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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7

[인물연구] 박완서 : 월간조선 200106

[인물연구] 박완서 : 월간조선

06 2001 MAGAZINE

[인물연구] 박완서
「평범한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감동을 자아내는 소설을 쓰는 박완서


서병욱 

「바람잡이」 노릇했던 미군 PX 초상화부 시절
6·25 한국전쟁 언저리. 갓 스물의 朴婉緖(박완서). 오빠의 죽음으로 늙은 어머니, 그리고 올케와 어린 조카 둘은 박완서의 몫이었다.

어머니와 올케는 허구한날, 아들과 남편을 잃은 설움에 산송장이었다. 어머니는 젊은 남자만 보면 『왜 저 사람은 살아 있냐?』 『왜, 하필 내 아들만 죽었냐?』며 애통절통했다.

그러면서 세상을 증오했다.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인 오빠의 죽음은, 남들에겐 한갓 「지나치는 바람」일 뿐이었다.

박완서의 일상은 廢家(폐가)에서 흘렀다. 식구들이 도무지 「살려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있는 것 파먹고, 돈 될 만한 물건들을 처분해 살았다. 그러나 이내 「굶어 죽을 처지」에 이르렀다.


박완서는, 「어떻든 살아야만 한다」는 의지가 일었다. 그 의지가, 식구들에겐 다소 염치없기까지 했다. 그러나 삶은 영화가 아니다. 구세주는 어디에도 없었다.

일거리를 찾아 무턱대고 거리로 뛰쳐 나갔다. 1951년 겨울. 대포 소리가 아직도 간간이 들리는 폐허의 도시 서울. 밤이 돼도 주택가는 어두웠다. 불을 켜는 집은 열 집에 하나가 채 안 됐다. 전쟁의 후유증은 길고도 깊었다. 너나없이 가난했다.

일거리가 어디 있나? 수없이 발품을 판 끝에 미군 PX 초상화부 점원이 됐다.

『서울대 국문과를 며칠 다녔지만, 영문과 2학년 재학중이라고 이력서에 썼다. 학력 위조인데도 무덤덤했다. 죄의식 같은게 전혀 없었다. 그만큼 산다는 게 절박했다. 누가 재학증명서를 떼오라고 말할 시절도 아니었다. 당시 서울엔 그만한 일자리가 없었다. 「미군 PX」라는 말만 들어도 모두 사족을 못 썼다』


그러나 몇 마디 회화 테스트를 거쳐 배치된 곳은 으레 생각하던 미제 물건을 파는 매장이 아니었다. 초상화부였다. 말이 근사해 초상화부지, 실상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극장에서 간판을 그리던 간판쟁이 대여섯 명이 앉아 미군의 초상화를 그려 주고 몇 푼 버는 곳이었다. 화려한 매장과는 달리 칸막이로 차단된 더럽고 우중충한 구석이었다.

박완서는 「바람잡이」가 됐다. 지나가는 미군을 꼬셔 초상화를 그리도록 하는 것이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재수 옴붙었다고 생각했다. PX 물건이야 定價대로 파는 거니까, 짧은 영어로도 가능했다. 하지만, 초상화를 그리도록 미군을 설득해야 하니, 우리말로도 어려운 걸, 그것도 그 짧은 영어로 하라니. 미치고 펄쩍 뛸 일이었다. 이왕 취직했으니 한달 월급이나 타먹고 그만두자고 맘 먹었다. 지금 같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일이었다』

미 8군 PX는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자리였다. 광복 전에는 미스코시 백화점, 그리고 광복 후엔 동화백화점이었다.

PX에서 흘러 나오는 물품은 담배, 껌에서부터 하다못해 쓰레기까지 모두 돈이 됐다. 없어서 못 팔았다. 국내에선 거의 아무것도 생산되는 게 없었다.

자연스레 PX를 중심으로 회현동, 남대문 시장 근처는 「PX 경기」로 달아 올랐다. 박완서는, 그러나 벙어리 노릇만 하기엔 한달이 너무 길었다.

박완서는 월급제였지만 화가들은 실적제였다. 그림 그리는 분량에 따라 수당을 받았다. 처음 얼마간은, 전임자가 주문받은 그림으로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주문량이 바닥나자, 화가들은 박완서에게 성화를 부렸다.



혓바닥에 경련을 일으킨 영어 실력

더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러나 궁하면 통했다. 박완서의 말문이 조금씩 열렸다.

『자기 얼굴을 그려 달라는 미군은 별로 없었다. 대부분 애인이나 아내, 어머니의 사진을 내보이고 초상화를 부탁했다. 차츰 관상도 좀 보게 됐다. 대개 졸병이고 좀 어수룩해 뵈는 미군은 꼬시기가 쉬웠다. 처음 수작은 「당신 참 핸섬하다」에서 「물론 걸 프렌드가 있겠지? 그 걸 프렌드는 얼마나 예쁠까? 보고 싶다. 사진 있으면 보여 줄래」로 이어졌다』

그 미군이 기혼자면, 걸 프렌드는 졸지에 와이프로 바꾸면 그만이었다. 미군들의 패스포트는 사진첩과 같았다.

쭈욱 펼치면 걸 프렌드는 물론 부모형제, 조카 사진까지, 열두폭 병풍쯤은 됐다. 그러나 미군들이 정 꼬셔지지 않으면 마지막 카드를 썼다. 화가들을 가리키며 『戰時니까 저, 유명화가의 그림이 헐값이지, 평시 같으면 어림없다』며 후려쳤다.

그림값은 6달러로 선불이었다. 서너 달후, 종전 수준의 그림 주문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산 너머 산이다. 미군들 중 더러는, 초상화가 맘에 들지 않는다며 반품을 해왔다.

이때 반품을 받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는 건 박완서의 수완에 달렸다.

그럴 땐 달랑달랑하는 박완서의 짧은 영어는 혓바닥에 경련을 일으키게 했다. 반품을 받게 되면 화가들도 죽을 맛이었다.

다시 그릴 경우 재료비 등 생돈이 들어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은 또 받을 수 없었다. 어쨌거나 주문이 전임자 때보다 더 늘고 반품도 크게 줄었다. 박완서의 콧대는 높아졌고, 화가들은 박완서를 치켜 세우기에 바빴다. 그러면서 한마디들 했다.

『화장도 하고 퍼머도 하면 훨씬 섹시해 보일 테고, 미군들도 더 많이 꼬일 텐데…』

박완서는 이따금 수틀리면 반품을 받았다. 그리고 반품된 그림을 그린 화가에게 쪼르르 달려가 화풀이를 했다.

『이것도 그림이라고 그렸어요? 발가락으로 그려도 이것 보단 낫겠네요』

『계속 이런 식으로 그림을 그리면, 윗사람에게 알려서 해고시키겠어요』

화가들은 대개 40~50代여서, 박완서에겐 아버지뻘이었다. 그런데도 박완서는 화가들을 「김씨」 「이씨」로 부르며 되바라지게 굴었다.

박완서 자신 때문에 화가들이 먹고 산다는 자만과 짧은 영어로 종일 지껄여야 하는 스트레스를 화가들 쪽으로 돌렸다.

『화가들이 「저런 못돼 먹은 계집애가 다 있을까」 하며 속으로 이를 간다는 걸 물론 알았다. 그러나, 「내가 양키들에게 당한 수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당신들도 한번 당해봐라」하는 식이었다』

실제 PX 출입 때 여순경으로부터 몸검사를 받았다. 도시락까지도 검사를 받았다. 물건을 숨겨 놓지 않았나, 감시하는 거였다. 한국인은 1달러라도 소지하다 발각되면 그걸로 끝장이었다. 해고당했다.

PX 뒤쪽은 싸구려 음식점들이 몰려 있었다. 양공주, 양아치, 달러장수, PX 걸, 잡역부 그리고 양키시장 상인들이 어울려 돌았다. 돈 셈을 하기도 하고 새로운 거래를 트기도 했다. 모두들 미군이나 美製 물건에다 밥줄을 걸고 사는 한통속이었다.

첫 월급을 타서 어머니에게 갖다 줬다. 어머니는 가방을 열고 돈뭉치를 꺼냈다. PX 포장지로 싼 봉투 안에서 돈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도 빳빳한, 은행에서 금세 나온 돈이었다. 사십만원이었다.

어머니는 금세 눈에 눈물이 괴었다.

『세상에, 세상에, 네가 이렇게 많은 돈을 벌었단 말이지!』



화가 朴壽根과의 만남

그러던 어느 날, 한산한 오후. 덩치만 크고 어수룩해 뵈는 「박씨」라고만 알고 있는 화가가 화집 1권을 가지고 와 박완서에게 보여 줬다.

박씨는 평소에도 공용의 허드레붓을 안쓰고 자기 붓만으로 초상화를 그려, 박완서는 그렇잖아도 속으로 「꼴값하네」라며 비웃고 있었다.

『「화집만 갖고 다니면 간판쟁이가 화가로 둔갑하나」라며 우습게 여겼다. 화집은 일제시대 鮮展(선전)에 입선한 작품들을 실은 것이었다. 박씨는 그중 시골여자 둘이서 절구질하는 그림을 가리키며 「자기 그림」이라고 했다. 명함만한 크기로 흑백이었다. 그 그림 밑에 「朴壽根」(박수근)이라고 인쇄돼 있었다. 그제서야 「박씨」의 이름을 알았다』

박완서는 간판쟁이들 중에 진짜 화가가 있다는 걸 알고 쇼크를 받았다. 그동안 너무 버르장머리없이 군 게 더없이 무안했다. 박수근뿐만 아니라 PX에는 서울대 출신도, 재학생도 있었다. 그리고 청소아줌마 중에는 중학교 교사 출신도 있었다. 전쟁은 인간을 하향 평준화시킨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朴壽根이 훗날 그 유명한 화가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쩌면 朴壽根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유명화가가 될 줄 알았다면, 그만한 안목이 있었다면, 朴壽根의 그림 몇 점쯤은 손쉽게 얻어 낼 수도 있었다.

아니 하다 못해 반품 들어온 초상화라도 몇 점 거둬 두었다면 「화가 朴壽根」의 그 어려운 시절의 증거품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8호 정도의 초상화가 단돈 6달러, 그것도 이것저것 떼고 나면 절반도 안 돌아갔다. 겨우 목숨줄이나 이어가는 정도였다.

『박씨는 눈이 황소처럼 순했고 그림 그리는 태도는 담담했다. 별 드러나지 않았다. 이웃집 아저씨 같은 얼굴에다, 목소리는 낮았다. 재담도 할 줄 몰랐다. 사교술도 없었다. 누가 점심먹으러 가자하면, 미적미적 따라갔지만, 먼저 바람 잡는 일은 없었다』

朴壽根은 가난했지만 의젓했다. 모두들 「돈, 돈, 돈」하며 한푼에 치를 떨 때도 朴壽根은 돈에 비교적 미적지근했다. 염색한 軍 작업복을 걸치고 다녔다. 그땐 그 옷차림이 낯설지 않았다. 초라해 보이지도 않았다.

박완서가 朴壽根의 그림이 반품당하지 않게 미군에게 이런저런 아양(?)을 떨고 있을 때면 박수근은 슬그머니 박완서의 등 뒤로 와서 나직이 말했다.

『또 그려 주면 될 걸, 뭘 그렇게 애를 쓰느냐』

還都(환도)로 PX는 용산으로 옮겨 갔다. 朴壽根도 따라 갔다. 이후 박완서는 朴壽根을 더 이상 만난 적이 없다. PX를 그만뒀기 때문이다.

『훗날 朴壽根 선생의 그림이 천정부지로 뛰었다. 난, 이 사실을 그가 작고한 지 몇 년 만에 열린 유작전을 보고야 알았다. 그가, 대단한 화가로 평가받는 게 너무 기뻤다. 그러나 그의 생전의 가난이 억울했다. 또한 절박했던 한 예술가의 생애가 너무 슬펐다. 그래서 그가 어떻게 살았는 가를 말하고 싶었다. 그의 전기를 쓰기 시작했다』



남편을 만난 곳도 PX

뒷날 남편이 된 扈榮鎭(호영진)을 만난 곳도 PX였다. 처음엔 그도 관심권 밖이었다. 박완서 자신을 빼놓곤 다 사람으로 안볼 때였다. 그와는 안면만 있었을 뿐이다. 뭘하는 사람인지도 전혀 모른 채 반년이 지난 어느 날. 한 번은 숙부가 찾아 왔다.

친척 취직 부탁 때문이었다. 그전에도 여기저기 취직 부탁이 많았다. 그때마다, 요령껏 거절했다. 그런데 그날은 사정이 달랐다. 숙부가 고향어른을 모시고 온 것이다.

직원 출입문인 뒷문으로 갔다. 그곳은 바로 북적대는 뒷골목에 잇대 있는 데다, 그날따라 쓰레기차가 들락댔다. 그 와중에 숙부와 고향어른에게 「상처 안 주는 거절」을 하자니, 신경이 곤두섰다.

이걸 먼발치에서 扈榮鎭이 봤다. 그런 박완서가 딴엔 안 됐던지, 扈榮鎭이 『밖에서 그러지 말고 사무실로 와서 얘기하라』고 했다.

사무실은 지하에 있었다. 작업연장과 설계도면이 널려 있었다. 그러나 깨끗한 책상과 의자가 있어서 얘기하기엔 괜찮았다.

扈榮鎭은 茶대접까지 해줬다. 그게 인연이었다. 扈榮鎭의 집은 명륜동, 박완서의 집은 돈암동. 같은 방향이어서 더러 전차를 같이 탔다. 扈榮鎭은 다행히 박완서가 내심 무시하는 PX 종업원이 아니었다. PX가 들어 있는 동화백화점 소속 직원인 측량기사였다.

박완서는 扈榮鎭이 우선 PX종업원이 아닌 게 맘에 들었다.

『남편은 사교술은 빵점이었다. 덤덤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굴었다. 편안한 사람이었다. 어떤 때는 과일봉투를 들고 밤에 불쑥 우리집을 찾아온 적도 있다. 방향이 같다는 게 늘 핑계가 됐다. 명륜동에서 내린다는 걸 깜빡 잊고 돈암동까지 온 김에 들렀다는 식이었다』





『너는 보통 애 하고는 다르다』

1953년 초. 박완서의 올케가 드디어 동대문 시장에 가게를 냈다. 박완서는 그제서야 한시름 놓았다. 어머니에게 PX를 그만두고 결혼하겠다고 했다.

