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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3

[인터뷰] 정안기 박사 “독립군 토벌했다는 간도특설대의 진실” - 미래한국 Weekly

[인터뷰] 정안기 박사 “독립군 토벌했다는 간도특설대의 진실” - 미래한국 Weekly

정안기 박사 “독립군 토벌했다는 간도특설대의 진실”

고성혁 미래한국 기자
승인 2020.08.12 

일제시대 육군특별지원병과 간도특설대 연구논문을 책으로 펴내


지난 7월 10일 6·25전쟁 때 북한의 남침으로 백척간두에 있던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하는 데 큰 역할을 한 백선엽 장군이 타계했다. 좌파는 백 장군이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간도특설대에 복무해 친일파라며 현충원 안장을 반대하기에 이르렀다. 8·15 75주년을 맞아 친일파의 의미가 무엇이고 간도특설대란 어떤 것이며 국군 창설 이후 6·25 때 기여한 일본 육군특별지원병제도는 어떤 것인지 이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한 정안기 박사에게 들어본다.
정안기 박사

- 얼마 전 백선엽 장군께서 돌아가셨는데 좌파 쪽에서는 간도특설대 경력을 물고 늘어지고 있습니다. 먼저 당시 간도특설대에 대해 설명해 주시죠.

간도특설대 규모는 중대급이라고 보면 됩니다. 1938년 12월 300명 정도 규모로 창설된 겁니다. 관동지구사령부의 직할로서 일종의 특수부대 성격이죠. 부대 창설 자체도 토벌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만주의 일본 관동군은 소련을 염두에 둔 부대입니다.

원래 관동군의 주적은 소련군이니까요. 소련군을 상대로 하는 특수부대 그러니까 후방 교란, 정보수집 등이 목적으로 만들어진 겁니다. 그러다가 중일전쟁이 발발하게 된 것이죠. 간도특설대라고 해서 조선인으로만 구성된 것도 아닙니다. 러시아인, 몽골인, 이슬람, 만주인 등 민족별로 구성된 겁니다. 정보수집 및 교란 등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각 민족별로 구성하게 된 겁니다. 당시 만주라는 곳은 여러 민족이 혼재하던 곳이었습니다.

논의에 앞서 우리가 합의를 해야 할 것이 있어요. 일단 조선인들은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본의 신민이 된 겁니다. 당연히 일본이 보호해야 할 일본국민이란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만주, 간도에서 일본신민, 일본국민이 된 조선인을 일본은 보호해야죠. 중국 마적단이 간도의 조선인을 약탈한다는 것은 즉 당시로는 일본국민을 약탈하는 것이니 일본군 일본 경찰이 나설 수밖에 없죠.

한마디로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고 국민은 국가에 충성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것이 근대국가론의 기본이죠. 제가 만주학회에서 꽤 오랫동안 연구를 해왔고, 사무총장도 했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꽤 연구를 했습니다.

최근 와서는 광복군, 조선의용군에 대해 많은 추적을 했습니다. 팔로군에 조선의용군이 속했던 것은 아니냐 하는 사람이 있는데 턱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간도특설대가 팔로군을 토벌했다면 그 속에 조선의용군도 있으니까 같은 민족에 총을 댄 것 아니냐고 하는데 턱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1944년, 1945년 당시 조선의용군이라는 것은 만들어지는 단계였고 인원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간도특설대라는 부대 자체가 총을 들고 싸우는 부대라기보다는 후방 교란, 정보수집에 더 초점을 두는 부대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저들이 백선엽 장군이 특설대로 독립군한테 총부리를 겨눴다고 말하는 것은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되죠.

- 충성과 반역이 보수우파사회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 책을 집필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요.

2005년 고려대에서 연구 발언을 하면서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브랜든 팔머 교수의 ‘일본통치하 조선의 전시동원’을 접하면서부터였습니다. 하와이대에서 출간된 것인데 일본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저는 전시경제를 연구했습니다. 교토대 유학 때도 전시(戰時)파트가 제 전공이었고, 그것으로 학위논문을 썼고 한국으로 돌아와 식민지 전시경제는 어떻게 돌아갔고, 그것이 해방 후에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연구했습니다. 이런 부분에 대한 산업사, 기업사, 제도사 등 연구를 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한국에서는 위안부 문제가 불거졌죠. 브랜든 팔머의 식민지 전시동원 첫장을 딱 보면 ‘육군특별지원병 제도’가 나옵니다.

또 자료에도 보면 놀라운 표가 있어요. 지원율 자체가 48:1, 49:1의 엄청나게 높은 지원율을 기록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죠. 일제에 강제로 끌려갔다는 기존 한국 근현대사의 논리로 보면 있을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정말 그럴까 하는 의문이 생긴 겁니다.

그래서 일본에서 자료를 조사해보니 놀라운 기록이 나오는 겁니다. 총독부가 일본 육군성 앞으로 보낸 자료를 보내 매년 지원병이 증가하는 겁니다. 지원병이 늘게 되면 교관, 시설, 예산을 늘려야 하기 때문에 관련 자료를 총독부가 취합해 보내 것인데 그 자료가 엄청 상세합니다.

조선의 지역별 연령별 지원자 수가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산내역도 나오고 지원병의 신체등급자료 등도 다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깜짝 놀랐죠. 자료를 보니까 사실인 겁니다. 일제 관헌의 공권력이 개입했다 하더라도 그런 숫자가 나올 수 없습니다. 신문, 잡지 자료를 찾아보니 지원하면서 혈서를 쓰는 것도 나옵니다. 기존 연구는 엄청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특별지원병에 누가 지원했나 보니 송요찬, 최경록, 임부택 같은 6·25전쟁 때 그야말로 대한민국을 구한 사람들이 총망라되어 있는 겁니다. 더 조사를 해보니 이분들이 중일전쟁(1937~)에도 참전을 했고, 태평양전쟁에도 참전하면서 필리핀, 버마, 뉴기니까지 갔더라구요. 그분들의 회고록을 보게 되니 그분들이 겪은 일들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래서 제가 결심을 했죠. ‘이건 내가 필생의 힘을 쏟아 한 번 해볼 테마다’라고 말입니다.

저는 원래 경제사가 전공이지 근대사가 전공은 아닙니다. 그런데 경제를 전공했으니까 실증 자료를 찾아내고 거기에 조선 청년들이 겪은 일들 그리고 총독부의 자료까지 합해서 보니 한마디로 딱 스토리가 서더군요. 조선총독부가 강제로 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왜 총독부가 징병제가 아니고 지원제로 했느냐 하는 겁니다. 그 맥락에서 ‘조선인 특별지원병제도’가 왜 나왔으며 그 속에서 당시 조선의 청년들은 무슨 생각을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하나하나 추적해 갔습니다.

중국인 마적단이 조선인 약탈

- 그럼 조선인 특별지원병에는 주로 어떤 사람들이 지원한 것입니까.

주로 중농층 대가구 가족들의 차남들입니다. 이것도 총독부가 조사한 자료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자료를 보면서 ‘이건 정말 나한테 하느님이 행운 준 것이구나’하는 생각도 했죠. 또 육군 특별지원병에는 전남 출신이 많습니다. 압도적입니다. 굳이 남북을 비교해보면 남한지역에서의 지원병이 70%나 됩니다. 북한지역보다 월등히 많습니다.

왜 그런가? 상대적으로 당시 남북지역을 비교하면 북한지역(평안도 함경도)은 그래도 깨어 있는 일종의 양반개념이 없는 평준화 된 상민(常民)의 사회였다면 남한지역은 아직도 양반·상놈의 관념이 있던 반상의 사회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반상의 사회라는 전근대적인 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대거 육군 특별지원병에 지원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일종의 사회적 돌파구가 된 셈이죠.

당시 일본인이 조사연구보고서에도 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앞으로 조선 사회가 전근대적 사회를 벗어나게 되면 서북지역 출신들이 조선 사회를 쥐고 흔들 것이라고 말입니다. 통계적으로 봐도 그렇습니다.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학생들 70~80%가 서북지역 출신이고 해외 유학도 그렇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랬잖아요.

기존 한국 근현대사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것들이 이번 연구를 통해 실증적으로 드러났고 그렇다면 친일파 논란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재검토를 해야 하는 이유가 나오는 겁니다. 육군 특별지원병의 지원율과 당시 조선 청년들의 생각을 들여다보면 최남선이라든가 이광수에 덧씌워진 친일파 논란도 다시 봐야 하는 것이 됩니다.


- 이 책에 대한 결론부터 말씀하신다면.

이 책을 들여다보면 최남선, 이광수에 대한 친일파 논란은 턱도 없는 것입니다. 육군 특별지원병에 지원한 이들은 일제의 공민으로 태어났지만 국민의식을 내면화 체화시키고 군사기술을 체득했고 그 기술로 대한민국 건국과 호국 그리고 발전에 기여했다는 것입니다.


- 당시 조선인의 일본 육군 특별지원병에 지원하는 사람들은 친일을 한다는 인식은 없었던 것인가요?

있을 수 없지요.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일본국민으로 태어난 것이니까요. 이들은 대부분 1920년대생이고 또 국민학교에 들어가면 가장 앞서가는 근대교육을 받은 것이 됩니다. 지금의 초등학교와는 다릅니다. 정신교육, 훈화교육이 강조되었습니다. 국민학교 다니면서 일본국민으로 황민화 국민화 교육을 받은 것이죠.

당시 남한사회의 향촌사회라는 것은 조선시대 양반상놈 개념이 그대로 있는 곳이란 말입니다. 학교내에서 근대적 교육을 받지만 밖은 여전시 ‘종’으로 살아야 했던 시대입니다. 서정주 시에도 나오지만 ‘애비는 종이었다’는 것이 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육군 특별지원병제도가 나오니까 그들에게 이것은 구세주와 같은 역할이 된 것입니다. 현실을 돌파하고 새로운 삶을 개척할 수 있는 계기가 됐습니다. 향촌사회에서 개처럼 사느니 일본군이 되겠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닌 겁니다. 게다가 당시 일본군의 위상이 매우 높았습니다. 한마디로 자기해방이었던 겁니다.

- 육군 특별지원병에 지원하는 것이 민족차별에서 벗어나기 위한 목적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시골 촌구석에서 사는데 일본사람을 만나봐야 뭐 차별이라도 받든가 할 텐데 촌구석에 일본사람을 만날 일 자체가 없는 겁니다. 차별을 받으려면 일본인과 동등한 조건에서 뭘 하려다가 차별을 받아야 말이 성립되는데 그런 상황 자체가 안 되는데 무슨 민족차별에서 탈출하려고 육군 특별지원병에 지원했다? 한마디로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들은 민족차별이 아니라 우리 향촌 사회 내의 내부적인 차별로부터 탈출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육군 특별지원병으로 합격이 된다는 그 의미는 무엇인가요?

정말 대우가 좋습니다. 그냥 징집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본은 그 당시에 이미 국민개병제를 실시한 나라입니다. 20세가 되면 일단 청년들은 모두 징병검사를 받게 됩니다. 징병검사를 받아 정말 신체등급이 좋은 사람들만 군에 갈 수 있었습니다. 조선인들은 징병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육군 특별지원병제도로 조선인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한 것이죠. 합격하면 일본인들과 말 그대로 똑같은 대접을 받습니다. 일본이라는 사회가 원래 군인에 대한 인식이 특별합니다. 당시는 상등병으로 제대하는 사람은 전체 입대자의 4분의 1밖에 안 됩니다.

