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동아시아 고전 시리즈’는 동아시아 지성사의 숨겨진, 그러나 가장 매혹적인 텍스트를 소개한다. 30년간 역사·고전 출판에 천착해온 서해문집이 공들여 채집한 이 시리즈는, 수 세기 앞을 내다본 원전의 통찰과 격조 있는 번역에 힘입어, 동아시아적 보편과 각국의 특수가 부딪히고 스미는 근사한 지적 풍경을 그려 보인다. 오규 소라이의 《정담》을 시작으로, 일본 자본주의와 장인정신의 원류가 담긴 《도비문답》, 근대 일본의 이념적 뿌리인 난학의 발전과정을 채록한 《난학사시》가 출간된다.
《정담》은 ‘동아시아의 군주론’으로 불리는 에도시대 일본의 고전으로, 최고권력자인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요청으로 대학자 오규 소라이가 집필한 ‘현실정치 이야기’다. 주자학의 고답적 공리공담을 벗어나 현실에 바짝 다가선 ‘지식인적 유학자’ 소라이는 ‘정치와 도덕의 분리’로 대표되는 그의 ‘근대적 정견’들을 이 책에 빼곡히 담아냈다. 일찍이 다산 정약용이 “조선 성리학의 수준을 아득히 초월했다”며 한탄한 바 있는 ‘소라이학(學)’의 정수가 바로 《정담》이다.
정약용도 감탄한 일본 ‘소라이학’의 진수 에도시대의 반주자학 사상가 성악설 바탕으로 ‘논어’ 해석 “인(仁)은 백성 편안케 하는것” 고명섭기자 수정 2019-10-20
논어징 1·2·3 오규 소라이 지음·임옥균 등 옮김 소명출판·각 권 2만9000원 광고
〈논어징 1·2·3〉 오규 소라이 지음·임옥균 등 옮김·소명출판·각 권 2만9000원
에도 막부 시대 일본 유학의 혁신자 오규 소라이(1666~1728·그림)의 주저 <논어징>이 한국어로 처음 완역됐다. 동양철학을 전공한 임옥균·임태홍·함현찬 박사가 함께 옮기고 이기동 성균관대 교수가 감수했다. <논어징>이 완역됨으로써 그동안 주로 2차 문헌을 통해 소개되던 ‘소라이학’의 진수를 한국어로 직접 느껴 볼 수 있게 됐다.
오규 소라이는 흔히 앞세대 이토 진사이(1627~1705), 뒷세대 모토오리 노리나가(1730~1801)와 함께 에도시대를 대표하는 사상가로 꼽힌다. 진사이는 <논어>와 <맹자>를 연구하여 주자학을 비판하는 ‘고의학’을 창시했고 노리나가는 <고사기>라는 일본 역사책을 연구해 ‘국학’을 집대성했다. 소라이는 진사이의 주자학 비판을 더욱 철저하게 밀어붙여 송대 유학과는 아주 다른 독창적인 반주자학 사상을 세운 사람이다. 광고
소라이의 사상을 국내에 알린 저작으로는 일본 정치사상가 마루야마 마사오의 노작 <일본 정치사상사 연구>가 먼저 거론된다. 일본 정치사상 연구에 획을 그은 이 저작에서 마루야마는 소라이를 근대성의 사상적 개척자이자 정치의 발견자로 주목했다. 그는 동서양을 동시에 관조하는 눈으로 송나라 유학의 완성자인 주자를 동시대 서구 기독교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선상에 놓고, 주자학을 비판한 소라이를 근대 정치사상의 선구자가 된 마키아벨리에 견주었다. 마키아벨리가 도덕과 정치를 분리해 근대 정치학의 토대를 닦았듯이 소라이도 주자학의 도덕관념에서 벗어나 정치 자체를 발견함으로써 근대성의 싹을 틔웠다는 것이 마루야마가 포착한 소라이학의 핵심이었다.
