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27

[인물연구] 박완서 : 월간조선

[인물연구] 박완서 : 월간조선

06 2001 MAGAZINE

[인물연구] 박완서
「평범한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감동을 자아내는 소설을 쓰는 박완서


서병욱 

「바람잡이」 노릇했던 미군 PX 초상화부 시절
6·25 한국전쟁 언저리. 갓 스물의 朴婉緖(박완서). 오빠의 죽음으로 늙은 어머니, 그리고 올케와 어린 조카 둘은 박완서의 몫이었다.

어머니와 올케는 허구한날, 아들과 남편을 잃은 설움에 산송장이었다. 어머니는 젊은 남자만 보면 『왜 저 사람은 살아 있냐?』 『왜, 하필 내 아들만 죽었냐?』며 애통절통했다.

그러면서 세상을 증오했다.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인 오빠의 죽음은, 남들에겐 한갓 「지나치는 바람」일 뿐이었다.

박완서의 일상은 廢家(폐가)에서 흘렀다. 식구들이 도무지 「살려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있는 것 파먹고, 돈 될 만한 물건들을 처분해 살았다. 그러나 이내 「굶어 죽을 처지」에 이르렀다.


박완서는, 「어떻든 살아야만 한다」는 의지가 일었다. 그 의지가, 식구들에겐 다소 염치없기까지 했다. 그러나 삶은 영화가 아니다. 구세주는 어디에도 없었다.

일거리를 찾아 무턱대고 거리로 뛰쳐 나갔다. 1951년 겨울. 대포 소리가 아직도 간간이 들리는 폐허의 도시 서울. 밤이 돼도 주택가는 어두웠다. 불을 켜는 집은 열 집에 하나가 채 안 됐다. 전쟁의 후유증은 길고도 깊었다. 너나없이 가난했다.

일거리가 어디 있나? 수없이 발품을 판 끝에 미군 PX 초상화부 점원이 됐다.

『서울대 국문과를 며칠 다녔지만, 영문과 2학년 재학중이라고 이력서에 썼다. 학력 위조인데도 무덤덤했다. 죄의식 같은게 전혀 없었다. 그만큼 산다는 게 절박했다. 누가 재학증명서를 떼오라고 말할 시절도 아니었다. 당시 서울엔 그만한 일자리가 없었다. 「미군 PX」라는 말만 들어도 모두 사족을 못 썼다』


그러나 몇 마디 회화 테스트를 거쳐 배치된 곳은 으레 생각하던 미제 물건을 파는 매장이 아니었다. 초상화부였다. 말이 근사해 초상화부지, 실상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극장에서 간판을 그리던 간판쟁이 대여섯 명이 앉아 미군의 초상화를 그려 주고 몇 푼 버는 곳이었다. 화려한 매장과는 달리 칸막이로 차단된 더럽고 우중충한 구석이었다.

박완서는 「바람잡이」가 됐다. 지나가는 미군을 꼬셔 초상화를 그리도록 하는 것이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재수 옴붙었다고 생각했다. PX 물건이야 定價대로 파는 거니까, 짧은 영어로도 가능했다. 하지만, 초상화를 그리도록 미군을 설득해야 하니, 우리말로도 어려운 걸, 그것도 그 짧은 영어로 하라니. 미치고 펄쩍 뛸 일이었다. 이왕 취직했으니 한달 월급이나 타먹고 그만두자고 맘 먹었다. 지금 같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일이었다』

미 8군 PX는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자리였다. 광복 전에는 미스코시 백화점, 그리고 광복 후엔 동화백화점이었다.

PX에서 흘러 나오는 물품은 담배, 껌에서부터 하다못해 쓰레기까지 모두 돈이 됐다. 없어서 못 팔았다. 국내에선 거의 아무것도 생산되는 게 없었다.

자연스레 PX를 중심으로 회현동, 남대문 시장 근처는 「PX 경기」로 달아 올랐다. 박완서는, 그러나 벙어리 노릇만 하기엔 한달이 너무 길었다.

박완서는 월급제였지만 화가들은 실적제였다. 그림 그리는 분량에 따라 수당을 받았다. 처음 얼마간은, 전임자가 주문받은 그림으로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주문량이 바닥나자, 화가들은 박완서에게 성화를 부렸다.



혓바닥에 경련을 일으킨 영어 실력

더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러나 궁하면 통했다. 박완서의 말문이 조금씩 열렸다.