상등병을 달고 제대했다면 당시 면에서 지역유지가 되고 지역 리더가 되죠. 지금도 일본에서는 군대 다녀왔다고 하면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제가 일본 유학 때도 군을 다녀왔다고 하니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에 대해 일본 사회, 일본인들은 감사하는 마음이 유독 큽니다.

- 그런데 좌파는 일본이 전쟁하면서 병력이 부족하니까 조선인에게도 문을 열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 점에 대해 정 박사님의 생각은 어떤 것인가요?

그 당시 일본군의 병력 규모가 중일전쟁 때부터 따지면 총 누계로 780만 명 정도 동원했고 태평양전쟁 시기 최대 병력은 280만 정도 되었습니다. 조선인에게 부여된 육군 특별지원병 총 병력수가 1만7000명 정도였습니다. 한마디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병력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병력이 부족해서 조선인에게 일본군 입대의 문을 열었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왜 조선인에게 이 제도를 시행했는가 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논점이 되는 것입니다.

조선인 육군 특별자원병 전남 출신이 압도적 다수

- 그럼 왜 문을 조선인들에게 열었던 것입니까?

저의 책 1장에서 그 부분을 분석해 놨는데 그 제도가 성립되는 과정을 말합니다. 일본이 조선인도 일본국민이라고 말하면서 황국신민화를 하죠. 대동아주의를 실현하려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정권도 안주고 병역의무도 안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조선인들이 요구합니다. 참정권을 달라고 말이죠. 그러니까 ‘너희는 민도가 낮고 정치 수준이 낮아 안 된다’고 거부를 합니다.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일본에 제기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만주사변을 거치면서 조선사회도 변하게 됩니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에 대한 거부감이 상존했고 차이가 있었습니다. 만주사변도 내면적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만주, 간도지역 조선인들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마적단이 자꾸 만주와 간도지역 조선인사회를 약탈을 하니까 일본이 그에 대응하면서 빚어진 것입니다. 조선인도 일본국민이니까 일본이 자국민을 지켜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만주와 간도지역 조선인사회도 마적단으로부터 일본의 보호를 요구했구요.

그렇게 만주사변을 거치면서 조선인들의 일본에 대한 인식이 변합니다. 알고 보니 일본이 정말 강한 나라구나, 조선인에 대해 차별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려고 하는 것도 있구나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되자 조선의 정치세력도 변합니다. 권리를 요구하기 전에 의무부터 하자는 식으로 바뀌면서 오히려 조선의 정치사회가 먼저 징병제를 요구합니다.

당시 조선인들의 문맹률이 80%나 됩니다. 초등학교 취학률은 30% 정도인 상태에서 국민개병제를 실시하는 일본 입장에서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수준 격차가 너무 벌어지고 문화적 차이도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조선인에 대해 징병제를 실시할 수 없는 상황인 겁니다. 징병제를 실시하기 전에 전 국민 의무교육제가 먼저 필요한 것도 있구요.

일본 육군성 자료를 보면 당시 30년대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는 30년 정도 지나야 가능하다고 전망합니다. 그러니까 조선인정치세력이 역제안을 합니다. 그렇다면 조선인 가운데도 국민학교도 나오고, 충분히 사상도 건전하고 병역의무를 수행할 수 있는 우수한 청년들을 뽑아 우선 병역을 시행해보자고 한 겁니다. 그러니까 조선총독부나 일본제국의회도 할 말이 없어지게 되었죠.

- 앞서 정박사님이 언급하실 때 만주사변이 조선내 사회 분위기랄까 전반적으로 완전히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지요?

만주사변 발발 자체가 만주에 살고 있는 조선인에 대한 중국인들의 탄압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즉 중국 마적 때로부터 조선인을 보호하겠다는 것이 만주사변 발발의 원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주국 건설하면서 붐이 일어납니다. 많은 조선인이 풍운의 꿈을 안고 만주로 만주로 넘어갑니다.

거기서 더 넓은 세상을 보고 한 것이 그대로 조선사회로 들어오면서 자연스레 조선도 변하게 됩니다. 경제도 발전하게 되니까 뭐랄까 조선독립이라는 화두가 물밑으로 가라앉게 됩니다. 개인의 생활이 나아지면서 권리와 의무에 대한 자각도 생긴 겁니다. 그래서 당시 사회 분위기를 이렇게 전합니다.

30년대 들어와 반일주의자는 회색분자로 바뀌고 회색분자는 친일주의자로 바뀐다고 말입니다. 수량적 통계도 보면 정치사범이 대폭 줄고 신사참배도 늘고 변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일제강점기는 20년대이거나 아니면 태평양전쟁 기간의 이미지이지 30년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대중가요로 유명한 ‘감격시대’나 ‘복지만리’도 일종의 만주 특수를 배경으로 한 노래입니다.
진정한 전쟁 영웅 임부택 장군. 그는 일제시대 육군특별지원병 출신으로 춘천지구 전투에서 북한군을 막아내는 등 주요 전투마다 혁혁한 공을 세웠다 . / 국가보훈처 제공


- 그러면 해방 후 특별지원병 출신들은 어떤 상황에 처해진 것입니까?

이들이 군에 갈 때는 지역에서 영웅 대접을 해 줬습니다. 그리고 복무 성적도 좋았습니다. 체력 수준도 좋았고 고향민들의 적극적 후원으로 일본군 생활을 하게 되죠. 태평양전쟁에서 약 5000-6000명 정도 전사를 합니다. 1만1000명 정도가 생존해 돌아와 보니까 어떤 상황이 되느냐 하면 친일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엊그제만 해도 영웅 대접을 받았는데 돌아와보니 순식간에 이상한 사람이 되어 버린 겁니다. 태평양전쟁에서 살 아 돌아온 사람들은 심신이 완전히 피폐해집니다. 사회생활에 바로 접하지 못하고 상당히 타격을 받게 되죠. 그후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간 사람들은 중국 전선이나 조선반도에 근무했던 사람들이었죠. 쉽게 귀국하고 바로 적응할 수 있었으니까요.

육군 특별지원병으로 태평양전쟁에 참가했다가 나중에 국군에 몸담게 되는 분들은 정말이지 최고의 군사 능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중국 전선에 있었던 사람들과는 차이가 납니다. 사실 박정희도 실전 경험은 없었다고 봐야죠. 육군 특별지원병 출신들은 4년 내지 5년 정도를 일본군에서 하사관으로 경험을 쌓은 상태였습니다.

비교가 안 되는 상태였습니다. 한마디로 백전노장이었죠. 이들이 국군에 들어와 국군창설 초기 신병 교육을 시킨 겁니다. 그렇다 보니 한국군에 일본군 잔재라고 할까요, 그 영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국군 창설 초기 구조를 보면 군 상층부는 만주군관학교나 일본육사 출신들이 차지하지만 그 바로 밑 부분 실질적으로 병사들을 훈련하고 전투에 임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육군 특별지원병 출신들이었습니다.

- 그렇다면 일본군에 지원을 독려했다는 이유로 친일파로 몰리는 모윤숙이라든가 최남선, 이광수도 사실과 다르다고 봐야겠군요?

조선인 정치세력들은 조선인들도 능력이 있고 그리고 근대국민으로서 제대로 살아가려면 참정권 같은 권리를 빨리 획득해야만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할 수 있고, 그래야 우리의 민족적 힘이 커지는 것이고, 독립의 기회를 잡아낼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능력 있는 인적자원이 형성되지 않으면 독립의 기회가 와도 독립을 할 수 없고 국가를 세울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인 겁니다. 참정권을 요구하는 것 자체도 궁극적으로는 나중에 독립을 위한 사전 포석인 것이죠. 그 참정권을 얻기 위해서는 의무, 병역에 대해 할 일은 하자는 것이고요.

- 그럼 육군 특별지원병들이 일본군에서 배운 것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그리고 대소전을 준비하면서 반공교육도 특별히 받았나요?

당연하죠. 1938년 전국적으로 반공협회가 발족이 되고 잡지가 발행이 되고, 각 경찰서를 중심으로 조선 전체에 지부가 결성되고, 매달 15일은 ‘반공의 날’이었습니다. 그 날은 모든 국민들은 반공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당연히 육군 특별지원병 훈련소에서도 반공교육을 시키죠. 나중에 해방 후에는 반공의 날이 ‘반공·방첩의 날’로 바뀌죠.

이렇게 일본이 반공교육을 강조한 것은 1930년대 보면 함경도 지역에서 공산주의자들이 활개를 칩니다. 소위 말하는 조선공산당들의 활동지역들이 흥남이나 온산 같은 곳인데 파업도 일으키고 했죠. 일본 국내에서도 공산주의자들이 암약했고 일본 내 지식인사회에도 공산주의자들이 많았는데 문제는 이들 공산주의자들이 일본 천황제를 부정하고 불식시키는 겁니다. 그것을 차단시켜야 하는 목적도 있죠.

‘역사왜곡에 의한 친일파 논쟁은 공허’

-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조선인 병사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하고 있는 것도 사회 이슈가 되고는 합니다.

야스쿠니에는 약 2만2, 3천 명 정도의 군인과 군속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국립묘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죠. 군인으로 전사를 하게 되면 야스쿠니에 모신다는 것은 약속이 되어 있는 겁니다. 일본은 비록 전쟁에 졌지만 제가 조사를 해보니까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모셔진 사람은 100명도 채 안 됩니다.

나머지는 모두 해방 이후 모셔진 겁니다. 조선인들이 군인이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전쟁 기간에는 일본국민이었기 때문에 약속을 지켜준 겁니다. 대단히 중요한 논점인 겁니다. 문제는 우리 사회는 그들, 일본군인이었던 조선인들을 친일파라고 몰면서 귀환을 막고 있습니다.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전쟁에 나간 이유는 사실 조선을 위해 나간 것입니다. 참정권을 확보해 근대적 국민으로 재탄생하는 데 앞장서서 나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이 현충원이 안된다고 한다면 어떤 형식으로든 모셔와야죠.

이렇게 해야 근대국가로서 이성이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또 반대로 이렇게 볼 수 있어요. 만약 일본이 야스쿠니에는 조선인 위패는 모실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일본에 이렇게 말할 겁니다. ‘부려먹을 때는 언제고 이제는 위패조차 모시는 것을 반대하느냐’고 말입니다. 야스쿠니에 전사한 군인의 위폐를 모시는 것은 사실 평등주의에 입각한 것입니다. 전사자 출신이 조선인이든 일본인이든 간에 차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인식은 죽으면 모두 같은 ‘신’으로서 모시는 것이지 계급에 따라 차등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현충원에 장군묘역이 따로 있고, 사병 묘역이 따로 있는데 야스쿠니에는 그런 것이 없고 군인으로 전사하는 순간 장군이든 사병이든 똑같은 ‘신’으로 대접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스쿠니에는 참전했지만 전쟁터에서 죽지 않은 사람은 합사하지 않습니다. 전사자들만 모시고 있습니다.

우리 현충원에는 애국열사 묘역이라고 해서 화려하게 치장해 놨던데 이것은 6·25 때 전사자들에 대한 모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육군 특별지원병 출신들이 해방 후 국군 내에서의 역할은 어떠했습니까?

