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은 어떻게 갑오경장을 맡게 되었나?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31회
법률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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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간에는 청과 일본이 본격적인 근대 전쟁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벌어진 조선에서의 개혁을 다루고자 하는데요. 청과의 일전을 벌이면서도 일본은 조선 내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근대 개혁을 추진합니다. 그런데 그 개혁을 이끌 지도자로 대원군이 전면으로 등장하게 되는데요. 쇄국주의자였던 대원군은 어떻게 조선 내정 개혁에 나서게 되었을까요. 또 이때 시작된 최초의 근대 개혁인 갑오경장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당시 기록과 함재봉 원장의 깊이 있는 해석을 통해 그 상황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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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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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음악] 안녕하십니까. 한국인의 탄생의
현재봉입니다. 지난 시간에 그 갑보장이 이제 막
시작이 되고 일본이 어 조선 경복공을 장악을 하고 청과의 전쟁을 치는과
동시에 조선의 내정 개혁을 어 시작하려는 어 그 부분까지 말씀을
드렸고요. 오늘은 이제 그때의 어 참
역사의 아이러니 중에 아이러니라고 저는 생각을 하는데 조선의 개혁을 이끌
정치인을 찾으려고 지도자를 찾으려 그러는데 당시 와 있었던 모든 어
외교 외국 사절들이나 일본 자체의 평가로 보거나 역시 대원분밖에
없다라는 참 아이러니의 한 그야말로 그주의자의
그 핵심이었고 의정적삭파랑 손잡고 어떻게 쓴지 개방을 안 하려고 개항을
안 하려고 했던 지도자인데 그 사람밖에 없다. 그래서 이제 대원군을
어 다시 모셔와서 갑장을 이제 치르게 됩니다. 1차 가보 개혁을 어
주도하도록끔 만듭니다. 물론 이것 때문에 앞으로 점점점 이제 그 개혁
자체가 어 지지부진해지고 꼬이기 시작하고 결국은 갑보 경쟁이 실패로 돌아가기도 하지만 아무튼 첫 단추를
뛰는데 있어서 대원군을 불러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는 거. 왜 그럴 수밖에
없었고 그리고 어떻게 대원근을 설득해서이 갑을 시작하게 되는지 그
부분에 대해서 오늘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인의 탄생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갑경에 대해서 말씀드리기 전에 우선 제가 왜 갑옷 경장이라고
하는지 보통 우리가 갑옷 개혁이라고 요새 그러는데요. 제가 지난번에
동학난 어에 대해서 말씀드릴 때에도 굳이 동학 혁명, 동학 농민 운동
이런 거보다 동학 난이 좋다. 저는 그렇게 쓰겠다 했는데 그건 제가 배운
역사학 방법론의 핵심입니다. 뭐냐면 역사라는 거는 어떻게든지 그 당시의
상황을 재현을 해야 되는 건데 그러려면은 가장 중요한 건 그 당시 상황에서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사용했던 용어와 언어를 가급적이면 사용해 줘야
됩니다. 그것이 핵심입니다. 우리가 지금 100년 지난 상황에서 그걸 우리의 어떠한 관점에서 뭐라고 부르는
거가 중요한게 아니라 그 용어를 쓰는데 담겨 있었던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이 나눴던 대화,
상황, 인식 모든 거를 자꾸 재현해 보려고, 재구현하려고 하는 어, 그런
방식으로 제가 역사를 소설하고 있기 때문에 경장이란 것이 갖고 있었던 그함이 그게 중국의 오랜 역사 속에서
나오는 거고 굉장히 중요한 뜻이었었거든요. 그러니까 그 당시에 우리가 얘기를 할 때는 갑옷 경장
어이라고 역시 얘기를 하면서 어, 그 당시에 사용했던 용어를 써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갑옷 개혁 대신 갑옷 경장 어이라고 표현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러면 1차 갑옷 경장이 이제 일어나는 순간입니다. 7월 23일 날 어
오토리 공사가 한양에 진주했던 일본 군을 이끌고 경복궁으로 어 들어가서
민시 척들이 이제 못 들어오록에 그걸 막아 버린 상태에서 궁을 장악을 하고 이제 고종한테 내정 개혁관을 제출을
하죠. 그러면서 이러 이런 이런 거를 하십시오.이 이래야지 지금 조선이 다시 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자,
그런데이 일본이 개혁을 추진을 하자고 하지만은
그러면 조선의 개혁인데 조선 지도자가 나와서 그거를 주도를 해 줘야 되죠.
그 당시 어 많은 논의가 있었던 거 같습니다. 지금이 어지러운 상황에서
고정하고 민비하고 민시척적들이 지금 나라를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럼 도대체 누가 어떻게 이거를 근대화를 할 수 있을까 그런 논위들이 있었던 거 같습니다.
그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까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역시 대원군밖에
없다 이렇게 얘기를 했던 거 같습니다. 그 기록들이 남아 있습니다. 당시 허드 미국 공사가
대원군에 대해서 했던 평가가 있습니다. 이게 이제 허드 공사가 자기 미국 국무성에다가 국무장관 미국
국무장관한테 보고를 한 보고서의 내용입니다. 정부는 빚을 갚고 관리들에게 본급을 줄 돈은 없는데도
불구하고 궁중의 예식들과 불필요한 사치품들의 거금을 탕진합니다. 불만이
사회에 팽배해 있고 얼마 가지 않아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이 이 얼마 가지 않아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감이라는 것은 카톨릭 신부님들이
1860년대에 써 놓으신 거에도 그고대로 나와 있어요. 그러니까 조선 사회가 얼마나 19세기에 들어와서
계속해서 불안하고 누구든지 그게 종교가 뭐든지 어느 나라 사람이 와서
보든지 어떻게 이게 유지가 됐지? 곧 무슨 일이 터질 거 같은데? 이런
얘기를 꼭 합니다. 1894년에 지금 허드 공사도 똑같은 얘기를 합니다. 여왕 즉 민비죠. 여왕이
우두머리인 민치 집안은 왕국의 모든 권력과 불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으며 원한의 대상입니다. 만일 진정으로
실력을 갖춘 지도자가 나타난다면 그 주변을 혁명을 원하는 세력이 곧바로
모여들 것입니다. 현재로서는 강력한 의지와 정신력의 소유자인 대원군을
제외하고 그런 역할을 담당할 인물은 없는 거 같습니다. 그니까 허드는
벌써 여기서 얘기를 하는 거죠. 그러니까 누가 이렇게 불꽃 하나만 튀워도 확 타 버릴 혁명 전야의 그런
상황인 거 같은데 그때이 상황을 장악해서 변화를 추구할 수 있는 것은
배원군밖에 없는 거 같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죠. 다만 나이가 많이 들고 몸이 쇠약한 것이 그를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그는 강한 성품을 가진 인물입니다. 최근에 일어난 그에 대한 암살 시도는 비록 정부는 그런
사실이 없다고 자주 그리고 강하게 보인하고 있지만 저는 실제로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무슨
얘기냐면은 민시 척적측적에서 계속해서 대원군을 암살를 하려 그럽니다.
