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10

다시, 마르크스를 읽어야 할 때 - 그가 선택한 인간 구원의 길 류대영 2026

다시, 마르크스를 읽어야 할 때 - 그가 선택한 인간 구원의 길

류대영 (지은이)푸른역사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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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카를 마르크스는, 정신분석학을 개척한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더불어 문명사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지성으로 꼽힌다. 그의 사상에 경도된 이들이 세계사를 요동치게도 했다. 당연히 그에 관한 저술은 차고 넘친다. 한데 원로 종교사학자가 쓴 이 책은 조금 색다르다. 《자본론》을 중심으로 마르크스의 정치경제 사상을 해석하고, 평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마르크스의 종교관에 초점을 맞췄다.

종교(기독교)의 본질을 어떻게 보았는지, 그것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중심으로 마르크스의 생애와 사상을 이야기한다. 대학 시절 흘려보냈던 ‘불온서적’을 다시 읽으며 “마르크스 지성의 거대함과 프롤레타리아로 대표되는 인간에 대한 그의 사랑”에서 받은 충격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풀어간 글을 읽노라면 “지금은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


목차


머리말

제1장 카를 마르크스: 괴물, 천재 혹은 진정한 철학자
프리드리히 엥겔스
모제스 헤스
다시 엥겔스

제2장 출생, 교육 그리고 가족
아버지의 개종
두 스승
한 여인, 그리고 아이들

제3장 청년 헤겔주의자
헤겔을 만나다
박사클럽
프로메테우스
브루노 바우어

제4장 역사적 유물론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민중의 아편”
프롤레타리아 해방

제5장 《자본론》
1848년 혁명
런던
《자본론》
그 이후

맺는 말

에필로그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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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기