육군 특별지원병 출신 중에 나중에 장군까지 올라가신 분은 86명인가 그렇습니다. 상당히 많은 장군을 배출시킨 것이죠. 그런데 해방 후 국군 창설 과정에서 이들은 사실 차별을 받았습니다. 군 요직에 들어가지 못했죠. 대부분 연대장 대대장 등 일선부대의 부대장에 보직을 받게 됩니다. 그러다가 6·25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면서 어떻게 보면 큰 기회가 된 것이죠.

실제로 보면 여순반란과 제주 4·3사건을 단기간에 진압한 최경록, 송요찬, 함병선 이 세명 모두 일본군 생활을 5년, 6년씩 한 사람들입니다. 백전노장이었죠. 그러니까 공산주의자들 반란을 단숨에 제압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6·25전쟁 초기 북한군의 계획에 큰 차질을 빚게 한 춘천지구 전투도 보면 육군 특별지원병 출신의 공이 큽니다.

흔히 춘천지구 전투하면 김종오장군을 이야기하는데 사실 학도지원병 출신의 김종오 장군이 한 일은 별로 없어요. 실제로 전투를 진두지휘한 사람들은 연대장급들이었고 사실 임부택 연대장이 춘천지구 승리의 주역이었습니다. 임부택도 특별지원병 2기 출신입니다.

임부택 장군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재조명되어야 합니다. 전공에 비하면 가려진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함병선 장군 역시 마찬가지로 홍천지구 전투에서 북한군을 막아냈습니다. 그만큼 일본군에서의 전투 경험이 6·25전쟁에서도 실전으로 증명이 된 겁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맨날 친일파라고 말하지만 냉정히 생각해 봅시다. 이들 같은 일본군에서 실전 경험과 그리고 투철한 군인정신과 사생관을 가진 사람이 군에 있었을 때 하고 그렇지 못했을 때하고 말입니다. 6·25전쟁을 말하면 맨날 북한군 탱크 탓을 하지만 이미 탱크를 막는 방법은 태평양전쟁에서도 다 알려진 내용이었습니다.

춘천지구 전투에서 북한군 2군단을 막아 낼 때는 미군의 지원도 없을 때였습니다. 그런데도 북한군을 물리친 것이 당시 임부택 연대장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강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고 미군이 올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분들에게 우리는 감사해야 하고 자랑스러워 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재 대한민국에서 누릴 것은 다 누리고 사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과거 일본군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친일파라고 손가락질하고 있으니 완전히 미친 사회죠.


정안기 박사

고려대를 졸업하고 교토대에서 일본경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학술진흥재단(JSPS) 특별연구원, 고려대 연구교수를 거쳐 서울대 객원연구원으로 동아시아 근현대사를 연구했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2020-08-09

근대 만주 자료의 탐색 | 임성모,한석정,정안기,김기훈,다나카 류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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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만주 자료의 탐색  | 동북아역사재단 기획연구 31 
임성모,한석정,정안기,김기훈,다나카 류이치 (지은이)동북아역사재단2009-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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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쪽
152*223mm (A5신)
314g


책소개
이 책은 근대 만주의 현재적 의미를 탐구하면서 크게 국내외의 만주 자료 추적과 만주 연구의 해외 네트워크 구축, 예비적 탐색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기초자료 추적과 예비 탐색을 통해 우리나라의 만주 연구를 위해 시급한 과제에서부터 장기적인 과제에 걸친 본격적인 연구를 제안하고 있다. 특히 거의 소멸 직전에 있는 만주 귀환자들의 추적, 국내 만주 자료의 정리, 분산된 자료의 수집과 해제 등을 당장의 시급한 과제로 제기하고 있다. 아울러 국외 자료의 지속적인 추적, 만철 자료의 해제, 만주국 센서스 연구, 정부공보와 성경시보 분석, 20세기 전반의 한중 관계 만주의 기억과 관련된 중국의 민족주의, 만주가 한국 문화 전반에 미친 영향, 나아가 해외 업적들의 번역까지 포함하는 장기적 과제들에 대해서도 그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동안 국제적으로 억제되거나 망각되었던 근대 만주는 아무리 그 중요성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것은 동북아의 현재에, 특히 남북한에 큰 영향을 미치는 현재적 의미를 지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등에 대해 늘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한국 사회가 보다 지속적 연구를 통해 보다 성숙한 자세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목차


● 총론 /한석정
Ⅰ. 연구 배경
Ⅱ. 연구 개요
Ⅲ. 정책 제안

● 근대 만주의 예비적 탐사 - 영남 지역의 만주 귀환자, 국내 만주 자료 그리고 문화 연구 /한석정
Ⅰ. 머리말
Ⅱ. 국내의 만주 자료
Ⅲ. 영남 지역의 만주 귀환자 추적
Ⅳ. 한국 문화에 미친 만주의 영향
Ⅴ. 맺음말

● 근대 만주 관련 해외 자료의 수집과 정리 /정안기
Ⅰ. 머리말
Ⅱ. 해외 지역 근대 만주 관련 자료
Ⅲ. 근대 만주 관련 주요 사료군의 해제
Ⅳ. 최근 만주 관련 해외 연구서
Ⅴ. 연구 결론과 학술 정책 제언

● 만주국 정치사 연구의 기본·심화자료 및 국내자료 /임성모
Ⅰ. 머리말
Ⅱ. 만주국 정치사 연구의 기본자료-전기·회상기 자료
Ⅲ. 만주국 정치사 연구의 심화자료-전쟁책임과 731부대
Ⅳ. 만주국 정치사 연구와 국내자료-도시연구와 신문자료
Ⅴ. 맺음말

● 간도 담론의 연구사적 검토 /김기훈
Ⅰ. 머리말
Ⅱ. 간도 담론의 형성과 전개
Ⅲ. 맺음말

● 일본의 ‘만주국’ 연구의 현황과 과제 - 공동연구를 중심으로 /다나카 류이치
Ⅰ. 머리말
Ⅱ. 1980년대 이전의 연구 현황
Ⅲ. 1990년대 이후의 연구 현황
Ⅳ. 맺음말

● 연구자료와 참고문헌
Ⅰ. 만주 귀환자 3인에 대한 면접 요약
Ⅱ. 부산·경남, 대구·경북, 서울 지역의 만주 관련 자료
Ⅲ. 근대 만주 관련 해외 자료
Ⅳ. 만주국 정치사 연구의 기본·심화자료 및 국내자료
Ⅴ. 간도 영유권 관련 자료
Ⅵ. 일본의 ‘만주국’ 연구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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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폴레조사단의 조사 시점은 1946년 5월이며, 국민정부의 지배지역에 한정하고 있다는 점이 한계이자 특징이라 하겠다. 그러나 일본이 만주국에 건설한 중화학공업은 당시 국민정부 지배지역에 집중적으로 입지했던 점을 고려하면, 당시 만주 경제의 실태와 관련한 중요한 보고서라 할 수 있겠다. 또한 같은 시기의 하얼빈과 목단강 등 공산당 지배지역의 대도시에 대한 조사 여행 기록도 포함하고 있다.-정안기, 「근대 만주 관련 해외 자료의 수집과 정리」中 접기
만주국 정치사 연구의 기본자료는 무엇보다 외무성, 척무성 등 일본 정부, 관동군, 만주국 정부가 발간한 공문서들이다. 『만주국 정부공보』 등 이들 공문서야말로 정치사의 기본골격을 이루는 정책의 입안, 논의, 실행, 결과 등을 개관할 수 있는 1차 자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밖에도 이들 통치구구에 몸담았던 관료, 군인, 기술자, 지식인 등과 농업이민, 노동이주 등의 형태로 만주국에 거주했던 농민, 노동자들의 전기 및 회상기 같은 자료가 있는데, 이들 자료는 최근 정치사 연구의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가운데 새삼 그 중요성을 평가받고 있다. (임성모, 「만주국 정치사 연구의 기본·심화자료 및 국내자료」中) 접기
은정태는 대한제국기 ‘간도 문제’에 대한 선행 연구가 대부분 영유권의 향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당시의 지식인들과 언론의 간도 ‘담론’ 혹은 ‘의식’을 분석하게 되었다고 연구 동기를 밝힌다. 이 논문에서 그는 대한 제국의 간도 정책을 ‘식민화(식민지로서 영토화하려 했다는 의미)’ 과정이라고 규정한다. 즉, 사회진화론적 문명 담론을 수용한 대한제국이 ‘비어 있는 땅(空地)’인 간도를 자국 영토로 만들고 현지 주민과 토지를 지배하려 한 결과로 보는 것이다. (김기훈, 「간도 담론의 연구사적 검토」中)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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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임성모 (지은이) 

일본근현대사 전공
연세대학교 사학과 교수

[역서]
『변경에서 바라본 근대』(2006, 산처럼)
『전장의 기억』(2002, 이산)
『번역과 일본의 근대』(2000, 이산)
편저
『조선과 만주 총목차 인명색인』(2007, 어문학사)



최근작 : <제국일본의 문화권력 3>,<제국일본의 문화권력 2>,<제국일본의 문화권력> … 총 23종 (모두보기)

한석정 (지은이) 

동아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시카고 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풀브라이트 재단 지원으로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 어바인 대학교 강의교수, 교토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日文硏)와 싱가포르 국립대학교 아시아연구소(ARI)의 외국인 연구원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 『만주국 건국의 재해석』 『만주, 동아시아 융합의 공간』(공저) 등이, 옮긴 책으로 『화려한 군주』 『주권과 순수성』이 있다.


최근작 : <만주 모던>,<근대 만주 자료의 탐색>,<만주, 동아시아 융합의 공간> … 총 5종 (모두보기)

정안기 (지은이) 

교토대학에서 일본경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학술진흥재단(JSPS) 특별연구원, 고려대학교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객원연구원으로 동아시아 근현대사를 연구하고 있다.『만주, 동아시아의 융합과 공간』(소명출판, 2008)과 『근대 만주 자료의 탐색』(동북아역사재단, 2009)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국제경영사』(한울아카데미, 2010) 등을 번역하였다.


최근작 :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충성과 반역>,<반일 종족주의> … 총 10종 (모두보기)

김기훈 (지은이) 
중국근현대사 전공, 육군사관학교 교수.


최근작 : <근대 만주 자료의 탐색>

다나카 류이치 (지은이) 

일본근대사 전공, 한국학중앙연구원 초청연구원.


