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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7

[이남주] 중국에서 인권규범의 확산과 한계


[이남주] 중국에서 인권규범의 확산과 한계 (10회포럼)





[ 제10회 한반도평화포럼 자료집]



"대북 인권정책과 인권문제의 세계적 추세"

일시 : 2008년 8월 29일(금) 13:00-18:30
장소 : 프레스센타 19층 기자회견장

*원문은 10회 포럼자료집에 있습니다.





중국에서 인권규범의 확산과 한계










이남주 교수(성공회대학교 중국학과)
















1. 왜 중국의 인권이 문제인가?


중국의 인권은 현재 국제인권체제(international human rights regime)에서 가장 논쟁적인 쟁점들 중 하나이다. 개혁개방 이후 경제적으로 고도성장을 지속한 중국의 일상생활에서 시민들은 상당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직업선택, 주거이전, 소비생활 그리고 사회생활 등에 대한 국가의 개입과 간섭은 크게 줄어들었다. 문화대혁명 시기와 비교하면 커다란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반면 중국에서는 정치적 신념이나 종교적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감시, 연금, 구속에 대한 소식도 끊이지 않고 들려온다. 이처럼 대조적 현상은 중국정부와 서방국가, 국제인권NGO들이 중국 인권상황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 가장 중요한 객관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은 UN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으로서 국제사회에서 합의된 가치의 실현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위치에 있으며, 개혁개방 이후 경제성장을 기반으로 명실상부한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점도 중국 인권문제를 둘러싼 논란을 복잡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중국의 국제사회에 대한 영향력의 증가는 중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이 다른 나라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갖게 만들며, 국제사회가 중국정부의 인권규범에 대한 태도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만든다. 게다가 강대국이라는 지위는 중국이 국제사회의 규칙과 규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의미하기 때문에 중국과 국제인권체제 사이의 상호작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지금까지 중국의 인권에 대해서 적지 않은 연구가 있었다. 특히 1989년 천안문 사태를 계기로 중국의 인권문제가 국제적 공론장에서 치열한 논쟁의 대상이 된 이후 국제인권체제와 중국 사이의 상호작용과 이러한 상호작용이 중국에서 인권상황의 변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많은 연구들이 진행되었다. 대표적인 연구로는 Kent(1999)와 Foot(2000)을 들 수 있다.


중국의 인권문제에 대한 연구가 국제인권체제와 중국정부의 관계에서 출발한 이유는 분명하다. 우선 인권이라는 개념은 서구 근대문명의 산물이며 중국적 전통문화는 물론이고 서구의 전통문화로부터 연역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Donnelly, 2007. 287) 뒤늦게 근대화의 길에 들어선 중국에게 인권규범은 외부로부터 도입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중국은 근대화 과정에서 사회주의의 길을 선택하였고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인권이라는 개념을 자본주의적 계급착취를 은폐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해왔다(최지영, 2005, 76-77).1) 따라서 중국도 다른 많은 비서구문명 국가들의 경우처럼 인권규범의 형성과 발전이 외부로부터의 충격에 의해 촉발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1970년대부터 빠르게 영향력을 증가시켜온 국제인권체제가 이러한 변화를 촉진하는 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중국연구들은 국제체제와 중국정부의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분석을 넘어서 중국 내에서 인권규범이 어떻게 확산되고 있는가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물론 이러한 한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1990년까지 중국 인권문제는 기본적으로 국제인권체제와 중국정부 사이의 문제였고, 중국 국내에서는 인권이 중요한 의제로 등장하지 않았거나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는 중국 내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인권담론이 확산되고 인권을 둘러싼 복잡한 상호작용이 출현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 인권문제에 대한 연구는 이제 중국 내에서 인권규범의 내재화(internalization)라는 문제를 더욱 적극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본고는 국제인권체제, 중국정부, 그리고 중국 내의 동력 등 세 가지 요소의 상호작용을 중심으로 중국 내에서 인권규범의 내재화가 어떤 단계에 도달하였으며 이러한 변화를 촉진한 요인들과 그 한계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필자는 이미 환경운동을 사례를 중국에서 권리담론이 확산되는 미시적 변화과정을 살펴본 바 있는데(이남주, 2007), 본 연구는 다시 거시적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이유는 중국에서 인권상황은 계속 변화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시적 영역과 거시적 영역에 대한 연구가 서로 계속 보완해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2장에서는 인권규범의 내재화 모델을 제시할 것이다. 이는 리세(Thomas Risse)와 시킹크(Kathlin Sikkink)의 '5단계 나선모델(spiral model)'을 출발점으로 삼고 이 모델에 대한 몇 가지 비판 등을 고려하며 본 연구의 초점을 제시할 것이다. 3장에서는 중국의 인권현황을 간단하게 정리하고 위의 나선모델에서 중국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점검할 것이다. 4장에서는 국제인권체제가 중국정부의 인권규범에 대한 태도변화에 미친 영향을 분석할 것이다. 5장에서는 중국 국내에서 인권규범의 내재화 진행과 그 한계를 설명할 것이다. 그리고 결론에서 위의 논의가 주는 이론적, 실천적 함의를 정리할 것이다.


2. 국제인권규범의 확산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 리세와 시킹크의 '5단계 나선모델'을 중심으로


리세와 시킹크는 국제인권체제의 영향 하에서 인권을 억압하는 국가가 인권규범을 존중하고 인권규범에 일치하는 행위를 하는 국가로 변화하는 과정을 5단계(five phase)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본 연구에서도 이를 기초로 중국에서 인권규범의 확산과정으로 추적할 것이다. 이는 이 모델이 국제인권규범의 확산을 체계적이며 일관성이 있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만 아니라 지금까지 중국을 사례로 하는 대표적 연구들도 이 모델을 출발점을 삼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2). 이 모델의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Risse and Sikkink, 1999, 22-33).


첫째, 억압(repression) 단계(phase 1). 이 모델은 출발점은 내부의 반대세력이 너무 약하거나 너무 강하게 억압되고 있어 정부에 도전을 제기할 수 없는 억압적 국가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인권을 침해하는 모든 국가들이 모두 국제인권체제의 의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인권규범의 공유, 공동의 담론, 지속적인 정보교류 등으로 결속된 초국적 네트워크(transnational networks)가 개별 국가에서 인권 억압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모으는 데 성공할 때 인권억압을 국제적 의제로 만들고 다음 단계로 이행할 수 있다.


둘째, 부인(denial) 단계(phase 2). 초국적 인권네트워크가 특정 국가의 인권억압 문제를 국제적 의제로 만드는 데 성공하면, 비판의 대상이 되는 정부의 일차적 반응은 대개 부인이다. 즉 국제인권규범 의 정당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인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것 자체가 그 정부가 국제인권체제에 의해 현성된 언설체계에 들어온 것을 의미하는 것이, 따라서 부인 단계에서 사회화(socialization) 과정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전술적 양보(tactical concessions) 단계(phase 3). 국제사회의 압력이 강화되면 비판을 받는 국가는 정치범의 석방, 정치활동 공간 확대 등의 부분적 양보를 시도한다. 이 양보는 인권규범의 수용과 같은 인식의 전환을 동반하지 않고 주로 국제사회의 비판을 완할 목적에 의한 도구적 적응(instrumental adaptation)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이는 국내에서 인권규범의 확장을 시도하는 세력이 사회적 동원을 가속화하고 국제인권네트워크와 연결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이로써 인권규범을 위반하는 정부에 대해 위로부터(from above)의 압력과 아래로부터(from below)의 압력이 동시에 작용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한편에서는 반대세력 내에서 인권규범의 행위의 원칙으로 수용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도 자신이 만든 수사의 덫에 걸리면서(self-entrapment in their own rhetoric) 더 이상 인권규범 자체를 부정할 수 없게 되면서 인권규범의 내재화가 진행되는 다음 단계로 이행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진다.


넷째, 규범적 지위 확보(prescriptive status) 단계(phase 4). 인권규범의 정당성은 더 이상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고 행위의 기준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하는 단계이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실질적인 차원에서도 인권이 잘 보장된다거나 정부가 진정한 신념에 기초해 인권규범을 내세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국제인권조약을 비준하거나, 인권규범이 헌법 및 법률을 통해 제도화. 시민들이 인권침해에 항의할 수 있는 제도적 절차가 존재하거나, 인권규범의 보편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이러한 단계로의 이행이 이루어졌다고 불 수 있다.


다섯째, 규범에 부합하는 행위(rule-consistent behavior) 단계(phase 5). 초국적 인권네트워크-국내 네트워크의 지속적 압력 속에서 인권규범의 관습적 실천이 이루어지고, 법의 지배가 실시되는 단계이다.


이 나선모델은 방법론적으로는 구성주의적 접근과 현실적으로는 1970년대 이후 영향력이 빠르게 증가한 국제인권체제를 두 개의 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러 케이스 연구에 의해서 뒷받침되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국제인권규범이 개별 국가에서 내재화되는 과정에서 대한 연구의 출발점이 삼을 수 있을 것이다.3) 그러나 이 모델이 방법론적으로 결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중에서도 다음 두 가지의 비판이 중국의 사례를 연구하는 데 중요하게 고려될 것이다.


우선, 나선모델의 특징은 이행과정에서 물리적 요인보다는 규범적 요인을 더욱 중요하게 보고 있는 점이다(Risse and Ropp, 1999, 236). 예를 들면 인권규범의 위반으로 비판을 받는 국가가 전술적 양보의 단계에서 규범적 지위를 확보하는 단계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수사의 덫’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설명한다(Risse and Sikkink, 1999, 29). 이는 규범과 정체성 등의 인지적 측면을 핵심적 독립변수로 보는 구성주의적 접근의 필연적 결과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특징은 당연히 합리주의, 혹은 현실주의적 이론들로부터 계속 도전을 받고 있다.


예를 들어 와크먼(Alan M. Wachman)은 중국정부가 국내외의 현실적 요인에 합리적 계산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국제인권규범을 앞세운 외부의 도덕적 압력이 중국정부의 주권 우위의 원칙을 포기시키지 못했다고 주장하였다(Wachman, 2001, 275-276). 쉬바르쯔(Rolf Schwarz)는 국가행위의 변화는 합리적이고 효용극대화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전술적 양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비판을 받는 국가의 재정적, 경제적 취약성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전술적 양보의 가능성이 높은 국가는 그들의 재정적 수립의 상당 부분을 외부에서 획득하며 정치적 기능이 상당 정도 ‘지대(rent)’로 분류할 수 있는 외부 수입 획득에 의존하는 ‘ 대의존 국가(rentier states)’고 주장하였다(Schwarz, 2004, 208).


여기서 과연 국가의 인권규범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촉진하는 요인으로 물리적 이익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행위의 적절성을 규정하는 규범이 더욱 중요한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런데 개별 사례에 대한 연구에는 이를 반드시 양자택일적 문제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는 상당 부분 개별 국가의 상황에 따라서 판단될 문제이고 따라서 연구의 초점은 대상이 되고 있는 국가의 경우 어떤 요인이 더욱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는가를 규명하고, 이러한 설명이 다른 국가들에게는 어떤 함의를 갖는가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본 연구는 중국 내에서 인권규범의 확산이 이루어지고 있는 각 단계에서 어떤 요인이 어떤 이유로 중요하게 작용하는가를 규명하고자 하며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선험적인 전제를 가지고 분석을 진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나선모델이 국가를 피동적 행위자로 간주하는 것도 방법론적 비판의 대상이 된다. 나선모델이라는 정의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이 모델이 국제인권규범의 확산을 단선적인 발전과정만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이 모델도 각 단계에서 역진될 가능성, 혹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을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내부의 무장한 반대세력이 있는 경우 2단계에서 3단계의 진전이 어렵다고 본다(Risse and Sikkink, 1999, 23). 그러나 이러한 이행은 중단되기보다는 연기되는 것으로 본다(Risse and Sikkink, 1999, 26)는 점에서 이행을 상대적으로 낙관하고 있다.4) 그 이유는 이 모델이 변화를 설명하는 데 국제인권체제의 역할, 특히 초국적 인권네트워크를 주요 동력으로 보며 국가는 이들의 압력에 저항하지만 결국은 끌려갈 수밖에 없는 피동적 행위자로 보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인권규범을 위반하는 국가를 통해 인권규범을 관철시켜야 하는” 국제인권체제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 딜레마를 고려하면(Donnelly, 2007, 283)) 국가라는 요인을 더욱 적극적으로 모델에 도입할 필요가 있다. 특히 중국의 경우, 정치체제, 역사, 규모 등을 고려하면 국가의 역할을 빼놓고는 인권규범의 확산을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국가의 역할을 중요한 독립변수로 삼아 중국 내에서 인권규범의 확산과 그 한계를 살펴볼 것이다.


3. 개혁개방 이후 중국 인권상황의 변화 - 강한 상대주의에서 약한 상대주의로의 전환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인권상황은 적지 않게 개선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개선의 정도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이다. 앰네스티 인터네셔널(Amnesty International) 등 국제인권NGO는 중국의 인권상황이 여전히 국제적 기준과 거리가 멀다고 비판하고 있으며 중국정부는 여러 차례 인권관련 백서를 발간하여 중국의 인권상황이 크게 발전하였으며 중국인민들의 권리가 폭넓게 보장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5) 이러한 양자의 대립에는 윤리적 기준과 현실적 기준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어 중국의 인권현황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어렵게 만든다. 나선모델은 중국 인권의 변화가 어떤 단계에 도달하였으며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해준다. 중국의 인권상황이 어떤 단계에 도달했는지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 이전에 먼저 개혁개방 이후 중국 인권상황의 변화를 객관적으로 살펴보자.


중국의 인권상황의 변화는 먼저 국제인권체제와 중국정부의 관계의 변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관계의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국제인권조약 가입 상황이다. 중국은 1982년부터 UN인권언위원회의 회원국이 되었으며 그 이후 국제인권규약을 비준하기 시작하였는데 <표1>은 현재까지 중국이 서명하거나 비준한 국제인권규약의 현황을 보여준다. 중국정부의 국제인권조약 가입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단계는 개혁개방 이후 UN 인권위원회의 회원국으로 가입한 이후 국제인권조약에 적극적으로 가입한 시기이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진전은 <고문 및 그 밖의 잔혹한, 비인간적인 또는 굴욕적인 대우나 처벌의 방지에 관한 협약>이다. 중국정부는 인권선언과 국제인권체제의 권리장전으로 분류되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이하 사회권 규약), 1998년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이하 자유권 규약)에 가입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89년 천안문사태로 그 진전이 중단되었다. 둘째 단계는 1997년과 1998년 각각 사회권 규약과 자유권 규약에 서명한 이후의 시기에다. 사회권 규약은 2001년 비준절차가 완료되어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으며 자유권 규약은 아직 비준이 미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변화는 중국정부가 국제인권규범의 보편성을 수용하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한다.


물론 이러한 태도의 변화가 국제인권규범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정부는 UN헌장 2조에서 UN의 내정 간섭을 금지한 조항을 인권기준을 준수하라는 요구에 대해 주권 우선의 원칙을 내세울 수 있는 근거로 활용하고 있다(Kent, 1999, 38). 이러한 입장은 1989년 천안문사태 이후 인권문제를 둘러싼 마찰이 심화되면서 더욱 분명하게 제시되었다. 그러나 주권 우위의 원칙으로 국제인권규범을 부인하는 것은 점차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이다. 외부적으로는 냉전체제 붕괴 이후 국제사회에서 인권규범의 지위가 더욱 강화되었다. 그리고 중국정부의 행위도 인권문제와 관련하여 점차 그러한 주관과 국제인권규범의 엄격한 경계가 유지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UN 인권위원회에 가입한 것, 보고절차를 의무화한는 고문방지관련 협약에 가입한 것, 그리고 중국정부가 미국 인권문제에 대한 비판을 가하기 시작한 것 등은 모두 그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개별 국가의 인권문제가 국제적 공론장의 의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중국정부가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Foot, 2000, 259).


중국 국내에서의 인권규범의 확산은 우선 법적인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6) 가장 대표적인 변화로 1979년 제정된 형법을 1997년 수정하여 개인의 신체의 자유에 대한 보장을 더욱 강화한 것이다. 개정형법에서 죄형법정주의, 형법적용평등, 죄책형(罪責刑)상응 이라는 세 가지를 형법의 원칙으로 제시한 것이 이전 형법보다 진전된 것으로 평가를 받았다(孫在雍․趙秉志, 2003). 또한 개인의 재산권 보장도 2007년 물권법이 제정되는 등 크게 강화되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2004년 수정된 헌법에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한다”는 구절이 삽입된 것이다. 이로써 중국에서 인권규범은대외적인 수사를 넘어서 대내적으로 국민들이 인권을 국가에 대해 자신의 권리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변화를 필자는 중국정부의 인권규범에 대한 태도가 강한 상대주의에서 약한상대주의로 전환한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강한 상대주의는 이념, 문화에 대한 토대론(fundamentalism)적 인식에 입각하여 인권에 대하여 상대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 이슬람 근본주의가 이에 해당되며 사실상 인권이라는 개념의 긍정성을 부정한다.



<표1> 중국의 국제인권조약 가입 현황





자료: http://www2.ohchr.org/english/bodies/ratification/index.htm(2008.7.30 검색)


약한 상대주의는 인권의 보편성을 인정하고 인권의 핵심적 원리를 수용하지만, 이를 국가체제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가 아니라 다른 원칙들과 경쟁하는 원리 혹은 부차적인 원리로서만 인정하는 것이다. 이 경우 인권에 대한 제약은 특정한 신념, 가치를 전제로 하는 토대주의(foundationalism)적 기준이 아니라 국가안보, 발전 등의 실용주의적 기준에 따른다(이남주. 2007, 318-322). 현재 중국 인권담론의 특징을 발전주의적(developmentalist approach) 인권관이라고 지칭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Foot, 2000, 4). 그리고 이는 단지 법적인 혹은 인식상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내에서 인권을 둘러싼 상호작용에 새로운 동력을 제공하고 있으며 중국 인권상황을 개선하는 데 실질적인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첫째, 중국에서 계속 진행되고 있는 법․제도 개혁에서 인권이라는 원칙이 반영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최근 노동법 개정과 물권법 제정 과정에서 나타나듯이 법률제정과 법의 실행은 이제 정부의 의도에 따라 하향식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집단적, 개인적 이해관계가 반영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2003년 3월 순즈강(孫志剛) 사건이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이는 순즈강이라는 청년이 유랑인 수용소에서 경찰의 구타로 사망한 사건인데, 인터넷에서 인권을 무시하는 경찰에 대한 비판이 확대되면서 사회문제로 되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도시 유랑자 수용 및 송환규정‘의 위헌심사 청원서가 제출되는 등의 정부에 대한 압력이 강화되고, 결국 2003년 6월 중국정부는 관련법규를 폐지하였다.


둘째, 시민들에게 자신들이 이해와 요구를 정당화시킬 수 수단을 제공하였다. 즉 중국에서는 최근 집단행동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는데 이는 사회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중국 시민들이 집단행동에 참여할 수 있는 논리와 수단들을 많이 개발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런데 국가와 사회 사이의 힘의 균형이 국가에 기울어져 있는 상황에서 중국에서는 이러한 집단행동은 체제저항적인 논리보다는 국가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는 논리를 동원하는 경우가 많다.7) 헌법에 인권존중이 명시된 것인 자신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goto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규범적 지렛대를 제공한 것이다.


물론 중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인권상황의 변화가 국제적 기준에 미치는 못하는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앰네스티 인터네셔날은 2008년 중국 인권관련 보고에서는 중국의 인권문제로 다음과 같은 것을 제시하였다(http://www.amnestyusa.org/annualreport.php?id=ar&yr=2008&c=CHN)


3.1.1.1.1. 사형: 재판의 공개성 부족, 사형선고 가능한 좌목이 지나치게 많음


3.1.1.1.2. 사법체계: 고문 사례


3.1.1.1.3. 인권옹호 변호사에 대한 탄압(사찰, 연금, 정체불명인에 의한 폭행)


3.1.1.1.4. 표현의 자유: 보도 내용에 대한 통제, 기자들에 대한 체포 및 구금


3.1.1.1.5. 여성에 대한 차별(취업, 교육, 의료보험 등)과 폭력(가정폭력과 납치)


3.1.1.1.6. 종교그룹에 대한 억압: 티벳 불교, 지하 기독교, 파룬공에 대한 탄압


3.1.1.1.7. 신강, 위구르 등의 소수민족에 대한 억압; 비폭력적 문화, 종교적 활동에 대한 억압


3.1.1.1.8. 탈북자, 홍콩에서 직선제제 연기, 동성애자들에 대한 차별, 난민신청자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


위의 목록들은 주로 자유권 규약 위반과 관련된 것으로 중국에서 인권의 존중을 위해 해결되어야할 문제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문제들이 어떻게 해결되느냐에 따라 중국의 인권상황이 나선모델에 제시하는 5단계 ‘규범에 부합하는 행위‘가 이루어지는 단계로 발전할 수 있는가의 여부가 좌우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지금까지의 변화를 보면 중국은 이미 전술적 양보 단계를 지나 인권이라는 가치가 규범적 지위를 확보하는 단계에 가가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풋(Rosemary Foot)은 이미 2000년도 중국에서 규범적 지위를 확보하는 단계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Foot, 2000, 257). 이후 사회권 규약의 비준과 국내법의 정비 등을 고려하면 중국의 인권상황이 그보다 더 진전된 단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중국이 과연 규범적 지위 단계로의 진전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지속시키고 5단계로의 진입을 얼마나 빨리 앞당길 수 있는가라고 할 수 있다.


아래에서 중국에서 인권규범의 확산과정을 각각 국제인권체제와 중국정부 사이의 상호작용, 중국 내에서 인권규범의 내재화로 나누어 각 단계의 변화를 촉진한 요인들을 살펴볼 것이다. 이 두 단계는 각각 나선모델의 3단계와 4단계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4. 국제인권체제와 중국정부의 상호작용 - 전술적 양보 단계로의 진전


4장에서는 국제인권체제가 중국정부의 인권에 대한 태도를 어느 정도로 변화시켰으며 어떤 수단이 효과적이었는가를 설명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국제인권체제가 중국정부의 인권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과 커다란 영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는 두 개의 상반된 주장이 있다. 국제인권체제가 개별국가에 영향을 미치는 수단은 크게 물리적 제재와 도덕적 압력으로 나눌 수 있다.8)


중국은 1989년 천안문사태 직후에 서방국가로부터 물리적 제재를 받았다. 그런데 현실주의적 접근들은 이러한 제재가 중국정부의 인권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키는 데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사실 천안문 직후 중국의 경제제재를 위한 국제공조는 조기에 무너졌기 때문에 별다른 분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물리적 제재와 관련하여 관심을 끈 것은 1993년 클린턴행정부가 중국의 인권문제 개선과 최혜국대우(MFN) 연장과 연계시키려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클린턴행정부는 중국의 인권상황에 커다란 진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1994년 5월 이러한 연계정책을 포기하였다.


이에 대해 디트머(Lowell Dittmer)는 인권이라는 이상주의적(idealist) 목표에 현실주의적(realist)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성공적 결과를 얻기가 어렵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경제제제의 효과를 가로막는 요인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었다(Dittmer, 2001, 433-434). 우선 제재 주체들이 상당한 비용을 감수해야한다. 둘째, 제재를 받는 국가에서 인권을 억압하는 사람들보다 인권을 박탈당한 사람들에게 더욱 큰 피해를 준다. 셋째, 국제사회의 통일적 행동이 이루어져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무임승차를 한 행위자에게만 유리한 결과를 가져온다. 클린턴행정부는 내부에서 중국에서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이익집단으로부터의 압력에 직면하였고, 외부적으로는 인권 이외의 영역(핵확산방지 등)에서 미국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중국의 협력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연계정책이 일관되게 실시되는 처음부터 힘든 것이었다. 게다가 미국으로서는 중국에 대한 경제제재에서 국제공조가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에서 미국만의 제재가 중국에 대해 압력이 되지 못하고 미국의 이익만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중국과 같이 국제사회에 대해 상당한 협상력(bargaining power)를 가지고 있는 국가에 대해 제재와 같은 수단을 사용하여 인권문제의 개선을 이끌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국제인권체제는 중국정부의 인권규범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키는 데 큰 의미를 갖지 못하였는가. 그렇지는 않다.


이에 대해 디트머도 인권문제라는 이상주의적 목표에 대해 현실주의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에는 회의적이지만 이상주의적 수단(국제여론의 동원, 보편적 규범에 대한 호소, 공공외교 등)을 사용하는 것은 긍정적으로 보았다. 다만 그는 이러한 수단이 단기적으로 효과를 발휘하기에는 너무 약하며 어떤 실질적이고 구조적인 효과를 낳기 위해서는 커다란 인내심이 필요하다로 보았다(Dittmer, 2001, 459). 반면 나선모델 등 구성주의적 접근을 하는 경우에는 규범에 대한 호소가 실질적인 효과를 발휘할 가능성에 대해 더 낙관적이다.


