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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4

Eunhee Kim - 언제까지 과거가 현재진행형이라고 생각할 것인가? '일제 청산'이라는 구호가 지긋지긋하다. 청산...

(22) Eunhee Kim - 언제까지 과거가 현재진행형이라고 생각할 것인가? '일제 청산'이라는 구호가 지긋지긋하다. 청산...



Eunhee Kim
2 March 2019 ·
언제까지 과거가 현재진행형이라고 생각할 것인가? '일제 청산'이라는 구호가 지긋지긋하다. 청산 안하면 또 어떤가? 문화(사고방식, 언어의 사용등 그 모든 살아가는 방식)는 외국(그래 "외세"라고 하자)으로부터 영향받는 것이고 영향받는 과정에 한국화되면서 변화한다. 언제까지 영향받은 것을 다시 원점으로 돌려놓는 불가능한 일을 하겠다고 정치인들은 무모하게 덤벼드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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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1 March 2019
삼일절 단상

대통령께서 기념담화에서 “빨갱이란 독립운동탄압을 위해 만든 말, 조선의 분열을 위해 일제가 만들었다”는 요지의 말씀을 하셨다.
누가 그런 인식을 주입했는지 모르겠지만, 빨갱이-아카라는 말은 조선인이 아니라 자국인—같은 일본인을 탄압하면서 생긴 말이다.

일본은 1910년, 한국을 합방한 같은 해에 천황암살음모를 꾀했다면서 일본의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들을 탄압했고 다음해에 24명이나 처형했다.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들은 (조선의 좌파와 연대해 식민지배를 비판했고)천황제와 제국에 저항했고, 그런 연유로 일본정부의 탄압을 받았다. 프롤레타리아 작가가 고문당해 죽는 일도 있었다.
사회주의/공산주의자들이 아카—빨갱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건 그런 과정 속에서의 일이다. 똑같은 인식과 감시가 한반도에서도 행해졌다 해도, 그건 “조선인”을 겨냥한 것이기 이전에 “공산주의자”를 겨냥한 것이었다.

따라서 ‘빨갱이’란 , “독립운동탄압을 위해 만든 말”도 아니고 “조선의 분열을 위해 일제가 만든”말도 아니다.
당연히, “색깔론은 친일잔재”가 아니다. 그 뿌리는 일제시대때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 탄압에 있고, 죽고죽이는 갈등 끝에 내전마저 하고 만 “해방직후 한반도”에 뿌리가 있는 “해방후 갈등-한국전쟁”잔재다.
현대일본에서도 ‘아카’가 사용되지만 우리만큼 증오를 담아 발화되지도 않는다.
뭐든지 일본 탓으로 돌리는 건 아직 우리가 유아적 심리에 머물러 있다는 얘기. 그런 심리는 100년이라는 “세월” 의 의미를 오히려 퇴색시킨다.

기념의 의미는 그저 “그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되살리는데에만 있지 않다. “그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만큼 정신적으로 성숙했는지에, “기념”의 더 큰 의미가 있다.
우리의 “기념”은 언제 “현재진행형”을 벗어날 수 있을까.

110박정미, Shin-pyo Kang and 108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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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일
이상일 친일은 과거완료형일뿐이고
빨갱이와 친북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완료가 아닌 현재진행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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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준
박찬준 동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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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soon Im
Yoonsoon Im 친일 매국노는 처벌해야 합니다. 물론 불법취득 재산 환수도 찬성하고요. 단, 조선시대도 아닌데 단지 후손이란 이유 만으로 불이익을 주거나 처벌하는 건 반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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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8

친일행위가 바로 반민족행위인가? 한승조 2005

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 전재 기사 】


한승조 '한글 원본' 공개, '망언' 그대로

[전문] 제목만 바뀌었을뿐, '문제 망언' 과장된 것 아니다

김한규 기자 | 기사입력 2005.03.05. 10:49:00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9529


매국망언으로 큰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한승조 고려대 명예교수가 일본 <세이론(正論)>가 자신이 쓴 글을 일부 과장했다며 5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한글 원본을 공개했다.

하지만 그의 글은 '親日行爲가 바로 反民族行爲인가?-한일관계의 인식전환을 위하여'라는 제목이 <세이론>지에서 '공산주의.좌파사상에 기인한 친일파 단죄의 어리석음-일한합병을 재평가하자'로 바뀌었을 뿐, 문제의 망언 등은 원본 그대로였다. 다음은 한승조의 한글 원본 전문이다.

친일행위가 바로 반민족행위인가? -한일관계의 인식전환을 위하여-

Category : 【 전재 기사 】 Tag :




한승조 고려대 명예교수

일제 강점하 친일반민족 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란 법안이 현재 한국의 국회에서 심의 통과를 기다리고 있다. 이 법안은 현 시국에서 야당이 강력하게 반대하는 국가보안법, 사학법 개정안, 언론법 등과 더불어 노무현 정권과 열린 우리당이 기필코 이번 會期(회기) 안에 통과 시키려고 하는 이른바 4대 惡法(악법)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12월 초가 되면 국회는 이 법안들의 통과를 둘러싸고 여야 의원들 간에 볼꼴사나운 격돌이 예상되고 있다.

여당 내부에도 노무현 정권에 대한 지지가 매우 저조한 이때 이런 사회여론을 등진 법안의 강제통과가 가져올 수가 있는 민심의 離叛(이반)을 염려하여 약간의 법안 수정을 협상하려는 움직임도 보이는 모양이다. 그러나 친일행위 진상규명 특별법에 관해서는 정부 여당도 어떤 양보나 타협의사도 생각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야당의 반대나 여론에 대해서도 별로 신경을 쓸 필요도 없이 강행을 자신하는 모양이다. 이런 법안에 대하여 한나라당이나 언론계도 반대하고 나설 명분이 강할 수가 없을 것으로 보기 때문인 것 같다.


-------[친일파 청산문제를 둘러 싼 몇 가지 다른 시각과 입장]

이 글은 친일 반민족 행위를 둘러 싼 네 가지 다른 시각과 입장을 정리하면서 비교 평가해 본 다음 좌경적인 시각과 심성이 얼마나 한국국민의 心相(심상)을 저질화, 우매화하는가를 고찰하려는 것이다. 친일파 문제에 대한 네가지 시각이나 태도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 첫째는 친일 협력행위을 반민족행위로 간주하여 엄하게 단죄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의 입장이다. 
  • 둘째는 기본시각은 동일하나 친일행위나 처벌대상자의 범위를 다소 축소하여 보다 완화하려는 입장인데 이 두 가지 입장이 친일파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좌파의 시각을 대변한다.

  • 셋째는 친일 협력행위가 반민족행위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일본의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불가피한 행위였으므로 본의 아니게 취해진 친일 행위는 응징 처벌함이 옳지 못하다. 또 일제의 식민통치가 종식된 후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이제 와서 진상규명이나 사후 처리도 어려운 일이니 그런 법안은 폐기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 마지막 네 번째 입장은 일제치하의 친일행위는 그때 상황여건상 불가피한 일이었다. 또 보기에 따라서는 친일협력행위가 반드시 반민족행위가 되는 것이 아니며 한국인 또는 국민에게 나쁘기만 했던 일이 아닐 뿐 더러 도리어 유익한 면도 적지 않았으니 오늘에 와서 청산 운운할 필요가 없다는 사고방식이다.


-------[친일 반민족행위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좌파세력의 동기]

본래 어느 나라 어느 정파도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비타협적인 투쟁에서 공산주의 집단을 능가하는 정파는 없었다. 국가 중에서도 일본의 과거청산을 강조하며 일본을 압박하는 것이 중국과 북한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실제로 日帝(일제)가 가장 위험시하고 가혹하게 탄압했던 대상도 공산주의 집단이었다. 가히 불구대천의 원수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終戰(종전)후 일제 청산과 친일파 숙청에 대하여 시종일관 적극성을 보여온 것이 북한공산주의와 그 노선을 추종하는 한국의 386세대 그리고 노무현 정권이다.

노무현 정권이 이번에 친일반민족 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국회심의에 상정한 이유는 첫째, 次期(차기)에 대통령 후보로서 大權(대권)에 도전해 올 것으로 보이는 박근혜 한나라당 총재의 정치적 발판을 무너뜨리자는데 있다. 박근혜는 일제시대의 친일파이며 해방전후의 독재자 박정희의 딸인데 그런 자가 민주화된 한국의 대통령이 될 수가 있느냐는 여론몰이를 위한 事前(전)布石(사전포석)인 면이 없지 않다.

둘째, 남한의 좌파세력이 대적하여 싸우는 대상이 한국사회의 기득권자들이며 보수세력들이다. 이들의 대부분은 일제치하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하기 보다는 적극적 또는 소극정인 扶日協力(부일협력)을 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 세력을 모두 친일파로 몰아서 정치적으로 무력화함으로써 좌파세력의 장기집권을 가능케 할 목적으로 이런 법안을 국회에 상정한 것이니 기필코 가결 통과시키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左派기회주의의 사고방법과 주장]

좌파정권 하에서 요즘 잘 나가는 중견 정치학자인 任赫伯(임혁백) 교수는 11월 22일자 조선일보에 “권위주의의 청산 해법”이란 제하의 時論(시론)을 기고하였다. 그 글의 요지는 軍部(군부)권위주의와 민주화의 관계에서 민주화가 군부권위주의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면 군부는 강제력을 동원하여 판을 쓸어버리려고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청산에 성공한다면 장기적으로 민주주의를 공고화할 수가 있는 것인데 한국은 성공적으로 권위주의의 과거를 청산한 사례이다.

노태우 정권은 구 군부출신이 대통령이 되었으므로 과거청산의 전망이 밝지 못했으나 여소야대의 정국과 시민운동단체의 압력에 의하여 과거청산 작업에 진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두환 前(전)대통령을 백담사로 유배 보낸 것이 그 성과라고 하겠다.

김영삼 정권은 군부정권을 떠받쳐 오던 군 내부의 조직인 하나회를 숙청하였으며 안기부와 보안사령부에 대한 문민통제를 시행하여 또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을 통하여 전두환?노태우 등 前(전)대통령을 형사처벌 할 수가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군사화된 지역에서 군부권위주의 정권의 핵심을 단죄한 것은 세계 민주화의 역사에서도 기록될 업적이었다.

김영삼 정권의 과거청산은 인적 청산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지만, 50년 만의 정권교체를 이룩한 김대중정부는 그 토대 위에 구 권위주의 제도의 청산, 민주적 제도 개혁, 그리고 인권의 향상에 획기적인 진척을 이루어냈다. 현 노무현 정권은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마무리하는 제도개력의 완결판을 제시할 것이다. 앞으로의 과거청산은 부정적 과거유산 청산에 주력하기 보다는 진실규명 후 피해자 보상과 가해자 사면을 통해 용서와 화해, 국민통합을 도모하는 긍정적 과거청산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이러한 해결책이 ‘진실규명과 화해를 위한 기본법안’이라는 열린 우리당의 과거청산 법안 이름에 걸맞는 것이고 한나라당을 과거청산에 등장시킬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매우 현실적이고 온건 원만하다는 인상을 주면서도 과거의 친일협력 행위는 용서받을 수가 없는 반민족행위였으나 그네들이 그들의 잘못을 시인하고 뉘우치며 자숙한다면 굳이 보복이나 처벌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보수세력과 친일파 후손들은 좌경정권의 후의와 온정에 감사하고 새 민주정권에 적극 충성을 하거나 자숙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글이었다고 해석할 수가 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 내지 학자나 언론인들은 물론 공산주의자는 아니고 또 좌파세력의 핵심골수 분자라고 볼 수도 없다. 다만 좌경세력에 잘 보이면서 보수 우익 편의 사람들에게도 밉게 보이지 않으려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이들을 온건한 중도주의자로 볼 것인가 아니면 좌경적인 기회주의적인 입장으로 보아야 할까? 그는 노태우 보다는 김영삼을, 또 김영삼 보다는 김대중을 더 높이 평가하며 노무현에게는 김대중에 못지 않은 치적을 올리도록 훈수 조언하려는 학자처럼 보아진다.


-------[소설가 복거일 씨의 ‘친일파 청산’에 대한 비판의 논리]

셋째는 그 반대의 입장에 서는 지식인의 논거를 정리해 보겠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좌파세력이 일제청산이나 친일파 숙청문제가 나오면 그에 동조 찬성하거나 아니면 이상스러울만큼 입을 다무는 경향을 보여 주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그런데 유달리 적극적인 발언으로서 이의를 제기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소설가 卜鉅一(복거일)씨이다. 이런 문제에 所信있고 용감한 발언을 하는 사람은 복씨 이외에 이문열씨 정도이다.

특히 복거일 씨는 다른 신문에도 기고했지만 <月刊朝鮮(월간조선)> 2004년 10월호에 장문의 글을 기고하였는데 그 논리가 매우 精巧(정교)하다. 여기서 그 논리를 상세하게 소개할 수는 없으나 그의 論旨(논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親日(친일)행위들과 친일파를 처벌하자는 주장은 적어도 다음 네 가지 가정 위에 세워진 것인데 그것이 과연 올바른 판단에 의하여 세워진 仮定(가정)일 수가 있느냐? ① 친일행위들이 뚜렷이 정의될 수가 있느냐? ② 친일 행위들을 한 사람들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가 있는가? ③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이 친일행위들과 친일파들에 대하여 그 죄과를 묻고 판결을 내릴 만한 도덕적인 권위를 지녔다고 보는가? ④ 그런 판결은 우리 사회의 개선과 발전을 위하여 필수적이거나 적어도 도움이 된다고 보는가?

복거일 씨는 이러한 가정에 대하여 조목조목 날카롭게 비판하는데 그 말의 핵심은 일본의 식민통치 시기에 어떤 행위가 친일행위이고 또 무엇이 아니다 라고 판단하기가 어려우며 더구나 단죄한다는 것은 실제로 생각하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주장은 ① 친일파에 대한 단죄가 없어서 민족정기가 서지 않았다. ② 민족정기가 서지 않아서 우리 사회가 혼탁하고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다. ③ 따라서 지금이라도 단죄해야만 민족정기가 바로 서며 우리 사회를 덜 혼탁케 함으로써 훨씬 더 빠르게 발전할 것이다. ④ 親日(친일)행위들과 친일파에 대한 단죄가 우리 사회의 발전에 필수적이냐? 적어도 도움이 된다고 보는 것인가? 아니다. 그 반대일 것이다.

필자도 복씨의 주장에 공감하고 동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첨언하겠다. 친일파를 단죄해서 민족정기가 선 사회는 북한이며 그러지 못하여 혼탁하며 발전하지 못한 사회가 남한이라고 공산주의자나 좌파들은 일상적으로 주장해 왔지만 그렇다면 북한이 결과적으로 남한보다도 훨씬 더 크게 성장 발전했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지 못하고 그 결과가 정반대로 나타났다면 그들 주장이 얼마나 부실하며 잘못된 기본전제 위에 서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친일청산’ 주장은 중대한 역사왜곡이며 억지주장임이 드러났다. 또 그들은 한국사회가 친일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우리 사회는 이미 반세기 전에 공식적으로 다루었으며 또 적절하게 친일문제에 대처하였다고 복씨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1948년에 제정된 헌법 제101조에서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서기 1945년 8월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가 있다”고 규정했다. 이 규정에 따라서 1948년 9월22일 ‘반민족행위법’이 공포되었다.… 이처럼 우리 사회는 이미 정식 재판절차를 통해 한일문제를 다루었다.… 국회는… 반세기 전에 자신이 한 일의 정당성을 부분적으로 부정하는 일이었다고 비판적으로 결론짓고 있다.