『자기 얼굴을 그려 달라는 미군은 별로 없었다. 대부분 애인이나 아내, 어머니의 사진을 내보이고 초상화를 부탁했다. 차츰 관상도 좀 보게 됐다. 대개 졸병이고 좀 어수룩해 뵈는 미군은 꼬시기가 쉬웠다. 처음 수작은 「당신 참 핸섬하다」에서 「물론 걸 프렌드가 있겠지? 그 걸 프렌드는 얼마나 예쁠까? 보고 싶다. 사진 있으면 보여 줄래」로 이어졌다』

그 미군이 기혼자면, 걸 프렌드는 졸지에 와이프로 바꾸면 그만이었다. 미군들의 패스포트는 사진첩과 같았다.

쭈욱 펼치면 걸 프렌드는 물론 부모형제, 조카 사진까지, 열두폭 병풍쯤은 됐다. 그러나 미군들이 정 꼬셔지지 않으면 마지막 카드를 썼다. 화가들을 가리키며 『戰時니까 저, 유명화가의 그림이 헐값이지, 평시 같으면 어림없다』며 후려쳤다.

그림값은 6달러로 선불이었다. 서너 달후, 종전 수준의 그림 주문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산 너머 산이다. 미군들 중 더러는, 초상화가 맘에 들지 않는다며 반품을 해왔다.

이때 반품을 받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는 건 박완서의 수완에 달렸다.

그럴 땐 달랑달랑하는 박완서의 짧은 영어는 혓바닥에 경련을 일으키게 했다. 반품을 받게 되면 화가들도 죽을 맛이었다.

다시 그릴 경우 재료비 등 생돈이 들어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은 또 받을 수 없었다. 어쨌거나 주문이 전임자 때보다 더 늘고 반품도 크게 줄었다. 박완서의 콧대는 높아졌고, 화가들은 박완서를 치켜 세우기에 바빴다. 그러면서 한마디들 했다.

『화장도 하고 퍼머도 하면 훨씬 섹시해 보일 테고, 미군들도 더 많이 꼬일 텐데…』

박완서는 이따금 수틀리면 반품을 받았다. 그리고 반품된 그림을 그린 화가에게 쪼르르 달려가 화풀이를 했다.

『이것도 그림이라고 그렸어요? 발가락으로 그려도 이것 보단 낫겠네요』

『계속 이런 식으로 그림을 그리면, 윗사람에게 알려서 해고시키겠어요』

화가들은 대개 40~50代여서, 박완서에겐 아버지뻘이었다. 그런데도 박완서는 화가들을 「김씨」 「이씨」로 부르며 되바라지게 굴었다.

박완서 자신 때문에 화가들이 먹고 산다는 자만과 짧은 영어로 종일 지껄여야 하는 스트레스를 화가들 쪽으로 돌렸다.

『화가들이 「저런 못돼 먹은 계집애가 다 있을까」 하며 속으로 이를 간다는 걸 물론 알았다. 그러나, 「내가 양키들에게 당한 수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당신들도 한번 당해봐라」하는 식이었다』

실제 PX 출입 때 여순경으로부터 몸검사를 받았다. 도시락까지도 검사를 받았다. 물건을 숨겨 놓지 않았나, 감시하는 거였다. 한국인은 1달러라도 소지하다 발각되면 그걸로 끝장이었다. 해고당했다.

PX 뒤쪽은 싸구려 음식점들이 몰려 있었다. 양공주, 양아치, 달러장수, PX 걸, 잡역부 그리고 양키시장 상인들이 어울려 돌았다. 돈 셈을 하기도 하고 새로운 거래를 트기도 했다. 모두들 미군이나 美製 물건에다 밥줄을 걸고 사는 한통속이었다.

첫 월급을 타서 어머니에게 갖다 줬다. 어머니는 가방을 열고 돈뭉치를 꺼냈다. PX 포장지로 싼 봉투 안에서 돈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도 빳빳한, 은행에서 금세 나온 돈이었다. 사십만원이었다.

어머니는 금세 눈에 눈물이 괴었다.

『세상에, 세상에, 네가 이렇게 많은 돈을 벌었단 말이지!』



화가 朴壽根과의 만남

그러던 어느 날, 한산한 오후. 덩치만 크고 어수룩해 뵈는 「박씨」라고만 알고 있는 화가가 화집 1권을 가지고 와 박완서에게 보여 줬다.

박씨는 평소에도 공용의 허드레붓을 안쓰고 자기 붓만으로 초상화를 그려, 박완서는 그렇잖아도 속으로 「꼴값하네」라며 비웃고 있었다.

