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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16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75 지사의 탄생, 270개의 일본이 하나가 된 이유

지사의 탄생, 270개의 일본이 하나가 된 이유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75회 - YouTube

지사의 탄생, 270개의 일본이 하나가 된 이유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75회
법률방송
7,330 views  Aug 12, 2026 
본 강연은 함재봉의 『한국 사람 만들기 II: 친일개화파』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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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부 말기, 일본의 역사를 뒤흔든 새로운 젊은 세력 ‘지사(志士·시시)’가 등장합니다.
존왕양이를 외치며 기존 질서에 도전한 이들은 말보다 행동을 앞세우며 격변의 시대를 이끌었습니다.
사이고 다카모리와 사카모토 료마 등 훗날 메이지유신의 중심에 서게 되는 인물들도 이 흐름 속에서 성장합니다.
개국과 쇄국, 막부와 천황 사이에서 갈라진 일본은 거대한 정치적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듭니다.
이번 《한국인의 탄생》에서는 메이지유신을 움직인 ‘지사’들은 누구였으며 어떻게 탄생했는지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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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제75회 <지사의 탄생, 270개의 일본이 하나가 된 이유> 강연에 대한 요약과 평론입니다.

<지사의 탄생, 270개의 일본이 하나가 된 이유> 요약

  1. 270개 번(藩)으로 분열된 막번 체제의 한계 도쿠가와 막부 체제 아래의 일본은 단일한 통일 국가가 아니라, 약 270여 개의 독립적인 다이묘 영지(번)로 쪼개진 분권 체제였다. 각 번의 무사들은 자신이 속한 번의 주군에게만 충성했을 뿐, <일본인>이라는 단일한 민족적·국가적 정체성을 공유하지 못했다.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침략 위협에 직면했을 때 이러한 분열적 막번 체제는 치명적인 안보적 취약점으로 드러났다.

  2. <탈번(脫藩)>과 초번적 <지사(志士)>의 탄생 서구의 외압과 국가적 위기 속에서 번의 경계를 뛰어넘어 국가 전체의 운명을 고민하는 새로운 지식인 집단인 <지사>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목숨을 걸고 자신의 번을 이탈하는 <탈번>을 감행하며 지역적 충성심을 버리고, 천황이라는 초월적 상징을 매개로 <일본>이라는 근대적 국민국가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사카모토 료마와 조슈·사쓰마의 청년 무사들이 연대한 삿초 동맹은 이러한 지사들의 네트워크가 낳은 결정적 성과였다.

  3. 폐번치현(廢藩置縣)과 단일 국민국가의 수립 메이지 유신 직후 권력을 장악한 지사들은 다이묘들의 영지를 국가에 반납하는 판적봉환과, 270여 개 번을 완전히 해체하고 중앙정부가 직접 관리를 파견하는 <폐번치현>을 단행했다. 이는 수백 년간 지속된 봉건적 분할 통치를 종식시키고, 단일한 법률, 조세, 군사 체계를 갖춘 중앙집권적 근대 국가를 형성하는 제도적 토대가 되었다.

  4. 사무라이 계급의 해체와 신분 철폐의 역설 메이지 혁명을 주도한 하급 무사(지사)들은 정권을 잡은 후 역설적으로 자신들이 속해 있던 사무라이 계급의 특권을 스스로 폐지했다. 사민평등 조치와 폐도령, 징병제 도입을 통해 무사 계급을 물리적으로 해체하고 모든 인구를 평등한 근대 <국민(병사)>으로 재편성했다. 자신의 기득권을 파괴하면서까지 강력한 근대 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지사들의 결단은 일본이 비서구권에서 가장 빠르게 단일 국민국가로 도약한 핵심 동력이었다.

평론

제75회 강연은 270여 개로 분할되어 있던 봉건 일본이 어떻게 단일한 근대 국민국가로 탈바꿈했는가를 <지사(志士)>라는 새로운 인간형의 출현과 계급 해체의 메커니즘을 통해 탁월하게 규명한다.

첫째, 근대 민족주의와 국민 정체성이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위기 극복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창출된 결과물임을 설득력 있게 밝힌다. 270개의 서로 다른 '나라'로 나뉘어 있던 사회에서 번을 초월한 지사들이 등장하여 '일본인'이라는 정체성을 주조해 낸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근대 국가 건설의 본질이 정서적 통일성과 제도적 중앙집권화의 결합에 있음을 보여준다.

둘째, 유신 주도 세력이 보인 <자기 파괴적 개혁>의 역설을 예리하게 짚어낸다. 혁명의 주역이었던 하급 사무라이들이 정권을 잡은 뒤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이자 신분적 표지인 칼과 녹봉을 스스로 내려놓고 전 국민 징병제를 택한 대목은, 기득권 보전에 매몰되어 개혁을 거부했던 당대 조선 양반 지배층의 행태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다만, 지사 중심의 위로부터의 혁명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신분 철폐와 봉건 해체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고 몰락한 수많은 하급 무사와 농민들의 저항(사족 반란, 농민 소요) 등 사회적 비용과 폭력성에 대한 비판적 평가는 다소 축소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편화된 봉건 사회를 근대적 통일 국가로 변모시킨 지적·제도적 추진력을 거시적 비교사적 관점에서 명쾌하게 분석한 매우 깊이 있는 강연이다.

지사의 탄생과 메이지 유신 해설

메이지 유신을 이끈 주역들이 스스로 신분 특권을 해체하고 근대 국가를 형성해 간 핵심 논리를 집약적으로 설명해 주는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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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재봉 「한국인의 탄생」 75회

<지사의 탄생, 270개의 일본이 하나가 된 이유> 요약·평론

75회는 앞선 73·74회에서 보았던 막부 말기의 정치적 혼란과 해외 학습의 흐름을 <지사(志士)>라는 새로운 정치적 인간형의 등장과 연결한다. 함재봉이 이번 강연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메이지유신이 단순히 막부와 천황, 조슈와 사쓰마 같은 기존 정치세력 간의 권력투쟁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막부 말기의 혼란 속에서 기존 정치조직에 공식적인 자리를 갖지 않은 젊은 하급 사무라이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자기 번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국가적 목표를 위해 움직이고, 다른 번의 젊은이들과 연대하고, 때로는 암살과 무력행동까지 감행한다. 이들을 당시 일본에서 <지사>라고 불렀다.

함재봉에게 이 지사들은 270여 개 번으로 나뉘어 있던 일본을 처음으로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상상하게 만든 정치적 행동세력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과격한 행동주의는 암살·테러·숙청·자결이라는 막부 말기의 어두운 정치문화도 만들어냈다.


1. ‘지사’라는 말은 어떻게 생겼는가

함재봉은 먼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애국지사>의 ‘지사’라는 말 자체가 막부 말기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서 등장했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지사는 단순히 훌륭한 애국자를 뜻하지 않는다.

기존의 다이묘나 막부 관리처럼 공식적인 정치적 직책을 가진 사람도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옳다고 믿는 대의와 국가의 운명을 위해 스스로 행동하는 젊은 사무라이>

를 가리킨다.

그들은 누가 명령해서 움직이지 않는다. 자기 번에서 공직을 받은 것도 아니고 막부에 공식적인 책임을 진 것도 아니다. 그러나 천황에게 충성하는 것이 나라를 위한 길이라고 확신하면 그것을 직접 행동에 옮긴다.

함재봉은 이 새로운 정치적 인간형이 메이지유신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본다.


2. 페리의 등장과 막부의 ‘여론 수렴’이 정치의 문을 열다

지사의 등장을 이해하려면 다시 페리의 내항으로 돌아가야 한다.

페리가 개항을 요구했을 때 막부는 처음으로 전국 다이묘와 조정에 의견을 묻는다.

함재봉이 반복해서 강조했듯 이것은 막부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미국과 전쟁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수백 년의 쇄국정책을 막부 독단으로 포기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이 결정이 뜻밖의 결과를 낳는다.

그전까지는

<막부가 결정하면 다른 사람은 따른다>

는 정치였다.

그런데 막부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고 묻는 순간 사람들은 자신도 국가정책에 의견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한 번 열린 정치적 참여의 문은 다시 닫히지 않았다.


3. 이이 나오스케의 강경통치가 오히려 지사를 만들어낸다

막부 최고권력자가 된 이이 나오스케는 이러한 정치적 개방을 다시 폐쇄하려 했다.

그는 개항을 밀어붙이고, 반대세력을 안세이 대옥을 통해 대대적으로 숙청한다.

요시다 쇼인도 이 과정에서 처형된다.

하지만 함재봉이 보는 역설은 바로 이것이다.

<막부가 반대자를 억누를수록 반막부 정치운동은 더욱 과격해졌다.>

이이 나오스케 자신이 미토계 무사들에게 암살되면서 막부의 최고권력조차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 뒤 일본은 암살과 테러가 빈번한 정치사회로 변해간다.


4. 지사는 ‘무소속 정치행동가’였다

이번 강연에서 가장 흥미로운 설명 가운데 하나다.

지사들은 현대적인 표현으로 하면 일종의 <무소속 정치행동가>에 가까웠다.

자기 번을 떠나 에도와 교토를 돌아다니며 다른 번의 젊은 사무라이를 만난다.

조슈 사람은 사쓰마 사람을 만나고, 도사 사람은 미토 사람을 만난다.

서로 토론하면서 점점 공통의 질문을 갖게 된다.

<일본은 어떻게 서양을 막을 것인가?>
<막부가 과연 일본을 지킬 수 있는가?>
<천황을 중심으로 나라를 다시 세워야 하지 않는가?>

여기서 기존 번의 경계가 약해진다.


5. 270개의 일본에서 ‘하나의 일본’로

함재봉이 이번 회에서 가장 강조하는 변화가 이것이다.

에도시대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나는 조슈 사람이다>
<나는 사쓰마 사람이다>
<나는 도사 사람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외세가 등장하고 지사들이 전국적으로 교류하면서 새로운 생각이 형성된다.

<우리는 모두 일본 사람이다.>

그리고 일본 전체를 상징할 존재로 천황이 부상한다.

따라서 함재봉에게 지사운동은 단순한 존왕양이 운동이 아니다.

<번 중심의 정치적 정체성을 하나의 일본국가 정체성으로 바꾸는 과정>

이었다.


6. 도사번의 지사들 ― 사카모토 료마와 다케치 한페이타

강연에서는 도사번을 대표적인 사례로 든다.

도사에는 엄격한 신분질서가 있었고 하급 사무라이들의 불만이 컸다.

그 가운데 <다케치 한페이타>가 중심이 되어 도사근왕당을 조직한다.

천황을 받들고 서양세력을 몰아내야 한다는 존왕양이 운동을 벌인다.

사카모토 료마 역시 같은 도사 출신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길은 점차 달라진다.

이 점은 후반부 메이지유신의 전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존왕이라는 목표는 공유했지만 서양과 개항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는 서로 다른 길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7. 지사의 윤리 ― 생각보다 행동

함재봉은 지사들의 특징을 <행동주의>에서 찾는다.

그들은 반드시 깊은 철학체계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다.

학문적으로 완성된 정치이론을 가지고 움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옳다고 생각하면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들>

이었다.

국가가 위험하다고 생각하면 번을 탈출한다.

천황을 모욕했다고 판단하면 암살한다.

서양을 물리쳐야 한다고 믿으면 검을 든다.

함재봉은 이러한 행동력이 막부가 우유부단하게 갈팡질팡하던 시기에 일본 정치의 방향을 실제로 움직이는 힘이 되었다고 본다.


8. ‘천주(天誅)’라는 위험한 논리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지사운동의 어두운 측면도 나온다.

자신들이 천황과 국가를 위해 행동한다고 믿게 되면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을

<천황의 적>

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리고 암살을 <천주>, 즉 하늘을 대신하여 내리는 벌이라고 정당화한다.

함재봉은 막부 말기의 사무라이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암살과 칼부림이 실제 당시의 심각한 정치적 현실이었다고 설명한다.

즉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치행동>

이라는 지사의 장점은 동시에

<법적 책임에서 벗어난 정치폭력>

이라는 위험과 맞닿아 있었다.


9. 조슈·사쓰마·도사가 천황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러한 전국적 지사 네트워크가 형성되면서 교토의 정치적 중요성이 급상승한다.

천황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에도에는 막부가 있지만 교토에는 국가적 정당성의 원천으로 새롭게 떠오른 천황이 있다.

젊은 지사들은 교토에 모이고 조정 주변의 공가들과 접촉하며 정치에 개입한다.

이렇게 해서

<에도의 막부>

와

<교토의 천황>

이라는 두 개의 정치중심이 생긴다.

막부 말기의 권력투쟁은 점점 이 두 중심 사이의 경쟁으로 바뀌어 간다.


10. 천황을 위해 죽는다는 것은 당시에는 새로운 정치적 경험이었다

함재봉은 지사들의 희생과 죽음도 중요하게 본다.

이들은 자신의 번주를 위해서가 아니라 <천황과 일본>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도사 지사들이 작성한 맹약문에는 천황의 뜻을 받들고 서양 오랑캐를 몰아내며 국가를 다시 일으키겠다는 강한 결의가 나타난다.

그 과정에서 많은 젊은이가 실제로 죽는다.

성공한 사람보다 처형·암살·자결로 끝난 사람이 훨씬 많았다는 것이 강연의 중요한 지적이다.


11. ‘순국 영웅’ 뒤에 있는 비극

함재봉은 이 점에서 메이지유신 성공자들의 화려한 이야기만 보면 안 된다고 말한다.

후대에는

  • 이토 히로부미
  • 야마가타 아리토모
  • 사이고 다카모리

같은 승자의 이름이 크게 남는다.

하지만 그 주변에는 이름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젊은 지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 암살당하고
  • 처형되고
  • 할복하고
  • 정치투쟁에서 제거된다.

함재봉은 이들의 희생과 강렬한 신념이 막부에서 메이지국가로 넘어가는 정신적 에너지가 되었다고 본다.


12. 그러나 지사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낼 국가를 알고 있었는가

강연 중반 이후 매우 흥미로운 문제제기가 나온다.

지사들이 과연

<사무라이 신분이 폐지되고>
<봉건제가 없어지고>
<근대 관료국가와 국민군이 만들어지는>

메이지국가를 처음부터 꿈꾸었느냐는 것이다.

함재봉의 답은 사실상 <아니다>에 가깝다.

그들은 주로

<천황을 받들자>
<막부를 몰아내자>
<서양의 침략을 막자>

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자신들이 일으킨 혁명은 자신들의 신분인 사무라이 자체까지 없애버린다.

이것이 메이지유신의 가장 큰 역사적 역설 가운데 하나다.


13. 왕정복고 이후 가장 피해를 본 사람도 사무라이였다

메이지정부는 천황을 중심으로 새로운 국가를 만든 뒤 신분제를 해체한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계층 가운데 하나가 사무라이였다.

봉록도, 무사 신분의 특권도, 칼을 차는 권리도 사라진다.

그러므로

<천황을 위해 싸운 사무라이들이 천황정부에 의해 사라진다>

는 역설이 생긴다.

강연에서는 이 모순이 훗날 사이고 다카모리의 사쓰마 반란과 세이난전쟁으로까지 이어지는 배경으로 제시된다.


14. 지사의 실패와 비극

함재봉이 특히 안타깝게 다루는 사례 중 하나가 도사 출신 지사 사카모토 료마의 주변 인물들이다.

막부가 무너지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 수많은 인물이 제거된다.

심지어 메이지유신을 실제로 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도 많았다.

따라서 함재봉은 지사를 단순한 성공한 혁명가라기보다

<자신들이 만들어낼 결과를 충분히 알지 못한 채 이상과 행동에 모든 것을 걸었던 세대>

로 묘사한다.

이 부분은 75회의 가장 인간적인 대목이다.


15. 조슈에서 먼저 등장한 공무합체론

이번 회 후반부에서는 다시 <공무합체> 문제가 자세히 등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공무합체론이 막부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조슈 내부에서도 제기되었다는 점이다.

조슈의 젊은 무사 나가이 우타는 1861년 번주에게 상소를 올려

<막부와 천황이 협력해야 한다>

고 주장한다.

외세의 압력 앞에서 일본이 분열되어 싸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300년 가까이 이어진 막부질서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리기보다

<천황의 권위 + 막부의 행정·군사력>

을 결합하여 국난을 극복해야 한다는 상당히 현실적인 제안이었다.


16. 공무합체론의 실제 내용

함재봉이 설명하는 나가이 우타의 논리는 흥미롭다.

일단 일본은 서양과 체결한 조약을 인정해야 한다.

항해술을 익히고 해군을 만든다.

무역을 통해 경제력을 키운다.

육군과 해군을 강화한다.

충분히 강해진 뒤 외국과의 관계를 다시 조정한다.

즉

<당장 양이를 하는 대신 개항을 이용해 힘을 키운 뒤 진정한 자주를 달성하자>

는 전략이다.

공무합체도 이 목적을 위해 필요했다.

천황과 막부가 힘을 합해야 국력을 한 곳으로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17. 그런데 조슈 내부에서도 두 갈래로 나뉜다

문제는 조슈 안에서도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쪽에는 나가이 우타와 같은 <공무합체파>가 있었다.

다른 쪽에는

<막부와 타협해서는 안 되며 천황 중심의 존왕양이를 실현해야 한다>

는 급진파가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가 <기도 다카요시>다.

기도는 훗날 메이지유신의 핵심 지도자가 된다.

이 갈등은 조슈 내부에서 점점 격렬해진다.


18. 나가이 우타의 비극

나가이 우타는 조슈와 막부, 그리고 조정 사이를 연결하며 공무합체안을 추진한다.

처음에는 번주도 찬성하고 천황측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이 나온다.

막부도 좋아한다.

겉보기에는 모든 세력이 동의하는 매우 합리적인 정책처럼 보였다.

그런데 바로 그 때문에 조슈 내부의 급진적 존왕양이파가 강하게 반발한다.

결국 나가이의 정치적 입지는 붕괴한다.

함재봉은 그가 결국 1862년 할복 자살을 명령받는 것으로 끝났다고 설명한다.


19. 지사 정치의 잔혹성

나가이 우타의 죽음은 당시 지사 정치의 특징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어제까지 존중받던 사람이 오늘은 역적이 된다.

번의 노선이 바뀌면 정치적 운명도 바뀐다.

암살될 수도 있고 할복을 명령받을 수도 있다.

함재봉은 이를 통해 메이지유신을 낭만적인 젊은 혁명가의 이야기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보여준다.

<엄청난 신념과 희생이 있었지만 동시에 극단적인 정치폭력과 잔혹한 권력투쟁도 있었다.>


평론

1. 75회의 가장 중요한 기여 ― ‘지사’라는 새로운 정치적 인간형을 발견한다

이번 강연은 63회 이후의 여러 회 가운데 특히 사회학적으로 흥미롭다.

그동안 우리는

<막부>
<천황>
<다이묘>
<조슈·사쓰마>

같은 제도와 조직을 보았다.

그런데 75회에서는 <조직 바깥의 개인>이 등장한다.

자기 번의 명령도 없는데

<“내가 나라를 구해야 한다.”>

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이다.

현대적인 의미의 시민과는 전혀 다르지만, 전통적인 봉건적 신하도 아니다.

그 사이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정치적 주체가 <지사>였다고 볼 수 있다.


2. 이것은 근대적 ‘국민’ 형성의 중요한 단계였다고 볼 수 있다

함재봉의 설명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부분이다.

도쿠가와시대 정치질서에서는 충성의 대상이

<번주 → 번>

이었다.

그런데 지사들은 점점

<천황 → 일본>

으로 충성의 대상을 바꾼다.

즉

<지역적 충성 → 국가적 충성>

이라는 변화가 일어난다.

이것이 270여 번으로 나뉜 일본을 하나의 국민국가로 묶는 정신적 토대 가운데 하나가 된다.


3. 그러나 ‘지사 = 근대적 국민’이라고까지 말하면 지나치다

지사들이 전국적 일본 정체성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강연의 논리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이들을 현대적 의미의 민주적 시민과 동일시하면 안 된다.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 개인의 권리
  • 민주적 대표
  • 법치

보다는

  • 천황
  • 충성
  • 국가
  • 희생

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목적을 위해 상대를 암살하는 일도 정당화했다.

따라서 지사는 <시민 이전의 새로운 정치적 주체>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4. 이번 회에서 가장 불편하지만 중요한 부분은 정치폭력이다

함재봉은 지사들의 행동력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확실히 그들은 우유부단한 막부 지도층과 달리 행동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매우 위험한 질문이 따라온다.

<자신의 신념이 옳다고 확신하면 법과 정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폭력을 행사해도 되는가?>

막부 말기 지사들은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다.

그 결과 수많은 암살과 숙청이 일어났다.

따라서 <행동하는 젊은이>라는 매력적인 이미지를 정치폭력과 분리해서는 안 된다.


5. 함재봉의 ‘행동주의’ 찬양에는 약간의 경계가 필요하다

강연에서는 지사들이

<이론보다 행동>
<사유보다 결단>

을 중시했다고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행동력이 언제나 좋은 결과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당시에는

<잘못된 판단 + 강한 신념 + 무장된 젊은이>

가 결합되어 엄청난 폭력이 발생했다.

따라서 메이지유신을 가능하게 한 행동력은 동시에 일본 근대 정치에서 훗날 반복되는 <목적을 위해 폭력을 정당화하는 정치문화>의 한 원형이 될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다만 이 마지막 연결은 강연이 직접 입증한 것이 아니라 자료에서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비판적 질문이다.


6. ‘270개의 일본이 하나가 되었다’는 설명도 조금 더 세분할 필요가 있다

함재봉의 제목은 매우 강력하다.

하지만 메이지유신 당시 모든 일본인이 갑자기 국민적 정체성을 가진 것은 아니다.

강연 자체에서도 변화의 중심에 있던 것은 주로 젊은 사무라이와 정치엘리트였다.

농민·상인·여성 등 일반 백성들이 이 새로운 ‘일본’ 의식을 어느 정도 공유했는지는 이 자료만으로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이번 회에서 실제로 입증되는 것은

<270개 번의 정치엘리트 가운데 일부가 번을 넘어선 일본국가라는 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는 정도라고 보는 것이 더 엄밀하다.


7. 가장 뛰어난 부분은 ‘그들은 결과를 몰랐다’는 지적이다

75회에서 특히 좋은 대목은 메이지유신을 결과론적으로 읽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메이지유신이 성공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당시 지사들도

<근대적 중앙집권국가를 만들려고 했다>

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이 원한 것은 대부분 훨씬 단순했다.

<천황을 받들자.>
<막부를 몰아내자.>
<서양세력에 굴복하지 말자.>

그런데 그 결과

<사무라이가 사라지고>
<신분제가 폐지되고>
<징병제가 생기고>
<근대 관료국가가 만들어진다.>

즉 자신들의 행동이 자기 계급을 없애는 혁명으로 귀결된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통찰이다.


8. 74회와 75회를 함께 보면 일본 근대화의 두 얼굴이 보인다

74회에서는

<외국에 가서 배우는 젊은이>

가 등장했다.

75회에서는

<국내에서 칼을 들고 행동하는 젊은이>

가 등장한다.

두 집단은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당히 겹친다.

존왕양이를 외치던 사람이 해외에 가서 서양을 배우고, 서양을 배운 사람이 다시 천황국가 건설에 참여한다.

