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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9

박유하의 언론 자유? 좌파가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 | 노동자 연대 2017

박유하의 언론 자유? 좌파가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 | 노동자 연대



박유하의 언론 자유? 좌파가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

〈노동자 연대〉 233호
입력 2017-12-13 23:35

차승일





12월 7일 박유하 세종대 교수(이하 존칭 생략)를 지지하는 ‘《제국의 위안부》 소송 지원 모임’이 결성됐다. 〈조선일보〉, 〈한국경제〉 등은 세계적 지식인들이 이름을 올렸다고 대서특필했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형사재판 판결(서울고등법원 2심)이 10월 27일에 나온 것에 대한 대응이다.

박유하 지지 선언은 2015년 말에도 있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오에 겐자부로는 이미 그때부터 참가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노엄 촘스키, 브루스 커밍스, 와다 하루키 등이 새로 이름을 올렸다.

국내 지식인 명단은 2015년에 견줘 대폭 바뀌었다. 우선 2015년 선언에는 194명이 참가했는데, 이번에는 49명으로 대폭 줄었다.
 2015년에 동참한 김규항, 유시민, 장정일, 홍세화 등이 이번에는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그 뒤로 국내외 논자들이 박유하 주장의 본질을 세밀하게 비판한 덕분인 듯하다. 특히, 정영환 교수의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푸른역사)는 박유하 주장의 모순과 맹점을 낱낱이 파헤치며 반박했다. 본지도 반박 기사를 내보냈다.(김영익, ‘《제국의 위안부》 옹호자를 비판한다: 박유하는 잘못된 사실을 확신하는 제국 옹호자’, 〈노동자 연대〉 192호)천대받는 이들을 모욕하는 게 ‘학문의 영역’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가? 2015년 12월 30일 수요시위ⓒ이미진


뉴라이트가 가세하다

이번 선언의 또 다른 특징은 안병직, 이영훈, 이대근 등 뉴라이트의 ‘낙성대파’가 가세했다는 점이다. 역사문제연구소의 후지이 다케시 연구원은 〈한겨레〉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썼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런 변화가 생겼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노무현 정부 때 우파들이 ‘표현의 자유’를 코드명 삼아 투쟁을 벌인 것이 떠올랐을 게다. 2005년 10월 우파들이 대거 참가한 시국선언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정체 불명의 배후 세력 등 ‘친북·좌경·반미’ 인맥이 청와대 등 국가기관과 KBS·MBC·SBS 등 공중파 TV를 장악하고 … 대한민국의 ‘좌향좌’를 선도하고 있다.” 아, 이 기시감!

지금도 우파들은 언론 통제 운운하므로 ‘표현의 자유’ 문제는 앞으로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전선이 될 것이다.

올해 10월 형사재판 항소심에서 박유하는 유죄가 인정돼 벌금 1000만 원을 선고받았다. 이에 박유하 지지 모임은 이렇게 주장했다. “군사 독재 정권과 함께 사라진 것으로 여겨졌던 사상적 통제가 다시금 부활하는 듯한 느낌, 획일적인 역사 해석이 또다시 강제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영훈이 “사상적 통제” 운운하니 역겹다. 그는 앞서 말한 2005년 우파 선언에 이름을 올린 인물인데, 그 선언은 좌파 역사학자 강정구 교수에 대한 마녀사냥도 촉구했다. “망언을 한 ‘친북·좌익’ 교수에 … 대해 좌파 정권의 법무부 장관이 … ‘수사지휘권’을 발동하여 ‘불구속 수사’를 지시하는 국기(國基)를 흔드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결국 강정구 교수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자격정지 2년의 판결을 받았다. 그러니 우파가 벌금 1000만 원 가지고 호들갑을 떠는 것도 우습다.

박유하 지지에 앞장서고 있는 김철 연세대 명예교수는 이영훈과 함께 뉴라이트의 주장이 잔뜩 담긴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책세상)을 편집했다.

일본의 자유주의 지식인 와다 하루키가 박유하 지지에 참가한 것은 하루키가 ‘위안부’ 문제가 “일본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하는 국가 범죄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하는 ‘현실론자’라는 점과 관계있다.

1990년대 무라야마 정부가 ‘도덕적 책임’만 인정한 채 ‘아시아여성기금’을 해결책이라고 내놓았고, 한국 ‘위안부’ 피해자의 3분의 2 이상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는데, 하루키는 이 기금의 이사로 참여했다.

2015년 한일 정부간 ‘위안부’ 합의는 점증하는 동아시아 긴장 속에서 한·미·일 동맹을 강화해야 한다는 인식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겨레21》 길윤형 편집장은 “일본 리버럴”이 이런 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하루키의 박유하 지지 참가는 이 한계의 논리적 귀결이다.

박유하의 엉터리 주장과 피해자 모욕

박유하는 오랫동안 ‘한국’과 ‘일본’의 화해를 주장해 왔다. 두 국가의 화해의 출발은 일본 국가의 진심 어린 사죄와 배상일 텐데, 박유하는 오히려 ‘위안부’ 피해자들이 먼저 용서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식민 지배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일본인들[의] … 혐한은 1990년대 초 이후의 역사 문제 갈등에서 한국인이 그들을 용서하지 않고 언제까지고 비난만 한다는 생각에서 오는 부분이 크다.”(《제국의 위안부》 7쪽, 이하 쪽수만 표기) 피해자의 사죄 요구가 문제라는 식이다.

박유하의 주요 전술은 비판 차단용 진술을 군데군데 끼워넣어 자기 주장의 본질을 은폐하는 것이다. 그래 놓고는 비판이 일자 ‘내 책을 읽어 봐라’는 식으로 나온다.

예를 들어 2장 1절에서 박유하는 위안소 포주의 말을 빌려 ‘위안부’들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을 때에도 그 일을 그만두려고 하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진술, 일본인 남성의 소설을 토대로“‘위안부’들이 본인의 희망에 따라 이동할 수도 있었다”는 진술, 일본군 장교를 인용해“군인들이 ‘관리’는 했지만 직접 모집하거나 영업은 하지 않았다”는 등의 진술을 거의 30쪽에 걸쳐 서술한다. 그래 놓고 “물론 이들 ‘열 명’이 ‘1000명’을 상대해야 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들의 ‘위안소 생활’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다” 하는 말을 쓱 집어넣는다.

게다가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제의 기획자이며 군위안소 설치 운영에 직간접으로 관여하고 군위안소를 감독 통제하는 주체였[다는] … 것은 문헌과 정황 속에서 확인”되므로, 박유하의 일부 서술은 사실도 아니다.(강정숙, ‘일본군 성노예(위안부)제 문제의 쟁점과 과제’, 《젠더리뷰》 2012년 가을호)


책략이거나 혼동

바로 이 때문에 박유하가 ‘위안부’를 모집한 업자들이 진정한 문제라고 강조하는 것도 책략이거나 혼동이다. ‘위안부’ 모집 업자들은 종범으로서 죄가 분명하지만, 이렇게 종범만을 강조하는 것은 주범(일본 국가)의 죄를 가리는 효과를 낸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가장 분노하는 부분은 박유하가 ‘위안부’를 “자발적 매춘부”인 듯 묘사하고 일본군과 ‘위안부’의 관계가 “동지적 관계”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박유하는 그런 적이 없다고 발뺌하지만, 돈을 벌러 외국 위안소로 자발적으로 간 일본 성매매 여성인 “가라유키상의 후예, ‘위안부’의 본질은 실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분명하게 말했다(32쪽). “조선인 위안부는 … 일본군과 함께 전쟁에 이기고자 그들을 보살피고 사기를 진작한 이들이기도 했다”고도 했다(205쪽).

이로부터 박유하가 끌어내는 결론은 이렇다. “법적 책임을 일본 국가에 있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일이다. … 일본 국가가 … 위안부들의 불행을 만든 구조적인 ‘죄’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는 있다. … 그것이 ‘도의적 책임’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 90년대의 일본의 사죄와 보상이었다.”(191쪽)

바로 여기서 박유하의 입장은 일본 정부의 기존 입장과 만난다. 이는 ‘위안부’ 운동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데로 나아간다.


