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주목사 : 기독일보
[김영주 설교] 언제 수건을 벗을 수 있을까
지난 주간 매우 의미 있는 한 주간을 보냈습니다. 3·1운동100주년을 맞이하여 100년 전 일제의 폭압에 맞서 독립만세를 외친 3·1운동의 선열들의 헌신적인 노력들을 기리며 그 의미를 되새겨보는 여러 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김영주 설교] “신비를 가슴에 안고”
회상해 보면 보람된 세월이었기도 하지만 또한 아쉬운 세월이었기도 합니다. 지난 한 해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은 갈등과 분쟁으로 전쟁 직전까지 위협이 고조되던 한반도에 화해와 평화의 문을 열어놓게 되어 우리 모두에게 큰 희망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가진 자들의 갑 질, 여성에 대한 혐오, 사회적 약자들..
[김영주 목사] 어디로 갈까?
예수 탄생의 계절이다. 모두들 예수를 맞이하기 위해 분주하다. 이제 예수탄생은 먼 갈릴리의 한 작은 마을 나사렛에서 몇몇 사람들이 알았던 사건이 아니라, 온 세상의 사람들이 알고 축하하는 큰 사건이 되어 있다. 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거리는 화려한 불빛으로 장식되고, 크리스마스 캐럴 노래가 흘러나고 있다...
개신교인 절반 이상 "통일해야" "동성애는 죄"
개신교인들의 신앙생활에 대해 발표했는데, "72.5%가 10년 이상 신앙생활을 해온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히고 "한국 개신교인의 상당수(72.2%)는 적어도 일주일에 1회 이상 공식적인 예배에 성실하게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 또 자신의 신앙심이 '보통'이라고 생각하는 신자들의 비율(44.9%)이 가장 높았다..
[김영주 설교] "믿음 · 헌신· 바름"
지난 주간은 10월 30일(「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출발점)이 있는 주간이었습니다. 한 주간을 지내면서 제 자신이 놀랐습니다. 무척 담담하게 한 주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작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보내면서 동분서주했고, 한국교회 역시 변화를 모색하기 위해 여러 부분에서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김영주 설교] 내 혀의 재갈 물리기
오늘의 본문 말씀은 설교를 앞둔 목사에게는 무척 부담되고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특히 야고보서의 말씀은 더 그렇습니다. 본문은 '혀를 조심하라'의 제목으로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김영주 설교] 신앙인의 자리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가 머리이신 교회공동체로 불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교회공동체는 여러 부분이 결합되고 서로 연결되어서, 각 부분이 그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을 따라 각 마디로 영양을 공급받고, 그 몸을 자라게 하여,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세워 가야 합니다..
[김영주 설교] “이제 우리는”
모두가 한반도의 운명과 관련된 문제들인데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세계를 뒤흔드는 폭탄적인 발언에 주변국들은 요동칩니다. 이런 상황을 만드는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가 얄밉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하지만 더불어 약소국가인 스스로의 한계를 느꼈습니다. 또 이런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을 옹호하는 듯 한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에 속이 상하기도 했습니다...
"한국교회 원로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 필요하다"
한국교회 원로들이 함께 한국교회 현 상황과 난제들을 논의하고 대교회·사회적인 목소리를 내자고 의견을 모았다. 한국교회 원로들로 구성된 '원로들의 대화 모임'이 최근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하 기사연) 회의실에서 열렸다. 모임은 이 모임을 이끌었던 김영주 목사가 NCCK 총무 직을 내려놓고 기사연 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장소가 옮겨져 열리게 됐다...
[김영주 설교] “부활의 삶”
부활이라고 하면 흔히들 생각되는 것이 죽은 자가 과연 부활할 수 있겠느냐? 그것은 어떤 근거로 말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 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의 기록에도 부활은 나사로와 예수 밖에 없습니다. 또 예수님 이후로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2천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없는데, 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이야기로 기독교는 2천년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김영주 설교] 불편한 진실
공관복음에는 사순절 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배치하면서 사순절의 의미를 잘 정리하고 있지만, 요한복음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 누가 복음은 처음에 예수의 족보를 설명하는 것부터 시작하지만, 요한복음은 이와는 달리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예수님이 계셨다는 말씀부터 시작합니다...
[김영주 설교] 나사렛 예수
지난해를 생각해본다. 지난해 한국사회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모두가 자중자애 하는 마음으로 협력하고 노력한다면 우리 사회는 한 단계 발전할 것이다. '새 하늘, 새 땅'에의 기대를 가지고 사는 우리 신앙인들의 기도와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 올해 첫머리에 남북 간의 북한의 평창 올림픽 참가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고, 이를 계기로 남북 간의..
1
2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tags/%EA%B9%80%EC%98%81%EC%A3%BC%EB%AA%A9%EC%82%AC/page1.htm#share
Showing posts with label 김영주.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김영주. Show all posts
2021-10-25
김영주목사 : 기독일보
김영주목사 : 기독일보
Tag : 김영주목사
"많은 은혜 입고 살았다…한국교회 앞에 감사하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를 7년 동안 실질적으로 이끌어 왔던 총무 김영주 목사가 20일 정기총회를 끝으로 떠난다. 15일 낮 정동 한 식당에서 김 총무는 기자들과 만나 마지막 퇴임 기자간담회를 갖고, 그동안의 일들에 대해 돌아보며 평가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반도 전쟁반대 호소를 위한 NCCK 교단장 긴급 기자회견 열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총무 김영주 목사, NCCK)가 28일 오전 9시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양이재 앞에서 "한반도 전쟁반대 호소를 위한 교단장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한반도 평화를 호소했다...
"종교가 한국사회 희망 주고 시대변화 이끌어 냈다"
한국종교인평화회의(대표회장 김영주 목사, KCRP)창립 30주년을 맞아 기념식과 함께 '2016 이웃종교화합대회' 개막식을 가졌다. 29일 그랜드 앰배서더 서울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행사에서 참석자들은 지난 30년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하나님의 평화, 무력으로 성취할 수 없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총무 김영주 목사, NCCK) 화해·통일위원회가 지난 1월 6일 있었던 북한의 수소폭탄실험에 대한 입장을 발표했다. 교회협은 11일 발표한 성명을 통해 “남북한 비핵화 공동선언”을 넘어 6자회담 당사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가 비핵화에 앞장설 것을 촉구하며, 한미 양국이 한반도 내에서 실시하고 있는..
NCCK 총무 김영주 목사가 말하는 "나의 새해 소원과 기도는"
생각해보면 우리들이 살아온 삶의 발자국 발자국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한해를 지나게 하시고, 또 새 날을 주셔서 새 각오 새 다짐을 하고 한해를 시작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우리가 그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2016년 신년 메시지]
2016년 새해는 모든 이들이 희망으로 맞이할 수 있는 한해이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의 가장 낮은 곳에서 눈물 흘리는 자들을 위로하심으로 희망이 되셨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소외된 곳에서 탄식하고 있는 이들에게 희망의 빛이 비치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김삼환 목사 WCC 상임위원장 사퇴 가시화‥상임위 연이은 불참
김삼환 목사(명성교회)의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 한국준비위원장직 사퇴가 가시화될 것으로 보인다. 김 목사는 지난 달 일부 상임위원들과 모인 자리에서 위원장직 사임 의사를 밝힌 후, 10일 오전 상임위원회 불참뿐 아니라 현재까지 임시 상임위원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사임 의지를 굳힌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NCCK 김영주 총무, 아웅산 수치여사 면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총무 김영주 목사가 비폭력 민주화운동 지도자 아웅산 수치 여사와 만났다.김 총무는 지난 3일부터 4일까지 미얀마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 아시아교회협의회(CCA) 미얀마교회협의회(MCC)의 공동주관으로 『미얀마의 평화, 안보, 화해를 지속시키게 하는 교회들의 참여』 컨퍼런스 마지막 날 미얀마의 비폭력 민주화 운동 지도자인 아웅산 수치 여사를..
1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tags/%EA%B9%80%EC%98%81%EC%A3%BC%EB%AA%A9%EC%82%AC/page2.htm#share
===
NCCK, 8월 해외동포 2·3세들과 北까지 '한반도 대순례' : 제휴 : 기독일보
NCCK, 8월 해외동포 2·3세들과 北까지 '한반도 대순례' : 제휴 : 기독일보
NCCK, 8월 해외동포 2·3세들과 北까지 '한반도 대순례'
분단 70주년 맞아 동포 자녀들에게 평화통일의 중요성 고취 목적;지난해 워싱턴 평화 대행진서 참가 동포들이 제안
기독일보 장세규 기자(veritas@cdaily.co.kr)
글자크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총무 김영주 목사. ©채경도 기자
[기독일보 장세규 기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분단 70주년을 맞아 한반도 평화를 위한 특별한 행사로 오는 8월께 해외 동포 2,3세를 초청해 남한에서 북한까지 가는 '한반도 대순례'를 진행한다.
NCCK 김영주 총무는 지난 21일 기독일보와의 인터뷰에서 "10월께 한국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 등 국제 지도자들과 함께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국제협의회'를 개최할 예정이다"며 이에 앞서 이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이날 인터뷰에서 김 총무는 먼저 "30여년 동안 (북한교회와) 대화를 해 왔고, 그 대화의 통로는 상당히 잘 연결돼 있다. 그래서 언제든지 우리가 제안을 하고, 저쪽에서도 제안을 하곤 한다"며 "현실적으로 북한교회 지도자들이 한국을 방문하는 것이 그렇게 여의치 않다면, 우리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북쪽으로 빠른 시일 내에 방문했으면 좋겠다"고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방북을 희망했다.
그러면서 '한반도 대순례' 행사에 대해 설명하며, 지난해 7월 워싱턴D.C에서 열린 '평화 대행진' 당시 참가한 미국 동포들의 요청임을 전한 김 총무는 "(동포들이) 자녀들에게 한국의 형편도 교육시키고 평화통일 운동에도 참여하고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해 8월 정도 2,3세들을 한국으로 불러서 '한반도 대순례'를 하자고 제안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이번 8월에 한반도 평화통일, 평화협정, 그리고 민족의 화해 등을 주제로 미국 뿐만 아니라 해외에 있는 동포들의 자녀들을 대상으로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하는 한반도 대순례를 하면 좋겠다"며 "만약 가능하다면 해외 동포들이 휴전선을 넘어 북쪽도 방문을 했으면 좋겠다"고 NCCK의 바람를 전했다.
▲지난해 7월 26일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평화 대행진 및 기도회에 참석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관계자를 포함한 참가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WCC
다만 김 총무는 "남북관계도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해외 한인 지도자들이 많이 요구를 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을 조심스럽게 준비하고 있다"면서도 "그러다 보니 굉장히 큰 프로젝트가 될 가능성이 커 조심스럽지만, 세밀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앞서 그는 2013년 10월 부산에서 열렸던 세계교회협의회(WCC) 제10차 총회서 결정된 사항을 언급하며 "국제적인 차원에서는 지난번 WCC 총회에서 올해가 분단 70주년이니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국제협의회'를 하기로 했다"면서 10월경 개최를 목표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를 위해 5월 초순 중에 국제 지도자들이 북쪽을 방문하려고 준비 중이라고 밝힌 김 총무는 "NCCK와 국제적인 차원에서 남북 교류가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김영주 총무는 이날 인터뷰에서 통일과 관련해 "요즘 정부에서 '통일 대박'이니 '통일 준비' 이야기가 나오는데, 저는 국가 간 통일에 대해 접근할 때 매우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우리 민간인들은 힘을 합쳐서 때론 압력도 넣고, 직접 교류도 펼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총무는 또 "정부가 보수적이고 진보적이고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들 정체성 때문에 할 수 없는 일들을 우리와 같은 민간 단체들이 보완하는 역할, '화살 촉' 역할을 해야 한다"면서 "그래서 NCCK는 통일 문제의 걸림돌이 되는 제반 악법들을 해결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53155#share
18 [김영주 목사] 어디로 갈까? : 제휴 : 기독일보
[김영주 목사] 어디로 갈까? : 제휴 : 기독일보
[김영주 목사] 어디로 갈까?
성탄을 맞는 2018년 12월 23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
기독일보 편집부 기자(press@cdaily.co.kr)
글자크기
NCCK 前 총무,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 김영주 목사. © 기독일보DB
예수 탄생의 계절이다. 모두들 예수를 맞이하기 위해 분주하다. 이제 예수탄생은 먼 갈릴리의 한 작은 마을 나사렛에서 몇몇 사람들이 알았던 사건이 아니라, 온 세상의 사람들이 알고 축하하는 큰 사건이 되어 있다. 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거리는 화려한 불빛으로 장식되고, 크리스마스 캐럴 노래가 흘러나고 있다.
성탄절은 한해를 마무리하는 계절인 12월 말이라는 시기와 맞물려 우리 모두를 들뜨게 하고 있다. 그동안 미뤄 왔던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고 모두들 각종 모임이 조직되고 나름대로 분주하다. 지난 한주 간 나 역시 약간은 들뜬 마음으로 여러 모임에 참여했다. 친한 벗들과의 만남. 정치지도자와의 만남, 시민사회 지도자들의 모임, 교계지도자들과의 만남, 세미나를 비롯한 교계 행사 등에 참여하였다.
그 모임들에 참여하면서 나를 붙잡고 있었던 생각은 '곧 크리스마스인데 우리 한국사회와 교회는 예수님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드리고 환영할 준비가 되어있는지?' 이었다. 유감스럽게도 그곳에는 예수님의 자리를 배려한 노력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좀 더 발칙한 생각을 하자면 " 만약 내가 예수라면 어디로 갈까."라는 질문이다.
지난 주간 우연히 만난 박사 한분이 생각난다. 그분은 본래 천주교인이었는데 개신교 신앙인으로 전환한 분이다. 최근 그분이 속해있는 교회의 목사가 법원으로부터 자격 상실이라는 판결을 받아 교회의 분쟁이 커지고 있어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한 지식인의 고민 뿐 아니라, 양식 있는 기독교인들의 고민일 것 같아 안타까웠다.
한국교회는 예수님을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감금하고 있다는 지적은 과한 것인가. 예수는 그들의 언어의 장식이 되고 생활 방편이 되고, 산업이 되어있고, 집단의 이익을 보호해 주는 이데올로기가 되어 있었다.
유진 피터슨의 지적처럼 한국교회는 '소비자중심의 교회'가 되고 있다. 나 자신 오랜 세월동안 예수 믿고 살아왔지만, 아직까지도 기독교문화가 어색하다. 간디의 말처럼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을 그리스도인들만 모른다.'는 말이 뼈아프다.
칼릴 지브란은 「모래 물거품」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백년마다 한번씩/ 나사렛 예수와/ 기독교인들의 예수는 삼나무 숲속에서 만납니다./ 그들은 오래동안 이야기를 나눕니다./ 언제나 나사렛 예수는 이렇게 말하며 사라져 갑니다./ 나의 친구여, 우리가 결코 일치할 수 없음이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늘 주변부 신앙인으로 살아왔다고 변명하며 기독교를 비판하기에는 너무 구차하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마리아를 생각해본다. 천사의 전언 "기뻐하여라. 은혜를 입은 자여,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 하신다" 을 들고는 무척 당황해 한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한다. 누가는 마리아의 입을 빌려 예수의 탄생은 당시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오심과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아마 누가 자신도 자신이 믿고 있는 메시아 탄생이 나사렛의 한 초라한 여인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매우 곤혹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예수탄생의 장소를 나사렛에서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으로 옮겨 놓고 아기 예수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보호하신다는 상징인 구유와 왕적인 권위를 나타내는 강보에 싸였다고 표현한 것이리라. 그리고 목자들이 구유를 방문한 사실을 설명하면서 목자 출신인 다윗과 연관시키고 있다.
(누가는 예수가 탄생했다는 사실보다 오히려 마리아가 새로이 태어난 아이를 어느 곳에 두었느냐를 말하는 데 더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리아가 첫 아들을 낳아서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혀 두었다.' /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깨닫지 못 하는도다.(사1:3) / 강보는 가난의 표식이나 이스라엘의 메시야가 그의 백성들 가운데서 버림받은 자가 아니라, 잘 영접되고 보호받는 자라는 표식이다.)
그 점은 오늘의 또 다른 본문인 이사야서를 예수 탄생의 예언으로 인용되고 있다는 점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유명한 메시아 곡의 가사가 된 구절이 되기도 한 것인데 이는 다윗의 후손인 히스기야왕의 대관식에 즈음하여 공표된 예언시라고 이해되고 있다.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 불릴 것이다. 그의 왕권은 점점 더 커지고 나라의 평화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 나사렛의 한 작은 마을에서 수줍게 태어난 예수의 탄생을 받아들이기에는 무언가 허전한 것 같다.
그러나 기적처럼 우리를 앞도하면서 나타나서 모든 사람들이 알아보며 그렇게 승복할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오시는 그런 메시아는 없다. 예수는 마리아가 느꼈던 당황스러움으로 우리에게 오실 것이다. 그분을 맞이하는 것은 어쩌면 처녀가 남편과 상관없는 아기를 잉태해서 키워야 하며, 그 아이가 성장해서는 세상의 기득권과 적대적 관계를 형성하는 아슬아슬한 장면을 목도하게 되어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하며 마침내 가슴을 후며 파는 아픔을 안겨주는 십자가 처형을 바라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성탄의 절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모셔야 한다. 예수께서 오실 수 있도록 잘 준비해야 한다. 그리하여 주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주안에 거하는 신비한 합일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작은 예수가 되어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라는 천사의 찬양이 실현되는 신비한 경험이 있는 성탄절이 되었으면 한다.
디도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 은혜는 우리를 교육하여, 경건하지 않음과 속된 정욕을 버리고, 지금 이 세상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된 소망 곧 위대하신 하나님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모든 불법에서 건져내시고 깨끗하게 하셔서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
이 말씀은 빌립보서의 말씀으로 대체할 수 있다.
' 마지막으로, 형제자매 여러분,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무엇이든지 경건한 것과, 무엇이든지 옳은 것과, 무엇이든 순결한 것과, 무엇이든 사랑스러운 것과, 무엇이든지 명예로운 것과, 또 덕이 되고 칭찬할 만한 것이면, 이 모든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나에게서 배운 것과 받은 것과 듣고 본 것들을 실천하십시오. 그리하면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빌립보서 4:8-9)
성탄의 절기에 우리 모두 내가 주안에 주가 내안에 거하는 신비를 경험하는 은총이 임하시길 기도한다.
[박만규 설교] "기뻐하시는 하나님"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81777#share
[김영주 설교] “부활의 삶” : 제휴 : 기독일보
[김영주 설교] “부활의 삶” : 제휴 : 기독일보
▲前 NCCK 총무, 現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 김영주 목사. ©기독일보DB
부활절입니다.
이 부활 주일을 맞아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고 다시 생각해 봅니다.
부활이라고 하면 흔히들 생각되는 것이 죽은 자가 과연 부활할 수 있겠느냐? 그것은 어떤 근거로 말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 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의 기록에도 부활은 나사로와 예수 밖에 없습니다. 또 예수님 이후로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2천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없는데, 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이야기로 기독교는 2천년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부활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최근에 만난 한 지인과의 대화에서 어떤 사람의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분은 과거 우리나라에서 유명했던 한 분의 비서로 일한 적이 있었는데, 모시던 분이 세상을 떠난 지가 여러 해 지났지만 아직도 1년에도 네 차례는 무덤을 찾아 간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무덤 앞에서는 자신은 지금 무슨 사업을 어떻게 하고 있으며, 또 어떻게 지냈고, 심지어는 가족들의 이야기 까지 마치 상사에게 보고하듯이 한다고 합니다. 마치 자신이 모시는 신(神)에게 (기도)하듯이 말입니다.
이 말을 들으며 저는 예수님께 늘 내 삶을 보고하면서, 제가 이렇게 살고 있으며, 또 어떻게 잘못 살았다고 고백하면서, 그러나 힘을 더해 주셔서 제게 늘 주님의 부활을 인식하며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사는가를 생각하며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활절 설교를 준비하면서 듣게 된 이 이야기를 통해 내가 신앙인으로서 정말로 예수 제자 되기 위해 내 삶을 갈고 닦고 고백하고 예수께로 가까이 가고 싶어서 오늘 설교의 제목을 '부활의 삶' 이렇게 먼저 정해놓고 말씀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요한복음의 말씀(요 20:1-18) 을 들여다보면 이렇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인으로부터 부활사건이 전해집니다. 이렇게 막달라 마리아로 시작한 예수님 부활의 이야기는 마지막에도 막달라 마리아가 또 다시 등장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가서 예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큰일이다. 예수 시신 없어졌다고 알리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전언을 들은 예수의 제자들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무덤가로 달려갔다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좀 더 자세히 보면 베드로가 뛰어가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 앞질러 도착합니다. 그러나 베드로 보다 먼저 도착한 젊은 제자는 베드로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베드로가 먼저 무덤 안에 들어가자 뒤따라 들어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덤에 들어간 제자들은 예수의 시신은 없어지고 세마포가 잘 개켜져 있는 것을 보고 자신들이 모인 곳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이 부활사건에 대해 유대인들은 무서워서 집에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어떻습니까? 제자들이 돌아가고 난 뒤, 무섭고 시신 없어진 무덤에서 슬피 예수 생각하며 울고 있습니다. 나중에 두 천사가 나타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잘 알듯 요한복음은 요한공동체가 자신들의 신앙을 위해서 새롭게 재편집해서 썼던 복음서입니다. 따라서 요한공동체는 베드로보다도 요한사도를 더 위에 두고 싶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가장 먼저 믿은 사람이 사도 요한이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 요한은 자신이 무덤에 먼저 도착했지만 베드로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베드로를 앞서 들여보내는 배려도 할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었음을 비칩니다.
