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16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66 메이지유신을 만든 에도 시대의 사상

메이지유신을 만든 에도 시대의 사상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66회 - YouTube


메이지유신을 만든 에도 시대의 사상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66회
법률방송
16,387 views  Jun 10, 2026
본 강연은 함재봉의 『한국 사람 만들기 II: 친일개화파』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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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재봉은 에도 시대 일본의 지적 토양이 메이지 유신의 성공적 배경이 된 과정을 분석합니다. 주자학, 고학, 국학, 난학 등 당시의 다양한 사상적 흐름과 일반 대중의 문해력을 높인 교육 체계가 어떻게 일본의 근대화 동력이 되었는지 역사적 관점에서 조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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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제66회 강의 내용에 대한 요약과 평론입니다.

요약

  • 청일전쟁과 동아시아 전통 질서의 붕괴 1894년 발발한 청일전쟁은 동아시아를 수천 년간 지배해 온 중화 조공·책봉 질서의 최종적인 해체를 알린 문명사적 분수령이었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구식 군사·산업 체제를 확립한 일본이 청나라 북양함대와 지상군을 궤멸시키며 승리하자, 한반도를 둘러싼 전통적 사대(事大)의 축이 완전히 무너졌다.

  • 시모노세키 조약과 <조선의 완전 무결한 독립>의 역설 1895년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 제1조에서 청나라는 <조선의 완전 무결한 독립 자주>를 승인했다. 이는 조선이 원하던 진정한 자주독립의 성취가 아니라,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박탈하고 독점적 침략과 간섭을 합법화하기 위한 전략적 조치였다. 결과적으로 중화 질서의 이탈은 자주독립이 아닌 일제의 노골적인 보호국화 야욕에 직면하는 결과를 낳았다.

  • 삼국간섭과 러시아의 부상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본이 요동반도를 할양받자, 러시아는 독일·프랑스를 끌어들여 <삼국간섭>을 감행하고 일본을 굴복시켰다. 이 사건은 일본 지배층에게 <와신상담>이라는 군국주의적 복수심과 군비 확장의 명분을 제공했으며, 조선 조정(고종과 민비)에는 청나라를 대체할 새로운 외세로서 러시아를 끌어들이는 <인아거일(引俄拒日)> 노선을 촉발했다.

  •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의 파국 러시아의 개입으로 입지가 좁아진 일본 군부와 공사 미우라 고로는 1895년 민비를 잔혹하게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자행했다. 이에 극도의 신변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했고, 조선은 자주적 국가 개혁의 동력을 완전히 상실한 채 열강의 이권 침탈 각축장으로 전락했다.

평론

제66회 강연은 청일전쟁에서 아관파천으로 이어지는 19세기 말 한반도의 비극적 궤적을 국제정치적 역학 관계와 세력 균형의 냉혹한 논리로 명쾌하게 해부한다.

첫째, 시모노세키 조약에 명시된 <독립>이라는 개념의 이중성과 기만을 탁월하게 짚어낸다. 만국공법 질서에서 공인된 독립은 약소국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안전망이 아니라, 기존의 중화적 보호막을 걷어내고 신흥 제국주의 일본의 독점적 침탈을 허용하는 무방비 상태의 선언이었음을 통찰하게 한다.

둘째, 당시 조선 지배 엘리트의 외교적 대응이 지닌 치명적 맹점을 비판적으로 조명한다. 청나라, 일본, 러시아로 맹목적인 외세 의존의 대상을 바꾸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은 자체적인 국방력과 제도 개혁이 뒷받침되지 않았을 때 필연적으로 국가 주권의 파멸을 부른다는 사실을 역사적 실증으로 증명한다.

다만, 상층부의 권력 투쟁과 외교적 파국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당시 동학농민혁명 등 기층 민중이 추구했던 반봉건·반외세적 자주화 열망과 내부적 역동성에 대한 분석은 다소 부차적으로 다루어졌다. 그럼에도 19세기 말 한반도가 강대국의 패권 경쟁 속에서 어떻게 체제 붕괴의 길로 내몰렸는가를 거시적이고 구조적인 안목으로 규명한다는 점에서 매우 깊이 있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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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재봉 「한국인의 탄생」 66회

<메이지유신을 만든 에도 시대의 사상과 교육> 요약·평론

66회는 앞선 63~65회에서 설명한 정치·경제적 조건에 이어, <왜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지적 능력과 사회적 준비를 갖추고 있었는가>를 사상과 교육의 측면에서 설명한다.

함재봉의 핵심 주장은 이렇다.

<메이지유신은 서양의 충격에 대한 즉흥적인 반응이 아니었다. 에도시대 250여 년 동안 일본 사회가 보여준 지적 개방성, 높은 문해력, 다양한 학문 전통, 그리고 중국 사상을 일본식으로 재해석하려는 태도가 이미 근대화를 받아들일 토대를 만들고 있었다.>


1. 쇄국 일본은 실제로 완전히 닫혀 있지 않았다

함재봉은 우선 흔히 말하는 ‘쇄국 일본’이라는 이미지부터 수정한다.

도쿠가와 막부는 외국과의 접촉을 강하게 제한했다. 특히 가톨릭 세력이 다이묘들과 결합해 정치질서를 흔들 가능성을 두려워했다. 포르투갈과의 관계를 끊고 기독교를 탄압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외부 세계와 완전히 단절하지 않았다.

네덜란드와의 교역을 유지했고 나가사키의 데지마를 통해 서양 정보와 문물이 계속 들어왔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상관장은 세계에서 일어난 중요한 사건을 정리한 보고서를 막부에 제출했고, 그 정보가 일본의 학자·의사·관리들에게 전달되었다.

즉 일본의 쇄국은

<외부세계와의 단절>

이라기보다

<정치적으로 통제된 개방>

에 가까웠다는 것이 함재봉의 설명이다.

그는 이것을 조선과 비교한다. 일본은 외세가 국내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막으면서도 외부의 정보와 기술은 받아들였다. 바로 이 균형이 이후 난학의 발전과 서구 지식 수용을 가능하게 했다고 본다.


2. 에도 일본의 놀라운 사상적 다양성

이번 회의 가장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가 <에도 일본의 사상적 다양성>이다.

함재봉에 따르면 일본에는 유교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 주자학
  • 고학
  • 국학
  • 난학
  • 불교
  • 신도

가 함께 존재했다.

조선에서 주자학이 압도적인 정통으로 자리 잡고 다른 해석을 이단시한 것과 달리, 일본에서는 주자학조차 하나의 사상전통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함재봉은 이것을 매우 중요한 차이로 본다.

조선에서는 사서삼경을 주자의 해석에서 벗어나 읽는 것 자체가 위험할 수 있었지만 일본에서는 중국의 유학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일본식으로 변형하고 재해석하는 지적 공간이 존재했다.

이러한 사상의 경쟁과 다양성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정신적 훈련>

이 되었다고 본다.


3. 교육과 문해력 ― 메이지유신 이전에 이미 준비된 사회

66회에서 매우 강조되는 것은 일본의 높은 문해력이다.

에도 초기 일본도 평민 대부분이 글을 읽는 사회는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교육이 광범하게 확산된다.

대표적인 것이 <데라코야>다.

데라코야는 서민 자녀들을 위한 일종의 초등교육기관이었다. 읽기와 쓰기뿐 아니라 윤리, 실용지식, 계산 등을 가르쳤다.

각 번에서도 사무라이 교육을 위한 학교들이 생겼고, 상인과 장인계층을 대상으로 한 교육도 발달했다.