이러한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 ‘창피주기(shaming)’이다. 중국에 대한 물리적 제재는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1994년을 전후로 종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90년 3월 제46차 UN 인권위원회 총회에서 미국이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국가와 함께 중국정부의 인권정책을 비판하고 인권상황 개선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한 이후 서국국가들이 거의 매년 UN 인권위원회 총회에 중국의 인권상황을 비판하는 결의안을 제출하는 방식으로 중국정부를 압박하였다. 이러한 결의안의 제출에 대해 중국은 특정국가의 인권상황을 비판하는 결의안은 내정간섭을 금지하는 UN헌장 위반이라고 주장하며 UN 회의에 의제로서 상정될 수 없다는 “비행동동의안(No Action Motion)”을 제출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이에 따라 매년 UN 인권위원회 총회에서는 중국 인권문제를 둘러싼 치열한 공방전이 진행되었다.


<표2> UN 인권위원회에서 중국의 비행동동의안에 대한 표결상황





자료: http://www.unhchr.ch/html/menu2/2/chr.htm(2004년 12월 1일 검색)의 매 총회의 기록을 기초로 필자가 정리.


중국에 대한 압력이 가장 강화된 시기는 1995년이다. <표2>가 보여주듯이 1995년은 중국의 비행동동의안이 부결되고 중국 인권문제에 대한 결의안이 총회에 상정된 유일한 경우였다.9) 비록 결의안은 반대 21, 찬성 20, 기권12로 부결되었지만 유엔이 인권 문제를 이유로 특정 국가의 내정간섭을 할 수 없다는 중국 정부의 일관된 주장에는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10) 그러나 1995년을 지나면서 중국의 비행동동의안은 더욱 많은 지지를 받기 시작하였고 2000년대 들어서는 중국의 인권상황을 비판하는 결의안을 상정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졌다. 이러한 전환에는 1997년부터 EU국가들이 중국 인권문제를 둘러싼 공방전에서의 공동보조를 취하는 것을 중단하고 점차 다자무대보다는 중국과의 쌍무대화를 중국 인권문제를 다루는 주요 통로로 삼시 시작한 것이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특히 1998년 2월 EU는 중국 인권문제를 비판하는 결의안 상정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 이후 EU 국가들은 쌍무적 인권대화를 중국 인권문제를 논의하는 주요 통로로 삼기 시작하였는데 베이커(Phillip Baker)는 중국에 대한 효과적인 압력수단을 포기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비판하였다Baker, 2002, 62).


EU 국가들의 태도전환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상업적 이익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점은 공통적으로 지적된다. 예를 들면 에어버스 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하던 프랑스, 스페인, 독일, 그리스 등이 중국의 에어버스 구매를 고려하여 중국 인권문제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Baker, 2002, 56). 이는 중국과 같은 많은 대응수단을 가지고 있는 국가에 국제공조가 유지되기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그러나 1997년까지 창피주기 전술은 일정한 효과를 거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와크먼은 창피주기 전술에 대해서도 회의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는 중국에 대한 창피주기에 중국 지도부들이 도덕적 수치심보다는 ‘분노감’을 느끼게 만들었고, 중국정부는 인권 문제에 대해 더욱 강경한 태도를 취하도록 만들었다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중국정부는 국내에서 중국에 대한 위협 혹은 중국적 문화가치의 쇠퇴에 대한 애국주의적 반응을 강화시키는 방식을 대응하였는데, 중국공산당 통치에 반대하는 세력이 약한 상황에서 창피주기 전술이 성공하기 어려웠다고 결론을 내렸다(Wachman, 2001, 274).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중국정부의 인권규범에 대한 태도가 1997년을 전후로 크게 변화하였다는 점을 간과하는 것이다. 1997년 5월 16일 장쩌민 국가 주석은 프랑스 시라크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발표한 공동성명에 “인권 보호와 촉진은 유엔 헌장의 정신과 원칙 그리고 인권의 보편성에 기초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는데 중국이 외국 정상과의 공동성명에 인권문제에 대한 합의를 포함시킨 첫 번째 사례이다. 장쩌민은 또한 1997년 10월 30일 클린턴과의 정상 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하던 중 아시아소사이어티에 참석하여 한 연설에서 인권의 발전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강조하면서도 “집단적인 권리와 개인적인 권리,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와 시민적․정치적 권리는 서로 나누어질 수 없는 것이다”라고 밝혔다(Foot, 2000, 213). 그리고 1997년 10월과 1998년 10월에 각각 국제 인권의 핵심적인 원칙을 담고 있는 사회권 규약과 자유권 규약에 서명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일종의 전술적 양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는데, 중국정부가 천안문사태 이후 반대세력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국내의 아래로부터의 압력의 결과로 보기는 힘들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는 중국정부가 자신들의 정한 프로그램에 따라 인권정책을 변화시켰다거나 국제적 압력이 효과를 발휘하였다는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이 두 가지의 요인들이 각각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하였는지를 분명하게 하기는 어렵지만, 중국의 양보가 UN 인권위원회에서의 공방전이 가장 치열하게 진행되던 시기, 특히 UN 인권위원회 총회를 앞두거나 중미정상회담을 앞둔 시기에 집중되었다는 점은 중국이 국제사회의 비판을 부담으로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규범이 정부의 행위에 영향을 미친다는 나선모델의 타당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응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이러한 반응을 유발하는 내재적 요인들이 있었다. 중국정부가 국제인권규범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에는 다음의 두 가지 요인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첫째, 중국은 개혁개방정책을 시작한 이후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서 참여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 하였으며 실제로 국제사회의 참여를 통해 경제적 측면에서 많은 이득을 누리고 있었던 국가이다. 둘째, 중국은 UN 상임이사국의 일원으로 UU이 주도하여 만든 국제규범을 무시할 수 없는 국가이다. 특히 자신의 성장에 대한 외부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책임을 지는 대국’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가려고 하는 중국에게는 물질적 제재를 동반하지 않더라도 국제규범을 위반하는 국가로 비쳐지는 것이 매우 커다란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중국은 물질적 축면과 규범적 측면 모두에서 이러한 창피주기에 부담을 느끼고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요인이 결여되어있거나 다른 내재적 요인들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국제인권체제의 도덕적 압력만으로 개별국가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데에는 커다란 한계가 있을 것이다.


요약하면 국제인권체제의 압력은 중국 인권상황의 전술적 양보 단계로의 이행을 촉진시켰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효과는 중국정부가 국제사회에서의 국제사회의 비판을 민감하게 받아들 수 있었던 요인을 가지고 있었던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전술적 양보에서 인권의 가치가 규범적 지위를 확보하는 단계로의 이행과정에서는 그 양상이 크게 달라진다.


5. 중국 내에서 인권규범의 내재화(internalization)와 한계


나선모델에서는 전술적 양보 단계에서 국가는 인권규범의 보편성을 전제로 하는 언설체계에 빠져들게 되고, 이는 다시 초국적 인권네트워크와 국내의 반대세력이 더욱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게 만들어 다음 단계로의 이행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든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중국의 경우 1997년부터 전술적 양보가 본격화되었다고 한다면 현재 10년이 지난 시점까지도 국내의 반대세력이 강화되거나, 국내의 반대세력이 초국적 인권네트워크와 결합되는 현상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즉 나선모델의 예측이 아직 실현될 조짐이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러한 상황이 단기간 내에 변화될 가능성도 낮아 보인다.


우선 국제사회에서 중국 인권문제는 계속 의제로는 제기되기 있지만 그 압력의 정도는 크게 낮아졌다. 서구 국가들의 중국 인권문제에 대한 태도는 문제가 나타나는 경우 구두로 개입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으며 중국에게 압력이 될 수 있는 어떤 실질적인 수단도 동원하지 않는다. 올해 3월 발생한 티베트사건으로부터 올림픽 개막에 이르기까지 서구 국가들의 태도가 이러한 양상을 잘 보여준다. 티베트에서 유혈충돌이 발생했을 때만 하여도 중국 인권문제에 강도 높게 개입할 것처럼 보였던 서구국가들이 어떤 실질적인 수단을 동원하지 않았고 올림픽이 개막되는 시점에서 티베트 문제는 더 이상 중국과 서구 국가들 사이의 관계에서 중요한 의제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반면 국제NGO들은 중국의 인권을 계속 문제로 삼고 있으나 물리적으로는 물론이고 도덕적으로도 중국에 커다란 타격을 주지 못하고 있다. 중국정부는 무엇보다도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기초로 억압적 국가로서의 이미지를 상쇄시킬 수 있는 많은 수단을 가지고 있다. 즉 국제NGO들의 비판이 주로 정치 및 시민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과 관련된 사항들을 문제로 삼는 반면, 중국정부는 생존권과 발전권이라는 국제인권규범의 또 다른 내용들을 자신들의 인권보호의 실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마지막으로 국제인권체제 혹은 국제인권규범이 중국 내 반대세력을 강화시키는 데 직접적인 효과가 거의 없다는 점도 분명해졌다. 1997년과 1998년 중국정부가 사회권과 자유권 규약에 서명을 하였을 때 이를 계기로 국내의 반대세력이 강화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1998년 중국 내 반체제인사들은 클린턴의 중국 방문을 앞둔 시점에서 ‘중국민주당’ 건설을 시도한 것이 그러한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그런데 중국정부는 중국민주당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주요 관련자를 체포하는 강경책으로 대응하였다. 2006년 8월 미국으로 추방된 인사들을 중심으로 중국민주당 제1차 당대회가 개최되는 등 이들의 활동은 계속되고 있으나 그 양상은 나선모델이 예측한 중국 내에서 반대세력의 강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위의 추세들은 국제인권체제의 작용만으로 중국 내에서 인권규범을 확산시키는 것은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나선모델의 3단계를 지나 4, 5단계로 진입하는 과정은 이 모델이 전망하는 것보다는 더욱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 것이며, 국내적 요인 특히 국가의 역할을 주요 독립변수로 삼아 이 과정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두 가지의 문제가 제기된다, 과연 중국은 3단계를 지나 4단계로 진입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중국이 4단계로 진입을 촉진할 수 있는 주요 동력은 어디에 있는가?


첫째 문제와 관련하여 쉬바르쯔는 나선모델에 대해 3단계의 마지막 국면에서 민주적 체제전환이 발생하여야만 4단계로 이행할 수 있다는 내용이 보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Schwarz, 2004, 206), 그의 주장에 따르면 위의 결과는 당연한 것이다. 즉 중국의 정치체제가 민주적 체제로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중국의 인권상황에 4단계로 진입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나선모델에서도 이러한 측면을 완전히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선모델도 민주적 체제로의 전환이 4,5단계로 발전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경로라고 보았으나, 그밖에 ‘통제된 자유화(controlled liberalization)’를 통해서도 4단계로 진입할 수 있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4단계로의 이행 경로를 더 폭넓게 설정하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중국의 경우에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쉬바르쯔의 논리를 따르면 중국은 4단계로의 이행을 위한 조건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고, 나선모델에서는 명시적으로 인정한 것은 아니지만 중국과 같은 경우도 체제의 근본적 전환이 없이도 인권상황이 개선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양자의 모델 모두 앞의 국제인권규범의 개별 국가에 대한 영향에 대한 설명에서 지적되었던 것과 비슷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쉬바르쯔의 모델은 인권상황의 변화를 지나치게 물질적 조건과 연결시키고 규범의 영향력을 무시하는 문제점이 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중국의 경우는 전술적 양보를 넘어서는 진전이 있었으며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3단계와 4단계 사이의 체제전환이라는 문턱이 존재한다고는 볼 수 없다. 그리고 나선모델의 경우는 다른 경로가 출현할 가능성을 제시하나 이러한 가능성이 어떤 상황에서 나타날 수 있는지를 설명하지 않고 있다. 이는 이 모델이 초국적 네트워크의 적극적 역할 이외에 이러한 변화를 촉진할 수 있는 국내적 변수 등 다른 변수, 특히 국가를 고려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 문제로 보인다. 중국의 경우는 4단계로의 진전이 단순히 초국적 네크워크의 영향으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2004년 헌법개정 등은 중국의 인권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력이 약화되던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며 이는 중국 내에 인권문제를 변화시키는 독자적 동력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두 번째 문제에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과연 중국 내에서 인권상황을 변화시키는 동력은 무엇인가?


중국 내에서 인권문제가 부상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경제적 변화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근대화이론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근대화이론은 경제성장 및 소득수준의 증가 - 중산층의 형성 - 민주화라는 틀로 인권문제의 진전을 설명한다. 그러나 중국에서 인권을 둘러싼 상호작용은 이러한 단선적 발전을 따르지 않는다. 그보다는 경제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시도된 시장화 개혁이 중국 내에서 계층분화와 계층 사이의 갈등을 촉발시키면서 중국정부 인권문제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과거 사회주의체제에서는 개인은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국가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는 대신에 국가의 개인들의 안정적 생활을 보장해주었다. 그러나 시장화 개혁은 개인들이 시장에서 자신의 생존을 위한 자원을 획득하도록 만들었으며, 따라서 이들의 경쟁에 참여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경제, 사회적 권리를 보장해주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특히 취약계층의 경우는 시장화 과정에서 권력과 유착된 세력에게 자신들의 재산권 등을 빼앗기는 등 개인권리를 심각하게 침해당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러한 조치가 시급하게 요구되었다.


또한 중국에서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의 통치정당성 문제도 국내에서 인권규범의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즉 중국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내세우고 있으며 중국공산당은 전체 인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정당이라는 이념을 내세워 집권당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중국정부는 인민에 대한 약탈자가 아니라 인민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이미지를 유지시킬 수 있는 실질적 조치를 필요로 한다. 이는 사회주의 이념이 비록 잔여적 존재로서의 전락하고 있지만 여전히 중국에서는 유의미한 역할을 하는 측면이기도 하다.


이러한 요인들이 비록 불완전하고 한계가 많지만 중국 내에서 인권규범을 확산시키는 주요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동력이 중국의 인권상황을 4단계를 넘어서 5단계로 진입시킬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 인권영역에서 규범과 일치하는 행위관습이 정착되기 위해서는 정치체제가 민주적이고 개방적 방향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점은 국제인권규범의 확산과 관련한 모든 연구가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 내 인권규범은 현실주의적 접근이나 구성주의적 접근이 예측하는 것보다는 정치사회 영역에서 더욱 복잡한 상호작용을 유발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는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작용에 주목할 경우 인권규범은 단지 정치체제 변화의 종속변수가 아니라 정치체제의 변화를 촉진시킬 수 있는 독립변수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 확산되는 아래로부터의 집단행동들이 이러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장기적으로 보면 이러한 변화의 폭과 속도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적 압력과 지배연합의 대응방식에 따라서 좌우될 것이다. 다만 현재 인권상황과 관련하여 중국이 4단계로 진입한 성과를 더욱 공공하게 하고 5단계로 진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는가의 여부를 판단하는 지표의 하나로 자유권 규약의 비준시기와 비준방법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 내 인권관련 연구자들은 자유권 조약의 비준이 비교적 적극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처음으로 자유권 규약의 비준과 관련한 구체적 제안을 제시한 천광중(陳光中)은 중국 국내적으로 많은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에 서두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늦출 경우 인권의 향상과 국제사회에서의 활동에 불리한 영향을 주기 때문에 비준을 위한 준비를 적극적으로 전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陳光中, 2002, 505). 국제인권조약과 중국 국내법 사이의 관계를 연구해온 모지홍(莫紀宏)은 2010년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법률체계를 초보적으로 구축한다는 목표를 고려하면 2010년까지 이 규약의 비준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구체적인 제안을 하기도 하였다(莫紀宏, 2005, 265).


<표3> 자유권 규약의 서명에서 비준까지 10년 이상 소요된 국가






<표3>은 자유권 조약을 비준한 162개 국가들 가운데 서명에서 비준까지 10년 이상이 걸린 국가들의 목록이다. 사실 서멍에서 비준가지 10년 정도의 기간이 걸리는 것은 아주 이례적인 것은 아니다. 선진국들 중에서도 법이 매우 엄격하고 구체적이기 때문에 국제규약과 국내법의 관련 규정들을 일치시키기 위한 정비를 위해 서명에서 비준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예가 적지 않다. 그러나 <표3>은 그 기간이 10년 이상 소요되는 것은 이례적이며 그 대부분이(캄보디아와 미국을 제외한)의 경우가 자유권 규약이 발효되기 이전에 서명한 국가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올해로 자유권 규약에 서명한 지 10년이 지나고 있는 중국이 비준을 위한 구체적인 작업을 진행시키지 않는다면 앞으로 비준을 요구하는 압력이 더욱 증가할 것이다.






자료: http://www2.ohchr.org/english/bodies/ratification/4.htm


만약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중국정부가 4-5년 내에 자유권 조약이 추진한다면 그 내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많은 나라가 규약을 비준하고 현실에서는 인권에 대한 침해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규약의 비준 자체가 인권보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차지하는 특수한 지위와 내부적으로 권리의식의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중국정부의 자유권 규약 비준이 중국의 인권상황에 새로운 역동성을 불어넣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중국정부의 자유권 비준에 대한 신중한 태도도 이를 단순히 형식적으로만 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반증해주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자유권 규약과 현재 중국의 국내법과 정치체제 사이의 충돌이 있기 때문에 중국은 자유권 규약을 비준할 경우 사회권 규약보다는 더욱 많은 유보 혹은 해석성 선언이 필요할 것인데 중국정부가 그 범위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이다.11) 천광중의 경우는 자유권 규약과 중국의 국내법 사이에는 커다란 충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고 일부 부분적 조정을 통해서만 비준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는 자유권의 내용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한 결과이며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반면 모지홍은 자유권과 국내법 사이의 구체적인 측면에서 적지 않은 충돌이 있다고 보고 비준 시 이를 더욱 신중하게 고려할 것을 제한하고 유보, 선언이 필요한 부분을 비교적 상세하게 정리하였다.12) 다음 <표4>는 두 사람의 비준 시 유보, 선언 및 국내법의 개정이 필요한 부분을 정리한 것이다.


이 방안에 따라 비준이 진행된다면 개인의 신체의 자유 등과 관련한 권리, 그리고 사법절차에서 개인의 변호권과 권리를 침해받을 경우의 항의 및 배상 절차 등과 관련한 영역에서는 인권보장이 강화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 집회 및 결사의 자유와 표현에 자유에 대해서는 국내의 관련 법규를 통한 제약이 계속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비준 자체가 이 영역의 권리보호에 직접적인 효과가 크지는 않을 것이다. 이 역시 현 체제 내에서도 인권보호가 증진될 수 있는 여지와 가능성이 있다는 점과 동시에 중국 내에서 국제인권규범이 관습화되기 위해서는 정치체제가 더욱 개방적 방향으로의 개혁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점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다.


<표4> 천광중과 모지홍의 자유권 규약 방안 비교





자료: 陳光中(2002; 503-523), 莫紀宏(2005; 263-336)에 기초하여 필자가 정리


6. 결론


위에서는 중국을 사례로 국제인권규범의 국내적 확산과정을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중국도 국제인권체제와의 상호작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국제인권규범의 보편성을 원칙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하였음과 중국 국내에서도 인권상황에 매우 동태적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우리는 국제인권규범의 확산과 관련하여 다음 몇 가지의 함의를 찾을 수 있다.


우선 기존 모델에 대한 함의이다. 본 연구는 나선모델을 연구의 출밤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 모델이 예측하는 것처럼 국제인권규범이 중국정부의 인권에


대한 태도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의 보완이 필요하다.


첫째, 중국에서 전술적 양보 단계로의 이행은 초국적 인권네트워크의 영향이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초국적 인권네트워크의 역할만으로 중국정부의 태도변화를 설명하기 힘들다. 중국정부의 태도변화는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특수한 지위와 이미 매우 높은 수준으로 진행된 경제개방 및 그로부터 획득할 수 있는 이익을 고려할 때 더욱 잘 설명될 수 있다.


둘째, 중국에서 인권의 동학은 전술적 단계를 넘어서면서부터는 5단계 모델이 예측하고 있는 것처럼 초국적 인권네트워크보다는 중국 내부의 변화요인이 더욱 중요하게 작용한다.


따라서 5단계 모델을 국내적 변수, 특히 국가가 갖는 정체성을 더욱 충분하게 고려하여야 개별 국가에서 진행되는 인권규범의 확산 메커니즘을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국제인권규범의 확산에서 개벌 국가는 피동적 수용자가 아니며 이들의 대응방식에는 커다란 편차가 존재한다. 따라서 국제인권규범의 확산을 위해서는 개별 국가가 이러한 규범의 확산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조건을 더욱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이러한 조건들을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도 병행할 필요가 있다.










또한 실천적인 측면에서 보면 중국의 사례는 정치체제의 개혁이 없이도 인권규범의 확산이 진행될 수 있다는 사실과 그 한계를 모두 보여준다. 즉 중국의 사례는 쉬바르쯔처럼 전술적 양보단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체제전환이 필요하다는 주장과는 달리 정치체제의 근본적 전환이 없이도 4단계로 진입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물론 4단계의 정착과 5단계로의 발전을 위해서는 정치체제의 전환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는 선택의 문제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권보호의 초기단계부터 체제전환이 이루어진다면 그 과정이 지속적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체제전환의 가능성이 낮은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즉 국제사회는 제한된 조건 내에서의 인권증진을 수용하며 인권증진을 장기적 과정으로 보며 대응할 것인가, 아니면 더욱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압박을 강화할 것인가라는 선택이 제기된다. 중국의 경우는 일단 전자의 경로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진행을 변화시킬 수 있는 동력이 외부로부터 주어질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앞으로 중국 인권상황의 변화속도는 국제체제의 압력보다는 내부의 변화요인들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중국은 국제인권규범의 영향력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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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1 http://www.koreapeace.or.kr/modules/forum/forum_download.html?ff_no=296

[김학성] 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 2


[김학성] 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 2 (10회포럼)





[ 제10회 한반도평화포럼 자료집]





"대북 인권정책과 인권문제의 세계적 추세"

일시 : 2008년 8월 29일(금) 13:00-18:30
장소 : 프레스센타 19층 기자회견장

*원문은 10회 포럼자료집에 있습니다.





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 2







김학성 교수(충남대학교 평화안보대학원)





기록보관소의 조사는 크게 6가지의 수단을 활용하여 이루어졌다. ① 연방국경수비대의 현황보고서, ② 동독 언론매체의 분석, ③ 피해자나 증인들의 개인적 증언 심사, ④ 주 및 연방정부 당국의 조회 요구와 정보의 분석·심사, ⑤ 석방거래된 정치범 및 이주자들의 임시 거주지인 기센(Gießen) 소재 연방수용소에서의 정보수집, ⑥ 동독 인민군으로서 귀순한 자들의 설문 조사 등이다.1)


기록보관소의 활동 역시 동독정권으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으며, 또한 동독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민당 좌파들로부터도 곱지않은 시선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통일에 이르기까지 총 4만3천여 건이 넘는 인권침해 사례와 8만여 명의 관계자 이름을 기록하는 성과를 남겼다. 더구나 1969년 민간단체였던 ‘조사위원회’가 내독성 산하의 ‘전독일 연구소’(das Gesamtdeutsche Institut)로 편입된 후, 기록보관소는 동독의 인권을 감시하는 중추 기관이 되었다. 비록 1970년대 이후 내독관계의 발전으로 이 기관의 활동이 여론에 크게 부각되기는 어려웠지만, 존재 자체가 동독정권에 대한 압력으로 작용했으며, 나아가 그 기록들은 통일이후 인권관련 과거청산을 위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었다.


1. 시사점


서론부분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독일사례는 우리의 문제 해결에 필요한 여러 가지 영감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이 맥락에서 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에 대한 개괄적 검토는 의미있는 대북인권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기 위해 우리가 숙고해야 할 것들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먼저 생각해볼 것은 인권문제와 분단현실의 상관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규정할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서독과 달리 우리의 정치·사회 문화에서 인권의식은 1980년대 후반 민주화와 더불어 비로소 확산될 수 있었다. 물론 이전에도 사회 곳곳에서 인권 및 사회운동단체들의 활동이 있었으나 안보와 경제발전의 국가목표는 인권의식의 사회적 확장을 억제했다. 특히 안보는 반공주의와 직결된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 사회에서 인권과 분단은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냉전시기 분단은 반공주의를 우선시 함으로써 보편적 인권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억압하는 주요인으로 작용했다.


