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04

광해군 -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 한명기 |2018

  • 광해군 (리커버 특별판. 표지 2종 중 랜덤 발송) | 한명기 | 알라딘


    광해군 (리커버 특별판. 표지 2종 중 랜덤 발송) -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한명기 (지은이)역사비평사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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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자신의 눈에 장점인 것이 다른 이들에게 단점일 수 있는 것처럼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늘 같을 수만은 없다. 어떤 때는 너무나 상반되어 오히려 혼란스럽기조차 하다. 저자가 이야기하려는 광해군 역시 마찬가지다. 광해군은 쿠테타로 왕위를 빼앗기고 죽은 뒤에도 '폭군' '패륜아'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인 동시에 명·청 교체기, 혼란의 시대에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저자는 우선 광해군에 대한 이러한 극단적 평가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살펴본다. 그가 보기에 부정적 평가는 인조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몰았냈던 서인들의 의도적인 왜곡의 결과이다. 또 긍정적인 재평가의 경우, 식민사관의 정치적 노림수일 뿐이라는 것이 저자의 견해다. 즉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모두 지극히 정치적인 배경에서 비롯됐다는 것.

    이 책은 이러한 미화나, 비하에서 벗어나 역사자료를 통해 객관적으로 광해군을 바라보고자 한다. 첩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렵게 왕위에 오른 인물, 여러 세력의 견제 속에서도 왕권강화와 국가의 재건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한 인물로서 광해군을 그려내는 저자는 광해군의 어린시절시절부터 인조반정으로 물러나기까지의 과정을 흡입력 있게, 생생하게 되살리고 있다.

    그러나 책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만을 더듬지 않는다. 임진왜란에서 한국전쟁을, 조선에 참전한 명군을 통해 오늘날의 주한미군 문제를 반추해보기도 하고 광해군의 군비강화책에서 한·미간의 미사일 협상을 끄집어내기도 한다. 그러면서 저자가 가장 강조하는 화두는 외교다. 광해군이 왕으로 있던 17세기와 지금의 상황이 별반 다를 바 없다고 말하는 저자는 주변 열강의 동향을 냉정하게 살피고, 유연한 외교정책을 통해 자강책을 마련한 광해군의 자세를 오늘날에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목차


    책을 내면서
    왜 갑자기 광해군인가

    1. 광해군 평가의 극과 극
    죽은 뒤에도 다시 죽은 광해군
    『광해군일기』 속의 광해군
    식민사관! 광해군을 띄우다

    2. 어린 시절
    출생과 소년기
    붕당의 시대
    왕세자가 되다

    3. 임진왜란의 한복판에서
    임시정부를 이끌다
    명군, 조선에 들어오다
    명군, 조선의 걸림돌이 되다
    지는 선조, 뜨는 광해군
    광해군, 반명감정을 품다
    즉위를 향한 멀고도 험한 길

    4. 정인홍, 이이첨과의 인연
    광해군, 왕위에 오르다
    정인홍의 부활
    산림, 의병장, 조식의 수제자
    이이첨의 야심

    5. 전란의 상처를 다독이다
    연립정국을 펼치다
    피폐한 민생을 어루만지다
    『동의보감』과 『동국신속삼강행실도』

    6. 왕권강화의 의지와 집착
    '호메이니' 정인홍의 무리수
    역모사건, 광해군을 흔들다
    은상 살해사건, 역모로 비화되다
    폐모논의 일어나다
    이이첨, 공안정국을 주도하다

    7. '절대군주'를 꿈꾸다
    짓고 또 지은 궁궐들
    받고 또 받은 존호들
    궁궐 공사가 남긴 것

    8. 대륙에서 부는 바람
    전장과 시장, 그리고 상인들
    명나라, 은에 웃고 은에 울다
    조선 전체가 은덩어리라도 그대들의 욕구를 채울 수는 없소
    누르하치, 솟아오르다

    9. 외교 전문가! 광해군
    시련 속에서 능력이 싹트다
    정보를 수집하고 기미책을 쓰다
    방어 대책을 마련하다
    명, 순이에게 원병을 요청하다
    광해군, 출병을 거부하려 애쓰다

    10. 명청교체의 길목에서
    조선군, 압록강을 건너다
    심하 전투, 그리고 강홍립
    주객이 전도되다

    11. 광해군, 명을 주무르다
    명 난민들, 조선으로 몰려오다
    광해군, 모문룡을 섬으로 밀어넣다
    명, 재징병을 시도하다
    "외교는 사술을 피하지 않는다"
    대명외교, 내정에 파장을 몰고 오다

    12. 반정인가 찬탈인가
    서인들, 재기의 기회를 얻다
    광해군, 폐위되다
    주변인들, 권력의 중심에 진입하다
    명, 명분과 실리를 놓고 고민에 빠지다
    정적에 의해 부활된 외교정책

    13. 권력 16년, 춘몽 16년
    반정의 명분은 지켜졌는가
    광해군의 최후
    광해군, 한반도 그리고 오늘

    연표
    참고문헌
    접기


    책속에서


    첫문장
    지난 6월 중순 광해군의 무덤에 다녀왔다.



    남아 있는 자료가 너무 적어서 유년이나 소년 시절 광해군의 삶의 모습을 온전히 복원해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우선 중요한 자료는 선조실록」이지만, 여기에 실린 왜란 이전의 광해군에 관한 내용은 부실하기짝이 없다. 그나마 사루의 내용 가운데 그의 어린 시절을 우츠할 수 있는 기록이 파편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 범스
    P. 23 우여곡절 끝에 1033년 12월, 중초본을 완성했다. 광해군을 쫓아낸 지10년 만이었다. 중초본을 완성했으니 다시 정서하여 활자를 뽑고 인쇄를 하는 것이 순서였다. 그런데 또다시 재정 문제가 불거졌다. 고민 끝에인쇄는 포기하고 두 벌의 정서본을 만들었다. 이어 정서한 두 벌을 강화도의 정족산과 무주의 적상산에 설치한 사고에 보관했다. 정서하는 데대본으로 썼던 중초본은 세초하지 않고 봉화의 태백산 사고에 집어넣었다. 『광해군일기」만 유일하게 정서본과 중초본이 동시에 남아 있게 된 배경이다. 접기 - 서향
    P. 233 내정에선 때로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모습을 보였던 광해군이었지만, 외교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보인 태도는 의외로 냉철했다. 그리고과감하고 준비성이 있었다. - 서향
    P. 139 이위경(李卿)은 ˝인목대비는 저주 사건을 일으키고 역모에 연결되었으니 어머니로서의 도리가 끊어졌다. 전하는 비록 대비와 모자 관계이지만 인목대비에게 현저한 죄악이 있으니 종사(宗社)를 생각할 때 신하의 입장에서는 국모로서 대우하기 어렵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 hoonyy
    P. 63 그러면 오늘날 중국에서 임진왜란은 무엇이라 부르는가? ‘항왜원조(完委援朝)전쟁‘ 이다.
    일본에 저항하여 조선을 돕기 위한 전쟁이라는 뜻이다. 명칭으로 보면 ‘조선을 돕기 위한 전쟁‘이지만, 명의 참전은 사실 자국의 안보를 확보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 hoony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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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및 역자소개
    한명기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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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외국어대, 가톨릭대, 한신대, 국민대에서 강의했으며 규장각 특별연구원을 지냈다. 계간 《역사비평》 편집위원,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 동북아역사재단 자문 위원을 역임했고, 지금은 명지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로 있다.
    그동안 《임진왜란과 한중관계》(1999), 《광해군》(2000),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2009), 《역사평설 병자호란 1, 2》(2013)를 썼고, 그 밖에 여러 저술이 있다. 동아시아 역사 속에서 한국사의 위상을 정립하는 데 관심이 많다. 첫 책인 《임진왜란과 한중관계》로 2000년 제25회 월봉저작상을, 《역사평설 병자호란 1, 2》로 2014년 제54회 한국출판문화상을 받았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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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려 25년 만에 다시 한명기 교수의 <광해군>을 다시 읽었다. 다시 읽다 보니 그 시절에 읽었던 기억들이 다시 살아났다. 역시 책은 다시 읽는 법인가 보다. 그리고 그 때보다 부수적으로 너튜브란 녀석이 있어서 관련된 여러 정보들도 같이 업그레이드하면서 읽을 수가 있어 좋았던 독서 체험이었다. 다시 읽기와 책 다이어트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고나 ... 더보기
    레삭매냐 2025-08-03 공감 (24) 댓글 (0)



