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09

헐버트 회고록 | 호머 B. 헐버트 2026

헐버트 회고록 | 호머 B. 헐버트 | 알라딘


헐버트 회고록 호머 B. 헐버트 (지은이),옥성득 (옮긴이)푸른역사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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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호머 B. 헐버트는 한국 근대사의 산 증인 중 한 명이다. 23세이던 1886년 한국 최초의 근대적 공립학교인 육영공원의 교사로 초빙되어 와서 1909년 일제에 의해 추방되기까지 이 땅에 머물렀다는 이유만이 아니다. 단순히 체류한 게 아니었다. 선교사이기도 했고, 한국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를 저술한 교육자, 《코리아 리뷰》를 발행하고 《독립신문》 영문판을 만든 언론인, 한글과 드라비다어의 유사성에 주목한 언어학자 등 다양한 얼굴로 조선의 개화에 기여했다.

무엇보다 대한제국의 국권 수호를 위해 평생 헌신한 ‘대한미국인’이었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 사살 후 일경에게 취조받던 안중근 의사가 “조선 사람이면 단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평가했을 만큼 헐버트의 한국 사랑은 치열했다. 이제는 국사 교과서에서조차 두어 번 언급하고 지나치고 말아서는 결코 안 되는 인물이란 뜻이다.

이 책은 헐버트 박사가 1886년부터 193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겪은 파란만장한 삶과 국제 정세에 관한 통찰을, 1920년대부터 1932년 말까지 타자기로 작성한 자서전이다. 편역자는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원고를 어렵게 확보하여 일부 희미한 본문을 완성하고, 350개의 역주와 관련 사진을 더해 90여 년 만에 우리 근대사의 핵심 사료를 선보이게 되었다.

제1권은 육영공원 시험 등 본인의 체험담과 을미사변에 가담한 일본 낭인에 대한 판결문 등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당대의 굵직한 사건을 짚는 한편 실패한 고종 밀사 역할 등 한국의 국권 수호를 위한 이방인의 분투를 담았다. 아관파천에 대한 재조선 외국인들의 반응 등 한국 근대사를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데 도움을 주는 내용이 그득하다. 제2권은 미국에서 과거와 현재를 회고하면서, 일본의 야욕으로 초래된 동양의 위기와 서구의 책임을 다룬 정치철학서로 헐버트의 통찰력을 보여준다.


목차


01 한국의 부름과 독립을 위한 여정, 1886~1919년
◦ 편역자 서문 005 | ◦ 헐버트의 생애 010
◦ 연보 016 | ◦ 저자 서문 025

1부 한국과의 첫 만남
1장 한국으로의 첫 항해: 1886년 5월
2장 일본에서 한국으로: 안개 속의 항해
3장 제물포에서 서울까지: 1886년 7월
4장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갈등
5장 서울에서의 첫 여름: 1886년
6장 육영공원, 첫 세례, 한국 고대사 연구
7장 한국어와 드라비다어 비교 연구
8장 일본 내륙 여행: 1887년 여름
9장 한국어와 일본어의 기원
10장 결혼을 위해 캐나다를 거쳐 미국 방문: 1887년

2부 격동의 세계와 한국의 위기
11장 뉴욕의 결혼식과 평양 탄광 조사: 1889~1890년
12장 아시아 여행 기록: 1891년 12월~1892년
13장 성지와 유럽 여행: 1892~1893년
14장 감리교 선교사로서 서울 귀환: 1893년 10월
15장 한국의 야생동물과 민속놀이
16장 청일전쟁: 1894~1895년
17장 일본의 왕비 시해: 1895년 10월 8일
18장 을미사변의 결과: 1895년
19장 선교사들의 고종 호위: 1895년 10~11월
20장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피신: 1896년 2월~1897년 2월

3부 제국주의의 올가미와 고종 황제 밀사의 길
21장 개혁의 여명: 《독립신문》, 독립협회, 사범학교: 1896~1898년
22장 《코리아 리뷰Korea Review》 창간: 1901년
23장 독립협회의 좌절과 시베리아 횡단 여행: 1903년
24장 러시아 풍경과 《타임스Times》 특파원 위촉: 1903년
25장 러일전쟁과 파괴된 동양 평화: 1904년
26장 고종 황제의 밀사로 워싱턴행: 1905년
27장 백악관의 배신과 외교의 내막: 1905년
28장 을사늑약과 한국인을 위한 투쟁: 1905년
29장 헤이그 특사 지원과 최후의 외교 원정: 1907~1909년
30장 한일병합과 파리 강화회의: 1910~1919년
31장 국제연맹의 명암과 새 국제 질서의 모색: 1919~1932년

02 일제의 무단 통치와 정의를 위한 제언: 1853~1932년

1부 일제의 부상과 한국의 수난
1장 미국과 일본의 첫 조우: 1853~1854년
2장 일본의 급격한 변모 뒤에 숨은 비밀: 1854~1877년
3장 새로운 일본의 탄생과 야망
4장 정한론의 서막
5장 미국의 작은 전쟁, 신미양요: 1871년
6장 ‘은둔국’의 개방과 갑신정변: 1876~1884년
7장 왕비 시해의 전말: 1895년
8장 대한제국 수립과 영일동맹의 지정학: 1896~1902년
9장 러일전쟁, 극동 패권의 지각 변동: 1904~1905년
10장 을사늑약과 ‘보호정치’의 시작: 1905년
11장 통감부의 주권 침탈 심화: 1906~1907년
12장 헤이그 특사와 고종 황제의 양위: 1907년

2부 무단 통치의 실상과 독립의 외침
13장 일제의 탄압과 교회의 시련
14장 일제의 탄압과 교회의 저항
15장 한일병합: 주권 찬탈의 현장: 1910년
16장 105인 사건, 날조된 총독 살해 음모: 1911년
17장 무단 통치와 헌병 경찰 제도: 1912~1919년
18장 일본의 산둥반도 점령: 1914~1919년
19장 마지막 외교적 호소: 1919년
20장 3·1 독립 만세 운동: 1919~1920년
21장 미국에 알려진 한국 독립운동의 진상: 1919~1920년
22장 제1차 세계대전과 일본의 연합국 배신: 1916~1920년

