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25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 성석제 | 알라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 성석제 | 알라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석제 (지은이)창비2002-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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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리뷰
"철딱서니 없는 세상, 웃음으로 한 대 패주기"
2년여 동안 발표한 일곱편의 중.단편을 묶은 소설집. 표제작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능청과 재치, 고전소설식 인물소개가 주를 이룬다. "황! 마안-그은 백분, 찝원, 여끈, 팔푼, 두 바리"란 주제가가 울려퍼지고, 드디어 성석제의 개인기가 시작된다.

반푼이 만근, 그와는 열 댓살 밖에 차이나지 않는 철부지 어머니, 싸가지 없는 아들이 명랑 극장의 주인공들. 이들의 합심 연기는 구봉서, 서영춘 콤비를 뺨친다. 소설이 이렇게 재밌어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다.

웃음에도 인이 배길 무렵, 작가는 본격적으로 농가 부채를 거론한다. 정부에서 대주는 농어촌 대출이 농민을 더 괴롭게 한다는 철퇴와 같은 호통. 또릿또릿한 목소리로 작가를 대신하는 이가 만근인 걸 보니, 그는 본래 반푼이가 아니었나 보다.

뭐, 만근이가 반푼이냐 아니냐는 중요치 않다. 반푼이 같은 사람이 오히려 사태의 본질을 더 잘 꿰뚫어 보는 법이니까. 이런 저런 논리에 둘러싸여 있어도 알맹이는 언제나 단순명쾌하지 않던가. 그래서 겉으로 똑똑한 척, 영리한 척 하는 사람들이 늘 더 크게 속는다. 국가에 속고, 은행에 속고, 사람에 속고.., 그래놓고도 만근이 같은 이를 흉보고 다니니, 세상은 참으로 요상한 곳이다.

그에 대면, '천애윤락'은 복잡다단한 사람의 속내를 지도처럼 펼쳐 보여준다고 할까?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부자 친구가 해를 더해 갈수록 베푸는 것 없이 마음이 짐, 물질적인 짐이 되어가는 과정을 심심찮게 그린 소설이다.

막상 외면하자니 마음이 짠하고, 도와주려니 그 골치아픈 삶이 이해가 안 돼서 주인공은 화가 치민다. 살면서 이런 일 한번 겪어보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애저녁에 인정을 불살라 먹은 놈이거나 원래부터 친구가 하나도 없던 자식일게다. 그만큼 흔하디 흔한 이야기다. (그래서 제목도 '모두 다 아득히 먼 곳을 떠도는 외로운 사람 어쩌자고 서로 만나 알게 되었는가'라고 붙였다지...)

이 2편의 소설을 소개하는 데만도, 이렇게 많은 지면을 쓸 수 있다. 그만큼 소설의 재미가 읽고 난 뒤에 더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소설을 읽는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 그 소설의 광고주가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주저없이 이 책을 읽어도 좋다. 그리고 광고주 마음대로 광고를 찍도록!!
- 최성혜 (2002-06-25)


목차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천애윤락
쾌활냇가의 명랑한 곗날

천하제일 남가이
욕탕의 여인들
꽃의 피, 피의 꽃

해설 | 정호웅
작가의 말


책속에서


•••• 선생은 어리석게 태어났는지는 해가 가며 차츰 신지가 돌아왔다. 하늘이 착한 사람을 따뜻이 덮어주고 땅이 은혜롭게 부리를 대주어 알껍질을 까주었다. 그리하여 후년에는지혜로웠다. 선생은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듯 그 지혜로 어떤 수고로운 가르침도 함부로 남기지 않았다. 스스로 땅의 자손을 자처하여 늘 부지런하였다. 그러니 선생은 술로써 망한 것이 아니라 술의 물감으로 인생을 그려나간 것이다. 선생이 마시는 막걸리는 밤이면서 사직의 신에게 바치는 현주였다. 근원이고 낙천의 하였다. 아아, 선생이 좀더 살았더라면 난세의 혹염에 그늘의 덕을 널리 베푸는 큰 나무가 되었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아니하고 하지 않는 삶이었지만 선생은 깊고 그 경지를 이루었다. 보라, 남의 비웃음을 받으며 살면서도 비루하지 아니하고로 할 바를 이루어 초지를 일관하니 이 어찌 하늘이 낸 사람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이 어찌 하늘이 내고 땅이 일으켜세운 사람이 아니라. 접기 - marx94
농사를 짓되 땅에서 억지로 빼앗지 않고 남으면 술을 빚어 가벼운 기운은 하늘에 바치고 무거운 기운은 땅에 돌려주었다. 그러므로 선생은 술로써 망한 것이 아니라 술의 물감으로 인생을 그려나간 것이다. 선생이 마시는 막걸리는 밤이면서 사직(稷)의 신에게 바치는 현주였다. 힘의 근원이고 낙천(樂天)의 뼈였다. - 시니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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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은




저자 및 역자소개
성석제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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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문학동네』에 단편소설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첫사랑』 『호랑이를 봤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참말로 좋은 날』 『이 인간이 정말』 『ㅤㅁㅢㅤ리도 괴리도 업시』 『사랑하는, 너무도 사랑하는』, 장편소설 『왕을 찾아서』 『인간의 힘』 『도망자 이치도』 『위풍당당』 『투명인간』 『왕은 안녕하시다』(전2권), 산문집 『소풍』 『성석제의 농담하는 카메라』 『칼과 황홀』 『꾸들꾸들 물고기 씨, 어딜 가시나』 등이 있다.

수상 : 2019년 조정래문학상, 2015년 채만식문학상, 2015년 요산김정한문학상, 2014년 요산김정한문학상, 2012년 무영문학상, 2005년 오영수문학상, 2004년 현대문학상, 2002년 동인문학상, 2001년 이효석문학상, 2000년 동서문학상, 1997년 한국일보문학상
최근작 :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소설의 첫 만남 1~10 세트 - 전10권>,<느낌 그게 뭔데, 문장> … 총 146종 (모두보기)
인터뷰 : "기억" 말로, 언어로 기록하고, 붙잡아야 할 <이 인간이 정말> 성석제 인터뷰 - 2013.11.14
성석제(지은이)의 말
내가 친 그물이 성글어 보인다.
성긴 그물이여, 나라도 엮어볼 테냐, 잡으려느냐.

이 책을 당신, 천지의 붉은 물고기처럼 유유한 존재께 바치노니, 나는 당신들과 다르고도 상관없어 보이는 모든 것, 나무와 돌, 하늘, 바람, 아카시아꽃에서 언제나 당신들을 느낀답니다.






북플 bookple
이 책의 마니아가 남긴 글
친구가 남긴 글
내가 남긴 글











예전에 아끼던 책들은 <창작과 비평>에서 출간된 책이 많았는데, 시간이 지나다보니 모든 책을 끌어안지 못하고 극히 일부분만 남아있네요.

















오래전에 출간된 대중소설이 많이 그러하듯 흔히 '갱지' 라고 부르던 종이 재질이라 낡은감이 심하게 있지만, 글 내용은 재미있어서 형제들이 모두 돌아가며 읽어봤던 [소설 동의보감].









소장하고 있는 도서는 1990년 출간된 이은성 작가 [소설 동의보감]



기존 역사를 근거로 허준의 생애를 작가가 무한 상상력 발휘해 소설로 재탄생 시켰던 글.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전 7권의 국내편 과 4권의 일본편까지...

국내편은 5권까지는 열심히 구매해서 읽었는데... 7권이 나오고 일본까지 영역을 넓히셨군요.

문화유산 사진과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면서 답사 당시의 에피소드까지 읽기 쉽게 풀어놓은 글이라 저의 소장 도서도 '출장'을 많이 다녔었죠. 지금 내게 남은건 달랑 1권 뿐이지만 ~























그리고,







































펜을 갖고 노는 작가 성석제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읽으면서 자꾸만 허무에 빠져들게 했던 은희경 [마이너리그],

판타지인줄 알았지만 씁쓸함을 남겼던 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빵집에 찾아드는 사연들. 구병모[위저드 베이커리],











































기대가 컸기에 나홀로 실망한 황석영 [바리데기],

이제는 주변에서 심심찮게 벌어지는 일들 때문에라도 무거운 마음으로 읽고 공감하며 여운을 남겼지만, 순수 창작하는 작가들을 새삼 찾게 만들었던 찝찝한 글 . [엄마를 부탁해] 양심에 부탁해! 오래전, 작가의 글을 좋아했던 시절에 역시나 구매했던 [오래전 집을 떠날 때]













박완서 [너무도 쓸쓸한 당신]

















<창작과 비평 창간 30주년 기념 작>







[작은 이야기 큰 세상] 작가들의 단편을 모아서 만든 30주년 기념 작.

송기숙 <고향 사람들 >, 손춘익 <벽화>, 김만옥 <나팔을 불어라>, 김향숙 <아버지의 의자>, 이병천 <고려장 소고>, 김인숙 <나비의 춤>, 김영현 <개다리 영감의 죽음>, 이남희 <사십세>, 최윤 <전쟁들:집을 무서워하는 아이>, 정태규 <길 위에서>, 김소진 <마라토너>, 최임순< 저들의 마당1>, 한창훈 <증인>, 배수아 <마을의 우체국 남자와 그의 슬픈 개>, 이상권 <살구꽃은 소리없이 진다>, 박현 <회색 눈보라>















한강 [소년이 온다]

말이 필요없는 글.

분명 훌륭했으니 작가에게 해외 유명 상을 안겨준 작품이겠지만, 저는 그 글보다 [소년이 온다]가 더 강렬하게 남아요.



























이번에 책장을 뒤적이며 꺼내본 도서들 이예요.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글이 많아서 도대체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며 이 글들을 읽었었나 싶네요. 군데군데 접어놓은 곳도 있고, 아직도 책갈피는 그대로 꽂혀서 줄 그은 부분도 있는데.... 분명 좋았으니 멀쩡한 책에 지금이라면 책 손상 된다며 하지 않았을 줄긋기도 했을텐데 말이죠.

