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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13
공유경제의 바탕이 된 이종만의 대동사상
2021-11-04
[박종인의 땅의 歷史] “내 꿈은 조선 농촌을 갱생시키는 것이외다” - 조선일보
[박종인의 땅의 歷史] “내 꿈은 조선 농촌을 갱생시키는 것이외다”
279. 친일파로 낙인찍힌 사회사업가 이종만

서울 종로구 견지동 NH농협 종로지점 건물은 1926년 ‘조선일보’ 사옥으로 지어졌다가 ‘조선중앙일보’ 사옥(1933), 1937년 이후에는 ‘대동광업주식회사’ 본사 사무실로 사용됐다. 대동광업 사장 이종만은 ‘소작농 없는 자작농의 조선’을 꿈꾸며 함남 영평금광 매각자본 155만원으로 농촌과 교육 갱생 사업을 벌였다. 해방 후 그는 금광이 있는 북한으로 넘어갔다. 그는 지금 ‘민족문제연구소’에 의해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다. /박종인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1.11.03 03:00
* 유튜브 https://youtu.be/nDFb3tEgEOQ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수수께끼의 인물 이종만
‘남들은 이종만씨를 마치 조선의 로스차일드요, 카네기라고 부른다. 어떤 이는 천만장자의 몸이면서 다 찢어진 양복에 각반을 치고 손수 굴 속에 들어가 갱부(坑夫)들과 괭이 잡고 일도 하며 어떤 때는 5전짜리 전차를 타고 동대문 밖 빈민굴에 나타나 100원도 주고 1000원도 주고 돌아온다 하여 몬테크리스토 백작 모양으로 상상하는 이도 있다. 세상 여러 십만 명의 주목을 끌고 있는 이종만씨란 대체 어떠한 인물이며 그의 사업관, 황금관은 어떠한고 필자 또한 궁금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삼천리’ 11권7호 1939년 6월호)
‘창랑객(滄浪客)’이라는 식민시대 잡지 ‘삼천리’ 기자는 1939년 이종만이라는 인물을 빈민굴에 적선하는 몬테크리스토 백작에 비유하며 그를 인터뷰했다. 이종만은 식민 조선 3대 금광왕으로 불리는 금광 갑부다.
그런데 이종만은 대한민국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돼 있다. 내용은 이렇다. ‘이종만: 일본명 쓰키시로 쇼마(月城鍾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북지위문품대’로 1000원을 기부했다. 1938년 10월 정주경찰서에 ‘황군위문금’을 냈다. 1939년 11월 조선총독부가 전 조선 유림을 동원해 조직한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을 맡았다. 1940년 7월호 ‘삼천리’에 게재된 <지원병사 제군에게>라는 칼럼에 격려의 글을 실었다.’(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발췌) 친일과 반일이 세상사를 재단하는 칼날로 변해가는 이 시대, 이종만 혹은 쓰키지로 쇼마의 일생을 보기로 한다.

이종만(1886~1977)
[박종인의 땅의 歷史] 279. 친일파로 낙인찍힌 사회사업가 이종만
견지동 111번지 붉은벽돌집
삼천리 기자 창랑객이 이종만을 인터뷰한 곳은 서울 ‘대동광업주식회사’ 사무실이다. 사무실 주소는 경성 견지초(堅志町) 111번지다. 거기에는 붉은 2층 건물이 있고 현판에는 금색으로 회사 이름을 새겨넣었다. 그 건물은 ‘실로 조선일보가 앉았을 적에는 이상재 옹을 위시해 안재홍, 신석우, 유진태 등 한다 하는 거인(巨人)들이 드나들며 안팎으로 사회 일을 지휘하던 자리요, 훗날 중앙일보가 되면서 여운형, 최선익 등이 또한 천하를 논하던 곳’이다.(‘삼천리’, 앞 글)
1926년 ‘조선일보’가 네 번째 사옥으로 만든 건물이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는 여운형이 운영하던 ‘조선중앙일보’ 사옥으로 쓰인 건물이다. ‘조선중앙일보’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 때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휴간한 뒤 1937년 폐간됐다.
그 이후 해방 때까지 바로 이 이종만이 운영하는 ‘대동광업주식회사’가 건물을 인수해 사용했다. 매각 비용은 9만8000원이었다.(’삼천리’ 10권10호 1938년 10월호) 지금도 남아 있는 이 건물은 농협 건물로 사용 중이다.