3부 국제 정세의 변화와 평화를 위한 제언
23장 워싱턴 군축회의와 광주 학생의거: 1921~1931년
24장 만주사변과 극동 위기의 해결책: 1931~1932년
25장 일본의 중국 침략: 1914~1916년
26장 만주국 수립과 무너진 국제연맹의 권위: 1917~1932년
27장 도덕적 국제주의: 세계 평화를 위한 대안
28장 결론: 한국의 독립이 세계 평화의 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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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60 수도 서울까지는 26마일이나 떨어져 있었고, 그곳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은 겨우 말 한 마리가 지날 만한 좁은 오솔길뿐이었다. 장마철은 코앞이었고 수은주는 화씨 90도(섭씨 약 32도)를 오르내렸다.…길모어 부인은 인력거를 타고, 우리 남자들은 안장도 없는 조랑말을 타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곧장 서울로 향했다.
P. 97 학생 한 명의 시험이 끝날 때마다 왕은 우리의 조언 없이 직접 성적을 결정했다. 성적은 ‘우수’, ‘양호’, ‘보통’, ‘불합격’의 네 단계였다. 놀랍게도 매번 왕은 학생이 보여 준 실력에 딱 맞는 점수를 주었다.
P. 117 왕은 즉시 모든 외국인 거주자를 초대하여 궁궐 내 호수에서 스케이트를 타게 했다.…호수 안 작은 섬에는 정자가 하나 있었는데, 왕과 측근들은 그곳에서 손님들이 벌이는 기묘한 동작을 지켜보았다.
P. 199 내가 감리회 선교부 산하의 출판소를 맡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갈 기회가 생겼을 때, 우리는 이를 기쁘게 수락했으며 마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분을 느꼈다.…한국이 보유한 놀라운 알파벳(한글)을 철저히 활용하는 것은 소홀히 할 수 없는 의무처럼 보였다.
P. 232 문관파가 실패했으므로 군부 파벌이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논리적인 수순이었다. 그 도구가 바로 미우라 고로였다.…그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푸는 대신 잘라 버릴 인물이었다.…일본 정부가 이 일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사실은 어떠한 역사적 분석이나 심리적 이론으로도 부정할 수 없다. 미우라가 저지른 것과 같은 범죄를 감히 독단으로 저질렀을 리도 없다. 자신의 정부가 처벌 면제를 보장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접기
P. 238 문관파가 실패했으므로 군부 파벌이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논리적인 수순이었다. 그 도구가 바로 미우라 고로였다.…그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푸는 대신 잘라 버릴 인물이었다.…일본 정부가 이 일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사실은 어떠한 역사적 분석이나 심리적 이론으로도 부정할 수 없다. 미우라가 저지른 것과 같은 범죄를 감히 독단으로 저질렀을 리도 없다. 자신의 정부가 처벌 면제를 보장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접기
P. 242 왕비의 침실 문 앞에는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서 있었다.…그들은 그를 베어 버렸고 그의 몸을 넘어 왕비의 방으로 뛰어들었다.…왕비는 처소의 한 방에서 구석으로 몰렸고 그곳에서 무참히 살해되었다. 희생자 곁에는 자객들뿐이었기에 누가 치명상을 입혔는지 아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나, 모든 정황은 일본인이 범인임을 가리킨다. 접기
P. 246 미우라는 자국 정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이번 소요가 궁궐 수비대와 국왕에게 불만을 토로하려던 일본식 훈련대 사이의 충돌로 인해 발생했다고 주장하였다. 심지어 자신이 직접 임명한 한국 군부대신으로부터, 미우라의 공모설은 근거가 없다는 내용의 공식 서한을 받아 내어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려 하기까지 했다. 그 대신은 임무를 너무 완벽하... 더보기
P. 250 수일 동안 국왕은 어느 미국 시민의 집에서 비밀리에 궁궐로 들여온 음식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였다. 국왕은 미국공사관에 전령을 보내 세 명의 미국인이 매일 밤 궁궐에 들어와 자신의 곁방에 머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전투를 위한 호위병으로서가 아니라, 적들의 음모에 대한 일종의 도덕적 장애물로서 말이다.
P. 298 서재필 의사와 같은 인물들의 활동은 여전히 용인되었으나, 국왕과 고위 관료들은 그들의 유익한 조언에 짜증을 냈다. 이는 우체국이 《독립신문》의 배송을 거부하면서 정점에 달했다. 러시아인들은 서재필 의사에게 만약 그가 이 분야에서 은퇴한다면 두둑한 보조금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P. 300 나는 (《코리아 리뷰》 사설에서) 일본이 한국의 자연스러운 친구이며 일본 내 문관파의 양식이 무관파의 무자비함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태도를 보였다. 나는 야마가타보다는 이토 히로부미를 더 신뢰했다. 물론 불안의 여지가 있었던 점은 인정하며, 나의 미국 친구들로부터 일본을 옹호하는 내 입장이 지지받기 힘들 것이라는 경고를 한 번 이상 받았다. 접기
P. 338 (1905년) 자신을 기만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일본을 변호할 수 없는 때가 왔다. 나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일본의 행위를 묵인하고 그들과 결탁하여 안락을 누리거나, 아니면 한국 인민의 권리를 옹호하며 그들이 당하고 있는 급증하는 부당함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었다. 한국 인민의 친구라는 자부심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적의 편으로 넘어갈 것인가? 내가 머물러 있을 중간 지대는 없었다. 접기
P. 340 1905년 가을, 일본이 먼저 보호국을 선포함으로써 한국을 흡수하는 과정을 시작하려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일본의 침략이 거기서 멈출 것이라는 생각은 완벽히 불가능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한국의 왕(고종)이 집권자로서 어떤 평가를 받든 간에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의 강요에 단 한 번도 자발적으로 굴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의무감에 따라 국가를 정치적 멸망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자신의 힘이 닿는 모든 일을 다했다. 그는 국제법상 일본과 대등한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서 한국의 이름이 지워지는 것에 변함없이 반대한다는 입장을 거듭 분명히 했다. 접기
P. 340 조미수호통상조약에는 체결 당사국 중 한쪽이 제3국으로부터 위협을 받을 경우, 그 위험을 알게 된 다른 쪽이 원만한 해결을 위해 ‘거중 조정good offices’을 행사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P. 343 그것은 정부의 교육직 사임과 재임용의 희망 없이 선택한 직업을 영구히 중단하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이미 한반도에서 일본인들의 사악한 수법을 폭로했기에 그들에게 ‘기피 인물persona non grata’이었고, 만약 그들이 나라를 장악한다면 어차피 그곳에서 나의 미래는 없었다. 반면, 나는 워싱턴에 왕이 자신의 인민과 왕조에 충성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기록 하나를 더 남길 수 있었다. 따라서 결정은 쉬웠다. 접기
P. 346 왕은 내각에 일을 맡기고 안방으로 물러났다. 그들 중 외부대신을 포함한 일부는 자신들도 죽을 운명이라 믿고 더 이상 저항할 용기를 내지 못했고, 결국 (을사보호조약) 문서에 서명했다. 정확한 추산에 따르면 서명은 내가 워싱턴에 도착한 후 한 시간 이내에 이루어졌다.
P. 347 한국 황제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개인적인 편지였으므로, 나는 그것을 대통령의 손에 직접 전달하고 싶었다. 나는 그를 면담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대통령이 편지를 받을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원한다면 국무부에 전달하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하려 시도했으나 그들은 지금 당장 그 문제를 처리하기에는 너무 바쁘다고 답변했다. 접기
P. 348 왜 이렇게 말하지 못했는지 항상 후회한다. “장관님, 누구도 일본과 문제를 일으키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한편으로 우리 자신을 기만하고 우리의 조약이 쓰인 종잇값만큼의 가치도 없음을 증명하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문제 사이의 선택이라면, 나는 차라리 문제를 택하겠습니다.”
P. 365 나는 한국을 방문하는 모든 저명한 미국인에게 인민들을 약탈로부터 보호하는 일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토 후작의 친구인 한 미국인 교수에게, 한국인들이 최소한 심리를 요청이라도 할 수 있는 곳이 마련되도록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고 호소했으나 전혀 반응이 없었다. 일본인들 에게 기피 인물이 아니었던 한 미국인 주교에게 찾아가, 그가 저명한 지도자로 있는 교단에 속한 기독교인 한국인들이 당한 심각한 부당 행위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제시했으나 그는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았다. 접기
P. 374 나는 헤이그로 달려가 평화회의에서 발언권을 얻고자 파견된 한국 대표단을 만났다. 그곳에서 스테드William. T. Stead를 만났고, 그는 나에게 그 도시의 평화 클럽에서 연설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이 진심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의 말로 보아 고통받는 한국인들에게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P. 378 상하이의 독일은행에 예치된 개인 자산의 잔액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한국 국왕이 비공식적으로 그 은행의 수표와 함께, 국왕 본인의 개인적 청구에 의해서만 돈을 지급하겠다는 보증서가 담긴 친필 서신을 내게 보내 왔다.…국왕은 일본인들이 그 돈을 가로챌까 두려워했고, 내가 그 돈을 인출해 미국 은행에 자신의 명의로 예치해 주기를 원했다. 접기
P. 634 이제 (1919년 3‧1운동에서) 우리는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두 가지 상반된 이상이 정면으로 충돌한 비극적 정점에 다다른다. 이는 인류의 역사에서 ‘정의Right’가 지배할 것인지, 아니면 ‘무력Might’이 지배할 것인지에 관한 숙명적인 투쟁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P. 675 일본의 어떤 정파도 군국주의를 포기할 의도가 전혀 없다. 군국주의가 없다면 일본은 4류 국가로 추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무력을 과시해야만 아시아 대륙의 일부라도 점유할 수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일본은 한국, 대만, 중국으로부터 엄청난 증오를 샀기에, 군국주의 지배력이 약화하는 순간 대륙의 모든 점유지에서 쫓겨날 것이다. 접기
P. 714 주목해야 할 점은 1929년 11월에 시작되어 한국 전역에서 일어난 놀라운 학생운동이다. 그것은 애국심의 분출이었으며 너무 뚜렷하고 보편적이어서, 이 나라의 젊은 세대가 일본의 지배에 순응해 가고 있느냐는 질문에 단번에 마침표를 찍었다.…이 운동은 한국인들이 행복하고 만족해한다는 일본의 주장이 거짓임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이 세계의 존중을 받을 권리조차 없는 겁쟁이 집단이라는 일본의 파렴치한 선전이 허구임을 만천하에 폭로한다. 접기
P. 756 최초의 ‘국제연맹’은 바벨탑이었다. 그 사건의 물리적 기록 여부와 상관없이 그 이야기는 국제주의의 철학을 담고 있다.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보다 국제연맹을 결성할 천성적인 능력이 더 컸다. 그들은 언어와 문화, 국가가 하나였다. 그러나 그들은 현재의 국제연맹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결핍, 즉 이기주의에 지배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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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호머 B. 헐버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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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선교사이자 교사, 역사가. 특히 한국의 역사, 언어, 문화에 대한 학문적 기여로 널리 알려져 있다. 1886년 23세의 나이로 조선 최초의 국립 근대식 학교인 육영공원Royal College 교사로 부임하였고, 1891년 한국 최초의 한글 교과서이자 세계 지리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출간하였다. 1896년에는 구전으로만 전하던 〈아리랑〉을 최초로 악보로 기록하기도 했다.
1895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일본의 만행을 세계에 고발했으며, 1896년 서재필과 함께 《독립신문》을 창간했고, 영문판 발행을 지원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저지를 위해 고종 황제의 밀명을 받아 워싱턴에 다녀오고,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지원 활동으로 일제에 의해 출국당했다. 그의 저서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1905)와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1906)는 20세기 여명기 한국의 문화적·정치적 분위기를 상세하게 담아 한국 역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 밖에도 한국 전래 동화책 《Omjee the Wizard》(1925) 및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소설 《The Face in the Mist》(1926)를 출간하기도 했다. 건국공로훈장 태극장(1950. 3. 1)과 금관문화훈장(2014. 10. 9)을 추서받았다. 접기