표현의 자유로 옹호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그리고 법적 규제

박유하 옹호파는 표현의 자유 문제로 소송과 유죄 판결을 비난한다. 특히 한국 정부의 사상 억압에 동조해 온 우익들이 그런 언사를 쓰는 건 불쾌한 일이다.

물론 원칙적으로 우리는 표현의 자유를 옹호한다. 의견과 주장의 제약 없는 교환이 노동계급과 천대받는 사람들의 저항에 이롭기 때문이다.

즉, 좌파의 표현의 자유 옹호는 그 자유가 어떤 경우에라도 지켜져야 한다고 보는, 즉 개인의 자유를 지고지상의 가치로 여기는 자유주의적 관점과 다르다. 이런 자유주의적 관점은 ‘표현의 자유’를 들먹이며 막말을 해대는 우파들 앞에 마비되기 십상이다.

계급으로 나뉜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 문제가 제기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그 자유의 계급적 내용이 중요하다.

박유하처럼 억압받기는커녕 완전히 자유롭게 언론의 자유를 누리는 제국주의자들의 편에 서서 수십 년간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천대받아 온 피해자들을 모욕하는 것에 “표현의 자유니까” 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찬가지로, 인종차별이나 성차별, 성지향 차별처럼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는 주장을 할 자유까지 표현의 자유라며 옹호할 수는 없다. 노동계급과 차별받는 사람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운동의 정당성을 폄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운동 안에서는 이런 주장을 규제할 수 있다는 생각이 폭넓은 지지를 받는다.

물론 좌파가 그런 차별과 억압의 핵심 기구인 자본주의 국가더러 법률적 제재를 가하라고 해서는 안 된다. 국가의 사상 통제는 오히려 노동계급과 차별받는 사람들에게 향하는 경우가 훨씬 흔하기 때문이다.

박유하가 관련된 이 사건에서는 특별하게 유념할 것이 있다. 자신들의 존엄을 무시하는 주장을 지속하는 박유하에게 ‘위안부’ 피해자들이 법에 기대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위안부’ 피해자 vs. 박유하라는 양자택일의 선택지 앞에서 표현의 자유를 제일 가치로 말하는 것은 박유하를 편드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는 진보의 대의에 역행하는 일이다. 일부 진보 지식인들의 박유하 지지 선언 동참이 유감인 까닭이다.

진보·좌파의 약점

박유하의 또 다른 전술은 역사학계에서 유행처럼 돼 있는 ‘미시사’ 방법의 사용이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 군상의 다양한 모습을 포착하려는 미시사는 역사유물론을 전제로만 한다면 우리의 역사 이해를 풍부하게 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사회 변화의 진정한 동역학을 잊은 채 “다양한” 모습에만 골몰하는 것은 오히려 역사 이해를 방해한다. 또, 낱낱의 개인들의 경험을 모두 수집하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그것이 설사 가능하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근본적 한계도 있다. 사회는 단순히 개인들의 합이 아니다.

게다가 박유하가 말하는 ‘위안부’의 다양한 모습이라는 것은 사실 새로운 발견인 것도 아니다. 기존의 ‘위안부’ 진술 모음집에서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을 취사선택했을 뿐이다.

박유하는 기존 ‘위안부’ 운동의 민족주의적 한계도 이용한다. 좌파 일부(민족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는)가 헷갈리는 까닭이다.

박유하 등은 ‘위안부’의 이미지가 우리 민족의 순결한 소녀로 정형화된 것을 문제 삼는다. 물론 ‘순결’하든 아니든, 미성년이든 아니든 여성을 성적 착취의 대상으로 이용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문제다.(미성년에 대한 성적 착취가 더 큰 공분을 일으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이 점에서 박유하가 페미니즘 담론을 이용해, 정형화된 이미지를 문제 삼는 것은 교묘하게 기존 운동의 약점을 파고들려는 것이다.(박유하와 위안부 문제에서 거의 동일한 입장인 일본의 우에노 치즈코가 ‘여성혐오사회’를 주장하고 그것이 한국의 일부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인기를 끈 것은 단지 우연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가 일본 제국주의의 성노예 범죄였음을 생각하면, 이런 정형화가 ‘위안부’ 운동의 대의 전체를 부정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일단 피해자의 상당수가 10대 나이에 원치 않게 ‘위안부’가 됐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일본 제국에 의한 민족 억압이 실재했으므로, 대중의 즉자적 반감이 민족주의의 수사와 논리를 빌어 표현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국인들은 일본 식민 지배를 겪었고, 해방 뒤로도 친일파 출신들이 국가 요직에 앉아 권력을 휘두르고 친제국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것을 겪어 왔다.

민족주의는 단지 지배계급 내 포퓰리스트들만이 이용하는 담론과 사상이 아니다. 제국주의에 대항한 민중의 민족 해방 투쟁이 더 높은 의식으로 나아가는 가교가 되거나 제국주의 국가의 노동계급을 자극할 가능성은 열려 있다. 아랍의 혁명과 저항들, 베트남 전쟁 등에서 우리는 이런 가능성들을 목격해 왔다. 저항 운동의 이런 변증법을 이해하지 못한 채 민족주의에 대한 거부 자체가 마치 세련된 진보인 것처럼 여기는 자유주의적 사고로는 오히려 그런 의식 발전의 계기를 만들 수 없다.

물론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는 자본주의 체제의 경쟁적 본질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므로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많은 저항이 반제국주의·반자본주의 운동을 지향하는 게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좌파라면 박유하의 주장을 ‘그래도 의미있는 일’로 보며 두둔할 수 없다. 부정직한 연구와 피해자 모욕이라는 도덕성 결여만이 문제가 아니다. 그가 교묘하게 비틀어 왜곡된 사실들에서 내리는 결론은 결과적으로 제국주의적 한·미·일 동맹 강화 노선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2022-03-06

| “일제강제동원역사관은 보상내역(위안부 포함) 공개하라!”

(11) 최덕효 | Facebook:


최덕효 is with 박봉철 and 
15 others
.


“일제강제동원역사관은 보상내역(위안부 포함) 공개하라!”

(사진1) 기증자=이준성 피해자=이철호 이철호(岩本哲鎬)의 군복장 개인사진
(사진2) 기증자=차승일 피해자=차말봉 차말봉(藤本末鳳)의 가족사진
(사진3) 기증자=최재현 피해자=최진현 최진현(崔真鉉)의 군복장 개인사진

