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평전
안도현 (지은이)다산책방2014-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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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당대의 많은 시인들을 매료시켰으며, 해방 이후 후대의 시인들에게도 절대적이고 폭넓은 영향을 끼친 백석의 생애를 담은 <백석 평전>. 스무 살 무렵부터 백석을 짝사랑하고, 백석의 시가 "내가 깃들일 거의 완전한 둥지"였으며 어떻게든 "백석을 베끼고 싶었다"고 고백하는 안도현 시인은 "그동안 백석에게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 "그를 직접 만나는 방식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백석의 생애를 복원했다.
백석의 이야기는 고향에서 유년을 보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더 큰 세상을 꿈꾸던 오산학교 재학시절과 방응모의 장학생으로 떠난 일본 생활, <사슴>을 세상에 내고 잘나가던 「여성」지 편집자이던 시절과 백석의 생을 관통한 사랑 이야기까지… 그렇게 안도현 시인은 백석의 전 생을 뒤쫓는다.
함흥에서 교편을 잡던 날들을 거쳐 만주에서 유랑을 하던 날들 그리고 북한에서 문단 활동을 하던 백석의 이름이 사라지고 1996년 1월, 여든다섯 살로 세상을 마감할 때까지의 이야기는 안도현 시인의 손끝에서 생생하고 감동적으로 되살아난다.
목차
귀향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오산학교 시절
소월과 백석
아오야마 학원으로 유학을 가다
일본에서의 문학수업
<조선일보>와의 인연
광화문의 3인방
실비 내리는 어느 날
시인으로 첫 발을 내딛었다
100부 한정판 시집 『사슴』
『사슴』은 문단에 던진 포탄
통영, 통영
진주에서 노래하고 술 마신 밤
함흥으로 떠나다
『사슴』을 보는 또 다른 눈
백석 시의 영향을 받은 시인들
함흥에서 만난 자야
친구 신현중의 놀라운 배신
중일전쟁의 틈바구니에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최정희와 노천명과 모윤숙, 그리고 사슴
삐걱거리는 함흥 시절
뛰어난 《여성》지 편집자
화가 정현웅
나는 만주로 떠나련다
북방에서
권태와 환멸
측량도 문서도 싫증이 나고
흰 바람벽이 있어
압록강이 가까운 안둥 세관에서
시의 잠적
해방된 평양에서
38선을 넘지 않은 이유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전쟁과 번역
동화시의 발견
공격적인 아동문학 평론
학령 전 아동문학 논쟁에 휘말리다
살아남기 위하여
붉은 편지를 받들고 관평의 양을 키우다
평양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삼지연 스키장 취재기
남으로 보내는 편지
그리하여 사라진 이름
시인의 죽음
접기
책속에서
P. 24 1980년 스무 살 무렵, 백석의 시 「모닥불」이 처음 내게 왔다. 그때부터 그를 짝사랑하기 시작했다. 사회과학적 열정과 기운이 문학을 견인하던 당시에 백석의 시는 내가 깃들일 거의 완전한 둥지였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집회에 참가해서 구호를 외치다가 돌아와 쉴 곳도 그 둥지였고, 잃어버린 시의 나침반을 찾아 헤맬 때 길을 가르쳐준 것도 그 둥지였다. _‘서문’에서
어린 백석은 수업시간에 경의선 열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의선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평양이 멀지 않았고, 10시간쯤 달리면 경성에 닿았다. 경부선으로 갈아타고 부산에 내리면 일본으로 가는 관부연락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도를 보면 바다 건너 일본이 지척이 아니었던가. 그것뿐만이 아니다. 북으로는 경의선의 종착지 신의주까지 달릴 수 있었고, 압록강만 건너면 드넓은 중국 대륙을 품에 안을 수 있었다. 경의선은 중국의 단동(안둥)에서 봉천까지 가는 단봉철도와 연결되어 바로 만주로 갈 수 있는 통로 구실을 하고 있었다. 접기
P. 73 백석은 외모만 ‘모던보이’가 아니었다. 일본 유학시절 습작기부터 그는 ‘가장 모던한 것’과 ‘가장 조선적인 것’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백석보다 앞선 주요한이나 정지용은 유학시절부터 일본어로 쓴 시를 발표했다. 그러나 백석은 단 한 편도 일본어로 된 시를 발표하지 않았다. 그는 모더니즘적인 시를 탐독하고 시론을 받아들였지만 조선 사람의 언어를 지키는 시인이고자 했다. _본문 51쪽
첫눈에 백석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가 박경련이었다. 그녀의 까만 머리는 가르마를 타 정갈하게 보였고, 갸름한 얼굴에는 두 눈이 유난히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말수가 적었다. 신현중이 좌중을 웃기려고 너스레를 떨면 가끔 입가로 살짝 웃음을 내비칠 뿐이었다. 그때의 헤프지 않은 미소는 백석의 가슴을 온통 뒤흔들었다. 접기
P. 136 윤동주는 백석의 시집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는 백석보다 다섯 살 아래였다. 윤동주는 1936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다니다가 이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가 되자 용정의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으로 전학을 갔다. 그는 문학소년으로 시를 가슴에 품고 장차 시인이 되는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의 책꽂이에는 김동환의 『국경의 밤』, 한용운의 『님의 침묵』, 정지용의 『정지용시집』, 이은상의 『노산시조집』, 윤석중의 『윤석중 동요집』도 있었지만, 정작 읽고 싶은 『사슴』은 구할 수 없었다. 접기
P. 168 겨울방학을 앞두고 백석은 아버지가 보내온 편지를 받았다. 12월에방학이 시작되면 지체 없이 경성으로 올라오라는 편지였다. 백석은 이사실을 자야에게 말했고, 자야는 아무 걱정 말고 다녀오라고 했다.
“나 혼자 어떻게 경성을 간단 말이오”
“왜요”
“당신이 보고 싶어 미쳐버리면 어떡해? 경성역에 내렸다가 당신이 ... 더보기
P. 175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는 표현은 분명히 문장구조의 인과관계를 무시하는 충돌이거나 모순이다. 가히 연애의 달인답다. 여기에 넘어가지 않을 여자는 없을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해서 이 우주에 눈이 내린다니! 그리하여 나는 가난하고, 너는 아름답다는 단순한 형용조차 찬란해진다. 첫눈이 내리는 날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말은 백석 이후에 이미 죽은 문장이 되고 말았다. 접기
1930년대 중반은 식민지 조선의 현실과 가치체계가 파국을 향해 가고 있었을 때였다. 이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백석은 일본 제국주의가 드리운 그늘에서 시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상상하였다. 그것은 과거의 재생을 통해 현실의 몰락을 타개해나가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백석은 주관적 감상주의와 계몽주의를 넘어선 ‘그 무엇‘을 찾고자 했다. 그 무엇‘은 새로운 미적 인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시를 구체화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시단을 휩쓸었던 카프 계열의 사회주의 문학론은 지나치게 계몽성이 강해 백석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소통이 불가능한 이상의실험주의도 마찬가지였다. 접기
P. 16 음식에는 가족이라는 공동운명체의 기질과 취향과 풍습이 반영되어 있다. 음식을 먹는다는 건 어떻게 보면 매우 사소하고 일상적인 행위일 뿐이다. 하지만 함께 밥을 먹었던 기억은 가족을 단단히 결합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음식의 공유는 기억의 공유로 곧잘 이어진다. 사소한 것을 통해 ‘조선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게 백석의 시라면 백석에게 음식은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먹을거리에 그치지 않는다. 백석의 시를 지배하는 음식이 거의 모든 시에 등장한다는 것은 그가 음식을 감각의 총화로 파악하고 의도적으로 시에 배치했음을 의미한다. 그 결과 음식은 놀라운 친화력을 발휘해 독자를 시의 자장 안으로 강하게 끌어들인다. 접기
P. 161 백석은 혼란스러워 머리를 흔들었다. 백석은 일본에 유학을 할 때나 귀국한 뒤에 단 한 편도 일본어로 작품을 쓰지 않았다. 수업을 하거나 사적인 편지를 쓸 때에도 일본어를 섞는 일을 극도로 자제했다. 의사전달도 문학적인 표현도 조선어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고향 평안도의 방언은 그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백석만의 특허상표였다. 그의 몸은 함경도에 머물고 있었지만 백석은 시시때때로 머리에 떠오르는 고향의 방언 때문에 외로움을 누를 수 있었다. 접기
P. 218 일제는 황국 신민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비국민’이라는 굴레를 씌워 분리하는 정책을 폈다. 식민지를 철저하게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통치하겠다는 발상이었다. 그것은 백석이 보기에 굴종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백석은 ‘내선일체’를 강요하고 빠르게 미쳐가는 조선에서 더 이상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조선과 일본은, 엄연히 민족과 언어가 다른데도 그 둘을 하나로 여기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경성에 계속 남아 있다가는 ‘내선일체’의 수렁으로 빠져들 게 뻔했다. 접기
P. 337 백석은 ‘1956년도 <아동문학>에 발표된 시인 및 서클 작품들에 대하여’라는 총평 형식의 글에서 시와 동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매우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피력했다. 시의 요건은 생활에서 우러난 감정, 사색의 중요성, 언어를 부리를 법이라고 명쾌하게 정리했다. 하지만 이 자신감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북한문학의 주류가 항일혁명문학에 이은 김일성 유일사상을 바탕으로 한 주체문학으로 변화하면서 북한문학에서 자율성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게 되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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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순 (시인, 문학평론가)
저자 및 역자소개
안도현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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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리운 여우』 『바닷가 우체국』 『쓸데없이 눈부신 게 세상에는 있어요』 등 여러 권의 시집을 펴냈다.
