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28
차경환 - 나무위키
2024-08-26
한명숙 등 후예들에게 보내는 경고 2012
한명숙 등 후예들에게 보내는 경고
기사입력 2012-02-14
사형(死刑)집행 기다리며 쓴 통혁당 주범(主犯)의 수기(手記)
한명숙 등 통혁당 후예들에 대한 경고 같다.
趙甲濟
▲ 태극기 위의 한명숙ⓒ
한명숙 민주당 대표의 언행(言行)에선 어떤 원한이 느껴진다.
대한민국과 미국과 부자들에 대한 적대감(敵對感) 같은 것들이다. 민주당이 집권하면 한미(韓美)FTA 협정을 일방적으로 폐기하겠다고 하는데 이는 한미(韓美)동맹을 해체, 핵우산을 치워버림으로써 핵무장한 북한정권 앞에서 조국이 벌거숭이로 노출되도록 하겠다는 생각이 없으면 하기 힘든 행동이다.
한명숙 부부는 1960년대에 북한노동당의 남한내 지하당인 통혁당에 가담, 옥살이를 하였다.
이 통혁당 사건의 주범(主犯)인 김질락은 사형되었는데, 죽기 전에 옥중에서 쓴 책이 있다.
그 책을 읽은 소감을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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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정권이 1960년대 후반 남한에 구축한 地下黨(지하당)인 통일혁명당의 창당멤버 중 한 사람인 김질락은 사형집행을 기다리면서 獄中(옥중)에서 手記(수기)-原(원)제목 <주암산>-를 썼다.
수기의 해설에 따르면 그는 1934년 영천에서 출생하였다. 1965년 11월 초 김종태, 이문규와 함께 지하당의 창당 발기인이 되었다. 그는 1967년 5월에 월북하여 북한노동당에 가입한 후 23일간 교육을 받고 돌아왔다. 1968년 정보부에 검거되었고, 7·4 남북 공동성명 직후인 1972년 7월15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수기(手記)는 슬프다. 그는 자신을 인생 낙오병이라면서 이 글을 碑文(비문)이라 하였다.
<영영 되찾을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을, 영원히 매장해버리려는 나의 이 작업에 대해 산 자들을 나를 고발할 것이요, 죽은 자들은 나를 증언할 것이다>는 머리글부터가 처연하다. 사형을 기다리면서 獄中(옥중)에서 쓴 이 글이 얼마나 자유의지를 반영하고 있는지 검증할 방법은 없다. 이 글을 쓰도록 허용한 당국의 뜻이 깔려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글을 읽고 나면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오늘에 더욱 가치 있는 자료라는 생각이 든다.
반공국가에서 反(반)국가단체인 북한 정권의 지령을 받아가며 숨어서 지하당을 만들고 목숨을 건 월북을 하고 거기서 공화국에 환멸을 느껴간 과정에서 웃음이나 밝은 면을 찾기는 불가능하다. 그는 이념전선의 뒤안길에서 보낸 너무나 절박하였던 삶을 너무나 성실하게 써놓았다. 아름다운 서울에서 자유와 번영을 누리면서 살고 있는 필자로선 ‘나의 시작은 나의 끝이었다’는 머리말의 제목부터 읽어 내려가기가 부담스러웠다.
특히 김질락 씨의 따님인 김수아 씨가 아버지의 머리글 뒤에 붙인 ‘아버지 나라도 지금 꽃이 피나요’란 글은 너무 슬퍼 아름다운 글이다.
<봄에 왔을 때는 아버지를 만난다는 기쁨이 있었는데 왠지 그날은 무섭고 답답했습니다. 구치소 앞마당의 비에 젖은 새까만 삼륜차를 보면서 벌써 눈물을 흘렸답니다. 그 삼륜차 안에는 棺(관)이 있었습니다. 멍석이 씌워져 빗발을 가리고 있던 아버지의 관. 하얀 바지저고리 차림의 아버지가 아니라 숨이 끊어진 屍身(시신)으로의 아버지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김수아 씨의 아버지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은 이 책에 溫氣(온기)를 준다. 그는 <아버지의 사상과 행동은 뒤로 하고서도 우리에게 주지 못한 아버지의 행복은 결코 값싸게 흥정하여 사들일 수도 없고 맛보고 싶은 때 마음대로 맛 볼 수도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안답니다>라면서 이렇게 다짐하였다.
<수아에게는 아직도 많은 날들이 주어져 있고 지난날의 상실은 오히려 소중하고 정성스럽게 가꾸어, 뼈를 주신 아버지의 薰氣(훈기)를 잃지 않으려합니다>
이 책은 김질락을 죽음의 길로 포섭해간 통일혁명당 사건의 주범 김종태(金鍾泰)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는 나의 셋째 삼촌이었다. 아버지의 5형제, 7남매 가운데 다섯째, 끝에서 둘째였다. 나보다는 여덟 살 손위인 삼촌이었고 맏이인 아버지보다는 열여덟 살이나 아래인 셋째 동생이었다>
김질락은 手記(수기)를 통하여 김종태의 인간됨을 많이 비판한다. 달변가, 자만가, 영웅심의 소유자라고 평했다. 日帝(일제)시절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공부를 하고 돌아와선 1946년 10·1 대구좌익폭동에 연루되어 한동안 고향에서 종적을 감춘 적도 있다고 했다. 동국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김종태는 仲兄(중형)인 김상도가 자유당 국회의원이 되자 그의 비서로서 정치에 입문하였다. 김질락은 이 활동가 삼촌의 영향권 안에 흡입되어간 사정을 설명하면서 <나에게 있어 그는 베어버릴 수 없는 그림자 같았고, 말할 수 없는 정신적 부담이었다>고 썼다.
