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들판 - 침묵은 어떻게 역사를 드러내는가
마거릿 주혜 리 (지은이),장상미 (옮긴이)한겨레출판2026-08-13
원제 : Starry Field: A Memoir of Lost History




































미리보기
편집장의 선택
지워진 이름을 다시 부르는 일
전과자이자 집안의 수치인 할아버지. 가족은 그에 대해 철저히 함구했다. 미국에서 자란 저자는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고 싶었지만, 할아버지에 대한 질문은 언제나 침묵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할머니에게서 아버지로, 다시 자신에게로 이어진 침묵의 이유를 찾아 그는 한 번도 만나지 못한 할아버지의 삶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60여 년 만에 침묵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손녀의 청에 할머니가 응답하면서부터였다. 할아버지 이철하. 그는 일제강점기 항일 동맹휴학과 시위를 이끈 학생 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였다. 그러나 해방과 분단, 다시 한국전쟁을 거치며 그의 삶은 은밀한 역사가 된다. 할머니는 남편의 기록과 편지, 책을 불태우고 과거를 삼킨다. 누군가에게는 기억하는 일이 의무였다면, 그에게는 잊는 일이 살아남기 위한 일이었으므로.
사후 60여 년 만에 이철하는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고, 지워진 이름은 다시 역사 속으로 돌아온다. 할아버지의 삶을 되찾으며 마거릿 주혜 리 역시 오래 잃어버렸던 자신의 뿌리를 되찾는다. 그리고 아들의 가운데 이름에 할아버지가 항일운동 당시 사용했던 가명 ‘성야(星野)’를 물려주었다. 한때 살아남기 위해 지워야 했던 이름은 그렇게 먼 시간을 건너, 한 아이의 이름 속에서 다시 살아간다.
- 알라딘 에세이 MD 박진희 (2026.08.14)
책소개
1970년대 휴스턴 교외 지역에서 거의 유일한 한국계 미국인 가족의 일원이던 저자 마거릿 주혜 리는 ‘너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느냐’는 타인의 질문, 지금보다 더 나은 어딘가를 향해 끊임없이 떠나고 싶은 충동,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공허함을 안고 살아갔다. 전과자이자 집안의 수치인 할아버지. 가족은 그에 대해 철저히 함구했고, 삶에서 필요한 것을 알기 위해 ‘나’가 누구인지 알아야 했던 마거릿의 질문과 의문에 대한 답은 번번이 침묵으로 돌아왔다. ‘침묵’이 가족의 유산으로 대물림되었다고 말하는 저자는 가족사의 공백이 자신이 겪어온 모호한 정체감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리라 예감하며 자랐다.
60여 년 만에 침묵이 깨진 건 성인이 된 마거릿의 청에 할머니가 응답하면서부터였다. 병에 걸려 할아버지에 관한 조사를 끝내지 못한 아버지의 작업을 언론학을 전공하고 기자가 된 마거릿이 이어받으며 시작된 인터뷰였다. 이후 마거릿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할아버지를 추적하는 데 몰두한다. 저자와 아버지의 노력으로 알아낸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공주 최초 항일 동맹휴학을 이끌고 수차례 항일 시위를 조직한 1909년생 학생 운동가이자 공산주의 혁명에 뿌리를 둔 독립운동가, 또 사상가였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에 가입해 비밀결사 활동을 하다 투옥되었고, 빨치산 활동을 주도한 이현상의 동지였던 그는 손녀의 추적 끝에 사후 60여 년 만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이야기는 잊힌 독립운동가 한 사람의 삶을 복원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할아버지의 비밀만큼이나 저자와 ‘아버지’가 성장 과정에서 겪은 소외와 이름 붙일 수 없는 공허가, 남편의 삶을 숨기고 부정해온 할머니의 생애가 중요하게 다뤄진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분단 이후를 통과하며 한 가족의 기억에 무엇이 남고 무엇이 지워졌는지를 보게 하고, 묻어 둔 ‘비밀’과 ‘애도되지 못한 역사’는 사라지지 않은 채 끝없이 현재를 점유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목차
저자의 말
프롤로그: 기원에 관한 이야기
유골
이장
유산
1. 할머니와의 첫 번째 인터뷰
얌전한 소녀
소녀 시절
사진
잃어버린 역사
탈출
새출발
상처 난 조직
저항
우화
치료
결핵
독재
반체제 인사
2. 할머니와의 두 번째 인터뷰
자유의 맛
이주
신 박사
잃어버린 아이러니
단서
밤
부역자
독방 감금
기록
항거
제물
3. 할머니와의 세 번째 인터뷰
부화장
화양연화
영웅
생존
빈소
내용
종손
에필로그: 천국의 정원
참고자료
감사의 말
추천의 말
접기
책속에서
P. 30 부모님은 관 없이 유골만 남기기를 바랐다. 아버지가 2018년 4월에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우리는 아버지에게 유골을 어디에 뿌리면 좋겠냐고 물어볼 시간이 없었다. 어머니는 의견을 내기에는 상태가 너무 나빠져 있었다. 부모님이 은퇴한 지역인 오리건? 가장 오래 살았던 텍사스? 태어난 나라인 한국? 두 분은 유해가 어디에 안치되기를 원했을까? 두 분에게는 어디가 집이었을까? 접기
P. 57~58 지금까지 알아낸 바로, 할아버지의 존재가 지워진 사실은 할머니에게서 아버지에게로, 또 내게로, 대를 거치고 대륙을 가로질러 전해져온 우리 가족 유산의 일부이다. 나는 미국에서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그 어느 도시에 살면서도 진정으로 내 집에 머무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나는 그 이유가 할아버지의 삶이 잊히고 만 사실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이리저리 떠도는 성인기의 내 삶에서 단 하나 변함없는 것은 더 전망 있는, 더 흥미로운, 더 ‘나은’ 어딘가로 이동하려는, 탈출하려는 충동뿐이다. 내 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접기
P. 123 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들은 바로는 아기 때 자신에게 결핵을 옮긴 이가 할아버지였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아마도 감옥에서 옮았을 것이다. 그 세균이 20년 넘게 잠복해 있다가 아버지가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인 1958년에 본격적으로 발병했다. 전쟁 후 결핵은 유행병이 되었다.
P. 146 내가 그랬듯이 할아버지도 대도시의 삶이 잘 맞았다. 그래도 정체성이라든지, 인생에서 정말로 원하는 것을 찾는다든지 하는 나의 고민은 할아버지의 투쟁에 비하면 너무 시시하게 느껴진다. 할아버지는 조국 독립을 위해 싸우는 십 대 혁명가였고, 그로 인해 수감되었다가 스물일곱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당신이 죽은 지 60년이 지난 1996년에 새로운 직업 경력을 쌓으러 온 이 대도시의 공원 벤치에 앉은 서른두 살의 독신 여성인 손녀처럼 ‘자기 자신을 찾고자’ 고민하는 사치를 누릴 시간은 전혀 없었다. 접기
P. 288 만약 그가 말한 그대로라면 이 문서들은 한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고, 학자와 언론인, 유가족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에 보존해두어야 한다. 심 씨는 일제강점기의 역사적인 문서를 왜 서울 변두리의 먼지 쌓인 계단식 2층 주택에서 팔고 있는 걸까?
P. 290~291 “이 기록이 왜 보존되지 않았나요?”
심 씨는 이렇게 대답한다. “감당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아무도 일제강점기 기록에 담긴 정보를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이제는 그 시절에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이 죄가 되지는 않지만, 자기 가족이 식민 지배 세력, 즉 일제에 협력한 인물로 지목될지 모를 기록을 누가 밝히고 싶어 하겠는가? 그것은 아무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오점이다. 접기
P. 306 할머니가 남편의 신념이 담긴 물적 증거를 파기한 것은 이런 이유였다. 할머니는 내용에는 관심이 없었다. 전쟁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할머니의 임무는 목숨을 지키는 것이었다. 자신, 그리고 자식들의 목숨을.
P. 147 그렇다 해도 나는 여기에 와 있다. 지구 반대편이기는 하지만 우리 할아버지 생전에도 존재했던, 할아버지의 신념과 가까운 어떤 것을 지지하는 정치 잡지사에서 일하면서. 여기에는 분명 어떤 의미가 있다.
내 가족을, 나 자신을 이해하는 일과 우리 할아버지의 활동을 밝혀내는 일 사이에는 무시할 수 없는 간극이 있다. 가족의 유산이 애초에 우리 부모님이 한국을 떠난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까? 어째서 두 분은 휴스턴의 해리스카운티 전체에서 몇 안 되는 진보주의자였을까? 내가 언론대학원을 졸업하고 얻은 첫 직장은 어째서 화려한 패션지가 아니라 《더 네이션》인 걸까? 접기
P. 254 나는 그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걸 느낀다. 어쩌면 전쟁 이전, 자신과 만나기 전 남편의 삶에 관해 아무것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아내 앞에서 기억나는 것을 말하기가 불편한 것일 수도 있다. 아내에게 충은 그저 밤 농사꾼일 뿐이다. 그런 이름으로 충분하다.