수상 : 2012년 임화문학예술상, 2009년 백석문학상, 2007년 윤동주문학상, 2005년 김준성문학상(21세기문학상, 이수문학상), 2001년 노작문학상, 1998년 소월시문학상,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최근작 : <연어>,<시처럼 살고 싶다>,<올해의 좋은 동시 2025> … 총 269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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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요절 금지>,<디어 윌버 문구점>,<에케 호모>등 총 520종
대표분야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12위 (브랜드 지수 396,237점), 과학소설(SF) 15위 (브랜드 지수 46,225점), 에세이 34위 (브랜드 지수 175,609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30년간 백석을 짝사랑해온 시인 안도현이 완성한
우리시대 최고의 평전!
백석의 첫 시집 『사슴』은 1936년 1월 20일, 100부 한정판으로 출간되어 세상에 선을 보였다. 백석은 “한 권의 시집을 실로 한 개의 포탄을 던지는 것처럼 새해 첫머리에 시단에 내던졌다.”(김기림) 백석의 시집을 구하지 못한 윤동주는 “도서관에서 『사슴』을 겨우 빌릴 수 있었다. 시집을 빌리자마자 그는 그 자리에서 필사를 하기 시작했다.” 백석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시인이라 할 수 있는 신경림은 “내가 시를 좋아하게 된 것도 실은 백석 시인으로 인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고 밝힌 바 있다.(『백석 평전』 본문 140쪽)
당대의 많은 시인들을 매료시켰으며, 해방 이후 후대의 시인들에게도 절대적이고 폭넓은 영향을 끼친 백석의 생애를 담은 『백석 평전』이 출간됐다. 스무 살 무렵부터 백석을 짝사랑하고, 백석의 시가 “내가 깃들일 거의 완전한 둥지”였으며 어떻게든 “백석을 베끼고 싶었다”고 고백하는 안도현 시인은 “그동안 백석에게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 “그를 직접 만나는 방식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백석의 생애를 복원했다.
‘평전’이라는 형식으로 백석의 생애를 복원해 본다면 이것 역시 그를 직접 만나는 방식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살아온 시간을 재구성하는 일도 결국은 그를 베끼는 일이었다. 그동안 시를 쓰면서 백석의 어투, 시어는 물론 시를 전개하고 마무리 짓는 방식과 세계에 반응하는 시인으로서의 태도까지 닮아보려고 나는 전전긍긍했다._‘서문’에서
“백석 시인이 왈칵 그리워질 때
나는 안도현이 쓴 이 책을 꺼내어 읽고 사무치는 그리움을 달래고자 한다.”
_이동순(시인, 영남대 교수)
그날 밤, 쭈글쭈글한 주름의 늙은 어머니가 서른네 살 아들의 손을 잡고 말했다.
“우리 아들이 오마니한테 어찌 이케 늦게 완?”
백석의 손등 위로 어머니의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백석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_본문 16쪽
만주에서 5년이 넘는 황폐한 시간을 보낸 백석이 해방을 맞아 고향으로 내려가는 장면으로 『백석 평전』은 시작한다. “그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통영 처녀 박경련도 없었고, 경성에서 마지막으로 본 자야도 없었다. 최정희도 노천명도 없었다. 평양에서 결혼을 하고 안둥과 신의주에서 잠시 같이 살았던 문경옥도 없었다. 조선일보에서 일하면서 자주 술잔을 나누던 신현중도 허준도 정현웅도 없었다. 함흥의 김동명도 한설야도 없었다. 낯선 만주에서 그를 돌봐주던 친구 이갑기도 시인 박팔양도 이석훈도 없었다.”(‘본문 13쪽) 늙은 어머니만이 그의 손을 붙잡을 뿐이었다.
백석의 이야기는 고향에서 유년을 보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더 큰 세상을 꿈꾸던 오산학교 재학시절과 방응모의 장학생으로 떠난 일본 생활, 『사슴』을 세상에 내고 잘나가던 『여성』지 편집자이던 시절과 백석의 생을 관통한 사랑 이야기까지…… 그렇게 안도현 시인은 백석의 전 생을 뒤쫓는다. 함흥에서 교편을 잡던 날들을 거쳐 만주에서 유랑을 하던 날들 그리고 북한에서 문단 활동을 하던 백석의 이름이 사라지고 1996년 1월, 여든다섯 살로 세상을 마감할 때까지의 이야기는 안도현 시인의 손끝에서 생생하고 감동적으로 되살아난다.
안도현 특유의 시인적 직관과 통찰,
품격 높은 상상력이 고스란히 살아나는 유일무이한 평전
『백석 평전』은 마치 “소설을 읽듯 전기를 읽듯, 혹은 작품세계에 대한 분석적 연구를 읽듯” 독자를 백석의 삶 한가운데로 서서히 끌어당기고 있다. “사실 백석의 생애와 문학세계에 대한 부분적 연구와 조명은 다수의 연구자에 의해 시도된 바가 있었지만 전체적인 통찰은 거의 전무하였다. 그런데 이 방대한 서사적 구조의 체계를 일일이 학인하고 재현해내는 전체적 통찰”을 안도현 시인은 “특유의 시인적 직관과 통찰, 품격 높은 상상력”으로 해낸 것이다.
“식민지시대와 일본유학, 만주표랑과 분단 이후 북한문단에서의 생활 등 한국현대사의 가장 치열했던 격동의 세월을 살았던 백석의 생애를 통찰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현대정치사, 경제사, 식민지생활사, 분단사, 방언학, 향토음식, 아동유희, 무속, 민간의약 등” 참으로 다양한 조사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안도현 시인은 조각조각 단편적으로만 흩어져 있던 백석 시인의 생애를 많은 자료를 찾아서 읽고, 당시의 구체적 사실을 증언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며 완전히 하나의 끈으로 꿰어냈다. 백석에 대한 슬픔과 애착을 내내 마음속에 품고 살았기에, “백석 문학에 대한 특별한 안목과 사랑으로 오랜 시간”을 살아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추천의 글’에서)
그는 대답을 하는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백석 시인 이야기 좀 해주세요.”
“…….”
“남쪽에서 요즘 대단한 인기를 끄는 시인이 백석이에요.”
오영재는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그의 머리 위로도 세월이 눈발을 뿌리고 있었다.
“백석 시인은 말년에 전원생활을 하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역시 똑같은 대답이었다. 북한에서 활동하는 시인이나 작가 그 누구를 붙들고 물어봐도 이와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_본문 422쪽
“해방 전 남한에서 그는 가장 주목받던 시인의 한 사람이었지만 해방 후 북한에서 시인으로서의 말년은 행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 생을 마친 백석에 대해 우리는 그가 살아온 삶을 단정적으로 말하지 못한다. 삶은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본문 421쪽) “2009년 개정 교과서에 따라 개발된 중.고등학교 국어 관련 교과서에 백석은 김수영과 함께 가장 많은 시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고형진의 『백석 시를 읽는다는 것』(문학동네, 2013)에 따르면 백석과 관련한 단행본, 학위논문, 평론, 에세이 등의 연구물이 800개가 넘는다고 한다.”(본문 424쪽)
안도현의 『백석 평전』에서 새로 밝혀지고, 새로 규명된 백석
“백석의 생애를 완벽히 재구성하는 일에 성공하다”
이 책은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백석의 생애와 관련된 사실들을 객관적인 자료를 근거로 재구성했다. 백석이 어떤 계기로 시를 쓰게 되었는지, 그가 일본에서 유학하며 습작할 때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는 그동안 잘 규명되지 않았다. 안도현 시인은 백석이 1920년대 일본의 모더니즘 시론을 폭넓게 수용했다는 점을 밝혔다.
또한 백석의 시와 산문에 드러나 있는 내용과 그의 실제 행적을 비교해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다. 고당 조만식이 백석의 집에서 하숙을 치지 않았다는 점, 백석이 사모했던 통영의 박경련이 그의 아버지처럼 폐결핵을 앓았고, 나중에 신현중과 혼인한 뒤에 아이를 낳은 적이 없었다는 점, 백석의 통영 방문 횟수가 모두 세 차례였다는 점 등 구체적인 세밀한 정황을 밝혀냈다. 더불어 1941년 평양에서 백석과 결혼한 문경옥의 오빠 문학수(오산학교 후배)와 깊게 교유했고, 그 사실이 백석의 수필 「사생첩의 삽화」에 드러나 있다는 점을 밝혀냈다.
