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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7-17

김재준 자서전 [범용기 제1권] 목차 요약 평론

 목회와 신학: [범용기 제1권](각주해설판) - 목차


[범용기 제1권](각주해설판) - 목차

〖 범용기 제1권 - 목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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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 목사의 자서전 『범용기』(각주해설판)을 발행하며
첫머리

어릴 때 추억

경원 함양동 3년

회령에서 3년

웅기서 서울로

서울 3년

서울에서 고향에 돌아와

소학교 교사 3년
동경 3년

미국 3년

돌아와 보니

평양 3년 [33-36]

간도 3년

조선신학원 발족

편집후기

부록 : 장공 김재준 목사 연보 및 휘호

장공 김재준 목사 연보

- 본 내용은 김경재 교수가 집필한 『김재준 평전』(2001)에 수록된 내용을 옮긴 것입니다.

1901년 9월 26일

함북 경흥군 상하면 오봉동 창꼴마을에서 김호병 씨와 채성녀 씨의 2남 4녀 중 둘째아들로 태어남

1905년 ~ 1910년

서당 훈장이셨던 부친으로부터 『천자문』, 『통감』, 『대학』, 『중용』, 『논어』, 『맹자』 등을 읽고 몸에 익히면서 가풍을 따라 유교의 세계에서 소년 시기를 자람

1910년 ~ 1915년

9살 때 경원 향동소학교 3학년에 편입, 고건원보통학교를 마치고, 회령 간이농업학교를 졸업(13~16세)

1915년 ~ 1917년

회령군청 간접세과 고원으로 취업

1917년

18세 때 장석연 씨의 맏딸 장분여와 결혼. 이후 일생을 해로하면서 3남 3녀를 낳고 기름

1917년 ~ 1920년

회령군청에서 웅기 금융조합 직원으로 전직. 웅기에서 만주, 시베리아로 망명하는 애국 지사들을 수시로 보며 가냘픈 민족 의식이 싹트기 시작

1920년

웅상 출신 청년 전도사로 서울 남대문교회 송창근 전도사의 방문을 받고, 나라와 교회를 생각하고 뜻을 품음. 웅기금융조합 사직하고 서울로 유학을 떠남

1920년 ~ 1923년

중동학교 고등과에 편입. 서울 YMCA 영어 전수과에서 영어 공부를 시작하고, 이상재ㆍ윤치호ㆍ신흥우 등의 강연을 듣고 신문화 흡수에 전력함. 톨스토이와 성 프란시스 전기 등을 탐독하고 청빈 사상에 큰 영향을 받음

1924년

승동교회에서 열린 장로교 연합 사경부흥회 때,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고 믿기로 결심하고 회심을 경험함. 믿은 지 3년 후 승동교회 김영구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음

1924년 ~ 1926년

함북 경흥에 귀향하여 용현소학교, 귀낙동소학교 신아산소학교에서 교사로서 어린 학생들을 가르침

1926년 ~ 1928년 

일본 아오야마 학원 신학부에서 고학하면서 자유로운 학풍에서 신학 공부. 1928년 아오야마 신학부 졸업. 기독교 사상과 신앙을 주축으로 한 교육 사업에 일생을 바칠 것을 설계함. 졸업반 때 귀향하여 두만강 유역 교회를 순방 강연함

1928년 9월 ~ 1932년 5월

미국에 유학함. 1928년 9월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수업하고, 1929년 9월 미국 웨스턴 신학교에 편입학. 같은 학교에서 1932년 5월 신학사(S.T.B), 1932년 5월 신학석사(S.T.M) 학위를 받음. 미국 경제 공황에 직면하여 귀국함. 미국 유학 시절 송창근, 한경직과 특별한 신앙 동지로서의 우의를 굳건히 함                                                   

1933년 4월 ~ 1936년 4월

귀국 후 평양에서 3년을 지냄. 1933년 4월 숭인상업학교 교유에 취임하고, 평양 산정현교회 집사직으로 봉사하다가 1933년 8월 평양노회에서 강도사(講道師) 인허를 받음. 1936년 4월 신사 참배 문제와 민족 교육 금지 문제로 숭인상업학교 교유직을 사임함. 이 무렵 순교자 열전 연구에 몰두함. 평양 3년 머무는 기간 동안 송창근, 한경직, 김재준 등 젊은 소장 학자들은 평양신학교 신학 연구지 『신학지남』에 기고자로 관계를 맺게 되고, 유형기 박사의 『단권 성경 주석』 번역자로서 필화 사건에 연루되어 세 사람 연서로 성명서를 냄

1936년 8월 ~ 1939년 9월

간도 용정 은진중학교에 봉직하면서 3년을 간도에서 청년 교육에 힘씀. 1936년 8월, 은진중학교 교유에 취임. 1937년 동만노회에서 목사 안수받음. 1937년 5월부터 1938년 2월까지 월간 『십자군』을 발간함

1939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평양신학교가 폐쇄됨

1939년 9월 ~ 1940년 2월

서울 승동교회 김대현 장로의 재정을 기반으로, 조선신학원 설립 기성회가 발족(김대현, 송창근, 김영주, 차재명 중심) 설립 사무 실무 책임자로 김재준 목사가 간도 은진중학을 사임하고 설립 사무를 전담하여 추진

1940년 3월

조선신학원이 경기도 도지사 인가로서 승동교회에서 개교. 설립자 겸 원장에 김대현 장로, 이사장에 함태영 목사, 교수로서 윤인구, 김재준 임명

1941년 ~ 1944년

일제 말기 조선신학원 끝까지 지킴. 일제에 의한 관제 『조선 혁신 교단』 시절(1942)과 조선신학원과 감신의 『합동 강의』 기간 동안에도 조선신학교 교장으로서(1943~46) 학교를 지킴

1945년

해방의 기쁨과 함께 8월에 「기독교 건국 이념」 집필 발표. 9월에 천리교 본부 건물을 미군정청으로부터 인수 불하받아 동자동 교사 시대 교수로 일함. 12월에 경동교회를 설립함

1946년 3월

송창근 박사가 제4대 조선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고, 김재준은 한경직과 함께 교수가 됨. 6월 장로교 남부 총회에 의해 총회 직영 신학교로 지정            

1950년 1월

『십자군』을 속간하여 1951년 8월까지 속간 30호 발간함

1950년 ~ 1951년

6ㆍ25 동란으로 같은 해 8월 송창근 학장 북으로 피랍. 1951년 3월 부산 피난 전시 대학 개강. 부산 항서교회당 및 남부민동 임시 천막 교사에서 수업.

1951년 4월

학교명을 한국신학대학으로 변경, 김재준 목사 학장 서리에 취임


1953년

장로교가 보수적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분열. 장로회 37회 대구 총회에서 김재준 목사직 파면 선언, 한국신학대학 총회 인준 취소, 한신 출신 교회 취임 거부, 이미 위임된 한신 출신 목사들의 노회 재심 등을 불법적으로 결의. 대구 37차 총회의 불법성에 저항하여, 같은 해 6월 서울 동자동 한국신학대학 강당에서 장로회 38회 호헌총회를 개최. 기독교장로회 탄생


1953년 ~ 1957년

서울 환도 후 동자동 교사에서 학장 서리 겸 교수로서 봉직


1958년 ~ 1959년

1957년 12월, 수유리 한국신학대학 새 캠퍼스로 입주. 김재준 목사 제6대 학장으로 취임. 캐나다 연합교회 초청으로 순회 답방(1958.8~1959.9)


1959년 5월

밴쿠버에 소재한 브리티시 콜럼비아 주립대학교 유니온 칼리지에서 명예신학박사 수여받음


1961년

5ㆍ16 군사정변으로 군사 정권에 의해 60세 정년제 강행으로 동년 9월 한국신학대학 학장직 및 교수직에서 강제 퇴임. 쌍문동 국민주택으로 이주함


1961년 8월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이 됨


1965년 4월

한국신학대학 명예학장으로 추대됨. 9월에 기독교장로회 총회 총회장으로 추대됨. 한신학원 제7대 이사장으로 피선(1966.9~1970.9)


1965년

한ㆍ일 굴욕 외교 반대 국민 운동을 한경직 목사와 주도하여 영락교회에서 대중 강연, 교회의 대사회 참여 운동 시작


1970년 9월

월간지 『제3일』 창간. 박형규, 현영학, 서광선, 이문영, 문익환, 문동환, 이우정 등이 동인으로 참여


1972년

국제엠네스티 한국위원장이 됨. 12월에 유신헌법이 발포됨


1973년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장으로 추대됨.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공동의장(김재준, 함석헌, 천관우, 지학순, 이병린)


1974년 3월

캐나다로 출국. 11월에 북미주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의장직 수임(2회 연임)


1974년 10월

캐나다에서 『제3일』 속간. 1981년 6월호까지 속간 60호 발간


1975년

북미주한국인권수호협의회 명예회장으로 추대됨


1983년 9월

귀국


1983년 ~ 1985년

전국 국토 순례. 『재야 원로 모임』에 참여하여 민주화 운동과 평화 통일 운동을 지속함


1987년 1월

고문으로 살해당한 고 박종철 군 국민추도회 발기인이 됨. 함석헌과 함께 「새해 머리에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유언으로 남김