따라서 메이지유신 세대에는

<강한 민족주의 + 급진적인 해외학습 + 폭력적 정치행동>

이라는 세 요소가 동시에 존재했다.

이 조합이 메이지유신의 힘이었지만 동시에 위험성이기도 했다.


종합 평가

75회는 지금까지의 함재봉 메이지유신 설명 가운데 특히 중요한 회차다.

그 이유는 처음으로 <제도나 지도자보다 그 아래에서 움직인 젊은 세대>를 중심에 놓기 때문이다.

함재봉이 그리는 지사는

<번의 관료도 아니고 막부 관리도 아니지만, 자신에게 국가의 운명을 결정할 책임이 있다고 느끼고 스스로 행동한 젊은 사무라이>

였다.

이들이 번을 넘어 서로 만나고 교류하면서

<조슈 사람·사쓰마 사람·도사 사람>

이라는 정체성 위에

<일본인>

이라는 새로운 정치적 정체성을 만들어갔다.

그 중심의 상징이 천황이었다.

따라서 이번 강연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이 하나가 된 것은 중앙정부가 국민을 위에서 통합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막부 말기의 위기 속에서 자기 번의 경계를 넘어 ‘일본 전체’를 걱정하기 시작한 젊은 지사들이 아래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았다.

그 젊은이들의 정치에는

<헌신과 용기>

뿐 아니라

<암살·숙청·맹목적 충성·할복>

도 함께 있었다.

그리고 가장 큰 역설은 그들이 천황을 받들어 자신들이 속한 사무라이 질서를 지키거나 일본을 구하려 했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메이지국가는 결국 <사무라이 자체를 폐지했다>는 데 있다.

63회부터 75회까지 함재봉의 논의를 따라오면 메이지유신은 이제 단순한 ‘서양화’가 아니라

<에도의 경제·교육·난학 → 외세의 충격 → 막부 권위의 붕괴 → 천황의 부상 → 해외 학습 → 지사 네트워크 → 번을 초월한 일본 의식>

이라는 매우 긴 과정으로 나타난다.

