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16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69 요시다 쇼인, 메이지 유신의 정신을 만들다

요시다 쇼인, 메이지 유신의 정신을 만들다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69회 - YouTube

요시다 쇼인, 메이지 유신의 정신을 만들다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69회
법률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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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강연은 함재봉의 『한국 사람 만들기 II: 친일개화파』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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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제69회 강연 내용에 대한 요약과 평론입니다.

요약

  • <요시다 쇼인의 사상과 정한론의 사상적 기원> 요시다 쇼인은 에도 막부의 무능과 굴욕적 외교를 비판하며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적 질서로 회귀해야 한다는 '존왕' 사상을 설파했다. 그는 서구 열강의 위협 속에서 일본이 생존하고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서는 국내 체제 변혁뿐만 아니라 주변국으로 세력을 확장해야 한다고 보았다. 특히 서구에 빼앗긴 이권을 보상받고 방어선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 만주, 대만을 복속시켜야 한다는 팽창주의적 구상을 제시하여 훗날 군국주의와 정한론의 사상적 모태를 제공했다.

  • <쇼카손주쿠와 조슈번 청년들의 지적 네트워크> 요시다 쇼인이 운영한 사설 학당 쇼카손주쿠(송하촌숙)는 가문과 신분을 뛰어넘어 하급 무사와 평민 출신 청년들에게 실천적 학문과 세계 정세를 교육하는 요람이었다. 쇼인은 제자들에게 맹목적 유교 경전 암기가 아닌 국가의 위기 타개를 위한 현실적 실천을 촉구했으며, 이는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기도 다카요시 등 메이지 유신을 기획하고 이끈 핵심 주도 세력의 결속력과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 <존왕양이에서 토막(討幕) 및 메이지 유신으로의 비약> 초기 외세를 배척하자는 맹목적 '양이(攘夷)' 운동은 서구 열강과의 실전(사쓰에이 전쟁, 시모노세키 포격전)을 거치며 불가능함이 입증되었다. 조슈와 사쓰마의 지사들은 서양 무기와 기술을 전면 수용하지 않고서는 양이가 불가능함을 깨닫고, 막부를 타도(토막)하여 서구식 근대 국민국가를 건설하자는 메이지 유신의 현실적 노선으로 급격히 전환했다.

  • <메이지 유신 지배 엘리트의 성격 규정> 쇼카손주쿠 출신을 비롯한 조슈·사쓰마의 번벌(藩閥) 엘리트들은 권력을 장악한 후 서구의 법제와 군사 제도를 도입하면서도, 요시다 쇼인으로부터 물려받은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대외 팽창 노선을 국가 정책의 근간으로 삼았다. 이로써 메이지 정부는 시작부터 근대화와 군국주의 팽창이라는 양면성을 내포한 국가로 출범하게 되었다.

평론

제69회 강연은 일본 근대화의 엔진이자 군국주의의 산실이 된 요시다 쇼인과 조슈번 엘리트 네트워크의 실체를 파헤치며 동아시아 근대사의 비극적 분기점을 조명한다.

첫째, 메이지 유신을 이끈 주도 세력의 사상적 DNA를 정밀하게 추적한다. 서구 제도를 모방한 근대화의 외피 아래에 요시다 쇼인이 주입한 천황 숭배와 침략주의적 정한론이 깊게 뿌리내리고 있었음을 명확히 규명한다. 이는 일본의 근대화가 왜 필연적으로 제국주의적 침략과 군국주의적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는가를 구조적으로 이해하게 돕는다.

둘째, 맹목적 관념론에서 현실적 실천주의로 급선회한 일본 하급 무사층의 유연성을 보여준다. 양이의 불가능성을 깨닫자마자 막부 타도와 서구 문물 전면 수용으로 노선을 바꾼 조슈번 청년들의 행보는, 성리학적 도그마와 척화비의 틀에 갇혀 실리적 전환의 기회를 번번이 놓쳤던 당대 조선 위정척사파의 경직성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다만, 요시다 쇼인의 사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 그가 지닌 광신적 테러리즘의 측면이나 막부 말기 내부의 잔혹한 정쟁 과정에 대한 비판적 평가는 다소 축약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침략 주역들의 사상적 뿌리와 한반도 침탈 구상의 지적 연원을 파악하는 데 있어 매우 명쾌하고 날카로운 통찰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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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재봉 「한국인의 탄생」 69회

<요시다 쇼인, 메이지유신의 정신을 만들다> 요약·평론

69회는 앞의 68회에서 다룬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의 문제의식을 그의 제자 <요시다 쇼인(吉田松陰)>과 그 제자들에게 연결한다. 이번 회의 핵심은 단순히 “요시다 쇼인이 위대한 사상가였다”는 데 있지 않다. 함재봉은 한 사람의 교육자가 작은 시골 학교에서 길러낸 젊은이들이 훗날 메이지유신을 주도하고 일본의 정치·군사·외교 체제를 만든 과정을 보여주려 한다.

따라서 69회는 지금까지의 메이지유신 설명 가운데 <사상이 어떻게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어떻게 조직을 만들며, 조직이 어떻게 국가를 바꾸는가>를 보여주는 회차라고 할 수 있다.


1. 작은 조슈 마을에서 시작된 요시다 쇼인

요시다 쇼인은 조슈번의 하급 무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학문적 능력을 보였고, 11세 무렵에는 번주 앞에서 강론할 정도로 재능을 인정받았다고 함재봉은 설명한다.

여기서 함재봉이 주목하는 것은 에도 일본의 교육구조다.

신분적으로 최고위층이 아니어도 재능이 있으면 번에서 교육을 받고, 에도로 유학하며, 다른 번의 학자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각 번이 인재를 경쟁적으로 발굴하고 교육시켰다는 것이다.

쇼인도 고향의 교육기관에서 출발했지만 곧 에도로 가서 더 넓은 세계를 접하고, 그곳에서 사쿠마 쇼잔에게 배우게 된다.

함재봉에게 이것은 메이지유신의 중요한 사회적 조건이다.

<지방에서 발견된 인재가 전국적인 지식 네트워크로 들어갈 수 있었다.>


2. 허가 없이 번을 떠나다 ― 지식에 대한 집착

쇼인의 성격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이 동북지방 여행이다.

그는 일본의 해안방어 실태와 군사시설을 직접 조사하기 위해 여행하려 했으나 번의 공식 허가가 늦어지자 그대로 출발해 버린다.

당시 무사는 자기 번을 마음대로 떠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는 ‘탈번’이라는 중대한 범죄였다.

돌아온 쇼인은 처벌을 받아 무사 신분과 봉록을 잃는다.

그런데 함재봉이 흥미롭게 강조하는 것은 그 다음이다.

조슈번은 그를 처벌하면서도 동시에

<앞으로 10년 동안 어디든 다니면서 공부해도 좋다>

는 허가를 내준다.

범법자는 처벌하지만 유능한 인재의 학습능력은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함재봉은 이런 사례에서 에도 일본의 교육적 유연성을 본다.


3. 1853년 페리의 흑선이 모든 것을 바꾼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군함을 이끌고 일본에 나타난다.

일본에 개항을 요구하고 미국 대통령의 국서를 막부에 전달한 뒤 다음 해 다시 오겠다고 한다.

쇼인은 이미 스승 사쿠마 쇼잔에게서

<서양을 막으려면 먼저 서양을 알아야 한다>

는 사고를 배운 상태였다.

막부가 페리의 요구를 어떻게 처리할지를 고민하는 동안 쇼인의 생각은 훨씬 급진적이었다.

<미국에 직접 가서 배워야 한다.>

쇼잔도 제자의 이러한 생각을 적극 지지한다.


4. 미국 군함에 몰래 올라타려 한 요시다 쇼인

1854년 페리가 다시 일본에 왔을 때 쇼인은 실제 행동에 나선다.

작은 배를 타고 밤에 미국 함선으로 접근해 자신을 미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요청한다.

단순한 ‘유학 희망’이 아니다.

당시 일본인의 해외출국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행동이었다.

