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침략과 대한제국의 종말 - 러일전쟁에서 한일병합까지 |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20세기 한국사 7
서영희 (지은이),역사문제연구소 (기획)역사비평사2012-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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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사실과 정확성을 바탕으로 20세기의 진실을 기록한 '20세기 한국사' 시리즈 7권. 러일전쟁부터 한일병합까지 7년의 시간을 들여다본다. 이 시기는 짧았던 대한제국 13년 역사의 후반부에 해당하며, 거대한 세계사의 소용돌이 속에 하염없이 휩쓸려 들어간 식민지시대의 전사이기도 하다.
흔히 일제에 의한 대한제국의 통치권 장악과 병합 과정은 일방통행식으로 진행된 것처럼 기술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통감부 통치나 병합 추진 과정은 당연하게도 대한제국의 저항에 따라 그 방식을 바꿔가며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이 과정이 낱낱이 밝혀질 때, 우리는 '식민지화'가 권력의 측면에서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보다 구체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침략'과 '저항'의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일제의 국권 침탈과 민족의 저항'이라는 단순한 인식으로 이 시대를 정리할 수 있을 것인가? 기껏 고종 황제 개인의 책임을 묻거나 을사오적으로 대표되는 친일파 몇몇을 매국노라 지탄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그때 그곳에서 대한제국인들은 어디를 바라보고 무엇을 위해 움직였는가. 망국의 치욕을 이제 역사로 되살려보자.
목차
01 러일전쟁 발발, 그리고 한반도의 운명
인천 앞바다에 울린 포성 / 전시중립선언은 휴지조각이 되고 / 한일의정서 강요―일본군 한반도 진주의 길을 열다 / ‘시정개선’을 앞세운 대대적인 고문관 파견 / 관제 개혁 명목의 대한제국 정부기구 축소 / 나가모리 프로젝트, 본격적인 이권 침탈의 시작 / 재정고문 메가타의 화폐정리 사업과 황실 재산 강탈 / 대한제국 해외 공관 폐쇄―보호국의 길로 들어서다 / 러시아 차르에게 보낸 고종 황제의 친서들 / 이용익의 페테르부르크행―러시아에 대한 기대가 실망으로
02 시일야방성대곡―을사늑약의 진실
강대국의 흥정에 맡겨진 대한제국의 운명 / 친일적인 루스벨트, 대한제국을 외면하다 / 을사늑약, 그날의 진실 / 스페셜 테마 : 을사늑약,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 스페셜 테마 : 을사늑약 유무효 논쟁 / 죽음으로 항거한 사람들과 조약 파기를 촉구한 상소운동 / 만국공법 체제와 보호국에 대한 인식 / 스페셜 테마 : 대한제국 지식인들의 만국공법 인식 / 보호국을 떠나가는 열강들, 해외로 망명한 대한제국 외교관들 / 국제사회를 향한 호소, 열강의 공동 개입 요청
03 통감부, 대한제국을 장악하다
대한제국의 총감독관, 통감의 탄생 / 스페셜 테마 : 일본 제국주의 통치에서 통감부의 위치 / 통감 이토 히로부미, 대한제국에 부임하다 / 통감부의 내정간섭과 시정개선협의회 / 황제권의 저항을 막아라 / 이완용 내각의 성립과 통감의 내정 장악
04 국권 회복을 향한 여러 갈래 길
헤이그 특사단의 피맺힌 절규 / 헤이그 특사단 파견의 의의와 한계 / 스페셜 테마 : 일제의 고종 황제 비자금 탈취 /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 / 군대 해산과 의병 항쟁의 불길 / 계몽운동―실력양성만이 살길이다 / 하얼빈 역에 울린 총소리 /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동북아 평화 체제 구상
05 대한제국의 종말―일제의 대한제국 병합
일본 관리들, 직접 대한제국 정부에 진출하다 / 사법권, 경찰 사무까지 빼앗기다 / 스페셜 테마 : 이토의 ‘자치육성 정책’, 실체는 있는가? / 일진회의 정계 진출 / 망명 개화 정객들의 귀국과 정치 활동 재개 / 일진회와 권력 지향적 계몽운동 단체의 3파 연합 / 일진회의 합방 청원운동과 각 정치 세력의 동향 / 스페셜 테마 : 일진회의 정치 체제 구상, 정합방론 / 일제의 병합 단행―대한제국,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 / 스페셜 테마 : 일제는 왜 1910년에 병합을 단행했을까? / 스페셜 테마 : 병합조약 무효론
06 글을 맺으며_근대 민족(국민)국가 수립을 향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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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리즈는 개항기 이후 오늘날까지의 근현대사를 아우르는 대중 역사서로서, 지난 20여 년 동안 축적된 근현대사 연구 성과를 망라해 일반인들에게 전하는 획기적인 역사서가 될 전망이다.
- 한겨레
저자 및 역자소개
서영희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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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공학대학교 지식융합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문화재청 근대문화재 전문위원, 경기도 문화재 위원, 인천시 문화재 위원을 역임했고, 역사도시서울위원회 부위원장,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 근대국가의 형성 과정과 정치세력의 동향에 관해 연구해 왔으며, 자주적 근대국가 수립에 실패하고 식민통치를 겪었던 역사적 경험이 현대 한국인의 삶에 남긴 유산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고 있다. 저서로 『대한제국 정치사 연구』, 『일제 침략과 대한제국의 종말』, 『아! 그렇구나 우리 역사 근대편』, 『조선총독부의 조선사 자료수집과 역사편찬』 외에 다수의 공저와 논문이 있다. 접기
최근작 : <근대 한국의 탄생 대한제국>,<[큰글자책] 일제 침략과 대한제국의 종말>,<조선총독부의 조선사 자료수집과 역사편찬> … 총 13종 (모두보기)
역사문제연구소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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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의 여러 문제들을 공동 연구하고 그 성과를 일반에 보급함으로써 역사 발전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사회의 민주화와 통일에 기여하는 것을 기본 목적으로 1986년 설립된 순수 민간 연구단체이다. 대한민국 역사 부문 최고의 싱크탱크로 여러 차례 선정된 바 있다.
최근작 : <역사비평 155호>,<역사비평 154호>,<역사비평 153호> … 총 173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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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20세기한국사’ 시리즈 7번째 출간!
사실과 정확성을 바탕으로 20세기의 진실을 기록하다
“이 시리즈는 개항기 이후 오늘날까지의 근현대사를 아우르는 대중 역사서로서, 지난 20여 년 동안 축적된 근현대사 연구 성과를 망라해 일반인들에게 전하는 획기적인 역사서가 될 전망이다.”
―한겨레 신문
백년전망국의기억,치욕과상처를넘어역사를본다
<일제침략과 대한제국의 종말>은 러일전쟁부터 한일병합까지 7년의 시간을 들여다본다. 이 시기는 짧았던 대한제국 13년 역사의 후반부에 해당하며, 거대한 세계사의 소용돌이 속에 하염없이 휩쓸려 들어간 식민지시대의 전사이기도 하다.
흔히 일제에 의한 대한제국의 통치권 장악과 병합 과정은 일방통행식으로 진행된 것처럼 기술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통감부 통치나 병합 추진 과정은 당연하게도 대한제국의 저항에 따라 그 방식을 바꿔가며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엄밀히 말하자면, 을사늑약 이후 통감부가 설치된 뒤에도 제한적이나마 대한제국의 주권은 살아 있었고, 통감부의 통치권 장악과 병합은 그 주권을 해체하기 위한 온갖 회유와 압박이 동원된 폭력적인 정치 과정을 통해 달성되었다. 또 이런 일제의 정치 공작하에서 민족 내부의 여러 세력들은 복잡한 갈등 양상을 노출했다. 이 과정이 낱낱이 밝혀질 때, 우리는 ‘식민지화’가 권력의 측면에서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보다 구체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침략’과 ‘저항’의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일제의 국권 침탈과 민족의 저항’이라는 단순한 인식으로 이 시대를 정리할 수 있을 것인가? 기껏 고종 황제 개인의 책임을 묻거나 을사오적으로 대표되는 친일파 몇몇을 매국노라 지탄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제국의 시대, 약소국 대한제국의 운명은 정해진 수순이었다는 숙명론과 패배주의 또한 답은 아니다. 그때 그곳에서 대한제국인들은 어디를 바라보고 무엇을 위해 움직였는가. 망국의치욕을이제역사로 되살려보자.
고종황제,친서외교에사활을걸다
―절대왕권과만국공법을무기로한외로운싸움
일반적으로 흔히 떠올리게 되는 지금까지의 고종 이미지는 ‘망국의 위기를 속수무책 방관하다가 폐위당한 무능한 왕’에 가까웠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속속 발견되는 고종 황제의 수많은 밀서와 친서들은, 그가 일본 제국주의의 압박에 겉으로는 굴복하는 듯했지만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만국공법하의 국제질서 속에 대한제국을 근대국가로 편입시킴으로써 외교를 통해 일본의 침략의지를 제어해보고자 끈질기게 시도했음을 말해준다. 일제는 통감부의 내정장악에 계속 제동을 거는 고종과 근왕세력의 손발을 묶기 위해 치밀한 첩보망으로 밀서의 행로를 막고, 막대한 내탕금을 불법적으로 강탈하는 한편, 절대왕권에 반발하는 일부 양반층 및 평민층을 친일파로 끌어들여 대한제국의 분열을 유도했다. 그럼에도 고종은 헤이그 특사 파견 등 국제사회에 대한 호소를 멈추지 않았고, 이토 통감이 조선을 비울 때마다 친일파들을 내각에서 숙청하고 통감부의 내정작악에 제동을 걸었다. 결국 일본은 통감정치의 한계를 자인하고 고종 폐위 등 노골적인 식민지화의 수순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국제열강은대한제국을외면하고
―약육강식의 시대논리
아관파천 시기부터 고종은 러시아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영세중립노선을 추구하면서도 정세가 급변할 때마다 러시아 차르에게 일본의 대륙침략 야욕을 경고하며 대한제국을 지켜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러시아에게 대한제국은 만주를 중심으로 한 일본과의 이권경쟁에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카드에 불과했다. 러일전쟁이 벌어지자마자 영사관을 철수한 것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 특사단 참여를 가장 적극적으로 막았던 것도 결국 러시아였다.
미국 역시 조미조약에 따른 거중조정 임무를 자임하는 열강이었으나, 특히 노골적인 친일성향을 지니고 있었던 루스벨트는 포츠머스에서 러일전쟁 강화회담을 중재하면서 대한제국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대한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그 공적(?)을 인정받아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 수상의 영광을 얻기도 했다. 영국, 프랑스 등 한발 떨어져 한반도를 둘러싼 이권경쟁을 관망하던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근대적 국제질서에서 ‘만국공법’이란 결국 하나의 이상이자 정치적 수사에 불과했던 것이다.
국권회복을향한 여러 갈래 길
―의병항쟁, 애국계몽운동과 안중근의 전쟁
소수 근왕세력 외에 지지층을 넓히지 못했던 고종 황제의 외로운 투쟁이 벌어지고 있던 같은 시기에, 대한제국의 다양한 민족 세력들은 저마다의 길 위에서 독립을 향한 투쟁과 미래의 모색을 해나가고 있었다. 위정척사의 지방 유생층이 주도하면서 시작된 의병항쟁의 불길은 일제의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근대적 군사훈련을 받은 해산군인들이 합류하면서 한층 강화되었고, 의병항쟁의 주도권도 양반 유생층에서 평민층으로 확장되었다. 한편 실력양성이 독립에 앞선다고 생각했던 애국계몽운동가들 내부에서도 각성의 움직임이 생겨났다. 일부 계몽운동가들이 친일파로 흡수된 것과 달리, 신채호·박은식 등은 민족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강화하고 독립운동의 길로 나섰다. ‘대한제국 의병 육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안중근 역시 고종 황제와는 또 다른 세계관, 국가관에 근거하여 동양 평화와 대한제국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호소하고자 했다.
방향 잃은 권력 의지, 일제에 포섭되다
―친일파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러일전쟁 개전과 동시에 한일의정서 체결로 군사적 강점의 길을 열었던 일제는, 을사늑약으로 국제사회에서 대한제국에 대한 보호권을 정식 승인받았다. 그 과정에서 일제는 이미 일부 정부 대신들을 장악하여 친일 내각 구성에 성공했다. 황제정 아래서 고종과 근왕 세력의 독단적인 정국 운영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던 정부 대신들은, 황제권의 독주를 견제하고자 하는 심리가 지나쳐 일제에 대한 경계심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제 침략은 대한제국 황제정에 내재되어 있던 권력 갈등의 문제를 현재화시킨 측면이 있었다. 한편 신분사회의 압박에서 벗어난 평민층의 정치적 욕구를 집결시킨 일진회는 대한제국 이후의 권력을 꿈꾸며 극단적인 친일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일제는 친일을 통해 양반층의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했던 이완용 등의 손을 들어주었고, 일진회는 결국 이용만 당한 채 버려졌다. 황제정을 부정하고 근대 입헌정치를 전망했던 대한협회·서북학회 등 일부 계몽운동단체의 지도자들은 정권 참여의 욕망으로 일진회와 손잡았다가 기층 조직원들의 거센 반발과 비판을 받고 우왕좌왕하며 방향을 잃고 표류했다. 민족 내부의 근대 정치 세력에 의해 극복되었어야 할 봉건 왕실이 외세에 의해 철저하게 해체되면서 생겨난 빈 공간에서, 국민의 주권보다 정파의 정권을 중시했던 이들은 결국 보호국 체제가 갑작스레 끝나면서 허망한 꿈의 좌절을 맛보았다.