최근작 : <헐버트 회고록>

옥성득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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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UCLA 아시아 언어문화학과 임동순·임미자 한국기독교학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와 국사학과를 졸업한 후 장로회신 학대학교 신학대학과 대학원에서 신학 수업을 이어나갔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 신학교(신학석사)와 보스턴대학교 신학대학원(신학박사)에서 기독교 역사를 공부했다. 현재는 UCLA에서 한국 근현대사와 한국 종교사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대한성서공회 사》(전 3권),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 《한국 기독교 형성사》(제37회 한국기독교출판문화상 대상), 《쇠퇴하는 한국교회와 한 역사가의 일기》, 《한국교회 첫 사건들》 등이 있고, 편역서로는 《언더우드 자료집》(전 5권), 《 대한 성서공회사 자료집》(전 3권), 《마포삼열 자료집》(전 4권)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브라운 총무의 한국 여행, 1901년>,<이야기 한국 교회사 1 : 1592-1893>,<한국교회, 어디로 가나?> … 총 24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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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헐버트 회고록>,<다시, 마르크스를 읽어야 할 때>,<한글, 불편한 진실>등 총 324종
대표분야 : 역사 5위 (브랜드 지수 623,748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결코 잊어서는 안 되지만, 잊혀져 가는
‘대한미국인’ 헐버트가 겪은 조선의 근대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던, 다재다능 미국인
호머 B. 헐버트는 한국 근대사의 산 증인 중 한 명이다. 23세이던 1886년 한국 최초의 근대적 공립학교인 육영공원의 교사로 초빙되어 와서 1909년 일제에 의해 추방되기까지 이 땅에 머물렀다는 이유만이 아니다. 단순히 체류한 게 아니었다. 선교사이기도 했고, 한국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를 저술한 교육자, 《코리아 리뷰》를 발행하고 《독립신문》 영문판을 만든 언론인, 한글과 드라비다어의 유사성에 주목한 언어학자 등 다양한 얼굴로 조선의 개화에 기여했다. 무엇보다 대한제국의 국권 수호를 위해 평생 헌신한 ‘대한미국인’이었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 사살 후 일경에게 취조받던 안중근 의사가 “조선 사람이면 단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평가했을 만큼 헐버트의 한국 사랑은 치열했다. 이제는 국사 교과서에서조차 두어 번 언급하고 지나치고 말아서는 결코 안 되는 인물이란 뜻이다.