이처럼 어떻게든 요한이 베드로보다 훌륭하다는 점을 내세우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그런 욕심이 있었던 그런 기록이 요한복음서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요한복음서에서도 뒤집을 수 없는 것이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기술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 시신 없어진 것을 가장 먼저 알고 제자들에게 알려줬습니다. 또 제자들은 시신이 없어진 것을 보고, 다들 자기 집으로 돌아갔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끝까지 앉아 슬피 울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났습니다. 그리고는 숨어있는 제자들에게 살아계신 예수를 보았다는 말도 전하는 장면입니다.
저는 이런 장면을 보면서 부활을 누가 경험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부활을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이런 표현을 할 수 잇을 것입니다. 부활은 정성이다.
오늘날 성경을 보면 사도 베드로와 요한의 사이에는 계층구조(hierarchy structure, 階層構造])라는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무덤에 늦게 도착했지만 베드로를 앞장세우는 이런 계층적인 질서가 있어야 복음이 전해진다는 당시 교회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계층적인 질서가 예수의 죽음과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도록 할 수는 없는 겁니다. 오로지 예수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예수와 살았던 삶을 다시금 되새기고, 예수가 지금 여기 계시지 않음을 애통하고 슬퍼하며, 그 예수를 내 마음 속에 기억하고 다시금 되새기면서 그 분의 삶을 따르겠다고 결심하는 사람만이 예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공감능력을 상실한 교회입니다.
슬퍼하는 사람, 아파하는 사람, 고통 받는 사람의 자리에 한국교회가 찾아가서, 그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과 흘리는 눈물에 동참하지 않고, 교회가 갖고 있는 교리와 틀을 갖고 포섭하려고만 하고, 이것을 복음이라 전하고, 복음을 알아듣기 쉬운 이야기로만 포장을 하다 보니 복음이 상품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공감의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할 것 같습니다. 제도를 세우고 복음을 재창조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오늘 본문 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여러분도 잘 아시는 대로 굉장히 분쟁이 많았던 교회입니다. 이분들이 바울선생의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합니다.
하나는 바울은 도대체 무슨 권위로 사도가 됐는가? 바울이 사도인가? 바울이 과연 베드로 , 야고보 등 예수님의 사도 반열에 들어 있는가? 있다면 무슨 권위로 되어 있는가?
둘째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사도들의 전승에 따른 복음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바울 선생은 고전 15장 1절 이하의 말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전하는 복음은 내가 전달받은 것이고, 여러분이 전달받은 것이 확실하다. 다시 말하면 내가 만들어 낸 복음 아니라 사도들의 전승으로부터 기독교인이 간직했던 교회란 제도와 틀이 만들어지기 전 여인들이 만났던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복음을 내가 전달 받은 것이고 내가 전달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니 내 복음이 바울의 만든 복음이 아니다. 염려하지 말라. 당신 권위는 뭔가? 부활하신 예수께서 게바(Cephas)에게 나타나고,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난 후 마지막에, 만삭되지 못한 채 낳은 나에게로 나타났고, 내가 부활하신 그 분을 만났다. 그 분이 나를 사도로 세워주셨다. 그러니 그 권위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이것은 확실한 근거 위에 내가 믿고 내가 지킨 것이니 여러분들도 그것을 지켜라. 그 외 다른 복음이 없다. 그리고 흔히들 그러니까 정말로 우리가 살아날 수 있느냐 없느냐, 복음은 회상(回想) 이기도 하지만 회상이 아니다. 부활은 그 분이 살아나심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살아계시고 앞으로도 살아나실 것이다. 그것은 너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예수가 살아나서 예수가 우리의 모범이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너희들도 예수님 말씀대로 살고 예수님 살아갔던 삶을 산다면 너희도 부활할 것임을 믿어라.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지만 나중에 분명히 보게 될 것이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울 선생은 이렇게 복음이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근거로 했으며, 그 분은 부활했고, 여러분도 그 부활의 경험을 갖고 살아야 하고 또 여러분들도 부활할 것이라고결론을 내립니다.
제가 여러 사람들과 부활절 예배, 부활절 설교를 놓고 이야기 하다가 사도 베드로의 모습에서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따르던 선생이 처형을 당하자 무서워서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서 부활을 경험도 못하던 모습의 베드로가 후일 사도행전의 기록에서는 공개적으로 여러분이 처형했던 그 예수가 3일 후 부활했다고 말하면서 "우리는 그 분과 만나서, 하나님과 만나서 같이 밥도 먹고 함께 지내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복음은 확실합니다. 죽은 자가 부활하셨습니다." 라고 힘주어 말하는 모습을 봅니다.(행 15장)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께서는 의심 많은 도마에게 말합니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더 복 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우리의 눈으로 예수가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볼 수 없습니다. 물론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서는 "보지 않고 믿는 너희가 복 있다. 너희가 꼭 너희가 손으로 만지고 느껴야겠느냐? 보지 않고 믿는 너희가 복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 죽었던 나사렛 예수, 그리고 부활했던 예수의 경험을 지금 2천년 후에 우리는 듣고 있지만 이 말씀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보지 않고 예수를 믿는 믿음의 사람인지. 아니 2천 년 전에 나사렛 예수가 소경을 고치고, 다리 저는 자를 고치고, 문둥병자의 몸을 깨끗하게 하시며 그들을 만지고 고쳐주신 예수님을 지금 느끼고 있는지.
또 우리는 가난하고, 어렵고, 힘들고, 병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려고 공감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지를 돌아보면서, 우리가 어렵고 힘든 사람들 그들과 가까이 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할 수 있다는 확신도가 가져야 할 때라 생각합니다.
부활은 그래서 거듭남이요, 부활은 정성을 다하는 것이요, 부활은 공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막달라 마리아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부활절 설교를 마치려 합니다.
자신이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때 '네게 죄가 없다' 말씀하신 그 고마운 말씀을 잊지 못해서, 그 고마운 말씀을 생각하며 무덤가에서 엉엉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께서는 가장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참으로 힘들고 어렵고운 소외당해 고통 받는 이웃들과 함께 했던 그 예수를 다시금 생각하면서, '아!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구나! 나도 그 예수님이 그립다.' 이 마음으로 온 정성 다해 가슴을 찢으며 눈물을 흘린다면,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듯이 우리도 만날 수 있을 것이고, 우리가 부활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신이 오래 전에 모시던 한 인간의 무덤 앞 에도 1년에 네 번이나 찾아가 자기의 생활을 보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활의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는 그 정성스런 막달라 마리아를 닮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러한 부활의 삶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에게 기쁜 부활절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임하시기를 빕니다.
* 설교는 지난 2018년 4월 1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79721#share
기독일보 김영주 설교
기독일보
[김영주 설교] 신앙인의 자리 : 제휴 : 기독일보
기독일보 › news
2018. 8. 8. ... [김영주 설교] 신앙인의 자리 ... NCCK 총무 김영주 목사. 前 NCCK 총무, 現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 김영주 목사 c 자료사진.
[김영주 설교] "믿음 · 헌신· 바름" : 제휴 : 기독일보
기독일보 › news
2018. 11. 7. ... [김영주 설교] "믿음 · 헌신· 바름". 제휴: 바이블25 ... NCCK 총무 김영주 목사. NCCK 전 총무·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장 김영주 목사.
[김영주 설교] “이제 우리는” : 제휴 : 기독일보
기독일보 › news
2018. 6. 18. ... 前 NCCK 총무, 現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 김영주 목사 c 자료사진. 지난주는 싱가포르의 북미정상회담, 그리고 그 이튿날 치뤄진 지방선거를 ...
[김영주 설교] 나사렛 예수 : 제휴 : 기독일보
기독일보 › news
2018. 1. 11. ... NCCK 총무 김영주 목사. △김영주 목사 c 기독일보DB. 지난해를 생각해본다. 지난해 한국사회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모두가 자중자애 하는 마음 ...
[김영주 설교] 내 혀의 재갈 물리기 : 제휴 : 기독일보
기독일보 › news
2018. 9. 18. ...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장, 前 NCCK 총무 김영주 목사. 오늘의 본문 말씀은 설교를 앞둔 목사에게는 무척 부담되고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김영주 설교] 언제 수건을 벗을 수 있을까 : 제휴 : 기독일보
기독일보 › news
2019. 3. 6. ... [김영주 설교] 언제 수건을 벗을 수 있을까. 제휴: 바이블25 ...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장, NCCK 전 총무 김영주 목사 ©기독일보DB.
[김영주 설교] “신비를 가슴에 안고” : 바이블25 : 기독일보
기독일보 › news
2019. 1. 10. ... [김영주 설교] “신비를 가슴에 안고”. 바이블25: 제휴 ... 설교는 2019년 1월 6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 전문입니다. #김영주목사 ...
[김영주 설교] 불편한 진실 : 제휴 : 기독일보
기독일보 › news
2018. 3. 22. ... [김영주 설교] 불편한 진실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NCCK 총무 김영주 목사. 前 NCCK 총무, 現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 김영주 목사.
[김영주 설교] “부활의 삶” : 제휴 : 기독일보
기독일보 › news
2018. 4. 6. ... [김영주 설교] “부활의 삶”. 제휴: 바이블25 ... 인터뷰 중인 NCCK 김영주 총무. △前 NCCK 총무, 現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 김영주 목사.
[김영주 목사] 어디로 갈까? : 제휴 : 기독일보
기독일보 › news
2018. 12. 26. ... 성탄을 맞는 2018년 12월 23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NCCK 총무 김영주 목사. NCCK 前 총무, 한국기독교사회 ...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search?q=%EA%B9%80%EC%98%81%EC%A3%BC+%EC%84%A4%EA%B5%90#share
===
[김영주 설교] "믿음 · 헌신· 바름"
성서일과 : 룻 1:1-8, 히 9:11-14, 막 12:28-34
기독일보 편집부 기자(press@cdaily.co.kr)
글자크기
NCCK 전 총무·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장 김영주 목사
지난 주간은 10월 30일(「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출발점)이 있는 주간이었습니다. 한 주간을 지내면서 제 자신이 놀랐습니다. 무척 담담하게 한 주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작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보내면서 동분서주했고, 한국교회 역시 변화를 모색하기 위해 여러 부분에서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올해 종교 개혁 주일(501주년)에는 지난해와 달리 한국교회는 아무런 성찰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는 듯 했습니다. 저 자신도 무덤덤하게 지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약간은 시니컬하게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지냈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적합한 것 같습니다. 단 1년 동안에 나는 왜 이렇게 변했는가 하고 생각하니 당황스럽기조차 했습니다. '서있는 곳이 다르면 풍경이 다르다'는 말이 내게 해당되는 말인가? 그러나 딱히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실 지난 1년은 여타의 일 년과 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촛불혁명이라고 불리는 촛불집회를 통한 시민들의 열망을 담고 새 정부가 성립되었습니다. 사회곳곳에서 적폐를 몰아내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자하는 바람이 큰 태풍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동안 기득권들이 관례와 관행과 관습으로 당연시 해왔던 일들이 '을'들의 도전에 의해 정죄되거나 물리쳐야 할 적폐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권위주의적 남성문화, 특권층들의 비리와 부패, 갑들의 고용비리, 재판관들의 부정과 부패, 금수저들의 오만과 독선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이렇게 문제가 많았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놀랄만한 일들이 매일 뉴스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한국사회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힘들더라도 세상을 바꾸고자하는 이런 노력들에 적극 참여하여야 할 것입니다. 혹자들처럼 "개혁 피곤증(?)"을 앞세워 그동안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 동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제가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오늘의 교회의 모습입니다. 세상을 새롭게 바꿔보려는 기운들이 분출되고 있는데, 교회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이 유달리 잠잠합니다. 한국교회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 살펴보지 않고, 새로워지겠다는 노력도 물론 없이 잘못된 관습을 되풀이 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봅니다. 오히려 세상의 언론들이 그런 문제점들을 속속들이 고발하고 있는데도 교회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부 교회가 앞장서서 매주 토요일 광화문에서 진행되고 있는 태극기집회(?)는 차치하더라도 한국교회는 우리사회의 변화의 몸부림과 상관없이 그 기득권의 모습을 공고히 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최근 광화문에서 열린 '한국교회의 회개기도 대성회'는 한국교회가 한국사회가 기독교를 보는 정서를 잘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단적인 예입니다. 저 자신도 개혁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괴롭습니다. 앞선 주일 김고광 목사님의 설교 '한국교회의 개혁은 목사부터'라는 말씀이 계속 마음에 남습니다. 개혁주간을 맞이한 우리는 먼저 가정과 회사와 교회와 일터에서 갑질(?)을 즐기지 않았는지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 고백이 우선되지 않는 개혁은 오히려 갈등과 분쟁을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개혁교회가 그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언제나 개혁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말씀을 개혁이라는 관점으로 읽습니다.
(마가복음) 오늘 본문말씀은 한 율법학자의 "가장 소중한 계명이 무엇입니까?"하고 묻는 말에 예수님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대답하는 장면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내가 곧 죽을 것이고, 부활 할 것이다.' 라고 예고하신 후, 예루살렘 성전 입성, 무화과나무 저주, 성전 정화, 포도원 소작인 비유, 부활 논쟁, 세금 논쟁 등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과 활동은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당시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는 제사장, 바리새인, 사두개인, 율법학자들에게는 큰 위협이 되었고, 예수 죽음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의 으뜸 되는 계명에 대해 단순히 한 율법학자와의 문답식의 지식 교류로 보면 안 됩니다. 이 말씀 이후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강하게 질책하고 있습니다. 이는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말씀(유언)으로 읽어야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되 네 마음(감정)을 다하여 목숨(죽음)을 다하여, 네 뜻(옮음, 바름)을 다하여, 네 힘(능력)을 다하여 섬기라""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붙들고 묵상해야 합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에게 마음이 이끌리고 있으며, 죽기까지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내 능력을 다하고 있는지! 그리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정말 사랑하는가! 하고 물어야 할 것입니다.
(룻기) 오늘 본문의 룻을 보면, 여성 신학에서는 여성들의 아름다운 연대라고 하지만 그것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모압 땅에서 약 10년 동안 거주하면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는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을 각자의 집으로 보내고자 합니다. 아마 나오미로서는 여러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이었을 것입니다. 아들들의 죽음으로 연결고리가 없어졌고, 모압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은 고향사람들이 모압 출신인 며느리를 어떻게 대할지 걱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한국사회가 남예멘사람을 비롯한 이주민을 대하는 태도를 보아도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은 출애굽의 역사에서 적대적 입장을 취하고 방해한 모압을 무척 싫어했습니다. 모압 사람들이 여호와의 회중에 오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습니다. 그러나 모압 출신인 룻은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따라 이스라엘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룻에게는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시어머니와의 관계가 좋았다 해도 남편도 없는 상황에서 홀로된 시어머니를 모셔야 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고, 또한 모압 사람들을 근원적으로 싫어하는 베들레헴 사람들의 냉대가 쉽게 예견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룻은 나오미를 따라 나섭니다. "당신이 가는 곳에 나도 가겠습니다. 당신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룻은 나오미를 따르는 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이해관계를 넘어선 결단입니다. 어쩌면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도 있는 길을 결단합니다. 룻은 헌신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옳은 결단이었습니다.
믿음은 선택이자 결단입니다. 신앙은 용기이기도 합니다. 어려움과 희생을 무릅쓰고 하는 결단이고 용기입니다. 룻기의 저자는 이 룻의 결단을 통해 여호와의 회중에 모압 사람들이 드는 것을 금하고 있는 이스라엘 중심의 신명기 법정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룻기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서는 국제결혼을 한 이스라엘 남자들에게 여자를 내 쫓으라고 했던 에스라의 이스라엘 국수주의에 제동을 걸고 있습니다.
유대인을 위한 복음서라고 알려지고 있는 마태의 예수님 족보에 당당하게 그 이름을 올리고 있는 위대한 결단의 여인들이 있습니다. 다말, 라합, 밧세바 등 이런 사람들이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라 이스라엘 밖의 이방인들입니다. 이들의 희생적이고 올바른 결단은 룻과 함께 예수님이 이스라엘만의 주님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구세주가 되는 길을 열어놓은 열쇄가 되고 있습니다.
이 분들 모두 관습과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부정과 부패와 불의가 정당화 되는 이 세상, 남성중심주의, 기득권 중심주의에 맞선 여인들이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바른 결단, 헌신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불행히도 한국교회는 아직까지도 이스라엘 중심주의, 남성우월주의, 기득권 중심에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 포용과 환대보다는 배제와 혐오를 신앙이라 고집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양과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자신의 피로 스스로 제물이 되셨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성령을 힘입어 자기 몸을 제물로 삼으신 그 피로 죽은 행실에서 떠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재물로 바쳤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바른 삶을 살기위해서는 자기의 몸을 죽이기까지 헌신해야 하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자기를 죽이기까지 헌신하지 않고서는 참 신앙인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오늘의 한국교회는 개혁이 필요합니다. 개혁에는 헌신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결단과 헌신이 없이는 개혁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양의 피나 송아지의 피로 제사를 드릴 수 있다는 이스라엘의 제사법을 완전히 무효화 시킨 것입니다.
신앙은 자기를 죽이는 것이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은 추상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시인 안도현은 그의 시 '너에게 묻는다' 에서 길거리에 뒹굴고 있는 연탄재에서 헌신을 발견하고 '내가 정말 한번이라도 누구에게 뜨겁게 사랑해본 적이 있는가' 라고 묻고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헌신과 희생의 다른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를 뜨겁게 사랑했는가? 온갖 힘을 다하는 착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예수를 사랑했는가"
최근 갈등과 분쟁으로 둘로 나뉘어 있는 교회에 출석하는 권사님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 권사님들도 분쟁으로 다투는 어느 한편에 속한 분인 듯합니다. 그분들은 본인들만이 진리의 편에 서 있다고 항변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분쟁의 한 복판에 서 있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촛불을 들고 있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목사님은 언행일치의 신앙을 가진 분으로 매우 존경스러운 분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늘 기도하며 응답을 받고 있다.
저는 그 분들의 주장을 들으면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지만, 우리들의 대화가 논쟁으로 이어질까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남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은 아집과 고집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표출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분들에게는 열정도 믿음도 헌신도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에게는 '바름'이 없었습니다. 조금만 사태를 객관적으로 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습니다. 광화문의 한 복판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사람들을 자주 봅니다. 그들의 확신과 헌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른' 복음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결단과 헌신과 함께 ' 바름, 올바름'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열정과 헌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바름'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무엇인지를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인 시편146편의 말씀은 하나님은 약한 자, 소경된 자, 비굴한 자, 고아와 과부 등을 돌보시는 분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신앙을 가진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신앙은 기득권과 어울려서 교회의 세력을 확장하고,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자리는 약자, 어려운 자, 주린 자, 소경, 비굴한 자, 고아, 과부 등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 자리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우리 교회는 「마틴 루터」가 개혁하고 싶었던 옛 부패했던 교회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토인비는 초대 수도원의 '거룩한 독서, 거룩한 노동, 거룩한 기도'운동이 근대 사회를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상한 운동이 「마틴 루터」에게는 그 시대의 적폐였습니다. 마틴 루터」는 수도원을 기득권의 논리를 뒷받침해주고 기득권에 의해서 각종 혜택을 누리는 타락한 종교집단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답기 위해 삼가 조심하며 그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늘 조심해야 합니다. 선줄로 아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의 교회는 자신을 끊임없이 갱신하고 개혁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자 뿌리 채 말라버렸던 것처럼 한국교회가 그렇게 될까 두렵습니다.
풍요로운 계절에 기독교의 절망을 이야기 한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지만, 오늘 예수의 말처럼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꼭 실천하는 한국교회가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 설교는 지난 2018년 11월 4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임을 밝힙니다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81384#share
==
[김영주 설교] “이제 우리는”
성서일과: 삼상 15:34-16:13, 고후 5:6-10, 14-17, 막4:26-34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press@cdaily.co.kr)
글자크기
前 NCCK 총무, 現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 김영주 목사 ⓒ 자료사진
지난주는 싱가포르의 북미정상회담, 그리고 그 이튿날 치뤄진 지방선거를 통해 여러 가지를 돌아보게 하는 그런 한 주간이었습니다.
모두가 한반도의 운명과 관련된 문제들인데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세계를 뒤흔드는 폭탄적인 발언에 주변국들은 요동칩니다. 이런 상황을 만드는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가 얄밉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하지만 더불어 약소국가인 스스로의 한계를 느꼈습니다. 또 이런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을 옹호하는 듯 한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에 속이 상하기도 했습니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을 둘러싸고는 북·미 최고 지도자들 사이에 막말이 이어지면서 이러다가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나라에서는 야당의 문재인 정부의 안보 무능력이라는 비난, 미국과 중국 사이에 코리아 패싱 이라는 등의 말까지 나왔습니다. 이 복잡한 상황 속에서 저는 세상을 바꾸라는 촛불의 민심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고 이른바 발목잡기에 골몰하는 정치권이 원망스럽고, 심지어는 국회 해산권을 주장해야 하지 않나 하는 할 수 조차 없는 일을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북미 정상회담을 언론들은 세기의 회담이라고 평가합니다.
