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16

29권 조선이 본 일본

 

29권 조선이 본 일본

한국문화사
[필자] 정옥자, 허동현, 하우봉, 한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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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시대의 질서에 기초한 교린 외교와 도덕률로는 힘의 정치가 지배하는 근대의 열강 쟁패 세상을 대할 수 없었다. 근대의 시간 경쟁에서 낙오한 조선은 결국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2009년 국사편찬위원회가 한국 문화사 사업의 일환으로 발간한 『조선이 본 일본』은 한 세기 전의 뼈아픈 실패를 거울삼아 오늘날 우리가 일본인에게 <의미 있는 타자>로 거듭나기 위한 기억의 거울을 제공한다. 이 책은 조선 전기부터 후기, 개화기에 이르기까지 시대별로 조선 지식인들이 일본을 어떻게 인식하고 타자화했는지 그 변천 과정을 다각도로 조명한다.

조선 전기의 지식인들은 주자학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화이관을 수용하며 스스로를 <소중화>로 설정했다. 명나라를 대중화로 받들고, 주변국인 여진, 일본, 류큐를 <이적>으로 타자화한 것이다. 이러한 자아 인식은 1402년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선명히 투영되어 있다. 이 지도는 중국과 조선을 세계의 중심으로 확대하여 소중화 의식을 과시한 반면, 일본은 작고 왜곡되게 묘사했다. 조선은 일본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을 일본 국왕으로 인정하여 적례교린을 맺었지만, 외교 의례에서는 상하 관계를 적용해 조공을 강제하는 등 중층적인 기미교린 체제를 병용했다. 이 시기 일본을 가리키는 <왜>라는 호칭은 문화적 저열성과 야만성을 상징하는 부정적 타자의 코드였다. 16세기 이후 막부의 약체화와 대일 정보 부족이 겹치면서 이러한 이적관과 소국관은 더욱 경직되었다. 반면 화이관의 포용 논리에 입각해 귀순한 일본인을 조선인으로 동화시키려는 향화 정책도 시행되어 이질 문화를 접하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15세기 후반 막부의 약체화와 일본 내란으로 대일 통신사 파견이 중단되었다가, 임진왜란이라는 참화를 겪은 후 17세기에 이르러 조일 관계는 급반전을 맞이했다. 전쟁의 원수였던 일본과 조선이 국교를 재개한 것은 후금의 대두에 따른 북방 방위의 절박성, 일본의 국정 탐색 및 피로인 쇄환이라는 현실적 필요성 때문이었다. 도쿠가와 막부 역시 정권의 대내외적 정당성 확보를 위해 통교 정상화에 적극적이었고, 생존이 걸려 있던 쓰시마 섬의 필사적인 중개 노력이 더해져 국교가 재개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쇼군의 즉위를 축하하는 통신사 파견이 정례화되었는데, 삼사를 비롯해 문화 교류를 전담하는 서기, 화원, 의원 등이 대거 포함된 470여 명 규모의 대장정이었다. 17세기 중반 이후 국제 정세가 안정되면서 통신사는 정치적 긴박성 대신 문화 사절단으로서의 성격이 부각되었다. 쇄국 체제 하의 일본 지식인과 서민들은 통신사행을 열렬히 환영하며 시문과 서화를 구걸했고, 이는 근세 일본 문화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조선 후기의 대외관 역시 대명 의리론과 반청 북벌론에 기초한 <조선 중화주의>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18세기 실학파의 대두로 획기적인 인식의 전환이 일어났다. 이익은 역사적 현실주의에 기반해 청조를 긍정하고 서학 연구를 통해 천원지방관을 비판하며 화이론적 차등 관념을 상대화했다. 홍대용은 지구설과 지전설에 기초하여 우주 안의 모든 나라가 대등한 중심이라는 <역외 춘추론>과 <만국 중화론>을 정립했다. 박지원과 박제가 또한 청나라의 문물을 힘써 배우자는 북학론을 제창하며 서양을 또 하나의 문명 세계로 인정했다.