● 위 사진은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소장 자료[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로서 한국 정부는 이 사진을 일제하 강제동원 증빙자료로 피해자 인정, 해당자는 보상금을 수령했다.
● ‘지원병 제도’에 있어 조선인의 경우 육군에 한해 1938년부터 입대할 수 있었다(해군은 1943년 7월 27일부터 총 3,000명). 식민지 출신 일본군을 양성한 ‘육군특별지원병제’는 1938년부터 1944년에 걸쳐 시행됐으며, 1만6500명 정원에 조선인 80만3000명이 지원해 약 49: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한편 ‘징병’은 1944년 4월부터 8월까지 이루어졌다.
● 군무원은 당시 용어로는 군속(軍屬)으로 통칭되었다. 군무원은 크게 군노무자와 기타군요원(문관, 운전수, 간호부, 포로감시원)으로 구분되었다. 특히 포로감시원은 타이완과 조선인을 대상으로 충당했는데 한반도에서는 1942년 6월에 모집해 훈련 후 인도네시아, 필리핀, 뉴기니, 미얀마, 태국 등의 포로수용소에 배치했다. 이들은 패전 후 포로에 대해 가혹 행위를 한 혐의로 BC급 전범으로 129명이 기소돼 20명이 처형되었다.
● 1942.10.1 조선총독부는 조선청년특별연성령을 제정, 시행(1942. 11. 3)했는데, 이 영은 조선인청년에게 심신단련 기타 훈련을 시행하여 장래 군무에 복무할 경우에 필요한 자질의 연성을 목적으로 함과 아울러 근로에 적응하는 소질의 연성을 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조선에 거주하는 17세 이상 21세 미만의 조선인남자는 의무였고, 17세 이상 30세 미만인자는 지원이 가능했다.
● 근로보국대는 일제가 중일전쟁 도발 후 인적·물적 자원을 총동원하기 위하여 공포한 「국가총동원법」(1938.4.1)과 함께 실시된 각종 통제법령의 대상인 ‘상시요원’에 포함되지 않는 ‘임시요원’인 학생·여성·농촌 노동력을 강제 동원하는 제도로서 「국민정신총동원근로보국운동에 관한 건」(1938.7.1)에 의해 조직되었다.[정태헌/고려대 한국사]
● '노무동원' 방식으로는 1939년 9월 이후 '모집', 1942년 2월 이후 '관알선', 1944년 9월 이후 약 8개월간 '징용'이 이루어졌다. (일본은 1939년 국민총동원령을 제정하였으나 한반도에 적용한 것은 1944년 9월부터)
● 일제하 ‘노무동원’ 관련, 포스코그룹은 2014년 1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행정안전부 산하)에 100억 중 60억을 약속대로 출연했지만 나머지 40억 출연 약속은 2018년 12월로 종료됐다.
● 정신대는 일제가 전시하 노동력 동원을 위해 여성 대원으로 이루어진 결성한 '‘여자근로정신대'를 말하며 식민지 조선과 대만에 적용되었다. 1944년 8월 23일에 여자정신근로령이 공포되었으며, 조선여자근로정신대에는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배우자가 없는 조선 여성이 소속되어 군수공장 등에 투입되었다. 동원 방법은 관청의 알선, 공개 모집, 자발적인 지원, 학교나 단체를 통한 선전 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 윤정옥 이화여대 교수는 “13세에서 많으면 17세까지 10-20만 명의 (조선)여성들이 정신대로 끌려갔다”는 등 정신대를 위안부로 착각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을 설립했다.
● 2020. 5. 26.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화해치유재단의 기금 잔액은 현재 56억원으로 총 46억원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유족에게 지급됐다. 2017년 6월까지 합의일 기준 생존자 47명 중 38명 대상, 수령자는 34명(1인당 1억원)
● 일본이 1990년대 중반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책으로 내놓은 아시아여성기금 사업에서 한국인 피해자 60(혹은 61명)명이 기금(1인당 500만엔 상당)을 수령했다.
● 한국정부는 당국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40명에게 1인당 4300만원의 생활안정지원금을 지급했다. 나눔의집(경기도)에 의하면 등록된 분들은 정부와 지자체로부터 매월 330만원과 연간 1,000만원 상당의 의료지원 등을 받고 있다.
*국비/여성가족부: 월 지원금 154만8천원(‘21년), 의료지원/간병비 피해자별 월 162만1천원(’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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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 1] 강제동원 보상(위로금)
1.박정희 정부 1974.12.21, `대일 민간청구권 보상에 관한 법률'(제정)에 의거
1975.7.1. ~ 1977.6.30. 인명.재산 포함 총 신고건수 10만9천540건 중 8만3천519건에 대해 모두 91억8천769만3천원 보상
인명보상 : 8천552명에게 25억6천560만원
재산보상 : 7만4천967명에게 66억2천209만3천원
(출처: 외교통상부)
2.노무현 정부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지원에 관한 법률'(2008.6.11 시행)에 의거
2005년~2006년 3차례 접수 21만8,639건 피해자 인정
조선인 출신 일본 군인 3만2,857명, 군무원(군속) 3만6,702명, 노무자 14만8,961명, 위안부 31명에 대한 위로금(사망자·행방불명자: 1인당 2천만원, 부상자: 300만원 ~ 2천만원) 지급
"#강제징용 보상은 1965년 #청구권 협정에 포함" 노무현 정부 당시 민관 공동委서 결론낸 사안: 2005년 이해찬 총리가 위원장, 문재인 민정수석은 위원으로 참여, 피해자 7만2631명에 6184억 지급(2007~2015)
(출처: 행정안전부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지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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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타련 공지] 한일갈등타파연대(한타련)는 2021.11.13(토) 부산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행정안전부 산하) 앞 집회를 통해 ‘한·일청구권 자금 보상내역 게시’와 ‘보상금 수령자 사진자료 복원’을 요구했다.
역사관 측은 한타련과의 전화 통화에서 보상자 사진 블라인드 처리에 대해 ‘개인정보 보호’ 운운했으나, 집회 후 역사관 측 직원은 홈페이지 작업 때문이라며 ‘再게시’를 약속했다.
그리고 11.21 보상자 사진자료 再게시가 확인되었다. 한타련은 역사관 측의 再게시를 환영하며, 아울러 한·일청구권 자금 보상내역 및 구 일본군 위안부 보상내역(아시아여성기금, 화해치유재단, 한국정부 등) 게시를 지속적으로 요구할 예정이다.
한타련은 국민들의 알 권리와 역사인식의 제고를 위해 역사관이 홈페이지에서 공개한 보상금 수령자 사진자료를 시리즈로 올린다. <한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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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1

박유하, 위안부 피해자 모독 계속하기로 작정하다 | 노동자 연대



《『제국의 위안부』, 지식인을 말하다》, 《『제국의 위안부』, 법정에서 1460일》: 박유하, 위안부 피해자 모독 계속하기로 작정하다 | 노동자 연대

《『제국의 위안부』, 지식인을 말하다》, 《『제국의 위안부』, 법정에서 1460일》
박유하, 위안부 피해자 모독 계속하기로 작정하다
차승일

252호
2018-07-05 | 주제:




▸ 맑시즘2018 — 18년째 열리는 국내 최대 마르크스주의 포럼,7월 19일(목)~22일(일), 장소: 고려대학교, 주최: 노동자연대운동을 비판하더라도 최소한 운동의 대의에 대한 존중은 필요하다. 박유하는 그 선을 넘었다.ⓒ이미진

“제국의 변호인” 박유하가 새 책 두 종을 동시에 출간했다. 《『제국의 위안부』, 지식인을 말하다》(뿌리와이파리), 《『제국의 위안부』, 법정에서 1460일》(뿌리와이파리)이다. 이로써 박유하는 ‘위안부’ 피해자 모독을 지속할 작정임을 밝혔다.

박유하는 《제국의 위안부》(뿌리와이파리)라는 책을 쓴 세종대 일어일문학 교수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그 책이 자신들을 명예훼손했다고 보고 민사·형사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해 10월 27일 박유하는 형사재판 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현재 이 사건은 대법원으로 가 있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소송을 제기한 뒤 《제국의 위안부》는 큰 논란거리가 됐다. 진보적 지식인으로 여겨지는 유시민, 장정일, 홍세화, 김규항 등이 소송에서 박유하를 편들었다. 그들은 형사재판 2심에서 박유하가 패소한 뒤에 결성된 ‘《제국의 위안부》 소송 지원 모임’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 뉴라이트가 가세했다.

이 논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위안부 문제는 단지 과거사 문제가 아니라 현재에도 중요한 이슈이다. 아래에서 설명하겠지만, 무엇보다 현재의 제국주의와 밀접하게 연관된 이슈이다. 바로 이 때문에 박유하 주장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와 대결하는 것은 좌파가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오독과 곡해”의 여지가 없음

결론부터 말하면, 두 책은 박유하의 아집과 독선으로 점철된 막돼먹은 책이다.

박유하가 쓴 《제국의 위안부》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재일 조선인 학자인 정영환 교수가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푸른역사)을 써서 상세히 비판한 바 있다. 박유하는 정영환 교수의 “비판이 오독과 곡해로 가득한 것”이었다고 일축한다.
그러면서 다른 학자들의 비판과 위안부 피해자들의 반감은, 더 나아가 자신에 대한 국민의 “강한 편견”은 정영환 교수의 “오독과 곡해”를 그냥 받아들인 소치일 뿐이라고 본다. 이런 시각을 바탕으로 박유하는 자신에 대한 소송이 피해자들의 주체적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원단체”의 잘못된 전달에 의해서 제기됐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들의 가처분 신청이 인정돼 《제국의 위안부》에서 삭제된 진술들을 보면, 오독의 여지가 없다. 예컨대 다음과 같다.