『암, 미군부대는 그만둬야지. 그런데, 학교에 다니는 게 아니라 시집을 가겠다고? 너 같은 애가 시집가서 애 낳고 빨래하고 구질구질하게 살려구? 너는 보통 애 하고 다르다. 공부 많이 하고, 맘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될 수도 있는 애야』

계속 시집가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마지 못해 『누구냐』고 물었다. 扈榮鎭이라고 말했다.

『뭐라구? 그 좋은 학교 그만두고 시집가겠다는 데가, 겨우 노가다 십장이라구? 집안 망신을 시켜도 유분수지』

扈榮鎭이 토목과 출신인 걸 두고 그 전에도 「노가다 십장」이라며 심드렁해 했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있는가?

두 사람은 1953년 4월21일 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 결혼했다. 제대로 된 예식장도 없을 때였다. 중국집 「아서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로는 호화판이었다. 신접 살림은 남편의 집-종로구 충신동 18평짜리 한옥에서 시작됐다.

1963년까지 그 집에서 살았다. 그동안 딸만 넷을 줄줄이 낳았다. 원숙 원순 원경 원균이었다. 집이 너무 좁아 동대문구 신설동 한옥으로 옮겼다. 대지 55평, 건평 30평쯤이었다.

남편은 PX가 옮겨 간 뒤 그 자리에 들어선 동화백화점에서 전기상을 시작했다. 동화백화점이 삼성그룹으로 넘어가기 前까지 10년 넘게 붙박고 있었다.

1963년 아들 원태를 낳았다. 첫 아들이라 집안의 기쁨은 엄청났다.



朴壽根을 소재로 한 데뷔作 「裸木」

이미 찌들대로 찌든, 주부가 돼버린 박완서. 1970년, 마흔 살이었다. 그때 마침 「신동아」의 논픽션 모집 마감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PX 근무와 화가 박수근」을 소재로 논픽션을 쓰기 시작했으나, 마음 같지가 않았다. 「논픽션」엔 「사실」이라야 한다는 족쇄가 따랐다. 자기 표현이 스며들 여지가 없었다.

논픽션에서 픽션으로 바꿨다. 대학노트에 촘촘히 적었다. 이게 데뷔작 「裸木(나목)」이다. 「여성동아」 장편소설 당선작이다.

그땐 문단형편도 알 턱이 없었다. 막연히 「현대문학」을 떠올렸고, 1년에 한두 번 현대문학에 단편을 발표할 수 있는 작가가 됐으면 했다.

그해 늦여름, 기자 몇몇이 신설동 집으로 들이 닥쳤다.

『당선을 축하합니다. 당선되실 줄 미리 아셨나요?』

『될 줄 알았어요. 여자들끼리 경쟁인데요, 뭐』

「裸木」은 11월호 여성동아 부록으로 세상에 나왔다. 그러나 그 후로도 박완서의 일상은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무거운 시장 바구니를 들고 언덕을 오르내렸다. 그러나 짬짬이 소설을 썼다.

그 이듬해. 「현대문학」에 단편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가 실렸다. 이로써 묵은 소원이 이뤄졌다.

1973년, 「신동아」에 단편 「지렁이 울음소리」가 실렸다. 이 작품은 그 얼마 후 「문학과 지성」에 再수록됐다. 박완서는 비로소 「작가」로서 대접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외 「부처님 근처」 「카메라와 워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저녁의 해후」 「아저씨의 훈장」 「엄마의 말뚝」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작품들을 쓴다. 이들은 한결같이 소위 「분단문제」를 다뤘으며 이를 통해 「비통한 박완서의 가족사」를 줄기차게 내비치고 있다.

『6·25 한국전쟁, 분단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로 인한 내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아니 피가 뚝뚝 흐르고 있다. 그 피로 뭔가를 써야 할 것 같다. 왜냐면, 이는 나뿐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상처이기 때문이다』

「未忘(미망)」. 1990년, 처음 쓴 장편 역사소설. 갑신정변부터 6·25 발발까지 60여 년 동안의 개성의 大商(대상), 전처만의 집안 5代의 가족사이자 사회사다.

「미망」은 역사적 사실보다 한 시대의 삶을 再창조했으며 개성의 지역성과 상인정신을 뛰어나게 그렸다는 평을 얻었다.

「미망」엔 박완서의 고향, 개성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녹아 있다. 이 소설을 위해 어릴 적 고향에의 기억을 총동원했다. 고향말은 물론 풍습을 복원키 위해 취재도 적지 않게 했다.

「…시니까」 「설라므네」 「했는?」 등 깔끔하고 단정한 개성사투리도 들어 있다. 이 소설은 쓰는 데 5년이 걸렸다.

『지척에 둔 고향은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곳이 돼 버렸다. 「미망」은 나의 귀향이다.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그리운, 두고온 산하를 거침없이 누비도록 했다. 「미망」은 「문학사상」에 5년 간 연재한 것이다. 월 100장씩 썼다. 당초 200자 원고지 7000장 분량이던 것을 책을 낼 때 상당수 덜어 냈다. 내가 애착을 가지는 작품이다』




「얼어 죽어도 곁불은 안 쬔다」

개성, 개성사람. 「얼어 죽어도 곁불은 안 쬔다」 「앉은 자리에 풀도 나지 않는다」 등은 개성사람들의 「올곧음」이 곧 「개성 정신」임을 표현하고 있다.

개성사람을 두고 「깍쟁이」라고 한다. 그러나 흔히 생각하는 「깍쟁이」는 아니다. 「깍쟁이」는 「가게쟁이」, 개성말로 「각」이 변한 것이다.

『개성사람들은 셈이 바르다. 셈이 너무 바른 것을 두고 「개성사람들은 무섭다」고들 하는데, 정작 개성사람들은 말한다. 「셈이 바른 게 왜 무섭냐? 셈이 흐린 게 무섭지」라고. 눈처럼 흰 옷을 즐겨 입고 검소하고 꼿꼿하다. 남의 신세지는 걸 죽는 것보다 싫어한다. 개성사람들은 돈을 꿔줄 때, 예를 들면, 쌀이나 장작을 사기 위해서라면 두말 없이 꿔 준다. 그러나 고기를 사기 위해서라면, 거절한다』

개성은 물이 흔전만전이다. 이탈리아 베니스를 닮아 있다. 개천이 거미줄같이 얽혀 있다.

개성인들은 재벌급은 별로 없다. 고만고만한 부자들은 많다. 이는 천민자본주의와는 생리상 맞지 않음을 보여 준다.

빚내는 걸 무척 경계한다. 신용을 뭣보다 중시한다. 도와 줄 사람은 끝까지 도와 준다.

개성상인들은 자식을 서로 교환해 장사하는 법을 가르쳤다. 자기 자식에겐 자칫 물러지는 인간의 심성 때문이다.

장사를 위해 돈을 빌려 줄 땐, 얼마간의 이자를 붙인다. 그러나 장사가 실패해 두번째 돈을 빌릴 땐 無이자로 준다. 그리고 그 장사가 성공할 때까지 도와 준다.

「미망」은 이렇게 시작된다.

『고려가 망한 지 근 오백년, 고려의 옛 서울 개성은 왕도의 영화는 비록 만월대의 秋草(추초)처럼 속절없이 되었을망정 또다른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조선팔도를 고루 누비며 5厘(리)의 이문을 위해 10里(리)를 쫓기를 마다하지 않는 보부상들뿐 아니라 상업의 요지마다 자리잡고 그 일대 물산의 유통을 원활하게 하여 때로는 담대한 買占(매점)으로 거액의 이윤을 노리는 소위 松房(송방)들의 돈과 물자의 모든 길은 개성으로 통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해질녘 수수밭의 수숫대가 흔들리는 것이 왠지 슬프다」고 느꼈던 일곱 살 소녀

박완서. 1931년 경기도 개풍군 묵송리 박적골에서 출생. 박적골은 개성에서 이십여 리 떨어진 벽촌.

세 살 때 아버지는 病死(병사)했다. 할아버지가 아버지였다. 어머니, 열 살 위인 오빠와 함께 유년기는 흘렀다.

할아버지는 「아비 없는 손녀」를 끔찍이 아꼈다. 동구 밖 산모롱이에서, 출타 후 귀가길의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건 큰 기쁨이었다.

그럴 때면 일쑤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사탕이나 약과 따위를 손에 쥐어 줬다. 더러는 산모롱이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할아버지가 나타나지 않았다. 비가 오거나 눈 내리는 날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청승 좀 작작 떨라』고 했다.

그런데도 「기다리는 재미」는 알싸했다.

어머니는 처녀적에 「삼국지」 「수호지」을 읽고 그 내용을 술술 외울 정도였다. 그리고 「옥루몽」 「홍루몽」 「춘향전」 「심청전」 같은 소설들은 손으로 베껴 책으로 만들었다.

박완서는 지금도 기억한다. 반닫이 속에 가득했던 그런 책들을.

어머니는 남편의 삼년상이 끝나자 마자 불에 덴 것처럼 후닥닥 오빠를 데리고 서울로 이사했다.

예닐곱 살 적에 이미 완서는 「해질녘 수수밭의 수숫대가 흔들리는 것」이 왠지 슬프다고 느꼈다. 어머니는 이내 완서도 서울로 데려 갔다.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

박완서는 1991년, 「저 세상으로 간 남편」에의 회한을 담은 소설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을 썼다.

남편이 1988년 폐암으로 죽기 前, 남편의 마지막 1년을 간병기 형식으로 그린 것이다.

『매일 밤 그의 손을 꼬옥 붙들고 잤다. 행여 내가 잠든 사이에라도 당신의 영혼이 육신을 훌쩍 떠나가지 않도록 지키고 있다는 몸짓이었고, 그도 그걸 알아 주길 바랐다』

소설에의 집착은 슬픔을 잊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슬픔에의 천착이기도 했다. 모티브인 여덟 개의 모자는 남편의 폐암이 뇌로 전이되면서 항암제 때문에 탈모증이 생기자 하나 둘 사모은 것이다.

간병하면서 절망하고 때론 짜증을 내면서도, 모자에 얽힌 신혼 때의 추억까지도 내비치고 있다.

1988년, 그해는 박완서에겐 「악몽」이었다. 남편을 잃은 그 3개월여 후쯤, 스물다섯의 외아들 원태가 죽은 것이다. 원태는 마취과 의사가 되려고 했다. 의과대 레지던트 과정에 있었다. 그러면서 연극에도 빠져 있었다. 연극 「세일럼의 마녀」에서 주연을 했고 「코뿔소」를 연출하기도 했다.

박완서는 스스로 미치지 않는 게 저주스러웠다. 아들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묘비명을 썼다.

『평생 인간과 의학과 연극을사랑하다 간 젊고 아름다운 영혼 여기 잠들다』

박완서는 부산 분도수녀원에서 20여 일을 하느님과 대결하며 살았다. 그러나 결론은 「그래도 살아야 한다」였다.

남편과 아들이 살았을 땐, 「글을 쓴다는 게 사치요, 욕심이지」 싶었다. 그러나 죽은 후엔 글은 공기였다. 마시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아들이 이 세상에 살아 있지 않다는 걸 인정하게 되면, 그 다음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미친 듯이 몸을 솟구치면서 울부짖을 차례였다. …목청껏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통곡하면 소리와 함께 고통이 반사되면서 곧 환장을 하거나 무당 같은 게 되어서 죽은 영혼과 교감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에 사로 잡히곤 했다.

이때의 심정을 1990년 가톨릭 잡지인 「생활성서」에 「한말씀만 하소서」라는 제목으로 일기처럼 썼다』

아들의 죽음도 「허무의 일부」라고 믿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순 없었다.

「하필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나」 그러나 또 한편 「왜 당신이라고 그런 일을 당하면 안 되는가」라는 질문과 대답을 스스로 했다.

『내 기억력 말고는 아들이 존재했었다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이 세상이 도무지 낯설고 싫다. 그런 세상과는 생전 화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누군가가 그런 박완서를 두고 『외롭지 않느냐』고 하면 『외롭다』고 했다. 그러면서 문득 「그런 너는 외롭지 않느냐」고, 속으로 되물었다.



『유려하고 한점 막힘 없는 천의무봉의 작가』

한동안 「자식을 앞세우고도 살겠다고 꾸역꾸역 음식을 처넣는 에미(자신)」를 생각해 내니 자신이 너무 징그러웠다.

박완서의 소설은 「평범한 개인의 일상」이 타깃이다. 의도적이기보다는 무의식적이다. 문학은, 소설은, 큰 게 아니라 조그마한 것이 감동을 준다는 걸 선험적으로 감지하고 있다.

소설도 저잣거리에 나가 찬거리를 마련하듯, 그렇게 쓴다. 그러나 실상 「뼛속의 진까지 다 빼는 고통」이 따른다.

문체도 애써 고급스럽게 치장하지 않는다. 일상에서 뱉을 수 있는 아주 흔한 말인데도, 그게 독자들의 가슴을 친다.

「대중성의 획득」에 뛰어나다. 그러면서도 천박스럽지 않게 잘도 주물러낸다.

박완서는 언젠가 말했다.

『누군가로부터 「어떻게 마흔 살에 글을 쓸 마음을 가졌느냐, 습작은 얼마나 했느냐, 누구에게 사사했는가」 등의 질문을 받을 땐 대답이 궁색하다. 사사도 한 바 없고 습작기도 없었다고 솔직히 말하자면 으스대는 것 같아 망설여진다』

누군가가 말한 「만들어진 소설가」가 아니라 「태어난 소설가」란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꼭 말하자면 「태어난 작가」 쪽이다.

어머니의 옛얘기나, 사춘기에 섭렵한 문학작품이나, 그리고 「애통한 가족사적 슬픔과 응어리」가 한데 어우러져, 그를 「소설가로 밀어 내지 않았나」 싶다. 아마 그는 쓰지 않았으면 지레 미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언젠가, 박완서를 가리켜 말했다.

『병의 물을 거꾸로 쏟는 듯이 유려하고 한점 막힘이 없는 천의무봉의 작가다』

박완서는 이제껏 6·25와 분단문제에 매달려 있다. 전쟁으로 인한 사회구조의 변화와 윤리의 붕괴 등을 보면서 억압받고 소외당하는 여성들을 끄집어 낸다. 왜곡된 현대사를 살아온 한국인들의 삶을 총체적으로 조명하기도 한다.

「裸木」은 6·25 전쟁으로 인해 신음하고 있는 사회, 황폐한 인간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 민족분단이라는 비판적 의식까지 담고 있다. 또한 어머니의, 여성의 존재를 통해 전쟁의 후유증을 적시하고 있다.

