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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8

박명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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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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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림
출생1963년 7월 29일 (57세)
경기도 안성시
국적대한민국 대한민국
학력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직업학자, 교수
박명림(朴明林, 1963년 7월 29일 ~ )은 대한민국의 정치학자이다.

생애[편집]

1963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와 동 대학원 석사, 박사를 졸업하였다. 1994년 최장집 교수의 지도로 "한국 전쟁의 발발과 기원"을 주제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전공 분야는 한국 정치와 동아시아 국제 관계이며, 고려대학교 아세아 문제 연구소 연구 교수, 하버드-옌칭 연구소 연구원, 연세대학교 국제학 대학원 교수를 거쳐, 현재 연세대학교 대학원 지역학 협동 과정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편집]

저서로는 박사학위 논문을 수정, 증보하여 출간한 <한국 전쟁의 발발과 기원 1,2>(1996, 나남) , <한국 1950: 전쟁과 평화>(2002,나남) 등이 있다. <한국 전쟁의 발발과 기원>은 1997년 월봉 저작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한국 1950: 전쟁과 평화>로 2003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받기도 했다. 이외에도, <해방 전후사의 인식 6>공저(2003,한길사), <역사 용어 바로 쓰기>공저(역사비평사,2006), <새로운 헌법 필요한가>공저(2008,대화문화아카데미) 등이 있다.

한국 전쟁 연구[편집]

기존의 브루스 커밍스를 중심으로 한 수정주의적 시각을 바로잡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커밍스가 <<한국 전쟁의 기원>>에서 남침유도설 쪽으로 경도된 내전설을 주장하였으나, 박명림은 구 소련 붕괴 이후 해제된 비밀 자료, 미국 측 비밀 문서, 남-북한 비밀 문서, 중국, 일본 등의 해제된 비밀 문서를 토대로 커밍스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특히 1945년 8월 20일날 테렌티 스티코프 중장에게 보낸 "38선 이북에 프롤레타리아트 정부를 세워라"라는 내용을 담은 서한은 38선 이북 조선 잠식야욕과 6.25까지의 일련의 행동의 시발점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로서, 박명림 교수가 발굴한 대표적 자료 중 하나다.

인터뷰[편집]

2020-08-26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6.15의 해법 박명림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6.15의 해법   

박명림 (지은이)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2019-12-27


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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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1부 한반도 평화를 위한 김대중 대통령의 인식과 실천

  • 김대중의 평화사상 - 최영태_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
  • 김대중 대통령의 평화외교: 현재적 함의 - 백학순_세종연구소 소장


제2부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국제외교 한반도 평화와 한미관계 김준형_한동대학교 국제어문학부 교수

  • 시진핑 시기 중국 외교, 미중 전략경쟁, 그리고 한중관계 - 김흥규_아주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 한일관계와 한반도 평화 양기호_성공회대학교 일본학과 교수 
  • 한러관계와 한반도 평화 - 조한범_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제3부 남북 화해와 관계 발전을 위한 경제, 사회, 문화 교류

  •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과 한반도 평화 박천조_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관리총괄부장 
  • 남북 이산가족 상봉과 사회문화교류 김은주_한국여성정치연구소 소장
  • 한반도를 평화를 위한 지자체의 역할, 서울시를 중심으로 - 황방열_서울시 남북협력추진단장


부 록 6.15 남북정상회담 19주년 기념 학술회의 및 기념식

  • 6.15 남북정상회담 19주년 기념 학술회의 기조강연
  • - 6.15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 임동원_서울시 남북교류협력위원장, 전 통일부 장관
  • 6.15 남북정상회담 19주년 기념식 특별강연 205 - 6.15가 밝혀준 평화와 통일의 길 - 임동원_서울시 남북교류협력위원장, 전 통일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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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박명림 (지은이) 

연세대학교 대학원 지역학협동과정 교수. 김대중도서관 관장과 인간평화연구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연구 주제는 평화와 화해, 한국 정치, 정치이론, 동아시아 국제관계다. 주요 저서로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I·II,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다음 국가를 말하다』, 『역사와 지식과 사회』, 『인간국가의 조건』 I·II(근간) 등이 있다.

최근작 : <세월호 이후의 사회과학 (큰글자책)>,<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6.15의 해법>,<트라우마와 사회치유> … 총 26종 (모두보기)

2020-08-17

몽양 여운형의 ‘좌우합작론’의 기독교적 의미 - 에큐메니안 이정배

몽양 여운형의 ‘좌우합작론’의 기독교적 의미 - 에큐메니안

HOME 학술 칼럼

몽양 여운형의 ‘좌우합작론’의 기독교적 의미

강덕상의 『여운형 평전』을 중심으로이정배(顯藏 아카데미) |
승인 2019.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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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강덕상의 책 『여운형 평전』(김광열 역[서울: 역사비평사]. 2007)을 토대로 했으나 관련 저서를 두루 살펴 자유롭게 서술했음을 밝힌다. - 저자 주


최근 필자가 속한 ‘생명평화마당’에서 정치학자 박명림 교수를 청해 남북 화해를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었다. 본 기회를 통해 두 가지 사실을 마음에 담을 수 있었다. 하나는 남북화해는 남남갈등 극복 없이 힘겨울 것이고 이 과제는 기독교, 크게 보아 종교가 풀어내야 할 과제라는 사실이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였으나 분단체제에 기생했던 이 땅의 정치와 종북/좌빨의 이념을 확대, 재생산한 한국교회의 현실을 생각할 때 본 사실이 가슴 깊게 새겨졌다. 이보다 먼저 논픽션 소설 『세 여자』를 읽은 적이 있었다. 이 땅의 독립을 위해 사회주의 이념을 택한 여성들의 지난한 삶을 다룬 이야기이다.

지금껏 일제하의 독립을 다룰 때 우리는 민족주의와 기독교적 시각만을 집중적으로 배웠다. 반공주의자 이승만을 국부로 강요했던 지난 역사 탓이다. 하지만 독립을 위해 중추역할을 했던 다른 이념, 사회주의를 간과하고서는 독립운동의 온전한 실태를 그려낼 수 없다. 건국절 논쟁도 이런 맥락에서 비롯한 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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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을 갖고 몽양 여운형의 자서전과 관련된 논문들을 다시 읽게 되었다. 재일 사학자 강덕상의 『여운형 평전』도 그 중 하나였다. 몽양 기념 사업회(회장 이부영 전 국회의원)가 조직되어 매년 추모 강연회가 열린다는 소식도 접했고 올해 발표된 자료집도 구해 읽었다.

자서전도 여럿 나왔다. 그의 생애가 독립에서 분단을 거쳐 통일을 위한 여정까지 걸쳐 있기에 자서전은 곧 이 땅의 정치사였다. 몽양의 정치 스펙트럼이 당대 민족주의 계열이나 사회주의 계열과 많이 달랐다.

3.8선이 만들어진 이후에도 그를 넘어 수차례 김일성을 만나기도 했다. 결국 양 진영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고 어느 쪽 사주인지 모를 일이나 혜화동 거리서 암살당했다. 이승만, 박헌영 심지어 김구가 그랬다고 하는 설도 지금까지 회자된다.


여하튼 그는 독립운동시기 부터 해방 후 찬/반탁 운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념을 품고 가려고 했다. 특정 이념 및 정파에 매몰되지 않고자 기를 썼던 정치가였다. 때론 상해 임정과도 거리를 두었고 민족배반자라는 오해를 무릅쓰고 일본 정치가들과 만난 적도 있었다.

해방 후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자주적 정권을 이루고자 했다. 일본이 그를 회유했듯이 미군정과 김일성 모두가 여운형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공을 들였다. 그만큼 그는 역량이 컸던 인물이다. 해방 공간에서 첫 대통령이 될 사람이 바로 그였다는 것이 당대의 역사적 평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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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운형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가나안 농군학교 김용기 장로 책을 읽던 중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을 발견한 시점에서였다. 사진 하단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조국이여 안심하라, 우리가 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이들이기에 이런 말을 내놓고 할 수 있었을까를 한참이나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와 함께 정치가 몽양과 기독교 장로인 김용기와의 관계가 궁금했다. 아니 정치인 몽양과 기독교의 관계가 더 궁금해 진 것이다.

그가 평양신학교 출신으로 승동 장로교회 전도사였고 상해에서 교회 담임자로 일했던 것을 최근 알게 되었다. 손정도 목사와도 임정에서 활동을 같이 했다. 3.1 독립운동 이후 일본 정부조차 자국 조합교회를 앞세워 그를 성직자로 묶어 둘 음모를 세운 바 있다.

무엇보다 몽양은 자신의 정치적 역량과 판단이 기독교적 시각 탓에 생겨난 것을 스스로 고백하였다. 잘 밝혀지지 않았을 뿐이지 최소한 일제 말기 까지는 이런 경향이 공공연했다. 실제 목사라는 직책이 당시 서양 세력과 접할 수 있게 하는 촉매가 되었을 것이다.

여하튼 소위 ‘좌우합작’ 이론가로 알려진 몽양의 정치여정을 기독교적 시각에서 조명할 여지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해방 후 강원용 목사도 몽양의 정당에서 활동한 바 있다. 평화의 기운감도는 한반도의 현 상황을 개척할 기독교 사상가로서도 큰 의미를 갖는 존재라 할 것이다.

이하 내용에서는 본 논문에서 엮어질 사안, 주제들을 생각나는 대로 나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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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은 젊은 시절 실천적 유교인 양명학의 가르침을 존중했고 이후 그 바탕에서 기독교를 수용했다. 일본 기독교인(우찌무라 간조)들 마음바탕이 본래 양명학이었듯이 말이다. 이보다 먼저 그의 조부 및 선친은 동학교도였다. 해월 최시형과 함께 동학 운동을 했던 가계였다.

이후 배재학당에 입학 기독교에 입문했고 상동교회에서 전덕기 목사 등 많은 독립지사들을 만나 민족의식을 키운다. 이후 이때 만난 인사들 다수가 104인 사건에 연루 되자 이를 민족의식을 함양하는 계기로 삼았다. 승동 교회에서 외국인 선교사를 돕는 전도사 역할 시작했다.

아주 열심을 다해 사역했기에 선교사들이 몽양을 기독교 지도자로 키우고자 평양 신학교에 입학시켰다. 이후 고향 양평 인근에서 교회 사역을 시작했으나 선교사들이 한국인을 무시하는 현실에 분노했고 말과 행위의 불일치에 기독교를 다소 멀리하기 시작했다. 한국 정치현실에 무관심한 선교사들에 절망하고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몽양은 선교사들이 세운 남경 금릉 대학에 기독교를 본격적으로 배우러 중국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그곳에서 배운 것은 영문학이었고 이 공부로 당대 세계적 인물들과의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학업 후 상해 임시정부를 함께 만들어 갔으나 의견 차로 임정과 거리를 두었고 상해에서 교회 목사로서 활동했다. 많은 청년들이 그의 감화로 교회에 모였고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하지만 본래 몽양은 임시정부를 원치 않았다. 정부대신 정당을 만들고자 했다. 실제로 그는 임정 이전에 ‘신한청년당’을 만들어 활동했다. 거시적 정부를 만들기에는 때가 이르지 못했다 여긴 것이다.

몽양은 조선 땅에서부터 중국 상해에 이르기까지 YMCA 활동을 많이 하며 기독교와의 관계를 깊게 했다. 상해에서도 이것을 실마리삼아 외국 선교사들과 소통하며 지냈다. 그 스스로 YMCA를 통해 한국 체육 발전을 위해 애썼다.

3.1 독립선언 이후 일제가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책으로 입장을 선회한 후 일본 조합교회 목사들이 대거 조선 땅이 들어와 선교했다. 일본 정신과 기독교 정신을 일치시켜 한민족을 개조하자는 취지에서였다. 한국인 목사들도 이에 동조하는 자가 많았다. 몽양을 이런 입장으로 회유시키고자 했으나 끝까지 이들과 타협치 않았다.

일제 말기 그리고 해방 후 정국에서 몽양은 목사 혹은 기독교 입지를 많이 내세우지 않았고 정치가로서 활동했다. 하지만 통일 논의 과정에서 그가 설(說)한 ‘좌우합작론’은 기독교 시각에서 살필 여지가 많다. 독립을 대의이자 하늘 뜻이라 여겼듯이 통일 역시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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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을 떠나 중국을 건너간 몽양은 그곳에서 젊은이들 모아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그 첫 쾌거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실행을 논하는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대표로 김규식(후일 우익으로 돌아선다)을 파견했다. 오히려 역으로 김규식을 나라 대표로 파견키 위해 파견주체로서 신한청년당을 결성했다고 봐도 좋겠다.

몽양은 국내 3.1 운동 전후로 상해에 머물면서 동경에 사람을 파견하여 이광수 등이 주도한 2.8선언에 동참시켰고 그 경험을 경성에 전달하여 3.1 선언의 힘을 불어 넣었다. 상해와 동경 그리고 경성(서울)의 연결고리를 만든 장본인이 바로 몽양 여운형이었다. 이후 3.1 선언을 중국의 5.4운동과 이어지게 한 사람도 몽양이었다.

3.1 선언 이후 세 곳에서 임시정부가 발족되었었다. 경성과 시베리아 이주민을 주축으로 한 소련의 블라디보스톡 그리고 상해가 바로 그곳이다. 이 세 곳을 상해 임시정부로 통합시킬 수 있었던 것 역시 몽양의 힘이었다.

특히 소련 연해주 지역의 임정은 사회주의적 요소를 갖고 있었다. 아울러 무력을 선호하는 입장이었다. 민족주의자들이 중심이었던 상해 임정이 이들을 거부했다.

하지만 몽양은 이동휘를 중심한 이들 세력을 수용했다. 이후 노선 다툼으로 흩어졌으나 하나의 정부를 이뤘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임정을 대한민국의 시작이라 할 경우, 그 속에 사회주의 요소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옳다.

정작 몽양은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원치 않았다. 나라를 빼앗긴 조선말기의 이름이었던 탓이다. 계급타파적인 언어를 선호했으나 의견을 합하기 위해 자기 뜻을 접었다. 이는 몽양이 소련에서 일어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깊이 관심한 결과였다. 소련과 중국의 혁명이 완성될 때 조선 독립도 그 선상에서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일제 후기로 갈수록 몽양은 조선 독립을 위해 소련 혁명과 중국 혁명에 주목했다.

하지만 몽양은 조선의 경우 계급 보다 민족모순 극복이 우선인 것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공산당과 협력한 것도 민족모순을 해결키 위함이었다. 더욱 몽양은 당시 조선을 계급투쟁의 여건이 갖춰지지 않았다고 보았다. 영어를 구사할 줄 알았던 몽양은 당시 시대적 상황을 꿰뚫고 있었다. 세계정세를 누구보다 잘 파악한 것이다.

중국 지도자 손문과도 수차례 만났고 트로츠키, 레닌과도 대화했으며(레닌의 공산당 선언을 최초로 번역소개) 모택동과도 의견을 나눴다. 중국 공산당의 특별회원이 된 적도 있었다. 민족주의자들과 달리 조선의 독립이 주변 국가들과의 연대에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던 탓이다.

그렇기에 몽양은 거듭 외교적 접근을 시도했다. 이점에서 민족주의 시각을 지닌 임정 지도자들과의 관계가 소원한 적도 있었다. 당시 안창호의 지지가 없었다면 몽양의 입지가 많이 좁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는 안창호의 독립노선과도 결별한다.

당시 이승만 중심의 미국 의존파, 소련과 손잡고 무력독립을 원했던 이동휘의 친소파, 중국혁명과 연대하자는 여운형파, 일중 간 교섭을 기다리며 우선 실력을 배양하자는 안창호 파 등이 공존했었다.

안창호의 신뢰 하에 몽양은 일본 정부의 초대에 응해 일본 땅을 밟았다. 몽양을 가장 큰 위험인물로 여긴 정부가 그를 회유키 위함이었다. 그렇기에 상해 임정 요원들은 그의 방일을 결사반대했다. 몽양 역시 고민했으나 일본 정부 각료들과 독립을 담판 짖고자 방일을 결정했다.

말했듯이 안창호 혼자 그를 믿고 지지해 주었다. 일본 수상을 비롯해(일본 천황까지 만났다는 기록도 있으나 정확치 않다) 여러 각료들과 만나 멋지게 독립의 정당성을 선포했다. 이 일로 일본 정부가 의회에서 불신임을 당하는 결과도 있었다. 조선 총독부와의 갈등도 컸다. 이 일을 주선한 조합교회 목사들이 자기 공적을 위해 몰래 추진했던 탓이다.

조합교회 목사들은 자기 정당화를 위해 몽양이 회유되었다는 이야기를 거듭 퍼트렸다. 이로써 당시 독립 운동가들 사이에서 몽양에 대한 평가가 엇갈렸다. 몽양 스스로도 방일을 주선한 당사자들의 입장을 고려해 이후 목회자의 길을 걷겠다고 생각을 바꾼 흔적이 있다.

하지만 몽양이 독립을 접고 일제치하에서 조선인의 자치로 마음을 돌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독립의지를 한 번도 접고 꺾은 적이 없었던 까닭이다. 일본 치하에서 자치를 원한 적이 없었다.

여하튼 몽양의 일본 방문을 두고 임시정부에서 찬반 논쟁이 심해지자 몽양은 임정과 거리를 두고 상해 민단의 대표자로 활동했다. 상해 거주 이주 동포들을 위해 계몽과 교육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의거로 죽음에 이른 의사(義士)들을 추모하는 모임도 빈번하게 주도했었다. 이주민 자녀들의 교육도 그가 감당했다. 물론 임정의 하부조직으로 편입되었으나 실상 민단 조직 없이 임정은 유지되기 어려웠다.

상해 민단대표가 전체 10명 바뀌었는데 그중 5번을 몽양이 맡았다. 이는 당대 상해에서의 몽양의 위치를 가늠케 한다. 몽양은 1920년 대 초반 필리핀 경우, 홍콩에 방문한 미국 국회의원 사절단과의 면담을 위해 백방의 노력을 다했다. 물론 나중에는 미국을 향한 마음을 접었으나 당시로서 미국의 역할에 주목하여 미국을 통해 독립의 기반을 다질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국 워싱턴회의(미국 중심한 서방국가들에게 일본 견제를 부탁할 것인가?)와 극동(지역)민족대회(약소국들의 저항 모임에 참여할 것인가?)를 두고 후자의 길을 선택했다. 이후 이승만이 독자적으로 미국에게 조선 통치를 부탁한 것을 알고선 미국에 대한 일체 미련을 접었고 그를 의지한 이승만과도 시종일관 갈등했다. 일제 말기(1944) 조선에 머문 몽양은 일본 패망을 예감하고 뜻있는 사람들과 비밀리에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당시로서는 선견지명을 지닌 행동이었다. 일제 패망 후 총독부에서 몽양에게 조선 치리권을 양도할 만큼 공신력이 컸다. 미소 양국이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몽양은 새 나라의 첫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이승만. 김일성의 이름은 아직 거론되지 않았었다. 이렇게 몽양은 일제 패망을 예견했기에 해방과 더불어 건국준비위원장의 자격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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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듯 해방군으로 들어 온 미소 군대로 인해 남북의 입장 차가 생겨났다. 북쪽의 경우 김일성을 앞세운 공산당 단일 체제가 쉽게 확립되었으나 남쪽의 경우는 정당 수가 수십 개나 되었다.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당 등 좌우익의 정당들이 부지기수로 생겨난 것이다. 이 정황에서 몽양은 ‘인민당’을 조직했다.

필자에게 이 정당 이름 속에 몽양에게 영향을 준 단군신화, 유교, 기독교 그리고 사회주의 뜻이 함축되었다고 생각한다. 몽양은 시종일관 어느 특정 이념세력이 독주하기보다 모든 이념이 함께하는 통합적 국가를 꿈꿨다. 모두가 자기 색깔을 강조하는 현실에서 몽양은 처음부터 ‘좌우합작론’을 내세운 것이다.


▲ 사진 왼쪽이 박헌영 선생이고 오른쪽이 몽양 여운형 선생이다. ⓒ한국 위키피디아
이로써 모두에게 비판받았고 미소 모두가 그를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한 공작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미 행정관 하지 중장이 수차례 회유했고 북쪽의 김일성도 몽양을 남노당 박헌영 보다 더 중히 여길 정도였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 이 땅 남쪽은 친/반탁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반탁이 대세였고 미군정을 등에 업은 송진우의 경우 친탁을 선호했다.

이 때 몽양은 친탁의 입장에 섰기에 민족진영으로부터 큰 미움을 샀다. 몽양의 친탁은 송진우의 친탁과 격이 달랐다. 국제 정치의 흐름을 읽은 탓이었다. 본래 이들 미·영·소 세 국가는 본래 몇 년간 정부수립을 도운 후 이 땅에서 손을 떼고자 했었다.

하지만 친/반탁 논쟁으로 혼란스러워지자 이들은 분할 통치로 마음을 바꾸었던 것이다. 일본이 회유한 자치를 거부하고 독립을 원했던 몽양이 친탁에 만족할리 없었으나 대세를 보았기에 오해를 무릅쓰고 이런 입장을 취했다. 이점에서 김구와의 갈등도 컸다.

김구에게 몽양은 좌익의 대표자로 여겨진 것이다. 이후 몽양은 민주주의민족전선 5인 의장단 자격으로 김일성을 만나 미·소 공동위의의 속한 재개를 촉구했고 이들 입장을 조정코자 했다. 남북 간의 대화와 협력 나아가 일치를 구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 모임이 무기한 휴회에 돌입한 탓에 남쪽에서라도 먼저 좌우합작을 통해 하나 될 것을 주창했다. 실제로 자신의 인민당과 신민당(민족주의) 그리고 남노당을 ‘사회 노동당’ 이름하에 7원칙 하에서 합당시켰다. 하지만 안팎의 방해공작으로 좌우합작은 성공할 수 없었다. 박헌영과의 도를 넘은 갈등이 한 몫을 했다. 그때마다 김일성은 몽양의 편을 들었고 합작론의 중요성을 지지해 주었다.

합작론이 깨진 후 몽양은 근로인민당을 재창당했으나 이미 힘을 잃은 상태였다. 몽양은 끝까지 ‘좌우 합작론’의 신념을 지키다가 7월 19일 정오 혜화동 로터리에서 62세 나이로 총탄에 맞아 횡사했다. 이전에도 십여 차례에 걸쳐 테러를 당해 몸을 다쳤으나 이번에는 일어서질 못했다.

우익도 좌익도 그의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민족사의 질고를 자기 몸에 지고 간 사람이었다. 새로운 조국에서 좌우가 하나 되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이 그간 너무도 주목받지 못했다. 이제 3.1 선언 100주년의 해에 그의 가치가 재조명되어야 옳다.

강조했듯이 오해를 무릅쓰고 모두를 아우르려 했던 그의 일관된 신념은 일제 치하로부터 시작되었다. 독립에서 통일에 이르기까지 몽양의 지속된 생각이었던 것이다. 무엇이 이를 가능토록 했을까?

이에 대한 답을 우리는 그의 기독교성에서 찾고자 한다. 이것은 그간 논의되지 않았던 새로운 과제일 것이다. 더구나 실천적 유교의 바탕에서 수용된 기독교의 정신이 그를 민족주의자(김구)와 거리를 두게 했으며 미국식 기독교(이승만)를 이질적으로 여겼음을 크게 주목할 일이다.

