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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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주 설교] 신앙인의 자리 : 제휴 : 기독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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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8. 8. ... [김영주 설교] 신앙인의 자리 ... NCCK 총무 김영주 목사. 前 NCCK 총무, 現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 김영주 목사 c 자료사진.
[김영주 설교] "믿음 · 헌신· 바름" : 제휴 : 기독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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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1. 7. ... [김영주 설교] "믿음 · 헌신· 바름". 제휴: 바이블25 ... NCCK 총무 김영주 목사. NCCK 전 총무·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장 김영주 목사.
[김영주 설교] “이제 우리는” : 제휴 : 기독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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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6. 18. ... 前 NCCK 총무, 現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 김영주 목사 c 자료사진. 지난주는 싱가포르의 북미정상회담, 그리고 그 이튿날 치뤄진 지방선거를 ...
[김영주 설교] 나사렛 예수 : 제휴 : 기독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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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11. ... NCCK 총무 김영주 목사. △김영주 목사 c 기독일보DB. 지난해를 생각해본다. 지난해 한국사회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모두가 자중자애 하는 마음 ...
[김영주 설교] 내 혀의 재갈 물리기 : 제휴 : 기독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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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9. 18. ...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장, 前 NCCK 총무 김영주 목사. 오늘의 본문 말씀은 설교를 앞둔 목사에게는 무척 부담되고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김영주 설교] 언제 수건을 벗을 수 있을까 : 제휴 : 기독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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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 6. ... [김영주 설교] 언제 수건을 벗을 수 있을까. 제휴: 바이블25 ...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장, NCCK 전 총무 김영주 목사 ©기독일보DB.
[김영주 설교] “신비를 가슴에 안고” : 바이블25 : 기독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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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 10. ... [김영주 설교] “신비를 가슴에 안고”. 바이블25: 제휴 ... 설교는 2019년 1월 6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 전문입니다. #김영주목사 ...
[김영주 설교] 불편한 진실 : 제휴 : 기독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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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3. 22. ... [김영주 설교] 불편한 진실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NCCK 총무 김영주 목사. 前 NCCK 총무, 現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 김영주 목사.
[김영주 설교] “부활의 삶” : 제휴 : 기독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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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4. 6. ... [김영주 설교] “부활의 삶”. 제휴: 바이블25 ... 인터뷰 중인 NCCK 김영주 총무. △前 NCCK 총무, 現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 김영주 목사.
[김영주 목사] 어디로 갈까? : 제휴 : 기독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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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2. 26. ... 성탄을 맞는 2018년 12월 23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NCCK 총무 김영주 목사. NCCK 前 총무, 한국기독교사회 ...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search?q=%EA%B9%80%EC%98%81%EC%A3%BC+%EC%84%A4%EA%B5%90#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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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주 설교] "믿음 · 헌신· 바름"
성서일과 : 룻 1:1-8, 히 9:11-14, 막 12:28-34
기독일보 편집부 기자(press@c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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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CCK 전 총무·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장 김영주 목사
지난 주간은 10월 30일(「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출발점)이 있는 주간이었습니다. 한 주간을 지내면서 제 자신이 놀랐습니다. 무척 담담하게 한 주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작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보내면서 동분서주했고, 한국교회 역시 변화를 모색하기 위해 여러 부분에서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올해 종교 개혁 주일(501주년)에는 지난해와 달리 한국교회는 아무런 성찰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는 듯 했습니다. 저 자신도 무덤덤하게 지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약간은 시니컬하게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지냈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적합한 것 같습니다. 단 1년 동안에 나는 왜 이렇게 변했는가 하고 생각하니 당황스럽기조차 했습니다. '서있는 곳이 다르면 풍경이 다르다'는 말이 내게 해당되는 말인가? 그러나 딱히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실 지난 1년은 여타의 일 년과 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촛불혁명이라고 불리는 촛불집회를 통한 시민들의 열망을 담고 새 정부가 성립되었습니다. 사회곳곳에서 적폐를 몰아내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자하는 바람이 큰 태풍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동안 기득권들이 관례와 관행과 관습으로 당연시 해왔던 일들이 '을'들의 도전에 의해 정죄되거나 물리쳐야 할 적폐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권위주의적 남성문화, 특권층들의 비리와 부패, 갑들의 고용비리, 재판관들의 부정과 부패, 금수저들의 오만과 독선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이렇게 문제가 많았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놀랄만한 일들이 매일 뉴스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한국사회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힘들더라도 세상을 바꾸고자하는 이런 노력들에 적극 참여하여야 할 것입니다. 혹자들처럼 "개혁 피곤증(?)"을 앞세워 그동안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 동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제가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오늘의 교회의 모습입니다. 세상을 새롭게 바꿔보려는 기운들이 분출되고 있는데, 교회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이 유달리 잠잠합니다. 한국교회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 살펴보지 않고, 새로워지겠다는 노력도 물론 없이 잘못된 관습을 되풀이 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봅니다. 오히려 세상의 언론들이 그런 문제점들을 속속들이 고발하고 있는데도 교회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부 교회가 앞장서서 매주 토요일 광화문에서 진행되고 있는 태극기집회(?)는 차치하더라도 한국교회는 우리사회의 변화의 몸부림과 상관없이 그 기득권의 모습을 공고히 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최근 광화문에서 열린 '한국교회의 회개기도 대성회'는 한국교회가 한국사회가 기독교를 보는 정서를 잘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단적인 예입니다. 저 자신도 개혁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괴롭습니다. 앞선 주일 김고광 목사님의 설교 '한국교회의 개혁은 목사부터'라는 말씀이 계속 마음에 남습니다. 개혁주간을 맞이한 우리는 먼저 가정과 회사와 교회와 일터에서 갑질(?)을 즐기지 않았는지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 고백이 우선되지 않는 개혁은 오히려 갈등과 분쟁을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개혁교회가 그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언제나 개혁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말씀을 개혁이라는 관점으로 읽습니다.

(마가복음) 오늘 본문말씀은 한 율법학자의 "가장 소중한 계명이 무엇입니까?"하고 묻는 말에 예수님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대답하는 장면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내가 곧 죽을 것이고, 부활 할 것이다.' 라고 예고하신 후, 예루살렘 성전 입성, 무화과나무 저주, 성전 정화, 포도원 소작인 비유, 부활 논쟁, 세금 논쟁 등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과 활동은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당시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는 제사장, 바리새인, 사두개인, 율법학자들에게는 큰 위협이 되었고, 예수 죽음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의 으뜸 되는 계명에 대해 단순히 한 율법학자와의 문답식의 지식 교류로 보면 안 됩니다. 이 말씀 이후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강하게 질책하고 있습니다. 이는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말씀(유언)으로 읽어야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되 네 마음(감정)을 다하여 목숨(죽음)을 다하여, 네 뜻(옮음, 바름)을 다하여, 네 힘(능력)을 다하여 섬기라""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붙들고 묵상해야 합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에게 마음이 이끌리고 있으며, 죽기까지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내 능력을 다하고 있는지! 그리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정말 사랑하는가! 하고 물어야 할 것입니다.

(룻기) 오늘 본문의 룻을 보면, 여성 신학에서는 여성들의 아름다운 연대라고 하지만 그것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모압 땅에서 약 10년 동안 거주하면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는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을 각자의 집으로 보내고자 합니다. 아마 나오미로서는 여러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이었을 것입니다. 아들들의 죽음으로 연결고리가 없어졌고, 모압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은 고향사람들이 모압 출신인 며느리를 어떻게 대할지 걱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한국사회가 남예멘사람을 비롯한 이주민을 대하는 태도를 보아도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은 출애굽의 역사에서 적대적 입장을 취하고 방해한 모압을 무척 싫어했습니다. 모압 사람들이 여호와의 회중에 오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습니다. 그러나 모압 출신인 룻은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따라 이스라엘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룻에게는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시어머니와의 관계가 좋았다 해도 남편도 없는 상황에서 홀로된 시어머니를 모셔야 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고, 또한 모압 사람들을 근원적으로 싫어하는 베들레헴 사람들의 냉대가 쉽게 예견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룻은 나오미를 따라 나섭니다. "당신이 가는 곳에 나도 가겠습니다. 당신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룻은 나오미를 따르는 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이해관계를 넘어선 결단입니다. 어쩌면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도 있는 길을 결단합니다. 룻은 헌신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옳은 결단이었습니다.

믿음은 선택이자 결단입니다. 신앙은 용기이기도 합니다. 어려움과 희생을 무릅쓰고 하는 결단이고 용기입니다. 룻기의 저자는 이 룻의 결단을 통해 여호와의 회중에 모압 사람들이 드는 것을 금하고 있는 이스라엘 중심의 신명기 법정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룻기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서는 국제결혼을 한 이스라엘 남자들에게 여자를 내 쫓으라고 했던 에스라의 이스라엘 국수주의에 제동을 걸고 있습니다.