최근작 : <근대 만주 자료의 탐색>


출판사 제공
책소개
연구의 사각이며 변경이었던 20세기 초의 만주는 냉전 시대 동북아의 정치, 경제, 문화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다문화, 다민족 사회를 외치는 세계화 시대의 동북아에도 큰 함의를 던지는 현재적 의미의 존재이다. 나아가 만주는 조선족 노동력의 국제적 확산, 북한의 변동 등 동북아 미래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에도 큰 유용성이 있다. 이 책은 근대 만주의 현재적 의미를 탐구하면서 크게 국내외의 만주 자료 추적과 만주 연구의 해외 네트워크 구축, 예비적 탐색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기초자료 추적과 예비 탐색을 통해 우리나라의 만주 연구를 위해 시급한 과제에서부터 장기적인 과제에 걸친 본격적인 연구를 제안하고 있다 특히 거의 소멸 직전에 있는 만주 귀환자들의 추적, 국내 만주 자료의 정리, 분산된 자료의 수집과 해제 등을 당장의 시급한 과제로 제기하고 있다. 아울러 국외 자료의 지속적인 추적, 만철 자료의 해제, 만주국 센서스 연구, 정부공보와 성경시보 분석, 20세기 전반의 한중 관계 만주의 기억과 관련된 중국의 민족주의, 만주가 한국 문화 전반에 미친 영향, 나아가 해외 업적들의 번역까지 포함하는 장기적 과제들에 대해서도 그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동안 국제적으로 억제되거나 망각되었던 근대 만주는 아무리 그 중요성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것은 동북아의 현재에, 특히 남북한에 큰 영향을 미치는 현재적 의미를 지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등에 대해 늘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한국 사회가 보다 지속적 연구를 통해 보다 성숙한 자세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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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과 반역 - 대한민국 創軍·建國과 護國의 주역, 일본군 육군특별지원병 정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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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과 반역 - 대한민국 創軍·建國과 護國의 주역, 일본군 육군특별지원병  

정안기 (지은이)조갑제닷컴2020-02-25



충성과 반역

592쪽

책소개

한국전 발발 70주년을 맞아 출간한 책으로, '일본군 육군특별지원병'들의 활약을 다룬다. 부제는 '대한민국 創軍·建國(창군·건국)과 護國(호국)의 주역, 일본군 육군특별지원병'이다.

목차

머리글 … 9

서장 … 14
왜 육군특별지원병인가 | 방법과 관점 | 활용자료에 대해서

제1부 제국의 첨병

01 제도와 성립 … 48
「협력엘리트」와 복선적 정략 | 식민권력의 대응과 역대응 | 정치적 반향과 동상이몽

02 집계와 분석 … 87
법제와 제도 | 집계와 분석 | 지원자 동기와 멘털리티

03 향촌사회와 모순 … 126
반상(班常)차별 | 지주제의 모순 | 1939년 대한발(大旱魃)의 충격

04 협력과 동원 … 165
통치협력 | 문예협력 | 「협력 이데올로그」의 군상들

05 황국신민의 도장 … 211
설치와 운영 | 생활·교육·훈육 | 조선인 사회의 관심과 후원

06 입영·생활·진급 … 242
입영과 생활 | 진급과 간부후보생 | 하사관 진급자들

07 중일전쟁 … 271
조선군 제20사단 | 전사상 및 특훈자 | 조선인 사회의 반향

08 천황폐하 만세 … 300
이인석! 그는 누구인가 | 전사와 「이상한 추모열」
09 아시아태평양전쟁 … 328
상주사단의 동원과 파병 | 임시사단 창설과 파병 | 뉴기니 참전과 생존투쟁


제2부 조국의 간성

10 임관과 창군 … 368
건국기 장교 양성 | 6·25전쟁기 장교 양성 | 고급 장성급의 군사경력

11 건국을 향한 대질주 … 406

「제주4·3사건」과 앵그리 중령들 | 「송악산 전투」와 최경록 대령 | 「양양 돌격작전」과 송요찬 중령

12 멸공의 횃불 아래 … 430
북한군 불법남침과 결사항전 | 「중공군 참전」과 필사의 탈출 | 휴전협상기 고지쟁탈전

13 또 다른 충성과 반역 … 474
송요찬! 그는 누구인가 | 「질풍노도」의 시대 | 누구를 위한 충성인가

14 국제비교 -대만과 인도- … 510

대만의 육군특별지원병제 | 제1~2차 세계대전기 영국령 인도 | 20세기 식민지 군사동원



종장 … 561

참고문헌 … 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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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첫문장

1938년 2월 일본은 조선인의 지원병역을 인정하는 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하였다.

저자 및 역자소개

정안기 (지은이)

교토대학에서 일본경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학술진흥재단(JSPS) 특별연구원, 고려대학교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객원연구원으로 동아시아 근현대사를 연구하고 있다.『만주, 동아시아의 융합과 공간』(소명출판, 2008)과 『근대 만주 자료의 탐색』(동북아역사재단, 2009)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국제경영사』(한울아카데미, 2010) 등을 번역하였다.

최근작 :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충성과 반역>,<반일 종족주의> … 총 10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검은 역사의 살아있는 유령들, 이들이 6·25의 진정한 영웅이었다!”



조갑제닷컴은 한국전 발발 70주년을 맞아 ‘6·25의 진정한 영웅’인 ‘일본군 육군특별지원병’들의 활약을 다룬 《충성과 반역》(592페이지, 2만2000원, 조갑제닷컴)을 펴냈다. 부제는 ‘대한민국 創軍·建國(창군·건국)과 護國(호국)의 주역, 일본군 육군특별지원병’이다.



일본군 육군특별지원병은 1938~1943년 사이에 총 지원자 80여만 명 중 1만 8000여 명이 선발(경쟁률 45.4대 1)되어 일본군 사병으로 훈련을 받고 입대했다. 이들은 中日(중일)전쟁과 아시아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전문적인 군사지식과 풍부한 실전경험을 쌓았다. 투철한 국가관, 군인관, 사생관을 내면화하였다. 1946년 이래 이들은 여러 군사학교를 거쳐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임관하였다. 이들은 미 군정기, 건국기, 6·25전쟁기 대한민국의 자유와 인권을 수호하는 데 발군의 군사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1950~1960년대 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 내각수반(국무총리)으로까지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육군특별지원병 출신자들은 해방 이후 깊은 침묵과 엄혹한 忍從(인종)의 세월을 감내해야 했다. 대한민국은 이들을 친일파, 민족반역자, 친일반민족행위자라 매도하고 공격했다. ‘검은 역사의 유령들’로 취급했다. 한국사회는 이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스미고 푸른 꿈을 꾸었던 지금의 육군사관학교 교정 어딘가에 이들의 흔적을 남겨주거나 기억해주지도 않았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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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종족주의>1, 2편의 공동저자인 정안기박사님의 기념비적인 역작이다. 일제시대에 우리 선조들이 어떻게 힘들게 살며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일구어왔는가에 대한 묻혀진 진실을 밝힌 책이다. 전교노와 날조, 국뽕, 종북교과서에 세뇌된 애송이들은 얼씬대지마라. 이책은 자유대한민국의 역사이다.  구매

최란은 댓글농단을 중단하지 못하겠느냐 2020-05-11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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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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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
최근 수정 : 2020년 7월 22일 (수) 12:47
분류:
군인
6.25 전쟁
월남자




백선엽(白善燁, 1920.11.23 ~ 2020.07.10)은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최초의 4성 장군이다. 6.25 전쟁 때 낙동강 전선을 방어했다.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평양으로 이사했다[1]. 고향 마을과 김일성이 태어난 대동군 고평면 남리 만경대 마을과는 거리가 40리 (16km) 정도라고 한다. 평양사범학교와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군 중위로 있다가 해방 직후 평양에서 조만식 선생의 비서를 지냈다. 평양에 온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대중 앞에 처음 나서던 날의 집회에도 참석했다고 하며, 조만식 선생을 찾아온 김일성을 몇번 보았다고 한다. 1945년 12월말 월남했다.

목차 [숨기기]
1약력[2][3]
2부음
3간도특설대에서 독립군을 토벌했나?
3.1일본육사와 만주군관학교 조선인 생도들의 고뇌
4백세 기념 대담
5친일 논란
5.1유신헌법 공부해서 사시합격한 노무현, 문재인은 유신 앞잡이
5.2마이클 브린, 백선엽의 마지막 전투
6참고 자료
7각주
약력[2][3]
1920년 11월 23일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江西郡 江西面 德興里)에서 출생[1][2]
1926년 평양으로 이사
1939년 평양사범학교 졸업
1940년 봉천군관학교 입교 (제9기생)
1941년 12월 견습사관 (보병 제28단)
1942년 6월 만주군 소위 임관 (보병 제26단 신병훈련소 소대장)
1943년 2월 간도특설대로 전속
1944년 11월 제1호 작전 (대륙타통[大陸打通] 작전), 북지(北支) 치안전 참가
1945년 봄 전속, 연길 국경경비대 근무
1945년 8월 만주국 패망으로 만주군 해산. (당시 계급 중위)
1945년 8.15 해방 후 귀국. 평양에서 조만식 선생의 비서관
1945년 12월말 월남. (조만식 선생은 소련군의 탄압으로 활동에 제약을 받다 1946년 1월 5일 고려호텔에 연금됨.)
부음
백선엽 장군 ‘영면’…“미한 동맹 창시자”
모건 오테이거스 국무부 대변인은 14일 성명에서 “미국은 백선엽 장군의 죽음에 대해 한국 국민들에게 진심으로 조의를 표한다”고 밝혔습니다.그러면서 “한국 최초의 4성 장군으로서 한국 전쟁 중 조국에 대한 그의 봉사는 오늘날까지 미국과 한국 모두 계속 지키고 있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위한 싸움의 상징이었다”고 강조했습니다. 아울러 “백 장군은 외교관과 정치인으로 일하면서 그의 나라를 위해 매우 탁월하게 봉사했고, 미국과 한국의 동맹을 구축하는데 일조했다”고 덧붙였습니다.[4]
1990년대 중반부터 최근까지 주한미군사령관과 유엔군사령관, 한미연합사령관을 겸했던 퇴역 4성 장군 4명이 VOA를 통해, 100세를 일기로 별세한 백선엽 장군을 추모하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백선엽 장군과 수십 년 동안 인연을 맺어온 전 사령관들은 하나같이 백 장군을 “정신적 지주”로 부르며 그가 한국의 생존과 평화적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습니다. [5]
6·25 전쟁 영웅이자 창군(創軍) 원로인 백선엽 장군 별세 : 월간조선 뉴스룸 2020.07.11백 장군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 존재 안 할 수도
서울 광화문광장에 백선엽 장군 시민분향소 설치 : 월간조선 뉴스룸 2020.07.11전대협-육사구국동지회 등,"비서 성희롱한 파렴치범을 서울시장(葬)으로 모시면서 구국의 영웅의 빈소를 막는다는게 말이 되느냐"
[단독] 6·25 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 별세…향년 100세 조선일보 2020.07.11 00:14 | 수정 2020.07.11 01:446.25 전투서 백척간두의 조국 구한 영웅32세에 대한민국 최초의 4성 장군에 올라역대 주한미군사령관들이 가장 존경한 한국 군인
[속보] 6·25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 별세… 향년 100세 조선비즈 2020.07.11. 오전 12:24
6·25전쟁의 영웅인 백선엽(100) 예비역 대장이 10일 오후 11시 별세했다.

1920년 평안남도 강서군 덕흥리에서 태어난 백 장군은 6·25 전쟁 초반인 1950년 8월 대구에 진출하려던 북한군을 다부동 전투에서 물리쳤다. 이 승리로 한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에 교두보를 마련했고,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반격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다부동 전투에서 그는 패퇴 직전인 아군에게 "내가 앞장설 테니, 내가 물러나면 나를 쏴라"고 말하며 인민군이 점령한 고지로 뛰어올라갔고 전세를 뒤집었다.1952년 7월 백 장군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고, 1953년 1월 한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 됐다. 정전 회담 때는 한국군 대표로도 참가했다. 백 장군은 1959년 합참의장을 지낸 뒤 1960년 5월31일 예편했다
간도특설대에서 독립군을 토벌했나?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 전속된 1943년 2월에는 만주에는 항일무장투쟁을 하는 독립군은 전무했다.