90여 년 만에 온전히 복원해낸 근대사 핵심 사료
이 책은 헐버트 박사가 1886년부터 193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겪은 파란만장한 삶과 국제 정세에 관한 통찰을, 1920년대부터 1932년 말까지 타자기로 작성한 자서전이다. 편역자는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원고를 어렵게 확보하여 일부 희미한 본문을 완성하고, 350개의 역주와 관련 사진을 더해 90여 년 만에 우리 근대사의 핵심 사료를 선보이게 되었다.
제1권은 육영공원 시험 등 본인의 체험담과 을미사변에 가담한 일본 낭인에 대한 판결문 등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당대의 굵직한 사건을 짚는 한편 실패한 고종 밀사 역할 등 한국의 국권 수호를 위한 이방인의 분투를 담았다. 아관파천에 대한 재조선 외국인들의 반응 등 한국 근대사를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데 도움을 주는 내용이 그득하다. 제2권은 미국에서 과거와 현재를 회고하면서, 일본의 야욕으로 초래된 동양의 위기와 서구의 책임을 다룬 정치철학서로 헐버트의 통찰력을 보여준다.

육영공원 교사에서 고종 황제의 밀사 역할까지
이 책의 매력 포인트는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역사의 이면이다. 제물포에 상륙해서 한양에 입성하기까지의 고된 여정, ‘friend’를 ‘부렌두’라 발음하는 육영공원의 수업 풍경이 그런 예이다. 그런가 하면 《동사찬요》 탐독에서 시작된 한국 고대사에 관한 흥미, 영국의 전문학술서까지 동원한 한글-드라비다어 연구는 헐버트의 학술적 관심사를 보여준다. 여기에 궁궐에 침입한 사실은 인정되지만 “누군가가 실제로 계획된 범죄를 저질렀다는 충분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민비 살해범들에게 무죄를 선고한 일본 재판의 모순을 지적하거나 필리핀을 지키기 위해 미국이 을사늑약의 무효를 호소하는 고종의 밀서를 외면하는 과정에서는 헐버트의 한국 사랑과 더불어 국제 정치에서의 ‘힘의 논리’를 절감하게 된다.

일제의 야욕 분석에서 세계 평화 대한 제시까지
국제 정치에 대한 헐버트의 식견과 통찰력을 보여주는 제2권에도 흥미로운 사실(史實)은 여럿 실려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독일과 연합국 측을 놓고 어느 편에 가세할지 저울질을 했으며, 영국은 미국의 참전을 촉구하기 위해 카리브해에 일본에 해군기지 제공을 검토했다든가 25만 명의 중국 노무자가 프랑스 전선에서 연합국을 도왔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등은 비밀조약으로 산둥반도 지배권을 일본에 넘겼다는 이야기는 국제 정치의 냉엄한 현실을 보여준다. 일본이 유대계 미국 은행가 야곱 쉬프가 제공한 차관에 힘입어 금본위제를 확립함으로써 러일전쟁의 승리를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는 분석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일본이 서구를 등진 채 문명 세계가 가장 두려워해 온 일, 즉 동양과 서양을 대립시키고 전쟁의 모체가 되는 상호 간의 의심과 적대감을 영속시키고 심화할 분열적인 움직임을 보인다는 헐버트의 지적은 이후 이어진 제2차 세계대전을 예고했다는 점에서 새삼 주목하게 된다.

책은 두툼하다. 원고량이 200자 원고지로 3,000매 가까워 700쪽이 훌쩍 넘는다. 한데 다 읽어치우는 데 들 수고로움을 걱정할 것 없다. 우리가 모르고 지나쳤던 조선 근대의 풍경, 일본에서의 이색적인 여행, 시베리아 횡단 철도 탑승기 등이 적절하게 곁들여져 의외로 술술 읽힌다. 영국 왕실의 유서 깊은 성소인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했던 그의 유언에 따라 양화진 선교사 묘원에 묻힌 육성을 귀담아 들어볼 일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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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머 B. 헐버트의 <헐버트 회고록>(원제: <동양의 메아리: 극동에서의 삶의 회고록>)에 대한 요약 및 평론입니다.

<헐버트 회고록: 제국의 틈바구니에서 타자의 편에 선 목격자>

<개요 및 저자 배경> 호머 베자릴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의 회고록 <동양의 메아리: 극동에서의 삶의 회고록>은 구한말 조선의 격변기를 가장 내밀한 거리에서 지켜본 한 서구인의 증언록이다. 1886년 조선 최초의 근대식 관립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의 교사로 파한(派韓)된 헐버트는 단순한 선교사나 교육자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한글의 과학성과 우수성을 최초로 서구 학계에 체계적으로 소개한 언어학적 선각자였으며, 고종의 외교 밀사로서 제국주의 열강의 파렴치한 침탈을 폭로한 행동가였다. 이 책은 그가 1886년 입국한 이래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당한 뒤 광복 후 다시 돌아오기까지, 조선과 동아시아 정세의 격랑을 회고한 기록이다.

<내용 요약>

  1. 조선과의 첫 만남과 언어적 충격 헐버트는 쇄국에서 막 벗어난 조선에 발을 디뎠을 때 마주한 문화적 충격과 더불어, 무엇보다 '한글'이라는 문자에 매료된 과정을 담담히 서술한다. 당시 지배층조차 사대주의에 갇혀 천대하던 한글에서 알파벳을 뛰어넘는 완벽한 음소 문자의 독창성을 간파한 그는 최초의 순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士民必知)를 저술한다. 그는 조선의 민중이 지닌 잠재력을 문자 교육과 계몽에서 찾았으며, 언어를 통한 주체적 근대화의 가능성을 증명하고자 했다.

  2. 궁중의 비극과 제국주의의 민낯 회고록의 중심축은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러일전쟁, 그리고 을사늑약에 이르는 외교적 비극이다. 헐버트는 을미사변 직후 신변의 위협을 느끼던 고종을 보호하기 위해 언더우드, 에비슨 등과 함께 권총을 차고 침전을 불침번 섰던 일화를 생생히 기록한다. 이는 단순한 목격담을 넘어 야만적 폭력이 주권 국가의 심장부를 유린하는 과정을 기록한 역사적 고발이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동양 평화'라는 기만적인 명분을 내세워 조선을 식민지화해 가는 과정, 그리고 이를 방조·묵인한 영미 열강의 냉혹한 국제정치적 계산을 거침없이 폭로한다.