유대인을 위한 복음서라고 알려지고 있는 마태의 예수님 족보에 당당하게 그 이름을 올리고 있는 위대한 결단의 여인들이 있습니다. 다말, 라합, 밧세바 등 이런 사람들이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라 이스라엘 밖의 이방인들입니다. 이들의 희생적이고 올바른 결단은 룻과 함께 예수님이 이스라엘만의 주님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구세주가 되는 길을 열어놓은 열쇄가 되고 있습니다.

이 분들 모두 관습과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부정과 부패와 불의가 정당화 되는 이 세상, 남성중심주의, 기득권 중심주의에 맞선 여인들이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바른 결단, 헌신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불행히도 한국교회는 아직까지도 이스라엘 중심주의, 남성우월주의, 기득권 중심에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 포용과 환대보다는 배제와 혐오를 신앙이라 고집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양과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자신의 피로 스스로 제물이 되셨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성령을 힘입어 자기 몸을 제물로 삼으신 그 피로 죽은 행실에서 떠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재물로 바쳤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바른 삶을 살기위해서는 자기의 몸을 죽이기까지 헌신해야 하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자기를 죽이기까지 헌신하지 않고서는 참 신앙인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오늘의 한국교회는 개혁이 필요합니다. 개혁에는 헌신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결단과 헌신이 없이는 개혁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양의 피나 송아지의 피로 제사를 드릴 수 있다는 이스라엘의 제사법을 완전히 무효화 시킨 것입니다.

신앙은 자기를 죽이는 것이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은 추상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시인 안도현은 그의 시 '너에게 묻는다' 에서 길거리에 뒹굴고 있는 연탄재에서 헌신을 발견하고 '내가 정말 한번이라도 누구에게 뜨겁게 사랑해본 적이 있는가' 라고 묻고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헌신과 희생의 다른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를 뜨겁게 사랑했는가? 온갖 힘을 다하는 착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예수를 사랑했는가"

최근 갈등과 분쟁으로 둘로 나뉘어 있는 교회에 출석하는 권사님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 권사님들도 분쟁으로 다투는 어느 한편에 속한 분인 듯합니다. 그분들은 본인들만이 진리의 편에 서 있다고 항변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분쟁의 한 복판에 서 있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촛불을 들고 있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목사님은 언행일치의 신앙을 가진 분으로 매우 존경스러운 분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늘 기도하며 응답을 받고 있다.

저는 그 분들의 주장을 들으면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지만, 우리들의 대화가 논쟁으로 이어질까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남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은 아집과 고집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표출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분들에게는 열정도 믿음도 헌신도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에게는 '바름'이 없었습니다. 조금만 사태를 객관적으로 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습니다. 광화문의 한 복판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사람들을 자주 봅니다. 그들의 확신과 헌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른' 복음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결단과 헌신과 함께 ' 바름, 올바름'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열정과 헌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바름'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무엇인지를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인 시편146편의 말씀은 하나님은 약한 자, 소경된 자, 비굴한 자, 고아와 과부 등을 돌보시는 분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신앙을 가진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신앙은 기득권과 어울려서 교회의 세력을 확장하고,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자리는 약자, 어려운 자, 주린 자, 소경, 비굴한 자, 고아, 과부 등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 자리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우리 교회는 「마틴 루터」가 개혁하고 싶었던 옛 부패했던 교회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토인비는 초대 수도원의 '거룩한 독서, 거룩한 노동, 거룩한 기도'운동이 근대 사회를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상한 운동이 「마틴 루터」에게는 그 시대의 적폐였습니다. 마틴 루터」는 수도원을 기득권의 논리를 뒷받침해주고 기득권에 의해서 각종 혜택을 누리는 타락한 종교집단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답기 위해 삼가 조심하며 그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늘 조심해야 합니다. 선줄로 아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의 교회는 자신을 끊임없이 갱신하고 개혁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자 뿌리 채 말라버렸던 것처럼 한국교회가 그렇게 될까 두렵습니다.

풍요로운 계절에 기독교의 절망을 이야기 한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지만, 오늘 예수의 말처럼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꼭 실천하는 한국교회가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 설교는 지난 2018년 11월 4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임을 밝힙니다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81384#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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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주 설교] “이제 우리는”
성서일과: 삼상 15:34-16:13, 고후 5:6-10, 14-17, 막4:26-34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press@c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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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NCCK 총무, 現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 김영주 목사 ⓒ 자료사진
지난주는 싱가포르의 북미정상회담, 그리고 그 이튿날 치뤄진 지방선거를 통해 여러 가지를 돌아보게 하는 그런 한 주간이었습니다.

모두가 한반도의 운명과 관련된 문제들인데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세계를 뒤흔드는 폭탄적인 발언에 주변국들은 요동칩니다. 이런 상황을 만드는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가 얄밉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하지만 더불어 약소국가인 스스로의 한계를 느꼈습니다. 또 이런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을 옹호하는 듯 한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에 속이 상하기도 했습니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을 둘러싸고는 북·미 최고 지도자들 사이에 막말이 이어지면서 이러다가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나라에서는 야당의 문재인 정부의 안보 무능력이라는 비난, 미국과 중국 사이에 코리아 패싱 이라는 등의 말까지 나왔습니다. 이 복잡한 상황 속에서 저는 세상을 바꾸라는 촛불의 민심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고 이른바 발목잡기에 골몰하는 정치권이 원망스럽고, 심지어는 국회 해산권을 주장해야 하지 않나 하는 할 수 조차 없는 일을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북미 정상회담을 언론들은 세기의 회담이라고 평가합니다.

사실 그동안을 돌아보면 남한이 북측과 잘해보려 하면 미국이 발목을 잡고, 미국이 북한과 잘해보려 하면 남한이 발목을 잡는 형국이었습니다. 과거 김영삼 정부는 미국이 북한과 정상회담을 추진하자 남한을 무시한다며(코리아 패싱에) 반발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우리 대통령이 오히려 나서서 북미 정상회담의 가교 역할을 자처하면서 돕는 모습을 보면서 좋은 시대를 만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와 맞물려 지방자치 선거도 국민들의 관심사항이었습니다. 저는 이번 선거가 촛불혁명의 정당성을 확인하고 미래지향적인 한국사회가 열어가는 과정이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다행히도 이번 선거 결과는 한국사회가 더 발전했으면 좋겠다는 유권자들의 염원이 담긴 결과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지방선거는 제2의 혁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관심사항인 북미 회담을 오늘성서일과 본문말씀에서 교훈을 얻어 볼까 생각을 하다 보니 본문이 말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으로 본문을 말하게 됩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예언서의 말씀 사무엘상 15장 34절 이하에는 사무엘과 사울의 대화가 나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너는 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가? 너는 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하지 않았는가?"하고 질책합니다.

이에 사울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소와 양을 진멸하라고 하시니, 병약한 소, 양은 다 죽였습니다. 다만 튼실한 소와 양은 남겨서 그것을 하나님께 따로 바치기 위해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설사 내가 말씀을 어겼다 하더라고 그것은 내가 어긴 것이 아니라 나를 왕으로 세워진 이스라엘의 백성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라고 강변합니다.

이에 사무엘은 순종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사울은 이 대목에서 사무엘에게 "당신의 하나님께"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사울은 "사무엘 당신의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당신의 말에는 억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전쟁에 들어간 비용을 얻은 소와 양을 얻어서 보충해야 합니다"라면서 사무엘에게 모두 진멸하라는 말은 현실적이지 않고 억지 같다고 항변합니다.

사울의 이 항변이 마치 "북미 회담은 진보했지만, 먹고사는 경제 문제는 여전히 어렵지 않습니까?" 하고 북미회담에 대해 반론을 펴는 말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소와 양은 취해서 우리 백성을 먹여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따르면서 살자니 세상 살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이런 현실 때문에 열 가지 말씀 중 한 두 가지만 따르면서 기독교인이라고 자부하면서 사는 것은 아닌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일 매일 세상일에 매여 타협하고 살면서 조금은 말씀과 어긋나도 하나님께서 용서 해 주실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지 않는지 생각을 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명령들을 복수로 시용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단수로 표현합니다. 다시말해 사무엘은 하나님의 명령들을 왜 안 지켰습니까? 라고 복수로 물었지만 사울은 여러 가지를 지키지 못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단수로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 어떤 주석가들은 여러 가지 하나님의 명령들을 다 지키지는 못했지만, 한 가지는 지켰으니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울의 변명 안에 우리도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에 "주님께서도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다.( 삼상 15:35)"고 기록되었지만 보이스 성경에는 "하나님도 사무엘도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슬퍼했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울에 대한 실망이 얼마나 크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복 받기를 원하면서, 자신은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는데 사무엘이 기름 부어 왕이 되었는데 하나님은 관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것은 다 못 지켜도 이것만큼은 지켰으니까 다른 잘못은 용서해 주십시오. 그래도 저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목사답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제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사무엘이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 대목에서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화려해 보이는 정치가들의 표현, 상황에 일희일비 할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서신서의 말씀 고린도 후서 5장 17절 이하의 말씀에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fl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화해하는 자로서의 직분을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말에 참석한 한 혼인예식을 보면서 과거 제 처조카의 혼인식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신부와 신랑이 마주보며 직접 축가도 불러주고, 참석한 사람들이 뽀뽀해! 뽀뽀해! 하니 스스럼없이 뽀뽀도 하고 하던 모습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혼례식이 좀 더 경건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론 내가 옛날의 관습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처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이 왔도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인 것입니다.

