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with label 다만버.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다만버. Show all posts

2026-01-21

일진회는 일본의 조종을 당하는 괴뢰 단체였는가? '한국인의 탄생' 최정운 헨더슨

일진회는 일본의 조종을 당하는 괴뢰 단체였는가? : 네이버 블로그

일진회는 일본의 조종을 당하는 괴뢰 단체였는가? 비이성적 반일감정 관련 글들

2013. 11. 21. 20:47

https://blog.naver.com/athina/40201270045


일진회는 조선 정부에 의해 처절하게 살육당한 동학의 잔당들이 자신들을 도륙한 조선 왕조의 멸망을 위해 작심하고 세운 반역집단이자, 만인이 만인에 대해 투쟁하는 식의 처참한 도탄에 빠진 조선에 홉스적 사회계약을 외세의 힘을 빌어 도입하려 했던 자들이라는 흥미로운 주장을 읽었다.

흔히 일제의 괴뢰 단체 쯤으로 그 의미가 축소되어 온 일진회는 사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능가하는 구한말 최대 규모의 정치적 에너지였으며 전성기에는 자발적으로 회비를 내는 회원만 십수만, 강연회 등에는 100여만이 열렬히 따라다녔고, 이들은 그 처절한 무능함과 전제적 잔인함으로 '홉스적 자연상태(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초래하여 조선의 천하창생을 어육으로 만든 조선 왕조를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일본이라는 새로운 권력을 초빙하여 일본의 힘에 의한 '홉스적 사회계약'을 도입하여 천하창생을 구원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들의 의도는 조선 침략을 내심 꿈꾸던 흑룡회의 우치다 료헤이마저 경악시켜 흑룡회 간부들은 일진회의 취지를 들었을 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여러 번 확인하기까지 했으며, 일진회는 이처럼 자생적인 거대한 정치 운동이었지 결코 괴뢰 단체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한편 조선은 도저히 살 수가 없는 최악의 나라이니, 이러한 나라를 팔아먹더라도 근대적 사회계약을 도입하겠다는 일진회의 활동은 다수의 조선인에게 자아정체성과 민족의식을 각성시켜 '조선 민족'이라는 민족의식을 역사상 처음으로 불러일으켰으며 이는 후일 일본 통치에의 협조를 바탕으로 하는 계몽적, 사회계약적 민족주의와 일본을 타도하고 독립을 추구하는 신채호로 대표되는 저항적 민족주의로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이 갈라지는 기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탄생' (최정운, 미지북스, 2013년 10월) 이란 이 흥미로운 책은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최정운 교수가 저자이다. '오월의 사회과학(오월의봄)'이란 명저(읽어보지는 못했으나)로 이름이 알려진 분이라 한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0&aid=0002482710

최정운 교수에 대해서는 위의 기사 링크 참조.

해당 책의 일진회 관련 부분 본문을 소개한다.





[반역 집단 일진회

당시 대한제국의 '홉스적 자연상태'에서 일부 사람들에 의해 해법으로 제기된 '홉스적 사회계약'의 발상은 1904년 러일 전쟁 와중에 일진회와 진보회로 구체화되었다. 당시 신문에서나 많은 지식인들은 이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일진회와 진보회란 실제로는 괴로운 자연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이웃나라 일본의 천황의 주권을 들여와서, 또는 일본의 정복을 초대하여 도탄에 빠져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는 조선 백성을 구해야 한다는 이성에 근거한 사회계약적 발상의 정치적 표현이었다.

일진회와 진보회는 처음부터 반역 음모 집단이었다(저자 주: 문유미에 따르면 일진회는 대한제국의 흥망에는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Moon 2005;2) 그러나 필자는 처음부터 일진회의 핵심 집단은 대한제국의 멸망을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일진회의 핵심적인 집단은 '동학 잔당'이었음은 알려진 일이었다(저자 주 : 일진회와 진보회는 1904년 말에 합병하였지만 여전히 독자적인 활동을 유지하고 있었다. 실제로 동학 잔당들은 이용구가 처음에 만들었던 진보회 쪽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일진회와 진보회를 구별하지 않고 일진회로 통일해서 논할 것이다.).