사실 그동안을 돌아보면 남한이 북측과 잘해보려 하면 미국이 발목을 잡고, 미국이 북한과 잘해보려 하면 남한이 발목을 잡는 형국이었습니다. 과거 김영삼 정부는 미국이 북한과 정상회담을 추진하자 남한을 무시한다며(코리아 패싱에) 반발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우리 대통령이 오히려 나서서 북미 정상회담의 가교 역할을 자처하면서 돕는 모습을 보면서 좋은 시대를 만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와 맞물려 지방자치 선거도 국민들의 관심사항이었습니다. 저는 이번 선거가 촛불혁명의 정당성을 확인하고 미래지향적인 한국사회가 열어가는 과정이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다행히도 이번 선거 결과는 한국사회가 더 발전했으면 좋겠다는 유권자들의 염원이 담긴 결과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지방선거는 제2의 혁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관심사항인 북미 회담을 오늘성서일과 본문말씀에서 교훈을 얻어 볼까 생각을 하다 보니 본문이 말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으로 본문을 말하게 됩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예언서의 말씀 사무엘상 15장 34절 이하에는 사무엘과 사울의 대화가 나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너는 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가? 너는 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하지 않았는가?"하고 질책합니다.
이에 사울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소와 양을 진멸하라고 하시니, 병약한 소, 양은 다 죽였습니다. 다만 튼실한 소와 양은 남겨서 그것을 하나님께 따로 바치기 위해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설사 내가 말씀을 어겼다 하더라고 그것은 내가 어긴 것이 아니라 나를 왕으로 세워진 이스라엘의 백성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라고 강변합니다.
이에 사무엘은 순종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사울은 이 대목에서 사무엘에게 "당신의 하나님께"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사울은 "사무엘 당신의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당신의 말에는 억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전쟁에 들어간 비용을 얻은 소와 양을 얻어서 보충해야 합니다"라면서 사무엘에게 모두 진멸하라는 말은 현실적이지 않고 억지 같다고 항변합니다.
사울의 이 항변이 마치 "북미 회담은 진보했지만, 먹고사는 경제 문제는 여전히 어렵지 않습니까?" 하고 북미회담에 대해 반론을 펴는 말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소와 양은 취해서 우리 백성을 먹여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따르면서 살자니 세상 살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이런 현실 때문에 열 가지 말씀 중 한 두 가지만 따르면서 기독교인이라고 자부하면서 사는 것은 아닌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일 매일 세상일에 매여 타협하고 살면서 조금은 말씀과 어긋나도 하나님께서 용서 해 주실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지 않는지 생각을 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명령들을 복수로 시용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단수로 표현합니다. 다시말해 사무엘은 하나님의 명령들을 왜 안 지켰습니까? 라고 복수로 물었지만 사울은 여러 가지를 지키지 못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단수로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 어떤 주석가들은 여러 가지 하나님의 명령들을 다 지키지는 못했지만, 한 가지는 지켰으니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울의 변명 안에 우리도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에 "주님께서도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다.( 삼상 15:35)"고 기록되었지만 보이스 성경에는 "하나님도 사무엘도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슬퍼했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울에 대한 실망이 얼마나 크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복 받기를 원하면서, 자신은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는데 사무엘이 기름 부어 왕이 되었는데 하나님은 관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것은 다 못 지켜도 이것만큼은 지켰으니까 다른 잘못은 용서해 주십시오. 그래도 저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목사답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제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사무엘이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 대목에서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화려해 보이는 정치가들의 표현, 상황에 일희일비 할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서신서의 말씀 고린도 후서 5장 17절 이하의 말씀에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fl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화해하는 자로서의 직분을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말에 참석한 한 혼인예식을 보면서 과거 제 처조카의 혼인식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신부와 신랑이 마주보며 직접 축가도 불러주고, 참석한 사람들이 뽀뽀해! 뽀뽀해! 하니 스스럼없이 뽀뽀도 하고 하던 모습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혼례식이 좀 더 경건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론 내가 옛날의 관습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처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이 왔도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인 것입니다.
과거의 반공논리를 최우선하던 세상, 그 안보로 세상을 지배했던 독재시대의 논리가 있었고, 그에 맞서면서 살아왔던 우리지만 나도 모르게 그 권위주의적인 생각에 물들지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세상은 저 만치 가고 있는데 우리는 정의롭게 살아왔고, 열심히 살았었고, 헌신적으로 살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살았다면서 자신의 과거를 미화하려 들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라 세상이 바뀌었다. 너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새로운 세상에서 어떻게 살지 생각해 보아라. 믿음으로 살아라.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살지 말라. 믿음으로 살아라. 너희에게 새로운 피조물로서 직분을 주었는데 예수님께서 세상을 화목하게 해주었던 것처럼 너희도 세상을 화목하게 해주며 살아라.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말아라.
바울 선생님의 이 본문처럼 새로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목표를 지니며 살아야 할지 생각해 봅니다.
오늘 마가복음의 본문은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작은 씨앗이 우리가 밤낮 자고 있는 중에 하나님께서 키우셨다는 내용입니다.
지금 돌아가는 세상(북미회담 등)을 보면 얼마 전만 해도 도무지 올 것 같지 않는 세상이었습니다.
아! 이런 세상이 이렇게 빨리 왔어! 꿈이야 생시야!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많은 노력과 헌신의 씨앗을 뿌리게 하셨고, 이를 하나님께서 고이 품어 싹이 트게 하시고, 자라게 하시고, 열매를 맺게 해주시고, 새가 깃들만큼 커다란 나무로 자라게 하시는 신비한 은총을 봅니다.
세상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역할을 하지만 꽃을 피우고 결실을 맺는 세상변화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일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는 역할을 성실히 감당해야 겠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남북통일에 관한 일을 많이 해왔습니다.
정부가 통일에 관심 없을 때는 우리가 열심히 일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정부가 통일에 관심을 갖고 나서니까 우리가 할일은 뭐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는 종전 협정, 미군 철수와 평화 협정을 생각을 하다가 빨갱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는데, 지금은 문재인 대통령이 종전, 평화를 말합니다. 더구나 트럼프 미국대통령은 미군 철수 얘기를 끄집어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우리는 무슨 일을 해야 할까?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마가복음의 말씀처럼 걱정 염려 말고 열심히 씨앗을 뿌리는 헌신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상에 대해 근심 걱정하지 말고, 겉을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로 화해자의 사명을 감당하자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성실히 감당하면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씨앗으로 받아 자라게 하셔서, 우리 한반도에 통일이 오게 하시고 한반도의 민주주의가 발전하게 해주시는 일을 인도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우리는, 같이 힘쓰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설교는 지난 2018년 6월 17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을 수정·편집한 것입니다.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80333#share
==
[김영주 설교] 나사렛 예수
성서일과 본문 시 29, 창 1:1-5, 행 19:1-7, 막 1:4-11
기독일보 편집부 기자(press@cdaily.co.kr)
글자크기
▲김영주 목사 ⓒ 기독일보DB
지난해를 생각해본다. 지난해 한국사회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모두가 자중자애 하는 마음으로 협력하고 노력한다면 우리 사회는 한 단계 발전할 것이다. '새 하늘, 새 땅'에의 기대를 가지고 사는 우리 신앙인들의 기도와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 올해 첫머리에 남북 간의 북한의 평창 올림픽 참가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고, 이를 계기로 남북 간의 새로운 전진이 있을 것 같아 기분 좋게 한해를 시작하게 되었다. 올해는 바울이 빌립보교인들에게 준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고, 감사하며, 기뻐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자 다짐해 본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 주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빌 4장 4-7절)
최근에 두 사람을 만났다. 첫 번째 사람은 소위 보수적 신앙을 가진 분으로 자신의 미래를 위해 기도중이라고 했다, 두 번째 사람은 한국교회에 무리가 되고 있는 다른 신앙을 가진 분으로 자신이 속해 있는 믿음 집단의 생활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들의 신앙이 올바른가, 아닌가는 차치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내게는 큰 도전이 되었다.
나는 내게 질문을 한다. '나는 기도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예수를 잘 믿고 있는 것인가?'
마침 오늘은 교회력으로 예수님의 수세일이다. 이번 주일에 제시된 성경말씀이 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본문은 창세기 1장 1-4절, 시편 29편, 사도행전 19장 1-6절, 마가복음 1장 10-11절이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의 영이 수면위에 운행하시고, 하나님이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겨났다.' 라는 말씀으로 시작되는 천지 창조는 장엄하기 조차하다. 시편의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세상을 세밀하게 묘사하며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공감되는 말씀이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예수로부터 시작된다. 즉 우리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나사렛 사람 예수를 말이다. 어떻게 나사렛 예수가 우리의 하나님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건너 뛸 수 없는 문제이다. 초대교회 공동체들도 이 질문을 여러 경로로부터 많이 받은 것 같다.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장면에서부터 이 질문에 대답해야한다. 즉 구세주인 예수가 어떻게 사람에게 세례를 받는가이다. 잘 알다시피 예수의 세례 받음은 공생애의 시작으로 일종의 출정식이다. 사복음서 모두가 예수의 수세를 증언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예수가 세례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 마가공동체는 예수의 세례 장면을 설명하면서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였고,'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내가 기뻐하는 자이다' 하늘의 음성이 들렸다'고 기록하여 일종의 대관식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다른 공동체들도 이 부분이 의식되는 것 같다. 마태공동체는 요한이 세례 주는 것을 사양한다. 그러자 예수가 하나님의 요구라고 말하며 세례를 자원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누가공동체는 예수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고, 성령이 하늘로부터 임하고, 하늘의 음성이 들렸다고 간단히 정리한다. 요한공동체는 예수의 수세장면을 아예 생략하고, 요한이 예수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고 설명한다.
이 점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나타난다. 이후 계속 신학적인 논쟁이 된다. 예수는 참 신인가, 참 인간인가? 이런 논쟁을 통해, 이단으로 처형당하기도 하고, 교회가 갈라지기도 했다. 오늘날도 그 흔적들은 남아 우리 신앙인들의 믿음의 자세를 결정하는 데 어려움을 주고 있다. 최근 한국교회의 신앙도 그러하다. 목회자들의 설교에서도 구약의 하나님이 예수를 거치지 않고 선포되고 있다.
이는 에베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도행전 19장, 오늘의 본문에도 나타나고 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너희가 신앙인이 되었을 때 성령을 받았는가?"라고 묻는다. 그들은 대답하기를 "성령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라고 한다. 바울은 너희가 어떤 세례를 받았는가 물었고,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말한다. 바울은 너희에게 준 요한의 세례는 근본적인 삶의 변화(radical life-change)를 말하는 것이고,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예수를 맞이할 준비가 된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 대답을 듣고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자, 성령이 임하였고 방언과 예언을 했다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다. 바울이 에베소교인들에게 성령 세례에 대해 설명하면서 한 말을 다른 번역본(message)으로 읽어본다.
"Did you changed heart and lives? Did you take God into your mind only or did you also embraced God with your heart?"
바울에게 세례란 하나님을 네 마음에 받아들임으로써, 네 삶 전체가 변하는 것이었다. 즉 요한의 세례는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이고(인간의 영역) 예수의 세례는 그 분을 믿는 것이다(성령의 영역). 그런 의미에서 (서진한 목사가 말한) 고유명사인 예수라는 사람이 보통 명사인 하나님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사렛 예수가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것이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그 동안의 삶을 생각해본다. 나는 예수를 알려고 했다. 다시 말해 머리로만 이해하려고 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라도 바울 선생의 말씀대로, 우리는 삶의 변화에 머물지 말고 예수를 우리 마음에 받아들이고 우리 마음에 껴안아야 할 것이다. 그리할 때, 오늘의 창세기 본문을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마음 혼돈과 흑암 속에 있더니 하나님의 영이 우리 마음 위에 운행하시리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사도바울은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믿게 된 후,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라고 선언하고 있다.
올 한해 우리 공동체 모두의 삶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시길 기도하며, 다음과 같은 바울의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길 기도한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3:5)"
■ 김영주 목사는 전 NCCK 총무를 지냈으며 지금은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 남북평화재단 이사장, 종교인평화회의 대표회장 등으로 헌신하고 있다.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78889#share
==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장, 前 NCCK 총무 김영주 목사
오늘의 본문 말씀은 설교를 앞둔 목사에게는 무척 부담되고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특히 야고보서의 말씀은 더 그렇습니다.
본문은 '혀를 조심하라'의 제목으로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1. 형제 여러분, 너도 나도 선생이 되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2 우리는 다 실수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만일 사람이 말에 실수가 없으면 그는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첫 마디부터 부담스럽습니다. 인내를 가지고 읽어봅니다.
5 이와 같이 사람의 혀도 몸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지만 [a]그것을 잘못 사용하면 큰 손해를 가져옵니다. 작은 불씨가 큰 숲을 태우지 않습니까? 9 우리는 이 혀로 하나님을 찬송도 하고 그분의 모습으로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도 합니다.10 한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저는 말하는 자리에 서기를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후회됩니다. 잘 정리되지 않았던 말을 너무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내가 했던 말들을 오늘의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봅니다. '그동안 나는 가르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내 말은 내 삶과 일치했는지?' '말의 일관성은 있었는지?' '내 말은 찬송의 말이었는지 저주의 말이었는지?' 사무실 근처 식당 벽에 게시된 글을 소개합니다. (말 한마디) 부주의한 말 한마디가 싸움의 불씨가 되고/ 잔인한 말 한마디가 삶을 파괴합니다./ 쓰디쓴 말 한마디가 증오의 씨를 뿌리고/ 무례한 말 한마디가 사랑의 불을 끕니다./ 은혜로운 말 한마디가 길을 평탄케 하고/ 즐거운 말 한마디가 하루를 빛나게 합니다./ 때에 맞는 말 한마디가 축복을 줍니다.
설교 제목을 "혀에 재갈 물리기"로 정한 것은 자기반성으로 시작하기 위함입니다. 생각해 보면 제 자신 목사가 된 후부터, 선생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르치려고 했고, 계몽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지혜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복종하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가르치려는 생각이 앞서 성경을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젊은 시절 문 익환 목사님을 만나 뵌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출옥한 후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우리가 주최하는 강연회의 강사로 오셨습니다. 그 때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 생각납니다. "김 목사, 감옥에서 성경을 읽으니까 성경 말씀이 내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어. 설교를 해야 된다는 부담이 없었기 때문일 거야."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분은 구약학자입니다. 성경을 누구보다 더 매우 많이 읽었을 것이고 또 가르쳤던 분입니다. 그 분 조차도 설교의 부담 없이(즉 가르치려는 의도 없이) 읽는 것과 가르치기 위해 읽는 성경의 의미가 다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문익환 목사님의 말씀을 지혜의 말씀으로 여기고 삼가 조심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큽니다.
그동안 했던 제 설교노트를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보면 제 설교문의 대부분 성경말씀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 노력 보다는 설교를 위해 성경말씀을 사용했던 흔적이 많았습니다. 즉 성경 말씀에 내 자신을 내려놓고 그 말씀의 의미를 깊이 깨닫기 위해 연구하고 묵상했던 것 보다 내 생각과 주장을 위해 성경의 권위를 이용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가르치려는 생각이 앞서다보니 말의 실수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좀 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했습니다. 그러니 설교는 설교로 끝나게 되고 설교 말씀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내가 했던 무수한 설교는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혹자들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복잡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구약의 본문 잠언(지혜의 호소)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0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그 소리를 높이며, 21시끄러운 길머리에서 외치며, 성문 어귀와 성 안에서 말을 전한다. 23 너희는 내 책망을 듣고 돌아 서거라. 보아라, 내가 내 영을 너희에게 보여 주고, 내 말을 깨닫게 해 주겠다
지혜는 길가는 사람들을 불러 세우고 광장에서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높이고 성 어귀나 성문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가르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부르고 외치며 전할 뿐 아니라, 깨달을 수 있도록 영을 보여주겠다고 합니다.
22 "어수룩한 사람들아, 언제까지 어수룩한 것을 좋아하려느냐? 비웃는 사람들아, 언제까지 비웃기를 즐기려느냐? 미련한 사람들아, 언제까지 지식을 미워하려느냐? 24 그러나 너희는, 내가 불러도 들으려고 하지 않고, 내가 손을 내밀어도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29 이것은 너희가 깨닫기를 싫어하며, 주님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않으며, 30 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내 모든 책망을 업신여긴 탓이다.
지혜의 말씀이 없어서가 아니라, 들을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어리석은 자로, 조롱하는 자로, 미련한 자가 되어 그 말씀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비추어 보니까 저도 어리석은 자였고, 시니컬하여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사람이었고, 미련한 자였다고 반성해 봅니다.
오늘 우리는 말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각종 오락물이나 TV 시사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어떻게 저렇게 말을 잘 하나'하고 감탄하기도 합니다. '말 못해서 죽은 귀신 없다.'라는 옛말이 생각났습니다. 말을 매끄럽게 잘 하지 못하는 저로서는 그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보는 것을 보면 부럽기조차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말은 절실하지 않는 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의 말은 논리적으로 머리까지는 다가왔지만, 우리 마음에 까지는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의 머리와 가슴까지의 거리는 채 30센티미터가 안되지만, 머리에서 가슴까지 옮기는 데에는 경우에 따라 한 평생이 걸리기도 합니다.' 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스위스의 융 플라우에 올라갔던 적이 있습니다. 자연의 신비를 느꼈습니다. 나도 모르게 흥얼거렸습니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한 외국인 부부가 나를 쳐다보면서 내 노래가 다 끝나자 '한 번 더 불러 줄 수 없냐?'고 정중하게 요청했습니다.
그들의 요청에 약간은 당황하였지만, 저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드려 찬송을 조금 더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찬송을 들은 그들은 매우 행복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들과 저는 모르는 사이였습니다. 저는 한국말로 찬송했고 그들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랫말이었습니다. 단지 저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에 취해 감격하여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 찬송을 들은 그들이 감동으로 화답했습니다. 그 때 저는 제 인생에 최고의 설교를 했던 것 같습니다. 설교는 가르치고, 계몽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은혜를 진솔하게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인 시편(19)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에서 설교는 인간의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지혜)를 받아드리는 것이라고 읽습니다.
19 하늘이 하나님의/영광을 선포하고/창공이 그의 놀라운 솜씨를/나타내는구나!
2 낮이 이 사실을 낮에게 말하고/밤도 이 사실을 밤에게 전하니
3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4 그 전하는 소리가 온 세상에 퍼지고/
그 전하는 말이 땅 끝까지 미쳤다. 하나님이 해를 위해/하늘에 집을 지으셨구나.
8 여호와의 교훈은 정확하여/마음을 기쁘게 하고/여호와의 계명은 순수하여/눈을 밝 게 한다.
오늘의 복음서(막8:27-38)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의 장면를 보여 줍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다른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은 베드로를 극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께 항의(rebuke)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한 자기 이해와 예수님의 말씀이 충돌하니, 자기 생각을 고집하며 예수님을 비난했다고 생각됩니다. 즉시 예수님은 베드로를 나무라면서 사탄이라고 질책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질책하셨던 것은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 베드로처럼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항의했듯이 예수님이 세상 권력에 의해 무력하게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용인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이 세상의 일도 잘되게 하고 사후에도 잘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고백은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다른 데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최고의 제자가 된 것은 그의 고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열어 지혜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야고보서에 나오는 공동체에서도 지혜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전하기 위해 선생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 공동체를 갈등의 와중에 빠지게 했던 것 같습니다.
설교는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게 아니라 나에게 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설득하려는 게 아니고, 자기가 받은 은혜를 나누는 것이고, 설교는 말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약1:.26-27) 누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혀를 제어하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3:13,15-18)"여러분 가운데 지혜 있고 이해력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러한 사람은 착한 행동을 하여 그의 행실을 나타내십시오. 그 일은 지혜에서 오는 온유함으로 행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위에서 오는 지혜는 우선 순결하고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정의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평화를 위해 씨를 뿌려 거두는 열매입니다"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81038#share
==
[김영주 설교] 내 혀의 재갈 물리기
성서일과: 시19, 잠1:20~33, 약3:1~12, 막8:27~38
기독일보 편집부 기자(press@cdaily.co.kr)
글자크기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장, 前 NCCK 총무 김영주 목사
오늘의 본문 말씀은 설교를 앞둔 목사에게는 무척 부담되고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특히 야고보서의 말씀은 더 그렇습니다.
본문은 '혀를 조심하라'의 제목으로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1. 형제 여러분, 너도 나도 선생이 되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2 우리는 다 실수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만일 사람이 말에 실수가 없으면 그는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첫 마디부터 부담스럽습니다. 인내를 가지고 읽어봅니다.
5 이와 같이 사람의 혀도 몸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지만 [a]그것을 잘못 사용하면 큰 손해를 가져옵니다. 작은 불씨가 큰 숲을 태우지 않습니까? 9 우리는 이 혀로 하나님을 찬송도 하고 그분의 모습으로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도 합니다.10 한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저는 말하는 자리에 서기를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후회됩니다. 잘 정리되지 않았던 말을 너무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내가 했던 말들을 오늘의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봅니다. '그동안 나는 가르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내 말은 내 삶과 일치했는지?' '말의 일관성은 있었는지?' '내 말은 찬송의 말이었는지 저주의 말이었는지?' 사무실 근처 식당 벽에 게시된 글을 소개합니다. (말 한마디) 부주의한 말 한마디가 싸움의 불씨가 되고/ 잔인한 말 한마디가 삶을 파괴합니다./ 쓰디쓴 말 한마디가 증오의 씨를 뿌리고/ 무례한 말 한마디가 사랑의 불을 끕니다./ 은혜로운 말 한마디가 길을 평탄케 하고/ 즐거운 말 한마디가 하루를 빛나게 합니다./ 때에 맞는 말 한마디가 축복을 줍니다.