함재봉은 19세기 중반 일본이 세계적으로 상당히 높은 교육수준에 도달했다고 강조한다. 강연에서는 남아의 약 40% 이상, 여아도 10% 이상이 교육을 받았다는 수치를 제시한다.

그 결과 메이지유신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상당한 규모의 사람들이

<읽고, 쓰고,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

가 만들어져 있었다.

이 점은 근대화에서 매우 중요하다.

정부가 새로운 학교제도와 군대·법률·행정제도를 도입하더라도 국민이 문자를 해독하지 못한다면 근대국가를 빠르게 만들기 어렵다.

따라서 함재봉에게 메이지유신의 교육혁명은 무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에도시대 교육의 대중화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4. 임진왜란이 일본의 지적 발전에 끼친 역설적 영향

흥미로운 대목은 임진왜란과 일본 학문의 관계다.

함재봉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조선의 책들을 대량으로 가져갔고, 그 서적들이 일본 학문 발전에 중요한 자극을 주었다고 말한다.

일본의 주자학 발전 역시 조선의 학자와 서적을 통해 영향을 받았다.

이것은 역설적이다.

조선에는 이미 고도로 발전한 유교학문이 존재했지만, 일본은 그것을 그대로 복제하지 않았다.

조선의 학문을 받아들이면서도

<“이것을 일본에서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라는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했다.

그 결과 일본에서는 학문이 다양한 방향으로 변형된다.


5. 하야시 라잔 ― 주자학을 일본화하다

도쿠가와 초기의 대표적인 주자학자로 함재봉은 <하야시 라잔>을 소개한다.

하야시 라잔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학문적 자문역이 되었고, 주자학이 막부의 정치이념으로 자리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함재봉이 흥미롭게 보는 것은 하야시 라잔이 중국의 주자학을 그대로 수입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중국 사상 가운데 보편적인 요소와 일본에 적용할 수 있는 요소를 구분하려고 했다.

중국에서 먼저 등장했다고 해서 반드시 중국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교적 가치도 보편적이라면 일본에서 일본의 방식으로 구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함재봉은 이것을

<중국 사상을 받아들이되 중국화되지 않는 태도>

라고 해석한다.


6. 야마자키 안사이 ― 유교·불교·신도를 결합하다

이러한 일본화의 대표적인 인물이 <야마자키 안사이>다.

그는 젊을 때 불교 승려였고 이후 주자학을 연구했으며 다시 일본의 신도와 결합시키려고 했다.

함재봉은 안사이가 보여주는 태도가 에도 일본의 지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고 본다.

중국 사상을 받아들이되 중국을 숭배하지 않는다.

오히려 중국의 주자학을

<일본의 역사·신도·정치질서와 결합>

시킨다.

안사이가 제자들에게 “중국 군대가 일본을 침략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물었다는 일화가 소개된다.

제자들이 답하지 못하자 그는 중국이 아무리 공자의 나라라 하더라도 침략한다면 일본인으로서 싸워야 한다는 취지의 답을 제시한다.

함재봉에게 이것은 매우 중요한 장면이다.

<유교보다 일본이라는 정치공동체가 우선한다>는 국가적 정체성이 이미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7. 오규 소라이 ― 주자학을 해체하다

또 하나의 중요한 학자가 <오규 소라이>다.

소라이는 주자학이 공자 이후 천여 년이 지난 뒤 만들어진 해석이기 때문에 공자의 원래 의미를 왜곡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고대 문헌을 원래 의미대로 읽으려면 당시의 언어와 역사적 맥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일본의 <고문학·고학> 발전으로 이어진다.

함재봉이 주목하는 것은 단순히 소라이가 주자학을 비판했다는 사실이 아니다.

<경전의 의미는 시대와 언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는 역사적 사고방식 자체가 중요하다고 본다.

이는 조선의 주자학적 정통주의와 매우 다른 태도라고 설명한다.


8. 국학 ― 중국 없이 일본을 이해하려는 시도

18세기가 되면서 이러한 흐름은 <국학>으로 발전한다.

국학자들은 점점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한다.

<왜 일본을 중국철학을 통해 이해해야 하는가?>

주자학뿐 아니라 중국문화 전체를 걷어내고 일본 고유의 정신과 문학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중국의 경서보다

  • 일본 고대문학
  • 신화
  • 신도
  • 일본어

였다.

함재봉은 이를 단순한 학문 변화가 아니라 <일본적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본다.


9. 모토오리 노리나가와 ‘모노노아와레’

국학의 대표적 인물로 <모토오리 노리나가>가 등장한다.

노리나가는 『겐지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일본의 미학적 정신을 찾으려 했다.

그가 강조한 개념이

<모노노아와레(もののあはれ)>

다.

함재봉의 설명에 따르면 이것은 사물과 삶의 덧없음, 아름다움, 슬픔과 감정을 섬세하게 느끼는 일본 특유의 미적 감수성을 뜻한다.

노리나가는 유교적 윤리주의를 비판했다.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욕망과 감정을 모두 억누르고 도덕적인 척하는 것이 오히려 위선이라는 것이다.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고, 사람에게 끌리고, 삶의 슬픔과 기쁨을 느끼는 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라고 본다.

따라서 국학은

<중국의 도덕철학으로 일본을 설명하는 대신 일본인의 감정과 미적 경험에서 일본다움을 찾으려는 학문>

으로 발전한다.


10. 사상적 개방성이 어떻게 군국주의로 연결되는가

함재봉은 여기서 매우 중요한 역설을 제시한다.

에도 일본의 사상적 다양성은 메이지유신을 가능하게 하는 장점이었다.

그러나 국학과 신도의 결합은 천황을 일본 정체성의 중심으로 만드는 사상으로도 발전했다.

막부를 무너뜨린 세력은

<천황을 중심으로 일본을 통합>

하는 논리를 채택한다.

그리고 청이 서양에게 패배하는 모습을 보면서 일본 사상가들은

<중국이 약해진 것은 강력한 국가적 중심이 없기 때문>

이라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일본에는 천황이라는 중심이 있어야 한다는 국가주의가 강화된다.

결국 에도시대의 국학과 천황론은 메이지국가의 천황제와 연결되고, 장기적으로는 일본 민족주의와 군국주의의 사상적 재료가 된다.


평론

1. 66회는 63~65회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63회는 정치제도, 64회는 정치세력, 65회는 경제를 설명했다.

하지만 66회가 추가되면서 함재봉의 메이지유신론이 완성된다.

메이지유신의 조건은

<정치 + 경제 + 교육 + 사상>

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근대화에서 문해력과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부분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제도를 수입하는 것만으로 근대국가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새로운 개념을 읽고 이해하고 번역할 수 있는 사람들이 사회 전반에 상당수 존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에도시대의 학교·출판·독서문화는 메이지유신의 보이지 않는 기반이었다.


2. 이번 회의 가장 중요한 통찰은 ‘선택적 수용’이다

함재봉이 묘사하는 일본의 지적 태도는 한마디로

<받아들이되 복종하지 않는다>

이다.

중국에서 유교를 받아들이고, 조선에서 서적을 받아들이고, 네덜란드에서 서양과학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것을 일본에서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라고 묻는다.

이러한 <선택적 수용과 재해석>이야말로 일본 근대화의 가장 중요한 지적 특징이라는 설명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3. 그러나 조선과 일본의 대비는 역시 지나치게 선명하다

문제는 여기서 다시 나타난다.

함재봉은

<조선 = 주자학의 독점과 사상적 폐쇄성>
<일본 = 다양성과 개방성>

이라는 강한 대비를 제시한다.

분명 상당한 차이는 있었다.