미친듯이 제대로 읽지도 못할 신간을 데려올게 아니라 나름 좋았기에 '팽' 당하지 않고 책장에 남아있는 이 소중한 글을 다시한번 읽어봐야겠어요.





처음엔 신선해도 지나다 보면 비슷한 글들이 넘쳐나고, 책을 팔겠다며 냄비와 라면을 들이미는 출판사도 많아지는 요즈음, 독자에게 시끄럽고 무책임하다는 기억 보다는 [창비]가 앞으로 몇십주년, 몇백년 기념을 할지 모르지만 책임 있는 출판사로 남으면 좋겠네요.


별이랑 2016-10-04 공감 (15) 댓글 (1)





독서회에서 소설 읽기의 장점은 이런 것이다. 혹은 단점도 이런 것이다. 아~좋은 책이야!, 뭐가 이래ㅡ.ㅡ; , 오..비극적이다..,하고, 가만히 혹은 탁! 책을 덮고 말 수 없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말해야 하니까, 내 취향이 아니예요 하고 입을 다물수는 없으니까, 어떤 이야기라도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이 매우 쉬운 책도 있고, 너무 힘든 책도 있다. 너무 재미가 없어서 아무리 생각하려 해도 생각할 거리가 없는 책도 있고, 목구멍이 뻐근하거나 혹은 콧구멍이 새큰거려 그 들끓는 감정을 딱딱한 언어로 뭉쳐낼 수 없는 책도 있다. 그래도 무언가를 쥐어짜내게 되는데, 새로운 생각의 촉매가 될 때도 있고, 아련한 느낌을 파사삭 깨버릴 때도 있다.



성석제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굳이 말하라면 후자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글머리를 이렇게 시작해버리면 당연히 양자택일의 압박에 놓이게 된다. 그러려고 시작한 말이 아니라면, 저 !와 ㅡ.ㅡ;와 ...는 새빛 둥둥도 아니고 낙동강 동동 오리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또 글이라는 것이 그렇게 앞뒤 딱딱, 가로세로 각맞는 그런 것도 아니다. 콧구멍은 간질거리는데,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잘 잡히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또 헐벗은 언어가 붙들기에는 너무 풍부한 어쩌고 그런 것은 아니다. 재미있는데, 재미있다고만 말하기에는 그렇고, 무언가를 더 파고 들기에는 평론가의 영역이 될 것 같고, 일상과 엮어보기에는 너무 이야기가 많다. 단편집이 이야기가 많은 것은 당연한데, 어느것 하나 그저그렇게 넘겨버리기에는 아까워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 하나하나 다 이야기하려고 덤벼들다간 독서회 회원들의 눈총에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안그래도 말이 너무 많아 요주의 인물이 된 지 오래다.



7편의 단편 중 마지막인 <꽃의 피, 피의 꽃>이 경험상(?) 제일 친숙하다. 이 단편에는 세상의 모든 도박이 등장한다. 섯다, 도리짓고땡은 기본이고 고스톱, 포카를 거쳐 전자오락 도박, 경마, 라스베가스까지 좌악 펼쳐진다. 하나 없는 것이 있다면, 나의 친애하는 지인께서 말씀하신 "세상의 가장 큰 도박"인 주식만 빠져 있다.



세상의 이 잡다한 그러나 거대한 도박 중 내가 직접 해본 것은 고스톱 같은 민속놀이를 빼면 경마다. 한 두번이 아니라 한 두 번의 한 이삼십 배는 될 듯 하다. 나야 기껏 하루 열두 경주 중 총 일이만원 정도 잃을 간덩이밖에 안되지만, 낮게 깔리는 음악과 함께 "제 9경주, 마권 발매가 시작되었습니다"라는 방송이 나오면, 초대형 전광판에 숫자들이 촤르륵 나타났다 또 촤르륵 바뀌는데 ,그것이 꼭 바람따라 이리 누웠다 저리 눕는 황금들판의 물결처럼 눈부시었다. 수백에서 시작해서 수천, 수억, 수십억으로 불어나는 그 숫자들의 물결을 보노라면, 어떻게 이삼십분 사이에 저렇게 많은 돈들이 한꺼번에 밀려드는지 봐도 봐도 신기했다.



그러나 배팅에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부터는 화장실이며 실내 객장이며 너른 경마공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가끔 시사프로에 나오는 경마장 꽁지며 큰손이며 예상전문가들도 보게 되고, 일가족이 둘러앉아 예상지에 머리를 맞댄 모습, 피니시 라인에 코차로 들어오지 못한 기수를 향해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으며 수십만원인지 수백만원인지 알 수 없는 마권을 뿌려대는 사람들의 말할 수 없는 상실감도 목격하게 된다.



거기에 인생을 건 모든 사람들도 결국 승자는 마사회라는 것을 알고 있다. <꽃의 피, 피의 꽃>에서 친절하게 설명하듯, 총 배팅 금액 중 72%만 배당금으로 경마꾼들에게 돌아가고, 나머지 28%는 마사회로 들어 간다. 판돈의 100%가 돌아도 딴 사람과 잃은 사람이 갈리기 마련인데, 그 판돈이라는 것이 한 판에 28%씩 줄어드는데, 하루 12경주를 모두 배팅하고 나면 결국 처음 100원으로 시작했다면 1원만 가져갈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 1원 중 딴 사람도 나오지만 당연히 잃은 사람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매 경주 사람들은 기대에 차 배팅을 한다. 간혹 1000배 이상의 배당이 터지기도 하는데, 만원만 걸면 1000만원을 따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은 한방이니까.



<꽃의 피, 피의 꽃>의 마지막 메시지는 이거다. 몇번을 읽어봐도 결정적인 오타가 있긴 한데, 게임이란 혹은 도박이란 이런것이다,라는 명시적 교훈이다. 가위바위보를 하는 두 사람이 있다. 아이들도 하는 게임이지만, 이 가위바위보는 목숨을 걸고 하는 내기다. 그런데 한 사람은 가위를 낼 수 없다. 상대편은 가위바위보 모두 낼 수 있다. 어떻게 될까? 거듭 말하지만 목숨이 걸려있다. 셋 모두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유리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현실과 확률은 다르니까. 내가 자유롭게 셋 모두를 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자. 나는 무엇을 낼 것인가? 상대는 무엇을 낼 것인가? 결론은 이 게임은 끝날 수 없다는 것이다.



「바위, 보 밖에 낼 수 없는 사람은 상대의 문제를 잘 알고 있다. 당연히 보를 낸다. 비긴다. 1라운드는 끝났다. 2라운드에서도 두 사람은 또 보를 낸다. 비겼다. 2라운드 끝. 3라운드에서도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보를 낸다. 역시 비긴다. 가위바위보에 목숨이 걸려 있다는 걸 상기하라.

두 사람이 늙어 죽을 때까지 같은 라운드가 되풀이될 것이다. 이것이 게임이다. 게임을 더 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는, 목숨을 거는 것이 게임이다. 목숨을 걸지만 아무도 서로의 목숨을 가져갈 수 없는 것이 게임이다. 게임이다.게임.다행인지 불행인지 인생에는 게임이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게임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p288~9」



바위,보 밖에 낼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 셋 모두 낼 수 있는 사람에게 도대체 어떤 문제가 있다는 걸까? 이 비밀을 눈치채셨는가? 셋 모두 낼 수 있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 선택의 경우가 있다. 이기거나 비기는 것, 이기거나 지는 것, 그리고 비기거나 지는 것이다. 목숨이 걸려 있다면 당연히 '지는 것'이 들어가는 경우는 선택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이기거나 비기는 것이다. 그것이 보를 내야 하는 이유다. 내가 보를 내면 가위를 낼 수 없는 상대는 보나 혹은 바위를 낼 것이다. 보를 내면 비기게 되고, 바위를 내면 내가 이긴다. 그런데 머저리가 아닌 이상 상대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도 당연히 보를 낸다. 죽을 때까지 보를 낼 수밖에 없다. 내가 진짜 도박꾼이라면, 오후 4시의 권태를 이길 수 없어 손가락을 걸고 내기 상대를 찾아 헤매던 허영만 만화의 주인공 허슬러라면, 나는 아마 가위를 낼 것이다. 상대가 나의 약점을 알고 보를 낼 것이라 예상한다면 나의 가위는 그만큼 승산이 있다. 그러나 가위에는 그만큼의 부담도 있다. 바위가 나오면 내가 죽는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다. (그런데 이걸 부추기는 소위 멘토들도 많으시다.) 그러나 목숨은 손가락이 아니고, 왠만한 우리들은 죽어나 사나 보를 낼 수 밖에 없다. 그것이 게임이고, 그것이 인생이란다. 그런데 성석제는 게임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한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시는가?
말리 2014-11-06 공감 (13) 댓글 (0)













황만근'은 바보'다. 띨띠리, 띨빵, 반편이, 쪼다-쉬, 빠가야로, 기봉이, 영구, 헐렁이, 개구리, 깍두기'다. 하지만 그'는 사실 알차다. 신대리 농민들이 모두 빚더미'에 시름시름 앓을 때에도 우리 만근'은 근면과 성실로 가계 빚 하나 없이 잘산다. 그뿐이 아니다. 그는 마을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서 열심히 일을 한다. 그는 < 마을길 풀깎기, 도랑 청소, 공동우물 청소...... 용왕제에 쓸 돼지를 산 채로 묶어서 내다가 싫다고 요동질하는 돼지에게 때때옷을 입히는 > 일도 한다. 궂은 일은 모두 도맡아서 한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다. 그런데 황만근이 사라졌다. 만근이가 사라지가 그의 부재는 마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큰 구멍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만근이가 했던 궂은 일을 하며 그를 그리워한다. " 만그이 자슥이 있었으마 내가 돈을 백만 원 준다 캐도 이런 일은 안 할 낀데, 아이구. 이 망할놈의 똥냄새, 여리가 싸놔 그런지 독하기도 하네. 이기 곡속한테 독이 될지 약이 될지도 모르겠구마. "



- 만그이, 어데 갔노 中













천재와 바보















어머니'는 늘 우스갯소리로 한동네에 살던 또래 만식이' 얘기를 하신다. 이 이야기'는 그 옛날 보릿고개 시절 이야기'다. 지금처럼 풍족하지 않던 시절이라 끼니 굶는 경우가 허다하다 했으니, 고기 구경'은 동네 잔치'가 아니고서는 구경하기 힘든 풍경이었다고 한다. 돼지 한 마리 잡아다가 가마솥에 우거지에 넣고 된장 풀어 한솥 끓인 괴깃국 맛이란 ! 동네 잔치'가 벌어지면 동네 일꾼 만식이'는 분주하다. 장작을 패고, 물을 나르고, 잔심부름'을 하고. 가마솥에서 보글보글 연기가 피어오르면 만식이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난다고. ( 이거 tv 특종 세상에 이런 일'이 멘트처럼 들리는군. ) 침이 고인다고. 아 ! 침이, 고인다, 고......