책속에서


P. 26 엥겔스는 1839년 11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는 슈트라우스의 책들이 “기독교 속의 가공의 것들”을 드러냈다면서, 다시 기독교로 돌아가는 것이 “어처구니없다”고 말했다. 엥겔스는 기독교 신앙을 버리면서 고향 바르멘을 지배하는 경건주의가 결국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도구가 되고 있음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접기
P. 36 헤스는 스피노자를 통해 사회주의적 인본주의의 길을 열었다. 신을 부정하고 유대교 가르침을 부정했다는 이유로 출교당한 17세기 네덜란드의 유대인(스피노자)과 할아버지에게 철저한 경전 교육을 받은 19세기 프로이센의 유대인(헤스)이 만나 인본주의에 기초한 초기 형태의 사회주의가 만들어진 것이다.
P. 55 마르크스의 부계는 트리어의 유서 깊은 랍비 가문이었다.…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큰아버지가 모두 랍비였다. 당시 프로이센, 특히 라인란트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랍비의 권위는 대단했다. 랍비는 유대교 의식을 집전하고 율법에 대한 해석권을 가진 종교 지도자였으며, 유대인 공동체 내부의 분쟁을 조정하고 판결하는 재판관이기도 했다.
P. 130 프랑스 점령으로 직업의 자유를 얻게 된 히르셸 마르크스는 변호사가 되었다.…1814년, 30대 후반의 나이에 트리어 고등법원 “법정 변론 변호사”가 되었다는 사실이다.…그리고 그해 말 그는 헨리 에테 프레스부르크와 결혼을 했다. 당시 유대인에게 가능한 모든 영예—랍비 가계, 성공한 상인, 그리고 전문직—가 결합된 결혼이었다. 카를 마르크스는 그 부부의 아홉 자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접기
P. 71 마르크스에게 사회주의를 처음 소개한 사람이 베스트팔렌이었다는 사실이다. 베스트팔렌은 생시몽을 “흠모”했고, 소년 마르크스와 긴 산책을 하며 그에게 생시몽의 유토피아 사회주의를 이야기해 주었다.
P. 76 그들은 카를이 본대학에서 베를린대학으로 전학하기 직전인 1836년 여름 조용히 약혼했다. …1843년 크로이츠나흐의 한 개신교회에서 간략한 결혼식을 올렸다. 프러시아 귀족과 유대인 평민의 관계가 애정을 넘어 결혼으로 이어지는 것이 그만큼 어려웠던 것이다.…아버지 루트비히 베스트팔렌 아래서 쌓은 계몽주의적이고 진보적인 교양이 예니로 하여금 유대인이요 급진적 청년이던 마르크스와 결혼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접기
P. 86 마르크스는 예수의 죽음을 ‘부자들’과 ‘가난한 목수’의 갈등, 즉 종교적이 아니라 계급투쟁적 관점에서 설명한 것이 틀림없다. “결국 우리는 기독교를 꽤 많이 용서해줄 수 있어. 왜냐하면 기독교는 우리에게 어린이를 숭배하는 법을 가르쳐주었으니까.” 마르크스는 아이들을 좋아했기에,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마십시오.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입니다”라고 했던 ‘가난한 목수’ 예수 또한 좋아했을 것이다. 접기
P. 97 마르크스의 김나지움 졸업논문 가운데는 “직업 선택에 관한 한 청년의 성찰”이라는 글이 있었다.…여기서 마르크스는…직업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한 원칙은 “인류의 복지”와 “우리 자신의 완성”이라고 보았다.
P. 116 청년 헤겔파는 이 논리를 더 발전시켜, 철학이 빛을 발하고 있으므로 그보다 낮은 단계인 종교는 불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들에게 종교는 인간의 자기의식을 억압하는 사회적·심리적 기제인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종교 비판 출발점이었다.
P. 121 박사학위 논문을 통해 마르크스는 이와 같은 헤겔의 철학을 이용하되 자유주의적-유물론적 접근을 했다. 헤겔과 달리 그는 각 사람의 자기의식의 절대성, 독립성, 개별성을 강조하였다. 마르크스는 그런 인식에 이르는 길을 열어준 에피쿠로스를 “그리스 계몽주의의 가장 위대한 대변자”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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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류대영 (지은이)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버지니아의 유니언신학교와 하버드대학교를 거쳐 밴더빌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성서 신학, 기독교 역사, 미국사를 주로 공부했다. 서양사학적 방법론으로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조명하는 일에 중점을 두면서, 《새로 쓴 한국 기독교의 역사》(2023), 《한국 기독교 역사의 재검토》(2019),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2009), 《개화기 조선과 미국 선교 사》(2004), 《북한 종교의 새로운 이해》(공저, 2002), 《초기 미국 선교사 연구》(2001), Protestant Christianity in Modern Korean History(Institute of the History of Christianity in Korea, 2026), A History of Protestantism in Korea(Routledge, 2022) 등의 책을 출간했다. 한동대에서 기독교, 역사, 고전을 가르치다 은퇴했다. 접기

최근작 : <다시, 마르크스를 읽어야 할 때>,<새로 쓴 미국 종교사>,<새로 쓴 한국 기독교의 역사> … 총 16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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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 했지만……
마르크스는 종교와 싸우지 않았다

왜, 지금 다시 마르크스인가
지은이는 책 말미의 ‘에필로그’에서 마르크스가 예견했던 자본주의 몰락은 이뤄지지 않았고, 그의 이론을 따랐던 모든 사회주의 체제 국가들이 실패한 현실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꿈은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한다. AI를 비롯한 과학기술의 발달로 생산수단이 갈수록 고도화하면서 인간 노동력은 더 비싸고 더 필요 없는 생산요소가 될 테지만 자본주의의 본질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즉 노동의 상품화는 인간 소외를 낳고, 노동과 생산수단의 분리는 부의 편중을 낳으며 생산수단의 발전은 이를 강화할 따름이라 예측한다. 그런 만큼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위해, ‘인류 복지’와 ‘자기 완성’을 추구했던 마르크스의 행적을 담은 이 책을 새겨 읽을 필요가 있다.