설교 제목을 "혀에 재갈 물리기"로 정한 것은 자기반성으로 시작하기 위함입니다. 생각해 보면 제 자신 목사가 된 후부터, 선생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르치려고 했고, 계몽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지혜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복종하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가르치려는 생각이 앞서 성경을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젊은 시절 문 익환 목사님을 만나 뵌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출옥한 후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우리가 주최하는 강연회의 강사로 오셨습니다. 그 때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 생각납니다. "김 목사, 감옥에서 성경을 읽으니까 성경 말씀이 내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어. 설교를 해야 된다는 부담이 없었기 때문일 거야."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분은 구약학자입니다. 성경을 누구보다 더 매우 많이 읽었을 것이고 또 가르쳤던 분입니다. 그 분 조차도 설교의 부담 없이(즉 가르치려는 의도 없이) 읽는 것과 가르치기 위해 읽는 성경의 의미가 다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문익환 목사님의 말씀을 지혜의 말씀으로 여기고 삼가 조심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큽니다.
그동안 했던 제 설교노트를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보면 제 설교문의 대부분 성경말씀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 노력 보다는 설교를 위해 성경말씀을 사용했던 흔적이 많았습니다. 즉 성경 말씀에 내 자신을 내려놓고 그 말씀의 의미를 깊이 깨닫기 위해 연구하고 묵상했던 것 보다 내 생각과 주장을 위해 성경의 권위를 이용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가르치려는 생각이 앞서다보니 말의 실수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좀 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했습니다. 그러니 설교는 설교로 끝나게 되고 설교 말씀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내가 했던 무수한 설교는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혹자들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복잡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구약의 본문 잠언(지혜의 호소)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0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그 소리를 높이며, 21시끄러운 길머리에서 외치며, 성문 어귀와 성 안에서 말을 전한다. 23 너희는 내 책망을 듣고 돌아 서거라. 보아라, 내가 내 영을 너희에게 보여 주고, 내 말을 깨닫게 해 주겠다
지혜는 길가는 사람들을 불러 세우고 광장에서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높이고 성 어귀나 성문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가르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부르고 외치며 전할 뿐 아니라, 깨달을 수 있도록 영을 보여주겠다고 합니다.
22 "어수룩한 사람들아, 언제까지 어수룩한 것을 좋아하려느냐? 비웃는 사람들아, 언제까지 비웃기를 즐기려느냐? 미련한 사람들아, 언제까지 지식을 미워하려느냐? 24 그러나 너희는, 내가 불러도 들으려고 하지 않고, 내가 손을 내밀어도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29 이것은 너희가 깨닫기를 싫어하며, 주님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않으며, 30 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내 모든 책망을 업신여긴 탓이다.
지혜의 말씀이 없어서가 아니라, 들을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어리석은 자로, 조롱하는 자로, 미련한 자가 되어 그 말씀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비추어 보니까 저도 어리석은 자였고, 시니컬하여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사람이었고, 미련한 자였다고 반성해 봅니다.
오늘 우리는 말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각종 오락물이나 TV 시사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어떻게 저렇게 말을 잘 하나'하고 감탄하기도 합니다. '말 못해서 죽은 귀신 없다.'라는 옛말이 생각났습니다. 말을 매끄럽게 잘 하지 못하는 저로서는 그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보는 것을 보면 부럽기조차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말은 절실하지 않는 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의 말은 논리적으로 머리까지는 다가왔지만, 우리 마음에 까지는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의 머리와 가슴까지의 거리는 채 30센티미터가 안되지만, 머리에서 가슴까지 옮기는 데에는 경우에 따라 한 평생이 걸리기도 합니다.' 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스위스의 융 플라우에 올라갔던 적이 있습니다. 자연의 신비를 느꼈습니다. 나도 모르게 흥얼거렸습니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한 외국인 부부가 나를 쳐다보면서 내 노래가 다 끝나자 '한 번 더 불러 줄 수 없냐?'고 정중하게 요청했습니다.
그들의 요청에 약간은 당황하였지만, 저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드려 찬송을 조금 더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찬송을 들은 그들은 매우 행복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들과 저는 모르는 사이였습니다. 저는 한국말로 찬송했고 그들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랫말이었습니다. 단지 저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에 취해 감격하여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 찬송을 들은 그들이 감동으로 화답했습니다. 그 때 저는 제 인생에 최고의 설교를 했던 것 같습니다. 설교는 가르치고, 계몽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은혜를 진솔하게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인 시편(19)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에서 설교는 인간의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지혜)를 받아드리는 것이라고 읽습니다.
19 하늘이 하나님의/영광을 선포하고/창공이 그의 놀라운 솜씨를/나타내는구나!
2 낮이 이 사실을 낮에게 말하고/밤도 이 사실을 밤에게 전하니
3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4 그 전하는 소리가 온 세상에 퍼지고/
그 전하는 말이 땅 끝까지 미쳤다. 하나님이 해를 위해/하늘에 집을 지으셨구나.
8 여호와의 교훈은 정확하여/마음을 기쁘게 하고/여호와의 계명은 순수하여/눈을 밝 게 한다.
오늘의 복음서(막8:27-38)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의 장면를 보여 줍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다른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은 베드로를 극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께 항의(rebuke)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한 자기 이해와 예수님의 말씀이 충돌하니, 자기 생각을 고집하며 예수님을 비난했다고 생각됩니다. 즉시 예수님은 베드로를 나무라면서 사탄이라고 질책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질책하셨던 것은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 베드로처럼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항의했듯이 예수님이 세상 권력에 의해 무력하게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용인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이 세상의 일도 잘되게 하고 사후에도 잘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고백은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다른 데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최고의 제자가 된 것은 그의 고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열어 지혜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야고보서에 나오는 공동체에서도 지혜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전하기 위해 선생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 공동체를 갈등의 와중에 빠지게 했던 것 같습니다.
설교는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게 아니라 나에게 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설득하려는 게 아니고, 자기가 받은 은혜를 나누는 것이고, 설교는 말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약1:.26-27) 누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혀를 제어하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3:13,15-18)"여러분 가운데 지혜 있고 이해력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러한 사람은 착한 행동을 하여 그의 행실을 나타내십시오. 그 일은 지혜에서 오는 온유함으로 행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위에서 오는 지혜는 우선 순결하고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정의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평화를 위해 씨를 뿌려 거두는 열매입니다"
* 설교는 지난 2018년 9월 18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81038#share
==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장, NCCK 전 총무 김영주 목사 ©기독일보DB
주현절의 마지막 주일이기도 하고 예수의 변모를 기념하는 주일 아침입니다.
지난 주간 매우 의미 있는 한 주간을 보냈습니다. 3·1운동100주년을 맞이하여 100년 전 일제의 폭압에 맞서 독립만세를 외친 3·1운동의 선열들의 헌신적인 노력들을 기리며 그 의미를 되새겨보는 여러 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제가 섬기고 있는 기사연도 한국교회의 여러 단체들과 함께 「31운동의 의미와 동북아 평화를 위한 한반도 미래구상」이라는 주제로 「3·1운동 100주년기념 국제 컨퍼런스」를 열었습니다. 저로서는 젊은 시절 매우 감동 있게 읽었던 「희망의 신학」의 저자인 몰트만 박사를 강사로 모실 수 있게 되어 감사했습니다. 호텔에서 자주 마주치며 가벼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 또한 저의 작은 즐거움이었습니다. 2박 3일의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92세 된 노신학자를 대하면서 문득 ‘이렇게 한 시대는 흘러가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자신의 신학적 소양이 부족한 탓인지 몰라도, 우리 신학은 더욱 정진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한국의 신학은 정체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과거를 회상하며 과거의 신학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그런 느낌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의 모습에서도 들었습니다. 과거의 위대함에 대해서는 모두들 합의하지만, 3·1절이 백년을 지난 지금, 그 역사의 의미를 오늘에 되살려 오늘의 우리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며 그리고 내일의 우리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자 노력하는 흔적이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도 못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한국교회조차 3·1 운동 백주년을 기념하는 예배와 각종행사를 상당부분 규모 있게 진행했지만, 오늘의 교회현실에 대한 냉혹한 반성과 미래를 세우고자하는 치열함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단지 교회의 지난 헌신을 내세우기에 급급했던 것 같아 보였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만약 내가 그때 살았다면 나도 목숨을 건 만세 행진에 기꺼이 참여하였을까? 사족이지만 기대를 모았던 하노이 북미회담이 합의 없이 끝나게 되어 아쉬운 마음은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매우 의미 있는 한 주간을 보냈지만, 위와 같은 아쉬움을 안고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을 봅니다.
구약의 본문은 시내 산에서 40일 금식 후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아들고 내려온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빛나 이스라엘 공동체가 두려워했으며,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한 후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는 말씀입니다. 서신서는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모세의 수건에 대한 해석을 통해 복음의 의미를 설명한 것이고,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변화 산에서 변모하시었고, 그 변모에 대한 세 제자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고, 그를 그리스도로 맞이하는 제자들의 진용도 갖추어가는 시점에 예수님은 세 제자와 함께 변화 산에 오르셔서 당신의 현재와 미래를 보여 주셨습니다.
저는 오늘의 본문 중에서 바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말씀을 해보고자 합니다.
바울은 추천장을 들고 다니면서 사도임을 내세우는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사도됨은 추천장에 쓰여 있는 글이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확신을 피력하면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사도직을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새 언약이란 하나님과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옛 언약으로(예레미야 31:31) 복음의 시대에 예수를 통해 맺은 언약이라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옛 언약을 받은 모세의 직분에 대해서도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있었던 것처럼 영광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광채는 곧 없어질 것이어서 모세가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것은 곧 없어질 광채를 가리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온 후로는 율법은 그 종말을 고하였다.(롬10:4)’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즉 옛 언약은 없어질 것으로서 새 언약은 사라지지 않고 길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고린도 교회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그 마음에 수건을 덮어 쓰고 있어 복음의 의미를 잘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직까지 옛 언약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처럼 과거의 삶에 매여 과거의 화려했던 모세의 영광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물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예수의 변모를 본 제자들의 반응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눅 9: 33)
오늘 본문 말씀은 저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만날 때 수건을 벗었는데,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벗어 버려야 할 나의 수건은 무엇인가?
바울은 율법의 시대에는 수건이 필요했지만, 복음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더 이상 수건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셨는데 나는 아직도 어떤 수건을 쓰고 있지나 않은지?
나는 예수를 믿고 그 분을 만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는데, 그 영광의 예수님께 세 제자들처럼 엉뚱한 제안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이 아침 제 자신을 살펴봅니다. 언제부터인지 지난 삶의 공과를 열심히 따져보는데 상당부분 집중하고 있으며, 오늘의 현실에 대해서는 약간은 관조하며 치열함 없이 살고 있으며, 내일을 위해 꿈꾸는 것조차 부담스러워 하고 있는 제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저는 그동안 배웠던 알량한 지식, 짧은 경험, 그리고 과거의 경력이나 지위라는 수건을 쓰고 복음을 대하고 있으며 종이에 쓴 증서가 저의 목사 됨을 증명하는 것이라 자위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을 묵상하면서 드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화려한 과거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것에 머문다면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라는 바울의 지적처럼 현실을 외면하며 미래를 설계하지 못하는 과거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과거가 하나님을 만나 얼굴의 광채가 난 모세처럼 위대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새 언약의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얼굴에 쓰고 있는 수건을 벗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수건을 쓰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으며 수건을 쓰고서는 예수의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라는 말씀의 의미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이제 그 수건을 벗어던지고 예수에게 나아가야합니다. 교만의 수건, 전통의 수건, 조직의 수건, 지식의 수건, 경험의 수건 등 벗어버려야 할 수건들은 도처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를 만난 감격으로 한국교회와 우리 신앙인들의 얼굴에 광채가 빛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다”(고후 3:18)
교부들은 사람이 하나님과 닮은 상태에 이르는 것을 ‘신화’라는 개념으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하나님을 닮아가도록 지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본래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이 발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화’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최종 목표로써,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신화’에 이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신화’는 현재의 삶에서부터 시작되고 발전하여 미래의 삶에서 완성됩니다. 그동안 우리 기독교인들은 물론 한국교회는 너무 쉽게 ‘신화’의 길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과 한국교회는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2:20)라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82694#share
==
[김영주 설교] “신비를 가슴에 안고”
성서일과: 사 60:1-6, 엡 3:1-12, 마2:1-12
기독일보 편집부 기자(press@cdaily.co.kr)
글자크기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장, NCCK 전 총무 김영주 목사 ©기독일보DB
한 해를 보냈습니다. 시간에 대한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괴물이 바로 '시간'이다. 시간은 쏜살같이 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무방비 상태로 미래에 진입한다. 그 결과 우리에게 남는 것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회상뿐이며,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주는 것도 바로 시간의 흔적이다. 과거는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회상해 보면 보람된 세월이었기도 하지만 또한 아쉬운 세월이었기도 합니다. 지난 한 해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은 갈등과 분쟁으로 전쟁 직전까지 위협이 고조되던 한반도에 화해와 평화의 문을 열어놓게 되어 우리 모두에게 큰 희망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가진 자들의 갑 질, 여성에 대한 혐오, 사회적 약자들을 비롯한 에멘 난민에 대한 혐오 등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의 천박함을 보는 것 같아 매우 씁쓸한 일이었습니다. 기름 저장 탱크의 화재를 비롯한 크고 작은 화재, 온수관 파열, 음주 운전 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버린 사건들, 특히 팬션의 가스관 배출로 인해 젊은이들의 죽음, 서해발전의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은 우리사회의 안전 불감증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하게 하였습니다.
우리 사회 뿐 아니라 우리 가정에도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기쁜 일들과 슬픈 일들, 그리고 보람된 일들과 후회스러운 일들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날을 회상해 보는 것은 앞으로 우리에게 열릴 새날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기 위함입니다.
새 해 첫 머리에 서서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고 어떻게 한 해를 시작할까 생각해 봅니다.(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제와 오늘이 그렇게 다르지 않는데 우리는 ‘왜 어제와 오늘에 경계선을 그어 지난날과 오늘을 구분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 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흘러가는 양적인 시간 즉 크로노스(chronos)가 아니라, 영원한 질적인 시간인 '카이로스(kairos)'를 살아가야 할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늘을 붙잡아야 할 것입니다.) 카이로스 시간은 질적인 시간,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지만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시간이며, '결정적 순간'입니다. ‘오늘’ 아니 ‘지금’은 과거와 미래를 잇는 지극히 짧은 시간이지만 카이로스적인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력으로도 오늘은 주현절입니다. (에피파니(ephiphany)는 '신이 자신을 찾는 이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에피파니의 순간에 우리는 자신이 가야할 길과 해야 할 일을 찾아내야 합니다.
즉 우리들에게 오신 주님을 만나서 그 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구약 말씀인 이사야서(60:1-6)는 하나님이 오실 때 이스라엘이 받을 영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일어나서 태양처럼 빛나라.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비치고 있다. 그때 너는 이것을 보고 희색이 만면하여, 너무 기쁜 나머지 흥분하여 가슴이 두근거릴 것이다.
복음서(마태)는 동방박사들이 아기예수를 만나기 위해 온 여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2:10-11) 그 별을 보고 박사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 아기가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에게 경배한 후 보물함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드렸다.
서신서(에베소서3:7-11)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바울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계시로 나에게 그분의 신비로운 계획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 가운데서 가장 보잘 것 없는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풍성하신 기쁜 소식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게 하시고 또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오래 전부터 숨겨졌던 신비로운 계획이 어떤 것인가를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오늘의 본문 말씀을 이렇게 읽습니다.
이사야서(구약)은 하나님의 현현(도래)이 가져다 줄 미래를 예언한 것이라면, 복음서(마태)는 하나님의 현현을 찾아 나서서 마침내 그 분을 만난 기쁨으로 온 몸과 마음을 드려 승복을 표현한 것이고, 서신서(에베소서)는 하나님의 현현을 통해 사명 받은 사람들의 삶의 자세와 노력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현현에의 소망을 가지고 그 현현을 경험하는 사람들이고 그 현현 속에서 그분의 신비로운 계획을 수행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저는 우리 공동체 식구들에게 이 아침 예배가 많은 예배의 하나가 아니라, 주님을 만나는 영광을 경험하고 그분의 크고 놀라운 뜻을 깨닫고 그렇게 살겠다고 결단하는 거룩한 시간(카이로스의 시간)이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다시 성경을 읽어봅니다.
그때 너는 이것을 보고 희색이 만면하여, 너무 기쁜 나머지 흥분하여 가슴이 두근거릴 것이다.
그 별을 보고 박사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 아기가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에게 경배한 후 보물함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드렸다.
또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오래 전부터 숨겨졌던 신비로운 계획이 어떤 것인가를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내 자신에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을 듣고 희색이 만면하여 너무 기쁜 나머지 흥분하여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는지, 기나긴 여정의 마지막 지점에서 동방박사들처럼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지, 그리고 바울선생처럼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 가운데서 가장 보잘 것 없는 나에게 이 은혜 즉 계시로 나에게 그분의 신비로운 계획을 알려 주셨습니다.”라고 묻고 있습니다.
이 아침 우리에게 오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전적으로 복종을 맹세하고 신비로운 계획을 가슴에 간직해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어떻게 예수를 만날 수 있겠습니까?)
별을 따라 길을 나선 동방박사들은 헤롯의 궁전으로 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고 있습니다. 왕을 비롯한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이 모여 예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나신다는 해석을 듣습니다.
동방박사들의 두 가지 실수는 예수의 탄생을 유대왕의 탄생으로 이해하였고, 그것을 헤롯과 학자들과 종교지도자들에게 물었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예수는 애굽에서 난민 생활을 하게 되었고,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의 어린아이들의 학살로 이어졌습니다.
오늘 우리도 똑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는 한 가난한 목수와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진 한 여인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왕은커녕 권력의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나사렛의 한 시골뜨기로 대접받고 살아가신 분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를 권력의 최 정점에 선 왕으로, 우리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시는 신출 기묘한 능력을 가진 분으로 포장하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는 권력을 가진 자들의 일탈을 보고 있습니다. 권력자 주변의 사람들의 오만은 우리 모두들 불안하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왕으로 이해하는 오늘의 교회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낮은 자리에 앉기보다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섬기기보다는 다스리기를 좋아하고 듣기보다는 가르치기를 즐겨하는 것입니다. 소통하기보다는 일방적이며 이해를 구하기보다는 독선적입니다.
예수를 왕으로 이해하는 한, 교회는 자기 겸손을 잊어버리고 오만해지기 마련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아도 이러한 점은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 제자의 우두머리를 황제라고 부르고, 교황은 하나님의 성전(베드로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면별부를 팔았고, 이교도들을 정복한다는 이유로 십자군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신앙으로 무장한 서구는 동아시아를 식민지화하는 데 거침이 없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헤롯 왕과 그 무리들에게 예수의 탄생지를 묻지 말아야 했습니다. 아마 동방박사들은 이미 율법과 정치 경제 사회에 전반에 걸쳐 많은 학문과 지식을 잘 갖추고 있는 사람들의 도움을 입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식은 하늘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의 학문은 권력과 권위 유지를 위해 사용하는 도구였으며, 권력 유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있는 무리들이었습니다.
하늘의 별을 따라 나선 동방박사들은 끝까지 별을 따라 갔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예수 믿는다는 것은?)
최근 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는 서울대학교 물리대학을 다니다가 전태일의 죽음을 보고, 학교를 자퇴하고 한동안 노동운동에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예수, 공자, 마르크스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모처럼 만났던지라, 과거에 우리가 만났던 인연 그리고 그 이후 그의 생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한 때 마르크스의 제자가 되어 혁명을 꿈꾸며 그 혁명의 길을 찾기 위해 인문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인문학은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라면, 인간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언어를 공부했고, 시간 속에서 살아갔던 인간과 사회 공동체를 알기위해 역사를 공부했으며, 인간 존재의 근본에 대한 지혜를 얻기 위해 철학을 공부했지만, 아직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짐작하기에는 그는 인문학을 넘어선 신의 영역을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와 장시간 대화를 나누면서 바울을 생각했습니다. 이미 익히 아는 대로 바울은 많은 공부가 된 사람이었고 또 열정도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4 하기야, 나는 육체에도 신뢰를 둘 만합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육체에 신뢰를 둘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합니다. 5 나는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6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하였고,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습니다.) 바울을 그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다메섹을 향해 가다가 예수를 만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을 받고 내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오래 전에 숨겨졌던 신비로운 계획 (즉 가장 보잘것없는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풍성하신 기쁜 소식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게 하시고 또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오래 전부터 숨겨졌던 신비로운 계획이 어떤 것인가를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알리기 위해서입니다.)을 깨닫고 예수의 제자가 되어 복음의 전파자로 나섭니다.
바울은 자신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나에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은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오물로 여깁니다.
그 친구는 인문학에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당위와 방법을 찾기 위해 씨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를 만났고 그 예수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을 찾았고, 그것은 곧 하나님의 신비한 계획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만나기는 했지만, 예수를 온 몸과 마음으로 영접하고, 그 분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결단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찬송가(302)의 가사는 저 자신을 비롯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2절.
