문은
그런데 풍도회전 직전에 이런 기사를 냅니다.
일본인들은 비록 가끔 노력은 해보지만 자신들을 부흥시킬 수 없다. 중국인들은 결코 자신들을 부흥시킬 수
없을뿐만 아니라 그러길 원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일본군이 풍도
회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 일본 해군의 능력보다는 청해군의 무능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러시아 신문은
일본군의 능력을 전혀 평가를 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일본이 잘했다기보다 너무 청군이 형편
없으다. 이렇게 분석을 했었던 거죠. 그런데 그다음부터 평가가 변하기
시작합니다. 일본의 해군역은 함정이나 장교, 장비 등 모든 면에서 유럽의
해군과 비교하여도 전혀 손색이 없다. 천왕의 육구는 극동에서 유일하게
유럽의 방식을 따라 창설되었다라고 이제 주날드 쌍투페테르라고 이것도
이제 러시아에서 나오는 불어로 된 신문인데 이제 그렇게 보도를 하는 거죠. 그러니까 육군에 대한 평가도
변하기 시작하고 해군에 대한 평가도 이제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노이나 헤드
이런 기사가 나옵니다. 전 세계는 일본이 우리 유럽 사회의 진보를
배우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였는지 잘 안다. 덜 알려진 것은 우리와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보다 훨씬 오래된 실로 놀라운 고유 문명에
우리의 문명이 이식되었다는 사실이다. 일본이 어찌 그토록 빠른 속도로 자신들을 서구 문명과 대등한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는지 그리고 역사의 전례가 없는 경의로운 진보를 이룰 수
있었는지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러면서 일본군에 대한
이제 그 제대로 된 평가가 나오기 시작하고 일본 자체에 대한 어 그
평가 메이주신이라는이 근대와 가정이 얼마나 놀라운 성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청일 전쟁에서 일본군의 승전보를 접하면서
그 평가가 나오기 시작을 합니다. 반면에
청에서는 그럼 이렇게이 전쟁을 전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는가? 첫 번째
육상 전투였죠. 성환 전투에서 우리가 살펴봤지만은 전투 다운 전투도 못 해 보고 천구는
그냥 패터에서 도망갑니다. 전부 다 평양으로 이제 옮겨 도망가 버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노스 차이나
헤드가 성환 전투에 대한 기사를 냅니다.
그런데 그 기사라는게 뭐냐면은 성환전투의 청군 장수였던 섭지초
장군이 자기가 성환 전투를 치르고 나서 청종에다가 낸 보고서를 그
보고서를 이제 노스 차이나 헤럴드가 입수해서 그걸 바탕으로 이제 내용을
보도한 겁니다. 내용이 이렇습니다. 3,500명의 청군은 만 명의
일본군을 상대로 며칠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아산에서 퇴각했다.
처음에는 일본군이 격퇴당하고 많은 피해를 본받면 청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7월 29일 청군은 퇴각하면서 진중에 300명의 경비병들만 남기고 간다. 이들은
새벽에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생포된다. 경비병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일본군은 500명이
전사했으며 천군의 진 중에는 무거운 짐들 외에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일본군은 포로들을 모두
죽였고 주변에 중국인 민간인인들도 모두 죽였다. 그니까 무슨
내용입니까? 실제 일어난 상황과 완전히 거꾸로
완전히 반대로 낸 거죠. 그러니까 섭지초가 졌다라는 얘기를 못 하고
아산을 내줬다. 그렇죠. 거기서 퇴각했다라는 것까지 인정하지만
퇴각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됐었냐? 치열하게 싸웠고 일본군이 훨씬 더 많이 죽었고 자기네는 거의 부상자도
없고 사상자도 없고 무기도 다 갖고 와서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고 그렇죠. 그리고 일본군이 괜히
양민들을 학살하고 포로로 잡은 청군들을 다 죽여 버렸다. 이렇게 지금 문제 쓰는 겁니다. 왜?
섭취초가 그렇게 보고를 했기 때문에 보고서를 믿고 이제 기사가 나온 겁니다. 다음은
중국의 청의 군기 군기처 장관이죠. 거기 군기 대신 옹동화라는
유명한 당대 최고의 학자이면서 정치갑니다. 옹동화가
군기 대신입니다. 옹동화가 일기에다가 쓴게 있습니다. 그때에 그 풍도 회전과 성원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바로 그때에 쓴 일기에 이런 내용들이 나옵니다. 6월 28일 양력 7월 30일 흐림 이른 아침에
서북풍입으로 구름에 쌓인 태양이 드러났다가 금방 또 숨었다. 이날 사께서는 양전께 나아가 예를
행하셨다. 그러니까 그 양전이라는게 서태후 하고 동태후 두 양 두
태우한테 가서 어 예를 행하셨다. 일이 없으면 본래 입주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래서 소식을 알아보려고 월화문에 가서 경을 찾았는데 이미
가고 없었다. 경이 이제 경친왕이죠. 경친왕이 그 황제의 사춘 어으로서
이제 그 통리기무화문을 이제 그 지회를 하고 총리기무화문을 지휘하고
있던 사람입니다. 결국 나와서 황주관으로가 고향에게 속을 터놓고
얘기했다. 장초야도 와서 같이 얘기했다. 사초 오전 9시경에 헤어졌다. 잠시 후 고향이 굳이
와서는 아산에서 승전보가 왔다고 알려주었다. 오전에 나음헌이 나왔다.
