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16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68 목숨을 걸고 일본을 바꾼 사람들

목숨을 걸고 일본을 바꾼 사람들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68회 - YouTube
목숨을 걸고 일본을 바꾼 사람들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68회
법률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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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강연은 함재봉의 『한국 사람 만들기 II: 친일개화파』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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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제68회 강연 내용에 대한 요약과 평론입니다.

요약

  • <네덜란드 풍설서와 막부의 서양 정보 독점> 에도 막부는 쇄국 정책 하에서도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관장에게 해외 정세를 보고하는 <화란풍설서(네덜란드 풍설서)>를 정기적으로 제출하도록 의무화했다. 막부는 이를 통해 아편전쟁의 발발과 경과, 영국의 승리와 청나라의 굴복, 서구 열강의 증기선 및 근대 무기 발전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 <아편전쟁의 충격과 해방론(海防論)의 대두> 수천 년간 동아시아의 중심이자 대국으로 군림해 온 청나라가 서양의 소국인 영국에 무참히 패배했다는 소식은 일본 지식인 사회에 거대한 문명사적 충격을 안겼다. 사쿠마 쇼잔, 다카노 조에이 등 난학자들과 지사들은 일본 역시 서구의 침략 위협에 직면해 있음을 직시하고, 전통적 무기가 아닌 서양식 포술과 군함 도입을 통한 해안 방어(해방론)와 국방 개혁을 강력히 주장했다.

  • <동도서기론의 일본적 선구, '화혼양재'와 '동양도덕 서양예술'> 사쿠마 쇼잔은 "동양의 도덕과 서양의 기술(예술)"이라는 명제를 제시하며, 유교적 윤리와 정신을 지키되 실용적인 서구의 과학기술과 군사 제도를 적극 수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는 서구 문물을 단순한 오랑캐의 기예로 배척하지 않고 국가 안보를 위한 필수적 수단으로 정당화하는 논리적 디딤돌이 되었다.

  • <요시다 쇼인과 쇼카손주쿠의 메이지 혁명 인재 양성> 사쿠마 쇼잔의 사상을 계승한 요시다 쇼인은 하급 무사들을 교육하며 존왕양이와 체제 변혁을 역설했다. 그가 이끈 쇼카손주쿠(송하촌숙)에서는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훗날 메이지 유신을 주도하고 일본의 근대 국가 체제를 설계한 핵심 정치가와 군부 지도자들이 대거 배출되었다.

평론

제68회 강연은 19세기 중반 서구 제국주의의 동아시아 침공 앞에서 일본이 어떻게 사전 정보를 축적하고 사상적·인적 전환을 이뤄냈는지를 치밀하게 추적한다.

첫째, 서구 충격에 대한 정보력과 위기 대응의 차이를 명확히 드러낸다. 청나라와 조선이 아편전쟁을 '남의 나라 변고'나 '오랑캐의 소요'로 축소 해석하며 성리학적 도그마에 안주했던 반면, 일본은 네덜란드 풍설서를 통해 사태의 문명사적 파괴력을 즉각 간파했다. 저자는 이 정보력의 격차가 곧 국가 운명의 분기점이 되었음을 설득력 있게 짚어낸다.

둘째, '동양도덕 서양예술'로 대변되는 실용주의적 사상 전환이 지닌 역사적 파급력을 예리하게 해부한다. 사쿠마 쇼잔과 요시다 쇼인으로 이어지는 지적 계보는 관념적 명분론을 탈피하여 국가 생존을 위한 현실주의적 국방 노선으로 신속히 이동했으며, 이것이 단순한 담론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인재 양성(쇼카손주쿠)을 통해 메이지 혁명의 실행력으로 연결되었음을 입체적으로 규명한다.

다만, 요시다 쇼인 일파의 사상이 내포하고 있던 맹목적인 천황 숭배와 초기 제국주의적 대외 팽창(정한론의 맹아)의 위험성에 대한 비판적 평가는 상대적으로 온건하게 다루어진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 동아시아 삼국의 엇갈린 행로를 '정보 수용'과 '현실주의적 지적 결단'이라는 렌즈를 통해 비판적으로 복원해 낸 매우 통찰력 있는 강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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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재봉 「한국인의 탄생」 68회

<목숨을 걸고 일본을 바꾼 사람들> 요약·평론

68회는 앞선 66·67회에서 다룬 에도시대의 사상적 개방성과 난학의 발전을 한 단계 더 밀고 나가, <서양 열강의 등장 앞에서 일본의 지식인과 무사들이 어떻게 ‘국가안보’라는 새로운 문제를 인식하고 행동했는가>를 다룬다.

중심인물은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이다. 함재봉은 쇼잔을 단순한 난학자나 군사기술자가 아니라, 서양의 기술·과학·학문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일본의 전통적 도덕과 정치질서를 함께 지키려 했던 최초의 근대적 안보 지식인으로 평가한다. 그의 사상은 훗날 메이지유신의 핵심 인물들에게 직접 전달되었다.


1. 난학에서 ‘안보학’으로

67회에서 난학은 주로 의학·해부학·천문학처럼 서양의 지식을 이해하는 학문으로 등장했다.

68회에서는 질문이 달라진다.

<서양이 실제로 군함을 끌고 일본 앞바다에 나타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19세기가 되면서 이 문제는 추상적인 학문적 호기심이 아니라 국가의 생존 문제가 되었다.

함재봉은 이때 가장 먼저 움직인 사람들이 현대식 표현으로 하면 <안보 전문가>였다고 설명한다.

그들은

  • 서양 함대의 군사력은 어느 정도인가
  • 어떤 무기를 사용하는가
  • 일본의 해안은 어떻게 방어해야 하는가
  • 어떤 선박을 만들어야 하는가
  • 서양의 군사기술을 어느 수준까지 받아들여야 하는가

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사쿠마 쇼잔 같은 인물이 등장하는 역사적 배경이었다.


2. 막부 말기의 번들이 경쟁적으로 서양을 배운다

함재봉은 일본의 독특한 정치구조가 여기에서도 중요했다고 본다.

도쿠가와 막부가 일본 전체를 하나의 중앙정부처럼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각 번은 상당한 자율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서양의 위협이 현실화되자 각 번이 경쟁적으로 서양 학문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특히 조슈와 사쓰마는 적극적이었다.

조슈에서는

  • 서양 의학 학교를 세우고
  • 서양서적 담당 관리직을 만들고
  • 학생을 에도에 유학시키고
  • 군함과 증기기관 제작까지 시도했다.

사쓰마 역시 서양식 군사기술과 산업기술을 적극적으로 연구했다.

함재봉은 여기서 <분권의 역설>을 발견한다.

도쿠가와가 번들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던 것이 단기적으로는 약점이었지만, 서구의 충격이 왔을 때는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경쟁적으로 새로운 기술을 시험할 수 있는 장점이 되었다.


3. 서양 기술을 ‘사는 것’에서 ‘만드는 것’으로

이번 강연의 중요한 대목은 일본이 단순히 서양 무기를 구입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슈와 사쓰마에서는 증기기관과 군함을 직접 만들어 보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실패가 많았다.

함재봉도 당시 일본이 청일전쟁 시기까지 상당수 군함을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구입해야 했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자체 제작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즉 서양문물을

<구매 → 관찰 → 분해 → 번역 → 모방 → 제작>

하는 학습과정이 이미 메이지유신 전에 시작되고 있었다.

이것이 67회의 『해체신서』 번역과도 연결된다.

서양 지식을 단순히 신기한 것으로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손으로 다시 만들어 보자>

는 태도로 나아간 것이다.


4. 사쿠마 쇼잔은 누구인가

사쿠마 쇼잔은 1811년에 태어나 1864년에 암살된 인물이다.

그는 신분적으로는 막부 핵심세력과 가까운 신슈 마쓰시로번의 무사였다.

처음에는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았다. 즉 서양 문명에서 출발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1830년대 이후 에도에 머물며 여러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서양 학문을 접하기 시작한다.

함재봉이 강조하는 것은 쇼잔의 전환이다.

그는 단순히

<서양의 대포가 좋으니 대포를 배우자>

고 생각하지 않았다.

점점

<서양의 군사기술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기술을 만들어 낸 과학과 학문 전체를 배워야 한다>

는 결론으로 나아갔다.

이것이 쇼잔을 단순한 군사기술자가 아니라 사상가로 만든다.