그러니까 대원군이 어 1800 85년인가에 돌아오지 않습니까? 3년
동안 이모군란 때 잡혀가서 중국 바우딩에 가서 3년 동안 잡혀 있다가 돌려보냈는데 5년에 10년 동안 거의
이제 유패돼서 위리한치 되다시피 하지만 일본에가 있는 개화파들하고 연락하고 뭐 이제 이러면서 뭔가를
꾸며 보려고 끊임없이 암약을 하고 있었던 거고 그리고 이제 민주척적
축에서는 저 사람을 어떻게서 이제 제거를 해야겠다. 그런 암살 시도가 여러 차례가 있었던 거를 서울 장안이
그때 다 알고 있었던 겁니다. 허드 공사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보고서에 정부는 아니라고 하지만
자기는 그 사람들이 분명히 대원군을 암살하려고 여러 번 시도했었다는 거가 사실이다라고 믿는다. 이렇게 이제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이를 사주한 것으로 그가 의심할 수밖에 없는 민비와 민비파의 인물들에 대한
그의 적대감은 더욱 강렬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가 요즘 외국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마지막 천주교 박해가 일어난다는
기간에 그는 섭정직을 맡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러나 시대는 변화였습니다. 조선은 이제
개방되었고 열광과 조약도 체결하였습니다. 그는 과거와 같이 마음대로 외국인들을 진멸시키는 것은
가망이 없는 일이며 오히려 그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들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모든 이익을 얻어내야 한다는 점을 깨닫을 정도로 똑똑한 인물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전형적인 즉 애국적이고
고집스럽게 자기 나라에 충성하는 조선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따라서 그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현재 퇴거하여 살고 있습니다.
그까 당시 어 미국 외교관의 공사의 평가가 그랬습니다. 우리가 다
알다시피 외국 정치 우두머렸고 천주교 밖에 앞장섰던 사람이 어 인형적으로
틀린 방향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그래도 지도력이나 인간적 매력이나 이런 걸로 봐서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그리고 시대가 바뀌었으니까 아 바뀐
데에 따라서 생각이 바뀔 수도 있을 정도의 머리나 모든 건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도 한다. 반면에
대부분의 당시 조선 사람들이 그 그를 여전히 따르고 있는데주의자라고 아직도 믿기 때문에 그런 그 그
따르는 거는 같다. 그렇지만 사실 지금 갇혀서 살고 있기 때문에 잘 모르겠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거듭 말씀드리지만 당시 조선에 있는 모든 정치인들
중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든지 굉장히 큰 변화가 필요하고 혁명적인 변화가 필요한데 어떤 한 방향으로 나갈 수
있는 지도력을 가진 사람은 대원밖에 없다라는 것은 분명히 모두가 공유하고
어 있었던 생각인 거 같습니다. 다음은 스기무라 당시 대리공사죠. 쓰기무라는 기억하시겠지만 12여년
동안 지금 일본 공사관에 있으면서 조선에 대해서 빠삭하게 알고 있는 제일 잘 아는 어 일본
외교관입니다.이 사람이 이제 갑경 시작할 때도 오돌리 공사 밑에서 다 모든 거를 어 일을
이끌어 나가게 되는데 그 스기라가 지금 어 대원군에 대한 평가를 한게
있습니다. 대체로 대원군은 선천적인 한토 즉 중국 숭배자이자 양이가 즉
처양을 배척하는 사람라서 일본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인물이었으나 근에
마침내 세계의 형세를 깨닫고 일본 청 조선의 삼국 동맹으로 동양의 형세를
유지할 필요가 있음을 설파하며 일본인을 우대했다.이 이 때문에 우리의 전후 공사와 관원들은 모두
대원군과 교재가 있었고 특히 나는 올해 재근했기 때문에 한층 더 깊이
교재했다. 지금 아까 허드 공사가 대원군이 자 그래도 바뀐 거 아닌가 생각한 이유가
한양에 지금 와 있는 많은 외국 외교관들하고도 굉장히 빈번하게 깊이
있게 교류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아이 사람이 옛날 같은 쇠곡주의자는 아닌 거 같다라는데 그기에게 바로
지금 스기라가 얘기를 어 해 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원래는 지독한
의정 척사파. 그야말로 최국주의자였지만 그근에서는 지금 오토리 공사뿐만
아니라 전임 공사들하고도 계속해서 교류를 했고 특히 조선하고 중국하고
일본이 그렇죠. 같이 그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 어 협력을 해야 된다.
어 일본에 건너가고 갔던 수많은 어 이동인이 됐든 뭐 김옥균이 됐든 전부
다 그런 사람들을 데리고 설득했던게 야 우리가 같이 이걸 해야 된다. 같이 해야 된다. 이제 그런 거죠.