오히려 기독교와 민(民)을 사랑하는 사회주의와의 만남을 이 땅의 방식으로 가능케 했다고 말해도 좋겠다. 동학은 물론 신채호, 박은식과의 비판적 관계 속에서도 홍익인간을 말한 단군신화를 소중하게 여긴 것도 중요하게 평가 받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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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몽양 속 기독교 정신이 일제로부터 해방정국에 이르는 그의 족적에서 제대로 조명된 적이 없었다. 남북분단 이상으로 남남 간 이념갈등이 심각한 상황에서 한 정치학자는 후자의 해결 없이 전자를 성취하기가 힘겹다는 사실을 강조했고 그 역할을 기독교의 몫이라 말했다. 이런 정황에서 독립운동 시부터 통일을 위한 여정에 이르기까지의 몽양 족적에서 기독교성이 어찌 들어났는지를 살피는 것이 의미 있다. 그토록 오랜 세월 기독교 목회자의 자의식을 갖고 살았는데 그의 정치활동이 있어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수유리 산속 어느 한 편에 초라하게 묻혔으나 그가 남긴 오늘의 의미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몽양이 제일 싫어했던 이승만 정권과 그를 지지해온 반공적 수구 기독교가 그를 내쳤으나 3.1 백주년을 맞는 오늘의 촛불정국과 기독교는 그의 정신으로 남북을 새롭게 이어야 할 것이다. 남북, 남남이 분단체제로 두 동강 난 현실에서 독립과 통일을 추동했던 몽양의 기독교성을 다시 찾을 일이다. 그렇다면 그의 기독교성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7

무엇보다 몽양은 실천력이 뛰어난 사상가였다. 믿음의 현실화를 위해 언제든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당시 선교사들의 기본 정서에 반해 신앙과 정치를 하나로 여기 것이다. 이는 ‘민’(民)을 사랑하되 지행합일의 정신, 곧 동학과 양명학에 근거하여 기독교를 수용한 결과라 말할 수 있겠다.

민족을 사랑하되 민족주의를 벗고 오히려 세상의 약자들, 인민을 새롭게 발견한 것 역시 기독교의 영향이라 말할 수 있다. 예수 삶을 이해한 결과일 것이다. 진보적 민족주의란 말도 그를 일컫는 말 중 하나이다.

몽양에게 있어 세상과의 소통은 선교사들이 전해준 타계적, 개인 구원적 신앙관을 단숨에 무력화시켰다. 그는 교회 안에 갇히지 않았고 세상을 보았으며 뭇 이념들 세계에서 노닐었다. 시대의 징표를 읽었던 것이다.

몽양에게 기독교는 세계주의와 같았다. 세상의 열려진 시각에서 교회를 보는 혜안을 지녔다 할 것이다. 몽양은 사회주의 노선을 수용했으나 무장 폭력주의와는 거리를 두었다. 일제 강점 하에서도 일본과의 평화를 원했지 그를 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점에서 몽양은 평화주의자였고 이것은 그가 지닌 기독교 신앙의 열매라 생각한다. 안중근과는 다른 맥락에서 동양평화를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했다. 이점에서 3.1 선언서 정신의 충실한 계승자였다.

몽양에게는 모두를 아우르려는 한 몸 사상이 있었다. 교회가 그리스도 몸이듯이 민족은 그에게 한 몸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모두-모든 이념이-가 함께하는 삶의 공간으로 이 땅을 만들고자 했다. 불굴의 정신으로 주장한 ‘좌우 합작론’은 인간이 쌓은 장벽을 허물고자 하는 기독교적 이념구현의 다른 말이었다. 어느 한 편에 서는 것이 편하고 득이 되었을 것인데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 이런 그를 진보적 민족주의자라 불렀으나 필자는 여기서 기독교 선지자의 신념을 확인하고 싶다. ‘좌우 합작론’은 3.1 평화정신을 가장 옳게 계승한 것이다. 이 경우 ‘좌우합작론’은 일제 치하에서 군사력(무장) 보다는 외교적 역량으로 독립을 이루려 했던 정신과 맥을 같이한다.

몽양에게 민족의 독립이나 통일은 하느님의 지상명령으로 여겨졌다. 민족에 대한  사랑, 시대정신의 산물이기도 했으나 몽양은 이를 하느님 명령이라 믿었다. 함석헌이 그랬듯이 통일의 뜻을 더 깊게 물었던 것이다.

8

이런 차원에서 정치가이자 성직자였던 몽양의 기독교성은 분단체제를 확대 재생산해온 이 땅의 기독교에게 할 말이 많다. 한반도에 드리운 평화의 새 기운을 우리 것으로 만들기 위해 3.1 백주년을 통일의 원년으로 삼아야 옳다. 이를 위해 몽양의 정신이 필요하다.

북에서도 몽양은 아직도 추앙되고 있다. 몽양의 자녀들을 김일성이 돌봤고 이들이 김일성 곁에서 큰 역할을 해왔다. 하나될 조국을 위해 가교가 필요하다면 그 사람은 의당 몽양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세계를 읽었고 민족을 사랑했으며 모든 이념을 하나로 엮고자 했던 몽양, 그 때문에 그는 세상 빛을 보지 못하고 거리서 객사했다. 형틀에 매달린 십자가상의 예수처럼 그렇게 죽어 우이동 산자락에 초라하게 묻혀있다. 백범 김구를 능가하는 몽양의 정신이 이 땅에 소통될 때 대한민국은 새나라가 될 수 있다. 단군신화까지 수용하며 사회주의까지 품고자 했기에 목하 북한과 대화를 위한 적절한 이념으로 봉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좌우합작론’은 남남갈등이 심한 이 땅의 현실에서 되살려 실현시킬 주제이다. 물론 좌우합작론이 남북의 하나 됨을 위한 초석일 수 있겠다. 분단체제하에서 형성된 남쪽에서의 좌우대립은 해방정국 당시 이상으로 강력하게 화석화되었다. 통일의 가장 큰 장애물이 되고만 것이다.

이를 풀어 해체시키는 일이 향후 기독교의 과제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이 과제가 이제 한 달 앞으로 다가온  3.1 독립선언서 반포 100주년 되는 2019년에 한반도 평화체제를 위한 우리들 몫이 되었다.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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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02

군경토벌 중 학살사건(3)-호남지역 학살 사건과 백야사 토벌작전 연재 임영태의 한국현대사 망각과의 투쟁(26)



통일뉴스


군경토벌 중 학살사건(3)-호남지역 학살 사건과 백야사 토벌작전
<연재> 임영태의 한국현대사 망각과의 투쟁(26)


2016년 12월 13일 (화) 12:45:10 임영태  ytlim20@hanmail.net




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연재를 시작하며

과거사 청산은 근대 국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있었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으로 세계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과거사 청산은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일로써 왜곡․은폐된 과거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사회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은폐된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바로잡기 위한 과거사 청산 노력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통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 아래서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고 왜곡하여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도가 계속되면서 그 성과가 희미해지고 있다.

역사는 진실을 밝혔다고 해서 끝나서는 의미가 없다. 역사의 진실이 영원히 기억되지 않으면 역사의 정의는 없다. 진실은 공식 기록으로 표기되고, 교육되고, 기억되어야 한다.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망각과의 투쟁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 권력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과 테러, 의문사, 고문에 의한 조작 등과 관련된 사건들을 되짚어 봄으로써 역사의 진실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고자 한다. / 필자 주





11사단 20연대의 토벌작전 전개 상황

11사단 9연대 3대대에 의한 거창학살 사건은 사건 직후부터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한국 사회의 민주화 이후 가장 먼저 진상규명 활동이 가능해졌다. 거창사건과 동일한 부대에 의해 자행된 산청․함양의 경우도 거창사건의 조명과 함께 해결이 가능했다.

그러나 함평을 비롯한 호남지역에서 일어난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다소 시간이 지체되었으나 2005년 12월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마침내 그 진실이 역사의 전면에 드러날 수 있었다.

11사단 20연대 2대대 3중대가 전남 함평에서 대량의 학살사건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다른 부대들도 호남의 여러 작전지역에서 숱한 민간인 학살사건을 일으켰다.

11사단 20연대의 작전지역은 전남과 전북 일부지역(고창, 순창)이었다.

20연대 1대대가 담당한 지역은 전남 담양과 곡성, 전북 순창 등이었는데, 1951년 3월에는 3대대와 함께 화순 백아산 빨치산 토벌작전에도 참여했다. 2대대는 장성을 중심으로 전남 함평과 영광, 전북 고창 등지에서 작전을 수행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2대대 5중대가 함평 민간인 학살사건을 일으켰다. 2대대는 1951년 2월에는 1대대와 함께 전북 순창 회문산 빨치산 토벌작전에도 참여하였다. 그리고 3대대는 1950년 10월 중순 목포․무안을 거쳐 함평․영광 등을 수복하고 화순에 주둔하면서 인근지역에서 토벌작전을 벌였다. 20연대는 호남지역에서 6개월여에 걸쳐 토벌작전을 전개한 다음, 1951년 4월 9일 거창사건으로 문제가 된 11사단 대신 제8사단이 투입되면서 대구로 이동하면서 토벌작전을 끝냈다.(1)

호남지역에서 토벌작전을 벌이던 당시 11사단 20연대의 지휘관을 아래 <표>와 같다.

<표> 11사단 20연대 지휘관(1950.1.~1951.3.)(2)


직위

성명

계급

기 간


연대장

박기병

대령

1950. 10. 04.~1951. 03. 06.


박원근

중령

1951. 03. 07.~


1대대장

최형록

소령

1950. 10. 05.~1950. 10. 31.


이동근

소령

1950. 11. 01.~1950. 12. 25. / 1951. 01. 26.~


김용재

중령

1950. 12. 26.~1951. 01. 25.


2대대장

유갑열

소령

1950. 10. 05.~


3대대장

김필상

소령

1950. 10. 05.~1951. 01. 13.


최형록

소령

1950. 01. 14.~


그런데 20연대 작전지역은 조선노동당 전남도당의 관할지역과 대체로 일치하였다. 인민군 점령시기 전남도당은 광주에 설치되었으나 유엔군의 총반격으로 전황이 급변하자, 1950년 9월 25일 지하당으로 개편하라는 중앙당의 지시에 따라(3), 백아산 기슭의 화순군 북면에 당본부를 정하고 모든 당조직을 비합법 체제로 전환하였다.

10월 5일 전남도당 조직위원회는 인민유격대 전남총사령부와 6개 유격지구를 창설하는 결정서를 채택하였다. 유격지구란 지하로 잠입한 각 시․군당과 유격대의 원활한 지도와 연락을 위해 일정한 지역에 설치하는 연계조직으로 당부가 아닌 일정한 거점조직을 의미하였다. 6개 지구는 광주지구(무등산), 노령지구(담양군 추월산과 가마골), 유치지구(화순과 동나주, 장흥군 유치면 연봉), 불갑산지구(불갑산 용천사), 모후산지구(화순군 모후산), 백운산지구(광양시 옥룡면) 등이었다.(4)

11사단 20연대는 주로 전남유격대가 활동하던 지역을 대상으로 빨치산 토벌작전을 폈는데 그 과정에서 빨치산과는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이제부터 20연대의 활동을 중심으로 이 지역에서 일어나 민간인 학살 사건들을 간략히 정리해보자.

함평과 영광, 불갑산, 그리고 장성

1950년 10월 22일 11사단 20연대 3대대는 목포와 무안을 거쳐 함평군 수복작전에 나섰는데 함평읍의 주요 관문인 학교면 사거리에서 빨치산과 첫 교전을 벌였다. 토벌군은 교전 후 불갑산 방향으로 퇴각하는 빨치산을 추격하는 한편, 사거리 인근마을인 율동과 낙천동, 월산리 월봉․송산․신흥마을 등에서 청장년들을 색출하여 사살하였다. 이런 작전 방식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11사단의 ‘견벽청야’ 작전 지침에 따른 것이었다. 빨치산 치하 지역의 주민들을 적과 동일하게 간주하여 사살한 것이다.

다음날 3대대는 부대를 둘로 나누어 함평읍 수호리 대등마을과 해등마을, 대동면 향교리로 진출하였다. 이때 토벌군은 무작정 총을 쏘며 마을로 진입하여 주민들을 끌어내 대딴봉과 마을 앞에서 살해하였다. 10월 28일에는 나산면 월봉리 안영동에서 청장년 7명을 부역혐의로 인근 연주봉에서 총살하였다.(5)

20연대 3대대는 1950년 10월 30일 2대대와 함께 영광을 수복한 후 화순으로 이동하였다. 함평에는 11월 하순부터 1951년 1월까지 2대대 5중대가 해보면 문장에 주둔하면서 불갑산 인근의 빨치산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던 것처럼 그때 5중대에 의한 ‘함평 민간인 학살사건’이 벌어졌다. 5중대에 의한 함평지역 민간인에 대한 집단적인 학살은 1월 14일로 끝나지만 민간인에 대한 군의 불법적인 학살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2월 20일에도 20연대 2대대의 함평군 해보면 ‘불갑산 공비토벌작전’ 직후 인근 주민들이 군인들에게 총살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불갑산 용천사에는 당조직과 전남인민유격대 불갑산지구가 있어서 당간부들과 좌익단체 관련자들과 상당수 은거해 있었다. 거기다가 한국군에 의한 수복작전이 시작된 이래 2대대 5중대의 무차별적인 학살에 두려움을 느낀 주민들도 대거 산으로 들어와 있었다. 주민들 가운데는 좌익관련 가족들도 있었지만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과 군경의 무차별적인 살상을 피해 어쩔 수 없이 피신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6)

불갑산 토벌작전은 1951년 2월 19일 밤 11시경부터 시작되었지만 본격적인 작전은 다음날 새벽 2~5시 사이에 전개되었다. 이날의 작전에는 2대대 4개 중대와 연대 중포중대, 대전차중포중대, 수색소대가 동시에 투입되었다. 군인들은 작전이 끝난 뒤 용천사 인근에서 붙잡힌 일부 민간인들을 오두재 근처에 파놓았던 방공호로 몰아넣고 총살했으며, 확인사살까지 감행하였다. 현장에서 총살되지 않은 민간인은 불갑지서로 연행되었는데, 이들 중 15세 이상의 주민들은 ‘총살’로 분류, 2월 25일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 옴팍골에서 살해되었다.(7)

▲ 1950년 11월, 장성군 북일면 박산리의 철로 앞 비각에 숨어 있던 빨치산은 철로를 따라오던 국군을 저격한 현장. 철로는 없어졌으나 비각은 여전이 남아 있다. [사진출처 - 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0연대 2대대는 1950년 10월 19일 장성읍에 주둔한 다음, 면 단위로 토벌작전을 확대해 나갔다. 10월 30일 2대대가 삼계면 수옥리에서 작전을 펼치자 빨치산들이 “집에 있으면 군인들이 죽일 것”이라며 주민들을 선동하여 수련산 방향으로 끌고 갔다. 11월 11일에는 수색을 나왔던 5중대원 2명이 빨치산에 의해 살해되었고, 북이지서가 습격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2월 6일 이런 일들을 보복하기 위해 2대대 5중대가 나서면서 대대적인 주민들의 대량학살이 자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학도연맹원들에 의한 부역자 색출과 고문, 학살사건도 발생했다.(8)

12월 8일 장성군 삼계면 발산리에서는 군인과 죽창을 든 청년단들을 피해 산으로 피신했던 사람들이 학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7세였던 정문자는 어머니와 동생(4세)을 잃었는데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증언하였다.

“어머니가 동생을 업고 산으로 갔는데 산속에서 군인들이 손들고 나오라고 해도 나오질 않고 있다가 이를 본 군인들에게 그 자리에서 바로 총을 맞아 어머니는 즉사하고, 동생은 팔에 총상을 입었다고 하더군요. 나중에 내가 그 동생을 데리로 사창리로 피난을 갔는데 동생이 결국 며칠 안 지나서 죽어버렸어요. 총을 맞아서 그런지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바보가 되어버렸거든요. 그러니 죽을 수밖에 없었죠.”(9)

1951년 1월 27일에는 장성군 황룡면 통안리에서 마을주민들을 학살하였다, 토벌군은 그 이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에게 소개령을 내렸다. 주민들이 마을을 떠나 피난을 가려했으나 빨치산이 나타나 방해하는 바람에 떠나지 못하고 불에 타나 남은 4채의 마을에 모여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자 군이 다시 나타나서 주민들을 산으로 끌고 올라가 살해했던 것이다. 현장에서 살아남은 박노준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하였다.

“군인들이 청방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저희 마을 주민 약 80여명을 한갓등이라는 산으로 끌고 갔다. 산에 올라가자 군인들이 주민들을 산중턱에 세 줄로 앉혀 놓은 상태에서 빨치산에 대한 협력 여부를 묻고 각 줄 앞에 군인들이 한 명씩 서서 한 줄씩 사격을 하였는데 그 와중에 나와 김요상, … 등은 살아남았다.”(10)

그런데 군인들은 확인사살까지 했다. 또 다른 생존자 김요상은 이렇게 증언한다.

“한 차례 사격 이후에 군인들이 ‘살아 있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라, 살려주겠다’고 하니까 여자 2명이 일어났고 군인들은 바로 그 2명을 쏘아 죽였어요. 그러고 나서도 세 번이나 더 ‘살아 있는 사람 있으면 나오라’고 했어요. 또 군인들은 죽은 사람들을 발로 차서 사망 여부를 확인했는데, 여자 한 분은 배에 나뭇가지가 있어 군인들이 몸을 밟으니까 ‘어매야’하고 소리를 내어 다시 총을 맞았지요.”(11)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오직 ‘천운’이었다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삶과 죽음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다는 말이 사실일까?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일까?

1951년 1월 30일에는 빨치산이 불갑산으로 퇴각한 뒤, 장성군 삼서면 학성리 원촌마을에 진입한 2대대 군인들이 4세의 여자아이와 그를 업고 숨어 있던 53세의 노인 등을 사살하였다. 2월 18일에는 불갑산 토벌을 위해 장성에서 함평으로 이동하던 2대대 군인들이 가옥이 소각되고 주민들이 소개된 상태에서도 마을에 남아 있던 주민들을 총살하였다.(12)

<지도> 11사단에 의한 고창의 대규모 학살사건 발생지역(13)




담양지역에서

담양지역은 북쪽으로 순창군과 접해 있다. 담양의 북쪽 끝 용면 추월산 가마골은 순창군의 회문산과 연결되는 요충지로 이곳에는 전남 인민유격대 노령지구가 자리잡고 있어서 빨치산활동이 활발했다. 당시 상황을 알고 있는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군인들에게 쫓긴 인민군들이 순창이나 정읍으로 못 가고 모두 가마골에 집결하였고, 또 가마골로 피신했던 민간인들도 인민군들 때문에 산을 내려오지 못하는 바람에 가마골에 빨치산이 많아졌다.(14)

담양지역에서는 1950년 10월 15일부터 20연대 1대대에 의해 빨치산 토벌작전이 시작되었다. 담양에 진주한 1대대는 대대본부와 3, 4중대를 담양읍에 주둔시키고, 1, 2중대를 전북 순창으로 이동시켰다.

이 무렵 담양군 무정면 덕곡리에 빨치산 중대본부가 들어와서 50여명이 활동하고 있었다. 덕곡리는 동북으로는 전북 순창군 금과면, 동남으로는 곡성군 옥과면을 접하고 있고, 담양군 용면 가마골과 화순군 북면 백아산과도 연결되는 요충지였다. 제20연대 3대대장 김필상에 의하면 “1950년 10월 중순에 곡성군 옥과면에서 11사단 김용주 대령이 미군과 함께 빨치산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였”으며, 마을에 주둔하던 빨치산에 의해 여자와 아이까지 포함된 경찰가족 7, 8명이 살해, 매장하는 일도 일어났다.

이에 20연대 1대대는 무정면 덕곡리 빨치산 토벌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10월 30일 마을청장년 9명을 빨치산 혐의로 살해하였다. 당시 15세로 사건 현장을 목격한 이춘백은 이렇게 증언하였다.

“오전 7시경부터 마을 주변으로 포가 떨어지고 8시경부터는 총소리가 나기 시작했어요. 이윽고 9시경에는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왔어요.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사방을 다 포위하지는 않고 순창으로 넘어가는 고개는 열어놓았어요. 그래서 마을에 있던 빨치산과 부역자들은 마을 뒷산과 서흥리를 지나 순창 쪽으로 도망갔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마을에는 아무런 죄가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만 남아 있었는데,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와 집에 있던 청장년 남자들을 마을 앞 모정으로 끌어내고는 구타를 하다가 마을 주변으로 데려가서 총살했습니다.”(15)

▲ 1950년 11월 7일 11사단 20연대 1대대 4중대가 부역혐의자 40여 명을 공개처형한 담양읍 추성경기장 건너편 현장. [사진출처 - 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1월 7일에는 제20연대장 박기병이 담양읍 추성경기장에서 주민들을 모아 놓고 연설을 한 다음 부역혐의자에 대해 공개처형을 실시하였다. 『담양군지』(1980)는 그 사실을 “동년(1950년) 음력 9월 27일(양력 11월 6일(16)) 공산당 악질분자 49명을 검거하여 담양공설운동장에서 주민들을 집결시켜 그들의 죄상을 낱낱이 공개하고 공설운동장 건너편 산기슭에서 당시 주둔군인 제20연대 (1대대) 4중대에게 공개 총살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40여명이 빨치산 혹은 부역자라는 이유로 총살되었던 것이다.

11월 10일에는 담양군 대덕면 운산리․갈전리와 화순군 북면 맹리의 주민들 50여명이 제20연대 3대대 12중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담양군 대덕면 운산리와 갈전리, 화순군 북면 맹리는 모두 동북쪽으로 당시 전남 인민유격대 총사령부가 있던 백아산으로 이어지는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토벌군은 점심 무렵 운산리 산정마을에 도착, 주민들을 불러 모은 다음, 인민위원장 가족 4명과 여맹위원장 출신을 총살하였고, 이어서 마을청년 16명도 총살하였다. 군인들은 산정마을 아래의 저심마을과 하갈마을, 건너편 맹리 월곡마을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지도> 담양군 대덕면․화순군 북면 사건 지도(17)

▲ (1)~(8): 12중대의 이동경로 [1]~[2]: 빨치산의 이동경로 ●: 민간인 피해발생장소


이때 군인들은 선발대로 1개 분대 규모를 인민군으로 위장시켜 먼저 보냈다. 당시 11세의 소년으로 사건 현장을 목격한 정문기씨는 그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오후 3~4시경, 갑자기 1개 분대 규모의 인민군 복장에 인공기를 총에 매단 사람들이 집으로 들어와서는 수색을 하면서 부친(정보순, 당시 38세)에게 ‘동무는 아주 대장을 할 만하네요!’라고 말하면서 포박을 하여 마을 앞으로 데리고 나갔고, 부친을 포함한 주민들에게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라고 강요하며 구타를 했는데, 그중 일부 주민은 끝까지 만세를 안 부르려고 했지만, 주민들이 보기에 분명 인민군인 것 같고 또 구타와 위협이 있고 그러니 안 죽으려는 생각에 만세를 부를 수밖에 없었죠. 근데 끝까지 만세를 부르지 않았던 몇몇은 그날 죽지 않고 살아났던 걸로 기억합니다.(군인들이 갈전리와 월곡에서 인민군복을 갈아입고 주민들을 속였는데, 몇몇 군인들은 몰래 태극기를 주민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 주민들은 끝까지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고, 그래서 안 끌려갔다 한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저의 부친이 먼저 총탄에 맞으셨습니다. 저의 조부님(정충래, 당시 74세)은 당신의 자식이 죽는 모습을 보면서 그 사람들에게 항의를 했고, 그래서 결국 조부님도 부친의 뒤를 이어 그 사람들의 총에 목숨을 잃었습니다.”(18)

1951년 2월 11일에는 제20연대 3대대 10중대가 담양면 남면 무동리에서, 3월 18일에는 제20연대 1대대가 담양군 남면(현 창평면) 외동리에서 각각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외동리에서는 군인들이 마을에 불을 질러 불태우는 바람에 맹인 1명과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 1명은 집에서 나오지 못한 채 불에 타 죽었다.(19)

화순과 나주, 남원에서

화순지역에는 북쪽 북면의 백아산에 조선노동당 전남도당본부와 빨치산 전남총사령부가 자리잡고 있었다. 남면과 동복면에 걸쳐 있는 모후산에도 모후산지구가 들어서 있었고, 남서쪽의 청풍면과 도암면에 걸쳐있는 화학산과 국사봉, 나주 다도면, 장흥 유치면 등에 유치지구가 있었기에 빨치산 활동이 매우 활발했다.