왜 너 인생은 언제나 거기서 저 큰 바다 물결보고
그 밑 모르는 깊은 바다 속을 한번 헤아려 안보나
3절.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보고 마음 약하여 못가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아는 것에서 머물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동방박사들이 예수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듯이 나를 바치는 것이고 바울처럼 내가 생각했던 귀중한 것을 다 배설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아침에 다시 나 자신에게 묻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신비한 계획을 깨닫고 그 것을 위해 나 자신을 바치고 있는가.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게 여긴다고 고백하며, 그의 현재와 미래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인정받으려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오늘 이 아침 에피파니의 첫 주일에 저는 예수를 만나 그분에게 순종을 맹세하고 그 분이 주신 오롯한 신비(비밀)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하나님의 신비를 간직한 바울은 큰 열정을 가지고 복음 사업에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열정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에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음"입니다. 영어로는 passion입니다. 이 passion은 고대 그리스어 '파세인(pathein)에서 나왔는데, 기본적인 의미는 고통이고,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해할 수 없고, 낯설고, 어렵고, 불편한 현실을 십자가를 짊어지듯 나의 어깨 위에 매는 행위"입니다.( 열정은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대문자로 Passion하면, 그것은 "예수의 수난"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의 열정적인 삶의 과정에서 당한 고초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고후 1:8-9)
신비를 간직한 바울에게는 그 어떤 고난과 고초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신비를 간직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에 대한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행복한 마음의 상태는 '흔들림 없는 고요한 마음'이다. 그러니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외부의 환경이 나의 행복에 영향을 끼칠 수는 없다.
바울은 자신의 고유한 임무 즉 하나님의 신비한 계획을 위해 ‘(갈라디아서6:17) 이제부터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내 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시 제게 묻습니다.
내 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낙인 찍혀 있는가. 그래서 행복한가.
* 설교는 2019년 1월 6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 전문입니다.
[박만규 설교] "기뻐하시는 하나님"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81979#share
==
[김영주 설교] “신비를 가슴에 안고”
성서일과: 사 60:1-6, 엡 3:1-12, 마2:1-12
기독일보 편집부 기자(press@cdaily.co.kr)
글자크기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장, NCCK 전 총무 김영주 목사 ©기독일보DB
한 해를 보냈습니다. 시간에 대한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괴물이 바로 '시간'이다. 시간은 쏜살같이 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무방비 상태로 미래에 진입한다. 그 결과 우리에게 남는 것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회상뿐이며,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주는 것도 바로 시간의 흔적이다. 과거는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회상해 보면 보람된 세월이었기도 하지만 또한 아쉬운 세월이었기도 합니다. 지난 한 해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은 갈등과 분쟁으로 전쟁 직전까지 위협이 고조되던 한반도에 화해와 평화의 문을 열어놓게 되어 우리 모두에게 큰 희망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가진 자들의 갑 질, 여성에 대한 혐오, 사회적 약자들을 비롯한 에멘 난민에 대한 혐오 등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의 천박함을 보는 것 같아 매우 씁쓸한 일이었습니다. 기름 저장 탱크의 화재를 비롯한 크고 작은 화재, 온수관 파열, 음주 운전 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버린 사건들, 특히 팬션의 가스관 배출로 인해 젊은이들의 죽음, 서해발전의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은 우리사회의 안전 불감증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하게 하였습니다.
우리 사회 뿐 아니라 우리 가정에도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기쁜 일들과 슬픈 일들, 그리고 보람된 일들과 후회스러운 일들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날을 회상해 보는 것은 앞으로 우리에게 열릴 새날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기 위함입니다.
새 해 첫 머리에 서서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고 어떻게 한 해를 시작할까 생각해 봅니다.(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제와 오늘이 그렇게 다르지 않는데 우리는 ‘왜 어제와 오늘에 경계선을 그어 지난날과 오늘을 구분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 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흘러가는 양적인 시간 즉 크로노스(chronos)가 아니라, 영원한 질적인 시간인 '카이로스(kairos)'를 살아가야 할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늘을 붙잡아야 할 것입니다.) 카이로스 시간은 질적인 시간,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지만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시간이며, '결정적 순간'입니다. ‘오늘’ 아니 ‘지금’은 과거와 미래를 잇는 지극히 짧은 시간이지만 카이로스적인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력으로도 오늘은 주현절입니다. (에피파니(ephiphany)는 '신이 자신을 찾는 이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에피파니의 순간에 우리는 자신이 가야할 길과 해야 할 일을 찾아내야 합니다.
즉 우리들에게 오신 주님을 만나서 그 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구약 말씀인 이사야서(60:1-6)는 하나님이 오실 때 이스라엘이 받을 영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일어나서 태양처럼 빛나라.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비치고 있다. 그때 너는 이것을 보고 희색이 만면하여, 너무 기쁜 나머지 흥분하여 가슴이 두근거릴 것이다.
복음서(마태)는 동방박사들이 아기예수를 만나기 위해 온 여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2:10-11) 그 별을 보고 박사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 아기가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에게 경배한 후 보물함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드렸다.
서신서(에베소서3:7-11)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바울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계시로 나에게 그분의 신비로운 계획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 가운데서 가장 보잘 것 없는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풍성하신 기쁜 소식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게 하시고 또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오래 전부터 숨겨졌던 신비로운 계획이 어떤 것인가를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오늘의 본문 말씀을 이렇게 읽습니다.
이사야서(구약)은 하나님의 현현(도래)이 가져다 줄 미래를 예언한 것이라면, 복음서(마태)는 하나님의 현현을 찾아 나서서 마침내 그 분을 만난 기쁨으로 온 몸과 마음을 드려 승복을 표현한 것이고, 서신서(에베소서)는 하나님의 현현을 통해 사명 받은 사람들의 삶의 자세와 노력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현현에의 소망을 가지고 그 현현을 경험하는 사람들이고 그 현현 속에서 그분의 신비로운 계획을 수행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저는 우리 공동체 식구들에게 이 아침 예배가 많은 예배의 하나가 아니라, 주님을 만나는 영광을 경험하고 그분의 크고 놀라운 뜻을 깨닫고 그렇게 살겠다고 결단하는 거룩한 시간(카이로스의 시간)이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다시 성경을 읽어봅니다.
그때 너는 이것을 보고 희색이 만면하여, 너무 기쁜 나머지 흥분하여 가슴이 두근거릴 것이다.
그 별을 보고 박사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 아기가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에게 경배한 후 보물함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드렸다.
또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오래 전부터 숨겨졌던 신비로운 계획이 어떤 것인가를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내 자신에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을 듣고 희색이 만면하여 너무 기쁜 나머지 흥분하여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는지, 기나긴 여정의 마지막 지점에서 동방박사들처럼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지, 그리고 바울선생처럼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 가운데서 가장 보잘 것 없는 나에게 이 은혜 즉 계시로 나에게 그분의 신비로운 계획을 알려 주셨습니다.”라고 묻고 있습니다.
이 아침 우리에게 오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전적으로 복종을 맹세하고 신비로운 계획을 가슴에 간직해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어떻게 예수를 만날 수 있겠습니까?)
별을 따라 길을 나선 동방박사들은 헤롯의 궁전으로 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고 있습니다. 왕을 비롯한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이 모여 예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나신다는 해석을 듣습니다.
동방박사들의 두 가지 실수는 예수의 탄생을 유대왕의 탄생으로 이해하였고, 그것을 헤롯과 학자들과 종교지도자들에게 물었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예수는 애굽에서 난민 생활을 하게 되었고,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의 어린아이들의 학살로 이어졌습니다.
오늘 우리도 똑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는 한 가난한 목수와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진 한 여인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왕은커녕 권력의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나사렛의 한 시골뜨기로 대접받고 살아가신 분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를 권력의 최 정점에 선 왕으로, 우리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시는 신출 기묘한 능력을 가진 분으로 포장하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는 권력을 가진 자들의 일탈을 보고 있습니다. 권력자 주변의 사람들의 오만은 우리 모두들 불안하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왕으로 이해하는 오늘의 교회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낮은 자리에 앉기보다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섬기기보다는 다스리기를 좋아하고 듣기보다는 가르치기를 즐겨하는 것입니다. 소통하기보다는 일방적이며 이해를 구하기보다는 독선적입니다.
예수를 왕으로 이해하는 한, 교회는 자기 겸손을 잊어버리고 오만해지기 마련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아도 이러한 점은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 제자의 우두머리를 황제라고 부르고, 교황은 하나님의 성전(베드로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면별부를 팔았고, 이교도들을 정복한다는 이유로 십자군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신앙으로 무장한 서구는 동아시아를 식민지화하는 데 거침이 없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헤롯 왕과 그 무리들에게 예수의 탄생지를 묻지 말아야 했습니다. 아마 동방박사들은 이미 율법과 정치 경제 사회에 전반에 걸쳐 많은 학문과 지식을 잘 갖추고 있는 사람들의 도움을 입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식은 하늘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의 학문은 권력과 권위 유지를 위해 사용하는 도구였으며, 권력 유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있는 무리들이었습니다.
하늘의 별을 따라 나선 동방박사들은 끝까지 별을 따라 갔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예수 믿는다는 것은?)
최근 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는 서울대학교 물리대학을 다니다가 전태일의 죽음을 보고, 학교를 자퇴하고 한동안 노동운동에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예수, 공자, 마르크스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모처럼 만났던지라, 과거에 우리가 만났던 인연 그리고 그 이후 그의 생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한 때 마르크스의 제자가 되어 혁명을 꿈꾸며 그 혁명의 길을 찾기 위해 인문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인문학은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라면, 인간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언어를 공부했고, 시간 속에서 살아갔던 인간과 사회 공동체를 알기위해 역사를 공부했으며, 인간 존재의 근본에 대한 지혜를 얻기 위해 철학을 공부했지만, 아직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짐작하기에는 그는 인문학을 넘어선 신의 영역을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와 장시간 대화를 나누면서 바울을 생각했습니다. 이미 익히 아는 대로 바울은 많은 공부가 된 사람이었고 또 열정도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4 하기야, 나는 육체에도 신뢰를 둘 만합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육체에 신뢰를 둘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합니다. 5 나는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6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하였고,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습니다.) 바울을 그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다메섹을 향해 가다가 예수를 만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을 받고 내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오래 전에 숨겨졌던 신비로운 계획 (즉 가장 보잘것없는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풍성하신 기쁜 소식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게 하시고 또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오래 전부터 숨겨졌던 신비로운 계획이 어떤 것인가를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알리기 위해서입니다.)을 깨닫고 예수의 제자가 되어 복음의 전파자로 나섭니다.
바울은 자신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나에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은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오물로 여깁니다.
그 친구는 인문학에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당위와 방법을 찾기 위해 씨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를 만났고 그 예수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을 찾았고, 그것은 곧 하나님의 신비한 계획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만나기는 했지만, 예수를 온 몸과 마음으로 영접하고, 그 분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결단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찬송가(302)의 가사는 저 자신을 비롯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2절.
왜 너 인생은 언제나 거기서 저 큰 바다 물결보고
그 밑 모르는 깊은 바다 속을 한번 헤아려 안보나
3절.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보고 마음 약하여 못가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아는 것에서 머물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동방박사들이 예수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듯이 나를 바치는 것이고 바울처럼 내가 생각했던 귀중한 것을 다 배설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아침에 다시 나 자신에게 묻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신비한 계획을 깨닫고 그 것을 위해 나 자신을 바치고 있는가.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게 여긴다고 고백하며, 그의 현재와 미래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인정받으려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오늘 이 아침 에피파니의 첫 주일에 저는 예수를 만나 그분에게 순종을 맹세하고 그 분이 주신 오롯한 신비(비밀)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하나님의 신비를 간직한 바울은 큰 열정을 가지고 복음 사업에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열정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에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음"입니다. 영어로는 passion입니다. 이 passion은 고대 그리스어 '파세인(pathein)에서 나왔는데, 기본적인 의미는 고통이고,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해할 수 없고, 낯설고, 어렵고, 불편한 현실을 십자가를 짊어지듯 나의 어깨 위에 매는 행위"입니다.( 열정은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대문자로 Passion하면, 그것은 "예수의 수난"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의 열정적인 삶의 과정에서 당한 고초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고후 1:8-9)
신비를 간직한 바울에게는 그 어떤 고난과 고초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신비를 간직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에 대한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행복한 마음의 상태는 '흔들림 없는 고요한 마음'이다. 그러니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외부의 환경이 나의 행복에 영향을 끼칠 수는 없다.
바울은 자신의 고유한 임무 즉 하나님의 신비한 계획을 위해 ‘(갈라디아서6:17) 이제부터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내 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시 제게 묻습니다.
내 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낙인 찍혀 있는가. 그래서 행복한가.
* 설교는 2019년 1월 6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 전문입니다.
[박만규 설교] "기뻐하시는 하나님"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81979#share
==
==
==
==
==
==
==
==
==
==
=
[김영주 설교] 불편한 진실
[김영주 설교] 불편한 진실
성서일과: 민수기 21장 4-9절, 에베소서 2장 1절-10절, 요한복음 3장 14-21절
기독일보 조은식 기자(press@cdaily.co.kr)
前 NCCK 총무, 現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 김영주 목사. ©기독일보DB
저는 오늘 봉독한 성경을 두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 째는 사순절의 한복판인 이 사순절 넷 째 주일에, 성서일과는 하필이면 왜 이 구절을 배치했을까하는 문제입니다.
공관복음에는 사순절 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배치하면서 사순절의 의미를 잘 정리하고 있지만, 요한복음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 누가 복음은 처음에 예수의 족보를 설명하는 것부터 시작하지만, 요한복음은 이와는 달리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예수님이 계셨다는 말씀부터 시작합니다.(요 1:2-5)" 좀 더 설명하면 공관복음은 인간의 모습이신 예수께서 어떻게 하나님이 되었는가를 변증하고 있지만, 요한복음은 이런 변증적 설명 없이 예수님께서 직접 내가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어 요한복음 2장에서는 가나의 혼인잔치에 참여하신 뒤 십자가 사건의 직접적 계기가 되는 성전 정화를 행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없는 요한복음을 왜 사순절 한복판에 본문으로 배치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두 번째는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미투(# Me Too)운동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또 이 문제를 성경 말씀과는 어떻게 연결 지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얻은 결과는 이렇습니다. 제가 직접 겪었던 한국사에서 암울했던 시절의 한 이야기, 당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인권을 무시했던 보안사에 끌려갔던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보안사는 그 청년에게 회유와 협박을 합니다. "우리에게 협조를 하면 궁핍한 집안 살림도 도와주고, 유학도 보내 줄 테니 우리의 프락치가 되라. 그렇지 않다면 너 하나 없애서 처리하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다. 잘 선택하라." 지금이야 어이없는 짓이지만 군사독재가 이어지던 당시는 권력기관의 일은 불법도 정당화되던 시절입니다.
고민하던 이 청년은 NCCK를 찾아 양심선언을 결심합니다. 당시 NCC 인권위원회 사무국장이었던 제 입장에서는 찾아온 청년의 말을 고스란히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혹시 보안사의 역공작일수도 있다는 의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믿을 만한 사람들과 2-3일 함께 지내면서 진위여부를 파악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관찰결과 이 청년의 결심은 진정인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후일담이지만 이런 결심을 했던 청년은 죽을 용기를 내어 NCC를 찾아 갔는데, NCC가 자신의 진정성을 의심하더라고 말합니다. 저는 당시의 불법적인 정치권력에 대한 고발과정을 보면서 최근의 미투 운동과 견주어 봤습니다. 죽을 힘을 다해서 고발하고 있는 여성, 그 여성은 자신의 미래에 어떤 희망을 걸고 있을까를 생각하면 마음이 참 답답해집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미투에 참여하는 여성의 참담한 감정을 생각하면서도, '나는 농담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나 역시 다른 여성에게 피해를 준 일은 없었을까' 하는 자기검열도 일어납니다. 혹시 내가 여성들에게 성차별적인 폄하 발언은 하지 않았는지? 남자는 보따리도 들지 않아야 한다고 하시던 어머니의 생각이 고스란히 남아서, 여성에게 말은 근사하게 하지만 은근히 남성 우월감을 드러내지는 않았을까?
미투 운동에 대한 논쟁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해자로 지목된 인사들이 모두 진보적 인사들인 점에 비추어 기획설이 퍼지기도하고, 지목된 어떤 사람들은 억울해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은(#Me too) 민중들이 촛불로 권력을 무너뜨렸듯이, 기존에 용인되어 온 불공평한 사회를 다시금 한 번 더 바꾸자는 촛불이다. 즉 얼들의 반란이다. 저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미투 운동을 적극 지지하면서, 스스로도 삼가 조심하기로 했습니다.
오늘 성경으로 다시 돌아가면 이렇습니다.
민수기를 보면 이스라엘백성의 출 애굽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사람들 출 애굽 초기에는 마른 빵도 먹고, 무교병도 먹고, 허리에 띠를 두르고 당당한 모습이었습니다. 희망도 넘칩니다. 그러나 점차 여정이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됩니다. 애돔 왕이 막아서고, 가다 보니 먹을 것도 떨어지고, 춥고 뜨거운 광야생활이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이 대목을 민수기는 우리 그 때는(애굽에서는) 먹을 것도 있었고 배는 굶지 않지 않았다. 여기 와보니 고통의 길인데, 이 길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하며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민 21:5) . 또 그 원망하던 사람들이 뱀에 물려 죽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청동뱀으로 구원해 주십니다(민 21:6-9).
그러나 이 말씀에 대해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크다'고 합니다. 불평하다가 뱀에 물려 죽은 백성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 사랑이 크다고 표현합니다.(시 107:17-22)
서신서의 에베소 사람들은 또 이렇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방인들과 이방인 아닌 사람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때문에 교회 내에서 종족 간에 갈등이 생긴 듯합니다. 종족의 차이, 신앙 때문에 교회가 나뉘자 바울선생은 하나가 되라고 권면합니다. 이 하나가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에베소서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에베소 사람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난 이방인이었고 율법도 몰랐고 아무 것도 몰랐는데,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었다.
그랬더니 이제는 날더러 유대 율법도 배우라고 한다. 예수를 믿기 위해서 유대율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이냐는 것입니다.
이런 갈등 속에 바울은, "너희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율법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대로 선한 생활을 하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하신 작품이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때문에 여러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작품입니다." 이렇게 멋지게 표현합니다.
(너희들이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이뤄진 것이기에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 그러니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는 것이다).
또 요3:16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렇게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또 올바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의 발걸음이 때로 주춤거리고 힘들 때에도, 이것은 너희들이 하는 일이고 너희들의 의지로 이뤄진 것 아니라 하늘의 뜻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위로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 광화문에서 큰 시위가 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2주년을 기념(?)하면서, 이른바 태극기 부대들이 "(그 동안)달라진게 뭐냐. 여전히 똑같지 않냐? 너희들이 대통령도 탄핵하고 난리 피웠는데 뭐가 달라졌는가?" 라고 하는 주장을 폅니다.
이처럼 과거를 회상하며, 그 과거를 아름답게 꾸미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 생활의 고달픔 때문에 미래로 가는 길을 머뭇거리면서, "아! 애굽에 사는 동안 비록 자유는 없었지만, 그래도 기름진 고기도 있었고, 포도주도 있었다. 그때 우리는 적어도 마른 빵은 먹지 않지 않았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성경 중에 니고데모라는 인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니고데모는 이런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일단은 굉장히 상식적이고 능력있는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유명한 선생'이라 표현한 것 보면 바리새파이고, 학식이 높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이 니고데모가 소문을 듣고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당신이 하나님 보내신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 예수님이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이다. 네가 거듭나야, 즉 다시 태어나야 날 볼 수 있다. 내가 하나님이다." 공관복음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너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부르느냐?'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대답하자 다른 사람에게는 이런 이야기 하지 말라고 예수님은 의외의 당부를 하십니다. 이처럼 메시아에게는 비밀이 있는데, 여기서는 오히려 "내가 하나님이다. 왜 나를 보고도 못 믿느냐." 이렇게 직접 말하고 계신 예수님을 향해 니고데모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혹시 "이것 봐라!" 이렇게 생각하진 않았을까요.
살아있는 사람은 하나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도 못하는 것이 거룩한 전통이라 생각했던 당시입니다. 이 시절에 예수를 보니, 참 멋진 사람 같고, 그래서 당신이 하나님 보내신 사람인 것 같다고 인정을 했지만, "내가 하나님인데" 너 똑바로 보아라"하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니고데모 입장에서는 그대로 다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오래 계속됐고, 그 오랫동안 군사독재가 이뤄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입고, 권력을 유지하고, 그 가운데 공부도 많이 하고 학문적으로 잘 정리해 둔 사람들의 입장에서 새로운 문민세대는 혼란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새로운 세대를 보는 그들의 눈은 어떨까요? 웃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면 착해 보이기는 한데, 과연 국가 운영을 잘 할 수 있을까하는 의심의 눈으로 봅니다. 그러나 큰 잘못은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제법하네' 까진 인정할 수 있지만 세상을 확 바꾸는 것은 너무하다는 생각은 여전합니다. 특히 '기득권의 입장에서 을들의 작은 반란까지는 조금 양보하겠지만, 그 동안 각인시켜온 기존 질서에 여자들마저 나서서 이렇게 반항을 한다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저는 여기까지가 니고데모의 마음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혹 니고데모의 마음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민수기의 이야기처럼, 우리가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과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를 생각해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그러느냐"고 수줍게 묻지 않습니다. 직설적으로 "내가 하나님인데, 내가 왔는데 날 몰라보느냐?" 하고 질책하시듯이 말씀하십니다.