소라이의 삶 자체도 마키아벨리의 삶과 유사한 면이 있다. 소라이는 도쿠가와 막부 5대 쇼군의 시의였던 오규 가게아키의 둘째아들로 에도(도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쇼군의 문책을 받아 유배를 당하자, 아버지를 따라간 소라이는 유배지에서 주자학을 독학했다. 27살 때 아버지가 사면을 받자 소라이도 에도로 복귀해 유학자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5대 쇼군의 총신이었던 야나기사와 요시아스에게 발탁돼 17년 동안 그의 정치 고문 노릇을 했다. 1709년 5대 쇼군이 사망하자 야나기사와는 실각했고, 소라이도 관직에서 물러났다. 마키아벨리가 피렌체 공화정에서 14년 동안 관직생활을 하다 쫓겨난 뒤 <군주론>을 저술했듯이, 소라이도 관직에서 물러난 뒤 저술 작업을 본격화했으며 대표작 <논어징>은 죽는 순간까지 가필을 거듭했다.
소라이는 관직에 있던 시절 주자학적 도덕보다는 막부의 정치적 상황을 먼저 고려하는 관점을 취했는데, 그런 사실을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1702년에 에도를 발칵 뒤집어 놓은 ‘46인 사무라이’ 사건이다. 주군을 잃은 낭인 46명이 주군의 원수인 기라 요시나카의 저택을 습격해 원수의 목을 벤 뒤 막부의 처분을 기다렸던 것이다. 이 사건은 주군에 대한 가신의 충성이라는 봉건적 주종관계와 막부 통일정권의 정치적 지배가 충돌하는 파장이 큰 사건이었다. 정치 고문으로서 소라이는 이 사태를 충성이라는 사적인 도덕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며 천하의 법도를 세운다는 정치적 관점을 앞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건은 소라이의 조언대로 사무라이들의 할복 자살이라는 방식으로 종결됐다.
이 에피소드에서 엿보이는 정치 우위의 사상을 <논어징>에서 확인할 수 있다. ‘논어징’(論語徵)이란 공자의 말씀을 모은 <논어>에 대한 해석들을 ‘밝히고 검증한다’(徵)는 뜻이다. 소라이는 선진시대에 성립된 육경에 입각해 <논어>를 해설하면서, 주자의 논어 해설이 불교와 도교에 사로잡혀 있다며 <논어집주>를 반박하고, 이토 진사이의 <논어고의>가 주자학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했다고 혹독하게 비판한다. 이런 비판작업을 통해 고대 육경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소라이의 사상은 순자의 학설에 기울어지는 모습을 보인다고 옮긴이들은 말한다. 고대의 육경, 곧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악기> <춘추>가 대부분 순자의 문하에서 경전으로 성립됐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맹자의 성선설이 아니라 순자의 성악설이 소라이 사상의 바탕을 이룬다.
더 중요한 것은 <논어>를 해석하는 데서 드러나는 정치적·현실적 태도다. 이를테면 공자가 말하는 ‘인’(仁)을 ‘사랑의 이치이며 마음의 덕’이라고 풀이하는 주자와 달리 소라이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으로 독해한다. 또 ‘학이’편의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는다’(人不知不溫)라는 주자의 해석을 거부하고 ‘윗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억울해하지 않는다’라고 풀이한다. 구체적인 정치적 해석인 셈이다. 소라이학은 뒷날 그의 제자 다자이 순다이가 쓴 <논어고훈외전>을 통해 조선의 다산 정약용에게도 전해진다. 다산은 처음에는 소라이학을 괴이쩍게 생각했으나 후에는 “찬란한 문채”를 높이 평가하고 자신의 <논어고금주>에서 깊이 살펴 많은 부분을 취했다. 나아가 “이제 그들(일본 유학자들)의 글과 학문이 우리나라를 훨씬 초월했으니, 참으로 부끄러울 뿐이다”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소라이학의 경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평가다.
고문사학을 창시하여 독특한 일본 유학을 형성한 저자가 <논어>를 주석한 <논어징>을 번역한 것이다.
<논어>에 대한 고문사학적 관점에서의 다양한 해석과 연구를 읽어나갈 수 있다.
송나라 유학자들의 <논어>에 대한 해석을 반박할 뿐 아니라, 일본 유학자 이토 진사이의 <논어고의>를 비판한다. 특히 송나라 유학자들의 주장은 불교나 도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고대부터 전해져온 도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입증해보이고 있다.