5. 모리슨호 사건이 만든 충격

쇼잔의 생각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로 강연은 <모리슨호 사건>을 소개한다.

1837년 미국 상선 모리슨호가 일본인 표류민들을 송환하기 위해 일본에 접근했다.

그러나 당시 막부의 정책에 따라 일본의 포대는 제대로 사정을 확인하지 않고 배를 포격했다.

모리슨호는 가고시마 등에서도 포격을 당하고 결국 일본을 떠났다.

처음에는 일본이 외국선을 물리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중에 사건의 실상이 알려진다.

그 배는 일본을 침략하러 온 군함이 아니라 일본인 표류민을 송환하려 했던 상선이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일본의 포격이 실질적으로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함재봉은 이 사건이 일본 지식인들에게 두 가지 문제를 제기했다고 본다.

<첫째, 일본은 국제정세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둘째, 일본의 군사기술은 서양에 크게 뒤져 있다.>


6. 와타나베 가잔과 다카노 조에이

모리슨호 사건 이후 막부의 쇄국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사람이 <와타나베 가잔>과 <다카노 조에이>다.

가잔은 화가이면서도 난학을 공부한 지식인이었고 국제정세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일본이 아무 이유 없이 서양 배를 공격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전쟁을 초래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다카노 조에도 비슷한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막부는 이런 비판을 위험한 정치적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결국 이들은 <반샤의 옥(蛮社の獄)>으로 불리는 탄압을 받는다.

조에는 투옥되었다가 탈옥했고 다시 체포되는 과정에서 죽었다.

가잔 역시 감금된 뒤 결국 자결한다.

함재봉은 이 사건을 통해 일본의 개방이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서양을 배우자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7. 아편전쟁의 충격

1840년 제1차 아편전쟁은 일본 지식인들에게 훨씬 더 큰 충격을 준다.

중국은 당시 일본이 오랫동안 문명의 중심으로 바라보던 나라였다.

그 중국이 영국에 일방적으로 패배했다.

함재봉은 이것이 일본인들에게 매우 현실적인 질문을 던졌다고 본다.

<중국이 저렇게 당했다면 다음은 일본 아닌가?>

특히 앞서 모리슨호 사건을 경험한 일본에서는 영국이라는 나라의 군사력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한 공포가 커졌다.

청이 패배했다는 소식은

<서양을 배우지 않으면 일본도 망한다>

는 위기의식을 급격히 확대했다.


8. 사쿠마 쇼잔의 해방팔책

이런 배경에서 쇼잔은 일본의 해안방어를 위한 구체적 계획을 제시한다.

강연에서 소개하는 그의 구상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 연안의 요충지에 포대를 건설할 것
  • 서양으로부터 대포를 무조건 사지 말고 일본에서 자체 제작할 것
  • 대형 선박을 건조할 것
  • 해군을 전문적으로 양성할 것
  • 포술훈련을 전국적으로 실시할 것
  • 학교를 세워 병법과 군사학을 교육할 것
  • 뛰어난 인재를 적극 등용할 것
  • 전국적으로 필요한 물자와 자원을 조사할 것

중요한 것은 이것이 단순한 ‘양이론’이 아니라는 점이다.

서양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서양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앞선 회차에서 함재봉이 설명했던 메이지유신의 역설과 정확히 연결된다.

<서양을 물리치기 위해 서양화한다.>


9. 사전 번역이 국가안보 정책이 된다

함재봉은 쇼잔이 네덜란드어 사전과 백과사전을 대단히 중요하게 보았다는 점도 강조한다.

전쟁기술을 배우려면 먼저 기술을 설명하는 언어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쇼잔은 서양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떤 개념을 사용하는지, 어떤 생활방식과 풍속을 가지고 있는지까지 알아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언어 → 지식 → 기술 → 안보>

가 하나의 연결된 문제였다.

이 점에서 함재봉은 일본 근대화의 또 하나의 특징을 본다.

번역이 단순한 학문 활동이 아니라 <국가생존 전략>이 되었다는 것이다.


10. 위원의 『해국도지』와 일본

여기서 흥미로운 비교가 나온다.

중국의 위원(魏源)은 아편전쟁의 충격을 받고 『해국도지』를 저술했다.

이 책은 서양 열강의 지리·군사·해군·국제정세를 설명하고 서양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했다.

그런데 함재봉이 강조하는 역설은 이것이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책을 일본이 더 적극적으로 읽었다.>

사쿠마 쇼잔도 『해국도지』를 읽는다.

그는 위원의 문제의식에는 크게 공감했지만 전략에는 차이를 보였다.

위원은 연안 요새와 육상 방어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쇼잔은

<대형 군함을 만들어 바다 한가운데서 적을 격파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여기서 이미 일본이 해양국가로서의 전략을 발전시키고 있었다는 것이 함재봉의 설명이다.


11. <동도서기>가 아니라 <서도서기>

쇼잔 사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서양문명을 바라보는 태도다.

흔히 동아시아 근대화에서는

<동도서기>

<동양의 도덕과 정신은 유지하고 서양의 기술만 받아들인다>

는 논리가 등장한다.

그러나 함재봉은 쇼잔이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갔다고 본다.

서양의 군사기술을 정말로 이해하려면 그 기술 뒤에 있는

  • 학문
  • 사고방식
  • 과학
  • 제도
  • 세계관

까지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대포와 군함만 수입해서는 안 된다.

함재봉은 쇼잔의 입장을 일종의

<동양의 도 + 서양의 도>

의 결합으로 해석한다.

즉 동양과 서양 어느 한쪽이 진리를 독점하지 않는다고 본다.

이것은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태도였다.


12. 요시다 쇼인과 메이지유신으로 이어지는 계보

사쿠마 쇼잔의 역사적 중요성은 그의 제자들에게서 더욱 분명해진다.

가장 유명한 제자가 <요시다 쇼인>이다.

쇼인은 조슈의 쇼카손주쿠를 통해

  • 기도 다카요시
  • 다카스기 신사쿠
  • 이토 히로부미

등 훗날 메이지유신의 핵심세력을 길러낸 인물이다.

따라서

<사쿠마 쇼잔 → 요시다 쇼인 → 조슈의 메이지유신 세대>

라는 지적 계보가 만들어진다.

함재봉은 쇼잔을 메이지유신의 직접적인 사상적 선구자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3. 미국으로 밀항하려 했던 요시다 쇼인

1854년 페리 함대가 다시 일본에 오자 쇼잔은 제자 요시다 쇼인에게 놀라운 제안을 한다.

<미국 배에 몰래 올라가 미국에 가서 직접 서양을 공부하고 오라.>

쇼인은 실제로 작은 배를 타고 미국 함선에 접근한다.

그러나 미국 측은 그를 받아주지 않고 막부에 넘긴다.

조사 과정에서 쇼인의 소지품 가운데 사쿠마 쇼잔의 편지가 발견되면서 쇼잔 역시 처벌받는다.

함재봉은 이 사건을 매우 상징적으로 본다.

이들은 단순히 책으로 서양을 배우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직접 가서 보려고 했다.>

즉 근대화는 단순한 학문적 관심이 아니라 목숨을 건 실천이었다.


14. 공무합체와 쇼잔의 죽음

쇼잔은 막부 말기 정치에서도 중요한 입장을 취한다.

당시 정치세력은 크게 갈라졌다.

한쪽은 막부를 지키려 했고,

다른 쪽은 천황을 앞세워 막부를 무너뜨리려 했다.

그러나 쇼잔은 양쪽의 협력을 주장했다.

이것이 <공무합체(公武合體)>다.

천황의 권위와 막부의 행정·군사력을 결합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보았다.

함재봉은 이것을 쇼잔의 포용적 사고의 연장으로 해석한다.

<동양과 서양을 함께 배워야 하듯 천황파와 막부파도 함께 가야 한다.>

그러나 당시 일본 정치는 이미 극단적으로 양극화되고 있었다.

쇼잔은 교토에서 존왕양이파에 의해 암살된다.

1864년, 53세였다.


평론

1. 68회의 가장 중요한 점은 ‘개방’보다 ‘위기 인식’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이전 66·67회에서는 일본의 지적 개방성이 중요했다.

그러나 68회에서는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사쿠마 쇼잔을 움직인 것은 서양에 대한 동경이 아니었다.