여인을 향해서 물을 달라고 하는 내가 누군지를 알았으면 벌써 줬을 것이다. 내가 바로 하나님이다. 이처럼 내가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어두움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빛의 세상으로 살라는 교훈을 듣고 있습니다.
이제는 밝은 세상이 올 것 같습니다. 이렇게 밝은 세상이 오는데 거역하는 사람들 되지 마시고, 뱀에 물려 나중에 하나님 잘못 했다고 빌지 맙시다. 우리가 낮아질 대로 낮아지고, 여성들의 저런 고통을 진심으로 우리의 아픔으로 여기고, 우리도 그 낮은 자리에 서는 것을 즐거워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세상 구원이 올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저는 잠시나마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던 미투 운동으로 유명 정치인들도 단숨에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다. 민중들이 촛불을 들었던 것은 정치인들이 잘나서 들어 준 것이 아니다. 소위 진보적 정치인들, 당신네가 잘나서 민중들이 촛불을 든 것이 아니라, 민중들이 촛불을 들었기에 너희가 그 덕을 본 것일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처럼 너희가 한 것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 따라서 진보적 정치인들은 민초들이 촛불을 든 것이 하늘의 거룩한 뜻이었으며, 그 뜻에 순종해야 한다는 자기 고백을 먼저 해야 한다. 아울러 민중들의 촛불을 자신에게, 정당에 유리하도록 활용하면서 지도자 행세를 하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로도 해석해 봅니다.
어쨌든 촛불 들고 진보적인 사람들이 덕을 많이 봤잖아요? 지도자 되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 덕을 봤는데 이 덕을 너희들이 잘해서 그걸 한 것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요3:16 의 말씀을 다시 되새깁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것을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라 믿으며,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바로 서도록 노력하는 신앙인의 자세로 부활의 주님을 맞이하기를 기도합니다.
[기도]
겸손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현존 앞에 늘 무릎 꿇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 그 선하신 뜻이 어디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잘 판단하는 빛의 사람들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귀한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설교는 지난 2018년 3월 11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사순절 네 번째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79583#share
[김영주 설교] 언제 수건을 벗을 수 있을까 : 제휴 : 기독일보
[김영주 설교] 언제 수건을 벗을 수 있을까 : 제휴 : 기독일보
[김영주 설교] 언제 수건을 벗을 수 있을까
출34:29~35, 고후3:12~4:2, 눅9:28~36
기독일보 편집부 기자(press@cdaily.co.kr)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장, NCCK 전 총무 김영주 목사 ©기독일보DB
주현절의 마지막 주일이기도 하고 예수의 변모를 기념하는 주일 아침입니다.
지난 주간 매우 의미 있는 한 주간을 보냈습니다. 3·1운동100주년을 맞이하여 100년 전 일제의 폭압에 맞서 독립만세를 외친 3·1운동의 선열들의 헌신적인 노력들을 기리며 그 의미를 되새겨보는 여러 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제가 섬기고 있는 기사연도 한국교회의 여러 단체들과 함께 「31운동의 의미와 동북아 평화를 위한 한반도 미래구상」이라는 주제로 「3·1운동 100주년기념 국제 컨퍼런스」를 열었습니다. 저로서는 젊은 시절 매우 감동 있게 읽었던 「희망의 신학」의 저자인 몰트만 박사를 강사로 모실 수 있게 되어 감사했습니다. 호텔에서 자주 마주치며 가벼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 또한 저의 작은 즐거움이었습니다. 2박 3일의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92세 된 노신학자를 대하면서 문득 ‘이렇게 한 시대는 흘러가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자신의 신학적 소양이 부족한 탓인지 몰라도, 우리 신학은 더욱 정진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한국의 신학은 정체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과거를 회상하며 과거의 신학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그런 느낌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의 모습에서도 들었습니다. 과거의 위대함에 대해서는 모두들 합의하지만, 3·1절이 백년을 지난 지금, 그 역사의 의미를 오늘에 되살려 오늘의 우리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며 그리고 내일의 우리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자 노력하는 흔적이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도 못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한국교회조차 3·1 운동 백주년을 기념하는 예배와 각종행사를 상당부분 규모 있게 진행했지만, 오늘의 교회현실에 대한 냉혹한 반성과 미래를 세우고자하는 치열함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단지 교회의 지난 헌신을 내세우기에 급급했던 것 같아 보였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만약 내가 그때 살았다면 나도 목숨을 건 만세 행진에 기꺼이 참여하였을까? 사족이지만 기대를 모았던 하노이 북미회담이 합의 없이 끝나게 되어 아쉬운 마음은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매우 의미 있는 한 주간을 보냈지만, 위와 같은 아쉬움을 안고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을 봅니다.
구약의 본문은 시내 산에서 40일 금식 후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아들고 내려온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빛나 이스라엘 공동체가 두려워했으며,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한 후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는 말씀입니다. 서신서는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모세의 수건에 대한 해석을 통해 복음의 의미를 설명한 것이고,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변화 산에서 변모하시었고, 그 변모에 대한 세 제자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고, 그를 그리스도로 맞이하는 제자들의 진용도 갖추어가는 시점에 예수님은 세 제자와 함께 변화 산에 오르셔서 당신의 현재와 미래를 보여 주셨습니다.
저는 오늘의 본문 중에서 바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말씀을 해보고자 합니다.
바울은 추천장을 들고 다니면서 사도임을 내세우는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사도됨은 추천장에 쓰여 있는 글이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확신을 피력하면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사도직을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새 언약이란 하나님과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옛 언약으로(예레미야 31:31) 복음의 시대에 예수를 통해 맺은 언약이라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옛 언약을 받은 모세의 직분에 대해서도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있었던 것처럼 영광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광채는 곧 없어질 것이어서 모세가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것은 곧 없어질 광채를 가리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온 후로는 율법은 그 종말을 고하였다.(롬10:4)’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즉 옛 언약은 없어질 것으로서 새 언약은 사라지지 않고 길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고린도 교회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그 마음에 수건을 덮어 쓰고 있어 복음의 의미를 잘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직까지 옛 언약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처럼 과거의 삶에 매여 과거의 화려했던 모세의 영광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물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예수의 변모를 본 제자들의 반응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눅 9: 33)
오늘 본문 말씀은 저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만날 때 수건을 벗었는데,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벗어 버려야 할 나의 수건은 무엇인가?
바울은 율법의 시대에는 수건이 필요했지만, 복음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더 이상 수건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셨는데 나는 아직도 어떤 수건을 쓰고 있지나 않은지?
나는 예수를 믿고 그 분을 만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는데, 그 영광의 예수님께 세 제자들처럼 엉뚱한 제안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이 아침 제 자신을 살펴봅니다. 언제부터인지 지난 삶의 공과를 열심히 따져보는데 상당부분 집중하고 있으며, 오늘의 현실에 대해서는 약간은 관조하며 치열함 없이 살고 있으며, 내일을 위해 꿈꾸는 것조차 부담스러워 하고 있는 제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저는 그동안 배웠던 알량한 지식, 짧은 경험, 그리고 과거의 경력이나 지위라는 수건을 쓰고 복음을 대하고 있으며 종이에 쓴 증서가 저의 목사 됨을 증명하는 것이라 자위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을 묵상하면서 드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화려한 과거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것에 머문다면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라는 바울의 지적처럼 현실을 외면하며 미래를 설계하지 못하는 과거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과거가 하나님을 만나 얼굴의 광채가 난 모세처럼 위대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새 언약의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얼굴에 쓰고 있는 수건을 벗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수건을 쓰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으며 수건을 쓰고서는 예수의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라는 말씀의 의미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이제 그 수건을 벗어던지고 예수에게 나아가야합니다. 교만의 수건, 전통의 수건, 조직의 수건, 지식의 수건, 경험의 수건 등 벗어버려야 할 수건들은 도처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를 만난 감격으로 한국교회와 우리 신앙인들의 얼굴에 광채가 빛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다”(고후 3:18)
교부들은 사람이 하나님과 닮은 상태에 이르는 것을 ‘신화’라는 개념으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하나님을 닮아가도록 지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본래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이 발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화’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최종 목표로써,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신화’에 이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신화’는 현재의 삶에서부터 시작되고 발전하여 미래의 삶에서 완성됩니다. 그동안 우리 기독교인들은 물론 한국교회는 너무 쉽게 ‘신화’의 길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과 한국교회는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2:20)라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설교는 지난 2019년 3월 3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박만규 설교] "주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해야 합니까?"
[박만규 설교] "기뻐하시는 하나님"
[강대인 설교] “예수 오심, 기쁨인가? 고통인가?"
[민영진 설교]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는 하나님”
[김고광 설교] "힘없는 예수"
[서진한 설교] "존재의 창조, 관계의 창조"
[강대인 설교] "평화의 씨앗: 정의, 행복"
[김영주 설교] 내 혀의 재갈 물리기
[박만규 설교]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믿음"
[서진한 설교] “존재와 당위 사이에서”
[서진한 설교] “칼의 노래, 권력의 노래”
"한국교회, 무엇부터 변화해야 하나?" (고후 6:3-4절)
[민영진 설교] “하나님은 혼자 사시나?”
[서진한 설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인간의 가치는 무엇으로 재나?” (단 5:22-28)
[민영진 설교] 부활마을은 유령사회가 아니다
[김영주 설교] “부활의 삶”
[김영주 설교] 불편한 진실
[김고광 설교] 두 개의 눈이 마주칠 때: 인천안목(人天眼目)
[김고광 설교] 세상이 변해버렸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기독교 종합일간지 '기독일보 구독신청 바로가기'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EA%B9%80%EC%98%81%EC%A3%BC-%EC%84%A4%EA%B5%90-%EC%96%B8%EC%A0%9C-%EC%88%98%EA%B1%B4%EC%9D%84-%EB%B2%97%EC%9D%84-%EC%88%98-%EC%9E%88%EC%9D%84%EA%B9%8C-82694.html#share
[김영주 설교] 언제 수건을 벗을 수 있을까
출34:29~35, 고후3:12~4:2, 눅9:28~36
기독일보 편집부 기자(press@cdaily.co.kr)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장, NCCK 전 총무 김영주 목사 ©기독일보DB
주현절의 마지막 주일이기도 하고 예수의 변모를 기념하는 주일 아침입니다.
지난 주간 매우 의미 있는 한 주간을 보냈습니다. 3·1운동100주년을 맞이하여 100년 전 일제의 폭압에 맞서 독립만세를 외친 3·1운동의 선열들의 헌신적인 노력들을 기리며 그 의미를 되새겨보는 여러 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제가 섬기고 있는 기사연도 한국교회의 여러 단체들과 함께 「31운동의 의미와 동북아 평화를 위한 한반도 미래구상」이라는 주제로 「3·1운동 100주년기념 국제 컨퍼런스」를 열었습니다. 저로서는 젊은 시절 매우 감동 있게 읽었던 「희망의 신학」의 저자인 몰트만 박사를 강사로 모실 수 있게 되어 감사했습니다. 호텔에서 자주 마주치며 가벼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 또한 저의 작은 즐거움이었습니다. 2박 3일의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92세 된 노신학자를 대하면서 문득 ‘이렇게 한 시대는 흘러가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자신의 신학적 소양이 부족한 탓인지 몰라도, 우리 신학은 더욱 정진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한국의 신학은 정체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과거를 회상하며 과거의 신학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그런 느낌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의 모습에서도 들었습니다. 과거의 위대함에 대해서는 모두들 합의하지만, 3·1절이 백년을 지난 지금, 그 역사의 의미를 오늘에 되살려 오늘의 우리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며 그리고 내일의 우리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자 노력하는 흔적이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도 못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한국교회조차 3·1 운동 백주년을 기념하는 예배와 각종행사를 상당부분 규모 있게 진행했지만, 오늘의 교회현실에 대한 냉혹한 반성과 미래를 세우고자하는 치열함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단지 교회의 지난 헌신을 내세우기에 급급했던 것 같아 보였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만약 내가 그때 살았다면 나도 목숨을 건 만세 행진에 기꺼이 참여하였을까? 사족이지만 기대를 모았던 하노이 북미회담이 합의 없이 끝나게 되어 아쉬운 마음은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매우 의미 있는 한 주간을 보냈지만, 위와 같은 아쉬움을 안고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을 봅니다.
구약의 본문은 시내 산에서 40일 금식 후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아들고 내려온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빛나 이스라엘 공동체가 두려워했으며,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한 후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는 말씀입니다. 서신서는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모세의 수건에 대한 해석을 통해 복음의 의미를 설명한 것이고,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변화 산에서 변모하시었고, 그 변모에 대한 세 제자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고, 그를 그리스도로 맞이하는 제자들의 진용도 갖추어가는 시점에 예수님은 세 제자와 함께 변화 산에 오르셔서 당신의 현재와 미래를 보여 주셨습니다.
저는 오늘의 본문 중에서 바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말씀을 해보고자 합니다.
바울은 추천장을 들고 다니면서 사도임을 내세우는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사도됨은 추천장에 쓰여 있는 글이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확신을 피력하면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사도직을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새 언약이란 하나님과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옛 언약으로(예레미야 31:31) 복음의 시대에 예수를 통해 맺은 언약이라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옛 언약을 받은 모세의 직분에 대해서도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있었던 것처럼 영광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광채는 곧 없어질 것이어서 모세가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것은 곧 없어질 광채를 가리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온 후로는 율법은 그 종말을 고하였다.(롬10:4)’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즉 옛 언약은 없어질 것으로서 새 언약은 사라지지 않고 길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고린도 교회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그 마음에 수건을 덮어 쓰고 있어 복음의 의미를 잘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직까지 옛 언약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처럼 과거의 삶에 매여 과거의 화려했던 모세의 영광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물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예수의 변모를 본 제자들의 반응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눅 9: 33)
오늘 본문 말씀은 저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만날 때 수건을 벗었는데,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벗어 버려야 할 나의 수건은 무엇인가?
바울은 율법의 시대에는 수건이 필요했지만, 복음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더 이상 수건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셨는데 나는 아직도 어떤 수건을 쓰고 있지나 않은지?
나는 예수를 믿고 그 분을 만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는데, 그 영광의 예수님께 세 제자들처럼 엉뚱한 제안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이 아침 제 자신을 살펴봅니다. 언제부터인지 지난 삶의 공과를 열심히 따져보는데 상당부분 집중하고 있으며, 오늘의 현실에 대해서는 약간은 관조하며 치열함 없이 살고 있으며, 내일을 위해 꿈꾸는 것조차 부담스러워 하고 있는 제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저는 그동안 배웠던 알량한 지식, 짧은 경험, 그리고 과거의 경력이나 지위라는 수건을 쓰고 복음을 대하고 있으며 종이에 쓴 증서가 저의 목사 됨을 증명하는 것이라 자위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을 묵상하면서 드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화려한 과거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것에 머문다면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라는 바울의 지적처럼 현실을 외면하며 미래를 설계하지 못하는 과거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과거가 하나님을 만나 얼굴의 광채가 난 모세처럼 위대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새 언약의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얼굴에 쓰고 있는 수건을 벗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수건을 쓰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으며 수건을 쓰고서는 예수의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라는 말씀의 의미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이제 그 수건을 벗어던지고 예수에게 나아가야합니다. 교만의 수건, 전통의 수건, 조직의 수건, 지식의 수건, 경험의 수건 등 벗어버려야 할 수건들은 도처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를 만난 감격으로 한국교회와 우리 신앙인들의 얼굴에 광채가 빛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다”(고후 3:18)
교부들은 사람이 하나님과 닮은 상태에 이르는 것을 ‘신화’라는 개념으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하나님을 닮아가도록 지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본래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이 발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화’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최종 목표로써,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신화’에 이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신화’는 현재의 삶에서부터 시작되고 발전하여 미래의 삶에서 완성됩니다. 그동안 우리 기독교인들은 물론 한국교회는 너무 쉽게 ‘신화’의 길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과 한국교회는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2:20)라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설교는 지난 2019년 3월 3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박만규 설교] "주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해야 합니까?"
[박만규 설교] "기뻐하시는 하나님"
[강대인 설교] “예수 오심, 기쁨인가? 고통인가?"
[민영진 설교]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는 하나님”
[김고광 설교] "힘없는 예수"
[서진한 설교] "존재의 창조, 관계의 창조"
[강대인 설교] "평화의 씨앗: 정의, 행복"
[김영주 설교] 내 혀의 재갈 물리기
[박만규 설교]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믿음"
[서진한 설교] “존재와 당위 사이에서”
[서진한 설교] “칼의 노래, 권력의 노래”
"한국교회, 무엇부터 변화해야 하나?" (고후 6:3-4절)
[민영진 설교] “하나님은 혼자 사시나?”
[서진한 설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인간의 가치는 무엇으로 재나?” (단 5:22-28)
[민영진 설교] 부활마을은 유령사회가 아니다
[김영주 설교] “부활의 삶”
[김영주 설교] 불편한 진실
[김고광 설교] 두 개의 눈이 마주칠 때: 인천안목(人天眼目)
[김고광 설교] 세상이 변해버렸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기독교 종합일간지 '기독일보 구독신청 바로가기'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EA%B9%80%EC%98%81%EC%A3%BC-%EC%84%A4%EA%B5%90-%EC%96%B8%EC%A0%9C-%EC%88%98%EA%B1%B4%EC%9D%84-%EB%B2%97%EC%9D%84-%EC%88%98-%EC%9E%88%EC%9D%84%EA%B9%8C-82694.html#share
19 이명남 목사 회고록 『인권, 온 몸으로』출판기념회 취재 및 보도 요청의 건
이명남 목사 회고록 『인권, 온 몸으로』출판기념회 취재 및 보도 요청의 건
이명남 목사 회고록 『인권, 온 몸으로』출판기념회 취재 및 보도 요청의 건
입력 : 2019-09-25 15:14:47 수정 : 2020-02-27 16:37:36
인쇄
보 도 자 료
교회협 언론 2019 - 118호(2019. 9. 25)
수 신 : 각 언론사
발 신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제 목 : 이명남 목사 회고록 『인권, 온 몸으로』출판기념회 취재 및 보도 요청의 건
1.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2. 사단법인 한국기독교민주화운동은 온몸으로 이땅의 정의와 평화와 인권을 위해 살아오신 이명남 목사의 회고록 『인권, 온몸으로』를 발간하면서 조촐한 출판기념회를 갖고자 합니다.
3. 자세한 일정은 아래와 같습니다. 귀 언론의 취재와 보도를 요청합니다.
- 아 래 -
1. 일시 : 2019년 10월 4일(금) 오후 2시
2. 장소 : 한국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
3. 내용
사회: 임광빈 목사
설교: 김영태 목사(예장 통합 전 총회장)
서평: 김영주 목사(한국기독교민주화운동 상임이사)
축사: 안재웅 목사(한국YMCA전국연맹재단 이사장), 이홍정 목사(NCCK 총무),
정진우 목사(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부이사장)
축하공연: 당진문화재단
헌정사, 인사: 권호경 목사(사단법인 한국기독교민주화운동 이사장)
축도: 손달익 목사(CBS 이사장, 예장 통합 전 총회장)
4. 이명남 목사 약력
대전신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원을 나와 당진교회에서 위임목사로 목회한 뒤 은퇴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충남노회 노회장과 예장총회의 부회록서기, 인권위원장, 사형폐지위원장 등으로 교단을 섬겼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위원장, 일치위원회 위원장, 한국교회 인권센터 이사장 등을 역임하여 교회의 일치와 선교를 위해 일했다. 또 전국목회자정의평화운동실천협의회 상임의장과 재일동포인권선교위원회 위원장, 민주화운동 관련 명예회복분과위원회 위원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운영위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문위원 등으로 섬기면서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인권 향상, 남북관계의 증진 등을 위해 헌신했다. 이뿐만 아니라 당진 시 승격 추진위원회 위원장, 충남환경운동 상임의장, 지방분권운동 충남지부 공동대표, 당진문화재단 이사장, 충남문화재단 이사장(현) 등을 지내며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서도 기여했다.
* 첨부 : 회고록 표지 1부.
* 문의 : (사)한국기독교민주화운동(02-312-3317)
The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n Korea (NCCK)
Tel. 02-742-8981 Fax. 02-744-6189
Email. kncc@kncc.or.kr http://www.kncc.or.kr
이명남 목사 회고록 『인권, 온 몸으로』출판기념회 취재 및 보도 요청의 건
입력 : 2019-09-25 15:14:47 수정 : 2020-02-27 16:37:36
인쇄
보 도 자 료
교회협 언론 2019 - 118호(2019. 9. 25)
수 신 : 각 언론사
발 신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제 목 : 이명남 목사 회고록 『인권, 온 몸으로』출판기념회 취재 및 보도 요청의 건
1.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2. 사단법인 한국기독교민주화운동은 온몸으로 이땅의 정의와 평화와 인권을 위해 살아오신 이명남 목사의 회고록 『인권, 온몸으로』를 발간하면서 조촐한 출판기념회를 갖고자 합니다.
3. 자세한 일정은 아래와 같습니다. 귀 언론의 취재와 보도를 요청합니다.
