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적으로 볼 것인가 부정적으로 볼 것인가는 각자의 정치적 견해에 따라 갈라지겠지만 노태우 본인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그의 행적은 한국 보수와 진보 양 정치세력의 극우화, 극좌화가 불가능한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좌우 세력이 공존할 수 있는 민주적 공화정의 틀을 만드는데 기여했다고 평가가 가능하다.
한편에서는 12.12사태와 5.18 광주항쟁과 그에 대한 진상규명 및 법제정을 통해 우파의 극우화 가능성이 차단되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자대투쟁을 폭력적으로 진압해 좌파 주도의 폭력혁명으로의 길이 차단되었다.
이 두 가지 가능성이 차단된 조건 속에서 6.29 선언으로 들고 나온 제6공화국이 기능할 수 있었다.
좋든 싫든 민주적 공화정이라는 틀내에서 노태우는 국내적으로는 지역정당 기반의 보수양당체제를 정착시켰고, 국외적으로는 체제경쟁에서의 자신감에 기초해 북방외교, 남북기본합의서 등을 통해 제6공화국의 기본적인 외교방향 또한 정초했다.
'물태우'라는 별명에 걸맞게 그의 행적은 극좌도 극우도 아닌 민주적 공화정이라는 보수적 색채가 짙은 지역정당체제 속에서 머물도록 한계를 지어놨다.
1906년 통감부 설치부터 1987년까지의 약 80여년간 한반도를 지배한 군사적 색채가 강한 권위주의 정치의 마지막 유산이면서 동시에 이후의 민주적 공화정으로의 이행의 계기와 그 한계까지 모두 정한 대통령이었다는 점에서 평가받을 지점이 있다.
그가 만들어놓은 제6공화국의 틀을 어떻게,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바꿀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그의 죽음을 계기로 더 많이.. 나오지는 않을 것 같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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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민주화선언(六二九民主化宣言)정치사건
1987년 6월 29일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盧泰愚) 민주정의당(약칭 민정당) 대표위원이 당시 국민들의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여 발표한 시국 수습을 위한 특별선언.
정의
1987년 6월 29일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盧泰愚) 민주정의당(약칭 민정당) 대표위원이 당시 국민들의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여 발표한 시국 수습을 위한 특별선언.역사적 배경1985년 2·12총선 이후 야당과 재야세력은 간선제로 선출된 제5공화국 대통령 전두환(全斗煥)의 도덕성과 정통성의 결여, 비민주성을 비판하면서 줄기차게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였다.이에 전두환 대통령은 1987년 4월 13일 일체의 개헌논의를 금지하는 호헌조치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박종철(朴鍾哲) 학생이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정국은 대결국면으로 치달았다.6월 10일 노태우가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공식 지명되는 와중에 전국 18개 도시에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주최하는 대규모 가두집회가 열리고,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가 연일 계속되었다. 26일 전국 37개 도시에서 사상 최대 인원인 100만여 명이 밤늦게까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내용경찰력이 마비되자 정부는 한 때 위수령(衛戍令: 육군 부대가 일정한 지역에 주둔하여, 경비와 질서유지 및 군기의 감시와 군에 딸린 건축물·시설물 등을 보호할 것을 규정한 대통령령) 발동과 군 투입을 검토하였으나 온건론이 우세하여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였으며, 6·29선언이 발표되었다. 신군부는 1988년에 개최될 올림픽의 중요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위수령이 발동될 징후를 알아차렸던 미국은 한국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이를 저지시켰으며, 야당과 신속히 타협하도록 촉구하였다. 