“가라유키상[돈을 벌러 외국 위안소로 자발적으로 간 일본 성매매 여성]의 후예, ‘위안부’의 본질은 실은 바로 여기에 있다.”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가 기본적으로는 동지적인 관계.”




“‘조선인 위안부’는 피해자였지만 식민지인으로서의 협력자이기도 했다.”



“위안부 제도의 근간이 관리매춘”이라는 박유하

박유하는 자신이 위안부의 고통을 여러 차례 언급했는데 왜 없는 셈 치냐고, “동지적인 관계”나 “협력자”라는 표현은 특수한 문맥 하에서 쓴 것이라고, 자신의 의도는 그저 감춰져 있던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자 한 것일 뿐이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위안부 피해자들의 분노를 일으킨 “동지적 관계”나 “협력자” 표현은 일본군이 위안부 제도를 체계적으로 조직하지 않았다는 박유하 자신의 견해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박유하는 한 일본인 학자의 말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쓴다.

“하야시는 2015년에 “‘위안부’ 연구의 성과”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간략히 요점만 정리해 둔다.

“1) 일본군 위안소의 계획, 설립, 운영에 일본군과 정부가 조직적으로 관여했다. 2) 일본군은 이른바 위안소를 점령한 대부분의 지역에 설치했다. 3)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군에 의해 조직되고 관리된 명확한 성노예제이고, 성차별, 민족차별, 계급계층차별 등 차별의 복합(적 결과)이자 여성의 인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였다. 4) ‘위안부’ 제도는 제도화된 위안소부터, 부대별 개별 위안소, 납치감금 하의 윤간, 개별 강간 등 다양한 전시 성폭력 중 하나다. 5)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당시의 국제법에 위반되는 행위이고 전쟁 범죄이며, 일본 형법 226조 위반에 해당한다. 6) ‘위안부’가 된 여성의 고통은 전쟁 당시뿐 아니라 전후에도 이어졌다.

“대체적으로 찬동하지만, 내가 다소 이견을 갖는 부분은 1)에서의 체계성의 일관성 여부, 3)에서의 군의 주체성 부분(시기와 공간에 따라 달랐다)과 ‘위안부’ 동원 과정 관계, 5)에서의 위법성 여부 부분뿐이다.”




주요 항목에 이견이 있다면서 무엇을 “대체로 찬동”하는지 궁금하지만, 아무튼 박유하는 이번에 출간한 책에서 “조선인 위안부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총체적인 분석을 시도”한
결과로 세운 자신의 견해를 명확히 밝혔다.



“위안소라는 곳이 … 기본적으로 ‘임금’이 지불되는 장소였다는 중심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 “조선인 위안부 제도”의 근간이 관리매춘이라는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저의 문제의식은 식민지로 만든 나라의 국민을 ‘제국 확장’에 가담시킨 행위 자체를 비판하는 ‘제국 일본’ 비판에 있고, 책 제목은 바로 그런 의식을 담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한, 주체적이건 비주체적이건 결과로서의 ‘가담성’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주장의 목적보다 역사적 사실 부합이 먼저

그러나 이미 1992년에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는 일본 정부가 위안부 동원에 관여했음을 입증하는 자료를 일본 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찾아내 공개한 바 있다. 그는 일본군이 “장병에게 현지에서 ‘성적 위안’을 제공한다는 발상으로” 군 위안소를 만들어 운영했고, 참혹한 침략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징집한 군인들의 불만이 상관인 자신들에게 오지 않도록 식민지 여성을 ‘위안’으로 제공하는 제도를 고안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조직적으로 운용한 주체는 바로 일본군임을 증명했다.




그 뒤로도 연구는 진척돼,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일본 국가가 저지른 성노예화 범죄라는 것이 입증됐다. 당시는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던 시기이므로, 위안부 등의 동원은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민중 수탈의 일환으로 일어난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동지적인 관계”, “위안부는 … 협력자”라는 말은 어떻게 둘러대더라도 애초에 성립될 수가 없는 표현이다.

그러니까 박유하 주장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바로 그 때문에 위안부 피해자들이 박유하의 주장을 모욕으로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박유하에 대한 여러 비판은 “오독과 곡해”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박유하가 “오독과 곡해” 운운하는 것은 ‘피해자 꼭두각시’론, ‘국민 멍청이’론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일이다. “세계를 마주하는 가장 겸손한 자세”를
말하기에는 너무도 오만하다.



그런데도 자신의 잘못된 주장에 대한 확신이 어찌나 큰지, 박유하는 잘못된 통계를 인용해 놓고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핵심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틀렸는데도 말이다.

박유하는 위안부 소녀상이 미성년을 모델로 한 것에 줄곧 이의를 제기해 왔다.
그 근거의 하나로 미군이 작성한 ‘일본인 포로 심문 보고 제49호’를 인용해, 버마에서 포로가 된 조선인 위안부 20명의 평균 나이가 25세라고 했다.



그런데 애초에 미군이 계산을 잘못한 것이다. 사실 그 20명이 포로로 잡힌 때 평균 나이는 23.15세이고, 징집 때 평균 나이는 21.15세다. 징집 당시 그들의 다수는 미성년이었다.




이 지적에 대한 박유하의 변명은 기상천외하다. “자료를 인용, 제시하면서 그 자료가 끝낸 계산을 다시 반복하는 작업은 연구자의 의무가 아니다. 따라서 사용한 자료의 계산이 틀렸다고 해서 그것을 나의 ‘오류’로 비판받을 이유는 없다.”




박유하는 자신의 비판자들에게 ““이해력이 부족한 것이거나” “트릭”을 구사한 지적 태만/퇴락 현상”이라고 비난을 하지만,
실제 역사적 진실에 입각해 보면 이 비난은 박유하 본인에게 딱 어울린다.


위안부 문제: 현재의, 제국주의의 문제


위안부 문제는 일차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조선인 억압과 천대의 문제이다.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역사는 동아시아 곳곳에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는 상흔을 남겼다.

물론 이제 한국은 경제 규모가 15위로 더는 일본한테 수탈당하는 나라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위안부 문제가 그저 과거사 문제인 것은 아니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세계적 초강대국으로 군림해 지금까지도 동아시아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과 크게 관련된 문제이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 전후 처리 과정에서 미국 제국주의는 일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패권을 유지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미국은 일본의 범죄를 덮어 줬다. 그래서 천황제가 유지됐고 전범들의 권력이 유지됐다. 유명한 사실을 다시 지적하자면, 현재 일본 총리 아베가 A급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의 손자이다.

현재 일본 지배자들은 미국의 날개 아래에서 군사대국화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데, 과거의 전쟁을 위해 한 일을 공식 사과하는 것은 현재의 프로젝트를 어그러뜨리는 일이다. 바로 이 때문에 법적 책임을 극구 부인하는 것이다.

한국의 역대 통치자들은 경제적·안보적으로 미국·일본과의 긴밀한 연관 속에서 성장했다. 그래서 국내의 식민 잔재 청산은 물론이고 일본의 과거사 왜곡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일본 지배자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려 애썼다. 일본 지배자들이 법적 책임을 부인하는 근거인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이 바로 그렇게 탄생했다.

과거 민주당 정부들도 마찬가지였다. 2004년 당시 대통령 노무현도 일본 총리 고이즈미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내 임기 동안에는 정부 차원에서 [위안부 문제를] 공식적인 의제나 쟁점으로 제안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런데 2011년 헌재는 한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외교적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설상가상으로 이듬해에 이명박 정부가 미국의 촉구 속에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을 비밀리에 추진한 것이 폭로돼, 거센 비난 여론에 직면했다. 그런 가운데 한·일 간 위안부 외교 회담이 시작됐다.