  3. 밀사 활동과 망명의 길 헐버트는 고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특사로 활약했다. 1905년 을사늑약 직전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조미수호통상조약에 근거한 중재를 요청하는 밀서를 전달하려 했으나, 친일적 태도를 취하던 미 국무부에 의해 문전박대당했다. 이어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을 배후에서 조율하고 지원했다. 이로 인해 통감부의 표적이 된 그는 끝내 조선에서 강제 추방당한다. 그러나 그는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서적 집필, 강연, 미 의회 증언 등을 통해 일본의 침략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4. 귀환과 영면 1949년 대한민국 정부의 국빈 초청으로 40년 만에 다시 방한했으나, 고령과 여독으로 인해 입국 일주일 만에 서거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는 그의 유언대로, 그는 현재 서울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어 있다.

<평론: 경계를 넘은 윤리적 실천과 역사적 의의>

  1. '구경꾼'이 아닌 '당사자'로서의 타자성 19세기 말 서구인들이 남긴 동양 견문록은 대개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에 갇혀 있었다. 우월한 서구 문명의 시각에서 조선을 '미개하고 정체된 은둔의 나라'로 규정하거나, 기벽(eccentricity)을 관찰하는 제국주의적 관음증이 만연했다. 그러나 헐버트의 글쓰기는 출발선부터 궤를 달리한다. 그는 관찰자나 구경꾼으로 머물지 않고 조선이라는 공동체의 비극 한가운데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그에게 조선은 계몽의 대상이자 시혜를 베풀 피식민지가 아니라, 독립된 언어와 유구한 역사를 지닌 동등한 주권체였다. 그의 시선은 서구 중심적 우월주의를 벗어나 타자의 고통에 연대하는 보편적 휴머니즘의 극치를 보여준다.

  2. 약육강식 국제정치학에 대한 환멸과 폭로 이 회고록의 가장 강력한 비판적 힘은 서구 열강의 이중성을 까발리는 대목에서 나온다. 헐버트는 특히 자국인 미국의 실리주의적 배신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조미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필리핀 통치를 위해 한반도를 일본에 넘겨준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배신을 날카롭게 응시한다. 그는 문명화라는 미명 아래 자행된 약소국 분할과 강대국의 카르텔을 비판하며, 국제법과 외교라는 명분이 어떻게 강자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전락했는가를 통렬히 해부한다. 이는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의 국제 분쟁과 패권 다툼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3. 지식인의 책무와 실천적 저항 헐버트는 학문과 실천을 분리하지 않았다. 한글의 체계화, 한국 역사서 집필(<한국사>, <대한제국 멸망사>) 등 문화적 주춧돌을 놓는 작업과, 총을 들고 왕을 지키거나 밀서를 품고 대륙을 건너는 정치적 결단을 하나의 호흡으로 연결했다. 지식이 행동으로 전환되지 않을 때 발생하는 무력함을 그는 용납하지 않았다. 그의 기록은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불의한 침략에 맞서 기록으로 저항한 한 지식인의 분투기다.

<결론> <헐버트 회고록>은 한 세기 전 격랑의 한반도를 무대로 펼쳐진 비극의 역사를 복원하는 텍스트인 동시에, 한 인간이 특정 국가나 혈통의 경계를 넘어 어디까지 보편적 정의와 타자의 권리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가를 묻는 기록이다. 국가주의적 편협성을 떠나, 강자가 약자를 짓밟던 제국주의 시대의 폭력에 온몸으로 맞선 한 세계인의 윤리적 궤적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성찰을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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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머 B. 헐버트, <헐버트 회고록> — 요약 평론

호머 B.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의 <헐버트 회고록>은 단순한 외국인 조선 체류기가 아니다. 원제는 <동양의 메아리: 극동에서의 생애 회고록>(Echoes of the Orient: A Memoir of Life in the Far East)이다. 헐버트가 1920년대부터 1932년 말까지 작성한 미출간 영문 원고를 옥성득 교수가 번역하고 약 350개의 역주와 사진을 덧붙여 776쪽으로 펴냈다. 헐버트가 처음 조선에 들어온 1886년부터 회고록을 완성한 1932년까지의 개인적 경험과 동아시아 국제정세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출간 경위와 구성은 연합뉴스 보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을 읽는 핵심 질문은 “헐버트는 왜 한국을 사랑했는가?”보다 “그는 어떤 한국이 살아남기를 원했으며, 그 목적을 위해 자신이 속한 미국과 서구 문명을 어떻게 비판했는가?”에 있다.

1. 교육자로 만난 조선

헐버트는 23세였던 1886년, 조선 최초의 근대적 관립학교인 육영공원의 영어 교사로 입국했다. 처음의 그는 서양 문명과 지식을 조선에 전달하는 미국인 교육자였다. 그러나 한국어를 익히고 조선인 학생과 관료들을 만나면서, 조선을 단순한 선교·문명화 대상이 아니라 고유한 언어와 역사적 개성을 가진 사회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가 특히 높이 평가한 것은 한글이었다. 한글이 배우기 쉽고 음운을 체계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지식의 독점을 깨뜨릴 수 있는 민주적 문자라고 보았다. 한문을 독점한 양반 계층에 의해 교육에서 배제되었던 백성과 여성도 한글을 통해 지식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글로 세계지리 교과서 <사민필지>(士民必知)를 저술한 일은 이러한 신념의 산물이었다.

이 지점에서 헐버트의 교육관은 선교사의 복음 전파를 넘어선다. 그에게 교육은 개인의 구원만이 아니라 국민의 자각과 국가의 자립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었다. 근대국가가 되려면 소수 엘리트가 아니라 일반 백성이 세계를 알아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한글 보급, 교과서 편찬, 교사 양성, 언론 활동은 서로 분리된 사업이 아니었다. 모두 한국인을 근대적 정치 주체로 만드는 작업이었다.

2. 조선에 대한 애정과 비판

헐버트는 조선인을 낭만적으로만 묘사하지 않는다. 그는 조선인의 지적 능력, 인정, 예의, 학습 능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정부의 부패, 양반의 특권 의식, 파벌주의, 행정의 무능과 보수성을 비판한다. 조선이 외세의 침략을 받은 것은 부당하지만, 내부의 취약성이 외세가 침투할 공간을 제공했다는 판단이다.

그렇다고 조선의 국권 상실을 조선인의 무능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 설명하지 않는다. 헐버트가 일본의 식민주의 논리와 갈라지는 지점이 여기다. 일본은 조선의 후진성과 정치적 혼란을 병합의 근거로 삼았다. 반면 헐버트는 한 나라의 정부가 무능하다는 사실이 다른 나라에 그 영토와 인민을 지배할 권리를 주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개혁이 필요하다는 진단과 독립할 권리가 있다는 원칙을 구별한 것이다.