그들은 동료 동학도들을 수도 없이 학살했던 조선 정부에 대한 복수를 노리는 집단이었고 그들의 목표는 조선의 멸망이었다. 1904년 말부터 그들은 전국적으로 '단발회'라는 행사 등 구경거리를 만들어 시위를 하며 전국을 누볐다. 그들의 빡빡 깎은 머리와 검은 옷은 '반 조선'의 상징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이 운동을 일러 '갑진개혁운동'이라고 했다. 그들은 1905년 11월 5일에는 대한제국은 일본에 외교권을 위임해야 한다는 '선언서'를 발표하여 마각을 여지없이 드러냈다(저자 주 : 이즈음에 일진회의 윤시병, 송병준 등이 선언서를 게시하였는데 그 대의는 "우리나라는 멸망할 징조가 이미 나타나고 있으므로 공사 간의 대소인이 모두 일본의 명을 따라야 한다."라고 하였다 한다.(황현)).

알려진 바에 따르면 회원 비표를 갖고 다니며 회비를 납부하는 정식 회원만 14만 명이 넘었고, 주변에서 일진회의 시위에 합류하고 박수치고 성원하며 쫓아다니는 사람들의 수는 1백만 명을 헤아렸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핵심의 동학 잔당을 제외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홉스적 사회계약에 참여하여 조선 백성을 위해 일본의 국가권력을 모셔와야 한다고 판단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1905년 의정부찬정이던 최익현은 여러 차례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고종은 허락하지 않았고 고종은 그를 불러 대화를 청했다. 그 자리에서 최익현은 당시 최대의 현안이던 일진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 백성들이 스스로 달갑게 외국 사람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것은 본디 미련하고 완고해서입니다. 하지만 참으로 그 근원을 따져보면 관리들이 탐욕을 부리고 포악하게 굴어 민심을 잃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본성을 잃고 이 지경에 이르게 만든 것입니다."

일진회의 정체에 특별한 비밀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우매했던 우리 민족의 일부였다. 백성들이 견디기 어려운 관리들의 착취는 이미 오래된 일이었지만 사회 자체가 분해된 자연상태의 고통은 더욱 입체적이었으며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각별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초기에 대부분의 언론은 일진회에 대해 혼란에 휩싸인 상황이었다. 일진회의 공식적 목적은 대한제국 황실에 충성한다는 것이었지만, 일본 군대가 그들의 모임을 조선 군대의 탄압으로부터 보호해주고 있었다. 그들의 일관되지 않은 행동은 사실 처음부터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를 의도적으로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공식적인 주 활동은 독립협회의 후신으로서 연설회, 대중집회를 통한 대한제국의 개혁 운동이었고 이는 당시 현실에서 강한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당시 현실에서 이런 운동이 나타났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보였다. '제국신문'은 1904년 9월 30일 일진회 창설에 대해 논설을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중략)

처음부터 이용구, 송병준 등이 이끄는 일진회는 그들 내부에서 이해하기로 반역 집단이라는 점이 명백했을 것이다. 1906년 천도교를 창건한 손병희가 이용구를 비롯한 60여 명을 출교시켰을 때 공식적인 명분은 그들은 조선에 복수를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핵심부는 복수를 원하는 동학 잔당이었고, 목표는 일본의 정복을 초청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목표 아래 일본군의 보호를 받으며 독립협회가 개발한 연설회, 시위 운동과 여러 구경거리 등을 통해 대중을 동원하는 전략을 구했던 것이다.

(중략)

당시에 독립협회의 뒤를 이어 개혁 운동을 다시 벌인다는 이들의 공식적인 명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이들이 시도한 것은 독립협회의 운동보다 훨씬 강력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독창적인 조세저항 운동을 벌였고 이는 엄청난 지지를 받았다(저자 주 : 문유미는 일진회의 조세저항 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하였다. (Moon 2005). 그들은 처음부터 일본군의 보호를 받은 이상 대한제국의 자의적인 폭압에서 자유로웠고 그만큼 더 큰 것을 처음부터 원했던 것이다.

당시 '이 지옥 같은 나라'라는 표현이 누구나 수긍하는 말이었다면, 그 나라를 멸하는 것은 동서고금의 명분에 타당한 일이었다.

(중략)

우찌다 료헤이를 비롯한 일본의 흑룡회 간부들이 일진회의 취지를 들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조선 내에서 일본을 도와줄 세력을 기대하긴 했지만 막상 나라를 통째로 갖다 바치겠다는 말을 듣고서 말 그대로 믿을 수가 없어 여러 차례 확인 절차를 반복해야 했다(저자 주 : 문유미는 일진회의 포퓰리스트적 성격을 강조한다(Moon 2005). 나아가서 일진회를 이끌던 지식인 계층은 대부분 겸인 계층 즉 실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급 관리로의 진출이 막혀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를 테면 쁘띠 부르주아 계층이 상당수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다(김종준 2005).