『「화집만 갖고 다니면 간판쟁이가 화가로 둔갑하나」라며 우습게 여겼다. 화집은 일제시대 鮮展(선전)에 입선한 작품들을 실은 것이었다. 박씨는 그중 시골여자 둘이서 절구질하는 그림을 가리키며 「자기 그림」이라고 했다. 명함만한 크기로 흑백이었다. 그 그림 밑에 「朴壽根」(박수근)이라고 인쇄돼 있었다. 그제서야 「박씨」의 이름을 알았다』

박완서는 간판쟁이들 중에 진짜 화가가 있다는 걸 알고 쇼크를 받았다. 그동안 너무 버르장머리없이 군 게 더없이 무안했다. 박수근뿐만 아니라 PX에는 서울대 출신도, 재학생도 있었다. 그리고 청소아줌마 중에는 중학교 교사 출신도 있었다. 전쟁은 인간을 하향 평준화시킨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朴壽根이 훗날 그 유명한 화가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쩌면 朴壽根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유명화가가 될 줄 알았다면, 그만한 안목이 있었다면, 朴壽根의 그림 몇 점쯤은 손쉽게 얻어 낼 수도 있었다.

아니 하다 못해 반품 들어온 초상화라도 몇 점 거둬 두었다면 「화가 朴壽根」의 그 어려운 시절의 증거품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8호 정도의 초상화가 단돈 6달러, 그것도 이것저것 떼고 나면 절반도 안 돌아갔다. 겨우 목숨줄이나 이어가는 정도였다.

『박씨는 눈이 황소처럼 순했고 그림 그리는 태도는 담담했다. 별 드러나지 않았다. 이웃집 아저씨 같은 얼굴에다, 목소리는 낮았다. 재담도 할 줄 몰랐다. 사교술도 없었다. 누가 점심먹으러 가자하면, 미적미적 따라갔지만, 먼저 바람 잡는 일은 없었다』

朴壽根은 가난했지만 의젓했다. 모두들 「돈, 돈, 돈」하며 한푼에 치를 떨 때도 朴壽根은 돈에 비교적 미적지근했다. 염색한 軍 작업복을 걸치고 다녔다. 그땐 그 옷차림이 낯설지 않았다. 초라해 보이지도 않았다.

박완서가 朴壽根의 그림이 반품당하지 않게 미군에게 이런저런 아양(?)을 떨고 있을 때면 박수근은 슬그머니 박완서의 등 뒤로 와서 나직이 말했다.

『또 그려 주면 될 걸, 뭘 그렇게 애를 쓰느냐』

還都(환도)로 PX는 용산으로 옮겨 갔다. 朴壽根도 따라 갔다. 이후 박완서는 朴壽根을 더 이상 만난 적이 없다. PX를 그만뒀기 때문이다.

『훗날 朴壽根 선생의 그림이 천정부지로 뛰었다. 난, 이 사실을 그가 작고한 지 몇 년 만에 열린 유작전을 보고야 알았다. 그가, 대단한 화가로 평가받는 게 너무 기뻤다. 그러나 그의 생전의 가난이 억울했다. 또한 절박했던 한 예술가의 생애가 너무 슬펐다. 그래서 그가 어떻게 살았는 가를 말하고 싶었다. 그의 전기를 쓰기 시작했다』



남편을 만난 곳도 PX

뒷날 남편이 된 扈榮鎭(호영진)을 만난 곳도 PX였다. 처음엔 그도 관심권 밖이었다. 박완서 자신을 빼놓곤 다 사람으로 안볼 때였다. 그와는 안면만 있었을 뿐이다. 뭘하는 사람인지도 전혀 모른 채 반년이 지난 어느 날. 한 번은 숙부가 찾아 왔다.

친척 취직 부탁 때문이었다. 그전에도 여기저기 취직 부탁이 많았다. 그때마다, 요령껏 거절했다. 그런데 그날은 사정이 달랐다. 숙부가 고향어른을 모시고 온 것이다.

직원 출입문인 뒷문으로 갔다. 그곳은 바로 북적대는 뒷골목에 잇대 있는 데다, 그날따라 쓰레기차가 들락댔다. 그 와중에 숙부와 고향어른에게 「상처 안 주는 거절」을 하자니, 신경이 곤두섰다.

이걸 먼발치에서 扈榮鎭이 봤다. 그런 박완서가 딴엔 안 됐던지, 扈榮鎭이 『밖에서 그러지 말고 사무실로 와서 얘기하라』고 했다.

사무실은 지하에 있었다. 작업연장과 설계도면이 널려 있었다. 그러나 깨끗한 책상과 의자가 있어서 얘기하기엔 괜찮았다.