이 평전은 『조광』 창간호에 실린 「나와 지렝이」, 이 지면 같은 호에 ‘백정’이라는 필명으로 실린 「늙은 갈대의 독백」, 만주의 <만선일보>에 ‘한얼생’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는 「고독」 「설의」 「고려묘자」, 1957년 북한의 <문학신문>에 실은 「계월향 사당」 등의 작품을 백석의 시로 규정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며 “백석 문학의 본체성까지 현저히 손상시키고 혼란과 무질서를 조장시키는”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잘못 알려진 사실을 “말끔히 정돈시키고 있다.”(‘추천의 글’에서)
일제 말 백석이 친일작품을 발표한 적은 없지만, ‘시라무라 기코(白村夔行)’로 창씨개명한 자료를 발굴했다. 한때 백석의 연인이었던 자야 김영한 여사의 에세이 『내 사랑 백석』에서 기억의 오류로 인해 잘못 알려진 사실들을 바로잡았고, 김영한이 ‘김숙’이라는 이름으로 1939년 《삼천리》에 발표한 수필 두 편을 새로 발굴했다. 더불어 그동안 지나치게 과장되었거나 풍문으로만 떠돌던 백석의 연애담과 결혼생활과 관련된 사실들을 정리했다.
또한 해방 후 북한에 남아 있던 백석의 옆에 조선작가동맹 위원장이었던 소설가 한설야가 있어 백석의 후견인 역할을 했다는 점을 밝혔다. 그리고 아동문학 논쟁 이후 어떤 과정을 거쳐 북한 문단에서 사라지게 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기술했고, 1948년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 어떤 경로로 남한의 잡지에 마지막으로 발표되었는지를 추적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자료 사진과 안도현 시인이 직접 작성한 백석 연보를 실었다.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본 『사슴』, 『사슴』의 출판기념회를 알리는 신문 기사, 『내 사랑 백석』을 출간할 당시 자야 여사가 이동순에게 보낸 편지, 이화여고보 재학 시절의 18세 박경련, 백석과 자야가 잠시 동거하던 서울 청진동 집, 이 책에서 처음 선보이는 백석이 「사생첩의 삽화」에서 묘사한 문학수의 그림 <죽은 새> 등의 자료 사진이 연대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또한 백석이 일생 동안 기차를 이용해 다녔던 길들을 지도로 보여줬다.
안도현 시인은 스무 살에 백석의 시 「모닥불」을 만난 이후 백석을 30년간 마음에 품어왔다. 안도현 시인은 “시인적 기질가 본성 자체가 백석 시인의 그것과도 너무도 닮아 있다.” 그의 “여러 시집들이 보여주는 시창작 기법과 표현양식, 포즈, 스타일 등에서도 백석의 호흡과 보폭”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안도현 시인은 “백석의 시세계, 시정신, 시인적途程을 배우고 닮아가려는 지향으로 살아온 것이다.” 『백석 평전』은 안도현 시인이 백석을 짝사랑해온 애착과 슬픔으로 쓰인 우리시대 최고의 평전이며 “우리 문학사에서 전무후문한, 유일무이한 명편”이라 할 수 있다 .(‘추천의 글’에서) 접기
북플 bookple

눈이 푹푹 나리는 날이면 자연스레 백석시인의 시가 떠오른다.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푹푹 내리는 눈, 사랑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눈이 되어 내리는 것 같은 그런 날, 백석시인의 시 한편에 괜히 울적해진다.
책방꽃방 2024-01-10 공감 (10) 댓글 (0)
사랑하는 딸과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예전에 안도현시인이 <백석 평전>을 썼단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오래 전에 알라딘 인터넷 서점 이벤트로 이 <백석 평전>을 전자책을 무료로 받은 기억이 있단다. 그래서 가끔 스마트폰으로 읽어보려고 했는데, 아빠는 스마트폰으로책 보는 것이 익숙지 않더구나. 그래서 앞에 몇 페이지 읽다가 ... 더보기
bookholic 2021-05-23 공감 (32) 댓글 (20)
(16-17) 음식에는 가족이라는 공동운명체의 기질과 취향과 풍습이 반영되어 있다. 음식을먹는다는 건 어떻게 보면 매우 사소하고 일상적인 행위일 뿐이다. 하지만 함께 밥을 먹었던 기억은 가족을단단히 결합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음식의 공유는 기억의 공유로 곧잘 이어진다. 사소한 것을 통해 ‘조선적인 것’이무엇인가를 묻는 게 백석의 시라면 백석에게 음식은... 더보기
bookholic 2021-04-07 공감 (1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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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백석의 모든것이 이 말속에 함축된것이겠죠.
대아재산책 2016-08-01 공감 (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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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쪽 유족으로는 부인 리영희
438쪽 백석의 옆이 부인 리윤희
백석평전 참 좋습니다.
오류에 대한 문제...
443쪽 열네 살 아래 신부 리윤희
*백석 부인의 이름은 리영희가 아니라 리윤희네요.
출판사에서 책을 좀더 꼼꼼하게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na-tree 2014-06-19 공감 (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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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백석, 윤동주의 평전 정도는
우리 시를 사랑하는 이라면 필수 소장목록.
이라고 내 맘대로.ㅎㅎ
난 3권 다 갖고 있으니까 괜히.
그런데 이 시대 예술가들의 평전을 읽으면 그 당시 시대상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져 눈물이 주륵주륵나버리고 만다.
SALON 2016-08-08 공감 (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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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의 <백석평전>이야말로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을 향하여 아름답게 빛나는 별, 백석의 삶과 시를 온전히 드러낸 명실상부한 최초의 <백석평전>이다. 백석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 백석의 시를 진심으로 읽지 못했다면 이뤄질 수 없는 <평전>의 기념비적인 작업이다.
흰바람벽 2014-08-05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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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좋아하는 시들이 많아 덥썩 구입했네요....^^ 이런 유명시인들의 작품을 요새 읽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mylovebread 2014-09-25 공감 (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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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을 사랑하는 그녀의 생일선물로 보냈다. 백석은 `자야`만의 연인이 아닌, 그의 시를 사랑하는 모든이들의 연인이다.^^
순오기 2014-07-07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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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에 대하여 좀 더 친밀감, 애정이 생기게 되었어요.
소소한 일상에서 시어들을 집어내어 한 편의 시를 만들어내신...
자료구하느라 고생 하셨을 안도현시인님의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한 권의 보석!
미망 2014-06-16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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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글을 쓰는 작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문학가인 백석. 남북 분단의 아픔으로 이름마저 생소하게 잊힌 민족 시인의 삶을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일본소설 2014-12-01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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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평전 중 하나임에 틀림없음
conatusian 2021-08-27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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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백석 전집을 들고 다니던 때가 있었지만 이제는 어디 있는지조차 잊어버렸다. 그래서 다시 `안도현`님의 부름에 답하여 백석에게 다가가려 합니다. 찬란한 우리말과 얘기 속으로
들풀처럼 2014-07-14 공감 (1) 댓글 (0)
마이리뷰
구매자 (16)
아, 백석!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예전에 안도현 시인이 <백석 평전>을 썼단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오래 전에 알라딘 인터넷 서점 이벤트로 이 <백석 평전>을 전자책을 무료로 받은 기억이 있단다. 그래서 가끔 스마트폰으로 읽어보려고 했는데, 아빠는 스마트폰으로 책 보는 것이 익숙지 않더구나. 그래서 앞에 몇 페이지 읽다가 그만 두었단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읽은 박균호 님의 <그래봤자 책, 그래도 책>에서 백석 시인을 소개한 준 것을 보고, 안도현 시인의 <백석 평전>이 생각나서 다시 읽어보고 싶었단다. 예전에 받은 <백석 평전>의 전자책을 아직도 읽을 수 있더구나. 그런데 전자책은 잘 안 읽어질 것 같아서, 검색해보니, 괜찮은 품질의 중고로 나와 있는 게 있어서 그걸 사서 읽었단다.
이왕 백석 시인에 관한 것을 읽는 김에, 관련된 책을 같이 읽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연달아 읽었단다. 안도현 님의 <백석 평전> 백석의 시를 모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김연수 님의 <일곱 해의 마지막>. 오늘은 먼저 안도현 님의 <백석 평전>을 이야기해 줄게.
1.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라는 곳에서 태어났단다. 어린 시절의 이름은 백기행이었어. 명문인 오산고보를 졸업했는데, 학창 시절 김소월 시인을 존경하여 시인에 대한 꿈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학교 선생님이 그의 첫 번째 꿈이었단다. 영어에 재능이 뛰어났다고 하는구나. 나중에는 러시아도 잘 하셨다고 하니, 언어에 감각이 있으신가 보구나. 부럽네.