(중략)

1904년 가을부터 부각된 일진회 운동은 사회 구성원들에게 집단적 정체성의 문제를 생각하도록 강하게 자극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모든 언동과 활동은 '한국'과 '일본'의 다름을 드러냈고 그들의 운동은 수많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였다. 사람들이 불쾌하게 느낀 이유는 바로 그들의 가슴속 깊은 곳에는 양심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는 역사적, 문화적 정체 즉 '조선 사람'이라는 낙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략)

그리고 이렇게 구석에 몰린 일진회는 1910년 9월 병합 후 한 달 만에 총독부가 해산 명령을 내리자 흔적도 없이 피 한 방울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 역사의 기억에서 지워져 버렸다. 민족과 일제에게 철저히 버림받은 이용구는 곧 화병으로 죽고 말았다.



일진회 회원들은 이성과 이해로 판단하였다. 그들에게 국가의 문제는 이성적 판단의 문제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간 우리의 의식, 역사적, 문화적 정체성 아래 침잠해 있던 '의(義)'가 어느 순간 일깨워지자 그것은 순식간에 이성의 판단을 뒤엎었고 그 결정은 돌이킬 수 없었다. 우리 정체의 '의'는 나라가 망했어도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서 살아있었다. 현대 우리의 정체의 틀, '한민족'임은 구한말 우리가 처했던 고난의 자연상태에서 우리의 '조선 사람'임을 '부정 negation'했던 홉스적 사회계약을 다시 '부정'하는 이중 부정의 고통스런 변증법을 겪고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그리고 우리의 민족주의 역사에서 3.1 운동이 위대한 역사인 것은 3.1 운동을 계기로 수많은 사람들이 용서받고 우리 민족으로 재결합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략)

'홉스적 자연상태'라고 제시한 구한말의 마지막 십 년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최악의 시대였다. 그리고 그 시대를 살던 우리 조상들 -필자로 따지면 할아버지 세대-의 고초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가난과 배고픔 뿐만 아니라 쓰라린 가슴의 상처를 수없이 입으며, 번민하고, 가책하고, 원망하고, 후회하던, 그러고도 자신이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도 확신할 수 없었던 그런 삶이었을 것이다. 살기 위해서 누군가에게 해가 되는 줄 알면서도 하지 않을 수 없는 일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1909년 12월 초 이용구는 전에 은밀히 기초했던 '한일합방서'를 일진회 회원들 앞에서 공개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국민 이천만 명의 눈앞에 위급한 상황은 과연 어떠합니까? 살려고 해도 살 수 없으며 죽으려고 해도 죽을 수 없습니다. 노예처럼 희생(제물로 쓰이는 짐슴)처럼 비참한 지경에 빠져버린 오늘에 처하여 장래를 생각한다면 어찌 앞길이 막막하며 아침햇살이 희미해지는... (중략)"

지금도 이 글을 읽으면 콧날이 시큰해 옴을 느낀다. 이렇게 말하고는 대한제국을 빨리 끝내고 -일제에 넘기지 않고 새 나라를 세웠더라면 우리가 이 역사를 대하는 마음은 한결 가벼웠을 것이다. 한일병합 한 달 후 조선 총독이 일진회의 해산을 명하자 일진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중략)

조선 땅이 사람이 살 만한 곳이었다면 김두수(소설 '토지'에 등장하는 악질 친일파)도 이용구도 송병준도 그렇게 비참한 존재로 추락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더 많은 애국자가 나왔을 것이다. 이런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시대에 그토록 많던 친일파를 용서까지는 못해 주어도 이해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어차피 우리 민족의 아종인 것이다.