<일본이 멸망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이었다.

따라서 일본의 서구화는

<서양이 좋아서 서양화했다>

기보다

<서양에게 정복당하지 않으려면 서양을 이해해야 했다>

는 현실주의에서 출발했다.

이 점은 메이지유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2. ‘서양을 배우려면 서양의 학문 전체를 배워야 한다’는 통찰이 핵심이다

이번 회의 가장 깊은 대목은 여기다.

처음에는

<대포가 필요하다>

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대포를 만들려면 금속공학이 필요하다.

금속공학을 알려면 화학과 물리학이 필요하다.

군함을 만들려면 조선술, 수학, 항해술이 필요하다.

그것을 배우려면 네덜란드어가 필요하다.

결국

<군사기술 → 자연과학 → 언어 → 사회와 세계관>

으로 학습의 범위가 확대된다.

이 과정 자체가 근대화였다.


3. 쇼잔은 ‘서구화론자’보다 <실용적 보편주의자>에 가깝다

함재봉의 설명에서 사쿠마 쇼잔은 단순한 서양숭배자가 아니다.

그는 동양의 유교적 도덕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면서 서양의 과학과 기술도 진리라고 인정했다.

따라서

<동양은 정신, 서양은 기술>

이라는 단순한 분업보다 더 적극적으로 양쪽을 결합하려 했다.

이것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훨씬 더 급진적인 탈아적 사고와도 차이가 난다.

쇼잔은

<동양을 버리고 서양으로 가자>

가 아니라

<동양과 서양에서 좋은 것을 모두 가져오자>

에 가까웠다.

이 점에서 그는 이후 일본 근대화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


4. 가장 흥미로운 반론 ― 중국도 이미 같은 문제를 알고 있었다

68회에서 오히려 함재봉의 ‘일본 예외론’을 수정하게 만드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등장한다.

바로 위원의 『해국도지』다.

중국에서도 아편전쟁 직후

<서양은 왜 강한가?>
<해안은 어떻게 방어해야 하는가?>
<서양 기술을 어떻게 배울 것인가?>

를 고민한 지식인이 있었다.

즉 문제를 인식한 것은 일본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더 중요한 질문은

<왜 중국에서 제기된 문제의식을 일본이 더 적극적으로 실행했는가?>

가 된다.

이것은 함재봉의 전체 논의를 한 단계 더 깊게 만드는 질문이다.


63~68회를 한꺼번에 보면

이제 함재봉의 메이지유신론은 거의 하나의 체계가 된다.

63회
<참근교대와 중앙집권>

64회
<조슈·사쓰마의 정치적 기반>

65회
<에도의 시장경제>

66회
<교육·문해력·사상적 다양성>

67회
<난학과 서양과학>

68회
<서양의 위협을 분석하고 국가전략으로 전환한 안보 지식인>

이렇게 보면 메이지유신은 더 이상 1868년의 사건이 아니다.

수백 년 동안 축적된

<정치 + 경제 + 교육 + 사상 + 과학 + 안보>

의 결과가 된다.


종합 평가

68회는 63회 이후 일본을 다룬 강연 가운데 특히 중요한 회차다.

이유는 메이지유신의 핵심을 단순한 ‘서양문물 수용’에서 <국가 생존을 위한 학습능력>으로 바꾸어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쿠마 쇼잔에게 중요한 것은 서양을 사랑하는 것도, 서양을 미워하는 것도 아니었다.

<상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무기만이 아니라 언어·과학·사상·사회까지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68회의 메시지는 이렇다.

<일본 근대화의 결정적인 힘은 서양을 숭배한 데 있지 않고, 서양에게 패하지 않기 위해 적의 세계를 철저하게 배우려 했던 데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함재봉의 조선-일본 비교를 너무 단순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중국의 위원처럼 다른 동아시아 사회에도 위기의식을 가진 지식인이 있었고, 조선에도 이후 해국도지와 서양 기술을 읽은 개화지식인이 등장한다.

따라서 더 근본적인 문제는 <누가 먼저 서양의 위험을 알았느냐>가 아니라,

<그 지식을 누가 정치제도·군사조직·교육·산업으로 실제 전환할 수 있었느냐>

이다.

그렇게 보면 68회는 함재봉의 지금까지 논의를 가장 중요한 질문으로 압축한다.