- 아 래 -
1. 일시 : 2019년 10월 4일(금) 오후 2시
2. 장소 : 한국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
3. 내용
사회: 임광빈 목사
설교: 김영태 목사(예장 통합 전 총회장)
서평: 김영주 목사(한국기독교민주화운동 상임이사)
축사: 안재웅 목사(한국YMCA전국연맹재단 이사장), 이홍정 목사(NCCK 총무),
정진우 목사(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부이사장)
축하공연: 당진문화재단
헌정사, 인사: 권호경 목사(사단법인 한국기독교민주화운동 이사장)
축도: 손달익 목사(CBS 이사장, 예장 통합 전 총회장)
4. 이명남 목사 약력
대전신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원을 나와 당진교회에서 위임목사로 목회한 뒤 은퇴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충남노회 노회장과 예장총회의 부회록서기, 인권위원장, 사형폐지위원장 등으로 교단을 섬겼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위원장, 일치위원회 위원장, 한국교회 인권센터 이사장 등을 역임하여 교회의 일치와 선교를 위해 일했다. 또 전국목회자정의평화운동실천협의회 상임의장과 재일동포인권선교위원회 위원장, 민주화운동 관련 명예회복분과위원회 위원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운영위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문위원 등으로 섬기면서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인권 향상, 남북관계의 증진 등을 위해 헌신했다. 이뿐만 아니라 당진 시 승격 추진위원회 위원장, 충남환경운동 상임의장, 지방분권운동 충남지부 공동대표, 당진문화재단 이사장, 충남문화재단 이사장(현) 등을 지내며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서도 기여했다.
* 첨부 : 회고록 표지 1부.
* 문의 : (사)한국기독교민주화운동(02-312-3317)
The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n Korea (NCCK)
Tel. 02-742-8981 Fax. 02-744-6189
Email. kncc@kncc.or.kr http://www.kncc.or.kr
한기협 김영주 목사 “촛불은 한국 민주주의 새로운 출발점..시장님 같은 분 잘해야” - 톱데일리
한기협 김영주 목사 “촛불은 한국 민주주의 새로운 출발점..시장님 같은 분 잘해야” - 톱데일리
한기협 김영주 목사 “촛불은 한국 민주주의 새로운 출발점..시장님 같은 분 잘해야”
구장회
승인 2017.03.20

20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김영주 목사가 20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예비주자를 예방한 자리에서 “이제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출발점에 섰는데 시장님 같은 분이 잘해야 한다”고 이 시장의 선전을 당부했다.
이어 김 목사는 “우리는 87년 아픈 상처가 있어서 승리감에 도취됐다가 놓쳐서 군사독재정권의 연장선에 섰는데 이번에는 한 단계 더 나아가서 해결해야 할 게 너무 많지 않나”라며 여지를 남겼다.
이날 김 목사는 ‘적폐청산’과 ‘국민통합’에 대해서도 적당한 봉합을 통합이라고 해서는 안된다고 ‘선 청산 후 통합’방안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이 후보는 “제대로된 통합을 하려면 통합을 막는 갈등 유발요소, 비정상적 구조시스템을 청산하는 게 진짜 통합의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한기협 김영주 목사 “촛불은 한국 민주주의 새로운 출발점..시장님 같은 분 잘해야”
구장회
승인 2017.03.20

20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김영주 목사가 20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예비주자를 예방한 자리에서 “이제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출발점에 섰는데 시장님 같은 분이 잘해야 한다”고 이 시장의 선전을 당부했다.
이어 김 목사는 “우리는 87년 아픈 상처가 있어서 승리감에 도취됐다가 놓쳐서 군사독재정권의 연장선에 섰는데 이번에는 한 단계 더 나아가서 해결해야 할 게 너무 많지 않나”라며 여지를 남겼다.
이날 김 목사는 ‘적폐청산’과 ‘국민통합’에 대해서도 적당한 봉합을 통합이라고 해서는 안된다고 ‘선 청산 후 통합’방안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이 후보는 “제대로된 통합을 하려면 통합을 막는 갈등 유발요소, 비정상적 구조시스템을 청산하는 게 진짜 통합의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퇴임 김영주 NCCK 총무 "기독교는 끊임없이 약자의 편에 서야" | 연합뉴스
퇴임 김영주 NCCK 총무 "기독교는 끊임없이 약자의 편에 서야" | 연합뉴스
퇴임 김영주 NCCK 총무 "기독교는 끊임없이 약자의 편에 서야"
송고시간2017-10-09 07:00
공유 댓글
글자크기조정 인쇄

박수윤 기자기자 페이지
7년간 진보 개신교 이끌어…'비상시국선언'으로 촛불정국 점화
"강자를 축복하고 약자를 혐오하는 건 예수 가르침 어긋나"
NCCK 인권국장 시절 김영주 총무
[NCCK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수윤 기자 = "지난 7년이 어땠냐고 물어보지만 사실 뒤돌아보니 이뤄놓은 게 하나도 없네요. 앞으로 한국 교회가 사회의 가장 약한 자들을 위해 존재하길 바랄 뿐입니다."
진보 성향의 개신교 교단 연합체인 한국기독교교회연합회(NCCK) 김영주(65) 총무가 오는 11월 20일을 마지막으로 퇴임한다.
1980년대 후반부터 NCCK에서 인권국장, 일치협력국장 등을 지낸 그는 2010년 총무로 선출돼 7년간 NCCK를 이끌어왔다.
그가 NCCK에 몸담은 30년은 현대사의 압축판이었다. 언론이 봉쇄되고 재야단체가 탄압받던 시절, 핍박받는 사람들은 종로 5가 기독교회관으로 몰려들었다.
"1990년 윤석양 이병이 '군 정보기관인 보안사가 민간인 1천300명을 사찰을 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의 파일을 가져왔습니다. 이곳에서 기자회견을 했죠. 1991년에는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일본기독교교회협의회(NCCJ)를 통해 일본인 필적감정가에게 의뢰해 당시 경찰의 감정이 틀렸다고 반박하기도 했죠."
그럴수록 정부는 개신교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감시와 도청은 일상이 됐다. 1989년에는 한국의 인권탄압 상황을 세계에 알린 미국의 페리스 하비 목사에게 인권상을 주기로 필담(筆談)을 끝내자마자 어용단체들이 몰려와 "미국에 사대주의를 한다"며 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총무 김영주 목사
(서울=연합뉴스)
두렵지 않았을까. 기자의 질문에 김 총무는 백발을 쓸어넘기며 "그때는 젊었지 않으냐"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어 "기독교에는 '예언자'와 '제사장'이라는 두 가지 사명이 있다"며 "목회자는 예언자로서 악한 권력에 저항하며 세상에 경종을 울려야 하고, 때로는 제사장으로서 이 땅의 억압받는 민중에게 용기를 북돋워 줘야 한다"고 우문현답을 내놨다.
NCCK의 '워치독' 역할은 오늘날에도 이어졌다. 촛불정국이 채 점화하기 전인 지난해 7월 27일, '박근혜 정부는 역사와 국민 앞에 사죄해야 한다'는 제목의 시국선언문을 냈다. NCCK가 국내정세를 비상시국이라고 규정한 건 25년 만의 일이었다.
김 총무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았지만 한국 교회는 길을 잃었다고 비판했다. 보수 개신교가 주장하는 종교인 과세 반대, 동성애 반대는 예수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끊임없이 약자의 편이어야 하는데 한국 교회는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힘 있는 사람들에겐 축복을 빌어주면서, 가난한 사람을 혐오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소수라고 간단히 무시해버립니다. 약자를 위한다는 정신을 잃어버린 교회는 이익집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 65세 정년을 맞아 떠나게 됐지만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NCCK이기에 헤어짐이 쉬울 수는 없다.
때문에 자신의 후임으로 오게 된 이홍정 목사에게 거는 기대도 컸다. 인선위원회 만장일치로 총무 후보가 된 이 목사는 오는 19일 회의에서 과반의 찬성을 얻으면 차기 총무가 된다.
그의 향후 계획은 어떻게 될까. 평범한 목회자로 돌아가는 것은 분명하지만 남북 화해를 위해 어떠한 역할도 감당하겠다는 생각이다.
"아직 사람들에겐 분단의 상처가 시퍼렇게 살아있어요. 남북이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도록,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통일에 남은 힘을 다 쓰고 싶습니다."
clap@yna.co.kr
퇴임 김영주 NCCK 총무 "기독교는 끊임없이 약자의 편에 서야"
송고시간2017-10-09 07:00
공유 댓글
글자크기조정 인쇄

박수윤 기자기자 페이지
7년간 진보 개신교 이끌어…'비상시국선언'으로 촛불정국 점화
"강자를 축복하고 약자를 혐오하는 건 예수 가르침 어긋나"
NCCK 인권국장 시절 김영주 총무[NCCK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수윤 기자 = "지난 7년이 어땠냐고 물어보지만 사실 뒤돌아보니 이뤄놓은 게 하나도 없네요. 앞으로 한국 교회가 사회의 가장 약한 자들을 위해 존재하길 바랄 뿐입니다."
진보 성향의 개신교 교단 연합체인 한국기독교교회연합회(NCCK) 김영주(65) 총무가 오는 11월 20일을 마지막으로 퇴임한다.
1980년대 후반부터 NCCK에서 인권국장, 일치협력국장 등을 지낸 그는 2010년 총무로 선출돼 7년간 NCCK를 이끌어왔다.
그가 NCCK에 몸담은 30년은 현대사의 압축판이었다. 언론이 봉쇄되고 재야단체가 탄압받던 시절, 핍박받는 사람들은 종로 5가 기독교회관으로 몰려들었다.
"1990년 윤석양 이병이 '군 정보기관인 보안사가 민간인 1천300명을 사찰을 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의 파일을 가져왔습니다. 이곳에서 기자회견을 했죠. 1991년에는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일본기독교교회협의회(NCCJ)를 통해 일본인 필적감정가에게 의뢰해 당시 경찰의 감정이 틀렸다고 반박하기도 했죠."
그럴수록 정부는 개신교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감시와 도청은 일상이 됐다. 1989년에는 한국의 인권탄압 상황을 세계에 알린 미국의 페리스 하비 목사에게 인권상을 주기로 필담(筆談)을 끝내자마자 어용단체들이 몰려와 "미국에 사대주의를 한다"며 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총무 김영주 목사(서울=연합뉴스)
두렵지 않았을까. 기자의 질문에 김 총무는 백발을 쓸어넘기며 "그때는 젊었지 않으냐"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어 "기독교에는 '예언자'와 '제사장'이라는 두 가지 사명이 있다"며 "목회자는 예언자로서 악한 권력에 저항하며 세상에 경종을 울려야 하고, 때로는 제사장으로서 이 땅의 억압받는 민중에게 용기를 북돋워 줘야 한다"고 우문현답을 내놨다.
NCCK의 '워치독' 역할은 오늘날에도 이어졌다. 촛불정국이 채 점화하기 전인 지난해 7월 27일, '박근혜 정부는 역사와 국민 앞에 사죄해야 한다'는 제목의 시국선언문을 냈다. NCCK가 국내정세를 비상시국이라고 규정한 건 25년 만의 일이었다.
김 총무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았지만 한국 교회는 길을 잃었다고 비판했다. 보수 개신교가 주장하는 종교인 과세 반대, 동성애 반대는 예수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끊임없이 약자의 편이어야 하는데 한국 교회는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힘 있는 사람들에겐 축복을 빌어주면서, 가난한 사람을 혐오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소수라고 간단히 무시해버립니다. 약자를 위한다는 정신을 잃어버린 교회는 이익집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 65세 정년을 맞아 떠나게 됐지만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NCCK이기에 헤어짐이 쉬울 수는 없다.
때문에 자신의 후임으로 오게 된 이홍정 목사에게 거는 기대도 컸다. 인선위원회 만장일치로 총무 후보가 된 이 목사는 오는 19일 회의에서 과반의 찬성을 얻으면 차기 총무가 된다.
그의 향후 계획은 어떻게 될까. 평범한 목회자로 돌아가는 것은 분명하지만 남북 화해를 위해 어떠한 역할도 감당하겠다는 생각이다.
"아직 사람들에겐 분단의 상처가 시퍼렇게 살아있어요. 남북이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도록,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통일에 남은 힘을 다 쓰고 싶습니다."
clap@yna.co.kr
2012년 평화통일 남북공동 기도주일 기도문
2012년 평화통일 남북공동 기도주일 기도문
성공회 소식/자료실
2012년 평화통일 남북공동 기도주일 기도문
온라인선교 푸드라이터 2012. 8. 7. 18:00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총무 김영주 목사, 이하 교회협)와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이하 조그련)은 해방과 동시에 오랜 시간 지속되어왔던 분단의 역사를 평화통일로 귀결하자는 의미로 지난 1988년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을 발표한 이후 1989년부터 매년 8월 15일 주간을 <평화통일 남북공동기도주일>로 지켜오고 있으며, 공동기도주일에 맞추어 연합예배를 매년 드려오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번에 드려지는 남북공동기도주일 연합예배는 “광복의 기쁨을 통일된 조국에서!”라는 주제로 남북의 민간교류와 경제 협력 사업의 활발한 전개를 소망하는 마음을 모아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또한 60년 전에 민족이 함께 누렸던 광복의 기쁨을 이제는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통해 다시 한 번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예배 때 드려진 헌금은 북한 어린이들에게 삶의 꿈과 희망을 주는 일에 사용되어집니다.
또한 교회협과 조그련은 평화통일 남북공동기도주일을 맞아 평화통일 공동기도문을 공동으로 작성하여 예배에서 사용하고 있으며, 전국 교회와 해외 교회에 공동 기도문을 보내 한반도의 평화통일과 화해∙ 협력을 위해 함께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남북관계가 경색을 넘어 위기 가운데 있는 시점에 남북의 교회가 함께 평화통일을 위한 연합예배를 드리고 함께 작성한 공동기도문을 통해 평화통일을 위한 신앙고백을 함께 드리는 일은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경색된 남북 관계를 신앙을 통해 풀어나갈 수 있는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 아 래 -----
1. 일시 : 2012년 8월 12일(주일) 오후 2시 30분
2. 장소 : 성천교회(서울 노원구 월계4동 285-1, 02-990-0031)
3. 주제 : “광복의 기쁨을 통일된 조국에서!”
4. 예배 :
- 인도 : 나핵집 목사(교회협 화해통일위원회 부위원장, 열림교회)
- 설교 : 김기택 감독(교회협 화해통일위원회 위원장, 성천교회)
5. 첨부 : 2012년 남북평화통일 공동기도주일 기도문 1부. 끝
2012년 남북평화통일 공동기도주일 기도문
평화와 통일의 하나님,
어언 67년 전 민족 해방의 8.15를 눈물어린 감격과 감사를 기억하며, 부끄러운 마음으로 2012년의 해방절을 맞이합니다.
“죽음의 그늘 밑 어둠 속에 사는 백성에게 빛을 비추시어”(눅 1:79) 우리 민족은 하나의 조국으로 해방을 맞이하였습니다. 주님의 자비와 놀라우신 은혜와 섭리를 다시금 새기며 올해도 남과 북의 교회가 민족의 통일을 소망하며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둘이 하나가 되게 내가 잡고 있으리라”(겔 37:19) 약속하신 하나님,
남과 북을 하나되게 이끄시는 주님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외세의 야망과 탐욕으로 분열과 전쟁의 상처를 입고 지금도 갈라진 채 총부리를 겨누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난 세기 전반기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40여 년간이나 우리 민족에게 식민지 노예생활을 강요한 일본군국주의가 되살아나 재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으며, 지난날의 수치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 민족 안에서 있어 우려하는 마음을 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막힌 담을 헐고, 갇힌 자를 풀어주시는 해방과 자유의 하나님,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평화와 통일의 길을 가도록 남과 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남과 북의 모든 교회들과 성도들이 6.15가 밝혀준 평화와 통일을 위해 무릎 꿇고 기도하게 하시고, 주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화해의 일꾼, 평화의 사도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동족을 반대하는 외세와의 전쟁연습이 사라지게 하시고, 동족을 적대시하고 비방중상하며 대결하는 비정상적인 관계를 해소하고 신뢰와 단합, 평화의 길을 걸어가게 하여 주옵소서. 민족의 명산이요 세계의 유산인 금강산을 남과 북의 형제들이 자유로이 오가고 협력의 길을 열며, 대결의 바다인 서해를 평화의 바다로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남과 북이 이루는 평화와 통일의 발걸음을 축복하시고, 아시아와 세계의 모든 분쟁과 대립을 화해로 이끄는 사명을 감당케 하옵소서. 이 민족에게 주신 특별한 사랑과 은혜에 평화의 열매로 응답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민족을 하나 되게 하시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2년 8월 15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조선그리스도교연맹
기도문 전문 다운로드 (HWP)
출처: https://www.skh.or.kr/13 [대한성공회]
14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남북 공동 행사 관련 방북 승인 - 보도자료 | 브리핑룸 | 뉴스 |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남북 공동 행사 관련 방북 승인 - 보도자료 | 브리핑룸 | 뉴스 |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남북 공동 행사 관련 방북 승인
2014.08.12 통일부
글자크게 글자작게 인쇄 목록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남북 공동 행사 관련 방북 승인
o 통일부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남북 공동 기도회 개최와 관련하여 방북을 신청한 데 대해 이를 8. 12.(화) 승인하였음.
- 방북 인원은 김영주 목사, 전용재 목사, 박동일 목사 등 19명이며,
- 8. 13. ~ 16. 방북, 8. 15. 평양 봉수교회에서 남북 공동 기도회를 가질 예정임.
o 정부는 비정치 분야의 순수 사회 문화 교류는 지속 허용해 왔으며,
- 이러한 입장에 따라 이번 방북을 승인하였음. 끝.
통일부 대변인
"이 자료는 통일부의 보도자료를 전재하여 제공함을 알려드립니다."
첨부파일
140812-보도자료(NCCK_방북_승인).hwp
[출처] 대한민국 정책브리핑(www.korea.kr)
보 도 자 료
▶ 보도협조일 : 2014. 8. 12. ▶ 자료배포일 : 2014. 8. 12. ▶ 담당부서 : 대변인실 (02)2100-5622~8
▶ 생산부서 : 교류협력국 사회문화교류과 이정택 서기관 02-2100-5854 xio26@unikorea.go.kr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남북 공동 행사 관련 방북 승인
o 통일부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남북 공동 기도회 개최와 관련하여 방북을 신청한 데 대해 이를 8. 12.(화) 승인하였음.
- 방북 인원은 김영주 목사, 전용재 목사, 박동일 목사 등 19명이며,
- 8. 13. ~ 16. 방북, 8. 15. 평양 봉수교회에서 남북 공동 기도회를 가질 예정임.
o 정부는 비정치 분야의 순수 사회 문화 교류는 지속 허용해 왔으며,
- 이러한 입장에 따라 이번 방북을 승인하였음.
/끝/
20 “화해에서 평화로” 남북나눔운동 이문식 목사 인터뷰 - 남북경협뉴스
“화해에서 평화로” 남북나눔운동 이문식 목사 인터뷰 - 남북경협뉴스
“화해에서 평화로” 남북나눔운동 이문식 목사 인터뷰
백찬홍 편집위원
승인 2020.03.03

아가페는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사랑’을 뜻하는 신학용어다. 사랑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가는 기독교의 소명의식은 ‘아가페’에서 출발한다.
사단법인 남북나눔운동(이하 나눔운동)의 북한 지원 역사가 짧지 않다. 1993년 창립 이래 26년간 약 1,500억 원을 지원해 민간단체 중에서는 가장 많은 지원 실적을 기록했다.
더욱이 나눔운동은 교계의 거목 홍정길 목사를 중심으로 ‘보수와 진보’의 구분법을 따지지 않고 힘을 합해 인도적 지원 사업을 전개해 왔다.
나눔운동 창립 당시 기획실장을 맡아 사무총장을 거쳐 현재는 상임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이문식 목사(광교산울교회 담임목사)를 만나 나눔운동이 걸어온 길과 교류협력의 필요성, 향후 전망을 들었다.
3.1운동처럼 불붙은 나눔운동
“남북나눔운동은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3년에 발족했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이하 NCC)는 1988년 노태우 정부때부터 북한 조선그리스도연맹(이하 조그련)과 교류해 왔습니다.”
시초는 NCC 권호경 목사가 1992년 1월 북한을 방문해 조그련 고기준 서기장과 함께 김일성 주석을 만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이때 권 목사는 “동서독이 통일이 될 때 교회가 주역을 담당했는데 그걸 본받아 남북교회가 통일에 좋은 역할을 했으면 한다.”면서 남북 나눔운동 이야기를 꺼냈다.
그 자리에서 확답을 듣지 못했지만 거절하지도 않았기에 권 목사는 돌아와서 일단 남북 기독교 교류를 추진하기로 했다.
NCC는 이 즈음 민주화의 과제를 달성하고 ‘통일운동’으로 방향을 설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뜻 북한 지원에 나서는 교계 지도자가 없었다.
“홍정길 목사님이 수락하셔서 3.1운동처럼 보수, 진보가 함께 참여하는 전 교회적, 전 사회적 운동으로 확산되었습니다. NCC 통일국장이었던 김영주 목사가 사무국장, 제가 기획실장을 맡았습니다.”
홍정길 목사와의 만남
홍정길 목사와의 만남이 궁금했다.
“홍정길 목사님과는 IVF 활동을 통해 만났습니다. 당시 숙명여대 사학과 이만열 교수님이 ‘이문식 목사와 함께 하면 NCC 쪽과 대화가 잘 될 것’이라며 추천했습니다." 홍정길 목사는 "기왕 일하려면 우리교회로 오는 것이 좋겠다."고 승락하셔서 남서울교회 협동목사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남북나눔운동은 적십자사 다음으로 가장 많은 대북 지원을 하는 민간단체로 자리매김했다.