이즈음 동네 사람들이 만식이를 놀린다고 한다. 동네 어른들이 만식이가 짝사랑하는 월례'를 들먹이며 ( 달밤 아래 냇가에서 훔쳐보았던 월례 젖가슴은 얼마나 뽀얗던가! ) 한 마디 한다. " 우리 월례는 괴깃국 좋아하는 남자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며 ? 우리 만식이도 괴깃국 별로 안 좋아허지. 아마. 늘 먹는 게 괴깃국이라며 ?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괴깃국이 꿀맛이지만서도. 만식이는 부자여. 누군지 몰라도 만식이에게 장가 가면 팔짜 핀 거여, 안 그려 그려 ? " 신호가 떨어지면 동네 사람 모두 다 이구동성으로 " 만식이이이이. 부자아아아아아아 ! " 큐 사인이 떨어지면 월례는 부끄러운 척을 한다. 그러면 만식이는 흘끔흘끔 월례를 보다가, 흘끔흘끔 점례를 보다가 한 그릇 퍼 담아주는 고깃국'을 일일이 사양하며 큰소리로 외친다고 한다.



배부르다고. 배고프지 않다고. 뱃속 거지가 훅 들어왔다가 훅 나갔다고. 괴기 별로 안 좋아한다고. 늘 먹는 게 괴깃국이라고 ! 아. 뱃속에서는 박연폭포 같은 번개가 으르렁으르렁거리며 소리를 내는데, 괴기 생각만 하면 입에 침이 괴는 데에에에에에에..... 동네 사람들은 웃음을 참으며 만식이에게 말한다. " 그려. 글지, 암... 글구 말구. 떡집 아들이 떡 헐레벌떡 먹는 거 봤는감 ? 우린 여기서 쬐께 괴기 좀 뜯다 갈 테니께, 자넨 볼 일 다 봤으니 집에 가 있어. 이젠 뭐 할 일도 없잖혀 ! " 아, 일만 하다 쫒겨나는 만식이. 어슬렁어슬렁거리다가 뒷마당 가서 운다. 어머니는 이 즈음에서 웃음을 참지 못한다. 늘 듣는 얘기'지만 나도 여기서 웃음을 참지 못한다. 만식이를 놀리는 데 앞장섰던 월례 아버지는 박장대소를 하며 만식이 없는 마당에서 만식이 칭찬을 한다.



" 우리 만식이가 바보여두 동네 일은 을마나 잘하는겨. 변소깐 똥 풀 때 봐봐. 똥물 튀어도 씨익, 한 번 웃어주고 계속 똥 푸잖어 ? 여보게들, 만식이 거시기 보았는가 ? 워메. 글씨 목간에서 만식일 만났는디 글씨 만식이 거시기 그것이 미꾸린 줄 알았는디 장어여, 장어 ! 을메나 길고 튼튼한지.... 첨엔 다리가 세 개 달린 줄 알았단 말이여. 어 ?! 얼라 ! 이 사람들 보게. 농담 아니여. 만식이 지금 뒷마당에서 울고 있제 ? ㅋㅋㅋㅋ 월례야, 가서 한 그릇 넉넉하게 담아 주고 와라. 늙은 노모, 병수발 든다고 얼마나 고생이 많냐. 만식이 효자여, 효자 ! 그런 놈 읎다. " 누가 그 소리를 듣다 외친다. " 그럼 월례 만식이한테 시집 보낼껴 ? " 월례 아버지가 정색을 하며 말한다. " 떽 ! " 일동 까르르르르르르르. 참... 깔끔한 토론이다.



어머니는 그때를 회상하며 말하고는 했다. " 얘. 얘. 한참 있다 보면 만식이가 안 보인단다. 어디 담' 아래에서 울고 있는 게지. 배가 고파서 말이다. 얼마나 먹고 싶었겠누. 그러면 월례 고것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만식이에게 다가가 괴깃국 한 그릇 수북히 담아 갔다 주고는 했지. 어찌나 잘 먹던지. 만식이 가는 손'에는 누워 있는 엄마 몫도 챙겨서 보내고는 했단다. 지금 만식이 뭐 하나 모르겠다. 옛날에는 늘 동네바보 하나씩은 다 있었는데 말이다. 요즘은 사람들이 굶지 않아서 그런가 바보'가 없어 "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마음 한 켠이 짠하다. 만식이 아저씨, 잘살고 계실까 ?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만식이 아저씨가 보고 싶다.



나는 동네 바보가 이건희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이건희가 동네 바보'보다 더 똑똑하다고도 생각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동네 바보가 이건희보다는 더 인간적이라고 생각하며, 굳이 비유를 들자면 보다 더 자연 친화적 무공해 채소'라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질문을 던졌다. ( 루스벨트였나? 정확히 모르겠다. ) " 가장 이상적인 사회는 어떤 사회입니까? " 루스벨트가 답했다. " 거리에 장애인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상적인 사회입니다. " 묻고 싶다. 내 유년의 기억 속에서 떠돌던 그 많은 동네 바보는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페스트처럼 가난했던 시절에 잠시 창궐했다가 사라진 선캄브리아 시대의 공룡이었을까? 편리하고 깨끗한 21세기 대한민국 환경이 동네 바보를 천연기념물로 만들어 놓았을까?



수많은 질문을 던졌고 다양한 답을 마련했으나 결론은 하나다. 그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숨겨 놓은 것이다. 좋은 동네는 그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이, 서울이, 내가 사는 동네에 바보가 어슬렁거리지 않는다면 이유는 하나'다. 동네사 살기 좋은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큐 60의 삼식이 형, 오줌싸개 동팔이, 있으면서 맨날 없다고 외치는 영구, 피규어'이면서 살아 있는 공룡인 척하는 공룡 쮸쮸, 발기하지 않는 곱추와 맵지 않은 곱추 형제, 선풍기'는 선풍기인데 선풍기는 아닌 선풍기 아줌마, 요리 보고 조리 봐도 도무지 알 수 없는 둘리 그리고 절뚝이, 외팔이, 맨드라미, 개망초, 앗, 사루비아 ! 모두 나와 당당히 거리를 걸어라, 라고 외치고 싶다.



장애인들과 동네 바보'가 거리를 자유롭게 보행할 수 있는 사회가 아름다운 사회이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과 가장 긴 대교'를 소유한 나라가 좋은 사회는 아니다. 꽃 피고 새 울면 그들이 다시 오려나 ? 기다리겠다.













- 네이버 블로그, 2009/10/23 15:30






곰곰생각하는발 2014-07-19 공감 (17)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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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땜에 읽게되었는데요, 단편이라 부담없고.. 또 재밌더라구요^^
발랄쪼이 2008-10-12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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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활냇가의 명랑한 곗날 ... 완전 뒤비짐... 넘 잼나여 지금도 가끔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여..ㅎㅎㅎ
혼불 2012-11-28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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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선생님추천으로샀어요! 아빠도 읽어보셨는데 너무 재밌게 읽으셨대요~
밍밍사토 2008-06-14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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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소설은 처음...
컴온타스 2014-11-21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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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이야기꾼들의 책들을 모아서 읽어 보고 있는데 성석제를 너무 늦게 알게 된 듯^^;;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고, 아~~~주 읽어 볼만한 책이라 권해드립니다.
독서꽝 2013-12-28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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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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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를 낼 것인가? 보를 낼 것인가?



독서회에서 소설 읽기의 장점은 이런 것이다. 혹은 단점도 이런 것이다. 아~좋은 책이야!, 뭐가 이래ㅡ.ㅡ; , 오..비극적이다..,하고, 가만히 혹은 탁! 책을 덮고 말 수 없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말해야 하니까, 내 취향이 아니예요 하고 입을 다물수는 없으니까, 어떤 이야기라도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이 매우 쉬운 책도 있고, 너무 힘든 책도 있다. 너무 재미가 없어서 아무리 생각하려 해도 생각할 거리가 없는 책도 있고, 목구멍이 뻐근하거나 혹은 콧구멍이 새큰거려 그 들끓는 감정을 딱딱한 언어로 뭉쳐낼 수 없는 책도 있다. 그래도 무언가를 쥐어짜내게 되는데, 새로운 생각의 촉매가 될 때도 있고, 아련한 느낌을 파사삭 깨버릴 때도 있다.



성석제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굳이 말하라면 후자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글머리를 이렇게 시작해버리면 당연히 양자택일의 압박에 놓이게 된다. 그러려고 시작한 말이 아니라면, 저 !와 ㅡ.ㅡ;와 ...는 새빛 둥둥도 아니고 낙동강 동동 오리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또 글이라는 것이 그렇게 앞뒤 딱딱, 가로세로 각맞는 그런 것도 아니다. 콧구멍은 간질거리는데,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잘 잡히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또 헐벗은 언어가 붙들기에는 너무 풍부한 어쩌고 그런 것은 아니다. 재미있는데, 재미있다고만 말하기에는 그렇고, 무언가를 더 파고 들기에는 평론가의 영역이 될 것 같고, 일상과 엮어보기에는 너무 이야기가 많다. 단편집이 이야기가 많은 것은 당연한데, 어느것 하나 그저그렇게 넘겨버리기에는 아까워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 하나하나 다 이야기하려고 덤벼들다간 독서회 회원들의 눈총에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안그래도 말이 너무 많아 요주의 인물이 된 지 오래다.