충의 아내는 거의 50년 동안 함께 지낸 남편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낸다. 나는 확실히 알아본다. 충의 입장을 존중해 나는 물러난다. 접기
P. 381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우리 할머니가 다음 세대는 물론 그 후대까지 가족의 생존을 위해 싸운 분이라는 사실이다. 종조부 완이 말했듯이 할머니는 홀로 살아남아 두 아들을 키워야 했던 사람이다. 일제강점기, 광복, 조국의 분단, 한국전쟁, 자식들의 미국 이민, 그리고 국가 재건의 과정을 다 겪으며. 할머니는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조국이 어떤 길을 걸을지 궁금해한 적도 없다. 다만 먼저 떠난 남편의 행적을 다른 이들이, 가족이든 당시의 지배세력이든 누군가가 악용할 수 있다는 것만 알았다. 할머니의 목적은 명확했다.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겠다는 것.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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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쿵쿵 소리가 울릴 때마다 외피를 하나씩 벗어던진다.” 미국인도 한국인도 아니었던 이주혜가 청춘의 시기 뉴웨이브 음악에 심취해 클럽에서 몸을 흔들 때, 빼도 박도 못하는 한국인, 그중에서도 빨치산의 딸이었던 나는 단 한 순간도 나의 외피를 벗어던질 수 없었다. 누가 더 불행했을까? 그런 비교는 가당치 않다. 다만 나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주혜의 이야기를 읽으며 때때로 전율했다. 그와 나는 전혀 다른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성장했지만 소름 끼치도록 접점이 많았다.
《비밀의 들판》은 이주혜가 오랜 시간에 걸쳐 추적한 자기 집안의 가족사다. 동시에 일제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관통하는 대한민국의 현대사이기도 하다. 역사와 동떨어진 개인은 없다. 개인은 역사를 이루는 강력한 하나의 점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고 한다. 역사를 잊은 개인에게도 내일은 없다. 미국인 이주혜가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 이철하의 삶을 평생 추적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철하의 삶을 복원해낸 이주혜의 가족이 이제는 별이 가득한 들판에서 길을 찾았기를!
- 정지아 (소설가)
기억과 증거, 그리고 가족사를 능숙한 솜씨와 넘치는 애정으로 엮어낸 장대한 태피스트리.
- 한요셉
이 책에 재현된 저자 조부모의 삶은 밝혀지지 않고 남은 부분들이 밝혀진 사실만큼이나 흥미롭다. 《비밀의 들판》은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아는 것이 어디로 가는지를 알게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 여정에 힘이 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 수잔 최
명민하고도 진심 어린 작품. 시급하면서 꼭 필요한 목소리를 통해 전하는 중요한 이야기이다.
- 매슈 살레세스 (《경이의 감각The Sense of Wonder》 작가)
치열한 관찰력과 재기와 영향력을 지닌 작가가 자기 자신을 찾고 집을 찾아가는 과정을 써내려간 면밀하고도 다정한 이야기.
- 사비나 머리 (《용맹한 신사들Valiant Gentlemen》 작가)
아름다운 문장과 꼼꼼한 탐구로 쓰인 《비밀의 들판》은 한 편의 추적 서사인 동시에 성장기의 회고록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 가족사에 등장하는 영웅이 꼭 우리가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이 아닐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 캐럴 스미스 (《강을 건너며: 내 삶을 구한 일곱 가지 이야기Crossing the River: Seven Stories That Saved My Life》 작가)
마거릿 주혜 리는 폭넓은 탐구와 자신의 감정적 여정을 솜씨 있게 엮어내어 할아버지의 과거에서 끊어진 실타래를 다시 살려낸다. 《비밀의 들판》은 어느 잊힌 생을 되살리기 위해 온 마음을 다해 쓴 기록이자, 역사가 남긴 파열을 마주할 때 현재가 어떻게 치유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언이다.
- 테사 헐스 (《유령 먹이기: 그래픽 회고록Feeding Ghosts: A Graphic Memoir》 작가)
의문 속에 담긴 탐구가 이야기가 되고,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은 여정이 되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회고록이다.
- 푸타사 렝 (《마와 나: 회고록Ma and Me: A Memoir》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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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일보 2026년 8월 15일자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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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2026년 8월 19일자
저자 및 역자소개
마거릿 주혜 리 (Margaret Juhae Lee)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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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 《더 네이션》의 문학 편집자로 일했으며, 《더 네이션》, 《뉴스데이》, 《엘르》, 《더 럼퍼스》 등에 기사, 비평, 인터뷰를 기고했다. 하버드대학교 래드클리프연구소의 번팅 연구 펠로십과 한국국제교류재단 한국학 연구 펠로십에 선정되어 《비밀의 들판》을 집필했다. 2020년에는 할아버지인 애국지사 이철하의 명예 회복에 기여한 공로로, 충청남도 공주의 상철문화복지재단에서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최근작 : <비밀의 들판>
장상미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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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운동을 공부하고 시민단체 활동가로 일하면서 사회운동, 인권, 생태에 관한 책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2012년 자립, 공존, 연대를 주제로 서울에서 ‘어쩌면사무소’라는 다중적 공간을 꾸렸고, 현재는 이를 목포로 옮겨 책방 및 카페로 운영하고 있다.
거주하던 재개발 지역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독립출판물 《지금은 없는 동네》를 제작했고, ‘어쩌면사무소’의 실험 과정을 담은 책 《어쩌면 이루어질지도 몰라》를 썼다. 옮긴 책으로 《마틴 루서 킹》, 《감각의 주술》, 《먹고, 싸고, 죽고》, 《휴식은 저항이다》, 《교도소 대학》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사람 마을 세계를 잇다>,<어쩌면 이루어질지도 몰라>,<7명의 현장활동가가 쓴 NGO 실무핸드북> … 총 40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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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끝나지 않는 노래>,<공부의 미래>,<아르고스>등 총 743종
대표분야 : 한국사회비평/칼럼 1위 (브랜드 지수 334,749점),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7위 (브랜드 지수 624,591점), 에세이 9위 (브랜드 지수 798,377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오랜 시간 추적한 가족사이자 일제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관통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_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작가
“기억과 증거, 가족사를 능숙한 솜씨와 넘치는 애정으로 엮은 장대한 태피스트리” _한요셉, 《핵가족》 작가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아는 것이 어디로 가는지를 알아가는 여정에 힘이 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_수잔 최, 《신뢰 연습》 작가
“가족사에 등장하는 영웅이 꼭 우리가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이 아닐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_캐럴 스미스Carol Smith, 《강을 건너며Crossing the River》 작가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2024년 올해의 책
“그 괴로운 일을 내가 왜 이야기하고 싶겠니”
침묵은 어떻게 역사를 드러내는가
비밀이 된 과거가 끝없이 현재로 되돌아오는 것에 대하여
1970년대 휴스턴 교외 지역에서 거의 유일한 한국계 미국인 가족의 일원이던 저자 마거릿 주혜 리는 ‘너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느냐’는 타인의 질문, 지금보다 더 나은 어딘가를 향해 끊임없이 떠나고 싶은 충동,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공허를 안고 살아갔다. 전과자이자 집안의 수치인 할아버지. 가족은 그에 대해 철저히 함구했고,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자신의 뿌리를 궁금해했던 저자 마거릿 주혜 리의 질문에 대한 답은 번번이 침묵으로 돌아왔다. 할머니에게서 아버지로, 아버지에게서 자신에게로 ‘침묵’이 가족의 유산으로 대물림되었다고 말하는 저자는 가족사의 공백이 자신이 겪어온 모호한 정체감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리라 예감하며 성장했다.
60여 년 만에 침묵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성인이 된 마거릿의 청에 할머니가 응답하면서부터였다. 병에 걸려 할아버지에 관한 조사를 끝내지 못한 아버지의 작업을 언론학을 전공하고 기자가 된 마거릿이 이어받으며 시작된 인터뷰였다. 이후 마거릿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할아버지를 추적하는 데 몰두한다. 아버지와 저자의 노력으로 알아낸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공주 최초 항일 동맹휴학을 이끌고 수차례 항일 시위를 조직한 1909년생 학생 운동가이자 공산주의 혁명에 뿌리를 둔 독립운동가, 또 사상가였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에 가입해 비밀결사 활동을 하다 투옥되었고, 빨치산 활동을 주도한 이현상의 동지였던 그는 손녀의 추적 끝에 사후 60여 년 만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이야기는 잊힌 독립운동가 한 사람의 삶을 복원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할아버지의 비밀만큼이나 저자와 ‘아버지’가 성장 과정에서 겪은 소외와 이름 붙일 수 없는 공허가, 남편의 삶을 숨기고 부정해온 할머니의 생애가 중요하게 다뤄진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분단 이후를 통과하며 한 가족의 기억에 무엇을 남고 무엇이 지워졌는지를 보게 한다.