민주화이후 지난 20여년간 인권의식이 사회적으로 점차 확산되어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인권의식은 아직도 반공주의적 안보의 관성력을 쉽게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의 존립은 상징적인 예이다. 세계적 탈냉전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는 냉전적 대결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상황에서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개발은 북한의 도발에 대한 경각심을 지속시키고 있으며, 이에 따라 안보 우위의 현실은 지속되고 있다. 다만 지난 10여년간 남북관계의 발전과 세계화의 큰 흐름 속에서 보수와 진보 그리고 세대간에 가치갈등이 대두되면서 우리 사회는 가치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다. 세계화의 보편적 흐름을 보면, 인권의 비중이 더욱 증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사실 가치의 측면에서 보면 인권과 북한의 위협 및 방어는 별개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역사에서 양자가 처음부터 서로 엮어진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과거 서독도 마찬가지였다. 서독사회는 과거의 잘못에 대한 반성을 바탕으로 인권문제를 분단문제로부터 독립시킬 수 있었으며, 그러한 노력의 축적을 통해 서독 사회의 인권의식의 진정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우리 사회에는 인권의식은 분단현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내부로부터도 인권의식의 수준 평가가 그리 높지 못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의 인권개선에 대한 요구가 북한을 포함하여 전지구상에서 얼마나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 따라서 인권문제에 대한 우리 정부나 사회의 관심이 북한을 넘어 우리사회 전반의 인권수준 고양을 비롯하여 국제인권문제로 확대될 필요가 있다.


분단현실을 극복하지 못한 우리 사회의 인권의식은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이해수준에서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민주화에 편승한 인권의식의 급성장에도 불구하고, 그 이전부터 강조되어왔던 이산가족문제를 제외하면, 인권의 관점으로 북한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북한인권문제는 1990년대 중반 북한의 식량난 악화를 계기로 비로소 우리 사회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북한 식량난을 계기로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대북지원이 활성화 되었다. 이 가운데 진보적인 대북지원단체들은 기초적 생존을 위한 경제생활조차 힘든 북한주민의 경제적 기본권에 집중한 반면, 자유적 기본권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과거 민주화는 물론이고 국가보안법 철폐와 같은 국내의 자유권에 대해 개선을 요구하는 반면, 북한주민의 자유적 기본권에 침묵하는 것은 모순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민주세력을 자부하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역시 남북관계 발전에 우선권을 두면서 북한정권을 자극할 수 있는 북한인권문제를 애써 외면하고자 했다. 유엔인권위원회에서 북한 인권개선 요구에 대한 표결에서 우리 정부가 수차례 기권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주민의 자유적 기본권 증진을 위한 프로그램은 거의 실천되지 못했다. 일부 보수세력은 북한의 자유를 외쳤으나, 구체적 실천계획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햇볕정책이 추진되는 동안 실질적인 힘을 얻을 수 없었다. 북한인권문제는 오히려 미국의 보수세력을 중심으로 국제문제화 되었다. 이에 편승하여 우리의 보수세력도 북한인권문제에 대한 목소리를 높였으나, 대부분 국내 인권상황에 대해 반성적인 태도가 전제되지 않았던 탓에 자기모순을 노정했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서 북한인권문제는 순수한 인권의 차원보다 정치적 맥락에서 인식되고 활용됨으로써 문제의식의 진정성은 물론이고 인권정책 자체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 정부와 사회는 향후 대북인권정책의 방향과 틀을 바로잡아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이를 위해 일차적으로 필요한 것은 북한 인권문제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규정할 것인지의 문제이다. 독일사례는 이에 대해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즉 체제비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정치적 공방이 발생할 수 있는 여지를 최소화 하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과거 서독은 자국의 체제가치 대신 국제규범을 내세워 동독의 인권문제를 규정하고 구체적 사안에 대한 개선을 촉구했듯이 우리도 북한 인권문제를 국제적 기준에 입각하여 사안별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북한은 이미 1981년 국제인권협약에 가입했기 때문에 이러한 접근은 충분히 가능하다.


다만 이 경우에 독일사례와 상응하지 않는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첫째는 동독의 경우에는 사례를 찾기 힘든 북한주민의 경제적 기본권 보장에 대한 문제이다. 북한이 만성적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경제적 기본권의 보장은 도외시될 수 없다. 근래 대북지원은 개발지원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 단순한 식량 및 기초 생필품 지원과 달리 개발지원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체제효율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현재의 북한 정치 및 경제체제 아래서 개발지원의 성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경제적 기본권에 대한 관심 역시 중장기적으로 보면 실질적으로 자유적 기본권과 수렴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면, 북한주민의 경제적 기본권과 자유적 기본권을 모두 문제해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는 국제적 규범을 적용해도 떳떳할 만큼 우리의 인권상황에 자신을 가질 수 있는지의 문제이다. 실천과 가치의 양면을 내포하는 인권문제의 경우, 실질적 문제해결 과정은 문제제기의 정당성, 특히 윤리적 측면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에 문제를 제기하는 입장에서는 끊임없는 자기반성이 요구된다. 그렇다면 우리사회는 현 상황의 인권지향적 변화를 위해 비판적이고 반성적인 태도를 꾸준히 견지해야 할 것이다.


북한인권문제를 규정할 수 있다면, 대북인권정책을 어떻게 수립하고 추진할 것인지, 그리고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뒤따른다. 독일사례에서 보듯이 서독의 다양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독인권문제가 서독이 의도했던 것처럼 개선될 수는 없었다. 동서독 관계에 비해 훨씬 열악한 남북관계를 감안하면, 과거 서독정부가 거두었던 정도의 성과를 기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더구나 이명박 출범이후 남북당국간 대화가 단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으로 남북관계 전반에 먹구름이 덮친 상황에서 아무리 북한인권문제를 잘 규정하고 문제제기를 훌륭하게 하더라도 실질적 개선을 위한 수단이 없다면, 대북인권정책은 명분에 그칠 것이다.


현재의 상황에서는 우선 현실적인 대북정책의 기조를 확립하는 것이 급선무로 보인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대북인권정책을 대북정책 기조의 하위 개념으로 파악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과거 서독정부는 통일을 잠정적으로 포기하고 분단관리정책을 추진하면서 “독일국민이 분단 상황을 인내할 수 있으며, 동독주민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웠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명분은 자유와 인권의 개념이 분단관리를 위한 평화 개념과 조화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1970년대 남북대화가 시작한 이래 우리의 대북정책에는 북한의 변화를 촉진하기 위한 평화적 개입(engagement) 의지가 그 비중을 키워왔으며, 세계적 냉전 종식이후 그 추세는 더욱 증대했다. 비록 우리 사회내부에는 평화적 개입의 방법론을 두고 여러 논란이 제기되었지만, 기본적 추세가 부인될 수는 없다. 대북 평화적 개입은 자유주의 원칙이 침범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장기적인 이익을 위해 북한과 상호 호혜적인 타협을 모색하며, 현실주의적 신중함을 참고하여 경제협력과 상호의존을 확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자유주의 원칙이 북한에게 무력적으로 강요되기 어려운 현실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패권국가인 미국조차 무력과 강압적 개입대신 평화적 개입을 선택했다는 점은 그러한 사실을 여실히 입증한다.


이러한 정책기조는 제한적이나마 북한 인권문제의 개선을 위한 평화적 수단을 확보해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쨌든 북한체제가 근본적으로 변화하기 전에 우리의 노력으로 인권문제의 온전한 해결을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을 염두에 두면, 중장기적 관점에서 명분과 실리를 모두 겨냥하는 대북인권정책의 추진이 필요할 것이다. 예컨대 명분의 차원에서는 국제규범에 걸맞게 북한인권문제를 원론적으로 제기해야 할 것이며, 또 북한인권문제는 대북 인도적 지원에 대한 적극적 태도와 병행하여 제기되어야 한다. 실리의 차원에서는 정치적 현실을 감안하여 신중하고 유연하여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대북인권정책이 진정으로 북한주민의 인간다운 삶에 도움이 될 수 있어야 하며, 단지 정치적 홍보용으로 비춰지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남북관계의 현황에 비추어 한동안 ‘조용한 해결’ 방식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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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성] 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


[김학성] 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 (10회포럼)





[ 제10회 한반도평화포럼 자료집]




"대북 인권정책과 인권문제의 세계적 추세"

일시 : 2008년 8월 29일(금) 13:00-18:30
장소 : 프레스센타 19층 기자회견장

*원문은 10회 포럼자료집에 있습니다.




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





김학성 교수(충남대학교 평화안보대학원)







1. 문제제기


우리 정부의 과거 대북 정책에서 북한 인권문제는 그리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시기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다. 냉전시기에는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인권에 대한 개념 차이가 서로 대립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내부에 인권문제가 엄연히 상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 인권문제를 진지하게 제기할 수 있는 충분한 명분을 갖추지 못했다. 1980년대 후반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통해 인권 개선에 진전이 이루어졌으나, 1990년대 초 탈냉전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남북당국간 대화의 확대 및 심화에 주력하는 가운데 북한 인권문제에까지 주목할 여력이 없었다.


과거의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고 화해를 통한 남북관계의 개선을 모색하는 단계에서 북한인권문제는 더더욱 외면 받았다. 인권문제를 가지고 북한정권을 자극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햇볕정책의 추진에서 보듯이 과거 남한의 권위주의 정부에 맞서 민주화와 인권을 외쳤던 민주세력 조차도 북한인권문제에 침묵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햇볕정책이 남북관계의 급격한 개선이라는 성과를 거둔 것은 높이 평가받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 결과가 북한정권유지에 도움을 주었을 뿐이며 북한주민의 인권개선에 제대로 기여하지 못했다는 국내외의 비판에 직면했다. 햇볕정책의 벤치마킹 대상이었던 독일의 ‘신동방정책’ 역시 초창기에 부분적으로 유사한 비판을 받았다. 신동방정책을 즐겨 인용했으며, 특히 정책비판이 제기될 때마다 독일 사례를 방어논리로 제시하곤 했던 햇볕정책론자들은 사전에 그러한 비판 가능성을 염두에 둔 적절한 대안을 모색하지는 못했다.


신동방정책은 독일의 분단을 자유지향적 토대위에 평화적 방법으로 극복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이러한 목표가 성취되지 못하는 동안에는 독일인들이 분단의 결과를 인내할 수 있도록 만들려는 의지의 산물이었다. 분단의 결과를 인내한다는 것은 양 주민들의 자유로운 왕래와 동독주민의 인간다운 삶의 보장이라는 동독인권 개선을 의미했다. 신동방정책을 주도했던 브란트 총리는 “동독정권을 인정함으로써 결국은 동독주민에 대한 정권적 인권탄압을 방조할 수밖에 없다”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명분과 실리의 양면에서 동독주민의 인권개선에 주력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예컨대 1970년 동서독 정상(총리)회담이 처음으로 두 차례 연이어 개최되었을 때, 브란트 총리는 동독인권 개선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이처럼 명분에 그치지 않고 내독관계 발전과정에서 서독은 동독에 다양한 형태의 경제적 혜택을 제공하면서 동서독 주민의 왕래와 같은 인도적 사안의 개선은 물론이고 동독주민의 인권 개선을 ‘조용히’ 요구했고, 제한적이나마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정권이 보수적 기민당(CDU)에게 넘어간 이후에도 서독정부의 대동독 인권정책과 관계개선정책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햇볕정책도 분단의 평화적 관리를 통한 통일여건 조성을 목표로 삼았으며, 지난 10년간 남북관계 개선과 대북 인도적 지원을 통해 북한주민의 굶주림 해소에 일정부분 기여했고, 또 이산가족 상봉의 정례화와 제한적이나마 남북주민간 상호방문의 물꼬를 텄다는 점에서 신동방정책과 유사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 인권에 관해 정부가 어떠한 공개적인 문제제기도 하지 않았으며, 더구나 유엔인권위원회의 북한 인권개선 요구와 관련한 표결에 기권하는 등의 행위는 과거 브란트 정부의 독일정책과는 분명하게 다르다. 또한 북한주민의 인권 상황은 두말할 것도 없고, 국군포로와 납북자 문제도 별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이는 국내 보수세력의 반대 논리를 강화시킴으로써 햇볕정책의 추진력을 반감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문제는 이렇듯 햇볕정책과 신동방정책을 단순 비교하여 햇볕정책을 평가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단순 비교평가는 마치 햇볕정책론자들이 서독 사례의 외형만을 편의적으로 인용하여 정책적 정당성을 찾으려했던 것과 유사한 오류를 범하는 일이 될 수 있다. 독일과 한반도는 분단구조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분단의 국내외적 환경과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비교나 정책적 시사점 모색은 매우 조심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미 역사가 되어버린 독일 사례는 우리에게 하나의 모델이 될 수는 있겠지만, 형식적인 모방의 대상은 결코 아니다. 독일사례는 독일분단과 통일의 국내외적 환경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전제로 비로소 창의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이명박 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북한 인권문제는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북한 인권개선에 대한 새 정부의 단호한 의지 표명은 이전의 정부가 엄두를 내지 못했던 새로운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북핵문제의 선해결과 연계된 일종의 대북 무시(benign neglect)정책이 추진되면서 남북 당국간 대화가 중단되고 대북 인도적 지원마저 북한이 거부하는 상황이 전개됨에 따라 북한 인권문제는 물론이고 인도적 사안을 실천할 수 있는 수단이 사라졌다.


북한 인권문제와 관련하여 햇볕정책과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상대의 강점이 자신의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 내부의 견해 차이가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실제로 북한 인권문제를 둘러싼 논란을 바라보면, 판단기준에 대한 합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당연한 귀결로서 구체적 정책의 내용과 범위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 점에서 동독인권 개선의 명분과 실리 양면을 추구했던 독일 사례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시사점을 제공한다. 특히 독일 사례는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판단기준을 확립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으며, 보다 구체적으로 대북 인권정책의 대상, 내용, 범위 등을 설정하는 데 있어서 생각거리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본 논문은 서독정부의 대동독 인권정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렇지만 정책은 사회의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독의 정책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독 인권문제에 대한 사회적 담론과 실천노력을 포괄적이나마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동독인권문제에 대한 서독사회의 담론과 실천


2.1. 서독사회의 담론구조 변화: 인권과 분단문제의 연계


서독의 인권의식은 태생적으로 반민족주의적 배경을 가졌다. 서독은 패전국으로서 나찌(Nazi)의 과오를 반성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독사회와 정부는 인권문제에 대해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치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나 사회적 맥락에서 인권이 특별하게 부각되었다. 2차세계대전후 제정된 서독 헌법(기본법) 제1조가 ‘인간존엄의 보호’를 규정한 인권조항이라는 사실은 인권에 관한 서독의 그러한 입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에 비해 분단문제는 인권의식과 상이한 출발점을 가졌다. 비록 패전이 원인이기도 했으나, 분단은 냉전의 결정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실제로 분단초기 서독사회는 동독지역의 인권에 대해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한 여력이 없기도 했지만, 동독의 인권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순수한 인권의식을 (탈나찌화를 통해 극복하고자 했던) 민족문제와 뒤섞음으로써 오염시킬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동서진영 대결구도가 안정적 질서로 자리잡는 가운데 서독사회에서는 정치적 맥락에서 동독인권문제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증대되었다.


분단초기 서독 국민들에게 동독은 기본적으로 민족보다는 이데올로기의 차원과 소련점령의 종식이라는 맥락에서 더욱 큰 주목의 대상이었다. 통일에 대한 열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냉전의 국제정세 속에서 통일보다 소련과 동독의 공산화 시도를 저지하는 것과 서독만이라도 주권을 찾는 것이 더욱 우선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소련과 동독의 통일공세를 묵살하고 미국 주도의 서유럽 진영에 철저하게 통합됨으로써 분단을 기정사실화했던 초대총리 아데나워(K. Adenauer)는 바로 그러한 배경에서 ‘서방정책’(Westpolitik)에 우선권을 두었다. 서독정부 수립 당시 동독을 포함하여 전쟁이전 독일영토였던 지역(동유럽지역)에서 쫓겨난 실향민이 서독 전인구의 약 1/5 정도를 차지1)했던 상황에서 반공주의의 확산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또한 1960년대 중반까지 서독사회는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민주공화국’(DDR)이라는 공식명칭보다 ‘소련점령지역’(SBZ)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에서 동독에 대한 서독의 인식태도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2차 세계대전이후 서독의 인권의식은 탈나찌화를 기반으로 서방정책 추진과정에서 확립되고 성장했다. 서방정책은 애초에 현실정치적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2) 서방정책의 일환으로서 아데나워는 국내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의 확립을 위해 애썼다. 자유민주주의는 비단 반공주의적 맥락에서 뿐만 아니라 나찌즘을 배태했던 독일의 전통적인 절대관료국가(Obrigkeitsstaat)적 정치문화를 청산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다. 1차 세계대전이후 수립된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실험되기도 했지만, 독일은 전통적 정치문화를 결국 극복하지 못하고 나찌정권의 탄생을 경험해야 했다. 따라서 2차 세계대전 직후 대다수 서독의 지식인들도 자유민주주의를 바탕으로 민주적 시민문화를 정착시키는 것을 (독일인의 손을 벗어나 있는) 통일문제보다 더욱 급한 과제로 여겼다.3) 이에 따라 서독에서는 초기부터 국가주도의 민주주의 정치교육이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1950년대 민주적 시민문화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서독사회는 동독지역의 인권문제를 당시 반공와 동의어로 간주되던 자유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경향을 띠었다. 4대 전승국의 점령시기부터 이어진 동독주민의 탈출, 1953년 6월 동독노동자 봉기, 1950년대 말 베를린 봉쇄 등 일련의 인권억압사태에 대해 서독은 궁극적인 해결책을 소련으로부터 동독을 돌려받는 것에서 찾았다. 실제로 1955년 서독의 나토(NATO) 가입과 재무장 허용을 통해 서독의 주권이 회복되자 아데나워 총리는 이전과 달리 통일문제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통일문제는 소련과 해결되어야 할 사안으로 간주한 서독정부는 소련과 국교를 정상화하는 한편, 서방의 지원을 받아 소련을 정치적·경제적으로 압박함으로써 소련의 양보를 얻어내는 소위 ‘강자의 정책’(Politik der Stärke)을 추진했다.4)


그러나 1961년 8월 베를린 장벽의 구축과 이에 대해 미국 및 서방 동맹국들이 보여준 온건한 대응은 ‘강자의 정책’이 비현실적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당시 핵전쟁의 위험성을 인식한 서방 동맹국들은 아데나워의 기대와 달리 유럽지역의 현상유지를 바탕으로 하는 긴장완화를 희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은 분단 및 통일에 대한 서독사회의 인식적 일대전환을 초래했다. 무엇보다 독일인들은 조속한 시일 내에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여태껏 정치계와 학계에 국한되었던 ‘독일정책’(분단과 통일에 관한 정책)에 대한 논의가 사회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당시 사회적 논의의 중심 주제는 1960년 철학자 야스퍼스(K. Jaspers)가 제기한 ‘선자유, 후통일’ 논제로 모아졌다. 야스퍼스는 당시 국내외적 상황에서 통일은 환상이며, 정치가들은 단지 선거를 위해 통일문제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일단 통일요구를 접어두고 먼저 서독에서부터 인권의 현실적 기반인 ‘진정한 자유’를 확립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민족자결권을 조용하고 단호하게 주장해 나감으로써 동독주민의 자유와 인권을 점진적으로 개선하는 토대로 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현실적 대안이라고 주장했다.5) 야스퍼스가 말하는 진정한 자유는 더 이상 반공과 동의어에 머물지 않고 서구 시민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를 포괄하는 것을 의미했다.


새로운 분단 인식은 당시 서독의 영향력 있는 언론인 및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확산되었으며, 마침내 분단 상황을 인내할 수 있는 여건 조성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는 여론이 서독사회에 형성되기 시작했다.6) 이와 더불어 아데나워의 정책노선과 다른 새로운 독일정책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즉 새로운 독일정책은 동독정권으로 하여금 동독내부의 자유화를 용인하도록 만드는 것을 당면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7) 당시 베를린 시장이었던 사민당(SPD)의 브란트(W. Brandt)가 자신의 참모였던 에곤 바(E. Bahr)를 시켜 발표했던 소위 ‘접근을 통한 변화’는 그러한 배경아래 지지기반을 확대해 나갔다. 1966년 서독의 양대 정당, 즉 보수의 기민련(CDU)과 진보의 사민당이 대연정을 구성하면서 실제로 독일정책의 변화가 모색되었고, 1969년 사민당의 집권을 계기로 동서독관계의 정상화를 위한 전기가 마련되었다.


브란트 정부는 대결보다 긴장완화, 그리고 통일보다 동독의 자유화에 초점을 맞춘 신동방정책 및 독일정책을 추진했으며,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과 1973년 동서독의 UN 동시가입을 통해 동독을 국가로 사실상 인정했다. 이에 대해 보수야당은 새로운 독일정책이 동독의 자유화에 결코 기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연방헌법재판소에 기본조약의 위헌소청을 제기했다. 동독정권의 인정은 곧 동독주민의 자유와 인권 억압을 용인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러한 우려는 브란트에게도 딜레마로 다가왔다. 그렇지만 동서독이 대화하지 않는 한, 서독이 실제로 동독주민들의 자유와 인권을 진작시킬 수 있는 수단을 전혀 가질 수 없는 현실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브란트는, 동서독 관계 정상화가 체제안정에 대한 동독정권의 자신감 확대는 물론이고 향후 내독관계의 제도적 발전을 통해 동독주민들의 자유와 인권 억압을 점진적으로 완화시킬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새로운 독일정책을 둘러싼 보수와 진보세력 간 갈등이 동독주민의 자유와 인권문제를 중심으로 모아지면서 동독 인권문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몇 가지 성과가 도출될 수 있었다. 첫째, 브란트 정부는 기본조약 협상과정에서 UN 헌장의 정신에 입각한 인권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결과적으로 기본조약 제2조에 ‘인권의 보호’를 명문화할 수 있었다. 또한 기본조약의 실천을 위한 후속 협상에서 서독정부는 동독주민들의 자유와 인권개선에 기여할 수 있는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둘째, 기본조약의 위헌소청에 대해 연방헌법재판소는 인권의 중요성을 재확인했다. 즉 재판소는 연방정부의 기본법에 입각한 정치적 행위에 대해 위헌여부를 판결할 수 없기 때문에 소청을 기각하지만, 기본조약의 해석과 실천은 철저하게 서독 기본법에 적합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특히 당시 동서독 국경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동독의 행태 ― 예컨대 장벽과 철조망 구축, 지뢰 및 중화기 설치, 탈출자에 대한 총격명령 ― 는 인권을 중시하는 기본법과 합치하지 않음을 지적했다.8) 셋째, 보수세력은 동독이 가입한 국제인권협정들을 근거로 대동독 인권개선 요구를 강하게 밀어붙일 수 있었다. 국제사회의 일원이 된 이상 동독정권은 국제여론에 민감했기 때문에 과거와 달리 인권개선 요구를 모른 척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1970년대 발전했던 내독관계의 속도와 비교하면 동독주민의 인권개선은 분명히 더디기만 했다. 이와 관련하여 서독사회의 보수와 진보세력 사이에는 갈등이 끊이지 않았고, 때때로 논쟁이 야기되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보수세력은 서독의 기본법을 잣대로 동독의 자유와 인권문제를 바라보았으며,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동독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사민당도 긴장완화를 위해 자유와 인권을 희생시킬 수 없다는 근본적인 문제의식에는 동의하지만, 서독의 기준으로 동독의 자유와 인권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했다. 대신에 인권문제에 대한 상호 대화를 지속함으로써 동독의 자유화와 인권개선의 길을 점진적으로 모색해야 한다는 생각을 유지했다.9) 이처럼 보수와 진보세력 사이에 인권문제에 대한 원론적 시각 차이는 크지 않았으며, 다만 방법론의 측면에서 입장 차이가 두드러졌다.


보수와 진보의 이견에도 불구하고 방법론적으로 동독 인권개선의 가시적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내독관계의 유지·확대 이외에 다른 대안은 없었다. 이는 1982년 보수정당이 다시 정권을 잡은 후에도 스스로 비판했던 브란트의 신동방정책 및 독일정책적 근간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입증된다. 결국 1970년대 동독 인권문제를 둘러싸고 보수와 진보세력 사이에 두드러졌던 방법론적 차이조차도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현저히 좁혀지게 되었다.


2.2. 서독 인권단체의 활동과 구조적 한계


동독 인권문제로 간주될 수 있는 구체적 사안들과 관련하여 이미 4대 전승국의 점령통치시기부터 서독 민간단체들은 주목하고 있었으며, 부분적으로 문제해결을 위한 실천노력이 있었다. 특히 동독지역주민의 탈출지원, 탈출자의 정착지원, 동독정권의 인권침해 및 정치적 박해에 대한 법률적 구조 모색 등의 활동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들 단체는 순수한 의미에서 인권단체라기보다 종교단체, 반공단체, 그리고 법조인의 자발적 모임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주로 1950년대 서베를린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1960년대에 들어와 동독탈출자나 이주자에 대한 정부차원의 제도가 점진적으로 완비되면서 이들의 역할은 현저히 줄어들게 되었다.