김종태는 법과대학을 지망하는 조카를 위협하여 정치학과로 진학하도록 했고, 선거 때마다 청년조직을 맡게 하였으며, 득표율이 가장 낮은 지역에 배치, 골탕을 먹였다고 한다. 책을 읽어가면, 김질락은 좀 心弱(심약)한 사람이 아니었나 추측된다. 집안의 최고 엘리트인 김종태의 권위에 눌려 내키지 않으면서도 그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으리란 느낌이다.
<우리 사회의 대가족 제도가 얼마나 큰 결점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 나는 나 자신의 경우를 본보기로 내세우고 싶다. 어떤 짓궂은 사람이 있어 나한테 굳이 변명하기를 권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의 시작은 나의 끝이었다’(My beginning is my end)라고>
그가 삼촌에게 포섭되어 통일혁명당에 연루되는 과정은 아마 요사이도 나라 한 구석에서 일어나고 있을 전형적인 사례이다. 人情(인정)으로 인간관계를 만든 뒤 이념적으로 설득해가다가 결정적 순간에 선택을 강요하는 좌익들의 수법은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을 것이다. 김질락은 김종태에게 먼저 포섭된 양춘우가 자신을 설득하는 상황을 이렇게 썼다.
<그는 나와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자신이 걸어온 기구한 인생에 대해 말하면서 그와 그의 가족의 가난이 모두 국가의 책임이며, 그 궁극적인 요인은 모순된 제도에 있고, 이 모순이 제거되지 않는 한 밝은 앞날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스톤이 쓴 《A Hidden History of Korean War》의 일역판 《조선전쟁비사》를 인용하여 6ㆍ25는 북괴가 먼저 침략한 것이 아니라 한국이 먼저 쳐들어갔다고 우겼으며, 김일성이 진짜 김일성으로서 항일전쟁의 투쟁경력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핏대를 올렸다. 또한 박헌영이 미국의 간첩이었음이 사실이라는 등 실로 허망 된 얘기를 마구 털어놓았다.
일부 불쌍한 지식인들 가운데는 자기의 두뇌를 필요 이상으로 과신한 나머지 남보다 그것을 곧 자기의 것으로 흡수하고 그것은 곧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라고 맹신 또는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일반적으로 북괴간첩들이 내세우는 선전내용은 ① 6ㆍ25 침공의 부인 ② 박헌영의 간첩설 ③ 김일성 항일빨치산 투쟁사의 정당화 ④ 계급의식의 고취 ⑤ 反정부 투쟁에 대한 고무찬양 ⑥ 반미사상의 고취 등이다>
김종태는 통일혁명당을 만들 때 북한의 지령을 받고 있었지만 순진한 동조자에겐 ‘동등한 관계의 형제당’이라고 속였다.
“그 점에 대해선 조금도 걱정할 것 없습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정당의 목적과 성격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바이고 이북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한다면 우리가 하고자 하는 당은 이북의 노동당과는 대등한 위치에 있는 형제당의 관계에 있는 겁니다. 우리 당은 비단 이북의 노동당만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의 공산당과도 형제당이 되는 것이며 국제공산당의 일원으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북한노동당에 의하여 滅絶(멸절)된 남로당의 운명이 보여주듯이 남한의 종북(從北)세력은 절대로 북한 정권에 대하여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없다. 이는 힘의 원리이고, 권력의 법칙이다.
김질락은 평양에 가서 들은 이야기를 이렇게 전한다.
<내가 평양에 갔을 때만 해도 노동당 간부들은 인혁당이 어떻게 해서 노출되었는가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들이 역대 민비(민족주의비교연구회) 회장들에 대한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확인하고 3ㆍ24에서 6ㆍ3에 이르는 국내 혼란이 북괴와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는 확증을 나는 얻고 있었다.
통혁당에 관련하고 평양을 다녀온 후에야 나는 6ㆍ3사태의 진상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있었고,
그 시점에서 한일회담은 불가피했었다는 것이 비로소 납득이 갔다.
또한 북괴의 상황과 대조하여 한국의 좌표를 보다 정확하게 내다볼 수 있게 되었고, 국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 5ㆍ16혁명은 역사적인 필연의 논리였다는데 전적으로 수긍이 갔다. 만일 4ㆍ19 직후의 혼란기가 좀 더 계속되었더라면 한국은 오늘의 성장과 번영을 도저히 기대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다. 뒷날 알게 된 일이지만 종태 삼촌은 인혁당의 주요 인물들을 자기 산하에 거두려고 애썼고, 인혁당은 인혁당대로 종태 삼촌을 이용하려 했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서로들 반목하여 공작 일반의 수법에 있어서 각자 우월하다는 등의 논란이 있었다는 넌센스가 있다>
<6ㆍ25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책들이 충실한 자료를 근거하여 북괴의 남침이 국제적으로 공인된 기정사실임을 증언하고 있지만 나는 단 한마디로 6ㆍ25사변이 북괴의 불법남침에 의한 것임을 증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북괴가 6ㆍ25사변을 ‘조국해방전쟁’이라고 하는 語感(어감) 자체가 이미 전쟁도발을 의미하고 있음은 바보가 아닌 이상 금방 느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평양에 있는 북괴의 혁명박물관이란 곳을 들어가 보면 6ㆍ25에 대한 김일성의 5단계 전략은 사전에 이미 계획된 것으로 첫 남침에서부터 패주해서 후퇴한 사실까지 모두 그의 탁월한 전략에 의하여 성공적으로 완수된 것으로 자랑하고 있다. 그들 자신이 침략자였음을 노골적으로 시인하는 것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닌 것이다>
김질락의 수기를 읽으면 온통 이념과 관념 이야기이다. 그런데 결국은 이런 것들의 귀착점이 인간의 먹고 사는 문제란 고백을 스스로 하고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공산당의 공식적인 회합이나 선전, 선동의 슬로건으로 많이 사용되지만 어떠한 공산주의자도 숟가락을 가지고 밥을 떠먹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지고 밥을 퍼먹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마르크스나 엥겔스, 그리고 레닌이나 모택동을 자나 깨나 주워 섬기지만 그들이 실제로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사고나 언동은 인간의 본래적인 습성과 인간생활의 인습에서 결코 한 치도 더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여기 이북에서 남파된 무장간첩이 있다고 하자. 그가 생각하는 것은 조국통일이나 김일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는 지금 생사의 기로에서 자신의 생명을 방위하기에 온갖 본능적인 지혜와 교육에 의한 후천적 경험을 총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때 당과 사상을 떠나 있으며, 그를 얽어매고 있는 당의 유일한 끄나풀은 이북에 두고 온 부모와 처자에 대한 가련하고 애절한 미련뿐인 것이다>
김질락의 手記(수기)엔 당시 서울상대를 졸업하고 숙명여대 강사로 있던 신영복씨를 포섭해가는 과정이 자세히 실려 있다. 신영복씨가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장기복역을 하고 나온 뒤 유명인사가 되었기에 더 흥미롭게 읽었다.