대한 제국,그 마지막 날들. 한반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왜’가아닌‘어떻게’를물어야제대로보인다
일제에 병합당한 대한제국의 근본적인 한계는 짧게는 서양문명과 조우한 개항기부터, 길게는 조선왕조 5백 년의 역사적·문화적 전통에서 비롯된 장기구조사적 원인에 기원하고 있다. ‘왜’ 대한제국은 일제의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질문이 자칫 공허한 패배주의나 운명론, 추상적인 반성과 다짐으로 귀결되기 쉬운 것도 그 때문이다. 저자 서영희는 ‘왜’를 묻기에 앞서 ‘어떻게’라는 질문부터 충실하게 채워나가는 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할 일임을 역설하고 있다. 실상을 알아야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말할 수 있고, 누가 무슨 책임을 어떻게 져야 하는지 준엄한 역사적 심판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5백 년 왕조가 무너지고 이민족 지배로 권력이 교체되던 그 시기, 대한제국의 지배 세력은 어디를 바라보고 어디로 움직였는가. 한반도 통치 권력은 어떤 식으로 어떻게 이동했는가.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은 문화재만은 아닐 것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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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역사서는 왠지 모르게 우울하게 만든다. 그래서 더더욱 읽기 주저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알아야 면장을 한다. 알아야 또 당하지 않는다.
호~~잇! 2023-02-06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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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식민지시대의 전주곡
hershchocolate 2012-04-05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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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션샤인의 마지막회를 본 후 내친 김에 읽다. 대한제국에 대해 비교적 균형잡힌 시각의 교양서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구한말을 다루는 국사학이 빠지는 함정, ‘일본‘을 단일한 실체이자 적으로 간주해버면서, 구한말을 침략-저항 도식에 가둬버리는 것은 아쉽다.
생쥐스뜨 2018-10-06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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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이 좋습니다. 20세기 초반 대한제국기의 모습을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했습니다. 교양으로 보는 것은 물론, 전공서적으로 봐도 좋을 듯 합니다. 특히 다른 개론서에서 보기 어려운 일진회를 비교적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어 좋았습니다.
반구제기 2014-03-06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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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틀을 위하여
국가가 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또 특히 그 사회 내부에서 새로운 국가가 창출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국가에 의한 식민지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고, 사회에 어떤 변화․충격을 주는 것이었을까? 단순히 민족주의적 시각, 혹은 친일, 반일이라는 틀거리를 넘어서 그 순간의 일반 민중들의 ‘망탈리테’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던 것일까?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 식민지조선 체제가 성립된 역사에 대한 오래된 서술들은 그것을 충분히, 사회적 의미로 포착하지 못했다는 느낌을 준다. 과도한 민족주의적 시각으로만 접근하면서, 정언명제적인 사건으로 그 시기를 사고하게 만들면서 오히려 나와는 전연 무관한 일로 만들어 그러한 역사상을 감성으로 느끼는 것을 힘들게 만들었다고 할까? 즉, 과거로부터 무엇을 배우고자 한다면, 그 당대의 사람들에게 더욱 몰입하고 감정이입할 수 있는 역사서술의 축이 형성되어야 하지만, 기존 역사서술은 ‘지배’와 ‘저항’을 기본 골자로 하는 속에서 오히려 우리를 그 역사적 감각으로부터 격리시켜두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본서는 한편으로는 그러한 지난 역사 서술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작은 진전을 내포하고 있는 책이다.
이를 위해 저자가 제시한 틀은 ‘지배’와 ‘동화’다.
이 틀 속에서 저자는 기존에 뭉뚱거려 서술되었고, 그 논리의 위치지점, 혹은 맥락이 무시되어왔던 친일정치세력들의 흐름을 드러내고자 했다. 또 한편으로 그들과 친연성을 지녔던 애국계몽운동세력의 내용도 같이 살피고 있다. 그들이 단순히 ‘친일’이라는 사실이 애초부터 부여된 정체성이 아니라, 19세기 개화 이후, 공화정에 대한 논의가 좌절되고 충돌하는 과정 속에서 변화해갔던 양상을 드러냈다는 사실은 의미가 깊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저자의 이러한 틀은 이전 구도를 여전히 답습하고 있다. ‘지배’와 ‘저항’이라는 도식을 여전히 폐기한 것도 아니고, ‘지배’와 그에 부응하는 ‘동화’의 양상을 전보다 풍부히 했다는 정도만이 눈에 띈다. 일제라는 강력한 ‘악’의 축은 여전하며(물론 그들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할 이유는 없다), 또 그에 저항한 정치주체로서의 ‘고종’(물론 그 무능력함도 간간히 서술에서 드러난다.)도 건재하다.
새로운 듯하면서도 새롭지 못함. 서술의 다양함을 담아내는 듯하면서도 그 구도가 명백한 것은 이 시대에 다시금 러일전쟁부터 한일병합까지의 시기를 어떻게 의미있는 역사적 시대로 바라볼지에 대한 충분한 답을 못내리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20세기 한국사 시리즈에서 역시 특징적인 서술은 책 중간중간에 배치된 ‘스페셜테마’다. 전문적인 역사연구자들 사이의 논쟁적인 지점이나, 서술이 불충분한 내용들을 보충해나가는 배치는 매우 유용하다는 느낌이었다. 다만 조금 아쉬웠던 점은 ‘을사늑약’과 병합조약의 ‘유무효논쟁’과 관련된 부분이었다. 두 사안 모두 ‘국제법’적으로 조약이 성립하느냐 안 하느냐를 한국학자들과 일본학자들이 다투고 있는 사안들이다. 조약의 성립유무를 따지는 것도 중요할 수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법’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절대시하고, 그 틀에 벗어난 것을 비판하는게 유용한 틀인냥 접근하는 방식이 당시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오히려 허망하고, 어떤 의미를 발견하기 힘들지도 모르는 지점이라는 느낌이 든다. 불법적인 방식으로 조약을 ‘성립’시켰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은 집행되었고, 실제 역사 속에서 그 영향력을 발휘했다. 법이란 것은 약자들이 보기에는 ‘공정한 룰’처럼 보이지만, 그 실상은 ‘강자들의 정당화 논리’이며, 그렇게 사용되어왔던 사실 자체를 더욱 드러내주고, ‘법’ 마저도 상대화할 수 있는 역사적 시각을 이 사안들은 오히려 우리에게 던져줄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쟁의 구도는 ‘불법’이냐 아니냐라는 사실관계를 따지는듯한 구도로 빠져들면서 그것은 평행선만을 끊임없이 달리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다룬 ‘스페셜테마’조차도 다양한 시각, 풍부한 해석을 덧붙여주려는 느낌보다도 일본 역사학계에게 죄지우기 이상의 구도를 독자들에게 낫지 못할 공산이 크다.
20세기 한국사 시리즈는 어떻게 역사에 접근할 것인가?
기존의 정치사 영역을 중심으로 대한제국 멸망이라는 사태에 접근한다면, 현재까지 이루어졌던 구도를 탈피하고, 우리 자신에게 성찰의 칼날을 돌릴 수 있는 구도를 만들기 힘들 것이다. 자신에게 성찰의 칼날을 돌린다는 것은 ‘망국책임론’을 ‘우리 민족’에게 따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현재의 우리에게 ‘역사에 대한 경계심’을 끊임없이 환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더 이상 어떤 절대적 ‘악’의 존재로서 역사를 설명하기보다는, 너와 나와 다를 바 없는 나약한 존재들이, 혹은 욕망에 찬 존재들이 그 시대를 어떻게 살아갔고 이끌어 갔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그것이 이끌어냈던 사태를 비판하며, 현재의 우리에게 매질하는 방향.... 그것이 더욱 현재의 우리에게 요구되는 역사적 방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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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is123 2012-05-01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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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침략과 대한제국의 종말
국권피탈 100년을 맞이해 지난 2010년에는 한국 근현대사에 깊이 새겨진 일제 식민통치의 실상과 그 유산을 더듬어 보려는 노력들이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저자는 늘상 있었던 "망국 책임 논쟁과 틀에 박힌 반성" 이외에 특별한 연구사적 진전이 없었다고 진단하였다. 나아가 식민통치의 원인과 배경을 묻는 저자의 질문에 대해 대다수는 틀에 박힌 답변만을 내놓거나 피상적인 역사 상식만을 열거할 뿐, 원인에 대한 깊이 있는 반성과 성찰이 함께 하지 못한다고 지적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저자는 본 저서를 통해 망국으로 귀결되는 과정을 세밀하게 들여다 보고자 시도하였다. 이를 통해 병합 추진과정 속에 나타난 일본과 대한제국의 시행착오들을 언급하면서, 이들을 낱낱이 살필 때야 비로소 식민지화되는 과정이 갖는 의미를 파악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저자는 통감부와 대한제국 정부가 동시에 존재하는 이중 권력의 시대의 특수성을 감안하면서, '시정감독'의 명분을 내세운 일본이 어떻게 대한제국의 권력을 해체하고 잠식시켰는지 파악해 보고자 하였다. 또한 이러한 역사 전개의 중심에는 일 제국주의 권력만이 아니라, 고종, 개화지식인 등의 여러 세력들이 실재했고, 저자는 그들의 경합, 갈등 양상을 주요하게 다루고자 시도한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저자의 목적은 과연 책 전반에 잘 구현되었을까? 위의 서술의도가 책 전반에 걸쳐 반영되고 있기는 하지만, 서술의 비중은 일본의 침략과정 전반의 상술에 놓여져 있다. 아무래도 이 시기 권력 관계의 주요 축이었던 일본의 활동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대목이긴 하다. 그러나 기왕 저자가 책머리에 밝혔던 대로 근대 국민국가 형성을 위한 여러 정치세력들의 동향과 갈등이 실재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에 조금 더 신경을 썼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민씨 세력, 고종, 근위세력들, 문명개화론의 입장을 취했던 이들, 유교적 입장에서 시대변화를 읽고 대응하려 했던 이들 등 다양한 세력들은 각자의 정치적 지향은 물론 나아가 세계관의 근본적인 차이마저 드러나던 때가 바로 이 시기였다. 이들은 종래 어떠한 지적 경험과 사회적, 정치적 배경 속에서 자신들의 태도를 취하였는지 기존의 연구성과들을 통해서 보다 상세하게 설명해 줄 수 있지 않았을까. 결론 부분의 첫 문장대로 한국 근대사에서는 "근대적 정치 체제 형성을 둘러싼 민족 내부의 갈등과 일제의 국권 침탈 과정은 함께 맞물려 전개되었다". 이에 반해 본 저서에는 '국권 침탈 과정'에 관한 높은 비중에 비해 '근대적 정치 체제 형성'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고, 주요 세력끼리 '갈등'하는 양상만 초점을 두어 설명하는 한계가 엿보이기도 한다.
책 전반을 관통하는 개념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도 보다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가령 대한제국의 보호국 결정을 '평화조약'이라 명명하고 이를 주도한 루스벨트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한 것에 대해 저자는 아이러니라고 지적하였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당대의 맥락에서 '평화'라는 개념은 경제적 차원에서 국제 무역의 안정적인 보장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과 연관된 것이었다. 주요 강대국끼리 벌이는 대규모의 무력시위를 외교적 노력으로 중재하는 가운데 국지전의 발발은 용인하던 때가 19세기였고, 평화로운 영리활동의 보장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인식되었던 것이 당대의 '평화'임을 감안한다면 저자의 지적은 다분히 오늘날의 시선에서 평가한 것이고 그 때문에 다소 안이하지 않냐는 것이다. '신의'와 '공론'을 중시하는 유교적인 습속에 머물러 근대적 만국공법 체계에 대한 안이한 이해에 머물렀다는 당대 정치세력에 대한 비판 역시 더 설명해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일제에 병합당한 대한제국의 한계를 장기구조사적인 맥락에서 살펴볼 여지도 있음을 책머리에 저자가 밝혔던 것처럼, '신의'와 '공론'에 대한 '유교적 인식'이 무엇인지 그 인식이 유교적 세계인식의 일면적이고 단편적인 상에 지나지는 않는지 더 설명해볼 필요가 있다. 당시 유교적 '변통론'에 입각해 제국주의 국가들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으로까지 나아간 소위 '변법론자'들이 실재하였음을 감안한다면 유교인식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다른 실천으로 귀결될 수 있음을 지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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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or 2012-05-07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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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마지막
조선의 세도정치기(1800~1863)년에서 부터 1910년에 대한제국이 사라지고 1945년 해방하기까지의 기간은 한국민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상흔이다. 그러다 보니 나 스스로도 그렇고 다른 한국민들도 냉철하게 바라본다는 것은 쉽지 않을 일이다. 사람들은 일본제국주의와 무능한 대한제국을 욕한다. 나도 역시 그래왔으며, 아무런 시도도 못해보고 끝내버린 멍청이들도 여기고는 했었다. 거기에 더해 단순히 당시 일제의 압도적인 무력으로 강점을 당했다고 생각하기도 하였었고.