따라서 6·29선언의 생성과정에서 미국의 압력이 일정하게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8개항으로 구성된 주요 내용은 ① 여야 합의하에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 1988년 2월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하며, ② 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는 대통령 선거법의 개정, ③ 국민적 화해와 대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김대중(金大中) 씨 등의 사면복권과 극소수를 제외한 시국사범 석방, ④ 인간존엄성을 존중하기 위해 개헌안에 기본권 강화조항 보완, ⑤ 언론자유의 창달을 위해 관련제도와 관행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며 언론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 ⑥ 사회 각부문의 자치와 자율을 최대한 보장, 지방자치 및 교육자치 실시, 대학의 자율화, ⑦ 정당활동 보장, 대화와 타협의 정치풍토 조성, ⑧ 밝고 맑은 사회건설을 위해 사회정화 조치의 강구 등이다.노태우 대표는 자신의 제안이 관철되지 않으면 민정당 대통령 후보와 당 대표위원직을 포함한 모든 공직에서 사퇴한다는 단서를 첨가하였다.그러자 민정당은 6·29선언을 당의 공식입장으로 추인하였으며, 전두환 당시 대통령도 특별담화를 통해 대폭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힘으로써 6·29선언은 정부와 집권당의 공식입장이 되었고, 결국 4·13호헌조치는 철회되었다. 이 결과 10월 27일 국민투표로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고, 12월 16일 대통령선거에서 민정당 후보 노태우가 김영삼(金泳三)·김대중(金大中)·김종필(金鍾泌) 후보 등에 맞서 36.6%의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다.6·29선언은 집권층의 공개적 민주화 선언으로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것이었다. 또한 민중항쟁에 의한 급격한 변혁논리와 지배층에 의한 점진적인 개혁논리 양자의 타협이었다. 그런데 이 선언이 있고 난 뒤, 선언의 주체와 실천여부 그리고 나아가서는 이의 평가를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선언 직후에는 노태우가 독자적으로 6·29선언을 발의해 상대적으로 강경한 입장이었던 전두환을 설득하였다는 것이 정설처럼 간주되었다.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전두환이 노태우에게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라고 지시하였다는 설이 힘을 얻고 있다. 이 과정에서 노태우는 소극적이었으며 전두환은 김대중이 해금된 상태에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면 1여2야의 3파전 혹은 1여3야의 4파전에서 승산이 있다고 설득하였다는 것이다.의의와 평가종합적으로 봤을 때 미국이 한국에 대하여 민주화를 요구한 상태에서 전두환이 주도하고 노태우가 발표한 것이라는 설이 현재로서는 가장 설득력이 있다. 직선제 개헌의 산물로 새로 출범한 노태우 정부는 이 선언이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한 획기적인 조치로서 이를 시발점으로 하여 한국사회가 권위주의를 청산하고 민주주의를 실천해 나아갔다고 평가하였다.이에 반해 당시 야당과 재야세력은 전국민적 항쟁에 직면해 위기에 몰린 제5공화국의 집권세력이 내놓은 일시적인 양보조치에 불과하다고 평가하였다. 이는 집권세력에 의한 충격요법의 하나로서 정권의 재창출을 위한 마지막 선택이며 불가피한 정치전략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민주주의의 절차를 보장함으로써 국민적 저항을 약화시키고, 저항세력의 내부분열을 일으킴으로써 집권당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있다는 것이다.당시 노태우 후보는 6·29선언을 국민의 민주화 요구에 대한 ‘6·29항복선언’이라고 규정하였으므로 야당과 재야세력의 평가에 더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가 당선되었다는 결과에 주목해 일시적인 양보에 불과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역사를 너무 단기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보다 긴 안목에서 본다면 6·29선언으로 인해 군사독재를 청산하는 한 전기가 마련되었으므로 민주화 선언으로서의 의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당시 신군부의 강경 억압전략이 대중들의 요구에 밀려 민주화 타협전략으로 선회하였으므로 민주화 투쟁의 한 값진 산물로 볼 수가 있다. 또한 민주화를 향한 대결이 거리의 정치가 아닌 선거를 통한 제도권 내의 경쟁으로 변화하는 전기가 마련되었다는 것도 이 선언이 가지는 또 다른 의의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12·12,5·18 실록』(대한민국 재향군인회,1997)『체제변동의 정치사회학』(성경륭,한울출판사,1995)『제6공화국실록』 (공보처,1992)「신군부 권위주의 체제의 등장과 정치갈등」(여현덕,『한국정치동태론』,오름,1996)「6·29선언의 진상-미 정보원의 증언-」(『시사월간 윈』,1996년 3월)「전두환 역사를 위한 육성증언-6·29 전야의 고백-」(김성익,『월간조선』,1992년 1월)