그는 한국의 몰락을 지정학적 조건과 연결한다. 한국은 중국·러시아·일본 사이에 위치했고, 특히 일본이 섬나라에서 대륙 세력으로 팽창하기 위한 첫 번째 발판이 되었다. 그러나 지정학은 운명 그 자체가 아니다. 침략국의 선택, 열강의 묵인, 한국 지배층의 실패가 결합해 국권 상실이 일어났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3. 을미사변과 일본 제국주의의 실체

1895년 명성황후 시해는 헐버트에게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일본은 동양의 근대화를 이끄는 개혁 세력이 아니라, 목적을 위해 폭력과 기만을 사용하는 제국주의 국가로 드러났다. 그는 왕비가 침전에서 일본인 자객들에게 살해된 정황을 기록하고, 서구 국가들이 이 사건에 단호하게 대응하지 않은 것을 비판한다.

이 사건 이후 헐버트는 관찰자나 교육자의 중립적 위치에 머물 수 없다고 판단한다. 일본의 행위를 묵인하고 편안하게 살 것인지, 한국인의 권리를 옹호하며 부당함을 세계에 알릴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자신에게 “중간 지대는 없었다”는 고백은 회고록 전체를 관통한다.

이는 헐버트가 선교사적 중립을 포기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상당수 외국 선교사들은 선교 사업의 안전을 위해 정치 문제에 관여하지 않으려 했다. 일부는 일본 통치가 행정의 안정과 선교의 편의를 가져오리라고 기대했다. 헐버트는 그러한 중립이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는 사실상 강자의 편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선택은 종교적 신념과 정치적 실천이 분리될 수 없다는 선언이었다.

4. 고종의 밀사와 미국의 배신

회고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헐버트가 고종의 밀사로 활동한 과정이다. 1905년 고종은 일본이 강요하는 보호조약을 막기 위해 헐버트에게 미국 정부에 도움을 요청하는 밀서를 맡겼다. 그러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과 미국 정부는 한국의 호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국 국무장관은 사실상 일본과 충돌하면서까지 한국을 도울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헐버트에게 이것은 개인적인 좌절이면서 미국 외교의 도덕적 파산이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통해 미국이 한국과 우호 관계를 맺었음에도, 실제 위기에서는 조약의 정신보다 필리핀 지배와 일본과의 전략적 협력을 우선했다.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용인하는 대신 일본으로부터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를 인정받으려 했다. 헐버트는 국제법과 조약이 강대국의 이해관계 앞에서 얼마나 쉽게 무력화되는지를 체험했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된다. 고종의 특사들은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으므로 무효라고 호소했지만, 열강은 한국 대표의 공식 참가를 허용하지 않았다. 헐버트는 이들을 돕고 국제 여론을 환기하려 했으나 실질적인 성과를 얻지 못했다. 한국은 국제사회의 일원이었지만, 국제사회는 그 구성원의 권리를 동등하게 보호하지 않았다.

그는 고종의 정치적 능력을 무조건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다만 고종이 일본의 강요에 자발적으로 굴복했다는 해석에는 명확히 반대한다. 고종이 통치자로서 우유부단하고 한계가 있었더라도, 대한제국을 국제법상 독립국으로 보존하려는 의지만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종을 단순한 무능한 망국 군주로 보는 서술을 수정하는 중요한 증언이다.

5. 일본의 팽창과 ‘동양의 위기’

회고록 후반부는 개인적 회상에서 국제정치 비판으로 확대된다. 헐버트는 일본의 한국 병합을 한반도만의 사건으로 보지 않았다. 한국에서 성공한 침략이 만주와 중국, 태평양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서구 열강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묵인한 것은 평화를 얻은 것이 아니라 더 큰 전쟁을 연기한 것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그에게 제국주의는 일본만의 죄도 아니었다. 일본은 서구 제국주의로부터 군사력, 식민통치, 인종적 우월주의를 배웠다. 영국과 미국은 일본의 팽창을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도움이 되는 동안 지지하거나 묵인했다. 따라서 동아시아의 위기는 일본의 야욕과 서구의 위선이 공동으로 만들어낸 결과였다.

이러한 관점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이미 일본 제국주의의 연쇄적 팽창을 파악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헐버트는 한국 독립을 한국인만의 민족적 요구로 보지 않고, 동아시아 평화와 국제질서의 신뢰를 가늠하는 시금석으로 보았다. 한 작은 나라의 권리를 희생시켜 얻은 세력균형은 결국 더 큰 폭력을 불러온다는 주장이다.

6. 회고록의 가치와 한계

이 책의 가장 큰 가치는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이라는 미담보다 국제정치의 비대칭성을 내부자의 경험으로 폭로했다는 데 있다. 헐버트는 조선 왕실과 관료, 미국 외교관, 선교사, 일본 당국을 두루 접했다. 특히 고종의 밀사 활동과 미국 정부의 냉담한 반응은 한국 외교사의 중요한 1차 증언이다. 회고록은 <독립신문>, <코리아 리뷰>, 외교문서, 헐버트의 편지들과 함께 읽을 때 더욱 큰 사료적 가치를 가진다.

그러나 비판적으로 읽어야 할 부분도 있다. 첫째, 사건이 일어난 지 수십 년 후에 작성된 회고이므로 기억의 선택과 재구성이 개입되어 있다. 자신이 직접 목격한 일, 타인에게 들은 이야기, 나중에 해석한 국제정세를 구분해야 한다.

둘째, 헐버트에게도 19세기 미국 개신교인의 문명관이 남아 있다. 그는 한국 문화를 존중했지만 서구식 교육, 기독교 윤리, 근대국가를 발전의 기준으로 삼았다. 조선 민중을 존중하면서도 때때로 그들을 계몽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본다. 따라서 그는 제국주의에 저항한 인물이지만 모든 형태의 서구 중심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난 인물은 아니다.

셋째, 그의 강한 고종 옹호는 일본의 침략 책임을 밝히는 데 중요하지만 대한제국 내부의 계급 갈등, 농민의 삶, 동학농민전쟁, 왕실과 관료층의 책임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킬 수 있다. 헐버트가 지키고자 한 한국은 기본적으로 고종을 주권자로 하는 개혁적 독립국가였다. 아래로부터의 사회혁명이나 공화주의적 변혁이 그의 중심 관심은 아니었다.

종합 평가

<헐버트 회고록>은 조선을 칭찬한 친한파 외국인의 감상록이 아니다. 그것은 교육자였던 한 미국인이 한국의 국권 상실을 목격하면서 언론인·외교적 대리인·독립운동 옹호자로 변해가는 정치적 자기증언이다. 동시에 정의와 국익이 충돌할 때 미국이 무엇을 선택했는지를 고발하는 미국인 자신의 양심적 기록이다.