남북 나눔운동이 사업을 시작할 때쯤 1차 북핵 위기로 북한과의 접촉이 불가능할 때였지만 국제사회의 봉쇄를 뚫고 만나보기로 했다. 처음엔 북한측 공식 파트너인 '조선그리스도연맹'을 통하지 않고 간접 접촉이 이뤄졌다.
“긴장된 상황이어서 북한에서도 평양의 관계자 대신 지역단위 인민위원회를 통해 간접적인 방법으로 접촉해 왔습니다. 우리도 연변에 회사를 만들고 조선족 출신 장로님이 대표를 맡아 구상무역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이렇게 시작해서 북한에 옥수수 가루를 중심으로 13회 지원했다. 이 사업 주체가 나눔운동이라는 사실은 북한 당국이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조선그리스도연맹’이 나눔운동의 공식 파트너로 나섰다. 조선그리스도연맹은 북한 내 위상이 낮아서 북한 민화협 내 작은 조직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문식 목사는 “기독교 단체 간의 교류가 북한 사회에 널리 알려지면 조선그리스도연맹의 북한 내 위상도 높아지지 않겠느냐”는 기대가 있었다고 한다. 이후 실제 조그련의 위상이 높아졌다고 한다.
“조그련 책임자 중에 한 분이 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이 되었습니다. 북한 적십자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실적을 쌓았으니 북한당국도 조그련을 인정했죠."
"처음에는 옥수수가루, 감자 등 식량지원을 했는데 군용 전용을 우려하는 여론을 의식해 어린이들을 위한 분유로 품목을 바꾸었어요. 어린이 분유 지원은 각계 호응을 받아 크게 성공했습니다. 보수적인 분들, 여러 다른 단체들도 앞다투어 동참을 했습니다.”
이 무렵 우후죽순으로 북한지원단체가 늘어나자 사업 효율성을 위해 50여 단체가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 즉 북민협을 결성했다.
4개 분과로 나뉘어 나눔운동은 농촌분과위원장을 맡았다. 이 때부터 다양한 농업 단체들이 농촌분과위원회 대북지원사업에 참여해 함께 일했다.
나눔운동은 ‘농촌주거환경개선사업’의 일환으로 황해북도 봉산군 천덕리에 주택 100채를 지었다. 그 뒤로 500채까지 늘어났다.
이 즈음 북측 파트너는 조그련이 아닌 민경련(민족경제연합회)으로 바뀌었다.
천덕리 농촌시범마을 조성사업 (남북나눔 홈페이지 캡처).http://sharing.net/document/pg7
황해북도 천덕리 농촌 주거환경 개선 사업
“농촌주거환경개선 사업은 협력사업이었습니다. 주민 1인당 월 50~60달러씩 지급하는 방식으로 북한 주민이 사업에 참여했죠.
그 외에도 각종 종자와 수해복구를 위한 복구자재를 지원하고 유치원, 탁아소도 세웠습니다. 단순 지원과는 다른 협력사업으로 발전했고 지원규모도 가장 컸습니다.”
천덕리 초등학교 터닦이 공사를 마칠 무렵, 2010년 정부가 모든 교류협력 사업을 중단시켰다. 나눔운동의 남북교류협력 사업도 중단되었다.
이문식 목사는 지난 10년 간 교류협력의 경험을 쌓은 인재들이 하나 둘 빠져나간 것이 가장 가슴 아프다고 한다.
“지원사업은 사람이 하는 일이라서 축적된 역량이 중요합니다. 이 기간 대북지원단체들의 역량이 10분의 1로 줄어든 것 같습니다. 저희는 공백 기간 동안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개발협력사업을 진행해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과연 북한에서 종교적 소통이 가능했는지, 북한의 기독교가 실재하는지에 대해서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가짜 예수쟁이, 속은 빨갱이에게 가서 무얼 하겠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이문식 목사는 “비난하는 내용이 맞을 수 있다. 하지만 북한에서 기독교에 대해 잘 아는 단체가 조그련이다. 복음을 접하는 접촉점을 소중히 여기고 무조건 만나고 교류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사마리아 사람에게 베푼 이웃사랑이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 중 하나이고, 나눔운동은 이웃 사랑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평양 봉수교회 전경 (남북나눔 홈페이지 캡처)
평양 봉수교회의 분위기가 궁금했다.
“봉수교회 예배에 참석하면 설교는 안 시키고 인사만 시키더군요. 담임목사인 이성봉 목사는 김일성 항일유격부대에 어린 나이부터 참여했어요.
혁명 원로인데 김일성 주석이 기독교적 집안에서 자랐으니 ‘교회를 맡으라.’고 해서 맡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신학을 할 수 없었죠. 설교가 쉽지 않았던가 봅니다. 저에게 설교집을 보내달라고 해서 여러 권 보내드렸습니다.”
이 목사가 설교집을 보내 준 후 “평양의 이성봉 목사 설교가 더 좋아졌다”며 활짝 웃는다.
이문식 목사는 북한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만 개방은 느리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했다.
“조그련의 영향력도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당이나 군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조그련이 활동할 수 있습니다. ”
나눔에서 평화로
‘나눔운동’의 교류협력 사업 전망에 대해 물었다. 또 최근 북한이 인도적 지원을 거절하는 배경도 궁금했다.
“현재 북한의 민간경제는 미국의 제재와 남한의 지원 없이도 매년 성장을 했다는 보도가 나왔지요.
이제는 교류협력 방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예전처럼 어린 코흘리개들 사진 찍어서 북한의 참상이라고 보도하는 것이 북한의 자존감을 무너뜨린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이 목사는 남북이 ‘따뜻한 시선’을 교환하는 인간적 연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한다. 교류활성화를 통한 민족 동질성 확보가 첫 단계라고 한다.
남한 청소년들이 아무 거리낌없이 금강산으로 가을 수학여행을 가고, 북한 학생들이 남쪽으로 유학 오고, 북한의 노동자들이 비자를 받아서 남한에 취업하는 관계까지 도달해서 사상과 이념의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눔운동이 지원한 물자의 분배투명성을 위해 교계 분들과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처음에는 6명, 10명이 가다가 규모가 커지자 버스 두 대로 갔어요. 가서 평양 시내 관광도 하고 우리가 지원했던 마을이나 농장을 자유롭게 방문했어요.
처음에는 꺼려했던 분들도 직접 체험하고 북한 사람들을 만나보고는 ‘별거 아니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굉장히 좋아 했습니다.”
하지만 이문식 목사는 최근 ‘북한 지원’ 이야기조차 꺼내기 어려운 상황을 우려했다. 보수-진보의 극한 대립으로 중도적인 입장에서 남북문제를 말하기가 어려워졌다고 한다.
“지금처럼 좌우로 극단적으로 나뉜 적이 없습니다. 진보든 보수든 한쪽에 서지 않으면 설 자리가 없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중도 세력이 약화된 것이 가장 큰 위기입니다.”
북한의 개방이 진전되면 우리 교계의 역할이 늘어날까? 이문식 목사는 “그때 한국 기독교계가 남북교류를 하려고 하면 늦은 감이 있다. 뒤쳐졌다는 생각에 후회할 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남북나눔운동은 대립에서 벗어나 ‘변화’에 대비하고 있다. 이문식 목사는 “진영논리 사이에서 자리가 없어도 평화는 완성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민간 차원의 평화, 대중적인 평화, 중도적인 평화의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이문식 목사는 남북협력을 ‘화해에서 평화로’ 진전시키는 과제에 주력하고 있다.
“화해는 개인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만 평화는 구조적 문제를 다뤄야 해요. 이 문제에 대해 나눔운동도 여러 각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북나눔운동은 향후 단순 지원보다 개발협력에 주력할 계획이다.
베트남 등에서도 경험을 쌓였다. 일회성 방문이 아니라 프로젝트형 협력사업이 전개될 때를 대비해 ‘국제협력전문가’도 양성할 계획이다.
ODA(공적 원조) 사업처럼 의료나 기술, 환경 등 다양한 분야의 인재를 육성해 북한과의 협력사업에 접목하겠다는 것이다. 나눔운동이 수행한 황해북도 천덕리 주택 사업의 경험도 있다.
숲으로 이루는 평화
“평화아카데미를 설립했습니다. 북한의 변화가 진행되면 개인의 경험보다 전문가 영역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평화연대의 경험을 시민사회에 나눠서 역량을 키우는 데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북한 진출을 준비하는 기업인, 직장인, 학생들은 교육해서 피스메이커가 될 수 있도록 해볼 생각입니다.”
이문식 목사는 군포에서 산울교회를 설립한 후 세 번이나 교회를 분립했다. “한 그루 큰 나무보다 아름다운 숲을 이루겠다.”는 목회 철학에 따라 스스로 개척한 교회를 떠나 2013년 현재의 광교산울교회를 설립했다.
광교산울교회 설립예배에서 홍정길 목사는 “한국교회의 위기는 예수를 따르는 삶을 다음 세대에 전수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라며 “하나의 큰 교회보다 작은 교회 여럿이 더 낫다”고 강론했다.
남북나눔운동은 26년간의 활동을 통해 남북 간 ‘화해’를 주도하고, 사회 저변에 스며들어 폭넓은 지원과 동참을 이끌어냈다.
시냇물이 흐르고 다양한 동물과 들꽃이 모여 사는 생태의 숲처럼, 나눔운동이 ‘평화’를 담는 큰 숲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Tag#이문식#이문식목사#광교산울교회#남북나눔#홍정길목사#황해북도천덕리#평화아카데미#남북나눔운동#평양#봉수교회#조선그리스도연맹
저작권자 © 남북경협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백찬홍 편집위원다른기사 보기
“화해에서 평화로” 남북나눔운동 이문식 목사 인터뷰
백찬홍 편집위원
승인 2020.03.03
아가페는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사랑’을 뜻하는 신학용어다. 사랑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가는 기독교의 소명의식은 ‘아가페’에서 출발한다.
사단법인 남북나눔운동(이하 나눔운동)의 북한 지원 역사가 짧지 않다. 1993년 창립 이래 26년간 약 1,500억 원을 지원해 민간단체 중에서는 가장 많은 지원 실적을 기록했다.
더욱이 나눔운동은 교계의 거목 홍정길 목사를 중심으로 ‘보수와 진보’의 구분법을 따지지 않고 힘을 합해 인도적 지원 사업을 전개해 왔다.
나눔운동 창립 당시 기획실장을 맡아 사무총장을 거쳐 현재는 상임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이문식 목사(광교산울교회 담임목사)를 만나 나눔운동이 걸어온 길과 교류협력의 필요성, 향후 전망을 들었다.
3.1운동처럼 불붙은 나눔운동
“남북나눔운동은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3년에 발족했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이하 NCC)는 1988년 노태우 정부때부터 북한 조선그리스도연맹(이하 조그련)과 교류해 왔습니다.”
시초는 NCC 권호경 목사가 1992년 1월 북한을 방문해 조그련 고기준 서기장과 함께 김일성 주석을 만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이때 권 목사는 “동서독이 통일이 될 때 교회가 주역을 담당했는데 그걸 본받아 남북교회가 통일에 좋은 역할을 했으면 한다.”면서 남북 나눔운동 이야기를 꺼냈다.
그 자리에서 확답을 듣지 못했지만 거절하지도 않았기에 권 목사는 돌아와서 일단 남북 기독교 교류를 추진하기로 했다.
NCC는 이 즈음 민주화의 과제를 달성하고 ‘통일운동’으로 방향을 설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뜻 북한 지원에 나서는 교계 지도자가 없었다.
“홍정길 목사님이 수락하셔서 3.1운동처럼 보수, 진보가 함께 참여하는 전 교회적, 전 사회적 운동으로 확산되었습니다. NCC 통일국장이었던 김영주 목사가 사무국장, 제가 기획실장을 맡았습니다.”
홍정길 목사와의 만남
홍정길 목사와의 만남이 궁금했다.
“홍정길 목사님과는 IVF 활동을 통해 만났습니다. 당시 숙명여대 사학과 이만열 교수님이 ‘이문식 목사와 함께 하면 NCC 쪽과 대화가 잘 될 것’이라며 추천했습니다." 홍정길 목사는 "기왕 일하려면 우리교회로 오는 것이 좋겠다."고 승락하셔서 남서울교회 협동목사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남북나눔운동은 적십자사 다음으로 가장 많은 대북 지원을 하는 민간단체로 자리매김했다.
남북 나눔운동이 사업을 시작할 때쯤 1차 북핵 위기로 북한과의 접촉이 불가능할 때였지만 국제사회의 봉쇄를 뚫고 만나보기로 했다. 처음엔 북한측 공식 파트너인 '조선그리스도연맹'을 통하지 않고 간접 접촉이 이뤄졌다.
“긴장된 상황이어서 북한에서도 평양의 관계자 대신 지역단위 인민위원회를 통해 간접적인 방법으로 접촉해 왔습니다. 우리도 연변에 회사를 만들고 조선족 출신 장로님이 대표를 맡아 구상무역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이렇게 시작해서 북한에 옥수수 가루를 중심으로 13회 지원했다. 이 사업 주체가 나눔운동이라는 사실은 북한 당국이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조선그리스도연맹’이 나눔운동의 공식 파트너로 나섰다. 조선그리스도연맹은 북한 내 위상이 낮아서 북한 민화협 내 작은 조직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문식 목사는 “기독교 단체 간의 교류가 북한 사회에 널리 알려지면 조선그리스도연맹의 북한 내 위상도 높아지지 않겠느냐”는 기대가 있었다고 한다. 이후 실제 조그련의 위상이 높아졌다고 한다.
“조그련 책임자 중에 한 분이 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이 되었습니다. 북한 적십자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실적을 쌓았으니 북한당국도 조그련을 인정했죠."
"처음에는 옥수수가루, 감자 등 식량지원을 했는데 군용 전용을 우려하는 여론을 의식해 어린이들을 위한 분유로 품목을 바꾸었어요. 어린이 분유 지원은 각계 호응을 받아 크게 성공했습니다. 보수적인 분들, 여러 다른 단체들도 앞다투어 동참을 했습니다.”
이 무렵 우후죽순으로 북한지원단체가 늘어나자 사업 효율성을 위해 50여 단체가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 즉 북민협을 결성했다.
4개 분과로 나뉘어 나눔운동은 농촌분과위원장을 맡았다. 이 때부터 다양한 농업 단체들이 농촌분과위원회 대북지원사업에 참여해 함께 일했다.
나눔운동은 ‘농촌주거환경개선사업’의 일환으로 황해북도 봉산군 천덕리에 주택 100채를 지었다. 그 뒤로 500채까지 늘어났다.
이 즈음 북측 파트너는 조그련이 아닌 민경련(민족경제연합회)으로 바뀌었다.
황해북도 천덕리 농촌 주거환경 개선 사업
“농촌주거환경개선 사업은 협력사업이었습니다. 주민 1인당 월 50~60달러씩 지급하는 방식으로 북한 주민이 사업에 참여했죠.
그 외에도 각종 종자와 수해복구를 위한 복구자재를 지원하고 유치원, 탁아소도 세웠습니다. 단순 지원과는 다른 협력사업으로 발전했고 지원규모도 가장 컸습니다.”
천덕리 초등학교 터닦이 공사를 마칠 무렵, 2010년 정부가 모든 교류협력 사업을 중단시켰다. 나눔운동의 남북교류협력 사업도 중단되었다.
이문식 목사는 지난 10년 간 교류협력의 경험을 쌓은 인재들이 하나 둘 빠져나간 것이 가장 가슴 아프다고 한다.
“지원사업은 사람이 하는 일이라서 축적된 역량이 중요합니다. 이 기간 대북지원단체들의 역량이 10분의 1로 줄어든 것 같습니다. 저희는 공백 기간 동안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개발협력사업을 진행해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과연 북한에서 종교적 소통이 가능했는지, 북한의 기독교가 실재하는지에 대해서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가짜 예수쟁이, 속은 빨갱이에게 가서 무얼 하겠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이문식 목사는 “비난하는 내용이 맞을 수 있다. 하지만 북한에서 기독교에 대해 잘 아는 단체가 조그련이다. 복음을 접하는 접촉점을 소중히 여기고 무조건 만나고 교류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사마리아 사람에게 베푼 이웃사랑이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 중 하나이고, 나눔운동은 이웃 사랑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평양 봉수교회의 분위기가 궁금했다.
“봉수교회 예배에 참석하면 설교는 안 시키고 인사만 시키더군요. 담임목사인 이성봉 목사는 김일성 항일유격부대에 어린 나이부터 참여했어요.
혁명 원로인데 김일성 주석이 기독교적 집안에서 자랐으니 ‘교회를 맡으라.’고 해서 맡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신학을 할 수 없었죠. 설교가 쉽지 않았던가 봅니다. 저에게 설교집을 보내달라고 해서 여러 권 보내드렸습니다.”
이 목사가 설교집을 보내 준 후 “평양의 이성봉 목사 설교가 더 좋아졌다”며 활짝 웃는다.
이문식 목사는 북한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만 개방은 느리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했다.
“조그련의 영향력도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당이나 군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조그련이 활동할 수 있습니다. ”
나눔에서 평화로
‘나눔운동’의 교류협력 사업 전망에 대해 물었다. 또 최근 북한이 인도적 지원을 거절하는 배경도 궁금했다.
“현재 북한의 민간경제는 미국의 제재와 남한의 지원 없이도 매년 성장을 했다는 보도가 나왔지요.
이제는 교류협력 방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예전처럼 어린 코흘리개들 사진 찍어서 북한의 참상이라고 보도하는 것이 북한의 자존감을 무너뜨린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이 목사는 남북이 ‘따뜻한 시선’을 교환하는 인간적 연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한다. 교류활성화를 통한 민족 동질성 확보가 첫 단계라고 한다.
남한 청소년들이 아무 거리낌없이 금강산으로 가을 수학여행을 가고, 북한 학생들이 남쪽으로 유학 오고, 북한의 노동자들이 비자를 받아서 남한에 취업하는 관계까지 도달해서 사상과 이념의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눔운동이 지원한 물자의 분배투명성을 위해 교계 분들과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처음에는 6명, 10명이 가다가 규모가 커지자 버스 두 대로 갔어요. 가서 평양 시내 관광도 하고 우리가 지원했던 마을이나 농장을 자유롭게 방문했어요.
처음에는 꺼려했던 분들도 직접 체험하고 북한 사람들을 만나보고는 ‘별거 아니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굉장히 좋아 했습니다.”
하지만 이문식 목사는 최근 ‘북한 지원’ 이야기조차 꺼내기 어려운 상황을 우려했다. 보수-진보의 극한 대립으로 중도적인 입장에서 남북문제를 말하기가 어려워졌다고 한다.
“지금처럼 좌우로 극단적으로 나뉜 적이 없습니다. 진보든 보수든 한쪽에 서지 않으면 설 자리가 없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중도 세력이 약화된 것이 가장 큰 위기입니다.”
북한의 개방이 진전되면 우리 교계의 역할이 늘어날까? 이문식 목사는 “그때 한국 기독교계가 남북교류를 하려고 하면 늦은 감이 있다. 뒤쳐졌다는 생각에 후회할 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남북나눔운동은 대립에서 벗어나 ‘변화’에 대비하고 있다. 이문식 목사는 “진영논리 사이에서 자리가 없어도 평화는 완성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민간 차원의 평화, 대중적인 평화, 중도적인 평화의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이문식 목사는 남북협력을 ‘화해에서 평화로’ 진전시키는 과제에 주력하고 있다.
“화해는 개인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만 평화는 구조적 문제를 다뤄야 해요. 이 문제에 대해 나눔운동도 여러 각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북나눔운동은 향후 단순 지원보다 개발협력에 주력할 계획이다.
베트남 등에서도 경험을 쌓였다. 일회성 방문이 아니라 프로젝트형 협력사업이 전개될 때를 대비해 ‘국제협력전문가’도 양성할 계획이다.
ODA(공적 원조) 사업처럼 의료나 기술, 환경 등 다양한 분야의 인재를 육성해 북한과의 협력사업에 접목하겠다는 것이다. 나눔운동이 수행한 황해북도 천덕리 주택 사업의 경험도 있다.
숲으로 이루는 평화
“평화아카데미를 설립했습니다. 북한의 변화가 진행되면 개인의 경험보다 전문가 영역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평화연대의 경험을 시민사회에 나눠서 역량을 키우는 데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북한 진출을 준비하는 기업인, 직장인, 학생들은 교육해서 피스메이커가 될 수 있도록 해볼 생각입니다.”
이문식 목사는 군포에서 산울교회를 설립한 후 세 번이나 교회를 분립했다. “한 그루 큰 나무보다 아름다운 숲을 이루겠다.”는 목회 철학에 따라 스스로 개척한 교회를 떠나 2013년 현재의 광교산울교회를 설립했다.
광교산울교회 설립예배에서 홍정길 목사는 “한국교회의 위기는 예수를 따르는 삶을 다음 세대에 전수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라며 “하나의 큰 교회보다 작은 교회 여럿이 더 낫다”고 강론했다.
남북나눔운동은 26년간의 활동을 통해 남북 간 ‘화해’를 주도하고, 사회 저변에 스며들어 폭넓은 지원과 동참을 이끌어냈다.
시냇물이 흐르고 다양한 동물과 들꽃이 모여 사는 생태의 숲처럼, 나눔운동이 ‘평화’를 담는 큰 숲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Tag#이문식#이문식목사#광교산울교회#남북나눔#홍정길목사#황해북도천덕리#평화아카데미#남북나눔운동#평양#봉수교회#조선그리스도연맹
저작권자 © 남북경협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ubscribe to:
Posts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