그러나 미국은 위안부 문제로 한·일 관계 개선이 지체되는 것에 큰 불만을 가졌다. 미국은 중국 견제를 위해 한·미·일 삼각 동맹을 구축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에 적극 관여해 한·일 양측에 협상 타결을 압박했다. 그 압력은 주로는 한국을 향했다.

그래서 미국은 2015년 12월 28일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는 한·일 위안부 합의가 발표되자 크게 환영했다.

이렇게 한·일 위안부 합의가 미국의 관장 하에 나온 약속이라는 점은 위안부 문제가 오늘날의 제국주의 문제와도 깊이 관련돼 있음을 보여 준다. 이 점이 한·미 동맹을 중시하는 문재인 정부가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며 한·일 위안부 합의를 유지시키는 이유이기도 하다. 문재인 정부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의 체결을 주도한 김종필에게 훈장을 주기로도 했다.

위안부 문제의 이런 역사를 인식하는 것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푸는 데 중요하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정부의 외교적 노력을 (심지어 미국의 중재를) 기대했으나, 세계 제국주의 체제 안에서 미국·일본과 여러 면에서 얽혀 있는 한국 국가가 이 문제를 해결할 동기를 발견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반자본주의적·반제국주의적 운동을 지향하는 게 옳다.

바로 이런 맥락 때문에 박유하의 문제는 순수한 학술 논쟁을 넘어서는 문제이다. 박유하가 한국 사회에서 유포하고 싶어 하는 메시지는 우선, 위안부 문제를 도의적 책임 인정으로 봉합하고자 하는 일본 내 ‘리버럴’의 입맛에 맞다.

박유하는 《제국의 위안부》 집필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일본에 국가 책임이 있다고 말해 온 기존 논리가 결코 일본을 설득할 수도 없고 따라서 ‘법적 책임’을 지울 수도 없다고 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 이 책에서는 ‘도의적 책임’의 가능성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리고 박유하의 주장에는, 위안부 운동 주도 세력이 ‘도의적 책임’ 수준에 만족하지 않고 과도한 요구를 하는 바람에 일본 내 ‘합리적’ 주장의 입지가 줄어들고 우익이 강화됐다는 논리가 함축돼 있다.



그러나 1995년 사회당 소속 총리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이끈 일본 연립정부가 ‘도의적 책임’은 인정했지만, ‘도의적 책임’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과거 식민지 지배 책임을 회피하려고 빈번하게 꺼내는 미사여구다.




“[무라야마] 담화 발표 당시의 기자회견에서 무라야마 수상은 천황에게 전쟁 책임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없다”고 한마디로 부정했다. 또 소위 조선‘병합’ 조약은 “도의적으로 부당했다”고 하면서도, 법적 부당성은 인정하지 않아 일본 정부의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이 선, 즉 ‘상징 천황제’라 불리는 전후 천황제를 지키고 식민지 지배의 ‘법적 책임’을 부정하는 것, 서로 간에 깊이 관련되는 두 개의 요새를 사수하기 위한 방어선을 당시 일본 정부가 그은 것이다.”




일본 리버럴들은 실상 일본 제국주의의 군사대국화·우경화 행보에 타협하고 있는데, 그 흐름을 박유하가 좇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일본 우익들에게 득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따라서 “《제국의 위안부》가 … 제국주의 비판”이라는
박유하의 주장은 설 자리를 잃는다.



박유하 주장의 귀결은 현재의 위안부 운동이 양국 관계 개선을 위해 중단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좌파는 박유하의 주장을 ‘그래도 의미있는 연구 결과’로 보며 두둔할 수 없다. 부정직한 연구와 피해자 모욕이라는 도덕성 결여만이 문제가 아니다. 그가 교묘하게 비틀어 왜곡된 사실들에서 내리는 결론은 결과적으로 제국주의적 한·미·일 동맹 강화 노선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뉴라이트와 동맹 맺기

이 점에서 박유하가 뉴라이트 학자들과 동맹 관계를 맺는 게 부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뉴라이트는 자본주의의 발전을 지고의 목적으로 보며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점령, 독재, 재벌 등이 결과적으로 필요하고 유익한 경로였다고 주장한다.

박유하는 김철 연세대 명예교수를 “오랜 학문적 동지”라고 부른다.
실제로 둘은 2000년대 초부터 각종 모임에 함께해 왔다. 김철 교수 자신은 뉴라이트를 표방하지는 않지만, 이영훈과 함께 뉴라이트의 주장이 잔뜩 담긴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책세상)을 편집했다. 그리고 2017년 12월 7일 결성된 ‘《제국의 위안부》 소송 지원 모임’에 이영훈을 비롯해 안병직, 이대근 등 뉴라이트의 ‘낙성대파’가 이름을 올렸다.



물론 박유하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은 … 진보”라고 밝혔으니,
그를 뉴라이트로 단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자기 명예 지키겠다고 뉴라이트와도 동맹을 맺는 행위는 자기 중심적 태도에서 비롯하는 기회주의라는 비판을 면하기 힘들다.



또, 박유하의 주장은 일본군 위안소는 “단지 군 부대로 옮겨 온 공창(公娼)”이고 “위안부들은 처지가 열악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 일본군 위안부 성노예 설에 대해 재검토가 이뤄져야 한다”는 뉴라이트 이영훈의 주장과
무척 닮기도 했다.
주장의 얼개, 논지 전개 방식, 근거 자료 면에서 그렇다.



위안부 운동 주도 단체를 비난하는 데서도 유사성이 느껴진다. 뉴라이트는 위안부 운동을 주도하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뒤에 ‘종북 좌파’가 있다며 비난한다. 민주노총, 정의당, 민중당, 노동당 등 진보 단체들이 지지하는 운동을 색깔론을 이용해 폄훼하는 것이다.

박유하는 뉴라이트처럼 색깔론을 적극 펼치지는 않아도, 위안부 운동 주도 세력의 “민족주의”가 일본 국가의 책임 회피보다 더 큰 문제인 듯 주장한다. “이제까지의 20년 동안에는 오로지 소수의 관계자들의 생각이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국의 태도를 결정지었고, 결과적으로 이들의 의견이 한일관계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당연히 어떤 운동이라도 비판에서 자유로운 성역일 수는 없다. 그러나 운동의 대의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은 필요하다. 바로 이 점에서 박유하는 선을 크게 넘었다. 그리고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피해자들의 과도한 요구와 운동 주도 단체의 민족주의가 아니다. 한·미·일 동맹을 굳건히 해 중국의 부상에 대응하려는 미국 제국주의의 화해 압박, 군사력 육성으로 달려 나가고자 하는 상황에서 옛 문제로 발목을 잡히기 싫어하는 일본 지배자들의 법적 책임 부인, 경제와 안보 문제에서 미국·일본과 얽히고설킨 한국 지배자들의 외면이다.
민족주의 비판한다고 다 진보인 건 아니다

박유하의 분별을 잃은 태도는 억압하는 민족의 민족주의와 억압당하는 민족의 민족주의를 전혀 구별하지 않고 싸잡아 퇴행적인 것으로 보는 관점에서 비롯한다. 박유하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요구와 그것을 지지하는 정서를 그저 “식민지 트라우마 현상”으로 치부한다.




그 과정에서 박유하는 페미니즘도 동원한다.
‘여성혐오 사회’론 등으로 국내에도 유명한 우에노 치즈코가 일본 국가의 책임 문제에서 미온적인 점을 이용해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듯도 하다. 그러면서 지독한 독선을 보인다. 자신을 비판한다면, 아무리 페미니스트이더라도 “가부장제 구도와 민족을 넘어서기보다 복속되어 스스로 2차 가해자가 [됐다]”거나,
“내가 언급한 증언들을 “부분적 진실”로 간주하는 태도는 … 가부장적 생각과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다양한 전쟁 성폭력의 현장에 대한 인식의 부재마저 드러낸다”는
것이다.