「裸木」의 연장선상에서 「엄마의 말뚝」은 도드라진다. 戰後(전후) 현실과 사회적 변동, 즉 물질만능주의의 세태와 속물주의적 근성을 야유한 그런 패턴은 이후 「도시의 흉년」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휘청거리는 오후」 등의 소설을 통해 확대된다.

그리고 6·25 이전의 시대적 의식의 근거로 장편소설 「미망」을 내놓는다.

「미망」을 통해 박완서의 관점은 역사로까지 접근한다. 오늘날 가치관의 붕괴는 가족 구조와 삶의 풍습이 파괴되는 데서 상당 부분 유래한다고 보고 있다.

박완서의 소설은 리얼리티에 도덕성을 가미한 것이다. 삶의 규범과 관습의 붕괴를 인간의 위기로 받아 들이고 있다.

소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는 「페미니즘 문학」이라고 일컬어지는 여성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 끊임없이 꿈으로부터 배반당하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꿈을 꾸는 이혼녀의 얘기다.

박완서는 이 소설 속에서 「인간으로 입문하는 조건을 100점으로 칠 때 남자로 태어나는 것은 50점을 따고 들어 가는 것」이라는 말을 통해 남성우위의 사회라는 부조리가 신의 섭리에 합당한 것인가를 묻고 있다.



「만년 소녀의 웃음」

박완서. 아직도 詩 100여 편은 외우고 있다. 김수영과 김기림은 그녀가 특히 좋아하는 詩人이다.

봄비라도 촉촉이 내려 주는 날엔 변영로의 詩를 읊는다.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15년 前 식구들의 성화로 가톨릭에 입문했다. 세례명은 「정혜」. 경기도 구리시 아차동 단독주택에서 살고 있다. 천호대교 북단에서 구리시로 이어지는 도로변에 움푹 들어간 곳이다.

옆으로 한강이 폭포처럼 길게 흐른다. 아침이면 머리에 해가 뜬다. 100여 평의 뜨락. 거기엔 살구나무, 모과나무, 라일락, 대나무, 작약, 심지어 채송화, 백일홍까지 있다.

이곳은 소설 「저문날의 揷話(삽화)」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저문 세대의 눈을 통해, 우리 시대 보통사람들의 삶과 세태를 엮은 것이다.

이 소설의 내용 중 『늙은 아내가 들어서며 「전화온 데 없냐」』는 저문 세대-노부부의 일상을 압축하고 있다. 「쓸쓸함」 「지겨움」 그리고 자식들에게서 언제 날아 들지 모르는, 좋지 않은 일들에 대한 조바심 등이 깔려 있다.

박완서. 아침 7시면 인근 아차산에 오른다. 동네사람들과 만나, 일상의 얘길 나누다 내려 온다.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지금 살고 있는 곳도 좋긴 하다. 그러나 「고향집 한옥」을 떠올리면, 이내 시큰둥해진다. 「보문동 한옥」도 꽤 좋았다.

『보문동 한옥에서 20년을 살았다. 그 곳에서 몸만 떠나고 마음은 두고 왔다』

서울 시내에 볼 일이 있을 때면 전철을 탄다. 그 밖엔 그냥 집에 눌러 있는 게 편하다. 『요즘 무슨 소설을 구상하고 있느냐』고 하자, 그 트레이드 마크인, 「만년 소녀의 웃음」을 슬쩍날리며 조용조용 말한다.

『아무 것도 없다. 그저, 머리 속에 뭔가 굴러 다니긴 하는 데, 실체는 없다. 그런데, 이상한 게 다른 일은 몇 십년 하면 「숙련」이 되는데 소설은 아니다. 언제나 두렵고 생경하다. 소설 데뷔 때도 하루 200자 원고지 20장 이상은 못 썼다. 「미망」은 잡지 연재라는 특성상, 하루 50장을 메우기도 했다. 그러나 평소 땐 하루 종일 애 써도 다섯 장을 넘기기도 힘들다. 쓰는 데도 고갯길이 있다. 고갯길만 넘어서면 내리막길을 쉽게 내려 가는 것처럼…. 그럴 때는 30~40장도 쓸 수 있어 좋다』

말 속엔 「깐깐함」이 서려 있다. 그리고 「할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도 배어난다.

그러나 아직도 소설 쓰기는 때론 고문이다. 청탁원고의 마감날이 되면, 일부러 친구도 만나고 장롱을 뒤지기도 하고, 꽃이파리도 닦는 등, 딴청을 핀다. 이는, 묶이는 것에 대한 방어다.

박완서. 말수가 적다. 새침떼기다. 남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지 못한다.

이따금씩 전철에서 만난 知己(지기)와 수작을 떠는 게 싫어 내릴 역을 몇 정거장 앞두고 슬그머니 내린 적도 없지 않다.

作中인물의 성격묘사는 칼이다. 지긋지긋할 만큼 그 묘사에 집착한다. 어휘 또한 다양하다. 이는 대중 속을 파고 드는 제1의 카드다.

『치밀한 성격묘사는 톨스토이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단역에까지도 성격묘사는 구체적이고 실체적으로 하려 한다. 그리고 어휘가 비교적 풍부한 건, 내가 대가족 속에서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대중 정서를 정확히 파악, 억압받는 부분을 양지로 끌어내 건강한 정서로 바꿔내는 것도 소설가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은 위로받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소설을 매개로 작가와 독자가 서로 위로받을 수 있다면, 더 이상 뭘 바라겠는가』



『달기도 하고 뒤끝도 좋은 것이 좋은 소설』

아직도 소설이 뭔지 모른다. 다만 소설은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소위 「대중소설」과 「순수소설」의 차이를 묻자, 의외로 싱겁고 단순하게 답했다.

『소설에서 「재미」는 「맛」이다. 맛이 혀에 달기만 하고 뒤끝이 나쁜 것과 달기도 하고 뒤끝이 좋은 것이 있다. 달기도 하고 뒤끝도 좋은 것이 「좋은 소설」일 것이다. 「좋은 소설」은 「知的 즐거움」을 주는 게 아니겠는가. 「대중」이니, 「순수」의 차이는 그만두고라도 그 한계는 있을 것이다. 독자들에게 「헛된 꿈」과 「삶을 너무 쉽게 보게 하는 것」은 「나쁜 소설」일 것이다』

적재적소의 「어휘」를 찾아 늘상 헤맨다. 그러다 그 상황에 따악 맞는 어휘를 찾았을 땐, 머리에 스파크가 인다.

그동안 이상 문학상(엄마의 말뚝 1), 이산 문학상(미망), 중앙문화상 예술대상(그 많던 싱아는 어디로 갔나) 등의 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게 무슨 대수인가」 싶다.

다만 소설가라는 게 그렇게 소중하고 대견할 수 없다.

『「소설가」란 신분증은 없어도, 「나는 소설가」란 자각 하나로 살아 왔다. 난, 아직도 소설의 정의를 못 내리고 있다. 다만 「소설은 얘기다」 정도로만 여긴다. 어머니처럼 「뛰어난 얘기꾼」이고 싶다』●

'제국의 사서' 이재욱과 박봉석은 '친일파'인가? - 오마이뉴스

'제국의 사서' 이재욱과 박봉석은 '친일파'인가? - 오마이뉴스


서울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 | 34화

'제국의 사서' 이재욱과 박봉석은 '친일파'인가?[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 국립도서관 ①
19.08.08 17:59l최종 업데이트 19.08.08 17:59l
글: 백창민(bookhunter)
이혜숙(sugi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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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국립중앙도서관은 1963년까지 '국립도서관'이라 불렸다. 1945년 10월 15일 문을 연 '국립도서관'은 조선총독부도서관의 시설, 장서, 사람을 그대로 승계한 도서관이다(관련 기사 : 명동 롯데백화점 주차장에서 이 표석을 본 적 있나요).

여기서 짚고 넘어갈 부분은 조선총독부도서관의 거의 모든 것을 승계한 도서관이 '간판'만 바꿔단다고 '국립도서관'으로 전환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 전환은 조선총독부에서 일하던 관료와 경찰이 미군정을 거쳐 대한민국 공무원과 경찰로 그대로 이어진 것과 무엇이 다를까.

도서관이 맞은 '해방'


▲해방은 단 25일뿐?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지만 1945년 9월 8일 미군의 진주와 함께 미군정 시대로 돌입했다. 해방이 되었지만 총독부 청사에는 ‘태극기’가 아닌 ‘성조기’가 내걸렸다. 미군 진주와 함께 뒤바뀐 이 상황을 도올 김용옥은 ‘해방은 단 25일뿐이었다’라고 표현했다. ⓒ Wikipedia관련사진보기

 
영화계의 거장 임권택은 인터뷰를 통해 그가 맞은 '해방'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남긴 바 있다.


"국민학교 때 학교에서 조선말 썼다고 모질게 때렸던 교사가 해방 후 여전히 학교에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박완서 역시 장편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그녀가 겪은 '해방'의 풍경을 이렇게 남겼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일본인 교장 선생님과 선생님들이 안 보이는 건 당연했지만 일본어를 가르치던 국어 선생님이 그냥 우리말의 국어 선생님으로 눌러앉아 있는 건 잘 이해가 안 됐다."

두 달 전까지 '사상의 관측소' 역할을 하며 '총독부도서관'으로 군림하던 곳이 간판만 바꿔 단다고 '국립도서관'이 되는 걸까. 경찰과 관료뿐 아니라 국립도서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런 모습이 우리가 겪은 '해방'의 실체는 아니었을까.

정부 수립 전에 출범한 '국립'도서관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기념식에 참석한 하지와 맥아더왼쪽부터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 중장,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원수, 이승만 대통령. 미국의 역코스(reverse course) 전략으로 인한 ‘현상유지’ 정책이 아니었다면 국립도서관의 설립 과정도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 서울대학교는 명예박사 학위 1호를 맥아더에게, 2호는 하지에게 수여했다. ⓒ 국가기록원관련사진보기
미군이 인천에 상륙한 것이 1945년 9월 8일, 서울 중앙청(옛 조선총독부)에서 교육 담당 업무를 시작한 것이 9월 11일, 미군 장교가 학무국장으로 임명된 것이 9월 14일, 공립초등학교가 다시 문을 연 것이 9월 24일, 한글 교과서 발행 원고가 승인된 것이 10월 15일이다.

국립도서관은 해방된 지 정확히 두 달만인 1945년 10월 15일 문을 열었다. 국립박물관 개관일이 1945년 12월 4일, 과학관 개관일이 1946년 2월 8일인 것을 감안하면, 국립도서관이 얼마나 빨리 문을 열었는지 알 수 있다.

국립도서관이 개관한 1945년 10월 15일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이다. 정부가 수립도 되기 전에 국가가 세운 '국립'도서관이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 제기가 있을 수 있다. 국립서울대학교 역시 같은 질문을 피할 수 없다.

물론 나라는 이어졌으되 주권을 강탈당해 정부가 수립되지 않은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국립도서관과 국립서울대학교 모두 실질적인 설립 주체는 대한민국 정부가 아닌 '미군정'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일제 통치기구와 제도, 인력을 그대로 유지한 미군정의 '현상 유지' 정책이 아니었다면 국립도서관과 국립서울대학교는 다른 방향으로 설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국립도서관 설립 주체였던 이재욱과 박봉석은 조선총독부도서관 고위직에 있던 이들이어서, 해방된 조국에서 새로운 인물을 중심으로 도서관을 설립하자는 논의가 일었다면 국립도서관 건립 양상도 달라졌을 것이다.

한국 도서관의 아버지, 박봉석


▲초대 국립도서관 부관장 박봉석국립중앙도서관 2층 문화마루 전시 공간에 새겨진 박봉석 부조.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 기간까지 국립도서관 개관, 조선도서관협회 결성, 조선도서관학교 설립과 같은 활발한 활동으로 우리 도서관의 기틀을 마련했다. ⓒ 백창민관련사진보기
국립도서관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박봉석이다. 박봉석은 '한국 도서관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1905년 8월 22일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박봉석은 1927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나와 1931년 중앙불교전문학교(동국대학교의 전신)를 졸업했다.

1931년 3월부터 조선총독부도서관에서 일하기 시작했는데, 신분은 고원(雇員)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봉석은 조선총독부도서관에 들어간 때부터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주로 분류와 편목 업무를 담당했다. 1939년 3월에는 일본 문부성 공립도서관 사서 검정시험에 합격했다. 해방이 될 때까지 조선인 중 일본 문부성이 발급한 '사서 자격증'을 보유한 사람은 박봉석과 최장수 두 사람뿐이다.

1940년 개성에 중경문고(中京文庫) 도서관 개관 준비를 맡으면서 새로운 분류표를 완성했고, 이를 조선공공도서관 도서분류표로 발표했다. 1940년 시점에 조선총독부도서관 서열 10위였던 박봉석은 1942년에는 80여 명의 직원 중 서열 3위로 뛰어올랐다. 오기야마 히데오(荻山秀雄) 관장과 이재욱 부관장에 이어 '넘버 쓰리'였던 셈이다.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16일 박봉석을 비롯한 조선인 직원은 일본인으로부터 조선총독부도서관을 접수할 것을 결의하고 도서관 장서와 시설 보존에 힘썼다. 1945년 9월 1일 박봉석은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방문했고, 건준으로부터 조선총독부도서관과 철도도서관의 유지를 요청받았다. 조선총독부도서관 접수와 건국준비위원회 접촉, 낙향한 이재욱 관장 추대 같은 일련의 움직임을 보면 박봉석은 '정무적' 감각도 상당한 인물이 아니었나 싶다.

1945년 10월 1일 오기야마 히데오 관장으로부터 도서관 운영권을 넘겨받았고, 10월 15일 아침 9시 이재욱을 관장으로 박봉석을 부관장으로 국립도서관을 개관했다. '국립도서관'이라는 이름은 박봉석과 미군정 문교부 최승만 교화과장이 정했다.

해방 직후에는 무슨 책이건 우리 글로 된 책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강준만은 해방 이후 '유흥계'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호황을 누린 분야가 '출판계'였다며 당시 상황을 '출판의 둑이 터졌다'라고 표현했다. 박봉석은 '문헌수집대'를 만들어 거리에서 뿌려지고 판매되는 인쇄물을 수집했다. 훗날 건국사의 귀중 자료가 될 것을 생각한 조치인데, 이렇게 모인 자료를 해방 1주년 전시회를 통해 공개하기도 했다.