유근실 초야가 앞뒤로 서신을 보내서 알리기를 23일에
아군이 외와 격렬한 전투를 버려서 외군 1,여명을 죽이고 우리 군대는
100여명을 잃었다. 하지만 외 병사가 5,명을 증언하고 또 평양이 이미 저들의 차지가 되었으니 득실과
승부의 결과는 아직 비교할 수 없다라고 했다라고 적어 놓습니다.
다음 또 29일에 이런 일기가 있습니다. 날씨가 맑아서 기분이 상쾌하다. 새벽에 입주하다가 건총문
밖에서 경를 뵙고 선체로 몇 마디 대화를 나눴는데 평양은 아직 잃지
않았고 어제는 와전이었다고 한다. 위마 좌명이 모두 의주에 도착했다.
24일에 아산에서 전투가 있었는데 승부를 알 수 없다. 소식이 불통이기
때문이다. 7월 초 1일기입니다. 밤에 초야에 서신을 받았다. 북양이
전보를 보냈는데 영국 화련선을 고임해서 인천을 탐지한다고 했다. 25일과 26일에 아군이 승리를
거둬서 적군 2천여명을 죽이고 한성 8리 지점까지 진격해서 주둔한다고
하니 매우 기쁜 일이다. 그러니까 전혀 지금 거짓 보고만 계속해서
청조정에 올라가요. 그래서 사실은이 섭지초의 허위 보고를 받고 청조정이
7월 31일 주청 대리공사 고무라주따로에게
국를 단절한다번하고 드디어 그러고 8월 1일 날 선전 포고를 청의하게
되는 이유가 섭지초에 보고해하면은 천군이 성환 전투에서도 이기고
그러면서 완전히 일본군을 쫓아내고 평양으로 물러서기는 는 했지만 아직도
오히려 전황이 모든 것이 천군한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라는 그
보고들을 바꿔서 자신만하게 선진 보고를 선전 보고를 했던 것입니다.
1894년 8월 3일에는 드디어 서태후가 섭취초 장군을 시야하고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상을 주는 측년까지 나옵니다. 이홍장의 전보를
보니 제독 섭지의 군대가 아산 등지에서 6월 25일 26일에 외인과
접전하여 외인 1천명을 죽였다고 하니 그 용맹이 실로 가상하다. 그 군사들에게 은자일만양을
상으로 드리니 군의 사기를 부ന്നു여라. 그래서 완전히 패퇴하고 상까지 봤습니다. 드디어
퍼가제트 영자 신문에 8월 6일자 영자 신문에 이게 전혀 지금 거꾸로 보도가 나오고
있다. 잘못된 거짓 보도가 나오고 있다라는 것을 알고서 펄말 가세트가
이런 기사를 씁니다. 동망으로부터 완벽한 헛소문의 바벨이
들려온다. 처음에는 일본이 해전에서 승리하였다고 하더니 그다음에는 일본이 지상전에서 패배하여 2,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는 공식적으로 천군이 아산에서 완전히 격파된 것이었고 비공식적으로는 천군의
전함 세척이 포획되었다고 한다. 만일 육지나 바다에서 전투에 이기지 못하면
종의 위에서는 이길 수 있으며이 모든 것을 서방에 알려라. 우리가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것은 아산 근처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사람들이 죽었다는 사실 뿐이다. 도대체가 청부가
조정이 발표하는 거는 하나도 믿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실제로 전항에 여기서 들려오는 얘기와 지금 정부에서
발표하는 거가 너무나 다르니까 이제 이런 거가 어 나오기 시작합니다.
광서제가 총황제가 섭치초에게 8월 26일 큰 상을 내리면서 이런 교지를
발표합니다. 섭취초의 군사가 승전한 공으로 황태 후의 은혜를 받들어 은자
이만양을 상으로 내려 군의 사기를 높이도록 하고 또 전보를 보니 공주로
가려고 할 때 외병 2만 명이 불류의 습격을 해왔다고 한다. 이들과 여섯시간 동안 맞서 외병
1,700여명이 죽고 우리 군사는 300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전략을
세워 수많은 적분을 물리치고 한강을 건너 평양에 진을 쳤으니 장수를 보내
일본군을 공격하도록 하며 전사한 장수와 병조를 구별하여 한편으로
질책하고 한편으로는 포상하도록 하였다. 원래 섭지초의 군사 수가 적은데 벼안감 몇 배나 되는 적분을
만나 약한 군대로 고립되어 싸우다 이번에 한 번 실수하였으니 공과가 동일하다. 패한 죄는 특별히 용서하고
또한 싸움에 패한 병사들은 더위를 무릎 쓰고 있는 힘을 다하여 충성을
바쳤으니 기특하다. 가장 심하게 다친 자를 가려 상금을 내리게 하고 섭지초는 이미 평양으로 들어가 대군과
합류했다 하니 급히 장수들을 거느리고 큰 공을 세워 크게 바라는 뜻을
이루라. 이홍장의 전부를 보니 섭취초가 전부를 보내 6월 25일에 성환 지방에서 접전하여 외병을 무수히
무찌르고 충 청주와 충주 김화등을 지나다가 여러 차례 외병을 만나
일일이 물리치고 방금 평양에 주둔했는데 힘써 싸운 자와 패한 자를 가려 상보를 해 달라 요청해 왔다.