저자는 한 번도 만나지 못한 할아버지의 비밀이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사람이 될지”(387쪽)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며 “나는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아야겠다”(45쪽)고 결심한다. 개인의 정체성이나 소속감은 가족사와 공적 역사를 어떤 서사로 받아들이고 해석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이 책은 비추며, 나아가 사적인 ‘비밀’과 ‘애도되지 못한 역사’는 사라지지 않은 채 끝없이 현재를 점유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 특히 전쟁 중에는”
생존의 조건으로서의 할머니의 기억 삼키기
“우리 가족은 괴로운 일을 털어놓지 않는다. 그것을 통째로 삼켜 대를 넘어 곪아 터지게 내버려둔다. 두려움, 공포, 고통을 삼키고는 그대로 영영 사라지기를 기대한다. 더 이상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꾹꾹 누른다. 그것이 할머니가, 또 아버지가 살아남는 방법이었다.”(311쪽)
할아버지의 역사를 복원하는 일은 동시에 왜 할머니는 그 역사를 은폐하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한국을 떠난 지 오래였고 아들인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기를 강하게 요구했음에도 할머니는 왜 입을 열지 못했을까. 저자는 고통과 기억과 두려움을 삼키는 것이 할머니에게는 곧 생존의 조건이었음을 알게 된다.
공산주의자 전과자의 아내라는 낙인은 남편의 죽음 이후에도 할머니를 따라다녔다. 재산을 모두 잃고 재봉사와 보육원 일을 전전하며 두 아들을 키워야 했던 할머니는 무엇보다 살아남아야 했다. 할머니는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조국이 어떤 길을 걸을지 궁금해한 적도 없다. 다만 먼저 떠난 남편의 행적을 다른 이들이, 가족이든 당시의 지배세력이든 누군가가 악용할 수 있다는 것만 알았다”(381쪽). 북한군이 공주에 도착하기 전날 밤, 할머니는 수감 관련 서류와 편지, 정치 이론에 관한 저술, 신문 기사, 남편의 책을 모두 불태운다. 어떻게 닥쳐올지 모르는 위험으로부터 남은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치러야 했던 대가였다. 북한군이 남하하면 남편의 흔적이 이들 가족에게 좋은 지위를 보장하리라 기대한 친척도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모든 기록을 불태우고 땅에 묻는다. 더는 불확실한 상황에 삶을 맡길 수 없었다. 할머니는 차라리 표백된 과거를 생존의 조건으로 받아들였다. 더 나아질 수 있는 가능성을 꿈꾸고 셈하는 것마저 배제했다.
“두 차례에 걸쳐 봉기해서 동학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렴. 그들은 자신들이 들고 일어난 결과 중국과 일본이 전쟁을 벌일 줄은 몰랐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거야. 역사가 그 증거다.”(269쪽)
과거를 지우기로 한 단호한 결정에 대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묻자, 할머니는 동학농민운동을 떠올렸다. 할아버지의 집안과 같은 양반 지주층과 외세에 저항하며 시작된 이 토착 사회운동을 막기 위해 조정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다. 이에 일본은 톈진 조약 위반이라며 자국군을 개입시켰고 이것이 1894년 청일전쟁으로 비화하여 결국 조선은 식민지의 길로 들어섰다. 할아버지의 집은 당시 동학 농민들이 점거해 사용하던 항쟁 본부였다. 할머니는 그들이 남기고 간 창 두 자루를 오래 바라보던 순간을 들려준다. 동학농민운동에서부터 일제강점기로, 다시 해방과 분단으로 이어지는 역사는 할머니에게 인간의 의지나 신념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할머니를 통해 할아버지의 삶을 복원하는 과정은 무엇이 밝혀지는가만큼 무엇이 사라졌는가를 보게 하는 여정이 된다. 그리고 이는 할아버지에 대한 결정적 자료를 발견하는 국면에서도 되풀이된다. 자료 소장자에게 왜 이처럼 중요한 기록이 제대로 보존되지 않았는지를 묻자, “감당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까요”(292쪽)라는 답이 돌아온다.
무엇이 기록되었는지가 아니라 무엇이 기록될 수 없었는지를 집요하게 따라가는 이야기 속에서 사적인 침묵과 공적인 망각은 별개의 현상이 아니다. 공적 역사의 공백은 가족 안의 비밀이 되었고, 가족이 삼킨 비밀은 공적 역사에서 다시 하나의 결락으로 남았다. 저자가 복원하는 것은 어느 독립운동가의 전기만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이 역사에서 사라지는 과정 자체다. 그리고 그 과정을 더듬는 끝에서 저자는 비로소 자신이 오래도록 설명할 수 없었던 공허와 모호한 정체감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세대를 건너 이어진 역사적 침묵의 유산이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나에게 집이란 장소가 아니다. 존재의 상태다”
내가 누구인지는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
긴 추적 끝에 저자는 범죄자였던 할아버지가 사후 60여 년 만에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어 국립현충원으로 이장되는 순간을 맞이한다. 아버지에게 상속된 줄조차 모르고 있던 토지를 정리해, 일제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던 공주고등학교에 할아버지의 이름으로 기부한다. 그리고 공주고등학교로부터 할아버지의 명예 졸업장을 받는다. 마거릿은 자신의 아이에게 할아버지의 호인 ‘성야星野’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지워졌던 이름이 다시 쓰이고, 가족은 잃어버린 역사를 회복한다.
나아가 이야기는 한 독립운동가의 명예뿐 아니라, 저자가 자신을 현재의 자신으로 존재하게 만든 시간을 되찾는 데로 뻗어간다. 저자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답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에 있는 것이었다. 할머니에게 과거를 지우는 일이 살아남기 위한 조건이었다면, 손녀에게는 그 과거를 되찾는 일이 비로소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잊힌 역사를 되찾고, 할머니의 오랜 침묵이 어떠한 시대적 조건 속에서 만들어진 언어였는지를 이해하면서 저자는 비로소 “집에 온 기분”(389쪽)을 느낀다. 여기서 집은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단절되지 않은 상태,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지를 설명할 수 있게 된 존재의 상태다.
이 책의 한국어판이 출간되며 독립운동가 이철하와 그 가족의 역사가 그 역사가 시작된 이곳의 ‘집’으로 찾아온 지금, 우리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말해지지 않은 것은 없거나 사라진 것이 아님을 상기하며 무엇을 응시하고 무엇을 말해야 할까.
“그 괴로운 일을 내가 왜 이야기하고 싶겠니?
나는 할머니가 감옥에서 돌아온 남편에게 그간의 일을 물었던 질문과, 내가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할머니에게 던진 질문에 비슷한 응답이 돌아왔다는 점을 마음에 새겨둔다.”(314쪽)
“너희는 알았으면 해. 너희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이 될지는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387쪽)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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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많은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공 2026-08-26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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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들판
" 따뜻한 시월의 이날,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나의 할아버지는 애국지사다. 한국이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였던 시절에 일본의 지배에 맞서 싸운 자유의 투사다. 보수적인 양반 지주 가문에 수치를 안긴 장본인이 아니라 영웅이자 순교자이다. 44"
공교롭게도 요즘 세상은 한 엘리트 집안의 친일행적에 대한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선대부터 좀 산다고 하는 집안들이 대체로 나라 팔아먹고 돈받고 땅받고 입씻은 사람들이 아니던가. 과거에 대한 제대로 된 청산이 없이 효율을 따져 빨리 성장하고자 했던 부작용이 아직도 여전하다. 선대가 쌓은 죄값으로 부유히 자라 유명인이 된 후대가 방송에 나와 몇대를 이어온 자신의 집안에 대해 자랑스럽게 늘어놓는 장면은, 그 개인으로서는 부끄러움을 모르고 자신들이 가진 것을 자랑하는 것에 급급해 짧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드러냈고, 우리사회에는 심각한 역사의식 부재와 물질만능적 사고의 천박함을 경고했다. 피로해진 눈을 씻고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마주한 '비밀의 들판'은 드러내고 자랑하지 않은, "침묵은 어떻게 역사를 드러내는가" 말하고 있었다. 부유함과 위명으로 화려하게 덮어씌운 거짓 대신, 조용하지만 끈질기게 이어져 증명하는 가족의 역사이자 개인의 삶이었다.
'나-주혜'로 인해 시작된 것이라 여겼던 기록은 사실 그의 아버지로부터 시작되었다. 갑작스런 폐수술(4년의 수감 생활 이후 결핵을 앓은 할아버지로부터 감염된 오랜 지병으로 인한) 이후 기억력이 감퇴하고 무기력해진 아버지의 일상을 채울 무언가가 필요했고, 전에 할아버지에 대해 찾아 기록하려 했으나 멈춘 채 두었던 계획이 다시 수면 위에 오른다. 그는 전화통화 조차 응하지 않는 아버지에게 할아버지에 대해 떠오르는 모든 것들을 전부 글로 써달라 요청한다.
아버지에게 할아버지의 존재는 인생 전반에 걸친 수치와 멍에였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수감생활을 했었다는 사실만을 알고 왜 수감되었는지는 알지 못했고, 자신이 범죄자의 아들이란 생각에 제대로 웃지도 말을 하지도 않고 지내왔다. 아버지가 범죄자가 아니라 잊혀졌던 애국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아내조차 다른 사람처럼 달라졌다고 평(224)할 정도로 영향을 받아왔던 것이다.
