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훈 일본 귀화 한국 은혜도 의리도 잊었다. 재일동포 최초 3000안타
장훈 일본 귀화 한국 은혜도 의리도 잊었다.
재일동포 최초 3000안타 대기록
재일 한국계 야구 선수 84세 장훈(일본명 하리모토 이사오)이 일본 귀화 사실을 공개했습니다. 다소 놀라지 않을 수 없는데요. 한국 야구계에 대한 실망감을 표시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장훈은 지난해 12월 29일 일본 산케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처음으로 말씀드리는데, 저는 몇 년 전에 국적을 바꿨어요. 지금은 일본 국적이에요"라고 말했습니다.
1940년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 프로야구에서 통산 3,000안타를 기록한 유일한 선수입니다. 현역 시절 여러 차례 귀화 제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국적을 취득한 것은 현재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상당아 충격적인 사실이었습니다. 다만 산케이신문은 일본의 대표적인 극우 언론으로 분류되고, 장훈의 인터뷰에서는 다소 과장된 표현이 사용됐을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도 있을 듯 싶습니다.
장훈은 "한때 (한국) 어떤 정권은 재일교포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여주기도 했다. '자발적으로 일본에 왔
다'거나 '다른 나라에서 잘 살고 있다'는 등의 말을 했다"며 "말도 안 된다. 내가 원해서 온 게 아니다. 징집당해서 왔거나, 먹고 살 수 없어 온거다. 재일교포 1세대가 고생하고 힘들었던 걸 모르나"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러면서 "국적은 한 번쯤은 뒤집힐 수 있다. 물론, 부모님 피를 이어받은 재일교포로서 자부심을 갖고산다"고 덧붙였습니다.
장훈은 1959년부터 1981년까지 일본 프로야구에서 활약하며 통산 타율 0.319, 안타 3085개, 홈런
504개, 타점 1676개를 기록한 전설입니다. 은퇴 후 오랫동안 야구평론가로 활동했고, 한국야구위원회
(KBO) 회장 특별고문 등을 지냈습니다. 장훈은 "한일 사회 발전에 기여한 공로와 오랜 기간 한국과 일본의 가교 역할을 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야구를 한 덕분이다"라고 답하며 "몇 년 전에 한국 야구계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표창을 받으러 관계자가 왔지만 거절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한국 야구계에 실망감을 표했습니다. 한국 프로야구 출범 이후 도움을 줬다고 강조한 장훈은 "20년 넘게 (KBO총재) 특별보좌를 하고 프로 리그를 만들었지만 한국시리즈나 올스타전에 초대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은총과 의리도 잊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또한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지적했다. 그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는 역사적인 것이 있다. 차별도 있었다. 우리는 간토 대지진에 불을 질렀다. 또는 많은 한국인이 물에 중독되었다는 소문으로 죽었다. 일본인은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표명했습니다. 그는 "한반도는 일본인이 지배했다. 의견이 많을 수 있지만 한국도 도움을 받았다"라며 "한일 양국이 협력으로 한국은 엄청나게 발전하여 근대 국가가 되었다. 우리는 서로를 더 많이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한편, 장훈은 1980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2007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받았습니다.
장훈, 별세 나흘 전에도 "핵무기 반대"…피폭 비극 널리 알린 삶
송고2026-09-11
조성미기자구독
히로시마서 누나 잃고 자신도 피폭…60대 들어 반핵·반전 메시지
(도쿄=연합뉴스) 조성미 특파원 = 지난 9일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재일동포 야구인 장훈(일본 이름 하리모토 이사오)씨가 별세 나흘 전에도 자신이 겪은 피폭의 아픔을 전하면서 핵무기 없는 세상을 강조했다고 마이니치신문이 11일 보도했다.
마이니치는 장씨가 수락해 지난 5일 진행된 전화 인터뷰에서 "핵무기를 전 세계에서 없애야 한다. 무기로 서로를 죽이는 전쟁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고 전했다.
재일교포 2세로 히로시마에 살던 그는 5세였던 1945년 8월 6일 폭심지에서 동쪽으로 2.3㎞ 떨어진 집에 있다가 피폭됐다.
그는 폭발 순간 온몸을 감싸 안아준 어머니 덕에 목숨을 건졌지만, 폭심지 가까이서 근로 동원으로 일하던 큰누나는 피폭 뒤 열기에 대한 괴로움을 호소하다 숨졌다.
마이니치는 2006년 10월부터 원폭 피해를 다루는 심층 기획 보도를 시작했는데, 1회 기사에 등장했던 인물이 바로 장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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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 일본야구 영웅 장훈, 9일 별세…향년 86세(도쿄 교도=연합뉴스) 재일교포인 일본프로야구의 영웅 장훈(일본명 하리모토 이사오) 해설위원이 별세했다. 향년 86세. 일본프로야구 전·현직 선수들로 구성된 명구회는 10일 "장훈 위원이 9일 오전 일본 도쿄 도내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1940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2세 장훈 위원은 1959년부터 1981년까지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하며 최다 안타 기록(3천85개)을 세우는 등 통산 타율 0.319, 504홈런, 1천676타점의 기록을 남겼다.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한 1982년부터 2005년까지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 특별보좌로 활동했으며 2007년엔 한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사진은 1980년 5월 28일 롯데 오리온스 선수로 출전해 한큐전에서 3천안타를 달성해 기뻐하는 장훈. 2026.9.10 photo@yna.co.kr
연재 시작 20주년을 맞아 이 매체가 인터뷰를 요청하자 전화 인터뷰를 수락한 것이 별세 나흘 전 진행됐다.