75회는 바로 그 가운데 <정치적 정체성의 변화>를 설명하는 핵심 회차라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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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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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한국인의 탄생의 함재봉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쓰는 말 중에 예를 들어서 철학, 또 예술, [음악] 어, 과학, 기술 이런 말을 그
단어들을 이제 영어의 어, 필소피, 테로지, science스, 아art스
이런 거를 번역을 했는데 그 번역을 한게 일본 사람들이었다고 [음악] 말씀을 드렸죠. 후쿠사이키 같은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쓰는 단어 중에 어 또 하나 있는게 뭐냐면 지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애국 지사 할 때 많이 쓰는 그 열혈 지사라고 했을
때 그 지사라는 말 자체가 일본 사람들이 만든 말인데 이거는 외국어를
번역하려서 그런게 아니라 막부 말기
메이주신을이 일어날 때에 그 당시에 나왔던 굉장히 특이한 계층의 젊은
그야말로 지사들을 일컬어서 처음으로 지사 일본말로 CC시라고 읽컫기 시작한
겁니다. 그니까 굉장히 특정의 인간형이고 그 인간형이 바로 어
메이지 유신을 [음악] 일으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젊은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우선 그
[음악] 시시 지지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누구를 지지라고 읽컫는지
지사를 하고 읽컫는지 만들어지게 된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면서 같이 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인의 탄생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음악]
이인우스케가 막부 말기에 이제 그 다이로 대로 임명이 되고 그리고
강력하게 전왕위 파들을 억누르고 그을 숙청하고
어 그러면서 계국을 밀어붙이죠. 미국하구의 조약을 밀어붙입니다. 그
요시다 쇼인 같은 요시다 쇼인이 길렀던 소과 손주구에서 길렀던 그런 제자들 그다음에 사스마에 있는 어
여러 젊은 어 사무라이들 이런 사람들이 격렬하게
계국에 반대하죠. 서양 오랑캐들하고 어 교류를 하기 시작하는 거를 그
국교를 맺고 나라를 열고 하는 거에 격렬히 반대합니다. 그러니까는 어
페리즈독이 도착을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서양의 무력 앞에서 맞설 수가 없으니까 독구가와 막부는 열기로가
결정을 하고 근데 여는 것이 너무나 큰 변화기 때문에 다이어들한테도 다
알리고 교도의 조종한테도 아 이런 거가 있는데 이런 요구가 들어오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이제 여론 수렴을 하죠. 그러니까 이제 여론 수렴을 하니까 그전까지는 절대로
막부가 남의 여론 다른 나이묘들의 여론 천왕의 여론 이런 거 의견 이런
거에 전혀 신경을 안 썼었습니다. 그러다가 너무 힘든 결정을 해야 되니까 몇백
년 만에 처음으로 한번 다이어들 하고 천왕부에 의견을 물었는데 이게 이제
벌집을 수어 놓는 거가 됩니다. 그러면서 그때까지
막부의 말이라면 꼼짝없이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고 따라만 했던 사람들이 어
자기한테 의견을 물어보니까 이제 그때부터 의견 개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국론이 완전히 양분이
됩니다. 계곡을 하자라는 사람들과 절대 계곡을 하지 않으면 하면 안 된다라는 이제
조항 양입파들이 나오는 거죠. 그렇게 되니까 바구 후에는 박구 후에서 어쩔 수 없이 강력한 이인 아우스케라는
다이어를 데려다가 다이로라는 일본 역사상 세 명밖에 나온 적이
없는 정말로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 정권을 주는 그런 자리를 이인하우스케라는 사람한테 이제 주는
거죠. 그래서 이인하우스케는 그 권력을 이어받자마자 전권을 받자마자
어떡합니까? 이거는 계곡을 해야 된다 그러면서 엄청나게 밀어붙여서 그때
이제 요시다 쇼인부터 시작해서 전국에 있는 존황양이 즉 즉 계국을 해서는
절대 안 된다. 미국하고 조약을 맺어서 안 된다라고 하는 그 세력들을
완전히 숙청을 하기 시작을 합니다. 그래서 안세이 대옥이라는
엄청난 숙청 사건을 일으켜 갖고는 전국의 전왕양입파들 숙청을 합니다.
그래서 마크후가 역시 예전에 그 힘을 권력을 다시 잡고 총 통치를 제대로
하는가보다 했는데 밑도번에 있는이 조항양이파 사월이들이
에도에서 만나고 퇴청하는 이인 아우스케를 급습을 해서 암사를 해
버립니다. 엄청난 사건이 터짐으로써 다시 한번 바꾸는 강력한 지도자를
잃고 다시 필요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일본의 정정은 극도의 혼란에
다시 빠지게 됩니다. 이인이나우스케 같은 높은 사람도 죽였으니이
젊은 조항양이파 사무라이들은 그다음에 이제 눈에 보이는게 없습니다. 그러면서 조금이라도 자기네가 봤을 때
천황을 모욕한다라든가 자기네가 생각하는 그러한 전왕위 정책에
어긋나서 뭐 왜곡하고 교류를 하자라든가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은 전부 다 다니면서 암살를
하고 하하기 시작을 합니다. 그러니까 애도 교도 이런 데가 완전히 그냥 암살의
천주로 변합니다. 우리가 가끔다가 사무라 영화들 보면은 거의 사무라 영화들은 대개가 바로 지금
말씀드리는이 막부 말기의 그 혼란기 그러니까 계국을 해야 되냐라는 것과
외국을 유지를 해야 된다라는 그 세력들 간의 다툼 속에서 그 낭인들이
론인들이 젊은 사무라이들이 상대편을 죽이고 암살하고 이런 얘기가 굉장히 많이 있지 않습니까? 실제로 그랬던
겁니다. 그래서 정말로 애도 곁도 이런 데는 공포 휩싸이고 밤에 다니면
안 되는 그런 거리가 되고 그럽니다. 칼찬 사무라이들도 무서워서 어 다니길
거리고 그런 상황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니까 치한 부제의 상황으로 빠지기
시작합니다.이 일을 버리는 사람들. 그러니까는
나라에 공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 번에 다이며 자기한테 공직을 내려 준
것도 인무를 부여해 준 것도 아닌데 자기네 생각에 이것이 천왕한테 충성한
것이다. 이것이 나라를 위해 옳은 길이라고 자기네가 생각해서
행동에 옮기는 그래서
굉장히 과격한 사상을 갖고 아무런 책임은 없이
자기네 생각에 따라서 마구 폭력을 휘두르는 그런 젊은 계층이 생겨나기
시작하는데 그 사람들을 일컬어서 지사 일본말로 시시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이 주로 젊고 아무런 공직도 없고
그러니까는 자기 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애도로 갈 수도 있고 교도로 가서 거기에
가서 다른 번에서 온 자기랑 비슷한 그런 젊은 사무라이들하고 교류를 하기
시작하고 연대를 하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아 우리가 공유하는 사상이
있구나. 그 공유하는 사상이 전황이. 그러니까 천왕을 모시고 막 막부이
외국하고 서양오랑캐들하고 교하는이 막부를 타도하자라는 그 뜻을 모으는
그 집단이 지금 지사라는 집단들입니다.이 지사들은요. 당연히 국정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굉장히 불만이었죠. 자기네가 전고 우리가 제대로 아는 거 같은데 아이 저 절 나이 맞는 대신들이나 이런
사람들은 막부에 있는 이런 사람들은 전혀 어떻게 되는지 모른다. 나라를 위해서
좋은게 뭔지 모른다. 언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고 그래서 항상
박후의이 정책 그다음에 자기네가 속했던 번의
다이며들의 정책 소극적일 이때가 이제 혼란스러우니까 어느 쪽으로 나라가 가야 될지 모르니까
다들 높은 사람들은 소극적일 수밖에 없죠. 서로 눈치를 보고 이게 어느
쪽으로 갈 건지 대국 쪽으로 갈 건지 계속 외국을 유지하는 쪽으로 갈 건지
그리고 바크후의 관력이 유지될 건지 아니면 갑자기 부상하기 시작한 교도의 천왕한테 천왕부의 세력이 쏠릴 건지
어느 편을 들어야 될지 그런 계산하고 있는데이 젊은 지지들은 시시들은 절대 그런 계산 안 하고
자기네가 생각하는 전왕이 예 사상으로 모든 것을 행동해 오기 시작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그렇게 공부가 깊었던 것도 아니고 따라서 어떤 특정
뭐 철학이나 이걸 공유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사회고 다까머리 그렇죠. 결국은 나중에 유신을 메이지
유신을 일정적인 역할을 하는 삼걸 유신 삼걸의 하나인
사이고 다감리 같은 사람은 왕 왕양명 양명하게
심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지행합일
생각하는 거하고 행동이 같아야 된다라는 그 왕영의 사상을 깊이
받아들이고 그래서 생각하는 바를 행동으로 옮기는 그런 어 지사의
상징이 되기 시작합니다. 어떤 시시들은 맹자를
중시하고 충, 효, 정, 성 이런 거를
철저하게 따르는 또 그러한 그 지사들도 있었습니다. 중요한 거는이
사람들은 이론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어떤 사유가 중요했던 것도 아니고
행동으로 옮겨서 모든 거를 빨리빨리 행동으로 옮겨서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은 그것을 곧바로 생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가장 중시했던 사람들입니다. 알아서 방향이 어떻게 됐든지간에
완전히 서로가 어느 쪽으로 갈지 몰라서 바꾸고 천왕 보고 다이며드리고
아무도 결정을 내리고 과감하게 어느 한쪽으로 가지 못할 때에 나라의
나라를 한쪽으로 움직이기 위해서 과격한 행동을함으로써 실제를 실제로
나라를 움직이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바로 또이 지사들입니다. 그리고 이제이 지사들은
젊은 사람들은 어 구왕위파들이 다 그랬듯이 이거는
세국을 유지하려 그러면 어떡합니까? 미국하고 결전을 불사해야 되는 거죠. 미국이 됐든 이제 뭐 영국도 나타나기
시작하고 프랑스도 나타나는데 서양 오랑캐들하고 일전을 버려야 된다라는
이제 그 의식이 완전히 투해지고 그러면서 어떡합니까? 야, 우리가
천왕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되니까 무수를 갈고 닦아야 된다 그럽니다.
그러면서 이때에 일본 전국의 도장들이 생기기 시작하고 그죠. 우리가 이제
그 사무라 영화들에서 많이 보는 그 수많은 도장이 생기고 하는게 이때 생깁니다. 왜냐면에도 에도가에도
280년 동안 평화의 시기에는요. 임진회란 끝나고 그리고 새끼가 하라
전투 끝나고 도구가와가 딱 권력을 잡은다고부터는 전쟁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무술을 연마하고 한 거는 커녕 사무라이들이 점점 점점 무술을
무술의 특기마저도 없어지기 시작하고 더군다나 가난한 사무라이들은 어떡합니까?
자기 칼을 팔아서 농사 농부가 돼 버리는 경우들도 허다했고 그죠. 몰락하는 사무라이들이
생기고 이제 이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전까지는 굉장히 여러 번에 다양한 번뇌 있었고 그 번에서 맨
말단이었고 젊었기 때문에 사실 별 역할도 없었고
다른 번에 갈 일도 없었고 그랬는데 지금 막부 말기에 이런 현상이
벌어지면서 막부가 전국적으로 여론을 수렴하기 시작하고 서로가 교류가
시작되기 시작하면서 그러면서 이제 계국이냐 세국이냐 냐 전왕이냐이
문제를 가지고 뭉칠 수가 있는 이념이 생기기
시작하고 그 이념으로 뭉치는 사람들이에도 아니면 교도로 가면서 같은 지리적 조건 속에서
같은 이념을 가지고 같은 지향점을 갖는 그런 젊은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이 사람들이
처음으로 아 우리나라가 이렇게 번으로 나눠져 있고 박가 있고 그런 것이
아니라 이게 다 같은 일본이다. 이게 우리가 한 나라다. 한 운명
공동체다. 그리고 그 운명 공동체의 수장. 그 운명 공동체의 우두머리
상징은 도구와 막부가 아니라 뭡니까? 천왕이다."
라면서 일본이 하나로 엮어질 수 있는 270개 번호로 나눠져 있었던 그
일본이 하나의 국가로서의 정체성 그리고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뭉치기 시작하는 그런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 조항위파
지사, 조항양입파 시들의 등장입니다. 대표적인지지 지지사이
도사의 지사들입니다. 도사번이라는게 바로 사건모토도 료마의 그 번입니다.
자, 그러면이 도사의 지지들이 지사들이 어떻게
형성됐는가?이 이 사람들이 1861년 10월에 처음으로 도사의 젊은
사무라이들이 우리가 이제 지사라고 부르게 되는 그 사무라이들이 모여서
맹약을 서약을 하는 당당한 신주가 신주라는게 신의 땅 하늘이 내 우리
신성한 황토가 오랑케의 모욕을 받아 예로부터 전에
내려온 대화혼 야마토다마시도 이제는 이미 끊어지려고 한다.
천왕께서는이를 깊이 한탄하시거늘 오랜 평화로운 천왕의 치세에 인순과 위타의
풍석에 젖어서 누구 한 명도이 마음을 분발해서 황국의 화를 제거하려는
사람이 없다. 왜람때에도 우리 노송이
도사의 어 다이며입니다. 야마오치요도 당시에
이제 다이며죠. 우리의 노손께서는이를 근심하시어 관리들 즉 박후와 언쟁을
하셨는데 오히려이 때문에 죄를 얻게 되셨다. 이처럼 고귀한 생각을 가지신
분을 어째서 그런 죄에 빠뜨리시는 것인가? 군주가 치욕을 당하면 신은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했다. 더구나 황국이 머지하나 좌임 즉 오랑케
풍속을 따르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니 저 대화혼을 분발해서 이성 형제 모든
형제들 서로가 다른 형제들을 결합시키고 한 점에 사심 없이 서로
협력해서 국가의 부흥에 만분의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한다. 어떻게
올바른 말씀을 하신 우리의 다녀를 저렇게 대할 수가 있느냐. 이거는
뭔가 정신이 썩었다. 너무 오랜 평화를 유지해오면서 지금 우리의 야마도 정신이 썩어 버렸다.
이렇게 해서는 우리를 지킬 수 없고 이렇게 해서는 천왕을 제대로 보필할 수 없다. 이제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이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근기 즉 태양을 그린 천왕 군대의 깃발입니다. 나중에 이제 그 실제로
그 보신 전쟁이 났을 때 도크가와 천왕군이 어 싸울 때 그때 사이고닷까머리가
천왕군을 이끌면서 천왕군의 깃발로 내세기했는데 그게 이제 금기입니다.
금기가 한번 나붙기면 단결에서 물불 가리고 뛰어들 것이다. 이에 신명께
맹세하노니 위로는 황제의 성의를 바들고 우리 노송의 뜻을 이으며
아래로는 만민의 근심을 제거할 것이다. 만약이 가운데 사심을 갖고
다투는 자 있으면 신의 분노가 벌을 내릴 것은 물론 동지들을 모아놓고 할복할 것이다. 각자가 이름을 적어서
넣어둔다. 그러면서 혈서를 씁니다. 이런 지지의
운동이 벌 벌어지기 시작하면서 지사들의 운동이 각 번마다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계국을 옹호하고 도구가 막부를 지지하는 다이어 밑에 있었던 젊은
사물아들은 어떡합니까? 자기의 번주가 잘못됐다. 그러면서 다이며들이 잘못했다라면서 자기의 번을
탈출을 해서 애도로 가고 교도로 가서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같은 뜻을 품고 있는 다른 번에서 온 조왕양이들 지지들하고
교류를 하면서 그러면서 자기네가 천왕의 호위병 천왕의 근위병
그러면서이 조항양이 파 대신들을 자기네가
보호한다라든가 이런 역할을 자하면서 애도하고 교도에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애도하고 교도가 공포의 도시가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지사들은요
굉장히 대부분은 아주 비극적인 삶을 삽니다. 월급도 없는 거고 아무것도 없는 거고 젊은이들이 그냥 뜻만
있어서 뜻으로 와서 무작정 상경을 해서 에도나 교도에 가서 그냥
여기저기 빌붙어서 동료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그렇죠. 그러면서
삽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성공한
대표적인 성공한 이런 지사들이 사고닷가머리 기도가 여시 오쿠보도시미치 뭐 이런 사람들이지만은
대부분은 실패하고 일찍 죽고
그러면서 굉장히 비극적인 어 종말을 맞이합니다.
또 많은이 지사들한테는 젊은이들한테는 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엄청난
대의명분 정말 나라를 위해서 자기내가 직접 뭐를 할 수 있고 그리고
국가의 방향을 틀 수 있는 그런 역할 할 수 있다라는 그러한 자부심과 그
흥분 이런 것이 이제 그 섞이면서 어
진짜 그야말로 삶을 만끽을 입니다.대 도사의 대표적인
지사 사까모토리오마 그 유명한 어 그 시 시 시바리오다라고 쓴 료마가
간다라는 그 소설의 주인공 어 그리고 그 연속국 유명한 일본 연속국의
주인공이기도 한 그 사과머또 료마는 그 당시에 아직이 지사로 본인도 이제
그 에도에 갔다가 교도에 갔다 떠돌아다니면서 다른 그 다른 번에서 온 지사들하고
교류를 하기 시작하고 살고 닷가머리하고 만나고 기도 다과요씨 조요씨 기도 이런 사람들하고 만나고
교류하고 이제 그러면서 뭔가를 도모하는 그런 분위기 속에 들어갔을 때 그 살고 있을 때 자기 노의한테
편지를 쓰는게 남아 있습니다. 그 편지 이렇게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소위 황국이라고
불리는 우리나라에서 의리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은 천황폐학께 권력을 다시
돌려드리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모른다. 그래서이는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같이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천황 폐악께서
마음을 놓으실 수 있도록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물론
천왕폐하의 조종을 자신의 한이나 부모들보다 앞세우 있다. 자신의
친척들과 자신의 한을 번을 우선시하지 않고 어머니와 부인 아이들을 버리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채물을 져버린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가 처에 있는
시대상에 비춰볼 때 바보 같은 관려들이나 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말에 현혹된 부모들은 우리의 한 우리
가문 우는하면서 아들들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게 만들고 있다.
가족이고 부모고 이게 중요한게 아니라 나라다. 그러면서 무조건 자기같이
신분이 낫더라도 천왕을 편하게 해 드릴 수 있는 그 역할은
사실 오히려 우리가 우리만이 할 수 일이다라고 지금
자기 누이한테 어 자기의 뜻을 지금 펼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구체적인 계획도 없고 뭐 구체적인 방향성 있는 것도 아닌데
전왕위는 그냥 구호입니다. 그러니까는 사실 생각해 보면 나중에 우리가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이런 지사들이 토대를 이루어서 근대 국가를 근대
개혁을 해서 근대 국가를 만들었게 메이주신의 역사지만이 당시만 하더라도이
실제로 명치신을 일으킨 메주 의신을 일으키는이 지사라는 젊은이들한테는
자기네가 그대 국가를 만든다라든가 뭐 그래서 결국은 사무라이 계급도
폐지되고 신분 계급이 폐지돼서 사무라이 자체가 없어지는 어떠한 그런 근대 국가를 만든가 이런 생각은
추어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기네 같은 사무라이들이
다만 천왕한테 충성을 해서 천왕을 받들어서 천왕이 막불을 쫓아내 버리고 막불을
해임시키고 천왕께서 직접 나라를 통치하는데 거기까지 갈 수 있도록
그리고 당연히 뭐 이제 천왕이 직접 나라를 통치하기 시작하면 자기네가 거기서 밑에서 보필를 하겠다 이런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그 전왕의 운동에 에
뛰어는 것이 이제이 지사들이었습니다.
법률 방송이 출간하는 시사 교양지 법치와 [음악] 자유는 우리 사회가
증면하고 있는 법치의 문제들을 가장 냉철한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는
정론지입니다. 26년 대한민국의 오늘을 가장
정확하게 깊이 있게 읽어 볼 수 있는 법치와 자유를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온라인으로도 편하게 읽어 보실 수 있습니다.
결국 메이지 신이 가져온 그러한 변역 그러한 그것 메이지신을 통해서
만들어진 일본의 그 근대 국가는 지사들이 원하던 것도 아니고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만일에 알았다라면 알았더라면 이런 나라를 만든 것이다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과연 [콧방귀] 그렇게 열심히 조항양의 운동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굉장히 전통적인
다만 막부가 아닌 천왕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나중에 나중에 또
하나 대표적인 사건모드려오마 말고 또 이제 정말로 메이지 유신을
일으켰던 사이고 다까머리라는 그 지사는 실제로 자기가
사스마의 사무라이들을 모아서 훈련을 시켜서 그 사람들을 그 사무라이들을
이끌고 천황의 군대가 돼서 도덕구가 막부의 군대와 싸워서 보신 전쟁에서
결국 이겨서 천왕의 왕정 천왕이 친정을 할 수 있는 왕정복고를
일으킵니다. 그런데 이제 그다음의 문제가 뭡니까?
그런데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자기내가 세웠던 그 메이지 정부가 뭐를
합니까? 신분 철패를 해 버리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제일 신분 철패에
가장 큰 타격을 받는게 누굽니까? 사월이들이죠. 특권이 없어져 버린 거죠. 그러니까는
자기네가 왕정복고를 하고 그리고 천왕 밑에서
천왕군이 돼서 그러면서 천왕을 보필해서 그러면서 이제 살아가려고
그렇게 거사를 했던 건데 웬걸 그 천왕이 명령을 내려서 사무라이를 없애
버리는 거죠. 그랬을 때에 그 고민을 끌어앉는게 사고 닦까머리고 결국은
자기도 정부직을 사임을 하고 사스마로 내려가서 그때에 그 지사들 그
사무라이들이 사회고한테 와서 어떻게 우리한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이렇게 넘어갈 수가 있습니까? 그러면서 무슨 근대 국가는 무슨 근대 국가입니까? 왜
우리 사무라이들을 없니까? 하면서 사스마 반란을 일으키는 거죠. 세인
전쟁을 일으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다들 높은 사람들은 흐릿한 상황에서 우왕장하고 있을 때 어쨌든
본인들의 생각에 맞는다라는 조항양이의 인념을 끝까지 관철시키면서 결국은
실제로 왕종복가 이루어지게 만들면서 가장 큰 희생타가 되는 것이 바로이
지사들 사무라이들입니다. 아예 그 계층은 사라집니다. 근데 살아이지기
전에 막부 시대에서 메이지우신 시대로 넘어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사과 머토리오마는 실제로 메이저신을 보지 못하고 암사를 당하고 사회거 닷가머리는 메이저신을
주도했는데도 결국은 자기가 세세운 정부와 싸우다가
자결을 할 수밖에 없는 그 비극이 바로이 지사들의
비극입니다. 자, 그럼 이제 지사들이 이렇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젊은이들은
막부의 힘이 약해지니까 인하우스케가 암살이 되고 막부의 강력한 지도자가 상 없어지고 나서부터는 막부도 이제
어떻게 해올지 잘 모르겠는 거고 그런 상황에서 막부 시대 내내
내침을 받았던 가장 바깥에서 중앙정치에 전혀 아무것도 못 하고 있었던
대표적인 도자마변인 번 도자마 번인 조수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을 합니다.
그러니까 전에 말씀드렸듯이 조수는 사스마도 그렇지만 사실은 굉장히 탄압을
받으면서 독구가와 막부 시절 내내 탄압을 받으면서도 여러 경제적인 이유
그다음에 또 사무라이 숫자가 유난히 많았던 이유 등등으로 인해서 굉장히 역동적이고 경제력이 강하고 그리고
군사력까지도 갖추고 있었고 개항의 계국의 시대가 오니까 굉장히 먼저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지금 정치적인 공백까지
생기니까 조수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특히 조수도 그렇고
사스마도 그렇고 원래 오랜 전부터 천왕부랑
천왕가랑 특별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혼 혼도 이어지고 있었고
그랬던 관계입니다. 그러니까는 막부의 힘이 약해지니까이
조주 같은 경우는 사스마도 그렇고 교도의 천왕부랑 손을 잡기 시작을
합니다. 내통을 하기 시작하고 긴밀하게 움직이기 시작을 합니다. 요수가
궁극적으로는 조왕양이 파의 근거지가 되지만
먼저 움직였을 때는 이때 제일 먼저 움직였을 때는 사실은 공무합체론 그러니까
막부하고 천왕이 협력을 하는 고부가타이라는 그 이론을 먼저 들고
나오는게 사실은 조슈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어떻게 보면 온 온권
정책으로 나오는 거였죠. 조수의 사무라이 중에 나가이 우타라는 젊은
사무라이가 있었습니다.이 사람이 1861년에 자기 조수의 다이며한테 자기
다이며한테 상소를 옵니다. 그러면서 뭐라 그러냐면요. 우리 조슈는 황가하고 굉장히 특별한 관계를 오래
전부터 전통적으로 갖고 있는 대나이묘다. 근데 지금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다.
그런데이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금 박후하고 막부하고
천왕이 교도의 조종이 이렇게 서로 다 가지고는 어떻게이 나라가 국란을
극복할 수 있느냐. 300년에 가까운 독구가와 의화에도 시대가 이어져 왔고
그래서 그 박구후가 그래서 무기력해진 것이고 어떻게서든지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그래서 정말로 속된 마음을 품고서
외세와 구력적인 조약을 맺는 것이 맺었던 것이다. 이것 때문에 이제
애국자들이 분노하고 있고 지지들이 분노하고 있고 존항이 바가 만들어지고 있고 그렇다 그러면서 그렇게 돼 갖고
최고을 할 거냐 개곡을 할 것이냐 이런 문제를 갖고 지금 허송 세월을 지금 우리가 하고 있지 않느냐 나라가
우왕저항하고 있지 않느냐 자 그런데 존황양파들은 무슨 뭐 천왕한테 다시
권력을 주자 그래서 왕종 복고를 하자 이런 얘기도 하지만은 자기가 봤을 때는 지난 300년간 천왕이 박구
마코프한테 모든 거를 맡겼지 않느냐. 국사를 맡겼던 거 아니냐. 그러니까는 외세가 외세 관련된 모든 것도 사실은
마크후프가 다뤄왔던 것이고 여태까지. 그리고 실제 외국 사람들은 천왕이 있는지도 모르고 바쿠후가 일본의
왕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는 정도인데 그거 어쩔 수 없는
현실 아니냐. 그러니까 그런 상황에서 이제 와서 양이들하고
맺은 헤르스 조약 조약들이 다 있는데 이거를 일방적으로 파괴하자라는
전항양입들의 얘기는 말이 안 되지 않느냐?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 그러느냐?
1번이 우선 항해수를 익히고 바다로 나가야 된다.이 사무라이들이
육지에서만 싸우는데 그게 아니라 이제 바다로 나가야 된다. 항해수를 익히고
군대를 기른 다음에 무역을 통해서 나라를 부흥시키고
그리고 황국의 군사력을 전 세계에 그런 식으로 육군과 해군과 이런
힘을 과시해야 된다. 즉 부국 강병을 제대로 해야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종이 천왕이 바쿠보고 이러한
전략을 추진할 것을 명하고 박후프는 그것을 실행해 옮기면은 그러면 양의와
조약을 맺었던 것이 오히려 나라를 강하게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돼 버리고 전화혹이 돼 버리는 것이고
그리고 바구후는 오랑캐를 무찔러야 된다는 그 본업 원래 그래서 대장군
아닙니까? 쇼근이라는 것이 천왕이 오랑캐드를 무찔르라고 임명하는
장군이지 않습니까? 그 본연의 임무를 완수할 수가 있게 되고 천왕의 권위를
만방에 떨칠 수 있게 됐다. 이렇게 되면은 즉 천왕하고 마크후가 힘을 합쳐서 천왕의 명령을
내리고 마크후가 그것을 옮기는데 뭐냐면 나라를 열어서
해군을 기르고 육군을 기르고 무역을 증대시켜서 국부를 일으키고 그때 가서
박국한테 외스를 쫓아내라 그러면 그러면 이건 진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천왕부 좋고 박부 좋고 일본
전체한테 좋은 일이 아니냐라는 의견을 올린 얘기입니다. 천왕하고
박후가 손을 잡아야 된다라는 그래서 국란을 극복해야 된다는이
나가의 우타의 이론이 소위 공무합체 이론이 되는 겁니다. 고부가타이라는
이름이 여기에 이제 그 고부가타의 이론이 가장 구체적으로 나타나는게
바로 나가의 우타의이 상소에서 나오는 겁니다. 어 조에다면 머리는
그래 좋다. 그러면 너 한번 교도로 가서이 제한을
네가 상소에서 얘기했던이 제안을 공부 합체론을 한번 교도에 교도의 조종에
가서 상진해 봐라. 뭐라 그런지 봐라. 그래서 나가이가 실제로 교도로
갑니다. 교도에 가서는 귀족 산조를 만납니다. 그때에
천왕부와이 조수하고의 연락을 맺는 그 연락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산조는 나가이의
그 안을 보고서는 어 이거 괜찮다. 그래 갖고 천왕한테 물립니다. 그래서 천왕도 아 좋다
그러면서 1861년 6월 2일 아예 나가이로 하여금 그러면
네가 이거를 가지고이 안을 지금 우리한테 얘기했던이 안 너희 다이묘한테 얘기를 했고 이제 우리
천왕한테 얘기를 했으니까 이거를 그러면 막부에 가서 얘기를 해 봐라.
그래 갖고 나가이가 에도를 향합니다.
그리고 에도로 가서 박구후한테 막부한테 올렸더니 막부도 이건 너무
좋다. 이제 그렇게 되는 겁니다. 자, 근데 문제는 뭐냐면
천왕도 좋다 그랬고 아니 우 조의 다묘도 좋다. 좋다 그랬고 천왕도
좋다 그랬고 막부도 좋다 그랬습니다.이 공부 합체 이론. 그래서 다 합의를 했습니다. 문제가
어디서 터지는지 아세요? 조수 내부에서 터집니다. 조수 내부에서 어디서 터지냐면 조수 내부의
조항양입파에서 터집니다. 그 조항양입파. 그러니까 아니 왜 저
서양 오랑캐하고 국교를 튼 [목을 가다듬음] 그 막불을 쫓아낼 생각을 하지 않고
쫓아내고 천왕한테 신정을 하시라고 왕종 복구를 시켜 드릴 생각을 안 하고 무슨 둘이 협력을 하도록 하자는
거를 하자 그런다라고 하는게 그게 조항 양위파들입니다. 근데 그 조항 양위파 조수의 조항 양위파의 대표가
누구냐면 바로 기도다카요입니다. 즉 나중에 메이지 유신을 일으키는 세
명 유신 삼걸이라고 하는 그 삼걸 중에 조슈를 대표하는 기도
다카요입니다. 나머지 둘은 이제 사이고 다가 머리하고 오쿠보도시미치 사스마 사람들이죠. 근데 거기에
이제이 사 조주의 기도가 이때 부상을 하는 겁니다. 스승 요시다 쇼인네
속과 손주구를 그죠. 그 조그만 마을에 있는 자기네가 태어난 하기의
조그만 마을에 있는 그 조그만 학교를 지금 여시다 쇼인이
미랑을 하려고 갔다가 결국은 실패를 해서 잡혀와 갖고 유배를 향해서 위리한치같이 고향에 가서 있으라 그래
갖고 거기에 있으면서 그래도 허가를 받고서는 자기 작은 아버지가 하는 조그만 학교를 인수를 해서 거기서
이제 동네 어린애들을 가리키기 시작하는 거죠. 가르킨 것 2년 반, 3년을 최 못 가르키는데 그때
80명을 가리키고 그중에 60명이 나중에 매주신 이후에 대신을
여임한다라는 바로 그 속과 전주권인데 거기에 나온 대표적인 학생이 바로이
기도죠. 그러니까 기도는 어려서부터 매 조왕양이의 사상을 요시타
시인으로부터 받았고 조수의 조왕양의 팔을 이끌고 나가오다가 하는게 이게
말이 되는 일이냐? 왜 조번이 이런 일을 합니까라면서 그때에 들고
일어나면서 이거 우리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 나가고 있습니다라면서 조주 내부에서 발론을 일으킵니다. 기도는
이제 속가주구를 나와서 어 요지다시한테 거기서 배우고 그리고
1852년에 이제 에도로 갑니다. 에도로 가서 검술도 배우고 그러니까
그 당시에 지사들이 하는 전형적인 일을 하는 거죠. 가서 무도 무도장에 다니면서 검수를 배우고 다른 번에서
온 그런 지사들을 만나서 교류를 하면서 왕정복고 조항양이 사상 이런
거에 대해서 이제 논의를 하고 그러면서 같이 뜻을 이제 키워 가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나가 있다가이 공부 합체론을 들고서
자기 다이묘의 허락을 받고 천왕에 허락을 받고 그리고 에도에 왔을 때
에도에 와서이 공부합체론을 막부한테 전달했을 때 그때에 기도는
자기네 번에 조수 번에 관리로 애도에 파견되어 와
있었습니다. 조항양이파로 애더에 파견되 와 있었는데 바로 자기 같은
번에서 나가오다가 공부 합체론이라는 걸 들고서 온 겁니다. 그러니까는 이런
일이 벌어질 때 기도는 에이나우스케를 암살했던 그 미토번의 그 그런
사무라이들 그렇죠. 그런 지사들 그리고 다른 조항의 지사들 이런
사람들과 교를 하면서 결국은 이때에 여섯 명의 사무라이들이 지사들이
모여서 천왕한테 충성하는 혈서를 씁니다. 이것이
존황양이파의 구체적인 시작입니다. 그 태동을 시킨 것은 기도
다카요습니다. 그 사람을 유신 삼걸로 치는 삼걸의 하나로 치는 이유도 바로 이만큼
근본적인 가장 기본적인 핵심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이
조항양이파들이 메주신을 일으키는 겁니다. 지금
나가이구타의 공부 합체로는이 조주의
기도닷가요씨 같은 번에 출신의 기도에가 주동하는 조항양위파의 반대만
부딪친 것이 아니라 히마즈
히사미스 그러니까 사스마 번의 번주의
에도의 개입으로 인해서 결정타를 맞습니다. 입니다. 히사미스는
조슈가 먼저 움직여서 공부합체론을 들고서 와서
중앙 정치를 정치 틀을 조가 잡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조수의 안에 따라서 천왕이 합의를 했고 막부가 합의를 했고 나가
오다가 실제로 그 역할을 다 하고 아 다 좋다 그럼 이대로 하자라고 하고 있었는데
비록 조주 내부에서 기도의 반대는 있었지만 갈 것 같은 상황이었는데
그렇게 조주가 주도하는 전국이 형성이 될 것 같았었는데
시마즈 그러니까 사스마번의 번주로서는 같은 도자마번 같이
쫓겨나 외방에 쫓겨나 있었던 번이었는데 조주가 그렇게 되는 정권을 잡는 거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시마즈가 오히려 군대를 끌고서 그리고는 에도로 갑니다. 에도로 가서 안 된다. 지금
공부합체로는 말이 안 된다. 왜? 아니 지금 공부 합체론을 하자고
그러지 않아도 천왕의 여동생이 이복 여동생이 소근은하고 결혼까지 시키고
그랬는데도 도대체 무 이거 제대로 안 되고 있는 거다. 그리고 쇼근이
감히 천왕에 여동생을 부인으로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아이이 황가를
전혀 존중하지도 않고 존경하지도 않고 너무 북선하게 곤다. 이런 이유를
들고서 와서는 자기가 오히려 막부 대신에
사스마가 와서 천왕하고 천왕가하고 협력을 하면서 권력을 잡으려고 그러는
시도를 합니다. 그래서 심마스는
안세이 대혹 때가 경 사람들 다 풀어주고 조항양이 파들 바크후에
요직에 안치고 그죠. 그때에 이인나우스키한테 수청당했던 사람들을
앉칩니다. 다시 권자 권력의 핵심에 다시 배치를 합니다. 그러면서도
과격한 조랑 양이파들 요시다 쇼인의 제자 같은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무력으로 다 제압을 해 버립니다. 그러니까 에도에 와 있었던 그 많은 조항양이파들를
젊은 지사들을 시마즈가 다 제압을 해 버립니다.
그러면서 자기네가 말하자면 온권 조항 양입하죠.
온권 조항양이 파로해서 박수후수후는 뒤로 물러나게 하고 자기가 천왕보하고
손을 잡고 그러면서 전국을 주도해 나가려는 그런 시도를
하면서 그러기 때문에 조주에서 왔던 극렬한 기도닷가요씨 같이 조항양이를
위해서 혈소를 쓰고 했던 그런 극급진 조항양이 파들을 숙청을 합니다.
에도에서 박구후를 타도하려는 그러한 그 조항 양이파들 교도의 조항
양이파들이 에도에 와서 박쿠후를 타도하려고 하는 거사를 일으킨다라는
그러한 정보를 입수하고는 이때에 히자미스가 군대를 보내 가지고이
교도의 론인들한테 지사들한테 거사를 포기하라고 하는데
말을 안 듣습니다. 그래서 이때에 전투가 벌어집니다. 그리고이 전투로
전왕향이 파들 론인들 지사들이 수없이 죽습니다. 사스마의 론인들은 조항
받으는 사스마로 강제 호송이 돼 버리고 이때에 조슈에 구사카 겐세이
같은 그 역시 일찍 죽게 되는 초기의 전왕위파의 핵심이었고 조슈의
사스마 조수의 지사들의 핵심이었던 쿠사카 겐세이 같은 이런 사람들이 다
조항양인파에 그때 있었는데 그때 도저히 사스마의 시마즈가
워낙 강하게 나오고 그리고 같은 사스마 출신 조항양이파
아리마라는 유명한 조항 양이파 사스마 출신데도 사스마의 다이메가 죽여 버립니다. 그러니까 전투를 피해서
달아납니다. 그래서 조슈로 가니까 히사미스가 조주 번에 대고서
너희 너희 번으로 도망친 조항양이파이 루인들 젊은 놈들 이거 내놔. 그런데
조주보는 못 내놓겠다고 그때 그럽니다. 이때부터 사스하고 조슈가 완전히
반목을 하기 시작을 합니다. 그러니까 나중에는 궁극적으로는
협력을 해서 조수아가 사스마가 협력을 해서 그래서 메이지를 일으키지만
지금 막부가 약해지고 흔들리고 있을 때에
그때는 서로가 경쟁적으로 전국을 주도하기 위해서 조수가 먼저 고부가타의 공부 합체론을 들고서
움직였다가 사스마의 시마즈 가 와서 그거를 축출을 시켜 버리고
강 그리고 자기가 전국을 주도하려고 하는 와중에
완전히 조수하고 샀으면은 라이벌이 돼 버린 겁니다.이
라이벌이 된 거를 나중에 풀어서 화해를 시켜서 서로가 힘을 합치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게 바로 도사의
지사였던 사과모도 료마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까모도리오마가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했다라는 거죠. 이렇게 반목을 하기 시작한 계국을 통해서 혼란에 빠진
그리고 권력의 공백이 생기기 시작한 애도의 권력 공백을 메우려고 서로
경쟁적으로 나선게 그 두 도자마 다이묘어였던 조슈하고 사스마였던 것이죠. 이렇게 되니까
시마즈가 사스마의 다이묘가 에도에 와서
꽉 잡고 그리고 군대를 보내서 교도에서
론인들이 일어나 갖고 또 전왕이 파여서 애도 막부를 타도하겠다라는 그
거사를 무력으로 진압을 해 버리고 거듭 말씀드리지만 고메이 천왕같은
같은 경우에는 아예 의존향이 원하지 않았어요. 그렇죠? 그냥 독구가 막보가 계속 잘
가면서 자기한테 자기가 쓰기 쓰는데 필요한 돈 체면 유지하는데 필요한 돈 주고
이러면 그냥 같이 가는 걸로 생각을 했었기 때문에 어차피 극렬한 조항양파를
원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랬기 때문에 나가 우타가 공부 합체론을 가지고
오니까 어유 하자 그랬던 거고 자기 여동생도 소근하고 결혼을 시켰던 거고
이런 상황이었는데 거기에 대해서 극렬하게 반대하는 그 조항 양이파를 시마즈가 와서 다
평정을 해 준 거죠. 그러니까 전부 다 천왕이 됐든 막부가 됐든 오히려
시마즈한테 고마워하면서 시마즈의 대안을 받아들이는 거죠.
시마즈의 그 권력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러면서 중앙 권력이 완전히 사스마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조슈는 어떻게 됩니까? 조우주의 [콧방귀] 지도층은
나가이 우타의 공부 합체론이 실패했다라는 거를 깨닫고
어떻게 합니까? 나가이한테 자결을 명합니다. 명합니다.
할복 자살를 명합니다. 그래서 1862년
11월 15일 나가 있는 조종과 조수에 저지른 죄
때문에 할복 자살을 합니다. 이것이 그 당시에
그 당시에 지사들의 젊은
사무라이들의 운명이었습니다. 지행합일 그야말로 모든 것을 행동으로
옮겨서 전왕 양이파도 있었고 나가고타 같이
공부 합체론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오히려 하급 사무라이로서 자기
다이며나 누구한테나 상소를 올리고 의견 개진을 해서 그래서 그걸
관철시키는 놀라운 행동력을 가진 그런 사람들이었죠.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지금이 엄청난
권력 싸움에서 권력 투쟁에서 참 억울하게
많은 경우에 억울하게 어처근이 없이
암살를 당하고 할복 자살를 명받고
할복 회복할 수 없게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운명의 처합니다. 이런 일들이
부지 기술로 일어납니다. 저는이 당시에 그 젊은 이들의 그 정신 비록
엄청난 희생을 치렀고 많은 경우에는 극히 일부만 나중에 메이신이 유신이
성공을 해서 유신삼걸에다가 뭐 야마가다리 또 뭐 이또 이러 이런 사람들이 엄청난
국가의 대신이 되고 나름대로 영화를 누리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거기까지 갈 때까지 일본이이 격동기를 넘어가는 하 있어서 막부 시대에서
매지유신 시대로 넘어가는 그 과정에서의이
강직하고 불같고 자기의 신념을 행동으로 옮김
옮기고 그래서 희생되는이 지사들의 희생이라는 것이 그 정신이라는 것이이
놀라운 본건제도에서 근대 국가로 넘어가는데 있어서 큰 정신적
밑받침, 밑걸음이 됐다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네. 오늘은 어
우리말로 지사 일본말로 CC시라는이 젊은 하급 사무라이 낭인이기도 하고이
사람들이 어떻게 막부 말기에 만들어 그 시대에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그
사람들이 누였으며 그 사람들이 결국은 메이지으로 넘어가는 밑걸음 역할을
어떻게 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지지들이 판을 치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전국이 극하면서 그러는 와중에 조슈하고 사스마가
대립을 하기 시작하고 거기에 결국은 결국은 그 대립의
와중에서이 조왕리 사상 때문에 결국은 조수하고 사스마가
외세하고 영국하고 프랑스하고 네덜란드하고 미국하고 전쟁까지 [음악] 하게 되는
그런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 상황에 대해서 다음 시간에 같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통해서 한국인의 [음악] 정체성을 담구하는
한국인의 탄생. 오늘은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니다.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74 가쓰 가이슈에서 조슈 파이브까지 근대 일본의 설계자들

가쓰 가이슈에서 조슈 파이브까지 근대 일본의 설계자들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74회 - YouTube

가쓰 가이슈에서 조슈 파이브까지 근대 일본의 설계자들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74회
법률방송
7,958 views  Aug 5, 2026 
본 강연은 함재봉의 『한국 사람 만들기 II: 친일개화파』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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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제74회 강의에 대한 요약과 평론입니다.

요약

  • <삼국간섭과 요동반도 반환의 굴욕> 청일전쟁 승리 직후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본은 요동반도를 할양받았으나, 러시아가 주도하고 독일과 프랑스가 합세한 <삼국간섭>에 굴복하여 요동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해야 했다. 이 사건은 일본 지배층과 국민들에게 군사적·외교적 실력이 서구 열강에 미치지 못하면 전쟁에서 이겨도 성과를 지킬 수 없다는 뼈아픈 현실을 각인시켰다.

  • <'와신상담'과 대러시아 결전 준비> 삼국간섭의 굴욕 이후 일본 사회 전체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을 국가적 표어로 삼고 대규모 군비 확장에 돌입했다. 청나라로부터 받은 막대한 배상금의 대부분을 육해군 현대화와 신식 전함 건조에 쏟아부었으며, 이는 조선과 만주를 둘러싸고 필연적으로 충돌할 러시아와의 차기 전쟁(러일전쟁)을 대비한 총력전 체제의 서막이었다.