사실 나중에 이런 것이 안중군 의사가 하는 동양 평화론이라는게 바로 이런 얘기들입니다. 우리가 같이 동양이
힘을 합쳐서 서양의 이억을 그 서세 동점 이거를 막아야 된다. 이제 이런 얘기를 했었던 거죠. 이제 그런
얘기를 대원군하고 그 일본 외교관들이 늘 얘기를 했었고 대원군도 그거에
대해서 이제 상당히 찬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사실은 스기무라는
어떻게 보면 허드 공사보다도 더 긍정적으로 보는 거죠. 즉 대원이 많이 바뀌었다. 이런 이런 식으로
이제 보는 겁니다. 자, 그러니까 일본 사람들이 여러 가지 논의를
통해서 심지어는 조선 사람들, 조선의 개화파 남아 있는 개화파들하고도
토론을 하면서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그랬을 때 대온 것밖에 없다. 다들 그랬다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오돌리가 군대를 이끌고 경복궁에 쳐들어가서 상황을 장악하고 강제로 개혁을
시작하기 이틀 전인 7월 22일 날 수기라가
대원군을 본격적으로 설득을 하기 시작을 합니다. 우리가 조선을 개혁하는데 당신밖에 없습니다.이
설득을 이제 하려고 그럽니다. 어떻게 그러면 대원 근로로 가게 됐는가가 그 당시에 상황들이 자세히 어 나와
있습니다. 대원군을 일본이 설득을 하려 그러는데 어쨌든 대원군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앞장서서 특히 일본의 힘으로 해서 이거를 뒤집어서 자기가 정권을
다시 잡고 뭘 한다라는 거가 굉장히 부담스러웠고 상황이 그게 가능한 지위에서도 굉장히 회의가 많았겠죠.
그러니까 은근히 말을 건너는 거 갖고는 전부 다 못들은 척하고 부정을
합니다. 그런데 7월 22일 날 일본 공사관에 누가 찾아오냐면은 대원군의
청지기를 했던 사람 정익이라는 사람이 찾아옵니다. 근데이 정익이라는
대원군의 청지기가 오돌리 공사를 만나서 뭐라고 그러냐면은 지금 대원군을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정은봉이라는 사람 딱 하나 있다.이 이 사람이 누구냐면은 대원군이 바우딩에 3년 동안 구금돼
있을 때 청나라에 그때에 계속해서 모셨던 신복 중의 신복이고 그리고는
대훈군이 귀국한 후에는 아예 고종이 그 정원봉을 감옥에 갖다 집어넣어
그 대원군하고 띄워 놓으려고 워낙 대원군의 신복이니까 그래서 정은봉으로 하여금 대원군을 설득하게끔 이게
분명히 설득이 될 수 고군의 당시 청지기가 이제 오토돌리 공사한테
팀을 해줍니다. 그래서 오돌리 공사가 곧바로
곧 쇼따로 당시 서기관을 일본 경비병들과 함께 해서 정운봉이 갇혀
있는 한양 우포 우포도청으로 보냅니다. 그래서 당시 그 우리나라의
감옥 같은게 조선의 감옥 같은게 어떤 건지 알 수 있는게 아무 문제 없이 가서 일본 서기관이 어 그 정원봉을
만납니다. 나와서 그러면 가서 이런 이런 일 때문에 우리가 왔다. 같이
가서 우리 대원군을 설득해서이 개혁을 개혁에 앞장서 달라고 좀 하자라고 했더니 정은봉이 근데 내가
지금 구강의 명으로 고정의 명으로 감옥에 갇혀 있는데 구강의 명력 없이 나는 타로할 수 없다. 그 나가면
탈옥이다. 그니까 안 된다 그랬더니 꾸부분이 계속해서 설득한다. 이게 나라를 위하는 것이다. 이건 정말로
나라를 위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정은봉을 데리고 나옵니다. 뭐 나오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은봉을 데리고 일본 공사관으로 가고 일본 공사관으로 가서 오가모또 유스 당시에 굉장히 그
일본의 강경파이기도 하고 그러면서 나중에 대원하고 굉장히 친 친해지게
되는 그리고 뭐 김옥균하고도 아주 절친이었던 오가모토리 유노스케 통역관
이런 사람들이 보병 두 개 중대 순사 열명 이렇게 허의하에 새벽 2시에
운연궁으로 갑니다. 정은봉을 데리고 가서 그래서 그때 옷과 못도 하고 정은봉이 사랑체로 들어가서 대원군을
만납니다. 대원군은 이재면 어 아들 이재면하고 손자 이준영을 데리고
셋시서 같이 옷감모도 하고 어 정원봉을 사랑체면 연담을 합니다.
그러니까 7월 23일 날 어 오토리공사가 일본 군을 이끌고 경복궁에 들어가서
이제 상황을 장악을 한 거죠. 그때에 이제 대원군이 같이 와줬었어야 되는데
대원군이 이제 안 나타난 겁니다. 그러니까 이미 오토리가 궁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원군을 끌어가려고 어
설득을 하려고 지금 하는 어 대화의 내용입니다. 나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대원군에게 입을 권했지만 들여려
하지 않고 다만 왕비의 안부를 물었다. 나는 군궐에 많은 사람들이 뒤쪽 담을 넘어 피신했으며 왕비 역시
그들과 함께 춘천으로 피신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대원군의 표정이 밝아졌으며 때마침 응
응접실로 들어오는 옷가모도를 가리키며 영웅호골과 같은 무사라고 말했다.
아마도 대원군은 만약 대원군이 나서지 않는다면 자신은 할복하여 공사관에
사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던 오카모또의 말에 놀랐던 거 같다.
나는 거듭 아침 일에 대해서는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 정부는 오로지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귀국의 내정 개혁을 권고했지만 민시 정부는 개혁을 실시할 기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을뿐만 아니라 사실상이를 거절했기 때문에 결국 오늘의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지금 내외의 모든 사람은 오로지 저하의 한 몸에 기대를 걸고 있다.