오산고보를 졸업했지만, 일본이 지배하고 있던 시절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어. 더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집안이 넉넉하지는 못했고 말이야. 이때 사업가 방응모의 후원으로 일본 유학을 갈 수 있었단다. 친일 신문인 조선일보의 사장 방응모 맞단다. 골수 친일이 되기 전에는 학생들의 학비를 대주던 리즈 시절도 있었던 것 같구나. 방응모의 후원으로 일본 아오야마 학원에서 4년 동안을 공부를 했어. 유학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백석. 방응모의 부탁으로 조선일보에 입사하게 된단다. 당시 그의 나이 스물 셋. 젊음이 절정을 이루던 시기…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그는 멋 내기 좋아하는 젊은이였단다. 모던 보이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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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당시 <조선일보> 사옥은 태평로 1가에 있던 2층짜리 조그마한 건물이었다. 백석은 광화문을 지나 세종로를 걸어 신문사로 출근했다. 멀리서 봐도 그는 남들의 눈에 금방 들어올 만큼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숱이 많은 새까만 곱슬머리에 선명한 눈썹에다 얼굴 한가운데에는 서양 사람처럼 콧날이 깎아놓은 듯 우뚝 자리 잡고 있었다. 균형 잡힌 어깨와 다리를 가진 훤칠한 키의 백석이 세종로를 겅중겅중 걸어가면 누구나 다시 한 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목이 유난히 긴 이 청년은 늘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이었다. 길 가던 여성들이 이런 모던보이를 마주치기라도 하면 화들짝 놀라며 곁눈질을 하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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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일하면서 번역으로 외국의 문학작품을 소개해 주기고 했어. 이때 허준, 신현중과 어울리면서 광화문 3인방이라는 별명도 생겼어. 허준이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게 되었단다. 통영에서 온 박경련이라는 이에게 첫눈에 반했단다. 박경련은 이화여고를 나온 신여성이었어. 박경련은 광화문 3인방인 신현중의 고향 후배였어. 그래서 백석은 신현중에게 부탁해서 같이 통영으로 박경련을 만나러 가기도 했단다. 하지만, 길이 어긋나서 만나지 못했어.
백석은 이렇게 사랑만 한 것은 아니야. 틈틈이 쓴 시들을 모아 시집 <사슴>을 출간했단다. 100부 한정판이고, 가격도 다른 시집의 두 배 가격이 될 정도로 고급으로 만들었다고 하는구나. 정말 멋쟁이로구나. 이 시에 대한 평단의 평가는 호불호가 갈리기도 했지만,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시집이 되었단다. 그의 시가 유명하고 사랑 받는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기 때문이란다. 모던 보이였던 그에게서 그런 시가 나오다니, 내면의 순수한 시인의 마음이 가득 들어 있었나 보구나.
…
2.
2년 기자 생활을 마치고 백석은 어렸을 때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함흥의 영생고보에 갔단다. 이곳에서 영어 선생님을 하게 되었단다. 이 때 칠판 앞에서 찍은 백석의 사진이 그의 사진 중에 가장 유명한 한 컷이 되었는데, 밝게 웃는 모습에 많은 학생들에게도 인기가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이때 제자들 중에 동화 작가로 유명한 강소천도 있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서울에서 더 위로 올라왔으니 사랑하는 박경련이 있는 통영과는 더 멀어졌구나. 하지만, 그의 사랑하는 마음은 더 커져만 갔어. 더 이상 늦출 수 없다,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얻을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한 것인지, 백석은 청혼하기 위해 다시 통영으로 갔단다. 하지만, 박경련의 부모님들이 반대했단다. 그 반대에 한 몫을 한 것이 백석 엄마가 기생이라는 근거 없는 소문이었는데, 그 소문을 낸 이가 바로 백석의 친구였던 신현중이었단다. 신형중도 뒤늦게 박경련을 사랑해서, 연적인 백석의 험담을 했던 거란다. 깊은 좌절을 안고 함흥으로 돌아온 백석. 얼마 뒤 접한 신현중과 박경련의 결혼 소식은 얼마나 슬펐겠니. 그것도 친구의 배신… 백석은 이후 신현중과 연락을 끊었다고 하는구나.
….
백석은 함흥에서 또 한 명의 여인을 사랑하게 되는데, 지덕체를 고루 갖춘 진향이라고 하는 기생이었딴다. 진향과 사랑에 빠진 백성은 진향에게 ‘자야’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었단다. 백석와 자야의 사랑은 이후에도 계속 된단다. 자야의 본명은 김영한인데, 나중에 서울로 와서 고급 요정을 운영하게 되는데, 말년이 그 술집을 그대로 법정 스님께 시주를 해서 길상사라는 절을 창건하게 된단다. 법정 스님의 길상사가 요정을 시주 받아 지었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었는데, 그 분이 백석의 애인이었다는 것은 얼마 전에 읽은 <그래봤자 책, 그래도 책>에서 처음 알게 되었단다. 멋진 분들이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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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
백석의 연인이었던 자야 김영한은 서울 성북동에 ‘대원각’이라는 큰 요정을 경영했다. 1970년대 후반까지 거물 정치인과 기업인들이 이 요정을 드나들었다. 1996년 대원각이 들어선 7,000여 평의 땅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했고, 1년 뒤에 사찰 길상사가 완공되었다. 1997년 김영한은 백석 연구자 이동순의 주선으로 창작과비평사에서 백석문학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1999년 자야 여사는 여든세 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백석의 연인답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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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 영생고보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시와 산문을 쓰던 이 시절이 그 인생의 전성기가 아닌가 싶구나. 백석은 영생고보의 축구부도 담당하고 있었는데, 서울에서 시합이 있어서 학생들을 데리고 서울 출장을 왔는데, 학생들 관리는 하지 않고 자야의 집에 찾아가서 지냈다고 하는구나. 그것이 들통이 나서, 징계를 받았는데 그 일로 학교는 그만 두었다고 했어.
그리고 조선일보에 재취업을 해서 <여성>이라는 잡지에서 일하게 되었단다. 이 잡지가 크게 히트를 쳤어. 이 시절이 1930년대였는데, 우리나라 1930년대는 일제 침략이 길어지면서, 우리나라의 광복을 하나 둘 꿈을 접을 때였어. 여러 분야의 유력 인사들이 친일로 돌아서던 시기였단다. 문학을 하던 이들도 친일로 돌아서기 시작했고, 조선일보도 이 때부터 일본 찬양을 하기 시작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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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하지만 그는 1933년 일제의 기관총 구입비용 1,600만원을 헌납한 것을 시작으로 중일전쟁을 전후해 친일의 길로 들어섰다. 1937년 1월 1일자 <조선일보> 1면에 일왕 부부 사진을 크게 실어 충성을 표시하는가 하면, 전쟁 발발 직후 8월 2일자 사설에서는 “출정 장병을 향하여 위로 고무 격려의 편지 한 장 보내는 것도 총후의 임무”라고 썼다. 그 후에는 국방헌금을 모은다는 사고를 내고 전쟁자금 모금에 앞장섰다. <동아일보>의 김성수 사장도 군사헌금 1,000만원을 헌납하는 등 중일전쟁을 전후에 친일신문의 대열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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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일본에서 유학까지 갔다 왔지만, 그는 한번도 일본말로 시를 지은 적이 없고,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그가 적극적인 항일 투쟁이나 독립 운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서정주나 이광수 등과 같이 친일로 돌아서지는 않았어. 국내 사정이 이렇게 돌아가게 되자, 이 시기에 만주 산징으로 이주하게 된단다. 그곳에서 화가 문학수의 동생인 문경옥과 결혼을 했지만, 1년 후에 이혼을 했단다. 이 문경옥이라는 분은 나중에 북한에서 최고의 여성 음악가가 된다고 하는구나. 그는 만주에 머물면서 일체 문학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가 해방을 맞이하게 된단다.
3.
해방이 되고 나서 백석은 신의주를 거쳐 고향 정주에 돌아왔단다. 그리고 예전 학창 시절 인연이 있던 조만식의 부탁으로 통역 비서 역할을 위해 평양에 왔단다. 그리고 리윤희와 결혼도 하였단다. 그리고 러시아 문학을 번역하는 일도 하고, 시도 다시 쓰기 시작했단다. 해방된 조국에서 의미 있는 일도 하고, 결혼도 하고 행복하게 삶을 그렸을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나라는 백성들의 행복한 삶을 그대로 두지 않았어. 남과 북으로 갈라진 한반도는 해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전쟁에 휩싸이게 된단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창작 활동을 하게 되는데, 아이들이 있어서 그래서인지 아이들을 위한 작품도 썼단다. 특히 동시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동화시집들을 써냈어. 우리 집에도 백석의 동화 시집이 한 권 있잖아. 너희들이 썩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말이야..^^
아무튼 전쟁 후 북한에서 그의 창작 활동은 순탄치 않았단다. 일부 작품들에 대해 비판을 받게 되었고, 자아 비판을 받는 자리도 여럿 있었어. 그런 자아 비판의 결말은 함경도 삼수군에 가서 현지 지도를 하라는 것이었어. 말이 현지 지도이지, 거의 유배나 다름 없었단다. 고향도 아닌 오지 삼수에 가라고 했으니 말이야. 삼수갑산이라는 말이 있단다. 함경도의 삼수군과 갑산군을 함께 부르는 말인데, 그 말의 숨겨진 뜻에는 엄청나게 힘든 오지를 뜻하고, 몹시 어려운 상황을 빗대어 이야기하는 뜻에 있단다. 그러니 삼수군이 얼마나 살기 어려운 곳이겠니. 그래도 숙청당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어야 했나. 남한 출신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작가들도 많이 숙청당했던 시절이니까. 아무런 연고 없는 삼수군에서 그는 국가에 순응하면 잘 지냈단다. 중앙 정부를 찬양하는 시와 글도 쓰고 그랬단다. 하지만 끝내 삼수군에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하는구나. 1962년 <조국의 바다여>라는 작품을 마지막으로 창작 활동을 접었다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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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
<조국의 바다여>는 백석이 북한에서 발표한 마지막 시였다. 아니, 그가 이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겨놓은 시였다. 평양에서 삼수군으로 쫓겨날 즈음 백석에게 시는 생활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시인으로 살아남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한 인간으로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백석에게는 더 시급했다. 해방 이후 백석의 북한에서의 작품 활동을 단순히 예술성을 망각하고 시를 정치도구화한 파렴치한 행위로 몰아붙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백석이 북한에서 아동문학논쟁을 통해 문학의 자율성과 미학주의를 주장한 마지막 시인 중 한 사람이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당의 지도 아래 놓인 북한의 문학을 조금이라도 더 보편적인 미학의 논리로 되돌려놓겠다는 그의 문학주의는 결국 꺾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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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창작활동을 그만두어서 1963년 즈음에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단다. 그래서 한 동안 백석이 그 때 죽었다고 알려졌었대. 하지만, 그는 삼수군에서 조용히 농부로 살아갔던 거야. 1996년 85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고 하는구나. 이 책에 백석의 노년에 식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실려 있단다. 젊은 시절 모던 보이 백석의 모습은 간데 없고, 한 노인의 지나온 인생이 보였단다. 그의 식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니, 넉넉하지는 못했지만, 행복해 보이더구나.