1945년 12월 10일부터 1946년 5월 11일까지는 법률도서를 법제도서관으로 이관하려는 미군정의 조치로부터 도서관 장서를 지켰다. 1946년 4월 1일에는 '조선도서관학교'를 설립해서 사서 양성에 힘썼다. 조선도서관학교는 조선인 스스로 도서관 인력 양성을 위해 설립한 최초의 교육기관이다. 박봉석은 1945년 조선도서관협회와 1947년 조선서지학회 결성을 주도하고 조선십진분류표와 조선동서편목규칙을 발표하며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박봉석 띄우기 '제대로' 하자


▲박봉석이 서훈받은 은관문화훈장문화예술 발전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수여하는 문화훈장에는 금관, 은관, 보관, 옥관, 화관이 있다. 은관문화훈장은 2등급 문화훈장이며, 박봉석은 2003년 10월 도서관인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이 훈장은 국립중앙도서관 2층 문화마루에 전시되어 있다. 도서관인 중에는 마을문고 운동을 활발히 전개한 엄대섭이 2004년 두번째로 은관문화훈장을 서훈받았다. ⓒ 백창민관련사진보기
박봉석을 띄우고 싶어서였을까. 박봉석을 다룬 책마다 박봉석이 만든 조선공공도서관 도서분류표가 "당시 여건으로는 신분상 위험이 따르는 일"이며 "냉혹한 일본의 침략정책 밑에서 박봉석의 굳은 민족의식을 엿볼 수 있는 흔쾌한 일"이라는 서술이 넘쳐난다. 박봉석이 일본 다음에 '조선문'을 배치한 이 분류표가 그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드러내는 지점일까?

박봉석은 조선공공도서관 도서분류표를 1940년과 1941년에 걸쳐 <문헌보국>(文獻報國)을 통해 공개 발표했다. <문헌보국>이 어떤 매체인가. 바로 서슬 퍼런 조선총독부도서관의 '기관지'다. 총독부뿐 아니라 특고경찰이 감시의 눈빛을 번득이는 상황에서 민족의식이 엿보이는 분류표를 공개적인 지면을 통해 발표하는 게 가능했을까?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박봉석이 신분상 위험이 따르는 분류표를 만들어 조선총독부도서관 기관지에 발표까지 했다?

박봉석은 <문헌보국>에 발표한 조선공공도서관 도서분류표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신동아 건설의 가을, 우리 조선 도서관계도 그 박차를 가해야 하나 발랄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다." 박봉석이 '조선 도서관계도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언급한 '신동아 건설'은 일제가 부르짖은 '대동아공영권'을 지칭했을 것이다.

박봉석이 만든 조선공공도서관 도서분류표는 그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드러내는 대목이 아니라 사서로서 그가 지닌 열정과 성실함을 보여주는 지점이 아닐까. 박봉석에 대한 '조명'은 좋지만 '오버'하진 말자.

'한국 도서관의 아버지', '한국의 멜빌 듀이', '도서관 사상가'... 박봉석에 대한 헌사와 찬사는 넘치지만 정작 그의 '사상'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전집'은 출간조차 되지 않았다. 한국 도서관과 문헌정보학계의 게으름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박봉석을 띄우는 것은 좋다. 이왕 띄우려면 그의 사상을 제대로 살필 수 있는 '전집'이라도 내자.

'한국 도서관의 아버지'인 박봉석이 이럴진대, 다른 사람은 말해 무엇하랴. 초대 국립도서관장 이재욱의 저술을 모은 <이재욱 전집>도 도서관이나 문헌정보학계가 아닌 '영남민요연구회'에서 출간했다.

이재욱은 왜 철저히 잊혔을까


▲초대 국립도서관장 이재욱1905년 9월 20일 대구에서 태어난 이재욱은 대구고등보통학교와 경성제국대학 조선어문학과를 졸업했다. <봄은 고양이로다>를 쓴 시인 고월 이장희가 그의 삼촌이며, 중추원 참의를 지낸 대구의 대표적 친일파 이병학이 그의 조부다. 1931년부터 조선총독부도서관에서 일했고, 경성방송국 라디오에 출연, 독서와 도서관 프로그램을 담당하기도 했다. ⓒ 백창민관련사진보기
국립중앙도서관 '서고 견학'을 다녀온 적이 있다. 견학 과정에서 관람객의 질문이 나왔다. 국립중앙도서관 2층 문화마루 전시 공간에서 '초대 관장이 아닌 부관장인 박봉석을 기리는 이유가 뭐냐'는 것이다. 그때 견학을 돕던 담당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박봉석은 사서이고 관장은 사서가 아니라서 그렇다'라고. 사서여서 기리고 사서가 아니어서 기리지 않는다는 설명도 이상하지만 담당자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다. 박봉석뿐 아니라 초대 관장인 이재욱 또한 '사서'다.

이재욱은 국립도서관 역사상 유일한 '사서 출신 관장'이다. 대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우현서루'(友弦書樓)라는 도서관을 접한 이재욱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선어문학과를 졸업했다. 1931년 조선총독부도서관에 촉탁으로 들어가 '사서'를 거쳐,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도서관 서열 2위인 '부관장'이 되었다.

1905년 박봉석과 같은 해에 태어난 이재욱은 조선총독부도서관에도 1931년 같은 해에 들어갔다. 동갑내기에 입사동기인 셈인데, 이재욱의 승진이 더 빨랐다. '제국대학' 출신인 데다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조부 이병학의 '후광'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식민지 도서관에서 보기 드문 '출세'를 한 걸 보면 이재욱이나 박봉석 모두 '능력'을 인정받았던 모양이다.

오기야마 히데오 관장이 와병 중일 때는 부관장인 이재욱이 총독부도서관을 이끌기도 했다. 이재욱은 1945년 초 조선총독부도서관을 그만두고 고향인 대구로 내려가 경북도청에서 일하다가 해방 이후 박봉석을 비롯한 국립도서관 직원의 추대를 받아 초대 국립도서관 관장이 되었다.

1935년 <농촌도서관의 경영법>을 한성도서주식회사를 통해 출간하고, 해방 후 1947년에는 <독서와 문화>를 조선계명문화사를 통해 출간했다. 이재욱이 남긴 글을 살펴보면 국문학과 민속학, 서지학, 도서관학 분야에서 상당한 식견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이재욱은 조선어문학회와 진단학회, 조선서지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46년 박봉석에 이어 조선도서관협회 2대 회장을 맡았다. 박봉석 부관장과 함께 '조선도서관학교'를 만들어 강사로도 활동했다.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그는 도서관 분야 '강습회'에서 빠지지 않는 강사였다. 특히 1939년부터 1943년까지 조선도서관연맹 주최로 열린 도서관 강습회에서 이재욱은 강사로 나선 '유일한' 조선인 사서였다.

그가 가진 실력이나 존재감으로 볼 때 이재욱은 박봉석에 필적하면 필적했지 부족한 사람이 아니다. 박봉석이 도서관학을 중심으로 전문성을 키운 사람이라면 이재욱은 도서관학뿐 아니라 여러 학문 분야를 넘나들며 팔방미인 같은 재능을 뽐낸 사람이다. 도서관 분야 안에서는 박봉석이, 도서관 분야 밖에서는 이재욱에 대한 평가가 높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찌 된 일인지 이재욱은 잊혔다.

박봉석 역시 오랫동안 잊혔지만 그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면서 '한국 도서관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이재욱은 지금도 잊힌 존재다. 이재욱이 철저히 잊힌 이유는 뭘까? 그가 '친일파'라서? 그의 실력이 부족해서? 그가 '납북'되었기 때문에?

이재욱이 일제 강점기 도서관 분야에서 조선인 중 최고위직에 있었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했다. 박봉석은 조선총독부도서관 서열 3위였는데, 서열 2위인 이재욱은 '친일파'이고 서열 3위인 박봉석부터는 '친일파'가 아닌 걸까?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이재욱이 '친일파'라면 박봉석도 '친일파'의 혐의를 벗기 어려울 것이다.

이재욱의 실력이나 경력이 박봉석에 못지않거나 그 이상임은 앞에서 설명했다. 이재욱과 박봉석은 한국전쟁 과정에서 '행방불명'되었는데, 둘 다 '납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납북 여부도 이재욱이 잊힌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재욱이 철저히 잊힌 것은 의아하기까지 한데, 그가 행방불명된 후 가족이 미국으로 이주한 것도 이유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도서관과 문헌정보학계의 '무관심'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도서관인을 발굴하고 도서관 역사를 조명하는 데 우리 도서관이 무심하고 게으른 것이 가장 큰 이유 아닐까. 늦었지만 2005년 10월 19일 한국도서관협회는 창립 60주년을 맞아 이재욱에게 공로패를 수여했다.

'제국의 사서' 이재욱과 박봉석은 '친일파'인가


▲이재욱 전집 영남민요연구회가 펴낸 <이재욱 전집>. 이재욱이 펴낸 <농촌도서관의 경영법>, <독서와 문화>, <동요집>, <영남전래민요집>를 모두 수록한 전집이 2013년 출간되었다. 도서관인뿐 아니라 서지학자, 민요학자, 국문학자로서 이재욱의 면모를 알 수 있다. ⓒ 백창민관련사진보기
해방 직후 박봉석이 일제로부터 장서와 시설을 지키고 국립도서관으로 전환한 것은 공적으로 치하해 마땅하다. 하지만 박봉석이 '사상 관측소' 역할을 한 조선총독부도서관에서 서열 3위까지 오른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조선총독부도서관 부관장이었던 이재욱 역시 마찬가지다. 도서관에 대한 열정과 업무 능력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지만 이들이 몸담은 조직이 일제 통치 기구의 하나였음을 고려할 때 당황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이재욱은 조선총독부 직원록에 1937년부터 이름이 나타난다. 처음에는 '촉탁'이라고 나오는데 조선인 중에 가장 수당을 많이 받았다. 1939년에는 '촉탁'이 아닌 '사서'로 기록이 나오는데, 총독부도서관에서 일한 조선인 중 가장 먼저 '사서'가 된 것으로 보인다. 총독부도서관에 들어간 지 8년 째인 1939년부터 이재욱은 오기야마 히데오 관장에 이어 두 번째로 관등이 높았다.

1940년에는 이재욱과 함께 박봉석이 '사서'로 기록된다. 1941년 직원록부터는 조선인 이름이 사라지고 일본식 이름만 나타나는데, 사서 '아오키 슈조'(靑山修三)가 이재욱이고, 사서 '와야마 히로시게'(和山博重)가 박봉석이다. 개정조선민사령에 의해 1940년 2월 11일부터 '창씨개명'이 시행되는데, 이재욱과 박봉석 모두 1941년 직원록 작성 이전에 창씨개명을 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총독부 소속 기관에서 일하면서 창씨개명을 피하기 어려웠을 테고 창씨개명 여부가 친일 부역의 잣대는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식민지 조선에서 '사상 통제'를 주도한 조선총독부도서관에서 고위직에 있던 조선인이라는 점은 당혹감을 안긴다.

일제 강점기 공직자의 관등은 친임관(親任官), 칙임관(勅任官), 주임관(奏任官), 판임관(判任官) 4종류였다. '친임관'은 천황이 직접 임명한다는 의미로 조선에서는 조선 총독과 정무총감 두 사람이 여기에 해당한다. '칙임관'은 총독부 국장과 각도 도지사 같은 고관이다. 고등관 1등급과 2등급이 칙임관에 해당하는데 지금으로 치면 중앙부처 차관과 국장급이다. 칙임관 이상은 '각하'라고 불렸다.

'주임관'은 고등관 3등급부터 9등급까지다.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하거나 판임관에서 승진해야 주임관이 될 수 있었다. 주임관 중 참사와 부참사는 1945년 서기관과 사무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군수도 주임관이었는데, 주임관 이상을 '고등관'이라고 했다. '판임관'은 고위직이 아닌 일반 직원으로 지금의 6급 이하 공무원을 말한다.

조선총독부도서관 부관장 이재욱과 서열 3위 박봉석의 '관등'은 어느 정도였을까? <조선총독부 직원록>에는 1942년부터 오기야마 히데오 관장만 표기하고 직원의 관등은 1941년까지만 기록이 남아 있다. 1941년 이재욱은 사서 관직 4등급, 박봉석은 6등급이었다. <조선총독부도서관 직제>를 살펴보면 관장은 주임관, 사서는 판임관이다. 이재욱과 박봉석은 판임관인 사서였는데 관등은 이재욱이 더 높았다. 해방 즈음에는 이재욱과 박봉석 모두 사서 2등급과 4등급까지 각각 승진했을 가능성이 있다.

해방 후 남조선노동당은 '주임관 이상'을 친일파로 규정했다. 해방 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1947년 3월 13일 '부일협력자, 민족반역자, 전범, 간상범에 대한 특별법률조례'(이하 특별조례)를 상정하고 7월 2일 최종안을 확정했다. 특별조례에 따른 부일협력자는 10~20만 명, 민족반역자는 약 1천 명, 전범은 2~3백 명, 간상배는 1~3만 명으로, 총 20만 명 정도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추산됐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특별조례는 미군정 장관이 인준을 거부하면서 시행되지 못했다. 이후 제헌국회에서 만든 '반민족행위처벌법'(이하 반민법)에서는 '칙임관 이상'의 관리를 '친일파'로 규정했다.

남조선로동당의 규정,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특별조례, 반민법 어느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이재욱과 박봉석은 친일파로 '단죄'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당시 친일파 청산 기준이 '최대치'가 아닌 '최소치'에 가까웠다는 점은 생각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재욱과 박봉석이 '사상의 관측소' 역할을 하던 조선총독부도서관의 고위직 조선인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우리가 프랑스처럼 '엄격한' 과거 청산을 했다면 이재욱과 박봉석은 '부일협력자'에 포함되었을 수 있다. 친일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우리는 과학자와 건축가, 사서 같은 '테크노크라트'의 친일과 부역에 대해 관대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데 이 부분 역시 짚고 넘어 가야 하지 않을까.

해방 후 최린은 반민법정에서 "민족 앞에 죄지은 나를 광화문 네거리에서 사지를 찢어 죽여라"라는 말을 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민족대표 33인의 하나로 활약하다가 변절한 최린은 그렇게 자신의 친일과 부역을 사죄했다.