과거의 반공논리를 최우선하던 세상, 그 안보로 세상을 지배했던 독재시대의 논리가 있었고, 그에 맞서면서 살아왔던 우리지만 나도 모르게 그 권위주의적인 생각에 물들지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세상은 저 만치 가고 있는데 우리는 정의롭게 살아왔고, 열심히 살았었고, 헌신적으로 살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살았다면서 자신의 과거를 미화하려 들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라 세상이 바뀌었다. 너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새로운 세상에서 어떻게 살지 생각해 보아라. 믿음으로 살아라.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살지 말라. 믿음으로 살아라. 너희에게 새로운 피조물로서 직분을 주었는데 예수님께서 세상을 화목하게 해주었던 것처럼 너희도 세상을 화목하게 해주며 살아라.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말아라.

바울 선생님의 이 본문처럼 새로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목표를 지니며 살아야 할지 생각해 봅니다.

오늘 마가복음의 본문은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작은 씨앗이 우리가 밤낮 자고 있는 중에 하나님께서 키우셨다는 내용입니다.

지금 돌아가는 세상(북미회담 등)을 보면 얼마 전만 해도 도무지 올 것 같지 않는 세상이었습니다.

아! 이런 세상이 이렇게 빨리 왔어! 꿈이야 생시야!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많은 노력과 헌신의 씨앗을 뿌리게 하셨고, 이를 하나님께서 고이 품어 싹이 트게 하시고, 자라게 하시고, 열매를 맺게 해주시고, 새가 깃들만큼 커다란 나무로 자라게 하시는 신비한 은총을 봅니다.

세상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역할을 하지만 꽃을 피우고 결실을 맺는 세상변화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일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는 역할을 성실히 감당해야 겠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남북통일에 관한 일을 많이 해왔습니다.

정부가 통일에 관심 없을 때는 우리가 열심히 일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정부가 통일에 관심을 갖고 나서니까 우리가 할일은 뭐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는 종전 협정, 미군 철수와 평화 협정을 생각을 하다가 빨갱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는데, 지금은 문재인 대통령이 종전, 평화를 말합니다. 더구나 트럼프 미국대통령은 미군 철수 얘기를 끄집어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우리는 무슨 일을 해야 할까?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마가복음의 말씀처럼 걱정 염려 말고 열심히 씨앗을 뿌리는 헌신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상에 대해 근심 걱정하지 말고, 겉을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로 화해자의 사명을 감당하자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성실히 감당하면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씨앗으로 받아 자라게 하셔서, 우리 한반도에 통일이 오게 하시고 한반도의 민주주의가 발전하게 해주시는 일을 인도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우리는, 같이 힘쓰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설교는 지난 2018년 6월 17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을 수정·편집한 것입니다.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80333#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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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주 설교] 나사렛 예수
성서일과 본문 시 29, 창 1:1-5, 행 19:1-7, 막 1:4-11
기독일보 편집부 기자(press@c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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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주 목사 ⓒ 기독일보DB
지난해를 생각해본다. 지난해 한국사회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모두가 자중자애 하는 마음으로 협력하고 노력한다면 우리 사회는 한 단계 발전할 것이다. '새 하늘, 새 땅'에의 기대를 가지고 사는 우리 신앙인들의 기도와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 올해 첫머리에 남북 간의 북한의 평창 올림픽 참가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고, 이를 계기로 남북 간의 새로운 전진이 있을 것 같아 기분 좋게 한해를 시작하게 되었다. 올해는 바울이 빌립보교인들에게 준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고, 감사하며, 기뻐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자 다짐해 본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 주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빌 4장 4-7절)

최근에 두 사람을 만났다. 첫 번째 사람은 소위 보수적 신앙을 가진 분으로 자신의 미래를 위해 기도중이라고 했다, 두 번째 사람은 한국교회에 무리가 되고 있는 다른 신앙을 가진 분으로 자신이 속해 있는 믿음 집단의 생활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들의 신앙이 올바른가, 아닌가는 차치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내게는 큰 도전이 되었다.

나는 내게 질문을 한다. '나는 기도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예수를 잘 믿고 있는 것인가?'

마침 오늘은 교회력으로 예수님의 수세일이다. 이번 주일에 제시된 성경말씀이 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본문은 창세기 1장 1-4절, 시편 29편, 사도행전 19장 1-6절, 마가복음 1장 10-11절이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의 영이 수면위에 운행하시고, 하나님이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겨났다.' 라는 말씀으로 시작되는 천지 창조는 장엄하기 조차하다. 시편의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세상을 세밀하게 묘사하며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공감되는 말씀이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예수로부터 시작된다. 즉 우리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나사렛 사람 예수를 말이다. 어떻게 나사렛 예수가 우리의 하나님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건너 뛸 수 없는 문제이다. 초대교회 공동체들도 이 질문을 여러 경로로부터 많이 받은 것 같다.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장면에서부터 이 질문에 대답해야한다. 즉 구세주인 예수가 어떻게 사람에게 세례를 받는가이다. 잘 알다시피 예수의 세례 받음은 공생애의 시작으로 일종의 출정식이다. 사복음서 모두가 예수의 수세를 증언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예수가 세례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 마가공동체는 예수의 세례 장면을 설명하면서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였고,'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내가 기뻐하는 자이다' 하늘의 음성이 들렸다'고 기록하여 일종의 대관식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다른 공동체들도 이 부분이 의식되는 것 같다. 마태공동체는 요한이 세례 주는 것을 사양한다. 그러자 예수가 하나님의 요구라고 말하며 세례를 자원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누가공동체는 예수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고, 성령이 하늘로부터 임하고, 하늘의 음성이 들렸다고 간단히 정리한다. 요한공동체는 예수의 수세장면을 아예 생략하고, 요한이 예수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고 설명한다.

이 점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나타난다. 이후 계속 신학적인 논쟁이 된다. 예수는 참 신인가, 참 인간인가? 이런 논쟁을 통해, 이단으로 처형당하기도 하고, 교회가 갈라지기도 했다. 오늘날도 그 흔적들은 남아 우리 신앙인들의 믿음의 자세를 결정하는 데 어려움을 주고 있다. 최근 한국교회의 신앙도 그러하다. 목회자들의 설교에서도 구약의 하나님이 예수를 거치지 않고 선포되고 있다.

이는 에베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도행전 19장, 오늘의 본문에도 나타나고 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너희가 신앙인이 되었을 때 성령을 받았는가?"라고 묻는다. 그들은 대답하기를 "성령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라고 한다. 바울은 너희가 어떤 세례를 받았는가 물었고,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말한다. 바울은 너희에게 준 요한의 세례는 근본적인 삶의 변화(radical life-change)를 말하는 것이고,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예수를 맞이할 준비가 된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 대답을 듣고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자, 성령이 임하였고 방언과 예언을 했다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다. 바울이 에베소교인들에게 성령 세례에 대해 설명하면서 한 말을 다른 번역본(message)으로 읽어본다.

"Did you changed heart and lives? Did you take God into your mind only or did you also embraced God with your heart?"

바울에게 세례란 하나님을 네 마음에 받아들임으로써, 네 삶 전체가 변하는 것이었다. 즉 요한의 세례는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이고(인간의 영역) 예수의 세례는 그 분을 믿는 것이다(성령의 영역). 그런 의미에서 (서진한 목사가 말한) 고유명사인 예수라는 사람이 보통 명사인 하나님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사렛 예수가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것이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그 동안의 삶을 생각해본다. 나는 예수를 알려고 했다. 다시 말해 머리로만 이해하려고 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라도 바울 선생의 말씀대로, 우리는 삶의 변화에 머물지 말고 예수를 우리 마음에 받아들이고 우리 마음에 껴안아야 할 것이다. 그리할 때, 오늘의 창세기 본문을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마음 혼돈과 흑암 속에 있더니 하나님의 영이 우리 마음 위에 운행하시리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사도바울은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믿게 된 후,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라고 선언하고 있다.