    결과만 덩버러니 몇자 몇줄로 서술된 고정된 나의 역사가 유동적인 그 과정을 통해 하나하나 엿본 긴 디테일로인해 풍성해지고 제대로 사건마다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주었다.
    hoonyy 2022-07-10 공감 (2) 댓글 (0)



    ‘그에게 정통성이라는 선물만 주어졌더라면.‘ 아아 역사에서의 가정은 아무리 헛되고 쓸모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후의 병자호란을 생각한다면 너무 비탄하다. 조금 더 광해군시절의 디테일의 역사를 엿볼수 있어서 기다려지는 책이다.결국에는 한명기 선생님의 병자호란. 그리고 엄광용님의 ‘광개토태왕 담덕‘ 레이황의 ‘1587, a Year of No Signific... 더보기
    hoonyy 2022-07-06 공감 (3) 댓글 (0)








    광해군에 대한건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오디오북으로 듣는 느낌이 다를듯 싶네요.
    waterguy 2021-01-28 공감 (2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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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론300년 통치의 노론자처럼 이용당한 군주, 문제있는 군주는 맞으나. 후에 군주 역시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만화애니비평 2018-09-20 공감 (1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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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퀴벌레 같은 노론의 희생양.
    Ajna 2018-09-12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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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해군에 대해 정리가 잘되었있네요. 명청 교체기 혼돈기에 외교적 전략이 돋보이네요.
    레비 2018-09-20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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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과만 덩버러니 몇자 몇줄로 서술된 고정된 나의 역사가 유동적인 그 과정을 통해 하나하나 엿본 긴 디테일로인해 풍성해지고 제대로 사건마다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주었다.
    hoonyy 2022-07-10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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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혁군주인가 폭군인가






    무려 25년 만에 다시 한명기 교수의 <광해군>을 다시 읽었다. 다시 읽다 보니 그 시절에 읽었던 기억들이 다시 살아났다. 역시 책은 다시 읽는 법인가 보다. 그리고 그 때보다 부수적으로 너튜브란 녀석이 있어서 관련된 여러 정보들도 같이 업그레이드하면서 읽을 수가 있어 좋았던 독서 체험이었다. 다시 읽기와 책 다이어트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고나 할까.



    조선 역사에서 역모는 변수가 아닌 상수였다. 체제를 뒤집어 엎으려는 수많은 시도들이 있었고, 딱 두 번 성공했다. 한 번은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 그리고 나머지는 이번에 읽은 광해군을 저격한 인조반정이다. 성공하면 반정, 실패하면 역모로 그야말로 집안이 풍지박산나는 그런 위험천만한 도박이다.



    일단 이야기는 선조 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조의 즉위로 중종 이래 치열하게 이어져온 훈구파와 사림의 대결은 사림의 승리로 귀결된다. 사화로 수많은 사림 출신 선비들이 죽어 나갔고, 최종장에서 권력은 사림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른바 붕당정치가 시작되면서 사림들끼리의 헤게모니 투쟁이 전개된다.



    일단 그 부분은 상당히 복잡하니 패스하고, 오늘의 주인공인 광해군에 대해 살펴 보도록 하자.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는 바로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이다. 형님 임해군에 이어 선조의 두 번째 아들로 태어난 광해군은 조선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한 임진왜란 중에 세자에 책봉되었다. 군주국가에서 후계자 문제는 가장 중요한 국가 대사 중의 하나였다. 자질이 시원치 않았던 임해군 대신 선조의 선택은 광해군이었다.



    왜군이 동래에 상륙한 이래 파죽지세로 수도 한양까지 함락시키자, 선조는 수도를 버리고 몽진길에 오른다. 조선 개국 이래, 수도를 버리고 몽진길에 나선 첫 번째 임금이 바로 선조였다. 그리고 조선 군주 가운데 몽진 삼총사야말로 최악의 군주 트리오로 봐도 될 것 같다. 선조, 인조(총 3회) 그리고 고종이 그들이다. 어쨌든 그렇게 나라가 망할 지도 모르는 위기 가운데, 세자가 된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고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아마 조선의 군주 가운데, 수도 말고 다른 곳에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낸 군주는 광해군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않나 싶다.