1987년 1월 27일

서울 한양대학교 부속병원에서 87세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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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 목사의 자서전 <범용기> 1권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 직후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기 속에서 한 사상가이자 목회자,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아낸 저자의 발자취를 담은 기록이다. 본 서는 저자의 유년 시절부터 청소년기의 방황과 결혼, 서울과 일본 및 미국에서의 유학 생활, 그리고 귀국 후 평양과 간도에서의 교육 및 목회 활동을 거쳐 조선신학원(현 한신대학교)의 설립과 해방을 맞이하기까지의 과정을 연대기적으로 추적한다. 이를 통해 개인의 역사를 넘어 한국 기독교 형성과 신학적 갈등, 그리고 민족의 수난사를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저자의 삶은 함경북도 경원의 <창꼴집>이라는 대가족적이고 유교적인 환경에서 출발한다. 조부와 부모의 영향 아래 서당과 신식 학교를 거치며 자란 유년기의 경험은 향후 그의 인성과 사상적 기초를 형성하는 자양이 된다. 청소년기 회령과 웅기를 거쳐 서울로 진출한 저자는 1920년대 서울의 역동적인 풍경과 YMCA 등을 접하며 근대적 지성과 기독교 신앙을 본격적으로 수용하고 세례를 받는다. 이후 소학교 교사 생활을 거쳐 감행한 일본 동경 유학과 미국 프린스턴 및 웨스턴 신학교로의 유학은 그의 학문적 지평을 세계적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산학원에서의 고학 생활과 미국에서의 경제공황기 유학은 그에게 단순한 학문 탐구를 넘어 세계사적 현실을 몸소 체험하게 만들었다. 귀국 후 평양 숭인상업학교와 간도 은진중학교에서의 교직 생활은 신사참배 강요라는 일제의 종교적·민족적 압제 속에서 신앙의 정조를 지키며 강원룡, 안병무 등 후학을 양성하는 실천적 역사의 장이었다. 마침내 김대현 장로와의 만남을 통해 조선신학원을 발족하고 전개해 나가는 과정은 보수적 교권과의 긴장 속에서도 한국 고유의 주체적 신학을 정립하려는 투쟁의 기록이며, 이 여정은 1945년 해방의 감격과 혼란 속에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 자서전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은 역사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개인이 겪은 실존적 고뇌와 선택을 담담하면서도 정직한 필치로 서술했다는 점에 있다. 저자는 자신을 영웅화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범용(凡庸)한 사람의 기록'이라는 서명에 걸맞게 인간적인 한계와 고뇌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특히 일제강점기 말기의 신사참배 압박과 단권성경주석을 둘러싼 교단 내 신학적 갈등은 저자가 겪은 사상적 수난의 깊이를 보여준다. 그는 전통적인 근본주의 신학의 배타성에 맞서 역사적·비판적 성서 연구의 길을 열고자 했으며, 이는 한국 개신교 신학의 다양성과 성숙을 이끈 기념비적 사건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또한, 간도 은진중학교 시절 학생회 활동을 하던 강원룡이나 안병무 같은 인물들과의 교류는 그의 교육적 거목으로서의 면모를 확인시켜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서는 연대기적 나열과 단편적인 삽화 중심의 구성으로 인해, 특정한 신학적 쟁점이나 사상적 전환점에 대한 깊이 있는 이론적 성찰이 다소 파편화되어 나타난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각 장의 소제목들이 보여주듯 사건과 장소의 이동이 빈번하여, 독자가 그의 내면적 사상의 심화 과정을 거시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행간을 읽어내는 노력이 요구된다.

결론적으로 <범용기> 1권은 한 기독교 지도자의 사적 연대기를 넘어, 식민지 지식인이 어떻게 세계적 지성을 흡수하고 이를 국내의 척박한 현실 속에서 토착화·제도화했는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다. 종교와 교육, 민족운동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그가 보여준 실천적 삶은 오늘날 한국 교회와 사회가 직면한 근본주의적 도그마와 역사의식의 부재를 매섭게 성찰하도록 유도하는 지혜의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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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1992년 한신대학출판부에서 나온 『범용기 1―새 역사의 발자취』를 중심으로 정리한 것이다. 『범용기』는 김재준이 캐나다 체류기인 1974~1983년에 집필한 여러 권의 자서전이며, 1983년에는 1·2권을 합친 368쪽짜리 국내판도 출간되었다. 현재 장공기념사업회가 원문을 다시 정리하고 해설판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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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용기 1―새 역사의 발자취>
장공 김재준 지음

 요약·평론

  1. ‘범용한 사람’이 기록한 비범한 시대

『범용기』의 제목은 한자로 ‘凡庸記’, 곧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의 기록이라는 뜻이다. 한국기독교장로회의 형성과 한신대학교 설립에 중심적으로 참여하고, 한국 교회의 신학 논쟁과 민주화운동을 이끈 김재준의 생애를 생각하면 지나치게 겸손한 제목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제목에는 그의 독특한 자기이해가 담겨 있다. 그는 자신을 영웅이나 성인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대의 흐름 속에 던져진 한 평범한 인간이 어떻게 신앙을 배우고, 판단하고, 실패하고, 책임을 감당했는지를 기록하려 한다.

김재준은 글을 쓴다는 것은 쓴 사람이 자기 삶에 책임지는 일이며, 과거에 쓴 글은 언제든 자신을 고발한다고 말한다. 이 고백은 『범용기』 전체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이 책은 성공한 종교 지도자가 자신의 업적을 정리한 공적서가 아니다. 한 인간이 자신의 과거를 다시 바라보며 무엇이 진실이었고 무엇이 미숙했는가를 묻는 양심의 기록이다.

그렇지만 『범용기 1』은 개인적인 추억에만 머물지 않는다. 김재준의 삶이 일제강점기, 식민지 교육, 일본 유학, 미국 신학 수학, 귀국 후 한국 교회의 신학적 갈등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한 목사의 자서전인 동시에 20세기 전반 한국 개신교 지성사의 내부 기록이다.

  1. 함경북도의 유교적 가정

김재준은 1901년 함경북도 경흥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 세계는 기독교보다는 유교적 질서와 전통적 농촌생활에 가까웠다.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고 동양고전을 접한 경험은 이후 그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그는 기독교인이 된 뒤에도 유교와 동양문화 전체를 미신이나 이교로 배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통적 선비정신에서 정직, 절제, 책임감, 의리를 발견했다.

『범용기 1』에서 고향은 단순한 출생지가 아니다. 그것은 그의 언어와 정서, 인간관계와 도덕적 감각이 형성된 장소다. 김재준은 후일 서구 신학을 깊이 공부했지만 서구인이 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의 신학은 동양적 교양을 버리고 서양 교리를 수입한 결과가 아니라, 한국인의 역사 경험 속에서 기독교 복음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노력으로 발전했다.

이 점에서 그의 자서전은 한국 개신교의 일반적 회심 서사와 조금 다르다. 흔히 회심 이전의 전통문화는 어둠, 회심 이후의 기독교는 빛으로 단순하게 대비된다. 그러나 김재준은 이전의 삶 전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전통을 파괴하는 외래 신앙이 아니라 전통의 장점과 한계를 새롭게 성찰하게 하는 자유의 경험이었다.

  1. 회심과 인격적 자유

청년 김재준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과정은 『범용기 1』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의 회심은 강렬한 신비체험이나 기적보다 죄책감과 내적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경험에 가까웠다. 그는 기독교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신분이나 가문, 관습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독립된 인격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자유는 자기 욕망을 마음대로 실현하는 개인주의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유로워진 사람은 동시에 이웃과 역사에 책임을 져야 한다. 자유와 책임은 분리되지 않는다. 이 인격주의적 신앙은 훗날 그가 교권과 독재권력에 맞서게 되는 정신적 뿌리가 된다.

그는 성경과 교회의 권위를 중요하게 여겼지만 인간의 양심과 이성을 포기하는 복종을 신앙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교회가 어떤 결정을 내렸더라도 그것이 복음과 양심에 어긋난다면 질문해야 한다. 『범용기 1』은 이러한 태도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젊은 시절부터 형성된 것임을 보여준다.

  1. 일본 유학과 신학적 탐구

김재준은 신학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한국의 지식인에게 일본은 식민통치국이면서도 근대 학문과 서구사상을 접할 수 있는 통로였다. 그는 일본의 신학교에서 공부하며 한국 교회에서 접하기 어려웠던 현대 신학과 성서연구 방법을 배웠다.

일본 유학은 그에게 두 가지 긴장을 남겼다. 하나는 식민지 조선인으로서 일본 제국 안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정치적 긴장이며, 다른 하나는 전통적 신앙과 현대 학문 사이의 신학적 긴장이었다. 그는 이 두 긴장을 회피하지 않았다.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학문을 거부하거나, 현대인이 되기 위해 신앙을 버리는 양자택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를 증언하는 책으로 믿으면서도, 그것이 역사적 상황에서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성경은 경건하게 읽어야 할 뿐 아니라 문학적·역사적·비판적으로 연구해야 했다. 이러한 입장은 훗날 한국 장로교 내부에서 심각한 논쟁을 일으켰다.

그의 신학적 태도는 ‘의심을 통한 불신’이 아니라 ‘질문을 통한 성숙한 믿음’이었다. 그는 질문하지 않는 믿음이 강한 믿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외부 권위에 의존하여 질문을 금지하는 신앙은 현실의 도전을 견디지 못한다고 보았다.

  1. 미국 유학과 보수신학의 중심부

김재준은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신학교와 웨스턴신학교 등에서 수학했다. 이 시기는 미국 장로교 안에서도 근본주의와 현대주의가 격렬하게 충돌하던 때였다. 그는 보수 장로교 신학의 중심부에서 공부했지만, 성경의 문자적 무오성을 신앙의 절대 기준으로 삼는 입장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에게 미국 유학은 서구신학을 그대로 한국에 옮겨오는 과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 교회 안에도 역사와 문화에 따라 다양한 신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시간이었다. 그는 선교사들이 전해 준 장로교 신앙을 기독교의 유일한 형태로 여기지 않았다. 선교사 역시 특정 시대와 교단의 신학을 가진 인간이며, 그들의 해석도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깨달음은 한국 교회의 신학적 자립이라는 문제로 이어진다. 한국 교회는 서구 선교사의 교리를 반복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되고, 한국의 역사와 문화, 민족의 고통을 자신의 신학적 질문으로 삼아야 한다. 김재준이 후일 조선신학교 설립에 참여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1. 귀국과 한국 교회의 현실

귀국한 김재준이 마주한 한국 교회는 신앙적으로 열정적이었지만 신학적 자유와 학문적 깊이가 충분하지 않았다. 교회는 성경을 사랑했지만, 성경에 대한 역사적 질문을 불신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했다. 선교사들의 권위도 여전히 컸다.