올 한해 우리 공동체 모두의 삶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시길 기도하며, 다음과 같은 바울의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길 기도한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3:5)"

■ 김영주 목사는 전 NCCK 총무를 지냈으며 지금은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 남북평화재단 이사장, 종교인평화회의 대표회장 등으로 헌신하고 있다.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78889#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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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장, 前 NCCK 총무 김영주 목사
오늘의 본문 말씀은 설교를 앞둔 목사에게는 무척 부담되고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특히 야고보서의 말씀은 더 그렇습니다.

본문은 '혀를 조심하라'의 제목으로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1. 형제 여러분, 너도 나도 선생이 되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2 우리는 다 실수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만일 사람이 말에 실수가 없으면 그는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첫 마디부터 부담스럽습니다. 인내를 가지고 읽어봅니다.

5 이와 같이 사람의 혀도 몸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지만 [a]그것을 잘못 사용하면 큰 손해를 가져옵니다. 작은 불씨가 큰 숲을 태우지 않습니까? 9 우리는 이 혀로 하나님을 찬송도 하고 그분의 모습으로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도 합니다.10 한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저는 말하는 자리에 서기를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후회됩니다. 잘 정리되지 않았던 말을 너무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내가 했던 말들을 오늘의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봅니다. '그동안 나는 가르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내 말은 내 삶과 일치했는지?' '말의 일관성은 있었는지?' '내 말은 찬송의 말이었는지 저주의 말이었는지?' 사무실 근처 식당 벽에 게시된 글을 소개합니다. (말 한마디) 부주의한 말 한마디가 싸움의 불씨가 되고/ 잔인한 말 한마디가 삶을 파괴합니다./ 쓰디쓴 말 한마디가 증오의 씨를 뿌리고/ 무례한 말 한마디가 사랑의 불을 끕니다./ 은혜로운 말 한마디가 길을 평탄케 하고/ 즐거운 말 한마디가 하루를 빛나게 합니다./ 때에 맞는 말 한마디가 축복을 줍니다.

설교 제목을 "혀에 재갈 물리기"로 정한 것은 자기반성으로 시작하기 위함입니다. 생각해 보면 제 자신 목사가 된 후부터, 선생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르치려고 했고, 계몽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지혜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복종하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가르치려는 생각이 앞서 성경을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젊은 시절 문 익환 목사님을 만나 뵌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출옥한 후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우리가 주최하는 강연회의 강사로 오셨습니다. 그 때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 생각납니다. "김 목사, 감옥에서 성경을 읽으니까 성경 말씀이 내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어. 설교를 해야 된다는 부담이 없었기 때문일 거야."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분은 구약학자입니다. 성경을 누구보다 더 매우 많이 읽었을 것이고 또 가르쳤던 분입니다. 그 분 조차도 설교의 부담 없이(즉 가르치려는 의도 없이) 읽는 것과 가르치기 위해 읽는 성경의 의미가 다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문익환 목사님의 말씀을 지혜의 말씀으로 여기고 삼가 조심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큽니다.

그동안 했던 제 설교노트를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보면 제 설교문의 대부분 성경말씀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 노력 보다는 설교를 위해 성경말씀을 사용했던 흔적이 많았습니다. 즉 성경 말씀에 내 자신을 내려놓고 그 말씀의 의미를 깊이 깨닫기 위해 연구하고 묵상했던 것 보다 내 생각과 주장을 위해 성경의 권위를 이용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가르치려는 생각이 앞서다보니 말의 실수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좀 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했습니다. 그러니 설교는 설교로 끝나게 되고 설교 말씀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내가 했던 무수한 설교는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혹자들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복잡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구약의 본문 잠언(지혜의 호소)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0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그 소리를 높이며, 21시끄러운 길머리에서 외치며, 성문 어귀와 성 안에서 말을 전한다. 23 너희는 내 책망을 듣고 돌아 서거라. 보아라, 내가 내 영을 너희에게 보여 주고, 내 말을 깨닫게 해 주겠다

지혜는 길가는 사람들을 불러 세우고 광장에서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높이고 성 어귀나 성문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가르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부르고 외치며 전할 뿐 아니라, 깨달을 수 있도록 영을 보여주겠다고 합니다.

22 "어수룩한 사람들아, 언제까지 어수룩한 것을 좋아하려느냐? 비웃는 사람들아, 언제까지 비웃기를 즐기려느냐? 미련한 사람들아, 언제까지 지식을 미워하려느냐? 24 그러나 너희는, 내가 불러도 들으려고 하지 않고, 내가 손을 내밀어도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29 이것은 너희가 깨닫기를 싫어하며, 주님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않으며, 30 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내 모든 책망을 업신여긴 탓이다.

지혜의 말씀이 없어서가 아니라, 들을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어리석은 자로, 조롱하는 자로, 미련한 자가 되어 그 말씀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비추어 보니까 저도 어리석은 자였고, 시니컬하여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사람이었고, 미련한 자였다고 반성해 봅니다.

오늘 우리는 말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각종 오락물이나 TV 시사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어떻게 저렇게 말을 잘 하나'하고 감탄하기도 합니다. '말 못해서 죽은 귀신 없다.'라는 옛말이 생각났습니다. 말을 매끄럽게 잘 하지 못하는 저로서는 그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보는 것을 보면 부럽기조차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말은 절실하지 않는 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의 말은 논리적으로 머리까지는 다가왔지만, 우리 마음에 까지는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의 머리와 가슴까지의 거리는 채 30센티미터가 안되지만, 머리에서 가슴까지 옮기는 데에는 경우에 따라 한 평생이 걸리기도 합니다.' 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스위스의 융 플라우에 올라갔던 적이 있습니다. 자연의 신비를 느꼈습니다. 나도 모르게 흥얼거렸습니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한 외국인 부부가 나를 쳐다보면서 내 노래가 다 끝나자 '한 번 더 불러 줄 수 없냐?'고 정중하게 요청했습니다.

그들의 요청에 약간은 당황하였지만, 저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드려 찬송을 조금 더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찬송을 들은 그들은 매우 행복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들과 저는 모르는 사이였습니다. 저는 한국말로 찬송했고 그들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랫말이었습니다. 단지 저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에 취해 감격하여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 찬송을 들은 그들이 감동으로 화답했습니다. 그 때 저는 제 인생에 최고의 설교를 했던 것 같습니다. 설교는 가르치고, 계몽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은혜를 진솔하게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인 시편(19)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에서 설교는 인간의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지혜)를 받아드리는 것이라고 읽습니다.

19 하늘이 하나님의/영광을 선포하고/창공이 그의 놀라운 솜씨를/나타내는구나!

2 낮이 이 사실을 낮에게 말하고/밤도 이 사실을 밤에게 전하니

3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4 그 전하는 소리가 온 세상에 퍼지고/

그 전하는 말이 땅 끝까지 미쳤다. 하나님이 해를 위해/하늘에 집을 지으셨구나.

8 여호와의 교훈은 정확하여/마음을 기쁘게 하고/여호와의 계명은 순수하여/눈을 밝 게 한다.

오늘의 복음서(막8:27-38)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의 장면를 보여 줍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다른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은 베드로를 극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께 항의(rebuke)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한 자기 이해와 예수님의 말씀이 충돌하니, 자기 생각을 고집하며 예수님을 비난했다고 생각됩니다. 즉시 예수님은 베드로를 나무라면서 사탄이라고 질책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질책하셨던 것은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 베드로처럼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항의했듯이 예수님이 세상 권력에 의해 무력하게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용인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이 세상의 일도 잘되게 하고 사후에도 잘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고백은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다른 데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최고의 제자가 된 것은 그의 고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열어 지혜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야고보서에 나오는 공동체에서도 지혜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전하기 위해 선생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 공동체를 갈등의 와중에 빠지게 했던 것 같습니다.

설교는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게 아니라 나에게 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설득하려는 게 아니고, 자기가 받은 은혜를 나누는 것이고, 설교는 말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약1:.26-27) 누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혀를 제어하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3:13,15-18)"여러분 가운데 지혜 있고 이해력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러한 사람은 착한 행동을 하여 그의 행실을 나타내십시오. 그 일은 지혜에서 오는 온유함으로 행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위에서 오는 지혜는 우선 순결하고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정의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평화를 위해 씨를 뿌려 거두는 열매입니다"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81038#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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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주 설교] 내 혀의 재갈 물리기
성서일과: 시19, 잠1:20~33, 약3:1~12, 막8:27~38
기독일보 편집부 기자(press@c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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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장, 前 NCCK 총무 김영주 목사
오늘의 본문 말씀은 설교를 앞둔 목사에게는 무척 부담되고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특히 야고보서의 말씀은 더 그렇습니다.

본문은 '혀를 조심하라'의 제목으로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1. 형제 여러분, 너도 나도 선생이 되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2 우리는 다 실수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만일 사람이 말에 실수가 없으면 그는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첫 마디부터 부담스럽습니다. 인내를 가지고 읽어봅니다.