우리나라는 저하가 나서서이 막중한 인무를 맡음으로써 조선을 중음시키고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기를 바라고 있다. 저하가이 막중한 대임을 거절한다면 조선의 종묘 사직의 안위
여하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며 우리 역시 다른 방법을 간고할 수밖에 없다. 바라건데 저하는 깊이 헤아려
주시기 바란다라고 끈질기게 설득했다. 모가모도와 정은봉 두 사람도 나와
함께 정말로 천재 이루의 기회를 맞이했으니 주저할 것이 없다고 권고하였다. 그러자 대원군은 안색을
바꾸며 귀국이 일으킨 이번 사건이 진짜로 의거라면 귀한은 귀국의 천황을
대신하여 일이 성사된 후 조손의 땅을 한치도 요구하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할
수 있겠는가라고 질문했다. 이에 대해 저는 한 서기관의 신분에 불과하므로
천황을 대신해서 어떤 약속을 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현재 오토리 공사의
사신으로 왔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오토리 공사가 일본 정부의
대표자라면 저는 오토리 공사를 대신하는 범위 안에서 약속을 할 수 있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대운구는
그러면 오토돌리 공사를 대신해서 우리나라의 땅을 한치도 요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 주기 바란다고
하며 옆에 있는 사람에게 종유와 붓을 가져오도록 했다. 나는 1번 정부의
이번 거사는 진심해서 나온 것이므로 일이 성공한 후 결코 조선의 땅을
한치도 요구하지 않겠음이라고 쏘고이 끝부분에 나의 직위와 성명을 적어
대원군에게 건네 주었다. 대원군은 한번 읽어본 다음 그렇다면 나는
귀간의 뜻을 받아들여 나설 것이다. 다만 나는 신하의 신분이므로 왕명이
없이는 입할 수 없다. 궁중에서 식사가 오도록 해 주면 좋겠다라고 했다. 이에 나는 급히 호수미
도라크로를 조희원의 집으로 보내 그로 하여금 궁중의 상황을 살펴 조하도록
하였다. 대원군은 역시 참 대단합니다. 저 상황에서도 지금 민시
척적을 몰아내야 되겠고 그것 다 알겠고 그걸 정말 하기 위해서 절치부심 어 자기도 노력을 하고
있었고 이게 참 그런 힘에서 천재 이루 이루의 기회지만 확실한 것은
이것 때문에 일본이 세력을 넓혀서 또 조선의 어떤 땅을 요구하거나 이러면
안 된다. 그거를 약속을 네가 해라. 그래서 이제 정부가 그 일본을
대표하는 거였고 그런 오토리 공사가 또 정부를 대표하는 거였기 때문에 오토리 공사의 자기 부하로서 그
약속은 그 이름으로 할 수는 있다. 이제 이렇게 해서 그 약속을 하는 거죠. 그랬더니 대원근이 알았다.
가겠다. 근데 역시 궁에 들어가려 그러면 어쨌든
국왕의 교지가 있어야 된다. 그냥 못 들어간다. 그리고 이제 벌써 그 그
정도야. 알았겠죠. 어 이건 국왕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들어갔다. 일본군하고 그러면 이제 나중에 큰
문제가 될 수밖에 없죠. 반란이 되는 거니깐요. 그거를 어떻게든지 고종이
나를 부르는 형식을 만들어내라 그랬더니 이제 스기무라가 어 당시
군부 대신 조현한테 보내서 빨리 어떻게 해 봐라 그래 갖고 조의현이
6일준하고 안경수이 사람들한테 고종의 명의로 대원군한테 입걸하라는 교지를
작성하도록 해서 그 교지를 대원군한테 어 전달을 합니다. 그러니까 드디어
대원군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일본 군사들이 대원군을 호회하고 대걸로
들어옵니다. 그다음 상황에 대해서 그러면 이제 대원군이 궁에 도착하게 해서 일어나는 상황에
대해서 오토리 공사가 본국에 어 상황이 끝난 다음에 본국에 보낸서에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이보다 앞서 대골 안에서는 민가일족이 우리 병사의 침입에 놀라서 차례대로 뒷문으로
달아났고 민가의 아류들도 그 뒤를 따랐습니다. 궁중의 소요가 점차 극게
달라자 대군주 폐하는 특별히 외무판을 우리 공사관에 파견해서 본관에게 속히
참내 입하라는 왕명을 전했습니다. 따라서 본관은 바로 입해야 했지만
일본인과 조선인 모두 감화꾼이 부족해서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11시경이 되어서에 간신히 공사관을
나서서 참내했는데 그때 대원군도 참내했습니다. 오랜만에 부자되면은 만열 감읍의
모습이었으니 대원군이 노해 국왕의 실정을 꾸짖고 폐한는 실제로 사제하는
등 한 때는 뜻밖의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대원군이 정당에
나와서 권관에게 대군주께서는 오늘 귀공사를 인견하실 계획이었으나
다소란스러워 혼잡함으로 자신이 대신 진화를 받겠다고 하고 또 자신이
대군주의 명에 따라 이제부터 정무를 통과할 것이니 조선 내정 개혁과 관련한 일은 조만관 기공사와 자세히
협의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본관은 먼저 대군주 폐하의 무양하심을 축하하고
다음으로 대원군 집정을 축하한다는 말을 아 후 물러났습니다.
그러니까 군사들이 먼저 들어가서대 그 경박공을 장악을 하고 민비하고
민시척들은 다 도망을 갖고 그런 상황에서 11시쯤에 옷돌리 공사가
오는데 그때에 그 시간에 맞춰서 밤새 이제 대원군을 설득을 해 갖고 그 시간에 맞춰 가지고 대원군도
들어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이제 드라마틱한 장면이 연출이 되는 거죠. 1885년
귀국한 이후로 바우등에서 풀려나서 귀국한 이후로 10년 만에 거의 10년 만에 처음으로 부자상봉을 하는
거고 어쨌든 그 서로가 감동적인 측면 장면도 있었지만 어 대원근이 또
국광인 아들을 꾸짖어서 도대체 어떻게 정을 국정을 어떻게 이끌었길래이
상황에이 모양으로 만들어냈느냐라고 꾸짖는 거고 또 그거에 대해서 고정이
사주하는 그런 모습도 있었다. 이제 그런 거죠. 그리고 이제 옷돌이는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 원래는
고종을 아연하려고 했었는데 고종이 완전히 대원군한테 모든 거를 이양을 한 거죠. 전권을 그니까 대원군이
대신 나와서 당신이 오늘 국강패와 뵙기 있는 건 알겠지만 오늘 국강께선
직접 뵙지 않고 내가 대신해서 나왔다. 그리고 앞으로 그래 개혁 다 한다. 그 모든 문제 이제 나하고
논하자. 그래서 오토리는 알겠습니다. 그리고 어 그 나왔다. 물러 나왔다.
이제 이런 보고 [음악]
그러고 나서 이제 공식적으로 고종이 모든 권한을 전권을 대원군한테
이양했다는 교지가 나옵니다. 7월 24일 고정의 교지입니다.