하지만 조선에서도 실학, 서학, 양명학, 고증학적 연구 등 다양한 지적 흐름이 존재했다.

따라서 <조선에는 사상적 다양성이 없었다>고 해석하면 지나치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조선에서는 주자학적 정통의 정치적·제도적 구속력이 일본보다 훨씬 강했다>

라고 표현하는 편이 적절하다.


4. 국학에서 군국주의까지의 연결에도 중간 단계가 필요하다

함재봉은 국학과 일본적 정체성의 발견이 메이지천황제, 일본 예외주의, 궁극적으로 군국주의의 한 사상적 뿌리가 되었다고 본다.

이 연결에는 상당한 일리가 있다.

그러나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미학과 1930년대 군국주의를 직접 연결하면 지나치게 단순해질 수 있다.

그 사이에는

메이지국가 건설, 천황제 국가이념, 제국주의, 사회진화론, 서구 인종주의, 군부의 성장

등 여러 단계가 존재한다.

따라서 국학은 <군국주의의 직접적 원인>이라기보다 후대 국가주의가 활용할 수 있었던 <문화적·상징적 자원>으로 보는 편이 좋다.


종합 평가

66회는 지금까지 이어진 함재봉의 일본 근대화 설명에서 매우 중요한 회차다.

특히 다음 네 가지가 핵심이다.

<첫째, 일본의 쇄국은 완전한 폐쇄가 아니었다.>

<둘째, 에도시대에는 이미 상당히 높은 문해력과 교육체제가 존재했다.>

<셋째, 중국과 조선에서 들어온 사상을 일본인들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재해석했다.>

<넷째, 이러한 지적 독립성이 메이지유신의 근대화를 가능하게 했지만 동시에 일본 민족주의와 천황제 국가주의의 기반도 만들었다.>

따라서 이번 회차의 가장 중요한 문장을 하나로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메이지유신의 진정한 준비는 군함과 공장을 만들기 전에 이미 학교와 책, 사상논쟁 속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63~66회를 함께 보면 함재봉의 논리는 매우 선명해진다.

<도쿠가와의 정치질서가 평화를 만들고 → 평화가 시장경제를 만들고 → 경제발전이 교육과 지식사회를 확대하고 → 사상의 다양성이 외부문명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게 했으며 → 그 모든 에너지를 조슈·사쓰마 세력이 메이지유신이라는 국가혁명으로 결집시켰다.>

이 서사는 상당히 강력하다.