<근대화란 지식을 얻는 문제가 아니라, 얻은 지식을 국가의 행동으로 바꿀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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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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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한국인의 탄생의 황재공입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 지난 시간에 예고해 드린 [음악] 대로 어
에도막부 말기의 어 안보 전문가 대해서 어 말씀을 드리도록 [음악]
하겠습니다. 일본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새로운 시대에 상황에
[음악] 대응하는 사람들이 누구냐면 나라의 안보를 걱정할 수밖에 없는 그
사람들이 그렇죠. 전혀 새로운 세계가 전개되고 서양의 열강들이
큰 전남들을 타고 와서 대포를 마구 쏴면서 중국에서는 앞편 전쟁을 일으켜
갖고 청나라를 초토화시키면서 개을 시키고 이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당연히 제일 먼저 일본에서도
그 상황을 이해를 하려고 하고 그 상황에서 어떻게 대비를 하려고 해야 되느냐가
가장 처하게 그 준비를 한 사람들이 대응한 사람이 [음악] 바로 안보 지식인들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사쿠마 쇼잔이라는 사람이 있고 [음악] 그리고 그의 제자인 요시다 쇼인 특히이 두
인물들을 중심으로 해서 에도막부 마기에
메이지 [음악] 유신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일본이 국제 사회 [음악] 속에서
새로운 국제 질서에 어떻게 적응해야 되는가를 고민했던 두 지식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음악] 한국인의 탄생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서양 문물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19세기에 들어오면요.
각 번이 앞다서 서양 문물들을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번들이라는게 도크가와 절묘한 균형을 유지했다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참근 교대 같은 인질 제도도 있고 포르투갈 같은 카톨릭
국가들의 영향력을 차단을 하고 자 그러면서
280년간에 그 에도의 평화 에도의 안정에도 시대의 그 안정기를 구가를 하고
있었는데 결국은 뭡니까? 사실 독구가 초기에 포르투가를 쫓아낼 때 걱정하던
그 일이 터지는 거죠. 서구 열강이 도래를 합니다. 그리고 서구 열강이 도래를 하기 시작하니까
각 번이 중앙에 허락도 안 받고
앞다투서 서양의 문물을 도입하고 서양 서구 열강하고 손을 잡으려고 경쟁적으로 왜
자기네들끼리 어차피 경쟁하고 있었지 않습니까? 물론 전쟁은 안 했었지만
경제적으로도 늘 경쟁을 하고 있었고 예를 들어서 애도에다 더 큰 번저를
더 화려하게 하고 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장사를 해야 되겠는데 장사를 해서 오사에 있는 구라야식에데가 갖고
거기서 자기네 쌀만 파는게 아니라 이제 뭡니까? 해외 다른 나라 서양 나라하고도 문물 저 교육도 하고 또
여러 가지 배워야 되고 이러면서 경쟁적으로 서양하고 접촉을 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나가사기 항이
있었던 사과원 사과번이 제일 먼저 서양 문물들을 도입하기 시작을
합니다. 또 밑도한 밑도한은 이제 미도학이라 그래서 조왕양이 사상을 잉태시켰던 바로 그 미도하는 방위를
위해서 서양의 군사학 이런 거를 적극적으로 합니다. 파스마는 서양의
산업을, 기술을 원격적으로 들여오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메이지 유신을
결국은 주도하는 조주번도 1840년대에 서양 의학을 가르치는 학교를 설립하고
1847년에는 그 번 정부 내에 아예 서양 책을
전담하는 관리를 직을 하나 신설을 합니다. 그리고이 조수번에서는
결국 고세이칸이라는 학교를 세워서 서양 의학을 본격적으로 가르키다가
그리고 1855년에는 의학뿐만 아니라 서양학문 전반을
가르킵니다. 개앙을 1853년에 해리스 조약을 통해서 1번이 개항을 해 버리죠. 그러니까 그 개양을 했을
때에는 정말로 번들이 제 발빠르게 움직이면서 서양 학문을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경쟁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조주번은 번의 수도였던 하기의
메일인간 명륜관입니다. 메일인간을 설립을 합니다. 지금도 그
명륜관이 그대로 있습니다. 또 번에서는 장학생들을 뽑아서 자기 나라의 수도인
에도에 에도에 보내서 에도에서도 또
막부가 마 박후가 설립한 서양학문을 가르키는 학교에 자기네
학생들을 또 유학도 보냅니다. 그니까 자체적으로 학교를 만들어서 서양문을 가르치기도 하고 또 우수한 학생들을
뽑아서 애도에 보내서 수도에 보내서 애도에 있는 더 규모가 큰 막부가
운영하는 서양 한문 가르킨 학교에 또 자기네 인재들을 유학을 시키는 거죠.
조슈는 1854년에는 서양식 장총을 아예 제작하는 부서를
신설합니다. 증기 기관 제작소를 만들어서 증기 기관을 만들려고 시도를
합니다. 물론 결국은 아주 조한 수준의 걸 밖에 못 만들고 자체
제작은 포기하고 서양거를 도입을 하기 시작하죠. 일본이 청일 전쟁 때까지만 하더라도 군함을 자체 제작을 제작을
못 합니다. 1894년이 됐을 때도 자체 제작을 못 합니다. 그래서 청일
전쟁 때 중국의 청의 북양 함대를 깨뜨렸던 일본의 연합함대의 그 모든
배들은 다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만든 배들이었습니다. 그만큼 당시이 군함을
만드는 이런 기술들은 너무나 천단 기술이었고 그런 걸 따라가는 건
간단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일본은 이미 일계 번인 조주 번에서
1854년 개항을 [콧방귀] 하자마자 다음 해에 곧바로 그런 거를 만들어
보는 자체 시도를 합니다. 노슈하고 사스마가
막강한 군사력을 갖출 수밖에 없었고 그리고 그 군사력을 이용해서 결국은
메이지신을 성공으로 성공적으로 이끄는 이끌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만큼 열려
있고 서양의 학문들을 서양의 기술 과학 기술들을
급격하게 빨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타쿠마 쇼사는
근대 사상을 일본이 있는 그대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안보 [음악] 지식이었습니다. 일본을 지키기 위해서는 서양권을 받아들여야 된다라는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있었고 그걸 통해서 결국은 [음악] 목숨을 받쳐
가면서 그 원칙을 고수했던 그런 지식입니다. 1811년에 태어나서
1864년에 죽는데 1811년이면 완전히 동향적인
교육만 난학 이런 것도 배우지만 기본적인 틀은 뭡니까? 동양의
사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로 치면은 화서 이항로 그렇죠. 면암
조금 앞선지만 화서하고 비슷한 연배 그런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전통적인 사고관 사고 방식 속에서 자랐을 수밖에 없죠. 그런데도 그는 결국은
서양학문이 유교의 세계관하고 필적할 만한 대등한 가치가 있는 거라는 걸
인정을 하고 그리고 특히 서양의 저남들이 출모를 하고 있고 동양이
서양의 무력 때문에 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분명히 인식하면서이 세계 질서를 새로 받아들여야 되고이 세계
질서 속에서 일본이 도퇴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됩니까? 서양의 과학 기술 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라는 분명한
인식을 갖는 최초의 지식인이었습니다. 특히이 사람이 중서형론이나
동도서기론하고 다른 이유는 뭐냐면요. 자, 중체서형이나 동도서는 뭡니까?
본체 원래 근본은 동양적인 거야 되고 아니면 중국 거야 되고 서양의 거는
거기에 그냥 과학 기술 같은 것만 갖다가 얹혀서 쓰면 된다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는데 사꾸마 쇼사는 처음으로