글쟁이가 글을 쓸 수 없던 많은 시간들… 누가 백석을 그런 삶을 살게 만들었는가. 아픈 우리나라 역사로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단다. 비록 백석이 출간을 하지는 않았지만, 혹시 시골에서 써 놓은 글과 시가 있지 않을까. 자녀분들이 그 시와 글들을 잘 보관하고는 있지 않을까. 언젠가는 그의 미출시 작품들이 무더기로 공개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기대를 기대해 보며, 오늘 독서 편지는 마치련다.
PS:
책의 첫 문장 : 1945년 8월 25일, 소련군 사령부는 경성에서 신의주를 운행하는 경의선 철도를 차단하였다.
책의 끝 문장 : 고형진의 <백석 시를 읽는다는 것>(문학동네, 2013)에 따르면 백석과 관련된 단행본, 학위논문, 평론, 에세이 등의 연구물이 8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음식에는 가족이라는 공동운명체의 기질과 취향과 풍습이 반영되어 있다. 음식을 먹는다는 건 어떻게 보면 매우 사소하고 일상적인 행위일 뿐이다. 하지만 함께 밥을 먹었던 기억은 가족을 단단히 결합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음식의 공유는 기억의 공유로 곧잘 이어진다. 사소한 것을 통해 ‘조선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게 백석의 시라면 백석에게 음식은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먹을거리에 그치지 않는다. 백석의 시를 지배하는 음식이 거의 모든 시에 등장한다는 것은 그가 음식을 감각의 총화로 파악하고 의도적으로 시에 배치했음을 의미한다. 그 결과 음식은 놀라운 친화력을 발휘해 독자를 시의 자장 안으로 강하게 끌어들인다. - P16
백석은 혼란스러워 머리를 흔들었다. 백석은 일본에 유학을 할 때나 귀국한 뒤에 단 한 편도 일본어로 작품을 쓰지 않았다. 수업을 하거나 사적인 편지를 쓸 때에도 일본어를 섞는 일을 극도로 자제했다. 의사전달도 문학적인 표현도 조선어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고향 평안도의 방언은 그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백석만의 특허상표였다. 그의 몸은 함경도에 머물고 있었지만 백석은 시시때때로 머리에 떠오르는 고향의 방언 때문에 외로움을 누를 수 있었다. - P161
일제는 황국 신민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비국민’이라는 굴레를 씌워 분리하는 정책을 폈다. 식민지를 철저하게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통치하겠다는 발상이었다. 그것은 백석이 보기에 굴종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백석은 ‘내선일체’를 강요하고 빠르게 미쳐가는 조선에서 더 이상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조선과 일본은, 엄연히 민족과 언어가 다른데도 그 둘을 하나로 여기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경성에 계속 남아 있다가는 ‘내선일체’의 수렁으로 빠져들 게 뻔했다. - P218
백석은 ‘1956년도 <아동문학>에 발표된 시인 및 서클 작품들에 대하여’라는 총평 형식의 글에서 시와 동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매우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피력했다. 시의 요건은 생활에서 우러난 감정, 사색의 중요성, 언어를 부리를 법이라고 명쾌하게 정리했다. 하지만 이 자신감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북한문학의 주류가 항일혁명문학에 이은 김일성 유일사상을 바탕으로 한 주체문학으로 변화하면서 북한문학에서 자율성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게 되었다. - P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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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holic 2021-05-23 공감(32) 댓글(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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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백석 평전
백석이란 사람을 이제야 알게 된것에 후회와 기쁨을 이루말할수 없었고 분단이 꺾어 놓은 그의 천재적인 능력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백석이 정상적인 창작 활동을 할수 있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행복할수 있었을까. 지금까지 남겨진 몇 안되는 시와 산문들, 짧은 글들로도 이렇게 행복에 넘치는데. 하지만 창작을 하지 못한 말년의 백석이 불행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백석 시인은 말년에 전원생활을 하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모든 무거운 것들을 내려 놓고 전원생활을 하며 너그럽게 미소 짓는 백석 시인을 생각하며 나도 미소 짓는다.
뫼르소 2016-06-05 공감(1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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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백석 평전
좀 지루하지 않을까 고민했는데 난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이름만 알던 백석을 인간적으로 시인으로 알수 있었어 정말 좋았다. 북한에서 시인으로 살지 못하고 살아낸 시인은 어떤 마음으로 시간을 보냈을까. 참 마음 아픈일이다.
몽이엉덩이 2017-04-26 공감(7)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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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평전은 독자가 만드는 것이지요.
안도현 시인의 백석평전을 읽었다. 다 읽고서도 좀 뒤적뒤적해보게 하는 것은 일말의 감동때문인 것같다. 예전에 알던 백석을 되새겨보기도 하고 또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 새로운 사실들에 대해서 생각해보게도 된다. 안도현 시인이야 예전부터 백석의 사도로 자청했던 사람이고 안도현 시인 외에도 알게모르게 백석에 영향을 받은 시인은 없지 않은 듯하다. 백석만큼 담담하면서도 구수하고 애닯고 한 다양한 맛을 주는 시인이 특별히 없었기 때문에...
여하튼 평전이라 하면 사실에 기반해야 하는데 이 평전은 초반에 간혹 픽션이 좀 지나친 면이 있어서 이런 식으로 계속되면 좀 곤란하지 않나 걱정스러운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서술은 사실에 기반을 둔 것이어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초반에 이 책을 읽을 때 오타가 보였다. 경의선 개통을 1905년이라 기술한 부분(24쪽), 고읍역을 도읍역(25쪽) 참으로 좋을 침(130쪽) 우리의 장상한 생활(134쪽) 등. 보통 교정상의 실수는 에너지가 소실되는 후반부에 있기 마련인데... 이 책은 특이하게도 책 전반부에 오타가 있었다.
또 기술된 사실의 정확성에 대한 의문이 든 부분도 있다. 예를 들면 80쪽에 카프 해산계를 김기진의 이름으로 제출했다고 하는데 내가 알기로 그 역할을 맡은 자는 임화다.
또 특별한 근거가 없는 추정은 논문이 아닌 이상 크게 문제삼을 바는 아니지만 단정적인 부분은 약간 거슬린다. 216쪽에서 백석이 조선일보사와 인연을 끊은 것을 사장 방응모의 친일행위에 대한 비판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기술한 부분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점을 차치한다면 이 책은 기존에 백석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독자들에게도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정보를 꽤 많이 담고 있다. 예를 들면 [흰 바람벽이 있어]같은 시에서 흰바람벽에 비치는 여러 환상 중 백석이 사랑하던 여인이 대구국을 끓여놓고 지아비와 마주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지아비를 나는 백석 자신의 환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안도현 시인은 이를 조선일보사 시절 동료이자 연적 신현중이라 말하고 있다. 정말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이 책을 백석에 관한 기존 성과들을 풍부하게 섭렵한 장점이 있는데, 특히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북한에서의 행적들이 비교적 소상하게 기술된 점은 이 책만의 장점이 아닌가 싶다.