이번에 섭취초가 적은 병력으로 대변과 맞서 싸워 6월 27일 이후로 쳐서
죽인 것이 5,여명이 되니 있는 힘을 다해 싸운 충성스러운 뜻에 대해
마땅히 큰 상을 내릴 것이다. 청종조차
전혀 전황이 어떻게 되는지 모릅니다. 지난에도 말씀드렸듯이
청구는 전통적으로 중국군은 장수는 해안 장수는
처형당합니다.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키다가 그 자리에서 전사를 해야 되는 것이고
갖고 있었던 무기나 이런 것을 갖다가 적군의 수중에 안 넘기기 위해서 부서
버리거나 이런 이런 것도 절대로 허역되지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섭섭지는 그야말로 신문에서 보도에서
말했듯이 실질적으로는 졌지만 말로라도 이겨야 되겠다 그래 갖고 왜냐면 자기가
목숨이 걸려 있으니까 그래서 저런 거짓 보고를 교명하게 쓰는 거죠.
평양까지 간 건데 페트에서 평양으로 간게 아니라 전략적인 후퇴를 잘해
가지고 후위를 도모하려고 평양에 아주 슬기롭게 들어간 듯이 그리고 그 와중에서 자기네가 워낙 군사 숫자가
져서 질 수는 밖에 없었지만 사실은 일본군한테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를
입혀서 뭐 일본군이 2만 명이었었는데 그중에 5천명을 죽였다. 뭐 만 명인데 5천명을 죽였다. 이런 식으로
보고를 올린 것입니다. [음악]
이렇게 청 조종은 그리고 실제로 전투를 했던
섭취초나 이런 사람들이 거짓 전항 보고를 하는 상황에서 어 황해 회전이
일어납니다. 어이 사진들을 자세히 보시면요.
일본해군의 전함 그리고 사실은 청 북양군의이
전함들이 전력들을 보시면 놀랍습니다. 여러분 당시 조선에는 군남 한 척도
없었습니다. 단 한 척도 없었습니다. 근대 군도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럴
때에 일본하고 청이 갖고 있었던이 놀라운 전력을 보시면은 그 당시에
조선과 일본과 청의 국력의 차이를 여실히 아마 어 절감하실 수 있을
거고요. 그리고 어 일본하고 천이 저런 전력을 갖출 수 있었다라는 것이
굉장히 놀랍고 부럽고 그렇습니다. 황해 회전의 우선 결과를
말씀드리면요. 청구는 두 척의 중형 순양함하고 세
척의 소형 순양함이 격침이 됩니다. 그러니까 다섯 척이 수양함, 다섯
척이 격이 됩니다. 나머지 전함들은 파괴가 되지만은 곧 수리에 들어가서
격집만 안 되면 다 곧바로 수리해서 쓸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718명이
전설하고 124명이 부상을 합니다. 반면에 일본은 군남 내척이 심각한
피해를 입점 한 척도 격된 거죠. 모두 4주에서 6주에 걸쳐서 수리를
한 다음에 다 전장에 다시를 합니다. 90명이 전사를 하고 208명이
부상을 하고 부상병 중 34명이 나중에 이제 병원에서 죽습니다. 이렇게 정확하게 그 사람들은 자기네
사상자 통계까지도 이제 냅니다.이 이 황해전의
중요성은 사실은 서로가 군함이 몇 척씩 격이 됐거나 뭐 사상자가
얼마나 발생했고 이거보다는 황해전을 계기로 일본이 완전히 재권을
장악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봤듯이
전쟁 초기만 하더라도 일본이 일군을 조선에 전개할 때만 하더라도
북양함대의 움직임이 굉장히 두려웠습니다. 처해의 제권은 기본적으로 외하의 외하고 루슨의
기지를 둔 북양함대가 재외권을 잡고 있는 거를 전제로 해서 일본은 그걸 어떻게 해서 견제를 하면서
육군을 수송선을 통해서 전개할까를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황해 회전을 통해서 재권은 완전히
어 일본으로 넘어가고 그다음부터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북양군 북양함대는
나와서 일본 연합한 함대하고 결전을 버리지를
않습니다. 숨어 다니고 피해 다니고 하면서 어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북양 해군까지 괴멸이 되면 이장 본인이 권력을 상실하게 될 거라고 생각해서 북양 해군이 나가서 싸우는
거를 두려워해서 내보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 웨이하이웨이에서
그대로 앉아서 제대로 나와서 싸워보지 보지도 못하고 괴멸이 돼 버립니다.