조선총독부도서관을 그대로 '승계'해서 문을 연 국립도서관은 '사상 통제 기관'으로 기능했던 자신의 과거에 대해 어떤 '반성'을 했을까. 국립도서관의 개관일을 1945년 10월 15일로 정하면 그것으로 조선총독부도서관 시절의 과거는 '청산'되거나 '단절'되는 것인가. 국립도서관뿐 아니라 '제국의 사서'이자 일제 강점기 지도적 위치에 있던 도서관인들이 식민 통치 기구에서 일한 과거에 대해 아무런 입장 표명이 없었다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도서관의 식민 잔재 어떻게 '청산'할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위촉장 수여 및 간담회2005년 5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성대경과 위원에게 위촉장을 수여하고 간담회를 진행했다. 이 날부터 2009년 11월 30일까지 4년 6개월 동안 활동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25권 분량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를 발간했다. ⓒ 정부기록사진집관련사진보기
해방 직후에 이뤘어야 하지만 우리는 해방 후 지금까지 제대로 식민 시대를 청산하지 못했다. 이루지 못한 과제는 계속 우리 발목을 붙잡아 해방 75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우리는 '청산'을 이야기한다.

식민 시대의 청산은 인적, 물적 청산을 바탕으로 제도와 문화적 청산까지 방향을 잡아 진행해야 했다. 하지만 인적, 물적 청산이 불가능해진 이 시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청산을 해야 할까. 과거에 대한 '역사적 청산'을 통해 '교훈'을 되새기고, 식민의 잔재 중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를 설정해서 그로부터 '탈피'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청산 과제가 아닐까.

해방 후 일본인이 떠나자 촉탁이나 하급 고원으로 일하던 조선인이 도서관 운영을 맡았다. 도서관 상층을 구성하던 일본인의 공백을 하층에서 일하던 조선인이 메웠다. 일종의 신분 상승이 이뤄진 셈이지만 갑자기 도서관을 맡게 된 조선인들은 어떻게 도서관을 운영했을까?

급한 대로 조선어로 된 장서를 수집하고, 조선에 맞는 분류 체계를 도입하고, 도서관학에 대한 지식도 습득하는 등 해방 조국의 실정에 맞는 도서관을 위해 분주했을 것이다. 넘치는 의욕에도 그들이 아는 도서관 지식은 일제가 이식한 틀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여기서 궁금한 점은 그들이 도서관 업무를 배우고 익힌 일제 식민 시대의 경험과 유산이 우리 시대 도서관에 얼마나 이어지고 어떻게 제도화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우리가 청산할 잔재와 적폐인지 구분조차 쉽지 않지만 지금이라도 이런 작업을 하지 않으면 우리 후손도 '청산'하지 못한 과거를 트라우마처럼 안고 살 것이다.

(* ②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는 격주로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국립도서관'을 다룬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①편입니다.