아니다. 서양의 거를 과학 기술을 받아들이려면 그 과학 기술의 기절을
형성하고 있는 서양의 문명 그 자체를 이해하지 않으면은 절대로 그 기술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라는 그런 결론에까지 이른 사상가였습니다.
쇼사는 후다이번이었던 마스시로 번입니다. 후다이번이라는게 전에
말씀드렸듯이 이제 도구가와 편에 가장 가까운 어 그 번이었죠. 거기에 하급
무사 어 집안에서 태어납니다. 그렇지만은 후다의 번이었기 때문에
애도의 일지감치부터 갈 수가 있었고 1830년대에는
그러니깐 10대 후반기부터는 애도의 오랜 기간 머물르면서 당시에 가장
유명했던 학자들 뭐 사도 이사 이런 사람들 밑에서 공부를 또 합니다. 자, 그런데 이때이 공부를 하고 있을
때 사쿠마 쇼잔이
완전히 서양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서행 문명을 우리가 제대로 배울 수밖에 없다라는 그런 인식을 갖게
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터집니다. 그 사건이 모리슨호 사건이라는
사건이었습니다. 모리슨호 사건은 뭐냐면 어 1837년에
미 미국의 찰스 킹이라는 사업가 일본을 열려고 중국에서 출발을 해서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영국 선교사 어 세월 윌리엄스 그다음에 독일
선교사 굿스라프 굿스라프는 나중에 조선회까지도 와서 성경을 전하고 가고
했던 유명한 선교사들입니다. 마카오에서부터 출발을 해서 완이
에도만까지 오는데 그 배에 모리순노에 누구를 태우고 오냐면이 두 선교사만
태우고 오는게 아니라 난파에서 마카오에 가서 머물고 있던 난파
선언들까지도 같이 태우 겁니다. 그러면서 찰스 킹의
의도는 뭐였냐면은 야 우리가 당신 백성들을 이렇게 살려 갖고 와서
송환을 해 주니까 그 대신에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전교를 할 수 있도록 그거를 허락해 달라. 이제이 거래를
하려고 이제 왔었던 겁니다. 그런데 에도만에 들어오자마자 에도만의 포대들이
뭐 뭐 말하고 물어보고 할 틈새도 없이 무조건 [음악] 대포를 쏴야 되니까 모리순호가 얼음 뒤돌아서
가고시마로 갑니다. 사스마 가고시마로 갑니다. 그래서 가고시마에 도착한데 이번에도 가고시마 포대도 그냥 대포를
쏴 버리니까 말도 얘기도 꺼내지도 못하고 정박도 못 하고 모리소가 다시
맨머리를 돌려서 마카오로 호향을 해 버립니다. 자, 이렇게 해선 그 모리순호 사건이 끝나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1년 후에 네덜랜드 돼지마의 네덜랜드
상관장이에도 막부에 보고서를 씁니다. 근데 그 보고서의이 모리스노 사건을 씁니다.
그 사건이 싱가포르의 어떤 신문에 놨었던 겁죠. 그거를 돼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장은 당연히 이제 화란 풍설수설를 통해서 어차피 쇼근한테
보고를 해야 되는데 이거는 더군 일본하고 관계된 일이니까 일본까지 미국 배가 와서 이런 일이 벌
벌어졌다는게 기사가 나니까 이제 그거 그걸 기사 내용을 스크랩을 해 갖고 이제 보고를 한 겁니다. 그런데
네덜랜드 상관장이 실수를 한게 뭐냐면 거기에 이게 미국배라고 쓰자고 영국배라고 써 놓습니다. 그랬더니
막부에서는이 소식을 1년 후에 사건이 일어난 지에이 소식을 듣고는 마크의
막부에서는 야, 이러면 영국배다.
영국배가 왔었는데 어 이러면 우리가 대포로 쏴서 쫓아버렸으면은이
영국 사람들이 또 군함을 몰고 우리한테 오면 어떡하느냐? 야, 이거 어떻게 대비를 해야 되느냐라면서
정부 최고의층에서 영국이 혹시 우리나라를 쳐들어오면 어떻게 우리가 준비를 해야 되냐라는
방책에 대한 논의를 시작을 합니다. 특히 난가구를 했던 학자들
네덜랜드 상관장을 통해서 네덜랜드의 그 세계관을 풍설서설서설을 보고 이랬던이 사람들 사이에는 이제 비상한
초미의 관심사가 돼 버립니다. 서양이 쳐들어왔을 때 우리가 어떻게 방비를 해야 되느냐. 그중에서
왔다나베카잔이라는 포다이번인 다하라의
로즈 그러니까 굉장히 높은 대신이었습니다. 다라한의 해안 방비
책임자이기도 했었습니다. 사실 굉장히 뛰어난 화가였고요. 여기 그림에서도
보실 수 있듯이 하여튼 자기 그림도 그리고 자기 자화상도 그리고 자기 스승 그림도 그리고 그런 그림들이
지금 다 일본에 남아 있습니다만이 사람은 본인은 네덜랜드는 못 했지만 네덜랜드 란 란학을 하는 학자들하고
굉장히 많은 교류를 하면서 서양 사정을 깨우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모리순호 사건까지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당시 일본이 처한 국제정치 상황이 뭐라는 거에 대해서 글을
씁니다. 고대의 정교가 융성했던 지역은 모두 북쪽 오랑캐에 의해
합쳐지지 않은 것이 없다. 고대의 정교 유교죠. 유교가 퍼져 있었고
했던 이런 지역 중에서 지금 서양 오랑키한테 잡혀 먹지 않은 지역이
없다. 중국은 논하지 않는다. 중국은 애매한 상황이니까 아직 논해를 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이어갑니다. [음악] 부처가 태어난 나라는 지금은 신론이 되었다. 즉 영국에 의해 정보되었고
인도 [음악] 중부는 예전에는 몽골에 의해 병합되었으나 지금은 서양 여러 나라들의 상관이 되었고 또 회가
태어난 아라비아 유대교가 융성한 이집트 예수가 태어난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은 모두 터키가 집어삼켰으며 [음악] 전 세계라고 일컬러진 로마는 바른
제도와 언어가 변하여 교만하고 사치스러우며 나태해졌다.이
이 막 무력을 갖춘 서양 오랑캐를 과소폭 평가하고 무조건 배척하는 거.
이거는 이거야말로 화를 자초하는 일이라고 씁니다. 이러한 하찮은 얘기들로 서양배를 무조건 내쫓기만
한다면 생각한데 그들에게 일본을 탐할 명목이 생긴다. 그러나 서양 오랑캐라
하더라도 명분이 없는 군사를 일으키는 [음악] 일은 없을 테니 일본이 계속 서양 배를 내쫓는 일은 7로 러시아
영국 두 나라의 오만 광자한 행동 즉 침략의 [음악] 단서가 될 것이다. 이렇게 책을
씁니다. 그런데 카자는 자기가이 글을 써
놓고도 하 이거 당시 외국 정책을 하고 있고 나라의 정책은 어쨌든
쫓아버리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애도만의 모리순호가 나타났을 때 뭐 말도 못 꺼내게 하고 대포를 쏴버렸던
거고 가고시마에서도 그랬던 거 아닙니까? 근데 지금 자기가 하는 얘기는 애도 정부의
모든 정체 정면으로 반하는 얘기죠.이 이 책을 써 놓고 책을 출판을 내놓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카산하고 친했던 난각자 중에 닭가노
조회이라는이 사람이 무리순호의 사건에 대한 글을
씁니다. 그 글에서 다크 후의 쇠국 [음악] 정책을 신랄하게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영국은 일본의 적이 아니다. 이유도 묻지 않고 외국 [음악] 배들을 쫓아낸다면 뭐가 옳고
그런 것인지도 모르는 막대먹은 나라로 여기고 부르의 나라 예의 지국으로서의
명성을 잃고 앞으로 어떤 걱정거리와 해악이 생겨날지는 짐작하기조차 어렵다.이 글이 회자 회자가 되니까
막부의 보수적인 유학자들 이런 사람들이이 조혜이라
놈이 뭐 하는 놈이냐? 이놈 잡아내라. 잡아서 취조를 하라.
그래서 조이가 잡혀옵니다. 그런데 조이만 잡혀오는게 아니라 조이를
수사하고 잡아오는 과정에서 조혜랑 친했던 카산도 같이
잡혀옵니다. 카산이 조해랑 친하다. 그래서 카산의 집도 수색을 하다가
카산이 써놓 써 놓고 그렇지만 감히 겁이 나서 내놓지 세상에 내놓지
못했든 출판하지 못했던 그 글까지 발각이 돼 버립니다. 결국은 저인은이
사건으로 감옥에 갇칩니다. 그런데 탈옥을 해서 6년 동안 도피 생활을
하다가 결국은 다시 체포되는 과정에서 저항하다 죽습니다. 카자는
자결를 할복을 명습니다. 불충 불효라는
마지막 글을 남기고 할복 자살을 합니다. 사건 때문에 지금이 난리가 나고 있고
카사는 세상을 너무나 정확히 읽었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결국은 활복 자살를 해야
되는 그런 비국적인 운명을 맞습니다. 자, 이런 사건이 지금 1837년에
모리순호 사건이 터지고 그다음 해에 카이 발각이 돼서 할복을 하고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데 조회인는 도망을 갔다가 다시 체포되고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1840년에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제1차 아편 전쟁이 일어납니다.
영국이 영국이 최초로 당시까지만 해도 세계 최강국이다라든
중국을 너무나도 어처근이 없을 정도로 일방적으로
추청이 완전 항복을 하고서 개항을 해졌으니까.
