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26

청일 전쟁 - 위키백과, 日清戦争 닛신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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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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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 전쟁

황해 해전 판화. 고레치카 작
날짜1894년 7월 25일 ~ 1895년 4월 17일
장소
결과

일본 제국의 승리

교전국
 청나라 일본 제국
지휘관
청나라 광서제
청나라 서태후
청나라 이홍장
청나라 정여창
청나라 등세창
청나라 유곤일
청나라 마건충
청나라 증국번
청나라 원세개
일본 제국 메이지 천황
일본 제국 야마가타 아리토모
일본 제국 이토 스케유키
일본 제국 노기 마레스케
일본 제국 이토 히로부미
일본 제국 고다마 겐타로
일본 제국 오야마 이와오
일본 제국 가와카미 소로쿠
일본 제국 오카모토 류노스케
병력
231,000명240,616명
피해 규모
사망자 50,000명사망자 12,000명

청일 전쟁(淸日戰爭)은 1894년 7월 24일부터 1895년 4월 17일까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둘러싸고 청나라일본 제국이 벌인 전쟁이다.[2] 1894년 7월 25일 일본 제국이 선전포고 없이 풍도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 해군을 기습 공격하면서 청일 전쟁이 발발했고, 이후 전쟁은 내내 일본 제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1895년 3월 26일 펑후 제도 작전을 끝으로 청일 전쟁의 모든 전투는 종료되었고, 청나라와 일본 제국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해 전쟁을 끝냈다.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의 패배는 1861년부터 청나라가 추진했던 양무운동이 완전히 실패했음을 의미했으며,[3] 일본 제국의 입장에서는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지속적으로 추진했던 근대화와 서구화의 결실을 맺었다고 볼 수 있었다.[4] 아울러 이 전쟁으로 인해 청나라는 조선과 류큐 왕국에 대한 종주권을 완전히 잃었으며, 이로 인해 동아시아의 열강이 기존의 청나라에서 일본으로 완전히 바뀌게 되었고[5] 일본 제국의 승리로 서구 열강은 일본을 자신들과 동등한 위치로 여기게 되었다.[6]

청일 전쟁은 청나라와 조선의 정치에도 영향을 미쳤다. 청나라 내부에서 캉유웨이쑨원 같은 사상가들은 청일 전쟁의 패배로 청나라 사회 및 제도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개혁의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1] 조선의 경우 1894년부터 시작되었던 갑오개혁이 1895년 일본 제국의 간섭과 친일파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중국에서는 갑오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갑오전쟁(중국어 간체자: 甲午战争, 정체자: 甲午戰爭, 병음: Jiǎwǔ Zhànzhēng 자우잔정[*]), 일본에서는 일청전쟁(일본어: 日清戦争 닛신센소[*]), 서양에서는 제1차 중일 전쟁(영어: First Sino-Japanese War)이라고도 불린다.

배경

국외적 배경

신흥 제국주의 국가로서, 일본은 그 관심을 조선으로 돌렸다. 일본은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의 약체화를 목격하고, 만주를 비롯한 대륙침략의 전진기지로, 또한 러시아의 남하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을 병합, 식민지화하려고 하였다.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강경파는 정한론을 주장하였으나, 이토 히로부미를 중심으로 주류의 반대로 좌절되었으며, 조선에 대해 포함외교를 통한 통상 요구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일본은 과거 미국이 자기에게 했던 방식을 모방하여 운요호 사건을 구실로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였으며, 1876년 2월 27일(음력 2월 3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조선에 부산, 원산, 인천 3개 항구를 개항시키며 경제침략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서양 열강에서 민중들이 왕조를 타도하는 흐름에 생기는 와중에 일본에서 막부가 타도되고 왕정이 복고되었다. 조선에서도 여러 개혁의 움직임이 일어나자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재집권하자, 청나라가 개입하여 대원군을 납치하고 난을 진압한 후 종주권을 구실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였다. 이후, 조선에서는 대청 관계와 개화 정책의 노선을 둘러싸고, 기성 관료를 중심으로 청나라에 대한 사대를 받아들이고, 양무운동을 모델로 점진적 개혁을 추구하려는 동도서기파와 소장 관료층을 중심으로 청나라에 대한 사대를 거부하고,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급진적 개혁을 추구하려는 변법개화파 간 정치투쟁이 발발하였다.

변법개화파가 일본 공사관과 내통하여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으나, 3일 만에 청나라 군사고문 원세개의 개입으로 반란은 진압되었다. 그 과정에서 청나라와 일본 군대 사이에 전투가 발생하였고, 패배한 변법개화파 인사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영국의 중재로 청나라와 일본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이듬해 1885년 톈진 조약을 체결하였다.

  1. 조선으로부터 군대를 철수시킨다.
  2. 조선의 군대를 훈련하기 위한 훈련교관을 보내지 않는다.
  3. 변란 등의 중요 사건으로 어느 한쪽이 파병할 경우 상대방에 통보해야 한다.

조선에서 청일의 충돌

1894년, 갑신정변을 주도한 친일 개혁세력인 김옥균홍종우에게 상하이에서 암살당하였다. 일본은 그 유해를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했으나, 청나라가 이를 막고 청나라의 전함에 실어 조선으로 보냈고, 조선에서 그를 다시 부관참시하였다. 일본 정부는 이를 직접적인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상황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봉기에 조선 정부가 청나라 정부에 지원병을 요청하였을 때 더욱 심해졌다.