이 책의 主무대는 음습한 폐쇄공간이다. 邪敎(사교)집단과 공산당의 공통점이 있다. 인간을 폐쇄공간으로 몰아넣고 오직 한 사람(또는 하나의 조직)을 숭배하도록 집중적으로 교육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꽉 막힌 상황에 몰려서 비교대상이 없으면 교육 받은 대로 한 점을 향하여 몰입,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이 책은 한번 들면 놓기 힘들다. 다가오는 죽음의 발자국 소리를 느끼면서 써내려간 心情(심정)이 전해 오기 때문이다. 生(생)을 걸고 증언한 책의 밀도가 대단하다. 김질락 씨는 상당한 문학적 재능까지 보여준다.
<나는 나의 사망을 매장해버리는 데 그치지 않고 나의 사망을 증거로 북괴를 고발하고 북괴로 말미암아 무서운 죽음의 길을 헤매고 있는 모든 가엾은 사람들에게 나를 증거하여 경고한다>
통일혁명당의 후예들인 오늘의 종북(從北)좌익세력에 보내는 충고로 들린다. 이 수기를 내게 된 경위를 설명하면서 편집자는 편집실을 찾은 김질락 씨 부인의 한 마디를 소개하였다.
“남편은 계속 서대문 구치소에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요즘도 아무리 서쪽 노을이 아름답다 해도 보고 싶지 않아요.”
편집자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떠나는 사람은 魂(혼)의 무게이지만, 남아 있는 사람은 몸과 혼, 온몸으로 지탱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썼다. 이념적으로 완전히 전향(轉向)하였고, 집행도 미뤄져 온 김질락을 7·4 공동성명 직후에 교수형에 처하게 된 정치적 배경에 대하여는 별도의 조사가 필요하겠다.
이 수기는, 38세에 죽은 김질락이 미리 써놓은 자신의 碑文(비문)이자 통일혁명당의 후예들인 오늘의 종북세력 앞으로 남긴 경고장이기도 할 것이다.
조갑제 조갑제닷컴대표
2024-08-25
1960년대 경제발전과 민족주의 -청맥 지식인 입장을 중심으로 | Baderdene Munkhzul - Academia.edu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청맥(靑脈)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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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맥(靑脈) 창간호
'청맥'(靑脈)이라는 민족주의 잡지가 그때 있었다.
문리대 선배인 김질락·이문규씨가 발행하고 송복·구동태·심재주 씨 등이 편집하는 새로 생긴 진보적 민족주의 잡지였다. 나중에는 그것이 평양에 의해 만들어진 남한 내의 '통일혁명당' 조직의 전위 기관지라는 사실이 그 당조직의 검거, 와해와 함께 밝혀져 꿈쩍 놀란 적이 있지만 그 무렵으로서는 논조가 좋았고 편집도 뛰어났다.
조동일 형은 청맥의 좋은 고정필자였는데 한번은 조형을 통해 청맥에서 내게 동학(東學)의 갑오혁명(甲午革命)을 주제(主題)로 한 한편의 장편 민족서사시를 써달라고 부탁해 왔다. 나는 그때 아무 계산도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그 말을 듣는 순간 우리 집안이 동학 집안이라는 것과 어렸을 때 전설처럼 들은 해남(海南)에서의 대전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영암 쪽에서 해남반도로 들어가려면 고개를 하나 넘는다. 그 고개가 우슬치(牛膝峙)인데, 우금치는 이미 다 알려진 장소이므로 우슬치라는 외진 시골에서 마지막 동학을 다루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 순식간에 내려진 것이다.
우슬치에서 관군과 일본의 연합군에 맞서던 2,000여명의 동학군이 전멸했는데, 지금도 고갯마루에 달이 뜨면 하얀 갈꽃들이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노래 노래 부른다는 외할아버지의 옛 이야기를 아주 어렸을 때 들은 적이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일제 통감부와 총독부 시절 해남에서 순검과 국민학교 선생님을 지내신 분이어서 해남이야기는 모두 다 환했다.
나는 그 전설을 판소리 형식의 서사구조 안에 담고자 했다. 내용과 형식의 일치라는 미학적 요구에서였다. 한 200여행을 써나갔을까. 당시 출간돼 나와 있던 유일한 동학 관련 서적인 최동희(崔東熙) 선생의 '동경대전'(東經大全)을 열심히 읽고 그 뜻을 새기며 판소리의 현대화를 시도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백방으로 몸부림쳐 봐도 아직은 역부족(力不足)이었다. 조형도 창작에 임해서는 그리 큰 도움을 못주었다. 나는 할 수 없이 훗날의 작업으로 미루고 200행의 서정시 20묶음 분량의 이름뿐인 그 서사시를 불태워버릴 수밖에 없었다.
동학(東學)의 사상적 특질을 철학적으로 이해함에서나 판소리의 현대 서사구조화의 미학적 기능에서나 나는 아직 걸음마에 불과했다. 청맥쪽에 포기를 전달했지만, 그 부채감이 내 평생(平生)의 그것으로 남게 되었음을 꿰뚫어본 사람은 조형뿐이다.