지금의 모든 서문은 긴중간 문제가 생기면 먼저 대원군 앞에 나아가 질정을 하더라. 각국의 사례를 보면
군문은 다 친왕의 관할로 되어 있으니 본국의 해군과 육군의 사물을 대원군
앞에 나아가 질정하여 결제를 받으라. 그러니까 청나라에는 예를 들어서 그
총리기무화문을 담당하는 것이 공친왕 혁큰 나중에
경친왕이 또 하죠. 그러니까 뭐냐면 친황이라는게 뭐냐면은 황제의 동생들이죠. 이복 동생들 이런
사람들이 이제 황실 내에서 그 그러한 사물을 감당 담당하게 만들었고
일본에서도 천왕의 동생들이 그 군대를 맞게 하고 무슨 친왕 무슨
친왕 하면서 하는 거죠. 나중에 우리나라도 마지막 황태자를 영친왕이라고 하는 이유가 그 중국식
일본식 그걸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친왕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는데 그런데
지금 뭐냐면 대원군이 말하자면 친황 인셈이죠. 중국이나 일본식으로 따지면
그래서 중국이나 이런 데서도 다 친왕 이런 걸 맡아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친왕이 대원군이시다. 그러니까
대원군이 군이랑이 모든 거를 어 그 맡아서 하실 거다. 그러면서 이제
전권을 이양을 합니다. 그리고 고종의 교지가 또 나옵니다. 백성을
학대하는 것은 곧 나라를 저버리는 것이다. 백성들이 살아갈 수 없는데 어떻게 나라 구시를 하겠는가? 한
세상에 떠들썩하게 소문이 나서 그 죄상을 가리기 어렵다. 좌찬성 민영주는 오로지 취렴을 일삼아 자신을
살찌우는 것으로 원망을 샀는데 이것은 심상하게 여겨 놓아둘 수 없으니 원악도에 안치하라. 전통제사 민형식은
탐욕스럽고 사나워 못하는 짓이 없어 그 여이 이웃 경내까지 두루미쳤으니
원도에 안치하라. 전 총제사 미능식은 군영을 창설하면서 고친 것이 많고
세금을 거두며 무리를 일으켰으니 절도에 정배하라. 전전 개성유수
김세기는 자악한 짓을 하여 백성들이 소요를 일으켰는데 여행이 처벌을 피하여 연방을 허물어뜨렸으니 원낙지에
정배하라. 경주 부윤 민치헌은 여러 번 수령을 지내면서 분해 넘치는 짓을
하고 욕심이 끝이 없어 만족할 줄을 몰랐으니 원지에 정배하라. 이것은 내가 백성을 위하는 것이고 또한
세신을 보존하려는 고심에서 나온 것이다. 모두 즉시
거행하도록 하라. 무슨 말씀입니까? 민시 척적들을 철저하게 쫓아내는
겁니다. 속아내는 겁니다.이 갑경장 어의 시작은 당연히 민시 척적을
몰아내는 걸 시작합니다. 동학란이 일어난 것도 민시척의 세도 가렴 주구를 그 없애려고 거기에
저항해서 일어났던 거고 그래서 민영준이 그죠 민영준하고 민영익이
청한테 파병을 요청했던 거고 그래서 청일 전쟁이 벌어지게 되는 거고
그래서 일본이 들어와서 대원군을 앞세워서 개혁을 시작하는데 그
대원군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뭡니까? 권력을 잡자마자 민시 척적들을
전부 다 유배 어 보내 버리는 겁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조선의
개혁이라는 것 곧 민시 정권을 몰아내야 된다라는 거 이거는 아까 뭐 허드 공사의 얘기해서도 있었고 다
모두가 동의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그 일을 가장 먼저 하는 겁니다.
그런데 어 그날 모든 전권을 대원권한테
넘긴다. 그다음에 민시들을 전부 다 유배를 보낸다. 이거에 대한 교만 내린게 아닙니다. 대원군이
또 다른 교지를 만들어서 고정의 이름으로 그거를 써서 오토리 일본 공사한테 보이면서
이것도 고정의 교지 교지로 내렸으면 좋겠다. 민비를 폐서인하겠다는 거.
지금이 민비하고 대원군의 싸움이 이모글란 때부터
시작해서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 거 조선의 개혁이고 모두 모든 것은
지금이 두 민시척과 대원군의 싸움 때문에 다 늘 그러니까 지금 대원군이이 상황에서
전권을 장악을 했는데 제일 먼저 하는게 민시들을
제거하고 민비를 아예 의 폐서인을 하자는 거죠. 자기 며느리
국모를 중전에 그 지위 자체를 뺏어 버리겠다는 거죠. 박탈하겠다라는
거죠. 대원군이 이원한테 지금 민비를 폐인하자라는 고종의 교지를 작성하도록
해서 그거를 가지고 오돌리한테 보내서 보입니다. 그랬더니 오돌리가 답을 못
하는 거죠. 그니까 옷돌이 입장에서는 이런 겁니다. 자기네가 전쟁을 중국하고 치르고 이러면서 조선을
근대화를 개혁을 하자고 해 갖고는 이렇게 어렵게 말도 안 되는 상황 같은 데서 어쩔 수 없이 대원군을
데리고 와서 그러면 우리 개혁을 하자. 그래 갖고 전권을이 우받게끔까지도 다 해 놨는데 아이
양반이 하는게 뭐예요? 그냥 수십년 동안 하던 그 전쟁을 계속하는 거죠.
수구 세력이 어떻게 반응할 걸지 몰라서 불안한 상황인데 민비까지 폐인을 하자. 그러니까 당연히 오돌리
야 이걸 어떻게 하라 그래 그러면서 이제 그러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이존영을 계속해서 보냅니다. 대구는
이걸 계속해서 설득을 하는 겁니다. 폐손시켜야 된다고. 그래서 오토리가 어쩔 수 없이 이제 스기무라 자기
이제 휘야 사람 조선을 진짜 잘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지금이 상황에서 어떻게 지금 또 민비를
폐인을 하냐고 반대를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대원구는 또 민비마저 폐인
하려고 한다라는 그 계획이 다른 조선 사람들 귀에 다 들어갈 수밖에
없겠죠. 그래서 김가진, 안경수, 조희현 이런 사람들이 그걸 다 듣게 되고 그걸 또 이제 고정학원 민비한테
가서 어 그 얘기를 또 합니다. 일러받칩니다. 그러니까 어이 전국이
또 그 두 파의 그 전쟁으로 끊임없는 암투 안력 어 그걸로 지금 또다시
변질이 어 되기 시작합니다. 정작해야 되는 개혁이 주한적이 아니라 그 두
세력간의 싸움입니다. 23일 날 경복궁을 장학을 하고 24일 날
전권을 대원군한테 넘긴다는 교지를 발표를 하고 27일 날 군국
기무처라는 거를 신설을 합니다. 중국의 청나라의 군기처를 모방을 한
겁니다. 그래서 그 군국 기무철라는 이름도 대원근이 붙입니다. 이것이 조선 역사상 최초로
근대식 정부 기구입니다. 이게 무슨 말씀이냐면요. 우리가 삼정승이 있고
육조 판서가 있었고 역사 책에서 배우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은 지금
우리가 얘기하는 식으로 무슨 국방부 장관, 내무부 장관, 총리, 부총리 이렇게 자기 역할이 분담이 돼 있고
직원이 따로 정해져 있고 이런게 아닙니다. 그냥 삼정승과 육조판서들은
모여서 그냥 아무나 늘 난상 토론을 벌리고 어떤 특정한
결정을 내리는데 있어서 누가 전권을 가지고이 토론을 거쳐서 우린 이렇게 결정을 내린다 이런 것도 없었었
분산도 전혀 돼 있지 않았었습니다. 모든 토론이 끊임없이
이어질 수밖에 없고 결정을 못 내리고 그런 일들이 조선에서 허더했었습니다.