청나라는 톈진 조약에 따라 파병 사실을 일본 정부에 알렸고, 엽지초 휘하 2,800명의 병력을 보냈다. 일본은 일본 내부의 정치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 원정군인 오시마 요시마사 휘하의 병력 8,000명을 조선으로 보냈다. 이들은 조선의 항의에도 1894년 6월 9일 이후 인천에 상륙, 7월 23일 고종 임금이 거하는 경복궁을 점령하였고, 조선군은 대항하였다. 고종이 직접 조선군에게 무기를 버리라는 지시를 내려 해산한다.[7]

〈일청전사 초안〉은 그때 조선군의 발포가 오후 2시에 이르러서도 그치지 않아, 국왕이 사자(使者)를 보내, 조선군의 사격을 저지시키자, 비로소 총성이 완전히 끊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7]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조선의 내각을 김홍집, 박정양, 민영달 등의 친일 인사로 교체하여 갑오경장을 실시하였다. 일본은 더 많은 병력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일본과의 국교가 단절된 청나라는 조선의 새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양국 간의 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일본은 대조선 정책의 일환으로 4가지 계획안을 준비했다. 각 계획은 다음과 같다.

  • 갑(甲)의 계획은 앞서 기술된 조선의 지식인들과 일본이 조선의 정치에 관여하면서 내세우던 동양 평화론과 함께 조선의 자주성 이야기의 내용 그대로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해서 진정한 독립국으로 조선을 만들고 그 자주도 맡기며 일본도 간섭을 안 하고 타국의 간섭도 허용을 하지 않는 형태로 조선의 운명은 그들 스스로에게 맡긴다는 것.
  • 을(乙)의 계획은 명의상의 독립국으로 공인하지만 일본이 직간접적으로 그 독립에 부지하며 타국으로부터 조선을 지키고자 한다는 계획.
  • 병(丙)의 계획은 조선 영토의 안전은 청일 양국이 담보한다는 청국과의 외교 교섭을 하는 것이 계획.
  • 정(丁)의 계획은 일본이 서양 국가들과 청나라에 제의하여 조선을 유럽의 벨기에나 스위스 같은 영세 중립국으로 만든다는 계획.

그러나 무츠 무네미츠 외교 대신은 조선이 영구 독립을 유지할 수 없다고 봤을 뿐만 아니라 친일 내각을 집권시켜도 다시 친청 내각이 집권할 가능성이 높아 허사가 된다고 판단함과 동시에 전쟁 시에 일본이 얻는 문제들을 고려할 경우를 고려하여 을의 계획안을 기반으로 해서 차후 논의를 지속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게 된다. 그리고 일본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면서 내세우는 명분으로 활용하였다. 이것이 바로 을사조약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대조선 정책의 기초적 발향으로서 1894년 8월 17일 내각에서 결정하게 된다.

진행

1894년 7월, 조선 내의 청나라 군대는 약 3,000 ~ 3,500명 정도였으며, 아산만을 통해서만 병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일본의 목표는 우선 아산의 청국군을 봉쇄하고 일본 육군으로 포위하는 것이었다.

풍도 해전

1894년 풍도 해전, 판화

1894년 7월 25일, 아산 근해를 순찰하던 순양함 요시노, 나니와, 아키쓰시마로 구성된 일본 제1유격대가 청나라 순양함 제원(済遠)과 군함 광을(広乙)과 마주쳤다. 이들은 아산으로 물자를 나르는 또 다른 청나라의 군함 조강호와 만나기 위해 아산을 떠나 있었다. 1시간의 전투 끝에, 광을호는 화약고가 폭발하여 암초에 좌초되고 제원호는 탈출하였다.

청나라에는 런던의 인도차이나 증기 선박회사(Indochina Steam Navigation Company) 소유의 2,134톤급 영국 상선 가오슝호가 있었는데, 이 배는 청나라가 군대를 조선으로 수송하기 위해 대여한 것으로, 골즈워디(T. R. Galsworthy) 선장과 64명의 승무원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 가오슝호는 1,200명의 군사와 보급품과 장비가 적재되어 있었으며, 조강호와 함께 조선으로 향하고 있었다. 청나라의 고문인 독일의 포병장교 하네켄 소령(Major von Hanneken)도 승선하고 있었고, 7월 25일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도고 헤이하치로 선장이 지휘한 방호순양함 나니와가 두 배를 가로막았다. 군함은 결국 포획되었고, 일본은 가오슝호에 나니와호를 따를 것과 승선한 유럽인들은 나니와로 옮겨탈 것을 요구하였다. 어쨌거나, 승선한 1,200명의 중국인들은 다시 돌아갈 것을 원했고, 영국 선장과 선원들의 생명을 위협하였다. 4시간의 협상 끝에, 도고 선장은 사격할 것을 명하였다. 유럽인들은 바다에 뛰어들었고, 중국인들은 이들을 사격했으며, 일본군은 승무원들을 구조하였다. 가오슝호의 침몰은 일본과 영국 간의 외교적 분쟁을 일으켰으나, 폭동에 대한 국제법으로 처리되었다.

성환과 평양 전투

조선인 병사와 중국인 포로
1894년 평양 전투, 미즈노 도시가타의 판화

친일 내각으로부터 청나라 군대를 몰아낼 권한을 부여받은 오시마 요시마사는 약 3,500명의 일본군 여단을 이끌고 한양에서 아산만까지 이동하여 아산과 성환(현재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에 주둔한 4,000명의 청나라 군대와 대치하였다.

1894년 7월 28일, 양측 군대는 아산 외곽에서 다음 날 아침까지 전투를 벌였다. 청나라 군대는 점차로 병력을 잃어 평양으로 후퇴하였다. 청나라 군대의 사상자는 500명에 달하였으나, 일본군 측은 100여명에 불과했다.

8월 1일에는 공식적으로 청나라와 일본 간에 전쟁이 선포되었다.