7편의 단편 중 마지막인 <꽃의 피, 피의 꽃>이 경험상(?) 제일 친숙하다. 이 단편에는 세상의 모든 도박이 등장한다. 섯다, 도리짓고땡은 기본이고 고스톱, 포카를 거쳐 전자오락 도박, 경마, 라스베가스까지 좌악 펼쳐진다. 하나 없는 것이 있다면, 나의 친애하는 지인께서 말씀하신 "세상의 가장 큰 도박"인 주식만 빠져 있다.



세상의 이 잡다한 그러나 거대한 도박 중 내가 직접 해본 것은 고스톱 같은 민속놀이를 빼면 경마다. 한 두번이 아니라 한 두 번의 한 이삼십 배는 될 듯 하다. 나야 기껏 하루 열두 경주 중 총 일이만원 정도 잃을 간덩이밖에 안되지만, 낮게 깔리는 음악과 함께 "제 9경주, 마권 발매가 시작되었습니다"라는 방송이 나오면, 초대형 전광판에 숫자들이 촤르륵 나타났다 또 촤르륵 바뀌는데 ,그것이 꼭 바람따라 이리 누웠다 저리 눕는 황금들판의 물결처럼 눈부시었다. 수백에서 시작해서 수천, 수억, 수십억으로 불어나는 그 숫자들의 물결을 보노라면, 어떻게 이삼십분 사이에 저렇게 많은 돈들이 한꺼번에 밀려드는지 봐도 봐도 신기했다.



그러나 배팅에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부터는 화장실이며 실내 객장이며 너른 경마공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가끔 시사프로에 나오는 경마장 꽁지며 큰손이며 예상전문가들도 보게 되고, 일가족이 둘러앉아 예상지에 머리를 맞댄 모습, 피니시 라인에 코차로 들어오지 못한 기수를 향해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으며 수십만원인지 수백만원인지 알 수 없는 마권을 뿌려대는 사람들의 말할 수 없는 상실감도 목격하게 된다.



거기에 인생을 건 모든 사람들도 결국 승자는 마사회라는 것을 알고 있다. <꽃의 피, 피의 꽃>에서 친절하게 설명하듯, 총 배팅 금액 중 72%만 배당금으로 경마꾼들에게 돌아가고, 나머지 28%는 마사회로 들어 간다. 판돈의 100%가 돌아도 딴 사람과 잃은 사람이 갈리기 마련인데, 그 판돈이라는 것이 한 판에 28%씩 줄어드는데, 하루 12경주를 모두 배팅하고 나면 결국 처음 100원으로 시작했다면 1원만 가져갈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 1원 중 딴 사람도 나오지만 당연히 잃은 사람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매 경주 사람들은 기대에 차 배팅을 한다. 간혹 1000배 이상의 배당이 터지기도 하는데, 만원만 걸면 1000만원을 따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은 한방이니까.



<꽃의 피, 피의 꽃>의 마지막 메시지는 이거다. 몇번을 읽어봐도 결정적인 오타가 있긴 한데, 게임이란 혹은 도박이란 이런것이다,라는 명시적 교훈이다. 가위바위보를 하는 두 사람이 있다. 아이들도 하는 게임이지만, 이 가위바위보는 목숨을 걸고 하는 내기다. 그런데 한 사람은 가위를 낼 수 없다. 상대편은 가위바위보 모두 낼 수 있다. 어떻게 될까? 거듭 말하지만 목숨이 걸려있다. 셋 모두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유리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현실과 확률은 다르니까. 내가 자유롭게 셋 모두를 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자. 나는 무엇을 낼 것인가? 상대는 무엇을 낼 것인가? 결론은 이 게임은 끝날 수 없다는 것이다.



「바위, 보 밖에 낼 수 없는 사람은 상대의 문제를 잘 알고 있다. 당연히 보를 낸다. 비긴다. 1라운드는 끝났다. 2라운드에서도 두 사람은 또 보를 낸다. 비겼다. 2라운드 끝. 3라운드에서도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보를 낸다. 역시 비긴다. 가위바위보에 목숨이 걸려 있다는 걸 상기하라.

두 사람이 늙어 죽을 때까지 같은 라운드가 되풀이될 것이다. 이것이 게임이다. 게임을 더 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는, 목숨을 거는 것이 게임이다. 목숨을 걸지만 아무도 서로의 목숨을 가져갈 수 없는 것이 게임이다. 게임이다.게임.다행인지 불행인지 인생에는 게임이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게임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p288~9」



바위,보 밖에 낼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 셋 모두 낼 수 있는 사람에게 도대체 어떤 문제가 있다는 걸까? 이 비밀을 눈치채셨는가? 셋 모두 낼 수 있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 선택의 경우가 있다. 이기거나 비기는 것, 이기거나 지는 것, 그리고 비기거나 지는 것이다. 목숨이 걸려 있다면 당연히 '지는 것'이 들어가는 경우는 선택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이기거나 비기는 것이다. 그것이 보를 내야 하는 이유다. 내가 보를 내면 가위를 낼 수 없는 상대는 보나 혹은 바위를 낼 것이다. 보를 내면 비기게 되고, 바위를 내면 내가 이긴다. 그런데 머저리가 아닌 이상 상대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도 당연히 보를 낸다. 죽을 때까지 보를 낼 수밖에 없다. 내가 진짜 도박꾼이라면, 오후 4시의 권태를 이길 수 없어 손가락을 걸고 내기 상대를 찾아 헤매던 허영만 만화의 주인공 허슬러라면, 나는 아마 가위를 낼 것이다. 상대가 나의 약점을 알고 보를 낼 것이라 예상한다면 나의 가위는 그만큼 승산이 있다. 그러나 가위에는 그만큼의 부담도 있다. 바위가 나오면 내가 죽는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다. (그런데 이걸 부추기는 소위 멘토들도 많으시다.) 그러나 목숨은 손가락이 아니고, 왠만한 우리들은 죽어나 사나 보를 낼 수 밖에 없다. 그것이 게임이고, 그것이 인생이란다. 그런데 성석제는 게임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한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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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 2014-11-06 공감(1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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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담 좋은 우리들의 이야기꾼

높은 점수를 줄 수 없었다. 황만근이라는 인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성석제가 우리 시대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잘 드러내 준다. 황만근은 모자란 사람이다. 그리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모자란 사람을 이용하고, 그의 불행을 모른체하고, 그리고 즐겁게들 산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에 대한 답은 없었다. 어떻게 말했다는 것인가. 온 몸으로 이 세상에 대해 술만 죽을 만큼 마시고 비를 맞으며 구식 경운기를 몰고 가는 것을 보여 준 것 일뿐 무슨 말을 했단 말인가.

성석제는 입담 좋은 이야기꾼이다. 그리고 그는 우리 주변의 가엾은 사람들을 쳐다 보고, 그려 낸다. 그러나,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만들지는 못했다. 지금은 21세기다. 21세기의 사고 방식으로 21세기의 삶의 지표를 보여주기 바란다. 일요일 종일을 뭔가 나올 듯한 황만근을 붙들고 기다렸건만, 반근도 못되는 한숨만 소복하게 쌓였다. 성석제의 자장면이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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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2-10-14 공감(2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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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는 이렇게 말했다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으로 성석제씨를 만났다. 다른 작품도 궁금해졌다. 리뷰를 보고서는 책을 골랐는데, 그들의 반응이 곧 내것이 되었다. 너무 재밌고, 흥미로웠고, 놀랍기까지 했다. 작가의 정신 세계가^^

말장난이 좀 있는 편인데 벨기에 작가 아멜리 노통이 생각났다. 제대로 얘기하자면 그녀만큼 엉뚱하지는 않지만 그녀보다는 진지하다^^

몇몇의 단편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번쩍- 책보다 호흡이 긴 것이 오히려 읽기 좋았다.

천하제일 남가이가 절정이었는데 으하핫, 너무 웃어서 내 배꼽 도망갈 뻔하기도...(진부한 표현?)

근래에 무료 일간지 등에도 이름이 자주 보이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 다작이 반가운 작가이니 그의 부지런함을 기원해 본다.

노란 표지도 특유의 익살을 잘 표현하는 색감이었다. 글씨체도.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의 작품이 가장 교훈적인 글로 느껴졌는데, 울컥!했던 그 감정은 직접 읽고서 느껴보시길...

혹자는 그의 말장난이 짜증난다고 하고, 심지어 이 책을 추천한 뒷편의 글에서조차 그의 글쓰기 형식을 비판하였는데, 난 크게 나쁘지 않았다. 과하면 모자람 못하지만, 눈살 찌푸릴 정도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아직은 즐기고 있는 편^^

이제 성석제씨도 내게는 미리 읽어보지 않고도 구입하고픈 소설가의 대열에 들어왔다. 작가에게는 기쁜 일일 것이다^^

우울하고 속상할 때, 가벼운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 이 책을 만나면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지 않을까. 그렇다고 실업이 가벼운 책이라고 생각하면 오산. 신나게 웃지만 그 안에 해학과 풍자가 있다는 것, 지혜로운 독자는 반드시 알아차릴 것이다. ....라고 나 마노아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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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04-03 공감(1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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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만근의 말에 귀기울이다.