어찌 보면 '오적'(五賊)마저 바로 그때 시도했던 판소리 서사시를 위한 '에튀드'(試作으로서의 소품)에 불과하며 그 뒤에 나온 산문집 '밥'이나 '남녘땅 뱃노래' 등도 그때 실패한 동학사상 이해의 한 부분적 시도들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 숙제를 졸업 후 폐결핵 요양원에까지 갖고 들어갔다. 그것을 잘 아는 조형이 졸업 무렵 내게 알려준 말이 있다.
"지금 어디선가 창작기금을 받아 신동엽(申東曄)시인이 동학서사시를 쓰고 있어. 그 결과가 한 2년(年)뒤에는 나올 것 같으니 그 결과를 보고 나서 김형이 시도해도 늦지 않을 것 같군. 조금 기다려!"
나는 기다렸다.
요양원에 가서도 기다렸다.
그래.
끈질기게 기다렸다.
2년(年) 뒤던가? 조형이 '금강'(錦江)이라는 제목의 신동엽 서사시를 들고 서대문 역촌동(驛村洞) 언덕 위에 있는 시립 폐결핵요양원에 올라왔다.
"한번 보면 알겠지만 '대하'(大河)가 아니라 또랑물 스무개 묶어 놓은 거야. 김형이 다시 써야겠어!"
다시 써야 한다?
다시 써야 한다?
그때 조형은 두가지 매듭을 짓고 갔다.
그중 하나는 자신은 문학평론(文學評論)을 하지않고 대학에서 학문(學問)을 공부하겠다. 그렇게 해서 사회에 이바지하겠는 것. 또 다른 하나는 평론(評論)은 염무웅(廉武雄) 형에게 맡기고 나는 창작(創作)에만 전념(專念)해줬으면 좋겠다는 것. 그리고 자기는 대구(大邱)로 내려간다는 거였다.
병원생활 이후 한번 그의 계명대(啓明大) 시절에 대구(大邱)에 가 만난 적이 있으나 그 뒤 우리는 몇년만에 한 차례, 혹은 10년만에 겨우 한 두번 만날 정도로 멀어졌다. 그러나 우리의 우정(友情)과 우리의 토론 내용들과 합의(合義)는 사라진 것도 멀어진 것도 아니다. 멀리서도 작품이나 논문으로 서로를 확인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해남으로 낙향(落鄕)하기 직전 작가 황석영씨 등과 미리 해남에 들러 그곳 친구들의 대접을 받은 적이 있다. 우리가 좌정한 곳은 '구림'이라는 곳인데 대흥사(大興寺)와 진도(珍島) 그리고 해남 읍내(邑內)로의 세 갈래 길이 갈라지는 병풍산 (屛風山)자락에 수십채의 요릿집을 세워놓은 '거품식(式)' 관광단지였다.
한 방안에서 술을 마시는데 이상하게 심기(心氣)가 불편했다. 뿐만 아니라 벽지(壁紙)의 문양이나 창문의 깎음새 등이 흐릿한 불빛 아래 괴괴(怪怪)스럽기 그지 없었다. 그런데 그때 내가 바라본 황석영씨의 얼굴이 아주 기분나빠하는 표정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왜그래? 기분 안좋아?"
"형은 안그러우? 이상하지 않아? 이 집 좀 이상해!"
"그렇지? 우리 나갈까?"
"나갑시다. 당장!"
우리는 일어서 나왔다.
나오면서 해남 토박이 친구더러
"이 집 터, 여기 어떤 데야?"
해남병원의 김동섭(金東燮) 형과 해남 YMCA의 김성종(金聖鍾) 형이 거의 동시에 외치듯 대답했다.
"아, 동학당 2,000명이 몰살한 데 아니오!"
"아하! 그럼 여기가? 그럼 우슬치가 아니라 바로 여기 '구림'이…?"
동섭이 말을 이었다.
"여기 요릿집들 들어서기 이전에 텐트를 치든가 하면 꿈에 시커먼 농꾼들이 나타나 배고프다고, 밥 달라고 애원을 한다는구만요. 그라고는 코펠에 남은 밥이나 과자나 사과 같은 음식은 다 없어져 버린다는구만요!"
"아하! 여기로구나!"
요릿집을 나서는 우리 눈에 벌판 너머 밤하늘, 남쪽 하늘 시커먼 하늘에 무슨 빛줄기 같은 것이 휙 지나가는 듯했다.
혜성인가? 귀신인가?
[출처] : 김지하 시인 :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부> - 130.청맥(靑脈) / 프레시안, 2002. 9. 3.
[출처]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Ⅴ[130~160회]|작성자 ohyh45
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Ⅴ[130~160회]
ohyh45 ・ 2020. 5. 11.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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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질락: 어느 지식인의 죽음: - 글감 모음 - 마실에서 천사흘밤
김질락: 어느 지식인의 죽음:작성자마실가|
어느 지식인의 죽음: 김질락 옥중수기 (원제 주암산)
김질락, 행림서원(杏林書院), 2011.11.01, P. xvi +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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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어제 철학아카데미에서 이정원이 발표한 「거짓, 필연, 확률」이라는 논문에 의해서이다. 그 논문의 주제는 사실(현실)에 등장한 것이 진리(진솔)이라고 한다면, 그 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내포한 다양체를 서술구조로 인정하여 진위를 구별하는 것이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즉 다양체의 표면은 하나의 서술인 것 같은데, 내면의 여러 갈래들은 계열로서 지속되어 온 것은 거짓인가? 그렇지 않겠지. 그 다양체가 드러낸 집합 같은 표면은 n이며 하나의 사건이다. 그 하나는 이미 다질성을 내포하고 있다. 다양체가 하나로서 사실의 단면이 되는 것은 필연이라 할 수 있는데, 하나로 표현되기 전의 다수에서 보면, 그 하나는 우발(contingent)이다. 그런데 여러 계열들 중에서 한 계열의 점과 다른 계열의 점의 마주침은 우발이라기보다, 공중의 주사위가 어떤 하나의 수가 나올 수 있는 것은 우연(hasard)이다. 현실화에서 우발이 아니라 나올 수 있는 아자르(우연)는 거의 무한이다. 이 무한을 다 합하여 수렴할 수 있다면 n으로써 필연이다. 그럼에도 주사위에서 1이라는 숫자는 무한하게 던져 본다면 1/6이다. 이것은 여섯 번 중의 하나가 아니라, 천 번은 1이 그 다음 천 번은 2... 이하 등등, 이렇게 해서 1/6일 수도 있을 것 같지만, 꼭 6등분이 되는 것도 아니다. 실험적으로 해보면 각각이 동등하게 1/6이라는 것도 아닌데, 계산은 필연적으로 1/6이다. 그러면 6등분의 모두가 한꺼번에 등장하는 영원(n)은 일어날 수 있는 각 부분들의 확률이 완성되어서 각 등분은 부동이며 그 각각은 다자로써 동일율이 성립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원이다. 즉 전체(일자)의 부분들(개체들, 다자들)이 확률로 등장한다고 할 수 있다.