扈榮鎭은 茶대접까지 해줬다. 그게 인연이었다. 扈榮鎭의 집은 명륜동, 박완서의 집은 돈암동. 같은 방향이어서 더러 전차를 같이 탔다. 扈榮鎭은 다행히 박완서가 내심 무시하는 PX 종업원이 아니었다. PX가 들어 있는 동화백화점 소속 직원인 측량기사였다.

박완서는 扈榮鎭이 우선 PX종업원이 아닌 게 맘에 들었다.

『남편은 사교술은 빵점이었다. 덤덤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굴었다. 편안한 사람이었다. 어떤 때는 과일봉투를 들고 밤에 불쑥 우리집을 찾아온 적도 있다. 방향이 같다는 게 늘 핑계가 됐다. 명륜동에서 내린다는 걸 깜빡 잊고 돈암동까지 온 김에 들렀다는 식이었다』





『너는 보통 애 하고는 다르다』

1953년 초. 박완서의 올케가 드디어 동대문 시장에 가게를 냈다. 박완서는 그제서야 한시름 놓았다. 어머니에게 PX를 그만두고 결혼하겠다고 했다.

『암, 미군부대는 그만둬야지. 그런데, 학교에 다니는 게 아니라 시집을 가겠다고? 너 같은 애가 시집가서 애 낳고 빨래하고 구질구질하게 살려구? 너는 보통 애 하고 다르다. 공부 많이 하고, 맘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될 수도 있는 애야』

계속 시집가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마지 못해 『누구냐』고 물었다. 扈榮鎭이라고 말했다.

『뭐라구? 그 좋은 학교 그만두고 시집가겠다는 데가, 겨우 노가다 십장이라구? 집안 망신을 시켜도 유분수지』

扈榮鎭이 토목과 출신인 걸 두고 그 전에도 「노가다 십장」이라며 심드렁해 했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있는가?

두 사람은 1953년 4월21일 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 결혼했다. 제대로 된 예식장도 없을 때였다. 중국집 「아서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로는 호화판이었다. 신접 살림은 남편의 집-종로구 충신동 18평짜리 한옥에서 시작됐다.

1963년까지 그 집에서 살았다. 그동안 딸만 넷을 줄줄이 낳았다. 원숙 원순 원경 원균이었다. 집이 너무 좁아 동대문구 신설동 한옥으로 옮겼다. 대지 55평, 건평 30평쯤이었다.

남편은 PX가 옮겨 간 뒤 그 자리에 들어선 동화백화점에서 전기상을 시작했다. 동화백화점이 삼성그룹으로 넘어가기 前까지 10년 넘게 붙박고 있었다.

1963년 아들 원태를 낳았다. 첫 아들이라 집안의 기쁨은 엄청났다.



朴壽根을 소재로 한 데뷔作 「裸木」

이미 찌들대로 찌든, 주부가 돼버린 박완서. 1970년, 마흔 살이었다. 그때 마침 「신동아」의 논픽션 모집 마감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PX 근무와 화가 박수근」을 소재로 논픽션을 쓰기 시작했으나, 마음 같지가 않았다. 「논픽션」엔 「사실」이라야 한다는 족쇄가 따랐다. 자기 표현이 스며들 여지가 없었다.

논픽션에서 픽션으로 바꿨다. 대학노트에 촘촘히 적었다. 이게 데뷔작 「裸木(나목)」이다. 「여성동아」 장편소설 당선작이다.

그땐 문단형편도 알 턱이 없었다. 막연히 「현대문학」을 떠올렸고, 1년에 한두 번 현대문학에 단편을 발표할 수 있는 작가가 됐으면 했다.

그해 늦여름, 기자 몇몇이 신설동 집으로 들이 닥쳤다.

『당선을 축하합니다. 당선되실 줄 미리 아셨나요?』

『될 줄 알았어요. 여자들끼리 경쟁인데요, 뭐』

「裸木」은 11월호 여성동아 부록으로 세상에 나왔다. 그러나 그 후로도 박완서의 일상은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무거운 시장 바구니를 들고 언덕을 오르내렸다. 그러나 짬짬이 소설을 썼다.

그 이듬해. 「현대문학」에 단편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가 실렸다. 이로써 묵은 소원이 이뤄졌다.

1973년, 「신동아」에 단편 「지렁이 울음소리」가 실렸다. 이 작품은 그 얼마 후 「문학과 지성」에 再수록됐다. 박완서는 비로소 「작가」로서 대접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외 「부처님 근처」 「카메라와 워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저녁의 해후」 「아저씨의 훈장」 「엄마의 말뚝」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작품들을 쓴다. 이들은 한결같이 소위 「분단문제」를 다뤘으며 이를 통해 「비통한 박완서의 가족사」를 줄기차게 내비치고 있다.