김재준은 이런 상황에서 신학 교육과 저술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정답을 암기시키기보다 스스로 질문하도록 가르치려 했다. 신학교는 교단에 순종하는 목사를 생산하는 곳이 아니라 복음과 시대를 함께 읽는 자유로운 인격을 기르는 곳이어야 했다.

그는 일부 선교사와 교회 지도자들이 성경비평과 현대신학을 위험한 자유주의로 몰아붙이는 태도를 비판했다. 그러나 『범용기』에서 그는 이들을 단순히 악인으로 그리지 않는다. 보수적인 선교사들과 목회자들도 나름대로 복음과 교회를 지키려 했음을 인정한다. 문제는 그들이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을 기독교 자체와 동일시하고 다른 해석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1930년대 ‘아빙돈 단권 성경주석’ 사건은 이러한 충돌을 상징한다. 현대 성서학의 성과를 수용한 이 주석서를 둘러싸고 김재준을 비롯한 신학자들이 자유주의자로 공격받았다. 그는 송창근·한경직 등과 함께 해명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훗날 김재준을 둘러싸고 벌어진 더 큰 성서관 논쟁의 전조였다. 김재준은 당시 경험을 통해 한국 교회에서 신학 논쟁이 학문적 토론보다 교권과 정통성 판정의 문제로 변질될 위험을 보았다.

  1. 조선신학교와 신학적 자립

『범용기 1』의 후반부에서 중요한 사건은 조선신학교의 설립이다. 일제 말기 선교사들이 떠나고 기존 신학교육이 위기에 처하자 한국인 스스로 교역자를 양성해야 할 필요가 커졌다. 김재준은 조선신학교 설립과 교육에 참여하며 한국인에 의한 신학 교육의 길을 열었다.

조선신학교는 단순히 평양신학교를 대신하는 임시기관이 아니었다. 김재준에게 그것은 한국 교회가 서구 선교사의 보호와 통제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신학을 시작하는 장소였다. 그는 현대 성서학을 가르치고, 학생들에게 학문과 신앙을 함께 추구하도록 했다.

그러나 일제 말기의 상황은 복잡했다. 신학교육을 계속하려면 식민지 당국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고, 신사참배와 황민화 정책의 압박도 피할 수 없었다. 『범용기』의 가치는 이런 시대를 단순한 영웅과 배신자의 대립으로 그리지 않는 데 있다. 그는 당시 사람들이 제한된 선택지 안에서 어떤 타협과 저항을 했는지를 회고한다.

다만 김재준 자신의 일제 말기 행적과 판단에 대해서는 좀 더 철저한 자기비판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가능하다. 자서전은 자신의 동기와 상황을 설명하는 데는 강하지만, 그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였는지까지 충분히 보여주지는 못한다.

  1. 문체와 자서전의 특징

『범용기 1』의 문체는 화려하지 않다. 사건을 과장하거나 자신을 중심인물로 내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과의 만남, 작은 일화, 여행, 학업, 교회생활을 담담하게 기록한다. 제목 그대로 ‘범용한’ 생활의 기록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담담함 속에는 강한 윤리적 긴장이 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예정된 영웅담으로 만들지 않는다. 선택의 순간마다 자신이 무엇을 보고 어떻게 판단했는지를 설명한다. 그에게 신앙은 초자연적 섭리를 사후에 발견하는 일이기보다, 불확실한 현실에서 양심을 따라 결단하는 행위다.

또한 이 책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목회자, 선교사, 신학자, 교인, 가족, 학생들과의 관계를 통해 한국 교회사 내부의 연결망이 드러난다. 유명 인물의 공식 전기에서는 보이지 않는 작은 만남과 감정, 오해와 우정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

  1. 책의 장점

첫째, 『범용기 1』은 김재준 신학의 사상적 형성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성서비평 수용, 신학의 자유, 한국적 신학의 필요성은 외국 이론을 추상적으로 받아들인 결과가 아니었다. 유교적 가정, 회심, 일본과 미국 유학, 식민지 현실, 선교사와의 갈등이 축적되어 형성된 것이다.

둘째, 한국 기독교사를 내부자의 목소리로 들려준다. 공식 교회사에서는 교단의 창립과 논쟁의 결과가 중심이 되지만, 『범용기』에서는 그 과정에 참여한 사람들이 무엇을 걱정하고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가 보인다.

셋째, 그의 자기 서술에는 비교적 절제된 겸손이 있다. 그는 자신을 예언자나 민주투사로 미리 규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는 후대의 추모자들이 김재준을 지나치게 이상화하는 것과 대조된다.

  1. 한계와 평론

그러나 자서전은 어디까지나 자기 기억의 산물이다. 김재준은 자신이 경험한 사건을 자신의 시각에서 선택하고 배열한다. 성서관 논쟁이나 교단 갈등에서 자신의 입장은 합리적이고 개방적인 것으로, 반대편은 폐쇄적이고 교권적인 것으로 보이기 쉽다. 실제로 보수 장로교인들이 느낀 신앙적 위기와 식민지·공산주의 경험에서 생긴 불안도 더 깊이 고려할 필요가 있다.

또한 ‘범용’이라는 자기비하는 진실한 겸손인 동시에 독자를 설득하는 수사일 수 있다. 자신을 평범한 사람으로 낮춤으로써 오히려 그의 도덕적 권위가 강화된다. 그는 공적 영향력이 매우 컸던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내린 결정의 정치적·제도적 결과도 개인의 선의와 별도로 평가해야 한다.

가족생활에 대한 서술도 공적 활동에 비해 제한적이다. 학업과 교회, 신학논쟁에 집중하면서 아내와 가족이 감당한 희생은 상대적으로 배경으로 물러난다. 이는 당시 남성 지식인의 자서전에서 흔히 나타나는 한계다.

무엇보다 『범용기 1』을 김재준의 후일 민주화운동 경력만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1권에서 더 중요한 것은 정치투사 김재준이 아니라 자유로운 인격과 주체적 신학을 찾아가는 청년 김재준이다. 그의 민주화운동은 갑작스러운 정치적 전향이 아니라, 젊은 시절부터 형성된 양심의 자유와 역사적 책임의식이 사회적으로 확장된 결과였다.

  1. 종합 평가

『범용기 1―새 역사의 발자취』는 한 위대한 인물의 성공담이라기보다 한 신앙인이 자유로운 인간으로 형성되어 가는 과정의 기록이다. 김재준은 유교적 전통, 기독교 회심, 일본과 미국의 신학,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통과하면서 어느 하나에 맹목적으로 복종하지 않는 태도를 배웠다.

그가 남긴 핵심 유산은 특정한 신학 이론만이 아니다. 신앙인은 성경과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스스로 생각해야 하며, 교회의 명령보다 양심의 책임을 더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정신이다. 또한 한국 교회는 외국 신학을 반복하는 데 머물지 않고 자기 역사와 현실을 신학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요구다.

이 책의 담담한 제목과 문체 뒤에는 매우 급진적인 인간관이 있다. 인간은 어떤 교권이나 국가권력에도 완전히 예속될 수 없는 자유로운 인격이며, 그 자유는 역사에 대한 책임으로 나타나야 한다. 『범용기 1』은 바로 그 자유와 책임이 한 인간 안에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보여주는 한국 기독교 지성사의 중요한 자서전이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범용기 1』은 자신을 평범한 사람이라 부른 김재준이 전통과 근대, 신앙과 학문, 교회와 역사 사이를 통과하며 자유로운 양심의 신학자로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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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 김재준 목사의 생애와 사상

長空 김재준 목사의 생애와 사상 : 네이버 블로그

長空 김재준 목사의 생애와 사상 교회이야기

2011. 9. 1. 20:07


https://blog.naver.com/truelychurch/150117817181


한국기독교장로회를 창시한 장로교 목사로 1901년 함경북도 경흥에서 태어났으며, 청년기에 개신교로 개종했다. 그는 유학자 아버지에게 사서삼경과 동양고전을 배우면서 자란 덕분에, 한국인의 주체적인 눈으로 서구에서 전래된 개신교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일본 도쿄 아오야마신학교,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공부한 김재준은 1940년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를 세운다.

이는 대일본제국의 신사참배 요구때문에, 선교사들이 평양신학교(현, 장로회신학대학교, 총신대학교)를 자진 폐쇄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재준은 성서비평학수용문제로 대한예수교장로회와 갈등을 겪게 된다. 지금은 신학교에서도 가르칠 정도로 성서비평학이 성서연구방법론으로 존중받고 있지만, 축자영감설이 당연시되던 당시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결국 1953년 장로교 목사직을 파면당하고 말았지만, 김재준은 한국기독교장로회를 설립하였다.



長空 김재준 목사의 생애와 사상


1. 인간 김재준



함석헌, 김교신, 이용도 등과 함께 1901년 20세기 첫 해에 출생한 ‘장공 김재준 목사’는 함경북도 경흥에서 ‘유가적 가풍’ 가운데 자라나 선비적 기질이 몸에 배어 있었다. 무척 과묵하고 점잖아서 젊은 시절부터 존경을 받는 인격과 인품을 지녔다.

또한 그는 ‘기독교신앙’으로서 성 프란시스를 매우 존경하여 ‘청빈(淸貧)’또는 성빈(聖貧)을 늘 마음에 새기며 검소하게 살았다. 그러면서도 평생 자기 수입의 상당 부분을 아무도 모르게 가난한 사람을 돕거나 제자들의 학비 보조에 썼다.

그는 소시적부터 한학을 공부하여 한문과 서예에 능통했고 타고난 문장가였다. 그가 유작으로 남긴 <김재준 전집>(전 18권)을 보면, 시대와 상황에 따라 설교와 논문, 수필과 자서전 등 호소력 있고 설득력 있는 문장으로 수많은 글을 써서 시대를 깨우치고 교회와 사회를 바로 세우려 노력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만큼 그는 우리 교회와 사회, 그리고 우리 민족을 사랑했다. 그가 작시한 우리 찬송가 261장 ‘교회의 노래’에도 이런 그의 정신이 짙게 배어 있다.