박완서 작가와 창씨개명 : 네이버 블로그

박완서 작가와 창씨개명 : 네이버 블로그

박완서 작가와 창씨개명
차경환
2022. 12. 23. 21:02
이웃추가
1931년생 작가 박완서의 너무나 솔직한 일제 체험기 (일제 36년의 오해와 이해 9_김용삼 기자) 강연을 텍스트화 각
색, 편집했습니다.
일제시대인 1931년에 태어나셨던 작가 박완서(朴婉緖, 1931-2011)라는 분이 있습니다. 작가로서 워낙 유명한 사람이
어서 이름만 들어도 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박완서 본인이 일제시대 때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 매우 솔직
한 일종의 자서전적 작품을 발표했는데, "그 많던 싱하는 누가 다 먹었을까?"라는 책입니다.
19 4 ♣My Identity♣
책에 의하면 본인이 1931년에 태어나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본인의 어릴 적 체험을 아주 솔직하게 써놨습니다. 솔
직하게 써 놨다는 얘기는 즉, 욕을 많이 얻어먹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분이 책을 내고 나서 많은 비난에 시달리기
도 했는데, 이 책에 쓰인 체험기를 통해 일제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를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작업이 필요한 이유는 현재 일제시대를 경험하고 직접 살아보신 분들이 대부분 돌아가셔서 우리는 이러한 간접
적인 체험 때문에 일제시대를 알 수밖에 없는데, 그 시대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려면 그 시대를 직접 살았던 분들
의 이야기를 듣는 게 가장 중요한 방법이기 때문에 입니다.
이분은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1938년 7살 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서울로 이주했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개화 물이 상당히 드셔서 그랬는지 내 아이만큼은 서울에 있는 학교에다가 꼭 넣어야 하겠다 하고 작심을
하고 딸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온 것입니다.
19 4 ♣My Identity♣
그 시절에도 교육열이 높았던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박완서 어머니도 그중에 하나인데, 딸을 경성 사대문 안에 있는
학교로 보내는 게 큰 소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집안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돈이 없어서 사는 곳은 서대
문구 현저동, 지금의 서대문형무소 근처에 있는 산꼭대기에 월세방을 얻어 살면서, '내 아이는 사대문 안에 있는 학교
에 보내야 하겠다.' 해서 위장전입을 합니다.
당시 사촌이 사직동에 집이 있었는데 그곳으로 위장전입을 합니다. 왜 위장전입을 했느냐 하면 그 당시 학교의 수는
한정되어 있는데 아이를 학교에 보내려는 사람들은 많다 보니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도 입학시험을 치렀습니다. 당시
의 국민학교는 의무교육이 아니어서 월사금을 매달 80전을 내야 재학이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조선인이 내
자식을 좋은 학교에 넣기 위해서 큰 노력을 했습니다.
그래서 박완서 씨도 좋은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입학시험을 봤는데, "세 문제 중에서 두 문제를 맞혔고 한 문제
는 못 맞혔다. 그런데도 합격했다."라는 그런 내용이 작품에 자세히 실려 있습니다.
19 4 ♣My Identity♣
당시 박완서 씨가 살던 집은 서대문구 현저동 산꼭대기 집이었기 때문에, 수도연결이 되어있지 않아 물지게로 물을
배달하는 물장수에게 한지게 얼마씩 해서 물을 사 먹는 동네였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합격통지서가 위장전입 한 사
직동 친척 집으로 와서 그 합격통지서를 받기 위해 사직동 친척 집에 가봤더니 거기는 수도에서 물이 콸콸 나오고 있
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보고 "물이 이렇게 나오는구나!" 하고 충격받았다고 합니다. 즉, 일제시대 때 경성에는 상수도
가 연결되어 많은 사람이 수돗물의 혜택을 받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 시절 왜 그렇게 좋은 학교를 보내려고 노력을 했느냐 하면 좋은 학교를 나오면 좋은 직장에 취업할 수 있었기 때문
입니다. 그 시절에 좋은 직장이란, 예를 들면 총독부 같은 직장이나 그리고 일본이 통치하는 통치기관의 관료로 들어
가거나, 조선에 진출한 일본 기업에 진출하는 것이 좋은 직장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박완서의 오빠가 공부를 열심
히 해서 총독부에 취직합니다.
또 개성 옆인 개풍에 살 때는 침침한 등잔불이 고작이었는데 경성에 와보니까 대낮같이 환한 전기가 들어오더라는 대
목도 나옵니다.
인류의 문명을 가늠하는 기준이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로 전기가 들어오느냐 안 들어오느냐, 두 번째 상수도 하수
도가 준비되어 있느냐 안 되어있느냐를 가지고 문명의 척도를 가늠합니다. 여기서 좀 더 고급 문명을 따진다면 내가
필요할 때 수도꼭지만 틀면 뜨거운 물이 언제든지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 하는 것을 문명의 척도라고 하는데, 한국에
서 뜨거운 물이 필요할 때마다 나오는 시스템이 일반에 공급된 시기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개최 하면서 아파트들
이 많이 지으면서부터였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문명이란 무엇인가? 문명을 우리에게 선사한 것은 누구인
가 하는 것을 이런 책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19 4 ♣My Identity♣
이윽고 박완서 씨가 1938년 4월 봄에 '매동국민학교'라는 곳에 입학했는데, 입학하고 보니 학교에서 한글은 가르치지
도 않고 한마디도 쓰지도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즉, 1938년부터는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면 전부 일본어로 생각하고 일본어로 이야기하고 일본어로 글씨를 쓰고 그런
교육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곧 일본 사람이 되는 겁니다. 박완서의 동기 중에는 한글을 읽고 쓸 줄 아는 학
생은 드물었다고 합니다. 즉, 당시 조선인 중 교육을 받은 사람 들은 대부분 일본인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일제 치하에서 이렇게 학교에 다니고 교육받는다는 것은 조선인이 일본인과 동질화되어가는 과정이었고, 이런 교육
을 받은 사람 들은 대부분 일본인화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레 해방되어 우리는 다시금 한국인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와 사회에서 아
주 광범위하고 강력한 반일 교육이 시행된 이유가 바로 일본인화된 이 조선인을 다시 한국인으로 되돌리기 위해 이
런 교육이 시작되었고, 그런 반일 교육은 지금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박완서의 오빠는 총독부에 취업했는데 이것은 정말 가문의 영광이었다고 합니다.
19 4 ♣My Identity♣
그런데 오빠는 그 좋다는 총독부 직장을 6개월 만에 그만두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와타나베 철공소라는 곳에 입사합
니다. 그러니까 이제 또 집안에서는 난리가 납니다. "그 좋은 총독부는 왜 그만두고 무슨 대장간에 취업하다니 이게
말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빠의 이야기는 간단했습니다. "총독부보다 일본회사가 월급을 2배나 더 많이 주
고 나는 사무직이기 때문에 철공소 노동을 하는 게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실린 것을 보면 이 무렵까지도 사농공상의 신분 구조가 얼마나 깊이 한국인들의 머릿속에 박혀 있는지
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농공상의 신분제가 현재 다 없어졌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요즘 젊은이들 보
면 고시 공부해서 공무원 되고 싶다고 합니다. 즉, 조선 시대로 이야기하면 과거 급제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과 똑같습
니다.
박완서 씨의 큰 숙부는 친일파의 후원으로 면서기로 취업해서 면의 총무과장, 노무과장을 역임했다고 합니다. 당시
에 면서기 면의 과장이 된 것도 역시 정말 가문의 영광입니다.
또 박완서 씨는 서대문 현저동 산꼭대기에 월세방에 살다가 오빠가 취업해서 받아오는 월급과 금융 조업이라는 곳에
서 융자를 받아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 드디어 내 집 마련에 성공합니다.
19 4 ♣My Identity♣
이 금융 조합이라는 것이 자료를 찾아보면 1940년 940곳의 금융 조합이 설립되어서 활동했는데, 일제시대 서민들은
은행에 가면 대출도 잘 안 해주고 그랬는데 일본 사람들이 금융 조합이라는 것을 만들어 금융 조합 덕분에 서민들에
게 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돈을 대출해주었고 그 원금을 나눠서 갚도록 해서 서민들이 편리하게 집을 마련하고 토지
를 취득할 수도 있게끔 대출을 쉽게 내줬습니다.
그런데 학자들은 서민 생활에 그렇게 큰 도움을 준 금융 조합을 '식민지 경영의 첨병이다. 조선의 지방과 농민을 장악
하기 위해 설치했다'라고 그렇게 비난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라는 곳에서는 금융 조합을 뭐라고 설명을 해놨냐 하면 '조선총독부가 창안한 가장 효율
적인 금융지배 수탈 기관이다.' 이렇게 써 놨습니다. 그런데 정작 당시 서민들은 박완서 씨의 자전적 소설에서처럼 금
융 조합에 가서 돈이 필요할 때 돈을 대출받아 집도 사고 땅도 사고하는 혜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 기
술 해놨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대체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벌어지면서 이제 군국주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19 4 ♣My Identity♣
그래서 박완서 씨도 아침에 조회하면 '황국신민의 맹세'를 낭독하고 조선의 유명한 소프라노 가수가 "깨어졌다. 싱가
포르, 물러서라 영국아"라는 노래를 불러서 유행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양군도 함락을 자축하기 위해 밤에 등
불행렬을 합니다.
특히 남양군도에서는 고무가 많이 났는데, 그 고무가 많이 나는 것을 일본이 점령했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국민 학
생들에게 고무공을 하나씩 나눠줬는데, 그 공놀이를 하느라고 정말 시간 가는줄 몰랐다 하는데 이야기가 박완서 씨
자서전에도 쓰여 있습니다.
박완서 씨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분들도 그때 고무공을 받아서 얼마나 즐겁게 놀았는지 똑같은 증언을 많이 합니다.
이렇게 그 시대를 실제 살았던 사람들은 일제가 정말로 그렇게 악랄했는지 아닌지 모두 다 알고 계신데, 당시를 직접
살았고 체험하신 분들이 지금은 모두 돌아가시고 없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고 전황이 점점 불리해지면서 폭격에 대비해서 방공 연습을 했고, 그리고 여성들이 대피할 때
긴 치마를 입고 뛰어가다 넘어지면 다친다고 해서 몸빼 바지를 교복처럼 의무적으로 착용을 하기 시작을 했으며 또
어느 날부터는 쌀, 운동화, 고무신 같은 것이 배급제로 바뀌고 생필품이 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고무신 같은
것은 애국반을 통해 한 반에 한두 켤레 나오면 제비를 뽑아 나눠 가졌다는 그런 내용도 나옵니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박완서 씨의 창씨개명 체험기입니다.
19 4 ♣My Identity♣
박완서를 일본어로 발음하면 '보쿠엔쇼(ボクエンショ)'가 됩니다. 그래서 자기는 학교 가서 일본인 담임이 출석을 부
를 때, 다른 조선 학생들은 전부 창씨개명을 해서 '하나코' '하루에' 이런 일본 이름으로 부르다가 박완서는 '보쿠엔쇼'
이러니까 그게 너무나 창피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집에 가서 "나도 창씨개명을 하게 해달라 하고 어머니를 막 졸랐
다."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또 분명한 것은 "한 반에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아이가 서너 명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불구
하고 학교에서 혹은 일본 선생님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어떤 압력도 받은 적이 없다"라고 본인의 글에 써
놨습니다.
또 박완서 씨의 고향인 '경기도 개풍 박적골에도 박완서 씨의 박씨 집안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 모두 다 창씨개명
을 했다'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19 4 ♣My Identity♣
집안의 호주인 박완서 씨의 할아버지가 "나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창씨개명은 절대로 안 된다."라고 선언했기 때문
에 창씨개명을 못 했고, 그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박완서 씨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오빠가 호주
를 승계했는데, 그런데 오빠도 창씨개명을 안 한다고 해서 자기 집사람들은 창씨개명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의견은 달라서 어머니가 바라는 출세라는 것은 바로 일본의 그늘에서 그들에게 협조해서 좋은 직장
들어가고 그런 것이 어머니의 소원인데, 그렇게 되려면 우리도 창씨개명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오빠를 설득했다고 합
니다,
우리는 일본 사람들이 창씨개명을 강요했기 때문에 우리가 창씨개명을 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데, 사실은 들여다보
면 그렇지 않은 사례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생활 여건은 점점 더 어려워져서 이제는 지원병 제도라는 것을 운영하다가 마지막에는 징
병제도를 운영해서 이제 조선인 사람들도 징병해서 전쟁터에 내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지원병 제도가 징병제
도로 바뀌면서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고, 우리는 징병제를 공짜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일본 중앙정계의 국회의
원 의석을 27석 얻는 대가로 징병제를 했다는 이야기는 지난번에 이미 언급했습니다.
19 4 ♣My Identity♣
이 무렵 국민학교 졸업을 앞둔 박완서 씨는 그 당시 엘리트 수재들만 들어갔다는 '경기고녀( 경기고등 여학교)'는 실력
이 안 돼서 못 들어가고 숙명고녀(숙명 고등여학교)에 지원해서 합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 입시를 앞둔 모든
조선 사람들이 합격을 빌기 위해 단체로 신사참배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국민학교 졸업식이 끝난 후에도 단체로
신사참배를 해서 즉, 그러니까 이 무렵의 조선인들은 모두 일본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전황이 이제 점점 어려워져서 '고녀' 즉, 지금의 여중·고생들마저도 군수품 제조에 동원하기 시작했다고 합니
다.
19 4 ♣My Identity♣
그래서 오전에 2교시 수업을 한 다음, 여학생들 교실은 군수품 공장으로 변해서 군복에 단추를 달고, 솔방울을 채집해
서 솔방울 기름을 짜서 군대로 보내고 그런 일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등교할 때는 구급낭을 휴대하고 등교했는
데, 그 구급낭 안에는 구급약과 지혈용 삼각건, 그리고 이름과 주소 혈액형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식량난이 닥쳐서 쌀 대신 콩깻묵을 배급해서 쌀을 구하러 다녔고, 식량이 모자라니까 딸 가진 집안은 한 식구라도 입
을 덜기 위해 14살 15살 먹은 애들을 시집보내고 그런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박완서 씨 어머니는 등화관제(燈火管制 :야간에 적의 공습 따위에 대비해 등불을 가리거나 끄게 하는 것)를 할 때면
"일본 놈들 폭삭 망하는 꼴을 봤으면 좋겠다"라고 얘기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 아들이 일본인 회사에 다니면서
월급을 많이 받고, 일본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것을 그렇게 또 즐거워하셨다"라고 합니다.
2학년에 지나갈 무렵 서울에 있는 사람들을 지방으로 소개(疏開: 공습 등 재난에 대비해 도시나 밀집 지역의 주민이
나 시설 따위를 분산하는 것). 하기 시작했답니다.
19 4 ♣My Identity♣
그래서 본인은 개성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학교를 이전 하는 학생들은 내가 이전하는 도시에서 가고 싶은 학교
를 지정하면 그 학교로 전학을 시켜 줬다고 합니다.
그래서 박완서 씨는 개성에 있는 '호수돈고녀'로 전학해서 그해 여름에 일본이 패망해서 해방되었다고 합니다.
19 4 ♣My Identity♣
해방되니 박완서 씨의 큰 숙부가 일제 치하에서 면서기로 취업해서 일했기 때문에 졸지에 친일파 집안이 된 것입니
다. 그렇게 친일파 집안으로 낙인찍혀서 마을 청년들이 몽둥이를 들고 "이놈 친일파 집안" 하면서 집안의 가재도구를
부수고 그랬는데 알고 보니 그 사람들이 모두 다 창씨개명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창씨개명한 사람들이, 박완
서 씨의 책에 의하면 '도쿠야마' '아라이' '기무라'로 창씨개명한 청년들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박완서 씨의 집안을
친일파 집안이라고 때려 부순 겁니다.
그런 혼란이 벌어진 와중에 박완서 씨의 작은 숙부는 남대문시장에서 장사했는데, 일본 사람들이 놓고 간 적산가옥
한 채를 어떻게 했는지 재빨리 차지했다고 합니다. 해방의 혼란에 와중에도 챙길 건 다 챙긴 겁니다.
그럼 창씨개명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19 4 ♣My Identity♣
한국인의 이름은 본관이 있습니다. 본관(本貫)은 그 일족이 처음 시작된 일족의 발상이 된 지역입니다. 예를 들어 광산
김씨라고 하면 전라남도 광산구가 시조의 고향으로 그 김씨가 그곳에서 처음 생겼다고 해서 본관이라고 하고, 성(姓)
은 아버지의 부계 혈통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일본은 부계 혈통을 나타내는 성이 없습니다. 단지 집안을 나타내는 씨(氏)만 존재합니다. 일본은 1870년까지
사무라이(武士) 계급 이하는 씨명도 없었는데, 1875년 메이지 유신 이후 전 국민은 모두 '씨'를 사용하라고 해서 비로
소 평민들도 '씨'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일본의 '씨'라는 것이 우리는 아버지의 핏줄을 나타내는 것이 '성'인데 반해 일본에는 혈통을 나타내는 것이 없
고 그냥 가계(家系)를 나타내는 이름인 '씨'만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렇게 일본의 성씨 제도와 한국의 성씨
제도는 완전히 달라서 일제시대 한국의 주요 성씨는 260개 정도였는데 일본에서 씨명은 30만 개가 넘습니다.
19 4 ♣My Identity♣
한국의 성은 아버지 혈통의 표식이기 때문에 딸자식이 출가해도 본인의 성이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씨명
은 일가족이 모두 같은 씨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우리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딸이 다른 집안의 남편에
게 시집가면 남편 집안의 씨명에 따라 그녀의 성이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일본은 주로 지형이나 지명 또는 직업을 씨명으로 많이 사용합니다. 가마야마(釜山,부산), 기우라(木浦,목포)
등이 지명을 이용한 씨명이고, 야마시타(山下 산 아래). 다나카(田中, 밭 가운데) 등이 그것입니다. 따라서 절대 성이
바뀌지 않고, 동성동본끼리는 혼인도 하지 않고 성이 다른 집안의 아이는 입양하는 관습이 전혀 없던 조선전통과 일
본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런데 본관과 부계의 성을 따르는 한국의 성씨 제도는 원래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전부 중국의 것을 도입한 것입니
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성+이름 두자=석 자로 되어 구성되어 본관 어디 어디이다'라고 하는 건 전부 중국식입니
다.
19 4 ♣My Identity♣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라는 조선학자의 책에 의하면 "한반도에 중국식 성씨가 보급된 시기는 고려 초기부터였고,
초창기에는 지배계층만 중국 성씨를 사용했고, 조선 초기 전 인구의 90%는 성씨가 없었습니다. 성씨가 정착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부터라는 것" 입니다. 즉, 우리가 현재 신줏단지 모시듯 집에 가지고 있는 족보는 거의 95% 이상이 일제
시대 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19 4 ♣My Identity♣
"내가 서읍(西邑)에 있을 때, 많은 사람이 족보를 가져와 보아 달라고 했으나 그 중 열에 하나도 진짜가 없다. 이는 한
때 세속에 불과한 것으로 믿을 것이 못 된다." 왜냐하면, 모두 가짜로 날조했기 때문입니다.
또 대만 국민 정치대학의 김근식 교수가 있는데 이분의 연구에 의하면 "김씨, 이씨, 박씨 3대 성이 한국 인구의 대부분
을 차지하는 이러한 현상은 정상적인 친족 관계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즉, 평민이나 천민 등 많은 사람이 그냥