첫문장을 읽어내면서 뒷문장을 곁눈질한다. 그러면서 또 그 다음문장을 행해 눈동자를 굴린다.
성석제에 대한 극찬의 글을 많이 읽어왔기에 더욱 더 그의 책이 궁금햇다. 아,이렇게 재미있어도 되는가?
버튼 하나를 누르면 저 혼자서 집안 구석 구석 청소하는 로봇처럼 딱딱한 과일을 금새 부드러운 과일쥬스로 탈바꿈시기는 머신처럼 그는 술술술 작가라는 사람들이 고통속에서 작품을 쓴다는 것과는 다르게 그렇게 써내려갔을꺼 같은 나만의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는 내 눈엔 탁월한 글쟁이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글에는 단단한 뼈가 있다.그 뼈를 교묘하게 위장해놓은 위장술이 대단하다.그 위장의 이름이 바로 이 책속의 주인공들인 황만근이며 남가이이며 동환이다. 그 뼈에 살을 붙이고 옷을 입히는 것은 독자의 몫이리라.

이야기속의 소재 선택은 또 얼마나 탁월하며 기발한가? 성석제의 단편은 어릴적 할머니가 들려주신 현대판 옛날이야기와 향토적 소재를 담은 구전동화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 어수룩하며 배운게 없어 온갖 굳은 일을 도맡아 하고 어머니에게조차 사랑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어머니를 보호하며 살아온 효자,동네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바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 어느날 그가 사라지고 결국은 죽음으로 돌아온다. 황만근 그는 정말 어수룩한 바보인가? 자신에게는 단 한푼의 빚도 없었건만 농가부채 해결을 위한 농민궐기대회에 그의 분신과 같은 경운기를 타고 참가의 길에 나가지만 한 줌의 재로 돌아왔다. 구수하고 정감있는 사투리로 처음과 끝을 함께 하지만 그 안에 진정으로 황만근을 향한 정감있는 말투는 어디에도 없다.

천하제일 남가이 - 황만근과 비슷한 배경과 소재로 쓰여졌지만 황만근에겐 없는 보이지 않는 권력이 남가이에겐 있다. 그의 외모는 그가 내딛는 세상을 달라지게 한다. 가이라는 이름은 개에서 따온거라는 설명이 없었더라면 가이 아름다운 이름이라 나는 생각했을지 모른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무엇에 집착하고 무엇에 환호하는가? 그것의 실체를 우리는 알고 있을까. 수 많은 질문이 쏟아진다. 하지만 사실 나 역시도 글속의 남가이를 한 번 만나고 싶을 정도인 것은 사실이다.

천애윤락 -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 동환과 나와 문학은 초등학교 동창이다. 동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나는 동환의 삶을 슬금슬금 무시하고 있다. 그러나 동환에게 나는 거의 하늘과 같은 존재의 친구이고 존경스러운 친구이다. 그 사이의 교각은 문학이 맡고 있다. 동환이라는 인물은 나에게 이런 저런 삶의 고비마다 도움을 요청한다. 매번 마지막이라고 하면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또 그를 만나지만 나의 속내는 적지않게 그를 경멸하고 있다. 동환의 슬픈 결혼식에서 동환은 이렇게 말한다.나,나 말야.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어.75쪽

동환에게서 자유롭지 못했던 나와 문학.동환은 정말 그들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동환의 구구절절하게 길기만 했던 삶의 무게가 전해져 이 문장이 너무 슬픈 빛으로 눈에 들어온다.그것이 과연 동환의 잘못이었고 동환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참으로 무지의 연속이기도 하다.

나머지 소설인 쾌활냇가의 명랑한 곗날,책,욕탕의 여인들,꽃의 피,피의 꽃들에는 반어적인 표현들과 남성적인 시선으로 누구나 한 번쯤은 알고 싶어하는 세상의 일면들을 시원하게 긁어주고 있다. 단편들의 주인공은 모두 남자이다. 성석제에 소설에는 힘이 있고 남자들의 걸죽한 목소리와 함께 그네들의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듯한 지배적인 심리가 가득하다. 그러면서 잘못된 그것들을 꼬집고 비틀고 있다.

작은 시골 동네의 황만근이나 남가이를 통해서 혹은 계라는 동호인들의 모임속에서 힘을 자랑하려하고 그러면서 위안을 받는 사람들,그 안에서 몰래 정당치 못한 권력을 쌓으려는 것들을 재미있는 어투로 쏟아내고 있다.

미끄럼틀 꼭대기에서 미끄럼을 타면 내려가는 내내 신나는 즐거움만이 있다. 이 소설은 읽는 내내 미끌럼을 타는 것만 같았다. 다시 꼭대기로 올라가려면 여러 개의 계단을 딛고 올라야하지만 그 즐거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왜 그런 생각이 드는 걸까?

이미 이 책을 만난 사람은 여전하게 성석제의 유쾌한 글솜씨를 기억할 것이며 처음 만난 사람은 더 많은 책들에서 더 많은 재미와 그만의 어투를 느끼고 싶을 것이다. 아직 못만난 그대라면 그대도 한 번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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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07-09-06 공감(10) 댓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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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성석제가 말하고 싶었던게였겠지??^^



노란색은 흔히들 좀 유치한 색이라고 한다....특히 노란색과 검은색의 조화는 최고의 촌스런 색깔이란다..하지만....아주 많이 촌스런만큼... 타인들의 눈에...그리고..뇌리속에 깊이 박혀버릴수있는 색의 조화란다...그래서 도로표지판이나...횡단보도에 검은색위에 노란색선을 그어서 위험을 방지시키데 적극활용한다고 미술시간에 배웠던 기억이 난다....

성석제의 소설집인 이책의 표지빛깔이 노란색이다...것도 채도가 아주 높은 색이다....나는 "TV는 책을 말하다"에서 이책을 처음 보았을때 강렬한 노란빛깔의 이책을 본후로...줄곧 눈에 아른거렸더랬다....다른 사람도 그랬을까?? 궁금했더랬는데.....한번은 지하철에서...가방에서 꺼내 읽으려고 이책을 든순간 모두들 이노란빛깔의 책에 시선을 집중하는것 이었다...^^....정말 미술시간에 배운게 맞긴 맞구나!!하면서 감탄을 하면서........황만근이가 말을 했다는 소설집을 읽으면서 또 감탄을 했더랬다.....

어쩜....말을 배배꼬아서 늘어트려놓은것도 아니요!!.....온통 미사여구로 장식을 한것도 아닌데.....왜~~ 나를 잡아당기는것이었을까??....강렬한 노란빛깔 때문에??......성석제는 노란빛깔로 일단 내눈을 흐리게 만들었고....그리고 그의 투박하면서도 담담한 필체로 내귀를 멀게 하였으며....그리고 중간,중간.....내눈에서 눈물을 훔쳤다......정말 배꼽잡고 웃느라 눈물이 찔끔 나왔다....ㅡ.ㅡ;;

그는.....이책에서 무슨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나는 하마트면 무슨 콩트집을 읽고난 느낌으로 그냥 무심코 지나칠뻔하였다....그렇게....그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으면서도...독자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그냥 편하게 분위기를 조성하고 싶었나보다....책에 나오는 팔삭둥이 황만근이나...소심맨인 동환이나....천하제일 남가이나....쾌활냇가에 모인 계원들이나....도박을 하면 잃을때 잃을지라도 무조건 첫판에서는 따고야 만다는 도박꾼이나....세상물정 모르는 책벌레 당숙등......나오는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평범치가 않다....평범그이상이거나....또는 그이하이다....그러니까...평범한 우리들세계에 대체적으로 끼기가 힘든 부류들이다....아마도 손가락질을 당하기 십상인 그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하지만 이주인공들은 성석제의 소설에서 빛나고 있었다....그들이 세상을 이끌고 있었고....사람들의 혼을 뺏을만큼...매력에 빠져들게 하였으며.....그들이 우리에게 자유를 달아 주고 싶어했던 것이다....성석제가 말하고 싶었던것이 이런것이었나??.....나는 나대로의 해석을 내리고....그기꺼움에 만족하고 있다.....성석제같은 황만근....황만근같은 성석제....나는 이두사람이 참 마음에 든다....불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하지만...실로 알고보면 꼭 필요한 사람!!.....그가 바로 황만근이었듯이......성석제도 한국소설계에 없어서는 안될 꼭 필요한 사람인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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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04-05-11 공감(9)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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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와 감동을 한꺼번에

무슨 일이든 계속해서 한가지 일을 반복하다 보면 지겹고 능률도 안 오르기 마련이다. 책을 읽는것도 마찬가지여서 두꺼운 장편만을 고집하던 사람이라면가끔은 중간 중간에 단편을 끼워 읽으며 머리도 식히고 웃음도 되찾아 볼 일이다. . 한참을 조정래의 장편들을 읽으며 심오한 주제의식으로 두껍게 무거워진 머리가말랑말랑하고 시원한 것들을 원하고 있음을 알아 채고 성석제의 대표 단편 소설을 읽게 되었다
비밀의 책방 2005-03-14 공감(1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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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그이 어데 있노 ?

















" 반그이 어데 있노 ? "









옷을 잘 입는 사람'은 두 가지'로 나뉜다. 유행에 민감하거나 유행에 ( 전혀 ) 민감하지 않거나. 그런데 유행에 민감한 사람'을 두고 감각'이 있다고는 하지만 개성' 있다고는 하지 않는다. 사실, 개성이란 유행'이라는 획일성'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고집스럽게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것이다. 문체도 마찬가지다. 조경란이나 은희경의 문장을 보고 감각이 있다고 칭찬할 수는 있으나 개성 있는 문체'라고 할 수는 없다. 반대로 김훈의 문장을 보고 감각 있다고 말하는 것'은 ( 솔직하게 말하자면 ) 그 작가에 대한 모독이다. 좋은, 문장의 조건 중에 감각'은 여러 가지 좋은 예의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개성'은 좋은 문장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러므로 성석제는 훌륭한 작가'다. 황만근'은 바보'다. 띨띠리, 띨빵, 반편이, 쪼다-쉬, 빠가야로, 기봉이, 영구, 헐렁이, 개구리, 깍두기'다. 하지만 그'는 사실 알차다. 신대리 농민들이 모두 빚더미'에 시름시름 앓을 때에도 우리의 만근'은 근면과 성실로 가계 빚 하나 없이 잘 산다. 그뿐이 아니다. 그는 마을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서 열심히 일을 한다. 그는 < 마을길 풀깎기, 도랑 청소, 공동우물 청소...... 용왕제에 쓸 돼지를 산 채로 묶어서 내다가 싫다고 요동질하는 돼지에게 때때옷을 입히는 > 일도 한다. 궂은 일은 모두 도맡아서 한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다.