자, 모리슨호가 영국배라고들 지금 생 그 상관장이
잘못 보고를 해서 모리슨호가 지금 영국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리고
그것 때문에 막 추사를 해가이 그 조이라는 사람이 뭐 막부의 쇠곡
정책을 막 비판하는 얘기를 써서 그놈을 잡아족치고 그 과정에서 카산을 죽이고 이제 이런 일들 하고 있었는데
바로 또 그 영국이 지금 해필리면 중국에 가서 청나라를 강제로 무력을
동원을 해 갖고 청 앞 전쟁을 일으켜서 계약 계국을 시켰다. 개을 시켰다라는 소식이 들려오니까
어떻겠습니까? 1번에 좋아야 하는 난리가 난 겁니다. 야.
어. 이제 분명히 영국이 우리한테 쳐들어올 거다. 그래서 그럼 빨리
데뷔를 하자. 이러면서 그때에 마스시로 한 사쿠마 쇼산에 있었던 번에 다이미어가 정부 전체에 일본
전체 해양 방어의 임무를 부여받습니다. 그래서 그 다이묘가
자기 부하인 사쿠마 쇼단한테 야 내가 우리나라의 해양 방어를 담당하게
됐어. 지금 영국이 모리순노 사건을 일으켜서 우리가 대포를 싸서
쫓아보냈던 그 영국이 지금 청나라를 깨뜨려서이 난리가 났어. 청이
무너졌어. 그럼 이거 분명히 우리한테도 올 올 거라 그러니까 그러면서 지금 나보고 해양 방어를
맡아라 그랬더니 너 사쿠마쇼 네가 좀 빨리 가서 어떻게 이걸 막는지 기술을
군사 기술을 빨리 익히고 가. 이렇게 명령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소사는 바크 후에 해양 방어를 담당한
에가와 히데타스라는 당대 최고의 포술 전문가로부터 우선 가서 포술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이때에 에가와 히데타스가 가르치는 포술은 일본의 전통적인
포즐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네덜랜드 이런 데의 포수를 배워 왔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때에 사쿠마 쇼산이이 포수를 첨단 서양 포수를
배우면서 그때 가장 놀랬던게 뭐냐면 어이 서양의 대포는 비가 오는데도
빚속에서도 이게 작동을 하네라는 걸 처음 봤다는 그러니까 옛날식 임진한 때 쓰고 했던 그죠 자기네 전국
시대에 썼던 그 대포들은 피가 오고 그러면은 쓸 수가 없는데
서양의 무기들은 이미 이때 그런 거랑 아무 상관없이 전천으로 쓸 수 있는 무기였다라는 거죠.
그러면서 이런 거를 보면서 아 서양 기술이 이렇게 앞서가는 거랑 놀래 놀랍니다. 그러면서 바로 이때에
사쿠마시오산이 모리순노 사건 때문에 죽은 카의 글을 입수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카의 글을 읽고서 감동을 하고 아
열어야 되는구나. 우리나라 열어야 되고 성향을 배워야 배워야 된다라는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사꾸마 쇼산이에도 막 말기에
완전한 안보 전문가로 탄생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그때까지
배우고 보고 느꼈던 모든 것을 집대성해서 자기 다이묘한테
해방 팔책 우리가 우리나라를 바다로부터는
외적으로부터 우리나라를 지키려면 다음 여섯 여덟 가지 원칙을 지켜야 됩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첫째, 각 한해 번뇌 연한 요충지의 포대를 쌓고 항상 대포를 갖추어
긴급한 일에 적절하게 대응할 것. 둘째, [음악] 네덜란드와의 교육에 동을 주는 것을 중지하고 그 동으로
서양 제품을 본받아 수백 수천의 대포를 주저해 여러 지역에 나누어질
것. 일본에서 나오고 있는 동을 자꾸 네덜랜드 사람들이 비싼 돈을 받고
주고서 사간다고 해서 그거 팔지 말고 그거를 이용해서 우리가 대포를 만들어야 된다. 수천 개를 만들어야
된다. 이런 겁니다. 셋째, 서양 제품을 본받아 견고한 큰 배를 만들어 [목을 가다듬음]
에도로 쌀을 나를 때 난파하는 배가 없도록 할 것. 넷째, 해운을 감독하는 일은 좋은 사람을 선발해서
외국인과의 통상은 물론 해상에 수많은 간악한 일들을 엄격하게 하도록 할
것. 그러니까 해적도 맞고 서양 하고 제대로 된 교육도 하고 이런 것을 할
수 있는 해운 담당 전담하는 사람도 임명을 해라. 다섯째 서양 제품을
본받아 전함을 만들어 오로지 수군의 작전을 연습시킬 것. 여섯째, 전국
방방곡에 학교를 세워서 널리 교화하도록 하고 우매한 사람들도 충효와 절의 일을 알 수 있도록 할
것. 일곱째, [음악] 산과 벌을 분명하게 해서 위험이 드러나게 하고
민심이 더욱 단단해지도록 할 것. 여덟째, [음악] 제주가 뛰어난 사람을 등영하는 법을 세울 것.
그러면서 사쿠마 쇼사는 1844년 본인이 뒤늦게 남아 네덜랜드를 직접
배우기 시작을 합니다. 당시에 바크 후의 명으로 난학 학자들이
번역을 한 쇼멜 백과 사전이라습니다. 네덜랜드의 백과 사전을
바크 후의 명으로 난학 학자들이 번역을 해낸 거죠.
그러니까 그 [음악] 나가사학에 있었던 번역 전문가들, 라학 전문가들 이런 사람들이 이제 번역을 했는데
백과 사전을 번역을 했니다. 그 백과 사전을 사꾸마쇼는 읽고서
거기에서 대포를 주저해 보고 거기에 백과 사진이 나온 것에 따라서은
구리 납맥을 전국을 다니면서 광맥을 또 찾아먹고 왜냐면 그거를
최취해서 그걸 가지고 무기들을 만들 수 있고 그러니까 어디에 무슨 구리가
있고 나이 있고 동이 있고 이런 것이 어디에 있는지 그걸 직접 또 찾아나서기도 입니다. 그리고
1850년에 박쿠의 로즈, 박쿠의 최고위
대신한테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립니다. 병법에서 먼저 해야 할 것 역시 상대방을 아는 것보다 더 힘쓸
일이 없고 현재 해방에서 먼저 해야 할 것 역시 저들을 아는 것보다 급한
일이 없습니다. 해방이라는 것은 8일로 해방이 아니라 해양
방어입니다. 해방이 해형 방어의 뜻입니다. 해방은 천하의 해방이므로
천하 사람들에게 저들의 사정을 모두 알게 하십시오. 천하 사람들에게 저들의 사정을 알게 하는 데는 일반
사람들에게 오랑캐의 서적을 읽히는 것보다 나은 일은 없으며 일반
사람들에게 오랑캐의 서적을 읽히는 데는 그 사전을 찍는 것보다 더 먼저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보통 사람들한테도 서양 사정을 다 알려야
되고 그걸 하기 위해서 서양 책을 읽혀야 되고 그 서양 책 중에서 특히 백과 사전을 제발 번역을 해 갖고
널리 인쇄를 해서 반포를 해서 읽히도록 해다. 우리는
청나라의 복처를 되새겨 지피지기 해야 된다. 청나라가 저지른 오류 즉
뭡니까? 전혀 준비를 하고 하지 하지 않고 있다가 영국한테 꼼짝없이 당해서
앞편 전쟁에서 참패 구력적인 참패를 하고 나라를 열 수밖에 없는 그러한
실패의 전례를 우리가 밟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해야 외구를 준비하는데 있
외구라는게 이제 외부에서 저기 쳐들어오는데 거기에 대해서 준비하데 있어서 그들을 아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그들을 아는 방법은 그들의 기술을 다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으며 그들의 기술을 다하기 위해서는
그 학의 입문서가 되는 사전을 간행한 것보다 파는 것은 없다. 이속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랑케의 풍속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정 [음악]
오랑케의 뜻을 알아야 하고이 정을 알기 위해서는 이어 오랑케의 언어에
통해 말부터 배워야 된다. 본인이 실천에 옮겼던 거죠.
네덜랜드어를 배우기 시작해. 외국어를 배워야 된다. 외국어를 배워야지 외국
오랑캐들의 뜻이 뭔지를 알고 그 뜻을 알고 그 사람들의 습속 풍속이
사람들의 행태를 알아야지만 우리가 제대로 방어를 우리를 지킬 수 있다라고 하는 거죠.
그러면서 당시의 맹목적인 양의 사상 그렇죠. 모리슨호 사건 같은 거를
일으켰던 외국주의 맹목적인 서양 오랑캐 격태 사상 의정 척사
사상이죠. 그것을 신랄하게 다음과 같이 비판단합니다. 나라에
남아 있는 자원조차 유용하게 사용하지 못하고 시변에 달하여도 시대가 변하는
시대에 달하여도 병제를 고칠 줄 모르며 포술이 있다고는 해도 옛날의
고로한 습속에 빠져 새로의 얻는 묘수를 강고하지 않으며 불편한 제도에
대해서는 그것이 불편하다는 것만 알뿐 개정할 방도를 모르고 오직 자기 나라만의 좋은 것에만 집착하여
외국이라면 무조건 경시하고 그들의 실사에 숙련하여 국가의 이익도 일으키 키며 병력도 번성하고 무술도 뛰어나고
항해에 능숙한 것 등 훨씬 자국보다 우위에서 있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단 영국과의 사이에 난이 일어나면 대패하여 크게 고속의 성현의
체면을 수행상시킬 것입니다.
법률 방송이 출관하는 시사 교양지 법치와 자유는 우리 사회가 증면하고