5 이와 같이 사람의 혀도 몸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지만 [a]그것을 잘못 사용하면 큰 손해를 가져옵니다. 작은 불씨가 큰 숲을 태우지 않습니까? 9 우리는 이 혀로 하나님을 찬송도 하고 그분의 모습으로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도 합니다.10 한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저는 말하는 자리에 서기를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후회됩니다. 잘 정리되지 않았던 말을 너무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내가 했던 말들을 오늘의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봅니다. '그동안 나는 가르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내 말은 내 삶과 일치했는지?' '말의 일관성은 있었는지?' '내 말은 찬송의 말이었는지 저주의 말이었는지?' 사무실 근처 식당 벽에 게시된 글을 소개합니다. (말 한마디) 부주의한 말 한마디가 싸움의 불씨가 되고/ 잔인한 말 한마디가 삶을 파괴합니다./ 쓰디쓴 말 한마디가 증오의 씨를 뿌리고/ 무례한 말 한마디가 사랑의 불을 끕니다./ 은혜로운 말 한마디가 길을 평탄케 하고/ 즐거운 말 한마디가 하루를 빛나게 합니다./ 때에 맞는 말 한마디가 축복을 줍니다.

설교 제목을 "혀에 재갈 물리기"로 정한 것은 자기반성으로 시작하기 위함입니다. 생각해 보면 제 자신 목사가 된 후부터, 선생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르치려고 했고, 계몽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지혜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복종하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가르치려는 생각이 앞서 성경을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젊은 시절 문 익환 목사님을 만나 뵌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출옥한 후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우리가 주최하는 강연회의 강사로 오셨습니다. 그 때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 생각납니다. "김 목사, 감옥에서 성경을 읽으니까 성경 말씀이 내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어. 설교를 해야 된다는 부담이 없었기 때문일 거야."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분은 구약학자입니다. 성경을 누구보다 더 매우 많이 읽었을 것이고 또 가르쳤던 분입니다. 그 분 조차도 설교의 부담 없이(즉 가르치려는 의도 없이) 읽는 것과 가르치기 위해 읽는 성경의 의미가 다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문익환 목사님의 말씀을 지혜의 말씀으로 여기고 삼가 조심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큽니다.

그동안 했던 제 설교노트를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보면 제 설교문의 대부분 성경말씀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 노력 보다는 설교를 위해 성경말씀을 사용했던 흔적이 많았습니다. 즉 성경 말씀에 내 자신을 내려놓고 그 말씀의 의미를 깊이 깨닫기 위해 연구하고 묵상했던 것 보다 내 생각과 주장을 위해 성경의 권위를 이용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가르치려는 생각이 앞서다보니 말의 실수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좀 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했습니다. 그러니 설교는 설교로 끝나게 되고 설교 말씀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내가 했던 무수한 설교는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혹자들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복잡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구약의 본문 잠언(지혜의 호소)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0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그 소리를 높이며, 21시끄러운 길머리에서 외치며, 성문 어귀와 성 안에서 말을 전한다. 23 너희는 내 책망을 듣고 돌아 서거라. 보아라, 내가 내 영을 너희에게 보여 주고, 내 말을 깨닫게 해 주겠다

지혜는 길가는 사람들을 불러 세우고 광장에서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높이고 성 어귀나 성문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가르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부르고 외치며 전할 뿐 아니라, 깨달을 수 있도록 영을 보여주겠다고 합니다.

22 "어수룩한 사람들아, 언제까지 어수룩한 것을 좋아하려느냐? 비웃는 사람들아, 언제까지 비웃기를 즐기려느냐? 미련한 사람들아, 언제까지 지식을 미워하려느냐? 24 그러나 너희는, 내가 불러도 들으려고 하지 않고, 내가 손을 내밀어도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29 이것은 너희가 깨닫기를 싫어하며, 주님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않으며, 30 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내 모든 책망을 업신여긴 탓이다.

지혜의 말씀이 없어서가 아니라, 들을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어리석은 자로, 조롱하는 자로, 미련한 자가 되어 그 말씀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비추어 보니까 저도 어리석은 자였고, 시니컬하여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사람이었고, 미련한 자였다고 반성해 봅니다.

오늘 우리는 말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각종 오락물이나 TV 시사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어떻게 저렇게 말을 잘 하나'하고 감탄하기도 합니다. '말 못해서 죽은 귀신 없다.'라는 옛말이 생각났습니다. 말을 매끄럽게 잘 하지 못하는 저로서는 그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보는 것을 보면 부럽기조차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말은 절실하지 않는 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의 말은 논리적으로 머리까지는 다가왔지만, 우리 마음에 까지는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의 머리와 가슴까지의 거리는 채 30센티미터가 안되지만, 머리에서 가슴까지 옮기는 데에는 경우에 따라 한 평생이 걸리기도 합니다.' 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스위스의 융 플라우에 올라갔던 적이 있습니다. 자연의 신비를 느꼈습니다. 나도 모르게 흥얼거렸습니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한 외국인 부부가 나를 쳐다보면서 내 노래가 다 끝나자 '한 번 더 불러 줄 수 없냐?'고 정중하게 요청했습니다.

그들의 요청에 약간은 당황하였지만, 저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드려 찬송을 조금 더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찬송을 들은 그들은 매우 행복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들과 저는 모르는 사이였습니다. 저는 한국말로 찬송했고 그들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랫말이었습니다. 단지 저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에 취해 감격하여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 찬송을 들은 그들이 감동으로 화답했습니다. 그 때 저는 제 인생에 최고의 설교를 했던 것 같습니다. 설교는 가르치고, 계몽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은혜를 진솔하게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인 시편(19)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에서 설교는 인간의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지혜)를 받아드리는 것이라고 읽습니다.

19 하늘이 하나님의/영광을 선포하고/창공이 그의 놀라운 솜씨를/나타내는구나!

2 낮이 이 사실을 낮에게 말하고/밤도 이 사실을 밤에게 전하니

3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4 그 전하는 소리가 온 세상에 퍼지고/

그 전하는 말이 땅 끝까지 미쳤다. 하나님이 해를 위해/하늘에 집을 지으셨구나.

8 여호와의 교훈은 정확하여/마음을 기쁘게 하고/여호와의 계명은 순수하여/눈을 밝 게 한다.

오늘의 복음서(막8:27-38)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의 장면를 보여 줍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다른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은 베드로를 극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께 항의(rebuke)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한 자기 이해와 예수님의 말씀이 충돌하니, 자기 생각을 고집하며 예수님을 비난했다고 생각됩니다. 즉시 예수님은 베드로를 나무라면서 사탄이라고 질책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질책하셨던 것은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 베드로처럼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항의했듯이 예수님이 세상 권력에 의해 무력하게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용인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이 세상의 일도 잘되게 하고 사후에도 잘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고백은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다른 데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최고의 제자가 된 것은 그의 고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열어 지혜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야고보서에 나오는 공동체에서도 지혜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전하기 위해 선생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 공동체를 갈등의 와중에 빠지게 했던 것 같습니다.

설교는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게 아니라 나에게 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설득하려는 게 아니고, 자기가 받은 은혜를 나누는 것이고, 설교는 말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약1:.26-27) 누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혀를 제어하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3:13,15-18)"여러분 가운데 지혜 있고 이해력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러한 사람은 착한 행동을 하여 그의 행실을 나타내십시오. 그 일은 지혜에서 오는 온유함으로 행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위에서 오는 지혜는 우선 순결하고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정의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평화를 위해 씨를 뿌려 거두는 열매입니다"

* 설교는 지난 2018년 9월 18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81038#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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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장, NCCK 전 총무 김영주 목사 ©기독일보DB
주현절의 마지막 주일이기도 하고 예수의 변모를 기념하는 주일 아침입니다.

지난 주간 매우 의미 있는 한 주간을 보냈습니다. 3·1운동100주년을 맞이하여 100년 전 일제의 폭압에 맞서 독립만세를 외친 3·1운동의 선열들의 헌신적인 노력들을 기리며 그 의미를 되새겨보는 여러 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제가 섬기고 있는 기사연도 한국교회의 여러 단체들과 함께 「31운동의 의미와 동북아 평화를 위한 한반도 미래구상」이라는 주제로 「3·1운동 100주년기념 국제 컨퍼런스」를 열었습니다. 저로서는 젊은 시절 매우 감동 있게 읽었던 「희망의 신학」의 저자인 몰트만 박사를 강사로 모실 수 있게 되어 감사했습니다. 호텔에서 자주 마주치며 가벼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 또한 저의 작은 즐거움이었습니다. 2박 3일의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92세 된 노신학자를 대하면서 문득 ‘이렇게 한 시대는 흘러가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자신의 신학적 소양이 부족한 탓인지 몰라도, 우리 신학은 더욱 정진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한국의 신학은 정체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과거를 회상하며 과거의 신학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그런 느낌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의 모습에서도 들었습니다. 과거의 위대함에 대해서는 모두들 합의하지만, 3·1절이 백년을 지난 지금, 그 역사의 의미를 오늘에 되살려 오늘의 우리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며 그리고 내일의 우리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자 노력하는 흔적이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도 못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한국교회조차 3·1 운동 백주년을 기념하는 예배와 각종행사를 상당부분 규모 있게 진행했지만, 오늘의 교회현실에 대한 냉혹한 반성과 미래를 세우고자하는 치열함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단지 교회의 지난 헌신을 내세우기에 급급했던 것 같아 보였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만약 내가 그때 살았다면 나도 목숨을 건 만세 행진에 기꺼이 참여하였을까? 사족이지만 기대를 모았던 하노이 북미회담이 합의 없이 끝나게 되어 아쉬운 마음은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매우 의미 있는 한 주간을 보냈지만, 위와 같은 아쉬움을 안고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을 봅니다.