이러한 실학파의 개방적 태도 속에서 1763년 계미 통신사행의 서기였던 원중거는 조선 시대 일본 연구의 최고봉인 『화국지』와 『승사록』을 남겼다. 철저한 정주학자였던 그는 일본 고학파 유학을 이단으로 비판하면서도, 현지 유학자들과 깊은 인간적 교감을 나누며 일본 문화의 장래 가능성을 높이 평가했다. 특히 그는 임진왜란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평화가 정착된 18세기 일본인들의 유약함과 성실함, 검소함이라는 <국화>적인 장점을 객관적으로 기술했다. 또한 막부의 무력과 형벌에 기반한 무치 사회의 특성을 분석하는 한편, 장차 명분론의 고양에 따른 <존왕 운동>의 발발과 막번 체제의 붕괴를 정확히 예견했다. 나아가 사행이 일본의 명분과 놀이 도구로 전락하는 수치스러운 현실을 비판하며, 사행 인원의 대폭 감축과 문화 교류의 정비를 골자로 하는 선구적인 통신사제 개혁안을 제시했다.

결론적으로 『조선이 본 일본』은 자아를 확립하기 위해 타자를 설정하고 배제했던 전근대의 완고한 화이관이 실학자들의 학문적 성찰과 현지 견문을 통해 어떻게 상대화되고 해체되었는지 보여준다. 비록 실학파의 대외관이 당대의 집권층에 의해 정책으로 전면 채택되지 못하고 19세기의 사대 수구주의로 퇴행하는 한계를 보였지만, 각 문화의 독자성과 대등성을 인정한 그들의 개방적 태도는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힘의 정치가 횡행하는 세계 질서 속에서 우리가 일본을 어떻게 바라보고 연대해야 하는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거의 상처와 도덕률에만 집착하여 힘의 정치의 변화를 읽지 못했던 한 세기 전의 지체 현상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타자에 대한 실정 파악과 성신의 태도를 강조한 실학자들의 통찰을 오늘날의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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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본 일본> 1,000단어 요약·평론

국사편찬위원회가 편찬한 <조선이 본 일본>은 조선 전기부터 개화기까지 조선인이 일본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추적한 책이다. 단순한 한일 외교사가 아니라, 조선의 세계관이 변화함에 따라 일본이라는 타자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여준다. 책의 핵심은 일본의 실체가 갑자기 변한 것만큼이나, 일본을 바라보는 조선의 인식 틀이 크게 변했다는 데 있다. 전근대에는 일본을 문화적으로 열등한 이적으로 보았지만, 19세기 후반에는 근대화를 배우기 위한 모델 또는 제국주의적 침략자로 보게 되었다.

1. 조선 전기의 일본 인식

조선 전기의 세계관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화이론에 기초하였다. 조선은 명나라를 대중화로 받들면서도 자신을 유교 문명을 계승한 소중화로 이해하였다. 이에 비해 일본·여진·류큐 등은 문명의 주변부인 이적으로 분류되었다. 일본을 가리키는 ‘왜’라는 말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문화적 열등성과 야만성을 나타내는 표현이었다.

그러나 실제 외교는 이념보다 훨씬 실용적이었다. 조선 왕조 초기의 가장 중요한 대일 과제는 왜구를 억제하고 남해안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조선은 군사적 대응과 함께 일본인에게 관직과 경제적 혜택을 주거나 귀순자를 받아들이는 회유책을 사용하였다. 향화 왜인들은 왜구 토벌, 통역, 외교, 조선술, 무기 제조, 의술 등에 활용되었다. 이는 조선의 대일 정책이 단순한 배척이 아니라 통제와 포용을 병행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조선과 무로마치 막부는 15세기 초 공식적인 국교를 재개하였다. 조선은 막부의 쇼군을 일본 국왕으로 인정했지만, 일본 내부에는 쇼군 외에도 지방 영주와 쓰시마 도주 등 여러 통교 주체가 존재하였다. 이에 따라 조일 관계는 중앙정부 간의 대등한 교린 관계와 지방 세력에 대한 기미 관계가 중첩된 복잡한 구조를 이루었다.