인간적 면모까지 담아낸 평전
이 책은 마르크스의 저술은 물론이고 그의 경제론, 종교론, 여성주의 등을 포함한 수십 종의 연구서까지 섭렵한 바탕 위에 쓰였다. 그의 두 ‘스승’, 아버지 하인리히 마르크스와 장인 루트비히 폰 베스트팔렌, 현실적으로도 큰 도움을 준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모제스 헤스의 영향과 인연으로 글을 시작한 이유다. 더해서 마르크스의 인간적 면모도 여실히 드러낸다. 마르크스가 평생 아버지 사진을 몸에 품고 있었다든가, “유럽 언어로 된 모든 시들”을 성실하게 열심히 읽었다든가 마르크스 사상의 원천으로 알려진 대영박물관에 때로는 “빚쟁이를 피하기” 위해서 간 적도 있다는 이야기가 그렇다. 그런가 하면 청소년 시절 김나지움 졸업논문에서 직업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한 원칙은 ‘인류의 복지’와 ‘자기 완성’이라고 했을 정도로 조숙한 천재의 면모도 들려준다.

종교 비판은 현실 극복을 위한 ‘싹’
물론 책의 핵심은 마르크스가 종교를 어떻게 보았는지 또는 어떻게 극복하려 했는지에 대한 분석이다. 이를 위해 헤겔과 포이어바흐 등을 거론하고, 청년 헤겔파와의 관계와 슈트랄라우에서의 각성을 꼼꼼히 살폈다. 지은이에 따르면 마르크스에게 종교는 민중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멋있게 보이도록 만드는 ‘후광’이었다. 즉, 그는 종교란 현실의 삶을 위무하기 위해 민중이 선택하여 사용하는 위안물이라 보았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그의 《헤겔 법철학 비판》에 등장하는 유명한 명제, “종교는 민중의 아편”은 역설적으로 마르크스가 종교의 현실적 효용을 인정한 말이기도 하다는 점을 짚어낸다. 결국 그의 대표작 《자본론》에서도 종교 자체는 더 이상 논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성서 구절은 종교를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 탐욕을 풍자하기 위해 사용되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즉, 마르크스는 종교와 싸운 사람이 아니라 민중이 ‘종교라는 아편’으로 고통을 달래야 하는 ‘현실’과 싸운 사람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접기


    

기독교 역사학자가 마르크스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자 쓴 글이다. 화염병 한번 제대로 들지 못한 비겁한 젊은 날을 속죄 해야 한다는 부채의식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586들이 이 나라를 붕괴시켰다. 왜? 이제 좀 편하게 커밍아웃 해도 될 것 같으니 마르크스를 들고 나오는건가? 실망스러울 뿐이다. 
Raffaelo 2026-07-31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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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마르크스를 읽어야 할 때: 요약과 평론>

<1. 서론: 역사가가 마르크스를 다시 호명한 이유>

종교사와 사상사를 넘나들며 종교와 권력의 결탁을 비판해 온 류대영 교수가 이번에는 카를 마르크스를 사유의 중심에 놓았다. 류대영의 <다시, 마르크스를 읽어야 할 때: 그가 선택한 인간 구원의 길>(푸른역사, 2026)은 20세기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박제되거나 왜곡된 마르크스의 사상을 '인간 해방과 구원'이라는 근원적 윤리 의식의 차원에서 다시 복원해 낸 저작이다. 저자는 마르크스를 소련식 전체주의나 맹목적 교조주의의 원흉으로 보는 시각, 혹은 건조한 경제학적 결정론자로 치부하는 통념을 거부한다. 대신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파괴된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고, 억압 없는 공동체를 모색했던 '세속적 구원자'로서의 청년 및 원전 마르크스의 실존적 면모를 탐구한다.

<2. 핵심 내용 요약>

<종교 비판의 재해석: '종교는 아편'의 심층> 마르크스의 유명한 명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에 대해 저자는 역사신학적 해석을 가한다. 마르크스가 비판한 대상은 억압받는 민중의 탄식 자체가 아니라, 민중의 비참한 현실을 은폐하고 불의한 지배 체제를 정당화하는 '제도 종교'였다. 마르크스에게 종교 비판은 환상을 걷어내고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세계를 변혁할 수 있도록 돕는 출발점이었다. 즉, 하늘로 떠밀려 올라간 구원의 희망을 역사의 대지 위로 끌어내리는 과정이 곧 마르크스주의적 기획의 첫걸음이었다.