역사,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를 누가 기억하는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지만 그와 그 자신에게서 이어져나간 이들에게 전해질 것이라는 걸 보여준다. '비밀의 들판'에서는 아버지-은설의 기록도 함께하고 있으니, 언젠가 나 역시 아버지의 이야기를 청해 듣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어졌다. 비록 그의 삶에 비장한 저항이나 사상, 운동 같은 것은 없었을지라도 내가 그를 알고 기억하기 위해서. 굉장히 세세하고 때로는 늘어지거나 돌아가고 있다고 여겨질만큼 자세했는데도, 누군가의 삶을, 가족의 역사를 담아냈다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짧고 간명했다.
" 할머니는 애국지사의 아내였다. 평생토록 남편을 잊으려고 애쓴 뒤에, 결국 영원히 남편 곁에 눕게 되었다. 354"
더불어 가족의 기록은 오랜 시간동안 침묵해온 할머니의 증언이기도 하다. 처음엔 할머니의 침묵이, 남편과 관련된 자료를 전부 없애버린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며 인터뷰가 계속될수록 살아남고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버텼구나 받아들이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삶이 명예로웠을지라도 가족들에게 남긴 상처는 적지 않았다. 원치 않는 결혼이었다며 아내는 고향 가족의 집에 남겨두고 훌쩍 어디론가 떠나버리는 남자, 사업 자금을 모으기 위해 첩을 들이려는 남자, 수감되어 있던 동안의 일을,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 남자, 자신의 아내 뿐 아니라 두 아이도 책임지지 않고 죽은 남자이기도 하다.
사실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느낀 것은 역사 속에서 고통받은 민족이나 애국같은 비애와 의기 넘치는 큰 뜻이 아니었다. 어린시절 나의 할머니에게 들었던 당신이 살아온 이야기. 누가 묻지도 않고, 어디에 말할 곳도 없어 어리고 철없는 손녀 옆에서 옛이야기 들려주듯 풀어내던 그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추억이었다. 오봉이니 쓰메끼리 같은 사소한 일본어들을 섞어서 쓰던, 전쟁의 잔인함과 피난길의 공포를 기억하던, 시집살이의 설움을 지워내지 못했던 내 할머니의 이야기는 제자리에 얌전히 있는 소녀(69)라는 이름을 가진 금순 할머니의 삶과도 닮아있었다.
저자가 완전한 미국인이라는 사실에 가끔은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다. 한국인 가족을 가지고 있지만, 그 틀을 제외한 모든 것을 미국에서 채워넣은 사람. 둘 다 가지고 있지만 '어디에서 왔는지("넌 어디 출신이야?" 14/387)' 끊임없이 대답해야 하는 사람이며, 존재의 한가운데에 난 구멍에 대해 들여다보아야 하는 사람의 고백이 함께했다. 두 나라 어디에서도 편하지 않다던 그의 내면이 불편할수록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냈음을 느꼈다. 처음엔 잊혀진 독립운동가였던 자신의 뿌리를 바로 세워 다시 세상에 드러내기 위한 과정을 겪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되돌리고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가족의 역사 안에서 이어져 온 상실을, 자신이 누구인지, 왜 관계 속에서 고통받고 실수하는지, 스스로도 이유를 찾기 위해 고뇌해야 하는 방황을 끊고자 한 사람의 노력이 더 크게 보였다. 과거와 역사가, 가족으로 이어지는 경험과 삶이 어떤 식으로 영향을 주고받는지 '비밀의 들판'은 말하고 있다. 이번 주말 읽기 좋은 책이다.
" 나는 너희가 알았으면 해. 너희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이 될지는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386"
* 유니클로 광고 ‘Oh My God, I can't remember that far back!’ ‘80년도 더 된 일을 기억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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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 2026-08-14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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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들판에 묻힌 비밀이 밝혀지면 별이 빛나는 하늘을 볼 수 있을 거예요
진보적 성향을 가진 ‘더 네이션’ 잡지의 편집자로 일했던 저자 마거릿 주혜 리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이다. 하버드대학교 래드클리프연구소와 한국국제교류재단의 펠로십을 받아 봉인되어 있던 가족의 역사를 추적했다. 언론학을 전공한 저자는 할아버지 이철하 선생의 독립운동적 공적을 밝혀냈고, 사후 60여 년 만에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 데 기여했다.
이 책은 할머니와의 세 차례에 걸친 깊은 인터뷰를 축으로 프롤로그에서 에필로그로 이어지는 3부 구조를 취한다. 저자의 아버지가 두 살 때 돌아가신, 중년은 커녕 할아버지가 된 적이 없었던 스물 일곱의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항일 동맹휴학과 비밀결사 활동을 이끌었으나 공산주의 이력으로 인한 수감생활로 집안이 숨겨야 했던 인물이었다. 이 책은 저자의 조부라는 한 명의 개인 일대기를 넘어, 두 자녀를 홀로 키워내기 위해 남편의 책을 불태워야 했던 할머니의 침묵, 그리고 한국전쟁과 도미를 거치며 후손들이 짊어져야 했던 소외의 역사를 저자는 담담하게 기록했다.
“아무도 일제강점기 기록에 담긴 정보를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이제는 그 시절에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이 죄가 되지는 않지만, 자기 가족이 식민 지배 세력, 즉 일제에 협력한 인물로 지목될지 모를 기록을 누가 밝히고 싶어 하겠는가? 그것은 아무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오점이다.”(pp.290-291)
이 책 한 권으로 그동안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았던 한국 역사의 한 부분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렸다. 저자는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았던 역사가, 개인에게는 애도되지 못한 과거가 되고 어떻게 현재의 후손에게 미치는 파장을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대물림된 침묵을 깨뜨림으로써 개인의 치유가 어떻게 사회적 역사의 복원과 연결되는지를 증명하며,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아는 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됨을 일깨운다.
개인적으로는 <비밀의 들판>이라는 제목을 처음 보고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망각의 아스포델 들판이나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명계의 들판이 떠올랐다. 억울한 사연의 영혼들이 숨겨진 공간으로서의 ‘들판’.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원제 ‘Starry Field’와 한국어 제목인 <비밀의 들판> 사이를 오갔다. 아버지가 되찾고자 했던 할아버지의 서사를 저자가 이어갈 때, 그리고 할아버지와 자신의 공통점을 찾아내던 부분을 읽으며 제목을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가려진 들판의 풀숲을 헤쳐나가며 비로소 드러나는 뿌리는 정체성의 근원과 연결되어 비밀이 해소되고 수많은 별들이 가득한 들판을 비춘다. 이 책을 읽어내는 것은 ‘비밀의’와 ‘별이 빛나는’ 이 두 단어가 하나로 합쳐지는 과정이었다. 또, 맥클린의 ‘Stary Night’의 멜로디가 배경음악이 되어주었다. 이 싱어송라이터가 반 고흐의 삶과 예술을 기리기 위해 이 노래를 지었듯, 이 책이 저자의 가족의 삶과 정체성을 기리기 위한 책임을 밝히는 상징이었음을 깨닫는다.
한 여배우가 ‘4대째 의사집안’이라고 말했다가 알고보니 조상이 친일파였던 안상호였던 점을 네티즌들이 파묘해내 연예계 뉴스로 시끄러운 요즘이다. 침묵의 세월동안 부를 축적했다면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치를 수 있는 법적 장치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다. 이 배우가 잘한 점도 없지만 몰랐었다면, 사죄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건강한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저자의 조부처럼 비밀의 들판에 묻힌, 항일을 했던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많이 밝혀져야 한다. 이대로 묻혀있는 억울한 사람들이 많은 상황에서 우리는 아직 용서할 마음이 없다.
#비밀의들판#하니포터#하니포터12기#한겨레출판#마거릿주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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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Moon 2026-08-14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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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은 어떻게 역사를 드러내는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가족사를 추적하는 일은 내게 삶의 목적이 되었을 뿐 아니라, 아버지를 다시 알아가는 수단이 되었다. 동시에, 가능성의 빛이 차츰 줄고 있었던 뉴욕에서 벗어나는 길이 되어주기도 했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도시에서, 명성은 높지만 보수는 형편없는 직장에 다니면서 또 한 번 연애에 실패하고, 회의감에 빠져 다시 나 자신을 찾으려 애쓰는 중이었다. 안정적으로 함께 가정을 꾸릴 사람을 만나기를 간절히 바랐건만, 그런 안정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상태였다. p.56
사람들은 다양한 제각각의 이유로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삶을 시작한다. 그러나 멀리 타국으로 떠나 다시 삶을 살아내는 것인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니고, 그것은 이민자들의 2세대에게 더 크게 와 닿을 것이다. 자신이 속해 있던 곳에 대한 상실감, 잘 알지 못하는 고향에 대한 향수와 이곳에도 저곳에도 속할 수 없는 단절감이 자라오는 내내 뿌리깊게 박혀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것은 늘 이민자의 몫이었다. 디아스포라 문학이 발전해 온 것도 그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마거릿 주혜 리는 ‘너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느냐’는 질문에서 시작해 한 번도 본 적 없는 할아버지에 대한 수수께끼를 파헤쳐보기로 마음먹는다. 부모님이 태어난 나라에 가서 한국전쟁 중에 할머니가 불태워버린 경찰 기록과 신문 기록을 찾아내고, 잃어버린 역사를 추적한 과정으로 책으로 쓴다. 문학 편집자이자 기자로 활동했던 이력을 토대로 탐사 보도, 구술사, 기록 조사, 가족 구성원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장면 재현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20세기 한국 역사 속 가족사를 담아냈다. 저자는 미국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자신만 다르게 생겼고, 먹는 음식도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람들은 "넌 어디 출신이야?" 라고들 물었고, "휴스턴"이라고 대답하면 사람들은 다시 묻는다. "아니, 진짜로 어디서 왔냐니까?" 열 살이 되어 부모님이 태어난 나라에 갔었지만, 그 나라도 역시 편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하는 말을 조금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정작 말을 하는 것은 짤막한 구절로만 아기처럼 말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2000년 한국행 비행기 안에서는 이 탐색을 시작한 이유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는, 잊힌 가족의 과거와 대면하는 것이 미래로 길을 내는 데, 그리고 내 아이를 갖는 데 꼭 필요한 단계였음을 깨닫는다.