8월 4일 이전 조선에 남은 청나라의 병력들은 평양으로 철수하였고, 청나라로부터 파견된 병력과 합류하였다. 15,000명의 수비군은 일본군을 저지할 것을 기대하면서 대대적으로 전투에 대비하였다.

9월 15일, 일본군은 여러 경로로 평양에 모여들었다. 일본군은 평양을 습격하여 청나라 군대를 항복시켰다. 어쨌든, 폭우와 어둠을 이용하여 잔존 병력은 평양을 빠져나와 의주로 향했다. 청나라 군대는 사망자 1,000명에 부상자가 4,000명에 달했으며, 일본군은 5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본군은 9월 16일 아침, 평양성에 입성하였다. 평양 전투 이후로 일본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였고, 조선의 물자와 노동력이 일본군에 제공되었다. 이로부터 농민 봉기가 발생하였다.

황해 해전

압록강 전투 또는 황해 해전은 청일 전쟁에서 가장 규모가 큰 해전으로, 1894년 9월 17일 청나라의 북양함대가 일본의 함대와 압록강 하구에서 맞서 싸웠으며, 청나라 측은 화력이 우위에 있었음에도 선원들의 경험과 기동력의 열세로 참가한 10대의 군함 중 5척이 침몰, 3척이 파손되었으며, 850명이 사망하고 500명이 부상하였다.

반면, 일본군은 4척 파손에 사망자 90명, 부상은 200명이었다. 이로써 일본군은 제해권을 확보했으며, 4,500명의 청나라 군대가 압록강 부근에 상륙하였다. 북양함대는 여순항으로 피신하였다.

압록강 전투

평양에서의 격퇴로 청나라 군대는 조선의 북부를 떠나 압록강가의 요새에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일본군은 병력을 보충한 후 1894년 10월 10일 빠른 속도로 만주로 진격했다. 10월 24일 밤, 일본군은 몰래 압록강을 건너 부교를 띄웠다. 다음날 오후에는 단둥 동쪽 호산의 주둔기지를 공격하였다. 오후 10시 30분, 청나라 군대는 방어 위치를 버리고, 다음날까지 단둥으로 후퇴하였다. 야마가타 장군이 지휘하는 제1군(3,5사단으로 구성)은 단둥을 향해 북쪽으로 진격하여 사망 4명, 부상 14명의 희생만으로 중국 영토에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가쓰라 다로의 3사단은 서쪽으로 도주하는 청국군을 쫓아 요동반도의 도시들을 점령하였다. 오오야마 이와오가 이끄는 일본 육군 2사단은 요동반도 남쪽 해안에 상륙하여 도시들을 점령하였고, 여순항은 일본군에 포위되었다.

여순 함락

1894년 11월 21일까지, 일본군은 여순항을 점령하였다. 일본군은 여순에 거주했던 수천 또는 2만 명의 시민들을 학살하였는데, 이를 ‘여순 대학살’이라 한다. 1894년 12월 10일까지 요동의 건양이 일본군 1사단에 점령되었다.

웨이하이 요새 함락

북양함대는 여순항을 거쳐 웨이하이 요새로 피신하였으나, 일본 육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웨이하이 전투는 육군과 해군이 동원되어 1895년 1월 20일부터 2월 12일까지 23일간 진행되었고, 웨이하이 요새는 일본군에 함락되었다.

일본군은 남쪽과 북쪽으로 진격하여, 1895년 3월에는 북경이 바라보이는 곳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3월 5일에는 잉커우 외곽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동중국해 점령

1895년 3월 26일, 일본군은 타이완 부근의 펑후 제도를 희생자 없이 점령하였고, 같은 해 3월 29일 가바야마 스케노리 지휘하에 타이완에 상륙, 점령하였다. 이에 따라 동중국해는 사실상 일본의 영역처럼 변하였다.

전쟁 종료 및 영향

청나라의 요청으로 1895년 4월 17일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라 청나라는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하여 조선에서의 일본의 국제적 위치를 확립시켜 주었고, 배상금 2억 냥(兩)을 일본에 지급하였으며, 랴오둥반도·타이완, 펑후 제도 등을 할양하였으며, 통상상의 특권을 부여하였다.

그 결과 청나라는 무력함이 드러나 세계열강에 의한 청나라 분할 경쟁이 더욱 노골화되었고, 일본은 더욱 적극적으로 조선 침략의 야욕을 표시하여 필연적으로 러시아 세력과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요동 반도는 러시아·프랑스·독일의 삼국 간섭으로 반환되었다.

조선 정부는 1895년 1월, 대내로 일본의 압박으로 종전의 청나라 연호를 폐지하고, 왕호를 대군주로, 왕비는 왕후로, 왕세자는 왕태자로 격상하여 호칭한다. 대외로 삼국 간섭 이후에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 세력을 몰아내고자 하였다.

승려 사노 젠레이(佐野前勵)는 일련종 간부를 찾아가 자신의 포부를 알리고 조선으로 건너와 덕양방(德陽坊) 계산동에 일련종교무소를 열고 포교활동을 시작했다.[8]:45 이후 사노 스님은 일본공사관의 알선으로 《법화경》과 《안국론》 등의 책과 향로를 궁내부에 헌상하고, 대신 이제면(李載冕)과 면담을 추진하는 등 다각적인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8]:45 또한 북한산 중흥사(重興寺)를 방문해 일련종 교리를 설명하고 일련종에 가입할 것을 약속받는 등 조선포교에 대단한 열성을 보였다.[8]:45 1895년 4월에 고종은 일본 승려의 부탁으로 승려의 서울 입성 금지를 완화하라 명한다.[9] 이보다 앞서 일본 일련종(日連宗)의 승려 사노 젠레이(佐野前勵)가 우리나라에 와서 내각 총리 대신 김홍집(金弘集)에게 해제를 청하여 김홍집이 왕에게 아뢰어 이 명령이 있게 된 것이다.[9]