미국 측은 일본과 외교협상을 하고 있던 상황에서 불법 출국자를 태워갈 수 없다고 판단해 그를 돌려보낸다.

쇼인은 체포되어 막부에 넘겨지고 다시 조슈로 보내져 감옥생활을 한다.

함재봉은 이 사건을 요시다 쇼인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으로 본다.

<책으로만 배우지 않고 직접 보고 배워야 한다는 행동주의>

가 있었기 때문이다.


5. 감옥에서도 교육자가 된다

쇼인은 감옥에 들어가서도 공부하고 사람들을 가르친다.

이후 풀려나 집에 연금되고, 그의 숙부가 운영하던 작은 학교를 이어받아 젊은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 학교가 유명한 <쇼카손주쿠(松下村塾)>다.

함재봉은 이 학교를 대단히 강조한다.

규모는 매우 작았다.

그러나 이 작은 학교에서 훗날 일본 근현대사를 움직이는 수많은 인물이 배출된다.

강연에서는 약 80명의 학생 가운데 상당수가 메이지정부의 고위관료와 지도자가 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6. 쇼카손주쿠가 특별했던 이유

함재봉이 쇼카손주쿠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는 점은 <신분을 크게 따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에도의 신분사회에서 무사계급 내부에도 엄격한 서열이 있었다.

그러나 쇼인은 재능과 의지가 있는 젊은이라면 비교적 폭넓게 받아들였다.

교육내용도 단순히 유교경전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 국제정세
  • 군사
  • 외교
  • 해양방어
  • 서양학문
  • 국가의 장래

를 함께 논의했다.

결국 쇼카손주쿠는 단순한 서당이 아니라

<나라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토론하는 정치적 교육공동체>

가 되었다.


7. 제자들이 메이지유신의 행동세력이 되다

쇼인의 제자 가운데 함재봉이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기도 다카요시>
<다카스기 신사쿠>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구사카 겐즈이>

등이다.

이들의 운명은 서로 달랐다.

일부는 메이지유신 전에 죽었고 일부는 살아남아 새 정부의 중심인물이 된다.

그러나 공통점은 요시다 쇼인의 교육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함재봉은

<사쿠마 쇼잔 → 요시다 쇼인 → 쇼카손주쿠의 제자들 → 메이지유신>

이라는 뚜렷한 지적·인적 계보를 그린다.


8. ‘기헤이타이’ ― 사무라이만 싸우는 군대를 버리다

특히 중요한 인물이 다카스기 신사쿠다.

그는 조슈번에서 <기헤이타이(奇兵隊)>라는 새로운 군사조직을 만든다.

에도시대의 전통적 군대는 기본적으로 사무라이 군대였다.

그러나 기헤이타이는 신분을 넘어 농민·상인 등도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함재봉은 이것을 일본 근대군대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로 본다.

논리는 단순하다.

<나라를 지키는 것은 사무라이만의 일이 아니다.>

전국민이 같은 국가를 지켜야 한다면 군대 역시 신분제에서 벗어나야 한다.

훗날 메이지정부가 징병제를 실시하면서 사무라이의 군사적 독점은 사라진다.

따라서 함재봉에게 기헤이타이는 군사혁명인 동시에 <국민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9.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이토 히로부미

쇼인의 교육적 영향력이 가장 오래 지속되는 사례로 함재봉은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이토 히로부미를 다룬다.

야마가타는 훗날 일본군의 근대화와 징병제 도입을 이끌고 일본 제국군의 토대를 만든다.

이토 히로부미는 외국 경험과 정치능력을 바탕으로 메이지정부의 핵심 지도자가 되고 일본 최초의 내각총리대신이 된다.

함재봉은 특히 이토와 야마가타의 역할을 대비해서 설명한다.

<이토 = 외교·정치·제도>
<야마가타 = 군사>

두 사람이 경쟁하면서도 메이지국가를 함께 만들어갔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작은 쇼카손주쿠에서 만들어진 인간관계가 훗날 일본 중앙정부의 권력 네트워크가 된 셈이다.


10. 요시다 쇼인의 가장 흥미로운 모순 ― 존왕과 개국

요시다 쇼인은 철저한 <존왕론자>였다.

천황을 국가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서양을 적극적으로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겉으로 보면 모순이다.

<천황이라는 전통을 복원하면서 어떻게 서양식 근대화를 추진할 수 있는가?>

함재봉은 바로 이 모순이 메이지유신의 본질이라고 본다.

메이지유신은 전통을 버리고 서양으로 간 혁명이 아니었다.

오히려

<천황이라는 가장 오래된 전통을 복원한다는 명분으로 가장 급진적인 근대화를 추진한 혁명>

이었다.

그래서 왕정복고가 오히려 근대국가 건설의 정치적 정당성이 된다.


11. 막부에 대한 충성에서 천황에 대한 충성으로

쇼인에게는 페리의 등장 이후 하나의 중요한 정치적 전환이 일어난다.

막부가 미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천황의 뜻을 충분히 따르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막부에 강하게 반발한다.

막부는 더 이상 일본을 지키는 정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결과

<막부에 대한 충성>

보다

<천황과 일본에 대한 충성>

이 우선하게 된다.

함재봉은 이 변화가 중요하다고 본다.

기존 봉건질서에서는 충성의 대상이 자기 번과 주군이었다.

하지만 메이지유신 세대에서는 점차

<번보다 일본>

이라는 새로운 충성관계가 만들어진다.


12. 안세이 대옥과 요시다 쇼인의 죽음

막부는 점점 급진화되는 존왕양이파와 반막부 세력을 탄압한다.

이것이 <안세이 대옥>이다.

쇼인은 다시 체포되어 에도로 압송된다.

그는 자신이 막부 요인을 제거하려 했던 계획 등을 숨기지 않고 말했고 결국 사형선고를 받는다.

1859년 10월 27일, 29세의 나이에 처형된다.

함재봉이 강조하는 것은 죽기 직전까지의 태도다.

쇼인은 자신의 죽음을 개인적 비극이라기보다 나라를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치러야 하는 희생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남긴 메시지는 이후 조슈의 젊은 지사들에게 강력한 정치적 유산이 된다.


평론

1. 69회의 가장 큰 장점 ― ‘사상’과 ‘사람’을 연결했다

66~68회가 학문과 사상을 주로 설명했다면 69회는 그 사상이 어떻게 <인간 네트워크>를 통해 역사적 힘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이 점이 매우 좋다.

아이디어가 있다고 혁명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스승 → 학생 → 동료집단 → 조직 → 정치권력>

이라는 전달경로가 있어야 한다.

쇼카손주쿠는 바로 그 연결고리였다.

함재봉의 설명에서 요시다 쇼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자신이 무엇을 직접 이루었다는 것보다 <사람을 길러냈다는 것>이다.


2. 그러나 ‘한 사람이 나라를 바꾸었다’는 설명에는 위험이 있다

강연 첫머리에서 함재봉은 한 사람이 한 나라의 운명을 얼마나 크게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쇼인을 제시한다.

흥미로운 서술이지만 다소 조심해야 한다.

지금까지 함재봉 자신이 63~68회에 걸쳐 설명한 내용을 생각하면 메이지유신에는 이미

  • 에도 경제의 성장
  • 높은 문해력
  • 번의 자율성
  • 난학
  • 서양군사기술
  • 조슈·사쓰마의 경제력
  • 막부체제의 약화
  • 서구 열강의 압력

이라는 거대한 구조적 조건이 존재했다.

따라서

<요시다 쇼인이 메이지유신을 만들었다>

기보다

<이미 변화하고 있던 일본에서 쇼인이 새로운 세대에게 방향과 언어, 행동의지를 제공했다>

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3. 가장 중요한 부분은 ‘교육의 방식’이다

쇼인의 교육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정답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현실문제를 학생들과 함께 고민했다는 점이다.

<서양은 왜 강한가?>
<일본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가?>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누가 나라를 지켜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어린 학생들에게 던졌다.

이것은 유교경전의 지식을 외우는 교육과는 성격이 다르다.

함재봉의 강연에서 쇼카손주쿠는 사실상

<정치적 판단력을 훈련하는 학교>

로 나타난다.