냉전시기 서독의 인권단체 활동은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았다. 특히 1960년대 후반에는 회원 수, 예산 등 규모면에서 미국을 능가했으며, 1970년대에 이르러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10) 서독의 대표적 인권단체로는 ‘독일인권연맹’(Deutsche Liga für Menschenrechte),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 독일지부’, ‘인도주의 연합’(Humanistische Union) 등을 들 수 있다. '국제사면위원회‘와 ’인도주의 연합‘은 1961년 창립되어 정치이념을 초월한 국제인권운동을 주도해오고 있다. 이와 달리 ’독일인권연맹‘은 패전직후부터 점령지역의 곳곳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인권단체였다. 사실 이 단체의 기원은 1차세계대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설립초기부터 연맹은 정치이념을 초월한 순수 인권문제를 다루었고 반나찌운동에 가장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나찌의 집권직후 지도부는 나찌의 탄압을 피해 국외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전후 독일인권연맹의 재건과정은 패전과 점령통치의 혼돈 속에서 혼선을 겪었다. 전쟁 종식에도 불구하고 기존 연맹의 지도부가 귀국을 거부하는 가운데 지역의 곳곳에서 연맹의 구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연맹 재건에 관심을 보이는 반면, 과거와 아무런 인연이 없었던 새로운 인물들이 연맹재건에 뛰어들면서 논쟁과 분열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논쟁과 분열은 크게 세 가지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11)


첫째 논쟁은 연맹의 활동 노선에 관한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전 원래 연맹의 노선은 특정 정파 지지나 민족주의를 지양하고 세계정부를 지향했으며, 단지 인권문제를 공론화함으로써 인권에 관한 여론을 조성하는 데 주력했던 데 반해, 재정이 소요되는 인도적 지원활동과는 거리를 두었다. 인도적 지원이나 자선사업은 재정지원자에 대해 연맹이 종속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종전직후 기존 연맹과 아무런 인연도 없으면서 가장 활발하게 재건운동을 주도했던 디에쯔(H. Dietz)란 인물은 민족주의 및 반공주의적 지향성과 자선활동을 통해 연맹의 세력을 넓히는 전략을 추진했다. 즉 동유럽으로부터 추방된 독일인의 귀환권 요구, 소련으로부터 독일의 전쟁포로 석방 촉구, 추방 독일인과 전쟁포로를 위한 자선사업을 실시했다. 심지어 재정확충을 위한 사업까지 추진했고, 청소년들의 펜팔을 통한 후원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디에쯔는 1947년경 나찌 동조자였다는 의혹과 연맹활동을 자신의 이익 추구의 방편으로 활용했다는 의심을 받으면서 지도적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둘째, 동독지역의 인권문제에 대한 연맹의 입장을 둘러싼 견해 차이였다. 연맹의 재건과정은 지역 곳곳의 지부가 먼저 결성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베를린에서는 소련군정의 거부로 지부결성의 어려움을 겪는 우여곡절 끝에 1948년 서베를린 지역에 지부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동서독 정부 수립이후 연맹은 서독을 중심으로 보편적 인권선언과 유엔선언을 기반으로 인권활동을 전개했으며, 우선적으로 과거 나찌의 범죄를 객관적으로 집대성하는 작업에 매진했다. 그렇지만 분단의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1949년 11월 전국 연맹재건 총회에서 동독지역의 인권상황에 대한 대응방식을 둘러싸고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다. 상당수의 회원들은 동독지역의 집단수용소, 강제노역 등을 나찌즘과 비교했으며, 동독지역의 정치범을 나찌의 정치적 희생자와 동일시했다. 이에 반해 국제주의자들은 서방진영에도 인권문제가 전혀 없지 않기 때문에 소련진영에 대한 비판이 쉽지 않았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물론 진정한 평화 및 인권운동은 서방에서 가능하다는 인식은 공유했다. 이들은 과거청산없이 반공도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문제는 소수의 독일인만이 그러한 자격을 갖추었을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결국 동독지역의 인권침해에 대한 대응 방식 논쟁은 새로운 회원의 확보를 위한 기회를 제공함과 동시에 연맹분열의 씨앗이 되었다.


셋째, 1961년 마침내 연맹을 분열에 이르게 했던 동독 탈출자 지원 여부를 둘러싼 갈등이다. 연맹은 1949년 동독탈출자 담당부서를 마련했다. 1953년 동독 노동자봉기를 전후하여 엄청난 수의 탈출자가 서베를린으로 몰려오는 상황에서 담당부서 책임자였던 괴쯔 부부(Afred & Annelisese Goetze)는 탈출자에 대한 인도적 지원 차원에서 숙소를 건립하고, 서베를린 시당국, 노조, 상공회의소 등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과거 나찌 친위대와 연관이 있고, 동독 정보국(Stasi)과 프랑스 첩보기관에 연루되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공금횡령의 의혹을 받았다. 이들은 연맹본부의 감사를 받았지만, 일부 연맹지도부의 비호아래 면죄부를 받았다. 그럼에도 의혹이 완전히 해소되지 못했고, 오히려 연맹지도부의 분열이 발생했다. 더욱이 1959년에는 연맹에 위장 침투하여 고위직에 올랐던 동독 정보국의 요원이 검거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연맹은 두 쪽으로 분열되었다. 뮌헨을 기반으로 하는 파벌은 독일연맹의 이름을 고수하며 반공노선과 민족노선을 고집했으나, 베를린을 기반으로 하는 국제파벌은 국제연맹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이데올로기적 당파성을 초월하는 활동을 전개했으며, 특히 나찌의 만행에 대한 반성과 탈나찌 교육에 집중했다. 독일연맹은 1960년대 국제적 긴장완화와 내독관계의 변화 분위기 속에서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 국제연맹도 그 세력이 확대되지는 않았으나 대중의 도덕적 지지를 받았다. 이후 국제연맹은 정치인, 지식인, 대학사회와 긴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하여 과거반성과 국제인권에 대한 주안점을 두었다.


독일 인권연맹이 분열되던 시점에 탄생한 국제사면위원회와 인도주의 연합은 정치이데올로기를 초월한 인권단체였다. 인도주의 연합은 냉전적 대결구도를 비난하고 다원주의와 열린사회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맥락에서 인도주의 연합은 동독의 인권침해에 대해 어떠한 비난도 하지 않았으며, 대신 국제적 차원의 인권문제에 집중했다. 이에 비해 국제사면위원회는 동독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심각한 인권침해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국제사면위원회가 처음 주목한 것은 동독의 정치범과 이들에 대한 고문이었으며, 1970년대에는 이에 더하여 서독이주 신청자와 공화국탈출자, 그리고 군복무거부자의 구금 및 억압과 같은 인권침해였다.


국제사면위원회의 활동은 통상 인권상황에 관한 적절하고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얻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를 토대로 인권침해 사안을 채택하고 문제해결을 위한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1960년대 동독의 폐쇄성 탓에 국제사면위원회는 동독의 인권상황에 대한 정보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따라서 이 시기 국제사면위원회가 채택했던 사안은 매우 미미했으며, 총 10여건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1970년대 동서독 관계가 정상화되고 동독이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면서 다양한 경로를 통해 동독내부의 정보가 외부로 유출되자 연 평균 100여건의 사안이 채택되었다. 런던의 국제사무국 통계에 따르면, 1989년 동독체제가 붕괴될 때까지 총 2,107건의 사안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런던 사무국의 통계가 때때로 불규칙적으로 집계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2000에서 3000건 정도가 실제로 채택되었을 것으로 추산된다.12)


이처럼 적지 않은 건수에도 불구하고 동독에 대한 국제사면위원회의 활동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먼저 정보 확보 과정에서부터 매우 조심스러웠다. 정치적 논란에 휩싸일 가능성이 있거나 사실입증이 어려운 사안일 경우 더욱 그러했다. 예를 들면, 서독의 잘쯔기터 중앙기록보관소13)의 자료는 거의 참고하지 않았으며, 특히 고문과 관련된 사안의 경우, 과장되거나 허위 보고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동서독 국경에서의 총격 사건에 대해서도 국제사면위원회는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철조망에는 이에 대한 경고가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으나, 궁극적으로 위원회의 정치적 독립성을 훼손할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동독의 감옥을 방문한다든지 정부대표를 방문하여 인권침해를 조사하고 항의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따라서 국제사면위원회는 동독지도부에 대해 외부로부터 수많은 편지와 항의서신으로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고 인권침해 상태를 문의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평균적으로 약 30여개 국가별 지부(section)가 동독의 인권침해를 관리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동독 정부에 배달된 항의편지는 매우 많았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이 과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는지를 평가하기는 어렵다. 다만 동독정권은 국제적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인권침해 공개를 두려워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의 영향력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이러한 한계 외에 더욱 근본적인 구조적 한계는 국제사면위원회의 ‘자국활동’(WOOC; Work on own country) 원칙에 기인한다. 즉 지부는 자국의 인권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 때문이다. 국제사면위원회는 동독과 서독을 하나의 나라로 간주했기 때문에 서독 지부는 동독의 정치범의 인권개선을 위해 효율적으로 행동하기 어려웠다. 서독 지부는 그 원칙을 매우 창의적으로 해석하려 했으나 어떠한 시도도 본부에 의해 좌절되었다. 이러한 탓에 동독인권문제에 대한 국제사면위원회의 활동은 동서독 어디에서도 널리 알려지기 어려웠다. 심지어 동독에서 국제사면위원회는 친동독정권 조직으로 오해받기도 했다.14) 어쨌든 국제사면위원회의 서독 지부는 동독 인권침해와 관련하여 여러 요구를 받았지만,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부여한 구조적 제약 탓에 적절한 대응을 하기란 애초부터 어려웠다.


이처럼 두 개의 대표적인 인권단체는 동독 인권상황을 결코 도외시 하지 않았지만,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데는 여러 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찌의 과오 청산을 비롯한 국제적 인권개선 노력은 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이 국제적 신뢰 확보는 물론이고 동독정권을 압박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하는 데 직·간접적으로 기여했다. 정치이념을 초월한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했던 이들 인권단체의 노선은 서독의 인권의식 수준을 고양시켰을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가 그것의 진정성을 인정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3. 동독 인권침해에 관한 서독의 판단기준과 내용


냉전시기 동서 진영의 체제대결 속에서 인권문제는 정치적 공방의 주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또한 양 진영의 인권개념 차이 탓에 1948년 유엔에서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66년에야 국제인권협약이 채택되고 1976년 비로소 발효될 수 있었다. 그것도 양 진영의 이해관계를 절충하여 두 개의 협약 ― 즉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협약’(ICESR: A규약)과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협약’(ICCPR: B규약) ― 이 공존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동서진영 간의 이러한 갈등구조는 동서독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동독과 같은 사회주의 체제는 개인의 자유 내지 인간의 존엄성 자체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전제조건인 사회적 기본권을 더욱 중시했다. 즉 공산당 일당독재, 사회적 소유권, 중앙계획 경제구조 등과 같은 사회주의적 정치, 경제, 사회질서를 수용할 때만이 개인의 자유나 인간존엄성이 보장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시민권 및 정치권을 무자비하게 억압했던 동독정권수립 초기를 거쳐 1960년대 체제 공고화 시기 헌법개정(1968년)을 통하여 좀 더 세련되게 다듬어졌다. 이에 따르면 사회주의 체제에 반대하거나 의문을 제기하는 집회, 결사, 의사표현은 언제든지 규제될 수 있으며, 인권침해로 간주되지 않았다. 동독정권은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은 1970년대 초반 이래로 다양한 법규정과 체제이념의 차이를 내세워 자국 인권실태에 대한 서방의 비난을 수세적으로 방어했다. 즉 국제인권협약에 허용된 유보조건들을 내세우거나, 내정불간섭 원칙을 들어 서독의 인권침해 비난을 회피하고자 했다.15) 또한 동독에서는 사회적 기본권이 실현되고 있으며, 현실적으로 부족한 개인적 권리 보장의 문제는 점차적으로 개선될 것이므로 완벽성에 기초한 서방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16) 나아가 서독의 인권문제 제기에 대해 역으로 서독의 실업문제를 겨냥한 ‘노동의 권리’, 또는 부의 불균등 분배에 따른 평등권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비판을 희석시키려고 했다.17)


그러나 동독은 정부수립 초기 바이마르 헌법 정신을 지향한다고 표방했으며, 실제로 동독헌법 제19조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에 대한 존중과 보장’을 규정했다. 더구나 1973년 서독보다 먼저 국제인권협약에 가입했으며, 1975년 ‘유럽안보 및 협력회의’(CSCE)의 창설을 의미하는 ‘헬싱키 최종의정서’에 서명함으로써 의정서의 ‘바구니 3’에 명기된 인권 및 거주·이전 등의 기본적 자유권을 보장해야 할 의무를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서방 및 서독이 강조하는 시민적 기본권을 전혀 무시할 수 없었다. 이러한 현실 아래 서독 정부와 사회는 단순히 개념차이만을 부각시킬 수 있는 논쟁을 최소화하는 한편, 동독정권에 대한 도덕적 압력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잣대보다는 주로 유엔의 국제인권협약이나 헬싱키 최종의정서와 같은 국제규범을 기준으로 동독의 인권문제를 제기했다.18) 이러한 입장에서 동독의 대표적 인권억압 사례를 기본권을 중심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3.1. 사상, 양심, 종교의 자유 제한


국제인권협약의 시민·정치권 협약(이하 B규약) 제18조에는 국가안보 및 공공질서 유지를 위한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종교와 세계관에 따라 의사표현 및 행동을 할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되어 있다. 동독정권은 항상 이를 준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교회에 대해서는 사회주의 국가의 주권, 헌법 및 질서를 존중할 것을 요구했다. 실제로 동독정권은 종교단체에 대한 직접적인 탄압을 자제했다. 그 대신 개인적인 신앙고백, 또는 교회의 보호아래 반체제활동을 벌이는 인사들을 대상으로 종교의 자유를 침해했다. 구체적 예로서 개신교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부모를 가진 자녀들은 고등교육기관에 진학하는 데 불이익을 당했으며, 또 신앙이 깊은 사람들은 교사로 임용되기 어려웠다.


동독지역은 개신교의 발생지로서 오랜 종교적 전통을 유지했기 때문에 동독정권은 교회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국제적 여론 때문에 교회를 박해하는 일은 어려웠다. 따라서 동독정권과 교회는 어느 정도 협조와 타협을 통해 상호 공존의 길을 모색하고자 했다. 제한적이나마 자율성을 확보한 교회는 평화운동과 환경보호운동 단체활동의 보호막 역할을 해주었다. 그러나 체제 저항적 인사들 개개인에 대한 동독정권의 인권침해를 모두 보호해 주는 것은 불가능했다.


3.2. 의사표현의 자유 제한


B규약 제19조 2항은 정보의 자유로운 취득과 전파, 그리고 의사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동독헌법도 의사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명시(제21조 1항)했다. 그러나 이는 헌법의 기본원칙, 즉 당의 영도적 역할, 개인과 국가이익의 일치, 동독과 소련의 동맹관계를 전제조건으로 하는 것으로서 실제로는 국제인권협약에 규정된 의사표현의 자유를 제한했다.


3.2.1. 형법 및 여타 법적 제재


1980년대 초 국제사면위원회의 동독 인권실태 보고에 따르면,19) 매년 약 200명씩 발생하는 정치범들 중 약 50%가량이 체제비판 발언으로 수감되었다. 의사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동독의 법적 조치들을 살펴보면, 동서독간 평화운동의 연대를 위한 집회개최에 대해서 형법의 ‘국가반역적 정보·자료 유출’ 또는 ‘불법적 외부인사 접촉’ 조항을, 반체제 지식인들의 체제비판에 대해서는 형법의 ‘간첩죄’를, 그리고 공산주의 이념의 새로운 분파를 형성하거나 다른 이념을 유포한 경우에는 ‘반국가적 선동죄’를 각각 적용했다.


3.2.2. 의사표현 자유의 방해 수단


의사표현의 자유 제한으로 인한 피해는 특히 작가들이 가장 직접적으로 받았다. 동독정권은 체제비판적인 작품에 대해서는 사전검열을 통해 작품의 출판을 금지했다. 그러나 국제여론의 압력 탓에 반체제 내지 저항 작가들에 대한 철저한 제재는 어려웠다. 특히 동독작가들의 작품이 서독에서 출판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3.3. 법규정 및 법적 보호 미비


B규약 제14조는 재판의 공개, 변호인의 선임, 그리고 변호업무에 대한 피고인의 알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 동기에 의한 구금과 형사 처벌이 빈번했던 동독에서는 그와 같은 권리가 준수되지 않은 사례가 많았다. 정치범의 경우, 심문과정에서는 피의자에 대한 변호인의 접견이 금지되거나 방해받았으며, 또 비밀경찰의 심문조서의 내용이 사실과 다를지라도 피의자는 서명을 강요당했다. 그리고 기소문이나 법적 근거들이 피고인에게 문서로 전달되지 않은 채, 단지 구두로 전달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재판이 시작되더라도 공개재판은 형식적이거나, 아니면 선발된 당간부 또는 비밀경찰 요원들만이 방청객으로 허용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3.4. 고문, 비인간적 가혹행위 및 형벌의 자행


B규약 제7조는 고문, 비인간적인 가혹행위 및 처벌을 무조건 금지하고 있다. 동독은 유엔인권위원회에 대한 보고서에서 가혹행위나 고문이 동독의 법적, 도덕적 기준에 합치되지 않는 것으로서 결코 행해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동독 행형시설 내의 육체적 고문 및 가혹행위는 일상적으로 발생하지는 않았으며, 국제적 기준에서 보더라도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가끔 가혹행위에 대한 사례가 보고되기도 했지만, 더 큰 문제는 행형시설이 너무나 열악하기 때문에 서방의 기준에서는 수감생활 자체가 인권침해의 소지를 다분히 안고 있다는 것이다. 고문이나 가혹행위는 주로 판결이전의 체포 및 구금단계에서 발생했다. 특히 정치범들은 비밀경찰에 의해 육체적, 정신적 가혹행위를 당했으며, 경우에 따라 가족과 친지들을 구속하겠다는 위협 속에서 허위자백을 강요당했다.


3.5. 동서독간 자유왕래 및 거주이전의 자유 제한


B규약 제12조는 국경을 넘는 거주이전과 자유왕래에 대한 권리를 명시하고 있다. 다만 국가안보, 공공질서 유지, 국민건강, 공공윤리를 위해서는 이 권리가 제한될 수 있다는 유보조건을 달고 있다. 동독은 1983년 유엔인권위원회에 제출한 정기보고서에서 거주이전의 자유권을 기본적으로 보장하고 있으며, 단지 유보조건들에 상응하여 예외적으로 그 권리를 제한하고 있을 따름이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동독정권이 자행했던 다음과 같은 일들은 B규약 제12조를 명백히 위반하는 것이었다.


3.5.1. 국경봉쇄 및 차단


동독정권은 동서독 국경선에 중화기와 지뢰를 설치해 놓고 서독으로 탈출하는 자들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국경수비대에 내려놓고 있었다.20) 동독에서는 탈출 행위가 불법으로 간주되었으며, 특히 1982년에 제정된 국경법을 근거로 총격사용행위는 국가안보 및 질서유지를 위해 불가피한 행위로 인정되었다. 1980년대 초반 재집권한 서독의 기민련 정부가 동독에 엄청난 차관을 제공하자 동독정권은 이에 대한 대가로 국경선에서 자동화기를 철수했지만, 총격사용은 지속되었다.


3.5.2. 정치적 형사처벌


‘공화국 탈출을 시도한 범죄자’들은 동독형법 213조에 의거하여 5년~8년간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이들의 숫자는 매년 수백 명에 이르렀으며, 대개 정치범으로 분류되었다. 또한 서독 이주를 신청하는 동독주민들도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탈출을 도운 자나 알고도 신고하지 않은 자 역시 ‘반국가적 인신매매죄,’ 혹은 ‘불고지죄’로 형사적 책임을 짊어졌다.


공식적 이주신청자들에 대한 박해는 대개 의사표현의 자유 제한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졌다. 이주신청 자체는 물론이고, 신청이 거부되었을 경우의 이의제기가 형사적 처벌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주를 위해 서방의 인권단체나 언론기관과 접촉하고 자신의 신상명세 등 문서를 전달한 경우, ‘국가반역적 정보 및 자료 유출죄’, ‘불법적인 외부인사 접촉죄’, 또는 심지어 ‘간첩죄’가 적용되었으며, 이주신청 기각으로 공공기관을 비난하거나 다른 공공기관에 이의를 제기한 경우에는 ‘반국가적 선동죄’와 ‘공공기관 비방 중상죄’ 등으로 처벌되었다.


3.5.3. 거주이전을 방해하는 기타 제재


이주신청자들은 형사처벌을 받지 않더라도 여러 방법으로 제재를 받았다. 즉 이주신청서 접수는 물론이고 아예 신청서 양식 교부도 거부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으며, 이주신청이 받아들여진 경우에도 국가기관의 회유와 협박을 받아야 했다. 협박으로서는 직장에서 해고 또는 자녀들의 상급학교 진학 거부 위협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이주신청자들은 일상적 생활의 통제를 받았다. 동베를린 지역의 체류 금지, 주거장소의 신고, 직장변경 및 특정인과의 교류 금지, 동구권을 포함한 모든 외국여행을 제한하는 특별증명서의 소지의무 등이다. 특별증명서 소지자는 1984년도 기준으로 약 6만 명에 달했다.


3.5.4. 가족상봉의 거부 또는 지연


서독으로 탈출한 자, 공식이주자들은 가족상봉을 위한 동독여행이 쉽지 않았다. 1972년과 1982년 두 차례에 걸쳐 동독당국은 각각 이전의 불법탈출자들의 동독국적을 말소하는 법을 제정·공포함으로써 이들의 동독 형사법적 책임을 면해 주었지만,21) 기본적으로 이들의 동독입국은 사실상 매우 어려웠다. 또한 동독의 정치범 내지 서독으로 추방된 자들은 자녀들의 양육권을 박탈당했으며, 이들 자녀들은 강제 입양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3.5.5. 서독방문 제한 및 인적 접촉 제한


동독정권은 동독주민의 서독방문을 가능한 억제시킨 것은 물론이고 상호 방문시 주민들간 접촉을 제한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예컨대 긴급한 가사사유로 서독친척을 방문하려는 주민들을 회유하여 여행을 포기토록 하든지, 또 다수의 동독주민들을 ‘비밀소지자’로 분류하여 여행을 금지시켰다. 심지어 교원들, 공공기관의 세탁 및 식당 종업원들도 비밀소지자로 분류되기도 했다. 그리고 동독주민들의 서독 단체방문시에는 비밀경찰 요원이 항상 동행·감시하여 동서독 주민들간의 자유로운 접촉을 방해했다.


3.5.6. 추방 및 재입국 거부


동독의 정치범들은 1960년대 초반부터 동서독간 석방거래(Freikauf)를 통해 서독으로 추방되었으며,22) 1970년대 중반부터는 동독의 평화운동 등 반체제인사들도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서독으로 강제이주 당했다. 동독기관은 반체제인사들에게 이주신청서를 내도록 강요했으며, 이를 거부할 경우 형사처벌의 위협을 가했다. 이처럼 추방당한 정치범과 반체제인사는 물론이고, 탈출자나 공식적 이주자들도 동독의 재방문은 원칙적으로 불허되었다. 이처럼 반체제에 대한 철저한 탄압과 추방으로 인해 동독에서는 다른 동유럽국가와 달리 조직적인 반체제활동은 거의 불가능했다. 동독에서 반체제 조직은 소련의 개혁정책이 시작된 이후인 1987년에 들어와서 비로소 탄생하게 된다.


4. 서독정부의 대동독 인권정책 사례


분단의 전 시기에 걸쳐 위에서 정리된 동독의 인권침해 사안들이 서독의 노력으로 온전히 개선될 수 있을 가능성은 전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분단초기 서독정부와 사회는 비난공세와 압박을 비롯하여 다각적인 방법으로 동독인권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했지만, 동서독 관계 정상화 이전에 그 성과는 매우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 긴장완화 덕분으로 동독 인권문제에 대한 서독의 개입 여지가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서독 개입의 영향력이나 성과에 대한 평가는 예나 지금이나 적지 않게 엇갈리고 있다.


브란트의 신동방정책 및 독일정책은 일방적 비난이나 압박보다는 정치적·경제적 수단을 활용하는 ‘조용한 교섭’을 통해 동독의 인권침해를 개선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물론 그 이면에 보수세력의 자유 및 인권개선 촉구와 국제인권회의에서 동독의 인권실태 비판들이 간접적이나마 동독정권에 대한 압력으로 작용했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방식은 동독정권으로 하여금 종종 인권 개선의 가시적 조치들을 취하도록 만들었다. 그 배경에는 동독정권의 실리 계산이 있었으며,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동독정권은 자신의 국제적 위상을 제고함으로써 국제사회의 명실상부한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둘째, 서독으로부터 경제적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독은 비단 내독교역 뿐만 아니라 비상업적 차원에서도 서독으로부터 경화를 획득할 수 있었다.23) 서독과의 우편 및 전화통화료, 통과도로 및 철로 사용료, 방문객의 비자 신청비, 서베를린의 폐기물 처리비, 국경지역의 환경보호 관련 비용 등은 고정된 비상업적인 이익의 대표적 예이다. 더욱이 동독은 서독의 요구에 선택적으로 응함으로써 대가성이 강한 서독의 차관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셋째, 서독 및 서방의 국가 인정을 통해 과거보다 훨씬 자신감을 가지고 내독관계에 응할 수 있었던 동독정권은 주민의 서독방문 통제를 완화함으로써 주민의 체제에 대한 불만을 부분적으로 해소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는 일종의 사회적 통풍효과를 노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냉전이 지속되는 한, 동독정권의 자유와 인권억압 문제 해결을 위해 서독정부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매우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내독관계가 본격적인 발전궤도에 올라섰던 1970년대 후반, 동독의 저명한 반체제 인사들은 내독관계 정상화이후에도 동독의 인권상황이 결코 개선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서독사회에 폭로하기도 했다.24) 이러한 한계를 인정하더라도 서독의 대동독 인권정책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독일통일의 과정에서 보듯이 중장기적으로, 또 누구도 의도하거나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동독체제에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발휘했고 변화를 촉진시켰기 때문이다. 이를 고려하여 서독정부가 실천했던 ‘조용한 교섭’의 방법과 수단, 그리고 그것의 성과들을 주요 개별사안을 중심으로 정리해볼 것이다.