4.13 호헌조치가 참아왔던 국민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그로 인해 일어난 6월 항쟁을 통해 국민의 민주화 요구가 거세지자 노태우 후보는 6월 29일 시국 수습을 위해 이 선언을 발표했다. 이렇게 해서 대통령 직선제가 한국 땅에 정착되었고, 13대 노태우 대통령부터는 국민 직선으로 뽑힌 대통령이 선출되었다.[1] 즉, 한국에서 제대로 정착된 제도적 민주주의의 첫 발걸음을 내딛게 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전두환에게 건의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 선언에서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비롯해 김대중의 사면/복권 및 극소수를 뺀 시국사범의 대거 석방, 대통령 선거법 개정, 국민 기본권 신장, 언론자유의 창달, 지방자치제 실시 등 8개항을 제시하였다. 당초 노태우는 5.18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에 대한 공식 사과도 넣으려 하였으나, 군부의 반발을 우려해 마지막에 빠졌다.[2]
노태우는 6.29 선언을 발표하면서 이를 청와대에 건의해 만일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당 대표 등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자 전두환 대통령은 선언 다음 날 특별담화에서 6.29 선언 수용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훗날 관련자들의 주장 등으로 드러난 바에 의하면, 노태우가 독단적으로 결정한 것은 아니고, 전두환이 직선제를 결심한 뒤 노태우로 하여금 이를 건의해 노태우가 수용하고 발표하게 하였다고 한다. 즉, 노태우의 직선제 당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일종의 이미지메이킹을 한 것. 김성익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의 저서 <전두환 육성증언>에서 전두환 본인은 이렇게 주장했다.
사실은 2주일 전에 노 대표와 저녁을 함께 할 때 내가 직선제를 검토해 보라고 했더니 노 대표가 펄쩍 뛰었다. 그래서 내가 「필사즉생, 필생즉사」라고 했어. 그리고 인간사회의 모든 원리가 백보 전진을 위한 일보후퇴에 있다, 지는 사람이 이기는 거라고 말해주었다. - 원 출처: <전두환 육성증언> - 김성익 저. 조선일보사. 1992. p441, 2차 출처: 중앙일보 1993년 2월 19일자 <청와대 비서실> 내용 중에서.
물론 노태우가 실제 이런 반응을 보였을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당시 보안사의 참모들 역시 정세 분석과 토론을 거듭한 끝에 직선제가 불가피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는데, 고명승 보안사령관은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보안사 참모들의 의견을 전두환에게 진언했고, 대통령은 보안사의 의견을 비중 있게 경청했다는 얘기도 있다. 고명승 본인은 다음과 같이 얘기하였다.
그해(1987년) 4월 중순 보안사의 장성 참모 등 핵심부에서는 누가 대통령 후보가 되든 직선제를 택해야 하며, 당선된 1년 후 중간평가를 통해 국민의 신임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아이디어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정치인들을 사면 복권한다면 굳이 특정인들을 제외시킬 필요가 없다는 참모들의 판단이었습니다.
또 김성익이 쓴 책에 의하면 1986년 당시 한 언론인이 작고 전에 전두환을 만날 적에 간선제가 직선제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는 주장을 했으며, 전두환이 이에 동조했다는 주장도 있었다.[3] 물론 전두환이 4.13 호헌조치를 고수하면서 6월 민주항쟁이 터진 것이기 때문에 지금 와서 보면 다 부질없는 소리긴 하지만.
어쨌든 6.29 선언으로 인해 몇달 후 대통령 5년 단임 직선제를 골자로 한 9차 개헌안이 국민투표에 붙여져 94.5%의 찬성을 받아 통과되었고, 이후 2020년대 현재까지도 한국은 소위 87년 체제라 일컬어지는 제6공화국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1. 여야 합의하에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고, 1988년 2월 새 헌법에 따른 대통령 선거를 통해 정권을 이양한다.
2. 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도록 대통령 선거법을 개정한다.
3. 김대중의 사면복권을 포함하여 시국사범 등을 석방한다.
4.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기 위해 새 헌법은 기본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수정한다.
5. 언론 관련제도와 관행을 개선, 언론자유를 최대한 보장한다.
6. 사회 각부문의 자치/자율을 최대한 보장하고, 이를 위해 지방자치 및 교육자치를 실시하고, 대학도 자율화한다.