일본은 러시아에 큰 위협을 느꼈고, 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에는 주조선 일본 공사 미우라가 지휘하는 일본군의 2개 대대가 왕후의 침소인 건청궁에 난입하여 왕후를 시해하였다. 그 뒤 대군주에게 왕후의 폐출 조서에 서명을 강요하며 위협하였다. 대군주가 그것을 거부하자 왕태자(순종)에 칼을 대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은 조선을 압박하여 을미개혁을 실행하였으나, 민중들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1896년 2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한 아관파천을 감행하여 조선 내에서 일본의 세력은 감소하였다. 이듬해 고종은 덕수궁으로 환궁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한편, 동아시아에 대한 주도권은 중국으로부터 일본으로 옮겨졌으며, 청나라 조정과 중국 중심의 중화사상에 치명타를 주었다. 이러한 경향이 훗날 신해혁명으로 이어졌다. 이후 일본 제국러시아 제국과의 치열한 대립을 펼친다.

또한,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의 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출정한 일본군 병사들을 상대로 이대로 곧장 중국으로 쳐들어가 성경과 길림과 흑룡강 3성을 점령하여 일본의 수중에 넣고, 북경까지 진공하여 보물과 고서적 같은 귀한 재보를 약탈하라는 내용을 담은 글을 연일 신문에 발표하기도 했다.[10]

같이 보기

외부 링크

주해

각주

  1.  Bevir, Mark (2010). Encyclopedia of Political Theory. Sage publishing. ISBN 978-1412958653. p 168.
  2. Kim, Samuel S. (2006). The Two Koreas and the Great Power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쪽. doi:10.1017/cbo9780511510496. ISBN 978-0-521-66899-6. Japan was at the forefront of hegemonic wars in a quest to extend the Japanese hegemony over Korea to the entire Asia-Pacific region – the Sino–Japanese War of 1894–95 to gain dominance in Korea.
  3. 양무운동.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2024년 3월 14일에 확인함.
  4. Jansen 2002, 432쪽; Schencking 2005, 78쪽.
  5. Hopper, Helen (2004). Fukuzawa Yukichi.
  6. Paine 2003, 293쪽.
  7.  탁양현(2020), 《동학운동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일합병: 일제시대 일제강점기 대일항쟁기 역사》
  8.  서재영 (2006). 승려의 입성금지 해제와 근대불교의 전개. 불교학보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45: 37–65. ISSN 1226-1386. UCI G704-001567.2006.45..002
  9.  17권 천민 예인의 삶과 예술의 궤적 > 제4장 떠돌이 예인들이 남긴 예술과 삶의 지문 > 1. 불교와 유랑 예인, 비승비속의 세계 > 불교의 몰락과 승려 집단의 비승비속화. 우리역사넷. 한국문화사. 국사편찬위원회. 2026년 1월 1일에 확인함.
  10. 야스카와 주노스케(やすかわ じゅのすけ).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침략사상을 묻는다(福澤諭吉のアジア認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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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도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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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도 해전
청일 전쟁의 일부

1894년 8월자 고바야시 기요치카가 묘사한 풍도 해전
날짜1894년 7월 25일
장소
한반도 서안, 풍도 앞바다
결과일본의 승리
교전국
 일본 제국 청나라
지휘관
쓰보이 고조
도고 헤이하치로
방백겸
병력
순양함 3척순양함 2척
포함 1척
상선 1척
피해 규모
침몰함, 사상자 없음2척 파괴 및 대파
1,100명 사상

풍도 해전(중국어: 豐島海戰, 일본어: 豊島沖海戦)은 1894년 조선 충청도 아산만 입구의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군 함대가 청군 함대를 공격하면서 일으킨 사건으로 이 전투를 시발점으로 청일 전쟁이 발발했다. 한국에서는 풍도 해전(한국 한자: 豊島海戰)이라는 한국식 한자로 명명하기도 한다.

배경

1894년 조선에서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청나라 모두 조선 내의 다른 세력과 연계하여 개입을 했다. 청나라는 여전히 조선과의 기존 종주권적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고, 일본 역시 조선을 영향권 내에 넣기를 원했다. 이 때 양국은 이미 조선 국경 내에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다. 6월초 아산만에는 3,000명의 청군(북양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그곳을 통해서만 보급을 받을 수 있었다.

일본의 계획은 아산만 입구를 봉쇄하고, 그러는 동안 육군이 내륙으로 이동하여 바다로 증원이 되기 전에 아산만에 주둔한 북양군을 포위하는 것이었다.

북양함대 사령관 중 일부는 이러한 위험한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고, 부대를 철군하거나, 아니면 더 북쪽의 평양으로 이전하거나, 또는 일본의 의도를 분쇄하기 위해 북양함대를 전부 이끌고 인천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은 아산만의 청나라 군대를 봉쇄하고자 하였다. 일본의 기록에 따르면 순찰하던 제1유격대가 아산만에 병력을 추가 수송하려는 청나라 함대와 조우하여 해전이 일어났다고 한다.

전투

조우

1894년 7월 25일 이른아침, 아직 서로 선전포고하지 않았지만 일본은 7월 19일에 들이댄 5일간의 유예를 둔 최후통첩이 청나라 측의 대답없이 기한이 끝나가고 있었다. 법적으로는 전쟁 상태에 돌입했고, 이후 언제 전쟁의 발단이 열리는가만 남은 단계에서 조우했다고 일본 측은 주장하고 있다. 다만, 청나라와 일본 이외의 영국 등의 제3국은 청나라와 일본 사이의 최후통첩 등의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일본 함대는 조선의 북서해안 풍도 앞바다에서 만날 예정이었던 정보함(Aviso) 야에스야마(八重山)와 구식순양함 무사시(武蔵)를 찾고 있었다. 두줄기의 연기를 발견하여 접근하고 보니, 청나라의 순양함 제원(済遠)과 광을(広乙)이었다.