구약의 본문은 시내 산에서 40일 금식 후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아들고 내려온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빛나 이스라엘 공동체가 두려워했으며,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한 후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는 말씀입니다. 서신서는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모세의 수건에 대한 해석을 통해 복음의 의미를 설명한 것이고,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변화 산에서 변모하시었고, 그 변모에 대한 세 제자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고, 그를 그리스도로 맞이하는 제자들의 진용도 갖추어가는 시점에 예수님은 세 제자와 함께 변화 산에 오르셔서 당신의 현재와 미래를 보여 주셨습니다.

저는 오늘의 본문 중에서 바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말씀을 해보고자 합니다.

바울은 추천장을 들고 다니면서 사도임을 내세우는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사도됨은 추천장에 쓰여 있는 글이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확신을 피력하면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사도직을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새 언약이란 하나님과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옛 언약으로(예레미야 31:31) 복음의 시대에 예수를 통해 맺은 언약이라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옛 언약을 받은 모세의 직분에 대해서도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있었던 것처럼 영광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광채는 곧 없어질 것이어서 모세가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것은 곧 없어질 광채를 가리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온 후로는 율법은 그 종말을 고하였다.(롬10:4)’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즉 옛 언약은 없어질 것으로서 새 언약은 사라지지 않고 길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고린도 교회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그 마음에 수건을 덮어 쓰고 있어 복음의 의미를 잘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직까지 옛 언약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처럼 과거의 삶에 매여 과거의 화려했던 모세의 영광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물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예수의 변모를 본 제자들의 반응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눅 9: 33)

오늘 본문 말씀은 저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만날 때 수건을 벗었는데,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벗어 버려야 할 나의 수건은 무엇인가?

바울은 율법의 시대에는 수건이 필요했지만, 복음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더 이상 수건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셨는데 나는 아직도 어떤 수건을 쓰고 있지나 않은지?

나는 예수를 믿고 그 분을 만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는데, 그 영광의 예수님께 세 제자들처럼 엉뚱한 제안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이 아침 제 자신을 살펴봅니다. 언제부터인지 지난 삶의 공과를 열심히 따져보는데 상당부분 집중하고 있으며, 오늘의 현실에 대해서는 약간은 관조하며 치열함 없이 살고 있으며, 내일을 위해 꿈꾸는 것조차 부담스러워 하고 있는 제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저는 그동안 배웠던 알량한 지식, 짧은 경험, 그리고 과거의 경력이나 지위라는 수건을 쓰고 복음을 대하고 있으며 종이에 쓴 증서가 저의 목사 됨을 증명하는 것이라 자위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을 묵상하면서 드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화려한 과거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것에 머문다면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라는 바울의 지적처럼 현실을 외면하며 미래를 설계하지 못하는 과거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과거가 하나님을 만나 얼굴의 광채가 난 모세처럼 위대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새 언약의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얼굴에 쓰고 있는 수건을 벗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수건을 쓰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으며 수건을 쓰고서는 예수의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라는 말씀의 의미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이제 그 수건을 벗어던지고 예수에게 나아가야합니다. 교만의 수건, 전통의 수건, 조직의 수건, 지식의 수건, 경험의 수건 등 벗어버려야 할 수건들은 도처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를 만난 감격으로 한국교회와 우리 신앙인들의 얼굴에 광채가 빛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다”(고후 3:18)

교부들은 사람이 하나님과 닮은 상태에 이르는 것을 ‘신화’라는 개념으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하나님을 닮아가도록 지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본래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이 발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화’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최종 목표로써,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신화’에 이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신화’는 현재의 삶에서부터 시작되고 발전하여 미래의 삶에서 완성됩니다. 그동안 우리 기독교인들은 물론 한국교회는 너무 쉽게 ‘신화’의 길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과 한국교회는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2:20)라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82694#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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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주 설교] “신비를 가슴에 안고”
성서일과: 사 60:1-6, 엡 3:1-12, 마2:1-12
기독일보 편집부 기자(press@c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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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장, NCCK 전 총무 김영주 목사 ©기독일보DB
한 해를 보냈습니다. 시간에 대한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괴물이 바로 '시간'이다. 시간은 쏜살같이 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무방비 상태로 미래에 진입한다. 그 결과 우리에게 남는 것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회상뿐이며,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주는 것도 바로 시간의 흔적이다. 과거는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회상해 보면 보람된 세월이었기도 하지만 또한 아쉬운 세월이었기도 합니다. 지난 한 해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은 갈등과 분쟁으로 전쟁 직전까지 위협이 고조되던 한반도에 화해와 평화의 문을 열어놓게 되어 우리 모두에게 큰 희망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가진 자들의 갑 질, 여성에 대한 혐오, 사회적 약자들을 비롯한 에멘 난민에 대한 혐오 등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의 천박함을 보는 것 같아 매우 씁쓸한 일이었습니다. 기름 저장 탱크의 화재를 비롯한 크고 작은 화재, 온수관 파열, 음주 운전 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버린 사건들, 특히 팬션의 가스관 배출로 인해 젊은이들의 죽음, 서해발전의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은 우리사회의 안전 불감증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하게 하였습니다.

우리 사회 뿐 아니라 우리 가정에도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기쁜 일들과 슬픈 일들, 그리고 보람된 일들과 후회스러운 일들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날을 회상해 보는 것은 앞으로 우리에게 열릴 새날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기 위함입니다.

새 해 첫 머리에 서서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고 어떻게 한 해를 시작할까 생각해 봅니다.(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제와 오늘이 그렇게 다르지 않는데 우리는 ‘왜 어제와 오늘에 경계선을 그어 지난날과 오늘을 구분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 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흘러가는 양적인 시간 즉 크로노스(chronos)가 아니라, 영원한 질적인 시간인 '카이로스(kairos)'를 살아가야 할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늘을 붙잡아야 할 것입니다.) 카이로스 시간은 질적인 시간,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지만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시간이며, '결정적 순간'입니다. ‘오늘’ 아니 ‘지금’은 과거와 미래를 잇는 지극히 짧은 시간이지만 카이로스적인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력으로도 오늘은 주현절입니다. (에피파니(ephiphany)는 '신이 자신을 찾는 이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에피파니의 순간에 우리는 자신이 가야할 길과 해야 할 일을 찾아내야 합니다.

즉 우리들에게 오신 주님을 만나서 그 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구약 말씀인 이사야서(60:1-6)는 하나님이 오실 때 이스라엘이 받을 영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일어나서 태양처럼 빛나라.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비치고 있다. 그때 너는 이것을 보고 희색이 만면하여, 너무 기쁜 나머지 흥분하여 가슴이 두근거릴 것이다.

복음서(마태)는 동방박사들이 아기예수를 만나기 위해 온 여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2:10-11) 그 별을 보고 박사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 아기가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에게 경배한 후 보물함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드렸다.

서신서(에베소서3:7-11)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바울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계시로 나에게 그분의 신비로운 계획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 가운데서 가장 보잘 것 없는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풍성하신 기쁜 소식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게 하시고 또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오래 전부터 숨겨졌던 신비로운 계획이 어떤 것인가를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오늘의 본문 말씀을 이렇게 읽습니다.

이사야서(구약)은 하나님의 현현(도래)이 가져다 줄 미래를 예언한 것이라면, 복음서(마태)는 하나님의 현현을 찾아 나서서 마침내 그 분을 만난 기쁨으로 온 몸과 마음을 드려 승복을 표현한 것이고, 서신서(에베소서)는 하나님의 현현을 통해 사명 받은 사람들의 삶의 자세와 노력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현현에의 소망을 가지고 그 현현을 경험하는 사람들이고 그 현현 속에서 그분의 신비로운 계획을 수행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저는 우리 공동체 식구들에게 이 아침 예배가 많은 예배의 하나가 아니라, 주님을 만나는 영광을 경험하고 그분의 크고 놀라운 뜻을 깨닫고 그렇게 살겠다고 결단하는 거룩한 시간(카이로스의 시간)이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다시 성경을 읽어봅니다.