『6·25 한국전쟁, 분단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로 인한 내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아니 피가 뚝뚝 흐르고 있다. 그 피로 뭔가를 써야 할 것 같다. 왜냐면, 이는 나뿐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상처이기 때문이다』

「未忘(미망)」. 1990년, 처음 쓴 장편 역사소설. 갑신정변부터 6·25 발발까지 60여 년 동안의 개성의 大商(대상), 전처만의 집안 5代의 가족사이자 사회사다.

「미망」은 역사적 사실보다 한 시대의 삶을 再창조했으며 개성의 지역성과 상인정신을 뛰어나게 그렸다는 평을 얻었다.

「미망」엔 박완서의 고향, 개성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녹아 있다. 이 소설을 위해 어릴 적 고향에의 기억을 총동원했다. 고향말은 물론 풍습을 복원키 위해 취재도 적지 않게 했다.

「…시니까」 「설라므네」 「했는?」 등 깔끔하고 단정한 개성사투리도 들어 있다. 이 소설은 쓰는 데 5년이 걸렸다.

『지척에 둔 고향은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곳이 돼 버렸다. 「미망」은 나의 귀향이다.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그리운, 두고온 산하를 거침없이 누비도록 했다. 「미망」은 「문학사상」에 5년 간 연재한 것이다. 월 100장씩 썼다. 당초 200자 원고지 7000장 분량이던 것을 책을 낼 때 상당수 덜어 냈다. 내가 애착을 가지는 작품이다』




「얼어 죽어도 곁불은 안 쬔다」

개성, 개성사람. 「얼어 죽어도 곁불은 안 쬔다」 「앉은 자리에 풀도 나지 않는다」 등은 개성사람들의 「올곧음」이 곧 「개성 정신」임을 표현하고 있다.

개성사람을 두고 「깍쟁이」라고 한다. 그러나 흔히 생각하는 「깍쟁이」는 아니다. 「깍쟁이」는 「가게쟁이」, 개성말로 「각」이 변한 것이다.

『개성사람들은 셈이 바르다. 셈이 너무 바른 것을 두고 「개성사람들은 무섭다」고들 하는데, 정작 개성사람들은 말한다. 「셈이 바른 게 왜 무섭냐? 셈이 흐린 게 무섭지」라고. 눈처럼 흰 옷을 즐겨 입고 검소하고 꼿꼿하다. 남의 신세지는 걸 죽는 것보다 싫어한다. 개성사람들은 돈을 꿔줄 때, 예를 들면, 쌀이나 장작을 사기 위해서라면 두말 없이 꿔 준다. 그러나 고기를 사기 위해서라면, 거절한다』

개성은 물이 흔전만전이다. 이탈리아 베니스를 닮아 있다. 개천이 거미줄같이 얽혀 있다.

개성인들은 재벌급은 별로 없다. 고만고만한 부자들은 많다. 이는 천민자본주의와는 생리상 맞지 않음을 보여 준다.

빚내는 걸 무척 경계한다. 신용을 뭣보다 중시한다. 도와 줄 사람은 끝까지 도와 준다.

개성상인들은 자식을 서로 교환해 장사하는 법을 가르쳤다. 자기 자식에겐 자칫 물러지는 인간의 심성 때문이다.

장사를 위해 돈을 빌려 줄 땐, 얼마간의 이자를 붙인다. 그러나 장사가 실패해 두번째 돈을 빌릴 땐 無이자로 준다. 그리고 그 장사가 성공할 때까지 도와 준다.

「미망」은 이렇게 시작된다.

『고려가 망한 지 근 오백년, 고려의 옛 서울 개성은 왕도의 영화는 비록 만월대의 秋草(추초)처럼 속절없이 되었을망정 또다른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조선팔도를 고루 누비며 5厘(리)의 이문을 위해 10里(리)를 쫓기를 마다하지 않는 보부상들뿐 아니라 상업의 요지마다 자리잡고 그 일대 물산의 유통을 원활하게 하여 때로는 담대한 買占(매점)으로 거액의 이윤을 노리는 소위 松房(송방)들의 돈과 물자의 모든 길은 개성으로 통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해질녘 수수밭의 수숫대가 흔들리는 것이 왠지 슬프다」고 느꼈던 일곱 살 소녀

박완서. 1931년 경기도 개풍군 묵송리 박적골에서 출생. 박적골은 개성에서 이십여 리 떨어진 벽촌.

세 살 때 아버지는 病死(병사)했다. 할아버지가 아버지였다. 어머니, 열 살 위인 오빠와 함께 유년기는 흘렀다.