조선은 일본인의 왕래와 무역을 통제하기 위해 삼포를 개항하고, 서계·도서·문인·세견선 제도를 마련하였다. 특히 1443년 계해약조를 통해 쓰시마 도주에게 매년 보낼 수 있는 배의 수를 제한하고 쌀과 콩을 지급하였다. 이 체제는 왜구를 평화적 통교자로 바꾸고 국경을 안정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조선 초기 대일 정책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아도 상당히 현실적이고 정교하였다.

문물 교류도 활발하였다. 일본은 고려대장경, 불경, 불상, 범종, 유교 서적 등을 끊임없이 요청하였다. 반대로 조선 사행원들은 일본의 수차, 선박, 화포, 제련 기술, 시장과 화폐 제도를 관찰하였다. 이예와 같은 실무 외교관은 일본을 무조건 야만시하지 않고 유용한 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15세기 후반 이후 통신사 파견이 중단되고 일본에 관한 정보가 줄어들면서 조선의 일본 인식은 경직되었다. 일본의 정치·경제·군사적 변화를 직접 확인하지 않은 채 기존의 ‘왜국’ 이미지만 강화하였다. 정보 부족과 문화적 우월감이 결합하면서 조선은 일본의 변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되었다.

2. 조선 후기 통신사와 일본 인식의 변화

임진왜란은 일본에 대한 인식을 결정적으로 악화시켰다. 일본은 문명 밖의 오랑캐일 뿐 아니라 조선을 파괴한 잔인한 적국으로 기억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국교가 재개되고 통신사가 파견되면서 조선 지식인들은 다시 일본 사회를 직접 관찰하였다.

조선 후기 통신사는 외교사절이면서 대규모 문화사절이었다. 일본의 유학자와 승려들은 조선 사행원에게 시문과 서예를 청하고 필담을 나누었다. 조선인은 자신들이 일본에 성리학과 문화를 전수한다고 생각했으며, 일본인도 통신사를 선진 문명의 대표자로 환대하였다. 통신사는 양국 사이의 평화를 유지하는 동시에 조선의 문화적 우월성을 확인하는 무대였다.

하지만 일본을 직접 본 사행원들 가운데서는 기존 인식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대표적인 인물이 1763년 통신사행에 참여한 원중거이다. 그는 일본의 역사·정치·제도·풍속을 조사하여 <화국지>를 저술하였다. 원중거는 일본을 비판하면서도 도시의 번영, 상업 발달, 치안, 행정질서, 출판문화와 학문 수준을 인정하였다. 일본을 무조건 오랑캐로 규정하기보다 장단점을 함께 살피려 한 것이다.

실학자들의 일본관도 비교적 유연하였다. 그들은 화이론의 틀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지만 농업·상업·기술·국방 면에서 일본의 장점을 배울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관찰은 일부 지식인에게 머물렀으며 국가 차원의 개혁이나 지속적인 정보 수집으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3. 김기수가 본 메이지 일본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제1차 수신사로 파견된 김기수는 근대 일본을 직접 목격한 최초의 조선 고위 관리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가 본 일본은 이전 통신사들이 보았던 일본과 전혀 달랐다. 철도, 증기선, 전신, 군대, 학교, 공장, 근대적 행정제도가 등장했고, 서양식 복장과 생활양식이 확산되고 있었다.

김기수는 일본의 기술과 제도에 놀라면서도 이를 전적으로 긍정하지 않았다. 그는 기계와 군사시설의 효율성을 인정했지만 서양 문물을 지나치게 추종하는 풍조와 전통 질서의 붕괴를 경계하였다. 일본의 근대화를 ‘기이한 기술’로 바라보았을 뿐, 그것이 새로운 국가와 사회를 만들어내는 체계적 변혁임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김기수의 사행은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조선과 일본의 문화적 위치가 역전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과거 일본은 조선에서 불교 경전과 유교 문화를 얻어가는 나라였지만, 이제 조선은 일본을 통해 서양의 과학·군사·제도를 배워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4. 조사시찰단과 근대 국가의 발견

1881년 파견된 조사시찰단은 일본의 정부 부처, 군대, 경찰, 학교, 산업시설과 세제 등을 체계적으로 조사하였다. 김기수의 수신사가 의례적 방문의 성격이 강했다면, 조사시찰단은 근대 국가 운영의 원리를 배우기 위한 실무 조사단이었다.