김일성이 속했던 동북항일연군은 중국공산당 산하 조직으로 코민테른의 지휘감독을 받았다. 투쟁 내용도 양민에 대한 약탈, 방화, 납치, 살인을 일삼아 마적단과 큰 차이가 없었는데, 1939년 10월 ~ 1941년 3월 치안숙정 작전기간의 집중토벌로 항일연군은 완전히 궤멸되고 소수의 잔존세력은 소련으로 도주하여 소련군 88여단에 배속된다. 김일성은 1940년 10월 23일 소만국경을 불법월경하여 소련으로 도주했고, 이후 해방될 때까지 아무런 항일투쟁도 하지 않고 소련군에서 편하게 지냈다.
백선엽, 간도특설대 논란 종결자 정안기 박사 류석춘의틀딱TV 2020. 7. 14.

정안기 박사의 해설중 김일성과 보천보 사건에 대한 부분은 오류가 많다. 이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고, 북한 김일성이 아니다. 또한 그는 1920년 무렵부터 유명했던 전설적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을 사칭한 가짜가 맞다.
일본육사와 만주군관학교 조선인 생도들의 고뇌

박정희, 백선엽 등 일본육사나 만주군관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날 때 대개 일본의 패배를 예측하고 있었고, 일본이 패망하면 조선도 독립될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들이 적극적으로 일본군 또는 만주군에서 출세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당시 사관학교를 다니던 조선인 생도들의 고뇌가 어떠했는지는 아래 글에서 알 수 있다. 그들을 친일파로 모는 것은 정치적 목적의 마녀사냥에 지나지 않는다.
‘친일파(親日派) 마녀(魔女) 사냥’의 광풍(狂風)에 부쳐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대표, 리버티코리아포스트 2020.07.20장지량(張志良, 1924~2015)이 일본 육사 생도 시절 ‘조선인(朝鮮人)’ 생도로서 겪었던 고뇌와 애환(哀歡)을 기록했던 ≪내정일지(內情日誌)≫라는 제목의 수기(手記) 내용을 발췌
백세 기념 대담

조선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아 창간되던 해에 태어난 100세의 백선엽(白善燁, 1920.11.23 ~ ) 장군과 김형석(金亨錫, 1920.04.23 ~ ) 연세대 명예교수의 대담을 주선했다.
[2020 신년특집] [백선엽과 김형석, 文武 100년의 대화] [1] 이광수, 김일성 그리고 이병철 조선일보 2020.01.02"내 친척 할머니가 김일성 젖물려 키워… 두 아들이 공산당에 죽자 통탄"
金 "어릴 때 옆 동네 살던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이라고 해 놀라"

白 "김일성 평양 환영회 갔는데 군중들이 말도 안된다며 비웃어"

金 "친일파라는 춘원 없인 독립 못했을 것… 그 덕에 민족의식 키워" 白 "당시 최선 다해 실력 키우려 노력, 일본서 배울 건 배워야 했다"

金 "한국만큼 교육에 열정 쏟은 나라 없어… 그게 발전 거름 됐다이병철, 사람 키우면 삼성 떠나도 한국에 남을 거니 괜찮다고 해"
[백선엽과 김형석, 文武 100년의 대화] [2] 이승만과 6·25, 그리고 박정희 조선일보 2020.01.10총살 열흘 앞둔 박정희 "살려달라" 한마디… 백선엽 "그렇게 해봅시다"
白 "이승만, 美사령관들 불평하면 美 헌법정신 거론하며 꾸짖어"

金 "6·25는 시련이었지만 대한민국이 국제화되는 계기로 작용"

白 "사회주의적 개혁? 자유민주주의를 이길수 있는 것은 없어"金 "이탈리아 前공산당원이 충고하더라, 절대 북한 믿지말라고"
[백선엽과 김형석, 文武 100년의 대화] [3·끝] 아이젠하워, 정일권, 한미상호방위조약 조선일보 2020.01.31종교 탄압하던 김일성, 뒤에선 "목사님, 기도해 주십시오… 아멘"
白 "김일성, 만주군관학교 출신 포섭하려 정일권 등에 접근"

金 "함석헌 선생이 하던 학교 맡아 운영하던 중 北압박에 월남"

白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 만나 한미방위조약 필요성 설득"金 "미국보다 중국에 기우는 文정부, 어리석었다는 평가받을 것"
친일 논란
"백선엽 장군이 친일파면 노무현, 문재인은 유신앞잡이다(feat.간도특설대) 류석춘의틀딱TV 2020. 6. 9.
유신헌법 공부해서 사시합격한 노무현, 문재인은 유신 앞잡이

노무현은 1975년, 문재인은 1980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유신헌법은 1980년 말에 5공 헌법으로 개정되었으므로 두 사람 다 출세를 위해 유신헌법을 열심히 공부하여 사법시험에 합격한 유신 앞잡이가 맞다. 노무현은 유신 판사였기도 하다. 누구를 친일파라 탓하는가?
司法試驗(사법시험) 2차 百(백)41명 合格(합격) 最高得點(최고득점) 趙載淵(조재연)씨 … 여자도 3名(명) 1980.06.04 동아일보 7면司法試驗(사법시험) 百(백)41명 합격 최고득점 趙載淵(조재연)씨┄女子(여자)도 3명 1980.06.05 경향신문 7면
司法考試(사법고시) 합격자 60명發表(발표) 最高得㸃(최고득점) 柳聖秀(유성수)씨, 紅一㸃(홍일점)도 끼여 1975.03.27 동아일보 7면司法試験(사법시험) 2次(차) 합격 최고得点 柳聖秀(득점 유성수)군 1975.03.27 매일경제 7면



마이클 브린, 백선엽의 마지막 전투
[朝鮮칼럼 The Column] 백선엽의 마지막 전투 조선일보 2020.07.21 A34면 1단[6]
백 장군이 부역자가 아닌 이유는 크게 3가지다.

첫째, 앞서 말했듯 일본 군대에서 복무했다는 게 부역의 증거는 아니다. 만주 제국군은 대한민국을 침공하지 않았고 백 장군도 자국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지 않았다. 간도특설대는 주로 중국 공산당 게릴라들을 뒤쫓았고, 백 장군은 적을 거의 보지도 못했으며 실제 전투를 겪지도 않았다고 회고했다.

둘째, 지금 반대파들이 악용하는 부역 기준은 정부 스스로 세운 원칙에도 어긋난다. 노무현 정부에서 만든 일제강점하 강제 동원 피해진상규명위원회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포로수용소에서 일본군 교도관으로 일하면서 가혹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전범(戰犯)으로 분류된 조선인 83명을 사면했다. 그들이 신분이 그랬을 뿐이지 실제 전범으로 볼 수 있는 행위를 안 했다는 이유였다. 그렇다면 백 장군도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간도특설대에 소속되어 있었을 뿐이지 친일 부역 행위를 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짓을 했느냐가 아니라 원래 신분이 어떠냐를 들어 처벌하는 건 북한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민주국가인 대한민국에선 있을 수 없다.셋째, 백 장군 반대 세력은 국가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들은 운동장을 옮겨 놓고 논쟁을 벌인다. 가만 생각해보자. 나라란 우리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우리 정체성을 확립하고 가치를 세우고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경험의 총체다. 백 장군이 어렸을 때 대한민국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25세 때 해방됐지만 바로 두 쪽으로 갈라졌다. 그는 이후 목숨을 걸고 다른 반쪽을 지켰고, 그때 대한민국은 겨우 건국 18개월에 불과했다.
참고 자료
白善燁(백선엽) 回顧錄(회고록) 軍(군)과나 (11) 5년만의 平壤(평양) 1988.09.01 경향신문 5면
각주

↑ 이동:1.0 1.1 [2020 신년특집] [백선엽과 김형석, 文武 100년의 대화] [1] 이광수, 김일성 그리고 이병철 조선일보 2020.01.02
↑ 이동:2.0 2.1 白善燁(백선엽) 回顧錄(회고록) 軍(군)과나 (11) 5년만의 平壤(평양) 1988.09.01 경향신문 5면
이동↑ 백선엽, 간도특설대 논란 종결자 정안기 박사 류석춘의틀딱TV 2020. 7. 14.
이동↑ https://www.voakorea.com/korea/korea-politics/state-general-paik 국무부, 백선엽 장군 타계 애도 성명…“자유와 민주주의 위한 싸움의 상징”
이동↑ https://www.voakorea.com/korea/korea-politics/general-paik 전 미 사령관들 “백선엽 장군은 나의 스승...한국 생존과 번영에 막대한 기여”
이동↑ https://youtu.be/q90VeK2fcPw 영국인이 말한다. "백선엽 장군이 부역자가 아닌 3가지 이유"

2020-07-10

손민석 August 2019 이영훈 외의 반일종족주의를 읽었다

(4) Facebook

손민석
13 August 2019

그 유명한 이영훈 외의 <반일종족주의>를 오늘 배송받아 2시간동안 정신없이 읽었다. 249페이지까지 읽다가 덮었다. 드는 의문점들을 한번 정리하는 글을 써야 할 것 같은데, 지금 당장 드는 느낌으로는 황당함과 당혹감, 그리고 허탈함을 감추기 어렵다. 

주지하다시피 나는 이영훈 선생의 연구를 굉장히 높게 평가한다. 한국 경제사에서 이영훈의 토지제도사 연구나 협호 경영에 관한 이론화 등은 극복할 수 없는 엄청난 업적이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 <조선후기사회경제사>(한길사, 1988)을 읽고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이 책에 나오는 언술들과 개념 구사는 예전에 쓴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강의록인 <대한민국 이야기>만도 못하다. 논의의 질과 깊이가 한참 뒤떨어진다. 사실 이정도의 집중도와 속도로 읽으면 머리가 아파야 되는데 답답해서 머리가 아프다.

 한 가지만 일단 지적하자면 저자들이 계속해서 언급하는 '반일 종족주의'라는 개념의 정의가 무엇인지 책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알 수가 없다. 프롤로그에 나오는 반일 종족주의 개념에 대한 언술을 종합해보면 이영훈이 생각하는 반일종족주의의 개념은 다음과 같다. "사회 저변"에 "장기추세로 흐르"는 "집단 심성"이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물질주의"이다. "돈과 지위야말로 모든 행복의 근원이라는 가치관" 등이 물질주의인데, 한국 사회는 이 물질주의에 기초한 집단 심성을 갖고 있는 사회이다. 

그러면 이 물질주의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국의 역사와 함께 오래된 샤머니즘"이라 할 수 있다. "선과 악을 심판하는 절대자 신"은 존재하지 않는 이 "샤머니즘 세계"에서 "샤머니즘의 현실은 벌거벗은 물질주의와 함께 육체주의"로, 여기에는 이웃을 "악의 종족으로 감각"하는 "샤머니즘의 집단"인 "종족과 부족"만이 존재한다. 이 종족과 부족을 위한 거짓말이 통용되고, 그런 거짓말을 통해 돈과 지위를 획득하는 물질주의와 육체주의의 세계관이 한국인의 심성에 자리하고 있다. 한국은 일본이라는 이웃의 종족을 악의 종족으로 삼아 거짓말을 통해 종족을 수호하고, 그 거짓말을 하는 이들이 부와 명예를 쥐는 사회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인의 세계관은 반일종족주의라 할 수 있다.