이 책을 읽고나서는 단순한 그러한 인식에 변화가 있었다. 단순히 일제의 압도적 무력으로 강점을 당한 것이 아니라, 대한제국내의 여러 세력들의 대립하는 사이를 파고들어 물리적 폭력과 함께 공작을 실시했던 것이다. 거기에 열강들을 호소하는 식으로 국권 수호 외교-만국공법을 단순히 유교적 세계관에서 존재하는 공론이니, 춘추대의적 성격으로 이상적으로 보는 등 현실인식에 한계를 보였지만-를 펼쳤지만 일정한 한계를 보였고, 헤이그 특사 파견은 고종 황제의 강제퇴위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순종황제가 즉위하고 얼마되지 않아 병합조약으로 대한제국은 마지막 숨을 멎는다. 얼마나 서글픈 일인지!...
고종과 근왕세력들. 기타 친일매국의 길을 걸었던 기득권 세력들에 대한 분노는 여전히 남아있지만, 이 책을 통하여 조금이나마 그들을 냉정하게 인식하고자 하는 인식이 싹튼 듯 하다. 이 시기에 대한 단순히 호불호가 아닌 정리된 인식틀을 가지는 것을 목표로 하여 관련 책을 읽어 나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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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13-03-14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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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종말 과정에 대한 정치사
저자는 ‘일제의 국권 침탈과 민족의 저항’이라는 인식틀이 한국 근대사 연구와 역사 교육에 자리 잡고 있는 점을 거론하면서 글을 시작하고 있다. 그런 인식 속에서 백 년 전 망국의 기억을 대물림한 채, 망국의 원인을 깊이 있게 따져보지 못했다는 데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저자는 궁극적으로 ‘왜’ 대한제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는지를 장기 구조사적으로 해명할 것을 제언하면서 우선 일제가 대한제국을 ‘어떻게’ 식민지화했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일제의 국권 침탈 과정 속에서 대한제국의 지배 세력이 보여준 정치적 동향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일제의 국권 침탈과 민족의 저항’의 틀 속에도 ‘저항’과 ‘동화’의 양 측면이 공존했던 정치사가 진행되었다는 결론이다.
저자가 서술의 방향을 제시한 것처럼 이 책에서는 첫째, 러일전쟁 이후 일본에 의한 ‘한일의정서’ 체결, 고문을 통한 내정 간섭, ‘을사늑약’ 체결, 통감부 설치와 내정 장악, 대한제국 병합 등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 과정을 세밀하게 소개하고 있다. 각종 조약과 협약의 내용들과 러시아와 미국 등의 입장을 소개하면서 일본이 국제 정세 속에서 어떻게 대한제국을 점령해갔는지 잘 묘사되어 있다. 둘째, 고종을 중심으로 대한제국 집권층이 국제법(만국공법) 인식 속에서 밀사외교의 전개와 국제사회에서의 구명을 호소하는 노력과 그 한계가 잘 서술되어 있다. 셋째, 국권 회복의 길목에서도 일제 통감부 세력에 저항했던 세력과 협력했던 세력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침탈-저항’과 저항의 이분법적 틀만이 아니라 대한제국 내의 ‘저항’과 ‘동화’의 양 측면도 보여줌으로써 민족 내부의 분열상을 드러내고, 병합으로의 과정을 묘사한 것이다. 넷째, 이와 함께 내용 중간 중간에 스페셜 테마를 통해 독자의 흥미를 끌 만하거나 그간 논쟁이 되었던 부분을 제시하였다. 특히 ‘을사늑약’의 유무효 논쟁이나 병합조약 무효론 등 강점의 불법성을 강조하는 모습이 보인다.
끝으로 저자는 근대 정치체제 형성을 둘러싼 민족 내부의 갈등과 일제의 국권 침탈 과정의 의미를 평가하고 있다. 대한제국의 각 정치세력들은 국권 상실의 직전까지도 자신들의 정치 참여 실현에 분주했고, 그들의 역량 미숙 속에 식민지화를 맞게 되었다. 스스로 참정권 획득의 역사적 경험을 갖지 못한 채 민족해방운동이 진행되었고, 해방 이후에도 한국사회의 과제는 근대 ‘민족’국가 수립의 문제로 환치되어버렸다고 한다. 여기서 일본 제국주의의 병합과 자발적인 시민 공동체 개념의 미형성이 현대 한국 정치의 미숙성을 낳았다고 결론짓고 있다.
이 책은 대한제국이 일제의 침략을 받아 멸망해가는 과정을 쉽게 묘사해주었다. 하지만 몇 가지 아쉬움도 남는다. 우선 병합의 과정을 ‘정치사’에 한정하여 설명하였다는 점이다. 역사문제연구소의 ‘20세기 한국사’ 시리즈 중 대한제국 시기에 정치사 이외에 다른 분야가 고려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일제의 침략은 정치·외교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사회경제적·문화적 침투 역시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한 점들이 종합적으로 고려되면서 병합의 원인과 과정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고종의 생각과 대응만이 지나치게 많이 고려된 것은 아닐까? 특히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한 외교사, 외교정책의 비중이 큰데, 거기서도 고종의 활동으로 서술되고 있다. 기왕에 정치사에 주목한다면 당시 지배층이나, 지식인들의 인식을 함께 다루면서 국권 침탈의 과정에서 그들의 대응과 한계를 동시에 다루고, 나아가 의병전쟁 등 일반 민중층의 대응도 좀 더 부각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끝으로 참고문헌이 책 말미에 소개되어 있는데, 본문 중에서 서술의 근거가 제시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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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twmaha 2012-05-09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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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정치사에 대한 대중서
역비의 <20세기 한국사> 시리즈 신간이 출간되었다. <일제 침략과 대한제국의 종말>, 이번에는 대한제국 시기이다. 기존 5권의 시리즈가 출간되는 동안 정태헌 선생의 <문답으로 읽는 20세기 한국경제사>를 제외하면 모두 해방 이후의 현대사였기에, 이번 신간은 근대사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 더욱 반가울 것 같다.
저자는 대한제국 정치사를 전공한 서영희 선생이다. 선생이 박사학위 논문부터 꾸준히 천착해왔던 주제이니 만큼 이 주제의 대중서를 집필하기에 가장 적합한 분 중에 한 분이리라 생각한다. 실제 내용 역시 편안히 읽히면서도 중간 중간 좀 더 깊은 주제를 다룬 스페셜 테마가 적절히 조화를 이룬 느낌이다.
책머리의 부제는 ‘망국 책임론을 넘어서’이다. 책의 기본 문제의식을 말해준다. 우리는 대한제국 시기의 정치사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1904년 한일의정서 고문정치, 1905년 을사조약 외교권 강탈, 1907년 한일신협약 차관정치 식으로 주요 사건을 기계적으로 암기하고 있진 않았을까. 혹 그 와중에 대한제국의 역사를 점차 국권을 상실해가는 망국의 역사로만 치부해버리진 않았을까. 저자는 이와 같은 모든 선입견을 비판한다. 식민지화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서도, 그럼으로써 보다 엄정한 시각으로 이 시기의 역사를 가늠하기 위해서도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에 대한 이해는 필요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저자는 이 시기 대한제국이 구체적으로 어떤 정치적 변동을 겪었는지를 중점을 두어 서술했다. 일제 통감부는 대한제국의 저항과 대응에 따라 어떤 식으로 통치권을 장악해갔는지, 고종과 근왕 세력은 당면한 위기를 어떻게 인식하고 대처하고자 했는지, 그 외에 친일 내각이나 일부 개화 정객, 권력 지향적 계몽운동 세력들은 병합과 자치 사이에서 어떤 행보를 보였는지 등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좀 더 역동적이고 절절한 대한제국의 역사상을 그려내고 있다. 교과서 수준의 지식을 넘어, 이 시기 역사에 좀 더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다만 다소 아쉬운 점을 지적하자면 저자는 책머리에서 일제를 포함한 각 정치주체의 동향을 서술하겠다고 밝히고 있으나 상대적으로 고종과 일제, 두 주체의 서술에 집중된 감이 없지 않다. 예컨대 이 시기 국내 정치세력이 어떻게 나뉘어 있었는지, 反고종 세력 중 양반 가문과 하층민의 신분적 구성·구별은 어떻게 되는지 등에 대해 이 책만 읽어서는 정확히 이해하기가 어렵다. 병합 직전의 동향은 서술되고 있지만 단지 표면상의 동향을 정리하고 있다는 느낌이며 고종에 대한 서술처럼 행위의 배경과 목적, 과정 등을 아우르고 있지는 않다. 또한 대중서이지만 내용 이해를 위해 중요한 용어들은 간략하게라도 부가설명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 146쪽, 이완용에 대해 정동파라는 설명이 예이다. 정동파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구성 인물은 누구이며 어떤 성향인지 등이 간략히 추가된다면 이 시기 정치세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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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terfjj 2012-05-05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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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희 저자의 <일제 침략과 대한제국의 종말: 러일전쟁에서 한일병합까지>에 대한 요약과 평론입니다.
<일제 침략과 대한제국의 종말: 러일전쟁에서 한일병합까지> 요약 및 평론
1. 도서 핵심 요약
서영희의 <일제 침략과 대한제국의 종말>(2012)은 1904년 러일전쟁 발발부터 1910년 한일병합에 이르기까지 6년 남짓한 짧은 기간 동안, 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해 가는 세밀한 정황과 이에 대응한 대한제국 황실 및 사회 각층의 역학 관계를 집중적으로 규명한 역사서다. 저자는 일제의 침략 과정이 단선적인 강점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계산된 단계적 수탈과 외교적 고립 작전을 통해 완성되었음을 역사적 사료를 바탕으로 실증한다.
책의 서술은 크게 세 가지 핵심 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첫째, 러일전쟁과 일제의 국권 침탈 공세다. 일제는 러일전쟁을 일으킴과 동시에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여 한반도를 군사 기지화했다. 이어 제1차 한일협약을 통해 고문 정치를 실시하고 금융·외교권을 침탈하기 시작했다. 저자는 일제가 러일전쟁이라는 국제적 대립 구도를 극도로 활용하여 열강(미국·영국 등)과의 밀약을 맺고,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국제적으로 승인받는 외교적 침략 과정을 치밀하게 파헤친다.
둘째, 고종 황제와 대한제국 정부의 저항 및 한계다. 저자는 고종을 무능하거나 소극적인 군주로만 바라보던 기존의 단편적 시각을 뛰어넘는다. 고종은 을사늑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는 등 사태를 반전시키기 위해 다각도의 친서 외교와 비밀 공작을 펼쳤다. 그러나 대한제국 황실의 저항은 국제정세의 냉혹한 현평형 구도를 깨뜨리지 못했고, 결국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이라는 치명적인 침탈로 이어지게 되었다.
셋째, 사회적 저항 노선의 분화와 국가의 종말이다. 국권 상실의 위기 속에서 한국 사회 내부의 대응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하나는 정미의병으로 대표되는 민중의 격렬한 무장 투쟁이었고, 다른 하나는 교육과 산업을 통한 장기적 실력 양성을 주장한 애국계몽운동이었다. 저자는 두 노선이 일제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 일정한 연대를 이루기도 했으나, 침략의 속도를 압도하지 못하고 결국 1910년 경술국치라는 비극적 종말을 맞이하는 과정을 감정적 토로를 배제한 채 객관적으로 추적한다.
결국 이 책은 대한제국의 종말이 내부의 자멸이나 단순한 국력 차이 때문만이 아니라, 일제의 다각적인 공작과 국제정세의 냉혹함, 그리고 내부적 대응의 구조적 한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음을 입증한다.
2. 평론: 침략의 미시적 매커니즘과 비극의 실증적 복원
서영희의 <일제 침략과 대한제국의 종말>은 한국 근대사 연구에서 가장 격동적이고 비극적이었던 6년의 시간을 미시적이면서도 정교한 시각으로 복원해 낸 수작이다.
이 책이 지닌 가장 큰 학술적 가치는 침략과 저항의 과정을 단선적인 구도(가해자 vs 피해자)로만 처리하지 않고, 침략의 미시적 메커니즘을 치밀하게 분석했다는 점에 있다. 일제가 법적·제도적 외피를 씌워가며 단계적으로 국권을 침탈해 간 수법(고문 정치 -> 통감부 설치 -> 정미7조약 -> 군대 해산 -> 경찰권 박탈 -> 강제 병합)을 조목조목 짚어냄으로써, 일제가 주장해 온 '합법적 병합'이라는 논리의 허구성을 명확히 파헤친다. 저자의 서술은 사료에 철저히 기반하여 논리적 격조를 유지함으로써 강력한 학술적 설득력을 확보한다.