헐버트의 가장 중요한 통찰은 약소국의 멸망이 그 나라의 후진성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데 있다. 한국 내부의 부패와 무능은 분명 존재했지만,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지 않으며 미국과 서구 열강의 방관도 면책하지 않는다. 내부 책임, 침략자의 책임, 국제사회의 책임을 함께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이 책을 읽을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강대국은 흔히 평화와 문명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전략적 이익에 따라 작은 나라의 권리를 거래한다. 헐버트는 한국을 구하는 데 실패했으나 그 실패를 통해 국제정치의 본질을 증언했다. 그의 삶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부당함을 보았을 때 안전한 중립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실패할 가능성을 알면서도 피해자의 권리를 말할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헐버트의 진정한 유산은 ‘한국 사랑’이라는 감정적 표현보다 연대의 윤리에 있다. 그는 한국인을 자신이 대신 구원해야 할 수동적 민족으로만 보지 않고, 스스로 독립과 민주주의를 이룰 권리를 가진 정치적 주체로 인정하려 했다. 바로 그 점에서 <헐버트 회고록>은 조선 말기의 기록인 동시에, 제국주의와 약소국, 방관과 책임, 신앙과 정치적 양심의 관계를 묻는 현재적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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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버트 회고록 호머 B. 헐버트 (지은이),옥성득 (옮긴이)푸른역사2026 
--- 1] 책의 용어 제목, 온라인 커피, 
2] 1,000 단어 요약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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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버트 회고록 — Echoes of the Orient: A Memoir of Life in the Far East>

1. 영어 원제와 온라인 copy

2026년 8월 30일 푸른역사에서 출간된 호머 B.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 옥성득 편역의 <헐버트 회고록>은 776쪽의 대형 자료집입니다.

영어 원제는

<The Echoes of the Orient: A Memoir of Life in the Far East> 또는 서지상 흔히 <Echoes of the Orient: A Memoir of Life in the Far East>

라고 되어 있습니다. 헐버트가 1920년대부터 1932년 말까지 타자기로 정리한 미출간 자서전 원고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이 2026년에 처음 발견된 자료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원고의 존재는 1994년 한국에 알려졌고, 서울의 선인출판사가 2000년에 영어 원고 일부를 330쪽짜리 영인본으로 출판했습니다.

원본은 현재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도서관의 Yong-jeung Kim Papers에 들어 있습니다. 컬럼비아 자료목록에는

“Box 4: Homer B. Hulbert, ‘Echoes of the Orient: A Memoir of Life in the Far East,’ Unpublished Manuscript, 321 pages”

라고 명시되어 있으며 마이크로필름도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컬럼비아대학교 원고 소장 목록 보기

2000년 영인본은 국립중앙도서관에도 소장되어 있고, 검색 결과상 <디지털도서관 디지털자료실> 이용 대상으로 표시됩니다. 저작권 제한 없이 집에서 내려받을 수 있는 완전한 공개 PDF는 찾지 못했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 헐버트 자료 검색

2026년판의 중요한 점은 옥성득 UCLA 교수가 약 10년 전에 원고를 확보하여 번역하고 사진과 약 350개의 주석을 보완함으로써, 90여 년 만에 사실상 온전한 한국어판을 만들었다는 데 있습니다.


2. 요약 평론

1) 이 책은 단순한 ‘조선 여행기’가 아니다

<헐버트 회고록>을 읽을 때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 책이 이방인의 조선 관찰기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헐버트는 1886년 23세에 육영공원 교사로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이후 그의 역할은 교사에서 선교사, 언론인, 한국어·한글 연구자, 역사가, 고종의 밀사, 그리고 결국 한국 독립의 국제적 옹호자로 변합니다. 따라서 그의 회고록은 세 가지 책이 겹쳐 있습니다.

① 한 미국인의 개인 회고록
② 1886~1919년 조선·대한제국 붕괴의 목격 기록
③ 일본 제국주의와 서구 열강의 국제정치를 고발하는 정치적 변론서

특히 후반으로 갈수록 ③의 성격이 강해집니다.

책의 전체 구성도 이를 잘 보여줍니다. 앞부분은 1886년 조선 도착에서 시작하여 육영공원, 한국어 연구, 청일전쟁, 명성황후 시해, 아관파천, 독립신문과 독립협회, 러일전쟁, 을사늑약, 헤이그 특사, 한일병합, 3·1운동으로 이어집니다. 후반에는 일본의 팽창과 미국·영국 등 서구 열강의 책임, 국제연맹의 실패, 만주사변, 그리고 ‘도덕적 국제주의’라는 헐버트 자신의 세계질서론으로까지 확대됩니다.

따라서 제목의 ‘회고록’보다 실제 내용은 훨씬 넓습니다.


2) 처음부터 반일 인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 제가 가장 흥미롭게 보는 부분은 헐버트의 대일 인식 변화입니다.

훗날의 헐버트만 보면 처음부터 철저한 반일·친한 인물이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한때 일본을 한국 근대화를 도울 수 있는 ‘자연스러운 친구’로 생각했고, 일본 내부에서도 이토 히로부미 같은 문관세력이 군부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행동, 1895년 명성황후 시해, 러일전쟁과 한국에 대한 군사적 장악을 경험하면서 그의 생각은 점점 바뀝니다.

그리고 1905년에 결정적인 단절이 일어납니다.

헐버트 자신의 표현을 요약하면, 이제 자신에게 두 가지 길밖에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본의 행동을 묵인하여 편안하게 살 것인가, 아니면 한국인의 권리를 옹호하고 그들이 당하는 부당함을 세상에 알릴 것인가.

그는 후자를 선택합니다.

이 변화가 중요합니다. 헐버트는 처음부터 일본을 악으로 규정한 민족주의적 선전가가 아니라, 메이지 일본을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보았던 서구인이 실제 경험을 거치면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자로 이동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증언은 단순한 ‘친한파 미국인의 주장’보다 역사적으로 더 흥미롭습니다.


3) 명성황후 시해가 하나의 전환점이다

헐버트가 일본을 근본적으로 의심하게 되는 가장 충격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입니다.

그는 사건을 단순히 조선 내부 권력투쟁으로 보지 않습니다.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와 일본인 행동대가 핵심적인 책임을 졌다고 판단합니다. 책에서는 왕비의 처소 침입, 이경직의 살해, 왕비 살해 과정과 일본 측의 사건 은폐가 상세히 서술됩니다.

여기서 헐버트에게 중요한 것은 한 개인의 암살만이 아닙니다.

그 사건은 일본이 ‘문명화된 근대국가’라는 외피 아래에서 타국의 주권을 폭력으로 제거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것은 국제사회가 이것을 사실상 묵인했다는 점입니다.

이때부터 헐버트의 문제의식에는 두 가지 비판 대상이 생깁니다.

일본 제국주의와
그 일본을 제어하지 않은 서구 열강입니다.


4) 고종에 대한 평가도 주목할 만하다

헐버트는 고종을 무조건 위대한 군주로 미화하지 않습니다.

그의 통치능력이나 조선 정부의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비판적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에서는 매우 확고합니다.