2.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와 김재준

1935년 당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서양 선교사가 그들의 본국으로 모두 돌아가 한국 개신교는 ‘선교사 후견인시대(1885-1935)’를 마감하는 역사적 전환점을 맞았다. 이때 새로운 시대에 새 시대를 이끌어갈 새 지도자와 신학적 비전이 필요했다.

새 포도주를 담을 새로운 가죽부대가 요청된 시기였다.

서양 선교사가 이끌던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음으로 인해 장로교 신학교육기관이 전무했던 바로 그 시점에서, 조선 교회를 이끌어 갈 목회자를 자주적으로 양육하려는 ‘조선신학교’ 가 설립된 것이다.

김대현, 송창근, 김재준 등 ‘창조적 소수자’들이 미래의 비전을 내다보면서 규모는 작지만 깊은 의미가 담긴 신학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조선신학교는 서양 선교사가 아닌 순수한 조선 사람이 교육하고 교육받는 장이 되어야 한다는 데서 출발한 학교이다.

당시의 시대 상황, 즉 1940년 일제 암흑기에 서양 선교사들이 돌아가 재정 지원이 한 푼도 없던 그 시절에 조선인들 스스로 조선 교회 목회자를 육성해내는 신학교육기관을 자주적으로 세우고 지속했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순교자적 신앙 결단행위이었다.

당시 조선신학교는 한국에서 유일한 신학교육기관이었고, 당시 조선기독교의 장로교회가 정식으로 인정한 신학교였다. 김재준 목사가 1940년 조선신학교를 개교하며 천명한 신학적 건교 이념은 세계적 개혁신학 전통을 바르게 계승하는 중심적인 신학교육기관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것이었다.


3.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와 김재준

1953년 한국 장로교의 분열은 성경 해석, 곧 김재준 목사의 새로운 ‘성경연구방법론’을 둘러싸고 일어난 순수한 신학적 이유 외에 더 많은 비본질적 요소들이 상승작용을 해서 발생한 불행한 사건이었다.

한마디로 교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비극적 교회사 사건이었다. 예를 들면, 해방 후 다시 귀국한 서양 선교사 세력들의 교권지배 의도와 당시 보수적 교권주의자들의 결탁이 불행한 역사적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당시 교권주의자들이 신학적으로 ‘축자영감설’을 기반으로 하는 보수신학을 내세우고, 새 시대 새로운 포도주를 새 가죽부대에 담으려 했던 김재준 목사를 중심으로 한 한국 개신교의 ‘창조적 소수집단의 신앙 양심’을 숫자라는 힘으로 단죄하고 추방시켜버린 결과로 기장 교단이 형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신학교 설립정신과 복음주의적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기장은 한국 장로교의 본류를 이어가는 교단이다.

새롭게 형성된 기장은 신앙과 양심의 자유, 학문 연구의 자유와 성서연구방법론의 수용, 바리새적 경직신앙의 철폐와 살아있는 그리스도 신앙의 생활화, 노예적 의존사상 극복과 자립, 자주적 신학 형성, 세계교회 형제들과의 연대 강화 등을 기본 정신으로 천명, 오늘에까지 이어오고 있다.

장공 김재준은 민주화운동과 성서비평학을 통한 한국교회 신학발전에 기여한 업적이 인정되어 2002년 12월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4. 장공 김재준의 신학사상



장공 신학의 중심 주제는 ‘현실의 변혁’이다.

성과 속, 하늘나라와 거룩한 것의 이원론적 구분 속에서 현실의 것을 소홀히 하는 일반 기독교인의 정서와는 달랐다.

그는 음식 속에 들어간 소금처럼, 밀가루 반죽 속에 들어간 누룩처럼 자기정체성을 잃지는 않으면서 현실 속에 들어가 현실을 그리스도 생명의 현실로 변혁해 가야 한다는 '생활신앙적 신념'의 소유자였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말씀이 육신을 이루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성경말씀을 교리적 차원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현실적 삶의 언어로 파악하였다.

그는 근본주의적이고 답답한 교리주의적 기독교 교파 중심적 기독교 선교신학 탈역사적 타계주의 신앙이 아닌, 더욱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기독교 신앙과 생활신앙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그는 문화간, 종교간, 교단간 화합과 협력을 위해 앞장섰다. 그의 이런 신앙과 신학사상은 한국교회(KNCC를 중심으로)의 에큐메니칼 운동(일치, 협력, 연대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고, 한국 개신교, 특히 기장의 성격을 형성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김재준, 그의 座右銘 -바로 살려는 노력 -

1.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2. 대인관계에서 의리와 약속을 지킨다.
3. 최저 생활비 이외에는 소유하지 않는다.
4. 버린 물건, 버려진 인간에게서 쓸모를
찾는다.
5. 그리스도의 교훈을 기준으로 ‘예’와 ‘아니오’
를 똑똑하게 말한다. 그 다음에 생기는 일은
하나님께 맡긴다.
6. 평생 학도로 산다.
7. 시작한 일은 좀처럼 중단하지 않는다.
8. 사건 처리에는 반드시 건설적, 민주적 질서를
밟는다.
9. 山河와 모든 생명을 존중하여 다룬다.
10. 모든 피조물을 사랑으로 배려한다.


5. 장공 김재준의 사상과 정신

장공의 사상과 정신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민주와 평화’ ‘인권과 생명’이라 할 수 있다. 장공의 사상은 철저히 민주주의적이며, 인간 평등사상이었다.

이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가르치는 성서적 세계관, 노동의 신성성을 가르치는 기독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것이다.

또한 그는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 하라(마태복음 5:37)”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그렇게 몸으로 실천하며 가르쳤다.

1960-70년대에 그가 군사독재 정권에 항거하며 현실 정치의 민주화투쟁 최일선에 나선 것은 그의 이런 분명한 소신에 입각한 행동이었다.

그는 한국 교회로 하여금 현실 정치와 사회 참여에 앞장서도록 이끈 선도자였다.




김재준 [죽으며 산다> 1975

목사님 설교가 아닌, 목사쟁이 삶을 담은 책 - 오마이뉴스

07.11.06 
목사님 설교가 아닌, 목사쟁이 삶을 담은 책
[사라진 책 23] 김재준 <죽으며 산다>
최종규(함께살기)



▲겉그림판이 끊어진 아쉬운 책 하나, <죽으며 산다>. 이 책을 써내고 엮어낸 분들 뜻과 생각이 좀더 널리 읽히지는 못할 테지만, 작은 씨앗 하나가 되어 우리 삶터 구석구석에서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올리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 최종규관련사진보기



- 책이름 : 죽으며 산다
- 글쓴이 : 김재준
- 펴낸 곳 : 사상사(1975.9.1.)

장공 전집(e-book) - 장공기념사업회

장공 전집(e-book) - 장공기념사업회
長空 김재준 전집(1-18권)을 e-book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에서 ‘장공 김재준 전집’을 e-book으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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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1권:새 술은
장공전집 2권:
전집3권: 전통과
전집4권: 역사변
전집5권: 고백과
전집6권: 성서해
전집7권: 그리스
전집8권: 신앙생
전집9권: 사흘째
전집10권: 말씀
전집11권: 예언
전집12권: 한민
전집13권: 새
전집14권: 민주
전집15권: 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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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16권: 민족
전집17권: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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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 (長空) 김재준 목사 (金在俊, 1901 ~ 1987)의 생애 - 크리스천 라이프 - 에듀 라이프

장공 (長空) 김재준 목사 (金在俊, 1901 ~ 1987)의 생애 - 크리스천 라이프 - 에듀 라이프

장공 (長空) 김재준 목사 (金在俊, 1901 ~ 1987)의 생애
09/26Updated: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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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공 (長空) 김재준 목사 (金在俊, 1901 ~ 1987)의 생애

김재준 (金在俊, 1901년 9월 26일 ~ 1987년 1월 27일)은 한국기독교장로회 (약칭 ‘기장’) 형성과 조선신학교 (현재 한신대학교) 설립에 공헌한 장로교 목사이며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적인 신학자이다.

호는 장공 (長空)이다.


– 김재준 (金在俊)

.호: 장공 (長空)

.출생: 1901년 9월 26일, 대한제국 함경북도 경흥

.사망: 1987년 1월 27일 (85세), 대한민국 서울

.교파: 개신교(한국기독교장로회)

.거주지: 대한민국 서울

.재직: 한신대학교 명예교수

.전직: 신민당 당무위원 겸 대표, 전임고문

.학력: 미국 웨스턴 신학대학원

.수훈: 국민훈장 무궁화장


○ 장공 (長空) 김재준 목사의 생애와 사상

1. 인간 김재준

함석헌, 김교신, 이용도 등과 함께 1901년 20세기 첫 해에 출생한 ‘장공 김재준 목사’는 함경북도 경흥에서 ‘유가적 가풍’ 가운데 자라나 선비적 기질이 몸에 배어 있었다. 무척 과묵하고 점잖아서 인격과 인품을 높이사 젊은 시절부터 존경을 받았다.

또한 그는 ‘기독교신앙’으로서 성 프란시스를 매우 존경하여 ‘청빈'(또는 성빈)을 늘 마음에 새기며 검소하게 살았다. 그러면서도 평생 자기 수입의 상당 부분을 아무도 모르게 가난한 사람을 돕거나 제자들의 학비 보조에 썼다.

그는 소시적부터 한학을 공부하여 한문과 서예에 능통했고 타고난 문장가였다. 그가 유작으로 남긴 <김재준 전집>(전 18권)을 보면, 시대와 상황에 따라 설교와 논문, 수필과 자서전 등 호소력 있고 설득력 있는 문장으로 수많은 글을 써서 시대를 깨우치고 교회와 사회를 바로 세우려 노력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만큼 그는 우리 교회와 사회, 그리고 우리 민족을 사랑했다. 그가 작시한 우리 찬송가 261장 “교회의 노래”에도 이런 그의 정신이 짙게 배어 있다.

2.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와 김재준

1935년 당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서양 선교사가 그들의 본국으로 모두 돌아가 한국 개신교는 ‘선교사 후견인시대'(1885-1935)를 마감하는 역사적 전환점을 맞았다. 이때 새로운 시대에 새 시대를 이끌어갈 새 지도자와 신학적 비전이 필요했다. 새 포도주를 담을 새로운 가죽부대가 요청된 시기였다.