마침내 집에 온 기분이다. 특정한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는 베이 에어리어는 아이와 함께 있는데도 여전히 거쳐 가는 곳으로 느껴지고, 한국은 좀 더 익숙하지만 그래도 외국이다. 나에게 집이란 장소가 아니다. 존재의 상태다. p.380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수차례 항일 시위를 조직했었던 독립운동가였다. 저자는 수년 동안 공부해 부모님의 언어를 어느 정도 읽고 말할 수 있게 되었고, 제국주의 일본의 통치에 저항한 십대 공산주의 혁명가라고 기록된 할아버지의 삶을, 잃어버린 가족의 역사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잊힌 할아버지의 생애는 일제강점기와 제2차 세계대전, 분단, 미군정, 한국전쟁, 재건, 군사독재를 거쳐 세기말에 민주주의와 번영을 이루기까지 격동으로 가득 찼던 20세기 한국사와 얽혀 있었다. 그렇게 가족사를 추적하는 일은 삶의 목적이 되었을 뿐 아니라, 아버지를 다시 알아가는 수단이 된다. 저자는 편집자 생활을 그만두고 근대 한국사 수업을 듣고, 도서관에서 일제강점기 조선 관련 정보를 찾아보며 거의 알지 못했던 미국 이민 이전의 삶에 관해 아버지에게 더 많은 질문을 던진다.
직업적 야망은 제쳐두고, 가족의 비밀을 풀어 내면 삶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게 될까? 대체 왜 과거로 향하는 이 여정에 뛰어든 것인지, 저자는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는다. 그리고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할머니와의 세 번째 인터뷰 전에 저자는 알게 된다. 왜 할머니가 남편의 신념이 담긴 물적 증거를 파기한 것인지. 전쟁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과 자식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말이다. 잊혀진 한 사람의 삶을 복원해내는 과정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분단 이후를 통과하며 감춰온 기억과 비밀 속에 담긴 역사를 보여준다. 개인의 가족사이자 대한민국 현대사를 함께 만날 수 있다는 것에 이 책의 특별한 점이 있다. 정지아 작가의 말처럼 역사와 동떨어진 개인은 없으니 말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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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오나 2026-08-14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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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들판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마음에 남은 것은 "왜 아픈 것을 알고 싶어 하느냐"는 할머니의 질문이었다. 마거릿 주해 리에게 할머니가 던진 이 짧은 질문 속에는, 어쩌면 우리 모두의 가족 안에 존재할지 모르는 침묵의 이유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고통스러운 과거는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믿음, 그리고 그 침묵이 다음 세대에게는 오히려 정체성의 공백으로 전해진다는 사실이 책을 통해 선명하게 다가왔다.
책은 표면적으로는 한 여성이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다 옥살이를 하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의 삶을 추적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역사 탐구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라는 사실이 더 크게 다가왔다. 저자는 할아버지가 "범죄자"라는 말만 듣고 자랐다. 그 오해와 침묵 속에서 아버지는 자신의 아버지를 알지 못한 채 살아야 했고, 그 결핍은 다시 저자에게로 이어졌다. 휴스턴이라는, 한국계 미국인이 극히 드물었던 도시에서 자라며 느낀 소외감, "어디서 진짜로 왔느냐"는 반복된 질문들, 그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했던 경험들이 결국 할아버지의 진실을 찾아 나서게 만든 근본적인 동력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정체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가족의 역사와 깊이 얽혀 있는지를 새삼 실감했다.
인상 깊었던 부분은 "세대 간 트라우마"다. 그녀가 책을 쓰기 시작했을 당시에는 이 개념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그 단어를 접했을 때, 자신이 오랫동안 느껴온 결핍과 공허함이 바로 그것이었음을 깨달았다는 것은 나에게도 깊은 울림을 주었다. 우리는 흔히 부모 세대가 겪은 고통이 자녀에게 자동으로 전달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오히려 말하지 않음, 침묵 그 자체가 하나의 유산처럼 대물림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민자 가정에서 부모 세대가 "생존 모드"로 살아가며 자신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자녀에게 전하지 않으려 했던 선택이, 역설적으로 다음 세대에게는 뿌리 없는 불안으로 남는다는 통찰은 비단 한인 이민 사회에만 국한되지 않는 보편적인 진실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 마음을 움직인 부분은 진실이 밝혀진 이후 아버지의 변화에 대한 묘사였다. 평생 과묵하고 근엄했던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진짜 이야기를 알게 된 후 다정하고 사교적인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일화는, 우리가 흔히 성격이라 부르는 것조차 사실은 채워지지 않은 상실과 결핍의 다른 얼굴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아버지에게 필요했던 것은 그저 아버지, 곧 할아버지의 이야기,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한 앎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이 뭉클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가 결국 자신의 아이들에게는 그 공백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였다는 대목에서는, 한 세대의 아픔을 온전히 이해하고 기록하는 행위 자체가 다음 세대를 위한 치유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한 개인의 가족사를 넘어, 이민자로 살아간다는 것, 침묵 속에서 자라난다는 것, 그리고 뒤늦게라도 그 침묵의 이유를 찾아 나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고 난 지금, 나는 "나만의 서사를 만들어 가족에게 뿌리를 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다시 한번 곱씹게 된다. 우리 각자에게도 아직 다 묻지 못한 질문들, 아직 듣지 못한 이야기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책이 나에게 준 가장 큰 울림은, 그 질문을 던지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조용한 격려였다. 역사는 가만히 두면 스스로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 누군가는 불편함을 무릅쓰고 먼저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을 책은 담담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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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ogi386 2026-08-02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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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과 가족이야기
침묵도 상속된다
술만 마시면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레파토리 몇 개가 있다.
지겹고 질리도록 들은 이야기는 언젠가부터 나의 이야기가 된다.
나의 아버지가 고민하고 결정했던 지점에는 나도 같이 서있고, 그의 고민을 나도 함께 한다.
그러고보면 가족에게서 물려받는 것은 얼굴이나 성격만이 아니다.
반복해서 듣는 이야기도, 그리고 집안의 누구도 말하지 않는 어떤 것도 물려받는다.
집안에서 자란 아이는 그 빈 공기, 누구도 설명하지 않은 집안의 공허도 함께 배운다.
마거릿 주혜 리의 <비밀의 들판>은 바로 그 공허에서 시작한다.
저자는 휴스턴에서 자라지만 미국에서도 이방인, 한국에서는 미국인으로 여겨진다.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그녀가 느끼는 공허의 끝에 모든 가족이 입을 다문 할아버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알고 있는 할아버지에 관한 정보.
전과자, 공산주의자, 집안의 수치.
어른의 침묵은 그 가족을 지키기도 하고 한 사람의 이름을 지우기도 한다.
하지만 그 침묵은 손녀가 자신을 이해하는 길까지 막아선다.
그녀는 이제 그토록 꺼려왔던 그 이름을 불러 내려고 한다.
할아버지를 찾아서
아버지는 자신의 아버지를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할아버지 이철하는 스물일곱에 세상을 떠났고, 가족이 아는 그의 생애에는 수감과 수치라는 낙인만 붙어 있다.
아버지도 할아버지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지만 병으로 멈추고 그 과업은 딸이 이어받는다.
다른 것보다 사실 이게 좀 궁금했다.
왜 우리는 늘 자신의 뿌리를 찾고 싶어할까.
그 끝에 마주할 수 없는 어떤게 있을지도 모르는데 우리는 왜 굳이 그 일을 알고 싶어하는 걸까.
마거릿은 할머니를 세 차례 인터뷰하고 한국의 기록 보관소와 사람들을 찾아다닌다.
흩어진 문서를 맞추자 전과자라던 남자는 일제강점기 공주에서 항일 동맹휴학을 이끌고 비밀결사에 참여한 학생 운동가 이철하로 돌아온다.
일본 제국이 범죄자로 만든 청년을 해방된 나라가 독립유공자로 다시 부르기까지 약 6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할아버지는 그 기간 동안 국가 뿐 아니라 가족에게도 철저히 외면당했다.