이 책에서 필자는 과학적 비평 능력 없이 백석 사랑만 가지고 쓴 백석 평전의 위험성을 적절히 지적하고 있다. 나도 처음에는 그런 평전을 흥미롭게 읽기도 했지만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기술은 날조에 지나지 않으며 시인에 대한 진정한 애정의 표현이 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이 리뷰를 쓰려고 이 곳에 들어오면서 이 책을 선전하는 "우리 시대 최고의 평전"이라는 문구를 보게 됐다. 우습다. 이건 독자들이 오래 두고 평가해야 할 부분이지 넉살좋게 떠벌릴 건 아니라고 보는데, 여러분들은 어떠신지... 이건 안도현 시인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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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sulemono 2014-11-02 공감(7)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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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시인의 눈으로 본 백석
안도현 시인의 눈으로 본 백석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속을 비워 그 사람을 내 가슴에 담는 일이다. 한 사람을 가슴에 담는 일이란 나로 인해 그 사람을 더욱 빛나게 하는 일이다. 하여, 그 일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온전히 내 가슴에 담고 그 사람으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공유할 때 사랑하는 사람과 내가 자유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게 된다. 여기서 사랑하는 대상이 꼭 이성일 필요는 없다. 남자와 여자와 같은 성별의 차이나 나이의 적고 많음의 차이도 상관없다. 같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일 수도 있고 전혀 다른 길을 걷는 사람일 수도 있다. 오직 한 인간과 한 인간의 만남이다.
여기 그런 귀중한 만남이 있다. 30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동안 짝사랑한 결과를 당당하게 밝히고 이제야 서로가 빛나는 관계를 정립한 사람들이다. 백석 시인과 안도현 시인이 그들이다. “맑은 시심을 바탕으로 낭만적 정서를 뛰어난 현실감으로 포착해온 시인”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 시인 안도현이 그가 짝사랑한 백석 시인의 삶과 시를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으로 백석을 찾아 빛을 내고 있는 평전을 펴냈다. 시인 안도현은 ‘스무 살 무렵부터 백석을 짝사랑하고, 백석의 시가 “내가 깃들일 거의 완전한 둥지”였으며 어떻게든 “백석을 베끼고 싶었다”고 고백하며 그간의 노력을 담아 백석의 생애를 복원했다. ‘백석 평전’이 그 책이다.
백석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중 한명이다. 시인 백석은 식민지시대와 일본유학, 만주표랑과 분단 이후 북한문단에서의 생활 등 한국현대사의 가장 치열했던 격동의 세월을 살았다. 한동안 한국의 지배이데올로기에 의해 거론 자체가 금기시된 문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최근 중, 고등학교 국어 관련 교과서에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과 ‘여우난골족’이 실리면서 더욱 주목받고 있다. 대표 시집으로 ‘사슴’이 있다.
시인 안도현은 백석의 삶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일제하 식민지시대 조선 문인들이 겪어야 했던 실상과 더불어 백석과 교류했던 문인들과의 관계를 밝혀 1930~40년대 문담의 실상을 알려준다. 백석의 모던보이의 소소한 일상에서 백석의 여인들까지, 오산학교에서 통영, 만주, 삼수군 협동농장까지 소설가에서 시인으로. 백석의 삶을 추적해 가는 과정에서 안도현이 다루는 부분은 문학, 식민지 경제, 분단정치 등 사회 각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백석이라는 이름만큼 그의 작품과 삶에 대한 이해는 넓지 않은 우리의 현실에서 백석의 문학과 삶에 대한 가감 없이 이해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안도현의 백석평전으로 인해 그동안 부분적으로 조명되면서 때론 오류가 있었던 백석의 삶과 문학에 대한 기준점을 제시했다는 점, 백석의 시와 산문에 드러나 있는 내용과 그의 실제 행적을 비교해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다는 점, 해방 후 북한에서의 생활을 그려가며 잊혀진 백석의 삶의 재구성과 같은 긍정적인 측면에서 주목받고 있는 책이다. 백석을 짝사랑한 안도현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결과물이기에 백석과 더불어 저자 안도현도 재조명되는 기회가 될 듯하다.
사랑은 이렇게 위대한 창조를 한다. 고사에 등장하는 사숙(私淑)이 이들 둘 사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백석에 대한 안도현의 사랑은 사숙 그것을 넘어서 한국 문학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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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無盡 2014-07-02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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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백석 평전
백석을 위한 변명.
오래 전에 사두고 근대문학 전반에 마음이 멀어져서 묵혀두다가 숙제하는 마음으로 읽는다.
아무래도 밀린 숙제는 짜증스럽기 마련인데, 그럼에도 재미가 없을 수는 없는 생애랄까.
그러나 허울좋은 모던보이.... 그 이면을 보게된 이후로 대체 이 양반 뭔가 싶은 면이 끊임이 없이 등장해서 오히려 모르는 채로 지내는 것이 나은게 아닐까 생각도 한다.
외양과 스타일만 모던 보이이며, 그 시대 있을 법한 가부장적 유교의 틀에서 그다지 해방될 생각 없는 남성이 아닌가.
자신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던 여성이 친구와 결혼했다고 뺏겼다고 생각하고, 수차례의 집안 강압?에 못이긴 결혼을 하고 부인들을 어떻게 책임지고 부양했는지는 생략되고, 그런 와중에 기생과 빠진 사랑은 어디로 봐도 그다지 책임감 있는 모습은 아니지 않나? 그 전력을 보다보면 참 그 시대의 남자란 편리한 족속이구나 싶은 생각만 들게된다.
시대가 하수상하여 스스로 뜻을 펼치기 어려운 시대였으나, 저자의 백석 감싸돌기는 좀 지나치지 않은가 싶다.
‘모던보이’의 윤리성의 파행을 근대성의 파행이라고 변명하기엔 찜찜한 감이 없지 않다.(207) 라니... 찜찜한 감이 없지 않은 정도는 넘어서지 않을까.
백석은 만주 시절에 일본어로 된시를 어디에도 발표하지 않았고, 시인으로서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자는 글을 쓰지도 않았다. ...... 1940년을 전후해서 거의 모든 시인과 작가들이 일본에 무릎을 꿇고 적극적인 친일행위를 했다는 것과 비교해보면 백석의 행동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227) 라니...
김응교가 공개한 ‘문인창씨록’에서 백석이 ‘시라무라 기코’로 창씨개명을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1943년경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문건대로라면 백석은 안둥세관에 창씨개명을 하는 조건으로 들어갔거나, 그 후에 어쩔 수 없이 현실과 타협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명단에는 친구 허준도 ‘기노시타 슌’으로 성씨를 바꾼 것으로 되어 있다. 자의에 의한 것이든 외부의 강압에 의한 것이든 백석이 창씨개명에 참여한 사실은 분명하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백석이 이렇게 바꾼 일본식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거나 공식적인 자리에 나선 일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백석은 백석이고자 했다.(278) 라니...
대단한 반일 행위라고 해야하나...
어쩔수가 없이 삐딱하게 읽힌 이 평전을 그렇다고 폄하할 수는 없다.
백석에 대해 꽤 많은 정보(결과적으로 필요이상인 경우도 있지만)를 얻게 되고 그의 문학적 어프로치도 시집 한권을 읽는 것보다는 폭넓게 이해할 수 있다.
예술가로서의 성취도 감히 나 따위가 왈가왈부할 수 없이 눈부시지만,
분단 현실로 인해 우리가 볼 수 없던 백석의 흐릿한 발자취가 어쩌면 그를 좀 더 스타일리쉬한 예술가로 바라보게 하는 면이 있지 않은지 생각했다.
2018. j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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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as 2018-01-13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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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전쟁이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가는 3년 동안 백석은 10권이 넘는 소설과 시집을 번역했다.”
이 문장을 읽는데 가슴에 뜨거운 것이 치밀고 올라온다. 책이 후반부로 갈수록 가슴이 미어진다. 비참한 결과를 미리 알고 보는 영화 같다. 이제 곧 비참해 지겠지, 점점 더 비참해 질 거야. 북한에서 발표한 시나 산문은 도저히 읽지 못하겠다. 눈으로 금방 금방 흘려 넘긴다. 내가 존경하던 선배가 살기 위해 자신을 팔아넘기는 장면이라도 목격한 것처럼 속이 에인다. 엄혹한 일제시대 조차 백석에게 이런 노골적인 글을 쓰도록 강제 하지 못했다. 백석은 자유주의 시인이었지 한 번도 정치적인 글을 쓰거나 입장을 표명한 적이 없었다.
정치적이지 않았던 백석은 그 누구보다도 정치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독립만세운동을 조직하지 않았지만 시를 쓸 때는 우리말을 썼다. 민족이나 독립에 대해 남긴 글은 없지만 본인이 일본말로 시를 쓰지 않음으로서 그 생각과 의지를 결과로 증명했다. 문인들이 자의든 타의든 친일 활동을 할 때도 백석은 만주 일대에서 붓을 꺾고 생활했다.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살기 위해 매문을 하지 않고 차라리 가난과 고립을 택했다.
내가 처음 백석의 시를 읽은 것은 대학 입학한 후였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그리고 ‘흰 바람벽이 있어’를 읽으며 뭐랄까 충격이랄까 감동이랄까. 나만 알고 있는 멋진 시를 발견한 것 같은 흥분이 일었다. 잘생긴 얼굴과 바람결 같은 모양의 머리 그리고 월북한 시인이라는 것. 자야라는 기생과 동거 했고 그 분이 운영하던 요정을 법정 스님께 시주해서 그곳이 길상사라는 절이 됐다는 것. 그 외에는 백석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일본 유학을 다녀오고 조선일보에 취직해서 모던보이로 경성을 누비고 다니는 시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통영의 처녀에게 반해서 그녀를 보러 먼 길을 다녀오는 모습, 돌아오는 길에 요릿집에 들러 기생들과 술을 마시고 연락처를 남기지만 막상 연락오니 당황하는 모습이 우습다. 백석의 개인적인 삶에서는 이 시기가 가장 행복한 때였으리라. 하지만 시인의 외로움과 경제적 궁핍이 심해질수록 시는 좋아진다. 함흥의 영어교사로 가서 세상과 격리되어 있을 때의 시가,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로 떠났을 때 고독과 외로움이 묻어나는 시가 훨씬 좋다.