청나라 함대도 나중에 육군을 태울 예정인 상선 고승(高陞)과 그 호위를 맡은 조강(操江)의 선도역이었다. 2대 3의 순양함이 대치하는 형국이 되었다.

해전

3,000m로 접근한 이후 양측은 서로 공격을 시작했다. 일본 측은 청나라 순양함 제원은 돌연히 21cm포를 발포했다고 주장하며, 일설에는 일본 순양함 ‘요시노’(吉野)가 ‘제원’에 먼저 발표했다고 한다.

몇 분동안 서로 포격을 나눈 후 오전 7시 50분 매우 안개가 짙어 시계가 좋지 않았던 가운데, 우세했던 일본 해군 앞에서 청나라 군함은 도주를 시작했다. 방호순양함 아키쓰시마는 ‘광을’(広乙)을 추격했고, ‘요시노’와 ‘나니와’는 더 큰 배인 ‘제원’(済遠)을 쫓았다. ‘광을’은 따라잡힌 결과 좌초되었다.

순양함 ‘요시노’와 ‘나니와’는 한개의 연돌을 가진 ‘제원’을 추격했다. 국기를 내려 항복했다고 판단했지만, 갑자기 도주를 시도했다. 도주하는 제원을 계속 추적하고 있던 중 청나라 함대와 합류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조강’(操江)과 영국 상선기를 게양하고 있던 ‘고승’(高陞)과 마주쳤다.

‘나니와’와 새로 나타난 청나라 함대가 입씨름을 하던 와중에도 ‘제원’은 계속 도주를 했다. 당시 ‘요시노’의 최고 속도는 23노트로, 15노트 속도를 가진 ‘제원’ 보다 훨씬 빨랐다. 제원은 능숙하게 갈짓자를 그리며, 도주를 계속했다. 도주하는 중에도 제원은 2문의 21cm포로 포격을 했고, 요시노의 15cm포로는 감당하기 힘들었다. 요시노가 제원을 2,500m까지 추적했을 때, 제원의 함장은 우현으로 틀었고, 얕은 여울로 배를 몰았다.

‘제원’은 독일제 순양함으로 2,300t에, 흘수 4.67m였고, 요시노는 영국제로 4,216t에, 흘수가 5.18m로 더 깊었다. 제1유격대 사령관 쓰보이 소장은 추격 중지 명령을 내렸다.

일본 측 주장에 따르면, ‘고승’은 전쟁 준비 작전으로써 조선 제물포(현재의 인천)에 청나라 육군 1,100명을 수송 중이었다. 제1유격대 사령관의 명령으로 나니와의 함장 도고 헤이하치로 대좌는 고승호에 정선을 명령하고, 임검을 행하려 하였으나, 청나라 병사들은 정선 명령에 따르지 않았고, 결국 고승호를 격침시켰다. 이때 영국인 선원 3명을 구조하고, 약 50명의 청나라 병사를 포로로 잡았다.

결과 및 영향

이 전투에서 일본측의 사상자와 함선의 손해는 전무하였고 청나라 측은 순양함 제원이 대파당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진위는 명확하지 않다. 순양함 광을과 상선 고승은 격침되었고, 포함 조강은 아키츠시마에 의해 나포되어 1965년 퇴역까지 일본 측에서 사용되었다.

비슷한 시기 일본군은 성환 전투를 치러 아산만 지역의 청군을 격파했다. 이로써 일본과 청나라의 전면전은 피하기 어려워졌고, 7일 후인 8월 1일 일본이 선전포고를 했다. 이후 영국 국적의 상선 고승을 격침당한 영국에서는 일본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었다. 일본 측은 전시국제법에 따른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양국의 함대

일본함대

일본해군 제1유격대 사령관 쓰보이 고조(坪井航三) 소장 휘하의

청나라함대

이후에 전투에 참가한

각주

  1. 당시 세계에서 꼽아주는 쾌속순양함이었다.
  2. 함장 방백겸(方伯謙)
  3. 함장 임국상(林国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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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전투 (1894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평양 전투
청일 전쟁의 일부

미즈노 도시카타우키요에로 묘사한 평양 전투
날짜1894년 9월 15일
장소
결과일본의 승리
교전국
 청나라 일본 제국
지휘관
청나라 섭지초
청나라 좌보귀  
청나라 위여귀
청나라 섭사성
청나라 마옥곤
일본 제국 노즈 미치즈라
일본 제국 가쓰라 다로
병력
13,000명 ~ 15,000명10,000명
피해 규모
2,000명 전사
4,000명 부상
325명 전사
864명 부상

평양 전투(平壤戰鬪)는 청일 전쟁 당시 1894년 9월 15일 일본군과 청군이 치른 두 번째 주요 전투로 일본군이 승리함에 따라 한반도 내의 모든 청군 세력이 소멸하게 된 계기를 마련한 전투이다.

전투 과정

일본 제국 육군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제1육군 5사단 노즈 미치즈라와 3사단 가쓰라 다로는 10,000명을 이끌고 6월 12일 조선인천에 상륙해 7월 29일 성환 전투에서 청군을 괴멸시키고 평양을 향해 진군했다.

9월 15일 아침 일본군은 3방향에서 평양성을 공격했고 북부와 남동쪽 지역을 돌파해 모란봉을 점령했으며 후면에서 예기치 않은 공격으로 청군은 대패해 을밀대에서 항복했으며 9월 16일 일본군은 평양성에 입성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폭우로 인해 공격을 연기했고 그 사이 생존한 청군 수비대 2,000명이 압록강 하류 의주로 탈출했다.