서양 선교사가 이끌던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음으로 인해서 장로교 신학교육기관이 전무했던 바로 그 시점에서, 조선 교회를 이끌어 갈 목회자를 자주적으로 양육하려는 ‘조선신학교’ 가 설립된 것이다. 김대현, 송창근, 김재준 등 ‘창조적 소수자’들이 미래의 비전을 내다보면서 규모는 작지만 깊은 의미가 담긴 신학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조선신학교는 서양 선교사가 아닌 순수한 조선 사람이 교육하고 교육받는 장이 되어야 한다는 데서 출발한 학교이다.

당시의 시대 상황, 즉 1940년 일제 암흑기에 서양 선교사들이 돌아가 재정 지원이 한푼도 없던 그 시절에 조선인들 스스로 조선 교회 목회자를 육성해내는 신학교육기관을 자주적으로 세우고 지속했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순교자적 신앙 결단행위이었다.

당시 조선신학교는 한국에서 유일한 신학교육기관이었고, 당시 조선기독교의 장로교회가 정식으로 인정한 신학교였다. 김재준 목사가 1940년 조선신학교를 개교하며 천명한 신학적 건교이념은 세계적 개혁신학 전통을 바르게 계승하는 중심적인 신학교육기관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것이었다.

3. 한국기독교장로회(약칭 ‘기장’)와 김재준

1953년 한국 장로교의 분열은 성경 해석, 곧 김재준 목사의 새로운 ‘성경연구방법론’을 둘러싸고 일어난 순수한 신학적 이유 외에 더 많은 비본질적 요소들이 상승작용을 해서 발생한 불행한 사건이었다. 한마디로 교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비극적 교회사 사건이었다. 예를 들면, 해방 후 다시 귀국한 서양 선교사 세력들의 교권지배 의도와 당시 보수적 교권주의자들의 결탁이 불행한 역사적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당시 교권주의자들이 신학적으로 ‘축자영감설’을 기반으로 하는 보수신학을 내세우고, 새 시대 새로운 포도주를 새 가죽부대에 담으려 했던 김재준 목사를 중심으로 한 한국 개신교의 ‘창조적 소수집단의 신앙 양심’을 숫자라는 힘으로 단죄하고 추방시켜버린 결과로 기장 교단이 형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신학교 설립정신과 복음주의적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기장은 한국 장로교의 본류를 이어가는 교단이다.

새롭게 형성된 기장은 신앙과 양심의 자유, 학문 연구의 자유와 성서연구방법론의 수용, 바리새적 경직신앙의 철폐와 살아있는 그리스도 신앙의 생활화, 노예적 의존사상 극복과 자립·자주적 신학 형성, 세계교회 형제들과의 연대 강화 등을 기본 정신으로 천명하였고 오늘에까지 이어오고 있다.

4. 장공 김재준의 신학사상

장공 신학의 중심 주제는 ‘현실의 변혁’이다. 성과 속, 하늘 나라와 거룩한 것의 이원론적 구분 속에서 현실의 것을 소홀히 하는 일반 기독교인의 정서와는 달랐다. 그는 음식 속에 들어간 소금처럼, 밀가루 반죽 속에 들어간 누룩처럼 자기정체성을 잃지는 않으면서 현실 속에 들어가 현실을 그리스도 생명의 현실에로 변혁해 가야 한다는 ‘생활신앙적 신념’의 소유자였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말씀이 육신을 이루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성경말씀을 교리적 차원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현실적 삶의 언어로 파악하였다.

그는 근본주의적이고 답답한 교리주의적 기독교이나, 교파 중심적 기독교 선교신학이나, 탈역사적 타계주의 신앙이 아니라, 더욱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기독교 신앙과 생활신앙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그는 문화간, 종교간, 교단간 화합과 협력을 위해 앞장섰다. 그의 이런 신앙과 신학사상은 한국교회(KNCC를 중심으로)의 에큐메니칼 운동(일치, 협력, 연대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고, 한국 개신교, 특히 기장의 성격을 형성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5. 장공 김재준의 사상과 정신

장공의 사상과 정신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민주와 평화’, ‘인권과 생명’이라 할 수 있다. 장공의 사상은 철저히 민주주의적이며, 인간 평등사상이었다. 이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가르치는 성서적 세계관, 노동의 신성성을 가르치는 기독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것이다.

또한 그는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라”(마태복음 5:37)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그렇게 몸으로 실천하며 가르쳤다. 1960-70년대에 그가 군사독재 정권에 항거하며 현실 정치의 민주화투쟁 최일선에 나선 것은 그의 이런 분명한 소신에 입각한 행동이었다. 그는 한국 교회로 하여금 현실 정치와 사회 참여에 앞장서도록 이끈 선도자였다.

최근에 알려진 장공 김재준 목사의 좌우명을 소개한다. 여기에 그의 진면목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 좌우명 (座右銘) : 바로 살려는 노력

1.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2. 대인관계에서 의리와 약속을 지킨다.

3. 최저 생활비 이외에는 소유하지 않는다.

4. 버린 물건, 버려진 인간에게서 쓸모를 찾는다.

5. 그리스도의 교훈을 기준으로 “예”와 “아니오”를 똑똑하게 말한다. 그 다음에 생기는 일은 하나님께 맡긴다.

6. 평생 학도로 산다.

7. 시작한 일은 좀처럼 중단하지 않는다.

8. 사건 처리에는 반드시 건설적, 민주적 질서를 밟는다.

9. 山河와 모든 생명을 존중하여 다룬다.

10. 모든 피조물을 사랑으로 배려한다.

(“젊은 시절부터 나는 이 열 가지를 정하여 바로 살려고 노력하였다.”)

김재준 | 현대 신학자평전 2 | 천사무엘 | 알라딘

김재준 | 현대 신학자평전 2 | 천사무엘 | 알라딘


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 | 현대 신학자평전 2
천사무엘 (지은이)살림2003-12-22









저자 및 역자소개
천사무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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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대학교 기독교학과 구약학 교수.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했다. 예일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버클리 연합신학대학원(GTU)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구약 외경의 이해』, 『지혜전승과 지혜문학』(2010년 문체부 우수학술도서), 『신구약중간시대의 성서해석』, 『성경과 과학의 대화』, 『사해사본과 쿰란 공동체』, 『김재준』, 『민중인권실천신학자 김찬국』 등이 있고, 공저서로는 『토라의 신학』, 『창조 신앙, 어떻게 볼 것인가』, 『구약학자들의 잠언 설교』, 『구약학자들... 더보기

최근작 : <도서관에서 배운 지혜와 영성>,<[큰글자책] 창조 신앙, 어떻게 볼 것인가>,<창조 신앙, 어떻게 볼 것인가> … 총 21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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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믿음과 행위의 관계

문익환 등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화를 외쳤던 사람들 중 한신대출신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바로 그 한신대를 세우고 한 평생 지켜온 사람이 김재준 목사라는 것도 알고 있는가? 그의 삶은 평생 싸움의 삶이었다. 유교 사상에 경도된 아버지와의 싸움, 서울과 일본, 그리고 미국의 유학 기간 내내 자신을 따라다녔던 가난과의 싸움, 목회와 교육 활동을 하는 동안 자신과 대면했던 근본주의와의 싸움, 군부 독재와의 싸움 등 그는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싸움의 중앙에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교육에의 열의를 잃지 않았고, 제자들에 대한 사랑을 거두지 않았다. 그가 있어 한국 교회는 더욱 풍요로울 수 있었으며, 그가 있어 한국 사회는 좀더 건강해질 수 있었다. 

이 책 '김재준 - 근본주의와 독재에 맞선 예언자적 양심'을 쓴 천사무엘 교수는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삶의 여정과 그가 직접 말했던 것, 썼던 글들을 하나하나 추적함으로써 가능할 수 있었다. 이를 위해 천사무엘 교수는 방대한 김재준 전집을 일일이 검토하고 '범용기' 등 김재준 자신이 썼던 글들을 꼼꼼히 살펴본 후 필요한 부분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친절함을 보여주고 있다. 

창꼴 마을에서의 어린시절부터 서울, 일본, 미국으로의 유학 시절, 조선신학원의 설립과 근본주의와의 갈등, 기장의 출범과 군부 독재와의 투쟁 등 이 책에서는 그의 삶을 제3자적 입장에서 될 수 있는 한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사실을 그대로 전해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우리는 신학자 김재준의 열정과 땀과 눈물을 확인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깊은 사랑을 엿볼 수 있다. 김재준은 함북 경흥 출생으로 일본 청산학원 신학부와 미국 프린스턴신학교를 거쳐 미국 웨스턴신학교에서 신학석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캐나다 브리티쉬 콜롬비아주립대학교 유니온 칼리지에서 명예신학박사를 받았다. 목사 안수를 받은 후 경동교회에서 담임목사로 목회를 시작했으며, 한국신학대학교의 전신인 조선신학대학교를 설립하고, 한국신학대학교 교수 및 학장으로, 한신학원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대한일보 논설위원으로도 활동했으며, 삼선개헌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 위원장, 민주수호 국민협의회 공동의장, 북미주 한국인권 수호협의회 회장, 북미주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위원장, 북미주 한국민주회복 통일촉진 국민회의 의장 등 군부독재에 맞서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국내외에서 다양하고 활발한 활동을 벌이다 1987년 사망했다. 

그는 평생 성경 본문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절대시하는 근본주의에 맞서 성경에 대한 문학적, 역사적 비평을 포함해야 함을 강조했고 이로 인해 장로교에서 분열하여 기독교 장로회를 세우게 된다. 또한 군부 독재에 맞서 의를 지키기 위해 몸소 실천한 실천가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는 교육자였다. 한국신학대학을 세우고 이곳을 지켜내기 위해 평생을 바친 학자이자 선생님이었다. 