  • <조선 조정의 '인아거일' 노선과 을미사변>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위상이 흔들리고 러시아의 강력한 군사력이 입증되자, 조선의 민비와 지배층은 일본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이는 <인아거일(引俄拒日)> 정책을 본격화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 군부와 공사 미우라 고로는 1895년 경복궁을 기습하여 민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이라는 극단적인 만행을 자행했다.

  • <아관파천과 국가 주권의 표류>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극심한 공포를 느낀 고종은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이로 인해 한반도는 일본의 압박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났으나, 러시아를 비롯한 서구 열강에 광산·철도·산림 등 막대한 국가 이권을 넘겨주게 되었으며, 조선은 주체적 근대화의 동력을 완전히 상실한 채 열강의 세력 균형에 국가 운명을 내맡기는 처지로 전락했다.

평론

제74회 강연은 삼국간섭에서 아관파천으로 이어지는 19세기 말 한반도 주변의 급박한 세력 전이와 파국적 사건들을 국제정치적 역학 관계의 시각에서 치밀하게 재구성한다.

첫째, 제국주의 열강의 냉혹한 세력 균형 원리를 명쾌하게 드러낸다. 삼국간섭을 통해 '국제법이나 조약'보다 '강대국의 힘의 연합'이 상위에서 작동함을 일본이 학습하는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메이지 일본이 왜 전면적인 군국주의 군비 경쟁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는가를 구조적으로 설명한다.

둘째, 조선 말기 외교 전략의 구조적 한계와 비극성을 날카롭게 해부한다. 자체적인 군사력과 제도 개혁 없이 외세를 외세로 막으려 했던 '인아거일'과 '아관파천'은 자주적 생존책이 아니라, 열강의 패권 다툼을 한반도 내부로 직접 끌어들여 국권을 더욱 취약하게 만든 자충수였음을 비판적으로 규명한다.

다만, 지배층의 권력 투쟁과 외교적 줄타기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이러한 외교 참사와 을미사변의 충격 속에서 전개된 기층 민중의 의병 항쟁이나 사회 저변의 민족적 저항 움직임에 대한 평가는 다소 축약된 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가 19세기 말 국제 질서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왜 자주적 근대화에 실패하고 식민지화의 길로 접어들었는가를 거시적이고 현실주의적인 안목으로 짚어낸 탁월한 분석이다.

==

함재봉 「한국인의 탄생」 74회

<가쓰 가이슈에서 조슈 파이브까지, 근대 일본의 설계자들> 요약·평론

74회는 앞선 70~73회가 주로 <페리의 충격 → 개항 → 막부 정치의 위기 → 천황의 부상>을 설명했다면, 이제 시선을 조금 바꾸어 <일본은 실제로 서양의 지식과 기술을 어떻게 배웠으며, 그 지식을 누가 일본 내부로 옮겼는가>를 다룬다.

핵심 인물은 가쓰 가이슈(勝海舟),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니시 아마네(西周), 그리고 조슈번이 영국에 비밀리에 보낸 이른바 <조슈 파이브(長州五傑)>다.

함재봉의 주장은 한 문장으로 압축할 수 있다.

<일본의 근대화는 ‘서양에 문을 열었다’는 데서 끝난 것이 아니라, 가장 애국적이고 일본적 정체성이 강한 젊은이들을 오히려 서양에 보내 배우게 하고, 돌아온 그들을 국가건설에 적극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1. 개항 이후에도 막부는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서양을 배웠다

73회까지 보면 막부가 천황·조슈·사쓰마의 압력을 받아 점점 쇠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74회의 흥미로운 점은 <막부가 정치적으로 약해지는 바로 그 시기에 학습과 개방정책에서는 오히려 훨씬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막부는 참근교대와 인질제도를 완화하고 각 번이 자체적으로 국방력을 강화하도록 허용한다. 동시에 막부 자체도 서양식 해군과 학교를 만들고 해외에 사람을 보내기 시작한다.

즉

<막부의 정치적 쇠퇴 = 막부의 지적·제도적 정체>

가 아니었다.

오히려 막부가 무너지기 직전인 1850~60년대에 일본 근대화에 필요한 상당수의 인재와 제도가 막부 자체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었다.


2. 네덜란드 ― 일본 근대 해군의 첫 번째 스승

함재봉은 다시 네덜란드의 역할을 강조한다.

에도시대 약 200년 동안 서양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한 사실상 유일한 나라였기 때문에 개항 직후 일본이 가장 먼저 의지할 수 있는 서양국가는 네덜란드였다.

1854년 막부는 네덜란드에 군함 구입을 요청한다.

당시는 크림전쟁 중이어서 네덜란드가 즉시 제대로 된 군함을 제공하기 어려웠지만, 작은 군함을 보내고 이후에는 장교와 수병을 파견하여 일본인에게

  • 항해술
  • 조선술
  • 함포술
  • 서양식 해군 운영

을 가르친다.

강연 2쪽에서 특히 강조되는 것이 네덜란드 해군 장교들이 일본 수병 약 200명을 직접 훈련시켰다는 점이다. 이후 네덜란드는 일본에 여러 군함을 공급한다.


3. 간코마루와 나가사키 해군전습소

네덜란드가 일본에 제공한 대표적인 군함이 <간코마루(観光丸)>다.

함재봉은 이것을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서양식 증기군함 가운데 하나로 다룬다.

이 배를 활용하여 막부는 <나가사키 해군전습소>를 운영한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배 한 척을 산 것이 아니다.

<배 + 기술자 + 교관 + 교육기관>

을 함께 만든 것이다.

일본인은 서양 군함을 구매한 뒤 서양인이 대신 운영하도록 놔둔 것이 아니라

<“우리 손으로 운항할 수 있어야 한다”>

고 생각했다.

이 지점이 이번 회의 중요한 주제다.


4. 가쓰 가이슈 ― 서양을 배운 막부의 핵심 인재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핵심인물이 <가쓰 가이슈>다.

그는 하타모토 계열의 무사 출신으로 난학과 서양 군사학을 공부했다. 사쿠마 쇼잔과도 연결되어 있었으며 서양 해군의 중요성을 일찍 이해했다.

막부가 나가사키 해군전습소를 열자 가쓰는 그곳에서 훈련받고 이후 일본 해군 건설의 중요한 인물이 된다.

그러나 가쓰 가이슈의 역사적 의미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막부 말기의 마지막 단계에서 그는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협상하여 에도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는 것을 막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함재봉은 이를 매우 높이 평가한다.

가쓰와 사이고는 정치적으로 서로 다른 편이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만나 상대의 인품과 능력을 인정했고, 결국 서로 양보함으로써 에도가 파괴되고 대규모 유혈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막았다.

즉 가쓰는

<막부를 위해 서양식 해군을 만든 사람>

이면서 동시에 훗날

<막부가 평화적으로 물러나는 것을 가능하게 한 사람>

이 된다.


5. 첫 일본 사절단을 미국으로 보내다

1858년 해리스 조약 이후 일본은 중요한 결정을 한다.

미국이 일본에 사절단을 여러 차례 보냈으니 이번에는

<일본도 미국을 직접 보자>

는 것이다.

막부는 1860년 미국으로 공식 사절단을 보낸다.

이것은 근대 일본 최초의 중요한 해외 공식사절단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당시 일본에는 태평양을 안전하게 횡단할 만한 선박운항 능력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 군함 <포우하탄호>가 일본 사절단을 태우게 된다.

동시에 일본은 네덜란드에서 구입한 <간린마루(咸臨丸)>도 미국으로 보낸다.

이것의 의미는 컸다.

<우리도 직접 태평양을 건너 보겠다>는 것이었다.


6. 간린마루와 가쓰 가이슈·후쿠자와 유키치

간린마루에는 가쓰 가이슈뿐 아니라 젊은 <후쿠자와 유키치>도 승선한다.

이 배는 일본인들이 직접 서양식 항해술을 사용하여 태평양을 횡단하는 상징적 사건이 된다.

후쿠자와에게도 이 여행은 결정적 경험이었다.

그는 난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네덜란드어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개항 이후 외국인들과 만나 보니 상황이 달라졌다.

<서양세계의 공통어가 네덜란드어가 아니라 영어>라는 것을 발견한다.

자기가 오랫동안 배운 네덜란드어만으로는 새로운 세계와 소통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영어 공부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함재봉은 이 장면을 일본의 적응능력을 상징하는 사례처럼 사용한다.

<기존에 익힌 지식에 집착하지 않고 현실이 바뀌었다면 다시 배운다.>


7. 미국에 도착한 일본인들이 한 일

후쿠자와 일행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다.

여기서 후쿠자와가 보이는 행동이 흥미롭다.

돈을 빌려 영어로 된

  • 지리책
  • 역사책
  • 학교 교과서
  • 각종 참고서

등을 가능한 한 많이 산다.

함재봉이 강조하는 것은 일본 사절단이 단순한 관광객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무엇을 가져가야 일본에 도움이 되는가?>

를 생각하면서 서적과 지식을 수집했다.

후쿠자와가 사진관에서 미국인 소녀와 함께 찍은 유명한 사진도 이 시기에 나온다고 강연은 소개한다.


8. 미국이 일본 사절단을 환영하다

일본의 공식사절단은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워싱턴과 뉴욕까지 간다.

워싱턴에서는 대통령을 만나고 조약 비준서를 전달한다.

뉴욕에서는 대규모 환영행사가 열린다.

강연에서는 약 50만 명에 달하는 인파가 일본 사절단을 보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월트 휘트먼이 일본 사절단을 환영하는 시를 썼다는 이야기도 소개한다.

일본인에게 이것은

<서양이라는 추상적인 세계>

를 실제 도시·사람·산업·제도로 경험하는 사건이었다.


9. 조선과 비교되는 첫 외교사절의 태도

함재봉은 여기에서 조선의 1876년 이후 수신사와 비교한다.

강연에서는 김기수가 일본에 갔을 때 보였던 소극적이고 불편해하는 태도와 일본의 첫 미국 사절단이 보인 적극적 학습태도를 대비한다.

함재봉이 말하려는 것은 분명하다.

일본인은 처음부터 서양을 좋아했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공식 임무를 맡으면

<“내가 왜 여기 왔는가?”>

보다는

<“여기에서 무엇을 배워 돌아갈 것인가?”>

에 관심을 두었다는 것이다.

이 비교는 함재봉의 전체 「한국인의 탄생」 논지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10. 니시 아마네 ― ‘철학’이라는 말을 만든 사람

이번 회에서 학문적으로 특히 흥미로운 인물이 <니시 아마네>다.

막부는 1862년부터 네덜란드로 유학생들을 보내기 시작한다.

니시 아마네도 이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당시 일본에서 금기시되던 분야까지 배우고 싶다고 한다.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 데카르트
  • 로크
  • 헤겔
  • 칸트
  • 국제법
  • 경제학

등이었다.

그런데 당시 일본어에는 이러한 학문을 표현하는 적절한 용어 자체가 없었다.

그래서 서양개념을 일본어로 번역해야 했다.

함재봉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철학(哲學)>

이라는 번역어 자체가 니시 아마네의 작업과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그 밖에도

<예술>
<이성>
<과학>
<기술>

등 현대 동아시아에서 사용하는 많은 추상적 학술용어가 당시 일본의 번역과정에서 만들어졌다고 강조한다.

이 부분은 74회에서 매우 중요하다.

근대화는 단순히 군함을 수입하는 일이 아니었다.

<새로운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드는 작업>

이기도 했다.


11. 번역의 혁명

함재봉의 논지를 더 확장하면 일본 근대화에는 두 종류의 기술습득이 있었다.

첫 번째는

<군함·대포·철도·산업기술>

을 배우는 것이다.

두 번째는

<철학·과학·경제·국제법 같은 개념을 번역하여 자기 언어로 사고할 수 있게 만드는 것>

이다.

두 번째가 훨씬 중요할 수도 있다.

영어 단어를 그대로 외우는 것이 아니라

<일본어로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사회 전체가 그것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훗날 중국과 조선도 상당수 이런 일본식 번역어를 다시 수입하게 된다.


12. 경쟁적으로 유학생을 보내는 막부와 번들

막부만 유학생을 보낸 것은 아니다.

정치적으로 막부를 강하게 비판하던 조슈·사쓰마도

<서양을 배워야 한다>

는 점에서는 경쟁적으로 움직인다.

이것은 이번 회에서 가장 중요한 역설 가운데 하나다.

막부는 개국파다.

조슈는 처음에는 강력한 존왕양이파다.

정치적으로 서로 싸운다.

그런데 양쪽 모두

<젊은 인재를 서양에 보내야 한다>

고 생각한다.

즉 정치적 목표는 달라도 <학습의 필요성>에는 합의가 형성된다.


13. 조슈 파이브 ― 쇄국론자가 몰래 영국으로 간다

1863년 조슈번은 다섯 명의 젊은이를 영국으로 밀항시킨다.

이른바 <조슈 파이브>다.

당시 일본인의 자유로운 해외출국은 여전히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식적인 유학이 아니라 목숨을 건 비밀파견이었다.

이들을 도운 사람이 영국 상인 토머스 글로버다.

함재봉은 여기서 또 하나의 역설을 강조한다.

조슈는 당시 가장 강경한 <존왕양이> 세력 가운데 하나였다.

서양 오랑캐를 몰아내자고 외치던 바로 그 번이

<가장 유망한 젊은이들을 서양의 중심인 영국으로 보내 배우게 한다.>

양이와 서양 학습이 동시에 존재한 것이다.


14. 조슈 파이브가 남긴 일본 근대화

조슈 파이브 가운데 특히 유명한 인물이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다.

다른 인물들도 귀국 후 일본 근대화의 핵심 분야를 담당한다.

강연에서는 대표적으로

  • 철도
  • 조선업
  • 공학
  • 산업
  • 외교
  • 교육

등으로 이들의 영향이 확대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예를 들어 야마오 요조는 영국에서 조선·산업기술을 배우고 귀국 후 공업교육에 기여한다.

노무라 야키치는 철도 건설에 참여하여 ‘일본 철도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된다.

이들은 단순한 유학생이 아니라

<서양에서 배운 전문지식을 일본의 국가기관과 산업으로 직접 옮긴 기술관료>

가 된다.


15. “도구가 필요하다” ― 조슈의 학습철학

함재봉이 조슈 유학과 관련해 소개하는 표현 가운데 중요한 것이

<“조슈에는 도구가 필요하다. 도구란 인간이다.”>

라는 취지의 생각이다.

나라를 바꾸려면 단순히 군함이나 기계를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

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지식이 있는 곳으로 보내 직접 배우게 해야 한다.>

이 사고가 조슈 파이브를 비롯한 해외유학생 파견의 배경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평론

1. 74회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사실 ‘개방’보다 <인재정책>이다

이번 회의 제목은 근대 일본의 설계자들이지만 내용을 끝까지 보면 핵심은 사람이다.

일본이 서양에서 군함을 샀다는 것은 결정적이지 않다.

중요한 것은

<누가 그것을 운전할 것인가?>
<누가 다시 만들 것인가?>
<누가 학교를 세워 다음 세대를 가르칠 것인가?>

였다.

가쓰 가이슈 → 해군
후쿠자와 유키치 → 교육·사상
니시 아마네 → 학문·번역
조슈 파이브 → 산업·외교·철도·공학

으로 연결되는 인재군이 만들어진다.

함재봉의 설명 가운데 매우 설득력 있는 부분이다.


2. 74회의 가장 깊은 통찰은 <민족주의와 개방성이 반드시 반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함재봉은 마지막 부분에서 매우 흥미로운 역설을 강조한다.

보통 우리는

<애국주의 → 외국배척>

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가장 강한 애국심과 국가위기의식을 가진 젊은이들이 오히려

<서양에 가서 가장 많이 배워야 한다>

고 생각했다.

논리는 이랬다.

<우리 것을 지키려면 우리가 강해져야 한다.>
<강해지려면 적이 가진 지식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서양을 몰아내자>

고 외친 조슈에서도 젊은이들을 몰래 영국으로 보낸다.

함재봉은 이것을 메이지유신을 가능하게 한 독특한 정신적 조합으로 본다.


3. 그러나 이것을 일본인의 ‘민족적 특성’으로 설명하면 위험하다

여기에서는 함재봉의 설명을 한 단계 조심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74회만 보면 일본인은 마치 본래부터

<외국 것을 거부하지 않고 좋은 것이면 배우는 민족>

이었던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앞선 회차들에서 본 것처럼 일본에도 극단적인 쇄국론과 외국인 혐오, 암살, 양이운동이 존재했다.

따라서 일본의 성공을 국민성으로 설명하기보다

<서양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제도와 이를 후원하는 정치세력, 번 사이의 경쟁, 상업자본, 교육망>

이 존재했다는 점을 더 중요하게 볼 필요가 있다.


4. 조선과의 비교는 역시 신중해야 한다

함재봉은 일본 사절단의 적극성과 김기수 같은 조선 수신사의 소극성을 대비한다.

이 비교는 인상적이지만 위험도 있다.

두 사람의 개인적 태도만 비교하면

<일본인은 적극적이고 조선인은 수동적>

이라는 문화론으로 쉽게 흘러갈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개인 뒤의 제도다.

일본 사절단 뒤에는 이미

  • 난학
  • 해군학교
  • 번의 교육제도
  • 해외정보망
  • 외국상인
  • 막부의 국가정책

이 있었다.

조선 수신사가 움직이던 정치·제도적 환경은 달랐다.

따라서 더 중요한 비교는

<후쿠자와와 김기수의 성격 차이>

가 아니라

<왜 한쪽 사회에서는 해외관찰을 지속적으로 국가정책과 인재양성체제로 연결할 수 있었는가>

일 것이다.


5. 이번 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번역’일 수도 있다

74회의 여러 이야기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니시 아마네라고 본다.

군함은 살 수 있다.

철도도 기술자를 불러 지을 수 있다.

하지만

<철학·과학·법·국가·사회·경제>

라는 새로운 세계를 자기 언어로 사고하지 못하면 근대적 제도 자체를 스스로 설계하기 어렵다.

일본이 서양 개념들을 대규모로 번역하고 새로운 한자어를 만들어낸 작업은 동아시아 전체의 지적 지형까지 바꾸었다.

오늘날 한국어의 수많은 근대 학술용어가 이 과정과 연결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군함 한 척을 만든 것 못지않게 중요한 혁명이었다.


6. 73회와 74회의 대비도 흥미롭다

73회는

<암살·숙청·정치투쟁>

의 일본이었다.

74회는

<학교·유학·번역·기술습득>

의 일본이다.

그런데 두 현상은 같은 시기에 일어난다.

즉 막부 말기 일본은

<내부에서는 거의 내전에 가까운 정치폭력>

을 겪으면서 동시에

<외부세계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적극적인 학습>

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 점이 중요하다.

메이지유신을 단순히 ‘일본사회의 단결된 근대화’로 보면 실제 역사를 놓친다.

<극심한 내부갈등 속에서도 외부 지식을 배우는 경쟁은 계속되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63~74회를 함께 보면

함재봉이 메이지유신을 설명하는 구조가 이제 거의 완성된다.

<에도의 장기평화>
→ <경제·교육의 성장>
→ <난학>
→ <서양 군사기술>
→ <사쿠마 쇼잔>
→ <요시다 쇼인>
→ <페리>
→ <개항>
→ <막부 위기>
→ <천황의 부상>
→ <사쿠라다문 암살>
→ <공무합체>
→ <해외유학과 인재양성>

그리고 다음 단계가

<이 인재들이 서로 만나 메이지정부를 만드는 과정>

이 된다.


종합 평가

74회는 최근 여러 회차 가운데 특히 중요한 회차다.

그 이유는 일본 근대화를 ‘제도’나 ‘혁명’보다 <사람을 만들어내는 과정>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번 강연을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은 서양에서 완제품만 사지 않았다. 사람을 보내어 배우게 했고, 돌아온 사람에게 직접 군함을 만들고 철도를 놓고 학교를 세우고 학문용어를 만들게 했다.>

이것이 일본의 압축적 근대화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함재봉의 마지막 결론은 더 흥미롭다.

메이지 일본의 힘은 단순한 서양숭배에서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나라를 지키고 싶다”는 강한 민족적 정체성>

과

<“그러려면 외국에서 무엇이든 배워야 한다”는 급진적인 지적 개방성>

이 결합했다는 것이다.

즉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남의 것을 가장 적극적으로 배운다.>

이것이 함재봉이 발견하는 메이지유신의 역설이다.

다만 이 설명을 조선과 비교할 때는 <일본인은 열린 민족, 조선인은 닫힌 민족>이라는 결론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 더욱 중요한 차이는 일본에서 해외학습이 개인적 호기심에 그치지 않고 <유학생 선발 → 국가·번의 지원 → 귀국 → 전문기관 배치 → 후진양성>이라는 재생산 체계로 연결되었다는 데 있다.

따라서 74회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외국에 많이 가라’가 아니다.