인물정보
저자(글) 오규 소라이 인물정보 동양학/동양철학자
저자 오규 소라이 荻生徂徠, 1666~1728 에도시대 유학자, 사상가로 고문사학(古文辭學)을 창시하여, 독특한 일본 유학을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일본사상사에서 최고의 사상가로 평가되기도 하는 그의 주요 저서로는 『변도(弁道)』, 『변명(弁名)』, 『논어징(論語徵)』, 『대학해(大學解)』, 『태평책(太平策)』, 『정담(政談)』, 『학칙(学則)』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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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공부하기 위해 온라인서점에서 책을 검색하면 대부분의 경우 번역서를 먼저 만나게 된다. 이게 뭔가 싶어 지인 중에 동양학을 한다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으레 '어차피 본문은 그대로 있고, 거기에 주희 주석이 달린 거니까, 그걸 읽으면 어차피 도 읽는거나 마찬가지야'라는 말을 한다. 누구의 번역본을 읽더라도 결국엔 그 번역자의 해석이 가미된 것이니만큼, 그 자체만을 읽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이 지인의 말에 크게 토달지 않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애초에 논어 텍스트를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하여 제시할 때부터가 주희의 독특한 해석 방식이고, 둘째, 주희의 해석방식이 이미 엄청난 권위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그것도 인간의 생각인 한 당연히 내포할 수밖에 없는 논리적인 문제 자체에 대해 문제제기가 안 되어 있기 때문에, 논어에 대한 아주 특정한 관점을 보편타당한 견해로서, 즉 이데올로기로서 수용하게 될 위험이 있다. 그런 점에서 은 그러한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고, 다른 해석도 존재하며 또 그것 또한 호소력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귀중한 텍스트다. 펼치기 0 답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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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가 하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지극히 엄하고, 인 (仁) 을 자기의 임무로 삼는 마음이 지극히 중하며, 국가를 편안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지극히 크
ok**** | 2023-02-16 | 신고/차단
오상 (五常) 은 「서경≸ 「주서」에 나오는데, 47 그 의미는 알지 못한다. 인․의․예․지는 ≷맹자≸에 나오는데, 본성에 뿌리박고 있다고 했지, 48 본성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본성이라고 말한 것은 한나라 유학자들로부터 시작되었고, 오행 (五行) 에 짝하게 한 것도 또한 한나라 유학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에도에서 5대 쇼군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시의(侍醫)였던 오규 가게아키(荻生景明)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에 하야시 가호(林鵞峰)·하야시 호코(林鳳岡)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그러나 열네 살 때인 엔포 7년(1679년)에 쇼군이 되기 직전이었던 쓰나요시의 분노를 산 아버지가 에도에서 쫓겨나 칩거하게 되면서, 어머니의 고향인 가즈사국의 혼나무라(本納村, 지금의 모바라시)로 이주해 살았다. 이곳에서 그는 13년동안 중국과 일본의 서적과 불경을 독학했고, 이 시간이 훗날 그의 학문적 토대가 되었다. 특히 하야시 라잔의 《대학언해》(大學諺解)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은 것이, 소라이 학문의 기초가 되었다. 본인도 가즈사에서 살던 시절을 회고하면서 자신의 학문은 이곳에서의 수학 과정을 기록한 《남총지력》 (南總之力)으로 완성되었다고 말하고 있다.[2]
겐로쿠(元錄) 5년(1692년)에야, 아버지가 사면되면서 에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에도로 돌아온 뒤에도 학문에 전념하여, 지증상사(芝增上寺) 옆에 주쿠(塾, 글방)을 열었지만, 초기에는 궁핍함을 면치 못해 끼니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근처에 살던 두부 장사꾼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겐로쿠 9년(1696년), 31세의 나이로 5대 쇼군 쓰나요시의 측근이자 막부의 소바요닌이었던 가와고에 번(川越藩)의 번주 야나기사와 요시야스에게 발탁되어 녹미를 지급받으며 그를 섬겼다. 나가사키에서 그는 일반 유학자로서는 있을 수 없었던 가정교사를 부른다. 그는 중국인 교사를 두고 발음 공부를 했다. 소라이는 야나기사와 저택에 불려가 학문을 강연하기도 하고 정치상의 주요 자문에 응하면서 쇼군 쓰나요시의 눈에도 들게 된다. 겐로쿠 14년(1701년)에 일어난 겐로쿠아코 사건(元禄赤穂事件), 이른바 추신구라(忠臣蔵) 사건 때에도 소라이는 여러 성리학자들과 함께 자문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소라이의 나이 44세 때인 호에이 6년(1709년), 쇼군 쓰나요시가 사망하고 요시야스가 실각하면서 야나기사와 저택을 나와서 니혼바시(日本橋) 가야바 정(茅場町)에 옮겨, 그곳에서 호엔주쿠(蘐園塾)라는 사숙(私塾)을 열었으며, 이후 이곳에서 그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기에 이른다(호엔 학파). 덧붙이면, 호엔주쿠라는 이름은 호엔주쿠가 위치해 있던 가야바초의 지명과도 관련이 있는데, 인근에 작가였던 다카라이 기카쿠(寶井其角)가 살고 있어 "매화꽃 향기 옆에 오규 소에몬이" (梅が香や隣は荻生惣右衛門)"라는 시구가 전해지고 있다.