할아버지는 「아비 없는 손녀」를 끔찍이 아꼈다. 동구 밖 산모롱이에서, 출타 후 귀가길의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건 큰 기쁨이었다.

그럴 때면 일쑤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사탕이나 약과 따위를 손에 쥐어 줬다. 더러는 산모롱이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할아버지가 나타나지 않았다. 비가 오거나 눈 내리는 날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청승 좀 작작 떨라』고 했다.

그런데도 「기다리는 재미」는 알싸했다.

어머니는 처녀적에 「삼국지」 「수호지」을 읽고 그 내용을 술술 외울 정도였다. 그리고 「옥루몽」 「홍루몽」 「춘향전」 「심청전」 같은 소설들은 손으로 베껴 책으로 만들었다.

박완서는 지금도 기억한다. 반닫이 속에 가득했던 그런 책들을.

어머니는 남편의 삼년상이 끝나자 마자 불에 덴 것처럼 후닥닥 오빠를 데리고 서울로 이사했다.

예닐곱 살 적에 이미 완서는 「해질녘 수수밭의 수숫대가 흔들리는 것」이 왠지 슬프다고 느꼈다. 어머니는 이내 완서도 서울로 데려 갔다.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

박완서는 1991년, 「저 세상으로 간 남편」에의 회한을 담은 소설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을 썼다.

남편이 1988년 폐암으로 죽기 前, 남편의 마지막 1년을 간병기 형식으로 그린 것이다.

『매일 밤 그의 손을 꼬옥 붙들고 잤다. 행여 내가 잠든 사이에라도 당신의 영혼이 육신을 훌쩍 떠나가지 않도록 지키고 있다는 몸짓이었고, 그도 그걸 알아 주길 바랐다』

소설에의 집착은 슬픔을 잊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슬픔에의 천착이기도 했다. 모티브인 여덟 개의 모자는 남편의 폐암이 뇌로 전이되면서 항암제 때문에 탈모증이 생기자 하나 둘 사모은 것이다.

간병하면서 절망하고 때론 짜증을 내면서도, 모자에 얽힌 신혼 때의 추억까지도 내비치고 있다.

1988년, 그해는 박완서에겐 「악몽」이었다. 남편을 잃은 그 3개월여 후쯤, 스물다섯의 외아들 원태가 죽은 것이다. 원태는 마취과 의사가 되려고 했다. 의과대 레지던트 과정에 있었다. 그러면서 연극에도 빠져 있었다. 연극 「세일럼의 마녀」에서 주연을 했고 「코뿔소」를 연출하기도 했다.

박완서는 스스로 미치지 않는 게 저주스러웠다. 아들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묘비명을 썼다.

『평생 인간과 의학과 연극을사랑하다 간 젊고 아름다운 영혼 여기 잠들다』

박완서는 부산 분도수녀원에서 20여 일을 하느님과 대결하며 살았다. 그러나 결론은 「그래도 살아야 한다」였다.

남편과 아들이 살았을 땐, 「글을 쓴다는 게 사치요, 욕심이지」 싶었다. 그러나 죽은 후엔 글은 공기였다. 마시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아들이 이 세상에 살아 있지 않다는 걸 인정하게 되면, 그 다음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미친 듯이 몸을 솟구치면서 울부짖을 차례였다. …목청껏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통곡하면 소리와 함께 고통이 반사되면서 곧 환장을 하거나 무당 같은 게 되어서 죽은 영혼과 교감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에 사로 잡히곤 했다.

이때의 심정을 1990년 가톨릭 잡지인 「생활성서」에 「한말씀만 하소서」라는 제목으로 일기처럼 썼다』

아들의 죽음도 「허무의 일부」라고 믿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순 없었다.

「하필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나」 그러나 또 한편 「왜 당신이라고 그런 일을 당하면 안 되는가」라는 질문과 대답을 스스로 했다.

『내 기억력 말고는 아들이 존재했었다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이 세상이 도무지 낯설고 싫다. 그런 세상과는 생전 화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누군가가 그런 박완서를 두고 『외롭지 않느냐』고 하면 『외롭다』고 했다. 그러면서 문득 「그런 너는 외롭지 않느냐」고, 속으로 되물었다.



『유려하고 한점 막힘 없는 천의무봉의 작가』

한동안 「자식을 앞세우고도 살겠다고 꾸역꾸역 음식을 처넣는 에미(자신)」를 생각해 내니 자신이 너무 징그러웠다.

박완서의 소설은 「평범한 개인의 일상」이 타깃이다. 의도적이기보다는 무의식적이다. 문학은, 소설은, 큰 게 아니라 조그마한 것이 감동을 준다는 걸 선험적으로 감지하고 있다.