영웅과 영웅의 부재를 견뎌낸 사람
이제까지의 이야기는 잃어버린 영웅,
그것도 나의 자랑스런 할아버지를 찾는 이야기다.
그런데 <비밀의 들판>이 더 복잡해지는 지점에는 할머니가 있다.
어린 나이에 이철하와 결혼한 할머니는 남편의 투옥과 죽음 뒤에 두 아들을 혼자 키워내야 했다.
식민 지배와 해방, 전쟁과 반공의 시대에 독립운동가와 공산주의자의 아내라는 이름은 결코 내세울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다.
결국 할머니는 남편의 기록을 없애고 남편에 관한 모든 것에 입을 닫는다.
이 침묵이 온 가족이 지닌 상처와 공허의 원인이지만 그 시절을 살아내야 했던 할머니에게는 가족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같은 행동이지만 어떤 세대에는 방패가 되고 어떤 세대에는 상처가 되는 일.
저자는 이 간극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다.
그 침묵의 좋고 나쁨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다.
마거릿의 취재는 할아버지 뿐 아니라 할머니에게도 시대를 살아낸 이야기가 있었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된다.
영웅과 그 영웅의 부재를 평생을 감당해온 사람의 생애는 같은 무게로 존중 받아야 한다.
당신의 역사도 새롭게 쓰이길
책은 세 차례의 할머니 인터뷰를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 한국과 미국, 가족사와 저자의 성장기를 오간다.
같은 기억을 여러 각도에서 되짚고 자료를 구하는 과정은 느리고 길고 꼼꼼하다.
그리고 이 더딤은 가족의 기억이 복원되는 모습과도 닮아있다.
한 번의 증언으로 모든 것이 명확해지지 않고, 기록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 밑바닥의 사정까지 설명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보면 역사는 객관적 팩트라기 보단 서로 다른 기억과 문서를 대조해 누군가에 의해 그냥 쓰이는 것이다.
<비밀의 들판>을 읽으며 우리가 역사라고 배운 이것들을 교과서는 식민 지배와 해방, 전쟁과 분단으로 설명하지만,
한 가족에게 역사는 불태운 문서 한 장이고, 부르지 않는 이름이며, 아이에게 끝내 들려주지 못한 아버지의 이야기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거릿은 할아버지를 찾으려다 아버지를 이해하고, 할머니를 새로 바라보며, 자신의 아이들에게 건넬 가족의 기록을 만든다.
한 사람이 자신의 가족을 기록하기 시작하자 집안의 수치로 불리던 이름은 한국 현대사의 한 자리로 돌아온다.
나는 나의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부끄럽지만 거의 아는게 없다.
쑥쓰러운 일이지만 나의 가족에게도 그 시절의 평범한 하루 하나를 물어보면 어떨까.
대단한 간증보다 무엇을 먹고, 어디로 걸었으며, 무엇을 두려워했는지부터.
우리의 역사, 그 뿌리는 이 대답에서 다시 시작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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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고아빠 2026-08-12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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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속에서 발굴한 우리라는 역사 | 마거릿 주혜 리 <비밀의 들판>
이민 2세들의 기록을 읽다 보면 비슷한 흐름이 보인다.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자신의 뿌리인 한국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마침내 나라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점이다. 작가 마거릿 주혜 리의 삶도 이와 닮았다. 조금 다른 점은 부모님의 나라를 알아가는 것을 넘어, 그 뿌리에 자리한 할아버지의 삶을 깊이 파헤쳐야 했다는 점이다. 그의 할아버지 이철하는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였으며, 오랫동안 가족들이 침묵한 존재였다. 미국에서 자란 그는 한국사의 한복판을 관통했던 가족의 역사를 스스로 복원해야 하는 미션이었던 셈이다.
독립운동가 할아버지는 자랑스러운 존재여야 마땅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현재 한국의 이념 체계와 정반대인 사회를 꿈꿨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광복과 6·25 전쟁, 이어진 독재 정권을 거치며 가족들에게 할아버지는 쉬쉬해야 하는 수치였다.
그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는 친척들의 생생한 증언이 꼭 필요했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철하는 학생운동을 이끌다 퇴학당한 뒤 사회주의 사상에 빠져들었다. 할머니는 가족에서 소원했던 남편이 원망스러웠고, 아들을 지키기 위해 그의 서적과 증거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물어도 결코 들을 수 없던 비밀스러운 이야기는 기자로 일하는 손녀 마거릿이 취재를 시작하며 봉인이 풀리기 시작한다.
가족들의 이야기는 마치 구전설화처럼 쏟아지며 저자는 퍼즐을 맞추듯 진위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 작업에서 이민 가정의 장녀로서, 여전히 유교적 분위기가 짙은 가족 안에서 자신이 자라며 느낀 불편함의 뿌리를 발견하다. 항상 털어내고 싶던 아픈 손가락, 할아버지를 말할 수 있는 대상으로 끌어올린다. 이렇게 이야기는 현재 진행형으로 이어진다.
결국 이철하는 독립운동자로 인정받아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고, 어둠 속에 묻혔던 기록들도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흩어져 살던 친척들이 새롭게 조성된 묘 앞에 묘여 찍은 사진을 보며, 오랫동안 가슴속에 삼켜온 깊은 한숨을 토해낼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온전한 안식처를 갖지 못했던 저자는 취재 이후 좋은 배우자를 만나 두 아이의 엄마가 된다. 한때 공허함을 느꼈던 그는 이제 없던 안식처를 직접 만들어 나간다. 자신이 느꼈던 혼란이 자녀에게 대물림될 수도 있겠지만, 경험을 바탕으로 더욱 단단하게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엄마가 될 것이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할아버지를, 손녀인 자신이 어떻게 세상 밖으로 찾아냈는지 털어놓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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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독서가 2026-08-15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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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진 이름을 되찾고 나의 뿌리를 마주하다
마거릿 주혜 리의 《비밀의 들판》은 가족에게 오랫동안 숨겨져 있던 역사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기 위해 시작한 여정은 어느 순간 아버지가 완성하지 못한 과업을 이어가는 일이 된다. 아버지가 품었던 질문은 어느 순간 저자의 질문이 되었고, 저자는 할아버지 ‘이철하’의 생애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이철하의 삶은 한 가족의 역사에 머물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의 동맹휴학과 서대문형무소 투옥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과 해방, 한국전쟁과 분단, 독재에 이르기까지 20세기 한국사의 격동과 맞닿아 있다. 한 사람의 생애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한 시대의 역사를 마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20여 년에 걸친 추적은 쉽지 않았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탐사 보도와 구술사, 1차 사료를 확인하고 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기록을 찾는 일도 어려웠지만, 할머니가 오랫동안 함구했던 기억에 다가가는 일은 더욱 어려웠다.
할머니에게 남편은 생존을 위해 덮어두어야 하는 이야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국가가 할아버지를 독립운동가 이철하가 아닌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을 찍었기에 다시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이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의 기록을 지우고, 그의 이름을 감추고, 그에 대한 기억마저 묻어두어야 했을 테니까. 그렇게 할아버지의 이름은 남았으나 그의 생애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되었다.
그래서 저자가 “왜 그 괴로운 일을 알고 싶냐”는 할머니에게 과거를 이해하고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결국 자신을 이해하는 일이라고 설득하는 장면은 중요하게 다가온다. 저자가 알고 싶었던 것은 단순히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만은 아니었다. 왜 그는 독립운동가가 아닌 ‘공산주의자’라는 이름으로 기억되어야 했는지, 그리고 그 이름 뒤에 가려진 삶은 무엇이었는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저자는 한 사람에게 씌워진 낙인을 걷어내고, 그 안에 있던 한 인간의 삶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조상의 부와 명예를 자신의 자랑으로 내세우지만, 모든 가족의 역사가 자랑할 수 있는 것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기억은 너무 아파서 말하지 못하고, 어떤 과거는 살아남기 위해 숨겨야 한다. 그렇게 오랫동안 감춰진 이야기는 어느 순간 가족 안에서 ‘비밀’이 된다. 살아남기 위해 비밀에 붙여두었던 과거를 다시 꺼내어 들여다보는 일은, 어쩌면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할아버지의 삶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저자는 자신이 서 있는 자리의 뿌리에 가까워진다. 그래서 이 책은 한 독립운동가의 생애를 복원하는 가족사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한 사람의 여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가족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자신에게 유리한 기억만 남기기 쉽다. 훌륭했던 조상, 성공했던 순간, 자랑스러운 가문의 이야기는 기억하고 싶지만, 가족에게 상처를 남긴 사건이나 감추고 싶었던 과거는 외면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렇게 선택적으로 기억하는 순간, 뿌리는 온전한 모습으로 남을 수 없다.
그래서 《비밀의 들판》이라는 제목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그곳에 묻혀 있던 것은 단순한 가족의 비밀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말해지지 못했던 한 사람의 삶이었고, 그 삶을 둘러싼 시대의 기억이었다. 가족에게 그 과거는 오랫동안 수치였을 수도 있고, 때로는 살아남기 위해 숨겨야 하는 위협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가 20년에 걸쳐 그 비밀을 추적한 끝에 마주한 것은 전혀 다른 이름이었다. ‘반역자’로 기억되던 사람은 훗날 국가유공자로 인정받는다. 가족에게 숨겨야 할 과거였던 그의 삶이 다시 역사 속으로 돌아온 것이다.