 당연히 여기에 제기될 수 있는 물음은 그렇다면 다른 사회의 내셔널리즘, 민족주의는 그러한 특성이 없는가. 이영훈은
다른 종족을 악의 종족으로 서술하는 것이 샤머니즘적 발상이라 주장하는데 내셔널리즘 자체가 본디 배타성을 지니고 다른 민족 혹은 종족을 적대시함으로써 공동체 구성원 내부의 평등을 상상적으로나마 구현해내는 기제를 갖고 있지 않은가. 구체적으로 다른 사회의 내셔널리즘과 어떻게 다른가.

 이영훈은 이런 비판을 인식했다는듯이 "한국의 민족주의"인 반일종족주의는 "서양에서 발흥한 민족주의와 구분"된다고 주장한다. 왜? "한국의 민족주의에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이란 범주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의 민족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집단이며, 하나의 권위이며, 하나의 신분"이기 때문에 "차라리 종족이라 함이 옳"다고 주장한다.
 납득이 가지 않는 주장이다. 내셔널리즘에 관한 수많은 연구들이 내셔널리즘에 "독립적인 개인이란 범주"가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던가? 내가 알고 있는 많은 연구들은 되려 반대로 내셔널리즘의 발흥이 그런 개인성을 사장하고 민족이라는 허구의 주체 속에 개인성을 투영함으로써 전체주의로 발흥하게 된다고 비판하고 있다. 한국의 민족주의인 종족주의와 다른 사회..도 아니고 서양의 민족주의 간의 차이가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이라는 범주"에 있다는 주장은 학술적으로 민족주의 연구자들이 납득할만한 주장인가. 내게는 마치 제국주의의 민족주의와 식민지의 민족주의를 두고 전자는 침략적이고 후자는 평화적이고 독립을 위한 것이니 괜찮다는 식의 도식적인 주장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최대한 선의를 갖고 해석하자면 사실 역사상 존재했던 수많은 사회들 중에 근대 자본주의적 세계시장과 접촉하였을 때 식민화의 길을 피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
비유럽적 사회에서는 일본이 거의 유일하다. 그렇다는 것은 근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구성하고 있는 사적 소유권, 민법 등의 제도 혹은 가치가 다른 사회들과 그만큼 이질적이었음을 의미한다. 당연하게도 서구에서 발흥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여러 제도 혹은 가치와 다른 사회들이 그만큼 이질적이었기에 설령 한국과 같이 자본주의화가 진행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온전하게 정착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해 그만큼 무심했던 세월도 길지 않은가.

 실상 이영훈의 지난 과거 연구들은 이렇듯 서구 자본주의의 발흥을 낳는 조건이나 가치와 무관했던 한국 사회가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서구 자본주의를 추격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이영훈의 대답은 소농사회론을 통해 자세하게 전개되었다. 그는 중국 송나라 이후,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 이후, 그리고 조선후기의 소농의 자립화의 진행이라는 동아시아적 현상이 비록 서구와 같이 근대 문명을 낳지는 못했지만 그것에 적응하여 추격하는데는 뛰어난 역량을 발휘할 "개인"을 형성했다고 주장해왔다. 그렇기에 그가 이 개인의 발전을 중심에 두고 여전히 서구적 가치와 제도가 잘 정착되지 못한 지점에 문제의식을 느끼는 것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주장은 개념적으로 조성이 잘되지 않은 것이다.
내셔널리즘 간의 유형적 차이 혹은 질적 차이를 논하는 것과 한쪽의 내셔널리즘에는 개인이 전제되어 있고, 다른 쪽의 내셔널리즘에는 개인이 전제되지 않았다는 식의 주장은 한 가지 요소만을 뽑아내어 차이를 억지로 구성하는 잘못된 개념 조성 방식이다. 

한 사회에서 내셔널리즘이 형성될 때 그 이전의 전근대 사회에 존재하는 여러 상징들을 사용한다는 족류주의적 분석은 내셔널리즘 분석의 한 유력한 설명틀이고, 이영훈이 이 책에서 백두산을 그 상징으로 제시하는 것도 그런 점에서 볼만한 여지가 있다. 그렇지만 내셔널리즘 자체의 내용적 차이를 이런 식으로 주장한다면 동의하기가 곤란하다.
 이 주장이 곤란스러운 또 한가지의 이유가 있다. 이영훈은 앞서 보았듯이
반일 종족주의 개념의 근간에 샤머니즘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 토지기맥론을 들고 있다. 토지에 어떤 길하거나 흉한 기맥이 흐른다는 생각으로, 그러한 신체 감각은 제사 혹은 묘지와 같은 것으로 이어지며, 불멸하는 혼백관이 유교관과 얽히면서 장례와 제사, 그리고 족보가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 지점에 이르러 책을 덮었다. 황당함을 넘어서 뭐라 말을 못할 심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영훈의 학식을 생각하면 이렇게 말해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한국사에서 족보가 쓰이기 시작한 건 15세기 무렵부터인데, 이 족보가 쓰이기 시작하는 시점이 중요하다. 무슨 말인가 하면 족보가 쓰이는 시기는 한국사의 전개에 있어서 거대한 변환기라 할 수 있는 조선 전기였다. 조선 전기에는 토지제도사에 있어 질적 전환이 일어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사회는 신라 이후의 고대사회에서부터 고려왕조, 그리고 조선왕조에 이르기까지 토지에 대한 세금을 걷을 수 있는 권리인 수조권을 국가가 관리, 귀족 등에게 나눠주었다. 이는 한국사의 특질로 중국에서는 이러한 수조권적 토지분여가 일어나지 않는다. 아마도 이것은 국가의 형성 과정에서 한국과 중국의 역사적 차이가 낳은 한국사의 특질이라 생각된다. 아무튼 15세기는 직전법, 과전법 등의 개혁을 통해 이러한 관리 등에 대한 수조권 분여가 마무리되고 모든 토지가 국가의 소유로 공인되며 그에 따라 토지매매 또한 자유롭게 이뤄지는 대신 조용조 국역을 담당할 수 있는 양인과 천민으로 신분제가 재편되며 노비 인구가 전체 인구의 30~40%로 팽창하게 되는 역사적 분기라 할 수 있다.

 기존에 수조권의 분여를 통해 지배계급 간의 위계적 관계를 조직해왔던 한국사회는 모든 토지가 국가의 소유임이 선포되고 수조권에 따른 위계적 관계 형성이 사라진(왕실에 대한 수조권 분여는 계속 남아서 조선왕조 패망까지 이어진다. 이영훈의 연구는 이 왕실 수조권에 대한 것이었다) 이 15세기 무렵부터 족보를 쓰기 시작한다. 양반 지배계급들 간의 혼맥 등을 기록해 지배계급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함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당시 조선왕조는 일천즉천에 기초하여 부모 중 하나라도 천인이 있으면 그 자신도 천인 신분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가계에 천인이 없음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족보는 그러한 증명을 넘어서 각 가계끼리의 연대를 강화하고 조직하는 기능을 수행했을 것이다.

 토지제도사를 연구한 이영훈이 이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샤머니즘에 입각한 풍수지리설 운운하며 신라시기부터 이어져 온 그러한 미신적 세계관이 족보의 형성으로 이어졌을 거라는 식으로 논의를 풀어간다. 더 나아가서 그런 토지와 인간 간의 연계성을 강화하는 세계관이 북조선의 전체주의로 이어졌을 거라는 식으로 나아가는 지점에서는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다. 만약 그렇다면 북조선 체제는 한국사의 전개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체제라는 것인가. 이미 수백년도 더 전부터 풍수지리설에 입각해 김일성 왕조가 성립되는 건 막을 수 없는 일이라는 주장인가. 한국은 외세에 종속되어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주장인가. 이 지점에서 브로델의 장기지속 개념을 사용하는 걸 보고 아연실색을 금하기 어려웠다. 닭잡는데 소잡는 칼을 쓴다고 식자우환이로다.

 
족보의 형성은 양반 사족들과의 관련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지, 샤머니즘과의 연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게다가 이영훈은 샤머니즘이 무엇인지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그는 앞서 지적했듯이 샤머니즘을 풍수지리와 연결시키거나 종족 또는 부족과 연관시킨다. 종교사가 아닌 경제사를 연구한 이가 어째서 갑자기 샤머니즘을 꺼내들고 이리 개념을 휘두르고 있는지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중간의 정안기의 연구나 주익종의 연구 등도 모두 전공자가 아닌 이들이 왜 이런 연구를 하는지 도대체가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들로 가득하다.

 한 가지만 지적하자면 정안기는 학도지원병에 대해 분석하면서 일본군 내무반 생활에서 크나큰 폭력을 겪은 이들이 임시정부로 탈출한 것에 대해 마치 부적응자가 도망친 뒤에 정치적 선전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높인 것처럼 묘사하는데 나로서는 황당할 뿐이다. 일본군의 내무반 생활의 가혹함을 인정하더라도 임시정부가 있는 곳까지 단신으로 가는 것과 내무반 생활을 비교한다면 대부분 후자를 선택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된다. 미쳤냐. 거기가 어딘줄 알고 거기까지 가니 대체. 엄마가 등짝 때리는 소리가 벌써 들린다. 임시정부는 적진이라 할 수 있는 중국 대륙 내부에 있었다. 거기까지 단신으로 탈영을 해서 찾아가는 게 내무반 생활에서 느낄 폭력의 위험보다 위험도가 낮다고 생각하는 정안기의 인식체계에서 나는 크나큰 가치체계의 착란 외에 달리 읽어낼 게 없다.