소설도 저잣거리에 나가 찬거리를 마련하듯, 그렇게 쓴다. 그러나 실상 「뼛속의 진까지 다 빼는 고통」이 따른다.

문체도 애써 고급스럽게 치장하지 않는다. 일상에서 뱉을 수 있는 아주 흔한 말인데도, 그게 독자들의 가슴을 친다.

「대중성의 획득」에 뛰어나다. 그러면서도 천박스럽지 않게 잘도 주물러낸다.

박완서는 언젠가 말했다.

『누군가로부터 「어떻게 마흔 살에 글을 쓸 마음을 가졌느냐, 습작은 얼마나 했느냐, 누구에게 사사했는가」 등의 질문을 받을 땐 대답이 궁색하다. 사사도 한 바 없고 습작기도 없었다고 솔직히 말하자면 으스대는 것 같아 망설여진다』

누군가가 말한 「만들어진 소설가」가 아니라 「태어난 소설가」란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꼭 말하자면 「태어난 작가」 쪽이다.

어머니의 옛얘기나, 사춘기에 섭렵한 문학작품이나, 그리고 「애통한 가족사적 슬픔과 응어리」가 한데 어우러져, 그를 「소설가로 밀어 내지 않았나」 싶다. 아마 그는 쓰지 않았으면 지레 미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언젠가, 박완서를 가리켜 말했다.

『병의 물을 거꾸로 쏟는 듯이 유려하고 한점 막힘이 없는 천의무봉의 작가다』

박완서는 이제껏 6·25와 분단문제에 매달려 있다. 전쟁으로 인한 사회구조의 변화와 윤리의 붕괴 등을 보면서 억압받고 소외당하는 여성들을 끄집어 낸다. 왜곡된 현대사를 살아온 한국인들의 삶을 총체적으로 조명하기도 한다.

「裸木」은 6·25 전쟁으로 인해 신음하고 있는 사회, 황폐한 인간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 민족분단이라는 비판적 의식까지 담고 있다. 또한 어머니의, 여성의 존재를 통해 전쟁의 후유증을 적시하고 있다.

「裸木」의 연장선상에서 「엄마의 말뚝」은 도드라진다. 戰後(전후) 현실과 사회적 변동, 즉 물질만능주의의 세태와 속물주의적 근성을 야유한 그런 패턴은 이후 「도시의 흉년」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휘청거리는 오후」 등의 소설을 통해 확대된다.

그리고 6·25 이전의 시대적 의식의 근거로 장편소설 「미망」을 내놓는다.

「미망」을 통해 박완서의 관점은 역사로까지 접근한다. 오늘날 가치관의 붕괴는 가족 구조와 삶의 풍습이 파괴되는 데서 상당 부분 유래한다고 보고 있다.

박완서의 소설은 리얼리티에 도덕성을 가미한 것이다. 삶의 규범과 관습의 붕괴를 인간의 위기로 받아 들이고 있다.

소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는 「페미니즘 문학」이라고 일컬어지는 여성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 끊임없이 꿈으로부터 배반당하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꿈을 꾸는 이혼녀의 얘기다.

박완서는 이 소설 속에서 「인간으로 입문하는 조건을 100점으로 칠 때 남자로 태어나는 것은 50점을 따고 들어 가는 것」이라는 말을 통해 남성우위의 사회라는 부조리가 신의 섭리에 합당한 것인가를 묻고 있다.



「만년 소녀의 웃음」

박완서. 아직도 詩 100여 편은 외우고 있다. 김수영과 김기림은 그녀가 특히 좋아하는 詩人이다.

봄비라도 촉촉이 내려 주는 날엔 변영로의 詩를 읊는다.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15년 前 식구들의 성화로 가톨릭에 입문했다. 세례명은 「정혜」. 경기도 구리시 아차동 단독주택에서 살고 있다. 천호대교 북단에서 구리시로 이어지는 도로변에 움푹 들어간 곳이다.

옆으로 한강이 폭포처럼 길게 흐른다. 아침이면 머리에 해가 뜬다. 100여 평의 뜨락. 거기엔 살구나무, 모과나무, 라일락, 대나무, 작약, 심지어 채송화, 백일홍까지 있다.

이곳은 소설 「저문날의 揷話(삽화)」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저문 세대의 눈을 통해, 우리 시대 보통사람들의 삶과 세태를 엮은 것이다.

이 소설의 내용 중 『늙은 아내가 들어서며 「전화온 데 없냐」』는 저문 세대-노부부의 일상을 압축하고 있다. 「쓸쓸함」 「지겨움」 그리고 자식들에게서 언제 날아 들지 모르는, 좋지 않은 일들에 대한 조바심 등이 깔려 있다.