-------[親日(친일) 협력행위를 민족반역행위로 단정할 수가 없다는 논거]

넷째, 마지막으로 친일파 논의에 대한 전면부정과 재검토를 요구하는 시각과 입장을 정리해 보겠다. 일제 치하에서 친일 협력행위를 무조건 죄악시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친일행위가 반드시 반민족행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생각은 수많은 상식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 속에 간직되어 있었을 것이나 공개적으로 입밖에 내놓지 못해온 것은 행방후의 한국의 사회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구체적인 實例(실례)를 들어서 검토해 보자. 崔南善(최남선) 李光洙(이광수) 徐廷柱(서정주) 洪蘭坡(홍난파) 崔承喜(최승희) 崔璘(최린) 등의 예를 보아도 그들이 일시적으로 친일행위를 한 것은 사실이라고 하지만 그들을 반민족행위자였다고 볼 수가 있는가? 아니다. 또 金性洙(김성수) 方應模(방응모) 홍종인 毛允淑(모윤숙) 金活蘭(김활란) 손병희 朴正熙(박정희)를 비롯한 日軍(일군) 출신 국군장교들 등을 반민족행위자로 몰아붙이는 것이 사회정의에 부합되는 주장일까?

많은 사람들은 마음 속에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공개적으로 발언하지 못해온 이유는 아마도 惡意(악의)와 憎惡(증오)로 가득찬 공산주의자들과 그 추종자들의 직접적인 공격에 자기자신을 노출하기 싫어하는 심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동아일보가 김성수를, 조선일보가 방응모를 부일협력으로 반민족행위를 했다는 좌파세력의 공격으로부터 변호하려고는 힘썼으나 명확한 설득력 있는 논리를 제시하지 못해온 것도 終戰(종전)후 한국의 反日的(반일적)인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이었으리라.

크게 보아서 친일파라고 지목되는 사람들 중에는 다음 세 가지 부류가 있었던 것 같다. 첫째 부류는 한민족을 위하여 무엇인가 뜻있는 좋은 일을 하려다 보니 최소한 일본총독부의 정책에 부응하고 협력하는 척이라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신문 잡지를 발행하려다 보니 더러는 일본 정책에 유리한 보도나 논평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학교를 세우고 유지하자니 일본어로 교육해야 했고 또 조선어를 사용하는 학생을 힐책 어야 했을 것이다.

둘째 부류는 일본이 쉽게 망할 것 같지 않았으니 한국인의 대우 개선과 정치적 참여 또는 자치의 권리라도 얻기 위하여 일본 총독부의 정책에 순응하고 협력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일본이 원자탄을 얻어맞아 또 떨어뜨리겠다는 협박에 굴복하여 연합국에 無條件(무조건)降伏(항복)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어떻게 예측하였던가? 그런 정세를 예측할 수가 있었던들 그처럼 적극적으로 일본의 식민지정책에 협조하였겠는가?

사람은 神이 아니므로 수시로 변하는 정세에서 상황판단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가 없다. 정세 판단착오는 행동이나 대책선택에 대한 판단착오로 나타나서 잘 하려는 의도가 도리어 매우 바람직스럽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때마다 그 정세 판단을 잘못한 결정권자를 응징하며 처벌해야 하는 것이 정의로운 일이냐 하는데 있다. 이런 상황에서 드러난 친일행위를 반민족행위로 몰아서 규탄하고 응징하려는 법안을 공정하며 적절한 입법이라고 볼 수가 있겠느냐?

이런 상황을 비근한 예를 들어서 설명해 보자. 어느 家長(가장)이 식솔을 거느리고 피난 가던 길에 육로를 피해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배가 파손되어 모두 강물에 빠지게 되니 일부는 죽고 나머지는 九死一生(구사일생)으로 구제되었다고 하자. 그 家長(가장)은 이런 과실로 인하여 살인죄 내지 살인미수죄로 형사처벌하자는 주장을 옳다고 보는가? 아니면 가장의 마음이 더 괴로울 것이니 不問(불문)에 부치자고 할 것인가? 기필코 형사고발해야만 한다는 것이 과격좌파이고, 재조사하여 진상규명이라도 하자는 것이 온건좌파이며, 그런 것은 오래 전의 일이니 不問(불문)에 부쳐야 한다는 것이 보수측의 주장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인도의 간디와 네루도 장차 독립을 얻을 목적으로 인도청년들을 제1차대전과 제2차 대전에 참전케 했다. 그렇다고 인도인들은 그들을 민족반역자로 몰아세우지 않았다. 이와 같이 친일파라는 사람들이 한국국민들의 복지나 지위향상을 위해서 扶日協力했다면 그들을 친일파 민족반역자로 몰아세움은 부당하다. 물론 개중에는 한국인 전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사리사욕이나 일신의 豪强(강호)과 榮達(영들)을 위해서 한 사람도 있을 것이니 이들에게는 반민족행위자로 지목하여 응징을 해도 반대할 이유가 없다.

이와 같이 親日行爲者(친일행위자)들을 무조건적으로 모조리 反民族行爲者(반민족행위자)로 몰아붙이려는 좌파의 논리는 당시의 역사적 시대적 국제정치적인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편파적인 역사인식이다. 이런 억지 주장은 그들 특유의 정치적인 邪心에서 나온 것이므로 경계해야만 할 일일 것이다.


-------[日韓合邦(일한합방)의 국제정치학적인 분석]

대한제국의 멸망과 한일합방이 한국민에게 不幸(불행)한 일이었다고 할지라도 이것을 오로지 편협한 민족감정으로만 인식하고 대응하려는 것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대한제국이 왜 일본에 의하여 합병되는 受侮(수모)와 悲運(비운)을 맞이했는지, 그 당시에 대한제국은 어떠한 상황에 놓여지고 또 국가지도자들에게 어떠한 선택의 여지가 남겨져 있었는지 우리는 당시의 역사적 진실을 정확하게 알지 않고서는 올바로 판단할 수가 없을 것이다. 아울러 그러한 상황판단에 기초하여 일한합방으로 귀착된 원인을 규명하고 그것이 한민족에게 잘된 선택인지 아닌지 검토하고 평가해야 할 일이다.

사실상 이 세상에는 좋기만 한 일도 나쁘기 만 한 일도 없는 법이다. 불행 중에 행복이 있고 또 행운 속에 불운이 따라 오기가 쉬운 것인데 한국의 國權喪失(국권상실)로 인한 日韓合邦(일한합방)은 민족적인 불행이기는 했으나 그것이 불행 중의 多幸이었는지 不幸이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게 접근해야 할 이유는 한국이 국권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는 한국이 일본과 러시아 중의 어느 한 나라에 合倂(합병)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당시의 국제정세와 열국과의 관계를 잘 알게 되면 한국이 당시에 러시아에게 점거 倂呑(병탄)되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만일 러시아에 合邦 병탄되었더라면 어떠한 결과가 생기며 어떻게 되었겠는가를 생각해 보라. 그러면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하여 한국은 공산화를 면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스탈린이 집권하자 그는 1930년대에 그랬듯이 대규모의 民族移住政策(민족이주정책)을 강행하여 한국민들을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 奧地(오지)로 移住시켜서 마구 분산 수용하였을 것 같다.

그에 앞서서 스탈린은 러시아에서 농업집단화 정책을 강행하였는데 수천만명의 러시아농민을 학살하였다. 이런 통치행태로 보아서는 한국민의 저항을 짓밟아버리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어떠면 일천만명? 이상)이 학살하였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때 시베리아, 연해주, 사할린의 한인들을 시베리아 각지로 移住(이주) 시켰다면 한국인들은 오늘 시베리아의 高麗族(고려족들처럼 실향민) 신세가 되었을 것이 아닌지?

일본은 3.1운동때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 수는 천만이 아니라 천명을 크게 넘지 않았을 것 같다. 다만 경찰이나 헌병에 의하여 체포되어서 獄苦(옥고)를 치른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만 그렇게라도 더 많이 죽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알아야 한다. 또 한국농민을 만주의 간도로 이주를 권장하였다고 하나 소련과 같은 강제성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로 보아서 한반도가 러시아에 의하여 점거되지 않고 일본에게 합방되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던가? 오히려 근대화가 촉진됨으로써 잃은 것에 못지않게 얻은 것이 더 많았음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필자가 또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은 것이 不幸중 多幸이었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한일 양국의 인종적 또 문화적인 뿌리가 같았음으로 인하여 한국의 민족문화가 일제식민통치의 기간을 통해서 더욱 성장 발전 강화되었을망정 소실되거나 약화된 것이 없었다. 한국의 역사나 語文學 등 韓國學(한국학) 연구의 기초를 세워준 것이 오히려 일본인 학자들과 그의 한국인 제자들이 아니었던가? 이런 말에 또 흥분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사실은 사실로 받아들이는 객관성을 중시함이 학문하는 올바른 자세일 것이다.

물론 일제가 학교에서 한글교육을 폐지하며 朝鮮語(조선어)의 연구와 사용을 금지하였다고 하나 그것은 1937년부터이며 1945년에 태평양전쟁이 끝났으므로 한국어문학에 큰 손실을 입은 바가 없었다. 만일 한반도가 일본이 아니라 러시아나 英美(영국과 미국)등 서방국가에 의하여 식민지 지배를 받았더라면 그 문화적이 뿌리가 너무 다름으로 인하여 민족문화의 성장이나 심화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하였을 것 같다.

이 뿐 만이 아니다. 한국인들은 영어의 sibling rivalry(어린 자매들 간의 경쟁의식)이라는 말이 있듯이 일본인에 대하여는 무조건 지지 않으려는 경쟁의식을 갖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한국인들의 성장 발전의 의욕을 크게 자극하여 한국인의 문명화에 크게 이바지 하였으며 결과적으로 한국이라는 나라의 빠른 성장과 발전을 촉진하는 자극제 역할을 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위와 같은 점을 감안할 때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는 오히려 천만 다행이며 저주할 일이기 보다는 도리어 축복이며 일본인들에게 고마워해야할 사유는 될지언정 日政 35년 동안 일본에게 저항하지 않고 협력하는 등 친일행위를 한 것 때문에 나무라고 규탄하거나 죄인취급을 해야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과거사의 진상규명 노력도 이런 거시적이며 객관적인 차원에서 또 보다 밝은 미래를 위하여 긍정적인 시각에서 진상을 규명하려고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다.


-------[좌경사상이 국민의 低質心理(저질심리)를 자극한다]

공산주의나 그 아류 좌경사상은 현실부정, 증오와 원한에 뿌리박은 사상이므로 그런 역사왜곡이 사람의 마음을 일그러뜨리고 低質化(저질화)하기가 쉽다. 그래서 한국의 좌경사상이 한국국민을 오도하고 저질화 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 같다. 필자는 과거사 기본법안에 숨겨진 불순한 정치의도라는 글에서 한국의 친북좌경세력이 국민의 심성을 어떻게 오도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잘난 국민과 못난 국민이란 글을 통하여 그 차이를 대조시키며 다음과 같이 간접적으로 고찰하였다. 그 부분은 인쇄에서 누락되어 외부에 발표가 되지 않았으므로 여기에 인용하고자 한다.

잘난 국민과 못난 국민의 행태를 비교해 볼 때 다음과 같은 차이가 드러난다.

---(1) 잘 난 사람은 잘못됨의 책임을 남들에게 전가하지 않는다.

잘 난 사람은 무슨 일이 잘 못되면 그 주요원인을 자신에서 찾고 반성함으로써 재발을 방지한다. 그러나 못난 사람은 그 원인과 책임을 자신이 아닌 남들에게 돌리며 그 책임을 전가하려고 애를 쓴다. 엄격하게 따져서 그 원인이나 책임의 소재가 남이 10분의 9이며 자신이 10분의 1이라고 할지라도 잘난 국민은 자기의 부족이나 과오를 훨씬 더 심각하게 다루면서 그 원인 제거에 주력한다. 공산주의자나 좌파사람들의 특징은 상습적으로 책임을 남들과 제도에 전가하는 특성을 보여준다.

반대로 못 난 사람은 자신의 책임이 97%였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부족이나 과오는 감추거나 제켜두고 남의 책임을 끈덕지게 추궁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상대방의 약점이나 단점을 최대한으로 부풀리며 과대 홍보 선전함으로써 그 원수 갚기나 보상청구에 주력을 하게 된다. 좌경사상이 인간 불행과 고통의 원인을 통치층이나 사회제도와 같은 외부로 돌리는 이데올로기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한일관계에 대해서 말해 보자. 한국 사람들 중에는 한국인들이 겪는 모든 불행이 일본인들의 침략과 간악한 식민통치에 기인한다고 보는 사람들이 좌파 측에만 있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일본을 증오하고 경계하는 사람들 중에는 좌파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보수파들은 한일관계의 나쁜 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좋은 면, 쌍방에 은혜적인 측면이 있음을 인정하므로 상대적으로 일본에 대하여 덜 적대적이며 친일적인 태도를 보일 때가 더 많다.

그러나 좌경세력은 은혜적인 측면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며 해악적인 측면이나 원한관계만 들추어낸다. 조선조가 멸망한 것은 일본의 침략주의로 기인한 것이며 한국의 지배계층이 그들을 방조해 왔다. 한국인의 모든 불행은 일본의 침략에 기인하므로 일본이 모든 책임을 져야한다. 일본이 주었다는 은혜적인 면은 친일협력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었다.

한일관계를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말한다. 이것은 한국인들 중에 모든 불행의 원인을 자신한테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 갔다 붙이는 경향 때문에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을 마음 속으로는 경멸하면서 한국인들을 敬之遠之(경지원지)하여 왔다. 이것도 한국인 측의 못난 mentality로 인하여 생겨난 현상이라 하겠다.

잘난 사람은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과거에 집착하지 않는다. 오로지 오늘 해야 할 일, 풀어야 할 숙제 그리고 미래의 일을 생각하며 준비하는데 全力投球(전력투구) 한다. 반대로 못 난 사람은 과거지사에 대한 미련이나 怨恨(원한) 때문에 그런 과거지사를 처리하는데 시간과 정력을 소모한다. 그 때문에 오늘의 문제를 등한시하거나 소홀하게 하기 때문에 한국은 아직도 완전한 자립 자주국가가 되지 못한다고 말할 수가 있다. 노무현 정권이 현재 추진하려는 과거사 진상규명의 법안들이 하나 같이 과거지사에 대한 집착과 집념에서 나온 좌경세력의 정략적인 산물이다.

과거에 대한 집착은 개인이나 나라의 미래문제에 충분한 대비를 못하게 함으로 나라의 중요문제를 그르치게 된다. 그래서 결국 또 남의 나라의 원조나 보호에 의존하는 신세가 되기가 십상이다. 그러면서 어떻게 自主獨立國家(자주독립국가) 구실을 하겠다는 것인가? 현재 노무현 정권 아래서 진행되는 과거사 진상조사 위원회의 활동이나 친일행동 조사위원회가 바로 그의 두드러진 사례이다.

---(2) 어질고 고상한 사람들이나 ‘잘난 국민’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과거지사에 너무 집착하지 않는다.

과거지사를 골몰하여 세상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알지도 못하는 한국국민은 이미 오랜 시일이 흘러가버린 일제시대나 해방 후의 이념대립 문제를 가지고 얼마나 더 우려먹을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과거지사에 신경을 집중하노라고 오늘의 상황이 어떻게 변하는지 모르며 한시 바삐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조차도 모르는 막가는 나라의 民草(민초)들 임을 보여준다.