저자가 찾은 것은 할아버지의 명예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아버지가 왜 그토록 그 역사를 알고 싶어 했는지, 가족이 왜 침묵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자신이 어떤 역사 위에 서 있는지를 함께 알아갔을 것이다. 이 책에서 뿌리를 찾는다는 것은 자랑스러워할 만한 과거를 찾아내는 일이 아니다. 때로는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기억과 가족이 오랫동안 감춰온 상처까지 마주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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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지 2026-08-12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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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진 이름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지워진 이름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비밀의 들판》을 읽고
어떤 역사는 기록되지 않아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너무 아픈 기억이라 말할 수 없어서 사라진다.
마거릿 주혜 리의 《비밀의 들판》은 독립운동가였던 할아버지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한 명의 위대한 인물을 발굴하는 역사책이 아니다. 저자가 찾아가는 것은 한 사람의 업적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사라진 뒤 남겨진 가족의 시간이다.
1970년대 미국 텍사스에서 자란 저자는 늘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함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싶었지만 가족에게 돌아오는 것은 침묵이었다. 가족에게 할아버지는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말할 수 없는 존재였다.
누군가에게는 영광스러운 역사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숨겨야 하는 상처가 될 수 있다. 같은 사건도 그것을 경험한 사람의 위치에 따라 전혀 다른 기억으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이 이 책 전체를 관통한다.
저자가 오랜 추적 끝에 발견한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공주 지역에서 항일운동을 이끌었던 인물이었고, 긴 시간이 흐른 뒤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비밀의 들판》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왜 이제야 그 이름이 돌아왔는가”에 머물지 않는다.
왜 한 사람의 삶은 오랫동안 기록되지 못했는가.
왜 그 가족은 자신의 과거를 말하지 못했는가.
그리고 침묵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어떤 시간을 견뎌야 했는가.
역사는 언제나 기록하는 사람의 선택으로 남는다. 무엇이 기록되었는지만큼 중요한 것은 무엇이 기록되지 못했는지다.
한 독립운동가의 삶이 오랫동안 드러나지 못한 것은 단순한 행정적 누락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식민지와 전쟁, 분단과 이념 갈등이라는 거대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한 가족은 자신의 과거를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삶을 살아야 했다.
가장 마음이 아팠던 것은 한 사람이 감옥에 갇힌 사실 자체보다, 그 이후 남겨진 사람들이 감당해야 했던 시간이었다. 고문과 수감은 한 사람의 몸을 파괴한다. 그러나 침묵된 역사는 남겨진 가족의 삶에도 오래 흔적을 남긴다.
어린 시절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부모의 행동과 선택이 시간이 흐른 뒤에야 시대의 맥락 속에서 다시 보이는 순간이 있다.
책 속 저자의 부친 역시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의 기록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가족에게 남겨진 것은 자랑스러운 독립운동의 기억이 아니라 설명되지 않은 수치와 침묵이었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왜 그런 삶을 살아야 했는지 알지 못한 채 자란 아이에게 역사는 자부심이 아니라 혼란과 상처로 남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깊이 와닿았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나 역시 가족의 역사를 떠올렸다.
나의 증조부는 구한말 고종의 근위대장이었다고 가족에게 전해 들었고, 한일병합 직후 스스로 생을 마감하셨다고 들었다. 그분이 어떤 마음으로 마지막 선택에 이르렀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시대의 질서가 무너지고 자신이 믿어온 세계가 흔들리는 순간을 경험한 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역사의 상처는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이후 가족이 겪은 몰락 속에서 친할머니는 더 많은 배움과 가능성을 펼칠 기회를 잃었고, 현실 속에서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숙명여고까지 다녔던 분이 생계를 위해 꿈을 접어야 했고, 영특하고 공부를 잘했던 아버지도 가난 속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온전히 펼치기 어려웠다.
어릴 때의 나는 그런 할머니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할머니를 나와 어머니를 미워했던 사람으로 기억했고, 그 감정은 오래 남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처음으로 다른 질문을 하게 되었다.
“그 사람은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 사람이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은 누군가의 잘못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다.
상처받은 사람이 반드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며, 시대의 피해자가 다른 사람에게 또 다른 상처를 줄 수도 있다. 그러나 한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행동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지나온 시간과 함께 바라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게 이 책이 인상 깊었던 이유는 이철하를 완벽한 영웅으로만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어서 시대에 맞선 것이 아니었다. 식민지라는 거대한 현실 속에서 무엇이 옳은지 고민했고, 두려움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선택했던 사람이었다. 역사를 바꾸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특별한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들 역시 불안하고 흔들리는 한 인간이다. 다만 자신의 두려움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있었기에, 어려운 선택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삶에서 더욱 오래 마음에 남은 부분은 가족을 대하는 태도였다. 그는 시대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가능성 역시 존중했다. 당시 여성의 교육 기회가 제한적이었던 시대에 아내의 배움과 성장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기록은 의미 있게 다가왔다.
사회적 정의를 말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자신의 가장 가까운 관계 안에서도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바깥세상의 변화를 이야기하면서도 가족 안에서는 익숙한 질서를 반복한다.
그런 점에서 이철하 지사가 가족이라는 작은 세계 안에서도 한 인간의 성장 가능성을 인정했다는 사실은, 그가 왜 시대의 부당함에 저항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모습처럼 느껴졌다.
한 사람이 가진 가치관은 거대한 역사적 선택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을 어떤 존재로 바라보는지에서도 드러난다.
그래서 이 책이 더욱 깊게 다가왔다.
그러나 《비밀의 들판》이 끝내 보여주는 것은 한 독립운동가의 위대한 삶만이 아니다. 역사의 격랑은 영웅 한 사람만 지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 곁에 있던 가족들, 이름 없이 기다린 사람들, 자신의 꿈보다 생존을 먼저 선택해야 했던 사람들이 함께 통과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이철하 지사의 삶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저자가 마주한 것은 할아버지의 용기만이 아니었다. 그 곁에서 긴 시간을 견뎌낸 할머니의 삶이었다. 남편을 잃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삶을 뒤로 미뤄야 했던 사람이 있었다. 할머니는 남편의 이름 뒤에만 머무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역사가 무너뜨린 자리에서 가족을 다시 일으켜 세운 또 하나의 주체로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독립운동가의 아내라는 이름으로만 살아간 것이 아니었다. 남편이 남긴 흔적과 불확실한 미래 사이에서 두 아들을 키워냈고, 손주들을 돌보았으며, 흩어질 수 있었던 가족을 붙잡았다.
저자가 “할머니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었다”고 표현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완전히 극복해서 위대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다. 상처를 품은 채 살아남았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의 삶을 지켜낸 사람이었다.
나는 이 부분에서 가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흔히 역사를 이름을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로 기억한다. 하지만 한 시대를 버티게 만든 힘은 기록에 남은 몇 명의 영웅만이 아니다. 그들의 곁에서 무너진 삶을 다시 세운 사람들이 있었다.
이름을 남기지 못했지만 누군가를 먹이고, 기다리고, 돌보고, 다음 세대가 살아갈 수 있도록 버틴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할머니를 단순히 나를 아프게 했던 사람으로만 기억하지 않는다. 그녀 역시 한 시대의 폭력과 상실을 통과한 사람이었다. 꿈을 잃은 사람이었고, 자신의 가능성을 접어야 했던 사람이었으며, 동시에 끝까지 가족을 지켜낸 사람이었다.
나의 할머니처럼 저자의 할머니가 남긴 것은 완벽한 사랑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이 견뎌낸 생존의 기록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함 속에서도 그녀는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삶을 버텨낸 사람이었다. 물론 고통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권리를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시대의 피해자가 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해한다는 것은 용서하거나 미화하는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의 행동만 바라보는 대신, 그 사람이 어떤 시간을 지나왔는지 함께 바라보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비밀의 들판》은 기억에 대한 책이었다. 사라진 기록을 찾아내는 일, 침묵 속에 묻힌 사람들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일은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확인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상처를 물려받고, 또 어떻게 다르게 이어갈 것인지 묻는 과정이다.
우리는 이전 세대가 남긴 선택과 결과 위에 서 있다. 그들의 용기뿐 아니라 두려움도, 희생뿐 아니라 상처도 때로는 다음 세대에게 이어진다. 그러나 과거가 우리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무엇을 반복하지 않을 것인지 선택하는 일이다.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결국 타인의 시간을 이해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타인의 시간이 나의 가족과 나 자신의 시간과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할 때, 책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자신을 이해하는 거울이 된다.
시대의 광풍 속에서도 끝내 남는 것은 거대한 이름만이 아니다.
싸운 사람, 기다린 사람, 살아남은 사람이 함께 역사를 만든다.