분명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이 갖고 있는 다양한 정체성(젠더, 계급 등) 중에서 ‘민족’ 정체성을가장 중요하게 보며, 민족 앞에서 다른 ‘부문’적 정체성을 내세우는 것을 반대한다. 페미니스트들이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경계하는 까닭이다.(노동자 국제주의를 표방하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도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적 측면만이 아니라, 위안부 문제 등에서 한국인들이 민족주의적 공분을 표출하게 되는 정치적 맥락을 더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

해방 이후에도 친일파들이 수십 년 동안 국가 권력 요직을 차지해 왔다. 지금도 한국 지배계급은 일본과 얽혀 있어, 일본 제국주의를 반대하지 않는다. 따라서 비록 민족주의적 공분으로 표출되나, 오늘날 위안부 문제는 반제국주의 문제이자 계급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좌파는 이 모순된 상황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 한국 민족주의의 근원과 모순을 이해하지 못하는 추상적 사고는 민족주의를 극복하는 데서 도움이 되지 못한다.

게다가 최근 개봉한 영화 〈허스토리〉는 페미니즘적 관점에 서서 위안부 피해자들의 여러 경험(심지어는 성매매 여성이자 나중에는 위안소의 주인이 되는 위안부의 경험)을 다루면서도, 위안부 문제가 일본 국가에 의한 성노예화 범죄라는 중심을 놓치지 않았다. 박유하와 달리 말이다.
그리고 박유하의 민족주의 비판은 편향돼 있다. 박유하의 주된 문제 의식이 어디를 가리키는지는 그가 쓴 책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다. 박유하는 《제국의 위안부》 전에 《누가 일본을 왜곡하는가》(사회평론, 2000), 《반일 민족주의를 넘어서》(사회평론, 2004), 《화해를 위해서》(뿌리와이파리, 2005)를 썼다.

그중 《누가 일본을 왜곡하는가》에 대해 한 일본인 연구자가 전반적으로 우호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이렇게 당부할 정도였다. “한국 지식인이 한국의 반일 담론을 비판할 때는 반드시 일본에 대한 비판도 잊지 말아 주었으면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 국수주의자들이 자기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재료로 이용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게 가장 두렵다.”




박유하로서는, 한국인으로서 한국 민족주의를 먼저 비판하기 위함이라고 정당화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여기서도 박유하는 선을 넘는다. 예를 들어, 박유하는 전쟁 범죄자들의 유골을 안치한 야스쿠니 신사를 일본 정치인들이 참배하는 것을 두고는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관용을 발휘한다.

“우리가 국립묘지 가는 것하고 기본적으로 다른 문제가 아니다. 결국은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친 사람들을 어떻게 추모할 것이냐의 문제다. … 이런 추도 형식은 우리도 가지고 있다. 어느 나라든 이런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야스쿠니 문제는 기본적으로는 비판하기 어려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




더 나아가 박유하는 호기롭게 ‘친일파’가 되겠다고도 했다. “이제 감히 말하고 싶다. 한국에 대해 잘 알고 대체적으로 호의적인 일본인들을 ‘친한파’라 칭하는 의미에서라면, 나는 ‘친일파’라고.”




박유하는 자신이 민족주의자들과는 달리 “[일본 비판이 아니라] 제국주의 비판”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저 흰소리일 뿐이다. 그 실천은 아래로부터의 반자본주의적·반제국주의적 운동을 지향하는 것과는 완전히 역행하기 때문이다. 박유하는 위안부 문제 해결이 더딘 책임을 엉뚱하게 위안부 운동에 돌리고, 피해자들을 모욕한다. 여러 사람이 박유하를 “제국의 변호인”으로 부른 까닭이다.
다시 표현의 자유 문제


박유하는 국가 탄압에 저항하는 투사 행세를 한다. 표현의 자유를 추상적으로 사고하는 지식인들도 박유하를 지지했었다. 서두에서 밝혔듯이, 유시민, 장정일, 홍세화, 김규항 등이 그랬다.

그런데 박유하가 표현의 자유를 정말로 중요하게 여기는지는 의심스럽다.

2016년 7월 정영환 교수는 박유하를 비판한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의 출판 강연회를 위해 한국에 오려 했으나, 한국 정부가 그의 입국을 불허했다. 한국 정부는 정영환 교수 같은 ‘조선(국)적’인 재일 한국인들의 입국을 자주 불허한다. 이때 박유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영환 씨는 한국과 북한에서 정치적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한국 입국이 불허된 사람이다. … 이들이 한일 화해에 강한 두려움을 내비치는 건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색깔론 냄새를 풍기는 진술이다. ‘누구를 위한 불화인가’라는 제목의 이 글에서도 박유하는 “국가가 개인의 이동의 자유를 관리하는 일에 나는 비판적이지만”이라는 구절을 넣어 비판을 빠져나가려 하지만, 글 전체의 요지는 국적을 이유로 부당하게 표현할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었다.

박유하가 표현의 자유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와 관계없이, 좌파는 원칙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옹호한다. 의견과 주장의 제약 없는 교환이 노동계급과 천대받는 사람들의 저항에 이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가 어떤 경우에라도 지켜져야 할 자유인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표현의 자유 문제는 계급으로 나뉜 사회에서 제기되고 있고, 따라서 그 자유의 계급적 내용이 중요하다. 박유하처럼 억압받기는커녕 완전히 자유롭게 언론의 자유를 누리는 제국주의 옹호론자가 수십 년간 천대받아 온 피해자들을 모욕하는 것을 ‘표현의 자유니까’ 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인종차별이나 성차별, 성지향 차별처럼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는 주장을 할 자유까지 있어야 한다며 옹호하면 안 된다. 노동계급과 차별받는 사람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운동의 정당성을 폄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운동 안에서는 이런 주장을 제재할 수 있다는 생각이 폭넓은 지지를 받는다.

물론 좌파가 그런 차별과 억압의 핵심 기구인 자본주의 국가더러 법률적 제재를 가하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국가의 사상 통제는 노동계급과 차별받는 사람들에게 향하는 경우가 훨씬 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위안부 피해자들의 소송 제기에는 특별하게 유념할 것이 있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박유하의 주장에 맞서 자신의 명예를 스스로 방어할 힘이 없다. 비록 광범한 국민적 연민을 받으나, 정부는 피해자들 목소리에 제대로 귀기울이지 않는다.(피해자들에게 힘이 있다면, 지금 문재인 정부가 화해·치유재단을 유지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조직 노동자 운동 같은 강력한 대중 운동 세력의 뒷받침을 받고 있는 것도 아니다. 자신들의 존엄을 무시하는 주장을 한·일 양국에서 지속하는 박유하에 대해, 위안부 피해자들로서는 법에 기대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박유하의 새 책 발간으로 위안부 피해자들의 우려가 옳았음이 입증됐다.

또, 피해자가 자신이 입은 피해에 대한 구제를 위해 법에 호소하는 것은 권리이기도 하다. 추상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말하며 박유하를 편드는 것은 진보의 대의를 저버리는 일이다. 일부 진보 지식인들의 박유하 지지 선언 동참이 유감인 까닭이다.

좌파는 박유하 주장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비판하며, 위안부 피해자와 운동의 대의를 굳건히 방어해야 한다


참고문헌

김영익 2016, ‘《제국의 위안부》 옹호자를 비판한다: 박유하는 잘못된 사실을 확신하는 제국 옹호자’, 〈노동자 연대〉 192호. https://wspaper.org/article/18167
김영익 2018, ‘위안부 문제는 무엇이고, 왜 이토록 해결되지 않을까?’, 《마르크스21》 25호(2018년 5~6월).
김재중 2005, ‘“야스쿠니 참배는 우리의 국립묘지 참배”’, 《말》 2005년 12월호.
박유하 2015a, 《제국의 위안부(34곳 삭제판):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 뿌리와이파리.
박유하 2015b, 〈정규재TV〉 인터뷰, 2015년 6월 4일자. https://www.youtube.com/watch?v=hbDW5C5Ug-g
박유하 2016a,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소녀 위안부, 평균적 모습 아냐”’, 〈뉴스1〉, http://news1.kr/articles/?2716376
박유하 2016b, ‘누구를 위한 불화인가’,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법정에서 광장으로〉, https://parkyuha.org/archives/5611
박유하 2018a, 《『제국의 위안부』, 법정에서》, 뿌리와이파리.
박유하 2018b, 《『제국의 위안부』, 지식인을 말한다》, 뿌리와이파리.
사나다 히로꼬 2000, ‘한국의 반일 담론과 일본의 국수주의’, 《창작과 비평》 통권 110호.
서경식 2011,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 《언어의 감옥에서 ― 어느 재일 조선인의 초상》, 돌베개. http://east-asian-peace.hatenablog.com/entry/2015/03/28/160734
요시미 요시아키 2013,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란 무엇인가》, 역사공간.
이영훈 2016, ‘이영훈 교수의 환상의 나라 ― 12강 위안소의 여인들’, 2016년 8월 22~23일. https://www.youtube.com/watch?v=Ng45SOF0kmM, https://www.youtube.com/watch?v=GLvJDHphV5Q, https://www.youtube.com/watch?v=HHX1Q2YteTI
정영환 2016,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 푸른역사.
차승일 2017, ‘박유하의 언론 자유? 좌파가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 〈노동자 연대〉 233호. https://wspaper.org/article/19762


박유하 2018b, p115.