<외국에서 얻은 지식을 사회가 흡수하고 사람에게 역할을 맡길 수 있는 제도가 있어야 근대화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문제는 이후 조선 개화파를 평가할 때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조선에도 김옥균·박영효·유길준 같은 해외 경험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결국 비교해야 할 것은 <누가 서양을 먼저 보았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보고 배운 것을 자기 국가의 제도와 지속 가능한 인재양성체계로 전환할 수 있었는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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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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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한국인의 탄생의 함재봉입니다. 어 오늘은 독구가와 막부가 천왕부하고
[음악] 손을 잡으면서 공무합책 고부가의 정책을 통해서 손을 잡고 노자마다이며
[음악] 조수나 사스마 같은 전에는 적대 세력으로 간주했던 그 번들하고도 손을
잡고 번들의 손발을 묶었던 참근 교대 이런 제도도 [음악] 풀어주고 인질
제도 같은 것도 풀어주고 그럼으로써 자유롭게 각자가 국방을 을 강화시키고
그리고 국론 통일을 이룰 수 있도록 이제 그런 장치를 마련을 합니다.
그런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러는 가운데
오늘은 이러한 엄청난 정치적인 변화 속에서도 그리고 [음악] 계국을
반대하는 강력한 전왕위 세력들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에도
막부는 강력한 개방 정책을 계속해서 추진합니다. 조건가 막부에 맞서고
있었을뿐만 아니라 존왕이 파무라이들의 온상이었던 조슈하고 샀으마도
경쟁적으로 외국의 [음악] 유학생을 보내고 하면서 개방 정책을 펼치기 시작을
합니다. 오늘은 막부와 조수 사스마가 어떻게
경쟁적으로 개방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는지 [음악]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인의 탄생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1854년에 네덜랜드는 좀빙호라는 자기네 군남한 척을
독구와 막부에 기증을 합니다. 원래 독구가 막부는
처음부터 계곡을 하면서부터 서양의 첨단이 해군역 이게 얼마나 중요하다는
걸 알고서 당연히 알았겠죠.이 이 폐리의 흑선이 오고 이런 거를 거대한 전함들이 오고 하는 걸 봤기 때문에
어떻게서든지 그 기술을 그 서양 해군역을 자기도 좀 갖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래서 어 네덜랜드에 우선 네덜랜드에 이제 얘기를 했죠.
뭐예요? 왜냐면 돼지마섬을 통해서 도구와 막부 내내 280년 동안 가장
그래도 거의 유일하게 막보하고
협력을 헤어오둔 나라가 바로 네덜랜드 아닙니까? 네덜랜드 동인도 회사의 상관장이 나가사기 돼지마에 있었으니까
그 사람들을 통해서 뭐 어 그 풍설도 받고 이러면서 깊은 어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었기 때문에 자 그러면 이제 개항을 했고 미국 때문에
개항은 했지만 그래도 가장 익숙하고 가장 의지할 만한 외세는 역시 네덜랜드였죠. 그래서 네덜랜드 보고
군남주 건조해서 우리가 사겠다고 군함을 달라 그럽니다. 그런데 1853년에는 바로 뭡니까? 크림
전쟁이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었고 네덜랜드는 따라서 그 전쟁에 참여하느라고 전혀 전혀 무슨 군함을
또 따로 뭐 일본에 팔고 이럴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참 처음에
이제 그 독구가 막부가 요청을 했을 때는 들어 주지 못하다가 미안하니까
1854년에 작은 배지만 그래도 배 하나를 전빙호를 보내서
성의를 표시합니다.이 전빙호가 왔을 때 그 배를 끌 몰고 온 사람이
파비우스 대령이라는 네덜랜드의 어 장교였습니다. 해군 장교였습니다.이
이 사람은 배를 끌고 와서 거의 반년 동안을 일본에 머물면서 일본 사람들
수병들이죠. 200명을 훈련을 시키면서 조선 기술, 항해술 이런 거를 가르칩니다. 그리고는 돌아갔다가
다시 좀를 이끌고 와서 이번에는 아예 네덜랜드 수병까지 20명을 대동하고
와서 또 일본 사람들한테 배를 어떻게 운영하고 군함을 서양식으로 군함을 어떻게 운영하고 이런 거를 이제 전부
다 가르쳐 주는 거죠. 사실 한때 최고의 그 해군역을 갖고 있었던
네덜랜드의 장교들이 와서 수병들이 와서 어 일본 어 수병들을 이제
훈련을 시키는 겁니다. 그리고는 두 번째 왔을 때는 아예이 강꼬마루를
기증을 하고 갑니다. 그래서 강마루는 어 정 최초의 전기선이고 외륜선
이렇게 큰 그 미국의 미시피 강에 보면은 이렇게 큰
그 물레방아 바퀴 같이 돌아가는 거를 통해서 그 동력을 그러니까 움직이는 그런 배를
그 이제 외륜선이라 그러는데 최초의 외륜선 증기 외륜선입니다. 그
범선이기도 하고 도담배도 있고 같이 그 동력을 이용해서 움직이는 배인데이
배를 1857년 3월에 일본 사람들이 처음으로 서양 사람들의
도움을 안 받고 나가사기에서 애도까지 처녀 항해를 합니다. 해군을 어떻게
운영 군함을 어떻게 운용하는지 서양식 근대 배를 어떻게 운영하는지
일본이 터를 하기 시작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후로 1859년까지
네덜은 여러 척의 군함을 일본에다 팔고 일본 해군이 성장하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이 이 강꼬마루가 왔을 때 처음부터 강마루를
인수받고 거기서 일본 사람들이 훈련을 이제 네덜랜드 장교와 수병들한테
훈련을 받을 때 그때의 일본측 책임자가 바로 가스갈이슈라는
인물입니다.이 가스갈이슈라는 사람 정말 대단한 인물입니다.이 이이 사람은 요시다 쇼인과
같이 사쿠마 쇼잔이라는 그 당대에 진짜 앞서가던 그 사람의 제자입니다.
역시 사쿠마 쇼단의 제자입니다. 그 왜 그 서양 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된다 그러고 서양식 말한 장만 타고 다니다가 결국은 전왕위파들한테 암살당하는 그렇지만은
요시사 쇼인한테 편지를 해서 배를 타고 미국을 가라고 미랑을 적극 권장했었던 바로 그 샤쿠마 소단의 또
다른 제자는 바로 가스 가이슈입니다. 가스가이슈는 쇼근 에도에서 쇼근의
하다모또 하다모또라는게 이제 그 무장들입니다. 그 쇼은 다이묘들의 가장 높은 무장을
하다모토라 그러는데 그 하다모토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애도에서 자라면서 난가구를
배우고 서양의 군사을 공부를 합니다. 그리고 말씀드린 대로 사쿠마 쇼잔한테 사사를 하고요. 그리고 1850년에는
사설학교를 세워서 서양의 군사학을 자기가 가르킵니다.
그리고 1855년에 네덜랜드의 도움으로 드디어 일본이
그렇죠. 이제 간꼬마루 같은 거를 받고 그러면서 훈련을 받고 그러면서
결국은 자기네가 나가사기 해군 전습라는 거를 엽니다.에도 막부가
그때에 거기 전습에 오는 전습생 그 훈련받으러 오는 일본
미래 수병들의 감독관이 됩니다. 가스가이슈는 나중에 사카모토료마
그죠. 메이주신의 결정적인 역할을 조슈와 사스마번의
화해를 이끌어내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선중 팔책이라는 거를 써서
일본의 헌법에 어 효시가 되는 그런 거를 써내고 하는 바로 그 유명한 어
사과모또 료마도 바로 나중에이 가스 가이슈한테 절대적인 영향을 받습니다.이 이
가스가 이슈가 또 하나 나중에 역할을 하게 되는 거는 사회고 다까모리가 사스마의 군대를 이끌고 도구가와
막부와 마지막 결전을 보신 전쟁 때 결전을 이루면서 그때 에도성을
둘러싸고 에도성을 막는 거는 가스가이었고 그걸 공격하는 것이 살고
다가머리였습니다. 그래서이 그게 마지막 전쟁이었 전투였을 수가 있는데
그 보신 전쟁에 그러니까 막보와 천왕군하고 사이에 그 메이지신군하고
사이에 마지막 전쟁일 수가 있었는 전투였었는데 만약에 그 전투가 일어났었으면은
에도성이 완전히 파괴가 되고 엄청난 살상이 일어날 수 있었는데 그때에
가스가이슈하고 사이고가 화해를 해서 사 가스가이슈가에도
성문을 열어줌으로써 마지막 피흘림 없이 자연스럽 럽게 평화롭게 정권
이향이 일어나면서 메주위신이 일어납니다.이 가스가이슈가 사이거와 그런 합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가스가이슈하고 사이고가 그 전에 몇 년 전에 만난 적이 있는데
그 만났을 때 서로 한쪽은 개화 개국파고 그렇죠. 가스는 당연히
개국파고 도구가와 막부 밑에서 큰 역할을 해군을 길러내고 있고 그런 서양식
해군을 길러내고 있는 그런 역할 하는 사람이고 사회고는 지금 사스마의 군대를 끌고 와서 조항 양육파를
대표하는 사람인데 그때에 서로가 만나서 대화를 나누면서
상대방의 인품과 그 큰 인물의 감복을 서로가 합니다.
그때 그래서 이미 그때에 서로가 한번 완전히 서로 이념이 다르고 나라의
미래를 구상하는 방 그 방향도 저 전혀 달랐지만 서로 인품에 완전히
매료된 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에도송을 놔두고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그때 둘이서 가스가 이슈하고 사이고가 화해를함으로써에도
성문을 열어 줌으로써 평화롭게 정광 교체가 일어나는 길을 틀린게 바로 가스가이슈입니다.
박호 정부에서 서행의 군사학, 천체학, 지리, 과학 이런 거를 하는 학교를
또 설립을 하자고 그렇게 강력하게 권 권유를 해서 1857년에에도
막부는 반쇼시라베쇼라는 즉 야만인 교육, 야만인의 학문을
가르키는 학교라고 이름을 해서 최초의
일본의 최초의 서양학문 문을 전문적으로 가르키는 학교를 엽니다. 이것도 가스가 이슈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사쿠마 쇼산 같은 선생의 영향을 받고 그렇죠. 그리고 요시다
쇼인 같이 같은 스승 밑에서 사사했던
여시다 쇼인 같은 사람 의고 그런 거를 다 이어받은이
어 가스가이쇼는 일본의 해군도 기르고
그리고 일본 최초의 서양 학문을 가르키는 전문학교를 세우도록 합니다.
1860년이 되면은 박후가
어 독구가 막부가 미국의 사절단을 파결하려 그럽니다. 그래서
1858년에 해리스약을 맺었기 때문에 사실은 그때부터 처음부터 처음부터
처음부터 사절단을 파견하려고 그럽니다. 그니까 미국에선 해리스가 와서 아예 영사로 상주를 하고 있는데
그렇지만 일본은 워싱턴에 상주할 수 있는 영사를 보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죠. 뭐 영어를
그렇게 잘하거나 무슨 그 근대식 외교를 알아 가지고 거기에 가서
제대로 영사 역할을 외교관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던 없었고 뭐
거기 가서 집을 사 가지고 뭐 이런 제대로 된 어 그 공관을 유지할 수
있는 영향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때는 못 보냅니다. 근데 일단 사절단이라도 보겠다 그래 갖고 그때에
그 해리스 조약을 타결하자마자 사실 일본 협상단측에서는 그럼 우리가
대사는 영사는 못 보내더라도 사절단을 파견하는 것은 어떻겠는가 물어봅니다.
그러면서 그때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미국은이 조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세차례나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이제
조약이 체결되었으니이 조약의 비준을 위하여 이번에는 우리가 워싱턴의 사절단을 파견하는 것은 어떻겠는가라고
해리스한테 물어봅니다. 그러니까 페리제독이 두 번 오고 그다음에
계속해서 사절단이 와서 조약을 맺으러고 헤리스가 또 와서 상주하면서 또 제약을 조약을 갖다가 또 협상을
하고 그러고 보면은 일본 입장에서선 그랬던 거죠. 아니 이거는 양국이
교육 저 교류를 하는데 우리는 한 번도가 본 적이 없고 미국 사람들만 계속 해서 하니까 우리도 한번
보내는게 어떻겠냐 그랬더니 아주 해리스가 너무 좋아하죠. 그래서
해리스가 이렇게 그날 그때를 기록합니다.
일본측은 만일 내가 원한다면 자신들의 증기선에 타절단을 태워서 캘리포니아를
경유하여 워싱턴에 보낼 수 있다고 제안했다. 나는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일본이
최초로 조약을 체결한 나라이기 때문에 일본의 첫 사절단이 미국을 방문하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라고 답하였다. 그런데이
파견은 일본 내 전국의 혼란놀이라서 계속 미뤄지고 결국은 2년 후인
1860년이 돼서야 그 사절단 파견이
성사가 됩니다. 그래서 1859년 9월에 박쿠후는 견미사절단을
꾸리고 거기에 뭐 어 정사에는 신미사오키 부사에 모라기 놀이마사
그다음에 감독관의 이제 오그리 다마사라는 사람들을 임명을 합니다. 그때에 그때에 부사에 임명됐던
무라가키 견미 사절단이라고 처음 견미 미국을 보러 가는 사절단이죠.
견미사절단의 부사에 명됐던 물학기는 자신의 일기에다가 이렇게 써
놓습니다. 우리는 옛날에 당나라로 사절단을 파견하였지만 그 이웃 나라는
좁은 바다만 건면 닿을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황국으로부터 수많리
떨어져 있으며 그쪽이 낮을 때 여기는 밤이다. 나는 내 딸들에게 남자는
이처럼 막중하고 전례가 없는 책임을 짐으로써의 이름을 떨치는 것보다 더 큰 영광이
있을 수 없다고 자랑하였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나같이 부족한
사람이 외국에 가는 최초의 사절단에 임명되다니 내가 만일 쇼근의 영을
올바로 집행하지 못한다면 우리 황토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구력을 당할 것이다라는 걱정이 들었다. 바로 그때
달빛이 너무 청명하여 나는 쇼근의 신임에 감사하며 엄숙히 술잔을
들었다. 제가 이거를 읽는 이유는 1876년
강화도조약을 통해서 처음으로 조선하고 일본이 교류를 맺고 그렇죠. 수결을
하고 그때 김기수가 최초의 수신사로 일본에 갑니다.
그때에 1차 수신사로 갔을 때 갈 때에 그때의 김기수는 일기에다가
내가 도대체 여기를 왜 가냐?이 이 서양 이상한 놈들을 만나 갖고 내가
뭐를 할 수 있고 나는 안 가고 싶은데 어쩔 수 없이 가라 그러니까 나는 갈 수밖에 없다라면서
그 그런 모습을 보입니다. 그때 박규수가 옆에서 있으면서 내가
나이만 적었더라도 나는 내가 갔으면은 참 난 정말 너무나 가고 싶고 보고 싶고 알고 싶고 하는데 나는 못
가는게 한스럽다고 박규수는 또 자기 일했었습니다. 근데 저는이 두 가지를
김기수의 일기와 지금 문화기의 일기를 보면서
어떻게 거의 똑같은 일을 맞이할 때 처음으로 외국과 수교를 해서 거 그
수교한 나라에 자기가 사신으로 파견이 됐을 때에 그거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저렇게 김기수는 너무나도 소극적이고
하기 싫은 거를 억지로 해야 되는 거 야만인의 나라의 지금 내가 왜 가야 되는지 모르겠다라는 거하고이
부산은 어 정말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게이 5대을 누리는 내가 이런
엄청난 기회가 나한테 주어졌고 이런 기회를 하기 내가 부족하지만 그래도
나한테 이런 믿음을 주고 나를 이런 자리에 임명을 해 준 추억군한테 정말
감사를 드리면서 내가 혼자 앉아서 술잔을 달밤네
술잔을 올리는 그런 모습을 보였습니다. 조선과 일본의 계국의 양상이 이렇게 달랐었습니다.
1860년 2월 9일 이른일곱명 규모의 견미 사절단이 신나가와 항해서
미군이 제공한 퍼탄호에 승선을 합니다.이 이 퍼탄호라는게
미국하고 일본에 끊임없이 등장을 합니다. 기억하시죠? 요시자 효인이
배를 타고 오밤중에 몰래 승선을 하려고 가는 그 유명한 웃기에 나오는
그 그 배도 그것도 파워하탄고 그 올 그 승선하려다 결국은 미국 수병한테
잡혀서 뜻은 못 이루지만 그다음에 간나거저액을 맺은 것도 퍼탄호
선상에서 맺었던 거고 이번에 이제 또 그러면 그러면
미국의 최초의 1번 사절단이 이
일본 최초의 공식적인 외교 사절단이죠.
그 사람들이 미국을 갈 때에 아직 태평양을 건너갈 만한 배가
일본에는 없기 때문에 미국이 또 군남인 퍼탄호를 제공을 하고 일본의
사절단이 그 퍼하호를 타고서 이제 갑니다. 그런데
그때에 그때에 카스가이슈 밑에서 훈련을 받았던 일본 수병들이 다 있을
거 아닙니까?이 이 사람들이 뭐라 그러냐면 우리가 지금 아직은 실력이
안 돼서 우리의 정사, 대사들은 미국 군함을 안전상 미국 군함을 타고 갈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우리가 명세기 몇 년 동안 훈련을 받았고 우리도 어쨌든 서양 배를이 근대식 배를
움직이는 방식을 우리가 알았으니까 우리도 자존심이 있지.
그리고 한번 우리도 해 봐야 되는 거 아니냐? 그러면서 네덜랜드로부터 산 갓린마루라는 배에
배에 타서 일부 사절단은 그 배를 타고
파워탄호를 따라가기로 합니다. 그래서 일부는
네덜랜드로부터 산 최초의 그 스크루식 그 전기선입니다.
갓린마루에 타서 따라가기로 합니다.이 이 갓님마루는 1853년에
바쿠가 네덜랜드에 주문을 해서 1857년 9월 1일 날 인도받은
일본 최초의 서양식 스큐루를 장착한 군함이었습니다. 그래서이 갓닌마루가
퍼우해탄호를 뒤따라갑니다. 무려 4개월 동안 항해를 해서
태평양을 건너니다. 그러니까 그 작은 배에
올라타서 거기에 일본 사람들만 일본인들만 타서
갑니다.이 사진은 지금 그 갓님마루에 탔던 그 선원들입니다.
그 선원 중에 그 사진에 보시면 맨 오른쪽 끝에 앉아 있는 사람이 누구냐면 그게 후쿠사와 유키치입니다.
후쿠사와 유키치는 나가스본이란 조그만 번에 정말 학급 무사로 태어나서
아들로 태어나서 그렇지만 똑똑해서 란가구를 배웠고 란가구를 배워 가지고
아주 네덜랜드 말을 유창하게 하게 됩니다. 그런데 간학가와 조약을 통해서 처음으로 간학가와 개항을 하고
거기에 외국 사람들이 왔을 때 후쿠사와는요. 어, 자기가 내가 여태까지 배웠던 네덜는 말을 좀 가서
과실을 해 봐야지 하고는 간나카 항에가 갖고 말을 거는데
거기서 네덜랜드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전부 다 영어만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어, 이게
영어를 배워야 되는 거구나. 영어가 중요한 말이구나. 네덜랜드 말이 중요한게 아니라 그러서 그때부터
그렇게 영어를 공부하려고 무지를 쓰는데 사실 방법이 없었겠죠.
그러니까는 미국에 처음으로 미국의 견미 사절단이 간다고 발표가 났을 때
그러면 그리고 갓마루라는 거가 따라간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때에
후크사와는 갓마루 선장을 찾아가 가지고 사정사정을 해서 저 제발이 배
좀 타서 미국 좀 한번 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그 배 탑니다.
그래서 같이 4개월 동안 항해를 해서 물론 중간에 사절단과 같이 하와이에
들려서 거기 어 하와이의 국광 카메아하메아 4세 어를 만나고 그리고
또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뭐 이제 크게 선대한 대접을 받고 거기 샌프란시스코
시장이 주최하는 만찬에도 가고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다시 내려와서 동해안으로가 갖고 5월 15일
워싱턴에 도착해서 뮤캐논 대통령을 만나서 그 비준서를
일미 화친 조약의 비준서를 전달을 하고 그럽니다.
그리고이 사절단은 어 25일 동안 워싱턴에 체류하면서 뭐 스미소니안도
가보고 미국 국회의상도 가보고 박물관 이런 거를 다 보고 미국의 곳곳에
있는 조선소 이런 거를 다 견악을 합니다. 6월 6일에서 16일까지 필라델피아도 가보고 그리고 16일 날
오후에 뉴욕에 도착을 합니다. 당시 뉴욕에서는요.이
일본 사절단을 환영을 하기 위해서 대규모 [목을 가다듬음] 퍼레이드를 준비를 합니다. 그
퍼레이드를 가기 위해서 무려 50만 인파가 나옵니다. 그러면서 최초의
아시아 국가의 사절단이 왔다 그래 갖고 엄청난 인파가 몰려 갖고 그 열렬히 환영을하고요. 그때에 그때에
미국의 대문호 미국을 미국 사람들의 정신을 가장 잘 대표한다는 미국의
대시인 월트위트만이 그때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월트위트만의 여러 시 중에 제일 유명한 시 중에 하나가 브러드웨이 패전트인데 그 브러드웨이 뉴욕의
브러드웨이에서 축제가 벌어지는 거에 대한 그런데 그게 바로 일본 사절단을
환영하는 그 퍼레이드가 벌어지는 거를 기념해서 쓴 시가 미국의 월트웨
위트만의 대표적인 시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이 사절단은 6월 29일 날 뉴욕을 출발을 해서
대서양을 횡단해서 희망봉을 돌아서 마타비아 자카르타죠. 그러니까
네덜랜드 동인동 회사에 아시아 본부가 있는 자카르타 옛날 이름 바타비아인데 거기를 들러서
홍콩을 경유해서 11월 9일 날 신하와에 도착합니다. 떠난지 7개월
만에 귀국을 하는 겁니다.
법률 방송이 출관하는 시사 교양지 법치와 자유는 우리 사회가 증면하고
있는 법치의 문제들을 가장 냉철한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는 정론지입니다.
2026년 대한민국의 오늘을 가장 정확하게 깊이 있게 [음악] 읽어볼
수 있는 법치와 자유를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온라인으로도 편하게
읽어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후크사와 유키치는이 갓린마루를 타고 갔지 않습니까?
갓마루를 타고 간 선원들은 워싱턴까지 갈 수가 없었습니다. 갓님마루까지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을 해서 샌프란시스코에 한 달만 머물다가 다시 간마루를 타고서 다시 태평경을 건너서
돌아와야 했었던 거고 사절단하고 다른 사람들만 이제 미국이 제공하는 군함을 타고 뉴욕을 해 갖고 이제 대서
건너가고 이렇게 돌아오는 거죠. 그런데 그때에 그때에 후크사유키츠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자기가 있는 돈을 다 긁어 먹고 남들의 돈도
빌려 가지고 영어로 된 교과서들을 책들을 살 수
있는 대로 다 삽니다. 지리, 역사, 교과서, 미국의 고등학교 교과서 이런
것들을 전부 다 그때 삽니다. 그리고 그때에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사진관에
가서 그 사진관에서 그 사진관의 딸 13사짜리
딸하고 사진을 좀 찍어도 되겠냐? 그래서 사진을 찍습니다. 그 사진이
지금 남아 있는 그 유명한 후크사와는 김모노 사무라이 김모노를 입고 앉아 있고 옆에 앨리스 그 사진관 딸이서
있는 그 유명한 사진이 이때 만들어지는 겁니다. 후크사회의이
탐구력,이 호기심 이거를 영어를 배워야 되겠다라고 해서
어떻게서든지 일본에서는 그 당시 너무나 구하기 힘들 힘들었던 거의
불가능했던 그 영어로 영어 공부할 수 있는 교재들을 이때 다 사옵니다.
바크후는요. 이렇게 해서 사절단을 보내고 하는 것뿐만 아니라 아예
1862년 11월 달에는 네덜랜드에 11명의 유학생을 보냅니다. 그니까
역시 네덜랜드죠. 제일 친했던 네덜랜드 쉽게 그 갈 수 있었던
네덜랜드였습니다. 그래서 네덜랜드에 보내서 법 항해술 의학 이런 거를
배우도록 합니다. 그중에는 니시 아마네라는 유명 후쿠사유키치와
일본의 근대화의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기여를 했던 지식인 니시아마네가
있는데이 니시아마네도 이때에 바크후가 막부가 보낸 유학생 중에 하나에
포함이 돼서 네덜랜드로 갑니다. 그래서 네덜랜드의 그 유명한 레이던 대학에가 갖고 레던대학 교수한테가
갖고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데카르트, 로크, 해겔, 칸트와 같은
인물들이 대표하는 철학 또는 과학이라고 하는 우리나라의 법에는
금지되어 있는 종교와는 별개인 이러한 분야를 탐고해 보고 싶습니다.이
주제는 매우 어려 보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우리나라의 문명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선생님한테 가서 교수한테가 갖고 내가
왜 철학을 공부하고 싶은지를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너무나 기가 막힌 문장은 얘기
아닙니까? 뭐냐면 도대체 철학이라는 건 뭔지 모르겠다라는 거죠. 그러니까
종교는 아니고 그러니까 종교는 지금 서양 종교를 일본에서 포교하는 거는 당연히 금지가 돼 있는 거고 저
카톨릭이 뭐가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일본에서는 기리스타는 철저하게 박해를 하는데 그러면 종교는 아닌데 그렇다고
그러면이 데카르트 칸트이 사람들이 하는 건 이건 또 뭔지 이거를 당신들이 철학이라고 하는데
이게 도대체 뭔지 모르겠는데 너무 어렵다라는 거예요. 문학도 아니고
종교도 아니고 그죠. 무슨 도덕도 아니고 그까
사서삼경 같은 것도 아니고 한악에서 배우는 전혀 그런게 아닌 아주 이상한 분야라는 거죠. 근데
이거는 내가 배워야 될 것 같다. 왜? 이게 우리 문명에 도움이 될 거 같다. 그래서 나한테 그거 좀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라고 도전을 합니다.이 사람이 여기서 철학이라는 걸
배웁니다. 철학이라는 걸 배우고 돌아와서 그래서 후크사와 유기치하고
같이 학회를 만들어서 같이 공부를 하면서 서양의 용어들을 전부 다 1번 말로
번역하는 역할을 하는데 바로 그중에는 대표적으로 니시아마네하고 후쿠사와
같이 번역을 한 말이 뭐냐면 필러소피를 철학이라고 번역하는게 바로 닌시
아마네하고 946키입니다. 우리가 지금 철학이라고 하는 거 일본이 일본말로 데스가구라는 그
철학이라는 개념은 니시아마네하고 후쿠사유키 제 머리에서 나온 겁니다. 그 니시아 아마네는 레이든 대학에가
갖고 철학을 공부하고 옵니다. 니시는 칸트 철학 국제법
경제학 이런 거를 다 공부를 해서 1865년에 귀고를 합니다. 독구가와
요신노부 일본의 마지막 쇼근 그죠? 미도 가문의 출미도 번
출신 마지막 어 그 쇼근이었던 어 독구가와 요시노브의 자은 역할을 하고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다음에는 1868년이 이후에는 병부송에서 그때
일하고 있던 후쿠사우키씨랑 같이 서양 철학을 일본에 소개하는데 일생을
바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니시가 번역한 말들이
영어의 그거를 예술이라고 번역하고
reason을 이성이라고 번역을 하고 사언스를 과학이라고 번역을 하고
테크놀로지를 기술이라고 번역한 거 이건 전부 다 니시아마네가 만들어낸
신조어들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필로소피를 철학이라고 번역한 것도 니시
아마네하고 후쿠크사의 기칩니다.이 도표은요 1862년부터
1867년까지 그러니까 1868년이면은 독구가 막부가 완전히 무너지고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서 메이지 정권으로 넘어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지막
5년 동안 독구가 막부가 마지막 5년 동안 얼마나 많은 수의 유학생들을 전
세계로 보냈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도표입니다.
도크가와 막부도 이렇게 노력을 했습니다.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려고
이러한 수준 이러한 차원에 이러하게 거창한 차원에 이러한 규모의 외국인
유학생 보내는 이런 일은 나중에 중국에서 이홍장이 시도를
해보고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조선에서도 뒤늦게 갑옷 경장 끝난
다음에 계속해서 [목을 가다듬음] 보내려고 애를 쓰지만 그 규모에 있어서나
깊이 있어서 전혀 필척할 수 못됐습니다. 얼마나
요소 요소의 적제 족소의 그리고 분야마다 인재가 필요하고 그 인재를
기르기 위해서는 서양의 최첨단 지식을 습득을 해오도록 해야 된다라는
것을 알고서 독구가 막부가 이런 놀라운
유학생 파견 사업을 망하는 순간까지
지속했던 것입니다. 자, 그런데 모두에서도 말씀드렸듯이 그러면 서양을
배워야 된다라는 건 독고가 막 그런게 아닙니다. 조수에서도 그럽니다.
조왕양이 파의 온상인 조수에서도 서양문명을 배워야 된다라는 것을 깨
깨닫기 시작을 합니다. 그래서 조수 사스마도 그렇고 경쟁적으로 유학생을
보냅니다. 그런데 조슈는 1863년 처음으로 다섯 명의 청년들을
[목을 가다듬음] 영국으로 미랑을 시킵니다. 근데 미랑을 시키는 방법이 나가사키에 있는 영국 상인 토마스
글로버라는 사람한테 맡깁니다. 그 사람한테
부탁을 해서 자기네 청년들을 그 사람이 운영하는 배에 몰래 식구
미랑을 시킵니다. 사실 1854년
간학가와 조약을 통해서 일본이 공식적으로 세국 정책은 포기를 했지만
아직 각 번에서 자기가 독자적으로 알아서 외국의 유학생을 파결할 수
그럴 수는 없었던 거죠. 다 에도의 독구가 막부에 허락을 받아야 됐던
거죠. 그러니까는 그리고 사실 조주가 하겠다 그러면은 그거 토락할 리가
만무했습니다. 그러니까 몰래 해서 영국 상인 글로버한테 부탁을
합니다.이 이 토마스 글로버라는 사람은 나중에 일본의
미스비C 상사를 만드는데 도움이 됐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고 지금도
어 나가사키에 여행하신 분들은 한번 꼭가 보시면 나가사키 그 언덕에 글로버 저택이라고 지금도 그 사람들이
살 살살던 그 저택이 있습니다.이 글로벌을 통해서 조주번이 부탁을 해서
미랑을 시킵니다. 그때 미랑을 시킬 때 조슈번의
중신이었던 스후마사노스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이
사람이 우겨서 이후 학생들을 영국에 보냅니다.
수후 마사노스케는 나중에 조슈가 다시 극렬한 조왕양의 파권력을
잡으면서 그때에 유학생들을 외국에 파견하고 그랬다는
이유 때문에 할복 자살을 하도록 명을 받아서 죽을 수밖에 없는 사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이 사람은 그 전에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조수번의 젊은이들을 미랑을 시킵니다.
그때 미랑을 시키면서 이런 글을 남깁니다. 조슈는 도구가 필요하다. 도구란 인간
도구 말이다. 오늘 우리나라를 보면 많은 한들이 조항양의 운동을
지지한다. 그러나이는 일본인들의 허세에 불과하다. 언젠가는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서로 교류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가 왔을 때 우리가 아직도 서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면 우리 나라는 매우 불리해질 것이다. 그때 필요한 도구들을 준비하기 위해서 나는 노무라야키치와
야마오 요조를 영국에 보내고자 한다. 이때 선발되는 인재들이 노무라야키치
그다음에 야마오 요조 그리고 앤도킨스케이 세 사람을 먼저
보냅니다. 그리고 나중에 이또이로 구매하고 이노의 가오루를
보냅니다. 매주신 이후에 결정적인 역할을 매주신 과정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그리고 매지우신 이후에는 일본의 헌법을 만들고 총 최초
총리되신 내가 총리되심 여임하고 등등등 했던 바로 그 이도 히로부이
그리고 일본의 외무 대신을 여임하고 조선의 계국을 그렇게 종영을 하면서
김기술을 만나고 김몽집을 만나고 그러면서 조선이 빨리 계곡을 해야 된다. 우리 같이 해야 된다라는
그러면서 결국 나중에 갑경장 때 와서 조선의 개혁을 이끌려고 했던 바로 그
인노의 가오루 그때 20대 초반에 젊은 청년들로서 이때 미랑을 해서
영국에 건너갑니다. 1863년 6월 27일 날 이도하고 인노의 가오로는
먼저 간 세 사람을 뒤따라서 뒤늦게 배를 타고 미랑선을 타고 이제
건너가기 시작합니다. 이돌은 아시다시피 조슈의 하건무사 출신이었었고
그리고 요시다시인의 수가 선주에서 공부를 했었던 학생이 학생이었던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떠나면서이는 아버지한테
편지를 남깁니다. 오늘날 우리는 영국의 모든 것을 배워 와야만 하고 해군 기술을 배워야 할
절박한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가망이 없습니다. 저는 이러한 생각을 품고 저의 임무를
다하려고 3년간만 다녀오겠습니다. 이또와 인노에는 4개월에 걸친 항해
끝에 11월 4일 런던에 도착해서 먼저 도착해던 노무라 앤도 야마과
해우를 합니다.이 이 다섯 명의 젊은이를 조주가 미랑을 시켜서 영국에
유니버시티 컬리지 런던에 보내서 유학을 시킨이 다섯 명을 일컬어서
장주 오골, 조슈 오골 아니면 영어로 조슈파라 그럽니다.이
이 조슈 5파는 얼마나 일본 사람들이 그리고 그중에서도 조슈
조왕양이 파의 온상 외국주의자들이 온상인 번조차도
어떻게 해서든지 해외에서 지식을 습득을 하려고 온갖 위험과 어려움을
무릎 쓰고 파견한 젊은 일입니다.이
이 사람들은 이또히로부와 이노의 가오로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같은
나머지 세 사람도 일본의 발전에 근대화의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서 야마이오조는요 유니버시티 컬레지에서 과학과 산업을
2년간 연구를 합니다. 공부합니다. 그다음 그다음에 스커틀랜드의 글래스고에 가서 거기에서 살면서
스커틀랜드의 가장 큰 네이얼스 조선소에서 일을 합니다.
야간으로는 앤드슨 컬레지라는 대학을 또 다닙니다. 그리고 귀국을 합니다. 귀국에서는
어떡합니까? 요코하마의 조선서를 세우고 운영을 하고 공부 장관을 여임하고 도쿄 공학부의
전신인 공부대학교 고부다이구를 설립을 합니다. 고부다이구는
공부대학교는 1874년에서 85년 사이에 47명의 외국 교수들을
초청해서 일본 학생들을 가르치도록 합니다. 그리고 야마오는 또 청각
장애인들을 위한 교육에도 헌신을 합니다. 노무라이야키치는 2년간 런던 대학에서 역시 공부를
하고 토목공학과 광산학을학을 전공을 합니다. 그리고 1868년에 귀국을
해서 대장성에 들어가서 일본 철도 건설를 추정합니다. 그래서
노무라이야키치는 일본 철도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앤도스케은 1866년에 귀국해서 1881년부터
1883년에 일본 조폐국에서 근무하면서 1881년에
조폐 국장이 됩니다. 조폐 개혁을 통해서 일본의 화폐를 통일하고 하는
일을 만들어 내으로써 일본 조폐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요 5파가 가장 극명하게
일본 역사의 흔적을 남기지만
두고와 박구 후가 보내는 보낸 그 유학생들 닌시아만네 그다음에 또
서단을 보내서 후쿠사유키지 같은 사람이 만들어지고 하는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일본은 철저하게 존항이 그러니까 한쪽으로는 는
나라를 지키겠다. 서양을 이겨야겠다.라는
라는 그 생각과 그 결기와 그 열정을
가진 젊은이들이 그 젊은이들을 외국에 보내서 외국에서 가장 첨단
가장 서양의 첨단 과학과 기술과 학문과 지식을 습득을
해서 돌아와서 그것을 그대로 일본에 심도록
하는 어떻게 보면 폭설 아닙니까? 자기 거를 지키기 위해서 외국거를
마음껏 받아들인다라는 거. 우리 걸 지키려면 외국 거를 막아야
되는 거, 거절해야 되는 거라고 보통 우리가 생각하기 쉬운데 일본이 메이주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그렇게 흔히 생각하는 외국거를 외국을 이기려면 외국을 거부해야
된다라는게 아니라 외국을 이기려면은 그 외국의 가장 앞선 지식을 기술을 과학을
우리도 가져야 되겠다라는 그 놀라운 해안이죠. 어떻게 그런 결론을 내려갖고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서 가장 애국적이고 가장 자기 정체성 강하고
가장 우리나라를 지켜야겠다라는 젊은이들을
선발한 또이 젊은이들이 다친 사고를 하는게 아니라 완전히 열린 사고를 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서양 사람들한테
가서 학자들한테 가서 에거를 하면서 나한테 이런 것 좀 가르쳐 주세요. 저런 것 좀 가르쳐 주세요. 우리나라에 이런 거 없는데 내가 배워
가야지. 우리 문명이 삽니다. 라면서 배워 오게 해서 또 그 사람들을
사장시켜 버리거나 배척하거나 차별하는게 아니라 어떡하는 겁니까?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그거 배웠어.
그럼 너 조폐국 맡아서 해 봐. 너 광상국 맡아서 해 봐. 철도 지어 봐.
외교해 봐. 조선소 만들어 봐. 이런 거를 하는 거죠.
그러니까 일본이 불같이 일어날 수가 있었던 겁니다. 정말로 다른 나라에서 보기 힘든 그리고 특히 조선말에
우리가 볼 수 없었던 조선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었던 이상한 혼합입니다. 조합입니다. 우리 거 지키고 우리
거에 대한 자랑스러움 그리고 외국 외세가 우리를 침탈하는 거에 대한 분노
우리 거를 못 지키는 사람들에 대한 그 분노 이런 거를 어떻게 수환을
시키냐면 외국거를 많이 배워서 더 강해지자. 그래서 우리 거를
지키자라고 하는 이상한 사상적 조합이 만들어진게 그게 메이지 유신네
사상입니다. 사실 그때나 지금이나 어떤 나라에서도
그 이상한 사상의 혼합은 나오기 힘듭니다.
근데 일본이 그거를 만들어 낸 순간
해외 유학생들을 보낼뿐만 아니라 돌아와서 철저하게 그
사람들을 활용을함으로써 1번이 단숨의
근대화를 달성을 하고
한 세대만의 선진국으로 발도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네.
오늘은 어 덕구가 막부하고 조수번이 어떻게 경쟁적으로
해외 유학들을 보내면서 인재를 양성을 했는가를 한번 [음악] 살펴보았고요.
다음 시간에는 이제 사스마번문을 포함한 다른 번에서도 어떻게 유학생들을 보내 가지고 해외의 지식을
빨아들이려고 했는가를 살펴봅니다. 그리고이어서
정말로 조왕양이를 주장하는 그 사무라이들하고
해외 유학을 갔다 온 사무라이들이 사무라이들이 어떻게 서로가 그러면
만나서 어떻게 협력을 하면서 독구와 막보를 타도를 하고 메이지소의
왕정복고를 이루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사적인 사건과 [음악] 인물들을 통해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한국인의 탄생. 오늘은 이만 [음악]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음악]
[음악]
[음악]
[음악]
[음악]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73 사쿠라다문 사건, 한 번의 암살이 일본을 바꾸었다