화순지역 수복작전은 1950년 10월 4일 화순경찰이 화순읍에 진주하면서 시작되었지만 본격적인 수복작전은 11월 초순 11사단 20연대 3대대가 화순에 투입되면서였다. 3대대의 각 중대가 동복면, 이서면, 이양면, 남면에 주둔한 다음 수복과 토벌작전을 펴기 시작하여 12월 말에는 북면, 남면 일부, 도암면, 청풍면, 그러니까 백아산과 모후산, 화학산 등의 빨치산 집중지역을 제외하고는 어느 정도 치안을 확보할 수 있었다.(20)

한편, 백아산과 모후산, 화학산 등과 유치지구에 대한 토벌작전은 1951년 2월~3월에 20연대 1대대와 9연대 2대대가 합류하면서 본격화되었다. 하지만 3개 대대를 동원하고도 이 지역을 완전히 수복하지 못한 채, 4월 8일 제8사단에 임무를 넘겨주어야 했다. 백아산의 빨치산이 최종적으로 전멸한 것은 1955년 3월이었다.(21) 그만큼 이 지역의 빨치산 활동이 격렬했다는 이야기다. 결국 그 때문에 토벌작전 과정에서 주민들의 희생도 컸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20연대 3대대에 의해 발생한 최초의 학살사건은 1950년 11월 17일이었다. 당시 화순읍에 주둔하고 있던 토벌군은 광주로 이동 중 화순과 광주의 경계지점 너릿재에서 빨치산의 습격을 받아 대부분 전사했는데, 살아 돌아온 군인들은 화순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던 30여명의 부역혐의자를 다지리 인근 저수지로 끌고 총살하였다. 빨치산에 당한 분풀이를 무고한 비무장 민간인에게 한 것이다.

11월 20일에는 이서면 서리에서 주민 12명을 학살했는데 이 또한 빨치산의 습격으로 입은 피해에 대한 보복이었다. 11월 15일 3대대 군인들이 차량 4대를 끌고 화순읍에서 묘치재를 넘어 동복면으로 이동하다가 묘치재에서 습격을 받아 1명을 제외하고 전원이 사망했던 것이다.

보고를 받은 3대대는 보복으로 ‘묘치재 너머 첫 마을’을 찾아서 떠났다. 그런데 동복면에서 묘치재 너머 첫 마을은 경치리이고, 화순읍에서 묘치재 너머 처 마을은 이서면 서리였다. 보복을 위해 출동한 토벌군은 경치리가 아닌 이서면 서리에서 일을 벌였다. 이 또한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

빨치산과의 교전이 많고 치열했던 화순에서는 특히 보복 학살이 많이 일어났다. 3대대 12중대는 12월 10일 와천리 사천․와천마을에서 끌어낸 청년들을 근처의 ‘난드리고개’에서 살해하였고, 12월 25일에는 북면 임곡리 임곡마을에서 마을을 불태우고 청장년들을 살해하였다. 또한 1951년 2월 7일에는 3대대 9중대가 남면 주산리 주산마을에서 토벌군을 피해 뒷산으로 피신하는 주민들을 향해 총과 포를 쏘아 살해하였다.(22)

▲ 1950년 10월 빨치산 전남도당본부는 화순군 북면 백아산 용촌으로 이동하고, 인근 수리 새목에는 총사령부가 들어선다. 사진 속의 마을이 백아산 남쪽 기슭의 용촌마을이다. [사진출처 - 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상반기조사보고서]


2월과 3월에는 집중적인 토벌작전이 펼쳐졌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2월 20일경 전남도당 본부가 위치하고 있었던 북면 용곡리 용촌마을이 소각되었다. 그 이전 북면지역 24개 마을이 대부분 소각되고 주민들이 살상되는 피해를 입었다. 한편, 3월 중순에는 남면 유마리에서, 3월 17일에는 도암면 도장리와 동두산마을에서, 3월 하순에는 백아산 북쪽인 북면 송단리에서 마을이 소각되고 주민들이 살상되었다.(23)

<지도> 1951.3.23. 화순군 북면 백아산 소탕전 지도(24)




20연대 3대대는 1950년 12월 22일에는 나주군 다도면 판촌리 고마․동판마을에서 토벌작전을 벌이며 주민들을 향해 마구 총질을 하였다. 나주에서도 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이 있었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1951년 1월 20일 20연대 2대대의 세지면 동창교 학살 사건이다. 이 사건은 1960년 5월 24일자 <전남일보>의 보도로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신문기사는 “1951년 1월 20일 낮, 영산포 쪽에서 국군 화랑부대(11사단) 1개 중대가 입성하여 약 200명의 남녀노소를 동창교 밑 만봉천 개천가에 모아놓고 군경가족을 제외한 뒤 청장년 138명을 골라내 사살하였다”(25)고 보도하고 있다. 이 사건의 가해자는 함평 학살 사건에서 악명을 떨친 권준옥 대위가 지휘한 20연대 2대대 5중대였다.(26)

<지도> 나주군 다도면 일대 소탕전 지도(27)




1951년 3월 19일에는 나주군 다도면 도동리 척동마을과 신기마을 주민들이 군의 토벌과정에서 학살되었다. 또한 6월 24일에는 경찰에 의해 문평면 국동리 동막골에서 주민 30여명이 학살되었는데 그밖에도 여러 곳에서 경찰에 의해 토벌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28) 순창과 남원에서도 11사단의 빨치산 토벌과정에서 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되었다.(29)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집단학살 사건

호남지역을 비롯한 빨치산 토벌작전은 11사단과 교체한 8사단에 의해서도 계속되었다. 11사단이 활동하면서 벌인 것처럼 대량의 민간인 학살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 뒤에도 불법적인 민간인 학살은 소규모로 계속되었다. 이승만 정부와 군부의 대민인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은 한 불법적인 행위는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터에서는 평상시와 같은 수준의 인권보호를 기대하는 것은 이상론일 수 있다. 토벌작전을 펴는 군인들도 항상 빨치산의 습격에 따른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했고, 때로는 동료의 희생 앞에서 감정적으로 격앙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전쟁터라고 해도 생명에 대한 존중 의식은 확고해야 한다. 내 목숨이 소중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목숨도 소중한 것이다. 만일 그런 사고를 하지 않는다면 총을 든 군인들이 인간의 목숨도 파리목숨처럼 취급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한 위험성 때문에 전쟁범죄에 대한 국제협약이 존재하고, 비무장 민간인의 생명을 보호하도록 규정한 국제법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6.25전쟁 중 빨치산 토벌과정에서 한국군은 그러한 국제적 협약과 국제법 규범을 지키지 않았다.

후방지역 토벌작전을 전담하기 위해 만든 11사단의 범죄행위는 앞에서 수도 없이 확인했다. 그런데 학살행위는 교체되기 직전까지도 계속되었던 듯하다.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는 경남 산청군 외공리에서 최소 258명, 최대 276명의 유해를 발굴하였다. 연령대는 대체로 20대 초반에서 30대 초반이 대다수를 차지하였으나 10여명의 여성과 1명의 어린아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조사를 통해 확인된 점은 이들 희생자들이 인천과 서울 등에 소재하는 학교 교복을 입은 사람들도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일부는 서울, 경기지역에서 왔을 가능성이 있다고 파악되었다. 따라서 이들 희생자들은 교도소 수감자 등과 같은 통일된 복장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그야말로 순수한 민간인 피난민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가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소정에서 발굴한 유해의 일부. 이곳에서 최소 268명, 최대 276명으로 추정되는 유해가 발굴되었다. 학살주체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1951년 2월~3월 수백 명의 민간인이 군인에 의해 골짜기로 끌려가 집단학살된 사실은 확인되었다.


이 집단희생의 가해자와 관련하여 1960년 5월 19일자 부산일보에는 이 사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산청군 시천면 사(糸)리에서 본사현지특별파견취재부 발(發1)] 경호강 300리 물줄기가 5만 마일의 지리산 허리를 감돌고 있는 각 지역 산촌에서 최소한 1,300명의 주민학살의 비극이 밝혀졌다.
당시의 시천면 특공대장 김남준(金南俊, 41)씨에 의하면 이제 대로 드러난 참살사건은 …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점동부락 뒷산 소진골짝에는 84년(1951년) 3월 12일 하오 2시 피난민을 이민시켜 준다고 양민을 끌고 와 500명을 송두리째 생매장한 학살사건이 김종원이가 인솔해온 11사단 9연대 화랑부대에 의하여 감행된 것이 알려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300명의 부락 청년들을 인솔, 전투에 직접 참가했던 김남준씨의 산 증언이며, 84년(1951년) 3월 12일 상오 10시 쏟아지는 비를 무릅쓰고 1대의 장갑차를 앞세워 검은 ‘택시’에 몸을 실은 김종원이 세 ‘추럭’에 태운 군인들의 호위 아래 11대의 ‘버스’로 이곳에 끌고 와 비 내리는 하오 2시 사리에서 10(리) 떨어진 외공리 점동부락 뒷산 소징(소정) 골짜기에 몰아넣고 능선의 상봉에서 모포와 솥, 냄비까지 소지했던 부녀자와 어린이 등 500여 명을 총살하고 떠나갔다는 것이다.”(30)

그러나 이 기사 내용이 정확한지에 대해서는 확인하기 어렵다. 11사단 9연대는 이 사건이 발생하기 한 달 전 거창사건을 일으켜 이미 문제가 되고 있었던 상태였고, 경남지구 민사부장이었던 김종원이 직접 9연대를 인솔하고 학살사건을 지휘했다는 증언 또한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군부대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1951년 2월~3월경 한국군이 이 학살사건의 주체라는 사실은 증언과 발굴내용을 통해 대체로 확인되고 있다. 증언자들은 버스에 민간인 수백명을 태우고 와서 골짜기에서 집단으로 학살했다고 증언하고 있고, 발굴을 통해 학살자들이 카빈 소총을 소지하고 있는 잘 편제된 정규군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31)

백야사 창설과 ‘견벽청야’의 재적용

이와 같이 대규모 학살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킨 11사단이 교체되고 4월 6일부터는 8사단이 토벌작전을 진행하였다. 8사단이 토벌작전을 진행하는 동안에는 11사단처럼 무차별적인 대규모 민간인 학살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1951년 겨울부터 빨치산 세력을 완전히 궤멸시킨다는 목표로 백선엽을 사령관으로 하는 ‘백야사(Task Force Paik)’가 발족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백야사는 이른바 ‘쥐잡기 작전(Operation Rat Killer)’이란 이름의 토벌작전을 전개하였고 그 과정에서 민간인 희생이 대폭 늘어났던 것이다.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는 이승만의 후방안정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백야사를 승인하였으며, 그리스에서부터 자신의 휘하에 두었던 다즈(William Dods) 중령을 60명으로 구성된 미고문단의 선임자로 임명하여 백야사의 작전을 지원하게 하였다. 미고문단은 장비 지원과 함께 작전연락, 통신, 공중연락과 정찰, 심리전을 담당하였으며, 미극동사령부는 수백만장의 투항권유 전단(32)을 지리산 일대에 뿌렸다.

백야사 예하에는 수도사단과 제8사단, 서남지구전투사령부 등의 군과 함께 남원치안국 전방사령부, 태백산지구전투경찰사령부, 지리산지구전투경찰사령부가 배속되어 군과 경찰이 합동으로 작전을 폈다. 백야사는 육군본부 작전지시 113호에 의해 1951년 11월 25일 대구에서 진주로 이동하였고, 11월 26일에 서남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김용배 준장)로부터 서남지구 빨치산 토벌 임무를 인수하여 1․2․9경비대대, 107․110․117 예비대대 등을 인수하였는데, 예하에 배속된 부대 병력은 총 3만여 명에 달하였다.(33)

▲ 지리산지구 전적비. 거꾸로 선 역사의 현장.


▲ 어린아이를 구하고 있는 국군상과 민간인을 치료해주는 국군의 모습 조각. 그러나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허구다. 역사의 진실과 정의를 세우고 기억하는 투쟁이 필요한 이유이다.


백야사의 작전방식은 “국내 공산유격대를 격멸소탕하고 그들이 사용하는 물자와 보급품 일체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작전은 결국 토끼몰이식 방식을 채택하여 지리산을 포위한 3만여 병력이 산정을 향해 포위망을 좁혀 들어가면서 산간마을의 가옥과 시설을 모두 소각함으로써 빨치산이 거점으로 이용할 수 있는 근거를 완전히 제거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결국 앞서 문제가 되었던 11사단의 ‘견벽청야’ 작전을 또다시 도입한 것이었다.(34)

백야사는 1951년 12월 2일부터 1952년 3월 14일까지 총 4기에 걸쳐 작전을 실시하였다. 제1기 작전은 1951년 12월 2일부터 12월 14일까지로, “지리산을 남북으로 분할하여 남쪽에 수도사단을, 북쪽에 제8사단을 배치하여 지리산을 포위한 후 이들 부대를 기동타격대로, 기타 부대를 저지부대와 거점수비대로 하여 포위망을 압축하면서 빨치산의 근거지를 분쇄하고 반복수색으로 그 잔당을 색출, 격멸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어서 1951년 12월 16일부터 1952년 1월 4일까지 진행된 제2기는 운장산, 회문산, 백아산지구 등으로 분산된 빨치산을 근거지별로 각개격파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1952년 1월 4일부터 1월 31일까지 진행된 제3기는 지리산지구로 재잠입한 빨치산 토벌을 위해 지리산, 백운산, 덕유산에 전투부대를 동시에 투입하여 빨치산 잔당을 격멸하기 위한 작전이었으며, 마지막으로 1952년 2월 4일부터 3월 14일까지 진행된 제4기 작전은 백아산, 모후산, 조계산지구에 대한 소탕작전이었다.(35)

이와 같은 4기에 걸친 백야사의 작전 중 가장 많은 민간인 희생이 발생한 것은 1951년 12월 2일부터 12월 14일까지 진행된 제1기 작전이었다. 총 전과(사살 6,600명, 생포 7,115명)에서 보듯 당초 예상했던 빨치산 숫자 4천여명의 무려 4배가 넘었다. 이는 백선엽의 주장에 따르면 “공비들에 포섭된 비무장 입산자가 많았음을 입증”(36)하는 것인데, 여기서 ‘비무장 입산자’란 결국 대부분이 토벌을 피해 지리산으로 피신했던 일반주민을 뜻하며, 이들이 모두 백야사의 토벌대상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조사한 사건들도 모두 백야사 제1기에 발생한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경남 산청군 삼장면에서 1950년 겨울부터 지리산 일대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일가족이 1951년 초겨울 백야사 토벌군에 의해 학살되었으며,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에서도 1951년 12월 백야사 토벌군에 의해 마을이 소각되고 주민들이 소개되는 과정에서 총살되거나 불에 타 죽는 일들이 벌어졌다. 백야사의 작전 초기에 또다시 11사단의 ‘견벽청야’ 내지는 ‘초토화작전’이 반복되었던 것이다.(37)

한편, 백야사는 토벌작전과 함께 광주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하여 토벌과정에서 생포된 일반 주민들을 수용하였는데, 열악한 수용소 환경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추위, 장질부사(장티프스), 기아 등으로 사망하였다. 또한 백야사는 작전 기간 중 빨치산 귀순자 생포자를 중심으로 구성된 사찰유격대도 토벌작전에 동원하였다. 사찰유격대는 백선엽 등 만주군 출신의 항일유격대 토벌 경험이 활용된 것이기도 하였다.(38) 사찰유격대는 입산시 경험과 조직 정보 등을 이용해 토벌작전에 가담하는데 각 지역 경찰서장이 사찰유격대를 직접 지휘했다.

1950년 10월부터 1952년 3월까지 11사단, 8사단, 백야사 등 군의 대대적인 토벌작전과 경찰, 청년방위대, 우익청년단 등의 합동작전 등으로 빨치산 세력은 궤멸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까지 무고하게 살상되었다.

지금까지 토벌작전 과정에서 학살된 민간인 문제는 주로 11사단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지만 11사단 외에도 전국에 걸친 토벌작전과 각 지역에서 경찰에 의해 발생한 사건도 수없이 많았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토벌작전과 부역혐의 등으로 학살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지역이 없을 정도이다. 또한 토벌작전과 부역혐의 학살사건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 특징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전쟁을 두고 ‘톱질전쟁’이라고들 이야기한다. 한국군(유엔군)과 인민군(공산군)의 반복적인 정복과 재정복이 반복되면서 그 사이에 끼인 민간인들은 그야말로 톱질을 당하듯이 잘근잘근 잘려나갔다.(39) 그와 같은 한국전쟁의 특성 때문에 유독 민간인의 피해가 막심했다. 우리는 무고한 민간인의 인명을 무참하게 살상한 전쟁 범죄자, 범법자들을 기억함과 동시에 전쟁의 참혹함을 깨닫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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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진실화해위원회, 「전남지역(담양․․장성․화순․영광) 11사단 사건」, 167~168쪽

2) 육군본부, 『한국전쟁사료』59, 1987, 930~933쪽; 보병 제20연대, 「부대역사일지」(1970), 35쪽;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167쪽

3) 김남식, 『남로당연구 Ⅰ』, 돌베개, 1984, 455쪽



4) 김영택,「한국전쟁기 남한 내 적색 빨치산의 재건과 소멸」,『한국현대사연구』제2집, 2003년 겨울, 132~134쪽; 진실화해위원회, 「전남지역(담양․․장성․화순․영광) 11사단 사건」,『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04, 2009, 166쪽

5) 진실화해위원회, 「함평수복작전 민간인희생사건」,『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02, 2008, 106~107

6) 진실화해위원회, 「불갑산지역 민간인희생사건」,『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03, 2009, 50~51쪽

7) 진실화해위원회, 「불갑산지역 민간인희생사건」(2008년 하반기), 58~62쪽

8) 진실화해위원회, 「전남지역(담양․․장성․화순․영광) 11사단 사건」(2008년 하반기), 205~206쪽

9) 진실화해위원회, 「전남지역(담양․․장성․화순․영광) 11사단 사건」(2008년 하반기), 208쪽

10) 진실화해위원회, 「전남지역(담양․․장성․화순․영광) 11사단 사건」(2008년 하반기), 225쪽

11) “그때 나는 느낌이 이상하여 뒷줄로 옮기는데 군인이 저에게 와서 개머리판으로 쳐 무릎을 구부린 채로 엉거주춤하게 있다가 바로 총소리와 함께 넘어졌는데 앞사람과 옆사람의 피와 살점들이 저의 온몸에 흥건하게 묻어 군인들이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위의 보고서, 225쪽)

12) 진실화해위원회, 「전남지역(담양․․장성․화순․영광) 11사단 사건」(2008년 하반기), 229쪽

13) 진실화해위원회, 「고창 11사단 사건」,『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008, 160쪽

14) 진실화해위원회, 「전남지역(담양․․장성․화순․영광) 11사단 사건」(2008년 하반기), 178쪽



15) 진실화해위원회, 「전남지역(담양․장성․화순․영광) 11사단 사건」(2008년 하반기), 170쪽



16) 담양군지는 11월 6일로 기록하고 있으나 유가족들은 11월 7일로 증언하고 있어 하루 차이가 있음.

17)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184쪽

18) 진실화해위원회,「전남지역(담양․장성․화순․영광) 11사단 사건」(2008년 하반기), 185쪽

19)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194쪽

20) 진실화해위원회,「화순지역 경찰에 의한 민간인희생사건」,『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04, 2009, 20~21쪽

21) 진실화해위원회,「전남지역(담양․장성․화순․영광) 11사단 사건」(2008년 하반기), 246쪽

22) 진실화해위원회,「전남지역(담양․장성․화순․영광) 11사단 사건」(2008년 하반기), 235~236쪽

23) 진실화해위원회,「전남지역(담양․장성․화순․영광) 11사단 사건」(2008년 하반기), 247~257쪽

24) 육군본부, 『한국전쟁사료』59, 1987, 1137쪽;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256쪽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는 최소 74명의 주민이 학살된 사실을 확인하였다.

25) 진실화해위원회,「나주 동창교 민간인집단희생사건」,『2007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007, 284~286쪽

26) 진실화해위원회,「나주 동창교 민간인집단희생사건」, 293쪽

27) 진실화해위원회,「나주지역 민간인 희생사건」,『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04, 2009, 627~695쪽

28) 진실화해위원회,「순창지역 민간인희생사건」(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3); 「남원지역 민간인희생사건」(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 참고

29) 백선엽에 따르면 전단은 총 9백92만장으로 지리산을 하얗게 뒤덮을 정도였다.(백선엽, 『군과 나』, 대륙연구소, 1989, 226쪽)

30) 진실화해위원회,「서부경남(거창․함양․하동․산청) 민간인희생사건」,『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07, 2010, 267쪽

31)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266~268쪽

32) 백선엽에 의하면, 전단은 총 9백92만장으로 지리산을 하얗게 덮을 정도였다.(백선엽, 『군과 나』, 대륙연구소, 1989, 226쪽) 지리산에 숨어 있던 빨치산들은 이 전단지를 담배말이나 화장지로 잘 썼다고 한다.(백선엽/유광종기자 정리, [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69) 2기 토벌작전 개시, <중앙일보 북한네트워크>, 2010.9.7)

33) 진실화해위원회, 「경남 산청․거창 등 민간인희생사건」, 『2010상반기 조사보고서』05, 750쪽

34) 진실화해위원회, 위의 보고서, 750쪽

35)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Ⅲ, 255~256쪽

36) 백선엽, 위의 책(1989), 229쪽

37) 진실화해위원회, 「경남 산청․거창 등 민간인희생사건」, 『2010상반기 조사보고서』05, 785~796쪽

38) 일제는 만주에서 항일유격대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귀순자를 앞세워 비밀아지트를 파괴하는 한편, 심리전 공작을 폈다. 이와 함께 일제는 조선인만으로 특별히 구성된 간도특설대를 조직하여 운영하였는데, 이 간도특설대에는 백선엽, 김백일, 송석하, 신현준, 김석범 등 한국군의 중추를 구성하는 주요인물들이 대거 참여하였다.(김효순, 『간도특설대』, 서해문집, 2014 참고)

39) 이와 관련해서는 박명림,『한국 1950 전쟁과 평화(나남출판, 2002); 김동춘,『전쟁과 사회』(돌베개, 2000)을 참고할 수 있다.

2020-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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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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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냉전한반도 분쟁의 일부

한국 전쟁 당시 사진

날짜 1950년 6월 25일 ~ 현재 (1953년 7월 27일부터 휴전 중)
장소
한반도, 동해, 황해
결과

휴전협정 체결
휴전선의 형성
양측의 대립 심화
양측의 중앙집권 강화(분단의 장기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개성시 및 옹진반도 점령, 대한민국은 강원도 4,000㎢의 지역을 점령[8]

교전국


대한민국
미국
유엔

전투 파병국[보이기]
의료 지원국[보이기]
물자 지원국[보이기]
지원 의사 표명국[보이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소련

의료 지원국[보이기]
기타 지원국[보이기]
지휘관


이승만
신성모
채병덕
정일권
백선엽
김석원
이종찬
김종오
김홍일
손원일
최용덕
해리 S. 트루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더글러스 맥아더
월턴 워커
매슈 리지웨이
제임스 밴 플리트
마크 웨인 클라크


김일성
박헌영
최용건
김두봉
남일
김책
강건
김무정
마오쩌둥
펑더화이
덩화
저우언라이
이오시프 스탈린
니키타 흐루쇼프

병력


UN군 사령부:[13]
대한민국 국군 1,090,911 명
미국 480,000명
영국 56,000명
프랑스 3,421명
오스트레일리아 8,407명
뉴질랜드 3,794명
캐나다 25,687명
네덜란드 5,322명
필리핀 7,420명
터키 14,936명
콜롬비아 5,100명
벨기에 3,498명
태국 6,326명
그리스 왕국 4,992명
에티오피아 제국 3,518명
남아프리카 연방 826명
룩셈부르크 83명
의료부대 목록
노르웨이 623명
이탈리아 128명
스웨덴 1,124명
덴마크 630명
인도 627명

총계: 1,719,579 명

공산군:
조선인민군 800,000 + 명
중국인민지원군 1,350,000 명[14]
소련군: 26,000 명[15]


총계: 2,150,000 명 이상
피해 규모



군인
149,005명 전사
710,783명 부상
132,256명 실종
민간인
373,599명 사망
229,625명 부상
303,212명 행방불명
총계
522,604명 사망
940,408명 부상
435,468명 실종
총계 1,898,480명 사상

36,574명 전사[16][17]
103,284명 부상
3737명 실종
4439명 포로
총계 137,250명

1078명 전사
2674명 부상
179명 실종
997명 포로
총계 4908명

펼치기
그 외총계: 1,500,000명 이상


군인
294,000명 전사
226,000명 부상
120,000명 실종 및 포로
민간인
406,000명 사망
1,594,000명 부상
680,000 명 행방불명
총계
700,000명 사망
1,820,000명 부상
800,000명 실종
총계 3,320,000명 사상

183,000명 전사
383,500명 부상
25,600명 실종 및 포로
총계 592,000여명 사상 및 실종&포로

315명 전사
500명 부상
총계 815명
총계: 1,190,000명 ~ 1,577,000명 이상.