7. 자유로운 정당 활동을 보장하고, 대화와 타협의 정치 풍토를 조성한다.
8. 밝고 맑은 사회건설을 위해 사회정화 조치를 강구한다.
이 선언을 통해 노태우 후보는 자신의 선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대통령 후보를 포함한 모든 공직을 사퇴한다고 발표했고, 이후 당시 여당이었던 민정당은 이 선언을 당의 공식입장으로 인정했다. 이어 전두환도 특별담화를 통해 6.29 선언을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하면서 이 선언은 정부의 공식 선언이 되었다. 그와 함께 4.13 호헌조치는 철폐되었다.
이렇게 발표된 6.29 선언으로 시민의 손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한 쾌거를 이룬 6월 항쟁은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으로 끝을 맺게 되었다. 6월 항쟁이 끝나고 6.29 선언에 따른 헌법 개정 작업이 착수되었고, 1987년 10월 27일 국민투표를 통해 새 헌법이 확정, 6월 항쟁과 6.29 선언으로 이어진 일련의 과정은 일단락되었다.
그동안 군부 독재국가였던 한국은 이 선언을 통해 민주주의 국가로 탈바꿈할 수 있었고,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이후에도 민주주의 지수 자료 등을 보면 한일과 함께 동아시아에서 그래도 민주주의 국가라 부를 수 있는 나라는 한국과 비슷한 민주화 과정을 거친 대만이나 공산주의 일당독재 체제를 포기하고 민주주의를 도입한 몽골 정도 뿐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5]
특히 한국의 민주주의는 4.19 혁명, 부산·마산 민주 항쟁, 5.18 민주화운동 등으로 국민들이 희생을 치르며 일궈낸 민주주의였다는 점에서 미국의 강한 압력하에 국가 차원에서 하향식 민주주의 체제를 도입한 일본과도 차이가 있다.[6] 세계적으로도 국민들이 직접적으로 희생을 치뤄서 민주주의를 쟁취해 낸 국가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7] 오히려 민주화 운동이 미완성으로 끝나 버리거나, 반대로 다른 독재체재의 연장선을 초래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서구권에서도 한국은 성공적인 민주주의 체제 전환의 한 예시로 보는 경우가 많다.
임영태가 쓴 <대한민국 50년사> 2권에서의 평가에 의하면, 6.29 선언은 신군부의 국민에 대한 '항복 선언'이지만, 실상은 신군부가 군 투입과 양보 사이에서 노태우가 주도적으로 실시한 것처럼 만든 위장 전략이자 강자의 아량이 아닌 궁지에 몰린 약자의 '마지막 저항'이라 주장하였다.[8]
노동자 출신 재야역사가 이성광은 <민중의 역사> 하권에서 6.29 선언을 미국의 '목표물 갈아치기'의 변종이라고 해석하였다. 즉, 국민들의 분노가 '간선제 대통령 선출'이란 비민주적 제도에 집중되어 그 제도만 갈아치워 국민들의 분노를 호도시켰다는 것이다.
대통령 직선제가 이루어졌는데, 차기 유력 대권주자로 거론됐던 양김이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고 서로 단독으로 출마하자 표가 나누어져 결국 13대 대통령으로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어부지리로 당선되었다. 노태우는 사실상 전두환과 한 뿌리였기 때문에, 5공 비리 청산은 늦추어 질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 제5공화국도 부정적인 시각을 보였다. 극본 전두환, 주연 노태우라는 표현을 통해 짜고치는 듯한 모습이 나왔다. 이들은 직선제를 선언한 후, 삼김씨를 다 풀어주면 서로 분열돼서 노태우에게도 충분히 승산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고 나온다. 그리고 이는 그들 입장에서는 맞는 판단이 되었다. 노태우는 득표율 36% 였음에도 분열된 삼김씨[9]가 투표율을 서로 애매하게 먹어버린 덕에 직선제로 당선된 대통령이 되었다.