교호 원년(1716년)경부터 소라이는 자신의 저서인 《논어징》(論語徵)의 집필을 시작했다. 이는 1712년에 발간된 이토 진사이의 《논어고의》에 대한 반박과 기존의 일본 유학계를 지배하던 사상인 주자학, 《주자집주》에 대한 비판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교호 2년(1717년) 소라이는 자신의 학문의 기본 방향과 성과를 《학칙》, 《변도》, 《변명》 등의 작품으로 정리하였으며, 1718년 《논어징》의 초고를 완성하였다.
교호 7년(1722년) 이후는 8대 쇼군 요시무네(吉宗)의 신임을 얻어 그의 자문을 맡아, 기존의 추방형을 자유형(自由刑)으로 대체할 것을 진언하기도 했다. 대담한 성격에 자부심도 강하고 중국어에도 통달했다고 하며, 이후로도 계속해서 호엔주쿠를 통해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교호 13년(1728년)에 향년 63세로 숨을 거두었다. 묘소는 지금의 일본 도쿄도미나토구의 나가마쓰 사(長松寺)에 있다. 그가 죽고 9년이 지난 1737년에 《논어징》이 발간되었다.
소라이학의 성립과 경세 사상
오규 소라이의 무덤
소라이는 기존의 주자학을 "억측에 근거한 허망한 설일 뿐이다!"라고 강하게 비판하면서, 주자학에 입각한 고전 해석을 거부하고 고대 중국의 고전을 독해하는 방법론으로서의 고문사학(古文辭學)을 확립했다. 당시 일본의 지식계급은 한문을 읽고 쓸 줄 알았고 중국 고전을 완전히 자기 교양으로 삼았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 소라이는 "우리가 읽고 있는 《논어》 《맹자》라는 것은 외국어로 쓰여 있다. 우리는 옛날부터 번역해서 읽고 있을 뿐이다"라고 폭탄선언을 했다.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하니 불역낙호(不亦樂乎)아"라고 읽고서는 《논어》를 읽었다고들 말하지만, 과연 그걸로 《논어》를 충실히 이해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의문이라면서 소라이는 일본어와 중국어는 기본적으로 문법구조가 다른데 그것을 한문식으로 뒤집어 읽어서는 '야마토 냄새(和臭)'를 면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일본어 냄새를 풍기며 읽고 있는데도 마치 중국의 고전을 그대로 읽고 이해한 양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발상이 처음으로 담긴 소라이의 저작이 《역문전제(譯文筌蹄)》이며 그 초편(初編)의 머리글에 이렇게 써 있다.[3]
"이쪽 학자들은 방언(곧 일본어-옮긴이)을 가지고 쓰고 읽으면서 이를 가리켜 화훈(和訓)이라고 한다. 이것을 훈고(訓詁)라고 이해하지만 실은 번역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이 번역임을 모른다." "저쪽에는 당연히 저쪽의 언어가 있다. 중화(中華)에는 당연히 중화의 언어가 있다. 언어의 체질이 본디 달라서 어느 것에 의거한들 딱 들어맞질 않는다. 이런데도 화훈으로 에둘러 읽고서 통할 것 같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견강부회일 뿐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반성하지 않고 책을 읽고 글을 쓸 때 그저 화훈에만 따른다."