그래서 황해 전투가 그렇게 어 황해 회전이 어 중요합니다.
아까 잠깐 말씀드렸지만 황해 회전을 통해서 청은 순양함들
다섯 척인가만이 이잃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청군이 갖고 있는 전함
두 척이 있었습니다. 정원과 진원이라는 두 척의 전남이 있었습니다. 배틀십이죠. 제일 큰
전함인데이 전함들은 외국에서 사온 겁니다.이 사람들이. 그리고 이건 철갑판을
이걸 철갑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 일본 해군의 함성들이 갖고
있었던 제일 큰 포로 쏘더라도 다 포탄이 튕겨나갈 정도였다고 합니다.이
진원하고 정원은 근데 전혀이 전투에서
일본이 격침을 시키지 못합니다. 결국은 어쨌든 끝까지 남아 있게 됩니다. 그런데도 청은 북양함대를
제대로 활용을 전혀 하지를 어 못합니다. 문제는 사기였습니다.
황해전 유로는 완전히 이제 부양함대 사기가 땅에 떨어지고 정창 제독도
이제 제 그 함대 사령관도 사기를 상실을 하고 일본군을 계속해서 피해만
다닙니다. 자 그러면 황해전이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황해 회전은 암록강
바로 어기에 대록도라는데 그 대록도란 섬에 바로 앞에 청함대가
정박해 있다가 일본 함대가 온다라는 걸 알고 바깥으로 나갑니다. 나가면서
그 일본 함대를 이제 만나는게 1894년 9월 17일입니다. 그
당시 그 전쟁을 봤던 그 영국 어 그
해군 장교가 작성한 그 당시의 상황도입니다. 그래서 따루따오
그러니까 대록도라는 데에서 거기에서 그 쭉 나가기 시작하는 그 방사성같이
나가는게 그게 이제 청양함되이고 위쪽에서 이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쭉
가로질러오는 것들이 그게 이제 일본 연합함됩니다. 근데 이게
뭐냐면요.이이 전법이 이게 소위 영어로 crossing the t 한자로
정자 전법 뭐냐면은 해군 전함들은요 한포들이 다 옆면에
있습니다. 앞면에 이렇게 가고 있으면 앞에 포한 하나 정도가 있지만은 모든 한포들이 옆으로 향하게 돼 있지
않습니까? 해군 전술에 있어서 두 함대가 있 이렇게 해서 서로 만나 만나면은
아니면 이렇게 만나면은이기는 함대는 뭐냐면 먼저 상대방을 상대방이
이렇게 오고 있는데 그 앞을 가로지른 거죠. 그러니까 crossing the t라는게 뭐냐면 T자를
만든다라는 겁니다. 이렇게 오고 있다가 이렇게 돌아서 T자를 만들어 가는 거죠. 이렇게 나열 돼 있으면은
쭉 지나가면서 옆에 있는 포드를 적권을 저걸 향해서 그 쏠 수가 있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절대적으로 정차전법에서이 크ossing the t를 해야 되는 겁니다. 그거를
정확하게 알고서 일본군이 먼저이 T자를 만드는데 정자를 만드는데
성공을 합니다. 영국 사령관 말라르드가이
전투를 분석한 다음에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횡제는 보통 가장 약한
배들을 가운데 배치하고 가장 강한 배들을 양 측면에 배치함으로써 작은
배들이 공격당하는 것을 방지하는 지인이다. 그렇죠? 그러니까 이렇게 쭉 나갈 때 가장 큰 배들 저남들을
양쪽해서 저남들이 포를 그 상대방을 쏠 수 있게끔 해서 가운데 약한
배들을 놔야지 되는 건데 그러나 정여창은 가장 약한 화약을 보여한 함정들을 양측면에 배치함으로써 일단
전투가 시작되자 일본 전남들이 횡진의 오른쪽 날개를 우회하여 끝에 있는
배들을 측면 한포들을 사용하여 맹렬히 공격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왼쪽
날개의 전남 주척 역시 곧바로 신용을 이탈하여 도주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일본 한포들은 북양함대 기함의 앞도때를 맞춰 쓰러뜨임으로써 신호
깃발을 통한 청함대 간의 교신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전략에 있어서
전술에 있어서 완전히 실패를 합니다. 차이나 가제트가 상하에서 나오는 청
차이나 가제트 기사에 이렇게 이런 보도가 나옵니다. 청이 용맹하게 싸운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전투 내내
놀라운 전술를 계속해서 보인 일본에는 상대가 안 되었다. 불쌍한 청구는 이성을 잃고 정신없이 포를
발사하였지만 그들의 장교들은 서투은 항해술로 수병들을 적의 먹이감으로
만들었다. 반면 일본이 발사한 포탄은 모든 포탄은 명중하였다.