있는 법치의 문제들을 가장 냉철한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는 정론지입니다.
2026년 대한민국의 오늘을 가장 정확하게 깊이 있게 읽어볼 수 있는
법치와 자유를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온라인으로도 편하게 읽어 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에 사쿠마 쇼산이 중국의 청나라의 위원의 해국 도지
책을 입수합니다. 여러분 해국 도지 책이 뭡니까? 위원이라는 그 훈난
학파, 그러니까 중국번 좌종당 이러한 그 악서원의 후회들로서
중국의 양무운동을 주도하고 특히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대표적인 그
학파 그 사람들인데 그중에 한 사람이 바로 위원이죠.이 이 사람이 처음으로
해곡 도지라는 책을 쓰는데 해곡 도지가 무슨 책이냐면 중국은 전통적으로 역사적으로 해양
방어를 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중국은 어디를 방어합니까? 북쪽에 오랑캐가
쳐들어오는 유목 민족으로부터 지키는 그게 방어의 핵심이었죠. 그러니까
만리 장성을 쐈던 거 아닙니까? 바다는 기껏해 봐요. 외구 정도가 오는 거니까. 외구는 귀찮기는 하고.
그렇지만 그거를 위해서 무슨 해양 방어를 따로 마련한 일이 전혀
없었습니다. 사실 조선도 그랬던 거죠. 임진회란이 터지니까 뒤늦게 이순신
장군이 해양 방어를 위해서 온갖 준 그 그거를 해서
간신히 일본을 격퇴를 시키지만 사실
중국도 조선도 따로 해군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 해군이 육군에 비견할
만한 그런 지원을 받았던 적도 없고 그래서
해양 방어가 완전히 열려 있었을 때 노출이 됐었을 때 그때에 위원이라는
사람은 무엇을 깨닫냐면 여태까지 우리의 역사상 모든 외적은 북쪽에서 쳐내려오는 유목
민족들이었는데 말타고 쳐들어오는데 지금 서양이 우리가 앞편 전쟁을 겪고
이런 것을 보면 서양은 어디로 냐? 바다로부터 온다. 그 바다를 지켜야
되는 거구나. 그럼 바다를 어떻게 지킬 것이냐? 왜 바다가 중요하냐?
이런 것을 처음으로 중국 학자 중에서 지식인 중에서 처음으로 그걸 설파해서 그걸 담은 책이 바로 해국 도지이고이
해국 도지가 조선의 역사에서도 우리 역사에서도 너무나 중요하지 않습니까? 왜?이 이 해국 도지를
연행사들이 북경에 갔다가 그 해국 도지를 사들고
와서 그 해국 도지를 박규수가 그 해국 도지를 가지고
북촌에 있는 양반 자재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이런 양반
자재들을 모아서 처음으로 개화사 사상을 공부를 시킬
때에 썼던 그 책이 바로 해국 도지입니다.
그 해국 도지를 사꾸마 소단이 읽습니다. 그러면서
그때에 읽었던 감을 다음과 같이 적어 놓습니다. 선공께서는 선공이라 자기네
다이묘입니다. [음악] 선공께서는 상대의 상대라는게 그 굉장히 높은
관직에 오르시어 그 뒤를 이어 바다를 방어하는 일을 맡으셨다. 그러니까
이제 그 자기 다이며 그 방어하는 일을 맡아서 자기 보고 이제 포술부터
시작해서 해안 방어 할지 다 공부를 하라 그랬으니까 이제 그 임무를 자기가 맡았다이 얘기입니다. 그때에
영국 오랑캐들이 청나라를 침략했으며 그 소문이 여기까지 [음악] 들려오게 되었다. 하는 그런 시사적인
일에 느낀 바가 있어 그을 올려서 개책을 말씀드렸다. 나중에 청나라 위원의 성무기를
보았더니 그도 역시 시사적인 일에 느낀 바가 있어 책을 저술했다고 하며
그 책 서문을 보면 역시 [음악] 그해 7월에 쓰여졌으니 내가 글을 올린 것보다 겨우 4개월 전이었다.
또한 그가 주장하는 바는 약속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더로 서로 같은
것이 있었다. 아, 나와 위원은 각각 다른 땅에서 태어났으며 그 이름을
서로 알지도 [음악] 못하지만 시사적인 일을 보고 느끼면서 그를 쓴 것이 마찬가지로 그 해였으며 또
생각하는 바 역시 거의 합치하고 있으니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그야말로 [음악]
바다 건너 있는 동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위원은 상세 이래로
중국에서는 바다를 방어하고 있어 [음악] 해전이 없었다고 하면서 벽을 견고하게 하고 들판을 깨끗하게 해서
해안가에 [음악] 상륙하는 적들을 괴멸시키며 그로서 바다를 방어하는 가법으로 삼았다. 나로서는 열심히
아주 큰 배를 타고 공격하는 포함 방법을 강구해 요격하는 것으로 계책을
삼고자 했으며 그처럼 쫓아내고 막아 버림으로써 적들의 목숨을 [음악] 바다에서 제압해 버리고자 했다. 그
전만이 서로 다를 뿐이었다. 일본의 지식이니 중국 최고의 지식인
것 동시대에 똑같은 문제 의식을 느끼고 너무나도 똑같은 시기에 똑같은
걸 느껴서 참 이분하고 나하고는 나라도 다르고 말도 다르고 서로가 이름도 몰랐지만은 상통 너무나
이심전심 뜻이 통한다 그러면서 굉장히 중요한 얘기를 합니다. [콧방귀]
그런데 위원이 제안한 중국의 해양 방언은 뭡니까?
해안에 요새들을 지어놓고 그리고 그 해안 뒤에 있는
평원을 갖다가 깨끗하게 정리를 해서 저기 오면은 바다에서 해안으로 와서
올 때에 상륙을 못하도록 해안가에 있는 요새에서 공격을 하고 그것이
결국 실패해서 서양 오랑캐들이 상륙을 하면 그다음엔
어떻 합니까? 뒤로 물러서 그 평원에서 육군이 대접전을 버려야 된다. 그런데 사쿠마사는 딱 뭐라
그럽니까? 그런 그래서 안 된다. 나는 생각하게 우리가 큰 전함들을
만들어서 그 전함을 가지고 바다 한 가운데서 그 적들을 격침시켜서 수장시켜 버리는 거지. 그렇게
해야지이 사람들이 다 오랑캐들이 다이 땅을 밟고서 상륙하는
거를 내버려도 절대 안 된다.이 점이 서로 다르다라고 하는데 사실 굉장히 정확하게 해양 방어 전술를 이미
파악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쿠마 쇼산이
그 당시에 가장 앞설 수 있었던 앞선 사상과
그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요. 서양의 학문과
지식을 접하는 이유가 군사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었습니다.
굉장히 현실적인 실질적인 이유를 위해서 서양의 학문을 배운 사람이죠.
네덜랜드 말을 배우는 것도 네덜랜드의 대포가 너무나도 뛰어나고 네덜랜드의
여러 가지 기술들이 네덜랜드 백과 사전 읽어 보니까 너무나 논놀랗고 하니까 그런 거를
습득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기술 해양 방어를 맡은 나라의 해양 방어를 맡은
사람으로서 하 어떻게 나라를 제대로 지켜날 수 있는가를
지금 영국이 고쳐 들어올 것 같은 상황에서 빨리 습득 습득을 해야 되는 그런
입장에서 학문을 습득합니다. 훨씬 더 현실적이고 훨씬 더
직설적으로 서양의 학문을 배우고
느끼고 흡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동도서기가 아니라
서도서기를 주장을 합니다. 그러니까 서양의 기술을 배우려면 서양의 본체,
서양의 도를 깨우쳐야 된다. 그러면서 한 걸음 더 나가서 뭡니까? 동양의
도와 서양의도 둘 다 충분히 같이 갈 수 있다.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동양 도덕
서양 예술은 양쪽이 합쳐져서 비로서 완전한 원의 형태를 이루는 것이다.
도덕과 예술이 서로 [음악] 보완하여 예컨인데 아시아와 유럽이 합해서 지구를 이루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한 쪽을 결해도 지구의 원형을 [음악] 이룰 수 없듯이 도덕과 예술에서 어느 한쪽을 결해도 완전하지
않다. 우주의 [음악] 진리가 두릴 수 없다. 천지도 이것을 다르게 할 수 없고 귀신도 이것을 다르게 할 수
없으며 [음악] 세의 성인도 이것을 다르게 할 수 없다. 래 서양인이 발명한 다양한
학술도 요건데 모두 진리로서 우리의 성학을 돕기에 [음악] 충분하다.
유교와 서양학문사에 아무런 마찰 충돌
없다. 둘 다 알아야 된다. 그리고 둘 다
충분히 조화시킬 수 있다. 나중에 일본의 메이지 시대의
문명화라는 개념을 통해서 서양의 것을 완벽하게 받아들이면서 일본의 거랑
좋아시켜야 된다라는 그 이론을 설파했던 후크사와 유키치
그런 사람이 설파했던 그 이론의 원조입니다.
조선의 농도서기론자, 중국의 중서형론자,
양무운동 이상한 절충주의가 아닙니다. 두 체계가 두 사상이 두 기술이 두
과학 세계가 완벽하게 같이 가야 되는 거고 좋아될 수
있다라고 보는 당시 아시아의 그 누구도 갖고 있지 않았던
넓은 포괄적인 포용적인 세계관을 사쿠마 쇼사는 이미
갖고서 설파하고 있었습니다. 1854년
페리 제독이 다시 돌아옵니다. 이때에 사꾸마 쇼산이 페리가 다시
돌아온다라는 미국 함대를 끌고 다시 돌아온다라는 소식을 듣고 있요.
자기 제자 요시다 쇼인한테 그 유명한 요시다 쇼인입니다.
누구냐면은 조주번에 소과존구라는