수학과 물리학에서는 영원이란 사영기하학의 점에 대비되는 성운과 같다. 들뢰즈가 고른평면이라 부른 것과 닮았다. 그런데 생물학에서 단세포들의 덩이인 볼복스가 그 모양을 한다. 그런데 진화론에서, 생물 종(種)에서는 덩이인 성운이 가우스의 종(鍾)모양일 것이다. 이 종(鍾), 쇠북 모양이 삶의 세상이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종모양의 중심에 있는 높은 마루(고원)가 세상의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 시대의 문제제기로서 사건을 드러낸 상태라는 점이다.
**이 논문의 주제는 “거짓의 힘”이다. 원문을 찾아보면 “이미지 속에서 거짓의 권능(la puissance du faux dans l'image)”이다. 여기서 이미지를 이루고 있는 것 속에서 현실화되지 못한 실재성이 논리적으로 또는 현실화되지 못했다고 거짓으로 취급 받을 수 있지만, 그 자체는 실재성으로서 권능을 지니고 있다. 이 권능은 현실에 등장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힘(능동력)을 발휘하고 있는 “기억 총체”이다. 이 기억 총체를 인식적으로 알아차리고 있지만 표현하지 못한(보이지 않은) “지각”이다. 이 침묵 속에 있는 것 또는 보이지 않지만(5관이 잘 표현해 줄 수 없지만) 실재하는 힘으로 있다. 유전과 기억은 이런 의미에서 잠재력(puissance)이며 번역상 권능이라 할 수 있다. 플라톤의 움직이지 않는 영원과 달리 ‘작동하는 권능’(puissance d'agir, 벩송의 용어)이며 들뢰즈가 영원이라고 또는 이념이라고 부르고 싶어 한다. 나는 이를 생명체로써 인간의 영혼이라 부르고 싶다. 소크라테스가 ‘이뭣꼬’를 추구한 것도 이 영혼이라는 생각이 든다.
논문은 말해지 않았거나 침묵의 힘이 있다고 한다. 한 수기에서 이야기가 거짓이라고 하는 것과 그것이 말하지 않는 침묵이 있다는 것은 다른 것(차히 différenciation)이 같다. 전자는 사실과 대비이다. 이에 비해 후자는 표현할 수 없거나 다 쓸 수 없는 경우에, 일반적으로 시에서 행간의 의미(signification)가 있듯이, 잠재해 있는 실재성이 있을 때 권능은 여전히 발휘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어제도 이제도 아니고, 아제(미래)의 이야기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n+1(아제)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은 어제(n-1)이지, 이제(n)의 사실(진리)이 아니라는 역설이 나온다. 왜 퀴니코스학파와 스토아학파가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반박하려 했는가 하는 점에서 보면, 플라톤은 이제(n)로서 간주된 것을 부동의 필연으로 삼아서 이데아를 영원화 하려 했다는 것이다. 고른 평면에 선을 그어 골을 팠는데, 그 골 하나만을 사실로 받아들여 영원화 했다는 오류를 범한 것이 된다. (50OMJ)
***김질락의 어느 지식인의 죽음: 김질락 옥중수기 (원제 주암산)(1991초, 2011재). 이 책은 두 동지(김종태, 이문규)가 사형당하고(1969) 난 뒤, 1972년에 그 자신도 사형 당하기 전까지 쓴 것으로 되어있으나, 죽음과 교환한 수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수기자 본인이 느끼고 있기도 한 것 같다. /
◎ 김질락(1934-1972) 년표
1934년 6월 4일 경북 영천군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인 김종태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자랐다.
1953(열아홉)년 서울대학교 문리대에 입학하여 학내 비밀서클 활동을 하였다
1957(스물셋)년 학교를 졸업하고 「경남매일신문사」 논설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63(스물아홉)년 결혼...
1964(서른)년, 김종태의 권유로 상경하여 김진환, 이문규 등과 「청맥」을 발간하였으며 이 잡지의 주간을 지냈다. 동시에 사회주의 이론 서적을 학습하고, 혁명운동에 관한 교육을 받으며 논의를 펴나갔다.
1965(서른하나)년 11월 초, 김종태, 이문규 등과 통일혁명당 창당을 결의하고 이의 발기인이 되었으며,
1966(서른둘)년 2월 후배인 이진영, 신영복과 함께 민족해방전선을 구성하였다.
1967(서른셋)년에 월북하여(5월 5일~5월 28일) 평양에서 약 20일간 머물면서 노동당에 입당하고 교양을 받았다.
1968(서른넷)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된 후, 수기 형식의 「어느 지식인의 죽음(원제: 주암산)」을 집필하였다.