팬클리 일본에서 나온 영자 신문은 일본 전함들은 전투 진용을 시종일관
유지하였지만 청구는 곧바로 아무런 전술적 지위도 없이 싸워야 했다. 한
유럽 외교관은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일본이 해전에서 승리한 것은 일본
수병들의 실력과 용맹 때문이었지 그들이 타고 있던 전남 때문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원래 러시아 신문
같은 데서는 거꾸로 했었죠. 너무 충군이 실력이 떨어져서 진 거지 뭐
일본이 그렇게 훌륭한게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사실 전력 그 객관적인 그 포의 구경이나 이런 거를
봤을 때 전함의 크기나 이런 거 봤을 때 청군이 훨씬 앞섰는데 그럼에도
부활고 이것은 결국 일본 수병들의 월등한 실력과 용맹 때문이었다라는
평가를 합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요. 진원이나 정원이
도망가면서 계속 그걸 따라붙습니다. 일본 배들이. 그러면서 그걸 끝까지 추적을
해서 계속해서 쏘는데 일본군이 갖고 있는 가장 큰 포로 아무리 쏴도 사실
그 정원이나 진원의 그 갑옷을 그거를 뚫지를 못합니다. 거꾸로 그럼 공격을
해야 될 텐데 공격을 하다가 멈춥니다. 멈춘 일이가 뭔지? 포탄이 없어서 싸움을 못 하고 그냥 도주를
해 버립니다. 그리고 있었던 포탄들도 태반이 불량품입니다.
천군이 부양함 배가 계속 포탄을 쏘는데 터지질 않아요. 그래서 보니까
그 폭탄이 왔는데 그 안에 화약이 들어 있지 않고 시멘트로 차 있더래요. 어떤 포탄들은 도자기로
채워져 있기도 했다. 그러니까 와서 쾅 왔더라도 구멍은 날지 몰라도 터지질 않는다라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 배에 있는 군함에 있는 그 포의 구경에 맞지 않는 포탄들을 또 싣고
있는 경우가 태반답니다. 이건 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이제 물론
알려지는 사실이지만 그래서 사실 전쟁 내내 전투 내내 일본군은 청군을
굉장히 두려워하고 청해군의 실력을 과대 평가를 오히려 했다 그럽니다.
청해관을 맡고 있었던 그 하트 그 유명한 하트에 의하면은
청배들이 갖고 있는 주력 그 화기들이 전부 다 크럭 독일의 크럭제 크럭제
포들이었는데 최고의 좋은 포들입니다. 거기에 사용할 수 있는 포탄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암스롱 장총 같은 최첨단 장총들도 다 갖고 있었지만
거기에 있는 그 총탄들이 없었답니다. 이런 거를 보면서 런던 타임즈가 또
이런 기사가 나옵니다. 일본은 문명 세계가 생각하고 이룬 가장 훌륭한 것들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능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또 한 가지는 그렇게 배운 아이디어들을
실천에 옮길 줄 안다는 사실이다. 아시겠죠? 일본에 대한 그 바깥
세계의 평가라는 것이 이때부터 놀랍게 급상승하고 있습니다. 서양문명을
받아들여서 자기 걸로 소화해내는 그러한 국가로서의 위상을 확실하게
굳입니다. 자, 그러면 황해전이 이렇게 치뤄졌는데
청군측에서는 황해전에 대해서 어떻게 보고 했을 거예요? 궁금하시죠?
청군측에서 낸 정부에다가 낸 그 받친 보고서가 있습니다. 이렇습니다.
수적으로 우세한 외인의 함대와 싸워 적의 함선 세척을 격짐시키고 나머지도
모두 심각한 피해를 입혔지만 우리 배도 내척을 잃었다.
이용장한테 또 올라온 다른 또 다른 보고선은 이렇습니다. 서양의 해전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라고 그 묘사를 합니다. 그러면서 양측의 배들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특히 적군의 배들이 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적이 먼저
퇴각하기 시작하였고 따라서 승리는 우리의 것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후방이 교란되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고서가
오르니까 중국에서는 중국에서 발행되는 모든 신문들은 오히려 일본측의
전왕 보고를 전혀 믿지를 않습니다. 왜냐면 일본은 실제로 배가 한 척도 격침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보고를
했더니 일본이 거짓말을 하는 줄 압니다. 너무나 차이가 나니까. 그래서
중국에서 나오는 모든 신문은 영자 신문까지 다 해 갖고 청함정은 선어척이 격침이 된게 맞고 그런데
일본측도 분명히 굉장히 심각한 피해를 믿어 입었다는 식으로 다 보도를
합니다. 그런데 사실이 밝혀지는 계기가 생깁니다. 뭐냐면 9월 20일
이때 해전에 참전했었던 외국인 천군의 외국인 군사 고문들
풍도회전에서도 까오숑의 외국 그 독일 그 장교도 있었고 다 참관인들이 꼭
있습니다. 외국 군사 고문들이 있었는데이 사람들이 회전 끝에 이제 끝나고 귀국 귀환을 합니다. 중국으로
그래서 확실하게 이때 처음으로 전남 내척이 분명히 격침이 되었다.