광산업자 이종만의 오뚝이 일생
저 거인들이 거쳐 간 건물을 인수한 광산업자 이종만의 인생은 이러했다. 이종만은 갑신정변 2년 뒤인 1886년 반농반어의 마을인 울산 대현면 용잠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종만은 ‘실로 언어도단인 병마절도사의 전횡을 그저 “양반은 지엄한 존재라 여기고 억울한 삶을 계속하던” 고향 사람들’을 기억한다.(1940년 4월 3일 ‘동아일보’)
우리나라 나이 스무 살이 된 1905년 이후 이종만은 대실패 연속의 인생을 살았다. 러일전쟁 군수품인 ‘빨간약’ 재료로 미역이 쓰인다고 해서 부산에 미역 도매상을 차렸더니 전쟁이 끝나버렸다. 그물을 사고 어선을 사서 명태잡이를 시작했다가 전복 사고로 명태를 다 수장시켰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무기 원료인 중석(텅스텐) 가격이 폭등하면서 강원도 양구에 중석광을 차렸다. 5만원 가까이 벌었다. 1914년 당시 서울 중견 목공 일급이 88전이니 월 26일을 일한다고 가정할 경우 월수입은 약 23원이다.(김낙년 등 4명, ‘한국의 장기통계’ 1, 해남, 2018, p191)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0년 대한민국 임금노동자 평균 월급은 318만원이다. 5만원을 임금 기준으로 환산하면 현재 가치는 69억원이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면서 중석값이 폭락했다. 빚을 갚고 또 거지가 됐다.
이어 목재상을 차렸더니 홍수에 목재들이 다 사라져버렸다.(이상 1937년 6월 10일 ‘조선일보’) 최창학, 방응모 같은 금광으로 성공한 사람이 잇따라 탄생하자 1928년 이종만 또한 함남 명태동에서 금광 개발에 착수했다. 이번에는 성공했다. 그런데 1931년 겨울 동업자 사기극에 말려 한푼도 건지지 못하고 쫓겨났다. 가진 돈은 27전이었다.
실패밖에 모르는 사업가 이종만은 또 금광업에 매달렸다. 1934년 이종만은 채산성 부족으로 방치된 함북 영평금광을 일본인에게서 450원에 사들였다. 2년 뒤 노다지가 터졌다. 1936년 한 해에만 40만원어치가 넘는 금이 채굴됐다. 그 돈으로 이종만은 역시 함남에 있는 장진금광 개발권을 사들였다. 한 해 채금량 140만원이 넘었다. 마침내 금광왕이라는 딱지가 붙게 된 것이다.
실패한 사업가의 상상초월 반전
위에 인용한 ‘삼천리’ 기자는 인터뷰 기사를 이렇게 끝맺었다. ‘말이 이에 미치매 나는 심중(心中)에 울었다. 왜 이리 이 사람을 늦게 만났냐고, 이분의 손목을 붓잡고 오래도록 울고 십헛다.’
왜 울고 싶었을까. 노다지가 터지고 딱 1년 뒤인 1937년 이종만이 그 영평금광을 155만원에 팔아치운 것이다.
그리고 2년 뒤 찾아간 삼천리 기자 창랑객에게 이 천하갑부가 이리 말한 것이다. “이 사장의 자리란 것이 실상은 본의가 아닙니다. 나는 저 갱부들과 같이 굴속에 들어가 그네와 같이 일하고 그네를 가르치고 하는 것이 더 마음이 편안하고 또 그가 소원이여요.”
인터뷰 2년 전인 1937년 5월 11일 이종만은 영평금광을 155만원에 매각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다음 날 경성에 있는 ‘천진루’라는 허름한 여관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또 다른 회사를 설립하겠다는 이종만이 설명회를 여는 날이었다. 새 회사 이름은 ‘대동(大同) 농촌사’다. 이종만이 입을 열었다. “조선 인구 팔 할이 농사에 종사하는 만큼 조선인 생활은 농촌에 달렸고 농민의 빈궁은 가장 우리의 관심할 바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10여 년 동안 광업에 종사하다가 금전을 잡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조선 농촌 갱생을 위하여 미력이나마 드려보자고 계획을 했습니다.”(1937년 5월 13일 ‘조선일보’)
가진 돈은 모두 조선을 위해
450원짜리 금광을 155만원에 팔아치운 졸부 입에서 놀라운 발표가 줄줄 튀어나왔다. ‘155만원 가운데 50만원으로 ‘대동농촌사’를 만든다. 조선 6개 지역에 집단농장을 만들어 경작자에게 영구히 경작권을 준다. 매년 수확량의 삼 할을 의무금으로 징수해 농지 추가 매입 비용으로 쓰고, 30년 뒤에는 의무금을 폐지한다. 교육, 위생, 문화 문제를 부락민이 자치한다. 교육시설을 만들어 농촌의 중추인 청년을 양성하겠다.’ 조선 농촌의 암(癌)인 소작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이다.(이상 ‘조선일보’ 위 날짜 등) 이종만은 농장용 토지 매입을 위해 100만원을 추가로 투입하겠다고 했다. 그러니까 영평금광을 판 돈 전액을 농촌 갱생에 쓰겠다는 발표였다. 1937년 150만원은 임금 기준으로 2020년 현재 757억원이다.(위 김낙년, 통계청 자료) 기자회견 이틀 뒤 이종만은 영평금광으로 가서 전 직원과 인근 마을에 12만원을 기부하며 석별식을 치렀다. 그달 28일 이종만은 고향에 보통학교 설립기금으로 1만5000원을 기부했다.