예를 들어 한자 정(靜)과 한(閑)의 일본어 훈은 모두 '시즈카(しずか)'다. 중국어로는 다른 한자로 표기되어 있지만 훈이 같아져 버리기 때문에, 화훈으로 훈독할 경우에 일본인은 중국의 시나 문장의 진정한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의 《역문전제》는 '시즈카'로 발음되는 한어를 전부 늘어놓고 이것은 중국에서 이러저러한 의미라고 밝히는 일종의 자전(字典)이다. 하지만 소라이는 문법도 다르고 질적으로도 다른 중국어를 일본어로 바꿔 읽고 있는 것이 번역임을 의식하지 못하는 일본인들이 자신들이 지금 번역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만 한다면, 중국어의 구조를 중국인 이상으로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면서 긍정적인 주장도 한다. 중국인은 별 생각 없이 자기 언어를 사용하니까 자기 언어와 사상의 참모습을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역문전제》의 성립 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대략 쇼토쿠 연간 이전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 시대에 이미 '고문사(古文辭)'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소라이는 교호 원년 이후 《논어징》 등을 잇달아 쓰기 전에, 그런 비교언어학이라고나 할 방법론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문사'는 언어학으로서 시작된 것이고, 경학으로서의 소라이학이 형성되는 것보다 빠르다.[4]
소라이는 야나기사와 요시야스나 8대 쇼군 요시무네에 대한 정치적 조언자였고, 그가 요시무네에게 제출한 정치 개혁론인 《정담》(政談)에는 그의 정치사상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서양 사상사에서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서 해석했던 마키아벨리처럼, 일본 사상사의 흐름 속에서 종교적 도덕에서 정치를 분리해 내려는 획기적인 저작이었다. 이후 본격적인 경세사상(경세론)이 태어났다. 정담은 쇼군에게 바친 책이었고 비밀에 부쳐졌기 때문에 출간된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인 1868년이었다.
소라이는 밖으로 드러난 것이 중요하지 마음 속에서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은 불교라고 했다. 불교에서는 내면성을 묻지만 유교에서는 인간관계를 문제로 삼는다고 말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소라이학이다. 따라서 정치철학이 되는 것이다. 도덕과 정치를 구별하고, 내면을 묻지 않는 소라이학을 넘어 제자인 다자이 슌다이(太宰春臺, 1680~1747)는 외형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문제를 삼는다고 해서 규범을 철저히 외면화해버림으로써 소라이학을 논쟁거리로 만들었다.[5]
아코 로시 사건에 대한 소라이의 입장
흔히 '추신구라'로 알려져 있는, 겐로쿠 시대에 일어난 아코 로시 사건에서, 아코 로시 47인에 대한 처분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하야시 호코를 비롯해 무로 규소(室鳩巢)·아사미 게이사이(淺見絅齎) 등이 그들을 칭찬하여 목숨만은 구해주자는 주장을 펼친 것에 맞서서, 소라이는 그들을 의사(義士)로서 인정은 하되 목숨을 구해주는 일 없이 전원에게 셋푸쿠(切腹)를 명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소라이 의률서(徂徠擬律書)》라 불리는 문서[6]에 따르면, 소라이는 이 자리에서 "도는 스스로를 깨끗이 하는 길이며, 법은 천하의 규정입니다. 예로서 마음을 다스리고 도로서 일을 다스리는 것인데, 지금 46인의 사무라이(士)들은 그 주군을 위해 원수를 갚았으니 이는 사무라이로서의 수치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깨끗이 하는 도리로서 그 일은 의롭다 할 만 하나, 그 무리들에게만 한정하여 처결한다면 결국은 사사로운 의론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 이유를 논하자면 원래 나가노리(長矩)는 저택 안에서 거리낌없이 행동한 죄를 받은 것인데, 또 다시 기라 씨(吉良氏)가 이를 복수한다며 공의의 허락도 받지 않고 소동을 기획한다 해도 법이라 하여 허용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그 46인의 죄를 결정함에 사무라이의 예로 셋푸쿠를 명한다면 우에스기 가(上衫家)의 원도 헛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충의를 가벼이 대하지 않는 도리로서 심히 공론이라 할 것입니다. 만약 사사로운 의론으로 공론을 해치게 된다면 이후 천하의 법이 서지 못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코 로시 47인의 충정보다는 이들의 행동이 가져올 정치적 영향에 관심을 두고, 충성이라는 도덕적인 기준보다는 천하의 법도라는 정치적 입장에서 그들의 단죄를 주장한 것이다. 소라이는 천하의 대법을 어겼으니 사죄에 처해야 마땅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사'의 도(道)로서는 훌륭하므로 목을 쳐서는 안 되고 할복의 예(禮)로 처리해야 마땅하다고 했다.