4.1. 동독 정치범의 석방거래


1963년부터 동서독 당국은 동독 정치범의 석방거래를 비밀리에 추진했다.25)점령통치시기부터 서독지역의 민간단체들은 소련의 점령당국에 의해 전범 혹은 반사회주의적 행위로 재판을 받은 동독지역의 정치범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서독정부는 1955년 전독문제성(내독성의 전신으로서서 1969년 개칭) 산하에 ‘사법보호국’를 창설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벌였다. 이 부서는 동독 변호사와의 연계를 통해 동독 형사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재판과정은 물론이고 사면신청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박해를 받는 정치범의 법률적 구조에 주력했다. 이 과정에서 1962년 동독정권이 물질적 대가를 조건으로 정치범의 석방 용의를 서독 측에 타진해 옴에 따라 본격적인 동독정치범 석방거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서독 당국에서는 전독문제성의 장관과 몇몇 담당자만이 거래에 참여했으며, 동독 측에서는 검찰청과 비밀경찰의 연계 속에 검찰총장이었던 쉬트라이트(J. Streit)가 책임자였으나 직접 나서지 않고 대리인을 내세워 모든 협상이 진척되었다. 동‧서베를린에서 변호사자격을 동시에 인정받은 포겔(W. Vogel)26)이 그 대리인으로서 활약했으며, 그의 역할은 1989년 통일 때까지 지속되었다.


정치범 석방 거래는 정부의 공식차원이 아닌 변호사를 통한 거래였기 때문에 양독간의 정치적 관계에 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1963년 말 거래조건에 대한 어려운 협상 끝에 8명의 동독정치범이 베를린을 통해 서독으로 넘어왔으며, 첫 거래에서는 동독 측의 요구에 따라 34만 DM이 현금으로 지불되었다. 그러나 이후 계속되는 대규모의 정치범 석방에 대한 대가를 비밀리에 조성하여 전달하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양측은 새로운 지불방법을 모색했고, 대안으로서 서독 개신교의 동독 개신교단에 대한 원조 통로를 이용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교회사업으로 위장된 정치범 석방 거래는 1964년과 1965년에는 상당액의 현금과 동시에 일부 열대과실들로 지불되었으나, 이후 주로 석유를 비롯한 천연자원과 일부 서독 공산품이 대가로 제공되었다.27) 석방거래가 시작된 이래 통일이 실현되기까지 그러한 방식으로 총 3만 3천여 명의 정치범이 서독으로 넘어왔다. 한 가지 특기할 것은 정치범 석방거래는 동독의 위신을 고려하지 않으면 지속되기 어려웠던 것이었던 만큼 비밀리에 추진되었고, 서독언론도 뒤늦게나마 이에 대한 정보를 얻었으나, 비밀유지의 필요성에 공감했기 때문에 인도적 차원에서 통일될 때까지 기사화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4.2. 이산가족의 재결합


독일에서 이산가족의 문제는 1961년 베를린 장벽의 구축으로 크게 부각되었다. 베를린 장벽으로 인하여 가족을 남겨둔 채 서베를린 혹은 서독으로 일자리를 찾아왔던 많은 동독주민들이 가족과 생이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독정부는 이산가족의 재결합 차원에서 동독주민의 서독이주28)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쏟았다. 동독에 가족을 남겨둔 채 서독으로 넘어온 자들은 먼저 적십자사를 통하여 남은 가족의 서독이주를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동독당국은 노동능력 또는 전문지식을 갖춘 이들의 동독귀환을 촉구하며, 잔류가족의 이주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독 당국이 취한 대응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정부가 직접 나서지 않고 서베를린 시 당국이 동독정부와 협상을 추진하여 제한된 기간동안이나마 베를린 지역에 국한된 이산가족의 방문을 가능케 하는 ‘통과사증협정’(Passierscheinabkommen)을 체결했다. 1963년 12월 제1차 '통과사증협정'이후 1966년 3월까지 총 네 차례 체결된 통과사증협정으로 서베를린 주민은 정해진 기간 내 하루동안 공휴일을 이용한 동베를린 방문이 가능했고, 긴급한 가사문제의 경우에는 그 기간 중 언제라도 동베를린의 가족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기민련 정부의 정파 이익을 뛰어넘은 정치적 결단이다. 통과사증협정은 당시 서베를린 시장이었던 브란트의 주도 하에 이루어졌지만, 당시 기민련이 이끌던 서독정부는 인도적 사안의 필요성을 인식함으로써 동독에 대한 경제적 원조 가능성을 언급하는 등 서베를린 시 당국의 결정을 지원했다.29) 둘째, 서독정부가 나서서 정치범 석방 거래선을 활용하여 남겨진 가족, 특히 자녀들의 서독이주를 은밀하게 추진했다. 그 결과 1964년 어떠한 물질적 대가없이 2천여 명의 아이들이 서독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30) 이러한 동독정권의 호의는 당시 서독의 동독에 대한 경제적 혜택 보장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당시 동·서독간에는 장기융자와 관련한 협상이 진행 중이었고, 1965년 4월 서독은 처음으로 동독회사에 장기융자를 제공했다.


1965년부터는 정치범 석방거래로 인해 동독에 남겨진 가족의 서독이주도 협상의 대상이 되었다. 헤어진 부부는 물론이고, 약혼관계에 있는 자, 그리고 부모 중 한 명에게 남겨진 아이들의 추가이주에 대한 협상이 진전되면서 1965년부터 1970년까지 약 2,700여명이 서독으로 이주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 동독정권은 부부가 각각 동서독에 떨어져 살게 됨으로써 부모 중 어느 한편과 함께 동독에 남게 된 약 800~1,000명의 아이들에 대한 생계비의 지원을 서독 측에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 동서독간에 일반적 외환거래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실현되지 못하다가, 1969년 초 특별협상을 통해 약 5백만 DM에 이르는 생계비가 동독 측에 지불되었다. 이 과정에서 약 250명의 아이들이 추가로 이주할 수 있었다.31) 이러한 방식으로 통일에 이르기까지 약 25만 명의 이산가족이 재결합 할 수 있었다.


4.3. 동독주민의 거주이전 및 여행의 자유 확대


4.3.1. 탈출 동독주민에 대한 지원


1949년 동서독 정부의 수립이후에도 양 지역주민간에 상호방문은 가능했다. 점령시기 각 지역의 점령군 행정당국이 발부했던 ‘점령지역간 여행증명서’ 제도가 정부수립 이후에도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서독정부는 민족 동질성 유지를 위해 양 지역주민들의 상호방문을 적극 권장하고 활성화시키려 노력한 데 반해, 동독당국은 상호 통행을 다양한 형태로 통제했다. 통제의 주원인은 주민의 탈출에 있었다. 1950년대 동독주민의 탈출은 노동력 감소를 우려할 정도의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동독주민의 여행 통제는 1953년 6월 동독 노동자 봉기를 계기로 약간 완화되었다. 이에 따라 1954년에서 1957년까지 매년 약 250만 명의 동독주민이 서독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대개 노동력이 없는 연금수혜자들이었으며, 모든 동독주민에게 여행이 허용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동독주민의 탈출은 멈출지 않았고, 동독정권은 다시금 여행통제를 강화했다. 베를린 장벽 구축도 주민들의 탈출을 막기 위한 한 방편이었다.


동독주민의 탈출에 대한 서독의 입장은 크게 두 측면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첫째, 서독당국은 동독주민의 탈출을 돕는 서독주민의 행위를 위법으로 간주하지 않았다.32) 특히 베를린 장벽 설치이후에는 인도적 차원에서 서베를린 주민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동베를린 주민의 탈출을 무상으로 지원해왔다. 1970년대 초 통과교통협정의 체결 이후에도 동‧서독 통행로를 이용한 탈출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동독주민이 탈출지원 대가로 서독주민 혹은 단체들에게 돈을 지불하는 계약행위가 빈번히 발생했다. 동독당국은 이를 인신매매라고 비난하며, 협정을 악용하는 서독주민 혹은 단체의 활동중지를 서독정부에 요청했다. 서독정부는 기본법에 보장된 거주‧이전의 자유 보장의 관점에서 탈출지원을 불법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또한 연방대법원도 통과교통협정은 개인의 권리‧의무가 아닌 양독간 국가관계를 규정한 것이기 때문에 탈주지원이 법적 금지사항이 될 수 없다고 판결했다.


둘째, 서독정부는 국적법을 근거로 동독으로부터 탈출‧이주한 주민이 서독 시민권을 향유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함으로써 동독주민이 지속적으로 탈출과 이주를 결심하는 데 적지 않는 영향을 미쳤다. 동독주민의 탈출 및 이주 사유는 정치적 자유, 경제적 풍요, 일상생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 등 다양했지만, 만약 서독사회에 정착하여 안정된 삶을 향유할 수 있다는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탈출 및 이주에 대한 열망이 그리 높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1950년 제정된 서독의 ‘긴급수용법’은 그와 관련한 대표적인 법적 제도이다. 이 법은 애초 단순히 탈출자를 지원한다는 차원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양 독일간의 정치적 문제와 전후 서독 국내의 사회‧경제적 어려움을 감안하여 동독지역으로부터의 지나친 탈출자의 유입을 적절하게 규제하는 데 있었다. 물론 법규정의 적용 대상이 아닌 탈출자들이 동독으로 추방된 것은 아니다. 이들은 정부의 보호대신 사회구호단체들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베를린 장벽설치와 더불어 분단의 극복 가능성이 요원해지면서 서독정부는 1961년 긴급수용법을 개정하여 탈출자들의 불법체류를 더 이상 문제시하지 않았다. 또한 시행령의 개정을 통하여 수용절차도 선별적 허가의 방식에서 단순한 신고 및 기록 방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따라서 탈출‧이주자들은 서독 기본법이 정한 모든 시민권을 향유할 수 있었다.33)


4.3.2. 동독주민의 서독여행 확대


기본조약 체결이전 서독의 거주이전 및 여행자유화 요구에 대한 동독정권의 소극적이나마 긍정적인 대응 ― 연금수혜자의 친지방문 허용 및 공식적 이주허가, 통과사증협정 등 ― 이 주로 서독의 동독 불인정 정책을 극복하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면, 기본조약 체결이후의 대응은 보다 복잡한 원인을 갖는다. 동독정권은 가능한 동서독 주민들의 접촉을 억제하는 소위 ‘차단정책’에 역점을 두었지만, 국제적 비난을 모면하는 동시에 서독으로부터 포괄적인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과거보다 진전된 조치를 취했다.


1970년대 동서독간에 체결된 통행조약과 기본조약은 동독주민의 서독방문에 긍정적인 파급효과를 미쳤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서독방문은 대부분 연금수혜자들만이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방문기간이 대폭 확대됨으로써 이들은 1년에 총 30일 한도 내에서 한번 혹은 여러 번 서독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한가지 새로운 변화는 1972년부터 동독당국은 일반주민들에게도 긴급한 가사문제로 인한 서독방문을 허용했다는 것이다.34)


1980년대 초 국제적 신냉전으로 인해 동독주민의 서독방문은 감소하였다. 그러나 1983년에 들어오면서 신냉전 분위기가 호전되고, 또 서독정부의 대동독 차관이 약속되자 동독정권은 인적 교류에 대한 직‧간접적 규제를 완화했다. 1984년부터 일반 동독주민의 서독 친지방문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방문허용 일수도 연간 총 30일에서 60일로 연장되었다. 여기서 특기할 사항은, 대개 긴급한 가사사안이 주류를 이루기는 했지만, 1986년부터 연금수혜자가 아닌 동독주민의 서독방문이 이전에 비해 급격히 증가(약 5배)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87년 이후 그 수는 더욱 증가하여 매년 120만여 명에 이르렀으며, 이를 포함하여 1987년 서독을 방문한 동독주민의 총 수는 총 380여만 명에 달했다.35) 여기에는 비단 긴급한 가사사안 이외에도 청소년 교류의 확대, 도시간 자매결연, 문화협정체결 등이 적지 않게 기여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제완화에도 불구하고 연금수혜자를 제외한 동독주민의 서독방문은 1년에 1회로 제한되었다.


동독주민의 서독방문에 대한 동독당국의 규제완화는 내독관계의 진전이라는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동독주민의 서독이주 열망의 부산물이기도 하다. 서독이주를 희망하는 주민수가 증가하면서 1984년에는 약 3만5천명의 서독이주가 허가되었다. 그러나 이 숫자는 수십만 명에 달하는 신청자에 비하면 미미했으며, 허가를 받지 못한 자들 중 몇몇은 동독주재 미국대사관과 서독 상주대표부에 난입하는 사태도 발생했다. 이주허가가 대부분 연금수혜자들에게 발급되었던 전례와 달리 1984년 이주자들의 3/4은 18세에서 39세에 달하는 노동인구였으며, 그 중에서도 1/3은 고졸 이상의 학력을 가졌다.36) 이주신청자가 쇄도하자 다시금 1950년대의 인구 및 노동력 감소라는 망령에 사로잡히게 된 동독정권은 1987년까지 이주허가를 재차 규제하기 시작했다. 그 대신 동독주민의 서독방문 허가를 확대함으로써 이주를 억제하려는 정책을 채택했다. 그러나 동독정권이 개혁을 완고히 거부하는 한, 그러한 조치만으로 동독주민의 불만이 근본적으로 해소될 수는 없었다. 특히 소련 개혁정치의 여파가 1987년경부터 반체제세력의 조직화로 나타나는 가운데 동독정권의 반체제조직 탄압과 이주허가 통제는 1989년 여름 동독주민의 제3국을 경유한 대규모 서독탈출과 나아가 대규모 평화시위를 유발했고, 종국에는 동독체제의 붕괴와 독일통일로 이어졌다.


4.4. 동독정권의 인권침해에 대한 감시


동서독 정부의 분리수립 직후부터 서독에서는 동독정권의 인권침해 및 정치적 박해를 서방에 고발하고, 동시에 인권침해에 대한 법률적 구조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민간단체가 결성되었다. ‘자유 법조인들의 조사위원회’(UFJ)라고 명명된 이 단체는 서베를린을 중심으로 활동했다.37) 이들의 활동은 동독정권으로부터는 간첩행위로 비난을 받았으며, 또 동독을 실체로 인정하려는 좌파 정치인들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했다. 순수 민간차원에서 운영된 이 단체의 활동은 1961년 베를린 장벽 구축 직후 당국 차원의 기구 설립으로 더욱 보강될 수 있었다.


1961년 10월 개최된 서독 및 서베를린의 법률장관 회의에서 함부르크 시의 기민련 지역당수였던 불루멘펠트(E. Blumenfeld)가 제안하고 당시 서베를린 시장이었던 브란트가 동의함으로써 ‘동독정권의 인권침해에 관한 중앙 기록보관소(Zentrale Erfassungsstelle)’의 설치가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기록보관소는 동년 11월 동독과 가장 긴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니더작센 주의 주법무성의 관할 아래 잘쯔기터(Salzgitter)시에 설치되었다. 설치 초기 주요 업무는 국경선에서 발생하는 폭력행위에 국한되었으나, 점차 업무의 영역을 넓혔다. 1960년 말부터는 ① 거주이전의 자유 또는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한 채 정권의 목적 달성을 위해 명시적 내지 묵시적으로 이루어진 모든 형태의 살인 및 상해, ② 인간의 기본권과 합치하지 않는 형벌로서 정치적 이유에서 행해지는 폭력적 판결, ③ 수사 및 기소과정, 또는 수감 중에 자행된 인권침해 등의 부당행위로서 동독의 정치폭력적 체제특성을 여실히 드러낸 모든 사안, ④ 형법 제220조(살인), 제234조(납치), 제241조(정치적 혐의)에 적용되는 형사사건 등을 조사·기록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38)


기록보관소의 조사는 크게 6가지의 수단을 활용하여 이루어졌다. ① 연방국경수비대의 현황보고서, ② 동독 언론매체의 분석, ③ 피해자나 증인들의 개인적 증언 심사, ④ 주 및 연방정부 당국의 조회 요구와 정보의 분석·심사, ⑤
링크 #1 http://www.koreapeace.or.kr/modules/forum/forum_download.html?ff_no=296

[원재천] 북한 인권의 국제법적 접근



한반도평화연구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원재천] 북한 인권의 국제법적 접근 (10회포럼)





[ 제10회 한반도평화포럼 자료집]



"대북 인권정책과 인권문제의 세계적 추세"

일시 : 2008년 8월 29일(금) 13:00-18:30
장소 : 프레스센타 19층 기자회견장

*원문은 10회 포럼자료집에 있습니다.




북한 인권의 국제법적 접근






원재천 교수 (한동대학교 국제법률대학원)








1. 서론

얼마 전 영변 핵 냉각시설 폭파로 북한은 전 세계에 핵 문제의 해결에 대한 긍정적인 의지를 표현했다. 이 사건은 국제사회가 북한이 국제 경제사회의 틀 안으로 들어오려는 실질적인 노력을 했다고 인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핵과 더불어, 북한이 국제사회질서에 편입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은 북한의 인권문제이다.


다행히도, 북한은 4개의 중요한 국제인권협약에 가입되어 있는 나라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시민적정치적권리규약, 경제적사회적문화적권리규약, 여성차별철폐규약1) 그리고 어린이권리규약2) 등에 가입 되어있다. 북한은 또한 “전쟁 희생자 보호를 위한 1949년의 4개의 제네바조약”(제네바 협정)에 가입하고 “전쟁범죄 및 비인도적인 범죄에 대한 시효 불적용에 관한 조약”을 비준했다.


이는 북한이 북한 헌법과 더불어 국제인권규약들을 바탕으로 인권개선을 이룰 수 있는 제도적인 틀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은 국제인권조약의 당사국으로서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조약을 성실히 이행하여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


본 연구는 기존의 국제법 틀 안 에서 북한의 인권현실을 조명하고, 북한의 국제법상의 의무사항들을 분석하여, 현재 틀 안에서 개선 될 수 있는 부분을 살펴보며, 북한이 인권개선을 하지 않을 경우, 북한의 지도자들에게 어떤 책임이 추궁될 수 있는 가를 알아보려 한다.


2. 국제인권법과 정치범수용소


북한은 과거 구소련의 집단 수용소제도를 계승하여, 해방이후 1947년부터 정치범 수용소를 운영해 왔다. 정치범 수용소는 북한 인권유린의 대표적인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범이란 북한체제와 김일성, 김정일 독재체제에 상반되는 모든 행동이 포함되어있으며, 일단 혐의가 있으면,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 구속하여 수용소에 보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3) 수용소는 완전통제구역과 혁명화대상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완전통제구역은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가 없는 구역이고, 혁명화대상구역은 어느 정도의 교화가 진행된 후 석방이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수용인원은 2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4)






정치범 수용소의 가장 큰 문제는 적법절차에 위반되는 법집행과 범법자는 물론 가족까지 처벌하는 연좌제 그리고 고문과 가혹한 수용조건 등이 있다.


2.1. 적법절차


북한은 정치사상범에 대하여는 일반 사법기관의 재판을 거치지 않고, 국가안전보위부의 비공개의 행정심판 형태의 과정을 거친 후 수용소에 보낸다.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정확히 왜, 어떤 이유 때문에 처벌을 받고, 얼마나 형을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것이 공지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내용들은 북한이 가입되어있는 시민적정치적권리규약 9조를 위반하는 사항들이다. 시민적정치적권리규약 9조 1항은, 형사 처벌에서 모든 피고인은 적법절차를 거쳐서 처벌을 받을 것을 공지하고 있고, 2항은 피고인이 구인 될 때, 무슨 죄 때문에 구속되는지 고지를 해주어야 한다.5) 시민적정치적권리규약 14조는 피고인은 공개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고, 유죄 판결이 날 때 까지 무죄추정의 원칙6)이 적용되어야 하며 재판에서는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명시하고 있다.


2.2. 연좌제


일단 정치범으로 분류가 되면 전 재산이 몰수되며, 사전 통보 없이 전 직계 가족이 수용소로 이송 된다고 한다. 강철환씨의 경우 만 아홉 살에 전 가족과 함께 할아버지의 죄 때문에 수용소로 끌려가게 되었다.7) 이후 강씨는 10년 동안 아동기와 소년기를 정치범 수용소에서 보내게 된다. 2006년 8월 대한민국에 입국한 신동혁씨는 정치범수용소 완전통제구역에서 태어나서 23년 동안 죄수 생활을 했다.8) 본인의 죄가 없는 어린이들을 처벌하고 수용소에 구금하는 것은 북한형법9)과 시민적정치적규약의 위반이다. 이들이 국제법상 어린이라는 사실은 북한이 가입하고 있는 어린이권리규약의 기본정신은 물론, 이들의 기본 생존권을 명시한 6조10)들 포함, 19조의 모든 형태의 학대 방지, 37조의 가혹한 처벌 금지, 40조의 적법절차 존중 등 거의 모든 조항을 위반하고 있다.


2.3. 수용조건


정치범은 정상적인 배급과 의료 혜택의 권리 등이 박탈되며, 결혼과 출산도 금지되고, 외부와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수용자들은 강제노동을 하게 되며, 극도의 식량난으로 영양실조가 만연하고, 질병으로 죽어 간다고 한다.


2.4. 정치범수용소의 국제인권적인 문제점


정치범수용소에서 자행되는 일들은 이 시대에서 통용되는 형벌의 범위를 훨씬 넘는 것은 물론, 강제노동, 종교자유금지, 영아살해, 적법절차를 거치지 않은 처형 등 잔혹한 인권유린이 자행 되는 바, 의도적인 인권유린에 대한 해결책이 있어야 한다. 해결책으로는 북한당국에 대한 수용소 폐지와 개선에 대한 권고, 기존의 인권조약과 유엔 특별보고제도에 따른 제소 그리고 국제형법에 따른 책임자 처벌 등이 제고 될 수 있다.


3. 국제인권법과 북한 종교의 자유


북한은 정권의 출범부터 종교 활동과 기타 사상, 신념 체계를 탄압해왔다. 아마도 김일성의 집권에 대한 조직적인 반대를 종교 그룹 등이 하였고, 한국 전쟁 이후로는 기독교는 미국제국주의 세력 확장의 도구인 반국가적인 조직이고 외국 선교사는 미국의 스파이며, 기독교인들은 ‘반 혁명분자’로 낙인을 찍어 탄압하였다.


3.1. 종교자유의 실태


북한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의 위치는 독보적이며, 절대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김일성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뒤 북한정부는 가족성분과 정권에 대한 충성도를 기준으로 사회를 계층화 했다. 북한에 남은 종교인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51개 계급 성분 중 최하층으로 분류가 되어 교육, 고용과 배급 등 삶의 전반적인 부분에서 차별을 받았다. 김일성은 조직적으로 그리고 광범위하게 종교를 말살해 갔다11). 1970년대로 들어와서 천도교를 제외한 거의 모든 종교는 북한 땅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북한이 극심한 식량난에 처하면서, 많은 탈북자들이 생겼고, 북한을 왕래하는 이들을 통해 종교가 다시 북한 땅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북한은 유입되는 종교를 철저히 색출 말살하는 동시에 평양 등지에 몇 군데 공식적인 종교시설을 허가하면서 종교행위를 허용하는 이중 정책을 쓰고 있다. 이 몇 개의 종교시설을 제외하면 실질적인 종교의 자유는 없는 것으로 조사 됐다.


3.2. 북한법과 종교의 자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제68조는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제68조에는 “종교는 외국의 영향력을 끌어들이거나 국가나 사회질서를 해치는데 사용할 수 없다.”를 문구를 조항 안에 포함하고 있다. 결국 이 문구는 ‘종교적 신념의 자유’에 대한 조항을 자의적으로 침해할 수 있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종교인들은 종교를 믿었다는 것 때문에 처벌을 받는 것 보다, 외국 반국가 세력들과 내통했다는 일종의 간첩죄에 따라 처벌 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한 탈북자가 중국에서 남한의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인이 돼서 강제 송환되어 들어 왔다고 할 경우, 먼저 국경을 허락 없이 넘었다면, 비법국경출입죄 (북한형법 제233조)와 남한사람과 접촉한 죄 그리고 소위 북한의 안위를 위협하는 남한의 간첩(선교사)12)과 내통한 조국반역죄 (북한형법 62조)가 적용되고 있다.