그런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이 10~20년 뒤 실제 국가권력을 잡았다는 점이 메이지유신의 중요한 특징이다.


4. 그러나 ‘행동주의’에는 어두운 면도 있다

69회를 비판적으로 읽을 때 중요한 부분이다.

함재봉의 서술에서는

<결단력·희생·애국심·행동>

이 상당히 긍정적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쇼인의 제자들이 활동했던 막부 말기에는 암살·폭력·무력충돌도 정치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강연 자체에서도 구사카 겐즈이의 죽음, 다카스기 신사쿠의 무장조직, 막부와 조슈의 군사충돌 등이 계속 등장한다.

따라서 이들을 단순히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청년들’이라고 낭만화해서는 곤란하다.

<근대국가를 만드는 힘과 정치폭력을 정당화하는 힘이 같은 애국주의에서 나올 수 있다>는 점까지 볼 필요가 있다.


5. ‘국민군’이라는 혁명적 발상이 이후 무엇이 되었는가

기헤이타이와 징병제에 대한 함재봉의 설명 역시 매우 중요하다.

신분을 넘어 모든 사람이 군대에 참여한다는 것은 봉건제를 무너뜨리는 혁명적 변화였다.

사무라이만 나라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국민이기 때문에 모두가 나라를 지킨다>

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것은 두 얼굴을 갖는다.

국민군은 신분해방과 국민통합의 도구가 될 수도 있지만, 강력한 국가가 국민 전체를 군사적으로 동원할 수 있게 만드는 제도이기도 하다.

이후 일본제국의 역사를 생각할 때 이 양면성을 놓쳐서는 안 된다.

69회에서는 첫 번째 측면, 즉 국민통합의 의미가 훨씬 강하게 강조된다.


6. 이토 히로부미를 다루는 대목은 특히 한국 독자에게 중요하다

함재봉도 흥미롭게 지적하듯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에서는 근대국가 건설의 핵심 지도자 가운데 하나이지만 한국인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같은 인물이

<일본에서는 근대화의 영웅>

이면서

<한국에서는 식민지화의 핵심 인물>

이 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어느 평가가 옳으냐는 문제가 아니다.

메이지유신 자체가 갖는 역사적 양면성을 보여준다.

일본 내부에서는 봉건제를 해체하고 국민국가를 건설하는 혁명이었지만, 그 국가의 역량이 커지면서 주변국에 대해서는 제국주의적 힘으로 작용했다.

69회의 논의를 한국사의 문제로 연결하려면 바로 이 지점까지 가야 한다.


63~69회를 함께 보면

지금까지 일곱 회를 연결하면 함재봉의 메이지유신 설명이 거의 완성된다.

63회 — <도쿠가와 정치질서와 참근교대>

64회 — <조슈·사쓰마의 정치적 기반>

65회 — <에도의 시장경제>

66회 — <교육과 사상의 다양성>

67회 — <난학과 과학적 지식>

68회 — <사쿠마 쇼잔과 국가안보의식>

69회 — <요시다 쇼인과 인재 네트워크>

<제도 → 경제 → 지식 → 위기의식 → 교육 → 조직 → 혁명>

이라는 흐름이다.

이 가운데 69회가 하는 역할은 매우 분명하다.

이전까지 축적된 모든 조건을 <행동하는 사람>으로 전환한다.


종합 평가

69회는 함재봉의 메이지유신론에서 중요한 전환점이다.

앞선 강연들이 “일본에는 왜 근대화가 가능한 조건이 있었는가?”를 설명했다면 이번 회는

<그 조건을 누가 실제 정치혁명으로 바꾸었는가?>

를 설명한다.

함재봉의 답은 요시다 쇼인과 그의 제자들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쇼인 개인의 천재성이 아니다.

<배움 → 여행 → 외부세계 관찰 → 토론 → 후진교육 → 정치적 행동>

이라는 연쇄가 가능했던 사회적 환경이다.

특히 작은 쇼카손주쿠에서 공부한 젊은이들이 훗날 일본의 정치·외교·군사제도를 설계했다는 사실은 교육의 장기적 힘을 매우 극적으로 보여준다.

동시에 69회는 메이지유신의 위험한 측면도 처음으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강력한 애국심, 신분을 초월한 국민적 동원, 강군 건설, 행동주의는 일본을 서양 제국주의의 희생자가 되지 않게 하는 힘이 되었지만, 바로 그 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자신을 제국주의 국가로 만드는 힘이 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이번 회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요시다 쇼인은 메이지유신을 직접 완성한 사람이 아니라, 일본을 바꿀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방법과 행동하는 방법을 가르친 사람이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역사적 역설은 이것이다.

<서양의 침략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강력한 근대국가가 훗날 스스로 주변국을 침략하는 국가가 되었다.>