펼치기

v
t
e
한국 전쟁


한국 전쟁(韓國戰爭, 표준어: 6·25 전쟁, 육이오 전쟁, 한국 전쟁[18], 문화어: 조선 전쟁/조국해방전쟁[19], 영어: Korean War, 중국어 정체: 韓戰/朝鮮戰爭, 러시아어: Корейская война)은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기습적으로 대한민국을 침공하여 발발한 전쟁이다. 유엔군중국인민지원군 등이 참전하여 세계적인 대규모 전쟁으로 비화될 뻔 하였으나, 1953년 7월 27일 22시에 체결된 한국휴전협정에 따라 일단락되었다. 휴전 이후로도 현재까지 양측의 유무형적 갈등은 지속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공산·반공 양강 진영으로 대립하게 된 세계의 냉전적 갈등이 열전으로 폭발한 대표적 사례로, 냉전(冷戰)인 동시에 실전(實戰)이었으며, 국부전(局部戰)인 동시에 전면전(全面戰)이라는 복잡한 성격을 가졌다. 이는 국제연합군과 의료진을 비롯해 중화인민공화국소비에트 연방까지 관여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의 국제전이다.

[20]


목차
1개요
2다양한 명칭

3배경
3.1한반도 분단과 군정 실시
3.2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상황
3.2.1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배력 강화와 전쟁준비 교섭
3.2.2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전쟁 지원 약속
3.2.3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쟁 준비
3.3대한민국의 상황
3.3.1대한민국 내부의 혼란
3.3.2대한민국의 전쟁 대비
3.4한국 전쟁 전의 여러 전투
3.5군사력 비교

4원인
4.1남침
4.2과거의 한국전쟁 원인 가설
4.2.1스탈린 주도설
4.2.2한미 공모설
4.2.3내란 확전설

5경과
5.1발발과 서전(緖戰)
5.1.1옹진반도 전투
5.1.2개성, 문산 전투
5.1.3의정부 전투
5.1.4춘천 및 홍천 전투
5.1.5강릉 전투
5.1.6육군본부의 대응
5.1.7서울의 상황
5.1.8조선인민군의 서울 점령
5.2낙동강 방어전
5.2.1대구 후퇴와 다부동 전투
5.2.2UN에서의 설득 작업
5.3UN군의 총반격
5.3.1인천 상륙 작전
5.3.2서울 수복
5.3.3중공군 개입과 장진호전투
5.3.4북한, 중공의 반격 준비
5.4제한전선의 격동
5.5대량살상무기
5.6휴전협정

7전투 목록
8갤러리
9기타
10한국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
10.1대한민국
10.1.1영화
10.1.2드라마
10.1.3게임
10.2해외
10.2.1영화
10.2.2드라마
11관련 서적
12같이 보기
13각주
14외부 링크
개요[편집]

전쟁 이전 미리 중화인민공화국마오쩌둥소비에트 연방이오시프 스탈린의 협조와 지지를 얻은 김일성[21]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38도선과 동해안 연선(沿線) 등 11개소에서 경계를 넘어 대한민국으로 진격하였다. 조선인민군의 대공세에 전쟁이 1주일만에 김일성의 승리로 끝날 뻔 했으나 유엔미국을 주축으로 바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82호를 의결하고 이 전쟁에서 한국을 원조하기로 결정하고 파병하였다. 그리하여 7월 7일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이 조직되었다.[22] 유엔은 일본 도쿄에 본부를 세웠다. 인민군은 무방비 상태였던 중부지방과 호남지방을 삽시간에 휩쓸었다. 연합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배수진의 결전을 전개하였다.[23]

연합군은 더글러스 맥아더의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을 개시하여 북한군의 뒤쪽을 공격하여 이를 시작으로 대대적인 반격을 하여 10월 10일 평양에 이어 압록강 부근까지 이르렀으나, 11월 중순 중국인민해방군이 개입하여 전세가 다시 뒤집히게 되었으며, 혜산진까지 진격하던 한국군은 1월 4일에 다시 서울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나 다시 3월 15일에 탈환하였다. 그 와중에 남로당의 대한민국 내부 전복을 위한 활동과 이를 제압하려는 대한민국 정부의 충돌로 거창 양민학살 사건, 국민 방위군 사건 등의 여러 비극적인 사건들이 일어났다. 이후 3년 동안 지속된 전투로 수많은 군인 및 민간인이 사상하였고, 대부분의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양측 모두가 큰 경제적, 물질적 피해를 입었으며, 이념적인 이유로 민간인들의 학살이 자행되고 지주들의 처벌과 그 보복이 반복되면서 남·북 간의 적대적인 골이 깊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심지어는 38선을 사이에 두고 같은 마을 사람들이 서로 전쟁까지 하는 안타까운 일까지 벌어졌으며 고지전 이후 1953년 7월 27일 22시에 체결된 한국휴전협정으로 인하여 설정된 한반도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휴전하였다. 현재까지 계속 이 상태가 유지되고 있어 가장 오래 이어진 전쟁이라는 기록을 계속 경신하고 있으며, 휴전협정 체결 이후에도 남북 간에 충돌은 발생하고 있다.
다양한 명칭[편집]
대한민국 정부와 대다수의 언론은 공식적으로 6·25 사변(六二五事變) 혹은 6·25 전쟁(六二五戰爭)[24] 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내전적 의미를 강조하는 경우 한국동란(韓國動亂), 6·25 동란(六二五動亂)이라 불린다.
약칭으로 부르는 경우 6·25(六二五)라고 한다.
육십갑자를 적용하여 경인동란(庚寅動亂)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다.
영어 원문의 번역을 통해 한국 전쟁(韓國戰爭)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다.[25]
조선전쟁(朝鮮戰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일본에서 쓰이는 용어로 중화인민공화국도 가끔 쓴다.[26]
중화인민공화국의 대부분 학자들은 항미원조전쟁(抗美援助戰爭)이라고 부른다.[27][28]
미국과 캐나다 등 서구 국가들은 2차 세계대전베트남 전쟁 사이에 벌어져 젊은 세대들이 잘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29] 혹은 알려지지 않은 전쟁(The Unknown War)으로 부르기도 한다.

배경[편집]

1945년 08월 1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5년 전,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맞은 한반도는 해방 직후 타의에 의해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미군소련군의 점령이 끝나고 한반도에는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북한은 소련과 중국을 설득하여 한반도를 적화통일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고 준비를 해 나갔다. 소련은 소련군이 한반도 38선 이북에 진주한 이래, 아시아 공산화를 목적으로 북한에 소련을 대리할 수 있는 공산 정권을 세우고, 한반도의 통일을 방해하면서 침략의 기회를 엿보아 왔다.[30]중국 공산당은 1949년 10월 01일 중국 국민당을 대륙에서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31] 반면에, 미국은 주한미군이 철수를 완료(1949년 6월)[32] 하고, 미국의 극동방위선이 타이완의 동쪽 즉, 일본 오키나와와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이라고 선언(애치슨 선언, 1950년 1월)[33] 을 하는 등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 원조를 최소화해 나갔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은 시기였기에, 미국은 소련 공산권과의 직접적인 군사 충돌이 제3차 세계대전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국제적인 정세를 고려하였으며, 소련 역시 그러한 이유로 북한에 대한 공개적인 지원을 중단하였다.
한반도 분단과 군정 실시[편집]
한국의 군정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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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일본 제국이 연합국에게 항복을 거절하자 미국일본 영토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고, 소련군은 한반도 북부 지역까지 진격했다. 이로써 한반도는 1945년 8월 15일에 일본 제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38선을 기점으로 하여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진주한 소련군과 미국군에 의해 남과 북으로 갈라져, 북쪽에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의 군정, 남쪽에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의 군정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이 소비에트 연방과 미국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여 이념 대결을 벌임으로써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는 시각, 즉, 한국 전쟁을 대리 전쟁으로 이해하는 시각이 있다.

그리고 남북분단 후 미소공동위원회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1950년까지 영국, 중화민국, 미국, 소련신탁 통치를 하는 내용도 있는데 즉, 38선을 경계로 남쪽엔 영국과 미국이, 북쪽엔 중화민국과 소련이 점령하기로 했는데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옛날 백제의 수도가 부여였을 때에 백제의 영토를 영국이 점령하고, 나머지 38선 이남은 미국이 점령하기로 했다. 38선 북쪽으로선 개마고원을 경계로 평양, 개성, 남포, 신의주, 해주을 포함한 서부 지역은 중화민국이 동부 지역 원산, 금강산, 함흥, 흥남, 장진, 혜산진, 청진, 나진을 포함한 곳은 소련이 점령해서 5년 간 신탁 통치를 하기로 한 것이다. 1949년에 국공 내전에서 국민당이 공산당에게 패배하고 38선 북쪽의 서부지역이 공산당으로 넘어가 서부 지역도 공산국가가 되므로 38선 북쪽 전체가 공산국가가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1950년대가 되면 4개국이 손떼야 되는 상황이었는데 미국은 이와 반대로 즉시 독립을 주장하여 서로 엇갈린 대화 때문에 전혀 실행되지 못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상황[편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 한국전쟁은 김일성박헌영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김책, 김무정도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리승엽남로당 계열의 인사들도 찬성하였고, 군사지도자들인 강건, 김웅, 김광협, 방호산, 리권무, 김창덕, 유경수 등은 남쪽과의 일전을 고대하였고 승리를 확신하였다. 이에 비해 최용건은 적극적으로 반대하였고, 김두봉, 홍명희, 장시우 등은 반대 또는 소극적 찬성을 하였다.[34] 김일성은 수 차례 소련의 지배자인 스탈린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자인 마오쩌둥을 만나 무려 48회나 남침 허락 내지는 전쟁 지원을 요청하였다.[35] 공개된 구 소련의 문서에 의하면 애초에 스탈린은 조선 인민군이 절대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인민군의 실력이 미국과 대한민국을 상대로 아직은 단독으로 전쟁을 치를 만한 실력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의 직접적 마찰을 두려워하여 무력 행사를 기피하였다. 그럼에도 김일성은 수 차례 스탈린을 설득하였고, 일부 역사 연구자들이 옛 소련의 문서들을 근거로 주장하는 이론에 의하면, 스탈린은 미국을 시험하고 미국의 관심을 유럽에서 아시아로 돌리기 위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전쟁에 대한 원조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하는 조건으로 김일성의 남침을 승낙하였으며 이리하여 스탈린은 강력한 군사적 원조로서, 소련의 최신무기들을 대량으로 제공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배력 강화와 전쟁준비 교섭[편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한국 전쟁의 준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김일성조선로동당의 일당독재를 기반으로 반대파(민족주의자, 종교인 특히 북한 수립 이전 융성하던 개신교, 지주, 마름, 기업가, 기술자 등을 포함한 상당수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에 대한 철저한 숙청을 통하여 자국 내 정치적 입지를 강하게 다지고 있었다.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최고인민회의 간부회의를 통하여 통일을 위하여 점령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둔 소련군은 1948년 12월 시베리아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소련 정부는 모스크바에서 비밀리에 군수뇌회담을 개최하여 철군 이후의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특별군사사절단'을 통해서 집행하기로 하였다. 이 회의에는 김일성 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고위 군부 대표도 참석하였다. 모스크바 계획이라고 불리는 전쟁준비 계획은 만주에 있던 조선인 의용군 부대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귀국시켜 5개 사단을 갖게 하고 이외에 8개의 전방사단과 우수한 장비를 보유한 8개의 예비사단, 그리고 500대의 탱크를 보유하는 2개의 기갑사단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1949년 2월 스탈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후 처음으로 김일성박헌영모스크바로 불러 소련군의 철수로 인한 군사력 공백과 한반도 정세를 논의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뇌부는 방문 기간인 3월 17일에 유럽에서 일반적으로 체결하던 '우호 방위조약'이 아닌 '조·소 경제·문화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는 앞선 미군 철수 발표에 대한 소련의 대응으로 앞으로 있을 한국전쟁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한 계획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36] 이러한 이유로 한국 전쟁 당시 소련은 공개적으로 돕지 않는다고 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통해 전쟁 물자 공급을 지속한다.

1949년 8월 12일, 김일성박헌영은 대한민국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평화적 통일안을 거부하고 있으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남공격을 준비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에서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대규모 민중봉기가 분명히 뒤따를 것이라고 언급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만약 대남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인민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많은 친북 종북 ‘민족인사’들을 투옥시켰지만 북한은 아직도 대한민국에서의 봉기를 조직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다.[37] 이는 1949년 남조선로동당 등의 대한민국 내부의 공산주의자들이 반공정권이었던 이승만 정권의 공산주의 탄압에 의해 대대적으로 검거되었다는 것을 대한민국에서 온 공산주의자들의 허위보고로 생각한 까닭이었다.[38] 1949년 8월 27일, 북한 주재 소련 대사 스티코프는 8월 12~14일의 김일성과의 면담내용을 스탈린에게 보고하고 다음과 같은 이유로 북한의 대남공격이 불가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1. 현재 한반도에는 두 나라가 존재하며 그중 대한민국은 미국 및 기타 국가에 의해 승인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격시 미국은 대한민국을 무기탄약 공급뿐 아니라 일본군의 파견을 통해 지원할 가능성이 있음.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남공격은 미국이 대소련 모함∙선전에 이용할 수 있음. 3. 정치적 측면에서 북의 공격은 남북한 인민 대다수의 지지를 얻을 수 있으나 군사적 측면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아직 대한민국에 대해 압도적 군사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 4. 대한민국은 이미 상당수 강한 군대와 경찰력을 창설하였음에도 소련의 지원하에 있는 조선인민군에 비하여 약세에 있었다.(스티코프는 김일성이 제의한 강원도 지역의 '해방구역' 창설계획에는 찬성하고 또한 인민군에 의한 옹진점령계획도 군사적으로 타당하다고 보고했으나 남한의 반격시 이 작전이 지구전이 돼버릴 수 있다고 언급)[39] 스탈린에게 제출한 9월 15일자 보고서에서, 스티코프는 “김일성박헌영은 현 정세하에서는 평화통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북이 남한 정부를 무력공격하면 남북양쪽의 인민들이 이를 지지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지금 무력통일을 안하면 통일이 연기될 뿐이고 그동안 남한 정권은 좌익세력을 탄압하면서 북진할 수 있는 강력한 군대를 만들어 통일은 물거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김일성은 남진을 시작할 때 소련과 중공이 원조해줄 것을 기대하는 듯하다.”고 썼다. 그의 견해는 남북의 내전은 북에 유리하나 북한군이 남한 공격을 개시하면 소련이 국제적 비난을 받게 되며 미국이 끼어들 것은 물론 남한을 적극 지원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또, 물론 북한이 남한에서 빨치산 활동을 강화하는 것은 좋다. 옹진작전은 유리한 상황하에서는 실시 가능하고, 이를 위해 38선 지역에서 남쪽의 도발을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40] 그러나 이에 대해서 소련 공산당 정치국 중앙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침이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는 지시문을 스티코프를 경유하여, 김일성에게 전달하였다.(1949년 9월 24일)[41][42]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전쟁 지원 약속[편집]

1950년 1월 17일 박헌영의 관저에서 열린 만찬에서 김일성은 북한 주재 소련 대사 스티코프에게 남침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이를 논의하기 위하여 스탈린과의 면담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이 대화에서 김일성은 중국 공산당중화민국을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성립한 것을 계기로 고무되어 대한민국이 차지한 남한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강조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기강이 세워진 우수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김일성은 이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남한의 선제공격에 대한 반격만을 승인한 1949년 3월의 스탈린의 결정에 불만을 토로했다.[43][44][45] 1월 30일, 스탈린이 서명한 전보를 평양으로 타전했다. 전문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불만은 이해가 되나 '큰일'에 관해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지나친 모험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접견해 이 문제를 논의할 준비가 돼 있으며 그를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46] 3월 20일, 김일성은 스티코프와의 면담에서 4월 초에 자신과 박헌영이 스탈린과 만나고자 한다는 것을 전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김일성은 이번 방문을 46년의 방문처럼 비공식(비밀)으로 할 것을 제의하였다. 김일성은 남북한 통일의 방법, 북한 경제개발의 전망, 기타 공산당내 문제에 관해 스탈린과 협의하기를 원하였다.[47] 4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과 김일성 간의 회담에서 스탈린은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북한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 데 동의하였다. 다만, 이 문제의 최종결정은 중화인민공화국과 북한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만일 중국 공산당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하였다.[48]

5월 12일, 스티코프가 김일성 및 박헌영과 면담한 자리에서 김일성은 마오쩌둥과의 면담계획을 밝혔다. “소련에서 돌아온 후 이두연 주베이징대사로부터 마오쩌둥과의 면담 결과를 보고받았다. 마오는 ‘조선통일은 무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미국이 남한 같은 작은 나라 때문에 3차대전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미국의 개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마오와 면담하기 위해 5월 13일 베이징으로 출발할 것이다. 마오는 내가 대남 군사행동을 곧 시작할 생각이라면 비공식으로 만나겠다고 한다. 마오에게 북한으로 이양되는 중공군 소속의 조선인 사단을 위해 중국이 노획한 일본 및 미국무기를 제공해줄 것을 요청할 계획이다. 50년 6월께로 예정하고 있는 남침계획을 구체적으로 수립하라는 지시를 북한군 총참모장에게 시달했다. 작전이 6월에 개시될 것이나 그때까지 준비가 완료될지 자신이 없다.”[49] 5월 13일, 김일성과 박헌영이 베이징에 도착하여 마오쩌둥과 면담하고 스탈린이 모스크바 회담 때 ‘현 국제환경은 과거와는 다르므로 북한이 행동을 개시할 수 있으나 최종결정은 마오쩌둥과의 협의를 통해 이뤄야한다’고 했음을 설명했다. 5월 14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특별전문에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국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동지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고 했다.[50] 5월 15일, 모스크바의 메시지를 받은 뒤 마오는 김일성 · 박헌영과 구체적으로 의견을 교환하였다. 김일성은 북한이 ‘군사력 증강-평화통일 대남제의-대 한민국쪽의 평화통일 제의 거부 뒤 전투행위 개시’의 3단계 계획을 세웠다고 언급했다. 마오가 이 계획에 찬성을 표명하고 일본군의 개입 가능성을 물은 데 대해 김일성은 일본군이 참전할 가능성은 별로 없는 것으로 보나 미국이 2만~3만명의 일본군을 파견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참전이 상황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오는 만일 미군이 참전한다면 중국은 병력을 파견해 북한을 돕겠다고 했다. 소련은 미국쪽과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가 있기 때문에 전투행위에 참가하기가 불편하지만 중국은 이런 의무가 없으므로 북한을 도와줄 수 있다고 했다. 북한이 현 시점에서 작전 개시를 결정함으로써 이 작전이 양국간 공동의 과제가 되었으므로 이에 동의하고 필요한 협력을 제공하겠다고 했다.[51] 5월 29일, 김일성은 스티코프에게 4월 모스크바 회담시 합의된 무기와 기술이 이미 대부분 북한에 도착했음을 통보하였다. 이 통보에서, 또한, 김일성은 새로 창설된 사단들이 6월말까지 준비 완료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북한군 참모장이 바실리예프 장군과 함께 마련한 남침공격 계획을 북한지도부가 승인하였고, 군조직 문제는 6월 1일까지 끝내기로 했다. 북한 군은 6월까지 완전한 전투준비 태세를 갖추게 된다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6월말 이후는 북한군의 전투준비에 관한 정보가 남쪽에 입수될 수 있으며 7월에는 장마가 시작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6월 8~10일께 집결지역으로의 병력이동을 시작할 것이이라고 보고되었으며, 김일성과 면담 뒤 스티코프는 바실리예프 장군 및 포스트니코프 장군과 의견을 교환했다. 그들은 7월에 공격을 시작하는 것이 가장 시의적절하나 일기관계로 6월로 변경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52] 6월 11일, 대한민국은 통일민주조국전선이 제의한 평화통일안을 거부했다.[5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쟁 준비[편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한국전쟁을 준비함에 앞서 대한민국의 정보를 상당부분 알고 있었다. 특히 평양에서 발견된 조선인민군 정보문건에 의하면 대한민국 각 행정 소재지의 군(郡) 단위까지 1950년도의 쌀, 보리 등의 모든 농작물 예상 수확량이 세밀하게 기록돼 있었다. 조선인민군은 이 정보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에서 한 해 동안 확보할 수 있는 식량의 규모, 즉 공출량을 계산한 상태였다. 특히 모든 종류의 주식은 물론이며 주식이 아닌 까지 군 단위별로 예상 수확량과 공출량을 매겨 놓았다. 그리고 대한민국 영토인 청단지역에서는 해방전부터 농업용수로 사용한 구암저수지의 수로를 북한이 일방적으로 끊음으로써 청단평야의 영농을 못하도록 하는데 서슴지 않았다.[54] 그리고, 전쟁 보름 전(6월 10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전형적인 화전양면기만술의 일환으로 대한민국이 체포한 김삼룡이주하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억류 중이던 조만식과 38선에서 교환하자며, 6월 23일을 협상기일로 제안하기도 했다.[55] 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 겸 외무상인 박헌영의 강력한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1950년 6월 16일 이승만은 북에서 먼저 보내라는 요구를 했고, 6월 1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동시교환을 주장했다. 한동안 “먼저 보내라,” “아니다. 동시에 교환하자”라는 공방을 되풀이하였다.[56][57] 또한, 6월 16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가 대한민국 국회에 평화통일 방안을 제의하기도 했다.[58]

그러나, 조선인민군은 그 이면에서 전쟁 준비를 마무리해 갔다. 즉, 6월 12일부터 인민군은 38선 이북 10~15km 지역으로 재배치되기 시작했고,[59] 6월 16일에는 소련대사 스티코프는 북한군 총참모부가 작성한 침공작전 계획을 모스크바에 보고했다. 이 계획은 1개월 기간으로 3단계로 구성되어 있다.[60] 6월 20일, 스티코프는 모스크바에 조선인민군의 수륙양용 작전용 선박공급과 소련군 수병을 함께 제공할 수 있는지 여부를 문의했다. 모스크바 시간으로 오후 10시 스티코프는 모스크바로 전화를 걸어 모스크바 시간으로 오후 11시께 남한정부가 북한에 대해 공격을 시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첩보가 북한쪽에 오후 8시 무렵 입수되었다고 보고했다. 스티코프는 이 첩보가 공개문서로 돼 있어 의심스럽다고 평가했다.[61] 6월 21일, 스티코프는 스탈린에게 김일성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 메시지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입수한 각종 첩보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침공에 관한 정보가 대한민국에 알려졌으며 이와 관련해 대한민국이 전투준비태세를 강화하는 조처를 취하고 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김일성은 전에 구상했던 옹진반도에서의 전초전을 수행치 않고 6월 25일 전 전선에 걸쳐 전투행위를 시작하는 것이 목적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62] 6월 21일 밤에, 조선인민군은 2차에 걸쳐 북한에 대한 전투행위를 개시하라는 대한민국 육군의 명령을 라디오를 통해 포착했다고 주장하였다. 소련은 조선인민군 군함에 근무할 소련 수병 파병요청에 대해 이는 적군이 개입할 수 있는 구실이 되므로 수락할 수 없다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답신하였다. 6월 22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소련 대사관에 암호전문의 교신은 바람직하지 못하니 향후 일체의 암호전문을 타전하지 말라는 모스크바의 지시가 시달되었다. 이후 1950년말까지 평양과 소련 외무성간에는 전보 교신이 중단되었다.[63]