북한형법 62조는 “공화국 공민이 조국을 배반하고 다른 나라로 도망쳤거나 투항, 변절하였거나 비밀을 넘겨준 조국반역행위를 한 경우에는 5년 이상의 로동교화형에 처한다. 정상이 특히 무거운 경우에는 무기로동교화형 또는 사형 및 재산몰수형에 처한다 라고 명시되어 있다13). 만약 이 사람이 성경을 소지하거나 전도를 한다면 정상이 무거운 조국반역죄로 다스려 지며, 종신형이나 처형을 당할 수 있는 것이 북한의 형법이다.


북한 헌법 67조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 조항도 종교의 자유에 대한 68조항과 마찬가지로, “국가는 계급로선을 견지하며, 인민민주주의 독재를 강화해야 한다.”는 조항에 의해 심각하게 손상되고 제한 받고 있다.


결국 종교를 믿고 전파하는 행위는 북한국내법에 의해 심각하게 제한되고 있고 이는 결국 북한이 가입되어있는 국제시민적정치적규약을 위반하는 사항이다.


3.3. 국제인권법과 북한 종교의 자유


북한은 국제인권의 가장 기본적인 세계인권선언 18조를14) 위반하고 있다. 세계인권선언 18조는 모든 사람이 사상, 양심 및 종교의 자유를 가질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을 천명하고 있다. 북한은 조약가입국으로서 1966년 시민적정치적권리협약 18조를15) 위반하고 있다. 조약 당사국으로서 북한은 종교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물론 그 권리를 표현할 수 있는 환경을 허락하여야 하며, 자녀들이 종교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여야 한다. 그리고 특정종교인이 종교인이기 때문에 교육, 의료, 고용권의 차별을 받는 것은 시민적정치적권리협약 25조16)가위반되는 행위이다. 또한 동 규약 26조에는 모든 사람들이 종교나 정치적인 신념 등 때문에 차별을 받지 못하게 되어 있다. 동 규약 27조는 조약 당사국은 종교인들이 종교행위를 공개적으로 하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의무를 지고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17)


북한 국제법에 따라 종교공동체를 인정하고 그러한 공동체가 합법적인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는 제도를 확립하여야 한다. 물론 북한은 국가 종교기관에서 허가받은 종교행위를 인정하고 있다고 주장한다.18) 그러나 위와 같이 명시된 국제법에 의거하여, 북한은 국가가 허가하는 종교 활동 이외의 사적 종교 활동을 인정하고, 인정받지 않고 있는 종교 조직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을 구금, 고문, 사형에 처하는 일을 중지하여야 한다.19) 그 외 개인이나 종교 단체가 외부로부터 종교서적이나 자료를 수입하는 것을 허락하여야 하며, 청소년과 성인들에게 종교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 할 수 있도록 허용하여야 한다.


4. 국제난민법과 탈북자 인권


소련이 붕괴되고 동부유럽이 민주화가 되어가면서 북한에 대한 많은 원조가 끊어졌다. 한편 북한은 1990년 초반부터, 자연재해와 낙후된 농업정책으로 극심한 식량난을 경험하게 된다. 결국 1995년 정도부터 북한에 극도의 기근이 닥치고 유엔 통계로 전 북한인구의 10%정도가 굶주려 죽게 되었다고 한다.20) 이때 수많은21) 북한주민들이 식량을 찾으러 중국 등 주변국가로 나가게 된다. 이중 과반 수 이상의 탈북자는 여성이라는 점이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아마도 가부장적인 북한사회가 여성들에게 식량난의 부담을 짊어지게 한 것 같다는 의견이 있다.


탈북자들은 중국내의 불법적인 신분 때문에 강제결혼이나 인신매매22)의 피해자가 되는 등 인권이 유린되며, 결국 강제로 북한에 송환되어 처벌되기도 한다.


유엔난민조약은 난민을 다음과 같이 정의 하고 있다. “인종, 종교, 국적, 어느 특정 사회그룹이나 정치적이 의견 때문에 받을 박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기 모국에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 라고 정의 하고 있다.23) 국제난민법의 가장 핵심적인 원칙은 이런 난민이나 난민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을 강제송환하면 안 된다는 조항이다.






4.1. 강제송환금지 (Non-refoulment)의 원칙


1951년 난민지위관련 협약 및 1967년 의정서 제 33조 에 의하면 체약국은 “난민을 어떠한 방법으로도 인종, 종교, 국적, 특정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추방하거나 송환하여서는 안 된다.”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


가장 탈북자가 많이 가는 행선지로는 중국인데, 중국은 탈북자들을 난민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고 많은 탈북자들을 색출하여 북한에 강제 송환시키고 있다. 중국은 탈북자들을 단순 불법 경제 이주자로 구별하고 있다. 실제로 만약 탈북자가 보다 나은 삶을 위한 경제적인 목적으로 이주를 했다고 하면 국제난민법상 난민의 지위를 획득 할 수 없다.24)


4.2. 사후 현장 난민 (refugee sur place)


과연 탈북자들이 국제법상 난민인가 하는 것에는 의견이 분분하다. 많은 경우 식량 때문에 북한을 나왔기 때문에 단순 경제이주자 보고 중국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고 보는 의견도 있으나 문제는 이들이 북한으로 강제송환 된 후 형사사건으로 북한에서 처벌을 받는다는 점에 있다. 실제로 북한은 여행의 자유가 없는 나라로 국가의 허락 없이 외국에 나갈 경우 단순탈북자는 2년까지 로동교화형25)에 처해지고, 중국에서 남한사람이나 선교사와 접촉이 있거나 기독교를 믿고 이를 전파하려 했다면 조국반역죄로26) 5년 이상 사형까지 받을 수 있다.


탈북자들은 중국내에서 인도주의적 도움을 조선족이나 남한 사람들에게 받게 되는 데 남한사람이나 교회를 통해 도움을 받는다는 순간 북한입장에서는 정치범이 되고 만다. 이 문제에 관해서 결국 유엔북한인권특별보고관인 비팃 몬타번 교수는 많은 탈북자들이 북한을 떠날 때는 어느 특정 박해 때문에 떠난 것은 아니지만, 돌아가면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과 실제 처벌을 받는 사례가 있으므로 이들을 사후 현장난민 (refugee sur place)으로 볼 수도 있다고 유엔인권위원회와 유엔총회 보고서27)에 명시 했다.28) 결국 탈북자가 경제이주자인가하는 문제는 개인적인 상황에 따라 구분이 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으므로, 인터뷰나 난민처리를 받지 않는 중국이 일방적으로 모든 탈북자들을 경제이주자라고 치부 할 수 없게 되었다.


4.3. 중국과 북한의 국제법상 의무와 난민 문제의 해결책


유엔북한인권보고관의 보고서와 유엔인권위원회의 북한 결의안, 유엔총회의 북한 결의안은 탈북자 문제를 명시 하고 있으며,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도 북한탈북자들을 “중요한 관심 대상”으로 명시하고 있으나, 중국이 협조를 하지 않는 이상, 탈북 난민을 돕기에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다.


중국에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 지역 사무실이 있고 난민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데, 주로 베트남 출신 등의 중국계 소수민족들을 중국에 정착 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유엔기구가 중국에 들어오면서 중국과 협약을 맺게 되는데, 중국은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과의 협약에서 중국내 난민이나 난민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게 무제한의 접근권을 주었다.


중국내 탈북자의 문제는 중국정부가 선한 의지를 가지고, 중국이 가입한 1951년 난민협약및 1967년 난민의정서를 이행하는데 부터 해결의 실마리가 풀릴 것 같다.


즉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과 협력하여 탈북자들에게 최소한의 임시 피난처를 제공하고, 탈북자들이 난민 신청을 할 경우, 이를 처리하며, 신분이 확정 될 때까지 모든 신청자를 유엔기구와 국제인도주의 단체들이 제한 없이 면담하고 인도주의적 지원을 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한편 북한은 송환된 자국 국민들을 형사처벌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북한에서의 박해의 두려움의 원인을 제거하게 되는 것이어서 중국이 주장하는 경제이주자라는 범주에 대부분의 탈북자가 들어가게 되므로 국제적인 인권 문제화가 안 될 수도 있다.


난민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보지 말고 인도적인 문제로 보며 당사자 국가들이 같이 해결책을 모색한다면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한 예로 중국이 탈북자들에게 임시 체류 증을 발부한다면, 법적 신분문제로 범죄의 피해를 보는 일을 최소화 할 수 있고 중국도 국제사회의 비판을 면할 수 있으며, 탈북자들은 북한의 경제사정이 개선될 경우 자연스럽게 다시 북한으로 돌아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5. 국제형법과 북한의 인권


인권 시민단체들은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의 해체를 주장하고 있다. 북한이 정치범 수용소에서 행하는 행위들은 제노사이드 (Genocide), 반인륜적 범죄 (Crime against Humanity)가 된다는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특히 2002년에는 로마 조약을 근거로 국제형사법원 (International Criminal Court)이 헤이그에 개원하게 되었는데, 국제형사법원은 각 국가에서 처벌이 힘든 사건 등을 처리하게 되므로, 현재의 국제법 제도 안에서도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나 종교 탄압의 책임자가 인권유린에 대한 법의 심판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형성 되었다고 사료된다.


국제형사법원이 설립되기 전에는 유엔헌장 7장에 의거하여, 상황에 따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특별법원을 만들어야 했다. 대표적으로 인도주의법과 인권유린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유엔유고전범법원 (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Former Yugoslavia: ICTY)29)과 르완다전범법원 (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Rwanda: ICTR)30)이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다. 또한 시나리온 특별법원과 캄보디아전범재판소등이 설치되어 운영되고 있다.


2002년 국제형사법원이 생기기 전까지는 특정 상황에 따라 유엔이 그때마다 법원을 설치하는 번거로움과 행정적인 제약이 있었으나, 국제형사법원이 설립된 후에는 따로 특별법원을 설립 할 필요가 없어졌다. 또한 유엔유고전범법원에서는 과거 유고의 국가원수였던 밀로셰비치를 처벌하는 등 한 국가의 최고 지도자와 군의 최고 지휘관에게 인권유린의 책임을 추궁하는 중요한 판례를 남기게 되었다.


북한의 경우, 북한의 인권유린상황을 위해 특별법원이 설치되려면 많은 절차와 국제사회의합의가 필요했지만, 국제형사법원이 생김으로써 법원의 관할에 북한이 들어온다면 특별한 유엔의 합의와 절차 없이도 북한인권문제를 다룰 수 가 있게 되었다는 점을 북한의 지도자들이 간과하면 안 되는 시대가 왔다.


5.1. 국제형사법원의 관할권 (Jurisdiction)


원칙적으로 대부분의 인권유린은 그 나라의 기본형법으로 처벌할 수 있다. 국제형사법원의 관할권은 보완적(complementarity rule) 관할권이다. 일반적으로 자국의 형법이 그 나라의 자도자의 인권유린에 대한 처벌을 하기는 어렵다. 결국 국제형사법원은 어려운 인권유린사건들을 처리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로마협약에 따른 법원규정을 보면, 국제형사법원은 제노사이드(genocide), 반인륜적인범죄(crime against humanity) 그리고 전쟁범죄(war crime)와 침략행위 (crime of aggression)에 대한 관할권을 가지고 있다.


한 개인이 재판에 회부 전 까지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성립되어야 된다.


첫째, 로마 협약 가입국이 되거나, 가입국이 아니라도 특정 사건에 대한 관할권을 인정한 국가에서 생긴 사건이나, 그 국가의 국적을 소지하고 있는 피고인이라야 한다. 이런 경우에 국제법원검찰은 사건을 수사하고 사법처리를 할 수 있다.


둘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유엔헌장 7장에 의거하여 검찰에 의뢰하는 사건이여야 한다. 이런 경우 피고인이 속한 나라나 사건이 발생한 나라가 로마협약가입국이 아니라도 사건을 기소하는데 아무 제약을 받지 않는다.31) 실례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수단의 다퍼 사태에 대한 조사를 국제형사법원 검찰에 의뢰를 했고 검찰은 초등 조사를 마치고, 위법사실이 어느 정도 합리적인 조건을 충족했다고 사료하여 법원에 정식 수사 허락을 신청해 놓은 상태이다. 놀랍게도, 거론되고 있는 피고인 중에는 현직 수단 대통령도 포함이 되어 있고 구인 영장이 발부되어있는 상태이다. 수단이 로마협약 인준국가가 아니라는 점은 북한도 어느 순간 국제형사법원의 관항에 들어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주시하여야 한다.


북한의 경우, 북한은 로마협약의 가입국이 아니고 앞으로도 자발적으로 관할권을 인정할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북한은 국제형사법원의 관할권밖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북한의 제반의 인권유린사건들을 국제형사법원 검찰에 의뢰할 경우 정치범수용소등 여러 인권유린의 책임자들이 사법처리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중국이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으로 북한 관계자들의 사법 처리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 하는 한 북한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국제형사법원에 의뢰하는 일은 없을 것이나,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하여, 세계 여론 앞에 결국 수단 문제를 양보한 실제 사례가 있는 만큼, 북한의 지도자들도 중국의 무조건적인 지지를 계속 기대 할 수 많은 없다.


5.2. 국제인권범죄의 구성요건


5.2.1. 제노사이드 (genocide)


“제노사이드”라는 표현은 세계 이차 대전 중에 유태인의 대량학살을 시작으로 쓰기 시작했다. 결국 1946년 유엔총회는 만장일치로 결의안 96(1)을 통해 제노사이드가 국제범죄라고 명시했다. 1948 제노사이드 방지와 제노사이드 범죄처벌에 관한 협약은 다음과 같이 범죄 구성요건을 명시했다.32)






어느 특정 민족(인종), 나라, 종교에 소속된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전부 또는 부분적으로 진멸하려고33) 다음과 같은 행위를 한 경우 제노사이드라고 한다.:


a) 그 특정 집단 사람들을 살인 하는 경우


b) 그 특정 집단 사람들에게 심각한 상해를 가하거나 정신적인 피해를 입히는 경우


c) 그 특정 집단 사람들 없애려고 열악한 삶의 환경을 조성하는 경우


d) 그 특정 집단 사람들이 아이를 낳는 것을 방지하는 경우


e) 그 특정 집단 사람들의 아이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제 전출시키는 경우






여기서 제노사이드는 살인뿐만 아니라 어느 특정 집단을 박멸하려는 의도적인 행위들을 포함하고 있다.34)


2.1.2)북한인권과 제노사이드


북한은 1989년에 제노사이드 협약에 가입했다. 이는 북한이 제노사이드를 저지르면 안 되고, 오히려 그런 사람을 처벌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북한의 인권유린 상황이 과연 제노사이드가 될까라는 의문에는 의견이 분분하다.


정치범 수용소에서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고, 환경의 어려움 때문에 석방되지 않을 경우 대부분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수용 되는 사람은 북한의 제도에서 탄압받는 사람들이고 사회적으로 낙인이 찍힌 사회 집단인 것은 분명하나 이들은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인 관계로 의도적으로 어느 특정집단을 멸하려한다는 구성조건을 충족시키는 대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북한은 기독교 (개신교와 가톨릭)에 속한 사람들을 북한사회에서 박멸하려 했고, 지금도 기독교를 믿으면 처벌을 하는 등 계속적인 박해로 북한사회에서 기독교를 뿌리 뽑으려 하고 있다고 하는데, 어느 특정종교인들을 의도적으로 멸하고자 행동하는 행위는 제노사이드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5.2.2. 반인륜적인 범죄


반인륜적인범죄는 어느 정부가 어느 특정 사람들을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게 공격하는 범죄를 말한다. 여기서 제노사이드와 다른 점은 “의도적으로 어느 특정 사람들을 진멸”하려는 구성요건이 없이 일반적인 어느 사람들의 인권을 조직적으로 유린한 경우를 말한다.


로마협약 7조는 다음과 같이 범죄구성요건을 명시했다.


반인륜적인 범죄는 공격주체가 일반 시민들을 상대로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공격을 하는 경우를 말하는데, 공격주체는 이런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여야 한다. 이때 행위란 다음과 같으며, 거의 모든 잔혹한 인권유린 행위를 포함하고 있다.35)


a) 살인


b) 박멸 (생존에 필요한 식량, 건강 환경이 제한되는 경우를 포함)


c) 강제노예


d) 강제이주나 추방


e) 구금 또는 행동의 자유를 규제함


f) 고문


g) 강간, 강제 매춘, 강제임신, 성적 착취


h) 어느 특정 정치, 인종, 민족(국적), 문화, 종교, 성에 속한 사람들을 박해하는 행위


등이 있다.






여기서 범죄처벌기간은 제한되지 않고 반인륜적인 범죄는 국제형사법원은 물론 유고전범법원 그리고 르완다 전범법원에서 다루었던 범죄로 국제관습법 (customary international law) 이라고 할 수 있다.


2.2.2) 북한인권과 반인륜적인 범죄


북한은 정치범 수용소를 오랫동안 운영해 왔다. 그리고 정치범들과 가족들을 수용해 왔다. 그 안에서 적법절차를 무시하며 구금되어 있는 사람들의 인권을 유린해 왔다. 이런 행위들은 로마협약아래 있는 반인륜적인 범죄의 구성요건을 거의 충족시키고 있다.


북한은 종교에 대한 적대적인 정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정책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고 있다. 특정 종교인들은 색출되어 처벌되며, 정치범 수용소에 보내지고 있다. 이런 일련의 행위 등은 반인륜적인 범죄가 될 수 있다.


일본인 납치문제도 국가가 의도적으로 일반인을 납치하여 이주시켜 강제로 일을 시키거나, 제반의 제약을 한 경우인데, 이는 일본 형법은 물론이고 반인륜적인 범죄로 볼 수 있고 납치를 지시하고 실행한 사람들은 그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5.3. 결어


범죄행위는 처벌 받아야 한다. 과연 북한의 행위가 북한의 특수사항으로 치부하기에는 국제형사법과 여러 판례들이 너무 많이 형성되었다. 북한은 정치범수용소나 종교탄압이 국제범죄행위라는 인식을 해야 한다. 그리고 국제인권협약을 이행하며 통치 행위를 해야 할 것이다. 국제사회와 한국은 이런 기본적인 국제법을 북한지도자에게 인식시키고, 북한의 학계와 주민에게도 교육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 법 이행에 대한 최소한의 부담과 책임을 느끼는 것은 북한이 선진사회를 이루고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는데 필요한 조건이다.


6. 국제인도법(전쟁법)의 적용과 납북자 및 미송환 국군포로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국군포로는 2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국군포로의 정의는 한국전쟁 포로송환 협상에서 귀환하지 못한 대상자들로 한다.36) 국군포로들은 전쟁 시기에 인민군으로 재편입되거나, 휴전이후 대부분 탄광, 농촌지역에 집단배치 되었다고 한다. 한편 최소 1만 2천명의 국군포로들이 소련에 이송되어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 이후 국군포로들은 공민증을 받고 북한사회로 배치가 되었으나 출신성분의 제약 때문에 본인과 자녀 등 가족들이 차별을 받고 살고 있다고 한다.


한편 6.25사변 납북자가족회가 발굴해낸, “6.25 사변 피납치자 명부”에 의하면 94,700명의 민간인이 전쟁 중 납북되었다고 한다. 이들 대부분의 송환은 고사하고, 생사조차 확인이 안되며 서신 같은 기본권이 인정되고 있지 않다. 휴전 이후 납북억류자는 총 3,795명에 이르고 있다.37)


6.1. 제네바 협정


북한, 중국, 소련, 남한, 미국 및 15국가들은 한반도에서 1950년에서 1953년 휴전이 있을 때까지 국제적인 전쟁 (international armed conflict)을 했다. 이차대전이후 국제사회는 과거 관습적으로 행해왔던 전쟁포로 보호와 민간인보호 등 중요한 전쟁의 원칙을 제네바 협정을 통해 명문화 시켰다. 북한과 남한을 포함한 모든 한국전의 참전국은 제네바 협정의 체결국으로 전쟁의 피해의 최소화와 민간인의 보호를 극대화 할 의무를 지게 되었다. 제네바 협정을 위반한 당사자들은 각국의 법정에서 전쟁범죄, 제노사이드, 반인륜적 범죄로 처벌을 받을 수 있으며, 각 국가의 처벌이 어려울 경우 국제형사법원에서 사법처리가 되게 되었다.38)


1949년 제네바 협정은 4개의 협약으로 되어 있다.


첫째 협약은 육상 전에서 부상을 당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둘째 협약은 해상 전에서 부상을 당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셋째 협약은 전쟁포로의 보호에 관한 협약이다.


넷째 협약은 민간인 보호에 관한 협약이다.39)






전쟁법의 가장 핵심은 전투원(combatant)와 비 전투원(none combatant)즉, 민간인 구분하는 것이다. 전쟁은 전투원들이 상대방의 전투원과 정당한 군사목적 (military target)을 무력화 시키는 제반의 행위로 정의 되어져 있다. 제네바 협정의 효력은 전쟁 시 발동되는데, 북한과 남한의 현재 전쟁법적인 구분은 휴전상태인 만큼 전쟁이 정식 평화조약이 될 때까지 두 나라는 제네바 협정을 이행할 의무가 있다.






6.2. 제네바 협정과 미송환 국군포로


제네바협정 전쟁포로에 대한 제3협약 71조에 의하면 전쟁포로는 가족들과 서신왕래가 허락되어 있다. 전쟁 중에 서신의 왕래로 서로 생사와 안부를 확인 할 수가 있어야 했는데, 지금까지 북한은 서신왕래를 허락하고 있지 않고 남한도 이에 대해 특별한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이는 명백한 71조40)의 위반이다.


가장 중요한 제네바 협정은 포로송환에 관한 대목이다. 제네바 협정 포로에 관한 협약 제 118조는 적대행위가 끝났을 경우 포로는 지체 없이 송환되어야 한다는 조항이다. 뿐만 아니라 제119조에 따르면, 참전국들은 흩어져 있고 찾기 어려운 전쟁포로를 위한 공동 위원회를 조직하여 이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명시 되어 있다.41)


6.3. 제네바 협정과 납북자 문제


전시에 민간인을 보호하는 것은 제네바 협정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민간인 보호를 위한 제노바 협약의 제3조를 보면 민간인은 인도적으로 존중을 받아야 하며, 민간인을 살해하거나, 민간인에게 고문 등 잔혹한 행위를 하면 안 되고, 민간인을 인질로 잡고 있으면 안 된다고 명시되어 있다.


북한의 경우 전쟁초기에 대규모의 한국 국민을 납북하였는데, 1950년 7월, 8월, 9월의 3개월 동안 전체 납북자의 88.8%를 납치 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연행 장소가 자택이나 자택근처에서 발생했고 이는 북한의 납북행위가 의도적이고 조직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민간인 납북은 명백한 제네바 협정의 위반이고 전쟁범죄에 속한다. 물론 북한은 이들 민간인을 전시에 이동시켜 보호하려했다는 이유를 댈 수 있지만, 휴전 이후에도 송환하지 않은 사실은 처음부터 민간인들을 납치하려 했다는 사실의 심증을 더욱더 굳게 한다.


휴전 후 북한은 제네바 협정 중 민간인 보호협약 제 132조에 의거하여 납북된 사람을 돌려보내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북한은 그 외 제 107조 의거하여 서신의 왕래, 제 116조에 의거한 친지의 방문, 특히 경조사시 친척의 방문을 전시에도 허락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데, 이런 의무는 당연이 휴전 후 까지 연결되고 있다.


6.4. 북한과 남한의 의무


북한은 제네바 협정의 체결국으로 제네바 협정을 이행하여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 한국전이 법적으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 협정을 계속적으로 위반하면 전쟁범죄가 되고 이는 국제형사법원의 관할에 속한다. 물론 포로 억류니 민간인의 억류를 어느 특정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기는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국제사법재판소 (Court of International Justice)에 제소하여 북한의 법적의무 사항을 각인 시킬 필요가 있지만 과연 북한이 관할권을 인정 할 지는 의문이다. 이 문제를 유엔안보리에서 국제형사법원에 다른 북한인권문제와 함께 의뢰한다면 북한의 책임자는 형사적 책임을 질 수 도 있지만, 이 또한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희박하다.


결국 유엔의 각종인권제도와 결의안 등을 통해 북한의 의무를 확인시키고, 국제적십사위원회와 남, 북한 적십자를 통해 인도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 같다. 최소한, 상시 서신교류와 생사확인 그리고 방문 등을 성사시키는 것은 남한과 북한이 공통적으로 이행해야 하는 제노바 협정의 규정 들이다.


7. 결론


북한이 국제사회의 선한 일원이 되기 위해서, 북한은 세계인권선언과 북한이 가입국으로 있는 국제인권규약들, 그리고 북한의 헌법을 이행하는 법치국가로서 탈바꿈하여야 한다.