다만 앞으로 계속 확인해야 할 것은 함재봉이 <일본의 역동성을 설명하기 위해 조선의 내부 변화와 다양성을 지나치게 축소하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점이다. 바로 그 문제를 함께 보아야 『한국 사람 만들기 II: 친일개화파』의 전체 논지를 균형 있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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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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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한국인의 탄생의 함재봉입니다. 오늘은 어 일본의에도
시대의 사상과 교육에 대해서 어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메이지 유신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고 메이지 유신이 왜 일어났고 왜 메이지 유신은 어 조선의 근대 개혁
시도나 어 중국의 근대 개혁 시도와
전혀 다르게 성공적이었을 수밖에 없었는가? 그 이유를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데 지난 시간에 경제 애도 시대의 경제 그니까 메이지 유신 일어나기 그
바로 전야의 경제가 어땠었고를 봤다면 오늘은에도
시대 메이지 일어나기 직전에 일본의 사상 그다음에 교육이 어땠었고
그것이 어떻게 일본이 근대화에 더 적극적으로 임할 수 있게
그런 토대를 놔줬는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습니다. 한국인의 탄생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조소는 임진회란이 끝난 다음에 일본과 일본을
상대로 쇠국 정책을 폈습니다. 일본도 사실은 쇠국 정책을 피죠. 사회곡구라
그래 갖고 일본도 유명한 쇠곡 정책을 un니다. 그런데 일본이 쇠곡 정책을
피는 거는 좀 다른 이유에서입니다. 도덕크가와는
정권을 잡은 다음에 쇠국을 하는 이유가 덕꾸가 외국
정책을 펴기 이전에 일본은 해외랑 많은 교류가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포르투갈하고 교류가 있었던 거죠. 그니까 포르투갈에서 어 많은
상인들이 왔었고 포르투갈에서 조총을 받았고 어 포르투갈에서 여러 가지 문물을 받았고 그리고 실제로
포르트갈에 사람들도 보냈었고 사신단도 파견을 했었고 그러면서 일본은 사실은
굉장히 개방된 사회였습니다. 자, 그런데 도구가와의 입장에서는 참근 교대, 상긴 교대 이런 거를
말씀드릴 때도 또 언급했듯이 뭐냐면 자기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굉장히
복잡한 절묘한 세력 균형 체제를 지금 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자기가 제어하기 처음 힘든 것이 뭐냐면 바로 외세였었습니다. 근데 그 외세가 해피면은 제일 많이
교류하는게 사스마 같은 데입니다. 그러니까 교수지방이죠. 그러니까는
자기가 만들어 놓은 체제를이 절묘한 균형을 깨뜨리는 위험 깨뜨릴 가능성이
제일 큰게 외국으로부터의 어떤 개입, 협조, 도움. 특히 조수나 사스마
같은 번하고 외국이 조총이나 대포나 이런 놀라운 병술들을 갖고 있는
나라들이 혹시 손을 잡고 나면 큰일 나니까 그걸 끊어 버리기 위해서 쇠곡을 하게 되는 거죠. 도크가와는
근데 분명히 외국과의 교류가 필요하다는 건 알았습니다. 그 전에 일본이 외국으로부터 여러 가지 문물을
들여오는 걸 다 알았기 때문에 그렇죠. 사실 뭐 가장 비근한 예가
사스마가 포르투갈 상인들로부터 조청을 받지 않았으면은
그러면 일본이 그 막강한 군대를 키워 갖고 임주나라를 일으킬 수도 없었던
거고 그렇죠. 그래서이 사람은요 도고가 시대는 뭘하냐면 포르투갈하고는
끊습니다. 그런데 포르투갈은 카톨릭 국가이기 때문에
독구가 뭐를 아냐면은 카톨릭 국가하고 극렬하게 지금 전쟁을 하고 싸우고
있는게 뭐냐면 캐신교 국가. 그러니까 서양에서 유럽에서 지금 종교 개혁이
일어나서 엄청난 종교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라는 사실을 알았던 거죠.
그만큼 바깥 세상의 뉴스를 다 접하고 있었던 겁니다. 카톨릭은 계속해서
지금 조수 사스마 이런 데랑 친하게 지내고 그러니까 그걸 끊어 버리기 위해서 카톨릭은 끊어야겠어. 근데
카톨릭은 끊지만 카톨릭으로부터는 쇠곡을 하지만 그리고 카톨릭 신자들을
대거 박해해서 그 끈을 완전히 끊어 버리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박깥 세상은 알아야겠다. 박화
세상의 소식은 전해져야 되겠다. 그러니까 그때에 가장 강력했던 개신교 국가였던
네덜랜드를 접촉을 합니다. 네덜랜드의 동인도 회사 보고 뭐라 그러냐면
당신들은 어차피 카톨릭이랑 맨날 싸우고 있으니까 우리랑 교육을 할 수 있다. 동인도
회사만 지사를 하나 차릴 수 있다. 근데 어디에 차리냐? 나가사기에
인공섬을 만듭니다. 대지말한 인공섬을 만들어서고 섬에만 네덜랜드
동인도 회사의 상관장 상관이라는게 이제 무역 회사죠. 무역해서 지점장과
몇몇 직원들은 와서 있으면서 무역은 하고
네덜랜드 동인도 회사의 상관장한테 지점장한테 요구한게 뭐냐면 매년
1년에 한 번씩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뉴스를 그걸 다 정리를
해서 그거를 1년에 한 번씩 보고서를 만들어서 쇼근한테
독구가 막부에 갖다 보고를 하라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화란 풍설서 1번 말로 오란다
후세츠가키 그니까 화란 풍설서 화란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환란이
정리한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얘기들입니다. 이거를 1년에 한 번씩 제출을 해야
됐고이 화란 풍설서설서를 들고서 그걸 가지고 애도까지 이제 가는 겁니다. 가사기에서이 상관장이 그걸 들고
가면은 그 사이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일본의
학자들과 그 길에서 도중에 그거를 보고 그걸 베기고 그러면서 전 세계
뉴스를 다 합니다. 그러니까 사실이 과정을 통해서 일본의 학자, 의사,
관려이 사람들은 박화 세상을 굉장히 많이 알 수밖에 없었고 그러면서 동시에 유럽의
여러 사조 이런 것까지도 접할 수가 있었습니다.이 이 난학이 들어오게
되는 과정이 보여주듯이 일본은 세국이라고는 하지만 조선같이 철저한
세국을 하지 않습니다. 왜? 바깥 세상의 소식을 알아야 되겠고 바깥 세상의
동정을 알아야 되겠고 그리고 바깥 세색의 문물을 도입을 해야 되겠
문을 하나 열어 놓었습니다. 근데 그런 식으로 사실은 저는이 난학
대지마를 통해서 난학이 들어오게 되는 그 그 과정을 보고 있으면은 아
일본은 사상적으로 굉장히 열려 있었구나. 궁극적으로는
조선이 사문난적 해 갖고 주자 집주자가
해석한 사서삼경에 대한 그 집 그
각주에서 한치에도 벗어나는 글을 썼거나 말을 하면은 사 난적이라 그래
갖고 죽임을 당하고 쫓겨남을 당해야 되는 그것과는 전혀 다르게 사실은
서양의 첨단 문물까지도 도 소위 소위을 하는
도중에도 끊임없이 일본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것이 사실 일본의 도구가와 시대의 정책의
근본적인 성격이었습니다. 따라서 도구가와 시대를 보면요.
놀라운 사상의 다양성을
보여줬던 시대입니다. 조선으로부터 주작이 들어옵니다.
나중에 일본의 궁국주의에 기초가 되는 곡구각구, 국학 그리고 고각구,
고학, 그러니까 주자학, 고학, 국학,
난학 이러한 조선으로서는 상상을 할 수 없게 조선은 주자학자들이 양명학만 하더라도
사문난적이라고 배척을 했습니다. 양명학조차도 조선 시대는 자리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반면에 1번에는
유교 당연히 양명학 같은 것도 있고 주자학도 있었고 그렇지만 자체적으로
개발하는 고학이라는 것도 있고 국학이라는 것도 있고 네덜랜드로부터
들어오는 난학이라는 것까지 있었습니다.이
이 모든 것이 일본의 사상계를 일본 사람들의 정신 세계를 훨씬 더
개방적인 만들었고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충분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해 줬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사상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저 퍼지기 시작하면서 일본
사회의 전체적인 어이 지식 수준이나 이런 것이 이제 굉장히 급격하게
향상이 되기 시작을 합니다. 독구가와 시대 초기만 하더라도요. 일본의 문혜력은 굉장히 낮았습니다. 뭐 승녀
일일부 다묘들 이런 사람들이나 글을 한문을 읽을 수 있었지 조선과 비슷한