그때 너는 이것을 보고 희색이 만면하여, 너무 기쁜 나머지 흥분하여 가슴이 두근거릴 것이다.

그 별을 보고 박사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 아기가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에게 경배한 후 보물함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드렸다.

또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오래 전부터 숨겨졌던 신비로운 계획이 어떤 것인가를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내 자신에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을 듣고 희색이 만면하여 너무 기쁜 나머지 흥분하여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는지, 기나긴 여정의 마지막 지점에서 동방박사들처럼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지, 그리고 바울선생처럼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 가운데서 가장 보잘 것 없는 나에게 이 은혜 즉 계시로 나에게 그분의 신비로운 계획을 알려 주셨습니다.”라고 묻고 있습니다.

이 아침 우리에게 오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전적으로 복종을 맹세하고 신비로운 계획을 가슴에 간직해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어떻게 예수를 만날 수 있겠습니까?)

별을 따라 길을 나선 동방박사들은 헤롯의 궁전으로 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고 있습니다. 왕을 비롯한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이 모여 예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나신다는 해석을 듣습니다.

동방박사들의 두 가지 실수는 예수의 탄생을 유대왕의 탄생으로 이해하였고, 그것을 헤롯과 학자들과 종교지도자들에게 물었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예수는 애굽에서 난민 생활을 하게 되었고,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의 어린아이들의 학살로 이어졌습니다.

오늘 우리도 똑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는 한 가난한 목수와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진 한 여인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왕은커녕 권력의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나사렛의 한 시골뜨기로 대접받고 살아가신 분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를 권력의 최 정점에 선 왕으로, 우리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시는 신출 기묘한 능력을 가진 분으로 포장하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는 권력을 가진 자들의 일탈을 보고 있습니다. 권력자 주변의 사람들의 오만은 우리 모두들 불안하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왕으로 이해하는 오늘의 교회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낮은 자리에 앉기보다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섬기기보다는 다스리기를 좋아하고 듣기보다는 가르치기를 즐겨하는 것입니다. 소통하기보다는 일방적이며 이해를 구하기보다는 독선적입니다.

예수를 왕으로 이해하는 한, 교회는 자기 겸손을 잊어버리고 오만해지기 마련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아도 이러한 점은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 제자의 우두머리를 황제라고 부르고, 교황은 하나님의 성전(베드로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면별부를 팔았고, 이교도들을 정복한다는 이유로 십자군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신앙으로 무장한 서구는 동아시아를 식민지화하는 데 거침이 없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헤롯 왕과 그 무리들에게 예수의 탄생지를 묻지 말아야 했습니다. 아마 동방박사들은 이미 율법과 정치 경제 사회에 전반에 걸쳐 많은 학문과 지식을 잘 갖추고 있는 사람들의 도움을 입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식은 하늘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의 학문은 권력과 권위 유지를 위해 사용하는 도구였으며, 권력 유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있는 무리들이었습니다.

하늘의 별을 따라 나선 동방박사들은 끝까지 별을 따라 갔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예수 믿는다는 것은?)

최근 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는 서울대학교 물리대학을 다니다가 전태일의 죽음을 보고, 학교를 자퇴하고 한동안 노동운동에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예수, 공자, 마르크스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모처럼 만났던지라, 과거에 우리가 만났던 인연 그리고 그 이후 그의 생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한 때 마르크스의 제자가 되어 혁명을 꿈꾸며 그 혁명의 길을 찾기 위해 인문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인문학은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라면, 인간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언어를 공부했고, 시간 속에서 살아갔던 인간과 사회 공동체를 알기위해 역사를 공부했으며, 인간 존재의 근본에 대한 지혜를 얻기 위해 철학을 공부했지만, 아직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짐작하기에는 그는 인문학을 넘어선 신의 영역을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와 장시간 대화를 나누면서 바울을 생각했습니다. 이미 익히 아는 대로 바울은 많은 공부가 된 사람이었고 또 열정도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4 하기야, 나는 육체에도 신뢰를 둘 만합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육체에 신뢰를 둘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합니다. 5 나는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6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하였고,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습니다.) 바울을 그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다메섹을 향해 가다가 예수를 만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을 받고 내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오래 전에 숨겨졌던 신비로운 계획 (즉 가장 보잘것없는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풍성하신 기쁜 소식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게 하시고 또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오래 전부터 숨겨졌던 신비로운 계획이 어떤 것인가를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알리기 위해서입니다.)을 깨닫고 예수의 제자가 되어 복음의 전파자로 나섭니다.

바울은 자신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나에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은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오물로 여깁니다.

그 친구는 인문학에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당위와 방법을 찾기 위해 씨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를 만났고 그 예수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을 찾았고, 그것은 곧 하나님의 신비한 계획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만나기는 했지만, 예수를 온 몸과 마음으로 영접하고, 그 분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결단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찬송가(302)의 가사는 저 자신을 비롯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2절.
왜 너 인생은 언제나 거기서 저 큰 바다 물결보고
그 밑 모르는 깊은 바다 속을 한번 헤아려 안보나

3절.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보고 마음 약하여 못가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아는 것에서 머물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동방박사들이 예수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듯이 나를 바치는 것이고 바울처럼 내가 생각했던 귀중한 것을 다 배설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아침에 다시 나 자신에게 묻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신비한 계획을 깨닫고 그 것을 위해 나 자신을 바치고 있는가.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게 여긴다고 고백하며, 그의 현재와 미래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인정받으려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오늘 이 아침 에피파니의 첫 주일에 저는 예수를 만나 그분에게 순종을 맹세하고 그 분이 주신 오롯한 신비(비밀)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하나님의 신비를 간직한 바울은 큰 열정을 가지고 복음 사업에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열정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에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음"입니다. 영어로는 passion입니다. 이 passion은 고대 그리스어 '파세인(pathein)에서 나왔는데, 기본적인 의미는 고통이고,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해할 수 없고, 낯설고, 어렵고, 불편한 현실을 십자가를 짊어지듯 나의 어깨 위에 매는 행위"입니다.( 열정은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대문자로 Passion하면, 그것은 "예수의 수난"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의 열정적인 삶의 과정에서 당한 고초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고후 1:8-9)

신비를 간직한 바울에게는 그 어떤 고난과 고초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신비를 간직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에 대한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행복한 마음의 상태는 '흔들림 없는 고요한 마음'이다. 그러니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외부의 환경이 나의 행복에 영향을 끼칠 수는 없다.

바울은 자신의 고유한 임무 즉 하나님의 신비한 계획을 위해 ‘(갈라디아서6:17) 이제부터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내 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시 제게 묻습니다.

내 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낙인 찍혀 있는가. 그래서 행복한가.

* 설교는 2019년 1월 6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 전문입니다.

[박만규 설교] "기뻐하시는 하나님"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81979#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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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주 설교] “신비를 가슴에 안고”
성서일과: 사 60:1-6, 엡 3:1-12, 마2:1-12
기독일보 편집부 기자(press@c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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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장, NCCK 전 총무 김영주 목사 ©기독일보DB
한 해를 보냈습니다. 시간에 대한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괴물이 바로 '시간'이다. 시간은 쏜살같이 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무방비 상태로 미래에 진입한다. 그 결과 우리에게 남는 것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회상뿐이며,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주는 것도 바로 시간의 흔적이다. 과거는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회상해 보면 보람된 세월이었기도 하지만 또한 아쉬운 세월이었기도 합니다. 지난 한 해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은 갈등과 분쟁으로 전쟁 직전까지 위협이 고조되던 한반도에 화해와 평화의 문을 열어놓게 되어 우리 모두에게 큰 희망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가진 자들의 갑 질, 여성에 대한 혐오, 사회적 약자들을 비롯한 에멘 난민에 대한 혐오 등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의 천박함을 보는 것 같아 매우 씁쓸한 일이었습니다. 기름 저장 탱크의 화재를 비롯한 크고 작은 화재, 온수관 파열, 음주 운전 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버린 사건들, 특히 팬션의 가스관 배출로 인해 젊은이들의 죽음, 서해발전의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은 우리사회의 안전 불감증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하게 하였습니다.

우리 사회 뿐 아니라 우리 가정에도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기쁜 일들과 슬픈 일들, 그리고 보람된 일들과 후회스러운 일들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날을 회상해 보는 것은 앞으로 우리에게 열릴 새날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기 위함입니다.

새 해 첫 머리에 서서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고 어떻게 한 해를 시작할까 생각해 봅니다.(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제와 오늘이 그렇게 다르지 않는데 우리는 ‘왜 어제와 오늘에 경계선을 그어 지난날과 오늘을 구분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 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흘러가는 양적인 시간 즉 크로노스(chronos)가 아니라, 영원한 질적인 시간인 '카이로스(kairos)'를 살아가야 할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늘을 붙잡아야 할 것입니다.) 카이로스 시간은 질적인 시간,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지만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시간이며, '결정적 순간'입니다. ‘오늘’ 아니 ‘지금’은 과거와 미래를 잇는 지극히 짧은 시간이지만 카이로스적인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력으로도 오늘은 주현절입니다. (에피파니(ephiphany)는 '신이 자신을 찾는 이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에피파니의 순간에 우리는 자신이 가야할 길과 해야 할 일을 찾아내야 합니다.