또한 고종과 대한제국 지도부에 대한 입체적 재평가 역시 돋보인다. 그동안 역사는 고종을 '무능한 전제 군주' 혹은 '비운의 피동적 인물'이라는 극단적 양상으로 재현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저자는 고종이 행한 외교적·정치적 모색의 구체적 맥락을 복원해냄으로써, 그가 가진 한계(열강에 대한 과도한 의존, 근명한 정세 판단의 부재)와 더불어 식민지화를 막기 위해 벌였던 고군분투를 균형 있게 조명한다. 이를 통해 대한제국의 종말이 단순한 '무대응의 자멸'이 아닌, 국제 정치의 서구 중심적 현실주의와 일제의 침략성이 빚어낸 역사적 비극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다만, 1904년부터 1910년이라는 지극히 집중된 시기를 조명하다 보니, 대한제국 내부의 사회·경제적 구조 변화나 기저에 흐르던 민중들의 삶의 조건에 대한 거시적 서술은 상대적으로 적다. 정치사와 외교사 중심의 서술 구조로 인해, 일반 대중에게는 다소 건조하거나 정치 문서들의 행간을 읽어내는 데 집중력이 요구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대한제국이라는 국가가 왜, 그리고 어떻게 붕괴했는가를 가장 정밀하게 보여주는 역사서다. 과거의 비극을 감정적 분노가 아닌 차가운 이성과 역사적 사료로 직시하게 만듦으로써, 오늘날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패권 다툼과 외교적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유의미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일제 침략과 대한제국의 종말―러일전쟁에서 한일병합까지>
요약 평론
서영희의 <일제 침략과 대한제국의 종말―러일전쟁에서 한일병합까지>는 1904년 러일전쟁 발발에서 1910년 한일병합에 이르는 약 7년 동안 대한제국의 국권이 어떤 과정을 거쳐 단계적으로 해체되었는지를 추적한 책이다. 이 책은 역사비평사가 펴낸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20세기 한국사> 시리즈의 한 권으로, 초판은 2014년이 아니라 2012년에 출간되었다.
책의 핵심 질문은 흔히 제기되는 <대한제국은 왜 망했는가>가 아니다. 저자는 그보다 먼저 <대한제국은 어떻게 망했는가>를 구체적으로 살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망국의 원인을 민족성, 지도자의 무능, 조선왕조의 낙후성 같은 추상적 설명으로 돌리면 역사가 운명론이나 자기비하로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의 멸망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일본이 군사력, 외교, 재정, 행정, 사법, 경찰을 차례로 장악하면서 국가의 주권을 해체해 간 과정이었다.
- 러일전쟁과 대한제국의 중립 붕괴
1904년 러일전쟁은 대한제국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바꾸었다. 대한제국은 전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국외중립을 선언했지만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한반도에 군대를 진주시켰다. 일본군은 서울을 점령한 상태에서 대한제국 정부에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했다.
한일의정서는 일본이 군사상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지역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형식상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의 협약이었지만 실제로는 군사점령 아래에서 체결된 강제조약이었다. 이때부터 대한제국은 자국 영토 안에 주둔한 일본군을 통제하지 못하는 국가가 되었다.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는 동안 대한제국을 군사적 병참기지로 이용했다. 철도와 전신망을 장악하고 토지를 수용했으며, 일본군의 필요에 따라 사람과 물자를 동원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기 전부터 대한제국의 주권은 이미 심각하게 제한되고 있었다.
서영희는 한일병합의 출발점을 1910년이 아니라 1904년으로 본다. 병합은 마지막 법적 절차였을 뿐, 실질적인 식민지화는 러일전쟁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 고문정치와 국가기구의 해체
일본은 군사적 점령에 이어 대한제국 정부 내부에 일본인 고문을 파견했다. 재정고문 메가타 다네타로와 외교고문 스티븐스 등이 대표적이다. 일본은 이를 대한제국의 행정과 재정을 개선하기 위한 ‘시정개선’이라고 선전했지만, 실제 목적은 대한제국 정부의 자율성을 없애는 것이었다.
메가타가 주도한 화폐정리사업은 낡은 화폐제도를 정비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화폐 교환과 금융 재편 과정에서 많은 한국인 상인과 금융업자가 피해를 보았고, 일본 금융기관이 대한제국의 금융을 장악했다.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 차관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재정 주권을 잃어갔다.
일본은 정부기구도 축소했다. 군사, 외교, 재정과 관련된 기관의 기능을 약화하고 황실 재산과 국가 재정을 분리한다는 명목으로 황제의 경제적 기반을 해체했다. 대한제국은 형식적으로는 독립국이었지만 스스로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할 능력을 잃어갔다.
이 과정은 일본이 근대적 제도를 이식해 대한제국을 개혁했다는 주장과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일본의 ‘개혁’은 대한제국을 강한 근대국가로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저항할 수 없는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한 행정적 해체였다.
- 국제정치와 을사늑약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국제사회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미국과 일본 사이의 가쓰라·태프트 밀약, 영일동맹의 갱신, 러일전쟁을 종결한 포츠머스조약은 강대국들이 서로의 식민지와 세력권을 인정하는 제국주의 외교의 산물이었다.
미국은 필리핀 지배를 일본으로부터 인정받는 대신 일본의 한국 지배를 용인했다.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일본과 협력했다. 러시아는 전쟁에서 패배한 뒤 한국 문제에서 후퇴했다. 대한제국의 운명은 당사자인 한국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강대국 사이의 협상 대상으로 처리되었다.
1905년 일본은 대한제국에 을사늑약을 강요했다. 고종은 조약에 서명하지 않았고 국새도 찍지 않았다. 일본군이 궁궐과 도성을 장악한 가운데 이토 히로부미는 대신들을 위협해 동의를 받아냈다. 이에 따라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빼앗기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책은 을사늑약이 정상적인 국제조약이 아니라 군사적 강압에 의해 체결된 불법적 조약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당시에도 조약의 절차와 효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을 써 조약 체결을 규탄했고, 민영환·조병세 등은 죽음으로 항거했다.
그러나 저자는 을사늑약의 책임을 이른바 을사오적 몇 사람에게만 돌리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고 본다.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 대신들의 책임은 분명하지만, 조약을 강요한 주체는 일본제국이었다. 을사늑약은 몇몇 매국노의 배신만으로 성립한 것이 아니라 일본군의 점령과 강대국들의 묵인 속에서 이루어진 국가적 침략이었다.
- 고종의 외교적 저항과 그 한계
을사늑약 이후 고종은 조약이 자신의 승인을 받지 않았음을 국제사회에 알리려고 했다. 외국 군주와 외교관들에게 친서를 보내고 미국과 러시아 등 열강의 개입을 요청했다. 1907년에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했다.
헤이그 특사들은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음을 알리고 대한제국의 독립을 호소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와 열강의 외면 때문에 회의장에 공식적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열강은 대한제국의 법적 호소보다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헤이그 특사 파견은 외교적으로 성공하지 못했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 지위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며, 황제와 정부 일부가 끝까지 외교권 회복을 시도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다만 고종의 외교는 지나치게 열강의 도움에 의존했다. 국제사회가 정의나 국제법에 따라 대한제국을 구해줄 것이라는 기대는 제국주의 시대의 현실과 맞지 않았다. 당시 국제질서는 약소국의 주권보다 강대국의 군사력과 이해관계를 우선했다.
고종은 일본의 침략에 저항했지만 국내 개혁세력과 민중의 정치적 역량을 충분히 결집하지 못했다. 황제 중심의 비밀외교는 제한된 선택지였으며, 국가 전체를 움직이는 공개적이고 조직적인 저항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 통감부와 대한제국 정부의 무력화
을사늑약 이후 일본은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으로 파견했다. 통감부는 외교권만 관리하는 기관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내정 전반을 지배하는 식민통치의 전 단계였다.
이토는 겉으로는 당장 병합할 의도가 없으며 대한제국의 자치 능력을 키우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 정책은 정부기관을 축소하고 일본인 관리와 고문을 각 부처에 배치하며 황제와 대신들의 권한을 약화하는 것이었다. 통감부는 대한제국의 행정을 직접 통제하면서 국가의 독자적인 정책결정 구조를 파괴했다.
고종이 통감부의 지시를 거부하거나 외교적 저항을 시도하자 일본은 황제권을 가장 큰 장애물로 판단했다.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1907년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이어 체결된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 정부는 법령 제정과 고위관리 임명에서도 통감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일본인 차관들이 각 부처에 들어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대한제국 정부는 이름만 남은 행정기관으로 전락했다.
- 군대 해산과 의병전쟁
1907년 일본은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했다. 군대는 국가주권의 핵심이었기 때문에 군대 해산은 대한제국이 독립국가로서 마지막으로 보유하고 있던 물리적 기반을 없애는 조치였다.
서울의 시위대 장교 박승환은 군대 해산 명령에 항의해 자결했다. 이를 계기로 해산 군인들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일부 군인은 지방 의병부대에 합류했다. 군사훈련을 받은 병사들이 참여하면서 의병운동은 이전보다 조직적인 전쟁 형태로 발전했다.
이 시기의 의병은 유생이나 농민뿐 아니라 해산 군인, 포수, 평민 등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일본군과 헌병대, 친일 관리와 일진회 등을 공격했다. 1908년에는 전국의 의병이 서울로 진격하려는 13도 창의군을 조직하기도 했다.
일본은 의병을 ‘폭도’라고 규정하고 대규모 토벌작전을 벌였다.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처형하며 의병과 민간인의 관계를 차단했다. 의병은 무기와 조직, 보급 면에서 일본군을 이기기 어려웠지만 대한제국 병합이 아무런 저항 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서영희는 이 운동을 단순한 봉건적 복벽운동이 아니라 국권을 지키기 위한 민중의 전쟁으로 평가한다. 특히 군대 해산 이후 의병전쟁은 대한제국이라는 국가의 저항이 민중의 무장투쟁으로 이어지는 과정이었다.
- 계몽운동과 국권회복론
의병이 무장투쟁을 선택한 반면 애국계몽운동가들은 교육, 산업, 언론을 통해 민족의 역량을 키우려 했다.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 같은 단체가 조직되었고 학교 설립, 민족산업 육성, 국채보상운동 등이 전개되었다.
계몽운동가들은 대한제국이 국력을 잃은 근본 원인을 국민의 교육 부족과 경제적 취약성에서 찾았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실력을 양성해야 독립을 회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활동은 근대적 국민의식과 시민사회를 성장시키는 데 기여했다. 특히 신민회는 공화주의적 독립국가 건설을 구상하고 해외에 독립군 기지를 세우려 했다.
그러나 계몽운동에도 한계가 있었다. 일부 계몽운동가는 의병투쟁을 시대에 뒤떨어진 행동으로 보았고, 일본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 실력양성이 실제 독립투쟁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식민지배에 적응하는 논리로 바뀔 위험도 있었다.
따라서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은 서로 완전히 대립한 운동이라기보다 국권회복을 위한 서로 다른 전략이었다. 하나는 즉각적인 무장저항을, 다른 하나는 장기적인 민족역량의 축적을 중시했다. 이후 독립운동은 이 두 흐름을 모두 계승했다.
- 안중근과 동양평화론
1909년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안중근은 이토를 개인적으로 증오해서 공격한 것이 아니라 대한제국 침략과 동양평화 파괴에 책임이 있는 전쟁범죄자로 판단했다.
안중근의 사상에서 중요한 것은 <동양평화론>이다. 그는 한국, 중국, 일본이 서양 제국주의에 맞서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고 중국을 위협함으로써 동양의 평화를 깨뜨렸다고 보았다.
그의 동양평화론은 일본 국민 전체를 적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침략정책을 추진하는 일본제국주의 지도부와 일본 민중을 구분했다. 이는 민족적 복수보다 국제적 정의와 평화질서를 추구한 사상이었다.
안중근의 의거는 대한제국 말기 저항운동의 절정을 상징한다. 국권을 잃어가는 상황에서도 한국인은 단순히 피해자로 남지 않고 동아시아의 새로운 평화질서를 구상했다.
- 한일병합과 대한제국의 종말
1909년 이후 일본은 사법권과 감옥 업무를 장악했고, 1910년에는 경찰권까지 빼앗았다. 대한제국 정부의 주요 기관에는 일본인 관리가 배치되었다. 행정·재정·외교·군사·사법·경찰을 모두 장악한 뒤 일본은 마지막으로 병합 절차를 밟았다. 이 책은 군사점령에서 보호국화, 통감부 지배, 정부 장악, 병합으로 이어진 국권 해체의 단계를 세밀하게 보여준다.
1910년 8월 이완용과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했다. 순종은 조약 체결 과정에서 실질적인 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일본은 병합이 양국 황제의 합의에 따른 평화적 조치라고 선전했지만, 그것은 이미 군대와 정부기관을 장악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강제병합이었다.
병합 뒤 대한제국은 사라지고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었다. 통감부를 중심으로 준비해 온 보호국 통치는 총독부의 직접 식민통치로 전환되었다.
- 평론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대한제국의 멸망을 단순히 <일본의 침략과 한국인의 저항>이라는 도식으로만 설명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일본이 어떤 제도와 절차를 이용해 대한제국의 주권을 단계적으로 해체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일본의 침략은 군사적 폭력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조약, 차관, 고문관, 행정개혁, 화폐정리, 국제법과 같은 근대적 제도와 언어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일본은 침략을 ‘개혁’, 지배를 ‘보호’, 주권 침탈을 ‘시정개선’으로 포장했다. 이 때문에 대한제국의 멸망은 전통국가가 근대국가에 단순히 패배한 사건이 아니라, 한 근대 제국이 근대적 제도와 군사력을 결합해 약소국을 해체한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
두 번째 장점은 대한제국을 완전히 무능하고 수동적인 국가로 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종의 비밀외교, 헤이그 특사 파견,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은 대한제국과 한국인이 국권 상실에 저항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서술은 일본의 한국 병합이 한국인의 동의나 역사적 필연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식민주의적 설명을 반박한다.