DJ정권 때부터 민주화투쟁 피해자 보상법인가 하는 이름으로 대구폭동사건이나, 여수순천 반란사건을 비롯하여 심지어 한국전쟁 중이나 그 이전 좌우대립 시기에 억울하게 죽은 피해자들을 명예보상하고 보상해주는 법안을 준비하며 추진해 왔다. 그 당시는 막강한 야당이 동의해주지 않아서 입법화되지 못했지만 이제 노무현 정권하에 와 있으니 다른 이름으로 국회에 상정되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과거지사에 억매일수록 오늘의 문제가 소홀해지고 나라의 내일 전망이 흐려져 버린다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니 이래가지고는 나라가 어떻게 전진 발전을 계속할 수가 잇겠는가?

---(3) ‘못난 국민성’이 과거사 왜곡뿐만 아니라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부추겨 왔다.

잘난 국민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두드러진 개방성과 포용력 그리고 세계성에 있다. 이 말은 한국국민이 타 국민에 대하여 폐쇄적이고 악의적이며 좁은 민족주의 감정에 사로잡힐수록 못난 국민, 저질 사악한 국민이 된다는 뜻이다. 한국 사람들 중에 중국에서 온 조선족을 무시해 대하고 일본인들에게 적대적이며 미국인들에 대하여 오만 불손하게 대하는 경향도 빗나간 배타적인 민족주의의 소산이다. 이렇게 외국인을 미워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을 일상적으로 보면서 어떻게 ‘위대한 조선민족’을 말할 수가 있겠는가?

김정일은 북한을 통치하면서 조선민족제일주의라는 말을 만들어내어 주민들에게 단단하게 교육해 왔다. 그렇게 한 목적은 김일성 김정일이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정치인이며 세계제일의 지도자라는 뜻을 주민들의 마음 속 깊이 각인시키려고 만들어진 구호였던 것 같다. 그러한 캠페인에 영향을 받았음인지 한국의 젊은 세대 중에는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일본이나 미국에게 실천하려는 행태를 보여 왔다.

밖으로는 미국과 일본을 적대시하는 것이 한민족의 위대함을 표시하는 유일 수단으로 하는 젊은이들이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국민들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외부세계에서는 망해도 한국에서 추진하는 사회주의혁명이 미래세계의 모범이 되고 귀감이 될 것이라는 自負心(자부심)마저 갖는 젊은이들이 있다고 한다. 그들의 착각과 무식한 패기에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나는 이런 증상을 무지하고 ‘못난 국민’의 극치로 보면서 이런 문화가 북한의 주체사상의 영향으로 생겨났음을 개탄하여 마지 않는다. 물론 한국 사람이라고 해서 세계 제일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김일성 김정일을 수령으로 떠받들고 있으므로 가장 위대한 민족이라는 논법은 전혀 타당성이 없다. 그런데도 이러한 정신병 증세가 남북한에 통용된다면 이것은 正常(정상)이 아니라 非正常(비정상)이다.


이런 비이성적이며 배타적인 국민의 민족주의는 어리석은 정부 결정과 불필요한 재정낭비로 나타난다. 그 예를 들자면 한이 없겠으나 몇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서울올림픽으로 외화를 많이 벌어들였던 노태우 정권시절의 이야기이다. 높이 솟은 외국인 아파트가 남산의 경관에 이롭지 못하다고 폭파해 치우면서 국민의 박수갈채를 유도하려고 하였다. 江南(강남) 쪽에서 남산을 바라보는데 외국인 아파트 하나가 돌출하여 남산전체의 경관을 방해한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필자가 보기에는 남산의 경관을 그리 심하게 훼손한 것 같지는 않았다. 또 그 외국인 아파트는 60년대 후반에 지은 매우 견고하게 지어놓은 아파트 건물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문제는 남산의 일부에 돌출해 보인다고 하여 그 외인 아파트가 마치 한국인의 자주성을 손상시키는 느낌을 주었던지 그런 건물을 철거하자는 제언을 받아들인 노태우 대통령의 심리구조이다. 필자는 기왕에 만들어진 것이니 그 건물이 낡아서 수리 보수해야 하는 시기, 약 10년 후에는 다른 곳으로 옮겨 놓아도 좋을 성 싶었다. 그러니 移轉(이전)결정만 해놓고 있다가 차후에 해도 무방한 것이니 노태우 대통령 임기 내에 해치울 필요가 없었던 일이었다.

김영삼의 시대에는 서울 한복판에 있는 구 조선총독부 건물의 폭파제거가 또 사회적인 이슈였다. 그 건물은 일제에 의하여 건축되기는 하였으나 당대의 세계적인 걸작 건축물로 알려진 중요한 문화유산에 속하는 건축물이었다. 또 일본총독부 보다도 더 긴 세월을 한국의 중앙청 건물로 활용되었던 대한민국 건국초기의 역사적인 건물이었다. 더구나 중앙청 건물이 옆에 세워진 다음에는 박물관으로 잘 사용되고 있었던 터였다.

그 건물의 폭파제거를 반대했던 사람들 중의 대부분도 조선총독부 건물의 폭파 제거를 반대해서가 아니라 박물관을 지은 다음에 폭파제거 하자는 이유로 반대하였던 터였다. 그러나 實利(실리)보다는 잘 난체 하고 싶어 하는 허영심과 다수인의 박수를 받고 싶어 하는 정치적인 욕심에 가려져서 그런 實利(실리)는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것 같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한국인들의 저질 행위]

수준 이하의 좌파적인 心性(심성) 중에는 일본사대의 종군위안부의 문제가 있다. 공산주의 세계에서는 性(성)도 혁명의 무기로 활용하라는 말이 있다. 태평양전쟁 중에 한국인 여성이 挺身隊(정신대)로 끌려가서 일본군의 性的(성적)인 위안물로 이용되었다 하여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계속 요구하는 모습은 일본을 나락에 밀어 떨어뜨리려다가 자신들이 먼저 떨어지는 ‘사악함과 어리석음’의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

전쟁 중에 군인들이 여성들을 성적 위안물로 이용하는 것은 일본 만의 일이 아닌 것이다. 일본이 한국여성을 전쟁 중에 그렇게 이용했다는 것도 전쟁 중의 일시적이면서도 예외인 현상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만일 그런 정책의 희생자가 수천, 수만명이 된다면 六何原則(육하원칙)에 따르는 명백한 증거를 찾아내어서 정식으로 거론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리 많았던 수도 아니었는데 그런 봉변을 당했다고 진술하는 몇 명 안 되는 소수의 노파를 끌고 다니면서 과장된 사실을 믿게 해줄 만한 명백한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거듭 배상금을 요구하며, 그나마 이미 받은 것 이외에 더 많은 돈을 요구하면서 몇십 년 동안 물고 늘어져 왔다는 것은 고상한 민족의 행동거지로 볼 수가 없는 것이 아닌지.

그런데 한국의 신문과 방송은 어쩌자고 이런 노파들의 행동이나 반일감정을 자극하는 기사를 만들고 열심이 보도해 대는 것인지. 애초에 性의 문제는 돈으로 환산될 수가 없는 것인데 왜 돈의 문제와 결부시켜서 자기 망신을 계속하는 것인지? 이런 치사하고 못난 짓은 하면서 어떻게 위대한 민족임을 내세울 수 있겠는가?


-------[인도인들의 개방성과 실용주의적인 생활태도]

아시아의 국가들이 대부분 외세의 식민통치를 받았다가 독립하였지만 과거의 종주국가가 세워놓은 관청이나 군 시설 또는 교육시설을 폭파 파괴했다는 예를 나는 듣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독립운동가들을 가두었던 형무소나 고문시설까지도 잘 보존하고 있으니 말이다. 인도의 경우만 보아도 영국인의 식민통치 시대에 지은 도시인 봄베이나 델리 등은 건물뿐만 아니라 거리 이름도 그대로 놓아두고 활용하고 있다. 그러는 한편에 옆에다 새로 도시나 관청을 세워서 뉴 델리시가 만들어지고 新舊(신구)도시가 모두 잘 활용되고 있다.

인도인들은 심지어 천년 이전에 이슬람 군대가 침범하여 파괴한 절터나 중요시설의 파괴현장이나 또 식민통치의 목적으로 만들어 놓은 왕궁 등은 물론 당시의 적대국의 귀족들이 놀던 정원조차도 하나도 파괴 훼손함이 없이 역사유적이나 문화재로서 소중하게 보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는 근래에 와서는 그런 역사 유물로 인하여 막대한 관광수입을 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도 사람들이 한국인들보다도 민족적인 자존심이 없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다. 인도사람들의 마음이 그만큼 크고 넓은데 비하여 한국인들의 소견머리가 너무 짧고 좁아서 그런 것은 아닌지? 어느 쪽이 더 지혜로운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인 것 같다.


-------[맺음 말]

이런 글에도 맺음말이 반드시 필요한 것 같지는 않지만 관례에 따라서 몇 마디나마 짤막하게 첨언해야겠다. 한일관계는 그 국가가 형성되기 이전부터도 발생하고 지속되어 오던 관계였다. 모든 인간관계가 그러하듯이 양국관계 속에는 시혜적 상생적인 요소가 있는가 하면 해악적인 상극관계도 혼재해 왔다고 보아야 한다.

그 중 어느 측면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느냐에 따라서 쌍방간의 관계는 더 좋아지기고 하고 또 더 나빠지기도 한다. 공산주의자들이나 좌파측은 일제청산과 친일파 제거 숙청 등 나쁜 쪽만 주목하면서 그 해악을 과장하려고 드는 성향을 지속해 왔다. 그들의 영향력이 다수 국민 간에 퍼지게 될수록 한일관계는 긴장의 도수가 높아 간다. 현재 추진되는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 법안이 이러한 예에 속한다.

반대로 보수성향의 반공세력 중에는 한일 양국간의 해악적 相剋的(상극적)인 측면보다도 受惠(수혜) 내지 施惠的(시혜적) 相生的(상생적)인 측면을 주목하며 그 쪽을 확대 발전하려고 의도한다. 그러다보니 日政(일정)시대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친일 협력적인 행동을 취했던 결과로 8?15해방 후 친일 반민족분자 내지 민족반역자란 비난과 비판을 들어 온 것이다. 終戰(종전)후 60년이 되어가는 이 시점에서 과거의 친일문제가 다시 붉어져 나온 것은 좌파세력이 그들의 정치권력을 영속화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親日行爲(친일행위)는 산업화 단계 내지 민족주의 시대에는 罪惡視(죄악시)되며 반민족행위로 지목되어 비판 규탄의 표적이었다. 그러나 탈 산업사회(post industrial society) 또는 세계화(globalization)의 시대에 와서는 친일행위가 도리어 애국애족 행위로 인식되고 환영받는 날이 올 것이다. 이런 사회를 맞이하게 되려면 우리는 어떻게 젊은 세대를 좌경화의 추세에서 벗어나게 하는가? 또 반일교육을 받아온 세대도 점진적으로나마 인식의 전환 및 태도변화로 유도하는가하는 문제가 제기되어야 한다. 앞으로 본격적으로 연구되고 노력해야만 할 분야가 아니겠는가? (끝)

출전 : 친일행위가 바로 반민족행위인가? --한일관계의 인식전환을 위하여--





"일제 식민시기 경제성장률 높았다" -낙성경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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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초기에 생산의 75%를 차지하던 농업의 비중은 당시의 농업개발정책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하락해 식민지 말기에 이르러서는 4할 수준에 이르고 대신 광공업과 서비스업의 비중이 크게 높아졌다."
"급속한 인구증가에도 불구하고 실질소비가 연평균 3.8%로 증가했으며, 1인당 실질소비는 연평균 2.3%의 지속적 증가를 보여 식민지기 동안에 약 2배 이상 증가."
"1인당 곡물소비량은 감소했지만 곡물 외 식료품소비가 급증해 전체 식료품 소비도 연평균 3%의 증가를 보였다."
"부문별 추계결과를 종합하여 계산되는 당시의 생산 및 지출은 연평균 4%이상의 성장을 보여, 국제적으로도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식민지기에 인구증가율이 1.6%였음을 감안하면, 1인당 생산이 연평균 2.6%로 성장한 셈."
"2차대전기를 제외한 식민지기에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상당히 높은 수준의 생산증가를 보였으며, 1인당 생산도 증가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결론."
출전 : 일제 식민시기의 생산 및 지출 성장이 국제적으로도 높은 수준이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된다





반일 반공 교육 , 언론 잘못된 보도 국민들의 무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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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승만의 정치적 정당성 확보를 위한 반일 반공 교육
2. 언론의 잘못된 보도와 국민들의 무관심

1. 이승만의 정치적 정당성 확보를 위한 반일 반공 교육
일단 역사이야기를 좀 해야겠네요. 역사적으로 반일감정은 한반도에서 뿌리가 깊다고 알려져 있는데, 실상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임진왜란이 당시에는 백성들이 쪽바리 개새끼 하면서 욕을 많이 했었지만, 동시에 자기들만 살겠다고 백성과 나라를 버리고 도망친 선조와 선비들에 대한 원망이 더 컸습니다. 경복궁에 불을 지를 정도로 이씨조선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했었죠. 그러다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개입하고, 일본을 몰아내게 됩니다. 그 후엔 조선 통신사가 일본에 가고 수백년에 걸쳐 양국의 우호도는 조금씩 올라갑니다.