가족과 함께 북에 가정을 꾸렸을 때 시인은 더 이상 본인의 의지로 살 수 없다. 처음에는 번역을 하면서 외국문학 분과위원으로 지내지만 문학이 정권의 나팔수가 되고 아동문학이 천편일률적으로 흐르자 결국 자기 목소리를 낸다. 목소리를 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벌떼 같이 달려드는 주류에 공격받고 시인은 유배된다. 삼수갑산의 오지로 가서 평생 해보지도 못한 농사일을 한다. 축출당하기 전에 시인은 처음으로 체제 찬양적인 시와 글을 쓴다. 그러나 그 글들조차 시인을 구원하지 못했다. 시인으로서의 백석은 이때 압사되어 절멸한다.
편안한 시대에 태어났다면 백석은 시골 영어 교사를 하면서 틈틈이 시를 쓰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백석은 끊임없이 정치적인 선택을 해야 했고 그 선택이 그의 삶을 결정했다. ‘서정시를 쓰기 어려운 시대’에 태어난 시인 백석은 오래 살아남아 조국의 애환을 온몸으로 겪어낸다. 전쟁 중에 원고를 들고 다니며 번역에 몰두하는 시인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의 분투에 오늘 나는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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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연 2014-07-23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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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평전
처절하다. 북한 김씨 사이비 공산 독재, 사상의 선명성 투쟁이라는 미명 아래 사그라진 위대한 시인의 영혼, 자유와 창의가 말살된 공간에서 행여나 화를 입으까 두려워 철저히 자기검열하며 한 평생을 도망치듯 살았던 그의 삶이 정말 처절하게 읽히는 것이다. 분하고 안타깝다. 부디 그의 시구처럼, 세상같은 건 더러우니 버렷버리고, 출출이 우는 산골에서 나타샤와 흰당나귀와 함께 행복했기를. 그의 명복을 빈다.
시시프 2016-05-22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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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백석 평전
2016. 10.30 독서모임 안도현, 『백석평전』
1. 백석의 시 주제가 토속적이면서도 모더니즘의 극치를 이룰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 모더니즘[국어국문학자료사전]
문예사조의 하나. 19세기 말기에 유럽 소시민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발생하기 시작하여 20세기에 들어와 크게 유행하였다. 근대주의 또는 현대주의라고도 한다. 기존의 리얼리즘과 합리적인 기성 도덕, 전통적인 신념 등을 일체 부정하고, 극단적인 개인주의, 도시문명이 가져다 준 인간성 상실에 대한 문제의식 등에 기반을 둔 다양한 문예사조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 토속 (土俗) [토속] [명사] 그 지방의 특유한 풍속.
일반적으로 모더니즘 시라고 하면
①전통시가 가지고 있던 음보율(3음보, 4음보) 등의 운율적 측면보다는 이미지/회화성에 초점을 두는 점
②감정절제, 주지주의의 모습
③현대문명에 대한 비판 ④탈권위로써의 형식의 파괴 등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사실 학교에서 모더니즘 시, 모더니즘 시인에 대해 배울 때 백석의 시가 언급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백석의 시에서 모더니티를 느낀다. 그렇다면 백석의 시가 갖는 모더니티는 무엇일까?
p.100. 김기림을 필두로 한 1930년대 일반적인 모더니즘의 언어와 백석의 언어를 확연하게 구별하는 점. 김기림, 정지용, 김광균, 이상 들은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구의 모더니즘 이론을 여과장치 없이 그대로 직수입하였다. 그들은 도시문명에 경도되었고, 회화적 이미지를 자주 구사했으며, 때로 상징적 수법을 과용하면서 근대성에 접근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몸은 없고 관념만 앙상한 시를 생산하였다. 그러나 백석은 달랐다. “백석은 시어를 현실생활과 거리가 있는 생경한 ‘지식의 언어’가 아닌 생활과 일체감을 느낄 수 이는 명료한 일상의 어휘로 운용하였다.”(최정례,『백석 시어의 힘』, 서정시학,2008)
p.96
『사슴』은 그 외관의 철처한 향토 취미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향토주의와는 명료하게 구별되는 ‘모더니티’를 품고 있는 것이다.
김기림은 백석의 시가 기억 속의 동화와 전설에 나오는 소재, 그리고 향토적인 분위기를 취하고 있지만 거기에 따른 감상주의와 복고주의를 일체 배격하고 있음에 주목하였다. 그는 백석의 시에 내재된 모더니티를 발견하고 그 모더니티가 치열하고 철저한 비타협의 소산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집어내고 있다.
책에서 언급하는 이러한 내용 외에 백석시의 모더니즘 경향을 한승태는 본인의 논문 ‘백석 시의 모더니즘 경향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① 낡은 형식의 파괴, 새로운 형식의 창조 자체가 모더니즘의 예술 원리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을 제외하고 백석의 시에는 ‘구두점, 쉼표, 마침표’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현실이 총체성을 찾을 수 없는 상황임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질서한 현실, 개인의 의식 속에 잡다한 생각을 형식에 반영한 것이다.
->모더니즘은 탈권위이다. 운문은 이렇게, 산문은 저렇게 써야한다는 것 자체가 ‘권위’라는 점에서 백석의 시는 사물의 나열과 산문시의 형식으로 ‘형식’이라는 권위에서 벗어나 있다. 이것을 백석의 시에서 우리가 모더니티를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② 객관적 감각성, 백석은 주관이 개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상을 묘사하여 객관적 이미지를 제시한다.
③내적 운율을 획득한 산문시 형식
④‘함경도 방언’ ‘시골 사람이 쓰는 말 그대로’의 어법
이는 단순한 시도가 아닌 식민체제의 폭력적 구조에 저항하는 독자적 방안이라는 점이다. 치열하고 철저한 비타협의 소산!
2. 백석은 왜 정치적 성향을 배제한 시를 썼는가?
백석이 살던 시대의 정치는 일제 강점기, 해방직후 혼란기, 분단 후 이념 갈등의 상황이었다. 그 시대를 비판하고 풍자하고 싶었다고 하더라도 실상 정치적 성향을 시에 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에 정치적 성향이 짙은 시라고 하면 1920년대 카프문학처럼 자신의 이념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거나 친일문인들처럼 당시 정치세력에게 유리한 선동적인 시를 쓴다거나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백석은 일복유학 때 받았던 1)이시카와 다쿠보쿠&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영향(p 50)도 있었을 것이고 2)목적성에 경도된 카프문학의 모습이나 현실인식과 민족의식이 결여된 당시의 순수시나 모더니즘 시의 모습도 마뜩잖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정치적 성향은 배제하되 우리 민족의 정신을 지킬 수 있는 시를 쓰는 길을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일본 유학시절 습작기부터 그는 ‘가장 모던한 것’과 ‘가장 조선적인 것’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백석은 단 한 편도 일본어로 된 시를 발표하지 않았다. 그는 모더니즘적인 시를 탐독하고 시론을 받아들였지만 조선 사람의 언어를 지키는 시인이고자 했다.
-1930년대 중반은 식민지 조선의 현실과 가치체계가 파국을 향해 가고 있었을 때였다. 이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백석은 일본 제국주의가 드리운 그늘에서 시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상상하였다. 그것은 과거의 재생을 통해 현실의 몰락을 타개해나가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백석은 주관적 감상주의와 계몽주의를 넘어선 그 무엇을 찾고자 했다. `그 무엇`은 새로운 미적 인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시를 구체화시키는 것이었다.
과거의 재생을 통해 현실의 몰락을 타개해나가는 것! ->음식, 방언
-‘백석과 음식’
백석의 시에는 유년과 관련된 음식이 거의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는 음식의 기억을 집요하게 시에 끌어들여 과거의 시공간을 복원하고자 시도한다. 음식에는 가족이라는 공동운명체의 기질과 취향과 풍습이 반영되어 있다. 음식을 먹는다는 건 어떻게 보면 매우 사소하고 일상적인 행위일 뿐이다. 하지만 함께 밥을 먹었던 기억은 가족을 단단히 결합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음식의 공유는 기억의 공유로 곧잘 이어진다.(p16) 백석이 유난히 음식에 집착했던 이유는 일제강점기의 궁핍한 현실을 반영하기 위한 의도도 아니고 음식을 통해 민족정신을 회복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백석에게 음식은 음식에서 파생되는 갖가지 감각을 활용해 시적 리얼리티를 확보하는 데 중요한 재료였다. 그는 민족적인 것의 원형, 혹은 정체성을 탐구하는 데 시적 열정을 바친 시인이었다. 백석에게 음식은 역사성의 현실적 현현으로서의 의미가 컸다.(217p)
-백석 시의 방언은 모국어의 위대한 힘을 깨닫게 함(98p)
이동순, 「문학사의 영향론을 통해서 본 백석의 시」
“청록파 시인들과 윤동주, 그리고 해방 후의 신경림, 박용래, 이시영, 김명인, 송수권, 최두석, 박태일, 안도현, 심호택, 허의행”의 시가 백석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견해 피력.