결과 및 영향

전투 후 한국에서 주도권을 잡게 된 일본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였고, 조선의 물자와 노동력이 일본군에 제공되었고 이로부터 농민 봉기가 발생하였다.

한편 일본 육군의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건강상의 이유로 부대를 인계했고 5사단은 오쿠 야스카타 중위가 맡게 되었으며 이후 압록강 전투를 거쳐 한반도 내의 모든 청군 세력이 소멸되고 일본군은 만주로 진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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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해전 (1894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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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해전
청일 전쟁의 일부

일본연합함대 기함 마쓰시마(松島)
날짜1894년 9월 17일
장소
황해, 압록강 앞바다
결과일본 제국의 승리, 북양함대 전멸
교전국
 일본 제국 청나라
지휘관
이토 스케유키
쓰보이 고조
정여창
등세창
이번건
병력
연합함대
전함 1척
방호순양함 8척
코르벳 1척
보조순양함 2척
어뢰정 1척
북양함대
전함 2척
순양함 7척
코르벳 1척
포함 2척
어뢰정 2척
피해 규모
90명 전사
200명 부상
전함 3척 대파
850명 전사
500명 부상
전함 5척 침몰
전함 3척 대파
황해해전을 묘사한 우키요에
청국군함신부(淸國軍艦神符)
원구사료관소장
중국함대를 공격하는 기함 마쓰시마
황해해전(그림:오가타 겟케이)
해전 당시 양국 함대 진행도

황해해전(黃海海戰)은 1894년 9월 17일 청일 전쟁 중기 일본해군 연합함대청나라 북양함대 사이에 벌어진 해전으로 압록강 해전(鴨綠江海戰, Battle of the Yalu River)으로도 불린다. 근대적인 장갑함이 실전에 투입된 최초의 전투로 알려져 있으며 이 해전의 결과, 청나라 해군은 큰 손실을 입고 제해권을 상실하여 무력화 된다.

배경

청일 전쟁 발발 초기 일본은 먼저 군대를 동원해 풍도 해전, 성환 전투, 평양 전투 등을 치러 조선 내의 청나라 병력을 패퇴시켰고, 청나라의 패잔병들이 압록강에서 재집결, 수송선 5척에 실려 요동 반도로 떠났다. 전쟁에 결착을 짓기 위해 일본군 대본영[1]은 일본 해군에게 다음 두가지 전략 목표를 하달했다. 첫째는 북양함대를 저지할 것, 둘째는 황해 제해권 장악이었다.

이에 반해 청나라의 리훙장은 되도록 지구전으로 끌고가 서양 열강들이 청일 양국간의 휴전 및 강화를 놓고 개입하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따라서 그는 북양함대 제독 정여창에게 연안방어와 전력보존의 방침을 하달했다. 이 때문에 카바야마 스케노리가 자신의 위장순양함 사이쿄마루(西京丸號)[2]를 몰고 북양함대의 기항인 여순항 근처에서 도발을 했음에도 그들은 좀처럼 대련만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1894년 9월 16일 오후 1시, 북양함대는 압록강에서 보병 4,000명을 태운 수송선 5척을 맞이하기 위해 마침내 대련만을 나왔다. 수송선이 대련항 근처 다후산(大狐山)에서 육군을 상륙시키는 사이 북양함대는 다후산 앞바다에서 훈련 중이었다.

1894년 9월 16일 오후 5시, 황해도 최서단 척백곶에 몰래 정박해 있던 일본 연합함대 본대(이하 연합함대)와 제1유격대(연합함대의 별동대)가 북양함대 출격 정보를 입수, 결전을 치르기 위해 침로를 잡고 출항했다. 여기에 비정규편성으로 아카기와 위장순양함 사이쿄마루가 뒤따랐는데, 아카기 호는 흘수가 낮은 점을 이용, 영국인 출신 존 윌슨 제독의 지휘하에 연안과 도서 지역 탐색을 수행했고 사이쿄마루카바야마 스케노리 함장과 이주인 고로 중좌 등을 태워 전황감시선으로 이용됐다.

1894년 9월 17일 오전 10시 경, 북양함대와 일본 연합함대가 동시에 서로를 발견, 조우했다. 제1유격대는 쓰보이 고조 소장이 이끄는 4척의 전함, 즉 기함 요시노, 다카치호, 아키쓰시마, 나니와 함의 순으로 앞에 섰고, 이어 연합함대 사령장관인 이토 스케유키가 지휘하는 6척의 전함인 기함 마쓰시마, 지요다, 이쓰쿠시마, 하시다테, 히에이, 후소 함의 순으로 제1유격대의 뒤를 받치는 단종진을 만들었다. 이에 맞서 북양함대리싸 해전(Battle of Lissa, 1866)에서의 오스트리아 함대를 모방해 13척의 전함과 2척의 어뢰정으로 횡렬진을 형성해 마침내 해전이 시작됐다.

전투 과정

해전#1 (12시 52분부터 14시까지 상황)

12시 52분, 기함 마쓰시마정원함(定遠艦)에 대해 발포를 시작했다. 이에 대항해 북양함대는 제1유격대를 향해 사격했다. 제1유격대는 이에 대응하지 않고 그대로 돌진, 3분 후 북양함대 최우측의 양위함(揚威艦)과 초용함(超勇艦)에 포격을 시작했다. 북양함대는 연합함대 본대에 대해 충각전술[3]을 시도해 접근했으나 연합함대의 속도가 더 빨라 그이상 접근할 수 없었고 오히려 제1유격대의 연계 사격에 의해 십자포화를 받고 화염에 휩싸였다.