그러다 일제시대가 터집니다. 현재 우리의 반일감정의 뿌리는 일제시대 말기에 일본이 무리한 전쟁을 추진하며 지나치게 많은 우리나라 국민들을 동원하면서 조금씩 고개를 들게 됩니다. 그 전에 조금만 더 시간을 돌려 조선시대 말기로 가봅시다. 많은 분들이 잘 모르고 계신 일인데, 조선 말기는 정말 헬게이트가 따로 없었습니다. 실제로 남아있는 통계나 기록 등의 객관적 자료를 살펴보면 조선 말기에는 평균수명이 30세를 넘지 못했다고 합니다. 대기근으로 수백만의 백성들이 죽기도 했죠. 대원군 때는 경복궁을 증축한다고 국가재정이 거의 파탄에 갈 정도가 되었으며, 목재 수송 등을 위해 수많은 백성들을 강제노역시켰습니다. 이런 것들이 쌓여 백성들이 못살겠다며 일으킨 동학농민운동을 외세를 끌어들여 진압합니다. 이 과정에서 외국인들의 힘을 빌어 우리 백성들을 학살한 이씨조선 왕족과 민씨일가에 대한 분노도 극단으로 치닫게 됩니다. (국사시간에도 배우지만 초기의 동학농민운동의 성격은 절대로 반외세가 아니었습니다.) 대한 제국이 들어오면서 뭔가 좀 바뀌나 했더니, 전제군주정이 그대로 계승되고 경제개혁들은 모조리 실패로 돌아가며 국민들을 또 비참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위 사진은 전후로 비교한 서울의 일반적인 풍경입니다. 일제가 들어오자 여러가지가 많이 바뀌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교과서엔 안나오지만 평균수명과 인구 모두 두 배 가량 늘어났다는 객관적인 통계가 존재하며 굶어 죽는 사람들의 수가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전엔 여가활동이라곤 알지도 못했던 백성들이 조금만 아끼면 화려한 서양식 건물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되었고, 문학등의 예술도 이때 엄청나게 발달합니다. 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점인데, 일본은 근대적인 법제도를 도입해서 공정한 재판을 우리국민들에게 선보였습니다. 과거 무조건 '주리를 틀어라!' 식의 말도 안되는 전근대적 사법제도와 고문을 전면폐지합니다. 뭐 그래도 고문을 아예 안했다곤 볼 수 없죠. 전두환 시절까지만해도 우리나라도 고문을 했으니까. 무튼 무조건 주리를 틀고 자백을 받아내는 전근대적인 사법제도는 사라지고 돈 없고 힘 없는 국민들도 판사들에 의해 어느정도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녀평등을 확립시키기 위한 제도의 일환으로 여권도 크게 신장되어 여성들이 과거보다 더 인간다운 삶을 살게 됩니다. 미신을 퇴치하기 위한 제도들도 법들도 집행됩니다. 미신하니 떠올라서 덧붙이자면, 일제가 쇠말뚝을 박았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날조라는것은 이미 여러 군데에서 밝혀졌으니 언급하지 않겠습니다.(관심있으시면 여기에서 쇠말뚝 검색해보세요.)초등교육과 대학 등 고등교육도 이때부터 등장합니다. 거의 강제로 일만 할줄 알던 백성들이 예술에 관심을 갖고 아래 사진처럼 휴가를 갖고 놀러다닐 수 있게 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우리나라 자체로 보면 일본이라는 외국에 의한 점령인 민족적 치욕이지만, 정작 백성들의 입장에선 자신들이 더 먹고 살만해지게 되었으니 조금씩 일본에 더 안주하게 됩니다. 조선이나 대한제국의 권력을 빼앗긴 구 기득권층이 주도한 사건들은 몇몇 더 있긴 했습니다만, 35년 동안 "민중"들에 의한 집단, 조직적 대규모 항의는 3.1운동뿐입니다. 조선 말기에는 이런 항의가 계속해서 일어났었죠. 조선이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백성들을 진압한 것과 일제가 경찰력을 동원해서 진압한 것들 중 어느 쪽이 더 낫다고는 섣불리 말하기 어렵겠습니다. 수탈의 증거라고 말하는 산미증식계획도 여러 통계와 기록이 '수탈'이 아닌 정식 '수출'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농민들이 돈을 벌기 위한 일환으로 일본에 수출한 것을 무조건 수탈로 교과서에 기록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왜곡입니다. 정신병환자에게 경을 읽어주며 복숭아 나무로 때리면 치료할 수 있다고 믿는다거나, 폐병에 두개골을 먹으면 낫는다고 믿어 도굴이 횡행하는 등의 얼토당토 않은 미신들로 인한 폐단을 막기 위해 강제로 집행한 법, 지나치게 비싼 가격을 요구하는 무당들의 횡포를 막기 위해서 수수료의 상한을 제한한 법 등을 무작정 민족문화말살이라고 교육하는 것도 왜곡입니다. (위의 예들은 20세기 초에 신문기사로도 기록이 남아있는 것들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믿기 어려우시면 도서관 등에서 직접 당시 자료를 찾아보시고, 귀찮으시면 그냥 그때 살았던 할아버지들에게 물어보세요. 교과서를 보면 노인들에게 일제시대는 지옥이고 일본은 악마들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노인정 같은데 가서 봉사활동하면서 물어보다보면 의외로 일제시대에 대한 감정이 없단 걸 보고 놀라게 되실 겁니다. 강제징용도 오해가 많습니다. 실제 강제징용은 지금 우리나라의 징병제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으며 사병의 대우는 오히려 10만원도 안되는 월급 주면서 사람을 개처럼 부려먹는 지금 한국군보다 상대적으로 낫다고 볼 수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위안부를 소집한 것들도 주로 "조선인" 포주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애초에 위안부를 모은 일본의 개막장짓이 잘했다는건 아니지만, 왜 조선인 포주들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고 일본에만 책임을 묻는 것일까요? 물론 일제시대 끝무렵 (44년~45년) 정도 가면 일본이 여러 방면에서 수탈한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우리나라에만 한것이 아니라 대만을 포함한 모든 식민지, 일본 본토 내까지 전쟁을 위해 총동원을 했죠. 그것과는 별론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처럼 정도를 넘어선 수탈에 대한 문제는 해결을 해야겠지만요.

서론이 길었네요. 이러다 일본이 원폭맞고 미국에게 털립니다. 이승만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확고히 하고자 합니다. 이때 사용한 것이 반일 반공 교육입니다. 근데 이건 이승만 대통령만 탓할 수도 없는게, 원래 정권이 바뀌면 자기 정권이 아닌 전 정권에 대해서는 비난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자신의 정당성이 인정되니까요. 조선이 건국되고 고려를 비판했으며, 지금만 봐도 이명박 대통령은 노무현 전대통령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죠. 또한 이승만은 미국에서 체류한 시간이 무척 길고, 태생부터가 친미파입니다. 미국의 지원을 얻기 위해서는 미국과 전쟁을 벌인 일본을 어떻게든 까내릴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일제시대 말기 무리한 전쟁을 위한 동원들도 이 주장의 근거로 활용었습니다. 무튼 이승만은 이런 일환으로 반민족행위처벌을 위한 특별위원회. 소위 반민특위를 만들어 친일파들을 처벌하겠다고 공표합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그때만해도 너무 많은 국민이 친일파였으니까요[...]만주 등지에서 민족운동을 했던 분들이 괜히 우리나라에서 영향력을 갖지 못했던 것이 아닙니다. 무튼 현실이 이랬기 때문에 반민특위는 결국 상징적인 의미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거의 몇명 처벌되지도 않고 유야무야 반민특위는 해체되어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이때 뿌리내리기 시작된 반공사상과 반일"교육"만은 지금까지도 남아있습니다. 원래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적을 외부에서 찾는 것은 역사를 살펴보면 얼마든지 있어왔던 일입니다. 이번에는 여러 환경이 그 적을 일본으로 만들었죠. 그러다 6.25가 일어나고, 그때 살아왔던 많은 분들이 돌아가시고 맙니다. 일제시대 이야기를 직접 할 사람들이 적어졌고, 많은 시설들도 파괴되어 증거가 사라져서 더욱 이런 주장하기가 쉬워집니다. 그리고 박정희 시절을 거쳐 '한강의 기적'과 '근면하고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만을 강조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다른 민족이자 계속 적으로 교육되어온 일본에 대한 반일도 자리를 잡게 됩니다. 사실 이런면에서 보면 교과서 왜곡은 우리도 만만치 않습니다. 역사적 사실에 가치를 개입해서 "의의"랍시고 우리에게 유리한대로 해석하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왜곡이죠.

유청년 시절의 기억은 일생을 결정합니다. 나이가 어릴때 받아들여진 정보는 뇌 속에 강렬하게 각인되어 이성뿐만 아니라 감성에까지 영향을 줍니다. (질문자께서도 어릴 때의 사건들이 지금보다 훨씬 강하게 남아 계실겁니다.)그런 측면에서 세뇌교육이라는 표현이 극단적이긴 해도 적절한 용어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얼마나 그 세뇌가 쉬운지도, 한번 걸린 세뇌를 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도 심각하게 따져볼 문제입니다. 당장 저만해도 그 "세뇌"에서 풀렸을때 받은 후유증과 충격으로 며칠동안 잠도 제대로 못잤으니까요. 아마 질문자께서도 지금까지의 제 취지에 동감을 하고 계시면 제가 받았던 것과 비슷한 충격을 받으셨을겁니다.

진짜 역사교육은 사건들을 자리 입맛대로 취사선택해서 자민족 중심적인 "의의"나 갖다 붙히는 것이 아니라, 서양처럼 역사교과서에 과거에 있었던 사실과 팩트, 사료 중심으로 서술하고 그것을 판단하는 이성적인 자세를 학생들에게 기르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 언론의 잘못된 보도와 국민들의 무관심
이번같은 가면 사건은 과거에도 한두번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기자들은 우리나라에서 '반일'이 얼마나 잘 먹히는 소재인지를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무조건 일본을 나쁘게 보도합니다. 일본을 무조건 악마처럼 알리는 것이 이들의 지상최고의 과제이자 사명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그 이유는 그래야 사람들이 더 클릭하고 그게 더 잘 팔리는 거니까요. 일본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 사는 동네입니다. 착한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들도 있어요. 하지만 착한 일본인들에 대한 얘기는 보도하지 않거나, 그 수와 비중을 무척 낮게 취급해서 보도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기사는 내봤자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지도 않고 클릭도 잘 안하거든요. 방금 본 가면 사건도 보세요. 저 가면 진실이 알려지고 일본사람들도 다 어떻게 돌아갔는지 알게 되었나봅니다. 그러자 나온 기사 제목이 "김연아 악마가면? 일 언론 네티즌 한국 한심해!" 입니다.

어떻게든 일본이 우리를 비난하는 것처럼 묘사하고 싶어 안달이 났습니다. 가면 진실을 모르고 일본을 욕한 우리 잘못이 확실한데, 그렇게 기사를 쓰지 않고 일본 네티즌과 언론이 우리를 비난하고 있다는 취지로 사실을 왜곡해서 전달하고 있습니다. 왜곡해서 전달하면 그나마 다행이지 제대로 사실전달도 안해주는게 문제입니다.

소녀시대나 카라 등 한류스타들이 일본에서 활약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자랑스러워 합니다. 실제로 외국 사이트에서 보면 일본에서 이들의 인기는 대단하고 일본사람들도 무척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한국의 DC인사이드처럼 익명 뒤에 숨어 악담만 하는 비슷한 일본 2ch 네티즌들의 글들을 근거로 "일본 소녀시대 비하." 이런 식의 기사나 써내고 있습니다. 멋도 모르고 우리 국민들은 또 "아니 우리 소녀시대를!" 이러면서 분노하고 있구요. 아니 우리나라에는 소녀시대 비하하는 사람 없답니까?

일본이 과거에 우리에게 수십번 사죄를 하고 엄청난 액수를 여러 번 배상했다는 사실도 우리 국민들은 거의 모릅니다. 왜냐하면 언론이 이를 제대로 보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랬다가는 '반일'이라는 아주 훌륭한 떡밥 하나를 손에서 놓쳐버리기 때문이죠. 언론에서 제대로 보도를 안하니 우리나라 인터넷 포탈에 검색해도 제대로 된 정보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결국 외국 사이트나 도서관의 서적 등을 통해 자료를 모아야 하는데, 대부분의 국민들은 외국어를 모르거나 이런 사실에 도서관까지 갈 정도로 관심이 없습니다. 가령 원칙적으로 위안부 문제 역시 일본에게 배상을 주장하기 전에 배상금을 받아낸 우리 정부가 먼저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돈을 준 다음에 일본에게 추가배상을 논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언론은 이런 말은 절대로 전하지 않죠. 우리 정부의 책임을 먼저 주장했다가는 '반일'떡밥을 잃어버리니까요.

이것은 우리 국민들의 무관심 또한 크게 기여합니다. 인터넷 돌아다니다보면 저처럼 통계나 사진, 자료 중심으로 왜곡된 사실을 알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물론 친일파란 오명을 듣고싶지 않아서 그런지 모르지만, 제대로 된 카페나 커뮤니티는 없고 그저 저같은 개인이 각자 조사한 정보만 여기저기에 올릴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 국민들은 이런 얘기를 듣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배운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도 않을 뿐더러, 관심도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TV에서 이영훈 교수가 제가 주장한 부분의 여러가지 내용들을 거론하며 수많은 통계자료와 근거를 가지고 우리 역사교과서가 잘못되었다는 말을 한 적 있습니다. 거의 사회적으로 매장됐죠. 반론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한심합니다. 무조건 욕부터 한다든가, 논거와는 다른 전혀 쌩뚱맞은 독도문제나 들고 와서 헛소리한다든가, 정상적이고 발전적인 토론과는 전혀 관계없는 짓들만 하고 있습니다.

진짜 애국자고 진짜 관심이 있다면 적어도 여러 우리나라의 자료뿐만 아니라 서양과 일본의 자료도 살펴보고 해석할 줄 아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하지만 달리는 것은 악플 뿐입니다. 저도 제 생각이 백퍼센트 옳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자료해석에 있어 잘못된 점도 있을수 있고, 틀린 근거가 있을지도 몰라요. 그러면 그 부분을 지적해주면서 건설적으로 토론을 하고 싶은데 무조건 욕만 합니다. 아마 여기에도 이 답변 올리면 욕이 주렁주렁 달리겠죠.

이런 반일감정이 너무 강해지다보니 정치인들도 사실을 알면서 목소리를 못냅니다. 정치인들은 표가 생명이기 때문에 사실을 말했다 까딱하면 친일파로 몰려 절대 재선되지 못하게 됩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 초기 소위 친일적 행각 벌였다 국민들에게 욕 먹는거 보세요. 인터넷 검색해보시면 알겠지만 별로 친일적인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이명박 대통령 일본 총리에게 과거사 사과와 사과 차원의 문화재까지 받아냈습니다. 그런데도 무조건 친일파라고 하는 것 보세요. 이명박 대통령이 좋은 대통령인지 아닌진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런 근거로 친일파라고 하는건 말도 안됩니다.

우리 국민들도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방금 돌아다녀보니 저 가면 가짜라는거 다 드러났는데도 그래도 일본은 나빴음. 이나 화산 터졌네 이게 다 너네가 응원 잘못한 죄임. 이런 말들 하고 있습니다. 이게 어디 제대로 된 생각입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부분은 일본의 좋은 점은 절대로 보지 않습니다. 그저 일본이기 때문에, 욕할 대상이 필요하기 때문에 욕하는거죠. 기자들도 이걸 잘 알고 그걸 노리는거구요. 일본만 들어가면 사람들이 무조건 누르고 무조건 욕하면서도 관심보여줄거라는걸 알기 때문에 절대로 반일을 놓치 않습니다.

원래 이렇게 길게 쓸 생각 없었는데 쓰다보니 되게 길어졌네요. 일본도 우리나라와 똑같은, 결국 인간들이 사는 나라에 불과합니다. 질문 내용 중에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표현을 쓰셨는데, 역사 앞에서 그런 태도를 취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일본을 욕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세요. 일본인이라고 무조건 편견을 갖고 보거나, 우리나라라고 무조건 감싸고 보는 태도는 고쳐야 합니다. 원래 세상 일이라는 것이 이론처럼 딱 나눠서 선과 악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어떤 현상이 지나치게 극단적이라면 거기에는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민족주의처럼 한면만 바라보기 쉬운 현상에는 말이죠.

제가 진정 말씀드리고 싶은 건 객관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과 자료를 보고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시라는 겁니다. 증거와 근거를 내세우는 주장과, 제대로 된 증거도 없이 거짓 애국심에만 호소해서 무조건 비난만 하는 주장. 어떤 것을 더 믿어야 할까요?
출전 : 일본 개새끼





금성출판사 발간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문제점 시정 민원제기
Category : 【 전재 기사 】 Tag : 교과서문제
금성출판사 발간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한국근현대사> 문제점 시정 민원제기

저희 교과서포럼은 2005년 1월 창립된 이래 현행 고등학교용 역사교과서 《한국 근ㆍ현대사》와 관련, 후세대들이 배우기에는 부적절한 내용이 들어있는 등,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일관되게 지적해 왔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우리나라 고등학교 가운데 가장 많은 학교가 채택하고 있는 ‘금성출판사’의 《고등학교 한국근ㆍ현대사》의 경우, 최근 2008년판의 내용을 보면, 일부분을 수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편향’과 ‘왜곡’이 심각하다고 사료됩니다.

그 대표적 사례로 ‘금성출판사’의 《고등학교 한국근ㆍ현대사》는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는데 매우 인색합니다. 이에 비하면 북한 현대사에 대해서는 중립적이거나 관대하게 서술하면서, 북한 공산주의 체제의 반인권적 성격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밖에도 31개 항목에서 심각한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자세한 내용과 지적은 첨부하는 자료 속에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이 판단력이 부족한 학생들에게 그대로 가르쳐질 때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왜곡된 사실과 잘못된 역사관을 배우고 성장한 학생들이 어떻게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나갈 수 있겠습니까. 또한 대한민국의 올바른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저희 교과서포럼은 귀 당국에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금성출판사’ 발간 《한국근ㆍ현대사》교과서의 문제점에 대하여 <교과서포럼>의 문제제기가 정당한 것으로 판단될 경우에는 지체 없이 필요한 시정조치를 강구해 주시기 바랍니다.