    선조는 의주까지 도망가서 자신의 일신을 위해 명나라 망명까지 시도했지만, 그의 아들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면서 전쟁에 지친 백성들을 위무하고 각지에서 병력을 끌어 모아 그야말로 사그라져 가는 사직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러다 전쟁 발발 다음해에는 병까지 들었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광해군 인생에서 빛나는 1부였다면, 그 다음부터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다. 정비가 없었던 선조는 늘그막에 아들 광해군보다 더 젊은 인목대비를 들이고, 인목대비는 영창군을 낳는다. 어쩌면 여기서부터 비극이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이미 장성한 광해군은 임진왜란이라는 전대미문의 대전란을 극복해낸 장성한 예비 군주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영창군의 탄생으로 광해군 즉위를 위한 스텝이 꼬이기 시작한 것이다. 선조 말기는 광해군에게는 그야말로 가시밭길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선조가 1608년 3월 16일 사망하면서,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암투는 광해군이 조선 15대 군주로 즉위하면서 종결됐다. 일단, 광해군은 16년을 기다린 끝에 대권을 손에 쥘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과제는 첩첩산중처럼 보였다. 우선 임진왜란 이후의 국가 재건 사업을 추진해야 했다. 전쟁으로 실추된 왕권 강화 사업도 필수였다. 마지막으로 중원에서는 명청 교체기라는 조선 건국 이래 최대의 국제적 이벤트가 벌어지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재조지은’이란 표현으로 대표되듯 명나라의 지원이 없었다면 조선 국가는 존재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는 의식이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들은 무조건 명나라 편을 들어야 한다는 강상 윤리를 따지며 광해군을 압박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국가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민생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이에 광해군은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훗날 조선의 기본 조세제도를 도입한다. 기존 공납 제도의 폐단을 없애기 위한 혁신적인 법률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전국 단위의 전면적인 시행은 아니었고, 경기 지방을 중심으로 한 시범 운영이었다. 어쨌든 중종 대, 조광조와 정광필의 제안으로 그동안 논의만 되어오던 대동법의 시행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광해군의 치적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그 다음에는 대규모 궁궐영건 사업과 각종 편찬사업에 착수했다. 임진년 7년 대전란은 조선 사회 전반을 뒤흔드는 일대 사건이었다. 개국 이래 200년 동안, 그 전란 없는 평화로운 시기를 보낸 조선은 임진왜란을 통해 신분제를 필두로 해서 그동안 공고하게 지켜져 오던 사회 질서들이 무너져 내렸다. 정통 성리학이 국시인 조선에서 아무리 강상 윤리를 따져본들, 당장의 생존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전쟁 시기에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았다. 어지러워진 사회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그리고 전란으로 건강을 해친 이들을 위해 비싼 중국산 약재 대신 토산 약재를 이용할 수 있는 <동의보감>도 펴냈다. 전쟁 와중에 소실된 조선왕조실록을 다시 복간하는 작업도 동시에 추진했다. 그나저나 이런 도서 편찬작업은 글을 읽을 수 있는 양반 계층에나 해당되는 일일 텐데, 민생과는 좀 동떨어진 이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광해군은 전란 동안 불에 타고 무너져 버린 궁궐을 영건해서 국왕의 권위를 과시하고자 노력했다. 전쟁 복구가 우선이라는 신료들의 반대에도 막대한 비용과 인력이 소모되는 궁궐 영건 사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자고로, 이런 대규모 토목사업은 가능하면 치세 기간 내에 자제하는 게 권력자의 기본이 아닌가. 그것도 전쟁으로 입은 피해들이 아직 복구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대단위 궁궐 영건사업은 아무리 왕권강화를 위한 정책이라고 하더라도 반대자들의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1623년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광해군 폐위 이유로 들었던 이른바 폐모살제의 근원이 되는 계축옥사(1613년 광해군 5년)로 결국 나이 어린 영창군은 폐위되고, 인목대비는 서궁에 유폐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광해군 집권기를 대표하는 북인의 영수는 임진왜란 의병 출신 정인홍과 훈구파 출신 이이첨이었다. 광해군 집권 초기에는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삼고, 이항복과 이덕형 같은 서인 출신 정치인들도 등용하는 연립정권을 출발시켰지만, 광해군 후반으로 갈수록 이이첨을 필두로 한 북인들이 정권 요직을 차지하게 되었다. 서인들에게 좀 더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여 주었더라면, 과연 인조반정을 막을 수 있었을지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한명기 교수의 역사평전 <광해군>의 상당 부분은 결국 외교의 달인으로서의 광해군의 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임진왜란 이전부터 건주여진 출신의 누르하치는 건주-해서-야인 여진족으로 나뉘어져 있던 무리들을 통합하면서, 서방의 명나라와의 대결을 준비하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임진왜란 중에 선조에게 왜군과 싸울 기마병을 파견하겠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건국 이래 여진족을 한 수 아래로 보고 있던 조선에게는 있을 수가 없었던 일이었다.



    명나라에 철저하게 신속하던 누르하치의 여진족이 점점 세력을 키워 가면서, 대국 명나라를 상대로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만력제 이래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명나라는 자력으로 동방에서 발흥하는 누르하치의 후금을 상대할 수 없게 되자, 재조지은을 이유로 조선에 대후금과의 전쟁에 파병할 것을 요구한다. 그동안의 냉철한 정보수집과 첩보활동을 바탕으로 광해군은 명나라가 후금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하지만, 중화중심의 화이관에 사로잡힌 조선 조정의 신료들은 부모의 나라을 요청을 거절할 수 없다며 파병할 것을 강력하게 광해군에게 주청한다. 오늘날에도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 아닌가.



    재조지은의 의리와 신료들의 주장 앞에 더 이상의 시간끌기 전술이 먹혀들지 않자 결국 광해군은 파병을 결정한다. 그리고 애써 기른 5천명의 조총수들을 비롯한 만여명의 병사들을 차출해서 이른바 심하전투에 파병한다. 이 때 도원수 강홍립을 불러, 가능하면 명군의 지휘를 받지 않으면서 만주 지역에서 융통성 있는 작전을 부탁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과연 현지에서 그게 가능했을지는 의문이다.



    심하전투는 처음부터 조선군에게 불리한 전투였다. 우선 자국 영토가 아닌 타국의 영토에서 싸우게 되어 지리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게다가 오랜 행군으로 전투지에 도달해서는 이미 병사들이 지쳐 버린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보급도 원활하지 않아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져 버렸다. 무엇보다 주력군이 되어야 하는 명군은 수만 많았지 오합지졸이었다. 명나라에서는 동방의 오랑캐 누르하치에게 한수 가르쳐 준다는 생각으로 20만에 달하는 대병력을 동원해서 여진족 무리를 일소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지만, 그동안의 전쟁으로 단련된 누르하치의 후금군을 너무 얕봤다. 게다가 만주 팔기로 알려진 이른바 철기대는 어중이떠중이 끌어 모은 명나라 기마병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총사령관인 요동경략 양호 아래 편성된 명나라 일선지휘관들은 서로 전공을 세우기에 바빠 실제 전투에서 상호 간에 도무지 협력이 되지 않았다. 결국 버일러로 임명된 누르하치의 아들들인 다이샨과 홍타이지 등이 주력이 된 후금군의 기습으로 모조리 격파되고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조선군 역시 3만의 후금군의 맹공 앞에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이를 예상한 광해군의 전략적 승리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파병군의 패전은 조선에 재앙이었다. 파병군의 절반이 현장에서 전사했고, 나머지는 노동력이 현저하게 부족한 후금의 포로로 끌려갔다. 남의 전쟁에 투입되었다가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고향에 남은 가족들의 절절한 심정이 시가로 남아 있다.



    심하전투에 명나라의 강권과 조정 신료들의 열화와 같은 주장으로 파병하긴 했지만, 결국 광해군의 예측이 맞았다. 설상가상으로 요동 반도 전체가 만주족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면서 이른바 요민들이 조선에 들어오는 사태가 발생했다. 천조국 사람들을 냉정하게 대할 수도 없고 그야말로 조선 정부 입장에서는 낭패였다. 게다가 가도에 요동에서 패퇴한 모문룡이 실지회복을 주장하면서 주저 앉게 되면서 조선의 입장은 더욱 난감해졌다. 밀수업자에 가까운 깡패 모문룡은 조선 조정에 물자를 요구하고, 명나라에도 지원을 요청하면서 요동반도를 수복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오히려 후금과 내통까지 했다. 결국 명나라의 마지막 충신 원숭환에게 잡혀 처형당하고 만다.