(중략)

일진회는 우리 역사에서 그간 아무도 말해서는 안 되는 '금단'의 주제였다. 우리 역사의 가장 수치스런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일진회에 대한 연구는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근무하던 미국인 그레고리 헨더슨에 의해 1968년에야 '소용돌이의 한국정치(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라는 제목으로 처음 발표되었다. 이 저작은 우리 학계에서 높이 평가되었지만 전혀 대학에서 진지하게 연구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이 책의 주장을 당시 우리 학계가 소화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2000년에야 우리 말로 번역되었다.
1970년대에는 일진회는 당시에 일본의 공작과 지원에 의해서 만들어졌던 괴뢰 단체로 제시되었고 이 주장이 정론으로 자리잡았다. 우리 역사가 아니라 일본의 역사라는 식이었다. 그러고는 2005년 문유미가 미국의 하버드대학교에 일진회 연구로 박사 논문을 제출할 때까지 일진회에 대해서는 아무도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그리고 2010년에야 김종준이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을 발전시켜 저서를 출판하였다.

헨더슨의 문제는 자신이 한국에서 근무하던 당시의 한국 정치의 특징을 소용돌이가 일시에 형성되어 몰아치는 것과 같다고 파악하고 한국 정치를 그러한 역사적 틀에서 연구했다는 점이다.
그는 우리 역사에서 나타났던 무시무시한 정치의 소용돌이의 전형적인 한 예는 구한말 최대의 정치 운동이었던 일진회 운동이었으며 이는 우리가 생가해 온 것보다 훨씬 대규모의 운동이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 시대 역사를 들어야본 사람이라면 일진회라는 엄청난 존재를 도저히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헨더슨에 따르면 그러한 대규모 운동, 소용돌이와 같은 한국의 정치는 중앙집권적 정치구조, 동질성이 강하지만 응집성이 없는 고도로 개인화된 '원자화된 사회', 그리고 매개 집단의 결여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 패턴은 구한말 뿐만 아니라 조선 초에서부터 일제 시대를 지나 해방 이후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착각한 부분은... (중략)

필자의 판단에 구한말에 우리에게 닥친 홉스적 자연상태는 쉽게 해소되지 않았고 적어도 70년 후인 1970년대까지 해소되지 않았다. 실로 깊고 고통스러운 ,오래 가는 상처였다.]



이상 해당 책의 일진회 관련 부분을 소개하였다. 최정운 교수의 견해에 깊이 공감하는 바이다.
태그#일진회#이용구#매국노#홉스적자연상태
댓글 11 이 글에 댓글 단 블로거 열고 닫기
블로그 보내기카페 보내기Keep 보내기메모 보내기기타 보내기 펼치기

인쇄


[출처] 일진회는 일본의 조종을 당하는 괴뢰 단체였는가? |작성자 다만버

유태설이라는 한 '친일파'의 일제시대 행각

유태설이라는 한 '친일파'의 일제시대 행각 : 네이버 블로그

유태설이라는 한 '친일파'의 일제시대 행각 비이성적 반일감정 관련 글들

2013. 11. 8. 

https://blog.naver.com/athina/40200453628

이 인물은 일제시대에 있었다는 '자력갱생운동(총독부에서 농촌 진흥을 위해 장려한 관제 운동)' 관련한 기사에서 처음 이름을 보았다.




이 1936년 기사를 보면, 함경남도 도회의 도의원인 유태설은 지난 수년 동안 총독부에서 농촌진흥운동과 자력갱생운동을 열렬히 부르짖는데도 해마다 자낙농이 몰락하고 소작농이 증가하는 것에 대해 사사키 내무무장이라는 총독부 관료에게 따져 묻고, 사사키가 이는 부득이한 현상이라 일축하자 성의없는 답변을 한다고 분격하여 설전을 벌였다고 한다. 
흡사 대한민국 국회의 국감현장을 연상시키는 모습이다.

이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궁금하여 검색을 해 보니...

http://ko.wikipedia.org/wiki/%EC%9C%A0%ED%83%9C%EC%84%A4 (유태설)

유태설은 1890년에 태어나 1914년에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하여 10여년 간 판사를 역임 후 1926년에 퇴직하여 함흥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여 활동하였다. 함흥부회 의원과 함경남도 도회의원을 역임하고 1933년에는 중추원 참의로 발탁되었다. 태평양전쟁 당시에는 조선임전보국단에 가담하였다. 해방 후 반민특위 조사 대상에 올랐으나 도피자로 처리되어 체포되지는 않았고 1968년에 사망하였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704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한일합방 전의 한성법학교가 합방 후 이름이 바뀐 경성전수학교는 1922년에 관립 경성법학전문학교로 승격되고 해방 후 경성제대 법학부와 통합되어 서울대학교 법대의 모태가 된 곳이다. 경성전수학교는 실무 법조인 양성, 경성제대 법학부는 법학 연구를 주 소임으로 하였다고 한다.

