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시대의 질서에 기초한 교린 외교와 도덕률로는 힘의 정치가 지배하는 근대의 열강 쟁패 세상을 대할 수 없었다. 근대의 시간 경쟁에서 낙오한 조선은 결국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2009년 국사편찬위원회가 한국 문화사 사업의 일환으로 발간한 『조선이 본 일본』은 한 세기 전의 뼈아픈 실패를 거울삼아 오늘날 우리가 일본인에게 <의미 있는 타자>로 거듭나기 위한 기억의 거울을 제공한다. 이 책은 조선 전기부터 후기, 개화기에 이르기까지 시대별로 조선 지식인들이 일본을 어떻게 인식하고 타자화했는지 그 변천 과정을 다각도로 조명한다.
조선 전기의 지식인들은 주자학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화이관을 수용하며 스스로를 <소중화>로 설정했다. 명나라를 대중화로 받들고, 주변국인 여진, 일본, 류큐를 <이적>으로 타자화한 것이다. 이러한 자아 인식은 1402년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선명히 투영되어 있다. 이 지도는 중국과 조선을 세계의 중심으로 확대하여 소중화 의식을 과시한 반면, 일본은 작고 왜곡되게 묘사했다. 조선은 일본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을 일본 국왕으로 인정하여 적례교린을 맺었지만, 외교 의례에서는 상하 관계를 적용해 조공을 강제하는 등 중층적인 기미교린 체제를 병용했다. 이 시기 일본을 가리키는 <왜>라는 호칭은 문화적 저열성과 야만성을 상징하는 부정적 타자의 코드였다. 16세기 이후 막부의 약체화와 대일 정보 부족이 겹치면서 이러한 이적관과 소국관은 더욱 경직되었다. 반면 화이관의 포용 논리에 입각해 귀순한 일본인을 조선인으로 동화시키려는 향화 정책도 시행되어 이질 문화를 접하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15세기 후반 막부의 약체화와 일본 내란으로 대일 통신사 파견이 중단되었다가, 임진왜란이라는 참화를 겪은 후 17세기에 이르러 조일 관계는 급반전을 맞이했다. 전쟁의 원수였던 일본과 조선이 국교를 재개한 것은 후금의 대두에 따른 북방 방위의 절박성, 일본의 국정 탐색 및 피로인 쇄환이라는 현실적 필요성 때문이었다. 도쿠가와 막부 역시 정권의 대내외적 정당성 확보를 위해 통교 정상화에 적극적이었고, 생존이 걸려 있던 쓰시마 섬의 필사적인 중개 노력이 더해져 국교가 재개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쇼군의 즉위를 축하하는 통신사 파견이 정례화되었는데, 삼사를 비롯해 문화 교류를 전담하는 서기, 화원, 의원 등이 대거 포함된 470여 명 규모의 대장정이었다. 17세기 중반 이후 국제 정세가 안정되면서 통신사는 정치적 긴박성 대신 문화 사절단으로서의 성격이 부각되었다. 쇄국 체제 하의 일본 지식인과 서민들은 통신사행을 열렬히 환영하며 시문과 서화를 구걸했고, 이는 근세 일본 문화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조선 후기의 대외관 역시 대명 의리론과 반청 북벌론에 기초한 <조선 중화주의>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18세기 실학파의 대두로 획기적인 인식의 전환이 일어났다. 이익은 역사적 현실주의에 기반해 청조를 긍정하고 서학 연구를 통해 천원지방관을 비판하며 화이론적 차등 관념을 상대화했다. 홍대용은 지구설과 지전설에 기초하여 우주 안의 모든 나라가 대등한 중심이라는 <역외 춘추론>과 <만국 중화론>을 정립했다. 박지원과 박제가 또한 청나라의 문물을 힘써 배우자는 북학론을 제창하며 서양을 또 하나의 문명 세계로 인정했다.
이러한 실학파의 개방적 태도 속에서 1763년 계미 통신사행의 서기였던 원중거는 조선 시대 일본 연구의 최고봉인 『화국지』와 『승사록』을 남겼다. 철저한 정주학자였던 그는 일본 고학파 유학을 이단으로 비판하면서도, 현지 유학자들과 깊은 인간적 교감을 나누며 일본 문화의 장래 가능성을 높이 평가했다. 특히 그는 임진왜란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평화가 정착된 18세기 일본인들의 유약함과 성실함, 검소함이라는 <국화>적인 장점을 객관적으로 기술했다. 또한 막부의 무력과 형벌에 기반한 무치 사회의 특성을 분석하는 한편, 장차 명분론의 고양에 따른 <존왕 운동>의 발발과 막번 체제의 붕괴를 정확히 예견했다. 나아가 사행이 일본의 명분과 놀이 도구로 전락하는 수치스러운 현실을 비판하며, 사행 인원의 대폭 감축과 문화 교류의 정비를 골자로 하는 선구적인 통신사제 개혁안을 제시했다.
결론적으로 『조선이 본 일본』은 자아를 확립하기 위해 타자를 설정하고 배제했던 전근대의 완고한 화이관이 실학자들의 학문적 성찰과 현지 견문을 통해 어떻게 상대화되고 해체되었는지 보여준다. 비록 실학파의 대외관이 당대의 집권층에 의해 정책으로 전면 채택되지 못하고 19세기의 사대 수구주의로 퇴행하는 한계를 보였지만, 각 문화의 독자성과 대등성을 인정한 그들의 개방적 태도는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힘의 정치가 횡행하는 세계 질서 속에서 우리가 일본을 어떻게 바라보고 연대해야 하는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거의 상처와 도덕률에만 집착하여 힘의 정치의 변화를 읽지 못했던 한 세기 전의 지체 현상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타자에 대한 실정 파악과 성신의 태도를 강조한 실학자들의 통찰을 오늘날의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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