학교를 만들어서 자기 제자들을 [음악] 가르키는데 그 제자들이 누굽니까? 기도다요씨,
다가수기 신사구 등 나중에 메이지신을 [음악] 통해서 대신들이 되면서
메이지 일본을 이끌어가는 그 기라성 같은 인물들을 키워내는 사람입니다.
그 학교를 만든 사람이 요시다 쇼인인데 그 요시다 쇼인의 스승이
사쿠마 쇼산입니다. 타쿠마 쇼산이 그래서 페리가 온다
그랬을 때 여시사 쇼인한테 편지를 보내서 자네
페리가 다시 온대 그러니까 이번에 어떻게 해야 돼? 자네가 어떻게서든지 그 미국 배에
몰래 타서에도 미국에 미랑을 해서 가서 서양을 좀
있는 그대로 제대로 좀 보고 오게 공부하고 오게 그럽니다.
그래서 실제로 여시다시이 어떡합니까? 조그만 배에 타서 몰래 정박해 있는
에도만에 정박해 있는 미국 함대에 가서 그 미국대 미시c시피호에 몰래
올라탑니다. 올라타다가 거기에 어떻게 됩니까? 미국 선원들한테 잡히는 거죠.
잡혀서 압이 돼 버립니다. 미국은 나 보내 달라 그러는데 당연히 안 보내고 압을
해서 바구후 정부에다 넘겨 버립니다. 쇼인은 취조를 받는 과정에서 자기
품속에 품고 있던 스승 사꾸마 수선의 편지가 발각이 됩니다. 그래서
소단이 가라고 종용을 해서 세국영을 어기고 지금 요시다 쇼인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미국으로 미랑하려는 짓을 했다라는 사실이 알려집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수호자는 9년 동안 가택 연구을 받고 물론 요시다 쇼인은
처형이 됩니다. 1862년이 돼서 갑택 연금이 풀리니까 그때
나중에 마지막 쇼근이 되는 도구나 도크가와
요시노브 아직 쇼은 되기 전입니다.이 사람이
사쿠마 쇼산을 부릅니다. 그래서 에도에
머물게 하면서 보호를 해 줍니다. 그럴 때에 사쿠마 쇼자는 에도에
머물면서 줄기차게 계국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당시에 쇼군 도크가와 이에모치의 영을
받아서 효자는 본격적으로에도
막말 말기의 정치에 뛰어드는데 그때 정치의에도 말기의 정치의 가장 큰 이슈 중에
하나가 뭐냐면은 바로 공무합체 이론입니다. 공무합체론입니다. 그게
뭐냐면 공은 천왕입니다. 곁도에는 천왕과 그다음에 무는
막부죠. 무신들이죠. 교도의 천왕과
즉 교도의 천왕을 내세우는 존양이파.이 사람들이
누굽니까? 계국을 하면 안 된다. 우리나라의 위정 척사자. 조선의 위정 척사파 같은 사람들이었죠. 그 위정
척사파들이 절대로 계곡하면 안 된다. 왜 자꾸 에도의 쇼그는
오랑캐드를 막으라고 막불을 세우고 막살를 세우고 장군에 임명을 했더니
서양 오랑캐들 막기는 커녕 서양 오랑캐들이랑 조약을 체결해 갖고 서양
놈들이이 땅을 밝게이 신성한 우리 땅을 밝게 하느냐라면서 들고 일어나는
사람들이 그게 조항양이 파들이죠. 그게 천왕파들입니다. 그게 누구냐면
메이지 유신을 결국은 성공시키는 기도닷가씨 오구보도시미치 사이고 다가머리 이또 히로부이 사람들이
처음에는 뭡니까? 존황양이 파로 시작하는 거죠. 위정 척사파로 시작하라는 겁니다. 왜
막부에 반대한 이유가 막부가 서양의 서양하고 관계를
옥토를 저 오랑캐들이 짓밟게 했다라고 해서 사실은 먼저 일어나는게
그런데 그 조항 양이파들하고 지금 실제로 계국을 한게 누굽니까? 계국을
한 거는이 조항양입파. 나중에 메이지 유신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메이지 유신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조항양익파들이고 그 조항양입파들로부터
엄청나게 비난을 받는 그 누구냐면 도구가 막부죠. 막부가 서양하고
폐리제독하고 만나서 계국을 하니까 그러면 개국 문제를 놓고서 실제로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천왕주의자들하고 그리고 계국을 해야 된다라고 하는
막부 사람들하고 이렇게 둘이 나라가 갈라져서 싸우기 시작하는 거고 그게 결국은 나중에 메이주신의
파가 갈리는 것도 그렇게 가르치는 거. 다만 메이지신을 일으키고 나서 어떻게 됩니까? 메이지 유신에
성공한이 존양파들이 조선으로 말하면 의정척사파들이
메지 유신을 하는 과정에서 뭐를 배웁니까? 아, 우리가 틀렸다. 쇠국을 하고 서양을 배척해서 안 되고
존황 황제를 제대로 모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서양을 배워야 되겠다고 하면서
사실은 계국파들 하고 같이 계국파들로
전향을 해 버리는 것이 매주신입니다. 그런데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둘이
완전히 갈라져 있는 상황에서 사꾸마 쇼사는 뭐를 주창을 합니까? 야, 천왕 파들하고이
세국주의자들하고 조항양이 파들하고이 계곡주의자들이
같이 가야 된다. 어떻게 쓴지 손을 잡고 같이 가야 된다. 그러면서 공무 합체론을 주창을
하고 그것에 그거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앞장을 쓰면서 양쪽을 붙잡고 앉아서
계속해서 설득을 하면서 계국을 같이 하자라는 그 설득을 합니다. 당연히
어떻게 됩니까? 전왕이 파들로부터 나중에 메이지 주신을 일으키는 참
역설입니다. 아이런입니다. 그 사람들로부터 무수한
위협을 받고 협박을 받습니다. 암살 대상 제호가 사쿠마 쇼단이었습니다.
계국을 주장했기 때문에 이렇게 무차별적으로 사료 위협을 받는
사쿠마 쇼이었지만 태연하게에도 시내를 활벌을 합니다. 그것도 그냥
활보를 하는게 아니라 말을 타고 활하는데
서양 안장을 꼭 씁니다. 그러니까 더욱더 존황 양이파들의
표적이 됩니다. 그때에 사쿠마산이 자기 애첩이 있었는데 그 애첩한테
이런 편지를 보내. 나는 외출할 때마다 서양 한장을 사용한다. 나는 이곳에 에도에 도착한 이후 단 한
번도이 나라에서 만든 안장을 사용한 적이 없는데이를 두고 나를 비판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일부러 서양 안장만 사용하는데이는
우리나라가 무엇이든 좋은 것이라면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이러한 생각은 일본의 영원한 이익을 위해서다. 하늘에 도가 있는 한
아무도 나에게 손을 대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쿠마쇼사는 애도에 도착해서
공무 합체론을 주장을 하고 계국을 주장하기 시작한지 불과 3개월 만에
존왕 양입파들에 의해서 암살당합니다.에도
[음악] 에도 시대의
다양한 사상적 조류
그야말로 법남을 하고 난 갖고 같이 서양의 [음악] 학문이
직접적으로 수입됐던 그러한 사상적인
기반을 그것을 바탕으로 사쿠마 소산 같은
지식인이 나옵니다. 서양의 것을 잇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된다. 서양을
이기기 위해서 일본을 제대로 지켜내기 위해서는 서양의 [음악] 기술은 물론이고 그 기술에 바탕이
되는 사상까지도 학문까지도 [음악] 그대로 받아들여야 된다. 서양의 도랑
동양의 도를 다 알아야지 되는 거다. 서양의 [음악] 기술과 동양의 기술 다 알아야 된다라는
그러한 개방적인 사고를 하면서이 서세 동점의
시대에 일본을 지켜내고자 [음악] 했던 대표적인
일본 최초의 근대 안보 지식인 안보 전문가 사쿠마 쇼사는 이렇게 [음악]
형성이 됩니다. 다음 시간에는
그 사쿠마 [음악] 소산의 제자 아까 말씀드렸던 그 요시다 쇼인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요시다 쇼인은 메이주신을 [음악] 일으킨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스승. 그런 의미에서 매주신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로 치는 사람이 바로 요시다 쇼인입니다. 그는 어떻게 사꾸마 쇼산의 뜻을
받들어서 어떻게 자기 사상을 형성을 했고 자기 제사들을 어떻게 길러냈고
그것을 어떻게 실천에 옮기려다가 결국은 참수당하는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은 사꾸마 쇼사 요시다 쇼인 같이 계국을 위해서
개항을 부르짖으면서 [음악] 그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그러한 사람 사상가들이 그러한 지식인들이
[음악] 있었기 때문에 결국 나라를 열고 군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유신의 성공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통해서 [음악] 한국인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한국인의 탄생. 오늘은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음악]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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