‘대동광업주식회사’를 설립한 이종만을 ‘문화발전에 기대가 다대(多大)한’ 사업가로 소개한 1937년 6월 10일자 ‘조선일보’. /조선일보db
또 일주일이 지난 6월 6일 이종만은 ‘대동광업주식회사’ 설립을 공식 발표했다. 자본금 300만원으로 장진금광을 비롯한 소유 광산을 운영할 이 회사는 광부 전원이 조합원이며, 이들은 임금은 물론 조합원으로 이익 배당을 받게 된다고 했다.(1937년 6월 9일 ‘조선일보’)
이종만은 더 이상 노다지 졸부가 아니었다. 그는 ‘문화발전에 기대가 다대(多大)한’ 사업가였고(6월 10일 ‘조선일보’), ‘가진 땅이 157만평에 불과한 것이 (조선 농촌이) 매우 섭섭해할 독지가’(1937년 9월 17일 ‘동아일보’)였다.
대동농촌사는 함남 영흥, 경기 연천, 평남 평원과 경남 하동에 집단농장 다섯 군데를 만들었다. 총면적은 750정보(225만평)였다. 이름은 농장이 아니라 ‘농촌’이었다. 쌀을 생산하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마을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이 가운데 ‘하동농촌’은 1940년 정식으로 이종만과 농민들 사이에 ‘자작농 계약’이 맺어졌다.(방기중, ‘일제말기 대동사업체의 경제자립운동과 이념’, 한국사연구 95호, 한국사연구회, 1996)
“같이 잘살 길을 찾고자”
이종만은 이어 1937년 10월 신사참배를 거부해 폐교 위기에 처한 평양 숭실학교를 120만원에 인수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계획이 불발되자 이종만은 이듬해 평양에 ‘대동공전’을 설립했다. 이미 수십 차례 사업에 실패하는 동안에도 고향과 경성에 학교를 설립해 아이들을 가르친 이종만이었다.
어느덧 이종만은 대동광업주식회사와 대동농촌사와 대동출판사와 대동공전을 운영하는 대사업가가 돼 있었다. 그런데 이종만은 “2000만~3000만원이면 대학 하나 만들 수 있을 텐데 공업과 농업과 광업을 포함한 종합대학교는 꼭 만들고 싶다”고 했다. 왜? “다 같이 잘살 길을 찾자는 일 이외에는 없소이다.”(‘삼천리’ 맨 앞 글)
삼천리 기자 창랑객이 인터뷰 기사 말미에 “손목을 붓잡고 울고 십헛다”라고 쓴 이유가 짐작이 가고 남는다.
이종만의 월북과 ‘친일인명사전’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로 금광업에 대한 총독부 지원이 중단됐다. 금광을 모체로 한 이종만의 ‘대동’ 사업체 또한 심한 자금난에 빠졌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총독부 기부 활동을 시작한 이종만은 1940년대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석하는 등 소위 ‘친일 활동’을 벌이다 해방을 맞았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김구와 함께 참가했다 돌아온 이종만은 그해 가을 다시 북으로 가 돌아오지 않았다. 미완으로 남아 있는 장진금광이 함경도에 있었다. 이후 이종만은 북한 정부 광업부 고문이 되었고, 1977년 죽었다. 그가 만든 대동공전 후신이 김책공과대학이다. 이종만은 지금 ‘자본가’로 유일하게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대한민국 ‘민족문제연구소’는 그를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한 자’로 규정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했다. 험한 시대를 살아간 한 기업가 이야기 끝.
2020-12-10
Sejin Pak - [외조부 이종만 이야기] (2) - 작년에 이종만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블로그에 올리지...
Sejin Pak
10 December 2017 ·
[외조부 이종만 이야기] (2)
- 작년에 이종만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블로그에 올리지 않고 페북에 올렸더니, 어디 있는지를 몰라, 드려다 보지 않아 다 잊어 버렸다. 이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블로그에 올려 분류를 해 놓아야 하겠다.