사쿠라다문 사건, 한 번의 암살이 일본을 바꾸었다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73회 - YouTube

사쿠라다문 사건, 한 번의 암살이 일본을 바꾸었다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73회
법률방송
9,518 views  Jul 29, 2026 
본 강연은 함재봉의 『한국 사람 만들기 II: 친일개화파』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

세진님, 요청하신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제73회 강의에 대한 요약과 평론입니다.

요약

  •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이익선 개념과 조선의 지정학적 위치>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국가의 영토인 <주권선>뿐만 아니라, 주권선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완충지대인 <이익선>을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고 보았다. 일본의 입장에서 조선은 시베리아 철도를 완공하며 남하하는 러시아와 전통적 종주권을 유지하려는 청나라의 위협을 차단하는 결정적 이익선이었다.

  • <청일전쟁의 필연성과 세력 균형의 파괴> 조선을 자국의 영향권 아래 두지 못하면 일본 본토가 직접적인 안보 위협에 노출된다는 판단 아래, 일본 군부는 군비를 대대적으로 확장하고 청나라와의 결전을 기획했다. 1894년 발발한 청일전쟁은 단순한 우발적 충돌이 아니라, 청나라를 한반도에서 축출하고 일본의 배타적 이익선을 관철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적 선택이었다.

  • <시모노세키 조약과 제국주의 열강으로의 진입> 청일전쟁의 승리로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조선의 자주독립을 인정받아 조청 사대관계를 공식 해체시켰으며, 대만과 요동반도를 할양받고 막대한 배상금을 획득했다. 이를 통해 일본은 동아시아 전통 질서의 수혜자를 넘어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신흥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했다.

  • <이익선의 팽창과 러일 대립의 예고> 삼국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반환하게 된 일본은 러시아를 차기 가상적국으로 규정하고 '와신상담'의 군비 확장에 돌입했다. 조선을 둘러싼 청나라와의 갈등이 해소되자마자 만주와 한반도를 잇는 더 거대한 이익선을 방어하기 위해 러시아와의 숙명적 대결 국면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평론

제73회 강연은 청일전쟁 전후 메이지 일본의 안보 전략이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군사 지정학과 세력 균형의 냉혹한 논리로 정밀하게 해부한다.

첫째, 안보적 위기의식이 공격적 제국주의로 변환되는 과정을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주권선·이익선 독트린은 단순한 영토 확장의 야욕이 아니라, 19세기 제국주의 국제질서 속에서 자국의 생존을 도모하려 했던 현실주의적 안보 계산의 산물이었음을 밝혀냄으로써 동아시아 패권 경쟁의 구조적 본질을 직시하게 만든다.

둘째, 시모노세키 조약이 지닌 문명사적 파괴력을 날카롭게 짚어낸다. 수천 년간 지속된 중화 조공·책봉 질서의 최종적 붕괴와 조선의 '독립' 선언이, 실제로는 한반도가 외교적 안전장치를 상실하고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장으로 내던져지는 취약한 상태로 귀결되었음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다만, 일본 지배층의 전략 기획과 국제정치적 역학 관계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이러한 패권 교체기 속에서 조선 내부의 자강 노력이나 기층 사회가 겪어야 했던 침탈과 파괴의 현실에 대한 심층적 평가는 다소 축소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말 한반도를 둘러싼 거시적 세력 전이와 일본의 제국주의화 경로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데 필수적인 통찰을 제공한다.

===

함재봉 「한국인의 탄생」 73회

<사쿠라다문 사건, 한 번의 암살이 일본을 바꾸었다> 요약·평론

73회는 72회에서 다룬 개항 이후의 정치적 혼란을 이어받아, <도쿠가와 막부가 왜 급격히 권위를 잃고 천황 중심의 정치질서가 부상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한다. 중심 사건은 1860년 <사쿠라다문 밖의 변(桜田門外の変)>이다. 막부의 최고 실력자 이이 나오스케가 미토계 존왕양이파 무사들에게 암살당한 사건이다.

함재봉의 핵심 주장은 단순하다.

<페리의 흑선이 막부의 외교·군사적 무능을 드러냈다면, 이이 나오스케의 강압정책과 암살은 막부가 내부 정치까지 통제할 능력을 잃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그러면서 도쿠가와 체제를 대신할 정치적 중심으로 <천황>이 급격하게 부상했고, 막부와 천황을 결합하려는 <공무합체>라는 마지막 타협책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타협마저 장기적으로는 막부를 구하기보다 천황의 정치적 지위를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 이번 회의 큰 줄기다.


1. 페리가 남긴 것은 외교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정당성의 위기였다

1853년 페리가 일본을 떠나면서 막부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개항할 것인가, 쇄국을 유지할 것인가?>

막부는 더 이상 혼자 결정할 자신이 없었다. 당시 쇼군은 병약했고, 실무를 맡았던 노중 아베 마사히로는 전국 다이묘들에게 의견을 묻고 심지어 천황에게도 견해를 요청하기 시작했다.

함재봉은 바로 이 점을 중요하게 본다.

도쿠가와 막부가 200년 이상 유지한 기본원칙 가운데 하나는

<외교와 국가정책은 막부가 결정한다>

는 것이었다.

그런데 외세가 나타나자 막부가 스스로 이 독점권을 포기하고 다른 다이묘와 천황에게 의견을 묻는다.

막부가 약해진 것을 인정한 셈이었다.


2. 조슈·사쓰마 같은 도자마 다이묘가 정치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막부가 전국의 의견을 듣기 시작하면서 가장 큰 변화가 발생한다.

그동안 중앙정치에서 배제되었던 조슈·사쓰마 등 도자마 다이묘가 정치적 발언권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함재봉의 설명에 따르면 이것은 막부가 스스로 도쿠가와체제를 해체하는 첫걸음이었다.

막부를 구하기 위해

<전국의 지혜를 모으자>

고 했지만, 그 결과 막부가 가장 경계해 온 세력들을 중앙정치에 불러들였다.

앞선 회차에서 반복해서 보았듯 조슈와 사쓰마는 단순한 지방세력이 아니었다.

경제력도 강했고, 군사력도 성장했으며, 서양 학문과 군사기술을 적극적으로 배웠다.

결국 막부가 나라를 살리려 실시한 정치개방이 막부 자신의 독점적 권력을 약화시키게 된다.


3. 고메이 천황 ― 근대화의 지도자가 아니라 강력한 쇄국론자

이번 회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 <고메이 천황>이다.

함재봉은 고메이 천황을 메이지유신의 결과만 보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고메이 천황은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강력한 쇄국론자였다.

미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데 반대했고, 외국세력을 일본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천황 중심 = 개혁·서구화>

라는 공식은 당시에는 성립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에는

<막부 = 현실적 개항>
<천황 = 쇄국·양이>

에 가까웠다.

이것이 훗날 메이지정부가 천황을 중심으로 가장 적극적인 서구화를 추진하게 된 사실과 비교하면 상당한 역사적 역설이다.


4. 이이 나오스케 등장 ― 강경한 막부 권력의 복원

막부 내부에서 우유부단한 정책에 대한 반발이 커진다.

그 결과 등장한 인물이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다.

1858년 그는 막부 최고직인 다이로가 된다.

함재봉은 이이 나오스케를 강력한 권위주의적 지도자로 설명한다.

그의 기본 판단은 명확했다.

<국가정책을 다이묘들에게 일일이 물어볼 수 없다.>
<천황에게 외교정책의 결정을 맡겨서도 안 된다.>
<막부의 권위를 다시 세워야 한다.>

따라서 아베 마사히로가 열어 놓았던 정치적 참여를 다시 닫으려 한다.


5. 안세이 대옥 ― 막부가 반대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한다

이이 나오스케는 개항을 반대하는 세력을 강력하게 탄압한다.

이것이 <안세이 대옥>이다.

특히 피해를 입은 것은

  • 미토의 존왕파
  • 조슈·사쓰마 계열의 개혁파
  • 요시다 쇼인 같은 급진적 지식인
  • 막부정책에 반대하는 여러 다이묘와 귀족

이었다.

함재봉은 단순한 몇 명의 체포가 아니었다고 강조한다.

다이묘를 강제로 은퇴시키고 봉록을 박탈하거나 연금하고, 하급무사와 지식인을 투옥하고 처형한다.

69회에서 다룬 요시다 쇼인이 1859년에 처형된 것도 이 과정이었다.

즉 이이 나오스케는

<막부의 권력을 강화하여 나라를 안정시키겠다>

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반막부 세력의 적개심을 폭발적으로 키웠다.


6. 1858년 해리스 조약 ― 천황의 허락 없이 체결하다

정치적 갈등을 폭발시킨 직접적인 사건은 미국과의 <미일수호통상조약, 해리스 조약>이었다.

고메이 천황은 조약 체결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이 나오스케의 막부는 천황의 재가를 받지 않은 채 조약을 체결했다.

천황을 정치적으로 중시하기 시작한 존왕파 입장에서는 이것은 단순한 외교정책의 차이가 아니었다.

<천황에 대한 모독>

이었다.

함재봉은 이 지점에서 존왕양이 사상이 폭발적인 정치적 에너지를 얻었다고 설명한다.

논리는 다음과 같다.