이 정도면 이름값'한다.



그렇다. 그의 이름, 만근'이 아닌가 ! 한 근'에 560g 이니, 만 근'이면 6000kg'이요, 그램으로 따지면 6000000g, 톤으로 따지면 6톤, 관으로 따져도 1600관이다. 니미럴 ! 이 정도의 무게'면 어처구니보다 무시무시한 놈'이다. 하지만 신대리 마을 사람들은 그'를 반근이1'라고 놀린다. 그렇다, 사람들은 그가 바보라는 이유로 만근이라는 이름을 < 돼지고기 반근만 > 한 " 반그이 " 라고 부른다. 만근이라는 무게감 있는 이름은 < 누구맨구로 반동가리가 났 > 다. 반 근'이라면 300g인데, 무시해도 유분수지, 만근이를 좆만한 놈'으로 빈정거리는 것이다. 아이콩, 너무, 므므므므... 무시한다 ! 그런데 황만근'이 사라지자, 그의 부재'는 생각보다 큰 구멍'이다. 그는 돼지고기 반 근'이 아니요, 좆만한 놈도 아님이 판명난다.





" 만그이 자슥이 있었으마 내가 돈을 백만 원 준다 캐도 이런 일을 안 할 낀데. 아이구, 이 망할놈의 똥냄새, 여리가 싸놔 그런지 독하기도 하네. 이기 곡속한테 독이 될지 약이 될지도 모르겠구마. "





성석제의 단편 <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 는 제대로 된 입 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소설이다. 경상도 사투리'에서 쏟아지는 걸죽한 구술'을 솜씨 좋게 기술'하는 작가의 능력은 가히 명불허전'이다. 그는 반근'이 보다 반그이'가 주는 사실적 구술의 힘'을 속도감 있게 밀어붙인다. 리얼리티'가 본질적으로 서사의 속도'를 감속시킨다는 측면에서 보면, 그가 쟁취한 빠른 속도감'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의 문장은 매우 빠르게 읽힌다. 하지만 오래 남는다. 가볍게 읽히지만 가볍지 않다. 그것은 마치 쉼표 없이 진행되는 악보' 같다. 쉴새없이 지나왔지만 노래'가 끝나고 났을 때 밀려오는 그 둔중한 멜로디' 말이다. 성석제의 < 황만근 > 은 속도의 힘, 구술의 힘'이 보이는 단편이다. 여러분에게 읽기를 권한다.













+



그 많던 바보'는 다 어디 갔을까 ? 반편이, 광년이, 띨띠리, 쬬다, 헐렁이, 만복이'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 사라진 것일까, 아니면 사람들의 조롱과 경멸이 부끄러워서 숨은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 그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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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03-20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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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말리는 입심



성석제만한 이야기꾼이 또 있을까. 바로 내 옆에 앉아서 자기가 보고 듣고 느낀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이니 말이다. 그는 아주 황당하지만 갖은 양념을 섞고 버무려 귀가 솔깃할만한 이야기로 빚어내는 솜씨를 가지고 있다. 그의 소설을 읽다보면 숨도 고르지 못하고 이야기에 빨려들만큼 재미가 있다.

그의 주인공들은 참으로 남루하고 초라하고 볼품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친근하다. 마냥 동정하고 싶다. 김화영의 말처럼 속수무책으로 엉뚱하고 정다운 사람들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한편으론 허무하고, 또 한편으로는 슬프다. 웃다가 울다가, 엉뚱하다가 진지하다가, 황당하다가 리얼하다가......성석제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인생 뭐 있어" 하는 말이 나올법 하다. 그래도 여러 사람 만나고 얻는 정서적 만족은 예사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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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현근 2007-02-01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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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반편은 누가 반편입니까. 이장이니 지도자니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방침을 정했으면 그대로 해야지, 양복 입고 자가용 타고 간 사람은 오고, 방침대로 경운기 타고 간 사람은 오지도 않고,이게 무슨 경우냐구요." (-11-)











황만근, 황선생은 어리석게 태어났는지는 모르지만 해가 가며 차츰 신지(神智)가 돌아왔다. 하늘이 착한 사람을 따뜻이 덮어주고 땅이 은혜롭게 부리를 대어 알껍질을 까주었다. 그리하여 후년에는 그 누구보다 지혜로웠다. 그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듯 그 지혜로 어떤 수고로운 가르침도 함부로 남기지 않았다. 스스로 땅의 자손을 자처하여 늘 부지런하고 근면하였다. 사람들이 빚만 남는 농사에 공연히 뼈를 상한다고 하였으나 개의치 아니하였다. 사람 사이에 어려움이 있으면 늘 함께하였고 공에는 자신보다 남을 내세워 뒷사람을 놀라게 했다. 하늘이 내린 효자로서 평생 어머니 봉양을 극진히 했다. 아들에게는 따뜻하고 이해심 많은 아버지였고, 훈육을 할 때는 알아듣기 쉽게 하여 마음으로 감복시켰다. (-38-)











"우리 계원이 모두 열여덟 명인데, 오늘은 열다섯 며이 왔구만. 준수하고 학철이하고 영만이가 빠졌는데 준수하고 학철이는 이따가 온다고 했고 영만이는 개 팔러 갔어."

계의 총무인 혁기가 늘 해오던 방식대로 성원보고를 했다. (-84-)













당숙은 일곱 살이 된 해 어느날 스스로 일어나 자신의 키에 맞는 칸의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반의 반은 한자,. 그 나머지가 그림책과 잡지, 한글로 된 책이었다. 한글로 된 책들 중 대부분은 열한 명이나 되는 학생들의 교과서와 참고서 따위였고 그외의 한글책들은 다른 언어로 된 책들에 비해 수준이 아주 낮고 상태도 좋지 않았다. (-116-)











책의 총수량 추정치 삼만권.아파트 지하에서 책 선반으로 쓰기 위해 조립했던 여섯 단짜리 앵글 열다섯 개.책을 넣어두기로 한 작업실의 공간 가운데 가로 4.5미터, 세로 6미터, 가로 5미터, 세로 6미터 짜리 인 두 방을 쓰기로 하고 큰방에는 앵글을,작은 방에는 책상자를 쌓아놓기로 했다. 일단 이삿짐쎈터와 연락을 해서 짐을 옮겨올 날짜를 정하고 시간은 겨울의 짧은 해를 감안해서 오후 두시로 했다. (-121-)











나는 당숙을 향해 책이 온 모양이라고,나가보자고 했다. 옷을 걸쳐 입고 나왔지만 삽시간에 몸이 떠내려오기 시작했다. 이삿짐을 어떻게 잡았는지 영하 10도가 넘는 추위였다. 그러게 낮에 왔으면 덜 추웠을거 아냐.중얼거리면서 나는 전원이 없다고 아우성치는 전화기의 통화버튼을 다시 눌렀다. (-132-)











그렇게 쏘다니다가 저녁이 되면 나는 기진맥진해서 내가 아는 안개시의 유일한 술집 '이방인'으로 들어갔다. 프랑스의 실존주의적인 소설을 연상시키는 제목과는 달리 이방인은 뒷골목의 중간 쯤에 자리잡은 허름한 선술집으로 세령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방인에서 실존을 자각케 하는 유일한 장치는 '변소업씀'이라는 계산대 옆의 팻말이었다.말 그대로 변소가 없어서 주변의 아무곳이나 오줌을 갈기면서 '투입=배출'의 실존 공식을 구현하는 스스로의 육체에 대해 자각하고, 단결 빼면 시신이나 다름 없는 골목 주민들의 단합된 욕설을 들으면서,재수가 없으면 물벼락을 뒤집어쓰기도 하면서, 한계상황의 인간조건에 대해 쓰디쓰게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버스가 끊어지고 난 뒤 하숙집으로 돌아가는 밤길은 또 얼마나 황량하고 추웠는지. 그럴수록 하늘의 별은 더 또렷하고 공기는 맑았다. (-210-)











소설가 성석제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을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이 책 속에,단편으로 나오는 「책」 속 스토리를 누군가 이야기했었기 때문이다. 책을 나와 인연이 되려면,우연이 필연이 되고,그것이 독자들의 손에 쥐어지게 된다. 누군가 추천하기도 하지만,이 책을 읽은 이가, 책 속에 무슨 이야기가 있는지 궁금하게 유혹하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책 속에서,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와 「책」에 눈길이 가게 되었다.











단편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의 주인공은 황만근이다. 황근근은 황씨 집안으로, 반편이라 부르고 있었다. 황만근의 모습은 공교롭게도 외갓집에 사는 친척을 연상했다. 그 친척은 황만근처럼 반편,바보였다.항상 부모님에게 걱정꺼리였고,결혼했지만, 아내는 도망가 버렸다. 소설 속 황만근이 성실하고,착한 이미지,도시로 경운기를 끌고 가는 그 모습,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것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착한 바보가 지혜로운 삶을 사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다.