- 일제시대의 기업가 이종만의 해방 후의, 북으로 가기 이전의 행적이 자본가측 경영자가 아니라 노동자측 경영자였던 것을 알게된다. 물론 해방 이전에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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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에서 시작
https://www.facebook.com/sejin.pak8/posts/10155863988942296


Sejin Pak
9 December 2016
[외조부 이종만 이야기] 미군정하의 노사관계에서 보이는 기업인 이종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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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 1946년 미 군정하의 삼척탄광에서의 스트라이크에 노동자 (16,000명의 규모의 기업!)들은 군정의 대변인은 반대하고 사장 이종만을 지지했다고 한다. 노동자들과 사장이 한 편이다. 무슨 이야기일까? 스트라이크는 군정에 대한 스트라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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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냉전체제와 생산의 정치
조순경 (지은이)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1995-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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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제1장 서론
1. 쟁점들
2. 방법론
제2장 미군정의 노동정책
1. 미국의 대한정책(對韓政策): 점령 초기
2. 준비된 무정책(無政策)과 노동 문제
(1) 미국의 한반도 점령 정책과 군정의 준비
(2) 미군정의 딜레마와 정치적 결과
(3) 점령 초기 노동운동에 대한 구상
3. 노동정책의 형성과 노동운동에 대한 미군정의 대응
(1) 점령 초기 노동정책의 수립
(2) 미군정의 대응과 노동정책의 성격
제3장 국가 기구의 노동과정
1. 노동력 구성의 다양성
(1) 노동부의 인력 부족
(2) 전문 인력의 부족
(3) 식민 관리의 재등용
(4) 군정 관리들의 이데올로기
2. 노동 조건
(1) 임금
(2) 노동환경
3. 노동력의 수급 구조
(1) 노동력의 높은 이동성
(2) 채용의 무원칙성
(3) 고용 불안정
제4장 생산의 사회적 구조
1. 해방과 산업의 축소 재생산
2. 축소 재생산의 원인: 식민지 유산과 국가정책
(1) 원료 및 생산 설비의 부족
(2) 기술 및 숙련 노동자의 부족
(3) 생산 설비의 부적합성과 유연성의 부족
(4) 미군정의 산업 정책과 기업가의 생산 기피
(5) 관리인 제도의 문제: 관리인의 무능과 모리배적 행각
제5장 노동운동의 조건과 성격
1. 노동계급의 구성과 의식
(1) 해방과 노동력의 재편성
(2) 전자본주의적(前資本主義的) 부문과 불완전 고용
(3) 임금 노동의 성격과 구성
2. 노동계급의 저항
(1) 공장 관리 운동
(2) 관리인 배척 운동
(3) 경영 참여 투쟁
(4) 반미(飯米) 획득 투쟁
(5) 경영 합리화와 저항
제6장 노동운동의 쇠퇴
1. 전평의 이념과 성격: 보편 정치와 국가 사회주의의 추구
(1) 전평의 형성과 대중성의 결여
(2) 정치 조직으로서의 전평
(3) 인민 정권 획득 수단으로서의 공장 관리 운동과 산업 건설 운동
(4) 전평과 국가 사회주의의 추구
2. 노동력의 선택적 배제
(1) 해고의 실태
(2) 해고의 이유와 방식
(3) 해고에 대한 대응
(4) 노동력의 재구성: 선택적 배제의 과정
3. 물리적 통제와 노총 세력의 확대
(1) 물리적 통제의 배경과 제도화
(2) 노동운동의 폭력화와 대중으로부터의 고립
4. 가부장제와 노동운동
5. 자본의 성격
(1) 관리인의 고용 불안정
(2) 교섭 대상의 모호성
6. '감정적 민족주의'와 반공 이데올로기의 형성
제7장 결론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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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조순경
저자파일
최근작 : <노동의 유연화와 가부장제>,<간접차별의 이론과 여성노동의 현실>,<젠더노동과 간접차별> … 총 6종 (모두보기)
소개 :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미국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y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이화여대 여성학과에 재직 중이다. 여성주의 방법론, 여성 노동론을 주제로 강의.연구해 오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냉전체제와 생산의 정치>, <노동과 페미니즘>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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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 [외조부 이종만 이야기] 일제하의 "진보적 조합주의자" 이종만의 "대동사업"과 "대동사회"의...