<막부가 서양 오랑캐와 조약을 맺었다.>
→ <천황의 뜻을 거역했다.>
→ <막부는 일본을 대표할 정당성을 상실했다.>
→ <천황을 중심으로 나라를 다시 세워야 한다.>

이렇게 개항 문제가 정권의 정당성 문제로 바뀐다.


7. 천황이 실제 권력보다 훨씬 큰 정치적 상징이 된다

여기서 함재봉의 설명 가운데 흥미로운 점이 있다.

당시 천황에게는 실제 군사력도, 재정도, 행정조직도 거의 없었다.

말 그대로 상징적 존재였다.

그러나 막부가 약해지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막부 반대세력은 천황이라는 상징을 이용해 자기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한다.

<막부에 반대한다>

라고 하면 반역자가 되지만,

<천황의 뜻을 받든다>

고 하면 충신이 된다.

즉 천황은 실제 권력이 없어도 <정치적 정당성을 생산하는 중심>이 된다.

이 변화가 메이지유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8. 1860년 사쿠라다문 밖의 변

이이 나오스케의 강압통치는 결국 폭력적인 반발을 불러온다.

1860년 3월 24일, 에도성 사쿠라다문 밖에서 미토번 출신 존왕양이파 무사들이 이이 나오스케를 습격해 살해한다.

PDF 6~7쪽에서 강연은 이 암살을 막부정치의 결정적 분기점으로 설명한다. 막부 최고권력자가 수도 한복판, 에도성 바로 앞에서 살해되었다는 것은 단순한 정치적 암살 이상의 의미였다.

그것은

<막부가 자기 최고지도자조차 보호하지 못한다>

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함재봉이 제목에서 <한 번의 암살이 일본을 바꾸었다>고 표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9. 암살이 오히려 존왕양이 운동을 강화한다

이이 나오스케를 제거하면 막부가 안정될 것 같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암살은 막부의 권위를 더욱 떨어뜨렸고 존왕양이파의 자신감을 높였다.

막부 입장에서도 문제를 군사적 탄압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새로운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공무합체(公武合體)>

다.

‘공’은 조정, 즉 천황을 뜻하고 ‘무’는 막부를 뜻한다.

쉽게 말하면

<천황과 막부가 손을 잡아 나라를 함께 운영하자>

는 것이다.


10. 공무합체 ― 막부를 살리기 위한 마지막 타협

함재봉은 공무합체를 매우 흥미롭게 해석한다.

막부는 천황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천황과 손을 잡으면 자기 정당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천황측에서도 막부의 군사력과 행정력을 이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천황의 권위 + 막부의 실력>

을 결합하면 외세에 대응할 수 있다는 구상이었다.

이것은 68회에서 사쿠마 쇼잔이 주장했던 공무합체론과도 연결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양쪽이 생각하는 ‘합체’의 의미가 달랐다.

막부는

<천황이 막부의 권위를 인정해 주기를>

원했다.

반면 존왕파는

<막부가 천황에게 복종하기를>

원했다.

같은 공무합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실제 정치목표는 전혀 달랐다.


11. 가장 놀라운 정치적 수단 ― 혼인

공무합체를 실현하기 위해 막부가 선택한 방법이 <정략결혼>이었다.

고메이 천황의 여동생 <가즈노미야 지카코 내친왕>을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와 결혼시키려 한다.

이것은 에도시대 정치질서에서는 매우 큰 변화였다.

도쿠가와 가문과 황실이 혼인으로 직접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강연 7~8쪽에서는 이 결혼 추진이 막부와 조정 사이의 정치적 결합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자세히 다루어진다.


12. 가즈노미야 혼인의 조건 ― 외국과 맺은 조약을 폐기하라

특히 흥미로운 것은 천황측에서 제시한 조건이다.

천황의 여동생과 쇼군의 결혼에 동의하는 대신,

<외국과 체결한 조약을 장차 폐기하고 쇄국으로 돌아가라>

는 요구를 한다.

막부는 이를 사실상 받아들인다.

그러나 함재봉이 지적하듯 당시 국제정세를 생각하면 거의 실현 불가능한 약속이었다.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네덜란드와 이미 조약을 맺어 놓고 몇 년 안에 모두 없애겠다고 약속한 셈이다.

막부는 국내정치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외교적으로 지킬 수 없는 약속까지 하게 된다.

이것은 막부의 정치적 취약성을 보여준다.


13. 참근교대까지 완화된다

공무합체와 정치적 타협이 진행되면서 막부가 수백 년 동안 유지해 온 핵심 통치제도도 흔들린다.

대표적인 것이 <참근교대>다.

다이묘가 일정 기간 에도에 머물고 가족을 사실상 인질로 두도록 했던 제도는 도쿠가와의 지방통제 핵심장치였다.

하지만 외세와 싸우려면 각 번도 자기 군사력을 강화해야 했다.

막부는 결국 참근교대의 부담을 줄이고 규제를 완화하기 시작한다.

함재봉의 표현대로라면

<막부가 자기 손으로 지방 다이묘의 족쇄를 풀어주는>

상황이 된다.

그 결과 조슈와 사쓰마 같은 강력한 번은 더욱 자유롭게 경제력과 군사력을 확대할 수 있게 된다.


14. 막부가 나라를 살리려고 할수록 자기 자신은 약해진다

73회 전체에서 반복되는 역설이다.

막부가 외세에 대응하려면

  • 전국 다이묘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 조슈·사쓰마를 중앙정치에 참여시켜야 한다.
  • 번들의 군사력을 강화해야 한다.
  • 천황의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
  • 참근교대를 완화해야 한다.
  • 서양 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이 모든 정책은 막부의 독점적 권력을 약화시킨다.

그래서

<일본을 강하게 만드는 것과 도쿠가와 막부를 강하게 만드는 것이 서로 반대되는 상황>

이 만들어진다.

이것이 이번 회의 정치사적 핵심이다.


평론

1. 73회에서 가장 중요한 설명은 <권력과 정당성의 분리>다

이번 회에서 특히 유익한 것은 막부가 여전히 훨씬 많은 군사·행정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천황이 정치적으로 더 중요해지는 과정이다.

막부에게는 <실제 힘>이 있었다.

천황에게는 <정당성>이 있었다.

그러나 막부의 실패가 계속되면 사람들은 실질적 힘보다 정당성을 찾게 된다.

그래서 천황은 거의 아무런 행정조직 없이도 정치적 중심으로 떠오른다.

메이지유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통찰이다.


2. 이이 나오스케를 단순한 악역으로 보는 것은 피해야 한다

강연에서는 안세이 대옥의 강압성이 크게 부각된다.

그러나 이이 나오스케에게도 나름의 현실적 논리는 있었다.

막부가 다이묘들과 천황에게 계속 의견을 물으면 정부가 아무 결정도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 미국과 전쟁을 하면 승산이 거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개항 + 강한 중앙정부>

를 만들려 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을 지나치게 강압적인 숙청으로 추진했다는 데 있었다.

즉 그는 단순한 반동주의자가 아니라 <막부 중심의 근대화를 추진하려 한 권위주의적 현실주의자>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3. 사쿠라다문 사건을 ‘한 번의 암살이 일본을 바꾸었다’고 하는 것은 절반만 맞다

이이 나오스케의 암살은 분명 엄청난 정치적 충격이었다.

그러나 이것 하나가 일본을 바꾸었다고 보면 지나치다.

이미 그 이전에

  • 페리 내항
  • 가나가와 조약
  • 해리스 조약
  • 천황의 정치개입
  • 조슈·사쓰마의 성장
  • 존왕양이 사상의 확산
  • 안세이 대옥

등이 누적되어 있었다.

따라서 사쿠라다문 사건은

<변화의 원인>

보다는

<누적된 막부의 위기가 돌이킬 수 없는 단계에 들어갔음을 보여준 사건>

이라고 보는 편이 낫다.


4. 함재봉의 설명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의도와 결과의 역전’이다

73회에는 이런 역설이 반복된다.

아베 마사히로는 막부를 살리려고 정치참여를 확대했다.
→ 조슈·사쓰마가 강해졌다.

이이 나오스케는 막부를 살리려고 강압적으로 반대파를 제거했다.
→ 존왕양이 운동이 더 격렬해졌다.

막부는 천황과 손잡아 자기 권위를 높이려 했다.
→ 천황의 정치적 권위가 더 커졌다.

참근교대를 완화해 국방을 강화하려 했다.
→ 지방 다이묘가 더 강해졌다.

즉 <막부를 살리려고 취한 조치가 막부를 죽이는 결과>를 반복적으로 낳는다.

이것이 73회를 매우 흥미롭게 만든다.


5. 다만 ‘정치는 의도와 무관하게 흘러간다’는 결론은 약간 지나치다

후반부에서 함재봉은 정치에서 인물들의 의도와 실제 결과가 크게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 점은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구조적 조건만 중요하고 인간의 선택이 별 의미 없다고 볼 수도 없다.

아베 마사히로, 이이 나오스케, 고메이 천황, 조슈·사쓰마 지도자들이 다른 결정을 했더라면 변화의 속도와 형태는 달라졌을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개인의 선택은 중요하지만 선택 가능한 범위 자체가 구조적 위기에 의해 빠르게 좁아지고 있었다>

고 해야 한다.


6. 공무합체는 실패였지만 메이지국가의 논리를 미리 보여준다

공무합체는 결국 막부를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이디어 자체는 흥미롭다.

<천황의 권위 + 근대화된 군사·행정력>

을 결합해야 한다는 논리다.

막부는 이를 자기 생존을 위해 사용하려 했다.

하지만 훗날 메이지정부가 실제로 해낸 것도 형태를 바꾸면 바로 이것이었다.

<천황을 국가통합의 상징으로 삼고 근대 군대·관료제·산업을 결합한다.>

따라서 공무합체는 정치적으로 실패했지만 메이지국가의 형태를 미리 보여주는 과도기적 구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7. 63~73회를 연결하면

지금까지의 흐름은 더욱 선명해진다.

<도쿠가와의 평화와 세력균형>
→ <시장경제·교육·난학의 성장>
→ <조슈·사쓰마의 강화>
→ <사쿠마 쇼잔과 요시다 쇼인의 서양인식>
→ <페리의 등장>
→ <개항·쇄국 논쟁>
→ <미국·러시아와의 외교>
→ <불평등조약>
→ <막부 권위 약화>
→ <천황의 정치적 부상>
→ <이이 나오스케의 강권통치>
→ <사쿠라다문 암살>
→ <공무합체>

이제 메이지유신까지 남은 단계가 많지 않다.


종합 평가

73회는 메이지유신을 <사상이나 서구화의 성공>보다 <정치적 정당성의 이동>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게 해주는 중요한 회차다.

도쿠가와 막부는 처음에는 군사력·행정력·외교권을 모두 독점했다.

천황은 거의 상징뿐이었다.

그러나 외세의 압력이 계속되는 동안 막부가 반복해서 실패하자 상황이 뒤집힌다.

막부에는 여전히 실력이 있지만 정당성이 약해지고,

천황에게는 실력이 거의 없지만 정당성이 커진다.

그리고 정치에서는 때로 <정당성이 새로운 실력을 만들어낸다>.

그 결과 전국의 젊은 사무라이와 강력한 번들이 천황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따라서 73회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사쿠라다문 밖에서 이이 나오스케가 죽은 순간 도쿠가와 막부가 즉시 무너진 것은 아니지만, 막부가 더 이상 일본의 미래를 혼자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분명해졌다.>