두번째 , 「책」에 눈길이 갔던 것은 내가 가진 책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던 중에 있는 와중에 , 자인이 이 책을 말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주인공의 당숙이 등장한다. 당숙은 어린 시절부터 책을 좋아했다. 그리고, 자신의 키에 맞는 책을 고르기 시작하였고,한 권 한 권 읽기 시작했다. 작은 할아버지의 아들을 당숙이라 부르는데, 요즘과 달리 , 그 시절에는 집성촌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당숙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다.영하 10도의 추운 날씨에 , 책 3만권을 이사하는 과정에서, 이삿잠 쎈터가 어덯게 책을 정리하고,이사동하는지 흥미롭게 말하고 있다. 그 모습이 너무 익숙하게 느쪄지고 있으며,당숙처럼, 3만권정도의 책을 가진 이들은 공통적으로 책에 대한 욕심이 있고,그 책을 처리하는데 골머리를 안고 있다. 흥미롭게 읽은 책이며, 유투브에도 책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이 요약되어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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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도리 2025-02-27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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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기대나 희망은 실망과 절망을 낳기 마련이다. 기대나 희망이 긍정적인 가치로 자리잡은 것은 절망을 이겨보려는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판도라의 상자에 유일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 희망이었듯이 말이다. 성석제의 이름으로 적잖은 기대를 했고, 기대했던 만큼 실망스럽다. 그렇담 내 판도라 상자에는 무얼 넣어야할까?

단편들 자체는 유려하고 재밌다. 무엇보다도 우리말을 구사하는 유연성은 마치 스릴있는 곡예를 보는 것처럼 아찔한 체험이었다. 그러나 이기호, 김영하, 박민규, 김경욱의 단편들이 주는 강렬함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에게 성석제의 소설집은 힘이 딸린다. 그이들의 소설이 산악지대를 힘있게 올라가는 4륜 구동 차라면, 성석제의 소설은 좁고 한적한 국도를 안정감있게 달리는 중형차 같다. 4륜 구동에 앉아서 산악의 높낮이를 가늠할 수 있어 역동적이지만 성석제의 소설은 소음도 별로 만들지 않으면서 주변 경치를 감상하게 선사하는 관찰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게 만든다.

성석제보다 조금 연배가 어린 일련의 작가의 소설들이 환상적이지만 현실의 단면을 볼 수 있다. 그것이 내가 그이들과 이루고 있는 시대적 감수성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성석제의 소설은 환상성만이 느껴져 말 그대로 소설에나 나올 법하다. 황만근, 남가이 등 비주류적 인물들의 분위기에서 아무런 메시지를 읽을 수 없다. 토속적이지만 입체감이 없다. 그들은 필연이 만들어낸 인물이 아니라 이야기를 위해 만들어진 철저한 허구적 인물이기 때문인 것도 같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궁금해서 다른 이들이 쓴 리뷰 몇 편을 읽어보았다. 그들 역시 썩 흡족하지는 않은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집의 판매지수는 이기호나 김경욱 소설집의 지수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나는 그 이유를 <꽃의 피, 피의 꽃>에 이런 글귀에서 찾아본다.

"노름은 믿음이다. 자신에 대한 믿음, 자신의 운에 대한 믿음, 노름의 일회성에 대한 믿음, 인생의 일회성,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노름을 하게 한다. 누구의 믿음이 큰가, 철저한가에 따라 이기고 진다. "

이기호나 김경욱의 소설집이 내 편애적 취향일 수있겠지만 다른 독자들에게는 성석제라는 패에 대한 믿음이 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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넙치 2007-02-07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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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요약 및 평론

1. 작품 개요 및 줄거리 요약

성석제의 단편소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농촌 마을 '신대리'를 배경으로, 마을의 지능이 조금 모자란 인물 '황만근'의 삶과 그가 갑작스럽게 실종된 사건을 그린 작품이다.

신대리는 신경통을 앓는 사람들의 마을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황씨 집성촌이자 지극히 평범하고 이기적인 농촌 사회이다. 이 마을에서 황만근은 누구도 하지 않으려는 온갖 궂은일—오물 치우기, 초상집 일 거들기, 마을 공동체 작업 등—을 묵묵히 전담하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반편이' 혹은 지능이 낮다며 은근히 무시하고 이용하지만, 정작 황만근이 없으면 마을의 온갖 순환 체계가 마비될 만큼 그는 실질적으로 중요한 존재이다.

어느 날, 농가 부채 해결을 촉구하는 농민대회가 열린다. 마을의 이장이자 실리적인 인물인 민씨(민순태)는 농민대회에 참가하자고 선동하면서,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기 위해 모든 농민이 경운기를 끌고 대회장에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작 다른 마을 사람들은 집회 장소까지의 거리와 위험성을 핑계로 경운기를 끌고 가지 않는다.

오직 황만근만이 이장의 말을 고스란히 믿고, 자신의 고물 경운기를 모듈러처럼 끌며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길을 온종일 달려 대회장으로 향한다. 정작 대회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집회가 끝난 후였고, 황만근은 지친 몸과 고장 난 경운기를 끌고 밤길을 돌아오다 길가에서 차가운 주체로 발견된다.

작품의 마지막은 마을에 외지인으로 들어와 살던 민순태가 작성한 <묘비명> 형식의 글로 마무리된다. 민순태는 황만근의 억울하고도 성실했던 일생을 기리며, 그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성인이자 '선생'이었음을 고백하고 추모한다.

2. 작품 평론: 해학과 비극이 교차하는 현대판 열전(列傳)

(1) 고전적 양식의 현대적 변용: '전(傳)' 양식과 묘비명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서구적 소설 문법보다는 전통적인 '전(傳)' 양식을 적극적으로 채용한다. 특정 인물의 일대기를 기록하고 마지막에 사평(史評)을 덧붙이는 전통적 서사 구조는 황만근이라는 인물을 단순한 소설 속 캐릭터가 아닌, 역사적으로 기록되어야 할 성인(聖人)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특히 민순태가 쓴 마지막 묘비명은 소설 전체의 톤을 해학에서 숭고함으로 반전시키는 결정적 장치이다. 이 묘비명을 통해 황만근의愚(어리석음)는 愚(어리석음)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거룩한 '이타성'으로 재해석된다.

(2) 농촌 사회의 이기주의와 근대화의 그늘에 대한 비판

소설은 표면적으로 황만근의 어수룩한 행동을 통해 웃음을 자아내지만, 그 이면에는 지극히 냉혹한 인간의 이기심과 근대화된 농촌의 몰락이 자리 잡고 있다. 신대리 사람들은 황만근의 노동력을 철저하게 착취하면서도 그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지 않는다. 지채장애인에 가까운 황만근을 도덕적·물질적으로 울타리가 되어주기는커녕, 자본주의적 타산에 빠진 마을 사람들의 욕망을 대리 충족하는 도구로 소비한다.

특히 농민대회 사건은 이러한 이기주의의 정점을 보여준다. 명분과 이득만을 챙기려는 마을 사람들과, 약속과 신의를 목숨처럼 지키려는 황만근의 대비는 '누가 진짜 이성적이고 정상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남을 속이고 자신의 안전만 도모하는 '정상인'들의 사회는 타락했으나, '반편이'라 불리는 황만근만이 인간성의 정수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3) 성석제 특유의 해학적 문체와 입담

성석제 작가의 장기인 입담과 해학은 이 비극적 서사를 지나치게 어둡지 않게 이끌어가는 힘이다. 사투리의 생생한 활용, 황만근이 부르는 기괴하면서도 리드미컬한 노래, 그를 둘러싼 희화화된 에피소드들은 독자에게 끊임없는 웃음을 유발한다. 그러나 이 웃음은 가벼운 코미디에 그치지 않고, 서사가 진행될수록 독자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 '해학적 비극'으로 변모한다. 희극적 장치들이 겹겹이 쌓인 끝에 맞이하는 황만근의 허망한 죽음은 독자에게 강렬한 부끄러움과 카타르시스를 동시에 선사한다.

3. 결론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지혜롭다고 자부하는 현대인들의 영악함과 이기심을 '황만근'이라는 순박한 거울에 비추어 경고하는 지혜로운 우화이다. 황만근은 자본주의와 효율성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이미 사라져버린 '공동체적 선'과 '무조건적인 신의'를 인격화한 인물이다. 결국 성석제는 황만근의 죽음을 통해, 그와 같은 순수한 영혼을 포용하지 못하고 죽음으로 몰아넣은 우리 사회의 도덕적 파산을 아프게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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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 성석제

1,000단어 요약 평론

성석제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농촌 마을에서 ‘반편이’, ‘바보’ 취급을 받던 한 인물의 죽음을 통해, 누가 진정으로 어리석고 누가 제대로 살아온 사람인가를 되묻는 단편소설이다. 작품은 해학적인 사투리와 과장된 인물 묘사로 웃음을 자아내지만, 그 웃음의 밑바닥에는 공동체의 붕괴와 농민의 몰락, 약한 사람을 이용하고 버리는 사회에 대한 깊은 슬픔이 깔려 있다. 황만근은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모자란 사람이지만, 작품이 끝날 무렵 독자는 그가 마을에서 가장 온전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1. 황만근의 실종

이야기는 황만근이 농민 궐기대회에 참석하러 나간 뒤 돌아오지 않는 사건에서 시작된다. 마을 사람들은 황만근의 집에 모이지만, 그를 진심으로 걱정하기보다는 책임을 피하거나 그의 행실을 흉보는 데 더 관심을 보인다. 황만근에게 경운기를 몰고 집회에 참가하라고 시킨 이장 역시 자신에게 책임이 돌아올까 두려워한다.

마을에서 황만근의 실종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외지에서 귀농한 민 씨뿐이다. 민 씨는 마을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황만근의 과거를 되짚어본다. 이 과정에서 황만근이 평생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여러 사람의 기억과 평가를 통해 드러난다. 이 작품은 황만근의 생애를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전’의 형식을 현대적으로 변용하고 있으며, 마지막에는 묘비명과 같은 글을 덧붙여 그의 삶을 평가한다.

황만근은 어린 시절부터 말과 행동이 느리고 어수룩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확실하지 않았으며, 생활력이 없는 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놀리고 함부로 부렸지만, 그는 원망하거나 반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머니를 봉양하고, 뒤에 생긴 아들을 돌보며, 자신의 힘으로 농사를 지어 가족을 먹여 살렸다.