앞으로 함재봉의 ‘친일개화파’ 논의를 평가할 때는 바로 이 두 단계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메이지 일본에서 배우려 했던 조선 개화파>와 <제국주의 일본에 협력한 친일파>를 처음부터 같은 범주로 놓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점점 본격적으로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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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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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한국인의 탄생의 함재봉입니다. 오늘은 사실 우리 한국에서도 많이
알려져 [음악] 있고 그리고 어떻게 보면은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음악]
지주라고도 어 불유는 요시다 쇼인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 제자들을
엄청난 [음악] 제자들을 길러서 그 제자들이 메이지을 일으킵니다.
선생님의 어 교육을 받고 어 그것도
어 불과 2년 동안에 운영한 고향 마을의 작은 어 그
학교에서 어 총 여명 [음악] 80명을 어 교육을 시키는데 그중에
무려 [음악] 60명이 나중에 메이지 정부하에서 대신을 [음악] 비롯해서
고위급 어 그 그 정부 관려가 되고 어
나라의 지도자가 됩니다. 한 인물이 얼마나 한 나라의 그 방향을 [음악]
운명을 바꿔 놓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아주 좋은 어 예가 바로이
요시다 [음악] 쇼인입니다. 어 그래서 그 요시다 쇼인 그리고 요시다 쇼인이 길러낸 그 제자들의 면물을 좀
오늘 함께 살펴보는 [음악]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인의 탄생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음악]
메이지는 우리가 그 도구가와 막부라는 것을 조슈하고 사스마라는 두 번이
힘을 합쳐서 무너뜨리면서 일으킨 것이 메이지 유신이다. 이렇게
이제 얘기를 하는데 그 조주하고 사스마 중에서 특히 조주번에서
어 나온 인물들을 그야말로
거의 다를 길러낸 어 정신적 지주 진정한의 스승이 요시다 쇼인입니다.
정말로 작은 마을에서 초원에서 태어납니다. 어 그 지금 야마구치 현
그 당시 조수원의 어 그 당시 수도였던 하기 어 성에서 태어나는데
저도 얼마 전에 하기의성을 한번 다녀와 봤지만은 아주 시골입니다. 아주 시골이고 아주
작은 마을인데 그 마을에서 이렇게 많은 어 인물들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 참으로 어 놀라웠습니다. 근데 그 엄청난 일을 읽고 낸 사람이
요시다 쇼인입니다. 요시다 쇼인은이 메이지 유신을 일으킨 거의 대부분의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번의 아주 하급 무사 집안에서
어 태어납니다. 어려서부터 굉장히 촉명했고요. 그래서 어 그 우리가
지난 시간에 그 말씀드렸던 그 명윤관 메일린관이라는
어 그 조주 번에서 만든 학교에 일찍감치 들어가서 어
여덟살 때부터 공부를 시작해서 두 각을 나타냈습니다. 저는 항상 놀라는 것이 학업 사무라이더에도 그 신분의
관계 없이 각 번에서 학교를 세워서 어렸을 때부터 교육을 시켰다라는 것이
참으로 놀랐습니다. 같은 어 균등한 교의 기회를 줬고 거기서 분명하게
자기의 두각을 나타낸 학생이 있으면은 신분 아버지가 누구고 할아버지가
누구고 집안 배경의 모구를 상관없이 적극적으로 장리를 합니다. 그래서
워낙 그 요시다시인이 어려서부터 이제 똑똑해서 어 그래서 한번은 11살 때 11살
때 아예 다이묘 앞에 가서 다이묘가 이제 모리 다카치카라고 그 당시
조수를 가장 앞서가는 번호로 만들려고 그 개방 굉장히 개혁적이고 개방적인
그러한 다이며였었습니다. 성주였었습니다. 그 성주 앞에 가서 11살짜리가 가서 어 강연도
했었답니다. 그래서 더욱더 그 머리에 어 그 사랑을 받고 인정을 어려서부터
봤 받았다고 그럽니다. 각 번들이 각 자기 번에서 두각을 나타낸 학생님은
물론 자기네도 교육을 시키지만 또 애도로 보내서 어 수도로 그말 수도로
이제 보내서 수도에 가서 더 넓은 교류를 하고 다른 번의 사람들
그다음에에도 막부의 중앙 정부에 있는 인사들과도 교류를 하고 거기에 있는
학교를 다니고 거기에 있는 학자들 만나서 교류를 하도록 합니다. 가
참으로 개방되어 있었고 인재들 양성에 경쟁적으로 번들이 뛰어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2살 때 에도에 가서 거기에서 이제 스승이었던 이제 나중에
유명한 스승이 되는 사쿠마 쇼잔 같은 사람들을 만나서 그 밑에서 이제
공부도 하고 감화를 받고 어 그럽니다. 그리고 이때에 바로 어
에도에서 이제 유행하고 있었던 부국강병론 그다음에 에도에서 또 유행하고 있었던 해방론 이런 그
바다를 지켜야 된다라는 어 해국도지 중국의 위원의 영향도 받고 그래서
일본에서도 이제 이때부터 바다를 지켜야 된다라는 그 해방론 이런 거 이런 것들을 이제 읽으면서
막부 말기의 대표적인 안보 지식인으로서 이제 커가기 시작합니다.이 이 쇼인의 성격을 어
인물 됨미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어 사건 중에 하나가 바로 어 이때에
애도에 가서 책들을 보고 해방론이나 이제 바다에다가 어떻게 요새를 짓고 뭐를
해야 된다 이런 여러 사람들이 책을 읽고 이러더니 그 당시에는 일본에서는
자기 번에서 벗어나서 애도를 가고 또 에도에 가서 에도를
벗어나서 다른 데로 가려 그러면은 꼭 자기 번에 번주에 허락을 맡아야 되는
겁니다. 근데 이때에 이때에 여시다시오인는
구두는 허락을 맞지만 실제로 자기 아직 허가증이 오기도 전에 에도를
떠나서 동북부 지방으로 가봅니다.가 버립니다. 그러니까 동북북구 지방으로
가는 이유가 거기에이 바다의 경비 같은 것이 어떻게 돼 있는지 그러니까 이제 전국을 돌면서
특히 동북 지방을 돌면서 거기가 이제 그 러시아랑 가깝고 이러니까 동북
지방을 돌고 이러면서 우리 방비 상태가 어떤가 무슨 요새가 있는가 무기 체계는 어떤가 이제 이런
거를 보기 시작을 하는 거죠. 그래서네 달 동안이나 이제 돌아다닙니다. 공문이 도착하기 전에
떠났기 때문에 4개월 후에 에도로 돌아왔을 때에는 그 당시에 이제 소위 탈번 죄
그러니까 번에서 허락 없이 벗어났다. 번을 탈출했다
그러는 죄에 걸려 가지고 즉시로 체포돼 갖고 자기 고향인 조수로 이제 다시 보내져 버립니다. 그래서
가서 조주번에 이제 끌려가서 조주번에서는 어떻게 되냐면은 사무라이직을 박탈를 당하고 그리고
사무라이로서 받고 있었던 봉급 그야말로 이제 봉토죠. 봉급 봉토로부터 봤던 봉급이
57석 굉장히 작은 어 그 본급이었지만 그거마저도 뺏깁니다.
번이이 조주 번의 지도자들이 참 놀라운게 뭐냐면
이제 당연히 국법을 어겼으니까 8번 죄를 저지 범했으니까 죄는 줘야
되겠어서 지위도 삭 뺏기 뺐고 자기 봉급도
뺏었습니다. 그런데 그 대신에 10년 동안 10년 동안
1번에 어디서든지 마음대로 가서 공부를 할 수 있다라는
또 허가증을 내 줍니다. 그니까 정말로이 그
인물이 아까우니까 죄는 주지만
그 인물이 자기가 탈번 죄를 저지르면서까지도
그렇죠. 감옥에 갈를 하고 체포될 과거를 하면서까지도 아이
나라가 어떻게 방비가 되고 있는지 공부를 해야겠다라고 동북 지방으로 떠났었던 그 마음을 가상히 여기고 그
마음을 귀하게 여겨서이 친구는이 친구는 우리 고향에 어디 감옥에다가
놓고서 지금 그렇게 섞힐 인물이 아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10년 동안
마음대로 어디 갔든지 공부를 해라라고 허가를 내 줍니다. 이렇게 해서 이제
요시다 쇼인이 어 결국은 1853년 잡혀가자마자
곧바로 에도로 또 갈수 가겠습니다. 그러니까 에도로 가라. 그래서
1853년 1월 16일 날 에도로 돌아갈 수 있다는 허락을 받고 이제 에도루 갑니다. 자, 그런데
1853년이 어떤 해입니까? 1853년이 바로 미국의 페리 제독이 미국의
함대를 이끌고에도 나타나는 바로 그 해입니다.