 안타깝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 책이 이렇게 잘 팔리는 현상 자체가 한국 사회가 지성적으로 부족해 어떤 책이 학술적으로 훌륭한지를 판별해내지 못하는 증거라 생각된다. 너무 실망스럽다. 나무야 미안해.. 전혀 과학적이지 못한 책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대체 무엇이 새로운 사실이라는 것인지도 나는 알 수가 없다. 1982년에 제출된 신용하의 연구를 비판하기 위해 2019년의 이영훈이 10년도 더 된 자신의 연구를 소개하는 게 새로 제시된 사실들인가? 헛웃음만 난다. 한국사회의, 아니 한국 우익의 지적 능력이 고작 이정도라는 데서 안도감보다는 참담함을 더 많이 느낀다. 이건 연구가 아니다. 연구라 부를 수 없다. 어느 학술지에서 이걸 받아주나. 뉴라이트가 처음 나왔던 2000년대에 비해 질적으로 훨씬 뒤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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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Luke Lee
저도 읽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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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이관식 사지는 마시고 서점에서 보시든지 도서관에 신청해서 보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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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un Hyunjin
많이 팔리는 이유 중엔, 반대로 그 동안 독립운동이나 일본의 식민지배를 과대하게 부풀린 것에 대한 반작용도 있는 듯합니다.
청산리, 봉오동 전투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독립운동을 너무 과도하게 부풀리는 것도 많았잖아요. 거기에 대해 반작용이 나온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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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Justin
그런 지점만 담백하게 풀어냈으면 나았을 텐데 그랬으면 지금 같은 관심은 못 받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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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산
공유해도 될까요? 리뷰 글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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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김호산 네.. 뭐 다들 하시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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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산
이영훈을 어느정도나마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봐야하는 건 그의 박사논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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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김은산 제가 집에 가서 논문 몇 개 보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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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산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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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un Bak
손민석 혹시 저도 받을 수 있을까요? 예전에 세종은 성군인가 관련해서 쓴 민석님 글 읽고 조선 후기에 대한 이영훈 교수의 논문 몇 편 찾아 읽어봤는데 이것만으로는 좀 이영훈 교수가 생각하는 전체적인 한국근대사가 잘 안그려지는 것 같아서요. 조선후기사회경제사도 헌책방에서 겨우 구했지만 한문독해력과 역사적 배경지식이 부족해 읽질 못하고 있네요 쩝...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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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박세준 네 제가 그나마 알기 쉬운 연구들로 찾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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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Heo
이책 지금 읽고잇어요
그 사고의 편협함에 놀라고
왜 이런 어거지를펴는지 진짜 이유가 궁금해지더라구요
이글 공유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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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ktae Oh
백두산? 샤머니즘? 토지기맥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혼란스럽네요. 이영훈 교수 말년에 학자로서는 정말 큰 실수를 하신 것 같습니다. 베스트셀러 저자로 등극하시기는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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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재
...물질주의가 '옆민족을 거짓으로 배척하여 자기민족내에서 돈과명성을 얻는다'의 근거로 사용되는 것부터 혼란한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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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
말년에 혼이 비정상이 되셔서 우주로 가버리셨네요. 토지기맥론 샤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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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주영 박근혜 따라가시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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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houn Tom Song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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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ghoon Cho
2시간에 200여 페이지의 독서량이면 상당한 거 아닌가요? 이 분야에 지식이 많이 쌓여있나봐요. 저도 근일 시간을 만들어서 찾아 읽어봐야 할 것 같아요. 재미있는 내용이 많은 것 같아요. 그때 댓글 한번 올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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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Sunghoon Cho 내용상으로 제게 별로 새로운 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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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우익들은 홍준표만 믿고 가라.
No photo description avail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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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중
손민석 그저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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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제발 누가 내가 잘못 읽었다고 제대로 이해하라고 납득할 수 있게 비판해줬으면 좋겠다.

 · Reply · 47 w
Moohoun Tom Song
이 책은 비판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히는 연구물로서 인정받기 어렵습니다.
학문적 연구물, 과학적 연구 저적물이 되기 위해서는 연구 방법의 엄격함이 요구된다는 건 다 아실텐요. 그 부분에 있어 요건을 상실하고 있는 부분이 한 두군데가 아닙니다.
손 선생님께서는 그 논리 부분을 엄격하게 반박해 주셨지만, 이영훈이 자랑하는 통계에 기반한 실증 분석도 그 수치의 왜곡 및 유리한 수자만 취사선택 (이것도 왜곡입니다) 하거나, 수자의 의미를 오역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물론 많은 내용을 다루다 보니 본인 연구의 빛나는 부분도 섞여 있지요. 하지만 진실한 연구는 100%의 진실로 구성되어야합니다; 본인이 알던 모르던 간에요. 하물며 의도적 조작이 들어간 저작물을 과학으로서 학문의 대상으로 봐 줄 수 없지요. 그래서 저는 <반일 종족주의>가 학문적 비판의 대상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영훈에 쏟아지는 관심은 과분하며, 애너지의 낭비입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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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규
한국은 자유로운 개인만이 있어서 오히려 문제인데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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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선생님이 말하시는 '자유'가 뭔가요?
 · Reply · 47 w
이장규
손민석 흠, 그렇게 물어보시니 이야기가 길어질 듯 ㅠ.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경제적 합리성에 기초한 자유라는 서구의 근대적 인간관이라면 그건 지금의 한국에선 이영훈 선생의 주장처럼 없다기보다는 오히려 서구보다도 더 많은 측면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하구요.
 · Reply · 47 w
손민석
이장규 이영훈 선생은 단순히 자유로운 개인을 ‘경제적 합리성’에만 기초하여 사고하지 않습니다. 그가 문제시하는 것은 개인을 개인으로 만드는 합리적인 공동체의 부재가 한국사회에 큰 문제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며, 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매몰된 개인들을 묶는 틀로써 민족주의가 이용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고 이런 책을 쓰는 것입니다. 그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위에서 말했듯이 저는 동의할 수 없지만 문제의식에서는 공감하는 바가 있지요. 단순히 개인만 있다고 개인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개인을 개인으로 만드는 조건들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건 중요하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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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규
아, 저도 이영훈 선생의 문제의식이 무의미하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다만 저는 개인을 묶는 틀로써의 민족주의라는 게 과연 현재의 한국사회에서 이영훈 선생이 생각하듯이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는가에 대해, 근거가 부족하다고 보는 것이지요. 저는 한국에선 오히려, 자본만이 아니라 각자의 개인조차 주어진 조건 하에서의 경제적 합리성 내지 개인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민족이나 국가를 이용하는 측면이 강하다고 보는 쪽이라서요. 소농 중심의 관료제 사회 및 이후의 국가주도 자본주의 고도성장에 대한 오랜 적응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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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이장규 결국 크게 다르지 않은 말입니다. 선생님 말씀도 개인이 민족주의가 아니고서는 이해관계를 관철시킬 수단이 없다는 말이니까요. 비슷한 지점이 있는데 첫 댓글처럼 말씀하실 건 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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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규
ㅎㅎ 그런가요. 저는 접근의 방향이 좀 다르다고 보고, 이영훈 선생의 이번 책은 애초의 접근 방향이 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인데, 여기서 얘기하려면 너무 길어질듯. 추후 얘기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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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이장규 이영훈 선생의 이번 책은 글에서 썼듯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ㅠ 아무튼 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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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Justin
이장규 민족주의를 통해 개인이 어떤 이해관계를 관철시킬 수 있는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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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규
어떤 경제적 이해관계도 순수한 개인으로서는 제대로 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사실은 그래서 완전히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이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이해관계를 조직하는 방식으로 제시된 것이 민족이나 국가(우익의 방식)이거나 계급(좌익의 방식)이지요. 그런데 한국에선 여러가지 요인으로 인해 계급을 통한 방식이 극히 어려웠고, 이런 조건 하에서 개인은 민족 내지 국가를 통한 성장의 과실을 일부라도 나눠먹는 방식을 택한 것이지요. 다만 그게 민족이나 국가에 무슨 숭고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이거나 이영훈 선생이 주장하듯이 종족주의적 사고가 강해서 그런 건 결코 아니지요. 저는 그래서 민족주의 비판이든 옹호든 둘 다 핵심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문제는 개인의 이해관계를 조직할 계급적 방식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그게 안 될 경우 민족주의나 종족주의라서가 아니라 그게 개인의 이익에 더 낫다고 생각하기에 민족이나 국가를 활용하려는 시도는 사라지지 않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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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규
쓰고보니 질문자의 의도를 잘못 캐치한 것 같기도 하네요. 혹시, 민족주의가 오히려 한국인 개개인이 각자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데 역효과라는 주장이신가요? 그렇다면 저는 그건 사실은 각자의 위치에 따라 다르거니와 (자본도 단일한 것이 아니니까요), 실제의 속내용이 어떠했든 한국의 그간의 경험은 개인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추구하기 위해서라도 민족 내지 국가 단위의 고도성장이 중요하다는 경험을 대중적으로 각인시켰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사실은 국제적 분업…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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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준
오오카 쇼헤이의 자전적소설 포로기만 봐도 탈주병들에 대해 저런식으로 못씁니다(그는 탈주는 하지 않았지만 미군에 투항한 포로출신) 임정탈주 학병은 쇼헤이 식으로 이야기하면 사상적 투항자입니다. 웬만한 용기나 생각없이는 불가능한걸루요(소설 표현 빌리면 손들고 나갔는데 잡았다 요놈하고 사살하면 어쩨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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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이 원준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생각해도 그것도 굉장히 큰 목숨을 걸고 하는 행위인데 정안기씨는 마치 그게 병영에 적응하지 못해 선택한 것처럼 말하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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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in Kang
이쯤되면 차라리 이영훈 선생이 쓴 것들 중에서 일반인들에게 읽어보라고 권할 만한 책들 추려 주셔야겠는데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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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in Kang
이런 리뷰 정말 소중합니다 페북판에 거의 없어요...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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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강한진 저는 다소 당혹감을 감추기 어려운 상태라.. 정리를 할 수는 당분간 없을 것 같습니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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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관
좋은 글 잘 읽고갑니다. 공유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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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 Yi
이영훈 교수의 최대 망작이자 그가 이루어 놓은 학술적 성과 모두를 개똥으로 만들 단 한권의 책이죠. 같이 딸려 들어가 있는 김낙년 교수가 불쌍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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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ktae Oh
'종족주의' 개념이 혼란스러운 것은 분명합니다. 동아일보 김순덕 기자가 '미국에서도 종족주의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파괴한다며 비판했다'고 하는데, 여기 나오는 tribalism은 사실 국내정치적인 개념, '소집단주의' 내지 'parochialism'에 가깝다고 봅니다. 김순덕 기자가 말하는 '전체주의적 우려'가 있는 사상은 차라리 민족주의, 내셔널리즘이라는 전통적 개념으로 표현하는 게 맞을 텐데요...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0&aid=0003234752
[김순덕의 도발]조국의 반일 종족주의
NEWS.NAVER.COM
[김순덕의 도발]조국의 반일 종족주의
[김순덕의 도발]조국의 반일 종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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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형
김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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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승
굳이 읽어볼 필요 없을 것 같아ㅋㅋ어떤 책인지 결이 잡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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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승
리뷰 태그 ㄱㅅ 아직 페북 안죽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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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형
권도현 한 번 읽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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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욱
이영훈교수의 반일종족주의에 아직 읽지 못했는데 읽게 되면 많은 참고가 되겠군요. 비판을 하더라도 이런 학술적 이성적 접근이 훨씬 설득력이 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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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성
요 며칠간 이분 이름을 많이 본거같네요. 처음 듣는 분인데 궁금하긴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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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종서
에효~~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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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ong Yunseok
여기 핫플 됐네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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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ohyun Choi
책 리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리뷰를 읽고 나니.. 책을 읽어볼까? 하는 생각은 사라졌습니다. 글 쓰기 까지 힘들게 읽었을덴데.. 고생하셨습니다. 이 글 말고 읽고 싶은 글이 많아 팔로우 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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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조
손선생의 글을 읽고 이영훈의 이상한 책 '반일종족주의'책을 읽어 보려다가 포기했습니다.
미리 읽어 봤으면 시간 낭비
할뻔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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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02

야스쿠니, 잠들지 못하는 조선인 영령들을 위한 책,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야스쿠니, 잠들지 못하는 조선인 영령들을 위한 책,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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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 잠들지 못하는 조선인 영령들을 위한 책,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구천을 떠도는 조선인 영령들의 귀향은 우리안의 식민주의를 청산하는 마중물 ... 휴머니스트 구로다 후쿠미의 신념과 용기에 박수보내지 않을 수 없어
정안기 mediasilkhj@gmail.com
등록 2018.11.04 20:28:02

일본의 국민배우이자, 대표적인 친한파 연예인으로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구로다 후쿠미(黑田福美). 그녀의 저서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도서출판 장수하늘소/타임라인)가 한국에 번역 출간됐다.