근데 이때 처음으로 이제 서양식 그리고 서양을 배웠던 일본식 근대
정부 기구를 처음으로 만든게 군국 기무처입니다. 군국 기무처는 조선왕조
역사상 최초의 제대로 된 정책 위반 기구입니다. 그래서 법안을 토일를
하고 공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됩니다.뿐만 뿐만 아니라 인사,
행정, 세금, 재정, 학교를 설립하고 군대를 일으키고 산업과 상업에 가는
모든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그 결정 기구를 지금 만들어 버립니다. 정부
기구. 여기에서 군국 김무처 회원들이라 그랬습니다. 그 사람들이
모여서 매일같이 결정들을 내립니다. 결정들을 내려서
대원군의 허락 그 사인을 받고 그다음에 왕의 제가를 받는 건데 사실은 왕의 제가만
받도록 만들었습니다. 대원군이이 개혁들을, 근대 개혁들을 반대할 수 있다라는
것도 알았기 때문에 대원근이 만일에 거절을 하더라도 고종의 재감만 받으면
될 수 있도록 그렇게 결제 라인을 만들어 놨습니다. 자, 그러고 나서는
엄청난 개혁들을 해내기 시작합니다. 7월 30일 날 첫 번째 개혁이 나
안이 나오는데 이게 이제 국내부에 대한 개혁이 아닙니다.요 부분에 대해서 약간 좀 약간 자세하게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왜 그러냐면요.이 이 국내부라는게 그니까 왕실이죠. 왕실에서 뭐를
했었고 어떻게 나라를 통치했었다라는 거를 잘 모르고 있는데 그게 명확하게
드러나는게 뭐냐면이 국내부를 군국 기무처가 들어와서 근대식으로 어떻게
개혁을 하는지를 그것만 잠깐 보면은 야 행정이 이랬었던 거구나. 조선의
행정이 일했었는데 이렇게 바뀌어 가는 거. 우리가 지금은 너무나도 당연하게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행정이
사실은 벌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국내부라는 것이 이렇게 이러한 수많은
기구들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개혁 이전에는 승선원
그게 뭐냐면 상서 기주 품질 검사 뭐 이런 이런 겁니다. 그다음에 경연청
허문관도 있고 예문도 그 밑에 또 들어 있 경연 학문을 논하고 경인분을 가르치는 거죠. 그다음에 규장각 이거
많이 하신고 그다음에 통예원 장학원 내수사 내수사는 이제 왕비
그죠? 그쪽 살림입니다. 거기에는 용동궁, 어이궁, 명예궁, 수진궁,
장음고 이런 것들이 또 나눠져 있었고요. 그다음에 사원이라는게 있었는데 거기는 이제 빙고, 서빙고,
동빈고 하는 그거를 운영하는데도 있고 예빈이라는 것도 있고 또 상위원이라는 것은 이제 궁중에 옷 만드는데
그다음에 내위원이라는 거는 궁중내 의원들이죠.이 이 밖에 또 종백부,
종묘 사직을 다루는데 영희전, 경모군, 장생전, 각능, 원궁묘
그다음에 봉상 전생 이런게 있습니다. 종친부도 있고요. 그다음에 시강,
내시사, 태복시 뭐 하여튼 뭐 별화별게 다 있습니다. 왜 지금이 첫
개혁관이 나열를 했는했는지 아십니까? 나열를 하는 이유가 그다음을 읽어 보시면 이렇습니다. 이상 각 사회
종전에 들어오던 돈과 곡식은 탁지부에서 전적으로 관할하고 일체의
지출은 균역청과 탁지부에서 배정한다.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까지 나열했던
그 모든 국내부와 상관 있는 그 관청들이 뭐를 할 수가 있었습니까?
각자가 세금을 거뒀습니다. 아무나 가서 세금을 건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면 우리가 딱 국세청에다 세금 내야 되는 거고 중앙정부에서 그 국세청에서 하는 걸
가지고 정확하게 예산을 짜서 나눠서 나중에 감사를 받아야 되는 거고 이게 당연히 우리가 돼 있죠. 여기는 전혀
그런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기억하시겠지만은
W주교 같은 전주교 신신부님들이 와서 야 진짜 조선의 백성들 너무나 너무나
가엽다. 학종 세금 다 받쳐야 되는 거고 뭐 아무 또 또 때가 되면
출몰하는 도적단한테도 뭐를 받쳐야 되고 그야말로 아무나 와서 야 나 종부인데 너 돈 내나 뭐 뭐 내 수사
어딘데 돈 내나 세금 그게 세금이라고 바쳤던 겁니다. 그러니까이 궁국
기무처에서 제일 먼저 하는게 야이 세금 세금부터 이거 이거 제대로 해야 된다. 그래서 일체에 세금을 걷는
거는 탁지부에서 그리고 지출은 균역청 하고 탁지부만 만들어서 거기에서 모든
지출을 관리하도록 한하지 아무도 왕실이고 종친부가 아무도 이제는 따로
세금 못 건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제일 먼저 하는게 재정 세금 세금을
어떻게 걷는가? 나라가 어떻게 쓰는가 그거에 제대로 된 합리적인 조직을
우선 만들어야 된다. 그래 갖고 그거부터 국내부터 이제 정리를 하는 거고요. 그래서 그다음에 뭐라 하냐면 의정부로
하여금 백관을 통설하여 모든 정물을 처리하고 나라를 운영하도록 한다.