[외조부 이종만 이야기] 일제하의 "진보적 조합주의자" 이종만의
"대동사업"과 "대동사회"의 비전은 해방 후에 어디서 계승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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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근대 한국의 민족주의 경제사상> 방기중 저. (2010)
제3부, 제2장, "일제 말기 대동사업체의 경제자립운동과 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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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어의 마직막 부분:
"이와 같이 전시체제하 대동사업체의 경제자립론과 그 사상적 변용은, 일제하 자본주의근대화론과 사회주의혁명론 두 계통의 경제사상과 교류하며 나름대로 '신국가건설'의 전망을 추구했던 진보적 민족주의 계열이 전시국가독점주의의 통제경제를 경험하면서 도달한 사상적 모색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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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사업체의 경험은 해방 후 북한에서도 남한에서도 "중간파 노선"에서 활용되었다.
"대동사업체의 경제자립론과 해방 후 사업체 주도층의 국가건설 활동은 일제하 진보적 민족주의 경제사상이 해방 후 새로운 민족적 조건 속에서 어떠한 경제이념 국가건설사상으로 재구성되는가 하는, 요컨데 중간파 경제사상의 역사적 맥락과 남북분단의 사상사적 다면을 살필 수 있는 하나의 재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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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
- 방기중 교수에 의하면, 대동사업체의 경험은 일제하에 전시체제기에 "농민적 입장의 민족주의 경제자립운동"이 해방 후에 이떻게 계승되었는가를 살펴보는데 요긴한 케이스 스터디 감이라고 한다. 계승이라면, 남한에서 보다, 북한에서 더 많이 되었을 것 같다.
" 이종만은 분단 이듬해인 1949년 6월 김일성이 평양에서 소집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에 조선산업건설협회 위원장 자격으로 참석했다."





9Naran Jung, 정혜경 and 7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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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관 홈페이지 알자고:::aljago.com
2020-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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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지은이)시대정신200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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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양장본
408쪽
135*195mm
571g
ISBN : 9788990959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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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김일성종합대학 총장(14년), 최고인민회의 의장(11년), 조선노동당 비서(18년) 등 무려 43년간 북한의 주요 요직에 있으면서 누린 최고의 명예와 권위, 수만 명에 이를 제자, 무엇보다 사랑하는 부인과 자식, 손자손녀 등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남한으로 온 황장엽의 회고록.
김일성의 집안 관계, 김일성의 생각의 변화 과정, 김정일의 권력 독점 과정과 그 방법 등에 관한 기술, 황씨 부부가 김일성의 전처 소생과 후처 소생 사이의 불화 속에서 어느 쪽도 편들지 않으려고 애썼던 이야기 등을 담았다.
중소 이데올로기 분쟁 때 사회주의 나라들의 격한 논쟁과 편 가르기, 사회주의 지도자들의 낮은 이론 수준과 권모술수, 북한의 대응 등을 목격자의 증언으로 들려주는 부분은 역사를 피부로 느끼게 한다.
목차
1 식민지 조국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의 추억 / 뒤늦은 학교생활 / 평양상업학교 진학 / 일본에서의 고학 / 조국으로의 송환과 징용
2 해방된 조국과 입당
해방의 기쁨과 고민 / 조선노동당에 입당 / 마르크스와의 만남
3 이상사회와 비극의 씨앗
모스크바종합대학 철학연구원 / 사랑과 이별의 고통 / 비참한 조국의 현실 / 숙청의 회오리
4 마르크스주의에서 주체사상으로
중앙당 비서실 / 김일성 일인 독재체제 확립 /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의문 / 주체사상의 싹
5. 시련 그리고 김정일
5·25 교시 / 영원한 봄 / 신임을 회복하다 / 후계자 김정일
6. 권력의 중심에서
굵직굵직한 감투 / 반대세력의 시기 / 무소불위의 조직부 / 권력과 탐욕 / 중국의 개혁 개방 / 신중치 못한 방문
7. 작은 나보다 큰 나를 위해
북한의 암울한 장래 / 사회주의 붕괴와 회의 / 다시 권력의 중심으로 / 김일성의 사망 / 무더기 죽음의 시작 / 마지막 건의 / 수령절대주의의 종말 / 형언할 수 없는 갈등
8. 한국에서의 10년
예기치 못한 사태 / 한국의 눈부신 발전 / 한국사회의 약점 그리고 민주주의 / 인간중심철학 / 인류의 발전 방향 / 김대중과 햇볕정책 / 한국의 진보와 보수 / 자주정신과 창조적 지혜
접기
책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생이별을 한 이 아픈 가슴을 이겨내며 내가 얼마나 더 목숨을 부지할지는 알 수 없으나, 여생은 오직 민족을 위하여 바칠 생각이오. 나 개인의 생명보다는 가족의 생명이 더 귀중하고 가족의 생명보다는 민족의 생명이 더 귀중하며 한 민족의 생명보다는 전 인류의 생명이 더 귀중하다는 내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만 알아... 더보기
저자 및 역자소개
황장엽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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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남도 강동에서 태어나 24세가 되던 해에 조선로동당에 입당하고, 42세의 나이로 북한의 최고 대학인 김일성종합대학의 총장 자리에 올라 14년간 역임했다. 그 후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11년간 지내고, 조선노동당 과학교육담당비서, 주체사상연구소 소장을 거쳐 조선노동당 국제담당비서 등 최고위급 요직을 두루 거쳤다. 또한 김일성의 이론 담당 서기와 김정일의 개인 교사 등을 하며 김일성 부자의 지근거리에서 그들을 수십 년간 지켜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사랑하는 가족과 동료, 사회적 명예를 뒤로하고 1997년 대한민국으로 망명했다. 2010년 10월 10일 논현동 자택에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했다.