13시 5분, 집중포화를 맞고 초용함에서 화재가 발생한지 30분만에 침몰, 양위함은 대록도(大鹿島) 남방에서 좌초해 전투 능력을 상실했다.

13시 6분, 평원함(平遠艦)과 광병함(広丙)을 비롯한 청군 별동함대가 해전 해역으로 남하해 왔다. 이때부터 일본해군도 손실을 입기 시작했는데, 제1유격대가 적의 우익을 격파 후 본대로 귀환하려고 방향을 전환하기 위해 12노트로 감속한 사이 ‘기함 요시노’가 우현 뒷갑판에 피격당해, 적재된 장약에 불이 붙었고 연합함대 본대 역시 기함 마쓰시마가 6인치 포탄을 맞는 등 피해가 속출했다.

13시 14분, 제1유격대가 전속력으로 적함들을 따돌리느라 사격이 일시중단될 무렵, 함대본대 후방에 ‘코르벳함 히에이’가 속도가 떨어지면서 대열에서 낙오하자 뒤에 있던 방호순양함 하시타테까지 탈락해 버렸다. 적함 사이에 고립된 히에이호를 노리고 정원함과 래원함(來遠艦)이 충각 전술을 시도했으나 히에이 호의 함장 사쿠라이 키쿠노조가 순간적인 판단으로 두 적함 사이를 돌파해 버렸다. 하는 수 없이 정원함과 래원함은 연합함대 최끝단에 장갑코르벳함 후소를 노리고 다시금 충각전술을 시도했다.

13시 20분, 제1유격대는 북서 방면으로 향하여, 북쪽에서 남하하는 별동대를 견제했다. 연합함대 본대에는 충각전술을 당한 후소가 가까스로 좌현으로 빠져나왔다. 문제는 방금의 기동으로 인해 지원함인 아카기사이쿄마루가 적함 전면에 노출됐다. 적함과 더 가까웠던 아카기에 맹포격이 가해졌고 함교에 명중을 당해 함장 사카모토 야타로(坂元八太郎) 소좌가 전사했다. 사토 테츠타로(佐藤鉄太郎) 1등 항해사가 지휘를 넘겨받아 몇 개 안되는 포로 반격을 가해 약 800m 거리에 있던 래원함의 갑판을 맞춰 타격을 줬다.

13시 30분, 연합함대 사령관 이토 제독은 동쪽을 향해 시계방향으로 회전 기동하여 북양함대의 배후를 노렸다. 제1유격대가 좌현으로 키를 16번 돌려 15노트로 가속, 남하한 연합함대와 나란히 진행하려 했으나 타이밍이 맞지 않은 채 연함함대의 뒤를 따랐다.

해전#2 (14시에서 17시까지 상황)

침몰한 정원함

14시 정각, 전투 능력을 상실한 코르벳함 히에이가 ‘본함 화재로 인해 열외하겠음’이라 긴급타전하면서 동북 방면으로 이탈했다.

14시 15분, 전황감시선 사이쿄마루로부터 ‘히에이, 아카기 위험’이란 무전을 받고 제1유격대가 북쪽으로 향했다. 당시 아카기는 추격해오는 래원함에 포탄을 명중시키는 등, 호랑이 아가리를 빠져나오려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사이쿄마루는 기관실과 방향타를 피격당한 채 ‘본함 기관 고장’ 무전을 재차 보냈다. 사이쿄마루에서 뿜어져나오는 연기를 관측한 평원함과 광병함(이상 전함), 그리고 복룡함(어뢰정) 등이 남하해 쾌속항진해 왔다. 사이쿄마루는 연합함대의 눈이었으며 무장과 장갑이 빈약해 공격을 오래 버틸 수 없었으므로 빨리 구조해야 했다.

14시 30분, 제1유격대는 서쪽으로 방향을 틀며 별동대를 향해 불을 뿜었다. 나니와가 사이쿄마루를 피하기 위해 잠시 기관을 정지하는 것을 확인한 정원함과 진원함(鎮遠艦) 등이 나니와 호 쪽으로 다가왔다.

14시 40분, 사이쿄마루는 접근해온 복룡함으로부터 2차례 어뢰공격을 받았고, 3발 째는 배 밑으로 그냥 통과했다. 곧 도착한 제1유격대는 히에이, 아카기, 사이쿄마루의 안전을 확인함과 동시에 청군 별동대의 후미를 노리고 들어갔다.

15시 10분, 연합함대 본대는 동진하여 적함대의 동쪽에서 돌아들어가, 정원함과 진원함을 집중포격했다. 제1유격대도 우현으로 키를 8번 돌려, 3.7킬로 거리에서 본함대와 함께 적함대를 때려댔다. 십자포화를 맞고 정원함(定遠艦), 진원함, 치원함, 정원함(靖遠艦)에 화재가 발생, 진형이 무너졌다. 이때 제원함과 광갑함이 전장에서 이탈, 여순 방향으로 후퇴했다. 그나마도 광갑함은 도망중 좌초돼 버려졌다. 이는 근대 이후의 해전에서 유일한 적전 도망 사례이다. 풍도 해전에도 참전했었던 제원함의 함장 방백겸은 그 책임을 물어 청일전쟁이 끝난 후 참수형에 처해졌다.