의정부가 모든 책임을 궁극적인 책임을 진다라고 하고 그 밑에 내무화문,
외무화문, 탁지암은, 법무화문, 항무화문, 공무화문, 군무암은, 농상
아문 등 여덟 개의 아문을 둔다. 근대식 정보가 가져야 되는 그렇죠.
내무부, 외무부, 재경부, 법무부, 교육부, 그다음에 산업부. 어,
그다음에 이제 당연히 국방부, 농림부. 어,이 이런 여덟 개의 이제
부처를 두는 거죠. 근데 부처만 두는게 아니라 뭡니까? 각 부처가 해야 되는 역할을 명확하게 규정을
해서 명시를 하고 부처의 명칭 역할 그리고 관료가 몇 명이어야 된다.
그니까 옛날에 병조에 2조에 관리가 몇 명이야 된다 이런 거
아무것도 명시된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그냥 자기 아는 사람, 자기
같은 파벌 이런 사람들 그냥 갖다 쓰고 그게 우리가 알고 있듯이 장관 있고 차관 있고 국장이 있고 명령
체계가 있고 책임 결제 라인이 이런게 아니었었습니다. 이런 것이 처음으로
들어오는게 지금 군국 기무처를 통해서 갑경장 때 하는 거죠. 이런 거를 지금 김옥균, 박영, 서재필 이런
사람들이 갑신정변 때부터 하렸던 거죠. 왜냐면 이게 지금 메이지신 때 했었던 거고 메이지신은 당연히
서양에서 저렇게들을 근대 국가들이 다 하고 있으니까 그걸 따라했던 거니까. 근데 그게 거듭 실패로 돌아가고 이제
와서 처음으로 조선이 근데 정부 체제를 갖추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개혁관을 구체적인 개혁관을 발표를 공표를
합니다. 여러분 이걸 읽같이 읽으시면서 들으시면서 야 이게 너무나 당연스러운 거지.
어떻게 보면 그렇지만 그 당시로선 혁명적이었었다. 그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같이 한번
어 내용을 살펴보시면 좋겠습니다. 1. 이제부터는 국내외의 공문서 및
사문서의 계국 기념을 쓴다. 뭡니까? 여태까지는 청나라의 연어를 썼었던
거죠. 이제 우리가 청의 속방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청의
연어를 쓸 이유가 없다. 이렇게 되는 거죠.이 2.을 개정하고 각국의 특명 전권 공사를
다시 파견한다. 청나라도 이제는 상국이 아닙니다. 상국 속방관계가
아니다. 따라서 어떻게 합니까? 청나라의하고의 관계를 재정립을 해야 되는 거죠. 천국 이제는 상국 속방
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관계다. 그동안에 천국하고 조청 무역 수득 장전 뭐 이런 것
전부 다 다시 한다. 만국 공법에 의해서 대등한 국가끼리의 대등한 평등
조약으로서 모든 걸 바꿔야 되기 때문에 그걸 바꾼다. 특명 정권도 대사 같은 것도 천국 밑에 우리가
보내는 것이 아니라 따로 공사를 완전히 독립 국가로서 보낸다. 그래서 다시 파견한다. 이제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3. 문벌 양반과 상인들의 등급을 없애고 귀천의
관계없이 인재를 선발하여 등용한다. 이것도 뭐 수없이 나오는 얘기입니다.
어느 집안이냐, 누구의 자식이냐, 후손이냐 이런 거 따지지 말고 그다음에 이제이 신분 계급 이거를
철패해야 되겠다. 등급 따지지 말고 인제는
좀 능력에 따라서 좀 선발해 보자. 이제 그런 거죠. 4. 문관과 무관의
높고 낮은 구별을 폐지하고 단지 품계만 따르며 서로 만나는 절차를 따로 정한다.
얼마나 무반에 대한 차별이 심했음은 그죠. 문반사대부들이
무반은 완전히 거의 중인 정도로 취급을 했고 전혀 그 교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뭐 종일품 종일품이면은 문반이든 무반이든 똑같은
거지. 그리고 서로 만나는 절차도 이제는 공식적으로 이게 서로가 교류를 해야 되는 거니까 그것도 다 만들어
놓니다. 얼마나 교류가 없었어. 다 만나야 된다.
같이 회의를 하고 그래야 된다. 이제 이런 얘기를 하는 거죠. 5. 죄인 본인 외의 친족에게 연화 형률을 일체
시행하자. 연좌제가 이때 없었을 겁니다. 갑신 정변이 일어났을 때
실패로 돌아가니까 그야말로 삼족을 멸하는 거 아닙니까? 홍영식 아버지
어 그 홍순먹영이정 자살을 하고 뭐 다 사형당하고 독살 저 독 먹고 죽고
이제 처형당하고 이제 이런 일인데 이제 그런 거 없다. 연좌제 없다.
지금 우리가 연좌제가 말이 안 된다라고 하는 뭐 너무나 당연한 걸로 받아들이지만 이때
처음으로 그 연자제가 없어지는 겁니다. 조선에서 6. 처와 첩에게
모두 아들이 없을 경우에만 양자를 세우도록 그 전 규정을 거듭 밝힌다.
그러니까는 뭐냐면은 첫판서 아무리 아들이 나더라도 그건 서자이기 때문에
자식으로 치지 않는 거죠. 그러니까 대를 입기 위해선 어떡합니까? 서자들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자기 동생내나 어디로 해 갖고 양자를 데려오도록 하는 거죠. 그 얘기는 뭐냐면 사실은 서자라는 거를 개념으로
없앤다. 첩배 자식도 똑같이 대한라는 그 얘기를 지금 하려고이 규정을
만드는 겁니다. 7. 남녀간의 조혼을 속히 엄금하며 남자는 20살, 여자는
16살 이상이라야 비로소 혼인을 허락한다. 교혼이 일어나는 이유는
저희가 여러 번 말씀드렸겠지만은 사실은 너무나 그 평균 수명이 짧고
정말 빨리 결혼해서 노동시키고 아이 많이 낳고 일찍 죽고 그러니까 이제 그랬었던 건데 아무튼 그런나 처참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그러니까 억주로 해도 남자는 20살 이전엔
절대 결혼하면 안 되고 여자도 16살 전에 결혼하면 안 된다라는 규정을 나라에서 지금 만들어는
겁니다. 8.과 과부가 제가 하는 것은 귀촌을 막론하고 자신의 의사대로
하게 한다. 일방적으로 어 그 여성한테 분리한 그러한 그 규정들을
이제 없애 버리는 겁니다. 9. 공비와 사노비에 관한 법을 일체
폐지하고 사람을 사고파는 일을 금지한다.