박유하 2015a, 32쪽.


박유하 2015a, 67쪽.


박유하 2015a, 294쪽.


박유하 2018b, pp367-368.


박유하 2018a, p28.


박유하 2018a. p93. 강조는 인용자.


박유하 2018a, p95. 강조는 인용자.


요시미 요시아키 2013.


박유하 2018b, p35.


박유하 2016.


정영환 2016a, p67.


박유하 2018b, p199.


박유하 2018b, p367.


이 부분은 김영익 2018을 크게 참고했다.


박유하 2018a, p89.


서경식 2011. 김영익 2016에서 재인용.


서경식 2011.


박유하 2018b, p273.


박유하 2018b, p373.


박유하 2015b, https://www.youtube.com/watch?v=hbDW5C5Ug-g〈정규재TV〉는 퇴진 촛불이 한창이던 2017년 1월 25일 박근혜를 인터뷰해 요설을 늘어놓게 한 우익 언론이다.


이영훈 2016. 이 인터넷 강의 역시 〈정규재TV〉를 통해 방송됐다.


이영훈은 2004년에도 비슷한 발언을 했다가 강력한 반발에 부딪힌 적이 있다. 이영훈은 자신이 “일본군 성노예가 ‘상업적 목적을 지닌 공창의 형태’였다”고 발언했다는 것은 “악의적 해석”이라면서도 사과를 한 바 있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이영훈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3000000/2004/09/003000000200409051453326.html 그런데 2016년에는 그 주장을 노골적으로 개진한 것이다.


박유하 2015a, p8.


박유하 2018b, p32.


그밖에도 박유하는 여러 장치를 이용한다. 비판 차단용 진술을 군데군데 끼워 넣어 자기 주장의 본질을 은폐하기, 주범인 일본 국가와 종범인 업자들의 죄의 경중을 뒤섞기, 미시사 방법을 사용하기 등이 있다. 차승일 2017을 참고하시오.


박유하 2018b, pp260-261.


박유하 2018b, pp278-279.


사나다 히로꼬 2000, p425. 강조는 인용자.


김재중 2005, p86.


김재중 2005, p87.


이 부분은 차승일 2017의 관련 부분을 조금 수정해 실었다.


박유하 2016b.

2014-09-16

데이비드 하비,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을 읽다 : 노동자 연대(옛 <레프트21>)

데이비드 하비,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을 읽다 : 노동자 연대(옛 <레프트21>):

<노동자 연대> 127호 | 발행 2014-06-02 | 입력 2014-05-31

1. 피케티 주장의 의의

토마 피케티가 쓴 《21세기 자본론》이라고 불리는 책이 꽤나 큰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세습”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시류를 거스를 유일한 방안으로 누진세 제도와 국제적 부유세 도입을 옹호했다.
피케티는 “세습” 자본주의의 특징이 부(富)와 소득의 “끔찍한” 불평등이라고 꼬집었다. 피케티는 매우 비판적인 시각으로 지난 2백 년 동안 부와 소득의 불평등이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를 상세히 밝혔다.
피케티는 특히 부가 하는 구실을 집중으로 다뤘다. 피케티는 자유시장 자본주의가 부를 [평범한 사람들에게까지] 확산시키고 개인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보는 널리 퍼진 견해를 허물어 버린다. 국가가 하는 주요한 재분배 기능이 모두 사라진 자유시장 자본주의에서는 비민주적인 소수 지배가 생겨난다는 것을 그는 보여 준다. 그가 이런 사실을 입증하자 자유주의자들은 격분했고 <월스트리트 저널>은 게거품을 물었다.
사람들은 흔히 피케티의 책을 19세기에 쓰인 마르크스의 동명의 책을 밀어낼 21세기의 저작으로 본다. 사실 그는 그럴 의도가 없다고 부인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그의 책은 자본에 관해서는 전혀 다루지 않는다.
피케티의 책은 2008년의 위기가 왜 일어났는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왜 그토록 오랫동안 장기 실업과 주택 압류가 가하는 이중의 부담에서 헤어나지 못하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그의 책은 최근 미국 경제의 성장이 왜 중국과 달리 부진한 것인지, 유럽은 왜 긴축의 정치와 경제 부진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극심한 불평등

피케티는 통계 자료(우리가 그와 그의 동료들에게 감사히 여기는)를 통해 자본주의 역사 내내 자본이 전례 없이 극심한 수준의 불평등을 일으켜 왔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게다가 마르크스가 자신의 《자본론》 1권에서 제시한 이론적 결론도 정확히 그런 사실이다. 
△ 피케티가 주장했듯이, 자본주의 체제는 끔찍한 수준의 불평등을 만들어 내고 있다. ⓒ Alex Proimos (플리커)
피케티는 마르크스가 이미 그런 얘기를 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는데 놀랄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파 언론이 마르크스주의자이면서 아닌 척한다고 피케티를 비난했을 때 그 자신이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어 본 적이 없다고 항변했기 때문이다.
피케티는 많은 자료를 끌어모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소득과 부의 불평등에 관한 그의 분석은 설득력이 있고 유용하다.
그리고 피케티는 상속세, 누진세 제도, 국제적 부유세를 도입하면 부와 권력이 더 집중되는 것에 맞설 수 있으리라는 주장도 세심하게 옹호한다.(비록 그런 조처들의 도입이 정치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이지만 말이다.)

2. 불평등을 지속 강화하는 동력

그런데 불평등 추세가 갈수록 커지는 까닭은 무엇인가? 제인 오스틴과 발자크를 넌지시 언급하는 말쑥한 문학적 표현으로 풍미를 더한 통계 자료에서 피케티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설명하는 수학적 법칙을 끌어냈다.
그것인 즉, 유명한 ‘1퍼센트’(‘점거하라’ 운동 덕분에 널리 즐겨 쓰이는 용어)가 전례 없이 어마어마하게 부를 쌓을 수 있는 것은 자본수익률(r)이 소득증가율(g)보다 항상 높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것이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자본의 “핵심 모순”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통계 자료에서 규칙성을 찾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충분하다고 볼 수 없다. 법칙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면, 그런 모순을 일으키고 유지시키는 동력은 무엇인가? 피케티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법칙은 법칙이고 이것은 이것이다 하는 동어반복을 할 뿐이다.
마르크스라면 자본과 노동 간 힘의 불균형을 그런 법칙이 생기는 요인으로 지적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설명이 지금도 여전히 타당하다.
1970년대 이래 국민소득에서 노동이 차지하는 몫은 꾸준히 떨어져 왔다. 자본이 과학기술, 실업, 해외 이전, 반노동자적 정치(예를 들어 마거릿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이 시행한 정책)를 동원해 노동운동을 파괴해서 노동의 정치적ㆍ경제적 힘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마거릿 대처의 경제 자문을 지낸 앨런 버드가 무심코 털어놓았듯이, 1980년대에 시행된 물가 인상 억제 정책은 “실업을 늘리는 매우 좋은 방법이었고, 실업 증가는 노동계급의 힘을 깎아 내는 매우 바람직한 방법”이었음이 드러났다. “그 정책이 의도한 바는 마르크스의 용어로 말하면 자본주의의 위기, 곧 산업예비군을 다시 창설하고 자본가들이 전례 없이 높은 이윤을 얻게 하는 위기였다.”
1970년에 기업 최고경영자들의 보수는 보통 노동자들의 임금보다 30배가량 많았다. 현재 이 수치는 3백 배를 웃돌고, 맥도널드 같은 곳에서는 1천2백 배 정도 된다.