15시 30분, 진원함의 12인치 포탄이 ‘마쓰시마’의 좌현 포탑에 직격됐다. 포탑 안에 적재된 장약에 불이 붙어 폭발, 28명이 즉사하고 마쓰시마가 대파됐다. 당시 마쓰시마 호의 승조원, 미우라 토라타로(三浦虎太郞) 3등수병은 중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원함 침몰은 아직입니까”라고 부함장 무카야마 싱고에게 물었고, 질문을 받은 무카야마가 “적함은 전투능력을 상실했다”고 답했다. 이 때 일화가 후일 일본군 군가 '용감한 수병(『勇敢なる水兵』)'의 가사로 만들어졌다. 아직 전투능력이 남아있던 치원함이 단독으로 연합함대로 돌진, 동귀어진[4]을 노렸으나 역시 집중포화를 맞고 흘수선 아래에 구멍이 뚫려 침몰했다.

16시 7분, ‘마쓰시마’는 함교 근처의 화재로 기함기능을 상실했다. 이토 사령관은 불관기(不管旗)를 게양해 이를 알렸다. 이를 본 연합함대의 다른 함정들이 기함을 보호하기 위해 기함 주변으로 집결했다. 한편 제1유격대는 경원함 등을 추격하여 북상했다. 북양함대는 지리멸렬하여 정원함과 진원함을 남겨둔채 패퇴했다.

16시 48분, 제1유격대 기함 요시노는 경원함을 따라잡고 포격을 가했다. 경원함은 불길에 휩싸여 17시 29분 경 함수 부분부터 침몰했다. 제1유격대는 다른 청국 함선들을 추격하려 했으나 본대복귀 신호를 받고 물러났다.

연합함대는 함대를 재편성, 손상된 함들을 본국으로 보내고 기함 기능을 ‘마쓰시마’에서 ‘순양함 하시타테’로 변경했다. 그 사이 북양함대의 잔여함들이 여순항으로 후퇴했다. 연합함대는 다음날인 18일 다시 북상하여 적함대와 다시금 해전을 벌이려 했으나 여의치 못하고 다시 그 다음날인 19일 8시를 기해 여순항으로 압박해 들어갔다.

결과 및 영향

이후, 여순항에 피항한 북양함대는 일본 육군에 의해 육지로부터 포위될 뻔 했다. 북양함대는 여순항을 겨우 빠져나와 산동웨이하이웨이로 갔지만 일본 해군의 추격으로 결국 항복했다. 일본이 황해의 제해권을 차지함으로써 대륙으로 일본 육군이 진격하는 일이 수월해졌다.

세계 해군사의 전술적 측면에서 볼 때도 단종진에 의한 속사포격전술의 유효성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됐고, 해전의 기본전술 중 하나로 정착됐다. 일본해군에서는 고속, 속사 전술을 주로한 부대(황해해전의 경우 별동대인 제1유격대)와 저속의 중무장 함대(연합함대본대)가 분업하여 운용되는 형태의 교리가 1945년 패전시까지 유지됐다. 서양에서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독일 양국이 전함부대와 고속순양함 부대를 나눠 운용하는 등 황해 해전의 일본해군의 전술은 근현대 해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단, 일본 해군 내에서 지적됐던 점은 속도가 느린 함이 청나라 해군의 한가운데에 남겨지거나, 다른 함정의 사격 선상에 다른 배가 끼어들어 포격을 방해한다던지 하는 것이었다. 기함이 대파되어 추격을 단념했던 것에 대해서도, 한층 더 추격해 공격을 속행해야 했다는 지적도 있었다. 한편 일본해군은 전투종료 후, 침몰한 함정에서 탈출해서 바다에 빠진 청국수병들을 한 명도 구조하지 않고 죽게 내버려 뒀다. 이 일은 매우 비인도주의적이며 전근대적인 처사로 당시 국제적으로도 크게 비난 받았고 일본제국주의의 앞날이 매우 인명경시적이며 광기에 어린 핏빛 미래가 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행태였다.

청나라는 황해 해전의 패배를 북양함대를 창설한 이홍장과 제독 정여창의 책임으로 돌렸으며, 정여창은 음독자살하고, 적전 도망했던 제원함 함장 방백겸 등이 참수됐다. 이 전투를 계기로 청일 전쟁에서 승기는 일본으로 급격히 넘어가게 되었으며, 청나라 황실은 권위를 잃게 되었고 그 틈을 타고 민족주의와 새로운 혁명의 불길이 중국 내부에서 거세게 타오르게 되었다.

전투 참가 함정

일본 연합함대

유격함대(遊擊艦隊):

주력함대(主力艦隊):

이외 전력:

청나라 북양함대

  • 순양함 양위 (揚威) (1,350t)-침몰
  • 순양함 초용 (超勇) (1,350t)-침몰
  • 순양함 정원 (靖遠) (2,300t)
  • 순양함 래원 (来遠) (2,830t)-손상
  • 철갑함 진원 (鎭遠) (7,430t)
  • 철갑함 정원 (定遠) (7,355t, 기함)
  • 순양함 경원 (經遠) (2,850t)-침몰
  • 순양함 치원 (致遠) (2,300t)-침몰
  • 순양함 광갑 (廣甲) (1,290t)-침몰
  • 순양함 제원 (濟遠) (2,355t)
  • 순양함 평원 (平遠) (2,100t)
  • 순양함 광병 (広丙) (1,000t)
  • 어뢰정

각주

  1. 대본영(大本營): 일본군 참모 본부를 지칭
  2. 사이쿄마루 호: 원래 미츠비시 상선이 소유했던 우편운반선. 청일전쟁을 앞두고 일본 해군이 개조해 순양함 대용으로 썼다.
  3. 충각전술: 배를 부딪혀 상대함의 진로 방해, 속도 저하, 혹은 침몰을 유도하는 전술
  4. 동귀어진(同歸於盡): 같이 파멸의 길로 끌고 들어감. 정식 사자성어가 아닌 무협소설에서 비롯된 단어.

참고 문헌

외부 링크

  •  위키미디어 공용에 황해 해전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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