    또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심하전투가 발생했던 1619년 과거에 급제해서 조정에 진출하는데 성공한 원숭환은 산해관에서 누르하치와 그의 후계자 홍타이지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천혜의 요새라는 산해관이 뚫리면 북경 역시 순식간에 함락될 지도 몰랐다. 원숭환은 산해관 서쪽에 영원성을 건축해서 산해관 이전에 후금을 저지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1626년 최신무기인 홍이포로 방비가 업그레이드된 영원성 전투에서 원숭환은 누르하치의 군대를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그런 명나라의 충신 원숭환 혼자만의 노력으로 국운이 쇠하는 명나라의 멸망을 막을 수는 없었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말이다.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 보자. 광해군은 명청교체기라는 동아시아 역사의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에서 조선의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외교전문가였다. 정보전의 중요성을 일찍이 깨달은 광해군은 후금에 투항한 강홍립을 통해, 후금의 내부 사정을 비밀리에 보고받았다. 동시에 조선 내부의 정보가 외부로 유출되는 것도 철저하게 막았다. 이게 바로 외교의 기본이 아니던가.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발생했다.



    광해군이 명나라와 후금 상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는 동안, 인조반정의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평산부사 이귀가 중심이 되어 광해군이 최근에 다시 기용한 김류와 최명길 등의 서인들이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의 조카 능양군 이종을 새로운 국왕으로 세우겠다는 역모가 진행되었다. 1623년 3월 즈음해서 이들의 비밀스러운 움직임을 파악한 조정의 신료들이 이귀 일당을 잡아들여 국문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빗발쳤지만, 광해군의 움직임보다 반정군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무엇보다 국왕의 친위대 역할을 맡은 훈련대장이 반정군에 붙으면서 광해군은 결국 몰락해 버렸다.



    그렇게 광해군은 권좌에서 물러나고, 그때까지 정권을 잡고 있었던 북인들은 일거에 숙청되었다. 광해군 시절 이데올로그로 활동하던 정인홍을 필두로 해서 이이첨 일당이 바로 처형되었다. 친명배금 정책을 이행하겠다고 나선 서인 반정정권이 그렇다고 하루 아침에 광해군이 조심스럽게 추진해온 줄타기 외교를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일단 명나라의 반정 추인을 받기 위해 노력을 하는 동시에 명나라와 후금 모두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문제는 인조 정권의 대세가 척화로 흐르면서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초래했다는 점이다.



    광해군식 외교가 빛나던 17세기 초반의 조선의 상황과 미중 무역대결의 여파로 관세협상의 파고가 몰아붙이는 현재의 상황이 묘하게 겹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반대파의 무력 쿠데타로 비록 정권을 잃긴 했지만, 광해군은 국익을 위해서라면 외교에서 사술도 마다하지 않는 군주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국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다. ‘재조지은’ 같은 명분보다 현재 국가 이익을 추구하는 게 바로 민생을 해결하고 국가의 지속적 발전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되돌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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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삭매냐 2025-08-03 공감(2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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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리뷰] 광해군 (리커버 특별판. 표지 2종 중 랜덤 발송)

    인륜을 져버린 폭군으로 기록되어 왔던 패자(敗者) 광해군 다시보기.. 승자들에 의해 왜곡되어 온 역사를 바로 잡는 것은 필요한 일이나, 그 과정에서 객관적 근거와 엄연한 사실을 넘어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과대평가하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조선시대 15대 왕으로서 광해군의 공과에 대한 냉정한 재평가를 보고 싶다.
    지구별여행자 2023-05-16 공감(17)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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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해군과 그가 살았던 시대에 대한 충실한 분석서



    조선왕조실록도 행간의 의미를 헤아려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조작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광해군이 왕기가 서린다는 정원군의 집을 빼앗아 그 자리에 궁궐을 지었다는 이야기는 광해군 당대의 사초 등 원자료를 옮긴 실록 본문이 아닌 인조(정원군 아들)대에 편찬될 때 작은 글씨로 추가된 세주(細註)가 출처라는 점이 대표적이다.



    한명기 교수의 '광해군'을 통해 다시 광해군 일기는 반정 세력인 서인의 입장이 반영된 글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광해군 일기는 사학사(史學史)적으로 단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유일하게 정서본(正書本)과 중초본(中草本)이 남겨진 것이 광해군 일기다.



    실록은 새 임금이 즉위한 뒤 임시기구인 실록청을 통해 편찬된다. 방대한 사고를 바탕으로 빠른 시일 내에 작성한(휘갈겨 쓴) 초벌 원고를 초초본(初草本)이라 하고 수정작업을 거친 원고를 중초본(中草本)이라 한다. 이 역시 초서로 휘갈겨 쓴 원고다. 중초본 원고를 정서한 것이 정초본(正草本)이고 정초본을 대본으로 활자를 뽑아 조판 작업을 벌여 인쇄한 것이 완성된 실록이다.



    초초본, 중초본, 정초본은 세초(洗草)한다. 종이 재활용 차원이고 완성된 실록과 다를 경우 생길 시비거리를 막기 위한 차원이기도 하다. 광해군 일기의 정서본과 중초본이 남은 것은 전쟁으로 인한 재정 부족과 청나라의 군사적 위협 때문이었다. 인쇄를 포기하고 정서한 두 벌을 강화 정족산과 무주 적상산 사고에 보관했고 중초본은 봉화의 태백산 사고에 보관한 것이다.



    광해군 일기 뿐 아니라 광해군도 기록의 주인공이다. 조선의 어느 임금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많은 곳을 노숙까지 하며 다닌 것이다. 분조(分朝)를 이끌고 왜와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분조란 위급한 때를 당하여 조정(朝廷)이 피란할 때 임금과 세자(世子)가 따로 피란하여 세자(世子)가 거느리는 조정(朝廷)을 말한다. 이 분조는 조선 역사상 유일한 기록이다.



    사실 왜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왜가 그렇게 빨리 밀고 올라오지 않았다면 선조가 광해군을 왕세자로 낙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광해군이 쫓겨난 것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해서다. 폐주(廢主) 즉 쫓겨난 임금, 혼군(昏君) 즉 어리석은 임금 등의 이름이 그에게 붙었었다. 폐주는 맞지만 혼군은 아니다.



    광해군을 쫓아낸 사람들은 반정 13년만에 청나라군의 침략을 받아 인조가 태종(홍타이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치욕을 맛보았다. 반정 세력은 광해군의 대(對) 후금 정책을 비판했지만 기본적으로 광해군의 정책을 답습했다. 광해군은 명과 청 사이에서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였다.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려 바른 세상으로 돌이킨다는 의미의 발난세반제정(撥亂世反諸正)에서 유래한 반정(反正)이란 용어 자체가 광해군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 기인한 것이다. 어떻든 반정 세력이 내세운 명분은 세 가지였다. 폐모살제, 무리한 토목공사, 후금과 밀통함으로써 재조지은을 베푼 명을 배신한 것 등이다.



    광해군의 부인 유씨가 반정 당일 창덕궁에 들이닥친 반정 주체들에게 한 말이 많은 것을 말해준다. “오늘의 거사가 대의를 위한 것이요, 아니면 일신의 영달을 위한 것이요?” 반정 주체들은 몇 사람을 빼고는 벼슬이 없는 포의(布衣) 신분이었거나 정치적으로 불우한 처지에 있었다.



    이 부분에서 상기할 말이 있다. “우암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 주류 학자들은 주자학 강화에 여념이 없었고, 정치에서 배제된 남인들은 실학적 작업에 몰두했다.”(이정우 지음 ‘인간의 얼굴’ 161 페이지)는 말이다. 포의(布衣) 신분이었거나 정치적으로 불우했던 인조반정의 주체들은 권력을 찬탈(簒奪)했고 우암 당시 정치에서 배제된 남인들은 실학적 작업에 몰두했다.