상황이었겠죠. 나머지 일반 사람들은 전혀 글을 몰랐었습니다. 그런데
도구가와의 쇼군들은 일반 백성들한테도 그를 적극적으로
장렬을 하기 시작합니다. 다섯 번째 쇼은 도구가와 쓰나요씨.이 이 사람은
1680년에서 1709년까지 이제 소근을 한 사람인데이 사람은 자기가
유교의 성인인 동시에 불교의 상황이다. 이렇게 자처를 합니다. 그러면서 유교하고 불교의 보급에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8대군 도크가와 요시문회 시대의
학자라인데이 그림에서 보시는 어 가다노 아즈마로라는 학자인데이 사람은
아예근에 허락을 받아 갖고 학교를 세우고 그리고 오사가의 또 상인들은
쇼근에 허락을 받아 가지고 자기네 자식들한테 상인들의 자식들한테 윤리도
가르치는 가독꾸독도 회덕당 우리말로 회덕당입니다.
가독구도라는 학교를 열립니다. 그리고 이제 사무라이 제자들을 또 가르치는 학교들도
우죽순처럼 18세기에 들어와서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불교나 유교를 가르치는
학교, 상인들을 가르치는 학교들도 생기고 그죠. 그렇지만은 또
사무라이들을 가르쳐야 되겠다라는 학교들이 각 번마다
생겨나기 시작을 하는 거죠. 사실 이게 전부 다 사무라이들이 세운 학교들이죠.
무사들이 장악한 사회니까 조선과는 달리이 문사, 선생, 교사들은 영 대접을 못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독거가 시대의 특이한 점은 조선과는 크게 다뤘던
점은 선생들이 문사들이 전혀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지휘가 굉장히 낮 낮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이
경학의 수준, 경서의 수준 같은 것도 이제 유교 경전 이런 거의 수준도 사실 조손의 뭐 그 서원이나 이런
데의 향교의 수준보다 낮았습니다. 그런데도 이것이 퍼져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많은 곳에 퍼져 있게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보통 사람들한테
글을 가르치고 문회력을 높이는데 데는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일본과 조선의 또 큰 차이입니다. 중국하고도 중국과 일본의 큰 차이입니다. 메이주신이 시작하기 전에
이미 일본의 일반 대중들 일반 서민들 일반 농민들
평민들의 지식 수준 글 읽는 수준 문회력은 소이나
중국에 비해서 월등이 높았습니다. 성민들을 위한 학교 중에서 이제
대표적인 것이 데라코야라는게 있습니다. 이게 뭐냐면은 어 데라코야라는 건 이제 초동
초등학교죠. 그래서 어 읽기 쓰기 또 뭐 윤리도 실무 지식 회계 이런 거를
좀 가르쳤습니다.이 그림을 보시면은 여기는 학생들이 얼마나 즐겁게 공부들
재밌게 공부를 하고 있고 재밌는 것은 교사들이 여성 여성 교사들이 있습니다. 상업이 발달하고 잉여가
나고 그러니까 학교를 세울 수가 있고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기고 여가가
생기는 거고 공부를 가리칠 수 있는 선생들이 생기는 거고 공부를 가리쳐서
학교를 운영해서 돈을 벌 수 있을 정도로 경제가 풍여어지는 것이고 그러니까는 학교들이 우죽순처럼
늘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도구가와 박후 도구가 막부 말기에는요.
이게 놀라운 통계입니다. 일본의 남자 아이들의 40%
이상이 여자아이들의 10% 이상이 학교
교육을 받은 것으로 줘서 1번은요. 19세기 중반 전 세계에서
교육 수준이 가장 높은 나라 중에 하나입니다. 여기에 필적할 수 있는
나라. 글쎄요. 스쿼틀랜드, 잉글랜드, 네덜랜드,
미국 정도밖에 안 됐을 겁니다.
일본의 교육 수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교육 수준에 도달합니다.
메이지 유신 이전에 이미 도달합니다.
법률 방송이 출관하는 시사 교양지 법치와 자유는 우리 사회가 증면하고
있는 법치의 문제들을 가장 냉철한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는 정론지입니다.
2026년 대한민국의 오늘을 가장 정확하게 깊이 있게 읽어볼 수 있는
법치와 자유를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온라인으로도 편하게 읽어 보실
수 있습니다.
사상이 아까도 말씀드리지만 주자학 저 유교 주유 주자학 그다음에
고구각구 국 그 국학 그다음에 고학
그야말 옛날 고학문 할 때 고문할 때 고학입니다. 그다음에 난각구가 이렇게
들어옵니다. 자 그럼 우선 추자학이 어땠었던가? 일본은 당연히 주자학의
나라였습니다. 역설적인 사실이 임진회란 때문에 일본의 주작이
본격적으로 또 퍼지는 계기가 납니다. 됩니다. 특히 퇴계의 저술 같은 것이
일본이 와서 약탈해 가서 가져간 그런 것들이 일본에 급격히 퍼지면서 일본의
주작 부음을 일으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어 전에도 제가 한번 말씀을 드렸는데 KBC 대학에 한
교수는 아예 임진회란이 체계 전쟁이라고 말할 정도로 일본이 임진회
당체 조선에 있는 책들을 다 쓸어갑니다. 그래서 그 책을 가지고 일본이 문의 부흥을 일으키는 학문적인
부흥을 일으킨게 그게 바로 애도 시대가 됩니다. 조선은 그때 약탈당했던 책들을 전부 다 다시
재발행을 하기 위해서 그 대역사를 일으키는게 그게 바로 영정조 시대의
문의 부흥이 되는 겁니다. 일본에서 주자학을 처음 받아들였던 것은 이제
중국으로 유학 같은 승려들이었고 그 사람들을 통해서 이제 받아들였던 거고 그렇지만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동시에
임진한테 조선에서 약탈해 온 조선의 서서적들 그중에서 특히 세계 그
저서들이 그렇게 널리 읽히면서 일본의 주작부을 일으킵니다.에도 에도
시대의 유학자들은 당연히 굉장히 하측민들이었습니다.
무사들이 권력을 잡고 있던 시대였기 때문에 문사들은 아무 굉장히 지위가
낮았죠. 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발전을 하고 여가가 생기고
합격이 생기고 하면서 유학자들의 선비들의
그죠 지위가 격상되기 시작하고 지식인들이 대접을
받기 시작하는게 또한에도 시대였습니다. 도크가와 바크가 주자학을
받아들이는데 결정적인 역할 하는게 하야시 라잔이라는 학자입니다. 도크가와이아스는
어이 사람을 어용학자 우리가 어용학자 그러면 굉장히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데
일본에서는 어용학자가 누구냐면은 바로 도구가와 박쿠후 쇼근이
임명한 굉장히 명예로운 최고의 학자로 임명한 것이 어용학자인데 하야시
라잔이 도크가와 이에아스의 어용학자가 됩니다. 근데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도구가와는 하야지 라잔 보고 자꾸 승려가 돼. 그러니까 어형학자로 임명을 한 다음에 자꾸 승려가 되라
그럽니다. 근데 그 이유가 뭐냐면은 도크가이아스조차도 사실 승려와
주자학자, 유학자의 구분을 몰랐답니다. 일본 사람들한테 불교와
유교의 차이가 그게 명확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런 것은 사실 주작은
새로운 학문이었다라는 거죠. 유교라는 것은 임진회라는 이후에나 일본에 들어오는
굉장히 새로운 학문이었습니다. 하야지라 같은 학자들은 학문만
도입한게 아니라 당시에 쇼근 같은 사람들한테 여러 가지
자문을 해 주는 역할을 하고요. 그리고 따라서 17세기에 이르면은
완전히 거의 모든 다이묘들이 자신의 주위에 이제
우리는 문사라 그런는데이 사람들은 아예 유사라 그랬습니다. 유학을 하는 사람들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자문도 하고 그러라고 이제 두기 시작하는 거죠. 자, 그런데
여기까지는 사실 조선의 주사학과 비슷한 측면들이 많습니다. 조선의 유교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1번의
주자학이. 그런데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이
사람들은 주자학을 절대적인 거로 받아들지 않습니다.
어떻게서든지 주자학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일본 것으로 만들려고 일본의
고유의 사상과 접목시키려고 그렇게 노력을 합니다.
조선에서는 어떻게서든지
중국의 명예 명나라에 그전에 주자에 사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체제와 학교와 글과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내제화시키려고 했다면은 일본은 그
주자 자을 받아들이면서 자기 것과 자기의 고수 사상과 접목을 시킵니다.
그래서 하현신는 이렇게 합니다. 유교의 왕도 정치를 일본의 신도와