교과서포럼
- 공동대표 :
  박효종 교수 (서울대)
  이영훈 교수 (서울대)
  차상철 교수 (충남대)

- 운영위원 :
  김세중 교수 (연세대)
  김종석 교수 (홍익대)
  김영환 편집위원 (시대정신)
  김재호 교수 (전남대)
  전상인 교수 (서울대)
  김일영 교수 (성균관대)
  김광동 원장 (나라정책원)
  주익종 연구위원 (낙성대경제연구소)
  김영호 교수 (성신여대)
  김용직 교수 (성신여대)
  정성화 교수 (명지대)
  강규형 교수 (명지대)
  이명희 교수 (공주대)

출전 : 금성출판사 발간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한국근현대사> 문제점 시정 민원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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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0

친일파 된 여성 교육선각자들



친일파 된 여성 교육선각자들



친일파 된 여성 교육선각자들
<자료입수> 김활란 등 선각 여성 5인의 친일행적
조병래 기자, 임경구 기자, 전홍기혜 기자
2002.03.08 16:23:00

친일파 된 여성 교육선각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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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은 세계여성의 날인 8일을 맞아 우리나라 근대 여성운동 및 교육의 선구자로 얘기되는 여성 5명의 친일 행적을 공개한다.

지난달 28일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회장 김희선 의원)이 발표한 '친일파 708명' 명단에 포함된 이들 여성계 인사의 친일 행적도 민감한 내용이다.

이들 여성들은 교육과 여성운동의 선각자로 평가받아 왔으며 이들의 행적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이들이 설립한 학교와 여성지원단체가 활동 중이다.

방응모ㆍ김성수가 친일파에 포함되자 이들이 설립한 조선ㆍ동아일보가 논쟁을 야기했듯이 여성계 일부에서도 이들이 친일파 명단에 포함된 데 대해 크게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우리나라 여성운동 및 근대교육에 기여한 공로가 많다고 해서 이들의 친일 행적이 덮어지는 것은 아니다.

프레시안은 독자들의 판단을 돕기 위해 국회의원 모임이 작성한 여성계 '친일파' 인사의 친일행적을 언론계에 이어 두 번째로 전재한다. 편집자 주

김활란(金活蘭)의 주요 경역 및 친일경력

-1899년 인천생
-1918년 이화학당 대학과 졸업
-1923년 김필례(金弼禮), 유각경(兪珏卿) 등과 함께 YMCA를 창립
-1924년 미국 오하이오 웨슬레안 대학에서 교육, 철학 등을 전공하고 졸업
-1924년 9월 보스턴 대학원에 입학하여 문학석사 학위 받음
-1925년 6월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및 학감에 취임
-1927년 민족, 사회 양진영이 손잡은 근우회(勤友會)의 창립 때 기독교 대표로서 발기총회 준비위원, 창립총회 임시의장, 초대 임시의장, 초대 중앙집행위원을 맡음
-1928년 7월 근우회 2차 중앙집행위원회 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임의로 활동을 중단
-1930년 도미하여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 받음

-1937년 조선부인문제연구회 상무이사
-1937년 작위를 받은 귀족부인들이 일본의 침략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금비녀를 뽑아 바치자고 조직한 '애국금채회(愛國金釵會)'의 간사
-1938년 6월 8일 조선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에서는 위원회를 개최하고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세계기청으로부터 퇴맹키로 결의하는 동시, 내선일체란 단일국민의 이념 하에 일본기청에 가맹키로 하였는데, 이때 경성실행위원이다.(매일신보 1938. 6. 9)
-1938년 6월 20일 이화여전과 이화보육의 4백명 처녀들로 '총후보국을 내조한다'는 애국자녀단을 조직
-1939년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이화보육학교의 교장으로 취임
-1940년 10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1940년 10월 16일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발기인, 이사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1941년 9월 16일에 전조선에 6개반을 동원, 10월 30일부터 1주일간 39개소에서 '부인생활정의'라는 연재로 강연반을 편성하였을 때 제5반으로 평양, 진남포, 안주, 신의주, 선천, 정주에서 강연활동
-1941년 10월 22일 현재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1941년 11월 15일 창립된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1941년 12월 2일을 기하여 저명한 부인강사를 각지에 파견하여 전국인식과 징병, 징용제의 취지를 철저히 하는 순회강연을 하기로 하였는데 김활란은 충청북도에 파견되었다.
-1941년 12월 27일 오후 2시 부민관 대강당에서 조선임전보국단 결전 부인대회를 결성하고 오후 6시 '여성의 무장'이라는 연제로 강연
-1942년 2월 15일 부민회관에서 열린 영(英) 동양침략의 아성 싱가폴 공략 대강연회에서 '대동아 건설과 우리의 준비'라는 연제로 강연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1946년 9월 파리에서 열린 국제연합총회 한국대표
-1956년 11월, 1957년 10월, 1958년 10월, 1959년 9월, 1965년 12월 등 다섯 차례에 걸쳐 국제연합총회 한국대표로 참석
-1961년 9월 이화여자대학교를 정년퇴직하고 명예총장 겸 재단 이사장으로 봉직
-1962년 11월, 1964년 11월, 1966년 11월의 제12~14차 유네스코 총회의 한국 수석대표 및 대표로 참석
-1963년 교육부문 대한민국장 수상
-1965~1970년 사망 시까지 대한민국 순회대사로 임명되어 활동함
-1970년 사망 후 대한민국 일등수교훈장이 추서됨

김활란의 친일행적

<<친일의 길 걸은 여성 지도자의 대명사>>

<교육, 기독교계 여성 지도자의 대명사>

- 김활란은 한국 근대여성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박사 1호이며 일제 하에서 전문학교의 유일한 여성교장 그리고 YWCA 창립자' 등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교육,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혀 왔다.

그리고 8.15 해방 이후에는 이화여대 총장직과 여러 학교의 이사장직을 맡았으며, 사회단체로는 YWCA, 한국여성단체협의회, 대한부인회, 주부클럽연합회 등 여성단체를 설립하고 회장 등의 임직원을 역임하였고 정부수립 직후에는 유엔총회 한국대표, 공보처장, 대한민국 순회대사, 한국아시아반공연맹 이사 등 정치, 외교활동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의 공로로 교육부문 대한민국장, 대한민국일등수교훈장, 필리핀으로부터 막사이사이 공익부문상, 미국으로부터 종교지도자에게 주는 다락방상을 받았다.

그러나 교육, 여성계에서 그가 누렸던 명성과 지위만큼이나 일제말기에는 당시 활동한 어느 여성보다도 자주 친일단체에 이름을 내놓았고, 많은 친일 논설을 발표했으며,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부응하는 행동을 취했다.

<민족주의자 이화학당 교사 김활란>

- 그가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하고 이화학당 교사로 있을 때 3.1 운동이 일어났다. 그 당시 그는 지하독립운동 조직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의 자서전 '그 빛 속의 작은 생명'을 보면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는 참으로 중대한 일을 맡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것은 발각되기만 하면 가차 없이 중한 형벌과 희생을 부를 만한 일이었던 것이다. 나는 비밀독립운동단체에서 일부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것은 학교와 교회여성단체로부터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단체로 보내는 독립운동자금을 중앙본부에 전하는 일이었다. 나는 엄중한 지령 하에 움직였다.'

이 일로 하여 1년 남짓 도피생활을 하고 그는 다시 이화학당 교사직을 맡았으며 1920년에는 이화학당 학생들로 조직된 전도대를 이끌고 평양, 신의주 등 북부지방 선교에 나서기도 하였다.

1922년 5월경 김활란은 유각경, 김필례와 함께 YWCA를 창립하고, 7월말 미국 유학의 길에 올랐다. 유학 중에는 YWCA 관련 국제회의에 몇 번 참석한 것 외에는 조국독립을 위해 일하자는 현지 독립운동단체들의 요청을 모두 거절했다.

- 1926년 말부터 민족, 사회 양 여성운동 진영간 통일전선 결성 움직임이 활발했다. 미국에서 귀국한 뒤, 기독교계 핵심인물로 떠오른 김활란도 이러한 움직임을 멀리 할 수 없었다.

1927년 5월 27일 마침내 민족, 사회 양진영이 손잡은 근우회(勤友會)가 탄생했다. 근우회 창립 초, 김활란은 기독교계 대표로서 발기총회 준비위원, 창립총회 임시의장, 초대 중앙집행위원을 맡으며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이후 근우회는 1928년 7월의 제2차 중앙집행위원회는 사회주의 세력이 대거 진출했다.
김활란은 2차 중앙집행위원회 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그 직후 임의로 활동을 중단해버렸다. 그는 자신이 주력할 곳은 근우회가 아니라 학교, 교회, YWCA 등 기독교계라고 생각한 것 같다.

<반민족행위의 시점>

- 김활란의 친일행위는 1937년 이화여전 부교장 시절부터 시작된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식민지 조선을 전쟁기지로 만드는 시점이다. 김활란은 애국금채회(愛國金釵會)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일제의 침략전쟁에 금비녀를 뽑아 바치는 이 단체에 가담한 것은 명백한 반민족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이후 그의 이름은 조선부인연구회,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조선교화단체연합회,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조선언론보국회 등 일제가 만든 온갖 단체의 간부직에 가장 자주 오르내렸다.

그런 가운데 1938년 6월 20일 이화여전과 이화보육의 4백명 처녀들로 '총후보국을 내조'한다는 애국자녀단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부인총궐기촉구강연회, 시국부인강연회, 학병권유계몽독려반 강연 등 전국을 돌며 일본의 침략전쟁에 협조하는 연설을 하고 다녔다. 야마기 카쓰란(人城活蘭)이라고 창씨개명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1938년 6월 8일 조선 YWCA를 일본 YWCA에 통합시키는데 앞장섰다. 이 때 회장이 김활란이었다.

<학병, 징병을 권유>

-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이후 일제는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지원병제에서 나아가 징용, 징병, 정신대 등의 강제 연행을 시작하였다. 동시에 식민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선전하기 위해 각종 친일단체를 결성하여 우리 민족의 정신까지 앗아가려는 온갖 책동을 다하였다.

그는 각종 친일단체의 간부로서 부인궐기촉구강연, 결전부인대강연, 방송 등을 통해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내선일체, 황민화 시책을 선전하며 일반 여성이나 여학생들에게 '어머니나 딸, 동생으로서' 징병, 징용, 학병 동원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였다.

확장되는 전선을 일본인 군인으로만 막을 길이 없자 전면적인 징병제를 실시하여 조선의 남아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삼고자 한 결정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감격하였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귀한 아들을 즐겁게 전장으로 내보내는 내지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반도여심 자신들이 그 어머니, 그 아내가 된 것이다……. 이제 우리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 알 수 없다.'('징병제와 반도 여성의 각오', 신세대 1942. 12)

'학도병 출진의 북은 울렸다. 그대들은 여기에 발맞추어 용약(勇躍) 떠나련다! 가라, 마음놓고! 뒷일의 총후(銃後)는 우리 부녀가 질 것이다. 남아로 태어나서 오늘같이 생의 참뜻을 느꼈음도 없었으리라. 학병제군 앞에는 양양한 전도가 열리었다. 몸으로 국가에 순(殉)하는 거룩한 사명이 부여되었다.'('뒷일은 우리가', 조광 1943.12)

이밖에도 그는 신문, 방송, 강연을 통해 일제의 앞잡이로서 내선일체, 황국신민화 정책을 선전하며 우리의 젊은이들을 징병, 징용 학병으로 내보내는데 앞장을 섰다.

1944년 악성 안질에 걸려 실명할 우려가 있다는 의사의 말에 "남의 귀한 아들들을 사지(死地)로 나가라고 했으니, 장님이 되어도 억울할 것 없지… 당연한 형벌"이라고 말하였다 한다.(김옥길의 '김활란 박사 소묘')

해방 후 김활란은 대부분의 친일경력을 가진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그가 택한 정치세력은 '친미반공'을 내세운 정치권력과의 밀착이다. 그는 단 한번도 독재권력과 맞서 싸운 적이 없다. 오히려 정권과 '밀월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의 수족으로 활동하였다.

김활란은 분명 탁월한 역량을 지닌 여성 지도자다. 그러나 그 탁월한 역량은 한국근대사가 굴절을 겪는 주요 고비마다 다수의 한국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소수의 지배권력을 위해 발휘되었다.

경찰이나 군대, 행정기관에 소속되어 항일운동가와 민족성원을 탄압한 사람들과는 다르지만, 문화, 교육가로서 일제에 협력한 그의 역할은 결코 가벼울 수 없는 만큼 그가 민족사에 남긴 오점은 분명히 해야 한다.

<종별 건명 또는 연재>

- 1941년 7월 5일 '애국정신에 빛나는 총후의 각오'
- 1941년 9월 19일 '부인 생활정의 강연' : '전조선 6반을 파견'
- 1941년 11월 26일 '국민총력중앙이사회석 담' : 담화
- 1943년 5월 5일 '가정도 전장이다' : 방송
- 1943년 6월 27일 '남자에게지지 않게 큰 결의를 갖고 있다'
- 1943년 8월 7일 '적 격멸에 일로 매진' : 매일신보 논문
- 1944년 6월 27일 '감격과 중한 책임'

<인용저서>
-친일파 99인, ②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275~283p), 저술자 : 강정숙(영남대 강사, 여성학,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친일파 99인, ③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부록2 일제하 친일단체 및 기관 소속 주요인명록, 268, 269, 279p)
-친일파 죄상기, 김학민 정운현 엮음, (민족정기의 심판 : 47, 48p, 친일파 군상 : 354, 386, 387, 431, 442, 443, 447, 448, 452p)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찬(108~109p)

황신덕(黃信德)의 주요경력 및 친일경력

-1889년 평양 생
-숭의여학교졸업
-1921년 일본와세다대학 수료
-1926년 귀국 후 시대일보, 중외일보기자
-1927년 근우회 창립회원으로서 활동
-1934~40년 동아일보 신가정부 기자

-1938년 5월 24일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여성단체연합 시국강연을 한때 '비상시국과 부인보국'이란 연재로 강연
-1940년 경성가정여숙을 창립, 해방 후에 중앙여자중학교로 승격시켜 교장에 취임
-1940년 10월 16일 발족된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생부 후생위원
-1941년 9월 15일 내지 1주일 예정으로 여류 지명인 총동원 하는 전위 여성 격려대를 전선 각지로 파견하여 강연회 혹은 좌담회, 일반부인층과 여학교생도들을 모아놓고 '일본여성의 갈길'로 강연 또는 좌담을 한때 청주, 충주, 영동지역 연사로 활동
-1941년 9월 16일 매일신보에 '폐품을 재생산하여 국가에 필요하게 쓰자'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
-1941년 10월 22일 부민관에서 결성된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1941년 12월 20일 2시 동양극장에서 시국부인대강연회 연사
-1941년 12월 22일 6시 영등포연예관에서 열린 시국부인 대강연회 연사
-1942년 1월 5일 발족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1943년 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생위원

-1948년 과도정부 입법위원에 선임 됨
-1952년 여성문제 연구회 창립회장
-1956년 가정법률상담소 창설이사장
-1961년 학교법인 추계학원 이사장
-1962년 문화훈장 대통령장을 받음
-1970년 3.1절 여성동지회 부회장에 취임
-1971년 범태평양 동남아 여성협회 회원으로 활동
-1983년 사망

황신덕의 친일행적

<<제자를 근로정신대로 보낸 여성교육자>>

<친일성향이 강했던 중앙여고 교장>

일장기 머리띠를 두른 제복의 여학생이 선생님들과 함께 찍은 한 장의 기념사진, 이 사진은 1943년 한 여학생이 정신대로 차출되어 가기 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찍은 것으로 사진속의 교장은 황신덕, 부교장은 박순천이다.