    맞 비교는 무리인가? 그렇지 않으리라. 물론 같은 시대는 아니지만 인조반정에 대해 동조했던 남인들은 나라를 다시 세운 경사(재조지경: 再造之慶)라 극찬했다. ‘어우야담(於于野談)’의 저자 유몽인을 보자. ‘상부(孀婦)‘란 시를 통해 유몽인은 새 남편감(인조)이 훌륭하다 해도 본래의 지아비(광해군)를 배신할 수 없음을 밝혔다.



    이 시로 인해 그는 반혁명 행위자로 몰려 처형당하고 말았다. 어우(於于)란 그의 호는 공자를 조롱하는 말이다. ’장자‘ 천지조에 나오는 말로 밭을 돌보는 노인이 공자의 제자 자공에게 공자를 빗대 ’허망한 말로 세상을 속이고(於于以蓋衆) 홀로 악기를 연주하며 슬픈 노래를 불러 천하에 이름을 파는 사람(獨弦哀歌以賣名聲於天下者乎)이라고 비웃으며 밭 가는 일을 방해하지 말라고 조롱한 데서 나온 말이다.(이덕일 지음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 269 페이지)



    광해군은 선조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혼(琿)이고 어머니는 공빈 김씨다. 광해군이 태어난 해인 1575년은 이조전랑 자리를 놓고 정치적 분란이 일어난 해이다. 정랑(正郎)과 좌랑(佐郎)을 의미하는 전랑(銓郞)은 5, 6품에 불과한 직이지만 장관인 판서까지도 견제할 수 있는 핵심 요직이었다.



    이 자리를 둘러싼 논쟁으로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했다. 김효원 후임으로 추천된 심충겸이 외척(명종 비 인순왕후의 동생)인 까닭으로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을 보인 세력이 동인이었고 옥석을 가려야 한다고 주장한 세력이 서인이었다. 광해군이 유년과 소년 시절을 보낸 1580년대는 중요 전환기였다. 척신정치가 끝나고 사림들이 대거 조정에 진출하던 시기였다.



    천하는 공물(公物)이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한 정여립 처리 문제로 인한 기축옥사(己丑獄事: 1589년) 과정에서 남명 문하의 수재였던 최영경의 죽음으로 수사 책임자인 송강 정철에 대해 불만을 품었던 남명 조식, 화담 서경덕 계열의 사람들이 북인이 되고, 이황의 제자들은 남인이 되는 동인의 분열이 일어났다.



    명(明)의 원병 파견은 자국이 전쟁터가 되지 않기 위해 택한 조치였다. 광해군에게 영특하고 총명하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명은 광해군을 왕세자로 승인해달라는 조정의 요청을 광해군이 둘째아들이라는 이유를 들어 번번이 거부했다. 이는 광해군의 반명(反明) 감정의 빌미가 되었다. 광해군은 끝내 명의 승인을 얻지 못했고 선조의 급서로 왕의 자리에 올랐다.



    어렵게 왕의 자리에 오른 광해군이 풀어야 할 과제는 산적한 것이었다. 왜란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어루만지고 무너진 국가 기반을 세우고 후궁의 자식이자 둘째로 등극한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왕권을 강화해야 했던 것이다. 붕당간의 갈등을 조정하고 인재를 적재적소에 써야 하는 과제도 빼놓을 수 없었다.



    심약했던 광해군을 더욱 심약하게 한 것은 형 임해군의 역모 혐의와 그에 따른 교살이었다. 광해군 5년인 1613년 대북(大北)이 영창군 및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계축옥사가 일어났다. 광해군의 계모인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도 연루되어 처형당했다. 인목대비도 저주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역모 관련자로 치부되어 대북파의 공격을 받았다.



    저주 행위란 선조가 죽은 것은 이미 죽은 ‘선조의 첫 왕비인 의인왕후 탓’이라는 소문을 듣고 인목대비가 의인왕후의 무덤에 사람을 보내 허수아비 등을 묻는 등 주술적인 행동을 한 것을 말한다. 폐모 논의는 이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무리한 토목공사는 광해군의 큰 실책이었다. 광해군은 단종과 연산군이 쫓겨난 창덕궁을 꺼림칙하게 여겼다. 당시 파주 교하(交河) 천도론이 있었으나 신료들의 반대에 막혔다. 이 좌절로 광해군이 서울에 새로운 궁궐을 짓는 것으로 방향을 바꾼 것일 수도 있다.



    후금을 치는 데 필요한 원병을 보내라는 명의 요청도 광해군에는 어려운 문제였다. 조선을 살렸다는 명분을 내세운 명의 무리한 은(銀) 수탈도 조정과 백성들을 힘들게 했다. 누르하치가 명을 멸망시키고 중원을 차지한 결정적 계기는 임진왜란이었다. 광해군은 명의 출병 요구를 거절하다가 결국 강홍립을 도원수로 하는 1만의 군대를 보냈다.



    광해군은 신중하게 처신(관망)하라는 명을 내렸다. 조선군은 후금에 항복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항복 사실만을 놓고 보면 강홍립은 비난받아야 하지만 그는 악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했다. 관망하라는 지시가 있었고 이미 전세가 기운 상황이었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은 요동 전체를 후금에게 빼앗긴 것을 강홍립의 책임으로 돌렸다. 하지만 언급했듯 전세는 이미 기운 상태였었음을 알아야 한다. 광해군은 강홍립의 항복을 고의적인 것으로 여기는 명의 의심을 희석하려 했다. 정묘호란 시 강홍립은 향도(嚮導)로 차출되었다.



    1616년 해주목사 최기(崔沂)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이천에 유배되었다가 1619년 풀려난 뒤 광해군의 부름을 받고 관직에 나아간 이귀란 자가 있다. 이귀 일당이 역모를 꾀한다는 투서가 들어가 광해군이 직접 이귀를 문초하고자 했으나 광해군을 주물렀던 개똥이가 이귀를 비호함으로써 결국 유야무야되고 말았고 이는 반정의 빌미가 되었다. 광해군의 외교는 내치에 의해 뒷받침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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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벤투의스케치북 2020-02-03 공감(1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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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명기 교수, 광해군



    영화 <광해>를 본 후 사람들은 광해군에 대한 호감도가 많이 올라갔을 것이나, 사실 광해군이 보여준 선정은 진짜 광해군이 아니라 하선이란 불리는 놀기 좋아하고 재주 많은 사내였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광해군이 보여준 장점과 단점은 분명 존재한다. <조선왕조실록>을 만화로 그려낸 박시백 화백이 말하길 자신이 좋아하는 조선임금 중에 광해군도 포함되어 있으며, 게다가 광해군이 조선임금 중에서 그나마 밥값을 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사실 광해군에 대한 논점은 역사학이나 일반 대중, 혹은 인터넷 공간에서 분분하다. 그러나 현실은 광해군에 유리한 자리를 내어주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한국에서 유교사상이 아직 내려있다. 하지만 공자의 유학보단 주자의 성리학에 의해 만들어진 유학이 강하다. 공자의 수사학적인 관점보단 주자학의 성리학적 멘탈리즘은 새로운 학문을 펼치기보단 꼰대주의적 방향으로 틀기도 했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가? 그것은 향교에 배향된 유학자들의 위패를 보면 알 수 있다. 고려와 고려이전 시대는 둘째치더라도 조선의 인물을 보면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김인후, 이황, 이이, 조헌,

    성혼, 김장생,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로 조광조까지 사림시대를 열어간 시대의 인물이다.