그러나 저자는 대한제국 내부의 한계도 외면하지 않는다. 황제권에 집중된 정치구조, 취약한 재정과 군사력, 관료사회의 부패와 분열, 제한된 대중 참여는 국가적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렵게 했다. 고종은 자주독립을 지키려고 했지만 황제권 강화와 국가의 독립을 지나치게 동일시했다. 의회와 시민의 참여를 확대하여 국가적 저항 역량을 결집하지 못했다.
다만 대한제국의 내부적 한계를 일본 침략의 원인으로 바꾸어 말해서는 안 된다. 국가가 약했다고 해서 침략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병합은 대한제국이 개혁에 실패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일어난 결과가 아니라 일본제국이 군사력과 국제정치를 이용해 의도적으로 추진한 침략이었다.
이 책은 또한 국제법의 한계를 보여준다. 대한제국은 만국공법과 조약의 정당성에 호소했지만 당시 국제법은 모든 국가의 평등을 실질적으로 보장하지 않았다. 강대국은 자신의 이익에 따라 약소국의 주권을 인정하거나 포기했다. 법은 힘을 통제하기보다 힘의 관계를 합법화하는 도구가 되기도 했다.
이 점에서 대한제국의 종말은 오늘날에도 의미가 있다. 국제사회가 법과 규칙으로 운영된다고 하더라도 군사력과 경제력의 불균형이 크면 약소국의 권리는 쉽게 희생될 수 있다. 국제법만을 신뢰하는 것과 군사력만을 숭배하는 것 모두 위험하다. 국가의 자주성은 외교, 국내 민주주의, 경제적 기반, 시민사회의 역량과 주변국과의 평화체제가 함께 뒷받침해야 유지될 수 있다.
종합하면 <일제 침략과 대한제국의 종말>은 대한제국이 망한 이유를 몇몇 인물의 무능이나 배신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일본의 군사적 침략, 제국주의 열강의 묵인, 대한제국의 구조적 취약성, 정치세력의 분열과 제한된 국민 참여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요인들의 책임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국권을 강제로 빼앗은 일차적 책임은 일본제국에 있다. 대한제국의 약점은 침략이 성공할 수 있었던 조건이지 침략의 도덕적·법적 책임을 나누어 갖게 하는 근거가 아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 책은 한일병합을 1910년에 갑자기 체결된 하나의 조약이 아니라,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군사·외교·재정·행정·사법·경찰권을 차례로 빼앗아 대한제국을 국가로서 기능할 수 없게 만든 <단계적 주권 해체 과정>으로 복원한 역사서다.
세진님, 요청하신 서영희 저자의 <일제 침략과 대한제국의 종말>(1904~1910년의 러일전쟁 및 국권 침탈기)에서 다룬 시기와 주제에 대하여 일본 학계 및 지식인 사회에서 형성된 4가지 시각에 대한 정리입니다.
러일전쟁~한일병합(1904~1910)에 대한 일본의 시각적 지형
1] 제국 일본의 메인스트림 시각 (전전 침략·제국주의적 관점)
전전(戰前) 제국 일본의 관관(관학자) 및 메인스트림 사학(도쿄제국대학 중심의 이치무라 산지로, 아사카와 카난 등)은 일제의 국권 침탈을 '동아시아 평화 확보'와 '조선의 정체성(停滯性) 극복을 위한 문명화'라는 논리로 정당화했다.
문명화론과 정체성론: 대한제국은 스스로 근대화를 이룰 능력이 없는 부패하고 정체된 국가이며, 일본의 보호와 병합이야말로 조선을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고 문명화하는 길이라 주장했다.
시혜적 병합 및 합법성 강조: 러일전쟁을 '아시아를 서구의 위협으로부터 구한 정당한 전쟁'으로 규정하고, 을사늑약과 한일병합을 양국 간의 합법적 계약이자 조선에 시혜를 베푼 사건으로 포장했다. 고종의 저항이나 의병 투쟁은 '시대착오적인 폭도들의 반란'으로 비하했다.
2] 제국 일본 시대의 맑스주의적 역사학의 시각 (전전 비판적 관점)
1920~30년대 야마카와 히토시, 노로 에이타로 등의 자산가치/강좌파 맑스주의자들과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은 메인스트림의 제국주의 논리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천황제 파시즘과 제국주의 침략 비판: 러일전쟁과 한일병합을 일본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른 '원시적 축적' 및 '식민지 수탈'의 과정으로 분석했다. 대한제국의 종말은 자본주의 자화 과정에서 발생한 제국주의적 침략의 결과로 보았다.
연대적 시각의 한계와 저항 인정: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한국 민중의 의병 투쟁과 국권 회복 운동을 피압박 민족의 정당한 저항으로 평가했다. 다만 당시의 가혹한 탄압(치안유지법 등)으로 인해 이러한 시각은 학술적·정치적으로 철저히 탄압받아 대중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웠다.
3] 전후 일본의 메인스트림 시각 (보수·자유주의적 학풍 및 신우익의 재평가)
1945년 패전 이후 일본의 메인스트림(보수 성향 사학자 및 정치학자, 예: 호소야 치히로, 구라치 사토시 등)은 전전의 노골적인 제국주의 찬양은 철회했으나, '국제정치적 불가피성'과 '식민지 근대화론'을 중심으로 논리를 재편했다.
국제정치적 현실론: 러일전쟁과 대한제국 병합을 당시 열강의 힘의 논리 속에서 일본이 생존하기 위해 선택한 '어쩔 수 없는 외교적·군사적 선택'이었다고 설명한다.
합법성 및 성과 강조 (식민지 근대화론): 병합 과정의 강제성을 일부 인정하면서도, 병합 조약 자체는 당시 국제법상 유효했다는 주장을 유지한다. 또한 대한제국 시기의 혼란을 정리하고 철도·법제·교육 등 근대적 인프라를 구축했다는 점을 강조하여 침략의 비극성을 희석하는 경향이 강하다.
4] 전후 일본의 맑스주의적, 또는 비판적 시각 (진보적 역사학 및 맘오카 학풍)
하타다 타카시, 와다 하루키, 가와무라 미나토, 그리고 '역사학연구회'를 중심으로 한 전후 일본의 진보적·맑스주의 학자들은 일제의 대한제국 국권 침탈 과정을 '가해의 역사'이자 '불법적 침략'으로 엄격하게 규명했다.
강제성과 불법성 입증: 을사늑약과 한일병합 과정에서 행사된 군사적 위협과 강제성을 사료를 통해 입증하며, 조약 자체가 무효이거나 심각한 불법성을 띠고 있었음을 자국 학계 내에서 적극적으로 고발했다.
고종과 의병 투쟁의 주체적 평가: 서영희 저자의 관점과 유사하게, 고종의 외교적 저항(헤이그 특사 등)과 정미의병을 비롯한 민중의 무장 투쟁을 '식민지화에 맞선 정당하고 주체적인 민족 운동'으로 높이 평가했다.
과거사 청산의 책임 강조: 러일전쟁에서 한일병합으로 이어지는 6년의 과정이 이후 35년간의 식민지 수탈과 전쟁 범죄의 원형이 되었다고 보며, 일본 정부의 성찰과 책임 있는 과거사 청산을 촉구해 왔다.
아래에서는 서영희의 <일제 침략과 대한제국의 종말>이 다루는 1904~1910년을 중심으로, 일본에서 형성된 역사해석을 네 흐름으로 나누어 보겠습니다. 여기서 ‘메인스트림’은 당시 또는 해당 시대 일본의 국가·대학·언론에서 가장 널리 통용된 설명을 뜻합니다. 각 흐름 내부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으며, 특히 전후 일본 역사학은 하나의 통일된 견해로 묶기 어렵습니다.
<대한제국 멸망과 한국병합을 바라본 일본 역사학의 네 가지 시각>
서영희의 <일제 침략과 대한제국의 종말>은 대한제국의 멸망을 내부적 무능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라, 일본이 러일전쟁을 계기로 군사·외교·재정·행정·사법·경찰권을 차례로 장악하여 주권국가를 해체한 과정으로 본다. 이와 같은 시각은 오늘날 한국 근대사 연구에서는 대체로 받아들여지지만, 일본에서는 시대와 사상적 입장에 따라 매우 다른 설명이 제시되어 왔다.
그 차이는 다음의 질문을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달려 있다.
<대한제국은 스스로 붕괴했는가, 일본에 의해 해체되었는가?>
<일본의 지배는 침략이었는가, 보호와 근대화였는가?>
<을사늑약과 병합조약은 합법이었는가?>
<한국인은 일본 지배를 받아들였는가, 지속적으로 저항했는가?>
- 제국 일본의 메인스트림 시각
<기본 논리: 한국은 자립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일본의 보호와 병합이 불가피했다>
전전 일본의 공식적 설명은 한국병합을 침략이 아니라 ‘합방’ 또는 ‘병합’으로 불렀다. 대한제국은 정치적으로 부패하고 경제적으로 낙후했으며 외교적으로 무능한 국가였기 때문에,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려면 일본이 한국을 보호해야 했다는 논리였다.
이 시각에는 세 가지 핵심 주장이 있었다.
첫째, 대한제국은 독립국가로 존속할 능력이 없었다고 보았다. 일본의 정치가와 관료들은 대한제국의 당쟁, 관료 부패, 재정 혼란, 군사력 부족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고종은 개혁보다 황제권 유지에 집착하고 열강 사이에서 기회주의적 외교를 벌인 군주로 묘사되었다.
둘째, 일본의 한국 지배는 러시아의 위협에서 한국을 구한 조치라고 주장했다. 러일전쟁은 일본의 제국주의 전쟁이 아니라 아시아를 러시아로부터 지킨 ‘자위전쟁’으로 설명되었다. 한국의 중립선언을 무시하고 일본군이 한반도를 점령한 사실은 군사적 필요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로 정당화되었다.
셋째, 보호국화와 병합은 한국인의 동의 아래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을사늑약, 정미7조약, 한일병합조약은 국가 간에 정식으로 체결된 조약으로 서술되었다. 군사적 협박과 황제의 비준 부재, 조약 체결 절차의 결함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을 즉시 병합하려 한 침략자가 아니라, 점진적인 개혁과 보호정치를 추구한 온건한 정치가로 묘사되었다. 일본의 공식 서사는 이토가 한국의 독립을 존중하려 했지만 고종의 방해, 한국 관료의 부패, 의병의 폭력 때문에 결국 병합이 불가피해졌다고 설명했다.
의병은 국권을 지키려는 저항세력이 아니라 ‘폭도’로 불렸다. 일본군의 의병 토벌은 식민지 전쟁이 아니라 치안 유지로 기록되었다. 안중근도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이토를 암살한 범죄자로 취급되었다.
이러한 역사관은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역사 편찬에서도 체계화되었다. 조선사편수회가 편찬한 방대한 <조선사>는 많은 사료를 수집·정리했다는 학술적 의미가 있었지만, 한국사의 발전을 정체와 분열의 역사로 보고 일본 지배를 그 귀결처럼 설명하는 식민주의적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
전전의 제국주의 역사학은 한국사의 특징을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 <정치적 당쟁과 분열>
-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 <자주적 근대화 능력의 결여>
- <강력한 국가와 시민사회의 부재>
- <일본의 지도에 의한 근대화의 필요>
결국 제국 일본의 메인스트림 시각에서 병합은 일본이 한국을 파괴한 사건이 아니라, 이미 붕괴하고 있던 한국을 일본제국의 질서 안에 편입한 사건이었다.
이 해석의 가장 큰 문제는 일본의 군사적 강제를 지워버렸다는 데 있다. 대한제국이 약했다는 사실과 일본이 그 국가를 침략했다는 사실은 별개의 문제다. 그러나 제국주의 역사학은 대한제국의 약점을 일본 침략의 원인이자 정당화 근거로 바꾸었다.
- 제국 일본 시대의 맑스주의적 역사학
<기본 논리: 한국병합은 일본 자본주의와 천황제 국가가 추진한 제국주의적 팽창이었다>
1920~30년대 일본의 맑스주의자들은 메이지 일본을 자유롭고 민주적인 근대국가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 자본주의가 지주제, 천황제, 군국주의와 결합한 특수한 체제이며, 국내 노동자와 농민을 억압하는 동시에 조선·대만·중국을 침략했다고 분석했다.
강좌파와 노농파는 메이지유신과 일본 자본주의의 성격을 두고 논쟁했다. 강좌파는 메이지유신 이후에도 봉건적 지주제와 천황제 절대주의가 남아 있다고 보았다. 노농파는 메이지유신을 불완전하지만 부르주아혁명으로 보고 일본이 이미 자본주의 국가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두 계열의 차이는 컸지만, 일본의 대외팽창을 자본주의 발전 및 국가권력과 연결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었다. 강좌파와 노농파가 일본 자본주의의 성격과 혁명단계를 둘러싸고 논쟁했다는 점은 일본 사회경제사 연구의 중요한 배경이다.
맑스주의 시각에서 러일전쟁은 ‘조국방위전쟁’이 아니라 일본과 러시아 두 제국이 만주와 한반도의 지배권을 놓고 벌인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일본의 한국 보호국화와 병합도 동양평화나 한국 개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시장, 자원, 투자처와 군사적 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팽창으로 해석되었다.