여러분 노비 사고파는 거 노예제도였습니다. 아무리 뭐 뭐 뭐라고 뭐라고 하도 노비 제도입니다.
어 노예 제도입니다. 이때야 1894년이
돼서야 공식적으로 너비가 폐지가 됩니다. 그때까지는 너비이 다
있었습니다. 10. 비록 평민이라도 나라에 이롭고
백성에게 편리한 의견을 제기할 것이 있으면 군국 기무처의 글을 얼려 회의에 붙인다. 이건 무슨
뜻이냐면요. 관료들이 아니면 그니까 사대부
출신으로 과거를 쳐서 공식적으로 관리가 된 사람이 아니면은 국정을
논할 수가 없었습니다. 평민들도 감히 정부의 정책을 비판한다라든가
논의를 하는 것만 하더라도 절대로 안 된다고 했어. 큰 일 납니다. 그거 하면은 잡혀가는 거죠. 가서 권장
맞고 이제 큰 처 처벌을 받게 돼 있었던 거죠. 아무도 국정 논할 수 없다. 지금 뭐
북한이나 뭐 독재 국가에서 그런 거죠. 감히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 비판하면은 그거 비밀 경창이 듣거나
그러면 이제 당장 잡혀가듯이 절대로 안 되는 거였었는데 국민이 백성이
나라의 국정에 대해서 이제 논해도 된다. 그리고 좋은 의견이 있으면은
그걸 써서 내라. 그럼 우리가 그거를 참조를 하겠다. 굉장히 혁명적인 변화입니다. 전제본 본건 전제
국가에서 근대 국가의 기본적인 모습 즉 국민의 여론을
내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겠다. 그 여론을 반영을 정책에 반영하겠다. 즉 정치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여지가
지금 생기기 시작하는 바로 그 규정입니다. 11. 관청의 조례애들은 참작하여 더
두거나 줄인다. 이런 규제들은 한 번 만들어서 딱 되는게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 그때그때 따라서 더 만들 수도
있고 줄일 수도 있고 그렇다. 12. 조정 관리의 의복 제도는 임금을 뵐 때의 차림은 사모와 장복, 품대와
화자라 하고 한가에 지날 때의 사복은 칠립 타포 실띠로 하며 사인과 서인의 의복 제도는 칠립 두루막이 실띠로
하고 군사의 의복 제도는 근래의 규례를 따르되 장수와 군사의 차이를 두지 않는다. 여러분 이게 굉장히
깁니다. 의복 때문에. 왜 그런지 아십니까? 여러분 신분 사회에서 그 신분을 나타낼 수 있는 거는 두
발을하고 의복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처전 철저하게 두 발을 규쟁을
했었고 누가 머리를 상투를 틀 수 있고 없고 그렇죠. 누가 어떤 옷을
입을 수 있고 어떻고 소의 길이가 얼마 이상이 되고 안 되고 이게 전부 다 신분에 따라서 규정이 됐던 거기
때문에 지금 뭡니까? 그 신분을 지금 없애겠다는 거 아닙니까? 귀천 보지 말고 인재를 동용을 하자. 의복에
따라서 신분을 규명할 수 있는 알아볼 수 있는 그거를 점점 없애게 된다는
얘기니다. 그리고 장수와 군사에서도 그 의박의 차이를 두지 않는다라는 어
그 얘기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 우리 현대군은 어떻습니까? 똑같은데 계급장만 조금 다른 거죠. 뭐 별이
두 개냐 세 개냐 이런 식으로 그런 식으로 완전히 어 그 어 바꿔
나갑니다. 이게요. 어 저는 역사를 특히 이때의 역사를
보면서 어 그 당시의 상황이 어땠다라는 걸 알아야 되는 거고 그런데 그 당시의
상황이 어땠다라는 걸 알기 위해서는요 지금 상황하고 비교를 제대로 해
봐야지 어 너무나 우리는 당연하고 아 정부는 자고로 일해야 되는 거고 아 세금 걷는 건 이런 거고 아 뭐
관료라는 건 이런 일을 해야 되는 거고 이런 것이 전혀 당연하지 않았다라는 거를 우리가 확 느끼면서
아, 그래야지 근대화를 하겠다고 하는 개화파들이 됐든 뭐 기독교인들이
됐든지 그리고 일본이 지금 들어와서 하려는이 근대 개혁이 그냥 막연하게
와서 뭐를 뭐 잘 안 되든 거를 잘하게 하는게 이게 아니라 정부를 운영하고 백성을 대하고 국가를 통치해
나가는 전혀 새로운 방식을 지금 도입하고 있는 과정이라는 거를 따라서
얼마나 크게 지금 조선이 변화가 있다는 거를 우리가 실감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런
규정들도 좀 자세히 읽어보고 개혁관들도 자세히 읽어 보면은 아
이렇게 달랐었구나. 그리고 아 이렇게 갈 수밖에 없었구나. 이래서가
근대화를 하려는 거 개혁을 하려는 거였구나라는 걸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네. 오늘은 어 어떻게 해서 대원군이 재집권을 하면서 어 제1차 갑보
경장을 이끌어 갈 수밖에 없었는가? 그리고 특히 그 갑보 경장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왜 혁명적이었나 같이 살펴봤습니다. 다음 시간에는요.
바로 요때입니다. 바로이 군국 기무처를 발표를 하고 이제 그 전권을
대원권한테 넘기고 하는 사실 7월 24일 날 청일 전쟁 최초의 전투인
풍도회전이 일어납니다. 동시 다발적으로 전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나서 풍도 회전에이어서 아산
전투라고도 하는 성환 전투가 일어납니다. 그러면 다음 시간에는
본격적인 어 그 청일 전쟁의 첫 번째 해전, 첫 번째 육상 전투에 대해서
어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음악] 구체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통해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탐구해 보는 한국인의 탄생. 오늘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입니다.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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