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성 이종만 선생을 기리며 -잘못된 집단기억
박동남
2021. 9. 26.
집단기억이라는 것이 있다. 어느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평가를 모두 일률적으로 규정하고 그 규정을 집단적으로 믿는 정신상태를 말한다. 집단기억은 오랜 세월 자의반 타의반으로 주입되고 생성되기 때문에 한번 만들어지면 좀처럼 바뀌지않는 게 특징이다.
문제는 이 집단기억이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진실이나 사료에 기초하지 않고 어느 특정한 시기나 세력에 의에 조작되었거나 꼭 그리해야만 된다는 이유때문에 억지로 형성된 경우다. 그런경우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16지게 된다. 역4사적으로 파시즘이나 나치한국사 거꾸로 보기 즘은 잘못된 집단기억이 만들어 낸 거대악이다.
우리 현대사에는 특히 정치적인 필요에 의해 잘못 형성된 집단기억이 많다. 친일파, 빨갱이라 규정된 개념적인 것에서부터 특정 사건이나 인물들까지 잘못된 집단기억은 실로 광범위하다. 더구나 남과 북은 전쟁까지 치뤘고 지금도 여전히 분단상태로 남아있기에 조작된 집단기억들은 때로 상대를 공격하는 무기로도 사용된다. 우리의 생각이나 표현등에 유독 자기검열이 심한 것도 잘못된 집단기억들에 뭇매를 자주 맞은 경험때문이다.
우리에게 잘못 형성된 집단기억의 대표적 인물이 약산 김원봉선생이다. 약산은 평생을 조국광복과 평화통일에 매진한 인물이지만 그가 해방 후 잠시동안 북한정권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그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다. 북한정권과 그 정권 참여자를 무조건 동일시하는 인식체계는 결코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그리할 요량이라면 이승만 정부에서 농림상을 역임했지만 평화통일을 주장하며 이승만과 맞섰던 조봉암 역시 이승만과 같은 무력통일파로 기억되어야 맞는 일이다.
남한에 거주하고있는 약산의 후손들이 지금껏 인고의 나날을 겪고 있는 이유도 이 잘못 주입되고 형성된 우리의 집단기억 탓이다. 약산은 결코 호전적인 김일성과 화합한 적이 없다. 그가 김구의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고 의열단을 이끌었으며 6•25전쟁 전후 평화통일 주창했지만 결국 말년에 장개석의 스파이라고 매도되어 북한정권으로부터 숙청되었던 역사적 사실은 무얼 말하는가? 이런 그의 행적에 눈을 감는 집단기억이라면 그것은 잘못된 기억일뿐이다.
일제시기 크게 활동했던 기업가들은 무조건 친일파라는 집단기억이 있다. 그들이 그렇게 많은 돈을 벌 수있었던 것은 친일때문이었을 거라는 가정하에 형성된 집단기억이다. 또한 그 기업가들은 부르주아지이기 때문에 프로레타리아가 세운 북한정권아래서 모두 숙청되고 청산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북한이 남한보다 친일청산이 훨씬 잘 되었을거라는 확신으로부터 형성된 집단기억이다.
이러한 집단기억의 대척점에 있는 기업가가 월성 이종만 선생이다. 선생은 1930년대 조선의 제일 부자였다. 그런데 그렇게 큰 부자였던 그가 어떻게 해방이후 그리고 그가 죽기 직전인 1977년까지도 북한의 최고인민위원으로 남았고 죽어서도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묻혀있는 것일까? 일제시대 큰 돈을 번 기업가는 모두 악질 친일파고 그런 부류들은 자본가를 증오하는 북한에서는 모두 숙청되었다는 일반적인 집단기억과는 상반된 모습이 아닌가?
월성 선생은 일제시기 광산업에 손을 대어 막대한 돈을 모았다. 그의 후손들이 전하는 이야기로는 수많은 실패를 거듭한 뒤의 결실이었다. 그가 이런 자금을 김구가 이끈 임시정부에 수시로 전달하여 임정의 가장큰 재정적 후원을 담당했었다는 사실은 알려진 일이다. 김구는 죽기 전에도 그와 동행하여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또한 선생은 일찍부터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아 김일성종합대학의 전신인 대동공업전문학교를 설립해서 후진양성에 힘을 쏟았다.
1930년대 조선, 동아일보 등의 기사에 따르면 그는 당시에 [대동농촌사]라는 단체를 만들어 '개인의 힘으로 모든 농민을 자영농으로 만들자'라는 구호 아래 활동했다. 지금 돈으로 따지면 천억원에 가까운 돈을 기꺼히 단체 운영비로 내놓았다. 또한 소작제도의 획기적 개선을 위해 먼저 자신이 소유한 토지부터 소작인에 7할, 지주에게는 3할이라는 정책을 실시하여 당시 농촌갱생의 혁신적 바람을 일으키기도 했다.
선생은 돈을 모으기 위해서가 아니고 돈을 나누기 위해 부를 축적해야한다는 소신을 실천했다고 한다.(출처: 전봉관 「이종만에 관한 연구」 카이스트 대학 국문과) 이런 기업가 정신은 후일 빌게이츠 등의 '창조적 자본주의',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자'로 승화발전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가 일제시대 거대 기업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에서 친일파로 분류되지않고 죽을때까지 북한사람들에게 추앙받았던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때문이다. 세간의 잘못된 평가처럼 그가 악질 친일파였다면 결코 북한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일제시대 거대 기업가는 모두가 친일파라는 집단기억, 그런 친일파는 북한에서 모두 숙청되었을거라는 무조건적 인식, 북한정권에 복무했던 사람들은 김일성처럼 모두 교조적 공산주의자라는 확신이 얼마나 허무 맹랑한 선입견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예이다. 그 잘못된 집단기억때문에 선생의 후손들 역시 지금도 인고의 세월을 감내하고 있다. 오늘따라 오직 나누기 위해 부를 추구했던 선생이 더욱 그립다. 선생의 명복을 빈다.
아래는 동아일보 1937 9월16일자에 실린 선생에 관한 기사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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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인 7 지주 3, 농촌사업가 이종만 씨가 소유토지에 실천’]
지난 봄 이상(理想) 농촌을 건설할 목적으로 50만원의 거금을 던져서 재단법인 대동농촌사를 창립한 이종만씨의 농촌사업에 대한 공적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이다. 또 대동농촌사의 토지경작자에게는 수확량의 3할만을 농촌건설 의무금으로 징수한다는 계획은 조선사회에 큰 충격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종만씨는 9월14일 대동농촌사 이사회 석상에서 자기 개인의 소유 토지 157만평에 대해서도 금년부터 소작료를 3할씩만 징수하겠다고 선언하는 동시에, 그 뜻을 소작인에게 통지했다. 이에 대하여 이종만 씨는 다음과 같이말한다.
“소작료를 3할 받는 것은 경영상으로 보아서도 지주에 손해될 것이 없습니다. 지금 조선농촌에서 소작료를 5할 이상 징수하는 지주가 있는지도 모르나 대부분은 5할을 기준으로 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에 비교할 때 나는 소작료를 2할쯤 내린 것입니다. 이만한 것쯤으로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가 원만히 진행된다면 얼마나 조선농촌을 위하여 기뻐할 일입니까? 조선인은 물질 방면에 있어서는 남과 같은 생활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마는 정신으로야 서로 돕고 살아가지 못할 것 있습니까? 나는 30년 동안 3할씩의 소작료를 징수하다가 30년 후에는 토지를 소작인에게 전부 물려주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나의 이번 이 행동이 조선농촌을 명랑하게 만드는 데 어떤 도움이 된다면 둘도 없는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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