북한의 인권문제는 더 이상 북한만의 문제가 아니다. 현 국제사회의 추세는 한 국가의 인권 유린사례를 더 이상 그 나라의 내부문제로만 보지 않는다. 실제로, 80년대 이후부터, 국제사회는 코소보 인권유린사태에 무력으로 인도주의적 개입했다. 그리고 인권유린의 책임을 묻기 위해 르완다 전범법정, 유고 전범법정, 캄보디아 전범법정 등 3곳의 특별법정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더불어 국제형사법원을 설립하여 국제사회가 특정 국가의 인권유린 상황을 좌시하지만 않는 방향으로 국제 정치 상황이 굳어지고 있다. 이런 일련의 국제형사법 제도의 확립은 북한 지도자의 국제정세 인식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사료된다.


한국은 아시아 공동체 협력에 북한의 인권문제가 걸림돌이 안 되게 한국과 주변국가가 더불어 노력해야 한다. 결국 아시아지역에도 유럽의 인권조약 같은 인권레짐의 확립이 필요하게 될 텐데, 한국은 그 인권 레짐의 중심국이 되어 아시아의 민주주의 확산과 인권증진을 위해 기여하여야 한다. 그러기위해서는 장기적으로는 동 아시아에도 유럽의 1975년 헬싱키 협정과 유럽안보협력기구 같은 한반도 안보와 동아시아 지역안보를 통한 안정을 가져오는 포괄적인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한편 한국은 단기적으로는 아시아 경제인권안보협력이라는 큰 틀을 가지고 지금의 당면 과제인 북한 핵 문제를 6자회담 안에서 잘 해결하는 동시에, 현재의 6자 회담을 확대하여 인권, 인간안보 (human security)등의 문제들도 논의 하고, 인도주의 지원의 모니터링, 탈북 난민보호문제, 이산가족 재결합, 국군포로와 납북자, 그리고 종교자유 등의 절박한 인권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주변국들과 협력하여 모색하여야 한다.

링크 #1 http://www.koreapeace.or.kr/modules/forum/forum_download.html?ff_no=296

08 [김수암] 인권정책의 세계적 추세와 이론적 흐름

[김수암] 인권정책의 세계적 추세와 이론적 흐름 (10회포럼)





[ 제10회 한반도평화포럼 자료집]



"대북 인권정책과 인권문제의 세계적 추세"

일시 : 2008년 8월 29일(금) 13:00-18:30
장소 : 프레스센타 19층 기자회견장

*원문은 10회 포럼자료집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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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정책의 세계적 추세와 이론적 흐름





김수암 박사(통일연구원 연구위원)






1. 서론


인권은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부여받아야 할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인권문제가 국제관계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은 20세기 중반 이후의 일이다. 국제연맹규약에는 인권에 관한 조항이 없었다. 나치에 의한 유태인 학살을 경험한 국제사회는 인권문제의 중요성을 인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유엔헌장에 인권 조항이 포함되면서 비로소 인권이 국제관계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후 국제사회는 인권보호를 위한 각종 협약들을 제정하고 유엔인권위원회 등 인권 보호 및 보장을 위한 인권레짐을 구축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여 오고 있다. 그렇지만 냉전 시기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인해 인권문제는 국제관계의 주요 의제로 다루어지지는 못하였다. 냉전이 종식되면서 인권은 국제관계의 핵심 의제로 부상하고 있다. 또한 일국의 외교정책에 인권이 주요 의제로 점차 통합되는 추세에 있다.


국제사회의 이러한 노력의 결과 어느 국가, 어느 조직, 어느 개인도 인권문제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인권이 보편적 가치라는 점을 부인하는 국가는 없다. 그렇지만 상위의 권위체가 없는 국가 중심의 국제관계에서 인권개념, 해석, 실천 기준 등에 대한 합의가 도출되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구체적으로 인권이 무엇이며 국제인권규약의 실천 차원에서 다양한 논쟁들이 전개되고 있다. 특히 특정 국가에서 인권이 유린될 경우 이를 시정하고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개입하는 것이 정당한 지에 대해 논의가 제기되고 있다. 탈냉전 이후 대량학살 등 인도에 반하는 범죄에 대해서는 개입이 가능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국제사회로부터 인권유린국가라고 비판받는 국가들은 주권, 내정불간섭 원칙, 문화상대주의 원칙 등 다양한 대응 논리로 반박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인권의 보편적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논쟁이 전개되고 있는 것은 여전히 국가가 핵심지위를 점하고 있는 국제관계의 속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북한도 예외는 아니다. 1990년대 이후 경제난으로 탈북행렬이 이어지고 이들로부터 심각한 인권실상이 알려지면서 북한인권문제는 국제사회의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다. 나아가 북한인권 실태를 개선하기 위해 국제사회는 다양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국제사회의 개선 요구에 대해 북한은 세계적 차원의 인권논쟁을 토대로 자신의 특수성을 반영하여 대응논리를 구사하고 있다. 따라서 따라서 대북 인권정책은 이러한 세계적인 논쟁과 추세, 이에 대한 북한의 인식을 바탕으로 추진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먼저 국제사회에서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국제인권레짐을 형성하고 합의를 도출해나가는 과정에서 전개되고 있는 논쟁과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적인 논쟁에 대한 북한당국의 이해와 인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이러한 논쟁에 결합되고 있는 북한의 특수성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인식 아래 이 글에서는 인권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는 세계적인 논쟁과 흐름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세계적인 논쟁과 흐름에 대한 북한의 입장과 북한의 특수한 논리를 분석하고자 한다.


2. 국가 중심의 국제관계와 인권


2.1. 주권, 내정불간섭 원칙과 인권


어느 국가도 인권의 보편적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현실 국제관계에서 인권문제를 둘러싸고 다양한 논쟁들이 전개되면서 갈등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인권의 보편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갈등이 발생하는 요인은 국제관계의 속성에서 찾을 수 있다. 국제관계는 국민국가를 합리적 행위자로 국가이익에 따라 행동한다는 국가 중심적 현실주의 시각이 여전히 우세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세계정부 또는 세계시민사회의 구상들에 논의가 제기되고 있지만 여전히 세계는 국민국가를 기본단위로 작동되고 있다. 또한 국가들의 사회(society of nations)라는 국제주의 모델이 제시되고 있지만 국경을 초월한 인권의 보편성에 대한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가가 여전히 핵심 행위자인 현실 국제관계에서 국가가 인권 실행의 주체라는 점에서 국제관계의 핵심작동 원리인 주권의 원칙과 지속적으로 긴장관계를 형성하여 오고 있다. 인권은 보편적 가치이기 때문에 특정 국가 내에서 자행되고 있는 인권 유린에 대해 타국이나 국제기구가 관여할 수 있는 지에 대해 논쟁이 전개되어 오고 있다.


보편적 가치인 인권의 구현과 주권원칙 사이의 논쟁은 유엔 헌장에 반영되고 있다. 유엔은 헌장 제1조 3항에서 “경제적·사회적·문화적 또는 인도적 성격의 국제문제를 해결하고 또한 인종·성별·언어 또는 종교에 따른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의 인권 및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을 촉진하고 장려함에 있어 국제적 협력을 달성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와 같이 유엔헌장에는 회원국들이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조항이 명문화되어 있다. 그렇지만 유엔 헌장에는 인권문제와 관련하여 유엔이 특정국가에 대한 실효성 있는 영향력 행사를 허용하는 어떠한 언급도 없다. 반면, 유엔 헌장에는 국제관계의 작동원리인 주권과 내정불간섭 원칙이 명문화되어 있다. 유엔헌장 제1장 제2조 7항에는 “현 헌장에 포함된 어떠한 것도 근본적으로 어떤 국가의 국내적 관할권 내에 있는 문제에 대해 유엔이 개입할 수 있는 권위를 부여하지 못한다”고 주권적 소관사항은 집단개입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천명하고 있다. 유엔 헌장의 조항은 인권유린행위가 발생하더라도 국제평화와 안보에 대한 위협이 되지 않는 한 유엔이 내부 국가/사회관계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회원국들이 확신하도록 만들고 있다. 또한 유엔헌장의 내정불간섭원칙은 인권을 국제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보편적 의무를 국내법 관할문제로 환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1) 이와 같이 유엔헌장을 비롯하여 인권관련 국제규범에서는 인권의 보호와 실행을 개별국가에게 맡기고 있다. 자국 내의 인권문제로 국제적 압력을 받는 국가들은 주권원칙을 방패막이로 인권문제는 타국 정부와 국제기구의 개입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개입은 국제평화와 질서를 해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주장한다.


유엔 헌장과 더불어 주권의 원칙과 내정불간섭의 원칙이 현실 국제관계에서 여전히 핵심 동력으로 작용하는 또 다른 요인은 인권분야 국제협력의 바탕이 되는 도덕적 상호의존의 성격 문제이다. 경제적 상호의존에 따른 국제협력은 개별 국가 내 일상생활에 비교적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물질적 상호의존 상태에서는 각자가 협력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게 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일방적인 힘을 가질 수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인권의 바탕이 되는 도덕적 상호의존은 타국 내 일반시민의 일상생활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멀리 떨어져 사는 외국인이 당하는 인권침해는 비교적 추상적이고 비실제적이다. 따라서 인권유린 국가가 내정불간섭의 원칙을 내세우더라도 도덕적 상호의존에 따른 국제협력이 어려운 국내·국제 정치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2)


여전히 주권 원칙이 국제관계를 움직이는 강력한 작동원리이지만 냉전 종식 이후 인권이 더 이상 국내문제가 아니며 보편적 가치로서 국제사회에 의하여 보호되어야 하며 인권보호가 주권에 우선한다는 논의들이 제기되고 있다. 코피아난 전 유엔사무총장은 국가주권보다 개인주권이 우선한다고 강조하고 인권침해에 대해 국경을 넘어 타국에 개입할 수 있다는 입장을 피력한 바 있다. 실제로 현실 국제관계의 다양한 변화로 인하여 보편적 가치인 인권의 보호를 위해 사실상 주권이 일정 정도 제약되고 있고 제약되어야 한다는 논의들이 전개되고 있다. 이에 따라 주권은 고정불변의 절대적 원칙이고 개념인가, 현실 국제관계에서 완벽한 주권행사가 가능한가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국제법의 주요 기능은 주권개념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약은 국가 사이에 서로의 의무를 수락하는 국가주권을 제약하는 계약이다. 결국 국제법이나 국제인권법은 주권에 대한 제약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국제인권법이 성안되어 올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인가? 주권국가들은 국제인권법의 실행 메커니즘이 구속력(강제력)을 갖지 않는다고 인식하고 있었고 이러한 인식에 따라 국제인권법의 출현이 정치적으로 가능하였던 것이다. 권위주의 국가조차도 국제인권규범에 어려움 없이 서명할 수 있었다.3)


인권유린 행위의 보호막으로 주권을 활용하는 국가의 행위를 본질적으로 제약하지는 못하지만 유엔은 국제 인권 모니터링 시스템을 발달시켜 오고 있다. 1967년 경제사회이사회의 제1235절차, 1970년 경제사회이사회의 1503절차 등은 커다란 한계가 있지만 인권 유린행위에 대해 개입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가입 당사국이 수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원칙적으로 취약한 제도이지만 국제인권협약에 따라 개인통보 메커니즘이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현재 7개 주요 국제인권협약은 전문가로 구성되는 규약위원회에 당사국들로 하여금 정기적으로 이행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한 특별절차에 따라 국가별·주제별 보고관들이 임명되어 인권 유린 행위에 대해 조사 및 보고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끝으로 2006년 유엔인권위원회를 대체하여 신설된 유엔인권이사회에서 모든 국가에 대하여 공정성과 보편성이 보장되는 방법으로 인권에 대한 이행과 책임을 검토하는 보편적 정례검토 제도(Universal Periodic Review)를 도입하였다. 실제로 유엔인권이사회 제5차 회의에서 채택된 결의 5/1(Institution-building of the United Nations Human Rights Council)에 따라 금년부터 4년 주기로 모든 유엔회원국을 대상으로 보편적 정례검토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이러한 보편적 정례검토제도는 전 유엔 회원국을 대상으로 의무적으로 시행한다는 점에서 높은 단계의 모니터링 제도라고 평가할 수 있다. 현 단계에서 이러한 메커니즘은 국가가 어떻게 국제인권의무를 실행하는 지를 모니터하는데 역할이 국한되어 있다. 비록 주권 자체를 본질적으로 넘어서고 있지는 못하지만 점차 주권에 대한 제약이 외형적이라기보다는 실질적인 양상으로 변화하기 시작하고 있다.


다음으로 국제관계 성격의 변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권에 대해 고정된 원칙으로 인식하고 주권의 역동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현실 국제정치에서 국경을 가로지르는 엄청난 교류의 증가로 재정, 경제, 정보, 인민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약화되고 있다. 특히 인터넷을 매개체로 한 사이버공간 등 정보통신혁명이 급격히 진행되면서 국가주권은 신성불가침의 강도가 점차 약해지고 있다. 주권을 핵심으로 하는 국가중심 시각은 세계화라는 국제현실의 변화 속에서 도전 받고 있다. 여전히 국가가 국제관계의 주연 행위자로서의 위치를 점하고 있지만 조연 역할을 하는 국제기구, NGO, 초국가기업 등 초국가적 행위자들의 역할이 증대되고 있다. 또한 정치·안보, 경제 중심의 국제관계 이슈에서 환경, 인권 등의 영역의 중요성이 증대되면서 복합적인 무대로 변화하고 있다. 이로 인해 전통 현실주의 국제정치이론에서 국가가 모든 것을 관장한다는 국가 중심 시각으로 설명되지 못하는 복합 행위자가 복합 이슈를 다루어야 하는 새로운 현상에 직면하고 있다.


특히 인권침해 국가의 행동의 자유를 제약하고자 하는 인권NGO가 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들 국제인권비정부기구들은 네트워크, 정보와 미디어를 주요 설득 수단으로 활용하여 억압적인 국가권력에 도전하는 초국가적 행위자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이와 같이 인권의 증진과 실행에 헌신하는 효과적인 초국가적 NGO의 출현으로 국가는 NGO에 의한 국제인권규범 실행 요구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다른 국가의 개입에 대해서는 주권과 내정불간섭의 원칙으로 반박할 수 있지만 NGO의 요구에 대해 국가 사이에 적용되는 주권원칙으로 대응하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이로 인해 외부세계의 책무성 요구에 대해 보호막으로 활용하던 주권의 기능이 어느 정도 제약당하기 시작하고 있다.4) 다만, 현 단계에서 초국가인권 NGO들의 인권 옹호활동은 주로 모니터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즉 주권 자체를 제약한다기보다 인권 유린 국가의 인권관행을 변화시키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2.2. 주권과 양자간 인권외교정책


1970년대 미국을 필두로 양자관계에서 인권을 외교의제로 채택하는 인권외교정책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국가 간 양자 관계에서 인권문제에 대한 개입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렇지만 냉전 시기에는 이념적 고려에 의해 우방국의 인권 유린에 대해서는 묵인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냉전시기 미국은 정치·군사적인 전략적 이해를 고려하여 동맹과 우호관계에 있는 권위주의 국가들의 인권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지 않았다. 레이건 대통령 시절 외교안보보좌관을 지낸 커크패트릭(Jeane Kirkpatrick)은 가장 심각한 인권 침해는 권위주의 독재정부가 아니라 전체주의적 공산주의에 의해 자행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5) 그런데 탈냉전 이후 미국과 유럽연합 국가들은 양자 관계에서 인권문제를 인권외교 정책의 일부분으로 통합하여 오고 있다. 사회주의로부터의 위협이 소멸된 이후 서방국가들이 적극적으로 인권문제를 제기하면서 국가 간 양자관계에서 근대 국제관계의 핵심원칙인 주권의 원칙과 현실적으로 충돌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그렇지만 인권 유린에 대해 무역제재 등을 통하여 개입하는 경우에도 정치·경제적 국가이익으로 인해 유보적인 태도로 보이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여전히 정치·경제적 국가이익을 우선시하는 현상이 지배적이지만 인권이 미국과 서방인권선진국의 외교정책으로 통합되는 현상이 강화되는 추세에 있다.


인권의 보편성과 주권의 원칙·내정불간섭의 원칙은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중국이 논쟁을 주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인권 논쟁에서 중국의 시각은 북한의 시각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소련 견제라는 공통의 전략적 이해가 소멸되면서 미국이 중국의 인권문제를 제기하게 되었고 중·미 양자관계에서 인권문제가 현안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미국의 인권문제 제기에 대해 중국은 확고하게 주권의 원칙에 입각하여 대응하고 있다. 인권은 본질적으로 국내관할에 속하는 사안이며, 국제법의 가장 중요한 원칙인 주권원칙에 종속될 뿐이라는 입장이다. 따라서 인권은 국가주권에 우선할 수 없다는 태도를 확고하게 견지하여 오고 있다. 또한 인권의 실천영역은 국내관할권에 속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인권에 국경이 없다’는 주장을 반박하면서 주권은 인권의 전제이며 인권은 주권에 의지하여 그 실현이 보장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권이 없다면 국제사회의 평등한 일원이 될 수 없으므로 근본적으로 인권을 향유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덩샤오핑은 “국가와 국가간의 관계는 자국의 전략적 국가이익을 고려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인식 아래 “국권이 인권에 비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6)


이와 같이 주권의 원칙에 입각하여 인권을 내정의 소관으로 규정하는 중국의 인식은 미국이 인권을 정치적으로 활용한다는 인식으로 연결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서방국가, 특히 미국이 화평연변(和平演變)의 전략목표를 실현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인권문제를 정치화하여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이 인권은 국경이 없다는 논리, 주권에 대한 인권우선론 등을 제기하면서 자국의 인권관과 의식구조를 다른 나라에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세계 패권 경쟁을 위한 새로운 전략으로 다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는 주요 구실로 인권을 활용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이 자신의 국가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인권문제를 국제관계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세계적으로 미국의 인권관념과 인권기준으로 양자관계와 국제문제를 처리하려는 세계화를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7)


중국은 미국이 중국 등 전 세계 국가들의 인권실태를 기술하는 연례각국인권보고서를 발간하는 것에 대응하여 Human Rights Record of the United States를 발표하여 오고 있다. 동 보고서에서 개인의 생명과 안전, 법집행·사법기관에 의한 인권침해, 정치적 권리 및 자유,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 인종차별, 여성 및 아동의 권리, 타국에서의 미국의 인권침해 등 7개 부문으로 대별하여 미국의 인권침해 실태를 기술하고 있다. 이를 통해 미국이 다른 국가의 인권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오히려 심각한 인권유린 국가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즉 미국의 도덕적 부당성을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8)


2.3. 인도주의적 개입과 주권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이후 국제사회는 집단학살, 고문, 대대적 인권유린을 금지하는 인권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그런데 탈냉전으로 다양한 형태의 분쟁이 발생하면서 세계 도처에서 고통을 당하는 시민들이 증가하게 되었다. 대량학살은 더 이상 주권의 특권적인 소관 사안이 아니라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그 결과 탈냉전 이후 인도주의적 개입(humanitarian intervention)이 국제정치의 주요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국가중심 시각에서 볼 때 현실 국제정치에서 인권과 국가주권이 대립되는 대표적인 이슈가 인도주의적 개입 문제이다.


국가 이외에 상위의 권위체가 부재한 상황에서 인도주의 개입은 다양한 논쟁을 야기하고 있다. 인도주의 개입의 대상이 되는 인권 유린을 누가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누가 개입의 정당성에 대한 권위를 부여할 것인지가 논란의 핵심대상이 되고 있다. 현 단계에서 인도주의적 개입의 정당성은 유엔이 부여한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되어 가고 있다. 유엔 헌장에서 주권의 원칙과 내정불간섭의 원칙을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예외규정을 두고 있다. 유엔헌장 제7장에서 안전보장이사회는 평화에 대한 위협, 평화의 파괴 또는 침략행위의 존재를 결정하고,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거나 이를 회복하기 위하여 개입을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규정을 두고 있다. 1990년대 집단학살 및 대량학살이라는 인도에 반하는 범죄가 발생하면서 유엔헌장 제7장의 강제개입조항을 확대 해석하여 군사개입이 정당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유엔헌장 7장에 따라 인도주의적 개입이 정당화되고 있지만 평화에 대한 위협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가 핵심쟁점으로 대두되고 있다. 현실적으로 대등한 국가가 병렬해 있는 국제정치의 속성을 감안할 때 모든 국가가 수용할 수 있는 인도주의적 개입을 정의한다는 것이 수월한 문제는 아니다. 여전히 사례별로 접근하고 있고 일반적 독트린을 정립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인도주의적 사안을 규정하는 문제를 놓고 국가 간에 견해가 대립될 수 있다는 것이 인도주의적 개입에 내포된 국제정치적 함의의 본질이다.


개입 동기의 이기적 성격과 선택적 개입의 문제가 논란으로 제기되고 있다. ‘인도주의’는 인류애라는 보편적 인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므로 인도주의적 개입은 인류애를 기준으로 사심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국가중심 시각이 우세한 현재의 국제관계에서 국가들은 자신의 국가이익이 무엇인지에 대한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행동할 것이므로 국익이 걸려 있다고 보이는 경우에만 개입할 것이다. 이로 인해 과연 인류애, 동정심 또는 동료의식에 의해 인도주의 개입이 결정되는 지에 대해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이로 인해 국가들이 이기적 이익 추구를 숨기는 구실로 인도주의적 동기를 내세울 수 있다. 인도주의 문제가 지정학적이고 전략적인 고려에 의해 좌우될 가능성이 있다. 또한 남용의 문제가 야기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국가들이 인도주의 개입의 원칙들을 선택적으로 적용하기 때문에 정책의 비일관성이 초래된다.9)


유엔이 개입의 정당성을 부여한다고 하더라도 유엔을 실질적으로 주도하는 강대국의 전략적 이해에 좌우될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현실적으로 강대국들이 전략적 이익이 없는 약소국의 국내문제에 개입하는데 주저할 경우 유엔이 인도주의적 개입을 주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결국 미국과 같은 강대국이 주도하지 않을 경우 유엔의 개입 실행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또한 인도적 문제로 유엔 안보리가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데는 구조적으로 한계가 있다. 냉전 종식 후 안보리의 이념적 색채는 사라지고 있으나 여전히 중국과 러시아는 서방이 영향력 확대의 장으로 유엔 안보리가 이용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유고의 사태에서 보듯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중국과 러시아가 반대하게 되자 미국과 나토동맹은 지역적 접근방식을 선택하였다.10)


개별적 혹은 집단적 인도주의 개입 권한이 어떤 원칙에 의해 지배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합의가 부재한 상황에서 강대국들이 자신의 문화에 근거를 둔 도덕적 가치를 국제사회의 약한 구성원들에게 강제로 이식하는 명분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현실 국제관계의 권력정치적 속성으로 인해 인도주의적 개입은 강자가 인도주의라는 가면을 쓰고 약자에게 간섭하는 수단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11)


국가 중심의 국제관계에서 자국민 보호의 의무가 있는 국가가 인도주의 개입 과정에서 자국민의 희생을 감수할 것인지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국가 중심 시각에 따를 경우 국가는 자신의 시민들의 안전에 대해 배타적으로 책임지게 되어 있다. 인도주의적 개입 시 자국민의 인적 피해가 발생할 경우 국내정치적 부담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국가 지도자들이 공통의 인류애를 위하여 무력을 수반하는 인도주의적 개입을 실행에 옮길 때 자국 병사가 위험에 빠지는 것을 감수할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개입하는 국가는 보호대상인 주민보다는 자국 병사의 보호에 우선 순위를 두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이로 인해 인도주의적 개입과정에서 자국민의 희생이 가시화 될 때 개입활동에 제약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인도주의적 개입은 성공적인가라는 기준에서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단기적 관점에서 성공여부는 대량학살의 종결, 전쟁지역에 묶인 민간인에 대한 인도적 구호품 전달 등을 통한 인간적 위기의 즉각적인 완화를 통해 평가할 수 있다. 장기적 관점에서 성공 여부는 개입이 분쟁해결과 작동 가능한 정치체제의 복원을 촉진함으로써 얼마나 인간적 위기의 근원적 해결을 해소하는 가에 초점을 둔다. 인도주의적 개입은 장기적인 임무를 요하는 것인데, 일시적 개입과 철수가 효과적이냐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인도주의적 개입이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너무 늦거나 일시적이고 피상적이어서 장기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12)


3. 인권의 보편성과 상대성 논쟁


3.1. 인권의 보편성과 문화상대주의


국제사회는 보편적 가치인 인권을 현실 국제정치에서 구현하기 위해 국제인권규범들을 만들어오고 있다. 유엔 세계인권선언 서문에는 모든 사람과 국가가 성취하여야 할 ‘공통기준’(common standard)으로서 세계인권선언을 선포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1993년 비엔나 선언과 행동강령에서 모든 인권은 ‘보편적’이며 불가분리이고, 상호의존적이며, 상호 연계되어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특히 첫 문단에서 모든 인권과 기본적 자유의 보편적 본질(universal nature)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와 같이 유엔 차원에서 인권은 선택적, 상대적이 아니라 보편적이라는 데 공감대가 형성되어 가고 있다.