즉 우리들에게 오신 주님을 만나서 그 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구약 말씀인 이사야서(60:1-6)는 하나님이 오실 때 이스라엘이 받을 영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일어나서 태양처럼 빛나라.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비치고 있다. 그때 너는 이것을 보고 희색이 만면하여, 너무 기쁜 나머지 흥분하여 가슴이 두근거릴 것이다.

복음서(마태)는 동방박사들이 아기예수를 만나기 위해 온 여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2:10-11) 그 별을 보고 박사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 아기가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에게 경배한 후 보물함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드렸다.

서신서(에베소서3:7-11)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바울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계시로 나에게 그분의 신비로운 계획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 가운데서 가장 보잘 것 없는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풍성하신 기쁜 소식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게 하시고 또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오래 전부터 숨겨졌던 신비로운 계획이 어떤 것인가를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오늘의 본문 말씀을 이렇게 읽습니다.

이사야서(구약)은 하나님의 현현(도래)이 가져다 줄 미래를 예언한 것이라면, 복음서(마태)는 하나님의 현현을 찾아 나서서 마침내 그 분을 만난 기쁨으로 온 몸과 마음을 드려 승복을 표현한 것이고, 서신서(에베소서)는 하나님의 현현을 통해 사명 받은 사람들의 삶의 자세와 노력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현현에의 소망을 가지고 그 현현을 경험하는 사람들이고 그 현현 속에서 그분의 신비로운 계획을 수행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저는 우리 공동체 식구들에게 이 아침 예배가 많은 예배의 하나가 아니라, 주님을 만나는 영광을 경험하고 그분의 크고 놀라운 뜻을 깨닫고 그렇게 살겠다고 결단하는 거룩한 시간(카이로스의 시간)이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다시 성경을 읽어봅니다.

그때 너는 이것을 보고 희색이 만면하여, 너무 기쁜 나머지 흥분하여 가슴이 두근거릴 것이다.

그 별을 보고 박사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 아기가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에게 경배한 후 보물함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드렸다.

또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오래 전부터 숨겨졌던 신비로운 계획이 어떤 것인가를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내 자신에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을 듣고 희색이 만면하여 너무 기쁜 나머지 흥분하여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는지, 기나긴 여정의 마지막 지점에서 동방박사들처럼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지, 그리고 바울선생처럼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 가운데서 가장 보잘 것 없는 나에게 이 은혜 즉 계시로 나에게 그분의 신비로운 계획을 알려 주셨습니다.”라고 묻고 있습니다.

이 아침 우리에게 오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전적으로 복종을 맹세하고 신비로운 계획을 가슴에 간직해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어떻게 예수를 만날 수 있겠습니까?)

별을 따라 길을 나선 동방박사들은 헤롯의 궁전으로 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고 있습니다. 왕을 비롯한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이 모여 예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나신다는 해석을 듣습니다.

동방박사들의 두 가지 실수는 예수의 탄생을 유대왕의 탄생으로 이해하였고, 그것을 헤롯과 학자들과 종교지도자들에게 물었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예수는 애굽에서 난민 생활을 하게 되었고,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의 어린아이들의 학살로 이어졌습니다.

오늘 우리도 똑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는 한 가난한 목수와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진 한 여인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왕은커녕 권력의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나사렛의 한 시골뜨기로 대접받고 살아가신 분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를 권력의 최 정점에 선 왕으로, 우리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시는 신출 기묘한 능력을 가진 분으로 포장하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는 권력을 가진 자들의 일탈을 보고 있습니다. 권력자 주변의 사람들의 오만은 우리 모두들 불안하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왕으로 이해하는 오늘의 교회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낮은 자리에 앉기보다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섬기기보다는 다스리기를 좋아하고 듣기보다는 가르치기를 즐겨하는 것입니다. 소통하기보다는 일방적이며 이해를 구하기보다는 독선적입니다.

예수를 왕으로 이해하는 한, 교회는 자기 겸손을 잊어버리고 오만해지기 마련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아도 이러한 점은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 제자의 우두머리를 황제라고 부르고, 교황은 하나님의 성전(베드로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면별부를 팔았고, 이교도들을 정복한다는 이유로 십자군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신앙으로 무장한 서구는 동아시아를 식민지화하는 데 거침이 없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헤롯 왕과 그 무리들에게 예수의 탄생지를 묻지 말아야 했습니다. 아마 동방박사들은 이미 율법과 정치 경제 사회에 전반에 걸쳐 많은 학문과 지식을 잘 갖추고 있는 사람들의 도움을 입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식은 하늘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의 학문은 권력과 권위 유지를 위해 사용하는 도구였으며, 권력 유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있는 무리들이었습니다.

하늘의 별을 따라 나선 동방박사들은 끝까지 별을 따라 갔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예수 믿는다는 것은?)

최근 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는 서울대학교 물리대학을 다니다가 전태일의 죽음을 보고, 학교를 자퇴하고 한동안 노동운동에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예수, 공자, 마르크스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모처럼 만났던지라, 과거에 우리가 만났던 인연 그리고 그 이후 그의 생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한 때 마르크스의 제자가 되어 혁명을 꿈꾸며 그 혁명의 길을 찾기 위해 인문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인문학은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라면, 인간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언어를 공부했고, 시간 속에서 살아갔던 인간과 사회 공동체를 알기위해 역사를 공부했으며, 인간 존재의 근본에 대한 지혜를 얻기 위해 철학을 공부했지만, 아직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짐작하기에는 그는 인문학을 넘어선 신의 영역을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와 장시간 대화를 나누면서 바울을 생각했습니다. 이미 익히 아는 대로 바울은 많은 공부가 된 사람이었고 또 열정도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4 하기야, 나는 육체에도 신뢰를 둘 만합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육체에 신뢰를 둘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합니다. 5 나는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6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하였고,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습니다.) 바울을 그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다메섹을 향해 가다가 예수를 만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을 받고 내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오래 전에 숨겨졌던 신비로운 계획 (즉 가장 보잘것없는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풍성하신 기쁜 소식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게 하시고 또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오래 전부터 숨겨졌던 신비로운 계획이 어떤 것인가를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알리기 위해서입니다.)을 깨닫고 예수의 제자가 되어 복음의 전파자로 나섭니다.

바울은 자신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나에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은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오물로 여깁니다.

그 친구는 인문학에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당위와 방법을 찾기 위해 씨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를 만났고 그 예수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을 찾았고, 그것은 곧 하나님의 신비한 계획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만나기는 했지만, 예수를 온 몸과 마음으로 영접하고, 그 분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결단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찬송가(302)의 가사는 저 자신을 비롯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2절.
왜 너 인생은 언제나 거기서 저 큰 바다 물결보고
그 밑 모르는 깊은 바다 속을 한번 헤아려 안보나

3절.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보고 마음 약하여 못가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아는 것에서 머물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동방박사들이 예수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듯이 나를 바치는 것이고 바울처럼 내가 생각했던 귀중한 것을 다 배설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아침에 다시 나 자신에게 묻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신비한 계획을 깨닫고 그 것을 위해 나 자신을 바치고 있는가.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게 여긴다고 고백하며, 그의 현재와 미래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인정받으려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오늘 이 아침 에피파니의 첫 주일에 저는 예수를 만나 그분에게 순종을 맹세하고 그 분이 주신 오롯한 신비(비밀)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하나님의 신비를 간직한 바울은 큰 열정을 가지고 복음 사업에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열정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에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음"입니다. 영어로는 passion입니다. 이 passion은 고대 그리스어 '파세인(pathein)에서 나왔는데, 기본적인 의미는 고통이고,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해할 수 없고, 낯설고, 어렵고, 불편한 현실을 십자가를 짊어지듯 나의 어깨 위에 매는 행위"입니다.( 열정은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대문자로 Passion하면, 그것은 "예수의 수난"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의 열정적인 삶의 과정에서 당한 고초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고후 1:8-9)

신비를 간직한 바울에게는 그 어떤 고난과 고초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신비를 간직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에 대한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행복한 마음의 상태는 '흔들림 없는 고요한 마음'이다. 그러니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외부의 환경이 나의 행복에 영향을 끼칠 수는 없다.

바울은 자신의 고유한 임무 즉 하나님의 신비한 계획을 위해 ‘(갈라디아서6:17) 이제부터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내 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시 제게 묻습니다.

내 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낙인 찍혀 있는가. 그래서 행복한가.

* 설교는 2019년 1월 6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 전문입니다.

[박만규 설교] "기뻐하시는 하나님"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81979#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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