근데이 사람들조차도 사실은 일본이 한 척도 안 잃었다라는 거는
그거는 아닌 거 같다. 그거는 일본이 왜곡하는 거 같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결국은 광서제가
청해 황제가 북양함대의 외국 고문 프로이센군 출신 한네켄 소룡을 소환을
합니다. 청황제가 청의 황제가 외국인 고문 정도 그것도 소룡 정도 되는
고문을 직접 불러서 친견을 하는 경우는 비슷한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광서제 입장에서는
뭔가 석연치 않고 궁금했던 거죠. 그래서 처음으로 외국인 고문을 직접
부릅니다. 한케는 프로이센 공병 출신입니다. 루션항 그다음에 외하의
외항의 그 거대한 그 놀라운 기지들을 구축
하는 거를 담당했던 어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어 바로이
한네켄이 풍도회전 때 까오흉에 타고 있어서 어
난이와가 왔을 때에 당장 항복하라고
아니면 격짐시키겠다 그랬을 때 그때의 청군들을 설득을 어떻게 하다가 결국은
실패하고 오히려 항복 안 하겠다고 그래서 이제 난이와가 바로 코앞에다
두고 어래를 싸서 격침을 하시키니까 그때 청병들은 다 수장이 돼 버리는 거고 간신히 이 맥큐로를 수영을 해가
가지고 살아남아서 돌아왔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황회전에 가서 참관을
했었던 거죠. 그러니까 그 한해 캔이니까 광세제가 부릅니다. 그러면서
이제 제대로 소식을 들었겠죠. 그러니까는 자기의 신하들이나 장수들이나 누구의 말도 믿지를 못하고
오히려 외국인 고문을 불러서 얘기를 들어야만 될 정도로 중국 조정
내에서는 어떤 보고도 전항 보고도 믿을 수가 없는 그러한 지경이 돼
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있어서 전력의 차이는 이로 말할 수 없고 사기의
차이는 이로 말할 수가 없었겠죠. 1894년 9월 7일자 the노h스
China her드 거기에서는 이런 기사가 나옵니다. 1884에서
1885년에 일어난 청불 전쟁 중 상하이의 중국
매체들은 프랑스군 사령관 쿠루베 제독이 전사했다고 37회 보도했고
이들의 통계에 의하면 전사한 프랑스군의 숫자는 160만 명에
달했다. 청불 전쟁은 시작한지 7분 만에 거의 모든 청의
전남들이 다 격심이 돼 버리고 그때 청이 갖고 있었던 가장 큰 무기창인
후조의 복주의 그 무기창이 완전히 파괴가 되는 괴멸 괴멸적인 타격이
있는 전투였었습니다. 그 역사상 최초로 어래라는 거를 어래가 투입이
됐던 전도였었고 바로 이쿠루베 제독이 그걸 사용을 해 갖고 시작한지
10몇분 만에 전투가 끝나 버렸던 그 전투인데 마강전이라는 그 전투에
대해서도 그 당시 상해 나온 프랑
중국 신문들은 그룹의 제독이 전사했다라는 보도만 37번이었고
실제로 그때 중국 신문들의 말을 믿는다면 그걸 토대로 전사한
프랑스군의 숫자가 160만 명이 된다라면서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외놈과 돼지꼬리의 전쟁이 시작된 후
이들이 쏟아내는 가짜 뉴스는 그저 경의로울 뿐이다. 아 거짓말장이라는
단어가 영어에서만큼 중국어에서도 강한 의미를 갖고 있기만 했다면 그러니까
영어로 라이어 그러면 굉장히 심한 욕입니다.이 이 신문 쓰는 하는 사람들 입장 가서는이
거짓말장이더라고 얘기를 하고 싶은데 그 말 자체가 중국어로는 별로 그렇게
나쁜 말로 들리지도 않을 정도. 아, 그래서 너무 안타깝다. 욕을 좀 거짓말장이라고 라이어라고 욕을 해
주고 싶은데 그 욕조차도 잘 먹히지가 않는다라는 얘기를 지금 하는 겁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저 중국인에게 너는 거짓말쟁이야라고 말해 주고 싶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결국은 청의 장수들은요. 이거는 도저히 숨길 수 없다고
생각되고 있는 모든 전황 보고도 다 거짓말이에요. 그래서 사실
청일 전쟁에서 천군 보고에 의하면은 천군은 한 번도 전투에서 진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중국계이 전근대 본건적인 군대의
전통은 아무리 충성스러운 장수라도 전투에서 패하면은 참수시켜 버립니다.
실제로 황제가 폐장은 황제가 베이징으로 불러 갖고 형부에서 취조를
하고 그리고 저작거리에 내 내보내 가지고 군중 앞에서 참수를 해 버리는
것이 그것이 관려였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한 가지가 더 있죠.