접목을 시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러면서 뭐라 하냐면 중국의 경제에
있는 가치들 그 다 보편적인 가치 아니냐. 그래서 그게 꼭 중국에서만
중국에서 그게 먼저 나온 것은 그냥 우연일 뿐이지 그게 꼭 중국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 중국 성현들의 도는 곧 일본의 가미들의 도이기도 하다. 중국
성현의 도는 일본의 신들의 감미,
일본 신의 도이기도 하다. 똑같은 거다. 일맥
상통하는 보편적인 거다.라고 주장하면서 일본의 신화들을 주자하게
본체론과 또 접목을 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도 합니다. 일본
사람 중에는 중국인들보다 뛰어난 사람들도 있다. 가르쳤다고 뛰어난 것도 아니고 배웠다고 못한 것도
아니다. 뛰어남은 그 사람이 얼마나 지혜와 관영과 용기를 보이느냐에
달렸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는 중국의 중화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소중화를 하겠다라는 생각을 하는게 아니라 중국의 사상을 받을수 이건
보편적이니까 그 보편적인 것을 우리 식대로 받아들이고 우리 식대로 소화를
하면 된다라고 하는 것이 일본이 유교를 받아들이는 자세였습니다.
일본이 얼마나 일본의 사상가들이 에도시대 일본 사상가들이 얼마나 자기 식대로
중국의 사상을 받아들려고 했는지를 가장 정하게 보여 준 것이이 아마삭기 안사 안사이라는 어 일본의 또
주자학자입니다.이 사람은 젊었을 때 불교 승려로 지냈습니다. 그러니까 불교가 성했던
일본에서 주작이 들어올 때 가장 먼저 주작을 받아들였던 것은 당연히 한문도
잘 알고 불경을 읽음으로써 한문을 잘 알고 했던 불교 승려. 더군다나
주자학이라는 것이 중국의 수나라 당나라 시대의 불교 사상을
접목하면서 그 불교 사상을 소화시켜 갖고 다시 유교를 해석해낸 것이
주자가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일본에서도 불교 승려들이 가장 주작을 받아들이기 쉬웠던 거죠. 그러니까는
자꾸 도구가와서는 하야시장 보고 당신은 왜 승려하나냐고 했던 것도 바로 그런 맥락이 되겠습니다.
야마잡기 안사이는 어
도사국에 가서 교도하고 도사에가 가지고 송유학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 에도에서는 또 신도를 접하면서 어 하야라 같이 이제
주자학하고 유교하고 신도를 이제 접목시키려고 어 굉장히 애를 시키
애를 쓰고이를 통해서 일본의 고대 사회에 대한 일본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합니다. 그는 6천명이 넘는
제자들을 길러내고요. 그리고 어 고대 일본이 중국보다
더 발달된 문명을 어 가졌다. 이런 거를 이제 증명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야마자끼 한사이가 얼마나 글쎄요. 객관적으로 얼마나 그 중국의
문명을 자기 식대로 받아들였는지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다음
대목입니다. 이것은 어 하라낸사이라는
야마삭키 안사이의 제자가 저술란 선담이란 책에 나오는 장면인데
야마자끼 안사이가 자기 제자들하고 이제 대화하는 장면입니다. 그 장면이 이렇습니다.
안사이는 제자들에게 지금 저 나라가 중국이 공자를 대장으로 삼고 맹자를
부장으로 삼아 수만 명의 기병을 이끌고 와서 우리나라를 공격한다면
공맹의 도를 배우는 우리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제자들한테 질문을 했답니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답을 못 하는 거죠. 그랬더니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불행하게도 만약 이러한 재을 만나게
된다면 우리들은 몸에 견고한 갑옷을 걸치고 손에 예리한 병기를 잡고
그들과 일전을 수행하여 공맹을 잡아 구근에 보답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맹의 도다. 여러분 이런 질문은요. 이런 대화는
조선에선 상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공자맹자가 중국 사람이기 때문에
언젠가 조선에 쳐들어올 수 있다. 따라서 만일에 쳐들어올 경우에 어떡할 거냐?
아예 그런 질문을 너무나도 불경스러운 질문이기 때문에 조선에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국과 그러니까 공자 맹자를 중국 사람이라고 객관화를 시킨 적이
없습니다. 조선에서는 중국과 별개에 독립된 정체성에 대한
개념이 조선의 주자학자들 사이에서 없었죠. 어떻게서든지 중국의 주자학을
그대로 받아들이느냐. 소중화를 하느냐 그게 중요했던 것인데
반면에 야마사기 안사이는 뭐라 그럽니까? 지금 우리가 하는게 소중화 아니야. 중국거를 우리 거 갖다
놓는게 아니라 중국의 놀라운 사상과 대단한 사상이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중국거다. 우리 식대로 그걸 받아들이고 객관을 시켜서 받아들여야
된다라고 하는 것이 일본이 야마자끼 안사이가 주작을 받아들이는 근본적인
자세. 조선과는 완벽히 다른 그런 자세였습니다. 그다음에 이제 또 일본의 유명한
유학자 중에 오규소라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이 오규소라이는 어 에도에서 어 활동을 했고 특히
오데쇼군 도구가와 스나요씨의 지원을 받아서 그 결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서
활동을 하다가 그다음 쇼근 때는 내침을 받습니다. 그랬다가 8대 쇼근
때 다시 어 독구가 요시문회 때 다시 등용이 됩니다. 그러면서 문학,
사상, 법, 역사, 음악, 군사, 베라벨 분야에 대해서 이제 다 저술를 어 합니다. 오규소라이는 떳떳하게 야
나의 학문 중국의 어떤 사상가의 학문 못지 않아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오규소라이는
주자학에도 반기를 듭니다. 주자학은 원래
노노맹자 이러한 원래 유교의 경전이 나온지 천년 후에나
지난 후에나 쓰여진 책이 바로 주자의
집주들이다. 후대의 해석에 불과하다.
그래서 원래 그러면 유교의 뜻을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주자학을 통해서 하면은 오히려 왜곡이 된다. 그러니까
고문학, 주자학 이전에 있었던 원시유학 그것을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곧 그 당시에 글을 알아야 된다. 그 글 주자하기 그거를 변형시키고
왜곡시키기 이전의 의미를 되찾아내야 된다면서 고문학을 일본에서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중국어하고 일본어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니까
중국어도 시대에 따라서 변하는데 일본은
일본 더구나 자기네만의 읽기 간이라는 자기네 특히 자기네 만에 한 문이
있는데 읽기가 있는데 그거를 통해서 접하기 때문에 일본은 또 전혀 다른 방식이다.
그리고 1번이 또 왜곡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모든 거를 극복을 하고
왜곡되지 않은 유교 경전을 주자학도 왜곡하지 않은 그전의 거를 하기
위해서는 고문을 배워야 된다. 그러면서 1번의 고문 사학을 창시하는 사람이 또 오규소라입니다.이 역시
뭡니까? 우린는 다르다. 시대마다 해석이 달라진다.
놀라운 얘기 아닙니까? 주자학자들은 사문난적해서 주자가 쓴 글에 단 한 옷이 하나도
틀리면은 죽여 버리는 그러면서 사상을 세계를 닫아 버리려고
하는 정조의 문체 반정도 그런 거죠.
이상한 새로운 문체가 나오지 못하게 옛날 문체를 그대로 유지해야 된다라고 하는 거죠.
그러면서 사상을 닫아버렸던 반면에 지금 일본에서는요. 유학자들 본인들이
공맹에도 공맹이 우리나라 쳐들어오면 어떡할 거냐라는 질문을 하면서 그러면서 주자학조차도
원래 공자 맹자의 시대에 천년 넘게 나중에 나온
얘기들인데 그 해석을 갖고 지금 우리가 볼 수 없는 거고 우린 더운다나 일본 사람이기 때문에
중국하고 또 다르다 그러면이 모든 걸 극복하고 원래의 뜻을 하려면 우리가 고문을 제대로
읽어 어서 해야 된다라는 완전히 새로운 해석학을 일본식 해석학을 창시를 합니다. 이게
전부 다 뭐냐면 아 문명이라는 거는 시대적으로 달라진다. 변천을 한다.
그리고 나라의 성격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라는 그러한 우리
근대인들이 알고 있는 이런 여러 가지 인식론적 상대주의
조선의 주자학자들은 그냥 딱 주자학만 붙잡고 해석 하나 변치 않는 진리
사문 그거 하나만 붙잡고 있으려고 했다는 반면에 일본에서는이 다이 시대
따라 변천하고 나라 따라 달라지는이 이 사상, 해석, 유교 이런 거에
대한 놀라운 의식을 갖고서 그거를 공부를 해 나가기 위해서 새로운