♧ 본문 소개

"나는 무슨 '주의'에 내 신앙을 주조할 생각은 없으니 무슨 '주의자'라고 판박을 수가 없오. 나는 생동하는 신앙을 은혜의 선물로 받았다고 믿으며 또 그것을 위해서 늘 기도하고 있소. 내가 어느 목표에 도달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를 목표로 달음질한다고는 할 수 있을 것 같소. 기어코 무슨 '주의'냐고 한다면 '살아 계신 그리스도주의'라고나 할까?" ('신학교육의 마지막에' 중에서) 

김재준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따르는 수많은 제자들이 생존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김재준에 대한 적절한 평가와 폭넓은 논의가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또한, 한국 장로교 역사에 있어 그가 관련되었던 성경해석에 대한 논쟁이나 교단 분열 등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시각이 아직도 학문적으로 적절하게 수렴되거나 정리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서 본 책은 가능한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아니하면서 학문적인 평가를 적절하게 가하여 신학도나 일반인들이 김재준을 쉽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했다. ('머리말' 중에서) 

4.19의거가 지나고 학교가 정상수업을 하던 날 오랜만에 전교생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이날 김재준은 설교를 하면서 흐르는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다. .... "우리 기성인들을 용서해 달라. 너희들 젊은이들이 나라를 위하여 피를 흘리는 동안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우리를 용서해라. 앞으로 너희가 길거리에 나서지 않게 하마. 너희가 나서기 전에 우리가 나서겠다. 너희는 이제 공부해 달라." ('신학교육의 마지막에' 중에서) 한 학생이 등록금이 없어 학교를 그만두면서 하직 인사를 하러 김재준을 찾았다. 그러나 그는 캐나다에 1년간 요양하러 가 있었다. 이 학생은 작별의 편지를 써서 캐나다로 보냈다. "캐나다에 계시는 김재준 목사님께 .... 더 이상 공부할 형편이 못 되어 고향에 내려가려 하는데 언제 다시 뵙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 ." 얼마 후 기숙사에 있던 그를 서무과장이 찾았다. 서무과장은 항공우편 하나를 보여주면서 말했다. "이거 큰일났다. 학장님이 캐나다에서 조원길 학생에게 이달분 월급을 등록금으로 내주라 하시면서 도장까지 찍어 이렇게 보냈으니 학장님의 가족들은 이 월급을 기다리고 있는데 큰일났다." 김재준은 학장 월급으로 이 학생의 등록금을 대납하라고 인감도장을 찍어 위임장을 보낸 것이다. 그 학생은 그 돈으로 등록하여 공부를 계속 할 수 있었다. ('신학교육의 마지막에' 중에서)

♧ 저자 소개

천사무엘연세대학교 신과대학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목회학 석사학위(M.Div.)를 받았으며, 미국 예일대학교 신학부(Yale University Divinity School)를 졸업(S.T.M.)하고, 미국 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박사학위(Ph.D.)를 취득했다. 목사 안수를 받고 미국 하트포드 한인교회, 새크라맨토 연합장로교회 등에서 목회를 하기도 했다. 현재는 한남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접기






김재준 평전 - 개정판, 성육신 신앙과 대승 기독교 | 김경재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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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 평전 - 개정판, 성육신 신앙과 대승 기독교
김경재 (지은이)삼인2014-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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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김재준 평전 개정판. 김재준 개인의 생애에 있어서나 한국 개신교사에서 가장 큰 시련 중의 하나였던 근본주의적 보수 신학과의 갈등과 그로 인한 교단 분열에 대해서도 ‘대승 기독교’로의 발전이라는 관점에 입각하여 서술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분열의 이면에 “교권주의자들의 추잡한 탐욕과 명예욕, 타락한 직업 종교인들의 밥그릇 싸움, 사랑과 이해보다도 미움과 분쟁으로 치닫는 인간의 죄성, 제3세계의 어린 교회를 영구 지배하려는 제1세계 선교사 집단들의 시대착오적인 우월 의식과 분파주의 책동 등등”이 작용하고 있었다고 지적하고, 김재준은 “결코 분열주의자가 아니었다”고 전제하면서 “프로테스탄트의 교파 분열사는 분명 바람직하지 않은 인간의 약함의 결과이다.

그러나 분열사가 꼭 부정적인 측면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복음의 생명력이 타성과 전통의 무게에 짓눌려 숨을 자유로이 쉬지 못할 때 영적 체험과 진리 파지를 목적으로 한 새로운 물결 운동이 일어나게 마련이고, 그 운동을 종교 전통의 기득권자들이 폭력으로 내리누르고 이들을 정통 교회 울타리 밖으로 내쫓아 버릴 때 그 결과로서 새로운 종교 교파가 생겨나게 마련이다.”라고 쓰고 있다.


목차


개정판에 부쳐

머리말

경흥 산골 마을에서 자란 늦깎이 청년
자연 환경, 가족 혈통, 시대 상황
유가 가풍, 서당 교육, 선비 기질
3.1 만세 사건 이후, 탈향

성 프랜시스와 예수의 심장에 귀기울이고
기독교로의 개종과 서울 고학 3년
성 프랜시스의 청빈과 예수의 심장에 접하고
아오야마, 프린스턴, 웨스턴 신학부 유학

섭리 손에 붙잡힌 상수리나무 그루터기 하나
1930년대 조선 사회와 조선 기독교의 상황
숭인상업과 은진중학 교사 시절
조선신학교 설립 과정에 부름 받고

조선 교회의 주체성 자각과 선교사 시대의 종언
조선신학교의 건교 정신과 하늘의 소명
해방 공간, 그 혼돈과 어둠으로부터 질서와 빛을
경동교회, 선린형제단, "기독교의 건국 이념"

복음의 자유혼과 프로테스탄트 개혁 정신
6.25 전쟁과 한국 장로교의 분열
한국신학대학과 기독교장로회
복음의 자유혼은 우상 숭배를 거절한다

성육신 신앙은 역사의 소금과 누룩
4.19와 5.16의 충격 속에서
'예'와 '아니오'를 분명하게 말해야 할 때
성육신 신앙은 현실 변혁을 지향한다

북미주 대자연 속에서 풍류객의 진리 증언
'제3일'과 말씀의 인간화
교회는 하늘 기관, 그러나 교회주의를 경계하라
목사는 시인의 마음을 지녀야
통일 한국을 위한 화해와 평화 신학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꿈꾸며 고토를 걷다
인간의 신비와 하나님의 형상
성속의 변증법과 기이한 꿈 이야기들
동양 종교와 기독교의 만남의 문제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와 대승 기독교론

에필로그: 김재준 목사의 초상화들

부록

장공과 신천옹의 삶과 사상의 상호조명
새해 머리에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글

장공 김재준 목사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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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김경재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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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대를 졸업한 후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과 고려대 대학원에서 현대신학과 동양철학을 공부했다. 미국 듀북 대학 신학원과 클레아몬트 대학원 종교학과를 거쳐, 네덜란드 유트레히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신대에서 문화신학·종교 신학 교수로 일하다가 정년 퇴임했다. 한국문화신학회 회장,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삭개오작은교회 원로목사, 한신대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 『폴 틸리히 신학 연구』, 『해석학과 종교신학』, 『이름 없는 하느님』, 『김재준 평전』, 『함석헌의 종교시 탐구』 등이 있다.

최근작 : <틸리히 신학 되새김>,<장공의 생활신앙 깊이 읽기>,<죽음과 부활 그리고 영생> … 총 28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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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연에게,>,<기적처럼, 채은이>,<사랑으로 가는 길>등 총 283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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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성육신 신앙은 현실 변혁을 지향한다.”