* 주요 저서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개인의 생명보다 귀중한 민족의 생명』
『어둠의 편이 된 햇볕은 어둠을 밝힐 수 없다』
『맑스주의와 인간중심철학Ⅰ- 인생관』
『맑스주의와 인간중심철학Ⅱ- 사회역사관』
『맑스주의와 인간중심철학Ⅲ - 세계관』
『인간중심철학의 몇 가지 문제』
『인생관』
『세계민주화와 인류의 마지막 전쟁』(2002년, 도서출판 시대정신)
『황장엽의 대전략』(2003년, 월간조선사)
『민주주의정치철학』(2005년, 도서출판 시대정신)
『북한의 진실과 허위』(2006년, 도서출판 시대정신)
『변증법적 전략전술론』(2006년, 도서출판 시대정신)
『황장엽 회고록』(2006년, 도서출판 시대정신)
『청년들을 위한 철학이야기』(2007년, 도서출판 시대정신)
『현 정치정세와 민주주의적 당면과업』(2007년, 도서출판 시대정신)
『북한민주화와 민주주의적 전략』(2008년, 도서출판 시대정신) 접기
최근작 : <황장엽 회고록>,<사회역사관>,<세계관> … 총 30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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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 사상 그 자체 황장엽
주체사상 그 자체로서 북한의 최고 핵심 권력인물중의 한 사람의 회고록이다.
1970년부터는 북한 권력의 최중심에 서서 반김일성, 반김정일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북한 권력 투쟁의 실제적인 흐름을 이해하는 흥미로운 자료이기도 하고,
한국에서 극보수세력 등과 연합하여 반김정일 연대를 형성하는
권력투쟁가, 정치가로의 일면이 이해되기도 한다.
모든 회고록과 마찬가지로 자기 미화의 욕구가 보이고,
특히 김정일과 연합하여 중국의 개혁 개방을 반대하던 문건을 작성하던 일 등에 대한
내용은 전혀 기술되지 않고 있다.
한국극보수세력의 논리와의 연결부분의 황장엽의 실질된 모습인지, 한국에서의 생존전략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국을 배신하면서 구구한 변명에서는 황장엽에게 측은지심이 들게 한다.
북한 최고 권력가를 통하여 북한의 주먹구구식 권력 관계를 조금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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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의눈 2006-11-25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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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장엽이라는 한 괴물적 사상가의 죽음
한 때 맑스-레닌주의를 공부했고, 김일성주체사상의 정립가이자, 탈북자 가운데 최고의 지식인이었으며, 가장 거물이자, 망명한 이후 북한체제의 가장 강력한 비판자였던 황장엽 씨가 어제 오전 사망했다. 아래의 기사를 요약해서 본다면, 그는 남북한 분단체제가 만들어낸 괴물에 다름 아니다. 그는 적어도 맑스-레닌주의의 이름아래 묶일 수 있는 지식인들이 역사와 권력이라는 거대한 운무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변형시켜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볼 때 그는 남북한 분단체제의 역사가 만들어낸 아이러니를 체화한 괴물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주체사상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이자, 자유민주주의-시장자본주의의 가장 강력한 비판자[물론 그것은 그가 북한의 지배엘리트에 속한 것이어서 그랬을 것이다.]는 말년에 그 체제를 가장 비열한 방식으로 옹호하는 자들의 나팔수 노릇[물론 직접적인 옹호자는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최종적으로 볼 때, 그것의 간접적 동의자 역할은 하였을지도 모른다.]을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진보의 이름을 가장한 얼치기 종북주의자들[여기엔 한때 그가 만들어낸 주체사상의 세례를 받은 자들도 포함된다.]은 그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기도 할 것이다.