해석학, 고문학 이런 것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 대표적인 사상가가 바로 오교소라입니다.
자, 이런 경향들이 결국은 19세기에 들어오면은 이제 미토학파라는 것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는데 어이 미토
학파는 어 미토번이라는 데는 도구가와랑 가장 친한 번입니다. 도구가와의 방계 번이었었죠. 근데이
번에서 학자들이 연구를 해낸 것이 미토학인데이 미토 학가 뭐냐면은
미토학글이라는 걸 만들어냈는데 유교와 일본 고유의 사상을 접목시키는
것도 일본의 고유 사상을 대표하는게
천왕이라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참 이것도 역설인데 도구가와 막부의 방이면서 도구가와
막부 밑에서 가장 번창하던 그 밑도 번뇌 학자들이
독구가 나중에 결국은 도구가와 막부를 무너뜨리면서
메이주신 일으키는 사람들이 천왕을 다시 데려오는데 그 그 천왕에 대한 사상
천왕을 을 존황하는 존황 천왕을 존중하는이 존황이 사상 메이지 유신의
핵심적인 사상이 되는 그 존황 사상을 만들어내는게 바로 도구가와 가문에서
통치하던 미도번의 미도학자들이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이 사람들이 천왕을
새롭게 해석을 해서 천왕 중심의 일본을 만들어 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국채쿠타이라는 개념을이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거고 그쿠타이의 핵심이 천왕이 되는 거죠.
그래서 이때 이제 앞편 전쟁이 일어나고 그러면서 중국이 청이
계속해서 서양한테 침탈을 당하고 구력적인 패배를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도학파 학자들이 뭐라는 결 어떤 결론을 내리냐면
중국이 저렇게 서양보다 약해진 이유 그리고 서양이 중국보다
저렇게 강해질 수 있었던 건 일본 서양은 국교를 걸 갖고 그 국교라는게 기독교겠죠. 그 국교를
갖고 있기 때문에 저렇게 강한데 중국은 그런게 없다. 그러니까 우리도 저런 일을 당하기 전에 일본에서도
국교가 있어야 되겠다. 그 국교가 바로 미도각가 말하는 천왕 중심의
국체론이 되는 거죠. 자, 그러면 이제 주자학이 이렇게
발달하면서 어 고유 사상과 접목이 되고 그러면서 이제 국채론까지도
나오고 조항 양의 사상까지의 그도 나오게 되는데 또 다른 한편에 이제이
국학이라는 것이 또 만들어지게 18세기에 나오기 시작하는 일본의 국구 갖고는 중국학을
권학한 꾸라고 불렀습니다.이 권학에 대한 의식적인 반발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주자학을 받아들이는 오교소라이나 야마자끼 안사이나 이런
사람들도 유교를 일본식으로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러면 곡구 갖고라는 거 국학이라는 것은 아예
중국학을 주자학을 포함한 유교를 포함한 모든 중국학을 배촉을
하겠다라는 겁니다. 그게 또 일본에서에도 시대에 일어나는 사상의 큰 사상 중에 하나입니다.이
이 곳 국학 일본의 국학에 관심 있는 학자들은 그 사람들은
중국의 경서 사서 3경 같은게 관심 있는게 아니라
문학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일본 고유의 문학, 일본 고유의 시 이런
것에 관심을 갖습니다. 일본의 문학에 담겨 있는 그 아름다움,
그 기가막힌 일본식 묘사 이런 것이 주자학의 윤리나 도덕, 유교의 윤리나
도덕 이런 거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그러니까이 도덕 중심주의 유교의 도덕
중심주의에서 벗어나면서 미학
미학과 이학적인 거를 가지고 일본의 고유성을 찾아내기 시작을 합니다.
이것도 참 놀라운 현상입니다. 그러니까는 모든 것을 도덕론 윤리도
윤리도 그게 뭐 기독교 윤리도 그니까 조선에서는 기독교를 받아들이도 그것도 거기에
윤리 도덕론 우리는 모든 사상 그러면은 거기에 윤리와 도덕이 어떻게 되고 국가 체제가 어떻게 되고 이렇게
항상 생각을 하는데 그게 불교의 윤리도 유교의 윤리도 기독교의 윤리도
우리가 사상적 다양성이라는 것은 사실 그 다양한 사상이 갖고 있는 각기 다른 유교 그러니까 윤리도론들이죠.
근데 일본에서는 국구가 그거가 나오면서 윤리도 자체가 아니다. 특히
중국의 윤리도 아니다. 그럼 뭐냐? 미학이다는 거죠. 일본만의 아름다움이
있고 이게 진짜 일본이다라는 것이 일본 국학의 기본입니다.
그러면서 주자학계 뭐 이런 글쓰기 형의상학적인 토론들 이런 것들 논리들
논지들 이런 글을 글보다 자연을 칭송하는 일본의 간결한 시들
있잖 하이쿠 같은 일본의 시 있지 않습니까? 그 시가
이게 더욱 아름다운 일본 사람들만의 감정과 미적인 감각을 드러내는 거다.
이게 일본 정신의 완벽한 구현이라 그럽니다. 일본이 아직도 뭐 하이코가
됐든 이런 여러 가지시나 일본적인 미적감과 그림 이런 것들이 살아 있는
것이 바로이 곳 각구가에도 시대에
발현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이 국학의 대표적인 사상가 멋도오리 어이
나갑니다. 1730년에 태서 1811년에 1801년에 죽은이 못도오린 우리
나인데요. 상인의 아들이었습니다. 근데 상인의 아들인데 평생 일본의 시
그다음에 고대문학을 탐구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적인
고사기를 연관데만 30년을 바칩니다. 일본 해안 시대 11세기 중반 중반에
쓰여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소설이라는 겐지모노 갓다리 원시
어으로 그러니까 겐지모노 갓다리라는 책을 집중적으로
연구를 합니다. 불교나 유교처럼 자꾸 당위론 윤리 도덕을 하는게 아니라
지금 겐지노 갔다리더라도 그게 어떠한 도덕적인 측면에서
윤리도덕적인 교훈을 주려고 한 소설이 아니라는 거죠. 그전까지는 사실은 겐지문노가리라는게 일본에도 당연히
가장 오래된 소수에서 알려져는 있었지만 일본의 불교 승 승들이나
일본의 유학자들은 뭐라 그랬냐면 이거는 그런 얘기가 아니거든요. 지금 겐지문어 갔다리는 무슨 얘기입니까?
궁중에서 일본의 아직 속은 이전의 시대에 아직도 궁정 시대에
천왕이 통치하던 시대에 그때 궁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그 남녀간의
사랑 얘기 이런 얘기들입니다. 그니까 완전히 연애 소설 같은 겁니다. 요정 치면 그러니까 여기서는 사실 무슨
윤리도적으로 권선학도 아니고 윤리도 얘기도 아니고 어떻게 살아야 된다 뭐 이런 얘기를
하는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일본에서조차 불교나 유교의
입장에서는이 겐지노 갔다리를 다루지를 않았습니다. 일본의 전통은
자꾸 불교나 유교처럼 사람의 어떤 인간의 어떤 윤리도적인
완성을 기하려고 하는게 그게 학문이 아니다. 그냥 뭡니까? 그 아름다움,
삶의 아름다움, 슬픔, 그 감정
말하자면 사단칠정 우리가 보통 그러면 사단이 흰 있는 예지고 그게 진짜여야 되고
히너에락 에오역이 칠정은 이건 우리가 어떻게 억눌러야 된다고 봤다면은 못나랑 거꾸릅니다. 사단 이런 거
하는게 아니다. 지금 겐지노가리에서 얘기는 거기서 무슨
인의지 얘기를 하고 있냐? 아니다. 칠정 얘기를 하고 있 거다. 흰노에락, 에오욕 이런 거. 그런
거를 아름다운 글과 아름다운 묘사를 통해서 묘사를 하고 있는 거. 그거를 그려 보여주고 있는 것이 이게 일본
진짜 일본거다라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노리나가의 가장 큰 업적은 뭐냐면 모노아레 무레의
사물의 슬픔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냅니다. 이게 일본 미약의 아주 정수가 됩니다.이
일본 고유의 미적 개념을 만들어야 냅니다. 그러면서 사물의 슬픔 비해로
이렇게 직역을 보통 하는데 일본 저 불교의 무상 개념 이런
비슷한 그런 개념이지만은 모든 것이 무상하고 슬프다라는 그
불교적인 무상론과 거기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거기에 굉장히 탐리적인 감각, 감성
그리고 단순하지만 굉장히 깊은 감정의 느낌과 표현 이런 거를 추구를
합니다. 기쁨 슬픔 모든 것이 아와레일 수 있고 아와레를
성리학적이나 무슨 이런 걸로 자꾸 억누르려고 그런 것은 위선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맛있는 것을 먹고 싶고 좋은 옷을 입고 싶고 큰 집에서
살고 싶고 돈을 손에 넣고 싶고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싶고 오래 살고
싶어 하는 것은 모두가 인간의 본래적 마음이다. 그런데도이를 좋지 않은 것으로 여기면서 오히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태도를 대단하게 생각하여 마치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고 바라지