이원복 교수는 <먼나라 이웃나라> 우리나라 편에서 다른 쪽으로 부정적 해석을 했는데, 6.29 선언 뒤 한국 곳곳에선 1945년 8.15 광복 후 해방 정국 상황과 동급으로 혼란이 넘쳐났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군사독재 치하에서 참아오던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 등을 외치며 시위를 하고, 사회 각계에서 군사독재 잔재와 권위주의 청산 등 불만과 분노를 쏟아내는가 하면 분단 상황 하에서 금지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평등과 정의라는 이름으로 번져 이념 대결이 심화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무조건 6.29 선언을 부정적으로 본 건 아니고, 6.29 선언 이후 한국 사회에 민주주의가 자리잡고 더 많은 자유와 권리를 누리게 되었으며, 더 이상 독재 정권을 용납하지 못하는 국민들의 저력을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 발전으로 국민들이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한민족의 비극이 6.29 선언으로 막을 내렸다고 서술하기도 했다.
실제 미국 일부 인사들은 6.29 선언 주도 사실을 숨기지 않고 자신들의 공적으로 선전하기도 했는데, 스티브 솔라즈는 게스틴 시거를 '노벨평화상 감'이라고 발언하였다.[10] 그리고 시거는 "1987년에 대선이 있을 것"이란 말을 남기고 선언 다음 날 한국을 떠났다. 물론 이때는 대선 일정은커녕 개헌조차 착수하지 못한 시점이었다.[11]
다만 과거 군부독재를 용인해줘[12], 오히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국 쯤으로 인식되던 미국이 어떻게 저럴 수 있냐며 국내 반미주의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던 당시를 생각해보면, 이는 상당히 아이러니한 부분이기도 했다.[13][14]
[1] 이전에도 이승만, 박정희는 직선제로 대통령이 된 적이 있긴 했다. 허나 알다시피 이승만은 박수칠 때 떠나지 못하고 사사오입 개헌과 3.15 부정선거 등 씁쓸한 모습을 남기며 국민들에게 쫓겨났고, 박정희는 합법적 민간정부였던 장면 내각을 5.16 쿠데타로 무너뜨린 후(제2공화국은 의원내각제였다), 관권선거란 이점 속에서도 직선제 대통령은 점점 힘들다는 감이 오자 종국엔 간선제로 국민의 주권을 뺏어버린다. (전두환 역시 간선제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연장선상에서 박정희 역시 김재규에게 암살당하고 만다.[2] 사실 노태우의 5.18에 대한 입장은 묘한데, 정권을 잡은 후의 행보는 4당 합당을 위해서인지 5.18 조사에 대한 전권도 약속하며 간이라도 내줄듯 김대중을 회유했으나,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노태우는 5.18을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당시 군부가 무조건 잘못한 것도 아니다(유언비어가 진범, 5.17은 치안 유지 차원이라고 믿고 있다, (1995년 구속 직전) 문화대혁명처럼 더 많은 피를 흘린 사건조차 처벌된 사람은 생각보다 적었다)란 식의 양비론을 펼쳤다. 그런데 몸져앓아 누운 후엔 전두환과 차별화를 하고 싶었는지 진짜 생각이 바뀌었는지 어쨌는지 2019년부터 장남 노재헌을 통해 사과 의사를 표명하고 있다.#[3] 원 출처: <전두환 육성증언> p447~448. 이 책에서 언급된 언론인은 그 당시에 사망한 선우휘로 보인다.[4] 때문인지 노재봉, 이홍구, 김학준은 노태우 정권에서 중용되었다.[5]중국이나 북한은 일당 혹은 일인독재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데다가 좀 더 넓게 잡아 유라시아권인 러시아를 포함해도 비슷한 상황이다. 이들 국가는 2019년 민주주의 지수 조사에서 모두 권위주의 체제로 분류되었다.[6] 사족으로 일본 제국 시절 (전제군주제와 입헌군주제 중간쯤에 놓인) 외견적 입헌군주제 체제가 들어서긴 했으나, 이것조차도 엘리트들이 위에서 주도한 것이었으며, 덕분에 덴노의 권한 대비 행정부의 위엄이 떨어져 군에 대한 문민통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종국엔 군국주의라는 괴물로 치닫고 만다.[7] 사실 과거만 해도 아시아 국가들에 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설 가능성에 대한 서구권의 시선은 꽤나 싸늘했다. 1960년대 영미권의 한 칼럼니스트는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탄생하길 바라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어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그리고 진짜 폈다(...)