자, 페리가 1853년에 7월에 옵니다. 와서 와서는대
한포를 막고 쏘고 그러니까 이제 일본 측에서 어쩔 수 없이 만납니다. 만나서
야, 너희랑 통상을 하고 싶다. 개항을 해라.
라고 하면서 미국 대통령의 밀 밀러 필모어 대통령의 국서를 너희 쇼근한테
갖다 전해라고 국서까지 전달을 합니다. 근데 이제 그때에 일본에서는 아 우리가 준비가 안 됐으니까 그리고
우리 쇼근이 너무 아 지금 아파서 이제 이런 핑계를 대면서 아 지금 할 수 없다 그랬더니 페리가 뭐라
그러냐면 내가 1년 후에 돌아오겠다. 그때까지는 그럼 준비를 해 놔라 그러고 떠납니다. 이때에이이 사건을
이제 사쿠마쇼산이 아는 거죠. 뭐 일본이 다 알았지만은
요시다의 스승인 사쿠마 쇼산 지난 시간에 말했던 저 그 어떻게든지 서양거를 받아들여야 된다라고 하면서
결국 나중에 서양 말한장 타고 다니다가 암살당하는 그 사쿠마시산입니다. 그 그 사쿠마시산이
페리가 왔다가 간 사이에 다음에 이제 오겠다라고 했을 때에 그때에
사쿠마산이에도 막부에 상소를 올립니다. 방송를 올리면서
회리가 온다니까 우리가 그 사이에 일본의 가장 우수한 인재들을 뽑아서
미국의 유학을 보냅시다. 그런 제안을 합니다.
당연히 막부는 거절을 하죠.에도 에도 막보는 이걸 거절을 합니다. 도구가 막는 거절을 하고 이때에
사쿠마 쇼단이 자기 제자 여시다 쇼인한테 자네가 미국 배에 좀
어떻게 얻어 타고 몰래 가서 미국 배에 올라타서 거기 사람들 설득해서
그 배를 타고 미국에 가서 네가 좀 배우고 와라 이럽니다. 미국을.
그래서 요시다는 편지를 작성해 갖고 그 시모다 그 에도만 있는 대로 가서
페리한테 미국 측에다가 전하는 표현 나를 좀 웬만하면 좀 승선시켜서 나를
좀 미국으로 데려가 달라는 표현지를 전달을 합니다. 전달을 해 달라라고
이제 관에다가 갖다 주는 거죠. 그리고 나서는요. 지금이 사진에
나오는 그 시모드 앞에 있는 어 항 앞에 있는
조그만 동굴입니다. 그 동굴에서 밤을 [음악] 지세고 거기서 숨어서 지세고
나루배 같은 거를 타고서는 미국 함대 정박해 있는 미국 함대로
가는 겁니다. 포화탄로 갑니다. 그래서 지금 유명 그 당시에 그 그
장면을 묘사하는 우기 요회가 있죠. 저 폭랑 속을 고쳐서 저 뒤에 있는 미국 배를 구남을 향해서 가고 가면
가고 거기에 앉아 있는 요시다 쇼인이 거기 앉아 있는 그런 모습이 있는데요. 이제 물론 상상을 해서
그린 거지만 저렇게 해서 유시다 쇼인이 미국 배로 갑니다. 그래서
가서 배에 몰래 승선을 한하면서 이제 당연히 미국 수병들한테 잡히죠.
그래서 수병들한테 이제 나 좀 데려가 달라. 미국 좀 나 진짜 배우고 와야 되겠다. 그렇지만 어떡합니까? 미국
수병들은 이제 그랬다가 자기네가 큰 일 날 일이니까 안 된다 그러면서요
요시다 쇼인을 체포를 해 잡아서 박구후 막부측에다 어 인도를 해
버립니다.에도 막부가 야 이거는 이놈 이놈은 너희 고향 조슈가 책이
다시 저라 그래서 조주 번호를 보냅니다. 1년 동안 1년 동안
번에서 조슈해서 감옥 생활을 하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1년만
가이 됐다. 185년에 풀려납니다. 그때에
자기 삼춘이 운영을 하고 있던 조그만 학교가 있습니다. 학교 이름이
송하촌숙과죽구 그면 촌숙입니다. 그 촌에서 하고
있는 조그만 학교죠. 그 촌숙에서
촌숙을 삼촌으로부터 인계 인수인계를 받아 가지고 인수인계 받을 것도
없죠. 굉장히 조그만 판자집입니다. 진짜 판자집입니다. 제가 한 두 달 전에
일본에 가서 제가 직접 찍은 어 사진인데 진짜 조그한 판자집입니다.
그걸인 인수해서 그 마을에 하기라는 그 조그만 마을에
있는 걸린 학생들을 11살 12살 13살 15 16 이런
학생들을 데려다가 가르치기 시작을 합니다. 이때 요시다 쇼인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인물들이 메이지신을 주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서 다카스키 신사쿠 이또 히로부미 야마가따리또모
신나가와야지로 모든 분야에 외교 안보 군사
모든 분야에 있어서 기라선 같은 인물들이 나오는데 전부 다 속가
촌죽구 출신들입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기도닷가요씨. 기도닷가요신은 우리가 메이지 유신
하면 메이지 유신을 이룬 지도급 인사 세 명이 있습니다. 그걸 유신삼걸
유신의 세 명의 호걸이죠. 유신삼걸이 있는데 그 유신삼걸이
사스마의 오쿠보도시미치 사스마의 사이고 다까머리 그다음에
조슈의 기도다가요씨 이때 소가주고에서 공부를 하고
선생으로부터 선생님으로부터 개항을 해야 된다.
그래서 그 교육을 받은 기도닷가요 씨는 1862년에
나가사기로 가서요. 나가사기 가서 서양식 전함을 건조하는 방식을 참관을하고
보고 배우고 돌아와서 조수번의 첫 번째 서양직 전함을
만들어 보는 것을 총 감독을 합니다. 물론이 사람들이 성공은 못 합니다. 일본이
제대로 된 전함은 훨씬 후에 그렇죠. 청일 전쟁, 러일 전쟁이 지나야지
간신이 만듭니다. 그렇지만 이미 이때부터 만들어 보려고 무진내를 쓰는
거죠. 그러깐 서양권을 배워야 되겠다.이 당시에 역사가 복잡하게
굉장히 재밌게 얽히지만은 그중에 중요했던 장면 중에 하나가 뭐냐면은이
조주번에서 요시다 쇼인의 제자 같은 사람들이 나오면서 굉장히 극진적인
개혁을 해야 된다.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야 되겠다. 그리고 특히
천왕을 다시 모셔고 천왕이 막불을 퇴거시키고 막불을 없애 버리고 천왕이
다시 친정을 시작해야 된다라는 전왕향이 사상으로 무장을 하고 그리고
이제 애도를 비판을 하고 막부 정부의 모든 정책을 비판을 하고 자꾸
이러니까 그리고 서양하고 계속해서 교류를 하려 그러고 그러니까 직접
교류를 하려 그러고 그러니까 그러니까는 는 독구가와 막부가 조주번을 정벌을 합니다. 그래서
그때에 기도와 같은 그 여시다 쇼인의 제자들이고 급진 개혁파들이 숙청을
당합니다. 그런데이 정보를 왔던 독구가 막부 군대가 철수를 하자마자
기도닷가요는 자기네가 군대를 조직해서 조주번의 군을 제대로 다시 조직을 해서 그
조직을 해 가지고 특히 제자들을 통해 자기의 후배들을 통해서 같이
요시다시소 선생 밑에 있었던 후배들과 함께 기타 기병대라는
새로운 군사 조직을 만들어서 그 군사 조직을 을 가지고에도 막부에 맞서기
시작합니다. 그래서에도 막부에서 2차 조수 정벌 다시 조수정벌 조수를
정벌하겠다고 군대를 일으켜서 오는 것을 격태를 합니다. 싸움을 해서
조주 번에 하급 사무라이가 사무라이들이 요시다시인의
가르침을 받고 자기네가 준 만들어온 만든
그 민병대 같은 그 조직이에도 막복근을 격태를 합니다. 이때부터
기도는 완전히 조주번의 지도자로 급부상이 되고 그리고 이때에
사스마번에 지도자로 부상하 하고 있던 자기와 같은 하급 무사였는데 역시
부상을 하고 있던 사이고 다까모리하고 어쿠보 도시미치하고 교류를 하기 시작하면서 서로가 만나서 우리가
도구가 막부를 무너뜨리고 왕정 복고를 하자 하는 구태타를
음모를 꾸미면서 이 세 사람이 결국은 도구가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신을 이루는 시작하는
삼걸이 되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기도닷가여고 기도가 바로
요시다의 애제자정의 하나였습니다. 1877년 5월 26일 날 43살의
나이로 어 갖고 있었던 지병 어 암이라고 합니다. 어 그 세상을
떠납니다. 특이한 일은 기도하고
어 사회고하고 옥구보하고 거의 동시에 죽습니다.
유신삼거리 기도는 병으로 죽고 바로 1877년에
사스마 반란이라는 것이 일어나서 사이고가 [음악] 반란을 일으켜서 자기가 세웠던 메이지 유신 정부를
상대로 군대를 일으켜서 자기의 [음악] 중마고 절친 중에 절친이었던
옥구보가 군대를 끌고 가서 자기 [음악] 절친을 죽일 수밖에 없는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그게 1877년에 사스마 반란이고 선남
전쟁 세인 전쟁이라고도 하는데 그 전쟁에서 사이고가 죽고 그리고 키도는
그 그때 거의 동시에 병으로 죽고 그리고 오쿠보는 다음 해에
사이고를 죽였다라는 것 때문에 사이고에 충성하던 사무라이들한테 또 암사를 당합니다. 이러면서 유신삼걸이
한꺼번에 무대에서 퇴장을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을 하면서 그 뒤를 이제