그리고 함재봉의 전체 논지에서 더욱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메이지유신은 처음부터 계획된 혁명이 아니었다. 막부가 살아남기 위해 하나씩 내린 현실적 결정들이 뜻밖에도 천황·조슈·사쓰마를 강화하고 막부 자신을 약화시키면서 만들어진 혁명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73회는 ‘사쿠라다문 암살사건’의 이야기를 넘어 <도쿠가와 권력에서 천황 권력으로 정치적 중심이 이동하는 결정적 중간단계>를 설명하는 회차라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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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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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한국인의 탄생의 함재봉입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이어서이
독구가와 막부 말기에 도구가와 애써서
구축해 놓은 [음악] 그 정치적 균형 체제. 어 그 체제가 어떻게
무너지는지에 [음악]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도구가와 어
창근 교대라는 인질 [음악] 제도를 통해서 또 자기한테 도전했던 번들을 어 영 영
영영 영지를 [음악] 뺏고 세력을 약화시키고 어 자기한테 충성하는 번으로 에워싸게
하고 그리고 이제 외세와의 모든 관계를 끊도록 하죠. 특히 외라는
[음악] 것이 외국으로부터 서양으로부터 대포가 들어오고 총이 들어오고 이런 거를 알기 때문에
[음악] 어떤 특정 번이 특히 자기에 반대하는 번이 어 외세랑 서양
열강이랑 손을 잡으면 큰일 나니까 이제 철전국 정책을 하는 거죠. [음악] 이렇게 해서 280년간의
평화가 옵니다. 그런데 그 평화가 깨지는 것이 결국은 외세의 도래 때문이죠. 회리제독에 미국 함대가
오면서 그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되는지 이국을 어떻게 풀어야 되는지
그리고 풀면서 [음악] 풀으로 해서 일어나는 정치적 불균형을
어떻게 잡을지 [음악] 특히 도구가와의 세력이 약화되는 것을
어떻게 막을지 이런 것을 가지고 독구가 막부에서 굉장히 고민들을 합니다. 그렇지만 결국은 결국은 어
그 외세의 [음악] 도래로 인해서 독꼬가 세력이 약해지기 시작하고 그
대안으로 부상하는 것이 [음악] 천왕이 부상을 하고 그리고 천왕을 미는 존양이파
쇠국주의자들 [음악] 젊은 사무라이들 그리고 옛날부터 독구어를 반대했던
번들이 [음악] 부상을 하기 시작하면서 세력 균형이 완전히
바뀌기 시작합니다. 오늘은 그 핵심 부분에서 어 그
막부가 도구가와 막부가 어떻게 해서든지 천왕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 어떻게서든지 어 동시에 다른 강한 번들을 견제를
하려고 하는 그 부분을 오늘 함께 [음악]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인의 탄생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음악] 페리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에도 안에 나타나서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어떻게서든지 쇼근한테 전달하겠다 했을 때에 처음에는
일본에서 막부가 그걸 거절을 하려고 애를 썼죠. 그렇지만 결국은 거절을
못 하고 그 친서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리고 1년 후에 다시 돌아오겠다라는 약속을
그 원포를 놓고 페리가 가고 나니까 그럼 이제 페리가 돌아오기 전까지
정확히 국가의 정책을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 열어야 될 건지 계국을 해야 되는 건지 쇠국을 유지할 건지
이제 이런 고민에 빠지게 되는 거죠. 그때에 마침 도크가와의
그 당시의 쇼그는 굉장히 병약하고 국정을 살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즈라는 어 높은 대신을 하나 임명을 해서 그 로즈한테 모든 거를
맡기고 있었죠. 그래서 그 로즈가이 당시에 호타라는 사람이었었는데
호타 입장에서는 이렇게 큰 일이 벌어졌고 그리고 지금
도구가와 막부 자체가 굉장히 약화돼 있는 상태고
그러니까는이 큰 일을 처리하데 있어서 도저히
옛날 같이 독구가와 막구가 강했을 때 같이 혼자 힘으로 할 수 없겠다 싶어서
처음으로 독구가 막부가 형성된 이후 처음으로 다른 심지어는 조슈와 사스마 같이
자기네한테 처음부터 맞었던 따라서 어
그 다이묘들을 3등급으로 나눠서 제일 낮은 등급은 조시와 사스마 같은 그
번들은 아예 국정에 참여를 못 할뿐만 아니라
아무런 그런 중앙 정부가 그니까 독구가 막부가 상의도 하지 않는
그러면서 독단적으로 결정을 한 그런 구조였던 거를 깨고 조수하고 사스마를
비롯한 모든 번에 그
해리 저 페리가 가져온 친서를 복사를 해서 다
돌려주고 그러면서 어떡하면 좋겠냐고 처음으로 질문을 합니다. 상의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심지어는 천왕한테까지도 그때까지는 완전히 독국어가 막고
묻어버리고 무시하고 있었던 교도의 천왕부에도 그걸 보내서 천왕부의
의견도 물어봅니다. 사실은 이게 독가가 약해져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였지만은
바로 이것 때문에 조슈하고 사스마가 부상을 하기 시작하고 특히 천왕부와 손을 잡고 부상을 하고 그것이 이제
궁극적으로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거죠. 자, 그러면
그래서 호다가 이런 편지를 다 보내고 그래서 의견을 청취를 하는데 그런데
참 역설적인게 뭐냐면은 독구가와는
막보에서는 토론을 다 해 보고 결국은 열어야 된다. 열 수밖에 없겠다.
그러고 했는데 정작 처음으로 한번 상의를 국사를
같이 노네보자고 상의를 했던 조주나 사스마버는 물론이고 천왕이
당시 천왕은 고메이 천왕입니다. 나중에 메이지 천왕의 아버지죠.
고메이 천왕은 철저하게 반대를 합니다. 즉 천왕이 독구가 막부보다도
더 쇠국주의자들입니다. 더 쇠국주의자입니다. 그러면서
절대로 쇠국을 하는데 동의를 못 해 주겠다. 천왕이 그럽니다. 그러니까
이제 호다 로즈 호다 입장에서 독고감 막부의 최고 책임자 입장에서는
기껏 상의를 하려고 여러 의견을 물었는데 그중에서도
어떻게 보면 제일 중요한 천왕의 입장은 절대로 안 된다. 이래
버리니까는 계곡을 하지도 못하고 못 하지도 못하고 아주 중간에 끼인
상태가 됐습니다. 그러니까 호탄은 결국은 자기는 도저히이 문제를 해결 못
하겠고 더 이상 국정을 이끌 자신이 없다 그러면서 사임을 해 버립니다. 그리고 또 도크가와의 당시 수군이었던
도크가와 이해 사단은 결국 병으로 죽습니다. 그런데 병으로 죽은 또이
쇼구는 후사가 없었습니다.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러면 어느 방
번에 방계 도구가와 가문에 누가 이거를 그러면
승계할 것인가 속은 자리를 승계하신할 것인가를 가지고 또 독구가와가와 감은
내에서 엄청난 내분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독구가 막부는 약해질 대로
약해지고 있고 내분까지도 일어나고 있고 결정을 못 내리고 있는 그런
상황에 빠져 버립니다. 죽기 4개월 전에 이나오스케는
임무를 다이로에 임명을 합니다. 아이로라는 것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이인나오스케가 나온 그 이문에서만
임명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도구가와 역사상이 다이로라는 자리는
세 명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만큼 나라가 위기라는 것은 알고
있었고 그리고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이 감은 자기네가 항상 가장
나라가 어려울 때 의지했던이 가문을 찾아서 그이 가문에
나오스케를 다이로에 임명을 합니다. 그런데이이
나오스는 임명된지 3개월 만에
안사의 대옥이라는 걸 일으킵니다. 즉 무슨 말씀이냐면
강경론자였습니다.이 이 사람은이 사람은 이인하우스케은
독구가와 막부가 도대체 왜 조슈하고 사스마 같은 번들하고 상의를 하며
국정을 논하며 왜 그 사람들한테 국정에 참여할 수 있 왜 목소리를 주며 도대체 천왕부에다가 왜 그런
편지를 보내 가지고 천왕부한테 의견을 물을 이유가 뭐가 있느냐고 절대로
그건 이제는 더 이상 안 된다 그러면서 대수 숙청을 합니다. 즉 계국을
반대하고 개항을 반대했던 세력들을 대거청을
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같은 도구가와의
가문이 통차든 그 미토버낸 미토의 날리아키
그런 사람들도 외국을 주장했지 않습니까? 자기한테 300명의 그 저 론인들하고 농부의
아이들만 주면 자기가 미국에 가서 옥세를 하겠다 이럴 정도로
세국주의자였고 계국을 반대했던 그 믿도의 날이 아끼 그다음에
도대체 처음부터 이런 다이어들한테 의견을 물었던 호다
전 로주였던 호다 마사요씨 그다음에 도사번에
야마 마우치 요도 이런 사람들을 전부 다 연금 상태 그러니까 가택 연금
시켜 버리고 후구 이번에 다이며나 이런 사람들은 아예 다이며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해 버립니다. 그러니까 도구가와 막부가 다시 한번 옛날에 그
권세를 되찾는듯한 모습을 보이면서 완전히 그 강경책을 밀어붙입니다.
그런데 그책의 목표는 뭡니까? 개항을 하자는 거였습니다. 그 그러니까
독가와 막은 개항을 하자는 거였고 그리고 지금 조슈나 사스마번이나 또
천왕은 계국을 하면 안 되겠다라는 겁니다. 근데 우리가 역사를 알지만 뭡니까?
계국을 하면 안 되겠다라는 천왕하고 천왕가하고 조수하고 사스마가 힘을
합쳐서 나중에 메이신을 일으켜서 완전히 계곡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게 참 역설입니다. 처음의 시작은 분명히 도크가와 개 계곡을
하려고 심지어는 이인우스케 같은 인물까지 나와 가지고 계곡을 반대한
사람을 대숙청을 하면서까지 계곡을 밀어붙였는데 처음에는 계곡을 했다라는 것 때문에
독구가 상대로 들고 일어났던 사람들이 도구가를 무너뜨리고 나서는
자기네가 도구가를 한 거랑 똑같은 거를 하는 겁니다. 그게 메이지 유신입니다. 하도 숙청이
심해 심해지니까 사스마번의 시마스나리아키
아주 그 그 사스마번의 큰 개혁을 주도했었고 했던 막강한 다이묘였는데이
사람은 아예인하우스케를 상대로
거병까지 계획을 합니다. 그런데 거하기 직전에 출하기 직전에 병사를
하고 맙니다. 그리고 이인하우스케는 이때에 전국에 그동안에
자기가 봤을 때 그동안의 나약한 소군과 나약한 로주들 때문에
계속해서이 많은 번의 젊은 사무라이들이
들고 일어나서 뭐 조왕양이 어쩌고 하면서 막부에 맞서고 있었던 이런 인물들을
내버려뒀었는데 자기는 내버려두면 안 된다 그러면서 전국적으로 적으로
존황양이 파은 사무라이들까지 전부 다 숙청을 합니다. 이때에 바로 요시다
쇼인도 조슈의 요시다 쇼인도 이때에 원래는
자기네 고향 하스마의 감옥에 있었던 거를 에도로 불러올려서 에도에서 처형을 해
버리는게 바로 이때입니다.이가 가인나우스케가 안세의 대옥을 일으켜서이 대숙청을
버리면서까지 계곡을 밀어붙이는데 천왕은 더욱더 쇠국하자는 목소리를
높힙니다. 그래서 1858년 7월 27일에는 이세이신궁 뭐 이런 여러
신궁에다가 식사를 보냅니다. 그러고 조직을 내려갔고
여몽합군이 일본에 쳐들어올 때 가미카제가 와서
신풍이 와서 신이 내린 바람이 태풍이 불어 갖고 그 함대를 선멸시켰듯이 이번에도
어떻게서든지 가미가 신이 가미카제를 내려줘서
신풍을 내려줘 갖고이 오랑캐들 무찌르게 해 달라고 전국에 있는 중요
신 이런 데에다가
죄를 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고메이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반대를 천왕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반대를 하는데도 7월 29일 날 어떡합니까?
간학가와 해안에서 정박해 있던 미국 퍼우하텐호에서
해리스 조약이라고 불리우는 일이 수호통상 조약이 체결이 돼
버립니다. 조약 내용은 심어다하고 학고다를 즉시 개방하고
5년 안에 다른 여러 한구들을 개양한다.
이런 거를 명시하는 조약이었습니다. 그런데이는
천왕의 제가를 받지도 않았고 받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완전히 천왕을 무시하는 겁니다. 옛날에 원래 박구 후 독구가 바꾸가
아듯이 천왕은 알 필요도 없고 우리가 천왕의 의견을 물을 필요도 없다. 우리 박 막부가 그냥 하면 된다.
이렇게 했던 거죠. 그리고 그래서 조약을 체결하고 나서 한 이틀
후 지나서야 교도에 있는 천왕부에
미국하고 어 조약을 맺었다. 사실 급해서 시간이 없어서 통보를 못 해
드려 죄송하다. 이렇게 그냥 넘어가 버립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간신이 독과의 이에모치라는 사람을 세소군으로
임명을 했는데 그것도 사후에 그리고 미국과의 조약 체결 한 일주일
후에서야 천왕부에다가 알립니다. 그러니까이는
원래 독구가 막부가 갖고 있었던 그 권세를
다시 회복하고 그걸 그대로 누려야 된다고 하면서 천왕부와 조황향이 계국을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철저한 숙청으로 잠재어 버립니다. 고메인은 당연히 천왕은 경로 하죠.
나한테 상의도 하고 물어보지도 않고 뭐 알린다 그랬는데 알 뒤늦게나 알리고 이제 이러면서
개곡을 했다 그러면서 자기 퇴 퇴를 해 버리겠다. 나 퇴임한다 그랬는데도 어
옆에서들 이제 말려서 퇴인을 못 합니다. 이러고 있는데 또 마크는 아예 한
걸음 더 나가서 곧바로 미국과의 수상 조약만 맺은게 아니라 곧바로이어서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과도 통상 조약을 맺어 버립니다. 완전히 계곡을 하는 겁니다. 고메인는 조종 회의를
열어서 고매 천왕은 조종 회의를 열어서 미국과 조약을 맺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다라는 걸 인정을 하면서도 그렇지만 자기의 영을 따르지 않았다는 점을 책망을 합니다.
그러면서 아주 중요한 제안을 합니다. 그게 뭐냐면은 이렇게 나라가 어려워졌으니까 그러면
천왕부하고 도구가와 막부하고
협조를 하자, 손을 잡자라는 제한을 합니다. 그 제한이 공무 협체
공이라는게 그
천왕이고 그죠. 우리가 어 공공성할 때이 공 그죠 공이고 그다음에 부는
당연히 이제 무사니까 막부를 말하는 뜻이고 합체 둘이 같이
하자 그래서 고부갓타에 1번 말로 고부가라는 거를 하자라는 거를 제안을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이제 철왕은 그나마 그래도 좀 타협을 하려 그러고 그러는
입장을 했는데도 굉장히 구력적이었죠. 자기한테는 자기는 그래도 알려 달라
그러고 더군다나 반대한다라는 걸 했는데 완전히 무시하고
막부가 그냥 미국하고 뭐 네덜랜드하고 영국하고 다 조약을 체결해 버리니까
굉장히 경로를 하고 분노하면서 어 나 이러면 그만두겠다라는
어 그 퇴의하겠다라는 협박까지도 하지만 결국은 다시 이제 주위의
신하들의 이제 말을 듣고 그러면서 아 너무 그렇게 과격하게 하시 안 됩니다. 하는 얘기를 듣고서 자
그러면 어쨌든 내 칭령을 어긴 것은 잘못된 일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나라가
어려우니까 우리가 힘을 합치자 이랬었지 않습니까? 막보하고 천왕의
힘을 합치자. 이렇게 천왕이 얘기를 했는데도 막상 막부에서는 당시에 로즈
마나베 아키카츠라는 유명한 로즈를 그니까 다이로이 밑에 있었던 로즈죠.
로즈를 보냅니다. 근데이 로즈가 처음에는
미국하고 맺은 조약을 설명하겠습니다. 이러고 왔는데 막상 와서는
어떡합니까? 막상 와서는 마베가 천왕 주변에서 외국을 주장하든
그러니까 막부의 정책에 방대하든
미국과의 조약을 맺는 거에 반대하든 천왕 주변에 있는 대신들 그리고 천왕
주변에는 전부 다 후계 귀족들이죠. 원래 귀족들이요. 일본의 귀족들.이
이 사람들을 대고 숙청을 해 버립니다. 그러니까 천왕주의에 있는 천왕의 가장
친한 천왕이 가장 믿든 그러한 대신들조차도
귀족들조차도 막부에서 사람을 보내 갖고 다
숙청을 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인물들은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하고 심한 경우에는 삭발을 하고 아예 출가하도록 합니다. 막부에서
로즈가 와서 천왕의 측근들을 다 잘라 버리는데
천왕이 어려서부터 같이 잘한 사람들 친했고 의지하는 사람들 잘자 숙청을
해 버린데도 사실 천왕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즉 천왕은
말로만 군주이지 실권은 전혀 없었다라는 것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고
이인 아우스케는 바로 그러한 목적으로 만나를 보내서 천왕부에 아예 가서 그
주변의 인물들까지 숙청하면서 자기의 힘을 막부의 힘을 과실을 했던
것입니다. 사실이 이인나우스케의 안세의 대혹 때문에 바쿠마츠 어
도고가 막부가 끝나가는 그 시기에 새로운 정치적인
전선이 형성이 됩니다. 그래서이이 나오스키가 이끄는 독구가 막부가
추진하고 있는 계국 계국 세력이 있는 거고 그리고 거기에 반대하는
양의 세력 즉 쇠국 세력이 있는데 그 쇠국 세력이 가장 쇠국을 앞장서서
지지하기 시작한 고매의 천왕
하고 힘을 합칩니다. 그러니까 양이 서양 오랑캐들을 물리쳐야 되고
서국을 지키지 않는 그 세력과
천왕을 따라야 된다. 천왕을 존중해야 된다.
천왕이 진짜 우리의 죽은이다라는 그 밑도번에서부터 나오기 시작했던 그
존왕 사상이 합칩니다. 그래서 존왕 양이 사상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황제를 천왕을 받드는 것은 곧 서양 오랑캐를 무찌르는 거라는 그 존왕양이
사상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이 존황파들은 곧파들이 [웃음]
되는 거고이 존왕파들은이
나오스케가 천왕의 제가도 없이
헤르스약을 맺어버렸다. 이게 천왕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을 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면서이 존황 양이파들은 전부 다 교도에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천왕 주변에 천왕부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러니깐 미국
등의 외세와의 서양 세력들과의 조약을 맺고 그거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교도를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하면서 국가 정책에 개입을 하기 시작하고
전국의 젊은 사무라이들 열혈분자 조황양입파 사무라이들이 다 교도에
모여들기 시작하고 이제는 는 박후나 막부나에도 대신에 천왕과
교도가 나라를 대표하는 중심으로 자꾸 떠오르기 시작하는
거죠. 그러면서 다른묘들도
이제 세력 중심이 두 개가 돼 버리는 거 아닙니까? 에도의
에도의 박구후가 있고 막부가 있는 거고 교도의 천왕부가 있는 거죠.
전에는 아예 비교할 수도 없이 애도가 강했고 천왕분이 있으나 많나 한
거였었는데 지금 계국을 통해서 완전히
교도의 천왕부가 관심의
관심의 초점이 되고 그리고 세력이 점점 점점 그쪽으로 쏠립니다.
그러니까 전국에 있는 다른 다이어들도 모든 다이여들도이 어느 쪽에 가서
있어야 되지 그러면서 누구 쪽에 붙는게 이게 맞는 거지 하면서 그
합종 연행 복잡하게이 서로가 이편 저편 들고
고민하고 하는 그 정치판
교도와에도 사이에서 천왕과 막부 사이에서
갈등하는 고민하는 합종 연행하는 소위 말하는 바꾸마츠 막부 말기의 정치가
시작이 됩니다. 이인 아우스케 때문에 이러한 새로운 정치 지형이
만들어집니다.
법률 방송이 출관하는 시사 교양지 법치와 자유는 우리 사회가 증면하고
있는 법치의 [음악] 문제들을 가장 냉철한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는 정론지입니다.
2026년 대한민국의 오늘을 가장 정확하게 깊이 있게 읽어볼 수 있는
법치와 자유를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온라인으로도 편하게 읽어 보실
수 있습니다.
요를 중심으로 한 천왕을 중심으로 한이 전왕 양위파
세력이 얼마나 강해지기 시작했는지를 알려주는 결정적인 사건이 뭐냐면은
1860년 3월 24일 일어나는 사꾸라다몽
사건입니다. 사꾸라다몽문은 에도송 지금의 그 고교죠. 저
도쿄에는 천왕의 거 그 거소인데 그게
그 당시에는 이제 독구가와 그 막부에 어 독구가 가문의
성이었죠. 거기에 가서 쇼근을 만나서 국사를 논하고 퇴청하는이
나오스케을 밑도한의 존양입파
론인들이 암사를 합니다.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참 끊임없는 아이런이지만 미터번은 도구가 번의 형제번입니다. 가장
가까운 번입니다. 근데 그 미토번에서 전왕이 사상이
나왔던 거고 그러니까 그 미토번에 사무라이들이
자기 그러니까 도구가와의 영을 어기고 도구가와의
다이로를 죽이는 거죠. 왜? 존왕
천왕을 모욕을 했기 때문에 어떻게 서양오랑캐들과 조약을 맺어서 나라를
열으로서 천왕을 모욕했다. 따라서 그 이인
아우스케를 암사를 합니다.
충격이었습니다. 바코는 너무나도 충격고 놀랍 충격이고
놀랍기 때문에 몇 달 동안이가 죽었다라는 사실을 숨기려고 그럽니다.
그렇지만 강력한 지도자였고 강력한 계국주의자였던이가
죽음으로써 박푸는 막부는 다시 한번 표류하기 시작을 합니다.이가 가 죽고
나니까 막부의 힘이 약해지는 거고 요때에
고메이 천왕이 다시 한번 우리 천왕부하고
막부하고 같이 가자라는 공무합체 론 고부가를
제시를 합니다. 그리고 막부의 입장에서도
천왕부하고 손을 잡는 것이 자기네
힘을 유지하는 방편이다. 유일한 방편이다 생각을 해 갖고 그래서 천왕하고 손을 잡으려고 그럽니다.
그래서 자 그런데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이 뭐냐면은 그러면 고매의 천왕을
고매의 천왕이 세력이 강해지는 것은 전왕이 파들이
거를 떠바들고 그리고이
천왕한테 천왕의 영을 어기고 오랑캐드를 조약을 맺은 막부를 타도해야 된다라는
그 조항양이파들 때문에 다시 천왕이 힘을 얻게 되는 건데
그런데 고메이의 천왕 본인은요 도구가 막보를 타도하고 자기가 뭐
왕정복고를 통해서 자기가 다시 친정을 하겠다. 친히 정치를 하겠다. 나라를
다스리겠다. 이런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사람입니다. 오히려 바꾸에서 돈 주는 돈과 모든
잘해 주는 걸 갖고 그냥 자기는 편하게 행복하게 잘 살면 된다고 생각을 했었지. 자기가 국정을 도모해
갖고 어떻게 하겠다 이런 생각 전혀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는 그를 추정하던 사람들이 생각했던 거하고
고매의 본인이 생각했던 건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고메가 사실은 독구가 막부를 타도하자 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라는 것은 어디서 나타냐면 바로 그 공무합체 고부가에서 론에서 나오는 거죠. 그래서
1860년 6월 3일 날 바로 그 고부갓타이를 그럼 한번 우리가 실행에
옮겨 보자라는 취지에서 그래서이 그러면 공공무합체론
고부가를 실행에 옮기자고 해서 1860년
6월 3일 날 가노미아 치카코 내친 왕 고메이의 이복 여동생입니다.
도매하고 가장 친했고 가장 서로가 믿고 의지했던 여동생입니다. 하고
시억군하고 결혼을 하자 이렇게 된 겁니다. 그 제안이 나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죠. 그러니까 도구가 280년 역사상 항상
천왕부를 억누르고 가서 천왕을 갈아버리기도 하고 그랬던 독구가의 가문에서 이제는
혼인 관계를 맺서이 고부가타이가
실체를 갖게 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박구 후측에서도 더욱더
적극적으로 적극적으로이 혼인을 성사시키자 이렇게 나오기
시작하니까 천왕이 자기가 가장 믿는 쿠게 그 귀족 출신 중에 이와꾸라
도모미한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당신 어떻게
생각하나 의견서를 제출하라 그럽니다. 이와꾸라 도무미는 나중에 이와꾸라
사절단이라는 꾸려서 전 메지우신 직후에 성공을 시킨 직후에 전 세계를
다니면서 그 2년 동안 어 외국을 보고 오는 그 유명한 이꾸라사절단의
그 그 수장이기도 합니다. 일본 근세사의 메이지신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인데 이때에 이제라가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 첫 번째 임무가 뭐냐면은 과연 천왕의
여동생하고 도크가 이예모치하고 결혼을 하는 것이 옳은 건가 했더니 그
가즈노미아 혼인에 관한 상신서라는 거를 제출을 합니다. 그러면서
이와꾸라는요. 조종하고 박후가 하나님을 대회에 과시하는 것 이거는 필요하다. 적극
동의한다. 그리고 만일이 혼인을 통해서 정말 고부가타의
공무 합체가 일어나면은 천왕부는 이제 점점 점점 국사에
참여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서 조정 조종이라는게 이제 천왕구죠.
조종의 권위는 한껏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라면서 적극 찬성합니다라는
의견서를 제출을 합니다. 그리고 그런데 마지막에 가서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 대신에이 결혼을 성사시킨다.
그 대신에 도구가와 막부가
외국 오랑캐들과 맺은 그 모든 조약들은 모든 조약들은
결국은 취화할 것을 맹세해야 된다. 그러니까
막부로 하여금 모든 외곡과의 조약들을 추할 것을 맹세하도록 약속을 하면은 결혼을
시켜라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천왕이 친서를 보냅니다. 독구한테 막부에 보내고 막부는 그걸
받아들이고 100% 동의 찬성한다. 그리고 어 이렇게 되면은
나라가 이제 천왕보하고 막부하고 손을 잡으면 나라가 이제 통합된 군사력도 갖게 되고 강렬하게 강력하게 대회의
그 외세의 개입에 저항을 할 수 있게 된다. 맞설 수 있게 된다. 이렇게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 군사력을 통해서든 아니면 조약의
재협상을 통해서든 앞으로 7년에서 10년 안에
서양하구의 서양 양이 그 서양 오랑캐들과의 모든 조약을 7년에서 10년 안에 다
취화하겠습니다라고 약속을 합니다. 그러니까는
존왕이 파들은 천왕주에 모여들면서 교도에 모여들면서 천왕 보고 저
당신한테 모욕을 준 오랑캐들하고 조약을 맺은 그 도구가
막부를 타도하고 천왕께서 직접 친정을 하십시오라고
하는 그런 와중에 천왕은 정작 고부가타이를
통해서 지금 독구가 막부랑 손을 잡는 겁니다. 근데 아무리 아무리 천왕이
독구가와 손을 잡고 본인은 친정을 할 생각은 곰의 천왕은 추어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세력의 중심은 권력의 중심 추는 교도로 옮겨가기 시작을 합니다.
그래서 그러면서 박쿠는 이제 고부 갓때를 통해서 천왕부하고도 관계를
설정을하고 특히 혼인 관계를 통해서 그렇죠. 천왕의 여동생이
초군하고 결혼을함으로써 그 관계가 탄탄해지니까 그다음에는
다른 번들하고도
특히 자기네한테 저항하던 번들하고도 관계를 다시 재설정을 하고자 합니다.
그러면서 이때 하는 것이 뭐냐면은 참근 교대 산긴따이 그 인질제도
그죠? 2년마다 한 번씩 그러니까 그 각 다이여들이 본인들은 2년마다 한
번씩 교 도쿄에 와서 살 애도에 와서 살아야 되는 것이고 그 정실 부인하고
그 후계자들을 무조건 에도에 늘 살아야 되고 했던 그 산킹고따의 제도
자체를 7년간 유회를 한다 이래 버립니다.
그래서 그 유회를 하는 이유는 그런 거를 참근 교대 할하는데 돈이 너무
돌아 들어가고 그걸 유지하는데 각 번이 재정을 너무 많이 쓰고 경제력이
약화되 됐었는데 그리고 사실 그런 목적으로 창근 교대 시스템을 제도를
만들어 놨었던 건데 이제는 나라를 지키려고 국방을 강화시키고 공동의적인
서양 오랑캐들 하고 맞싸우려 그러면은 그 번들이 들이 참근 교대 같은 데다
모든 재력, 경제력을 다 써 버리면은 안 되고 오히려 각 번마다 군사력을
길러서 국방을 강화시켜야지 된다 해서
산긴다이를 7년간 유예를 해 버린다. 사실 이렇게함으로써 참근 교대 제도
자체가 완전히 사라집니다. 이렇게 되니까
사츠마와 조슈 같은 대표적인 도자마 다이묘 그죠. 또
그거한테 맞었던 그 다이묘들은 이제는
막간 경제력과 모든 거를 동원해서 자체의 국방력을 강화시키고 군사력을
강화시키고 마음껏 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겨나게 됩니다.
도구가와 그렇게 애써서 구축했던 세력 균형
280년 동안 에도의 평화를 가능케 했던 그 세력 균형은 이렇게 무너지게
됩니다.이 박쿠마스의 정치 막말 막부 말기의
정치는 정치 진술를 보여줍니다. 그러깐
정치라는 건요. 그 참여자들의 의도,
이념 이런 것과는 사실은 별 상관없이 흘러가는게 정치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인물이 나오더라도 대혼란계에 나오면은 어떤 선택을 하는지 그 선택지가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간 옳게 뜻대로 한 사람의 뜻대로 정치가
이루어지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이런 것은 없습니다. 각자가 다 그 당시 그 순간순간에
나름대로 이런 결정을 내려야 될 수밖에 없고 이것이 나라를 위하는 것이고 이게 나의 번을 위하는 것이고
하는 그 모든 그렇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을 하고 열심으로 그걸
위해서 노력을 하더라도 결국은 그 모든 의도와 노력이 합쳐지면서 역사가
흘러가는 방향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그러니까 지금
도구가와는 결국은 자기네가 힘이 약해지고 외세의 도래를 통해서 아
우리가 생각보다 너무 모든 것을 상황을 통제할 수 있 힘이 없구나. 외세를 막을 힘은 더운다는 없구나.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그동안에 우리가 갈라져 있고 서로
분열 통치를 하던 이런 다이여들 그다음에 억누르고 있던 천왕부 이런
세력까지 그래도 국론을 통일하기 위해서 우리가 다 다시 끌어들려야 되겠다라는 굉장히 좋은 의도에서 국론
통일을 하겠다는 의도 그리고 국가가 갖고 있는 모든 역량을
총동원시키는 방법을 만들어 보자고 해서
천왕부나 다이어들한테 그야말로 정책 참여할 수 있는 문호를
개방한 건데 그것 때문에 결국은 도덕가 막부는 무너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반면에 천왕부라는데는 천왕은 특히 당시 고메이의 천왕이라는
사람은 그냥 쇠곡주의자였고 기존 체제 도구가 막불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체제가 그냥 유지되는 것만 바랬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최국을 해서 최국을 하라는게 독국어의 막부의 정책에 반대하는게
아니라 결과적으로 반대하는게 됐지만이 사람은 뭐를 하고 싶었냐면 독가와 막부가 미워서 반대를 한게 아니라
독구와 막부가 좀 계속 그대로 가라 좀. 그래서 나 같은 우리 천왕한테는
그냥 그때그때 연금 주고 돈 주고 편하게 살게 내버려두고
국정 같은 거 우리 참여하도록 괜히 골치 아프게 그런 거 안 하도록 하자고
그런 의미에서 독구가 막부하고도 손을 잡고 그러는 겁니다.
그런데 막상 천왕을 미는 존황이파들은
천왕을 모욕을 준 도구가와를 타도하고
그리고 천왕께서 직접 나라를 다시 다스리는 친정 체제로 돌아가야
됩니다. 그러면서 외세를 몰아내야 됩니다.라는 세력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럼이 세력이 서로가 전혀 다른 꿈을 갖고 있고 미래를 전혀 다르게
보는 겁니다.이 이 세력이 어떻게 서로가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삽종 연행을 하면서 그러면서 결과적으로는
고메이 천왕이 죽고 새 천왕 메이지가 나오면서 그 메이지 천왕부가
조슈하고 사스마하고 손을 완전히 잡으면서 결국은
도크가와 막부를 타도를 하지만 그 타도를 하는 과정에서 존황양이 파들의
양이 즉 서양을 물리치고 세곡으로 돌아가자라는 그 원칙은 사라져 버리고
천왕이 친정을 하는 왕종 복가 이루어지는 거는 맞지만
그 메이지의 새 정부는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수입된 새 정부는 적극적인 개방 정책
독구가와 막부보다도 더 적극적인 개방 정책을 펼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은 독구가 막보는 굉장히 억울하죠. 자기네는 계곡을 하겠다고 그렇게
설득을 하고 그래서 전국을 설득하려 그러고 천왕을 설득하려 그러고 도자마이며들을 설득하려고 했는데 전부
다 그 계곡했다고 반대 벌대같이 일어나서 자기네를 다 타도해 갖고 무너뜨리고 나서는 결국 하는게
뭡니까? 자기네가 했던 정책을 그대로 오히려 더 심화시켜서 더 개방 개혁
정책으로 가는 겁니다. 그렇지만이 과정에서이
과정에서 모든 사람들이 변하는 거죠. 특히 전왕 양이파가
존황은 맞는데 양이가 아니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메이주신을
일으키는 기도 오크보도시미치 사이고 다까머리이 또
뭐 야마가이 모든 사람들이 처음에는 전부 다 전왕 양입파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가 다음 시간에도 계속 살펴보겠지만 외국
유학을 가고 사신으로 외국을 가보고 그러면서이 사람들이 전차
양의가 아니라 계국주의자들로 아주 친서방주의자들로
변해 나가면서 [목을 가다듬음] 결국은 메이주의신이라는 그 이상한
이상한 집합체가 생깁니다. 자들이 계국주의자들이 되고 계국
세국주의자들이 계국주의자들을 무너뜨리고 나서는 본인들이 계국주의자가 돼 버리는 그 과정을
통해서 메이주의신이라는 엄청난 변화가 혁명이 일본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다음 시간에는 그러면 이제
막부하고 초왕부하고 손을 잡고 공무 합체가 일어나기 시작하고
사스마 조슈 같은 도자마 다이여들도 국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되고 참근 교대도
없어지면서 자유롭게 되기 시작하면서 그다음부터는
막부는 물론이고이 번들이 경쟁적으로 개방정책을 하고
특히 놀라울 정도로 많은 수의 유학생들을
외국에 파견하면서 일본이 근본적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 과정을 다음 시간에 함께 살펴보도록 [음악] 하겠습니다.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통해서 [음악] 한국인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한국인의 탄생. 오늘은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