유효수요 부족

그런데 《자본론》 2권(역시 피케티가 읽지 않은 동시에 별 거리낌 없이 일축해 버리는 책)에서 마르크스는 임금을 낮추려는 자본의 노력이 어느 순간이 되면, 자본이 만든 생산물을 흡수하는 시장의 능력을 약화시킨다고 지적했다.
일찍이 헨리 포드는 이런 딜레마를 인식했다. 그래서 그는 소비 수요 진작을 위해 노동자들에게 하루 8시간씩 일 시키며 일당 5달러를 주는 제도[1914년 당시 상황에서 이 제도는 노동시간을 줄이고 임금을 두 배 가량 높인 것이었다]를 도입하라고 지시했다.
많은 사람들이 1930년대 대불황이 유효수요 부족으로 더 심각해졌다고 봤다. 그런 정서 덕분에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케인스적 재정 지출 확대 정책이 힘을 얻었다. 그리고 강력한 수요가 경제 성장을 이끌면서 소득 불평등이 어느 정도 줄었다.(부의 불평등은 그리 많이 줄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해법을 실행하려면 노동계급의 힘을 비교적 강화하고, 누진세로 재원을 확보하는 “사회적 국가”(피케티의 용어)를 건설해야 했다.
피케티는 이렇게 쓴다. “1932~80년이라는 반세기에 가까운 시기 내내 미국 연방정부 소득세의 최고 세율은 평균 81퍼센트였다.” 그럼에도 경제 성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이 사실도 우파의 신념을 논박하며 내놓은 피케티의 증거다.)
1960년대 말이 되면 자본가들이 과도해진 노동계급의 힘에 대해 무언가 조처를 취해야 한다고 분명히 느끼게 됐다.
그래서 케인스는 존경받는 경제학자의 지위를 잃었고 대신 밀턴 프리드먼의 공급자 중시 사상이 득세하게 됐다. 세금을 안정시키거나 심지어 낮추고, “사회적 국가”를 파괴하고, 노동계급의 힘을 길들이려는 성전(聖戰)이 일어났다.
1980년 이후 미국에서는 최고 세율과 자본소득(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데 필요한 주요 소득 원천)에 매기는 세금이 낮아졌다. 그 결과 부가 상위 1퍼센트에게로 흘러 들어가는 속도가 빨라졌다.
그러나 피케티가 보여 주듯이, 경제 상황은 거의 나아지지 않았다. 경제가 성장하면 부가 부자들에게서 나머지 평범한 사람들에게로 흘러넘치리라는 “트리클다운”(낙수 효과; 우파들이 아주 좋아하는 또 다른 믿음)은 작동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피케티가 말하는] 무슨 수학적 법칙 때문이 아니다. 정치가 작동한 결과였다.
그런데 상황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더 화급한 문제가 닥쳤다. 바로 수요가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1990년대에 이 문제는 서브프라임 시장에 담보대출 자금이 많아지는 등 신용이 막대하게 확장되며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생긴 자산 거품이 2007~08년 리먼 브라더스 파산과 신용제도 붕괴로 터지게 됐다. 그럼에도 2009년 이후 이윤율은 빠르게 회복됐고 부는 소수에게로 더한층 집중됐다. 반면 경제 상황과 나머지 사람들의 처지는 나빠졌다.
이제 미국에서 기업의 수익성은 [2008년] 경제 위기 전만큼 올라갔다. 기업들은 돈더미에 앉아 있으면서 그 돈을 쓰지 않으려 한다. 시장의 상태가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케티가 공들여 만들어 낸 수학적 법칙은 이런 상황에 담긴 계급 정치에 관해 보여 주는 것보다 감추는 것이 더 많다. 워런 버핏이 말했듯이, “확실히 계급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확실히 우리 계급이, 부자들이 승리하고 있다.” 저들이 승리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핵심 척도 하나는 상위 1퍼센트의 부와 소득이 나머지 사람들에 견줘 더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3. 피케티의 잘못된 자본 개념

피케티의 주장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가 자본에 대한 잘못된 개념 규정에 기대어 생기는 문제다.
자본은 사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과정이다. 자본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돈을 사용하는 순환 과정으로, 대개 노동력을 착취해서 더 많은 돈을 버는 과정이다.
그러나 피케티는 자본을 개인ㆍ기업ㆍ정부가 보유한 자산 일체로 규정하며 그 자산이 사용되든 말든 시장에서 거래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그의 자본 개념에는 토지, 부동산, 지적재산권은 물론이고 개인의 예술 작품과 귀금속도 포함된다.
그런데 그런 것들의 가치를 어떻게 결정할 것이냐 하는 것은 기술적 난제로, 합의된 바가 없다.

자본의 가치

자본수익률(r)을 제대로 계산하려면 초기 자본의 가치가 얼마인지를 측정할 방법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생산에 이용되는 재화와 서비스의 가치가 얼마인지, 또는 그것이 시장에서 얼마에 팔리는지와 무관하게 초기 자본의 가치를 측정할 방법은 없다.
신고전학파 경제 사상(피케티 사고의 토대) 전체가 동어반복에 기초하고 있다. 자본수익률이 얼마나 될지는 결정적으로 경제성장률이 얼마나 될지에 달려 있다. 자본의 가치가 그 자본이 생산한 것으로 측정되는 것이지 그 자본을 생산하는 데 들어간 것으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의 가치는 투기적 상황의 영향을 크게 받아 그 유명한 “불합리한 과열” 탓에 심각하게 왜곡될 수 있다.(“불합리한 과열”은 앨런 그린스펀이 주식 시장과 부동산 시장의 특징으로 지목한 것이다.)
자본이 무엇인지를 규정할 때, 헤지펀드 운영자들이 수집한 예술 작품은 말할 것도 없고 주택과 부동산도 제외한다면(주택과 부동산이 자본에 포함돼야 할 근거는 희박하다) 부와 소득의 불평등에 관한 피케티의 설명은 허물어져 버린다. 비록 과거와 현재의 불평등에 관한 그의 묘사는 여전히 유효하겠지만 말이다.
화폐, 토지, 부동산, 공장, 설비는 생산에 쓰이지 않으면 자본이 아니다.
생산에 사용되는 자본의 수익률이 높다면, 그것은 자본의 일부가 순환에서 빠져나가 사실상 투자 파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신규 투자에 대한 자본의 공급을 줄이면(현재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순환되고 있는 자본의 수익률을 확실히 높일 수 있다. 이렇게 인위적으로 품귀 현상을 만들어 수익률을 높이려 하는 행동은 석유 기업들만 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자본이 틈만 나면 하는 짓이다.
바로 이런 행태 탓에 자본(어떻게 정의하고 그 가치를 어떻게 측정하든)의 수익률이 소득 증가율보다 항상 높은 경향이 강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행태가 바로 자본이 자신을 재생산하는 방식이다. 자본은 우리 나머지에게 어떤 나쁜 결과를 초래하더라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자본가 계급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피케티가 모아 놓은 자료는 가치가 크다. 그러나 왜 불평등이 생기고 왜 소수가 지배하는 경향이 생기는지에 관한 그의 설명에는 심각한 결함이 있다. 불평등을 해소할 치료법으로 그가 내놓은 방안은 순진하고 심지어 공상적이기도 하다. 분명히 그는 21세기의 자본이 작동하는 방식을 설명하지 못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여전히 마르크스나 마르크스에 필적하는 현대 사상가가 필요하다.
번역: 차승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