장공(長空) 김재준(金在俊) 목사는 한국 개신교의 진보적 흐름을 대표하는 한국기독교장로회와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학교) 창립의 중심 인물로, 한국의 개신교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수많은 신학 논쟁은 물론이려니와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대한 기독교단의 현실 참여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미친 종교 지도자이다.
그는 1945년 경동교회를 설립하여 초석을 다진 목회자였으며, 한국신학대학을 통해 수많은 성직자와 종교 지도자를 양성한 교육자였으며, 교회 갱신 운동에 헌신하면서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라는 포용적 입장에서 교회간/종교간/문화간/민족간의 상호 이해와 협력을 위해 앞장선 선구적 신학자였다. 또한 1965년 ‘한일 굴욕 외교 반대 국민운동’을 주도한 이래, 국제사면위원회 한국위원장, 삼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위원장, 북미주 한국민주회복 통일촉진 국민회의 의장, 북미주 한국인권수호협의회 명예회장 등을 지내며 적극적인 사회 활동을 전개한 사회 운동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저자 김경재 교수(한신대)는 “신라에 불교가 공식 전래된 지 200여 년이 지나 원효와 의상을 낳았고, 조선 왕조가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아 건국한 지 200년쯤 되자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낳았”던 것에 비유하여, 기독교가 전래된 지 200여 년 만에 장공 김재준과 신천 함석헌이라는 두 거목을 낳았다고 평가한다. 저자는 이러한 평가의 근거로, 그 이전까지의 소승적인 전통 기독교에 대하여 한국의 ‘대승적 기독교’를 창시했다는 점을 내세운다.
저자는, 김재준 개인의 생애에 있어서나 한국 개신교사에서 가장 큰 시련 중의 하나였던 근본주의적 보수 신학과의 갈등과 그로 인한 교단 분열에 대해서도 ‘대승 기독교’로의 발전이라는 관점에 입각하여 서술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분열의 이면에 “교권주의자들의 추잡한 탐욕과 명예욕, 타락한 직업 종교인들의 밥그릇 싸움, 사랑과 이해보다도 미움과 분쟁으로 치닫는 인간의 죄성, 제3세계의 어린 교회를 영구 지배하려는 제1세계 선교사 집단들의 시대착오적인 우월 의식과 분파주의 책동 등등”이 작용하고 있었다고 지적하고, 김재준은 “결코 분열주의자가 아니었다”고 전제하면서 “프로테스탄트의 교파 분열사는 분명 바람직하지 않은 인간의 약함의 결과이다. 그러나 분열사가 꼭 부정적인 측면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복음의 생명력이 타성과 전통의 무게에 짓눌려 숨을 자유로이 쉬지 못할 때 영적 체험과 진리 파지를 목적으로 한 새로운 물결 운동이 일어나게 마련이고, 그 운동을 종교 전통의 기득권자들이 폭력으로 내리누르고 이들을 정통 교회 울타리 밖으로 내쫓아 버릴 때 그 결과로서 새로운 종교 교파가 생겨나게 마련이다.”라고 쓰고 있다. 이러한 평가는 1930년대부터의 해묵은 주제인 ‘성서 무오설 논쟁’을 비롯한 기독교의 보수-진보간 신학 논쟁의 지평에 ‘소승-대승’이라는 새로운 신학적 논점을 마련하면서 논쟁의 불씨를 던지고 있다.
저자는 김재준 신학의 핵심으로 ‘성육신(成肉身) 신앙’을 제시하면서, 이 역시도 구체적으로 한국 교회의 ‘타계(他界)주의적 경향’을 겨냥한 비판으로 읽어 낸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교회가 세상 속에 존재하는 이유는, ‘시한부 종말론’자나 ‘타계주의자’처럼 이 세상을 포기하거나 무책임하게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 평등, 정의, 사랑이 숨쉬는 ‘생명 공동체’가 되도록 변혁시켜 가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따라서 “김재준이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 운동을 통해 현실 변혁적 운동체 속으로 깊이 관여한 것은 본래적 신앙인의 삶에서부터의 ‘이탈 행동’이 아니라 그 성실한 ‘실천 행동’이라고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성육신 신앙’이야말로 김재준의 생애를 ‘실천 신앙’, ‘생활 신앙’으로 이끌어 주는 신학적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저자의 이 같은 시각은 “김재준이 한국의 보수적 기독교계가 그를 비방하는 대로 ‘자유주의 신학 전통’이 아니라 철저히 바울/어거스틴/루터와 캘빈/칼 바르트로 이어오는 정통적인 신학적 인간학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평가로 이어진다. 저자는 김재준을 통해 ‘보수의 폐해’를 지적하고 그 대안으로서 해석하기보다는, 오히려 ‘무엇이 진정한 보수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시각은 극단적인 ‘교리주의적 기독교’야말로 ‘교리’라는 상대적 가치를 절대화하는 ‘우상 숭배’라는 비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김재준의 생애를 연대기적으로 좇아가면서 당시의 시대 상황과의 연관 속에서 김재준 신학의 핵심을 이끌어 내어 보여 주는 서술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기독교 사상이나 신학적 개념에 그다지 친숙하지 않은 일반 독자들도 알기 쉽게 그의 생애와 사상을 접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 김재준은 기독교인에게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종교 지도자이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실천 신앙’이 상징하듯 우리 사회의 현대사 전체를 보아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비중을 지니는 인물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특히 눈여겨 볼 대목이다.

2001년. 장공 김재준이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 장공 김재준을 다룬 본격적인 인물 평전으로는 최초로 <김재준 평전>이 발간되었다. 이 책은 2014년에 새로 내는 개정판이다.
개정판에는 부록으로서 ‘장공과 신천의 비교연구’ 논문과 역사적 ‘편지’, 그리고 중요한 사진 자료를 추가하였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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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재 교수가 저술한 <김재준 평전 - 개정판, 성육신 신앙과 대승 기독교>는 한국 현대 개신교사에서 가장 독보적인 발자취를 남긴 장공(長空) 김재준 목사의 삶과 신학을 집대성한 저작이다. 저자는 김재준의 신학적 핵심을 <성육신 신앙>과 <대승 기독교>라는 두 가지 기둥으로 규정하며, 그가 어떻게 한국 교회의 폐쇄적인 근본주의와 싸우고 사회적 실천에 투신했는지를 깊이 있게 추적한다. 이 평전은 단순한 인물 연대기를 넘어 한국 기독교가 나아가야 할 보편적이고 개방적인 지평을 제시하는 신학적 평론서의 성격을 지닌다.

1. 장공 김재준의 생애와 역사적 맥락

김재준의 삶은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기 및 한국 개신교의 형성기와 궤를 같이한다. 일제강점기, 해방, 한국전쟁, 그리고 군사독재 정권으로 이어지는 수난의 역사 속에서 그는 신앙의 공적 책임을 온몸으로 구현했다.

그는 당시 한국 교회를 지배하던 문자주의적·축자영감설적 성서해석에 의문을 제기하며 고등비평 학문을 도입했다. 이는 보수적인 총회파와의 극심한 갈등을 낳았고, 결국 1953년 교단 분열(한국기독교장로회 설립)과 총회에서의 출교라는 아픔으로 이어졌다. 저자는 이 사건을 단순한 교리 논쟁이 아니라, 한국 교회가 <과거의 도그마에 갇힐 것인가> 아니면 <시대의 역사적 현실과 호흡할 것인가>를 가름한 결정적 분수령으로 평가한다.

2. 신학적 핵심: 성육신 신앙과 대승 기독교

이 책의 가장 큰 학문적 기여는 김재준 신학의 정수를 <성육신 신앙>과 <대승 기독교>라는 개념으로 명징하게 포착해 낸 점에 있다.

성육신 신앙 (Incarnational Faith)

김재준에게 신앙은 저 멀리 있는 천국을 앙망하는 내세주의가 아니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 사건처럼, 기독교인은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역사와 사회의 한복판으로 성육신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따라서 교회가 사회적 불의를 외면하고 개인 구원에만 몰두하는 것은 성육신의 진리를 배반하는 행위였다. 그의 이러한 신학은 유신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과 인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실천적 원동력이 되었다.

대승 기독교 (Mahayana Christianity)

저자는 김재준이 한국적 토양 속에서 불교의 대승(大乘) 사상을 기독교적으로 수용하고 소통하려 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소승(小乘)이 개인의 해탈과 구원에 집중한다면, 대승은 모든 중생의 구원을 지향한다. 김재준의 기독교는 바로 이러한 대승적 성격을 지녔다. 그는 교파의 벽을 넘고, 종교의 벽을 넘어 인간성을 억압하는 모든 구조적 악으로부터 인류를 해방하고자 했다. 이는 타 종교에 대한 배척이 아닌, 기독교 복음의 보편성과 개방성을 극대화한 <우주적 그리스도론>과 맞닿아 있다.

3. 종합 평론 및 현대적 의의

김경재의 <김재준 평전>은 장공에 대한 맹목적인 영웅주의적 찬사에 머무르지 않는다. 저자는 장공이 처했던 시대적 한계와 그가 남긴 과제까지도 객관적으로 성찰한다.

이 책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은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완벽한 조화에 있다. 저자는 김재준의 방대한 저작과 설교, 서신을 치밀하게 분석하는 동시에, 그것이 발현된 정치·사회적 배경을 놓치지 않는다. 이를 통해 독자는 김재준이라는 인물이 어떻게 한국 교회의 폐쇄성을 깨뜨리는 망치가 되었으며, 동시에 상처받은 시대를 치유하는 보듬이가 되었는지 생생하게 목격하게 된다.

특히 종교가 점차 사사화(privatization)되고 교조적 배타주의가 심화되는 오늘날의 21세기 종교 지형에서, 김재준의 <대승 기독교> 사상은 매우 강력한 예언자적 울림을 준다. 그것은 이 땅의 교회가 자기보존이라는 소승적 차원에 머물지 말고, 정의와 평화, 그리고 생명 살림이라는 대승적 지평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준엄한 요청이다.

결론적으로 이 개정판 평전은 한국 개신교 지성의 최고봉이었던 김재준의 사상을 한국적 종교 사상의 맥락에서 재해석해 낸 기념비적인 저작이다. 기독교 신앙이 어떻게 역사적 책임 의식을 가질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타 문화 및 종교와 깊이 있게 대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탁월한 길잡이 역할을 한다.

세진님, 요청하신 분량과 지침에 맞추어 김경재 교수의 <김재준 평전 - 개정판, 성육신 신앙과 대승 기독교>에 대한 요약 평론을 작성해 보았습니다. 혹시 이 평전에서 다룬 김재준 목사의 민주화 운동 행적이나 특정 신학적 논쟁 등 더 깊게 살펴보고 싶으신 부분이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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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2014년 개정판의 서지·책 소개와 장공사상연구소 자료, 김재준 관련 연구를 함께 참고해 정리한 것이다. 초판은 2001년 삼인에서 239쪽으로 출간되었고, 2014년 장공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개정판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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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 평전―성육신 신앙과 대승 기독교>
김경재 지음

요약·평론

1. 한 신학자의 전기가 아니라 한국 기독교 현대사

김경재의 <김재준 평전>은 장공 김재준(1901~1987)의 생애를 시간순으로 서술하면서, 한 인간의 삶을 통해 한국 개신교가 근본주의적 신앙에서 역사 참여적 신앙으로 변화해 간 과정을 보여주는 책이다. 김재준은 한국기독교장로회와 조선신학교, 곧 오늘날 한신대학교의 형성에 중심적으로 참여한 신학자이자 교육자이며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따라서 그의 삶은 일제강점기,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 교단 분열, 군사독재와 민주화운동을 관통한다.

김경재는 김재준을 단순한 자유주의 신학자나 교단 창립자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김재준의 사상이 어떻게 삶으로 구현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책에서 신학은 교리의 체계가 아니라 인간이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실천적 지혜다. 저자는 이러한 김재준 신학의 중심을 <성육신 신앙>과 <대승 기독교>라는 두 개념으로 압축한다.