특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주민들이 초가지붕을 고칠 여유도 주지 않음은 물론이고 당시 대한민국에 전혀 전무했던 T-34/85를 확보해놓기까지 했으며 특히 일제시대에 닦아놓았던 도로의 폭을 2배 이상 넓혀 놓기까지 하는 등 철저하게 준비했다. 반면,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전쟁 하루 전날 병사들에게 휴가를 보내는 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64]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의료부대인 조선인민군 949군부대는 6월 24일 오전 1시 38선 부근에 야전병원을 설치하고 의료요원들을 각 해당 부분에 배치하였다. 6월 25일 오전 12시까지 치료준비사업을 완료한 병원은 전투 준비 상태로 대기하였다. 25일 오후 2시부터 부대는 벌써 전상(戰傷) 환자 취급을 시작하였다.[65]

대한민국의 상황[편집]
대한민국 내부의 혼란[편집]

대한민국이승만 대통령은 귀국한 지 얼마 안 되는 입장으로, 대한민국 내의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박헌영과 같은 좌익 정당, 또 김구와 같은 국내파의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이승만과 같은 해외파 독립운동가들은 서로를 불신하였고, 그 결과 대한민국은 여러 개의 정당이 난립되는 등 심각한 정치 사회적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김규식 등은 좌우파의 합작과 협력을 추진해왔고 양자를 중재해보기 위해 한 차례 평양을 방문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여기에 장덕수 암살 사건으로 이승만과 사이가 틀어진 김구가 동참하여 힘을 얻는 듯 했으나, 김일성이나 이승만이나 모두 강경한 태도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므로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편, 미국 군부는 한반도를 '전략적으로 포기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미국 군부 수뇌부의 사고관에서 '만일 소련이 동북아시아에서 3차 대전을 일으킬 가능성'이란 의문은 대한민국의 가치를 평가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사고였다. 만일 미국이 육군전을 상정한다고 생각하면, 한반도 남쪽에 주한미군을 배치할 수 없었다. 한반도에서 3차 대전이 발발할 경우에 한반도에 투입될 소련 육군과 미국의 육군은 군사학적으로 근원적인 한계가 있었다. 소련과 한반도는 땅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미국 육군은 한반도에 투입되기 위해서는 태평양을 건너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해군전과 공군전을 상정한다면 역시 한반도는 미국 입장에서 전혀 필요가 없었다. 어떠한 작전이라도 공군전과 해군전은 한반도를 우회해서 충분히 수행이 가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미 군부는 잠정적으로 한반도에서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만일 소련이 대대적인 도발을 감행할 경우에는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을 포기하고 북태평양에 있는 알류샨 열도일본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도서방위선을 구축해 소련과 3차 대전을 수행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것이 미 군부가 1946년 비밀리에 수립한 핀서 계획과 문라이즈 계획이다. 핀서 계획과 문라이즈 계획의 도서방위선 구상이 바로 주한미군의 전면 철수를 명시한 애치슨 라인의 원형이다.[66] 결국, 대한민국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은 약 500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마지막 남아 있던 부대가 1949년 6월 29일 철수하였다.[67][68]

김일성에게 적극적인 군사력 지원을 제공한 소련과 달리, 위와 같이 미국이승만이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 결과 대한민국의 군사력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비하여 매우 취약한 상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49년 9월 30일 외신 기자 회견에서 "우리는 북한의 실지(失地)를 회복할 수 있으며 북한의 우리 동포들은 우리들이 소탕할 것을 희망하고 있다."고 말하는 등[69] '북진통일론'을 주장했다. 또한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라디오 방송에서 "아침은 개성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며 호전적인 발언을 하였다. 또한, 이러한 북진통일론은 한국 전쟁 당시 서울이 금방 함락될 정도로 군사력이 취약했던 것을 보면 분명히 실현가능성이 없는 공상일 뿐이었으나, 북한은 이를 전쟁의 빌미로 이용하려 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70]

대한민국의 전쟁 대비[편집]

1949년 말, 육군본부 정보국은 1950년 춘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38도선에서 전면적인 공격을 할 것이라는 종합정보보고서를 내놓았다. 이에 육군본부는 계획 수립을 서둘러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38호(일명, 국군방어계획)을 확정(1950년 3월 25일)하고, 예하 부대에 이를 하달하여 시행토록 하였다. 이 국군방어계획은 신태영(申泰英) 육군총참모장의 지시로 육군본부 작전국장 강문봉(姜文奉) 대령이 중심이 되어 작성되었다.[71] 전쟁 발발 1주일 전까지 강문봉이 작전국장에 있었다. 그는 매일 적정(敵情)판단보고서를 읽었는데 이 보고서에 조선인민군의 병력이동상황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었고 병력집결이 완료되면 남침할 것이라는 분석자료도 있었다. 이러한 정보를 신성모 국방장관과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에게 보고했고 미 극동군사령부에도 제보, 무력증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미국 측은 "공산군의 남침은 없다"고 단언하면서 한국군의 정보는 군사원조를 얻기 위한 것으로 경시하는 일이 빈번했다.[72] 신성모는 대통령이 명령만 내리면 바로 전쟁준비를 마치고 북침을 하겠다고 망언을 했고 전쟁을 원하지 않았던 미군은 국군의 전차와 전투기 모두 압수하고 곡사포와 대전차포 90% 이상을 압수했다. 이 일로 인해 북한이 남침할 명분이 생겼고 1950년 6월 정보국에서 북한이 남침을 준비한다는 정보를 수없이 보냈지만 신성모는 북한은 절대 남침을 하지 않는다고 정보를 무시했고 1950년 6월 23일 정보국에서 북한이 남침한다는 정보를 보냈으나 신성모는 남침정보를 매번 무시하였고 채병덕에게 명령내려 전군 비상경계령을 모두 해체하였다. 채병덕은 국군 장병들을 휴가외출 보낼 것을 요구했고 신성모는 이를 허락하였다. 국군 병력 반 이상을 휴가외출을 보낸 이 일은 정보를 받은 북한에게는 큰 손실 없이 남침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고 결국에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원인이 되었다.

한편, 제헌국회의 임기가 끝날 무렵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정계는 물론이고 일반의 물의를 무릅쓰고 제2차 총선거 실시를 지연시키는 한편, 적자예산의 편성을 시도하였으나 당시 이를 반대하는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의 각서 도달로 말미암아 정부에서는 종래의 주장을 변경하여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다.(1950년 5월 30일)[73] 선거의 결과 무소속 의원이 국회 의석의 과반수를 점하여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고 몇몇 중간파 의원들이 두각을 나타냈으며, 정부측 여당의 진출은 미미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에 대해, 1949년 6월에 제정되어 선거 직전인 1950년 4월에 시행규칙을 공포한 토지개혁법이 유상매수(有償買收) · 유상분배(有償分配)를 원칙으로 하고 있으므로 사실상 토지개혁의 의의가 희박하여, 국민이 노골적으로 정부에 반감을 표시한 결과라고 속단하고 이때에 남침을 감행하면 틀림없이 대한민국 국민의 지지를 얻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74] 1950년 6월 19일의 대한민국 제2대 국회가 의장단 선출을 시작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전쟁 직전이었다.

한편, CIA는 한국 전쟁 발발 엿새 전의 보고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침가능성을 낮게 평가하고 있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소련의 위성국가로 독자적인 전쟁 수행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 근거였다. 그러나 CIA의 예측과는 달리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백악관은 그 책임을 물어 CIA를 전쟁 발발 후 며칠간 백악관 안보회의에서 배제했고 두 달 뒤에는 CIA의 수장을 교체했다.[75] 반공주의자인 미국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 고문이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38도선을 시찰(1950년 6월 20일)하는 등[76] 미국의 북침에 대한 위협을 느낀 김일성이 먼저 남침을 결정했다는 주장도 있다.

1950년 6월 24일 육군본부 정보국(국장 장도영, 북한반장 김종필, 문관 박정희)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규모 병력이 38선에 집결했다는 보고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군 수뇌부는 바로 그 날 비상경계를 해제하였다. 그 날은 주말이라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이 외출했다. 그 날 저녁 육군본부 장교 클럽 낙성 파티에는 전방부대 사단장들까지 초청되었었다.[77]

그 외 전쟁 발발 2주 전 대부분의 지휘관을 교체하고, 1주 전 대부분의 전방 부대의 위치를 변경하고, 전방 부대의 중화기와 차량 중 60% 가량을 후방으로 보내는 등 개별적으로는 이해가 가나 종합적으로는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위가 집중적으로 일어나 이형근이 저서 《군번 1번의 외길인생》에서 6.25 초기의 10대 불가사의를 제기하며 군 지휘부(이승만, 채병덕 참모총장, 김백일 참모장, 신성모 국방부장관, 김경근 국방부차관) 안에 통적 분자가 있다고 주장하게 되는 원인이 되며, 일각에서는 이승만 남침 유도설의 근거가 되었다.(이형근은 군번 1번 문제로 일본 육사 선배인 채병덕과 개인적으로 사이가 매우 좋지 않은 상태이며, 이것은 국군 창설 첫날이자 최초의 파벌 싸움의 시초가 되었다)

한국 전쟁 전의 여러 전투[편집]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도 여러 번의 전투가 있었다.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1949년 1월 18일부터 1950년 6월 24일까지 있었던 전투횟수는 총 874회였다.

1948년 4월 3일: 제주 4·3 사건
1948년 10월 19일: 여수·순천 사건
1949년 12월 24일: 문경 양민학살 사건.

북한의 남침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주장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군이 침입한 횟수는 432회에 이르고, 그 가운데에 71회는 비행기 침입, 42회는 함대습격도 포함 되어 있었다. 물론 대한민국 공군은 지역의 정찰만을 위해 쓸 수 있는 L-4 연락기 및 L-5 연락기 외에, 전쟁 발발 직전 국민 성금으로 캐나다로부터 구입한 T-6 텍산 10대가 전부였다. 충돌은 황해도 옹진 반도에서 강원도양양까지 걸쳐져 있어 단순한 국부적 충돌이 벌어지고 있던 셈이었다. 그 가운데 옹진 반도, 개성, 의정부, 춘천 그리고 강릉부근에서 전투가 자주 벌어졌다. 이 지역들은 1950년 6월 25일에 조선인민군이 주 공격지역으로 삼았던 곳이었다. 북한군 제1사단은 개성 부근 도처에서 마치 한국군의 전력이라도 시탐하듯 빈번한 도발을 자행하다가 1950년 봄에 와서는 거의 매일같이 개성과 백천등 38선 연변도시에 박격포사격을 가하였다.[78]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은 전국을 통틀어 항공기는 고작 22대였으며 그것도 분계선이 아닌 호남지방에 있었다. 또한 함정은 36대 보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민군이 선제공격했다는 당시의 목격담도 끊이지 않았다.[79]

군사력 비교[편집]

1950년 6월 당시 북한군은 13만 5천여 명의 지상군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이때 대한민국의 병력은 정규군 6만 5천여 명, 해양경찰대 4천여 명, 경찰 4만 5천여 명 등이었다.[80] 대한민국 육군은 8개 사단 1개 독립연대로 편성돼 있었다. 최전방인 38선 방어를 위해 서쪽에서부터 17연대(옹진반도)-1사단(청단∼적성)-7사단(적성∼적목리)-6사단(적목리∼진흑동)-8사단(진흑동∼동해안)을 포진해 놓았다. 후방인 서울에는 수도경비사령부를 두고, 대전에 2사단, 대구에 3사단, 광주에 5사단을 둬 공비 소탕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 부대를 통합 지휘한 것은 육군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이었다.[81] 반면 북한군은 민족보위성최용건 부원수를 앉히고(1948년), 지금의 한국 육군 야전군사령관에 해당하는 전선사령부를 만들어 김책(金策) 대장(4성장군)을 사령관에, 강건(姜健) 중장(2성장군)을 참모장에 임명했다. 그리고 전선사령부 밑에는 서부전선을 담당하는 1군단과 동부전선을 공격할 2군단을 창설했다. 1군단장에는 김웅(金雄) 중장을, 2군단장에 김광협(金光俠) 중장을 임명했다.[82] 6월 12일부터 북한군의 38선 배치를 위한 부대 이동은 시작되었으나 38선에서 떨어져 있던 부대들이 일제히 남하했다. 23일에 완료된 북한군의 38선 배치 병력을 보면 10개 보병사단과 1개 전차여단 및 3개 경비여단 등으로서 북한 공산군의 총병력에 해당하는 것이었다.[83] 북한군 1군단 휘하에는 6사단-1사단-4사단-3사단-105전차여단이, 2군단에는 2사단-12사단-5사단이 배속되었다(서쪽에서부터). 그리고 예비부대로 13사단은 1군단에, 15사단은 2군단에 배속하고, 10사단은 총예비대로 북한 방어를 위해 평양 지역에 배치해두었다. 북한군과 별도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내무성에 북한 주민의 월남을 막는 부대로 38경비대(한국의 전투경찰대와 흡사) 3개 여단을 편성했다. 이중 3경비여단은 국군 17연대가 포진한 옹진반도 바로 북쪽에 포진해 있었다[84]

북한군은 소련제 T-34/85형 탱크 242대, 야크 전투기와 IL폭격기 200여 대, 각종 중야포와 중박격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반면 대한민국 국군은 한국 전쟁 직전까지 공군은 대공포화가 없는 지역의 정찰만을 위해 쓸 수 있는 L-4 연락기 및 L-5 연락기 외에, 전쟁 발발 직전 국민 성금으로 캐나다로부터 구입한 T-6 텍산 10대를 추가한 것이 전부였다. 육군은 탱크와 기갑 차량(장갑차)은 전무했으며, 유일한 독립 기갑연대의 장비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정찰용으로 쓰인 37mm 대전차포를 탑재한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1개 대대가 전부였다. 대전차 화력으로는 보병용의 2.36인치 바주카포와 포병 병과의 57mm 대전차포가 있었지만, 그것은 성능이 향상된 후기형T-34를 상대하기에는 힘든 무기였다.[85]

또한 현대전의 핵심 지원 전력인 포병은 105mm 화포와 4.2인치 박격포만으로 무장하고 있었을뿐더러 그나마도 사단 당 1개 대대만 배치되어 있었고, 포탄도 부족했다. 실제로 백선엽 장군이 지휘한 개성 - 문산 - 파주 축선을 방어하던 국군 1 보병사단은 전투 하루 만에 포탄이 바닥나 버렸던 것이다[86]. 전체적으로 대한민국 국군은 단지 15일간 전투 행위 수행이 가능한 보급품만 가지고 있었다.[87][88][89][90]

원인[편집]
남침[편집]

한국 전쟁은 북한의 의지로 발발하였으며,이오시프 스탈린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의 지원을 약속(김일성은 소련의 지원이 충분하므로, 중국 공산당의 지원은 받지 않겠다고 말했음) 받고 일으킨 남침이며, 이 설명은 대한민국미국의 기록, 공개된 구 소련의 비밀문서를 통해 증명되었다. 소련공산당니키타 흐루쇼프 전(前)서기장은 그의 회고록에서 한국 전쟁은 김일성의 계획과 스탈린의 승인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밝혔다.

결국 구 소련 비밀문서의 공개에 따라 조선인민군의 남침은 김일성이 주도한 것으로 밝혀졌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을 약속받은 것도 김일성이라는 것이 밝혀져 내란확전설, 이승만 주도설 등은 그 설득력을 잃고 있다.[91]

전쟁기념관에서 전시 중인 러시아어로 된 남침작전 계획서

폐쇄적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공산주의 체제의 특성, 참전자 증언, 구 소련의 공개된 문서를 고려할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주장하는 이승만 북침설은 설득력이 없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대한민국과의 수교 이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장인 북침설을 공식적으로 동의하였으나, 최근의 경제개방과 대한민국과의 수교 이후에는 남침설을 정설로 인정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96년 7월에 한국 전쟁의 기록을 대한민국의 북침에서 북한의 남침으로 수정하는 역사 교과서 개정을 하였다.

소련의 붕괴 이후 베일에 싸여 있던 한국 전쟁 관련 비밀 문서가 공개된 이후, 한국 전쟁의 원인은 남조선로동당 박헌영의 설득을 받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김일성이 대규모의 대한민국 침입을 계획하고 스탈린의 재가를 얻어 개시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재가를 무려 48번이나 거절하고 전방 위주의 게릴라전만 허용했지만 김일성의 강력한 의지를 꺾을 수 없어서 결국 스탈린은 남침을 승인하고 말았다.[35][44] 미국의 사회학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스탈린이 훨씬 더 깊이 개입해 있었다고 한다. 영국 정보기관에서 나온 문건에 따르면,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미국은 대한민국을 지켜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과거의 한국전쟁 원인 가설[편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중심이 된 인민해방전쟁이라는 평가와 함께 북침이라는 견해, 남침이라는 견해, 쌍방 책임론이 과거에 있었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한 전쟁 이라는 평가 등도 있다. 대한민국 중심 시각으로는 군병력과 경찰병력의 휴가일을 이용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무력 도발행위이자 남침으로 규정하고 있고,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한 전쟁이라고도 주장해 왔다. 다음은 대한민국미국 등의 국가에서 과거에 제기되었던 한국 전쟁 원인에 대한 여러 가설과 주장들이다.

스탈린 주도설[편집]

한국 전쟁이 김일성이 아니라 스탈린의 의지로 발발했다는 설이다. 그 이유로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압력을 극동으로 분산, 미일평화조약의 견제, 미국의 위신을 떨어트리고 아시아 지역의 공산화를 촉진하기 위한 무력 시위, 중국 공산당의 독자 노선에 대한 견제 등의 이유로 한국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소련은 소련의 지배 아래 있던 부라야트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현 부라야트 공화국)의 기갑부대 군사 1,500여 명을 파견했으며, 전쟁 초 서울에 나타난 조선인민군 탱크는 모두 이들이 조종했다는 설도 소련의 주도를 뒷받침하고 있다.[92]

스탈린미국과의 갈등을 걱정하여 한국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으로 알려져 있었다.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50여 회 가량을 한국 전쟁을 발발시켜달라는 재가를 요구하였고, 스탈린은 이를 거절하였지만, 결국은 이후에 전쟁을 승인하게 되었다.[35][44]

한미 공모설[편집]

이승만제1공화국의 북진 통일론이 대남 도발을 촉진시켰다는 설이다. 이승만은 여러 차례 무력 북진 통일을 부르짖었으며, 미국의 군사 원조를 공공연히 요청한 바 있다. 실제로 1950년대 초부터 남북은 경쟁적으로 군비를 증강시키기 시작했고, 미국이 국군을 강화시키면 이승만이 무력통일을 추구할 것이라고 판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예방적 조치를 취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한미공모설은 위 항목에 관련된 구 소련의 문서공개로, 제시된 적 있는 가설로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2010년 6월, 56년만에 공개된 CIA 극비 문서에서 한국 전쟁 발발 불과 엿새전인 6월 19일, 북한의 남침가능성이 낮게 평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고 북한이 소련의 철저한 위성국가로 독자적인 전쟁 수행능력이 전혀 없다고 보고 있었다.[75]

내란 확전설[편집]

한국 전쟁은 6월 25일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기간을 포함해야 한다는 설이다. 1950년 이전부터 이미 정치적, 이념적 대립에 따른 국지적 무력 충돌이 수십 차례 계속되었으며 그것이 확대되어 한국 전쟁이 되었다는 시각이다. 실제로 1950년 6월 25일 이전에 이미 수많은 국지전과 무력 충돌이 있었으며, 1950년 6월 25일에도 사람들은 기존의 국지전의 연장으로 인식하여 피난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전쟁 기간은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작은 전쟁( ~ 1950년 6월 25일): 38선 부근에서의 국지적 무력 충돌이 계속됨.
제한 전쟁(1950년 6월 25일 ~ 1950년 7월 1일): 북한이 대규모 무력 동원을 통해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전격 침탈하여 불법으로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 함.
전면 전쟁(1950년 7월 1일 ~ 1950년 10월):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대대규모의 미군 스미스부대가 참전, 북한은 7월 1일부로 전시국가총동원령을 발령함.
확대 전쟁(1950년 10월 ~ 1951년 6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후 UN연합군은 서울을 수복함. 이후 항복을 재차 권고했으나 대답이 없어, 국군이 최초로 38선을 넘어 북진 시작, 곧 유엔군도 진격 시작, 평양 수복, 압록강까지 진격했으나, 중국 인민해방군 참전으로 이어짐. 전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듦.
고착 전쟁(1951년 6월 ~ ): 중국 인민해방군의 2차례에 걸친 춘계공세를 막아내고 연합군의 막강한 화력에 공산 측이 정전협정을 받아들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위주이거나 그를 중심으로 평가하려는 시각에 의하면 인민군이 중심이 된 인민해방전쟁이라는 평가와 함께 북침이라는 주장, 미국 등 외국의 개입으로 실패한 해방전쟁이라는 주장도 있다.

기타 양시양비론적 성격으로 쌍방책임론을 제기하는 의견도 있다.