이 관점은 제국 일본의 공식 역사관과 분명히 달랐다.
공식 역사관이 <일본 대 러시아>의 문명적 대결을 강조했다면, 맑스주의자는 <일본과 러시아 제국주의 사이의 경쟁>으로 보았다.
공식 역사관이 한국인을 보호 대상으로 보았다면, 맑스주의자는 조선 민중을 일본 제국주의와 지주·자본가의 이중 억압을 받는 피지배 대중으로 보았다.
공식 역사관이 의병을 폭도라고 불렀다면, 맑스주의적 해석은 의병과 3·1운동을 민족해방운동으로 평가할 가능성을 열었다.
그러나 전전 일본 맑스주의 역사학의 한계도 분명하다.
첫째, 일본 자본주의의 발전단계와 일본혁명의 전략에 관심이 집중되어 한국사를 독자적인 역사로 깊이 연구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 조선은 일본 자본주의의 식민지 팽창을 입증하는 사례로 다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둘째, 민족문제를 계급문제에 종속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조선인의 독립 요구를 고유한 민족해방운동으로 보기보다 일본과 조선 노동계급의 공동혁명 속에서 해결될 문제로 이해하기도 했다.
셋째, 일본 공산주의 운동과 맑스주의 학자들은 치안유지법 아래에서 강하게 탄압받았다. 공개적으로 한국병합의 불법성과 조선 독립을 주장하는 연구를 지속하기 어려웠다. 많은 연구자가 투옥되거나 전향을 강요받았고, 1930년대 후반에는 비판적 역사학의 공간이 거의 사라졌다.
따라서 전전 맑스주의 역사학은 일본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이론적 틀을 제공했지만, 1904~1910년 대한제국 주권 침탈의 구체적인 외교·법률·군사 과정을 충분히 연구하지는 못했다.
여기서 백남운과 같은 조선인 맑스주의 역사학자를 구별해야 한다.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는 일본에서 출판되어 일본 학계에도 영향을 주었지만, 일본인이 생산한 역사학이 아니라 조선인 지식인이 식민사관에 맞서 쓴 한국사였다. 그는 한국사회도 보편적인 역사발전 단계를 거쳤다고 주장함으로써 ‘조선은 자력으로 발전할 수 없다’는 정체성론을 반박했다.
- 전후 일본의 메인스트림 시각
<기본 논리: 병합은 정치적으로 부당했지만, 당시 국제관계와 조약 형식 안에서는 설명할 수 있다>
1945년 패전으로 일본제국은 해체되었지만, 식민지 지배에 관한 역사학이 즉시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니었다. 전후 초기 일본사회는 침략전쟁의 피해와 가해 문제보다 일본 국민 자신이 겪은 공습, 원폭, 패전과 점령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조선 식민지배는 일본 근대사의 중심 문제가 아니라 주변적인 외교 문제로 취급되기 쉬웠다.
전후 메인스트림 연구는 전전의 노골적인 ‘합방 은혜론’을 대체로 버렸다. 한국이 미개했기 때문에 일본이 구제했다는 주장을 학술적으로 그대로 유지하기는 어려워졌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를 일본 근대국가의 구조적 범죄로 해석하기보다, 당시 국제정치의 권력경쟁과 외교정책 속에서 설명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 시각은 러일전쟁을 일본과 러시아의 세력권 경쟁으로 보고, 일본의 한국 지배가 전쟁의 결과로 강화되었다고 설명한다. 가쓰라·태프트 대화, 제2차 영일동맹, 포츠머스조약을 통해 열강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했다는 점을 중시한다.
대한제국의 내부 문제도 중요한 원인으로 다룬다. 고종의 외교정책, 황제권 중심의 개혁, 정부의 재정난과 정치적 분열을 분석하면서 일본의 침략과 대한제국의 대응 실패를 함께 살핀다.
전후 메인스트림 가운데 대표적으로 논쟁적인 입장은 <불법은 아니지만 부당했다>는 설명이다. 해야 후쿠주(海野福寿)는 일본의 한국 지배가 침략적이고 부당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을사늑약과 병합조약이 당시의 조약 형식상 법적으로 무효였다고 단정하는 데에는 신중했다. 그의 <한국병합>과 <한국병합사 연구>는 조약 체결 과정을 상세히 검토하면서 한국 학계의 ‘처음부터 불법·무효’ 주장과 논쟁했다. 관련 서평은 그의 입장을 ‘형식적 합법성과 정치적 부당성을 구별하는 합법·부당론’으로 설명한다.
이 접근의 장점은 사료와 조약 절차를 세밀하게 검토한다는 데 있다. 일본의 침략성을 인정하면서도 도덕적 평가만으로 법적 결론을 내리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문제도 있다. 군대가 수도와 궁궐을 장악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조약을 문서 형식과 국제법 관행만으로 판단하면, 식민지 권력관계가 부차화될 수 있다. 당시 국제법 자체가 제국주의 강대국 중심의 법질서였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전후 메인스트림 연구에서는 이토 히로부미를 둘러싼 평가도 다양하다. 일부 연구는 이토가 처음부터 병합을 추진하지 않았고 보호국 상태에서 점진적으로 한국을 개혁하려 했다고 본다. 이 주장은 전전의 영웅화와는 다르지만, 이토의 온건성을 강조할 경우 보호국화 자체가 한국 주권을 박탈한 침략이었다는 사실이 희미해질 수 있다.
오늘날 일본의 주류 전문 역사학은 대체로 다음을 인정한다.
- <한국병합은 일본 제국주의 팽창의 결과였다>
- <을사늑약은 군사적 압력 아래 체결되었다>
- <한국에서는 광범위한 저항이 존재했다>
- <식민지 지배는 민족차별과 정치적 억압을 수반했다>
다만 조약의 법적 효력, 이토의 병합 구상, 대한제국 내부 개혁의 가능성, 일본의 경제적 동기와 군사전략 가운데 무엇을 더 중시할 것인지를 두고 차이가 남아 있다.
따라서 전후 일본의 메인스트림을 곧바로 우익 역사수정주의와 동일시하면 안 된다. 전문 역사학의 주류는 노골적인 식민지 미화와 상당히 멀어졌지만, 일본을 분석의 중심에 놓고 한국을 일본 외교정책의 대상으로 다루는 경향은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 전후 일본의 맑스주의적·비판적 시각
<기본 논리: 한국병합은 일본 근대국가가 수행한 식민지 전쟁이며, 일본사회 전체가 그 책임을 성찰해야 한다>
전후 일본의 비판적 역사학은 전전 맑스주의 역사학을 계승하면서도 식민지 민중의 주체성과 일본의 식민지 책임 문제를 더 깊이 다루었다.
대표적인 초기 연구자로 야마베 겐타로(山辺健太郎)를 들 수 있다. 그는 일본의 한국침략과 병합에 관한 외교문서와 식민지 자료를 수집하여, 일본이 단계적으로 한국의 주권을 빼앗은 과정을 복원했다. 그의 연구는 한국병합을 일본 외교의 성공이 아니라 제국주의 침략의 과정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했다.
이노우에 기요시(井上清)는 메이지 국가와 천황제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일본의 대외전쟁과 식민지 지배를 일본 제국주의 형성의 핵심 요소로 보았다. 이 관점에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일본 근대화의 영광스러운 승리가 아니라 조선과 중국을 침략하며 제국으로 성장한 과정이었다.
재일조선인 연구자 강덕상(姜徳相), 박종근(朴宗根) 등의 연구도 중요했다. 이들은 일본인 중심의 외교사에서 벗어나 조선인의 저항과 피해, 일본군의 탄압을 사료로 드러냈다. 박종근의 청일전쟁 연구 등은 일본의 전쟁을 조선의 관점에서 다시 읽는 데 기여했다. 비판적 연구 목록에는 박종근, 가지무라 히데키, 강성은, 조경달 등의 연구가 지속적으로 거론된다.
가지무라 히데키(梶村秀樹)는 전후 일본의 조선사 연구에서 특히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조선사를 일본 제국주의의 부속물로 연구하는 태도를 비판하고, 조선 민중을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주체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연구는 ‘내재적 발전’과 ‘민중사’의 관점에서 한국사를 이해하려 했다. 가지무라의 문제의식은 일본의 조선 침략과 식민지 지배가 만들어낸 인식구조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나카쓰카 아키라(中塚明)는 일본이 조선을 어떻게 인식하고 침략을 정당화했는지를 연구했다. 그는 메이지 일본의 정치인과 군인들이 조선을 무능하고 낙후한 나라로 묘사하면서 침략의 명분을 만들었다고 보았다. 특히 일본 측 공식 전쟁기록과 실제 자료 사이의 차이를 검토하여, 일본 국민이 전쟁과 침략을 정당한 것으로 믿게 된 과정을 비판했다.
와다 하루키(和田春樹)는 러일전쟁을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전쟁으로만 보지 않고, 전쟁터가 된 한국과 만주의 경험을 포함해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이 진행한 ‘한국병합 100년’ 연구도 러일전쟁, 식민지 지배, 전후 책임, 역사인식과 세계사적 의미를 함께 검토했다.
최근 비판적 연구에서는 의병전쟁을 ‘폭도 토벌’이 아니라 <식민지 전쟁>으로 재규정한다. 일본이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고 주권을 빼앗는 데 맞서 벌어진 전쟁이며, 일본군이 민간인을 포함한 지역사회를 폭력적으로 진압했다는 것이다.
이 흐름은 서영희의 책과 가장 가까운 시각을 가진다. 양쪽 모두 1910년 병합조약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다음의 연속 과정을 강조한다.
- <1904년 일본군의 한반도 점령>
- <한일의정서와 고문정치>
- <재정·외교권 장악>
- <1905년 을사늑약과 보호국화>
- <통감부 설치>
- <고종 강제 퇴위>
- <정미7조약과 군대 해산>
- <사법권·경찰권 장악>
- <1910년 병합>
이 관점에서 한일병합은 하나의 조약으로 성립한 사건이 아니라, 전쟁과 군사점령을 바탕으로 한 장기적인 국가 해체 과정이다.
그러나 전후 맑스주의 역사학에도 한계가 있었다.
첫째, 일본 독점자본과 국가권력의 경제적 이해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민족주의, 인종주의, 문명론과 대중문화의 역할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경우가 있었다.
둘째, 일본 지배계급과 민중을 너무 명확히 분리하여 평범한 일본 국민이 제국주의의 혜택을 누리거나 식민주의적 인식을 공유한 책임을 가볍게 다루기도 했다.
셋째, 조선의 민족해방운동을 계급투쟁의 틀로 해석하면서 민족, 젠더, 종교, 지역의 다양한 경험을 충분히 포괄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최근의 비판적 연구는 이러한 한계를 넘어 ‘식민지 책임’, ‘전쟁 책임’, ‘젠더’, ‘민중의 경험’, ‘제국의 문화와 기억’을 함께 연구하는 방향으로 확장되었다.
- 네 시각의 핵심 비교
1] 제국 일본의 메인스트림
대한제국관: 부패하고 자립 능력이 없는 국가
러일전쟁관: 러시아로부터 동양을 지킨 자위전쟁
을사늑약관: 합법적인 보호조약
이토 히로부미관: 한국의 개혁을 추진한 온건한 지도자
의병관: 근대화와 치안을 방해한 폭도
병합관: 불가피하고 합법적인 통합
2] 전전 맑스주의 역사학
- 대한제국관: 봉건적 지배구조를 가진 약소국
- 러일전쟁관: 일본과 러시아의 제국주의 전쟁
- 을사늑약관: 일본 자본주의의 식민지 팽창
- 이토 히로부미관: 천황제 국가와 부르주아지의 대변자
- 의병관: 반제국주의 저항이지만 계급적 한계도 가진 운동
- 병합관: 일본 자본주의와 군국주의의 필연적 팽창 결과
3] 전후 일본의 메인스트림
- 대한제국관: 개혁을 시도했으나 구조적 취약성이 컸던 국가
- 러일전쟁관: 국제적 세력균형과 제국 간 경쟁의 산물
- 을사늑약관: 강압적이고 부당했으나 법적 효력은 논쟁적
- 이토 히로부미관: 보호국 지배자이지만 즉시 병합에는 신중했던 인물
- 의병관: 국권회복운동이지만 조직과 이념은 복합적
- 병합관: 제국주의적 지배였으나 조약의 법적 무효 여부는 별도 검토
4] 전후 맑스주의적·비판적 역사학
- 대한제국관: 한계에도 불구하고 주권을 가진 국가이자 개혁의 주체
- 러일전쟁관: 한국과 만주를 전장으로 만든 식민지 쟁탈전
- 을사늑약관: 군사점령 아래 강요된 주권침탈
- 이토 히로부미관: 온건파라 하더라도 보호국화를 실행한 제국주의자
- 의병관: 일본의 식민지화에 맞선 민중의 식민지 전쟁
- 병합관: 군사·외교·행정적 강압을 통한 단계적 국가 해체
- 서영희의 책은 일본의 어느 흐름과 가까운가
서영희의 해석은 네 번째인 전후 일본의 비판적 역사학과 가장 가깝다. 특히 다음 세 가지 점이 공통된다.
첫째, 1910년 병합보다 1904년 러일전쟁을 결정적 출발점으로 본다.