일제시대 유태설의 활동을 네이버 라이브러리로 검색해보면 함흥의 유지로 활동하며 지역사회를 위해 상당히 긍정적인 활동을 많이 하였다.

함경남도 도회에서의 활동으로는 흥남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기사에서는 조질회사로 약칭.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의 자회사)가 부전강, 장진강에서 수력 발전으로 생산되는 전기를 염가로 쓰고 있는 것을 통박하며, 이 조질회사로부터 전기료를 더 받아 그 재원을 활용하여 초등학교 입학률이 2할 5푼도 안 되는 비참한 함경남도의 교육을 위한 재정에 활용해야 할 것이 아니냐며 열변을 토한 일이 있다. 실제로 이 열변은 받아들여져서 당국은 일본 내지의 수력 발전된 전기 사용료를 조사하여 조질회사에게 요금을 증수하여 연간 4만원의 함경남도 재원을 확보하게 되었다는 후속 기사가 있다.


또한 함경남도에도 전문학교를 설치해야 한다고 도회에서 열변을 토하였다는 일본어 기사(원산매일신보)가 존재한다.

함흥여자고등보통학교를 설치하기 위한 운동의 중심인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변호사로서는 수리조합, 농업조합 활동을 하다가 고소당한 농민들을 변호하기도 하였고, 태평양노조, 공산주의 청년동맹을 변호하기도 하였다. 또한 순사를 사살한 국민부원(국민부는 1928년에 만주에서 설립된 독립운동 조직)의 변호를 맡아 감형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함흥수리조합 살해사건에서의 변호에서는 이 사건은 일본인 지주가 조선인을 무시하여 함부로 구타하여 생겨난 일로 피고인들은 사건과 무관하므로 무죄를 주장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중추원참의, 함경남도 도회의원을 역임하였으니 유태설이 일제의 통치에 순응하고 협조하였다는 의미에서 '친일파'가 아니라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유태설은 대한제국의 녹을 먹은 인물이 아니라 한일합방 후 총독부의 교육기관에서 법조인으로서의 교육을 받아 판사가 된 인물이니 대한제국에 대한 배신자 혹은 역적이라 볼 수는 없다. 또한 함경남도 도회의원으로서, 변호사로서 함경남도와 함흥 사람들의 인권과 복리를 위해 본인의 입장에서 열심히 노력한 인물임에는 분명하다.


'친일파'라는 딱지야 그렇다 치더라도 과연 이 사람이 '반민족행위자'라는 무시무시한 이름까지 덮어써야 하는 것일까? 일본 비료회사로부터 전기사용료를 증수하여 교육 재정에 활용하게 한 것이나, 일본인 지주 살해 사건에 연류된 조선인을 극력 변호한 사람인데도...

나는 이 사람이 친일파건 아니건 간에 보편적 견지에서 '나쁜 놈' 혹은 '악질'이라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일제시대에 내가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보다 더 훌륭한 인생을 살 자신이 없기도 하다.






































태그#유태설#친일파유태설#도회의원#부회의원#중추원참의
댓글 14 이 글에 댓글 단 블로거 열고 닫기
블로그 보내기카페 보내기Keep 보내기메모 보내기기타 보내기 펼치기

인쇄

[출처] 유태설이라는 한 '친일파'의 일제시대 행각|작성자 다만버


===


유태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유태설
劉泰卨
본명유태설
로마자 표기Yu Tae-seol
출생1890년 2월 19일
사망1968년 12월 1일
국적대한제국 (일제강점기)
경력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직업법조인
활동 기간일제강점기

유태설(劉泰卨, 일본식 이름: 邦本泰卨구나모토 다이세쓰1890년 2월 19일 ~ 1968년 12월 1일)은 일제강점기의 법조인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도 지냈다.

생애

함경남도 북청군 출신으로 1914년에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했다.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 서기 겸 통역생을 거쳐 1916년에 조선총독부 판사로 임명이 되면서 법조인으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공주지방법원 홍성지청 판사, 함흥지방법원 판사, 함흥지방법원 원산지청 판사, 평양복심법원 판사 등을 지낸 뒤 1926년에 퇴직하였다. 이때 종5위에 서위되어 있었으며, 퇴직한 후에는 함흥부에서 변호사를 개업해 활동했다.