유성호, 「백석 시의 영향」
①근대 혹은 ‘근대적인 것’에 대한 반성적 전거
②‘시각’보다는 ‘후각/미각’으로 경사된 사물 인식 방법
③‘가난’의 시적 기표를 통해 소외된 이들에 대한 따뜻한 연민을 보인 현실 이해 방식
④운명 또는 생의 형식에 대한 중후한 성찰의 태도와 그 특유의 산문시형
3. 백석의 시 중 가장 맘에 드는 시 1편 외워오기 (백석, 선우사)
낡은 나조반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아서
쓸쓸한 저녁을 먹는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은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다.
우리들은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서로 좋구나
우리들은 맑은 물밑 해정한 모래톱에서 하구긴날을 모래알만 헤이며 잔뼈가 굵은 탓이다.
바람좋은 한 벌판에서 물닭이 소리를 들으며 단이슬 먹고 나이들은 탓이다.
외따른 산골에서 소리개 소리 배우며 다람쥐동무하고 자라난 탓이다.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어졌다.
착하디 착해서 세괏은 가시 하나 손아귀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이 함께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4. 책 속 편린들로 보는 백석
p.12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터벅터벅 길을 걸었다.
p.36 ‘백석과 소월’
소월이 선배로서 백석의 문학적 감성에 불을 질렀지만 백석의 시가 소월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백석은 의도적으로 리듬을 거부했다. 소월이 시의 ‘노래’로서의 기능에 심취했다면 백석은 묘사를 통한 ‘이야기’의 효과에 더 끌렸던 것이다.
p.45 고향(아버지로 섬기는 이, 지원자 방응모)
백석에게 영향을 미친 시경향~p.52
백석은 외모만 ‘모던보이’가 아니었다. 그는 ‘가장 모던한 것’과 ‘가장 조선적인 것’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백석보다 앞선 주요한이나 정지용은 유학시절부터 일본어로 쓴 시를 발표했다. 그러나 백석은 단 한 편도 일본어로 된 시를 발표하지 않았다. 그는 모더니즘적인 시를 탐독하고 시론을 받아들였지만 조선 사람의 언어를 지키는 시인이고자 했다.
백석의 외양묘사 p.62
멀리서 봐도 그는 남들의 눈에 금방 들어올 만큼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숱이 많은 새까만 곱슬머리에 선명한 눈썹에다 얼굴 한가운데에는 서양사람처럼 콧날이 깎아놓은 듯 우뚝 자리잡고 있었다. 균형 잡힌 어깨와 다리를 가진 훤칠한 키의 백석이 세종로를 겅중겅중 걸어가면 누구나 다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목이 유난히 긴 이 청년은 늘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이었다. 길 가던 여성들이 이런 모던보이를 마주치기라도 하면 화들짝 놀라며 곁눈질을 하기 일쑤였다.
아카시아들이 언제 힌 두레방석을 깔었나
어데서 물쿤 개비린내가 온다
백석, 비(p.85)
p.125. 선우사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우리들이 같이 있으면/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이동순, 「문학사의 영향론을 통해서 본 백석의 시」
“청록파 시인들과 윤동주, 그리고 해방 후의 신경림, 박용래, 이시영, 김명인, 송수권, 최두석, 박태일, 안도현, 심호택, 허의행”의 시가 백석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견해 피력.
p.140
산뽕닢에 빗방울이 친다
멧비들기가 닌다
나무등걸에서 자벌기가 고개를 들었다 멧비들기켠을 본다
백석, 산비
p.156 백석, 1937년의 봄 백석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통영의 박경련과 그의 절친했던 친구 신현중의 결혼소식.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온 백석은 수첩에 적혀있던 신현중의 이름을 붉은 펜으로 지워버렸다.
....나는 하이얀 자리 우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백석 ‘내가 생각하는 것은’
‘백석과 음식’
백석의 시에는 유년과 관련된 음식이 거의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는 음식의 기억을 집요하게 시에 끌어들여 과거의 시공간을 복원하고자 시도한다. 음식에는 가족이라는 공동운명체의 기질과 취향과 풍습이 반영되어 있다. 음식을 먹는다는 건 어떻게 보면 매우 사소하고 일상적인 행위일 뿐이다. 하지만 함께 밥을 먹었던 기억은 가족을 단단히 결합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음식의 공유는 기억의 공유로 곧잘 이어진다.(p16) 백석이 유난히 음식에 집착했던 이유는 일제강점기의 궁핍한 현실을 반영하기 위한 의도도 아니고 음식을 통해 민족정신을 회복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백석에게 음식은 음식에서 파생되는 갖가지 감각을 활용해 시적 리얼리티를 확보하는 데 중요한 재료였다. 그는 민족적인 것의 원형, 혹은 정체성을 탐구하는 데 시적 열정을 바친 시인이었다. 백석에게 음식은 역사성의 현실적 현현으로서의 의미가 컸다.(217p)
161p
<조선일보> 방응모 <동아일보> 김성수의 친일
기회주의적인 지식인들과 문인들의 친일
카프를 이끌었던 박영희의 변신 1934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 전향선언,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공개적으로 친일 문인조직
백석은 일본에 유학을 할 때나 귀국한 뒤에 단 한 편도 일본어로 작품을 쓰지 않았다.
183p
노천명, 사슴
점잖고 고결한 존재인 사슴, ‘사슴’이 백석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는 없지만 백석이 두 해 앞서 ‘사슴’이라는 제목의 시집을 냈다는 점, 그리고 최정희 모윤숙 노천명이 서로 주고받은 편지에 아예 백석을 ‘사슴’이나 ‘사슴군’으로 호칭했다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두 시편 사이의 친연성은 여러 가지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게 사실이다.
193p 멧새소리
259p 흰 바람벽이 있어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상투적인 시어 사이에 ‘높고’를 끼워넣음으로써 시는 갑자기 쓸쓸함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는 시인의 위치를 드높은 정신의 차원으로 고양시킨다.
“흰 바람벽이 화자의 의식의 스크린 구실을 하고 있는데 예사로워 보이지만 절묘한 착상이요 전개”(유종오)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 속내를 직접 토로하지 않고 지나가는 글자들로 말하게 한 데서 박력과 호소력이 생긴다.”(다시 읽는 한국 시인, 문학동네, 2002)
218 이광수의 철저한 친일, 만주로 떠나는 백석
278 백석의 창씨개명. 그러나 백석이 이렇게 바꾼 일본식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거나 공식적인 자리에 나선 일이 전혀 없다는 점. 백석은 백석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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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미 2016-10-31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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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백석 평전
문학 작품들중 가장 어프로치하기 쉽지 않고 또 해봤자 잘 모르겠는 분야가 시다. 흔히들 문학중 시에서 단편, 장편소설 순서로 쓰기 쉽다고 한다. 시는 문학인들 사이에서도 문학적인 재능이 있어야지 쓰는 장르라고 하던데 난 잘 모르겠다.
아직 시를 읽고 큰 감흥을 느껴보거나 가슴에 와닿는 순간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시인이 시인에 대해 쓴 평전이다. 작가는 안도현 시인으로 이분도 우연치 않게 아는분이다. 물론 연탄재 발로 차지마라 그 시만 알고 있지만, 백석 시인이야 워낙 유명하신분이니 말할것도 없고 지금 책상에 받침판으로 쓰는 고무판에 백석 시인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가 적혀있다.
시인이 썼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사료에 입각해서 상당히 사실적으로 쓴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시중에 백석평전이 여러권 나왔지만 아무래도 이 책이 가장 인정받는 평전이 아닐까 싶다. 안도현 시인은 평생의 시인으로 백석을 흠모해 왔으며 그의 생애를 존경 어린 마음으로 조명했기에 이 책이 가지는 가치는 더 높아보인다.
평전 중간 중간에 백석의 시가 지문으로 들어가 있어, 그의 생애와 시를 동시에 맛보는 즐거움도 매력적이다. 백석이 태어난 시기나 유년시기는 별로 다루지 않았고 백석이 어떤 계기로 시를 쓰게 되었는지, 그가 일본에서 유학하며 습작할 때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등 유년의 시절부터 장학생으로 떠난 일본 생활등을 다뤘고, 그의 애정과 사랑도 들어가 있어 한 사람의 생애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특히 삼청각을 운영하고 법정스님에게 길상사를 기부했던 김영한과의 사랑도 매우 잘 기술되어있다. 그녀와 백석의 사랑은 평생 서로 간직한듯 싶다. 함흥에서 만났던 사이었을줄이야... 평전을 읽는 즐거움을 가져다 주기도 하고, 체제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들 그리고 백석 시인의 아름다운 시를 즐길 수 있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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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티 2017-06-17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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