1972(서른여덟)년 7ㆍ4 남북공동성명 직후인 1972년 7월 15일 사형되었다. [책의 앞 날개 안쪽의 기록이다]
어느 지식인의 죽음: 김질락 옥중수기 (원제 주암산)(1991초, 2011재):
# 김질락 옥중수기 어느 지식인의 죽음 : v-viii
기억 속에 잠들어 있던 이 책을 재발간 하기까지 도움을 주신 행림서원 이갑섭 사장님과 이 책의 배포를 흔쾌히 맡아주신 조갑제닷컴에 감사드리며 제작을 위하여 비용을 후원해주신 많은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함을 전합니다. (vii-viii)
[글쓴이 이름이 없고, 사이버안보감시단블루아이즈(http://cafe.naver.com/iblueeyes)라 되어 있다.]
# 사형집행을 기다리면서 쓴 從北[종북]세력 앞 경고장 ix-xvi
- 조갑제 [그는 이 책을 반공자료로서 쓰기 위해 머릿 글을 쓴 셈이다. 하락도 없이 .. 허락받을 수도 없지만 말이다. 이 책이 비매품이라 되어 있어서 가격도 없다. 그런데 종로 도서관에 들어와 있다. (50OMJ) ]
[내부 제목] 어느 지식인의 죽음 1
▪차례 3
•머리말: 나의 시작은 나의 끝이었다 5-6
- 김질락
•아버지 나라도 지금 꽃이 피나요 7-10
- 아버지의 딸 김수아 드림
•역사의 진실이라는 무게를 느끼며 12-14
- 편집자 씀
여름이 오려 하던 4개월 전 어느 날 한 중년 여인이 조용히 편집실의 문을 열었다. 내가 걸어 다닐 수 있을 때 남편을 정리하고 싶다는 여인의 소박한 소망... (13) [1991년 이라면 부인 55세 정도 때?... 원고를 맡긴 뒤 이야기가 있을 것인데... ]
- 월간 청맥 주간 김질락 17-101
- 통일혁명당 창당 준비 과정 102-159
- 이진영, 신영복 등과 함께 민족해방전선 구성
“... 이집트의 낫세르가 그랬고,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가 그랬으며, 쿠바의 카스트로가 그렇게 성공했습니다. 지금 세계는 미소의 지배시대에서 벗어나 다원화의 시대로 이행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조국을 통일할 수 있고 우리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할 수가 있습니다. 모든 일은 순서가 있는 법이니 우리는 가장 쉬운 데서부터 일을 착수하여 점차 어려운 투쟁으로 발전해 나가야 합니다. 나는 결코 인혁당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나대로 혁명의 방법론을 갖고 있습니다. 미스터 신은 나하고 같이 일해 볼 생각이 없으시오?” / “말씀 잘 들었습니다. 저도 인혁당에 관련했던 사람들을 몇사람 알고 있는데 그들은 모두지 돼먹지 못했더군요. 너무 교조주의적이라고 할까. 요즘 세상엔 그런 방법이 통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저는 곧 군대를 입대하게 됩니다. 단기간의 훈련만 차치면 육사교관으로 임명됩니다. ...” (106)
1923 서도원(徐道源 1923-1975) 인혁당, 대구매일 신문기자. ‘경락연구회’(經洛硏究會)
1924 도예종(都禮鍾 1924-1975) 인혁당, 삼화토건 회장, ‘경락연구회’(經洛硏究會)
1926 김종태(1926-1969 사형)-통일혁명당 위원장, 경북 영천군 출생
나는 신영복을 향해 조직을 함에 있어서 너무 덤벼서는 안된다고 수차에 걸쳐 당부하고, 양보다는 질을 더 중요시해야 하며, 당원은 항상 합법적인 인물들이 둘러 싸여 자신을 은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정간 은폐의 원칙을 철저히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28) [참조 155쪽, 258쪽]
- 첫 번째 입북 기도 160-191
-운명의 날 4월 4일
아들인 영아는 그 때 돌지난 지 7개월이었고, 딸인 수아는 낳은 지 겨우 넉달 밖에 안된 때라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던 때였다. (174)
- 마침내 이북행 보트를 타다 192-224
- 공해로 해서 산동반도에 들러 북상행
[월북 과정 이야기]
- 주암산에서의 20일: 서울과 평양은 너무 멀다 225-291
- 서울과 평양은 너무 멀다.
[평양체류 이야기가 이 책 끝가지 이다.]
- 1970년대의 결정적 시기론 292-
- 당이 우선인 사회
- 대동강은 흐른다 403-447
- 나의 가족들에게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한다.
(4:14, 50PKC)
김질락, [어느 지식인의 죽음> 2 좌익사상과.. : 네이버블로그
1960년대 <청맥> 지식인 집단의 탈식민 민족주의 담론과 문화전략 - earticle
2024-08-22
주진오 - 나무위키
주진오
중앙고등학교(66회)와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근대사 전공으로 1984년 사학 석사 학위[3], 1995년 사학 박사 학위[4]를 각각 취득했다.
석사 학위 취득 후 1987년 3월, 30세의 젊은 나이에 상명대학교 교양학부 교수에 부임했고, 이어 1992년 3월 사학과[5] 교수로 전입해 2022년 2월 정년퇴임했다.
그 사이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집필자협의회 공동대표(2011),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근현대사 분과 간사, 상명대학교 평생교육원장, 상명대학교 인문사회과학대학장, 콩고민주공화국 국립박물관설립 컨소시엄 총괄 책임자, 서울특별시교육청 역사교육위원장 등을 역임했고, 2017년 11월 1일부터 2021년 5월 6일까지 제3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장을 역임했다.
박근혜 정부에서 역사 교과용도서를 국정화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그는 새정치민주연합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특별위원회와 연대하며 反국정화 교과서 활동을 했다. 이 당시 그야말로 국정화 교과서 반대진영을 대표하는 학자였는데, 이때 반대편에는 주진오 교수 모교의 명예교수이자, 뉴라이트 성향의 정치사회학자인 송복 교수였다.[6]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은 주진오 교수의 역사관을 문제삼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전원책, 조갑제 등의 보수논객들도 일제히 반대의 뜻을 밝혔다. 국민의당은 '낙하산 인사'라고 비판하였다.