함흥부회 의원과 함경남도 도회의원을 역임하는 등 지역 유지로 활동하던 중, 1933년에는 중추원 참의로 발탁되었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조선임전보국단에 가담한 바 있다.[1]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 미군정 지역인 서울로 내려와 있었다. 1949년에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반민특위가 반민피의자를 체포했을 때 조사 대상에 올랐다. 그러나 도피자로 처리되어 체포되지 않았고, 반민특위가 활동을 중단하면서 처벌받지 않았다.

사후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중 중추원 부문에 수록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중추원과 사법 부문에 포함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같이 보기

참고자료

각주

  1.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2004년 12월 27일). 《일제협력단체사전 - 국내 중앙편》. 서울: 민족문제연구소. 395쪽쪽. ISBN 89-953307-2-4.

일제시대 소작농과 구한말 소작농의 평균적 생활.. : 네이버블로그

일제시대 소작농과 구한말 소작농의 평균적 생활.. : 네이버블로그




일제시대 소작농과 구한말 소작농의 평균적 생활 수준 비이성적 반일감정 관련 글들

2014. 1. 20. 22:53



https://blog.naver.com/athina/40204995899







허수열 교수의 이 논문을 참고하면 구한말 소작농과 일제시대 소작농의 생활수준을 짐작하는데 약간의 도움이 될 듯 하다.


http://www.kehs.or.kr/xe/796 (일제하 조선에 있어서 일본인 토지소유규모 추계. 경제사학회 vol. :46 저자 :허수열 발행연월 :2009-06 )


허수열 교수의 이 논문은 2005년 출판된 '개발없는 개발(허수열 저)'에서 본인이 일제시대의 쌀 생산량의 절반 혹은 때에 따라 50% 이상을 일본인들이 점유하고 있었다고 통계치를 제시한 것에 대해, 김낙년 교수가 허수열 교수는 통계치를 완전히 오독하여 일본인 소유 토지가 조선인 소유 토지에 비해 4-5배의 생산성을 보였다는 식의 엉뚱한 결론을 낸 것이라고 서평을 통해 반박한 것에 대답한 연구이다(김낙년 교수의 지적 내용은 아래 링크 참조).

http://www.kehs.or.kr/xe/2243 [서평] 허수열 저, 『개발 없는 개발: 일제하 조선경제 개발의 현상과 본질』경제사학회 vol. :38 저자 :김낙년 발행연월 :2005-06



간단히 요약하면 허수열 교수는 김낙년 교수의 해당 지적을 이 논문에서 인정하였으며, 일본인 소유 토지의 쌀 생산량은 '개발없는 개발'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조선 전체 생산량의 절반이 아니라 1931년에 20%였고 피크에 도달했을 때에도 25.4% 수준이었을 것으로 본인이 애초에 계산한 수치를 대폭 하향하였다(각론적인 계산법에서는 김낙년 교수와 의견을 달리하였다). 또한 '개발없는 개발'의 2011년 개정판에서 김낙년 교수에게 지적받은 오류를 수정하였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806180 (개발 없는 개발 - 허수열 : 일제하 조선경제 개발의 현상과 본질)



[이 책은 그동안 허수열 교수 이론의 문제점으로 지적된 ‘토지생산성을 고려한 일본인 소유의 논면적 추계’ 부분을 수정, 보충한 개정증보판이다. 이로써 초판본에서 일본인들이 소유했던 경지면적이 부풀려진 오류를 바로잡았다. 그러나 ‘식민지적 개발은 조선인의 진정한 개발을 저해한 개발 없는 개발이었다’는 전체적인 기조는 변함없다. 일본 식민 지배기 동안 급속히 근대화되었다는 농업, 공업, 교육 등 각 분야에서 민족별 극심한 불평등과 차별이 존재했으며, 그러한 식민지 경제체제의 구조적 문제 때문에 조선인들의 삶의 질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고 개선될 전망도 없었음을 보여줌으로써 개발의 허구성을 논증한다.]

위의 책 소개를 보면 허수열 교수는 수량통계적 방법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소위 말하는 '식근론'과는 전혀 다른 지향점을 가지고 일제시대를 해석하는 성향임을 알 수 있다. 때문에 허수열 교수의 '개발없는 개발'은 식근론을 반박하기 위해 "일제시대에 근대화가 있기는 했으나 조선인들의 삶의 질에는 향상이 없었고 그나마 남은 유산도 해방 후에 폭삭 사라져버려 거의 의미가 없었다"는 주장을 하는 쪽의 좋은 참고자료로 이용되곤 한다.