2. 유교적 교양에서 기독교 신앙으로

김재준은 1901년 함경북도 경흥의 유교적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한문과 동양고전을 배우며 선비적 교양을 익혔다. 이러한 배경은 그가 기독교를 서구의 종교로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동양적 인간 이해와 한국인의 역사 경험을 통해 해석하게 만든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청년 김재준의 회심은 전통문화의 완전한 부정이라기보다 새로운 정신적 자유의 발견이었다. 그는 예수를 믿음으로써 죄책감과 율법적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인격이 되는 경험을 했다. 그러나 이 자유는 개인적 마음의 평안에 머물지 않았다. 그에게 신앙은 자기중심성에서 해방되어 이웃과 사회를 책임지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김재준은 일본 아오야마신학교에서 공부한 뒤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수학했다. 그는 보수신학의 중심부를 경험했지만 성경을 문자 그대로 무오한 책으로 받아들이는 근본주의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를 증언하지만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문서이므로, 역사적·비판적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3. 조선신학교와 신학의 자유

1940년 김재준은 조선신학교 설립에 참여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선교사들의 철수로 기존 신학교육이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 조선신학교는 한국인이 주체가 되어 신학을 연구하고 교역자를 양성하려는 시도였다. 이는 단순히 학교 하나를 세운 사건이 아니라 한국 기독교가 서구 선교사의 통제에서 벗어나 스스로 생각하려는 신학적 독립운동이었다.

김재준은 학생들에게 특정 교리를 암기시키기보다 자유롭게 질문하고 성경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도록 가르쳤다. 그는 신학의 자유가 신앙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아 있는 신앙을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성경의 문자적 무오성과 전통적 교리를 지키려는 보수 장로교 세력과 충돌했다.

갈등은 해방 이후 더욱 심해졌다. 김재준은 성경의 인간적·역사적 요소를 인정했으며, 창세기와 같은 문서를 현대 학문의 성과와 함께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수 교권은 이를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으로 규정했다. 결국 1953년 장로교 총회는 그를 목사직에서 파면한다고 선언했다. 이 과정에서 김재준을 지지하는 목회자들과 교회들이 독자적인 교단을 형성하면서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출범했다.

김경재는 이 사건을 단순한 교리 논쟁으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신앙과 학문의 자유를 인정할 것인가, 교회가 권위주의적 조직으로 남을 것인가를 둘러싼 충돌이었다. 김재준에게 교회의 정통성은 과거의 교리를 반복하는 데 있지 않고, 복음의 정신에 따라 시대의 문제에 응답하는 데 있었다.

4. 성육신 신앙

이 책의 중심 개념인 성육신 신앙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기독교 교리를 삶과 역사에 적용한 것이다. 김재준에게 성육신은 예수에게 한 번 일어난 과거의 기적만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구체적인 인간관계, 사회제도, 정치와 경제 속에서 몸을 입는 것이 성육신이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을 죄악시하며 사후 천국만 기다려서는 안 된다. 현실 세계를 버리고 영혼 구원만 추구하는 신앙은 예수의 성육신과 모순된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과 역사 안으로 들어왔다면 기독교인도 가난, 억압, 전쟁, 독재, 분단과 같은 현실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김경재는 김재준의 성육신 신앙을 한국 교회에 만연한 타계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으로 해석한다.

이런 의미에서 김재준의 신학은 <생활신학>이다. 신앙은 예배당이나 신학교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진실, 자유, 사랑을 실천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는 사회 구조의 변혁을 중시했지만 인간 내면의 변화 역시 소홀히 하지 않았다. 새로운 제도만으로 새로운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이 계속 공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사회변혁론에는 개인적 회심과 구조적 개혁이 함께 존재한다.

5. 대승 기독교

김경재가 사용한 <대승 기독교>라는 표현은 불교의 대승과 소승이라는 역사적 구분을 기독교에 비유한 말이다. 여기서 소승은 특정 불교 전통을 낮추려는 뜻이라기보다 자기 영혼의 구원과 자기 교회의 성장에만 몰두하는 좁은 신앙을 가리킨다. 대승 기독교는 개인의 구원을 넘어 민족과 인류, 자연과 우주 전체의 생명을 품으려는 넓은 신앙이다.

김재준의 기독교는 교회 밖의 사람을 정죄하거나 다른 종교를 적으로 돌리는 배타적 종교가 아니었다. 그는 진리는 기독교 교리 속에 갇히지 않으며, 성령은 교회의 경계 밖에서도 역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유교와 불교, 동양사상과 서구사상, 종교인과 비종교인이 모두 인류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협력할 수 있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대승 기독교는 모든 종교가 같다는 피상적 종교혼합주의가 아니다. 그 중심에는 예수의 십자가와 자기희생적 사랑이 있다. 기독교가 자기 우월성을 포기하고 타자를 위해 자신을 비울 때 오히려 예수의 정신에 충실해진다는 주장이다. 김경재는 김재준과 함석헌 등을 한국적 대승 기독교의 선구자로 해석한다.

6. 민주화운동과 예언자적 신앙

김재준의 역사의식은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을 거치며 더욱 구체적인 정치 참여로 발전했다. 그는 박정희 정권의 권위주의와 장기집권에 반대했고, 한일협정 반대운동과 민주수호운동에 참여했다. 교회가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에 대해 그는 정치가 인간의 생명과 자유를 억압한다면 침묵하는 교회가 오히려 복음을 배반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의 선교신학은 역사적 상황에서 분명하게 “예”와 “아니오”를 말하는 신앙이었다.

김재준은 혁명적 구호를 외치는 투사라기보다 조용한 선비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의 온건한 성품은 현실 타협을 뜻하지 않았다. 그는 교권으로부터 파면당하고 정치권력의 압력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신학적 양심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삶 때문에 김경재는 그를 우리 시대를 살다 간 <작은 예수>로 평가한다.

7. 책의 장점

이 평전의 가장 큰 장점은 김재준의 신학을 추상적인 개념으로 설명하지 않고 구체적인 생애 속에서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의 성서관, 교회론, 정치참여론은 모두 개인적 선택과 역사적 사건 속에서 형성된다. 독자는 한 인물이 시대와 부딪히면서 어떻게 자신의 신앙을 재해석했는지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또한 김경재는 김재준을 한국 신학사 안에만 가두지 않는다. 김재준의 삶을 통해 기독교가 한국 정신문화와 사회변혁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이 때문에 이 책은 한 목사의 전기이면서 동시에 한국 근현대 정신사의 일부가 된다.

특히 <성육신 신앙>이라는 해석은 김재준의 자유주의적 성서 이해, 생활신앙, 사회참여, 종교간 대화를 하나로 연결해 준다. 신학적 자유와 민주화운동이 별개의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이 현실 속에서 몸을 입어야 한다는 동일한 신앙에서 나온 것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8. 한계와 비판

그러나 이 책은 제자가 스승을 기념하며 쓴 평전이라는 한계를 지닌다. 김경재는 김재준의 장점과 역사적 의미를 풍부하게 설명하지만, 그의 판단 착오나 인간적 약점, 조직운영에서의 갈등을 상대적으로 적게 다룬다. 김재준을 <작은 예수>나 한국적 대승 기독교의 창시자로 부르는 표현은 평전이라기보다 신학적 헌사에 가까운 인상을 주기도 한다.

또한 보수신학과의 갈등이 자유 대 교권, 역사비평 대 근본주의라는 구도로 정리되면서 반대편이 지나치게 단순화될 위험이 있다. 당시 보수교회가 가졌던 식민지 경험,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 문제도 좀 더 입체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었다. 김재준의 입장이 역사적으로 더 생산적이었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의 우려 전체를 무지나 교권욕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대승 기독교>라는 개념도 매력적이지만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불교 내부에서 대승과 소승이라는 용어가 가진 역사적·종파적 문제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으면, 불교 개념을 기독교의 자기설명을 위해 빌려 쓰는 결과가 될 수 있다. 더구나 기독교의 사회참여를 대승으로, 개인 구원을 강조하는 신앙을 소승으로 구분하면 개인의 내적 회심과 영성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할 가능성이 있다.

9. 오늘의 한국 교회에 주는 의미

이 책이 출간된 지 오래되었지만 김재준의 질문은 여전히 현재적이다. 한국 교회의 상당 부분은 성장, 교세, 교리적 순수성, 정치적 영향력에 집중하면서 사회적 신뢰를 잃었다. 현실의 고통보다 사후 구원을 강조하고, 사랑보다 진영논리를 앞세우며, 권력을 비판하기보다 권력과 결합하는 모습도 나타난다.

김재준의 성육신 신앙은 교회가 세상과 분리된 거룩한 섬이 아니라 세상의 아픔을 자기 몸으로 받아들이는 공동체여야 한다고 말한다. 대승 기독교는 교회의 생존이 아니라 인류 공동체의 생명, 평화, 정의를 우선하라고 요구한다. 이는 오늘날 민주주의, 한반도 평화, 기후위기, 빈부격차, 종교 갈등을 대하는 한국 교회에 직접적인 도전이 된다.

그러나 김재준을 단순히 진보적 정치신학의 상징으로만 기념해서는 안 된다. 그의 근본 관심은 특정 정치이념의 승리가 아니라 자유로운 인격, 진실한 생활, 사랑의 공동체였다. 그는 공산주의의 구조 변혁론도 인간 내면의 변화가 빠져 있다는 이유로 비판했다. 진보교회 역시 자기 진영의 정의를 절대화하거나 개인의 영적 갱신을 무시한다면 김재준의 생활신앙에서 멀어질 수 있다.

10. 종합 평가

<김재준 평전>은 한국 기독교가 어떻게 서구 선교 종교를 넘어 한국인의 역사와 현실에 뿌리내린 신앙이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책이다. 김경재는 김재준의 생애를 통해 신학적 자유, 교회개혁, 민주주의, 종교간 대화가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밝힌다. 그 뿌리는 하나님이 인간의 몸과 역사 속으로 들어왔다는 성육신 신앙이다.

김재준이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어떤 특정한 신학 이론이라기보다 신앙인이 역사 앞에서 자유롭게 판단하고 책임 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정신이다. 교회의 권위가 양심보다 앞설 수 없고, 교리가 인간보다 중요할 수 없으며, 영혼의 구원이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는 구실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김경재의 서술에는 스승에 대한 존경과 이상화가 강하게 배어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은 김재준이라는 인물을 통해 한국 개신교의 또 다른 가능성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 가능성이란 크고 강한 교회가 아니라, 자유로운 양심을 지키고 사회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며 자기 경계를 넘어 모든 생명을 품는 교회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김재준의 신앙은 하늘로 도피하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몸과 역사 속에서 자유·정의·사랑으로 실현되게 하는 성육신적 생활신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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