않는듯한 척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은 것은 저 중국풍의 시끄러운 위선과
허위의 다름이 아니다. 유교를 중국풍의 허허위라고
그죠 위선이라고 비판을 합니다. 세상에서 선생이나
거사 등의 공경받는 지식인들 혹은 승녀들이 다리나 꽃을 보고는 아
아름답구나라고 감탄하는 언굴을 하면서도 예쁜 여자를 보고는 본 척도
안 하는 얼굴로 지나쳐 버린다면 그것이 본심이라 할 수 있을까? 만일
다리나 꽃을 정치 있게 볼 줄 아는 마음이 있다면 예쁜 여자를 보고 어찌 눈을 옮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리나 꽃에는 정치를 느끼지만 여색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은 인간적인 마음이 없는 위선에 찬
인간이다. 얼마나 적나한 얘기입니까? 주자학자들이 조선의 주자학자들이
들었으면 큰일 날 얘기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얘기들을 일본의 사상가들이에도
시대의 사상가들이 합니다. 그러면서 겐지모노 갓다리 같은 책은
절대로 유교적인 맥락에서 해석할 수 없는 권선학이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 뭡니까? 모노아래이 슬픔, 사랑 이런 감정들에 대한
그러한 인간세에 대한 더 솔직하고 아름다운 직설적인 인간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유교와 주자학, 중국풍의 시끄러운
위선을 공격을 합니다. 일본의 시야말로이 일본 특유의 미적
감각인 모노 아와레를 가장 잘 묘사할 수 있는 방법이고 그래서이시는
특히 여성들이 잘 짓는답니다. 그래서 남성보다는 사실 일본의 밑적 감각과
일본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줄 아는 대변할 줄 아는 것은 여성들이 더
남성들보다 더 우월하다라고까지도 못떠오리 노래나간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이
남성우의 사회에서 유교 사회에서 특히 조선 같이 지독한 남성 의의
사회에서여서 이런 얘기는 있을 수가 없는 얘긴데 못또리나 같은 사람들은 일본의 곳학과
학자들은 일본의 진짜 진수는 유교가 아니고 중국도 아니고 자기네 모노
아레라는 것이 따로 있고 이것은 일본의 시만이 제대로 표현하고 그
시를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은 여성들이다. 따라서 가장 일본적인
어떤 것을 사상과 미익적 감각을 배태하고 있는 것은 여성들이다라는
얘기까지도 합니다. 그러면서 일본 문명이 중국 문명을 분명히
능가하고 있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중국 책도 여가에는
충분히 읽을 만하다. 중국 책을 읽지 않는다면 그 나라의 단점도 알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일본의 고소가 전부
한문으로 쓰여 있으므로 중국 문자를 몰라서는 한 문도 진전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이 만사에
그릇되어 있음을 잘 이해하고 또한 일본 혼만 뚜렷하고 흔들리지 않는다면
밤낮으로 중국 책을 읽는다 해도 마음이 동요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얘기입니까? 중국 책은 여가 있으면 그래 읽으면 만하다.
중요한 건 일본 책을 다 읽어야 되겠지만 만약 집이든가 뭐 저 겐지노
갔다든가 일본의 시라가 이런 걸 읽지만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중국
책도 읽어라. 왜? 야 일본 말이 일본 글이 다 한 한문
아니냐? 중국 글이냐? 아니냐? 그러니까 중국 글을 읽을 줄 알아야지 우리가 우리 글도 쓸 수 있다.
여러분 이게 같이 한 문을 쓰지만
그리고 따라서 중국의 한 문을 알아야지만 우리 글도 알 수 있다. 그렇으면 이건 다른 것이다.라고
얘기를 하는 거죠. 그리고 그 대신에 중국의 경서들을 읽을 때 사서
3삼경을 읽을 때 야 이건 다 중국적 위선이다. 이건 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라고 하면서 그렇죠. 일본 내가 일본 사람으로서 갖고 있는
일본의 정신은 뭐노 아레 이런 거다라고 일본은 이런 것이다라는 거
그 정신만 뚜렷하면 아무리 그런 경소 사서경을 많이 읽고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그러니까 지금 일본 사람들 내내 하시 라잔부터 시작해서
전부 다 중국 걸로부터 유교를 받아들이더라도 중국 유교가 다른게
받아들이는 거고 또 곳 갖고해오면은 아예 에 중국 유교 자체를 중국
자체를 중국의 자상 문명 자체를 배척을 하면서 일본 고유의 거를
만들어 내려고 합니다. 곧리나가의
오류랄까 폐착이랄까는 하나는 뭐냐면 일본 고유의 거를
긍정을 하고 그걸 어떻게 해서든지 정립을 시키려고 중국 거를 떼어내고 중국을 배척하고 유교를 배척하면서
일본 고유의 거를 하다 보니까 일본 사기 고사기 같이 일본에서
오래된 책에 나오는 거기 나오는 여러 가지 전설에 나오는 얘기들이 있는데
신화들이 있는데 이거조차도 놀이나가는
사실이었다라고 합니다. 일본의 심화, 일본이 중국하고 완전히 다른 독자적인
문명이고 전혀 다른 밑적인 감각을 갖고 있고 했다라는 그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는
건데이 자부심,
중국에 대한 거부, 내지는 중국에 대한 혐오 이런 것이 합치면서
일본 특유의 일본 예외주의가 나오는 거죠. 그의 사상이 결국은
이렇게 일본 예외주의 사상을 만들어 내는데 큰 기어를 하면서 메이지
군국주의로 전락하는데 있어서 또 결정적인 이론적인 고리 사상적인
고리의 역할을 해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본의 사상을에도
시대의 사상을 공부하데 있어서 이해하데 있어서 다양하다. 열려 있었다. 그리고 마음껏 새로운
사상들을 연구를 해냈고 토론을 했고 퍼티다. 근데 그 와중에서 중국의
문명을 거부하고 유교 문명을 거부하면서 일본 고유의 거를 찾아내려는 그러한 시도들이
미토바에서도 일어났었고 그 각구에 의해에서도 일어났었고 뭐 또 오리노리나 같은 사람들이 그 과정에서
대단한 미학을 만들어 내고 일본 고유의 사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실이지만 또 그런 것이 시대가
바뀌면서 국제 상황이 바뀌고 하면서 결국은 일본의 군국주의에 일본의 의
예외주의에 또 밑바탕이 됐다라는 사실도 우리가
함께인지를 해야 되겠습니다.
네. 오늘은 일본의에도 시대의 어 사상과 교육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거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열려 있었고 어 그리고
어 역동적이었습니다. 어 그런 모든 면이 메이지 유신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밑바탕이 됐던 것은 분명합니다.
동시에 바로 그 사상들이 또 시대가 바뀌면서 일본의 군국주의에 또 밑걸음이 됐다는
것들 우리가 벌써 이미이 사상들을 들다 보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사상이라는 것은 이념이라는 것은 항상 시대에 따라서 새롭게 만들어지기도
하고 또 시대에 따라서 새롭게 해석이 되고 그 정치적인 결과는 역사적인
결과는 전혀 다르게 먼저 만들었던 사람이 예상했던 거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사상이고 이념입니다. 그래서 이런
역사의 교훈을 통해서 우리가 아 이렇게도
좋은데 쓰일 수도 있고 일본 사람들의 자금심과 정체성을 갖다 강화시킨데도 쓸 수
있지만 또 그것이 과하다 보면은 너무나도 엉뚱한 결과, 너무나도
비극적인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라는 것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사상과 인형을 배우고 이용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이용하기 위해서이 역사를 우리가 공부해야 되는 이유기도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오늘 다루지 못했던 어떻게 보면은 일본의에도 시대 사상에 가장 특이했던
점 즉 난구 란각구 일본의 어 네덜랜드에서 들어온 그 학문이 또에도
시대에 어떻게 변형이 됐고 퍼졌는지 어 다음 시간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통해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한국인의 탄생. 오늘은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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