그런데 허수열 교수는 위의 논문을 쓰면서, 일제 시대의 소작료율이 낮은 등급의 논에서는 더 낮고, 높은 등급 논에서는 더 높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최빈값은 50%에 수렴하고 있음을 여러 가지 자료들을 통하여 주장하고 있다. 그와 반대로 김낙년 교수는 '개발없는 개발'에 대한 서평에서 소작인 1인이 가져가는 쌀의 양은 크게 차이가 없어 생산량이 증가하면 소작료도 올라갈 것이라고 가정하였다. 어째 두 학자가 서로의 성향과는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아무튼 일제시대 농민의 삶의 질에 '향상'이 있었는지에 대한 구체적 계산법을 둘러싼 두 학자의 논쟁점과 관련이 있는 부분인 모양이다.



그러한 쟁점이야 어찌되었든 이 논문에서의 허수열 교수의 주장을 전적으로 인정한다면, 일제시대 소작료는 생산량과 거의 무관하게 거의 50% 수준에서 고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일제시대 동안 단위 농지당 쌀 수확량이 두 배까지 점진적으로 증가하였다는 사실과 결합하면 결국 일제시대에 조선인 소작농이 소작료를 내고 가져가는 쌀의 양은 구한말에 비해 두 배로 증가한다는 뜻이 아닌가? 조선시대의 소작료나 소작비율은 일제시대와 대동소이한 수준이었다.

아래 링크(도쿄대 농학생명과학연구과) 홈페이지에서는 조선총독부의 통계치를 통해 일제시대 조선, 대만, 일본의 쌀생산량과 단위면적당 수확고 변화를 보여준다.

http://park.itc.u-tokyo.ac.jp/iee/







일제시대 동안 쌀 수확량은 2배 이상으로 점진적으로 늘어났고, 단위 면적당 쌀 생산량도 최대 2배까지 늘어났다. 허수열 교수의 2009년 논문에 따르면 이중에서 일본인이 소유한 땅에서 생산된 양이 20%에서 최대 25%가량이라니 이를 전적으로 인정한다해도, 조선인이 소유한 토지에서 생산된 쌀의 양만도 구한말보다는 훨씬 더 많아진 것이다. 또한 허수열 교수에 따르면 소작료율은 50%에서 거의 고정되었다고 하니 일본인 지주의 땅에서 생산된 쌀의 절반은 조선인 소작인이 가져가는 것이고, 실질적으로 조선 쌀 생산량에서 일본인 지주의 최종적인 몫은 10%에서 최대 12.5%였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결국 일제시대 동안의 쌀 수확량의 90% 가량은 최종적으로 조선인의 몫이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물론 대부분의 조선인 농부에게 쌀은 소중한 환금작물이라 함부로 먹을 수 없으니 이를 내다팔고 주식은 값싼 만주산의 좁쌀과 콩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때문에 농업인구가 동일하다는 가정 하에서라면 구한말의 소작농에 비해 일제시대의 소작농의 생활수준은 더 높아졌을 것이다.

물론 일제시대 동안 조선은 일본 본토의 인구증가율을 두 배 가까이 상회하는 폭발적 인구 증가(1500만, 1600만 수준에서 2700만명 수준으로)를 보였으니 이러한 인구증가로 인해 농업생산성의 증가가 매우 큰 부분 잠식되는 맬서스적 상황에 빠졌을 수 있다. 김낙년 교수와 허수열 교수의 논쟁은 이 부분도 다루고 있다. 사실 경제성장률이 제한적인 상태에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할수록 1인당 생활수준은 단기적으로는 떨어질 수 밖에 없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인구의 급증은 한편으로는 식민지 조선의 상태가 적어도 마구 증가하는 인구를 먹여살릴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동안 조선 전체의 농업생산성이 급증하였음에도 인구의 급증이 이를 상쇄하여 생활수준의 향상이 미비했을 수 있다는 점은 일본의 에도시대의 인구급증을 떠올리게 하는 듯도 하다. 이러한 질곡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결국 해방 후 이루어진 진정한 산업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아래는 허수열 교수의 해당 논문에서 소작료 관련 부분들의 이미지들이다(전문은 맨 위의 링크에서 다운받으면 됨).




