    특히 조광조 선생의 기묘사화는 연산군 시대의 갑자사화와 다른 성격이다. 성리학의 세력이 중앙권력자인 훈구세력과 지방산림에 포진된 신생선비들의 대립에서 일어난 것이 기묘사화라면, 갑자사화는 연산군 시대의 폭정이 만들어낸 비극이다. 조광조 이후는 조금 다르다. 명종이 죽고, 그의 종실인 하선군을 선조로 옹립한다. 선조는 당대 명재상 동고 이준경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르고, 명종 때의 부패한 정치를 해결하려 했지만, 선조 역시 기축옥사로 선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선조 시대 김효원과 심의겸의 대립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지고, 서인은 추후 노론과 소론으로 갈린다.



    동인과 서인의 분류에서 중요한 것은 동인에서 퇴계학파와 남명학파, 서인에서 율곡학파로 이어지고, 동인은 퇴계학파가 남인이 되고 북인은 남명학파가 중심으로 올라간다. 이황과 이이를 제외한 후대의 성리학자를 보면 대부분 서인계통이다. 조헌과 성혼은 율곡 이이과 가까운 사이이고, 김장생, 김집 역시 조헌과 성혼의 뒤를 이은 서인의 영수이다. 더구나 이들은 광해군의 실정을 주도한 인조반정의 대표적 인물이다. 송시열과 송준길은 노론의 대표적 인물이고, 박세채 역시 송시열과 혈족관계에 있는 점에서 조선의 유산인 향교의 반 이상의 서인계 인물이란 점이다.



    향교의 인물에서 유학에 지대한 공로가 있다고 생각해보면, 차라리 의병장 조헌보단 남명 조식의 수제자인 정인홍이 더 뛰어난 인물이고, 사상적 실학적 유학적 유산으로 보자면 송시열보단 백호 윤휴 쪽이 더 많은 서적을 남겼다. 조선실록에서 가장 많은 이름이 드러난 인물은 우암 송시열이다. 분명한 사실은 뛰어난 유학자이나, 그의 학문은 부드러움이 없었다. 광해군 시대에 처음 시작은 선혜지법은 대동법으로 이어지나, 산림의 거두였던 송시열은 노론의 입장을 대변하여 대동법을 반대했다. 대동법은 농민의 부담을 줄기위한 도량화 작업이나, 그가 반대한 이유는 노론의 대부분은 농가의 대지주였던 점이다.



    대신 한양 중심에 있던 한당(漢黨)이란 불리는 서인계열은 대동법을 찬성했고, 김육이란 분은 대동법에 모든 것을 걸은 서인계 유학자이다. 광해군과 서인들의 대립은 이렇게 복잡하게 시작된다. 당쟁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면 광해군이란 그저 중립노선 외교주의자 또는 잔혹한 폐모살제를 저지른 인물에 불과하다. 한명기 교수가 저술한 <광해군>은 2000년 초판이 나왔고, 2018년 2판이 새로 나왔다. 그동안 반양장본을 나오다 아주 깔끔한 하드커버가 씌워진 도서로 제작되었다. 게다가 책을 사면(물론 5만 이상 소비해야 하나) 광해(光海)라는 한자가 찍한 머그컵까지 주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하고,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이 정권을 잡고 있다. 그때나 지금의 특징은 당시에 북한의 권력자 김정일이 있었으나, 이제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도 세월의 부침에 따라 세상을 떠나고, 김정일의 아들 김정은이 위원장으로 있다. 단순히 북한과 한국의 대립관계가 중요한 게 아니라 당시 외교적 정쟁에서 미국과 중국, 러시아와 일본이 상당한 입김이 작용했다. 최근에 일본의 입김은 줄어들었다. G2에서 중국의 변화와 거기에 드러난 트럼프 정권은 새로운 권력구도를 만들어내었다.



    중국을 두고 공산국가를 지향하는 사회주의국가라고 하나, 사실 그 속내는 상당히 자본주의적 가치관이 도래했고, 중국은 사회주의적 노선보다 자본주의 노선에 가깝다. 사회주의란 단지 모택동이 중공을 만들기 위한 하나의 건국헤게모니에 불과하다. 중국의 개방화는 세계의 분쟁이 이념의 문제에서 점차 경제적으로 변모했다. 명분과 실리에서 실리로 가게 되면서 세계의 시장구도는 변모했다. 중국의 물품수입을 제대로 하지 않은 한국이 이제 중국에서 많은 물품을 수입하고, 공장도 세우고 사업도 연다. 이제는 중국에서 들어오는 식량과 공업품이 우리 일상을 덮는다.



    러시아가 자본주의적 시장경쟁에 뛰어들면서 북한은 20세기 중후반처럼 이데올로기만으로 중국과 러시아를 상대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최근 외교적인 모습이 불과 2년과 다르게 변모하는 것은 세계적인 강대국들의 모습을 보면 어느 정도 대략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광해군의 이름이 다시 불려나온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이다. 조선은 생각보다 평화로우면서도 아주 참혹했다. 한 국가가 600년이나 지속되는 경우는 세계적으로 드문 케이스며, 전쟁을 그래 겪고도 왕조가 존재하는 것조차 어렵다. 중국의 역사에서 큰 전쟁에 타격을 입으면 그 국가는 망한다. 조선의 역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어도 살아났다.



    대신 민중의 삶은 헐벗고 고통이었다. 전쟁의 피해는 곧 민중의 삶을 그대로 반영된다. 고대의 전쟁은 창과 칼이나 현재는 미사일과 첨단무기이다. 한사람이 한사람씩 죽이는 게 아니라 한사람이 수만 수십만의 인간을 죽일 수 있다. 광해군이 가진 장점이란 바로 그런 시기에 어떻게 하면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다. 전쟁을 하려면 많은 장정이 필요하고, 임진왜란 후 인구가 반 정도 사라진 현실에서 수많은 장정을 내보내면 국가적으로 손실이고, 거기에 필요한 군수물자는 백성의 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장정들이 타국에서 죽으면 그 가족들은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광해군 시대 삼하전투 희생자들의 부모는 다 임진왜란 당시 아비규환의 고통을 겪었다. 광해군 역시 자신도 피란의 고통을 당하고, 명나라 장수 앞에서 수모를 겪으며, 분조를 지휘하며 목숨을 잃을 뻔했다. 거리에서 죽어가는 백성을 보며 그가 느낀 조선의 미래는 무엇이었을까? 성을 짓는데 정신이 팔리고, 개똥이란 궁녀에게 속임을 당해 왕위를 잃는다. 내정에 제대로 돌보지 못함은 실수였고, 남인과 서인을 제대로 다독이지 못한 것도 실수이다. 이덕형, 이항복, 이원익처럼 임진왜란 당시 같이 고통을 나누던 원로대신을 제대로 지켜주지 않음도 실수다.