라는 글을 실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8] 승부수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맞을 듯하다. 어찌됐든 총을 쥔 건 군부였으니.. 단, 궁지에 몰렸던 것은 사실이었다.[9] 김영삼, 김대중을 합한 득표율이 무려 55%였다. 하지만 이는 사표가 되버리고 말았다.[10] 원 출처: <통일교실> - 민성일 저. 돌베개. 1991.[11] 원 출처: <한미관계의 재인식(2권)> - '한국 정치변혁기의 미국의 역할(김홍석 글)'. 두리. 1991. p26.[12] 사실 한국에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고, 대만이나 인도네시아, 칠레, 니카라과, 온두라스, 아르헨티나, 브라질, 이집트, 파라과이, 과테말라, 우루과이, 태국, 이란 등 많은 국가들의 독재정을 지원했고, 특히 중남미에서 중남미의 민주주의를 내팽겨치는 짓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더러운 전쟁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그 참상이 어느정도인지 알 수 있을 정도. 1980년대와 90년대에 이들 나라 상당수가 민주화되었지만 지금 보면 도미노 이론에 매몰되어서 제3세계 민주주의를 내팽겨치는 짓을 정당화했다는 얘기이다.[13] 1970년대 후반 당시 민주당 출신 지미 카터 대통령은 주한미군 철수론까지 거론하며 한국의 인권 개선을 촉구한 적도 있다. 이후 박정희가 암살되고 미국도 공화당 출신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으로 정권이 바뀌며 잠잠해졌다. 오히려 레이건은 전두환에게 무기 개발을 포기하게 하고 전두환을 백악관으로 초대해서 연설까지 하게 해준 모습을 보였다.[14] 다만, 그 당시 미국도 군부독재를 용인했던 것이 나름 사정이 있었다. 당시에 국제 정황이 빠르게 변하고 있었기에 한국에 또다른 문제가 생기기를 바라지 않았다. 물론, 미국도 나중에 군부독재가 저지른 짓을 보자 경악해하며 당시 야권인사였던 김대중을 구출하는데 나름 신경을 썼었고 6.10 민주 항쟁 당시에 신군부가 시위자들에게 무력진압하려는 등의 계획을 세우자 하지 말라고 정치적으로 압박을 가하는 등의 노력도 했었다. ===김대호tu1hr01ie · 가장 많은 성과를 내고도 가장 저평가된 대통령이 노태우가 아닐까 합니다. 북방외교, 남북기본합의서, 주택 200만호(1기 신도시), 서해안 고속도로, 중부내륙고속도로, 인천공항, 지방자치체, 지하철 5~8호선 등. 음수사원 굴정지인이라고, 노태우가 판 우물이 참 많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 여소야대 하의 4당체제가 그래도 한국 정치의 생산성이 가장 높았던 것 같습니다. 다 대통령을 꿈꾸며 당을 확고히 장악한 제왕적 총재 3명과 한명의 그래도 목숨 걸고 12.12쿠데타를 한 현직 대통령이 서로 견제와 경쟁도 하고 타협과 야합도 하면서 끌고 갔으니...... 그래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과 마찬가지로 공칠과삼이라고 봅니다. 1987년에는 이런 구호 많이 외쳤습니다. "안돼 안돼 절대 안돼 노태우만은 절대 안돼!" 1987년 12월 16~18일 구로구청에 있었는데, 먼저 달려가 이틀을 지켰고, 전국에서 몰려온 사람(사수대?)들도 많아서 근처(가리봉오거리) 제 자취방에 와서 한잠 잤는데, 아침에 진압이 되었더만요. 간발의 차로 구속을 면했습니다. 그 이후 12월 20일 이후에는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했는데, 싸늘한 민심을 느꼈습니다. 이후 위장취업 혐의로 구속이 됐는데, 구속영장이 2월 25일 떨어졌을 겁니다. 6공 최초의 시국사범이라나? 그래서 이북 방송에서 제 이름을 들먹이며 훌륭한 학생이라고 칭송했다고, 당시 방송 청취하던 녀석들이 알려주더군요. 아무튼 노태우 당선을 계기로 민주화의 종말이 오는 줄 알았습니다. 1988년 이후 대대적인 반동이 오는 줄 알았습니다. 지금 돌아 보면 어찌나 한심하고 부끄러운 무지와 착각인지!! 노태우 시대는 개인적으로 역사현실 인식과 사상이념과 인생행로의 거대한 전환이 일어나던 시대였습니다. 원희룡, 하태경, 장기표, 김문수 등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뒤에 책을 쓰면서 노태우 회고록을 본 적이 있는데 제 책(2013년 이후)에 서 인용한 대목입니다. "1987년 체제의 첫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은 자신과 전두환 전 대통령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기를 ‘민주화시기’라 규정하면서 이렇게 말했다.