태그#일제시대#소작농#자작농#생활수준#일본인지주
댓글 12 이 글에 댓글 단 블로거 열고 닫기
블로그 보내기카페 보내기Keep 보내기메모 보내기기타 보내기 펼치기

인쇄
필롭
일제시대때 소작농들은 구한말 소작농의 생활수준보다 확실히 나아졌다고 봐야하는군요
2014.1.21. 15:31신고
답글
공감공감0

다만버블로그주인
일제시대 동안 조선인의 평균신장이 2cm 커졌다고 하니, 생활수준의 향상이 비록 충분하지는 않았으나 일정 수준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제에게 다 수탈당해서 굶고 살았다는 시각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닌가 합니다.
2014.1.21. 16:51신고
답글
공감공감0


[출처] 일제시대 소작농과 구한말 소작농의 평균적 생활 수준|작성자 다만버

조선 중후기 동안 감소하다가 개항기와 일제시대.. : 네이버블로그

조선 중후기 동안 감소하다가 개항기와 일제시대.. : 네이버블로그


조선 중후기 동안 감소하다가 개항기와 일제시대에 증가한 조선인의 키 비이성적 반일감정 관련 글들

2014. 1. 21. 12:59


https://blog.naver.com/athina/40205027717



http://www.kehs.or.kr/xe/1891 (조선 중,후기의 신장 추세, 1547-1882 경제사학회 vol. : 53 저자 : 조영준, 차명수 발행연월 : 2012-12)



위의 논문에서는 17세기와 18세기에 조선인의 키가 감소했으며, 19세기는 감소 내지 정체하다가 개항기부터 이의 반전이 시작되어 일제 시대 동안은 성인 남자의 키가 2센티미터 커졌다고 설명한다.

http://blog.naver.com/athina/40204719379

논문의 1저자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조영준이고 교신저자는 위의 링크에서 소개한 '동아시아 내 비숙련 임금의 수렴과 발산, 1900-1939' 논문의 저자인 영남대 경제금융학부 차명수 교수이다.

논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조선 중후기 동안 성인 남성의 키는 감소 내지 정체하는 추세였고 증가하는 추세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평안도 지역 출신자가 타 지역보다 키가 컸으며, 천인이 양인보다 더 키가 큰 경향이 일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조영준 교수에 따르면 성인의 키의 증감은 현재 전세계의 경제사학계에서 과거 어느 시점의 복리후생의 정도를 알 수 있는 대단히 소중한 지표로 활용되고 있다는데, 이는 현재 북한과 남한의 평균 신장을 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정부가 갑자기 육식을 금지하였다거나 하는 식의 식생활의 인위적인 통제가 없다면 신장의 증감 추세는 개인의 복리후생의 매우 좋은 지표가 될 것이다.



논문의 도입부에서 대한민국 건국 후 현재까지 한국 성인의 평균 신장은 10cm, 일제시대 동안 2cm의 증가가 있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해당 시기에 1인당 영양 섭취의 양이 이전 시기에 비해 늘어났음을 의미하며, 이 시기(일제시대 + 대한민국)에 폭발적 인구 증가가 동반되었음에도 경제 성장이 맬서스적 정체를 뛰어넘어 개인의 복리후생에 그만큼의 기여를 했음을 뜻할 것이다.



저자는 조선 시대 중후반에 때로 천인이 양인보다 도리어 키가 더 큰 경향이 발견되는 것은 노비는 주인의 재산이었기 때문에 잘 먹여서 그랬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조선 시대 중후반의 일반 양인의 경제적 실상은 노비보다 나을 것이 없거나 도리어 못한, 참으로 참혹한 수준이었다고 밖에는.



흔히 19세기는 어찌되었든 간에 그래도 18세기 조선인들은 생활이 양호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이 논문에서는 18세기에 오히려 키가 감소하였고 19세기에는 그 감소한 키 상태에서 정체하였다는 보고를 하고 있으니 상당히 놀라운 일이다. 혹 18세기에 일어난 인구 증가를 농업생산성이 따라잡지 못한 때문일까? 물론 논문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표본의 수가 충분하지 못하다는 점은 고려해야 할 것이다.



논문의 흥미로운 부분들과 표를 일부 캡쳐하여 아래에 첨부한다. 전문은 맨 위의 링크에서 다운받아서 보면 된다.






































































태그#조선인키#조선키#조선시대키#감소#증가#일제시대#북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