고종은 일본에게 한국의 주권을 자발적으로 넘겨준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고종이 군주로서 어떤 평가를 받더라도 “한국이라는 국가가 국제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소멸하는 것”에는 끝까지 저항했다고 봅니다.

이것은 대한제국 멸망을 설명하는 데 매우 중요한 논점입니다.

한국이 내부적으로 무능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일본의 보호를 요청했다는 일본 제국주의의 공식 서사와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헐버트에게 대한제국의 멸망은 ‘근대화에 실패한 국가의 자연도태’가 아니라 강대국에 의한 주권 박탈입니다.


5) 1905년 미국에 대한 배신감

저는 이 책에서 일본 비판 못지않게 중요한 부분이 미국 비판이라고 봅니다.

1905년 헐버트는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워싱턴으로 갑니다. 그러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과의 면담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미국 정부는 이미 동아시아 질서를 전략적 이해관계의 관점에서 보고 있었습니다.

헐버트가 미국 국무장관에게 한국 문제를 제기했을 때 돌아온 반응은 사실상

“한국을 위해 우리가 일본과 충돌하기를 원하는가?”

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헐버트가 발견한 것은 국제정치의 냉혹한 원리였습니다.

조약, 국제법, 독립국의 주권 같은 원칙은 강대국의 전략적 이해와 충돌하면 너무 쉽게 폐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필리핀에서 자신의 지위를 보호해야 했고, 일본은 한국 지배를 원했습니다. 헐버트는 결국 한국의 독립이 이 강대국 거래의 희생물이 되었다고 판단합니다.

이 점에서 <헐버트 회고록>은 단순한 반일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왜 서양의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작은 나라 한국을 보호하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책입니다.


6) 한국에 대한 애정과 동시에 존재하는 서구인의 시선

그러나 헐버트를 한국인의 완전한 대변자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19세기 미국 개신교 선교사이며 서구 근대주의자입니다.

한글과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높이 평가하고 한국인의 독립능력을 옹호했지만, 조선의 정치적 파벌, 관료제, 교육, 사회관습에는 상당히 비판적입니다. 그의 기본적인 역사관에는 ‘교육·기독교·근대문명·법치’를 발전의 기준으로 삼는 19세기 미국 개신교 문명론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최근 연구에서는 헐버트가 한국 음악과 민속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서구의 ‘자연/문명’이라는 범주를 이용해 한국인을 설명했던 점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즉 그는 제국주의적 인종주의를 그대로 따르는 서양인은 아니었지만 완전히 21세기적 문화상대주의자였던 것도 아닙니다.

이 양면성을 인정해야 헐버트를 더 정확히 읽을 수 있습니다.


7) 가장 중요한 장점과 가장 큰 한계

이 자료의 첫째 장점은 헐버트가 역사의 주변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육영공원, 고종, 독립협회, 서재필, 명성황후 시해, 러일전쟁, 을사늑약, 헤이그 특사 등 중요한 사건과 인물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조선의 분위기와 외국인 사회의 반응을 재구성하는 데 독보적인 가치가 있습니다.

둘째 장점은 ‘제국 일본’뿐만 아니라 서구 열강을 함께 비판한다는 것입니다.

헐버트에게 일본은 가해자이지만 미국과 유럽은 결백한 방관자가 아닙니다. 국제법을 말하면서도 전략적 이해관계 때문에 작은 나라의 권리를 외면한 국제체제 자체가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한계 역시 분명합니다.

이것은 사건 당시의 일기가 아니라 수십 년 후 작성한 ‘회고록’입니다.

1880~1900년대 사건을 1920~30년대의 헐버트가 다시 기억하고 재구성합니다. 그 사이 한국은 병합되었고 3·1운동과 제1차 세계대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의 만주침략까지 벌어졌습니다.

따라서 젊은 시절 헐버트가 당시 실제로 어떻게 생각했는가와 노년의 헐버트가 자기 생애를 어떻게 이해하게 되었는가를 구별해야 합니다.

회고록은 ‘사실 기록’인 동시에 ‘자기 삶의 해석’입니다.


8) 이 책의 핵심 주장

776쪽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저는 이렇게 정리하겠습니다.

한국은 단순히 스스로 무너진 것이 아니라, 내부적 약점을 가진 국가가 제국주의 경쟁 속에서 외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주권을 빼앗겼으며, 그 과정에서 일본의 책임뿐 아니라 국제법을 지키지 않은 서구 열강의 도덕적 책임도 크다.

그리고 헐버트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1930년대 만주사변과 국제연맹의 무기력을 보면서 그는 한국 문제가 이미 끝난 지역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작은 나라의 주권을 강대국이 마음대로 침해하도록 허용한다면 그 질서는 결국 세계전쟁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책의 마지막 부분이 ‘도덕적 국제주의’와 ‘한국의 독립이 세계 평화의 관건’이라는 주장으로 끝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 점 때문에 <헐버트 회고록>은 오늘 읽어도 상당히 현대적인 책입니다.


9) 평론 — 신복룡·함재봉을 읽고 있는 맥락에서 특히 중요한 이유

세진 님께서 최근 읽으신 신복룡, 함재봉, 하야시 다다스, 무쓰 무네미쓰, 나카츠카 아키라의 저작과 나란히 놓으면 이 책의 가치가 더욱 커집니다.

무쓰의 <건건록>이나 하야시 다다스의 회고록에서 조선은 대체로 일본 외교가 해결해야 할 ‘문제’로 등장합니다. 조선 내부의 혼란과 청·러시아의 영향력이 일본의 안보를 위협하기 때문에 일본이 개입해야 한다는 논리가 기본 구조입니다.

헐버트는 같은 시기를 정반대 방향에서 보았습니다.

그에게 조선은 열강이 처리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국제법상 권리를 가진 하나의 정치공동체입니다.

그래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와
<누가 조선을 무너뜨렸는가?>

는 같은 질문이 아닙니다.

함재봉은 전자의 질문, 즉 조선 내부의 제도·사상·정치문화가 왜 근대국가 건설에 실패했는가를 강하게 묻습니다.

헐버트는 후자를 묻습니다. 내부에 결함이 있다고 해서 다른 국가가 그 나라를 병합할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두 주장이 양자택일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조선의 내부적 취약성을 설명하는 것과 일본의 식민지배 책임을 설명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인과 수준의 문제입니다. 오히려 헐버트를 함재봉과 함께 읽으면 이 두 수준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점에서 <헐버트 회고록>은 최근 읽고 계신 1890~1910년 동아시아 관계 자료 가운데 상당히 중요한 한 권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건건록> → <하야시 다다스 비밀 회고록> → <헐버트 회고록>을 차례로 놓으면, 동일한 사건이 ‘일본 제국의 내부 시선’과 ‘한국을 옹호한 미국인의 외부 시선’에서 얼마나 다르게 구성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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