김씨 박씨 이씨를 마구 갖다쓰는 참칭(僭稱)을 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했다." 이것이 학자들이 연구결과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왜 이렇게 김씨 박씨 이씨가 많을까요? 바로 민적법(民籍法)이라는 것에 그 비밀이 있습니다
19 4 ♣My Identity♣
1894년 갑오개혁을 하면서 갑오개혁의 개화파들이 성씨가 없는 사람들에게 성씨를 사용하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니냐
고 해서 성씨 사용을 시킬까 말까 하던 중에 그 양반들이 반대합니다. "노비나 천민들이 무슨 성이 필요하노? 그냥 개
똥이 쇠똥이 마당쇠 이렇게 부르면 됐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통감부 시절인 1909년 일본 사람들이 "노비나 천민이나 모두 다 같은 사람이니, 이 사람들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모두 똑같이 인간다운 예우를 받는 이름을 가져야 한다."라고 민적법이라는 것을 법제화했습니다. 그 당시는 대
한제국이 살아있었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은 통감부에서 민적법을 만들어 대한제국에 강제해서 1909년에 법이 통과
된 것입니다.
그런데 시행 과정에서 노비나 천민 따위 사람들에게 "너희들도 이제부터 성을 사용하라"라고 했는데, 그런데 애초부
터 성이 없었기 때문에 그러다 보니 노비들이 자기 주인의 성과 본관을 대부분 따랐던 것입니다. 또 양반이 자기 집안
의 노비를 해방하면서 너는 앞으로 김씨 해라 그러면 김씨가 되었던 것이고, 그리고 성이 없던 노비 천민이나 무성 층
의 대부분이 김씨, 이씨, 박씨로 신고를 했다. 그래서 김,이,박씨가 더욱 비대해졌다는 것입니다.
조선 시대 노비로 태어나거나 천민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이름도 참 걸쩍지근했습니다. 마당쇠 개똥이 쇠돌이 도야지
그런 식으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19 4 ♣My Identity♣
여자노비(婢)의 경우는 대부분 태어난 달을 따라서 삼월이 사월이 구월이 이렇게도 지었고 또 촉새냔(足金蓮) 작은년
언년이, 간난이 이런 식이었고, 남자노비(奴)는 돌쇠, 마당쇠, 개똥이, 개떡이, 강아지, 똥개, 도야지, 두꺼비 같은 동물
이름은 물론 어린놈, 뒷간이, 개부리, 소부리, 개노미, 개조지 같은 아주 천한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것을 보고 일본 사람들이 "같은 인간으로서 이게 말이나 되느냐?" 고 해서 1914년 조선총독부가 "노비나 천민에게
부여된 가축이나 가축의 분뇨, 사물, 태어난 월 따위를 표명하는 등 인간다운 품위를 갖추지 못한 이름은 민적에 등록
시켜주지 않는다"라고 해서 비로소 "노비 천민에게도 양반과 다름없는 품위 있는 이름을 부여한 사람은 바로 일본 사
람들이었다"라는 것입니다.
19 4 ♣My Identity♣
이때부터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한 사적 자치의 주체로서의 개인임을 일본 사람들이 법적으로 보장해준 것입니
다. 그 이전까지 그 시대에 태어난 남자 노비나 천민 여자 노비들은 성은 물론이고 제대로 된 이름조차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양반 쌍놈의 신분 계급제도를 법적으로 철폐시켜준 것은 한국인이 아니라 다름 아닌 조선총독부였던 것입니
다.
또한, 조선 시대 여성은 이름이 없었습니다. 외국 선교사들이 조선에 와서 보니 여자들이 성은 있는데 이름은 없고 그
래서 얘들을 어떻게 불러야 하나 고민하다가 모두 서양 이름을 붙여준 것입니다.
너는 헬렌(Helen)을 해라, 너는 낸시(Nancy), 이런 식으로 이름을 붙여서 이화여대 총장 이름이 김활란(金活蘭,1879-
1970)이 되었습니다. 헬렌(Helen)을 한자로 표기하니까 활란(活蘭)이 된 것입니다. 김활란 여사의 영문 이름은
Helen, Kim 입니다. 또 여성 독립운동가 하란사(河蘭史,1872-1919)라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낸시(Nancy)입니다. 낸
시를 한자로 표기해서 란사(蘭史)가 되었습니다.
조선 시대 호적에 여성의 이름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19 4 ♣My Identity♣
양반 가문의 경우조차도 성 또는 씨만 존재했습니다. 예를 들면 김씨 부인, 박씨 부인 안성댁, 부산댁 이렇게 불렀을
뿐 이름이 없습니다. 간혹 여성의 이름이 있는 예도 있었지만, 호적등록은 불가능했습니다. 이것은 조선 시대에서 여
성을 사회적으로 공인된 인격체로서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조선 사람의 절반에 해당하는 여성들에게도 민적법을 시행해서 이 땅의 모든 여성에게도 남성과 같은 성과 이
름을 민적에 기재하도록 의무화한 것은 일본 사람들입니다. 즉, 여성을 법적으로나 사회적인 인격체로 공인해준 것
은 일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진정한 여성 해방은 바로 일본 사람들이 시켜 줬다는 사실을 왜 이 땅의 국민은
잘 모르거나 인정을 안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도 뭐 대륙침략 야욕에 활활 불탄 일제가 조선에 병참기지 만
들고 수탈 잘 하려고 그랬을까요?
재미있는 것은 1911년 11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24호에 의해 조선인은 내지인과 혼동할 수 있는 일본식 성명은 사
용하지 못하도록 법적으로 강제했습니다. 그 이유는 드디어 한일합방에 되어 일본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일본 세상에서 조선 사람들도 출세하려고 보니 일본 이름을 쓰는 게 더 유리합니다. 그래서 조선 사람 중에 많은 사람
이 일본 이름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19 4 ♣My Identity♣
이렇게 되니 이 사람이 과연 일본 사람인지 조선 사람인지 구분할 수 없습니다. 사실 지구상에 가장 외모가 비슷한 것
이 일본인과 한국인입니다. 지금도 일본 도쿄 한복판에 가서 가만히 서 있으면 이 사람이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 잘
모릅니다. 거기다 일본어를 좀 잘하면 그냥 일본 사람입니다.
거기다 이름마저 '와타나베' '고바야시' 이런 식으로 하면 일본 사람과 조선 사람이 분간하기가 어려우니 1911년도에
는 일본 이름을 쓰지 못하도록 규제한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인 중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이나 일본인과 사업하
는 사람들이 나는 일본 이름을 쓰고 싶은데 왜 일본 이름을 못 쓰게 하는 거냐? 하고 항의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
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일본 기업들이 조선에 진출해서 일본인과 거래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과 교제하고 거래하려면 나도
일본 이름을 쓰고 싶은데 왜 일본은 못쓰게 합니까? 하고 계속 이의제기를 하니까 1937년 이후 태어난 신생아 에게
만 일본식 이름을 허용을 해주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되니 왜 아이들만 되고 어른은 안 되냐? 하고 시비를 거는 조선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이때 당시의 조선총독부의 정무 총감인 오노 로쿠이치로(大野緑一郎, 1887-1985)라는 사람이 " 이렇게 많은 민원이
쇄도하니, 조선인이 일본 이름을 쓰고 싶다는데 우리가 그것까지 막을 필요가 뭐 있겠느냐? 일본 이름도 쓰게 해주
자" 바로 이것이 '창씨개명'의 시작입니다. 민족 말살 어쩌고 하는 따위 그런 엉터리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서 오키나와현(沖縄県)의 사례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19 4 ♣My Identity♣
1872년 이전까지는 오키나와가 류큐 왕국(琉球國)이라고 해서 독립왕국이었습니다. 그런데 메이지 유신 때인 1879
년 류큐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으로 만들면서 일본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키나와 사람들이 먹고살기 위
해 일본 본토로 왔는데 당시 오사카 일대 공장과 상점이 많은 그런 곳에 취업하러 갔습니다.
문제는 새롭게 일본인 된 오키나와가 예전 류큐국이라고 해서 조선과 똑같이 중국에다 책봉을 받고 조공을 바치는 나
라였고 한자를 사용한 나라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일본말도 못 하고 이름도 물어보니 조선처럼 중국식
으로 되어있으니 그때 일본 사람들이 오키나와가 이미 일본 땅이 되었는데도 얘네들이 아직 일본어도 잘하지 못하고
이름도 이상하니 오키나와 사람이라고 해서 일본 사회에서 차별받게 되지 않겠느냐 해서 오키나와의 학교에서는 일
본어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오키나와 사람들의 이상한 중국식 이름을 전부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게 했습니다.
바로 그 오키나와에서 썼던 제도를 조선에다 그대로 도입한 것입니다.
'창씨(創氏)'라는 것은 조선의 성을 일본식 '씨'로 바꾸는 것이고 '개명(改名)'이라는 것은 '이름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
래서 '창씨'는 의무적이었지만 '개명'은 별도였습니다.
19 4 ♣My Identity♣
그래서 1939년 11월 10일 미나미 지로(南 次郎, 1874-1955) 총독이 본국 정부와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조선에 일본
식 씨명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그러니까 일본 본국에서 "야 이거 무슨 이름까지 바꾸게 하냐, 조선 사람들이 전부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면 그게 조
선 사람과 일본 사람인지 구분이 되냐"고 반대했고 또 조선총독부의 관리들도 그런 식으로 이름을 바꾸면 어떻게 관
리를 하느냐 했고 치안을 담당하던 총독부 경찰들도 띠매고 반대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일본 정부 역시도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지금 우리가 정작 황국신민이니 내선일체라고 하면서 조선 사람도 일본 사람들과 동등한 예우
를 한다고 하면서 왜 조선 사람은 일본 사람과 이름이 달라야 하나? 불만이 많으니까 안 되겠다. 그래서 일본 사람과
똑같이 예우해 주고 이름도 일본 사람과 똑같이 만들자 해서 이 제도를 도입한 것입니다.
그래서 1940년 2월 11일~8월 10일까지 의무적으로 씨를 정해서 제출하라. '창씨(創氏)'는 의무적으로 하고 '개명(改
名)'은 너희 맘대로 해라. 이렇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 일본의 척식성(拓殖省) 관리들도 "일본 사람들은 차치하더
라도 조선 사람들도 반대한다던데 당신이 어떻게 하려고 이런 짓을 하냐"며 난리가 났습니다.
어찌 되었건 이 제도가 시행되면서 조선 사람들은 두 가지로 반응했습니다.
19 4 ♣My Identity♣
위에 이야기 한 대로 필요 때문에 일본 이름이 필요한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자진해서 창씨를 했습니다. 그러나 "아니
내가 지금까지 써온 성씨를 누구 맘대로 바꾸라고 하는 거야?" 하고 극렬하게 저항 한 사람들도 있어서 어떤 집안에
서는 자살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총독부에서는 강제하는 게 아니라고 해명을 했고, 조선인들이 지금까지 계속 일
본식으로 이름 쓰게 달라고 민원을 넣어놓고 정작 하라고 했더니 또 마구 반발하니 일이 좀 이상하게 되었습니다.
19 4 ♣My Identity♣
창씨를 제출하는 기간이 1940년 8월 10일까지였는데 5월까지 참여율이 7.6%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렇다 보니 총
독부가 행정력과 경찰력을 총동원해서 협박 강요해서 신고 마감 때까지 79.3%가 참여했다고 학계에서는 주장합니
다.
이 과정에서 뭐 강제가 있었느냐 없었느냐 얘기를 하는데 강제가 왜 없었겠습니까. 창씨개명을 자발적으로 한 사람
도 있었지만, 창씨개명을 하기 싫다고 하면 통상 행정이라는 것은 새로운 제도가 도입되면 새 제도를 시행하기 위해
무언의 압력이 들어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현대의 백신패스 정책을 보십시오
19 4 ♣My Identity♣
결국, 끝까지 신고하지 않은 20%가 있습니다. 이 20%는 원래 자기 성이 씨가 되어서 그것이 그대로 굳어져 버렸습니
다. 그래서 조선인들은 처음에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게 할 때는 왜 못하게 하느냐 우리도 일본 이름 쓰고 싶
다고 하더니, 소원대로 이제 이름 바꾸라고 하니 이제 또 반발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이러면서 창씨개명을 어떻게든
지 일본식으로 개명을 강제하는 무언의 압력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19 4 ♣My Identity♣
그리고 해방이 되고 창씨개명이 법적으로 폐지된 것은 1946년 10월 23일입니다. 미군정청 법령 제122호로 조선 성
명 복구령에 따라 창씨개명에 의해 바뀌었던 이름이 원래 본래 이름으로 돌아온 것은 해방이 되고 나서도 1년 2개월
후의 일이었습니다.
19 4 ♣My Identity♣
그러면 창씨개명을 조선인들이 반대했다고 하는 그 내면의 논리는 무엇일까요?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냈던 이성무 원
장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성씨 제도를 연구했는데 이분이 남긴 그 논문의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한국 족보
중 80%는 시조가 중국에서 온 사람이다"라고 기록을 해놨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주자 성리학에 따라 우리
는 중국이 되는 것이 가장 큰 영광이었던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야말로 사대 모화사상이 세계 우주관을 지배하고 있던 소중화라는 조선에서 "우리 조상은 중국에서 온 사람이다"라
고 하면 그만큼 그 집안의 권위는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성씨가 노(盧) 씨들입니다. 노씨들은 자기들이 강태공의 후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노 씨
중에 대통령이 두 명이 배출되었습니다. 노태우(盧泰愚), 노무현(盧武鉉).
중국의 노씨 집안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우리의 후손들이 조선으로 건너가서 대통령을 두 명이나 배출했다" 해서 노
태우 대통령이 퇴임한 후 2000년 6월 중국 산둥성 지난시 창칭구에서 열린 '세계 노 씨 대회'에 참가를 해서 '선조의 고
귀한 뜻을 높이 받들 것이다'라는 휘호를 써서 그것을 중국 노 씨 집성촌에 현판으로 걸어 놨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기가 대통령 재임 기간 중인 2003년 중국 저장성 둥양시 노택(盧宅) 관리위원들이 청와대를 방문
해 또 다른 종친 노무현 대통령을 예방하고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고, 지금도 우리나라의 노 씨 중앙종친회는 조상을
찾아가는 종친회 중국여행을 매년 두어 차례씩 주관한다고 합니다. 또 반기문(潘基文) 씨가 UN 사무총장에 올랐을
때 중국 허난(河南)성의 판(潘의 중국어 발음) 씨 집성촌에서도 야 우리 반 씨들이 세계의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하며
대잔치가 벌어지고 난리가 났습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족보를 들춰보면 우리는 모두 중국인입니다. 성씨만 그런 게 아니고 심지어 이름까지도 중국식으
로 창씨개명 했습니다. 그 증거를 제시합니다.
19 4 ♣My Identity♣
고려말 조선 출범에 저항했던 성리학자 정몽주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름이 '몽주(夢周)' 입니다. 몽주라는 것은 '꿈
(夢)속에서라도 주(周)나라를 보겠다'라고 해서 '몽주'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조선 개국의 일등 공신인 정도전(鄭道傳)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을 풀이하면 도(道)를 전(傳)한다는
뜻인데 이 사람이 이야기하는 '도'라는 것은 주자 성리학의 '도'인데, 조선을 동주(東周)로 만드는 '도'를 전하기 위해 정
도전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성웅으로 떠받드는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아버지가 아들을 넷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을 아주 엄청나게
흠모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들들 이름을 지을 때 삼황오제의 이름을 한 글자씩 빌려다 이름을 지었는데, 삼황오
제란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요임금, 순임금 뭐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첫째 아들은 복희씨(伏羲氏)의 희(羲)자를 따서 희신(羲臣)으로 지었고 둘째는 요(堯)임금 이름을 빌려서 요신
(堯臣)이라고 짓고 세째는 순(舜)임금 이름을 따서 순신(舜臣)이라고 지었고 네째는 우(虞)임금 이름을 따서 이우신(虞
臣)으로 했습니다. 즉, 이런 것은 모두 중국식 이름입니다. 즉, 한국인들이 지금까지 쓰고 있는 현재의 이름은 중화 방
식으로 창씨개명을 해서 중국 문명에 투항한 결과물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제국이 망하고 일본인들이 들어와 가만히 보니 이것들이 지금 세상이 바뀌었는데 아직도 중국을
추종하는 이름을 쓰고 있네? "너희 이제 중국 세상은 끝나서 앞으로는 일본 세상으로 들어와라" 그렇게 해서 이름을
바꾼 게 창씨개명입니다.
19 4 ♣My Identity♣
그런데 이름을 바꾸라고 하는 주체가 조선인들이 그렇게 오매불망 상국으로 여기던 중화 문명의 중국이 아니라 그냥
게다짝이나 끌고 다니고 훈도시나 차고 다니던 오랑캐 왜놈이 감히 우리네 이름을 바꾸라고 하니까 짜증이 났고 저항
을 했던 것입니다.
일제시대 때 조선인의 80%는 창씨개명을 했지만 20%는 끝까지 창씨개명을 안 했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중화 방식
을 고수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미국이나 유럽에 가서 한자로 된 이름으로 된 명함을 주면 "중국 사람이세
요?" 하고 묻습니다. 즉, 이름만 가지고는 중국인인지 한국인인지를 구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조선 사람들은 초기에 소중화라는 세상 속에서만 살다가 결국 명나라가 망하고 드디어 청나라가 들어섰습니다. 하지
만 조선 양반들이 생각하기에 저 위대한 중화 문명이 청나라 오랑캐 야만인에게 갔을 리가 없다. 따라서 중화 문명의
정수는 오매불망 중국을 사랑하는 조선으로 강림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선의 소중화 주의는 이후 조선 중화주
의로 발전합니다.
19 4 ♣My Identity♣
그래서 중국에서는 이미 모두 없어진 주자 성리학적인 '제사제도', '족보 제도' 이런 것을 한국이 더 잘 유지하고 있습
니다. 심지어 빼도 박도 못 하게 한국인들의 족보의 80%가 모두 자기 조상이 중국에서 왔다고 써놨습니다. 그리고 지
금 우리가 쓰고 있는 본관과 성으로 되어있는 우리네 이름조차도 사실 우리의 것이 아니라 중국 것이라는 사실입니
다.
이렇게 되어있으니 중국 지도부가 이런 것을 보고 "한국 너희들은 대체 뭐 하는 놈들이냐?, 너희들 족보를 봐라. 너희
들의 뿌리는 중국 사람이다. 즉 중국인의 후예들인데 무슨 엉뚱하게 한미동맹 따위를 하나? 빨리 한미동맹을 깨고 나
와서 중화의 본고장인 중국에 투항하라!." 이것이 '한중동조론' 입니다.
19 4 ♣My Identity♣
당시 조선 사람들이 일제시대 창씨개명에 대해 그렇게 발끈하고 나선 이유가 무엇일까요? 삼국시대만 해도 사람들
이름이 뭐 '연개소문' 이나 '거칠부' 그랬습니다. 중화의 방식으로 조선인들은 전부 창씨개명을 했는데 일본 사람들이
일본방식으로 하라고 그러니까 모두 들고 일어나서 반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중국이 저런 식으로 대한민국을 모욕하는 얘기를 대놓고 해도 우리가 중국에 대해 뭐라고 항의하고 규탄
한 적 있습니까? 그에 반해 일본에서 뭐 요만한 얘기만 나와도 온 국민이 그냥 길길이 날뛰면서 불매운동을 하면서 가
지 않습니다. 사지 않습니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창씨개명이란 이름을 어떤 식으로 바꾸겠다는 그 시도는, 조선인이 중화 문명과 일본 문명의 중간에 서서 어디로 가
야 하는지에 대해 가늠하는 하나의 시험대였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해야 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박완서 씨 본인의 체험에 의하면 일제시대 때 일본 담임 선생님이었지만 어린 박완서가 창씨개
명 안 해도 너 왜 창씨개명 안 했어 하고 불러서 때리거나, 창씨개명 하라고 협박을 당한 사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창씨개명하게 해달라고 자기네들이 다 원해 놓고 조선인들은 대체 왜 그랬을까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배후에는 우
리는 이미 중국 방식으로 창씨개명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19 4 ♣My Identity♣
우리는 냉정하게 현재 우리의 좌표는 뭐고 우리가 서 있는 저희 현실은 어디인지? 우리가 지금 이렇게 단발을 하고 양
복을 입고 휴대전화 하나씩 다 들고 다니지만, 아직도 우리의 인식 속에는 조선 시대의 도포 자락 휘날리던 그 시대의
DNA가 고스란히 살아있는 것은 아닌지 냉정한 자기반성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습니다.
#박완서 #그많던싱아는 #교육열 #일본어교육 #총독부취직 #면서기 #금융조합
#싱가폴함락 #창씨개명 #신사참배 #부계혈통 #일본인성씨 #족보 #민적법 #노비이름
#여성해방 #오키나와 #중국족보 #중국시조 #이순신 #정몽주 #정도전 #한중동조론
#노재팬
1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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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몽상 | 박완서 - 교보문고 알라딘