둘째, 일본이 조약 하나로 대한제국을 합병한 것이 아니라 군사·외교·재정·행정권을 순차적으로 빼앗았다고 본다.
셋째, 대한제국의 내부적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일본 침략의 정당화 근거로 삼지 않는다.
다만 서영희의 책은 전후 일본 맑스주의 역사학보다 대한제국의 국가적 대응을 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전통적인 맑스주의 연구는 대한제국을 봉건적·전제적 국가로 보고 민중운동과 구별하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 서영희는 고종의 외교, 정부의 국권수호 노력, 의병과 계몽운동을 서로 다른 차원의 저항으로 함께 살핀다.
- 종합 평가
일본에서 한국병합을 바라보는 역사학은 크게 변화했다. 전전의 공식 역사학은 병합을 문명화와 동양평화로 정당화했다. 전전 맑스주의자는 이를 일본 자본주의와 천황제 국가의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비판했다. 전후 메인스트림은 노골적인 식민지 미화를 버리고 외교사와 국제정치의 관점에서 병합을 분석했지만, 조약의 법적 효력과 대한제국 내부 요인을 중시했다. 전후 비판적 역사학은 한국인의 시각과 식민지 책임을 중심에 놓고 병합을 군사점령과 식민지 전쟁의 결과로 재해석했다.
오늘날 일본의 전문 역사학에서 <한국은 자립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병합이 불가피했다>는 전전의 공식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견해는 주류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대중 담론과 역사수정주의에서는 여전히 다음과 같은 주장이 반복된다.
- <당시에는 병합이 합법이었다>
- <일본이 한국을 근대화했다>
- <한국 내부에도 병합 찬성자가 많았다>
- <강대국 모두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했다>
이 주장들은 일부 사실을 포함하지만, 군사점령과 주권 박탈이라는 전체 구조에서 떼어내 사용될 때 전전의 제국주의적 논리를 재생산한다.
가장 설득력 있는 종합은 대한제국 내부의 약점과 일본의 침략을 모두 보되, 두 문제의 책임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다. 대한제국의 정치체제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고 개혁도 충분히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영토를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주권을 빼앗을 권리를 주지 않는다.
따라서 대한제국의 멸망을 설명할 때는 다음의 두 문장을 함께 말해야 한다.
- <대한제국은 제국주의 세계에서 살아남기에 충분히 강하고 민주적인 국가를 만들지 못했다.>
- <그러나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직접적인 행위자는 일본제국이었다.>
첫 문장만 말하면 식민주의적 자책론이 되고, 둘째 문장만 말하면서 대한제국 내부의 문제를 전혀 보지 않으면 역사적 분석이 단순해진다. 서영희의 책과 일본의 전후 비판적 연구가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내부적 취약성의 분석과 침략 책임의 규명을 함께하되, 양자의 도덕적·정치적 책임을 동일하게 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 측 시각을 더 깊이 읽는 데에는 해양 후쿠주의 <한국병합>, 야마베 겐타로의 병합 연구, 가지무라 히데키의 <조선사 방법>, 나카쓰카 아키라의 일본 근대 조선인식 연구를 서로 비교하는 방식이 가장 유용합니다.
세진님, 함재봉 교수의 <한국인의 탄생> 연작(특히 친일개화파 및 대한제국 시기 인식)에 대한 저자의 기본 시각과, 그것이 제국 일본의 사관 및 일반적인 한국 사회의 통념과 어떻게 접하는지 정리해 드립니다.
1. 함재봉의 시각은 제국 일본의 시각과 완전히 같은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결과론적인 궤적이나 평가 대상(대한제국의 무능, 개화파의 긍정 등)에서는 제국 일본의 메인스트림 시각(식민지 근대화론/정체성론)과 상당 부분 겹치지만, 그 근본적인 '목적'과 '사상적 뿌리'에서는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합니다.
① 겹치는 부분 (외형적 유사성)
대한제국 및 위정척사파에 대한 극단적 부정: 함재봉은 조선 왕조와 대한제국, 그리고 유교적 위정척사파를 '중화질서에 안주하며 세계사의 흐름을 읽지 못한 무능하고 정체된 집단'으로 평가합니다. 이는 전전 제국 일본의 관학자들이 주장했던 '조선 정체성론'이나 '자력 근대화 불능론'과 매우 유사하게 읽힙니다.
친일개화파에 대한 적극적 재평가: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윤치호 등 개화파(이후 친일로 기울어진 인물들 포함)를 '유일하게 세계사의 흐름(서구 문명)을 파악하고 근대화를 시도한 선구자'들로 봅니다. 일제가 이식한 근대적 제도와 문화를 근대 한국인 형성의 핵심 자산으로 평가하는 대목 역시 식민지 근대화론의 프레임과 맞닿아 있습니다.
② 결정적 차이점 (사상적 지향과 목적)
제국 일본의 시각: 일본의 지배와 한일병합을 '일본 제국의 영토 확장과 수탈, 그리고 천황의 시혜'로 정당화합니다. 조선인은 영원히 제국의 2등 신민이거나 동화되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함재봉의 시각: 그의 지향점은 일본 제국이 아니라 '서구 해양 문명(Protestant Ethic + 자유민주주의 + 자본주의)'에 있습니다. 함재봉에게 일본은 서구의 문명을 먼저 받아들여 이식해 준 '매개체(Proxy)'에 불과합니다. 즉, 그가 찬양하는 것은 '일본의 식민 지배' 그 자체가 아니라, 일본을 통해 유입된 '서구적 근대성'입니다.
2. 대부분의 한국인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각인가?
네, 그렇습니다. 현재 한국 사회의 대중적·학술적 메인스트림 시각에서는 매우 받아들이기 어렵고 극심한 논란을 부르는 시각입니다.
① 식민지 지배의 '강제성'과 '수탈성'의 탈색
함재봉의 시각은 앞서 살펴본 서영희, 박찬승, 이준식 등 국내 주류 역사학자들의 성과와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서영희나 박찬승 교수는 일제의 침략이 지닌 불법성과 강제성을 고발하고, 고종과 민중이 근대 국가를 만들기 위해 벌인 주체적 노력을 입증했습니다. 반면 함재봉의 프레임에서는 이러한 주체적 저항(의병, 헤이그 특사, 민족 운동 등)이 '시대착오적인 몸부림'으로 저평가되거나 생략되는 경향이 강합니다.
② '친일'에 대한 면죄부 논란
한국 사회에서 '친일개화파'는 식민지 수탈 구조에 협력하고 민족의 주권을 파괴하는 데 일조한 인물들로 규정됩니다. 그러나 함재봉처럼 이들을 '근대 문명을 먼저 눈뜬 계몽가'로만 부각할 경우, 결과적으로 일제의 국권 침탈 과정에서 발생한 비극과 범죄성을 정당화해 준다는 강력한 비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③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의 근원에 대한 시각 차이
일반적인 한국인의 시각: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는 과정(3·1 운동, 임시정부, 독립운동)에서 민주공화국의 주체이자 근대적 '한국인'이 탄생했다고 봅니다 (박찬승의 시각).
함재봉의 시각: 친일개화파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서구적·해양적 근대 문명과 제도를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근대적 '한국인'이 탄생했다고 봅니다.
요약
함재봉의 시각은 제국 일본이 주장했던 "조선은 스스로 근대화할 수 없었기에 외부(일본)의 근대화 수용이 필수적이었다"는 논리와 구조적으로 거의 동일한 궤를 그립니다.
다만 그 목적이 '일본 제국주의 찬양'이 아니라 '한미동맹과 서구식 자유주의 체제의 당위성 확보'라는 정치철학적 맥락에 있다는 점에서 구별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민중의 주체적 저항사를 부정하고 친일개화파의 논리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현재 대부분의 한국인과 학계가 받아들이기 매우 힘든 '극단적 신치우적/식민지근대화론적 역사관'에 해당합니다.
세진님, 함재봉 교수의 <한국인의 탄생> 연작(총 5권)이 지닌 사상적·출판적 비중에 비해 학계나 언론, 교양 도서 시장에서 본격적인 서평이나 비판적 토론이 눈에 띄게 적은 이유에 대하여, 한국 학계의 구조와 이 책이 지닌 고유한 특성에서 몇 가지 원인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분량의 압도성과 학술적 '전문 분야'의 불일치
가장 실질적인 이유는 책의 압도적인 분량과 저자의 학문적 정체성에서 비롯됩니다.
5권, 3,000쪽이 넘는 방대한 대작: <한국인의 탄생> 시리즈는 권당 수백 쪽에 달하는 총 5권의 대작입니다. 본격적인 학술 비평이나 서평을 쓰기 위해서는 시리즈 전체를 통독하고 사상적 맥락을 꿰뚫어야 하는데, 이는 평론가나 학자들에게도 엄청난 시간적·지적 부담을 줍니다.
'정치학자'가 쓴 '역사·사상사' 책: 저자인 함재봉 교수는 역사학자가 아닌 정치학자(정치사상 전공)입니다. 한국 역사학계는 전통적으로 분과 학문 간의 경계가 엄격합니다. 역사학자들 입장에서 정치학자가 쓴 거시사적 사상가는 "역사학의 정통 실증적 연구가 아니다"라며 학술적 비평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스킵(Skip)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대로 정치학계에서는 근대사 사료를 다룬 이 책을 정치학의 영역으로 온전히 포섭하기 애매해하는 일종의 '학문적 경계선(No Man's Land)'에 놓여 있습니다.
2. 주류 역사학계와의 '대화 불가능성' (진영 논리의 고착화)
현재 한국 사학계 및 지식인 사회의 지형 역시 이 책에 대한 비평이 활발하지 않은 큰 원인입니다.
침묵을 통한 무시 (Academic boycott/Ignoring): 한국 역사학계의 주류(민족주의적·진보적 사학) 시각에서 함재봉 교수의 논지는 사실상 '식민지 근대화론'의 변형이자, 친일개화파 및 친미승만 노선을 정당화하는 극단적 우파 시각으로 받아들여집니다. 학계에서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일일이 학술 논문으로 반박하거나 서평을 써서 논쟁을 키워주기보다는, '논평할 가치가 없는 정치적 사관'으로 치부하며 논쟁 자체를 피하는 전략(침묵)을 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영별 소비의 고착화: 이 책은 학술적 토론의 대상이라기보다는 특정 정치적 성향(보수·우파 지식인층) 내에서 일종의 '사상적 무기'나 '신념의 서적'으로 소비되는 경향이 강합니다. 반대 진영에서는 아예 읽지 않거나 외면하고, 옹호하는 진영에서는 비판적 검증 없이 찬사만 보내다 보니,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비평의 공간이 형성되지 않는 것입니다.
3. 학술서와 대중 교양서 사이의 어정쩡한 위치
출판 및 매체 비평의 관점에서도 한계가 존재합니다.
대중 매체(신문·잡지)의 한계: 일간지나 문화 잡지의 서평 코너는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합니다. 그러나 이 책은 내용이 매우 관념적이고 깊은 서구 및 동아시아 정치사상을 다루고 있어, 대중 서평가들이 쉽게 다루기 어렵습니다.
학술지의 한계: 학술지 전문 서평은 주로 학회 회원들의 전공 논문이나 전문 학술서를 대상으로 합니다. <한국인의 탄생>은 대중 출판사에서 나온 교양 학술서 형식을 취하고 있어, 전문 학술지의 공식 서평 대상에서 비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약
<한국인의 탄생>에 대한 비평이 드문 것은 이 책이 중요하지 않아서라기보다는, ① 3,000쪽에 달하는 압도적 분량, ② 정치학자가 쓴 역사 사상사라는 학문적 경계성, 그리고 ③ 한국 지식인 사회의 극심한 진영 논리로 인한 '주류 학계의 의도적 침묵'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책은 학술적 공론장에서 정밀하게 검증되고 토론되기보다는, 한국 사회의 사상적 균열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적 텍스트로 외롭게 존재하고 있는 셈입니다.
먼저 제목은 함재봉의 <한국 사람 만들기>입니다. 세진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 책은 현대 한국인의 사상적 계보를 중국·일본·미국·소련·민족주의와 연결해 재구성하려는 매우 큰 작업입니다.
그런데 <서평과 비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1권에 대해서는 이숙인의 학술서평 <한국 사람의 계보학적 탐색>이 2019년 학술지 <인간연구>에 실렸고, 2권 <친일개화파>에 대해서도 동북아역사재단 김현철의 비교적 긴 서평이 나왔습니다. 관련 강연, 대담, 소개 기사도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다만 책의 규모와 논쟁성에 비하면 본격적인 학술논쟁이 놀랄 만큼 적다는 세진님의 인상은 맞습니다.
그 이유는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조건이 겹친 결과로 보입니다.
1. 아직 완결된 저작이 아닙니다
이것이 가장 직접적인 이유입니다.
<한국 사람 만들기>는 원래 현대 한국인을 형성한 다섯 계열을 다루는 대형 기획입니다.
<친중위정척사파>
<친일개화파>
<친미기독교파>
<친소공산주의파>
<인종적 민족주의파>
그런데 현재까지 출간된 다섯 권은 이 다섯 계열을 모두 다룬 완결된 다섯 권이 아닙니다.