민주화의 시기는 욕구분출의 시기이다. 이 거친 욕구분출은 역사의 대세이고 당위이므로 도도히 흐르는 강물과도 같아서, 어설프게 막으려 하다가는 둑이 터지고, 그렇다고 내버려두면 마을을 휩쓸어 생존의 근거를 무너뜨린다.…… 나는 지금도 민주주의는 공짜가 아니라 비싼 대가를 치러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귀중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오죽하면 미국 독립선언의 기초자인 토머스 제퍼슨은 “민주주의는 독재자와 애국자의 피를 마시며 자란다”는 끔찍한 이야기를 했겠는가(노태우, <노태우 회고록(상권)>, 조선뉴스프레스, 2011, 머리글) 노태우 대통령에게 머리 긁적거리며 미안했다고 할 기회를 잃었네요. 영면 하소서.===[4보] 노태우 전 대통령 사망…향년 89세 | 연합뉴스(서울=연합뉴스) 이준서 기자 =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숨졌다. 향년 89세.
지병으로 오랜 병상 생활을 해온 노 전 대통령은 최근 병세 악화로 서울대병원에 입원, 의료진의 집중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삶을 마감했다.
1932년 12월4일 경북 달성군 공산면 신용리(현 대구 동구 신용동)에서 면 서기였던 아버지 노병수와 어머니 김태향의 장남으로 태어난 노 전 대통령은 경북고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안사령관, 체육부·내무부 장관, 12대 국회의원, 민주정의당 대표를 지냈다.
노태우 전 대통령 사망
(서울=연합뉴스)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숨졌다. 사진은 1981년 국군보안사령관 노태우 대장 전역식. 2021.10.26 [연합뉴스 자료사진] photo@yna.co.kr
노 전 대통령은 육군 9사단장이던 1979년 12월12일 육사 11기 동기생인 전두환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하나회' 세력의 핵심으로서 군사쿠데타를 주도했다.
쿠데타 성공으로 신군부의 2인자로 떠오른 노 전 대통령은 수도경비사령관, 보안사령관을 거친 뒤 대장으로 예편, 정무2장관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이어 초대 체육부 장관,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민정당 대표를 거치면서 군인 이미지를 탈색하고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5공화국 말기 전두환 전 대통령을 이을 정권 후계자로 부상, 1987년 6월10일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치러진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후보로 지명됐다.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의 성과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뤄져 야당으로의 정권교체 가능성이 부상했지만, 노 전 대통령은 야권 후보 분열에 따른 '1노(盧)3김(金)' 구도의 반사 이익을 보면서 같은 해 연말 대선에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보통사람 노태우'를 슬로건으로 내건 노 전 대통령은 직선 대통령에 선출된 뒤 민주주의 정착과 외교적 지위 향상, 토지공개념 도입 등 경제 발전에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퇴임 후 노 전 대통령은 12·12 주도, 5·18 광주 민주화운동 무력 진압, 수천억 원 규모의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로 전 전 대통령과 함께 수감됐고 법원에서 징역 17년형과 추징금 2천600억여 원을 선고받았다.
1997년 12월 퇴임을 앞둔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사면 조치로 석방됐지만, 오랫동안 추징금 미납 논란에 시달리다가 지난 2013년 9월에야 뒤늦게 완납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옥숙 여사와 딸 소영, 아들 재헌이 있다. 소영 씨와 이혼 소송 중인 최태원 SK 그룹 회장이 사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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