1970년 어느 해 황신덕 교장의 병환 소식을 듣고 찾아가 "'선생님, 그때 절 정신대로 보내신 것 너무하셨어요. 선생님 가슴 아프라고 하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때 왜 그렇게 하셨어요?' 라고 하였더니 선생님께서 '그래, 네 말이 맞다. 나도 그 일을 후회하고 있네'라고 처음으로 사과의 말씀을 하시더군요" 라고 증언하고 있다. (뉴스메이커 19992.6.5)

그러나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황신덕은 우리나라 여성운동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며, 탁월한 여성교육자이다.

'일제하의 압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민족의 자긍을 지키며, 정부수립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황신덕', '여성문제의 해결과 그 입지를 구축하는 일에 앞장서 온 황신덕은 우리민족의 수난사와 동시에 그 안에서 얼마나 꿋꿋하게 설 수 있는가에 대한 민족자존의 표상으로 현대 한국인에게 삶의 한 좌표를 제시하고 있다' 등 이것이 황신덕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이다.

<각종 친일단체의 간부와 중책을 맡으며 시국강연 강사로 활약>

그에 대한 이러한 공식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일제하의 그의 경력과 족적은 '일제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민족의 자긍을 지킨 사람'이 아니라 '친일성향이 강한 교장선생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초기에는 애국계몽적 여성운동을 이끌어 온 황신덕은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좌우세력이 협력하여 건설한 '근우회' 활동을 그만 둔 이후부터는 적극적인 친일파 여류인사 중의 한사람으로 되었다.

1938년 6월 24일 종로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부인들을 대상으로 보국을 주제로 한 시국강연회를 개최하고 국방헌금을 모금하였는데, 그 자리에 연사로 참석하여 '비상시국과 가정경제'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또한 1941년 9월 16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폐품을 재생산하여 국가에 필요하게 쓰자'라는 논설은 겉으로는 절약정신을 주장하는 것이지만 결국에는 가뜩이나 굶주리고 피폐해진 민중들을 쥐어짜서 일제의 전시품을 동원하자는 것이었다.

'전시생활과 부인도덕'이라는 주제의 좌담이 매일신보 1942년 1월3~10일자에 5회에 걸쳐 연제되었는데, 황신덕은 김봉희(金鳳姬), 임효정(林孝貞), 아라이(新井昌子) 등 6명과 함께 착석하였다.

좌담 참석자들은 '새 시대의 도덕은 개인에서 공중도덕으로', '소극적인 것을 버리고 정에서 동의 도덕으로' 등을 논하고 있으나 중심 내용은 전시에 국가를 위하여 여성들이 적극 호응하고 나서자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매일신보 1941년 12월 25일자에는 '정전(征戰)을 뒤에서 지키는 맹서-근로의 정신'이라는 제목으로 근로정신의 신명을 갖고 책임을 다하자는 취지의 글을 실었다. 또 '어머니의 책임이 중대'라는 글에서는 "해군 지원병제도를 실시한 우리는 구군신(九軍神)과 같이 한 번 나라를 위해 죽을진대 '죽음'을 생각지 않는다는 그러한 위대함을 길러내는 어머니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라고 강변하고 있으며, '전위 여성격려대'로 청주, 충주 영동 지방을 순회하며 강연하고 다녔다.

-그는 글이나 강연을 통한 활동뿐만 아니라 각종 친일단체의 간부, 임직원을 맡아 활동하였다. 황신덕은 1940년 19월에 결성된 '국민총력 조선연맹' 후생부 위원직을 맡았으며, 1941년 10월 22일에 친일세력을 총망라하여 조직된 '조선임전보국단' 에도 몇 안 되는 여성 평의원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또 1942년 1월 5일 조선임전보국단 산하기관으로 총후부인 진영을 망라한 '조선임전 보국단 부인대'가 발족되었는데 황신덕은 그 단체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징병, 학병, 해군지원병 제도가 잇따라 실시되던 1943년 무렵부터는 지원병과 학병으로 나갈 것을 강요하는 데도 앞장섰다.

<근우회에서 각종 친일단체의 임원으로 활동>

-황신덕은 기자로 재직하면서 애국계몽운동계열의 여성운동을 주도하였다. 1927년 여성운동과 항일운동의 일원화라는 목표 아래 여성운동계가 망라하여 근우회를 창립하였을 때 황신덕은 21명의 중앙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중책을 맡았으며, 중앙기구의 부서에서 교양교육부 상무직을 역임하였다.

1928년 제1회 대회에서 지방과 해외지사의 대표가 추가되어 31명으로 중앙집행위원회가 구성될 때에도 황신덕은 다시 집행위원회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근우회가 해체되고 나서 일제의 조선인 탄압정책이 더 혹독해지고 노골화되자 친일인사로 변모하게 된다.

-중앙여고의 전신인 경성가정의숙을 1940년 10월 37명의 신입생으로 시작하였다. 그런데 황신덕은 이 시절 이미 각종 친일단체에 깊이 관여하여 일제에 적극 협력하는 인사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1940년 37명으로 세운 학교는 1945년 1월에 사립학교 규정에 의해 중앙여자상과학교로 인가를 받게 된다.

1983년 11월 22일 사망하기까지 황신덕은 추계학원 이사장으로 있었으며 수많은 여성단체에 관여하였고, 3.1 여성동지회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인용저서>
-친일파 99인, ②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289~294p), 저술자 : 장하진(충남대 교수, 사회학)
-친일파 99인, ③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부록2 일제하 친일단체 및 기관소속 주요인명록 268~270p)
-친일파 죄상기, 김학민 정운현 엮음(민족정기의 심판 : 39, 54p)
-민족문화대백과사전 25,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찬(484p)

고황경(高凰京)의 주요 경력 및 친일경력

-1909년 서울 생
-1928년 일본 도지샤(同志社) 여전 영문과 졸업
-1931년 일본 도지샤(同志社) 여전 법학부 졸업
-1937년 미국 미시간대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 받음

-1937년 1월 총독부 학무국 알선으로 '조선부인문제연구회'가 조작됐을 때 중요한 핵심적 역할 담당
-1937년 8월 6일 조선중앙정보위원회의 권유로 결성된 '애국금채회(愛國金釵會)'의 간사
-1938년 6월 8일 조선여자기독교청년연합(YWCA)회에서는 위원회를 개최하고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세계기청으로부터 퇴맹키로 결의하는 동시, 내선일체란 단일국민 이념 하에 일본 YWCA에 가맹키로 했는데 김활란과 함께 경성부 실행위원(매일신보 1938년 6월 9일 발표)
-1938년 9월 12일부터 '조선부인문제연구회'의 활동을 선전 계몽하기 위해 13도 순회 강연시 홍승원(洪承嫄)과 함께 전남북을 맡아 강연
-1940년 10월 16일 국민총력조선연맹이 발족됐을 때 참사가 됨
-1941년 9월 7일 '임전대책 대연설회'를 마친 후 임전대책협의회에서는 '총후봉공(銃後奉公)은 채권으로부터'라고 외치며 가두판매했는데 그는 신흥우, 주요한 등과 함께 서대문에서 채권을 판매
-1941년 10월 17일 시국부인 대강연회가 용산 인보관에서 열렸을 때 연사로 강연
-1941년 10월 30일부터 1주일간 全鮮 39개소에서 '부인생활정의' 강연회를 개최했는데 제 2반으로 충청도 지방(청주, 대전, 충주, 공주, 강경)으로 속해 강연
-1942년 1월 5일 조선임전보국단의 산하기관으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가 발족됐을 때 지도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
-1943년 8월 5일자 매일신보에 '징병 감사와 우리의 각오, 건군 정신에 투철'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

-1945년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장
-1946~48년 미군정에서 보건후생부 부녀국장
-1949~50년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연구활동
-1960~63년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참석
-1958~86년 대한어머니회 회장
-1961~84년 서울여자대학 학장
-1963~67년 걸스카우트 단장
-1988년 학술원 종신회원
-1989년 서울여대 명예총장
-2000년 사망

고황경의 친일행적

<<황도정신 선양에 앞장선 여성 사회학자>>

<박사학위 받고 귀국 직후부터 식민지 사회교육에 가담 협조>

-고황경은 일제시기에 일본과 미국의 대학에 유학했으며 일본에서는 영문과와 법학부를 졸업했으며, 1937년 미국 미시간대학 대학원에서는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그는 이화여전 교수로 재직하게 되나 1937년부터 바로 친일집단에 가담 협조하는 행적으로 남기고 있다. 일제가 식민지 정책을 강화하는 사회교화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각종 어용단체를 조직토록 했다.

그 일환으로 1937년 1월 총동부 학무국 알선으로 '조선부인문제연구회'가 조직됐다. 이 단체는 총독부의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책'에 호응하여 '가정보국운동으로서의 국민 생활의 기본양식'이라는 것을 제정했다.

전시에 맞게 가정생활을 간소화하는 것이었는데, 이 단체는 신진 여성을 총망라해 매월 마지막 토요일을 회합일로 정하고 생활개선부와 수양부를 두어 활동했다.
여기서 고황경은 중요한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 단체의 활동을 선전 계몽하기 위해서 11명으로 구성된 순회강연반을 결성하여 1938년 9월 12일부터 13도를 순회강연했으며, 그는 전남북을 맡아 강연했다.

1937년 1월 총독부 사회교육과가 주동해서 '방송선전협의회'가 발족됐는데 이 역시 '일본 국민으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 즉 내핍과 절약을 전쟁을 이겨내고 신명을 천황께 기꺼이 바치게 한다는 사회교육을 수행하게 할' 목적으로 수양강좌, 부인강좌, 상식강좌 등의 방송강좌를 실시했다. 여기에도 고황경은 부인강좌를 맡는 역할을 했다.

<애국금채회 간사로 활약>

-조선부인문제연구회에서 활약하던 고황경은 '애국금채회'의 간사를 맡게 됐다. 1937년 8월 16일 조선중양정보위원회의 권유로 귀족의 처와 중견여류를 망라해서 결성된 이 단체는 한마디로 말해서 금비녀 금가락지를 뽑아 일제의 국방비로 헌납하자는 전쟁협력단체였다.

동시에 애국금채회는 '황군원호'를 목적으로 하면서 황군의 '환 송영, 총후가정의 위문 격려, 총후가정의 조문, 일반 조선부인에 대한 황군원호의 강화 및 국방비의 헌납 등을 사업계획을 정했으며 육군병원 방문, 위문금 전달, 국방헌금, 장병위문을 실시했다.

1939년 9월 10일 '동양지광' 주최의 '내선일체 좌담회'에 참여했으며 1941년 '채권가두유격대'에 서대문대로 편성되어 우체국 앞에서 신흥우, 주요한 등과 함께 채권을 판매했다.

1942년 1월 5일 조선임전보국단의 산하기관으로 이른바 총후부인 진영을 총망라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가 발족됐는데 고황경은 이 단체의 지도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1943년부터는 지원병과 학병을 권유하는데도 앞장섰다. 이러한 활동의 일환으로 매일신보 1943년 8월 5일자에 '징병감사와 우리의 각오, 건군정신에 투철'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해방이 되자 고황경은 다른 친일 여류명사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자기반성 없이 분단 조국의 교육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또 미군정하에서는 보건후생부 부녀국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1960~63년에는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참석했으며, 1961~84년 서울여대 학장, 학술원 종신회원을 역임하였으며, 대한민국문화대상 국민포장 동백장, 5.16 민족상을 수상했다.

<인용저서>
-친일파 99인 ②,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284-288p), 저술자 : 장하진(충남대 교수. 사회학)
-친일파 99인 ③,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부록2. 일제하 친일단체 및 기관 소속 주요 인명록, 270p)
-친일파 죄상기, 김학민 정운현 엮음, (민족정기의 심판: 35, 53p, 친일파 군상 : 391, 443, 445p)

박인덕(朴仁德) 주요경력 및 친일경력

-1896년 평남 용강 생
-1916년 이화학당 대학과 졸업 동시에 이화학당 기하 체육 음악 교사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에서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학생을 선동하였다는 죄목으로 붙잡혀 4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름
-1919년 11월 대한애국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름
-1922년 배화여고 교사로 교육계에 복귀하면서 신문 잡지 강연을 통해 여권신장과 여성계몽운동을 위하여 활동
-1923년 9월 감리교 여자신학교에서 금주 금연운동을 주요 활동으로 하는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를 발족하여 회장으로 활동
-1921~26년 배화여고와 여자신학교에서 영어 음악을 가르침
-1926년 미국 조지아주의 웨슬레안대학에 유학해 사회학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컬럼비아대학 사범대에서 교육학 문학석사를 받음
-1928년 2월 뉴욕에서 김마리아, 황애덕(黃愛德) 등과 민족주의 단체인 근화회(槿花會)를 발기하여 활동
-1935년 '농촌교역지침'을 발간해 농촌계몽운동

-1941년 덕화여숙(德和女塾) 설립 일에 검사정 야마사와(山澤) 및 나가사키(長崎), 구라시게(倉茂) 보도부장, 이화여학교 신도순(辛島純 : 원 이름은 辛鳳祚) 등이 축사를 읽었고 교사진도 녹기연맹의 쓰다(津田節子), 청화여숙 교사가 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淸田美智子, '덕화여숙을 방문하고' 綠旗 1941.6)
-1941년 8월 25일 부민관에서 임전대책협의회를 개최하였는데 실천위원으로 선출됨
-1941년 8월 30일 '나서라 증산 건설(절대적인 국가 요청)'이라는 요지로 담화문 발표
-1941년 9월 4일 부민관에서 임전대책연설회를 개최하였을 때 '승전의 길은 여기에 있다'는 연제로 강연
-1941년 임전보국단 준비위원회 준비위원
-1941년 9월 7일 임전대책강연회를 끝마친 임전대책협의회에서는 '이로써 실천으로!'라는 슬러건을 세우고 채권가두유격대로 나섰는데 박인덕은 윤치호(尹致昊) 등과 함께 종로대에 나섰다
-1941년 11월 15일 창립된 조선언론보국회 이사로 선출됨
-1941년 12월 18일 동성상고에서 시국부인 대강연회가 열렸을 때 모윤숙(毛允淑)과 함께 강연
-1941년 12월 20일 '정전(征戰)을 뒤에서 지키는 맹서'라는 요지로 매일신보에 논문 발표
-1941년 10월 22일 부민관에서 결성된 조선임전보국단 결전부인대회를 결성하고 오후 6시 강연회 때 사회를 맡아 '우리 1천5백만 여성은 당당한 황국여성으로서의 천황폐하께 충성을 다할 천재일우의 시기입니다' 등의 내용으로 개회사를 함
-1942년 1월 5일 결성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1942년 2월 15일 영(英) 동양침략의 아성 싱가폴 공략 대강연회에서 '동아여명과 반도여성'이라는 연제로 강연
-1943년 조선교화단체연합회 부인계몽독려반
-1945년 6월 8일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1980년 사망

박인덕의 친일 행적

<<황국신민이 된 여성계몽가>>

<여성계몽가로서 화려한 활동>

-박인덕은 1916년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하였다. 이 시기에 이화학당 대학과는 국내 최고의 전문과정이었고 졸업생은 이화학당 내에서만이 아니라 조선사회의 주목과 기대를 한 몸에 받기 마련이었다. 박인덕은 졸업과 함께 이화학당에서 기하 체육 음악을 맡아 가르쳤다.

그는 이 시기에 계몽운동적 차원에서 사회참여 활동도 하였다. 그러다가 3.1 독립만세운동 때에는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학생을 선동하였다는 죄목으로 경찰에 연행되어 4개월 동안 감옥생활을 했다. 그리고 출옥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해 11월 또한 대한애국회 사건으로 투옥되는 고초를 겪었다.