뭐 이또 히로음이 어 야마가따리또 뭐 마츠시타 어 그 마사타케 이런
사람들이 이제 일으 본격적으로 어 메이지 유신을 일으키게 되는데 아무튼이 유신 3골 중에
조슈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기도 다카요고 기도는 어 요시다시 쇼인의
제자였었습니다. 그 메이지신을 일으키는 대표적인 인물 중에서
어 여시다 쇼인의 제자로서 가장 역사적으로 사람들이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다가스기 신사구라는 인물입니다. 다가스기 신사구는 사실은 기도보다도 더
요시다의 요시다 쇼인의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워낙 출중했었던 인물이라고 합니다. 역시 1852년에
그 조주 번에서 하는 메인간 명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그러면서 공부를 잘하고 그러면서 1857년에는
요시다 쇼인의 소가 손주구에 가서 공부를 합니다.
요시다가 사실 가장 총회하는 제자가 기도도 있지만 닭가스기를 또 그렇게
어 총회를 했다 그럽니다. 1862년에는요.
어 자기네 조주 번의 명령을 받고서
막부사절 수행원으로 나가사기에서부터 청나라 상하이로 여행도 다녀옵니다.
그러니까 1862년이면요. 1차 앞편 전쟁을 통해서 청이 패하면서
일곱 개 항을 개항을 했었고 1860년에 2차
앞편 전쟁이 일어나면서 그때 이제 북경의 원명원이 불타고 함락이 돼서
북경이 함락이 되고 그 그 한풍제는 저 열하로 도망을 가고 하는 이제
이런 일이 벌어지는 벌어진 것이 1860년입니다. 그러니까 1862년에
중국에 특히 상해에 갔던 다카스기 신사권은
서양 사람들이 전부 다 들어와서 급변하고 있던 상해의 모습을 본
동시에 서양의 열강들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져 가고 있던 청나라의 모습을 정확하게 보고 옵니다. 태평국의 난
때문에 어떻게 중국이 분열이 되고 초토화가 됐었든지 이런 거를 다
보고서 7월에 귀국을 합니다. 우리가 중국 같이 그런 국란 순환을 겪지
않으려면 국력을 키워야 된다. 그리고 어떻게든지 서양의 서양 열강의
식민주로 전락하는 것은 막아야 된다라는 것을 다카스키가 끝 또 배우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 스승이
요시다 쇼인이 했었던 외국을 가서 배워야 되는 거 서양이 어떻다라는 걸
우리가 알아야 된다라는 거를 그 가르침을이어서
다카스키는 벌써 또 중국에도 가보고 그러면서
일본을 어떻게 지켜내야 되겠다라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1865년에는
기회타이를 창설합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기도랑 같이 기이타이라는 거를 어
만드는데요.이 기타이가 뭐냐면은 그리고 일본에서 원래 사 전쟁이라는
거는 사무라이만 하게 돼 있는 것이 일본의 전통이지 않습니까? 사무라이는
계급은 전쟁하라고 있는 계급입니다. 그러니까 전쟁은 딴 사람들은 절대 하면 안 되는 거였던 자기네들만의
특권이었던 거죠. 사무라이들의 그런데 기도하고 닭가스기는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뭘 하냐면요. 자기 동네의 군대를 조직한데 있어서
사무라이들한테만 국한시키지 않습니다. 보통 농부들하고 상인들하고 모든
사람을 각계 각층 사람들을 신분과 배경에 상관하지 않고
뽑습니다. 뽑아서 군사 훈련을 시켜 줌으로써 강한 애양심과 강한 애국심과 그죠.
서로가 신분과 계급을 초월해서 나라를 같이 지키고 자기네 번을 같이 지키는
그러한 강력한 근대 군대를 처음으로 만드는게 조주번의 키이타입니다. 그
당시에 사진들도 남아 있고 그 당시 젊은이들이 사진을 찍은 겁니다. 그
가운데 중앙에 앉아 있는 것이 어 다카스기 신사고입니다. 그러니까 각계 각층에 옷도 그렇죠. 옷도 여러 가지
다양한 옷이 서양 옷과 자기 옷과 여러 가지가 섞여 있는 거고 그러니까 얼마나 실용주의적으로
전력을 극대화시킬 방식을이 사람들이 찾아내고 애국심을
고치하고 애양심을 고치할 수 방법을 만들어는지 알 수 있습니다.이 이 기의타이 때문에 기헤이타이 때문에
조슈하고 사스마가 독구가 맞부를 결국은 타도하고
메이지신을 일으키게 되는데 그 에이타이를 만든 사람이 바로 다카스기 신사고입니다. 다카스기는 28살에
폐결핵으로 죽 죽습니다.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기 1년 전에 어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니까이 메이주신의 꿈을 못 이루고 세상을 떠나는 거고 그 대신 그의 부하였던
야마가따리또모 일본 육군을 창설한 사람이죠. 일본
육군을 창한 야마가다 아리도모가 바로카스기의 부관 부하 후배였었습니다. 같이
속과존 축구의 선후배였었고 그래서 그 뒤를이어서
키헤이타이를 이끄는 것이 야마가따리또뭐 이또히로미 이런 사람들이었고 그 사람들이 나중에
정권을 잡고 나서는 군대를 일으킬 때 일본 제국군이라는 거를 만들어 낼 때
처음으로 사무라이를 없애라. 사무라이는 계급을 기반으로 한 군대는
약하다. 왜? 모든 계급, 모든 사람이 같이 들어가는 참여하는 그게
군대예야지 그래야지 나라를 지키는 애국심 서로를 차별하지 않고 그죠.
같은 국민으로서, 같은 신민으로서 나라를 지킨다라는 마음이 생길 거다. 그러니까 그래서 근대 군대를 나중에
만드는데 그 근대 국가의 근대군의 모델이 된 것이 바로 키이타이입니다.
법률 방송이 출관하는 시사 교양지 [음악] 법치와 자유는 우리 사회가 증면하고
있는 법치의 문제들을 [음악] 가장 냉철한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는 정론지입니다.
2026년 대한민국의 오늘을 가장 정확하게 깊이 있게 읽어볼 [음악]
수 있는 법치와 자유를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온라인으로도 편하게
[음악] 읽어 보실 수 있습니다.
또 요시다 쇼인의 제자 중에 쿠사카 갱이이 사람들 다가스기 신사과 같이
일찍 죽습니다. 어 그 메지우신을
보지 못하고 죽 죽습니다. 그렇지만 메이지신이 성공하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
실제로 보진 못하지만 가장 중요한 역할 했던게 다카스기 신사고하고 구사카 겐즈입니다.이
구사카 겐스이는 하기에서 역시 태어나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그러니까 의사라는 굉장히 이제 신분이 낮은 어 직책이었죠. 의관이라는게 뭐 조선에서도 그렇듯이 어 굉장히 신분이
낮았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지만 역시 번의 학교인
메일인간 명륜관에 가서 공부를 합니다. 그러니까이 명눈관이라는게 참 어 대단합니다. 각향 각층에 각
모든 계층의 아이들을 다 받아들여서 공부를 시키는 거죠. 그래서 거기 또 호생관이라는 의학 전문 또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그리고 어 난도 이때 어 난학을 또 배웁니다.
1856년에는 유학을 교슈로 떠납니다. 주슈로여
여행을 떠나서 거기에 가서 자네 교향인 조주의 요시다인이라는
놀라운 훌륭한 선생이 계신데 왜 당신 거기 가서 공부를 하지 않느냐 그러니까는 어 요시대 수인에 대해서
교수에 가해서 오히려 알게 되고 다음에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곧바로
요시다 소인을 찾아가서 속가 죽구에 입학을 하면서 그 밑에서
공부를 합니다. 1857년에는 요시다 쇼인의 여동생과 결혼도
합니다. 그리고 58년에는 교도와 에도에서 유학을 합니다. 그러니까이
각 번들이요. 각 번들이 경쟁적으로 인물들을 키워 가지고
여기저기 보내고 결국은 수독 에독 또 촌에 있는 교도 이런 데에 다 보내서
교류를 하고 공부를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스승이 스승인 요시다
쇼인이 처형을 당하자 그 뒤를이어서 요시다 쇼인의 조왕양이 운동을
이어받아서 본격적으로 그 운동을 일으키는게 구사가 겐스입니다. 그리고
어 예를 들어서 1862년에는요. 닭가스기 신사구 이또 히로부미와 같이