이처럼 소라이는 공(公)과 사(私)의 구별을 아주 분명히 했다. 소라이는 '사'를 나쁘다고 하지 않았으며, '사'의 영역에 속하는 것과 '공'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서로 구별된다고만 했다. 따라서 문학처럼 '사'의 영역에 속하는 데에 권선징악의 잣대를 들이밀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문학은 일종의 사적 작업인지라 천하국가론과는 관계가 없으며, 필생의 업으로서 사명감을 갖고 있는 자신의 학문 역시 사적 작업이라고 했다. 따라서 통치하는 것과 학문을 한다는 것은 영역의 구별이지 가치의 구별은 아니라고 명시했다.[7]
소라이의 두부
일본의 만담이나 강담 같은 전통대중예술에서 상연되는 목록의 하나인 '소라이의 두부'는, 쇼군의 어용학자가 된 소라이와 그가 가난했던 시절의 소라이의 은인이었던 두부 장수가 이 아코 로시 사건을 계기로 재회하는 이야기이다.
널리 알려진 스토리는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소라이가 아직 가난한 학자였던 시절에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서 돈도 없이 두부를 주문해서는 점포 앞에서 먹어 버렸다. 하지만 두부 장수는 그것을 용서해 주었을 뿐 아니라 그 자신도 가난한 처지이면서 소라이에게 많은 지원을 해 주었다. 그 두부 장수는 아코 로시 사건이 있은 다음날 가게가 화재로 불타버리는 바람에 졸지에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는데, 이 처지를 알게 된 소라이는 새 가게를 열 돈과 자리를 두부 장수에게 주었지만, "의사(義士)에게 셋푸쿠를 시킨 소라이가 주는 도움 따위, 에도 사람으로서 받을 수 없다"며 두부 장수는 딱 잘라 거절했다. 이에 소라이는 "두부 장수께선 가난하여 돈도 없이 두부를 먹은 저의 행위를 '출세하거든 갚게나.' 하고 너그럽게 봐주셔서 도둑이 되지 않도록 저를 구해 주셨습니다. 그때 법을 굽히지 않는 한계 안에서 정을 베풀어 주셨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입니다. 저도 학자로서 법을 굽히지 않고 그 로시(浪士)들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정을 베풀었으니, 이는 두부 장수께서 제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라며 법의 도리를 말하고, 게다가 "무사라는 자가 아름답게 피어난 이상 보기 좋게 지게 해주는 것도 정을 베푸는 것이며, 무사의 큰 칼은 적을 위해 존재하지만 작은 칼은 그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라며 무사의 도덕에 대해 설파했다. 두부 장수도 이에 납득하고 소라이의 도움을 기꺼이 받고, 로시들의 셋푸쿠와 소라이로부터 받은 선물을 가리키며 "선생님께서는 해를 위해 자신의 부담을 떼어 주셨다"라고 두부 장수가 외치는 데서 이야기는 끝난다.
Ogyū Sorai (荻生 徂徠; Japanese pronunciation:[o.ɡʲɯː(|)soꜜ.ɾai,o.ŋʲɯː-],[1][2] March 21, 1666 – February 28, 1728), pen name Butsusorai/Bussorai[3] (物徂徠), was a Japanese historian, philologist, philosopher, and translator. He has been described as the most influential such scholar during the Edo period Japan. His primary area of study was in applying the teachings of Confucianism to government and social order. He responded to contemporary economic and political failings of the Tokugawa shogunate, as well as the culture of mercantilism and the dominance of old institutions that had become weak with extravagance. Sorai rejected the moralism of Neo-Confucianism and instead looked to the ancient works. He argued that allowing emotions to be expressed was important and nurtured Chinese literature in Japan for this reason. Sorai attracted a large following with his teachings and created the Sorai school, which would become an influential force in further Confucian scholarship in Japan.