결혼 후 박인덕은 1923년 9월 감리교 여자신학교에서 금주 금연운동을 주요 활동으로 하는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를 발족하여 회장으로 활동하는 등 사회활동을 계속하였다.
1921년부터 1926년 9월까지 배화학교와 여자신학교에서 영어와 음악을 가르치다 배화학교 외국인 교사의 협조로 1926년 미국 웨슬리안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이 대학에서 사회학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컬럼비아 대학 사범대에서 교육학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미국에서도 사회활동을 계속했는데 민족주의 단체인 근화회에서 활동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근화회는 1928년 2월 뉴욕에서 김마리아, 황애덕 등 여자유학생들의 발기로 조직된 것으로 출판이나 순회강연 등을 통해 국내정세를 외국인에게 소개하여 조국광복에 기여하려는 단체였다.

1931년 귀국 후 그는 교사 모임으로 조직되었던 망월구락부를 황애덕, 최활란과 더불어 '단정한 직업을 가진 여성'들의 모임인 조선직업부인협회로 개편하여 여성들을 위한 경제학 강연을 여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33년에는 농촌 부녀를 위한 이동학교를 개설하기도 했으며 감리교 농촌 부녀지도자 수양소의 일을 하기도 했다.

1935년에는 '농촌교역지침'을 발간하여 종교 활동의 일환으로서 농촌계몽운동을 하였다. 그의 활동은 주로 농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파악하고 행해졌으며 그들의 처지를 개선하는 것에 주요한 관심을 기울였고 무지로부터의 해방이 생활개선의 주요 수단이라고 보았다.

이처럼 일제에 대한 저항보다는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합법적 공간에서 운동하는 그의 성향이 훗날 반민족행위로 나아가는데도 거리끼지 않게 만드는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녹기연맹(綠旗聯盟)의 지원을 받아 덕화여숙을 설립하여 급격한 변신>

-미국에서 조선민족의 존재를 알리며 민족주의 단체에 참가했던 그가 어떤 계기로 반민족행위자가 되었는가. 이에 대한 분명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정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1935년경부터는 일제가 기독교에 대해서도 신사참배니 하는 각종 시책을 강요하여 강력하게 통제하였다. 이때부터 국내의 민족주의계 인물들 대부분이 이미 일제에 대해 투쟁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 되었다.

-박인덕의 친일행각은 덕화여숙의 설립에서 시작된다.
덕화여숙은 녹기연맹 부설 청화여숙을 본 따 자매학교로서 만들어졌다. 후대의 기록에 의하면 덴마크의 실업학교를 본보기로 삼은 것이라고 하나 덕화여숙은 음으로 양으로 녹기연맹의 도움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박인덕이 녹기연맹과 관련을 갖게된 것은 일본어를 배우게 되면서부터이다. 녹기연맹의 쓰에(須江愛子)에게서 배우기 시작하여 하시키타(橋北町)의 '국어강습회'를 거쳤다. 이러한 가운데 녹기연맹은 자기 끄나풀로서 박인덕을, 박인덕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줄 수 있는 학교 설립의 지원자로서 녹기연맹을 선택한 셈이다.

1941년 4월 18일 덕화여숙 설립일에 검사정 야마사와 및 나가사키, 구라시게 보도부장 등이 축사를 하였고 교사진도 녹기연맹의 쓰다, 청화여숙 교사가 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매일 아침마다 '황국신민의 서사'를 읊고 청화여숙과 조선신궁에 합동 참배하는 일종의 녹기연맹의 부설학교와 같은 것이었다.

-1941년 8월에는 임전대책협의회의 결성에 위원 자격으로 참여했으며 9월에 김동환, 신태악, 최린 등과 함께 '임전대책협의회'에서 '승전의 길은 여기에 있다'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또한 전쟁비 조달을 위한 채권가두유격대로서 이숙종(李淑鍾), 송금선(宋今璇)과 함께 참가하였다.

그가 그 당시 행하고 다닌 친일행위들은 1941년 12월 20일 매일신보에 실린 '정전(征戰)을 뒤에서 지키는 맹세'라는 글을 통해 명확히 드러난다. "대체 왜 영 미 하고 싸우게 되나를 잠깐 생각합시다...... 중대한 것 중의 하나는 남의 구역에 영 미가 침범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대동아에 사는 전 민족에게 끼치는 일이니까 우리는 정의를 위하여 굳게 싸우려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자신이 공부하고 강연하고 다녔던 미국을 적국으로 돌리고 자신의 조국을 짓밟고 있는 일본 제국주의를 비호하여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을 '정의의 전쟁'으로 미화하였다.
그는 조선임전보국단의 평의원과 그 부인대의 지도위원으로서 1941년 12월 27일 결전부인대회에서 사회를 맡아 "지금은 우리 1500만 여성이 당당한 황국여성으로서 천황폐하께 충성을 다할 천재일우의 시기입니다. 이에 우리 반도 여성을 대표로 하여 '결전부인보국회'를 조직하자"고 하였다.

그리고 전쟁이 소모전으로 되면서 군인의 충원이 급해지자 일제는 징병제를 계획하고 학병을 끌고갔다. 이를 위해서 우선적으로 선전대원으로서 각종단체를 동원하였다. 이때 박인덕은 '새 어머니 될 우리의 감격과 포부'를 논제로 한 좌담회에 참석하였고 학병을 동원하기 위해서 조선교화단체연합회 부인계몽독려반으로 파견되었다.
이외에도 조선언론보국회의 이사를 맡는 등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각종 반민족단체나 각종 토론회 강연회의 연사로서 그리고 사회자로서 맹활약하였다.

<해방 후 반탁 반공 연사로 활약>

-해방 전에는 미국을 비난하던 입으로 박인덕은 일제가 패망하고 미군이 들어오자 돌변하여 미군정에 밀착되어 미소관계의 냉전이 시작되는 틈 속에서 다시 변신을 꾀하였다.
1946년 신탁문제를 둘러싸고 반탁운동체가 총집결될 때 여성단체도 독립촉성애국부인회로 결집되었다. 박인덕은 독립촉성애국부인회의 전국 부인대회에서 '민주주의와 여성'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는가 하면 회의의 사회자로 맹활약을 하고 정보부장으로 선임되어 전국적 무대에 재등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미군정청에 의해 제1회 국제부인대회에 남한대표로 미국에 파견되었고 미국에서 반탁여론을 조성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이후 미국에서 저술 강연에 열중하여 자서전적인 책 2권과 또 한권의 책을 썼다.
그 인세와 강연료 등을 기금으로 1961년 이후 인덕실업전문대학 등을 설립하여 인덕학원 이사장이 되었다. 그리고 일제시기 학교 설립자가 되었던 대부분의 인물들이 학교를 그들의 자손에게 물려준 것처럼 그 역시 딸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인용저서>
-친일파 99인, ②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295~302p)
저술자 : 강정숙(영남대 강사. 여성학,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친일파 99인, ③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이력서,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부록2 일제하 친일단체 및 기관소속 주요인명록 270p)
-친일파 죄상기, 김학민 정운현 엮음(민족정기의 심판 : 33~35,39,47p, 친일파 군상 : 366, 441, 445, 447, 451, 466p)
-친일변절자 33인, 무크 친일문제연구 제2집, 편집위원 : 김삼운 임해봉 김승태 김순석 정운현 (92~100p)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찬(59~60p)

송금선(宋今璇)의 주요 경력 및 친일사항

-1905년 경기도 출생
-동경여자고보(東京女子高普)
-덕성여자실업학교장

-1940년 10월 16일 발족된 국민총력조선연맹 연성부 연성위원
-1941년 9월 1일 '전위여성 격려대'라는 제목으로 천안, 대전, 공주 각지로 순회강연
-1941년 9월 7일 임전대책연설회를 끝마친 임전대책협의회에서는 '이로써 실천으로!'라는 슬로건을 세우고 채권가두유격으로 나섰는데 송금선은 정교원(鄭僑源), 이돈화(李敦化), 김사연(金思演) 등과 함께 경성역대로 나섰음
-1941년 11월 15일 창립된 조선언론보국회 평의원
-1941년 12월 9일 '최저국민생활은?'이라는 담화를 경성일보에 발표
-1941년 9월 전위여성격려대가 전선(全鮮) 각지로 파견되어 부인층과 여학교 생도들을 모아놓고 '일본이 갈 길'을 주제로 강연회, 혹은 좌담회를 했는데, 송금선은 천안, 대전, 공주에 파견됨
-1942년 1월 7일 저명인사들의 방송에서 '생활전에도 이기자'라는 제목으로 방송
-1943년 1월 현재 국민총력조선연맹 연성부 연성위원

송금선의 친일 행적

<채권가두유격대>

-1941년 9월 7일 임전대책협의회에서는 '이로써 실천으로!'라는 슬로건을 세우고 동회원 70여명을 총동원하여 채권가두 유격으로 나섰다. 70여명을 시내 11개 장소로 배치시켜 '총후봉공은 채권으로부터'라고 외치며 추태를 연출했는데 송금선은 정교원, 이돈화, 박기효(朴基孝), 김사연, 김사연의 부녀 손홍원(孫弘遠)과 함께 경성 역대로 나서서 가두 판매했다.

<국민정신선양 각도 강연 행각>

-1939년 8월 5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서는 이달과 내달 중에 각 도로 강사를 파견하여 국민정신 선양에 관한 순회강연을 열기로 됐다. 강연할 연제는 시국진전에 대한 인식과 결심, 총동원 운동의 본위, 백억저축생활 쇄신에 관한 것들이며 강사들은 남자 18명, 여자 8명으로 조선 각처로 강연을 다니리라고 한다. 여자부는 송금선, 조기홍(趙圻烘), 이숙종, 손정규(孫貞圭), 홍승원, 유각경(兪珏卿), 차사백(車士伯), 임숙재(任淑宰)이다.

<부인궐기촉구 강연>
-1941년 9월 19일 총독부 학무국 연성과내에 있는 조선교화단체연합회에서는 12월 2일을 기해 저명한 부인강사를 각지에 파견해 전국 인식과 징병징용제의 취지를 철저히 하는 순회강연을 하기로 했는데 송금선은 경기도 강사였다.

<인용저서>
-친일파 죄상기, 김학민 정운현 엮음, (민족정기의 심판: 35, 54, 130p, 친일파 군상 : 391, 437, 450, 454p)


조병래 기자, 임경구 기자, 전홍기혜 기자다른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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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6

약산 김원봉 평전

[eBook] 약산 김원봉 평전 - 개정판 



김삼웅 (지은이) | 시대의창 | 2015-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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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 김원봉 평전. 약산 김원봉은 남한과 북한 정권으로부터 ‘반역자’ 취급을 받고 철저히 배척되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대표적인 의열투쟁과 관련된 일반적인 기록을 제외하고는 그에 대한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런 이유로 약산 김원봉을 다룰 때는 보통 ‘픽션’ 형태를 취하거나 추측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김삼웅은 30여 년간 수집한 각종 자료를 토대로 약산 김원봉의 삶을 가장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묘사했다. 의열단 창단의 의의, 단재 신채호의 <의열단선언> 집필 배경, 조선의용대 창설과 한국광복군에 합류하게 된 실질적인 동기 그리고 월북과 그의 의문의 죽음 등 역사적인 사실 이면에 숨어 있는 ‘진실’을 재조명한 것이다.



이 책에는 일본 정보기관의 기록, 각종 증언록 등 국내에서 처음 공개되는 자료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때문에 기존의 어떤 책보다도 약산 김원봉을 심도 있게 다룬 평전다운 최초의 평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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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약산 김원봉 회견기(가상)



제1장

‘떡잎’부터 남다른 어린 시절

체 게바라와 호세 리잘

‘그림자’ 같은 사나이

밀양에서 열 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망국소년이 된 김원봉

전홍표 교장과 평생동지 윤세주 만나

독립운동의 묘판, 밀양

평생 동지들 만나 의기투합하다



제2장

조국독립의 꿈을 그리며

무장투쟁의 꿈을 안고 중국으로 망명

파리강화회의에 자객 보내

비폭력 3.1운동 소식 듣고 실망

무장부대 대신 폭렬투쟁론 정립

신흥무관학교 입교, 폭탄제조법 배워



제3장

폭렬투쟁의 의열단 창단

‘의열단’이라는 고유명사

혈연적 운명공동체 ‘의열단’

“놀라울 정도로 멋진 친구들”



제4장

식민통치 기관을 파괴하라

폭렬투쟁에 생명 걸어

부산경찰서 폭파 작전

밀양경찰서 폭파 작전

조선총독부 폭파 작전

자금 조달과 폭탄 반입의 어려움

아나키즘에 매료되기도

아나키스트 유자명과의 만남

의열단, 임시정부와는 거리 두다

소련으로부터 독립운동자금 지원받아

일본 육군대장 처단 시도

단재 신채호의 <의열단선언>

<의열단선언>은 어떤 내용인가

의열단 총회 열어 결의 다짐

‘불멸의 문헌’에 대한 역사적 평가



제5장

황포군관학교 입교 전후

의열단의 시련과 세력 확장

임시정부에 실망한 세력 의열단 가담

의열투쟁자금 마련에 고심

김지섭의 이중교 투탄 의거

확고한 민족주의 신념

황포군관학교에 입교

유오한국혁명동지회 결성

군관학교에서 얻은 인적 자산

김성숙의 김원봉 회고담



제6장

중국혁명전선에 서다

의열단의 개조운동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발전

무창혁명청년회 결성

장개석의 북벌에 참전

살육의 현장을 뒤로하고 상해로

남창봉기에 직접 뛰어들어

광주봉기에는 참가하지 않아

시련을 딛고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발돋움



제7장

독립운동진영 통합운동에 앞장서다

공산주의 이론가 안광천과의 만남

상해에서 새 활로 모색

대표자대회 열어 강령 · 슬로건 채택

창립 9주년과 3.1운동 10주년 성명

레닌주의정치학교 개설

사회주의사상에 깊이 빠져들어



제8장

독립군전사들의 용광로 조선혁명간부학교

세계 대공황과 파시즘 체제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세우기까지

‘남의사’통해 중국정부로부터 재정 지원 받아

황포군관학교 동기생들의 협력

남경 교외 탕산에 훈련소 개설

조선혁명간부학교 운영에 열정을 바쳐

치열한 혁명계급론 분석

백범 김구의 격려 방문

졸업생들, 특수임무 띠고 적 후방으로

혁명음악가 정율성 배출

독립운동진영의 지도자로 우뚝 서다

“왜노 몰아내는 조선독립의 역군이 돼라”



제9장

사랑과 혁명의 합주곡

북경에서 만난 여성 혁명가 박차정

젊은 혁명가들의 사랑과 조국해방투쟁

노신과 허광평의 사랑과 혁명운동

남경조선부녀회 조직, 운영지도

불꽃처럼 살다간 소피아 코발렙스카야처럼



제10장

민족혁명당 창당 총서기에 취임

국제정세의 변화를 지켜보며 통합정당을 지도

단일대당 운동에 임시정부는 불참

민족 · 민주혁명이념 제시

당권 장악했으나 이청천 계열 이탈

《민족혁명당보》 발행에 심혈을 기울여

민족혁명당 창당의 ‘실천적 의의’

중일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



제11장

조선의용대 창설, 총대장이 되다

중일전쟁, 한국독립 절호의 기회

조선의용대 창설

기독청년회관에서 결성식 가져

의용대원들의 회고

핵심대원들로 의용대 편제

일본인 반전운동가들과 연계투쟁

한국광복군 창설에 자극제 역할

강도 일본을 타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

기관지 《조선의용대통신》 발행

후방지역 전지공작에 투입

중국 문인 곽말약과 김성국의 회고

의용대원 김학철의 회고

의용대원 유자명의 회고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결성



제12장

조선의용대의 활동과 화북이동 전후

조선의용대의 선전공작과 유격전

“모든 반일 역량을 단결시키자”

다양한 대적선전활동 전개

일제 침략에 공동으로 대응

일본 반전단체의 축하 메시지

조선의용대의 미래 활동 지침

조선의용대 주력 화북으로 이동

중국공산당, 김원봉의 화북행 차단

중국인 사마로의 증언

“망명자 가족 생계유지를 위해”

〈연안송〉을 지은 정율성은 조선의용대원



제13장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취임

국권침탈기 무력항전의 전통

한국광복군의 결성과 성격

한국광복군의 역할과 사명



제14장

좌절과 민족해방의 중경 시절

잔류대원 이끌고 중경으로 이동

장개석 정부의 통합 압력

임시정부에 참여하기까지의 좌우 갈등

“배운 것 적어도 도량 큰 인물”

소절에 구애받지 않는 혁명가의 풍모

임시정부에서 소외당해

3.1 소년단장 최동선과 재혼



제15장

광복의 깃발 들고 27년만에 환국

일제 패망의 날, 중경

제2진으로 12월 초 환국

일제 패망과 조국독립의 의미

환국 순위 양보

소용돌이치는 정국의 한복판에서

비상국민회의 탈퇴 선언

임시정부와 결별, 민전의장 맡아

28년만의 귀향, 대대적인 환영받아

친일경찰에 붙잡혀 수모 당해

3일간 통곡, 그 눈물의 사연

친일파들이 활개치는 기막힌 ‘해방조국’

이현상의 글, 〈혈투의 30여 성상〉



제16장

단정반대 월북 그리고 의문의 죽음

일관된 통일정부수립 노선

테러위협으로 인한 긴장된 생활

4월 9일 북한으로 가다

월북 동기와 배경

북한정권수립에 기여, 국가검열상 취임

월북, 납북 독립운동가들과 만나

재북 독립운동가들과 평화통일기구 만들어

풀리지 않는 ‘퇴장’의 진실

그림자 사라져도 존재는 남아

혁명시인 마야꼽스끼처럼

조국은 그에게 너무 많은 빚을 졌다.