신나가와 있는 영국 공사관을 습격을 해서 영국 공사관의 방을 방화하고
이럽니다. 그러니까이 젊은 젊은 열혈 지사들이 근데 이때이
사람들을 지사라고 불렀습니다. 지지라고 부르는데 우리가 뭐 애국 지사라는 할 때 그 지사라는 말은
바로 일제 일본 시대에 독구가와 막부 말기에
메이지 유신을 일으키는 하급 사무라이들을 그렇죠. 구사가 겐즈이 뭐
이또히로브미 야마가따리또 뭐 이런 사람들을 사과모토리오마이 사람들을 지지사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이런 지사들은 지지들은
애국을 해야 되겠고 나라를 지켜야겠다라는데 어떻게 지키고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바꿔야 되는지에 대해서 젊어서 여러 가지를 해 보는 거죠. 그러니까
처음에는 최고 강화 어떻게 보면 반외도 해보다가 그것이 아니다
싶으니까 나중에는 급격하게 외국 문물을 받아들어야 된다라는 메이지
유신을 일으키는 또 그런 주역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젊어서 사상적으로
고민도 해보고 혼란도 겪어보고 이쪽으로도 가봤다 저쪽으로 가봤다 하면서 결국은 중심을 잡아냅니다.
그게 메이지 유신을 일으키는 사상이 되는 겁니다. 근문의 번이라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 번 사건이 사건은 나중에 또 자세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었는데 결국은 뭐냐면 조주번이 조주번과
사스마번이 싸우는 겁니다. 사실은 에도에서 누가 천왕과 천왕을 모시고 누가
나라를 주도하느냐를 가지고 사실은 그때 어
조수 군대하고 사스마군이 싸우는데 그때 조수군의 대장이 쿠사카였습니다.
너무 조수군의 군사 숫자가 절대적으로 [음악] 열쇠였었습니다. 그 병 그 군대에 쳐서 싸우는
과정에서 그 구사가 견수인은 총에 맞아서
부상을 당합니다. 그러니까 구사카는 자기가 체포되는
잡히는 것을 어 잡히는 것이 싫어서 자결을 해
버립니다. 그래서 굉장히 젊은 나이에 역시 구사가 겐지도 착을함으로써
어 메이지 유신 일어나기 4년 전이었죠. 그렇지만 이런 정신 이러한 행동력 이러한
세계관 그렇죠. 어, 이런 개방된 세계관
이런 것을 갖춘 사람들이 전부 다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이었었습니다.
메이지신을 통해서 일본이 근대 국가를 건설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입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또 히로부이
야마갔답니다. 자, 그럼 이또 히로이야 뭐 우리 역사에서 너무나도 잘 알려진 어 조선 사람들, 한국
사람들이 가장 그 싫어하는 어 인물이고 어떻게 보면 어
우리 근세사의 영웅인 안중근 의사가 바로 사살를 한게 이또 히로부입니다.
사실 한일 관계의 참 난맥상 중에 하나는 바로 뭐냐면 이또 히로부미는
근대 일본을 만든 사람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가장 추앙하는 일본 인무들
중에 하나하고 실제로 한 일들이 놀랍습니다. 그런데 조선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게 바로
이또 이로이고 이또로 죽인 안중근 의사는 한국에서는 영웅입니다. 자,이
부분이 사실 한일 관계에 있어서 우리 근세사에서 참 풀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봐서이 또로 보면 놀라운 인물이었었습니다.
역시 하기에서 태어나서 아주 하급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나서 쇼가
손구에서 여시다 쇼인 선생 밑에서 공부를 하고
예를 들어서 장주오골 오걸 그러니까는 어 조슈파라 그러는데 장 조슈의 다섯
명의 젊은 청년들이 미랑을 해서 영국에 1863년에 미랑을 해서 일본
영국에 가서 공부를 하려고 하하는 그 조슈 5파에도 도 들어가 있었고
그리고 이와꾸라사 절단이라는 걸 통해서 1871년에 2년 동안 해외 유학을 또 하고 돌아오고 메이지
헌법을 만든게 이도고 내각제를 처음으로 만든 것이 이도고 그리고
청일 전쟁을 승리로은 것도 이도고 러일 전쟁을 승리로은 것도 이도입니다. 일본 근세사에 있어서는
핵심적인 인물이 있도록 이러 봅니다.이 이 사진들을 보시면은 젊었을 때에 어 그 아직 사무라이
복장으로 찍은 사진 그다음에 조슈 5로 영국에 가서 그 찍은 사진이
사진은 그 영국에서 영국의 조슈로 갔다가
조슈가 그때 미국하고 영국하고 네덜랜드하고 프랑스
함대하고 전쟁을 하겠다 그럽니다. 그래서 그때에 전쟁을 막으려고 급
귀국을 해서 그러면서 그때부터 이제 그 조수의 정치에 뛰어들어서 설득을
하면서 어 조수가 우리가 이래서 서양하고 지금 싸울 상황이 아니다라는 걸 설득을 하고 서양 사람들하고
만나서 협상을 하고 그때 잠깐 가서 배운 영어를 가지고 그걸 가지고 하고
하면서 이제 급격하게 성장을 하기 시작하면서 이제 그 당시에 지도자급으로 조주번의 지도자급으로 그
부상을 을하고 기도 기도가 오구보나 어 사이고 같은 그 사츠마
번 사람들하고 만나서 사스마 조수 동맹을 이끌어낼 때에 그때의
사진입니다. 그래서이 사진에서 보시면은 맨 왼쪽이 앉아 있는 것이 그게 이도히로이고 맨 오른쪽에서 있는
것이 그게 오쿠보도시미칩니다. 그리고 위에이이 사진은 지금
나이가 많이 들어서 정말 일본의 최고의 원로로서 왼쪽에 이도이
오른쪽에 야마갔다 이동목 어 1880년대
이후로 일본을 이끌어간 두 인물이고 고향 친구이고 중마거우이자
최고의 정치적 라이벌들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일본의 외교를
외교과 민간 외교록을 대표하는게 이도였다면 일본의 군사력을
대표하는 것은 야마같다.이 둘이서 사실 일본을 어 그 1880년
이후로는 내내 이끌어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근데 아무튼이는
이런 면에 그런 면에 있어서 어 일본 근세에 없어서는 안 될이었고 그리고
요시다 쇼인의 제자였었습니다. 뭐 이제 야마가리 또는 뭐 역시
속과족구 출신이고 하기성 출신이고 일본 제국 제국 군대를 만들었고
당연히 일본 제국 어 원수 제국군의 원수였었고 내각 총리 대신을 두 번을
여김을 하고 어 하여튼 뭐일본의 경찰 제도도 야마갔다가 만들고 어 또
아까 말씀드린 대로 기회타이를 창소를 한 그
어 닭가스기 신사구의 후배로서 닭가스기가 죽고
나니까 그의 타이를 이어받아 가지고 막부 타도 운동을 버립니다. 특히 때
이제 독일에 가서 프로이젠 그때 프로이젠이 비즈마르크 밑에서 불같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면서 완전히
프로이즌의 궁극주의, 팽창의, 공업 발전, 산업 발전에 굉장한 감명을
받고 돌아와서 농업 국가였던 어 일본을 프로이젠 같은 공 국가로
만들겠다라고 하는 그 야심찬 꿈을 안고서 다시 돌아와서 일본을 근대 국가로 만드는데
착수하는 어 또 대표적인 인물이 야마 그랬던 겁니다. 육군 경의 임명대에서는
징병제도라는 걸 도입을 합니다. 그러니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일본은
전통적으로 사무라이들만이 전통하는전쟁하는 계급이었죠. 그런데 그 전통을 없애고
사무라이 계급을 없애 버리고 징병제 그러니까 기회타의 같이 신분과
뭐 이런 거에 전혀 상관없이 다 특정 나이가 되고 건강한 남성이면은
군대에 가야 되는 겁니다. 어 1873년에 처음으로 징병 제도를
도입을함으로써 강력한 일본 군대를 창설한 것이
야마가다였고 야마가다 역시 요시다 쇼인의 제자였었습니다.
요시다 쇼인은 참 여러 가지 모순된 뭐 모든 사람이 다 그렇고 특히
위대한 인물들이 그런 경향에 많습니다. 여러 가지 모순된 것들을 동시에 끌 끌어 안고 가는 어
사람들이 어 그 위대한 인물들인 경우가 많은데요. 요시다 효인이 그런 점이
있었습니다. 뭐냐면 당연히 계국을 지지했죠.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서는
천황주의자로서 그러면 한쪽으로 계국을 하자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전황양이라는 거는 사실은 구체적인 정책 내용을 보면 마찰 모순일 수밖에 없었던