경과[편집]

북한의 김일성의 명령 하에, 대한민국이 공격해 왔으므로 부득이 반격한다는 허위 선전을 하면서, 소련에서 지원한 최신형 T-34/85를 앞세운 조선인민군이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38도선과 동해안 연선(沿線) 등 11개소에서 경계를 넘어 대한민국을 기습 남침하였다.[93] 대한민국은 수적으로 열세인데다 장비도 부족했다. 오전 9시경에는 개성방어선을 격파하고 당일 오전에 동두천포천을 함락시켰다. 26일 오후에 의정부를, 27일 정오에는 이미 서울 도봉구의 창동방어선을 넘었다. 창동방어선이 뚫린 대한민국 국군은 미아리방어선을 구축하였으나 조선인민군의 전차에 의해 붕괴되었다. 28일 새벽에는 서울 시내가 점령되고, 오전 2시 30분에 폭파를 맡은 장교 세 사람에 의해 한강 대교가 폭파되었다. 미국 공군 항공기가 “당시 미 공군이 사용하던 항공기 투하용 ‘AN-M64’ 미제 폭탄”을 한강 대교한강 철교에 투하했다.[94]

북한의 남침은 때마침 냉전으로 긴장되어 있는 전 세계에 미친 바, 파문은 참으로 전에 없던 것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본국과 연락이 두절된 주미 한국대사 겸 UN 한국 대표 장면은 때를 놓치지 않고서 국난을 타개하는 중책을 짊어지고 비장한 결의로 6월 24일 당일(미국은 한국보다 하루 늦음) 우선 미 국무성과 철야 협의한 결과 한국문제를 익일 UN안보이사회에 긴급제소하여 25일과 27일의 결의로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즉시 38선 이북으로 철퇴할 것과 회원 국가는 이 침략자를 원조하지 말뿐 아니라 이를 격퇴시키는데 협력할 것을 결의하였다. 사태를 중시한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은 27일 미해공군에 출동을 명령하고 다시 30일에는 미지상군의 한국 출동을 명령함과 동시에 한국 전 해안의 해상 봉쇄를 명하였다. 그 사이, 6월 28일 서울조선인민군에게 함락당하였으나 장면은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을 통해 유엔 결의 사항 등을 본국에 방송하였다. 이어 7월7일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이 조직되었고 8일에는 유엔 결의에 의한 유엔 깃발이 처음으로 전장에 나타나게 되었다.[95] 7월 14일에는 대한민국 국군의 지휘권이 미군에게 넘어갔다. 윌리엄 F. 딘 소장이 행방불명이 된 것으로 유명한 대전 전투(7월 20일)를 비롯한 전쟁 초기에 있어서 미국 제24사단과 국군은, 압도적인 병력과 장비를 갖춘 북한군의 작전에 대항하여 지연 작전으로써 후방의 한 · 미군의 증원 전개를 위한 귀중한 시간을 얻었던 것이다. 한편 대전을 넘어선 북한군은 진로를 세 방면(호남, 경북 왜관(낙동강), 영천포항)으로 침공을 계속하였다. 북한군은 호남 평야를 휩쓸고서 남해안 연안으로 침입하는 한편 경북 북부 전선과 동해안 전선과 호응하여 세 방면으로부터 부산-대구의 미군 보급선을 절단하여 한미 양군을 바다로 몰아넣으려는 작전을 강행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북한군의 공세에 밀린 대한민국 정부대전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이전하였다. 한 · 미 연합군은 낙동강을 최전선으로 동해안의 포항으로부터 북부의 왜관 남부 해안의 마산을 연락하는 워커 라인(부산 반월형 진지)를 구축하고 최후의 결전을 전개하였다.[96]

북한군은 8월 15일 대구를 침공하고자 대구 서남북방에 6만의 병력과 수십대의 전차를 집중하였으나 16일 미국 공군 B29의 전략적 대폭격으로 말미암아 완전 궤멸되었고 한편 이 사이에 연합군 병력은 한국군 5개 사단을 비롯하여 미군 4개사단, 영국군 2개 대대, 호주군 1개 대대 그 밖에 10개국에서 파견된 수만의 연합군으로써 증원되어 이렇게 북한군의 주력을 유도흡수한 연합군은 마침내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의 총지휘하에 인천 상륙 작전을 감행하여 성공하였다.[97] 9월 28일에 낙동강 방어선을 넘어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했으며, 같은 날 서울 중앙청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원수를 동반하여 서울 수복식을 거행하였고 비로소 90여일간 죽음에 사로잡혔던 서울 시민은 다시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유엔 총회는 38선 돌파에 대한 기본적인 목표를 부여함으로써 본격적인 북진이 전개되어 10월 19일[98]에는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수도인 평양까지 다다랐고, 26일에는 국경지대인 초산까지 이르렀다.[99] 그러나, 중화 인민 공화국의 중국 인민 지원군 28만명이 전투에 개입하여(11월 28일) 전세가 요동치게 되었으며, 연합군은 장진호 지구의 혈전을 전사(戰史)에 남기고 철수 작전을 시작하여 서울 시민은 또다시 쓰라린 1·4 후퇴를 겪게 되었다. 그 와중에 거창 양민학살 사건, 국민 방위군 사건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리하여 한반도 내에서 미국, 소련, 중국까지 개입하여 한반도에서 모두 맞붙었다. [100]

발발과 서전(緖戰)[편집]

왜관(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서 미군이 버려진 T-34/85를 살펴보고 있다. T-34/85는 공산 국가의 맹주격인 소련에서 대량으로 제작하여 여러 공산권에 뿌린 관계로 당시 북한 뿐만 아니라 공산계의 주력 전차였다

개전 초기 북한 보병의 기본 화기

북한군은 "선제 타격 전략"으로 불리는 전쟁 개시 작전계획에 따라,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인민군은 242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 옹진 · 개성 · 동두천 · 춘천 · 인악(仁岳) 등지의 육로와, 동해안을 돌아 삼척(三陟) · 임원진(臨院津) 등지에 상륙하여 일제히 공격해 왔다.[101] 북한군 3경비여단과 6사단 소속의 14연대를 동원해 옹진반도에 배치된 한국군 17연대를 공격하였고, 북한군 6사단과 1사단은 한국군 제1사단을(개성 문산 지구), 북한군 4사단과 3사단은 한국군 제7사단을(의정부 지구), 북한군 2사단과 12사단은 한국군 6사단을(춘천 지구), 북한군 5사단은 12사이드카연대를 배속받아 한국군 8사단(강릉 지구)을 밀어붙였다.[102] 단 한 대의 전차도 없는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당한 한국군은 전반적으로 북한군에게 밀려 후퇴하였다. 한국군은 즉각 주말 외출 중인 장병들을 전원 귀대시키고 후방 사단들로부터 5개 연대를 일선에 급파하였으나 26일에 옹진반도의 한국군 17연대는 할 수 없이 철수했고, 치열한 공방전(攻防戰) 끝에 의정부가 적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27일 저녁에는 서울 동북방 미아리 고지를 방어하는 한국군 제5사단 및 제7사단의 진중에 적이 침투하여 피차 적을 분간할 수 없는 육박전이 벌어졌다.이 혼란 중에 적 전차부대의 일부는 이미 서울 시내에 침입했으며, 정부는 대전으로 후퇴했다. 28일 새벽 3시 한강 인도교가 예정시간보다 앞서 폭파되고, 한강 이북의 한국군은 총퇴각을 감행해, 북한군 전투기가 상공을 나는 가운데 도하작전(渡河作戰)을 전개하여 전원 철수하니 28일에는 수도 서울이 적에게 완전 함락되었다. 육군본부는 수원으로 후퇴하고 도강한 한국군 부대들은 통합재편되어 한강 남안에 방어선을 구축했다.[103]

옹진반도 전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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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문산 전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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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발발일(1950년 6월 25일) 청단(靑丹), 연백(延白), 개성, 고랑포(高浪浦)[104] 일대에서는 한국군 제1사단(사단장 백선엽)이 제203전차연대로 증강된 북한군 제1사단 및 제6사단과 맞서 싸웠다. 개전 직전, 한국군 제1사단 휘하에는 제11, 12, 13연대가 배속되어 있었다. 제12연대는 청단군에서 개성시까지 80km, , 제13연대는 제12연대 배치지역의 서쪽 끝인 예성강 유역부터 20km(즉, 대원리(大院里)-원당동(元堂洞) 구간)에 이르는 38선, 즉 국경을 경비하고 있었고 제11연대는 사단 예비로서 수색에 주둔하고 있었다. 북한군 제1사단과 제6사단이 포격과 그에 이어, 전차부대를 앞세워 38선을 넘어 전투를 개시하자 제 12연대는 초전(初戰)에 분산되어 개풍군 남단의 한강 최하류에서 강을 건너 김포 반도(金浦半島)와 문산리로 철수하였다. 제11연대는 수색에서 문산으로 나아가, 임진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을 맞았다. 제13연대는 파주 파평산에서 북쪽을 향해 방어전을 펼쳤다. 다음날(6월 26일), 제1사단의 서쪽에 위치한 한국군 제 7사단이 후퇴함으로써 서쪽이 취약해지게 되고, 이 틈에 북한군 제6사단의 일제공격에 밀려, 제11연대는 임진강 방어선에서 물러났다. 또한 제13연대도 파평산에서 북한군에 저항하지 못하고 밀려났다. 이로써 1사단 지휘부는 봉일천에 주둔하게 된다.[105] 제12연대를 좇아 북한군 제6사단은 김포와 서울 양천구까지 진출하였다.(6월 28일)

의정부 전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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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발발 직전, 의정부 포천 지역의 38선은 제7사단(사단장 유재흥)의 예하 제1 · 9연대와 포병, 공병이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제1연대는 동두천 정면(서쪽), 제9연대는 포천 정면(동쪽)에 배치되었다. 한편 북한군은 철원-연천-의정부를 거쳐 서울을 조기 점령하려는 계획하여 제1군단의 2개 사단이 의정부 정면을 집중 공격할 준비를 해 두었다. 발발 당일, 영내에 대기하고 한국군 제9연대를 북한군 제3사단이 공격을 시작하였다. 경계임무 중이던 제9연대 제2대대는 북한군의 포격에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제2대대장의 전황 보고를 받은 제9연대장(윤춘근)은 의정부읍내에 대기 중이던 제1 · 3대대로 하여금 포천 신북면 만세교 부근에서 진지를 구축하게 하고 방어전을 펼쳐 북한군은 잠시 주춤했으나, 북한군 제3사단 제7·9연대는 호국로를 따라 남침을 계속했다. 이에, 제1·3대대는 끝내 흩어지고 다음날 의정부 등에서 집결했다. 한편, 수도경비사령부 예하의 제3연대가 포천에 급파되어 소흘읍 송우리 부근에서 방어전을 펼쳤으나 이 역시 북한의 기계화부대에 밀려서 소흘읍 이동교리 축석령으로 후퇴를 거듭했다.(이상, 6월 25일) 이로써 의정부가 급박한 상황이 되었다.

체신부 보험국장 김의창(金義昌)은 포천 · 의정부의 전황을 국무회의에 보고한 바 있다.[106]

춘천 및 홍천 전투[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춘천 및 홍천 전투입니다.
강릉 전투[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강릉 전투입니다.

육군본부의 대응[편집]

당시 육군의 총지휘자는 채병덕 총참모장이었다. 개전 당일(6월 25일), 오후 2시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채병덕은 “적의 전면공격은 아닌 것 같으며 이주하, 김삼룡을 탈취하기 위한 책략으로 보인다”고 답했다.[107] 채 참모총장은 육사교도대 생도 1기(262명) 및 2기(227명)를 포천 전투에 투입하라고 명령하였다.(6월 25일 오후)[108] 채병덕은 다음날(6월 26일) 오후의 국무회의에서는 서울 사수를 공언하였고 명령만 있으면 나흘 안에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기도 했다.[109]

한편, 육군본부 상황실의 당직하사관들은 뜬눈으로 밤을 새워 분주하게 상황을 접수하고 있었다. 아침 7시 이전에는 육군본부로 이어지는 군의 주요통신망이 재경유격대들에 의해 절단되었고 북한군은 한국군의 통신망을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등에 역이용하고 있었다.[110]

서울의 상황[편집]

이전부터 38선 부근에서의 소규모 충돌이 많았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들은 많이 놀라지 않았으나, 잠시 뒤 군용차가 거리를 질주하고 "3군 장병들은 빨리 원대로 복귀하라"는 마이크 소리가 요란해지면서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지만 무슨 일인지 알 길은 없었다. 오전 7시가 넘어서야 방송은 조선인민군이 침공해 왔다는 소식만 간단히 전하고 "장병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빨리 원대복귀하라"는 공지방송만 반복하고 있었다.[111]

UP통신사의 서울주재 특파원 잭 제임스(Jack James)가 발송한 전문(電文) 기사 내용에 대하여 UP통신사의 도널드 곤잘레스(Donald Gonzales)는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국 섭외관 브래들리 코너스(W. Bradley Connors)에게 확인을 요청하였다.(오전 11시 4분)[112] 주한 미국 대사 존 무초도 11시에 워싱턴D.C.에 전화를 걸어 “북한군이 한국에 대한 전면 공격을 개시했다”고 보고했고, 북한의 공격 상황을 국무부에 전달했다. 워싱턴 당국은 이 공식보고를 6월 24일 21시26분에 접수하였다. 전쟁이 발발하고 7시간26분 후였다.[113]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국 차관보 딘 러스크는 동국(同局) 섭외관 브래들리 코너스로부터 전쟁 발발 사실을 보고받고, 주한 미국 대사 존 무초에게 잭 제임스가 타전한 기사(전쟁 발발)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114] 한편, 전쟁 발발에 관한 주일 연합군 최고사령부 사령관 맥아더의 최초의 보고는 워싱턴 시간으로 1950년 6월 25일 5시, 침공이 개시된지 14시간 뒤에 육군성본부에 도착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주한 미군 군사 고문단의 요청에 따라 개전당일부터 합참의 지시도 받지 않고 한국군 지원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115] 1950년 6월 26일 밤 10시 반경 이승만도쿄에 있는 미국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였다.[116] 이승만은 라디오 연설로 서울시민은 정부를 믿고 동요하지 말라는 방송을 통해, 서울 시민들이 서울 안에 그대로 머무르도록 독려한 반면 그 자신은 방송 진행 중에 각료들과 함께 특별열차로 대전으로 피신하였다. 6월 27일 새벽 2시에 이승만은 대전행 특별 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내려갔다.[117] 6월 27일 새벽 4시에 열린 비상 국무회의에서 정부의 수원 천도가 정식으로 의결되었다. 이승만은 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이리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에 도착하였고, 배편으로 부산으로 옮긴 뒤 7월 9일 대구로 옮겨갔다.[118] 6월 27일 아침 6시에 서울중앙방송은 수원 천도 소식을 전했으나, 이를 취소하라는 압력으로 취소 방송이 있었다.[119] 서울 시민들이 전혀 모르고 있던 상황에서 조선인민군미아리고개까지 쳐들어 오자 그 때서야 서울 시민들은 대피하기 시작했다.

처형된 미군

보도연맹 사건

6월 27일 저녁에 서울 근교까지 밀어닥친 조선인민군들과 육박전을 감행했으나, 워낙 전세가 불리하여 대한민국은 정부를 대전으로 옮겼다. 6월 27일 보도연맹원에 대한 처형이 집행됐다. 학살은 주로 국군(육,해,공군)과 서북청년회(단)등의 극우 폭력단체의 의해 자행되었으며 , 미국 문서에서 미군정 미군 장교의 참관과 허가 최종 지시로 밝혀져있다.

한국전쟁 초기, 대한민국 국군 보병의 기본 화기

대한민국 정부북한군한강을 넘어서 진격할 것을 우려해 6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강에 단 하나뿐인 다리였던 한강철교를 폭파하였다. 이 폭파로 50대 이상의 차량이 물에 빠지고 최소한 500명이 폭사하였다.[120] 한강 철교의 폭파로 국민들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정부의 이 같은 실책은 비판을 받고 있다. 당시의 전황으로 볼 때 6~8시간의 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기 폭파로 인명 살상은 물론 병력과 물자 수송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는 비판이 대두되자, 이승만 정권은 나중에(8월 28일) 당시 폭파 책임을 맡았던 공병감인 대령 최창식을 '적전비행죄'로 체포해 9월 21일 사형을 집행했다. 최창식은 12년 만에 재심을 거쳐 1962년 무죄 판정을 받아 사후 복권되었다.[121] 한강 철교의 폭파는 신성모국방장관이 지시했지만, 총리 이범석이 건의하였다는 주장도 있다.[122] 한강 철교의 폭파로 국민들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고 조선인민군은 서울을 넘어 부산, 포항과 경상도 동해안, 대구, 울산, 경주, 영천과 그 이남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서울시민 144만6천여 명 가운데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하기 전에 서울을 빠져나간 사람은 40만명이었다. 그 가운데 80%가 월남동포였고 나머지 20%인 8만명이 정부고관, 우익정객, 군인과 경찰의 가족, 자유주의자들로 추정된다.[123]

한때 이승만일본 야마구치현에 망명정부를 설치하는 방안도 세우고 있었다.[124] 정권 관리들은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야마구치현에 망명정부 수립의사를 일본에 전달했으며, 일본 정부는 야마구치현 지사 다나카에게 6만여명을 수용할 시설 및 식량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 했다. 당시 다나카 지사는 현의 소학교를 망명정부 시설로 확보하는 방안과 일본 정부에 대해 특별 식량배급요청 여부를 검토하기도 했다.[124] 1950년 6월 27일 이승만은 대통령과 내각으로 구성된 망명정부를 일본에 수립하는 방안을 주한 미국 대사 존 무초에게 문의해왔고 이는 그대로 미 국무성에 보고되었다.[124]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전라도까지 위협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이리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에 도착하였고, 배편으로 부산으로 옮긴 뒤 7월 9일 대구로 옮겨갔다.[125][126]

조선인민군의 서울 점령[편집]
조선인민군의 서울 점령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월 28일 새벽 인민군의 탱크가 서울 중심부에서 목격되었다. 그러나, 바로 한강을 도하하지 않고 7월 3일까지 서울에 머물렀는데, 그 이유에 대해 여러 견해가 나뉘어 있다. 첫째 춘천전투의 패전으로 인한 포위계획 실패, 둘째 도하장비 부족, 셋째 남로당 책임자인 박헌영이 전쟁 발발시 20만 명의 남로당원의 일제 봉기로 대한민국 자체가 조기 붕괴시키겠다고 호언 장담하며 이를 기다리자고 주장 하였다는 3가지 설이 있는데 여러 가지 견해 중 많은 학자들이 춘천전투에서의 국군의 방어가 인민군을 저지한 것이 서울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라는 이유로 보고있다. 이 2사단[127]의정부에서 조선인민군에 패퇴하고 남은 병력이 지금의 동작대교에서 광나루까지 방어진을 구축하고 조선인민군의 도하를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128]
낙동강 방어전[편집]

낙동강 전선에서 미 육군 24사단 소속 M24 채피 전차와 전차병들 (1950년 8월 17일)

대전을 점령한 북한군은 다시 진로를 3분하여 일부는 서쪽으로 호남(湖南) 일대를 휩쓸고 마산으로 닿고, 일부는 경부선을 따라 대구로 향했으며, 또 일부는 동으로 포항에 육박했다. 유엔군은 총사령부하에 한국군까지 포함시켜 작전 계통을 통일하고 부대를 대폭 증강하여 낙동강 전선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아 반격을 개시할 태세를 완료한 때였다.

8월 7일 유엔군은 마산지구에 미 제 25사단 · 34사단 기타 제5전투단 · 제3해병여단 등을 투입하여 부산을 목표로 육박하는 북한군에게 강력한 반격을 가하여 3일 동안에 60리를 진격, 한국군의 채병덕 소장이 전사한 하동지구를 탈환했다. 이것은 6월 25일 이후 유엔군이 가한 최초의 본격적 반격이었다.

8월 13일에는 동부전선 포항에 돌입한 북한군을 한국군 수도사단과 제3사단이 대항하여 북한군의 주공격 지점으로서 낙동강 도하작전을 위해 10여 일을 두고 4개 사단의 병력을 투입, 인해전술(人海戰術)로 몰려들었다. 이에 유엔군은 8월 16일 하루 사이에 B29 99대를 출동시켜 북한군의 집결지인 왜관(倭館)에다 도합 850톤에 달하는 수천개의 폭탄을 투하했으니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최대의 폭격기록이다. 그러나 북한군은 굽히지 않고 18일에는 대구 북방 13마일 지점까지 육박했다.

이 날 정부는 대구에서 부산으로 후퇴하고 대구 시민에게는 소개령(疏開令)을 내렸다. 최후의 결전을 각오한 한국군 제1사단은 영국군 보병 제27여단의 지원을 받아가며 북방으로 4Km를 반격, 뒤이어 이 날 미 제 24사단과 해병사단의 응원 출동이 있어 23일까지는 대구 북방의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켜 낙동강 이남 지역을 확보했다. 이 후 북한군은 대구를 피하여 동·서로 부대를 이동하더니, 최후의 결전인 제2차 협공(挾攻)작전을 기도했다. 서남지역 진주(晋州) 방면에 북한군의 4개 보병사단(4·6·7·9)과 1개 전차연대(105사단 16연대)가 집결하고, 동부전선 포항 북방에 역시 4개 보병사단(5·8·12·15)과 1개 전차연대(105)가 집결하여 9월 3일 12시를 기하여 동시에 유엔군을 공격해 왔다. 그러나 북한군은 이미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고 전투력이 기진하였으며, 훈련도 되지 않은 신병들을 보충 병력으로 편성한 상태였다.

서남지역에서는 마산의 미 제2사단·25사단이 북한군의 계속되는 야습공격을 막아서 격퇴시켰으며, 동부전선에는 한국군 제2군단이 9월 10일 최강을 자랑하던 북한군 제15사단과 1개 포병연대를 영천(永川)지구에 몰아 포위하고 4,800여 명의 북한군을 사살, 수 많은 차량과 전차 무기 등을 빼앗아 완전 섬멸한 후 단번에 15km를 북진하여 적의 기세를 최종적으로 꺾어놓고 말았다.

당시 미8군 사령관이던 워커(Walker) 중장은 12일 담화를 발표하여 ‘한국 전선 최대의 위기는 지나갔다’고 말하였다. 이로써 북한군의 남침 공세는 결정적으로 꺾이고 유엔군의 북진이 있을 뿐이었다.[129]

대구 후퇴와 다부동 전투[편집]

다부동 전투의 주요 지휘관이었던 육군소장 백선엽이 전투로 낙동강의 임시 방어선을 구축하고 UN군 등의 증원 파병때까지 여유 시간을 획득했다.

다부동 전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월까지 북한군대구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과 미군의 강렬한 저항으로 교착상태에 빠졌고 치열한 교전이 계속되었다. 이때 대한민국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은 다부동에서 인민군의 침공을 격퇴하고 8월 3일 유엔군은 마산-왜관-영덕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을 쳤다.

UN에서의 설득 작업[편집]

소비에트 연방중화인민공화국 측은 6.25 전쟁이 대한민국의 선제 공격으로 발발했다고 주장했다. 8월 1일, 안보 이사회의 8월 의장국이었던 소련 측 대표 말리크는 이사회에 출석했다.[130] 의장석에 앉은 소련 측 대표 말리크는 그 동안의 한국 사태에 대한 안보리의 모든 결의가 무효임을 선언하였다. 그는 “안보 이사회의 상임 이사국인 소련과, 또 상임 이사국으로서 당연히 참석해야 할 중공 대표가 없는 동안에 통과된 결의안은 하나도 인정할 수 없다”[130] 고 주장하였다.

대한민국 측 대표 단장 장면은 8월 유엔 안보리 회의에서도 옵서버 자격으로 자리 잡고 앉으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리크는 끝내 장면의 착석을 거부했다.[130] 또한 말리크는 “6‧25 동란은 인민군의 남침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반대로 한국군의 북침”이라며 “미국이 한국군을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주장하였다.[130] 소련 측 대표의 이런 역선전을 미리 예상한 장면은 미국 측 대표 오스턴과 짜고 한국 전선에서 노획한 소련제 소총[130] 한 정을 증거물로 제시하고 반박하였다. 말리크는 “이번 싸움은 한국 사람끼리의 싸움이지 소련은 전혀 관련이 없다”며 “소련군은 이미 1947년에 완전히 북한에서 철수했고, 이번 동란에 소련에서는 총 한 자루 보내 준 일이 없다”고 단언했다. 미국 측 대표 오스틴은 장면이 한국 전선에서 가져온 ‘1950년 소련제’라는 철인이 찍힌 소총을 증거물로 제시하였고, 소련 측이 제시한 대한민국의 북침 주장과 소련의 불개입 주장은 논파당하였다.

장면 대표는 9월에 열린 UN 안보리 이사회에도 참석하는데, 9월 안보리 의장국은 영국이었다. 9월 1일, 글랜드윈 접 영국 측 대표가 안보 이사회의 사회를 맡자 장면은 착석과 발언권을 달라고 미리 요구했다. 의장은 “당사국인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장 대사에게 착석을 허한다”고 선언하[131] 여 장면 대표는 무난히 착석하였다. 의장으로부터 발언권을 얻은 장면 대표는 “그 동안 갖은 모욕을 당하면서도 나는 할 말을 못하고 참아 왔다”고 말문을 열어 소련을 공박하였다.[131] 소련 대표 말리크는 “규칙 발언!”이라며 그의 발언을 제지하려 들었다. 이어 말리크는 그에게 “도대체 저 자가 누군데 무슨 자격으로 저 자리에 감히 앉아서 발언을 하는 것이냐?”며 “저 자는 이승만 도당의 괴뢰”라고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장면은 말리크의 욕설에 대해 취소하라고 항변하였다.[131]
대한민국에는 이승만 도당이라는 것은 없고 나는 헌법에 의해 합법적으로 당선된 대통령의 임명을 받아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해 이 자리에 의장의 초청으로 착석했노라.[132]

그는 약 40여 분간 공산권의 “대한민국의 북침” 주장과 “한국민들끼리의 내란”이라는 주장을 반박하는 연설을 했고, 이는 국제사회에 생방송으로 중계되었다.

UN군의 총반격[편집]

유엔군이 육전(陸戰)에서 전과(戰果)를 올리기까지는 공군의 지원폭격(支援爆擊)이 크게 주효하였으니 유엔 공군은 이미 개전(開戰) 20일 만에 제공권(制空權)을 장악, B29, B26 등 중폭격기는 적 후방의 교통로를 파괴하는 한편 평양·진남포·함흥·성진·청진·나남 등지의 군수품 공장을 완전히 파괴했다. 세이버 제트기·F51 전투기·영국기·호주기(濠洲機) 등이 전선을 주 공격목표로 삼고 각 방면으로 공습작전을 전개하였다.