박물관장 시절에는 제주 4.3 사건과 관련된 전시에서 남조선로동당 포고문을 크게 내걸어 논란을 야기했고 상설전시관에서는 한강의 기적에 대한 내용을 대폭 축소하고 촛불집회 내용을 추가하는 연구용역을 발주하기도 했다. 또한 촛불집회 취재로 유명한 친민주당성향 미디어몽구의 영상 전편을 구매하려고 추진하였다. 그러나 박물관 직원들의 반대, 법적인 하자 등으로 그가 추진했던 정책들은 진행되지 못했다. 또 이명박 대통령이 쓴 표석을 하역장에 치워뒀다가 해당 표석에 대한 취재가 시작되자 수장고에 옮겨놓았다. #
- 위 논란의 연장선 상에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재직 당시에도 전시 서술로 논란을 빚은 적이 있다. 해당 문서 참조
- 대한민국역사박물관장 재직시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표지석을 이명박 대통령의 글씨라 하여 뽑아서 하역장에 방치하는 행위를 하였고, 오랜 기간 후 수장고로 옮겨 편향된 의식에 의한 행위로 인식됨. 박물관 주변 복수의 관계자는 "주진오 당시 관장이 보기 싫다는 이유로 '표석을 치우라'는 지시를 내렸던 것"이라고 조선일보 기자에게 밝혔다. 또 한 관장 재직 당시인 2018년 친여 매체인 '미디어몽구'의 영상을 박물관이 구입할 것을 지시했다가 내부 반발로 실패한 일도 있었다. (근거 : 조선일보 2022.9.7 기사 "쓰레기 속 방치됐던 'MB표석', 3년 반 만에 제자리 돌아온다")
2024-08-19
민족 민주 정부 수립위해 목적의식적으로 투쟁한 남민전 < 민플러스
민족 민주 정부 수립위해 목적의식적으로 투쟁한 남민전
기자명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승인 2022.10.1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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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열사 신향식 40주기에 부쳐서
10월 8일. 마석 모란공원에서 ‘통일열사 신향식 40주기 및 남민전 동지 합동추모제’가 개최되었다.
1976년 2월 29일 박정희 군사파쇼정권에 맞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을 발기한 김병권, 이재문, 신향식 선생의 묘소가 그동안 지방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것을 2019년 3월 30일 마석 모란공원으로 이장했다.
그리고 43년 만에 발기 3인과 남민전 동지 그리고 통일열사 이재문 40주기를 공개적으로 작년 11월 20일 합동추도식을 거행하였다.
사형을 구형받고 옥중 투쟁 중 옥사한 이재문 선생은 주로 대구 경북 지역 운동의 중심이었기에 경북대학교 민주동문회, 대구경북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대구경북지역대학민주동문(우)회 협의회, 대구경북추모연대, 여정남기념사업회 등이 주최하였다.
올해는 남민전 사건으로 유일하게 사형 집행된, 아니 국가가 살인한 신향식 선생의 40주기를 보다 연대범위를 넓혀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 사월혁명회, 서울대학교민주동문회,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한국진보연대가 주최하고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가 후원하여 추모식을 개최하였다.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위한 ‘10월 유신’과 긴급 조치 시대
1975년 4월 30일 베트남의 패망은 박정희의 ‘10월 유신’ 영구 집권을 위한 결정적 구실을 주었다. 연일 북의 남침 규탄 대회를 개최하면서 이 분위기를 교묘하게 이용해 민주화 시위를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렸다.
1974년 1월 8일에 긴급조치 1호를 시작으로 모든 긴급조치의 결정판이자 산천이 떠는 법률인 긴급조치 9호가 1975년 5월 13일 공표되었다.
긴급조치 9호는 헌법에 대한 논의 자체를 금지하고 일체의 유언비어 날조 및 헌법 비방 행위의 금지, 학생 집회 및 시위의 금지한 제3의 쿠데타이자 민주정치를 박살내는 핵폭탄이었다.
긴급조치 9호는 거의 5년, 날수는 1천6백69일(4년 6개월)이나 지속되면서 8백여 명의 구속자를 낳는 공안 탄압의 대기록을 세웠다.
긴급조치 9호의 대상은 물론 대학이었다.
75년 이후의 교내 시위는 학교 곳곳의 경찰의 감시 눈초리로 대개 10분 이내에 끝났다.
짧으면 몇 십초, 잘해야 5분을 넘기기 어려운 시위다운 시위를 하지 못하고 무지막지하게 머리채를 잡혀 끌려가는 시절이었다.
그리고 민주 통일인사들에게는 소위 인혁당 사건을 만들어 북과 연결시켜 처형하고 장기 옥살이 시키는 등 너무도 엄혹한 상황이었다.
유신군사독재정권의 말기적 상황으로 일인지배체재가 강고해 통상적 방법으로 도저히 박정희 독재를 무너뜨릴 수 없었다.
특히 대학의 산발적 데모 그리고 명망가 지식인 중심의 평화적 시위나 유인물 만들어 살포하는 민주화투쟁으로는 더욱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6‧3한일협정반대 투쟁 당시 최초로 화염병이 나왔지만, 남민전은 그것 이상의 무장투쟁까지 준비해야했다.
남민전은 이런 엄혹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몸을 희생하는 그야말로 해방공간의 투쟁처럼 혁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예비군훈련장 무기 획득과 학교, 버스정류장, 건물 옥상 삐라살포 그리고 투쟁 자금 조달을 위해 보석상과 당시 민중 공분 대상 중 하나인 악덕 기업 동아건설 회장 자택 강탈 등 남민전의 반유신 투쟁은 민중들에게 오히려 희망을 주었다.