원제가 ‘꿈의 전후, 귀향기원비와 나 (夢のあとさき, 帰郷祈願碑とわたし)’인 이 책은 오늘의 대한민국 사회를 사는 한국인들의 양심과 눈물샘을 자극하는 지극한 휴머니즘의 기록이다. 참으로 근자에 보기드문 양서의 출간이 아닌가 싶다.





▲ 경남 사천 출신의 조선인으로 태어나 결국 일본군 카미카제로 산화할 수 밖에 없었던 20대 청년 탁경현. 국적이나 이념에 대해선 어떤 확신도 가질 수도 없었을 앳된 나이의 청년이 낯선 땅에서 숨져야 했던 극적인 비극성에 구로다 후쿠미를 비롯 많은 일본인들이 안타까워 했으며 이에 탁경현 귀향 운동이 추진되었다.


필자는 책장을 넘기면서 산자와 죽은자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다룬 “사랑과 영혼(Ghost)”이라는 오래 전 대학 시절에 관람했던 영화를 추억하게 되었고, ‘살아서는 갖지 못하는 그런 이름 하나 때문에…’로 시작하는 국민가수 장윤정이 불렀던 ‘초혼(招魂)’과도 오버랩되는 각별한 감동과 울림을 체험하였다.


한편으로, 이 책은 ‘한국인! 당신들은 누구인가’ 하는 가시와도 같은 질문과 함께 청산하지 못한 우리안의 식민주의에 대해 성찰을 촉구하는 착잡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현재 일본의 심장부 도쿄 한복판에는 한국 사회에서는 그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가 위치한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잘 모르고 있지만 야스쿠니에는 일본인만이 아니라 조선인(한국인) 군인·군속 2만 2,182명(군인 6,178명과 군속 1만 6,004명)의 혼령이 합사되어 있다.


이 책은 그 가운데 경남 사천에서 출생한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이었던 탁경현 씨와 저자와의 영적인 인연과 현실의 인연을 다루고 있다. 탁경현은 1945년 5월 오키나와 전장에서 빗발치는 미군의 함포사격에서도 가미가제(神風)의 조종간을 놓지 않았던 조선인이었다.

저자는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게 된 일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 이름으로 죽는 것은 유감이며 죽어서라도 고향 땅에 묻히고 싶다”는, 저자의 꿈에 나타난 탁경현의 하소연과 소망에 감응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앞서 장윤정의 명곡 초혼의 노랫말처럼 어쩌면 그냥 스치듯 지나칠 수 있는 인연이었다. 그럼에도 저자는 한 조선인 영혼의 귀향을 위해 헌신했던 꿈밖에서의 지난날의 고군분투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 동안 야스쿠니의 조선인 혼령들은 민족을 배신하고 일본과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친 매국노, 친일파에 불과하다는 식, 황당한 이유가 들먹여지면서 유가족은 물론이고 동족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해 왔다. 그래서 저자는 영혼의 귀향마저 거부당한 채 이승과 저승을 떠도는 이 불쌍한 영혼들에 대한 절절한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분명한 것은 탁경현과 같은 2만 2,182명의 조선인이 나서지 않았다면, 또 다른 조선인 청년들이 이들을 대신해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으리라는 것이다. 20세기 제국주의라는 구조적 강제성을 고려하면, 이들은 일본과 천황을 위해서가 아니라 실제로는 부모 형제와 이웃을 위해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국적, 이념에 대해서 어떤 특별한 인식이 있었다기보다 단지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한 개인으로서 그러한 선택을 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스물 갓 넘은 조선인 청년들의 선택을 두고 매국노와 친일파로 몰아세우고, 영혼의 귀향마저 거부하는 것은 오만함과 몰지각함으로 가득한 한국사회의 또 다른 자화상이다. 당시 일본군 징병 1기였던 우수용 옹의 반론처럼 이 청년들은 어리석었을지는 몰라도 결코 사악하지는 않았다.











이 책의 메시지는 너무나 간단하다. 아시아태평양 전쟁기를 살아남아서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인 혹은 그 후손이 감당해야 하는 최소한 인간적 도리와 책무는 아직도 먼 이국 땅 야스쿠니에서 잠들지 못하는 불쌍한 조선인 영혼들의 유패를 회수해서 고향땅에 정중히 배향하고 진혼하는 일이다.


구천을 떠도는 조선인 영령들의 귀향은 우리안의 식민주의를 청산하는 마중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반일강박관념의 사회적 병리에 신음하는 사회 현실을 고려하면, 과연 한국사회에 그럴만한 용기, 양심, 의지가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오늘의 한국인들은 ‘반일이라는 울타리에 갇힌 양떼’와도 같다”는 저자의 지적은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움이 있다. 한국사회 일반적 통념과 달리 집단적 자기성찰을 결여한 역사청산은 단지 제삿밥이나 탐하는 탐욕에 찬 공염불에 불과하다고 들리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읽어가면서 한국인 우리들은 과연 누구이며, 어디를 향하는가를 자문하게 되었다. 이 같은 감상은 아마도 필자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회가 닿는다면, ‘그래서 우리도 포기하지 않는다’고 저자에게 말해주고 싶다.


/ 정안기(경제학 박사 · 서울대학교 객원연구원)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원제 : 꿈의 전후, 귀향기원비와 나 (夢のあとさき, 帰郷祈願碑とわたし)

[ 목 차 ]

한국어판 서문 _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프롤로그 _ 반일反日의 표적이 된 위령비
조선인 병사를 떠올린다 / 이런 꿈을 꾸었다 / 묘한 꿈은 이어지고 있었다 / 왜 ‘자위대’라고 했을까?

01 _ 두 개의 이름, 미쓰야마 후미히로(光山文博)와 탁경현卓庚鉉
‘혐한嫌韓’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 처음 찾아간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 / ‘그 꿈’을 신문에 발표하다 / 일명 미쓰야마 후미히로, 탁경현은 누구인가? / ‘특공의 어머니’ 도리하마 도메를 다룬 텔레비전 프로그램 / 부산으로, 친척들과의 대면 / 예전에 있었던 ‘탁경현 현창비顯彰碑’ 건립 움직임 / 탁경현의 고향을 찾아가자!

02 _ 지란, 오키나와에 세워졌던 조선인 특공병 위령비
아카바 레이꼬(赤羽?子) 씨와의 대화① ― 꿈속의 청년 / 아카바 레이꼬 씨와의 대화② ― 청년의 참모습 / 아카바 레이꼬 씨와의 대화③ ― 청년의 최후 / 위령제와 ‘나데시코대隊’ / 나만이 아니었던 ‘꿈’ 이야기 / 해마다 열리는 지란 특공기지 전몰자 위령제 / 소녀들의 환영幻影 / 오키나와로① ― 첫 번째 목적, 평화의 초석 / 오키나와로② ― 두 번째 목적, 하얀 산호 조각

03 _ 한국에서 만난 탁씨 일족의 수수께끼
서울에서 살다① ―『서울의 달인』 최신판 / 서울에서 살다② ― H선생과의 만남 / 서울에서 살다③ ― 피부로 느끼는 한국 / 서울에서 사는 탁씨의 본가本家 사람 / 탁성룡 씨와의 대면 / 석비 건립 장소를 발견?

04 _ 학적부에서 발견한 또 하나의 이름 ‘다카다 현수(高田賢守)’
2천만 원의 땅값!? / 리쓰메이칸 중학 시절, 제3의 이름 / 교토 약학전문학교 시절, 조기 졸업 / 미쓰야마 일가가 살던 교토를 거닐다 /
마음에 스미는 메일

05 _ 석비 비문을 에워싼 갈등
부지敷地를 구하느라 벌인 행각 / ‘친일파’로 여겨지지 않도록 / 손자에게 이어진 레이꼬 씨의 꿈 / 제공받은 조그만 부지를 앞에 두고 / 꼬리를 물고 생겨나는 석비의 과제 / 장부 대신 은행 계좌를 개설 / 일본에서의 평가

06 _ 이야기가 거대해져 가는 한국판 ‘평화의 초석’
‘귀향 기념비’ 투어를 결정 / 사천시장의 등장 / 한국 미디어의 호의적인 보도 / 석비 디자인은 권위 있는 조각가의 손에 / 지란과 사천의 불가사의한 인연 / 팸플릿 준비도 완료 / 석비에 관심을 기울여 준 군인 출신 한국인들 / H선생의 허풍 / 「평화의 초석 건립 시안」이란?

07 _ ‘한일 우호의 가교’에 떠돌기 시작하는 먹구름
2백 평에서 3천 평, 그리고… / 비판의 목소리 / 팸플릿 배포 중지 / 단 세 글자 ‘위해서’로 인해 / 꽁무니를 빼는 한국관광공사 / 석비의 운명은 어떻게? / 수수께끼 같은 토목업자의 교란攪亂 / 격앙된 K교수와의 대결

08 _ 반일 단체의 함성으로 저지된 제막식
최악의 각오를 한 제막식 전야 / 백지철회를 선언한 당국 / ‘반일’ 딱지 붙이기의 위력 / 참석을 고사한 한국의 대학 교수 / 반대파와의 대치, 진보연대와 광복회 / 임시 모면의 사정 설명회 / “즉각 돌아가라!” / 우리만의 제막식 / ‘반일’은 ‘비단 깃발’? / 설마 했던 철거 / 시민 부재不在의 ‘시민 감정’ / 사천시내의 절에 드러누운 석비 / ‘반일’이라는 울타리 안의 슬픔을 보다

09 _ 철거된 석비를 재건할 땅을 찾아서
10엔짜리 동전 크기의 탈모를 발견? / 불구덩이 속의 밤을 주워준 법륜사法輪寺의 자애 / 사천시에 대한 마지막 주장 / 진심을 담아 새로운 비문을 썼다 / 엄숙하게 거행된 의식과 함께 재건이 이뤄지다 / H선생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다 / 뜻밖의 선물

10 _ 광복회 관계자를 상대로 흘린 뜨거운 눈물
씨알도 먹혀들지 않는 광복회 간부 / 빈손으로 발걸음 돌린 광복회 본부 방문 / 한층 두드러지지 않는 곳으로 / 또 다시 넘어진 석비 / 사욕私慾을 넘어서 / 번져가는 공감의 테두리 / 언젠가 석비가 세워질 그날까지

에필로그 _ ‘진실을 말해줄 사람’이 없어지기 전에
미래를 향한 생각① / 미래를 향한 생각② / ‘진실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어진다!’는 안타까움의 수기 / 우 옹과 귀향기원비 / 어느 조선인 병사의 유족과 야스쿠니신사

개정판 후일담 _ 법륜사와 더불어 걸어가련다
사천으로부터 10년째의 법요 / ‘전통 사찰’ 지정이라는 반가운 소식 / 손님으로 온 공군 병사들

후기 _ 지혜와 용기로 한일의 상극을 넘어서고 싶다

해설 _ 구로다 후쿠미는 왜 배신당했나? - 구로다 가쓰히로(黑田勝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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