<소외론과 인간성의 회복> 책의 전반부는 <1844년 경제학 철학 초고>를 중심으로 한 '소외(Alienation)' 개념에 집중한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노동자는 자신이 만든 생산물로부터, 생산 행위 자체로부터, 자신의 유적 본질로부터, 그리고 동료 인간으로부터 소외당한다. 노동이 자기실현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고역으로 전락할 때 인간성은 파괴된다. 저자는 마르크스가 추구했던 공산주의의 본령이 단순한 '물질의 평등한 분배'가 아니라, 노동을 통해 인간 본래의 창조성과 자유를 회복하는 '전인적 인간의 해방'이었음을 강조한다.

<자본의 운동과 신화의 해체> 중반부에서는 <자본론>의 분석 틀을 빌려, 자본주의가 어떻게 스스로를 자연법칙이자 영원불변의 질서로 둔갑시키는지를 짚어낸다. 상품 물신성(Fetishism) 속에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사물과 사물의 교환 관계로 왜곡되고, 화폐라는 우상이 삶의 의미를 지배하게 된다. 류대영은 이를 성서적 맥락에서의 '우상숭배' 비판과 비교하며, 자본의 맹목적 증식 운동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질식시키는 구조적 폭력임을 설명한다.

<21세기 다중 위기와 마르크스의 현재성> 후반부에서 저자는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극단적 불평등, 플랫폼 노동의 파편화, 그리고 기후 위기를 마르크스의 시각으로 진단한다. 무한 성장을 전제로 인간과 자연을 끝없이 착취하는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은 필연적으로 생태적 파국을 부른다. 마르크스가 구상한 인간 해방의 길은 물질적 탐욕을 숭배하는 사회에서 벗어나, 생태계와 인간이 조화롭게 공존하며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대적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이었음을 논증한다.

<3. 비판적 평론>

<사상사의 탈신화화와 인간적 복원> 이 책의 가장 큰 성취는 냉전적 증오와 공산주의식 독단에 갇혀 있던 마르크스를 '인간의 고통에 깊이 공명했던 윤리적 사상가'로 구출해 냈다는 점이다. 역사학자 특유의 꼼꼼한 문맥 읽기를 통해, 마르크스의 텍스트가 뿜어내는 예언자적 열정과 인간에 대한 연민을 선명하게 부각했다. 종교사를 연구해 온 저자의 이력은 마르크스의 소외론과 우상숭배 비판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독창적인 해석의 깊이를 더해 준다.

<신자유주의적 체념에 대한 통렬한 경종> "자본주의 외에 대안은 없다"는 체념이 지배하는 동시대 사회를 향해, 저자는 체제의 모순을 구조적으로 응시할 수 있는 비판적 사유의 도구로서 마르크스를 소환한다.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여가와 행복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초양극화와 고립으로 귀결되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효함을 설득력 있게 증명한다.

<한계와 아쉬움: 실천적 이행 경로의 모호함> 다만 윤리적·인본주의적 마르크스를 조명하는 데 방점을 찍다 보니,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 축인 '계급투쟁'과 '국가 권력 문제', 그리고 구체적인 체제 전환의 방법론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덜 부각되었다. 21세기의 고도화된 글로벌 금융 자본주의와 분절된 노동 환경 속에서, 마르크스가 제시한 연대와 공동체적 구원이 어떤 제도적 경로를 통해 현실화될 수 있는가에 대한 구체적 대안은 미완의 과제로 남는다.

<4. 결론>

<다시, 마르크스를 읽어야 할 때>는 이념의 낙인을 걷어내고 인간다운 삶의 본질을 되묻는 정직한 인문학적 고백이다.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구원'은 저편의 내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억압적인 체제를 직시하고 서로의 해방을 위해 연대하는 현실의 역사 속에 있었다. 자본의 우상이 인간의 존엄을 잠식해 가는 위기의 시대, 삶의 주체성을 되찾고자 고민하는 모든 이들에게 깊은 지적 성찰과 실천적 용기를 불어넣는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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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대영, 『다시, 마르크스를 읽어야 할 때: 그가 선택한 인간 구원의 길』 — 1,000단어 요약·평론>