* 경향신문(2010.10.10)
황장엽은 누구… 분단 비극의 또다른 아이콘
주체사상 입안한 북 최고 엘리트… 남쪽으로 망명해 ‘극과 극’의 삶
북한 주체사상을 정립한 이론가에서 북한을 가장 매섭게 비난하는 반북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10일 서울 논현동 자택에서 숨진 황장엽 전 북한 조선노동당 비서가 걸어온 길은 분단된 한반도의 현실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또 하나의 풍경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인 1923년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태어났다. 일제에 강제징용돼 강원도 삼척탄광에서 노역하던 중 해방을 맞아 평양으로 돌아가 교사 생활을 했다. 그후 모스크바대학 유학 중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을 본격 공부한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북한에 최적화해 주체사상을 이론화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황장엽 회고록> (2006)에 따르면 주체사상은 '김일성의 사상'이다. 그가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이 된 65년부터 체계화하기 시작한 주체사상은 김일성 주석이 항일 독립투쟁 때부터 얘기했던 '자기혁명은 자기가 해야 하고, 남의 원조를 받지 않고 자기갱생을 해야 한다'는 소박한 사고에 바탕해 있다. 80년에 후계자로 공식화된 김정일은 김 주석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그 후광을 이어받고자 주체사상을 널리 퍼뜨렸다. 당시 남한 내 변혁 운동가들도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이 공로로 그는 59년 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에 오른 뒤 72년부터 11년간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수행하고, 84년엔 당 국제담당 비서 겸 조국평화통일위 부위원장의 중책을 맡았다.
주체사상의 배후세력으로 남한 내에도 유명했던 황장엽이 97년 2월12일 탈북, 남한에 망명했다는 사실은 남북한 모두에 큰 사건이었다. 그가 김덕홍 전 북한 여광무역 사장과 함께 베이징 주재 한국 총영사관에 망명을 신청한 뒤 필리핀을 거쳐 서울에 도착하자, 남한 진보진영에는 소련 붕괴 이후 또 한 번의 '쓰나미'가 몰려왔다. 베일에 싸여 있던 북한 정권의 비사가 그의 입에서 쏟아졌다. 황장엽은 분단 이후 지금까지 최고위급 탈북자로 남아 있다. 그는 북한 사정을 가장 잘 알기에, 가장 무섭게 북한의 치부를 공격할 수 있는 인물로 통했다.
반대로 북한 내에서 그는 '조국'이 가장 어려울 때 떠나간 '배신자'였다. 돈 착복, 여자문제 등이 원인이 돼 권력핵심부의 눈 밖에 나고 탈북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미확인 얘기도 흘러나왔다. 탈북후 13년간 그는 암살 위협에 시달리며 안가에 머물러야 했다. 남한의 학계 일각에서도 그는 "과학적 분석보다 감정적인 측면이 앞선다"는 평가도 나왔다. "김일성은 그를 대접해줬지만, 김정일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탈북 동기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남북 모두에도 안착하지 못한 경계인 성격이 있는 것이다.
북한 내 잘나가던 권력 엘리트였던 그가 탈북을 결심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은 8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과 90년대 중반 북한 내 대기근이었다. 그의 회고록 곳곳에는 "나는 중국이 개방정책으로 전환하는 걸 본 사람이었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북한의 권력에는 더 이상 기대를 걸지 않았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그는 김일성 생전에도 중국식 개혁·개방의 길을 가는 것이 옳다는 식의 의견을 폈지만 김일성 부자는 남한과 수교하고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도입한 중국을 마뜩지 않아 했다. 김일성 사후에도 김정일이 중국식 개혁·개방 노선을 취하지 않을 것임이 분명해지자 그는 결단을 내렸다.
그가 숨을 거둔 순간, 그에게서 주체사상을 배웠고 또 한때 많이 의존했던 김정일은 자신의 3남 정은을 북한 조선노동당 창건 65주년 주석단에 공식 등장시켰다. 그 사이 황장엽이 정립한 '주체사상'은 역사가 됐고 그 자리를 '선군정치'가 메웠다. 그로선 지도 이론을 만들었던 당 창건일에 세상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운명을 겪었다.