시찰단원들은 일본의 발전을 단순히 기계의 힘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중앙집권적 행정, 전문 관료제, 교육, 재정, 군대와 산업이 결합되어 국가 역량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일본의 힘은 증기기관 몇 대가 아니라 사회 전체를 조직하는 근대 국민국가에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에 문명을 친절하게 전해주는 중립적인 교사가 아니었다. 조사시찰단 파견 자체가 일본 정부의 영향력 확대와 연결되어 있었다. 일본은 조선의 개화를 돕는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조선을 자국의 정치·경제적 영향권에 편입시키려 하였다. 책은 일본이 ‘개화와 독립의 옹호자’라는 얼굴과 ‘제국주의적 침략자’라는 얼굴을 동시에 지녔다고 평가한다.

5. 개화기 일본을 본 두 시선

개화기에는 일본을 보는 시선이 크게 갈라졌다. 위정척사파는 서양을 받아들인 일본을 서양 오랑캐와 동일하게 보았다. 이들은 일본의 침략성을 일찍 경계했지만, 변화한 국제질서와 근대 국가의 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반대로 김옥균·박영효·윤치호 등 개화파에게 일본은 조선이 따라야 할 근대화 모델이었다. 일본은 아시아 국가이면서 서구 문명을 성공적으로 수용한 사례로 보였다. 이들은 일본식 개혁을 통해 조선을 독립된 국민국가로 만들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심을 과소평가하거나 아시아 연대론을 지나치게 신뢰하였다.

1900년대 이후 이승만과 서재필 같은 친미 개화파는 일본을 비판적으로 보기 시작하였다. 그들에게 일본은 천황제와 군국주의를 유지한 ‘후진적 근대’였으며, 미국식 민주주의가 더 나은 모델이었다. 따라서 개화파의 일본관도 하나가 아니라 친일적 근대화론과 친미적 비판론으로 갈라졌다.

평론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한일 관계를 감정이나 도덕의 문제로만 다루지 않고, 인식의 역사로 분석한다는 점이다. 조선인의 일본관은 일본의 객관적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니라 조선이 자신을 어떻게 규정했는가에 따라 구성되었다. 조선이 소중화를 자처할 때 일본은 오랑캐였고, 조선이 근대화의 위기에 빠졌을 때 일본은 모델이 되었으며,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다시 적국이 되었다.

또한 이 책은 조선의 실패를 단순히 쇄국이나 무지 때문이라고 설명하지 않는다. 조선 전기의 대일 외교는 상당히 유능하고 실용적이었다. 문제는 성공한 제도가 오래 지속되면서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는 경직된 체제로 바뀌었다는 데 있다. 초기에는 정확한 정보와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을 다루었지만, 후기로 갈수록 관념이 현실을 대신하였다.

다만 책의 일부 서술에는 근대화론적 판단이 지나치게 강하다. 조선이 ‘시간의 경쟁’에서 뒤처졌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있지만, 일본식 국민국가와 부국강병을 역사의 유일한 정상 경로로 간주할 위험이 있다. 일본이 신속하게 근대화한 결과는 문명 발전만이 아니라 식민지 침략과 전쟁이었다. 조선이 일본을 충분히 배우지 못한 것이 문제였지만, 일본을 더 충실하게 모방했더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또 일본의 사과가 부족한 이유를 한국이 일본에 ‘존중받을 만한 타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서문의 일부 주장은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과 사과는 피해국의 국력이나 문화적 위상에 따라 달라질 문제가 아니다. 피해자가 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해자가 반성하지 않는다는 논리는 자칫 가해 책임을 흐릴 수 있다.

그럼에도 <조선이 본 일본>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책이다. 이 책은 일본을 무조건 미워하거나 이상화하는 두 태도가 모두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조선은 일본을 야만국으로만 보았을 때도 실패했고, 근대화의 모범으로만 보았을 때도 실패하였다. 필요한 것은 우월감이나 열등감이 아니라 상대 사회의 내부 변화와 권력 의도를 정확히 읽는 능력이다.

이 책이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다음과 같다.

<타자를 잘못 보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과 세계의 변화를 잘못 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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