류대영의 『다시, 마르크스를 읽어야 할 때』는 2026년 6월 푸른역사에서 나온 304쪽의 책이다. 제목만 보면 오늘날 자본주의 위기를 마르크스 경제학으로 분석하는 책처럼 보이지만 실제 주제는 훨씬 특이하다. 저자 자신이 밝히듯 원래 염두에 둔 제목은 <마르크스와 종교>, <마르크스와 인간 구원>, 심지어 <카를 마르크스: 종교적 평전>이었다. 즉 이 책은 『자본론』 해설서라기보다 종교사학자 류대영이 “마르크스는 종교를 왜 비판했고, 그 종교비판이 어떻게 인간해방의 사상으로 발전했는가”를 추적한 지적 평전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부제 <그가 선택한 인간 구원의 길>이 오히려 책의 본래 제목에 가깝다.

1. 마르크스에게 처음부터 있었던 것—‘인간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류대영은 마르크스를 처음부터 냉혹한 유물론자나 공산주의 혁명가로 등장시키지 않는다. 그의 가족, 교육, 스승, 친구들을 먼저 길게 다룬다. 책은 제1장 <카를 마르크스: 괴물, 천재 혹은 진정한 철학자>, 제2장 <출생, 교육 그리고 가족>, 제3장 <청년 헤겔주의자>, 제4장 <역사적 유물론>, 제5장 <『자본론』>이라는 비교적 단순한 구조를 취한다. 그 속에 엥겔스, 모제스 헤스, 헤겔, 포이어바흐, 브루노 바우어가 차례로 등장한다.

류대영이 흥미롭게 보는 것은 청소년 마르크스에게 이미 나타났던 윤리적 열망이다. 김나지움 졸업논문에서 마르크스는 직업 선택의 기준으로 개인적 성공보다 ‘인류의 복지’와 ‘자기완성’을 강조했다. 저자는 훗날 프롤레타리아 해방을 위해 일생을 소비한 혁명가 마르크스와 이 열일곱 살 청년 사이에 하나의 연속성을 본다.

따라서 류대영의 마르크스는 먼저 ‘인간의 고통’을 문제 삼은 사람이다. 공산주의는 그 문제에 대한 뒤늦은 해답이었다.

2. 기독교를 버렸다고 종교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마르크스의 아버지 하인리히는 유대교 가문 출신이었으나 프로이센의 사회적·직업적 제약 속에서 개신교로 개종했다. 마르크스 자신도 기독교 문화 안에서 성장했으나 베를린대학 시절 헤겔과 청년 헤겔학파를 만나면서 급속히 철학적 무신론으로 이동한다.

여기서 류대영에게 중요한 인물이 브루노 바우어와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다.

포이어바흐는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가장 이상적인 속성을 외부로 투사하여 신을 만들었다고 보았다. 인간이 자기 안의 사랑·정의·전능성 등을 신에게 넘겨버림으로써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다는 것이다.

젊은 마르크스는 여기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곧 포이어바흐보다 한 발 더 나아간다.

“왜 인간은 자신을 신에게 투사해야 하는가?”

마르크스의 관심은 여기서 종교 자체에서 종교를 필요하게 만드는 현실로 이동한다.

이 전환이 류대영 책 전체의 핵심이다.

3.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를 다시 읽는다

류대영이 가장 힘을 주어 바로잡는 것도 이 유명한 문장이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라고 하면 마르크스가 종교를 지배계급이 민중에게 먹이는 마약이라고 말했다고 이해한다.

류대영은 이것이 정확하지 않다고 본다.

1844년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에서 마르크스는 종교를 억압받는 인간의 탄식이자 “심장 없는 세상의 심장”이며 “영혼 없는 상황의 영혼”이라고 말한 다음 아편에 비유했다. 즉 민중에게 종교가 필요한 이유부터 물었다.

고통받는 사람이 아편으로 통증을 줄이듯 인간은 견디기 어려운 현실에서 종교를 통해 위안을 얻는다.

그러므로 류대영이 강조하는 차이는 중요하다.