1권: 조선 사람 만들기·친중위정척사파
2권: 친일개화파 1
3권: 친미기독교파 1
4권: 친일개화파 2
5권: 친미기독교파 2
따라서 아직 친소공산주의파와 인종적 민족주의파에 대한 본격적인 서술이 남아 있습니다. 출판사 소개도 이 저작을 당초 총 6권으로 기획된 시리즈라고 설명했지만, 지금까지의 분량과 구성을 보면 실제 완결 규모는 더 커질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비평가 입장에서는 저자의 최종 결론이 나오기 전에 전체 역사관을 평가하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함재봉이 친일개화파와 친미기독교파를 상당히 긍정적으로 다루더라도, 뒤에 나올 공산주의파와 민족주의파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보아야 그의 전체적 균형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설명만으로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출간된 친일개화파 부분만으로도 충분히 큰 논쟁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2. 너무 방대해서 서평자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이 시리즈는 일반적인 단행본보다 훨씬 깁니다. 예를 들어 3권은 색인과 부록을 포함해 약 1,000쪽에 이릅니다. 각 권이 방대한 일본사·중국사·서양사·종교사·정치사 자료를 포함하므로, 다섯 권 전체를 제대로 검토하려면 수천 쪽을 읽어야 합니다.
학술지 서평은 대개 5~15쪽 정도입니다. 그 안에서 함재봉의 다음 주장들을 모두 검증하기는 어렵습니다.
조선 성리학에 대한 해석
위정척사파의 형성
에도 일본의 정치·경제·사상
메이지유신의 성격
김옥균·박영효·유길준의 일본 인식
미국 선교사의 역할
서재필·윤치호·이승만의 기독교적 자유주의
한국 민족주의 및 공산주의와의 관계
따라서 한 명의 서평자가 전체를 평가하기보다는 조선사학자, 일본사학자, 정치사상사학자, 기독교사학자가 각자의 전문 분야에서 공동으로 검증해야 할 책입니다.
그러나 한국 학계의 서평 관행은 이런 대작을 대상으로 한 장기간의 공동비평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논문은 연구업적으로 인정받지만 긴 서평이나 서평논쟁은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되는 구조도 작용합니다. 이 부분은 출간자료가 직접 설명한 사실이라기보다 한국 학술출판 관행에 근거한 제 판단입니다.
3. 학문적 소속이 애매합니다
함재봉은 역사학자라기보다 정치학자·정치사상 연구자입니다. 그의 작업은 역사서이면서 동시에 문명론, 계보학, 정치사상사, 국제정치학입니다.
이 때문에 전문 역사학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생깁니다.
<이 책을 역사학의 기준으로 비평해야 하는가?>
<정치사상적 해석으로 읽어야 하는가?>
<한국 보수주의의 지적 계보를 구성하려는 정치적 저술로 읽어야 하는가?>
함재봉은 사건을 새로 발굴하기보다 기존의 방대한 연구와 자료를 자신의 큰 틀 안에서 재배열합니다. 전문 역사학자들은 개별 사실의 오류나 해석의 문제를 발견할 수 있지만, 책 전체가 특정한 정치철학적 관점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실증사학 방식만으로 비평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정치학자들은 에도시대, 메이지유신, 개화파와 선교사에 관한 세부 역사자료를 검증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책의 중요성은 모두 인정할 수 있지만, <누가 이 책을 책임지고 비평해야 하는가>가 불분명해집니다.
4. 출판·홍보 구조가 독립적인 비평을 끌어내기 어렵습니다
초기 두 권은 함재봉이 원장으로 있던 아산정책연구원의 아산서원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이후 책들은 에이치프레스에서 출간되었고, 저자 강연과 연구기관 중심의 소개가 많았습니다. 5권 역시 2025년 3월에 출간된 비교적 최근 책이며, 대형 상업출판사의 광범위한 서평 마케팅보다는 저자 인터뷰와 강연 중심으로 알려졌습니다.
이것이 책의 학문적 가치를 낮춘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출판사가 전문 역사학계와 광범위한 서평 네트워크를 조직하고, 상반된 입장의 연구자들에게 공개적으로 비평을 의뢰하는 방식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지금 검색되는 ‘서평’ 가운데 일부도 독립적인 비판이라기보다 연구원 내부 또는 출판 관련 소개 성격이 강합니다. 따라서 책은 널리 홍보되었지만, 반론을 조직적으로 불러내는 출판 과정은 부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5. 정치적으로 너무 쉽게 분류됩니다
함재봉은 한국에서 보수 지식인으로 분류됩니다. 그의 친미적 외교관, 자유주의·기독교에 대한 긍정적 평가, 민족주의와 종북·친중 노선에 대한 비판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때문에 진보적 연구자들은 그의 책을 읽기 전부터 <보수적 근대화론> 또는 <친일·친미 역사관>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보수적 독자들은 이를 한국의 민족주의 사관을 깨뜨리는 중요한 저술로 환영하기 쉽습니다.
이렇게 되면 본격적 비평보다 정치적 진영 분류가 먼저 일어납니다.
진보 쪽에서는 “결론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해 긴 비판을 쓰지 않고, 보수 쪽에서는 책의 기본 방향에 동의하기 때문에 세밀한 검증을 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찬반 양쪽에서 진지한 텍스트 비평이 줄어듭니다.
책이 너무 논쟁적이어서 비평이 많은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너무 쉽게 정치적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학술적 논쟁이 줄어든 것입니다.
6. 함재봉의 논지는 단순히 ‘친일’이라고 공격하기 어렵습니다
함재봉은 일본제국의 병합을 노골적으로 찬양하거나 식민지배를 합법화하는 주장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의 주장은 더 복잡합니다.
그는 친일개화파를 일본제국에 복종한 매국세력이라기보다, 일본을 통하여 서구 근대를 배우려 한 능동적 정치세력으로 복원합니다. 또한 친일개화파만이 아니라 친중위정척사파, 친미기독교파, 친소공산주의파, 인종적 민족주의파 모두가 한국인을 형성했다고 주장합니다. 책의 공식 소개도 이를 한국인의 다섯 가지 ‘인간형’에 대한 계보학으로 규정합니다.
따라서 그를 단순히 <식민사관>이라고 비판하면 함재봉은 이렇게 반론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한 것이 아니라, 일본을 근대화 모델로 선택한 조선인의 사상과 행동을 설명했을 뿐이다.”
이 반론에는 상당한 타당성이 있습니다. 친일개화파의 능동성과 사상적 세계를 연구하는 것 자체는 식민주의가 아닙니다.
함재봉을 제대로 비판하려면 단순한 도덕적 비난보다 훨씬 복잡한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가 일본 근대화를 얼마나 이상화하는가
메이지 근대와 제국주의의 내적 연관을 충분히 다루는가
개화와 침략 협력을 구별하는가
조선 내부의 개혁 가능성을 지나치게 낮게 평가하는가
일본을 거치지 않은 근대성의 가능성을 배제하는가
민중·농민·여성의 주체성을 엘리트 계보보다 약하게 다루는가
이런 방식으로 비판해야 하기 때문에 상당한 전문성과 분량이 필요합니다. 간단한 신문 서평으로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7. 책의 시간적 범위가 결정적인 순간 직전에 멈춰 있습니다
세진님이 정확하게 지적하셨듯이, 현재 나온 친일개화파 관련 두 권은 대한제국의 완전한 보호국화와 병합이 진행되는 결정적 시기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사실상 멈춥니다.
바로 이 때문에 함재봉의 친일개화파 해석에 대한 최종 평가가 유보될 수 있습니다.
1880~1890년대 일본을 모델로 삼은 개화파의 선택과, 1905년 이후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군사권·행정권을 빼앗는 상황에서 일본에 협력한 행위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일본이 아직 개혁 모델이자 잠재적 동맹국으로 보이던 시기의 ‘친일’과, 일본이 대한제국을 실제로 해체하던 시기의 ‘친일’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함재봉이 이 경계선을 어떻게 그을지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김옥균의 친일
유길준의 친일
갑오개혁 관료의 친일
일진회의 합방청원
을사오적의 협력
식민지 관료와 지식인의 친일
이들을 하나의 ‘친일개화파’ 계보로 묶을 것인지, 아니면 근대화 모델의 선택과 제국주의 협력 사이에 책임의 단절선을 그을 것인지가 밝혀져야 합니다.
현재까지의 출간분에서는 이 문제가 완전히 결론 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학자들이 전면적인 평가를 미루는 측면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을 비평 부재의 충분한 이유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바로 이 지점이 지금 논쟁되어야 합니다.
8. 한국의 서평 문화 자체가 약합니다
한국에서는 중요한 대작이 나와도 깊이 있는 서평논쟁이 드뭅니다. 신문 서평은 대개 신간 소개에 가깝고, 온라인 서평은 개인적 독후감에 머무르며, 학술지 서평은 분량과 영향력이 제한됩니다.
실제로 1권의 학술서평은 6쪽에 불과하고, KCI 기준 피인용 횟수도 0회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 책이 학문적 논쟁의 중심으로 진입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입니다.
2권에 대한 김현철의 서평은 책의 의의와 내용을 비교적 상세히 소개하지만, 이것만으로 여러 학문 분야가 참여하는 본격적인 논쟁이 형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서구 학계라면 이 정도의 야심 찬 저작에 대해 다음과 같은 형식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전문 학술지의 서평 심포지엄
역사학자·정치학자·종교학자의 공동 비평
저자의 응답
후속 반론과 재반론
특정 장에 대한 검증논문
한국에서는 이런 서평 심포지엄 문화가 상대적으로 약합니다.
9. 저자의 문체와 자료 제시 방식도 비평을 어렵게 합니다
함재봉의 책은 명확한 이론 명제를 짧게 제시하고 논증하는 방식이라기보다, 방대한 역사적 맥락과 인물, 사건을 축적해 큰 서사를 만드는 방식입니다.
이런 책은 읽을 때는 설득력이 있습니다. 독자는 많은 자료와 상세한 서술을 따라가면서 저자의 전체 구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비판하려면 다음을 분리해야 합니다.
사실의 선택
사실의 배열
원인과 결과의 연결
인물에 대한 가치평가
다른 가능성의 배제
최종 정치적 결론
예를 들어 메이지 일본이 조선보다 성공적으로 제도를 개혁했다는 것은 사실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에서 곧바로 친일개화파의 선택이 가장 합리적이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그 결론에서 일본식 근대화가 한국 근대의 핵심 경로였다는 주장으로 넘어갈 때에는 추가적인 논증이 필요합니다.
함재봉의 서술은 이런 전환을 방대한 이야기 속에서 이루기 때문에, 이를 비판하려면 책 전체의 논리구조를 다시 해체해야 합니다.
10. 가장 중요한 이유: 불편하지만 일부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이 가장 깊은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함재봉의 주장 전체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다음과 같은 문제제기는 쉽게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조선은 심각한 정치적·사회적 경직성을 가지고 있었다.
위정척사파는 외세 침략에 저항했지만 근대국가 건설의 구체적 대안을 충분히 제시하지 못했다.
메이지 일본은 조선 개화파에게 가장 접근하기 쉬운 근대화 모델이었다.
친일개화파를 모두 처음부터 매국노로 규정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부정확하다.
일본을 통해 수용된 제도·개념·인력이 현대 한국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해방 이후 한국은 식민지기의 제도와 인력을 상당 부분 계승했다.
이 문제들은 한국 민족주의 역사학이 불편해하는 지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함재봉에게는 다음과 같은 심각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조선 내부의 실패를 강조하면서 일본 침략의 주체성을 약화하지 않는가?
일본의 근대화를 성공으로, 조선의 근대를 실패로 보는 목적론에 빠지지 않는가?
일본의 자유주의적 개혁과 제국주의적 폭력을 분리해 설명하지 않는가?
개화파 엘리트의 선택을 민중 전체의 역사보다 지나치게 크게 보는가?
친일개화와 식민지 협력 사이의 윤리적·정치적 경계를 어디에 긋는가?
함재봉의 책은 간단히 칭찬하기도 어렵고, 단순히 친일사관이라고 배척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많은 연구자가 침묵하거나 평가를 미루는 것으로 보입니다.
결론
<한국 사람 만들기>에 비평이 적은 이유는 책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음 조건들이 겹쳤기 때문입니다.
- 아직 시리즈가 완결되지 않았다.
- 각 권이 너무 방대하다.
- 역사학·정치학·종교학을 가로질러 비평 주체가 불분명하다.
- 저자가 정치적으로 쉽게 분류된다.
- 출판과 홍보가 독립적인 비평논쟁을 조직하지 못했다.
- 한국 학계의 장문 서평과 서평 심포지엄 문화가 약하다.
- 함재봉의 문제제기 가운데 상당 부분은 부정하기 어렵지만, 그 결론은 매우 논쟁적이다.
제 판단으로는 이 책은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많은 비평을 받아야 할 중요한 저작입니다. 특히 <친일개화파> 부분은 서영희의 <일제 침략과 대한제국의 종말>, 박찬승의 독립운동사, 일본의 비판적 제국주의 연구와 정면으로 비교해야 합니다.
그 핵심 쟁점은 함재봉이 ‘친일’을 긍정했느냐는 단순한 질문이 아닙니다.
<일본을 근대화의 모델로 선택한 것과, 일본제국의 주권 침탈에 협력한 것 사이에 함재봉은 어디에서 선을 긋는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이 명확해질 때 <한국 사람 만들기>의 역사적 가치와 한계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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