    권력의 정점에서 권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함은 책임이 크다. 그러나 이후는 그보다 못했다. 광해군 이후 밥값을 제대로 했던 임금은 누구인가? 생각하면 정조 이름을 빼면 그다지 나오기가 어렵다. 인조는 병자호란에서 임금의 자질을 이미 절실히 보여줬고, 폐모살제란 명분에서 인조 역시 자신의 권력을 위해 소현세자와 그 가족을 박대했고, 종실에서 반역의 기미가 보이면 그 역시 숙청했다. 숙종 때 이르러 삼복의 옥사는 가까운 집안 아저씨조차 사약을 내리는 비정한 임금이 되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당쟁에 의한 무고와 정치적 전략이었다. 여전히 백성에 대한 학대는 심했고, 백골난징과 황구첨정은 계속 나온 말이다.



    광해군이 그렇게 무능했고, 성을 짓는 공사에 예산을 탕진했다면, 인조는 모문룡에 바친 것은 조선 전체예산의 30% 이상이라면 차라리 성을 짓는데 돈을 투자하는 게 나을 것이다. 타인에 대한 행위를 문제 삼아 뒤집은 결과가 그 이상으로 되지 못했다면 의미 없는 행위일 것이다. 영화 <최종병기 활>을 보면, 주인공은 인조반정 당시 아버지가 반정세력에 의해 참수되는 장면을 본다. 그로부터 14년 후 어른이 된 주인공은 병자호란을 겪고 자신의 여동생과 매제가 청국에 끌려가는 것을 보고, 구하기 위해 싸운다.



    이때 조선의 관군은 해결사로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여진족에게 사냥대상에 불과하며, 조선민중은 포로로 끌려갔을 뿐이다. 병자호란이란 거대한 서사에서 이 영화는 병자호란의 정치적 색깔보단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쟁하던 남매와 소꿉친구를 보여준다. 물론 인조반정이 실패한 정치였다는 것은 영화 전체를 보면 알겠지만, 조선이란 국가의 운명도 중요하나 그보다는 나와 내 주변의 인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가가 내 소중한 사람을 지켜주지 않는다면 결국 내가 지킬 수밖에 없는 점이다.



    조선의 향교에 배향된 인물은 병자호란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인조반정의 중심인물이었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비극을 본 사람도 있다. 게다가 북벌을 주장하면서 말로만 그래하고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은 인물도 있다. 청나라의 위세를 알면서도 내부적으로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청나라는 이중적인 잣대가 적용된다. 청나라에게 분명히 패배했지만, 조선은 청나라에게 패배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청나라 사신이 오면 은을 상당히 제공하고, 온갖 거드름에 비위를 맞추며, 청나라 편에서 통역사를 맡은 자는 과거 천인이었지만, 조선에서는 당상관보다 더 높은 권세를 보여줬다.



    향교에서 임진왜란 전후의 인물로 조헌과 성혼이 있으나, 사실 임진왜란에서 더 높은 활약과 학문적으로 더 뛰어난 인물로 서애 유성룡이 있다. 향교에 퇴계 이황 이후로 남인계열 학자는 없다.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 같은 인물들은 역적 내지 사문난적, 천주학쟁이로 몰려 죽임을 당한다. 그 이전에 기축옥사에서 곤재 정개청이나 삼봉 최영경 등 같은 명유도 죽임을 당한다. 사실 퇴계와 남명 아래 수학 받은 유학자 중에 상당한 학문을 가진 자도 있었고, 연구자료도 남긴 것도 많다. 그러한데도 여전히 향교의 배향은 현재도 그러하다. 조선의 유학을 두고 세계 유학학회에서는 조선의 정약용을 빼놓지 않는다.



    지식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분명 명유는 존재하나, 향교는 그 명맥이 끊긴 점이다. 서인의 정쟁에서 승리한 이유는 왕실과 혼인하고, 지방산림의 거대한 유학자를 올려 중앙집권에서 왕을 압력하고, 지방에서도 중앙으로 입김을 작용하여 권력의 카르텔을 완성했다. 광해군은 기축옥사가 일어날 때 일개 왕자였고, 임진왜란 때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가 반정에 의해 실각하자 여진족에 의해 조선이 치욕을 당했다. 그러나 당쟁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의 운명은 피할 수 없는 비극이었다. 선조는 기축옥사로 동인세력을 제거하고, 세자거취로 서인을 견제했으며, 임진왜란 당시 남인을 활용하면서도 끝이 나자 남인 대신 북인(이산해)을 불렀다.



    말기에는 대북파 대신 소북파 유영경을 신임하다 세상을 떠났다. 선조가 저지른 붕당의 피는 광해군 시대에 대북파의 독주로 이어지고, 결국 서인에 의해 폐위된다. 광해군의 정치사는 단순히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구도가 외부의 조건에 따라 움직이는 점이다. 국내 정치에서 현재 대통령이 촛불에 의해 태어났지만, 최근에 촛불을 배신했다는 말도 나온다. 하지만 광해군의 역사적 현실을 봤을 때, 광해군은 권력의 구도에 의해 정치권력을 추구하던 그들의 명분에 맞게 돌아갔기 때문에 성공했지만, 지금은 국민이 정치권력을 추구하기 위해 이전 대통령을 탄핵시킨 게 아니다.



    물론 그 당시 외부의 조건, 내정의 여건, 이미 그 현실을 만들어낸 토대에 의해 움직인다. 선택은 스스로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선택이란 몇 가지 갈림길만 두고, 그 길 너머로 보이는 것은 높은 언덕뿐이다. 언덕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길을 가지 않을 수는 없다. 어느 길이 답이라 말할 수 없지만, 답을 정해놓기 보단 답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결국 과거의 길을 다시금 밟아볼 수밖에 없다. 과거처럼 정권에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을 멋대로 감옥에 잡아와 장형으로 죽게 만들고, 가족들과 친구, 그 친구의 가족조차 잡아 죽일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해오던 사람들을 역사책에서 보는 것만이 아니라 드라마와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이 구루시마군을 울돌목에서 격파할 때, 자신의 수하 안위 장군에게 명령을 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안위가 물러서면 군령에 의해 참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도 안위는 살아가기 힘든 여건에 있다. 안위의 삼촌뻘 되는 사람이 기축옥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정여립이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안위가 임진왜라에서 공을 세워도 추후 정묘호란이 일어날 때 기용하지 않는다. 그가 정여립의 조카라는 사실이다. 기축옥사가 1589년이고, 정묘호란이 1627년이다.



    당장이라도 조선이 망할 위기인데도 당쟁의 관계성을 따진다. 광해군시절의 중요업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광해군 시대에 이순신의 사당이 제대로 생겨났고, 유성룡의 병산서원의 액자가 내려졌으며, 원균의 가족이 받던 녹봉을 중지했다는 점이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원균의 가족에게 다시 곡식이 녹봉으로 내려졌다. 선조가 공신목록에서 1위 이순신의 옆자리에 원균과 권율을 올리는 것은 다소 과도한 처사이다. 차라리 홍의장군 곽재우가 이순신 옆이라면 모두가 인정할 것이다. 아니면 진주성의 김시민 장군 정도면 말이다.