거죠.이 두 가지가 근데 사실 다 있었던 겁니다. 여기서이 두 전혀 모순될 거 같은
이념이 절묘하게 하나가 되는 거죠. 즉 천왕을 지키려 그러면 결국은 어떻게 합니까? 계곡을 해서
소행한거를 배워야 된다라는 걸로 되는 거죠. 쇼인은 철저한 조황 양입파였습니다.
근데 쇼인이 요시대 쇼인이 급진 어 천왕 주의 조항량이 파로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박구가
페리제독이 와서 결국은 미국하고 해리스 조약을
일미 수호통상 제약을 맺는데 그 맺는 것을 사실은 그때 당시 천왕 고메이
천왕 메이지 천왕의 아버지 고메이 천왕은 반대를 했었습니다.이 천왕주의자였던
요시다 쇼인은 바로 고메이 천왕이 반대를 했었기 때문에 계국을 반대를
했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미국의 미랑을지가 해야겠다라고까지
했었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조랑양이 바로 전향을 때합니다.
그리고 어쨌든 자기는 미국하고 교리를 해야 된다고
했었지만은 천왕이 반대하는데도 미국하고 교 제
조약을 체결한 것은 그거는 천왕에 대한 모독이고 일본의 구력이라고
그렇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면서 이때에이 나오스케 당시에 이제
로즈로서 최고 그 행정가로서 쇼근 밑에서 모든 정책을
위반하고 있을 때이 나오스케가 결국은이 조주하고 사스마 특히 조주에
있는이 조왕이 파들 때문에 너무 골치가 아프니까 그 조왕양이 파들을
갖다가 숙청을 하라 그러면서 안세의
대옥이라는 대숙청을 일으킵니다. 결국은 1858년 12월에 요시다
쇼인은 막부 정부가 계속해서 압력을 넣서 어쩔 수 없이 조에서
요시다 슈을 다시 체포를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탈번에서도
체포가 됐었고 하여튼 수차례 이제 그 그
자기 번을 곤란에 빠뜨리는 셈이 되는 거죠. 어 그래서 수감이 됩니다.
그런데 수감이 돼서도 자기는 바크후를 계속해서 격태를 하겠다 그러면서 지도창을
박프의 지도층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그리고
자기 말을 사람들이 듣지 않으니까 농민들을 또 본 선동을 해서 봉기를 하자 그러고
이러면서 굉장히 격렬한 조항 양이파가 됩니다. 감옥에
있으면서 그래서 결국은 자기 제자들까지도 아 이렇게 되면은
선생님도 위험해지는 거고 자기 번도 곤란해진거다 싶어서 그때 다카스기 신사고하고
쿠사카 겐즈이 애에애제자들이 그다음에 이제하고 기도 다 등 다섯
명의 제자들이 공동명이로 편지를 써서 감옥에 수감되 있는 자기 스스 스승
요시다시한테 편지를 보냅니다. 그 편지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선생님,이 번의 혁한 정론에 얼마나
마음을 쓰셨는지 참으로 감격해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천하의 시세도
우늘에 이르러 크게 변했으며 여러 한도 여러 번도 무기를 거두어들이고
방관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어 심히 유감스럽기는 하지만 쇼군의 생계 즉
하명도 있었고 사람들의 기분도 차분해졌기 때문에 의기를 들고 의로운
기치만을 들고 일어나는 것은 실로 쉽지 [음악] 않은 일을뿐만 아니라 도리어 필연적으로 사직의 해를 끼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박후의 관리들이 창해서 뜻을 가진 사람들
외에도 제후들에게 은거를 명령한다거나 교육이 열리게 된다거나 [음악] 하면
반드시 반관할 수 없는 그런 형세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에드
막부가 너무 심하게 이러한 탄압을 해서 어떤
자기네 같은 선생님 같은 분들을 감옥에 가두고 또 보다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려고 하는 다이묘 같은 사람들한테는 애도 막보에서
너 집에서 나오지 마. 고향에서 나오지 마라는 명령을 내리고 위리한치같이 그런 명령을 내리고
그럽니다. 그런 일이 점점 심해지면은 지금은
아직까지는 아직까지는 여론이나 모든 것을 봤을 때 선생님의 거를 따라가지
않을 않겠지만 이런 일들이 계속 막부가 일을 저지르니까 결국은 여론이 바뀔 것이고
선생님이 뜻하는 그런 일을 도모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입니다라고 얘기를 하는 거죠. 그때 맞춰 실로 다
[음악] 같이 나라를 위해서 몸과 마음을 다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때까지는 가슴을 잠시 억누르고 칼을
거두어 들여서 어떻게든 사직의 해가 되지 않도록 하고 또 나라를 위해서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간곡하게 편지를 씁니다. 그런데
쇼인은 제자들을 격렬하게 비난을 하고 제자들하고 결 절연을 해 버립니다.
그리고 1859년 5월에 바쿠프는 결국은 조수를 조수한 번한테 쇼인을
애도로 인도하라고 그럽니다. 그니까 지방에서 그냥 지방 정보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그 번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가 직접 처리를 하겠다고
해서 그만큼 요시다 쇼인는 중요한 어 인물이라고 생각을 해서 애도로 압을
시킵니다. 그래서 어 저 이때
이때 요시다는 자기가 어 조항양의 이념을 위해서 죽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어 그 해리스 조약을 맺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일본 어 사람 만나베 아키카스라는 사람을 내가 암사를
하려고 했다라는 것을 오히려 자백을 해 버립니다. 그냥 시인을 해
버립니다. 그래서 결국은 1859년 10월 27일 쇼인는 에더의 덴마초
감옥에서 효수됩니다. 왕정 복고라고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서 근대를 받아들인다.
그러니까 중국이나 청나라나 조선에서는 근대로 가려 그러면은 왕정을 폐지를
해야 되는 거죠. 그러니까 왕정의 왕실들이
청의 황실이 됐든 조선의 왕실들이 대화 근대화를 반대를 하죠. 왜?
근대하러 가려 그러면 왕실을 없애 버리고 입헌 군주제로 가고 결국은 민주주의로
가고 공화주의로 가겠다라는 거니깐요. 그런데 일본은요. 를 보는 왕정복고를
하겠다는이 기치를 내걸고 인적 이념적 기치를 내걸고
어떻게 보면은 왕종복과라는 이름 뒤에 숨어서
조선이나 청나라보다 훨씬 더 과격한 급진적인 근대화를 읽고냅니다. 그것이
바로 메이지 유신입니다. 네. 오늘은 요시다 쇼인에 대해서 그리고 요시다
쇼인이 세운 소카죽구란 학교가 어떤 인물들을 배출했고 요시다 쇼인의
사상이 전왕향이 사상과 계곡 사상이 어떻게 충돌를 하고 조화될 수 있었는지 그러면서 매지신을 읽어낼 수
있었는지 한번 살펴봤습니다. 다음 시간에는요. 도구가와 막보가 새끼가라
전투 이후에 권력을 잡으면서 어렵게 만들어 놓은 그 균형 그 체제가
280년 동안 에도의 평화를 가능케 했던 그 체제가
흔들리는데 흔들리는 결정적인 요소 요인이 뭐냐면 바로 외세의
출연입니다. 폐리제독의 출연입니다. 그러면
왜 페리지독의 출연이, 왜 외세의 출연이 그렇게 도구가와 이아스가
그렇게 공을 들여서 만들어 놓은 그 절묘한 균형 280년 동안 일본
사람들한테 평화를 가져다 준 평화 번영을 가져다 준 그 균형이 왜
깨졌는지 [음악] 왜 깨질 수밖에 없었는지 그러면서 새 대안을 찾아나서면서 결국은 천왕 왕중심의
왕종복으로 갈 수밖에 없은지 그 부분을 외세의 출연과에도
체제가 안고 있던 그 모순의 관계에 [음악]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통해서 [음악] 한국인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한국인의 탄생. 오늘은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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