부록1 민족혁명당 당의 · 당강 · 정책 · 당장

부록2 우리 운동의 새 출발과 민족혁명당의 창립

김원봉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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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은 자신의 생애에서 두고두고 잊지 못할 제1기생 졸업식에서 목 메이는 어조로 “강도 왜노를 몰아냄으로써 조선의 절대독립과 동삼성의 탈환을 기하자”고 역설했다. 1기생 졸업식에서 행한 김원봉의 훈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지들은 졸업 후에 차차 개별적으로 행동해야 하지만 입교 시기의 혁명적 정신을 잊지 말고 조국을 위해 크게 투쟁할 뿐 아니라, 6개월 동안 받은 교육을 기초로 삼아 공부와 연구를 거듭하여 진취적인 정신을 기르고 결사적인 투쟁을 계속하여 우리들의 강토에서 강도 왜노를 몰아냄으로써, 조선의 절대독립과 동삼성의 탈환을 기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혁명투쟁을 위해 헤어진 동지들이 최후에는 반드시 목적을 달성하고 기쁜 얼굴로 서로 만나기를 기대한다.

<8장 중에서>





1938년 10월 10일 오전, 한구 중화기독청년회관에서 조선의용대 결성식이 거행되었다. 이날 결성식에는 100여 명의 대원이 자리잡았고 각 지역에서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한국인과 중국의 군·정 관계 요인들이 참석했다. 대장으로 추대된 김원봉은 제1지대와 제2지대의 지대장에게 각각 군기를 수여하고 ‘朝鮮義勇隊조선의용대’라는 한자 다섯 자와 ‘Korean Volunteer한국의용군’라는 영문이 새겨진 배지를 대원들에게 나눠주었다.

대원들은 태극기와 군기를 앞세우고 당당하게 김원봉 앞에 도열했다. 김원봉은 대원들에게 “중국혁명이 완성되지 못함으로써 일제의 한국에 대한 압박과 착취가 날로 심하며, 한국민족이 해방되지 못함으로써 일제의 중국대륙 침략이 더욱 포악해졌음이 사실이다. 조선의용대의 기치를 높이 들고 중국 형제들과 굳게 손잡고 최후의 일각까지 분투하자”고 역설했다. 또 “우리의 역량이 작다고 깔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조선 3000만 민중은 모두 우리의 역량”이라는 김원봉의 연설은 대원들의 가슴을 진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날 조선의용대 대원들이나 내빈 그리고 주역인 김원봉에게 무장부대의 창설은 생애를 두고 잊을 수 없는 감격적인 행사가 되었다. 비록 남의 나라 땅이지만 당당하게 무장한 군사력을 갖춘 조선의용대가 출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1장 중에서>





김일성의 입장에서는 김원봉의 존재가 대단히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김원봉은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곤 했다”는 황용주(전 MBC 사장)의 증언 등을 종합할 때 두 사람의 사이, 그 내면의 관계는 ‘빙탄불상용’과 같았을 것이다. 김일성은 이미 남로당계 인사들과 연안파 독립운동가들을 숙청한 바 있다. 이제 김일성의 절대권력에 도전할 수 있는 인물은 연부역강한 김원봉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숙청되었을지 모른다.

숙청 과정에서 자결이냐 살해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은밀하게 살해됐을 수도 있고 옥중에서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자살을 택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혹은 살해한 뒤 자살로 위장되었을 수도 있다.



<16장 중에서>















저자 : 김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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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 :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 현재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대한매일신보』(현 『서울신문』) 주필을 거쳐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문화론을 가르쳤으며, 4년여 동안 독립기념관장을 지냈다.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제주 4·3사건 희생자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백범학술원 운영위원 등을 역임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원 등을 맡아 바른 역사 찾기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역사·언론 바로잡기와 민주화·통일운동에 큰 관심을 두고,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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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해방’되지 못한 20세기 최고의 독립운동가

격동의 시기에 태어나 조선의 독립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한 약산 김원봉 선생. 그는 일제 관헌이 그 이름만 들어도 오금을 저렸다던 의열단을 창단하고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항일운동을 전개한 20세기 한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다. 의열단장,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장, 조선민족혁명당 당수, 조선민족전선연맹 대표, 조선의용대 총대장, 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인민공화당 대표, 국가검열상, 노동상 등 그가 역임한 직위만도 10개가 넘는다.

광복 뒤 환국한 조국에서 그를 기다린 것은 테러의 위협과 정치적인 모략이었다. 그는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지만 좌우의 이해관계 속에서 정치적 입지가 축소되었고, 이승만 세력에 빌붙은 친일 세력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겪는다. 결국 김원봉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월북을 감행한다. 그러나 북한에서도 1958년 이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남과 북 어디에도 그의 설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우파의 김구 선생과 함께 만주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도 역사 속에서 해방되지 못한 채 60여 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남한에서는 월북했다는 이유로 그리고 북한에서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정치적 모략 속에서 그를 언급하는 것이 금기시되어왔기 때문이다.



약산 김원봉에 대한 평전다운 최초의 평전

약산 김원봉은 남한과 북한 정권으로부터 ‘반역자’ 취급을 받고 철저히 배척되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대표적인 의열투쟁과 관련된 일반적인 기록을 제외하고는 그에 대한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런 이유로 약산 김원봉을 다룰 때는 보통 ‘픽션’ 형태를 취하거나 추측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김삼웅은 30여 년간 수집한 각종 자료를 토대로 약산 김원봉의 삶을 가장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묘사했다. 의열단 창단의 의의, 단재 신채호의 <의열단선언> 집필 배경, 조선의용대 창설과 한국광복군에 합류하게 된 실질적인 동기 그리고 월북과 그의 의문의 죽음 등 역사적인 사실 이면에 숨어 있는 ‘진실’을 재조명한 것이다. 이 책에는 일본 정보기관의 기록, 각종 증언록 등 국내에서 처음 공개되는 자료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때문에 기존의 어떤 책보다도 약산 김원봉을 심도 있게 다룬 평전다운 최초의 평전이라고 할 수 있다.

광복된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 김원봉에 대한 평가가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할 때다. 김원봉의 월북과 의문의 죽음을 비롯해 아직 해결되지 않은 많은 문제들이 남아 있다. 이 책은 김원봉이란 존재를 진정으로 ‘해방’시키고 한국현대사의 전면으로 이끌어내는 중요한 가교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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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잘 생긴 얼굴과 젠틀한 언행을 보면 어떻게 피의 무장투쟁을 이끄는 리더로서의 힘이 나올수 있었을까? 의문이다.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굽히지 않는 열정이 그 힘의 원천이었을 것이다. 

sprenown ㅣ 2017-07-20 l 공감(1) ㅣ 댓글(0)  







  분단과 이데올로기로 역사도 반편만 배우는 슬픔을 느끼네요. 일제시기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사는데... 일제청산을 못한건 우리의 치욕인 역사네요.  

pada ㅣ 2016-01-15 l 공감(1) ㅣ 댓글(0)  







  약산의 삶을 읽어가면서 왜 나는 엉엉 울.. 아니 통곡했는지. 얼마든지 타협하고 부와 영화를 얻을 수 있었지만 초개처럼 스러져간 동지들이 눈에 밟혀서 버텨왔던 약산이 노덕술에게 그 모욕을 당했을때.. 그는 정말 어떤 심정이었을까. 대상을 모르는 분노가 가슴에서 쳐받아오른다. 

랄프로렌 ㅣ 2015-09-28 l 공감(1) ㅣ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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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 : 2편



 





 김원봉 평전 히버드  ㅣ 2016-12-09 ㅣ 공감(0) ㅣ 댓글 (0)





의열단으로 인해 알게 된 독립투사. 자세히 알고 싶어 평전도 구매해봤다. 의외로 복잡다단하신 분이라 놀랐고...해방 후에 무려 일제 부역자에게 심문까지 당한 치욕(이건 이 책 전에 이미 알고 있었지만)은 다시 봐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며...역사에서 지워지다시피 했다는게 안타깝다. 여러 복합적인 사상을 가지셨던 분인데 어느 한쪽으로만 단정지을 수도 없는 거고.



여하간 공감할 수 없는 부분도 있긴 했으나 약산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면 이 책이 괜찮을듯 싶다. 다소 지루한 부분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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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렬한 정의의 불꽃 삶을 살고 간 김원봉 hikelly ㅣ 2014-05-13 ㅣ 공감(8) ㅣ 댓글 (0)





김원봉 이름 석자를 아는 사람은 많이 드문 편이다. 그러나 역사를 좋아하는 나느 김원봉 이름 석자는 들어보았다. 하지만 디테일을 잘 모르기는 마찬가지. 김원봉과 관련되어서는 의열단의 이름 정도만 들어본 정도.







역사 팟캐스트 이작가와 이박사의 이이제이를 좋아한다. 어느 날 이이제이에서 약산 김원봉을 다루는 편이 방송되었다. 당연히 들어보았겠지. 소감은? 우~~~~~와~~~~~~! 이런 분의 생애와 업적이 왜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 왜 우리 교과서는 김원봉에 대하여서 한 줄도 다루지 않았을까? 내 기억속에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투척 나석주는 국사교과서에서 독립투장부분에서 윤봉길과 같이 이름 정도 언급된 정도였다. 그런데 나석주열사외 활동이 의열단 활동이었고 김원봉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니!







언젠가 꼭 김원봉에 대하여 더 많이 알고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김삼웅씨의 약산 김원봉 평전을 접하였다. 느낌은? 또 다른 우~~~~~와~~~~~!



간략하게나마 그의 생애를 풀어보자면,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10대에 벌써 항일 의식을 가지고 19세에 독립을 위해서는 무장투쟁만이 살 길이라는 생각으로 군사학으로 배우기 위해 당시 군사학에서 독보적 존재였던 독일로 가기 위해 중국의 독일 대학 덕화학당에 입학하였다. 비록 곧 독일이 1차 대전에 패전하여 4개월만에 그만두게 되었지만 이 후 김원봉은 상해에 계속 머무르면서 뜻 있는 사람들과 '정의'의 의과 '맹렬'의 열의 더하여 의열단을 조직하고 그야말로 정의가 맹렬히 살아숨쉬는 일제를 향한 폭렬 투쟁을 시작한다. 일제 시대에 이루어진 웬만한 폭탄 투척 사건의 대부분 김원봉의 주도하에 의열단에서 했다고 해도 무방하다. 단지, 해방 후 보수 우익 및 민족주의 진영의 논리에 의하여 이 사실이 후대에 부각되지 않았을 뿐.







당시 다른 독립투사들과는 달리, 김원봉은 외교니 교육을 통한 실력 양성이니 이런 것들은 독립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로지 정신 무장되고 실력이 있는 군대를 통한 무장 투쟁만이 독립의 지름길이라 굳게 믿었다. 그리하여 초기 폭렬 투쟁은 종국에는 조선 의용대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조선 의용대는 당시 3천만 동포의 염원에 맞추어 임시정부에 소속되었고 이는 임정의 한국광복군 청설에 밑거름이 되었다.



실제로 당시에는 김구보다도 김원봉의 활약 및 존재감이 더 컸다고 할수 있다. 그런데, 왜 지금에는 김구의 존재와 비중에 비하여 김원봉은 철저히 무시당하여왔을까? 바로 그가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한 부분때문이다. 그러나, 이 평전을 보면, 그가 공산주의자들과 교류하고 사회주의사상을 공부한 것은 그야말로 단지 조선의 독립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며, 공산주의자들이 독립보다 사상을 더 우선시 한다고 생각했을때는 가차없이 그들과 결별하였다.



36년 일제 치하에서 독립 투쟁(그렇다. 김원봉의 활약은 독립 운동이 아니라 그야말로 투쟁이다.)중에 오로지 나의 뜻과 꼭 맞는 사람, 조직과만 일을 한다고 하면 과연 독립 투쟁이 제대로 운영되겠는가?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이런 조직 저런 조직 어울려가며, 논쟁도 해가며 양보도 해가며 한 판 흐드러지게 어울려야 결국 합이 될것이 아닌가?



그러나 해방 후 우리의 지도층 및 지식인들은 철저하게 민족주의의 논리만을 교육시켰다. 그 외 다른 진영의 활동과 영역은 아예 다루지도 않았다. 여기에서 이런 훌륭한 족적을 남긴 위인이 실로 조국에서 외면당하는 쓰라린 현실이 남은 것이다.



해방 후 미군정이 들어온 현실에서, 김원봉은 1947년 친일 경찰에게 체포당하고 만다. 급기야 친일 경찰에게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는데, 김원봉을 고문했는 군정경찰이 바로 최고로 악독한 친일 경찰 노덕술이다! 이 때 체포와 고문을 당하고 풀려나서 3일 동안을 엉엉 울었다고 한다.



독립 투쟁을 할 당시에도 민첩한 행동과 철저한 보안으로 단 한번도 일제에 잡히지 않고 일제를 파멸시키고자 목숨까지 내놓았던 그가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 경찰에게 붙잡혀 고문을 당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나? 그가 진실로 독립시키고자 했던 조국의 모습은 이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그가 느꼈을 분노와 억울함이 그대로 내 속에 전해야 나도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극도의 실망감을 갖고 김구와 함께 남북연석회의 차 북한을 방문하고 나서는 남한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친일을 한 인간들과는 같은 하늘에서 숨을 쉴 수가 없다고 했다. 너무 가슴이 아프다. 잘못된 꿰어진 역사의 첫 단추는 위대한 우리 독립 투사를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 때 잘못 꿰어졌던 단추는 그 후 여러번의 기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잔재들이 남아있으니, 김원봉은 하늘에서 어떤 심정으로 이 땅 남한을 내려다 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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