장씨는 다카이치 사나에 정권 출범 이래 일본의 '국시'(國是)로 여겨져 온 '비핵 3원칙'의 재검토가 거론되는 데 대해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가져서는 안 될 것은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라며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가 핵무기를 포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18세에 프로 무대에 데뷔한 뒤 입을 닫고 있다가 60세가 넘은 2005년 무렵에서야 피폭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TV 거리 인터뷰에 응한 젊은이들이 "전쟁 같은 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말하는 데 위기의식을 느껴 자신의 피폭 경험을 공유하고 반핵 메시지를 내기로 결심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피폭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우리 세대가 마지막"이라며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자들이 지구상의 마지막 원폭 피해자가 돼야 한다고 역설해왔다.
그는 한때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8월 6일이 너무나 싫은 마음에 "법으로 이 날짜를 없애버렸으면 좋겠다"라는 발언도 한 적이 있다.
이 발언이 보도되자 한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 "8월 6일을 잊지 말아달라"는 손 편지를 보내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이후 피폭 당시의 기억이 상기되는 것을 꺼려 한 번도 찾지 않았던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을 2007년 처음 둘러봤다.
일본 전국의 평화 단체들로부터 핵무기·전쟁 반대 활동 관련 메시지 요청이 잇따랐고 그는 적극적으로 응했다.
장씨의 별세 소식이 알려지자 히로시마현 원폭피해자단체협의회 하라다 히로시 이사장은 "누나를 잃은 아픈 경험을 안고서도 수많은 증언을 해 온 데 대해 경의를 표한다"고 그의 공헌을 기렸다.
그는 지난 2011년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피폭 경험을 이야기해도 별다른 반향을 얻지 못하는 현실을 한탄하며 "지구상에서 핵무기가 사라졌다는 말을 듣고 죽고 싶다"고 말했지만, 그의 소원은 이뤄지지 못한 셈이 됐다.
한편, 마이니치는 장씨가 고등학교 야구부 2학년 때 1학년 후배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지만, 재일교포라는 이유로 모든 책임을 뒤집어썼던 경험에 대해서도 전했다.
당시 받은 처벌로 인해 그는 뛰어난 야구 실력에도 일본 고교 야구 선수들의 '꿈의 구장'으로 불리는 고시엔 대회(일본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다.
장씨가 당시 학교 야구부장이 "나는 조선인이 싫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알고 좌절하자 그의 어머니는 "조선인이나 일본인이나 평등하다.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라"고 조언했다. 이는 그가 오랜 기간 한국 국적을 유지하는 계기가 됐다.
cs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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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선수(몇년전에 귀화했다니 하리모토 이사오라는 이름으로 인생을 마친 셈이지만 일단) 가 3000안타를 달성한 1980년에 나는 일본에 있었다. 야구관전이라고는 早慶戦(와세다/게이오 대학 야구시합)을 딱 한번 경험했을 뿐인 나도, 그래서 일본인들이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피부로 안다. 며칠 전 그의 작고를 일본 언론이 모두 크게 다룬 건 바로 그래서다.
한국도 이런저런 기사가 나왔지만, ’재일동포 히어로의 죽음‘ 을 넘어 더 기억되어야 할 부분에 대한 언급이 없어 보여 쓴다.
1)
이미 지적된 것처럼 재일교포 장훈도 피폭자로서의 공포를 한평생 안고 살아왔다는 점.
<히로시마 노트>를 썼던 오에겐자부로가 오래전에 한국에서 강연했을 때, “일본이 죄를 지었으니 원폭투하는 당연한 거 아닙니까?“라고 질문 했던 사람에게, 잠시 침묵했다가
“하지만 피폭된 사람 중에는 조선인도 많았습니다..“라며 상기시켰던,
그 2만이 넘는 ”조선인“중 한사람이었다는 점. 그 중 얼굴을 가진 다섯살 꼬마 ”장훈“과 하얀 얼굴의 누나가 있었다는 점.
그러니까, 원폭투하를 당연시하는 사고가 장훈과 그 가족의 고통을 기억하는 일을 통해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기를 다시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만년에 핵무기 반대발언을 해 왔던 장훈의 존재는 한일 양쪽 사회에 더 의미가 커질 수 있지 않을까.
2)
장훈은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는 걸로도 유명했다.
그래서 인기도 있었지만 당연히 여러번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를 지키는 이들이 있었고 그런 이들은 용인되었다.
그러니까 일본은 과(禍)를 구실로 공(功)을 깨부수는 ‘파괴’사회가 아니라는 점.
스포츠선수든 가수든, 기쁨을 준 존재와 본받을 만한 이들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일본인들이 오래 유지할 수 있는 건 실수에 관대하기 때문이다. 관대할 수 있다는 건 뭐가 더 중요한지에 대한 판단력이 있다는 이야기다.
이번에 나온 수많은 애도 기사들은 그 결과다.
3)
만년에 이르러 굳이 귀화한 이유가,
평가와 기억에 인색했고 재일교포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한국사회에 대한 실망이라는 점.
그는 일본사회에 대해 해야 할 말을 확실하게 해 왔고 그랬기에 그의 야구는 야구자체를 넘어 재일동포-조선의 긍지를 드높였다.
그럼에도 그의 일제시대 관련 발언은 그저 “식민지근대화론“ 이라는 쉬운 틀로 묶여 내쳐졌었다.
그러니까 한국사회는 사실 장훈이라는 사람을 제대로 이해한 적이 없다.
한국의 애도 기사들에 영혼이 담기지 않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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