박완서. 아침 7시면 인근 아차산에 오른다. 동네사람들과 만나, 일상의 얘길 나누다 내려 온다.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지금 살고 있는 곳도 좋긴 하다. 그러나 「고향집 한옥」을 떠올리면, 이내 시큰둥해진다. 「보문동 한옥」도 꽤 좋았다.

『보문동 한옥에서 20년을 살았다. 그 곳에서 몸만 떠나고 마음은 두고 왔다』

서울 시내에 볼 일이 있을 때면 전철을 탄다. 그 밖엔 그냥 집에 눌러 있는 게 편하다. 『요즘 무슨 소설을 구상하고 있느냐』고 하자, 그 트레이드 마크인, 「만년 소녀의 웃음」을 슬쩍날리며 조용조용 말한다.

『아무 것도 없다. 그저, 머리 속에 뭔가 굴러 다니긴 하는 데, 실체는 없다. 그런데, 이상한 게 다른 일은 몇 십년 하면 「숙련」이 되는데 소설은 아니다. 언제나 두렵고 생경하다. 소설 데뷔 때도 하루 200자 원고지 20장 이상은 못 썼다. 「미망」은 잡지 연재라는 특성상, 하루 50장을 메우기도 했다. 그러나 평소 땐 하루 종일 애 써도 다섯 장을 넘기기도 힘들다. 쓰는 데도 고갯길이 있다. 고갯길만 넘어서면 내리막길을 쉽게 내려 가는 것처럼…. 그럴 때는 30~40장도 쓸 수 있어 좋다』

말 속엔 「깐깐함」이 서려 있다. 그리고 「할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도 배어난다.

그러나 아직도 소설 쓰기는 때론 고문이다. 청탁원고의 마감날이 되면, 일부러 친구도 만나고 장롱을 뒤지기도 하고, 꽃이파리도 닦는 등, 딴청을 핀다. 이는, 묶이는 것에 대한 방어다.

박완서. 말수가 적다. 새침떼기다. 남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지 못한다.

이따금씩 전철에서 만난 知己(지기)와 수작을 떠는 게 싫어 내릴 역을 몇 정거장 앞두고 슬그머니 내린 적도 없지 않다.

作中인물의 성격묘사는 칼이다. 지긋지긋할 만큼 그 묘사에 집착한다. 어휘 또한 다양하다. 이는 대중 속을 파고 드는 제1의 카드다.

『치밀한 성격묘사는 톨스토이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단역에까지도 성격묘사는 구체적이고 실체적으로 하려 한다. 그리고 어휘가 비교적 풍부한 건, 내가 대가족 속에서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대중 정서를 정확히 파악, 억압받는 부분을 양지로 끌어내 건강한 정서로 바꿔내는 것도 소설가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은 위로받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소설을 매개로 작가와 독자가 서로 위로받을 수 있다면, 더 이상 뭘 바라겠는가』



『달기도 하고 뒤끝도 좋은 것이 좋은 소설』

아직도 소설이 뭔지 모른다. 다만 소설은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소위 「대중소설」과 「순수소설」의 차이를 묻자, 의외로 싱겁고 단순하게 답했다.

『소설에서 「재미」는 「맛」이다. 맛이 혀에 달기만 하고 뒤끝이 나쁜 것과 달기도 하고 뒤끝이 좋은 것이 있다. 달기도 하고 뒤끝도 좋은 것이 「좋은 소설」일 것이다. 「좋은 소설」은 「知的 즐거움」을 주는 게 아니겠는가. 「대중」이니, 「순수」의 차이는 그만두고라도 그 한계는 있을 것이다. 독자들에게 「헛된 꿈」과 「삶을 너무 쉽게 보게 하는 것」은 「나쁜 소설」일 것이다』

적재적소의 「어휘」를 찾아 늘상 헤맨다. 그러다 그 상황에 따악 맞는 어휘를 찾았을 땐, 머리에 스파크가 인다.

그동안 이상 문학상(엄마의 말뚝 1), 이산 문학상(미망), 중앙문화상 예술대상(그 많던 싱아는 어디로 갔나) 등의 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게 무슨 대수인가」 싶다.

다만 소설가라는 게 그렇게 소중하고 대견할 수 없다.

『「소설가」란 신분증은 없어도, 「나는 소설가」란 자각 하나로 살아 왔다. 난, 아직도 소설의 정의를 못 내리고 있다. 다만 「소설은 얘기다」 정도로만 여긴다. 어머니처럼 「뛰어난 얘기꾼」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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