<민중의 아편>과 <민중에게 먹이는 아편>은 같지 않다.

마르크스는 종교가 실제로 고통을 위로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문제는 그 위로가 고통을 만들어내는 현실 자체를 없애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따라서 마르크스에게 진짜 목표는 교회를 폐쇄하거나 신앙인을 설득해 무신론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더 이상 ‘아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4. 종교비판에서 사회비판으로

바로 여기서 마르크스는 청년 헤겔학파와 갈라진다.

류대영의 설명에 따르면 『라인신문』 편집자가 된 마르크스는 종교 자체를 공격하는 추상적 무신론에 점점 흥미를 잃었다. 그는 현실의 정치·경제 문제, 빈곤과 사유재산, 국가와 법의 문제로 이동했다. 『라인신문』이 “무신론이라는 꼬리표”를 가지고 노는 대신 현실에 대한 교육적 비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상적 전환이다.

<신은 존재하는가?>

에서

<왜 인간은 이렇게 비참하게 사는가?>

로 질문이 바뀐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의 답을 종교나 인간의 의식이 아니라 사회관계에서 찾으면서 역사적 유물론으로 나아간다.

마르크스에게 인간의 의식·사상·도덕·종교는 사회적 진공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 계급구조라는 구체적인 삶의 조건 속에서 만들어진다. 종교 역시 그러한 역사적 사회관계에서 나온다.

따라서 인간을 해방하려면 생각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인간을 억압하는 관계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5. ‘인간 구원’의 주체로서 프롤레타리아

그러면 누가 그 일을 할 것인가?

여기서 프롤레타리아가 등장한다.

류대영이 인용하는 마르크스의 표현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는 단순히 우연히 가난한 사람이 아니다. 사회구조에 의해 “인위적으로 궁핍해진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해방은 몇몇 빈민에게 자선을 베푸는 방식으로 해결될 수 없다. 그들을 만들어낸 사유재산과 생산관계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기독교적 구원과 마르크스적 구원의 차이가 가장 선명해진다.

기독교가 고통받는 인간에게 궁극적인 구원을 약속한다면 마르크스는 묻는다.

왜 구원을 저세상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가난, 착취, 굴종을 만들어내는 사회관계를 지금 여기에서 바꿀 수는 없는가?

따라서 마르크스에게 혁명은 단순한 정권교체가 아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없는 조건을 폐지하는 일이다.

류대영이 이 책에 <그가 선택한 인간 구원의 길>이라는 부제를 붙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6.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종교가 중심에서 사라지는 역설

1840년대 후반부터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함께 공산주의 운동을 조직하고 1848년 『공산당 선언』을 쓴다. 이후 런던 망명생활을 하면서 자본주의를 구조적으로 분석하여 『자본론』을 집필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기가 되면 종교가 마르크스의 중심적인 관심사에서 거의 사라진다는 점이다.

이것이 류대영 주장의 결정적인 증거다.

만약 마르크스의 평생 목표가 종교 제거였다면 『자본론』이야말로 종교 공격으로 가득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자본론』에서 성서는 오히려 서양인이 잘 아는 고전 텍스트로 사용되고, 때로는 성서의 도덕적 언어를 이용해 자본주의의 탐욕을 풍자한다. 류대영은 한 연구자의 평가를 빌려 ‘종교 제거’를 마르크스의 주요 목표라고 생각한다면 마르크스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마르크스는 종교비판을 끝내고 자본비판으로 이동한 것이다.

7. 류대영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자는 것인가?

아니다.

이 책은 소련식 사회주의를 옹호하지 않으며 마르크스의 예측이 모두 옳았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류대영 자신도 마르크스가 예상한 방식으로 자본주의가 붕괴하지 않았고,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적응·개혁하면서 살아남았다는 점을 인정한다. 종교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르크스를 다시 읽어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노동의 상품화 → 인간소외 → 잉여가치 → 부의 집중>이라는 마르크스의 문제제기가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성공하면 할수록 생산력은 커지지만 동시에 부와 권력이 집중될 가능성 역시 커진다. 류대영은 자본주의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존재하는 한 마르크스의 질문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평론: 종교사학자 류대영이 왜 마르크스를 썼는가>

내가 보기에 이 책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마르크스보다 오히려 <류대영이 마르크스를 읽는 방식>에 있다.