    광해군은 위에 거론한 인물과 동시대에 살아간 인간이다. 권력의 최고점에도 있지만,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던 인물이다. 시대는 변화 하고, 전쟁의 상흔은 남아있다. 한국 역시 한국전쟁의 상처가 70년이 지나지 않았다. 전쟁의 비극, 배고픈 시대, 암울한 정치, 권력에 의해 숙청되는 지식인과 정치인, 외교적 갈등 등을 보면 400년 전에 혼란하던 광해군의 시대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향교와 관련하여 전주 경기전에 놀러간 적이 있다. 신혼여행 이후 데이트스냅을 찍으며 경기전과 전주향교를 거닐었다.



    경기전을 재건한 인물이 광해군이고, 광해군이 폐위된 후 숙종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그곳에 모신다. 전주이씨 문중을 매년 일정한 시기가 되면 제사를 지낸다. 과거 조선시대의 의복을 입고, 한자어로 된 축문을 읽는 그들이 우리에겐 과거의 유산일까? 아니면 현재의 새로운 관광자원일까? 적어도 그들이 전주이씨 문중이면서도 과거의 광해군이란 먼 조상친척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복거리에 많은 여성들이 개량한복을 입고 셀카를 찍거나 아니면 추억을 기념할만한 인생사진을 남긴다. 이러나저러나 광해군은 문제가 많은 임금이나 밥값은 제대로 한 임금은 분명하다. 전주의 한복거리를 거닐며 수많은 인파가 즐거운 얼굴로 하루를 보내기 때문이다.



    광해군, 그도 사실은 한복거리처럼 수많은 한국인, 조선인의 후예들이 즐거운 삶을 살기를 바랐을까? 광해군이 다른 왕자와 같은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반찬이 뭐냐고 물었을 때 다른 왕자와 달리 지혜로운 답을 내놓았다. 소금이라 답을 했다. 소금이 있어야 음식의 맛을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옛날과 지금까지 지위와 계급, 부와 빈을 막론하고 한국과 동양에서 쌀과 소금은 모두가 공통으로 먹는 음식이다. 소금은 왕자인 본인도 물론이고, 길가의 봇짐장수조차 먹는 음식이다. 전쟁의 아픔과 당쟁의 피로는 스스로를 결국 몰아갔다. 그가 남긴 업적과 실책은 여전히 우리에게 호불호가 갈린다. 하지만 적어도 100년 전보다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은 분명하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가 지속적으로 대화하는 것이라면, 그가 남긴 업적이 우리에게 충분히 밥값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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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애니비평 2018-11-25 공감(12) 댓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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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리뷰] 광해군 (리커버 특별판. 표지 2종 중 랜덤 발송)

    탁월한 외교 정책을 펼친 군주라는 책의 부제답게 이 책의 절반 가량이 당시 동아시아 정세와 광해군의 외교정책에 할애하여 서술되어 있다.
    광해군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이 책은 당시 주변정세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작가의 해석을 자세히 알려준다는 면만을 보더라도 의미있는 독서를 할 수 있다 하겠다.
    하지만 반대로 책의 부제에 너무나 충실한 나머지(의도적이었겠지만.....) 광해군의 국내 실정(대규모 궁궐공사, 역모사건 등)에 대해서는 왕권강화 내지는 세자시절 겪었던 수모에 따른 컴풀렉스 등으로 인해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는 측면 혹은 외치를 바쳐주는 내치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에 중점을 두고 서술되어 있다.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경험에 빠진 군주
    - 오항녕의 광해군 - 그 위험한 거울
    - 한명기의 광해군 - 탁월한 외교 정책을 펼친 군주
    만약 광해군시대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이 3권의 책을 함께 읽는 것이 흥미로울 것 같다.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이처럼 극단적이다. 부정적인 평가의 경우, 인조반정을 성공시켜 광해군을 쫓아냈던 서인들의 집권이 이어진 상황에서 광해군에 대한 지속적이고 의도적인 죽이기를 계속함으로써 그의 본 모습을 가리는 측면이 있다. 긍적적인 재평가는 식민사관(만선사관)이 지닌 정치적 노림수에 말려들 위험성이 적지 않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양쪽 압장 모두 지극히 정치적이다. p.33

    광해군의 왕권은 정인홍과 이이첨의 협력을 받아 어느 정도 높아져 갔지만 그 과정에서 이들은 더 높은 신권의 확보를 추구했다. 특히 이이첨이 왕권강화를 빙자하여 자신의 권력을 키워가고 궁극에는 그것을 남용한 것이 자신 뿐만 아니라 정인홍과 광해군도 파멸의 길로 몰아갔다. 인목대비와 마찬가지로 두 사람이 광해군과 맺은 악연의 끈도 참으로 질겼다. p.87

    비록 정권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이이첨 등은 사림의 여론을 움직이고 그들의 심복을 얻오내는 것이 권력만으로 되지 않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까? 광해군과 더욱 밀착하는 수밖에 없었다. 왕권을 등에 업고 왕권강화를 외치면서 그것을 빌미로 자신들의 권력을 확대해가는 방식이다. 폐모살제의 비극은 이 같은 흐름 속에서 싹트고 있었다. p.131

    궁궐건설에 대한 광해군의 집착은 일단 그의 소시뫈 성격, 왜란이후의 간난신고, 천도 사도가 좌절된 데 대한 보상 심리 등에서 그 배경을 찾을 수 있겠다. 다음으로는 왕실의 위엄을 세우고 왕권의 위상을 높이려는 욕구와 연관된 것이다. p.152

    왜란이 끝난 이후 명은 조선에게 그만큼 버거운 존재였다. 명이 도와주었다 그러므로 그 은혜를 보다봬애 한다는 의식이 퍼져가면서 명은 더욱 생색을 내고 조선은 부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 와중에 명에서 심각해지고 있던 광세의 폐가 조선에서 변형되어 재현되었다. 요컨데 조선은 ‘재조지은‘을 ‘은‘으로 갚아야만 했다. p.182

    원정군 가운데 1만은 조선의 정예병만을 선발하여 훈련했다. 이제 장수와 병사들이 서로 숙달하게 되었노라. 그러니 그대는 명군 장수들의 명령을 그대로만 따르지 말고 신중하게 처신하여 오직 패하지 않는 전투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라. p.215

    조정에는 ‘삼창‘이 조정 바깥에는 정인홍이 버티고 있었다. 서인이나 남인들의 눈에 그것은 철옹성이었다. 광해군 대에는 그 때문에 주변부에서 빙빙 돌았지만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권력을 잡은 이상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삼창이나 정인홍의 정치적 행태는 배울 가치가 충분했다. 인조 반정 주체들 사이에서 ‘물실국혼‘, ‘숭용산림‘의 밀약이 나왔던 것은 바로 이론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p.287

    아 훈신들이여 / 잘난 척하지 말아라
    그들의 집에 살고 / 그들의 토지를 차지하고
    그들의 말을 타며 / 또다시 그들의 일을 행하니
    당신과 그들이 / 돌아보건디 무엇이 다른가
    반정공신들의 행태에 비판적인 분위기는 이처럼 당시 사대부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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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로카가티아 2018-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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