한편 해군도 개전 직후부터 제해권을 장악하였으나 지상작전이 후퇴를 거듭하므로 큰 활약을 못 하고 있던 중, 낙동강 전선에서 육군의 반격이 개시되자 전격적 북상을 기도하는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명령에 의해 9월 13일 인천 상륙작전이 개시되었다. 이 작전의 해군 사령관은 미 해군 소장 도일(Doyle)로서, 동원된 군함은 한국 15척, 미국 226척, 영국 12척, 캐나다 3척, 오스트레일리아 2척, 뉴질랜드 2척, 프랑스 1척, 도합 261척이었다.

13일부터 2일 간에 걸쳐 맹렬한 함포 사격을 가한 후 15일 새벽 마침내 유엔군과 국군 해병대가 맥아더 장군 지휘로 인천에 상륙, 서울을 향해 진격했다. 김일성은 유엔군의 인천상륙이 있자 소위 민족보위상(民族保衛相)인 최용건(崔鏞健)을 서울 방위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약 2만의 병력으로 최후 저항을 시도했으나 20일에 유엔군 수색대는 이미 한강을 건너 서울에 침투했고, 23일에는 한국군해병대와 미 제1해병사단이 서울 서북방의 안산(鞍山)을 점령하고 다음 날 마포로 도하(渡河)하여 시내로 돌입했으며, 25일에는 관악산 방면으로부터 한국군 제17연대와 미 제7사단이 한강을 도하하여 남방으로부터 시내로 돌입, 협공으로 맹격을 가했다. 북한군은 결사적 항거로 시가전을 기도하였으나 병력의 대부분이 섬멸되어 서울에서 퇴각하니, 9월 28일 역사적인 서울 탈환이 이루어져 중앙청 첨탑에 다시 태극기가 올랐다.

이 서울 탈환작전은 남한지역 전투의 최종적 결판이 되었으니, 서울을 완전 탈환한 유엔군은 다시 수원 방면으로 남하하여 적의 배후를 찔렀으며, 중부와 동부전선에서도 무제한 북진공세를 취하니 30일에 벌써 국군 제30사단은 동해안을 전격적으로 북상하여 38선 접경 인악리(仁岳里)에 이르렀다. 이에 38선 이남의 공산군은 사실상 퇴로(退路) 마저 끊긴 채 완전히 마비상태에 빠졌다. 9월 30일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북한 공산군 총사령관 김일성에게 항복 권고문을 보냈으나 김일성은 이를 거부하고 다만 남한지역에 있는 공산군의 전면 퇴각만을 명령했다. 따라서 같은 날 유엔군 사령부는 휘하 전장병에게 38선을 돌파하여 북진할 것을 명령했고, 북한군 부대들은 태백산맥(太白山脈)을 유일의 퇴로로 이용하여 후퇴했으며 나머지 일부는 지리산 · 대덕산·회문산 일대에 포위된 채 유격전을 기도하게 되었다.

10월 1일 오전 11시 45분 국군 제3사단은 이종찬(李鍾贊) 대령 지휘하에 최초로 38선을 넘어 북진을 개시했으며 뒤이어 수도사단이 인제(麟蹄)를 거쳐 북상하여 10월 10일 3사단과 함께 원산(元山)시내와 명사십리(明沙十里) 비행장을 완전 점령했다. 중부전선에서는 국군 제7사단과 8사단이 화천(華川)·김화(金化)를 거쳐 북상, 18일에는 서부전선으로 북상한 미 제1군단과 만나 평양 남방 근교에 육박하고 19일 한국군 제1사단을 선두로 하여 평양을 완전 점령했다. 당시 평양을 지키고 있던 적군의 최인(崔仁) 중장은 신병으로 보충된 약 2만의 병력으로 방어태세를 취했으나 대패하여 청천강(淸川江) 이북으로 도주했다.

한편 서부전선에서는 10월 20일에 청천강 이남 숙천(肅川) 일대에 미 제11공정사단(空挺師團)의 약 4천명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 적의 후방을 공격하였으며, 국군 제6사단이 미 제24사단과 영국 여단의 서해안 진격과 보조를 같이하여 덕천(德川)·희천(熙川) 등지를 거쳐 서북 국경의 중앙지점인 초산(楚山)으로 진격, 26일 오후 5시 50분 6사단 제7연대 수색대가 압록강에 이르렀다. 11월 21일에는 중부로 진격한 국군 제7사단의 일부가 중부국경 혜산진(惠山鎭)에 도달했고, 동부전선의 수도사단과 3사단은 원산에서 다시 북진하여 10월 17일에 함흥, 22일에 북청(北靑), 28일에 성진(城津)을 점령했으며, 여기서 제3사단은 길주(吉州)를 거쳐 백두산(白頭山)을 향해 합수(合水)로 진격하고 11월 25일 수도사단은 함경북도 도청 소재지 청진(淸津)에 돌입했다. 이로써 국토의 전역이 거의 수복되고 통일이 목전에 다달았다.[133]

인천 상륙 작전[편집]

인천에 상륙하는 유엔군
이 부분의 본문은 인천 상륙 작전입니다.

UN 장군 더글러스 맥아더, 인천에서 상륙작전을 관찰하다.

작전의 제1단계는 월미도의 점령으로 시작되었다. 1950년 9월 15일 새벽 5시 시작된 공격 준비 사격에 이어 미 제5해병연대 3대대가 전차 9대를 앞세우고 월미도 전면에 상륙하였다. 월미도는 2시간 만에 완전히 미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미군은 부상 7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었으며, 인민군은 108명이 전사하고 106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어 제2단계로 국군 제17연대, 미군 제7사단, 미국 1 해병사단이 주도한 인천반도 공격이 이어졌다. 인민군 제18사단과 인천 경비병력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미군 제1해병사단과 국군 해병 제1연대는 인민군의 주력이 규합할 시간을 성공적으로 빼앗아버리며 인천 장악에 성공하였다.

서울 수복[편집]

그 후 서울을 빼앗긴 지 3개월 만인 9월 28일에 서울을 되찾았다. 한국군은 이어서, 달아나는 인민군을 뒤쫓아 38선을 돌파하여 10월 10일에는 원산을,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했다. 이어, 10월 26일에는 서부는 청천강 북부와 압록강초산에 이르렀고, 중부는 장진호까지 진격했으며, 동부는 압록강혜산진까지 진격했다. 또한 11월에는 두만강 일대까지 진격하였다. 한편, 김일성은 정부와 인민군을 미리 10월 9일에 북쪽으로 거의 모두 철수시킨 다음에 10월 12일부터 평양에서 철수했다.

중공군 개입과 장진호전투[편집]

서울 수복후 38선을 넘어 계속북진하던 한국군과 미군은 평양를 점령후 계속 북진해 나아갔다.그러던중 압록강 까지 진격했다. 그런데 통일직전까지 갔던 연합군는 중공군이 갑작스런 개입에 당황하고 평양까지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그리고 연합군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계속 후퇴를 하게 된다. 한편 미10군단는 함경남도 장진군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당하고 치열하게 전투를 하게되는데 그 전투가 바로 장진호전투다.

북한, 중공의 반격 준비[편집]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9월 30일경, 스티코프를 면담한 자리에서 김일성은 전황이 불리하기 때문에 소련의 원조를 요청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낼 의향임을 밝혔다.: “적군이 38선을 넘어 이북을 침공할 때에는 소련군의 출동이 절대 필요하다. 만일 그것이 불가능할 때에는 중국과 기타 공산주의국가들이 국제의용군을 조직해 출동하도록 원조해 주기 바란다.”[134]

10월 1일, 스탈린은 베이징주재 소련대사 로신에게 전문을 보내 다음 내용을 마오쩌둥이나 저우언라이에게 지급 전달하도록 지시하였다.: “중국의용군을 보낼 수 있다면 빨리 5~6개 사단이라도 38선에 진출시켜야 할 것임.”[135] 10 월 3일, 마오는 이렇게 회답했다.: “처음에 우리는 적군이 38선을 넘을 시점에 중국 의용군 수개사단을 투입할 생각이었으나 지금은 당분간 지켜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된다. 북한은 유격전쟁으로 이행하면 될 것이다. 필요하다면 귀하의 휴양지에 저우언라이와 린뱌오를 보내도록 하겠다.”

이에 대한 주중 소련대사 로신의 견해는 이러했다: “마오의 이 회답은 조선문제에 관한 중국의 태도가 바뀌었음을 보여주고 있음. 태도 변경의 원인은 아직 불명하다.”[136] 김일성은 주북한 소련 대사 스티코프를 통해, 스탈린에게 북한이 어려움에 봉착하였음을 이유로 원조와 도움을 요청하였다. 김일성은 미군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여 극동에서의 전략기지를 만들 의향인 것 같다고 밝혔다.[137] 11월 20일, 스탈린은 스티코프에게 비행사 양성에 관한 김일성의 요청을 받아들일 것임을 통보토록 지시하였다.[138] 그리고, 11월 28일, 소련 각료회의는 소련 민간대학에 유학중인 북한 학생 2백명을 12월 5일까지 만주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139]

제한전선의 격동[편집]

공산측은 결국 전세가 유리하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6월 23일 소련의 유엔 대사 마리크(Marik)로 하여금 한국전쟁의 정전을 제의해 오고 미국은 이에 호응함으로써 7월 8일 개성에서 정전회담 예비회담이 개최되고 10월 25일 회담장소를 판문점(板門店)으로 옮겨 회담을 진행했다. 11월 28일에는 당시 전선을 임시 휴전선으로 채택하게 되어 한때 전투가 소강상태에 들어갔으나 치열한 선전전을 수반하면서 여전히 전투는 계속되었다.한편 국군은 후방에서 9·28수복 때 지리산 일대의 산악으로 집결한 패잔(敗殘) 공비(共匪) 소탕작전을 개시했다. 국군 수도관과 제7사단 및 전투경찰대 5개 연대는 이해 12월 2일부터 이듬해 3월 13일까지 4차에 걸친 공격을 가해 사살 7,147명, 포로 6,883명, 귀순 172명의 전과를 올려 일단 전면적 소탕을 끝냈다. 이외에도 1952년 여름에는 거제도(巨濟島) 포로수용소에서 수차에 걸쳐 폭동이 일어난 5월 7일에는 포로대표와 담판을 하려던 수용소 소장 돗드 준장(准將)이 포로들에게 납치되는 등 소란이 일어났으나 6월 말경에는 완전히 질서를 회복했다[140]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개시된 후부터 한국전쟁은 세계 전사상 처음보는 소위 제한공격(制限攻擊)이라는 전법을 채택하게 되었으니, 당사국인 한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산군과 유엔군은 함께 휴전의 성립을 희망하여 서로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전투는 다만 진격을 감행하지 않을 뿐이지 거의 고정된 전선에서의 근거리 고지 쟁탈전은 치열하였으니, 한 능선(稜線)·한 고지에서 퇴각과 탈환을 20여 회 이상 거듭하는 게 보통이었다.

1952년 8월부터 공산군은 후방의 병력과 장비를 보강하여 8월 5일 국군 수도사단이 지키는 김화 등 북방의 수도고지에 공격하여 왔다. 전례없이 포격을 강화한 적은 1일 평균 2만 발을 발사하여 인해전술로 육박해 8월 10일까지 6일 만에 7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갈리었다. 이러한 싸움을 9월 28일까지 계속하여 아군은 고지를 확보하니 29일에는 개전 이래 최대의 포격으로 4만 8천 발을 수도사단 지구에 퍼붓고 다시 방향을 돌려 백마고지(白馬高地)에 공격해 왔다. 백마고지는 북한강 동쪽에 위치한 독립고지로서 철의 삼각지대 안의 교통로를 제압하는 전략상의 주요 고지다.

이 지대는 국군 제3사단·9사단 및 미 제2사단 등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10월 29일까지 1개월 사이에 25회 이상 고지의 주인이 바뀐 끝에 아군은 한걸음 진격하여 철마(鐵馬)고지까지 점령했으며, 이 동안의 접전은 주로 백병전이었다. 한편 수도고지와 백마고지 사이에 있는 저격능선(狙擊稜線)에서도 10월 초부터 맹렬한 적의 공격을 받았는데, 이 능선은 철의 삼각지대 동측 요충으로 적의 주요 진지인 오성산(伍聖山)에 대치하는 지점이다. 이 지대는 국군 제2사단이 당하고 있었는데 4일 간 전투에 17회나 능선의 주인이 바뀌었으나 12월 21일 저격능선의 암석봉(岩石峰)에 공격해 오는 적을 네 번이나 격퇴시키자 평온상태로 들어갔다.

이리하여 1953년 1월로 들어가 적은 산발적으로 소극적인 공격을 해 왔다. 그러나 이 해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한 후 4월 6일, 5개월 만에 휴전회담이 재개되고 11일에는 상이포로 교환협정이 조인되니 벌써 휴전 경계선의 결정을 토의하게 되었다. 휴전협정이 결정적으로 성립될 단계에 이르자 적군은 5월 초순부터 전전선(全戰線)에 걸쳐 공세를 취해 왔다. 그리하여 5월 12일 중동부 전선에 약 4만 5천의 병력을 투입하고 12시간 동안에 11만 8천 발의 포격을 가해 약 3km 후퇴했으며, 동부전선 단장(斷腸)능선, 서부전선 연천(蓮川)지방도 심한 공격을 받았다.

7월 16일부터 아군은 총공격을 개시, 휴전을 앞두고 전략상의 요지들을 확보하려던 적의 공격을 격퇴시키고, 20일까지는 앞서 잃었던 지역의 대부분을 탈환했다. 드디어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정전협정이 정식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에 걸쳐 참담했던 한국전쟁은 종전이 아닌 휴전협정만이 조인되었고, 한반도에는 '제2의 38선'인 휴전선이 설정되어 민족분단의 비운을 또다시 맞이하게 되었다.[141]

대량살상무기[편집]

1952년 2월 중국의 마오쩌뚱은 소련의 스탈린에게 전문을 보내 미국이 항공기와 야포를 이용, 8차례에 걸쳐 세균무기를 사용했다고 주장했다.[142]

1952년 2월 22일, 북한 외무성은 미국이 한국에서 세균전을 펼치고 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1952년 1월 28일부터 미군 비행기가 세균에 감염된 곤충을 대량으로 한반도 상공에 살포하고 있다면서 유엔 측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1952년 3월, 중국의 주은래 총리는 미군 비행기가 중국의 화북지역 및 만주에서 세균전을 수행하고 있다고 발표하며 미국을 비판했다.[143]

당시 중국군은 북한군측에서 발병한 전염병과 관련해, 미군 조종사 전쟁포로들에게서 세균무기를 사용했다는 진술을 받아냈지만, 이들은 석방되어 미국으로 돌아온 다음에는 진술을 번복했다.[144]

영국의 생화학자인 조지프 니덤을 단장으로 하는 국제과학자협회 공식조사단이 이와 관련한 조사를 하여, 1952년 니덤 보고서를 작성했다. 미군 비행기가 투하한 생물무기 폭탄 사진 등 200여가지 증거자료가 첨부된 670 페이지 보고서로, 2015년 6월 최초로 원문이 공개되었다.[145]

2010년 3월 17일 알자지라 방송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입수한 미국 합동참모본부 명령서를 공개했다. 1951년 9월 21일에 작성된 이 문서에는 "작전 상황에서 특정 병원체의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대규모 현장 실험을 시작할 것"을 지시했다.[146]

맥아더 장군은 중국 만주지역에 핵공격을 가함으로써 중국 지원을 차단하고 전세를 역전시키려고 했다. 핵무기 26발을 1차로 북한과 만주에 투하하자고 주장했다.[147] 당시 트루먼 대통령도 한국전쟁에서의 핵무기 사용을 주장했다.[148]

휴전협정[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한국휴전협정입니다.

이승만은 1951년 6월 9일 휴전의 결사반대를 선언하였고 6월 27일 소련의 휴전안을 거부하였다. 1951년 7월에 휴전 회담이 개시된 후 세계 전쟁 사상 처음 보는 제한 전쟁(휴전이 되면 각기 점령 지역에서 국경이 정해지는 조건으로 싸우는 전쟁)이 벌어졌다. 1951년 9월 20일 이승만은 휴전 수락의 전제조건으로 중국 인민지원군 철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무장해제, 유엔 감시 하 총선거를 요청하였다. 군사분계선 문제는 이미 1952년 1월 27일에 타결되었으며, 1952년 5월에 이르러선 포로 교환 문제를 제외하곤 거의 대부분 의제에 합의하였다.

한국 전쟁 중 2년 동안 이렇다 한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개입으로 전선이 고착화하자, 중화인민공화국을 부담스러워한 미국은 현상유지 차원에서 휴전협정을 추진하였다. 소련이 부분적으로 참전하자, 세계 여러나라들은 한국 전쟁이 머지않아 냉전체제와 한국의 통일을 위한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거라는 가능성이 커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엔군과 중국 인민해방군은 얼른 이 한국전쟁을 중단하고, 휴전을 하기로 했었다. 미국소비에트 연방중화인민공화국 측과 휴전을 논의한다. 1952년 3월 이승만은 분단 상태에서의 휴전은 한국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다고 주장하며, “민족국가로 생존하기 위해 단독으로라도 계속해 싸워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149]

철저한 반공주의를 지향하였던 이승만은 북진을 고집하며 휴전에 협조하지 않았다. 유엔군과 한국군이 반격하였고 인민군압록강까지 북쪽으로 물리쳤을 때, 이승만은 한국을 분단시킬 여러 번의 휴전 제안에 동의하기를 거절하였고 이 때문에 연합국들로부터 인기를 잃게 되었다. 이승만유엔의 도움으로 통일된 한국의 지도자가 되기를 희망하였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완전히 제거하는 데 방해가 되는 어떤 협정에도 반대하였다. 또한 그는 중화인민공화국에 대응하여 좀 더 강력한 방법이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미국이 폭격을 하는데 망설이는 것에 대해 화를 내곤 하였다.

그리고 또한,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의 사망으로 휴전 회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어, 1953년 3월 19일 소련 내각은 '한국 전쟁을 정치적으로 마감한다.'는 결정을 중화인민공화국과 북한에 통보하면서 부상포로의 우선 교환에 동의하도록 지시(또는 요청)했다.[150][151]

1953년 5월 30일 이승만아이젠하워에게 보낸 친서에서 다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요구하였다.[152] 이승만은 휴전협정을 방해할 목적으로 수감된 포로 중 반공포로대규모로 석방했다.(1953년 6월 18일) 전격적인 반공포로 석방에 격분한 미국이승만을 제거할 작전을 계획한다.

주로 개성금강산에 이르는 곳에서 전투가 계속되다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소련을 통해 휴전을 제의하였고, 유엔군 측의 승인으로 휴전이 성립되었다. 1953년 7월 27일22시에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 만에 한국 전쟁은 휴전으로 매듭이 지어졌으며, 현재까지 계속해서 효력이 이어지고 있다. 휴전협정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다시 서울에 올라와서, 휴전협정 4조 60항은 협정 체결 후 3개월 안에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고위급 관계국 정치회의를 개최할 것을 쌍방 정부에 건의했다. 직후인 1953년 8월 28일 제7차 유엔 총회유엔 총회 결의 제711호를 통해 휴전협정을 인준하고, 협정 4조60항이 건의한 대로 한반도 통일을 위한 정치회의가 개최되는 것을 환영한다고 선언했다.[153]

여파[편집]

대한민국을 비롯한 세계 대부분이 북한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기 위한 차원에서 38도선 전역에 걸쳐서 대한민국에 대한 무력 침공을 감행하였다는 남침(남으로 침략함)설을 정설로 보는 가운데, 3년 1개월에 걸친 한국 전쟁은 한반도 전체를 폐허화했고, 참전한 외국의 병력에까지 극심한 해를 입었으며, 이때 사용된 폭탄의 수는 불분명하지만 1차 세계대전에 맞먹는다고도 하고 그렇지 않다고도 한다.

한국전쟁은 그밖에도 약 20만 명의 전쟁 미망인과 10여만 명이 넘는 전쟁 고아를 만들었으며 1천여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을 만들었다. 그리고, 45%에 이르는 공업 시설이 파괴되어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를 초래했다.[154] 이번 한국 전쟁은 미국소련을 비롯해 UN의료진 그리고 중공군까지 참전하면서 제3차 세계 대전에 가까운 전쟁이었다.

소련의 통계에 따르면, 북한의 11.1%에 해당되는 113만 명의 인구가 전쟁을 통하여 사망하였고, 양측을 합하여 250만 명이 사망하였다. 80%의 산업시설과 공공시설과 교통시설이 파괴되었고, 정부 건물의 4분의 3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으며, 가옥의 절반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

한국전쟁은 핵무기를 제외한 당대 최신의 살상무기가 총동원된 새로운 전쟁이었다. 전쟁 중 미극동군은 폭탄 46만 톤, 네이팜탄 3만 2,357톤, 로켓탄 31만 3,600발, 연막 로켓탄 5만 5,797발, 기관총 1억 6,685만 3,100발을 쏟아 부었다. 한반도 전역이 갈기갈기 찢겼고, 그 안에 사는 생명체들이 무수히 살상되었다.

3년 동안 계속된 이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숨지거나 다치고, 대부분의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양국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대한민국북한 간의 적대적 감정이 팽배하게 되어 한반도 분단이 더욱 완고해지면서, 현재까지도 휴전선에 의한 분단대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155]

휴전협정 이후의 충돌[편집]

휴전협정 이후 크고 작은 국지 도발 및 무력 충돌이 여러 번 있었다. 1968년에는 북한에서 김신조를 앞세워 청와대 침투를 시도한 사건이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경찰과 민간인을 포함해 인명피해가 있었다.

2013년 10월 24일 평화문제연구소 창립 3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에서 청샤오허(成曉河) 중국인민대학 교수에 의해 김일성1965년 제2차 한국 전쟁을 계획했지만 중국 공산당이 거부했다는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의 기밀해제 문서(No.106-01480-07)가 공개되었다.[156]

1990년 이후에는 서해 북방한계선 부근에서 수차례의 해상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1999년에는 연평도 부근에서 제1연평해전이 있었으며, 2002년 한일 월드컵 기간 사이에 비슷한 지점에서 제2연평해전이 발발하였다.

2007년 남북 정상 회담은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서로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으나, 이명박 행정부 이후 상황이 급변하여 북한의 핵실험 등으로 인한 지속적인 갈등으로 남북관계가 경색되었다.

2008년에는 금강산에서 대한민국관광객 1명이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나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었으며, 2009년에는 대청해전이 발발하였다. 2010년에는 천안함 피격 사건연평도 포격이 발생하였다.

2013년 3월 5일 북한의 3차 핵실험에 따른 UN의 대북 제재 추진과 한미 합동 군사훈련 키 리졸브에 반발해 북한은 인민군 최고사령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키 리졸브 훈련이 개시되면 휴전협정을 백지화할 것이라고 선언했으며 11일 훈련이 개시되자 정전협정의 백지화를 선언했다.[157]

그리고 2006년, 2009년, 2013년, 2016년에 잇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4차례의 핵실험을 강행하였고, 2015년에는 서부 전선 포격사건이 일어났다. 또한 2016년에는 4차 핵실험인 최초의 수소탄 핵 실험까지 강행하면서 남북관계가 더욱 경색되었다. 1년 뒤인 2017년, 6차 핵실험을 진행하고, 미사일을 발사하여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전후 국가별 실태[편집]
대한민국[편집]

미국의 통계에 따르면, 60만 명이 전쟁 중에 사망하였고, 전체 참전국의 사망자를 모두 합하면 2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의 사망자는 백여만 명이 넘으며 그중 85%는 민간인이다.

한국 전쟁으로 인해 한반도 전체가 폐허가 되었으며, 특히 일본이 만들어 놓은 북한 지역의 대규모 공업지역은 융단폭격을 당해 완전히 소실되었다. 한강의 다리는 모조리 끊어졌으며 수많은 전쟁고아가 양산되었다. 고려 궁궐 만월대는 미군의 야전병원을 만들기 위해서 불도저로 파헤쳐 지기도 하였다.[158]

한국 전쟁을 인해 1000만명 이상의 이산가족이 발생하였다.