2. 마을의 모든 궂은일을 맡은 사람

황만근은 마을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지만, 역설적으로 마을을 실제로 유지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남들이 피하는 일을 도맡아 한다. 잔치가 열리면 준비를 돕고, 장례가 나면 상여를 메며, 길을 고치거나 공동작업을 할 때도 빠지지 않는다. 남의 논밭일을 거들고, 술에 취한 사람을 업어다 주며, 대가를 따지지 않고 이웃을 돕는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그의 노동과 선의를 당연하게 여긴다. 황만근이 공동체를 위해 한 일은 기억하지 않으면서도, 그가 조금만 실수하면 비웃는다. 그가 순종적이라는 이유로 더욱 쉽게 일을 떠맡긴다. 농민 궐기대회에 경운기를 몰고 가라는 부탁 역시 마찬가지다. 겨울 추위 속에서 먼 길을 낡은 경운기로 왕복하는 일은 위험했지만, 이장은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을 황만근에게 넘긴다.

황만근은 부탁을 거절하지 않는다. 그는 집회 전날 민 씨와 술을 마신 뒤, 민 씨가 잠든 사이 경운기를 몰고 길을 떠난다. 집회에서 돌아오던 중 경운기가 길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황만근은 부서진 경운기 옆에서 추운 밤을 지새우다가 얼어 죽는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다. 공동체가 가장 순하고 약한 구성원에게 위험과 책임을 떠넘기고도 아무도 그를 보호하지 않은 결과다.

3. ‘바보’와 정상인의 역전

작품의 핵심은 ‘바보’라는 말의 의미를 뒤집는 데 있다. 마을 사람들이 보기에 황만근은 영리하지 못하다. 그는 재산을 모으는 데 능하지 않고, 남에게 이용당하면서도 따지지 않는다. 세상의 경쟁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며, 자신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황만근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정말 중요한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자기 몫의 노동을 하며, 가족을 돌보고, 이웃을 돕고, 자연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농사를 짓는다. 남들처럼 많은 돈을 벌겠다는 욕심으로 농기계를 사고 농지를 늘리다가 빚더미에 오르지도 않는다. 그는 농사를 투기나 사업으로 보지 않고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반대로 정상적이고 영리하다고 자부하는 마을 사람들은 눈앞의 이익에 사로잡혀 있다. 정부의 농업정책과 시장 논리에 따라 무리하게 농사를 확대하고, 농기계와 비료를 구입하기 위해 빚을 진다. 공동체의 협동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서로의 형편보다 자기 손해를 먼저 계산한다. 이들은 황만근의 노동을 이용하면서도 그를 존중하지 않으며, 그가 사라진 뒤에도 자신의 책임부터 피하려 한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진짜 어리석은 사람은 황만근이 아니다. 돈과 지위와 말솜씨를 인간의 가치로 착각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더 근본적인 바보다. 황만근은 지적 능력이나 사회적 성공에서는 뒤처질 수 있지만, 삶의 윤리에서는 누구보다 앞서 있다. 작가는 모자란 사람과 정상인의 위치를 뒤집어, 현대사회가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 자체를 풍자한다.

4. 몰락하는 농촌의 현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한 선량한 농민의 이야기인 동시에 1990년대 한국 농촌의 위기를 다룬 작품이다. 당시 농촌은 시장 개방과 농산물 가격 불안, 부채 증가, 인구 감소와 고령화 속에서 급격히 흔들리고 있었다. 정부는 기계화와 규모 확대, 생산성 향상을 농촌의 살길로 제시했지만, 그러한 정책은 농민들에게 더 많은 투자와 빚을 요구했다.

작품 속 농민 궐기대회는 이러한 현실의 산물이다. 농민들은 생존을 위해 집회에 나가지만, 집회의 명분과 실제 마을생활 사이에는 모순이 존재한다. 농민의 권리를 외치는 사람들이 정작 같은 마을의 가장 약한 농민에게 위험한 역할을 떠넘긴다. 거대한 정치적 구호 뒤에서 구체적인 인간 한 사람의 안전과 존엄은 무시된다.

이 점에서 황만근의 죽음은 농촌정책의 실패와도 연결된다. 생산량과 경쟁력만을 강조하는 정책은 농촌을 단순한 생산 공간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농촌은 노동과 생산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이웃 간의 협동, 공동행사, 상호부조, 자연에 대한 경험과 기억이 함께 있어야 한다. 한 연구는 황만근이 상징하는 공동체성이 단순한 농업활동을 넘어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무형유산의 성격을 지닌다고 분석한다.

황만근은 바로 그 공동체성을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마을은 공동체를 유지해온 사람을 가장 하찮게 취급한다. 그의 죽음은 한 개인의 죽음인 동시에 농촌 공동체 정신의 죽음이다.

5. 해학과 비극의 결합

성석제 소설의 중요한 특징은 웃음이다. 작품은 경상도 농촌 사투리와 능청스러운 서술, 과장된 일화를 통해 황만근과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익살스럽게 그린다. 작가는 경북 상주 지역에서 보고 들은 경험과 방언을 이 작품에 적극적으로 반영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웃음은 인물을 조롱하기 위한 웃음이 아니다. 처음에는 독자도 마을 사람들과 함께 황만근의 엉뚱한 행동을 웃으며 바라본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웃음의 대상이 바뀐다. 황만근보다 마을 사람들의 탐욕과 비겁함이 더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마지막에 황만근의 죽음이 밝혀지면, 이전의 웃음은 죄책감과 슬픔으로 변한다.

이러한 해학과 비극의 결합은 작품의 도덕적 효과를 강화한다. 작가가 처음부터 황만근을 성인이나 희생자로 엄숙하게 묘사했다면 인물은 관념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황만근은 먹고 마시고 실수하며, 때로는 우스운 행동을 하는 구체적인 인간이다. 그의 선함은 완벽한 도덕적 영웅의 선함이 아니라, 평범한 생활 속에서 몸으로 실천되는 선함이다.

6. 황만근의 농사 철학

황만근은 민 씨와 술을 마시며 농사와 빚에 관해 자신의 생각을 밝힌다. 그는 큰돈을 벌겠다고 무리하게 농사를 확대하고, 기계를 사고, 빚을 지는 사람들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농사지으면 굶어 죽지 않고 오래 살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 말은 경제성장과 규모 확대를 당연한 진리로 여기는 사회에 대한 비판이다. 황만근의 농사는 효율성이 낮아 보이지만 지속 가능하다. 그는 토지와 노동, 소비의 한계를 받아들인다.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현재의 삶을 빚에 저당 잡히지 않는다.

황만근은 체계적인 사상가가 아니지만, 그의 삶에는 일종의 농민 철학이 존재한다. 인간은 자연과 공동체로부터 독립된 존재가 아니며, 필요한 만큼 일하고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한다는 철학이다. 이 때문에 제목의 ‘말했다’는 표현은 역설적인 의미를 지닌다. 평소 말을 잘하지 못하고 무시당하던 황만근이 죽은 뒤에야 그의 삶 전체가 하나의 발언으로 들리기 시작한다.

7. 작품의 한계

다만 황만근을 지나치게 순수한 희생자로 읽는 데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그의 선량함은 감동적이지만, 거절하지 못하고 부당한 대우를 감수하는 태도까지 무조건 미덕으로 찬양할 수는 없다. 공동체가 유지되려면 황만근 같은 사람의 희생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노동과 책임을 공정하게 나누어야 한다.

또한 작품은 지적 장애가 있거나 사회적 능력이 부족한 인물을 ‘순수한 바보’로 이상화하는 전통적 서사와 일부 겹친다. 황만근에게 보다 복잡한 내면과 욕망, 분노를 부여하지 않고 선량함과 희생을 중심으로 형상화했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그를 대신하여 민 씨가 그의 삶을 해석하고 묘비명을 작성한다는 점에서도 황만근 자신의 목소리는 제한적이다.

그러나 작품의 제목은 바로 이 문제를 보완한다. 황만근은 긴 연설을 하지는 않지만, 그의 노동과 선택과 죽음이 하나의 말이 된다. 문제는 그가 말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데 있다.

8. 종합 평가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한 ‘바보 농민’을 애도하는 이야기를 넘어, 우리 사회의 인간 평가 기준을 심문하는 작품이다. 사회는 돈을 잘 벌고, 말을 잘하며, 자기 이익을 지키는 사람을 유능하다고 평가한다. 반면 남을 돌보고 공동체의 궂은일을 맡는 사람은 무능하거나 만만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황만근의 죽음은 선한 개인의 비극이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그 선함을 착취한 공동체의 도덕적 파산을 드러낸다. 마을 사람들은 황만근이 살아 있을 때는 그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가 사라진 뒤에야 그가 맡아왔던 노동과 돌봄의 크기가 드러난다. 이는 가정과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돌봄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현실과도 연결된다.

이 작품이 오래 읽히는 이유는 황만근이 과거 농촌에만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공동체에나 말없이 쓰레기를 치우고, 아픈 사람을 돌보고, 남들이 피하는 일을 맡는 사람이 있다. 공동체는 그런 사람에게 의존하면서도 충분히 존중하거나 보상하지 않는다.

성석제는 황만근을 위대한 영웅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는 경운기를 몰고 농사를 짓고, 술을 마시며, 서툰 말로 자기 생각을 표현하던 가난한 농민이다. 그러나 바로 그 평범한 삶이 탐욕과 경쟁에 사로잡힌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황만근은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가족을 버리지 않았고,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았으며, 자연과 자신의 능력에 맞추어 정직하게 노동했다. 그런 의미에서 황만근의 삶은 실패가 아니다. 오히려 그를 바보라고 부르고 이용한 사람들이 인간답게 사는 데 실패했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결국 이렇게 묻는다.

<많이 소유하고 자기 이익을 잘 챙기는 사람이 영리한가, 아니면 남을 돌보고 자기 몫의 노동을 다하는 사람이 영리한가?>

작품의 대답은 분명하다. 황만근은 마을에서 가장 어수룩해 보였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장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의 죽음 뒤에 남겨진 말은 거창한 정치적 구호가 아니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으며, 공동체는 가장 약한 사람을 이용하는 순간 이미 공동체이기를 멈춘다는 준엄한 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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