앞에서 살펴본 『새로 쓴 미국 종교사』와 『새로 쓴 한국 기독교의 역사』에서 류대영은 종교를 교리의 집합으로 보지 않았다. 종교가 실제 인간의 삶과 사회관계 속에서 무엇을 하는지를 물었다.

이 책에서도 똑같다.

그래서 그는 마르크스의 무신론보다 <왜 마르크스가 무신론을 지나쳐 갔는가>에 더 관심을 가진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통찰이다. 마르크스가 기독교에 던진 가장 어려운 질문은 “하나님이 존재하는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이것이다.

“당신들이 구원을 말하는 동안, 왜 인간은 지금 여기에서 굶주리고 착취당하고 인간 이하로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는 기독교인이 마르크스를 단순히 ‘무신론자’라고 배척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특히 류대영이 보여주는 마르크스는 인간의 고통을 냉정한 경제공식으로만 바라본 사람이 아니다. 인간이 인간으로부터,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자신의 인간적 가능성으로부터 소외되는 현실을 견딜 수 없었던 도덕적 사상가다.

<그러나 ‘인간 구원’이라는 표현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나는 동시에 류대영의 <인간 구원>이라는 독법이 매우 매력적이지만 조금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고 본다.

마르크스 자신은 종교적 구원을 세속적 정치 프로그램으로 단순히 옮겨놓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비판한 것 자체가 추상적인 ‘인간’이나 ‘구원’의 언어였다. 사회관계를 실제로 바꾸는 praxis, 즉 실천을 강조했다.

또 하나는 20세기 공산주의 국가들의 경험이다. 인간해방을 목표로 한 사상이 국가권력과 결합했을 때 당과 국가라는 새로운 억압기구를 낳았다는 역사적 사실은 피할 수 없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마르크스 자신>에 관한 책이지 <마르크스주의 정권의 역사>에 관한 책이므로 그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이것은 책의 잘못이라기보다 범위의 한계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선택한 인간 구원의 길”을 오늘 되살리려 한다면 반드시 물어야 한다.

<인간을 해방시키겠다는 확신이 어떻게 또 다른 인간 억압으로 변하는 것을 막을 것인가?>

이 질문까지 가야 마르크스 이후의 20세기를 통과한 독해가 된다.

<기독교와 마르크스가 갈라지는 지점보다 만나는 지점>

앞서 읽은 류대영의 세 책과 이번 책을 함께 놓으면 저자의 관심사가 의외로 일관적이다.

『새로 쓴 미국 종교사』에서는 기독교가 미국 사회 안에서 어떤 인간과 사회를 만들었는가를 묻고, 『개화기 조선과 미국 선교사』에서는 그 기독교가 조선에 들어와 무엇을 했는지 묻고, 『새로 쓴 한국 기독교의 역사』에서는 한국인이 그것을 어떻게 자기 종교로 만들었는지를 추적했다.

이번에는 반대편에서 묻는다.

<기독교의 구원으로 만족하지 못한 한 사람이 왜 세상을 실제로 바꾸는 인간해방의 길을 선택했는가?>

그래서 류대영의 마르크스는 기독교의 단순한 적이라기보다 기독교에 대한 매우 심각한 도전자로 읽힌다.

기독교는 인간의 고통을 보고 <사랑과 구원>을 말했다.

마르크스는 같은 고통을 보고 <그 고통을 만들어내는 관계를 없애라>고 말했다.

둘의 차이는 고통에 관심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의 차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이 책은 마르크스 입문서이면서 동시에 기독교인에게 상당히 불편하고 생산적인 책이라고 생각한다. 류대영이 마르크스를 다시 읽으면서 발견한 것은 ‘종교의 적 마르크스’가 아니라, 종교가 약속해온 인간 구원을 지상에서 실현하려고 평생을 건 <경쟁적 구원론자>에 가까운 마르크스다.

그리고 그것이 이 책의 가장 독창적인 성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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