전쟁을 통해, 대한민국은 미군의 주둔과 미국의 경제지원으로 군사적으로는 전후 공산세력에 의한 남침을 막고 경제적으로는 성장기반을 마련했다고 보나, 전쟁 이전부터 있었던 반공주의가 국가의 이념으로 굳어지게 되어, 이승만의 독재정권 유지에 활용하였다는 시각도 있다.[159]

남북을 분단시키는 경계선이 전후 새로 바뀌게 되었는데 개성시 등에 평야 지역은 북한으로 되고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한 조금 더 늘어난 산악 지역은 남한으로 정해졌다. 군사적으로는 산악 지역이 평야 지역보다 점령하기가 힘들어서 더 가치가 있다는 이유로, 군사 분야에서는 전후의 점령 지역에 전쟁 이전의 점령 지역보다 더 의미를 부여한다고 알려져 있다.

한편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서울특별시 용산구의 전쟁기념관을 비롯해 전국 16곳에 참전기념비, 참전기념관, 공원을 조성하여 각국 군의 참전과 순국을 기리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편집]

전쟁 과정과 전쟁 이후에 김일성은 한국 전쟁의 책임을 박헌영, 김무정 등 자신의 정적들에게 전부 뒤집어씌우고 숙청하여 자신의 정적을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게 됨으로써 '김일성 공산왕조체제'의 기반을 닦았다. 그리고 전쟁 기간 동안 점령지 주민에 대해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으며, 이는 RG 153의 미군 전쟁범죄조사국(The War Crimes Branch) 문서들에서 드러났다.

공산주의적인 산업화 즉, 계획경제에 따른 산업화를 더욱 급속하게 추진할 수 있는 계기를 얻었으나 급진적인 단기정책들의 효과는 미비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적인 상황이 1960년대 이후로 대한민국과의 비교에서 매우 악화되었다.[160]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이 만들어 놓은 대규모 공업단지가 폭격으로 인해 완전히 소실되었으며 한국 전쟁 직전까지 대한민국보다 공업이 발전한 선진국이였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러한 피해, 이후 족벌독재, 군사력 증강에만 집중하게 되어 1970년대에는 경제가 역전되어 대한민국보다 후진국이 되었다.

북한은 전후 복구를 위해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10억 루블을 지원받았으며,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8억 위안을 지원받았다.[161]

미국[편집]

미국은 한국 전쟁에 가장 많은 군사를 지원하였고, 윌리엄 F. 딘 장군을 비롯한 상당수의 미군들이 전쟁포로로 잡혔다. 또한 이 과정에서 총살된 미군의 숫자도 많았다고 한다. 약 54,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으며, 이는 베트남 전쟁 때보다는 약간 적은 수이지만 훨씬 짧은 시기에 발생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편집]

중화인민공화국은 공산주의 진영을 지키고 미국이 주도한 국제연합군에 패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신생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국제적으로 위상을 제고시켰다. 그리고 국제법상, 대한민국을 침략한 북한을 지원함으로써, 국제적으로 외면과 지탄을 받았고, 이는 한동안 같은 사상을 공유하는 소련과 관계가 밀접해지는 경향을 낳았다. 또한 이 전쟁 이후 중국의 경제는 피폐해져서 중국 공산당은 대약진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UN군[편집]

UN군에는 미국 이외에 영국, 캐나다, 터키, 그리스 등이 소속되어 1만명 이상을 파병하였다. 터키군은 1만 4936명을 파병하였고, 724명이 전사하였다.[162]

전쟁 중의 납북자, 포로 송환 문제[편집]
납북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중복인원을 제외하고 납북사실이 확인된 납북자 수는 96,013명.[163] 으로 현재에도 생존하고 있는 납북자가 일부 있을 것으로 대한민국 정부는 추정하고 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부인하고 있다.

한국 전쟁 대한민국 국군 포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또한 휴전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모든 유엔군 포로들을 송환했다고 주장하나 아직도 미송환 국군 포로가 존재하고 있으며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 포로들도 전부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의 한국 원조[편집]

미국은 1945년 8월 15일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한 직후부터 1970년 5월까지 20년 동안 물자와 외화부족 문제를 무상으로 지원해 주었으며,[164] 특히 1950대말까지는 유일한 외자도입 창구로 한국 경제부흥에 미국의 한국 원조 정책이 가장 큰 기여를 해주었다.[165] 미국의 한국 무상원조는 약 44억 달러, 유상원조는 약 4억 달러에 달하여 한국 경제의 투자재원 마련, 국제수지 적자보전 및 경제성장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고 미국의 원조는 그 당시 가난했던 한국 정부 예산에 큰 도움이 되었다.[166]

전투 목록[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한국 전쟁 전투 목록입니다.

갤러리[편집]
Korean War Historical Images Morning Calm Weekly Newspaper Installation Management Command, U.S. Army
Signal Corps Photographs of American Military Activity Part 2 (2차 세계대전 전후)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중공군 개입으로 평양에서 철수하는 UN군을 따라 남하하기 위해 대동강 철교에 매달린 피난민들: 1950년 12월 3일 D. Helms 중사 촬영.



남하하기 위해 끊어진 대동강 철교를 오르는 피난민들. 1950년 12월 3일 D. Helms 중사 촬영.



6.25 전쟁 당시 대동강을 건너 남하하는 피난민들. 1950년 12월 3일의 사진. 강물은 얼어붙기 직전이고, 얼음조각이 떠다녔다.



중공군의 남하를 피해 얼음같이 찬 대동강을 맨발로 건너는 피난민들. 이들은 고향인 평양을 떠나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다. 1950년 12월 3일 D. Helms 중사 촬영.



중공군의 남하를 피해 대동강을 건너 피난하는 피난민 행렬 가운데 가족을 찾고 있는 한국인 아동: 1950년 12월 3일 D. Helms 중사 촬영.



중공군의 개입으로 신발을 벗어들고 얼음 조각이 떠 다니는 대동강을 건너 남하하는 피난민들: 1950년 12월 13일



1950년 12월 19일 흥남 철수 당시 상륙함에 오르기 위해 늘어선 피난민들. 일부는 소달구지로 끌고온 하찮은 물품들을 어선에 싣고 있다.



1950년 12월 19일 흥남 철수를 위해 물에 뜨는 것은 무엇이 타려는 북한주민. 남한 상륙함의 갑판과 여러 어선에 가득찬 피난민 들.



1951년 1월 8일 강릉 외곽에서 폭설을 뚫고 남쪽을 향해 끝없이 이어지는 피난 행렬



서울에서 생포된 12살의 인민군 송종태 이등병과 미군 Desert B Knight 일병. 송 이병은 "Bugs Bunny"를 닮았다고 해서 "Bugs"라는 별명이 붙었다: 1951년 1월 14일 Angus J Walker 소령 촬영
기타[편집]
위안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특수 위안대 실적 통계표’ 단기 4285년도 (1952년도) 육군본부 후방전사[167]

특수 위안대 한국 전쟁 때 특수 위안대가 설치되었다.[168] 채명신 장군의 증언에 의하면 한국군은 사기 진작을 위해 60여 명을 1개 중대로하는 위안부대를 서너 개 운용했다.[169]

기타 관우의 67대 후손이자 관평의 66대 후손인 관충금(關忠金)은 이 전쟁에 중공군의 자격으로 참전하여 국군과 유엔군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다. 직책은 일반 병졸이였다.
한국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편집]

대한민국[편집]
영화[편집]
1961년 《5인의 해병
1965년 《인천상륙작전
2003년 《태극기 휘날리며
2005년 《웰컴 투 동막골
2010년 《포화 속으로
2011년 《고지전
2014년 《국제시장
2015년 《서부전선
2016년 《인천상륙작전
2019년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
드라마[편집]
1975년 《전우
1983년 《전우
1991년 《여명의 눈동자
1999년 《왕초
2003년 《야인시대
2006년 《서울 1945
2010년 《전우
2010년 《로드 넘버원
게임[편집]
2015년 《6월 25일
해외[편집]
영화[편집]
1957년 《전송가
1970년 《매시
1981년 《오, 인천
2017년 《아일라
드라마[편집]
1972년 《매시

관련 서적[편집]
김성칠. 《역사 앞에서》. 창비. 1993년. ISBN 978-89-3647-596-3
한성훈. 《가면권력》. 후마니타스. 2014년. ISBN 978-89-6437-212-8
같이 보기[편집]


한국 전쟁의 무기 목록
한국 전쟁 전투 목록

정전 이후의 전투 및 국지도발
1·21 사태 - 김신조 무장공비 침투사건
제1연평해전
제2연평해전 - 최초에는 서해교전으로 명명되었다가 이후 제2연평해전으로 개명
대청해전
천안함 피격 사건
연평도 포격
56함 피격침몰사건
해군방송선 피랍사건
해경경비정 제863호 피격사건
2020년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사건
재일학도의용군
제1공화국
이승만
특수 위안대
북미평화협정
일본의 한국 전쟁 특수(ja:朝鮮特需)


인천 상륙 작전
더글라스 맥아더
강계시
평양 철수
1·4 후퇴
인해전술
대한민국 국군
백인엽
신성모
신익희
원용덕
이범석
윌리엄 F. 딘
해리 트루먼
존 무초
이시영
망명정부
백선엽
김석원


김홍일
김일성
김종필
박헌영
리승엽
김신
장면
최용덕
한신
주한미군
9·28 수복


마오 쩌둥
이오시프 스탈린
중화인민지원군
조선인민군
KBS 특별기획 한국전쟁
제네바 합의
제네바 협정
6·25전쟁일



각주[편집]

“Českoslovenští lékaři stáli v korejské válce na straně KLDR. Jejich mise stále vyvolává otazníky” (체코어). Czech Radio. 2013년 4월 11일. 2016년 7월 25일에 확인함.
이동:가 Edwards, Paul M. (2006). 《Korean War Almanac》. Almanacs of American wars. New York: Infobase Publishing. 528쪽. ISBN 9780816074679.
Kocsis, Piroska (2005). “Magyar orvosok Koreában (1950-1957)” [Hungarian physicians in Korea (1950-1957)]. 《ArchivNet: XX. századi történeti források》 (헝가리어). Budapest: Magyar Országos Levéltár. 2016년 11월 22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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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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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lett, Allan Reed, 편집. (2001). 《The Korean War, Volume 3》. Korea Institute of Military History. U of Nebraska Press. 541쪽. ISBN 9780803277960. 2015년 9월 18일에 확인함. India could not be considered neut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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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의: 출처에 따라 수치는 다를 수 있고 주둔 병력 기준.
출처는 중국 위키. 교대 병력을 포함한 전체적 참전 병력. 실제 주둔 병력은 60만
영문 위키 출처
1999년까지는 미군 전사자 수가 54,246명으로 기록되었으나 2000년에 미국 국방부에서 대외적으로 36,574명으로 정정, 이런 혼란이 빚어진 이유는 미국의 한국전 참전 기념비 건립 주관 단체에서 한국에 들어와서 전사한 미군뿐만 아니라, 미국 본토 등에서 한국전쟁 지원 업무 등을 하는 것과 같은 한국전쟁 기간 동안 종사한 전세계 모든 미군들 중에서 사망한 모든 미군들을 기념하기 위해 미국의 한국전 참전 기념비 전사자 수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How Many Americans Died In Korea?
대한민국에서는 1973년 제정한 〈각종 기념일에 관한 규정〉에서 6·25 사변일(六二五事變日)을 공식 명칭으로 써왔으나, 2014년 3월 24일 개정으로 6·25 전쟁일이라고 규정한다. 또는 6·25 사변, 6·25 동란, 6·25 전쟁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국해방전쟁(祖國解放戰爭),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으로도 부른다. 대한민국의 국정 국사 교과서에는 6·25 전쟁으로 표기했는데, 이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따른 것이며, 대한민국에서는 공식적으로 한국 전쟁보다 6·25 전쟁을 사용한다.
중화인민공화국조선족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주로 사용하는 말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6·25전쟁〔槪說〕
소련의 비밀문서가 공개되어 스탈린김일성의 긴밀한 협의 아래 전쟁이 일어났음이 확인되었다.
“光復十年의 발자취(19): 六 · 二五事變”. 경향신문. 1955년 8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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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Archived 2013년 5월 20일 - 웨이백 머신에서 '한국전쟁' 검색
“'6·25전쟁'이냐 '한국전쟁'이냐”. 조선일보. 2010년 6월 21일. 한국학중앙연구원 현대한국연구소가 25일 개최하는 6·25 60돌 기념 국제학술회의에서 '6·25전쟁의 명칭과 복합전적 인식'을 발표하는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한국전쟁은 미국식 용어로 어느 나라도 자기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을 이렇게 부르지는 않는다"고 지적한다.
정원교, 중국의 속내는… 행사 자제 속 ‘北·中-韓·美 대결구도’ 꺼려, 국민일보, 2013년 7월 26일
문예성, 中 당국, 북한 전승절 대표단 파견 전하면서 최초 항미원조→조선전쟁, 뉴시스, 2013년 7월 25일
오승렬, 한·미·중의 ‘6·25 전쟁 재평가’ 의미, 문화일보, 2013년 7월 30일
이승관, "잊혀진 승리" 미국 펜타곤에 한국전 전시관, 연합뉴스, 2013년 6월 19일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전쟁발발 직전의 정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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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5. 高浪浦 -汶山-奉日川地區 戰鬪〉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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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1권》. 54쪽.
사실, 이승만은 조만식이 대한민국에 내려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조만식을 삼팔선 이남까지 데리고 내려오라.'는 조건을 붙여 사실상 교환을 거부했다. <박헌영 평전>, 안재성 지음. p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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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전쟁발발 직전의 정황
이동:가 CIA 한국전 잇단 오판, 수장까지 교체 Archived 2013년 11월 11일 - 웨이백 머신, KBS, 2010년 06월 16일
“덜레스氏 38線視察”. 동아일보. 1950년 6월 19일.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1권》. 47~48쪽.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5. 高浪浦 -汶山-奉日川地區 戰鬪〉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93쪽.
임영태, 《인류 이야기 현대편 2권》(아이필드 출판사 2004년) 124~128쪽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1권》. 46쪽.
이정훈 기자 (2000년 5월 1일). “[6•25 50주년 특별연재|‘잊혀진 전쟁’의 비록<상>]”. 동아일보사.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이정훈 기자 (2000년 5월 1일). “[6•25 50주년 특별연재|‘잊혀진 전쟁’의 비록<상>]”. 동아일보사.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전쟁발발 직전의 정황
이정훈 기자 (2000년 5월 1일). “[6•25 50주년 특별연재|‘잊혀진 전쟁’의 비록<상>]”. 동아일보사.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미국은 2차 대전 때 57mm포로도 충분히 T-34를 사냥했었기 때문에 한국군이 57mm포를 보유하고도 제대로 활용을 못했다고 생각했었다. 후에 스미스 대대가 치른 오산 전투에서야 자신들이 오판했음을 깨닫게 된다.
백선엽의 회고록 참조. 한국군 사단 포병이 미군 수준으로 4개 대대로 구성된 포병연대급으로 증강된 것은 전쟁 후반기였다
김학준 (1995년). 《북한 50년사: 우리가 떠안아야 할 반쪽의 우리 역사》. 동아출판사. 146쪽. 북한군은 소련제~가지고 있었다.
로버트 T. 올리버 (1982년). 박일영 옮김, 편집. 《이승만 비록》. 한국문화출판사. 322쪽.
윌리엄 스톡 (2001년). 김형인 외 옮김, 편집. 《한국전쟁의 국제사》. 푸른역사. 65쪽.
채명신 (1994년). 《사선을 넘고 넘어: 채명신 회고록》. 매일경제신문사. 98쪽.
아나톨리 토르쿠노프(Anatoli Torkunov); Mark Jarvis 편역. “Subject: Korean War: how it started”. Korean War Project. 2013년 5월 2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7월 6일에 확인함.
[http://www.fn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437 소진철교수 - 6.25 전쟁사 다시 써야한다.) 파이낸스 투데이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전쟁 발발 직전의 정황〉 “이러한 상황 하에서 북한의 김일성은 ‘대한민국이 공격해 왔으므로 부득이 반격한다’는 허위 선전을 하면서 6월 25일 새벽을 기해 침략을 개시하였다.”
“한강 철교 수중에서 6·25때 사용한 불발탄 인양”. 2015년 12월 11일.
“光復十年의 발자취(19): 六 · 二五事變”. 경향신문. 1955년 8월 19일.
“光復十年의 발자취(19): 六 · 二五事變”. 경향신문. 1955년 8월 19일.
“光復十年의 발자취(19): 六 · 二五事變”. 경향신문. 1955년 8월 19일.
“국가기록원 나라기록 컬렉션/토픽”. 2019년 11월 18일에 확인함.
“光復十年의 발자취(19): 六 · 二五事變”. 경향신문. 1955년 8월 19일.
“光復十年의 발자취(19): 六 · 二五事變”. 경향신문. 1955년 8월 19일.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전쟁발발과 유엔군 출동
이정훈 기자 (2000년 5월 1일). “[6•25 50주년 특별연재|‘잊혀진 전쟁’의 비록<상>]”. 동아일보사.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전쟁발발과 유엔군 출동
당시에는 장단군 백학면이었으며, 현재는 연천군 장남면에 속한 고랑포리이다.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5. 高浪浦 -汶山-奉日川地區 戰鬪〉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93쪽.
추억의 가지가지〉 《경향신문》(1956년 6월 25일) 4쪽.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1권》. 48쪽.
軍 어제와 오늘<30> 「북극성會」(6) “正規출신은 온실의 화초같은 애송이 “短期출신, 후배명예욕 질타”〉 《동아일보》(1993년 7월 29일) 5쪽.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1권》. 49쪽.
“6.25스물세돌특집 1950년6월25일 새벽4시…당시 일선지휘관들의 증언”. 경향신문. 1973년 6월 22일. …육본상황실로 들어갔다. 상황판에서는 당직하사관들이 평일과는 달리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 당직병들은 뜬눈으로 밤을 새운듯 충혈된 눈으로 계속해서 걸려오는 전화기를 붙잡기에 분주했고 통화가 끝나면 색연필을 가지고 상황판의 붉은 화살표시를 남쪽으로 내려었다…. …아침 7시쯤부터 걸려오는 괴전화였다…. 그때는 이미 육본으로 이어지는 군의 주요통신망이 재경유격대들에 의해 절단되었고 적은 아군의 통신망을 역이용하고 있었다.
노정팔 (1995년). 《한국방송과 50년》. 나남. 159~160쪽. 이전부터 38선~반복하고 있었다.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7章 UN의 決意와 赴援軍의 出動 2. 美國과 UN의 動向〉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1977, 개정판) 869쪽.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7章 UN의 決意와 赴援軍의 出動 2. 美國과 UN의 動向〉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1977, 개정판) 869쪽.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7章 UN의 決意와 赴援軍의 出動 2. 美國과 UN의 動向〉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1977, 개정판) 869쪽.
〈맥아더傳記3部「勝利와 不幸」(1945~64)(下)〉《경향신문》 1985년 5월 10일 5쪽.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1권》. 50~51쪽.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1권》. 51쪽.
전쟁기념사업회 (1992년). 《《한국전쟁》 제3권》. 행림출판. 39쪽. 1950년 6월 27일 새벽 4시에~정식으로 의결되었다.
노정팔. 《앞의 책》. 161~162쪽. 6월 27일 아침 6시에~
김동춘 (2000년). 《전쟁과 사회: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돌베개. 91쪽.
이한우. 《앞의 책》. 84쪽. 당시의 전황으로~
백사 이윤영 회고록 제I편 171~172쪽
김동춘 (2000년). “〈서울시민과 한국전쟁:'잔류'·'도강'·'피난'〉”. 《《역사비평》》 (제51호): 45. 서울시민~
이동:가 일 산케이신문, 일 산케이신문, "50년 일본 야마구치에 이승만, 망명정부 구상" 조선일보 1996년 4월 14일
고은 (2004). 《만인보 1》. 창비. 21~23쪽. 대전에서 사흘을~
강준만, 앞의 책, 66쪽.
당시 사단장은 박춘하(朴春河)였다.
김동선 (1991년 6월 27일). “〈돌아온 老兵 “50년6월29일 수원서 맥아더 만났다”〉”. 《《시사저널》》 (제87호).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전쟁발발과 유엔군 출동
이동:가 장면,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9 증보판) 113페이지
이동:가 장면, 장면,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9 증보판) 113페이지
장면,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9 증보판) 115쪽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9·28수복에서 압록강까지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4>”.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4일. 5면.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4>”.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4일. 5면.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4>”.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4일. 5면.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4>”.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4일. 5면.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5>”.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5일. 5면.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5>”.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5일. 5면.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1·4후퇴와 재북진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최후의 혈전과 휴전 성립
"한국전 생화학무기 사용주장은 허구" <CNN>, 연합뉴스, 1999-03-12
최초로 폭로된 세균전, 한국전쟁, 통일뉴스, 2015.07.10
“미군, 일본 ‘731부대’에서 세균무기 배워 한국전쟁에서 사용” 보고서 공개, 경향신문, 2015-01-27
[단독]"美, 6·25서 세균전" '니덤보고서' 전문 나와, 연합뉴스, 2015-06-09
미군, 한국전쟁때 북한서 세균전 명령, 한겨레, 2010-03-19
[책과 삶]원전 문제는 결국 민주주의 문제… 동북아 우경화로 문제 해결 요원해져, 경향신문, 2013.03.08
[논술 따라잡기] '한국전쟁과 맥아더' 어떻게 볼것인가, 매일경제, 2006-02-20
“북진통일 위협과 미국의 이승만 제거작전”. 《신동아》 (동아일보사). 2006년 8월 1일.
온창일. 《〈한국전쟁과 한미상호방위조약〉》. 군사분계선 문제는~동의하도록 지시(또는 요청)했다.
한국전쟁연구회, 편집. (2000년). 《탈냉전시대 한국전쟁의 재조명》. 백산서당. 389쪽.
홍용표. 〈〈전쟁 전개과정에서의 한·미간의 갈등: 이승만의 북진통일론과 미국의 대응을 중심으로〉〉. 《앞의 책》. 392~393쪽.
“6·25 참전국 모두 모여 만든 ‘유일한 국제공인 통일원칙’”. 《신동아》 (동아일보사). 2008년 2월 1일.
한국의 역사 19, 234 ~ 246쪽.
“"다시 보는 한국 전쟁"”. 2007.09.02 19:12. 2013년 11월 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1월 2일에 확인함.
“김일성, 1965년 '제2차 한국전쟁' 준비했었다”. 뉴스1. 2013년 10월 24일.
http://economy.donga.com/3/all/20130311/53619871/2
“개성의 근대와 새로운 기회”. KBS오피스 북한백과. 2006년 3월 19일.
김동춘. 《앞의 책》. 292쪽. 한국 전쟁은 이승만이~수 있었다.
《같은 책》. 292쪽. 전쟁 과정에서~계기를 얻었다.
소진철, 《한국전쟁 어떻게 일어났나》 270쪽, 한국학술정보 2008년, ISBN 978-89-534-6814-6
정철근, 전쟁고아도 챙겼던 터키 노병 “한국 발전 감사”, 중앙일보
이미일. 《〈6·25전쟁 중 남한민간인 납북 문제에 대한 전후 처리 현황과 과제〉》. 전쟁납북자명부 5종을 통합하여 중복된 경우 하나만 남기고 정리한 96,013명의 인적자료를 분석한 결과~
http://www.archives.go.kr/next/search/listSubjectDescription.do?id=008856
http://www.archives.go.kr/next/search/listSubjectDescription.do?id=008856
http://www.archives.go.kr/next/search/listSubjectDescription.do?id=008856
한국군도 '위안부' 운용했다 오마이뉴스 2002.02.22
이영훈 그날 나는 왜 그렇게 말하였던가 뉴데일리 2009.06.01
대한민국 정부가 포주였다 한겨레21 2011.11.28 제8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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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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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 위안부 문제, 뇌관은 남아있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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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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