만일에 한족 장수가 나가서 패했으면은 그 한족 장수를
패했다고 해서 참수시키는 거에 대해서 만주 황실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오히려
환영을 했습니다. 그러니깐 청은 한 나라로서 싸운게 아닙니다.
실제 내용상으로도 이홍장 혼자서 북양군하고 북양함대를 가지고 이홍장하고 일본이
싸웠던 거고 끊임없이 이홍장을 견제하고 시기에서 어떻게 쓴지
북양함대를 이홍장으로부터 뺏으려고 하니까 이용장은 부양함들을 전투에 투입을 안 하려고 오히려 피해 다니게
만들었던 거고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패하면은 더군다나 한족이면은 자기네
의 만주적 정권을 유지하는데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그건 당연히 괜찮은 걸로 생각했던 거죠. 그러니까
태평국의 난이 일어났을 때 기억하시죠? 그때는 중국본
이홍장 이런 한족 사대부들이 황제하고
서태후의 명령을 받들어서 오히려 자기네 고향에 가서 향토근을
일으켜서이 사람들이 나라를 지켜줍니다. 청조를 지켜줍니다. 만주족의 청조를 지켜줍니다.이
사람들은 근데 끝까지 청조에 충성을 하죠. 실제로 중국분한테는 많은
사람이 당신이 황제하라고 한족 황제하라고 그런는데도 다 거절을 했고 오히려 전쟁 끝나자마자 상군을 해산을
시켜 버렸는데 이홍장은 그 자기 휘군을 그대로 갖고 있는 거죠. 그리고 회군을 갖고 있으면서 그러면서
어떡합니까? 그거를 가지고 일본하고 싸우는 거죠.
결국은 자기가 예상했던데 1번이 위험하다가는데 일본하고 역시 전쟁이 벌어지는데 그 안에서도 또 싸우는
겁니다. 또 다 갈라지는 겁니다. 전황이 나빠질수록
거짓말은 더 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청에서 청의 전쟁을 지휘하는 군기처 같은 데서는 전왕을 파악할 방법이
없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졌는지를 정확히 알고 무슨 전술과 전략 때문에
뭐가 어떻게 됐고 이런 거를 늘 정확한 전왕이 올라와야지 된 보고가
올라와야 되는데 그게 하나도 없습니다. 시작된 이후로 완전히
눈 가리고 전쟁을 하는 셈입니다. 풍도 회전 성환 전투에서 평행 전투를
하고 황해 회전을 해서 암록강을 건너가면서 류순으로 건 일본군이 순으로 전개가 되고 그죠? 여순으로
전개가 되고 왜 하이웨이로 되면서 완전히 베이징 수도로 들어오는 바로
앞에까지 왔는데도이 전 보고들이 하나도 안 들어갑니다.
이걸 전혀 모르고 있다가 외국인들이 자꾸 얘기를 해 주고 그리고 실제로
일본군이 쳐들어오는 거를 보고서는 그때 가서야 대응을 하고 그랬어.
그니까 자기네 수도의 바로 눈앞에까지 목존에까지 정권이 쳐들어오는 것조차도
파악이 안 되는 겁니다. 그 안에 내부적인 논리 자체에 의해서 있는
그대로 보고를 하고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따르고 그러면은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는 그러한 상황을 만들어 놨다는게 그게 나라가 망하는
방법입니다. 나라가 망하는 길입니다. 그런 논리가 횡행하게 되면 그 나라는
아무리 훌륭한 장소가 있고 아무리 훌륭한 무기를 갖고 있더라도 절대로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중국 청이 이렇게 지금 망해 가고 있습니다.
청정은 결국은 끝에 가서는 이제 알기 시작합니다.이 장수들이 엉뚱한 보고를
하고 있는 거구나. 그런데도 청조정 입장에서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거짓 보고를
자기네도 공표를 그대로 합니다. 어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태평국의 난
이런 거를 진압하는데 역할을 했던 상군 일으키고 회군 일으켰던 그런 4대부들 입장에서는
우리가 왜 이거를 전쟁을 못 이기냐 그럴 리가 없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끝까지 싸워야 된다. 끝까지 쌓여야 된다. 일했었습니다. 그런데요.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청의 4대부들은 자기네가지고 있는지를 몰랐답니다.