우리가 기록하는 이유는 과거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가 아니다. 누군가의 희생과 누군가의 고통을 함께 기억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같은 상처가 다음 세대에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역사는 영웅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싸웠고, 누군가는 기다렸으며, 누군가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이 이어져 지금의 우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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뚱냥다독 2026-08-05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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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알아가고 기록한다는 건...
#비밀의들판 #마거릿주혜리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2기
비밀의 들판. 마거릿 주혜 리 지음/장상미 옮김. 한겨레출판. 2026.
_침묵은 어떻게 역사를 드러내는가
저자의 가족사는 곧 역사였고, 그 역사를 알아나가는 시간은 곧 자신을 찾는 과정이었다. 내가 누구인가 어디에서 어떻게 완성되어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었는지. 그 과거를 알기 위한 노력은 힘겹고 어렵울 수밖에 없었지만, 그만큼의 가치와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의미는 고스란히 저자의 아이들과 가족 모두에게로 이어지게 될 것이고.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까지 가치있는 길을 함께 따라가보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너희가 정체성을 탐구해 나가는 과정은 나와 너희 아버지와는 다를 거야. 언젠가 배우자나 부모나 반려인이 되겠지. 나는 너희가 알았으면 해. 너희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이 될지는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 연결고리는 너희 증조할아버지의 이상주의와 증조할머니의 투지와 생존 의미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과 애정에서, 어머니의 탐구와 아버지의 헌신에서 비롯했다는 것을.
너희에게 우리가 있다는 것을.(386-387쪽)
'나'라는 존재가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닌 이상, 우리에겐 우리가 온 분명한 지점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 중 얼마나, 그 지점을 알고 찾고 확인하고 싶어할까. 어쩌면 일반적으로 우린, 우리의 뿌리와 그 과거가 낯설지 않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고, 그래서 더 알아야한다는 생각 없이 살고 있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미, 이민자로서 환경의 변화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정체성이 혼란을 일정부분은 경험했기 때문에 더욱, 궁금하고 알고자 하는 강한 욕구를 갖게 된 것이 아닐지. 그러면서 자연스레, 이 모든 과정을 통해 그 다음 세대와 또 그 다음의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알아나가는가가 결국은 그 다음의 삶을 어떻게 살아나갈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답이 된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지 않을까.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방법은 자기 자신의 지금이 어떤 과거와 역사에서 비롯되었는가를 확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참 굴곡 많은 시간과 사건의 연속이었다. 물론 이 굴곡진 역사는 현재에도 진행중이기는 하다. 그리고 이 역사를 감당하는 것은 오롯이 그 역사 속을 살아냈어야 했던 우리였고, 그런 우리의 과거를 외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은 책임이지 않을까. 그 책임을 다하는 과정이 순탄할 수는 없다. 쉽지 않기도 하고. 그럼에도, 저자가 쫓으려했던 이야기는 그만큼의 이유가 있었고 찾아야만 했던 가치가 충분했다. 단순히 한 가족의 개인적인 과거의 기록으로 그치지 않고 더 커다란 감동을 우리에게 줄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의 과거는 비단 개인의 것으로만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 책의 기록이 소중한 이유이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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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7070 2026-08-14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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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들판, 언젠가의 당신을 만나 내가 향할 그곳에서.
*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
#비밀의들판 #마거릿주혜리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2기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자기의 역사를 찾는다는 건 대체 무엇일까. 사람은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 사람의 몸으로 살아간다. 자기 정의는 역설적으로 타인에게 비춰 보이는 나, 타인과의 관계 어딘가에 위치하는 나, 나를 둘러싼 관계의 이름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 이유로 나를 이해한다는 것, 누군가를 알아간다는 것, 그 삶의 궤적을 좇는다는 것은 그 기원과 현재를 훑고, 감각하고, 음미하는 것과도 같다.
위, 아래, 좌우(?)까지 고루고루 잃어가며 살아온 결과, 가장 큰 아쉬움은 그의 삶을, 기억을, 언젠가의 시절을 말해줄 사람이 점점 줄어가다 기어코 한 명도 남지 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나의 OO은 말했다. 나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알더라도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고. 언젠가 너의 어린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도 너뿐인 때가 올테니 지금이라도, 틈 날 때마다 자주 말해주고 싶다고.
p.16 나는 신문 기록, 수감 중 읽은 책 목록, 공산주의자 동지들과 연락을 주고받기 위해 직접 고안했던 암호 등 내 할아버지 이철하의 짧은 생애에 관한 사실들을 밝혀냈지만, 정작 내 존재 자체에 깊이 스며든 것은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내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이었다. 그 이야기들은 내 몸을 파고 들어 와, 손녀였고 딸이었으며 마침내 어머니가 된 나라는 사람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내 몸에서 풀어내야 했다.
p.58 나는 미국에서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그 어느 도시에 살면서도 진정으로 내 집에 머무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나는 그 이유가 할아버지의 삶이 잊히고 만 사실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이리저리 떠도는 성인기의 내 삶에서 단 하나 변함없는 것은 더 전망 있는, 더 흥미로운, 더 '나은' 어딘가로 이동하려는, 탈출하려는 충동뿐이다. 내 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그 자리는 다른 누군가에게 속해 있다는 느낌으로만 채울 수 있었다.
누군가를 영영 보내고 온 날엔 으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누구가 아닌 이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뭘 좋아하고, 어떤 꿈을 꾸고, 어느 길을 따라 마침내 그곳에 뿌리내리고 살아왔을까. 그 가슴에 무엇이 싹트고 시들어 묻히고야 말았나. 내도록 아쉽고 궁금했다. 서럽기도 했다. 그가 평생에 걸쳐 지키고 쌓아온 것들, 형체도 남기지 못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삭이고 숨겨온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렇게 그가 따돌려진, 숨이 턱에 차도록 쫓아다니게 한 세월은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누가 그의 삶을 들어주었을까. 누가 그 자신의 가슴 가장 깊은 곳에 묻힌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고이 닦아 전해주었을까. 그 이야기의 이름을 안다. 상처. 상처. 상처.
p.123 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들은 바로는 아기 때 자신에게 결핵을 옮긴 이가 할아버지였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아마도 감옥에서 옮았을 것이다. (...) 아버지가 전혀 알지 못했던 부친이 남긴 유산이, 당신을 죽음으로 몰고 갔거나 적어도 주요인을 제공한 전염병이었던 것이다. 잠복기를 거친 다음 발병해 조직을 훼손하고, 결코 온전히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그 병. 아비 없이 자라난 상처. 아비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처. 내게로 대물림된 그 상처.
p.198 내가 묻는다. "할머니가 지내던 집 사람들은 정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아니면 중국으로 탈출한 가장 민강에 관해서 언급한 적은요?" 할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한다. “내 주위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민강을 언급하는 것도 들은 적 없고. 나는 애초에 왜 일본인들이 한국에 있었는지 조차 몰랐어. 그 시대는 그랬지."
저자가 추적하는 가족들의 계보는 복원해낸 조부의 삶, 침묵 속에 전달된 조모의 삶, 소외와 포기로 점점이 이어져온 모부의 삶이라는 낱알들의 모음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의 삶, 자기가 살아오지 않은, 알 수 없었던 시대, 파편화된 기억으로만 존재해온 일화를 한데 모아 가족과 핏줄로 이어져는 더 큰 그림이자 새로운 시작에의 첫 획이다. 여전히 미완이며, 영영 완결될 수 없는 '것'을 위한.
그리하여 종국에는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무엇을 남길 것인가, 가 아닌, 무엇이 남는가, 무엇이 끝내 살아남아 귓가로 입속말로 손때 묻은 흔적들로 전해지는가. 저자가 끝내 도달한 '미완'에서 진정 자기 자리를 찾은, 어쩌면 영영 그럴 수 없게 된 과거와 현재의 의의를 묻기를 바란다. 그렇게 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들어봐, 너의 이전을 말해줄게. 들어봐, 나는 이 몸으로 이어져 왔으니, 우리는 어느 몸에서 갈라져 어느 '곳'을 살아가는 몸인가…
p.380 마침내 집에 온 기분이다. 특정한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는 베이 에어리어는 아이와 함께 있는데도 여전히 거쳐 가는 곳으로 느껴지고, 한국은 좀 더 익숙하지만 그래도 외국이다. 나에게 집이란 장소가 아니다. 존재의 상태다.
p.387 옛날 옛적에 자기가 태어난 나라가 전혀 편하지 않은 소녀가 있었어요. 소녀는 혼자만 다르게 생겼고, 먹는 음식도 달랐어요. 사람들은 소녀에게 묻곤 했어요. "넌 어디 출신이야?" 소녀가 "휴스턴"이라고 대답하면 사람들은 다시 물었어요. "아니, 진짜로 어디서 왔냐니까?" (…) 여성은 여전히 두 나라 어디에서도 편하지 않지만, 가족과 함께하면서 비로소 집에 온 기분을 느끼게 되었어요. 엄마와 달리 아이들은 과거를, 자신의 조상이 누구인지를 알고 자랄 거예요. 여성은 진심으로 바랐어요. 아이들이 그들 자신과, 어디가 되었든 자신이 살기로 선택한 곳에서 편안히 머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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뫕 2026-08-06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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