Biography
Grave of Ogyū Sorai
Sorai was born in Edo the second son of a samurai who served as the personal physician of Tokugawa Tsunayoshi, who was at the time daimyō of Tatebayashi Domain. At an early age, Sorai studied the Zhu Xi version of Neo-Confucianism under Hayashi Gahō and Hayashi Hōkō; however, his father was exiled in 1679 to a rural village what is now Mobara, Chiba after angering Tsunayoshi. In this rustic setting, he continued to study the major Chinese classics, as well as Japanese and Buddhist texts on his own for the next 13 years, which formed the foundations for his later philosophy. In 1692, Sorai's father was pardoned, and the family moved back to Edo. Sorai opened a school near the temple of Zōjō-ji to teach Chinese classics, and in 1696 received a position in the service of Yanagisawa Yoshiyasu, a senior councillor to the now Shōgun Tokugawa Tsunayoshi. Sorai was assigned to serve Yanagisawa in his domain of Kawagoe. Later, he was granted income of 500 koku, and was assigned to Yoshiyasu's Edo residence, where he provide advice on political issues. One of these issues involved the Akō vendetta in which the Forty-seven rōnin avenged their fallen lord by killing Kira Yoshinaka in 1702. Whereas Muro Kyūsō, Hayashi Hōkō and others praised the actions of the rōnin for their loyalty, Sorai took the opposite stance and argued that they should be forced to commit seppuku, for regardless of the "righteousness" of their actions and the weight of public opinion, the fact that they committed a capital offense was undeniable, and the rule of the law must be impartial.
In 1705, Yoshiyasu became daimyō of Kōfu Domain. Sorai remained in Edo, but visited Kai Province in 1706 at the behest of Yoshiyasu, and wrote a travelogue of the journey, In 1709, following the death of Tokigawa Tsunayoshi, Yanagisawa Yoshiyasu fell from favor, and Sorai left his service and relocated to Nihonbashi, where he opened a private school, the Kenenjuku.He gradually turned away from the teachings of Zhu Xi to develop his own philosophy and school.[4]
In 1722, Sorai was asked to return to public office under the 8th Shogun, Tokugawa Yoshimune, but he refused. He continued to teach until his death in 1728. His grave is located at the temple of Chōshō-ji in Mita, Minato, Tokyo (35°38′38.4″N139°44′16.2″E). The gravestone has the inscription Sorai-mono sensei no haka (徂徠物先生之墓) in front and an inscription on the back stating that the epitaph was by Honda Tadanori and the writing by the noted calligrapher Matsushita Useki. The tomb was designated a National Historic Site in 1949 .[5]
Teachings
Sorai wrote several influential works in which he identified two fundamental weaknesses in the philosophy of Neo-Confucianism. The first was in the bakufu-domain system, which by the eighteenth century was in trouble. As a result, he doubted whether the reliance on finding an individual's ethical good was sufficient. As such he argued that the political crisis of the time required more than perfecting moral character. Moreover, he saw the ancient Chinese sage-kings as concerned not only with morality but also with government itself. His second disagreement with Neo-Confucianism was that he felt putting too much emphasis on morality repressed human nature, which was based on human emotion.