이것은 소위 인혁당 사건을 조작하여 국가 살인하는 박정희 유신체제를 평화적인 시위나 유인물 몇 장으로는 타도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물론 1976년 2월 남민전 산하 조직인 민주국국학생연명은 신민당사에서 농성 중이던 YH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가혹한 진압과 이 과정에서 사망한 김경숙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횃불 투쟁’으로 명명된 유인물을 배포 하는 학생들의 민주화 투쟁도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10월 4일 김영삼의 제명 결의안이 통과되던 엄중한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10월 9일, 10월 16일(이후 박정희 사후 11월 13일) 남민전 사건을 발표하면서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전위대로서 폭력에 의해 적화통일을 기도해 온 대규모 반국가 조직체’, ‘자생적 공산혁명 세력’으로 몰아 부치며 84명을 검거한다.
민전과 민자통 이후 최대 전선 조직
남민전은 해방공간의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과 4월혁명 공간의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이후의 최대 전선 조직으로 볼 수 있다.
남민전을 발기했던 당시 세분 선생의 걸어온 길은 인혁당, 전략당, 통혁당 차이가 있지만 이것을 남민전으로 통합하여 박정희 군사파쇼정권 타도 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한 것이다.
이재문(李在汶) 선생은 경북 의성에서 출생하여 4월혁명 공간에는 통일민주청년동맹 활동과 민족일보 기자로, 1964년 1차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으로 구속 이후 계속해서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대구경북지부 활동,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되지만 1차, 2차 인혁당에 연루가 된 상태였다.
김병권(金秉權) 선생은 대구에서 출생하여 해방공간에는 대구 대중일보 기자로, 4월혁명 공간에는 사회당 경북도당 상임위원으로 활동하다 1968년 남조선해방전략당(전략당) 사건에 연루돼 징역살고 나와 1975년 사회안전법 신고를 거부하며 수배 중이었다.
신향식(申香植) 선생은 전남 고흥에서 출생하여 서울대 졸업 후, 1965년 동아출판사 제작부에 취업하여 임금투쟁과 노조결성 그리고 학사주점 활동을 하였다.
1968년 통일혁명당에 사건으로 구속 되어 1972년 만기출소 후, 1975년 사회안전법 발효에 맞서 신고를 거부하며 지하투쟁에 돌입하였다.
세분 선생은 비밀유지를 위해 1976년 2월 29일. 4년마다 한 번 2월에 29일을 두어 하루를 늘리는 윤년에 남민전을 발기한다. 비록 발기인은 셋밖에 안되지만 과거의 어떤 운동보다 각계각층이 결합하여 목표를 분명히 했다.
남민전 강령 제1조는 “미일을 비롯한 국제제국주의의 일체의 식민지체제와 그들의 앞잡이인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족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연합정권을 수립한다”고 되어 있다.
즉 당시 남민전이 지향하는 것은 이 땅을 억누르고 있는 제국주의가 기본척결대상이고 그 다음에 그를 대리하는 박정희 정권을 타도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특히 민족적이고 민주적인 정부를 새롭게 수립해야 한다는 목적의식적으로 한 전선운동이었다.
김남주 시인의 “전사 2”
남민전 동지 김남주 시인의 신향식 선생 “전사 2” 마지막 구절로 추모의 결의를 대신한다.
오늘 밤 또 하나의 별이
인간의 대지 위에 떨어졌다
그는 알고 있었다
투쟁의 길에서
자기 또한 죽어갈 것이라는 것을
그 죽음이 결코
헛되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렇다 그가 흘린 피 한 방울 한 방울은
어머니인 조국의 대지에 스며들어
언젠가 어느 날엔가는
자유의 나무는 열매를 맺게 될 것이며
해방된 미래의 자식들은
그 열매를 따먹으면서
그가 흘린 피에 대해서 눈물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쑥스럽게 부끄럽게
이야기 할 것이다
만성 신향식 선생(당시 48세) 약력
1934년 12월 1일 전남 고흥군에서 부 신춘우 님과 모 정정옥 님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
1958년 2월 전남 고흥군 두원초등하교, 고흥중학교를 거쳐 서울 경복고등학교 졸업
1964년 3월 서울대학교 문리대 철학과 졸업.
1964년 4월 노동청 산재보험과 서기로 근무
1965년 5월 동아출판사 제작부에 취업하여 임금투쟁과 노조 결성
≪학사주점≫과 ≪60년대 학사회≫ 상무 간사로 활동
1966년 재경고흥군 학사모임인 ≪삼산친목회≫를 결성
1968년 7월 ≪학사주점≫ 봉사부장, 총무부장 역임
1968년 8월 ≪통일혁명당≫사건으로 구속, 징역 3년 6월을 선고 받음
1972년 2월 25일 대구교도소에서 비전향 만기출소.
1975년 7월 박정희 군사독재의 사회안전법 발효에 맞서 간고한 지하투쟁 돌입.
1976년 2월 29일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를 결성, 중앙위원으로 활동.
1980년 12월 23일 법정투쟁을 다했으나 대법원 상고심에서 법정최고형인 사형 확정.
1982년 10월 8일 정오 12시 서울구치소 사형 집행.
유족으로 부인 이계영(2016년 12월 21일 별세) 장남 원호, 따님 선미, 차남 유호가 있음.
관련기사
“우리의 힘으로 인류의 진보를 향한 새 시대를 열어나가자!”
조국은 당신을 기억합니다
민주화와 역사정의 실현의 선도자 고 괴산(槐山) 전기호 교수 추모의 밤
준비되지 않는 싸움은 진다
단지 이승만과 박근혜만 끌어내렸지, 국회는 그대로였다
한글은 민족어, 민족어 없는 민족은 없다
퇴진 마중물의 깃발이 올랐다
제주 4‧3항쟁을 모욕하지마라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 하느냐!
우크라이나 전쟁과 제3세계의 부상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
노동자여! 심판을 넘어 퇴진으로 총단결하라!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webmaster@minplus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