그러니까 조종의 극소수 몇 명 빼놓고 실제로 전쟁에서 패한 사람들 몇 명 빼놓고는 전쟁에서 다 이기고 있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수많은 사대부들의 상소가
전국에서 답지합니다. 그런데 그 상소들은 하나같이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라는 거를 전제로 했기 때문에 어처이 없는 제한들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청조종의 입상에서는 뭡니까? 만주족의 입장에서
한족을 절대 다수의 한족을 다스려야 되기 때문에 전쟁에서지고 있다라는 얘기를
하면 오히려 한족 사대부들과 백성들의 반란을
자극할까 봐 더더욱이 자기네가지고 있다라는 전왕 발표를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홍장에 대해서 결국 가서는 서양의 군사 고문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총독의 작전은 총독이라 이장입니다. 총독의 작전은 허세였을뿐
진정한 방어가 아니었다. 그의 육군과 해군은 중세 아시아의 군인들이 적군에
겁을 주기 위해서 썼던 무서운 가면과 같았다. 그는 실전에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러나
그는이 허세를 끝까지 가져간 나머지 더 이상 물러서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그리고 서태우는이 홍장을 계속 밀어붙였다. 일본은 포커 용어를
빌리자면 일본의 블러프를 코했다. 굉장히 내가 갖고 있는 패가 굉장히
약한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센 것처럼 허세를 부려서 상대방이 먼저 포기하게끔 하는 그 calling
the bluff. 근데 일본이이 허세에 부리는 거를 알고서 어쨌든
정확하게 공격을함으로써 블러프가
아무 소용이 없게끔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게 허세임을
여실히 보여줬다. 이런 이런 말이 되겠습니다. 1894년
겨울이 되면은 완전히 전세가 기울어집니다. 그럼에도 청의 장수들은
계속해서 가짜 승전벌을 올립니다. 외국인들은 이때에
청의 조종이 너무나도 전세를 왜곡하는 거를 보면서 이건 너무 도가
지나치다. 그러면서 청은 잘못을 뉘우치고 뭐를 개혁하려는 거보다 전부
다 자기네가 잘못하고 있는 걸 거짓으로 덮고 있는 나라구나. 이게 왜 중요하냐면요.
1860년에 신유 정변을 통해서 서태오하고
이홍장 이런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그러면서 총리암문을 만들고 그러고
양무운동을 시작해서 어 그때 외국 사람들 보고 야이 사람들 정말 놀랍
노력을 하는구나. 그래서 무슨 금능 기기창 이런 거를 기기창들을 다 만들
공장들 만들고 배를 건조하기 시작하고 이러면서 학교를 만들고 이러면서 아 이게 진짜 뭐가 돼 가는거나 하면서
그래서 한 10몇 년 동안 그걸 두고 보고 청이 그걸 할 수 있는 여지를 주기
시작을 하죠. 이홍장 같은 사람을 보면서 다들 아 중국에서 일부에서라도
참 놀라운 역할을 하는구나. 그러니까 이장이 전쟁 직전만 하더라도 군사 그
뭐죠? 시험 시입범을 보일 때 외국 기자들이 다 가서 보고 야 역시 대단하다 그러고 그랬다는 거
아닙니까? 그랬는데 전쟁이 딱 시작되고 설마
청이 질이야? 설마 중국이지 그래도 이기겠지 그러면서 계속 그러고 있었습니다. 근데 하나하나가 전부 다
거짓말입니다. 거짓말도 아주 심한 거짓말이고 나중에 이게 다 거짓말이라는게 누구나 다 알았는데도
군이 천군이 거짓말을 하는 거를 보면서 굉장히 열심히 노력을 했는데
최선을 다 했는데 실패한 군대화가 아니라 다 허장성세였구나.
아무것도 아니구나. 청에 대한 모든 신뢰와 청에 대한 지지가 그때부터
완전히 문제죠. 그다음부터는 열강들이 서구 열강들이 청을 도와줄 생각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래도 청을 살려 줘야 된다. 청조의 영향력을 유지하도록
도와주려고 했었는데이 청 전쟁을 적고 나서부터는 완전히 그 노력을 포기하면서 그 그다음부터 뭐가
벌어집니까? 중국을 수박 자르듯이 갈라먹기
시작하는 그러한 스크포 for Ch이나 청을 갈라먹기 위한 앞다툼의
경쟁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네. 오늘은 어 일본이 청일 전쟁을
어떻게 준비를 했었고 그리고 황해전 어 가장 중요했던 해전을 어떻게
승리로 이끌 수가 있었고 반면에 처음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폐전을
어떻게 거짓 홍보로 그거를 커버를 하려고 그렇게 애를 썼었던가 그
과정에서 청에 대한 서구 열강의 신뢰가 완전히 무너지고 중국에 대한
본격적인 침탈이 시작되는 계기를 마련하는 반면 일본의 의상은 전
세계적으로 올라가기 시작해서 오늘날까지도 일반적으로 일본이 선진국이라는 어떠한
그런 그 국제적인 인식이 고착된 것이 바로이 청일 전쟁이었다. 그 말씀을
이제 드렸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그다음 전투 평양 전투 다음으로 루션
전투입니다. 큰 전투가 있고 외하이웨의 전투가 있고 그 두 전투에
대해서 전쟁이 어떻게 이제 결말에 이르는가에 대해서 어 말씀을 드리는 한편
바로 그때의 조선에서는 1차 가보 개혁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대원군을 결국은 1번이 축출을 해보고 하고 1번에서 돌아온 박영효를 앉혀서
제2차 갑을 시작하는 하는 그리고 그 와중에 2차 동학이 일어나는 그 어
상황을 어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통해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한국인의
탄생 오늘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입니다.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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