그렇지만 상위의 권위체가 없는 국제관계에서 인권개념, 구속력 있는 실행시스템에 대해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논쟁이 전개되고 있다. 실천 차원에서 보편성과 상대성에 대한 논쟁이 끊임없이 전개되고 있다. 무엇이 인권을 상대적으로 만드는가? 무엇에 대해 상대적인가? 가장 강력한 상대성에 대한 주장은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문화상대주의는 주권의 원칙과 결합되어 국제적으로 승인된 인권에 대한 해석과 실천기준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갈등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문화상대주의는 다양한 문화 간 합의기반 확대를 통한 인권개념의 편차를 해소하려는 필요성을 제기한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반면, 인권침해를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악용되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문화상대주의는 인간의 가치는 상이한 문화 시각에 따라 매우 다르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상대주의를 인권의 증진, 보호, 해석과 적용에 적용하게 될 경우 서로 다른 문화권에 속한 민족들과 개인들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에 대해서도 다르게 이해한다는 주장으로 연결된다. 문화상대주의 시각에 따르면 인권은 보편적이라기보다 문화적으로 상대적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문화상대주의는 현대인권이론이 내포하고 있는 서구중심주의를 비판하고 문화와 가치의 다양성에 기반을 둔 인권의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이론이다.13) 이와 같이 인권의 보편성과 문화상대주의 논쟁은 인권은 원래 서구에서 태동된 개념이라는 서구 중심적 사고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세계인권선언의 채택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근본주의를 중심으로 인권은 서구문명의 산물일 뿐이며 지나친 개인주의라는 서구 문명적 특수성을 함유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다른 세계의 문명적 특수성을 배제하고 있는 서구식 인권개념은 보편적 개념이 아니라 특수한 개념이라는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인권을 국제법적으로 성문화해가는 과정에서도 인권에 대한 상대적 시각이 반영되고 있다. 각자가 처한 정치·경제·문화적 입장에 따라 인권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첫째, 제1세대 인권은 ‘서구적’ 접근법으로 시민적·정치적 권리와 사유재산권을 강조하는 시각이다. 둘째, 제2세대 인권은 ‘사회주의적 접근법’으로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를 강조하는 시각이다. 셋째, 제3세대 인권은 ‘개발도상국의 접근법’으로 자결권과 발전권을 강조하는 시각이다. 특히 권리의 주체라는 측면에서 제2, 3세대 인권은 집단 지향적 성향을 보이는 반면, 제1세대 인권은 개인주의 성향에 기반하고 있다.


그런데 세계인권선언의 법적 구속력을 뒷받침하기 위한 국제인권규약을 입안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인권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좁히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하나의 국제인권규약을 만들지 못한 채 각자의 시각을 반영하여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과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이라는 별도의 규약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인권의 보편적 가치를 국제인권규범으로 성안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시각 차이가 그대로 투영되면서 갈등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나아가 제3세대 인권은 1, 2세대 인권과 달리 인권으로 인정할 수 있는 지 여부에 대해 여전히 논쟁이 전개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국제인권규범으로 제정되고 있지는 못한 상황이다.


3.2. 아시아적 가치와 인권의 보편성


1990년대 들어 동아시아 일부 국가에서 제기되고 있는 ‘아시아적 가치’를 필두로 한 인권의 보편성에 대한 논쟁이 고조되었다. 아시아적 가치론에 입각한 보편성 비판은 고도의 경제성장에 대한 자신감에서 연유하고 있다. 또한 인권을 보는 데 있어서 서구 개인주의와는 다른 문화적 전통에 대한 자의식의 증가도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14)


싱가포르,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동아시아 권위주의국가들은 서구에서 주장하는 인권의 보편주의(universalism)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동아시아의 인권은 아시아 나름대로의 정치, 사회, 문화, 경제 문제를 포괄하는 상대주의(relativism) 입장에서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논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중국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중국 역시 인권침해를 이유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진영의 비판을 받게 되자 종래에는 인권을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라고 비판하던 태도에서 벗어나 점차 중국의 고유한 전통을 내세워 반격함으로써 아시아적 가치 논쟁에 합류하게 되었다.15)


아시아적 가치론은 “질서정연하고 건강한 사회를 창출함에 있어서 아시아의 유교문화적 공동체주의가 서구의 개인주의에 비해 훨씬 우월하다”는 주장을 지칭한다. 아시아 가치론자들은 개인주의에 뿌리박은 서구사회의 퇴화현상-극단적 개인주의·이기주의, 마약·폭력·범죄의 확산 등-과 공동체와 질서를 중시하는 아시아의 질서정연하고 건강한 사회를 대비하여 접근하고 있다. 이에 따라 동아시아 국가들이 가야 할 길은 무질서와 혼란과 이기주의를 조장하는 서구의 자유민주주의 모델이 아니라 유교의 기본가치인 조화를 바탕으로 하는 동아시아 고유의 모델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16)


이상에서 보듯이 아시아 가치론자들은 개인의 자유보다 질서와 조화를 강조한다. 자율적인 개인을 주체로 하는 서구식 인권과는 달리 아시아적 가치에서는 집단 내 조화를 중시하고 있다. 인간은 개인으로 존재하지만 집단의 성원으로서 개인성과 사회성은 인간다운 삶의 불가피한 양 측면이라는 주장이다. 인권을 개인의 권리로 한정하게 되면 사회성이 훼손되고 공동체의 연대와 협력을 통해 성취되는 다른 차원의 인권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성과 사회성을 조화시키는 방향으로 인권 개념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개인의 자유권 확대는 사회적 무질서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고 이러한 사회적 무질서가 인권유린의 근본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인식이다. 이에 따라 아시아 가치론자들은 서구사회의 높은 범죄율과 마약문제 등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인권유린이라고 규정하고 있다.17)


아시아적 가치론에 입각한 인권인식은 국가의 역할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정립되고 있다. 아시아적 가치론자에게 범죄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야말로 가장 중요한 인권의 하나이며 이러한 인권을 보호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와 정부의 존재이유이다. 바람직한 사회란 개인의 자유보다 질서와 안정 및 집단 내 조화를 중시하는 강력한 국가와 정부가 존재하는 사회이다. 강력한 경찰력과 군대, 사법제도 등은 기본적인 사회질서와 기강을 유지함으로써 국민들에게 안정된 삶을 제공하여 주고 범죄 등의 사회불안요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를 보호해 주는 기제로 인식되고 있다.18)


또한 아시아 가치론자들은 권리 보다는 의무를 중시하는 인권 인식을 표출하고 있다. 인권개념에서는 사회적 의무 수행 여부와 상관없이 일정한 권리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동아시아의 개인적·정치적 윤리학에서는 개인의 권리보다는 ‘의무’를 중시하고 있다. 개인의 권리보다는 공동체 내에서 지켜야 되는 가치와 덕목을 최우선으로 상정하고 추구한다. 유교사상에서는 절대적인 인권, 공동체보다 우선하는 권리, 사회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침해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개인영역이란 없다는 것이다. ‘서구’의 권리와 그러한 권리의 행사는 전통적인 의무 중심의 가치나 실천들과 갈등을 일으키는 파괴적인 개인주의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19)


아시아적 가치에서 인권을 규정하는 인식은 단순히 논쟁 차원을 넘어 유엔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표명되기도 하였다. 비엔나 국제 인권회의에 앞서 준비단계로 1993년 3월 29일부터 4월 2일 태국 방콕에서 개최된 유엔 아시아지역인권회의에서 49개 아시아 국가(북한도 참석)는 「방콕선언」(Bangkok Declaration on Human Rights)을 채택하였다. 이 선언에서 인권은 ‘본질적으로 보편적’이지만 국가와 지역적 특성, 다양한 문화적, 역사적, 종교적 배경의 맥락 속에서 고려되어야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문화상대주의적 시각이 강하게 표출되고 있다. 그리고 정치적 권리 이외에도 경제, 사회, 문화적 권리 역시 존중되어야 하며, 특히 발전권은 인권의 보편적이고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천명하였다.20)


아시아 가치론자들에 의한 인권 인식은 여러 가지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아시아 가치론자들에 의한 인권의 보편성에 대한 비판은 정치적 권위주의를 합리화하려는 명분에 불과하다는 반론이다. 서구에서는 자국민을 억압하고 민주화를 지연시키며 권위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아시아의 특수한 ‘문화전통’이라는 개념은 자국 내 시민들의 인권에 대한 반발을 호도하기 위해 내세우는 ‘선전용 구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아시아적 가치가 개인주의 대 공동체라는 구도 아래 질서와 안정을 중시하는 ‘합의 추구’(consensus seeking)를 지향한다고 하지만 ‘합의 강요’(consensus imposing)가 보다 적절하다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합의추구는 모든 시민이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의 견해를 표현할 수 있는 언론자유가 필수요소인데,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21)


인권이 ‘서구중심적’이라는 비판에 대하여 인권사상과 실천의 ‘서구적’ 기원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일 뿐이며, 인권이 유럽에서 최초로 출현한 것은 서구의 가치나 식견이 우월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곳에서 근대국가와 자본주의가 출현했기 때문이라는 반론이다. 국제적으로 승인된 인권의 적용가능성 혹은 적용 불가능성의 여부는 기원이 어딘가라는 문제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22)


전통의 결함, 근대적인 장점을 보지 못하는 문제가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전통적인 관습은 근대적인 조건에서도 여전히 타당하다는 가정에는 정치적 순박함이 깃들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회이동이나 인구변화가 거의 없었던 농촌 사회에서 발달한 관습들이 근대적인 도시생활에 얼마나 타당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특히 문화의 유동적 본성을 간과한다는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한 나라의 문화전통은 객관적 상황의 변화에 대한 주체적 대응의 요구에 따라 그 내용과 형식이 변화할 수 있다. 모든 문화 전통은 유사성과 차별성, 계속성과 가변성의 양면성을 공유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4. 개발(발전)과 인권


경제발전과 인권과의 상관성에 대한 다양한 논쟁들이 전개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사회주의권과 개발도상국들은 3세대 인권으로서 발전권이 핵심 인권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1986년 유엔은 발전권 선언을 채택하였다. 동 선언 제1조에서 발전권은 모든 인간과 인민이 경제·사회·문화·정치적 발전에 참여·기여·향유하도록 부여받은 양도할 수 없는 권리라고 규정하고 있다.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실 홈페이지에는 발전권은 국가 자원에 대한 완전한 주권, 자결, 발전에 대한 참여, 기회의 평등을 포함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1993년 비엔나 선언과 행동강령에서는 민주주의, 발전과 인권 존중, 기본적 자유는 상호 의존적이고 상호 강화하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이상에서 보듯이 유엔 차원에서 발전권 문제가 논의되고 있지만 여전히 발전권을 권리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아시아적 가치의 연장선상에서 발전과 인권의 상관성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아시아적 가치론자들은 시민적·정치적 권리 보장 이전에 경제성장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시아 개발독재국의 정치지도자들은 “국가의 경제성장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자유와 인권은 유보될 수 있다”는 태도를 보여 왔다. 아시아적 가치론에서는 급속한 경제발전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국제적으로 승인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사회집단 전체의 권리를 위해 유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대중은 동남아시아 정부들에 대해 ‘인권’이나 ‘민주주의’보다는 바람직한 정부(good government)를 원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바람직한 정부란 자국 국민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나가며 공동체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는 정부를 의미한다. 이를 위해 정치지도자들의 합의구축(consensus-building)이나 신뢰에 기반을 두는 바람직한 정부를 실현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23)


개발과 인권의 상관관계에 대한 아시아 가치론자들의 주장에 대해 다양한 비판들이 제기되고 있다. 경제발전을 위해 자유를 유보해야 한다는 아시아 가치론자들의 주장은 아시아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기보다는 문화적 권리와 인권 모두를 유린하는 보편적인 발전지상주의라는 비판이다. 자유의 흥정(the liberty trade-off)은 모든 형태의 개발독재의 버팀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인권탄압은 정치안정이나 경제발전이라는 명분 아래 권력과 정치적 이해에 기반을 둔 전략적 선택일 뿐이라고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24)


다음으로 권리를 보장하는 국가는 경제발전에 성공할 수 없는가, 부유해지고 강력해지기 위해 억압이 필요한 것인가라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먼저 시민적·정치적 권리들을 부정함으로써 치르게 될 경제적 대가도 고려해야 한다고 반박하고 있다. 발전을 위해 시민적·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를 희생하는 것은 ‘바람직한 정부’ 형태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체제가 오래 지속된 곳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부정부패의 만연, 정부의 책임성 결여, 정책 형성의 투명성 저조, 부의 집중화 및 빈부격차의 심화와 같은 부작용이 발견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이 시민적·정치적 권리를 부정함으로써 치르게 될 경제적 대가의 문제도 발생하며, 타락이나 독단적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인권 억압적 권위주의 정부가 경제성장에 성공한 어떤 내적 이유도 발견되지 않는다. 나아가 대부분의 아시아 나라들에서 권위주의가 경제적 실패로 귀결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25)


개발과 인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논의는 아시아 가치와 다른 차원에서 새롭게 전개되고 있다. 1990년대 들어 인권과 개발(development)은 상호강화(mutually reinforcing) 작용을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특히 빈곤 퇴치와 인권의 상관성에 주목하는 논의가 활성화되고 있다. 최근 빈곤 퇴치는 경제발전 전략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인권의 개선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주장들이 전개되고 있다. 즉, 인권적 관점에서 빈곤퇴치 문제에 접근하는 인식과 논의가 확산되고 있다. 빈곤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차별, 착취, 남용과 같은 불평등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빈곤은 단순히 경제적인 차원의 저소득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보건이나 교육에 대한 접근부족, 취약성, 소외(voicelessness)와 무기력 등을 모두 포함한다. 따라서 성장 중심적(growth-centered development) 개발로 빈곤을 퇴치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빈곤을 퇴치하기 위해서는 건강, 교육, 주거, 영양 등에 대한 빈민들의 접근성이 증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빈곤퇴치를 위한 발전 계획은 소득 빈곤만이 아닌 더 넓은 의미의 능력 박탈의 문제를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26)


특히 인권과 개발의 조화라는 시각에서 인권을 개발과정에 통합해야 한다는 ‘권리에 기반한 접근’(rights-based approach)이 새롭게 제시되고 있다. ‘권리에 기반한 접근’은 ‘인간개발’의 관점에서 국제인권체계의 규범, 원칙, 기준, 목표를 개발과정에 통합시키는 접근 방식이다. 국제기구들이 인권 개선을 위해 중요시하는 가치는 참여 및 비차별, 국가 및 지역단위 주인의식, 책무성과 투명성, 참여 및 권능강화(empowerment) 등이다. ‘권리에 기반한 접근’에 따르면 사업의 대상을 단순한 수혜자나 참여자의 개념으로 보지 않고 권리보유자(rights-holders)로 인식한다. 개발지원에 있어서 중요한 사안은 수원국가의 책무성(accountability)을 강화하는 것이다. 단순히 인권관행을 지원프로그램에 적용시킬 필요뿐만 아니라 개발지원과정에서 정책결정과정과 정책결과 향유에 있어서 동등한 참여, 책임, 투명성의 보장을 강조한다. 즉 개발지원과정에서 빈곤층과 소외계층들의 참여와 권능강화가 핵심 요소로 설정되어야 한다.27)


5. 인권 논쟁과 북한


보편적 가치인 인권에 대한 북한의 입장은 세계적 차원의 일반적 논쟁을 바탕으로 정립되고 있지만 북한의 특수성이 결부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북한의 경우 사회주의 일반원칙과 세계적 차원의 논쟁, 특히 아시아 가치 논쟁과 일맥상통하면서도 주체사상, 우리식 사회주의, 선군정치가 결합되는 특수한 입장으로 정립되고 있다.


‘공세’에 대한 자신의 ‘대응’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북한도 국제정치의 핵심원리로 작동하고 있는 주권의 원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북한은 인권문제가 주권의 소관사항이라는 입장을 확고하게 견지하여 오고 있다. 인권의 보편성을 보장하기 위해 국경을 넘어선 개입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인권보호’라는 명분 아래 약소국가의 내정에 간섭하려는 불순한 정치적 목적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권은 모든 국가와 민족의 ‘생명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주권이 없는 인권은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주권의 원칙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28)


세계적인 논쟁과 마찬가지로 북한도 주권의 원칙에 입각하여 논리를 전개하고 있지만 북한의 경우 체제 안보관점이 보다 강하게 투영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북한은 국제사회의 인권개선 요구에 대해 사회주의를 와해시키려는 ‘인권공세’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북한은 제국주의 세력이 인권을 명분으로 북한체제를 전복하고 정권을 교체하려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경직된 체제 안보 관점에서 인권은 곧 국권이라는 논리로 연결시키고 있다. 자주권을 상실당하면 인권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인권은 곧 국권’이라는 북한의 논리이다. 자주권의 상실 여부의 시각에서 국제사회의 인권문제 제기를 인식함으로써 체제안보의 관점에서 국권과 연결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나아가 최근 북한의 문헌에서는 선군정치의 연장선상에서 인권은 곧 국권이라는 논리를 설명하고 있다. 인권은 강력한 국력을 전제로 할 때 보장될 수 있기 때문에 강력한 총대를 기반으로 하는 선군정치가 인권을 보장하는 최상의 정치방식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선군은 인권옹호의 선결이며 믿음직한 담보”, “선군정치는 곧 인권옹호정치”라는 것이다. 선군정치 아래 수령과 우리식 사회주의를 결사 옹위할 때 인권이 보장된다는 특수논리로 발전되고 있다.29)


체제안보와 주권원칙에 따른 국권 수호의 논리로 인권개선 압력에 대응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은 인도적 개입(humanitarian intervention)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인도주의적 개입은 신성불가침인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비판하고 있다. 또한 일부 국가가 노골적인 정치적·전략적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수많은 군대를 동원함으로써 시민의 인권을 보호·증진하기보다는 오히려 무고한 시민을 살해하는 등 인권을 유린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도주의적 개입은 예외 없이 유엔헌장과 국제법의 위반이며, 인권 유린 행위라고 주장하고 있다.30)


북한도 유엔의 회원국이면서 4개 국제인권협약의 가입 당사자라는 점에서 국제적으로 승인된 국제인권규범을 수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북한은 문화상대주의 시각에 입각하여 문화·역사적 차이로 인해 모든 국가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인권기준은 없다는 논리에 따라 ‘우리 식 인권론’을 정립하여 국제사회의 인권개선요구에 대응하고 있다. “인민이 좋아하고 그들의 요구와 리익에 부합되는것”이 북한의 실정에 부합하는 ‘우리식 인권기준’이 된다는 논리이다. 인권이 보편적 가치라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인권기준’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국제사회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인권기준은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우리 식의 올바른 인권기준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가와 민족마다 역사, 풍습, 경제, 문화발전 수준과 생활방식 등 조건이 다른 상황에서 특정 국가와 집단의 ‘문명’과 ‘기준’이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서방국가들이 수용하도록 강요하는 인권기준은 북한의 실정에 맞지 않는 ‘서방식’ 인권기준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북한은 서방식 인권기준을 전 세계에 전파하려는 것은 자신들의 ‘가치관’과 생활방식이 지배하는 세계를 만들어 세계를 지배하려는 목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31) 즉 문화제국주의 관점에서 인권문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아시아적 가치 논쟁에서 개인의 권리보다 사회의 조화와 질서를 중시하고 있듯이 북한도 이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렇지만 보다 경직된 형태의 인권개념을 갖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공민의 권리와 의무는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집단주의 원칙에 기초한다”(제63조)는 사회주의헌법 규정에서 보듯이 극단적인 집단주의 원칙으로 강화되고 있다. 그리고 북한에서 집단주의 원칙은 사회주의 대가정론이라는 가부장적 사고와 결부된다는 점에서 아시아적 가치론, 사회주의 일반의 인식과 차별화되는 특징이 발견된다. 북한도 아시아적 가치론자와 같이 집단과 조화를 중시하지만 수령과 연결되는 독특한 인식으로 변질되고 있다.


그리고 아시아 가치론자들이 주장하듯이 북한도 집단주의적 사회가 와해될 때 실업, 빈궁, 범죄와 사회악의 희생이 되어 인권이 유린된다고 범죄와 사회악을 인권유린으로 인식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특히 중국의 미국인권기록과 마찬가지로 미국 내에서 발생하고 있는 범죄와 사회악을 인권의 범주에 넣고 미국의 인권상황을 비판하고 있다.32)


아시아적 가치론과 마찬가지로 북한은 권리보다 의무를 중시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북한당국은 개인보다 국가가 우위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시민들의 권리보다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개인의 권리보다 국가에 대한 의무가 우선하며 모든 권리는 이에 상응하는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개인의 권리보다 국가에 대한 의무를 강조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북한은 사회주의권, 다른 개발도상국과 마찬가지로 제1세대 인권인 자유권 대신 제3세대 인권인 자결권과 발전권을 강조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33)


6. 결론


인권은 인간이라는 그 자체만으로 향유하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로서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냉전 종식 이후 이념적 고려가 사라지면서 인권이 국제관계의 주요 의제로 부상하고 있다. 지구 상에서 인권의 보편적 가치를 공개적으로 부정하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세계 도처에서 인권이 유린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대부분의 인권유린 국가들은 국제사회의 인권 개선 요구에 대해 여전히 주권의 원칙, 내정불간섭의 원칙을 보호막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런데 점차 보편적 가치인 인권의 구현을 위해 국경을 넘어 인권 유린행위에 대한 개입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는 추세에 있다. 또한 미국 등 서방국가들은 외교정책에 인권의제를 통합시키는 방향으로 인권정책을 추진해나가고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병렬적인 국민국가가 핵심행위자로서 상위의 권위체가 없는 국제관계에서 인권유린국가에 대해 효과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인권레짐을 형성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다. 양자관계에서 인권을 외교정책에 통합하는 추세가 강화되고 있지만 여전히 국가들은 도덕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자신들의 정치·경제적 이익을 희생하는 데 주저하고 있다. 이러한 제약 요인에도 불구하고 주권의 약화 현상이 확대되고 있다. 주권은 고정불변의 개념이 아니며, 주권국가들은 국제관계 현실의 변화로 인해 주권의 행사가 제약당하고 있다. 국가 이외에 국제비정부인권기구 등 초국가적 행위자들이 인권 영역에서 중요한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국제비정부인권기구의 활동에 대해 주권의 원칙과 문화상대주의를 적용하여 대응하기는 어렵다. 또한 모니터링 중심으로 제도가 형성되고 있지만 유엔은 회원국가의 인권이행 상황을 점검하는 제도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따라서 현실 국제관계에서 주권의 원칙과 인권의 구현을 위한 개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인권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인권의 구현을 위한 다양한 제도를 형성하여 가고 있고 어느 정도 국가주권이 약화되는 현실 국제관계의 변화를 고려할 때 국가주의 관점에서 인권문제를 바라보는 것은 현실의 적절한 평가라고 할 수 없다. 도널리가 구분하듯이 인권분야에서 약한 국제주의 모델이 적용될 수 있을 정도로 현상의 변화가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문화 상대주의 관점에서 인권의 서구 중심적 속성을 비판하는 논의가 제기되고 있다. 문화상대주의는 다양한 문화 간 합의기반 확대를 통한 인권개념의 편차를 해소하려는 필요성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그렇지만 인권침해를 호도하는 명분으로 이러한 상대성 논리가 악용되는 부정적 측면은 지양되어 나가야 할 것이다. 도덕적 상대주의는 정도의 문제라는 점에서 보편성 대 문화상대주의라는 극단적인 이분법은 지양되어야 한다. 인권의 보편성을 문화적 동질화와 동일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문화적으로 인권개념에 대해 상이한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라는 점에서 인권개념, 해석, 실천방도의 편차를 좁히려는 국제사회의 노력이 확대되어야 한다.


주권의 원칙과 인권가치의 구현, 인권의 보편성 대 상대성이라는 세계적인 논쟁의 관점에서 평가할 때 북한은 이분법적 시각에서 보편성 문제에 접근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특히 주권의 원칙은 우리식 사회주의, 수령 옹위라는 극단적인 체제방어 논리, 국권 수호의 논리로 변질됨으로써 인권적 관점에서 인권보호를 위한 내적 관행을 만들어나갈 여지는 사라지고 있다. 문화상대주의 시각의 입장에서 보편성을 비판하고 있지만 인권을 유린하는 체제를 은폐하는 명분으로 악용되는 측면이 강하다. 우리식과 서방식이라는 극단적인 이분법적 시각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인권개념의 편차를 극복할 수 있는 대화의 여지 또한 사라지고 있다. 따라서 북한은 인권영역에서 점차 국제주의 모델 요소가 확대되고 있는 세계적 흐름에 역행해서는 국제사회의 정당한 일원으로 동참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