오만과 몽상 | 박완서 -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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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몽상1 새창으로 보기
매국노와 독립군의 차이는 무엇일까?

 

동학군에서 시작된 독립군의 골짜기의 끝을  쥐고 있는 남상!

매국노에서 친일파로 그리고 악덕기업가로 호의호식하는 아버지를 둔 현!

 

두친구의 만남은 일제침탈로 아니 일제에 통채로 갖다바친 우리의 민낮이고 현실인 듯 싶다

 

책을 읽기전 매국노와 독립군의 차이는? 단지 현실에 순응하고 반항하는 차이일까?

매국노에서 친일파로 악덕기업가로 이어지는 가력을 부정하고 싶은 현이의 마음을 단지 친구 남상에게 가지는 호의로만 느껴야 할까?

 

그건 오만이며 몽상이다. 그 시대의 바람이며 몰아치는 파도인것이다.

조선이라는 거대 괴물을 삼켜야 했던 세상의 바람앞에 우리는 지키는 것과 버려야 할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아니 알아차릴 틈새도 없이 섞여 버린것이다.

 

오만과 몽상1의 현과 남상은 그렇게 서로의 주체사상을 확인도 못한채 돌고 돌아 비탈길의 철재화장실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다.

서로의 현실가면이 바뀌채 말이다

 

2편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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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의도는 뭘까?

책을 소개하는 잡지통해 80년대 스테디셀러 중 하나가 박완서의 '오만과 몽상'이라는 걸 알게 됐다. 과거에 스테디셀러였다니 한 번 읽어봐야겠다고 마음만 먹었지 차일피일 미루다 이제서야 읽게 됐다. 생각했던 것보다 재미가 있었다. 독립투사의 자손과 친일파의 자손이 고등학교 동창이지만 서로의 집안 내력을 알게 되고 멀어지면서 일어나는 이야기인데 읽으면서 내내 왜 제목이 '오만과 몽상'일까, 제목이 뜻하는 게 뭘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다 읽은 후, 내가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틀릴 확률이 훨씬 높지만- 우선 오만과 몽상은 주인공인 남상과 현, 둘 다에게 적용되는 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집안 내력을 알게 된 후, 그 집안 분위기에 역행해서 살고자 하고 자신들이 집안과는 무관하게 나름대로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는 -내용상- 오만한(?) 생각을한다. 선조의 친일 행각으로 부자인 현은 일부러 집을 나와 고생하면서 의대 공부를 하고, 독립 투사의 후손이며 가난한 남상은 자신의 성격과 가치관과는 다르게 자신처럼 힘들게 사는 노동자들을 감시하면서 돈 버는 일을 하게 된다. 그들은 서로를 의식하면서 살아가지만 자신들의 생각대로 인생은 엮어지지 않고 결국 그들은 다시 자신들의 자리로 되돌아온다. 마치 한바탕 꿈을 꾼 것처럼... 책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생각한 것을 정리해봤는데 이런 의미에서 작가가 붙인 제목과 내용이 어느 정도 일치한다고 생각하지만 솔직히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모르겠다. 도대체 그래서 어쨌다는 건지, 자신이 짊어지는 굴레를 벗어나고자 하는 게 오만한 생각이며 몽상인지, 아니면 사회에 대한 고발인지... 이야기는 재미있게 읽었지만 나의 지적 수준에서는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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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델라이데 2003-02-27 공감(3)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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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오만과 몽상 새창으로 보기 구매
아시마 2021-01-13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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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몽상이 보여주는 불합리한 현실, 진정한 인간

오만과 몽상은 친일파의 후예 현과 독립투사의 후예 남상이의 인생 이야기이다. 실제로 현재 친일파의 후손들은 권력을 잡고 풍족하게 사는 반면 독립투사의 후손들은 정부보조도 못 받고 가난하게 살고 있듯이 이 소설에서도 현은 부유하게 남상은 가난하게 살고 있다. 나라를 팔아먹는 사람들의 후손은 사회적 권위도 있고 풍족하게 살아가는 반면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의 후손은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고 빈곤하게 살아가는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 소설 속에서 현과 남상이의 생각으로 계속 되뇌어진다. 독립투사들이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에 결과는 결국엔 가난이었다. 남상은 계속해서 독립투사 집안이라는 긍지를 보존하려하지만 결국엔 가난에 무너지고 만다. 남상이가 독립투사의 피가 이어졌으므로 정의롭고 인간적이고 현실에 굴복하지 않을 것 같지만 가난은 결국 그를 그저 비겁한 인간으로 만든다. 독립투사의 후예 남상은 가난에 대한 경멸로 자신의 공장의 직원을 무자비하고 야비한 방법으로 해고하고 오로지 돈,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이 된다. 그렇다면 친일파의 후예 현은 부유하게 잘 먹고 잘 살았으니 남상과 비교되게 행복하게 살았을 것 같지만 아니다. 현은 친일파의 후예라고 남상에게 절교 선언을 받은 뒤 모욕감과 배신감으로 자존심이 짓밟힌 것에 분노를 느끼고 남상에게 복수를 꿈꾼다. 그래서 자기가 하고 싶던 소설가의 꿈도 포기하고 집도 나와서 혼자 힘으로 의사공부를 시작하다 자주 회의감에 빠지는 삶을 살게 된다. 현은 혼자서 살 때 주위의 여자들을 함부로 대하고 그들을 도구로 이용하기까지 한다. 현이 그렇게 사람을 소중히 대하지 못하는 것은 부유하지만 현을 내버려두고 집을 나간 어머니와 어머니가 없어져도 누구하나 찾지 않는 가족들이 있는 집안 환경 때문으로 보인다. 이렇게 남상과 현 둘 다 인간성이 결여되고 이기적이게 살아가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살고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은 어떠한 보답도 없이 가난하게 살아가는 잘못된 현실이 낳은 결과이다. 오만과 몽상이라는 책 제목처럼 둘은 오만하고 몽상적이게 살아간다. 자존심을 밟은 친구에 대한 복수로, 가난에 대한 경멸과 돈에 대한 욕심으로 현과 남상은 둘 다 공허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환경이 남상과 현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이 책 속에는 이러한 불합리한 현실 속에서 진정한 가치를 위해 살아가는 인물이 나온다. 바로 영자이다. 영자는 고아로 살아왔고 돈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다. 하지만 영자는 위의 현과 남상과 다르게 살아간다. 영자는 현이 자신을 함부로 다루고 결국 다른 여자까지 데려오면서 자신의 자존심을 무너뜨리지만 그것에 대한 분노도 느끼지 않고 복수도 하지 않는다. 또 남상이처럼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이지만 가난에 대한 경멸도 느끼지 않고 돈에 욕심도 내지 않는다. 영자는 그저 사람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가지며 살아간다. 이 책을 보면서 영자처럼 살아가고 싶었다. 누군가에 대한 분노도, 가난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죽는 순간까지 사랑을 표현하며 살아가는 영자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독하게 자신의 힘으로 의사 인턴이 된 현, 가난에서 이겨나 어느 정도 풍족하게 살던 때의 남상의 모습은 보통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닮고 싶어 하는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사랑이 없었다. 사람을 소중히 할 줄 모르고 진정한 사랑을 하지도 못 했다. 영자는 가난하고 힘도 없는 약자이지만 사람을 소중히 하고 진정한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실제로 우리는 이런 사람을 부러워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영자를 통해 현은 생명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남상은 자신이 해고했던 덕환이의 도움을 받게 되면서 현과 남상 둘 다 지금까지 잃었던 인간성을 다시 찾게 된다. 또 오랫동안 서로를 미워했던 현과 남상은 영자의 죽음을 계기로 서로에 대한 미움을 버리고 화해하게 된다. 한 사람의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생은 이렇게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분명 중요한 일이지만 누군가에게 진정한 사랑을 느끼게 하고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는 삶을 사는 것은 잘 먹고 잘 사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는 일임을 느꼈다. 오만과 몽상은 친일파의 후예와 독립투손의 후예가 서로 엇바뀐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안타까운 현실을 보여주고 그 현실의 결과로 친일파의 후예도 독립투손의 후예도 진정으로 행복하게 살아가지 못하는 참혹한 모습을 보여주며 그러한 안타깝고 씁쓸한 현실 속에서 환경에 굴복하고 이기적으로 사는 게 아닌 사랑과 인간성을 가지며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나도 이제는 친일파의 후손들과 독립투사의 후손들의 삶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고 그것의 불합리함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삶이 바뀔 수 있도록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어떤 방법이 있을지 생각도 해보고 또 이렇게 불합리하고 억울한 일도 많은 현실에서 내 안의 오만과 몽상에서 벗어나 영자처럼 사람을 사랑하며, 소중히 하며 살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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킈킈 2012-12-05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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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몽상이란?

동학군은 독립투사를 낳고, 독립투사는 수위를 낳고, 수위는 도배장이를 낳고, 도배장이는 남상이를 낳고... 매국노는 친일파를 낳고, 친일파는 탐관오리를 낳고, 탐관오리는 악덕 기업인을 낳고, 악덕 기업인은 현을 낳고...' 이 책에서 자주 인용되는 문구이자 모든 것의 시작인 문구이다. 우리의 역사를 보고 인용한 저 문구는 이 책의 모든 내용을 대변해 준다. 현과 남상은 고등학교 때 부터 서로 둘도 없는 친구이지만 집안의 과거 이데올로기, 역사적으로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 집안은 쇠퇴해 가고 나라를 배신하고 팔아먹은 친일 매국노는 부를 축적한다는 사실로 인하여 서로 대립하고 멀어지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를 회상하고 서로의 꿈을 생각하기를 계속하면서, 자신들의 과거의 이데올로기, 역사적 아픔에서 벗어나 현이는 집안에서 원하는 의사가 아닌 소설가가 되는, 남상이는 가난하고 궁핍한 현실에서도 의사가 되는 자신의 상황과 반대되는 오만한 미래를 몽상한다. 그리고 이를 몽상하고 이루어 가는 현실에서 그들을 현실과 타협하게 해주고 서로에게 여유를 가져다 주는 존재가 '영자' 이다. 영자로 인하여 현이와 남상이는 조금씩 변화하게 되고 이것이 그 둘에게는 다른 결과를 가져다주게 된다. 결국 나는 이 작품을 끝까지 감상하면서도 이 책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책이 어려운 탓 도 있었지만. 오만과 몽상 이라는 책 내용을 대변하는 것 같던 현과 남상의 상황을 내가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이 책에서는 오만과 몽상이라는 것이 현과 남상으로써 표현되었지만 사실 모든 인간들은 오만하고 자기 중심적이다. 자기가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일절 하지 않고 자신의 앞길만은 가려한다. 우리 주변의 '영자'같은 존재는 생각하지 않은 채, 결국 현과 남상처럼 자신의 현실에서 벗어나려고만 하는 오만한 몽상에만 빠지게 된다면 우리는 나락으로 빠지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모두 오만한 몽상가이다. 어떠한 상황이 생기고 그것을 해결한다 하여도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자'와 같은 존재가 우리 주변에 있음을 눈치 채지 못한 채, 결국 이 작품은 우리를 포함한 지금의 현실의 부조리함을 현과 남상에게 투영하여 보여준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현과 남상은 오만한 몽상을 쟁취하지는 못한다. 현은 소설가가 될 수 없었고, 남상은 의사가 되기는커녕 남상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인하여 나락으로 빠지게 된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몽상으로 인하여 파멸하게 된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항상 많은 것들은 무리하게 욕심내고 원하지만 이룰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으며 무리하게 나아가다 보면 오히려 부정적인 결과가 뒤따라 올 수 도 있다. 결국 우리는 모두 오만한 몽상가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오만한 몽상을 스스로 쟁취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나 '영자'와 같은 자신을 희생하면서 우리를 도와주는 존재들이 있음으로 인해 다시 한발 짝 나아간다. 현과 남상은 그러하지 못했지만. 우리는 아무리 오만한 몽상이라도 그것을 꿈꾸고 노력하며 주위에 도움을 받아 조금씩 나아가다보면 처음엔 오만한 몽상이었던 꿈들이 현실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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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다 2012-11-29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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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몽상


박완서소설전집 8
박완서 저자(글)
세계사 · 1994년 10월 01일
9.5
(6개의 리뷰)
평가된 감성태그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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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이 책이 속한 분야국내도서 > 소설 > 한국소설 > 고전소설/문학선
국내도서 > 소설 > 고전소설/문학선 > 한국고전소설/문학선

한국 근현대사를 가로지르는 단순하고도 명백한 역사적 아이러니에 대한 작가적 통찰.
<참 듣기 싫은 소리지만 독립투사의 후손은 제대로 된 교육조차 못 받아 지지리 못 살고, 반대로 친일파 후손은 다 잘 산다는 얘기가 있다. 이 소설은 그렇게 대립되는 두 家系의 후손으로 태어난 두 젊은이가 그런 어려운 상식에 각기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항거하는 이야기이다.-작가의 말 중에서>


이 책의 총서 (17)
전체선택
전체목록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나목


엄마의 말뚝


꿈엔들 잊힐리야 (중)


꿈엔들 잊힐리야 (상)


꿈엔들 잊힐리야 (하)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서 있는 여자


오만과 몽상


목마른 계절


욕망의 응달


살아있는 날의 시작


도시의 흉년(상)


도시의 흉년(하)


휘청거리는 오후

장바구니

작가정보

저자(글) 박완서
인물정보
현대문학가>소설가



저자 박완서는 1931년 경기도 개풍군에서 출생하여 숙명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국어국문과를 입학했으나 한국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1970년 마흔살의 나이로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치열한 예술혼으로 한국 현대소설을 대표하는 빛나는 자품들을 발표해왔다. 소설집으로 [부꾸러움을 가르칩니다], [배반의 여름], [엄마의 말뚝], [꽃을 찾아서], [해산바가지], [저문 날의 삽화], [한 말씀만 하소서], [너무도 쓸쓸한 당신]등을, 장편으로 [휘청거리는 오후] [도시의 흉년] [목마른 계절], [살아있는 날의 시작] [서 있는 여자],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미망]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아주 오래된 농담] 등을 간행했다.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한 길 사람 속], [어른노롯 사람노릇], 기행문 [모독]등 여러 권의 산문집을 펴냈다. 한국문학작가상(1980), 이상문학상(1981), 대한민국문학상(1990), 이산문학상(1991), 중앙문화대상. 현대문학상(1993), 동인문학상(1994), 대산문학상(1997), 만해문학상(1999), 황순원문학상(2001), 호암상(2006)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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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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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방민호
작가 ·작품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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