However, these weaknesses he felt stemmed not from a deficiency in Confucianism itself, but rather from a misreading of classic works of the Four Books and the Five Classics by Neo-Confucianists, which he insisted "did not know the old words." Sorai went back to the ancient works for more reliable knowledge, stating "The ultimate form of scholarly knowledge is history." To him, these historical works were the ultimate source, even for an ever-changing present. Sorai thought that study of philosophy began with the study of language. In this he was highly influenced by the Ancient Rhetoric school of the Ming period, which was a neoclassical movement that saw the Qin and Han periods as the model for prose, and the Tang period for poetry. The Sorai school introduced Selections of Tang Poetry, a work thought to have been edited by Li Panlong (李攀竜 1514–70), a founder of the Ancient Rhetoric school, to Japan, where it became very popular. As a result, his school is today sometimes also known as the Ancient Rhetoric (kobunji古文辞) school. However it differed in that he saw it mostly as a means of accessing the Five Classics. He would also accuse other Confucianists in Japan, such as Hayashi Razan, of relying too heavily on Song sources such as Zhu Xi.[6]
Sorai further differed from the Neo-Confucian viewpoints in other aspects. One was that the Way was not a predetermined principle of the universe, but rather an establishment of men, of the ancient sages who described it in the Confucianist classic works. These works provided for the Way, which was divided by rites (rei礼) and music (gaku楽). The former gave social order, while the latter was inspiration for the heart. In this it directly allowed for the flow of human emotions, something denied by the moralist philosophy of Song Confucianism. Sorai argued for the opposite, allowing one to be enriched through music and poetry. As a result of his teachings in putting emphasis on literature as a fundamental form of human expression, Chinese writing would begin to thrive in Japan, becoming an accepted artistic pursuit. His school would thus produce several such great writers of Chinese composition at that time.[4]
Sorai was furthermore a supporter of the samurai class. Institutions that were once under great leadership will later decline and more able men will be less likely to come to power. The samurai, he felt, were best able to overcome this through a system of rewards and punishment. He also saw problems with the merchant class at the time, which he accused of conspiring to fix prices. He was not, however, a great supporter of the lower classes. He argued, "What possible value can there be for the common people to overreach their proper station in life and study such books [as the Confucian classics]?"[7]
Some later scholars criticised his work and found his teaching to be impractical. Goi Ranshū believed that Sorai was motivated to surpass Itō Jinsai, another Confucianist who had influenced him a great deal, and that Sorai took his arguments to the level of absurdity for this reason. Had any of his teachings actually been implemented, Goi felt it would have caused extensive damage to moral philosophy.[8] Another later scholar critical of Ogyū's teachings was Nakai Chikuzan, who was also familiar with Goi's opposition to Ogyū Sorai. Goi wrote his opposition to Sorai in his essay Hi-Butsu hen, which was written in the 1730s, but not published until 1766 having been edited by Chikuzan and his brother. Nakai later wrote his own, highly emotional, rebuttal to Ogyū's beliefs in his work Hi-Chō (1785), wherein he rejected the idea that individuals could not better themselves through moral choices. Moreover, he claimed individuals were able to judge whether external ideas and actions were true and just or not. Denial of these morals, he felt, would leave only "rites and rules" to be followed.[9]
Master Sorai's Teachings
Master Sorai's Teachings is a record of his teaching and exchanges with his students. The text was edited by his own students and contained their questions followed by his answers to them. The work was not released until 1724, but is thought to have actually taken place around 1720. In it he reinforces that literature is not so much intended for the purposes of instruction in morality or governance, but rather it simply allows for the flow of human emotions. From this, answers on the former topics may be found, he argued.[4] While Ogyu sought to redefine the sources of Tokugawa legitimacy, his purpose was clearly to strengthen the authority of the Tokugawa shogunate.[10]
Economic contributions
Though Sorai was best known for being a teacher of Confucianism, he was also called on to find answers to some of the issues in the growing economy, the most notable of which was the rising inflation and prices that began after the debasement of coinage in 1695. The Tokugawa shogunate carried out a total of 12 recoinages between 1695 and the start of the Meiji Restoration in 1868 debasing the currency in an attempt to match the rising demand for money as the commercial economy rapidly expanded. There was an attempt to quell the inflation and high prices in 1714, when the government reminted coins in an effort to reduce the amount of gold in circulation. However, this exacerbated the problem as the old coins remained in circulation alongside the newly minted coins. In response to the currency reforms, Sorai noted that the monetary policies enacted failed as they accounted for only one of the causes of high prices and inflation. Sorai realized that there were more than just monetary influences that needed to be taken into account to address the problem. He noted that since the large cities like Edo had become the center of large markets one had to consider the costs of tariffs and transportation from distant provinces as well as the costs of land and housing in the cities into final prices. Additionally, there was a breakdown of the traditional class distinctions: commoners were able to buy goods that were once reserved for the higher classes, which pushed up prices. Finally, he pointed out that as the merchant class grew in power, it began to collude and fix prices above what was normal. It was all of these factors together, in addition to the monetary influences, that caused wealth and power to shift away from the shogun and into the hands of the merchants, which prompted the debasement of coinage, leading to inflation and exorbitant prices.[11]
Tucker, J., ed. (2006). Ogyu Sorai’s Philosophical Masterworks: The Bendo And Benmei (Asian Interactions and Comparisons).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ISBN978-0-8248-29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