* 한겨레(2010.10.10)
황장엽, 주체사상 대부에서 북 비판 선봉자로 ‘극과 극 삶’
[한겨레] 김일성 이론서기→김정일 개인교사…북 권력 측근
1997년 "평화통일 기여" 망명 뒤 '북 민주화' 깃발
10일 숨진 황장엽씨는 1997년 4월 남쪽으로 온 73살 이전까지는 '주체사상의 대부'였고, 남쪽에 온 뒤론 '북한민주화운동의 좌장'이란 극명하게 대조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황장엽씨는 북한 유일사상체계를 체계화한 '주체사상의 대부'이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개인교사로 알려져 있다.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 모스크바종합대학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을 공부한 황씨는 1958년 1월 초부터 1965년 4월까지 김일성 주석의 이론서기로 일했다. 65년부터는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으로 김일성 주석 자녀(김정일 국방위원장 등)의 교육을 책임졌고, 60년대 이후 주체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 문제로 김 주석을 수시로 만났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각 나라의 구체적 실정에 맞게 적용해야" 하며 "사대주의를 반대하고 자주적 관점을 지켜야 한다"는 김일성 주석의 시각에 자신이 고민해오던 '인간 중심의 철학'을 더해 이를 '주체사상'이란 이론틀로 만드는 작업을 했다.
그는 1972년부터 11년 동안 남쪽 국회의장 격인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지냈다. 황씨는 1979년부터는 당중앙위원회 주체사상 담당비서, 과학교육 담당비서, 국제사업 담당비서 등을 맡아 북한 권력의 핵심이자 최고위층의 측근으로 지냈다. 요약하자면 14년간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11년간 최고인민회의 의장, 18년간 조선노동당 비서로 일한 북쪽의 대표적 지식인이자 권력핵심인사로, 역대 탈북자 가운데 최고위 인사이기도 하다.
이런 황장엽씨가 국제세미나 참석차 일본 방문 뒤 귀국을 위해 베이징 북한대사관에 머물던 97년 2월12일 베이징 주재 한국총영사관에 망명을 신청하자, 남북한은 물론 국제사회에 큰 파문이 일었다. 황씨의 망명 신청 다음날 북한 외교부 대변인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전제한 뒤 "만일 그가 북경의 한국대사관에 있다면 납치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쪽 외교부는 황씨의 망명 의사가 확인되자 "변절자여 갈 테면 가라"는 성명(97년 2월17일)을 발표했다. 당시 북한은 김일성 주석 사망 뒤 식량난 등으로 이른바 '고난의 행군' 중이었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황씨 같은 고위층의 망명을 북한 붕괴의 전주곡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황씨는 97년 4월18일 베이징을 출발해 필리핀을 거쳐 4월20일 서울에 들어온 뒤 "한국에 온 가장 중요한 목적은 전쟁방지와 평화통일에 기여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당시 서울 도착 기자회견에서 "갈라진 조국의 어느 한 부분만을 조국이라고 생각해 본 일이 한번도 없다. 그래서 누가 '망명이다' '귀순이다' 하고 말하는 것은 나하곤 관계없다"고 주장했다.
황씨는 남쪽으로 온 뒤 줄곧 김일성 주석의 지도자 자질은 인정한 반면에 "김정일은 정치가로서 0점"이라고 혹평했고, 지난해 하반기부터는 북한의 '3대 세습' 움직임을 비판하는 등 북한 체제에 대해 직설적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또 황씨는 자신이 기초를 다진 주체사상이 북한에서 김일성·김정일 숭배를 위한 봉건사상으로 변질됐다고 비판했다. '개인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사회정치적 생명은 무한할 수 있다'는 주체사상의 사회정치적 생명관을 김 부자가 '수령 절대주의'로 왜곡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공개 강연이 되고만, 지난달 30일 < 자유북한방송 > 의 '황장엽의 민주주의 강좌'에서 "개인은 죽어도 집단은 영생합니다"라고 강조하는 등 개인주의보다는 집단주의 정치철학을 중시했다.
P.S
정말 아이러니하게도[그가 북한 노동당 창당일에 죽은 것도 아이러니하지만] 남한에서 황장엽의 대부분의 저서는 뉴라이트의 사상과 정치적 이념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출판사 <시대정신>이라는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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來而 2010-10-11 공감 (1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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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이야기 그리고 북한 이야기
황장엽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이 그저 '보기에도 짜증나는 찌질한 할배 이미지'만 갖고 있었다. 그러다 지난 10월 9일 욕실에서 사망했다는 기사를 보고 그때야 비로소 이 인물이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겨 바로 이 회고록을 구입해서 읽기 시작했다.
사실 황장엽 본인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그 동안 별 관심이 없었던 해방시절부터의 북한사회 모습을 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는데, 특히 김일성이 어떻게 일인체제를 구축해갔는지, 그 일인체제가 어떻게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는지를 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다만, 김정일에 대한 악감정을 많이 드러내고있고, 자신의 망명을 정당성을 인정받으려는 느낌이 많아서 개인적으로는 이 책도 왜곡이 없지는 않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어디까지 사실로 받아들이고 어디까지 왜곡인지를 알 수 없어서 책을 덮는 이 순간에도 고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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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아저씨 2010-11-28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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